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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출국장. photo 오장환 영상미디어 인턴기자
지난 11월 18일 오후 4시30분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출국장. 중국 칭다오(靑島)행 국제여객선 뉴골든브릿지5호의 출항을 앞두고 진풍경이 벌어졌다. 등짐을 짊어진 채 양손에 가방을 든 보따리상들이 ‘상인 전용’ 통로를 통해 허겁지겁 출국장으로 몰려갔다. 출국장 보안검색대의 직원들은 “상인들 빨리 들어오세요. OOO씨 빨리 들어오세요”라고 재촉했고, 특정인의 이름을 거명하기까지 했다. 자주 이용하는 사람인 듯했다.
인천의 구(舊)도심인 중구 인중로에 있는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은 칭다오를 비롯 웨이하이(威海), 롄윈강(連雲港), 톈진(天津) 등 중국행 국제여객선이 떠나는 곳. 산동성 칭다오와 웨이하이는 한국인과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사는 지역이다. 한국산(産) 공산품에 대한 수요가 많고, 인천에서 각각 18시간, 16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보따리상들의 왕래가 잦다.
이로 인해 칭다오나 웨이하이행 국제여객선 출항 시간이 임박하면 지방 시외버스터미널 규모의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은 보따리상들로 늘 만원을 이뤘다. 보따리상들이 들고 다니는 대형 이민가방과 박스가 가뜩이나 비좁은 출국장을 가득 채운 탓에 일반 여행객이 이동에 불편을 느낄 정도였다. 관세법을 엄밀히 적용할 경우 ‘불법’인 보따리상의 출국 편의를 위해,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측이 별도의 ‘상인 전용’ 통로까지 개설한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이런 풍경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곧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한·중 양국은 지난 11월 10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한·중 FTA 협상 타결을 선언했다. 한·중 FTA 체결로 연간 87억달러에 해당하는 대중 수출 물품의 관세가 협정 발효 즉시 철폐되며, 458억달러에 해당하는 물품은 발효 10년 후 관세가 철폐된다. 그간 양국 간 관세 차에 의존해 수익을 내온 보따리상의 수입이 줄어드는 셈.
통관절차와 같은 각종 비(非)관세장벽도 대폭 개선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700달러(약 77만원) 이하 물품에 대해 원산지증명서 제출이 사라지고, 48시간 내 통관, 특송화물 서류 폐지 등 통관절차가 간단해진다. 보따리상은 통관절차가 까다로운 중국 해관(세관)의 비관세장벽을 발품을 팔아 뚫어왔다. 한·중 FTA 체결로 비관세장벽이 낮아지면, 더이상 발품 팔 이유가 사라진다.
‘한·중 FTA 체결 시 보따리상이 가장 치명타를 입는다’는 관측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일본 공산품 수입으로 인한 무역역조를 막기 위해 설정했던 ‘수입선 다변화정책’이 지난 1999년 폐지됐을 때도 그랬다. 당시 현해탄(玄海灘)을 오가던 한·일 간 보따리상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인천항 일대의 보따리상은 예상보다 더 빨리 자취를 감춰 가는 중이다. 제2국제여객터미널과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인천시 중구 연안부두로의 제1국제여객터미널에 중국 산동성 옌타이(烟台)에서 출항한 향설란호가 이날 낮 12시30분 입항했다. 짐을 찾아 세관검사를 마치고 입국장에 들어온 사람은 중국인 단체여행객이 대다수였다. 짐 가방은 칙칙한 색의 대형 이민가방 대신 형형색색의 소형 캐리어가 주를 이뤘다. 칭다오맥주와 옌타이 장위(張裕)와인 등 면세주류를 박스째 카트에 옮겨 싣고 입국장을 나가는 사람은 2~3명에 그쳤다. 인천항 보안공사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보따리상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제1국제여객터미널은 랴오닝성 단동(丹東), 다롄(大連), 잉커우(營口)를 비롯 친황다오(秦皇島), 스다오(石島), 옌타이행 배가 출항하는 곳이다. 특히 단동, 다롄 등은 조선족 동포들이 집중 거주하는 동북3성으로 향하는 바닷길 관문이라 과거에는 배가 입항하면 중국산 농산물을 가득 싣고 몰려오는 조선족 보따리상들로 입국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 짐을 가득 짊어진 보따리상들이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이날 제1국제여객터미널 앞의 수화물탁송장 역시 개점휴업 상태였다. 지붕이 쳐진 너른 공터인 수화물탁송장은 보따리상들이 들고 온 가방을 풀어 국내 농산물 수집상들에게 전달하던 곳이다. 하지만 이날 수화물탁송장은 거의 텅 빈 채, 한쪽에 대형 이민가방만 줄지어 놓여 있었다. “자가소비용으로 면세받은 농산물 등 여행자 휴대품을 판매, 수집, 운반, 보관하면 관세법에 의거 처벌됩니다”란 인천세관장 명의의 공고문만 펄럭였다.
인천항여객터미널관리센터(IPPT)에 따르면, 지난해 인천항을 통해 한·중 국제여객선을 이용한 사람은 91만8437명. 이 중 보따리상은 28만3019명(추정)으로, 전체의 30%가량이다. 지난 2011년 46만4802명에 비해 절반 가까이 급감한 것이다. 과거 한때 한·중 국제여객선 승선객의 70% 이상이 보따리상이었다. 2011년만 해도 5000명에 달한 보따리상은 급속히 줄었다. 여전히 활동하는 보따리상은 1000명 내외로 추산된다.
보따리상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중교역을 주도한 일등공신이다. 2013년 기준으로 한·중 간 교역규모는 2700억달러(약 297조원). 보따리상은 양국에서 화물을 직접 들고 바다를 건너는 운반상을 뜻한다. 현대판 보부상으로, 물건을 직접 들고 다닌다 해서 중국에서는 ‘다이공(帶工)’으로 부른다. 화물을 한데 모아 소매상에 넘기는 수집상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보따리상들은 한·중수교 직후부터 중국의 농산품을 들고 와 풀고, 빈 가방에 한국의 공산품을 채워 다시 중국으로 실어 날랐다. 보따리상이 황해(黃海)를 부지런히 오간 덕에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 한국은 중국의 세 번째 교역국이 됐다. 오는 2015년에는 한·중 간 교역규모가 3000억달러(약 333조원)를 돌파할 것이 확실시 된다.
보따리상이 급증한 것은 1998년 외환위기 직후다. 그간 보따리상은 참깨, 고추, 잣 등 저렴한 중국산 농산물을 국내로 들여와 국내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참깨 630%, 콩 487%, 마늘 360%, 고추 270% 등 초고율 관세를 ‘국내 농가 보호’란 이름으로 부과해 왔다. 중국산 한약재와 애완견, 짝퉁 비아그라를 비롯한 약품류도 이들의 주된 운송품이었다.
특히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소(小)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인천항은 보따리상의 최대 메카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맞아 임시 국제여객터미널(현 제2국제여객터미널)이 개설된 이래 보따리상들의 루트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제2국제여객터미널 입구에는 ‘소(小)화물운송’이란 간판을 단 점포가 수십여 곳이다. 제1국제여객터미널 앞에도 보따리상들을 구할 수 있는 컨테이너 가건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 점포들은 보따리상 사장들이 운영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중국까지 인편으로 운송해줄 물품을 받거나, 중국에서 가져온 물품을 한국에서 받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곳이다. 중국으로 직접 화물을 실어갈 보따리상 알선도 이곳에서 모두 이뤄진다.
보따리상들이 성업했던 건 양국 세관의 까다로운 통관절차 탓이다. 특히 중국 해관총서(세관)의 통관은 까다롭기로 악명 높다. 박스에 포장한 물건 일부가 종적을 감추는 일이 빈번했다. 서울 용산의 한 전자부품 업체 관계자는 “중국으로 보낸 수백 개의 케이블 박스가 세관에서 통째로 ‘실종’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더욱이 한 번 해관에 압류된 물품을 다시 빼오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이 같은 중국 해관의 ‘만리장성’을 뚫어낸 것이 보따리상이다. 물건을 직접 들고 갈 경우 개인휴대품으로 간주돼, 통관이나 검역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통관 시 문제가 생겨도 그간 수백 차례 드나들며 다져온 ‘관시(關係)’와 읍소를 통해 물건을 안전하게 중국이나 한국에 풀어 놓을 수 있었다.
지금도 한·중 간 보따리상은 양국 우정당국이 제공하는 국제 EMS(특급우편)보다 경쟁력이 있다. 제1국제여객터미널에서 만난 조선족 보따리상 이모 사장은 “우체국 EMS보다 ㎏당 단가는 비싼데, 반송되는 경우가 많은 EMS보다 우리가 훨씬 빠르고 안전하다”며 “EMS는 주소도 영어로 일일이 적어야 하지만, 우리는 전화번호만 주면 중국 전역은 물론 내몽골까지도 배달해 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가령 화물을 동북3성 최대 도시인 랴오닝성 선양(瀋陽)과 같은 내륙으로 보낼 때 가장 가까운 단동항으로 화물을 보낸 뒤, 현지 택배를 이용해 내륙운송을 하는 구조다. 내륙운송의 경우 선양은 대략 3일, 상하이는 5일 정도면 도착한다. 이 보따리상은 “긴급화물의 경우, 현지 항구에서 물건을 수령한 다음 택시나 오토바이에 태워 물건을 보내기 때문에 당일 저녁에도 물건을 받아볼 수 있다”며 “총이나 마약만 제외하면 100% 안전하게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우체국 EMS의 경우 중국 현지 통관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반송되는 경우가 실제 허다하다. 이 경우 오고가는 시간과 비용을 모두 날리게 된다. 또 보낸 물건이 파손되거나, 물건 중 일부가 빠진 채로 전달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중국에서 인기가 많은 마스크팩 등 한국산 화장품과 미용기기, 유아용 분유 등은 우체국 EMS로 보낼 경우 거의 다 되돌아온다. 제2국제여객터미널 앞에서 만난 한국인 보따리상은 “화장품, 미용기기, 분유는 중국 세관의 위생검사 탓에 우체국 EMS로 보내면 무조건 반품된다”며 “사람 손으로 들고가는 수밖에 없고 중국 통관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우리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했다.
실제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통상협력팀에 따르면, 중국은 그간 한국에서 발행한 검사성적서 및 위생증명서를 인정하지 않고 매 수입 시마다 중국에서 다시 검사함에 따라, 한국산 식품 및 화장품의 유통기간 단축, 상품성 상실로 인한 폐기 등 어려움을 겪어 왔다. 식약처 통상협력팀의 한 관계자는 “유통기간이 짧은 신선식품 및 계절, 유행에 민감한 화장품의 경우 특히 심각한 문제였다”고 했다.
하지만 양국 관세행정의 허점을 교묘히 활용하는 보따리상에 대한 양국 정부의 규제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보따리상 휴대품에 대한 전량 X-레이 검사를 실시하고, 1인당 휴대가능한 화물의 무게를 과거 80㎏에서 50㎏으로 대폭 낮춰버렸다. 또 수화물탁송장에서 취급하는 가방의 가로(90㎝), 세로(63㎝) 규격까지 엄격히 제한했다. 급기야 중국 웨이하이 해관(세관)은 지난 5월부터는 박스 포장을 원천금지하는 조치까지 내놨다.
특히 지난 2009년부터 보따리상에 대한 통관관리가 엄해지면서, 상당수 보따리상은 ‘소량 컨테이너화물(LCL)’로 전업한 상태다. LCL화물은 말 그대로 여러 화주들의 소량화물을 합쳐 1개 컨테이너에 적재하는 것이다. 이 경우 휴대물품에 실시하는 전량 ‘X-레이’ 검사를 피해갈 수 있다. 또 초고율 관세의 농산품을 컨테이너 뒤쪽에 교묘히 숨기는 소위 ‘커튼치기’ 수법으로 들여올 수도 있었다.
보따리상이 줄어들며 한·중 여객선사도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인천항만공사에 따르면, 한·중 간 국제여객선 이용객은 2011년 104만명을 정점으로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다. 한·중 간 국제여객선 일반여행객과 보따리상의 비중도 2011년 55 대 45에서 2013년 70 대 30으로 변했다. 특히 한·중 국제여객선이 주로 취항하는 산동반도 노선은 한·중 간 항공자유화(오픈스카이)가 부분 실시되는 지역이라, 저가항공사 등과의 운임경쟁도 치열하다. 인천~칭다오의 경우 대개 비행기가 더 싸다. 더욱이 지난 4월 세월호 침몰사고로 선박운항과 관련된 규제가 엄해지면서 새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에 한·중 여객선사들은 최근 관광프로그램과 연계하는 상품을 출시하거나, 도착비자(사증) 발급 조건을 완화하는 식으로 항공기와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도착비자’는 별도의 비자발급 없이 중국 도착 즉시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국제여객선 특유의 편리한 비자제도다.
최근 급증하는 중국 관광객들의 집단 보따리상화도 전통적 보따리상의 생계를 심각하게 위협 중이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중국 관광객은 432만명. 이들 중에는 ‘텅 빈’ 대형 이민가방을 들고 한국으로 입국해 화장품과 분유, 의류 등 한국산 공산품을 가방에 가득 채운 뒤 중국으로 돌아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사이트인 알리바바의 오픈마켓 ‘타오바오(淘寶)’ 등에 올려 판매하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실제 이날 찾아간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길 건너편 이마트 동인천점에서는 중국 관광객들이 한국산 공산품을 쓸어담고 있었다. 이마트 동인천점 입구에는 별도의 ‘중국 요우커(遊客) 인기상품’ 코너를 입구에 별도로 마련해 쇼핑을 돕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중국 관광객들은 계산대 앞의 자율포장대에서 화장품과 분유를 종이박스째로 포장해 들고 나갔다. 보따리상들의 직접 경쟁자로 떠오른 셈이다.
432만 중국 관광객은 보따리상들의 위탁배송 업무도 급속히 대체해 가고 있다. 가령 중국인이 좋아하는 한국산 전기밥솥을 중국으로 반입할 때 그렇다. 중국 세관에서는 대개 1인당 1개의 전기밥솥과 착즙기 정도의 반입만을 허용한다. 과거 한·중 사이를 오가는 중국 관광객들이 많지 않을 때는, 보따리상들이 무리를 지어 각자 1~2개씩의 한국산 전자제품을 짊어지고 중국으로 들어갔었다.
하지만 요즘은 중국 단체관광객을 수소문하면 전문 보따리상을 수소문할 필요조차 없다. 관광객들에게 적당한 수고비를 쥐어주고 밥솥 운송을 대행시키는 것. 인천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만난 한 한족(漢族) 전기밥솥 도매상은 “한국산 전기밥솥의 경우 개당 3만원 정도면 즉석에서 단체관광객을 수소문해 위탁배송을 맡길 수 있다”며 “중국 현지에서 세관통과 후에 물건을 건네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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