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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추도문
2011년 03월 30일 12시 55분  조회:7816  추천:36  작성자: 오기활

            추억의 추도문

                 
                오기활
길림신문 고급기자

필자는 요즘 서류를 정리하다가 1994년 10월 28일에 작고한 사촌매부의 추도문을 다시 읽으며 인생의 가치관을 반추하게 되였다.

이 추도문은 17년전 사촌매부(허세근)장례식에서 아들(허룡길)이 올리는 추도사에 감동을 받고 수장한것이였다.

허세근은 도문철도렬차단의 말단로동자(목공)였다. 그의 생전에 우리가 받은 인상이라면 그가 《남을 돕는데 진심이다》는것뿐이다. 그런데 매부는 《훌륭한 남편》이나 《훌륭한 아버지》로 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글쎄 50대 중반에 타계한 그가 집에 남긴 유산이란 단위에서 분배받은 24평방메터의 허름한 한족식집과 14촌짜리 흑백텔레비가 전부였다. 전화마저 없었다.

그는 술상에서 늘 이런 말을 하였다.
《부모들이 내 이름을 세근(世根)이라 지은것은 나더러 인간세상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라는 바램이였는데 아직 뿌리를 내리자면 멀었소…》
우리는 그때만도 그의 말을 우스개로 흘려 버렸는데 아들의 추도사를 들으며 그가 말하는 뿌리란 사랑의 뿌리임을 알게 되었다.
 
추도문은 이렇게 쓰고있다.

《나에게는 허숙방이라고 부르는 한족누님이 있습니다. 허숙방은 우리아버지가 그를 구해주고 얻은 딸이랍니다…》

사실은 이러했다.

전 세기 5,60년대 허세근이 섬서철도국 공무단에서 재료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하루는 그가 서안시내에서 일을 보다가 웬 처녀가 어린애를 안고 안절부절 못하는것을 목격했다. 허세근이 달려가서 사정을 물어보니 사천성 어느 농촌에서 왔다는 18살짜리 처녀애가 타인의 소개로 남자대상을 만나려고 동생을 데리고 왔는데 불시에 동생이 병에 걸렸다는것이다.

허세근은 두말없이 애를 엎고 철도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들은 급성페염이라며 급히 입원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세근이는 그애를 자기 딸이라 하고 입원시켰다. 며칠간의 치료가 끝나 병원에서 출원하자 자기 집에 데려다 며칠간 살뜰히 보양한 다음 그를 집에까지 데리고 가서 부모한테 맡겼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몇달후에 어린애의 어머니가 딸애를 데리고 다시 허세근을 찾아와서 자기는 생활이 쪼들려 더는 애를 부양할 능력이 없으니 이 애를 친딸로 받아달라고 사정할줄을.

그때 세근이네는 아직 아이도 없는 신혼생활이였다. 하지만 마음씨 착한 세근이는 두말없이 받아드렸다. 그 애의 어머니는 너무도 반가와 딸애의 이름이 소방(素芳)이라며 새아버지가 마음대로 이름을 개명하라고 했다. 그래서 세근이는 한어발음으로 素와 비슷한, 조선족들이 이름에 흔히 쓰는 淑을 택해 淑芳이라 작명했다.
허세근은 숙방이를 친딸처럼 키웠고 두집사이 관계도 돈독이 하였다. 그러다가 1969년에 허세근이 도문철도분국으로 전근하게 되자 친부모를 영영 떠나야 할 숙방이가 불쌍하다며 또 다시 친부모들에게 맡겼다.

그후 서로간의 여라가지 원인으로 서로간의 련락이 끊어졌다. 허세근은 숙방이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인편을 통해 숙방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1984년부터는 돈을 팔면서 《사천일보》 등 신문, 잡지에 광고를 냈고 그래도 안되니 사천성민족사무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1986년 5월 23일, 사천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허세근의 민족우애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숙방이를 찾았다는 소식과 상세한 통신주소를 보내왔다. 허세근은 너무도 기뻐했다. 그래서 이미 애어머니로 되였다는 숙방이가 기회를 만들어 동북에 오겠다는데도 참지 못하고 1991년초에 성도에 찾아가서 숙방이를 보고야 시름을 놓았다.

숙방이를 찾아서부터 허세근이 사망되기까지 허세근은 숙방이가 부쳐온 편지를 94통이나 받았다. 편지마다에는 조선족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절절한 효심이 담겨있었다.

1992년 7월 중순, 숙방이는 아버지가 간암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눈물에 젖은 편지와 함께 현금 200원을 보내면서 병치료에 보태라고 하였다.

숙방의 편지와 돈을 받은 허세근은 병석에서 진정할수 없었다.

허세근은 숙방이가 보낸 돈을 보람있는 일에 써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7월 25일 오전, 병석에서 일어나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40돐경축활동 판공실에 찾아가 현금 100원을 내놓으면서 자기의 딸을 찾아준 당과 정부에 감사를 드리며 적은 돈이지만 자기네 부녀간의 성의라면서 자치주창립40돐기념행사에 보태라고 하였다.

1992년 8월 16일,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속절활동 《속보》는 《허동무의 마음》이란 제목으로 허세근의 아름다운 애족애주정신을 소개하였다. 자치주창립40돌경축 지도판공실에서도 그에게 감사장과 함께 자치주창립40주년기념마크 3매를 보내왔다.

이상의 속보, 감사장, 기념마크는 그가 사망한후 가족들이 그의 유물을 정리하던중 우연히 발견한것이다. 그는 자기가 한 일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것이다. 사망자의 유물을 서로 돌려보며 가족들은 남편,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흐느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허세근이 연길에 갔다가 연길기차역에서 흑룡강성 밀산에서 왔다는 손님(3명)들이 돈가방을 잃어 버리고 애간장을 태우는것을 목격했다. 고향애(그의 고향은 흑룡강성해림임)가 앞섰던지 그는 자기의 호주머니에 돈이 없자 연길기차역의 아는 사람을 찾아 자기이름으로 돈을 꿔서 그들에게 차비로 주고도 자기집(도문)에 모셔와 잠을 재우며 술상까지 차려서 대접시켰다.

그후 그들이 돌아간후 며칠이 지나도 전화한통 없으니 집식구들은 아버지가 쓸데없는 돈을 팔았다며 원망하였다.

《내가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절대 노여워 말라.》

허세근은 가족들에게 《준것은 다 잊고 가진것만 기억하라》며 베품의 삶을 가르쳐주었다.

《어머니마저 중풍으로 앓다보니 우리집 생활은 퍼그나 곤난하였습니다. 그런 형편에서도 남을 돕는것을 락으로 한 아버지의 인생은 베푸는 인생이였습니다…》

아들이 쓴 아버지추도문을 다시 읽는 이 시각, 필자의 귀전에는 19년전 추도문을 들으며 상객들이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귀전에 들려오며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수 없었다.

매부가 간암으로 세상을 뜬후 중풍으로 투병중이던 사촌녀동생(오미옥)마저 세상을 떴다.

어머니장례를 치른 며칠후다. 외조카(허해란)가 을형간염으로 앓는 외숙부(오기용)를 찾아와 문병하면서 외숙모(김순복)의 손에 돈봉투를 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돈(2000원)을 삼촌의 병치료에 보탬하세요. 이 돈은 어머니장례때에 받은 부조돈입니다. 며칠후 우리 둘은 취직하러 안쪽으로 갑니다. 우리는 젊으니깐 나가서 벌면 되지요…》

《나와 오빠가 토론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숙모는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철없는 나이(룡길 25살, 해란 23살)에 그것도 고아로 모든 일에 돈을 앞세워야 할텐데 어머니의 장례부조돈까지 몽땅 내놓는 그들의 대견스러운 처사에 목이 메였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구나! 너희들은 앞으로 돈을 써야 할 일이 너무 많단다. 선량한 너희들을 하느님이 도와 줄것이다!》

봉투를 돌리는 숙모의 손은 더없이 떨렸다.

후에 안 일이지만 용길이는 부모들이 생전에 꿔준 빚돈을 받으면서도 생활이 어려운 몇집의 돈은 받지 않았단다.

지금 룡길이는 청도, 해란이는 상해서 가정을 꾸려놓고 열심히 산다.

한 인간의 미덕은 그의 평소의 적선(積善)으로 완성된다.

희생과 봉사는 맹인도 볼수있고 귀머거리도 들을수 있는 사랑의 언어요, 자비의 메시지다.

필자는 추도문을 덮으며 고인의 생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거룩함을 느끼게 된다. 그에 따라 아버지를 거울로 베품의 삶을 엮는 조카들이 더욱 대견스러웠다.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발자국을 남긴다.》 《후대들에게 1억(亿, 재산)을 남기지 말고 추억을 남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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