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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휘에서 온 장서의 댓글:  조회:60  추천:2  2025-01-13
장서의는 안휘성 부양의 농촌에서 심천으로 일하러 온 50대의 사나이다. 중등키에 까만 눈섭을 가진 그런대로 봐줄만한 인물을 가졌는데 보통말보다는 혀를 꼬부라뜨리는 안휘의 지방말을 더 많이 하여 그가 하는 어떤 말들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여러곳을 전전긍긍하였는데 강소성, 절강성 그리고 녕파 등지의 공사장에서 페인트공질도 하였다 한다. 심천에 와서도 개인이 꾸리는 화훼회사에서 일하다가 보스의 눈에 나서 잘리게 되였는데 그 자신은 맞같지 않아서 그만뒀다고 하지만 그때 그와 함께 일하다가 후에 또 한회사에서 정원사일을 하는 호남에서 온 주주길의 말에 따르면 제앞의 일을 깔끔하게 하지 못하여 잘렸다고 한다. 장서의가 심천으로 오기전에 그의 안해가 먼저 와서 지금의 회사에 취직하게 되였는데 회사의 제조부부장이 녀동생남편이라 남보다는 쉽게 회사에 입사할수 있었다. 장서의 또한 화훼회사에서 잘리게 되자 동서간이 되는 제조부부장과 청을 들어 회사의 정원사로 취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후 부장동서의 덕분으로 장서의의 아들 딸 모두가 회사에 입사하였으며 사위는 입사 2년도 채않되여 계장으로 승진하였으니 부장동서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안휘의 농촌마을에서 온 장서의는 순박한 면도 가지고있지만 또 어딘가 어리숙하기도 하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말주머니를 풀어헤치고 어떤 말이든 숨김없이 말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로 누님둘에 아래로 녀동생 둘, 그러니까 누님들과 녀동생들 사이에서 그가 태여나게 되였는데 부모들은 대를 이어갈 아들이라고 어려서부터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귀염을 받으며 자라나 한족남자들 거의 모두가 가마목일을 잘하는데 비해 그는 전혀 할줄을 몰랐다. 그가 할줄 안다고 자랑할만한것이라면 밀국수(挂面)를 삶는것과 땅콩을 기름에 볶는것이였는데 그것도 간혹 안해나 딸이 퇴근이 늦을 때면 제딴에는 잘하느라고 솜씨를 보이군 하는데 그의 그런 솜씨를 안해와 딸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밀국수를 한가마 삶아놓으면 안해가 한오리만 먹어보고는 이게 돼지죽이지 사람이 먹을것이냐고 호통치면서 이후로 밀국수를 삶겠으면 네혼자 먹을만큼만 해서 먹으라고 한단다. 그뒤로 안해와 딸은 잔업으로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는 집부근에서 사서먹고 귀가하군 하였다. 그들이야 그러건말건 장서의는 자기가 갖고있는 한가지 재주 – 밀국수를 삶고 땅콩을 기를에 볶아서는 술두냥까지 곁들여서 맛난 저녁식사를 치르군 한다고 한다. 그가 낯에 웃음기 하나 띠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할때면 모두가 호탕하게 웃으며 슬슬 놀려주거나 직접 대놓고 이 머저리야, 그 나이에 밥도 할줄 몰라?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장서의는 개의치않고 정색해서 나 어릴 때 부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자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 라고 하면서 어딘가 득의양양해하는 표정까지 지었다. 회사에서는 한해에 두세번정도로 사회공익성활동(义工)을 조직하는데 이를테면 삼림공원이나 바다가를 찾아가서 널린 쓰레기를 줏는것이다. 사회공익성활동인만큼 회사에서는 회사원들이 자원적으로 참가하게 하였는데 활동에 참가하는 회사원들은 모두 20대들이였다. 장서의는 회사벽보란에 공익활동통지가 나붙으면 그자리로 상관부서를 찿아가서 등록할뿐만아니라 꼭 참여하게 해달라고 사정까지 하여 지금껏 회사에 입사하여 한번도 공익성활동에 빠진적이 없다. 회사에서는 매번 활동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빨간색 모자에 글을 박아 나눠주는데 장서의는 그 모자를 그날뿐만아니라 그후 회사울안에서 화초를 가꿀 때도 쓰고 하여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였다. 회사에서는 해마다 추석명절이면 대형문예야회를 조직하군 하였는데 그날도 공익활동의 하나로 자원적으로 걸상옮기기, 장소정리, 장소청결 등을 하였다. 장서의는 이 활동에도 번마다 선참으로 등록하고 밤늦게까지 로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도 글이 박힌 빨간색 모자를 나눠주었기에 장서의는 그 모자를 쓰고 신나게 돌아쳤으며 그후로도 그 모자를 오래도록 쓰고 다녔으며 그러는 그를 보는 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회사공회에서는 한해에 한두차례 등산활동을 조직하는데 대형버스 세대에 만원이였다. 공회에서 조직하는 활동인만큼 격식을 차려 글이 박힌 기 발도 마련하고 반팔적삼도 통일적으로 주문하여 나눠주었다. 장서의는 이 활동에도 선참으로 등록하고 참가하였을뿐만아니라 공회글이 박힌 기발을 자청하여 자기가 들고 산을 오르고 내리였다. 이런 장서의를 두고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이름을 달아 부르게 되였는데 누가 처음으로 지어서 불렀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기발하고 묘하였는바 한입두입 회사내에 인차 퍼져 모두가 원이름대신 새로 지은 이름을 부르는데 습관되여 갔다. 장서의는 한어로 张西仪인데 그음에 따라 脏兮兮로 새로이 불려졌다. 脏兮兮는 실은 더럽고 어지럽다는 뜻으로서 그에 대한 멸시와 모욕이였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으며 너희들 짖겠으면 짖어라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간다는 격이여서 모두가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신 脏兮兮라 스스럼없이 부르는데 익숙해져갔다. 회사에는 실내외를 청소하는 청결공들이 있는데 모두가 녀성들이였다, 청결공들도 짱시이라는 이름대신 짱시시라고 부르기 좋아하였으며 참대비자루를 자르거나 무거운것을 들거나 등 자질구레한 일들은 장서의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그는 번마다 거절하지 않고 잘도 도와나섰으며 그들과 어울려 잡담하기를 즐겼을뿐만아니라 회사울안 귀퉁이에다가 몇포기 심은 채소도 아까워하지 않고 통이 크게 따다가 그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가 회사울안 한모퉁이에 어떤 채소를 얼마나 심었는지 누구도 알지못하고있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는 만나는 사람과마다 자기가 심은 채소가 여차여차 왕성하게 잘 자라고있다고 자랑하군 하였으며 얼마후에는 자람새가 좋은 채소를 누군가가 다 따갔다고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두고 모두가 허구픈 웃음을 웃을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호주머니에 지갑이란걸 넣고 다녀본적이 없다. 호주머니에 고작 아침사먹을 돈 20원쯤 넣고 다니였기에 급하게 돈쓸 일이 생기면안해를 찾아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서 꾸어야 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 회사의 운전기사가 한번은 그가 당장에서 월급카드를 내놓는다면 고급음료수 한병을 사주겠노라고 도전장을 던지자 장서의는 어물쩍하게도 림기응변책을 대여 모두가 웃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오다보니 깜빡하여 지갑을 소지하지 못하였으니 래일 출근하는 길로 보여주겠으나 음료수는 필요없다는것이였다. 이튿날 출근한 운전기사는 전날의 일을 감감 잊고있었으나 장서의는 출근하자 운전기사를 찾아가서 지갑과 월급카드를 꺼내 그의 코밑에 대고 흔들어 보였으며 또 천원은 훨씬 넘어보이는 백원짜리 지페도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그가 그렇듯 정색하고 득의양양해하자 운전기사는 그가 마다하는것도 음료수를 사주었다고 한다, 며칠후 짱씨씨의 호주머니에는 또 아침밥을 사먹을 돈이 10원이나 20원 밖에 없었다.  회사규모가 크고 그에 따라 울안도 크기에 각종 수목과 꽃나무 그리고 잔디밭이 있어 정원사를 채용하고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면 각종 수목과 꽃나무를 가꾸고 전지하며 자라나는 잔디를 기계로 깎는것이다. 공원이나 명승지의 정원사라면 차원이 높아야겠지만 회사울안의 정원사인것만큼 가쯘하게 가꾸면 되였다. 헌데 짱시시는 그것도 만족스럽게 못하여 눈에 뜨일 정도였다. 일을 한시간도 안되게서 하다가는 헝겊으로 눈을 싸맨 당나귀가 석마를 돌리듯 회사울안을 돌고 돌아다니다가는 또 잠간 일하다 다른 사람들이 밖에서 작업하는데를 찾아 구경하군 하였다. 총무에서 그의 작업태도를 언녕 보아냈지만 그의 동서가 부장이라 한두번 타이르는척 하다가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보안일군들의 단련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철봉대를 만들고 가끔 롱구시합도 하였다. 보안일군들이 농구시합을 하면서부터 짱시시의 몸단련도 시작되였다. 전에 철봉대를 만져도 못본 그였지만 틈만나면 철봉대에 붙어있다보니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짓듯이 철봉에 매달려 몸돌리기 ,턱걸이 등 철봉을 자유자재로 할수 있었으며 멀리서도 농구공을 던져 그물안에 넣을수 있었다. 그의 몸단련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하다가도 잔디밭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꺼꾸로 서기-도립(倒立), 거꾸로 서서 손으로 걷기 등도 련습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거꾸로 서기는 2분에서 5분까지 견지할수 있었으며 꺼꾸로 서서 걷기는 3미터에서 5미터까지 갈수 있었다. 이렇게 그의 재간이 늘어나자 그는 여럿이 모여서 휴식하는것이 보이면 하기 좋아했는데 자기의 재간을 자랑해보려는것이였다. 다른이들 역시 그의 아들또래 아이들까지 그를 만나면 씨씨 또리 라이거베 하고 말을 걸군 하였는데 그때면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흔쾌히 꺼꾸로서기와 꺼꾸로 서서 걷기를 하군 하였으며 구경하는 이들은 박수까지 쳐대면서 호우,호우 하고 춰주군 하였는데 그러면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군 하였다. 년말회식때였다. 모두들 술한잔 얼근하게 마시고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짱시시시와 마주치게 되였다. 이때 누군가 짱시시 보고 라이거 라고 하자 뒤따라 나오던 이들도 이구동성으로 라이거,라이거 하기에 이르렀다 실은 회식은 음식점에서 한지라 음식점 밖은 콘크리트 바닥이고 하루의 열기가 그대로 슴배여 있어 가마목못지 않게 뜨끈뜨끈하였다. 그래도 짱시시는 개의치 않고 흔쾌히 얼굴에 웃음까지 띄우면서 하루동안 열기를 확확 내뿜고 있는 콘크리트바닥에 머리를 대고 꺼꾸로 서기를 하였는데 머리가 뜨거워 인차 다리를 내리우고 말았다 원숭이가 부리는 재롱을 구경하듯 빙 둘러서서 구경하던 이들이 이번에도 박수까지 쳐가면서 호우를 련발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인건 더 말할것도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회사총경리가 새로 부임되여 오면서 회사내부에 큰 인사변동이 생기에 되였는데 짱시시에게도 그 자신마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제일 큰 변동으로는 부장으로 있던 그의 동서가 이번 회사내 인사변동에서 부총경리로 발탁되여 회사내 2인자로 권리를 틀어쥐게 되였다. 인사변동정황이 회사내에 공시문으로 공포되여 일반 회사원들마저 다 알게 되면서부터 짱시시(张兮兮)라 부르던 별호가 차츰차츰 적게 들리다가 어느날부터인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게 되였으며 대신 로짱(老张)이란 호칭이 생겨나 짱시시를 대신하게 되였다. 만날때마다 시도때도 없이 거꾸로서기를 권유하던 이들도 그를 만나면 얼굴에 웃음을 바르고 로짱이라고 정중히 불렀으며 무겁거나 힘들고 어지러운 일이 있을때마다 짱시시를 부르면서 곧잘 청들던 청결공아낙네들도 온 얼굴에 해시시 웃음을 바르면서 짱따거라고 불렀을뿐만아니라 더는 그에게 그런 일을 청들지 않았다. 처음에 짱시시가 로짱으로 짱따거로 호칭이 바뀌였지만 장서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나 한듯이  개의치 않았을뿐만아니라 전대로 변함이 없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여럿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 엊저녁 부총경리인 동서와 술한잔 했다는둥 자기한테 변속자전거를 선물로 주더라는둥 함께 심천공원으로 놀러갔댔다는둥 등의 자랑을 누구 묻지도 않는데 곧잘했으며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하였다 그의 그런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처음에는 얼굴이 굳어졌다가 인차 얼굴에 웃음을 게바르군 하였으며 그럴수록 장서의는 신이 나서 때론 손짓발짓까지 해대면서 열을 올리군 하였다. 음력설에 회사에서는 두주일간 방학을 하게 되였는데 회사대문을 지킬 보안일군이 모자라게 되였다. 그사이 출근은 두배의 돈을 주지만 고향으로 가고픈 보안일군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였다 전같으면 장서의를 념두에 두고 생각지도 않았겠지만 혹 생각했다 할지라도 보안일군도 아닌 그를 그동안 채용하는걸 유관책임자가 동의할리 만무할것이였다. 허나 이번에는 방학사이 보안일군이 모자라자 보안대장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이가 바로 장서의였다. 그는 가정성원 모두가 와있으니 고향으로 갈리 만무하고 또 부총경리의 동서간이니 유관책임자가 동의안할리가 없을것이니깐. 결국 장서의는 매일 두배의 돈을 받으면서  두주일 방학기간 회사대문을 지키게되여 돈도 벌고 틈틈히 철봉과 도립을 마음대로 할수 있어 실로 말그대로 누이좋고 매부좋았으며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때는 격이 되였다. 음력설이 지나 출근이 시작되여 얼마 안지나서 장서의에게는 모두가 눈이 둥그래질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소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었는데 자기 이름석자도 써놓으면 오리가 똥물을 갈기고 헤집어놓은것처럼 뒤죽박죽이 되여 겨우 알아볼 지경이였으며 회사공고란에 나붙는 공시문도 대강 뜻이나 겨우 알아보는 정도였다. 그런 그가 직원으로부터 일약 조장으로 승진하게 되였던것이다. 조장직이 회사내에서는 제일 말단직이지만 모두가 조장으로 되는게 아니고 자기가 되고싶어 되는것은 더구나 아니였다. 비록 말단직이지만 직원보다 월급을 5백원이상 더 받으니 조장으로 승진한 장서의가 부럽지 않을수가 없었다 .조장으로 승진한 장서의는 더는 짱씨씨가 아닌 로짱, 짱따거로 불리웠으며 그의 어깨 또한 전보다 더 넓어진듯 해보였다. 실로 한사람이 출세하면 그 집의 개와 돼지도 따라서 살찐다는 말이 바로 이런걸 두고 한말이 아닌가 싶다                                                                
3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댓글:  조회:37  추천:0  2025-01-13
우연한 기회에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로인”을 읽어보게 되였다. 짧은 한편의 수필이지만 여름날의 잔잔한 보슬비가 옷속까지 스며들며 적셔주듯 마음속까지 잔잔한 감동이 여울져오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나”는 퇴근길에 길가에서 방망이 깎는 로인을 만나 방망이 한벌을 깎아달라고 부탁한다. 로인이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것 같아 흥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로인이 퉁명스럽게 나와서 흥정을 포기하고 잘 깎아달라고만 부탁하고 만다. 로인은 처음에는 방망이를 빨리 깎는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면서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다 된것같아 달라고 했으나 못들은척 대꾸가 없이 그냥 깎기만 한다. 타야할 차시간이 림박하여 초조해난 “내”가 그만 달라고 하자 로인은 버럭 화를 내면서 끓을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밥이 되냐며 안팔겠다고까지 한다. 별수없이 “내”가 체념하자 로인은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방망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계속 할 일에 열중한다. 타야 할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타야 하는 “나”는 로인을 상도덕(商道德)도 모르는 무뚝뚝한 로인이라고 원망하게 된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안해는 방망이가 배가 부르지도 약하지도 않게 맞춤하고 이쁘게 잘 깎았다면서 이렇게 잘 깎은 방망이를 만나기 조련찮다고 한다. 안해의 말을 듣고 비로서 로인을 원망했던 자신을 뉘우치며 다음 일요일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사과라도 하려고 로인을 찾아갔으나 그 자리에는 로인이 없어 아쉬움만 가득 남는다.   길가에 앉아 방망이를 깎는 로인이라면 우리 모두에게 낯선 풍경이 아니다. 방망이 한벌을 깎아야 돈이 얼마 되지도 않겠지만 로인은 혼신을 다해 정성스럽게 깎는다. 배가 부르지도 약하지도 않고 맞춤하게 그리고 이쁘게 깎았다.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것이 로인의 상도덕이라면 합당할것 같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하는 일에 전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로인이다. 참으로 돋보이고 존경스러운 로인장이다.   일전에 연변텔레비죤위성방송에서 화면석소장가 정려화씨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역시 잔잔한 감동을 불러오는 이야기였다. 화면석수장도 좋지만 그보다는 그림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그가 나이 40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것도 돌에다가 여러가지 동물들을 위주로 화초들을 그렸다는것이며 모두가 살아숨쉬는듯이 생동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혀를 두르게 하고있다. 물론 농후한 흥취와 애호가 뒤받침하였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내가 사는 동네 입구에는 음식점들이 서로 겨루기라도 할듯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지나다니면서 눈여겨 보노라니 어떤 음식점은 숱한 돈을 팔면서 장식하고 폭죽을 터치우면서 요란하게 개업해서 두달후면 문을 닫고 양도를 한다는 딱지를 붙이고 만다. 그런가하면 어떤 음식점은 십여년이나 주인이 바뀌지 않고 쭉 문을 열고있으며 매일 호황을 이루고있다. 물론 음식업은 위치나 노하우가 비결이겠지만 그에 앞서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세상의 그 어떤 일이든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오직 피타는 노력이 동반되였을 때만이 예기한 목적에 이를수 있을것이다. 피타는 노력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최선을 다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도리를 깨우쳐준 방망이를 깎던 로인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2    소산에 다녀오다 댓글:  조회:41  추천:0  2025-01-13
2016년 국경절 련휴때 우리 나라5악중의 하나인 남악 형산을 톺아 그정상까지 올랐댔다. 형산은 호남성형양에 있는데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5악인만큼 비록 산세가 험준하여 힘에 부쳤으나 정상에서 밑을 굽어보는 순간만큼은 가슴 뿌듯한 순간이였다. 형산의 정상에서 일몰과 일출을 보려고 풍막과 생활도구들을 꿍져메고 힘겹게 톺아오르는 이들을 보면서 내심 탄복하기도 하였다. 형산을  답파해도 련휴가 남았기에 호남땅을 밟은 바에는 소산으로 가서 모주석의 생가를 방문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소산으로 향발하게 되였다. 소산을 향해 떠나는 순간부터 나는 이름할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면서 몇십년전의 일들이 밀물이 밀려오듯 줄줄이 떠오르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드는건 나로서도 억제할수가 없었다. 아마도 소학교2학년때라고 기억된다. 그때 비록 시골학교였지만 전교문예경연을 조직하게 되였는데 우리 학급에서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는 가무를 내놓게 되였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그때 그 노래가사와 곡이 그대로 기억에 생생하다. “기차는 달려요. 소산으로 달려요. 산을 넘고 강건너 소산으로 달려요. 해빛은 찬란히 창을 비추고 차칸안은 들끓어요. 참말 들끓어요. 장족할아버지 해금타고 신강누나 춤추고 몽고족아저씨 노래불러요. 노래소리 웃음소리 그칠줄 몰라요.” 보다싶이 각 민족인민들이 기차타고 모주석의 고향인 소산으로 가면서  즐거운 심정과 들끓는 장면을 보여주고있다. 당시 우리 학급에는 20명이 채않되는 학생들이였는데 전원이 참가하였다. 한켠에 다섯씩 10명 학생은 종이박스로 만든 둥근 기차바퀴를 돌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각양각색의 민족복장을 차려입고 차칸에서 춤추고 노래불렀다. 특히 장족할아버지, 신강누나, 몽고족아저씨 차림을 하고 해금타고 춤추고 노래부르는 이들이 있고 또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치고 춤추는 이들이 있어 관객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당연히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어린 가슴에 소산으로 다녀오고픈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다.사실 나뿐만아니라 중국인이라면 전국인민의 태양이며 위인인 모주석의 생가를 가보고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을것이다. 허나 호남성까지는 거리가 너무도 멀어서 가슴속에 념원으로만 남겨둘수밖에 없었다. 몇해전 남방으로 옮겨와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생각한것이 여건이 허락되면 어릴 때 출연했던 장면을 되새기면서 소산에 한번 다녀오리라는것이였는데 이제 그 소망을 현실로 이루게 되였으니 그 마음을 뭐라 표현했으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흥분에 들떠 소산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가는 내내 그 노래를 수도없이 흥얼거리였다.     소산충의 모주석생가는 어릴때부터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아오던것과 같았지만 직접 발을 들여놓고 보는 순간만큼은 숙연해지는 마음이였다. 집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집앞이 논으로 된 생가는 아늑하고 조용했을거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산수가 좋다는 느낌이였다. 방방곡곡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방문객이 인산인해에 장사진을 이루었며 시종 비비적거리면서 밀려다녀야 했기에 사진한장 기념으로 남기지 못하는것이 큰 유감으로 남았다. 국경련휴인것도 있겠지만 위인은 영원히 인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으며 인민들은 영원히 위인을 기리고있음을 알수 있었다,  모주석의 생가는 1929년 국민당정부에 의하여 몰수당하여 파괴당한것을 1950년 원모습대로 복원하였으며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에서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고 1997년 중공중앙선전부에서는 전국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명명하였다. 1983년6월27일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등소평동지가 “모택동동지생가(毛泽东同志故居)”라는 친필제사를 써주었다.  모주석의 어린 시절 부모님들을 도와 곡식이랑 말리웠다는 집옆 마당에 서있노라니 어느 책에서 본 한토막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주석은 어릴 때부터 이웃이나 어려움에 처한 동네사람들을 즐겨 도왔다고 한다.  1910년 가을, 당시 17세인 모주석은 호남상향 현립동산고등소학당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집떠나 50리 밖에 가서 공부하게 되였다. 집떠나기전 그는 시한수를 써서 아버지의 장부책에 끼워놓아 작별인사로 하였는데 길이길이 후세에 전해지고있다.    이 아들은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니    배워서 이름 날리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    뼈를 묻을 곳은 고향뿐만 아니거늘    인생 그 어디엔들 청산이 없으랴.                                                  일본인 사이고우 다까모리의 시를 고쳐서 쓴 시지만 17세 소년의 가슴에 품은 웅대한 포부와 장한 뜻 그리고 그 씩씩한 기개가 읽을수록 가슴에 와닿으면서 감동에 젖어들게 한다. 방문객이 많아  밀쳐댔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잠간 사색의 늪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그렇듯 웅대한 포부와 장한  뜻이 있었기에 집을 떠나게 되였으며 끝내는 큰 뜻을 현실로 이루어 만민의 대구성으로 인민의 마음속 태양으로 되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하여 아쉬운대로 귀로에 올라야 했다.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모주석의 생가를 다시 우러르면서 이제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방문하면서 기념사진도 꼭 남길것이리라고 나름 소원을 만들어보았다.
1    잊혀지지 않는 민병훈련 댓글:  조회:31  추천:0  2025-01-13
티비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면 나는 전투편을 즐겨보는데 그러는 나를 두고 모두들 리해않된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기도 한다. 내가 전쟁하는 드라마를 즐겨본다해서 참군한적이 있거나 더우기 전투에 참가 해본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40년전의 민병훈련이 잊혀지지 않고 생생히 떠오르면서 가끔 추억속에 묻힐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때 년대에는 마을을 단위로 민병조직이 있었는데 민병조직이란 한마디로 간단히 말한다면 생산로동을 탈리하지 않는 무장조직을 말한다. 이를테면 농촌에서 농사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전제하에서 청년들로 조직된 무장조직이다. 무장조직이라 하여 항상 무기를 지니는것은 아니고 유사시에 쓸수 있도록 무기를 촌정부 무기고에 보관하고있었다. 생산로동을 리탈하지 않는만큼 일년농사일이 다 끝나고 음력설까지 쇠고나서 봄철일이 시작되기전에 한달에 가까운 시간을 리용하여 민병훈련이란걸 진행하는것으로  민병들의 자질을 높였다. 민병훈련은 향정부의 비준을 거쳐 향무장부에서 책임지고 조직하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약 130여가구가 살았었는데 청년들이 백여명에 가까워 한개 련대로 편성되였으며 한개 생산대를 한개 패로 세개 생산대에 세개 패로 편성되였었다. 무기는 보총 60자루, 돌격총(카빙총)9자루, 기관총6정이 있었다. 모두가 전쟁에 나갔던 무기들이지만 제때에 기름을 치고 보수하여 녹이 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민병훈련동원대회가 있고 총을 분여받은 이튿날부터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8리 상거한 향소재지에 집결하여 훈련을 받았다. 훈련내용은 대렬짓기로부터 전술훈련, 무기해부 및 원상복귀하기, 실탄훈련 등으로 이어졌다. 음력설이 지나 봄을 눈앞에 두고있으나 날씨가 제법 맵짰지만 종일 총을 메고 대렬짓기를 하다보면 땀이 흥건히 배여 나왔다. 간혹 앉아 쉬다가도 갑작스레 집합호각을 불면 총을 메고 달려가 렬을 짓고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전술훈련은 쾌속전진과 포복전진, 돌격 등인데 새끼줄을 가로세로 쳐놓아 가시철조망을 대체하였으며 적진이 앞에 있다고 가상하고 조별로 나뉘여 포복전진으로 가시철조망을 넘어서 엄페물을 찾아 적진을 살펴보다가 돌격하였는데 교관이 전과정을 지켜보고 점수를 매기였다. 무기해부와 원상복귀하기는 실내훈련이였는데 교관이 여러가지 총과 수류탄, 폭파약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한후 보총과 돌격총을 모두가 보는데서 해부하고 다시 원래대로 맞추고 우리더러 해보게 하였다. 비록 간단한것 같았지만 거기에도 순서가 있는지라 참답게 배워야 빠른 시간내에 해부하고 맞출수 있었다. 마지막 훈련내용은 모두가 제일 기다리던 실탄훈련이였는데 사격은 80메터,120메터 사격거리로 두번에 나누어 진행하였으며 탄알은 매번 10발씩이였고 수류탄은 한사람당10개씩이였다. 80메터 사격거리는 사격판이 보이지만 120메터 사격거리는 사격판이 아물아물거려 잘 보이지가 않았으며 눈을 크게 오래동안 뜨고있으니까 눈물이 나와서 더 보이지 않았다. 요구도 80메터 사격거리에서는 요구가 높았지만 120메터 사격거리에서는 사격판만 맞추어도 합격으로 인정해주었으니 백메터 넘는 사격거리에서는 명중하기 어렵다는걸 알수 있었다. 사격에서 관건은 3점일선(3点一线)을 지키면서 묘준이 되면 숨을 몰아쉬고 방아쇠를 살짝 당겨서 조그마한 공간도 없애고 다시 숨을 죽인후 방아쇠를 천천히 당겨서 발포한다는걸 그때 배워서 실천해보았었다. 수류탄은 안전을 고려하여 평지에서가 아니라 언덕밑에 내리던지고 명령에 따라 도랑에 납작 엎드렸으니까 10개를 줴뿌렸지만 어떻게 터졌는지 몰랐다. 교관이 수류탄뿌리는 자세나 행동을 보고 점수를 매기였으니까 함부로 일어나서 볼수도 없었다. 그렇게 20여일간의 민병훈련이 끝나면 과거급제하고 금의환향이나 하듯이, 큰일이나 하고 개선하듯이 마을로 돌아와 총을 바치면 다시 농사일을 해야 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업군인이 아닌 민병훈련이지만 많은걸 배웠으며 특히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헤쳐나가는 정신을 배운것이 제일 값지다고 생각해본다. 나는 오늘도 티비를 켜고 “대청산을 피로 물들이다”란 전쟁편을 시청하고있다. 잊혀지지 않는 그때 그 시절의 민병훈련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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