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실크로드에묻힌 조선족화가 한낙연7
조글로미디어(ZOGLO) 2005년11월21일 08시55분    조회:1222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첫 전시회 한편 상하이 기독교청년회에서 써준 소개장을 들고 선양의 봉천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간 한낙연은 그곳에서 진보적인 청년들의 의식을 깨우는 조직사업에 열중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는다. 덕분에 ‘상하이미술전문학교 졸업생 한낙연의 유화전시회’라는 이름으로 생애 첫 개인전을 봉천기독교회관에서 개최한다. 이미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조선인 사회에 소개된 그의 이력 때문에 첫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전시회를 통해 그의 이름이 만주 전역에 알려지자 그에게 그림을 배우겠다는 학생이 많이 찾아왔다. 자신 또한 상하이에 가서야 제대로 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던 한낙연은 그림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많은 학생을 다 가르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친하게 지내던 상하이미술전문학교의 동창생 몇몇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동참해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얼마 후 루사오페이(魯少非), 루이(陸儀) 등 반가운 얼굴 몇몇이 선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낙연은 그들과 함께 선양의 소남관 풍우대 근처에서 미술학교를 열고 자신이 직접 교장을 맡아 학교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이름만 허울 좋은 교장일 뿐 월급은커녕 오히려 모자라는 학교 운영비를 해결하기 위해 번번이 자신의 그림을 판 돈까지 보태야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선양 제1사범학교의 미술교원을 겸직하면서 힘들게 미술학교를 운영했다. 하지만 그는 바쁜 와중에도 자신이 왜 선양으로 왔는지에 대한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메이퍼광(梅佛光) 등 진보적인 중국 청년 지식인들과 힘을 모아 쑨원의 삼민주의를 따르는 ‘계몽학사’를 설립한다. ‘계몽학사’의 주요 구성원은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계몽순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는데 한낙연은 잡지 편집을 맡으면서 청년학생단체들과 연대를 도모한다. 다시 상하이로 그런 가운데 만주에서도 혁명의 기운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1925년에 발생한 5·30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양에서도 6월10일 학생 시위가 벌어진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한낙연을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그해 겨울이 끝나기 전 선양에도 중국 공산당 지부가 결성된다. 탁월한 활동을 보인 그를 눈여겨본 상부에서는 한낙연에게 1925년 7월 하얼빈(哈爾濱)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지시한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국경을 넘어 탈출해온 백계 러시아인이 북적여 ‘중국 속의 러시아’로 불릴 정도였다.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을 왜곡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전파하는 일이 시급했다. 한낙연은 그곳에 설립된 보육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조상지(趙尙志) 등과 독서회와 야학을 꾸리며 조직사업을 병행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공산당 동북지구당의 중심지라 할 하얼빈에서는 공산당 계열에서 선전사업의 일환으로 ‘하얼빈일보’를 발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얼빈일보’의 기사와 논조에 불만을 가졌던 군벌은 끝내 이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직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위험을 직감한 상부에서는 군벌의 주시를 한몸에 받고 있던 한낙연으로 하여금 신분이 드러나기 전에 하얼빈 인근 치치하얼(齊齊哈爾)로 급히 옮기게 했다. 군벌의 체포를 피해 가까스로 치치하얼로 피신한 그는 그곳에서 용강시립공원 도시건설사업의 책임자로 일했다. 지금까지도 치치하얼의 용강시립공원엔 한낙연이 이때 설계한 팔각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치치하얼에 있는 동안 한낙연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보태 또 다른 사업을 벌인다.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낙천사진관’이란 이름의 사진관을 운영한 것이다. 그는 하얼빈에서 틈을 내어 사진 촬영기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배워두면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때 배운 사진기술을 이용해 사업을 시작할 만큼 그는 다재다능했다. 한편 사진기술은 이후에도 그의 인생에 여러모로 긴요하게 쓰이게 된다. 긴박한 정치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치치하얼에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 한낙연에게 다시 상부로부터 활동거점을 옮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던 것이다. 다음 장소는 더 깊은 오지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그의 다음 활동장소는 뜻밖에도 상하이였다. [*신동아]통권554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미국 뉴욕의 일원지역은 조선족의 급속한 류입으로 어디를 가나 조선족들을 쉽게 접할수 있다. 특히 조선족의 90%이상은 한국인사회에서 생활하며 한인가게에서 일을 하는 관계로 야채장사나 식당, 네일가게(손톱관리) 등 한인들이 하는 곳마다 조선족 직원이 한두명씩은 있다.대부분이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는 평을 받고있...
  • 2006-01-16
  • [원제: 녀자축구팀 로장 손문의 청혼광고] “남자가 나이 들면 장가가기 마련이고 녀자가 나이들면 시집가기 마련”이라고 올해 33살인 손문도 청혼광고를 내 사회상에서 반향들이 크다. 청혼광고의 내막을 보면 본인이 집필한것이 아니고 “상해수요일”신문사의 편집으로 있는 그의 친구가 몸소 기획하고 집필하였던 것이...
  • 2006-01-16
  • 황우석 "용서를 빈다…참담한 심정" 서울대 황우석교수가 12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론문조작에 대해 사과 하고 있다. /외신 한국 황우석교수는 12일 “서울대 조사위에서 발표한 조사결과에 대한 론문과 관련한 허위 데이터 사용은 제1저자인 제가 모두 책임질 부분으로 모두 인정하고 사...
  • 2006-01-13
  • 황우석은 1953년 12월 15일, 한국 충청남도의 한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를 좋아했고 커서 꼭 수의사가 되고야말겠다고 작심했었다. 1972년, 그는 소망대로 서울대학 수의약학원에 입학, 1982년까지 그는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및 박사학위를 따냈다. 졸업후 그는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게 되였...
  • 2006-01-13
  • 품팔이녀자애로부터 연길시인대대표로 되기까지, 월수입 5000여원의 업주로부터 500여원의 로임을 받는 사회구역위원회서기로 되기까지 갖은 세파를 겪어온 조국영(34살)은 《사회구역사업을 하면서부터 진정으로 인생의 가치를 느끼고있다》고 말하고있다. 1986년 12월, 16살에 나는 조국영은 호북성의 한 편벽한 농촌에서...
  • 2006-01-11
  • [원제: 어머님의 손맛으로 고객 감동] 이제까지 없었던 새 업종이나 서비스를 개척해 큰 성공을 거둬보자는 블루오션전략, 가치혁신으로도 통하는 이 전략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약 성공의 희열을 맛보고있다. 그제날 따뜻한 온돌방에서 온 집 식구가 단란히 모여앉아 먹던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칼국수, 생각만 해도 어...
  • 2006-01-11
  • 일전 북경에서 있은 2005년 중국기획년회 및 제2기《제갈량》기획평의활동에서 연변오늘기획연구소 소장 겸 연변오늘상무광고유한회사 리사장 박준덕이 《2005년 중국10대기획전문가》명예를 받아안았다. 소개에 따르면 박준덕사장은 길림성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영예를 받은 사람일뿐만 아니라 조선족가운데서 《기획전문가...
  • 2006-01-10
  • [원제: 전통산업에 인터넷 나래를 달아] 할빈호천과학기술개발회사 오철웅총경리 사업담 “대형국유기업에서 거들떠보지 않는 비표준장비제조의 거대한 시장잠재력을 노리고 접어들었지요." 2000년말 등록자본금 50만원으로 할빈호천과학기술개발회사를 일떠세운 오철웅(43세, 고급공정사)총경리가 밝히는 창업동기이다. 일...
  • 2006-01-10
  • "마음의 고향 한국에 와서 기쁩니다." [세계일보 2006.01.08 13:00:19]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항상 그리워하시는 제 마음의 고향 한국에 오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중앙아시아·러시아 동포청소년 연수단으로 6일 모국을 찾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거주하는 한국인 4세 라가이 베라양(17). 라가이 양은 고려인들이 한국어...
  • 2006-01-09
  • [원제: 잣왕 조이철의 삼단도약] 장백산자연부원에 의탁해 세계를 도모한다 조이철은 누구? 그의 창업은 어떻게 시작됐나? 조이철, 길림송보생물기술산업유한책임공사의 리사장. 길림성 정우현 사람.올해 47세. 1985년 장춘사범학원 력사학부 졸업. 1990년 경제관리 연수. 1996년 주식회사 길림송보공사 창설. 길림성 특색기...
  • 2006-01-0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