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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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야, 지주가 되고싶냐?” 댓글:  조회:1381  추천:0  2013-07-25
“야, 지주가 되고싶냐?” 홍천룡 전번날, 손자녀석의 첫돌생일날, 술상에서 오고간 말이다. “지금 젊은 아새끼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아니 글쎄, 아들놈이 집 살돈을 내놓으라구 야단쳤다니까. 그게 어떻게 번돈이라구…” 가문에서 년장자이신 아즈바이가 억하심정으로 배갈 한잔을 입안에 다 털어넣었다. 한국에 가서 몇년간 드세게 벌고 금방 귀국한 분이다. “똑똑한 녀석이던데. 무얼 좀 창업이라도 하자고 그래겠지.” 곁에 친척들이 그집 아들을 두둔했다. “창업이라도 하겠다면야 내가 있던 집도 팔아서 들이밀겠소. 이거라구야 지금 마을에 돌아가서 팡가네를 준 땅도 되찾구 다른 집 경작지도 양도받아 농장을 꾸리겠다는게요. 나 원, 기가 차서!” 그 한탄에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입이 터졌다. ”어허, 그 녀석이 궁리가 엉뚱하구만!” “요즘 중앙어른들이 농촌, 농촌하더니만 아마 그 녀석도 얻어들은게 있어서 그래겠지비.” “갸가 지주되고싶어하는 모양이구만!” “아즈바이, 갸가 이제 꼬깔모자를 쓰구 타도당할 때까지 소작료나 받아 호의호식하면서 오래오래 앉으십소.” 으하하! 술상이 떠나갈듯 웃음보가 터졌다… 나는 엉뚱한 궁리를 가지고있는 그 친척집동생(아즈바이의 아들)이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농촌개혁은 시종 우리 나라 국책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관건적인 고리였다. 이번 당의 17기3차전원회의의 기본요점도 따져보면 기실은 세가지 실제문제이다. 첫째는 토지류전문제이고 둘째는 도농관계에서의2원화사회구조를 시급히 개혁하여 농촌로동력을 해결하는 문제이고 셋째는 농촌금융시장을 개척하는 문제이다. 이 세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농촌개혁이 더 심화될수가 없다. 특히 토지문제가 제일 심각하게 제기된다. 토지는 농민들의 명줄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역시 그렇다. 태고연한 그 옛적에 신농씨가 괭이로 화전을 일구기 시작해서부터 땅을 가꾸는 일은 “천하지대본”으로 되였다. 농민은 그 땅에다 꿈을 심어왔고 그 땅에다 자기의 모든것을 바쳐왔었다. 세세대대로… 진승, 오광이 농민봉기의 홰불을 지펴올린 때로부터 태평천국이 세워질 때까지 수많은 농민봉기자들이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구호를 불러서 얼마나 많은 농민들의 가슴을 불태워놓았던가! 우리의 선조들도 쪽박차고 사품치는 두만강을 건너올 때에는 갈대에 뒤덮혀 잠자던 만주의 그 시커먼 땅을 노리고 왔던것이다. 그들은 땅많은 청인지주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허벅지까지 쑥쑥 빠져드는 습개늪이래도 소작만 맡으면 손톱발톱이 다 다슬어빠지도록 그걸 벼파도 넘실거리는 옥답으로 걸구어냈었다. 봄에 곰팡이 낀 수수쌀이나 보리쌀을 꿔다가는 가을에 가서는 백옥같은 입쌀을 가져다 바치면서도 원망의 소리 한마디 못했다. 그 어느 땐가에 가서는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자기의 땅이 있기를 소망해왔던 그들이였기때문에! 그런 소망의 꿈을 가슴 깊이에 묻어두고 온 그들이였기때문에 땅을 독차지하고있는 지주들을 그토록 부러워했고 또한 그처럼 미워했었다. 오죽했으면 토개 때 농민들의 손에서 생매를 맞아죽은 지주들이 있었겠는가! 세월은 언제나 공평스럽지 못했던 협곡으로부터 출렁거리며 흐르다가도 공평스럽게 잔잔한 물곬을 따라 흐르게 된다. 그러다가도 락차가 심한 골짜기를 만나게 되면 또 그 평형을 잃게 된다. 호조조로부터 인민공사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농민들은 파란곡절을 껶어왔었다. 개혁개방이 된후 근 30년동안 농촌에서는 호도거리책임제을 실시해왔었다. 비록 명의상 제땅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덕에 농민들은 자기의 소망을 이루어볼수 있었고 먹을 문제를 해결했고 일부는 부유해지기도 했다. 허지만 지금 땅이 적고 인구가 빨리 늘어나는 중국의 실정에서는 그 정책을 개혁하지 않으면 안될 국면에 이르게 되였다. 농촌달구지길로 소수레를 몰고 오르락내리락해서는 큰 문제가 없겠는데 승용차를 몰고 다니자면 기름은 기름대로 더 태우고 속도는 낼수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도리로 가가호호에서 저마다 밭뙈기 몇이랑씩, 기껏해야 한두헥타르씩 끌어안고 있는다면 농업기계화를 어떻게 실현할수 있겠는가? 농업의 규모화, 기계화, 과학화를 실현하자면 우선 토지가 소수 감농군들에게 집중되여야 한다. 즉 다시말해 일정한 경영능력, 일정한 과학영농지식, 일정한 자본을 가지고있는 현대지주—농장주들이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농장주들이 새농촌이라는 무대로 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층층의 계단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계단은 많은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류전시키고 농업에서 해탈되게 하는것이다. 그러자면 그들의 직업이 해결되여야 하고 사회보험, 년로보장, 도시입주 등 구체문제들이 여유있게 장기적인 시책으로 해결되여야 한다. 이것은 국가와 해당부문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그보다도 그 해결과정에서 저애력으로 나타날수 있는 농민들의 낡은 관념, 세습습관, 향토감정이 더 심각한 문제로 제기될수 있다. 이 문제를 우리 지성인들이 지금부터 앞장에 나서 해결하기에 노력해야 할것 같다. 생일파티가 끝나 술자리에서 일어나시게 된 아즈바이가 상체를 살짝 비틀거리시였다. 약주가 좀 과하신 모양이였다. 내가 급히 다가서서 부축했다. 문밖으로 나오며 나는 동생의 뜻이 장하다며 새농촌건설에 대한 의의와 앞날에 대한 전망을 구구히 해석해드렸다. 그래도 아즈바이는 팔을 휘휘 내저으시였다. “아무때건 땅을 독차지하고 너덜거리던 눔들이 잘되는 법이 없더라. ” 확실히 나보다 소금도 더 축냈고 다리도 더 두드려보며 건너온 선배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 수천년 내려온 농촌력사에서 땅을 독차지 하고 남을 부려먹던 지주들 가운데서 잘된 놈이 별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지주는 그 성질이 좀 다르다. 자기의 토지를 가지고 남을 부려먹는것이 아니라 남의 토지를 가지고 사회의 힘, 기계의 힘, 과학의 힘에 의거해서 남을 먹여살리면서 자아발전을 시도해야 하는것이다. 지금 앞을 내다보는 농촌젊은이들이 너무나도 적다. 현시대”지주”들의 등장을 위해 여론조성도 바람직한 일이다. “야, 지주가 되고싶으면 한번 크게 해봐. 파이팅!”
52    장백산언덕가에는 미인송이 서있다 댓글:  조회:1254  추천:0  2013-07-24
장백산언덕가에는 미인송이 서있다 홍 천 룡 농촌에 있을 때에는 산이 그리운 줄 몰랐었다. 짬만 있으면 산에 올라가 땔나무도 하고 나물도 캐고 새둥지도 털고 했으니까. 사회가 발전하면서 도시가 확대되고 도시생활이 보편화되면서 도시문화가 풍부해졌다. 긴장하면서도 질서있고 복잡하면서도 향상해지고 호화로우면서도 무정해지는 도시생활에 푹 빠져 흐지부지 퍼진다음에야 사람들은 느긋하고 근심걱정없이 땀 흘리며 먹어라 써라 하던 목가적인 농경생활이 그리워지고 산이 그리워지고 꽃이 그리워지는 모양이다. 요즘은 산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많아지고있다. 별일이다고 의혹감이 들 정도이다. 덩달아 몇번 산에 올라가보니 그 원인을 알것만 같았다. 산은 정말 좋은 곳이다. 공기 좋고 물이 좋고 경치가 수려하다. 그래서 나도 자주 산으로 다니게 되였다. 두루 산을 돌아보면 산은 산마다 특색이 있다. 어떤 산에 가면 마음이 한없이 안온해지고 어떤 산에 가면 정서가 더없이 숭엄해지고 어떤 산에 가면 세상을 등지고 도를 닦는 스님이 되여보고 싶은 생각이 덧없이 들기도 한다. 우리 조선민족은 장백산을 성산으로 우러러 보고있다. 그래서 나도 오래전부터 장백산으로 여러번 갔다왔다. 매번 갈 때마다 감수가 달라지군 한다. 장백산기슭에 이르러 언덕가에 오르면 특별히 눈길을 끄는 나무가 있다. 먼데서 보면 꿋꿋한 전선대에 갓을 씌워놓은것 같기도 하다. 그 나무가 바로 미인송이다. 가까이에 가보면 아래로부터 웃부분의 “갓”모양이 펴지는 곳까지는 곁가지 하나도 없이 미끈하게 쭉 올리 뻗쳐있다. 창공을 찌르려는 삼각창 같기도 하다. 그리고 또 어찌보면 사람다리 같기도 하다. 미끈한 겉모양을 보면 녀자의 다리와 같기도 하고 힘있게 쭉 뻗은 전체모양을 보면 남자의 다리 같기도 하다. 미인송은 미인과 같은 체격을 가지고 있지만 미인과 같은 나긋한 교태감과 화려한 아양감은 없다. 그 어떤 광풍폭우속에서도 그 긴 허리를 굽힐줄 모른다. 사람들은 미인송을 장백산출입구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에다 비기기도 한다. 미인송이 지켜주기에 장백산에서는 각종 야생동물들이 마음껏 뛰놀수 있고 미인송이 지켜주기에 장백산에서는 각가지 야생화들이 울긋불긋 피여날수 있다는것이다. 나는 20여년전부터 장백산으로 다니기 시작하면서 장백산기슭에다 화원을 꾸리는 한 조선족사나이를 알게 되였다. 기름한 얼굴에 키도 미인송처럼 늘씬하게 빠졌다. 하냥 조용한 미소를 짓는것이 특징적이였다. 장백산기슭에서 조용히 피는 야생화처럼. 20여년전만 해도 장백산기슭은 거칠고 인적이 드문 황산언덕이였다. 그런 곳에다 꽃밭을 꾸리려고 하니 무슨 아이들 같은 소꿉장난은 그만 두라고 마음좋은 동네분들이 막아나서기도 했었다. 사나이는 그냥 고맙다고 조용한 미소를 보내고는 그냥 괭이를 메고 산기슭으로 향하군 했었다. 그 구부정한 뒤잔등을 바라보며 그 깊은 속을 헤아려보는 동네지기 몇분이 그 뒤를 밟아주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꽃을 좋아한다. 악인이든 호인이든, 남자이든 녀자이든 다 즐긴다. 왜서? 곱기 때문에!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이 고운줄을 다 안다. 요즘엔 거주조건이 개선됨에 따라 집집마다 화분을 몇통쯤은 다 가꾼다. 그 몇통쯤 되는 화분을 가꿔본 사람이라면 다 알것이다. 꽃이란 보기에는 좋아도 가꾸기란 얼마나 시끄러운 일인줄을! 하물며 잡목이 무성하고 잡초가 우거진 산기슭에다 꽃밭을 꾸리겠다고 하니 그 고생인들 오죽했으랴! 꽃밭을 일구자니 소도 사야 하고 보습도 사야 하고 일군도 써야 했다. 그 세월에도 돈이 들어가야 일감이 손에 잡힌다. 그래서 사나이는제호주머니도 털고 부인앞에 손을 내밀기도 하고 지기들의 선심도 받아주고 깍쟁이 청인들의 돈도 꾸고 하면서 꽃밭도 일궈놓고 화단도 수건해놓았다. 그다음 문제는 꽃씨를 얻는것이였다. 그는 늘 새벽부터 신들메를 죄여매고는 먼길을 떠나군 했다. 동서남북에 꽃을 재배한다는 집들은 다 찾아다녔다. 까만 들가방을 달랑 들고는 연길도 얼마나 드나들었는지 모른다. 한번은 그 사나이가 연길로 왔다기에 찾아가 뵈였다. 한창 기음철이라 땡볕에 그을린 얼굴이 새까매져있었다. “고생이 많으시우! 두루 몸도 살피면서 하세유.” “나야 뭐, 별로 큰일도 못하면서 슬렁슬렁 돌아다니니 괜찮수다.” 사나이는 늘 조용한 미소에 조용한 말소리로 락관적인 모습을 보여주군 했다. 사나이는 꽃씨를 얻느라 국내 각지를 동분서주했을 뿐만 아니라 없는 돈에 비싼 비행기를 타면서 한국, 조선 , 일본, 미국 등 해외로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우량품종을 갖출수 있게 되였다. 그 가운데는 적지 않은 명화들도 들어있었다. 어떤 꽃은 세계적으로도 손을 꼽을수 있는 명화였다. 고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어떤 꽃은 너무 고와서 일부 구경군들의 눈을 자극하기도 했다. 사나이는 고운 꽃만 키운 것이 아니라 꽃의 약용성이며 식용성도 따져가며 심었고 또한 연구가치가 있는 기이화초도 길러 일부 구경군들의 물의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 아무튼 그처럼 아글타글 가꾼 꽃밭에 울긋불긋 각가지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꽃구경오는 관광객들이 많아졌다. 사나이는 거기에서 힘을 얻고 더 큰 희망을 내다보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어느 날부터 하느님이 우숩게 놀았다.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우뢰가 울부짖더니 폭우가 쏟아져내렸다. 해마다 몇번씩 퍼붓는 폭우때문에 고생해왔지만 그번 폭우는 련며칠 그치지 않고 퍼부어 홍수가 지게 되였다. 골물이 터지니 사정없었다. 아가리를 쫙 벌리고 사품치는 흙탕물에 알뜰히 가꿔놓은 꽃밭한쪽이 밀려나갔고 집채같은 바위돌이 굴러떨어지면서 정교하게 수건해놓은 화단이 박산나게 되였다. 사나이는 비속에서 삽을 쥐고 결사적으로 싸웠다. 물곬을 옮기지 않으면 꽃밭이 끝장날수도 있었다. 원내 동료들이 몽땅 동원되였고 집식구들도 동원되였었다. 동네분들도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끝내 물곬을 옮기고 꽃밭을 지켜내고야 말았다. 그번 홍수와의 싸움에서 사내도 지쳤고 동료들도 지쳤다. 부인은 그번 홍수에 병까지 얻었다. 사나이는 부인의 병을 치료해주려고 국내 여러 병원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도 홍수에 밀린 부분을 다시 가꿔놓도록 많은 조치를 댔다. 지칠대로 지친 사나이는 그 어느 날 꽃밭머리에서 잠간 숨을 돌리느라 미인송나무에 기대여 앉은것이 그만 깜박 쪽잠에 떨어져 꿈나라로 들어가게 되였다… 장백산기슭에 꽃바다가 펴진다. 이쪽에서는 진붉은 진달래가 불타오르고 있는가 하면 저쪽에서는 하얀 민들레꽃이 거대한 면사포를 이루어가고있었다. 장백산입구는 완전히 꽃대궐을 이루었고 머루넝쿨로 이루어진 길다란 랑하에는 먹음직한 머루송이들이 데룽데룽 드리워져있었다. 올리 쭉 뻗은 그 끝머리에는 락락장송들이 하늘을 가리우면서 선선한 그늘을 지어주고있었다. 완전히 선경같은 환경이였다. 그속에서 새들이 지저귀며 합창을 했고 꽃나비들이 집체무용을 펼쳐냈으며 꽃사슴들이 마라손경주를 했고 곰들이 씨름판을 벌리고있었다. 나중에 장백산호랑이가 따웅! 하며 산곡간을 은은하게 울려주니 녀석들은 저마다 꽃묶음을 안고 두줄로 렬을 지어 장백산입구로부터 천지정상에까지 이르는 구간에 환영진을 이루어놓는것이였다. 둥기당! 가야금가락에 맞춰 상모춤대오가 처음으로 꽃대궐속으로 들어갔고 그 뒤로 새장구를 앞가슴에 건 꼬리치마 아낙네들이 따랐다. 풍상고초를 겪을대로 다 겪어온 우리 민족의 어르신님들이 백발을 흩날리며 퉁소가락을 건건하게 흘려넘긴다. 이어 칠색단 꽃저고리를 입은 동자들이 환호소리 야- 울리며 산기슭을 메우며 밀려온다. 희망의 구름떼를 이루어준다. 그다음에는 원예사들이 나타났다. 세계각국으로부터 모여온 우리 민족의 고급원예사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의 화원에서 정성껏 가꿔서 받은 꽃씨를 가지고 왔다. 그 꽃씨를 바야흐로 이 대지에 뿌려놓을것이다. 끝으로 구경군대오가 나타났다. 대서양 저쪽에서 날아오신 분들도 있고 태평양남안에서 헤염쳐오신 분들도 있다. 유럽의 털부숭이도 보이고 아프리카의 깜장미인도 보이고 동남아의 뽈록이마도 보인다. 상모춤대오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 천지를 진동하는 폭죽소리가 터진다… 그 소리에 사나이는 꿈을 깼다. 그리고는 또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그 이듬해에 사나이는 꽃밭을 장백산중턱으로 옮기려고 했다.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꽃밭규모도 확대해야 할 추세에 직면했던것이다. 허나, 자리를 옮긴다는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자금도 문제이고 인력도 문제이지만 그보다도 산을 관리하는 해당부문의 수속절차가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허나, 사나이는 또 그 특징적인 까만 들가방을 달랑 들고는 이런저런 부문을 문턱이 닳도록 다녔다. 그렇게 닦은 공력은 세상사람들이 다 알고 우리 민족이 다 알고있다. 지어 하느님도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자리를 옮기니 꽃밭이 더 화려하게 가꾸어졌다. 사나이는 세계각국에 있는 우리 민족지성인들이 가꾸어서 심은 꽃씨를 가져다 심고 가꾸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특유한 품종도 가꾸어서 꽃씨를 받아냈다. 그래서 세계각국의 저명한 인사들의 중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력사와 민족의 뿌리에 얽혀지면서 이루어진 이런 특유의 품종은 이제 앞으로 다른 품종과 교접되면서 더많은 명화를 배출해낼것이다. 인젠 꽃밭도 화려하게 가꾸어놓았으니 좀 여생을 여유작작하게 보낼수 있었지만 사나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근간에 와서는 또 동네분들이 가꿀수 있는 삼림까지 도맡았던것이다. 점점 더 아름차게 일을 벌려나가고있다. 요즘 나는 또 장백산에 올라가보았다. 언제나 산에 오를 때에는 땀이 나고 숨이 차서 고통스럽게 헐떡거리게 된다. 그럴 때에는 괜히 밥먹고 할노릇이 없어 하는 짓거리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나, 정상에 오른다음에는 기분이 완전히 달라진다. 만천하가 한가슴에 안겨온다. 력대의 영웅호걸들도 산중에서 산을 지키면서 웅심을 키워오군 했었다. 모택동도 정강산에서 《8•1》붉은기를 휘날렸고 김일성도 장백산줄기를 주름잡으며 유격전을 벌려왔었다. 시대란 이 거형의 불도젤은 이미 붉은기를 휘날리며 총가목을 틀어쥐고 싸우던 혁명시기를 저 멀리 뒤골짜기로 밀어놓았다. 세계는 바야흐로 화목과 평화의 화려한 화원에 들어서고있다. 부동한 사람들의 조화로운 만남의 장소를 이루어주는데는 꽃보다도 더 매력적인 매개물은 없다. 꽃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것은 부동한 사람들의 공동한 념원이기때문이다. 장백산중턱에 이르러 숨도 돌릴 겸 미인송나무에 몸을 기대고 서서 고개를 돌려보니 저기 저 꽃밭에서 꽃을 가꾸고있는 사나이들이 얼마나 돋보이는지 모르겠다. 다시 고개를 쳐들고 미인송을 올려다보니 몇년전보다 더 미끈해진것만 같았다.
51    영양실조에 걸린 “팡즈”와 “말라깽이” 댓글:  조회:1247  추천:0  2013-07-22
•수필• 영양실조에 걸린 “팡즈”와 “말라깽이” 홍 천 룡 전번 날, 학교 때 우리 반주임이시였던 한선생님네 꾸린다는 “신라원”사우나탕에 들어가 본적이 있다. 시설도 구전했고 뒤따르는 서비스도 상쾌할만큼 흡족스러웠다. 들어내여 보일건 다 보이고 씻어내야 할건 다 밀어버리고 볼거리도 보고 먹거리도 먹었다. 늘 입고다니던 옷견지들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뚱이로 사람들앞에 스스럼없이 나선다는것이 어딘가 좀 민망스러운 감이 들었지만 그것도 순간적이였을 뿐, 너도나도 다 알몸이고 보니 민망스러울것도 없었다. 참, 묘한 세계였다. 아, 원시사회에서도 야인들은 아마 이렇게 … 실내는 뜨거운 수증기로 이루어지는 얇은 안개로 묘하고도 몽롱한 분위기를 이루고있었다. 그 몽롱한 분위기속에서 분주스럽게 얼비치는 사람들의 라체가 동적인 예술품이였다. 생활이 풍요로워진 오늘날 사람들의 몸체는 대개 보기가 좋았다. 유들유들한 살집이 감싸준 몸체에는 뼈의 형태가 기본상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개중에는 혹간 특이한 “풍경”을 이루어 보이는 “걸작품”도 있었다. 무우처럼 툭실한 다리로 남산처럼 축 처진 배를 지탱하면서 휘우뚱거리는 거동도 표현되고있었다. 보기에도 숨차오른다. 더욱 가관인것은 그런 비만인들이 시트가 없는 마싸지침대에 네각을 팔자로 벌리고 척 들어 누운 모습이였다. 희여번듯한 몸체가 눈을 풍요롭게 해준다. 안마사들이 저 몸체를 어떻게 다루나 궁금했는데 생각보다는 달랐다. 때밀이수건을 낀 안마사들의 손이 그 몸우에서 대패질 하듯 오르내리니 연신 “으야야-”하는 신음이 발설되면서 살결이 푸들푸들 떨렸다. 근육질이 강한 피부보다 지방질이 두텁게 낀 피부가 마찰에는 연약한가부다. 이런 풍경과는 달리 피끗 스쳐보아도 소슬하게 으쓱 움츠려지는 “속사편”도 있었다. 저가락 같은 다리에 가슴뼈가 아릉아릉하게 내비낀 사람들도 혹간 비츨거리며 나타나군 했는데 그 걷는 형태에서 벌써 절각거리는 뼈소리가 방불히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마가을 늦바람에 앙상한 나무가지가 소연하게 울어예는 소리를 듣는 감각이라 할가! 그런 사람이 달각거리며 마싸지침대에 오르면 어딘가 처연해보인다. 건장하고 뚝뚝하게 생긴 안마사들의 억센 손아귀에서 어떻게 배겨낼가 하는 근심이 앞섰는데 생각과는 달랐다. 독수리가 병아리를 잡아채듯 갈구리 같은 손아귀가 마른 뼈대를 부셔내듯 몸체를 주물러놓는데도 오히려 간지럽다는듯 미소를 피우며 “야, 좀 더 쎄게! 원 계집애들 손인가!”라고 조롱질이다… 사우나탕에 들어가서 흔히 눈으로 사생할수 있는 스케체이다. 뚱뚱한 사람과 여윈 사람, 뚱뚱한 사람이 여윈 사람을 부러워할 때가 있고 여윈 사람이 뚱뚱한 사람을 부러워할 때가 있게 된다. 뚱뚱한 사람은 뚱뚱한 사람으로서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가지고있고 여윈 사람은 여윈 사람으로서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가지고있다. 어느 한 시기에는 뚱뚱한 사람들의 뚱뚱한 몸집이 “죄”가 되여 몰리운 페단도 있었다. 근대에 와서 우리의 생활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적이 두번 있었다. 한번은 공화국건립전후였고 한번은 개혁개방전후였다. 전자의 변화는 정치생활의 계급적지위의 변화였고 후자의 변화는 경제생활의 실질적향상의 변화였다.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이데올로기통제하에 모든것을 계급관점으로 분석처리했기에 해괴하고 우습꽝스러운 일들이 많았었다. 아이들가운데 누가 좀 통통하게 생기면 “지주놈새끼”란 별명을 달아주고 “똥딸보, 똥딸보, 지주뱃때기 나간다!”고 놀려주기도 했었다. 기실 그 시기에는 영양부족으로 몸에 살이 오른 아이들이 별반 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장기간 저질음식의 편식으로 말미암아 단백질결핍으로 인한 부종이 와서 퉁퉁해보였던것이다. 그런데 잘먹어 살이 찐 지주의 형상에 비교되여 그런대로 억울한 별명을 얻어가지게 된다. 당시 문학작품이나 영화의 스크린막에 부각되여 나온 지주의 형상은 대개 돼지처럼 살이 피둥피둥 진 모습들이였다. 배를 쫄쫄 곯던 세월이라 배가 좀 나온 사람을 보면 달라는것 없는데도 소리없는 질투가 생겼고 시샘이 났었다. 음식이 단조롭고 먹어야 할만큼 먹지 못하는 세월에 영양실조로 몸이 퉁퉁 붓기는 뚱뚱보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한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가죽이 등에가 붙은 말라깽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헌데 계급적안광으로 볼 때 말라깽이들의 형상도 그닥 광채롭게 비껴들지 않았다. 언제나 “개다리”, “앞잡이” 혹은 “보지고 같은 변절자”의 반면 이미지로 전락되군 했었다. 그래서 개처럼 주인에게 꼬리질 치며 주인의 턱찌끼만 얻어먹느라 뼈다귀처럼 말라빠진 놈들이라고 “개뼈대”란 별명을 달아줄 때도 있었다. 우리 동네에도 “개뼈대”란 별명을 가진 아이들이 몇이 있었다. 그때 그런 세월에만 있을수 있었던 별명들이였다. 요즘 세월에 그런 별명을 달고다니는 아이들이 있는가? 개혁개방이 되면서 우선 먹는 문제부터 해결되였다. 30여년동안 잘먹으니 모두들 살집이 좋아졌다. 아래배가 비죽이 나온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이들도 영양이 좋아 통통하게 자라난다. 보기에도 귀엽다. 인간생활에서 먹는것도 큰 복이다. 먹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이 또 어디 있으랴? 없다! 그래서 먹을수 있다는건 다 먹어본다. 단조로운 편식이 없어졌다. 그다음 맛있는걸 골라서 먹게 되였다. 맛있는것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그다음에는 맛있는 가운데서도 영양이 풍부하고 몸에 좋다는걸 골라서 먹게 된다. 한때는 돼지고기보다 소고기가 좋다고 하니 소고기값이 막 치달아올랐다. 록용이 보약이라고 하니 술에다 마구 불궈 마셔 엉덩짝이 함지박만해진 녀자도 있고 솔잎이 몸에 좋다고 하니 소나무밑에 가서 입술이 퍼렇게 물들어질 때까지 그걸 질근질근 씹어서는 내뱉아버리고 또 질근질근 씹어대는 남자도 있었다. 아무튼 건강을 지키자는 보건의식이 높아지니 좋은 현상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하느님이 심술쟁이였다. 세상 사람들이 먹는 즐거움에 너무 빠져 복중복을 누리니까 시샘이 들었나부다. 고혈압이요 당뇨요 하는 문명병을 사람들에게 안아다주었다. 그런 문명병의 발생원인이 주요하게 비만에 있다고 하니 또한 비만과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몸까기요 살빼기요 다이어트요 식이료법이요 하면서 절식이로다 소식이로다 하면서 고양이 종지밑굽 핥듯 한다. 어떤 녀자애들은 허리가 한줌만 해서 바람에 날려갈듯 하느작거리는 갈대 같은 체격임에도 헬스방에 가서 땀을 한동이씩 빼고도 모자라서 또 요가에 가서 바삭거릴 정도로 말라빠진 어깨를 들쑥날쑥거린다. 지금은 빼빼 말라빠진 체격이 선호의 대상이 되였다. 아마도 그제날 “개뼈대”들에 대한 명예회복인양 싶다. 오늘날 뚱뚱하다고 해서 다 영양과다섭취인것도 아니고 또한 빼빼 말랐다고 해서 다 영양실조에 걸린것도 아니다. 허지만 뚱뚱보인 “팡즈”도 좋고 말라꽹이인 “개뼈대”도 좋고 다 영양실조나 영양과다섭취에서 인기되는것이다. 기실 영양과다섭취도 나중에는 영양실조를 초래시킨다. 해결책은 음식을 골고루 먹고 영양을 균형적으로 섭취하는것이다. 음식은 크게 곡물류, 채소류, 고기류로 나뉜다. 세가지 부류의 음식을 골고루 먹는것이 해결책인데 정작 그렇게 하자면 제대로 안될 때가 많다. 여기까지는 음식을 놓고 사람의 신체에 해를 끼치는 영양실조를 론해봤는데 그렇다면 사회에 해를 끼치는 “영양실조”는 무엇을 놓고 론해야 하는가? 전번에 과학발전관학습에 관한 보고회가 있어서 참가했다. 중요한 회의였고 또한 주요한 지도간부의 중요한 강화가 있다기에 노트까지 챙겨가지고 갔었다. 헌데 기대와는 좀 어긋났다. 보고자의 보고가 어느 학교의 랑독시간에 선생님의 지적을 받은 학생이 교과서를 펼쳐들고 랑독하는 모습과 흡사하였다. 누가 써준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두툼한 발언고를 한장한장 펼치면서 좔좔 읽어내려갔는데 고저강약도 없었다. 다만 띄염띄염 모를 글자가 나타나는지 아니면 글씨가 잘못 타자되였는지 머리를 홰홰 돌리다가는 어물어물 넘겨버리는 그 코소리가 따분해지는 보고장분위기에 미세한 활력소를 부여해줄뿐이였다. 보고내용은 주요하게 리론에 대한 연구였고 형세에 대한 분석이였다. 그다음에는 학습제도에 대한 강화였고 실무연찬에 대한 요구였고 금년도 계획이였다. 년초에 들은적 있었던 계획같았다. 보고가 약 한시간반쯤 진행되였는데 청중과의 소통은 한마디도 없었다. 유모아 한마디도 없었다. 새로 제기되는 개념도 없었다. 더우기는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실제적인 중점이 한개도 제기되지 못했다. 보고회가 끝나서 회의장밖으로 참가자들이 보뚝이 터진 밀물처럼 밀려나왔다. 여기저기에서 수군덕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공연한 시간만 랑비했어. 할일이 막 밀리는데…” “ 뭘, 한잠 잘잤잖아!” …… 보고자에 대한 조소였고 보고회의에 대한 풍자였다. 우리의 지도일군들에게는 예전보다 모든 여건이 구전하게 주어지고있다. 기층이나 현지시찰을 나가려면 고급승용차가 기다리고 외국고찰을 나가려면 비행기를 탈수 있다. 기층에 내려가면 해결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고 외지나 외국에 나가보면 선진경험도 있고 반면교훈도 있다. 왜 그런걸 보고에다 인용하지 못하는가, 왜 그런 경험과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못하는가? 문제는 그런걸 보아내지 못하고 그런걸 접수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해결해야 할 중점을 틀어잡지 못하는것이다. 왜서? 허울좋은 자리만 탐내고 “학습”이라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았기에 “능력부진”이라는 “영양실조”가 왔기때문이다. 주석대에 오르면 “뚱뚱”해보이고 고급승용차에 오르면 “뚱뚱”해보이고 개막식에 테프를 끊어야 “뚱뚱”해보이고 축하연에서 남먼저 술잔을 높이 들어야 “뚱뚱”해보이고 상급지도자의 뒤꽁무니에 서있어야 “뚱뚱”해보이는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각 분야마다에 이처럼 “영양실조”에 걸린 “뚱뚱보”들이 아직도 적은가? 꽃이 만발하는 봄철에 한 학술세미나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대학교교수도 참석했고 새파란 문단햇내기들도 끼여있었다. 세미나의 테마는 대중문화사업을 어떻게 흥기시키겠는가 하는것이였다. 한두 사람이 첫”포”를 쏘자 분위기는 인차 열렬해졌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한국에서는 어떻게 대중가요를 보급시키고있는가, 청신함을 즐기는 일본에서는 어떻게 목욕문화와 화초문화에 잠겨있는가, 프랑스의 거리예술이 어떻게 도시의 풍격특색을 도드라지게 했는가 하는 주제발언이 이어지더니 어찌하여 화제가 중세기의 로마네스크예술이 유럽의 옛구조건축물에 준 영향을 어떻게 볼것인가로 전이되였다. 뒤이어 수도원제도하에 노르만양식의 보급과 그 우아한 건축기교에 리용된 원통형, 아치형원리가 거론되더니 종교건축물내의 벽화와 인상파의 물에 젖은 로댕의 조각예술도 론의되였다. 뒤이어 고전음악의 대표인물인 바흐와 종교음악, 종교음악과 대중문화지간의 관계도 의론되였고 르네상스시기에는 왜 화가들이 시대의 선두에 서게 되였는가, 그 시기에 도대체 철학가들의 힘이 더 컸는가 아니면 문필가들의 힘이 더 컸는가 하는 쟁론에까지 이르렀다… 문제는 점심오찬시간이 퍽 지나면서 배가 촐촐해났던것이다. 배가 잠시 촐촐해나지 않았어도, 시간이 잠시 흐르지 않았어도 거론은 끝이 없었을것이다. 아마도 멀리는 태고연한 구석기시대의 마그달레니안인들의 동굴벽화로부터 20세기초엽의 현대미술거장인 피카소에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듣지 못했던 말도 많이 들었고 기억속에 아리숭해졌던 인물들의 이름도 다시 확인할수 있었다. 시야가 저기 저 먼 유럽에까지 넓혀졌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시간상의 제한으로 세미나는 고향의 대중문화, 우리네 도라지춤, 우리네 봄노래를 어떻게 보급시킬것인가, “가무의 고향”이란 옛호칭에 부끄럼없이 “꾀꼬리” 울어예고 “능수버들”이 하느적거릴 “미래의 고향판”예술과는 제대로 련결되지 못했던것이였다. 실제와 멀리 떨어진 리론이 공돌고 있고 현실을 떠난 지식결구가 구조되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는 적지 않은 문제들이 존재하고 위기가 잉태되고있다. 수요를 떠난 교육결구라든가 토대를 닦지 않는 거품경제라든가 정신적지주를 허무는 이색문화라든가… 아무튼 실제를 떠난 리론은 “영양과다”에 걸린 표면적형태이다. 학습에는 리론학습과 실천학습이 있다. 리론만 리론이라고 추구하면 “영양과다”에 걸릴수 있고 일만 일이라고 열중하면 “영양실조”에 걸릴수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균형을 잡는가 하는것이다. 균형을 잘 잡으면 더는 사우나탕안에 들어가 배가 처진 “뚱뚱보”도 볼수 없을것이고 뼈마디 절각거리는 “개뼈대”도 볼수 없을것이다.
50    숙녀들, 좀 더 뽐내봐 댓글:  조회:1201  추천:0  2013-07-18
숙녀들, 좀 더 뽐내봐 홍천룡 무더운 여름날, 맥주점 북쪽 음달진 창턱밑 좌석은 언제나 꾀죄죄한 녀석들이 차지하고있다. 서늘한 곳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지나오고 지나가는 녀자들의 풍채를 마음껏 흠상할수 있고 이러쿵 저러쿵 제멋대로 평가도 할수 있는 자리였다. 한번은 점잖은 친구를 만나 맥주점으로 들어갔다. 면바로 그 창턱곁에 남은 좌석이 있었다. 서로 우아하게 사양하면서 앉은 다음 잔을 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잔을 비우며 조용하게 정세흐름이나 론하자고 했는데 뒤좌석에서 무슨 시비를 캐는 말소리가 번주그레하게 들려와서 우리를 소란스럽게 굴었다. “야, 고년이 정말 여우야, 여우! 여우처럼 논다니까. 홀랑거릴 때는 정말 간이 다 녹아나, 녹아빠지지. 간이 녹아난 다음에는 제 안속만 홀랑 챙기는거야. 내 더러워서 콱 차버릴가 하다가도… 에익, 씨—” “임마, 네게는 그년이 칼라카메라지. 계집은 그래도 여우같은 녀자가 좋네라. 너 그래 돼지같은 녀자를 끼고 살겠냐? 흐흐! ” “응, 그래! 난 돼지같은 녀자가 좋겠어. 꿀꿀, 먹기두 잘먹구 말도 잘 듣구. 이거라구야 요래조래 다 빨아내구 말라빠져 시들면 홀랑 꼬리를 뺄게 아니겠어.” “임마, 남자란 그 홀림에 빠지는 멋에 사는거야.” “야, 그럼 너나 그 홀림에 빠져 살아봐.” “임마, 그럼 너 돼지같은 녀자를…” 슬며시 돌아다보니 명태같이 길쭉한 녀석과 호박같이 둥근 녀석이 서로 삿대질해가며 벌거이르르하게 열을 올리고있었다. 웃기는 녀석들! 곁사람들까지 걸쭉하게 웃기고있었다. 구경 여우같은 녀자가 좋으냐, 아니면 돼지같은 녀자가 좋으냐! 두 술군의 술상머리에서 벌어진 주정이나 다름없는 입씨름이라 용속된 비유로 찧고박고 했지만 무언가 깔려있는듯한 화제같기도 했다. 사람의 몸이 천근 간다면 눈이 팔백근 간다는 말이 있다. 참, 지당한 말씀이다. 눈이 귀신같다. 꽃과 풀이 동시에 눈에 안겨올 때면 풀보다 꽃이 깜찍하고 화려해보인다. 우선 꽃잎이 풀잎보다 앙증하게 펴지고 좁은데는 좁고 넓은데는 넓어지면서 곡선을 이룬다. 거기에 풀잎처럼 한층이나 한마디에 외잎으로 삐여지는것이 아니라 둘, 넷, 여섯, 여덟… 우수나 셋, 다섯, 일곫, 아홉… 기수로 동시에 삐여지면서 원형이나 각을 형성하면서 원활한 꽃부리조형을 이룬다. 또 거기에 어떤 꽃은 폭이나 길이가 좀 작은 속잎이 련이어 겹치면서 층차의 립체감도 이루어준다. 그리고 또 거기에 웅성, 자성을 띤 꽃술이 생겨나 화심을 만들며 절경을 이룬다. 또한 거기에 빨간색, 노란색, 자주색, 흰색 등 색치마를 주름잡으며 현란하고 화려함을 이룬다. 그것이 아양을 떨고 애교를 부리며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거기에 어떤것은 그윽한 향기까지 뿜어 사람의 심성도 희롱한다. 그래서 꽃은 녀자의 상징물로 되였다. 녀자가 있어야 눈이 즐겁고 녀자가 있어야 심성도 즐겁고 녀자가 있어야 웃음이 있고 녀자가 있어야 사랑이 있고 녀자가 있어야 행복이 있다. 눈을 가진 남자들이 고운 녀자를 보게 되면 눈부터 즐거워난다. 눈이 반짝반짝 광채를 띠며 가만 있지를 못한다. 보고 또 보고싶어진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두세번씩 고개를 돌리느라 애매한 길손들의 어깨를 쳐놓거나 발등을 디디여 정상적인 교통질서를 혼란시키는 페단도 생기게 된다. 정말 꽃처럼 고운 녀자는 집에 가져다가 화분처럼 가꾸고싶다. 그러면 보고싶을 때엔 보고 보고 또 볼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나 즐거운 일일가! 헌데 눈이 즐거우면 인차 피곤해진다. 세상이 돌아가는 도리가 다 그렇구 그렇다. 조물주가 얼마나 랭철한가! 고운 꽃도 시들 때가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고왔던 꽃도 시들면 곱지 않다. 문제는 여기에서 터진다. 시들면 꽃 자신도 더 어여쁘게 뽐내 볼수가 없고 곁에서 그걸 보아주는 눈도 즐거워질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가꾸는 문제가 제기된다. 꽃을 가꾸자면 시간, 영양토, 물, 해빛, 공기, 시비, 살충, 전지 등 자연물질과 인공기술이 수요된다. 녀자도 꽃이인것만큼 가꿔야 시들지 않는다. 녀자란 꽃을 가꾸는데는 주요하게 세가지 방면이 있다. 첫째는 천성적인 유전요소인데 고운 얼굴, 날씬한 몸매, 총명한 두뇌는 부모에게서 따온다. 둘째는 환경요소인데 영양, 가정, 사회, 교육, 직업이다. 셋째는 인공기술인데 주요하게는 자기절로 자기를 가꾸는 기술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방면에 부동한 전업기술의 전수와 숙달이 수요된다. 례를 들면 건강해야 아름다워질수 있는데 그럼 건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 정결한 위생습관을 키워야 맑아질수 있는데 그럼 위생습관을 어떻게 키워야 하느냐, 보건미용을 잘해야 생생한 피부를 보존할수 있는데 그럼 보건미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냐 등등, 이밖에도 음식, 의복, 화장, 심리, 혼인, 생육… 지어 손톱과 발톱을 어떻게 가꾸겠는가 하는데도 깊숙한 학문이 있다고 한다. 녀자들이 예뻐지지 않을래야 않을수 있겠는가! 지난세기 60-70년대에는 녀대학생이 극히 희소했다. 구경 어떤 녀자들이 대학생이 되였느냐고 궁금증이 심한 싱겁쟁이들이 대학가에 가서 힐끔힐끔 훔쳐보고는 무릎을 탁 쳤다. 대학가에는 미인이 없었구나! 그럼 그렇겠지! 그런데 삼사십년이 지난 오늘날 대학가에 가보면 말짱 미니미녀들이다. 크게 말하자면 사회가 발전한 결과라고 말할수 있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녀자들이 자기를 부단히 가꿔온 보람이 아니겠는가! 녀자는 우리 사회를 장식해주는 장식품이다. 녀자가 없는 사회가 아름다울수 있을가! 지금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리상적으로 아름다와지질 못하고 추악하고 더러운것이 지저분하게 널려있는데는 녀자들이 져야 할 책임도 크다. 이 사회가 백화만발한 화원이 되자면 천송이 만송이 갖가지 꽃들이 저마다 활짝활짝 피여나야 한다. 하지만 이 사회의 꽃으로 되고있는 많은 녀자들이(부동한 지역에 따라 그 비례수가 부동함) 아직까지 자기를 활짝 피우지 못하고있다. 꽃이 활짝 피지 못하는데는 가물거나 해빛을 보지 못하는 등 원인이 있다. 녀자들도 자기를 활짝 피우지 못하는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신체건강원인도 있을수 있고 사상, 신앙 원인도 있을수 있고 심리, 성격원인도 있을수 있고 가정, 사회적원인도 있을수 있다. 제일 주요한 원인은 자기가 자신의 이파리를 펴지 못하게 감고있는것이다. 그걸 펴야 한다. 자기를 나타낼줄 알아야 한다. 자아표현은 녀자의 천성이다. 녀자는 뽐내야 예뻐보인다. 뽐내는데는 여러 가지 류형이 있고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여러 가지 예술적기교가 있다. 맥주점 그 창턱밑 좌석에 앉아 지나가고 지나오는 녀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각양각색이다. 앙골라토끼털같은 머리로 굽실굽실 파도를 이루며 또각또각 절주있는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녀자,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한쪽으로 스며들듯 잦아들듯 사뿐사뿐 걸어가는 녀자, 만져보고싶도록 앙증한 엉뎅이를 달싹달싹 추슬리며 걷는 녀자… 제가끔 제멋대로 걸음걸이를 뽐내고있는것이다. 녀자는 뽐내야 남자의 눈길을 끌수 있다. 세계를 정복하는 주력군은 남자다. 그 남자들을 정복하자면 우선 그 남자들의 눈길부터 끌어야 한다. 어떤 녀자는 고운 얼굴에 함박꽃 피우며 그 눈길을 끌고 어떤 녀자는 날씬한 몸매를 하느적거리며 그 눈길을 끈다. 녀자는 뽐내야 남자의 마음을 잡아끌수 있다. 남자의 마음에는 세계를 담고있다. 그 세계를 함께 가지려면 남자의 마음을 끌어당겨야 한다. 어떤 녀자는 깨끗한 순정을 바쳐 그 마음을 끌고 어떤 녀자는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며 그 마음을 끈다. 녀자는 뽐내야 들말같은 남자를 순양으로 만들수 있다. 남자는 천성적으로 충격적인 공격형동물이다. 그 야성으로 많은 비극이 빚어질수 있다. 그 야성을 길들일수 있는 순록사가 녀자들이고 제일 효과적인 비방은 녀자들의 부드러움이다. 어떤 녀자는 뽐내기도 하고 온순하기도 하며 남자를 길들인다. 녀자로서의 예술이다. 녀자는 뽐내야 사랑스럽고 귀엽다. 요염하게 뽐내든 수집게 뽐내든 다 아름답다. 아름다움에는 캐야 할 도리가 없다. 녀자는 뽐내야 젊어지고 싱싱해진다. 싱싱하지 않으면 남자들의 싫증을 사게 된다. 이밖에도 녀자들이 뽐내야 할 리유는 많고도 많다. 뽐낼수 있는 녀자는 그만큼 밑천이 있다는걸 말한다. 허지만 턱없이 뽐내면 싱거워보인다. “뽐내는 녀자를 보면 달라는것 없이 밉더라”란 말이 이런걸 두고 하는 소리일것이다. 싱겁긴 하지만 안 뽐내는 녀자보다는 낫겠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아직도 수많은 녀자들이 뽐내지 않고있으며 지어 뽐낼줄 모르고있다. “녀성이 해방되는 날이면 세계가 해방되는 날이다.” 그어떤 사상, 신앙, 종교, 습관, 압박, 리념에 의해 많은 녀자들이 억눌려서 뽐내지 못하고있다. 아직도 남녀균형은 젖은 걸레처럼 한쪽으로 축 처지게 기울어지고있다. 그걸 쭉 짜서 말리우고 균형을 잡자면 녀자들이 한결 더 뽐낼수 있게 되여야 한다. 이 세상이 녀성이란 꽃으로 만발할 때 세상 불행한 남자들이 그 속에서 위안을 얻고 즐거움을 찾을수 있을것이다. 그날을 위해 숙녀들 좀 더 뽐내봐! !
49    맛이 없게 해서 맛이 있게 먹자 댓글:  조회:1126  추천:0  2013-07-17
수필.음식 맛이 없게 해서 맛이 있게 먹자 홍 천 룡 사람이 살면서 먹는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을가? 없다. 그래서 세계명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세월이 좋아지니 하루 세끼니 배를 곯지 않고 먹게 되였다. 배가 부르니 좀 더 맛있는걸로 먹자는것이 사람입이 내미는 욕심이다. 옛날에는 돼지고기국을 해놓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요즘에 와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돼지고기국을 먹는 사람이 있을가? 전번 날, 축하할만한 일이 생겨 남자에 녀자들 두루두루 맞춰 한상에 마주 앉았다. 녀자들 환심을 사느라 누군가 “궈보뤄(탕수육)도 청하지. 녀자들 전매특권이니까” 라고 호기를 피웠다가 그만 말밑천도 못찾고말았다. “지금 그런걸 누가 먹습니꺄! 집에 각시가 그런걸 먹습디꺄?” “허, 이 녀자들 입이 점점 고양이입이 되여가는구만. 그래 무얼 먹겠소?” “남자들이 사줄 때 맛있는걸로 콱 먹어야겠는데… 야, 우리 무얼 먹을가?” “글쎼말이, 요즘은 입에 맞는 음식이라곤 없더라.” 점점 높아가는 입덕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도 적지 않게 늘어간다. 랑군님의 안해로 된 새각시들, 아이들 어머니로 된 주부들, 아침상엔 무얼 올려놓을가, 저녁상준비는 어떻게 할가, 때시걱마다 근심이 앞선다. 끼니마다 맛이 있게 해서 정성껏 갖춰줘도 언제한번 맛있게 먹었다는 소릴 못들어본다. 그다음에는 돈깨나 벌려고 분식점이나 식당같은 음식업을 벌려놓은 주인들이다. 손님들 구미를 맞춰주기 점점 힘들어진다. 지금은 입이 입이 아니고 검사의기가 된듯 싶다. 먹으러 다니는것이 아니라 검식하러 다니는것 같다. 이게 이 맛이 아니고 저게 저 맛이 아니라고 송곳질 하며 꼬집어낼 때에는 정말 주인으로서는 입이 아홉개라도 할말이 없어진다. 이런저런 맛있다는걸 다 구입해다가 요런조런 조미료를 다 쳐서 이래저래 주물럭거려 삶고 삶은걸 볶으고 볶은걸 지지고 지진걸 튀기고 튀긴걸 걸러서 올려놓았는데도 맛이 없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다. 어처구니 없어도 그 손님이 “황제”이니 어쩔수 없다. “먹거리업은 밑지는 법이 없다”는 명언을 성지처럼 받들고 시작한 일이 아닌가! 더 맛있게, 오직 더 맛있게만 하면 손님들도 “ok!”고 주인도 “ok!”다. 그래서 골을 질끈 동이고 머리를 짜면 수가 생긴다. 그 질긴 소고기도 어찌어찌 주물럭거려놓으면 두부모처럼 몰씬몰씬해지고 튀긴걸 어떻게 또 튀기면 그 땅땅하던 닭뼈가 사각사각 씹히다가도 사르르 녹아내리기까지 한다. 끓인걸 또 끓이고도 모자라서 가스렌지까지 상우에 올려놓고 자꾸자꾸 끓인다. 거기에다 연변고추가루요 사천후추가루요 하며 푹푹 뿌려서는 훌훌 불며 먹으니 입안이 짱- 열리며 얼벌벌해진다. 세상 별맛이다. 그런 특이한 맛을 보기 위해 한두번 찾아가는것쯤은 별문제가 아니다. 헌데 어떤 량반들은 그런 맛에 맛을 들이면 하루이틀이 멀다하게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선동하기까지 한다. “야, 거기 그 맛이 한절반 죽여준다. 가자, 오늘저녁은 내가 쏠게!” 모두들 우르르 쓸어가서 그 맛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세상 별맛이라고! 그 사람들 돌아가서 또 제각기 제친구들을 꼬드긴다. 그러면 손님이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고 그 식당엔 대박이 터지게 된다. 식당에 대박이 터져서 주인은 돈을 버는데 그 식당으로 드나드는 단골객들의 위와 간을 비롯한 장기들은 어떻게 되여갈가? 음식물을 끓이면 끓일수록, 기름에 튀기면 튀길수록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점은 이미 전문가들의 과학실험에 의해 검증되였다. 그래서 어느 한 전문가는 이렇게 대성질호하고있다. “식당으로 한번 가는것이 무덤으로 한걸음 다가서는것과 같다”고. 좀 지나친 말이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음식은 맛이 있을수록 독이 된다”는 말도 있는데 뭐 과학적수치로 검증해낸 결론은 아니지만 많은 실례로 증명해줄수 있는 조언은 될수 있겠다. 중국력대의 황제들 수명이 모두 길지 못했었다. 40대중반에 요절한 황제가 많았다. 그 락후했던 세월에 맛있다는걸 돌아가며 다 맛본 황제일수록 더 일찍 죽어나갔다. 지금 우리 주변을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잘먹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비례가 높다는걸 보아낼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젊어서 외국에 나가 돈을 무척 벌어온 친구가 있었다. “먹다가 죽으면 후회없다”고 늘 마음을 쓰며 놀고먹고 락천적으로 보냈는데 간암이란 진단을 받고 상해에 가서 수술까지 하고나니 그게 아니였다. 그제야 하루라도 더 살겠다고 애를 써봤지만… 먹거리가 흔장만장할 때일수록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 음식물도 돈처럼 많아도 탈이요 적어도 탈이다. 먹을것이 적었을 때에는 별 우수운 일들이 다 있었다. “대식품시기”에는 음식이 맛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며 먹은것이 아니라 먹을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 먹었다. 무릇 먹을수 있다면 그것이 풀뿌리든 나무껍질이든 벌레든간에 가리지 않고 다 먹었다. 먹을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돋굴수 있었던것이다. 먹는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다. 삶는것이 위주였다. 조미료도 소금간장뿐이였다. 멀건 푸대죽에 소금을 툭 쳐서 차려놓아도 맛이 없다고 타발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며칠씩 감자만 삶아줘도 그처럼 맛있게, 일년내내 강냉이떡만 쪄줘도 그처럼 맛있게…모든 음식이 그처럼 맛이 있었던 세월이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먹는것을 놓고 로선분석도 하고 계급투쟁도 벌렸었다. 맛이 있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자산계급이고 맛이 없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로동자나 빈하중농같은 무산계급이였다는것이다. 중학시절의 어느 한 겨울방학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웅덩개”마을에서는 계급투쟁교육을 강화한다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빈농 최할아버지를 모셔다 놓고 “이쿠스탠”(忆苦思甜)활동을 조직했었다. 널찍한 우사칸회의실안에 마을의 소학생과 중학생들이 사오십명 빙 둘러앉았다. 암흑했던 구사회를 추억하는 보도가 시작되자 환한 전등을 끄고 초불 몇대를 켜놓았다. 그런다음 녀자애들이 우사칸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에다 쪄낸 겨떡을 대야에 담아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어두운 초불밑에서 그 쓰디쓴 겨떡을 먹으며 지난날의 쓴맛을 체험해보라는 뜻이였다. 나도 자그마한 걸로 골라 한입 떼여 먹어보니 입안이 껄껄해났다. 뱉아버리고싶었다. 벌써 저급학년 철부지들이 앉은 쪽에서는 퉤! 퉤! 하고 뱉아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과외보도원선생님의 준절한 질책소리도 엄엄하게 들려왔다. “누구야? 계급감정도 없어!” 다시 조용해지면서 우물우물 씹는 소리만 들렸다. 최할아버지의 보고는 눈물겨웠다. 과거회억부분이 끝나고 최할아버지가 “마침내 해방이 되였습니다” 라고 하시자 누군가 스위치줄을 탁 당겨 전등을 켰다. 회의실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뒤이어 녀자애들이 이번에는 대야에다 맛있는 과자를 골똑골똑 담아서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팔을 뻗쳐 한웅큼씩 쥐여다가는 볼이 미여지게 먹었다. 목이 메여 꿱꿱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달콤한 과자를 먹으며 새사회의 행복을 느껴보라는 뜻이였다. 그런데 보고가 끝나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우루루 쓸어나가자 구석구석에 먹다가 버린 겨떡들이 지저분하게 나타났던것이다. 녀자애들이 그걸 거둬서 모으니 대여섯 대야나 되였다. 그걸 중간에 놓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몇몇 학생골간들과 함께 밤중까지 로선분석을 하느라 열을 올렸었다. 아무리 열을 올린들 어찌하랴, 맛이 있는걸 좋아하고 맛이 없는걸 싫어하는 아이들의 입을! 개혁개방이 되면서 음식물도 개방되였고 또한 새롭게 많이 개발되기도 했다. 지어 먼 옛날 황제들만 맛볼수 있었던 궁전음식도 다시 개발되여 평민들도 마음대로 맛을 보게 되였다. 헌데 10년 배부르게 먹고 10년 맛있게 먹고나니 먹는 수준이 사람마다 프로급이 되였다. 외국인들도 중국에 와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맛있는 먹거리들이 너무나도 많다. 동북에는 동북맛이 있고 남방에는 남방맛이 있고 북방에는 북방맛이 있다. 어느 한 고장에 가보면 무엇부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한다. 한 접시에 몇만원짜리 고급료리도 있는가 하면 한개에 오십전짜리 전병도 별맛을 돋구는것이 있다. 맛있는걸 더 맛있게 해먹기 위해 벼라별 방법을 다 쓴다. 조미료도 열가지, 스무가지, 무엇이 맛을 돋굴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버무려쓴다. 삶고 닦고 지지고 볶고 튀기는것도 모자라서 태우고 굽고 내굴에 그슬러 먹기도 한다. 날것, 생것 그대로 먹는것도 모자라서 동물이나 곤충을 산채로 잡아다 먹는 료리도 있단다. 지어 한때는 남방에서 원숭이를 산채로 잡아다 놓고 눈알이 판들거리는 고놈의 정수리를 뾰쪽망치로 쳐서 뇌즙을 빨아먹는 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사람이 할 노릇인지! 무슨 일에나 한계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도”라고도 했다. 그 “도”를 넘으면 일은 비뚤어질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음식도 대개 먹을만한 맛이 있으면 되는건데 맛이 있는걸 자꾸 더 맛있게 해먹다보니 그 음식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지금은 맛있는 음식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있다. 맛있는 음식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나쁜점이 있다. 첫째,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평상시보다 더 먹게 된다. 맛있는걸 해놓으면 서로서로 더 들라고 권한다. 이것이 먹는 법도의 례절이고 우리 사회의 인품이다. 과식이 불식이라는 말이 있다. 일년에 한두번이나 한달에 한두번쯤 과식하는건 별문제이겠지만 자꾸자꾸 과식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가 하루이틀이나 일이년내에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몇년, 지어 몇십년후에 나타난다. 시간이 길게 나타나는 문제일수록 인체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될수 있다. 좋은 음식일수록 적게 먹어야 “보약”이 된다. 둘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종합적인 배합물이다. 식당에 가보면 료리사들이 조미료를 열가지이상씩 놓고 쓴다. 료리의 맛을 돋구는 가장 관건적인것은 소금이다. 국제위생조직에서는 매일 매인당 소금흡수량을 6그람으로 제한할것을 요구하고있다. 헌데 료리 한접시에 들어가는 소금량이 6그람을 초과할 때가 있게 된다. 소금이 적게 들어가면 맛이 없다는 고객들의 의견이 홍두깨처럼 들이닥친다. 그러니 맛있는 료리를 많이 먹을수록 소금흡수량이 늘어나게 된다. 소금흡수량이 늘어나면 인체에 불리하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도리가 아닌가! 셋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연하고 부드럽고 만만하고 시원하면서도 거뿐한 자극을 준다. 지어 사르르 녹아나는 감을 주는것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이발을 해친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얼마든지 씹어서 먹을수 있는것도 더 맛있게 더 시원하게 먹는다고 믹스에다 갈아서 마신다. 무슨 음식이나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고 씹으면 씹을수록 묽어져서 물이 된다. 그걸 하필이면 영양세포를 파괴시키면서 이발을 무르게 하면서 전기를 랑비하면서 갈아 마실건 뭔가! 누가 승냥이가 산포도를 뜯어먹는 장면을 보았는가? 까맣게 무르익어 몽글몽글해진 산포도를 승냥이는 찔긴 날고기를 먹을 때처럼 텁썩텁썩 물어뜯어서는 까등까등 힘주어 씹어먹는다. 만약 사람이 그걸 뜯어먹는다면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녹여먹을것이다. 다 같은 산포도이지만 까등까등 씹어먹은것과 오물오물 녹여먹은것이 위안에 들어간다음의 효과는 다른것이다. 이것이 총명한 사람의 무지한 약점이라고나 할가! 넷째, 맛있는 음식은 조합과정에서 많은 오점이 생긴다. 례를 들면 파와 두부를 섞어먹으면 인체에 불리한 물질이 생성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부를 먹을 때 양념간장에 생생한 파를 송송 썰어서 넣는다. 그래야 맛있다. 일반적으로 무엇과 무엇을 섞어서 만들어 먹을 때 그 영양가치나 인체에 리로운가를 따지는것이 아니라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다 보니 인체에 불리한 물질을 생성시켜 먹을 때가 있게 된다. 중약재도 잘 조합시키면 약이 되고 잘못 조합시키면 독이 된다. 이밖에도 맛있는 음식에 보이지 않는 약점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음식을 맛이 없게 해서 맛이 없게 먹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어떻게 먹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 관건은 맛있게 먹는것이다. 무릇 맛있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하고 맛이 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 음식을 맛이 없게 먹으면 병이 생긴다. 그런데 맛이 없는 음식을 어떻게 맛이 있게 먹는단말인가? 여기에 먹는 예술이 수요된다. 첫째, 음식먹는 분위기를 조성할줄 알아야 한다. 혼자 먹거나 여럿이 함께 식사를 나누든지간에 각자의 성격, 애호, 환경,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각, 청각, 후각의 작용을 동원시켜 미각을 자극할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음식량을 잘 조절할줄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체중이 다르고 종사하는 직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기때문에 공통적인 표준량은 있을수 없다. 일반적으로 식사후 서너시간이 지나면 배고파날수 있는 량으로 조절하고 습관화시키면 좋다. 배고파날가말가 할 때 먹는것이 좋다. 배고픈 시간이 길면 위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 셋째, 특수한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상응한 대책을 대야 한다. 례를 들면 기름기 있고 느끼한것을 먹었을 때에는 운동량을 좀 늘이고 마른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물을 더 마시는것이 좋다. 그래야만이 다음 끼니를 맛있게 먹을수 있다. 넷째, 맛이 없는 음식일수록 오래 씹어야 한다. 오래 씹으면 무엇이나 다 맛이 난다. 문제는 맛이 없는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오래 씹기 싫어한다. 한번 쓴맛이 나는것을 오래 씹어보면 알수 있다. 이밖에도 맛이 없는 음식을 맛이 있게 먹을수 있는 비결이 많다. 또한 각자가 자기의 특점에 따라 자기로서만의 독특한 비결을 찾아낼수도 있는것이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건강으로 지켜야 한다. 건강을 지키자면 먹는것이 관건이다. 관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과학이다. 과학적으로 음식을 만들자면 우리의 입맛과 달라질 때가 많게 된다. 일반적으로 맛이 없는 음식이 인체에 리롭다. 마치도 “쓴것이 약”이라는 도리와 같다고나 할가! 영양학적으로 따지면 음식은 간단하게 만드는것이 좋다. 대개 간단하게 만들어낸 음식이 맛을 돋구지 못한다. 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것을 맛이 있게 먹어야 한다.
48    세월아, 좀 천천히 가려무나! 댓글:  조회:1591  추천:0  2013-07-16
•수필• 세월아, 좀 천천히 가려무나! 홍천룡 아기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다 그 아기가 하루라도 빨리 자라나기를 원할것이다. 걸레짝처럼 구질구질한 세월을 끌어당겨다 지릿한 아기의 기저귀마냥 꾹꾹 짜서 한나절의 해볕에 말리우듯, 쪽박으로 아침저녁 물을 주며 콩나물을 기르듯 하루볕이 새롭게 느껴지는 심정이다. “어서어서 자라고 빨리빨리 크거라!” 하루가 다르고 한달이 다르게 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심정은 얼마나 뿌듯할가! 헌데 어떤 엄마는 그것도 성차지 않아 키가 크는 생장소를 먹인다, 이러저러한 비타민을 먹인다고 A, B , C를 부른다. 10년, 20년이 지나 그 아기가 제멋에 자랐다고 워들렁거리며 요람을 떠나 밖으로 물덤벙술덤벙 나돌아다닐 때에야 세월이 너무나도 빨랐구나 하는 원망과 근심에 쌓이게 된다. 우리 사회의 발전도 대개 아이들의 성장과 비슷한 점이 있다. 금년은 공화국건립 60돐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60년이란 로정을 걸어온 공화국도 인젠 바야흐로 무르익어가는 사과가 되였다. 초가을에 과원에 가서 무르익어가는 사과를 살펴보면 양지쪽을 향한 면은 발가우리하게 익어가고 음달쪽을 향한 면은 여전히 익지 않은 상태로 퍼러딩딩해있는것을 볼수 있다. 그런 사과는 잠시 따지 않고 둬두면 늦가을에 가서야 다 붉어진다. 공화국의 첫 30년은 사과의 퍼런 면이 익는것처럼 그 발전이 굼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우선 먹고 입고 자는 집이 첫째 요소일것이다. 첫 30년은 공화국에서 먹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었다. 최저한 굶어죽지 않는 생존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수요에 따라 먹을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은 지워주지 못했었다. 가불간 몇십년 동안 6억 인민이 “워워터우”(옥수수가루로 찐 떡)를 떠날수 없었으니깐. 그것도 배부르게 먹을수 있는 집이 몇집이 안되였다. 지금은 그것이 건강식품이라고 다시 해들고 그제날 옛맛을 재차 음미해보는 사람들도 두루 있긴 있다. 그다음 6억 인민이 몇십년 동안 입어온 옷맵시를 살펴보자. 우선 색상이 단조로웠다. 침침한 검정색이 아니면 곤색이였다. 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덕분에 누런 국방색이 첨가되여 좀 생기를 띠기도 했었다. 국방색웃옷에다 곤색바지를 받쳐입으면 그당시 청춘남녀들의 류행되는 패션이였다고 할수 있겠다. 필자가 연길시3중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 있을 때 대원들의 공연복으로 국방색웃옷을 갖추야 했고 거기에 하얀 셔츠도 갖춰야 했다. 안에다 하얀 셔츠를 입고 그우에다 국방색웃옷을 받쳐입고 단추를 채우면 목깃둘레에 실오리 같은 하얀 선이 레이스처럼 내돋친다. 고 햐얀 선이 없기와 있기가 완전히 한 사람의 형상을 바꿔놓는다. 참 귀신 같은 디자인수작이라고 할가! 헌데 한번 공연에 땀에 절은 셔츠를 빨아야 했기에 최저 두세벌 갖추어야 했다. 당시 집집의 가정형편을 보아 한 아이에게 셔츠를 두세벌 갖춰줄 형편이 못되였다. 그래서 우리는 깃만 달린 가짜 셔츠를 만들어서 겨드랑밑으로 줄을 껴서 어깨우에다 걸쳐놓군 했는데 그것이 마치도 녀자애들의 젖싸개와도 같아 매번 그걸 낄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군 했었다. 그 세월에 낡은 옷을 기워입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을가! 시집온 새색시의 일솜씨가 낡은 옷을 깁는데서 엿보였고 아줌마들이 제일 부러워한 것이 재봉침이였다. 재봉침만 있으면 낡은 옷을 새옷처럼 만들어낼수 있었고 무릎도리나 엉뎅이쪽을 곱게 기워낼수 있었던것이다. 그다음은 잠자리나 꿈자리가 있는 집이다. 공화국 첫 30년동안에 대부분 백성들은 한집에 한구들로 아이들을 평균 대여섯명씩 키워냈었다. 밤이 되면 한구들에 형님오빠, 누나언니 할것없이 한이불을 덮고 쪼로롱 누워 자야 했다. 그러면 집안이 발을 옮겨디딜 자리도 없게 된다. 한 녀석이 사타구니에다 이불을 감고 딜딜 구을면 끝머리에 서너놈은 발가숭이로 태질하다가 옹송그린채 잠을 자야 했다. 장밤 알몸에다 바람 맞고도 이튿날 한놈도 배앓이를 하는 녀석이 없었다. 참, 괴상한 현상이였다. 더 괴상한것은 우리의 아빠와 엄마가 그런 환경속에서 어떻게 “밤작업”을 했는가 하는것이다. 그래도 거침없이, 거창하게 했기에 곰같은 동생들이 련이어 나왔겠지. 우리 웃집에는 자식이 9명이였는데 맏아들과 막내의 년령차이는 20살이였다. 그 가운데서 물에 빠져죽은 다섯째를 내놓고도… 스무평방이나 될가말가한 집안에서 말이다. 지금에 와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우리 “웅덩개마을” 북쪽 언덕위, 지금의 공원소학교운동장 남쪽에는 뿌연 기와에 철근콩크리트로 지은 아담한 일본식가옥이 한채 있었다. 공원가에서는 아마도 제일 좋은 고급가옥으로 첫손 꼽아야 할것이다. 저명한 화가 석희만선생님의 저택이였는데 광복전에 지은 집이였다. 80년대후기에 들어와서 파가이주 바람에 무너졌다. 근 40년동안 전반 공원가에서 그 집이 민가중 첫자리를 굳혀왔으니 연길시 가옥건설발전이 얼마나 굼떴다는것이 알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는가! 이와 상반대로 공화국 후 30년은 그 발전이 상상외로 빨랐다. 우선 먹는 문제가 해결되였다. 배를 두드리며 먹을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먹고싶은것을 다 먹을수 있게 되였다. 너무 잘 먹어서 탈이 나고있다. 옷견지도 수시로 바꿔입을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색상도 봄날의 화원처럼 울긋불긋 각양각색이고 디자인도 요란스레 기괴할 정도이다. 어떤 녀자들은 바지가랭이 아래도리를 아깝게도 툭 잘라서 내버리고 시뻘건 정갱이를 내놓고 다닌다. 뭐, 그것도 류행이라나! 전번에 한 중년녀자가 급병으로 죽었다. 함께 태워서 하늘로 날려보낼 옷견지들을 꺼내놓으니 몇 박스나 되였다. 대부분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새옷들이였다. 천당에 올라가서 몇백년은 몰라도 몇십년쯤은 슈퍼에 갈 필요가 있을것 같지 않았다. 지금은 시민들의 거주조건도 많이 개선되였다. 옛날처럼 대여섯이 한이불을 덮고 자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집집마다 침실, 거실, 서재, 주방, 위생실이 따로따로 있게 되였다. 연길시내를 한바퀴 돌아도 공용변소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였다. 80년대초반이라고 기억되는데 주정부 북쪽켠에 4층 아빠트가 지어져 어느 한 집으로 초대되여 식사한 적이 있었다. 술상을 차려놓고 누군가 마중켠 위생실에 들어가 쏴- 하고 소리를 내며 갈기니 녀자들이 캐득거렸다. 좀 별란감이 들었다. 깨끔치 못하게 집안에서 대소변을 보게 만들다니! 헌데 지금에 와서는 집안에 위생실이 없는 집에 들어가면 오히려 별란감을 느낀다. 개명치 못하게 집안에 위생실도 안 앉혔나! 지금은 새집에 들어 벌써 5, 6년 살고나면 양식이 낡았다고 더 좋은 신식아빠트로 이주해가는 집들이 적지 않다. 공화국 후 30년이 이렇게 발전이 빨랐고 그와 동시에 세계경제도 발전이 아주 빨랐다. 서울에서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또 퇴근해서 서울로 돌아가는 보스가 있다니 정말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지구가 바야흐로 한동네로 되고있다. 죄꼬만 연길시내바닥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네마실 다니듯 서울행차를 하고있다. 발전이 빠르니 자연 그 덕을 백성들이 본다. 아츨한 아빠트가 수풀처럼 일어서고 차흐름이 개울물처럼 도시의 골목길을 메우며 흐른다. 지금 만원쯤은 큰돈이 아니다. 일년에 수십만원, 수백만원씩 버는 사람이 꽤나 된다. 중산층이 일떠서고 부호층이 앞자리를 다투는 단거리시합이 벌어지고있다. 시합에 참가하고보니 숨이 차오른다. 숨이 차도 그 시합에 참가해야 남못지 않게 살수 있는 세월이니깐. 숨이 차도 남에게 뒤떨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니 자연 부르튼 타발이 튕겨나간다. 제밀할것! 인간세상은 원래 좋을수록 불만이 많은 법이다. 그래서 자꾸 더 발전! 발전! 하며 닫는 말에 채찍질을 하게 되는것이다. 금년은 소해이다. 말이란 놈은 그래도 채찍질 하면 빨리 뛰면서도 갈 곳까지는 간다. 헌데 소란 놈은 궁둥이를 쳐서 빨리 달리도록 하면 멀리 못 간다. 필자가 말하고저 하는 중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전쟁보다 그 피해가 더 무섭다는 차사고를 분석해보면 십중팔구는 초속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발전이 빠르면 좋은 점이 많다. 또한 그만큼 나쁜점도 초래하게 된다. 이럴 때에 모주석의 2분법을 다시 외워보면 그 위대함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발전이 너무 빠르면 우선 자원이 고갈된다. 석유, 석탄, 광철… 그다음 자연생태환경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몽골에서 호도거리책임제를 실시하게 되니 양, 말, 소가 대량으로 늘어났다. 개인도 돈을 벌고 가공업도 일떠서고 나라에도 공헌이 컸다. 네 좋고 내 좋고 다 좋은 판이 되였다. 허나 좋은 판국은 언제나 오래 못간다. 먹새좋은 양들에 의해 풀이 없어졌다. 풀이 없는 땅에 바람이 부니 먼지가 일고 모래가 일었다. 새파란 초원이 점차 누런 사막으로 변해갔다. 사막에서 양을 길러낼 뾰족수가 있는가! 아무리 발전이 빠르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모래알만 먹고 자라는 우량종양은 개량해내지 못했다. 그러니 개인도 양을 더 기를수 없게 되고 가공업도 파산되고 나라에서도 황사피해를 입게 되였다. 한시기 세계경제도 급속히 발전했다. 월가의 금융거두들이 피우던 려송연을 한번 툭 털면 사대양 오대주에 그 재가 흩날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경제의 급속한 발전은 주식시장를 흥성케 한다. 앉아서 커피나 차물을 후르륵 후르륵 마시면서도 몇만원, 몇십만원씩 벌수 있었다. 돈이 돈을 버니 너도나도 돈주머니를 안고 달려와서는 여기에다 한줌, 저기에다 한줌, 툭툭, 사처에다 미련없이 처넣는다. 하루아침새에 신사적인 투자인이 되여 슬슬 열매만 따먹는다. 그 피땀으로 바꿔온 거금들이 주식시장으로 사품치며 흘러드니 모든 업계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팽창한다. 대출이 빈번해지고 리식이 올라가는데도 도처에서 자금을 인입하느라고 야단이다. 돈만 주면 할아버지다. 돈이 많이 들어오면 얹혀둘 필요가 없다. 그 돈으로 더 큰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래서 웅대한 계획이 세워지고 사처에서 집을 짓고 기업을 앉힌다. 땅값이 개구리처럼 풀꺽풀꺽 뛰여오르지만 별문제다. 그만큼 집값을 올리고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해내면 되는거다. 하루밤사이에 집값이 한층, 두층씩 올라가니 도무지 하늘끝이 바라보이질 않는다. 전기사닥다리라는 엘레베터를 타고서도 늦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니 거품이 안생기게 되겠는가! 고요한 물에다 자갈을 서너대야씩 한꺼번에 뿌려보시라, 거품이 안생기는가고! 이번에 전 지구촌을 휩쓴 금융위기가 전세계에 다시한번 경종을 울렸다. 오바마가 아메리카합중국의 대통령이 되였다고 국면이 돌려질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반드시 금융헌병대가 조직되여 세계금융기구를 정돈하고 주식시장이 더는 도박판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말아, 좀 천천히 달리려무나…” 저기 저 일망무제한 초원의 끝머리로부터 녀중음가수 마옥도의 웅글진 노래가락이 미풍에 서서히 실려오는것만 같다. 말을 탄 녀석도 인젠 고삐를 늦출 때가 되였고 소를 탄 녀석도 유유하게 피리나 불 때가 되였다. 소란 놈은 원체 엉기적거리며 뜨적뜨적 걷기를 좋아한다. 그 성격에 맞춰줘야 목적지까지 무난하게 갈수 있는것이다. 옛날 로인들도 무정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두고 한탄했었다. 그래서 “백구과극(白驹过隙)”이란 말도 나왔고 일대 거인인 모택동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고 개탄했었다. 세인들은 무슨 뚝이라도 쌓아놓고 세월의 흐름을 막고 무슨 금실이라도 늘여서 세월의 발목을 동여매자고 무등 애를 써왔었다. 필자도 엊그저께 학교를 졸업하고 편집부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선것 같은데 벌써 근 30년 세월이 흘러 60고개를 바라보게 되였다. 후, 어쩌노? 해야 할 일을 절반에 절반도 못해놨는데… 오십고개를 넘어서부터는 시간이 총알처럼 나간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꺼풋하면 하루가 지나간다. 정상적인 사업실무를 내놓고도 저녁술이 떨어지면 최저한 그날 뉴스프로는 들어야겠지, 최저한 련속드라마 한집쯤은 봐야겠지, 최저한 인터넷에 들어가 한고패 “헤염”쳐봐야겠지, 전화를 받고는 최저한 친구생일에 가서 술잔이라도 나누어야겠지, 최저한 천당으로 가시는 분에게 묵도라도 드려야겠지, 최저한 결혼잔치에 부조라도 해야겠지, 최저한 아들딸의 일에 참녜해야겠지, 최저한 손주녀석을 안고 곱다고 해줘야겠지, 잠자리에 들면 최저한 마누라의 허벅다리라도 슬슬 어루만져줘야겠지, 최저한 량쪽 부모님집에 한번쯤은 들려봐야겠지, 최저한 친척나들이쯤은… 숨이 차오른다. 언제면 만사구애없이 남산소나무그늘아래에서 보고싶은 책이나 뒤적이며 세월을 보낼수 있을가! 세월이 사람을 너무 숨가쁘게 만든다. 백년도 못살 인생을 천년만년 살것처럼 뛰고 뛰고 또 뛴다. 국내로도 뛰고 외국으로도 뛴다. 오십이 넘었다면 좀 쉬면서 뛰자! 할 일이 많다 해도 할 일을 다 해놓으면 우리의 후배들이 무얼 하겠는가! 옛날에는 남산에도 범이 둥지를 틀고있었다는데 우리의 로선배들이 다 잡았기에 지금은 우리가 범을 잡자고 해도 범을 찾아볼수가 없게 되지 않았는가! 무슨 일이나 천천히 해서는 랑패가 없다. 중화민족의 한가지 고유한 특점이 “만만디(慢慢地)”가 아닌가! 그 “만만디”가 앞으로 이 지구의 땅떵어리에다 거대한 기적을 이뤄낼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날 너무나도 빨리 흘러가는 세월에 대고 한마디 웨치고싶다. 세월아, 좀 천천히 가려무나!
47    이 세상 남자들아, 서러워 말아! 댓글:  조회:1588  추천:0  2013-07-15
이 세상 남자들아, 서러워 말아! 홍천룡 왜 남자로 태여났을가? 살아나가기 너무나 힘들다. 우리 아버지 힘이 센 탓이였을가, 아니면 우리 어머니의 “터밭”이 기름진 덕이였을가! “고추”동자 낳으셨다고 우리 어머니께서 미역국 몇사발 더 축내셨겠는지요. 바다멱도 사기 힘들었던 그 세월, 그 시골마을에서! 사람의 유전요소 DNA의 가운데서 무슨 X를 딱 하나 뽁 빼버리면 남자가 아닌 녀자가 된다는데… 전번날 무슨 모임이 있어 병풍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어느 한 농촌마을가의 탈곡장에 이르게 되였다. 북데기무지를 에워싸고 닭 한무리가 구구구거리며 북데기를 헤집고 먹이를 쪼아먹고있었다. 암탉 대여섯마리는 몽톡한 몸뚱아리를 달싹이며 부지런히 헤집고 쪼아먹고있었다. 날마다 알을 낳자니 영양보충이 필수적이겠지. 헌데 그 무리에서의 유일한 신사 — 수탉만은 목을 빼들고 휘두룩휘두룩 거드름을 피우고있었다. 뚜걱뚜걱, 이 다리에 저 다리를 껑충거리며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다. 녀석은 눈을 띠룩거리며 주변의 “적정”을 살피기도 하고 “꾹꾹”거리면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과연 북데기 저쪽켠에 닭 한무리가 또 나타나자 웬일인지 거드름을 피우던 수탉이 길건너편으로 걸썽걸썽 달아가는것이였다. 그러자 대여섯마리의 암탉도 먹이를 버리고 그뒤를 쭈클거리며 따라갔다. 그 정경을 바라보며 우리 일행중 누군가 부러움을 참지 못해 개탄을 토했다. “후, 저 수탉이란 놈은 얼마나 행복하겠어. 숱한 아가씨들을 거느리구…” 개탄이 나올만도 했다. 일행중에는 안해를 몇년간 외국에 보내고 “독수공방”하는 남편도 있었고 리혼당하고 혼자사는 “외토리”도 있었고 수염이 꺼츨하도록 장가못든 덜먹총각도 있었다. 녀자에 굶주려온 사내들이였다. 그 옛날, 진시황이 궁녀 3천명을 데리고 살았다니 매일 꽃밭에서 이리저리 뒹굴면서 호강부렸겠지… 아무튼 수천년 내려온 력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흐름이 남자가 녀자의 배를 타고 노를 저어온 력사였다는것이 알린다. 혹간 귀신같은 요녀들이 남자의 등을 타고 자맥질해본적도 있긴 있었다. 허나 그것은 창해일속에 불과했다. 나라를 세운 개국공신들, 진시황, 당태종, 칭키스칸, 누르하치, 모택동 모두 남자였고 영원한 진리를 내놓은 리론교육가들, 공자, 맹자, 장자도 남자였고 고대과학의 4대발명가들도 남자였고 생로병사의 길목을 지켜준 의학가들도 남자였고 불후의 고전명작을 남겨준 문학가들도 남자였다. 집집마다 양몰이를 하고 농사를 짓고 말몰이운수를 하고 장사를 하고 아이들을 깨우치는 훈장노릇, 역시 남자들이 기둥이 되여 해주었던것이다. 눈이 아프게 아득한 그 먼 옛날을 돌이켜보지 말고 가까운 공화국력사가 펼쳐쳐지면서 흘렀던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을 한번 훑어보자. 항미원조 제일선으로 남자들이 달려가 목숨으로 조선을 구해주었고 조국을 지켜냈다. 호조조, 초급사로부터 쭉 인민공사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이 선줄을 끌었었다. 도시에서도 직장으로 다니는 남자들이 한달로임 삼십원, 오십원으로 대여섯씩, 일여덟씩 되는 식구들을 먹여살렸었다. 그래 말바른 대로 남자들이 큰소리 치게 안됐는가! 집에서 별다른 음식이 생겨도 먼저 남편이 되고 아버지로 된 남자의 앞으로 간다. 남자들이 언제 시시하게 구들깔개를 쓸고 장판을 닦는 법이 있었던가! 남 보기가 무안해서도 채소바구니를 못들고 다녔다. 우리 “웅덩개” 마을에는 “조보톨이”라고 혼자 사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채소를 사가지고 마을에 들어서면 보는 사람마다 놀려주군 했다. “저 주제를 좀 보우. 두룽두룽 사들고 다니는 꼴을. 그래도 수캐라구 덜렁덜렁 달구다니겠지.” 부부간이 다 출근하는 쌍직공호에서도 남자들이 부엌간일은 하지 않았었다. 혹간 석탄부에 가서 석탄을 밀차에 실어온다거나 량식공급소에 가서 배급을 타오는 등 힘든 일엔 좀 나서기도 했다. 농촌에서도 역시 그러했다. 부부간이 함께 생산대밭에 나가 콩김을 매고 들어와서도 남자는 담배를 말아물고 휘적휘적 백양나무그늘밑에 가서 이웃집 나그네들과 장기를 두지 않으면 한담에 세계형세를 론한다. 녀자는 밥을 짓고 돼지죽을 끓여먹이고 밀린 빨래나 바느질을 한다. 우리 외가집동네에 박씨라는 나그네가 있었는데 모두들 그를 “둥글소”라고 불렀다. 검실검실한 얼굴에 눈이 부리부리했다. 그림책 “수호전”에서 나오는 리규를 방불케 했다. 기운이 무진장인 그는 겨울철목재부업에 가서는 언제나 특등공수를 받았었다. 일생에 그는 곰같은 아들을 다섯이나 련이어 빵빵 찍어냈다. 동네에서는 모두 그 집을 부러워했다. 남자들이 어깨를 살구고 호기를 부렸던 세월이였고 남자들이 남자노릇을 할수있었던 세월이였다. 그 세월이 지난 세기 80년대까지는 쭉 내리흐른것 같았다. 우리 집 안해가 82년도에 첫 아이를 아들로 낳고 88년도에 두번째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였다.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증세를 종합분석해본 결과 또 아들이겠다는 짐작이 갔다. 우리 집 로모께서 아주 반가워하셨다. 헌데 병원에서 해산한 다음 간호원이 산실로부터 나오며 “그 집은 딸입니다”고 알렸을 때 우리 집 로모께서 강렬한 반응을 보이며 의혹을 금치 못하셨다. “아들이라구 하던데 왜서 딸이우? 거 혹시 바뀌우지나 않았는지…” 간호원이 절대 그럴수 없다고 설명했다. “후— 서운하다. 같은 값이면…” 그 세월에 부대끼여 늙어오시면서 남자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강하게 박혔으면…가히 리해될만한 로모의 심정이였다. 크게는 나라의 정사로부터 작게는 집안의 자질구레한 가사에 이르기까지 전반 사회적인 방향판이 남자들의 손에서 돌아가면서 운행되였던 세월이였다. 남자들에게는 풍요로운 황금가을과 같았던 그 호시절이 차디찬 눈바람속에서가 아니라 훈훈한 봄바람속에서 지나가버리게 되였다. 누군가 “봄바람에 잠자던 여우들이 깨여났다”고 비유했다. 좀 저속적인 비유에 불과하지만 그 어떤 추향을 빗대고 긁어대는 소리였다. 개혁개방이 되면서 출국문이 활짝 열렸다. 녀자들이 보따리를 꿍쳐 이고지고 외국나들이를 하더니만 목돈을 안고 돌아왔다. 한다하는 남자들이 직장에서 몇년간 꾸벅꾸벅 일해도 벌어내지 못했던 목돈을! 90년대 중반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연변통용기기계공장의 웅장한 건물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와그르르 무너져내렸다. 그 먼지가 포연처럼 하늘로 뭉게뭉게 피여올랐다. 수백명 직공들이 자호감에 넘쳐 출근했던 공장이다. 그 무렵에 연길시내의 수많은 공장굴뚝들이 사라져버리면서 연길시는 점차 상업도시, 소비의 거리로 변해갔다. 남자들의 일자리가 적어지고 녀자들의 일자리가 많아졌다. 너도나도 장사에 나선다고 허둥대던 시기도 있었다. 그때는 장사마당을 바다에다 비유했었다. 그래서 “하해(下海)”바람이 불었다. 다같은 장사를 하는데 녀자와 남자가 달랐다. 남자가 하면 본전까지 밀어넣을 때가 많았고 녀자가 하면 본전없이도 돈만 잘 벌었다. 참, 묘했다. 뭐 해석할 도리가 없다. 장사에서는 돈을 버는것이 도리이니까. 그래서 녀자들 손에서 돈이 다슬어빠지게 되였다. 남새장사를 하는 아줌마의 수입이 어느 기관의 처장이나 국장의 월로임보다 더 높을 때가 있게 되였다. 맑스주의 리론에는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하고 경제토대가 상층구조를 결정한다는 진리가 있다. 한 가정내에서도 아마 경제라는 지레대가 결정적인 작용을 노는것만 같다. 남자가 지레대의 이쪽을 꾹 누를 때에는 녀자가 허공에 둥둥 뜨고 녀자가 지레대의 저쪽을 꾹 누를 때에는 남자가 허공에 둥둥 뜨게 된다. 녀자들 손에 돈깨나 쥐여지니 집안이 요란스럽고 사회교제가 요란스러워졌다. “동무, 구들도 닦지 않고 뭘했슴꺄? 온하루 목이 빠지게 사구려를 불렀는데 또 집에 와서 구들까지 닦아야 함꺄?” 낮에 어쩌다가 친구를 만나 어정쩡하게 보냈더니 저녁에는 안해의 “빗깡대질”에 찍소리 못하고 볼기짝을 내맡겨야 하는 남편! “또 돈? 없어요. 하루건너씩 생일이요 모임이요 하며 군스럽게 구네. ” (이거야말로 그저 어쩌라니!)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이 소리없이 운다. 허나, 할수없는 일! 그 손바닥만한 얼굴에 체면을 세우려면 빈손으로는 갈수 없다. 그래서 “여보!” 하고 안나가는 웃음을 낯에다 흙탕물 바르듯 하는 남편! 비굴해지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다. 이런것쯤은 웬만하면 다 참을수 있다. 남자이니까! 남자의 속이 얼마나 넓은지 녀자들 한번 그안에 들어가 뽀트놀이나 해보시라! 더욱 참기 어려운것! 처가집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 정성을 몰부었는데, 자기부모님께 그만큼 해드렸으면 나라임금님도 감동되여 진작 “효자동”감사패를 하사했을터인데, 열가지를 잘하고 딱 한가지 일에 된살(살코기)쪽으로 사가야 할것을 흰살(비게)쪽으로 사갔다고 비양거리는 소리! “당신도 남잡니꺄! 시시하게스리.” 남자의 자존심을 밑뿌리채로 뽑아버리고 칼질한다. 남편을 통해 자기 동생을 어디로 전근시켜달라고 부탁했던 일이 소기했던대로 되지 않아도 앙탈이다. “동무도 남자입니까! 고만한 일도 못하는 주제에.” 설밑에 남편보고 무얼 어떤걸로 사달라고 했는데 그만 그 남편이 호주머니사정이 딱해서 다른걸로 바꿔 사게 되여도 고양이 락태상이 된다. “자기야, 남자야! 째째하게스리.” 남자란? 남자란 무엇이냐?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것이 오늘날 남자냐? 죽으라고 해도 꺼저버리라고 해도 참기만 하는것이 이 세상 남자냐! 곡괭이 휘둘러 밥벌이 하고 주먹을 내둘러 시비를 가르고 피를 휘뿌려 강산을 지키던 영웅시대는 지나갔다. 소나기뒤끝의 잠풍한 날씨에는 개굴개굴 개구리소리만 요란하다. 털갈기를 휘날리며 포효하는 사자의 울부짖음도, 무거운 멍에를 지고 허연 입김을 내뿜는 황소의 영각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무송이 되여보고 싶어도 범이 다 달아났다. 지금은 사람이 범을 피하는것이 아니라 범이 사람을 피한다. 관운장이 되여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적진을 무찌르고 싶지만 적토마가 달릴만한 전쟁터가 없다. 수풀처럼 일어난 층집때문에! 남자들은 천성적으로 충격적인것이 본능이다. 대부분 영웅이 되고싶은 생각을 가지고있을것이다. 허나, 영웅도 미인관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 오늘에 와서 진정 효험을 보는것 같다. 남자들의 영웅기개를 떨칠수 있는 적토마가 달릴수 있었던 전쟁터가 없어지니 고요한 화원속의 꽃송이들이 송이송이 피여나 그 어여쁜 자태를 뽐내고있다. 어쩌다가 간혹 고급술집에서 한병에 수백원씩 하는 모태주나 오량액술을 한두잔 마셔보고는 유한 그 맛에 감취되여 감탄을 금치 못하는 우리 남자들이다. 그대들, 품위있는 녀자들의 화장실을 엿본적이 있는가? 목이 길고짜른 화장용크림병이 여라문개씩 갖춰져있다. 한병에 역시 수백원내지 수천원씩 한다. 그걸 아침저녁으로 치고 바르고 문대고 닦고 한다. 보지 않았으니 눈이 까집혀지진 않겠지만. 고급옷매장에 가보시라. 한벌에 수만원씩 하는 밍크외투를 눈 한번 깜빡 하지 않고 사간다. 그것도 마음에 드는것이 없다고 시뚝해서 입을 삐쭉거리면서! 한 여름철, 연길시내 거리바닥에 웬 고급승용차가 이렇게 많아졌는가고 살펴보다가도 눈이 데꾼해질 때가 있다. 앙골라 양머리처럼 굽실굽실 파도치는 금발머리를 휘날리는 미녀들이 차를 몰고있지 않는가! 그것도 시커먼 선글라스를 끼고말이다. 이거 촌놈이 맨하탄거리에 잘못 들어서서 헤매고있지나 않는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한번은 한 부동산개발회사로 일보러 간적이 있었다. 두루미같이 끼끗한 남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리사장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저으기 놀랐다. 주당위 서기사무실이나 주정부 주장사무실보다 얼마 더 엄엄하고 호화스러웠다. 그보다 더 놀란것은 컴퓨터뒤로부터 서서히 쳐드는 얼굴이였다. 곱게 화장한 새파란 아가씨의 부용홍안이였다. 요렇게 젊고 고운 아가씨가 이 사무실주인이라고 하니 어쩐지 주눅이 들어 엉거주춤 자리에 앉아도 속이 편안치 못했다. 헌데 외모와는 달리 녀리사장의 관찰력과 분석력이 뛰여났고 종합판단능력이 대단했고 일처리가 과단했다. 지도자로서의 성숙과 로련함을 남김없이 과시했다. “강비서, 이 분이 이번 행사에 우리와 합작하실분이예요. 외출할 일이 있으니 차를 대기시키세요. 그리고 저를 대신해서 이분을 접대하세요. ” 그녀의 지시를 받은 강비서의 접대가 얼뜰하지 않았다. 탄복하지 않을래야 탄복하지 않을수 없다. 경제령역 뿐만 아니라 기타 당정기관, 과학, 군사, 체육 등 모든 령역에서 중견작용을 놀고있는 녀성이 많아지고있다. 사회지성인으로 자라고있는 녀성들이 늘어나고있다. 녀류시인, 녀류화가, 가수, 탤런트… 중국체육계에서는 “음성양쇄(阴盛阳衰)”라는 말이 돌고있다. 녀자축구, 녀자배구는 세계의 앞자리를 다투고있으나 남자축구, 남자배구는 늘 꼬라지수준에서 맴돌고있다. 무슨 사물이나 가장 리상적인 상태는 균형을 잡는것이다. 문제는 그 균형을 잡기 힘들다는 점이다. 사람의 인체내에서도 음양균형이 파괴되면서 모든 질병이 산생된다고 한다. 우리가 병이 나면 약을 먹고 수술을 하고 휴식도 하고 운동단련도 하는것은 역시 그 균형을 되찾기 위해서이다. 까마아득했던 그 먼 옛날, 원시적인 모씨사회가 해체되면서부터 사회적인 성관계는 계속 한쪽으로 기울어져왔었다. 수천년간 녀자가 남자의 지배를 받아왔었고 그것을 하늘이 점 찍어준 운명으로 간주해왔었다. 그 운명으로 녀자는 세세대대 내려오면서 씨를 받고 종자를 염글어내는 “터밭”에 불과했고 남자들의 놀이개감으로 전락되여왔고 가무를 돌보는 보모역을 놀아왔었다. 자유와 평등이 없었다. 그 자유와 평등을 위해 수많은 개명지사들과 녀류활동가들이 녀성해방의 길을 모색하고 더듬어왔었다. 지어 자기의 몸을 바쳐가면서! 허나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그것이 잘 실현되지 못하고있다. 남녀평등이란 진보적인 사람들의 주관적인 념원이다. 진정 그것을 실현시키자면 객관적조건이 따라가야 한다. 즉 경제가 고도로 발전되고 사회가 고도로 문명개화되여야 한다. 농경시대에서는 부녀들에게 해방의 길을 열어줄래야 줄수가 없었다. 오늘날 녀자들이 좀 기를 펴고 남자들과 어깨겨룸하면서 제할 노릇들을 할수 있게 된것도 우리의 경제가 그만큼 발전했고 문명이 그만큼 개화되였고 사회가 그만큼 진보하였기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남자들의 자존심을 꺾어놓았고 우리 남자들의 속을 상하게 하였고 우리 남자들을 섧게 만들고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리혼률이 늘어나고 가정이 흩어지고 무직업자가 늘어난다. 녀자의 발길에 채운 남자들 슬프고 분하다. 녀자를 멀리 보낸 남자들 녀자의 품이 그립고 사랑에 목마른다. 슬프고 분하다고 고독하고 그립다고 가슴만 치며 한탄만 할가. 술로 분을 삭이고 담배로 고독을 태워버릴가! 주눅이 들고 고민에 빠지면 정신상태가 돌아지기 마련이다. 정신상태에 탈이 생기면 인체내의 질병요소들을 공제하고있던 제동기가 스스로 풀려진다. 내리막길에서 제동기가 풀려지면 차가 어떻게 될가! 가뜩이나 짧은 우리 남자들의 수명을 우리 자신이 더 잡아끌고있다. 그래서 동구밖의 페교가 된지 오랜 학교마당에 나가 비술나무에 달아맨 종이나 치고싶다. 뗑! 뗑! “친구들, 상학종이 울렸습니다. 오늘은 특별생리시간이여서 남학생들만 들어오십시요!” 그리고는 이렇게 강연하고싶다. 남자들아, 왜 이 세상에 남자로 태여났느냐? 남자로 태여난바엔 좀 남자답게 살아보자! 우선 곁에 안해가 없는 남자라면 래일 옷매장에 가서 옷부터 사라. 자기의 체격과 년령에 알맞고 남보기에 시원해보이거나 깔끔해보이는 옷을 골라라. 남자의 자신심을 세우고 키우는데는 세가지가 있다. 즉 좋은 안해, 좋은 가정, 좋은 옷이다. 지금 안해가 없으니 좋은 가정이 있을수 없다. 허나, 좋은 옷은 돈을 주고 살수 있다. 돈이 없으면 꿔서라도 사라. 그리고 자신심부터 세우라. 그다음 녀자의 눈에 나서 녀자의 발길에 채울 위험이 있는 남자라면 래일부터 녀자의 비위를 발라맞추느라 애를 쓰지 말라. 비위를 맞춰주느라고 하면 점점 더 업수임을 당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녀자를 잃고만다. 자기의 개성을 내세우고 자기의 매력을 살려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외고집만 내세우라는 말은 아니다. 여기에 유모아적인 예술이 수요된다. 그리고 남자라면 자기의 흥취와 애호에 따라 한두가지 기능을 닦아야 한다. 례를 들면 장기에 흥취가 있는 사람이 장기를 귀신같이 놀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할노릇이 없어 심심풀이로 당구를 치던 친구가 있었는데 후에는 프로급이 되여 어느 한 시합에서 상을 타게 되였고 녀자들이 안겨주는 꽃묶음을 받게 되였고 인생길을 완전히 바꾸게 되였다. 애호에 따르는 노릇이라면 자그마한 진보에 자그마한 칭찬에도 심정이 한없이 즐거워진다. 심정이 즐거워지면 녀자에 대한 한도 풀리고 세월에 대한 원망도 풀린다. 또 그리고 남자라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안해나 자식에 대한 책임감에 앞서 자신에 대한 책임감부터 있어야 한다. 일자리도 없고 돈도 없고 먼지만 툭 털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털이인데 무엇으로 어떻게 책임진단 말인가? 일자리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에게 제일 흔한 것은 시간이고 거기에 따르는 고독이다. 시간을 밑천으로 삼으면 세상에 못해낼 일이 없다. 흔한 시간을 푼푼히 투자해서 자질양성비로 쓰고 항목개발에도 써보노라면 큰일이 벌어지고 대박이 터질 때가 있게 된다. 그것이 5년후이든 10년후이든 20년후이든… 시간을 길게 잡을수록 대박이 더 크게 터질것이다. 래일 당장 안해가 리혼하겠다고 납뜨든, 래일 당장 녀자의 발길에 채우게 되든, 시간만은 놓치지 말고 틀어쥐면서 진정 자기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밖에 나간 강아지도 시간이 지나면 배고파서 돌아오는 법이다. 가령 더 큰 비게덩어리에 반해 주인을 배반하고 달아나는 강아지라면 다시 부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강아지는 일반적으로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녀자들도 일반적으로 첫사랑, 첫 감정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대가 진정 남자라는것을 알아봤을 때에는 돌아서지 말라고 해도 돌아선다. 이상 “약처방”을 떼놓았으니 누구든 써보고 싶으면 써보시라. 약은 써야 약이 된다. 섧다고 울면 녀자들의 동정을 살수 있는가? 섧다고 술만 마시면 녀자들이 술을 사오는가? 동정으로 마음을 끄는 시대는 지나갔다. 녀자도 남자의 앞에서만이 값이 간다. 이 세상 남자들아, 우리 좀 즐겁게 살자. 우리의 즐거움으로 비싸지는 녀자들의 즐거움을 사오자!
46    “설산”고개를 넘으면서 부른 노래 댓글:  조회:1429  추천:0  2013-07-12
•생활•예술•천당• “설산”고개를 넘으면서 부른 노래 홍천룡 지난 세기 70년도 겨울이라고 기억되는데 우리 “연길시 3중학교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서는 농촌순회공연을 나가게 되였다. 홍군의 2만5천리장정정신을 따라배운다고 도보로 돌아다녔다. 하루에 이삼십리씩 걷고는 저녁이면 절목을 공연했다. 대부분 우사칸마당에서 로천무대를 리용했고 조건이 괜찮은 고장이면 학교구락부같은데서 공연했다. 전기가 없는 고장이면 뜨락또르헤드라이트를 켜놓고 공연했고 뜨락또르도 없는 고장이면 아예 헝겊뭉치에 디젤유를 쳐서 불을 단다음 홰불처럼 사처에다 피워놓고 우등불공연을 했던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격정적이고 랑만적인 분위기를 돋궈주기도 했다 .당시 우리 선전대는 모든것이 군사화였고 전투화였다. 기률성이 강했고 규칙이 엄격했다. 농촌의 로천무대였지만 제대로 무대화장을 하고 나섰고 복장이나 공연도구도 제대로 다 갖춘다음에야 나서게 했다. 한번은 한 녀대원이 날씨가 춥다고 까만 장갑을 끼고 무대에 나섰다. 그랬다고 그날 밤, 하루총화에서 호된 비평을 받았었다. 자산계급아가씨들의 생활작풍을 무대에 옮겨놓았다는것이다. 요즘 중앙TV에서 녀가수가 까아만 그물식 장갑을, 그것도 장갑목이 팔굽까지 올라가고 끝머리에다는 파도식레스까지 달린 장갑을 끼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때 생각을 하며 허구푼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지금은 생활이 소부르죠아적수준에 이른 것 같다. 추구하는 예술적소양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날 눈물을 똑똑 떨구며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그 녀대원의 모습에 우리는 측은해나는 감을 금치 못해 눈을 감아버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인심이란 후했다. 우리가 간다고 찰떡을 치고 두부를 앗고 지어 어떤 곳에서는 돼지를 잡아엎기도 했다.(당시 돼지 한마리를 잡자면 소대, 대대, 공사의 비준을 받아야 했음.) 구경군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어떤 고장에서는 집체로 손잡이뜨락또르를 타고 몇십리밖에서 달려오기도 했었다. 그 열정에 우리도 온하루 “장정”한 피곤을 싹 잊고 만강의 열정으로 공연했던것이다. 도끼봉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석산촌으로 갈 때였다. 당시 석산촌에는 전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전철수동지가 대대당지부 부서기 겸 민병련장책임을 맡고있었다. 그날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었다. 한 시오리쯤 눈길을 헤치고 가고나니 대원들은 저마다 기진맥진해졌다. 눈은 그치지 않았는데 바람이 일면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금방까지 낯이 빨개지면서 땀 흘리며 왔는데 조금 모여앉아 쉬게 되니 인차 낯이 파래지면서 추워져 몸을 오돌오돌 떨게 되였다. 다시 일어나서 걷자니 다리가 천근무게나 되는상 싶었다. 대원들은 저마다 자기의 공연도구들을 지고메고 떠났다. 그 짐이 적지 않았다. 특히 손풍금이나 튜바, 북과 같은 악기들은 체적이 컸을 뿐만 아니라 무게도 꽤나 무거웠다. 비록 서로 엇바꿔가면서 메주고 들어주었지만… 앞에는 높다란 산마루가 아츨하게 가로 놓여있었다. 그 고개를 넘어야 석산촌에 이를수 있었다. 대지의 모든것이 눈속에 파묻혀 주위는 하얀 면사포에 감겼고 눈보라에 그 면사포가 파르르 떨고있었다. 눈보라에 길도 알리지 않았다. 올리막에 들어서면서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어떤 대원들은 벌벌 기기도 했다. 산중턱까지도 올라가지 못했는데 어떤 녀대원들은 아예 퍼더버리고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난감한 일이였다. 뒤이여 대여섯명 되는 녀대원들이 련이어 덩달아 퍼더버리고 앉아 울어댔다. 아직은 열대여섯살밖에 안먹은 나긋나긋한 소녀들이였으니깐. 그 녀대원들앞에 남대원들이 모여들었다. 한명씩 업고 올라갈수만 있다면… 할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니 부득불 돌아갈수 밖에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인지 녀대원들의 울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헌데 돌아간다는것도 막연한 일이였다. 절반도 더 걸어왔는데 돌아가자면 또 반나절이나 걸리게 된다. 지도교원과 대장이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애타게 서성거렸다. 어떤 대원들은 배고프다고 눈을 움켜쥐고 서걱서걱 씹어 먹기도 했다. 눈보라가 휙 몰아치자 모두들 몸을 오싹 떨었다. 더는 지체할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가고 돌아 안가면 계속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퍼더버리고 앉아 울고있는 녀대원들은 어떻게 하고?… 그때 뒤켠에 선 누군가 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정”이란 노래를 흥얼거렸다.아마도 추워서 견딜수 없으니 저절로 나간 노래같았다. “홍군은 원정의 곤난을 두려워하지 않네 만수천산을 한가로이 넘어가네……” (红军不怕远征难,万水千山只等闲…) 인차 두세 사람이 따라 불렀다. 가락이 리듬에 맞춰지면서 모든 남대원들이 따라 불렀다. 노래소리가 점차 격앙되면서 우리의 가슴이 끓어번지기 시작하였다. 대장이 앞으로 썩 나서며 두팔을 힘차게 휘둘며 지휘했다. 노래소리는 눈보라를 타고 산골짜기에로 메아리쳐갔다.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기운이 막 솟구쳤다. 대장이 먼저 눈우에 퍼더버리고 앉아 울고있는 가장 나어린 녀대원한테로 달려가서 짐을 몽땅 벗겨 자기가 짊어지고 한쪽 팔을 그 녀대원의 팔짱에 끼워넣고 부축해서 일쿼세웠다. 우리들도 저마다 달려가서 눈우에 퍼더버리고 앉은 녀대원들의 짐을 빼앗아메고 그녀들을 부축해서 일쿼세웠다. 노래소리는 멎지 않았다. 더욱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우리는 다시 산마루를 향해 올리 톱기 시작했다. 이어 노래는 모주석의 어록에 곡을 단 “결심을 내리고 희생을 두려워 하지 말며 만난을 물리치자”로 바뀌였다.우리는 사기가 충전해져 숨가쁜 줄도 몰랐다. 설산을 넘는 홍군전사가 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누가 미끌어 넘어지면 서로 달려가 부축했고 누가 무얼 떨구면 그걸 주어가지고 자기가 걸머메군 했다. 어록노래가 끝날무렵에 녀자들의 합창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 전진! 전사의 책임 중하고 부녀의 원한 깊다네… 우리 랑자군들도 총을 메고…” 랑랑한 그 노래소리가 우리 남대원들을 더욱 흥분케 했다. 랑자군을 거느린 “당대표”가 된 기분이였다. 그제날 적진을 무찌르는 홍군전사가 영웅이였다면 오늘날에는 내가 영웅이 아닐소냐! 마치도 눈보라속에서 눈길을 헤치며 령을 톺아오르느라고 곤난을 겪고있는것이 아니라 천당에서 꽃보라속에서 행복에 겨워 흥분에 들떠 춤추고 노래부르고있는것만 같았다. 지금 와서 전반 중학교시절을 돌이켜보아도 그 시각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각은 없었던것 같다. 나중에 우리는 남자가 녀자의 손을, 녀자가 남자의 손을, 서로서로 손에 손잡고 노래를 부르며 령마루로 톺아올랐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지금 그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역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내리막길에서는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미끄럼질 치며 궁둥방아를 찧으며 즐거운 웃음소리를 반공중에 흩날리며 내려왔다. 얼마나 즐겁고 유쾌했던지! 꿈만 같은 시각이였다. 천당에 가서도 이처럼 생생한 쾌락을 맛볼수 있을가! 석산촌우사칸 회의실구들에 저마다 걸레처럼 축 늘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배가 못견디게 고파났고 얼었던 발이 녹아나면서 아려나는 고통을 느꼈다. 그때에야 인간세상이 천당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천당에는 극락세계만 있다지만 인간세상에는 천당같은 극락세계도 있고 지옥같은 고통세계도 있는것이다. 고통을 겪어봐야 락을 진정 알게 된다. 극락이 있으면 극통이 있게 되고 극통이 있으면 극락이 있게 되는 법이다. 예술의 매력이란 극락과 극통을 전형적으로 가공하고 반영하는데 있다. 오늘날 나는 우리의 사회가 나날이 발전하고있을 때, 우리의 생활도 점차 예술화되였으면 얼마나 좋을가고 천진한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그러면 천당에 갈 필요가 없게 된다. 예술화된 우리의 생활자체가 천당이니깐!
45    생활 · 예술 · 천당 댓글:  조회:1456  추천:0  2013-07-11
홍천룡 상전벽해라 나도 어느덧 손주녀석을 안게 된 할아버지가 되였다. 톡 치면 깨여질듯한 말쑥한 유리살결에 깜장 포도알처럼 또릿거리는 눈을 가진 손주녀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한장의 예술사진 같다. 아직은 엄마와 엄마의 젖밖에 모르는 아이를 놓고 벌써 곁에서 아이의 먼 장래를 위해 “날개”를 달아준다. 인기많은 예술가로 되겠냐, 돈많은 기업가로 되겠냐, 아니면 학식깊은 학자로 되겠냐고. 텔레비에서 아름다운 선률이 흘러나오면 아이가 그쪽으로 귀를 벌쭉거린다. 그러면 또 새로운 “발견”이 생긴다. 봐라, 예술세포가 있는 아이가 아무데가 달라도 다르다. 생일상에서 아이가 복판에 있는 빨간 사과에 눈독 들여 왼손을 내밀자고 오른손으로 상을 짚었는데 그 손에 백원짜리 지페가 집히게 되였다. 봐라, 돈복이 있는 아이가 다르긴 다르지. 이다음 틀림없는 갑부야. 아이가 방안에서 벌벌 기여다니다가 아빠가 떨군 볼펜을 주어들고 아무데나 대고 긁적거린다. 봐라, 학문을 닦을 아이는 벌써 아이때부터 알린다. 필을 쥔 모양부터 다르거든… 나는 예술에 대해 잘 모른다. 어려서부터 예술의 감화를 받으며 심신을 도야시키지 못하고 자랐다. 내가 자라던 동네는 백여호나 되는 큰마을이였지만 라지오가 있는 집이 두세집밖에 없었으니까 정규적인 음악소리를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었다.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들을수 있는 리듬적인 곡조래야 동구밖 개울가와 논밭으로부터 울려오는 개구리들의 대합창이였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자갈사태가 쏟아지듯 요란했고 방문을 꾹 닫으면 자장가인양 요요하게 귀전에서 멀리 메아리친다. 그 자장가속에서 도야지나 강아지와 뒹구는 목동적인 꿈나라로 들어가군 했다. 어느 날, 복순이네 집앞을 지나다가 그 집의 라지오에서 우렁차게 울려나오는 “사회주의 좋다”란 노래소리를 듣게 되였다. 얼마나 박력있고 경쾌한 선률이였던가! 나는 그집장재(널판지로 세운 울바자)에 매달려 넋을 잃고 들었다. 빨래를 널고있던 복순의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놀랍게 악청을 뽑았다. “요놈, 뭘 도적질하자구 눈이 빨개 거기 매달려있느냐? 냉큼 물러가지 못해! ” 얼마나 아쉬웠던지! 헌데 이웃집 선희누나가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있었다. 나는 감자“까마치”(누룽지)를 주면서 그 누나한테서 그 노래를 배워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노래를 가사 한마다 틀리지 않고 부를수 있게 된것이다. 당시 우리 조무래기들이 다룰수 있는 악기라고는 버들피리따위였다. 봄에 물이 잘 오른 버들가지를 꺾어가지고 손칼로 손가락만큼 잘라서 속대를 쏙 뽑아낸다음 중간쯤에 구멍을 뚫고 입술에 물고 낯이 지지벌게 나도록 불면 비단폭이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것도 짧게 한것과 길게 한것이 소리가 다른데 길게 하자면 속대를 뽑아내기 곤난해진다. 잘못 뽑아 바늘귀만한 구멍이라도 생기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별로 듣기좋은 소리는 아니였지만 그걸 해서 불면 그래도 아이들이 좋다고 모여든다. 그것이 소리의 매력이였을가!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고 기억되는데 동네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 복순이네 큰오빠인 광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그를 “풍각쟁이”, 혹은 “빠이롱쟁이”라고 불렀다. 지금에 와서 기억을 더듬어봐도 온동네 치고 그마큼 훤칠하고 멋있게 생긴 사람은 없었던것 같다. 한번은 우사칸마당에서 무슨 경축대회가 열려서 동네의 남녀로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북장단에 새납소리가 요란한 가운데서 할아버지들이 퉁소를 불고 아줌마들이 꼬리치마를 펄럭이며 너울너울 돌아갔다. 나중에 그 “풍각쟁”광이가 구경군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중간에 나섰다. 점잖게 말 몇마디 하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던지는 모르겠으나 그 목청이 둥글소의 영각소리처럼 웅글졌고 입을 어찌나 크게 벌렸던지 저 입이 귀밑으로 올리 짜개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앞섰던 기억이 난다. 그처럼 멋있던 “풍각쟁이”가 이웃집 강철네 훗어미와 함께 뒤산 수수밭에서 서로 끌어안고 죽었다는것이다. 그 수수밭으로는 우리 조무래기들이 늘 “깜부지”(꺼먼 수수벌레통)를 따먹으러 다녔던 곳이다. 얼굴이 하얗고 갸름하게 생긴 강철네 훗어미를 마을에서는 “멋따개”라고 불렀다. 심양이라는 고장에서 한 문공단에 다니며 춤을 유명하게 췄다는데 무슨 어떠어떠한 문제로 쫓겨나서 여기로 오게 되였고 강철네 훗어미로 되였다는것이다. 멀쩡한 총각이 유부녀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그당시 사람들로는 아무리 어떻게 생각해봐도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당시 “웅덩개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줄집에서 살았는데 우리 앞줄에 소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림선생님이 계셨다. 림선생님은 그들 둘의 죽음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둘이 마음껏 살수 없으니까 극락세계나 찾아보자고 천당에 올라간거지.” 마을에서 글깨나 깨쳐본다는 사람들은 림선생님의 말씀에 수긍했고 매일 집안먹거리때문에 부지런히 뛰여다니는 사람들은 미친 년놈들이 마을 풍기를 더럽히고 동네망신만 시켰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굿거리에 놀아났던 할망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천당은 매일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즐길수 있는 극락세계라고 한다. 인간세상에서는 먹고 입고 살기 위해서 고달프게 일해야 하고 고달프니 병이 생기고 병이 생기니 죽음이 있게 되고 죽음이 있게되니 비통하고 비통하니 일하고싶지 않게 된다. 일하지 말고 잘먹고 잘살자니 남을 얼리고닥치고 남과 싸워야 했고 싸움이 있으니 쫓겨나고 피를 흘리고 또 죽음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인간세상에서 살자면 번한 날이 없게 된다는것이다. 번한 날이 없는데 언제 노래부르고 춤추며 흥얼거릴 겨를이 있겠는가! 사람은 즐거워야 노래를 부르게 되고 춤을 추게 된다고 한다. 또한 노래 부르고 춤을 추게 되면 자연 심정이 즐거워진다고 한다. 그 도리를 나는 “사회주의 좋다”라는 노래를 배우면서 깨우쳤던것이다. 곁에 “까마치”친구들이 없어 심심할 때면 그 노래를 혼자서 흥얼거려본다. 그러면 인차 신바람이 나서 가만있지를 못한다. 흥이 나면 그 선률에 맞춰 “깔락뜀”을 뛰기도 했다. 확실히 노래와 춤에는 이런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풍각쟁”광이와 “춤추개” 강철네 훗어미는 이런 매력에 끌려 매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려고 했던것이 그렇게 되지 못하니 “천당”으로 올라갔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세상에서는 왜 매일 고달프게 일만 하게 되고 “천당”에서처럼 매일 노래부르고 춤추며 즐길수 없느냐는것이다. 미신깨나 믿는다는 할망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천당”에는 농사질 같은 고달픈 일이 없다는것이다. 자연적으로 자라는 “천도복숭아” 한알을 따먹어도 몇백년쯤은 살수 있다니깐. 그러니 “천당”에는 고달픈 일들이 없고 병도 없고 얼리고닥치고 하며 싸울 필요도 없다는것이다. 그윽하고 안온하니 심정이 즐거울수 밖에 없고 즐거우니 매일 노래 부르고 춤출수 밖에 없고 노래 부르고 춤추니 자연 더 즐거워질수 밖에 없다는것이다. 그후 나는 공원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많은 노래를 배웠다. 글도 배우고 노래도 배우니 학교가 “천당”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학교를 지각할세라 부지런히 잘 다녔다. 당시 공원소학교 북쪽에는 지금처럼 넓은 공원로가 동으로부터 서쪽으로 쭉 올리 뻗었는데 비포장도로여서 혹간 화물차가 지나가면 누런 모래먼지가 일군 했었다. 그 길 북쪽에는 요란스러운 목재가공소가 있었다. 가공소울안에는 한아름씩 되는 원시적인 통나무가 군데군데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가공소내에는 그 통나무를 부리우고 쌓고 다시 허물어서 가공소직장안으로 메여나르는 목도군이 이삼십명 있었다. 한여름, 그들은 런닝그바람에 통나무를 날랐는데 고동색근육이 불끈불끈 살아나서 육색이 좋았었다. 통나무를 메여나르는 작업은 대개 이러했다. 두가닥짜리 큰 쇠갈구리를 통나무에 걸고 갈구리웃쪽 구멍에 멜대를 꽂은다음 좌우에서 그 멜대를 어깨에 메고 통일지휘에 따라 함께 일어서고 함께 발을 떼고 나가야 했다. 그들은 둘둘씩 짝을 맞추고 통나무의 크기에 따라 여섯, 여덟, 혹은 열명씩 한팀이 되여 통나무 한대를 메여날랐다. 통나무가 많이 들어올 때에는 가공소울안면적이 제한되여있었으므로 높이 쌓아야 했다. 기중기가 없는 세월이라 그 육중한 통나무를 몽땅 목도군들이 인력으로 한대한대 올리 쌓아야 했다. 목도군들은 두껍고 긴 널판자를 둬어메터가량 사이를 두고 두줄로 꼭대기까지 편다음 그걸 딛고 통나무를 메여올린다. 만약 열 사람이 통나무 한대를 메여올린다면 열사람의 보조가 일치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큰사고를 빚어낼수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반급대렬행진할 때면 반장의 “하나, 둘, 셋…” 하는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군 했었다. 하지만 목도군아저씨들은 그처럼 위험하고 긴장한 작업을 하면서도 딱딱한 구령소리로 보조를 맞추는것이 아니라 아주 구성지고 고저강약리듬이 완연한 선소리먹임으로 보조를 맞췄던것이다. 열명중 한사람이 선소리를 치면 기타 사람들이 후렴식으로 따라 부르면서 발을 맞춰 목도를 메였던것이다. 그 장면은 그야말로 예술의 종합적인 표현형태였다. 청아하게 울리는 선소리군의 목소리, 그에 따르는 웅글진 목도그루빠의 후렴소리, 한뼘의 오차도 없이 기계처럼 절주있게 움직이는 열사람의 스무개 다리, 해빛에 반사되여 뾰족뾰족 돋아나는 등곬의 땀방울, 지렁이처럼 불끈거리는 이마의 피줄들… 선소리군들이 먹이는 선소리에는 고정된 내용이 없었다. 무엇을 보거나 무엇이 생각나면 즉흥적으로 말을 꾸며 불렀는데 호언장담도 있었고 패설육담도 있었고 고달픈 하소연도 있었다. 지나가는 고운 녀자를 보고 희롱질 치는 선소리도 있었다. 무더운 날, 듣기싫은 선생님의 강의에 잠기가 꺼풋꺼풋 습격해서 흐리마리해질 때면 목재가공소로부터 울려오는 선소리가 자장가인양 교실안을 흔들어놓는다. 그 선소리가 어떤 때에는 경쾌하게 들리고 어떤 때에는 비장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목재가공소안에서 큰사고가 일어났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통나무무지가 무너져내리면서 사람이 깔려죽었다는것이다. 목재가공소로 인파가 골물처럼 밀려들었다. 마침 하학시간이라 우리들도 책가방을 둘러메고 사람들속에 끼여들어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홀연, 인파가 량쪽으로 쫙 갈라지더니 등뒤에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왔고 그 뒤로 일여덟살 되여보이는 남자애가 눈물범벅이 되여 아버지를 부르며 따라왔다. 여기저기에서 동정에 어린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이구, 저 불쌍한것들을 남겨놓구 가다니!” “그래두 죽은게 불쌍합지비.” “고달픈 일을 고달프게 하다가 끝내 천당으로 갔구만.” … … “천당?” 나는 할망구들이 말한 적이 있는 그 극락세계를 떠올렸다. “천당”으로 간다면야 왜 아기업은 저 어머니가 저렇게 울며불며 통곡하고있을가! 나는 나의 일생에서 공연예술과는 인연이 없을것으로 추정했는데 “문화대혁명”이라는 력사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중학교에 올라가 학교의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 들게 되였던것이다. 지금에 와서 나도 일찍 학교문예선전대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활약했다고 하면 누구도 곧이 듣지를 않는다. “당신이? 좀 작작 불라구.” “보기와는 다르구만. 어디한번 좀 표현해보지. 확실하게!” 생활가운데서 우리는 늘 이런 현상을 보게 된다. 예술적인것이 아닌 것 같은데 예술품인것이 있고 예술품인것 같은데 예술이 아닌것이 있다. 무엇이나 결핍했던 그 세월에 우리의 공연절목은 대개 우렁찬 혁명가곡에 주먹을 내흔들며 대렬을 바꾸는것이 많았다. 예술절목이라기보다는 률동적인 집단체조표현에 더 가까운것이였다. 그런데도 많은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고 지어 외국손님을 모셔놓고 공연하기도 했었다. 70년도 겨울이라고 기억되는데 우리는 농촌순회공연을 나가게 되였다. 홍군의 2만5천리장정정신을 따라배운다고 도보로 돌아다녔다. 하루에 이삼십리씩 걷고는 저녁이면 절목을 공연했다. 대부분 우사칸마당에서 로천무대를 리용했고 조건이 괜찮은 고장이면 학교구락부같은데서 공연했다. 전기가 없는 고장이면 뜨락또르헤드라이트를 켜놓고 공연했고 뜨락또르도 없는 고장이면 아예 헝겊뭉치에 디젤유를 쳐서 불을 단다음 홰불처럼 사처에다 피워놓고 우등불공연을 했던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격정적이고 랑만적인 분위기를 돋궈주기도 했다 .당시 우리 선전대는 모든것이 군사화였고 전투화였다. 농촌의 로천무대였지만 제대로 무대화장을 하고 나섰고 복장이나 공연도구도 제대로 다 갖춘다음에야 나서게 했다. 한번은 한 녀대원이 날씨가 춥다고 까만 장갑을 끼고 무대에 나섰다. 그랬다고 그날 밤, 총화에서 호된 비평을 받았었다. 자산계급아가씨들의 생활작풍을 무대에 옮겨놓았다는것이다. 눈물을 똑똑 떨구며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그 녀대원의 모습에 우리는 측은해나는 감을 금치 못해 눈을 감아버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인심이란 후했다. 우리가 간다고 찰떡을 치고 두부를 앗고 지어 어떤 곳에서는 돼지를 잡아엎기도 했다.(당시 돼지 한마리를 잡자면 소대, 대대, 공사의 비준을 받아야 했음.) 구경군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어떤 고장에서는 집체로 손잡이뜨락또르를 타고 몇십리밖에서 달려오기도 했었다. 그 열정에 우리도 온하루 “장정”한 피곤을 싹 잊고 만강의 열정으로 공연했던것이다. 도끼봉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석산촌으로 갈 때였다. 당시 석산촌에는 전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전철수동지가 대대당지부 부서기 겸 민병련장책임을 맡고있었다. 그날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었다. 한 시오리쯤 눈길을 헤치고 가고나니 대원들은 저마다 기진맥진해졌다. 눈은 그치지 않았는데 바람이 일면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금방까지 낯이 빨개지면서 땀흘리며 왔는데 조금 모여앉아 쉬게 되니 인차 낯이 파래지면서 추워져 몸을 오돌오돌 떨게 되였다. 다시 일어나서 걷자니 다리가 천근무게나 되는상 싶었다. 대원들은 저마다 자기의 공연도구들을 지고메고 떠났는데 그 짐이 적지 않았다. 특히 손풍금이나 바레동, 북과 같은 악기들은 체적이 컸을 뿐만 아니라 무게도 꽤나 무거웠다. 비록 서로 엇바꿔가면서 메주고 들어주었지만… 앞에는 높다란 산마루가 아츨하게 가로 놓여있었다. 그 령을 넘어야 석산촌에 이를수 있었다. 대지의 모든것이 눈속에 파묻혀 주위는 하얀 면사포에 감겼고 눈보라에 그 면사포가 파르르 떨고있었다. 눈보라에 길도 알리지 않았다. 올리막에 들어서면서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어떤 대원들은 벌벌 기기도 했다. 산중턱까지도 올라가지 못했는데 어떤 녀대원들은 아예 퍼더버리고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난감한 일이였다. 뒤이여 대여섯명 되는 녀대원들이 련이어 덩달아 퍼더버리고 앉아 울어댔다. 아직은 열대여섯살밖에 안먹은 나긋나긋한 소녀들이였으니깐. 그 녀대원들앞에 남대원들이 모여들었다. 한명씩 업고 올라갈수만 있다면… 할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니 부득불 돌아갈수 밖에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인지 녀대원들의 울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헌데 돌아간다는것도 막연한 일이였다. 절반도 더 걸어왔는데 돌아가자면 또 반나절이나 걸리게 된다. 지도교원과 대장이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애타게 서성거렸다. 어떤 대원들은 배고프다고 눈을 움켜쥐고 서걱서걱 씹어 먹기도 했다. 눈보라가 휙 몰아오자 모두들 몸을 오싹 떨었다. 더는 지체할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가고 돌아 안가면 계속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퍼더버리고 앉아 울고있는 녀대원들은 어떻게 하고?… 그때 뒤켠에 선 누군가 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정”이란 노래를 흥얼거렸다. “홍군은 원정의 곤난을 두려워하지 않네 만수천산을 한가로이 넘어가네……” (红军不怕远征难,万水千山只等闲…) 인차 두세 사람이 따라 불렀다. 가락이 리듬에 맞춰지면서 모든 남대원들이 따라 불렀다. 노래소리가 점차 격앙되면서 우리의 가슴이 끓어번지기 시작하였다. 대장이 앞으로 썩 나서며 두팔을 힘차게 휘둘며 지휘했다. 노래소리는 눈보라를 타고 산골짜기에로 메아리쳐갔다.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기운이 막 솟구쳤다. 대장이 먼저 눈우에 퍼더버리고 앉아 울고있는 가장 나어린 녀대원한테로 달려가서 짐을 몽땅 벗겨 자기가 짊어지고 한쪽 팔을 그 녀대원의 팔짱에 끼워넣고 부축해서 일쿼세웠다. 우리들도 저마다 달려가서 눈우에 퍼더버리고 앉은 녀대원들의 짐을 빼앗아메고 그녀들을 부축해서 일쿼세웠다. 노래소리는 멎지 않았다. 더욱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우리는 다시 산마루를 향해 올리 톱기 시작했다. 이어 노래는 모주석의 어록에 곡을 단 “결심을 내리고 희생을 두려워 하지 말며 만난을 물리치자”로 바뀌였다.우리는 사기가 충전해져 숨가쁜줄도 몰랐다. 설산을 넘는 홍군전사가 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누가 미끌어 넘어지면 서로 달려가 부축했고 누가 무얼 떨구면 그걸 주어가지고 자기가 걸머메군 했다. 어록노래가 끝날무렵에 녀자들의 합창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 전진! 전사의 책임 중하고 부녀의 원한 깊다네… 우리 랑자군들도 총을 메고…” 랑랑한 그 노래소리가 우리 남대원들을 더욱 흥분케 했다. 랑자군을 거느린 “당대표”가 된 기분이였다. 그제날 적진을 무찌르는 홍군전사가 영웅이였다면 오늘날에는 내가 영웅이 아닐소냐! 마치도 눈보라속에서 눈길을 헤치며 령을 톺아오르느라고 곤난을 겪고있는것이 아니라 천당에서 꽃보라속에서 행복에 겨워 흥분에 들떠 춤추고 노래부르고있는것만 같았다. 전반 중학교시절을 돌이켜보아도 그 시각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각은 없었던것 같다. 나중에 우리는 남자가 녀자의 손을, 녀자가 남자의 손을, 서로서로 손에 손잡고 노래를 부르며 령마루로 톺아올랐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지금에 와서 그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역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내리막길에서는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미끄럼질 치며 궁둥방아를 찧으며 즐거운 웃음소리를 반공중에 흩날리며 내려왔다. 얼마나 즐겁고 유쾌했던지! 꿈만 같은 시각이였다. 천당에 가서도 이처럼 생생한 쾌락을 맛볼수 있을가! 석산촌우사칸 회의실구들에 저마다 걸레처럼 축 늘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배가 못견디게 고파났고 얼었던 발이 녹아나면서 아려나는 고통을 느꼈다. 그때에야 인간세상이 천당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천당에는 극락세계만 있다지만 인간세상에는 천당같은 극락세계도 있고 지옥같은 고통세계도 있는것이다. 고통을 겪어봐야 락을 진정 알게 된다. 극락이 있으면 극통이 있게 되고 극통이 있으면 극락이 있게 되는 법이다. 예술의 매력이란 극락과 극통을 전형적으로 가공하고 반영하는데 있다. 오늘날 나는 우리의 사회가 나날이 발전하고있을 때, 우리의 생활도 점차 예술화되였으면 얼마나 좋을가고 천진한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그러면 천당에 갈 필요가 없게 된다. 예술화된 우리의 생활자체가 천당이니깐!
44    미술의 매력 댓글:  조회:1436  추천:0  2013-07-10
•생활·예술·천당• 미술의 매력 홍천룡 한여름, 차를 몰고 연길로부터 동불사까지 시속 백메터쯤으로 달리면 기분이 아주 상쾌해진다. 길량켠으로 시원스레 쫙 펼쳐져나간 파아란 논밭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것이다. 참, 사람의 눈이란 이상하고 신비스럽다. 벼한포기를 눈앞에 갖다놓으면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는다. 길가의 야초같은 곡식포기구나 하는 생각밖에 더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수천수만포기로 가쭌하게 똑같은 키로 자라나고있는 장면이 눈앞으로 쫙 끝없이 펼쳐져있을 때에는 소리없는 충격을 받게 되는것이다. 너무나도 장관이구나! 헌데 그 장면을 가까운 밭머리에서 바라보는것과 먼 산중턱에 올라서서 바라보는것이 감각이 다르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정지된 상태에서 바라보는것과 달리는 승용차나 렬차의 차창으로 바라보는것이 또한 감수가 다르다. 그다음 자연적으로 현실에 처한 장면을 직접 보는것과 그 장면을 사진이나 그림에 옮겨놓은것을 간접적으로 감상하는것이 또한 기분적으로 다르다. 그밖에 그런 장면을 매일과 같이 보던 때와 몇년, 혹은 몇십년사이에 한번씩 보았을 때의 감흥은 완전히 다른것이다. 똑같은 장면이라 해도 또한 내가 자라던 고장에서 보았을 때와 멀리 이국타향에 가서 보았을 때의 감정도 완전히 다를수 있다. 왜서 이럴수 있을가? 필자도 모르겠다. 아마도 미술이나 촬영과 같은 시각예술을 전공하는 친구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아야 할것 같다. 아이들이 자라는걸 보면 종이장에다 규범적인 “ㅏ, ㅑ, ㅓ, ㅕ…”를 쓰기전에 먼저 락서같이 아무데나 대고 마구 갈기고오리고 하는것을 볼수 있다. 대개 아이들은 글씨쓰기를 배울 때 글씨쓰기보다 그림그리기를 더 좋아한다. 제일 그리기 쉬운 동그라미를 하나 쳐놓고 제나름으로의 생각에 따라 그것이 태양일수도 있고 선생님의 얼굴일수도 있고 축구뽈일수도 있고 사과알일수도 있다. 아이들은 그림그리기를 통해 객관사물을 관찰하고 감지하고 모방하며 그걸 표현시키려고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객관사물의 법칙을 터득하고 정감교류를 하게 되며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된다. 때문에 이 시기에 아이들의 그림그리기를 잘 이끌어주는것이 자못 중요하다. 그 아이들이 다 미술가나 화가가 되는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의 지력개발에는 촉매작용을 놀수있는것이다. 당년에 우리 반 아이들가운데서 그림을 특별히 잘 그리는 아이들이 몇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정치적동란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미술시간이 정치활동으로 대체되여버리는 바람에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이 하얀 안개로 소리없이 사라져버리고말았다. 대부분 아이들을 놓고 볼 때 미술공부는 걸음마를 떼놓고 익히지 못한 상태로 절름발이 되고말았다. 미술에 대한 흥취도 없어졌고 미술에 대한 상식도 배우지 못했고 미술을 한낮 심심풀이장난으로만 우습게 여기게 되였다. 당시 공원소학교운동장남쪽에는 게딱지같은 초가집 몇채가 질서없이 들어앉아있었는데 그 가운데 유표하게도 콩크리트로 지은 일본식주택 한채가 덩그랗게 자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 집의 주인이 다름아닌 예술학교교장이며 저명한 화가이신 석희만선생님이였다. 좀 왜소한 체구에 강마른 나그네였는데 사람들, 지어 학교에서 지엄하게 보이던 교장선생님마저도 그를 보면 허리가 불거지도록 굽썩거리는것이 우리 애들의 눈에는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사람들의 주고받는 말에 의하면 석희만선생님이 젊었을 때 두부를 그린것이 일본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소묘전시회에서 대상을 타게 되였고 그걸 계기로 그이도 미술계의 새별로 떠오르게 되였으며 당시 조선족총각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내는 일본색시를 안해로 맞아들이는 혼인까지 이루었다는것이다. 두부를 그려서 상을 타다니?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는 일이였다. 누군가 미술시간에 모주석을 그린다는것이 호박골에다 머리털을 몇대 꽂아놓고 그 아래에다 “모주석 만세!”를 번듯하게 써놓았다가 “새끼반동”으로 몰리워 밤낮 눈물코물을 쥐여짰다고 한다. 만약 모주석을 멋있게 그려서 상을 탔다면 그건 그럴듯한 소리겠는데 두부를 그려서 상을 탔다니 우리로서는 황당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콩알같은 일본놈들이 콩으로 만든 두부밖에 모른다고 비꼬아치기도 했다. 아닐세라 우리의 비꼬음이 맞아떨어진 셈이 되였다. 2년후에 그집 일가가 그 으리으리한 콩크리트집을 내놓고 로투구농촌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어느 핸가 학교에서 조직한 로투구만인갱참관을 갔다가 우리또래 몇몇이 그 집을 찾아가게 되였던것이다. 우리는 그집 둘째 아룡이와 한학년동창이였던것이다. 그 집은 렴명촌이라는 마을뒤끝쯤 해서 도랑물곁에 있는 허술한 농가에서 살고있었다. 아룡이를 만나 그동안 그립던 정을 나누고 작별을 고하는데 저쪽 도랑둑으로부터 싯누런 초모자를 꾹 눌러 쓴 석희만선생이 호미를 쥐고 터벅터벅 걸어오고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어린 나이에도 좀 별랗다는 감이 들었다. 그처럼 어마어마했던 분이… 길가에 나와 뻐스를 기다리면서 누군가 우스개를 피웠다. “아룡이네 아버지가 지금에 와서 진짜 화가가 된거야. 호미를 거머쥐고 지구에다 그림을 그리고있잖아.” 그렇다! 화가가 농민이 될수 있고 농민도 화가가 될수 있었던 시대였다. 저 푸르른 전야를 누가 그려내고있는가? 호미자루를 거머쥔 농민들이 그려내고있는것이 아닌가! 누구나 다 화가가 되여 이 지구땅떵어리에다 자기의 “작품”을 발표할수 있지 않는가! 저 렴명촌어귀를 병풍처럼 막아서서 훈훈한 미풍에 흐느적거리며 춤추고있는 백양이랑, 그 사이를 에돌아 흐르는 도랑물이랑, 거기에서 뛰노는 개구리랑, 보기만해도 토장국냄새가 진하게 풍길듯한 저 초가집이랑, 그 둘레를 비뚤써 막아주는 강냉이대배재(울바자)랑, 그 배재굽상공에서 자리다툼질 벌리는 꼬추잠자리랑… 그려내기만 하면 다 명작이 될것만같은 농촌풍경이다. 뻐스에 앉아 눈길을 차창밖으로 던진채 나는 이런저런 자아감상에 빠졌다. 수채화같은 농촌점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명화가가 농촌으로 쫓겨나가고 미술학과가 교학에서 밀려나간 세월이였지만 미술이란 이 예술이 의연히 아이들을 매혹시키고있었다. 그 시절 우리반에는 두 남자아이가 그림그리기에 푹 빠져있었다. 당시 학교의 매일 첫시간은 “날마다읽기(天天读)”였는데 “모주석어록”과 “로삼편(老三篇)”을 학습하는 시간이였다. 학교에서 제일 엄숙한 교학시간이기도 했다. 쏠락패들도 얄개를 피우지 못했고 손장난질도 못했다. 그런데 두 “꼬마화가”만은 제 할 노릇을 제대로 하고있었다. 연필로 소묘에 능란한 만호는 꽁다리연필을 쳐들고 엄지손가락끝을 연필꼭두부분에 댄채 왼쪽눈을 지긋이 감고 교단에 서있는 선생님을 겨냥해서 엄지손가락끝을 올리고 내리며 무언가 조절한다. “목측법”을 쓴다나! “목측법”을 쓰면 선생님얼굴의 길이와 넓이를 정확하게 측정해낼수 있다는것이였다. 우리도 그걸 본따서 선생님의 얼굴을 측정해보려고 여러번 시도해보았으나 도저히 측정해낼수가 없었다. 한번은 어느 수학시간에 얼굴이 동글납짝하게 생긴 녀성교원이 들어왔었다. 교학이 절반쯤 진행되였을 때 대여섯명되는 남학생들이 동시에 연필꽁다리를 쳐들고 선생님을 겨냥해서 선생님의 의혹을 자아내게 되였고 그중 한 학생이 지명받고 일어서게 되였다. “동무, 시간에 왜서 연필을 쳐들고 춤을 추오?” 얼굴이 홍당무우가 된 그 아이가 우물쭈물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만호동무가 배워준 ‘목측법’으로 선생님의 얼굴이 원형인가 타원형인가 측정해보는라구…” 와! 전 교실이 떠나갈듯이 폭소가 터졌다. 만호는 자기의 마음에 드는 선생님이 들어오면 곱게 그렸고 자기의 마음에 안드는 선생님이 들어오면 우습꽝스럽게 만화를 그려서 아이들의 웃음을 자아낼 때가 많았다. 지어 녀자애들마저도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는 입을 싸쥐고 키득거리기도 했다. 만년필을 쓰기 좋아하는 영칠이는 구호글씨체같은 글자를 새기길 좋아했다. 그는 “혁명을 위해 분투하자!”, 혹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라는 그 당시 류행되였던 호언장담을 만년필로 굵게 새겨서는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마치도 지금 한다하는 서예가들이 자기가 써낸 붓글씨를 귀한 손님에게 증송하듯이 말이다. 그걸 받은 아이들은 무슨 귀한 선물이라도 선사받은듯이 그걸 얼마간씩 귀중하게 간직해두었던것이다. 지금 나에게도 그가 당시 그려준 그림과 글씨가 있다. 좋은 일에 훼방이 많다고 그림을 좋아하는 기특한 아이들이였지만 당시에는 교학파괴행위로 인정받아 비평도 많이 받았었다. 그린 그림이 압수되여 찢겨지기도 했고 교무실에 불리워가서 벌을 받기도 하고 검토서를 써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그 “고약한 버릇”만은 떼질 못했었다. 졸업하고 그들도 수천수만의 지식청년들처럼 “재교육”을 받으러 광활한 천지로 나가게 되였다. 고달픈 농사일에 시달리며 어설푼 집체호생활에 부대끼면서도 그들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만호가 있는 북대집체호에 놀러갔다가 만호의 궤짝을 들춰보고 놀랐었다. 궤짝안에 옷견지나 일용품이 들어있는것이 아니라 몽땅 그가 그린 그림이 꽉 차있었던것이다. 농촌에서는 일이 사랑이다. 일만 잘하면 다 곱게 보는것이다. 그림그리기도 한층 차원이 높은 일이다. 허지만 농촌에서는 농민으로서 그림그리기에 빠져있는 사람을 썩 곱게 안보았었다. 만호가 한 궤짝이나 되는 그림을 그리면서 뒤등에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겠는가 하는것이 상상되기도 했다. 후에 그들은 도시에 들어와서 직장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만호는 연변산천을 누비며 민족특색이 짙은 시골풍경화를 많이 그려냈고 영칠이는 정교한 뿌리조각품들을 많이 내놓았다. 그들 둘은 다 그어떤 전업학교도 다녀본 적이 없었고 지어 강습반같은데도 기웃거려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주렁진 열매를 따낼수 있었다. 만호는 한국서울롯데전시청에서 개인미술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개인화집도 출판해냈다. 영칠이는 전국뿌리조각예술품전시대회에서 련속 3년, 련이어 금상, 은상, 동상을 안아오기도 했다. 나는 이런 동창생들이 있음으로 하여 긍지감을 느낀다. 그들은 생활속에서 예술에 감화되였고 생활속에서 자신의 심신을 도야시켰고 생활속에서 예술의 기량을 닦아냈고 생활속에서 예술적인 소재를 발굴하고 창작하면서 생활속에다 자기들 예술의 천당을 짓고있는것이다.
43    사진- 세월을 돌이켜 주는 추억의 드라마 댓글:  조회:1094  추천:0  2013-07-09
•생활•예술•천당• 사진- 세월을 돌이켜 주는 추억의 드라마 홍천룡 전번 날, 이사짐을 싸다가 사진첩 몇 개를 들춰보게 되였다. 부모님께서 소중히 간직해주신 덕분에 옛날에 찍은 사진도 있고 근간에 찍은 사진도 있었고 빛 바랜 흑백도 있고 천연색컬러도 있었다. 그걸 한장 한장 들여다 보노라니 무한한 감개가 차분히 젖어오른다… 앙-앙- 울보챘을 아기 때도 련상되고 물덤벙술덤벙 흙탕물에서 입성을 적시던 개구쟁이시절도 아물아물해나고 깜장 헝겊가방을 메고 엄마의 손에 손목을 잡혀 학교로 끌려가던 일도 떠오르고 중학시절에 홍위병완장을 끼고 군례를 올리던 모습도 나타나고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 일원으로 문화궁무대에 처음 오르던 장면도 눈앞에 선하고 수백메터되는 지하막장에서 석탄구루마를 밀던 정경도,량식숙식품가공공장건물을 짓느라 건축시공대 대원들을 이끌고 얼음장이 서걱거리는 부르하통하에 뛰여들어 모래를 파내던 일도,우등불을 피워놓고 진주임과 함께 당기앞에서 선서하던 모습도,청년간부양성반에서 배우던 무산계급독재리론도,기본로선공작대로 인평촌에 내려가 신호탄발사비밀을 정탐하던 계급투쟁도,대학시험을 치겠다고 외가집뛰뜰안 살구나무밑에서 왕왕 내리 읽던 복습제강도,중산복왼쪽웃호주머니덮개끝에다 달랑 달고 학교정문에 들어설 때면 꺼내놓고 학교문을 나설 때면 밀어넣던 하얀 연변대학빠찌도,세계명작을 독파하겠다고 뒤고방 창문같은 도서관접수구에 매달려 꺼내던 누런 소설책도,내 글이, 내가 쓴 글이 활자로 인쇄되여 찍혔던 "연변문예"잡지도,조선족문단에서는 두번째로 수여받은 "연변문예문학상"증서도,편집부에 배치받아 첫 편집한 원고가 전국문학상을 타게 되여 편집보람을 느끼게 했던 "몽당치마"소설도,문학통신학부를 내오고 "개간지"부간을 꾸리던 나날도,"지하활동"으로 꾸려냈던 "특수사명","황야의 복수","장백산부간","과학정보","독자의 벗" 등 총서와 부간들도,적을 두고 나와서 상점과 식당을 꾸리며 가가호호에 문전송달하던 일도,"농가"를 꾸린답시고 허줄한 봉고차를 몰고 농촌부락을 굽이굽이 돌며 부르릉거리던 노릇도… 이처럼 얍술하게 빨깍거리는 사진 몇장을 통해 내가 걸어온 50여년이라는 세월을 생생하게 돌이켜 볼수가 있었다.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진을 통해 자기의 일생을 돌이켜 보군 한다. 정말 사진발명가 다게르에게 큰절을 올려야 할 것 같다.“그래도 제일 좋은 기념이 사진이다"란 말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그렇다.백성들의 생활에서는 사진이 제일 생동하고 제일 간편한 기념품으로 되고있다.듣는 말에 의하면 사진기가 우리 고장에 금방 나왔을 때에는 사진찍기를 죽기보다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속의 요귀가 생사람의 허울을 홀딱 발가간다는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의 겉모양을 그대로 종이장에다 옮겨놓을수 있겠느냐 하는것이였다. 그후 사람들이 사진이 찍혀나오는 과학적원리를 터득했을 때에는 그것이 일종 사치품으로 되여 일반 백성들은 일생에 한두번 아니면 두세번밖에 찍지 못했었다. 우리 집에는 싯누렇게 된 화투장만한 노할배의 정면 탈모사진 한장이 있다. 노할매의것은 없고. 노할배는 허연 중치막을 입고 찍은 것 같은데 그런 사진이라도 있었기에 그 당시의 정황을 얼마간 상상해볼수가 있었다. 최저한 유전학각도에서 내가 노할배를 얼마나 닮았는가를 짐작해 볼수가 있었던것이다. 만약 몇장 더 있었더라면 당시의 생활환경을 여러 측면으로 분석하고 추리하고 상상해볼수가 있었을것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지금 광복전에 찍은 사진을 보관해 둔 분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해방후에도 나라의 경제가 락후했고 우리네들의 생활이 궁핍했기에 사진을 찍고 싶은대로 찍지는 못했다. 허나 기념될만한 일에는 사진을 빼놓지 않았었다. 졸업, 결혼, 참군… 때문에 80년대 이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대부분이 두세줄씩 렬을 맞춰 찍은 집체사진들이였다. 개인사진도 증명사진이 아니면 증명사진이나 다름 없는 정면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찍은것들이여서 판에 박은듯한 감밖에 안난다. 그런 사진들이지만 지금에는 아주 귀한 기념사진으로 되고있다. 연길시 신흥소학교서쪽에 있는 “리조식당”에 들어가보면 옛날 연길시내 도시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칸칸마다 걸려있어 그 식당의 일개 독특한 풍경을 이루어 손님들의 눈길을 끈다. “오, 우리가 살아왔던 연길시내 모습이 저랬던가!” 감개가 무량해지면서 그 옛날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추억에 잠겨보게 된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말기에 우리 웃집에는 김광영이라는 중학생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사진기를 가지고 다녔었다. 누가 사진기를 다룬다 하면 대단한 어른으로 볼 때였으니깐. 파아란 중학시절부터 사진기를 다루며 사진을 찍고 사진을 연구해왔기에 그는 지금 저명한 촬영가가 되여 수많은 예술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의 생활에는 사진에 관한 재미나는 이야기들도 많았다. 사진 한장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 할 때도 있었고 사진 한장에 의해 행복한 한 가정이 이뤄지기도 했다. 직장의 기대앞에서, 교정의 숲속에서, 사래 긴 밭머리에서, 훈련장 한쪽 구석에서 돈지갑속에 끼인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남몰래 들여다 보며 달콤한 꿈을 꾸고 무지개 같은 미래를 동경해온 사람들이 얼마였던가! 새세기에 들어서면서 웬간한 사람들에게는 다 사진기가 있게 되였다. 특히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사진이 모든 령역에서 그 작용을 남김없이 발휘될수 있었다. 생활이 다채로워지면서 사람들의 가치관념, 도덕관념, 심미관념도 가일층 승화되고 물질적생활과 정신적생활에 대한 추구도 가일층 높아지게 되였다. 인젠 촬영도 일종 대중적인 예술활동으로 되였다. 지금은 표상적인 기념성이나 기록성적인 현상을 찍는데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내심세계에까지 파고들며 찍어낸다. 사랑, 행복, 희망, 쾌락뿐만 아니라 번뇌, 절망, 탄식 등 반면 세계도 찍어내고있다. 좀 더 차원이 높은 촬영가들은 사물을 다층차, 다측면, 다각도로 관찰하고 반영하며 시공간을 교묘하게 리용하여 예술적극치에 도달할수 있는 사진을 찍어내려고 노력하고있다. 이전에 내가 꾸렸던 잡지에서 부기원사업을 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남영자씨가 전번날 친척방문차로 왔다가 나한테 디지털카메라 한대를 선물해왔다. 사진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샤타를 꾹꾹 누르면 저절로 찍혀나오는 “괴물”이였다. 그걸 컴퓨터에다 이어놓으니 찍은것들이 환하게 나왔다. 헌데 누가 환하게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수준이 발바닥인 그 사진을 누가 시간을 팔며 봐주겠는가! 슬그머니 배짱이 생겼다. 좀 구도도 강구하고 장면포착도 틀어쥘줄 알고 나름대로 풍격이나 특색도 추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것이 혹시나 내 일생에서 사진예술을 위한 첫발자욱이 되지나 않을가!
42    범이 무리를 짓게 되면? 댓글:  조회:901  추천:0  2013-07-08
•수필• 범이 무리를 짓게 되면? 홍천룡 경인년에 범이 남산에서 내려올가? 백년전에 국자가와 가까운 봉림동어구에 어슬녘이면 범이 어슬렁 어슬렁 내려오군 했단다. 범이 한마리만 내려와도 온마을 수십호되는 인가에서 집집마다 문을 닫아걸고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그래서 녀석은 육개장이 생각나면 송아지를 잡아먹고 개장국이 생각나면 강아지를 잡아먹군 했었다. 허지만 호랑이의 호시절은 오래 가질 못했다. 그 누구도 당할 자 없고 세상무적인 백수의 왕 호랑이는 그 누구의 공격이나 침해를 받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 멸망의 길에 들어서서 스르르 꼬리를 감춰버렸던것이다. 너무나 용맹스러웠기 때문이다. 영웅은 언제나 그 한때 그 한시절이다. 범은 늘 자기의 용맹만 믿고 독단독행하는 독단주의자였다. 그 독행행위가 그들을 멸망에로 끌었다. 거기에 법도 모르는 무뢰한 무송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침해가 그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오늘날 숱한 재력과 인력을 동원해서 녀석들을 보호해주고 서식지를 만들어주자고 해도 곤난하게 되였다. 반면에 영웅이라 일컫기에는 너무나도 하찮은 벌이나 개미, 지어 겁쟁이 쥐새끼들마저도 수천년을 내려오며 그 가세가 번성해지기만 했다. 녀석들은 근면하고 민감하며 분공이 명확하고 똘똘 뭉칠줄 안다. 개미를 놓고 봐도 그렇다. 매일 대지에 서광이 비끼여 어둠을 밀어낼 때면 척후병 개미들이 순라의 길에 나선다. 비가 오지 않나 바람이 불지 않나 하는 천기의 변화를 알아보고 또한 주위에 그 무슨 위험이 닥쳐오지 않았나 하는 군사정보도 탐지해 가지고는 돌아온다. 척후병의 무사보고가 떨어지면 먹이찾기 공정병소분대가 잇따라 출발하게 된다. 그들이 주변에서 영양이 풍부하고 맛갈스러운 먹이자원을 발견하고 저마다 먹이를 물고 개미굴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일부 근무병들을 이끌고 다시 나간다. 만약 먹이자원이 풍부하면 그들은 부지런히 쉴새없이 나른다. 그 거동에 로동대군이 출동하게 된다. 만약 먹이자원이 적으면 녀석들은 쉬염쉬염 거드름을 피우며 나른다. 그러면 로동대군은 출동하지 않는다. 많은 로력을 작은 수입에 랑비하지 않는것이다. 정말 집체의식이 강한 동물군체이다. 경탄하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다. 력대로 사람들은 약육강식이란 도리를 믿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과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강한 자는 강한 자로서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약한 자는 약한 자로서의 생존방식이 있었고 번성해나가는 비법이 있었다. “동물세계”프로를 보노라면 들소, 들말, 산양 등 초식성동물들은 수십마리, 수백마리씩 무리를 지어다니지만 그걸 잡아먹고 사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육식성동물은 많지 못했다. 사자는 기껏해야 대여섯마리씩 짝을 지어 다니고 호랑이는 단독행동이 많다. 그걸 비유해서 인류력사에서도 육식하는 민족이 강세할 때가 많았고 소식하는 민족이 그 압박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인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이 력사의 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있는 얕은 력사의 숲을 헤집고 봐도 대개는 그러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람을 강하게 만들기를 바란다. 범처럼! 민족도 강해야 하고 나라도 강해야 한다는 도리이다. 나는 우리 민족도 강한 민족이라고 자호감을 느낀다. 접수력이 빠르고 사유가 민첩하고 교육이 앞서고 경쟁력이 강하다. 세계 그 어느 곳이든 단독으로 보내줘도 리더십이 강한 엘리트로 자라날수 있는 파워민족이다. 허지만 아직까지 세계적무대에서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고 놀아야 할 배역을 놀지 못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역시 강한 민족의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가! 세계적으로 말썽이 많던 독일의 동부와 서부도 합친지 이슥하고 미국양코배기들의 골머리를 앓게 하던 웨트남의 남부와 북부도 한동네가 되여 아담한 살림살이에 들어갔는데 오직 우리 민족만이 아직도 동족상잔의 미열로 서로 아웅다웅하며 세간을 웃기고있다. 한덩어리의 반도에서 한 민족으로 살면서 말이다. 아무튼 우리 민족은 력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꼭 고치고 극복해야 할 허점이 심각하게 존재하고있다. 그래서 나는 천진하게도 범이 무리를 지을줄 알았다면 지금도 저기 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남산에서 으르릉거리며 그 호기를 자랑하고 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새해벽두에 빌고싶은 것은 경인년에 저 남산으로부터 범이 무리를 지어 못내려 올지언정 짝이라도 지어 내려왔으면 하는것이다.
41    미래의 부자는 그 누구? 댓글:  조회:1254  추천:1  2013-07-05
미래의 부자는 그 누구? 홍천룡 우리 사회가 시장경제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돈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선망했다. 부자가 되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고 부자가 될 래일에다 희망을 걸고 아득바득 애를 써왔다. 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나와 같이 오늘 이 시각까지도 부자가 되지 못한 궁지에 빠져있다. 남은 진작 부자가 되여 고급주택에 고급자가용에 고급식당으로 드나들고있는데… 동지날 팥죽 끓이듯 속이 부글부글 끓어번진다. 도대체 얼마만큼 벌어야 부자가 되는 판국인가? 20여년전에는 만원만 벌면 한뉘 놀고먹는 부자가 될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하루빨리 부자가 되겠다고 어렵게 가진 공직에 아깝께 쌓은 공령을 다 버리고 “바다(下海)”에 뛰여들었다. 한 십여년전에는 십여만원만 벌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포근했던 친인들의 품을 떠나 비행기를 잡아타고 외국으로 날아갔다. 한국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로씨야로… 지금은 한 백만원쯤 있어야 부자라고 할가? 세상에는 올리막 길이 얼마 있으면 내리막 길도 얼마 있는 법이다. 슬슬 잘 풀려나가던 세계란 대목이 요즘에 와서는 금융위기라는 폭풍설을 맞아 잎이 누렇게 시들고있다. 단꺼번에 부자가 되여보려던 황금몽을 깨고 일어날수 밖에 없다. 한국에 나가 한달에 인민페로 칠팔천원씩은 벌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오천으로 뚝 떨어졌다. 세계적인 화페라고 늘 묵직했던 딸라도 그 가치가 뚝 떨어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집에 생활비마저 못 보내고있는 상황이다. 이번 금융위기가 이처럼 심각해지리라고는 세계적으로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미국의 대통령 부시나 오바마도, 한국의 대통령 리명박도. 그리고 세계의 저명한 경제학자들도… 일찍 1997년도에 한국, 태국 등 동남아지구를 휩쓴 IMF외환위기가 세계금융계에 빨간 신호를 보냈던것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심각해질줄은 상상밖이였다. 자본주의사회가 아직 독점계단에 들어서기전이였던 19세기에 맑스가 자본주의사회의 생존과 발전을 이어주는 세포인 상품을 분석하고 상품경제발전법칙에 따르는 경제공황이 주기적으로 일어난다고 지적하였다. 그후 과연 세계적인 자본주의경제위기가 몇번 일어났었다. 상가에서 상품을 불태워버리고 농장에서 우유를 강물에 쏟아버리는 현상도 나타났었다. 허지만 이번 금융위기는 상품생산과잉으로 생기는 위기가 아니라 은행가와 보험사들에서 주가와 펀드, 각종 금융상품들을 내놓고 또한 부동산업계에서는 고층건물을 내놓고 “콩닦기”를 하듯이 한번 볶아내면 될것을 두번, 세번… 볶으면서 “거품”을 만들어내고 “풍선”에 바람만 불어넣다가 그것이 푹 터지고 가라앉는 위기였다. 그래서 어떤 회사의 상품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란데 그 회사의 주가는 주식시장에서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는가 하면 어떤 곳의 집값은 밤을 자고나면 평방당 몇백원, 몇천원씩 껑충껑충 뛰여오르는 괴의쩍은 현상들이 나타났던것이다. 이런 위기는 그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나 그 어느 나라의 재정대신이 예측해내고 막아주고 조절해줄수 있는것이 아니였다. 아직까지는 그 옛날 맑스가 상품을 가지고 전반 자본주의경제에 대한 리론체계를 구축해내듯이 화페를 연구하여 전반 자본주의 금융시장에 대한 리론체계를 내놓은 사람이 없다. 오히려 경제에 대해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위기앞에서 더 맹동적으로 놀고있다. 간혹 아는것이 해가 되고 모르는것이 복이 될 때도 있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두루 주변사람들의 변화를 여겨 보느라면 무엇이나 다 안다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경우가 아주 적고 오히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경우가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그 어떤 공식적인 도리나 법칙으로 해석하기에는 곤난하다. 부자가 되는 도리를 터득하고 부자가 되는 법칙을 장악한다음 부자가 된 부자가 이 세상에 별로 없다. 지금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어떻게 하면 억만부자가 되겠는가 하는 비결을 종합해놓은 책들도 많고 인터넷에 들어가봐도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유태인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 일본인들이 어떻게 세계시장을 점했는가, 한국인이 어떻게 기업을 꾸렸는가 등 답안은 책속에 다 있다. 부자가 된 경험을 열가지로 종합해놓은것이 있는가 하면 스무가지로 종합해놓은것도 있고 백가지로 종합해놓은것도 있다. 헌데 그것은 몇십년전에 외국사람들이 부동한 시기에 부동한 사회제도하에서 쌓은 경험들이였다. 21세기에 연변사람들, 특히 우리 조선족이 부자가 된 경험을 종합해놓은 책이 나왔는가? 아직 나오지 못했다. 그걸 우리가 써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외국사람들이나 우리 선배들의 경험을 학습하고 참고하는것은 제창할만한 일이다. 허지만 그런 경험을 다 학습하고 다 터득한 다음에 부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또 그럴수도 없다. 돈을 벌겠다고 밤낮이 따로 없이 돌아치고있는 사람들이 언제 퍼더버리고 앉아 그걸 학습할 사이가 있겠는가! 복잡한 경제적법칙이나 외국사람들의 치부경험 같은것은 자기가 알만큼 알면 되는것이다. 그걸 다 알려고 하자면 세월이 다 흘러간다. 어떤것은 몰라도 괜찮다. 모르는것이 오히려 부자가 되는데는 더 유리할수도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때 산수시간이 되면 늘 응용문제를 풀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돌대가리—석두”란 별명을 선사받은 아이가 있었다. 몇십년후에 그 아이가 대부자로 되였다. “그 석두가? ” 그 아이의 어마어마한 씀씀이에 동창생들은 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 뱅뱅 돌아친것은 “그 돌대가리로 어떻게 돈을 벌었을가?” 하는 궁금증이였다. 그 아이가 그동안 특별히 총명해졌을가? 물론, 세월이 사람들의 머리를 총명하게 만든다. 세월은 공평한것이다. 원래 그 아이보다 머리가 더 좋은 아이들도 더 총명하게 만들어놓은것이다. 문제는 그 아이가 총명해져서 모든걸 다 알고 귀신같이 돈을 번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도 돈계산에 들어가서는 늘 틀려서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한다. 총명한 사람만 부자가 되는것이 아니다. 총명한 사람도 될수 있고 총명하지 못한 사람도 될수 있고 학문이 있는 사람도 될수 있고 학문이 없는 사람도 될수 있고 외국인도 될수 있고 중국인도 될수 있고 한족도 될수 있고 조선족도 될수 있는것이다. 물론, 모든걸 다 알고 부자가 되면 좋겠지만 웬간히 몰라도 부자가 될수 있다. 일반 사람들을 놓고볼 때 모든걸 다 알 필요가 없다. 다만 기본적인것만 지켜도 부자가 될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 기본적인것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있기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하고있다. 그렇다면 그 기본적인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신비한것도 아니고 그 무슨 비결도 아니다. 지구란 땅떵어리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지켜낼수 있는것이다. 들어보면 기본적인것이 아닌것 같은 기본이다. 우선 부자로 될 사람은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부터 버리고 한두가지 일에 흥취를 가져야 한다.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으면 마음이 급해진다. “왜 남처럼 돈이 모아지질 않을가?” 그래서 돈을 따라다니게 된다. 묘하게도 돈이 부자를 만들어내지만 돈만 따라다니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비률은 아주 낮다. 개중에는 혹간 번개같이 벼락부자가 되였다가 벼랑에서 떨어지는 “깜짝쇼부자”도 있다. 그런 부자는 진정한 부자라고 할수 없다. 한 20여년전, 연길시 하남가 장백로와 천지로의 동쪽머리로부터 서쪽으로 쭉 올라가면서 길량켠을 돌아보면 대부분이 조선족들이 경영하는 상가였다. 헌데, 오늘날 다시 장백로와 천지로의 동쪽머리로부터 서쪽으로 쭉 올라가면서 훑어보시라.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량켠에 조선족이 경영하는 상가들이 도대체 몇집이나 되는가를! 개혁개방초기에는 확실히 조선족들이 앞장서 돈을 벌었다. 그런데 기초를 닦아놓고는 더 큰 “집”을 짓겠다고 대부분 외국으로 빠졌다. 외국에 있는 돈을 따라간것이다. 지금 몇년간 한국나들이에서 괜찮게 번 사람들의 재산이 대개 얼마나 될가? 뭐, 세밀한 조사를 해보기는 곤난한 일이지만 대략 짐작해보면 아빠트 몇채쯤은 가지고 세돈이나 챙기고있는걸로 어림잡게 된다. 헌데 장백로나 천지로에서 상가를 경영하고있는 주인들의 그 상가집 한채가 지금 시세로 얼마나 갈가? 보통 몇백만원, 몇천만원이다. 문제를 이처럼 표상적으로 비교하는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측면적인 해석은 될것 같다. 여러개 측면으로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석을 가할수는 있지만 지면제한으로 구구히 다 설명할수는 없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간을 가지고있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경우가 적다. 어느 한 항업에서 그 항업의 달인이 되여보시라. 그러면 부자가 안되겠다고 발버둥질 쳐도 소용없이 저절로 부자가 된다. 돼지는 울안에서 먹고자는 재간밖에 없으면서도 피동피동 살찌지만 새는 만천하를 날아다녀도 살찌는 법이 없다. 두번째 기본은 건강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는것이다. 건강이 중요한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지만 일단 돈벌이에 들어서면 건강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 많다. 굶어죽지 않는 이상 무슨 돈벌이를 하려면 꼭 자기의 건강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부터 따져 선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체력로동에서는 고된 로동강도거나 악렬한 작업조건을 따지지만 뇌력로동에서 속을 썩이는 일인가, 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가, 감정충격으로 풀어나가야 할 일인가, 죄의식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인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 페단이 많다. 기실 이런 일이 건강에 더 해롭다. “영웅이 미인관을 넘기 바쁘다”는 말이 있다. 경제시대에는 돈을 버는 부자가 영웅인것이다. 돈이 생기면 남자나 녀자나 좀 풍류적으로 놀아보자는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다. “사람의 일생이 얼마라고 돈이 있을 때 락을 누려보자. 죽으면 그만인데!”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인륜지락에는 크게 세가지 락이 있다. 먹는 락, 노는 락, 혈연에 따르는 천륜지락인데 아마도 먹고노는 락이 제일 클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남자와 녀자가 배가 맞아 돌아가는 락이 제일 즐거울것이 아니겠는가! 즐거움이 과하면 죄를 낳는다. 그래서 남자가 녀자에 망하고 녀자가 남자에 녹아나는 일이 비일비재로 나타나는것이다. 얼마나 많은 부자들이 그 락에 빠져 헤여나오질 못했던가! 때문에 가정지킴에 있어서 안해나 남편을 지키는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자식을 지켜주는 일이다. 자식농사도 잘하면 풍년을 맞아올것이요, 잘못하면 흉년을 맞아오게 된다. 자식때문에 망한 부자가 얼마라고! 때문에 조강지처를 지켜내지 못하고 자식을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부자가 되려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세번째 기본은 원가의식을 키우고 실수를 피해야 한다. 돈벌이에 들어가선 누구나 다 원가와 리윤을 따져보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구구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생활, 교육, 건강, 시간, 인간관계에 들어가서 원가를 따지지 않는 페단이 많다. 일반적으로 작은 돈을 들여서 큰 효과를 보는것이 정확한 원가의식이라고 하지만 교육, 건강같은 방면에는 큰돈을 들여 작을 효과를 보더라도 장원한 관점에서 득실을 따져야 한다. 그리고 크고작은 일에서 될수록 실수를 피해야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도리에 맞고 아주 철리성이 있는 말이다. 특히 기업을 꾸리는 기업가가 간난곡절을 겪어보지 않고 어찌 기업을 꾸려낼수 있었겠는가! 발명가가 실패를 보지 않고 성공할수 있었겠는가? 없다! 하지만 기업가나 발명가라고 해서 다 부자인것은 아니다. 부자가 되려면 될수록 실수를 피해야 한다. 글쎄 “잰내비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데 그 기나긴 부자로 되는 길에서 어찌 실패가 없겠냐만 명기해야 할것은 부자가 되는 길은 온당한 길이라는것이다. 지금 “모험하지 않고서는 큰돈을 벌수 없다”는 말이 명언처럼 떠돌고있다. 그렇다. 모험해야 큰돈을 벌수 있는것이다. 허지만 큰돈을 벌었다해서 다 부자가 되는것은 아니다. 모험해서 큰돈을 번 사람이 또 모험해서 크게 망할 때가 있게 된다. 개혁개방초기에 연길에도 모험하기를 즐기는 모험가들이 때를 만났다고 땅! 땅! 큰소리를 치며 큰돈을 번 사람들이 적지 않았었다. 헌데 그 가운데서 지금 진정 부자로 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이밖에도 부자로 되는 기본이 따로 있을수도 있다. 운명에 따르는것도 있을수 있고 우연한 기회에 따르는것도 있을수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술한 세가지 기본만 에누리없이 지켜나가가만 한다면 꼭 부자가 될수 있다. 언제되는가 하는 시간적문제는 각기 다르겠지만! 만약 이 글을 보고계시는 당신이 오늘부터 이 세가지 기본을 지켜내겠다고 결심을 내리고 꾸준히 드팀없이 노력해나가기만 하신다면 미래의 부자는 다름 아닌 당신이 될것이다.
40    문학동네 “강아지”들 댓글:  조회:1375  추천:2  2013-07-03
문학동네 “강아지”들 홍천룡 연변농촌의 조선족동네를 두루 돌아다니며 보면 참 유정스럽다. 신작로에서 멀찍이 들어앉은 벌방마을이나 오불꼬불 달구지길을 따라 들어앉은 산간벽촌이나 다 아담해보이고 오붓한 감을 준다. 뻐스에서 내려 아무 동네에로나 터벅터벅 발길을 옮겨 마을어귀에 들어서면 마치도 외가집으로 찾아들어가는듯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낯선 인간이 나타났다고 집집의 “수호천사”인 강아지들이 마루턱에 올라서서 목을 빼들고 “왕!왕!” 짖어대는것이 또한 그 동네의 점경이라 하겠다. “네 감히 우리네 초가삼간대청을 엿보려나? 어림도 없지! 왕! 왕!” 주인들이 일밭으로 나간 대낮에는 강아지들의 사명이 자못 신성해지고 위대해진다. 초가삼간과 터전이란 “강산”을 지켜내고있지 않는가! 그 보수로 아침저녁 뜨물죽을 홀짝홀짝 마실수 있다. 그 멀건 뜨물죽만 먹고도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구치는지 달리기시합을 벌린다면 아마도 가축들가운데서는 챔피언으로 손을 꼽아야 할것 같다. 말의 특종인 다리 짧은 몽고말과는 그 속도를 비기지 못하나 일반 말보다는 속도도 더 빠르고 폭발력도 더 세다고 한다. 동네 뉘집에 암캐가 새끼를 낳았다고 가보면 정말 귀여워서 못봐줄 지경이다. 부얼부얼한것들이 오골보골 서로 품을 파고들며 오구작작거리는 모습은 요람속의 평화인양 눈을 즐겁게 해주고 뜬김속의 호함진 닭곰인양 구미까지 돋궈준다. 안고 보듬어주고 싶고 안고 뽀뽀해주고 싶다. 까만 녀석들은 까마반드르르해서 귀엽고 노란 녀석들은 노르므레해서 귀엽고 알록진 녀석들은 알락달락해서 귀엽다. 고것들이 좀 더 커서 서로 재롱을 부릴 때면 더 귀여워난다. 농가의 강아지들과 친해서 데리고 놀며 두루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는것 같다. 우선, 녀석들은 천성적으로 충성스럽다. 개만큼 주인에게 충성하는 가축은 이 세상 더 있는상 싶지 않다.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개, 개로 하여 목숨을 건지게 된 주인, 이러루한 감동적인 실례는 많고도 많다. 혹시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자기가 겪은 사실이거나 누구한테서 들은 이야기도 좋으니 개가 주인에게 충성한 실례를 한두가지씩만 련상해보시라. 그러면 한족속담 “작은 은혜도 크게 보답하라 (滴水之恩,涌泉相报)”는 함의를 더 깊이 체득할수 있을것이다. 둘째는 녀석들에게 존귀비천이 없다. 매일 쏘세지를 먹는 강아지나 매일 뜨물죽을 먹는 강아지나 뜨물죽도 없어서 밖에 나가 똥무지를 뚜지고 뼈다귀를 핥는 강아지나 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라든가 울안을 지켜주는 책임심은 똑같은것이다. 매일 쏘세지를 준다고 해서 크게 더 충성하는것도 아니고 매일 뜨물죽만 준다고 해서 슬쩍 충성하는체 가상만 보이는것도 아니다. 강아지의 충성심과 책임심에는 거짓이 없다. 세번째는 녀석들이 용감한것이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금방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아이앞에 흉측스러운 몰골을 해가지고 주먹을 내흔들어보이면 아이는 금시 무섭다고 울음보를 터뜨린다. 역시 금방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강아지앞에 흉측스러운 몰골을 해가지고 주먹을 내흔들어보이면 녀석은 금시 앞발을 살구며 아르릉— 입을 짝 벌린다. 그 주먹을 물겠다고! 주인의 호령에 따라 곰과 싸우는 개들을 보았는가! 정말 처절하고 비장한 장면이다. 녀석들은 용맹스럽기도 하고 지혜롭다. 네번째는 녀석들이 인정스럽다는것이다. 돼지에게 돼지죽을 줄 때에는 꿀꿀거리며 좋다고 텁썩텁썩 먹어댄다. 허지만 먹거리를 주지 않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하면 녀석도 시무룩해지면서 눈만 꺼부적꺼부적거리다가 제멋에 들어누워 쿨쿨 자버린다. 헌데 강아지는 다르다. 먹거리를 주나 안주나 주인만 보면 꼬리를 내저으며 별 아양을 다 떤다. 나들이 행차로 객지에서 묵을만큼 묵고 돌아와서 삽작문을 열면 우선 강아지부터 먼저 반겨준다. 그 반겨주는 꼴이 또한 천태만상이다. 좀 함양이 있는 녀석은 수집다고 한쪽으로 몸을 꼬며 머리를 아래로 탈며 꼬리질 친다. 좀 왈패스러운 녀석은 아예 앞발로 주인의 아래배를 짚고 목을 잔뜩 빼들고 뽀뽀나 하려는듯 주둥이를 내흔들어친다. 개란 정말 사람 못지 않은 령물이다. 주인집에서 무슨 기쁜 일이 생겨 웃고 떠들면 녀석도 같이 덩달아 좋다고 쉴새없이 꼬리를 내젓는다. 주인집에서 무슨 상심한 일이 생겨 입을 다물고있으면 녀석도 한쪽구석에 엎드려 묵묵히 침묵만 지킨다. 혹간 동네우사칸마당에서 돼지추렴이라도 있는 날이면 온동네 강아지들도 명절을 쇠듯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면서 분위기를 돋군다. 고기 한점 먹어보지도 못하면서… 다섯번째는 녀석들이 락천적인것이다. 눈이 오는 날에도 강아지들은 좋다고 눈속에서 뒹굴며 논다. 한여름, 장마철에 비가 구질구질 내려도 강아지들은 진창길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놀아댄다. 그래서 뒤고방 령감들은 담배대통을 툭툭 치며 “궂은 날은 아이들과 강아지들 세상”이라고 했다. 녀석들은 태평세월에도 그랬고 란세속에서도 그랬다. 깡깡 마른 뼈다귀 하나만 던져주어도 서로 물고 빼앗고 쫓고 으르렁거리며 일대희극을 벌리며 논다. 이밖에도 강아지들의 특점을 례로 들자면 수두룩하다. 지난 세기 80년대초반이라고 기억된다. 문학편집부의 명의로 문학학도들을 불러 문학강습을 조직한 적이 있었다. 연변의 저명한 작가와 시인들을 모시고 강단에 오를 때였다. 누군가 이런 말을 던졌다. “말짱 햇개지들이구만!” 그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딘가 좀 초학자들을 얕잡아 풍자할가 하는 야유감이 푹 풍기는 말이였지만 아주 형상적인 비유였고 또한 다른 면으로는 어딘가 참, 대견스럽다, 귀엽다, 보듬어주어야겠구나 하는 관심에 젖은 허물없는 롱조인것 같기도 했다. 나도 한시기는 문단강아지가 되여 덜렁수캐처럼 뛰여다녔었다. 강아지가 되면 무서운게 없다. 벌써 대여섯만 모여들어도 오골보골 끓는다. 18전짜리 생맥주 열사발쯤씩 마셔야 저마다 시인이 되고 저마다 소설가가 되고 저마다 문단대가가 되는 판이였다. 명작구상이 맥주 쏟아내듯 흘러나오고 명태짝을 찢듯이 문단혹평이 가해지는 가운데 혹간 주제파악이 제대로 되지 못해 삐뚤게 나갈 때도 있었다… “쟈, 요즘엔 그 장항항이라는 한족기집애가 써낸 작품은 편편마다 명작이더라. 틈을 타서 모두 뚜져봐!” “어느? 그 북대황집체호에 있었다는 새애기말이냐?” “응, 그래. 나기도 참, 잘 났대.” “야야, 그 장항항이 약혼했다니?” “야, 취했나, 미쳤나? 약혼했으면 어떻구, 약혼 안했으면 어쩔 셈이냐? 그 녀자가 너희들 같은걸 외눈깔로나 보겠느냐! 이 답답한 촌구석개지들아!” “자식, 사람을 우숩게 보지 말아. 그 녀자가 뭐 그리 대단해? 금방 내가 선포했잖아. 최후의 세계명작은 내손에서 나온다구. 그러면 난 세계적인 대문호가 되는거구 그 녀자는 소설가의 안해가 되고마는거지. ” 으하하하! … … 그때는 왜 밤이 그렇게 짧았던지! 밤을 패가며 열변을 토해도 배안의 “명작”들이 다 나오지 못해 속이 늘 그들먹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해장국을 둬어사발씩 재껴야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아도 그때 그 시절이 제일 행복한것만 같다.늘 강아지로만 뛰여다녔으면 좋았겠는데… 지금도 뭐 문학동네에서는 강아지나 다름없지만서두… 그 당시에 문학동네에는 “강아지”들이 많고도 많았었다. 그 어디로 가나 부얼부얼한것들이 오골보골 끓어번졌었다. 시내돌이를 하다가 컬컬하면 아무 상점이나 뛰여들어도 낯익은 문학도 서너명은 만날수 있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열변을 토할수 있었고 농촌에 가서도 뉘집온돌에 올방자를 틀고 앉으면 문학도 서너명쯤은 배갈병을 차고 찾아들군 했었다. 문학동네에 “강아지”들이 많으니 언제나 잔치집처럼 들썽들썽해서 좋았다. 문학동네 “강아지”들이 놀던 모습을 두루 돌이켜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특점들이 있은것 같다. 우선 겁이 없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줄 모르니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인줄 안다. 그래서 장백산도 낮다고 한발에 딛고 넘어가려고 한다. 뭐, 맹동적인 기분에 불과하겠지만 “강아지”로서는 그런 웅심이 있어야 할것 같다. 생각이 커야 구상도 커지고 써낸 작품도 클것이 아니겠는가! 많은 문단 “강아지”들은 처녀작으로 명성을 날렸엇다. 아마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것 같다. 다음으로는 구속감이 없다. 자유자재로 논다. 체면이 깎이울가봐 념려되는 근심도 모르고 말하고 싶은걸 말하고 쓰고 싶은걸 써낸다. 그러니 자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수있는것이다. “도깨비”같은 글이라도 어떤것은 엉뚱한데가 있게 된다. 창작에서 제일 귀중한것을 가지고있는 셈이다. 그다음으로는 열이 높다. 늘 펄펄 끓는다. 문학도들이 겨울에 털모자를 쓰고다니는걸 못봤다. 열이 심하니 추운줄 모른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열변을 토하고서도 이튿날이면 싱싱해서 깡충거렸고 밤잠을 자지 않고 원고지를 메우고서도 이튿날이면 눈이 또릿또릿해서 발발 기여다닌다. 이밖에도 “고기점”이라도 던져줄만한 특점들이 많다. 반면에 이러저러한 약점들도 많이 보인다. 주요하게는 채 성숙되지 못한 까닭에 면역력이 약하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회의 류행성유혹에 잘 넘어간다. 대개 중도반단하고 필을 꺾게 된 문학도들을 진찰해보면 이런 류행병에 걸려들어 제대로 되는 치료를 받지 못한것이 그 주요원인으로 되고있다. 요즘 세월에 농촌에 가보면 덩실한 새 주택들이 줄지어 일어서고있는데 강아지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우리 “외가집”이 있던 동네가 옳은가고 의혹이 들 지경이다. 역시 문학동네에 들려봐도 “강아지”들이 엄청나게 줄어들고있다. 어설푼 감이 서늘하게 스며든다. “부모”님들의 “계획생육”이 잘되였다는 현상일가? 아니면 “밤작업”이 원활하게 되지 못한 원인이였을가? 상전벽해라 아무튼 문학동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변해가고있으니 별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제날 행복했던 시절을 그려보며 또 어느 땐가에는 “강아지”들이 다시 문단어귀에서 오골보골 법썩 끓어번질수 있기를 기대해 볼뿐이다.
39    세 상 특 미 — 돼 지 고 기 댓글:  조회:1285  추천:0  2013-07-01
세 상 특 미 — 돼 지 고 기 홍 천 룡 삼겹살(五花肉)하면 돼지고기중에서도 막등고기여서 값도 제일 눅었다. 돈이 없고 썰썰할 때면 삼겹살 둬어근 떠다가 시래기국이나 끓여서 생활개선을 하군 했는데 요즘은 그것도 값이 껑충 뛰여 둬어근 사자면 십원짜리 석장쯤은 메쳐야 한다. 식당에 가봐도 돼지고기료리가 잘 나간다고 한다. 값이 비싸지니 아마 맛도 덩달아 달라진 모양이다. 나는 돼지고기가 눅을 때나 비쌀 때나 다 맛있다. 세상에 맛있다는걸 두루두루 검식해봤지만 나중에는 그래도 돼지고기가 제일이다. 언제나 아무렇게나 해먹어봐도 늘 구수하고 만만하다. 맹물에다 삶아 소금에 찍어먹어도 맛있고 양고기뀀처럼 구워먹어도 고소하고 지어 소고기생회처럼 회를 쳐서 먹어도 물씬한 감이 난다. 언제나 편안하게 맛있게 먹을수 있고 수시로 영양보충도 할수 있는게 돼지고기이다. 우리 나라 공민들의 부식물해결에서 돼지고기는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지난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것 같다. 30여년전에는 돼지고기도 쌀처럼 공급제를 실시했었다. 매인당 매달 어떤 때는 반근, 어떤 때는 한근반, 돼지고기국에다 이밥을 말아먹는 날이면 명절이였다. 농말국수에다 흰살된살 반반인 돼지고기를 넓쩍넓쩍 썰어넣고 국을 해놓으면 서로서로 땀을 흘려가며 후르륵 후르륵 들이마셨다. 거침없이 련달아 말려들어가는 속도에 돼지고기맛이 우려나오는것일가!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아마 신선도 그 맛은 다 모를 터였다. 어느 결에 후딱 해치우고는 숟가락으로 사발밑굽을 달달 긁으면 뜨거운 가마목을 지키느라 면상이 시루떡이 된 어머니가 흡족해서 한국자 더 떠준다. 그 맛, 그 정, 그 행복감! 그 세월에는 제때에 고기맛을 보지 못해 영양실조로 키도 크지 못하고 몸도 푸들지 못했던 아이들도 많았고 지어 질병에 걸려 모대겼던 아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당시 제일 무서운 병은 결핵이였다. “결핵병은 돼지고기만 제때에 먹어도 떨어지는건데…”라고 한탄하는 로인들의 말씀을 여러번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일여덟살쯤 되던 해라고 기억된다. 설밑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달라재”라는 깊은 시골마을로 친척방문가게 되였다. 아버지가 꼬댕꼬댕 언 돼지고기를 내 팔뚝만치나 샀고 거기에 량식공응점에서 탄 밀가루를 반주머니쯤 가지고 갔었다. 그집에서 그걸로 물만두를 빚었다. 언배추도 서너통 들여다 푹푹 썰어서 넣었다. 배추가 너무 많이 들어가 서벅서벅거렸다. 별로 맛이 없었다. 허지만 더덕더덕 기운 옷견지들을 되는대로 걸친 그집 식구들은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볼이 미여지게 먹고있었다. 꼬박 3년만에 물만두맛을 다시 본다며 그집 큰어머니가 감개무량해 하였다. 한창 정신없이 먹고있는데 뒤고방쪽으로부터 콜록거리는 기침소리가 련달아 울려나왔다. “에그머니야, 깜박했구나. 그 맛부터 먼저 보느라구…” 큰어머니는 둥깃한 몸을 비틀며 김이 서려오르는 가마안에서 물만두를 꺼내 한사발 담았다. “누군데요?” 내가 무엇이나 물어보고 알고서야 시름을 놓을 때였다. “오냐, 네게는 누나벌 되는 앤데 그만 몹쓸병에 걸려서…” 나는 물만두가 먹고싶지 않던차라 발딱 일어나 그 사발을 쥐여들려고 했다. 누나벌 된다고 하니 보고싶기도 했었다. 헌데 어머니가 말없이 내 팔소매를 와락 잡아당겼다. 어찌나 힘주어 당겼는지 나는 그 자리에 풀썩 물앉고말았다. 큰어머니가 서글프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그 방으로 못들어간단다. 내가 가져다줘야지.” 큰어머니는 사발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것이였다. 웬일인가 싶어 살펴보니 뒤고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누런 종이로 완전도배되여있었다. 오후에는 싸락눈이 푸실푸실 내렸다. 그때 나는 뒤울안에서 멀찌감치 그 누나를 보게 되였다. 낮다랗게 드리운 초가집처마밑으로 자그마한 뒤고방뙤창문이 달려있었는데 네모난 변두리에는 하얀 성에가 끼여있었고 중간 부분이 동그랗게 녹아있었다. 아마 그 누나가 바깥세상을 내다보느라 입김으로 녹아낸것 같았다. 그 동그란 거울속같은 유리창에 하얀 얼굴에 하얀 이발이 나타나며 얼른거렸다. 우리를 보고 웃는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서 보려고 하니 그집 둘째 누나가 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안돼. 가까이 가면 병에 전염된단다.” 나는 병에 걸린 사람을 병원에 보내지 않고 왜 가둬두고 있을가 하는 생각에 애처러운 감에 젖어들었다. 그때 어머니가 와서 다짜고짜 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집 식구들이 우르르 다 나왔다. 큰어머니가 달려와서 나의 호주머니에 지페 한장을 밀어넣었다. 그걸 어머니가 다시 꺼내 큰어머니의 손에 꾸겨주었다.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서로 손을 잡고 밀고당기고 했다. 그러다가 그 지페가 하늘거리며 눈우에 떨어졌다. 그제야 둘은 서로 손을 뗐다. 어머니의 눈에도 큰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가 그 돈을 주어 큰어머니의 바지호주머니에 밀어넣었다. 큰어머니가 더는 참지 못하고 끄억-끄억- 흐느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다음 누나의 병이 떨어지면 다시 놀러오너라. 밤잠이라도 재워서 보내야 하는건데…” 동구밖은 새뽀얀 눈보라속에 잠겨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팔을 끌며 그 속으로 향했다. 나는 한참씩 끌려가다가는 눈보라속으로 희미해지는 마을을 뒤돌아보군 했다. 그 속에서 하얀 얼굴에 하얀 이발이 얼른거리는것만 같았다… 썩 후에야 나는 페결핵에 걸린 그 누나가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는것을 알았다.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도 못받고 집식구들에게 전염된다고 동생들과도 함께 놀지 못했단다. 그날 아버지가 가지고 간 돼지고기와 밀가루로 빚은 물만두를 먹고 너무나도 맛있다며 한사발만 더 먹고싶다고 했다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돼지고기를 고까짓걸 사가지 갔다고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 누나가 치료는 제대로 받지 못했어도 돼지고기만 자주 먹을수 있어도 죽지는 않았을텐데… 그 세월에는 돼지고기가 귀한 때라 농촌에서도 가가호호 돼지를 길렀고 도시직공호에서도 돼지를 기르는 집들이 있었다. 우리 건너집 종구네가 손바닥만한 울안에다 돼지를 두세마리씩 길렀는데 여름이면 악취가 코를 찔렀고 파리떼가 무리로 웽웽거렸었다. 그래서 아래웃집사이에 늘 말썽이 생기군 했었다. 남들이야 욕설을 퍼붓든말든지간에 그집에서는 악을 쓰고 돼지를 길렀다. 당시 돼지 한마리를 푸등푸등 살찌워 식품공사에 바치면 값은 값대로 받고 장려로 사료용 겉옥수수 한마대를 더 탈수 있었기때문이였다. 집집이 쌀알이 귀할 때라 겉옥수수 한마대면 집안살림에는 큰 보탬이 되는것이였다. 간혹 어느 집에서 기르던 돼지가 병이 들었거나 혹은 특수정황으로 말미암아 돼지를 엎어놓고 추렴할 때가 있게 된다. 그럴 때면 온동네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모두 나와 그 주위를 빙 둘러싼다. 흥분된 백정들이 번뜩이는 칼을 휘두르면서 괜히 희떠웁게 서로 소리를 먹이며 분위기를 돋군다. 맨나중에 창자를 끄집어내여 처리할 때에는 발그무레한 콩팥을 떼내 도마우에다 놓고 싹싹 저민다. 그러면 김이 몰몰 피여나 정말 맛갈스러워 보인다. 백정들은 술을 한두모금씩 쪽쪽 내고 그걸 소금에 뚝뚝 찍어서는 턱을 잔뜩 쳐들고 입안에 밀어넣는다. 야, 얼마나 맛있을가! 곁에서 그저 보아주기에는 참기 어려울 지경이였다.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개혁개방이 되면서 돼지고기공급제가 취소되였다. 마음대로 사다가 마음대로 해먹을수 있게 되였다. 어머니가 하루이틀이 멀다하게 신선한 돼지고기를 사다가 국도 끓이고 채도 볶았다. 매일 명절을 쇠게 되여 꿈만 같았다. 가끔 그 친척집 누나가 세월을 잘못 만나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은 페결핵에 걸려도 웬간해서는 죽지 않는다. 돼지고기를 마음대로 먹을수 있는 세월이니깐. 지난 세기 50-60년대에는 중국공민의 평균 수명이 50세가량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70세가 휠씬 넘어 세계선진수준에 거의 이른다고 한다. 여기에는 돼지고기의 공헌이 컸다. 나는 지금도 돼지고기를 즐겨먹는다. 배안에 곱이 찼는지 예전처럼 많이 먹지는 못하지만 자주 먹는다. 돼지고기가 느끼하다고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권장하고 싶다. 먼저 잘 익은것으로 한입만 뚝 떼서 입안에 넣고 꼭꼭 씹어보시라. 느끼할가 말가 얘싹할가 말가 한 그 맛이 얼마나 고소하다고. 세상특미— 돼지고기! 나는 계속 그걸 먹으며 건강을 지켜보련다. 나 뿐만 아니라 전국인민이 그걸 먹으며 건강을 지켜나갈것이다.
38    돌멩이가 옥으로 다듬어지기까지 댓글:  조회:1504  추천:1  2013-06-28
•예술의 이야기• 돌멩이가 옥으로 다듬어지기까지 홍천룡 중국에는 “화벽수주”(和璧隋珠)라는 성구가 있다. 거기에 첫 두글자 “화벽”에는 이런 옛말이 깃들어있다. 춘추시기에 초(楚)나라의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투둘투둘한 돌멩이 하나를 주었는데 그는 그것이 세상에서 보기드문 옥돌이라고 인정하였다. 나라의 백성으로서 일편단심을 지닌 그는 그것을 초나라 려왕(历王)께 바쳤다. 그것을 본 려왕은 그것이 돌멩이지 어디 옥인가고 대노했고 언감생심 나라의 임금님을 속였다고 그의 왼쪽다리를 잘라버렸다. 후에 초무왕(楚武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곁사람들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또 그 옥돌을 바쳤다. 초무왕 역시 돌멩이라고 여기고 한쪽밖에 없는 그의 오른쪽다리마저 잔혹하게 잘라버렸다. 후에 개명한 초문왕(楚文王)이 즉위하니 변화는 그 옥돌을 끌어안고 밤낮없이 대성통곡하였다. 그 까닭을 알게 된 초문왕은 사람을 시켜 그 돌멩이를 까고 제련하고 다듬어보게 하였다. 반복적인 가공을 거쳐 마침내 더없이 귀하고 정결한 옥이 나왔다고 한다. 정말 무서운 인내심으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결과였다. 돌멩이가 옥으로 되기까지는 이처럼 간난곡절을 겪게 된다. 그걸 보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걸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걸 가공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무생명적인 옥이 이럴진대 유생명적인 인간이 무재로부터 인재로, 더 나아가서는 천재로 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간난곡절을 겪어야 할가! 전번 날 작품전을 벌린다고 한국으로 떠나는 동창생 신만호씨를 만났다. 그는 수십년간 과외로 서양화를 전공해온 “토배기 화가”였다. 크게 이름을 날리지 못했지만 그는 자기가 전공하는 서양화에 아주 큰 자신심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하군 했다. “내가 혼을 빼서 그린 작품이 그 어느 땐가에는 세계화단에서 빛을 보일게다. 그것이 나의 생전이 되겠는지 사후가 되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날이 꼭 오게끔 죽을 때까지 붓대를 놓지 않을거야!” 그의 제일 큰 꿈은 세계적인 문화대도회지 빠리에 가서 한번 개인작품전을 꾸려보자는것이다. 그걸 위해 그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래일도 화실에 몸을 잠구고 혼신을 다 바쳐 그렸고 또한 그릴것이다. 신만호는 식구가 열한명이나 되는 대가정에서 넷째로 태여나 가난하게 살아왔다. 늘 배를 곯아 마을주변의 채마밭에 기여들어 가지며 오이며 훔쳐먹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적도 여러 번 된다. 그때 그 시절에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랐다. 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요인은 어느 한 “봤다-꿍!”이라는 숨바꼭질 놀음에서였다. 술래에게 들키우지 않겠다고 어느 한 집의 창문밑으로 기여들다가 순간적으로 방안을 피끗 훔쳐보던 그의 눈이 홀연 휘둥그래졌다. 그는 앙증스레 창문에 매달려 방안을 완전히 시야에 잡아넣었다. 방안 벽체에 거폭의 그림이 걸려있었던것이다. 그처럼 크고 황홀한 그림을 그는 처음 보았다. 그는 술래가 쫓아와서 “만호, 봤다-꿍!”하고 소리치는것도 모르고 그 그림에 얼을 빼앗겼었다… 그 집이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의 저명한 화가 석희만선생님네 저택이였다. 어릴 때에는 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희구하게 보이는 것이 어린 심령에 충격을 주게 된다. 그 그림에서 충격을 받은 만호씨는 그때부터 그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숙제공부는 뒤전에다 쓱- 밀어놓고…자기절로 자기의 몸속에 있는 “옥”을 발견한 셈이였다. 세상에서 제가 그린 그림이 제일 멋있다고 여긴 그는 동학들 앞에서도 자랑했고 선생님 앞에서도 자랑했고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도 자랑했다. 헌데 그들이 모두 그의 붓대를 “잘라버리자”는 “려왕”이였을줄이야!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고소장”이 날아들었고 부모들의 “빗강대”에 볼기가 부어났고 동학들의 조소가 그칠새 없었다. 허지만 그의 그림 그리기열정은 점점 더 죽가마처럼 끓어번졌다. 그에게는 일주일에 한시간밖에 없는 도화(图画)시간이 제일 재미있는 학과목이였다. 헌데 그도 시기를 잘못 만난 것 같다. 소학교 5학년때부터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도화시간이 취소당했다. 최저한 미술에 대한 상식도 배울수 없게 되였고 전반 사회적으로 미술을 한낮 심심풀이장난으로 우습게 여기게 되였다. 한창 배울 때 토대를 닦지 못한 것이 만호씨에게는 큰 허점으로 남게 되였다. 마치도 초무왕이 변화의 오른쪽다리를 잘라버린것과 비슷한 정경이라고나 할가! 허지만 세월은 한쪽으로만 기울며 흐르는 것이 아니였다. 신만호씨한테도 초문왕과도 같은 귀인이 어깨를 툭 쳐주시고 가신 적이 있다. 바로 방안 벽체에다 거폭의 그림을 걸어놓아 신만호씨의 호기심을 당겨주셨던 석희만선생님이시다. 만호씨는 석희만선생님의 둘째 아들 석아룡씨와는 송아지친구였다. 그런 연줄로 자기의 창작품을 석희만선생님께 뵈이고 가르침을 받을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그의 어깨를 쳐주시며 “어물쩍하구나. 노력하면 될거야!”라고 격려해주시군 하셨다. 거기에서 큰힘을 얻은 만호씨는 집체호에 내려갔을 때나 시내에 들어와 건축회사에 다닐 때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붓대를 놓은 적이 없었다. 전문학교를 나오지 못한 그는 남보다 열배이상의 노력으로 분투해야만 한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후에는 아예 직장까지 버리고 나와 서양화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로임이라곤 일전한푼 없다. 부인의 로임에 매달려 세 식구가 살아왔다. 그 생활이 어떠했겠는가를 상상해볼수가 있다. 허지만 그는 그림을 그릴수 있다는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다며 늘 랑만적인 분위기에 빠져 논다. 1992년 7월에 서울 롯데미술관에서 중국동포 서양화가 신만호의 첫 초대전이 성황리에 열렸다. 작품은 36점이였고 5일간 진행되였다. 두번째 전시회는 그해 11월에 경북 포항의 시그너스호텔에서 열렸다. 경북매일신문사에서 주최하였던것이다. 한국화단의 많은 전문가들도 “대륙풍이 물씬 풍기는 표현과 색채의 조화가 잘 어울려져 특색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신만호씨의 한국행 제3차초대전도 역시 성황리에 성공적으로 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앞으로 그가 꼭 우리 민족을 위해 좋은 걸작을 내오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37    그때 그 시절의 문학꿈2 댓글:  조회:1969  추천:2  2013-06-27
그때 그 시절의 문학꿈 홍천룡 2 지난 세기 80년대는 중국에서 개혁개방의 봄철이라고 할수 있었다. 산곡간의 잔얼음이 녹아내리고 평야의 만물이 소생하고 화단의 백화가 만발하는 춘삼월이였다. 특히 우리의 문단은 그 가운데서도 잔설속의 진달래였다. 50년대에 “우파”모자를 쓰고 내내 “흙”속에 파묻겼던 원로 시인과 작가들, “문화대혁명”에 “명”을 잘리운 중견 시인과 작가들이 이 시기에 다시 모든 걸 툭툭 털고 일어나 붓대를 되찾아쥐였다. 그들의 붓끝에서 메새의 지저귐이 다시 울렸고 가슴속에 맺혔던 울화가 곡성으로 터졌고 사랑의 희비극이 눈물로 흘러내렸다… 광야의 모래불에서 문화의 고갈을 이기지 못해 갈증이 심했던 우리 민족독자들에게 퐁퐁 솟구치는 샘물을 바가지짝으로 푹푹 퍼주었다. 그래서 만민이 문학작품을 보고 만민이 만천하에 감격의 눈물을 휘뿌리는 “문학부흥”시기가 초래되였다. 그 “문학부흥”시기에 그 호시절에 나는 20대후반의 젊은 나이에 젊은 패기로 조선족문단의 최고원지−”연변문예”잡지사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일종 그 어떤 사명감으로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눅잦히지 못하고 들어섰다. 출근해서 몇 달은 붕- 떠서 돌아쳤다. 리상각주필님을 따라서 흑룡강의 목단강, 상지, 할빈, 탕원, 가목사, 화천 등지를 한바퀴 빙 돌았고 장지민과 김호근주임님을 따라 룡정, 화룡, 왕청, 도문, 훈춘 등 지방도 한바퀴 빙 돌았다. 현시에 내려가면 선전문화부문의 지도일군들이 맞아주었고 향진에 가면 당위서기들이 배동했고 어느 과외작가의 집에 찾아들면 닭을 잡는다 두부를 앗는다 하는 최고대잡을 받군 했었다. 그들의 그 열정에 마음도 녹아나고 몸도 녹아날수 밖에 없었다. 그 열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편집사업을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지였다. 헌데 정작 들뜨는 정서를 가라앉히고 편집에 달라붙자고 하니 말못할 고충과 내놓고 해결하지 못할 난제들이 한두가지 아니였다. 금방 들어온 후배로서 말단 편집인 나에게 차려진 첫 과업은 매일 투고되여 한아름씩 들어오는 원고였다. 눈이 아홉이 되여 밤잠을 자지 않고 본다 해도 근본 다 보아낼수 없는 원고더미였다. 그다음 난제는 나의 주변에는 나와 수시로 련계를 취할수 있는 기성작가군이 형성되지 못했기에 발표에 통과시킬만한 작품을 편집할 수가 없는것이였다. 편집부소설조내에는 모두 다섯명이였는데 어떤 편집은 원로작가들을 맡고 어떤 편집은 청년작가들을 책임지고 어떤 편집은 녀성작가들을 대상하고있었다. 둬어달은 그럭저럭 한편도 편집하지 못하고 원고더미와 씨름했다. 투고되여 오는 원고가운데는 별의별 글들이 다 있었다. 몇십만자씩 되는 장편도 있었고 몇백자도 안되는 통신보도와 같은 손바닥만한 글도 있었다. 그런데 내눈에도 쓸만한 작품이 보이질 않았다. 당시 초학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심각하게 느꼈다. 열정은 높았으나 필력은 여물지 못했었다. 하루는 소설가 림원춘선생님이 작품 한편을 가지고 와서 남주길선생님께 맡기셨다. 남선생님이 그걸 보신다음 나를 부르셨다. “천룡이, 이걸 좀 한번 해보오. 내 생각에는 작품도 괜찮고 또한 천룡의 풍격과도 맞는 것 같소. 이름있는 작가의 작품이래서 주눅이 들지 말고 고칠건 고치고 빼버릴건 빼버리면서 대담하게 해보오.” “예!” 그때는 정말 남선생님이 눈물나게 고마웠었다. 그러면서 근심이 앞서기도 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누구의 글에도 손을 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 남의 글에 손을 대게 된 작품이 저명한 소설가의 작품이여서 손이 떨리기도 했다. 처음 편집하는 작품이라 잘해보리라 마음먹으면서 우선 두세번 읽어보았다. 슈제트의 째임새나 인물부각, 정서흐름, 세절묘사에 이르기까지 흠 잡을데 없는 작품이라고 인정되면서 일부 빼버려도 좋을 곳이 있다고 인정되였다. 나는 조심스레 사전을 찾아가며 편집했다. 그때는 작자가 직접 쓴 원고에 대고 철필로 지우고 가필하면서 편집할 때였다. 나는 철필을 안쓰고 먼저 연필로 가필했던것이다. 그러면 잘못 되여도 원문에 손상없이 지우고 다시 보면서 수개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렇게 연필로 편집한 것을 주임께 바치고 주임이 그걸 주필실에 넘겼다. 나는 저으기 긴장되는 심정으로 통과여부를 기다렸다. 당시 편집부에서는 “3심제”(三审制)를 실시했는데 아주 엄격했다. 일심에서 “챵비”(枪毙:심사에서 떨어진 작품을 이렇게 한어로 비유했음)당하는 작품은 헤아릴수 없이 많았고 2심에서 떨어진 작품도 많았다. 관건은 주필심사관이였는데 까리까리한 작품은 대개 거기까지 허덕지덕 올라갔다가는 좌르르 미끌어져 내려올 때가 많았다. 그러면 작자도 허탈감에 빠지고 그걸 편집한 편집도 멋적은 기분에 빠지군 했다. 한편의 작품을 발표시키기 위해 정말 편집들도 심혈을 아끼지 않았던것이다. 어떤 작품은 몇번씩, 지어 수십번씩 수개시키면서 겨우 그곳까지 올라갔는데 여지없이 “챵비”를 맞군 했다. 이름있는 작가의 작품들도 락자없이 떨어지는 것이 많았다. 들어오는 작품은 많고 발표원지는 제한되여있고 또한 사회의 각계 각층의 독자들과 지명인사들이 잡지에 대한 요구가 높았기 때문에 그렇게 “무정”할 수밖에 없었던것이다. 며칠후 주필님이 그 작품을 가지고 들어와서 내 책상우에 놓으며 느긋한 미소를 지으셨다. “작품도 괜찮고 편집도 잘되였구만. 이 연필로 가필한 부분을 깨끗이 지우고 다시 정식으로 해서 올려보내오.” 나는 안도의 숨이 활 나가며 기분이 상쾌해졌다. 나의 첫 편집임무가 완성된 셈이다. 그 작품이 발표된다음 림원춘선생님이 저녁식사나 함께 나누자며 우리를 부르셨다. 남주길선생님이 일이 있어 못오시고 나와 최홍일씨가 선생님네 댁을 찾아갔다. 내 기억에는 지금의 신화서점자리인 것 같은데 길녘의 단층줄집에서 맨 앞줄 제일 동쪽집인 것 같았다. 옛날 내가 공신 “웅덩개마을”에서 개구쟁이로 홀랑거릴 때 딱친구 동엽의 아버지가 시인이였다. 백여호넘는 그 큰 마을에서 그 집이 제일 으리으리했던것이다. 뜨락에는 앵두나무도 있었고 기이화초도 울긋불긋 자라고있었다. 동엽이를 따라 그 집에 들어가 놀면서 보면 집안에 없는 것이 없었다. 라지오, 손풍금, 재봉침… 다른건 몰라도 그 당시 연길시내에 손풍금이 있는 집이 몇집이나 되였을가! 서재에 들어가보면 벽을 꽉 메운 책들이 정말 대단했었다. 후에야 나는 동엽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우리 문단에서 일찍부터 명성을 떨쳤던 “설인”선생님이시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인상이 있어서 대개 저명한 작가나 시인이면 저택이 큼찍하고 서재도 으리으리할것이라고 추측했었다. 헌데 림선생님네 집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나의 추측이 빗나갔음을 감지했다. 밖에서 외면으로 볼 때는 좀 높직이 올라앉은 주택인 것 같았는데 정작 문안에 들어서니 집안은 푹 꺼져있었다. 지은지 일정한 년한이 지났음을 말해준다. 실내는 기껏해야 이십여평방메터쯤 되는 통칸방이였는데 미닫이로 아래웃방을 갈라놓고있었다. (아, 이런 곳에서 숱한 작품을 써내셨구나) 하는 감수가 차분히 젖어들면서 나는 집안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성격이 소탈한 림선생님이 우리들과 야, 자 하며 술잔을 나누시여 기분이 둥글어졌고 우리도 흔쾌하게 마시며 문학과 창작에 대해 갑론을박 하느라 밤이 깊어가는줄 몰랐었다… 그 작품은 그해 “연변문예”문학상에 당선되였고 후에 “전국우수단편소설상”까지 받게 되였다. 그 작품이 다름 아닌 “몽당치마”였다. “몽당치마”를 편집하고 나서 나에게는 편집사업도 잘해낼수 있겠다는 신심이 생겼다. 관건은 인재를 발굴해내는것이다. 많은 인재를 발견해내고 그들을 잘 인도해야만 그들에게서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올것이고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와야 나의 편집사업도 원만하게 해나갈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며칠 품을 들여 한쪽 구석에 무져진 원고더미를 정리했다. 투고된지 오랜 원고부터 쭉 내리 훑었다. 첫 서너페지를 훑어보아 “싹수”가 파랗게 보이는 원고면 쑥 뽑아놓고 처음부터 “싹수”가 노랗게 보이는 원고면 아예 구석쪽에다 처넣었다. 그렇게 고른 원고가 40여편 되였다. 그 가운데서 다시 더 “체질”하여 20여편 골라잡았다. 나는 그걸 가방에 넣어가지고 선생이 아이들네 집 “가정방문”하듯 한집한집 찾아떠났다. 안도현만보에 가서 차경순네 집을 찾았고 두만강을 굽이굽이 에돌아 오르다가 강녘에 자리잡은 부유향 하마령에 가서 윤희언을 찾았고 평강벌 투도에 가서 리태근을 찾았고 도문시에 가서 송호석을 찾았다…그렇게 20여집을 돌면서 어떤 집에 가서는 하루밤, 어떤 집에 가서는 이틀밤, 어떤 집에 가서는 사흘밤씩 자면서 수개시켰고 다시 쓰게 했다. 며칠후에 그 수개시킨 20편작품이 다시 나한테로 날아왔다. 나는 그 가운데서 다시 추리고 선정해서 10편을 골라잡고 다시 또 수개시켰다. 두번째로 날아온 수개원고부터는 수개의견대로 미끈하게 빠진 작품은 남겨두고 그렇게 되지 못한 작품은 반복적으로 수개시켰다. 어떤 작품은 세번만에, 어떤 작품은 네번만에… 제일 많이 수개시킨 작품은 김극민의 “박씨부인”이란 작품이였는데 내 기억에는 아마 일여덟번 수개시킨 것 같다. 맨나중에 김극민선생님이 머나먼 부유 한끝에서 달려와 나한테 수개원고를 맡기면서 이런 말로 뒤끝을 사렸다. “두손 바짝 들었소. 되든 안되든 인젠 홍선생께 맡기겠소.” 그러면서 선자리로 돌아가려는 그를 붙잡고 눌러앉힌다음 나는 상세하게 그 수개원고를 본다음 또다시 수개시켰다…그렇게 반복적으로 수개시키고 다듬은 열편의 처녀작으로 나는 그해(1983년) “연변문예”잡지 제9기에다 “신인작자소설묶음”을 내왔다. 그 가운데서 서너편이 주필관을 넘지 못하고 “챵비”를 당한 외에 대부분이 그 “묶음”란에 나갔다. 그 “묶음”의 편자의 말에다 나는 이렇게 썼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국화만발한 황금의 구월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몇몇 문학신인들이 《처녀지》를 개간하여 지은 《오곡》으로 여러분께 《햇밥》을 지어드리고저 《신인작자소설묶음》이라는 《상》을 차렸습니다. 여러분들과 초면이거나 아직 익숙하지 못한 그들은 갖가지 《음식》을 정성껏 갖춰놓고 인사를 나누잡니다. 이 《상》엔 각자의 부동한 생활체험으로부터 공장생활을 반영한것도 있고 농촌생활을 보여준것도 있으며 인민교원의 뜨거운 사랑을 구가했는가 하면 오늘날 대학생들의 순결한 애정을 노래하기도 했으며 가정생활의 인정흐름도 썼기에 그야말로 하얀 이밥에 노란 기장밥, 모두부에 토실토실 터지는 감자들이며를 소담하게 차려놓은 우리 민족의 팔각소반을 방불케 합니다. 구미는 돋구는데 구경 그 맛이 어떠한지 여러분께서 검식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상》을 차리면서 우리는 또한 문학을 지향하려는 청년동무들에게 한마디 하고싶습니다. 문학의 길에서 《처녀지》를 개간하자면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 고생속에서 삶의 희열을 느낄수 있고 청춘의 희망을 꽃피울수 있지 않을가요? 그대들이 지은 《햇밥》은 언제쯤 가서 맛볼는지요?… 그 신인작자작품들중 제일 많이 수개시켰던 김극민의 “박씨부인”이 그해 “연변문예문학상”을 탔던것이다. “신인작자소설묶음”이 나간다음 사회적반향은 아주 강렬했다. 특히 농촌독자들과 농촌의 문학애호가들에게 준 영향은 아주 컸다. 그 시기는 연변의 문학부흥시기였다. 당시 연변의 유일한 문학지인《연변문예》가 금방 복간되였고 길림의 《대중문예》와 통화의 《장백산》잡지가 금방 창간되였을 때였다. 《연변문예》가 매기에 7-8만부씩 나갔으니까 전 중국조선족을 대상하여 19명에 한부씩 돌아가게 발행된 셈이였으니 대단했던것이다. 당시 전 중국적으로도 그처럼 발행비률이 높은 잡지는 없었다. 문화소양이 높은 우리 민족의 자랑찬 과시가 아닐수 없었다. 농촌에 가보면 젊은이 셋 가운데서 한 사람쯤은 문학도라고 자칭했을 정도였다. 처녀들도 문학청년이라면 다른 눈길로 흠모의 정을 보내군 했었다. 그러니 모든 과외작자들이 “신인작자소설묶음”에 주의를 돌리게 된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알았는지 하루에도 나의 앞으로 수십편씩 되는 작품들과 편지들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신인작자소설묶음”같은 절목란을 될수록 많이 개설하여 자기네와 같은 신인작자들의 처녀작을 많이 실어달라는 요구를 강렬하게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강렬한 요구는 만족될 수가 없었다. “연변문예”잡지가 신인들만 위한 원지가 아니였다. 기성작가들의 성숙된 원고도 다 실어주지 못하는 실정에서 미숙한 원고들을 “특수우대”하여 내줄수는 없었다. 기성작가들과 신인작자들의 수준차이는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있었다. 신인작자로서 처녀작을 한편 발표한다는 것이 정말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었다. 한편 발표하면 그 사람의 인생행로를 바꿔놓는 계기로도 되군 했었다. 작품발표가 이처럼 어려우니 적지 않은 열혈청년들이 문학창작이라는 이 “용광로”에 뛰여들었다가도 너무 뜨겁다고 나와버린다. 그들 가운데는 천부적인 창작기질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허지만 별수 없었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재목”을 안타깝게 바라 볼 뿐이였다. 개산툰에 윤가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나를 부지런히 찾아다녔었다. 올 때마다 글을 서너편씩 써가지고 와서는 봐달고 간청하군 했다. 써가지고 온 글들은 정말 농촌벽보란에다나 낼수 있는 “좋은 사람 좋은 일”같은 “표양신”들이였다. 처음에는 대강 보는척 하다가 무뚝뚝하게 “작품이 안됐다”는 한마디로 돌려보내군 했었다. 그런데도 며칠에 한번씩 끈질기게 찾아다녔다. 구차한 살림에 차비를 팔며 다니는 그 갸륵한 열정에 저으기 감화되여 점차 상세하게 봐주며 내심하게 일깨워주군 했다. 그러는 가운데서 그의 필력도 눈에 뜨이게 늘어났고 습작수준도 많이 제고되였다. 나중에는 어물쩍한 글을 써가지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될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그한테 걸어보게 되였다. 그는 나의 손에서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 편집되여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야, 나의 글도 한번 좀 활자로 인쇄되여 나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그 순진한 얼굴에 비껴지는 동경심이 나를 자극했다. 어찌나 한편쯤은 발표되도록 도와주자! 드디여 그는 발표할 가망이 보이는 글을 써왔다. 나는 그를 붙잡고 이래저래 반복적으로 수개시켰다. 그도 발표할 가망이 보인다는 소리에 부쩍 힘이 솟구쳐서 이틀이 멀다하게 개산툰으로부터 연길로 오르내리며 나의 수개의견을 “성지”처럼 받들고 이렇게 뜯어고치라면 이렇게 뜯어고치고 저렇게 뜯어고치라면 저렇게 뜯어고치면서 수개에 집념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정리하고 편집해놓은다음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미타한 점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시 또 수개시켰더니 그는 가타부타 한마디 불평도 없이 집으로 가지고 가서 다시 수개해왔다. 그것을 내가 좀 더 가필한다음 정식으로 주임께 올려보냈다. 주임도 그것이 애타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지라 별 의견없이 주필실로 넘겼다. 그 작품의 “운명”을 기다리는 시간이 더 안타깝기만 했다. 윤씨는 며칠에 한번씩 와서 물어보지 않으면 편지로 소식을 탐문하기도 했다. 무엇이 그를 문학에 그처럼 “미치”게 하였을가? 만약 그가 그 어느 한 녀자한테 그처럼 집념했으면 그 녀자가 나중에 몸을 풀고 마음도 바치지 않고서는 견디여 내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일종 무슨 힘이였을가? 지금까지 인류개명사에서는 정신적으로 신앙의 힘이 제일 막강했다고 한다. 문학도 인간의 생활본질을 보여주는 정신적예술인것만큼 그 힘이 막강할것이다. 문제는 그 힘을 어떻게 키워주겠는가에 달렸다. 곁에 앉아 풍구로 바람을 불어주면 불길이 더 세차게 타번질것이고 높이 서서 바가지짝으로 물을 퍼부으면 불길이 사그라질것이다. 둬어달 목이 빠지게 기다린 뒤에야 그 작품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였다. 이러저러한 미숙한 점들이 보여 발표하기에는 곤난하다는것이였다. 나는 기분이 크게 상했다. 내가 이런 기분인데 작자본인한테 알리면 얼마나 큰 정신적 타격이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편지로 알릴가 하다가 그만 두고 한번 왔다가라고 기별을 띄웠다. 기별을 받자마자 그는 달려왔다. 그 어떤 좋은 소식이라도 있겠거니 해서 희색이 만면해서 들어섰다. 나는 그의 원고를 슬며시 가방에 집어넣고 그를 데리고 맥주점으로 갔다. 맥주를 마시면서 문학창작에 대해 론했고 그의 창작수준이 제고된 점에 대해 많이 긍정해주었고 부족되는 점도 지적해주었다. 나중에 그의 원고를 내놓고 주필관을 넘지 못한 원인을 분석해주었다. 원고를 내놓는 순간부터 그의 낯색은 변했고 입이 꾹 다물어졌다. 갈라질 때 대문밖으로 나서며 돌아지던 그가 고개를 휙 돌렸다. 순간, 눈가에 맺힌 이슬이 오후 해빛에 반사되여 반짝이였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은 나의 심정은 무겁기만 했다. 원고를 보자고 펼쳤지만 원고의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밀어놓고 신문을 펼쳐들었다. 신문의 내용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문도 와락 뿌리치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리고 사색에 잠겼다. 그의 작품이 그래 발표될 수준에 도달못했단 말인가? 물론 옥에도 티가 있을라니 졸작이든 명작이든 내놓고 흠을 꼬집어내려면 이래저래 다 꼬집어낼수 있는것이다. 아무리 반복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도 초학자로서 그의 작품은 발표될 수준에까지는 이르렀다고 인정되였다. 그렇다면 나의 편집이 미진해서 주필관을 넘지 못했을가? 원래의 초고와 수십번 수개를 거친 원고를 대비해보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까리까리한 작품이 우리 편집부, 우리 소설조, 나의 손에서만 얼마나 많이 떨어져 나갔던가! 그 많은 작품을 다 실어줄수 있는가? 우리의 잡지편폭으로… 그래서 나는 한동안 고민하게 되였다. 어떻게 하면?… 그후 윤씨는 편집부로 발길을 딱 끊었다. 그동안 뻔질나게 다니며 나를 “시끄럽게” 굴었던 정이 있어서인지 나는 그가 그리워졌다. 그래서 편지를 띄웠다. 뭘하고 있는지, 글이라도 쓰고있는지… 일개 이름없는 문학도를 잊지 않고 생각해주셔서 고맙다고 인차 회답이 왔다. 그는 자기가 문학할 “재목”이 될만한 사람인지 의심이 든다면서 책도 보기 싫고 글도 쓰기 싫어져서 꾸벅꾸벅 일만 하고있다는것이다. 열정도 있었고 문학적기질도 있는 젊은 초학자가 이렇게 가라앉는구나! 그렇게 가라앉는 초학자가 어찌 윤씨 한사람뿐이랴! 사람들은 고달프고 지루한 일을 농사에다 비기군 한다. “자식농사”요 하면 자식키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준다. 문학창작도 가끔 농사질에다 비유할 때가 많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뇌력로동”이다. 허지만 농부의 농사질과 뚜렷하게 다른 점이라면 “도박성질”이 있는것이다. 농부의 농사는 잘하든 못하든 가을에 가서 좋든 나쁘든 일정한 수확이 다 있는것이지만 문학창작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한평생 글을 써도 성공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한두편 쓰고 만방에 명성을 떨치고 만금낟가리에 올라앉는다. 얼마나 불공평한가! 헌데 그 불공평한데 매력이 있었다. 마치도 복권뽑기에 한사람이 5백만원에 당첨되였다 하니 수천수만이 골이 터질 듯 복권뽑기에 나서듯이… 중국의 고전소설 “삼국연의”가 수백년을 내려오면서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매력을 끌었고 얼마나 많은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불러일으켰고 얼마나 많은 평론가들의 “밥통”을 해결해주었는지 모른다. 라관중이 지금까지 살아계신다면 원고료를 얼마나 탈수 있었을가? 어느 한 유명한 가수는 노래 한곡 부르고 20만원씩 챙겨넣는다고 한다. 그것도 소득세를 제하고 말이다. 불공평한들 어찌하랴! 만천하가 공인해주는 “매력”임에야! 의견이 있으면 하느님상전에다나 드릴수 밖에 없다. 우리의 문학창작도 그런 매력에 유혹되여 하는 문자예술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예술적인 매력이 너무나 적다. 무엇이나 많으면 매력이 상실된다. 적은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할수 없는 남다른 “공”이 닦아져야 하고 남에게 있을수 없는 천부적인 기질이 갖춰져야 한다. 때문에 많은 문학도들이 문학창작에 열광을 보이다가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 거기에는 해도 안될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해도 될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문제는 해도 될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것이다. 아깝지 않은가! 그 속에 만약 “라관중”이 될만한 사람이 한명 있었는데 우리가 놓쳐버렸다면 그것은 수백년 력사에 “죄”를 짓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초학자들은 서너편씩 써보고는 나앉을 때가 많다. “공”을 닦기전이 가장 관건적인 시각인데 그 시각에 한편씩 발표해주어 “기”를 돋구어주면 천부적인 기질이 갖춰진 사람이라면 크게 룡트림질 하며 솟아날수 있는것이다. 그것이 그 몇년간 내가 편집사업을 하면서 더듬어 본 객관적법칙성이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사람들이 “공”을 닦기전에 한편씩 발표하도록 해줄수 있겠는가? 그러자면 그들만이 마음대로 춤출수 있는 무대를 열어줘야 했다. 어떻게? 초학자원지를 개척해야 한다. 나는 이 문제를 심중하게 고려한 끝에 편집부지도부에 제기했다.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생각은 좋은데 맨손으로 어떻게?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일을 하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정부재정에서는 계획외에 일전한푼도 주지 않을것이고 단위의 돈도 예산내의 돈이기에 마음대로 쓸수 없는 돈이였다. 자금문제를 내놓고도 수두룩한 문제들이 제기되였다. 원지가 출판물이기에 해당부문의 허가수속을 밟아야 하는것이고 편집실이 따로 나와야 하고 편집일군을 따로 배치해야 했다. 해당부문에 자문해보니 내부인쇄준인증(准印证)수속을 밟으면 출판물은 인쇄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다음 문제는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기에 달린것이다. 나는 국가의 돈, 단위의 돈 일전한푼 쓰지 않고 “문학창작, 번역통신학부”와 통신생들의 원지인 “개간지”잡지를 꾸릴 방안(초안)을 작성해낸다음 과외초학자들의 의견도 들어보았고 기성작가들의 고견도 들어보았다. 모두들 대찬성이였고 이러저러한 수정안도 가첨해주었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실제문제들도 적지 않게 제기해주었다. 그 의견을 종합하고 참작하면서 “방안”을 다시 수개한다음 지도부에 바쳤다. 지도부에서 반복적으로 검토하고 나중에 문련당조(당시 작가협회는 문련에 귀속되여있었음)에 지시를 청했다. 문련당조의 비준지시가 떨어지자 나는 인차 소설조에서 나왔다. 편집부에서 강장희선생님을 보내주었고 문련에서 장원희동무를 보내주었다. 셋이서 “통신학부”와 “개간지”편집실을 구성했고 층계옆 작고 비좁은 타자실에 우리의 사무실이 “더부살이”로 들어앉게 되였다. 나는 총책임자로서 완전탈리였고 강선생님은 본직 실무인 총무사업을 하면서 반탈리로 나를 돕게 되였고 장동무도 본직실무인 문서와 타자사업을 하면서 반탈리로 학부의 재정관리를 맡게 되였다. 재정관리이래 돈 일전도 없었다. “더부살이”세간기구래 내가 쓰던 책상과 걸상이였다. 전화도 없었다. 나의 책상과 걸상을 타자실로 옮겨놓고 셋이서 실내청소를 간단히 한다음 당금 해야 할 일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토론이 끝나자 셋이서 불고기점(강선생님이 불고기를 즐겨하셨음)에 가서 내돈으로 학부의 설립과 “개간지”의 창간을 위한 축하연을 검소하나 화기있게 베풀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처녀지”에 첫 삽을 박으면서 “개간”에 들어붙었다. 편집부와 문련의 각 협회책임자들이 근심어린 눈길로 우리를 지켜보고있었다. 저게 될가? 우리는 “통신생모집잠정규례”를 찍어서 발포하는 한편 해당부문을 찾아다니며 해당수속을 밟았다. 며칠이 지나도 반응이 즘즘했다. 벌써 어떤 사람들은 지금 손을 떼도 늦지 않다며 진심으로 권장하기도 했다. 호미난방이 되기전에 말이다. 나는 선동원이 되려고 원정의 길에 나섰다. 각 현시 문화관과 문련을 찾아다니며 작가, 시인, 문학보도원선생님을 찾아서 동원해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에서 특히 화룡현의 고 현규동선생님, 룡정의 고 황병락선생님, 김재권선생님, 도문의 고 정몽호선생님, 왕청의 고 김학선생님, 고 박철선생님, 권중철선생님 등 선배님과 문우들이 헌신적으로 도와나섰다. 그 가운데서 화룡행은 아주 감동적이였다. 현규동선생님이 문학도들을 불러다 놓고 선동모임을 조직해주었다. 그 모임에서 나는 열변을 토했다. 화룡역에서 현선생님의 전송을 받으며 뻐스에 오른 나는 겨우 비집고 자리를 찾아앉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상황이여서 뻐스는 늘 만원이였던것이다. 달리는 뻐스안에서 뒤좌석에 앉은 청년 서넛이 서로 주고받는 말이 나의 귀맛을 당겼다. “야, 저 아래 동성에서는 리짬장(站长)이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문학활동도 재밋게 한다더라.” “그게 정말이야? 그럼 이번 걸음에 한번 들려보자꾸나.” “새가이(처녀애)들두 있다니?” “임마를 봐라, 문학공부를 하겠다는 눔새끼 색시사냥부터 하자구 드네. 엉큼한 녀석!” “흐흐흐!” …… 나는 몸을 슬쩍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굴들이 불그스레 하고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들이였다. “거 참, 좋은 일을 하고있구만. 나도 동무네들과 같이 가보면 안될가?” 내가 이렇게 청을 드니 그들은 덩둘해서 나를 눈여겨보는것이였다. 그중 한 젊은이가 나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이게… 혹시 소설을 쓰시는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제가 잡지에 나온 사진에서 본것 같은데…”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차안이 부산하게 벌떡벌떡 일어나 나와 악수를 청하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흥성촌에서 내려 해란강남안에 있는 “리짬장”네 집으로 향했다. “리짬장”이란 동성향문화소 소장 리룡칠선생님을 말한다. 리소장과 나는 그전부터 서로 면목을 익힌 사이였다. 당시 동성향은 전국문화사업보급선진단위였다. 그래서 “가무의 고향”이라 불리웠고 동성사람들은 어디에 가나 노래를 잘 불렀고 춤을 잘 추었다. 상대적으로 문화소질이 높은 고장이였다. “연변문예”편집선생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어떻게 새나갔는지 그날 숱한 문학도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거기에서도 문학창작통신학부와 “개간지”원지를 꾸리게 된다는것과 문학창작에서의 첫걸음을 어떻게 떼겠는가에 대해 일장 열변을 토했다. 좁다란 농가의 아래웃방은 문학도들의 열기로 화끈 달아올랐었다. 그렇게 약 반달동안 돌고 편집부로 돌아오니 신청등록인이 몇십명 늘어나있었다. 나는 더욱 신심이 커졌다. 한번 사내답게 멋지게 해보자.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건 둘째문제다. 문학에 몸을 담군이상 연변에서 우리 민족의 문학붐을 일궈보자. 나는 즉시 우리 문단에서 영향력이 있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 편집, 번역가 44명을 통신학부의 과외지도교원으로 초빙했고 “천지문학창작, 번역통신수업장정”을 내왔고 통신생등기표와 통신수업증을 찍어냈다. 그리고는 인차 동북 3성을 상대로 각지, 각 향진의 문화일군과 문학창작에서 지명도가 있는 분 오륙십명을 모셔다가 동원대회를 열었다. 회의장소에다는 자전거 열대를 사다가 갖춰놓았다. 그때만 해도 자전거가 주요교통도구였고 가정에서는 큰 재산으로 칠 때였다. 통신생이 백명 넘는 고장에다는 통신학부 분원을 세워주고 사업용으로 자전거 한대씩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들이 돌아가자 각 지방에서는 인차 문학창작통신수업에 참가하는 열조가 일어났다. 점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타오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 시기가 바로 연변문학사에서는 전례없었던 비약의 시기였다. 등록송금표가 하루에도 몇십장, 몇백장씩 날아들었고 통신생들이 부쳐보낸 원고 역시 하루에 몇십편씩 날아들었다. 나는 기본상 밤잠을 제대로 잘 사이가 없었다. 낮이면 강선생님과 장동무를 데리고 신청자의 명단에 따라 등기표와 수업증을 발급하고 들어온 원고들을 소설, 시, 수필, 번역 등 쟝르별로 분류해서 지도교원게 보내고 밤이면 “개간지”창간호와 통신학부제1기교과서편집을 다그쳐야 했다. 눈이 아홉이래도 그 숱한 원고를 다 보아낼수 없었고 손이 아홉이래도 그 많은 평어를 다 써낼수 없었고 다리가 열개래도 이곳저곳 다 달아다닐수가 없었다. 사람을 써야 했다. 학부관리원도 있어야 했고 편집일군도 있어야 했고 발행원도 있어야 했으며 부기원도 전직으로 두어야 했다. 그때에야 나는 “처녀지”를 개간한다는 것이 얼마나 간고하고 벅찬 일이란 것을 뼈로서 느끼게 되였다. 장가를 들 때에는 허공에 붕-떠서 어리벙벙하게 숫처녀를 “개간”했었지만… 헌데 문학원의 “처녀지”는 얼뜰하게 고추장 맛보기로 개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가지 원칙을 세웠다. 통신학부와 “개간지”의 모든 사업과 활동은 통신생을 위해서 진행되여야 하고 “개간지”에 발표되여 나갈 작품은 전부 통신생의 원고와 통신생들을 지도하기 위한 지도교원의 원고여야 하며 모든 사업일군과 편집일군, 그리고 발행원들까지도 모두 통신생들가운데서 선발해서 써야 한다는것이다. 오직 그래야만 통신학부와 “개간지”가 진정 통신생들의 포근한 요람으로 될수 있고 그들의 련락처로 될수 있고 활동중심으로 될수 있으며 그들이 자기의 처녀작을 발표할수 있는 원지로 될수 있고 그들이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춤출수 있는 무대로 될수 있는것이다. 모든 통신생들의 요구를 다 만족시켜줄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다시 분발할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수 있고 희망을 안겨줄수 있는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니겠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문학창작에 천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인재를 더는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발견해낼수 있고 계속 개발해낼수 있다는 점이였다. 일은 나의 뜻대로 번지여 갔다. 통신생신청인이 매일 배로 늘어나자 편집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해나섰고 문련당조에서도 관심을 돌렸다. 정말 범에게 날개를 돋쳐준 셈이였다. 통신학부로 찾아오는 통신생들이 매일 줄을 설 지경이였다. 개산툰의 윤씨도 다시 찾아왔고 먼 할빈에서도 면목 모를 분이 찾아왔고 심양, 장춘, 목단강, 동경성…지어 압록강변의 집안과 통화에서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매일 들어오는 신청자들의 간력을 살펴보면 사회의 각계 각층이 다 있었다. 농촌의 농민이 있는가 하면 공장의 로동자도 있었고 대학교의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소학교의 교원도 있었고 사회의 구직청년이 있는가 하면 감옥의 죄수도 있었고 병원의 의사가 있는가 하면 기관의 간부도 있었고 가정의 주부가 있는가 하면 경로원의 로인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중공당원도 있었고 공청단원도 있었으며 해방군전사도 있었고 기독교신자도 있었으며 장애인도 여러명 있었다. 환갑이 지난 로인이 있는가 하면 금방 학교문을 나온 풋내기도 있었고 부부간이 있는가 하면 형제간이거나 자매간이 참가한 친인들도 있었다… 문학의 힘은 그처럼 컸고 문학의 영향력은 그처럼 넓게 퍼져나가고있었다. 문학이란 무엇이길래? 나 스스로도 리해될수 없을만큼 감동을 받을 때가 많았다. 나는 “개간지”제1기편집을 다그치는 한편 사업일군을 모집했다. 그래서 하태렬 등 통신학부관리일군들과 김룡길 등 “개간지”편집일군들도 초빙해왔고 전일규 등 발행일군들도 40여명 받아들였다. 모두 통신생가운데서 추천하고 심사를 거쳐 받은 사람들이였다. 받아들인 사람들의 사업열정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지경이였다. 그들과 함께 모든 일을 밀고 나아가면서 통신학부개학식준비를 다그쳤다. 정말 통쾌하기 그지 없었다. 사업이란 조건이 좋아서 잘되는것도 아니고 곤난이 첩첩하다 해서 안되는것도 아니고 장애가 있다 해서 막히는것도 아니였다. 오직 목표가 뚜렷하고 의기가 분발되고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열정이 끓어넘친다면 그 어떤 엄청난 사업도 해낼수 있는 것이였다. 그때 나는 광복의 홰불을 지펴들고 장백의 밀림속에서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해나가던 항일련군들의 혁명열정이 얼마나 높았겠는가를 상상해보았고 섬북의 토굴집속에서 등잔불에 비치는 래일의 새중국전망을 내다보시며 글을 쓰신 모택동의 심정이 얼마나 벅차올랐겠는가를 련상해보기도 했다. 근 37년이란 나의 사업경력에서 그때처럼 성수나게 일해본 적은 별반 없었다. 드디여 우리는 통신학부개학식을 성황리에 거행하게 되였다. 1985년 4월 7일 오전, 해빛도 화창한 봄날이였다. 우리 통신학부와 “개간지”의 전체 사업일군들은 새옷을 갈아입고 아침 일찍 새로 락성한 연변대학교학청사로 갔다. 대회장소는 5층의 계단식강당으로 정했다. 우리는 문어귀에 두줄로 서서 개학식에 참가하러 온 지도교원과 통신생들을 뜨겁게 맞아주고 환영했다. 벌써 8시가 좀 넘자 통신생들이 줄줄이 찾아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춘색이 완연했다. 서로서로 초면이였지만 구면처럼 스스럼없이 악수를 나누고 얼싸안고 빙빙 돌아가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성스러운 창작욕이 그들의 마음을 한줄에 꿰매여놓았고 문학창작통신수업이 뉴대가 되여 그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던것이다. 회의장은 명절날 축제의 분위기로 전환되였다.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여났고 열기 띤 목소리로 부르고 화답하느라 장내는 화기롭게 웅성거렸다. 그날 감동적인 장면은 화룡시의 장애인 처녀 최성자가 부모님과 함께 전문 차를 세내서 직접 대회장문앞까지 달려온것이였다. 이에 감화된 내가 성자를 업고 아래층에서 5층까지 올라갔다. 내가 그녀를 업고 회장에 들어서니 숱한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보내왔다. 성자가 낀 하얀 안경밑으로 맑은 이슬이 반짝이였다. 통신생 조기택씨는 이런 시구로 그날의 그 장면을 남겼었다. …… 년로하신 분들도 나어린 소년도 불타는 구지욕에 하나의 지향 불구의 청년들도 교양소의 죄인도 한결같이 모여왔네 통신수업 개학식 …… 그 넓은 강당은 통신생들로 자리가 꽉 메워졌다. 빈자리라곤 찾을수 없어서 후에 온 사람들은 량쪽 벽체거나 뒤켠 창문턱에 걸터앉았다. 두줄로 된 주석대에다는 주위 선전부, 문련당조(작가협회도 문련에 소속되여 있었음), 편집부 등 해당 부문의 지도성원들과 우리 문단의 덕망높은 로작가, 로시인, 로교수 등 20여명을 정중하게 모셨다. 시간이 되여 내가 발언석에 나서 개학식을 선포하자 장내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길게길게 터졌다. 내가 일어서서 팔을 내저으며 제지시켜서야 박수소리는 점차 가라앉았다. 그다음 리상각주필님이 편집부를 대표하여 개막사를 올렸다. 그이도 퍽 격동된 모습이였다.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누가 첫 보습날을 개간지에 박을것인가? 누가 첫 씨앗을 뿌리고 물을 줄것인가? 다름 아닌 그대들, 문학에 큰뜻을 둔 열혈청년들, 정다운 통신생들이여, 어서 손에 손을 잡고 우리네 화원에서 마음껏 뛰놀자. 즐거이 노래하며 춤추자.”라고 호소하였을 때 장내에서는 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의 개막사는 수시로 되는 박수소리에 눌리웠다가 다시 우러나오군 했다. 뒤이어 문련당조의 축사도 있었고 통신생대표들의 발언도 있었다. 그들의 발언 역시 수시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에 자주 끊기군 했다. 그 가운데서도 장애인 최성자의 발언은 많은 통신생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최성자는 눈물을 머금고 속심에 서리서리 맺혀있던 고초를 이렇게 실실히 풀어냈다. “운명이 불운하였던가 팔자가 기구했던가 저는 일곱달만에 소아마비증에 걸렸댔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여나서 사람구실 못하는 것 이상 큰 슬픔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활개치는 청춘들을 볼 때마다 치마꼬리를 날리는 녀인들을 볼 때마다 저는 삷의 권태를 느꼈습니다…문학은 저에게 생명을 주었고 기쁨을 주었으며 웃음을 주었습니다…공식없는 문학이란 배움의 길에서 엎어지고 머리를 깨며 그 언젠가 한무더기돌틈에서 퇴화될지 모르지만 기어코 그 길로 가고야 말겠습니다.” 그 목메인 소리에 많은 통신생들이 눈굽을 찍었다. 그다음 감옥에서 온 죄수 통신생인 장성보의 발언이 또한 큰 충격을 주어 장내분위기를 한번 더 일렁거리게 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심중을 토로하였다. “이번에 제가 개학식에 참가하려고 감옥문을 나설 때 동범들은 다투어 나의 손을 잡아주며 자기들을 대신해서 지도교원들께 인사를 전해달라고 거듭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심코 개조의 발걸음을 다그쳐 진지하게 문학창작기초지식을 잘 배우겠습니다… 가장 큰 희망이라면 통신학부내에서 허용되는 일상 필요한 일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십시오. 죄지은 우리는 땀으로 심령속의 오물을 가셔내려 합니다…” 나중에 전반 개학식대회장의 클라이맥스 고조는 소설가 림원춘선생님이 지도교원대표로 발언할 때 이루어졌다. 벌써 그가 발언석에 나서자 아래에서는 박수소리가 터져나오며 그칠줄 몰랐다. 원래 체격이 쭉 빠진 미남인데다가 그날 따라 하얀 샤쯔깃과 앞섶이 두드러지도록 까만 양복을 받쳐입고 거기에 걸맞게 빨간 꽃줄이 세로 쭉쭉 금을 친 나비넥타이까지 깡똥 매듭을 지어놓으니 그야말로 인기 만점이였다. 거기에 소탈한 성격 그대로의 솔찍한 고백, 허스키한 저력적인 음성, 창작욕을 불러일으켜주는 문학에 대한 진지한 감정이 통신생들의 마음을 확 끌었던것이다. “저는 내가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후배들에게 몽땅 쏟아붓고싶은 충동으로 항상 자신의 가슴을 들먹이군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알고있는 전부를 하나도 속임없고 탐오함이 없이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싶은 그 마음입니다.”라고 그가 자기의 심정을 절절하게 토파하였을 때 장내에서는 또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나는 사업에 참가한 수십년래 크고작은 회의에 수없이 참가해 왔었다. 회의로 사업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의 경력에서 그번 개학식만큼 감격적이고 열광적인 대회에 참가하고 소집해보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 우리의 문학창작통신수업은 이렇게 첫 시작을 성공적으로 개시하게 되였다. 통신수업에 참가한 통신생은 1천3백여명이였는데 중국경내에서 무릇 조선족이 있는 곳이면 한두명씩 다 참가한것으로 된다. 이민사에 뒤따른 우리의 민족문학사가 이미 백여년력사를 가지고있는데 1985년에 있은 문학창작통신수업은 력사상 있어본적이 없는 가장 큰 규모의 문학창작활동이였다고 할수 있다. 우리의 문단사를 펼쳐보아도 천여명 초학자들이 붓을 들고 창작에 뛰여든 실례가 여지껏 없었고 그처럼 영향력이 넓게 퍼진 적도 없었고 그때만큼 많은 창작품이 나온 적도 없었으며 그처럼 많은 지도교원들이 동원되여 성심껏 지도해준 적도 없었다. 또한 초학자들이 자기의 전문 원지를 가지고 그 어느 부문이나 개인의 협찬금도 없이 대형적인 창작활동을 거대하게 진행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문단사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볼수 없었다. 물론 그처럼 크게 벌린 활동이고 또한 처음 해보는 일이라 많은 면에서 실수가 빈발했고 허점들이 여기저기에서 벌거벗고 로출되였다. “개간지”제1기가 출판되여 나올 때였다. 나는 발행원들이 올려보낸 수자와 각지에서 올라온 주문예약에 따라 주먹구구를 해보았다. 원래는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따져봐야 하는데 시간도 급촉했다. 그래서 4만 8천부를 빨리 찍어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연변문예”가 3만부가량 발행될 때였다. 편집부의 마음좋은 분들이 4만 8천부를 찍는다는 말에 너도나도 찾아와서 진심으로 나를 말렸다. “도대체 어쩌자구 이래? 처음부터 코밥 먹자구!” “우전국발행도 아닌데 저네 몇사람의 힘으로 될가?” “정간(正刊)도 3만부인데 부간(副刊)을 그것보다 더 찍는다면 그게 말이나 되오?” …… 그때나 지금이나 나로서의 사업풍격은 방향이 정해지고 주선이 제대로 그어졌다면 기타의 부선이나 잡건에서는 기분에 따라 즉흥적인 처사가 많았다. 그 당시 잡지 한부의 값은 0.45원이였는데 많이 찍어도 손해를 보고 적게 찍어도 손해를 보는 판이였다. 제일 안전한 방법은 한 보름쯤 품을 들여 다시 확인해 보는것인데 그러자면 다른 일에 영향이 미치게 된다. 제일 중요한건 천여명 통신생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수 있다는 점이였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자기들이 가꾼 원지-“개간지”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중이였다. 하루란 시간이 늦어져도 그들에게는 한바가지의 찬물을 끼얹는것으로 된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원래의 주장대로 4만 8천부를 계속 빨리 찍어내라고 고집을 부렸다. 손해를 보면 나 개인이 책임지겠으니 인제부터 누구도 이 일로 시간을 더 지체시켜서는 안된다고 막 밀어내붙였다. “연변문예”잡지는 줄곧 우전국에 위탁하여 발행되였다. 그러다 보니 내가 편집부에 들어와 2년철 잡게 공작하였지만 발행에 대해서는 상식조차 없었다. 4만 8천부란 그저 나의 머리속에서 수자에 불과했지 그것이 얼마만한 무지에 몇묶음으로 되였겠는가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이 인쇄되였다는 통지가 왔고 미포장에 백책씩 묶은 몇백 묶음의 잡지가 트럭에 실려왔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부리우고 보니 아름찼다. 모두들 나와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때에야 나는 속이 꿈틀해났다. (아이들 장난이 아니구나!) 편집부에는 책을 보관해 둘 창고도 없었다. 우리는 림시로 책을 편집부의 복도 량옆 벽에다 쌓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복도가 숨막히게 비좁아졌다. 편집부가 들어있는 그 낡은 3층건물은 원래 부대의 초대소였다고 하는데 우리 편집부만 아니라 문련 각 협회사무실도 들어있었고 중국조선족소년신문사와 주 공청단위, 주 인대, 주 세무국 등 여러 부문 기관들이 들어있어 래왕하는 사람들이 많고 복잡한 곳이였다. 복도가 꽉 메니 자연 사람들의 불평을 자아내기 마련이였다. “앗따, 우둔하게두 찍어냈구만.” “어마나, 이걸 언제 다 …” “여기가 뭐 창고인가 하네. 과연실루!” …… 나는 전체 통신학부와 “개간지”의 사업일군들을 거느리고 누구말마따나 빨찌산식의 “돌격전”에 “속도전”을 벌려나갔다. 이틀동안 묶는 사람은 전문 묶고 주소를 쓰는 사람은 전문 주소를 쓰고 세는 사람은 전문 책을 헤여놓고 봉투에 넣는 사람은 전문 봉투에 넣고 하면서 낮에 밤을 이어갔다. 다행히도 하남우전지국이 거퍼 열미터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우리는 보일러실의 밀차를 빌어 포장된 책을 쉽게 실어갈수 있었다. 한 밀차 한 밀차씩 련이어 실어가니 우전국녀자들이 거기에 언제 다 도장을 찍겠느냐고 입을 한발씩 내밀었다. 그 숱한 책을 다 처리하고나니 사람마다 손에 물집이 생겨나서 손바닥을 입에 대고 호호 불어댔다. 월요일날 아침에 출근하던 사람들은 복도가 텅텅 빈걸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은 분분히 통신학부의 문을 열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여기 책들이 다 어디로 갔어?” 나는 그저 시무룩이 웃어만 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약 일주일후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묶음, 두 묶음씩 부쳐보낸 책이 웬일인지 반환되여 되돌려오기 시작했던것이다. 그 후에는 다섯 묶음, 일여덟 묶음씩 마구 들이닥쳤다. 대부분 포장이 툭툭 터진채로 돌려져 왔다. 복도에 다시 책무지가 쌓여졌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일시 어찌 할 방도가 나질 않았다. 구경 무슨 문제인가? 나는 인차 각 현시의 발행을 책임진 통신생들을 불러다가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분석해보았다. 사전에 미처 예견못했던 문제거리가 많이 제기되였다. 회의끝에 제기된 문제들을 귀납하고 추리해보니 대개 아래와 같은 문제들이 존재했던것이다. 많이 보내야 할 곳에다는 적게 보내고 적게 보내야 할 곳에다는 오히려 많이 보낸것이다. 례를 들면 석현은 원래 크지 않은 고장이고 거주민 대부분이 한족이 많고 조선족이 적은 곳인데 2천 5백부나 보냈던것이다. 그와 반면에 평강벌을 끼고있는 투도는 조선족이 집중되고 그 주변의 룡수, 룡문, 동성 등 지역에는 젊은 독자층이 많은 비례를 차지하고있었는데 천여부밖에 보내지 않았다. 그 다음 문제는 통신생의 비례에 따라 독자비례를 추측해서 보냈는데 그것이 틀린 실책이였다. 통신생비례가 상대적으로 높은 고장이지만 독자비례가 낮은 고장도 있고 통신생비례가 상대적으로 낮은 고장이지만 독자비례가 높은 고장도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기타의 문제들도 생각보다 휠씬 심각했다. 나는 그 문제들을 편집부와 문련당조에 회보한다음 문련 박주석의 비준을 거쳐서 발행이 바쁠 때마다 일정한 비용을 내고 차를 쓰기로 하였다. 당시 문련에 “쌍패쭤”(쌍줄배기좌석차)소형화물차가 있었는데 운전수 백씨는 내가 량식국에 있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 시간상 거리상에서 차를 무난하게 마음대로 움직일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부터 우리는 책을 차에 싣고 떠났다. 비암산을 넘어 동성으로부터 룡수, 룡문에 이르기까지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독자들의 비례를 따져가며 나눠주었다. 당지의 통신생들이 발벗고 도와나섰다. 그리고 평강벌의 문학명인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해나섰다. 동성에서는 리룡칠소장이 몇백책을 맡았고 팔포강록장의 박은선생님도 나섰고 룡호의 정세봉선생님도 나섰고 연안의 차룡순선생님도 나섰다. 특히 우리를 감동시킨 분은 정세봉선생님의 사모님이였다. 당시 마을의 부녀주임이였던 사모님은 4백책이나 맡아가지고 책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나눠주었던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계속 차를 가지고 조양천, 안도, 팔도 등 고장을 돌았고 이어 개산툰, 도문, 훈춘, 왕청, 배초구 등 지를 돌면서 다시 수자를 조절하며 발행했던것이다. 그렇게 다 돌고 나서도 나중에는 2-3천부 적치되였다. 허지만 큰 손실은 아니였다. 전반적으로는 일정한 리윤이 나왔었다. 제1기”개간지”발행에서 그런 경험교훈이 있었기에 제2기부터는 기본상 적치되는 페단이 없이 다 발행되여 나갔다. 지금도 그 때 그 옛날의 “개간지”잡지가 있다면 높은 가격이래도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후 대개 굵직굵직한 일들은 순리롭게 진행되여 나간 셈이였다. 개학식을 성황리에 열고 “개간지”제1기발행도 마치고 뒤이어 “문학통신학부 교과서”제1책도 인차 편집출판되여 나갔다. “개간지”제2기와 교과서제2책의 편집도 정상적궤도에 들어섰다. 그런데도 해야 할 일들은 자꾸 밀려오며 쌓이고 쌓였다. 지도교원들의 순회강연이나 구체보도를 해달라는 요구가 각지로부터 강렬하게 제기되여 왔다. 그다음 하루에도 한아름씩 들어오는 통신생들의 원고를 순서에 따라 절차있게 쟝르별로 지도교원들께 보내여 그들의 지도를 받게 해야 했다. 그것은 정말 시끄럽고 자질구레하고 실수가 빈발하는 일이였다. 원고가 들어오는 족족 지역별로 주소에 따라 등기하고 쟝르에 따라 선택해서 모 지도교원에게 보내고 며칠후 그 지도교원이 다 본다음 의견이나 평어를 달아놓으면 그걸 가져다가 다시 분류해서 주소에 따라 부쳐보내야 하는데 그 기간에 어느 한 환절에서 외끼거나 문제가 생기면 원고가 분실되거나 다른 사람한테 잘못 가기가 일수였다. 그래서 통신생, 사업일군, 지도교원사이에 서로 네탈내탈 하면서 얼굴을 붉힐 때도 있었다. 이런 일보다 실제적으로 골치 아픈 일은 발행원들의 로임문제였다. “개간지”잡지를 찍기로 결정한 다음부터 우리는 통신생가운데서 비교적 꼴꼴하다고 인정되는 젊은이들을 물색하고 추려서 사오십명 뽑았다. 그들이 연변 각지와 동북3성을 주름잡으며 뛰여다녔기에 우리의 “개간지”가 기마다 몇만부씩 나갈수 있었던것이다. 그 가운데는 전형적인 인물이 한사람 있었는데 장백산아래 첫 동네인 숭선의 어느 한 골안 마을에서 올라온 전일규란 젊은이였다. 그는 혼자서 “개간지”전년분을 1천 6백여부나 돈 일전 차남이 없이 주문해왔다. 지금에 와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좀 불어치는 소리겠지 하고 생각할수도 있다. 오십명 가운데서 그가 제일 어리무던하고 순진해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제대로 해낼수 있겠는가고 근심되여 원래는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제기하는 요구가 아주 간단하고 진솔하고 천진한것이였다. 자기는 스무살을 먹도록 여태껏 숭선골안을 벗어나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 어떤 보수도 요구하지 않겠으니 전국에 산재해있는 조선족마을을 다 돌게 해달라는것이였다. 그런데 그 요구가 통신학부내 일부 사람들에게 꼬리로 잡혔다. 그 녀석이 잡지발행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곳구경이나 하자는 것이니 절대 내보낼수 없다는것이다. 허지만 나는 그의 순진함을 믿었다. 하여 그의 신분확인에 따른 발행원공작증을 발급하도록 비준하고 일정한 려비를 주어서 지정한 발행로선에 따라 나가게 했다. 그는 약 한달반동안 연변과 동북 3성을 한바퀴 빙 돌고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정신이 더 포만해졌고 더 활발해져서 말도 술술 잘했다. 아닌게 아니라 집안에 있는 똑똑이보다 나다니는 머저리가 낫다는 속담이 딱 맞는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한달반동안 그는 한 끼니도 식당에 가서 사먹어본적이 없다고 한다. 갈 때 어머니가 큰 통졸임통에 담아준 고추장에 만두나 빵을 사다가 찍어 먹었다는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목이 꺽 메여올라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일규의 어깨만 툭툭 쳐주기만 했다. 내 기억에는 그때 우리 통신학부에서 그에게 특별장려금을 내주었고 아래우 옷 한벌을 사준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입고 다니는 옷이 낡아서 볼성모양 없었던것이다. 그후 통신학부가 마무리되면서 전일규와 갈라진후 여직껏 한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 지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말 한번 보고싶다. “개간지”제1기발행이 끝난다음 우리는 그 오십명 발행원가운데서 또 능력과 조건에 따라 20명을 추려서 남겼다. 그런데 “개간지” 한 잡지만 발행해서 그들의 로임을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돌려보내면 “개간지”가 정상적으로 발행될수 없었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량난에 빠진 셈이였다. 어떻게 할것인가? 일개 잡지사의 편집으로서는 어디 가서 돈을 구할수 있는 구멍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문화계통에서는 “문화산업으로 문화를 살리자!”(以文养文)는 구호가 제기되였다. 그 때 그 말을 듣자마자 나의 머리속에서는 그 무엇이 반짝 불꽃을 튕겨주는 것이 있었다. 나는 당장 그 자리로 당시 “개간지”에 몸을 담고있던 김룡길씨(아동소설작가임)를 불러내여 맥주점으로 데리고 갔다.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그 반짝 튕기던 불꽃에 대한 구상을 내놓았다. 서로 의견을 교환하다가 나중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인즉 “개간지”외에 다른 잡지나 도서를 경영하고 발행할수 있는 합법적인 발행기구를 내오자는것이였다. 그러면 “개간지”도 정상적으로 계속 발행할수 있고 발행원들의 로임문제도 해결할수 있으며 또한 리윤이 있게 되면 통신학부운영에도 보태쓸수 있다는 것이 당시 우리 둘의 생각이였다. 그 술좌석에서 우리 둘은 모든걸 다 결정하였다. 내가 명의상 총책임을 지고 김룡길씨가 구체적으로 책임지기로 하고 기구의 명칭을 “천지서간사”로 정했다. 이튿날부터 김룡길씨를 “개간지”편집에서 뚝 떼내여 전문 “서간사”창건준비사업에 달라붙게 했다. 그당시 정황으로는 무엇을 결정하면 결정하는 그 시각부터 행동에 옮겨야 했다. 그걸 세워서 리윤을 볼수 있겠는가 밑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문제따위는 고려해볼 사이도 없었다. 그걸 고려하느라면 다른 일이 망태기가 되여버린다. 무릇 해야 할 일이 눈앞에 떠오르면 그걸 눈앞에서 해야 했다. 래일에 가 밑져서 망해빠진다 해도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에 해야 했던것이다. 세계 유명기업의 창업사를 두루두루 뚜져보아도 대개는 이러한 것 같다. 초창기에 언제 모든 것을 다 따져보고 고려해보고 준비한다음 일떠선 기업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기업이 일정하게 발전한다음 여유작작할 때 하는 노릇이였다. 김룡길씨가 며칠간 달아다니더니 알맞춤한 경영장소를 찾아내였다. 바로 신흥파출소곁에 있는 자그마한 일본식 2층 양옥이였는데 아래층은 매대를 놓고 경영할수 있고 웃층은 사무실로 쓸수 있었다. 지금의 광주상점자리인데 듣는 말에 의하면 우리 문단의 로선배이신 김창걸선생님의 옛 저택이였다고 한다. 그때 돈으로 1만 2천원을 주고 그 집을 사서 자리를 정한다음에는 인차 공상국이요 세무국이요 도시관리대대요 하는 해당 부문의 “어르신님”들을 모셔다가 없는 돈에 식당놀이를 해대며 복잡한 수속을 거침없이 밟았다. 거기에 20여명 발행원들을 배치해놓고 “개간지”외에 다른 잡지도 발행하고 도서도 경영했다. 내가 직접 목단강민족출판사에 가서 많은 도서를 구매해오기도 했다. 그해 하반년에는 “연변녀성”잡지를 총도거리로 맡아 호황을 이루기도 했다. “천지서간사”를 꾸리면서 재미있는 일도 있었고 눈물겨운 일도 있었고 내 일생을 망쳐먹을번한 고통스로운 일도 있었다. 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 털어놓을 작정이다. 통신생들의 요구에 따라 순회강연을 조직하는것도 통신학부의 중요한 활동이였다. 이 공작은 하태렬씨가 구체적으로 책임지고 조직했다. 그는 일을 해도 언제나 깔끔하고 날파람있었다. 경비때문에 먼곳과 편벽한 고장에는 가지 못했지만 통신생이 집중된 각 현시의 주요 지역들은 대부분 돌며 순회강연이나 개별보도를 진행했었다. 그 가운데서 인상깊었던 것은 연길감옥과 돈화추리구감옥에서의 순회강연이였다. 감옥이란 좀 특수한 곳이여서 우리도 호기심을 가졌고 감옥측령도에서도 아주 큰 중시를 돌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죄수들에 대한 재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긴 모양이였다. 그들의 초청에 의해 내가 지도교원 몇분을 모시고 감옥에 들어가 강연하게 되였다. 그 걸음에 감옥안도 한바퀴 돌아볼수 있었고 도대체 죄수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도 관찰해볼수 있었다. 감옥안에는 운동장도 있었고 가공공장도 있었다. 죄수들의 생활은 전부 군사화였다. 침실에는 2층짜리 침대를 놓았는데 이불을 개여놓은것도 병영처럼 모두 네모반듯하게 각이 났다. 어찌나 깨끗한지 침실안에서 수지 한장 널려있는 것을 발견할수 없었다. 화식도 생각보다는 휠씬 좋았다. 밥은 하얀 입쌀에 노란 강냉이쌀을 섞은 “얼미빤”(二米饭)이였고 국도 돼지고기 흰점이 둥둥 뜬 배추국이였고 반찬도 가지볶음채와 김치가 있었다. 원래 나는 감옥안에서는 강냉이떡만 먹는가고 생각했었다. 생활상에서는 별로 일반 사회사람들과 큰 차별이 없지만 자유가 없고 로동에 참가하면 로동강도가 높고 시간상에서 좀 지루할 때가 많다는것이였다. 우리가 통신생들만 모여놓고 강연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감옥측에서는 다른 죄수들도 함께 방청할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제기해왔다. 문학강연이란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강의가 조선말로 진행되기에 조선족죄수들 가운데서 중범과 병자, 그리고 작업중인 죄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참가하였다. 그들의 회의장 입장도 각 반급별로 렬을 지어 한줄 한줄 들어와서는 차렷 자세로 기립하고 서있다가 반장의 구령에 따라 하나, 둘, 셋 하며 번호를 불러 자신을 확인시킨다음 다시 구령에 따라 반급끼리 집체로 착착 자리에 앉는것이였다. 그날 지도교원 여러 분이 강연하는 바람에 시간이 꽤나 길어지게 되였다. 허지만 누구 하나 도중에 소변보러 가는 자도 없었고 서로 소곤거리며 소동작을 부리는 자도 없었다. 매번 강연이 끝날 때면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지군 했다. 나도 학생생활 십여년에 교원사업도 해보고 무슨 강습반이요 당교학습이요 하며 수많은 강연활동에 참가해보았지만 그날처럼 질서정연하고 엄숙하고 조용하고 열렬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된 강연은 처음 참가해본다. 그리고 그날 감옥활동에서는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죄수들이 화식하는 모습을 돌아보면서 나는 몇몇 낯익은 자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그들은 나를 보는 순간에 혹은 외면하거나 혹은 계면쩍게 피씩 웃고는 돌아서는것이였다. 그러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리해할만 했다. 어느 한 침실에 들어서는데 한 녀석이 밥을 떠담다가 나를 힐끔 올려다 보더니 밥주걱을 훌 던지고 돌아서 구석쪽 침대가에 가서 걸터 앉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다시 쳐들지 않는것이였다. 갸름한 얼굴에 판들거리는 작은 눈이 너무나도 눈에 익은 면목이였다. 어릴 때 공신 “웅덩개마을”에서 함께 놀았던 친구인데 나보다 아래아래 학년 후배였었다. 성이 강씨이고 이름이 휘여서 우리는 늘 그를 “휘야”라고 불렀다. 공부는 안하고 장난질이 심했고 그때 벌써 손길이 늘 거칠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자식 여럿을 낳았는데 이래저래 다 죽고 나중에 그의 아버지가 “휘야”를 유복자로 남겨두고 돌아가셨단다. 과부로 된 어머니는 그 아들 하나만 믿고 정말 애지중지 하며 길러냈단다. 한번은 “휘야”가 크게 앓아서 죽게 된 것을 어머니가 집까지 팔아 사경에서 그를 구해냈단다. 집이 없는 그들 모자간은 우리 웃집웃집 룡철네 헛간을 빌어 살았다. 집에 들어가면 구들복판에 늘 구겨져있는 이불과 요밖에 없었다. 밥상도 없어서 모자간이 늘 마루널장판우에 마주 앉아 밥을 먹군 했다. 우리 어머니가 그집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별다른 음식이 있으면 나를 시켜 조금씩 보내주군 했다. 그런데 그런 집에서 자란 아들이 그만 이상제하도 모르고 헤덤비는 야반무례한 무뢰배로 자라났고 제어미도 마구 잡아두드리는 “도리깨아들”로 커갔다. 한번은 자기가 어디에 가서 후무려온 확대경의 볼록렌즈유리(해빛에 초점을 맞추면 불을 붙일수 있음. 당시 성냥이 긴장해서 아이들이 담배를 남몰래 피울 때면 그런 유리를 리용했음)가 없어졌다고 제또래 친구들 앞에서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감아쥐고 마구 흔들어 대는것이였다. 그때 우리는 아이가 로인이거나 이상 어른들께 쌍욕을 하거나 손찌검질을 하는 것을 세상 제일 큰죄로 생각하고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 “휘야”가 자기의 어머니한테 마구 대들어 잡아채고있지 않는가! 녀동생이래도 그렇겠는데! 우리는 너무 기가 차서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더는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달려들어 뜯어말렸다. 뒤이어 더 희한하고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는 장면이 벌어졌다.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그의 어머니가 이제 당금 “빗강대”(비자루)같은 것을 잡아쥐고 그 아들의 못된 행실을 잡아주려니 해서 긴장해 있는데 뜻밖에도 그의 어머니는 히죽이 웃으며 아들을 올려다 보는것이였다. “얘두, 전번에 그걸 저 뒤마을 남철이한테 준걸 벌써 잊었니?” 그제야 “휘야”도 생각나는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며 제쪽에서 오히려 버럭 소리를 지르는것이였다. “그럼 왜 언녕 그렇다구 할게지?” “네가 머리를 마구 끄잡아당기니 생각나더구나. 히히!” “에잇, 씨베-” 우리로서는 정말 어처구니 없게 보이는 일이였다. 그런 “휘야”가 지금 감옥안에 와있다. “휘야”를 이런 길에 들어서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의 어머니가 생각나며 가슴이 쓰려났다. 지금 아들을 감옥에 보낸 그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가? “휘야”가 먼저 알은체 했더라면 나는 그의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보았을것이다. 허지만 때와 장소도 그렇거니와 그가 외면하고있는데 먼저 건드릴 수가 없어서 그런대로 훌 나와버렸다. 어쨌든 처량한 기분이 감돌아 심정이 착잡해졌다. 강연할 때 보니까 “휘야”는 네번째 줄 왼쪽 창문가에 앉아있었다. 다른 사람이 강의할 때에는 그도 기타 동범들과 같이 발언석을 지켜보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강의 할 때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있었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 수시로 그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허지만 그는 시종 고개를 쳐들지 않았다. 강연이 끝나자 감옥측에서는 저녁식사를 준비해놓고 우리를 청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김씨라는 경관에게 강휘의 정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는 강휘란 죄범이 없다고 했다. 내가 몇호실에 있고 강연할 때 어느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말했을 때 그는 인차 그의 이름이 강휘가 아니라 강××(변성명했다는 이름이 지금 생각나지 않음)라고 했다. 후에 이름을 고친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의 가정정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자기가 구체 담당경관이 아니여서 똑똑하게는 모르겠지만 어떤 꼬부랑할머니가 가끔 그 손자를 보러 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가 손자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들을 보러 오는것이라고 알려주면서 그 자의 어릴 때 정황을 간단하게 교대해주었다. 그해 년말에 통신학부졸업식을 준비하면서 감옥의 통신생대표들을 참가시킬 일로 또 그 김경관을 만나게 되였다. 그때 김경관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휘야”라는 녀석이 하루는 김경관을 보고 나의 소설 “구촌조카”를 얻어서 빌려달라는 것이였단다. 김경관이 친구를 통해 얻어주었더니 녀석은 그걸 한벌 다 베끼기까지 했단다. 그걸 베껴서 외우자고 했는지 아니면 두고보자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후 개조표현이 남다르게 좋아졌다고 한다. 감옥안에서 개조표현이 좋아 모범수가 되면 감형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날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쩐지 심정이 거뿐해났다. 아무튼 그가 하루라도 빨리 나가 년로해지신 어머니의 근심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줄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였다. 그후 나는 그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 다음 인상이 깊었던 것은 오상사범학교에 가서 한 강연활동이였다. 그때 내가 김성휘, 림원춘, 류원무 등 십여명의 지도교원을 모시고 좀 품위있게 떠났었다. 따지고 보면 차원이 높고 규모가 선 강연대오였다. 오상역에 내려서 인상이 깊었던 것은 오상의 “마차택시”였다. 말 한필이 끄는 단두마차인데 짐실이가 높고 평평해서 그 우에다 벼짚이나 도래멍석을 깔면 제법 푹신푹신 했고 덜렁거리며 달리는 멋이 좋았다. 그런 “마차택시” 수백대가 오상현내를 주름잡으며 손님을 끌었는데 일이원이면 현성내의 그 어떤 목적지까지 다 도달할수 있어서 편리했다. 원래 그걸 타고 학교까지 가려고 했는데 학교지도부성원들이 봉고차를 가지고 역까지 영접하러 나와서 우리 일행은 봉고차에 앉았다. 후날 나는 일부러 학교앞에서 그 “마치택시”를 타보았던것이다. 학교에서는 수백명되는 사생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환영하는 대회까지 열어주었다. 강연은 오전오후로 나뉘여 이틀동안 진행되였는데 강의하는 지도교원도 그렇고 강의를 듣는 사생들도 그렇고 모두 문학열로 끓어번지는 흥분의 도가니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당시 오상은 연변보다 먹거리가 더 풍요로웠다. 우리가 머무는 2박3일동안 대소연회가 교내식당에서, 교외음식점에서, 교원저택에서 련이어 벌어졌는데 번마다 그 갖춤새가 풍성스러워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군 했다. 우리가 도착하는 날 저녁에 학교식당에서 큰연회가 베풀어졌는데 김성휘선생님이 도도한 기분에 일어나시여 술잔을 들고 일장연설을 펴내시였다. 선생님은 연설가운데 가끔 즉흥시를 읊조리기도 하셨다. 원래 운치있는 스타일이지만 선생님이 그때만치 멋져보일 수가 없었다. 록화기가 없어 그 장면을 영상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무슨 내용의 시구였던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아무튼 주옥 같은 시구에 감정이 서리서리 옥맺힌 읊조림이여서 사생들의 갈채를 자아냈고 그들의 기분을 열광에로 끌어올렸다. 하여 연회장은 나중에 노래와 춤판으로 번지여갔다. 그날 선생님이 상마다 돌며 기분나게 “깐베이”하는 바람에 그만 만취되고말았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을 업고 침실로 올라가게 되였다. 선생님을 업는 순간, 나는 속이 뭉클해났다. 마치도 우리 집에 다섯살짜리 아들 홍파를 업은것처럼 가볍고 홀가분한 느낌이였다. 이런 몸에서 그처럼 주옥 같은 시구들이 샘물처럼 용솟음쳐 나왔다는걸 생각하니 어쩐지 코마루가 찡-해났다. 나는 한달음에 3층침실까지 올라가 선생님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드렸다. 선생님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천룡이, 참 안됐소.”하시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주무시는것이였다. 이튿날 학교에서는 우리를 위해 들놀이를 조직했다. 이름난 명승지인 룡풍산저수지로 가서 유람선을 타고 저수지주변의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였다. 그들은 연변사람들이 생선국과 생회를 즐긴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강물에서 잡아올린 펄펄 뛰는 물고기로 잉어생회도 치고 생선국도 끓이고 여러 가지 생선료리도 해올렸다. 우리는 그걸 천처히 맛보며 웃음꽃도 피우고 노래도 불렀다. 그번 오상행은 그야말로 문학으로 불꽃 튕기는 열광의 려정이였고 노래와 춤으로 즐긴 환락의 려정이였고 풍성한 음식을 감미롭게 음미한 만포식의 려정이여서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길수 있었다. 통신학부에서는 또 일부 특수한 통신생이거나 지방에 대해서 개별지도를 하여 그들의 창작능력을 제고시키는데 중시를 돌리기도 했다. 석현에 당시 칠순에 가까운 박운규라는 로인이 계셨는데 창작열정이 대단하셨지만 수준제한으로 난이도가 크다는 정황을 료해하고는 두세번 찾아가서 구체적인 지도를 해드려 미숙하나마 작품을 발표할수 있게 해드렸다. 그리고 녕안현 마련하에서 젊은 문학도들의 창작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즉시 하태렬씨 등 사업일군을 파견하여 그들의 정황을 조사하게 하고 그들의 창작활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게끔 하였다. 거기에는 김재호, 박룡철, 장혜영, 김미화 등 통신생들이 있었는데 하태렬씨의 광림은 그들에게 크나큰 힘으로 되였다. 그후 그들은 “개간지”뿐만 아니라 기타 여러 문학잡지에도 많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였었다. 바쁠수록 시간은 빨리 흘러가는 법인가부다. 어느새에 일년이 훌떡 지나갔다. 제1기문학창작, 번역통신학부졸업식과 “개간지”총결을 지어야 했다. 우리는 지나간 일년동안 걸어온 로정을 회고해보았다. 성과도 컸지만 실수도 많았고 허점도 많이 드러나있었다. 그동안 “개간지”를 6기 꾸려냈고 도합 16만부가량 발행하였으며 통신학부교과서를 3책까지 편집출판하여 도합 4천여책을 찍어 통신생들에게 공급해주었고 크고작은 순회강연을 50여차 조직했고 통신생들의 창작품(소설, 시, 수필, 민담, 재담, 씨나리오극본, 이야기 등 쟝르가 포함되였음)과 번역품이 200여편이 발표되였고(그 기간 다른 잡지에 발표된 통신생들의 작품은 여기에 통계되지 않았음) 지도교원들의 창작리론, 문학과 번역기초지식, 창작경험담, 작품평어, 강연재료 등 50여편을 교과서에 실어내보냈고 수많은 원고에다 수개의견이나 평어를 달아 보내주었다. 그 기간 통신생들의 원고는 하루에 한아름씩 받아들였는데 그 수자를 통계해낼 방법이 없었다. 지금처럼 컴퓨터를 사용했더라면 그 수자를 정확하게 통계해낼수 있었을텐데… 우리는 우수통신생과 우수지도교원을 추천할데 관한 통지를 각지에 발급했고 “개간지”문학상과 번역상작품추천활동도 벌렸다. 각지에서 올라온 추천명단과 작품에 대해 반복적으로 심의하고 추려서 후선명단과 후선작품을 편집부에 넘겨서 최후결정을 짓게 했다. 결과 김성훈 등 46명 우수통신생과 김응준 등 8명 우수지도교원이 최후로 결정되였고 김승일의 단편소설 “나그네의 시집살이” 등 3편 작품이 “개간지”문학상과 안종훈의 번역작품 “산촌소야곡” 등 3편 번역작품이 “개간지”번역상을 타게 되였다. 모든것이 다 준비되고 모든 것이 다 결정되자 우리는 “천지제1기문학창작, 번역통신학부”졸업식과 “개간지”문학상, 번역상수상식을 함께 성황리에 열었다. 그날 주석대에는 주 선전부, 주 문련의 지도동지들과 지도교원대표들이 올랐고 특별히 두리모자를 쓴 주 검찰원과 감옥의 지도동지들도 올랐던것이다. 그들은 감옥의 통신생대표가 몇 명 참가하였기에 우리가 특별초청해 온것이였다. 그 가운데는 당시 주 검찰원 부검찰장이였던 고 조병철동지도 참석하였었다. 졸업식과 수상식은 축하의 분위기속에서 화기있게 진행되였다. “천지제1기문학창작, 번역통신학부”와 그 원지인 “개간지”가 일으킨 역할은 력사적으로나 그 당시 현실적으로 모두 심원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한국에서 온 문학인들과 이 일을 말했더니 그들은 한국에서도 국제적인 문학창작활동은 몇번 있었지만 이처럼 규모있는 군중성적인 문학창작활동은 없었다고 했다. 조선에서도 이처럼 큰 문학창작활동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전반 조선문학사에 이처럼 규모가 큰 군중성적인 문학창작활동은 그 전례를 찾아 볼수 없는것이다. 비록 특정된 력사적조건하에서만 진행될수 있었던 활동이지만 그 활동이 일으킨 력사적의의와 우리 문단의 후비력량양성의 토대를 닦아놓았다는 현실적의의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만약 그때 창작통신학부와 “개간지”를 꾸리지 않았더라면 천부적인 창작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게 붓대를 꺾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 문단에서 중견역할을 놀고있는 작가나 시인들 가운데서 그 절반이상이 그때의 통신생출신들이다. 어느 땐가 내가 통신생등록부를 가지고 대조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글은 쓰고있지 않지만 우리의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때의 통신생출신들이다. 또한 통신학부를 통해 “개간지”에 작품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여 중소학교 교원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문화소 사업일군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향진정부에 들어간 사람도 있다. 그들이 지금 우리 민족문화교육사업에서 기본 력량으로 되고있다. 그들 가운데는 앞으로 다시 붓대를 들고 창작에 달라붙을 사람도 적지 않다. 통신생들 가운데는 또한 자기의 맡은바 공작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출세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령도직위에 올라간다음에도 계속 문학사업을 적극 지지해주고있다. 나는 그때 그런 문학창작의 통신학부를 꾸리고 그 원지인 “개간지”를 창간하여 꿈많은 문학도들에게 마음대로 발버둥질 칠수 있는 “요람”을 만들어 주었다는데 대해 지금도 아주 큰 자호감을 느낀다. 흘러온 세월에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것이 그래 자호감을 느껴볼수 있는 자본이 아니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그 시절에 꾸었던 문학꿈을 다시 해몽해볼 때마다 가슴이 들먹거리군 한다. 기회만 있으면 그런 일을 또 하고싶다. 아직도 그 문학꿈에서 깨여나지 못했으니깐.
36    그 때 그 시절의 문학꿈1 댓글:  조회:1960  추천:4  2013-06-26
그 때 그 시절의 문학꿈 홍천룡 1 “문학이란 무엇이냐?” 퇴근길에 들린 술집에서 술에 얼근해진 젊은 친구가 문학잡지를 쥐고 마구 흔들어치며 억설을 쏟는다. “소위 문학이란 책을 놓고 말하면 책가위이요 랭면을 놓고 말하면 고명이요 모두부를 놓고 말하면 마늘양념간장이지요…” “에끼, 이 사람아, 무슨 허튼 소릴!” 내가 꾸중을 하자 그는 더구나 부풀어 오르며 낯짝을 해뜩거렸다. “아닙니꺄, 까놓고 말해서 문학이란 빛좋은 개살구나 다름없죠! 문학해서 돈이 나옵니꺄 녀자가 나옵니꺄? 기껏해서 술 몇잔 생기겠지요. 술잔이나 기울면서 허황한 꿈이나 꾸고 …” “어허, 이 사람 점점 더 왜지밭으로 달아나네. 안되겠어!”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차분하게 젖어가는 밤공기가 머리를 헹구어준다. 구름없는 하늘은 짙은 쪽빛융단을 깔아놓은듯 검푸르기만 하다. 초저녁인데 벌써 별들이 나타나 깜박인다. 아득하게 요요해 보이는 별무리를 바라보노라니 멀고 먼 옛날 허연 코물을 국수오리처럼 달고 다니던 개구쟁이시절이 떠오르고 그 시절 고향의 밤하늘이 떠오른다. 역시 여름 밤, 공기가 청청하고 별들이 총총한 여름밤이면 정구네 마당가에는 쑥태를 태우는 노오란 내굴이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그 주위에는 늘 동네 조무래기들이 눈이 별처럼 초롱초롱해서 빙 둘러앉아있는다. 그러면 귀신옛말을 귀신같이 하는 정구형님이 귀신같이 앉아서 귀신옛말을 한다. 옛말에서 나오는 귀신은 저마다 팔방미인이다. 사람이 하는 노릇도 귀신이 다 할 줄 알고 사람이 하지 못하는 노릇도 귀신이 다 한다. 사람은 땅우에서만 헤집고 살지만 귀신은 땅우에서도 살고 하늘에 올라가서도 살고 바다밑에 들어가서도 자유자재로 산다. 귀신옛말을 들으면서 나는 신비한 환상세계를 엿볼수 있었고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랑만의 즐거움을 맛볼수 있었으며 상아아씨처럼 달나라로 훨훨 날아갈수 있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줄도 알게 되였다. 그것이 문학의 길에 들어서는 한쪽 발이 되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무슨 일이든 남보다 색다르게 해보려고 광분하군 했었다. 학교 때에는 작문숙제를 늘 엉뚱하게 써내서는 비평을 받기도 하고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남보다 더 특수한 일을 하려고 날뛰였다. 18살에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우겠다고 밤마다 석탄실이차에 따라다니며 차를 몰았고 19살에는 정식로동자가 되겠다고 누구도 가지 않는 삼도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기도 했고 20살에 정식로동자가 된다음에는 8개월만에 화선입당을 하고 시 선진생산자와 시 모범당원이라는 계관을 쓰고 찦차에 앉아 모주석저작학습활용강용회마다 불리워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장중하게 문학공부를 한답시고 필을 들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준확하게 대학교 2학년 후학기부터였다. 학과공부는 중학생아이들이 책가방을 뒤고방에다 메치듯 뒤전에다 밀쳐놓고 말이다. 울바자밑의 봉선화가 피여나기까지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자연적으로도 많은 요소가 수요되고 인공적으로도 많은 가꿈이 따라가야 한다. 지금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글을 쓴답시고 필을 긁적거리게 된데는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끼쳐주신 분이 몇분 계신다. 간단한 실례를 든다면 이러루한 에피소드도 있다. "문화대혁명"이 고조로 치달아 올라 전국형세가 한결같이 “붉은 바다”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우리 공원가의 “쏠쏠이패”들은 매일 할노릇이 없어 짝패를 무어 서시장거리를 한고패씩 휘젓고 다니는 것이 업이였다. 그러다가도 어디에서 공판대회가 열린다 하면 무리를 지어가서 구경하군 했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시내 어느 무리의 “짜새끼”(도적무리에 든 도적놈을 가리키는 은어임)가 몇년징역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였다. 징역년수가 높은 자일수록 우리는 재주있는 놈이라고 더 높이 보았다. 70년도 초반이라고 기억되는데 어느 날 로동자문화궁에서 또 공판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우리는 무리를 지어 가보았다. 그날 공판이 끝난다음 죄범을 실은 트럭이 굴러왔는데 맨 앞에 선 차우에는 얼굴이 하얗고 눈이 움푹 꺼져들어간 죄수가 가슴에 "김학철(金学铁)"이라는 "개패(죄수의 가슴에 건 간판을 당시 속되게 이르던 말)"를 걸고있었다. "어느 무리 짜새끼야?" "연길바닥에서는 면목이 없던 놈인데…" “보매 되게 날랜 눔이야!” …… 차림새를 보니 건달같아 보이는 두 청년이 주고받는 말에 곁에 섰던 중년사나이가 그들의 말을 시정해주는것이였다. "짜새끼가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라구." 그 말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어찌 죄인이 될수 있다는건가! 아니 그래?… 나는 그 중년사나이를 올려다보며 다급히 물었다. "그래 저 분이 소설을 쓰신다는 그 김학철…" "그래그래, 맞다. 너 죄꼬만 녀석이 아는것도 많구나. 반동소설을 썼으니 도적질한것보다 죄가 더 중한거지." 나는 그때까지 김학철선생님을 본적도 없고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도 못했었다. 다만 언젠가 정구형님한테서 연변에도 김학철선생님같은 분들이 소설을 많이 쓰고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때 나는 이다음 크거들랑 글을 잘 쓰면 그런 분들을 만나볼수 있겠지 하는 미련을 품고있었다. 헌데 그날 포승에 묶이워 "개패"를 걸고 트럭에 실린 "현행반혁명분자-김학철"이를 이처럼 비참한 눈길로 보게 될줄이야! 그날 나는 처음으로 이 세상이 너무 허무하다는 감을 느껴보면서 이다음 어느 땐가는 감옥으로 가더라도 한번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순간적이나마 가져 보았었다. 그다음 분은 강장희선생님이시다. 그 분과 나는 한 직장에서 함께 일했었다. 당시 우리 량식숙식품가공공장의 행정부문은 두개 조로 나뉘여졌는데 하나는 정공조(政工组)이고 하나는 생산조였다. 정공조산하에는 민병, 공청단, 공회, 인사, 보위, 총무 등 부문이 포함되였고 생산조산하에는 생산, 판매, 구입, 회계, 통계, 운수, 보관 등 부문이 포함되여있었다. 내가 정공조 조장이였기에 일상적인 사무는 내가 처리하게 되여있었다. 당시 강선생님은 신문과 금방 복간한 “연변문예”잡지에 글을 써서 발표하고 계셨다. 나의 사무실과 간벽을 사이두고 있었기에 그인 매번 자기의 글이 실린 신문이나 잡지를 먼저 나한테로 들고 와서 보이군 했다. “쑈훙(小洪),이것 보오. 내 쓴 글이 또 실렸다니.” 가는 실눈이 시물거리는 너부죽한 얼굴에는 은근한 자호감이 일렁거리고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가 글을 척척 써서 발표하는데 대해 흠모의 정을 금치 못했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내지 않았다. “로쨩(老姜), 이런 글을 써서 발표하면 무엇이 생김둥?” 그러자 강선생님은 얼굴에 피여나던 미소를 거두고 정색해서 이런 말을 했다. “쑈훙, 문학이란 돈이나 물질을 보구 하는 노릇이 아니오.” 그리고는 자기가 어떻게 되여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는가 하는 경력담을 들려주는것이였다. 남의 경력담을 듣기 좋아하는 나는 의례 퇴근길에 그이를 모시고 간이식당으로 가군 했다. 둘이 앉으면 근들이 흰술 한근에 소고기생회 한접시면 필이였다. 보기만 해도 얼큰한 소고기생회만 들어오면 강선생님의 코등에는 벌써 땀방울이 송송 내돋쳐 알릴락말락 반짝 빛을 뿌렸다. 그러면 인차 기분이 돌아져서 쾌적한 분위기속에서 문학과 인생을 론할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문학의 예술성과 감화력을 감지할수 있었고 습작의 간고함과 성공의 희열성을 습득하고 창작의 충동성을 가지게 되였다. 당시 “연변문예”편집부에서는 과외작자들의 창작강습반이거나 “화평회”같은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있었다. 강선생님도 통지를 받고 단위령도의 비준을 얻어 몇번 참가하셨다. 헌데 한두번이지 그냥 비준받자고 말을 떼기가 난감할 때가 있었다. 나의 기억에는 개산툰에 가서 강습반을 꾸린다고 할 때였다. 행정간부들의 외출허가는 공장의 2호인물이고 생산을 책임진 진주임의 비준을 맡아야 하는데 아마도 입을 떼기가 난처하셨는지 강선생님은 나의 사무실에 들어와 푸념하셨다. 나는 그이의 속심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과외작자로서 그번 강습반이 그에게는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얼마나 가고싶었겠는가를!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될 것 같았다. “로쨩, 아무 사람과도 말하지 말고 떠나는 날 말없이 떠나갑소. 그렇지 않아도 로쨩이 그런 강습반에 자주 다닌다고 전번 회의에서 말이 있었습꾸마.” 생산단위여서 공장의 출퇴근감독이 엄했고 청가제도가 층층이 세워져있었던것이다. “그래서 될가? 돌아와서 진주임이 가만 놔둘가?” “내 비준을 맡고 갔다고 합소. 로쨩이 떠난다음 내가 진주임한테 말해놓을테니깐요.” 행정적으로 따지면 공장내에서 내가 5호인물이였지만 젊은이들이 많은 공장이라 나의 역할은 2호인물에 못지 않았었다. 그래서 진주임도 많은 면에서 나의 의도를 마음대로 꺾지는 못했다. 강선생님이 떠난다음 내가 그 일을 진주임께 털어놓았더니 그는 대뜸 낯빛이 뚝뚝해지면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것이였다. 분명 자기를 무시했다고 노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닐세라 어느 한 당원생활회의에서 진주임이 이름은 찍지 않고 일부 당원간부들이 청가제도를 무시하고 월급행위로 무정부주의사조를 부축하고 있다고 맹렬한 비평을 가하는것이였다. 나는 꾹 참고있다가 나중에 자아검토를 하고나서 “반공격”을 개시했었다. 공장내의 문예인재와 체육애호가들을 관심하고 지지해주어야 한다고, 아무리 생산단위라고 생산만 틀어쥐고 혁명은 틀어쥐지 않겠는가고! 확실히 그해 연길시“5•1절”경축문예회연에서 우리 공장의 여러 개 절목이 집체상을 타게 되였는데 거기에는 강선생님이 직접 가사도 써주시고 또한 문화관의 친구를 모셔다 무용과 음악을 가르쳐주게 한 공로도 컸던것이다. 그리고 한분은 김관웅박사님이시다. 그 분과 나는 대학교 동기동반 동창생이였다. 동창생들지간의 년령차이는 엄청났다. 사회에서 십여년간 공작하다가 온 사람도 있었고 금방 고중을 졸업하고 들어온 학생도 있었다. 아마 학교교육이 보급된이래 중국에서 그것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 뒤끝이라는 특정된 력사배경하에서만 있을수 있는 아이러니한 현상이라 하겠다. 나는 나보다 세살이상인 그를 “로찐”(老金)이라고 불렀다. 그 때 그는 벌써 집체호생활도 겪었고 군부대단련도 했었고 출판업계에서 저작도 번역했고 문학작품도 쓰고 계셨다. 우리 반에서는 선망과 존경의 우상이였다. 성격이 소탈하고 박식하여 우리 어린 또래들은 모를것이 있으면 늘 그와 물어보았고 그러다가도 속에 내키지 않거나 달통되지 않으면 그와 변론하기를 즐겼다. 그와의 변론은 언제나 열렬했고 서로 지지 않겠다는 즐거운 게임이였고 감성으로부터 리성으로 승화되는 과정이였으며 그의 학문을 “도적질”해내는 쾌감적인 분위기였다. 지난 세기 70년대말기는 어리둥절한 가운데서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기였다. 관념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그에 따라 대학교교정에서는 세가지 바람이 불어쳤다. 탐구바람, 련애바람, 문학바람이 교정의 구석구석마다에서 회오리쳤었다. 낯짝이나 좀 사내답게 생기고 좀만 더 츨츨하게 빠졌더라면 나도 련애바람에 말려들어 죽자살자 하는 랑만의 그 파도에 표류해보는 풍류사 한페지를 교정에 남겼을텐데… 그것이 대학시절에 남긴 유감이라면 제일 큰 유감이겠다. 못난 새끼오리 동동 뜬다고 나같이 못난 놈은 한번 문학에서나 떠보자고 마음먹었다. 또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조문학부나 우리 중문학부의 대부분 동학들이 문학에 열광하고있었던것이다. 하물며 우리 반에는 “로찐”과 같은 문학스승도 계시고 또 문학과 문학번역에 뜻을 둔 동창생들이 여러명 있었으니까 뒤심이 있다고 속이 든든해났던것이다. 그 당시 “로찐”네는 부모네 집 방 한칸을 따로 도배해서 살림살이를 하고있었다. 우리반 문학도들이 대여섯명만 그 집에 가서 앉으면 방이 꽉 차는 비좁은 방이였다. 어떤 녀석은 널마루에 퍼더버리고 앉았고 어떤 녀석은 문턱에 걸터앉아서 생맥주에 명태쪼각을 찢으며 문학과 인생에 대해 열변을 토하군 했는데 저마다 중국과 세계의 문단을 주름잡으며 달리는 준마였고 당금이라도 세계명작을 써낼 것 같은 대가의 자태였다. 문학으로 삶을 영위해가면서 한번 우리 말 우리 글로 세계를 흔들어보겠다고 꿈꾸는 시각이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분위기에 그 꿈속에서 헤매던 그 시절이 그립다. 열변을 토하고 돌아온 날 저녁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담배대를 꼬나물고 비좁은 방안을 휘젓거리며 위대한 구상을 무르익히노라면 불현듯 뽀얀 운무속으로 반짝 번개같이 뇌리를 탁 내리치는 것이 있다. 옳지, 바로 그거야 그것! 잡았다, 잡았어! 세상을 놀래우는 명작이 잉태하는 과정이 아닐손가! 그것이 날아날가봐 담배불을 부벼끄고는 부랴부랴 이불부터 쫙 펴고 거기에 엎디여 턱을 베개에다 걸고는 원고지우에다 필을 날린다. 필끝에서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며 부서진다. 래일모레면 저기 저 문단봉우리에 함박꽃이 활짝 피여날게 아닌가! 그 불꽃처럼 튕기던 령감이 달아날가봐 날이 밝아오는줄도 모르고 대학교등교시간도 까맣게 잊고 필만 날린다. 그렇게 이삼일 써낸 “명작”을 한시급히 문학월간지에 내서 세상사람들에게 빨리 알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워 일분일초라도 지체될세라 우편국으로 달려가서는 편집부주소에다 “편집부책임자앞”이라고 밝혀서는 부쳐보낸다. 그것도 위대한 “명작”이 분실될가봐 잔돈이 더 들어붙는 등기우편으로 말이다. 프로레타리아 강철작가 오스또롭쓰끼도 원고를 분실당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지 않았는던가! 우편국을 나서니 정말 하늘이 맑아보이고 그 맑은 하늘로 내 마음이 한마리의 비둘기가 되여 포르릉 날아오른다. 그제날 건축시공대 대장질 할 때 그날 떨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 무더운 여름날 퇴근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한두시간씩 땀동이를 흘리군 했었다. 임무를 완성한다음 서늘하게 깃드는 어스름에 땀에 전 몸을 식히며 대원들과 우스개를 피우면서 “쑈풀치기”(소매점찾아들기)하는 멋이란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모른다. 그때는 체력로동으로 인한 육체상의 기분전환을 위해 생맥주를 마셨다. 오늘은 뇌력로동으로 인한 정신상의 기분전환을 위해 한잔 들어야 하겠다. 우편국에서 돌아오는 걸음에 마을어구에서 “쇼풀치기”를 했다. 한잔 마시면 가슴이 쩡 열리던 생맥주, “명작”을 써낸뒤에 마시는 맥주는 더욱 더 시원하기만 하다. 한잔 또 한잔… “주인님, 이 상점 이름이 뭐던가요?” “북광상점.” “아, 그렇지. 오늘이 며칠이던가요?” “8월 5일, 목요일.” “아, 그렇지. 8월 5일, 위대한 8월 5일, 드디여 내가 오늘 이 북광상점에서 명작을 마무리지은 기분에 잔을 기울이며…” “이봐 젊은이, 금방 뭐라했나?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아하, 무슨 날인가구요? 그건 이다음 차차 알게 될겁니다. 자, 맥주 한컵 더!” “인젠 그만하지? 앉은 자리에서 벌써…” 상점주인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젊은 친구가 더 마시면 주정이나 부릴가봐 근심되는 모양이였다. 비츨거리며 상점문을 나서니 만천하가 노래진다. 이삼일동안 밤낮이 따로없이 련속작전한 피곤이 일시에 몰려드는지 눈까풀이 천근무게마냥 내리드리워 눈을 뜰수가 없었다. 겨우 집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문턱에 걸려 넘어진 것이 그대로 마루바닥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야, 드디여 발표되였다. 내 글, 내 작품이 드디여 활자로 찍혀나왔다. “자식, 쓴다더니만 끝내 써냈구나.”동학들의 부러운 지껄임. “천룡이, 희망이 있소. 힘을 내오!” “로찐”의 고무의 말씀. “천룡씨, 정말 대단해요. 문학공부를 한다더니만 끝내 작가가 되였군요. 축하해요!” 꿈결에나 찾아가던 몇몇 꽃분이 같은 얼굴에서도 함박꽃 같은 웃음이 활짝 피여나며 축하의 인사가 날아든다. 세상이 이래서 살만하구나! 헌데 손바닥만한 단편이 좀 시시해! 기나긴 인생행로에 등대와도 같이 머나먼 미래를 비춰줄만한 장편대작을 써내자! 그래 소뿔은 단김에 뽑으라고 내 오늘부터 또 필을 들고 쓰자. 필이 어디에 있냐? 원고지가 어디에 있냐? 팔을 허우적거리며 아무리 찾아도 필이 손에 쥐워지질 않는다… “야, 일어나라. 너 이게 마루바닥에서 무슨 주제야!” 필을 찾느라 허우적거리는데 누가 궁둥이를 잡아두드린다. 눈을 떠보니 상을 찡그린 어머니가 가슴츠레한 눈으로 흘겨보고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어 꺼부적거리며 일어나 보니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아마도 마루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뒹군 모양이였다. 젠장, 작가가 이게 무슨 꼬락서니야! 나는 옷에 먼지를 툭툭 털었다. 풀썩풀썩 시뿌연 먼지가 피여올랐다. “어이구, 이 먼지를, 밖에 나가 못털가? 썩 나가!” 어머니가 장난꾸레기를 내쫓듯 마구 밀어낸다. “앗따실루 참, 엄마, 인젠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되우. 내가 지금 무슨 사람이 된 줄 알기나 아우?” “무슨 사람이겠냐? 학생이지. 학생이란게 술을 퍼마시구 이게 무슨 꼴이냐! 어서 못 나갈가? 이 입성주제를 어쩌누? 금방 빨아서 입혔더니…에그에그, 저런저런, 저것두 원 대학생이누!” “엄마, 난 인젠 학생이 아니라 작가란 말이우 작가. 알겠소? 홍작가가 됐단 말이우.” 어서 나가라고 손사래를 치던 어머니가 팔을 내리우며 덩둘한 표정을 짓는다. “작가라니? 대학도 졸업하지 않구 작가질 한다냐? 졸업하면 선생질 한다더니…그래 작가질 하면 한달에 얼마나 탄다더냐?” “앗따실루 엄마두 참, 작가란 거 뭐 전문직업이 아니구, 거 뮈라구 할가…됐소됐소, 어이구!” 나는 몸을 돌려 밖에 나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쇠귀에 경 읽기지. 어이구, 작가두 모르구 무슨 멋에 세월을 살아왔누?” 그날 저녁부터 나는 담배대를 꼬나물고 방안을 왔다갔다 서성거리며 장편대작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밤이면 밤마다 담배 한통씩 태우며 구상을 무르익히느라 머리속알머리까지 욱씬욱씬해나도록 뇌즙을 짰지만 어쩐지 그 놈의 구상이 무르익혀지질 않았다. 낮이면 낮마다 교실에 앉아서 창밖을 멀거니 내다보며 편집부의 희소식이 언제면 날아오겠는가고 학수고대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가고 이틀이 지나가고 일주일이 지나가고 한달이 지나갔는데도 편집부쪽에서는 감감무소식이다. 이럴 수가 있나! (편집부선생님들의 수준이라면… 한번 찾아가서 내 의도를 엿쭈어본다?) 이튿날 나는 원시초고뭉텅이를 안고 쭈클거리며 하남시장곁에 있는 편집부를 찾아갔다. 복도에 들어서니 마침 몸집이 시리시리한 량반이 테굵은 안경을 코등에 걸고 나와 두리번거리고있었다. 어쩐지 주눅이 싹 들며 그 사람한테로 다가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맹랑하게도 되돌아서 나오고말았다. (작가가 되려면 자세를 좀 높여야 해! 시시하게 작품을 내주지 않을가봐 편집부를 찾아다녀? 못난 놈!) 그 길로 나는 동반동창 “로꾸이”네 세집으로 찾아갔다. 이불밑에서 잡지를 훑어보느라 꾸무럭거리는 그를 불러 앉히고 원고를 내밀었다. “이걸 보라구. 내가 구상하구 직접 집필한건데 어떤가 좀!” “야 이거참, 아직 밥도 안먹었는데…” “로꾸이”는 시쁘둥해서 팅팅 붓긴 눈두덩이를 주무른다. “지금 밥 먹는게 중요한가? 위대한 작품을 눈앞에 두고… 먼저 보라구. 볼새에 내가 맥주를 사올테니.” “맥주는 무슨 맥주야? 식전부터!” “앗따, 그래 위대한 작품을 놓고 맹물에 놀겠는가?” 나는 그집 퍼런 비닐통을 찾아들고 상점으로 달려갔다. 내가 생맥주에 마른 안주를 사들고 돌아오니 “로꾸이”는 시무룩이 웃고있었다. “재밋게 썼구만. 습작숙제로 바칠건가?” “숙제라니, 무슨 숙제?” 나는 아닌 밤중에 무슨 홍두깨냐는듯 덩둘해졌다. “전번 습작시간에 심선생님이 습작품 한편씩 써내라고 포치했는데 당신이 또 빠진 모양이구만.” “아니아니, 그건 아니야! 그까짓 작문숙제를 바치자구 내가 맥주를 사들고 다녀? 시시하게스리! 이건 직접 편집부에 정식으로 투고하는거라구.” 나는 시뚝해서 골을 내저었다. “어벌통이 크건만 그게 어디…” “아니 그래 작품이 안됐다는 말인가? 좀 똑똑하게 말해주게!” 장사에서 밑진 놈이 탈을 잡는다고 나는 괜히 “로꾸이”와 걸고들었다. 그가 마시든 말든 나는 맥주 한통을 다 마시고 그 집에서 나와버렸다. 집에 와서 다시 어지럽게 갈겨뭉개놓은 초고를 뒤적이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로꾸이”가 제기한 의견들이 어딘가 속을 콕콕 찌르는데가 있는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시 첫 시작부터 수개하기 시작했다. 수개한다음 몇몇 동학들에게 보였다. 역시 긍정해주는 사람은 없고 생각밖의 의견들이 줄줄 튕겨나왔다. (이 눔들 수준이 요것밖에 안돼? 명색이 대학생이라는것들!) 나는 머리가 뻥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작문숙제를 달리 쓸 필요도 없이 이걸 바치고 선생님의 의견이나 들어보자! 그런데 습작시간에 심선생님이 그 위대한 작품을 전반 학생들 앞에서 줄거리를 소개한다음 전형분석을 가할줄이야! 그때 무안에 빠져 골도 들지 못했던 꼴이 지금도 생각하면 눈앞에 선하다. 강단에 높직이 올라선 심선생님이 팔을 내저으시며 “물이 쏴−하고 흘러내릴 때면…”하는 구절을 외우시면 교실안에서는 와−하고 폭소가 터지군 했다. 그 위대한 작품속에는 물이 쏴−하고 흘러내릴 때마다 작중 주인공인 처녀의 행동거지, 심리상태, 애정표현이 다양하게 변화되는 과정이 정채롭게 묘사되여있었던것이다. 심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물이 쏴−하고 흘러내릴 때면…”하고 읽었을 때에는 전반 교실이 떠나갈듯한 폭소가 터졌었다. 그 폭소속에서 나의 첫 미발표 완성작이 끝을 보고말았던것이다… 한편 작품으로 세상을 놀래워 놓고 하루밤새에 작가가 되려던 꿈이 깨여지자 저으기 사기가 저락되였다. 맥주를 마셔도 말오줌처럼 찝질하기만 했다. 학교가기도 싫어졌고 책보기도 싫어졌다. 그런데다가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작가월급이 언제쯤부터 나오냐고 따져묻기도 했고 작가가 되더니만 맥주값이 더 들고 담배돈이 더 날아난다고 고깝게 골려주기도 했다. 한번은 우리 몇몇이 앉은 자리에서 “로찐”이 대개 이런 말을 했다. 작품 한편을 완성하자면 정말 공력을 들여야 하는데 생활체험으로부터 구상에 이르기까지 인물의 전형화부각으로부터 성격변화에 이르기까지 생활론리에 맞아야 하고 형상이 생동하고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언어예술인것만큼 언어토대도 잘 닦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 말에 고무를 받고 큰힘을 얻었다. (그래, 한술에 배 부르는 법은 이 세상에 없지. 한걸음 한발자국씩 떼보자!) 그후부터 나는 매 한편의 작품, 매 한부의 명작을 본다음에는 그 감수를 일기로 적었고 어휘를 풍부하게 장악하느라 애를 썼다. 그리고 습작삼아 생각나는대로 몇편 써보기도 했다. 허나 발표하겠다고 들뜨지는 않았다. 한편을 쓰고는 랭정하게 검토해보고 수개하군 했다. 그러다가 “진심”이라는 단편소설이 “대중문예”(지금의 “도라지”잡지 전신임)잡지에 발표되여 25원이라는 원고료가 날아왔다. 머리에 털이 나서부터 그때까지 처음 나의 글이 활자로 찍혀나온것이였다. 축하할만 했다. 나는 그 돈을 어머니께 맡기면서 한상 잘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이게 작가 월급이냐? 량식국에 쌍발(출근)할 때보다 적구나.” “월급이 아니라 원고료요. 글을 쓴 값이란 말이오. 작가가 되여 글을 써내면 돈이 이렇게 척척 나온단 말이오.” “오, 전번에 그 퍼런 잡지에 둬어장 실린 글값이겠구나. 웨 백장쯤씩 써낼거지.” “그래 엄마, 이 아들이 이제 저명한 작가가 되여 백장 아니라 천장씩, 만장씩 써내서 엄마한테 돈을 마대로 메다 바칠게.” “흐흐, 너 큰소리는 잘 치더라.” 량식국에 있을 때 나의 로임은 삼십여원이였고 그전에 림시공질할 때에는 사오십원씩 탔고 삼도탄광에 가서 채탄공질 할 때에는 96원씩 탔었다. 당시 주급단위에서 자그마한 부과장직을 맡고있던 아버지의 로임이 68원이였던것이다. 아무튼 그 원고료덕분에 그날 친구들과 함께 밤을 패며 잘 먹고 잘 놀았다. 나는 속으로 은근히 이런 좋은 일이 한달에 한번쯤은 있게 만들자고 맘먹었다. 그 이듬해, 즉 1981년도 여름방학이였다. 어느날, 조양천교동촌에 있는 아재와 아즈바이가 놀러왔다. 어머니는 퇴근길에 돼지고기와 감자국수를 사들고 와서 국을 끓여 대접하려고 했다. 내가 부엌바닥에 내려가 불을 지폈는데 부엌아궁이로부터 내굴이 뽀얗게 밀려나왔다. 어머니와 나는 캑캑거리며 눈물을 쥐여짰고 아재와 아즈바이도 집안에 앉아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에구, 시내살림두 이 꼴이구나. 월급쟁이 부러울게 없다야!” 아즈바이가 나가며 비양거렸다. “어이구, 검정개 도투(돼지)수 하우. 아즈바이네는 북데기나 때는 신세에. 우리 시내에서는 그래두 석탄을 땐다우.” 뽀얀 내굴에 잠긴 내가 맞받아 한마디 찔 갈기니 아즈바이 또한 지려고 하지 않았다. “야, 우리 촌놈들은 북데기를 때도 이렇게 내굴을 먹으며 밥을 짓는 법은 모르고 산다야, 쳇!” “포화”속에서 어머니와 나는 얼굴이 시루떡이 되면서 끝내 감자국수에 돼지고기를 푼덕푼덕 썰어넣은 국을 맛있게 끓여냈다. 창문마다 활짝 열어젖히고 내굴을 뺀다음 우리는 저녁상에 삥 둘러앉았다. 반주술 둬어잔이 들어가자 호방한 아즈바이가 말이 많아졌다. 아즈바이의 입이 터지기 시작하면 그 동네 마을안팎 일들이 다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아즈바이와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면 더없이 구수하고 즐거운 기분이다. 이튿날 아재와 아즈바이를 보내고 어머니는 출근하면서 나한테 일을 시켰다. “너 밤낮 책만 붙들구 있지 말구 머리두 쉬울 겸 구들이나 좀 뜯어라. 아무래 구들고래가 멘 것 같구나.” 내가 사회에 나와 일하면서부터 우리 집 구들은 기본상 내가 뜯어고치군 했다. 어쩐지 내가 뜯어고친 구들은 불길이 잘 들군 했다. 그래서 동네 청을 받고 이웃들의 구들을 고쳐준 적도 몇번 있었다. 그러면 돼지고기장물에 술대접은 빠지지 않는다. “이마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령감쟁이들처럼 어디서 그런 재간은 배웠노?” 동네 나그네들이 풋내기같은 죄꼬만 녀석이 구들을 척척 뜯어고치는 꼴이 희한했는지 혀를 찰 때가 있었다. 기실 불이 잘 들게 구들을 놓자면 주요하게 세곳이 관건이다. 즉 부엌아궁이의 높이와 가마후렁이에 내는 구멍높이와 크기, 그리고 구들고래의 제일 끝머리인 구새밑의 “개자리”이다. 이 세곳에서다는 모두 벽돌 석장이상 높이의 격차를 두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모병이 많이 생기는 곳은 “개자리”이다. “개자리”를 빼는 위치와 간격, 그리고 깊이를 잘 조절해주지 못하면 구새가 내굴을 제대로 빨아올리지 못하는것이다. 그날 나는 공장에 있는 친구 둘을 불러다 구들을 뜯었다. 뜯고보니 구들고래가 꽉 멨고 또한 여름에 불을 제대에 때지 않은 탓에 “개자리”에 습기가 좀 차있었다. 구들고래를 훑어내고 습기찬 “개자리”에 마른 석탄재를 살짝 깔아주고나니 점심 때가 휠씬 지난 뒤였다. 얼굴에 검댕이칠을 한채로 간이식당에 가서 개장국 한그릇씩 먹고와서 구들돌을 놓고 벼짚을 썰어넣어 이긴 진흙으로 “거미줄”을 치고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거미줄”을 친 구들은 바짝 말리워야 한다. 장밤 패면서라도 바짝 말리운 다음 이튿날에는 모래를 많이 섞은 몰탈로 “낟가노리”(온돌웃면을 몰탈로 얇게 바른 것)를 해야 한다. “낟가노리”는 천천히 말리우는 것이 좋다. 빨리 마르게 하면 구들이 쫙쫙 갈라터지게 된다. 어머니가 수고했다며 퇴근길에 명태를 사다가 국을 끓여주었기에 나와 친구 둘은 생맥주에 만포식했다. 밤에 내가 “거미줄”을 친 구들을 말리워놓으면 이튿날 두 친구가 일찌감치 와서 오전내로 “낟가노리”를 다 해놓기로 약속했다. 그날 밤, 나는 널쪼각을 짜개서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불길이 허리를 굽히며 활활 빨려들었다. 그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땔나무가 마른 널쪼각이여서 빨리 붙기도 했고 빨리 꺼지기도 했다. 널쪼각 대여섯개를 아구리에 밀어넣으면 담배 둬어대 태울 여지는 있었다. 아구리로부터 비껴나오는 불빛에 전신이 훈훈해나기도 했다. 나는 불을 피우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면서 아궁이안의 불길이 비춰주는 불빛에 잠겨 끝이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저 머나먼 시골에서 사래긴 콩밭기음을 매던 아줌마가 목이 말라 땀만 발발 흘릴 때 시원한 오이냉국이 담겨 출렁거리는 “퉁재”를 메고 지나가던 동네집 나그네… 몇년후 시가지 번화한 거리로 땀을 뻘뻘 흘리며 삼륜인력거를 모는 그 동네집 나그네가 금방 내린 손님에게서 차비를 받고있는데 까만 승용차가 스르르 미끌어져 오더니 그 옆에 와서 무겁게 멈춰선다. 차문이 열리며 까만 정장을 한 녀인이 내린다. 바로 그 사래긴 콩밭기음을 매던 아줌마… 지주성분을 가지고 죽은 아버지때문에 학교 때에는 홍소병, 홍위병에도 못들고 마을에 돌아와서는 공청단에도 못들고 동네 멍텅구리 석두도 드는 민병련에도 못들고 내내 서른고개를 넘도록 장가도 못간 덜먹총각이 자살하려고 몇번 독한 마음을 먹었다가도 시름시름 병환에 계시는 로모때문에 죽지도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마을의 꽃분이인 로지서의 막내딸 영실이가 시집을 가지 않고있었다. 영실의 도적사랑에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된 덜먹총각, 그 어느 날부터인가 영실의 아래배가 비죽이 나오면서부터 동네에서는 “전쟁”이 폭발된다. 그런데 그럴 때에 대학교입시제도가 회복되면서 덜먹총각이 대학으로 가게 된다. 4년대학공부기간, 영실이는 아이도 키우고 병환에서 골골거리는 시어머니도 돌보면서 별별 고생을 다 하며 졸업하고 돌아올 대학생을 기다린다. 그런데, 또 역시 그런데 졸업을 앞둔 대학가에서는 교정의 “모란꽃”으로 불리우는 한 처녀대학생의 아래배가 또 비죽이 나오기 시작한다… 오만가지 구상이 얼기설기 얽혀서 뜬김처럼 서려오르는것이였다. 그 속으로 천천히 사유의 노대를 저어가다가 문뜩 엊저녁에 아즈바이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하여 구상의 돛대를 다른 한 풍력에 맞추었다. 부엌아궁이안에서 널쪼각이 픽-픽- 소리를 내며 타번지고있었다. 계속 구상에 잠겨 노대를 저어가다가 머리속 저 멀리로부터 한 인물이 천천히 걸어오고있었다. 마주 달려가며 찬찬히 여겨보니 너무나도 익숙한 면목이였고 또한 너무나도 생소한 모습이였다… 바로 그 사람, 그 인물이야! 꼭 붙잡아야 해! 나는 그 사람, 그 인물을 붙잡아다 내 뇌리속에 가둬넣기 위해 장밤 패며 담배 한통을 다 태웠다… 이튿날, 두 친구가 와보고 혀를 찼다. “야, 잘 말랐구나. 너 엊저녁 밤을 팼지? 이제 이 우에다 ‘낟가노리’를 하면 그저그만이겠다. 자, 빨리 서둘러 점심전에 끝내자.” “아니아니, 미안하지만 너희들 돌아가 줘. 내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이거 참, 안됐구나.” 내가 팔을 내젓자 그들은 의혹이 생겨서 덩둘해졌다. “밤새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너 어디로 가야 하니?” “아니 가긴 어디로 가? 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야 이게 밤잠 못자더니 머리가 돌지 않았어?” “그래. 머리가 돌았다 돌았어. 이제 지랄을 부리기전에 어서 돌아가!” 나는 무작정 그들 둘을 돌려보내고 림시 숙식처로 정한 헛간에 들어가 두리반상을 놓고 그 우에 원고지를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엊저녁 구상에 떠오른 그 사람, 그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녁에 어머니가 퇴근해서 뒤죽박죽이 된채로 있는 집안팍을 돌아보고 목청을 빼며 야단을 쳤다. “야, 일을 이렇게 건둥반둥 꼬리를 팽개쳐놓으면 어쩌니? 그래 퇴근한 이 에미가 한밤중에 하라는거냐? 이 답답한 녀석아!” “엄마, 날 건드리지 마오. 나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한밤중에 하든 한대낮에 하든 그건 다 엄마 맘대루야. 그렇지 않으면 래일 삯군을 부르든지. 나 오늘부터 위대한 명작에 대한 구상과 집필과정에 들어섰는 바 요즘은 내손을 바라볼 생각은 아예 하시지도 말 것!” “저런, 저런, 어이구 기가 차서 원, 25원짜리 작가가 되더니만 틀거지가 대단해졌구나. 이다음 어떤 색시가 들어와 그 틀에 맞춰줄런지…에그에그!” 내 성미를 잘 아는 어머니는 더 닦달을 부리지 않고 이런 푸념을 남기고 몸을 둘쳐 나갔다. 그 푸념속엔 그 어떤 미진한 기대감도 은근히 깃들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튿날 어머니는 동네 령감 두분을 삯군으로 불러놓고 출근하였다. 나는 그들이 일하든 말든 관계치 않고 글만 써내려갔다. 글은 쓰면 쓸수록 나를 흥분시켰다. 이틀에 초고를 마무리짓고나니 령감들이 해놓은 “낟가노리”도 거의 말라가고있었다. 대충 갈겨 쓴 초고를 들고 친구들을 찾아가 의견을 들어봤더니 생각밖에도 무릎을 치는 녀석에 엄지를 내미는 녀석도 있었다. “야, 이거 정말 니가 쓴거야? 니가 쓴거라면 ‘포’를 쏜 셈이다!” “근자에 보기 힘든 력작이야! 글쎄 네손에서 이런 작품이 떨어졌다는게 물음표를 던질만한 일이거든. 혹시… 그럴수는 없겠지만 어디서 힌트를 받았다거나 그 어떤 작품을 모방…” 나는 더 참을수 없었다. “야- 이 눔들, 사람보기를 와늘 더럽게 보는구나. 래일 연길시내 경찰이란 경찰은 다 풀어서 수사를 벌려 봐! 이것과 너 그 뱁새눈만큼이라도 비슷한 작품이 이 세상에 또 있는가를! 자식들, 이제 원고료가 나오면 너희들 맥주잔이 차려질려니 생각지도 마. 명태껍질만 태워서 줄거야!” 나는 집에 돌아와 친구들의 의견을 참작해서 삭제할건 삭제하고 수개할건 수개하고 보충할건 보충해넣은다음 다시 베껴서 정식으로 “연변문예”편집부에 투고했다. 별로 자아감각이 좋아져서 길가는 처녀애들을 보고도 휘파람을 휙-휙-불고 길가의 돌멩이를 보고도 발길로 차버리군 했다. 이번에는 별로 지루하게 기다리지 않았는데 희소식이 골목바람을 타고 날려왔다. 연변신화인쇄공장에서 “연변문예” 제 11기를 찍고있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박힌 문장이 인쇄되여 나오더라는것이였다. 나는 인차 친구를 찾아 인쇄공장에서 찍고있는 그 인쇄종이쪼박이래도 “훔쳐”낼수 없겠느냐고 간절한 심정을 비췄더니 이튿날 그 친구가 활자의 기름도 채 마르지 않은 인쇄종이를 둘둘 말아서 내앞에 내놓았다. 펼쳐보니 확실히 내 이름이 박힌 “구촌조카”라는 작품이 활자로 인쇄된 종이였던것이다. “야, 성공이다, 성공! 내 인생이 180°로 확 도는거야! 자, 가쟈!” 나는 그 종이를 말아쥐고 휘휘 내둘렀다. 그 친구가 덩둘해서 눈을 치떴다. “가긴 어딜 가?” “쑈플(상점)!” “자식, 또 쑈플치기야? 나 지금 출근시간이다. 너의 이 종이때문에 겨우 허가를 맡고 나온거야. 제시간에 돌아가지 않으면 이달 장려는 ‘물깍지’야. 그러니…” “야- 이 자식, 인생이 확 도는 판인데 무슨 출근이야! 지금은 ‘쓰딸린그라드격전’같은 격변기야. 그래 이런 격변기에 마른 정신에 놀아야 한단 말이니? 말 같잖은 말! 어서 가쟈!” 나는 무작정 그 친구를 끌고 “쇼플치기”하러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 작품이 발표된후 사회적반향이 아주 컸다. 대개는 학생으로서 이처럼 완숙된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는 후론들이였다. 하학하고 교정에 나서면 혹간 하얀 대학빠찌를 달고 두세씩 짝을 지어 가던 녀학생들도 나를 보고 할끔거리며 쏙딱거리군 했다. 아마도 “저 애다. 그 소설의 작자야. 히-, 그저 그렇구나. 쑬쑬하지.”라고 저희들끼리 웃었을것이다. 교원들도 나를 보고는 눈살을 쪼프리시며 고개를 끄덕이시군 했다. 아마도 “너 어물쩍하구나!”하고 속으로 긍정해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야말로 고무풍선을 타고 붕 떠다니는 기분이였다. 그해 년말에 가서는 더 큰 희소식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연변문예”잡지가 복간된후 1980년도부터 “연변문예문학상”을 설치하고 독자들의 추천표에 따라 후선작을 뽑고 해당 전문가들의 평의를 걸쳐서 문학상 작품을 선정했던것이다. 당시 “연변문예문학상”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유일한 최고문학상이였다. 첫해 첫기에 농민작가 정세봉선생님의 “하고싶던 말”이 제일 높은 추첨표수로 당선되였고 두번째 해인 1981년도에 제2기로 생각밖에 나의 작품 “구촌조카”가 제일 높은 추첨표수로 당선되였던것이다. 뭐, 지금에 와보면 그저 그런 작품이지만 그 당시에는 확실히 우리 문단을 들썽해놓았었다. 정말 꿈을 꾸다가 현실로 꿈을 꾸게 된 꿈이였다. 나를 놓고 볼 때 인생길에서 제일 큰 성과를 거둔 셈이였다. 우리 말 우리 글로 우리 민족의 문화진지를 고수할수 있는 해병대 수호천사가 되였다는 긍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르기도 했었다. 시상식 날, 주급 지도일군들과 문련주석들(작가협회가 문련에 소속되여 있었음), 그리고 문학계의 원로선배님들, 나의 문학지우들이 참석하였다. 그날 너무 격동된 나머지 수상소감을 어떻게 피력했던지 지금 기억에 남지 않는다. 저녁축하연에서 나는 상마다 돌아다니며 술을 부어올리고 맞잔을 하다보니 연회청의 샨데리야등이 빙글빙글 돌아갈 지경으로 취했다. 한밤중에 누구의 부축을 받으며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택시도 없는 세월에! 원래는 부모님들앞에 문학상영예증서와 상금을 내놓아 기쁘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두분 다 주무시고 계셨다. 그들이 주무시는 모습을 내려다 보며 나는 코마루가 찡-해나서 술을 많이 깼다. 어머니의 이마에도 주름이 많아졌고 아버지의 이마에도 주름이 많아졌다. 저도 모르게 눈굽이 젖어올랐다. 나는 슬며시 집을 나와 야간상점을 찾아갔다. 소주 한병에 소고기통졸임 한통, “닭똥과자” 한봉지에 사탕 한봉지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그걸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무시는 침상머리에 놓고 이런 생각을 했다. 인제는 내가 종종 아버지와 어머니깨 “닭똥과자”라도 사드려야겠다고. 바야흐로 “25원짜리”작가가 되고있지 않는가! 나는 불을 죽이고 조용히 그 방에서 나왔다… 이튿날 일어나서 어쩐지 옷 매무새에 신경을 쓰게 되였다. 체경앞에서 이옷 저옷 갈아입어보기도 하고 몸에 대보기도 하면서… 종래로 있어본 적이 없던 현상이라 어머니가 의혹스레 눈을 흘끔거렸다. “또 무슨 행사가 있냐? 작가가 되면 좀 분주스럽겠다야.” “아니 뭐, 시시한 행사!” 학교정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다. 인젠 체면이 설만한 인물이 되였는데 혹시 실수라도 하면… 사람이 이러지 말아야겠는데… 자그마한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에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하도깨비인양 우쭐렁거리기를 좋아하고 좀 큰 성과를 올리게 되면 오히려 그 성과에 먹물이 튕길가봐 조마조마해진다. 더구나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의 인사요 축원의 고무격려이니 앞으로 처신을 제대로 갖출 것 같지 못해 더 근심스러워졌다. 졸업을 앞둔 어느날, 나는 학교정원에서 “연변문예”잡지사의 리상각주필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다. 달려가서 인사를 올렸더니 무척 반가워하셨다. “안녕하십니까! 우리 학교에는…” “좀 볼 일이 있어 왔다가는 길이오. 어떻소?” 주필님께서는 나의 정황에 대해 물어보시며 관심을 돌리시였다. 나중에 계속 힘을 내라며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시였다. 나는 스스로 기운이 솟구침을 느꼈다. 며칠후에 학부내에서는 리주필님이 왔다가신 것은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기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했다. 내가 정말 “연변문예”잡지사로 갈수 있을가? 그때나 지금이나 “연변문예”(지금의 “연변문학”)는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최고문학지였으니깐. 또 며칠이 지난후 우리 반을 책임지신 한선생님이 정식으로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동무의 사업배치는 “연변문예”잡지사로 결정되였는데 다른 의견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두말없이 학교의 배치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교원실에서 나온 나는 교정의 잔디밭에서 몸을 솟구치며 “야-“하고 소리질렀다. (됐다, 인젠 됐어! 이제 잡지사에 가면 일년에 소설을 열편, 아니 스무편씩 써서 다 발표할거야!) 1982년도 초여름 대학가의 하늘은 푸르고 푸르렀다.
35    그때 그 시절의 대학꿈 댓글:  조회:1409  추천:1  2013-06-25
꿈결 2부곡 그때 그 시절의 대학꿈 홍천룡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지 30년이 되다니? 어길수 없이 흘러간 세월이였건만 어쩐지 믿어지질 않는다. 대학생이 되여보겠다고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얼푸름히 등사된 복습제강을 밤중이면 서로 바꿔가며 베끼던 정경이 엊그저께 새벽 두시경에 있었던 일 같은데… 지난 세기 60년대초반에는 대학생이라면 그야말로 새중 봉황이요 옥중 옥이였다. 내가 살던 공신 “웅덩개마을”은 백호나 넘는 큰 마을이여서 우리 조무래기들도 아래 마을무리, 윗마을무리 하면서 갈라져 놀았었다. 그 큰 마을에 정구네 큰 형님만이 대학으로 다니는 대학생이였다. 온 동네 아이들을 가진 어머니들의 입에서는 늘 이런 말이 튕겨나오군 했다. “공부를 잘해라. 정구형님처럼 대학생이 되게.” “숙제를 제때에 해라, 정구형님처럼.” “너 공부한다는 꼬라지를 보니 정구형님처럼 대학생이 되긴 백번도 틀려먹었구나.” …… 어머니들의 그 구질구질했던 시까스름이 후날 아이들이 대학꿈을 꾸게끔 흔들어준 요람이 된 것이 아니였겠는가!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바자굽이골목길을 메우며 동네안팍을 들썩이던 우리 철부지들도 정구 형님만 골목길에 나타나면 인차 조용해진다. 그럴 때면 손등으로 코물을 닦는 놈도 있었고 단추가 떨어져나간 저고리앞섶을 더듬어 포개는 녀석도 있게 된다. 호랑이는 세살먹은 애도 알아본다고 대학생명성이 얼마나 뜨르르 했으면… 62년도 여름은 하늘도 맑았고 대지도 푸르렀다. 배를 쫄쫄 곯던 시절이 지나가며 아이들도 가끔씩 어른들의 손에서 “개눈깔사탕”을 얻어쥐고 냠냠거리게 되였다. 그해 여름에 나는 깜장 새옷에 헝겊책가방을 메고 어머니의 손에 손목을 잡혀 학교로 가게 되였다. “공부를 잘해서 이다음−이다음 크거들랑 정구 형님처럼 대학생이 되여야 해. 알겠느냐?” 앞날에 대한 어머니의 먼 희망이였다. “대학생”이 정구형님이라는것밖에 모르는 나는 그 첫날등교에서 숱한 아이들과 면목을 익힌 흥분과 집에 돌아오니 “닭똥과자” 한봉지와 “개눈깔사탕” 한봉지가 기다리고있었다는 기쁨이 더 컸었다. “ㅏ, ㅑ, ㅓ, ㅕ…”로부터 시작된 공부가 그래도 반급에서는 언제나 앞줄로 간다는 축에 속했다. 가끔 백점짜리 시험지가 나오면 나는 그걸 차곡차곡 개여서 교과서갈피속에 간직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걸 꺼내 찬장모서리우에다 올려놓고 빈사발을 엎어놓는다. 그러면 “닭똥과자” 한봉지는 문제없이 생긴다. 그때까지 “닭똥 과자”보다 더 맛있는걸 먹어보지 못한 나였다. 어쩌면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과자도 있는가! 먹으면 먹을수록 사각거리며 깨고소해지는 “닭똥과자”- 어머니는 백점짜리 시험지만 보면 혼자 시물시물 웃으시였다. 그리고는 무슨 뜨개감이 아니면 그릇 빌리러 간다는 구실을 달고는 몇집 건너편에 있는 정구네 집으로 마실을 나가군 했다. 보나 마나 백점짜리 아들을 자랑하러 가는것이다. 아마도 자랑 할바에는 대학생네 집에 가서 자랑하자는 속셈이였을 것이다. 혹시 대학생네 집에 붙어있는 그 “기”를 묻혀 오자는 심사도 있었는지 모른다. 점치기에 무척 흥취가 있었으니까… 얼마후 과연 그 “기”가 나의 몸으로 옮겨오게 되였다. 어느날 내가 헝겊뽈을 안고 우사칸마당으로 달려가다가 바자굽이에서 그만 웬 사람과 콱 부닥치게 되였다. 올려다 보니 다름 아닌 대학생- 정구형님이였다. 내가 어쩔바를 몰라 쩔쩔 매는데 정구형님은 오히려 나를 내려다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 백점짜리 선수였구나. 너 계속 백점을 맞으며 공부 해. 그러면 꼭 대학생이 되는거야.” 나는 어망결에 “예!”하고는 인차 몸을 돌려 쫑드르르 꼬리를 뺐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 헝겊가방을 멘 내가 연변대학가의 큰 비술나무밑에 서서 “닭똥과자”를 먹고있 었다.(당시 연변대학이 우리 소학교서쪽이였고 대학주변은 아름드리 비술나무로 우거져있었음) 그후 점차 헴이 들면 서 나는 배움의 최고학부가 대학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나마 깨닫게 되였고 공부에 극성을 부려 5학년까지는 줄곧 우수생으로 되였다. 그런데 5학년 때부터 신문지상에 오함, 등척과 같은 인물들이 나오고 “삼가촌”이란 어느 동네이름 같은 말들이 나오게 되였다. 얼마후 아래동네 철봉형님이 차비도 없이 북경으로 갔다오더니 모주석을 만나보았다고 동네를 들썽 해놓았다. 모주석의 얼굴이 정말 보름달같이 둥굴고 떠오 르는 아침해처럼 불그스레 했다는것이였다. 뒤이어 거리에 대자보가 나붙게 되고 고깔모자를 쓴 사람들이 거리돌림을 당하게 되였다. 그다음에는 반란바람이 불더니 학교마다 수업이 중지되여 우리는 매일 무리를 지어다니며 노는게 업이 되였다. 그 무렵에 철봉형님이 어디서 “똥푸개모자” 를(당시 원예농장 장원들이 인분차를 끌고 다니며 공용 변소를 칠 때면 긴 장대기에다 철갑모를 달아썼는데 우린 그걸 똥푸개모자라고 불렀다) 얻어쓰고 다녔고 거리에서는 무시무시한 “돌팔매시가전”이 벌어지고있었다. 매일마다 어디에 불이 났소 어느 곳은 피바다가 되였소 하는 소문에 우리 조무래기들도 가슴을 조이고있었는데 나중에는 무서운 비보가 확실하게 날아들었다. 철봉형님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환자들의 생명을 구해줄 의사들을 양성해 낸다는 의학원마당에서 총에 맞아죽었다는것이다. 그 집 어머니가 미쳐났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땅을 치며 통곡 하던 그 처참한 모습을 나어린 내 눈으로도 차마 보아낼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구밖에 나서서 아들을 피타게 부르던 그 부름소리가 지금도 가끔 귀가에서 울리는것만 같아 가슴이 미여질 때가 있다. 그 “문화 대혁명”이 아니였더라면 철봉형님도 후에 대학생이 되였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시가전”이 끝나고 혁명위원회가 설립되더니 우리가 중학생이 되였다고 시3중으로 나오라는것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보니 대학생출신이였던 교원들이 한쪽으로 밀려나고 석현제지공장의 “로동자선전대”가 들어와 우리들에게 “어록학습”을 시켰다. 그때 “어록”을 학습하니 정말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난관에 부딪치든 “어록”만 펼치면 그 속에 해결묘방들이 다 들어있었다. 1차방정식이요 2 차방정식 이요 하며 아무리 수학공식을 풀어도 실제문제를 해결하 는가? 골치 아프게 원소주기표를 외울 필요도 없었다. 중학시절 4년동안 우리는 벽돌공장에 가서 로동자들의 일본새를 배웠고 방공호파기삽질에 근육질을 굳혔고 “5•7 농장”의 콩밭기음에서는 의력을 키웠다. 졸업할 때 내가 사회에다 보여줄 “졸업증”은 붉은 사상과 건강한 신체였다. 사회로 나오고 보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대학교 입시제도가 페지된지 여러해 되였다. 연변대학서쪽에는 맥주공장이 있다. 나는 맥주공장림시로동자로 들어가 건축 일을 하였다. 고된 로동에 지쳐 무거워진 다리를 끌며 대학교앞을 지나 갈 때면 대학생이 되여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군 했다. 그러나 림시공으로서는 그걸 바라볼 엄두도 못낼 처지였다. 나는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우려고 맘먹었다. 그래서 한 마을에 있는 조갑룡을 형님으로 모시고 그의 차에 따라다녔다. 밤이면 석탄실이를 갈 때 빈차는 내가 몰고가고 돌아올 때는 형님이 몰고 왔던 것이다. 헌데 림시공은 운전면허증취득시험을 치르게 못했다. 우선 정식공이 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 삼도탄광에서 로동자모집을 하였는데 가서 잘하면 인차 정식공으로 넘길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부모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불짐을 싸가지고 삼도만으로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탄광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별반 없다. 그때는 감옥에서 만기석방된 사람들과 산동, 하북 등 중국관내 에서 온 한족들이 많이 자원해갔었다. 당시 탄광으로 가면 두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한가지는 간고하고 위험하고 어려운 곳에 가면 정식로동자로 빨리 전이고정될수 있었고 정치적발전이 빠를수 있었다. (정치적 발전이란 주요하게 당원에 가입하는것인데 그래야 대학교도 추천받아 갈수 있고 간부로 승급할수도 있었음.)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로임이 높은것이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후자를 보고 갔지만 나는 전자를 보고 갔다. 간고한 곳에 가서 자신을 단련하면서 정치적으로 빨리 진보하려고 작심했던것이다. 삼도탄광은 연길시에서 약 200리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잡고있었다. 당시 탄광에는 세개 탄굴이 있었는데 나는 제1호탄갱 제2작업반에 배치되였다. 우리 작업반의 십오명가량 되는 일군들가운데서 나 혼자만 조선족이였다. 대부분 산동사람들이라 혀를 꼬부랑치며 내뱉는 말을 잘 알아들을수가 없는것이 큰 장애였다. 나는 그래도 몇달간 일을 잘하느라고 애를 썼다. 산동사람들은 개인위생을 지킬줄 몰라 좀 더럽기는 했지만 소박했고 아주 근면했다. 그래서 나와 잘 어울렸다. 어느날 오후, 왕반장이 밤대거리에 지쳐 낮잠을 자고 있는 반원들을 깨웠다. 탄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무산 계급독재리론"을 학습하고 심득발표도 해야 한다는것이다. 왕반장이 중공중앙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펼쳐들고 약 십분간 읽고는 반원마다 돌아가며 발언하라고 재촉하였다. 왕반장곁으로부터 련이어 네사람이 열기 띤 발언을 했다. 그다음 내차례였다. 탄광에 와서 처음 참가하게 되는 회의 여서 저으기 흥분되고 긴장해졌다. 더구나 탄광정치공작 조의 장씨라는 간사가 하얀 안경알을 번뜩이며 매 사람들 의 발언을 열심히 적고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어를 제대로 배워내지 못했고 한어로 발언하기는 처음이였다. 처음 몇마디는 한어로 나갔지만 그다음엔 저도 모르게 조선말이 막 나갔다. 장씨가 알아못듣겠다고 손을 내저 었다. 나는 더구나 얼굴까지 화끈 달아오르며 어쩔줄 몰라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때 나와 사무상을 사이두고 마주 앉았던 로씨가(평상시 나와 매끄럽게 놀던 자식이였음) 야멸차게 한마디 내쏘는것이였다. "니 쩌거 꼬리빵즈, 지리와라디 쟝썬머? 워먼 팅부둥. 깐추이 베쟝라(이 조선놈새끼야, 뭐라고 씨부렁거리는지 알아못듣겠어. 아예 입다물어버려!)" "꼬리빵즈"란 한족들이 전문 조선족을 욕하는 모욕적 언어로 인정된 구두어이다. 만약 그가 다른 말로 욕했다면 혹시 내가 참았을 수도 있다. 나는 대뜸 밸이 왈칵 치밀어 올라 맞받아 한마디 내쏘았다. "마세이, 니 쩌거 싼뚱빵즈!(너 누굴 욕하고있어? 이 산동놈새끼야!)" "싼뚱빵즈"란 산동에서 온 한족을 욕하는 모욕적언어로 인정된 구두어이다. "쩌 쑈투짜이즈, 쩐 뿌샹화. 까이따스타!(요 빌어먹을 새끼, 덜돼먹었어. 잡아쳐!)" 로씨가 벌떡 일어나며 나한테 주먹을 날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의 주먹이 귀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가 팔을 거둬들이는 틈을 타서 나도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그 자식의 면상에서 코피가 탁 터져흘렀다. "쩌 쑈즈, 따런나!(이 자식, 사람을 친다!)" 내곁에 앉았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내 입술을 쳤다. 나의 입에서도 피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다른 한 녀석이 사무상우로 풀쩍 뛰여올라 발길로 나의 턱을 걷어찼다. 나는 걸상과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뒤이어 숱한 사람들의 주먹이 나의 면상으로 날아들었고 숱한 사람들의 발길이 나의 배며 하신을 걷어찼다. 사지가 얼얼해나며 숨이 꺽 막히는것만 같았다… 다행히 왕반장과 장씨가 그들을 뜯어말려냈다. 이튿날 나는 매를 맞고도 "리론학습회"를 파괴했다는 죄로 비판까지 받았다. 그때 "조선족"이라는 설음이 북받쳐 혼자 눈물을 흘렸었다. 더는 탄광에 붙박혀 있을수가 없었다. 탄광에서 돌아온 나는 대학생이 되고싶어졌다. 당시 대학은 시험쳐서 붙는것이 아니라 추천받아가게 되여 있었다. 추천받자면 우선 정치적표현이 좋아야 했는데 정치적표현이 좋다는 표징은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표"를 얻는것이였다. 이듬해 1월에 나는 시정부의 통일배치로 시량식국산하 의 "숙식품가공공장"에 정식로동자로 들어가게 되였다. 그때는 공장에 지식청년이 몇백명 되였다. 나는 날듯이 기뻤다. 로임은 림시로동자로 일할 때의 절반도 안되였지 만 정상적으로 조직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는데서 더 흥분되였다. 나는 인차 사상회보를 써서 당지부에 바쳤다. 당지부 최서기가 나를 찾았다.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사상회보를 제때에 써낸것을 높이 치하했다. 그리고 어떻게 진보하겠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주었다. 나중에 특히 한어를 잘 배워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번 사상회보는 한어로 써오라는것이였다. 그것이 난처한 일이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동네를 돌아 다니며 한어자전을 찾았다. 자전이나 사전을 찾아보기 힘든 세월이라 대여섯집을 돌아서야 겨우 두부모만큼 크고 두꺼운 《신화자전》을 빌릴수 있었다. 그걸 뒤적거리며 장밤 썼는데 겨우 편지지 반장도 못써내려갔다. 그렇게 사흘밤을 악을 써서야 문장을 마무릴수 있었다. 눈에 피발 이 섰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그걸 최서기한테 바쳤더니 그는 손수 만년필을 꺼내 여기저기 틀렸거나 어휘사용이 타당치 못한 곳을 새까맣게 고쳐주는것이였다. 그후부터 나는 무슨 글을 쓸 일이 있게 되면 틀리든 말든 한자로 썼고 누구와 말을 하거나 회의발언할 때면 꺽꺽거리면서라도 한어로 했다. 그래서 웃음거리를 자아낸 적이 많았다. 몇백명이 참가한 직공대회에서 한어발언을 잘못해서 크게 망신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고 한어말을 잘못해서 비판도 받았고 욕도 얻어먹었고 매도 얻어맞은 적이 있다. 우습고 생동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걸 다 쓰자면 너무 길어질것 같다. 그해 가을에 시당교에 가서 "맑스레닌주의-모택동사상리론"을 학습하고 심득필기를 써내게 되였는데 나는 장장 만여자에 달하는 글을 한자로 20여페지 써냈다. 잘썼든 못썼든간에 나로서는 대단한 "걸작"이였다. 1975년도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해였다. 1월 달에 정식로동자로 되였고 그달 중순에는 제2직장 제2조의 조장이 되였으며 4월달에는 공장건축시공대 대장이 되였다. 나는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녔다. "말띠" 인 내가 말처럼 뛰여다닌다고 "말새끼"란 별명이 붙기까지 했다. 원래 1년반으로 계획되였던 공장건물시공을 우리 시공대가 8개월만에 완성하여 그해 12월 28 일에 나는 "화선입당"을 하여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였다. 그후 선후 하여 공장, 량식국, 재무계통의 선진공작자가 되였고 전시 모범당원이 되여 상장과 영예증서만 해도 대여섯개를 수여받았다. 그해 겨울은 눈바람을 타고 둥둥 떠서 다녔다. 인젠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였다. 대학생추천지표만 내려오면 당상인것이였다. 그야말로 "만사구비에 지결 동남풍(万事俱备, 只欠东南风)"인 셈이였다. 헌데 그해도, 그 이듬해에도 대학생지표는 우리 공장에 내려오지 않았다. 당조직에서는 갈수록 나에게 더 큰 과업을 맡겼다. 민병련장, 단총지 전직서기, 정공조 (政工组)조장 등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학습을 할 기회도 많이 주었다. 단간부훈련반, 공회학습반, 당교리론학습반, 청년간부양성반 등 부동한 강습반을 통해 나의 리론수준도 크게 제고되였다. 후에는 “시 재무계통쌍학판공실(市财 贸系统学大寨学大庆办公室)”로 발탁되여 사업하게 되였 다 . 판공실주임으로는 재무계통을 책임진 시위 부서기 최장부라는 로간부였는데 학식이 깊고 세심한 분이였다. 부주임으로는 상업국, 량식국, 은행, 공소사 등 부문의 제1책임자들이였지만 일이 있을 때만 모여서 회의를 하군 했다. 구체일은 판공실사업일군 6명이 처리했다. 회의와 활동이 많았고 상급지시문건과 아래 각 부문에서 올라오는 보고재료들이 많았다. 정말 눈코뜰새없이 보냈다. 내가 제일 어리고 수준도 제일 낮았다. 끝없이 물어보고 자꾸만 청시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반면에 뛰여다니 며 심부름을 잘했기에 사람들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1977년도 겨울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11월말 일이라고 기억된다. 시험치기 사흘전에 시험을 쳐보겠다고 말미를 받으려니 판공실사람들이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그때 우리 판공실을 책임진 최서기의 비서가 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험이라니 전도가 양양한 동무가 시험을 치겠다니? 량식국산하 각 단위에도 대학졸업생이 얼마나 많소? 하지만 다 동무보다 못하지 않소? 황차 지금 사업이 이렇게 긴장한데 당원으로서 개인전도보다 혁명사업을 먼저 생각해야 할게 아니겠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시조직부에서 동무를 중시하고있단말이오." 그 말을 듣고 나오면서 나의 사상은 좀 동요되였지만 대학꿈을 이뤄보겠다는 결심만은 꺽지 못했다. 이튿날 그 일이 최서기께 회보되였는지 나더러 하던 일감을 김동무 한테 인계시키고 집에 들어가 시험준비를 하라고 했다. 산고개에 올라 짐을 풀고 내리막길에 들어선 기분이였다. 그날 밤중까지 돌아다니면서 나는 수학, 어문, 정치 등 방면의 복습제강을 빌리거나 베껴왔다. 이틀동안 대충 훑어보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문제가 별로 바쁜것 같지 않았다. 중문시험에서 활 펼쳐공포한다는 뜻인 "披露"란 단어를 제대로 써넣지 못한것이 후회되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단어는 내가 보고문을 쓰거나 비판문장을 쓸 때 가끔 써먹던 단어였는데… 쉽게 여겼던 시험이 결코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나는 몇점차이로 락방되였다. 77년도 겨울은 날씨도 혹독하게 추웠다. 시험을 친후 얼마 안되여 나는 본단위로 소환되 였다. 아마도 고집을 부리며 시험을 친 것이 무슨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니 화창한 봄날이 찾아왔다. 78년도 봄은 봄바람도 거세찼고 봄물도 빨리 녹아내렸다. 우리 사회에는 가끔 "바람"이 잘 부는것이 특징이다. 례하면 전쟁시기의 참군바람으로부터 초급사바람, 약진바람, 도끼 머리에다 금을 쪽 내는 하이칼라바람, 원피스에다 딴스 바람, 문화대혁명시기의 충성무바람… 78년도 봄은 대학 시험바람에 공부열이 끓어번졌다. 아마 중국의 5천년 문 명사에도 그 전례가 없었을것이다. 10년간 대학시험을 쳐보지 못한 중청년세대들이 모두 복습제강을 들고 나섰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지가 하루 아침새에 배움의 천당으로 변하는것 같았다. 실안개 감도는 이른 아침이면 어디 앉아 책을 볼 자리를 찾기 힘들게 되였다. 거리에도 강둑에도 숲속에도 책을 보는 사람들로 공간이 다 메워 졌다. 만민이 대학생이 되고 만천하가 교정이 된것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여서 책을 쥐고 나서면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다. 그 가운데는 학교문을 금방 나온 초중졸업 생도 있었고 "로싼제(老三届)"고중졸업생도 있었으며 혼자 나온 사람도 있었고 부부동반하여 나온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챤스를 잘보는 "못된 송아지"들도 있었다. 공부도 할겸 련애도 할겸 슬금슬금 처녀애들의 뛰꽁무니를 따라 이 나무 저 나무밑을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한창 나이라 나도 그런 유혹에 빠져들 었다. 당시 부르하통하수원지(지금의 연길호텔주변임)에 가면 자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있었다. 개울가곁에 큰 비술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아침마다 그 비술나무밑에 가서 복습문제를 외우군 했다. 어느날 아침에 한 처녀애가 그 비술나무에서 얼마쯤 떨어진 백양나무밑에 와서 복습제강 을 외우는것이였다. 날씬한 몸매라든가 갸름한 얼굴이 라든가 어느 모로 보나 총각들의 눈길을 끌만한 처녀애 였다. 댕금하니 서서 책을 보는 자태나 앙증맞게 앉아서 글을 쓰는 모습은 정말 한폭의 그림이였다. 더구나 량어깨를 사선으로 이어놓은 두가닥의 쌍태머리가 몸매의 움직임에 따라 한쌍의 깜장나비처럼 어깨우에서 춤을 출 때면 률동미가 시각조화를 이루어주어 더욱 눈뿌리를 뺐다. 나는 복습제강에 눈길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눈을 팔지 말자고 결심하며 고개를 들지 않고 한동안 죽치고 앉아있노라면 혹시 그 처녀애가 자리를 뜨지 않았나 돌아앉지 않았나 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또다시 고개를 들고 눈길을 그 쪽으로 돌리게 되였다. 혹간 처녀애가 내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눈길이 옮겨질 때면 나는 바짝 정신이 긴장해지며 흥분에 떨군 했다. 아늑한 아침에 미묘한 화면분위기에 매달려 일렁이는 감정파문이랄가! 아무튼 혼쭐이 방향없이 둥둥 떴다. 그렇게 허황한 분위기속에서 귀중한 아침복습시간을 며칠간 랑비했다. 출근시간때문에 언제나 내가 먼저 아쉬운 자리를 뜨군 했다. 어느 하루아침이였다. 내가 거의 한시간이나 복습제강을 외웠는데도 저쪽 백양나무 밑은 그냥 비여있었다. 허전한 감이 들며 별로 근심스럽기도 했다. 아침복습을 포기했을가 아니면 앓아누웠을가? 시간이 되여 자리를 차고 일어나 강뚝길에 올라섰다. 헌데 웬걸, 마침 그 처녀애도 저쪽켠으로부터 강뚝길에 올라서고있었다. 어쩔수 없이 정면으로 마주 띠우게 되였다. 처녀애가 낯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숙이였다. “문과를 복습하죠?” “양. 거긴?” “저도 문과예요. 집체호일때문에 늦게 시작하다보니 복습제강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그럼 이걸 가져다가 보오.” “아니 그럼 거긴…” 처녀애는 뒤걸음질 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수록 더 대범해지는 것이 남자다. “일없소. 난 또 얻을수 있다니까.” 기실 그 복습제강은 힘들게 얻은것이였다. 나는 우격다짐으로 복습제강을 처녀애의 손에 쥐여주었다. 처녀애가 그걸 받아쥐고 훑어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한어문이구만요. 한어로 쳐요? 대단해요. 전 수준이 낮아 한어로는 안돼요.” 그러면서 처녀애는 복습제강을 되돌려주는것이였다. 갈라질 때 우리는 서로 복습을 잘해서 대학에 붙기를 기원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예전대로 나갔더니 웬 녀석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제법 소리를 왕왕 내며 무엇을 외우고있 었다. 녀석은 수시로 빨간 내의를 입고 백양나무밑에 앉은 처녀애쪽으로 눈을 흘끔거리고있었다. 괘씸했지만 쫓을수 도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좀 떨어진 다른 비술나무밑으로 찾아갔다. 한 처녀애와 두 남자애가 갈라져앉은 세곳을 점선으로 이어놓는다면 아마도 직각삼각형쯤은 될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언제나 나보다 일찍 나오는 바람에 그런대로 며칠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참, 이성지간의 흡인력이란 어쩔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이십대의 청춘들임에야! 나는 주동이 되여 먼저 “공격”을 개시해보자고 작심했다. 그래서 그 처녀애가 얻지 못했다는 복습제강을 얻어놓았다. 헌데 “공격”을 개시하자고 나갔던 그날 아침부터 그 처녀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며칠은 무엇을 잃어버린듯 마음이 허전해서 복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후회되였다. 강뚝길에서 맞띠웠을 때 집이 어딘가고 물어봐야 했을걸! 그럼 후에 찾아갈수도 있는데… 그후 한번도 그 처녀애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갸름한 얼굴에 새물거리는 실눈이 인상적이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만 감으면 백양나무밑에서 공부하던 그 처녀애의 동탕한 모습이 떠오른다. 후에 그 처녀애도 어느 대학의 대학생처녀로 되였을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왔다. 헌데 지금에 와서 하는 솔직한 말이지만 그 처녀애가 후에 계속 나왔더라면 나의 복습공부는 엉망이 되였을는지도 모른다. 시험날을 한달 남겨둔 6월초라고 기억된다. 복습을 다그쳐야겠다고 청가를 달라고하니 그자리에서 부결당했다. 시험을 치겠다고 나선 사람이 20여명 되니 다 허락해주면 공장이 마비상태에 들어갈수 있다는것이다. 나는 금방 부임되여온 서서기네 집을 찾아가 울며불며 야단을 피웠었다. 이튿날 나는 예나 다름없이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공장으로 나간것이 아니라 공원뒤산으로 올라갔다. 배나무밑에 앉아 복습제강을 외웠다. 배가 고프니 도시락을 꺼내 먹고는 계속 외웠다. 지껄이는 놈이 없어 좋았다. 날씨가 무더우니 옷을 활활 벗어 배나무에 걸어놓고 팬티바람에 앉아 외웠다. 선선하고 조용하니 복습제강의 글발들이 머리안으로 쏙쏙 들어와 붙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질 때 자전거에 올라탔다. 저녁바람이 선들선들 샤쯔자락을 날려주어 기분이 났다. 그렇게 나는 사흘동안 공원뒤산으로 “출근”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집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달랐다. "너 단위로 안나가고 어디로 갔댔냐?"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누가 알려주었을까? 이어 아버지가 엄하게 타일렀다. "단위에서 요주석이라는 분이 왔다갔네라. 래일 단위로 나가보거라. 너 무슨 노릇을 하겠으면 조직에다 알리고 해야지. 무슨 짓거리를 그렇게 마음대로 하는거냐? 아래우도 없이." 요주석이란 우리 공장의 공회주석이다. 요주석의 가정방문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시해준다. 이튿날 공장회의실에 가보니 20여명 남녀청년들이 저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대학꿈을 이뤄보겠다는 공장의 "열혈학도"들이였다. 그들 대부분은 공장의 골간이였으며 입당신청서를 낸 당조직의 후비력량들이였다. 그들은 아마 당원인 나의 거동을 주시해온것 같았다. 내가 출근하지 않으니 그들도 약속이나 한듯 몽땅 출근하지 않고 시험공부에 달라붙었던것이다. 하여 후과는 엄중해졌다. 당지부의 서서기, 공장의 진주임, 공회의 요주석 등 지도간부들 로부터 차례로 입을 열면서 비판의 불을 토했다. 우리 20여명 직공수험생들의 무조직, 무규률성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경제손실이 빚어졌는바 어떤 직장에서는 부득불 밤대거리를 취소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우리 공장에서는 비판대회가 여러 번 있었다. 탐오분자를 붙잡아내여 비판한 적이 있었고 남녀문제로 작풍이 단정치 못한 “바람쟁이”를 비판한 적도 있었으며 공자, 림표, 등소평을 비판한 적도 있었다. 허지만 이날처럼 치렬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져본적은 없었다. 생산을 책임진 진주임이 일어나서 책상을 치며 대성질호했다. 입에서 침방울이 튕겼고 원래 망울이 큰 눈이 당금 삐여져 나올것만 같이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 이것이 그래 사회주의기업의 담벽을 허무자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며 문제를 아짜아짜한 경계선에까지 끌어올렸다. 비판의 초점은 점차 나에게로 돌려졌다. 당원으로서 반면적인 솔선작용을 놀았다는것이다. 혁명의 리익과 개인전도를 두고 관건적인 시각에 어느쪽을 선택하겠는가? 입당선서를 할 때에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지금 당조직에서 너를 고험할수 있는 시각이 닥쳐왔다는것이다. 나는 고개도 쳐들지 못했다. 비판의 대상이 된 기타 수험생들도 고개를 푹 떨군채 입을 다물고있었다. 래일부터 무조건 출근하라고 강요되였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당원은 당적을 고려하고 공청단원은 단적을 고려하고 일반 사람은 로동자적을 고려하라는것이였다.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그때 한 “용사”가 나타났다. 제분직장의 오동무라고 기억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대학입시제도의 회복은 당과 국가의 영명한 결책인데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호응해 나서지 않고 누가 나서겠는가, 시험치는 문제를 가지고 당적문제요 단적문제요 하며 압박을 가하는 것은 그릇된 작법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와서 그런 말은 누구든지 다 할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말을 감히 생각해냈다는 자체가 웬간한 수준이 아니였고 또 그런 말을 그런 회의장소에서 꺼낼수 있었다는 것이 조련찮은 일이였다. 옳지, 그래 그 말이 맞다. 물에 빠진 놈이 지프래기라도 잡은 격이라 할가 우리는 머리가 팩팩 돌았고 흥분되였다. 10년간 빼앗꼈던 권리를 우리가 당당하게 행사해야지. 이것은 결코 당과 국가의 전도에 관계되는 대사이지 어느 한 공장의 생산에 영향이 미치는가 안미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 우리가 “죄” 아닌 죄를 졌다고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이건 아니다! 그래 우리가 누구냐? 공장에서 제일 똑똑한 총아들이 아니고 누구냐! 이어서 우리의 “반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똑똑한 녀석들이라 너도나도 입을 터뜨리니 당할 자 없었다. 나중에는 예상외로 타협적인 결과를 보게 되였다. 공장에서 로동력을 다시 조절하여 정상적인 생산운행을 보장하고 수험생들은 생산강위를 지키면서 시간을 짜내 시험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나는 출근해서 될수록 오전에 사무를 보고 오후엔 사무실문을 꾹 닫아놓고 시험공부에 몰두하려고 하였다. 허지만 일은 삐뚤게만 나갔다. 제일 신경질나는것은 전화벨소리였다. 전화가 보급되지 못했던 시기여서 전 공장에 전화가 몇대 없었다. 평생 전화를 쳐보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었을 때였으니깐. 그래서 전화가 오면 틀림없이 급한 일이거나 중요한 통지였다. 그러면 그걸 전달해야 했고 활동을 포치해야 했다. 전화가 서너통만 와도 그날 오후복습은 엉망이 된다. 어느날 오후였다. 금방 전화를 받고나서 복습제강을 펼쳐들었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신경질이 나서 송수화기 를 들었다가 콱 놓아버렸다. 이어 련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벨이 네번째로 울릴 때 방정맞게도 진주임이 들어서면서 송수화기를 집어드는것이였다. 몇번 "오오, 예예"하더니 송수화기를 놓고 내앞에 와서 장승처럼 뚝 박아섰다. 올려다보니 두눈을 뚝 부릅뜨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있으면서도 왜 전화를 받지 않았소?" "금방 시험문제를 푸느라…" "시험, 시험, 그래 이곳이 시험공부만 하는 장소요? 이따위로 공작하려면 당장 이 자리를 내놓소." "진주임이 내놓으라면 내놓을 자리입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대들었다. 둘은 서로 삿대질 하면서 말다툼을 벌렸다. 그 소리에 저쪽 사무실사람들이 나와 말렸다. 우리 아버지년세와 비슷한 진주임은 평상시 나를 아들처럼 생각해주시던 분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버르장머리없이 놀았다는 자책감 이 들었다. 시험날자가 하루하루 박두해오면서 나는 더욱 조바심만 났다. 복습제강은 절반도 못외운 꼬락서니였다. 이래 저래 짜증만 났다.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또 미역국을 먹게 될 판이였다. 하루라도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시 서서기를 찾아가니 딱 잡아떼는것이였다. 이튿날 나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필기장, 복습제강을 대충 꿍져가지고 농촌에 있는 외가집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하늘이 무너지겠으면 무너져라는 배짱이였다. 끼니마다 외할머니가 보글보글 끓여주는 토장국에다 이밥을 두세사발씩 제끼며 시험공부에만 전념했다. 인츰 효과가 나타났다. 외가집 뒤뜰안의 살구나무밑은 그야말로 천국속의 학당이였다. 기분이 날 때면 왕왕 소리를 내며 읽었다. 가끔 외할아버지가 지나가며 대견스러운지 껄껄 웃기도 하셨다. "더 크게 읽거라. 온동네에서 우리 외손주가 대학공부를 한다고 알게스리." 기운이 났다. 복습제강에 찍힌 글이 그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와 배겼다. 그동안 어머니가 몇번 왔다갔다. 공장에서 사람이 두번 왔다갔다는것이다. 그들이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나도 캐여묻지 않았고 어머니도 말씀해주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의 얼굴에 근심에 쌓인 그늘이 비꼈을 뿐이였다. 드디어 시험칠 날이 돌아왔다. 시험치는 세날동안 날씨가 특별히 무더웠었다. 긴장해서 목이 말랐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시험지를 바치고 밖에 나오면 눈앞이 아물거릴 지경이였다. 시험을 다 치고 친구들과 함께 렬군속식당에 가서 생맥주를 대여섯 사발씩 들이켰다.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들던 날 우리 사무실은 왁짝 들끓었다. 20여명가운데서 나만 붙었던것이다. 숱한 사람 들이 와서 축하해주었다. 그 가운데는 서서기도 있었고 진주임도 있었고 요주석도 있었다. 진주임의 지시에 따라 공장에서는 돼지를 엎어놓고 환송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군용멜가방과 사지옷 이래웃벌을 선사했다. 진주임 한테서 그걸 받아안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34    김치는 절반 먹고 절반 던져라 댓글:  조회:1376  추천:0  2013-06-24
김치는 절반 먹고 절반 던져라 홍천룡   어릴 때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어머니가 내준 바가지짝을 들고 뜨락으로 쫑드르르 달려나갔다. 눈에 파묻겨 봉긋이 솟은 김치움은 흰 만두같다. 벼짚단으로 눈을 쓸어버리고 움아구리를 막았던 거적을 들면 서리가 하얗게 낀 움안으로부터 썽-한 기운이 확 끼쳐온다. 몸을 흠칫 떨고는 들어가 살얼음이 설걱거리는 배추김치 한포기를 바가지짝에 담고들어와 서걱서걱 쏠아놓고 걸쭉하게 쑨 옥수수죽에 조겨주면 하늘에 하느님이 불러도 늬 아들이 개방구를 뀌는가 한다. 그것도 누더기담요를 뒤잔등에 걸치고 따뜻한 아래 구들목에 옹크리고 앉아서 말이다.  김치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우리의 입맛을 굳혀준 소식(素食)감이였다. 어느 땐가 야외들놀이를 갔다가 한 총각이 부르는 “김치가 없이는 못살아”하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확실히 김치는 우리의 식탁에서 떼여버릴래야 버릴수 없는 밑반찬거리가 되였다. 더구나 “싸스”가 돌개바람처럼 구석마다 휙 휩쓸고 지난 뒤에는 조선족김치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각광받게 되였단다. 좀 믿기가 어렵다. 너무나 자주 먹어서 보기만 해도 시쿨어지는 김치쪼박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번쩍거린다니 당신인들 곧이 듣겠는가! 아무튼 무엇이 좋다면 세계의 입이 쫙 벌려지는 시대가 도래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만 “쏸차이”도 국수오리에다 들들 볶아내면 별맛이다.   금년여름에 결장염수술을 받은다음 한시기 술을 딱 끊었다. 좋은 점이 많았다. 우선 연회석에 앉으면 각가지 료리마다 맛이 다 알린다. 이전엔 “깐베이”역풍에 수절을 들기전에 술잔부터 들고 “위하여!”를 위하여 련속 서너잔씩 털고나면 료리맛이 잘 알리지 않았었다. “북경오리”도 돼지고기 같고 “훙먼러우”도 닭고기 같았었다. 허지만 술을 마시지 않으니 쫀득쫀득한 살코기맛과 니글니글한 비게덩이맛이 알렸고 비릿한 오징어맛과 푸석푸석한 명태맛이 알렸다. 기름기 지르르한 육식을 하고나면 배안이 느끼해서 불편해진다. 그걸 삭이고 중화시키는데는 김치이상이 없다. 그래서 목을 빼들고 휘두룩거리며 복무원을 찾는다. 요즘은 어디가나 조선족복무원을 찾아보기 힘들다. 부득불 안되는 중어를 내갈기는 수밖에 없다. “쑈우제, 초우샌주라빠이채, 이팔!(조선족김치 한접시)” “즈-또우라!(알았어요)”   매일 먹는 김치지만 그때만치나 맛있을 때가 없다. 믿기지 않으면 한번쯤은 연회석상에서 술을 마시지 말고 시험해 보시라. 이렇게 좋은 김치에도 미흡한 점이 두루 버물려져있다. 동네돌이로 살 때에는 김장철이 돌아오면 아줌마들이 제일 바쁘고 성수날 때였다. 초절이 끝난 배추속을 헤집고 노루무레한 속잎을 뚝 따서 벼라별게 다 들어간 빨간 양념에 훌훌 버무려서는 서로 제집 김치를 맛보라고 내두른다. 뻘건 혀를 내둘러 그걸 감아서 입안으로 빨아들이고는 와삭와삭 씹어본다. 그리고는 별맛이라고 서로서로 춰올린다. 맛있기는 뭘 맛있다고? 생마늘냄새에 생배추맛밖에 안난다. 금방 한 김치는 맛이 없다. 보관되는 온도에 따라 닷새나 아흐레쯤 되여야 제맛이 날가 한다.    정상적인 온도에서 보름쯤 지나면 시굴어지기 시작한다. 시굴어지기전에 새콤새콤 할 때가 제일 맛있다. 헌데 시굴어질대로 시굴어진 “시구럭”김치를 더 좋아하는 괴짜도 있다. 봄에 나가 허옇게 버섯이 뜬 김치를 건져서 두부장에 썰어 넣으면 그 두부장이 또 별맛이 된다. 그런데 음식을 맛으로 따지는 시대는 서서히 지나가고있다. 음식으로 얻는 병이 너무나도 많아지고있기 때문에! 그러니 음식의 영양가치를 따지게 되고 칼로리를 따지게 되고 신선도를 따지게 되고 콜레스테롤따위를 따지게 된다. 김치는 발효과정에 유산균이 적중하게 산생될 때가 영양분이 제일 많이 생성될 때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아질산함량이 초과되기 시작한다. 초과되였다고 해도 한두 끼니쯤, 혹은 며칠에 한 끼니쯤 맛으로 먹어보는것쯤은 별문제가 아니다. 헌데 그런 김치를 장기적으로, 혹은 수시로 자꾸 맛있다고 먹으면 먼 후날에 가서 문제가 생긴다. 문제가 생길 때에 가서는 그것이 결코 일반 문제가 아닌것으로 된다.   일반적으로 김치는 해서 절반쯤 먹었을 때까지 제일 영양이 좋을 때이다. 절반쯤 먹은다음에는 던지는 것이 좋다. 지금은 김치를 해서 먹는 집도 있고 해놓은걸 사다가 먹는 집도 있다. 해서 먹든 사서 먹든 김치는 김치다. 파티가 있어서 여럿이 한꺼번에 먹어치우면 아무 탈도 없다. 헌데 일반 가정의 식생활에서는 그걸 보관해두고 끼니마다 꺼내먹는다. 그래서 절반쯤 먹고 절반쯤 던지라고 권장하는것이다. 좀 머리가 돌아진 놈이 줴치는 괴설이라고 여길것이다. 물론 지금은 옛날처럼 김치움안에다 자연적으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랭장고나 김치랭장고에 보관한다. 신선도도 오래 유지할수 있고 발효과정도 늦츨수 있어 유효기를 연장시킬수는 있다. 허지만 공기를 완전 격리하지 못하는 이상 절대적인 안전보관법은 없다. 그러니 절반 이상쯤은 먹고 절반 이하쯤은 던지는 것이 좋다. 그러면 랑비가 아닌가?   랑비가 아니고 절약이다. 전번날 회의석상에서 한 간부가 절약에 대해 언급하자 밑에서 쉬쉬거렸다. 뜻인즉 향방부지라고 어느 때 할 소리를 지금에 하는가 하는것이다. 지난 세기 륙칠십년대에는 우리가 “절약하며 혁명하자”는 구호를 입에 달고 다녔었다. 밥 한알을 떨궈도 다시 주어먹는 것을 선행으로 여겼고 옷을 누덕누덕 기워입고 다니는 것을 간고소박함의 표징으로 삼았었다. 헌데 지금은 석탄이나 석유제품 같은 에너지자원을 빼놓고 다른 것은 절약할 필요가 없게 된 세월로 흘러왔다. 마음대로 사먹고 마음대로 사서 쓰시라고 돈이 모자라면 은행에서 대부금을 대주겠다고까지 한다. 원륭평이라는 노인이 있는데 벼육종가로서 명망이 높으신 분이다.    그 분이 요즘 고급자가용차를 7대나 갖췄다. 그렇다고 그를 사치하다고 랑비한다고 질책하는 사람은 없다. 연길시내에 고급아파트를 서너채 이상씩 사놓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렇다고 그들의 뒤를 누가 캐고드는가! 오히려 부동산회사에서는 돈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를 자꾸만 더 사라고 녀자들을 벗겨내세워 “가달춤”을 추게까지 한다.   우리의 생활이 곤난했던 시기에는 절약정신이 우리로 하여금 곤난을 극복하고 전승하게끔 하였다. 락후한 농경사회에서는 확실히 큰 작용을 발휘하였었다. 헌데 발전하는 시장경제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생산력발전의 저애작용을 논다. 치솔을 사서 한두달씩 쓰고 던졌으면 좋겠는데 그걸 이삼년, 혹은 몇년씩 써서 다슬어 “민민도리”가 된다음에야 아쉽게 던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물며 중국에는 치솔질이라는걸 모르고 사는 사람이 아직도 수두룩하니까 치솔공장이 대형기업으로 부상했다는 소문을 여지껏 못들어봤지. 요즘 정부에서는 낡은 자동차를 갖다 바치고 새차를 사면 잘했다고 몇천원씩 보조금을 준다는 정책을 내세웠다. 낡은것을 아까워 말고 콱콱 던지라는 선동이다. 옛날 내가 공작대로 내려갔던 생산대에는 낡아빠져 우사칸마당가에서 녹이 쓸던 수레가 있었는데 한 령감이 그걸 손질해서 몰고 다녔다. 그랬다고 년말총결에 “모범사원”으로 뽑혀 붉은 꽃을 달고 빨간 일기책을 타게 되였다. 이듬해 이른 봄에 거름을 낼 때 보니까 찌그덕거리는 그 수레의 속도가 제일 늦었다. 허지만 그 령감이 받는 보수는 생산대에서 제일 높은 공수였다. “절약모범”였으니깐. 얼마나 선명한 대비인가!   그리고 그 절약정신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갉아먹고 신체건강을 얼마나 “랑비”시켰는지는 이루 다 통계해낼수가 없다. 사오십을 넘긴 사람들과 두루 얘기를 나눠보면 위가 좋다는 사람이 별반 없다. 물론 그많은 사람들의 위가 잘못된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했겠지만 50%쯤은 우리들의 식생활가운데서의 “절약정신”이 조성시켜준것이다. 우리의 식생활에서 한두끼니쯤 묵은 밥과 묵은 채를 먹는 것은 이미 례사로운 일로 되여있다. 랑비를 막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식당마다 먹고 남은 음식을 가져가라고 비닐주머니를 다 갖춰놓고있다.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고 “따보우(싸다)”해서 가져다가 다시 먹는 것을 일종 미덕으로 보고있다. 허지만 우리가 위생학적으로 따져볼 때 많은 불량한 점들이 있다는 것을 보아낼수 있다. 우리 중국식연회는 일반적으로 뷔페식이 아니라 군체식회식이다. 원체 둥글게 생긴 사람들이여서인지 둥근 술상에 둥근 접시가 울긋불긋 둥굴게 얹혀지고 동글동글 깎은 저가락을 들고 둥굴게 앉아 너도 좋고 나도 좋은 둥굴둥굴한 얘기를 나누며 둥굴둥굴 돌아가며 집어먹는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채들이 절반도 달아안나고 남게 된다. 가령 그 둥굴게 앉은 가운데 전염병바이러스나 세균을 보유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음식을 가져다가 다시 먹으면 어떻게 될가? 면역력이 낮은 아이들에게라도 먹이면…     그리고 한번 익힌 음식은 공기중에서 빨리 산화되고 빨리 부식된다. 그 과정은 일분일초를 따지며 가속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가져다가 다시 끓여먹으면 문제없다고 인정한다. 물론 백도이상 끓이면 대부분 바이러스나 세균이 죽어번진다. 허나 부식과정에 산생된 아질산염 등 인체에 해로운 물질은 그냥 남아있게 된다. 오히려 한번 더 끓임으로 하여 더 증가될수도 있다. 그러니 “따보우”행위는 절약이 아니라 더 큰 랑비가 된다는 말이다.   전번에 한 의학전문가가 비만인이 많아지는 시대에 식사할 때마다 밥 한공기를 떠서 3분의 2쯤 먹고 3분의 1쯤은 던지라는 명언을 발설했다. 그러면 그 3분의 1쯤은 랑비되는것일가? 매인당 매년 량식소비량을 백근가량으로 칠 때 그 백근을 다 랑비한다고 해도 2백원쯤 된다. 십년이면 2천원가량 될게 아닌가! 십년동안 랑비하지 않고 먹고싶은대로 다 먹고 당뇨병과 같은 “문명병”에 걸리면 그 치료비가 얼마 들겠는가? 필자가 전번에 닷새동안 입원치료를 받았는데 근 4천원 치료비를 냈다. 어느 것이 더 큰 랑비이고 어느 것이 더 큰 절약인가?   절약과 랑비의 변증관계에 대한 모호한 인식은 전반 사회적으로도 많은 면에서 존재하고있다. 심각할 정도로! 어떤 사람들은 일정한 직위나 권력을 가지고 있다하여 그걸 보존하기 위해 마시기 싫은 술도 하루건네씩 마시고 받기 싫은 스트레스도 찾아가며 받는다. 훌 뿌리치면 아주 편안해질것을. 우리 문단에도 손바닥만한 안면과 자존심을 위해 시시껄렁한 일을 가지고 입에 거품을 물고 다니면서 밤마다 “사이버전쟁”을 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정신적압력과 신경자극이 얼마나 큰데. 한번 히쭉 웃고 지나치면 그뿐인걸 가지구!   물론 김치를 해서 절반 먹고 절반 던지라고 웨쳐봤댔자 던질 사람이 몇이나 될가? 생활의 고질화된 습성과 인식의 보수적인 고집성은 순간적으로 타개되는 법이 없다. 그래도 안위를 느낄만한 것은 건강에만 해롭다면 아무리 귀중한것이래도 훌훌 던지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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