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병사의 이야기](11)
작전지도 번역과 대적방송으로 3등공 세차례
―항미원조전쟁 참전 로병사 성무경을 만나보다
대학꿈 포기하고 형들 따라 입대
“항미원조 1차전역이 끝나고 회덕현(공주령시의 전신)에서 번역일군을 5명 추천하라는 통지가 성으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때 저는 료북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대학에 진학하여 새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성무경의 부모님은 7남매중 맏아들과 둘째아들이 륙속 입대하다보니 셋째아들인 성무경이만은 꼭 대학에 보내고 싶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학교에서 3호 공청단원이였던 의연하게 군대에 지원했다.
“이 선택은 강대하고 행복한 나라의 래일을 위하는 길임을 알았으며 이를 위해 저의 청춘과 열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제들과 남긴 가족사진(뒤줄 오른쪽)
당시 성무경 등 5명 학생은 길림성정부가 있는 길림시에 파견되여 길림성당교에서 1주일간 전쟁 형세에 대한 집중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 회덕현에서 온 우리 5명 동창과 연변구(현 연변주)에서 온 20명이 모였습니다. 일주일의 집중 학습이 끝나자 비행기를 타고 동북군구(현재의 북부군구) 소재지인 심양으로 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였지요.”
1950년 11월 20일 성무경은 압록강 집결 지점에 도착했다. 이송 차량은 모두 소나무 등으로 완전 위장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미군 정찰비행기에 발견되였다. 폭탄이 도처에서 터졌고 도로가 파괴되였다. 더 이상 차량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미군 비행기는 걸어 다니는 개를 봐도 마구 폭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낮에는 은페해있다가 해가 지면 이동했습니다. 그렇게 100여리를 걸었습니다.”
총사령원의 명령 앞당겨 완수, 첫 3등공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 곳이 평안남도 회창군에 위치한 중국인민지원군 정치부 적공처 (敌工处)였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학습과 훈련에 들어갔다. 당시 영어, 일본어, 조선어 번역일군이 필요했는데 성무경은 회덕현 양대성자소학교에서 6년간 배운 일본어 지식을 토대로 일본어 번역 업무를 맡았다.
“처음으로 받은 명령은 팽덕회 총사령원이 내린 일본어로 된 작전지도를 일주일내에 중국어로 번역하는 것이였습니다.”
당시 대부분 작전지도가 일본어 되어 있었다. 명령을 받고 나가보니 작전지도가 한 트럭 실려왔다. 당시 성무경과 기타 번역일군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그 많은 작전지도를 1주일내에 무조건 전부 번역하라는 것이였다. 전쟁의 승패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작전지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번역일군들은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분주히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여기는 안동, 여기는 원산......”
1956년 단동 지원군정치군사ㅛ학원 정치리론학습 수료식을 마치고 단체사진
번역일군들은 하루 평균 한, 두시간씩만 간간히 눈을 붙이면서 작전지도 번역에 매달렸다. 결국 불과 5일만에 번역임무를 원만히 완수했고 번역된 작전지도는 작전참모였던 모안영을 통해 지원군 총사령부에 전해졌다.
“당시 작전참모 모안영도 사령부에 있었는데 그는 로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우리 일본어 번역일군들이 중국어로 번역한 작전지도를 또다시 로어로 표기해놓은 후 팽덕회 총사령관에게 전달했습니다. 팽사령원이 내린 명령을 이틀이나 앞당겨 번역한 일본어 번역일군들은 지원군사령부로부터 3등공을 기입 받았습니다.”
대적방송으로 평화제의, 두번째 3등공
전쟁의 불길은 계속해서 타올랐다. 성무경이 속해있던 적공처는 단순히 번역 업무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였다. 그들은 적군을 와해시키는 데 특수한 역할을 하는 대적방송을 했다.
“비록 전쟁의 일선에서 총을 메고 직접 적들과 싸우지는 못했지만 록음기와 확성기를 메고 가는 것도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였습니다.”
패장 시절의 성무경
전쟁터에 나선 성무경은 매일 적들의 맹렬한 포화를 무릅쓰고 몇개의 봉쇄선을 통과해야만 했다. 적들은 대적방송을 하는 지원군 부대원을 발견하는 즉시 대포와 기관총을 쏘아댔지만 성무경과 부대원들은 용감하게 대적방송을 계속해나갔다. 특히 4차 전역에서 부대원들은 여러 지역에 분산하여 방송하는 모험적인 방식을 개척했다.
“적군에게 우리의 진지한 평화제의와 인도주의 대우를 알리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적후로 깊숙이 침투하여 선전했는데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단동 지원군정치군사학원 시절의 성무경(뒤줄 왼쪽 두번째)
전선 곳곳에 들려오는 지원군의 진심이 담긴 평화제의는 적군의 사기를 저락시키고 더 나아가 적군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대량의 적군이 평화 제의의 감동적인 내용에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들고 투항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성무경의 군복 왼쪽 가슴에는 두번째 3등공 메달이 달렸다.
최후 전역의 대적방송, 세번째 3등공
1953년 7월, 항미원조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성무경과 부대원들은 금화전역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우리는 금화지역에 심입하여 록음기를 땅속에 깊이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100개가 넘는 확성기를 설치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적에게 대적방송을 했습니다.”
특히 전쟁이 가장 격렬한 순간에 록음기와 확성기를 멘 성무경과 부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적들의 방어선을 돌파해 적후에 깊이 들어가 평화의 목소리를 전했고 적들의 전투의지를 무너뜨렸다.
금성전역에서 지원군은 성공적으로 약 5만여명의 적군을 소멸했고 또한 대량의 적군을 포로했으며 결국 7월 27일의 정전협정 서명을 이끌어냈다.
젊은 시절의 성무경, 전정숙 부부
“금성전역이 끝나고 상급에서 적공처 3명의 공청단원을 입당 적극분자로 추천했는데 저도 운 좋게 그중의 한명으로 되였습니다. 그리고 1954년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라고 성무경은 말한다.
전투가 끝나고 부대로 돌아오기 전, 조선정부에서는 ‘국제 3등공’ 영예를 특별히 수여했다. “이는 우리 개인에 대한 긍정뿐만 아니라 적공처 전체에 대한 높은 평가였다고 생각합니다.”
홍색유전자 대대손손 전승되길
1958년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에서 전부 철수했다. 그때 이미 패장으로 승진한 성무경은 부대에 남아 국가의 국방사업에 힘을 기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갓난아기가 소아마비증세를 보여 안해 전정숙은 남편이 빨리 제대하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성무경은 비록 내키지 않았지만 제대 신청을 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회덕현에 돌아온 그는 현(현재 공주령시)당위 조직부에 배치받았다. 까근하고 책임심이 강한 그는 우수한 사업 성과로 ‘우수당원’과 ‘선진사업일군’ 등 영예를 여러번 받았다.
“저와 함께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다가 희생된 옛 동창이자 전우인 안병섭, 홍인표입니다.”
적공처에서 일할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성무경은 희생된 전우들과 함께 록음기와 확성기를 메고 전장을 넘다들던 장면들이 어제 일처럼 눈앞에 떠오른다고 말했다.
당시 격정의 나날들을 이야기하는 성무경로병사
1939년, 7살의 성무경은 고향 한국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와촌리(현재의 세종시)에서 부모와 형들을 따라 기차로 길림성 공주령시 회덕현 양대성자향으로 이민을 왔다.
어언 85년 넘게 지났다. “이제 제 나이가 92살입니다. 저희 로병사들을 항상 잊지 않고 관심하고 배려해주는 당과 국가에 정말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퇴직후 근 40년째 공주령시조선족로인협 행사에 적극 참여했을뿐더러 새 세대들에게 혁명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면서 홍색정신을 세세대대 전하고 있다.
“오늘의 행복은 수많은 선렬들이 피 흘리며 바꾸어온 것입니다. 우리 후대들이 홍색유전자를 전승하면서 어렵게 얻어온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더욱 분발해 조국의 번영부강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다면 저는 여한이 없겠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력사를 명기하고 분발하여 맡은 바 일터에서 빛을 발하며 더욱 부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기 바랍니다.”라고 성무경은 말한다.
/길림신문 유경봉, 정현관, 오건 기자
编辑:유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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