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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문철--고아들의 아버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월31일 21시08분    조회:7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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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의 35년

이 세상에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싶지 않은 아이들이 어데 있겠는가. 100여 불우한 아이들로부터 아버지, 어머니로 불리는 화룡시희망복리원 리문철원장 부부, 의지가지 없는 고아들과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에게 친부모와도 같은 사랑을 쏟아 35년! 희망복리원의 감동은 끝없는 메아리가 되여 사방에 퍼져나간다.
 
리문철은 1954년 10월 화룡의 한 가난한 문화인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3년 대기황으로 아버지(노래 <공산당과 모주석의 은덕일세>의 작사자)가 중환에 시달리고 그후 누님이 암으로 사망한데다 그 자신도 병약하다보니 가정은 몹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왔었다.
 
생활난으로 공부마저 바로 할수 없었던 리문철은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도시 그저 지나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점차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려는 뜻을 굳히고 종당에는 필생의 사업으로 삼게 된것이다.

 
그렇다 할만한 수입 래원도 없이 여섯 식솔이 도대체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그 광경을 보는 리문철의 마음은 괴롭기 짝이 없었다



 화룡시희망복리원 2007년도 대학생 환송기념사진.

 
30여년 전인 1974년, 갓 스물의 하향청년 리문철은 농촌에서 뽑혀와 화룡시부동산관리소에서 로동자로 일하고있었다. 단위에 종업원숙소가 없어 그는 한 개인집 방을 세내여 들었다.

 
집주인은 박씨였는데 죄를 지어 감옥살이를 하고있었고 안해는 병으로 앓는 몸에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있었다. 큰 아이는 14살, 작은 것은 겨우 6살이였다. 수입이라야 리문철이 집세로 내는 8원이면 고작일 터이였다. 수입래원도 없이 여섯 식솔이 도대체 무얼 먹고 산단말인가?
 
그 광경을 보는 리문철의 마음은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 집을 훌쩍 떠나 다른 집을 세내여 들수도 있었지만 고민 끝에 그는 이 집에 눌러앉기로 작심했다. 매달 39원 되는 월급을 몽땅 이 집에 맡겨 살림을 유지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리문철은 의지가지 없는 고아, 가정 살림 형편이 어려운 학생, 지체 장애자, 그리고 형기가 차 석방됐거나 로동교양에서 풀려나온 인원들을 도와주는 사업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였다.
 
1982년이였다. 화룡시 투도진에 어려서 부모를 여읜 아이가 있었는데 형님 집에서 초중까지 다녔다. 그러나 고중에 시험쳐붙은 후에는 학비를 이어대지 못해 더는 공부를 할수가 없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리문철은 안해 채명자와 그 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는게 어떨가 하고 상의를 했다.
 
1979년에 결혼한 이 젊은 부부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었다. 누님이 병으로 사망한지 얼마 안되여 두 외조카를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18평방밖에 안되는 비좁은 집에서 네 식솔이 붐비는 삶이 원래 기구한데 16살 나는 고중 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였다.  
 
난색을 짓던 안해는 끝내 남편의 뜻을 따라주었다. 그러는 안해가 너무 고마웠다. 아이를 집에 데려와서 보름만인가 안해가 병으로 입원하게 되였다. 한 병실에 해금이란 녀자애가 있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다 부어있었다. 여러번 캐물어서야 그 애는 자기가 고아라고 실토정했다.

 
네 식솔이 비좁은 집에서 붐비는 삶이 원래 기막힌데다 고중 학생
하나를 더 데려다 키운다는 건 누가 봐도 머리를 저을 일이였다


안해가 출원하자 그 애를 집에 데려왔다. 하여 집 식구가 또 하나 늘었다. 아이 셋만 키우고 공부까지 시키려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그 후 아이를 하나 낳자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매달 39원의 로임으로 아이 둘을 공부시키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그들은 정말 굶기를 밥먹듯 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나 하는 문제를 두고 리문철부부는 많은 고민을 했다. 때마침 개혁개방이 갓 시작되여 개인창업열이 한창 오를 때였다. 당시 중앙농업학교 5년 통신학습을 마치고 화룡시종자공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리문철은 개인창업을 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고 안해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과외시간을 타서 가축사양을 벌렸다.
 
후에는 아예 단위에 적을 남겨둔 채 로임도 받지 않고 나와 곰사육장을 꾸렸다. 그 수입은 기대했던 바 이상으로 짭짤했다. 그는 그 수입을 전부 고아들 부양과  학생들 보조에 썼다.
 
처음 데려다 키운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3년 만에 대학에 시험쳐 붙었다. 그의 집에 처음 있는 큰 경사였다. 리문철은 아이가 너무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비좁은 집에 친구들을 몇몇 불러놓고 “축하연”을 차렸다.

 


리문철은 매일 아이들을 학교에까지 데려다준다.


데려다 키우는 아이들은 늘어만 갔다. 그러니 집이 너무 비좁아 집을 새로 지어야 하는데 돈을 다 아이들 부양과 보조에 쓰다보니 1987년에 와서야 18평방짜리 초가집을 2000원에 팔고 교외에 땅을 얻어 66 평방 되는 벽돌집을 짓게 됐다. 이 집을 지을 때 세방에 들 돈이 없어 길가에 비닐막막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일곱달을 살았다.
 
천신만고 끝에 아담한 집이 지어져 드디어 새집들이를 하게 되였다. 리문철은 친척과 친구들에게 잠시 맡겼던 여섯명의 고아를 모두 불러들였다.
 
은이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였다. 다병한 아버지가 80여세의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집에 은이 아래로 초중에 다니는 녀동생까지 달려 있어 수입래원이 없는 집에 생활형편이란 말그대로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게 하나 없었다. 이제 바로 고중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은이는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이 일을 알게 된 리문철부부는 주동적으로 은이를 집에 데려왔고 학비를 대주어 계속 고중공부를 하게 했다. 은이는 그의 집에서 4년을 있으면서 머리를 동여매고 공부를 하여 재작년에 북경교통대학에 붙었다.

 
개체의 명의로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설립했다. 이때로부터
이들에게는 명실공히 따뜻한 자기의 집이 있게 되였다

 

웃음꽃 만발하는 화락한 한 가정.


광이는 리문철이 다년간 후원해준 특곤생이다. 리문철은 줄곧 그에게 돈을 부쳐주었다. 1998년 광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우전학원에 입학했다. 2000년 그는 북경시 20개소 중점대학의 일본어경연에서 단연 1등을 하였으며 2002년에는 일본에 가 연구생공부를 하게 되였다.
 
용화(한족)의 아버지는 상해지식청년인데 그가 앓는데다 어머니까지 정신분렬증환자라서 가정살림이 말이 아니였다. 리문철은 학기마다 용화의 학비를 대주고 학습용품도 사주었다. 리문철의 보살핌속에서 용화는 순조롭게 초중, 고중을 나왔고 2002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컴퓨터학원에 입학했다.
 
리문철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초중졸업후 학업을 중지하게 된 홍이도 자기집에 데려다 키웠다. 지난해 대학고시에서 홍이는 550점의 우수한 성적으로 동북사대에 입학하였다.
 
리문철의 사업은 관계부문의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그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관련 일군들이 찾아와 함께 해결책을 연구하기도 했다. 2001년도 관계 부처의 협력과 지지밑에 그들 부부는 개체의 명의로 화룡시희망복리원을 세웠다. 이때로부터 고아들에게는 명실공히 따뜻한 자기 집이 있게 되였다.
 
 


                                    자상한 아버지, 아프면 아플세라...


리문철은 이렇게 생각했다
. 아이들에게 먹고 잘 곳을 마련해주는게 물론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건 아이들을 어떻게 참된 인간으로 키우냐이다. 하여 그는 아이들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리상이 있는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현일이는 고아로서 거리를 떠돌며 걸식하던 류랑아였다. 그는 이 집으로 갓 왔을 때 저녁만 되면 언제나 상의로 머리를 감싸고 고슴도치처럼 온 몸을 꼬부리고 자다가도 전등만 켜지면 발딱 일어나 공포에 질린 눈으로 불안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였다. 이처럼 고통스럽게 비틀려져있는 여린 심령을 교정하기 위해 리문철은 6개월 동안 매일 저녁 현일이와 함께 보내면서 잠을 자도 그를 품에 꼭 그러안고 잤다. 하여 그도 다른 아이들처럼 뛰놀며 유쾌한 삶을 살수 있게 되였다.

 
“걔를 쫓아내면 걔가 어디로 가겠니? 어린 아이가 왜
잘못을 저지를 때가 없겠느냐. 너희들 잘 생각해 봐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면 항상 즐겁다.


그런데 현일이한테는 류랑생활을 할 때부터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었다
. 다른 아이의 방에 들어가 돈을 훔치던 그가 한번은 리원장의 호주머니에까지 손을 뻗히다가 그만 덜미를 잡혔다. 아이들은 분개한 나머지 이런 배은망덕한 애를 어떻게 이 집에 그냥 둘수 있냐며 당장 쫓아내자고 했다. 리문철은 애들의 말을 내심하게 듣고나서 그들을 차분히 타일렀다.
 
“현일이를 쫓아내자구? 너희들 생각해봐라. 걔를 쫓아내면 걔가 어디로 가겠니? 현일이는 아직 어리다. 어린 아이가 왜 잘못을 저지를 때가 없겠느냐. 잘들 생각해 봐.”
 
이 일에서 아이들은 깊은 교육을 받았고 현일이도 성숙된 아이로 자라주었다. 올해 소학교 6학년생인 김일은 지금 반급의 중대장이고 남을 잘 돕고 로동 잘하고 해서 작년에 학교에서는 최우수진보상, 복리원에서는 로동열애상을 탔다.

 

                                                                교양의 일과.


리문철도 이 일을 통해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꼈다
. 그후 리문철은 정치, 시사, 례의 등 내용의 좌담모임을 매달 한차례씩 가졌고 청명절이면 애들을 데리고 화룡시 13용사기념비, 김좌진장군과 함께 싸운 청산리항일유적지 항일투사들의 묘소에 가서 벌초도 해주었으며 쉬는 날이면 고독한 로인돕기 활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연변과기대도 견학시켜 나라와 고향을 사랑하고 과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해마다 각종 신문, 간행물을 2000여원어치 주문해서 보게 하였고 또 독서모임도 만들어 자주 독서심득을 나누게 했다.
 
사스로 세상이 바짝 긴장하던 때였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수 있을가? 하는 문제를 내놓고 리문철은 애들에게 토론을 시켰다.
 
“우리도 사랑의 헌금을 해야죠.” 형기가 차 풀려난 뒤 희망복리원에 와있는 남철과 장두만 두 청년이 리문철원장이 다달이 소비돈으로 쓰라고 준 돈에서 선참 50원을 내놓았다. 그들둘이 솔선수범하자 다들 다투어 호주머니를 털었다. 5원, 10원, 20원…이렇게 모은 성금이  900원이 되였다.
 
복리원 근처의 한 집에 가스폭발사고가 났을 때 부상자치료를 돕기 위해 애들은 소비돈을 280여원 모아 의연했다.
 
사천지진 때에도 리문철은 매일 중앙TV 뉴스를 집체로 시청, 아이들이 자각적으로 모은 돈에 자기돈을 보태 애들의 요구대로 999원 99전(救救救)을 만들어 시적십자에 헌금하였고 그외 그 자신도 따로 1000여원을 시농업국 당위에 특수당비로 바쳤다.
 
이런 일들을 통해 아이들은 사랑의 마음을 우썩우썩 키워갔다.

 
 “우리도 사랑의 헌금을 해야죠.” 두 청년이 솔선수범하자
서로 다투어 호주머니를 털어 성금 900원이 모아졌다

 

                                                    대학 신입생들 어버이와 함께.


2001
년 연길감옥에서 리문철을 교양보도원으로 특별 초청, 정기적으로 형기 찬 석방인원들에게 출옥교육보고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화룡시공안국에서는 희망복리원 아이들에게 집체호구를 앉혀주어 불우한 운명의 고아들이나 출옥후 여러 가지 원인으로 호적등록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기의 진정한 안신처가 있게 하였다. 이때로부터 출옥인원들을 안치하는 일은 명실공히 그의 사업으로 되였다.
 
그는 장춘, 진위, 추리구, 연길 등 감옥에 찾아가서 범죄 청소년들이 새로운 출발을 할수 있도록 일깨워주고 도와주었다.
 
송국이는 타인상해죄로 17년 유기형을 언도받았는데 리문철의 도움으로 개조에 노력하여 2003년 2월 앞당겨 풀려나왔다. 출옥 후 일시 거처할 곳이 없자 리문철은 그더러 자기 집에 와 있게 하였다. 송국이는 심한 페결핵으로 앓고있었는데  리문철네 집에는 데려다 키우는 애들이 6명이 들고있어서 그애들에게 감염시킬가봐 걱정이였다.  생각끝에 그한테 단독 방을 하나 내주고 식기도 따로 마련해주었다. 그가 매번 식사를 끝내면 식기를 끓여 소독을 했다.
 
그러나 생활상의 관심과 병에 대한 치료만으로는 송국의 "사상병"을 퇴치하기에 부족했다. 사회로부터 날아오는 기시와 랭대에 송국이는 거의 절망상태에 빠져있었다. 하루는 남몰래 애꿎은 술만 축내면서 자정이 넘도록 자지않고 속에 가득 깔려있는 울분을 토해내고있었다. 리문철이 타이르고 말렸으나  듣기는 고사하고 도리여 리문철을 마구 잡아흔들면서 그가 자기의 고충을 모른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한테 이리저리 밀치여 리문철은 몸 여러 군데에 멍이 들었고 다리는 무엇에 다쳤는지 피까지 흘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냥 설득작업을 하였다.

 


지체장애자 식솔에게는 자연 관심이 더 쏠린다. 

그날 밤 마침내 제정신이 돌아온 송국이는 리문철을 붙들고 울면서
“나는 정말 무용지물입니다. 나에게 남한테 차별시당하지 않고 살 날이 올가요?” 라고 했다.
 
리문철은 "그건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면서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송국이에게 마침내 변화가 생겼다. 자기의 삶에 비관하지 않고 일마다 열심히 했다. 병이 완치되자 그는 천진에 가서 일자리를 찾았다. 얼마 전 그가 천진에서 전화를 걸어왔는데 회사에서의 사업상황을 자세히 전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저의 몸은 천진에 살고있지만 화룡의 집을 잊지않고있습니다. 화룡의 집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있는 집입니다. "

 
리문철은 "그건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날이 안올리 없다"고 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식사시간.


리씨는 상해죄로
8년 유기형에 언도된 사람으로 돈화시 추리구 감옥에서 복역했었다. 그더러 잘 개조를 해서 하루속히 사회에 돌아오도록 리문철은 늘 감옥에 가서 그를 면회하군 했다. 면회 때마다 마음속 얘기를 나누면서 열심히 개조를 하라고 고무 격려해 주었고 과학기술 도서와 문화서적도 자주 사다주어 장래 출옥한 후 사회에서 일을 찾는데 기초를 닦게 했다. 형기가 차 석방된 후 리씨가 경제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리문철은 만원을 내서 목기공장을 꾸리도록 도와주었다. 몇 년간 경영을 열심히 잘한 보람으로 공장은 경기가 갈수록 좋아져 지금 리씨는 이미 백만 자산을 갖춘 민영기업가로 되었다.
 
최근 리문철은 또 형기가 차 출옥한 3명의 석방인원과 원조커플이 되였다. 그중의 둘은 갈 곳이 없는 무의탁자이다. 그들에게 장사를 해보라고 돈 만원을 뀌여주면서 "바른 길만 걷는다면 어느 때든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들도 노력을 아끼지 않아 장사가 꽤 잘 되고있다.

 
                                                                컴퓨터공부.


이처럼 시종 변함없이 "불량자"교양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한사람 한사람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돌려세웠다. 그가 도와준 청소년 치고 다시 죄를 짓고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다.
 
2001년 종자공사 경리직을 그만둔 후 리문철은 곰 20여 마리를 치고 샤워실도 경영하여 해마다 근 1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얼마전 그는 외상으로 26만원짜리 포크리프트 한대를 사서 경영하기 시작했다. 희망복리원을 자기 힘으로 잘 꾸려나가자면 경제래원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전히 비교적 가난한 상태에 있다. 번 돈을 모두 아이들 돕는데 썼기 때문이다. 그의 가정 식구들은 늘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돈 한푼 함부로 랑비하지 않는다. 석탄도 아껴 애들 방에는 17~20도 열량을 공급하나 자기 방에는 12~15도 공급한다. 담배와 술도 끊어버렸고 친구들이 가지는 모임에도 웬만하면 가지 않는다. 20여년래 그들 네 식구는 종래로 단독으로 지낸적이 없으며 자기집 식구끼리 명절을 쇤적도 없다.

 
사회에서 천시받으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줄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그러면서도 사회 약세군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씀씀이가 대범했다. 매년 설이 되면 그들 부부는 위문품을 가득 사가지고 독신로인, 지체장애자와 곤난호들을 집집이 방문하여 위로했다. 수년래 선후로 여러 명의 빈곤학생에게 컴퓨터와 CD기, 그리고 기타 생활용품을 사주고 석방인원들에게 장사를 하라고 자금을 대주었으며 고독한 로인들과 장애인들에게 식품이나 생활용품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든 자금이 해마다 만여원 되였다.

 


아이들의 생활개선을 위해 토끼, 개, 닭도 친다.

35년래 리문철이 수양하고 도와준 아이와 석방인원은 모두 120여명에 이른다. 그들중 40명이 북경, 상해, 운남, 사천, 대련, 장춘 등지의 대학에 입학했다. 그중 2008년 한해에 나온 대학생만도 7명이다. 일본에 연구생으로 간 학생을 포함하여 연구생도 3명이 나왔다. 그의 딸애도 현재 한국 조선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 연구생공부를 하고있고 아들애는 청도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하고있다.
 
현재 희망복리원의 아이 26명중 고졸반 10명이 한창 금년도 대입준비로 드바쁘다.
 
이미 대학을 마친 애들도 자랑스럽다. 한 학생은 졸업후 연변과기대 “꿈미래희망 장학재단”에서 근무하고 있고 몇몇은 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있으며 적지않은 아이들은 남방의 한국기업에 취직했다. 개인으로 창업한 아이들도 많다.
 



아이들을 데리고 샘터에 가 샘물도 퍼오고...

사랑넘치는 특수가정의 영위자 리문철부부는 다년간 각급 정부로부터 많은 영예를 받아안았다. 2000년 이래 시, 주, 성, 나아가 중앙에 이르기까지 “꽃망울프로젝트 최우수조학상”, “차세대배려선진개인”, “연변감동10대인물”,
“길림성로력모범”으로, 국무원과 중화총공회로부터 “전국청소년문학대상”, “전국민족단결진보선진개인”, “전국로력모범” , “전국5호문명가정” , “전국공익사업걸출인물” 등도합 38차례 표창받았는데 그중 중앙과 성급영예가 15가지다. 최근(2008년 12월)에 받은 상은 “길림성도덕모범제의상”이다. 현재 리문철은 화룡시정협 상무위원이자 자치주 정협위원이다.
 
그러나 리문철은 명예가 중요한게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명예와 관련해서 바라는것이 있다면 나의 영향으로 고아, 돈없는 학생, 자생능력을 잃은 장애인,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안겨줄수 있는 이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하는 한가지 소망뿐이다!


 



(본 기사에 나오는 고아와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임)


길림신문   기자: [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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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6-13
  • "의사는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또 배운 리론지식과 실제경험들을 관통시켜야만이 진단의 정확률을 높일수 있다"고 늘 얘기하는  연변대학병원 소화내과 주임 박희서는 시골 아저씨와도 같은 소박하고도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평소 환자를 진찰하거나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할 때도 항상 차근차...
  • 2008-06-13
  • 중국관계자 중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지난 두 차례의 한중올스타전 때 중국 올스타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방복순(69) 통역이었다. 방 통역의 한국과 인연은 벌써 18년이 넘어간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는 되지 않았지만, 스포츠 교류는 있었던 90년 김학영 국제심판과 중국인 심판의 가교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
  • 200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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