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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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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산다는 것 그리고 건강 댓글:  조회:600  추천:0  2020-09-18
산다는 것 그리고 건강 □ 강효삼 거리 산책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누구든 내가 늘 주시하는 것은 그 사람의 건강상태이다. 의사처럼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해도 겉보기가 속보기라고 건강한 사람은 첫 대면에도 알린다. 내가 환자여서인지 무조건 건강한 사람들이  부럽다. 그래서 때론 상대방이 나보다 나이  많다고 해도 그가 건강하다면 나는 나의 나이와 그의 건강을 바꾸고 싶고 가능하다면 훔쳐서라도 그의 건강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여느 것은 속여도 나이만은 못 속인다고 이제 내 나이 일흔이 넘어 여든, 점점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기 때문일가. 도대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여나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가? 결코 굉장하고 심각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우선 필자의 생각에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거뜬히 일어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젊은 사람이야 그게 뭐 대수겠냐 할 수 있지만 협압이 너무 낮거나 높아 평소에 늘 어지러워하는 사람과 뇌경색,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거쁜히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일어난다는 것은 사는 것이요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에 다가섰거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경색으로 장기간 머리가 어지러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늘 부담이 되는 나로서는 아침마다 거뜬히 잠자리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최근의 소망이다. 산다는 것은 또한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새끼를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이다. 만성 신부전이 와서 속이 메스꺼워 밥은커녕 죽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어 밥상에 그토록 먹을 것이 많아도 먹고 싶기는커녕 쳐다보기 조차 싫어질 때,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너무 깊이 깨달았다. 먹지 않으면 아파죽기 앞서 먼저 굶어죽을 것이라 어떻게든 먹어야 하는데 하루 삼시 끼니를 에우는 일이 나에겐 마치 밥과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았다. 인간은 우선 무엇보다 먹어야 산다. 그리하여 이럴 땐 차라리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 쩔쩔 매던 과거로 돌아갔으면 싶다. 후날 병이 나아 시걱이 되여 먹고 싶은 것을 마음놓고 먹으면서 밥이 그토록 맛있는 것임을 다시한번 체감했을 때 산다는 것은 바로 산해진미가 아니고 풋나물 밥이라도 번지지 않고 배불리 먹는 것이라는 것을 더욱 절감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간건강의 표준을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삼쾌(快)로 보기도 한다. 잘 먹자면 무엇보다 속이 편해야 하는데 여기가 아프지 않으면 저기가 아파 늘 속편한 날이 별로 없는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배 속이 편안한 것, 좀 쉽게 말하면 똥집이 편안한 것이다. 산다는 것은 또한 잘 걷는다는 것이다. 걷지 않으면 다리가 무뎌지고 다리가 무뎌지면 건강이 무너진다. 로인은 누우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나이 많을수록 더 열심히 걸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한국의 소설가 박완서는 “중국속담엔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우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다니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반듯하고 쟁쟁하게 걷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라고 했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다리맥이 없는 데다 심장이 약해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웬만한 곳은 갈 엄두도 못 낼 때   튼튼한 다리와 심장이 있어 고향의 들길을 자유로이 걸으면서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꽃을 보고 스쳐가는 바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비록 평범한 날이라 해도 아주 행복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걸어가서 보고 싶은 사람이나 경치를 마음대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산다는 것은 또한 좋아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며 함께 식사하고 차 한잔 따르는 등 그런 사소한 일이 아닐가. 친구들과 술상을 벌려놓고 웃고 떠들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머도 하고 조금 야한 육담이라 해도 허물없이 나누고… 이제 몸이 너무 쇠약해져서 술은 입에도 못 대고 더구나 친구모임엔 갈 엄두도 못 내니 랑만적인 삶은 끝이 난 것이 아닌가. 볼바에 술은 몸에 과하면 해롭다 하지만 술이 먹고 싶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건강이 없으면 술상도 없다. 술상이 없으니 오락도 환희도 즐거움도 사라지고 그저 메마른 삶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고 싶은 날인 즉 병없는 날이고 건강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제 나에게서 행복이란 별게 아니다. 하루하루 아프지 않을 때 아무리 하찮고 평범한 날이라 해도 그런 날은 아주 행복한 날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산다는 것은 결국 건강을 산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병이 왜 생기는 것일가? 학자들은 인간의 병은 객관적으로 외계의 병균이 인체의 몸에 침입한 것 때문이라고 하지만 주관적으로는 자신이 몸을 잘 관리하지 못해 벌을 받는 것이라 했다. 이 미운 병 때문에 한창 살아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때이르게 생명을 결속지었는가. 그 속엔 인류에게 도움되는 많고도 많은 사람들이 아깝게 때이르게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병처럼 두려우면서도 미운 것이 없다. 하지만 어쩌랴, 질병은 그림자처럼 인간의 삶을 뒤따르는 재앙인 것을. 그런 맥락에서 인류에겐 수많은 귀중한 직업이 있지만 인간의 건강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의사의 직업이야말로 가장 귀중하고 성스러운 직업이라는 것을 이번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내걸고 환자를 치료하는 수많은 의료진들의 미거에서 보았다. 늘 몸이 아파 병원출입을 하고 약을 쓰면서 바른 량심과 친절한 태도를 가진 의사의 도덕과 의술이 얼마나 많은 환자를 죽음에서 구해내는가를 알게 되였고 그 무엇보다 경제가 발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는 의학이 발달한 나라라는 것을 느끼게 되였다. 인간은 건강해야 한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인간의 기쁨과 행복이 어디서 오는가? 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실은 건강이란 두 글자에서 온다. 건강해야 부도 가치가 있다. 악착같이 일해서 돈을 산더미같이 벌어놓고 암으로 기타 질병으로 죽은 부자들을 보면서 여느 것은 다 잃어도 부디 건강만 잃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와 전쟁을 벌리는 가운데 우리는 다시한번 이 세상에 뭐니 뭐니 해도 목숨이 제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감안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귀중한 목숨을 유지해지는 것이 건강이 아니던가. 온 나라는 물론 세계적인 대재난이 된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인류는 더욱 건강과 생명의 귀중함을 피부로 절감한 것 같다. 그래서 생명을 받쳐주는 건강은 더욱 소중한 재부로 떠오르고 있다. 아프다는 것은 건강을 잃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한번 아프다 하여 건강을 죄다 잃은 것은 아니고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건강을 찾는다면 아픔이 도리여 도움을 줄 때도 있다. 아픔은 건강의 귀중함을 알게 하고 아플수록 생명의 귀중함을 더 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삶의 참고서이고 교훈이며 삶의 도리를 반면으로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아프고 보면 건강을 지키는 데 경험과 묘리를 터득하게 되여 앞으로 건강을 챙기는 데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건강할 때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인생도리를 깨우치게 된다. 아파서 외롭게 병원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으면서 가장 반가웠던 것이 병문안 오는 귀익은 발걸음 소리이다. 일부러 찾아와 위안해주는 것이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 설사 찾아오지 못해도 희망과 신심을 주는 그 한통의 전화가 얼마나 고마운가. 위챗에 올린 하루빨리 건강회복을 기대한다는 말씀들 또한 고맙고 고맙다. 설사 당장 낫지 않더라도 고무하고 편달해주는 그 말씀들 모두가 가장 좋은 정신적 보약이다. 그래서 아픔을 치유하여 건강이 회복되면서 건강을 회복시켜준 백의천사들과 아플 때 곁에서 위안을 해주는 인간에 대하여 전에 없이 고마움을 느낀다 아프면 미워하던 타인에 대한 마음도 바뀌여지고 욕심도 질투도 삼가하게 되며 따라서 사회적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리해심도 늘어난다. 그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한 인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아프면서 더 뉘우쳤기 때문이다.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고마운 일들만 떠올리면서 원쑤진 것 미웠던 것들을  잊어버리자. 고마움으로 하여 세상은 더 아름답고 인간은 더 정겨워서 더욱 삶과 인간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이 살면서 그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의 건강을 관심하고 배려해주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고 배려라는 것이다. 아플 때 절망은 금물이다. 그러므로 환자에게 웃는 얼굴은 매우 귀중하다. 한바탕  아프고 나서 얻은 교훈은 아픔을 너무 홀시해서도 안되지만 두려워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아플수록 강한 생명의식을 갖자. 족히 병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 그만큼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건강을 살 수 없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병이 있어도 치료 못하니 결국 돈이 건강이 아닌가? 그러니 아프면서 알았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아픔과 건강에 대한 글을 쓰노라니 어릴 때 부모들이 타이르던 말씀이 떠오른다. 병 나서 울지 말고 웃으면서 예방하자, 자신이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나중에 병에 걸렸을 때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연변일보 
23    한국에서 공부하는 조선족 학생 교육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781  추천:0  2020-05-19
한국에서 공부하는 조선족 학생 교육에 대한 단상 강효삼 코리안드림이 보편화 되면서 한국에 가 장기거주하는 중국조선족들이 늘고 있다. 따라서 결혼적령기가 된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서 자연 자식들을 출산하게 되는데 필자의 아들 며느리도 한국에 장기 거주 하면서 올해 여섯 살난 손자가 하나 있다. 연령이 늘면서 집에만 처박아 둘 수 없어 어린이학교에 보내는 데는 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아침 늦게 가서 저녁 일 찍 돌아오는 돌봄 어린이학교에 휴식 날을 다 빼고도 남은 날의 한달 학비가 한화 50만 원, 중국 인민페로 3천 원 남아 된다. 실로 뻐근한 금액이다. 그래서 한국정부에서는 어린이가 있는 가정의 학비부담을 줄이려고 어린이가정에 경제적보조를 해주어 학비부담을 덜어주지만 중국 조선족은 외국인이라고 하여 아무런 보조도 없다. 그러니 학비는 물론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는 한국에서 성년이 되도록 공부를 시키자면 얼마나 많은 학비가 소모될까? 저출산에 목 매여 밤낮 출생아 타령하면서 동포자녀들을 잘 우대하면 모국에도 도움되련만 고정 직업이 없이 오늘은 여기 래일은 저기 날품팔이를 하며 사는 우리 아들 내외 같은 상대적인 빈곤층으로 말할 때 집세내고 기타 온갖 세금 내고 나면 자식 학비가 늘 빠듯해서 맵새가 황새걸음하다가 가랑이 째지는 격은 아닐까?? 그래서 “잘산다”는 한국에 가 있는 아들 며느리에게 오히여 “못산다”는 중국의 할아버지가 적은 노임을 아껴 학비로 보태는 판이다. 어쩜 그러지 않으면 공부도 못시킬 형편이니(하긴 가난탓이지만)…그래서 나는 늘 아들 며느리에게 족히 그 곳에서 공부를 시킬 수 있는가? 못시킬 것 같으면 아에 일찌 감치 돈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중국에 돌아와 자식 공부부터 시키라고 한다. 아니면 아들 며느리는 그냥 한국에 남아 돈을 번다고 하고 이제 곧 학교에 보낼 연령이 되였으므로,  손자를 중국에 데려다 키우며 공부시키면 좋으련만, 내가 나이 많은 데다 몸에 병이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그대로 한국에 두고 공부를 시킬 수밖 없다. 그러나 우리 가정과 달리 우리 주위를 보면 자식들의 엄청난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젖이나 겨우 뗀 어린 것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기는 젊은 부부들이 늘고 있다. 헌데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맡기니 학비도 적게 들고 먹이고 입히고 병 치료해 주는 것은 그런대로 되는데 공부가 문제다. 지금 어린 것들은 어려서부터 컴퓨터며 스마트폰이며 시대의 최신 전자품들을 사용할 줄 아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런 것들을 모르다 보니 학교 교원들과 소통이 잘 안 되어 손자의 학년이 높을 수록 공부 지도를 하지 못하여 단지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는 보모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해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 학비도 절약하고 가정 조건은 되지만 이번엔 아이가 적응하지 못한다. 특히 배움의 입문이나 다름없는 한어가 안 된다. 지금 중국의 조선족어린이들은 도시화 현대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한족애들 못지 않게 한어를 잘한다. 헌데 중국인이면서 중국말을 한마디도 몰라 꿀먹은 병어리다. 서투른 언어를 따라가는 시간을 벌기 위해 한국에서보다 한 학년 낮추어 붙이지만 여전히 한어가 문제다. 더구나 조선족 교원이 부족해 한족 교원을 데려다 쓰는 조선족학교일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고가 학비를 무름쓰고 울며 겨자먹기로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도로 아이들 한국에 데려가는 부모도 있다. 어린 때 배움은 바위에 돌을 새기는 것과 같이 인생의 백년대계나 마찬가지라는데 이렇게 시계주처럼 왔가갔다 하다 보면 한창 배울 때 배우지 못하는 그런 자식들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고사리도 꺽을 때 꺽는다고 공부도 때가 있는 법인데…. 물론 헌국에서  자식들을 키우는 것이 모어의 고향이고 보니 우리민족고유의 예절과 전통은 물론 우리 말과 글을 배우는데는 좋은 기회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밖에 교육반경이 상대적으로 좁은 조선족에 비해 보다 넓고 선진적이고 문명한 교육을 앞당겨 받을 수 있는 여견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 말과 글을 배우는 것을 말할 때 중국조선족학교에서도 한국애들 못지 않게 우리 말과 글을 얼마든지 잘 배우고 있으니 대민족 속에 섞여 살고 있지만 제말과 글을 잃을 걱정은 없다. 더욱이 중국의 조선족학교에 다니면 제 민족 말은 물론 주체어인 한어와 그 밖에 국제통용어인 영어와 일어등 다종언어를 배우는데 필자가 일본에 체류하는 한 조선족애게서 들은 말이다. 그곳에 가있는 조선족들 거의 고학력출신이라선지 조선어(한국어), 중국어, 영어, 일어를 다 잘하니 어떻게 그렇게 글로벌시대를 대비하여 다종의 언어를 배웠는가? 며 중국 조선족의 교육에 감탄하더라면서 중국의 민족정책을 칭찬했다고 한다. 교육은 어릴 때부터 잡아야 한다. 우리 주위엔 이를 잘 아는 부모들이 있어 돈벌이가 좀은 늦춰지더라도 자식공부 잘 시킨다고 아예 한국에서 체류를 접고 자식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와 곁에 두고 다잡아 공부를 시키는 젊은 부부가 있는가 하면 한국에 있더라도 장차 중국에 돌아와 살 것을 대비하여 한국에서 막대한 사교육비가 들더라도 중국어학교에 보내여 미리 중국어를 알아두어 장차 중국에 와서 비교적 빠르게 적응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이야말로 먼 앞낲날을 내다보면서 돈도 벌고 자식도 공부시키는 두마리 코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명지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엄청나게 학비가 많이 들어 족히 감당할만한 경제 조건과 옳바른 교육이념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에게서야 문제가 되겠냐만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보통의 사람들로는 감당하기 뻐근한 것이 한국의 교육비임은 본토 국민들도 잘 아실 것이다. 어느 명인은 부모가 자식에 대한 봉사는 가장 큰 봉사이라고 했다. 물론  자식을 위해 분투하는 만큼 많은 부모들이 결사적으로 일하여 학비가 아무리 많이들더라도 얼마든지 감당해낼 것이이라 믿으면서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중국 조선족이고 장래를 이나라에 맡기고 살아야하는데는 이렇게 양 다리를 걸친 그네들 미래마저 불투명힌 미래를 두고 심각히 고민하고 사고하지 않을  수없다. 구경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일까?  
22    [수필]고개 숙인 벼이삭들을 보면서 댓글:  조회:782  추천:0  2019-07-16
21    문학상과 문학창작 댓글:  조회:1370  추천:2  2019-05-06
       작품은 발표하면 그만인 것 같은데 발표가 되고나서도 한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상을 받는 것이 아닐가 생각된다. 이는 글을 쓰는 작자로서는 지금까지 누구도 버리지 못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또한 한 작가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힘들게 쓴 작품에서 얻는 최대의 향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 죄다 상을 받을 수는 없고 그 중에서 극히 개별적이고 우수하다는 작품만이 상으로 선정될 수 있는데는 상이 될 작품을 바르게 평가하는 공정성과 공평성이 우선되여야 하지 않을가싶다. 물론 작품이자 사람이고 사람의 수준이자 작품의 수준으로 작품과 사람을 다 같이 보는데는 의견이 없다.그 사람의 인격도 하나의 작품질이 될 수 있으니깐.   하지만 정작 상을 평할 때는 그렇게 되지 않는지 요즘 우리 문단에서 어떤 문학상에 대하여 진정 옳바르게 상을 평가했는가를 두고 이런 저런 뒤말들이 나돈다.마치 상을 론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 같아서 설사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뒤에서는 쉬쉬 하는 소음이 그치질 않는 것 같다. 요즘 해내외로 이런 저런 문학상이 많아지면서 이에 도전하는 과정에 키가 크면 그림자가 크다고 필자의 견해가 잘못되였는지 몰라 잡음 또한 적지 않은 걸로 짐작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 그렇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리유는 문학상을 줌에 있어서 작품을 보지 않고 사람을 우선하기 때문이 아닐가싶다.   어느 필회에 참가했을 때였다. 필자는 한 모모한 평론가가 자기의 제자라고 하는 한 보통 작자에게 “모 잡지에서 지금 문학상을 평하는데 그 평은 내가 한다. 그러니 나를 믿고 글을 보내라.”라고 로골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그것은 지금 문학상을 평함에 대학교수들이나 모모한 평론가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절대적인 의견을 듣는 것 같은데 바로 우리의 어떤 문학상들은 그렇게 평가되고있는 것인가 하니 왠지 마음이 서글프다. 씁쓸해났다.   필자의 소견에 요즘 우리 문단의 평론가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가 누구든 작품을 보고 바른 평가를 해주는 평론가이고, 다른 한 부류는 말은 작품을 본다면서도 실은 사람을 보고 내려깎기가 아니면 추어주기식 (주로 추어주기식)절대 평가를 하는데 대개 이런 평론가들의 평론을 읽어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진미가 알린다. 그래서 상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어떤 작품은 번연히 좋은 줄을 알지만 나와의 어떤 관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문풍이나 추구가 아니라는데서 문학상의 선택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닐가?   언젠가 필자가 한 중문잡지에서 보고 놀랐던 일이 하나 있다. 한 초학자가 자신이 쓴 작품에 현지 문단에서 이름 있는 작자의 이름을 달아 잡지에 투고하였는데 글이 발표되었을 뿐 아니라 상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품을 발표한 것은 문인으로 말할 때 극히 비도덕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아마츄어작자가 리용한 것은 문단에 존재하는 어두운 구석이요 문학비리에 대한 일종의 항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소홀한 편집에게도 잘못이 있겠지만)   하지만 이러한 일이 존재해도 문단에 별다른 반응이 없고 평온하며 작가들 또한 너그럽게 이 같은 현상을 수용하는 것은 상에 대한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우리의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기에 앞서 사람이 되여야 하는 것을 우선적인 작가적 사명으로 명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이런 사명감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령혼의 공정사나 다를 바 없다고 자처하는 작가로 말할 때 어쩌면 상을 두고 아웅다웅 따지고 떠드는 일을 수치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정신적 제품인 문학작품은 여느 물질과 달리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달듯이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때론 그 저울마저 오차가 생기는데) 평가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공정해야 문단이 바로 선다. 문학상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서 어느 한 사람의 권위나 몇몇 사람의 평가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서 좀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울지라도 충분히 진지하게 론의된 작품을 상으로 준다면 보다 많은 작자와 독자들이 공감할 것이고 따라서 시야비야도 적을 것이며 상의 권위도 높아 진정 작품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할 뿐 아니라 문단 내 작자들의 공존과 화합에도 좋은 촉진제가 될 것이라 믿고싶다. 이런 번거롭고 복잡한 평의 과정을 거쳐 좋은 작품은 어디까지나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글은 글로써 평가하는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기준을 자대를 적용할 줄 아는 대바르고 정직하며 흉금있는 편집이나 평론가가 많아야 작가들 또한 이에 힘입어 순수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혼신을 다 하는 치렬한 문학정신을 소유할 수 있다.   한편 문학상을 대함에 있어서 상을 주는 사람을 탓하지 말고 그 무엇보다 상을 바르게 대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가싶다. 진정한 작가라면 구차한 인간관계로 살기보다 깨끗한 량심으로 작가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작품으로 도전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평가기준이 제각기라 해도 좋은 작품은 역시 좋은 작품으로 종당에 많은 사람의 공인을 받기 마련이다. 누구나 글을 쓰면서 자기 작품이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상을 바란다고 하여 그 어떤 인간관계를 리용하거나 비문학적인 것에 공력을 들일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가짐과 흉금을 가지고 치렬한 문학정신으로 글에 매진하는 것이 진정 글쓰는 사람의 바른 자세가 아닐가.   필자의 경험에 의해도 상을 받겠다고 돌격적으로 쓰는 글이 오히려 좋은 글이 못되고 상을 념두에 두지 않고 평소에 꾸준히 노력한 글들이 오히려 좋은 글이 된다. 때문에 상을 목적이 아니라 글을 잘 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아 글을 쓸 때는 상을 받을만한 표준의 높이에서 작품의 질을 높이기에 최선을 다 하면서도 그렇게 노력한 것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 상을 받으면 좋고 받지 않아도 마음에 부담이 없는, 편안하고 대범한 마음가짐으로 창작에 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작가다운 인격일 것이다. 흑룡강신문
20    술문화가 달라졌다 댓글:  조회:1129  추천:0  2017-08-16
술과 문화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요즈음은 술과 문화가 긴밀히 결합되여 “술문화”라는 하나의 명사로 쓰이고 있다. 이렇듯 “술”이 “문화”로 부상한데는 술을 마시면서 삶을 담론한다는것 이외에 술상이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락이나 예술을 감상할 때의 정신적 향수를 술상에서 받게 된다는데서 그 의미를  “술”보다는 “문화”쪽에 더 놓는것은 아닌가 싶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보편적으로 제고되면서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술상이 잦아지고 있다. 이젠 단지 술을 마신다는 식욕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친구를 사귀고 사회교제를 진행하며 새로운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 흔히 술상이 리용되면서 술상문화가 확실히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요즈음 들어서서 술상은 참가자들의 자질과 문화수준에 의해 그대로 하나의 독특한 문화장소로 되고 있다. 술상에서 해학과 유머가 곁들여지고 오락과 예술이 융합되면서 정신적 분위기를 돋구게 된다. 술상의 해학이나 유머가 일종의 “특별”안주가 되고 술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정신을 흥분시키고 고달픔을 위안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이제 조선족들도 더는 술상에서 상대방에게 우격다짐으로 술을 권하지 않는다. 한두번 권해보고 대방이 거절하거나 사양하면 더는 예전처럼 억지를 부리거나 성을 내지 않는다. 그것은 과음이 건강에 해롭다는것을  잘 알기때문이고 술을 권하는 호의가 상대방의 정서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하여 요즈음 우리 민족 술상에서도 “술은 권하는 멋에 마신다”는 말이 무색해졌다. 어디까지나 내 인사는 차려 술을 붓되 마시고 안 마시고는 상대방의 의사에 따르며 대방의 요구에 좇아 적게 붓거나 술 대신 다른 음료나 물로 대신한다. 그래서 술이 약한 사람이라 해도 술상에 가는것이 별로 고뇌거리가 되지 않는다. 술상문화가 이렇게 탈변하는데는 출국과 대도시진출로 술을 함께 마실만한 사람이 날로 줄어드는 원인 외에 보통 어떤 대사나 행사장 술상에서라야 오래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기회가 있기때문이 아닐가. 술상이 아니면 술을 마실 리유 그리고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는 우리들의 삶이다. 그래서 술상은 만남의 장이고 교류의 장이고 스트레스나 고독을 해소하는 장소이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건전한 술문화가 자리잡아가고 있어 전에 술만 마시면 평소에 풀지 못한 스트레스때문에 다툼이 잦고 말썽이 많고 지어는 손찌검까지 하면서 싸우던 낡은 술문화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사라져버렸다. 건전한 술문화를 따라배우고 술상을 즐겁고 의미있는 문화장소로 되게 하는것 역시 시대의 진보가 아닐까.▣ 잡지
19    대림동에서의 사색 댓글:  조회:1129  추천:0  2016-05-10
       (흑룡강신문=하얼빈) 말로만 자주 듣던 한국 서울의 대림동에서 난생 처음 보름이라는 시간을 체류했다.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특별이 한족과 조선족들이 많이 집거하여 대림동은 명실공히 서울안의 중국거리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스스럼없이 들리는 중국어,함경도,평안도,경상도 말씨가 한데 뒤섞여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그리고 중국음식점, 중국상점, 직업소개소, 환전소 등 한국사람보다는 중국조선족과 한족을 상대로 하는 크고 작은 간판들 속엔 심지어 사천의 마라탕에 동북타래떡과 만두를 판다는 간판도 있었다.그밖에 노래방 또한 곳곳에 연변사람들을 위한 연변노래방도 있었다.. 대림동은 매우 자유스런 거리다. 법과 질서를 위반하지 않으면 소신껏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거리다. 어느 계선까지 동그라미를 쳐놓고 그 속에서는 중국사람으로 살아보라는 것인가?   들리는 말에 대림동은 경찰들도 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선지 아무데나 뱉아놓은 가래침과 되는대로 널린 담배꽁초가 여기 저기 자주 눈에 띄웠다.좀은 부끄럽고 유감스러웠다.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새는 격인가? 중국에서 하던 습관을 못버린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대림의 낮은 이렇다 하고 밤은 어떠할까? 살펴보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날 일부러 대림거리를 산책하였다. 지금은 한국행이 아주 편리하여 가족이 나가 함께 생활하는 가정이 많다고 들었는데 가족을 떠난 외로움과 그리움이 그래도 해소된 것은 아닌지 휴식날 밤 외출이 빈번했다. 곳곳에서 남성들이 술마시고 좋은 기분에 큰 소리로 떠드는 장면과 남녀들이 한데 몰려 다니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전에 불법체류 단속을 할때야 어디 이런 풍경이 있었을가? 이런 기회에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며 직장에서, 회사에서, 건설현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확 풀어버리는 것 같아 좀은 무질서해 보였지만 이해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아무리 같은 민족이라고 해도 오랜 세월 다른 체제에서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했기에 이질적인 차이 때문에 다년간 한국인들 속에 있지만 그들 세계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원인과도 관련이 있다.그러니 한국에 살면서도 부득히 같은 문화권에서 오래 생활해온 조선족끼리 내왕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에 와 가족별로 사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 생일도, 잔치도, 환갑연도 심지어는 어린아이 돌잔치까지 한국에서 가진다고 한다.그리고 동창회, 향우회 등 동아리들이 따로 있어 그렇게 자주 만나 스트레스를 풀면서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은 좋은데 소비가 늘어나고 술자리가 잦다고 한다.부조돈만해도 대국의 기질이 있어 통크게 10만원, 20만원,서울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의 생활패턴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점차 중국에서 생활할때의 그 생활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그러므로 돈은 많이 벌지만 별로 남지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저런 허점이 있는 와중에도 이제 출입국정책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왕래가 매우 쉬워졌고 합법적인 체류자가 많아 거리를 다니는 사람 역시 자유스러웠으며 불안이나 공포감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반가왔다.이제 한국행은 조선족에게 거의 자유왕래라 해도 되지 않을까? 거의 7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 있다니 조선족인구의 3분의1 이상이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땅은 서울을 위주로 어디가나 중국조선족이 섞여있는 곳으로 되고 있다.   전엔 월세나 고시원 등에서 거주했다면 이젠 점차 전셋집,더 나아가서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아예 아파트나 빌라같은 개인주택을 사고 눌러앉은 것이다. 대림동에서 필자가 요해한데 의하면 한국에 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젊은 계층들이 더욱 그러한데 만일 그렇다면 조선족의 미래는? 백여년 지켜온 우리의 민족공동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뒤를 이어나갈 후계자가 없다면.그래서 누군가는 조선족의 한국에로의 이민설도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조선족이 한국국적이 되어 한국에 마음놓고 정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다가 중국이 한국보다 더욱 좋아진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그러지 않아도 요즈음 한국에 국적을 올린 사람중에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어떤 사람은 국적을 올렸다가 거액의 돈을 밀어넣고서야 한국국적을 취소하고 중국국적을 다시 회복했다고 한다.   한국행은 날이갈수록 세대차이와 계층차이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의 뒷받침은 바로 같은 민족이지만 국적이 다름으로 하여 받게 되는 차별에서 느끼는 자괴감으로 중국 조선족은 지금 한국에서 오랫동안 정착하면서 한국문화에 많이 적응하여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평등하게 대하기를 바라지만 이는 아직 시기상조인 것같다. 조선족들의 욕망과 달리 한국인은 엄연히 한국인이고 조선족은 조선족이면서 달리 붙여진 이름은 " 중국동포"아니면 "중국인"이다. 이번 20대 국회위원선거에서 당선 희망자들이 웃움을 지으며 선거공약을 발표하고 심지어 국민 앞에서 도와달라고 엎드려 절을 하지만 어느 여당,야당 할 것 없이 어느 누구의 당선 희망자들도 재외동포에 대한 언약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그만큼 한국정치인들의 심목 중에는 확실이 조선족은 없는 것이다.물론 선거기간이여서 투표를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으로 이해가 된다.공연히 "이민법이요.국회위원이 나와야"한다고 말하지만 그런 좋은 말 잘못믿었다가는 "떡줄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격이 될 수도 있다.   조선족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조선족이다.그래서 정녕 우리는 누구인가 물음을 수시로 제기하게 되는 곳이 바로 서울의 중국거리-대림동이다.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처음 우리가 한국땅에 발을 디딜때 낯설듯이 이제 중국에 돌아오면 중국이 낯설어질 것이다. 더구나 점차 중국의 정치제도, 사회생활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참여하지 않으면서 중국을 모르는데서 삶에 많은 불편이 제기될 것이다. 특히 가장 걱정되는 것은 자라는 아이들이다.그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러므로 중국인이지만 중국어를 모른다. 중국어를 모르고 중국에 와서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는가? 때문에 시계추처럼 반복하다보면 우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찌해도 중국의 조선족으로 중국의 물을 먹고 자랐기에 중국문화의 영향이 깊이 베여 중국에 살 수밖에 없는 중국사람이다.물론 중국사람으로 산다고 하여 자기민족 정체성을 잃고 살아서는 안된다.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이 좋은 나라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지키면서 앞서가는 민족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흑룡강신문 2016-5-10
18    조선족 설맞이 패턴 바뀐다 댓글:  조회:1380  추천:1  2016-02-08
설명절은 예로부터 가장 최대의 민족적명절로 각광받았다.하지만 대량적인 해외나들이와 연해도시에로의 진출로 리산가족이 많아지면서 조선족들의 설맞이 패턴은 새롭게 변화하고있다.   조용하고 단출한 설   물질이 결핍하던 년대엔 설이 오면 무엇을 먹을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으로 떠올랐다면 지금은 누구와 함께 설을 쇠는가? 이것이 새로운 고민으로 떠오른다. 설이되면 가장 반가운것은 헤여져있던 가족들이 만나 함께 즐기는 것이다.그래서 가족을 만나기 위해 국외나 연해도시에서 귀향하는 자식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부모들이 자식들을 보러가는 경우가 늘고있다. 상지진만해도 자식이 있는곳으로 설쇠러간 부모들이 20여명, 부모에게로 설쇠려오는 자식들의 숫자는 불과 5,6명밖에 되지 않는다고한다. 실은 한국에 가 있는 자식들로 말할때 전엔 불법체류 단속때문에 설날에 오고 싶어도 못왔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올수있어도 오지 않는데는 설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기때문이다. 설은 아무리 굉장해도 그 며칠뿐이지만 돈은 계속해서 벌어야 하는것이 인생의 삶이다.그래서 요지음 한국에서는 설에 일하면 로임도 높고 서비스까지 두둑히 채워준다면서 설이 되여도 돌아오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늘고있다고한다.한편 자식들이 먼 외국에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지만 자식들의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피곤을 고려해서 일부러 자식들더러 오지 말라하고 하는 부모도 있는데 어쩌면 무정한것같지만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들의 후더운 마음이 감지되는 설이기도 하다. 료해한데 의하면 우리 주위에 설을 전에 처럼 온 가족들이 제대로 모여서 참으로 풍요롭게 쇠는 가정은 그닥 많지 않다. 농촌은 말할것없고 도시라하여도 절대 대부분 우리 조선족가정은 부부간 혹은 량주간 단촐하게 설을 지내는것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고있다. 이제 우리 조선족들의 설은 좀은 외롭다.그렇지만 이제 습관이 된듯 조용하고 단출하게 쇠는 설을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것은 설에도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지 않고 헤여져 사는 가족들이 결코 무정하거나 무심해서가 아니고 설날 그 며칠만이 아니라 인생이 사는 그 많은 날들을 모두 설같이 즐겁고 풍족하게 살기위한 희망을 갖고있기 때문일것이다.   간단하고 소박한 설   한마디로 잘먹고 잘 노는것이 설이다.그래서 평소에도 잘먹고 잘 논 날을 두고 오늘 설을 쇠였다고한다.그러나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그러자면 그에 해당한 물질적기반이 있어야한다.비록 오늘 전에없이 우리민족들의 돈주머니가 불룩하지만 "한해 번돈의 절반을 설에 쏟아붓는다"고 하는 타민족들의 통큰 소비에 비해 우리 조선족들의 설맞이 씀씀이는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간단하다. 필자가 3인 식솔을 가진 한 한족( 중등생활수준)에게 설비용이 얼마나 드는가 물으니 한번 설쇠는데 먹거리,선물,세배돈,지어 옷을 사는것까지 3천원이 넘게 든다고한다. 헌데 한 조선족가정은 한국에 가 있던 아들 며느리 와 손자손녀 출가한 딸과 사위 외손녀 등 아홉식솔이 모여 설을 쇠는데도 어린 손자, 손녀에게 세배돈까지 포함하여 2천원이면 넉넉하다고 한다.   상지,연수,방정 등지의 조선족가정들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평소의 생활수준 보다 좀 높게 소비할뿐 별다르게 큰 소비는 하지 않는다는것이다. 리유는 가뜩이나 핵가족으로 가정인구가 적은데다 우리 민족은 사회관계나 인맥에서도 타민족 보다 아주 협소하여 설에 올 사람도 적거니와 찾아갈 사람 또한 많지 않은데다 전처럼 이웃간에 술상을 차리는 습관도 많이 사라져 그렇게 많은 음식을 쌓아둘 필요가 없다는것이다. 특히 지금은 생활이 좋아 전에는 설이라야 맛볼수있는 음식들을 평소에도 얼마든지 먹을수있어 로인들의 말처럼 "날마다 설명절"인셈이다.게다가 설이되여도 휴식하지 않고 여전히 영업을 하는 곳이 많아서 구태여 금값이나 다름없는 겨울 채소들을 잔뜩 사둘 필요없이 수요되면 그때그때 사다먹어도 얼마든지 될수있다는것이다.이렇게 간단하고 소박하게 설을 쇠는 대신 그 무엇보다 설에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은 건강한 몸과 편안한 마음인데 그것은 아마 지금 우리주위에 남아있는 사람들중에 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기때문으로 인식된다.   더불어 쇠는 즐거운 설   우리민족에게서 설은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것인가? 가난한 세월에 우리민족은 음식이라야 고작 이밥에 콩나물,술도 넉넉하지 않은 세월이였지만 친척은 물론 이웃까지 불러다 적은 음식이나마 나누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놀아야 비로소 설을 설같이 쇠였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렇다 하여 물질에 대한 욕망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면을 더 추구하는것이 우리민족설맞이특점이 아닐가? 때문에 비록 지금 설을 함께 지날 사람들이 많지 않아 좀은 외롭고 단출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않고 이빨이 없으면 이몸으로 산다고 합동심이 좋은 우리민족은 지금 특정된 환경에서 우리민족 특유의 새로운 설맞이문화를 만들어가고있다. 그것은 설날 외로운 사람들끼리 한데 모여 더불어 설을 즐기는 풍속이 탄생한것이다.이에 대한 해결사는 바로 로년협회다.   상지시조선족로년협회에는 올해 80을 맞는 분이 세분인데 그들에게 팔순 축하상을 차려주고 그들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윷놀이 등을 조직해 단체로 설맞이를 한다고 한다.뿐만아니라 외로운 로인들이 함께 모여 설을 즐길수 있도록 정월 초하루날도 활동실을 개방한다고 한다.   지난해도 설때 40ㅡ50명의 로인들이 초하루부터 협회에 나와 제각기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면서 화투도 치고 마작도 놀며 설을 즐겼는데 올해도 특별히 협회에서는 명절날 마실 술을 책임지고 공급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외롭게 설을 쇠는 사람들을 관심하여 단체로 설맞이 음식상을 차려주어 더불어 설을 쇠는것으로 외로운 사람들을 위안해주는 새로운 설맞이 문화가 점차 각광을 받고있는 것이다. 한편 아직도 옛정이 돈독하고 인심이 후한 곳에서는 설날이면 마을 사람들끼리 돌림음식을 나눈다. 이제 더불어 즐기는 우리민족의 새로운 설맞이는 가족의 의미를 넘어 협동과 조화를 이루는 민족공동체적인 의미로 승화되면서 오히려 외롭고 조용한 설이 흥성하고 따뜻하며 즐거운 설로 전환하는 좋은 계기를 맞고있다.   민족전통과 타민족의 풍속이 공존하는 설   문화적인 면에서 우리민족설맞이를 고찰해 볼때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는 설에 민족의 전통음식을 해먹는 습관이 남아있다.이를테면 찰떡,설기떡,송편,순대,묵 등…그리고 설날 아침 조상에게 차례상을 차려드리고 세배도 하고 있는데 특히 부모의 집에 설 쇠러 온 젊은이들이 설날아침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는 미풍량속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상지시 신흥촌에서는 귀향한 젊은이들이 일일이 마을 로인들을 찾아다니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초하루날 아침 로인협회에 모여 단체로 세배를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이러한 세배법은 사람이 곁에 있어서만 아니고 집을 떠나 멀리 있는 사람들도 마을 어른들에게 설인사를 올리는 새로운 미덕이 나타나고 있는데 월성촌 출신 기업인 김용화씨는 마을에 남은 분들에게 설 세배를 드리는 마음으로 설날 매 가정에 귤 한 상자씩 선물했다고 한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정초부터 마음이 훈훈하게 하는 소식이다.   민족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아 중국 조선족은 우리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대민족의 설문화를 하나하나 받아들여 자기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를테면 섣달 그믐밤 자정에 물만두를 삶아 먹고 생활에 여유가 있으라는 의미로 설에 생생한 물고기만은 꼭 먹는 음식습관 말고도 최근에 설을 맞으면서 요란스럽게 폭죽을 터트리고 출입문에 주련을 붙이는 가정이 늘고있다. 이것 역시 장차 중국 조선족의 하나의 설맞이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이제 우리민족의 설맞이는 우리의 전통과 타민족의 풍속이 공존하는 설로 변하고 있다.        흑룡강신문 2016.2.5  
17    [수필] 그리움의 고향(외 2편) 댓글:  조회:1142  추천:2  2014-08-25
누군들 고향과 인연이 없으련만 나는 나서자란 고향과 좀 특이한 인연이 있다. 남들처럼 고향에 붙박혀 산것이 아니라 여러번 고향을 떠나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고향의 귀중함을 깨우쳤다. 내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것은 소학교 6학년 전학기였다. 분가하여 이주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아성이란 작은 도시에 이사했다. 갈 때는 전등불이 있는 도시라고 하니 마음이 울렁거렸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촌놈이여서인지 아니면 고향에 정이 들어서인지 은근히 고향산천이 그리워 고향이 자리잡고있는 동쪽을 바라볼 때면 저도 모르게 그리움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첫주의 토요일이 되니 너무 고향에 남아계시는 아버지네 집으로 가고싶어 선생님께서 휴가를 주지 않자 몰래 도망쳐서 50리 길을 간적이 있다. 그때 현성을 벗어나 멀리서 손짓하듯 누워있는 고향산을 바라보니 마음이 가벼웠고 몇십리 걸음도 힘들지 않았다. 기실 나의 고향은 봉산아래 자리잡은 너무도 소박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뒤로는 마이강이 굽이쳐흐르고 여기저기 크지 않은 들판에 띄염띄염 마을들이 자리잡은것이 보기에 매우 스산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 고장이 좋을가? 아마 어릴 때부터 때가 묻은 곳이고 사람도 산천도 익숙하고 친절하기때문일것이다. 그때 고향밖을 많이 나가보지 못한 나는 고향이 제일 좋았다. 산과 물이 제일 좋았고 고항친구가 제일 편했으며 고향의 곡식이 제일 맛있었다. 하여 고향에 오면 특별한 볼거리도 없지만 어릴 때 자주 가던 산에 오르고 물고기를 잡고 이웃을 만나면서 시간이 지루함을 전혀 몰랐으니 그야말로 고향은 그 어떤 특별한 매력과 흡인력이 있는것 같다. 그러나 나는 또 고향을 떠나야 했다. 부모님이 이주하면서 아주 멀고 낯선 곳으로 가게 되였다. 신비한 낯선 곳으로 간다기에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는 서러움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고향이 그리웠다. 나는 다시 고향에 돌아왔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고향산천과 고향사람들의 삶을 글에 담았다. 그리고 고향의 젊은이들과 함께 겨울이면 마른 과자를 씹으며 문예종목을 만들어 고향사람들앞에서 공연했다. 영화도 공연도 볼수 없고 텔레비죤과 라지오도 없던 문화갈증의 시대에 전기도 없이 등잔불을 켜놓고 보는 마을청년들의 문예공연이지만 고향사람들은 집안이 터질듯이 모여왔다. 나는 그것이 너무 고마와 고향에 있는 동안 거의 해마다 선두에서 문예공연을 조직했다. 부득이한 사정때문에 나는 또 고향을 떠나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교원사업조차 할수 없게 되여 타지 학교로 가게 되였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나에게 눈총을 쏜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마 내가 고향을 위해 홍보하고 힘쓴 보람일것이다. 나는 《문화대혁명》때 당한 억울함을 시정받은후 고향마을에서 다시 교편을 잡고 고향의 문화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고향을 노래하는 글을 많이 썼다. 그후 인구대이동이 생기면서 고향사람들이 하나 둘 도시로 진출하자 나도 얼마후 고향을 떠났다… 이제 고향은 그리움뿐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기때문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은 흙으로 떠나갔고 살아있는 세대들은 고향을 등지고 멀리 연해도시 혹은 가깝지만 농촌이 아닌 도시로 떠나갔다. 어쩜 지금은 고향상실의 시대이고 고향변화의 시대이며 고향을 바꾸는 세월일가. 몇십년 오붓이 이마 맞대고 우리 민족들이 한 고향에 붙박혀 대를 이어 살아가던 삶은 영원히 과거가 되지 않았을가?! 그러나 고향은 의연히 고향이다. 그것은 내가 나서 살아온 곳이기때문에 항상 그립다.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바로 그리움이다.   다문화가족이 되면서   아들의 결혼식때문에 멀리 미국과 일본 등지에 가서 정착한 딸들이 애들을 데리고 왔다. 우리 가족에 참으로 오랜만에 한상에 모여앉아 밥을 먹으면서 재미 있게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정작 바랐던 감동적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긱할수 없었다. 나의 자식세대까지는 단일 조선족으로 우리 말 대화가 가능했지만 지금 자식들의 남편들과 애들은 타민족이거나 타국의 사람이여서 소통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제 우리 가정도 다문화가족으로 되였기때문이다. 일본국적인 큰 사위와 큰 외손녀는 일어를 그리고 작은 사위는 한족이다보니 한어를, 미국에 가 출생한 작은 외손녀는 영어를 했다. 이렇게 한 밥상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조선어, 한어, 일어, 영어 네가지 언어를 사용하다나니 우리 가족은 작은 《유엔》이 된셈이다. 나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재미 있게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것이 제일 안타까왔다. 누가 이런 세상이 올줄을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여났지만 그때 불과 세살밖에 되지 않아 일어를 배우지 못했다. 그후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일어나 영어는 적대국의 언어라고 근본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한때 변화된 세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외국어에 대해 편견을 가졌었다. 이제라도 가능하다면 일어나 영어를 배우련다. 설사 나이 많아 잘 배우지 못하더라도 외국어에 대한 거부감만을 깡그리 버리겠다. 그리고 자식들한테는 더 많은 언어를 배우라고 권장하여 언어가 바로 재부라는것을 깊이 깨닫게 하겠다. 물론 자식들은 조선민족으로서 우리 말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타지방에서 타민족들과 함께 살더라도 우리가 조선민족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린 손자, 손녀들한테 우리 말과 글을 배우도록 하겠다. 자식들이 떠날 때 나는 유치원에 가서 우리 말 독본을 사주었다. 타국에서 이 독본으로 꼭 아이들한테 우리 말을 가르쳐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조선민족언어는 세계 어디서나 발달한 언어로 주목을 받고있다. 글로벌화시대에 물질의 풍요를 얻는 대신 자기 민족을 잃어서는 안된다. 누군가 《민족적인것이 바로 세계적인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문화적인 삶에 적응하면서도 자기 민족을 잊지 않고 사는것이 중국조선족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가싶다.   미운 가난 고운 삶   나는 지금도 부유하지 않지만 과거는 그야말로 가난하여 서발막대 거칠것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때는 20세기 70년대였다. 모두다 가난한 세월이라 하지만 나는 왜 더 가난했을가? 그것은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너무 없는데다 경제대우가 낮은 시골의 교원사업을 했기때문이다. 그때는 한근에 30전씩 하는 소고기도 사먹지 못했다. 단돈 1원도 없어 남에게서 꾸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쌀이라도 팔려고 쌀주머니를 숨겨가지고 온 동네를 다니면서 쌀 사라는 말을 입밖에 낼수 없어 그만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그처럼 주인에게 충실한, 집에서 기르던 개를 닭 한마리 값을 받고 판적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친척들도 가난한 우리와 거래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지어 어떤 친척은 로골적으로 우리를 무시했다. 한번은 아이들을 데리고 그래도 설인사를 한다고 찾아갔는데 우리가 가지고 간 물건이 너무 적어선지 《주둥이를 끌고 구걸하러 다닌다》고 인격적인 모욕까지 서슴지 않아 지금도 나의 가슴에 못으로 박혀있다. 가난하면 사람대접조차 제대로 못 받는다. 오죽하면 거지에게는 인격도 없다고 했겠는가! 가난때문에 우리는 별의별 기시와 미움을 다 받았다. 나는 가난에서 해탈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분발했다.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서 길에 나뒹구는 나무토막 하나라도 주었고 모자라는 식량을 보태기 위해 달 밝은 가을밤이면 혼자 콩이삭과 벼이삭을 줏기도 했다. 지어는 50전이면 편하게 타는 뻐스비마저 남기려고 걸어다녔다. 어쩌다 현성에 갈 때면 타래떡 하나 사먹고싶었지만 꾹 참고 그 돈으로 집에서 쓸 사소한 가장집물 하나라도 사왔다. 후에 향의 간부가 되였을 때도 몇십호가 운집해 사는 향소재지 마을에서 직접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내라는 불쏘시개값 3원이 아까와 대신 아이들과 함께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해 학교에 바친적도 있었다. 이렇게 아글타글 애써 절약하면서 나 혼자의 로임으로 식솔 다섯이 살았다. 더는 남에게 구걸하지 않고 살면서 오히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친척들을 도와줄수 있었다. 만일 가난때문에 받는 수모가 괴롭다고 하소연만 하면서 남들이 동정하고 도와줄것만 바라고 남들의 도움을 받는데 만족했더라면 지금도 남의 손만 바라보며 게으름까지 덧붙인 못난 사람으로 살고있을것이다.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혹독하게 불편할뿐이다.속담에 3대 부자가 없고 3대 가난뱅이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 가난이 두려운것이 아니고 기개가 없는것이 두려운것이라고 했다. 가난은 매섭지만 《좋은 스승》이여서 가난해도 마음이 죽지 않고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은 가난하면 변하려 하고 변하려 하면 길이 열리기때문이다. 미운 가난을 고운 삶으로 전변시키는것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서 희망은 가난한자의 빵과 같은것이다. /강효삼
16    달라진 조선족의 설맞이 풍경 댓글:  조회:2471  추천:2  2014-01-30
     1년에 한번밖에 없는 설은 타향에 가 있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이며 헤여졌던 가족들이 한데 모여 즐기는 날이다. 하지만 코리안드림과 도시진출이라는 특정된 환경속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이제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면서 설을 맞아 온 가족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설을 쇠는 풍경은 거의 찾아 볼수가 없다.대신 새로운 풍경이 눈에 보여지고 있다.   오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몇년전만 해도 설 림박이면 그래도 타향에서 고향으로 설 쇠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하지만 이제는 설쇠러 오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남방으로 가기도 하지만 주로는 한국으로 가는데, 한국에 있는 부모에게 설쇠러 가는 학생들, 남편 혹은 안해에게 설 쇠려가는 외짝 부부들,그 밖에 자식집으로 설쇠러 가는 로부부들…어떤 이들은 설을 계기로 잔치나 환갑,진갑 등 가족행사를 치르러가고 효도에 이끌려 설도 쇨겸 관광도 하러 가는것이다. 할빈공항 국제항공편도착 출구를 빠져나오는 귀향객들.(자료사진)   모 려행사의 조사에 의하면, 근년 설기간 오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들의 수자가 눈에 뜨이게 늘고 있는것이 항공권 예약에서 여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김모녀인은 이번 설을 한국에 가 보내면서 그곳에 아들딸 친척들이 많아 설명절과 함께 환갑잔치를 치른다고 한다.그밖의 리유로 한국에 가서 설 쇠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는것은 이젠 고향에 있는 사람보다 나간 사람들의 수자가 훨씬 많기때문이다. 한 가정을 놓고봐도 아들 며느리, 딸 사위로 등 가정성원 대부분이 한국에 가 있다. 하여 이제 조선족은 설이라 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 오느니보다 이곳에 있는 적은 사람들이 가는것이 훨씬 경제적으로도 편리하다는 계산하에 설에 오는 사람보다 가는 사람이 많은것이다. 하여 온 가족 실솔이 고향에 모여 북적거리며 설을 쇠는 가정은 가족 성원들 거의가 출국하지 않고 가까운 곳에 사는 공부원, 도시 직장인 등 생활이 부유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설이 되여 집집마다 음식을 해놓고 서로 청하던 풍경은 언녕 볼수 없고 도시라 해도 마찬가지 조선족들의 설은 점차 조용한 설이 되고있다.   그래도 편안한것이 좋다고 ?   현실에 적응하여 사는것이 인간이다. 조선족들의 설쇠기도 마찬가지다.가족 성원들이 멀리 떠나 외롭게 설 쇠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닌 상황에서 이제 그렇지 않기를 바란들 무슨 소용있으랴! 해서 조용히 외롭게 간단하게 설을 쇠는데 눈이 익어 거부감도, 불평도 느끼지 않는것이 보편적인 심리상태다. 그것은 밖에 나가있는 사람중에 설이 되여도 올수 없는, 이를테면 일본, 미국 등지에 가 정착하는 자식들의 수도 늘고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설에 잊지 않고 택배나 돈을 부쳐오면 고맙고 설날아침 전화라도 걸려오면 반갑고…그런데 이렇게 외롭게 지나는 사람중엔 일부러 혼자지내기를 소원하는 사람도 있다.   한 로부부의 고백이다. 설에 몰려왔던 자식들이 다 떠나니 섭섭하기도 하지만 한편 시원하다는것이다. 리유를 알아보니 밖에 나갔던 자식들이 왁자하니 몰려와 있는동안 오랜만에 만남은 좋으나 어쩌다 집에 온 그네들에게 부엌일을 시킬수없어 부모가 대신 식모노릇, 보모노긋 하느라고 아주 힘이 들었다는것이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오지 말라고 했다 한다.부모들이 오지 말라니 대신 자식들이 부모더러 자식집에 와서 함께 지내자고 하는데 그래도 가지 않겠단다. 외로와도 편히 지나는것이 좋다고. 할빈시조선족로인문화협회 로인들이 설맞이 사물놀이를 선보이고 새해축복을 전하고있다.(자료사진)   너무 오래동안 부모 자식이 헤여져 살면서 그리움은 잠간이고 인간의 정마저 무디여졌는가.요즈음 외롭게 설 쇠는 로인들에게 새로운 신조어가 하나 있다. "설이고 머고 건강하면 된다,아프지만 않는다면 그게 바로 설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 설의 이미가 달라졌기때문일수도 있겠다. 물질이 궁핍하던 년대엔 설이 되여야 좀 잘먹을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소에도 잘먹고 잘사니 날마다 설인 셈이다. 그래서 구태여 설, 설 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지어 아예 설이라는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가운데는 내심 설날의 외로움에 대한 심적고통이 있을수 있기때문이지만, 여하튼 설을 맞이하는 중요성이 우리 생활에서 많이 빛 바래지고있다는것만은 사실이다. 한해를 보낸다는 의미일뿐 물질적으로는 그립지 않은 설이다.   새로 나타 나는 풍경 ㅡ 더불어 함께 쇠는 설   하지만 설명절은 어쨌든 누구인가 만나야 하고, 사람이 사람과 함께 지나는것이 가장 설명절다운것이다. 지난날 비록 가난했지만 가족 ,친족은 물론 이웃과 더불어 설을 쇠는것이 설명절의 광채도 더 하고 설도 한결 더 의미가 있지 않았던가. 리별 많은 세상,각박해지는 인심이지만 그럴수록 명절만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만나 함께 보낼수있다면? 하여 요지음 우리 항간에 비록 남남이지만 설날 아침부터 외로운 사람끼리 한데 모여 설을 쇠면서 그 옛날 '녀자들은 정초에 남의 집 울안에 발을 디디지 않는다'는 규레가 저절로 타파되고 있다.   지난해 모 로인협회에서는 정월 초하루날도 여늬 날과 똑같이 로인협회 대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한다. 그것은 설이 되여도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외롭게 집에서 텔리비와만 싸름하면서 사람이 그립지만 옛날 관념때문에 (정초에는 남의 집에 가지 않는다는) 감히 바깥돌이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평소처럼 로인협회 모여 함께 명절을 쇠게 하자는 의미에서였다. 결과 10여명이 로인들이 손수 술이며 음식들을 가지고와서 즐거이 먹고 마시고 놀며 고독을 풀었다고 한다.   이런 풍경은 완전히 무의무탁한 경로원에서나 있을법한데 이제 로인협회에서 외롭게 설을 쇠는 로인들의 심정을 감안하여 이렇듯 협회를 공동히 명절맞는 집이 되고 서로가 가족이 되게 하니 이거야말로 우리 조선족들이 더불어 설을 쇠는 새로운 풍경이 아닐가. 이에 올 설 이 로인협회에서 올해는 더 크게 설날의 모임을 조직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설날의 기쁨을 만끽하게 될것이다. 이는 제창할만 하다. 설사 로인협회가 아니라 해도 공공장소에서 문화오락활동을 한다면 설이 더욱 설같을것이다. 기대해본다 . 흑룡강신문 2014.1.29  
15    민들레화단을 보면서 댓글:  조회:1568  추천:0  2013-09-24
민들레화단을 보면서  아빠트앞 손바닥만한 화단에 다른 꽃은 심지 않고 몽땅 민들레만 심었는데 문득 민들레만 골라서 심어놓은 작은 민들레화단을 보면서 민들레에 대하여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되였다. 이 작고 보잘것 없는 수수한 꽃을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시줄에 담았으며 얼마나 많은 작곡가들이 오선보에 담아 노래했는가? 그래도 끝없이 나오는 민들레에 대한 시, 민들레에 대한 노래, 민들레처럼 작고 보잘것 없는 꽃이 이렇게 많고많은 시와 노래를 가지고있는것도 드물것이다. 더우기 우리 겨레의 예술가들이 민들레를 사랑하여 민들레를 두고 많은 시와 노래를 창작한데는, 그네들이 이 작고 보잘것 없는 꽃에 그렇듯 심취하는데는 과연 어떤 리유가 있어서일가? 평범하고 소박해도 밝고 명랑하기때문일거다. 민들레는 작고 여리고 단일한 색갈의 평범한 꽃이지만 어쩐지 대하면 마음이 편하고 너그러워진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에도 매양 민들레를 보면 항상 밝은 그 얼굴이여서 우울한 기분을 가질수 없다. 흔해도 사랑스럽기때문일거다. 워낙 많고 흔한것은 천스럽다하지만 민들레는 그렇게 많은데도 볼수록 귀엽다. 너무 수수하고 흔해서 공원같은데 따로 옮겨심어지지 못하고 자연 그대로 방치해두어도 하느님의 배치에 대해 원망도 불평도 없는지 어디에서든 들꽃으로의 사명을 다 한다. 봄날 파아란 잔디우에 그 누가 줄을 세운듯 그렇게 줄느런히 수북히 늘어서서 길가는 행인을 반겨주는 소담한 민들레, 그래서 지나던 걸음에도 무심히 지나칠수 없어 한번 더 보게 되고 때론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쓰다듬으며 입을 맞추고 그와 무엇인가 살뜰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하기때문일것이다. 때로 짐승에게 사람에게 밟히고 짓눌리우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 약한것이 쉽게 구겨지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다시 고개 들고 일어선다. 시름을 털듯이 툭툭 털고 일어서서 민들레꽃으로 무성한다. 민들레는 대개 한곳에 모여 집단적으로 피기를 즐기지만 때론 혼자도 핀다. 외로워도 외로움을 탓하지 않는 민들레, 나는 언젠가 빈집의 처마밑에 외롭게 딱 한송이가 피여있는것을 보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쓰다듬어준적도 있다. 그리고 마당의 풀을 깎아내면서도 민들레만은 다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어디에 있어도 항상 순수한 자태로 조용한 모습으로 열심히 사는 꽃이다. 그러기에 떠들지 않고 뽐내지 않고 어질고 순박한 민들레를 보면 소문없이 살더라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한편 민들레는 그 하나하나가 인간의 심성을 무르익혀주는 작은 태양 같다. 그래서 시인들과 작곡가들이 민들레를 곧잘 자신들의 예술속에 담아 민들레가 더욱 고상한 꽃으로 인정받는것은 아닌지. 아, 서리가 내린 뒤에도 그 여린것이 그냥 그 밝은 얼굴을 견디면서 끝내 자신을 성숙시켜 하얗게 여물리고야 조용히 삶의 종지를 끝내는 책임있는 생명력을 가진 민들레꽃, 역경속에서 대접받거나 떠받들리지 못해도 강하게 사는 민들레꽃, 그러고보니 인간이 민들레를 사랑하는 리유는 부드럽지만 억세고 귀중하지만 흔하여 쉽게 접촉할수 있고 감상할수 있기때문인지 모르겠다. 소문없이 열심히 살면서 자신에 충실한 민들레꽃은 또한 어질고 밝은 지성을 가지고 사는 예술인, 지성인 같기도 하고 시골에서 소문없이 몇세대를 살면서도 시종 게으름없이 향토를 사랑하고 로동을 사랑하며 생활을 사랑하는 우리네 소박하고 아름다운 성품의 농부들 같아 더욱 사랑스럽다. 그래서 민들레를 보면서 다시금 인생의 도리를 깨우쳐본다. 인간의 심성을 아름답게 정화시켜주기에.
14    연변노래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1723  추천:0  2013-09-05
  한때 산골동네의 노래였지만 연변과 기타 조선족산재지구는 물론 전국을 상대로 인기를 누리던 연변조선족들의 노래가 많았다. 필자의 어린시절만 해도 “제비”, “병아리”, “새봄”, “고개길” 등 아이들의 심경에 맞는 연변에서 창작된 동요들을 배워서 부르며 동심을 키웠고 따라서 이런 동요를 통해 우리 말과 글을 더욱 새기게 되였고 민족심도 키웠다. 성인가요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연변의 작곡가들이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창작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물론 연변이 이렇게 할수 있는것은 나라의 민족정책 좋아 민족자치를 실시하기때문이지만 민족예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지도자나 예술가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였을가?   물질생활이 가난하다 하여 정신생활마저 가난할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지리 가난한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락천적으로 살아올수 있었던 리유중의 하나는 음악 즉 대중가요를 꼽을수 있는데 그런 가요의 창작과 공급이 바로 연변으로부터 왔기에 나는 연변의 노래가 음악이라는 이 예술형식을 통해 중국조선족들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보존하고 살려나가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 고마운 음악이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같은 성과는 한때 민족음악을 고집한탓에 온갖 고초와 억울함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민족음악을 살리려는 끈질긴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분발해온 연변의 수많은 조선족음악인들로 하여 이루어낸 성과임을 더욱 긍정하고싶다.      연변 하면 민족자치주로도 그렇겠지만 노래와 춤으로 이름난데는 텔레비죤이 보급되지 않은 세월 방송매체를 통해 대중들이 쉽게 우리 민족 노래를 접촉할수 있은데 있다. 노래로 말할 때 연변은 집단적거주지를 형성하면서부터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 그들속에서 그들만의 음악이 존재하게 되였는데 해방후 새로운 조건하에서 그들은 서둘러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킨것이다. 하여 남들은 아직 음악에 대해 생각도 못할 때 연변에서는 벌써 자신의 음악체계를 갖추고있었다. 연변에서는 이러한 지방적특성때문에 각종 음악단체들이 일찍부터 성립되였는데 특히 연변가무단의 조기건립은 연변음악의 급성장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였는가싶다. 연변가무단은 당지의 예술공연은 물론 산재지구로 다니며 민족예술의 씨앗을 뿌려 민족의 문화를 자래우는 좋은 터밭이 되였다. 그래서 흑룡강내지에서는 연변가무단이 한번 온다 하면 그렇게 반가와 몇십리 먼길도 서슴없이 걸어가서 관람하군하였다. 그리고 그네들은 한번 왔다간후면 그곳에 곧 새로운 노래들이 보급되면서 대중문화생활이 활기를 띠군 하였다.      특히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전에 이룩한 기초상에서 연변의 음악은 더욱 발전하여 참으로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좋은 가요들이 많이 창작되여 전례없는 호황을 이루었는데 80년대초에 창작되고 불리워진 많은 노래들은 연변노래의 황금기를 이루지 않았나싶다. 그동안 이런저런 제약으로 구속받고 갇혀있던 예술혼이 해방된 기쁨과 함께 터져나오면서 “내 고향 오솔길”, “장백의 새아리랑”, “산간의 봄은 좋아”, “오래오래 앉으세요”, “선생님 들창가 지날 때마다”, “고향길”, “장백의 새 아리랑” 등 대중들의 귀맛을 돋구는 좋은 노래들이 라지오방송을 통해 혹은 전문예술단체의 공연을 통해 조선족들이 사는 곳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는데 이런 노래들은 새로운 시기를 맞아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며 자신있게 사는 조선족들에게 생활의 기쁨과 함께 삶의 활기를 보태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요 “오래오래 앉으세요”는 흑룡강조선족으로 말할 때 환갑날이면 어김없이 부르는 지정곡으로 되였다. 가요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는 “4인무리”에 의해 고린내 나는 아홉째로 기시받던 많은 교원들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성스러운 로동가치를 이렇게 음악으로 인정받음으로 하여 눈물을 흘리며 경청하는 명곡의 하나로 되였던것이다. 이밖에 참으로 많은 가요들이 대중들의 입에 올라 한때 연변의 노래는 흑룡강조선족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엔도르핀이였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코리아드림이 시작되면서 연변의 노래가 충격을 받지 않았나싶다. 요즘 들어 연변위성TV방송을 흑룡강 각지에서도 시청할수 있어 여려가지 프로중에서도 특히 음악프로를 즐겨보는데 음악프로그람에 나오는 매주일가를 비롯하여 다른 가요들이 웬 일인지 전처럼 광범한 대중들의 호감을 얻지 못하는것 같다. 물론 음악에 대한 평가기준이 사람마다 다를수 있고 사람마다 자기가 즐기는 기호의 노래가 있기때문일수도 있고 전과 달리 지금은 대중들의 음악에 대한 체험이 다양한데다 많고많은 영상매체들의 충격때문에 가요 한가지에만 사람들의 심미적추구가 쏠리지 않은 때문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워낙 한류 말하자면 한국의 대중가요들이 대중의 마음을 붙잡는 예술적묘미(특히 가사에서)가 있는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있을수 있겠지만 주관적인 요소에서 문제를 찾는다면 연변노래의 예술적특성과 그 질이 전만 못해진때문은 아닐가?전에 창작된 연변의 노래들은 조선, 한국과 달리 다같은 민족의 피줄이면서도 특정된 연변나름의 향토적 미와 정서가 특색이 있어서 어디에 가도 구분할수가 있고 또한 그 노래들의 울림이 중국조선족들의 정서와 매우 어울려 연변나름의 독특한 브랜드를 갖추고있지만 요즈음 연변에서 창작되는 노래들은 국적불명, 지방불확실의 선률들이 많지 않는가싶다. 얼핏 들으면 조선노래 같기도 하고 한국대중가요 같기도 하고 지어 한족노래 같기도 하여 자신의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잃어가고있는듯 싶다. 물론 근래에 창작된 노래중에 좋은 노래가 없는것은 아니다. “고향의 봄”, “타향의 달밤”같은 노래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적욕구와 맞기때문에 곧잘 부르며 공감하는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난 노래지만 “내 고향 오솔길”이며 “수양버들”같은 서정가요와 우에서도 말했지만 “오래오래 앉으세요”와 같은 전통도덕을 찬양한 가요들의 생명력은 지금도 의연한것이다.    노래가 보급되는데는 자신의 특정미 있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좋다기보다 시골의 이름없는 녀인이 시내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명곡일수도 있다. “도라지”, “아리랑” 등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요가 바로 이렇게 서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지금까지 류전되여 내려오면서 그 독특한 생명력을 과시하는것은 아닐가.    물론 대중들의 노래에 대한 심미표준도 많이 달라져 공적인것에서 개성적인것으로 다양화되면서 전처럼 어느 한가지 풍격의 노래에 치중하지 않는다. 필자도 이제 로년기에 들어서 지난 시대를 살아오며 쌓이고 구축된 감정세계가 낡아서 새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기때문에 이런 판단을 할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부르든 누가 듣든 좋은 노래는 어디까지나 좋은 노래이다.    50년대 중기에 연변에서 창작된 “안해의 노래”는 연변의 혁명성이 너무 강해 그런지 몰라도 흑룡강조선족들은 그것이 “독초”로 지적받고있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즐겨불렀다. 그것은 대중의 감정세계에 그 노래가 어울렸기 때문이다.    창작은 자유지만 불리고 못 불리고는 강박할수 없다. 대중이 스스로 호감을 가지고 불러야 한다. 이제 대중은 정치적인 설교나 그 어떤 리념적인것을 들씌우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노래보다 진실한 감정이 배인 생활적인 노래들을 더 즐긴다. 가사로부터 곡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희로애락을 대신할수 있는 노래들을 즐겨 선택한다.    중국조선족의 음악이 존재하고 발전하자면 연변의 음악이 발전해야 하는데 원인이 무엇일가를 이런 기회를 통해 한번쯤 곰곰히 생각해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음악의 한 토양으로서의 연변음악이 력사와 현실에 존재하는 그 가치와 의의에 대한 절실한 진단과 뼈아픈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가. 연변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노래에 대한 투자를 늘여야 한다. 연변축구와 함께 음악을 부흥시켜 연변을 세계에 알리는 밑거름이 되게 하자. 그리고 진정 연변의 음악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분투할 결의를 가진 음악인의 능력과 지혜를 최대한 발휘시키며 고무해야만 연변은 물론 중국조선족 더 나아가서 세계 우리 민족속에서도 당당하게 내놓을수 있는 중국조선족의 명곡이 나오게 되지 않을가.  
13    서탑을 그리며 댓글:  조회:1348  추천:1  2013-03-20
.수필. 서탑을 그리며 서탑이란 이름을 알았지만 정작 서탑에 와보기는 1960년 초봄, 황고구에 계시는 고모님의 집에 놀러왔다가 심양에 조선사람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곳을 가보지 않고는 심양에 와본 의미가 없다고 하여 일부러 전차를 타고 서탑을 찾아갔다. 당시는 불끈 솟은 탑외에 소위 대도시의 한거리라지만 초라함을 감출수 없었다. 좁은 골목에 촘촘히 들어앉은 낮은 단층집들가운데 어떤 집은 시간이 오래되여 땅속으로 주저앉으면서 집안이 오히려 바깥보다 낮아 이른 봄 눈석이물이 질질 마당으로 흘러들고있었다. 몇십년이 지나 개혁개방이 되면서 서탑이 낡은 면모를 일신하고 멋드러진 코리안드림으로 부상했다는 굉장한 보도를 신문에서 보았다. 그러나 정작 서탑을 찾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그때는 2003년 가을, 그것은 화려한 모습으로 변신한 서탑의 풍경을 즐겁게 감상하기에는 내 몸을 파고 든 병이 너무 엄중했기때문이다. 그때 나는 서탑에 유명한 조선족의사가 있다고 하여 그를 찾아갔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파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어찌 서탑의 풍경을 즐길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가! 후에 나는 다시 서탑을 찾게 되였는데 그때도 나는 환자의 몸이였다. 그때 나는 병을 고쳐도 심양에 와서 고치고 싶어 일부러 먼 북방에서 심양 고모의 아들과 짜개바지친구인 장모가 원장으로 있는 심양적십자병원에 와서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치료기를 놓쳐서인지 이 병원에서 죽음선고를 받고 퇴원하였는데 그래도 행여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성병원을 찾아가니 마침 그곳에서 입원을 시켜주어 신부전의 마지막 치료방법인 혈액투석을 시작했지만 저혈압인 나는 도저히 진행할수 없어 물러나오면서 이제 죽음은 완전 결정이 되였다고 생각하였다. 했지만 아마도 살 운명이였는지 투석을 하지 못했는데도 나는 죽지 않고 병이 점차 호전이 되자 서탑에 한번 와보고싶어 일부러 택시를 타고 왔었는데 정작 서탑은 보았지만 일어설 맥도 없어 한겨울인데도 땅바닥에 한참 드러누워있다가 기운이 조금 회복되자 간신히 일어나 차에 올랐다. 그러한 서탑을 한때는 심양에 이사를 오게 되면서 비록 서탑가에 살지는 않아도 일부러 서탑을 구경하러 먼곳에서 차비를 쓰고 와서 려관에 묵으면서 서탑을 감상하는 부담없이 어느때고 서탑을 보고싶으면 뻐스를 타고 와서 서탑거리를 흔상하군 했었다. 명실공히 서탑은 코리안타운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 말 속담에 “근처 색시 고운줄 모른다”고 서탑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곳에 사는가를 미처 깨닫지 못할수 있다. 더구나 누군가는 서탑거리를 화려한 소문과는 달리 복잡하고 시끄럽고 박하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서탑을 그런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기실 너무 쉽게 이 풍경을 볼수 있으니말이지 멀리 사는 사람들은 일부러 한번 찾아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이제 나도 그런 처지의 사람이 되였다. 조선족이라면 심양행차에 서탑을 들러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별반 없을것이다. 심양 하면 서탑을 떠올리고 서탑 하면 우리 겨레들을 떠올릴만큼 서탑은 가히 조선족의 상징이라고도 할수 있다. 그리고 서탑을 통해 심양이 변하였고 우리 조선족들의 삶이 변하였다는것을 일목료연하게 알수 있다. 농경민족인 우리 겨레들이 흙을 생명의 근원으로 알면서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에 가 살 때 어찌하여 이곳 겨레들은 그때 도시의 이 터전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그처럼 어려운 력사의 고비들을 넘기면서도 끈질기게 우리의것으로 만들어왔는지… 그래서 서탑이 더욱 자랑스럽고 귀중하다는것이다. 민족특색을 갖춘 우리의 건물들과 새로 선 아빠트단지들, 민족의 먹거리가 그대로 살아숨쉬는 로천시장과 서탑거리에 줄줄이 늘어선 우리 글 간판과 평안도, 함경도, 서울 말씨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숨결이 물씬 풍기는 곳… 서탑이 그립다, 서탑에 가고싶다. 단지 중국조선족만이 아닌 한반도 남북의 겨레들이 다 함께 모여 꾸리고 빛내는 그런 서탑이기에 늘 가고싶은 마음이다. 서탑이여, 세월이 가도 우리의 전통, 우리의 문화, 우리의 향기가 더더욱 뿌리내리고 만발하라! 그리운 마음 먼 북방에서 축원을 보낸다.
12    효도는 못해도 최저한 천대만은 말았으면… 댓글:  조회:1756  추천:4  2013-02-04
 대낮인데 아래층에서 웬 울음소리가 나기에 상사가 났나 하여 내려가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눈물을 훔치며 안에서 로인이 문을 열어주기에 웬 울음소린가 물으니 손자녀석이 하도 할미를 구박해서 서러워 운다는것이다.   아들 며느리 다 한국 가고 손자를 맡아 키우는데 전자유회만 놀면서 공부를 안하기에 무어라 했더니 할머니 코앞에 대고 주먹질을 하면서 아버지 엄마 벌어 보내는 돈쓰며 사는 주제에 무슨 잔소리냐 하더란다. 너무 기막히고 분해서 울수밖에 없다는 로인.   로인의 말을 들으니 문득 어느 책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시골 살던 아버지가 도시 아들의 집에 얹혀사는데 가만 보니 아들 집에서 첫째로 우대를 받는것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고 두번째는 손자녀석, 세번째는 아들이고 자신은 네번째란다. “항렬”이 네번째라 몸이 불편해도 무관심이여서 병원에 가자는 소리가 없었지만 “첫째”는 조금만 몸이 어떻다 해도 인차 안고 태우고 병원에 “모시고” 간단다. 하도 꼴불견이여서 참다못해 다시 시골 제 집으로 내려가면서 다음과 같은 쪽지를 남겼다고 한다. “셋째야, 잘 있거라 넷째는 간다.”   주변에서 들은 얘기다. 외아들녀석 애지중지 키워 대학공부 시키고 장가 들여주고 집까지 사주었는데 색시가 싫어한다며 아버지보고 양로원에 가있든지 아니면 세집 잡고 따로 나가란다. 그래 대답을 안했더니 어느날 외출한 짬에 집열쇠를 바꾸는바람에 부득이 려관방신세를 지고있다는것이다.   우리의 자식들이 죄다 이렇다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에 비해 효자가 줄어들고 불효자들이 늘어난것만은 사실인듯싶다. 그래서 요즘 로인들간에는 “이제 돈 있으면 자식한데 주지 말고 꽁꽁 묶어둬라. 그저 돈이 효자다. 그러지 않고 있는 돈 다 주고 빈털털이 되면 자식에게 천대받다못해 가난뱅이라고 쫓겨날수도 있다”라는 말들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원래 그 어느 민족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례절밝은 민족이였다. 그런데 인조위성이 우주를 날아다니는 초첨단시대에 오히려 도덕품성만은 땅바닥에 떨어지고있으니 계속 이 지경으로 추락한다면 인간사의 그 끝은 어디일가?   최저한 부모에게 효도는 못해도 천대만은 말았으면!    료녕신문
11    부모는 죽어야 자식을 “만난”다? 댓글:  조회:2295  추천:2  2012-08-13
부모가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장례식에 모든 자식들이 다 참가하여 장례식을 아주 크게 치렀다는 말을 듣고 새삼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요즈음 세상은 부모와 자식의 리별이 밥먹듯하여 부모가 살았을 때 자식을 만나기는 쉽지 않고 죽어서야 “만날수” 있는것은 아닌지? 살았을 때는 바쁘다는 구실로 와보지 않다가도 이젠 진정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지 세상을 떠났을 때 찾아와 “효도”하는 자식들이 늘고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다행, 어떤 자식들은 부모가 죽었다 해도 오지 않는것이다. 온다고 이미 죽은 부모가 살아나겠는가, 그래서 장례식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돈이나 부쳐보내고 아니면 그것마저도 잊고… 그래서 어떤 부모는 외롭게 혼자 있다가 세상을 떠서 며칠이 되여서야 이웃에서 알게 되여 장례가 치러지는 경우도 있다.   하긴 부모와 자식간의 리별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것이라 어떤 부모들은 자식한테 끼칠 경제적부담때문에 마지막 가는길까지도 자식에게 될수록 알리지 않는다. 한편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르는 인생에 부모만을 위해 자식들을 오래 곁에 붙들어둘수도 없는것이 오늘의 상황, 그리고 장병엔 효자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하여 부모곁을 지켜서서 그 림종을 보는 자식들이 많지 않고 그래서 요즈음 늙은 부모들은 살았을 때는 자식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죽어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은것이다.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나무는 가만 있자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가슴에 다가오는 말€?”있을 때 잘해”, 그리고 “살았을 때 와보아!”
10    부모는 죽어야 자식을 “만난”다? 댓글:  조회:1391  추천:0  2012-08-11
부모가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장례식에 모든 자식들이 다 참가하여 장례식을 아주 크게 치렀다는 말을 듣고 새삼스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요즈음 세상은 부모와 자식의 리별이 밥먹듯하여 부모가 살았을 때 자식을 만나기는 쉽지 않고 죽어서야 “만날수” 있는것은 아닌지? 살았을 때는 바쁘다는 구실로 와보지 않다가도 이젠 진정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지 세상을 떠났을 때 찾아와 “효도”하는 자식들이 늘고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다행, 어떤 자식들은 부모가 죽었다 해도 오지 않는것이다. 온다고 이미 죽은 부모가 살아나겠는가, 그래서 장례식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돈이나 부쳐보내고 아니면 그것마저도 잊고… 그래서 어떤 부모는 외롭게 혼자 있다가 세상을 떠서 며칠이 되여서야 이웃에서 알게 되여 장례가 치러지는 경우도 있다. 하긴 부모와 자식간의 리별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것이라 어떤 부모들은 자식한테 끼칠 경제적부담때문에 마지막 가는길까지도 자식에게 될수록 알리지 않는다. 한편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르는 인생에 부모만을 위해 자식들을 오래 곁에 붙들어둘수도 없는것이 오늘의 상황, 그리고 장병엔 효자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하여 부모곁을 지켜서서 그 림종을 보는 자식들이 많지 않고 그래서 요즈음 늙은 부모들은 살았을 때는 자식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죽어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은것이다.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나무는 가만 있자고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려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가슴에 다가오는 말€?”있을 때 잘해”, 그리고 “살았을 때 와보아!”
9    제 자식은 한족학교에 보내면서 댓글:  조회:2211  추천:4  2012-05-18
 최근 필자가 료해한데 의하면 흑룡강성 모 조선족학교 교직원들의 자녀들중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단 한명도 없는것으로 나타나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민족교육은 많은 진보를 가져옴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점들도 안고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것이 학생래원의 부족으로 민족학교가 문을 닫는것이다. 물론 학생래원문제의 책임을 교원들에게 돌릴수는 없다. 출산률 하강으로 아이들의 수가 적어질수록 현재 있는 아이들만이라도 제 민족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이다. 불완정한 수자이지만 필자가 살고있는 곳의 한 한족학교에 조선족학생이 백여명이라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족학교는 학생래원문제로 존페가 달려있는 상황이니 한심할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 조선족학생가운데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있는것이 바로 조선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교원직원들의 자녀들이라니 답답함이 더해진다.   물론 자녀가 한족학교에 가는 현상을 두고 천편일률적으로 몰아붙일수는 없다. 주위에 조선족학교가 전혀 없는 남방의 대도시들이나 연해지구라면 자식을 조선족학교에 보내고싶어도 그럴수가 없는 사정이여서 리해가 간다. 그러나 문제는 력사도 깊고 교육질도 괜찮은 당당한 민족학교가 근처에 있는데도 일부러 거리가 먼 타민족학교에 자녀들을 보낸다는것은 쉽게 리해할수가 없다. 더구나 민족학교에 몸담고있는 교직자로서 자식을 앞장서 타민족학교에 보낸다는것은 리치에 맞지 않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속에서 우리 말과 글을 배워서 쓸모가 적다는 민족언어무용론이 다시 머리를 들면서 련쇄반응으로 민족교육의 존재에 대하여 그 필요성과 전망을 두고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고있는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말하고싶다. 지금껏 민족교육이 존재해왔기에 수많은 민족후대들이 응분의 지식을 쌓을수 있었고 나라의 인재로 성장할수 있었다. 현재 교직에 몸담고있는 상기 학교의 그 자신도 민족교육의 혜택을 받았기에 가능한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누구나 자녀를 타민족학교에 보내고 그로 인하여 민족학교가 페교된다면 민족의 미래는 암담해질것이고 교원들 자신이 설 자리도 사라지게 될것이다. 민족교육의 전초지에 선 사람들마저 이렇듯 민족에 대한 애착심과 책임감이 부족하니 민족교육의 장래가 걱정되지 않을수 없다.
8    코리안드림과 조선족의 삶에 대한 사고 댓글:  조회:1994  추천:10  2012-03-08
       중국 조선족사회에 코리안드림 즉 한국행만큼 사람들의 주의력이 집중되고 이목을 끄는 화제는 없는 것 같다. 이는 또한 월경민족으로 인접하고 있는 고국인 남북이 항상 중국조선족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작용하기 때문으로 인식된다. 현재 코리안드림은 중국 조선족에게 희와 비의 명과 암이 엇갈리는 삶의 결과를 수없이 만들고 있는데喜보다는悲,明보다는暗에 쏠리어 대우받고 사랑받는 일보다는 멸시받고 소외받는 일이 더 많은 듯 싶어 중국 조선족을 위해 정의와 양심을 호소하는 언론이 주도를 이루고 있다.   세상만사는 복잡다단하다.한국에 체류중인 중국 조선족들의 실상을 들여다 볼 때 그들은 그들 나름의 욕망이 있다. 한마디로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해도 그들은 그래도 한국에 오래 머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한국에는 아직 일자리가 많고 소비도 높지만 임금 또한 상대적으로 높아 있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이 제정한 범위내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에 나가 있는 재한동포들의 상황보다는 우리가 직접 몸담고 사는 중국 조선족사회의 현황이다.   조선족사회는 중국 조선족으로서의 그 동질성과 정체성을 보존해 가려는 의지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근간이되어 유지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 같다..민족사회를 굳건히 견지해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즈음 민족사회에 관심과 애호를 가진 사람들이 민족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두고 날이 갈수록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개혁개방으로 나라의 발전속도는 아주 빠르고 따라서 이에 힙입어 주체민족은 잘되어 나가지만 어쩐지 그에 비해 우리는 못해가고 있지 않느냐는 위구심때문이다.때문에 정체성 유지는 이상으로 멀어져가고 대신 현실적 삶이 더욱 유혹적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중국조선족은 그 어느때보다 심각한 역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 같다.가장 두려운 것은 지금까지 우리 민족 앞에 닥친 어떤 어려움들이 전 민족적인 것의 영향권에 있었다면 이제 이 어려움은 월경민족인 중국조선족 ㅡ우리만의 어려움이라는 것이다.그리하여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이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 역사적 임무가 가로 놓여 있다. 우리는 자칫하면 코리안드림으로 경제적인 실리는 챙겼지만 정신적으로는 혼란을 가져와 우리가 오래 몸붙이고 산 이 땅의 믿음도 놓쳐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실제 난관을 헤쳐나갈 돌파구를 객관적 원인에서 찾기보다는 바로 우리 민족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지난날 우리는 우리 부형들이 이룩한 공로의 발판을 딛고 나라에서 주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의거하여 살면서 자생력을 많이 잃고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장기간 평균주의 의식속에 자신도 모르게 잠재해 있던 이러한 약점은 한국에 가서도 자연스럽게 발로가 되어 한 민족,한 동포이기에 마땅히 한국정부로부터 돌봄을 받고 우대를 받아야 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된 듯도 싶은데 우리는 조선민족이면서도 그누구 아닌 바로 중국의 조선족이다.이 점을 명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부딪치는 많은 난관 앞에서 쉽게 방황할 수 있다.항상 우리는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점을 명기하고 그러한 자세로 사고하며 지혜와 방법을 모색하여 우리 나름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7    아름다운 시작 댓글:  조회:2383  추천:2  2011-12-02
《료녕성조선족시선집》을 읽고서       필자가 《료녕성조선족시선집》을 받은쥐기는 지난 6월이다. 시간이 좀 경과됐지만 료녕땅에 살고있는 조선족시인들로 말할 때 처음으로 발간된 자체의 시집으로, “료녕조선족문학사에 하나의 찬란한 리정표”로 자리매김할 력사적의의가 있는 대사다. 지금까지 몇백권의 시집을 읽은 나지만 《료녕성조선족시선집》에서 풍기는 특별한 맛과 향기를 떨쳐버릴수 없다. 그것은 내가 한시기 그곳에 몸담고 살아서일가? 아니면 시는 그 사람이라고 내가 그네들을 잘 알고있기때문일가? 그보다도 내가 생각해볼바에는 비록 지금은 료녕의 조선족문학이 개혁개방의 성과와 민족문화에 대한 지대한 사명감을 지닌 기업인들의 대폭적인 지지와 성원으로 상대적으로 산재지구문학가운데 앞서나가고있어 세인의 주목과 부러움을 받고있지만 지난 한시기는 그렇지 못하였다는것이다. 그러한 리유는 그들 자신의 문제라기보다 객관환경의 지배때문이였다. 동북3성치고 조선족이 제일 적었고 그것도 조선족이 집중된 심양과 몇개 도시를  내놓고는 수자가 많지 않았기에 소수민족이 대민족의 포위속에 살면서 자기민족문화를 고집한다는것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이렇듯 문학환경이 곤핍한 현실에서 그래도 굳이 문학을 지향하고 문학을 고집하는 작가, 시인들이 있었다는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여느 곳과 달리 료녕의 문학인들이 더욱 돋보이고 그래서 또한 여느 곳에 비해 문화풍토가 빈약한 곳에서 오랜시간의 잉태끝에 출간된 《료녕성조선족시선집》이라서 더욱 값진것 같다. 이 시집에는 도합 30명 시인의 시 183수가 들어있는데 시를 낸 사람들중 시만 쓰는 시인도 있지만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지어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다. 문학쟝르를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 시는 료녕문인들의 보편적인 애호로 되고있다는 점을 알수 있다. 더우기 문학을 전문직업으로 하지 않고 과외창작으로 하는데도 이만한 수준을 보유하고 또 당당하게 시인의 반렬에 오른 수준있는 하나의 군체를 이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이 한권의 시집은 료녕시인들 삶의 투영이다. 시에서는 평범한 자신들의 생활체험을 시로 승화시켜 밝고 환하고 투명한 시적세계를 각자 자기나름의 시적추구로 개성이 있으면서도 소박하고 진실하게 표현하였다. 대부분 시들이 뜻이 감추어졌거나 아리송한것 (물론 그런 기법을 시에 도입하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시들도 있다)이라기보다 알기 쉬우면서도 깊은 뜻을 담았거나  담으려는 시도가 보여지는 시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때로는 신선한 아침이슬을 보는듯 때론 훈훈한 평안도숭늉을 마시는듯 시적정서의 푸근함과 맑은 호수에 반짝이는 해빛같은 재치있는 발견의 신선함들로  그리고 김 안나는 숭늉이 뜨겁다는 격으로 내심의 감동을 차분하게 내비친 부드러운 시들이다. 누군가 시는 만드는것이라고 하지만 료녕조선족시인들의 시는 물을 추기지 않은 벼짚으로 새끼를 꼬듯 억지로 비벼냈다는 감각을 느낄수 없다. 시상이나 시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기교를 부린 흔적이 없기에 쉽게 공감할수 있다. 요즘 우리 시단에서 류행하는 일부 시를 보면 상대가 모호할수록 그것이 창조고 혁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시는 어디까지나 독자들이 알아보기 쉽게 쓰면서도 그속에 깊은 철리가 담겨져 인간을 뜨겁게 고무하고 격려하는 사상감정을 내포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의 시는 시에 앞서 인간으로서 그네들의 순박하면서도 겸허한 삶의 성격이 고스란히 내비치여 더욱 친근한가싶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집은 각자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떠들썩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닦아온 시적성숙을 가늠하는 시험에서 합격된 점수를 따낸것이 아닌가싶다. 시집은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와 무게를 갖고 지금껏 료녕시단에 대해 별로 료해가 없거나 관심이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료녕시단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였다. 또한 시인은 있는데 자체의 시집이 없었던 료녕조선족시문단의 공백을 메움과 아울러 이제부터 료녕의 시인들도 당당히 시단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수 있는 하나의 군체가 형성되였다는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되고있다. 또한 이들이 새로운 도약에로 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 이러한 시적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탐구를 거듭한다면 료녕땅에도 조선족시단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좋은 시들이 쏟아져나올것이란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시집에는 이런저런 아쉬움도 보여진다. 시집은 오늘의 료녕조선족시인들의 현주소를 알리는데(편집후기에도 적혀있듯이) 력점을 둔것같은데 빈약했던 료녕시단이 오늘에 이를수 있은것은 지난날의 모지름과 진통이 있었으며 초기 료녕땅에서 시문학을 정립하기 위해 애쓴 박화, 리창영과 같은 시인들을 빼놓을수 없다고 본다. 박화시인의 주지시는 현대시작품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으며 리창영은 산문시로서 그만의 독특한 풍격을 갖춘 시인이다. 물론 1978년에 나온 종합시집 《꽃피는 봄》에 그 력사발자국이 찍혀있지만 이번 시집에 반영되였더라면 한권의 료녕조선족시단을 반영하는 좋은 시집이 아니였겠는가 한다. 또 단지 호적이 근원적으로 료녕사람이 아니라는데서 다년간 료녕땅에 거주하면서 시창작에 누구보다 열을 올려 성과도 많이 냈고 중국조선족문단에도 이름있는 대련의 김파같은 시인이 빠진것도 아쉽다. 또한 자기울타리안에 만족하면서 대담하게 료녕문단을 떨치고 중국조선족문학전반에 도전하는 패기와 열정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한사람의 일가견이다. 《료녕성조선족시선집》€쀀?한권 책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시는 한개 사회, 한개 민족의 흥망성쇠를 짚어보는 청우계라고 할 때 이 한권의 시집은 그야말로 료녕조선족시단은 물론 전반 중국조선족시단을 부흥시키는 아름다운 시작이라고 할수 있다. 이 한권의 책이 료녕문단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당당히 나서는 든든한 고임돌이자 첫 발단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6    아름다운 줄서기 댓글:  조회:2065  추천:2  2011-12-02
       줄을 선다는 것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차례가 오기 때문에 줄을 서있는 것인데 줄서기를 시키는 목적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 공공질서와 공중도덕을 자각적으로 지키기 위한 올바른 습관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문명이 뒤지고 물질이 곤핍한 연대에는 줄을 제대로 선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지나간 세월은 오늘에 비해 상대적으로 각오도 낮지만 물질 또한 너무 부족한 것이 많아 각오만으로 줄을 제대로 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다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먹고 사는 것의 필수품인 식량,기름, 천과 고기,술,사탕, 과자. 등 생필품을 살 때 그밖에 유일한 문화생활인 영화관람을 할 때 또 나들이 할 때 필수인 기차표나 버스표를 살 때 만일 줄을 섰다해도 차례가 오는것이 없다고 할 때? 그래서 줄서기가 난장판이 되곤 했는데 그럴 때일수록 질서를 지키려는 정직한 사람, 체면있는 사람이 늘 손해를 보곤 했었다   현재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현상도 많이 줄어들었거니와 새치기를 하는 현상도 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많이 뒤떨어져있는 것 같다.   지난해 청명 때였다. 폭설이 내리면서 달리던 열차가 한 역에서 열시간이나 멈춘 적이 있다. 열차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는데 필수품인 물과 식품이 다 떨어지면서 할 수 없이 역전 가까운 곳의 소매점에 가서 물건을 사는데 사람은 많고 물건은 적어 그만 난장판이 됐다.   자질높은 국민이라면 물건이 부족할 때일수록 오히려 질서를 더 잘 지키면서 서로 양보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폭설에 길이 잠시 막힌 것을 두고도 이렇게 밀고 당기며 싸움판을 벌이는데 만일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재앙이 닥쳤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해보니 약간 두려움이 앞섰다.   그 누구의 말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재앙보다 인간 스스로의 양보없는 충돌로 하여 빚어지는 재난이 더 크지 않을까?   아름답고 감동적인 줄서기는 인류의 문명을 잘 보여준다. 예상을 초월하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는 불행한 나라 사람들을 돕기 위해 너도 나도 길게 늘어서서 성금을 넣는 줄서기이다.여기서 모금액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엄마가 무얼 사먹으라고 준 용돈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성금함에 넣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담겨있는 줄서기 , 세상에 이것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줄서기가 또 어디있을까.   요 몇 해 사이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대재난이 자주 덮치면서 세계 각국에서 국적과 민족 종족을 가리지 않고, 그리고 과거의 원한이나 분규도 고려하지 않고 피해를 입은 나라, 다른 민족을 돕는 오로지 사랑 나누기 모금 줄서기가 점점 자주 또 길게 늘어서고 있다.   재난이 닥쳐도 침착하게 대응하여 서로가 남을 배려하기 위해 양보하는 줄서기와 그리고 그가 누구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늘어선 줄서기 , 이는 인류의 문명과 도덕이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 평화와 사랑의 질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줄서기라고 말하고 싶다.  
5    타민족간 결혼의 비와 희 댓글:  조회:2183  추천:3  2011-11-07
   요즘 왜서인지 결혼청첩을 받으면 경하하는 마음보다 심정이 자꾸 무거워남을 어쩔수 없다.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이나 신부의 이름중 한켠이 타민족인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있기때문이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어쩌다가” 하던것이 최근에는 “거의다”로 되여 오히려 동민족끼리인 경우가 “어쩌다가”로 되고있다.    그래서 누구네 집 사위는 한족이요, 누구네 집 며느리도 한족이요 하는 말은 보통으로 들리고 청첩을 들고 결혼잔치에 가면 한족과 결혼하기에 손님 대부분이 한족들이다. 결혼식순은 한어, 지어는 축가마저 중국노래가 위주로 되고있다. 이제 우리의 오랜 잔치문화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인것이다.    대민족속의 소수민족으로 사는 조선족총각처녀들이 타민족 총각처녀를 신랑, 신부로 맞아들이니 한 가정이나 한 민족구성원으로 놓고보면 득이 분명하지만 후세계승에 있어서는 결국은 실이 된다. 왜냐하면 남편이 타민족일 때 그 자식은 남편의 민족성분을 따르는것이 자명한것이고 설사 남편이 조선족이고 안해가 타민족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직접적으로 양육하고 생활을 지배하는 현실능력이 남자보다 녀자에게 더 있기때문에 자식은 “껍질만 남은 조선족”으로 될 가능성이 많다. 조선족이 극히 적은 연해지구나 남방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은 설사 부부쌍방이 조선족이라 해도 학교가 없어 그 자식은 결국 “타민족”으로 변하고있는데 이 수자가 도대체 얼마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태도는 각이하다. 울며겨자먹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후자의 견해인즉 중국에 살바에는 하루빨리 동화되는것이 살아가는데는 훨씬 좋다. 한민족이라 하여 모국을 찾아가도 외국인대우 받으니 차라리 “이방인”으로 잘 살아보겠다는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외국나들이로 조선족처녀들이 많이 빠져나가는데다 또 대상을 찾는 눈높이가 너무 높아 웬간한 수준선에서는 취할수가 없기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런가하면 먹물을 꽤나 먹었다는 처녀총각인 경우 동민족은 한족보다 못한데다 혼인이 감정에서 점차 실리를 추구하면서 출세와 부를 위해서는 인맥관계가 좋은 한족이 더 낫다는것이다. 그래서 한때 타민족과의 통혼을 극력 반대하던 부모들도 이젠 어쩔수 없다는 립장이다.    또 한편으로 민족심이 강하다고 자부하던 조선족들이 타민족과의 결혼이 점차 보편화되여가는데는 순발력이 강한 그들이 주류사회에 뛰여들려는 욕망과 기개가 누구보다 강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타민족과 쉽게 조화하는 적응력과 가변성을 갖고싶기때문일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위기는 민족인구의 급감이라는 이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는것이다. 일찍 우리 민족은 이 땅에 와 살면서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서도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삶을 영위해왔다. 그것은 강한 민족정신과 생명의식에 의거하여 백의겨레의 말과 풍속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왔기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민족과 조화를 추구했어도 결혼만은 꼭 동민족을 고집해왔고 긴긴 세월속에서 중국조선족사회를 형성하고 발전시켜왔다. 헌데 이제 타민족과 결혼이 늘면서 민족의식마저 쉽게 흔들리고 민족자부심의 최후보루도 인젠 무너져내리고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강한 민족 의식과 사명을 갖고 자식만은 동민족끼리 혼인시키는것을 철칙으로 리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고집과 노력이 더 돋보인다. 이러한 노력과 소망이 하나의 민족을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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