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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소설 시 수필 문학 철학 력사 예술 天时 地利 人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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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0 ]

10    둥글둥글 살아봅시다/외 2수 /가사 댓글:  조회:1423  추천:0  2019-11-30
고성리 내 고향   산 좋고 물 맑은 두메산골 내 고향은 하늘아래 첫 동네 고성리라오 뻐꾹새 종달새 정답게 지저귀고 상천벌 하천벌 황금가을 불러오오 이깔나무 백양나무 어서 오라 반겨주고 머루 다래 앵두 돌배 탐스럽게 열리는  아, 그립고 그립소 군함산아래마을 꿈에도 가고 싶은 고성리 내고향 경치 좋고 인품 좋은 보배 세상 내 고향은 하늘아래 첫 동네 고성리라오  아가씨들 산나물 입안에 군침돌고 남정네들 반디질 소천어국 얼큰하오 신랑각시 소꿉놀이 숨박꼭질 신나던곳 산에 들에 강기슭에 어디 가나 정다운 아,  그립고 그립소 홍기하폭포소리 언제나 가고 싶은 고성리 내 고향       둥글둥글 살아보세 지지고 볶고 사는 인생살이 이것저것 따져서 무엇하리오 저기 저 푸른 하늘 제비처럼 나래 펴고 훨훨 날면서  둥글둥글 살아보세. 지지고 볶고 사는 인생길에 니것내것 따져서 무엇하리오 저기 저 넓은 바다 하얀파도 처럼  출렁출렁 헤염치면서 둥글둥글 살아보세. 정이란 뭐길래 정이란 뭐길래  겨우겨우 들인정  이 정을 어떡하나 애초에 이럴줄 알았다면은  정들지나 말것을 정이란 뭐길래  정이란 뭐길래  정때문에 울고 정때문에 웃고  정 때문에 웃는다 정이란 뭐길래  이미 깊이 들인정  이 정을 어떡하나 누구는 맘대로 정들여 놓고  이제는 내탓이란다 정이란 뭐길래  정이란 뭐길래  정때문에 울고  정때문에 웃고  정 때문에 웃는다. 。。。。。。  프로필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9    [ 단편소설 ] 배 신 댓글:  조회:1959  추천:0  2019-11-30
    1   한가한 저녁, 윤희는 딸 혜단이가 헤집어놓은 옷장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안 입는 옷들을 걷어내고 계절별로 나누어 차곡차곡 개여놓느라니 몇해전에 리혼수속을 끝내고 짐을 싸가지고 집을 나오던 때가 떠오른다. 그날이 어제 같은데… 아무렇게나 볼품없이 나딩구는 불쌍한 옷보따리들을 바라보노라니 리혼하고 집을 나온 자기의 신세처럼 더없이 가련하고 초라해보였다. “두번 다시 너희들을 초라하게 하지 않을게, 미안해. 너희들도 나도 더 이상 구질구질해지지 말자.” 윤희는 말 못하는 보따리들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딸애까지 자기처럼 초라해지는게 싫어서 잘사는 아빠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살라고 그처럼 얼리고 닥치고 했는데도 기어이 엄마를 따라나섰다. 사춘기때의 쌀쌀맞던 그 서슬은 어디로 갔는지? 자기를 두고 갈가봐 이사짐차에 먼저 올라타고는 겁 먹은 눈으로 엄마만 하염없이 쳐다보던 딸애. 대체 초라함의 극치는 어디까지일가? 불쌍한 내 새끼. 불쌍한 내 보따리. 불쌍한 윤희. 배짱을 부리며 갑자기 리혼을 하고보니 집도 없고 돈도 없어 살길이 막막하였다. 남편이 일년씩이나 미루면서 리혼수속을 해주지 않아서 지칠대로 지친 윤희, 사람이 정 떨어지니 하루라도 빨리 해탈하고싶은 마음뿐이였다. 하여 윤희는 자기 몫의 가게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리혼수속을 끝냈던것이다. “살기 싫은데 그깟 재산이 뭐 필요해? 마음 편히 살아야지, 돈이야 다시 벌면 되지.” 매일 BMW를 몰고 여유작작하게 출근하던 일용잡화점 사장인 윤희는 몇년만에 다시 일원짜리 공공뻐스를 리용하여 출퇴근할수 밖에 없었다. 세집살이도 십몇년만에 다시 하게 되였다. 장사도 이상하게 내리막질한다. 돌려쓸 돈도 없어서 달마다 신용카드를 긁을수 밖에 없다.  대부금에, 보험비에, 애 학잡비에… 경제적압력도 대단하다.  전에는 친구들 모임에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기분에 따라 취하고싶으면 취하고 놀고싶으면 놀고 했는데 혼자가 되고보니 마음대로 취할수도 놀수도 없다. 책임져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길을 지나다가 혹시 교통사고라도 당할가봐 조심스럽다. 혼자 살면 힘들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겪어보니 생각밖으로 산 넘어 산이다. 모든것이 가난했던 옛시절로 돌아간것 같다. 전에는 한해에도 두세번씩 친척, 친구들의 잔치집 둘러리를 섰댔는데 인제는 결혼식에 가서 춤 추기도 저어된다. 딸애를 보면 죄 없는 딸애가 불쌍하고 다시 남편한테 되돌아가서 살자니 자기 자신이 불쌍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친척과 친구들이 업신여기는것 같아 늘 신경이 쓰이고. 웬간한 정신력으로는 정말 버텨내기 힘들다. 리혼이 진짜 할짓이 아니라는것을 세포 하나하나로 느끼게 된다. 흔히 돈이 별거 아니라고 우아하게들 말하지만 정작 돈이 궁해봐야 돈이란 물건이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무시하고 괴롭히고 초라하게 만드는지 알수 있다.     2   “준걸아, 저녁에 선약이 없지? 술이나 한잔 할가? 다섯시 반까지 김삿갓꼬치집으로 슬슬 걸어오렴. 나도 그 시간에 맞춰 갈게.” “알았어.” 동주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준걸이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둘은 커서도 자별한 사이다. 3년전에 귀국한 준걸이는 마음이 늘 허전하게 보냈다. 십년 동안이나 미국에 있다가 돌아오니 “신생사물”이 너무 많아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늘 다른 세상에 온것처럼 어리벙벙하다. 물가는 또 어찌나 치솟았는지 백원짜리 한장을 터뜨리면 도적을 맞히기라도 한것처럼 금방 거덜이 났다. 맥주집이나 커피점도 거리에 총총하고 밤문화도 미국 못지 않았다. 가족끼리 려행도 다니고 친구들끼리 파티도 벌리고 모두들 제법 사는 멋이 있어보였다. 거리에는 외제차들이 굴러다니고 친구들도 여유 있게 잘살고있다. 아무리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번것 같아도 제고장에서 출근하면서 발전한 친구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잘사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애초에 직장을 버리고 나온 자기가 바보 같았다. 그래도 동주가 외국에서 고생한 준걸이가 아직 국내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외로와한다면서 자주 술장소에 불러주었다. 물론 준걸이도 미국에서 돈을 꽤나 벌었노라고 상황에 따라 술값을 척척 치렀다. 윤희는 친구들이 남편을 위로해주는건 고마왔지만 가족을 제쳐놓고 남자들끼리 너무 붙어다니니 탐탁치 않았다. 아니, 야속했다. 사실 오래동안 헤여져 산 준걸이네 부부는 서로 소통이 필요하였다. 헌데 남편이 쩍하면 밖으로 나돌아 얼굴을 보기마저 쉽지 않았다. 매양 그때마다 윤희는 속수무책으로 한숨을 토해내며 독수공방할수 밖에 없었다. 윤희에게는 딸애랑 남편이랑 함께 세식구가 오붓하게 가족분위기를 한껏 누리며 해보고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등산, 캠핑, 가족려행, 축구구경… 다 다니고싶다. 또한 원없이 집에서 함께 뒹굴면서 그동안 그리웠던 이야기, 고생스러웠던 이야기도 나누고싶다. 윤희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남편대로 굴레 벗은 말처럼 바깥생활을 즐기느라 안해의 기분이나 정서 같은건 관심도 없었다. 남편이 외국에 가있는 동안 윤희는 집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도 잘 벌고 육아교육에도 열중하고 사업체도 탄탄하게 키웠다. 요즘 같은 세월에 보기 드문 녀자였다. 그래서 마누라를 잘 만났다고 남편의 친구들도 부러워했다. 착하지, 돈 잘 벌지, 능력이 있지. 그만큼 윤희에게는 가족과 가게가 전부였다. 그런데 남편이 돌아온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남편이 친구가 더 중해서 밖으로만 나도는데 나라고 혼자서 가족타령만 부를수 없잖아. 놀면 좋은줄 누가 몰라? 윤희도 점차 친구모임이나 동창모임에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미국에 있을 때에는 지인들을 만나 늦게까지 수다를 떨다가 와도 눈치 볼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먼저 집에 돌아와서 기다리는것 같아서 송곳방석에 앉은듯 편하지를 않다. 그래서 아예 일찍 집에 돌아오군 하였다. 그런데 윤희가 모임에 참가하고 와도 남편은 늘 집에 없었다. 또한 남편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며 놀았는지 묻지도 않았다. 반겨주는 따뜻한 가족이 없고 남편의 사랑을 못 받는 윤희는 외로왔다. 그날도 윤희가 동창들과 노래방까지 거치고 집에 돌아오니 역시 남편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여보, 애타게 서방님이 오길 학수고대하는 바보 한명 있으니 일찍 오면 안되겠슴까?” “금방 갈게. 다른 친구들의 안해는 전화가 오지 않는데 왜 당신만 자꾸 전화질이야? 창피하게.” “다른 친구들은 당신처럼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게 아니니깐 전화 안하겠지. 전번에 부부동반으로 단풍구경을 한번 가자고 하니 친구들이 거의다 외토리라며? 딱 한명만 마누라가 있는데 한국 간지 6년째 되도록 기별도 없다고 했잖슴까? 그러니 다른 친구들은 빨리 집에 오라고 전화할 사람이나 있겠슴까? 가족이 없는 사람처럼 친구만 친구라고 나다니다가는 당신도 외토리신세가 되지 않나 보쇼. 내가 지금 벼르는중이니 조심하쇼 예. 그리고 우리 친구들은 모임할 때 혹시 남편이 전화라도 오면 짐짓 나무라는척하며 은근히 재밌게 산다고 자랑합디다. 따지고보면 아직까지 당신의 행처를 관심하는 사람이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전화하는게 불편하다면 이젠 다시 전화하지 않을거니깐 남편에게 관심 없다, 섭섭하다, 이런 말 하지 마쇼 예.” “재수없이 말하지 마. 그 패들이 아니고 지금은 다른 친구들과 있단 말이야.” 말투가 신경질적이다. 외국에 가있더니 성격이 완전히 괴벽해졌다. 성낼 일도 아닌데 성을 내는가 하면 재수없다는 말은 아예 입에 달고 산다. 보살펴야 할 가족은 관심도 하지 않고 완전히 자아중심적이 되여버렸다. 남자들도 갱년기가 있다더니 갱년기일가? “재수없다는 말 그만하면 아이됨까? 그 말을 입에 달구 사니 재수없는 일들이 자기넬 부르는줄 알고 당신만 자꾸 따라다니지. 듣는 나까지 막 재수없어지려 하네.” 윤희는 밸이 난김에 콱 쏘아붙였다. “됐어, 금방 갈게. 당신 전화할 때마다 돈을 떼워. 내가 돈 다 잃으면 좋겠어? 마작 놀 때 다시는 전화하지 마.” “빨리 오쇼 예. 12시를 넘기면 문을 안으로 잠그고 열어주지 않겠슴다. 집이 없는 사람처럼 맨날 밖에서 살면서.” 10시에 전화했을 때 금방 온다던 남편은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가끔씩 조용한 아빠트복도에서 울리는 발걸음소리가 제 집 문어구로 오는듯하다가도 웃층으로 올라갔다. 늦게 귀가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허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남편의 발걸음소리는 아니다. 바깥동정에 너무 신경을 도사렸더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났다. 생물시계가 잘못됐는지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으니 잠도 오지 않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노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매일 노래처럼 일찍 돌아오라고 해도 서울에 감투부탁이였다. 미국에서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는데 정작 돌아오니 여러가지로 생활습관이 맞지 않아 늘 부딪쳤다. (마작판이 끝나 밤참 먹으러 갔을가? 이렇게 자지 못하는줄 알면서 일찍 올거지…) 그러다가 비몽사몽간에 어렴풋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손더듬으로 핸드폰을 집어들고 시계를 보니 새벽 한시였다. 남편은 조용조용 들어와서 TV를 켜놓고 객실 쏘파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사업때문에 저토록 늦게까지 바삐 돌아친다면 윤희가 얼마나 감지덕지해할가? 윤희는 일어나서 그동안 열번도 더했을 얘기를 곱씹었다. 이러다가 연설가가 되는게 아닌가싶다. “매일 만나는 친구들인데 저녁 먹고 10시쯤 되면 그동안 외국에 가있어서 안해와 얘기도 많이 나누지 못했는데 좀 일찍 들어가서 안해를 동무해줘야겠다면서 엉뎅이를 떼고 일어서면 친구들도 말리지 않을게 아임까. 그리고 슬슬 뭔가 해서 제고장에서 기반을 닦을 타산을 해야지 매일 밖으로만 나도니… 벌어온 돈을 다 써버리면 또다시 외국에 나가겠슴까?” “집에 와서 그새 좀 놀았다고 벌써 바가지를 긁소?” “그게 아니라 뭔가를 하면서 놀라는 말이지. 그렇게 논게 이젠 몇년째임까?” “당신 돈 잘 번다구 작작 너덜거려.” “남들은 월급은 월급대로 타면서 휴일에만 마작을 노는데 당신은 월급이 있슴까? 아니면 돈이 나오는 사업체가 있슴까? 무시를 당하면서 힘들게 벌어온 돈을 그렇게 값없이 쓰겠슴까? 당신 눈에 안해와 자식이 보이기나 함까? 가족은 둘째 치구 당신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살면 아이되잼까? 한 나이 젊었을 때 로후대책을 세워야지.” “미국에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미국에 가서 일한 당신만 고생하구 집에서 부모와 애를 돌본 나는 놀았슴까? 어쩜 늘 자기만 고생했다고 말함까? 그래 나는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마작치기 간 남편이 언제 돌아오나 멀뚱멀뚱 기다려야 됨까? 립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쇼. 그동안 애면글면해서 남부럽지 않게 갖출거 다 갖추고 이제 좀 살만한데 왜 우리는 비 오는 날이 해가 난 날보다 더 많슴까? 제발 좀 서로 아끼면서 살기쇼.” 그러거나말거나 남편은 무거운 짐을 윤희 혼자만 지고 가라는듯 모르쇠를 댔다. 어쩌다 이런 남자를 만났는지 이대로 나간다면 조만간에 미쳐버릴것 같았다. 안해가 열심히 맞벌이를 해서 잘살자고 애를 쓰는데 한 가정의 기둥인 남편이란 사람이 허구한 날 마작판에만 빠져있으니 윤희로서는 도저히 마음의 평형을 잡을수 없었다. 지금이 어떤 세월인데? 나다녀보면 종종 초라해진다. 상대적빈곤감! 남들이 잘사는걸 보면 기분이 상해 못살겠다. 요즘 같은 세월에 애 학잡비, 생활비, 상업보험, 대부금, 거기에다 부조돈까지… 돈 쓸 일들이 줄을 쳐서 기다린다. 돈 없으면 촌보난행이라는 말에 완전히 공감이 간다. 준걸이는 오늘도 마작판에서 돈을 꽤 떼웠다. 아침부터 바가지를 긁은 안해탓이였다. 그동안 미국에서 그 잘난 개도 안 먹는 돈을 버느라 굽신거리며 살아왔었다. 오죽했으면 돌아올 때 미국쪽에 대고 오줌도 안 싼다고 맹세했겠는가. 그런데 정작 집에 돌아오고보니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마작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젠 어느새 푹 빠져버리고말았다. 그동안 미국에서 업수임을 당하면서 악착같이 번 돈을 야금야금 마작에 거의다 탕진하였다. 미국에 가지 말고 여기서 아무 일이라도 시작했더라면 지금쯤은 기반이 잡혔을텐데 10년 외국생활때문에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안해가 몇년째 백수생활을 한다고 구박해도 속수무책이다. 이러다가 돈이 다 떨어지면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는 안 간다던 외국으로 나갈수 밖에 없다.     3   -나와요, 문앞에 다 왔어요. -집에 가더니 벙어리가 됐나? 련락이 없네. 마누라가 무섭긴 무서운가보네. 일일드라마도 다 봤겠다, 뉴스도 끝났겠다. 야심한 밤 마작 놀러 간 남편이 돌아오자면 한창 이른 시간인지라 윤희는 객실 쏘파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청하다가 남편이 미국에서 사용했던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숭배하는 신(神)에 집착하듯 남편이 외국에 가있는 동안 문학에 깊이 빠진 윤희는 시간만 나면 책이든 핸드폰의 메시지든 손에 잡히는대로 몰입해 잘 읽었다. 그런데? “어이쿠 망칙해라. 이게 무슨 메시지람?” 날씨예고거나 명절인사 같은것으로 가득찼을줄 알았던 메시지창엔 지우지 않은 이상야릇한 문자들이 한달 사이에 무려 200여개나 저장되여있었다. 대화내용으로 보아서 가정이 있는 불륜남녀가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주고받은 닭살 돋는 내용였다. 윤희는 너무도 뜻밖의 메시지에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소설에서만 보아오던 애매한 관계에 호기심을 잔뜩 품고 단숨에 쭉 내리읽었다. 오- 남편이 미국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핸드폰을 가졌다더니 그 핸드폰주인이 애인이 있었던 모양이네. 쯔쯔, 이 녀자 나쁜 녀자네.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와… 어머, 이 녀자 말발 괜찮네… 헌데 남자도 꽤 재밌게 맞장구치고있지 않는가? -안해가 왔어, 이만하자. 래일 또 봐. -알았어 준걸씨, 싸(사)랑해, 내 꿈 꿔. 마지막 메시지를 읽는 순간에야 윤희는 비로소 그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남편임을 알게 되였다. “와아- 세상에…” 자기가 되려 나쁜짓을 하다가 들킨것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뛰였다. 갑자기 날벼락이라도 맞은듯 머리가 뗑해나면서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어… 어떻게 내 남편이?”  일부러 뒤를 캐려고 한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재미로 들춰본 남편의 핸드폰에서 이런 메시지를 발견하다니? 윤희는 괜히 남편을 억울한 사람으로 만들가봐 두번, 세번 다시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무뚝뚝한 남편의 인간성을 굳게 믿고있었는데 오늘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닌가? 표달도 잘하고 랑만도 넘치고 련애경험도 꽤 있는것 같았다. 상대는 남편과 여라문살 나이차이가 나는, 가정이 있는 한회사의 녀직원이였다. 엄연한 사실앞에서 윤희는 괴롭고 가슴이 아릿해났다. 배신자! 윤희도 가끔 남자동창들과 모임도 가지고 만나서 별의별 우스개도 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녀자가 끼이지 않는 술자리가 어디 있는가? 이렇게 나름대로 개방된 사유를 가지고있었던 윤희였다. 남편도 그 정도일거라 믿고있었는데… 남편은 미국에서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한회사에만 출근하였는데 사장의 두터운 신뢰를 얻어 꽤 높은 직위에 있었다. 상대녀자는 그런 남편에게 돈개나 있는줄 알고 유혹하였고 남편은 그걸 즐기고 리용하였던것이다. “있어보이고싶었을가? 놀고 자빠졌네.” 윤희는 머리가 폭발할것 같았다. “앞집 영자네 남편은 어떤 여우같은 녀자와 눈이 맞아서 밖에다 집까지 사놓고 몇해 같이 살았다오. 당사자만 모르지 두 사람이 영자네 시집에 가서 인사까지 해서 그 친척들도 다 알고있다오. 입만 벌리면 우리 남편, 우리 남편 하며 남편 잘 만났다고 으시대더니만 울 일이 나졌지. 이제 영자가 알게 되면 속이 괘번저져서 어찌 살겠소?” 옆집에 사는 정은이 엄마한테서 이런 얘기를 듣고 남편한테 “당신은 그래도 바람을 피우지 않아 내가 그런 속을 태우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라고 감지덕지해했던게 불과 며칠전이 아니였던가? 자기도 오쟁이를 진줄을 모르고. 문득 며칠전의 일이 떠올랐다. 남편이 밖에 나가려고 복도에 나섰다가 핸드폰을 깜박했다며 갖다달라고 해서 얼핏 봤더니 핸드폰화면에 자기 사진도, 딸애 사진도 아닌 웬 낯모를 예쁜 녀자 사진이 떡하니 떠있었다. “웬 녀자 사진임까? ” 윤희가 올롱하니 눈을 치뜨고 물었다. “엽서에 이쁜 녀자 사진이 있길래 올렸어. 왜? 안돼?” “당신 눈에 나보다 더 이쁜 녀자두 있슴까?” “당신도 좋아하는 남자연예인 많잖아?” “하긴 뭐.” 남편이 너무 태연스럽게 말하길래 그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는데 지금에 와보니 그게 아니였다. 윤희가 또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어 다시 남편 핸드폰의 사진첩을 뒤져보니 그 녀자 사진이 수두룩하였다. -요즘 몸이 더 살쪘어요. 얼굴이 막 네모꼴이 되고… -자기야, 나한테 호박 같은 아들 낳아주렴. -집에 마다매보구 낳아달라 하세요. (여우같은 년, 벼락이나 콱 맞아라.) 농촌태생인 윤희가 자식욕심이 많아서 아들이든 딸이든 애 하나 더 낳자고 애걸하다싶이 할 때는 귀머거리인척 외면하더니. 윤희는 사실 둘째를 낳고싶은 욕심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헌데 남편이 이런 여우같은 년과 애까지 낳겠다고? 쓰레기 같은것들. 윤희의 친정엄마가 늘 당부했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윤희야말로 그 꼴이 되였다. -저녁에 바다바람 쐬러 갈가? -우와, 신난다. 집에 돌아온후로 마작판에 붙어있지 않으면 친구들과만 만나면서 윤희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던 남편이 애인과는 별의별 랑만을 다 누리고있지 않는가? 이름을 밝혔으니망정이지 윤희는 정말 죽었다 깨여도 메시지내용의 주인이 남편인줄을 몰랐을것이다. 미국에서 가족을 위해 개고생한다고 울부짖던 남편, 윤희도 남편이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다. 2000년에 미국에 가서 10년 동안 분투하여 그 어마어마한 빚을 다 갚고 50만원(인민페)이나 집에 보냈다. 그만큼 고생했으니 집에 돌아오면 고이고이 받들어모셔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사이에 앙큼한짓을 저지르다니?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 누구누구는 애인한테 차 사줬대, 집 사줬대, 애까지 밖에서 낳았대… 이런 얘기들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 그때마다 기가 막혔었다. 허지만 세상 남자들이 다 바람을 피운다 해도 자기 남편만은 그러지 않을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그래서 모든 부동산을 다 남편명의로 등록하였다. 물론 남편이 미국에서 고생한것도 있지만 더우기는 남들이나 친척들 앞에서 학력이 낮은 남편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뭐가 잘났다고 중년에 이 지랄이야? 배운게 있나, 돈이 있나, 능력 있나? 무식해도 말없이 살아줬는데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열심히 살아온 하루하루가 후회스러웠다. “꼬라지하곤… 어디 두고보자.” 윤희는 잠시 내색을 하지 않고 일단 하회를 계속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한편 남편이 믿을수 있는 해석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해였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어쩌면 그냥 악몽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가? 남편과 그닥 감정이 좋은건 아니였지만 그동안 안온한 생활에 길들여져있어서 좋은 집, 좋은 가게를 포기할 용기는 없었다. 진실이 궁금하다. 무엇때문에? 뭐가 모자라서? 아, 그때 그랬었지. 44살이라고… 3년전, 금방 미국에서 돌아온 남편과 하늘땅이 뒤번져지게 다투었다. 오래동안 서로 갈라져있어서 생각하는게 서로 극과 극이였다. 그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러서 저주를 받는건 아닐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남편은 늘 “당신이 어찌 외국 가서 쿨리처럼 개고생하면서 산 사람들의 설음을 알겠어? 말하면 다 눈물이거든…” 하고 윤희에게 한풀이를 하면서 쩍하면 바깥에서 흥청망청 마시고 놀고는 밤중에 집에 와서 술주정을 부렸다. 윤희는 “그렇게 남의 나라에서 힘들게 일하고 무시를 당했으면 제 나라에 와서 빨리 자리를 잡을 생각을 해야지.”라고 늘 남편을 다독여주군 하였다. 기실 일년 365일 치고 쉬는 날 없이 애를 돌보랴, 부모님들 보살피랴, 가게를 운영하랴 천방지축 달려온 윤희는 여기서 아무 고생 없이 안온한 생활을 하고 자기만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는 론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또 외박하고 아침 5시가 다되여서야 슬글슬금 집으로 기여들었다. 온밤을 하얗게 지새운 윤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당신 이젠 집에 오지 마쇼. 차라리 밖에서 사쇼.” “친구들끼리 밤참 먹고 안마방에 가서 안마받고 홀 잠든게 이제껏 잤어. 눈을 떠보니 아침이더군. 그래서 내친김에 친구들끼리 죽집에 가서 죽까지 먹고 왔어.” 남편은 히쭉히쭉 웃으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기려 하였다. “내가 보기엔 당신은 가족이 필요 없는 사람임다. 제멋대로 놀고싶은거 다 놀고 거기다 외박까지 하는 사람이 가족을 해서 뭐하겠슴까? 혼자 사쇼.” 윤희는 시악을 쓰며 계속 련주포를 쏘아댔다. “남편이란 사람이 맨날 마작판에 붙어있는데 내 혼자 버둥거려서 뭐하겠슴까? 밑굽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격이지. 이젠 가게를 남에게 임대해주고 나도 아예 집에서 놀겠슴다. 저녁엔 외박두 하구. 있는 돈을 같이 펑펑 쓰다가 없으면 당신이 알아서 벌겠지. 내가 혼자서 애면글면할게 뭐가 있슴까? 콱 같이 망해버리기쇼.” 밸이 꼬일대로 꼬인 윤희는 흥분한 나머지 손에 잡히는대로 이것저것 마구 쥐여서 던졌다. 남편이 제일 애지중지하는 정교한 도자기술잔들도 미련없이 바닥에 쾅쾅 박살을 냈다. TV를 켜놓고 잠자코 있던 남편이 갑자기 꽥 소리치며 발딱 일어나더니 윤희의 멱살을 거머쥐고 면상에 주먹을 안겼다. “앗!” 윤희는 눈을 싸쥐고 그 자리에 널부러졌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았는지 남편은 윤희의 머리채를 휘여잡고 성난 사자마냥 울부짖으며 벽에 짓쪼아놓았다. 윤희는 몸을 옹송그리고 손을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저항하였지만 이미 미치다싶이 한 남편의 힘을 당할 길이 없었다. 한참후에야 겨우 제정신이 든 남편이 구타를 멈추었다. 윤희는 머리가 삼검불같이 헝클어지고 눈언저리가 퍼렇게 멍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매를 맞고 당신과 살것 같슴다? 아이 삼다, 아이 살아. 지금 당장 민정국으로 가기쇼. 리혼하기쇼.” 리지를 잃은 윤희는 소리소리 지르며 길길이 뛰였다. 리혼이라는 말에 놀라서 남편이 잠시 멍해졌다. 남편이 미국에 갈 때까지만 해도 어려워 감히 대들지 못하던 윤희가 십년 세월에 완전히 이악스러운 아줌마로 변하였다. “지친다 지쳐. 너도 지치고 나도 지치고…” 이렇게 대판으로 싸운 뒤면 남편은 하는수없이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던 마작판에 나가지 않았다. 안해가 밸이 풀릴 때까지 참아야지 안 그러면 보따리를 싸가지고 가출해버리는수가 있었던것이다. 또한 그 가출이 몇주가 될지, 몇달이 될지… 뒤수습을 하기가 더 어려웠다. 매번 윤희가 가출할 때마다 남편은 저지른 죄가 있는지라 처가집에 찾아가서 손이야 발이야 성근하게 빌군 하였다. 이때다싶어 윤희는 남편에게 각서를 씌웠다. 첫째, 둘째, 셋째… 다 자기에게 유익하게 작성하였다. 남편은 서명할 권리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풍파가 지나가면 한동안은 아기자기 평화로왔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고 몇달이 지나서 윤희의 마음이 다소 가라앉으면 남편은 눈치껏 낮에만 마작판에 다니다가 조금씩 용감해져서 밤에까지 드나들었다. 윤희의 히스테리가 또 폭발하면 남편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금방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었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몇해인지 모른다. 너무 신물이 나서 어느 하루 윤희는 답답한 마음에 앞날을 예측한다는 철학관을 찾아갔다. 점쟁이할머니는 윤희의 생년월일을 물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44살이 고비가 될거야. 그 시기만 잘 넘기면 리혼은 하지 않아.”   지난 세기 90년대에 윤희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다. 허지만 도시에 남아서 직업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그즈음에 친구의 소개로 우람진 몸매에 인물도 시원스럽게 생기고 성격도 호방한 준걸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고중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준걸이는 일곱 형제중 막내였는데 형제들 몇은 유럽에 가있었고 부모님들은 모두 로간부였다. 어려운 가정에서 나서 자란 윤희는 준걸이만한 조건이면 괜찮은 상대라고 생각되여 선선히 결혼하였다. 결혼뒤 둘은 그럭저럭 무난한 나날들을 보냈다. 일년뒤엔 귀여운 딸애까지 태여나 행복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런데 몇년 뒤부터 남편의 단위 사정이 점차 어려워졌다. 그때 마침 출국바람이 불어 남편도 거액의 돈을 브로커에게 주고 미국으로 가게 되였다. 윤희는 집에서 딸애와 부모님들을 보살피면서 일용잡화점을 운영하였다. 낮에는 가게에 출근하고 퇴근후엔 대충 저녁밥을 지어먹고 또 자전거에 커다란 짐을 싣고 야시장에 가서 적치된 물품들을 팔군 하였다. 애를 키운다는 핑게로 집에서 놀수도 있었지만 시골태생인 윤희는 천성적으로 일하기 위해 세상에 태여난 사람처럼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남편이 미국에 가면서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부지런히 일했다. 윤희의 친정엄마가 마을에서 “꼬리 없는 소”라고 불렸는데 윤희도 바로 그러했다. 허지만 윤희는 고달픈줄을 몰랐다. 그는 오매불망 부부가 하루빨리 다시 모여 오붓하게 살 날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청천벽력이라더니 남편이 신고를 당하여 본전도 못 벌고 반년만에 붙잡혀 중국으로 강제송환될줄이야. 하늘이 무너졌다. 온 여름밤 야시장에서 목이 쉬도록 물건을 팔면서 아글타글 일했는데 남편이 십몇만원이나 되는 빚도 갚지 못한채 돌아오니 너무도 허무하였다. 왜 하필 남편한테만 액운이 떨어졌는지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돌아온 남편은 또다시 밀입국으로 여러 나라를 거쳐 재차 미국땅을 밟았다. 두번의 출국수속에 처넣은 돈이 얼마인지 모른다. 허지만 그들에겐 오직 그 길만이 살길이였다. 천문수자와 같은 빚을 걸머진 그들은 한 사람은 미국에서, 다른 한 사람은 중국에서 억척스럽게 일하였다. 청춘과 바꾼 10여년 세월, 그들은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윤희네는 마침내 빚을 다 물었다. 나중에는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재산도 많이 늘었다. 윤희는 이젠 알콩달콩 재밌게 살줄로 알았다. 헌데 세상살이가 그렇게 록록치 않았다. 학수고대하였던 남편의 귀국은 결국 행복이 아니라 시한폭탄이였다.     4   며칠간 윤희는 탐정처럼 남편이 없는 사이에 핸드폰을 들춰보군 하였다. 과연 남편과 그 녀인은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고있었다. 긴가민가하던 의혹은 점점 더 확실해졌다. 남편의 두 핸드폰에 다 메시지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남편은 왜 이런 기록을 지워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고있을가? 혹시 윤희가 뒤져보고 먼저 리혼하자고 제기하길 바라서 올가미를 늘인건 아닐가? 아니면 윤희가 핸드폰을 들춰보려니 생각지 못해서일가? 정직한줄로만 알고 시름 놓고 살던 남편의 배신은 소금으로 아린 상처를 씻어내는것 이상의 아픔이였다. 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남편이 들어왔다. 윤희는 잠결에 놀라 깨여났다. 밤 12시다. 이어서 쏴- 샤와소리가 들리더니 텔레비죤을 켜놓고 객실 쏘파에 누워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듯했다. 그녀겠지, 바로 남편의 애인. 그녀와는 다정다감하게 굴면서도 안해와 딸애가 자는 방은 기웃거리지도 않는 남편이였다. 내가 어쩌다 이 신세가 됐지? 몇해 같이 살지도 못했다. 남편이 오래동안 외국에 가있다나니 함께 한 시간이 불과 5년 밖에 안된다. 이튿날 아침, 윤희가 출근하려는데 면도를 하고있던 남편이 턱에 거품이 가득한채로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여보, 요즘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놀면 지기만 하는데 돈이나 존 주라. 쉬 좀 붙게…” “이달에만 이미 3,500원 줬는데 또 달라면 우리 식구는 뭘 먹고 삼까? 너무함다. 주지 않은것도 아니고.” “돈을 따면 돌려줄게.” “안됨다.” “그럼 이 목걸이 팔아서 쓸거야.” “정신이 나갔잼까? 전번에 집 살 때 3만원이 모자라도 아까와서 팔지 않은 목걸이인데… 팔기만 해보쇼. 큰일날줄 아쇼.” 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포를 놓았다. 그로부터 며칠뒤 윤희가 장판을 닦다가 어망결에 쏘파에 앉아있는 남편을 쳐다보니 늘 보기 좋게 목에 걸려있던 싯누런 24k짜리 금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 목걸이가 안 보이네. 정말 팔았슴까? 얼마에 팔았슴까?” “만 륙천.” “당신 바봄까? 그거 시가로 3만원짜린데 왜 그렇게 눅거리로 팜까? 사채라도 쓴게 아임까?” “당신이 돈을 주지 않으니 어쩔수 없었소.” “미쳤구나 미쳤어.” “당신이 날 미치게 했잖아? 남자는 호주머니가 비면 별짓을 다해.” “그래서 녀자도 끼고 다님까? 전번날 저녁에 하두 심심해서 당신의 핸드폰을 뒤적이다가 본의 아니게 당신이 애인과 나눈 메시지를 우연히 봤슴다. 그동안 미국에서 점잖게 지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별짓을 다했습디다. 그러고도 내앞에선 얌전한 고양이처럼 수염 쓱 씻고…” 남편은 깜짝 놀라더니 큰 눈을 희번득거렸다. “왜 남의 휴대폰을 함부로 뒤지고 그래?” “보길 잘했지. 안 봤더라면 내가 언제까지 바보처럼 당하고있었을지 누가 암까?” “애인은 무슨 개코같은 애인, 그냥 심심해서 장난 좀 친거 가지구.” “뻔뻔스럽게 하나도 당황해하지 않고 둘러붙이는걸 봐. 세살짜리 애하고나 그렇게 말해보쇼. 믿는가? 참, 이제는 하다하다 별짓을 다하네. 한회사 직원?… 나 원 어이가 없어서. 그리구 뭐 나를 마다매라구? 애까지 낳아달라구? 로망이 났나.” “난 장난으로 그런것뿐이야. 큐큐에 들어가봐. 요즘 모두들 취미로 그렇게 장난치며 놀아.” “흥, 장난? 웃기고 자빠졌네. 장난인데 그 녀자 사진을 가득 저장해두고 봄까? 어리숙한줄 알았는데 치밀하기까지 하네. 당신이란 사람 참 대단함다. 내 사진이나 애 사진은 한장도 없더구만. 하긴 그렇게 둘러댈수 밖에 없겠지. 안 그러면 사람이 얼굴 가지구 어떻게 그런짓을 저지를수 있겠어. 애 아빠가 돼가지구 도덕이 거지 발싸개구만.” “믿지 않겠지만 분명 장난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돈 잘 버는 안해를 배신할수 있겠어?” “그 말을 내가 믿을줄 암까?” “하, 이거 버선목이니 뒤집어보이겠는가?” 윤희네 동창들도 워이신에서 별의별 육담을 다한다. 특히 모임때마다 육담을 잘하는 친구가 있다. 자기는 웃지도 않으면서 어찌나 술술 생동하고 구수하게 얘기하는지 모두 허리 부러지게 낄낄 웃어댄다. 하지만 우스개는 어디까지나 우스개일뿐이다. 유감스럽게도 남편의 메시지는 그런 유머가 아니였다. “당신 애까지 낳고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녀자가 있어 잘됐네. 내가 깨끗하게 자리 내줄게.” “아니야. 당신이 오해할만해. 잘못했어. 당신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가 정말 잘할게.” “아니,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이것만은 용서 못하겠슴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는데… 마음 떠난 사람을 붙잡고 사는 그런 불쌍한 녀자는 되기 싫슴다.” “정말 아니란데… 증거도 없잖아.” “무슨 증거가 필요함까? 녀자들은 느낌이란게 있슴다.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쇼. 누가 당신을 믿어주나?” “나는 그냥 외국에서 고독했을뿐이야.” “쳇, 고독하다구 그래도 됨까? 나두 혼자서 지내기 고독해서 외간남자를 찾았다면 당신 바람 핀 안해와 살수 있겠슴까?” “어떤 상황이였나 봐야지.” “흥, 말도 안되는 소리. 당신은 될수 있겠는지 모르지만 나는 안됨다.” “이젠 다시 련락하지 않을게.” “집에서도 손에서 핸드폰을 놓을세라 항상 쥐고 다니는 당신의 그 말을 믿으라고? 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게 낫지. 나도 내가 바보였으면 좋겠슴다. 알고도 모르는척하는 바보 말임다.” “……” “나는 부처님이 아님다. 너무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재수없어 미치겠슴다. 오쟁이를 지고 창피해서 어떻게 삼까? 지금껏 고이 지켜온 내 자존심이 한방에 무너져버렸슴다. 당신의 경솔함이 이제 당신의 소중한 모든걸 앗아갈검다.” “……”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짓지 마쇼. 세상엔 용서할 죄가 있고 용서 못할 죄가 있슴다. 이 세상 어느 녀자도 바람 피운 남편과 살려고 하지 않을검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짐다. 나를 원망하지 마쇼. 저절로 제 무덤을 판거지.” “……” “사실 살면서 나는 당신한테 늘 섭섭했슴다. 하지만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평생을 당신과 함께 하려 했슴다. 애 아빠니깐. 아버지가 없이 자란 나에게 제일 큰 한이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보지 못한거였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으면 꼭 시아버지가 있는 집안에 시집 가려 했겠슴까? 그런데 이젠 어쩔수없이 내 새끼를 또 나처럼 아버지가 없는 아이로 키우게 되였으니… 정말 힘들었슴다. 일찍 집에 돌아오쇼, 제발 도박을 놀지 마쇼, 술을 적게 마시쇼… 빌다싶이 애원했지만 당신은 귀등으로 흘려버렸슴다. 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검다. 이젠 당신이 살고싶은대로 사쇼. 도박도 놀고 녀자도 사귀고… 애는 내가 키우겠슴다.” “혜단이 엄마, 애를 봐서라도 딱 한번만 용서해주오. 내 각서 쓸게. 무릎 꿇고 빌게. 집에서 노예처럼 살게. 믿어줘.” “서랍에 당신이 쓴 각서가 넘쳐남다. 기념으로 두고두고 보쇼.”     5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큰시누이가 만나자고 몇번 전화가 왔다. 그래, 만나지 못할것도 없지 뭐. 아무튼 이 집안 누군가에게는 이야기해야 할것 같았다. 그동안 왜서 그렇게 다투며 살았는지? 지금은 왜서 리혼하려 하는지? 다른 가족들에게 어떻게 가감이 되여 전달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꼭 교대는 해야 할것 같아서 시누이를 만났다. 평소에 언니처럼 잘 보살펴주고 배려와 포용으로 도닥여주던 맏이다운 시누이였다. “애를 봐서라도 다시한번 생각해보오. 나도 준걸이한테서 들었는데 별일은 없는것 같습데. 안 그러면 어떻게 돈을 집에 보낼수 있었겠소? 여우같은 년과 붙었다면 돈을 다 써버렸을게 아니요? 믿기요. 본인이 절대 아니라지 않소. 리혼하면 애한테 얼마나 큰 충격이요? 또 세상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데. 리혼한 녀자라면 남들이 다 손가락질하오.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제발 혜단이를 위해서라도 다시한번 잘 생각해보오…” 간절한 눈빛으로 절절히 말하는 큰시누이의 권유는 진심이였다. 허지만 윤희의 눈에는 아니꼽게 보였다. 흥, 가재는 게편이라더니 누가 한피줄을 타고난 남매가 아니랄가봐. 만약 자기 녀동생이 이런 일을 겪었다면 어떻게 할가? 한편 윤희는 자기에게도 무작정 편을 들어주는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누이가 만약 자기 언니라면 “너 그동안 정말 마음고생 많이 했구나.” 하면서 남편을 같이 욕하기도 하고 또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도 할것이다. 헌데 윤희에게는 오빠들만 주렁주렁 넷이 있었다. 언니 하나만 있어도 그동안 억울했던 일들을 쫑드르르 달려가서 하나부터 열까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련만. 그런대로 오빠들이라도 찾아가서 말할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말하면 흉밖에 날게 없을것 같고 말하지 않고 혼자 삭히자니 병이 날것 같았다. 사업가인 작은오빠는 무조건 윤희 편을 들어주었는데 대학교수인 셋째오빠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차분하게 타일렀다. “내가 볼바엔 너에게도 잘못이 있어. 자기는 다 잘한것처럼 말하지만 너도 뭔가 잘못했기에 남편이 그러지. 녀자가 너무 영악스러우면 못써.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데 있니? 서로 용서해주고 양보하면서 사는거지. 네 남편도 그만하면 괜찮아. 그동안 외국에서 고생했는데 한번 봐줘라…” “머리로는 살고싶은데 마음이 못살겠다 하오. 오빠가 재간이 있으면 나도 설복시키지 못하는 내 마음 설복시켜보오.” 결혼이 한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라면 리혼은 정든 가족과의 잔인한 리별임을 윤희는 가슴 아리게 깨달았다. 이튿날 아침, 윤희는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이사짐회사에 련락해 짐들을 친정집에 가져갈 타산이였다. 남편은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밖에 나가면서 “기분이 상하면 며칠 친정집에 가서 놀다 오오. 허지만 짐은 절대 가져가지 마오.”라고 건성으로 당부하였다. 자기한테서 마음이 떠난지 오랜데 아직도 안해인줄로 아는 모양이였다. 안해가 리혼하겠다고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나가는 마당에 별로 할 일도 없는 사람이 무슨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외출하는지? 아무튼 남편은 늘 그랬다. 주요한것과 차요한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였다. 예전처럼 자기의 버릇을 고쳐주자고 가출하려는줄로 착각하는것 같았다. 많은 재산을 제쳐두고 안해가 리혼을 선택할리 없다고 배포 유하게 생각하고있는듯하였다. 사실 윤희도 재산때문에 방황했었다. 아글타글 일궈놓은 재산. 아깝다. 좋은 집, 좋은 차… 재산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꾹 참고 살가? 전에도 윤희는 몇번 가출을 했었다. 하지만 짐들을 그대로 둔채로 몸만 가출을 했었다. “가출한 딸을 집에 들이지 말고 돌려보내야지…” 그때마다 남편은 자기 잘못은 승인하지 않고 윤희의 친정엄마만 나무람하였다. “당신이 잘했더라면 내가 가출을 했겠슴까? 도박 놀구, 외박하구… 사실 엄마집에 가면 정말 불편함다. 가출한 그날부터 당신이 빨리 와서 데려가주기를 기다림다. 허지만 이렇게라도 시위하지 않으면 문제해결이 안되니까. 좋게 말해서 당신이 어느 한가지 들어준적이 있슴까? 자기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누굴 탓함까?” 남편은 본전도 못 찾고 윤희에게 코만 떼우군 하였다. 헌데 이번에는 아니다. 정작 리혼하려고 마음 먹으니 남편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이 가득 밀려왔다. 여태껏 선물 하나 안 사준 남편, 생일 한번 챙겨주지 않은 남편… 랑만과는 한참 동떨어진 남편이 야속해났다. 그래도 윤희는 늘 바깥일로 바삐 보내다나니 남편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것이 미안해서 리혼하려고 각방을 쓰면서도 속을 풀라고 아침마다 숙취해소에 좋은 명태국을 끓여올렸다. 윤희가 애지중지하는 옷들, 가방들, 신들… 자기와 같이 가출하게 될 불쌍한 소지품들을 보노라니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사실 리혼이 앞으로 윤희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그 자신도 모른다. 보따리를 싸놓고 이사짐회사에 전화를 하니 득돌같이 달려와서 반시간도 안되여 이사짐을 차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지지고 볶고 싸우던 집을 둘러보았다. 남편이 미국에서 보낸 돈에 자기가 번 돈을 보태서 윤희는 도시중심에 낡은 집들을 몇채 사놓았었다. 그것도 당시 미국에 있는 남편이 반대해서 입이 닳도록 설복해서야 겨우 사놓은 집들이였다. 재작년에 그 집들이 파가이주범위에 들어 가격이 몇곱으로 뛰여오르는 바람에 윤희네도 일약 벼락부자가 되였다. 윤희네는 그 돈으로 집도 사고 차도 사놓았다. 새집은 남쪽 베란다에 나가면 부르하통하가 한눈에 안겨오고 북쪽창문을 열면 낮은 산언덕이 바라보였다. 인테리어는 유럽풍으로 설계하여 궁전처럼 화려하였다. 게다가 아빠트단지내의 풍경도 좋아서 마치 공원에서 사는듯한 느낌이였다.  남편도 “이젠 집 바꾸지 말고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자.”고 하였었다. 그런데 새집에 이사 와서 딱 일년만에 이런 일이 터지고말았다. 남편은 그동안 강경하게 리혼을 고집하는 윤희를 얼리고 닥치고 하면서 별의별 노력을 다하였다. 가족도 지키고 밖에서 즐기고도 싶은것이 남편의 진심이였을것이다. 처가집에도 찾아가서 제발 좀 윤희를 말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바보. 그런 부탁보다는 자기의 진심어린 사과가 더 필요한줄을 모르고… 필경 자식 낳고 산 남편인데 별나게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다. 설레이던 시절도, 두근두근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누군가 부부사이도 가꿔야 된다더니 과연 맞는 말이였다. 윤희도 사실 남고싶었다. 어떤 리유를 붙이면 남을수 있을가? 차라리 남편의 비밀을 몰랐더라면 좋았을걸… 친정집에서는 극력 반대하였다. “집만 몇채요. 돈나무(摇钱树) 같은 가게도 있겠다, 고급아빠트에, 고급차에, 어마어마한 저금까지… 게다가 애 아빠가 미국에서 번 돈을 다 갖다바쳤다며. 그러면 되지 뭘 더 바라겠소. 언젠가는 꼭 후회할 날이 있을거요.” 평생 농사를 지은 형님의 충고다. 그랬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할 때는 남편이 잘해주든 못해주든 그런 감수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생활형편이 나아지니 이런저런 투정을 부리는것 같다. 윤희의 큰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바람을 피웠대두 그렇지. 이제 리혼하면 너도 다른 남자 만날거 아니야? 어차피 숫총각이 아닌 이상 애 아빠한테 한번 기회를 줘라. 남자들이 어쩌다 그럴수도 있지. 한번만 눈을 질끔 감고 같이 살아라. 두번 다시 그럴 때에는 내가 가만 놔두지 않을게. 애가 불쌍하지두 않니?…” 딸애도 처음에는 펄쩍 뛰였다. “엄마아빠, 내가 학급 일등도 아니고 전 학년 일등을 해서 장학금까지 타게 되였는데 꼭 이렇게 축하해줘야 되겠어요? 래년에는 대학시험인데 날 위해 조금만 참고 살아주면 안돼요? 우리 반에도 엄마아빠가 리혼한 불쌍한 애들이 많은데 나도 기어이 그속에 가담시켜야 되겠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로 키운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어른들부터 그 약속을 깨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라면 아예 하지도 말거지.” 윤희의 가슴이 터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의 마음을 설복할 길이 없었다. 윤희와 남편은 딸애앞에서 죄 지은 사람이 되여 고개를 떨구었다. “혜단아, 네 맘대로 해라. 아빠 같이 있겠으면 있고 엄마따라 가겠으면 가고. 엄마아빠가 헤여져도 너는 여전히 우리 딸이야. 그리고 우린 이 세상에서 널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구.” 말이 씨가 된다고 쩍하면 리혼을 들먹이던 그들은 끝내 민정국에 가서 그동안 괴롭히던 혼인에 종지부를 찍었다. 리혼증을 받아쥐니 점심때가 되였다. 남편이 랭면이나 먹고 가잔다. 가지 뭐. 반년동안이나 지구전을 벌려 원하던 리혼증을 손에 쥐였으니 해방을 축하해야지.     6   리혼한 뒤 윤희는 시간과 정력을 모두 자신에게 투자하여 여러 단체에서 활약하다보니 활동이 많아졌다. -심술이 나게 당신은 많이 행복해보이네. 워이신에 여러가지 활동사진을 올린걸 보고 외국에 가있는 전남편 준걸이한테서 문자가 날아왔다. -가족이 소중한줄도 모르고 맨날 밤 12시를 넘겨서야 집을 려관처럼 찾아오고 마작과 녀자에만 빠져있을 때는 언제구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해. 저녁마다 일찍 돌아와달라고 애걸할 때는 외면하더니… 있을 때 잘하지. -그래 맞어. 내가 너무했지. 벌받아 마땅해. -어쭈, 나이가 들더니 솔직해졌네? 잘못을 인정할줄도 알고. 며칠전에 준걸이가 윤희 오빠한테 전화를 걸어와서 윤희한테 많이 미안하다고 하더란다. 사실 리혼한 뒤 몇년간 윤희도 고민하지 않은게 아니였다. 주위 지인들의 진심어린 권고도 있고 또 자기가 직접 부닥쳐보니 리혼이라는것이 배짱치기로 할 일이 아니였다. 비록 용서할수 없는 남편의 치명적인 결함때문에 리혼을 선택했지만 서로 아량을 베푼다면 넘지 못할 산이 없을것 같았다. 그깟 결혼증이 뭐 그리 대단해? 마음으로 사는거지. 사실 같이 살 때 남편은 놀러 다니는게 미안해서 그러는지 집일을 많이 거들어주었었다. 빨래하고 장판 닦고 쓰레기 버리는것은 모두 남편의 몫이였다. 그래서 윤희가 시름 놓고 장사를 할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남편에게도 우점이 꽤 있었다. 그 사람과 헤여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한 전부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남편의 가까운 친구한테서 전해들은데 의하면 요즘 그는 친구들과 같이 노래방에 가면 “있을 때 잘해”만 부른다고 한다. 그토록 절절하고 간절하게. 나름 사연이 있는 사람들에겐 가슴을 후비는 노래다. 시간이 약이긴 약인가보다. 그도 불쌍하고 딸애도 불쌍하고 윤희도 불쌍하고…     《연변문학》 2016년 12호 -------------  프로필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8    엄마 힘내!내가 잘할게 댓글:  조회:1299  추천:0  2019-11-30
엄마, 힘내! 내가 잘할게 / (연변2중) 김은주 아침출근시간이 다 되였건만 엄마는 이불속에서 나올념을 않고 궁시렁댄다. "언제부터면 니가 나가 벌고 나는 집에서 실컷 낮잠이나 자겠니. 심심하면 한가하게백화점에 가서 마음대로 카드 긁으며 여유롭게 쇼핑도 하고 말이야. 5년뒤면 될가 ?" 나는 아무 주저도없이 대답한다. "네에~!" "호호~ 그래, 말만이라두 고맙구나." 나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힘을 얻었는지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들을 주어입고 "그래 너만 믿고 이제 한 5년만 더 분투해 볼란다."하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출근하신다. "엄마 힘들어, 은주야, 엄마한테 위로의말 좀 해주렴." 엄마한테서 걸려온 전화다. "네, 엄마, 힘내! 내가 잘할게. 엄마, 오늘도장사 대박나세요" 장사군의 딸이 아니랄가봐 내 입에서 어느새 엄마 마음에 쏙쏙 드는 달콤한 말들이 줄줄 쏟아진다. 하긴 이게 어디 한두번인가. 가끔씩 아니, 아주많이 매번 힘들때마다 엄마는 나한테서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피장파장이다. 나도 공부가 힘들때마다 엄마한테 힘들다고 아우성이니깐. "엄마 이번 시험에 성적이 내려갔어. 속상해." "괜찮아, 그럴때도 있지뭐, 너라고계속 시험 잘 치라는 법은 없지. 세상은 워낙 그 래.맑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꽉 덮일때도 있고 모든 일이 계속 다 잘 풀릴수는 없어. 꼭 참고 차분하게 견디느라면 또 다시 맑은 하늘이 너를 반겨줄거야.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수 있는 사람이 진짜 강자야,우리 모녀 같이 노력해보자. 아자아자, 화잇팅!" 40 대인 엄마는 동갑내기친구들이 다 좋은 고급차들을 굴리고 다닌다고 늘 부러워하신다. 그럴때면 내가 또 엄마에게 호언 장담한다 "엄마 걱정마, 내가 대학졸업하고 돈 많이 벌어서 엄마한테 빠라리(法拉利) 사줄게." 그러면 엄마는 허허 웃으면서 얘기한다. " 벌써 가진것 같네. 허허  그때가서 너나 사달란 말을 안해두 고맙겠다." 전번 주말에는 백화점에서 천원좌우되는 운동복 한벌 사입었다. "나도 이런 비싼 옷 사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하며 못내 부러워하신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엄마는 시장옷을 선호하는 타입이라 내가 어쩌다 한계절에 한벌씩만 백화점 옷을 사입겠다고 해도 울상이 되여 따라나선다. 그래도 어떡해! 시장가보다 몇배는 비싸지만 브랜드를 선호하는 우리 세대들을 엄마가 어떻게 리해할수 있을가? 다른 애들은 모자부터 신발까지 모두 다 유명브랜드인데 그렇다고 말하면 엄마가 또 속상해 할가봐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킬수밖에 없다. 나는 어쩌다 캐주얼 한벌만 갖추자 해도 이렇게 엄마와 한바탕 싱갱이질 해야 되니, 참 빨리 커서 나절로 벌어 사고 싶은걸 다 사야지 하는생각이 갈마든다 . 그래서 나는 또 " 이제 내가대학졸업하고 출근하게 되면 엄마에게 카드 하나 만들어 줄테니깐 그때가서 엄마 마음대로 백화점에가서 사고 싶은걸 다 사요." 라고 말했다. 엄마는 진짜로 카드 손에 지기라도 한것처럼 밝게 웃으시며 "그게 언제쯤이면 될가? 정확히 몇년 뒤면 되겠어? 난 좀 급한데."라고 묻는다. 나는 "아마 10년 뒤면 비슷할거야 "라며 너스레를 떤다. 엄마는 금방까지 천진하게 웃으시더니 금방 또 실망한듯이 새초롬해서 "엄마나이 60이 되면 이쁜 옷을 입어 뭐하게. 그때는 건강이 더 중요하지 "라고 하며 서글픈 웃음을 짓는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기전부터 옷가게 해왔다는 엄마는 평생 소원이 백화점에 그럴듯한 명품가게 하나 차리는것이라고 늘 말한다 . "네가 잘돼서 엄마한테 백화점에 가게 하나 챙겨주렴 " 라고 롱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면 나는 드라마대사로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얼마면 되겠어요?" 엄마는 어이없다는듯 웃으면서"50만원이면 돼."라며 받아친다. 나는 또 "그래요? 그 정도면 내가해줄수 았지."하고 허풍을 친다. 이럴때 보면 누가 엄마인지 누가 딸인지 모르겠다. 뭘 사줄때마다 "앞으로 네가 벌게 되면 다 받아낼거야, 몇곱절 이자까지 합쳐서 받아낼거야."라고 곱씹는 엄마이지만 그 말이 나는 듣기 싫지도 않거니와 늘 나를 편달할수 있어 너무 좋다. 심지어 너무 들어서 이젠 노래마냥 정겹기까지 하다. 헌데 엄마, 엄마는 그거 모르지. 내가 잘 되라고 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엄마의 마음을 내가 알면서 모르는척 속아주는걸. 아무튼 엄마와의 약속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언제면 출근해서 엄마 소원을 다 풀어줄수 있을가? 오늘도 나는 앞으로 내가 잘 돼서 엄마입이 귀에 걸리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살포시 꿈나라를 찾아간다. «연변녀성» 2016년6기
7    자식은 부모의 <<작품 >> 댓글:  조회:990  추천:0  2019-11-30
"바닥만 다 펴구 공부하게요." 딸애는 핸드폰 게임에 집중하면서 뭔가 찔리는지 이렇게 말한다. " 몇분이며 되니? 벽지는 안발라두 돼?옷장에 옷은 정리안해두 되구?" 꾸지람하고 공부하라고 닥달할 대신 이렇게 말했더니 이외라는듯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키득거린다. 엄마인 내가 바보여서 애가 게임 놀게 가만히 놔둘가? 말리다 못해 방법이 없는 방법, 매일이다싶이 "이젠 그만하구 공부해라" 를 웨치다못해 "전략"을 바꾸어 보았더니 평소에들었는둥 말앗는둥 하던 딸애가 반응을 보였다. 고중생인 애가 게임에빠졌있으니 엄마인 내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가는지 미치고 환장하겠다.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저녁자습을 할때에는 그나마 속이 덜 탔는데 지금은 밤자습이 취소되는 바람에 저녁마다 딸과 입씨름을 해야 한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 대한 희망사항은 많고도 많을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막 고중에 다니는 딸애에게 품는 기대가 밤을 자고나면 새로워지고 우수한 사람을 보면 우리 딸도 저렇게 커줬으면 하고 그 기대가 또 부풀어 오르고기대가 샘물처럼 자꾸 솟아난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기대를 잘 따라주지 않는다. 고분고분 말을 잘듣기에 잘하는줄로만 알고 방심하고 있었는데 요즘 곁에서 지켜보니 엄중한 문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밤늦게까지 게임을 놀고 잔다던지, 늦어 본 자식이라고 집안에서 누구나 곱다고 했더니 아직도 버릇없이 반말을쓴다던지... 어릴때에는"고래도 칭찬하면 춤춘다"고 해서 늘 "잘한다, 잘한다" 하고 격려하면서 키웠다. 그러다 요즘 드는 생각이 칭찬만 받고 자란 딸애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날텐데 마냥 순진하고 마음이 약해 빠지면 안될것 같아 가끔 일부러 딸애에게 "태클"을 걸군 한다. 그때마다 딸애는 놀라서 낯선 사람 보듯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끝까지 밀어 붙인다. 어쩌면 약간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딸애가 험한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나가기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다. 딸애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더 말해 무엇하랴. 모든일이 잘못 되더라 할지라도 자식일만은 잘되길 바라는게 천하부모의 마음이라하겠다. 엄마야 어떻게 자식때문에 여차여차 인생까지 바쳐가며 희생하던지 나 몰라라 자기 고집만 부리는 애들, 훌륭하게 키우느라 벼라별 노력과정성을 다 몰붓지만 정말 홀로 사랑이다. 그래서 요즘은 사춘기 딸애와 갱년기 엄마의 전쟁으로 우리 집안에 포연이 자욱할때가 많다. "너두 이제 꼭 너같은 딸애를 키워봐. 그때면 이 엄마의 마음을 알게될거다."라고콕 쏘아 붙히고는 뒤돌아 앉으면 속상한게 부모의 마음이다. 이렇게 엄마를 괴롭히던 딸님, 싸울때는 화끈하게 싸우고 의논할 일이 있으면  또 언제 그랫냐 싶게 어김없이 나에게 다가든다. "엄마, 나는 지리와 력사가 참으로 어려워요.락제는 면하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과쪽은 아닌것 같아요.그래서문과할가? 리과할가? 최종선택 하기전에 엄마의 조언을 좀들어보고 싶어요"라고 제법 진지하게 나온다. "곰곰히 잘 생각하고 네가 더 잘하는 쪽으로 선택하는게 좋지 않을가?엄마도고중때 스스로 리과쪽에 소질이 있다고 착각하고 리과를 선택해서 고중3학년에 올라가서 뒤늦게야 문과반에 넘어가 문과로 대학시험을 봤어. 그때 애초에 문과를 선택하지 않은것이 얼마나 두고두고 후회되던지… 그러니깐 너는 절대 엄마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말고 옳은 선택하길 바란다." 나는 교훈을 말해주면서 딸애의 판단과 결정에 맡겼다. 이럴때 후회없는 선택을할수 있게 확실하게 도와 줄수 있는 유식한 엄마가 아니여서 참으로 미안하다. 살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딸애가 당장 코앞에 닥친 문제도 그렇지 않은가?어느지역,어떤 대학,어떤전업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끝에 딸은 리과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나 개인 욕심에는 문과쪽을 택했으면 하고 바랬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애가 어릴적부터 집 벽마다에 중국지도와 세계지도 도배해 놓으면서라도 지리과에 취미를 붙혀 줬을걸. 력사드라마도 같이 보고 명승고적들도 유람 다니면서 력사에 재미를 붙혀줬을걸… 지금에 와서 후회막급이다. 사춘기여서 찬바람이 쌩쌩 불게 쌀쌀 맞기만 하던 딸애가 요즘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지 잠들기전에 한 십여분씩 속심말을 들려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덕분에 즐거웠던 일들을 말할때는 오랜만에 평화를 찾아서 히히~호호~ 웃다가 잠이 들어서 꿈마저도 달콤하다. 솔직하게 자기의 고민을 털어 놓을때는필경은 부모이기에 애가 말하는 그 한마디 한마디를 그냥 무심히 흘려 들을수 없다. 이럴때에는 어떻게도닥여 줘야될가?어떻게 인도해 줘야 될가? 걱정하다가 잠이드니그런 날 밤은 영낙없이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다. 애를 키워보니 어떤때는기대 그 이상으로 참 잘하는데 또 어떤때는 너무도 엉망이여서 무척 속상하다. 그래서 "자식 키우는 부모들 남의 자식 흉 허물 하지 말라"고한것 같다. 어떤 일은 비록 남의 집 일이지만 사실 또 남의 일 같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참 자식이 뭔지… 오만가지 상념에서헤여나와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흐드러지게 피여난 정원의예쁜 꽃들이 오가는 행인들을 반겨주어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 화사하다. 부모로서 바로잡아줄수 있는데까지 바로잡아주어야 되겠다. 감수성이 제일 좋은 나이에 잘 배워서 앞으로의 인생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차분하게 쉽게쉽게 살아가길 바라는 부모된 마음이다. 그래! 이렇게 야금야금 노력해 보는거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과 힘차게 전진하는 기쁨 넘치는 하루하루를 축적하여 딸애에 대한 나의 희망사항들을 하나하나 막연하지 않은 현실로 이어지게 하리라. 어느날 딸애가 엄마생일이라고가게에 예쁜 장미 한 묶음을 보내왔다. 어느새 이러 센스를 배웠을까? 센스도하나의 학문이라면 학문인데 ... 정말 너무 뜻밖의 서프라이즈에 나는 멍해졌다.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넘실넘실. 그래, 이런게 자식 키우는 멋이겟지. 조금이나마 위안이되는건 내 자녀교육이 너무 비관적인 실패는 아닌것 같다. 삶이 힘들다고 주저앉지말고 희망이 묘연하다고 포기하지 말자. 엄마로서 내 인생의 무대도 멋지게 장식하고 평생동안 정성들여 만들어낸 자식이라는 "작품"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되여야겠지.
6    아홉과 바꾸고 싶은 하나의 유혹 댓글:  조회:990  추천:0  2019-11-16
나는 문학반에 다니면서 미자씨를 알게 되였다. 모임이 끝난 뒤면 집에 돌아가는 길이 같아서 우리는 늘 얘기를 나누며 걸어서 가군 하였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보니 서로를 많이 알게 되였고 많은 공동언어도 생겼다. 매양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누워 그녀의 말을 되새겨보면 참 좋은 책 한권을 읽은듯한 잔잔한 감동까지 받는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몇번 미자씨 주변의 친구들 모임에도 합석해보고 미자씨에 대해서도 좀씩 깊이 알아갔다. 그런데 웬 일인지 미자씨한테서 종래로 녀자들이 입에 달고있는 “우리 남편”이란 말은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나는 어느날 끝내는 조심스레 물어봤다 “남편은 어디 출근해요?” 미자씨는 시무룩이 웃으며 대답했다. “헤여졌어요.” 나는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의외라는 표정만 지었다. 미자씨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한듯이 담담히 웃으며 얘기했다 “사람들은 그냥 입버릇처럼 좀만 언짢아도 리혼하자고 오기를 부리는데 정말 말이 씨가 된다는걸 절실하게 느꼈어요. 저도 필경 오래동안 자기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배짱이 좀 두둑해요. 남편에게 의지해 사는 연약한 녀자라면 혹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리혼을 후회하는 목소리일가? 어쩌면 그런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차분하게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남편은 외국에 가 십년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외국에 간지 처음 얼마간은 앞으로 어떻게 혼자 살겠나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어쩌다보니 장사도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잘되였고 외롭다보니 여기저기 모임에 다니며 친구들도 많이 사귀였고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이런저런 학습반도 다니며 지식면도 많이 넓어졌다 어떤 일은 미리 예고되여있는듯하다 남편이 10여년만에 귀국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십여년 갈라져있은데다 한 사람은 엄청 성장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제자리걸음을 하다보니 두 사람 사이에 제일 기본적인 공동언어가 없어졌다. 대화도 대화지만 생각의 차이, 습관의 차이, 관념의 차이 거의다 극과 극 같았다. 한국에서 십년동안 남의 밑에서 시키는 체력로동만 하다 돌아온 남편은 뭘 마땅히 할수 있는 일이 없다는 핑게로 매일같이 마작판에 빠져 새벽이 다돼서야 집에 돌아오군 했다. 남편이란 사람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 놀음을 밥 먹듯한다면, 또 그런 상황이 몇년씩 이어진다면 어느 안해인들 감당할수 있을가? 게다가 십년씩 한국에서 독신생활을 해온 남편은 내놓은 들말이나 다름없었다. 오래동안 외국생활에 가족분위기도 그리웠으련만 전혀 그런 눈치가 없이 늘 어중이떠중이 친구들이 더 좋고 마작에 대한 유혹이 더 컸으며 일찍 집에 돌아와야 된다는 개념 자체가 없이 밤 12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아무리 타이르고 각서를 씌워보고 해도 그 상이 장상이였다. 그래서 다투기도 많이 다투었다. 물론 다툰 뒤 며칠은 마작 놀러 안 가는척했지만 며칠 안 지나서 마누라 화가 좀 풀렸다싶으면 또 마작판에 “출근”했다. 남편은 자기가 한국에서 벌어온 돈을 다 집에 들여놓았다며 떵떵댔지만 사실 그 돈들은 집 살 때 선불금으로 충당되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돈 벌어왔노라고 자기 소비돈은 얼마나 펑펑 써대는지… 막무가내였다. 미자씨는 매일같이 마작판에 빠져있는 남편, 친구밖에 모르는 남편과 다투는 일도 지긋지긋해났다. 전에 그나마 애틋했던 정도 싹 사라질만큼 십여년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부부사이의 격차는 상상 그 이상이였다. 종이로 불을 쌀수 없다더니 일은 끝내 터지고말았다. “단지 자식만을 위한다는 책임감에서 이렇게 문제투성이인 사람과 결혼이라는 멍에를 지고 계속 함께 살아야 할가요? 남보기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게 아니잖아요.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자기 감정을 속이고 사는 자체가 비극이잖아요. 하물며 친구도 맘이 통하지 않으면 발길을 돌리는 판에 평생 같이 갈 부부사이가 이래서야 될가요?” 미자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하는 얘기, 그동안 얼마나 마음속으로 갈등이 심했을가? 이런걸 일컬어 감정이 깨졌다고 하나보다. 미자씨는 한때는 그래도 타향에서 고생하는 남편이 불쌍하여 귀국하면 잔소리 말고 잘 대해줘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귀국해서 5년 동안 놀고 먹고 마작에 빠져있는 남편이 너무 정 떨어져서 더 이상 련민의 정도 생기지 않더라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싸우는게 부부사이라 하더니 그 말이 맞는것 같다. 하긴 제일 가깝고 또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부대끼기때문이겠지. “사람이 그런것 같아요. 부부사이에 다툰다는건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잘못된 부분을 고치면서 잘살자는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어느날부터인가 미자씨는 더는 일찍 집에 오라, 마작 제발 좀 그만 놀아라, 고향에서 뭐든 시작해서 기반을 잡아나가라 등등 잔소리를 뚝 멈추었다. 대신에 헤여지자고 조용히 그러나 드세게 밀어붙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보더라도 좀 참고 살라고 권고했지만 미자씨로서는 이제는 자기 인생을 살고싶었다. 정말 단 하루를 살아도 정이 가는 사람과 살고싶었다. 남들이 리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무서울게 없었다. 남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앵돌아진 마음을 다시 돌려세우기가 쉽지 않더란다. 고민끝에 미자씨는 단호히 리혼을 결심하게 되였던것이다. 자기 인생이니 누구와 상론할수도 없고 상론해봤자 무슨 정답 같은게 있을가? 정말 어느날 후회해도 자기가 한 선택이니 스스로 감당할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어코 리혼을 고집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남편은 죽어도 리혼을 못해준다고 나누웠다 돈 잘 버는 기계로만 보이던 안해의 반란이 이 정도로 강력하게 리혼까지 가려니는 생각지도 못했을것이다.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그 많은 재산도 다 포기하고 안해가 정말 단지 이런 리유들로 리혼하자고 나설가? 남편은 리해 못하는 눈치였다 다툰 뒤면 안해가 종종 리혼을 들먹이긴 했지만 그것이 정말 현실로 이어지려니는 예상을 못했던것 같았다. 하지만 미자씨는 남편한테서 이미 떠나버린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반년만에 끝내 두 사람은 남남이 되였다. 그동안 잘살아보겠다고 애면글면 모아놓은 재산은 혼인의 결속과 함께 가차없이 두쪽으로 나뉘여졌다. 가슴이 아팠다. 실제로 한 가정이 깨지기까지는 이런 과정,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거구나 실감했다! 그럼 리혼후의 생활은 어떠했을가. 과연 생각처럼 행복했을가? 현실은 그게 아니였다. 미자씨는 리혼한 뒤 한 1년간은 홀가분하게 살았다. 예전처럼 늦게 귀가하는 남편때문에 잠을 설칠 일도 없고 일찍 들어오라 잔소리할 일은 더더구나 없었다. 그동안 가끔씩 소개 들어오는 사람도 만나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미자씨는 지인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보았다. 그 사람은 학벌도 있고 직위도 있고 단위도 괜찮은데다 가정부담도 없었다. 인물체격이 좋은데다 녀자를 이뻐해주고 유머감각도 있었다. 이 나이, 이 조건에 어쩌다 이런 호박이 넝쿨채 굴러들었냐 싶을 정도로 너무나 완벽했다. 그야말로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였다. 세상에 어쩜 이 같은 행복이… 미자씨는 이제야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무등 기뻤다. 그런데 그 남자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술만 마셨다 하면 누구나와 걸고들어 시비를 걸었다. 그 남자의 못된 술버릇에 질린 친척이나 지인들은 모임에 아예 그를 부르지도 않았다. 참으로 어이없었다. 그러나 미자씨는 조건 좋은 그를 쉽사리 포기하고싶지 않았다 자기 같은 조건에 어디 가서 이만한 조건의 사람을 만나랴 싶었다. 그래도 사람이 인정스러운 면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남편과는 부부정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지만 이 남자는 그나마 자기를 이 세상의 전부로 알아주고 그렇듯 소중하게 여겨주었던것이다. 정이 뭔지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 외롭게 살다가 어쩌다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니 쉽게 잃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떡하나 주풍을 바로잡아주고 같이 살고싶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술을 안 마실 때는 순한 양 같다가도 술만 마시면 야수같이 돌변했다. 이중성격자인지 정신이 든 다음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늘이 야속했다. 전남편은 도박군, 두번째로 만난 남자는 주정뱅이… 여태 살아오면서 남한테 해코지 한번 하지 않고 착실히 살아왔는데 어쩜 남편복이 이토록 없단 말인가. 때로는 차라리 전남편과 회복하고싶었다. 도박군이 주정뱅이보다는 나을듯싶었다. 이 남자는 만날 술에 취해있다보니 언제 맑은 눈동자를 서로 마주보며 얘기를 나눌수도 없었다. 그제는 정신상태도 좀 이상해진듯했다. 결국엔 마음을 모질게 먹고 헤여지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그렇게 온순하던 남자가 헤여지자고 하니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전남편은 그래도 자식이라도 있으니 막 나가지는 않았는데 이 남자는 달랐다. 어찌나 무섭게 나오는지 당하면 어데 가서 해볼데도 없었다. 그제는 손톱만큼의 미련도 안 남았다. 정말 갖은 수단을 다해 겨우 그 남자와 헤여졌다. 그렇게 두번째 혼인에서까지 실패하고나니 그녀는 인생에 회의가 들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시집 갈 나이가 다된 딸애한테 부모가 리혼했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것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더 커졌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애가 있는 부부들은 웬만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고. 세포 하나하나로 깨달은 그녀의 인생담, 어둡고 소름 끼치는 기나긴 턴넬 그끝까지 가본 사람의 절절한 부탁이였다. 요즘 사람들은 돈보다, 명예보다 더 그리운게 감정인가보다. 그렇게 풍족하게 살았었지만 감정이 없으니 못살겠더라는 미자씨는 가지고있던 소중한 아홉가지로 바꾸고싶은 한가지가 바로 부부정이라고 했다. 요즘 세월 돈벌이때문에 부부가 서로 떨어져 사는걸 보면 서글퍼진단다. 자기네도 잘살겠다고 떨어져 살다가 결국엔 이렇게 되였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엔 내 집 마련을 위해 아글타글, 그뒤에는 더 많은걸 갖추느라 다람쥐 채바퀴 돌듯 살다보니 부부감정따위엔 신경 쓸 사이도 없었는데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서로간에 제일 중요한 정을 무시하고 살았던것이다. 미자씨의 비극이 우리 시대의 비극이 아닐가싶다. 요즘은 부부사이에 정이 다 사라져 리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부부사이에 좀더 대화를 가지고 부부감정을 차곡차곡 다져간다면 이러한 비극은 피할수 있지 않았을가. 매일같이 코를 맞대고 사는 부부들은 가깝기때문에 더구나 서로의 감정따위를 무시하면서 사는 경우가 흔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은 돠지 말자. 내것이라고 이름 짛었던 내 남편 내 안해도 당신의 무관심과 외면속에서, 거듭되는 실망으로 남남이 될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자. 일단 정말 비극이 일어나면 제일 상처받는건 당신과 당신의 가장 소중한 가족이다.   미자씨 인생담이 좋은 귀감이 되였으면싶다. 연변녀성 2015년 10기
5    제로도 아니고 마이나스로 시작한 인생수업 댓글:  조회:1962  추천:0  2019-11-16
남들은 사는게 다 행복해 보인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간간히 속탄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내가 들어볼바엔 별 일도 아닌 일때문에 속탄다고들한다. 그럴때면 나는 속으로 “그대들은 진짜 속이 탄일, 진짜 설음이 뭔지나 알기나 해?” 라고 혼자말로 중얼댄다. 요즘 샐러리맨들의 일상화장법을 배워주는 강습반에 다니면서 여러분야의새로운 분들을 알게 되였다. 모두들 참 예쁘기도 하다. 반달같이둥근 눈섭,짙고 긴 눈초리, 예쁜 눈매,오똑한 코, 섹시한 입술,아기 피부같은 살결, 꽁꽁 들어박힌 단정한 오관,한마디로 젊고 이쁘고 같은 녀자인내가 봐도 황홀하기 그지없다 어느새 입가에 튕겨나오는 감탄. 엮시녀자는 이뻐야 돼! 그게 자산이구나! 그 분들을 지켜보노라니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부모들은 잘 살지도 못해서 내가 그토록가고싶어하는 대학공부도 다 못시켜 평생 한이 맺히게 하였는데 이쁘게나 좀 나주시지. 하지만 인츰 또 허허 허구픈 웃음을 웃게된다. 내가 부모가 되여보니 그게 어디 부모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그런줄뻔히 알면서도 가슴속 한켠으로는 은근히 섭섭함을 떨쳐버릴수 없다. 예쁘게 나주면 좀 좋아! 하지만 그 서운함도 잠시 잠간 순간뿐이다. 다시 잘 생각해 보니 늘씬한 체격도, 예쁜 얼굴도 매력적인곳이라고는 한곳도 찾아볼수 없는 아주 수수한 사람으로 태여나서 가진것 하나없이 낳아 주었지만 그래서 많고많은 고생들을 거듭했지만 과정이야 여하하튼 지금은그래도 결과적으로 행복하게 잘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이렇게 이쁘고 지성미 있고 여유넘치는 이들과같이 또 다른 아름다움과 취미생활을 즐기고있는 내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느새 원망은 봄눈 녹듯 사르르 없어지고 감사가 샘물처럼 솟구친다. 힘든 가정형편때문에 너무 일찍부터 고생의 쓴맛을 알았고 어려서부터 저절로 분투할 생각을 했었고 누구나 다 다닐수 없는 고생이라는 명패 "대학"을 나와서 돈주고는 절대 바꿀수 없는 소중한 자산, 좋은경력들을 쌓았고 뒤 돌아 볼사이도 없이 책임감 하나로 오늘날까지 분투해온 덕분에 지금은 저절로도 조금 아니 아주 만족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 물질적으로 풍족한 부모의 그늘밑에서 자랐다면 아마오늘날의 이런 성취들은 없었을것이다. 반듯하게 키워준것외에는 부모로부터 얻어가진것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고 오히려 숱한 보따리만 지워주었던 내 가족, 밑바닥인 제로도 아니고 마이나스로부터 시작해야만했던 나의 인생수업, 그래도 그 많은 고생들을 하나하나 용케도 이겨내고 지금은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고있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나의 휘황한 성취와 나의 전성기에는 나의 노력과 분투의 땀방울이 슴배여있지않은게 없다. 그런 힘들었던 나날들 그런 과정 과정들이 쌓여서 오늘같은 사업의 성공과 함께 내 생에봄날을 맞이한게 아닐가?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겪었던 고생들과 그 과정 하나하나가모두 감사하기 그지없다 이쁘지 않으면 좀 어때,녀자는 가꾸기에 달렸다는말도 있잖아. 그래 많이 가꾸면서 살자.내적 미도 외적미도 지성미도 가지고 있는 모든거에 늘 감사한 삶을 살련다 생각을 바꾸니 내 삶도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감사의 샘물이 솟아오르고 이런웨침이 메아리 되여 울려퍼진다 “부모님들이여! 반듯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하나로 저희는 평생을 만족하며 살렵니다.”
4    행운의 로또 보따리 댓글:  조회:746  추천:1  2019-11-16
시골에서 자란 나는 사남매 셋째딸로 아래에 남동생 하나 두고있다. 그런데 이 남동생이 나에게 엄청난 부담을 가져다주는 애물단지 보따리가 되였던적이 있다.  피줄을 나누어 가진 혈육으로 그냥 내쳐버릴수도 없고 그렇다고 끌어안자니 내 힘이 부치여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막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애물단지 보따리가 지금에 와서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보배단지 보따리가 되였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지난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것이다. 그때 나는 집 한칸 있고 매달 먹고쓰는데 부족하지 않게 벌어다 주는 남편을 만나 그냥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다. 거기에 자그마한 가게 하나 차려놓아 다달이 푼돈도 생기게 되여 그야말로 더 이상 바라는것없이 무지무지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너나가 다 한국가는 세월에 애아빠도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고 나는 집에서 애나 키우면서 하던 가게일을 계속 보며 그럭저럭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시골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던 남동생이 찾아왔다. 시골학교여서 학생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학교문마저 닫게되였다며 이젠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될일만 남았다고 한숨을 풀풀 내쉬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제와서 다른 길이 없는데 어떻게 좀 누나와 같이 장사나 할수 없겠냐며 마구 들이대는것이였다. 장사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말이 장사지 그거 어디 아무나 하는 일인가. 그거 누구나 다 하는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장사해서 못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것이니 말이다. 나도 이제야 겨우 밥벌이나 하는 장사인데 동생이 와서 거기에 숱가락을 얻고 같이 밥을 나눠먹자고 한다. 그러나 답답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 짚오라기잡는 심정으로 없는 비위까지 쓰며 매달리는 동생을 보니 차마 거절할수 없었다. 나는 기실 오래전부터 동생에게는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손에서 자라면서 나는 시집오기전까지 못해본 고생이 없었다. 시골에서 어렵게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시험을 치렀으나 락방하였다. 그 다음해 보습반에 들어가 재수하자면 그때 돈으로 500원만 더 내면 다닐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집에 그 돈 500원은 천문수자나 다름없어서 나의 학비로 선뜻이 낼수 있는 형편이 아니였다 세살 터울인 남동생이 금방 내 뒤를 따라 고중에 붙다나니 혼자 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어머니께는 아무래도 무리일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어머니는 그래도 차마 넌 다니지 말라는 말씀은 못하시고 어떻게 하나 어디서 돈을 구해보겠으니 포기하지말고 다시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격려해주셨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집안형편을 빤히 알고 있는 나는 계속 보습반을 다니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릴수 없었다. 그리고나서 혼자 궁리한것이 나절로 돈을 벌어 학비를 마련한다는 계획이였다. 상학기엔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후학기에 보습반을 다시 다녀 대학시험을 한번 더 쳐보려고 마음 먹었던것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정작 사회에 나오고 보니 다시 학교에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어머니는 금방 고중에 붙은 남동생의 학비도 제때에 대주지 못하는 형편이셨다. 나는 내가 고중다닐때 집에 돈이 없어 학비도 제일 마지막에 내다나니 몸과 마음이 늘 초라해나던 생각이 들어 사내자식인 동생만은 그렇게 기가 죽어 학교를 다니게 하고싶지 않았다. 잘 먹이고 잘 입히지 못하더라도 사내자식의 기만은 살려주고 싶었던것이다. 그러나 보습반 후학기만 다니고 다시 한번 대학시험을 쳐보자했던 애초의 나의 생각이 얼마나 천진한 생각이였는지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평생 동안 얼마나 후회하고 한이 맺히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는지를 얼마 안가서 금방 깨닫게 되였다. 만약 시계바늘을 되돌려 나더러 지금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엄마의 다리라도 잡고 어디가서 돈을 꿔서라도 기어코 다시 한번 대학시험을 칠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며 애원했을것이다. 그런데 환장할것은 그렇게 내가 모든 설음을 혼자 씹으면서 애면글면 뒤바라지하여 고중공부를 마친 동생이 나중에는 글쎄 대학에 붙고도 붙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한것이다. 동생은 자기에게 날아온 입학통지서를 남몰래 감춰놓았던것이다. 나는 그런줄도 모르고 늘 동생을 탓했다. 이 누나가 내 인생 내 꿈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힘들게 너를 공부시켰는데 대학문앞에 가지도 못했다고 나무랐다. 그때마다 동생은 벙어리가 된듯이 눈만 껌벅껌벅거렸다 그렇게 동생이 힘들게 살때마다 늘 원망하였는데 그로부터 거의 십년이 지났을까 어느날 동생이 더는 참지 못하고 실토정했다. "사실 그때 입학통지서는 받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놓을수 없었어."라고 말이다. 순간 나는 몽둥이에 한매 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왜, 왜서? 통지서를 감췄단말이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동생이 그때 그런 선택을 했을땐 그로서 리유가 있었을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흥분을 최대한 자제하고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대학 가면 그 뒤바라지는 누가 해주겠어. 그때까지는 누나가 뒤바라지해준 돈으로 어렵게 고중공부는 마쳤지만 이제 시집갈 나이가 다 된 누나한테 더는 보따리가 되고싶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녀봤자 우리집에 뒤를 봐줄도 사람 하나 없는데 사회에 나와서 또 뭘 어쩌겠나.” ”남자로 태여나서 왜서 그렇게 옹졸하게 생각했느냐. 멀리 보고 길게 생각해야지. 네가 그때 입학통지서만 내 놨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대책을 강구하였을것이야. 아버지의 생전단위에서도 네가 대학에 입학했다면 꼭 돌봐줄거고. 대학을 졸업하고 멋있게 사는게 누나의 고생에 대한 보답인걸 왜 몰랐나? 형제사이에 신세질땐 신세를 지고 잘 돼서 잘 살아주면 되는게 아니였나.” 나는 동생을 애면글면 뒤바라지 해줬기에 배신감이 더 들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을 졸업했더면 지금쯤은 좋은 직장에 출근하고 떵떵거리며 살수 있지 않겠어. 지금처럼 고중만 졸업하고 시골에서 선생질하다가 백수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어. 바보 팔푼이라구. 저 절로 제 눈을 찔렀지. 그 년대에 대학생이 얼마나 받들렸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짓을 한 동생이 야속하기만 했다 . 그렇게 가시든 내 살점처럼 아픈 내 남동생, 그런 동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동생몫으로 가게를 하나 더 내서 동업하였다. 그런데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인지 기댈 언덕이라곤 없는 우리 남매에게 대박이 터질 기회를 주었다. 적은 돈으로 시작해서 열심히 한 장사가 몇해 안되는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고 불어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어마어마하게 커져버린것이다. 때로는 어린 자식들을 조롱조롱 넷씩이나 둔채 너무도 일찍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가 저 세상에서 우리 남매를 돕는게 아닐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누가 그저 부조해 주듯이 해석이 불가능한 어떤 힘이 우리를 돕는듯 말이다. 이런걸 행운이라 하지 않을가? 아마 행운에도 이런 행운은 더없을것이다. 완전히 로또에 당첨되면 이럴가. 그야말로 나도 대박, 동생도 대박이라 내가 마음 잘 쓴 대가를 톡톡히 받아낸 행운의 로또당첨자같았다. 장사가 잘 된날은 온 저녁 달콤한 마음에 생각할수록 고맙고 또 고마웠다. 래일 또 이런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고마움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 집평수도 늘이고 자동차도 사서 반평생을 홀몸으로 우리 사남매를 키우시면서 고생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벌의 저기 끝까지 씽씽 달려보고도 싶었다. 매일 퇴근한 뒤엔 모아산에 올라가 시원한 공기도 마시며 여유도 즐기고 싶고 내 힘 내 능력으로 열심히 벌어서 사고싶은 모든걸 다 사고 싶다. 돈 많이 벌어서 내 인생의 가치도 실현하고 내 부모형제의 언덕이 되여주고도 싶다. 장사에서 대박이 터져서 자금이 풍족한데다 머리가 좋은 동생이 좋은 아이디어를 자꾸 대주고 나에게 경험까지 좀 있어서 그 뒤에도 장사는 계속 즐거움의 련속이였다. 이렇게 우리 남매는 자그마한 가게장사군으로부터 이제는 사업가로 불릴만하게 발돋음을 한 셈이다 그때 만약 동생을 "애물단지 보따리"로만 보고 외면하고 내쳤더라면 그리고 동생한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냥 한달에 삼사천원이나 버는 작은 가게장사군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니 동생은 그야말로 "보배단지” 보따리가 되고 내 인생의 귀인이 된것이였다. 이런 생각이 나에게 세상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여서 나는 시골에 있는 오빠들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도와주면서 살았고 그 길에서 또 우리를 도와주는 많은 귀인들을 만났다. 결국 내가 덩달아 톡톡히 혜택을 본셈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늘 감개무량하게 지인들과 얘기한다. 못 사는 부모형제들일지라도 절대로 그들를 외면하지 말라고. 그들이 꼭 당신이 상상할수도 없는 복을 가져다줄것이라고. 세상은 꼭 그렇더라고. "덕은 쌓은대로 가고 죄는 지은 대로 간다”더라고. 오늘도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 내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을것이다. 꼭 축복받는 인생을 선물받으리라는 기대보다도 온 가족이 행복하니 내 마음도 더 없이 행복하니깐말이다. 가족과 함께한 책임감이 오늘날 내 성취의 황금열쇠가 아니였던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머리속에는 이런 시구가 저절로 떠오른다. 팽개치고 싶은  보따리 외면하고 싶은 보따리 어쩔수 없는 내 몫이라네 무거운 보따리 힘겹게 지고  높은 산 오르느라 불만이 얼마였던가? 하지만  보따리덕에 마음씨 좋은 동행자들 돕고 도우며 산마루에 올랐거니 굽어보니 혼자 오르는 이들  까마득히 산중턱에서 헤매고 산밑에서 맴돌더라 정상에 이른 동행자들  감지덕지 하였노라 애초에 내동댕이치지 않은 보따리를 두고
3    동네 아이 댓글:  조회:1365  추천:0  2019-11-16
"친엄마가 아니예요?" 딸애는 종종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때마다 나는 "응? 어떻게 알았지? 내가 고아원에가서 건강하고 나 닮은 너를 데려다 입양한줄을." 이렇게 짐짓 정색해서 되묻는다. 그러면 딸애는 "거짓말, 그럼 사람들이 왜서 나를 엄마 꼭 빼 닮았다 해? 난 엄마 친딸이야."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나이 삼십이 다 되여 딸애를 본 우리는 애가 그렇게 귀여울수가 없었다. 쥐면 부서질가 놓으면 날아날가? 금지옥엽으로 키우면서 애아빠도 나도 다 애한테만 사랑을 쏟고 애가 없었던 나날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정도로 아기에게 엄청 집착하였다. 뒤늦은 아이의 탄생은 그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히 다른 즐거움과 쾌락을 안겨주어 우리는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것처럼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고중 다닐때 한 숙사에서 제일 가깝게 보내던 동창생이 상해에서 연길로 출장왔던 길에 아기도 볼겸 그 동안 헤여져 살았던 회포도 풀겸 겸사겸사 우리집에 와서 며칠 묵어가게 되였다. 친구는 그동안 애 키우는데 아직은 천방지축인 나를 도와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거들어주면서 자기가 먼저 애를 키워보았노라고 이런 저런 주의점들을 말해주면서 친정언니인양 자상하게 잘 알려주었다. 기저귀도 매일 깨끗하게 씻어서 꼭 땡볕에 말리워 소독시켜 주고 태교때처럼 아기한테 늘 은은한 음악을 띄워주어 감성을 키워주고 아기방은 구석구석 늘 깨끗하게 청결해주고 방안을 늘 시원한 바깥공기로 환기시켜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아기가 너무 이뻐서 물고 빨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우리부부를 보더니 나에게 이렇게 따끔한 충고 한마디 했다. "애가 돐이 지나면 옷가게를 다시 시작하겠다하면서 애한테 너무 살뜰하게 굴지마. 그렇게 해야 이제 애하고 떨어져 출장다녀도 너도 애도 다같이 적게 힘들거야." 그때에는 다는 리해하지 못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도리는 있는것 같아서 나는 차츰 많이 아쉽지만 많이 자제하고 의식적으로 조금씩조금씩 거리를 두고 키웠다. 그렇게 어느덧 애는 한돐이 지나고 나도 가게에 나가 장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의류업에 종사하는 나는 한달에 한번씩은 꼭 외지에 물건구입을 다녀야 했다. 돐이 지나서까지 모유수유했던 애를 집에 떼두고 외지에 출장갔는데 이것 참, 글쎄 때때로 "살인"미소로 쓰러지게 만들고 옆에서 살갑게 굴던 딸애가 눈에 삼삼해 미치겠는데 애를 먹이던 젖까지 띵띵 부어서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파나 죽을 지경이였다. 한쪽으로 짜버릴수록 점점 더 불어나는 젖때문에 갔던 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서 이튿날 곧바로 집에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나는 잊혀지지 않을 고생을 하며 집에 돌아와보니 애는 다행히 아무일도 없이 태평무사하게 할머니와 짝짜그르르~ 쾌활하게 잘 놀고 있었다. 그 친구의 말이 감동으로 안겨오는 순간이였다. 과연 애와 사이를 두고 키웠더니 엄마가 출장가도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유쾌하게 잘 놀고 있었던것이다. 얼마나 그 친구한테 고맙던지. 그 때에서야 그 친구의 한마디가 얼마나 나와 애한테 도움이 되는가? 절실하게 느끼게 되였다. 그 뒤에도 늘 출장이 잦은 직업이여서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잊지 않고 애한데 시종일관하게 그 원칙을 고집하며 키웠다. 그 덕에 지금은 "엄마가 오늘 한국에 물건구입 갔다 와, 한주일 걸릴지 모르겠어, 그 동안 집에서 애 먹이지 말고 잘 노세용"하면 딸애는 "그래요, 엄마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놀음에 빠져 논다. 순간 조금은 섭섭하지만 그래도 "엄마 가지마, 보고싶어 안돼."하면서 칭칭 매달리며 떨어지지 않으면 우리 모녀는 서로 엄청 더 힘들것 같다. 며칠 출장중에 차분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잘 처리하고 돌아와도 "엄마 그 동안 그리웠어."하며 감겨드는 다른 집 "공주"나 "왕자"들과는 다르게 무탈하게 아빠랑 할머니랑 동네 이웃들과 잘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릴때부터 둥글둥글 성격 좋게 동네의 누구나 잘 어울려서 "동네아이" 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그렇게 애가 크는 동안 나는 늘 애를 마음으로만 이뻐하고 겉으로는 무관심인척 키우고 있다. 저녁 늦게 돌아와도 그때까지 기다리며 자지 않으면서도 자는 척, 아침에 학교갈때 "내 새끼 장하다. 오늘도 화잇팅 !"하고 싶으면서도 짐짓 다른 일 보는 척, 무덤덤하게 "잘가..." 좀 컨디션이 좋지 않은것 같으면 출근해서 온 하루 애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나, 큐큐에 올리는 글을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제일 먼저 읽어보고 학교에서 친구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부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나, 대학진학을 앞두고 어떤 학교 어떤 전업이 평생에 혜택을 입을수 있는 전공일지?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조언을 요청하는 나는 영낙없는 친엄마이건만. 겉보기에는 다른 집 엄마들처럼 섬세하지도 살뜰하지도 못하고 늘 랭혹하고 엄격한 나를 보며 아주 많이 "엄마, 친엄마가 아니지요? 친엄마 맞어?"라고 의혹에 가득 차 묻는 딸. "그래 맞어, 나는 친엄마가 아니야, 너는 저기 고아원에서 입양했거든." “그런데 왜 난 엄마를 꼭 빼닮았어요?" "엄마가 나를 닮은 애를 뽑아서 데려오다나니 나 닮아보이는거야." 딸애는 허허 웃으면서 "쳇, 엄마 언제부터 거짓말 이렇게 잘해 " 종종 낯설게 굴고 차갑게 구는 내가 친엄마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다 우리모녀는 하하하~ 웃음보를 터뜨린다. 애는 늘 "친엄마가 어찌 이럴수 있냐?"고 애매하다는 표정이다. "나의 이런 무관심속에서 너는 홀로 서기 달인이 되였잖아." 딸애가 열아홉살 되는 해에 나는 딸애에게 나의 그 동창얘기를 해주었다. 깜짝 놀라는 눈치더니 "네가 알다싶이 엄마가 늘 출장해도 그 친구의 충고대로 마음으로만 이뻐했기에 너는 이렇게 무난하게 잘 커줬단다."고 말했다. 눈 깜짝하지 않고 듣던 딸애가 어른처럼 리해된다는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이지 그 말 한마디의 혜택을 나는 평생 입으며 살았다. 그래서 애를 힘들이지 않고 무난하게 참 잘 키울수 있었다. 덕분에 딸애는 앞으로의 대학생활 회사생활도 거뜬하게 보낼수 있을것같다 . 나도 또 많은 샐러리맨후배엄마들에게 "힐링육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라고 이 경험을 얘기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상황엔 그 말이 참 적시적인 보약이였던것 같다. "고마워 친구야, 나 두고두고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그리고 꼭 이 '원쑤'갚을게."
2    알랑방구 딸애의 성장 노트 댓글:  조회:1425  추천:0  2019-11-16
1탄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적있다. 부모는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이미 재미와 즐거움을 만끽하였기에 다 큰 뒤엔 자식한테서 뭘 더 바라지 말라 이말은 도리가 있는것 같다. 그러나 애를 키우면서 그래도 뭔가 희망을 품고 바라며 사는 삶이 행복하지않을가? 하는 미련을 떨쳐저릴수 없다.애들 때문에 더 많이 벌고 싶고, 더아끼고 싶고, 다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마음이 아닌가? 학교의 운동대회나 학부형회의 때는 학부형들이 가게에 와서 옷들을 잘도 사간다. 자기집 애들이 부모님들이 옷을 잘 입고 오라고 신신당부 해서 그런단다. 그래서 나도 한번 애와 물어본적이 있다. "엄마도 학부형 회의때에 멋지게 차려 입구 갈까?" "괜찮아요, 옷가게 하는 엄마는 언제 봐도 멋지니까." 엄마기분을뛰워 줄줄 아는 딸애의 능청스러운 대답이다  "좋네, 엄마 기분 짱이야." 나 또한은근 슬쩍 받아 주고. 하긴 요즘은 부모들은 거의 외국에 나가 있으니 학부형회의에 가보면 거의 다할머니나 할아버지들께서 오시다 보니 그냥 젊다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될 것 같았다  예쁜 옷까지 굳이챙겨입지 않아도 애 눈에는 엄마가 제일 멋질 법도 하지. 헌데 어제는 별 생각 없이 애 만나러 학교에 갔는데 낯선 사람 보듯이 눈이휘둥그래서 엄마를 바라본다. 왜 냐고 물었다. "엄마 오늘 너무 멋져." 그런 멋진모습을처음 보는듯 탄성까지 지르면서...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차려 입긴 했었다. 나는그저 피씩 웃고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래, 멋진 엄마가 너 보러 오니 기분이 어때?” "넘 좋네." 딸애가 히쭉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내민다. 우리는 히히 호호 웃으며 같이 밥먹으러 학교 부근의 음식점에 갔다. 밥 먹으면서도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속심 얘기, 학교 동학들 얘기, 선생님 얘기들을 한다. 다 먹은 뒤 나와서 학교대문까지 같이 가면서반에 동학들도 몇 명 만나게 되였다. 딸애는 자기 동학들에게 엄마라고 이전과는 다르게 주동적으로 그리고 그처럼 자랑스럽게 인사시켜 주었다. 제 엄마가 무슨 시위서기라도 되는것처럼. 덕분에 나도 애들과 한참 서서 몇마디 즐거운 롱담도 하고... 애와 헤여지고 차에 앉아 집에 돌아오면서 마음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다. 애들한테 자랑스레 소개해주던딸애의 그 표정때문에 아마 난 며칠동안, 아니 몇달동안 기분이 좋을것 같다. 앞으로 딸애의 그 자랑스러운 표정을 위해서라도 더 예쁜 엄마가 돼야 될겄같네. 부모를 울리고 웃기는 새끼란 뭐길래? 2탄 요즘 슬그머니 후회하고 있는 한가지일이 있다. 개학초부터 고중 2학년에 다니는 딸과 이런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제 대학에 가면 너절로 돈을 계획적으로 써야 되기에 달마다 한달치의 소비돈을 한꺼번에 다 줄테니깐 이제부터 이렇게습관하구 적응해보자." 이렇게 애와 토론하고 설득하고 옴니암니 격렬한 흥정끝에 한달 소비돈 겸 식비를 1000 원으로 결정하고 매달 은행카드에 입금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웬걸 줄돈을 다 주니 그동안 돈이라도 달라고 자주 걸려오던 전화기가아예 벙어리로 되여버렸다 적게 자주 줄때는 그나마 대화라도 할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니 이젠 아예 소식두절이 되여 버렸다. 애초 그 계약이 후회되여서 내가 또 먼저 다시 고치자고 제안 했다. 고려할사이도 없이 안된다고 딱잘라 말하는 따님, 돈이라도 달라고 전화할때가 좋았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속수무책이되여 속맘 끙끙 앓고 있는데 어느날 아침일찍 따님한테서 걸려오는 전화벨소리! "엄마 은행카드를 도저히 못찾겠어, 저녁에 퇴근뒤에 돈 좀 갖다주라." “얼씨구~절씨구~”, 딸님 만날수 있어 좋구 좋네. 이제 카드 내가 먼저 찾아서 아예 꽁꽁 숨겨버려야겠다. 내가 자식키워보니 자식 타향에 보내놓고 그리워하는 부모님들의 그 마음을 그나마 알것같다. 3탄 아침에 딸애가 학교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이번 운동대회는 장거리달리기를 하자 말아야겠어, 등수에도 들지 못하는데." "너무 등수에 연연하지 마, 등수에 드는건 별문제야 참여가 중요하지." 이 말에나는 제꺽 동을 달며 이렇게 받아 말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급하다 못해 이번 달리기에 참여하면 엄마가소비돈도 더 많이 주고 상까지 주겠다고 말해 또 한번 다른 나쁜 습관을 키워줄뻔했다. 선생님이나 동학들 립장에선 등수에 못들면 많이들 아쉽겠지만 딸애의 앞으로의 인생에는 하나의 경험이 되고 얼마나 좋은 자신감의 바탕이 될지 잘 알기에 엄마인 나의 욕심에서볼 때 도시락 사들고 다니며 응원해주고 싶은 일이다 요즘 다 큰 딸애를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분명 내 잘못이 더 큰것 같아 후회막급이다. 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그때그때 바로 잡아 줬어야 할 부분들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한 후회로 지금은 몇 곱절 더 공력을 들여야 그런 습관을 고쳐줄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 일단은 아침 일찍 잃어나는 습관, 달리기나줄뛰기 운동을 견지하는 습관을 했더면 좋았을걸. ■ 편식하지 말고 여러가지 음식을 다 잘 먹을수 있게 키웠어야 했을걸. ■ 낮에 학교 가서는 이런 저런 애들과 잘 어울릴수 있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로키웠어야 했을걸. ■ 어릴때부터 애에게 그 년령때에 맞는 동요 동시 동화를 읽어줌으로써 일찍부터애의 감성을 키워줬어야 했을걸. ■ 어릴때부터 이곳저곳 유람을 다니면서 애한테 앞으로 커서 자연의 오묘와더불어 넓은 흉금을 가질구 있게 했더면 좋았을걸. ■ 부모의 존엄 즉 애들이 부모가 무서운 줄 알게 키웠어야 했을걸. 곱다구만 어루 만지며 키워 가지고 집집마다 애들이 왕이요 밖에 나가면 안하무인.애들이 어린 집 학부모들은 부디 나같은 유감을 남기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 4탄 방학동안엔 여행을 다녀오자고 너무나도 닥달해서 그 성화에 못이겨 딸애와 한국행을떠나게 되였다. 평소엔 제법 컸느라고 엄마인 나의 말을 무시할때가 참 많았다. “무릎아래 자식”이라고 어릴때 잘 길들였어야 되는데 이제 훌쩍 크고보니부모의 눈으로 볼바엔 하는 일들이 어이없고 눈에 거슬릴때가 참 많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좀 다르다 처음 같이 여행을 떠나다나니 곰상곰상 엄마말을 들을수밖에 내 지휘를 들을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속으로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이 참에애한테서 그 동안 무시당한 봉창을 든든히 해야지. 나 원 깨 고소해서 못살겠네.) 특히 비행기표 끊는 일부터 나는 모든 여행과정진행을 애한테 맡겼다. 정확히 비행기표 끊은날부터 딸애는 설걷이 하라면 설걷이 하고 채소사오라면 채소 사오고 방바닥 닦으라고 해도다 하고 옷장정리와 기타 심부름을 싫단 말을 안하고 곰상곰상 다 해줬다. 길 떠나서 주의해야 할 일상상식들을말해주면 귀가 솔깃해서 듣는다. 예전과는 완전 다른 딸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진짜 저렇게 원하는걸못해준 자책감도 어느 정도 들었다. 요즘은 애들 교육을 위해서 이런저런곳에 데리고 다니며 여행하는 가족들이 많은데 나는 늘 시간에 쫓기다보니 애 데리고 려행 한번 못갔으니 애한테 여간만 죄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떠나게 된 여행로정은 연길에서 기차로 심양까지 가서 다시 심양도선공항에서 인천으로, 올때는인천공항에서 북경공항으로 북경에서 삼박사일 명승고적 즉 력사공부 좀 시키고 연길로 돌아오기로 일정을 잡았다. 여행떠나는 날에도 나는미리 두시간 전에 기차짬에 데리고 가서 기다렸다. 한시간 전인줄 알고 따라왔던 딸애는 너무 일찍하다며툴툴댄 뭐나 미리하기 좋아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애한테도 뭐나 확실하게 하는 습관을 심어주고 싶어서앞으로 혼자 하는 여행도 미리미리 다니게 하고 싶어서 일찍 나왔었다. 여행하는 내내 모든 일은 애한테맡기고 내가 도리여 애마냥 따라다니기만 했다. 누구처럼 "바보엄마 역할, 무식한 엄마 역할, 나약한 엄마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딸애는 여기저기 뛰여 다니면서 앞으로혼자라도 아무데나 다 찾아 다닐수 있게 모든 일들을 척척 잘도 해나갔다. 때론 네가 엄마를 무시할만도하겠다는 생각까지들 정도로. 다 키워놓았구나 하는 뿌듯함까지 들게 한다. 이번 여행은 나와 딸, 모두에게 즐거운 힐링이 되였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다시 연길에 가면 애는 열심히 공부할거고 나는즐거운 일터에서 재부를 창조,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라고다짐했다. 힐링하고 왔으니 새로운 목표를 위해 오늘부터 빡세게 일하자. 아자!아자!화잇팅!
1    열혈모녀 축구팬 댓글:  조회:889  추천:0  2019-11-16
열여덟살 딸아이 라디오에서 나는 축구 승전 소식을 들으면서 슬그머니 눈물을 훔친다. 어김없는 이 엄마의 모습이다. 나는 쓰윽~ 웃으면서 "너 우는거야 허허~" 딸애는 "네에~진짜 감동입니다" 한다. 그러면서 "엄마, 이번주 토요일 축구표 석장을 끊어주세요, 친구들 같이 응원을 가겠습니다. 엄마, 스티브 선수의 싸인을 받고 싶은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엄마 인맥 다 동원해 보세요"라고 한다. 고중2학년인 딸애와 나는 축구때문에 울고 웃는 열혈모녀축구팬이다. 딸애는 요즘 스티브선수의 싸인을 받겠다고 엄마를 못살게 굴며 온갖 애교를 다 부린다. 전번날 북경 북공과의 홈장경기에서 5:0 으로 이겼을때 일이다. 나와 딸애는 축구경기 내내 너무 박수를 쳐서 손바닥이 다 얼얼해나고 너무 좋아 목청껏 웨치다나니 상반전에 이미 목이 다 쉬여버려 후반전부터는 안타깝지만 소리도 못치고 그저 두손을 높이쳐들고 기립박수로 환호하고 응원할수밖에 없었다. 목이 아프고 쉬여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맥이 없을때까지 딸애는 계속 응원했다.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다. 그날 돌아와서 며칠동안 목캔디를 쭉~ 먹고서야 목상태가 좀 나아졌다 . "2륜 앞당겨 슈퍼리그에로의 진출!" 라디오에서 일년 내내 안타깝게 조바심을 태우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 박태하감독은 매체에서 “우승과 준우승은 의미가 다르다”고 한다. 어느새 코등이 찡~해나고 눈가에 눈물이 핑~돈다. 이런 알싸한 감정이 어디 나뿐일가? 29륜 경기때 보라. 눈물범벅이 되여 구경하는 관람자들을, 지금 생각하도 속이 뭉클하다. 예로부터 축구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였다. 특히 연변축구는 명실공히 우리 연변 조선민족의 자존심뿐만이 아닌 지구촌 조선민족의 자부심이다. 하기에 조선민족이라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생활하든 너나없이 다 눈물을 머금고 맞이한 가슴 뿌듯한소식이였을것이다. 나는 늘 하던대로 가게에서 바쁜 일손을 멈추고 연변축구가 갑급리그에서 슈퍼리그에로 진출한 소식을 흥분에 겨워서 위쳇모멘트에 옮기느라, 이그룹, 저그룹에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누가 월급 주는것도 아니고 칭찬하는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성수나고 즐거울수가 있을까? 아마 올 일년을 "기자"가 아닌 "기자"로 묵묵히 축구소식을 제일 먼저 모멘트에 올리느라 돌아쳤던것 같다. 올 한해는 연변축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한 한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하는데 다시 슈퍼리그로 등극하기까지는 장장 15년 만이다. 기쁘고 울컥하고 내 마음을 통째로 앗아간 연변 축구, 홈장에서 프로축구가 주는 즐거움은 정말 하나의 예술이고힐링이다. 선수들이 헤딩하는 멋진 동작, 악착스레 상대팀 한테서 공 뺏는 의지와 노력, 개인기술, 전략들, 축구팬들을 축구에 미치도록 빠져들게 하는 매력인 같다. 꼴이터질때마다 느끼게 되는 그 짜릿함, 그냥 세상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이 순간 만큼은 모든 세상의 번뇌와 스트레스 싹 잊고 축구삼매경에 빠져보자. 바로 그 멋에 얼마나 많은 나와 같은 무명축구팬들이 축구와 같이 울고 웃었던가? 그래서 요즘 나는 상대가 축구에 대해서 알고 모르고 관심있고 없고를 떠나서 축구얘기만하는 축구수다쟁이가 되고 말았다. 축구 하면 빠뜨릴수 없는 축구팬들의 의리 또한 잔디밭에서 열정을 쏟아 붓는 축구선수 못지 않게 짠~하게 안겨오는 감동이다. 축구팬 그룹의 숨은 축구해설자들, 전략가들, 분석가들, 소식통들 덕분에 나는 올 한해 여러 시각으로 축구를 즐길수 있게 되였고 조금은 더 "박식"한 축구팬이 되였다. 축구가 있는 날과 축구 있기 전날은 축구팬 위쳇그룹의 명절 날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모아진 위쳇 축구팬그룹의 구호는 “이겨도 내 형제 져도 내 형제”, “승리하자 우리 연변”이다. 삼복철 해볕이 쨍쨍 쬐는 땡볕에도 그늘도 없는 10구역, 15구역에서 경기 두세시간 전부터 기발 들고, 플래카드 들고, 북 들고, 빨간 유니폼을 통일로 차려입은 이들이 보인다. “아리랑”을 높이 부르면서 경기만 시작하면 아낌없는 응원으로 축구선수들에게 홈장에서의 우세를 마음껏 누리게끔 사기를 불어준다. 그 의리에 코등이 시큰시큰해나고 그 기세에 가슴이 찡~저려나게 감동을 먹게 된다. 그 분위기에 빠져보느라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이런 울림이 들리는듯하다 "박태하 감독님 감사합니다 !" “연변축구여 ! 비상하라!” 올 한해의 축구시즌을 마무리하며 올 일년 연변 장백산 축구때문에 받은 신선한 충격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지금 이 시각, 어제일처럼 떠오른다. ● 하태균 선수가 이적할가봐 열혈 축구팬들이 모멘트를 도배하던 일… 체육장에서제일 열심히 뛰는 찰든과 스티브의 노력에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던 일… ● 축구가 완승한 날에는 꼴넣는 장면들이 자꾸 눈앞에 얼른거려서 달콤한 흥분에 잠들수 없던 일… ● 할빈팀과의 경기에서 무패행진 기록이 깨지게 되니 너무 기분 상한 나머지 웬지 내 장사도 같이 슬럼프를 겪던 일, 그 이후로는 쭉 홈장이 아닌 집에서 텔레비로 시청할때에도 빨간유니폼을 입고 옹근 마음으로 응원 하던 일… ● 지금은 기실 스티브팬이 되였지만 애초엔 하태균이 여차여차 멋있는 미남이라고까지 벼라별 유혹을 다 주면서 고2인 딸애를 축구팬으로 만들기 위해 축구장에 데리고 다녔던 일… 그 덕에 지금 딸애는 엄마를 초월하는 진짜축구팬이 되여 친구들과 같이 홈장경기는 빼놓지 않고 다니는 축구장 개근생이 되였다. "엄마 축구는 종료 되기 일 분전에도 꼴이 터질까 조마조마하게 손에 땀을 쥐고 봐야되지, 선제꼴이 선수들에게 사기도 돋구어주고 대개는 그 날 축구의 승패를 결정하는 같습다. 축구는 기세가 참 중요한것 같습다" 늘 내곁에서 축구 얘기다. 그래서 요즘 딸애와 공동언어가 더 많아졌다. 주력선수, 핵심선수,체력, 끈기, 투지, 흐름, 진공, 방어, 수비 온통 축구전문용어들이다 . "최고의 파트너와 최고의 합작만이 슬기롭게 이길수 있는 비결인것 같습다." 애들이 분석력도 참 빠르다. "26골로 득점왕의 영예를 딴 하태균, 금년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고 올해 슈퍼리그로의 진출에 제일 큰 공신"이라고 한다. 또 뿌리는 알아가지고 늘 연변 FC 주축인 본토선수들 즉 김파, 손군, 리훈, 배육문, 강홍권, 박세호, 최민, 조명, 오영춘 이름도 줄줄, 개성도 줄줄, "축구는 박지성 같은 해결사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겠지만 전체를 잘 다독여 줄줄 아는 맏형 같은 사람도고종훈처럼 뽈을 조직해주는 역할도 있어야 됨다." 문뜩문뜩 전하는 말들이 완전히 전문가처럼 얘기하니 온집안 가족 어르신들이 희귀해하고 기분좋아서 더 난리다. 축구선수들의 개성을 잘 나타낼수 있는 정어린 별명들도딸한테서 들어보니 정말 재밌다. "하신- 하태균, 찰떡 -찰튼, 양고기 뀀을 좋아하는스티브는- 쵈티브, 거미손 ㅡ지문일!" "하태균, 찰튼과 스티브 등 외적 용병도 중요하지만 축구의 주축을 이루는 본토선수들이 협력이 없다면 연변축구를 누가 애정을 가지고 보기나 하겠습까? "라고 딸애는 말한다. 그러면 나도 "우리 축구팀, 연변 장백산호랑이가 래년 슈퍼리그에서도 천시,지리, 인화(天时, 地理, 人和)로 잘 조합되여 올해보다 더 휘황한 기적을 맞이하길 바란다"고 웃으며 맞장구친다. 축구팬 엄마에 축구팬 딸, 올해 기적같은 축구승전소식만큼 나도 딸아이도 진정한 축구팬이 된게 너무 흐뭇하다. 온 여름 땀벌창이 되여 홈장에 앉아 응원한 노력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것 같다. 앞으로도 쭉~우리 모녀는 열혈축구팬이 되여 장백산 호랑이 기상을 떨치는 연변축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할것이다. 글/최선숙 ——————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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