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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의 일본 진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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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의 일본 회사 입사 1년 생활기 댓글:  조회:748  추천:0  2010-05-12
나 바줄은 회사입사 1년이 된 애숭이 사원 회사에서의 1년이란 나날을 돌이켜보면 나도 놀랄만큼 많은 일이 벌어졋다. 회사권력타툼,그중에서 난 자신은 장기쪽 하나 엿다.회사 입사 1년 사이에 나의 부서는 3번이나 바뀌였다. 중국에서 기시받은적도 없고 부모잘만나 소용없는 자좀심만 많앗던 나, 일본사람들의 시마구니 곤죠우때문에 그들아닌 내가 섬 나라에서 온 이상한 놈이 되엿던것이다. 회사 채용면접 물음:왜서 우리 회사를 선택햇냐?회장83살 전 예전부터 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온샤의 물자원을 깨끗이 하는 사업은 장래성이 있다고 봅니다. 환경문제가 과제로 되고잇는 지금 온샤의 사업내용은 크나큰 의의가 잇습니다. 물음 :자신의 장점은 ?영업부부장 무엇이나 하려고 맘 먹은일은 끝까지 해내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전 중국에 돌아가서 1년동안 영어를 배운적잇습니다. 처음에는 기초가 전혀 없어서 힘들었지만 매일마다 13시간씩공부하여 1년후 일상용어를 할수가 잇게끔 되였습니다. 지금도 매일마다 영어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물음:리력서에 손자병법을 애독하고 있다고 쓰여잇는데 그내용에 대하여 간략하여 말할수 잇나.?인사부 부장 1 경쟁에 들어가기전에 상대방과의 협력을 고려하는것입니다. 경쟁이란 많은 인력 재력이 들어가기에 서로 협력하여 공동의 리익을 얻는것입니다. 2 경쟁을 시작하기젼에 상대방과 아방의 력량을 분석하는것입니다.자신을 알고 상대방을 모르면 승산은 50퍼선트 상대방을 알 고 자신을 모르면 승산은50퍼선트 상대방을알고 자신을 알면 승산은 100퍼선트 반대일 경우 실패이 가능성이 100퍼선트입니다. 3 변화에 적응하는것입니다.정지상태에서는 기회란 없습니다. 만물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기회를 노리는것입니다.그러자면 변화 에 적응해야 합니다.크고 강하다고 해서 이기는것이 아니고 작고 약하다고 해서 지는것이 아닙니다. 공룡은 크고 힘세지만 변화 에 적응하지 못하엿기에 이세상에서 사라진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쟁에서는 시시각각 분석이 필요한것입니다. 즉 경쟁의 법칙을 강조한것이 손자병법입니다. 인사부부장은 웃엇다. 어이없다는지 아니면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그웃음이 자연스럽지 못햇다. (후에 알앗는데 나의 회사채용심리테스의결과가 자신과승으로 나왓던것이다.) 마지막물음;기미와 온나 스끼나노 ?회장 준비가 없엇던 물음이라 난 말문이 막혓다. 웃음으로 그 대답에 응햇다. 하하하 그는 늘 웃음으로 사는 유모아 감각이 뛰여난 분이였다. 면접이 끝나 5층으로 올라가서 자신의 짐을챙기고 엘레베이터를 탓다. 3층의 문이 열리면서 회장이 들어왓다. 친절한 웃음으로 <<널 근기가 잇는 놈으로 판단하고 회사에서는 널 영업부 사원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회사를 나오면 서 두주먹 쥐면서 얐따 하고 짧게 웨쳣다. 저녁;함께 한방쓰는 친구가 하는말 <<말두 않돼 일본에서 외국사람을 국내 영업뛰게 한다고 왜 일본사람쓰지 않고 널 쓴대>> 나:<<왜 내가 어때서 일본놈들이 하는일 내가 왜 못해 너 진짜 친구를 그렇게 볼래>> 친구:<<아니 외국사람은 보통 외국일과 관게되는일을 하게 해 갑자기 입사금방한 외국인은 영업으로 쓰는일은 그닥 없어.>> 친구는 나보다 1년 먼저 입사한 선배이다. 이렇게 난 2009년 4월 지금회사에 입사하게 되엿다. 그러나 친구의 말이 맞앗다. 일본국내 영업은 나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웟다. 나이가 비슷해도 회사경력6,7년 되는애들과 경쟁 한다는것은 참으로 힘들엇다.그리고  나를 채용한배후에는 생각이 서로다른 인간들이 경쟁이 있엇다. LAST,저의 경력을 적는것은 지금부터 입사하는 분들께 일본회사와 일본인들에 대하여 알려주기 위한것입니다. 시간 나는대로 계속 올리겟습니다.   글쓴이:천당의 바줄  
7    일본 와서 지나온 4년~ 댓글:  조회:649  추천:0  2010-04-26
  오늘이  일본땅  볿는  5년째에  들어서는  날... 아직두  내보다  더  큰  트렁크  질질  끌메  나리타  공항에  들어서던  내  모습이  아련하짐.. 바람이  넘  세게  불어서  뱅기  뜨지  못해서  대련공항에서  다섯시간두  넘게  기다리는  바람에  고모집에  들어섰을때는  이미  저녁  11시. 나를  위해  준비한  밥과 채는  이미  다  식은  상태고, 내가  상상했던  일본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났던지라,  진짜  그냥  짐두  풀지  않구  중국에  되돌아가고싶었던  4년전의  오늘. 학교는  이미  개학한지  13날두  넘었건만..  학과가  맘에  안들어서  굳이  학과를  바꾸갰다구  교무처로  올리뛰구  내리  뛰구  하멘서  끝내  내가  가기싶었던  학과에  들어간  나. 반주임은  이런  나를  별루  반가바하는  기색은  아니였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공부할건  다하고, 취직두  내  나름  만족가는  회사로  했고  일도  내가  좋아하는  일러  하게  됐으니  소원성취는  된  셈이고. 일본와서 4년(학교 2년, 회사 2년)을  말해보면~     <<알바편>> 젤  첫  알바가  고모소개로  어느  유명한  레스토랑  12층에서  사발  가시는  일. >>적어도  학비정도는  벌어야겠다  하고  생각하메  울며겨자먹기로  하던  나날들. >>중국에서  대학  필업하고  여기서  사발  가시는게  말이  되냐며  속으로는  통탄하고  또  하던  나날들. 결국에는  내  자존심상  허락  못해서  한달동안  꼬박  타운와크  홈피  뛰져서  찾은  알바가  바로  작은  회사서  지무  겸  외부디자인보조  겸  홈피개발하는  일. >>학교  댕기는  내내  참으로  배운게  많았고  내절루두  젤  자부심으러  생각한게가  바로  이  회사서  알바하게  된거. >>내가  알바생을러  여기  들어가면서  느낀게가  <하면  된다!>  딱  요  네글자~  굳이  살을  더  붙이자면 <노력하면  된다!>. 위에  작은  회사서  일  열씨미  하면서  신임  얻게  돼서  소개로  이번에는  일본에서  30위안에  드는  회사서  이라스토번역하고  DS겜  테스트  하는  일까지  소개받게  되였짐. >>내가 들어간 부서에  여자가  대부분이여서  서로  물그뜯구  하는게  눈감구  못봐줄  지경이였지만,    부장소개라는  명의하에  나한테는  누기두  손을  뻗치지  못하는거  보면서  느낀게가,  현실사회란  바로  이렇게  참혹하구나  하는거. 어느  년대  어느  사회든지  권력지상  이거는  변함이  없는것. >>여기서  알바 하면서  느낀게가, <현실은  참혹하다, 참혹한  현실을  정시하려면  노력+운+뒷바침>이 잇어야  된다. 일본와서  반년후  주말마다  하던  알바는  일본인(친구가  다니던  회사  령도)한테  한국어  배워주는  일. >>내가  배우는  학업하구  같은  업종에  종사해서  말이  잘  통해  그런지, 잘  배워주지도  못하는  나한테  시급 2500엔씩  주고  집에  돌아갔을때마다  지모또음식하구  물건을  우편을러  보내주던  사람. 엄마가  함박꽃으  좋아해서  집에서는  항상  함박꽃을  키운다고  하니까, 함박꽃정원  구경  시켜주던  사람. 참으러  맘  따뜻한  분이여서  일본사람들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거  절실하게  느꼈짐.   <<학교편>> 거의  맬마다  그냥  고무줄바지에  운동화  질질  끌메  학교  댕기던  나. 이런  나를  반겨주는  이들이  잇는가  하면, 아니꼽게  쳐다보멘서  눈으  올리깔구  내리  깔구  하던  이들두  있었고  항상  불쌍하게  보는  이들두  있었다. 머래두  상관없짐.  내가  학교  들어온거는  그냥  내앞에  공부  하기  위해서지  므슨  멋으  따메  친구  사귈려구 들어온게  아니니까. 배우기  위해서는  선생들하구  친해야  된다는게  내  원칙.  글구  실력있고  잘  배워주는  선생들은  내가  꽁무니  쫄쫄  따라댕기메  물어볼거는  물어보고  이랬다. 학교  댕기는  2년동안,  학비는  비싸고  공부는  내가  섭취하기  힘들만큼  바쁘고  해서  중도에서  두세번  포기할려구  했지만, 그때마다  친구하구  부모반대에  다시  맘 잡구  학업에  몰두  하던 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학업으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은게  천만번  다행이란  생각이  들짐.ㅎㅎ 머니머니해두  <시작한  일은  끝까지  견지하자! 그리고  최선을  다하자!> 이게  내가  모든  류학생들한테  말하기 싶은  한마디이짐. <<회사편>> 회사서  유일한  외국인인  나.  여자가  보기드물  정도로  적은  회사. 한마디러  딱  잘러  말하므  쬬꼼  보호동물쪽에  들어있짐.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머  별  스트레스는  없그.. 회사 사람들두  기본상  다  맘  고분  사람들이래서  어케  보므  스트레스  밤바라구  말할수  잇짐.. 회사라구  말하므  젤  큰  스트레스가  그래두  인간관계라구  말할수  잇짐. 그램  회사서는  어떻게  인간관계를  처리해야  하는가?? 1.선배들은  깍듯이  모신다. 즉  선배위신은  세워준다.  모를게  있거나  상담할게  있슴  즉석에서 한다. 2.동기가  제가  더  잘한다고  우쭐렁거리거나  치푸할까  할때므  쪼꼼  참는새  하다가  실력을러  내리까버린다. 이건  좀  시간이  수요되짐.그래두  내리까버린담에는  동기쪽에서  우호적을러  나오짐. 3.선배한테서  이지메  당했거나  무시  당한  일이  있으면,  그자리에서  말할  형편이  안되면  노미까이를  리용한다.  술  한잔  하면서 그동한  당했던거  서러웠던거  다  툭  털어  말하고  선배가  이러면  되냐  이런  형식을러  도리  따진다. 물론  선배쪽  말두  들어주면서  도리  따져야짐. 4.후배가  까불가  하면,  역씨  기회  잡아서  한방에  내리까부린다. 더  이상  까불지  못하도록  즉사해버려야짐. 내같은  경우,  자꾸  말으  하는  어간에  끼여드는  후배가  있었짐..그래서  노미까이에서  선배하구  둘이서  이러쿵  저러쿵  하메  말하는데  자꾸  어간에서  끼여드니까  제절에  큰소릴러 <오마에와  다마로우!>  내  짐  선배하구  말하는게  아이보이니? 니  께낄  자리  아니다. 이런  형식을러  말한게  찍소리  못하드란데.. 쩝~ 그후부터는  꼬박꼬박  선배대접  해주짐. 5.회의  할때므  자기  의사를  똑똑하게  밝힌다. 즉, 하기싶은  말,  해야 할말, 글구 지금  종사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의견같은거는  꼬물꼬물거리지  말구  즉석에서  발표하는것. 6.자기  취향과  비슷한  친구를  맹근다. 그렇다구  그  친구하구만  단짝이  돼서  노는  일은  없도록  해야짐. 7.머니머니해두  책임감  가지고  맡은바  일을  제대루  해야  되는거. 8.더  보태자면  배움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거. 항상  허심하게  배우도록  노력해야짐.   끝으로~ 일본와서  젤  큰  성과는  그래두  좋은  남친  만난거. 5년째가  되는  오늘부터  저는  나  혼자만이  아닌  두사람의  미래를  가꾸는데  노력하겠슴다..ㅎㅎ 힘든  일본생활이지만,  다  같이  노력하면서  삽시다~~~!!! 길고도  또  긴  글  읽어주느라  수고  많으셨슴니다~~~ 꾸벅~~~^^   글쓴이:비밀글입니다.  
6    일본 회사생활 1년채와 5년채 댓글:  조회:819  추천:0  2010-04-07
1년:  아침에 일찍 가서 책상주위 정돈하고 옆의 선배책상위도 닦아준다. 태양은 빛나고 하늘은 마냥 푸르고 모든게 신선하기만 하다. 5년:  오늘도 통근전차 놓쳤다… 회사주위에 가서 또 뛰여야 한다… 기리기리 朝礼 間に合う까나… 화장도 채 못했는데.. 젠장 -_-   ---------------------------------------------------- 1년: 앗차~~ 늦잠을 잤다… 일단은 세수하고 치솔질만 하구 그냥 뛰여간다… 혹시라도 지각한 신입이라는 딱지가 붙을까봐 조마조마하다… 5년: 늦잠을 잤다… 시계를 확인후 인상쓰면서 일단 회사에 전화넣고, 더 잔다… -_- 그리고 천천히 일어난뒤에 화장 풀코스를 다 하고 런치까지 먹고 오후에 나간다… -------------------------------------------------- 1년: 저녁에 환영회다… 아직 이름도 다 기억못한 선배들이 넘흐 많고 마니 떨린다… 책에서만 봤던 연회석매너와 신입의 마음가짐을 다시한번 되새겨보고 달달 외웠던 자아소개도 또다시 되새겨본다… 연회장에 가선 최대한 이쁜척 순진한척 잘보여야 하고 2차 3차까지 몸에 배지않는 정장차림으로 배동해야 한다… 5년: 해마다 그러하듯 올해신입들두 참 답답하다… 어뜨케 술상에 어른들과 선배들이 앉아있는데 지들끼리 뭉쳐앉아 떠들어댈수 잇을고?  잔이 비였는데도 술 따를 생각안하고 음식들이 올라오면 못먹은 집안에서 온것처럼 완죤 작정하고 어떠없이 먼저 수저를 든다… 게다가 잘생긴 남자옆에 딱 붙어서 온갖 아양을 떠는 저건 또 머고 어린애들 옆에 두고 좋타고 찌야호야 하는 옷상들 또한 눈꼴시렵다….요즘 것들… 너무 못됐다 -_- -   -------------------------------------------------- 1년: 오늘 입사해서 처음으로 기획안을 만들고 발표했다… 몇날며칠동안 속 썩이면서 꿍꿍 생각하고 고민하고 정말로 열씨미 했는데, 회의때 몇년선배인 어떤 노처녀 히스테리한테 완전 부정당하고 콧웃음만 당했다… 앞길이 암울하고 내가 앞으로 그밑에서 스트레스 받을꺼 생각하니 참담하다… 과장님은 내 아이디어가 괜찮타구 했는데… 능력이 나보다 못하니까 저나이 저때되도록 시집두 못가구 한낱 신입한테나 화풀이하고 지보다 우수한 나를, 첨부터 기죽이고 싹둑 잘라낼려구 그러지….아…. 괴롭다 ㅠ 5년: 어린것이 참으로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신입때에는 윗전들 눈치만 살피느라고 할말두 못하구 한 3년은 죽어서 살았는데…요즘 젊은것들은 두려운것도 없나 보다….오늘 신입 아이디어가 미숙하고 한번도 걸어가보지 못한 전례없는 やり方였기에 머리속이 꽉 막힌 윗전을 설복한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였고, 또한 리스크가 너무 큰건 둘째치고 뒤에 받쳐준 론증재료가 하도 빈약했기에, 내선에서 일단은 보류하자고 했다…지금은 너무 정신없이 여유없이 처리할게 너무 많아 황황하지만 이제 시간날때 다시한번 그 안을 검토해보고 숫자와 근거를 하나하나 맞춰보고 다시 다듬어 올려보내도록 해야겠다… 어젯밤도 밤을 지새운지라 피부가 엉망이고 두눈도 꺼멓게 우엉하게 들어갔다…-_- 사는게 사는게 아니다…. --------------------------------------------------- 1년: 오늘 일하다가 ミス를 했다… 아흑~~ 난 왜 모르는게 이렇게 많을가?  주의하느라고 한것도 엄범덤벙한건 못고치나 보다… 부장한테 호되게 욕먹었다…저녁에 일찍 돌아가 이불쓰고 울고싶건만, 눈치없는 노처녀선배가 또 술먹을러 가잰다 -_-  선배의 押しが強い한것두 그렇고 무셉구 떨려서 거절두 못했다… 휴~~ 인생 어둡다~ 5년: 신입이 갖짢은 일루 부장한테 호되게 당했다… 괜시리 맘이 스르르 해지고 아파왔다… 저넘 대머리부장넘은 엊저녁 마누라랑 싸움했나? 애들보고 소리를 지르면서…-_-  자기가 지난번에 청구서를 잘못보내 거래처에서 혼난건 생각두 안하나부다… 후배가 가슴아파 저녁에 요가교실 캔셀하구 술이나 사주면서 달래줘야겠다… 오호홓~ 내는 일케 아랫사람들을 잘 챙겨줘서 문제라니까~ 흠흠~~   more    
5    조선족이 일본살며 배워야 할 3가지 댓글:  조회:613  추천:0  2010-03-07
(중국인으로써 중국의 자부심을 가지고 장기간 일본에 몸을 머물면서 일본인들의 훌륭한 3대특징이라고 생각되는 점을 함 적어봅니다) 중국은 지금 경제대국의 길로 들어섰습니다.개혁개방후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미국을 앞두고 세계2위를 찾이하고 있지요. 중국경제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 나갈것이고 또 발전해 나가야만 나라가 이쁘게 발전된 나라가 될수 있으니 앞으로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렬해 질것입니다.크게 말하면 나라와 나라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렬해 진다고 볼수있 겠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본의 발전된 모습들을 잘 따라배워야 합니다.잘 따라배워야 발전된 인간으로 살아갈수있으니깐요.그렇다면 일본의 어떤 모습들을 따라배워야 할까요.사실 일본의 발전된 모습은 별거아닌 아래와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일상생활에서 항상 절약정신에 노력을 하고 있다.이런 정신을 키운다면 사람은 만족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고 만족을 아는자는 행복을 얻게 됩니다 둘째:상대방에게 페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즉 상대방과 의사소통을 할때 상대방의 립장을 우선 생각해야한다. 셋째:법과규률을 잘 지키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 이런정신이 있기때문에 일본사람들은 정직하고 일을 열심히 한다. 이상의 세가지를 개괄해보면 우리들은 생활하면서 항상 절약정신을 키우고 밖에서 무엇을 하던  상대방을 료해하려하고 례절을 갖추어야하며 사람들이 정해놓은 법과규률을  잘 지켜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는것이다. 이 모든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가꾸기위 한것이다(수양과도덕을 키우는것). 돈을 많이 벌려는 정신으로 살아가는것보다  수양과 도덕을 쌓으려는 정신을 키워가면서 사는것이 진짜 잘사는것이라고 봅니다.    글쓴이 : 山谷凡人    
4    나의 일본 류학 경험담 댓글:  조회:509  추천:0  2010-03-07
동경엔수많은외국사람들이살고있다.주위를함둘러보면주로아세아지역의많은나라사람들이생활하고있음을알게된다.나라별로 함 적어본다면 중국인(몽골족)은 물론이고 한국인,필리핀인,페르인,브라질인,독일인,스리랑카인,인도인,네파르인,부단인,대만인,인도네시아인,미국인,월남인,파키스탄인,먄마인들이다.지금까지 일본을 포함한 16개국의 많은 사람들과 접촉해오면서 그들에게서 참으로 많은것을 알게되고 터득하게 되였다.   이런 많은 나라사람들을 만나게된 계기는 학교를 다니면서 자기절로 적극적으로 다양한 알바를 해온데 있다.특히 제조업체에서 오래동안 일하면서 그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접촉하게 된것이다.중국에서 장사경험을 일년정도 하고 일본와서는 서비스업과 류통업에서도 일해봤고 음식업에서도 일해봤지만 역시 제조업에서만이 일본의 사회에 대해서 깊은 료해와 많은면들에 대해서 알아보는데 큰도움이 되였다. 제조업외의 알바생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라 거의 사회나 정치 대해서 별로 흥취가 없는같았다.또한 통계에서도 볼수 있듯이 요즘 일본 젊은이 들은 정치에 별로 흥취가 없다.그러하니 일본사회를 알면 어느만큼 알겠는가 하는점이다.또한 일본사회는 로년화되여 있으니 일본사회를 제대로 잘 인식하고 배우려면 역시 중년층 이상의 많은 일본 사람들을 만나봐야 그들에게세 일본사회를 배워야 한다고 보았다.제조업에서 중년이상의 많은분들과 같이 일하다보면은 일본의 국민성알게될뿐더러 일본사회가 로년화사회라는점도 인상깊게 느끼게 된다.맨날 같이 붙어서 일을 하고 대화를 나누니 말이다. 덕분에 이런 분들에게서 사회와 교육 정치에 대해서 자기가  의문되거나 물어보고 싶은것을 마음껏 물어보고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현재 일본의 경제를 뒤받들어주는 일본의 중소기업의 제조업체들은 날따라 힘들어 가고 있다는것은 두눈으로 직접 확인할수 있다.첫째로는 모든 종업원들에게 일에 대한 책임심을 높여려는 회의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둘째로는 종업원수를 줄인것이고 셋째는 회사의 각종 비품들의 질량이 예전보다 못해졌다는것이다.회사의 상품들은 적게 팔리고 회사는 살아야 하니깐 고용하는쪽에서는 인수를 최대한 줄이고 일하는 강도를 전면적으로 높일수 밖에 없는것이다.일본의 많은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라는것은 기사를 통해서도 볼수있다.   반면에는 작년에 기적적으로 민주당이 정권을 틀어쥐면서 일본의 전국 국민들의 시급을 올리는것을 실시한것 같은데 실제로 현재 받고 있는 시급은 변화가 없다.파견회사를 통해서 일하는 제조업이나 직접 본사를 통해서 일하고 있는 두곳 다 말이다.한곳은 경영의 방식의 변화가  크게 개선을 못가져와서 다음달에 문을 닫게 되는 형편이니...이것이 현재 일본의 현실이라 할수 있다(데흐레현상은 언제까지...)... 사회주의사회와 자본주의사회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무장하고 절대적인 자신심과 자유정신을 키울수 있었던것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통해서였다.첫째 책과 주의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담배와 주색에 대해서 미리 료해하고 그런 유혹에 절때 빠지지 않는 정신을 키운것이다 둘째로는 사회의 모든 단체들이나 기업 그리고 가정의 내부를 들여다 볼수 있는 공부를 해온것이다.셋째로는 사랑에 대한 의식을 키울수록 사상은 해방되고 머리속의 모든 근심과 불안함은 살아지고 만다는것을 경험해온것이다.마지막으로는 치명적인 정신적고통과 유체적인 고통을 이겨낸것이다. 이 네가지의 경험들이 있었기에 비로서 자신의 리성과 감정을 자유롭게 공제하게 하고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이게하는것이다.  그 누가 말한것처럼 신은 우리에게 눈과귀를 주었으며  이 세상엔 이미 많은것을 남겨놓았는다. 그리고 부귀란 마치 저하늘에 떠돌아 다니는 구름과 같다는것이니 이젠 더 이상 필요한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류학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    글쓴이 : 山谷凡人
3    설.설.설 !!! 음력설~아~나는 집도 못가고~ㅠ..ㅜ 댓글:  조회:760  추천:0  2010-02-19
    일본에 오니 , 우리나라 명절들이 하나같이 잊혀져간다 .    오늘같이 중요한 음력설에도 나는 ,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하고 ... 아~ 일하는중에 할머니한테 설인사 올리려고 전화드렷더니 , 친척들이 할머니집에 다~모여잇어서 웅성웅성 , 즐거운 분위기에 마음이 찡-해온다  .   한국에 잇는 큰오빠도 금년설에는 중국 할머니댁에 놀러갓고, 이러고보니 , 우리 친척들중에서 나만 설마다 빠지는것같다 ... 마음같앗으면 , 정녕 달려가서 마음껏 우리나라 명절을 즐기고 싶건만 ... 해마다 생각대로 않돼서 할머니댁에 찾아못뵙는게 참 .. 마음이 아프다 .   우리는 설이면 , 돈내기 화토치기를 한다 . 십전 , 이십전 ,,일원 , 이원 .. 하면서 깡톨도 쓰면서 .. 풋 .. 우리 친척들중에 , 매번 화토치기에서 깡톨 잘쓰는 이모랑 , 큰아버지 .. 아~ 지금생각해봐도 선수다 선수 !!! 어쩌면 탄재밑에서 손이 슬써~들어가서는 서로 바꿔치기나하구 질까~하면 ,, 또 탄재밑에서 슬써~ 손이들어가서 남의 돈으 도둑질하면서 ..칫 ~ 깡톨재지만 .. 그 재능이 부럽다 ㅋㅋ 그리고 ㅡ 언배 ! 와~~~ 이 명사가 오늘 내 입에서 떠오르기엔 10년인가 ? 추운겨울엔 , 밖에 꽁꽁 얼게 내놓은 배 ㅡ 검게될때까지 꽁꽁 언배를 질질 ~녹여서 먹는다 ... ..이맛이야 ~~ 냠냠  왜 이런전통이 생겻는지 , 지금도 언배의 정체가 알고 싶다 ! 아~~ 다같이 만든 만두 .. 많은 만두안에 딱 하나의 만두만에 오전짜리 동전을 넣어둔다 . 그런들 뭐하냐 .. 나는  중국에서 18 년 새해맞이하면서 한번도 씨버본적이 없는데 .. ㅠ..ㅠ 근데 우리오빠는 한해가 멀다하게 , 꼭꼭 오전짜리 씨입더라 ?? 못먹어본 사람은 원 기분상해서 , 만두안에동전 넣는 전통 싹싹 거둬치웟으면!!! 조용하게 혼자서 컴퓨터앞에서 커피한잔 마이면서 고독한 설을 보내는 나 ..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 가슴한구석이 많이 섭섭하다 .   그래도 , 외국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 쨍~하고 해뜨는 그날을 위해서 분투하는 우리자식들을 , 부모님들은 어엿하게 생각하고 잇을것이고 , 많이 기대하고 잇을것이다 .   다음해에는 , 꼬~옥 중국할머니집에서 설을쇠고 싶고 , 우ㅡ리 할머니한테 손녀로써 소비돈도 쥐여드리고 , 즐거워하는 우리할머니를 상상하면서 화토치기해서 이번에야말로 따먹고 따먹어서 설야의 부자가 될것이다 !!!! ... 라고 생각하면서 헤불쭉 .. .   새해 ... 우리 중국에계시는 할머니 , 이모고모 ,큰아버지,동생 ,오빠 언니 ,,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 큰어머니 ,오빠 . 형 . 신세많은분들 .. 일본에 계시는 모든 칭구들 , 류쌍슈쌍 ,중국동포들 ,, 그리고 홀로 커피에 낙지나 뜯는 희구하고 고독한 내 자신도   복많이받으시길 ㅡ .... 바라면서 !     글쓴이:스프라이 제공: 쉼터
2    일본에 와서 10여년 댓글:  조회:776  추천:0  2010-02-19
저는 일본온지 10여년 되는 연변사람입니다,사랑하는 연변의 부모님들 곁을 떠난지는 20년 가까이 됩니다, 90년대 초에 연길에서 학교졸업하고 직장생활 일년정도 하다고 친구의 소개로 중국 남쪽지역의 대도시로 떠났습니다, 국가간부라는 철밥통을 버린다고 공산당령도하의 신앙으로 몇십년 고생하신 부모님들의 말림도 마다하고, 처음엔 친구의 소개로 한국모대기업의 중국지사에 취직하게 되였습니다,남쪽지역의 무더위는 그 무엇보다도 참기 힘들었습니다, 첫달봉급은 연변에서의 칠배정도니 그땐 솔직히 너무너무 기뻣습니다,그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전국에서 30분정도 줄서서 기다리며 소비돈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부모님한테 송금했습니다,그때는 낯선 타향땅에서 매달 송금하는 날 만이 나의 전부 였습니다,지금도 부모님들은 저한테 그 얘기를 하십니다,수발실에 또 돈 깍지가 날아 왔으니 얼른 돈 찾으러 가셔요하고 수발보시는 아바이로 부터 전화가 있엇다는, 물론 한국의 외래어 땜에 의사소통이 잘 안돼 한국직원들한테 이지메 당할때도 많았지요,허나 이상하게 그것이 이지메보다는 저한테는 많은 편달이 되였습니다,언젠가는 열심히 배워 한국직원들 보다는 우수한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3년정도 있다보니 과장으로도 승진이 되고 봉급도 처음의 두배정도는 받게 되였습니다,어느정도 인정은 받게 되였습니다, 그후로 우연한 기회에 새로 진출한 일본기업에 면접을 보게 되였습니다,학교때 배운 일어를 바탕으로 면접은 무사히 통과되여 입사하게 되였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일어정도가 진짜 터덕터덕 했을 거지요,물론 봉급도 한국기업의 두배정도 였고 일년에 한번씩 보너스도 있었습니다,그때 만난 일본인 상사는 참 좋은 분이 였습니다,그분의 고향은 長野県이였는데 제가 일본와서도 한번 놀러간적이 있습니다,물론 처음에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였지만 그분은 머든지 열심히 가르쳐 주었습니다,대화시에는 항상 메모장하고 사전을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그리고 특히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일 하는 스타일 등을 많이 가르쳐 주었습니다,그때 처음으로 他人に迷惑を掛けないこと를 알게 되였고 또 그렇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標準日本語-中級를 일년정도 자습을 하였습니다,그러니깐 그분하고 대화도 되고 업무상 커무니켜선도 잘 되였습니다, 시간은 흘러 90년대말에 연변에서 일본 출국 붐이 일어났습니다,저를 잘 대해주던 일본상사도 귀국을 하고 저는 5년간 해왔던일본회사를 그만 두고 일본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이 선택이 잘 된 선택이 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태껏 후회한적은 없습니다,그때 일본회사서 같이 분투하던 친구들 지금은 다들 남 못지 않게 잘 보내고 있더군요, 처음엔 동경에 있는 일본언어학교에 오게 되였습니다,일본의 비싼 물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요,교통비 절약을 위해 거리에 관계없이 거의 자전거로 이동을 했습니다,지금 보게 되면 좋은 운동이 였죠,낯선 이국땅에서의 시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점과 배울점이 많았습니다,일어는 어느정도 했으니깐 알바 찻기는 쉬을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 였죠,알바 찻는 한달 동안 매일 불안속에서 헤매이고 무었땜에 일본 왔는가 하고 다시 생각하는 날 들이 많았습니다,한달후 음식가게서 알바 하게 되였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매일매일을 보낼수가 있었습니다,난생 처음하는 음식가게는 진짜 생각보다는 힘들었습니다,싰어도 씻어도 산더미처럼 쌍져지는 그릇들,,,無表情でひたすら줄서서 기다리는 일본 사라리만들 ,,,早く早くっと叫ぶ店長,,,어제일 처럼 생각됩니다,물론 처음엔 익숙하지 못해 이지메같은거 좀 있었습니다,この野郎、馬鹿、アホ、この中国人などなど,,,그럴떄마다 일본에 올 때 좀 더 노력해서 잘 살아보자는 아름답고 순진한 미래만을 생각하며 꾹 참았죠,저는 음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천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적은 한번도 없지만 고달프고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떄마다 난 나중에 꼭 일본사회에서 너같은 점장들을 부려먹는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지금은 생활을 위하여 어쩌는 수가 없지만,,, 언어학교 일년(실제는 10달)을 마치고 일본의 모 사립대학학부에 입학을 하게 되였습니다,입학 첫해부터 운 좋게 문부성 장학금을 타게 되였습니다,우리 학교는 절대적인 시험성적으로 장학금평가를 하거던요,전 한족애들보다는 죽더라도 공부를 더 잘 해야 겠다는 것만은 있엇거든요,솔직히 말해서 우리 그때는 중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일본사비류학을 오는건 아니였거던요,좀 돈이나 벌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죠,저도 물론,찌나미니 한달에 장학금이 5만엔 였어요,그거로 학비는 무꾸되였습니다, 집도 학교 부근에 잡고 알바도 하나 바꿧지요,야끼니꾸였습니다,음식가게 일도 어느정도 숙련이 되고 하니 일본사람들 보다도 일 잘한다고 가게주인이 그냥 맛있는 마까나이만 잘 내 주더군요,참 고마운 분이 였습니다,일에 숙련이 되다보니 일본 알바생 들을 내가 이지메하게되는 립장이 돼 버렸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일 잘하는 사람들 괴롭히는 일은 어느 사회에도 없는것 같습니다,학교에서도 류학생협회를 이끌어 나가게 되였습니다,다들 알바 바쁘다고 학교행사에 빠지는 중에서도 열심히 学園祭도 조직해나갔습니다,焼き餃子、水餃子、小籠包の模擬店で3日間売り上げ20万円を記録したこともあります。공부도 열심히 해서 학부2학년때도 몬부성 장학금을 받았고 3학년,4학년때는 中島平和奨学金-月10万円을 받게 되였고 門前仲町에 있는 중국대사관교육부에서 학교 류학생협회에 주는 활동경비도 12만엔 받은적이 있습니다,물론 대사관교육부의 행사에 잘 참가 했거던요,학부를 졸업하고 취직을 시도해 보았으나 그때도 지금처럼 취직빙하기여서 취직이 잘 안되였습니다,할수없이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게 되였고 또 2년을 같은 학교서 보내게 되였습니다,이번에는 넘넘 행운이라 할까 로타리장학금을 2년동안 월15만씩 받게 되였습니다, 로타리안들의 정신에 감명도 받았고 세상엔 이렇게 좋은 분들도 있고나 하고 모임에 참가 할때 마다 감동되였습니다,특히 저의 카운세라되시는 할아버지는 수십번 저를 집에 초대해주셨고 같이 여행도 몇번 갔다왔습니다,다만 저한테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많이 베풀어 주면 할아버지 은혜 값는 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지금도 친 자식처럼 귀여워 하십니다, 대학원석사과정 무사히 졸업하고 지금은 동경에 있는 모중소기업에서 사라리만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봉급은 그럭저럭이지만 스트레스 크게 없이 매일매일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중국 한국 출장도 드문드문 있습니다,회사에서 자기만이 할수 있는 일을 지금도 열심히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회사 일본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농담으로 옆에 있는 부장보고 部長中国人でしょ、 最近は韓国人じゃないの 할때도 있습니다,회사생활 하면서 우리 조선족들은 일본인보다 못지 않는 전업지식 스킬과 중국어 한국어 우세로 자기의 지위를 궅혀 가야 한다고 봅니다, 월신일보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이 자기의 조국이라는 점을 자부하면서 언젠가는 일본인들도 중국서 알바할거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우수한 점들 만을 배우고 중국의 장점만을 살리면서 또한 우리 조선족의 吃苦耐劳 정신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우리 조선족들도 일본사회서 아니 전세계 어디서라도 항상 멋지게 잘 사시는거 아니 겠습니까 질서없는 글 이지만 마지막끼지 읽어 주신 분들께 경의를 표시합나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쓴이: 땅찌치기 출처:쉼터 10-02-13 13:02        
1    이젠 울어도 될가 - 일본생활 10년 댓글:  조회:915  추천:0  2010-02-19
1999년에 일본와서 만 10년이 되엿다. 다른 사람들이 다 겪듯이 일본생활 10년은 파란만장많은 인생의 하나의 에피소드일가? 쓰겁고 차겁고 서럽고 분하고 …… 물가 차이가 엄청난 일본에 와서 감히 쌀사먹을 생각을 못하고 석달을 가마치에 물에 된장을 풀어먹엇다. 안그러면 숙사 구석에 처박혀잇던 쇼미기겐 기레 한 한국국수로 입맛을 바꿀때도 잇엇다. 녀자로 생겨서  땍볓에 같이 일하는 남자하고  내보다 몇배나 큰 쓰레기주머기를  차에 실어 올릴때 힘든것보다도 머리속으로 돈계산을 햇다. 그렇게 죽도록 일시켜먹어도 한달에 고작 5만엔 받앗다. 4시간 일시켜야 할것을  8시간시켜도 4시간 돈밖에 안주엇다. 그래도 5만엔을 받으니 이제 새로 싼 집을 잡을수 잇다고 생각하니 기뻣다. 원래 좀 쬐쬐하고 지독해서인지 딸라고 200딸라 남기고는 생활비로 가져왓던 돈을 집으로 몽땅 부쳣다. 난 다른건 괜찮은데 흰밥에 간장 비벼먹는것이 꿈이엿다. 야채사먹는건 사치니깐 엄두도 못내고 . 그때레다스가 제일 싼게 백엔이니 환률이 8.3이엿으니 중국에서 상추 한포기를 8원주고 사먹는다면 눈이 뒤집혀질것이니깐.   아무리 힘들어도 학교는 갓다. 일단 일어만은 잘 배우고싶엇으니 . 그런데 왜 그렇게 잠이 오는지 첫두시간은 잠 안잔다. 그다음 두시간은 아예 세상도 모른다. 그래도 1급은 건넛다. 얼마나 공부를 안햇으면 이듬해 친 1급이 처음가서 반년후에 친 성적보다 1점이 적엇을가? 일본와서 1년 넘으니 일어능력이 도태되엿는 모양이다.  힘든것보다 돈이 너무 적어서 쓰레기 처리하는 일은 그만둿다. 그다음 우에노의 야끼니꾸 갓는데 한국애들이 얼마나 깔보는지. 거기다가 재일 교포 녀자 점장도 잡아먹을라 한다. 모든 스트레스는 제일 약한 이 중국사람한테 푼다.돈때문에 참아야 하지만 힘든건 참아도 무시당하는건 못참는다. 자존심 강한 나는 내절로 나왓다. 그때 진짜 하루종일 얼마나 울엇는지 모른다.  그 다음 다른 야끼니꾸 에서 1년 반이상 일하여 중국에 집 한채 마련햇다. 그때는 아무 생각도 없엇다. 힘든줄도 몰랏다. 돈하고 공부 , 잠 자는것밖에 몰랏다. 마까나이를 주니 이밥먹는 꿈은 없어지고 언제만 실컷 잘고 하는 생각밖에 없엇다. 난 영원히 야끼니꾸의 사장님을 잊을수 없다. 면접하러 간 나를 한끼 불고기 대접하고 구질구질한 내가 잘못하는 일어로 「頑張るから、雇ってください」 하니 그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난 아예 안된줄 알앗는데 어디어디 가서 일하라고 한다. 나는 얼마나 속으로 그 젊고 멋진 미남자사장님 만세를 불럿는지 모른다. 거기서 일어도 많이 늘엇고 밥도 배불리 먹엇고 돈도 벌엇고 집도 마련햇다.   일어학교 끝날 무렵 어떤 재일 교포 사장이 열심히 뛰는 구질구질한 내가 불쌍하다고 입사하라고 하는걸 난 거절햇다. 사장이 간곡히 취직하기 힘든데 들어와 하는 바람에 들어갓는데 이넘의 비자가 반년만에 나와 난 미치는가 햇다. 그런데 일어를 잘못하는 나엿기에 나하고 같이 들어간 재일 교포 박사상사한테 진짜 너무 많은 구박을 받아서  스트레스 받아서 미칠 지경이다. 자기네들도 일본에서 업신당하는 주제에 중국사람이라고 비자를 줘서 선심썻다고 란리다.    3년이 지나는 해 업무가 없는 나는 구비를 당햇다. 구비당한 나는 진짜 앞길이 막막햇다. 왜 대학에 안들어갓는지 후회되고 비자는 어떻게 할가 고 눈이 퀭해졋다.   그래서 선택한것이 영국행이다. 영국에서 여러 가지 생긴 일을 쉼터에 낸적 잇엇다. 영국에서 오는길에 중국들려 또 집한채 마련햇다. 영국갓다 와서 빠진코 재털이 청소 아르바이트 하면서  어떤회사에 일햇는데 거기 중국녀자가 비자때문에 어려운줄 알고 갖은 수단을 다 써서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난 그렇게 비렬한 중국녀자를 처음 만낫다.  그 회사에서 나온 다음 다른 중국무역하는 회사에 가서 중국 주재로 잇엇는데 미친 ㄱ ㅐ 같은 사장이엿다. 완전 노예취급에 밥을 못먹게 한다. 할수 없이 또 그만둿다.   난 리력서를 200몇통 보내 겨우 지금 다니는 회사에 들어왓다. 그때 경쟁률은 상당햇다. 한곳에 몇접하러 가니 이력서가 사장앞에 1메터는 싸인것 같다. 사장이 하는 말이 여기 말고도 인터넷으로 응모한것만 해도 얼만지도 모른단다. 그런데 딱 한사람만 필요한데 몇백명이 달려붙은것이다. 난 진짜 절망적이엿다. 나이 많고 녀자이고 키도 작도 일본에서 대학도 못나오고. 난 어떻게 해야 하나는 생각뿐이엿다. 하여튼 죽을둥 살둥 모르고 리력서를 쓰고 보내고 햇다. 어떤땐 열통 보내도 면접오라는데는 한군데도 없엇다. 어쨋든 난 지금회사에 취직하여 여기에서 몇년을 보냇다.     이 회사에 들어오니 사장 성질이 어찌나 괴벽한지 어떻게 대응할지 모른다. 난 여기서 구비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이마살을 펼때가 적엇다. 그런 나를 보고 사장이 널 구비안시킬테니 걱정마 한다. 일이 익혀져 얼마 안되 난 결혼을 하고 남편을 일본에 데려왓다. 그리고 얼마 안되 애가 태여낫다. 나의 출산 휴가때문에 다른 일본녀자애를 받아들엿는데 이 애가 완전히 인간성이라곤 조금도 없다. 그래도 난 나보다 어리기에 여러모로 많이 돌봣는데 영어 할줄 안다는 턱대고 내 일을 몽땅 빼앗아갓다. 난 애때문에 잔업도 못하고 휴가도 많다. 그 녀자애는 사장하고 이상한 사이로 까지 발전해 완전 마누라 행세를 해가면서 누구한테나 마구다지다. 사장이 좋아하니 누구하나 감히 어쩌지 못한다. 뭐라 고자질 햇는지 사장이 완전히 날 사람 취급 안한다. 사인 회의 할때는 나만 뺀다. 다같이 먹으러 가도 나만 없다.  아침 인사를 해도 저녘 인사를 해도  누구하나 응답하는 사람 없고 하루종일 잇어도 일만 없이 가만잇는게 지옥이라면 이보다 더 하랴! 그리고는 한국사람 생긴꼴을 봐라 하면서 딱 저거같이 생긴게 한다. 분명 날 두고 하는 말이다. 난 영주권을 신청한 상태에서 애때문에 어쩔수도 없는 비참한처지에 잇엇다. 내쫓지만 않으면 어떤 벌이라도 달갑게 받겟습니다 는 상태엿다.   어떤 모욕을 당해도 난 우리 아들의 엄마다! 엄마가 된 이상 난 애를 위해서 영주건을 위해서 내 이때까지 꿋꿋이 지켜온 내 자존을 팔앗다. 아침  저녘마다 1시간 넘게 되는 길을 베비카로 걸어서 애를 보육원에 보내면서 엄만 너때문에 모든걸 참을수 잇어 꼭참을거야 하면서 힘든 날들을 지내왓다.   한번은 너무도 지 라 ㄹ하는 그년이 미워서 한바탕 해댓더니 내가 중국가잇는 사이에 회의를 열고 날 구비시켯단다. 비겁한 놈, 나한테 말못하고 다른 사람 시켜서 전달하란다. 하지만 그년하고 사장외에 다 불동의하기에 1달만 두고 보기로 햇다. 구비 결정이 나서 며칠 안지나 회사 신체검사 갓는데 변에 피가 섞엿단다. 설마 큰일이 아니겟지 햇지만 그래도 마음이 안놓여 시티 해봣더니 혹이 생겻단다. 난 하늘땅이 무너지는줄 알앗다. 이 어린 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때까지 고생만 햇는데 왜 난 복이 없을가? 그날 애안고 눈물흘리니 간호사가 애가 보는데 왜 그러니 한다. 이런병 걸린 사람 많은데 한다. 애가 눈이 올롱해서 날 쳐다보니 애 볼 용기도 없다. 그래도 구비가 결정된 상태에서 난 계속 무시당하면서 회사를 다녓다. 일단은 보험이 필요햇기에. 그리고 나에게는 2010년이 없다고 마음 속 각오까지 다 햇다.    난 살고싶엇다. 애를 위해서가 잇지만 주요하게는 생에 대한 애착이 이렇게 강한줄은 몰랏다. 병이 날때는  옆의 사람들도 힘들지만 자신은 허무하고 무섭고 서럽고. 그리고 살고 싶다. 하느님이든 신선님이든 의사선생님이든 살려주세요 하고 달라 붙고 싶은게 진심이다. 살려만 준다면 하라는 대로 하겟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여전한 그 이지메 ! 인간성을 잃은 넘들이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난 병원에 갈 용기가 없어서 미루다가 내 목숨은 내절로 책임진다는 생각에서 병원예약햇다. 남편은 학교다니기에 못가고 수술 하고 입원할 물건을 챙겨가지고 애를 베비키에 앉히고 수술하러 갓다. 가니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이 그렇게 많앗다. 난 벌써 결과가 나왓기에 수술시키려고 제일 마지막에 안배햇다. 수술실에 들어갈려 하니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애 안고 남편오기를 기다려 들어갓다. 카메라가 장에 들어가는게 모티타로 보인다. 난 그래도 아니길 빌엇다. 난 성격이 강할뿐 나쁜 사람은 아니니깐 더 큰 고생은 할수 잇어도 이런 암같은 병은 싫다고 빌엇다. 하지만 빌면서도 머리속은 텅빈 공백이다. 의사도 그 위치까지 왓으니 뗀다고 하니 난 더 이상 모니타를 볼 용기가 없어 눈을 감앗다.   순간 선생님이 이건 혹이 아니라고 소리를 지른다. 너무 기뻐서. 순간 난 새로운 생을 얻엇다고 생각햇다. 그러면서 나보고 보란다. 작은 물집같은데 물이 찰랑찰랑 차잇다. 간호사가 너무 기뻐 남편하고 애까지 데리고 들어왓다. 그길로 난 그 후의 병원예약을 다 취소하고 나왓다. 그저 선생님손을 꼭 잡고 감사하다는 말만 햇다. 기쁨의 눈물도 없엇다. 그길로 스시집에 자극하면 안된다고 햇는데 스시를 배터지게 먹엇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영주권이 내려왓다.  회사에서는 아직도 그년이 날 괴롭히고 잇지만 난 이젠 맞받아 싸운다. 말해도 말에 힘이 잇엇다. 난 이젠 겁날게 없으니깐. 덜되먹은 년놈들 좋아하면 밖에서 좋아할거지 좋아하면 그만이지 그걸 밑천을 삼아 무고한 사람을 잡으려 하는건지. 지금은 내가 그년 한테 인사를 안한다. 사장한테도 전에는 깍듯햇는데 지금은 무시한다. 애 때문에 영주권때문에 참앗는데 지금 참을 가치가 없다. 난 외국사람이지만 난 당당한 인간이기에! 지금 애하고 대화 도 다양해졋다. 엄마는 내 인생을 살뿐이지 널 위해 사는게 아니다. 넌 내 인생에오색령롱한 이색을 가져다주는 천사이다.   오늘 난 은행에 가서 집 수속을 다 밟앗다. 돈을 다 낸것이다. 2280만짜리 집을 롱 35년에 처음 내는 비용 합쳐서 300만에 삿다. 호무레스 같은 행색을 해가지고 들어간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시끄럼게 굴엇지만 끝까지 싫어하지 않고 끝까지 내 마음을 시켜주신 부동산 점장하고 담당한테두분에게 진짜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다음 주일이면 새집에 들어간다. 일본생활 10년만에 일본에 내 잇고다데를 마련햇다.  난 내가 살아서 영주권을 쥐고 2010년 내 새집에 들어가는게 진짜 꿈같다. 집산게 꿈같은게 아니고 살아서 집산게 꿈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다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잇다는걸 난 내자신을 통해서 검증햇다. 내가 제일 바라는거 바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는것이다. 힘들게 사는 인생이라 할지라고 오래 오래 살고싶다!   지난 2009년을 돌이켜보면 꼬부라진 한해엿다. 너무 힘들엇다. 하지만 감사하다! 힘든 날들을 보내게 햇지만 웃는 얼굴로 2010년을 맞이하게 해서.   오늘은 실컷 울려고 햇다. 이젠 울어도 될가? 하지만 난 웃으면서 이글을 쓴다.   감사! 일본생활 10년!     락동강   출처:쉼터 10-02-0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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