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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살며 생각하며
1999년에 일본와서 만 10년이 되엿다. 다른 사람들이 다 겪듯이 일본생활 10년은 파란만장많은 인생의 하나의 에피소드일가? 쓰겁고 차겁고 서럽고 분하고 ……
물가 차이가 엄청난 일본에 와서 감히 쌀사먹을 생각을 못하고 석달을 가마치에 물에 된장을 풀어먹엇다. 안그러면 숙사 구석에 처박혀잇던 쇼미기겐 기레 한 한국국수로 입맛을 바꿀때도 잇엇다. 녀자로 생겨서 땍볓에 같이 일하는 남자하고 내보다 몇배나 큰 쓰레기주머기를 차에 실어 올릴때 힘든것보다도 머리속으로 돈계산을 햇다. 그렇게 죽도록 일시켜먹어도 한달에 고작 5만엔 받앗다. 4시간 일시켜야 할것을 8시간시켜도 4시간 돈밖에 안주엇다. 그래도 5만엔을 받으니 이제 새로 싼 집을 잡을수 잇다고 생각하니 기뻣다. 원래 좀 쬐쬐하고 지독해서인지 딸라고 200딸라 남기고는 생활비로 가져왓던 돈을 집으로 몽땅 부쳣다. 난 다른건 괜찮은데 흰밥에 간장 비벼먹는것이 꿈이엿다. 야채사먹는건 사치니깐 엄두도 못내고 . 그때레다스가 제일 싼게 백엔이니 환률이 8.3이엿으니 중국에서 상추 한포기를 8원주고 사먹는다면 눈이 뒤집혀질것이니깐.
아무리 힘들어도 학교는 갓다. 일단 일어만은 잘 배우고싶엇으니 . 그런데 왜 그렇게 잠이 오는지 첫두시간은 잠 안잔다. 그다음 두시간은 아예 세상도 모른다. 그래도 1급은 건넛다. 얼마나 공부를 안햇으면 이듬해 친 1급이 처음가서 반년후에 친 성적보다 1점이 적엇을가? 일본와서 1년 넘으니 일어능력이 도태되엿는 모양이다.
힘든것보다 돈이 너무 적어서 쓰레기 처리하는 일은 그만둿다. 그다음 우에노의 야끼니꾸 갓는데 한국애들이 얼마나 깔보는지. 거기다가 재일 교포 녀자 점장도 잡아먹을라 한다. 모든 스트레스는 제일 약한 이 중국사람한테 푼다.돈때문에 참아야 하지만 힘든건 참아도 무시당하는건 못참는다. 자존심 강한 나는 내절로 나왓다. 그때 진짜 하루종일 얼마나 울엇는지 모른다. 그 다음 다른 야끼니꾸 에서 1년 반이상 일하여 중국에 집 한채 마련햇다. 그때는 아무 생각도 없엇다. 힘든줄도 몰랏다. 돈하고 공부 , 잠 자는것밖에 몰랏다. 마까나이를 주니 이밥먹는 꿈은 없어지고 언제만 실컷 잘고 하는 생각밖에 없엇다. 난 영원히 야끼니꾸의 사장님을 잊을수 없다. 면접하러 간 나를 한끼 불고기 대접하고 구질구질한 내가 잘못하는 일어로 「頑張るから、雇ってください」 하니 그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난 아예 안된줄 알앗는데 어디어디 가서 일하라고 한다. 나는 얼마나 속으로 그 젊고 멋진 미남자사장님 만세를 불럿는지 모른다. 거기서 일어도 많이 늘엇고 밥도 배불리 먹엇고 돈도 벌엇고 집도 마련햇다.
일어학교 끝날 무렵 어떤 재일 교포 사장이 열심히 뛰는 구질구질한 내가 불쌍하다고 입사하라고 하는걸 난 거절햇다. 사장이 간곡히 취직하기 힘든데 들어와 하는 바람에 들어갓는데 이넘의 비자가 반년만에 나와 난 미치는가 햇다. 그런데 일어를 잘못하는 나엿기에 나하고 같이 들어간 재일 교포 박사상사한테 진짜 너무 많은 구박을 받아서 스트레스 받아서 미칠 지경이다. 자기네들도 일본에서 업신당하는 주제에 중국사람이라고 비자를 줘서 선심썻다고 란리다.
3년이 지나는 해 업무가 없는 나는 구비를 당햇다. 구비당한 나는 진짜 앞길이 막막햇다. 왜 대학에 안들어갓는지 후회되고 비자는 어떻게 할가 고 눈이 퀭해졋다.
그래서 선택한것이 영국행이다. 영국에서 여러 가지 생긴 일을 쉼터에 낸적 잇엇다. 영국에서 오는길에 중국들려 또 집한채 마련햇다.
영국갓다 와서 빠진코 재털이 청소 아르바이트 하면서 어떤회사에 일햇는데 거기 중국녀자가 비자때문에 어려운줄 알고 갖은 수단을 다 써서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난 그렇게 비렬한 중국녀자를 처음 만낫다.
그 회사에서 나온 다음 다른 중국무역하는 회사에 가서 중국 주재로 잇엇는데 미친 ㄱ ㅐ 같은 사장이엿다. 완전 노예취급에 밥을 못먹게 한다. 할수 없이 또 그만둿다.
난 리력서를 200몇통 보내 겨우 지금 다니는 회사에 들어왓다. 그때 경쟁률은 상당햇다. 한곳에 몇접하러 가니 이력서가 사장앞에 1메터는 싸인것 같다. 사장이 하는 말이 여기 말고도 인터넷으로 응모한것만 해도 얼만지도 모른단다. 그런데 딱 한사람만 필요한데 몇백명이 달려붙은것이다. 난 진짜 절망적이엿다. 나이 많고 녀자이고 키도 작도 일본에서 대학도 못나오고. 난 어떻게 해야 하나는 생각뿐이엿다. 하여튼 죽을둥 살둥 모르고 리력서를 쓰고 보내고 햇다. 어떤땐 열통 보내도 면접오라는데는 한군데도 없엇다. 어쨋든 난 지금회사에 취직하여 여기에서 몇년을 보냇다.
이 회사에 들어오니 사장 성질이 어찌나 괴벽한지 어떻게 대응할지 모른다. 난 여기서 구비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이마살을 펼때가 적엇다. 그런 나를 보고 사장이 널 구비안시킬테니 걱정마 한다. 일이 익혀져 얼마 안되 난 결혼을 하고 남편을 일본에 데려왓다. 그리고 얼마 안되 애가 태여낫다.
나의 출산 휴가때문에 다른 일본녀자애를 받아들엿는데 이 애가 완전히 인간성이라곤 조금도 없다. 그래도 난 나보다 어리기에 여러모로 많이 돌봣는데 영어 할줄 안다는 턱대고 내 일을 몽땅 빼앗아갓다. 난 애때문에 잔업도 못하고 휴가도 많다. 그 녀자애는 사장하고 이상한 사이로 까지 발전해 완전 마누라 행세를 해가면서 누구한테나 마구다지다. 사장이 좋아하니 누구하나 감히 어쩌지 못한다. 뭐라 고자질 햇는지 사장이 완전히 날 사람 취급 안한다. 사인 회의 할때는 나만 뺀다. 다같이 먹으러 가도 나만 없다. 아침 인사를 해도 저녘 인사를 해도 누구하나 응답하는 사람 없고 하루종일 잇어도 일만 없이 가만잇는게 지옥이라면 이보다 더 하랴! 그리고는 한국사람 생긴꼴을 봐라 하면서 딱 저거같이 생긴게 한다. 분명 날 두고 하는 말이다. 난 영주권을 신청한 상태에서 애때문에 어쩔수도 없는 비참한처지에 잇엇다. 내쫓지만 않으면 어떤 벌이라도 달갑게 받겟습니다 는 상태엿다.
어떤 모욕을 당해도 난 우리 아들의 엄마다! 엄마가 된 이상 난 애를 위해서 영주건을 위해서 내 이때까지 꿋꿋이 지켜온 내 자존을 팔앗다. 아침 저녘마다 1시간 넘게 되는 길을 베비카로 걸어서 애를 보육원에 보내면서 엄만 너때문에 모든걸 참을수 잇어 꼭참을거야 하면서 힘든 날들을 지내왓다.
한번은 너무도 지 라 ㄹ하는 그년이 미워서 한바탕 해댓더니 내가 중국가잇는 사이에 회의를 열고 날 구비시켯단다. 비겁한 놈, 나한테 말못하고 다른 사람 시켜서 전달하란다. 하지만 그년하고 사장외에 다 불동의하기에 1달만 두고 보기로 햇다. 구비 결정이 나서 며칠 안지나 회사 신체검사 갓는데 변에 피가 섞엿단다. 설마 큰일이 아니겟지 햇지만 그래도 마음이 안놓여 시티 해봣더니 혹이 생겻단다. 난 하늘땅이 무너지는줄 알앗다. 이 어린 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때까지 고생만 햇는데 왜 난 복이 없을가? 그날 애안고 눈물흘리니 간호사가 애가 보는데 왜 그러니 한다. 이런병 걸린 사람 많은데 한다. 애가 눈이 올롱해서 날 쳐다보니 애 볼 용기도 없다. 그래도 구비가 결정된 상태에서 난 계속 무시당하면서 회사를 다녓다. 일단은 보험이 필요햇기에. 그리고 나에게는 2010년이 없다고 마음 속 각오까지 다 햇다.
난 살고싶엇다. 애를 위해서가 잇지만 주요하게는 생에 대한 애착이 이렇게 강한줄은 몰랏다. 병이 날때는 옆의 사람들도 힘들지만 자신은 허무하고 무섭고 서럽고. 그리고 살고 싶다. 하느님이든 신선님이든 의사선생님이든 살려주세요 하고 달라 붙고 싶은게 진심이다. 살려만 준다면 하라는 대로 하겟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여전한 그 이지메 ! 인간성을 잃은 넘들이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난 병원에 갈 용기가 없어서 미루다가 내 목숨은 내절로 책임진다는 생각에서 병원예약햇다. 남편은 학교다니기에 못가고 수술 하고 입원할 물건을 챙겨가지고 애를 베비키에 앉히고 수술하러 갓다. 가니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이 그렇게 많앗다. 난 벌써 결과가 나왓기에 수술시키려고 제일 마지막에 안배햇다. 수술실에 들어갈려 하니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애 안고 남편오기를 기다려 들어갓다. 카메라가 장에 들어가는게 모티타로 보인다. 난 그래도 아니길 빌엇다. 난 성격이 강할뿐 나쁜 사람은 아니니깐 더 큰 고생은 할수 잇어도 이런 암같은 병은 싫다고 빌엇다. 하지만 빌면서도 머리속은 텅빈 공백이다. 의사도 그 위치까지 왓으니 뗀다고 하니 난 더 이상 모니타를 볼 용기가 없어 눈을 감앗다.
순간 선생님이 이건 혹이 아니라고 소리를 지른다. 너무 기뻐서. 순간 난 새로운 생을 얻엇다고 생각햇다. 그러면서 나보고 보란다. 작은 물집같은데 물이 찰랑찰랑 차잇다. 간호사가 너무 기뻐 남편하고 애까지 데리고 들어왓다. 그길로 난 그 후의 병원예약을 다 취소하고 나왓다. 그저 선생님손을 꼭 잡고 감사하다는 말만 햇다. 기쁨의 눈물도 없엇다. 그길로 스시집에 자극하면 안된다고 햇는데 스시를 배터지게 먹엇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영주권이 내려왓다. 회사에서는 아직도 그년이 날 괴롭히고 잇지만 난 이젠 맞받아 싸운다. 말해도 말에 힘이 잇엇다. 난 이젠 겁날게 없으니깐. 덜되먹은 년놈들 좋아하면 밖에서 좋아할거지 좋아하면 그만이지 그걸 밑천을 삼아 무고한 사람을 잡으려 하는건지. 지금은 내가 그년 한테 인사를 안한다. 사장한테도 전에는 깍듯햇는데 지금은 무시한다. 애 때문에 영주권때문에 참앗는데 지금 참을 가치가 없다. 난 외국사람이지만 난 당당한 인간이기에! 지금 애하고 대화 도 다양해졋다. 엄마는 내 인생을 살뿐이지 널 위해 사는게 아니다. 넌 내 인생에오색령롱한 이색을 가져다주는 천사이다.
오늘 난 은행에 가서 집 수속을 다 밟앗다. 돈을 다 낸것이다. 2280만짜리 집을 롱 35년에 처음 내는 비용 합쳐서 300만에 삿다. 호무레스 같은 행색을 해가지고 들어간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시끄럼게 굴엇지만 끝까지 싫어하지 않고 끝까지 내 마음을 시켜주신 부동산 점장하고 담당한테두분에게 진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다음 주일이면 새집에 들어간다. 일본생활 10년만에 일본에 내 잇고다데를 마련햇다.
난 내가 살아서 영주권을 쥐고 2010년 내 새집에 들어가는게 진짜 꿈같다. 집산게 꿈같은게 아니고 살아서 집산게 꿈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다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잇다는걸 난 내자신을 통해서 검증햇다. 내가 제일 바라는거 바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는것이다. 힘들게 사는 인생이라 할지라고 오래 오래 살고싶다!
지난 2009년을 돌이켜보면 꼬부라진 한해엿다. 너무 힘들엇다. 하지만 감사하다! 힘든 날들을 보내게 햇지만 웃는 얼굴로 2010년을 맞이하게 해서.
오늘은 실컷 울려고 햇다. 이젠 울어도 될가? 하지만 난 웃으면서 이글을 쓴다.
감사! 일본생활 10년!
락동강
출처:쉼터 10-02-0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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