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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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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늘의 <엽공> 댓글:  조회:1996  추천:0  2009-05-16
<<엽공이 룡을 즐기다>>라는 고사가 있다. 말 그대로 엽공은 룡을 무척 즐겼는바 방안 벽마다 룡을 그렸고 기둥에도 룡을 새겨넣고... 아무튼 그의 방은 룡으로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하늘의 진짜룡이 이 말을 듣고 그의 집에 내려와 머리를 남쪽창문으로 기웃이 들이밀고 꼬리를 북쪽창문에 걸쳤다. 엽공은 이것을 보고 그만 혼비백산하여 온 몸을 사시나무떨듯하면서 황급히 숨어버렸다. 실은 그가 즐기는 것은 가짜룡이지 진짜룡이 아니였다. 그런데 현실생활에서 우리 주변에는 엽공과 같은 사람도 없지 않다. 가슴을 치면서 사내대장부라고 호언장담을 뽑다가도 일단 남이 위험에 처한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주자를 놓는 인간, 호랑이 없는 골안에서 원숭이가 왕질한다는 격으로 안중에 약자로 보이는 사람앞에서는 호통질을 곧잘 하다도 저보다 강해보이는 사람앞에서는 굽실거리며 머리를 낮추는 인간도 현주소를 가진 <<엽공>>이라 하겠지만 그보다도 시대의 개혁자라로 자처하는 일부 지도일군의 옳지 못한 소위는 옛날의 엽공마저 무색할 정도이다. 사회발전에 유리한 것이면 언제나 푸른등을 켜주련다고 말은 아름답게 뱉으나 그것이 자기의 리해타산과 마찰이 생기면 그냥 사정이 달라진다. S국의 한 국장님은 말끝마다 합리하고 현명한 인재등용설을 부르짖으나 S국산하의 어느 한 공장의 공장장이 그의 공장에 조동시키려는 국장의 조카를 언감생심 시험을 쳐 받으려 하자 그만 혈압이 높아질양으로 대노하더니 정신적프레스로 그 공장장을 꽉 눌러놓아 공장장은 범의 수염을 다친 자기의 미련함을 한탄하면서 별 수 없이 이사짐을 싸지않으면 안되였다 한다. 옛날의 엽공이 진짜룡을 보고 혼비백산한것은 그래도 담 작은자의 명철보신이라 하겠으나 S국 국장의 한심한 처사는 바로 리해관계라는 이 령혼심처에서 오물처럼 괴고 있는 비도덕적이고 비량심적인 도척같은 사리사욕임이 틀림없다. 개혁을 시대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인재의 합리한 등용을 개혁의 필연적인 요청이라고 쏘프라노로 웨치면서도 그것이 일단 자기앞의 현실로 나타나 자기의 리익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되면 그만 온 몸이 추워나고 혈압이 올라가면서 시비를 전도하고 인재를 죽이는것마저 서슴치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리상이 있고 포부가 있으며 하다못해 자그마한 욕망이래도 있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은 래일에 미련을 두고 오늘을 분투한다. 아무것도 바라는것이 없다면 인간은 어제, 오늘, 래일을 반복하는, 성장이 없는 동물적인 삶에 무의미한 수명을 연장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를 서로 어울리며 살아간다. 욕망이 서로 다른 인간이 한 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장치가 바로 도덕과 법에 의한 질서이다. 그만큼 질서는 어떤 가치이기전에 벌써 인간이 서로를 제약하여 서로가 피해를 입지않기 위한 방책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더라도 어디까지든 능동적으로, 상승적으로 쟁취해야지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어느땐가는 자기도 피해를 입게 된다. 남을 물에 끌어들이려면 자기도 한발 빠진다는 말처럼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서도 남을 피해주는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덕을 쌓는다는것은 남에게 베풀어 자기를 충실히 하고 세상 인심을 얻는 순리적인 인생자세다. 인심이 희박해지고 믿음이 퇴색하는 현실에 살면서 낯을 익힌 주변인간들의 긍정과 관심을 받는것보다 더 큰 얻음이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천냥주고 못산다고 했다. 돈이나 권력은 몸외의 물건이다. 이는 옷을 입을수도 있고 벗을수도 있는것처림 돈이나 권력도 한 때의 향수나 기능에 불과한것이고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잘못 알면 어느날 아침 갑자기 돈도, 권력도, 인심도 모두 잃은 알거지가 될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돈이나 권력이 사회에 선택된 인간의, 사회를 주도해나가고 인생을 윤택하는 하나의 수단이나 에너지가 될 때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하게 될것이고 평화의 질서가 지켜질것이다. 가짜룡을 좋아하는 엽공이 되느니 차라리 강을 건늬워주는 사공이 됨이 나을것이다.
3    궁전에 들어야 할 <왕>들이건만 댓글:  조회:1950  추천:0  2009-05-16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은 위대한 자연이 모든 생물에 부여한 기본적인 생존본능이다. 인류가 원시적인 때가지만도 그러했다. 그러나 인류가 차차 동물세계로부터 인간사회에로 전화함에 따라 상기 정의는 인류를 제외한 모든 생물은... 하는식으로 고쳐져야만 하였다. 인류사회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실천활동은 더는 생을 위한 본능적인 수단으로만 되지 않으며 이성이 결합하여 남편되고 안해되여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되고 어머니되여 자식을 키우는 것이 다만 대를 잇기 위한 본능적인 결합만이 아니다. 오늘을 딛고서서 미래를 당겨오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신념으로 확고해지고 있다. 과연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어린이들을 나라의 왕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 <<왕>>들이 살게 될 사회를 마련하는 <<신하>>들이며 <<백성>>들이다. 그들을 잘 보호하고 건실하게 키우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의무와 도덕적책임이다. 조선족은 예로부터 <<집을 털고 나앉더라도 자식만은 공부시킨다>>는 참으로 빛나는 삶의 신조를 지켜왔다. 16~17세기 영국의 저명한 철학가 프란시스 페겐의 <<지식은 곧 힘>>이라는 명언이 좌우명으로 된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지식을 중시한 미덕이 있었다는 것으로 하여 자호를 느낄만하다. 특히나 지식과 능력으로 삶의 길을 개척해야만 하고 고도로 첨단적인 문명을 창조하는 시대에 생을 허락받은 우리고보면 조상들이 굳혀준 이 삶의 신조가 얼마나 보배롭고 미더운지 모르겠다. 하기에 파릇파릇 새싹같이 래일에 피려고 방긋 웃는 어린 자식을 너무도 일찍 금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부모는 그 자식한테 죄짓기에 먼저 우리 조상님들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한 부모의 소행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인 병페로 그것이 만연될 때 그 위해성은 전체 민족의 건강에 미치게 되며 민족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날로 황페화되여가고 있는 농촌에서 인제 어린들이 배움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부모들이 가난때문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정부의 재정난으로 교원들이 로임을 받지 못하여 교단을 떠나 학교들이 페허로 되고 쑥대만 무성히 자란다. 나라의 왕, 미래의 주인인 어린이들-이들은 인류의 창조물중에서도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가치있고 가장 신통력이 있는 재부이다. 이 재부가 있는한 미래는 역시 우리에게도 속한다. 만약 혹자가 자기를 위해 어린이를 포기했다면, 만약 그들이 오늘을 위해 미래를 차던졌다면 과연 그보다 더 한심한 리기주의, 그보다 더 한심한 한치보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아이는 결코 한 가정의 재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역시 인류적인 <<창조물>>이다. 보다 고급적인 사유와 보다 과학적인 사회는 한세대한세대를 거쳐 현실로 된다. 세계가 지구촌으로 좁아지고 문명이 정보화로 창조되는 시대에 호미로 땅을 뚜지는 원시로력을 미련없이 생산해낸다면 우리 민족은 동화에 먼저 시대의 락오자로 도태당하고 말 것이다. 때문에 웃세대가 아래세대에 대해 사회적의무감과 도덕적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사회력사의 필연적인 요청이다. 이에 대한 거부는 력사에 대한 반역이요, 민족에 대한 배신이다. 그것은 결국 미래의 비극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고만다. 학교는 미래의 행복이 창조되는 책원지이다. 그만큼 그것의 질적가치는 높이 긍정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결코 응부적으로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뜻깊은 사회적학과로서 틀림없이 전 사회적으로 눈길을 모아야 하며 능동적인 제도적장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금을 잃고 도금을 얻는 사람 댓글:  조회:1922  추천:0  2009-05-16
한국에 다녀온 한 친구가 담배가게에서 외제담배를 사려고 손을 들어 왼쪽으로 몇번째 담배를 가리키자 가게주인이 영어로 씌여있지 않으냐며 얼굴에 아주 비웃는 표정을 짓기에 그만 얼굴이 확 뜨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동행한, 어느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있는 친구가 짐짓 영어로 이것저것 묻자 가게주인은 또 <<한국인>>같은데 그렇게 유식한체 할것 있느냐며 꼬집더란다. 그러고보니 그 가게주인도 영어는 기껏 안다는 것이 자주 구입하고 있는 물품명이나 기억(암기)한 정도인듯 했다. 술상에서 금방 친구의 소개로 낯을 익힌 친구가 물흐르듯 류창한 중국어로 일장 <<연설>>이다. 이쪽이 중국어에 퍽 낯설어서 겨우 의미전달이나 하자 그 친구는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어가 왜 그 꼴이냐 하는 야릇한 표정이다. 그때 누군가 당신은 우리 말을 아는가고 묻자 그 친구는 그게 무슨 대순가 하는 떳떳한 얼굴로 전혀 모르거니와 또 알아서 무슨 쓸모가 있는가고 하는 것이였다. 그러니 모국어를 모르는 것은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고 영어나 중국어를 모르는 것이 도리여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과연 장소나 신분에 따라 영어나 중국어에 견습공수준을 보여줄 때면 어느정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역시 다민족국가에서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민족들에게 있어서 그 주체민족의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공간이나 자활력이 약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된 사회에 선택된 인간들이 사회 적응력의 부족에서 가지게 되는 안타까움이지 수치심은 결코 아니다. 모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 그것도 모국어는 몰라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대하기가 도리여 부끄러운 노릇이다. 주체민족어에 잘 통하지 못하는 사람을 얕보기전에 벌써 그는 자기 조상을 외면해버린 사람, 현대 <<진화>>를 겪어 동화된 <<이민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신분증을 확인하고보면 그는 워낙 중국어밖에 모르는 <<중국인>>인데 구태여 조선사람으로서 과연 중국어를 잘 한다고 감탄할 아무런 리유도 없다. 그가 중국이란 이 땅덩어리에서 인간가치를 실현하는 유일한 의미는 그가 이미 중국인으로 동화되였다는 것외에는 달리 자리매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어에 잘 통하지 않으면 생존공간이 좁아지니 자활력이 약해지니 하는 것부터가 바로 우리는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조선족이기를 고집하고 강한 생명력으로 이 땅에 민족의 원색적인 문화터전을 마련하려는 모지름 때문이다. 청나라의 봉금령으로 월강죄에 걸리면 사형까지 당할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른바 <<룡흥지지(龍興之地)>>에로 대거 천입한 조선족은 봉금령의 페지와 함께 또 앞머리를 깎고 만복을 입는 <<치발역복( 髮易服)>>이란 민족동화정책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죽더라도 조선족이기를 바라고 조상한테 치욕을 주기를 한사코 원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갖은 릉욕과 천대를 받으면서도 끝끝내는 <<자기>>를 잃지 않았지만 일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마침내 그에 순종하여 <<치발역복>>하고 점산호(占山戶)의 마름이 되거나 지어는 점산호가 되여 천여쌍의 땅을 소유한 으리으리한 부호가 되고 조선족소작농을 부렸다. 한일합방을 탄압적으로 <<실현>>한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민족어를 말살하려 할 때에도 우리 민족은 돌틈에 솟아나는 풀마냥 끈질긴 생명력으로 민족의 얼을 고스란히 지켜냈지만 역시 창씨개명하고 넔마저 빼앗긴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수치심이란 것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거나 어떤 일에 떳떳하지 못할 때 느끼는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를 아예 잃어버린 사람앞에서 모국어는 <<정통>>하고 주체민족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수치심을 가질 리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럼에도 나 역시 간혹 때와 장소에 따라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없지 않다. 그것이 대학을 나온 이른바 선택된 인간의 부끄러움이라면 신분적차원에서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으나 그것이 아니고 그냥 중국어가 신통치 않다는 사실에서 느끼게 되는 사회 일반에 흐르는 의식이라면 그 수치심은 우리 민족의 체면의식의 변질된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리조량반의식을 보여주는 <<선비정신>>이 인제 빈 껍데기만 남았을 때 그것은 허례허식과 유식을 자랑하는 것이였다. 사회에 아무런 유익함도 없이 그냥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세속을 묻지 않았던 량반들은 고리타분한 유흥에 달을 보고 풍월을 잡으면서 유식을 자랑했다. 바로 그것이 비탈려 어떤 경우라도 절대 체면 하나만은 잃어서는 안된다는 민족의 변질된 체면의식으로 확대된듯 싶다. 그리고 그런 체면의식이 절대화되면 경우불문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자기의 <<유식>>이나 <<우월>>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의 뿌리를 뽑히운 사람이 꼭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수치심을 느낄 대신 자기의 유식이나 우월을 자랑하는 것이 퍽 민망스럽다. 연변오동팀의 영웅이라고 할만한 문지기-블라이마가 조선말을 모른다고 해서 안스러움은 있어도 수치심이 있을 수 있을가. 연변의 중국인이 조선말을 모른다고 해서 불편함은 있어도 수치심이 있을 수 있을가. 여자가 아무리 부끄러움을 잘 탄다고 해도 남자의 불능으로 아이가 없다면 여자가 임신못한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 아니라 남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수치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리치이겠으나 조선말을 전혀 몰라도 좋다는 것은 벌써 마음속으로 조선족이기를 포기한 것인데 그래도 여기에 <<표범의 반점을 지워도 의연히 표범>>이라는 속담이 적용될 수 있을가. 민족어를 잃어도 민족의 넋은 잃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은 타민족도 그 민족의 문화를 알면 그 민족으로 될 수 있다거나 또는 쪼각난 것을 풀로 붙이면 의연히 새것이 된다고 하는 억지임에 다름아니다. 곰이 옥수수따는 격으로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다거나, 지어는 순금보다 화려한 도금쪽에 마음을 빼앗겨 귀중한 것을 잃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1    문학인은 철학인생을 살아야 한다 댓글:  조회:2002  추천:0  2009-05-16
기계마다 자기의 성능이 있듯이 사람은 태여나면서 천성적인 기질이 있다. 유아교육의 가장 기본은 어린이의 천성적인 기질, 특장을 잘 발굴하고 키워주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많은 투자를 하여 자식을 어릴 때부터 어떤 인재로 양성하려다가 결국 발을 깎아 신에 맞추는 격이 되고만 가장 원질적인 요인이 바로 남의 성공적인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식의 기질, 특장 판단이 빗나간데 있다. 억지로 딴 참외 달지 않은듯 아이가 전혀 무관심이거나 거부감까지 있는 일을 강박관념으로 채찍질한다면 그 아이는 에누리없이 그 일을 해낼 수는 있으되 덜 익은 참외처럼 썩 잘 해내지는 못하고 만다.  그만큼 재능에서 기질이 바탕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재능이 최고의 절정에 오를 수 있는 가장 관건적이고 확실한 요인은 결코 기질이 아니라 심, 즉 마음 또는 정신이다. 그 일을 꼭 하고싶다는 강렬한 욕망, 어떤 어려움도 견디여 내리라는 강한 의지, 꼭 어떤 경지에 도달하고야 말리라는 드팀없는 신념, 이런 내적인 또는 심적인 자아완성이 있어야만 기질을 바탕으로 재능이 그 자신의 체질적인, 그리고 소망적인 한계까지 쭉 치달아오를 수 있다.  고종훈이 오동팀의 령혼으로 될 수 있은 것은 기질적인 바탕에 심적인 자아완성이 있었기때문이다. 직업의식, 그것이 직업축구선수의 심적인 자아완성이다.  고봉이 학해동보다 어리고 잠재력이 크다고 평가되면서도 마침내는 한 머리 솟아오르지 못한 것은 바로 심적인 자아완성을 가져오지 못했기때문이다. 북경국안팀에 있을 때에도 술을 마시고 지도와 배짱을 부려 출전하지 못한 경력이 있었는데 금년에 전위환도팀에 와서 다시 한번 력사를 재현하였다. 정신적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정신이 흐트러지거나 잘 정리되지 않으면 왕성한 의력이 있을 수 없다. 망동은 멸망에 앞서간다는 말이 있듯이 심적인 자아완성이 없으면 아무리 천부적인 기질이 있다고 해도 종당에는 예기가 꺾이고 만다.  문학도 례외일 수 없다. 천부적인 언어구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문학인재로 될 수 있다는 판단은 옳은 것이고 그런 기질이 없으면서도 선택착오로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을 위한 특별한 노력만 있다면 시인, 소설가 또는 무슨 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한 것이지만 꼭 남보다 한 머리 뛰여날 수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문학이 그냥 기술적인 조작에만 그치고만다면 생명력이 있을 수 없고 지어는 언어유희에 그치고말 수도 있다.  율곡 리이는 <<도(道)가 나타난 것을 문(文)이라 하니 도는 문의 본(本)이요 문은 도의 말(末)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깐 도에 근본을 두고 문으로 도를 꿴다는 것이다. 오늘의 개념으로는 도를 철학으로 바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기술적으로 허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내용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문학이 인간학이기때문이요, 그리하여 문학은 군체동물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본체를 파악하는 것이 본체론적인 근본일 수 밖에 없으니 과연 문학의 궁극적인 성공은 철학인간으로 성장하는 길을 택하는 길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에서조차 개인적인 차원, 가정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의 원리가 립체적으로 파악될만큼 작가는 지극히 철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시끌벅적하고 허둥거리는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가치를 판단하고 사물의 본질을 진맥하려면 문학인 자체가 벌써 철학인생을 살지 않으면 안되고 덕행과 학문에 의한 심적인 자아완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심적인 자아완성은 모든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물질적인 빈곤내지 사회적인 빈곤속에서도 정신적으로 충족한 철학인생을 살아가려는 자세를 갖출 때만이 비로소 이루어진다. 자고로 청빈은 선비정신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빈을 가난하고 말끔하다로 풀이할 것이 아니라   <<청백하여 가난하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청백하기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다함은 선비의 깨끗하고 굳은 지조를 말해주면서도 또 어찌보면 부자로 되는 길은 선비의 길이 아니요, 선비는 오직 마음의 부자가 되여야 함을 표방하기도 한다. 그러니 문학의 선택은 가난을 딛고 세상을 옳게 조명할 수 있는 정신적독방을 가질 때라야만 성공을 약속받을 수 있는 것이고 문학을 다만 장끼로 표현하거나 상업적인 관심을 가지고 출세의 수단으로 리용한다면 마음조차 가난해지게 된다. 돈과 권력의 힘이 팽창하는 사회에서 모든 영욕을 버리고 오직 마음의 부자로 인정사회를 구축하려고 문학이란 이 초불을 켜들고도 그 자신이 벌써 마음이 가난해진다면 그것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일 또 어디 있겠는가. 몸은 문학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돈과 권력의 주변에서 활약한다면 그것은 욕망이 실천능력을 넘쳐난 것이요, 어찌하면 처음 문학을 전공하려는 것부터가 선택착오일 수 있다.  사실은 문학뿐이 아니고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로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역시 마음이 근본이다. 재능이 없으면 한 무능함이요, 마음이 서지 않으면 한 간릉함이다. 심리건강이 좋지 못하고 자기를 지키는 도덕적장치가 마련되여 있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든 차디찬 정신적방랑을 하게 되거나 자칫 인생에 락서를 하게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건강한 마음이 있어야 인간의 군체속에서 유익무해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역시 인간을 구원하려는 정신과 사명감이 있는 작가라야 인정이 메말라가는 사회에 하나의 오아시스를 마련해줄 수 있다.  학자는 산속에서 나고 철인은 목동의 오두막에서 난다고 했다. 세속에 몸을 담고있으면서도 정신은 멀리 비켜서서 사회를 조명하고 취사선택하는 것이 철학인생이다. 아, 고달픔이여, 고행이여.  오직 내몸을 위하여야겠다는 일념에 가슴태우는 사람은 돈과 권력의 힘이 팽창하는 사회에서 선택착오를 실감할 것이니 그냥 세속에 <<하해(下海>>하는 것이 바람직한 계산적조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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