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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3 댓글:  조회:353  추천:0  2020-12-21
 7. “영길현, 서란현, 유수현”의 수전 개간으로 인한 풍파   알라의 발전사에서 이제는 숨을 좀 쉬는가 했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듯이 시에서 갑자기 통지가 왔다. 영길현, 서란현, 유수현 세개 현이 송화강의 젖강을 막아 수위를 높여 1000여쌍의 토지를 수전으로 개간한다는 결정이다. 만약 그렇다면 알라의 200쌍은 물에 잠기게 되니 미리 조치를 강구하란다.    알라대대에서는 급하게 김서기가 사람들을 데리고 금주땅을 돌아봤으나 알라사람들이 옮겨갈 형편이 안 되었다. 또 배주환씨를 데리고 흑룡강성까지 돌아보아도 300여호의 농가와 300쌍의 수전을 풀 수 있는 곳은 전혀 없었다.   할 수 없이 알라에 다시 와 지부회의를 열고 부득불 일부 인원을 이사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총지에서 누구든지 마음대로 조직하여 좋은 곳으로 이사가는 사람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리종원(전임 대대장)씨가 30여호(전임 대대장)를 조직하여 길림시 교구 구참공사 남산도(南山道)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가을에 일부는 남산도에 가서 집을 짓고 논 풀 준비를 하고 이사했다. 내가 따라가 봤는데 산골이고 물을 퍼 올려 논을 풀어야 하는데 물을 푸는 일은 국가에서 도와준다 하였다. 산골에 논을 푸니 얼마나 좋을까?     그것 또한 기발한 창조였다. 후에 다시 진툰(陈屯)으로 옮겨갔다. 나는 그냥 말하지 않고 알라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알라에서의 발전은 가망이 적기에 후에 떠날 생각을 하고 길림시정부의 고시장을 찾아가 알라에서 호수를 줄여야 하기에 부득불 떠나야 하는데 수전을 풀만한 곳을 련계해달라고 제기했더니 고시장은 알라사람들은 벼농사를 잘해 길림시교구에 와서 수전을 발전을 이끌어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교구정부에 전화를 걸고 우리를 보고 바로 구참공사에 가라 하여 구참공사에 찾아갔더니 박구장(조선족)과 하와자(下洼子)대대 서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논풀 곳을 돌아보았다. 신작로 옆이고 송화강가에 고점자 남쪽인데 강냉이를 심던 한전을 우리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하와자대대의 접대를 받고 돌아왔다(당시 나와 강필근이 함께 갔다).   알라에 돌아와 이사 갈 사람을 조직해 보려니 자리가 좋아 서로 가려고 할 것 같아서 젊은 사람들로 조직하였는데 서기감인 신기원, 대장감 최형두, 강필근은 당지와 관계를 잘 맺어 양수장과 주택 건설을 맡고 나는 길림시와 가까우니 방법을 연구하여 기업을 꾸리면 하와자에 가게 될 30여호의 미래 생활은 좋아질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우리가 김서기에게 30여호가 이사 간다고 하니 김서기가 명단을 보자고 했다. 강필근이가 김서기에게 쓴 명단을 보여주었더니 김서기는 명단을 훑어보다가 그 종이를 쫙 찢어버리며 “아무도 못 간다!”고 화를 내면서 나가더니 합작사에 가서 술 한컵에 소금 한알을 안주로 마신 뒤 집으로 갔다.   강필근과 나는 기가 막혀 집으로 갔는데 사람을 시켜 저녁도 먹지 않은 나를 김서기가 불러서 갔더니 “6대 리형출 서기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가봐야 되지 않겠나?"고 했다. “예!?” 리서기네 집에 가서 인사를 한 다음 술상을 차렸는데 김서기가 “리서기는 알라의 훌륭한 당원이다.”라고 하면서 여러 면에서의 그의 착한 인생살이와 사업에 힘써온 얘기를 하면서 나에게 “명수도 알라를 위하여 알라사람들을 위하여 너는 알라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정중하게 말씀하셨다.   김서기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다시 생각해 보게 되였다. 알라에는 나를 낳아 젖 먹여 키워준 세상에 둘도 없는 어머니의 뼈가 묻혀 있었고 또 같은 피가 흐르는 겨레들이 서로 도우면서 참된 사랑과 인정으로 살아온 인정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내 고향 알라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알라사람들과 같이 영원히 알라의 청산록수에 묻혀 살며 알라를 지켜보며 세상 끝까지 가야 했다.   김서기에게 떠나지 않겠다고 하자 김서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맙다고 인사한 뒤 매우 기뻐하였다. 내가 떠나지 않겠다고 하니 목수 윤광수, 철만지, 윤상건 등은 기계 사용에 재간 있는 김리선 등 몇 사람들도 못 가도록 다시 붙들어놓았다. 그리하여 리종원(李钟元)씨를 비롯한 30여호와 강필근이 조직한 30여호 250-260명의 인구가 줄었는데 그것은 한개 대대가 없어진 셈이였다. 알라사람들은 그래도 그 물 때문에 걱정이 되여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정부에서 좋은 통지가 내려왔는데 "알라에다 국가에서 제방을 새로 쌓아주고 수문을 단속하고 배수는 큰 펌프를 놓아 논에 물이 차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 안심하라" 하였다.   그렇게 해결한 덕분에 가물 때는 송화강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장마 때는 퇴수물을 밖으로 퍼 내니 자연에 맞서는 알라사람들에겐 하늘도 울고 갈 가물이나 장마도 없었고 그 후로는 해마다 풍작을 거두었다.   8. 문화대혁명   알라에서는 1963년도 제1차 사회주의교육 운동이 시작되여 길림시농업국 국장 리규삼(李圭三)의 령솔하에 공작대 십여명이 장기 주둔하면서 군중을 발동하여 경제청산을 하고 간부들의 문제를 적발하는 운동을 벌렸다. 그 때는 생산소대가 핵심이여서 일부 소대간부들은 돈을 좀 더 가져가고 소대돈으로 술상을 차리는 등 부정한 일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고 다만 대대의 회계가 1000여원을 횡령하여 철직처분을 받았다. 그래서 잠시 내가 회계를 맡아했으며 년말에 공작대가 철거했다.   1964年에 다시 제2차 사회주의교육 운동이 시작되였는데 박원종(朴元钟)씨가 공작대 조장으로 되였다. 경제상에서 큰 문제는 없었고 다만 대대장이 생활작품문제로 떨어지고 26세인 내가 정치대장으로 되였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농촌사업에서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농사에는 문외한이였고 정치사업에도 깜깜이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일곱 식구에 다섯명이나 학생이니 부모님들의 부담이 너무나 많아 나는 부모님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려고 퇴학하여 포두시(包头市)에 가서 측량대로 있다가 돌아왔으니 농촌사업에서 많은 것을 모르기에 마음속으로는 달갑지 않은 간부가 되였다. 내가 대대장으로 된 것은 그 시기에는 가정출신을 많이 따지는 세월이라 나는 빈농출신에다 렬사의 동생, 아버지는 렬군속모범이었으니…   대대장이 되였지만 정치운동에 아무런 흥취가 없어 내 앞의 일이나 보고 대대 김서기가 시키는 일만 중시하고 언제나 열심히 해나갔다. 하루는 사무실에 있는데 호구를 겸하여 관리했던 회계 한춘근씨가 나에게 “김국범(金国范) 선생의 호구에는 성분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써야하는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초기에 학교에서 나의 자형 김국범 선생은 목에 패쪽을 걸고 비판투쟁을 받았다. 당시 우리 가정은 혁명가정인데 자형이 지주분자로 인정된 것이 접수되지 않아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지주라도 세살 때 아빠가 죽었는데 네 자형이 무엇을 알겠나? 그래도 길림성 우수교사로 입당까지 했는데…”    나는 또 김서기께 직접 물어보았다. “우리 자형은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요?” 김서기는 소지주의 아들이라 했다. 그리하여 나는 회계에게 김국범이 소지주의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 일이 문화혁명시기 나에게 큰 문제로 되였다. 한번은 나를 새 교실에 오라고 하여 갔더니 라고 써서 붙여놓고 앞에 서라하여 섰더니 “계급투쟁을 견지하자!”, “무산계급전정을 공고히 하자!”라는 구호를 부른 뒤 나더러 검사하라 했다. 속으로 나는 집체공금을 횡령하지 않았고 다른 오점도 없으며 벽돌 한장도 공짜로 쓴 적이 없고 바람을 피워 녀자를 본 적도 없는데 무엇을 검사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학습이 부족하여 정치를 돌출이 하지 못했고 능력이 모자라 대대 일을 잘 보지 못하였다.”라고 검사하니 뒤에서 누군지 큰소리로 말하기를 “나라를 배반하고 조선에 갔다 온 것은 죄가 아닌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조선에 갔다 온 것은 사실이고 입당할 때 김서기에게 다 교대했고 조선 남양에 갔다가 나흘 만에 돌아왔었고 조선의 실 한오리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슨 죄를 론할 것인가? 다시 생각해 보니 국경을 넘어 불법 월경한 것이 죄인 것 같아 잘못했다고 했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은 나에게 인생살이에 대한 많은 것을 느끼게 했고 배우게 했다.  나는 영국의 유명한 작가 쉐익스피어의 “세상의 그 어떤 권위와 위망이 있는 사람도 여론계의 중상을 피면하기 어렵고 가장 순결한 도덕품행도 배후의 공격을 피면할 수 없다”라는 명언에 담긴 철리를 다시 한번 느꼈었다.   9. 개혁개방의 풍랑 속에서 알라의 개혁은 성공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중국에 개혁개방정책이 시달되면서 농촌에는 호도거리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1978년에 안휘성 소강촌의 18명 농민이 혈서로 대보간을 하자고 하여 당시 성위 서기 만리의 지지를 받고 1979-1980년에는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그 때 알라의 김서기는 1979년에 병환으로 있다가 1980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서기는 일편단심 당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26년이란 기나긴 세월, 1953년부터 1980년까지 알라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하여 현위 곽(郭)서기는 추도식에서 “김룡구 서기의 업적은 알라에서 대대로 빛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은 훌륭한 일꾼을 잃었고 알라사람들은 훌륭한 령도를 잃었기에 알라사람들은 매우 비통해 했다.    김서기의 추도식이 끝난 후 공사 허명(许明)서기가 알라에 와 하루간 있더니 이튿날 다시 와서 당원대회를 소집하고 하시는 말씀이 “당원, 간부들의 다수 의견에 따라 공사당위는 배명수동지를 알라당총지 서기로 임명한다.”라고 선포했다. 오래전부터 김서기는 후계자를 고려해 모든 일을 나하고 먼저 토론해 결정하였는데 4, 5명이나 선발해 사업해봤지만 한 사람도 후계자로 되지 못했다 .   나는 지부사업은 조금도 해보지 못했고 할 줄도 몰랐으며 지부서기사업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되였으니 정영기(원 화전시당위 서기)의 의견을 많이 참고하고 도움을 받아가며 하루하루를 겨우  견지한 것 같다.   호도거리정책을 실시할 때 처음엔 알라사람들에게 접수되지 못했다. 20여년간의 집체경제제도로 얻어온 성적과 발전도 많았는데 호도거리를 실시하면 이미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묵살되는 것 같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현위 김서기를 찾아 의견을 청취하려 하였더니 김서기 말씀이 “알라는 보통 농촌과 달라서 자기 립장에서 꼭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은 못하겠으나 알라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차 1981년 길림성 성장 장근생(张根生)과 중앙농촌정책연구소 두윤생(杜润生) 소장이 알라에 왔을 때 나는 알라사람들이 집체화길에서 얻어온 많은 성과를 보고했는데 두윤생 소장의 말씀은 “지난날 알라는 참 잘 했습니다. 성적도 컸습니다. 그런데 알라의 이 좋은 기초에 전국에서 얻어온 좋은 경험을 보태면 알라는 더 빨리 좋아지지 않을까?”라고 했다. 마지막 그들이 떠나갈 때 장성장과 두주임의 말은 중앙의 지시와 같다 하면서 나의 어깨를 도닥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호도거리 시달을 결심하고 1982년도 호도거리정책을 시달하였다.   호도거리가 실시된 후 농민들은 제 땅의 주인이 되였고 땅에 대한 애착도 커졌으며 공출미를 바친 뒤에 남은 곡식은 배불리 먹고도 팔 것이 많았다. 몇십년 분투 끝에 성적도 많았지만 호도거리는 우리에게 일체는 자기 형편에 따라,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어 생활이 제고되였으며 사람마다 좋아했다.   알라는 개혁개방의 영향 아래 원래 집체공금으로 집을 짓던 제도를 개혁하여 이미 벽돌집에 살고 있는 사원들은 값을 싸게 쳐서 받고 소유권은 개인에게 돌리고 새로 집을 짓는 농호들은 자기 마음대로 설계하고 보기 좋고 쓸모 있게 잘 짓게 하였다. 주택건설에 힘 입어 1983년에 알라는 초가집 한채도 없는, 그림 같은 마을로 변모되였다.                         알라송            인생길 굽이굽이 산수 80 지난 오늘          태평산령 우에서 세상을 굽어보니          하늘은 높아졌고 땅도 넓어졌는데           그 속에서 알라는 번영창성해 가네            천년 묵은 갈대밭 초가집도 없는데           백의동포 피땀 흘려 걸군 곳          무연한 들판엔 황금파도 물결치고          아스팔트 줄치는 자동차            줄지어 선 주택이 아름다운 그림 같고          만발한 화초 속 꽃나비 춤 추네          흥겨운 공장의 기계소리           성(城)향을 구분키 어렵구나            태평산 뿜어올리는 붉은 태양          찬바람 막아주는 봉황산          송화강이 고향 적셔주니          만풍년 알라에 호적 올렸네   오늘의 알라가 이렇게 좋아졌으니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중국공산당의 영명한 령도와 오늘을 위하여 수십년 세월 속에서 힘겹게 살아온 알라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10. 잊을 수 없는 알라사람들    지난 수십년 세월의 흐름 속에 잘 먹고 잘 입지 못하면서도 달을 지고 나갔다가 별을 이고 돌아오시던 어머님, 아버님들... 저녁 굶고 자는 어린 자식들에게 헌 옷자락을 덮어주고나선 일에 지친 나머지 자장가 한번 불러주지 못하고 혼곤히 잠드신 어머님들의 가슴 아픈 사연 또한 그 얼마였던가...  알라사람들의 장백산려행                    운동대회에서   무더운 여름이면 해빛을 등으로 받아주고 흐르는 땀은 논물에 보탬이 될 지경이였으며 엄동설한 추운 겨울 털모자 눌러 쓰고 주먹장갑을 껴도 손이 얼어드는데 곡괭이로 언 땅을 파헤치며 방전화 평정을 하느라고 그믐날까지 일했던 적이 어찌 한두해뿐인가! 알라사람들 잘 살아보자고 일하다가 20여세에 어린 아기 하나 두고 탈곡기에 치마 감겨 생명을 잃은 조한악씨! 당의 호소 받들어 농토개혁의 길에서 지게짐을 지고 가다 허리가 끊어져 어린 아이 둘을 두고 세상을 하직한 안승도 부서기.   2011년부터 해마다 진행되는 고추문화축제            신 나는 장고춤          풍작을 위해 궂은 날 폭우 속에서 일하다 번개불에 목숨 바친 김정임씨(30세에 인생을 마쳤음), 어린 아기를 남겨 두고 떠나간 그 마음 오죽했을까?    벽돌공장에서 일하다 차사고로 숨진 안용건의 어머니! 알라의 건설을 위하여 밤을 지새우며 벽돌을 나르다가 차에 깔려 사망된 조병태의 안해, 차바퀴가 가슴 우로 지나갔는데 그래도 금방 일어나 앉았다가 탁 쓰러지면서 눈 뜨고 저 세상에 갔으니…   나는 또 이미 저 세상을 떠나간 윤기태 부서기를 잊을 수 없다. 전세기 60년대초부터 당총지 부서기로 있으면서 사업능력도 있고 원칙성이 강한 주요령도였다. 간부들이나 군중들 중 잘못이 있으면 추호의 량해라곤 없고 엄격히 처리하기에 일부 사람들은 반감을 샀다. 후에 자식들중 생활작풍문제가 있는 것으로 하여 서기사업 그만두었지만 알라벽돌공장과 새 농촌 건설 사업에서 대대내의 구체적 건설은 윤주임이 관여하면서 사업했으며 사업에 대한 책임감이 아주 높았다.    벽돌을 생산하는 관건은 벽돌가마의 건축이었고 벽돌가마건축의 관건은 천장을 마무리는 것인데 벽돌을 눕혀 틈사이로 흙모래로 꽉 밀어넣고 위에 흙을 바르고 또 벽돌을 깔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힘들게 가마를 다지고 나서 개를 잡아 점심에 술을 마시려고 상을 차려 놓고 술을 마시려 할 때 윤주임이 들어와 서쪽에 비구름이 밀려오니 금방 다져놓은 가마를 덮어야 하기에 빨리 나가 덮자고 동원하니 원래 못 먹고 곤난한 시기여서 개고기냄새만 맡아도 춤이 넘어가는 형편인데 잠깐 먹고 나가면 될 것을 저 사람이 “덜살 대네.”하면서 다수가 먹고 나갈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 윤주임은 큰 소리로 "몽땅 나가자"고 소리 질러 모두 나가 비닐로 덮었고 10분도 안되여 소나기가 퍼부었지만 벽돌가마는 무사했다.   만약 제때에 덮지 않았으면 비에 흙과 모래가 씻겨 내려가면 벽돌가마가 무너진다고 하여 크나큰 경제손실을 피면하였다. 이 얼마나 참된 공산당 간부인가? 후에 년세가 많아 또 알라의 로인협회 회장으로 사업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나 나는 그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또 저승에 간 알라사람을 말하려 한다. 정영기 부서기는 원래 화전에서 이름 있는 대대 서기였는데 원 화전현위서기 김수희(金守希)가 영길현 서기로 조동되여서 알라의 정황을 료해한 후 알라를 더 잘 꾸리기 위하여 정영기를 알라로 오게 했다. 정영기는 사람이 침착하고 속에 든 것도 많지만 더욱 큰 특점은 진실함이였다. 모든 처사를 공정하게 하고 어느 편에 서는 법이 없는 사람이였다. 옳고 그름을 똑바로 가르고 자기의 주위에 사람을 끌어모으는 법도 없었고 언제나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주었는데 중한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별세는 알라의 큰 손실이였다.         알라디룡성충압공장의 모습          배명수의 아들 배철훈  길림시룡성실업유한공사 리사장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상무부회장                                                                            신종화, 리충환(李忠焕) 두 사람은 알라의 기업발전에 자기들의 정열을 다 바쳤다. 항상 사업에 열중하고 그 많은 정치운동에 얼굴을 내밀려는 야심이 없었고 패거리에 휩쓸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몹쓸 병은 그들의 인생을 너무 일찍이 앗아가 알라의 발전에 손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당원도 아니고 간부도 아닌 순수한 농민인 김근식씨를 나는 말하고 싶다. 그는 장춘에서 알라로 와서 알라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열을 바쳐온 훌륭한 사람이다. 다른 건 그만두고 알라에서 경제난이 생겨 부득불 자동차를 조립하여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였을 때 자동차 4대를 조립해 낸 뛰여난 공로가 있다. 한시기 장춘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자동차공장의 작업복을 입고 자동차공장에 드나들면서(제1자동차공장의 출입구는 자동차공장의 작업복만 입으면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과의 밀접한 련계를 가졌다. 그는 갖은 방법으로 당시 사기 어려운 자동차부속품 구매에 큰 공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명이 짧아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의 마음은 지금도 쓰리다. 나의 사업에 손과 발처럼 중요한 작용을 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술 한잔 따로 대접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 시절, 나에게는 돈이 없었고 대대돈은 일전도 아껴야 했으니 말이다. 좋은 말이라도 해주지 못한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고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를 많이 돌리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프다!    이 분들은 모두가 한 민족의 피가 흐르는 알라사람들이였다.    알라사람들! 나는 언제나 알라사람들을 자랑하고 싶다.   박호산:탄지니아 수력발전소 건설공정의 총지휘로 지원 나갔다가 건설을 끝마치고 돌아와 백산수력발전소의 책임자로 사업하셨다.   오만복: 알라에서 일하다 자습하여 대학까지 졸업하고 공사당위 서기, 시위조직부의 처장, 길림시상업국 국장으로 사업한 분이다.   한철근: 알라에서 일하다가 문예면에 재간이 있어 시조선족문화관에서 사업했는데 많은 조선족노래를 작곡했으며 우리 로인들이 즐겨 부르는 로인협회가를 작곡한 이름난 작곡가이시다.   김홍란: 지금 우리 민족의 이름 있는 《도라지》 잡지사의 편집부에서 사업하시며 작가이시다.   안수근(안승도의 아들): 길림시보험공사의 처장이고 그의 동생은 중국인민해방군 모 부대 사장으로 사업하고 있다.   도규섭: 장춘교통학교를 졸업하고 연길현도로공사에서 공정사, 양로참 참장으로 사업하다 정년퇴직하여 길림시조선족문학사랑회를 발기한 사람이다.   박상래: 길림시 룡담구정부에서 요원으로 사업하고 있다.   김석대(김룡구 서기의 아들): 한시기 알라대대 당총지서기로 선거되여 알라사람들을 위해 사업하였다. 개혁개방 시기 북경에서 기업을 꾸리였다.   김미도: 장춘철도부문에서 일했는데 중국철도에서 최고상인 기관차 (火车头)훈장을 수여받았다.   배철훈, 배광훈: 지금 알라에서 250여명의 직공들을 거느리고 중국 자동차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다소간 공헌을 기여하고 있다.   남효일, 김영배: 모두 조기대학생으로 북경대학을 졸업한 후 국방부 모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사업했다.   김노미: 병환에 계시는 남편에 아이들까지 일곱 식구를 먹여살리겠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뼈 빠지게 일해 온 그녀는 아마 알라에서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외에도 많은 알라 사람들의 사적이 있지만 이젠 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알라사람이 아닌 나의 훌륭한 친구 박광현씨를 얘기하려 한다. 중학시절 나의 동창이고 포두시계획국에 출근하다가 (그 때 나는 측량대에서) 영길현에 조동되여 현민족사무위원회, 현조직부에서 사업하였다. 후에 길림시 강남에 있는 교통은행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는데 이 분이 현에서 사업하면서 알라에 공작대로 와서(1956年) 알라의 사업을 관심하고 지지하였으며 간부내의 모순과 결함을 해결해 준 좋은 분이다. 후에는 길림시로년협회 부회장으로 10여년 사업했으며 알라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깊어 지금도 알라로인협회에 있으면서 만년을 보내고 계신다. 고맙습니다! 박광현 씨!   그리고 알라에 또 하나의 신문인물은 배석환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배재선씨의 삼촌인데 1945년도 해방후 팔로군에 입대하여 깡요, 막석, 서란 일대는 물론 알라에도 자주 왔는데 키가 훤칠하고 아주 약빠르고 담량도 큰 사람이였다.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이어서 늘 검은 안경 한알을 걸치고 다녔고 한족말은 한족들도 물러설 정도로 잘했고 그가 거느리는 부대는 깡요 일대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이 사람이 1947년도에 사라졌다. 후에 알고 보니 일부분의 부대를 거느리고 국민당에 귀순하여 장춘에서 퇀장질하고 있었다. 배상호 아버지나 배씨네 집안에서는 누구도 이 말을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후기 밤중에 배상환이가 알라 배상호네 집에 왔다 갔다고 한다. 배석환씨는 원래 팔로군 련장이였는데 그 때 국민당과 내통하였다. "돈을 받고 국민당에 귀순하면 군급도 높여 준다"하여 귀순했는데 해방전쟁 후기 남방에서 대만으로 갈 것을 결정했다. 정작 대만에 가려고 하니 동북땅에 부모형제 다 두고 수만리 멀고먼 대만까지 가게 되면 바다가 가로놓여 영원한 리별이 될 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래서 마음을 돌려 배석환은 해방군에게 의식적으로 체포되였다.   후에 퇀장급은 전쟁범에 속하기에 려순군사감옥에 들어갔는데 열흘도 안 되어 감옥책임자가 찾아왔다. 이전에 배석환씨가 장춘에서 국민당군대의 퇀장으로 있을 때 팔로군 12명(조선족)이 체포되였다. 석환씨가 심문한 후 그 팔로군포로들에게 빈총을 메워 팔로군 주둔한 지역 가까이에 보내주었다.   당시 석환씨는 같은 민족이 변을 당한 것에 민족의 동정으로 팔로군포로를 구해주었는데 마침 그 감옥장이 그 때 구해준 12명 팔로군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감옥장의 힘으로 석환씨는 감옥에 한달도 있지 않고 나왔는데 알라에 돌아가려니 문화대혁명시기여서 친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까봐 갈 형편이 못 되여 부득불 자기 신분을 감추려고 혼자서 흑룡강의 어느 깊은 산속의 벌목장을 찾아가 부모형제도 없이 밥벌이를 했다.   신분을 속이고 사람들 앞에서 부지런히 일했더니 몇년후 벌목대의 채벌대장까지 되였다. 그러다가 근처 산골마을의 처녀와 결혼을 하고 농사일을 했었다. 한해 지나 또 입당도 하였고 2년도 안 되어 대대 서기로 되었다.   석환씨는 그곳에서 열심히 공작한 결과 군중위망도 높게 얻었고 상급의 신망도 컸었다. 한번은 흑룡강에서 조직한 과거의 고통을 회억하고 오늘의 행복을 생각(忆苦思甜)하는 대회에서 전형인물로서 발언을 했는데 그의 말재주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이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중 그가 예전의 국민당 퇀장임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며 그를 적발하는 바람에 공산당에서 퇴당되고 보통 농민으로 뭇사람들이 멸시의 시선을 받으며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인생이란 한조각 구름 같아서 구름이 사라지면 눈앞의 현실이 없듯이 인생 역시 구름과 같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으로 말하면 지나간 내 인생 80여년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11. 알라의 희망과 나의 간절한 소망      수십년 세월을 알라에서 살면서 심혈을 바쳐왔고 지금도 호흡을 같이 하고 있는 년세 높은 친구들! 전세기 1960년대 초기부터 농업 제일선에서 사업해 온 김성오, 최수열, 강춘근, 백상례, 리동복, …, 후에 대대 간부로 사업한 리종태, 차인석, 알라 건설에 힘바쳐 온 김철우, 김무영, 윤광수 씨, 1962년 알라에 첫 전기를 들여 온 그 때부터 알라의 첫 전공, 전기관리와 전기안전사용을 위해 말 없이 꾸준히 일해 온 신종광씨! 교육사업에서 알라의 후대들을 위해 힘들게 사업해 온 강병운 교장, 김룡선 선생, 리연란, 김곡자 등 선생님들! 근 20년 알라의 촌사업을 해온 박기순씨! 중학교원으로부터 대대기업 서기로 후에 로인회 회장으로 사업해온 강동산씨! 알라 중학교 교원사업을 오래동안 하다가 알라로인협회 회장으로(10여 년 간 사업했음) 지금까지 로인들을 위해 자기 만년의 정열을 바치고 있는 심철우 회장! 그리고 리동만, 김기수 친구들! 금년에 전국 로년협회 모범대회에서 표창을 받고 돌아오셨고 지금도 열심히 로인협회 이끌어 가시는 박찬동 회장! 세상은 한이 없고 인생은 한이 있는데 인간이 아무리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래일을 모르고 산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삶을 행복으로 삼고 래일은 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면서 서로 손잡고 지난 세월에 못 다한 알라사람들과의 사랑과 인정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 나의 부탁이고 간절한 소망이다.   지금 알라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리수영, 손청송, 재춘선 등 현임간부들이 새로운 현실에 도전하고 있다.   알라의 조선족들은 시의 령도와 시조선족군중예술관의 지지하에 고추축제로 새로운 력사를 쓰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넋인 알라를 더욱 잘 지키려는 목적으로 민속촌을 꾸려 대대로 알라를 빛내어갈 것을 다지고 있다.   그렇다! 중화의 꿈, 민족의 꿈이 바로 우리의 꿈이 아니겠는가?   민족의 자랑, 우리들의 희망, 알라여! 영원히 빛나라!   배명수 프로필: 1937년 3월 27일, 영길현 알라에서 출생. 1951년, 길림조중에 입학후 부모님의 부담을 덜려고 알라에 돌아와 농사일에 종사.                                           1956-1958년, 내몽골 포두시측량대에서 근무. 1958년, 알라민영중학 설립 제1임 교원. 1959-1962년, 알라디대대 공청단총지 서기. 1963년, 알라대대 대대장 등 직무 력임. 196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80년, 알라디대대당총지 서기. 1982년, 제3-4기 길림시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및 중공길림성 제4차 대표대회 대표. 1986년, 영길현충압공장 공장장. 1995년, 길림시광명충압유한회사 리사장.   편자의 말: 본 《기록》문집은 이미 타계하신 배명수 알라디대대 당총지 서기의 아들 배철훈씨로부터 자료를 받아 다시 재편집하였다.    배철훈 프로필:     1962년, 길림시 룡담구 알라디마을 출생.     길림시룡성실업유한회사 법인대표 리사장.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상임부회장.     월드옥타길림지회 명예회장.  
2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2 댓글:  조회:301  추천:0  2020-12-21
  4. 전기 가설해 풍수를 안아오고 한족들을 도와 수전을 풀었다   알라는 호조조로부터 초급사, 고급사, 인민공사화에서 사회주의건설과 혁명에서 시종 전 현에서 앞장서서 걸어왔고 민족단결의 모범대대였다. 1961년에 큰 가물이 들어 7월이 됐는데도 논판에 물이 없어 모판에 모가 그대로 서있는 것이 매우 많았다. 모를 심지 못한 면적이 많아 사람들이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자연조건과 하늘만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김서기와 리종원, 윤기태 그리고 나까지 송화강물을 끌어오려는 기발한 생각을 갖고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송화강가에 가 보았는데 물을 끌어올 수 있는 조건은 매우 좋으나 전기가 문제였다.   그때부터 김룡구 서기는 공사와 현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전기를 당겨오기로 결정하고 시, 현에 찾아다니며 련계하여 울라가 원전화(园田化)전기를 그해 가을부터 길림성 전기가설대가 전기가설을 시작하여 동네에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양수장까지 설치하여 1962년봄부터 물을 퍼올릴 수 있었다.         해마다 대풍작                  양식업을 크게 발전   그 때부터 사원들은 전등을 하나 쓰면 100원, 두개 쓰면 150원을 내기로 하고 집집마다 전기를 쓸 수 있었고 농업에서는 아무런 가물도 겁나지 않았으며 알라의 기타 발전에도 아주 좋은 기초를 닦아놓았다.   1962년도에 양수장을 설치한 후 알라는 해마다 농업풍수를 거두게 되자 김서기는 회의에서 "우리의 밥사발에 밥이 높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반드시 이웃집 밥사발에 밥도 같이 높아야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1963년에 마을과 밭이 높은 언덕 우에 있는 전알라대대(한족대대)는 수원관계로 한전뿐인데 사원들의 생활도 매우 빈곤하였다. 그래서 김서기는 우리가 퍼올린 강물에 전알라양수장을 설치하여 수십쌍 되는 논을 풀게 하였고 기술자(나의 아버지)를 파견하여 울라가공사 26개 한족대대에서 제일 처음으로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 역시 좋은 뉴스였고 그 때부터 련속 대정(大郑),장로(张老),고모(高毛)대대 등 모두 알라의 지원으로 수전을 풀기 시작하여 전 공사적으로 적지 않은 대대가 벼농사를 하였다.    5. 벽돌공장 꾸리고 새 농촌 건설을 시작했다   1967년 5월 7일, 당중앙 모주석께서 "각 인민공사는 농업생산을 틀어쥐는 한편 조건을 창조하여 기업을 꾸려 농민들의 수입을 올려야 한다"고 지시했다. 지시가 하달되자 당지부에서는 기업을 꾸리기로 결정했다.   당시 알라의 정황은 공장을 꾸릴만한 아무런 여건도 구비되지 않았고 기초도 없었다. 농사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대장간에서 소발에 편자를 박는(挂掌) 심방룡, 구금서 두 사람, 부대에서 기계(军械)를 수리하다 복원한 리종환씨와 발동기를 좀 볼 줄 아는 리동화, 송기헌 씨외에 목수 몇사람뿐이였다. 토론 끝에 알라를 둘러싸고 있는 산언덕이 모두 황토이기에 “혹시 벽돌공장을 꾸리면 되지 않을까.”라고 했지만 그곳은 우리 알라대대에 소속한 땅이 아니고 또 그 황토로 벽돌을 구울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험을 무릅쓰고 달려드는 의미에서 렴치도 불문하고 한족대대와 상의하기로 하였다. 김서기와 나는 전알라(前阿拉) 왕풍림(王风林) 서기를 찾아가 언덕의 땅문제를 제기했더니 왕서기는 묵어있는 땅인데 수요되는 대로 쓰라고 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땅을 얻어놓았으니 이번에는 그 흙으로 벽돌을 만들 수 있는 지가 문제였다.     우리는 벽돌 굽는 데는 깜깜 무지라 벽돌공장을 찾아야 했다. 알라에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벽돌 공장이란 대툰북산(大屯北山)에 있는 길림시제3벽돌공장이였는데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련 며칠 연구 끝에 강필근과 같이 김룡선 선생님을 불러서 길이 1.8m, 너비 0.90m 되는 합반(胶合板)에 붉은색을 칠한 후 금빛색으로 모주석의 5.7지시(1966년 5월 7일 발표했음)를 밤새워가며 써 붙였다.   이틀후 나와 강필근 서기 둘이서 그것을 가지고 장호역에서 렬차에 오르려니 물건이 크다고 막더니 모주석의 지시를 쓴 것이여서 마침 차를 탈 수 있어 금주역(金珠火车站)에 내렸는데 봄바람이 얼마나 불어제끼는지 갖은 애를 먹어가며 겨우 길림시제3벽돌공장에 도착하여 공장입구에서 수발실(收发室) 직원에게 우리는 모주석의 지시를 전달하러 왔으니 공장의 령도들을 찾아달라고 했더니 두말없이 달려가 공장장과 서기를 데리고 왔다.   그들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접대하였다. 우리가 온 목적은 모주석의 지시를 락실하기 위해 벽돌공장을 꾸리려고 찾아왔다고 하자 공장장은 두말없이 기술자를 파견하겠으니 래일 알라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튿날 왕사부(王师傅)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벽돌공장을 차릴 자리와 토질을 파보고 2시간 남짓이 돌면서 알아본 후 벽돌을 굽는 데는 질이 아주 좋은 흙이라고 했다.   왕사부는 열정적으로 기계설비는 어디에다 설치하고 벽돌을 굽는 가마(窑)를 쌓을 자리까지 상세히 알려주어서 우리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입쌀  5근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당시에는 큰 선물인 셈이었으니) 왕사부에게 억지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자기는 벽돌기계(砖机)는 모른다면서 공장에 호(胡) 씨성을 가진 기술자가 있는데 그 사람을 찾아 연구하라고 귀띔해 주었다. 우리가 이내 신종화(辛钟华)를 보내 도움을 청하자 호사부(胡师傅)가 금방 찾아왔다.   벽돌공장을 꾸리려는 결심과 노력으로 땅도 해결되고 토질도 좋기에 벽돌공장을 꾸릴 수 있는 가능성이 크지만 호사부의 말에 의하면 쇠 덩어리 하나 없는 농촌에서 기계를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면서 “벽돌기계(砖机)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드는데 나 자신도 똑똑히는 모르겠고 몇천원 가지고는 공장 꾸릴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의 생각에는 벽돌공장을 꾸리자면 반드시 기계가 있어야 하고 기계를 만들자면 많은 돈이 든다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 끝에  나는 솔직히 호사부에게 우리는 돈이 없는데 아마 벽돌공장을 꾸리려는 계획이 허사일 것 같다고 말하면서 애달픈 마음을 그대로 토로하며 도와줄 수 없냐고 말했다.   그러자 호사부는 말 없이 앉아 있다가 형편이 정 그렇다면 벽돌공장에 위만 시기부터 쓰던 낡은 벽돌기계(砖机)가 있는데 그것을 자기네 공장에서 쓰다가 새로운 기계를 사서 낡은 기계는 창고에 처박혀 있는데 보기에 어설프고 우둔(笨重)하지만 큰 부속품은 거의 제대로 있으며 큰 전동기를 써야 하니 전기세가 좀 많이 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호사부는 그 기계만 사오면 자기가 책임지고 벽돌을 생산할 수 있게 할 수 있으니 공장과 련계해보라고 했다.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알라에서 벽돌공장을 꾸리는 것은 관건적인 문제이고 또 제3벽돌장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여 그들의 지지와 관심을 받아야만 벽돌공장을 세우려는 우리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관계를 가깝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김서기에게 상황을 반영하면서 내 생각을 말했다. 당시 우리의 조건으로는 선물을 주거나 돈을 주는 방법은 생각도 못했고 약 10여일후  5.1국제로동절인데 알라의 문공단을 보내 위문공연을 하면 어떻겠는가고 제기했다.    별 방법이 없었던 김서기는 나의 의견에 따르는 수밖에 없어 김정곤(문공단 단장)과 리응두, 재정태를 불러서 위문공연을 준비시켜 련습하기 시작했다.   알라사람들은 일찍부터 문화생활에 흥취가 있었고 예술을 즐기는 김재곤 등 분들이 편찬한 극 “심청전”은 50년대초부터 길림지구 조선족마을에(강밀봉, 쌍하진 등) 순회공연을 하여 소문이 자자한데다 1964년, 1965년까지 길림성민족가무단을 알라에 건립하여(연변에서 많이 왔음) 그들이 알라농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문예련습을 지도하여 알라사람들은 문예방면에 수준이 매우 높았었다. 이번 기회에 마침 5.1절이 다가오자 신종화를 제3벽돌공장에 보내 공인들께 위문공연을 해주겠다고 전했다.    우리는 제3벽돌공장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해 한 열흘 앞두고 련습하여 4월 30일, 세틀의 수레에 악기와 배우들을 싣고 벽돌공장에 갔다.   공장의 마당에다 꾸려 놓은 무대는 어설펐다. 그래도 전등불을 환하게 켜놓아 처녀들이 알락달락한 치마저고리에 분단장 곱게 하고 남성들은 한복에 조끼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질러매고 꽹과리, 장구, 북을 치며 펼치는 조선민족의 노래는 로동자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 속에서 공연은 아주 원만하게 막을 내렸다.   이어서 공장의 령도들과 로동자들이 함께 어울려 춤과 노래로 즐겁게 놀다가 밤중에 돌아왔는데 이번 공연은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며칠이 지나 나와 신종화가 벽돌공장에 가 낡은 벽돌기계(旧砖机)를 사겠다고 했더니 대번에 낡은 기계를 페철가격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우리는 당장 창고에 가서 헌 기계를 본 후 이튿날 마차 세대에 싣고 왔는데 저울이 없어 주먹구구 잡아 200원을 주기로 하였다.   신종화가 다음날 보관원에게 돈을 가져다주러 갔는데 보관원(김씨라는 조선족)이 마누라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하지 못하여 돈 200원만 꿔달라고 하였다.   신종화가 알라에 돌아와서 벽돌공장 보관원의 돈 문제를 말하기에 먼저 안해의 병 치료나 잘 하라하며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이튿날 신종화를 통해 돈 200원을 보관원에게 보내 주었다. 김씨는 감동되어 눈물이 글썽하여 “이후 벽돌생산에 수요되는 물건이 있으면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 돕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져온 기계는 수송기(输送机), 교반기(搅拌机), 절전기(切砖机)인데 별로 정밀한 기계는 아니지만 조금 손질하고(전동기도 호씨가 가져왔음) 3개월 내에 기계를 설하고 실험해보니 벽돌이 잘되여나왔다.   벽돌 굽는 가마(窑)는 윤기태씨가 책임지고 건설하여 10월에 마른 토피를 구워놓고 이듬해(1968년 4월초) 꺼냈(出窑)는데 정말로 좋은 벽돌이였다. 바로 전 성에서 처음으로 농촌기계벽돌공장이 알라에서 일어섰다.   기술인재는 한명도 없고 돈도 없는 형편에 반년이란 기간에 공장을 꾸려 벽돌까지 훌륭한 것으로 나왔다는 자체가 실로 놀랄만하며 자랑거리였으니 온 길림지구를 들썽하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참관하고 탄복했다.           알라디민속촌대문            알라디조선족중심소학교청사   벽돌이 나오자 나는 벽돌을 팔기 위해 수소문 했는데 마침 길림자동차부품공장(吉林汽配厂)에서 직장(车间)을 짓기에 벽돌을 해결해 달라고했다. 책임과장이 가격은 요구대로 다 주겠다고 하여 초보적으로 한장에 6전씩 결정하였다.    돌아와 김서기에게 회보하니 김서기는 벽돌공장의 윤주임과 몇 사람이 벽돌 원가가 한장에 3전가량 된다고 하는데 김서기는 벽돌공장을 차려 돈을 너무 많이 벌면 자본주의길로 가게 되니 리윤을 적게 부치자고 해서 벽돌가격을 한장에 4전씩 받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처음으로 벽돌이 대외로 팔리기 시작했는데 그 때 우리 알라사람들의 성공의 기쁨은 얼마나 컸던지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며칠후 길림시강북제2백화상점에서 오철해(吴铁海)라는 후근주임과 사무실 곽주임이 벽돌을 요구하여 해결해 주었더니 질 좋고 값 싸니 고맙다 하며 앞으로 알라일을 많이 돕겠다하여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후 알라 새농촌건설에서 우리는 운수방면에서 그들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알라대대가 농촌에서 기계벽돌공장을 꾸렸다는 소식은 신문에도 실렸고 공사, 현, 시의 령도도 참관왔고 앞으로 알라의 농민들에게 벽돌집을 지어 살게 하라고 고무격려하는 바람에 대대당총지에서는 새 농촌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후 시정부 고시장이 알라에 왔을 때 김서기가 새 농촌 건설을 해야 하는데 계획을 세우려니 많은 방면에 경험이 부족하니 좀 관심을 해 달라고 했더니 “그럼 좋아요. 래일 즉시로 시달할터니 소식을 기다려보시요!”라고 하기에 우리는 이튿날 고시장을 찾아갔다. 고시장은 부동산공사에 얘기해 놓았으니 찾아가라고 했다.   시부동산공사 서기 김명곤씨는 알라사람인데 항미원조에 갔다가 부동산관리국의 당위서기로 배치받은 분이었다. 그분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시장의 지시대로 며칠내로 측량대에 제일 좋은 기술자를 배동해 보내겠다고 했다. 다음날 측량대원 7명과 설계원인 리충교(李忠桥)란 공정사를 보내 왔다.  새 농촌건설의 설계는 넓이 10m , 길이 900m 짜리 중심거리가 동서로 두개, 남북으로는 집 4채마다 길을 두었고 3채는 3간방으로 다른 한채는 5간방으로 하고 집마다 차지하는 땅은 집 앞 10m, 집 6m, 채마지기 14m로 하여 동네는 장기판처럼 설계되었으며 큰길 남쪽 문화지에는 학교, 유치원, 병원, 로인활동실을 짓기로 했다.   일주일후 측량대는 돌아갔지만 리충교는 일년 동안 알라에 남아 설계와 건설을 지도했다. 처음 남북으로 7채씩 4채의 집을 시작했고 작은 삼칸집 기초는 1.7m 좌우 깊이로 파고 자갈과 모래를 채워 넣었다(다행히 모래와 자갈은 동네에서 해결했는데 지금의 양어장이 당시 모래와 자갈을 파낸 자리이다). 지량(地梁)을 하는데 전단(前团)에서 돌을 사와야 하는데 집 한채에 자갈(沙石)이 25립방메터 수요되고 전단석(前团石)이 6립방메터가 들어야 하는데 운수가 큰 문제였다.     6. 새 농촌 건설에서 닥친 난관을 지혜와 의력으로   당시 촌에는 생산소대마다 소 몇마리와 동방수레가 여섯개가 있을 뿐이다. 소에게 못 먹여 여위고 말라서 형편 없고 때로는 소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여 나와 김 서기는 소에게 운수를 시키면 농사도 짓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생각다 못해 헌 자동차라도 사야겠다는 것을 결정하고 그 임무를 내가 맡았다.   차를 어디에 가야 살 수 있겠는지? 생각 끝에 장춘에 자동차공장이 있으니 그곳에 가야 하는데 태여나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장춘에, 그것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어떻게 할까? 걱정하던중 장춘에서 중학교를 다닌 적 있는 신종기를 찾아가 장춘에 있는 그의 동창 김근식, 송국환, 권오식, 정모모를 찾아갔다. 김근식과 송국환은 직업도 없기에 우리를 도와 매일 자동차소식을 탐문하다가 어떤 사람이 심양에 자동차 파는 곳을 안다기에 나는 급한 김에 알라에 돌아와 현금 6000원을 가지고 그 사람을 따라 김근식, 송국찬 넷이 심양에 도착했다.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도 자동차 파는 곳을 안다는 사람이 자동차 파는 사람을 못 만났다며 차일피일 미루기에 기다리다가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간 다음 우리는 의심스러워 그 사람의 보따리를 들춰보았다. 조선녀성의 루추한 옷 한벌과 소학생 공책에 형님, 동생이란 글자외에 아라비아 수자만 몇 개 쓰여 있었다.   우리는 사기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려관을 나와 심양시 뜨락또르제조공장(拖拉机制造厂)에 다니는 동창생 도영국(都英国)을 찾아 심양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말하고는 헌 차라도 사게 련계해 달라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지금 단위에서 차를 마음대로 살 수 없고 팔 수도 없으며 자동차는 국가의 계획에 따라 분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알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알라에 와보니 알라의 새 농촌 건설사업중 세가지 난관에 부딪쳤는데 하나는 목재문제였고 두번째는 수도 박을 파이프 문제며 세번째는 지붕에 얹을 세멘트기와인데 기와 한장의 무게는 약 여섯근으로 길림에 가서 사오려면 돈도 많이 들지만 운수가 제일 큰 문제였다.   닥친 곤난은 하나씩 해결해야 했는데 먼저 목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사에 찾아가 소개신에 도장을 받고 길림서관(西关)목재가공공장에서 목재를 사려니 “시내만 공급하고 대외는 상대하지 않는다.”고 딱 잡아떼기에 말도 못하고 밖에 나와 애꿎은 담배를 피웠다. 목재가 이렇게 많은데 어째서 팔지 않는가하고 두덜거리고 있는데 팔에 붉은 완장을 낀 사람이 꽥 소리를 질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차! 금연! 나는 농촌에서 왔기에 몰랐다고 사과하면서 웃는 얼굴로 익숙한 사람을 묻듯이 목재가공공장의 조과장네 집이 어딘지 생각나지 않는다며 거처를 물었다.   조과장네 집은 공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알려주어 찾기가 쉬웠다. 나는 이튿날 입쌀 10근(당시 쌀이 매우 귀했다)을 과장집에 가져다 그의 마누라에게 주었더니 얼른 받아서 침대 밑에 넣는 것이였다.     다음날 또 조과장을 찾아갔더니 소개신을 보고나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다 해결한 뒤 나에게 정황을 묻기에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알라에 벽돌공장이 있으니 기건과장(基建科长)을 찾아가서 벽돌을 팔겠다고 말해보라 했다.    기건과장을 찾아가니 나이는 40세 좌우이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벽돌문제를 말했더니 자기네 공장에서 창고를 짓는데 10만장의 벽돌이 수요되여 지금 각 곳에 련계중인데 벽돌이 질만 좋으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알라벽돌은 질이 일등급이고 한장에 4전이라고 했다. 왕과장이 난제가 해결되여 좋아할 때 우리는 목재가 수요되니 공소과에 가서 우리에게 목재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왕과장이 쾌히 승낙하여 우리 두사람은 조과장을 찾아갔다. 조과장은 목재를 주겠다고 승낙했다. 기실은 조과장이 알라에 목재를 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합법적 절차였다.    다음은 수도파이프가 긴급하였다. 집집마다 수도는 박아야 하는데 그 숱한 파이프를 파는 곳도 없고 현이나 시물자국도 계획 없는 강철재료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또 장춘에 있는 송국환과 김근식을 찾아가 얘기하니 국찬의 매부가 리놀륨공장 공소과(油粘纸厂供销科) 과장으로 사업하는데 국환의 매부는 출장 가고 없고 지금 공장에는 1.2촌짜리 파이프는 있는데 팔지 않고 규격이 큰 파이프와 바꿔 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리놀륨공장장(油粘纸厂长)을 찾아가 우리가 농촌에서 왔다고 하면 접대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아 국찬이는 나를 전기용접봉공장(电焊条厂)공소과(供销科)에서 왔다고 하면서 1.2촌짜리 파이프을 먼저 주면 일주일내로 굵은 파이프로 바꾸어주겠다고 했다. 공장장은 아주 좋아하면서 동의했다. 발등에 붙은 불부터 꺼야 했으니 굵은 파이프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후과를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소뿔은 단김에 뺀다고 우리는 급히 수요되니 래일 와서 차로 가져가게 해달라고 했다. 공장장은 래일은 휴식날이지만 급하게 수요된다면 차를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밤새 마음이 뒤숭승하여 잠 한숨 바로 자지 못했다.   리놀륨공장(油粘纸厂)에 들어가 보니 공일날이라 직공들은 출근하지 않았고 보관원은 우리를 기다렸다. 나는 장춘시 전기용접봉공장공소과 배명수(长春市电焊条厂供销科裴明守)가 파이프를 받았다는 사인을 하고 파이프를 차에 실었다.   알라에 돌아오려면 차로하(岔路河),수등참(授登站)에 물자검사참(物资检查站)이 있어 목재나 강철재료 같은 것은 허가 없이 지나가지 못하기에 밤중에 떠나려고 점심때 운전수에게 술대접을 하고 우리 몇은 장춘남호(南湖)에서 놀다가 저녁 무렵 려관에 오니 장춘시 엄단판공실(严打办公室,엄격히 법규를 위반한 자를 다루는 판공실)에서 운전수를 데려갔는데(알고 보니 운전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라 다른 사람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침대 주인이 자기 침대를 비우라고 운전수를 깨우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했다) 나를 오라 하여 책임자인듯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인사를 했더니 그 사람은 문화대혁명시기에 장춘에 와서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지만 농촌에서 왔으니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풀어주었다. 그날 밤 10시경 우리는 알라로 출발했다.   앞에 두곳의 검사참(检查站)을 어떻게 무사히 건너가겠는가 조마조마 했는데 찰로하검사참(岔路河检查站)은 마침 긴 란간도 내려놓지 않았고 지키는 사람이 잠을 자는지 잠시 나타나지 않아 무사히 건너왔지만 수등참검사참(授登站检查站)에 오니 란간이 좀 짧아서 절반 쯤 막혀 있었다. 자동차를 길 옆쪽으로 몰며 속도를 내어 건너다가 자동차 앞부분이 좀 망가졌지만 별 문제 없이 알라에 도착하여 이튿날 아침부터 수도를 박기 시작했다.   약 10여일후 장춘시 공안국에서 영길현 투기장사정돈조직(打击投机倒把办公室)과 련합하여 구성된 3-4명의 공작인원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촌에다 회보한 상태여서 회계 제룡태는 “배명수가 출장 갔기에 저녁에야 돌아올 것이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공사에 가서 김서기에게 알렸더니 공사의 양서기, 김서기와 나는 함께 저녁 무렵에 공안국 사람들을 만나 나는 새농촌건설에 급히 수요되는 수도파이프는 훔친 것도 아니며 먼저 쓰고 후에 갚으려 했다는 사실을 재삼 설명하였다.   하지만 우리 능력으로 굵은 파이프는 해결할 수 없어 하루하루 미루다가 시간이 오래되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결국 공짜로 수도문제는 해결한 셈이었다.   다음으로 닥친 문제는 벽돌집에 덮어야 할 기와인데 경비와 운수가 큰 일이었다. 한장에 5, 6근 되는 그 많은 기와를 어떻게 가져온단 말인가? 부득불 우리는 기와공장을 차려야겠다고 결정했다. 윤주임이 길림시기와공장에 갔었는데 알고 보니 기와 생산은 아주 간단했다. 기와형틀(瓦母子) 200개와 압반(压板) 4개만 사서 틀 우에 올려놓고 반죽한 세멘트와 모래를 형틀(模具)에 올려놓은 다음 압반(压板)기로 잘 눌러서 2, 3일이면 굳어지는데 그 때 형틀에서 떼어내 약 열흘 양성하면 기와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알라의 기와공장은 계속하여 해나왔다.   알라건설중 제일 힘들게 지어진 중, 소학교는 너비 10메터, 길이 76메터 이층집 근 1600평방메터의 큰집을 지어야 하는데 우리 실력으로 말하면 실제는 막막한 일이었다.   이 집을 설계한 사람은 리송교(李松桥)인데 이층에 덮을 콩크리트판은 길이 5메터, 넓이 0.95메터인데 수요량이 160개였다. 사오자니 돈도 없고 설상 돈이 있어 사온다 해도 운수와 싣고 부리우는 것도 난제였다.   그래서 부득불 자체로 만들기로 하였다. 말이 쉽지만 콩크리트판은 품질요구에 도달하지 못하면 특히는 학교라서 우리들의 자식들, 즉 많은 아동들의 생명에 관계되는 큰 일이기에 재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기술을 지도하는 리공정사는 기술만 지도할 뿐이지 후과는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당시 나의 생각은 공정사가 시키는 대로 어김 없이 하면 질은 보증할 수 있을 것이고 콩크리트판(水泥板)을 올려 놓은 뒤 학생들이 인차 들어가지 않고 또 그 우에다 세멘트를 바르게 되니 시간적 여유가 많으니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리공정사에게 신신부탁하여 만들 때 꼭 옆에 붙어있으면서 엄격히 요구하고 감시하게 했다. 그리하여 160개 콩크리트판을 충분히 양성시켜 나무받침대를 세우고 널판을 깔아펴고 밀차에 실어서 우에서 바줄로 당기고 네 사람이 뒤에서 밀면서 올렸다. 처음 올릴 때는 조마조마하였지만 두번째부터는 잘 올려놓아 이층집을 순리롭게 지었다. 지금 이층집을 짓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만 70년대 기술, 설비 없는 농민들에게는 기적이었고 참관을 온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알라의 새 농촌 건설중 운수문제가 제일 큰 난제였다. 우리가 곤난에 처해있을 때(1969년 가을) 마침 현에서 고무바퀴 뜨락또르를 보내주었다. 벽돌공장에 석탄재가루를 실어와야 하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라도 딸리는 형편이여서 자동차 한대를 조립하기로 하였다.     1970년에 첫 자동차를 조립하였는데 우리가 성공적으로 자동차를 조립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군구 부대농장에서 5.7지시를 받들어 음마하에 땅을 맡아 수전을 풀었는데 길림성에서 수전농사는 알라가 으뜸이라는 소문을 듣고 양신영(당시부대농장장)이 알라에 찾아와 도움을 요구했을 때 김서기가 선뜻 동의하고 차경철(2대서기) 등 몇 사람을 보내 논을 풀어주고 모 키우는 기술지도를 하여 농사를 참 잘 되였기 때문이였다.   벼가 잘 자라고 있을 때 양농장장은 나를 요청하여 음마하농장을 구경시켰고 이튿날 자동차공장에 데리고 가 공구분공장(工具分厂) 두(杜)공장장의 접대를 받은 다음 샤시공장(底盘厂)에 가서 장영(张英)서기와 진모영(秦冒榮)공장장과 엽량부(叶良富)공장장을 만나 접대를 받았다. 당시 양신영 공장장은 알라를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새 농촌을 정말 잘 건설한다고 했다. 이 때 샤시공장의 엽공장장이 그 공장에서 림시로 겨울에 쓸 수 있는 자동차 창고가 수요되는데 알라에서 지을 수 있는가하고 제기하자 나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답복하였다.         우수한 길잡이로 떨친 원 알리디 당총지 서기 김룡구 70, 80년대 알라디 새 마을 풍경   그리하여 너비 10메터 길이 15메터 되는 차고를 두주일에 다 지어주고 품값을 주려하자 얼마 되지 않은 품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관계가 대단히 좋아져 자동차 조립에 큰 도움을 주어 자동차를 조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길림성계획경제위원회 주임 미풍균은 원래 제일자동차 샤시공장에서 엽공장장의 부하로 같이 사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일본 50령” 자동차가 길림성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장춘에 가 엽공장장과 함께 성정부에 가서 미주임을 찾아 일본차를 요구하니 미주임은 웃으면서 특별히 비준을 해주어 50령자동차를 가져왔다. 이렇게 알라에는 조립한 자동차 한 대, 고무바퀴 뜨락또르 한대 또 50령차까지 있어 운수문제는 해결되였다.   그후에 알라사적이 신문에도 자주 나고 상급령도들도 많이 왔었는데 길림성 성장 장근생(张勤生), 심양군구사령 심사장(深师长), 중앙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文正一) 부주임,중앙수력발전부 전재영(钱在英) 부장, 중앙군사위원회 후근부 조남기(赵南起, 그는 두차례 알라에 왔음) 부장, 특히 국무원 온가보(温家宝) 총리도 알라를 돌아보고 문기춘(文基春) 집에 들어가 보았다. 그외 길림성, 흑룡강성, 료녕성의 조선족참관단은 헤아릴 수 없이 왔었으며 일부 동남아국가, 태국, 라오스, 파키스탄 손님들도 다녀갔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를 보고는 꿇어앉아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조선량강도도위 서기 등 손님들도 왔었다. 오는 손님이 너무 많아 위생소에 출근하던 손명호(孙明浩) 씨를 대대 부주임이라는 직위를 주고 초대소를 관리하면서 손님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후에는 고문주(高文珠)가 책임지였다.    당시 알라는 성내에 제일 먼저 기계벽돌공장을 꾸려 새 농촌 건설을 하였고 그후 목재가공(설비가 좋았다) 선반기, 용접, 꽃무늬거울공장, 화학비료공장, 세멘트공장, 유기비료공장, 양계부화장, 전문건축대, 양어장 등 공장과 생산기지가 있어 참관 온 사람마다 놀랐으며 대단한 농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내막은 1982년부터 10여년간 새 농촌 건설로 인하여 투자가 너무 많았다. 사원주택은 짓는 족족 사원들에게 분배했는데 일전도 받지 않았고 학교 초대소, 병원, 대대사공실 등은 공가건설로 돈 일전 나오지 못하였고 대대내에 그 많은 기업은 벽돌공장을 제외하고 돈 버는 기업이 없어 본기업의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형편이였다. 대대의 자금래원은 다만 농업에서 루적을 많이 떼기에(17%, 20%) 사원들의 분배가 적게 돌아서 다수의 농민들은 량식값을 떼고 나면 찾아 갈 돈이 얼마 없었다. 로동력이 좋은 사람들은 찾아갈 돈이 좀 있어도 주지 않거나 흉내만 냈다. 그리하여 음력설이 돌아오면 생산대마다 돼지를 잡아 고기 1, 2근씩 주고 때로는 콩기름도 줄 때가 있었다. 그외에 복리는 생각지도 못했다. 극소수의 사원들이 돈 때문에 간부들의 멱살을 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상급이나 대외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돈 없는 경제난이 큰 문제로 되여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정말 딱한 사정이었지만 별 방법이 없었고 그렇다고 상급에 제기할 형편도 아닌데 때마침 할빈가용전기공장(家用电器厂) 리익수(녀)와 공소과 과장 서종발(徐宗发) 두 사람이 샤시공장(底盘厂) 장영(张瑛)서기의 소개로 나를 찾아왔는데 자동차를 조립해달라고 하였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샤시공장 장영은 제1자동차공장 서기로 승급했으며 강택민(江泽民) 주석과 쏘련류학도 같이 했고 강택민 주석이 장춘제1자동차공장의 열전공장(一汽热电厂) 서기로 있을 때 장영은 샤시공장 서기였다.    그리고 샤시공장의 진(秦)부공장장은 제1자동차공장의 부공장장으로, 엽량부(叶良富)부공장장은 제1자동차공장 배치처(调度处) 처장이니 내가 자동차공장에서 알라대대의 일을 보는데 기본상 통달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의 곤난을 해결하기에 아주 편리했다.   이런 기초가 있었기에 할빈가용전기공장에서 자동차를 조립해줄 것을 요구할 때 돈이 없어 헤매던 알라가 돈을 벌기 위해 나는 렴치를 불구하고 자동차의 가격문제를 먼저 말하면서 자체로 자동차를 조립해 보니 경비도 많이 들고 조립하기도 힘이 드는데 아무리 절약한다 해도 원가가 많이 들어 약 3만원 이상 든다하면서 먼저 4만원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더니 할빈에서는 값이 싸던 비싸던 관계 없이(당시 자동차가 귀했다) 그저 조립만 해주면 고맙다고 했다.   그리하여 할빈에서 돈 4만원을 부쳐와 알라는 목마를 때 물을 마신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자동차를 만들 때에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후에 책을 사서 재료를 보고 부속품의 명칭도 알고 자동차의 5대총성 및 부속품의 전부 명칭도 기본상 장악한 기초에 자동차 공장과의 좋은 관계가 있어 2개월 만에 자동차를 조립했고 돈을 부쳐온 지 두달도 안되어 자동차 한대를 할빈에 보내 우리는 경제난을 초보적으로 해결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동차 한대를 조립하는데 돈 만원도 안 들었고 할빈에서 남은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기에 더 많은 수익을 본 셈이다.   또 얼마 안 되어 연변림업국에서 자동차 한대를 해결해 달라하여 돈을 버는 재미도 있고 앞으로 목재 해결에 좋은 조건을 창조하기 위하여 선뜻 자동차 한대를 조립해 주었더니 돈도 벌었고 알라의 건설사업에 목재는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었다. 화룡림업국과 안도림업국과의 관계가 아주 좋아져 목재 래원이 더 풍요롭게 되었고 모든 일이 더욱 순리롭게 해결되였다.   그후 산서성대동시모피공장(大同皮毛厂)에서 자동차 한대를 요구하여 보내주었더니 돈 4만원을 부쳐왔다. 사실은 당시 4만원씩 받았지만 우리는 만원도 들지 않았는데 많은 부속품은 관계망을 리용해 공짜로 가져오는 것이 많았고 큰 부속품은 헐한 값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되여 대대 경제난은 점차적으로 해결되었고 대대의 형편은 풀려나갔다.   대동시모피공장과의 관계는 우리가 자동차를 조립할 때 내가 장춘에 자주 갔었는데 한번은 큰길 근처의 영춘려관에 들게 되어 내몽골사자왕기모피공장공소과(四子王旗毛皮厂供销科)에 있는 성명이 요복(姚福)이란 사람이 키도 훤칠하고 희고 갸름한 얼굴에 숱이 많고 검은 눈썹을 가진 사람이였는데 처음에는 서먹했으나 며칠 지나서는 밥 먹은 후에도 서로 앞을 다투어 밥값을 내려는 사이로 되였다.   서로간에 익숙해진 다음 나는 무슨 볼일로 장춘에 왔는가하고 물었더니 장춘 어느 공장에 양털을 가공하는 기계를 주문했는데 기계가 완성되지 않았다며 대방에서 날짜만 미루고 부쳐주지 않아서 몽골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또 좋은 양털옷감을 달라하기에 며칠내로 옷감이 도착하면 기계를 부쳐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들어봐도 기계는 돈 받고 만들어주면서도 자기들의(개인) 털옷감을 얻으려고 수단을 부리고 있다는 게 뻔하고 격분할 일이었다.   나는 요복에게 나와 같이 공장에 가보자고 하면서 “공장에서 구체관리를 맡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내가 그 자리를 피할 테니 나를 길림시강북기계공장(吉林市江北机戒厂)에 있다고 말하며 이 공장에 양털가공기계가 있다는데 만약 당신들이 기계를 인츰 해결하지 못하면 돈을 돌려달라!”고 말해라 했다. 내가 길림에 가서 바로 사가지고 가겠다고 말하라고 했더니 그들은 그제야 이틀내로 부쳐주겠으니 기다리라하여 려관에 오니 양털옷 두감과 검은 털장갑이 도착해 있었다.   이튿날 요복이 양털옷 한감과 장갑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니 매우 좋아하면서 마침 기계도 다 되엿으니 래일 당장 부쳐준다고 하여 이 일은 해결됐다. 떠나가기 전에 둘이서 술잔을 나누며 그는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면서 남은 양털옷 한감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돈도 없고 그저 가지는 게 미안하여 거절했지만 너무 간곡히 주는 바람에 결국 받고 말았다.   서로 갈라질 때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바쁠 때 서로 돕기로 하였다. 며칠이 지나 요복의 편지가 왔는데 지난 일들이 고맙다고 인사한 후 몽골에는 목재가 곤난한데 동북엔 산림이 많고 목재가 많이 나는 곳이니 조건이 되면 도와달라고 했다. 그 때 나는 길림시강만로(吉林市江湾路)에 있는 21목재가공공장(制材厂)에 목재를 사느라 자주 다녔는데 공소과 과장 조상현(供销科科长赵相贤)을 알게 되여 래왕중 조과장이 자기 녀동생이 나이가 들었는데 대상을 물색해 달라하여 나는 고삼범이라는 총각을 소개했는데 혼사가 되어 결혼까지 했다.  그 때부터 조씨와 나는 서로 친하게 되어 몽고의 목재문제를 말하니 제21목재가공공장의 도장만 찍으면 전국 각지 어디에나 목재를 보낼 수 있는데 이 도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목재는 국가계획에 따라 보내기에 함부로 도장을 찍으면 착오를 범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나라내에서 곤난한 곳에 목재를 줘서 돈을 제대로 받으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고 그 사람들도 감사하여 양털이라도 기부할 수 있으니 목재를 부쳐주라고 권고하자 조과장은 내가 “곤난한 지방에 목재를 부쳐줘 큰 죄가 될 것 없지.”라면서 부쳐 보냈다.   그후 사자왕기(四子王旗)에 송목 한차피를 보냈고 돈 결산도 다 되였다. 사자왕기모피공장(四子王旗皮毛厂)에서는 양털옷과 구두 몇컬레를 감사의 뜻으로 나에게 부쳐왔기에 그 털옷과 구두를 조과장에게 보내주었다.   사자왕기(四子王旗)에서는 력사이래 처음으로 그렇게 좋은 목재가 들어와 전기(全旗)에 소문이 나고 요복의 이름도 날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산서성대동모피공장(山西大同皮毛厂)에서 요씨가 큰 인재이니 요씨를 대동모피공장(大同皮毛厂)으로 조동시키고 가족도 모두 대동으로 이사시켰다.   요씨는 대동모피공장공소과(大同皮毛厂供销科)에서 사업하면서 그 공장에서 자동차를 사지 못하여 나에게 또 도움을 부탁하기에 우리는 돈을 받고 자동차를 조립해 보내주 었다. 그 공장은 민영기업인데 전국에서 이름이 있고 공장장 리자영은 전국 정협위원이였다.(계속)  
1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1 댓글:  조회:616  추천:0  2020-12-21
실화코너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             배명수     배명수                                           머리말:   인생은 흘러가는 류수라고 내 나이가 벌서 80세에 들어섰다. 지나간 인생의 려정을 돌이켜 보노라니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다. 인생은 피고 지는 꽃이라고 보귀한 여생을 좀 더 보람차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로년활동에 참가하고 사회공익활동에도 참가해 보았다. 정작 일손을 놓고 풍요롭고 한가한 나날을 보내다 나니 불현듯 그 무엇을 이 세상에 남겨 보자는 사명감이 머리에 떠올랐다.   알라는 내가 나서 자란 곳이고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일하고 진심으로 분투해온 고장이다. 또 나의 희망과 리상을 실현한 고장이며 오매에도 그리는 정든 고향이다. 겸허하지 못한 자신의 자호감인지는 모르지만 새삼스럽게 나 역시 알라의 번천과 고락을 같이 해온 사람이고 알라가 번영 발전한 력사의 견증자이고 참가자란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겸손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 펜을 들고 알라가 번영 발전해온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나는 알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엄격한 교유과 혁명정신의 영향을 줄곧 받아왔다. 어머니가 나를 낳아 키운 계몽선생이라면 아버지는 나의 본보기였고 나의 인생지향을 인도해주신 선생님이었다. 해방 전 아버지(裴元稷)는 조선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일제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으로 등이 시리고 배가 고파 1928년 무렵 살 곳을 찾아온 고장이 바로 영길현 알라였다. 그 때의 알라는 몇 천 년이나 잠자고 있었던 황무지였는데 이사 온 7호의 농민들이 처음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소학시절의 배명수                                     해방전쟁시기 나의 맏형 배시환은 어린 나이 15살 때 팔로군에 참가하여 남정북전하다가 1947년 울라가 해방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었는데 당시 겨우 18세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해방군 어느 후근부대의 담가대원으로 있었는데 부상병을 나르다가 자기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였지만 전투의 수요로 자식 잃은 비통을 가슴에 간직한 채 눈물을 머금고 다른 부상병의 담가를 메고 진지를 떠났다고 한다. 길림이 해방되고 백성들이 번신하자 지방정부에서는 렬군속가정을 위문하고 량식과 천으로 혹은 논밭갈이로  보조를 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의 아들이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것은 그가 응당해야 할 일이라”면서 정부의 렬사가족보조대우를 단연히 거절했다. 그후 해마다 번번이 렬사가족모범상의 표창을 받았다. 1956년에는 영광스럽게 전국소수민족참관대의 성원으로 선정되어 북경에 가서 모주석 등 중앙령도 동지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만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존경하는 아버지는 림종시 나를 보고 “너는 어릴 때부터 내가 중히 여기고 믿어온 아들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당조직에 몸을 담고 시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알라에 뿌리박고 알라사람들을 위해서 제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일을 봐줬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시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   알라는 전세기 광복전후와 해방전쟁시기부터 우리 겨레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와 민족정책의 관심배려속에서 중화대가정의 일원으로 된 자신감과 나라의 당당한 주인으로 된 자호감으로 시종일관하게 시대발전의 앞장에 서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눈부신 성과를 취득하였고 한 시기는 전 성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우리 조선족의 마을이었다.   알라 사람들은 전쟁시기에 우수한 청장년들이 적극 참군하여 총탄이 쏟아지는 전선으로 달려갔고 후방에서는 담가대를 조직하고 군수물자를 적극 지원하여 전선지원모범마을이라는 영예도 지니게 되었다. 해방 후 토지를 분배받은 알라 사람들은 들끓는 열정으로 생존을 위하여, 나라에 더 많은 알곡을 바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배들처럼 습지를 개간하고 벼종자를 개량하여 해해년년 징구량임무를 초과 완성하였다. 인민공사 후기부터 빈곤을 내몰고 생존환경의 개선을 목적으로 새 농촌건설을 다그쳤고 향촌기업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 고향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 빠짐없이 땀을 흘리며 힘과 지혜를 다 바쳤다. 그래서 생활수평이 일정한 정도로 제고되었고 집체경제도 현저한 발전을 가져왔으나 끊임없는 정치운동과 좌적로선의 영향으로 고향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제한되어있었고 집체나 개인의 경제수입과 집체경제발전 역시 제한을 받아왔다.   한시기 우리 당과 나라가 “사회주의 초급단계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은 구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중대한 문제의 정확한 답안과 옳바른 도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심지어 침통한 실패의 공통을 겪기도 했다. 그 대가로 수많은 백성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굶어서 죽는 사람도 있었던 우리 당의 교훈과 곡절이 우리 알라에서도 다소나마 재현되였었다고 본다. 지금 다시 이 력사를 회고하노라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의 총설계사인 등소평 동지가 제시한 개혁개방의 도로와 당중앙 11기 3중 전회의 결의가 얼마나 영명하고 정확했다는 것을 더 한층 심각히 느껴진다.   이 기회를 빌어 오래전부터 알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피땀 흘리며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로서기 김룡구 선생님을 비롯한 알라사람들에게 충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알라의 해방과 건설사업에서 공헌하시고 심지어 보귀한 생명까지 바친 렬사들과 선배들 및 알라에서 출세하여 전국 각지에서 공화국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서 성과를 취득한 고향사람들에게도 뜨거운 경의를 드린다. 이 책이 나오도록 성심껏 도와주고 수고해주신 문학애호자협회 회장님들과 편집 선생님들 및 특히 허정애 선생님과 한철근 선생님께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2016년 12월 12일                1. 알라의 래력   알라! 알라는 우리나라 수천만 농촌마을중 평범한 이름이겠지만 이 이름 속에는 우리 겨레들이 80여년이란 기나긴 세월 속에서 슬픔과 웃음, 피와 땀, 지어는 생명을 받쳐가면서 걸어온 태평산 아래 곱게 피어난 한폭의 아름다운 꽃 같은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알라디”라는 단어는 만족어로 언덕이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언덕 앞은 전알라(前阿拉), 언덕 뒤는 후알라(后阿拉)라고 불렀고 내가 지금 말하는 곳은 언덕 아래에 있기에 알라디(阿拉底)라고 불렀다. 알라의 총면적은 약 500쌍 좌우이고 그중 농토면적은 400쌍이 좀 넘는다. 동, 남, 북쪽은 산과 언덕으로 련결되어 주위에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둘러서 있는 모습이 마치 마을을 둘러싼 대자연이 천연적으로 만들어놓은 평풍 같다. 서쪽은 산 하나 볼 수 없는 망망한 평원인데 천지의 한 줄기인 송화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묘지를 선택하거나 마을을 세울 때 먼저 풍수를 보아 반드시 동쪽이 높은 곳이어야 하고 그 앞에 수원(水源)이 있으면 좋은 터라고 했다 한다. 원인은 중국은 동이 낮아 모든 하천은 동으로 흘러가기에 동이 낮으면 복도 흘러가 버린다고 했고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풀이해서인지 알라는 동이 높은 산들로 솟아있고 서쪽에는 송화강이 흐르기에 복이 흘러가지 않아 살기 좋은 곳으로 된 것 같다.    알라의 들판은 지대가 낮아 군데군데 샘물이 솟아나며 습지와 포자(泡子)가 매우 많았고 갈대와 쟁피, 그리고 줄풀, 미나리도 많으며, 큰 포자에는 련꽃, 말밤과 물고기도 많았다. 승냥이 울음소리도 가끔 들을 수 있었고 너구리, 여우, 토끼 등 짐승들도 많았다. 당시 조선족 김유관씨가 이런 짐승을 잡아왔었다.    우거진 수풀 속에는 물오리, 물닭, 아름다운 물새와 파랑새 그 외 이름 모를 새들이 하도 많아 6-7월이면 둥지를 틀어 알을 까고 오리새끼들은 가을이면 떼를 지어 놀다가 서리가 온 후 새끼들이 날개가 튼튼해지면 어미가 데리고 더운 곳으로 날아가곤 했다. 이른 봄이면 수백 마리의 기러기떼들이 날아와 쉬어갔는데 어떤 사람들은 낚시에 미꾸라지를 미끼로 끼워 기러기를 잡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내가 포자에 놀러갔을 때 갈대와 줄쟁피가 꽉 우거져있는데 복판의 물 많은 곳에서 어미오리가 새끼오리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포수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오리무리에 총질하자 새끼는 풀숲에 도망해 들어갔고 포수의 총을 피해 날아갔던 어미오리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새끼들이 걱정돼 다시 날아왔다. 어미오리의 부름소리에 새끼오리들이 다시 모였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매복해 있던 포수가 다시 총질하여 어미오리를 잡아버렸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나는 어미를 잃고 숲속으로 사라진 새끼오리들이 매우 가련해 보였다. 새끼를 위해 목숨 잃은 어미오리가 너무 불쌍하여 그 포수가 얼마나 밉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알라는 그 옛날 부모들이 조선에서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에 살아갈 수 없어 1934년에 이민으로 중국의 만주땅에 발을 붙여 천년 묵은 황무지 개간으로 시작된 곳이었다. 당시 알라를 개척하신 분들로는 남현호(길림에서 사업함), 정광호(정병수의 아버지), 고판동(고윤범의 큰아버지), 장도관(장분덕의 아버지), 배원직(배명수의 아버지), 주상열, 최갑봉(최주이의 큰아버지) 등 일곱 분들이었다.   집은 주위 가까운 한족툰에 림시로 집을 잡았고 처음으로 논을 풀기 시작한 곳은 알라사람들이 말하는 팔로땅이다. 철뚝 북탄산 서쪽 언덕아래는 샘물터가 많았고 또 그 물량이 많아 그 물을 리용하여 농사 짓기로 작정했다(지금도 물이 난다).   처음으로 지은 벼농사는 “일본 북해도”라고 하는 붉은 털벼였는데 무상기가 짧고 밥맛은 특별히 좋았지만 산량이 낮아 정작 뼈 빠지게 농사 지은 사람들은 입쌀밥을 먹을 형편이 못되어 잡곡죽과 나물로 기아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알라에 조선족들이 살게 되었는데 그 후 한 두호씩 더 모여서 조선족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제일 먼저 있은 집은 워팡인데 (지금 동네에 들어서면 썩 훗날 집지을 때 모래를 판 구덩이자리, 지금의 양어장 자리인데 원래는 마을에서 지대가 제일 높은 지대였다) 앞은 포자였고 다음으로는 영매팡자(후알라로 가는 길 퇴수 도랑 옆), 장가팡자와 버들팡자에 점차적으로 주민이 불어나면서 동네가 형성되었다.   인구가 불어나 논을 더 풀려고 하니 물이 모자라 후알라 북쪽 산비탈 물을 받아 곡강을 튀웠지만 그래도 물이 모자라 할 수 없이 알라에서 10리 떨어진 화수강에 보를 막아 오대툰(五代屯) 뒤로 도랑을 내어 알라까지 물을 끌어왔다.   마을이 점점 커지면서 학교도 세웠고 학교가 있게 되니 전단툰(前团屯)에 조선족이 약 20호가 살고 있었다(홍두섭, 남천수, 박두섭, 주상열 등). 오대툰(五代屯)도 근 20호(서윤택, 배리환 등), 화수촌 10여 집, 서양무에도 근 30여호(전중열, 손명호, 리기용, 김성동 등), 동양무 조가툰, 고산툰 등에 수십호(손승익, 오월분, 한영기, 김무일 등)가 살았는데 동양무와 조가툰(30리 거리) 학생들은 알라에 기숙하였고 다른 곳의 학생들은 모두 점심을 싸가지고 통학하였다.   그후 기차가 통하면서 막석, 깡요일대 그리고 길림 합달만과 기반가 일대의 조선족 학생들은 모두 알라학교에 다녔는데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을 키싸쓰각새이라고 불렀다. 당시 학생들은 200명이 넘었다.   나는 그때 소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었지만 일본놈들이 침략하여 식민지처럼 통치하고 있어 학교에서는 조선말을 근본상 할 수 없었고 만약 무심결에 한마디 하는 것이 들통 나면 벌을 서야했다. 당시 조선족교원으로는 장경렬 등 조선족이 대부분이었다.     2. 고난의 생활   1941년부터 3년 사이 전국적으로 전염병(홍진과 장질부사)이 심하게 돌아 알라에는 사람들이 많이 사망되었고 백성들을 공포 속에서 떨게 하였는데 당시 우리 집에서도 어머니와 누님은 괜찮았으나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남동생, 녀동생까지 네 사람은 전염병에 걸려 아버지는 머리가 많이 빠졌고(후에 다시 자라났다) 나도 사경에서 겨우 헤어나와 목숨을 부지했지만 다섯살 되는 녀동생 시남이와 두살짜리 남동생 정환이는 돈이 없어 아무 방법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다가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 당시 너무도 가난하여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쌀미음 한 숟가락 먹이지 못하고 그저 앙가슴을 쥐어뜯으며 죽어가는 자식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 마음을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이 저미는 듯 짜릿하게 아프다.    당시 알라에는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에 재앙이 덮쳐들었는데 어떤 가정은 아이 하나만 남기고 부모가 다 전염병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 가버린 집도 있었다. 그 때 알라에서 40-50여명이 사망되엿고 전염병이 돌고 있을 때는 사람들의 왕래가 금지되여있었지만 우리 민족들은 죽음을 꺼리지 않고 마을의 초상집 장사에는 술을 많이 마시고 소독하는 의미에서 서로간에 후사를 도와주곤 했다. 고통스러운 생활에 또 놓여진 재앙 앞에서 알라사람들은 굽힘 없이 헤어 나왔고 전염병이 좀 뜸하자 부지런히 일하여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있을 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철뚝길에는 소련군인의 자동차, 대포 및 군대들이 지나갔으며 뒤숭숭한 그 세월에 조선족부녀들은 얼굴에 검뎅이를 바르고 헤어진 옷을 꿰매지 않은 채 람루하게 입고 다녔다. 낮에는 강냉이밭에 숨어지냈는데 영문 모르는 어린 나이의 나는 그저 어른들의 행동이 우습게만 생각되엿다.   그런중에도 도둑이 기승을 부려 대낮에도 헌옷가지와 조금밖에 없는 식량, 콩이며 팥 같은 것들도 보이는 것이면 남기지 않았다. 도둑들은 사람은 해치지 않고 물건만 빼앗아갔는데 옷도 헐벗었고 생활이 너무 가난하여 살기 힘든 알라 주위의 한족들이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알라사람들에게 새로운 봉변이 닥쳐왔다. 비록 전국적으로 해방은 되엿지만 팔로군과 국민당의 전쟁이 계속되어 밤과 낮이 구별 없이 총소리 그칠 새 없었다.    알라의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 속에서 부득불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에 늘어선 피난민들은 지계에 이불이나 또 짐 위에 아이들을 얹어 가지고 가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가는 사람, 걱정 어린 얼굴에 힘없이 걸어가는 피난민들의 움직임은 정말로 처량해보였다.    그날도 하루 종일 항요(缸窑)까지 걸어가 비어있는 큰 량식창고 같은 곳에서 몇십명이 밤을 새우고 아침에는 냄새 나는 강낭가루 푸대죽으로 요기를 하였는데 항요 서쪽에서 총소리가 계속 나며 국민당이 쳐들어오기에 또 떠나서 서란(舒兰),신개림(新开林) 등 곳으로 서로 갈라져 피난길에 나섰다. 당시 우리 집은 황니허자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 곳은 아주 깊은 산골이라서 모기와 쇠파리가 얼마나 많은지 소에는 땡파리가 피를 빨아먹고 간 자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대낮에도 쑥불을 머리에 달고 일하는 것을 보았다.     3. 또 다시 알라에로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디로 가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지방의 원래 본토배기들은 당지생활에 습관되여 조금 괜찮았지만 우리는 얼굴이 부어나며 수토에 적응하지 못해 견딜 수 없어 얼마간 있다가 원래 살았던 곳인 알라로 다시 돌아왔다.     알라로 돌아와 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이불 하나 없이 물건이란 건 다 없어진지라 텅 빈 집에서 어구들은 옷가지에 발을 밀어넣고 밤을 지새워야만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산나물과 풀뿌리로 연명했는데 그릇이란 바가지뿐이였고 반찬이란 소금뿐이어서 날마다 밥과 반찬이 따로 없는 나물죽이었다. 나도 나이가 어렸으나 살림에 도움이 되려고 들판에 나가 쑥대 한단씩 하거나 마른나무를 주으러 다녔다.   1947년 가을, 울라가(乌拉街) 해방전쟁이 끝나자 그 해 겨울에 정부에서는 연변에서 100여호 조선족을 이사시켜 알라에는 200여호의 조선족이 살게 되였고 후에 점차 북길림, 항요, 화전, 심양일대 사람들까지 이사를 와 알라에는 300여호의 조선족마을로 되였다. 그 때 한족은 한호도 없었다.   그 시기 촌장은 남영달씨였다. 근로하고 소박한 알라사람들은 부지런히 황패했던 습지와 갈대밭을 옥토로 개간했고 벼농사로 나라에 공헌이 많아 1956년에 촌장 리종원(李钟元)씨는 전국농업모범대회에 참가하여 북경에 가서 영광스럽게 모주석 등 중앙령도 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그해 10월에 배원직(나의 아버지) 씨는 렬군속모범으로 전국 소수민족참관단에 참가하여 모택동, 류소기 등 당중앙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길림시인대 상무위원과 함께 인민대회당 앞에서 왼쪽으로부터 리충환, 박광현, 김룡구, 배명수 그 외 박기순씨는 1965년 국경절, 청년관람대에 참가하였고 모주석 등 국가 령도동지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김룡구 서기는 중공중앙 제10차 대표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나는 제3차, 제4차 길림시당대표대회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은 알라 사람들의 끊임없는 분투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보람찬 알라 사람들의 영광이 아닌가.   1962년의 통계에 의하면 울라가공사(乌拉街公社)는 전 영길현에서 제일 큰 공사인데 27개 생산대대에서 알라의 렬군속이 47호였고 그 인수는 전공사의 1/4을 차지했으니 알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 해방전쟁에서도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잠깐 올라가 해방전쟁의 과정을 이야기 하려 한다. 1947년 8월의 어느 날 울라가 해방전쟁을 하게 되는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났지만 걱정 말라는 구정부의 통지로 알라사람들은 태평한 세월이 올 것이라는 마음에 모두 기뻐하였다.   그때 나는 저녁을 먹고 동무들과 함께 달도 없는 저녁에 학교 쪽으로 갔을 때 장로(张老)방향에서 총소리가 드문드문 났다. “옳다, 이제 울라가를 해방하는 것 같다.”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점점 총소리는 잦아지고 하늘에는 빨간색, 푸른색 신호 총알이 날기 시작하여 우리는 호기심에 촌공소 제일 높은 곳인 지붕위에서 멋도 모르고 그 장면을 구경했다. 철 없던 어린 시절 류혈의 해방전쟁에서 많은 친인들을 잃을 수 있고 네가 사느냐? 내가 사느냐? 하는 참혹한 전쟁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후에 어른들이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는 했다.   이튿날 날이 새기도 전에 담가에 부상병 8명이 실려 학교마당에 왔다. 뒤에는 군대 둘이 따르고 부상병들을 메고 온 사람들은 국민당 포로들이었다. 부상병중 어떤 사람은 앓음소리를 냈는데 그중 한사람은 작탄에 맞아 엉덩이 살이 다 떨어졌는데 얼굴에 덮인 옷을 제껴보니 이미 희생되였었다. 전우가 희생되어 한 군인은 격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부상병을 메고 온 국민당 포로를 총으로 쏴죽이려 하자 알라 사람들은 후과를 고려하여 제발 죽이지 말라고 말렸다.   알라 사람들은 이 참담한 장면에 마음이 끌려 미음을 끓여와 부상병들에게 대접하려 했지만 상처가 너무 엄중해 그들은 한 숟가락의 미음도 넘기지 못했다. 알라 사람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아침 먹을 무렵 아버지는 주섬주섬 옷을 주어입으시며 담가대로 전선에 간다면서 죽만 조금 마신 뒤 우리 남매에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부탁을 하고 나가셨다. 그 때에도 울라가에서는 계속 요란한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나고 있었다. 우리 집은 4월말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버지와 누님 그리고 나까지 세식구가 사는 어머니가 없는 썰렁한 빈집이었는데 아버지까지 담가대에 가신다고  하니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남매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 것도 모르지만 외로움의 공포로 울지도 못하고 말없이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날 12시가 넘어 총소리가 뜸해지더니 총소리가 멎었다. 누님과 나 둘이서 하루종일 집안에서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오시지 않았다. 이튿날 점심때가 좀 넘어서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기척에 문을 차고 나가 아버지를 맞았으나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멍하니 계시다가 나에게 “뒷집에 사는 삼촌에게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이르고 불러 오라 하셨다.   얼마 안지나 삼촌과 숙모, 그리고 또 몇이 왔는데 아버지가 고개를 떨구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번 담가대에 갔다가 시한이(나의 형님)가 희생된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왔다.”라고 하시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였다. 삼촌은 억이 막혀 “이런 일이 어디 있냐.”며 실색하는데 누님의 흐느끼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오고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배명수의 어머니                  배명수의 아버지(배원직)   며칠 지나 아버지와 삼촌 그 외 몇 사람이 울라가에 형님묘지를 찾아갔다. 절간 동쪽 평지인데 많은 묘들이 줄지어있었는데 풍속에 따라 조선족 묘는 땅을 파서 묻었고 한족렬사는 관체를 땅위에 놓고 그 위에 삽으로 흙을 파 몇 삽 떠서 묻어놓았는데 아마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그랬던 것 같았다. 묘지를 관할하는 사람이 장부책을 가져와 첫번째 묘는 세 사람이 묻혀 있는데 첫번째 사람은 성이 배 씨라고 하여 삽으로 좀 파보니 연필로 배시환(裴时焕)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때에 아버지는 형의 이름이 적힌 글자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쉰 후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나도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형의 묘지에 술을 부어주며 “전우들과 함께 잘 있어라."하고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울라가양진묘(阳珍庙)에 갔는데 제일 치렬한 전투가 마지막으로 끝난 곳이라고 했다. 그리 높지 않고 삿갓처럼 생긴 산 우에 절간이 한채 있고 뒷벽은 포탄에 맞아 큰 구멍이 뚫려졌다. 중간에는 아름드리 붉은 기둥이 있는데 절반이 짜개져 겨우 지붕을 받들고 있었으며 집은 모두 검은 내화벽돌로 쌓았지만 벽돌에는 총알에 맞은 상처로 온전한 벽돌은 아예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울라가전투에 참가한 형님은 언덕을 넘다가 총알에 맞아 “악”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져 희생되였다. 이 사연은 다리에 총알을 맞아 부상당한 홍두섭(알라 사람) 씨의 얘기에서 전후를 상세히 알게 되었다.                                            울라가에는 길림의 국민당군대 주력이 있어 울라가를 해방하지 않고는 길림 해방은 불가능하기에 당시 울라가 해방 계획은 꼭 실현해야 했다. 계획은 저녁부터 강을 건너 밤 사이에 울라가 주위의 적들을 소멸하고 날이 새면 울라가 개성을 해방할 계획이었다. 비록 많은 군대를 투입시켰지만 당시 무기가 우세였던 국민당이 양진묘방어가 너무나 세어서 전쟁은 계획대로 순리롭지 않았다.   배명수의 아버지가 계실 때 1930년의 가족사진      양진묘의 동북으로는 큰 토성이 둘러쌓여있고 토성 밑은 사람들이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를 팠으며 구덩이 밑에는 날창을 꽂아놓아 사람이 빠지면 날창에 찔리게 해놓았다. 두차례 진공은 실패로 많은 살상자를 냈다. 세번째 진공임무를 장교덕이 거느리는 부대에 맡겼다. 장교덕영의 5, 6, 7련은 대부분이 조선족이고 알라 사람들이 제일 많은 부대다(홍두섭, 배시환, 최주이 아버지, 김해근, 배수환, 배리순, 배리순 남편, 유춘호, 리만식 형 등…).   장교덕부대는 임무를 맡고 토성 밑까지 갔으나 머리만 들면 적들은 양진묘의 높은 곳에서 기관총을 내려 쏘기에 진공하기 힘이 들었다. 이 때 장교덕이 권총을 빼들고 신속히 토성을 넘어가지 않으면 군사처벌을 하겠다고 호령하고 일제히 토성을 넘기로 명령했다. 그리하여 사상자도 많았지만 성공적으로 양진묘를 탈취하여 마지막 승리를 쟁취했다. 그 때부터 장교덕(원 영길현병원 원장 장인덕의 동생, 길림시로년협회 비서장 장성학의 삼촌) 씨는 이름을 날린 조선족지휘관이었다.   중국 해방전쟁이 기본상 끝날 무렵 조선의 김일성이 소련, 중국을 방문하고 조선 통일을 위하여 조선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의 조선족부대 두개사를 비밀리 조동시켜 두만강을 건너 인민군 복장을 갈아입힌 후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장교덕씨는 4,4,10련대 대대장으로 전쟁에서 크게 이름을 날린 군사지휘관이었다.   알라 배룡환씨는 울라가전쟁부터 장교덕씨와 같이 있었고 또 조선전쟁까지 갔다가 제대했는데 돌아올 때는 중성 한개를 단 퇀장급 군관이였다. 장교덕씨는 조선전쟁에서도 명성을 날렸지만 불행히 적의 폭격에 희생되였다. 그가 희생되자 중국신문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알라에서도 영웅의 사진을 걸어놓고 성대한 추도식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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