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아혁회사 창업편린
청도 하면 사람들은 흔히 청도맥주를 떠올린다. 그만큼 우리와 익숙한 고장이다.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하면서 연해개방도시로서 청도는 우리 민족의 새로운 집거지로 이미 자리를 굳혀가고있다. 중국조선족이 근 20만, 한국인들이 10여만명에 달하여 불완전한 통계에 의해도 우리 겨레가 3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서 굴지의 기업으로 일떠선 청도아혁회사는 새로운 시대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랑이자 동시에 개척과 창업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청도아혁회사의 창업은 연변에서부터 시작되였다. 김혁리사장은 1992년 25세의 열혈청년으로 고향땅 연변에서 조선, 한국, 로씨야 등 이웃나라들을 넘나들며 무역거래와 장사로 창업의 스타트를 떼였다. 그러다가 1995년 일정한 경제토대가 마련되자 자치주 수부도시 연길의 앞남산에 터를 잡고 아혁회사를 설립, 창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김혁리사장이 한창 초창기의 창업에 열중할 때 인생의 대변혁을 가져오는 중대한 기회가 찾아왔다. 중한수교와 더불어 산동반도에 한국인투자붐이 형성되면서 중국내의 웅심을 품은 지성인들도 여기로 대거 진입한것이다. 김혁씨도 이 조류에 편승하여 1997년 11월 청도에 진출하였다. 당시 모아가지고 간 밑천이 30만원, 그는 이 자금으로 청도 로산구 고과원에 터를 잡고 가구와 주방시설을 주로 생산하는 소형공장을 앉혔다.
<<신용은 기업경영의 기본토대이고 질은 생명이다.>> 김혁리사장은 이를 경영리념으로 삼고 창업과 경영의 전반 과정에 시종일관하게 관철하였다. 하기에 그는 제품의 생산과 판매에 앞서 시장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조사를 거쳐 관련 내용과 사항을 속속들이 파악하였다. 사활을 건 치렬한 시장경쟁속에서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병법이 통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만사가 구비되여 일단 생산에 진입하면 질을 목숨처럼 여기면서 추구하였고 판촉활동이 시작되면 신용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그는 티끌만한 흠집도 없는 100%를 추구하였고 0.001%의 허점도 용허치 않았다. 그만한 실수도 결과적으로는 자기를 해친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다. 하여 그의 제품들은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하넓은 중국의 시장에서 불패의 지반우에 우뚝 서게 되였다.
10여년간의 창업은 간고하였다. 하지만 심혈을 기울인만큼 정비례를 이루어 그 성과도 혁혁하였다. 오늘날 아혁회사는 멜라민판 등 여러가지 인터리어자재를 생산하는 총투자가 390만딸라에 달하는 아혁인터리어재료유한회사, 등록자금이 570만원에 달하는 아혁국제무역회사, 투자액이 250만딸라에 달하는 합작기업 아혁인터리어재료유한회사, 투자액이 350만딸라에 달하는 협력기업 대신멜라민산업유한회사, 투자액이 250만원에 달하는 아혁실내인테리어회사 등 자회사들을 거느린 아혁그룹으로 성장하였다.
당면 아혁회사는 지구촌을 작고 좁다고 할 정도로 판로를 세계의 방방곡곡에 펼쳐가고있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인터리어벽자재는 한국, 일본, 독일 그리고 중동지역의 여러개 나라와 향항, 오문 등 지역에 수출되고 년간수출액은 1200만딸라에 달한다. 합자기업 아혁인터리어자료제품도 일본, 미국, 동남아의 여러개 나라와 지역에 수출되며 대신멜라민유한회사의 제품은 ISO9002국제품질인증을 흭득하여 한국, 미국, 로씨야 그리고 중동의 여러개 나라와 지역에 수출되고있다.
연변일보 장경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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