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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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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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정취
자전거 수리
로천영화와 함께한 나날들
포도풍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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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편폭을 혼자 놀면 어떻게 됩니까
혼자노는 곳인가 상식도 없는 작가
가사가 어페 있네요. 내 기억에는 마반산 높은봉에 아침해 솟고....농부야 쟁기메고 밭갈이 가세..달랑 보습으로 밭을 갈수 없으니, 글은 익히고 삭여서 발표함이 좋을듯,그저 다산이 능사가 아니죠,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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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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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9
봄비가 내린다. 아침에 밖을 내다 보니 적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래만에 내리는 봄비가 대지를 적셔 주고 있었다. 출근길에 보니 흐린 날씨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길가에 활짝 핀 꽃들이 길손을 반긴다. 물기를 가득 먹음은 연분홍 복숭아꽃 새하얀 살구꽃 노오란 개나리꽃이 더 아름답고 청수하게 보인다. 어제는 곡우(谷雨)절기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곡우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하루가 늦어 서라도 비가 내리니 마음이 즐겁다. 하긴 곡우가 봄이 끝나는 절기라 하지만 우리 연변으로 말하면 이제야 봄이 제철기에 들어 선것이다. 봄이 되니 만물이 소생한다. 며칠전 자전거운동길에 하룡촌에 가보니 산 비탈에 진달래가 떨기떨기 피여 있었다. 우리 민족의 사랑을 한몸에 듬뿍담은 진달래다. 저멀리 산동교동반도의 석도에도 진달래가 있다고 한다. 들에는 이름모를 새파란 야초들이 뾰족뽀족 땅을 뚫고 올라 오고 있었다. 한 여름이면 그저 스쳐지나갈 풍경이건만 요지음 같은 봄에는 보이는 모든 푸른 생명이 그토록 반갑다. 지나온 몇달은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였다. 불의에 들이 닥친 코로나19로 인하여 사람들은 출입을 금지하였고 긴 재택생활을 하여야만 하였다. 하지만 당과 정부의 강력한 대응책과 호소를 잘 따라 주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점차적으로 일상을 찿아 가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 코로나의 강타를 받고 있을때 우리 나라는 지금 생산을 회복하고 경제가 점차 회복세를 나타 내고 있다. 얼마나 행운스러운지 모른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물떠나 생명은 존재 할수 없다. 이제 물먹음은 대지에는 만물이 소생할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겪은 코로나19역경과 관계없이 또 다시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싱싱한 록색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그것은 우리가 역경을 이기여내는 큰힘이 된다. 우리 모두서로서로 도우며 코로나를 그복하고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 사회생활중에서 사람이 사람을 떠나지 못한다. 이탈리아에서 이번 코로나의 역경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데 와중의 한개 원인이 바로 과도한 밀접 접촉이라고 한다. 이번 역경을 통하여 사람들은 많은 도리를 총화하였다. 사람사이 거리를 너무 가깝게 두지 말아야 하고 또 너무 멀리 하여도 안된다. 너무 멀리하면 상업이 중지되고 인간관계가 멀어 지고 너무 가까이 하면 사생활이 없어 지고 부담스럽게 된다. 자연의 리치가 생명의 대가로 우리를 깨우쳐 주었다. 이제 우리는 점점 일상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요 희망이 꿈트는 계절이다. 봄비를 먹음은 대지는 이제 곳 록색단장하게 될것이고 왕성한 생명을 과시할것이다. 봄비는 차겁다. 하지만 생명을 잉태시키는 단비가 그토록 반갑다. 봄비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준다. 희망이 가득한 봄철 우리 모두 올해 완수 하여야 할 제반 과제를 다시 한번 검토하고 보완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가배의 노력을 경주해야 생명이 하사한 새생활을 만끽할수 있는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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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사람과 그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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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7
남도사람과 그 후손들 一、이민1세 어릴때 우리가 살던 소영마을에는 남도(南道)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기에 마을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경산도 사투리에 특별한것을 느끼지 못하였지만 동네에서는 아버지를 남도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1921년생인데 고향은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이다. 한일 합병으로 인한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는 경산도 시골마을에도 례외가 아니였다. 경찰서에서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려고 시골까지 쫓아 다니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던 그 시절 땅이 넓고 사람이 적은 만주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18살되던 나이에 혼자서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왔다. 하지만 가진게 없는 사람에게서 만주 역시 똑같은 인간지옥이였다. 중국말 한마디도 모르는 경상도 청년은 만주허허발판에서 탄갱에서 벌목장에서 별의별 고역을 다 하다가 광복을 맞이 했다. 그뒤 지인의 소개로 엄마를 만나서 연길 근처 소영촌에서 새가정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3남1녀의 가장으로서 마른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밭도 다루고 소방목도 하고 양봉도하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한일 고생만하다가 락을 보지 못하고 1985년 파산균감염으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몇해만 더 살아 계시였으면 고국땅을 밟아 볼수 있었으련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릴때 우리집에는 친척이라고 해야 외삼촌 한집밖에 없었다. 내 또래 친구들은 쩍 하면 큰집에 간다거니 뭐니 했지만 우리에게는 큰집이 없었다. 어릴때 나는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였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아버지 고향이 남쪽이라는것 아버지는 홀몸으로 중국에 왔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고향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고향은 조전리(枣田里)인데 대추가 많이 나고 맛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이 통일되면 우리를 데리고 고향을 간다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고국을 떠나 40여성상 되도록 한번도 고향땅을 밟아 보지 못하였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고향을 가고 싶었고 부모형제들을 그리워했을가. 지난세기 70년대 말부터 중국과 한국사이에는 서신거래가 통하였다. 우리 마을에도 누구네 집에서는 한국의 친척편지를 받았다고 하였다. 당시 메아리방송에서는 정기적으로 리산가족찿기 방송을 하였다.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늘 방송에 귀를 귀울리였다. 당시 둘째형님이 아버님의 분부대로 메아리 방송에 편지를 하게 되였다. 중국길림성 연길에 살고 있는 아무개가 고국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형제 여러분을 찿는다는 내용이였다. 그뒤로 아버지는 메아리방송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게 되였다. 얼마후 한 마을에 사는 한 사람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사는 큰아버지께서 우리가 보낸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내용이 메아리방송에서 나왔다는것이다. 탈곡장에서 일하던중 아버님은 이 반가운 소식을 동네분들 한테서 전해 들었다. 그날 아버님은 그토록 기뻐 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보고 남조선의 친인들을 찿았다고 그들이 살아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이날 같이 즐거운 날이 더 없었을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혈열단신으로 만주땅에 들어와 산전수전 다겪고 연변땅에 자리 잡고 처자를 거느리던 아버님이 아니였는가. 친인이 살아 계신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얼마나 즐거워 했는지 모른다. 저녁먹을 때에는 힌술도 몇잔 마시였다. 오매불망 애타게 기다리던 고향소식에 아버님은 어린애 마냥 즐거워 하였다. 얼마후 남조선의 큰아버지께서 혈육의 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 왔다. 주소도 아버지가 기억한것과 거의 같았다. 다만 행정구역이 재획분으로 작은 변화가 있었을 뿐이였다. "아우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네가 살아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만주땅에서 얼마나 고생 했느냐" 그날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후일 내가 당년의 소중한 편지들을 따로 묶어 놓았다. 우리집의 력사기록물이였으니 말이다. 二、이민2세 중한수교가 이루어진 후로 한국방문길이 많이 열리였다. 어떤집들에서는 친척방문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허나 우리집의 사정은 좀 특별하였다. 글쎄 한국호적에 아버지가 언녕 돌아가신것으로 기재되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큰아버지도 우리를 요청할수도 없게 되였다. 이야기는 거슬러 만주국시절이 였다. 한번은 도문에서 막일을 하던 아버지가 의외로 고향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아버지는 너무도 반다워 무작정 친구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술도 사주고 식사도 대접하였다. 고향의 부모님 안부도 묻고 자신의 근황도 소개하였다. 헤여질 때에는 권연도 한보루 사주면서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자기의 소식을 전해줄것을 부탁했다. 헌데 무슨 원인이 였는지 그 친구가 고향에 가서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한다. 하여 고향에서는 아버지가 사망한것으로 기록되여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한국 호적이 제명되지 않았다면 후손들인 우리의 초기 한국방문이 가능했었다. 헌데 관공서에서는 사망으로 기록된 사람의 후손이라니 요청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을 통하여 아버지가 중국에 살아 있었다는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것이 매우 힘들었다. 하여 남들보다 일찍이 혈육을 찿은 우리가 오히려 남들이 다 가는 한국을 가지 못하게 되였다. 2001년 큰형님은 한국기업의 요청으로 고국을 방문하였다. 그뒤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하게 되였다. 그당시 형님은 우리집의 대표로 처음으로 아버지의 고향집을 찿았다. 그때 아버지의 형제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시고 산내면에는 사촌형님 부부만 살고 있었다. 형님은 고향에 찿아온 동생을 그토록 반겨 주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집안 제사때면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했다. 진짜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였다. 한번 본적도 없는 삼촌의 제를 지내주다니 너무도 감동되는 일이였다. 당시 형님이 한국에 장기체류하려면 친척 요청이 있어야 했다. 사촌형님은 요청에 필요한 서류를 마련하려고 관공서에도 여러번 다녀 왔다. 머리칼을 잘라DNA검사를 마친 결과 혈육의 가능성이 99. 99% 로 나왔다. 그리하여 형님은 혈육감정에 통과되였고 또 한국영구체류권을 획득하게 되였다. 2019년설 우리집 세식구는 한국에서 설을 쇠게 되였다. 한국에 도착하자 형님이 이번 걸음에 고향방문을 다녀오자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고향을 참배하는것이 응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초사흩날 형님 누나 나 조카까지 네명이 아버의 고향을 찾아 떠났다. 평택에서 떠난차는 경주방향을 바라보며 달리였다. 차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산이다. 차가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공연히 심장이 두근 거리였다. 아버님의 동년의 발자취가 남아있을 그 땅을 밟게 된다는 격동 때문이다. 사전에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받은 형수님이 여러번 전화를 해왔다. 어떻게 오냐고 몇시에 도착하냐고 말이다. 그리고 포항에 사는 딸에게 전화를 하여 올라와 우리를 배동하도록 분부하였다. 차는 경주에 들어서기전에 오른쪽으로 돌려 산 내면 방향으로 달렸다. 나는 차창밖의 모든 것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어떤곳일까 옛날에는 어떠했을가 지금은 어떨가. 나로 말하면 조상의 발자욱과 숨소리가 슴배여 있을 고향에 다가선다는 그 자체가 격동이였다. "다왔어. 여기야" 차에서 내려보니 완전한 시골 풍경이다. 새로지은 아담한 집은 널판자로 울타리를 둘었고 뜰안에는 경인기한대와 네바퀴오토바이가 서있었다. 집뒤에는 참대나무가 빼곡히 자라있다. 출입문을 열고 들여다보는데 형수님이 나온다. "아이고야. 너들이 왔꼬나" "형수님 안녕하셨습니까?" 형님과 형수님이 정좌하시였다. 우리는 옛법대로 큰절을 올리였다. "너들이 오니 참 반갑다. 오노라 욕보았다. " "많이 기다렸다. 고생했다. " 처음으로 듣는 한씨집안의 이야기였다. 저녁때가 되니 밥상을 갖추어 올린다. 아마 큰집에서 맨날 제사상차리던 연고인지 형수님의 일솜씨가 재빠르다. 올해75세의 나이지만 목소리가 챙챙하고 기억력이 비상하다. 식사하는 내내 우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 했다. 처음으로 중국에서 편지가 왔던이야기 그편지를 받고 그처럼 즐거워하던 큰아버지의 이야기 등이다. 전에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만주로간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간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다. 하여 아버지의 제사까지 지내였던 것이다. 三,이민3세 큰형님의 아들은 2006 년에 아버지를 찿아 한국에 갔다. 우리 아버지가 당년에 살길을 찿아 만주에 왔는데 지금 조카애가 돈벌이를 떠난 아버지를 찿아 한국에 간것이다. 조카는 한국에가서 처음에 건설현장등에서 용역으로도 뛰였다. 지금은 꼬치집을 경영하였는데 장사가 잘 된다고 했다. 누님의 딸 그러니 나의 외조카도 한국서울에서 사업한다. 원래 공부를 잘하던 조카는 중국의 유명대학을 나와 일본에가서 석사연구생을 마치였다. 그뒤로 중앙텔레비전방송국 등 여러곳에 취업하다가 지금은 중국유명게임회사의 한국주재관리직을 맡아 보고있다. 한국은 게임산업이 엄청 발달하였다. 조카는 지금 중국과 한국 일본등 여러개 나라를 넘나들며 사업을 넓혀가고 있다. 다음 나의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은 2016년북경건축대학에 입학하였다. 아들의 대학교 전업교수님은 한국전균관대학의 박사졸업생이다. 아들이 대학1학년일때 교수님은 아이의 시야도 넓혀 주는겸 여름방학에 전균관대학에가서 견습할것을 건의하였다. 마침 본인도 가고 싶다고 하여 아들은 여름방학에 집적 서울에 갔다. 헌데 어릴때부터 한족유치원을 거쳐 줄곳 한족학교를 다닌 금진이는 그때만해도 한국말에 서툴었다. 공항에서 전철타고 학교가는데 의사소통이 안되여 많은 고생했다고 한다. 그뒤 아들은 어머니따라 한국글과 말공부를 시작하였다. 아들은 올해 대학 졸업이다. 맺는말 아버지는 전형적인 이민1세였다. 아버지는 홀몸으로 중국에 들어와 많은 고생하다가 어머니을 만나 결혼하고 우리3남1녀를 보았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갑산집이요 용포동집이요하는 고향마을 이름을 붙인 집들이 많았다. 그법대로라면 우리집은 조전리집이였을 것이다. 남도(南道) 생활의 특징는 우리집 여기저기에서 표현되였다. 과거에 동네에서고추장을 담그는 집은 우리집이 유일하였다. 아버지는 비빔밥도 좋아하고 냉국도 즐긴다. 학교에서 들놀이 갈때 내가 고추장에 묻혀 구운 더덜기반찬을 가져가니 모두 맛있다고 야단이였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뜬지도35년이 된다. 중한수교이후 두 나라사이의 경제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아도 아버지는 고국으로 돌아 가려던 념원을 실현하였을 것이다. 지금 형님이 한국가서 일한지도 근 20년이 된다. 나도 한국에 여러번 다녀 왔다. 한강의 기적은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한 경산도 청년의 만주 이민사는 많고 많은 이민사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별과 상봉 슬픔과 환락은 우리 가정의 진실한 력사였다. 그 후대로서 우리는 아버지가 못 이룬 념원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고 있다. 이민1세에서 이민2세로 이민3세로 내려가면서 끊어지였던 가정 력사도 잇었고 또 고국땅에가서 젊음의 꿈도 이루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우리는 혈육이 였기에 40여년의 이별속에서도 잊지 않고 끈끈한 정을 안고 살았으며 우리는 동포이기에 방문취업의 길이 열리여 시름 놓고 로동하고 돈을 벌수 있으며 우리 두 나라의 우호적 관계가 지속되기에 젊은 세대들간의 친선교류가 끊임 없이 이루어 지고 있다. 아버지세대의 만주 이민은 일본놈들의 핍박에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피눈물의 력사의 한부분이 였다. 우리 민족은 지나온 과거를 영원히 잊지 말고 분발노력하여 경제의 발전과 사회건설에 힘다해야 할것이다. 두나라가 사이 좋게 보내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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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갈이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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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6
밭갈이 가세 손바닥만한 뙈기 땅이라도 밭갈이가 필요하다. 밭을 갈아 번져야 땅이 폭신폭신해지고 수분을 먹을수 있는데 그래야 종자 발아에 유리하다. 맨땅에다 종자를 넣어서는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곡식이건 채소건 밭고랑을 따라 북을 돋구어줘야 뿌리가 튼튼해지고 대가 건실하게 자라날수 있다. 전에는 밭갈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소가 한다고 생각했다. 보통 대전밭은 소두마리로 밭갈이 해야 한다. 한마리로서는 그많은 밭을 감당해낼수 없기 때문이다. 소나 말을 역축(役兽)이라고 하는것은 일하는 짐승이라는 말이다. 그당시 소나말은 선진생산력이였다. 몇사람이 해야 할일을 소 한마리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밭갈이 하려면 농부의 팔기운이 세야 한다. 보습이 너무 땅에 박히면 소가 힘들고 너무 옅으면 땅을 번지지 못한다. 이런것을 모두 농부의 팔뚝으로 조절해야 한다. 재미있는것은 농사군과 소의 대화다. "들어서 들어서" "이랴 가자 가자" "올라서 올라서" 소가 무슨 사람의 말을 알아듣겠냐만 농부는 자기로 말하고 자기로 웃고 성내며 진종일 소와 같이 일한다. 그러면서 고된 로동에서 해탈되려고 노력한다. 농사일은 어느 한가지가 고역이 아닌것이 없다 . 시대의 발전과 더부러 지금은 부역소가 가본상 소실되였다. 왜냐하면 생산효률이 낮고 또 소사양 할려면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릴때 신문방송에서는 네가지현대화를 건설한다고 선전하였다. 그중에 농업현대화가 있는데 현대농업은 또 원전화 수리화 기계화가 있었다. 기계농사를 보급하자던 념원이 지금 많이 현실화 되였다 . 농사 짓는 집이라면 기본으로 경인기 한대 정도는 갖춰져 있다. 왕년에는 밭을 부치는 친구가 밭갈이를 도맡아 해주었다. 때가 되면 친구가 녕파에서 생산한 네바퀴 뜨락또르를 몰고 와서 밭갈이를 했다. 그런데 올해 그친구가 출장중이다. 밭갈이도 철기가 있다. 요지음 해야하는 상황이다. 우리 동네에는 미국에가서 한 20년 일하다온 친구 형님이 있다. 형님으로 말할진대 위로는 나의 누님과 동창이고 아래로는 나와 형님동생은 친구사이다. 내가 형님을 찿아 이야기 했다. "형님. 사간나면 내 밭갈이 해주오" "응 . 그래마" 형님은 흔쾌히 받아 주었다. 15마력짜리 경인기에 보습을 메웠는데 힘이 좋았다. 한참 일하는 모습 보았는데 원통 밭고랑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걸 가르켜 밀잡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어 보니 밭을 더 부드럽게 하려고 먼저 밀잡이를 하고 나중에 다시 밭갈이 하겠다고 했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였다. 그저 대충해줘도 뭐라고 할 사람 없는데 형님의 진심에 감동되였다. 나는 경인기 뒤따라 다니며 돌맹이를 줏어 내였다. 그러면 동서내외간이 그 돌맹이들을 차에 실어서 밖에 내다 버린다. 우리 밭에는 원래 돌맹이가 없었는데 몇해전 수도공사를 하면서 돌맹이가 많이 나왔다. 보일때마다 주어 내니 땅이 부드럽다. 검고 부들부들한 땅 이런 땅을 가르켜 땅 힘이 세다고 한다. 무엇을 심어도 잘 된다. 거기에 또 몇해 전에 친구가 유기농 비료 몇차를 실어다 내였다. 비옥한 땅이다. 김소월의 시 한구절이 떠올랐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일본놈의 통치하에 땅 잃고 힘들게 살아가는 농민들의 심정을 잘 보여주었다. 나는 보습대일 뙈기밭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일이 거의 끝날 무렴 동서가 목탄 불을 짓피였다. 형님이 수고 하셨는데 맥주에 양고기뀀을 대접할려고 말이다. 형님은 맥주도 얼마 마시지 않았다. 소뿔은 단김에 빼라고 오늘 손을 대였던 김에 옥수수 파종까지 마무리 할 참이다. 무슨 일이나 집적 해봐야 한다. 전에는 친구가 파종해주니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형님의 옥수수파종가를 가져다 한참 봐도 종자를 넣는 곳과 비료를 넣는 곳을 찿지 못하겠다. 물어 보니 이 파종가는 종자만 넣게 된것이라고 한다. 아참 원래 이런판이였구나. 나는 차를 운전하여 소영촌에가서 파종과 시비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파종기를 가져 왔다 . 기계농사라 얼마 안되여 파종도 마무리 했다. 기계가 하니 말이지 호미로 자리를 찍고 씨앗을 넣고 밟고 하자면 원간히 품이 가는 일이 아니다. 요 며칠은 누구를 찿아 밭갈이 할가고 걱정도 했는데 오늘 형님덕에 밭갈이 끝냈으니 한 시름을 놓았다. 전통적인 우애는 이렇게 이어 온다. 부모들끼리 사이 좋으면 자식들 사이도 좋고 형님네끼리 사이 좋으면 동생들 사이도좋다. 뭐나 내가 잘나서 대접받는다고 생각 말고 모두 우리 부모 형님 누님들이 잘 해주었기에 내가 덕을 본다고 생각하자. 그러니 자식을 위해서라도 내가 허투로 남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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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이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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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6
꽃피는 봄이오면 올해 많은 사람들이 5. 1절을 기다리는것 같았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오래 동안 집에 있던 사람들는 오래만에 밖에나와 자연을 가까히 할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였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5. 1절날 연길은 기온 높고 바람도 약하다고 하니 야외 활동하기는 딱 좋은 날이다. 동서간부부가 한국에서 연길에 온지도 4달이 되여 온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발이 묶겨 출국 못하고 있는 동서간네와 같이 오래만에 마반산에 가기로 하였다. 아침에 차를 운전하여 마반산으로 가는데 광흥양어장에는 차량과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보매 아침 일찍이 온것 같은데 사람들은 촘촘이 앉아 낙시대를 드리워 놓고 있었다. 양어장은 마치 무슨 축제행사라도 여는 분위기다. 오래만에 이런 정경을 보는 동서는 놀라워하는 기색이다. 우리 단위에도 낙시애호가들이있는데 올해 들어서 가온이 차고 바람이 세여 몇번 낙시질 해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 낙씨애호가들에게 오늘은 더 없이 좋은 날씨다. 마을에 들어서니 시공차량들로 가득하다. 시공대가 촌에 입주하여 골안에서 흘러내리는 물곬의 언제를 시공하는 판이였다. 이골에 평소에는 물이 얼마 안되지만 큰비가 내리는 날에는 물곬이 사람을 깜짝 놀아게 한다. 몇해전에 나도 그런 장면을 집적 목격하게 되였는데 꽝꽝하는 바위가 서로 부디치는 소리가 골안을 진동하고 흙탕물이 사품치며 일사천리로 흘러 내리였다. 이 곬물을 업수히 보았다가 사고를 낸 사람도 있었다. 차가 도착하여 동네를 둘러보니 봄 기색이 완연하다. 집집의 뜰에 심어 놓은 살구나무에는 새하얀 살구꽃이 다닥다닥 피여나 있고 산등성이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마치 타오르는 우등불인냥 한아름 한아름씩 피여나 있었다. 꽃피는 봄이 온것이다. 부지런한 실농군들은 벌써 뜰안의 밭을 갈아 놓았다. 보통 밭갈이는 밭의 지세에 따라 형태에 따라 방향을 설정하게 되여 있다. 일매진 터밭은 기계호리의 힘을 입어 반듯한 여러가지 기하도형을 이루었다. 일이 몸에 배인 동서는 터밭의 돌줏기에 처형은 나물 캐기에 나섰다. 해마다 터밭의 돌을 주어 냈지만 지난해 수도물공사로 밭을 파혀친 후로 또 많은 자갈돌들이 보인다. 오늘 행사에 쓸 양고기꼬치와 닭은 언녕 준비된 상태다. 동서는 가장 좋은 양고기를 사다가 직접 썰고 꿰였다. 안해는 로두구 시골토닭 두마리를 사다 손질해 놓았다. 뭐니뭐니해도 시골행사에는 고기구이와 토닭이 제격이다.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정자에 올라 앉아 시골맛이 다분한 동네를 바라보며 맛나는 고기에 캔맥주를 마시는 기분 생각만해도 즐겁다. 오늘이 명절이라 둘째형부부 누님부부도 놀려 내려 왔다. 모두들 5. 1절은 로동절이라며 꽉지며 삽을 찿아 내여 옥수수 뿌리치기에 나섰다. 과거 농사경험이 있는 누님과 매부는 걸싸게 일한다. 누님의 북경에서 온 외손자는 밭에서 달아 다니며 좋다고 야단이다. 올해 소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역시 코로나 때문에 연길에 와서 발이 묶긴것이다. 아들 금진이도 연장을 찿아 들고 일손을 도왔다. 삽시에 불어난 손님들 덕분에 우리집 울안은 너무너도 흥성흥성하다. 정심준비도 차실 없이 진행되였다. 밖의 부뚜막의 가마에서는 닭고기 삶는 구수한 냄새가 풍겨 나온다. 아궁이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촌에서 행사할때는 집안부엌보다 바깥 부뚜막이 제격이다. 옥수수 뿌리털기 일이 거의 끝날 즈음 우리는 식사하기로 하였다. 화로에서 뿌직뿌직하며 익어가는 양고기 냄새가 뜨락을 진동한다. 꼬치전문집과 야외꼬치구는 맛이 틀리는대 주요하게 두가지 원인이다. 첫째는 야외에서 꼬치를 구울 때에는 고기에 그을름 냄새가 배기는데 꼬치집에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다. 가게에서는 공기 오염문제때문에 연기를 화로 밑으로 뽑아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꼬치를 야외에서는 양념을 뿌려가며 굽는다. 다 익은 꼬치에 양념을 묻혀 먹는거과 꼬치에 양념을 뿌려가며 구워 먹는거은 본질상 맛이 구별이 난다. 가장 중요한것은 뭐니뭐니 해도 현장 분위기다. 시골은 공가가 시원하고 물맛이 좋다. 큰컵으로 맥주를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닭고기도 다 익었다. 닭고기를 손으로 쭉쭉 찟어 간양념에 찍어 먹으니 그맛이 별미다. 묵은 토닭이다 보니 삶는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그맛이 일품이다. 고기닭하고는 완전히 다른 판이다. 동서의 말에 의하면 양계닭은 닭뼈가 불는색이 나는 반면 토닭은 뼈가 희다고 한다. 식사후에는 아들과 같이 드론 띄우기를 하였다. 하늘로 날아 오른 드론은 일상에서는 볼수 없는 높이와 각도로 우리에게 생신한 화면을 보내 주었다. 근 4달간 집에 갇혀 있던 아이는 드론 띄우기에 신났다. 금년에 대학교 졸업인데 코로나때문에 필업론문 집필도 집에서 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 올때 보니 성자산에는 상춘객들이 가득하였다. 산에서 진달래 꽃구경하는 사람들 비탈에서 봄 나물캐는 사람들 강기슭에 돗자리 펴고 음식먹는 사람들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봄을 느끼고 있었다. 꽃피는 봄이 오면은 사람들 마음도 덩달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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