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일본온지 10여년 되는 연변사람입니다,사랑하는 연변의 부모님들 곁을 떠난지는 20년 가까이 됩니다, 90년대 초에 연길에서 학교졸업하고 직장생활 일년정도 하다고 친구의 소개로 중국 남쪽지역의 대도시로 떠났습니다, 국가간부라는 철밥통을 버린다고 공산당령도하의 신앙으로 몇십년 고생하신 부모님들의 말림도 마다하고, 처음엔 친구의 소개로 한국모대기업의 중국지사에 취직하게 되였습니다,남쪽지역의 무더위는 그 무엇보다도 참기 힘들었습니다, 첫달봉급은 연변에서의 칠배정도니 그땐 솔직히 너무너무 기뻣습니다,그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전국에서 30분정도 줄서서 기다리며 소비돈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부모님한테 송금했습니다,그때는 낯선 타향땅에서 매달 송금하는 날 만이 나의 전부 였습니다,지금도 부모님들은 저한테 그 얘기를 하십니다,수발실에 또 돈 깍지가 날아 왔으니 얼른 돈 찾으러 가셔요하고 수발보시는 아바이로 부터 전화가 있엇다는, 물론 한국의 외래어 땜에 의사소통이 잘 안돼 한국직원들한테 이지메 당할때도 많았지요,허나 이상하게 그것이 이지메보다는 저한테는 많은 편달이 되였습니다,언젠가는 열심히 배워 한국직원들 보다는 우수한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3년정도 있다보니 과장으로도 승진이 되고 봉급도 처음의 두배정도는 받게 되였습니다,어느정도 인정은 받게 되였습니다, 그후로 우연한 기회에 새로 진출한 일본기업에 면접을 보게 되였습니다,학교때 배운 일어를 바탕으로 면접은 무사히 통과되여 입사하게 되였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일어정도가 진짜 터덕터덕 했을 거지요,물론 봉급도 한국기업의 두배정도 였고 일년에 한번씩 보너스도 있었습니다,그때 만난 일본인 상사는 참 좋은 분이 였습니다,그분의 고향은 長野県이였는데 제가 일본와서도 한번 놀러간적이 있습니다,물론 처음에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 되였지만 그분은 머든지 열심히 가르쳐 주었습니다,대화시에는 항상 메모장하고 사전을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그리고 특히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일 하는 스타일 등을 많이 가르쳐 주었습니다,그때 처음으로 他人に迷惑を掛けないこと를 알게 되였고 또 그렇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標準日本語-中級를 일년정도 자습을 하였습니다,그러니깐 그분하고 대화도 되고 업무상 커무니켜선도 잘 되였습니다, 시간은 흘러 90년대말에 연변에서 일본 출국 붐이 일어났습니다,저를 잘 대해주던 일본상사도 귀국을 하고 저는 5년간 해왔던일본회사를 그만 두고 일본유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이 선택이 잘 된 선택이 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태껏 후회한적은 없습니다,그때 일본회사서 같이 분투하던 친구들 지금은 다들 남 못지 않게 잘 보내고 있더군요, 처음엔 동경에 있는 일본언어학교에 오게 되였습니다,일본의 비싼 물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요,교통비 절약을 위해 거리에 관계없이 거의 자전거로 이동을 했습니다,지금 보게 되면 좋은 운동이 였죠,낯선 이국땅에서의 시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점과 배울점이 많았습니다,일어는 어느정도 했으니깐 알바 찻기는 쉬을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 였죠,알바 찻는 한달 동안 매일 불안속에서 헤매이고 무었땜에 일본 왔는가 하고 다시 생각하는 날 들이 많았습니다,한달후 음식가게서 알바 하게 되였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매일매일을 보낼수가 있었습니다,난생 처음하는 음식가게는 진짜 생각보다는 힘들었습니다,싰어도 씻어도 산더미처럼 쌍져지는 그릇들,,,無表情でひたすら줄서서 기다리는 일본 사라리만들 ,,,早く早くっと叫ぶ店長,,,어제일 처럼 생각됩니다,물론 처음엔 익숙하지 못해 이지메같은거 좀 있었습니다,この野郎、馬鹿、アホ、この中国人などなど,,,그럴떄마다 일본에 올 때 좀 더 노력해서 잘 살아보자는 아름답고 순진한 미래만을 생각하며 꾹 참았죠,저는 음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천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적은 한번도 없지만 고달프고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떄마다 난 나중에 꼭 일본사회에서 너같은 점장들을 부려먹는 인간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지금은 생활을 위하여 어쩌는 수가 없지만,,, 언어학교 일년(실제는 10달)을 마치고 일본의 모 사립대학학부에 입학을 하게 되였습니다,입학 첫해부터 운 좋게 문부성 장학금을 타게 되였습니다,우리 학교는 절대적인 시험성적으로 장학금평가를 하거던요,전 한족애들보다는 죽더라도 공부를 더 잘 해야 겠다는 것만은 있엇거든요,솔직히 말해서 우리 그때는 중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일본사비류학을 오는건 아니였거던요,좀 돈이나 벌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죠,저도 물론,찌나미니 한달에 장학금이 5만엔 였어요,그거로 학비는 무꾸되였습니다, 집도 학교 부근에 잡고 알바도 하나 바꿧지요,야끼니꾸였습니다,음식가게 일도 어느정도 숙련이 되고 하니 일본사람들 보다도 일 잘한다고 가게주인이 그냥 맛있는 마까나이만 잘 내 주더군요,참 고마운 분이 였습니다,일에 숙련이 되다보니 일본 알바생 들을 내가 이지메하게되는 립장이 돼 버렸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일 잘하는 사람들 괴롭히는 일은 어느 사회에도 없는것 같습니다,학교에서도 류학생협회를 이끌어 나가게 되였습니다,다들 알바 바쁘다고 학교행사에 빠지는 중에서도 열심히 学園祭도 조직해나갔습니다,焼き餃子、水餃子、小籠包の模擬店で3日間売り上げ20万円を記録したこともあります。공부도 열심히 해서 학부2학년때도 몬부성 장학금을 받았고 3학년,4학년때는 中島平和奨学金-月10万円을 받게 되였고 門前仲町에 있는 중국대사관교육부에서 학교 류학생협회에 주는 활동경비도 12만엔 받은적이 있습니다,물론 대사관교육부의 행사에 잘 참가 했거던요,학부를 졸업하고 취직을 시도해 보았으나 그때도 지금처럼 취직빙하기여서 취직이 잘 안되였습니다,할수없이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게 되였고 또 2년을 같은 학교서 보내게 되였습니다,이번에는 넘넘 행운이라 할까 로타리장학금을 2년동안 월15만씩 받게 되였습니다, 로타리안들의 정신에 감명도 받았고 세상엔 이렇게 좋은 분들도 있고나 하고 모임에 참가 할때 마다 감동되였습니다,특히 저의 카운세라되시는 할아버지는 수십번 저를 집에 초대해주셨고 같이 여행도 몇번 갔다왔습니다,다만 저한테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많이 베풀어 주면 할아버지 은혜 값는 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지금도 친 자식처럼 귀여워 하십니다, 대학원석사과정 무사히 졸업하고 지금은 동경에 있는 모중소기업에서 사라리만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봉급은 그럭저럭이지만 스트레스 크게 없이 매일매일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중국 한국 출장도 드문드문 있습니다,회사에서 자기만이 할수 있는 일을 지금도 열심히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회사 일본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농담으로 옆에 있는 부장보고 部長中国人でしょ、 最近は韓国人じゃないの 할때도 있습니다,회사생활 하면서 우리 조선족들은 일본인보다 못지 않는 전업지식 스킬과 중국어 한국어 우세로 자기의 지위를 궅혀 가야 한다고 봅니다, 월신일보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이 자기의 조국이라는 점을 자부하면서 언젠가는 일본인들도 중국서 알바할거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우수한 점들 만을 배우고 중국의 장점만을 살리면서 또한 우리 조선족의 吃苦耐劳 정신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우리 조선족들도 일본사회서 아니 전세계 어디서라도 항상 멋지게 잘 사시는거 아니 겠습니까 질서없는 글 이지만 마지막끼지 읽어 주신 분들께 경의를 표시합나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글쓴이: 땅찌치기
출처:쉼터 10-02-13 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