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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기록》제1집 -> 배명수 편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1
2020년 12월 21일 08시 00분  조회:616  추천:0  작성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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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
           
배명수
 
 
배명수
                                         
머리말:
 
인생은 흘러가는 류수라고 내 나이가 벌서 80세에 들어섰다. 지나간 인생의 려정을 돌이켜 보노라니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다. 인생은 피고 지는 꽃이라고 보귀한 여생을 좀 더 보람차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로년활동에 참가하고 사회공익활동에도 참가해 보았다. 정작 일손을 놓고 풍요롭고 한가한 나날을 보내다 나니 불현듯 그 무엇을 이 세상에 남겨 보자는 사명감이 머리에 떠올랐다.
 
알라는 내가 나서 자란 곳이고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일하고 진심으로 분투해온 고장이다. 또 나의 희망과 리상을 실현한 고장이며 오매에도 그리는 정든 고향이다. 겸허하지 못한 자신의 자호감인지는 모르지만 새삼스럽게 나 역시 알라의 번천과 고락을 같이 해온 사람이고 알라가 번영 발전한 력사의 견증자이고 참가자란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겸손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 펜을 들고 알라가 번영 발전해온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나는 알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엄격한 교유과 혁명정신의 영향을 줄곧 받아왔다. 어머니가 나를 낳아 키운 계몽선생이라면 아버지는 나의 본보기였고 나의 인생지향을 인도해주신 선생님이었다. 해방 전 아버지(裴元稷)는 조선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일제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으로 등이 시리고 배가 고파 1928년 무렵 살 곳을 찾아온 고장이 바로 영길현 알라였다. 그 때의 알라는 몇 천 년이나 잠자고 있었던 황무지였는데 이사 온 7호의 농민들이 처음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소학시절의 배명수
                                   
해방전쟁시기 나의 맏형 배시환은 어린 나이 15살 때 팔로군에 참가하여 남정북전하다가 1947년 울라가 해방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었는데 당시 겨우 18세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해방군 어느 후근부대의 담가대원으로 있었는데 부상병을 나르다가 자기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였지만 전투의 수요로 자식 잃은 비통을 가슴에 간직한 채 눈물을 머금고 다른 부상병의 담가를 메고 진지를 떠났다고 한다. 길림이 해방되고 백성들이 번신하자 지방정부에서는 렬군속가정을 위문하고 량식과 천으로 혹은 논밭갈이로  보조를 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의 아들이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것은 그가 응당해야 할 일이라”면서 정부의 렬사가족보조대우를 단연히 거절했다. 그후 해마다 번번이 렬사가족모범상의 표창을 받았다. 1956년에는 영광스럽게 전국소수민족참관대의 성원으로 선정되어 북경에 가서 모주석 등 중앙령도 동지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만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존경하는 아버지는 림종시 나를 보고 “너는 어릴 때부터 내가 중히 여기고 믿어온 아들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당조직에 몸을 담고 시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알라에 뿌리박고 알라사람들을 위해서 제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일을 봐줬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시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
 
알라는 전세기 광복전후와 해방전쟁시기부터 우리 겨레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와 민족정책의 관심배려속에서 중화대가정의 일원으로 된 자신감과 나라의 당당한 주인으로 된 자호감으로 시종일관하게 시대발전의 앞장에 서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눈부신 성과를 취득하였고 한 시기는 전 성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우리 조선족의 마을이었다.
 
알라 사람들은 전쟁시기에 우수한 청장년들이 적극 참군하여 총탄이 쏟아지는 전선으로 달려갔고 후방에서는 담가대를 조직하고 군수물자를 적극 지원하여 전선지원모범마을이라는 영예도 지니게 되었다. 해방 후 토지를 분배받은 알라 사람들은 들끓는 열정으로 생존을 위하여, 나라에 더 많은 알곡을 바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배들처럼 습지를 개간하고 벼종자를 개량하여 해해년년 징구량임무를 초과 완성하였다. 인민공사 후기부터 빈곤을 내몰고 생존환경의 개선을 목적으로 새 농촌건설을 다그쳤고 향촌기업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 고향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 빠짐없이 땀을 흘리며 힘과 지혜를 다 바쳤다. 그래서 생활수평이 일정한 정도로 제고되었고 집체경제도 현저한 발전을 가져왔으나 끊임없는 정치운동과 좌적로선의 영향으로 고향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제한되어있었고 집체나 개인의 경제수입과 집체경제발전 역시 제한을 받아왔다.
 
한시기 우리 당과 나라가 “사회주의 초급단계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은 구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중대한 문제의 정확한 답안과 옳바른 도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심지어 침통한 실패의 공통을 겪기도 했다. 그 대가로 수많은 백성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굶어서 죽는 사람도 있었던 우리 당의 교훈과 곡절이 우리 알라에서도 다소나마 재현되였었다고 본다. 지금 다시 이 력사를 회고하노라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의 총설계사인 등소평 동지가 제시한 개혁개방의 도로와 당중앙 11기 3중 전회의 결의가 얼마나 영명하고 정확했다는 것을 더 한층 심각히 느껴진다.
 
이 기회를 빌어 오래전부터 알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피땀 흘리며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로서기 김룡구 선생님을 비롯한 알라사람들에게 충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알라의 해방과 건설사업에서 공헌하시고 심지어 보귀한 생명까지 바친 렬사들과 선배들 및 알라에서 출세하여 전국 각지에서 공화국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서 성과를 취득한 고향사람들에게도 뜨거운 경의를 드린다.
이 책이 나오도록 성심껏 도와주고 수고해주신 문학애호자협회 회장님들과 편집 선생님들 및 특히 허정애 선생님과 한철근 선생님께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2016년 12월 12일
 
        
    1. 알라의 래력
 
알라! 알라는 우리나라 수천만 농촌마을중 평범한 이름이겠지만 이 이름 속에는 우리 겨레들이 80여년이란 기나긴 세월 속에서 슬픔과 웃음, 피와 땀, 지어는 생명을 받쳐가면서 걸어온 태평산 아래 곱게 피어난 한폭의 아름다운 꽃 같은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알라디”라는 단어는 만족어로 언덕이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언덕 앞은 전알라(前阿拉), 언덕 뒤는 후알라(后阿拉)라고 불렀고 내가 지금 말하는 곳은 언덕 아래에 있기에 알라디(阿拉底)라고 불렀다.
알라의 총면적은 약 500쌍 좌우이고 그중 농토면적은 400쌍이 좀 넘는다. 동, 남, 북쪽은 산과 언덕으로 련결되어 주위에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둘러서 있는 모습이 마치 마을을 둘러싼 대자연이 천연적으로 만들어놓은 평풍 같다. 서쪽은 산 하나 볼 수 없는 망망한 평원인데 천지의 한 줄기인 송화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묘지를 선택하거나 마을을 세울 때 먼저 풍수를 보아 반드시 동쪽이 높은 곳이어야 하고 그 앞에 수원(水源)이 있으면 좋은 터라고 했다 한다. 원인은 중국은 동이 낮아 모든 하천은 동으로 흘러가기에 동이 낮으면 복도 흘러가 버린다고 했고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풀이해서인지 알라는 동이 높은 산들로 솟아있고 서쪽에는 송화강이 흐르기에 복이 흘러가지 않아 살기 좋은 곳으로 된 것 같다. 
 
알라의 들판은 지대가 낮아 군데군데 샘물이 솟아나며 습지와 포자(泡子)가 매우 많았고 갈대와 쟁피, 그리고 줄풀, 미나리도 많으며, 큰 포자에는 련꽃, 말밤과 물고기도 많았다. 승냥이 울음소리도 가끔 들을 수 있었고 너구리, 여우, 토끼 등 짐승들도 많았다. 당시 조선족 김유관씨가 이런 짐승을 잡아왔었다. 
 
우거진 수풀 속에는 물오리, 물닭, 아름다운 물새와 파랑새 그 외 이름 모를 새들이 하도 많아 6-7월이면 둥지를 틀어 알을 까고 오리새끼들은 가을이면 떼를 지어 놀다가 서리가 온 후 새끼들이 날개가 튼튼해지면 어미가 데리고 더운 곳으로 날아가곤 했다. 이른 봄이면 수백 마리의 기러기떼들이 날아와 쉬어갔는데 어떤 사람들은 낚시에 미꾸라지를 미끼로 끼워 기러기를 잡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내가 포자에 놀러갔을 때 갈대와 줄쟁피가 꽉 우거져있는데 복판의 물 많은 곳에서 어미오리가 새끼오리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포수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오리무리에 총질하자 새끼는 풀숲에 도망해 들어갔고 포수의 총을 피해 날아갔던 어미오리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새끼들이 걱정돼 다시 날아왔다. 어미오리의 부름소리에 새끼오리들이 다시 모였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매복해 있던 포수가 다시 총질하여 어미오리를 잡아버렸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나는 어미를 잃고 숲속으로 사라진 새끼오리들이 매우 가련해 보였다. 새끼를 위해 목숨 잃은 어미오리가 너무 불쌍하여 그 포수가 얼마나 밉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알라는 그 옛날 부모들이 조선에서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에 살아갈 수 없어 1934년에 이민으로 중국의 만주땅에 발을 붙여 천년 묵은 황무지 개간으로 시작된 곳이었다. 당시 알라를 개척하신 분들로는 남현호(길림에서 사업함), 정광호(정병수의 아버지), 고판동(고윤범의 큰아버지), 장도관(장분덕의 아버지), 배원직(배명수의 아버지), 주상열, 최갑봉(최주이의 큰아버지) 등 일곱 분들이었다.
 
집은 주위 가까운 한족툰에 림시로 집을 잡았고 처음으로 논을 풀기 시작한 곳은 알라사람들이 말하는 팔로땅이다. 철뚝 북탄산 서쪽 언덕아래는 샘물터가 많았고 또 그 물량이 많아 그 물을 리용하여 농사 짓기로 작정했다(지금도 물이 난다).
 
처음으로 지은 벼농사는 “일본 북해도”라고 하는 붉은 털벼였는데 무상기가 짧고 밥맛은 특별히 좋았지만 산량이 낮아 정작 뼈 빠지게 농사 지은 사람들은 입쌀밥을 먹을 형편이 못되어 잡곡죽과 나물로 기아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알라에 조선족들이 살게 되었는데 그 후 한 두호씩 더 모여서 조선족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제일 먼저 있은 집은 워팡인데 (지금 동네에 들어서면 썩 훗날 집지을 때 모래를 판 구덩이자리, 지금의 양어장 자리인데 원래는 마을에서 지대가 제일 높은 지대였다) 앞은 포자였고 다음으로는 영매팡자(후알라로 가는 길 퇴수 도랑 옆), 장가팡자와 버들팡자에 점차적으로 주민이 불어나면서 동네가 형성되었다.
 
인구가 불어나 논을 더 풀려고 하니 물이 모자라 후알라 북쪽 산비탈 물을 받아 곡강을 튀웠지만 그래도 물이 모자라 할 수 없이 알라에서 10리 떨어진 화수강에 보를 막아 오대툰(五代屯) 뒤로 도랑을 내어 알라까지 물을 끌어왔다.
 
마을이 점점 커지면서 학교도 세웠고 학교가 있게 되니 전단툰(前团屯)에 조선족이 약 20호가 살고 있었다(홍두섭, 남천수, 박두섭, 주상열 등). 오대툰(五代屯)도 근 20호(서윤택, 배리환 등), 화수촌 10여 집, 서양무에도 근 30여호(전중열, 손명호, 리기용, 김성동 등), 동양무 조가툰, 고산툰 등에 수십호(손승익, 오월분, 한영기, 김무일 등)가 살았는데 동양무와 조가툰(30리 거리) 학생들은 알라에 기숙하였고 다른 곳의 학생들은 모두 점심을 싸가지고 통학하였다.
 
그후 기차가 통하면서 막석, 깡요일대 그리고 길림 합달만과 기반가 일대의 조선족 학생들은 모두 알라학교에 다녔는데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을 키싸쓰각새이라고 불렀다. 당시 학생들은 200명이 넘었다.
 
나는 그때 소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었지만 일본놈들이 침략하여 식민지처럼 통치하고 있어 학교에서는 조선말을 근본상 할 수 없었고 만약 무심결에 한마디 하는 것이 들통 나면 벌을 서야했다. 당시 조선족교원으로는 장경렬 등 조선족이 대부분이었다.
 
 
2. 고난의 생활
 
1941년부터 3년 사이 전국적으로 전염병(홍진과 장질부사)이 심하게 돌아 알라에는 사람들이 많이 사망되었고 백성들을 공포 속에서 떨게 하였는데 당시 우리 집에서도 어머니와 누님은 괜찮았으나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남동생, 녀동생까지 네 사람은 전염병에 걸려 아버지는 머리가 많이 빠졌고(후에 다시 자라났다) 나도 사경에서 겨우 헤어나와 목숨을 부지했지만 다섯살 되는 녀동생 시남이와 두살짜리 남동생 정환이는 돈이 없어 아무 방법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다가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 당시 너무도 가난하여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쌀미음 한 숟가락 먹이지 못하고 그저 앙가슴을 쥐어뜯으며 죽어가는 자식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 마음을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이 저미는 듯 짜릿하게 아프다. 
 
당시 알라에는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에 재앙이 덮쳐들었는데 어떤 가정은 아이 하나만 남기고 부모가 다 전염병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 가버린 집도 있었다. 그 때 알라에서 40-50여명이 사망되엿고 전염병이 돌고 있을 때는 사람들의 왕래가 금지되여있었지만 우리 민족들은 죽음을 꺼리지 않고 마을의 초상집 장사에는 술을 많이 마시고 소독하는 의미에서 서로간에 후사를 도와주곤 했다.
고통스러운 생활에 또 놓여진 재앙 앞에서 알라사람들은 굽힘 없이 헤어 나왔고 전염병이 좀 뜸하자 부지런히 일하여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있을 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철뚝길에는 소련군인의 자동차, 대포 및 군대들이 지나갔으며 뒤숭숭한 그 세월에 조선족부녀들은 얼굴에 검뎅이를 바르고 헤어진 옷을 꿰매지 않은 채 람루하게 입고 다녔다. 낮에는 강냉이밭에 숨어지냈는데 영문 모르는 어린 나이의 나는 그저 어른들의 행동이 우습게만 생각되엿다.
 
그런중에도 도둑이 기승을 부려 대낮에도 헌옷가지와 조금밖에 없는 식량, 콩이며 팥 같은 것들도 보이는 것이면 남기지 않았다. 도둑들은 사람은 해치지 않고 물건만 빼앗아갔는데 옷도 헐벗었고 생활이 너무 가난하여 살기 힘든 알라 주위의 한족들이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알라사람들에게 새로운 봉변이 닥쳐왔다. 비록 전국적으로 해방은 되엿지만 팔로군과 국민당의 전쟁이 계속되어 밤과 낮이 구별 없이 총소리 그칠 새 없었다. 
 
알라의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 속에서 부득불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에 늘어선 피난민들은 지계에 이불이나 또 짐 위에 아이들을 얹어 가지고 가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가는 사람, 걱정 어린 얼굴에 힘없이 걸어가는 피난민들의 움직임은 정말로 처량해보였다. 
 
그날도 하루 종일 항요(缸窑)까지 걸어가 비어있는 큰 량식창고 같은 곳에서 몇십명이 밤을 새우고 아침에는 냄새 나는 강낭가루 푸대죽으로 요기를 하였는데 항요 서쪽에서 총소리가 계속 나며 국민당이 쳐들어오기에 또 떠나서 서란(舒兰),신개림(新开林) 등 곳으로 서로 갈라져 피난길에 나섰다.
당시 우리 집은 황니허자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 곳은 아주 깊은 산골이라서 모기와 쇠파리가 얼마나 많은지 소에는 땡파리가 피를 빨아먹고 간 자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대낮에도 쑥불을 머리에 달고 일하는 것을 보았다.
 
 
3. 또 다시 알라에로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디로 가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지방의 원래 본토배기들은 당지생활에 습관되여 조금 괜찮았지만 우리는 얼굴이 부어나며 수토에 적응하지 못해 견딜 수 없어 얼마간 있다가 원래 살았던 곳인 알라로 다시 돌아왔다.  
 
알라로 돌아와 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이불 하나 없이 물건이란 건 다 없어진지라 텅 빈 집에서 어구들은 옷가지에 발을 밀어넣고 밤을 지새워야만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산나물과 풀뿌리로 연명했는데 그릇이란 바가지뿐이였고 반찬이란 소금뿐이어서 날마다 밥과 반찬이 따로 없는 나물죽이었다. 나도 나이가 어렸으나 살림에 도움이 되려고 들판에 나가 쑥대 한단씩 하거나 마른나무를 주으러 다녔다.
 
1947년 가을, 울라가(乌拉街) 해방전쟁이 끝나자 그 해 겨울에 정부에서는 연변에서 100여호 조선족을 이사시켜 알라에는 200여호의 조선족이 살게 되였고 후에 점차 북길림, 항요, 화전, 심양일대 사람들까지 이사를 와 알라에는 300여호의 조선족마을로 되였다. 그 때 한족은 한호도 없었다.
 
그 시기 촌장은 남영달씨였다. 근로하고 소박한 알라사람들은 부지런히 황패했던 습지와 갈대밭을 옥토로 개간했고 벼농사로 나라에 공헌이 많아 1956년에 촌장 리종원(李钟元)씨는 전국농업모범대회에 참가하여 북경에 가서 영광스럽게 모주석 등 중앙령도 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그해 10월에 배원직(나의 아버지) 씨는 렬군속모범으로 전국 소수민족참관단에 참가하여 모택동, 류소기 등 당중앙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길림시인대 상무위원과 함께


인민대회당 앞에서 왼쪽으로부터 리충환, 박광현, 김룡구, 배명수

그 외 박기순씨는 1965년 국경절, 청년관람대에 참가하였고 모주석 등 국가 령도동지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김룡구 서기는 중공중앙 제10차 대표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나는 제3차, 제4차 길림시당대표대회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은 알라 사람들의 끊임없는 분투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보람찬 알라 사람들의 영광이 아닌가.
 
1962년의 통계에 의하면 울라가공사(乌拉街公社)는 전 영길현에서 제일 큰 공사인데 27개 생산대대에서 알라의 렬군속이 47호였고 그 인수는 전공사의 1/4을 차지했으니 알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 해방전쟁에서도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잠깐 올라가 해방전쟁의 과정을 이야기 하려 한다.
1947년 8월의 어느 날 울라가 해방전쟁을 하게 되는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났지만 걱정 말라는 구정부의 통지로 알라사람들은 태평한 세월이 올 것이라는 마음에 모두 기뻐하였다.
 
그때 나는 저녁을 먹고 동무들과 함께 달도 없는 저녁에 학교 쪽으로 갔을 때 장로(张老)방향에서 총소리가 드문드문 났다. “옳다, 이제 울라가를 해방하는 것 같다.”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점점 총소리는 잦아지고 하늘에는 빨간색, 푸른색 신호 총알이 날기 시작하여 우리는 호기심에 촌공소 제일 높은 곳인 지붕위에서 멋도 모르고 그 장면을 구경했다. 철 없던 어린 시절 류혈의 해방전쟁에서 많은 친인들을 잃을 수 있고 네가 사느냐? 내가 사느냐? 하는 참혹한 전쟁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후에 어른들이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는 했다.
 
이튿날 날이 새기도 전에 담가에 부상병 8명이 실려 학교마당에 왔다. 뒤에는 군대 둘이 따르고 부상병들을 메고 온 사람들은 국민당 포로들이었다. 부상병중 어떤 사람은 앓음소리를 냈는데 그중 한사람은 작탄에 맞아 엉덩이 살이 다 떨어졌는데 얼굴에 덮인 옷을 제껴보니 이미 희생되였었다.
전우가 희생되어 한 군인은 격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부상병을 메고 온 국민당 포로를 총으로 쏴죽이려 하자 알라 사람들은 후과를 고려하여 제발 죽이지 말라고 말렸다.
 
알라 사람들은 이 참담한 장면에 마음이 끌려 미음을 끓여와 부상병들에게 대접하려 했지만 상처가 너무 엄중해 그들은 한 숟가락의 미음도 넘기지 못했다. 알라 사람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아침 먹을 무렵 아버지는 주섬주섬 옷을 주어입으시며 담가대로 전선에 간다면서 죽만 조금 마신 뒤 우리 남매에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부탁을 하고 나가셨다. 그 때에도 울라가에서는 계속 요란한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나고 있었다. 우리 집은 4월말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버지와 누님 그리고 나까지 세식구가 사는 어머니가 없는 썰렁한 빈집이었는데 아버지까지 담가대에 가신다고  하니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남매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 것도 모르지만 외로움의 공포로 울지도 못하고 말없이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날 12시가 넘어 총소리가 뜸해지더니 총소리가 멎었다. 누님과 나 둘이서 하루종일 집안에서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오시지 않았다. 이튿날 점심때가 좀 넘어서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기척에 문을 차고 나가 아버지를 맞았으나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멍하니 계시다가 나에게 “뒷집에 사는 삼촌에게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이르고 불러 오라 하셨다.
 
얼마 안지나 삼촌과 숙모, 그리고 또 몇이 왔는데 아버지가 고개를 떨구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번 담가대에 갔다가 시한이(나의 형님)가 희생된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왔다.”라고 하시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였다. 삼촌은 억이 막혀 “이런 일이 어디 있냐.”며 실색하는데 누님의 흐느끼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오고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배명수의 어머니                 


배명수의 아버지(배원직)
 
며칠 지나 아버지와 삼촌 그 외 몇 사람이 울라가에 형님묘지를 찾아갔다. 절간 동쪽 평지인데 많은 묘들이 줄지어있었는데 풍속에 따라 조선족 묘는 땅을 파서 묻었고 한족렬사는 관체를 땅위에 놓고 그 위에 삽으로 흙을 파 몇 삽 떠서 묻어놓았는데 아마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그랬던 것 같았다. 묘지를 관할하는 사람이 장부책을 가져와 첫번째 묘는 세 사람이 묻혀 있는데 첫번째 사람은 성이 배 씨라고 하여 삽으로 좀 파보니 연필로 배시환(裴时焕)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때에 아버지는 형의 이름이 적힌 글자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쉰 후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나도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형의 묘지에 술을 부어주며 “전우들과 함께 잘 있어라."하고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울라가양진묘(阳珍庙)에 갔는데 제일 치렬한 전투가 마지막으로 끝난 곳이라고 했다. 그리 높지 않고 삿갓처럼 생긴 산 우에 절간이 한채 있고 뒷벽은 포탄에 맞아 큰 구멍이 뚫려졌다. 중간에는 아름드리 붉은 기둥이 있는데 절반이 짜개져 겨우 지붕을 받들고 있었으며 집은 모두 검은 내화벽돌로 쌓았지만 벽돌에는 총알에 맞은 상처로 온전한 벽돌은 아예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울라가전투에 참가한 형님은 언덕을 넘다가 총알에 맞아 “악”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져 희생되였다. 이 사연은 다리에 총알을 맞아 부상당한 홍두섭(알라 사람) 씨의 얘기에서 전후를 상세히 알게 되었다.   
                                       
울라가에는 길림의 국민당군대 주력이 있어 울라가를 해방하지 않고는 길림 해방은 불가능하기에 당시 울라가 해방 계획은 꼭 실현해야 했다. 계획은 저녁부터 강을 건너 밤 사이에 울라가 주위의 적들을 소멸하고 날이 새면 울라가 개성을 해방할 계획이었다. 비록 많은 군대를 투입시켰지만 당시 무기가 우세였던 국민당이 양진묘방어가 너무나 세어서 전쟁은 계획대로 순리롭지 않았다.
 
배명수의 아버지가 계실 때 1930년의 가족사진   
 
양진묘의 동북으로는 큰 토성이 둘러쌓여있고 토성 밑은 사람들이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를 팠으며 구덩이 밑에는 날창을 꽂아놓아 사람이 빠지면 날창에 찔리게 해놓았다. 두차례 진공은 실패로 많은 살상자를 냈다. 세번째 진공임무를 장교덕이 거느리는 부대에 맡겼다. 장교덕영의 5, 6, 7련은 대부분이 조선족이고 알라 사람들이 제일 많은 부대다(홍두섭, 배시환, 최주이 아버지, 김해근, 배수환, 배리순, 배리순 남편, 유춘호, 리만식 형 등…).
 
장교덕부대는 임무를 맡고 토성 밑까지 갔으나 머리만 들면 적들은 양진묘의 높은 곳에서 기관총을 내려 쏘기에 진공하기 힘이 들었다. 이 때 장교덕이 권총을 빼들고 신속히 토성을 넘어가지 않으면 군사처벌을 하겠다고 호령하고 일제히 토성을 넘기로 명령했다. 그리하여 사상자도 많았지만 성공적으로 양진묘를 탈취하여 마지막 승리를 쟁취했다. 그 때부터 장교덕(원 영길현병원 원장 장인덕의 동생, 길림시로년협회 비서장 장성학의 삼촌) 씨는 이름을 날린 조선족지휘관이었다.
 
중국 해방전쟁이 기본상 끝날 무렵 조선의 김일성이 소련, 중국을 방문하고 조선 통일을 위하여 조선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의 조선족부대 두개사를 비밀리 조동시켜 두만강을 건너 인민군 복장을 갈아입힌 후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장교덕씨는 4,4,10련대 대대장으로 전쟁에서 크게 이름을 날린 군사지휘관이었다.
 
알라 배룡환씨는 울라가전쟁부터 장교덕씨와 같이 있었고 또 조선전쟁까지 갔다가 제대했는데 돌아올 때는 중성 한개를 단 퇀장급 군관이였다. 장교덕씨는 조선전쟁에서도 명성을 날렸지만 불행히 적의 폭격에 희생되였다. 그가 희생되자 중국신문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알라에서도 영웅의 사진을 걸어놓고 성대한 추도식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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