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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심천의 변화와 속도 댓글:  조회:68  추천:0  2026-04-14
십년전 심천의 오동산에 자리한 미디어회사에서 근무할 때는 그리로 가려면 버스로 공항동쪽지하철역까지 한시간, 지하철타고 또 한시간, 버스로 반시간을 가야 목적지에 도착할수 있었다. 혹 볼 일이 있어 심천시내로 다녀오려면 공항동역 지하철역(机场东地铁站)까지 버스로 한시간 가서 지하철을 타든지 아니면 버스역에 가서 버스를 두시간넘게 타든지 해야 했으니 실로 불편한 고역이였다. 십년전 심천의 지하철은 고작 5호선까지 도합 다섯갈래뿐이였으며 길이도 1호선외는 모두 짧았다. 지금 협회의 노래교실활동은 매주 한차례씩 조직하는데 내가 사는데서는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전같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길에서 허비하다보면 가고싶어도 갈수 없을것이다. 허나 지금은 집에서 나와 도보로 10분이면 지하철역에 도착해서 다시 밖에 나올 필요가 없이 한번 환승하면 활동지점인 문체예술중심에 도착할수 있다. 매양 지하철을 리용할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나오는건 어쩔수가 없다. 십년이 지난 오늘 심천의 지하철은 5갈래로부터 17갈래로 발전했으며 그 길이도 21,3키로메터로부터 640키로메터로 늘어났다. 이제 10년후에는 33갈래 선로에 총 길이를 1300키로메터로 늘일 계획인데 현재 진행중에 있으며 현실로 다가올것이다 현재 심천의 지하철은 심천의 각 구(区)는 물론 각 가두(街道)에 까지 통하고있으며 동관과 혜주변계까지 통하는데 이제 동관과 혜주에서 지하철을 건설하여 이어놓으면 주민들의 출행이 더 많이 자유로워질것이다. 동서 길이가 81,4키로메터, 남북길이가 10,8키로메터에  총면적이 1987평방키로메터인 작은 도시지하에 거미줄처럼 늘여진 차길로 기차들이 바람처럼 실북나들듯 드나들고있다면 적절할것 같다.  심천 강샤베이(岗厦北) 지하철역은 아세아주에서 제일 큰 지하철역인데 심천의 중요한 교통중추로서 방대한 규모와 독특한 설계로 이목을 끌고있다. 걍샤베이 지하철역은 2호선, 8호선, 10호선, 11호선, 14호선의 환승역인데 총 건축면적은 22,5만 평방메터이고 23개의 출입구가 있어 편리하면서도 늙은이들한테는 조금은 어지름증을 준다. 강샤베이 지하철역은 일평균 30만명이 리용하고있으며 명절이나 휴일일때는 36,2만명이 리용하고있다 한다. 371억원을 투자하여 현재 건설중인 시리역(西丽站)은 그 규모가 120개의 축구장만하여 세계적으로 제일 큰 지하철, 고속철 등 여러가지 궤도종합역인데 심천의 특대형 교통중추가 될것이라고 한다. 2028년에 준공될 시리고속철역은 이미 주체결구시공단계로 진입했으며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심천의 공공버스는 언녕 전기로 달리는 버스로 바뀌였으며 기름을 태우는 버스가 달리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개인 자가용도 거의 3분의 1이 전기차인데 정부에서 혜택을 주고 거기다 사용이 편리하니 전기차가 나날이 늘어가고있다. 실로 심천의 발전속도는 어지름증이 날 지경으로 일사천리라면 적절할것 같다. 1979년11월 광동성위에서는 심천을 지구1급 성직할시로 결정하였고 1980년8월26일 전국인대상무위원회에서는 심천을 경제특구로 비준하였으며 1981년3월 부성급시로 승격시켰다. 심천이 경제특구로 되면서 수많은 외국기업들이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하였는바 그 주요원인은 경제특구여서 우혜정책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부두가 있고 홍콩과 이웃해있으니 운수에 편리하기때문이였을것이다. 수많은 외국기업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공장을 앉히고 회사를 설립하니 당연히 일손들이 수요되였으며 일손들이 수요되니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젊은이들이 꿈을 안고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게 되였다. 어촌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던 보잘것없던 작은 도시가 개혁개방40여년에 일약 부성급도시로 부상하고 고층건물이 수풀마냥 일떠서면서 뒤따라 공항, 지하철이 완공되자 말그대로 명실상부한 젊은 도시로 부상하였다. 심천은 높이가 200메터가 넘는 건물이 246채, 300메터가 넘는 건물이 20채, 400메터가 넘는 건물이 2채로서 세계적으로 앞자리를 차지한 고층건물이 촘촘이 들어선 도시라고 한다. 문제는 특구로 되니 우혜정책이 뒤따랐을것이며 그러니 회사나  공장들이 일떠서고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였는데 사람들이 몰려드니 그들의 의식주행을 해결하려면 그에 상응한 부서가 있어야 되고 또 그에 따른 소비가 있게 된다. 마치도 련쇄반응과 같다면 어떨가? 심천의 상주인구(常驻人口)는 1779,81만인데 호적인구는 606,14만이고 상주 비호적인구(常驻非户籍人口)는 1172,68만이다. 심천의 구마다 사립학교가 몇십개소씩있고 가도마다 병원의 규모를 늘려도 병원에 들어가면 의연히 사람들과 어깨를 스쳐야 한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붐비고있다면 적절할것 같다. 인구가 급증하면 그에 따라 모든것을 늘려야 하니 발전은 불가피적이고 발전하면 할수록 더 급부상하게 된다. 심천에서 살면서 심천의 발전과 그 속도를 목격하노라니 마냥 감탄만 터져나올뿐이다. 우리 말 속담에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란 말이 있는데 잘살아야 남한테도 인심을 낼수 있지 못살면은 마음뿐인 일로 될것이다. 지난 여름 탠훙상가(天虹商场)에 있는 헬스장에서 헬스를 끝내고 집으로 가려고 나오니 밖에서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한참을 기다렸찌만 비가 조금 누그러들었을뿐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상가에서는 일차성 비옷을 무료로 제공해주는것이였다. 일차성이니 가격이야 몇푼않하겠지만 그 비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에서 감동의 물결이 일렁이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역시 지난 여름에 있은 일이다. 그날 심천시내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 지하철역입구로 나오니 갑자기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조금후 보안복차림의 젊은이들이 일차성 비옷을 한아름씩 갖고와서 역시 무료로 나누어주는것이였다. 지하철역의 안전과 출행인들의 불편해소를 위한 유관부문에 감사한 마음이였고 역시 감동이 일었다. 심천은 로인들에 대한 복지대우도 아주 좋다. 60세 이상의 로인들은 호적과 상관없이 심천에 오면 지하철과 공공버스를 무료로 리용할수 있으며 공원도 무료입장이다. 그리고 일년에 한번씩 무료로 신체검사를 받을수 있으며 무료로 독감예방백신을 접종받을수 있다. 심천은 특구인만큼 발전속도는 자고일어나면 변모된 모습이고 또 그런 발전에 걸맞는 대우도 따라세워 살만한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2025/11/24
75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건만 댓글:  조회:126  추천:0  2026-03-05
내가 가입한 중년협회에서 금년에도 “3,8부녀절”축제가 있다기에 부푸는 가슴에 기대를 안고 떠났다. 활동장소까지는 지하철을 리용해야 했는데 려로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하여 나도 젊은이들처럼 핸드폰을 꺼내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지난해 “3,8부녀절”축제때 찍은 사진들이 생각나 사진첩을 뒤적여보기 시작하였다. 지난해 “3,8부녀절”사진은 세가지로 분류되여 있었는데 하나는 중년협회 축제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이모의 위챗모멘트에서 복제해온 사진들이였고 또 다른 하나는 고향마을위챗그룹에서 복제해온 사진들이였다. 사진속의 사람들이 다르고 축제현장이 다르지만 모두다 “3,8부녀절”에 찍었다는건 같아서 복제해온것이다. 우리 중년협회는 행사때마다 악대가 있어 지난해에도 관악대가 합주곡을 연주하고 무용대가 그간 준비한 무용을 선보이고 노래교실에서 소합창을 내놓아 말그대로 축제의 분위기가 짙었으며 장내는 시종 박수갈채가 끊기지 않았다. 이모의 위챗모멘트에서 복제해온 사진속에는 한국에서 이모또래들이 “3,8부녀절”이라고 빙둘러 앉아 식사하는 모습과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들이 포착되여 있었다. 전에는 한마을에서 살았던 분들이였는데 지금은 찬찬히 뜯어보아야 누구인지를 알아볼수 있었다. 이젠 모두가 고래희의 막바지를 톺는 나이인데다가 오래동안 보지 못하고 또 한국에서 힘든 일로 고생해서가  아닐가 생각해보는 순간이였다, 고향마을그룹에서 복제해온 사진속에는 마을에서 살고있는 이들 모두가 “3,8부녀절”이라고 한자리에 모여앉았지만 30여명밖에 않되는데다가 여자는 몇않되고 거의가 남자들인 이들이 집체사진을 찍고 모두가 얼굴이 불그레해서 먹고 마시는 장면도 포착되여 있었다. 그렇게 사진첩을 뒤적여 보노라니 어쩐지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나면서 좀처럼 진정할수가 없었으며 자기도 모르게 40여년전의 “3,8부녀절”이 떠오르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전에 촌에서는 “3,8부녀절”이면 마을의 부녀들이 한자리에 모여 “3,8부녀절”의 유래에 대한 학습을 간단히 하고 모범부녀들에게 상품을 발급하였는데 상품이라야 세수소래나 세수수건, 비누 등 일상 생활용품들이였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면 각 소대별로 소대에서는 또 부녀들을 또래별로나누어 창고에 비축해둔 입쌀싸래기를 나누어주면 그걸로 가루를 내여 떡을 빚어 먹는것으로 부녀절을 보내였다. 그렇게 의미있는 부녀절을 보내다가 어느 해인가부터 남자들도 동참하게 되였는데 남자들이 동참하면서 “3,8부녀절”은 일년중 큰 명절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촌에서는 일반적으로 양력설, 음력설, 정월보름, “3,8부녀절”까지 쇠고나서 모상판 벼뿌리를 치고 두엄을 실어나르기 시작하는걸로 일년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개인농사를 시작하면서부터 “3,8부녀절”은 마을의 남녀로소 모두가 참여하는 모두의 명절로 되였으며 그날 하루만은 온마을이 명절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경제가 펴이면서 더는 집체로 나누어주던 싸래기를 바라지 않고 또래끼리 모여 닭이나 오리, 게사니를 잡던데로부터 개나 양을 잡아 엎어놓고 며칠씩 모여들어 먹고 놀았다. 그때 이모네 패들이 중장년패였는데 마을에서 제일 통크게 노는 패들이였다. 개를 잡아 먹고 마신후에는 장단을 치면서 뛰놀았는데 한손으로 코방울을 쥐고 다른 한손의 식지로 바이올린을 켜듯이 코등에서 왔다갔다하여 코바이올린 아저씨가 된 코바이올린 아저씨의 코바이올린 연주에 리아저씨의 두다리를 건뜻건뜻 들었다 놓는 쏘련딴스(댄스), 정아저씨의 건드러진 “홍도가”와 타령은 보는 이들이 배를 끌어안고 눈물을 찔끔거리도록 하였다. 지어 어떤 해에는 너무 뛰고 굴러서 구들장이 깨지는 일까지 생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몇해동안 “3,8부녀절”이면 마을이 흥성흥성하여 사람사는 마을같았으며 금년 “3,8절”을 쇠고나면 다음해 “3,8”절이 기다려지군 하였다. 헌데 지금은 어떠한가? 전에120여 가구의 마을에 30명도 채않되게 그것도 녀자는 몇안되게 남을 정도로 한국으로 연해도시로 이동하였으니 실로 민족의 대이동이다. 이런 민족의 대이동은 마을이 거의 비여가고있는 현실을 초래할수 밖에 없다. 모두가 살던 고향마을을 떠나 타국으로, 타향으로 갔지만 생활문화는 그대로 간직하고 가서 옛날을 떠올리며 유쾌한 하루를 보내고있을것이다. 내가  가입한 중년협회회원수는 60명으로서 옛날 큰마을의 중년수와 맞먹는다.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위해서 남단까지 왔지만 “3,8부녀절”을 잊지 않고 모여서 즐겁고 뜻깊게 보내는 모습들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3,8부녀절”이건만 고향을 떠나온 이들은 좀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금년 “3,8부녀절”에는 나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내여 향수에 푹 빠져보려 한다.     2026/1/8
74    마스크를 낀 처녀애 댓글:  조회:201  추천:0  2025-12-19
마스크는 세균이나 먼지를 막기위하여 또는 세균의 전파를 막기위하여 입과 코를 싸는 물건을 말하는데 병원에 가보면 의무일군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마스크를 끼고 일보는 정경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우리 북방에서는 겨울이면 병원이 아닌 거리에서도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수 있다. 겨울이면 감기가 류행되기에 감기를 예방할겸 추위도 막으려는것이다. 북방의 엄동설한 한겨울에 칼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때릴 때면 칼로 얼굴을 오려놓는것처럼 얼굴이 얼얼해나면서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이럴 때 마스크를 끼면 얼굴에 맞혀오는 칼바람을 막아줄수 있을뿐만아니라 옷한벌을 껴입은것처럼 온몸이 훈훈해나기도 한다. 나도 전에 겨울아침단련을 나갈 때면 마스크를 끼고 나가군 하였는데 매연이 코구멍으로 들어오는것을 막을수 있을뿐만아니라 추위도 막을수 있어 실로 말그대로 일거량득, 일석이조였다. 우리 나라의 남단에 위치한 심천은 위도가 비교적 낮은 아열대해양성기후에 속하며 계절풍의 영향으로 고온에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다. 일년4계절이 뚜렷하지 않으며 특히 여름이면 령상 30도를 넘어 북방에서 겨울을 넘기기 어렵듯 심천에서는 여름을 넘기기가 참으로 힘들다. 하다보니 북방에서처럼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수가 없으며 겨울이면 춥지도 않지만 간혹 눈에 띄우는데 정말 말그대로 쌀에 뉘라고 하면 적절할것 같다. 지난 코로나시기 이 무더운 곳에서 매일 마스크를 껴야 했으니 그 고통이야 말하지 않아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코로나가 물러가고 전의 일상으로 돌아오자 제일 시원하고 편한것이 더는 마스크를 끼지 않아도 되는것이라면 좋을것 같다. 간혹 일부 사람들이 끼고 다닌는데 눈을 씻고봐야 겨우 눈에 띄일뿐이다. 삼복무더위로 숨쉬기조차 가쁠 정도로 무더운 그날은 마침 휴식일이라 심천시내에 볼 일이 있어 지하철을 리용하게 되였다. 지하철은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다음 차가 오기를 기다리느라 사람들은 차문 하나에 두줄씩 죽 늘어서 조용히 자기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다음 기차가 들어서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바로 이때 삼복의 무더위에 마스크를 끼고 시체멋이 줄줄 흐르는 차림을 한 새파란 처녀애가 줄을 서서 조용히 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을 마구 비집고 차문과 가까운 앞쪽에 끼여 들어서는것이였다. 갑작스레 끼여든 불청객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였지만 처녀애는 그것을 의식못했는지 너무도 태연자약하였다. 그처럼 무더운 삼복철에 많은 사람들속에서 유표하게 마스크를 끼고있다는것에 나도 처녀애한테 눈길을 주게 되는건 어쩔수 없었다. 코로나도 물러간지 오랜데 이 무더운 날씨에 왜 마스크를 끼였을가? 혹 여름감기에라도 걸렸을가? 나는 쓸데없는 의문을 가지고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기차가 역에 들어서자 앞쪽으로 비집고 서서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있던 처녀애는 차문이 열리자 차안의 려객이야 내리든 말든 궁둥이에 불이 달린 호랑이마냥 후닥닥 사람들을 밀치면서 차에 올랐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광경에 모두가 놀란 표정들이였으며 나는 저으기 실망스럽기까지 하였다. 차에 올라보니 가운데 서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람들을 밀치면서 후닥닥 차에 뛰여오른 처녀애는 언녕 자리를 차지하고 두다리를 가위자세로 꼬고앉아 핸드폰에 열중하고있었다. 이때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허리가 구부정한 얼핏 보기에도 고래희의 막바지를 톺을 로인이 지팡이를 짚고있었지만 사람들 틈에 끼이다보니 밀려서 바로 그 처녀애의 앞에까지 오게 되였는데 겨우 몸을 가누고있었다. 차가 움직이자 스피커에서는 안내원의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인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것은 중화민족의 미덕입니다. 늙은이와 아이들, 병있고 몸이 불편한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 얼핏 볼라니 이쪽저쪽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전경이 한폭의 그림마냥 눈에 들어와 공연히 마음이 설레여 왔다. 헌데 마스크를 끼고 핸드폰에 열중하고있는 처녀애는 귀나 눈이 잘못되여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안내원의 말이나 자리를 양보해주는 정경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지 아니면 다른 행성에서 와 들을수도 볼수도 없는지 요지부동이였다. 자기 앞에 고래희의 막바지에 이른 할아버지가 몸도 가누기 힘들게 서있는데도 두다리를 가위자세로 한 그대로 변함없이 굳어져 있었다. 그때 좀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안경을 건 젊은 남자애가 할아버지한테로 다가와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앉히는것이였다. 잠간사이에 벌어진 일이였지만 가슴에는 잔잔한 감동이 여울져 왔으며 안경을 건 남자애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나 혼자만의 생각을 굴려보기에 이르렀다. 무더운 삼복철에 처녀애로서는 자기만의 리유가 있어 마스크를 끼였겠지만 참으로 잘하고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를 끼면 병균의 침입을 막을수도 있지만 병균의 전파도 막을수 있는데 처녀애의 마스크는 병균의 침입보다는 병균의 전파를 막는데 더 효과적이였으면 하는 바람이였으며 제발 전파되지 말기를 바랐다. 2025/3/29                                                    
73    유쾌하게 가리라 댓글:  조회:207  추천:0  2025-11-06
심천은 늙은이들에 대한 복리대우가 좋아 60세 이상부터는 지하철과 공공버스 등 시내교통수단을 무료로 리용할수 있으며 공원들을 무료로 구경할수 있다. 그외에도 신체검사를 무료로 하고 독감백신을 무료로 접종할수 있다. 60세 이상 늙은이들은 신분증을 소지하고 평안은행에 가서 의년카드(颐年卡)를 신청하면 무료로 발급받을수 있을뿐만아니라 의년카드 한장이면 많은 무료혜택을 받을수 있다고 늘 공익광고를 하기에 나도 어정쩡한 김에 평안은행을 찾아 의년카드를 발급받게 되였다. 헌데 그 카드가 오히려 나한테 정신상 큰부담으로 될줄이야. 공공버스를 탈 때면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를 뚫어져라 주시해보는것 같았고 지하철을 탈 때면 사업일군이나 옆의 사람들이 의문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것 같아 마음이 굉장히 불안해나면서 편치 못하여 카드를 발급받은것이 못내 후회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직 이런 대우를 받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날은 심천시내에 볼 일이 있어 일찌감치 집을 나서게 되였다. 공공버스에 오르고보니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았지만 빈좌석이 없기에 나는 앉아가려는 사치한 생각을 아예 단념하고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손잡이를   거머쥐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나의 옷깃을 잡아당기는것 같아 눈을 뜨고 바라보니 바로 나의 옆 걸상에 앉아있던 도수안경을 건 젊은 남자애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나의 옷섶을 당겨 나를 그 자라에 앉으라는것이였다. 생각지 않게 벌어진 일이였지만 체면은 있어 손사래를 저으며 극구 사양했지만 남자애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선지라 기어이 나의 등을 밀어서 자리에 앉히는것이였다. 자리를 양보받아 편히 앉아가는 나는 고마움에 자주 남자애를 훔쳐보게 되였는데 인물체격이 흠잡을데가 없었다. 심천시내로 가려면 공공버스와 지하철을 리용하여야 하기에 나는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서 지하철을 타게 되였다. 매양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그날도 례외없이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나는 빼곡이 선 사람들틈에 끼여서 간신히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손잡이를 거머쥐고는 두다리에 힘을 주면서 몸의 평형을 잡고는 버릇처럼 두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렇게 차가 움직이려는데 누군가 나의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것 같아 감았던 눈을 뜨고 내려다보니 처녀애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손짓으로 나를 앉으라는것이였다. 역시 미처 생각지못했던 일이였지만 체면은 남아있어 사양하다가 처녀애가 진심으로 기어이 앉으라고 손짓하기에 결국에는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기고는 비위좋게 털썩 앉고 말았다. 처녀애한테서 자리를 양보받아 편하게 앉아갈수 있어 처녀애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헌데 그것도 잠간, 문득 내가 자리를 양보받아야 할 나이가 됐는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으며 지어 서운한 생각까지 들었다. 공공버스안의 형광판에도 지하철안의 스피커에서도 “로인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것은 중화민족의 미덕입니다. 자리가 수요되는 분들에게 주동적으롤 자리를 양보합시다”라는 문자가 나오고 방송이 울리는데 내가 어린이는 절대로 아닐터인즉 그럼 로인대접을 받고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갈마들수록 마음은 점점 더 서운해났다. 심천시내에서 볼 일을 보고 오후 네시쯤 귀로에 오를때에도 지하철에서나 공공버스에서 역시 젊은이들이 나에게 자리를 양보했으나 나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그들을 눌러 앉히고는 그대로 서서 왔다. 젊은이들은 양보해주는 자리를 극력 사양하면서 앉지않는 나를 어딘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기까지 하였다. 나는 허공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부여잡고는 허리를 펴고 가슴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는 차창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차창에 비쳐지는 내 모습이 피끓는 열혈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폭삭 늙은 모습은 아닌것 같았다. 그러노라니 불시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쿡 나왔다. 내 나이 이순을 넘어서 고래희를 향해가고있으니 과시 젊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때로는 내 나이가 얼마인지를 망각하고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자신의 생각이 엉뚱하다는걸 느낄때면 내 나이를 새삼스럽게 알게 되기도 한다. 숱많던  검은 머리가 사라져버리고 흰 머리로 그것도 된서리를 맞은 풀밭처럼 훵 해지고있다. 반반하던 얼굴과 목에는 주름이 패우기 시작하고 살결도 윤기와 탄력이 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흰 수염이 한두대 보이던것이 이제는 제법 검은 수염을 밀어내고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기억력도 급하강이고 눈도 아물아물해난다. 아무리 좋은 글도 읽는 순간뿐 돌아앉으면 하얗게 백지장이 되고 돋보기를 걸어야 작은 글들을 볼수 있다. 한편의 글을 쓰려고 해도 며칠이고 머리를 쥐여짜며 거듭거듭 구상해야 한다. 로쇠를 스스로 감지못한건 아니지만 항시 자신은 늙지 않을것 같은 생각으로 아니, 늙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현실은 속일수 없다. 젊은이들의 시각에는 내가 늙은이로 보였으며 또 자리를 양보해줘야 할 사람으로 보였을것이다. 내가 아무리 젊었다고 우기고 늙지 않았다고 발버둥질쳐도 되돌릴수 없으며 괴로운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생로병사는 자연의 섭리로서 모든 생명체는 여기에 순응해야 할것이며 태연히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하긴 발버둥질치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으니깐. 문제는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사는가이다. 늙어가는 길은 누구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생소한 길이다. 한번 가보고 다시와서 갈수 있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생소한 길을 자신만이 설계해서 즐겁고 유쾌하게 그리고 씩씩하게 가야할것이다. 그런다면 후회가 적을것이며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픈 생각도 적을것이다. 나는 오늘도 나만의 두번째 인생설계도를 그리고 하나하나 실천해가면서 나만의 즐겁고 유쾌한 로년을 보내고있다. 2025/3/27        
72    생강밭에서 노니는 꿈을 꾸었다. 댓글:  조회:159  추천:0  2025-10-14
생강은 우리의 식생활에서 빼놓을수 없는 식재료로 쓰이고있는바 특히 김치류를 특색음식으로 선호하는 우리 민족으로서는 생강이 없이는 맛을 제대로 낼수가 없다. 전에 사스가 류행될 때 배추김치의 유산균이 사스를 예방할수 있는것으로 알려진것도 그 주요원인이 배추김치의 양념으로 쓰인 마늘과 생강의 작용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생강이 톡쏘면서 쨍하고도 매운 맛으로 음식뿐만아니라 약용으로도 쓰인다는것은 삼척동자도 알고있는 일인바 감기, 고혈압, 고혈지, 당뇨, 심뇌혈관, 풍습, 위장 등 병에 널리 쓰이고있으며 중의약처방전에 많이 오르고있다. 동북에서 생활할 때는 생강이 감자처럼 땅밑에 열린다는것 쯤으로만 알았지 직접 생강의 자람새를 눈으로 보지 못했기에 구체적으로는 몰랐었다. 우리 나라의 남단에 속하는 심천에 와서 생활하면서 생강을 직접 접하고 자람새를 보고 또 생강을 파보게 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되였다. 다년생초본식물인 생강의 원산지는 동남아의 아열대지구로서 지금도 아열대지구에서 보편적으로 재배하고있는바 우리 나라는 중부, 동남부, 서남부에서 재배하고있다. 남방의 각 성구에서는 보편적으로 재배하는데 산동, 호남, 귀주, 광서, 사천, 하남, 호북, 섬서 등지에서 재배하고있다. 산동성 청주시에서 생강을 가장 많이 출시하고있으며 래무(莱芜)시는 생강재배력사가 2000여년에 달하며 옛적부터 조정의 공품으로 지정되였었다. 제3기 중국농업박람회에서는 이름난 산품(品牌产品)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생강은 습온과 습윤기후를 좋아하며 추위와 가물에 견디지 못하는바 가장 적합한 온도는 25도 _ 28도로서 20도보다 낮으면 발아가 잘되지 않는다. 생강의 키는 갈대보다는 작지만 그 잎은 얼핏보면 갈대잎과 흡사하다. 지난해말 회사의 동료친구가 회사울안 귀퉁이에 심은 생강을 캐는 일을 도와준적이 있다. 나는 생강도 감자처럼 땅밑에 열리니 감자와 같으려니 생각하고 생강대를 모여 움켜쥐고 당겨보았더니 그게 아니였다. 나의 생각이 완전히 빗나갔던것이다. 감자는 땅속으로 줄기가 뻗으면서 그 줄기에 따라 알알이 열리지만 생강은 원대에 맺혀 있었는데 한쪽옆에 또 다른 한쪽이 우둘투둘하게 뭉쳐서 열려있었다. 감자가 줄기에 따라 한알한알씩 열리는것에 비해 생강은 밑으로 옆으로 하나에 또 다른 하나가 맺혀 열렸는바 한마디로 감자는 제멋대로 흩어져 열렸다면 생강은 하나같이 뭉쳐서 열려 있었다. 처음 접하는 일이여서 신기한것도 있었지만 그 하나같이 뭉쳐있다는것이 더 마음을 사로잡아와 한포기씩 캘 때마다 더 유심히 살펴보게 되였으며 더 유심히 살펴볼수록 저도 모르게 가슴에 무언가 맞혀오는 느낌이였다. 그날 발아가 될수 있는 생강몇쪽을 얻어 나도 회사귀퉁이에 몇포기 심어보게 되였으며 그후로 틈이 나는대로 그곳을 찾아보군 하였다. 허나 생강을 심어 시간이 꽤 지났건만 돋아나지 않기에 동료친구를 찾아 물었더니 온도와 습도가 맞지 않아 발아되지 않고있으니 내심하게 기다리라는것이였다. 나는 생강이 발아도 못하고 땅속에서 썩어버리지나 않을가 공연히 걱정되였지만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방도도 없는지라 일단 동료친구의 말대로 내심하게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며칠전 오랜만에 생강심은 곳을 찾아보았더니 푸른 싹이 뾰족뾰족 머리를 내밀고있을줄이야. 너무도 신기해서 보고 다시 또 보아도 분명 내가 심은 생강이 맞았다. 하루이틀도 아닌 한두달을 땅속에 묻혀있으면서도 썩지 않고있다가 습도와 온도가 알맞으니 푸른 싹을 떠이고 돋아났다는것이 너무도 신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다시한번 설레여오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기에 이르렀다. 언젠가 볼일이 있어 심천의 러후구 동문으로 다녀온적이 있다. 심천의 동문은 심천에서도 비교적 번화한 보행거리로서 상가들도 즐비하지만 먹자골목이기도 하여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날 우연히 회오리 감자를 만들어 팔고있는 우리 민족을 만나게 되였는데 우리 민족이여서 반가웠지만 그보다는 한국 서울의 거리에서 간식으로 흥행한지 오래지 않은 회오리 감자를 심천의 번화한 먹자골목에서 우리 민족이 버젓이 만들어 팔고있다는것이 더 반가웠다. 지구가 촌으로 변해가고있는 오늘날 지구촌의 어디나 우리 민족이 자리를 잡고 삶의 터전을 가꿔가고있으며 어디에 우리 민족이 자리잡으면 곧 여러가지 조직기구를 설립하고 하나같이 뭉친다. 여기 광동성에도 조선족련합회가 있고 그 산하에 로인협회, 여성협회를 비롯한 여러가지 협회가 설립되여 있다. 이런 여러가지 협회는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주고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자원적으로 해나가고있어 사회적으로 호평을 받고있다. 2025년을 맞으면서 일본에서 세계조선족 설맞이 문예공연과 글짓기 경연이 있어 우리 조선족들의 마음을 고도로 달구고 흥분시켰었다. 세계조선족행사를 그것도 일본에서 보란듯이 진행했다는건 장거가 아닐수 없기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이 사단법인 조직이 일떠서고 또 그 조직에 하나같이 뭉치고있으며 기회만 생기면 그 기회를 잡고 맨먼저 달리니 참으로 자랑할만한 일이다. 작지만 톡 쏘는 매운 맛, 습도와 온도가 맞다면 푸른 싹을 돋히고 흩어지지 않으면서 하나같이 뭉쳐서 열려있는것이 생강의 특점이라면 비록 수자적으로는 적지만 여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고있으며 어디든 살기 좋으면 뿌리를 내리고 하나가 아닌 뭉쳐서 함께 하는것이 우리 백의겨레가 아닌가. 계속하여 하나같이 똘똘 뭉쳐 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보다 더 유익한 일들을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몇포기 않되는 생강이지만 잡초하나라도 눈에 띄이면 그 자리로 뽑아버리고 가물면 물을 뿌려주면서 정성껏 열심히 가꾸고있다. 때로는 나이와 걸맞지 않게 생강밭에서 노니는 꿈을 꾸기도 한다.    2025/3/3
71    티끌모아 태산 댓글:  조회:198  추천:0  2025-08-25
우리 말 속담에 “티끌모아 태산”이란 말이 있는데 작은것도 모이고 모이면 크게 이루어진다는 말로 쉽게 리해하면 될것 같다. 70-80년대 농촌에 있을 때 한족들을 보면 아무리 누더기 옷을 입고 살아도 궤짝을 열어젖히면 10원짜리 지페가 한뭉테기씩 나왔으며 조선족들은 그런 한족집들을 찾아 고리대로 리자돈을 융통하면서 사는걸 직접 보아왔다. 그때 한족들은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1전짜리가 열개 모아지면 10전짜리로 바꾸고 10전짜리가 열장되면 1원짜리로 바꾸며 1원짜리가 열장되면 10원짜리로 바꾸어 궤짝안에 깊숙히 넣어둔다는 말이 있었다.(당시는 인민페 액면이 가장 큰것이 10원짜리였음) 실로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의 함의를 되새겨보게 하였다. 어릴 때 보고들은 이야기였지만 잊혀지지 않았는데 그 속담의 함의를 심천에서 다시 새겨보게 될줄이야. 그날 퇴근길에 내가 십자로에 도착하니 푸른 등이 붉은 등으로 바뀌여 걸음을 멈추고 다시 푸른 등으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전동오토바이를 탄 녀인이 나의 앞에 와서 멈춰서면서 역시 불이 바뀌기를 기다리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녀인이라 얼결에 쳐다보게 되였는데 40중반쯤 되는 녀성으로서 시체옷차림에 예쁘장한 인물체격이였으며 고급스런 가방을 어깨에 멘걸봐서는 출퇴근하는 직업녀성으로서 퇴근길같았다. 얼결에도 시체멋이 줄줄 흐르는 이쁜 녀성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번화한 사거리라 붉은 등이 푸른 등으로 바뀌려면 시간이  좀 걸려야 했다.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치면서 어디선가에서 빈 광천수병이 마치 부르기라도 하듯이 또그르르 굴러오더니 그 녀자가 차를 부여잡고 서있는 곳으로 갔다. 어느 누구인가 물을 마시고 쓰레기통이 아닌 아무곳에나 함부로  빈병을 버리는 일들은 비일비재로 너무도 쉽게 띄우는 일이여서 난 별다른 생각이 없이 멍하니 서있었다. 빈병이 그녀가 서있는 발치까지 가자 그녀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발을 움직여 빈병을 꽉밟아 납작하게 한후 한손으로 전동자전거 핸들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허리굽혀 밟혀 납작하게 된 빈병을 주어 어깨에 메고있는 가방에 찔러넣는것이였다. 갑작스런 녀인의 행동에 나는 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만 바라보기에 이르렀다. 녀인이 나의 시야에서 멀리 사라지자 난 신호등이 바뀌였음을 알고 부랴부랴 건널목을 건넜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방금전 십자로에서 본 그 녀인을 두고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왜 빈병을 밟아 그 고급스런 가방에 아무런 주저나 유예도 없이 담았을가. 쓰레기가 제멋대로 구을러 다니는것이 싫어서? 아니면 빈병을 모아 팔려고? 결국 나는 집에 이르기전에 그녀가 제멋대로 구을러 다니는 쓰레기가 싫어서 줏어 모았다가 팔려고 그랬을거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시체멋이 줄줄 흐르는 예쁘장한 녀인이 그렇게 했다는데는 감복이 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녀의 정신세계는 그렇듯 감염력이 강했던것이다. 심천시내를 제외한 교외의 진이나 현성의 택시는 모르긴 해도 아마 연길시내보다 적을것이다. 대신 전동오토바이가 물흐르듯이 길을 메우고 다니는데 모두 뒤에 사람을 둘 혹은 셋씩 앉혀가지고 다닌다. 전동오토바이가 택시를 대체한 셈인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전동오토바이로 손님을 실어 나르는 모두가 타지방사람들이다. 그들속에는 하루종일 전문으로 종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간근무를 하고 낮에만 하는 사람이 있고 낮에 출근하고 밤에만 하는 사람이 있다. 하기에 회사에 출근하는 남자들 거의가 전동오토바이를 장만하고있는데 회사일이 끝나면 곧 전동오토바이로 손님실으러 나간다. 한번 나가서 두세시간 고생하면 40- 50원 벌어오는데 그 돈으로 생활소비를 한다고 한다.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대부분 남자들이 인터넷으로 전동리발도구를 사서는 자체로 머리를 깎거나 서로 깎아주기를 한다. 리발비가 아까워 한푼이라도 절약하려는것이다. 깎아놓은 머리모양은 정말로 보기 흉하지만 그들의 말대로라면 며칠만 지나면 머리가 자라나 알리지 않는다는것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회사의 젊은 축들은 퇴근하고 롱구를 치는것이 상례인데 편을 갈라서 칠 때가 많다. 롱구는 작은 공간에서 늘 뛰여야 하는 격렬한 운동인데다 심천의 날씨이다보니 땀을 흠뻑 흘리게 되는데 땀을 흠뻑 흘리면 당연히 물을 많이 마시게 된다. 물은 병에 담긴 광천수를 사지 않고 회사에 날라오는 큰통에 담긴 광천수를 메여다 컵에 따라 마시군 한다. 역시 돈을 한푼도 팔지 않는 절약이다. 롱구는 편을 갈라쳤으니 당연히 승부가 나기 마련인데 승부는 승부일뿐 내기는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생각이나 우리들의 관습으로 미루어본다면 한창 젊은 축들이니 이긴 편과 진 편이 합의를 봐서 한잔할것 같건만 그들은 전혀 입밖에 내지도 않으며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것 같았다. 고향떠나 타향에서 리산의 아픔을 겪으면서 돈을 버는 그들은 오직     돈을 한푼이라도 더 벌어모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하나의 생각뿐이다. 하기에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휴식시간을 할애하여 소비돈을 벌기에 월급은 한푼도 다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말을 하는 그들을 바라보느라면 정말 감복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어쩐지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알알해나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여기저기로 흩어져 리산의 아픔을 겪고있는 우리 민족도 돈은 여기 있는 한족들보다 더 많이 벌고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총명하고 부지런한 우리 민족이니 말이다. 허나 버는것만큼 소비도 많음을 시인해야 할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처럼 돈을 벌면서 한족들처럼 아껴쓰고 모인다면 갑부들이 줄줄이 나오지 않을가. 혹자는 인생이 얼마라고 벌기만 하고 쓰지 않겠냐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나이들고 병들고 늙어 힘없을때까지 벌기만 하기보다는 힘있을 때, 건강할 때 벌어서 모아뒀다가 나이들면 편하게 사는것도 좋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티끌모아 태산”, “소처럼 일하고 쥐처럼 먹는다”라는 말의 참뜻을 다시 새겨보면서 우리 모두가 잘살아보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2025/3/18     
70    아련한 추억 댓글:  조회:231  추천:0  2025-07-28
누구나 이 세상에 태여나면 부모님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게 되는데 보통 그 이름에는 부모들이 불면 날아갈가, 쥐면 부서질가 금쪽같은 자기 자식에 대한 희망이 담겨지게 된다. 그렇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살면서 혹자는 타인들로부터 이름외로 별명이 붙여지는 수도 있는데 그 별명들은 대체로 그 사람의 성격특징이나 외모특징, 언행에 의하여 지어지는바 자칫하면 꼬리표처럼 한생을 붙어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별명으로 이름을 대신하여 불러도 화를 내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옛적에 사람들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외에 자체로 호와 자를 더 지었는바 자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부르는 호칭으로  하고 호는 무람없는 사이에 부르는 호칭으로 하였다. 수호전에 나오는 급시우나 표자두, 흑선풍같은 별호면 듣기가 거북스럽지 않겠지만 떳떳치 못한 별명은 비록 그 어떤 악의도 없이 지어졌지만 이름보다는 귀에 거슬리는데 이미 붙여진터라 한생을 따라다녀도 어쩔수가 없었다. 이름보다는 별명이 사람들에게는 더 익숙하였으니깐.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은 마을가운데의 길을 경계선으로 동쪽에는 한족들이, 서쪽에는 120여 가구의 조선족들이 옹기종기 화목하게 모여사는 마을이다. 지난 집체화시기 많은 사람들에게 별명이 붙여지면서 이름보다는 별명이 더 익숙하게 불려졌었는데 많은 별명중에서 오늘까지도 기억에 또렷한 몇사람만 적어보려 한다. 김로인은 젊어서부터 소사양원으로 일했는데 소를 알뜰히 거둘뿐만아니라 소에 대하여 아는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소의 이발로 소의 나이를 보아낸다든지, 소의 가슴이나 엉덩이로부터 살진 상태를 알아낸다든지, 소의 걸음걸이로 소가 밭일을 할수 있는지 없는지 등을 환히 꿰뚫고있었다. 그는 소가 혀바닥에 쓸이 돋아나 여물을 제대로 먹지 못하거나 새끼를 당금 낳을 암소들의 뿔에다가 “병중휴식”이라는 패쪽을 만들어 걸어놓군 하였는데 누구든 그런 소들을 끌고가서 일한다면 크게 혼내주군 하였을뿐만아니라 아예 다치게도 못하였다. 암소가 새끼를 낳는 날이면 한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지켜서 있었으며 생산대장과 사정하여 싸래기라도 얻어내여 죽을 쒀먹였다. “사람을 믿고 사는 짐승이니 잘 거둬주면 그만큼 보상해줄거네” 그가 늘 외우는 말이였다. 김로인이 그렇듯 정성스럽게 소를 거두다보니 생산대의 소가 날따라 늘어났다. 소가                 부릴수 있게 자라면 다루기 쉽게 코뚜레를 꿰야 하는데 생산대남자들중 유독 김로인만이 준확하고도 신속하게 코뚜레를 꿸수 있어 소코뚜레꿰는 일은 김로인이 전담하다보니 어느 소나 김로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소가 없었다. 사람들은 어느날부터인가 그를 “코뚜레”라고 부르게 되여 차츰 코뚜레령감이라면 동네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류씨는 타곳에서 우리 마을로 이사왔는데 사람들과 차츰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은 류씨가 먹물이 든 사람임을 알게 되였다. 비가 와서 생산대 일을 못하는 날이나 저녁에 혹 일이 있어 류씨네 집을 지나치면서 보면 류씨가 늘 책을 펼쳐놓고 독서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비록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였지만 우리 글로 된 신문잡지를 모두 청구해보았으며 평소 집식구들 모두가 책이나 신문을 읽는 전경을 볼수가 있었다. 거기다 류씨는 아침마다 라지오로 방송을 듣기에 국내외시사에 대하여 밝았다. 생산대일을 할 때 휴식시간이면 사람들은 늘 그가 앉아 쉬는데로 모여와서는 그에게서  옛말이나 뉴스를 흥미진진하게 얻어듣군 하였기에 휴식시간이 너무도 짧게만 느껴졌다. 그런 박식한 류씨를 두고 누군가가 “류박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어 사람들은 그의 이름보다는 류박사라 부르기를 더 편해했다. 70년대말 집체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집체에서 소형공장을 운영하는걸 제창하게 되여 우리 생산대에서도 고무가공공장을 꾸리게 되였는데 기술자로 최씨가 타곳에서 이사오게 되였다. 고무가공공장이란 고무를 가공하여 맥주병뚜껑안의 고무받치개를 만드는것이였다. 일을 시작한날부터 사람들은 기술자로 일하는 최씨를 “고무땔”혹은 “죠피땔(胶皮垫)“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최씨 또한 푸접좋게 웃음띤 얼굴로 스스럼없이 받아들였기에 모두가 편해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최씨를 “죠피땔”로만 알고 기억하고있지 이름은 아예 모르고있다. 마을의 앞쪽에는 조씨네가 살았는데 그들은 한족생산대에 귀속되였으나 같은 민족이다보니 조선족마을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비록 조선족마을에서 생활하였지만 마을사람들과 크게 래왕하지는 않았다. 후에 들을라니 살길을 찾아 조선에서 중국으로 올 때 조씨는 박치기로 일본경찰 셋을 쓰러뜨렸는데 박치기를 굉장히 잘한다는것이였다. 조씨는 살림살이가 얼마나 굳은지 바느질도 자체로 하고 신이나 옷이 해여지면 손바느질로 한뜸한뜸 기워서 입고 신었으며 식구들도 기워서 입히고 신겼다. 창고열쇠는 항상  옆구리에 차고 끼니마다 먹는 쌀은 떠서 내놓았기에 밥이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을 때는 절대로 없었다. 그가 혹 생산대의 림장에 며칠씩 묵으면서 일하러 갈 때면 그사이 집식구들이 먹을 쌀을 정확히 떠서 내놓은후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창고의 쌀마대들을 모두 아구리가 밑으로 가게 꺼꾸로 뒤엎어 놓고야 시름을 놓고 떠나갔다. 자기가 간후 안해의 힘으로는 쌀마대를 다시 뒤엎을수 없으니 쌀이 줄어들 걱정은 없었던것이다. 팬티도 목천으로 해서 입으면 빨리 해진다고 풍천으로 그것도 자기 손으로 손수 만들어 입었다.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갈 때 입고 갔다가 나무를 하느라 땀이 나자 두꺼운 풍천이라 살이 쓰리워 더는 아파서 한걸음도 걸을수 없으니 아예 팬티를 벗어 쪽지게에다 건다음 맨살에 바지를 입고 일하다 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는 사람들로부터 “조좁쌀”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였는데 사람들은 친구들이 모여 놀 때 좀이라도 잘게 놀면 “조좁쌀”이 되려구 그러냐?”, “조좁쌀”이보다도 더하네” 라는 말로 뚱겨주거나 핀잔을 주군 하였다. “조좁쌀”이라는 별명은 마을의 남녀로소에게 익숙한건 물론 린근에까지 퍼져 이웃마을에서도 조씨의 이름보다는 “조좁쌀”이라면 더 잘알았다. 리로인은 첫사람으로 마을개척에 나선 분으로서 마을 앞벌에 첫보습을 박고 삶의 터전을 가꾸어왔기에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안고있었다. 그런 그의 소개로 그와는 8촌간이 되는 사람을 마을에 이사호로 받게 되였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8촌까지 한구들에서 살았다고 했듯이 한 마을에서 살면 오죽좋겠는가. 사람들은 그가 이사온날부터 리로인과의 친분을 생각하고 리로인의 8촌을 “팔추이”라고 부르게 되였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것이 굳어져 이름은 둬두고 마을사람들 남녀로소 모두가 “팔추이”라고 부르다보니 말그대로 동네 8촌이 되였다.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팔추이”라면 코흘리개애들까지도 데꺽 알았으니 동네8촌이라해도 너무 어이없는 일은 아니였다. 70년대초 왕청 하마탕에서 마을의 의사로 이사호를 받았는데 의사인 남편보다 안해가 키가 더 컸으며 마을녀성중에서도 키가 제일 컸기에 마을 사람들 모두를 눈이 휘둥그래지게 하였다. 하여 이사짐을 푼 이튿날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군대말”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였다. “군대말”은 그 별명에 맞게 일을 헌걸차게 잘도 하였는데 웬만한 남자들은 저리 가라할 정도였으니 실로 산이 커야 그림자도 크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다. 성격 또한 시원스럽고 왈패스러워 모두와 잘 어울렸으니 “군대말”이라고 불러도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코뚜레, 류박사, 죠피땔, 조좁쌀, 팔추이, 군대말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 모습, 친인척관계에 의하여 부모님들이 지어준 이름외로 덧붙인 악의없는 별명인데 덧붙여진 그날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이름대신 익숙하게 불리워지다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함께 사라졌으며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아득한 옛말로 되고있다. 고향마을도 이젠 모두가 떠나가고 비여진지가 오래다보니 한족마을과 조선족마을을 갈라놓던 경계선 길도 그와 함께 역할을 잃은지 오래다. 지금은 많은 한족들이 조선족마을의 빈집들을 사서 번듯하게 벽돌기와집을 짓고 살아가고있다.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 모두해야 50명도 않되니 전처럼 별명을 붙일 사람도 붙여줄 서람도 없다. 전같은 풍경을 재현하기는 어렵거나 아예 될수도 없는 일일수 있겠지만 나는 내 마음속에 나름대로 그 풍경을 곱게 고이 그리고싶다. 나만의 소망과 함께. 2025/5/12  
69    한 그루의 바나나나무에도 미치지 못한다. 댓글:  조회:467  추천:0  2025-06-03
어린 시절 손벽을 치면서 놀던 유희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과는 맛있다. 맛있는것은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긴것은 기차…” 그때 북방에서 사는 우리로 놓고말하면 바나나는 말그대로 그림의 떡이였다. 사과도 맛있는데 바나나는 사과보다도 더 맛있다니 그맛에 대해서는 그저 군침을 꼴깍 삼키는것으로 상상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바나나가 그때 우리  북방사람들에게 얼마나 생소하고 희귀한 존재였는가를 알수 있다. 70년대말 북경에서 대학공부를 하던 지인이 방학이 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모님들을 대접시키려고 바나나 한송치를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집과 얼마 멀지 않은 현성에서 뜻밖에 친구들을 만나 묵어 가게 되였다. 바나나가 상할가 걱정하던차 마침 한마을분을 만나 인편에 바나나를 보내게 되였다. 자식보다 먼저 도착한 꾸레미를 헤쳐본 어머니는 어떻게 먹는지를 알수 없던차에 동네친구들이 마실을 오자 바나나를 내놓으면서 권하였으나 모두가 처음보는지라 먹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결국 싱싱하고 단단한걸로 보아 쪄서 먹어야 할것 같다고 의견이 모아지자 가마에 물을 붓고 시루대를 맞춘후 바나나를 얹고 쪘다고 한다.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 교통이 사통발달해지자 바나나는 더는 신비하거나 희귀한 물건이 아니게 되였으며 북방에서도 언제든지 슈퍼에 가서 돈만 내면 싱싱한걸로 사서 먹을수 있다. 이제 더는 바나나를 쪄서 익혀먹는 일같은건 없을것이다. 나 역시 바나나는 남방에서 재배한다는것만 알았지 직접 보지 못했기에 구체적으로는 몰랐었다. 후에 남방에 와서 직접 보면서 알게 되였는데 알면 알수록 점점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길 없었다.   바나나의 원산지는 인도를 비롯한 아세아주 동남부의 열대, 아열대지구이다. 바나나는 2000여년의 재배력사를 가지고있는데 우리 나라도 그 력사가 오랜 나라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주요하게 서남지구들인 광서, 광동, 복건, 대만, 운남, 해남 등지에서 재배하고있다. 바나나는 다년생초본식물로서 따뜻하고 습윤한 환경이 있어야 하는바 그 생장온도는 20도 _ 35도이고 가장 적합한 온도는 24도-32도이며 15,5도 아래여서는 않된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토층이 깊고 비옥하며 배수가 잘되는 미산성토양중에서 생장하기 적합하다고 한다.   처음에 나는 바나나는 씨가 없는데 어떻게 묘목이 생겼을가 하는 의문이 생겼었다. 마치도 닭이 먼저냐 아님 닭알이 먼저냐 하는것처럼 의문스러웠다. 그후에 알게 되였지만 처음에는 야생바나나가 있었는데 그 씨로 식물의 염색체로부터 종자를 개량했다고 한다. 마치도 씨없는 수박이 나오듯이 말이다. 씨없는 수박은 씨를 심어 씨없는 수박이 열리지만 바나나는 씨를 심는것이 아니라 묘목을 옮겨 심는다. 개량한 바나나나무묘목을 전문 공급하는 곳이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묘목을 한번 옮겨 심으면 자체로 번식하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바나나나무는 실은 나무가 아니라 거형초목식물로서 대가 나른하다. 애어린 묘목때는 걸핏 다쳐도 부러져 나갈때가 많으며 설령 큰사발통만큼 굵어졌다 하더라도 무드럭 낫으로라도 찍어넘길수 있으니 어쩌면 동북의 8월초순 옥수수대와 흡사하다면 비교가 될것 같다.   바나나나무는 옮겨심어서 약 9_ 13개월이면 바나나를 수확할수 있는데 제일 윗부분으로부터 기다란 꽃망울이 구부정하니 튀여 나오는데 꽃망울은 많은 꽃잎들로 포개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일 윗쪽 꽃잎부터 일정한 시간을 간격으로 한잎한잎 펼쳐지는데 펼쳐질때면 10여개의 바나나로 이어진 송치가 나타난다. 그렇게 7-8개 혹은 10여개의 송치가 펼쳐져서 큰 바나나송치를 이루는바 약 2-3개월이 지나면 바나나가 통통해지는데 바나나가 통통해지면 수확할수 있다. 일반적으로 많이 열렸을때에는 한그루에서 30~40근 수확할수 있으며 아무리적어도 15근은 수확할수 있다. 노랗게 된 바나나가 익은 바나나라는것쯤은 삼척동자도 아는일이다. 허나 바나나를 절대로 나무에 달린 그대로 노랗게 익힐수가 없다. 그 주요원인은 많은 작은 송치들로 큰 송치를 이룬 바나나가 하루이틀에 몽땅 노랗게 익을수가 없기때문이다 ,한두개씩 노랗게 익어가는데 그렇다고 한두개씩 익는족족 딸수는 없어 그대로 방치하면 날새들의 좋은 먹이감으로 되고만다. 날새들은 하나씩 모조리 먹는것이 아니라 익는족족 부리로 구멍을 내서는 조금씩 먹어치우는데 보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하기에 색은 푸르더라도 너나없이 통통하게만 되였다면 수확할수 있는데 뜯어서 노랗게 익혀도 맛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바 관건은 통통해져야 하는것이다. 통통하지 않은걸 수확하면 쉽게 썩어버리는수가 많게 된다.   다른 과일나무들은 한번 심으면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열매를 맺어 가을에 수확하기를 반복하지만 바나나나무는 그렇지 않다, 우선 계절에 관계없이 일년 사계절 때가 되면 꽃망울이 나와서 열매를 맺는바 북방에서도 언제든지 바나나를 먹을수있는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다음 바나나나무가 일년이 되여 바나나가 열려 수확하고나면 그나무는 자신의 사명을 철저히 완수한것으로 된다. 한번 열렸던 바나나나무에 다시 바나나가 열리지않기때문에 찍어서 버리게 된다. 바나나나무를 낫으로 찍거나 톱으로 켤때면 한공기는 실히될 물이 흘러나오는데 어찌보면 일년넘게 짧은 시간을 세상에서 자기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고 떠나가는 바나나나무의 눈물이라면 어떨가.   바나나를 선사하는것만이 바나나나무의 사명이 아니다 .바나나나무는 바나나를 선사하는것외에도 바나나나무를 번식시켜준다. 땅에 옮겨져 자라기시작하면서부터 뿌리도 튼실하게 발육시키면서 자기의 뿌리옆으로부터 여러개의 애어린 새싹이 돋아나게 한다. 바나나나무가 자기사명을 완수하고 찍혀나가면 옆에서 돋아 자라난 묘목들이 왕성하게 자라는바 뒤따라 또 맛있는 바나나를 선사해주게 된다. 이렇틋 반복이 되기에 한번심어 관리만 잘한다면 바나나나무로 숲을 이룰수 있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엄마뿌리옆에서 새싹으로 돋아나 짧은 일년더되는 시간에 비바람을 견디면서 세상을 구경하다가 다시 자기의 사명인 맛있는 바나나 선사와 후대번식을 충실히 완수하고는 아무런 원망도 요구도 없이 흔연히 떠나가는 바나나나무라면 어떨가.   비록 별 희귀할것도 없는 한그루의 바나나나무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는건 어쩔수가 없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아무런 원망도 요구도 없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면서 오직 헌신만 하는 이들의 사적을 학습하고 따라배우자고 목청껏 웨쳐왔으나 실제로는 거리가 멀었다. 항상 자신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고있으며 타인이 박절히 수요되는것이 나한테 있을 때 선뜻이 내여주지 못하고있다. 살아가면서 너무 거창하게 헌신보다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타인을 배려하고 편리를 도모해주면서 타인이 수요되는것이 나한테 있을 때 주저없이 내여줄수 있다면 살맛나는 세상이 될것이며 민족공동체수립에도 한몫할수 있을것이다                                                                           .   바나나나무를 알아서부터 가장 고귀한 존재로 칭하는 우리가 별 희귀할것도 없는 바나나나무에도 미치지 못할때가 있어 마음이 아려온다. 나는 지금도 가끔 거리나 슈퍼에서 바나나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바나나나무를 떠올려본다. 2024/12/27
68    광동의 음식문화 댓글:  조회:176  추천:0  2025-04-28
광동이란 령남동도, 광남동도로부터 연변되여 온 이름이다. 광동은 대륙남단연해의 성으로서 령남이남, 남해에 위치하고있는바 홍콩, 마카오,광서, 호남, 강서, 복건과 린접해있으며 바다를 사이두고 해남을 바라보고있다. 아열대계절풍기후이며 산지, 구릉, 평원이 있는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있다. 주로 주3각, 월동, 월서와 월북 등 4개 구역으로 나뉜다. 광동은 령남문화의 중요한 전승지로서 언어, 풍속, 생활습관, 력사문화 등 방면에서 독특한 풍격이 있는바 언어에서 통행월어, 객가어와 민어가 있을뿐만아니라 월, 객 두가지 방언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광동성은 우리 나라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사상, 문화가 가장 개방된 성인데 광동에 와있는 외국인이 거의 백만에 가깝다고 하니 가히 리해가 갈만한 일이다. 광동은 진이전의 남월족이 농업활동에 종사했던 곳으로서 중국력사상 상품성농업이 가장 일찍 발전한 지구중의 하나일뿐만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처음으로 자본주의생산방식이 출현한 성이다. 현재 광동성은 중국제1경제대성으로서 경제총량이 전국의 8/1을 차지하고있는바 향항과 대만을 초월하여 중국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크고 경제종합경쟁력과 금융세력이 가장 강한 성으로 부상하였다. 광동은 아열대에 속하기에 일년사계절 푸르며 물산이 풍부하다. 하늘을 날고있는 조류가 있는가 하면 땅우에서 달리고있는 짐승들이 있고 여러가지 해산물이 있으며 거기다 여러가지 과일과 채소도 있어 말그대로 풍부하다. 그래서인지 광동사람들은 못먹는것이 없다. “하늘에서 날고있는 비행기와 땅우의 네다리를 가진 책걸상을 제외하고는 못먹는것이 없다”라는 말이 류전될 정도로 못먹는것이 없다. 시장에 가보면 시장어귀부터 닭, 오리, 게사니, 비둘기를 잡아 파는 풍경이 펼쳐지는데 손가락보다도 더 약한 닭, 오리, 게사니의 밸도 다 검질하여 판다. 광동사람들이 말하는 기름개구리는 동북의 기름개구리와는 완전히 다른 마치도 동북의 두꺼비같이 우둘투둘하면서 시커멓고 어른들의 큰 주먹만큼씩 되는데 불툭 불거져 나온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것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친다. 그런 개구리를 사는 사람만 있으면 가위를 리용하여 그 자리에서 껍질을 발라 잡아주는데 잡는 솜씨는 기가 막힐 정도이다. 개구리뿐만아니라 인공악어와 토끼도 그자리에서 잡는데 처음보는 사람은 다 달아날것이다. 두꺼운 갑을 쓰고있는 거부기를 동북에서는 거의가 관상용으로 생각하나 광동사람들은 그것도 먹는다. 역시 고객이 보는데서 칼로 배를 가르고 갑을 뜯어내는것으로 잡는데 그 솜씨는 형용할수가 없다. 한번은 시장에 갔다가 직접 보았는데 털도 나지 않은 빨간 쥐새끼를 술에 담가 팔고있었다. 그날 종일 술병에 불려져 있던 빨간 쥐새끼들이 어른거려 속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전에 산원숭이 머리를 짜개고 뇌수를 파먹는 료리를 고급료리로 했다는 말이 참말이였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저녁이면 거리량켠에 포장을 치고 겨끔내기로 음식을 해서 파는데 서로 자기들이 진짜를 판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닭, 오리, 개 등을 가둔 초롱을 배렬하고는 손님이 주문하면 즉석에서 잡아 올린다. 초롱안에는 작은 새끼돼지, 메돼지, 꿩도 섞여 있으며 지어는 물쥐까지 있다. 코로나후로는 많이 제약을 받고있어 지금은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 광동사람들은 음식만드는 방법이 다양한바 주요하게 볶고 굽고 끓이고 고으고 찌고 굽고 튀기는 등으로 음식맛을 다양하게 살리고있다. 광동사람들은 진국(煲汤)을 끓여 먹기를 좋아하는데 닭, 오리, 게사니, 양, 개, 토끼, 악어, 뱀, 거부기 등은 속이 깊은 질그릇에 약재와 함께 넣고 둬시간씩 푹 끓여서 그 국물을 마신다. 동북에서는 약재는 꼭 약방에 가야 사지만 광동에서는 어느 슈퍼든 황기,. 당삼, 감초, 백작, 당귀, 오미자, 구기자, 인삼… 등 약재들을 팔고있는데 바로 진국을 끓일 때 늘 사용하기때문이다. 광동사람들은 입맛이 담백하고 원래의 맛을 살리는데 중시를 돌린다. 광동은 기후가 무덥기에 특별히 담백한 입맛을 선호하며 맵거나 기름기가 많은것을 피하고 식재료의 원래의 맛을 살리는데 중점을 둔다. 이는 위장의 부담을 줄이고 무더위를 이겨내는데 크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아침차(早茶)는 광동음식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농후한 지방특색을 띠고있다. 특히 주말이나 휴식일이 되면 온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차집(早茶店)을 찾아 여유작작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차물을 마시는데 음식문화일뿐만아니라 일종의 사교방식의 하나로 되기도 한다. 아침식사는 여러가지 모양이 이쁜 떡이(点心) 있는데 보기도 좋지만 그맛도 좋다. 조차댄(早茶店)이나 차찬팅(茶餐厅)은 음식값이나 차물값외에 자리비(茶位费)와 복무비(服务费)를 받는데 참으로 리해가 가지 않는다. 허나 광동의 차문화와 함께 기원된 자리비와 복무비는 광동인들에게는 응당한것으로 받아들여지고있다. 그 주요한 원인의 한가지라면 식사하고 차물도 마시다보니 느긋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오래고 또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이 오래게 되니 자연 복무가 따라가기에 비용을 따로 첨가하여 평형을 잡는다는것이다. 동북에서 가는 이들은 좀처럼 쉽게 받아질수 없는 일이다. 광동인들은 식사전에 국을 마시는 습관이 있는데 그들의 말을 빈다면 목구멍을 윤활하게 하여 곧 시작될 연회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국을 선택하는데 례하면 몸이 허약하거나 앓고난 뒤라면 닭고음 국을 마시고 애엄마가 있다면 영양가가 풍부한 붕어국을 마시기도 한다. 한마디로 국에 대하여 특별히 중시한다고 할수 있다. 푸른 채소를 중요시한다. 광동인들은 매끼마다 푸른 채소를 먹어야 하는데 고기와 푸른 야채가 배합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푸른 채소도 담백하게 하는걸 선호하는 그들은 채소를 데친후 우에다가 양념을 올리는것을 즐겨 먹는다. 광동인들은 닭고기를 즐겨 먹는데 연회는 물론 집에서 식사도 닭고기를 즐겨 먹는다. 하기에 그들은 여러가지 품종의 닭을 알심들여 배육하는데 잠강(湛江)이나 청원(清远)의 닭은 육질이 부드럽고 쫄깃하여 그 맛이 다르다. 조리법도 다양한바 그중 가장 대표적인것이 염국계(盐焗鸡)와 백절계(白切鸡)라고 할수 있는데 염국계는 닭전체가 노랗고 기름기가 돌아 보기만 해도 식욕을 돋구며 백절계는 닭고기의 원맛을 그대로 살려 담백하면서도 고소하다. 찬구(餐具)사용에서도 독특한 풍격이 있는데 음식점에 가서 일단 자리를 정하고 주문이 끝나면 찬구와 함께 더운 물이나 차물이 한주전자 올라 오는데 찬구를 헹구는데 쓴다. 미지근한 물에 헹궈봐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열심히들 헹군다. 찬구는 큰 접시 하나에 작은 공기 하나, 작은 차고뿌 하나가 오르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광동인들이 국을 얼마나 중시하고 차물을 즐겨마신다는것을 충분히 알수 있다. 동북과 다르다면 동북에서는 술잔이 오르는데 광동에서는 술잔을 따로 요구해야 올린다. 일년중 절반 넘어되는 시간을 무더위에 시달려야 하는 그들이기에 흰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동북에서는 두냥되는 술을 파는데가 간혹 어쩌다 보이지만 광동에서는 소매점이나 음식점에 여러가지 두냥되는 술들을 팔고있다. 동부과 다르다면 동북에서는 채소를 듬뿍듬뿍 담아주지만 광동채소는 접시는 커도 한귀퉁이에 발라서 오르는것이다. 동북에서는 풍을 맞아 비틀걸음을 걷는 사람들을 심심치않게 맞띄워 볼수 있지만 여기 광동에서는 보기 힘들다. 그만큼 여기 광동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풍을 맞는 사람이 적다는것을 말해준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기후문제와 담백한 음식습관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반대로 통풍을 앓고있는 사람이 많은데 풍부하고 신선한 여러가지 해산물을 즐겨먹는것이 그 주요원인이다.   
67    사는 재미 댓글:  조회:317  추천:0  2025-03-14
갓 가입한 중년협회에서 “3,8”녀성의 날 축제가 있으니 참석해라는 통지를 받고 나는 협회라니 고향떠나 멀리 타향에서 어떤 형식으로 축제를 조직할가 하는 호기심이 드는건 어쩔수 없었다. 그러면서 전에 농촌에 있을 때와 사업에 참가했을 때 보냈던 “3,8”녀성의 날들이 눈앞에 우렷이 떠올랐다.  전에 농촌에 있을 때는 음력설, 정월보름, “3,8”절 이렇게 명절순위를 놓고 “3,8”절까지 쇠고나서야 모상판을 만들고 두엄을 실어나르는 등 봄일을 시작하였다. 3월8일이면 모진 추위도 풀린 뒤라 거기다 “3,8”부녀절을 맞이한 마을은 아침부터 환락으로 들끓었다. 청년들로부터 로인들에 이르기까지 실로 말그대로 남녀로소가 다 즐거움과 환희에 휩싸여 들끓었다. 한것은 “3,8”부녀절이라 해서 부녀들만 보내는것이 아니라 남자들도 녀성의 명절을 축하해주고 쇠준다는 명목으로 함께 어울려 놀수 있기때문이였다.  오전에는 촌 부녀협회의 주체로 로인독보조 활동실에서 전촌 부녀대회를 가지는바 촌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촌 부녀주임의 사회하에 “3,8”부녀절에 관하여 간단히 학습한 다음 우수녀성, 효도녀성 등 본보기로 될만한 녀성들을 선거하고 상품을 발급하는데 상품들로는 꽃소래, 세수수건 등이였다. 회의가 끝나면 로인협회, 중년들, 청년들로 패를 나누어 활동경비를 나누어주는데 경비라야 푼푼치 못해서 쌀이나 돈을 더 거둬서 보태야 했다. 그때는 고기를 사려해도 현성으로 가야했기에 제일 쉬운 방법으로 쌀을 메고 한족동네로 가서 닭이나 오리, 게사니 따위를 바꿔오는것이였다. 거기다 생산대에서 나눠준 싸래기로 떡을 빚으면 훌륭한 먹거리가 되였다. 그날 제일 바삐 돌아치는데는 공소합작사의 직원들이였다. 남녀로소가 다 일떠나서 활동하는데 물건파는데라고는 공소합작사밖에 없었으니 그럴법도 하였다.  늦은 점심삼아 이른 저녁을 쓰고 제일 먼저 장구소리와 타령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로인독보조 활동실이였으며 뒤따라 중년패들이 노는 개인집들이였고 청년들이 마지막이였는데 청년들은 록음기를 틀어놓고 당시 갓 류행되고있는 사교무를 췄다. 전촌에 새장구도 로인독보조에만 있기에 중년패들은 저가락 장단이 아니면 소래에 물을 떠놓고 박바가지를 엎어놓은후 저가락으로 두드리면 장구소리 못지 않게 울렸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때 제일 많이 불려진 노래가 “한강수야…” ,“세월아, 네월아…”였다. 그때까지만해도 마을에 록음기를 가지고있는 집들이 많지 않아 귀한 물건이였다.  청년패들은 사교무로 놀다가 지치면 노래하기를 했는데 먼저 부른 사람이 다음 부를 사람을 지명하면 잇따라 부르기를 하거나 혹은 빙둘러 앉아 바가지를 돌려 바가지 쪽자루가 누구의 앞에 가서 멈추면 그 사람이 노래부르고나서 다시 바가지를 돌리였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놀다가 마지막에는 편을 나누어 카드놀이를 하는데 진편에서 언배나 언감을 샀다. 그날만은 공소합작사는 늦게까지 문을 열고있었으며 설령 문을 닫았다할지라도 문을 두드려 직발인원을 깨워서라도 수요되는 물건을 샀다. 남은 채소와 언배나 언감으로 중참까지 먹고나면 한밤중이나 새벽녘이 되군 하였다. 집에 돌아가서 양말을 벗어보면 바닥이 까맣다못해 딱지가 앉을 지경이였다. 하루종일 구들에서 뛰놀았으니 그럴법도 하였다.  그후 세월이 좋아지면서 살림이 윤택해지자 “3,8”절이면 통이 크게 놀기 시작하였는데 개나 양을 잡아 엎어놓고 며칠씩 먹고 놀군 하였다. 비록  먹는건 전보다 비교도 않되게 풍성했지만 의미는 좀씩 색바래져 가고있었다. 그렇게 명절의 분위기로 들끓던 마을이 지금은 “3,8”절이 되여 온동네 사람들 남녀로소가 다 모여도 50명이 채안된다는 고향마을이다.  전에 변강현에서 사업할 때의 일이다. 그때 “3,8”녀성의 날이 돌아오면 단위에서는 그날이 일요일과 맞아 떨어지지 않기에 일요일에 출근하고 일요일인 휴식일을 그날로 미루어 휴식하군 하였는데 모두가 부부동반으로 사회친구들을 찾아가서 즐겁고 유쾌하게 노는것이 상례로 되여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흥이 나서 놀았지만 나는 타고장에서 와서 사업하는데다가 독신이다보니 그날을 보내기가 실로 멋적었다. 그때 년세가 있는 분들은 사회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년세가 비슷한 한단위의 분들끼리 짝을 무어서 부부동반하여 함께 식사를 마치고 오락으로 하루를 즐기였다. 그들은 숙소에 혼자 있는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끌기에 따라가서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윷놀이를 하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며 평소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도록 즐겁게 놀던 일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 그 년세있던 분들 모두가 지금은 저세상의 고인이 되였으니 가슴만 알알해온다. 협회에서 조직하는 축제장소에 다달으니 모두가 얼굴에 함박꽃 웃음을 띠고 즐거움에 겨워 부산을 피우고있었다. 관악합주로부터 시작된 축제는 남성들이 녀성들의 가슴에 생화를 달아주기, 협회회장의 축사. 무용교실 무용팀의 다양한 무용, 독창, 노래교실팀의 중창, 즉석표현하기 등 다양한 절목들로 장내는 시종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절목이 다양하여서 사람마다 참여할수 있어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고향을 떠나 광동이라는 타향에서지만 녀성의 날 축제를 모두가 고래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우리 노래와 우리 춤으로 즐겁게 보내는 그 가슴벅찬 장면들을 보노라니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고 다리가 건뜩건뜩 들리였다. 특히 관악합주와 무용은 수준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악대성원중 녀성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있었고 무용팀은 상모를 돌리는 남성들외 몽땅 녀성들이였는데 악기나 무용복과 같은 무용에 필요한 도구들은 모두 자비로 해결하였다고 하니 그 열정이나 정성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축제가 끝나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나는  다시한번 큰충격을 받게  되였으며 그들이 마냥 존경스러웠다. 젊어서는 하는 일에 개미채바퀴돌듯 바삐 돌아치고 거기다 가정을 돌보다보니 하고싶은 일도 마음뿐이였다면  지금은 모든걸 부려놓은 홀가분한 신세가 됐으니 젊어서 하고싶어도 못한것들을 마음껏 할수 있어 세상을 다가진 기분이라는것이다. 뿐만아니라 민족문화전통을 고양하는데 한몫할수 있기만 한다면 더 신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협회에서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은 무용련습, 수요일은 노래교실 노래련습, 토요일과 일요일은 악대훈련을 진행하고있는바 사람마다 자기의 흥취에 따라 선택하여 마음껏 배우면서 즐길수 있다.  우리는 흔히 퇴직한 이순의 나이부터 제2인생을 맞이하고 새롭게 살아가야 한다고들 말하고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설계가 다르겠지만 느낌만은 하나, 바로 사는 재미를 새롭게 느끼는것일것이다. 꿈은 젊어서만 갖는것이 아니다. 나이와 무관하게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 과정에서 사는 재미를 느낄것이다. 나는 그들이 젊어서 이루지 못한 꿈을 마음껏 펼쳐 사는 재미를 한껏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2025/1/8  
66    “라이땐러(来电了)” 댓글:  조회:327  추천:1  2025-02-11
업주 위챗그룹에서 아파트옥상에 태양열에네르기 발전설비를 가설하는것을 두고 의론이 분분하기에 호기심이 동해 옥상에 올라가보니 아니나다를가 주민구역관리처에서 태양열에네르기 발전판을 즐비하게 가설하고있었다. 언젠가 티비뉴스에서 보았는데 우리 나라는 현재 태양열에네르기 발전과 풍력발전이 세계의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다고 한다. 이제 더는 전력부족으로 정전하는 일은 없을것이며 정전은 흘러간 과거로서 한낱 추억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태양열에네르기 발전설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지난세기 전력부족으로 정전하던 나날들이 우렷이 떠오르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기억에는 80년대 말기까지 전력부족으로 거의 매일 정전하였었다. 전력부족으로 정전하니 전기가 제일 수요되는 저녁식사시간이면 어김없이 정전하였다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되는 9시나 10시면  전기를 주었다. 80년대는 초대를 사서 켤수 있었지만 70년대까지는 초대를 사서 켤 형편이 못되여 등잔불을 켰는데 집집마다 각양각색의 등잔을 만들어 썼다. 보통 유리통졸임통으로 등잔을 많이 만들어 썼는데 양철뚜껑의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양철쪼박으로 심지로 쓸 실을 감싼다음 뚫은 구멍에다가 단단히 고정시킨후 유리통졸임통에 석유를 붓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심지가 석유를 빨아올려 불이 붙는것이였다. 석유로 불을 켜다보니 시커먼 연기가 많아 집안이 그을고 두세시간씩 켜고나면 사람도 코밑이 시커멓게 되였다. 남포등 이나 초대를 켜면 환하고 연기도 적은줄을 알지만 그걸 사서 쓸 형편이 못 되다보니 사치한 생각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누군가의 발명품이 나오게 되였는데 탄알깍지를 리용한것이였다. 그때는 민병훈련에서 실탄사격훈련이 있다보니 탄알깍지를 얻기는 쉬웠는데 탄알깍지의 밑부분을 쇠톱으로 자른후 다시 탄알깍지를 사선으로 비스듬히 베여내고 등잔심지대에 꽂으면 되였다. 먼저 탄알깍지를 사선으로 베여낸 곳으로 등잔심지에 불을 붙이면 심지로 석유가 연소되면서 연기가 탄알깍지우로 나오는데 그때 다시 그 연기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연소되면서 불이 붙기에 그을림이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큰 발명상을 줄만한 발명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와 식사하려고 밥상에 마주앉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정전이 되군 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등잔불밑에서 저녁밥을 먹는수밖에 없었다. 때론 석유를 미처 준비하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때면 솜을 비벼서 심지로 하고 접시에 콩기름을 둬숟가락붓고 불을 켤 때도 있었다. 그런날 저녁이면 저녁식사가 끝나서 대충 거두고는 불을 끄고 어두운데서 전기오기를 기다리다가 피곤해서 잠들어버리기도 하였다. 귀한 콩기름을 더는 태울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전기가 오나하여 줄스위치를 몇번 당겨보노라면 끈 상태로 되여서 전기가 와도 모를 때가 있었다. 그런 집이 한두집이 아니기에 일단 전기가 오면 밖에 있던 사람들이 목청을 돋구어 “라이땐러(来电了)”라고 웨치면 일제히 불이 켜지군 하였다. 그때 라이땐러 웨치던 사람이 전기를 보내준 사람처럼 그렇듯 고마울수가 없었다. 한번은 겨울에 친구들이 모여서 소처녑추렴을 하게 되였는데 소쳐녑을 손질하는 중에 정전이 되여 등잔불밑에서 손질하고 데쳐서 소처녑회를 한소래만들어 등잔불밑에 빙둘러 앉아 술잔을 마주치면서 주흥이 도도해서 먹고 마셔댔다. 헌데 어떤 처녑은 너무 질겨서 씹기가 힘들었다. 질기다고 하니 소처녑은 우물우물 씹어 넘겨도 탈이 않난다고 하기에 간혹 질긴건 우물우물 씹어서 넘겼다. 어쩌다 친구들이 모여서 하는 추렴이라 모두가 즐거워 그렇게 웃고 떠들며 먹다가 전기가 오게 되여 환한 불빛에 소래밑굽에 남은 소처녑회를 찬찬히 보게 되였다. 아뿔싸! 이게 뭐지? 어두운데서 급하게 손질하여 썰다보니 그만 행주를 소처녑과 함께 썰어 초고추장에 버무려 그토록 질겼던것이다. 영문을 알고 박장대소하는 바람에 술이 다 깼다.      여름철에는 해가 길어 어둑해질 때면 저녁식사를 마칠수 있어 정전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모두 마당에 나앉아 어른들은 모기쑥불을 태우면서 이야기판을 벌리고 아이들은 뛰여다니면서 술래잡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라이땐러”하는 웨침소리가 들리면 불을 켜고는 밖의 모기쑥불을 끈후 술래잡기에 정신없이 뛰여다니는 애들을 불러들이기에 바쁘다.      그때는 문화생활이라고는 향에서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영화를 돌리는것뿐이였는데 고작 한달에 두번정도였다. 그렇게 기다리던 영화구경도 정전되여 바로 볼수 없어 애탔다. 영화구경할 준비로 일찍 해바라기씨나 호박씨, 콩 등을 볶아서 준비를 단단히 해갖고 로천영화터의 맞춤한 곳에 자리까지 잡았는데 정전되면 아예 자리에다 북데기나 마대같은것을 펴고는 들어누워있다가 잠들어버릴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라이땐러”하는 웨침소리에 정신이 번쩍들어 일어나 영화를 보았다. 그때 영화라해봤자 거의가 경극이였으며 간혹 전투편이 있었다. 그래도 정전이 되여 기다려가면서라도 빼놓지 않고 다보았다.  1831년 영국의 물리학가이고 화학가인 마이클 파라디(迈克尔 法拉第)가 발전기를 발명한 뒤를 이어 40여년이 지난 1879년 발명대왕으로 이름난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하면서 인류는 전등조명시대를 맞이했다. 허나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지난세기 80년대까지도 전력난으로 정전하면서 생활에 많은 불편을 가져다주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은 전기화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기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으며 모든것이 마비상태에 들어가게 될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것만 말해도 고속렬차와 지하철 모두가 전기로 쏜살같이 달리고있고 승용차와 공공버스도 지어는 모터찌클이나 자전거도 전기로 달리고있다. 저녁이면 어디나 불야성을 이루어 황홀경을 자랑하고있으며 사람들은 그 매력에 취해보군 한다. 사람마다 거의 휴대하고 다니는 핸드폰도 전기가 없으면 무용지물로 될것이다. 지금 자라는 세대들은 정전이란 무엇이고 왜 정전했는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세계에는 정전이란 특수상황을 제외하고는 있을수 없을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반가워했던 “라이땐러”하는 웨침소리는 더는 들을수가 없을것이다. 즐비하게 배렬된 태양열에네르기 발전설비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2024/12/9
65    안휘에서 온 장서의 댓글:  조회:691  추천:2  2025-01-13
장서의는 안휘성 부양의 농촌에서 심천으로 일하러 온 50대의 사나이다. 중등키에 까만 눈섭을 가진 그런대로 봐줄만한 인물을 가졌는데 보통말보다는 혀를 꼬부라뜨리는 안휘의 지방말을 더 많이 하여 그가 하는 어떤 말들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여러곳을 전전긍긍하였는데 강소성, 절강성 그리고 녕파 등지의 공사장에서 페인트공질도 하였다 한다. 심천에 와서도 개인이 꾸리는 화훼회사에서 일하다가 보스의 눈에 나서 잘리게 되였는데 그 자신은 맞같지 않아서 그만뒀다고 하지만 그때 그와 함께 일하다가 후에 또 한회사에서 정원사일을 하는 호남에서 온 주주길의 말에 따르면 제앞의 일을 깔끔하게 하지 못하여 잘렸다고 한다. 장서의가 심천으로 오기전에 그의 안해가 먼저 와서 지금의 회사에 취직하게 되였는데 회사의 제조부부장이 녀동생남편이라 남보다는 쉽게 회사에 입사할수 있었다. 장서의 또한 화훼회사에서 잘리게 되자 동서간이 되는 제조부부장과 청을 들어 회사의 정원사로 취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후 부장동서의 덕분으로 장서의의 아들 딸 모두가 회사에 입사하였으며 사위는 입사 2년도 채않되여 계장으로 승진하였으니 부장동서의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안휘의 농촌마을에서 온 장서의는 순박한 면도 가지고있지만 또 어딘가 어리숙하기도 하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말주머니를 풀어헤치고 어떤 말이든 숨김없이 말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로 누님둘에 아래로 녀동생 둘, 그러니까 누님들과 녀동생들 사이에서 그가 태여나게 되였는데 부모들은 대를 이어갈 아들이라고 어려서부터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귀염을 받으며 자라나 한족남자들 거의 모두가 가마목일을 잘하는데 비해 그는 전혀 할줄을 몰랐다. 그가 할줄 안다고 자랑할만한것이라면 밀국수(挂面)를 삶는것과 땅콩을 기름에 볶는것이였는데 그것도 간혹 안해나 딸이 퇴근이 늦을 때면 제딴에는 잘하느라고 솜씨를 보이군 하는데 그의 그런 솜씨를 안해와 딸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밀국수를 한가마 삶아놓으면 안해가 한오리만 먹어보고는 이게 돼지죽이지 사람이 먹을것이냐고 호통치면서 이후로 밀국수를 삶겠으면 네혼자 먹을만큼만 해서 먹으라고 한단다. 그뒤로 안해와 딸은 잔업으로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는 집부근에서 사서먹고 귀가하군 하였다. 그들이야 그러건말건 장서의는 자기가 갖고있는 한가지 재주 – 밀국수를 삶고 땅콩을 기를에 볶아서는 술두냥까지 곁들여서 맛난 저녁식사를 치르군 한다고 한다. 그가 낯에 웃음기 하나 띠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할때면 모두가 호탕하게 웃으며 슬슬 놀려주거나 직접 대놓고 이 머저리야, 그 나이에 밥도 할줄 몰라?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장서의는 개의치않고 정색해서 나 어릴 때 부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자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든 라고 하면서 어딘가 득의양양해하는 표정까지 지었다. 회사에서는 한해에 두세번정도로 사회공익성활동(义工)을 조직하는데 이를테면 삼림공원이나 바다가를 찾아가서 널린 쓰레기를 줏는것이다. 사회공익성활동인만큼 회사에서는 회사원들이 자원적으로 참가하게 하였는데 활동에 참가하는 회사원들은 모두 20대들이였다. 장서의는 회사벽보란에 공익활동통지가 나붙으면 그자리로 상관부서를 찿아가서 등록할뿐만아니라 꼭 참여하게 해달라고 사정까지 하여 지금껏 회사에 입사하여 한번도 공익성활동에 빠진적이 없다. 회사에서는 매번 활동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빨간색 모자에 글을 박아 나눠주는데 장서의는 그 모자를 그날뿐만아니라 그후 회사울안에서 화초를 가꿀 때도 쓰고 하여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였다. 회사에서는 해마다 추석명절이면 대형문예야회를 조직하군 하였는데 그날도 공익활동의 하나로 자원적으로 걸상옮기기, 장소정리, 장소청결 등을 하였다. 장서의는 이 활동에도 번마다 선참으로 등록하고 밤늦게까지 로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도 글이 박힌 빨간색 모자를 나눠주었기에 장서의는 그 모자를 쓰고 신나게 돌아쳤으며 그후로도 그 모자를 오래도록 쓰고 다녔으며 그러는 그를 보는 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회사공회에서는 한해에 한두차례 등산활동을 조직하는데 대형버스 세대에 만원이였다. 공회에서 조직하는 활동인만큼 격식을 차려 글이 박힌 기 발도 마련하고 반팔적삼도 통일적으로 주문하여 나눠주었다. 장서의는 이 활동에도 선참으로 등록하고 참가하였을뿐만아니라 공회글이 박힌 기발을 자청하여 자기가 들고 산을 오르고 내리였다. 이런 장서의를 두고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이름을 달아 부르게 되였는데 누가 처음으로 지어서 불렀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기발하고 묘하였는바 한입두입 회사내에 인차 퍼져 모두가 원이름대신 새로 지은 이름을 부르는데 습관되여 갔다. 장서의는 한어로 张西仪인데 그음에 따라 脏兮兮로 새로이 불려졌다. 脏兮兮는 실은 더럽고 어지럽다는 뜻으로서 그에 대한 멸시와 모욕이였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으며 너희들 짖겠으면 짖어라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간다는 격이여서 모두가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신 脏兮兮라 스스럼없이 부르는데 익숙해져갔다. 회사에는 실내외를 청소하는 청결공들이 있는데 모두가 녀성들이였다, 청결공들도 짱시이라는 이름대신 짱시시라고 부르기 좋아하였으며 참대비자루를 자르거나 무거운것을 들거나 등 자질구레한 일들은 장서의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그는 번마다 거절하지 않고 잘도 도와나섰으며 그들과 어울려 잡담하기를 즐겼을뿐만아니라 회사울안 귀퉁이에다가 몇포기 심은 채소도 아까워하지 않고 통이 크게 따다가 그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가 회사울안 한모퉁이에 어떤 채소를 얼마나 심었는지 누구도 알지못하고있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는 만나는 사람과마다 자기가 심은 채소가 여차여차 왕성하게 잘 자라고있다고 자랑하군 하였으며 얼마후에는 자람새가 좋은 채소를 누군가가 다 따갔다고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두고 모두가 허구픈 웃음을 웃을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호주머니에 지갑이란걸 넣고 다녀본적이 없다. 호주머니에 고작 아침사먹을 돈 20원쯤 넣고 다니였기에 급하게 돈쓸 일이 생기면안해를 찾아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서 꾸어야 했다. 그런 사정을 알고 회사의 운전기사가 한번은 그가 당장에서 월급카드를 내놓는다면 고급음료수 한병을 사주겠노라고 도전장을 던지자 장서의는 어물쩍하게도 림기응변책을 대여 모두가 웃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오다보니 깜빡하여 지갑을 소지하지 못하였으니 래일 출근하는 길로 보여주겠으나 음료수는 필요없다는것이였다. 이튿날 출근한 운전기사는 전날의 일을 감감 잊고있었으나 장서의는 출근하자 운전기사를 찾아가서 지갑과 월급카드를 꺼내 그의 코밑에 대고 흔들어 보였으며 또 천원은 훨씬 넘어보이는 백원짜리 지페도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그가 그렇듯 정색하고 득의양양해하자 운전기사는 그가 마다하는것도 음료수를 사주었다고 한다, 며칠후 짱씨씨의 호주머니에는 또 아침밥을 사먹을 돈이 10원이나 20원 밖에 없었다.  회사규모가 크고 그에 따라 울안도 크기에 각종 수목과 꽃나무 그리고 잔디밭이 있어 정원사를 채용하고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면 각종 수목과 꽃나무를 가꾸고 전지하며 자라나는 잔디를 기계로 깎는것이다. 공원이나 명승지의 정원사라면 차원이 높아야겠지만 회사울안의 정원사인것만큼 가쯘하게 가꾸면 되였다. 헌데 짱시시는 그것도 만족스럽게 못하여 눈에 뜨일 정도였다. 일을 한시간도 안되게서 하다가는 헝겊으로 눈을 싸맨 당나귀가 석마를 돌리듯 회사울안을 돌고 돌아다니다가는 또 잠간 일하다 다른 사람들이 밖에서 작업하는데를 찾아 구경하군 하였다. 총무에서 그의 작업태도를 언녕 보아냈지만 그의 동서가 부장이라 한두번 타이르는척 하다가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보안일군들의 단련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철봉대를 만들고 가끔 롱구시합도 하였다. 보안일군들이 농구시합을 하면서부터 짱시시의 몸단련도 시작되였다. 전에 철봉대를 만져도 못본 그였지만 틈만나면 철봉대에 붙어있다보니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짓듯이 철봉에 매달려 몸돌리기 ,턱걸이 등 철봉을 자유자재로 할수 있었으며 멀리서도 농구공을 던져 그물안에 넣을수 있었다. 그의 몸단련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하다가도 잔디밭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꺼꾸로 서기-도립(倒立), 거꾸로 서서 손으로 걷기 등도 련습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거꾸로 서기는 2분에서 5분까지 견지할수 있었으며 꺼꾸로 서서 걷기는 3미터에서 5미터까지 갈수 있었다. 이렇게 그의 재간이 늘어나자 그는 여럿이 모여서 휴식하는것이 보이면 하기 좋아했는데 자기의 재간을 자랑해보려는것이였다. 다른이들 역시 그의 아들또래 아이들까지 그를 만나면 씨씨 또리 라이거베 하고 말을 걸군 하였는데 그때면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흔쾌히 꺼꾸로서기와 꺼꾸로 서서 걷기를 하군 하였으며 구경하는 이들은 박수까지 쳐대면서 호우,호우 하고 춰주군 하였는데 그러면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군 하였다. 년말회식때였다. 모두들 술한잔 얼근하게 마시고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짱시시시와 마주치게 되였다. 이때 누군가 짱시시 보고 라이거 라고 하자 뒤따라 나오던 이들도 이구동성으로 라이거,라이거 하기에 이르렀다 실은 회식은 음식점에서 한지라 음식점 밖은 콘크리트 바닥이고 하루의 열기가 그대로 슴배여 있어 가마목못지 않게 뜨끈뜨끈하였다. 그래도 짱시시는 개의치 않고 흔쾌히 얼굴에 웃음까지 띄우면서 하루동안 열기를 확확 내뿜고 있는 콘크리트바닥에 머리를 대고 꺼꾸로 서기를 하였는데 머리가 뜨거워 인차 다리를 내리우고 말았다 원숭이가 부리는 재롱을 구경하듯 빙 둘러서서 구경하던 이들이 이번에도 박수까지 쳐가면서 호우를 련발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인건 더 말할것도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회사총경리가 새로 부임되여 오면서 회사내부에 큰 인사변동이 생기에 되였는데 짱시시에게도 그 자신마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제일 큰 변동으로는 부장으로 있던 그의 동서가 이번 회사내 인사변동에서 부총경리로 발탁되여 회사내 2인자로 권리를 틀어쥐게 되였다. 인사변동정황이 회사내에 공시문으로 공포되여 일반 회사원들마저 다 알게 되면서부터 짱시시(张兮兮)라 부르던 별호가 차츰차츰 적게 들리다가 어느날부터인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게 되였으며 대신 로짱(老张)이란 호칭이 생겨나 짱시시를 대신하게 되였다. 만날때마다 시도때도 없이 거꾸로서기를 권유하던 이들도 그를 만나면 얼굴에 웃음을 바르고 로짱이라고 정중히 불렀으며 무겁거나 힘들고 어지러운 일이 있을때마다 짱시시를 부르면서 곧잘 청들던 청결공아낙네들도 온 얼굴에 해시시 웃음을 바르면서 짱따거라고 불렀을뿐만아니라 더는 그에게 그런 일을 청들지 않았다. 처음에 짱시시가 로짱으로 짱따거로 호칭이 바뀌였지만 장서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나 한듯이  개의치 않았을뿐만아니라 전대로 변함이 없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여럿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 엊저녁 부총경리인 동서와 술한잔 했다는둥 자기한테 변속자전거를 선물로 주더라는둥 함께 심천공원으로 놀러갔댔다는둥 등의 자랑을 누구 묻지도 않는데 곧잘했으며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하였다 그의 그런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처음에는 얼굴이 굳어졌다가 인차 얼굴에 웃음을 게바르군 하였으며 그럴수록 장서의는 신이 나서 때론 손짓발짓까지 해대면서 열을 올리군 하였다. 음력설에 회사에서는 두주일간 방학을 하게 되였는데 회사대문을 지킬 보안일군이 모자라게 되였다. 그사이 출근은 두배의 돈을 주지만 고향으로 가고픈 보안일군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였다 전같으면 장서의를 념두에 두고 생각지도 않았겠지만 혹 생각했다 할지라도 보안일군도 아닌 그를 그동안 채용하는걸 유관책임자가 동의할리 만무할것이였다. 허나 이번에는 방학사이 보안일군이 모자라자 보안대장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이가 바로 장서의였다. 그는 가정성원 모두가 와있으니 고향으로 갈리 만무하고 또 부총경리의 동서간이니 유관책임자가 동의안할리가 없을것이니깐. 결국 장서의는 매일 두배의 돈을 받으면서  두주일 방학기간 회사대문을 지키게되여 돈도 벌고 틈틈히 철봉과 도립을 마음대로 할수 있어 실로 말그대로 누이좋고 매부좋았으며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때는 격이 되였다. 음력설이 지나 출근이 시작되여 얼마 안지나서 장서의에게는 모두가 눈이 둥그래질 변화가 생기게 되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소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었는데 자기 이름석자도 써놓으면 오리가 똥물을 갈기고 헤집어놓은것처럼 뒤죽박죽이 되여 겨우 알아볼 지경이였으며 회사공고란에 나붙는 공시문도 대강 뜻이나 겨우 알아보는 정도였다. 그런 그가 직원으로부터 일약 조장으로 승진하게 되였던것이다. 조장직이 회사내에서는 제일 말단직이지만 모두가 조장으로 되는게 아니고 자기가 되고싶어 되는것은 더구나 아니였다. 비록 말단직이지만 직원보다 월급을 5백원이상 더 받으니 조장으로 승진한 장서의가 부럽지 않을수가 없었다 .조장으로 승진한 장서의는 더는 짱씨씨가 아닌 로짱, 짱따거로 불리웠으며 그의 어깨 또한 전보다 더 넓어진듯 해보였다. 실로 한사람이 출세하면 그 집의 개와 돼지도 따라서 살찐다는 말이 바로 이런걸 두고 한말이 아닌가 싶다                                                                
64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댓글:  조회:487  추천:0  2025-01-13
우연한 기회에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로인”을 읽어보게 되였다. 짧은 한편의 수필이지만 여름날의 잔잔한 보슬비가 옷속까지 스며들며 적셔주듯 마음속까지 잔잔한 감동이 여울져오는건 어쩔수가 없었다.    “나”는 퇴근길에 길가에서 방망이 깎는 로인을 만나 방망이 한벌을 깎아달라고 부탁한다. 로인이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것 같아 흥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로인이 퉁명스럽게 나와서 흥정을 포기하고 잘 깎아달라고만 부탁하고 만다. 로인은 처음에는 방망이를 빨리 깎는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면서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다 된것같아 달라고 했으나 못들은척 대꾸가 없이 그냥 깎기만 한다. 타야할 차시간이 림박하여 초조해난 “내”가 그만 달라고 하자 로인은 버럭 화를 내면서 끓을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밥이 되냐며 안팔겠다고까지 한다. 별수없이 “내”가 체념하자 로인은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방망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계속 할 일에 열중한다. 타야 할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타야 하는 “나”는 로인을 상도덕(商道德)도 모르는 무뚝뚝한 로인이라고 원망하게 된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안해는 방망이가 배가 부르지도 약하지도 않게 맞춤하고 이쁘게 잘 깎았다면서 이렇게 잘 깎은 방망이를 만나기 조련찮다고 한다. 안해의 말을 듣고 비로서 로인을 원망했던 자신을 뉘우치며 다음 일요일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사과라도 하려고 로인을 찾아갔으나 그 자리에는 로인이 없어 아쉬움만 가득 남는다.   길가에 앉아 방망이를 깎는 로인이라면 우리 모두에게 낯선 풍경이 아니다. 방망이 한벌을 깎아야 돈이 얼마 되지도 않겠지만 로인은 혼신을 다해 정성스럽게 깎는다. 배가 부르지도 약하지도 않고 맞춤하게 그리고 이쁘게 깎았다.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것이 로인의 상도덕이라면 합당할것 같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하는 일에 전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로인이다. 참으로 돋보이고 존경스러운 로인장이다.   일전에 연변텔레비죤위성방송에서 화면석소장가 정려화씨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역시 잔잔한 감동을 불러오는 이야기였다. 화면석수장도 좋지만 그보다는 그림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그가 나이 40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그것도 돌에다가 여러가지 동물들을 위주로 화초들을 그렸다는것이며 모두가 살아숨쉬는듯이 생동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혀를 두르게 하고있다. 물론 농후한 흥취와 애호가 뒤받침하였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한 결과가 아닐가 생각해본다.   내가 사는 동네 입구에는 음식점들이 서로 겨루기라도 할듯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지나다니면서 눈여겨 보노라니 어떤 음식점은 숱한 돈을 팔면서 장식하고 폭죽을 터치우면서 요란하게 개업해서 두달후면 문을 닫고 양도를 한다는 딱지를 붙이고 만다. 그런가하면 어떤 음식점은 십여년이나 주인이 바뀌지 않고 쭉 문을 열고있으며 매일 호황을 이루고있다. 물론 음식업은 위치나 노하우가 비결이겠지만 그에 앞서 하는 일에 전심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세상의 그 어떤 일이든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오직 피타는 노력이 동반되였을 때만이 예기한 목적에 이를수 있을것이다. 피타는 노력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최선을 다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도리를 깨우쳐준 방망이를 깎던 로인이 고맙고 존경스럽다.  
63    소산에 다녀오다 댓글:  조회:465  추천:0  2025-01-13
2016년 국경절 련휴때 우리 나라5악중의 하나인 남악 형산을 톺아 그정상까지 올랐댔다. 형산은 호남성형양에 있는데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5악인만큼 비록 산세가 험준하여 힘에 부쳤으나 정상에서 밑을 굽어보는 순간만큼은 가슴 뿌듯한 순간이였다. 형산의 정상에서 일몰과 일출을 보려고 풍막과 생활도구들을 꿍져메고 힘겹게 톺아오르는 이들을 보면서 내심 탄복하기도 하였다. 형산을  답파해도 련휴가 남았기에 호남땅을 밟은 바에는 소산으로 가서 모주석의 생가를 방문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소산으로 향발하게 되였다. 소산을 향해 떠나는 순간부터 나는 이름할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면서 몇십년전의 일들이 밀물이 밀려오듯 줄줄이 떠오르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드는건 나로서도 억제할수가 없었다. 아마도 소학교2학년때라고 기억된다. 그때 비록 시골학교였지만 전교문예경연을 조직하게 되였는데 우리 학급에서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는 가무를 내놓게 되였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그때 그 노래가사와 곡이 그대로 기억에 생생하다. “기차는 달려요. 소산으로 달려요. 산을 넘고 강건너 소산으로 달려요. 해빛은 찬란히 창을 비추고 차칸안은 들끓어요. 참말 들끓어요. 장족할아버지 해금타고 신강누나 춤추고 몽고족아저씨 노래불러요. 노래소리 웃음소리 그칠줄 몰라요.” 보다싶이 각 민족인민들이 기차타고 모주석의 고향인 소산으로 가면서  즐거운 심정과 들끓는 장면을 보여주고있다. 당시 우리 학급에는 20명이 채않되는 학생들이였는데 전원이 참가하였다. 한켠에 다섯씩 10명 학생은 종이박스로 만든 둥근 기차바퀴를 돌리고 나머지 학생들은 각양각색의 민족복장을 차려입고 차칸에서 춤추고 노래불렀다. 특히 장족할아버지, 신강누나, 몽고족아저씨 차림을 하고 해금타고 춤추고 노래부르는 이들이 있고 또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치고 춤추는 이들이 있어 관객들의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당연히 1등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어린 가슴에 소산으로 다녀오고픈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다.사실 나뿐만아니라 중국인이라면 전국인민의 태양이며 위인인 모주석의 생가를 가보고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을것이다. 허나 호남성까지는 거리가 너무도 멀어서 가슴속에 념원으로만 남겨둘수밖에 없었다. 몇해전 남방으로 옮겨와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생각한것이 여건이 허락되면 어릴 때 출연했던 장면을 되새기면서 소산에 한번 다녀오리라는것이였는데 이제 그 소망을 현실로 이루게 되였으니 그 마음을 뭐라 표현했으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흥분에 들떠 소산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가는 내내 그 노래를 수도없이 흥얼거리였다.     소산충의 모주석생가는 어릴때부터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아오던것과 같았지만 직접 발을 들여놓고 보는 순간만큼은 숙연해지는 마음이였다. 집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집앞이 논으로 된 생가는 아늑하고 조용했을거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산수가 좋다는 느낌이였다. 방방곡곡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방문객이 인산인해에 장사진을 이루었며 시종 비비적거리면서 밀려다녀야 했기에 사진한장 기념으로 남기지 못하는것이 큰 유감으로 남았다. 국경련휴인것도 있겠지만 위인은 영원히 인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으며 인민들은 영원히 위인을 기리고있음을 알수 있었다,  모주석의 생가는 1929년 국민당정부에 의하여 몰수당하여 파괴당한것을 1950년 원모습대로 복원하였으며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에서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고 1997년 중공중앙선전부에서는 전국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명명하였다. 1983년6월27일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등소평동지가 “모택동동지생가(毛泽东同志故居)”라는 친필제사를 써주었다.  모주석의 어린 시절 부모님들을 도와 곡식이랑 말리웠다는 집옆 마당에 서있노라니 어느 책에서 본 한토막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주석은 어릴 때부터 이웃이나 어려움에 처한 동네사람들을 즐겨 도왔다고 한다.  1910년 가을, 당시 17세인 모주석은 호남상향 현립동산고등소학당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집떠나 50리 밖에 가서 공부하게 되였다. 집떠나기전 그는 시한수를 써서 아버지의 장부책에 끼워놓아 작별인사로 하였는데 길이길이 후세에 전해지고있다.    이 아들은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니    배워서 이름 날리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    뼈를 묻을 곳은 고향뿐만 아니거늘    인생 그 어디엔들 청산이 없으랴.                                                  일본인 사이고우 다까모리의 시를 고쳐서 쓴 시지만 17세 소년의 가슴에 품은 웅대한 포부와 장한 뜻 그리고 그 씩씩한 기개가 읽을수록 가슴에 와닿으면서 감동에 젖어들게 한다. 방문객이 많아  밀쳐댔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잠간 사색의 늪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그렇듯 웅대한 포부와 장한  뜻이 있었기에 집을 떠나게 되였으며 끝내는 큰 뜻을 현실로 이루어 만민의 대구성으로 인민의 마음속 태양으로 되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하여 아쉬운대로 귀로에 올라야 했다.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모주석의 생가를 다시 우러르면서 이제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방문하면서 기념사진도 꼭 남길것이리라고 나름 소원을 만들어보았다.
62    잊혀지지 않는 민병훈련 댓글:  조회:428  추천:0  2025-01-13
티비로 드라마를 시청할 때면 나는 전투편을 즐겨보는데 그러는 나를 두고 모두들 리해않된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기도 한다. 내가 전쟁하는 드라마를 즐겨본다해서 참군한적이 있거나 더우기 전투에 참가 해본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40년전의 민병훈련이 잊혀지지 않고 생생히 떠오르면서 가끔 추억속에 묻힐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때 년대에는 마을을 단위로 민병조직이 있었는데 민병조직이란 한마디로 간단히 말한다면 생산로동을 탈리하지 않는 무장조직을 말한다. 이를테면 농촌에서 농사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전제하에서 청년들로 조직된 무장조직이다. 무장조직이라 하여 항상 무기를 지니는것은 아니고 유사시에 쓸수 있도록 무기를 촌정부 무기고에 보관하고있었다. 생산로동을 리탈하지 않는만큼 일년농사일이 다 끝나고 음력설까지 쇠고나서 봄철일이 시작되기전에 한달에 가까운 시간을 리용하여 민병훈련이란걸 진행하는것으로  민병들의 자질을 높였다. 민병훈련은 향정부의 비준을 거쳐 향무장부에서 책임지고 조직하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약 130여가구가 살았었는데 청년들이 백여명에 가까워 한개 련대로 편성되였으며 한개 생산대를 한개 패로 세개 생산대에 세개 패로 편성되였었다. 무기는 보총 60자루, 돌격총(카빙총)9자루, 기관총6정이 있었다. 모두가 전쟁에 나갔던 무기들이지만 제때에 기름을 치고 보수하여 녹이 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민병훈련동원대회가 있고 총을 분여받은 이튿날부터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8리 상거한 향소재지에 집결하여 훈련을 받았다. 훈련내용은 대렬짓기로부터 전술훈련, 무기해부 및 원상복귀하기, 실탄훈련 등으로 이어졌다. 음력설이 지나 봄을 눈앞에 두고있으나 날씨가 제법 맵짰지만 종일 총을 메고 대렬짓기를 하다보면 땀이 흥건히 배여 나왔다. 간혹 앉아 쉬다가도 갑작스레 집합호각을 불면 총을 메고 달려가 렬을 짓고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전술훈련은 쾌속전진과 포복전진, 돌격 등인데 새끼줄을 가로세로 쳐놓아 가시철조망을 대체하였으며 적진이 앞에 있다고 가상하고 조별로 나뉘여 포복전진으로 가시철조망을 넘어서 엄페물을 찾아 적진을 살펴보다가 돌격하였는데 교관이 전과정을 지켜보고 점수를 매기였다. 무기해부와 원상복귀하기는 실내훈련이였는데 교관이 여러가지 총과 수류탄, 폭파약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한후 보총과 돌격총을 모두가 보는데서 해부하고 다시 원래대로 맞추고 우리더러 해보게 하였다. 비록 간단한것 같았지만 거기에도 순서가 있는지라 참답게 배워야 빠른 시간내에 해부하고 맞출수 있었다. 마지막 훈련내용은 모두가 제일 기다리던 실탄훈련이였는데 사격은 80메터,120메터 사격거리로 두번에 나누어 진행하였으며 탄알은 매번 10발씩이였고 수류탄은 한사람당10개씩이였다. 80메터 사격거리는 사격판이 보이지만 120메터 사격거리는 사격판이 아물아물거려 잘 보이지가 않았으며 눈을 크게 오래동안 뜨고있으니까 눈물이 나와서 더 보이지 않았다. 요구도 80메터 사격거리에서는 요구가 높았지만 120메터 사격거리에서는 사격판만 맞추어도 합격으로 인정해주었으니 백메터 넘는 사격거리에서는 명중하기 어렵다는걸 알수 있었다. 사격에서 관건은 3점일선(3点一线)을 지키면서 묘준이 되면 숨을 몰아쉬고 방아쇠를 살짝 당겨서 조그마한 공간도 없애고 다시 숨을 죽인후 방아쇠를 천천히 당겨서 발포한다는걸 그때 배워서 실천해보았었다. 수류탄은 안전을 고려하여 평지에서가 아니라 언덕밑에 내리던지고 명령에 따라 도랑에 납작 엎드렸으니까 10개를 줴뿌렸지만 어떻게 터졌는지 몰랐다. 교관이 수류탄뿌리는 자세나 행동을 보고 점수를 매기였으니까 함부로 일어나서 볼수도 없었다. 그렇게 20여일간의 민병훈련이 끝나면 과거급제하고 금의환향이나 하듯이, 큰일이나 하고 개선하듯이 마을로 돌아와 총을 바치면 다시 농사일을 해야 했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업군인이 아닌 민병훈련이지만 많은걸 배웠으며 특히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헤쳐나가는 정신을 배운것이 제일 값지다고 생각해본다. 나는 오늘도 티비를 켜고 “대청산을 피로 물들이다”란 전쟁편을 시청하고있다. 잊혀지지 않는 그때 그 시절의 민병훈련을 떠올리면서  
61    깔개가 없으면 습기가 올라온다 댓글:  조회:2389  추천:0  2014-09-01
(흑룡강신문=하얼빈) 큰 범위는 제쳐두고라도 지방의 “장”자를 가진 령도간부들의 순위를 놓고보면 농촌마을의 지서, 촌장이 제일 말등석임은 틀림이 없다. 비록 제일 말등석을 차지한 지서, 촌장이지만 전에는 마을과 그 마을에 사는 촌민들을 위하여 불철주야로 뛰여다니면서 로고를 아끼지 않고 많은 일들을 하였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지서, 촌장들이 몸에 치유할수 없는 병을 갖고도 불평불만이 없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혀를 내두르지 않을수 없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대가를 따지지 않았으며 그 직을 맡았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것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일해왔던것이다. 공신이란 바로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면 어떨가.   이제 사회가 발전하면서 많은것이 달라져가기 시작하였는바 제일 말등석에 쪽걸상을 가지고 앉은 한 마을의 지서, 촌장의 로고를 알아주기 시작하여 몇년전부터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일년동안의 수고비를 년말이면 괜찮게 지불해주어 그런대로 위안이 되고 또 일하는 지부서기나 촌장도 그런대로 자신들의 로고를 알아주니 힘을 갖게 된다고 할수 있다. 또한 현재 비여가는 마을을 지켜가면서 새농촌건설의 선두에서 땀흘리며 달리고있는 이가 바로 지서, 촌장들이니 그들의 로고를 알아주는것은 천만 무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외나들이와 더불어 연해도시로의 진출로 우리의 조선족사회가 흔들리고있으며 우리의 조선족농촌마을들이 비여가고있는 현실쯤을 지금 조선족사회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비여가는 마을을 지키면서 마을을 알뜰하게 꾸려나가는것은 자못 중요한 일이 아닐수 없으며 이런 일들을 하고있는 이들의 가슴에 마땅히 꽃다발을 달아주어야 한다. 여기서 물론 말등석에 쪽걸상을 놓고 앉은 우리의 지서, 촌장들이 선두로 나서고 자신을 바쳐가고있어 다소라도 위안이 되여가고있으며 또한 앞날이 기대되기도 한다. 헌데 살펴보면 말등석에 쪽걸상을 놓고 힘다하는 지서, 촌장들의 뒤에 쪽걸상도 없이 쪼크리고 앉았지만 소리없이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촌로년협회 회장들이다. 이제 어느 마을이나 찾아보면 젊은이는 지체자나 장애자를 제외하고는 근본 찾아볼수 없으며 중년이나 장년들도 쌀에 뉘격이고 오직 늙은이들뿐이다. 전에는 마을마다 청년조직이 있어 마을에 생기가 넘친것은 두말할것 없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젊은이들이 힘차게 밀고나갈수 있어 참으로 든든하였다. 허나 이제 늙은이들뿐인 마을에서 그런대로 마을을 지키고 또 마을을 꾸리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나가는 조직이 곧 로인협회인데 그 조직을 맡아 선두에 서서 모든 일들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 바로 로인협회 회장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서, 촌장까지는 말등석의 위치에 놓고 쪽걸상이라도 주면서 로고를 알아주지만 로인협회 회장만은 위치도 없고 로고도 말로만 진행되니 어딘가 서운한 느낌이다. 물론 지금까지 그 마을에서 평생을 살면서 잔뼈를 굳히고 갖은 풍상고초를 겪어온 분들이라 칭찬이나 로고를 따지는 일 없이 오직 마을을 위한다는 그 한곬으로 마음을 쏟고있으니 참으로 감격할 일이 아닐수 없지만 경제사회이니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들의 로고를 알아준다면 어떨가? 그러면 그들도 그것이 자각이 되고 동력이 되여 더 열의를 쏟을것이며 비여가는 우리 마을들을 더 잘 보살필수 있을것이다.   자고로 한 사회나 한 단체를 이끌자면 사람마다의 위치가 달라야 함은 의심할바 없는 일이며 또 그 위치에 의하여 순위가 결정되는것이다. 푹신한 의자로부터 쪽걸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앉을수 있다는것은 보기 좋으나 깔개도 없이 앉은 사람은 보기 좋을수가 없다. 물론 순위가 없으니 걸상은 바라지 않지만 깔개쯤이라도 주어 습기가 올라오지 않게 해주면 좋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깔개가 없이 앉으니 습기가 올라오고 그 습기가 오래되면 앉을수 없을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년세가 있어가지고도 한마음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위하여 헌신하는 로인협회도 돌봐야겠지만 그 선두에 서서 일하는 사람에게도 일정한 대가가 차례진다면 힘이 되고 열이 될것이다. 마치 습기가 올라오지 않는 깔개에 앉은듯이 말이다. 흑룡강신문 2014년 8월 29일자
60    생각을 바꾸면 거리가 줄어든다 댓글:  조회:2547  추천:1  2014-06-18
중한수교 20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조선족들에게나 한국사람들에게 더는 한국이나 중국이 생소한 느낌을 주지 않으며 우리들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다녀왔고 현재 몇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기에 체류하고있다. 한민족으로서 짧지 않은 20년동안 서로 래왕하고 또 20년동안 함께 해왔다면 이제는 거의 한집식구나 다름없이 되여야겠지만 아직도 갈등과 불신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봐야 할것이다. 물론 20년 세월을 지나오면서 서로의 사이가 많이 개선되였다고 할수는 있지만 아직도 때로는 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 가슴을 아프게 하고있다. 어쩌면 그 주요 원인이 생각을 바꾸지 않고 자기만의 옛생각을 그대로 가지고있는데서 비롯된것이 아닐가 생각해본다.    모두가 알고있는 일이지만 간단히 실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피부로 느껴서 알겠지만 한국사람들은 현재 우리가 사는데 비하면 정말 피곤하게 산다고 할수 있다. 날이 밝기 바쁘게 집을 나서면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건 아주 정상적이니깐. 아침일찍 출근시간과 저녁 열한시가 넘어 퇴근시간때에 지하철을 리용해보면 그 시간대에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비고있으며 차안은 발디딜 틈조차 없다. 우리 여기서는 그 시간대면 아마 집에서 편안히 누워 텔레비죤을 보거나 아니면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또는 달콤한 꿈나라에 들어갔을것이다.    필자도 한국에 갔던김에 한국생활을 피부로 체험해보려는 생각으로 식당에서 일해보았는데 한국식당일이 힘든 원인의 하나가 한국사람들은 낮술을 마시지 않고 식사만 하기에 상 하나를 차지하고 식사하는 시간이 길어서 20분, 빠르면 십분이면 되니깐 손님들이 륜번으로 쉴새없이 들이닥치니 당연히 식당일군들이 힘들수밖에 없는것이다. 우리 여기서는 점심시간도 상에 앉으면 짧아서 한시간, 길면 두시간씩 술상을 벌리고 저녁에는 아예 퍼더버리고 앉아서 서너시간씩 술을 마시는건 희한한 일이 아닌 아주 례사로운 일로 되고있지 않는가.    지난 여름 한국에서 연수하는 기간에 여수세계박람회에 가보게 되였는데 때는 삼복무더위라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날 어찌하다보니 자동판매기가 있는 그늘밑에서 두분 한국분들가운데 끼여 땀을 들이면서 담배쉼을 하게 되였는데 그들은 자동판매기에서 랭커피 두개를 뽑아 여유작작하게 나누어 마시면서 나는 근본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연수기간 우리의 학습과 생활을 책임진 분들이여서 막연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면목있는 사이였다. 우리 여기라면 금방 면목을 알아서 인사를 나눈 사람이 곁에 있다면 먼저 그분에게부터 드리고 다시 자신들의 차지가 될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실례들은 많고도 많다. 생활의 이구석 저구석에서 우리의 생활과 비교해보면서 우리들의 생각을 하나하나 바꾸어야지 않을가. 혹 어떤 이들은 왜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가고 질문할수도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한국이라는 곳에 정착하고있기때문이다. 우리 말 속담에 “산에 가면 산노래, 들에 가면 들노래”라는 말이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갔으면 마땅히 그들의 생활방식과 그들의 사고를 생각하고 따라야 할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내키지 않는 면이 많을수 있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을수록 일하고 생활하는 자신이 엄청 피곤해질것이고 스트레스는 쌓이고 쌓이게 될것이며 그런것들이 종당에는 자신을 불리해지게 하거나 화근을 불러오게 될것이다.    한국인들 역시 우리 조선족들이 너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한국에 간것이 아니라 좀더 잘살아보려는 생각으로, 또 한민족으로서 언어와 생활습관의 동질성으로 한국행을 했다는 생각을 해주고 어지럽고 힘든 일, 3D업종에는 우리 조선족들이 한몫 해줘서 고맙게 여긴다면 서로의 거리는 훨씬 줄어들것이다. 한국인들도 40대까지의 젊은 층들은 중국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있지만 40대후반의 년세있는 세대들은 아직도 낡은 관념을 채 가시지 못하고있는것을 필자도 직접 목격했다.    환경에 적응할줄 아는 사람만이 살아남을수 있다 하여 적자생존이란 말이 생겼는데 살아남으려면 마땅히 그 환경에 적응하여야 할것이다. 그 환경에 적응하는것은 스스로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적응하게끔 부추켜주는것도 빼놓을수 없는것이다. 우리 조선족들이 생각을 바꿀 때 한국인들 역시 다른 시각으로 보고 생각한다면 서로의 거리는 훨씬 줄어들것이며 어느날인가는 서로의 사이가 무람없이 될것이리라 믿고싶은 마음이다. 해란강닷컴 2014,6,17.
59    높이 서서 멀리 바라보자 댓글:  조회:2649  추천:1  2014-05-13
우리말 속담에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 뜻인즉 십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것이 없다는것이다. 지금 음미해보면 이 속담은 그제날 락후하여 변화가 느린 사회배경에서 만들어진것이기에 현재는 근근히 표현에 그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여 모든것이 전자에 의해 정보로 처리되는 현대사회는 일년이라도 강산이 변해가고있다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말그대로 일사천리로 발전하는 사회다보니 자고깨여나도 느껴지는건 오로지 변화뿐이다. 작은 도시도 일년만 지나면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가고있으며 층집은 말그대로 땅을 차고 수풀처럼 일어나 사람들의 눈을 뒤집히게 하고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6, 7층짜리 아빠트였었는데 요즘은 20여층짜리 고층아빠트가 어깨겨룸을 하면서 일어서고있으니 그 변화를 한입으로 다 표현할수 없다. 거기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엄두조차 못내던 자가용이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 우리 모두에게 한낱 평범한 일로 다가서고있다. 수풀처럼 일어나는 층집도, 날따라 늘어가는 물매미 자가용도 좋지만 그로 하여 가장 힘든 일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길에 나서는 일이다. 애초에 층집을 지을 때는 서로가 한치의 땅도 양보없이 짓다보니 중심거리를 제외한 골목길들은 그제날의 길넓이대로 늘이지 않게 되였는데 그당시까지만도 그런대로 행인들의 통행에 괜찮았었다. 헌데 여기저기 층집들이 수풀처럼 일어나고 도시인구의 증장과 더불어 또 차들이 늘어나면서 그 좁은 길은 미여질 지경으로 되였기에 문밖을 나서서 도보로 일보러 다니자면 촌각도 헛눈길을 팔지 말고 신경을 고도로 도사려야 하는데 피로한건 둘째로 심신이 괴로워서 사맥이 나른해지지 않을수 없다. 더우기 차가 많아지면서 중심거리 곳곳에 붉은 등과 푸른 등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감시카메라까지 안장하다보니 차주들은 될수록 골목길을 리용하려고 하는데 그로하여 좁은 골목길은 말그대로 미여질 지경이여서 때로는 도보로도 발을 옮겨딛기가 힘들다. 어린애가 있는 집들은 항상 걱정과 불안속에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맞이한다. 애초에 집을 지을 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람도 차도 불어나 상상외로 시끌벅적할것이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그 당시로서는 좀 내키지 않는 생각일지라도 길을 넓히면서 집을 지었을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차를 운전하는 사람도 길을 가는 사람도 힘들지 않을것이다. 문제는 코앞만 보고 좀 더 앞을 내다보는 장원한 타산이 없었기때문이 아닐가 생각한다. 현재 거의 모두가 아빠트에서 생활하고있는데 제일 밑층에서의 감수와 제일 높은 층에서의 감수는 확연히 다를것이다. 낮은 층은 오르기는 쉬워도 갑갑하고 보이는것이란 오직 맞은편 아빠트의 같은 층밖에 없을것이지만 높은 층일수록 비록 오르기는 힘들어도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가슴이 탁 트이면서 거뜬한 감을 줄것이며 앞을 내다보면 시내를 벗어나 저멀리 산등성이까지 볼수 있다. 그러고보면 힘이 들더라도 높은 층에서 저멀리 산등성이까지 바라볼수 있는 즐거움속에서 사는것을 더 선호할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지혜와 너무도 흡사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집을 지을 때 길을 넒히는데 내놓는 땅이 비록 아까울지라도 내여놓는다면 길을 번듯이 넓히면서 아빠트를 지을것인데 그러면 시간이 지나 사람과 차가 늘어난다고 할지라도 시원스런 길에서 활보하면서 다닐수 있을것인즉 앞을 내다본 명지한 처사가 아닐수 없다. 그 당시 아깝다고 내여놓지 않고 그런대로 집을 짓다보니 몇년이 지난 지금 초가집도 아닌 아빠트를 허물수도 없는 딱한 처지여서 결국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힘에 부치지 않을수 없다. 낮은데 서서 코앞만 내다보기보다는 높은데 서서 멀리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가. 낮은데서 내다보았자 코앞만 볼것이지만 높은데 서서 바라보면 멀리 내다볼수 있을것이며 그 바라보는 즐거움은 멀지 않아 현실로 다가올것이고 그 다가온 현실은 그렇듯 가슴뿌듯할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어떤 일에서나 높은데 서서 멀리 바라보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면 되돌릴수 없는 후회는 적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해란강닷컴  
58    개는 어디까지나 개이다 댓글:  조회:3260  추천:1  2014-05-08
일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참으로 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구역아빠트에서 있은 일이다. 7층에 거주하는 집에서 10년도 더 넘어되게 개를 길러왔는데 이제 그 개도 나이를 먹은 탓에 로쇠해져서 수염도 흰 수염이 나면서 얼굴이 모두 희여졌을뿐만아니라 그에 따라 운신도 버거워 7층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려면 힘에 부쳐 헐떡이면서 몇번씩 쉬여야 한단다. 하여 이제는 개도 스스로 힘에 겨운것이 알리자 아예 7층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고 집에 죽치고 누워있는데 하루 세끼를 쏘세지와 햄버거로 “대접”하는가 하면 목욕까지 시켜주면서 그 정성이 너무나 지극하여 보는 사람들이 보기가 민망할 정도라고 한다. 옆사람들이 가져다 버리든지 아니면 처리하라고 하면 펄펄 뛰면서 화를 낸다고 하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하긴 개도 생명을 가졌고 또 오랜 시간동안 기르면서 정들었으니 다소 리해는 되지만 그렇듯 정성을 다하는데는 어딘가 썩 내키지는 않는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개를 제일 천한 짐승으로 생각해왔으며 제일 천한것과 속된것을 말할 때면 의례 개에 비유하여 말하였는바 우리 말 속담에도 개와 관련한 속담들이 많고도 많으며 우화들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전부터 개를 기르는것은 집지킴을 시키기 위한것이고 그러다 다 자라면 잡아먹기도 하기 위해서였다. 너무 멀리는 몰라도 지난세기 70년대부터 90년대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개를 키워서 잡아먹거나 개를 사서 잡아먹는 등 추렴들을 자주 하였으며 또 그것을 모두가 함께 모여 즐겁게 보내는 시간으로 간주하였었다.   헌데 언제인가부터 서양의 물이 들어오면서 개에 대한 관념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는바 우리가 전에는 보지도 못하였던 앙증맞거나 혹은 괴상하게 생긴 개들이 높은 몸값으로 우리의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였으며 또 그것을 일종 자랑으로 혹은 부의 상징으로 간주하기까지 하고있다. 길을 가다가도, 강변로를 산책하다가도, 아침시장을 돌 때도 개를 안고 다니거나 개의 목에 맨 줄을 쥐고 어깨를 살리고 으쓱해서 다니는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볼수 있다. 그러는 그들이 자신들이 아주 대단해보일거라 생각하는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개털을 풀풀 날리고 또 이리저리 쏘다니며 걸어가던 개가 아무곳에나 마구 변을 보아 다른 사람들의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준다는것은 아예 생각해보는것 같지 않다.   언젠가 한국 TV에서 본 이야기인데 한 가정부녀가 개의 옷을 각양각색으로 백벌이나 갖추어놓고 하루에도 몇번씩 갈아입히면서 거기에다 신까지 받쳐 신기는것을 보고 그 개가 분명 개였지만 그 순간만은 정말 개인지 의심할 지경이였다. 한것은 너무도 분에 넘치는 사람대접을 그것도 고급대접을 받고있으니 말이다. 확실히 현재 애완견들은 사람이상의 대접을 받고있는것만은 사실이다.   언젠가 TV에서 본데 의하면 아프리카를 비롯한 빈민구의 어린이들은 하루에 고작 한끼도 먹지 못하고있으며 단돈 몇십원이 없어 약을 먹지 못하여 실명되고있거나 목숨을 잃어가고있다. 그들에게 만약 지금 애완견의 하루 이틀 먹이에 들어가는 돈만 준다면 아마도 큰 도움이 될수 있을것이다.   자신의 생활이 넉넉하여 그리고 자신의 취미가 그러하여 개를 기르는데 남의 잔치상에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는격으로 참여할 일은 아니겠지만 개가 아무리 령리한들 개는 어디까지나 개이지 필경 사람은 아니지 않을가 생각한다. 물론 관습의 차이는 있겠지만 개에게 너무 고급대접을 하거나 정성을 다하는것은 좀처럼 리해가 가지 않는다.   개에게 그렇듯 고급대접을 하고 정성을 쏟을 때 한번쯤 생각해보는것도 좋지 않을가. 나의 부모님께, 나의 형제에게, 나의 친척들에게, 나의 친구들에게, 나의 동료들에게, 나의 이웃에게 그만큼한 친절과 정성을 베풀어보았는지를 말이다. 만약 나와 관계되는 모든 주위사람들에게 항상 감사해하면서 친절과 정성을 베푼다면 말그대로 정많은 사람이 될것이며 그와 함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정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될것임은 더 말치 않아도 될것이다.   그렇다 하여 개를 너무 천하게 굴거나 기르지 말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개는 어디까지나 개인만큼 개로서의 대접을 받으면 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해란강닷컴
57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해야 한다 댓글:  조회:2297  추천:3  2014-04-21
대학입시를 코앞에 두고 어떻게 하면 조선어문성적이 제고될수 있겠는가 물어오는 학생들이 있는데 성적이 올라가지 않아 속을 태우는 그들의 안타까운 마음은 리해할수 있지만 그렇게 물어오는데는 말그대로 코막고 답답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선어문성적이 낮은 학생들 대부분이 우리 말로 된 단어의 기본 뜻을 알지 못하고있으며 그 단어의 뜻을 몰라 물어오게 되는데 해석하면 듣기 싫은 말이지만 소귀에 해금타고 소귀에 경읽기라고 하면 가장 적합할것 같다. 허나 그 말뜻을 한어로 바꾸어서 해석해주면 인차 깨우치는 그들이다. 허나 한어로 깨우친들 무엇하랴. 조선어문은 필경 우리 말로 된 조선어문이지 한어로 된 한어문이 아님에랴. 그러다보니 우리 글로 된 과외독서는 아예 하지도 않아 단어장악량이 너무도 적기에 작문이라고 지어보았자 너무도 메말라 읽을멋이라고는 없다. 하니 어찌 단시일내에 조선어문성적을 제고시킬수 있겠는가.   현재 우리 조선족학교들의 현황을 보면 소학교든 중학교든 교정에서 학생들 거의 모두가 한어로 일상대화를 하고있으며 또 그렇게 한어로 대화를 하는걸 아주 정상적인 일로 혹은 자랑으로 간주하고있다. 특히 고중같은 학년을 본다면 조선어문을 제외하고 거의 한어로 혹은 한어와 조선어를 병용으로 사용하여 교수하는 사례가 많기에 한어로 접촉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있는 현실이다. 거기에 현재 대학을 졸업한 조선족청년들은 교직에 몸담으려 하지 않다보니 한족청년들이 우리의 교육현장에 참여하는 수가 날따라 늘어나고있는 실정인데 그들은 일색 한어로 교수하고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학생들이 우리의 언어와 문자로 표달할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이제 조선어문시간이 가장 유일한 표달시간으로 되고있다.   학교마다 한족교원들이 십여명씩 되고 또 나날이 늘어나는 추세이다보니 학교의 대소형회의나 활동에서 우리 말이 아닌 한어가 늘어나고있으며 학급의 주제반회의나 문오활동도 살펴보면 우리 말보다는 한어가 더 많은 비례를 차지해가고있다. 때로는 이게 조선족학교가 옳은가싶을 정도로 얼떠름해질 때도 있으면서 그 뒤끝은 서운한 마음이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며 씁쓸해지는건 어쩔수 없다.   개혁개방 30여년, 중한수교 20년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대이동이 생기면서 우리의 언어문자와 전통문화를 어떻게 지켜나갈것인가가 큰 문제로 대두하고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하여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과 지성인들이 우리 민족 언어문자를 살리고 전통문화를 이어가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힘을 고스란히 바쳐오고있는 미거가 우리들의 마음을 흥분하게 하고있다.   우리 민족 언어문자를 지켜가고 전통문화를 어어가는 가장 전초적인 진지가 바로 우리의 교육임은 누구나 자인하는 일이다. 하다면 우리 민족 언어문자와 전통문화를 지켜가는 우리의 교육은 구경 무슨 일을 해야 할가? 간혹 웅변대회나 랑독랑송대회, 전통문화에 대한 강의로 우리 민족 언어문자와 전통문화를 지켜나가는데 한몫 했다고 한다면 너무 간단하면서도 과분한 평가가 아닐가 생각한다. 언어문자의 정확한 사용과 활용은 한두번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며 한두번의 강의로 전통문화가 계승발전되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세계화의 길에서 우리 민족 언어문자를 살리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면 지속적인 노력은 물론 보편화, 보급화가 되여야 할것이다.   보편화, 보급화가 되여야 할 전초기지인 우리의 교육현장이 말짱 한어로 된다면 어찌 언어문자를 살리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서 자기의 역할을 했다고 할수 있겠는가? 민족의 언어문자가 소실되고 전통문화가 잊혀져간다면 그 대부분의 책임을 우리 교육이 짊어져야 할것이다. 하다면 이제 우리는 더는 다른 누구를 믿거나 다른 누구에게 의탁하지 말고 우리가 바로 이 일을 해야 함을 심심히 느끼고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해나가야 할것이다. 한어도 잘해야 하겠지만 민족의 언어문자도 잘하게끔 조건과 기회를 마련하여주어 자라나는 후대들이 진정 우리 말과 글에 깃든 향기를 느끼게 하여야 할것이며 전통문화로부터 조상들의 얼을 느끼고 숭배할수 있게 하여야 할것이다. 다른 누가 해아 하는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자각하고 우리의 교육이 진정으로 우리의 언어문자를 살리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기름진 터전이 되게 하여야 할것이다. 해란강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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