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몽당치마》의 작가 림원춘 만나본다
● 《가무단 한쪽구석에 처박힌 〈논물관리원〉이 입었던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한복차림으로 나타나자 수백명 기자들이 샤타를 누르는데 ...》
● 《농촌에 내려가 하숙집의 나무도 패주고 불도 때주고 배갈 한병 받아놓고 주인집 량반과 술 한잔 나누면서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였습니다》
림원춘 프로필:
1937년 음력 12월 15일 길림성 연길현 덕신향 안방촌(지금의 숭민촌)에서 출생
1956년―1960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1960년―1982년 연변인민방송국, 연변텔레비죤방송국 편집, 주임
1982년― 현재 연변작가협회 전직작가,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상무리사
주요작품: 단편소설 《몽당치마》 등 80여편, 중편소설 《눈물젖은 숲》 등 10여부, 장편소설 《우산은 비에 운다》 등 3부, 장편실화문학 《예고된 파멸의 기록》 등 3부
주요영예:
1980년 단편소설 《꽃노을》 중국제1차소수민족문학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수상, 초급중학교 조선어문 교과서 교재에 편입
1983년 단편소설 《몽당치마》 중국단편소설우수문학상, 중국소수민족문학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등 수상, 1985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고급중학교 조선어문교재로 리용,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진달래문학상》수차,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수차, 연변작가협회50주년《특수공헌상》, 《공로상》 등 수상
1988년 중공연변주 당위 선전부《문화사업돌출상》 수상
2007년 중공연변주 당위, 연변주인민정부 《민족문화사업특수기여인물상》 수상
2008년 20세기중국소수민족작가 100명 선택된 《20세기중국소수민족문학백가평전》에 수록
단편소설 《몽당치마》로 중국조선족의 유일한 중국단편소설우수문학상 수상 작가 자리를 보유하고있는 저명한 소설가 림원춘선생 인터뷰는 국경절휴가기간에야 할수 있었다.
기자: 선생님의 단편소설《몽당치마》는 우리 조선족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국가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고급중학교 조선어문교과서의 교재로 사용되고있는 성공한 작품입니다. 듣건대 영예도 컸고 풍파도 많았다면서요?
림원춘: 그렇습니다. 《몽당치마》는 우리 민족이 저에게 준 복이며 저는 우리 민족의 복받은 행운아입니다. 1983년 《연변문학》1기에 《몽당치마》가 발표되자 반향이 컸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몽당치마》가 도작이라는 소문으로 문단을 들썽했습니다. 저는 초고까지 바치면서 조직에서 빨리 결론을 내려줄것을 바랐지만 질질 끌기만 했습니다. 저는 석달동안이나 창작은 물론 밥술마저 드네마네하면서 흐리마리 끝나고 말았습니다. 남이 잘되는것을 바라지 않는 우리 민족의 렬근성의 표현이 아닌가 봅니다.
1984년 4월, 저는 북경에 가서 상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때 제가 먼저 생각한것은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라야 한다는 그것이였습니다. 림원춘이라는 이름석자보다 조선족이라는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엔 남성들 한복이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만들어 입을 시간적여유도 없었구요. 저는 연변가무단 복장실을 찾아갔지만 구슬이 다닥다닥한 연출복이여서 내가 입을수 있는 한복이 아니였습니다. 예술학교 복장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한쪽구석에 처박힌 《논물관리원》이 입었던 한복을 발견하고 그것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내가 외투를 벗고 한복차림으로 나타나자 수백명 기자들과 사진사들이 샤타를 누르는데 그 불빛에 눈도 뜰수 없었습니다. 진짜 인기인물이였습니다. 아니 내가 유명인물인것이 아니라 우리 조선족이 빛을 뿌린것입니다.
내가 상을 받고 돌아오자 기자들과 비평가들이 우리 집 오막살이가 터지게 찾아들었습니다.
여러 간행물에 저의 창작담이 발표되였습니다. 그러자 친척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우리 집안에 어데 《조양천댁》과 같은 사람이 있는가 등등 말이 잦을새 없었습니다.
글을 써도 고통, 상을 받아도 고통, 좋은 작품은 그런 진통을 겪어야 하나 봅니다.
농촌에 내려가 흙속에 묻혀 산 작가
창작에 몰두하고있는 림원춘작가
기자: 많은 애독자들로부터 선생님의 작품은 재미있다는 호평을 받고있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림원춘: 작가에게는 비결이 없습니다. 혹여 비결이라는 단어를 붙일수 있다면 작가는 보통백성들의 대변인이 되여야 한다는 그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퍽 어렵게 공부한 사람입니다. 9살때부터 부모를 떠나 룡정에서 자취생활을 하면서 며칠씩 굶어 교실에서 쓰러진적이 한두번이 아니며 중학교에 입학하자 하숙비를 댈수 없어 35리길을 통학하면서 눈보라와 비바람을 얼마나 맞았는지 모릅니다. 상학할 때엔 저절로 삼은 초신도 아까와 맨발바람으로 산길을 걷다가 시내에 들어서서야 신이랍시고 초신을 신었고 하학할 때엔 시내만 벗어나면 신었던 초신을 벗어 둘러메고 맨발바람으로35리길을 걷군 했습니다. 진짜 굶으면서, 잠을 자지 못하면서 공부한 저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한시도 생활의 최하층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을 잊은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고 그들을 위해서 말하고 싶은 그런 마음가짐과 자세로 그들에게로 다가갔습니다. 20여년의 방송국 기자생활, 20여년의 전직작가생활, 아니 지금까지도 저는 가정의 세대주지만 집을 《려관》처럼 드나드는 사람입니다. 절반이상 밖으로 나돌았다는 말입니다. 농촌에 내려가 하숙집의 나무도 패주고 부엌에 내려앉아 불도 때주고 배갈 한병 받아놓고 주인집 량반과 술 한잔 나누면서 그들의 현황, 원성, 소원을 듣노라면 자연 자신도 그 속에 녹아버리고맙니다. 그때가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였습니다. 1984년 저는 중공훈춘현위 선전부 부부장이라는 관직을 갖고 생활체험하러 훈춘으로 내려갔댔습니다. 명색이 부부장이지 저는 알쭌한 농민이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자고 그들과 함께 먹으면서 그들과 동체로 뒹굴었습니다. 가정도 자식도 버리고 말입니다. 2년간의 객지생활, 그것은 저에게도 가정에도 자식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지금의 행운과 비길수도 바꿀수도 없는 응당한, 행복한 고통이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통백성들에게 한발작 더 다가설수 있은 시간이자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때의 그 생활들이 영화화면처럼 떠오르는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런 다가섬이 있었기때문에 후기의 많은 작품들이 독자들과 호흡을 같이 할수 있었고 《장백산》잡지문학상 같은 상을 많이 받을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부의 작가들이 이《원천》을 멀리하거나 소홀히 하는 페단이 존재하고있습니다. 하여 독자들이 작품을 외면하고 작가가 독자들을 외면하는 일부 경향이 보이고있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신호입니다. 저는 우리의 작가들이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좀 더 뜨거운 마음으로 보통백성들속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왜냐면 보통백성들의 대변인으로 되는것은 우리 작가들의 신성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돈화 대구촌에서 생활체험을 하고있는 림원춘선생(1988년 9월).
목숨을 내걸고 비리를 폭로한 작가
기자: 언젠가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창작활동에서 비리와의 전쟁을 한시도 멈춘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얼핏 보면 선생님의 작품은 부드러운 면이 더 많은것 같은데 기실 《비리와의 전쟁을 한시도 멈춘적이 없다》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가요?
림원춘: 작가의 직책이 무엇입니까? 작가가 작품을 통해 비리를 소멸한다는것은 거짓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적어도 비리를 폭로할줄 알고 비판할줄 알고 통탄할줄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은 권력이자 금전이고 금전이자 권력이라고들 합니다만 전혀 도리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비리는 권력과 금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비리가 만연된다면 우리의 당은 어떻게 되고 우리의 조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작가로서의 이런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1992년, 전국을 들썽한 도문시의 길림성우전공업무역회사 총경리 한옥희의 죄악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전이 어떻게 권력을 리용했고 권력이 어떻게 금전의 유혹에 빠졌는가를 파헤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촌보도 움직일수 없었습니다. 해당 부문에서 저를 추문하기 시작했고 10여명 되는 한옥희의 폭력배들이 도문시에 널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 감옥문에 들어설지 몰랐고 폭력배들의 칼맛을 볼지 몰랐습니다. 저는 반년동안 도문시의 려관들을 전전하면서 숨어다녔고 믿음직한 개인집들에 피신하면서 자료수집을 하는 한편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저의 개인 경비로 한옥희의 피해자들을 찾아 훈춘, 왕청, 룡정, 화룡 … 전 연변을 답파했습니다. 1992년《은하수》잡지 8기부터 제가 쓴 《예고된 파멸의 기록》을 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반향이 컸지요. 국가문학상을 받은 저의 《몽당치마》를 초과했으니깐요. 종합집 《예고된 파멸의 기록》이 3만5000부라는 출판기록《문학작품》을 웃돌았으니 짐작이 가리라 믿습니다. 그러자 연변주당위 선전부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출판을 당장 중지하라는 통보였습니다. 저는 단호히 《나는 언녕 감옥에 한쪽발을 들여놓고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입니다》라는 한마디만을 던지군 했습니다. 지금은 쉽게 이 말을 하지만 그때의 분위기로는 정녕 하기 힘든 말이였습니다.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을 지경으로 삼엄했으니깐요. 하지만 저는 끝까지 이 글을 쓰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저는 이런저런 제약으로 한옥희의 죄악만 폭로하는 반쪽작품만 완수하고 붓을 놓고말았습니다. 벽을 뚫고나갈 구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떠벌이기 위해 이 일을 운운지설하는것이 아니라 작가라면 비리와의 전쟁에서 감옥에 들어갈수도 있고 단두대에도 오를수 있다는 점을 귀띔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문단은 정품을 창작하고 소개하는 작업 필요
기자: 림선생님께서는 우리 조선족문단을 어떻게 진맥하고있는지요? 현황과 그 전망에 대해 간단히 말씀주시죠!
림원춘: 개혁개방후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인한 조선족집거구의 해체, 인구의 마이나스 성장과 해외진출로 인한 독자층의 감소, 출판과 교육의 부진, 많은 중견작가들의 상업의 길로 하여 한때 우리 문단은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활약적인 군체였던 우리 문단은 그 모진 진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해에 몇권, 극상해야 열권좌우에서 헤매던 작품집들이 지금은 매년 거의 백여권을 헤아리는 수자로 급상승했습니다. 진짜 기뻐하고 축복할만한 희사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것은 국가상을 받을만한 정품들이 나타나지 못했다는 그것입니다. 작품도 작품이겠지만 아직도 번역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전국에 소개되지 못하고있습니다. 진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한가지 군말을 더 단다면 우리의 문단은 쟁명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있습니다. 부동한 의견, 부동한 관점이 나타나면 쟁명이 끝나기도 전에 문질러버리거나 결론부터 내리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편파적현상들이 존재하고있습니다. 이런 옳지 못한 기풍으로 하여 시비는 물론 문단의 단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있습니다. 옳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우리의 문단은 앞이 보이는 활약체입니다. 그것은 40, 50대의 중견작가들이 창작의 고봉기를 맞고있으며 20, 30대의 싹수가 보이는 쳥년작가들이 그 뒤를 잇고있기 때문입니다. 자부심이 없는 민족은 사멸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 민족동화라는 엄혹한 현실을 앞에 두고있습니다. 민족의 동화는 언어의 동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문단은 교육과 더불어 우리의 민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 그 보루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귀여운 손자를 《왕》으로 모시고.(사진 34)
길림신문 류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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