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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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다, 떳떳하라 당당하라!
2013년 10월 17일 09시 24분  조회:5525  추천:11  작성자: 장경률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한 재론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한국에서 체류하고있는 적지 않은 우리 동포들은 이처럼 자문하면서 곤혹스러워한다.

<<우리는 중국조선족이다.>>이렇게 떳떳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자기신분을 말하기를 저어한다. 지어는 숨기려고까지 한다. 그럴수록 더욱 천대와 멸시가 뒤꽁무니를 따르게 마련이다.

우선 우리는 중국조선족, 우리 민족은 과경민족이다. 오늘날 중국에는 주체민족인 한족을 포함하여 기타 자치민족까지 도합 56개 민족이 살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 민족은 과경민족(过境民族) 이라 하는데 다시 말하면 국경을 건너 와서 뿌리 박은 민족이라는 의미이다.

중앙민족대학 황유복교수에 따르면 <<중국에는 조선족 이외에도 같은 민족집단(ethnic group--“族群”)이 중국국경선 밖에 독립된 단일민족국가를 갖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로씨아족, 몽골족, 까자흐족, 따지크족, 우즈베크족, 따따르족 등 7개 민족이 있다. 그리고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절반이 넘는 33개 민족이 소위 과계민족(跨界民族)이다.>> 조선족은 중국과 조선반도의 국경선인 두만강 혹은 압록강을 건너 와서 정착한 민족이다. 특히 1949년에 중국의 전 지역이 해방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에는 중화민족의 대가정에서 중국조선족으로서 떳떳한 일원으로 되였다.

이제 간략하나마 력사적으로 따져보기로 하자. 서기 1616년 청태조 누르하치가 허투아라(료녕성 신민현)에서 금나라(중국력사상 후금이라 함) 세웠는데 년호는 천명이였디. 1636년 누르하치의 아들 황태극이 성경(오늘의 심양)에서 황제로 등극하고 국호를 <<대청>>이라고 고치고 녀진족을 만주민족 다시 말하면 만족이라고 하였다. 1644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어 명나라를 멸망시킨후 수도를 지금의 북경으로 옳기였다. 그리고 신빈현 이북, 이통하 이동, 두만강이북의 천여리 땅을 발상지로 정하고 봉금령을 발부하였다. 명목은 <<청조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것이 였지만 주되는 목적은 한족과 몽고족 그리고 우리 민족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침입하는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그후 봉금한 200여년간 장백산지역을 포함하여 광활한 대지는 원시밀림이 울창하고 산짐승이 득실거리는 불모지 땅, 황페한 땅으로 되였다.

상기한 봉금정책이 해제된데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원인, 하나는 1881년 짜리로씨야의 침공을 막고저 봉금령을 페지하고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한것이다. 그리하여 이 해에 훈춘 초간국을 설립하였다. 200여년에 달하는 봉금정책을 해제한 다른 하나의 원인은 바로 조선반도의 특대기근이였다.

청나라는 봉금 200여년간 봉금지역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였다. 당시 두만강이나 압록강 이동의 조선사람들이 일단 강을 건너 와서 약초를 캐거나 수렵을 하거나 지어 가만히 농사를 짓는것만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잘랐다. 그렇잖으면 리씨조선관리들이 월경자들의 목을 잘랐다. 그 일례로 강희황제 49년(1710년) 평안도 위원사람 리만건네 4형제와 기타 몇 명이 강을 건너와 인삼캔것이 들통이 나 5명이 참수형을 당하였다.

1860년부터 1870년 10년사이에 함경도일대를 포함한 한반도북부지역에서 전례없던 자연재해가 발생. 특히 1869년에는 얼마나 굶어 죽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해를 <<기사년(굶어 죽은해>>라고 불렀다. 젖먹이 엄마가 환장하여 등에 업은 아이도 삶아 먹고 미친사건도 발행하였다. 그래서 변경민들이 목숨걸고 월강하여 화전농사를 지었다. 당시 화전농사를 짓는 방식이 여러 가지였는데 그중 전형적인 방식의 하나가 바로 <<일귀경장(밤에 가만히 강을 건너 와서 땅을 뚜지고 씨앗을 심은후 새벽이면 돌아 가는 방식)>>, 혹은 <<춘경추귀(봄에 강을 건너 와서 깊은 산속에 숨어 일년간 농사를 지은후 가을이면 타작하여 가지고 남몰래 건너 가는 방식)>> 이런 화전농들이 붙잡히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당시 강을 건너간 남편을 외롭고 쓸쓸하게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안악네들의 참상을 반영한 민요..당시에는 상당히 류행된것이다.

그 민요의 제목이 바로 <<기다림>>

새봄이 다 가도록 기별조차 없는 님을

가을밤 안신까지 또 어찌 참으래요.

두만강 눈얼음은 다 풀리여 갔다는데

새봄이 아니오라 열세 봄 지났어도

못 참을 내 아니언만 가신님 날 잊었을가

강남의 제비들은 제 집 찾아왔다는데...

1883년 청나라는 두만강을 건너 오는 월강민들을 막을 방법이 없어 두만강이북 해란강이남을 조선인들의 <<전문개간구역>>으로 정하고 대량적으로 조선이민을 받기 시작하였다. 우리 민족이 연변지역을 포함하여 대량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났다.이처럼 우리 민족은 조선조말기에 봉건지배 및 봉건지주들의 가혹한 압박과 착취에 견딜수 없어서 범월잠입한 월경민, 일제의 식민지략탈에 파산된 농민, <<망국노>>를 원치않은 반일군중, 일제의 식민지이민정책에 의해 강제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청나라말기부터 지난 20세기 40년대, 일제가 패망한 광복전까지 중국조선족인구는 무려 216만3115명으로 나타났다.

우리 민족은 인가가 없는 심산속에 귀틀집을 짓고 개척의 첫 괭이날을 박고 황무지를 개척하고 밭농사를 지으면서 이 지역을 개발하였다. 이 지역의 개척자, 개발자로서 역시 중국땅의 북방지역에서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보급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중국동북지역의 벼농사는 개산툰의 천평벌, 룡정부근의 세전이벌, 대교동으로부터 시작된것이다.

중국조선족은 민족독립과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의 선구자들이다. 당시의 특수한 력사적환경에서 조선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힘들었기에 리상설, 김약연같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가정을 이끌고 혹은 온 집안의 친척들을 이끌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서 반일사립학교를 꾸리면서 반일교육운동을 진행하였다. 서전서숙의 설립, 그 얼마후 설립된 명동, 창동, 정동, 광성 등 수많은 반일학교들이 반일인재양성의 요람, 반일투쟁을 전개하는 여론진지, 행동중심으로 된것이다. 이와 동시에 김약연, 리동춘, 백옥정, 김립 등 수많은 저명한 반일투사들이 탄생되였다. 이처럼 조선반도가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민족해방투쟁과 민족독립의 기지로, 전장으로 된것이다.

우리 민족은 하넓은 중화의 대지에서 제일먼저 반일의 봉화를 피워 올리였다. 제일 먼저 항일항쟁의 첫 총성을 쏘아 올렸다. 세인을 놀래운 봉오동전역, 청산리대첩 그후 1945년 8월까지 장장 20여년간 일제와 피비린전쟁을 펼친 불요불굴의 민족이다. 특히 동북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가렬처절하고 전대미문이였다.

중앙민족대학 정희숙교수는 론문 <<항일전쟁에서 조선족의 불멸의 발자취>>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중국관내지역은 지난 20세기 전반기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이 중국의 대력사 사변들속에서 진리를 찾고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굴함없이 싸웠던 력사의 현장이다.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은 신해혁명으로부터 북벌전쟁, 토지혁명, 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의 거친 물결속에서 만악의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중국의 군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으며 중국혁명과 항일전쟁승리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남겼다.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중국혁명의 승리는 곧 조선혁명의 승리로 이어질이어질 것 굳게 믿으면서 중국의 신해혁명과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조선혁명가 양림, 무정, 리철부, 김산, 주문빈 등이 그 대표적인물이다. 한편 김원봉과 윤세주, 김규광, 박건웅, 류자염을 비릇한 조선혁명가들과 신정, 신채호, 김구를 비릇한 독립지사들도 각자의 민족독립과 구국의 길을 찾으면서 일제와 싸웠다.이들은 서로 비슷하거나 다른 주장을 가지고 중국의 현대사와 함께 하면서 조선민족 반일투쟁사에 영광스러운 한패지를 엮어놓았다.

필자는 최근에 연변대학의 교수들과 함께 <<중국조선족혁명렬사 략전>>을 편찬하고있다. 이 와중에 수많은 독립투사, 항일투사들이 민족의 독립과 구국을 위하여 20대의 꽃나이에 일제와의 싸움터에서 하나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이름도 남기지 못한 장면을 수없이 목격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남을 금할수 없었다. 중화의 대지우에 광활한 동북지역의 그 어느곳에 이름없이 묻혀 있는 그네들을 생각하면 정말 저도몰래 숙연해진다.

중국조선족은 필경 조선반도에서 과경한 민족인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이나 한국의 국민들과는 달리 이미 원래 그 자체가 아니다. 조선족은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소수민족이다.지난 15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층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우수한 민족이다.중국조선족은 중화의 대지에 정착하면서는 자기나름대로 자기특색의 문화를 창출하였다.  우리는 반드시 이 점을 알아야 할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원래에 토대하여 자기특성의 우수성을 형성하였다. 다시 말하면 반도에 안주하는 <<우물안의 개구리>>의 의식에서 해탈되여 대륙의 기질를 갖추어 대범하고 포옹력이 강하고 끈질기고 그 어떤 역경도 잘 참고 견디며 이겨내는 우수한 민족이다. 이런 우수성은 우리 조상들이 일단 중국 땅을 밟고 이 곳에 정착하면서 그 시각부터 한족, 만족, 몽골족, 회족, 등 수많은 민족과 함께 생활하고 생산활동을 진행하면서 이런 과정에 서로 융합되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 충실하게 받아들인것이다.

타방으로 연변지역을 망라한 중국 다시 말하면 지정학적인 특점에 의하여 결정된다는것이다. 인간은 그 어떤 환경에 처하게 되면 그 영향을 받게 되고 그 락인이 찍히게 된다. 우리는 흔이 이를 가르켜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한다. 한반도는 필경 10만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반도이지만 중국은 960만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대국이다. 령토는 로시야, 카나다 다음으로 가는 세계3대국인것이다. 그리고 연변지역을 포함하여 중국조선족이 절대대부분 집거한 구역인 흑룡강성, 료녕성은 기후가 춥고 산구이고 그런 기후환경, 자연조건에 의하여 기필코 한반도에서 가지고갔던 그런 자연력사적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나름의 민족적특성과 민족적군체, 민족적민속과 문화를 형성하고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고있다는 얘기다.

중국조선족은 재래로 중화대지의 타민족과 공존하면서 서로 돕고 타민족이 곤경에처하면 자기 일처럽 그 역경에서 해탈되도록 최선을 다한것으로 모범이 되고있다.하다면 동족임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지난 60여년간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 대하여 종래로 등한지 않았다. 중국조선족은 압록강, 두만강을 사이에 둔 조선의 사회진보와 발전, 경제비약과 진흥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이는 세인이 주지하는 바이다.

중국조선족은 지구촌에서 랭전이 종식되고 중국과 한국이 수교를 한것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였다. 하기에 중한수교를 계기로 한국에 진출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마련된 것을 몹시 보귀하게 여기고 적시에 틀어 잡았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 한국에 진출한 중국조선족은 50여만으로 헤아린다. 물론 초기에는 적지 않은 이들이 돈을 벌려고 경제적부를 창조하려고 여기를 찾은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으로 하여 민족적자호감을 느끼고 여기 와서 열심히 일하면서 피땀으로 돈도 많이 벌어 잘 살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 20년이 지난 오늘날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였다. 중국조선족은 한국사회에서 절대 홀시할수 없는 사회력량, 경제세력으로 성장하면서 한국에 엄청난 재부를 창조해 주고 거대한 기여를 하고있다는것도 철 같은 사실이다.

혹자는 주제가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이라고 하면서 다 아는 조선족의 력사에 대하여 왜 새삼스레 이처럼 장황하게 늘여놓는가고 의이를 제기할지 모르겠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절실하기에 이처럼 반복하여 력설하는것이다. 한국에서 현재 거주하고있는 50여만에 달하는 중국조선족은 현실적인 존재로서 바로 상기한것과 같은 아주 영광스러운 력사를 자랑하는 군체이다. 이 군체는 막강한 실력을 갖춘 빛나는 력사로 하여 자호감을 느끼는 자랑스러운 민족, 위대한 민족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은 모르거나 얻어 들은 방편에 불과하다. 이런 분들에게 자기를 분명하게 알고서 절대 주눅이 들지 말고 떳떳하고 당당하라는것이다.

한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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