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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3 댓글:  조회:353  추천:0  2020-12-21
 7. “영길현, 서란현, 유수현”의 수전 개간으로 인한 풍파   알라의 발전사에서 이제는 숨을 좀 쉬는가 했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듯이 시에서 갑자기 통지가 왔다. 영길현, 서란현, 유수현 세개 현이 송화강의 젖강을 막아 수위를 높여 1000여쌍의 토지를 수전으로 개간한다는 결정이다. 만약 그렇다면 알라의 200쌍은 물에 잠기게 되니 미리 조치를 강구하란다.    알라대대에서는 급하게 김서기가 사람들을 데리고 금주땅을 돌아봤으나 알라사람들이 옮겨갈 형편이 안 되었다. 또 배주환씨를 데리고 흑룡강성까지 돌아보아도 300여호의 농가와 300쌍의 수전을 풀 수 있는 곳은 전혀 없었다.   할 수 없이 알라에 다시 와 지부회의를 열고 부득불 일부 인원을 이사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총지에서 누구든지 마음대로 조직하여 좋은 곳으로 이사가는 사람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리종원(전임 대대장)씨가 30여호(전임 대대장)를 조직하여 길림시 교구 구참공사 남산도(南山道)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가을에 일부는 남산도에 가서 집을 짓고 논 풀 준비를 하고 이사했다. 내가 따라가 봤는데 산골이고 물을 퍼 올려 논을 풀어야 하는데 물을 푸는 일은 국가에서 도와준다 하였다. 산골에 논을 푸니 얼마나 좋을까?     그것 또한 기발한 창조였다. 후에 다시 진툰(陈屯)으로 옮겨갔다. 나는 그냥 말하지 않고 알라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알라에서의 발전은 가망이 적기에 후에 떠날 생각을 하고 길림시정부의 고시장을 찾아가 알라에서 호수를 줄여야 하기에 부득불 떠나야 하는데 수전을 풀만한 곳을 련계해달라고 제기했더니 고시장은 알라사람들은 벼농사를 잘해 길림시교구에 와서 수전을 발전을 이끌어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교구정부에 전화를 걸고 우리를 보고 바로 구참공사에 가라 하여 구참공사에 찾아갔더니 박구장(조선족)과 하와자(下洼子)대대 서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논풀 곳을 돌아보았다. 신작로 옆이고 송화강가에 고점자 남쪽인데 강냉이를 심던 한전을 우리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하와자대대의 접대를 받고 돌아왔다(당시 나와 강필근이 함께 갔다).   알라에 돌아와 이사 갈 사람을 조직해 보려니 자리가 좋아 서로 가려고 할 것 같아서 젊은 사람들로 조직하였는데 서기감인 신기원, 대장감 최형두, 강필근은 당지와 관계를 잘 맺어 양수장과 주택 건설을 맡고 나는 길림시와 가까우니 방법을 연구하여 기업을 꾸리면 하와자에 가게 될 30여호의 미래 생활은 좋아질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우리가 김서기에게 30여호가 이사 간다고 하니 김서기가 명단을 보자고 했다. 강필근이가 김서기에게 쓴 명단을 보여주었더니 김서기는 명단을 훑어보다가 그 종이를 쫙 찢어버리며 “아무도 못 간다!”고 화를 내면서 나가더니 합작사에 가서 술 한컵에 소금 한알을 안주로 마신 뒤 집으로 갔다.   강필근과 나는 기가 막혀 집으로 갔는데 사람을 시켜 저녁도 먹지 않은 나를 김서기가 불러서 갔더니 “6대 리형출 서기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가봐야 되지 않겠나?"고 했다. “예!?” 리서기네 집에 가서 인사를 한 다음 술상을 차렸는데 김서기가 “리서기는 알라의 훌륭한 당원이다.”라고 하면서 여러 면에서의 그의 착한 인생살이와 사업에 힘써온 얘기를 하면서 나에게 “명수도 알라를 위하여 알라사람들을 위하여 너는 알라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정중하게 말씀하셨다.   김서기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다시 생각해 보게 되였다. 알라에는 나를 낳아 젖 먹여 키워준 세상에 둘도 없는 어머니의 뼈가 묻혀 있었고 또 같은 피가 흐르는 겨레들이 서로 도우면서 참된 사랑과 인정으로 살아온 인정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내 고향 알라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알라사람들과 같이 영원히 알라의 청산록수에 묻혀 살며 알라를 지켜보며 세상 끝까지 가야 했다.   김서기에게 떠나지 않겠다고 하자 김서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맙다고 인사한 뒤 매우 기뻐하였다. 내가 떠나지 않겠다고 하니 목수 윤광수, 철만지, 윤상건 등은 기계 사용에 재간 있는 김리선 등 몇 사람들도 못 가도록 다시 붙들어놓았다. 그리하여 리종원(李钟元)씨를 비롯한 30여호와 강필근이 조직한 30여호 250-260명의 인구가 줄었는데 그것은 한개 대대가 없어진 셈이였다. 알라사람들은 그래도 그 물 때문에 걱정이 되여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정부에서 좋은 통지가 내려왔는데 "알라에다 국가에서 제방을 새로 쌓아주고 수문을 단속하고 배수는 큰 펌프를 놓아 논에 물이 차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 안심하라" 하였다.   그렇게 해결한 덕분에 가물 때는 송화강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장마 때는 퇴수물을 밖으로 퍼 내니 자연에 맞서는 알라사람들에겐 하늘도 울고 갈 가물이나 장마도 없었고 그 후로는 해마다 풍작을 거두었다.   8. 문화대혁명   알라에서는 1963년도 제1차 사회주의교육 운동이 시작되여 길림시농업국 국장 리규삼(李圭三)의 령솔하에 공작대 십여명이 장기 주둔하면서 군중을 발동하여 경제청산을 하고 간부들의 문제를 적발하는 운동을 벌렸다. 그 때는 생산소대가 핵심이여서 일부 소대간부들은 돈을 좀 더 가져가고 소대돈으로 술상을 차리는 등 부정한 일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고 다만 대대의 회계가 1000여원을 횡령하여 철직처분을 받았다. 그래서 잠시 내가 회계를 맡아했으며 년말에 공작대가 철거했다.   1964年에 다시 제2차 사회주의교육 운동이 시작되였는데 박원종(朴元钟)씨가 공작대 조장으로 되였다. 경제상에서 큰 문제는 없었고 다만 대대장이 생활작품문제로 떨어지고 26세인 내가 정치대장으로 되였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농촌사업에서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농사에는 문외한이였고 정치사업에도 깜깜이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일곱 식구에 다섯명이나 학생이니 부모님들의 부담이 너무나 많아 나는 부모님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려고 퇴학하여 포두시(包头市)에 가서 측량대로 있다가 돌아왔으니 농촌사업에서 많은 것을 모르기에 마음속으로는 달갑지 않은 간부가 되였다. 내가 대대장으로 된 것은 그 시기에는 가정출신을 많이 따지는 세월이라 나는 빈농출신에다 렬사의 동생, 아버지는 렬군속모범이었으니…   대대장이 되였지만 정치운동에 아무런 흥취가 없어 내 앞의 일이나 보고 대대 김서기가 시키는 일만 중시하고 언제나 열심히 해나갔다. 하루는 사무실에 있는데 호구를 겸하여 관리했던 회계 한춘근씨가 나에게 “김국범(金国范) 선생의 호구에는 성분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써야하는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초기에 학교에서 나의 자형 김국범 선생은 목에 패쪽을 걸고 비판투쟁을 받았다. 당시 우리 가정은 혁명가정인데 자형이 지주분자로 인정된 것이 접수되지 않아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지주라도 세살 때 아빠가 죽었는데 네 자형이 무엇을 알겠나? 그래도 길림성 우수교사로 입당까지 했는데…”    나는 또 김서기께 직접 물어보았다. “우리 자형은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요?” 김서기는 소지주의 아들이라 했다. 그리하여 나는 회계에게 김국범이 소지주의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 일이 문화혁명시기 나에게 큰 문제로 되였다. 한번은 나를 새 교실에 오라고 하여 갔더니 라고 써서 붙여놓고 앞에 서라하여 섰더니 “계급투쟁을 견지하자!”, “무산계급전정을 공고히 하자!”라는 구호를 부른 뒤 나더러 검사하라 했다. 속으로 나는 집체공금을 횡령하지 않았고 다른 오점도 없으며 벽돌 한장도 공짜로 쓴 적이 없고 바람을 피워 녀자를 본 적도 없는데 무엇을 검사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학습이 부족하여 정치를 돌출이 하지 못했고 능력이 모자라 대대 일을 잘 보지 못하였다.”라고 검사하니 뒤에서 누군지 큰소리로 말하기를 “나라를 배반하고 조선에 갔다 온 것은 죄가 아닌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조선에 갔다 온 것은 사실이고 입당할 때 김서기에게 다 교대했고 조선 남양에 갔다가 나흘 만에 돌아왔었고 조선의 실 한오리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슨 죄를 론할 것인가? 다시 생각해 보니 국경을 넘어 불법 월경한 것이 죄인 것 같아 잘못했다고 했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은 나에게 인생살이에 대한 많은 것을 느끼게 했고 배우게 했다.  나는 영국의 유명한 작가 쉐익스피어의 “세상의 그 어떤 권위와 위망이 있는 사람도 여론계의 중상을 피면하기 어렵고 가장 순결한 도덕품행도 배후의 공격을 피면할 수 없다”라는 명언에 담긴 철리를 다시 한번 느꼈었다.   9. 개혁개방의 풍랑 속에서 알라의 개혁은 성공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중국에 개혁개방정책이 시달되면서 농촌에는 호도거리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1978년에 안휘성 소강촌의 18명 농민이 혈서로 대보간을 하자고 하여 당시 성위 서기 만리의 지지를 받고 1979-1980년에는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그 때 알라의 김서기는 1979년에 병환으로 있다가 1980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서기는 일편단심 당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26년이란 기나긴 세월, 1953년부터 1980년까지 알라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하여 현위 곽(郭)서기는 추도식에서 “김룡구 서기의 업적은 알라에서 대대로 빛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은 훌륭한 일꾼을 잃었고 알라사람들은 훌륭한 령도를 잃었기에 알라사람들은 매우 비통해 했다.    김서기의 추도식이 끝난 후 공사 허명(许明)서기가 알라에 와 하루간 있더니 이튿날 다시 와서 당원대회를 소집하고 하시는 말씀이 “당원, 간부들의 다수 의견에 따라 공사당위는 배명수동지를 알라당총지 서기로 임명한다.”라고 선포했다. 오래전부터 김서기는 후계자를 고려해 모든 일을 나하고 먼저 토론해 결정하였는데 4, 5명이나 선발해 사업해봤지만 한 사람도 후계자로 되지 못했다 .   나는 지부사업은 조금도 해보지 못했고 할 줄도 몰랐으며 지부서기사업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되였으니 정영기(원 화전시당위 서기)의 의견을 많이 참고하고 도움을 받아가며 하루하루를 겨우  견지한 것 같다.   호도거리정책을 실시할 때 처음엔 알라사람들에게 접수되지 못했다. 20여년간의 집체경제제도로 얻어온 성적과 발전도 많았는데 호도거리를 실시하면 이미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묵살되는 것 같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현위 김서기를 찾아 의견을 청취하려 하였더니 김서기 말씀이 “알라는 보통 농촌과 달라서 자기 립장에서 꼭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은 못하겠으나 알라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차 1981년 길림성 성장 장근생(张根生)과 중앙농촌정책연구소 두윤생(杜润生) 소장이 알라에 왔을 때 나는 알라사람들이 집체화길에서 얻어온 많은 성과를 보고했는데 두윤생 소장의 말씀은 “지난날 알라는 참 잘 했습니다. 성적도 컸습니다. 그런데 알라의 이 좋은 기초에 전국에서 얻어온 좋은 경험을 보태면 알라는 더 빨리 좋아지지 않을까?”라고 했다. 마지막 그들이 떠나갈 때 장성장과 두주임의 말은 중앙의 지시와 같다 하면서 나의 어깨를 도닥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호도거리 시달을 결심하고 1982년도 호도거리정책을 시달하였다.   호도거리가 실시된 후 농민들은 제 땅의 주인이 되였고 땅에 대한 애착도 커졌으며 공출미를 바친 뒤에 남은 곡식은 배불리 먹고도 팔 것이 많았다. 몇십년 분투 끝에 성적도 많았지만 호도거리는 우리에게 일체는 자기 형편에 따라,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어 생활이 제고되였으며 사람마다 좋아했다.   알라는 개혁개방의 영향 아래 원래 집체공금으로 집을 짓던 제도를 개혁하여 이미 벽돌집에 살고 있는 사원들은 값을 싸게 쳐서 받고 소유권은 개인에게 돌리고 새로 집을 짓는 농호들은 자기 마음대로 설계하고 보기 좋고 쓸모 있게 잘 짓게 하였다. 주택건설에 힘 입어 1983년에 알라는 초가집 한채도 없는, 그림 같은 마을로 변모되였다.                         알라송            인생길 굽이굽이 산수 80 지난 오늘          태평산령 우에서 세상을 굽어보니          하늘은 높아졌고 땅도 넓어졌는데           그 속에서 알라는 번영창성해 가네            천년 묵은 갈대밭 초가집도 없는데           백의동포 피땀 흘려 걸군 곳          무연한 들판엔 황금파도 물결치고          아스팔트 줄치는 자동차            줄지어 선 주택이 아름다운 그림 같고          만발한 화초 속 꽃나비 춤 추네          흥겨운 공장의 기계소리           성(城)향을 구분키 어렵구나            태평산 뿜어올리는 붉은 태양          찬바람 막아주는 봉황산          송화강이 고향 적셔주니          만풍년 알라에 호적 올렸네   오늘의 알라가 이렇게 좋아졌으니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중국공산당의 영명한 령도와 오늘을 위하여 수십년 세월 속에서 힘겹게 살아온 알라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10. 잊을 수 없는 알라사람들    지난 수십년 세월의 흐름 속에 잘 먹고 잘 입지 못하면서도 달을 지고 나갔다가 별을 이고 돌아오시던 어머님, 아버님들... 저녁 굶고 자는 어린 자식들에게 헌 옷자락을 덮어주고나선 일에 지친 나머지 자장가 한번 불러주지 못하고 혼곤히 잠드신 어머님들의 가슴 아픈 사연 또한 그 얼마였던가...  알라사람들의 장백산려행                    운동대회에서   무더운 여름이면 해빛을 등으로 받아주고 흐르는 땀은 논물에 보탬이 될 지경이였으며 엄동설한 추운 겨울 털모자 눌러 쓰고 주먹장갑을 껴도 손이 얼어드는데 곡괭이로 언 땅을 파헤치며 방전화 평정을 하느라고 그믐날까지 일했던 적이 어찌 한두해뿐인가! 알라사람들 잘 살아보자고 일하다가 20여세에 어린 아기 하나 두고 탈곡기에 치마 감겨 생명을 잃은 조한악씨! 당의 호소 받들어 농토개혁의 길에서 지게짐을 지고 가다 허리가 끊어져 어린 아이 둘을 두고 세상을 하직한 안승도 부서기.   2011년부터 해마다 진행되는 고추문화축제            신 나는 장고춤          풍작을 위해 궂은 날 폭우 속에서 일하다 번개불에 목숨 바친 김정임씨(30세에 인생을 마쳤음), 어린 아기를 남겨 두고 떠나간 그 마음 오죽했을까?    벽돌공장에서 일하다 차사고로 숨진 안용건의 어머니! 알라의 건설을 위하여 밤을 지새우며 벽돌을 나르다가 차에 깔려 사망된 조병태의 안해, 차바퀴가 가슴 우로 지나갔는데 그래도 금방 일어나 앉았다가 탁 쓰러지면서 눈 뜨고 저 세상에 갔으니…   나는 또 이미 저 세상을 떠나간 윤기태 부서기를 잊을 수 없다. 전세기 60년대초부터 당총지 부서기로 있으면서 사업능력도 있고 원칙성이 강한 주요령도였다. 간부들이나 군중들 중 잘못이 있으면 추호의 량해라곤 없고 엄격히 처리하기에 일부 사람들은 반감을 샀다. 후에 자식들중 생활작풍문제가 있는 것으로 하여 서기사업 그만두었지만 알라벽돌공장과 새 농촌 건설 사업에서 대대내의 구체적 건설은 윤주임이 관여하면서 사업했으며 사업에 대한 책임감이 아주 높았다.    벽돌을 생산하는 관건은 벽돌가마의 건축이었고 벽돌가마건축의 관건은 천장을 마무리는 것인데 벽돌을 눕혀 틈사이로 흙모래로 꽉 밀어넣고 위에 흙을 바르고 또 벽돌을 깔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힘들게 가마를 다지고 나서 개를 잡아 점심에 술을 마시려고 상을 차려 놓고 술을 마시려 할 때 윤주임이 들어와 서쪽에 비구름이 밀려오니 금방 다져놓은 가마를 덮어야 하기에 빨리 나가 덮자고 동원하니 원래 못 먹고 곤난한 시기여서 개고기냄새만 맡아도 춤이 넘어가는 형편인데 잠깐 먹고 나가면 될 것을 저 사람이 “덜살 대네.”하면서 다수가 먹고 나갈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 윤주임은 큰 소리로 "몽땅 나가자"고 소리 질러 모두 나가 비닐로 덮었고 10분도 안되여 소나기가 퍼부었지만 벽돌가마는 무사했다.   만약 제때에 덮지 않았으면 비에 흙과 모래가 씻겨 내려가면 벽돌가마가 무너진다고 하여 크나큰 경제손실을 피면하였다. 이 얼마나 참된 공산당 간부인가? 후에 년세가 많아 또 알라의 로인협회 회장으로 사업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나 나는 그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또 저승에 간 알라사람을 말하려 한다. 정영기 부서기는 원래 화전에서 이름 있는 대대 서기였는데 원 화전현위서기 김수희(金守希)가 영길현 서기로 조동되여서 알라의 정황을 료해한 후 알라를 더 잘 꾸리기 위하여 정영기를 알라로 오게 했다. 정영기는 사람이 침착하고 속에 든 것도 많지만 더욱 큰 특점은 진실함이였다. 모든 처사를 공정하게 하고 어느 편에 서는 법이 없는 사람이였다. 옳고 그름을 똑바로 가르고 자기의 주위에 사람을 끌어모으는 법도 없었고 언제나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주었는데 중한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별세는 알라의 큰 손실이였다.         알라디룡성충압공장의 모습          배명수의 아들 배철훈  길림시룡성실업유한공사 리사장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상무부회장                                                                            신종화, 리충환(李忠焕) 두 사람은 알라의 기업발전에 자기들의 정열을 다 바쳤다. 항상 사업에 열중하고 그 많은 정치운동에 얼굴을 내밀려는 야심이 없었고 패거리에 휩쓸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몹쓸 병은 그들의 인생을 너무 일찍이 앗아가 알라의 발전에 손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당원도 아니고 간부도 아닌 순수한 농민인 김근식씨를 나는 말하고 싶다. 그는 장춘에서 알라로 와서 알라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열을 바쳐온 훌륭한 사람이다. 다른 건 그만두고 알라에서 경제난이 생겨 부득불 자동차를 조립하여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였을 때 자동차 4대를 조립해 낸 뛰여난 공로가 있다. 한시기 장춘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자동차공장의 작업복을 입고 자동차공장에 드나들면서(제1자동차공장의 출입구는 자동차공장의 작업복만 입으면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과의 밀접한 련계를 가졌다. 그는 갖은 방법으로 당시 사기 어려운 자동차부속품 구매에 큰 공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명이 짧아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의 마음은 지금도 쓰리다. 나의 사업에 손과 발처럼 중요한 작용을 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술 한잔 따로 대접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 시절, 나에게는 돈이 없었고 대대돈은 일전도 아껴야 했으니 말이다. 좋은 말이라도 해주지 못한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고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를 많이 돌리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프다!    이 분들은 모두가 한 민족의 피가 흐르는 알라사람들이였다.    알라사람들! 나는 언제나 알라사람들을 자랑하고 싶다.   박호산:탄지니아 수력발전소 건설공정의 총지휘로 지원 나갔다가 건설을 끝마치고 돌아와 백산수력발전소의 책임자로 사업하셨다.   오만복: 알라에서 일하다 자습하여 대학까지 졸업하고 공사당위 서기, 시위조직부의 처장, 길림시상업국 국장으로 사업한 분이다.   한철근: 알라에서 일하다가 문예면에 재간이 있어 시조선족문화관에서 사업했는데 많은 조선족노래를 작곡했으며 우리 로인들이 즐겨 부르는 로인협회가를 작곡한 이름난 작곡가이시다.   김홍란: 지금 우리 민족의 이름 있는 《도라지》 잡지사의 편집부에서 사업하시며 작가이시다.   안수근(안승도의 아들): 길림시보험공사의 처장이고 그의 동생은 중국인민해방군 모 부대 사장으로 사업하고 있다.   도규섭: 장춘교통학교를 졸업하고 연길현도로공사에서 공정사, 양로참 참장으로 사업하다 정년퇴직하여 길림시조선족문학사랑회를 발기한 사람이다.   박상래: 길림시 룡담구정부에서 요원으로 사업하고 있다.   김석대(김룡구 서기의 아들): 한시기 알라대대 당총지서기로 선거되여 알라사람들을 위해 사업하였다. 개혁개방 시기 북경에서 기업을 꾸리였다.   김미도: 장춘철도부문에서 일했는데 중국철도에서 최고상인 기관차 (火车头)훈장을 수여받았다.   배철훈, 배광훈: 지금 알라에서 250여명의 직공들을 거느리고 중국 자동차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다소간 공헌을 기여하고 있다.   남효일, 김영배: 모두 조기대학생으로 북경대학을 졸업한 후 국방부 모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사업했다.   김노미: 병환에 계시는 남편에 아이들까지 일곱 식구를 먹여살리겠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뼈 빠지게 일해 온 그녀는 아마 알라에서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외에도 많은 알라 사람들의 사적이 있지만 이젠 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알라사람이 아닌 나의 훌륭한 친구 박광현씨를 얘기하려 한다. 중학시절 나의 동창이고 포두시계획국에 출근하다가 (그 때 나는 측량대에서) 영길현에 조동되여 현민족사무위원회, 현조직부에서 사업하였다. 후에 길림시 강남에 있는 교통은행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는데 이 분이 현에서 사업하면서 알라에 공작대로 와서(1956年) 알라의 사업을 관심하고 지지하였으며 간부내의 모순과 결함을 해결해 준 좋은 분이다. 후에는 길림시로년협회 부회장으로 10여년 사업했으며 알라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깊어 지금도 알라로인협회에 있으면서 만년을 보내고 계신다. 고맙습니다! 박광현 씨!   그리고 알라에 또 하나의 신문인물은 배석환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배재선씨의 삼촌인데 1945년도 해방후 팔로군에 입대하여 깡요, 막석, 서란 일대는 물론 알라에도 자주 왔는데 키가 훤칠하고 아주 약빠르고 담량도 큰 사람이였다.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이어서 늘 검은 안경 한알을 걸치고 다녔고 한족말은 한족들도 물러설 정도로 잘했고 그가 거느리는 부대는 깡요 일대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이 사람이 1947년도에 사라졌다. 후에 알고 보니 일부분의 부대를 거느리고 국민당에 귀순하여 장춘에서 퇀장질하고 있었다. 배상호 아버지나 배씨네 집안에서는 누구도 이 말을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후기 밤중에 배상환이가 알라 배상호네 집에 왔다 갔다고 한다. 배석환씨는 원래 팔로군 련장이였는데 그 때 국민당과 내통하였다. "돈을 받고 국민당에 귀순하면 군급도 높여 준다"하여 귀순했는데 해방전쟁 후기 남방에서 대만으로 갈 것을 결정했다. 정작 대만에 가려고 하니 동북땅에 부모형제 다 두고 수만리 멀고먼 대만까지 가게 되면 바다가 가로놓여 영원한 리별이 될 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래서 마음을 돌려 배석환은 해방군에게 의식적으로 체포되였다.   후에 퇀장급은 전쟁범에 속하기에 려순군사감옥에 들어갔는데 열흘도 안 되어 감옥책임자가 찾아왔다. 이전에 배석환씨가 장춘에서 국민당군대의 퇀장으로 있을 때 팔로군 12명(조선족)이 체포되였다. 석환씨가 심문한 후 그 팔로군포로들에게 빈총을 메워 팔로군 주둔한 지역 가까이에 보내주었다.   당시 석환씨는 같은 민족이 변을 당한 것에 민족의 동정으로 팔로군포로를 구해주었는데 마침 그 감옥장이 그 때 구해준 12명 팔로군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감옥장의 힘으로 석환씨는 감옥에 한달도 있지 않고 나왔는데 알라에 돌아가려니 문화대혁명시기여서 친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까봐 갈 형편이 못 되여 부득불 자기 신분을 감추려고 혼자서 흑룡강의 어느 깊은 산속의 벌목장을 찾아가 부모형제도 없이 밥벌이를 했다.   신분을 속이고 사람들 앞에서 부지런히 일했더니 몇년후 벌목대의 채벌대장까지 되였다. 그러다가 근처 산골마을의 처녀와 결혼을 하고 농사일을 했었다. 한해 지나 또 입당도 하였고 2년도 안 되어 대대 서기로 되었다.   석환씨는 그곳에서 열심히 공작한 결과 군중위망도 높게 얻었고 상급의 신망도 컸었다. 한번은 흑룡강에서 조직한 과거의 고통을 회억하고 오늘의 행복을 생각(忆苦思甜)하는 대회에서 전형인물로서 발언을 했는데 그의 말재주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이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중 그가 예전의 국민당 퇀장임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며 그를 적발하는 바람에 공산당에서 퇴당되고 보통 농민으로 뭇사람들이 멸시의 시선을 받으며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인생이란 한조각 구름 같아서 구름이 사라지면 눈앞의 현실이 없듯이 인생 역시 구름과 같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으로 말하면 지나간 내 인생 80여년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11. 알라의 희망과 나의 간절한 소망      수십년 세월을 알라에서 살면서 심혈을 바쳐왔고 지금도 호흡을 같이 하고 있는 년세 높은 친구들! 전세기 1960년대 초기부터 농업 제일선에서 사업해 온 김성오, 최수열, 강춘근, 백상례, 리동복, …, 후에 대대 간부로 사업한 리종태, 차인석, 알라 건설에 힘바쳐 온 김철우, 김무영, 윤광수 씨, 1962년 알라에 첫 전기를 들여 온 그 때부터 알라의 첫 전공, 전기관리와 전기안전사용을 위해 말 없이 꾸준히 일해 온 신종광씨! 교육사업에서 알라의 후대들을 위해 힘들게 사업해 온 강병운 교장, 김룡선 선생, 리연란, 김곡자 등 선생님들! 근 20년 알라의 촌사업을 해온 박기순씨! 중학교원으로부터 대대기업 서기로 후에 로인회 회장으로 사업해온 강동산씨! 알라 중학교 교원사업을 오래동안 하다가 알라로인협회 회장으로(10여 년 간 사업했음) 지금까지 로인들을 위해 자기 만년의 정열을 바치고 있는 심철우 회장! 그리고 리동만, 김기수 친구들! 금년에 전국 로년협회 모범대회에서 표창을 받고 돌아오셨고 지금도 열심히 로인협회 이끌어 가시는 박찬동 회장! 세상은 한이 없고 인생은 한이 있는데 인간이 아무리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래일을 모르고 산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삶을 행복으로 삼고 래일은 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면서 서로 손잡고 지난 세월에 못 다한 알라사람들과의 사랑과 인정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 나의 부탁이고 간절한 소망이다.   지금 알라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리수영, 손청송, 재춘선 등 현임간부들이 새로운 현실에 도전하고 있다.   알라의 조선족들은 시의 령도와 시조선족군중예술관의 지지하에 고추축제로 새로운 력사를 쓰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넋인 알라를 더욱 잘 지키려는 목적으로 민속촌을 꾸려 대대로 알라를 빛내어갈 것을 다지고 있다.   그렇다! 중화의 꿈, 민족의 꿈이 바로 우리의 꿈이 아니겠는가?   민족의 자랑, 우리들의 희망, 알라여! 영원히 빛나라!   배명수 프로필: 1937년 3월 27일, 영길현 알라에서 출생. 1951년, 길림조중에 입학후 부모님의 부담을 덜려고 알라에 돌아와 농사일에 종사.                                           1956-1958년, 내몽골 포두시측량대에서 근무. 1958년, 알라민영중학 설립 제1임 교원. 1959-1962년, 알라디대대 공청단총지 서기. 1963년, 알라대대 대대장 등 직무 력임. 196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80년, 알라디대대당총지 서기. 1982년, 제3-4기 길림시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및 중공길림성 제4차 대표대회 대표. 1986년, 영길현충압공장 공장장. 1995년, 길림시광명충압유한회사 리사장.   편자의 말: 본 《기록》문집은 이미 타계하신 배명수 알라디대대 당총지 서기의 아들 배철훈씨로부터 자료를 받아 다시 재편집하였다.    배철훈 프로필:     1962년, 길림시 룡담구 알라디마을 출생.     길림시룡성실업유한회사 법인대표 리사장.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상임부회장.     월드옥타길림지회 명예회장.  
10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2 댓글:  조회:301  추천:0  2020-12-21
  4. 전기 가설해 풍수를 안아오고 한족들을 도와 수전을 풀었다   알라는 호조조로부터 초급사, 고급사, 인민공사화에서 사회주의건설과 혁명에서 시종 전 현에서 앞장서서 걸어왔고 민족단결의 모범대대였다. 1961년에 큰 가물이 들어 7월이 됐는데도 논판에 물이 없어 모판에 모가 그대로 서있는 것이 매우 많았다. 모를 심지 못한 면적이 많아 사람들이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자연조건과 하늘만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김서기와 리종원, 윤기태 그리고 나까지 송화강물을 끌어오려는 기발한 생각을 갖고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송화강가에 가 보았는데 물을 끌어올 수 있는 조건은 매우 좋으나 전기가 문제였다.   그때부터 김룡구 서기는 공사와 현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전기를 당겨오기로 결정하고 시, 현에 찾아다니며 련계하여 울라가 원전화(园田化)전기를 그해 가을부터 길림성 전기가설대가 전기가설을 시작하여 동네에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양수장까지 설치하여 1962년봄부터 물을 퍼올릴 수 있었다.         해마다 대풍작                  양식업을 크게 발전   그 때부터 사원들은 전등을 하나 쓰면 100원, 두개 쓰면 150원을 내기로 하고 집집마다 전기를 쓸 수 있었고 농업에서는 아무런 가물도 겁나지 않았으며 알라의 기타 발전에도 아주 좋은 기초를 닦아놓았다.   1962년도에 양수장을 설치한 후 알라는 해마다 농업풍수를 거두게 되자 김서기는 회의에서 "우리의 밥사발에 밥이 높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반드시 이웃집 밥사발에 밥도 같이 높아야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1963년에 마을과 밭이 높은 언덕 우에 있는 전알라대대(한족대대)는 수원관계로 한전뿐인데 사원들의 생활도 매우 빈곤하였다. 그래서 김서기는 우리가 퍼올린 강물에 전알라양수장을 설치하여 수십쌍 되는 논을 풀게 하였고 기술자(나의 아버지)를 파견하여 울라가공사 26개 한족대대에서 제일 처음으로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 역시 좋은 뉴스였고 그 때부터 련속 대정(大郑),장로(张老),고모(高毛)대대 등 모두 알라의 지원으로 수전을 풀기 시작하여 전 공사적으로 적지 않은 대대가 벼농사를 하였다.    5. 벽돌공장 꾸리고 새 농촌 건설을 시작했다   1967년 5월 7일, 당중앙 모주석께서 "각 인민공사는 농업생산을 틀어쥐는 한편 조건을 창조하여 기업을 꾸려 농민들의 수입을 올려야 한다"고 지시했다. 지시가 하달되자 당지부에서는 기업을 꾸리기로 결정했다.   당시 알라의 정황은 공장을 꾸릴만한 아무런 여건도 구비되지 않았고 기초도 없었다. 농사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대장간에서 소발에 편자를 박는(挂掌) 심방룡, 구금서 두 사람, 부대에서 기계(军械)를 수리하다 복원한 리종환씨와 발동기를 좀 볼 줄 아는 리동화, 송기헌 씨외에 목수 몇사람뿐이였다. 토론 끝에 알라를 둘러싸고 있는 산언덕이 모두 황토이기에 “혹시 벽돌공장을 꾸리면 되지 않을까.”라고 했지만 그곳은 우리 알라대대에 소속한 땅이 아니고 또 그 황토로 벽돌을 구울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험을 무릅쓰고 달려드는 의미에서 렴치도 불문하고 한족대대와 상의하기로 하였다. 김서기와 나는 전알라(前阿拉) 왕풍림(王风林) 서기를 찾아가 언덕의 땅문제를 제기했더니 왕서기는 묵어있는 땅인데 수요되는 대로 쓰라고 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땅을 얻어놓았으니 이번에는 그 흙으로 벽돌을 만들 수 있는 지가 문제였다.     우리는 벽돌 굽는 데는 깜깜 무지라 벽돌공장을 찾아야 했다. 알라에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벽돌 공장이란 대툰북산(大屯北山)에 있는 길림시제3벽돌공장이였는데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련 며칠 연구 끝에 강필근과 같이 김룡선 선생님을 불러서 길이 1.8m, 너비 0.90m 되는 합반(胶合板)에 붉은색을 칠한 후 금빛색으로 모주석의 5.7지시(1966년 5월 7일 발표했음)를 밤새워가며 써 붙였다.   이틀후 나와 강필근 서기 둘이서 그것을 가지고 장호역에서 렬차에 오르려니 물건이 크다고 막더니 모주석의 지시를 쓴 것이여서 마침 차를 탈 수 있어 금주역(金珠火车站)에 내렸는데 봄바람이 얼마나 불어제끼는지 갖은 애를 먹어가며 겨우 길림시제3벽돌공장에 도착하여 공장입구에서 수발실(收发室) 직원에게 우리는 모주석의 지시를 전달하러 왔으니 공장의 령도들을 찾아달라고 했더니 두말없이 달려가 공장장과 서기를 데리고 왔다.   그들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접대하였다. 우리가 온 목적은 모주석의 지시를 락실하기 위해 벽돌공장을 꾸리려고 찾아왔다고 하자 공장장은 두말없이 기술자를 파견하겠으니 래일 알라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튿날 왕사부(王师傅)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벽돌공장을 차릴 자리와 토질을 파보고 2시간 남짓이 돌면서 알아본 후 벽돌을 굽는 데는 질이 아주 좋은 흙이라고 했다.   왕사부는 열정적으로 기계설비는 어디에다 설치하고 벽돌을 굽는 가마(窑)를 쌓을 자리까지 상세히 알려주어서 우리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입쌀  5근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당시에는 큰 선물인 셈이었으니) 왕사부에게 억지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자기는 벽돌기계(砖机)는 모른다면서 공장에 호(胡) 씨성을 가진 기술자가 있는데 그 사람을 찾아 연구하라고 귀띔해 주었다. 우리가 이내 신종화(辛钟华)를 보내 도움을 청하자 호사부(胡师傅)가 금방 찾아왔다.   벽돌공장을 꾸리려는 결심과 노력으로 땅도 해결되고 토질도 좋기에 벽돌공장을 꾸릴 수 있는 가능성이 크지만 호사부의 말에 의하면 쇠 덩어리 하나 없는 농촌에서 기계를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면서 “벽돌기계(砖机)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드는데 나 자신도 똑똑히는 모르겠고 몇천원 가지고는 공장 꾸릴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의 생각에는 벽돌공장을 꾸리자면 반드시 기계가 있어야 하고 기계를 만들자면 많은 돈이 든다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 끝에  나는 솔직히 호사부에게 우리는 돈이 없는데 아마 벽돌공장을 꾸리려는 계획이 허사일 것 같다고 말하면서 애달픈 마음을 그대로 토로하며 도와줄 수 없냐고 말했다.   그러자 호사부는 말 없이 앉아 있다가 형편이 정 그렇다면 벽돌공장에 위만 시기부터 쓰던 낡은 벽돌기계(砖机)가 있는데 그것을 자기네 공장에서 쓰다가 새로운 기계를 사서 낡은 기계는 창고에 처박혀 있는데 보기에 어설프고 우둔(笨重)하지만 큰 부속품은 거의 제대로 있으며 큰 전동기를 써야 하니 전기세가 좀 많이 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호사부는 그 기계만 사오면 자기가 책임지고 벽돌을 생산할 수 있게 할 수 있으니 공장과 련계해보라고 했다.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알라에서 벽돌공장을 꾸리는 것은 관건적인 문제이고 또 제3벽돌장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여 그들의 지지와 관심을 받아야만 벽돌공장을 세우려는 우리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관계를 가깝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김서기에게 상황을 반영하면서 내 생각을 말했다. 당시 우리의 조건으로는 선물을 주거나 돈을 주는 방법은 생각도 못했고 약 10여일후  5.1국제로동절인데 알라의 문공단을 보내 위문공연을 하면 어떻겠는가고 제기했다.    별 방법이 없었던 김서기는 나의 의견에 따르는 수밖에 없어 김정곤(문공단 단장)과 리응두, 재정태를 불러서 위문공연을 준비시켜 련습하기 시작했다.   알라사람들은 일찍부터 문화생활에 흥취가 있었고 예술을 즐기는 김재곤 등 분들이 편찬한 극 “심청전”은 50년대초부터 길림지구 조선족마을에(강밀봉, 쌍하진 등) 순회공연을 하여 소문이 자자한데다 1964년, 1965년까지 길림성민족가무단을 알라에 건립하여(연변에서 많이 왔음) 그들이 알라농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문예련습을 지도하여 알라사람들은 문예방면에 수준이 매우 높았었다. 이번 기회에 마침 5.1절이 다가오자 신종화를 제3벽돌공장에 보내 공인들께 위문공연을 해주겠다고 전했다.    우리는 제3벽돌공장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해 한 열흘 앞두고 련습하여 4월 30일, 세틀의 수레에 악기와 배우들을 싣고 벽돌공장에 갔다.   공장의 마당에다 꾸려 놓은 무대는 어설펐다. 그래도 전등불을 환하게 켜놓아 처녀들이 알락달락한 치마저고리에 분단장 곱게 하고 남성들은 한복에 조끼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질러매고 꽹과리, 장구, 북을 치며 펼치는 조선민족의 노래는 로동자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 속에서 공연은 아주 원만하게 막을 내렸다.   이어서 공장의 령도들과 로동자들이 함께 어울려 춤과 노래로 즐겁게 놀다가 밤중에 돌아왔는데 이번 공연은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며칠이 지나 나와 신종화가 벽돌공장에 가 낡은 벽돌기계(旧砖机)를 사겠다고 했더니 대번에 낡은 기계를 페철가격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우리는 당장 창고에 가서 헌 기계를 본 후 이튿날 마차 세대에 싣고 왔는데 저울이 없어 주먹구구 잡아 200원을 주기로 하였다.   신종화가 다음날 보관원에게 돈을 가져다주러 갔는데 보관원(김씨라는 조선족)이 마누라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하지 못하여 돈 200원만 꿔달라고 하였다.   신종화가 알라에 돌아와서 벽돌공장 보관원의 돈 문제를 말하기에 먼저 안해의 병 치료나 잘 하라하며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이튿날 신종화를 통해 돈 200원을 보관원에게 보내 주었다. 김씨는 감동되어 눈물이 글썽하여 “이후 벽돌생산에 수요되는 물건이 있으면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 돕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져온 기계는 수송기(输送机), 교반기(搅拌机), 절전기(切砖机)인데 별로 정밀한 기계는 아니지만 조금 손질하고(전동기도 호씨가 가져왔음) 3개월 내에 기계를 설하고 실험해보니 벽돌이 잘되여나왔다.   벽돌 굽는 가마(窑)는 윤기태씨가 책임지고 건설하여 10월에 마른 토피를 구워놓고 이듬해(1968년 4월초) 꺼냈(出窑)는데 정말로 좋은 벽돌이였다. 바로 전 성에서 처음으로 농촌기계벽돌공장이 알라에서 일어섰다.   기술인재는 한명도 없고 돈도 없는 형편에 반년이란 기간에 공장을 꾸려 벽돌까지 훌륭한 것으로 나왔다는 자체가 실로 놀랄만하며 자랑거리였으니 온 길림지구를 들썽하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참관하고 탄복했다.           알라디민속촌대문            알라디조선족중심소학교청사   벽돌이 나오자 나는 벽돌을 팔기 위해 수소문 했는데 마침 길림자동차부품공장(吉林汽配厂)에서 직장(车间)을 짓기에 벽돌을 해결해 달라고했다. 책임과장이 가격은 요구대로 다 주겠다고 하여 초보적으로 한장에 6전씩 결정하였다.    돌아와 김서기에게 회보하니 김서기는 벽돌공장의 윤주임과 몇 사람이 벽돌 원가가 한장에 3전가량 된다고 하는데 김서기는 벽돌공장을 차려 돈을 너무 많이 벌면 자본주의길로 가게 되니 리윤을 적게 부치자고 해서 벽돌가격을 한장에 4전씩 받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처음으로 벽돌이 대외로 팔리기 시작했는데 그 때 우리 알라사람들의 성공의 기쁨은 얼마나 컸던지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며칠후 길림시강북제2백화상점에서 오철해(吴铁海)라는 후근주임과 사무실 곽주임이 벽돌을 요구하여 해결해 주었더니 질 좋고 값 싸니 고맙다 하며 앞으로 알라일을 많이 돕겠다하여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후 알라 새농촌건설에서 우리는 운수방면에서 그들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알라대대가 농촌에서 기계벽돌공장을 꾸렸다는 소식은 신문에도 실렸고 공사, 현, 시의 령도도 참관왔고 앞으로 알라의 농민들에게 벽돌집을 지어 살게 하라고 고무격려하는 바람에 대대당총지에서는 새 농촌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후 시정부 고시장이 알라에 왔을 때 김서기가 새 농촌 건설을 해야 하는데 계획을 세우려니 많은 방면에 경험이 부족하니 좀 관심을 해 달라고 했더니 “그럼 좋아요. 래일 즉시로 시달할터니 소식을 기다려보시요!”라고 하기에 우리는 이튿날 고시장을 찾아갔다. 고시장은 부동산공사에 얘기해 놓았으니 찾아가라고 했다.   시부동산공사 서기 김명곤씨는 알라사람인데 항미원조에 갔다가 부동산관리국의 당위서기로 배치받은 분이었다. 그분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시장의 지시대로 며칠내로 측량대에 제일 좋은 기술자를 배동해 보내겠다고 했다. 다음날 측량대원 7명과 설계원인 리충교(李忠桥)란 공정사를 보내 왔다.  새 농촌건설의 설계는 넓이 10m , 길이 900m 짜리 중심거리가 동서로 두개, 남북으로는 집 4채마다 길을 두었고 3채는 3간방으로 다른 한채는 5간방으로 하고 집마다 차지하는 땅은 집 앞 10m, 집 6m, 채마지기 14m로 하여 동네는 장기판처럼 설계되었으며 큰길 남쪽 문화지에는 학교, 유치원, 병원, 로인활동실을 짓기로 했다.   일주일후 측량대는 돌아갔지만 리충교는 일년 동안 알라에 남아 설계와 건설을 지도했다. 처음 남북으로 7채씩 4채의 집을 시작했고 작은 삼칸집 기초는 1.7m 좌우 깊이로 파고 자갈과 모래를 채워 넣었다(다행히 모래와 자갈은 동네에서 해결했는데 지금의 양어장이 당시 모래와 자갈을 파낸 자리이다). 지량(地梁)을 하는데 전단(前团)에서 돌을 사와야 하는데 집 한채에 자갈(沙石)이 25립방메터 수요되고 전단석(前团石)이 6립방메터가 들어야 하는데 운수가 큰 문제였다.     6. 새 농촌 건설에서 닥친 난관을 지혜와 의력으로   당시 촌에는 생산소대마다 소 몇마리와 동방수레가 여섯개가 있을 뿐이다. 소에게 못 먹여 여위고 말라서 형편 없고 때로는 소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여 나와 김 서기는 소에게 운수를 시키면 농사도 짓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생각다 못해 헌 자동차라도 사야겠다는 것을 결정하고 그 임무를 내가 맡았다.   차를 어디에 가야 살 수 있겠는지? 생각 끝에 장춘에 자동차공장이 있으니 그곳에 가야 하는데 태여나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장춘에, 그것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어떻게 할까? 걱정하던중 장춘에서 중학교를 다닌 적 있는 신종기를 찾아가 장춘에 있는 그의 동창 김근식, 송국환, 권오식, 정모모를 찾아갔다. 김근식과 송국환은 직업도 없기에 우리를 도와 매일 자동차소식을 탐문하다가 어떤 사람이 심양에 자동차 파는 곳을 안다기에 나는 급한 김에 알라에 돌아와 현금 6000원을 가지고 그 사람을 따라 김근식, 송국찬 넷이 심양에 도착했다.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도 자동차 파는 곳을 안다는 사람이 자동차 파는 사람을 못 만났다며 차일피일 미루기에 기다리다가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간 다음 우리는 의심스러워 그 사람의 보따리를 들춰보았다. 조선녀성의 루추한 옷 한벌과 소학생 공책에 형님, 동생이란 글자외에 아라비아 수자만 몇 개 쓰여 있었다.   우리는 사기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려관을 나와 심양시 뜨락또르제조공장(拖拉机制造厂)에 다니는 동창생 도영국(都英国)을 찾아 심양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말하고는 헌 차라도 사게 련계해 달라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지금 단위에서 차를 마음대로 살 수 없고 팔 수도 없으며 자동차는 국가의 계획에 따라 분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알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알라에 와보니 알라의 새 농촌 건설사업중 세가지 난관에 부딪쳤는데 하나는 목재문제였고 두번째는 수도 박을 파이프 문제며 세번째는 지붕에 얹을 세멘트기와인데 기와 한장의 무게는 약 여섯근으로 길림에 가서 사오려면 돈도 많이 들지만 운수가 제일 큰 문제였다.   닥친 곤난은 하나씩 해결해야 했는데 먼저 목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사에 찾아가 소개신에 도장을 받고 길림서관(西关)목재가공공장에서 목재를 사려니 “시내만 공급하고 대외는 상대하지 않는다.”고 딱 잡아떼기에 말도 못하고 밖에 나와 애꿎은 담배를 피웠다. 목재가 이렇게 많은데 어째서 팔지 않는가하고 두덜거리고 있는데 팔에 붉은 완장을 낀 사람이 꽥 소리를 질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차! 금연! 나는 농촌에서 왔기에 몰랐다고 사과하면서 웃는 얼굴로 익숙한 사람을 묻듯이 목재가공공장의 조과장네 집이 어딘지 생각나지 않는다며 거처를 물었다.   조과장네 집은 공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알려주어 찾기가 쉬웠다. 나는 이튿날 입쌀 10근(당시 쌀이 매우 귀했다)을 과장집에 가져다 그의 마누라에게 주었더니 얼른 받아서 침대 밑에 넣는 것이였다.     다음날 또 조과장을 찾아갔더니 소개신을 보고나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다 해결한 뒤 나에게 정황을 묻기에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알라에 벽돌공장이 있으니 기건과장(基建科长)을 찾아가서 벽돌을 팔겠다고 말해보라 했다.    기건과장을 찾아가니 나이는 40세 좌우이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벽돌문제를 말했더니 자기네 공장에서 창고를 짓는데 10만장의 벽돌이 수요되여 지금 각 곳에 련계중인데 벽돌이 질만 좋으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알라벽돌은 질이 일등급이고 한장에 4전이라고 했다. 왕과장이 난제가 해결되여 좋아할 때 우리는 목재가 수요되니 공소과에 가서 우리에게 목재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왕과장이 쾌히 승낙하여 우리 두사람은 조과장을 찾아갔다. 조과장은 목재를 주겠다고 승낙했다. 기실은 조과장이 알라에 목재를 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합법적 절차였다.    다음은 수도파이프가 긴급하였다. 집집마다 수도는 박아야 하는데 그 숱한 파이프를 파는 곳도 없고 현이나 시물자국도 계획 없는 강철재료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또 장춘에 있는 송국환과 김근식을 찾아가 얘기하니 국찬의 매부가 리놀륨공장 공소과(油粘纸厂供销科) 과장으로 사업하는데 국환의 매부는 출장 가고 없고 지금 공장에는 1.2촌짜리 파이프는 있는데 팔지 않고 규격이 큰 파이프와 바꿔 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리놀륨공장장(油粘纸厂长)을 찾아가 우리가 농촌에서 왔다고 하면 접대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아 국찬이는 나를 전기용접봉공장(电焊条厂)공소과(供销科)에서 왔다고 하면서 1.2촌짜리 파이프을 먼저 주면 일주일내로 굵은 파이프로 바꾸어주겠다고 했다. 공장장은 아주 좋아하면서 동의했다. 발등에 붙은 불부터 꺼야 했으니 굵은 파이프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후과를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소뿔은 단김에 뺀다고 우리는 급히 수요되니 래일 와서 차로 가져가게 해달라고 했다. 공장장은 래일은 휴식날이지만 급하게 수요된다면 차를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밤새 마음이 뒤숭승하여 잠 한숨 바로 자지 못했다.   리놀륨공장(油粘纸厂)에 들어가 보니 공일날이라 직공들은 출근하지 않았고 보관원은 우리를 기다렸다. 나는 장춘시 전기용접봉공장공소과 배명수(长春市电焊条厂供销科裴明守)가 파이프를 받았다는 사인을 하고 파이프를 차에 실었다.   알라에 돌아오려면 차로하(岔路河),수등참(授登站)에 물자검사참(物资检查站)이 있어 목재나 강철재료 같은 것은 허가 없이 지나가지 못하기에 밤중에 떠나려고 점심때 운전수에게 술대접을 하고 우리 몇은 장춘남호(南湖)에서 놀다가 저녁 무렵 려관에 오니 장춘시 엄단판공실(严打办公室,엄격히 법규를 위반한 자를 다루는 판공실)에서 운전수를 데려갔는데(알고 보니 운전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라 다른 사람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침대 주인이 자기 침대를 비우라고 운전수를 깨우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했다) 나를 오라 하여 책임자인듯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인사를 했더니 그 사람은 문화대혁명시기에 장춘에 와서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지만 농촌에서 왔으니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풀어주었다. 그날 밤 10시경 우리는 알라로 출발했다.   앞에 두곳의 검사참(检查站)을 어떻게 무사히 건너가겠는가 조마조마 했는데 찰로하검사참(岔路河检查站)은 마침 긴 란간도 내려놓지 않았고 지키는 사람이 잠을 자는지 잠시 나타나지 않아 무사히 건너왔지만 수등참검사참(授登站检查站)에 오니 란간이 좀 짧아서 절반 쯤 막혀 있었다. 자동차를 길 옆쪽으로 몰며 속도를 내어 건너다가 자동차 앞부분이 좀 망가졌지만 별 문제 없이 알라에 도착하여 이튿날 아침부터 수도를 박기 시작했다.   약 10여일후 장춘시 공안국에서 영길현 투기장사정돈조직(打击投机倒把办公室)과 련합하여 구성된 3-4명의 공작인원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촌에다 회보한 상태여서 회계 제룡태는 “배명수가 출장 갔기에 저녁에야 돌아올 것이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공사에 가서 김서기에게 알렸더니 공사의 양서기, 김서기와 나는 함께 저녁 무렵에 공안국 사람들을 만나 나는 새농촌건설에 급히 수요되는 수도파이프는 훔친 것도 아니며 먼저 쓰고 후에 갚으려 했다는 사실을 재삼 설명하였다.   하지만 우리 능력으로 굵은 파이프는 해결할 수 없어 하루하루 미루다가 시간이 오래되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결국 공짜로 수도문제는 해결한 셈이었다.   다음으로 닥친 문제는 벽돌집에 덮어야 할 기와인데 경비와 운수가 큰 일이었다. 한장에 5, 6근 되는 그 많은 기와를 어떻게 가져온단 말인가? 부득불 우리는 기와공장을 차려야겠다고 결정했다. 윤주임이 길림시기와공장에 갔었는데 알고 보니 기와 생산은 아주 간단했다. 기와형틀(瓦母子) 200개와 압반(压板) 4개만 사서 틀 우에 올려놓고 반죽한 세멘트와 모래를 형틀(模具)에 올려놓은 다음 압반(压板)기로 잘 눌러서 2, 3일이면 굳어지는데 그 때 형틀에서 떼어내 약 열흘 양성하면 기와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알라의 기와공장은 계속하여 해나왔다.   알라건설중 제일 힘들게 지어진 중, 소학교는 너비 10메터, 길이 76메터 이층집 근 1600평방메터의 큰집을 지어야 하는데 우리 실력으로 말하면 실제는 막막한 일이었다.   이 집을 설계한 사람은 리송교(李松桥)인데 이층에 덮을 콩크리트판은 길이 5메터, 넓이 0.95메터인데 수요량이 160개였다. 사오자니 돈도 없고 설상 돈이 있어 사온다 해도 운수와 싣고 부리우는 것도 난제였다.   그래서 부득불 자체로 만들기로 하였다. 말이 쉽지만 콩크리트판은 품질요구에 도달하지 못하면 특히는 학교라서 우리들의 자식들, 즉 많은 아동들의 생명에 관계되는 큰 일이기에 재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기술을 지도하는 리공정사는 기술만 지도할 뿐이지 후과는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당시 나의 생각은 공정사가 시키는 대로 어김 없이 하면 질은 보증할 수 있을 것이고 콩크리트판(水泥板)을 올려 놓은 뒤 학생들이 인차 들어가지 않고 또 그 우에다 세멘트를 바르게 되니 시간적 여유가 많으니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리공정사에게 신신부탁하여 만들 때 꼭 옆에 붙어있으면서 엄격히 요구하고 감시하게 했다. 그리하여 160개 콩크리트판을 충분히 양성시켜 나무받침대를 세우고 널판을 깔아펴고 밀차에 실어서 우에서 바줄로 당기고 네 사람이 뒤에서 밀면서 올렸다. 처음 올릴 때는 조마조마하였지만 두번째부터는 잘 올려놓아 이층집을 순리롭게 지었다. 지금 이층집을 짓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만 70년대 기술, 설비 없는 농민들에게는 기적이었고 참관을 온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알라의 새 농촌 건설중 운수문제가 제일 큰 난제였다. 우리가 곤난에 처해있을 때(1969년 가을) 마침 현에서 고무바퀴 뜨락또르를 보내주었다. 벽돌공장에 석탄재가루를 실어와야 하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라도 딸리는 형편이여서 자동차 한대를 조립하기로 하였다.     1970년에 첫 자동차를 조립하였는데 우리가 성공적으로 자동차를 조립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군구 부대농장에서 5.7지시를 받들어 음마하에 땅을 맡아 수전을 풀었는데 길림성에서 수전농사는 알라가 으뜸이라는 소문을 듣고 양신영(당시부대농장장)이 알라에 찾아와 도움을 요구했을 때 김서기가 선뜻 동의하고 차경철(2대서기) 등 몇 사람을 보내 논을 풀어주고 모 키우는 기술지도를 하여 농사를 참 잘 되였기 때문이였다.   벼가 잘 자라고 있을 때 양농장장은 나를 요청하여 음마하농장을 구경시켰고 이튿날 자동차공장에 데리고 가 공구분공장(工具分厂) 두(杜)공장장의 접대를 받은 다음 샤시공장(底盘厂)에 가서 장영(张英)서기와 진모영(秦冒榮)공장장과 엽량부(叶良富)공장장을 만나 접대를 받았다. 당시 양신영 공장장은 알라를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새 농촌을 정말 잘 건설한다고 했다. 이 때 샤시공장의 엽공장장이 그 공장에서 림시로 겨울에 쓸 수 있는 자동차 창고가 수요되는데 알라에서 지을 수 있는가하고 제기하자 나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답복하였다.         우수한 길잡이로 떨친 원 알리디 당총지 서기 김룡구 70, 80년대 알라디 새 마을 풍경   그리하여 너비 10메터 길이 15메터 되는 차고를 두주일에 다 지어주고 품값을 주려하자 얼마 되지 않은 품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관계가 대단히 좋아져 자동차 조립에 큰 도움을 주어 자동차를 조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길림성계획경제위원회 주임 미풍균은 원래 제일자동차 샤시공장에서 엽공장장의 부하로 같이 사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일본 50령” 자동차가 길림성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장춘에 가 엽공장장과 함께 성정부에 가서 미주임을 찾아 일본차를 요구하니 미주임은 웃으면서 특별히 비준을 해주어 50령자동차를 가져왔다. 이렇게 알라에는 조립한 자동차 한 대, 고무바퀴 뜨락또르 한대 또 50령차까지 있어 운수문제는 해결되였다.   그후에 알라사적이 신문에도 자주 나고 상급령도들도 많이 왔었는데 길림성 성장 장근생(张勤生), 심양군구사령 심사장(深师长), 중앙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文正一) 부주임,중앙수력발전부 전재영(钱在英) 부장, 중앙군사위원회 후근부 조남기(赵南起, 그는 두차례 알라에 왔음) 부장, 특히 국무원 온가보(温家宝) 총리도 알라를 돌아보고 문기춘(文基春) 집에 들어가 보았다. 그외 길림성, 흑룡강성, 료녕성의 조선족참관단은 헤아릴 수 없이 왔었으며 일부 동남아국가, 태국, 라오스, 파키스탄 손님들도 다녀갔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를 보고는 꿇어앉아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조선량강도도위 서기 등 손님들도 왔었다. 오는 손님이 너무 많아 위생소에 출근하던 손명호(孙明浩) 씨를 대대 부주임이라는 직위를 주고 초대소를 관리하면서 손님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후에는 고문주(高文珠)가 책임지였다.    당시 알라는 성내에 제일 먼저 기계벽돌공장을 꾸려 새 농촌 건설을 하였고 그후 목재가공(설비가 좋았다) 선반기, 용접, 꽃무늬거울공장, 화학비료공장, 세멘트공장, 유기비료공장, 양계부화장, 전문건축대, 양어장 등 공장과 생산기지가 있어 참관 온 사람마다 놀랐으며 대단한 농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내막은 1982년부터 10여년간 새 농촌 건설로 인하여 투자가 너무 많았다. 사원주택은 짓는 족족 사원들에게 분배했는데 일전도 받지 않았고 학교 초대소, 병원, 대대사공실 등은 공가건설로 돈 일전 나오지 못하였고 대대내에 그 많은 기업은 벽돌공장을 제외하고 돈 버는 기업이 없어 본기업의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형편이였다. 대대의 자금래원은 다만 농업에서 루적을 많이 떼기에(17%, 20%) 사원들의 분배가 적게 돌아서 다수의 농민들은 량식값을 떼고 나면 찾아 갈 돈이 얼마 없었다. 로동력이 좋은 사람들은 찾아갈 돈이 좀 있어도 주지 않거나 흉내만 냈다. 그리하여 음력설이 돌아오면 생산대마다 돼지를 잡아 고기 1, 2근씩 주고 때로는 콩기름도 줄 때가 있었다. 그외에 복리는 생각지도 못했다. 극소수의 사원들이 돈 때문에 간부들의 멱살을 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상급이나 대외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돈 없는 경제난이 큰 문제로 되여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정말 딱한 사정이었지만 별 방법이 없었고 그렇다고 상급에 제기할 형편도 아닌데 때마침 할빈가용전기공장(家用电器厂) 리익수(녀)와 공소과 과장 서종발(徐宗发) 두 사람이 샤시공장(底盘厂) 장영(张瑛)서기의 소개로 나를 찾아왔는데 자동차를 조립해달라고 하였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샤시공장 장영은 제1자동차공장 서기로 승급했으며 강택민(江泽民) 주석과 쏘련류학도 같이 했고 강택민 주석이 장춘제1자동차공장의 열전공장(一汽热电厂) 서기로 있을 때 장영은 샤시공장 서기였다.    그리고 샤시공장의 진(秦)부공장장은 제1자동차공장의 부공장장으로, 엽량부(叶良富)부공장장은 제1자동차공장 배치처(调度处) 처장이니 내가 자동차공장에서 알라대대의 일을 보는데 기본상 통달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의 곤난을 해결하기에 아주 편리했다.   이런 기초가 있었기에 할빈가용전기공장에서 자동차를 조립해줄 것을 요구할 때 돈이 없어 헤매던 알라가 돈을 벌기 위해 나는 렴치를 불구하고 자동차의 가격문제를 먼저 말하면서 자체로 자동차를 조립해 보니 경비도 많이 들고 조립하기도 힘이 드는데 아무리 절약한다 해도 원가가 많이 들어 약 3만원 이상 든다하면서 먼저 4만원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더니 할빈에서는 값이 싸던 비싸던 관계 없이(당시 자동차가 귀했다) 그저 조립만 해주면 고맙다고 했다.   그리하여 할빈에서 돈 4만원을 부쳐와 알라는 목마를 때 물을 마신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자동차를 만들 때에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후에 책을 사서 재료를 보고 부속품의 명칭도 알고 자동차의 5대총성 및 부속품의 전부 명칭도 기본상 장악한 기초에 자동차 공장과의 좋은 관계가 있어 2개월 만에 자동차를 조립했고 돈을 부쳐온 지 두달도 안되어 자동차 한대를 할빈에 보내 우리는 경제난을 초보적으로 해결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동차 한대를 조립하는데 돈 만원도 안 들었고 할빈에서 남은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기에 더 많은 수익을 본 셈이다.   또 얼마 안 되어 연변림업국에서 자동차 한대를 해결해 달라하여 돈을 버는 재미도 있고 앞으로 목재 해결에 좋은 조건을 창조하기 위하여 선뜻 자동차 한대를 조립해 주었더니 돈도 벌었고 알라의 건설사업에 목재는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었다. 화룡림업국과 안도림업국과의 관계가 아주 좋아져 목재 래원이 더 풍요롭게 되었고 모든 일이 더욱 순리롭게 해결되였다.   그후 산서성대동시모피공장(大同皮毛厂)에서 자동차 한대를 요구하여 보내주었더니 돈 4만원을 부쳐왔다. 사실은 당시 4만원씩 받았지만 우리는 만원도 들지 않았는데 많은 부속품은 관계망을 리용해 공짜로 가져오는 것이 많았고 큰 부속품은 헐한 값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되여 대대 경제난은 점차적으로 해결되었고 대대의 형편은 풀려나갔다.   대동시모피공장과의 관계는 우리가 자동차를 조립할 때 내가 장춘에 자주 갔었는데 한번은 큰길 근처의 영춘려관에 들게 되어 내몽골사자왕기모피공장공소과(四子王旗毛皮厂供销科)에 있는 성명이 요복(姚福)이란 사람이 키도 훤칠하고 희고 갸름한 얼굴에 숱이 많고 검은 눈썹을 가진 사람이였는데 처음에는 서먹했으나 며칠 지나서는 밥 먹은 후에도 서로 앞을 다투어 밥값을 내려는 사이로 되였다.   서로간에 익숙해진 다음 나는 무슨 볼일로 장춘에 왔는가하고 물었더니 장춘 어느 공장에 양털을 가공하는 기계를 주문했는데 기계가 완성되지 않았다며 대방에서 날짜만 미루고 부쳐주지 않아서 몽골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또 좋은 양털옷감을 달라하기에 며칠내로 옷감이 도착하면 기계를 부쳐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들어봐도 기계는 돈 받고 만들어주면서도 자기들의(개인) 털옷감을 얻으려고 수단을 부리고 있다는 게 뻔하고 격분할 일이었다.   나는 요복에게 나와 같이 공장에 가보자고 하면서 “공장에서 구체관리를 맡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내가 그 자리를 피할 테니 나를 길림시강북기계공장(吉林市江北机戒厂)에 있다고 말하며 이 공장에 양털가공기계가 있다는데 만약 당신들이 기계를 인츰 해결하지 못하면 돈을 돌려달라!”고 말해라 했다. 내가 길림에 가서 바로 사가지고 가겠다고 말하라고 했더니 그들은 그제야 이틀내로 부쳐주겠으니 기다리라하여 려관에 오니 양털옷 두감과 검은 털장갑이 도착해 있었다.   이튿날 요복이 양털옷 한감과 장갑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니 매우 좋아하면서 마침 기계도 다 되엿으니 래일 당장 부쳐준다고 하여 이 일은 해결됐다. 떠나가기 전에 둘이서 술잔을 나누며 그는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면서 남은 양털옷 한감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돈도 없고 그저 가지는 게 미안하여 거절했지만 너무 간곡히 주는 바람에 결국 받고 말았다.   서로 갈라질 때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바쁠 때 서로 돕기로 하였다. 며칠이 지나 요복의 편지가 왔는데 지난 일들이 고맙다고 인사한 후 몽골에는 목재가 곤난한데 동북엔 산림이 많고 목재가 많이 나는 곳이니 조건이 되면 도와달라고 했다. 그 때 나는 길림시강만로(吉林市江湾路)에 있는 21목재가공공장(制材厂)에 목재를 사느라 자주 다녔는데 공소과 과장 조상현(供销科科长赵相贤)을 알게 되여 래왕중 조과장이 자기 녀동생이 나이가 들었는데 대상을 물색해 달라하여 나는 고삼범이라는 총각을 소개했는데 혼사가 되어 결혼까지 했다.  그 때부터 조씨와 나는 서로 친하게 되어 몽고의 목재문제를 말하니 제21목재가공공장의 도장만 찍으면 전국 각지 어디에나 목재를 보낼 수 있는데 이 도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목재는 국가계획에 따라 보내기에 함부로 도장을 찍으면 착오를 범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나라내에서 곤난한 곳에 목재를 줘서 돈을 제대로 받으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고 그 사람들도 감사하여 양털이라도 기부할 수 있으니 목재를 부쳐주라고 권고하자 조과장은 내가 “곤난한 지방에 목재를 부쳐줘 큰 죄가 될 것 없지.”라면서 부쳐 보냈다.   그후 사자왕기(四子王旗)에 송목 한차피를 보냈고 돈 결산도 다 되였다. 사자왕기모피공장(四子王旗皮毛厂)에서는 양털옷과 구두 몇컬레를 감사의 뜻으로 나에게 부쳐왔기에 그 털옷과 구두를 조과장에게 보내주었다.   사자왕기(四子王旗)에서는 력사이래 처음으로 그렇게 좋은 목재가 들어와 전기(全旗)에 소문이 나고 요복의 이름도 날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산서성대동모피공장(山西大同皮毛厂)에서 요씨가 큰 인재이니 요씨를 대동모피공장(大同皮毛厂)으로 조동시키고 가족도 모두 대동으로 이사시켰다.   요씨는 대동모피공장공소과(大同皮毛厂供销科)에서 사업하면서 그 공장에서 자동차를 사지 못하여 나에게 또 도움을 부탁하기에 우리는 돈을 받고 자동차를 조립해 보내주 었다. 그 공장은 민영기업인데 전국에서 이름이 있고 공장장 리자영은 전국 정협위원이였다.(계속)  
9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1 댓글:  조회:616  추천:0  2020-12-21
실화코너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             배명수     배명수                                           머리말:   인생은 흘러가는 류수라고 내 나이가 벌서 80세에 들어섰다. 지나간 인생의 려정을 돌이켜 보노라니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다. 인생은 피고 지는 꽃이라고 보귀한 여생을 좀 더 보람차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로년활동에 참가하고 사회공익활동에도 참가해 보았다. 정작 일손을 놓고 풍요롭고 한가한 나날을 보내다 나니 불현듯 그 무엇을 이 세상에 남겨 보자는 사명감이 머리에 떠올랐다.   알라는 내가 나서 자란 곳이고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일하고 진심으로 분투해온 고장이다. 또 나의 희망과 리상을 실현한 고장이며 오매에도 그리는 정든 고향이다. 겸허하지 못한 자신의 자호감인지는 모르지만 새삼스럽게 나 역시 알라의 번천과 고락을 같이 해온 사람이고 알라가 번영 발전한 력사의 견증자이고 참가자란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겸손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 펜을 들고 알라가 번영 발전해온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나는 알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엄격한 교유과 혁명정신의 영향을 줄곧 받아왔다. 어머니가 나를 낳아 키운 계몽선생이라면 아버지는 나의 본보기였고 나의 인생지향을 인도해주신 선생님이었다. 해방 전 아버지(裴元稷)는 조선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일제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으로 등이 시리고 배가 고파 1928년 무렵 살 곳을 찾아온 고장이 바로 영길현 알라였다. 그 때의 알라는 몇 천 년이나 잠자고 있었던 황무지였는데 이사 온 7호의 농민들이 처음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소학시절의 배명수                                     해방전쟁시기 나의 맏형 배시환은 어린 나이 15살 때 팔로군에 참가하여 남정북전하다가 1947년 울라가 해방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었는데 당시 겨우 18세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해방군 어느 후근부대의 담가대원으로 있었는데 부상병을 나르다가 자기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였지만 전투의 수요로 자식 잃은 비통을 가슴에 간직한 채 눈물을 머금고 다른 부상병의 담가를 메고 진지를 떠났다고 한다. 길림이 해방되고 백성들이 번신하자 지방정부에서는 렬군속가정을 위문하고 량식과 천으로 혹은 논밭갈이로  보조를 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의 아들이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것은 그가 응당해야 할 일이라”면서 정부의 렬사가족보조대우를 단연히 거절했다. 그후 해마다 번번이 렬사가족모범상의 표창을 받았다. 1956년에는 영광스럽게 전국소수민족참관대의 성원으로 선정되어 북경에 가서 모주석 등 중앙령도 동지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만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존경하는 아버지는 림종시 나를 보고 “너는 어릴 때부터 내가 중히 여기고 믿어온 아들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네가 당조직에 몸을 담고 시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알라에 뿌리박고 알라사람들을 위해서 제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일을 봐줬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시고 이 세상을 떠나갔다.   알라는 전세기 광복전후와 해방전쟁시기부터 우리 겨레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와 민족정책의 관심배려속에서 중화대가정의 일원으로 된 자신감과 나라의 당당한 주인으로 된 자호감으로 시종일관하게 시대발전의 앞장에 서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 눈부신 성과를 취득하였고 한 시기는 전 성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우리 조선족의 마을이었다.   알라 사람들은 전쟁시기에 우수한 청장년들이 적극 참군하여 총탄이 쏟아지는 전선으로 달려갔고 후방에서는 담가대를 조직하고 군수물자를 적극 지원하여 전선지원모범마을이라는 영예도 지니게 되었다. 해방 후 토지를 분배받은 알라 사람들은 들끓는 열정으로 생존을 위하여, 나라에 더 많은 알곡을 바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배들처럼 습지를 개간하고 벼종자를 개량하여 해해년년 징구량임무를 초과 완성하였다. 인민공사 후기부터 빈곤을 내몰고 생존환경의 개선을 목적으로 새 농촌건설을 다그쳤고 향촌기업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 고향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 빠짐없이 땀을 흘리며 힘과 지혜를 다 바쳤다. 그래서 생활수평이 일정한 정도로 제고되었고 집체경제도 현저한 발전을 가져왔으나 끊임없는 정치운동과 좌적로선의 영향으로 고향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제한되어있었고 집체나 개인의 경제수입과 집체경제발전 역시 제한을 받아왔다.   한시기 우리 당과 나라가 “사회주의 초급단계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은 구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중대한 문제의 정확한 답안과 옳바른 도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심지어 침통한 실패의 공통을 겪기도 했다. 그 대가로 수많은 백성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굶어서 죽는 사람도 있었던 우리 당의 교훈과 곡절이 우리 알라에서도 다소나마 재현되였었다고 본다. 지금 다시 이 력사를 회고하노라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의 총설계사인 등소평 동지가 제시한 개혁개방의 도로와 당중앙 11기 3중 전회의 결의가 얼마나 영명하고 정확했다는 것을 더 한층 심각히 느껴진다.   이 기회를 빌어 오래전부터 알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피땀 흘리며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로서기 김룡구 선생님을 비롯한 알라사람들에게 충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알라의 해방과 건설사업에서 공헌하시고 심지어 보귀한 생명까지 바친 렬사들과 선배들 및 알라에서 출세하여 전국 각지에서 공화국의 혁명과 건설 사업에서 성과를 취득한 고향사람들에게도 뜨거운 경의를 드린다. 이 책이 나오도록 성심껏 도와주고 수고해주신 문학애호자협회 회장님들과 편집 선생님들 및 특히 허정애 선생님과 한철근 선생님께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린다. 2016년 12월 12일                1. 알라의 래력   알라! 알라는 우리나라 수천만 농촌마을중 평범한 이름이겠지만 이 이름 속에는 우리 겨레들이 80여년이란 기나긴 세월 속에서 슬픔과 웃음, 피와 땀, 지어는 생명을 받쳐가면서 걸어온 태평산 아래 곱게 피어난 한폭의 아름다운 꽃 같은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알라디”라는 단어는 만족어로 언덕이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언덕 앞은 전알라(前阿拉), 언덕 뒤는 후알라(后阿拉)라고 불렀고 내가 지금 말하는 곳은 언덕 아래에 있기에 알라디(阿拉底)라고 불렀다. 알라의 총면적은 약 500쌍 좌우이고 그중 농토면적은 400쌍이 좀 넘는다. 동, 남, 북쪽은 산과 언덕으로 련결되어 주위에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둘러서 있는 모습이 마치 마을을 둘러싼 대자연이 천연적으로 만들어놓은 평풍 같다. 서쪽은 산 하나 볼 수 없는 망망한 평원인데 천지의 한 줄기인 송화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묘지를 선택하거나 마을을 세울 때 먼저 풍수를 보아 반드시 동쪽이 높은 곳이어야 하고 그 앞에 수원(水源)이 있으면 좋은 터라고 했다 한다. 원인은 중국은 동이 낮아 모든 하천은 동으로 흘러가기에 동이 낮으면 복도 흘러가 버린다고 했고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풀이해서인지 알라는 동이 높은 산들로 솟아있고 서쪽에는 송화강이 흐르기에 복이 흘러가지 않아 살기 좋은 곳으로 된 것 같다.    알라의 들판은 지대가 낮아 군데군데 샘물이 솟아나며 습지와 포자(泡子)가 매우 많았고 갈대와 쟁피, 그리고 줄풀, 미나리도 많으며, 큰 포자에는 련꽃, 말밤과 물고기도 많았다. 승냥이 울음소리도 가끔 들을 수 있었고 너구리, 여우, 토끼 등 짐승들도 많았다. 당시 조선족 김유관씨가 이런 짐승을 잡아왔었다.    우거진 수풀 속에는 물오리, 물닭, 아름다운 물새와 파랑새 그 외 이름 모를 새들이 하도 많아 6-7월이면 둥지를 틀어 알을 까고 오리새끼들은 가을이면 떼를 지어 놀다가 서리가 온 후 새끼들이 날개가 튼튼해지면 어미가 데리고 더운 곳으로 날아가곤 했다. 이른 봄이면 수백 마리의 기러기떼들이 날아와 쉬어갔는데 어떤 사람들은 낚시에 미꾸라지를 미끼로 끼워 기러기를 잡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내가 포자에 놀러갔을 때 갈대와 줄쟁피가 꽉 우거져있는데 복판의 물 많은 곳에서 어미오리가 새끼오리들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포수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오리무리에 총질하자 새끼는 풀숲에 도망해 들어갔고 포수의 총을 피해 날아갔던 어미오리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새끼들이 걱정돼 다시 날아왔다. 어미오리의 부름소리에 새끼오리들이 다시 모였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매복해 있던 포수가 다시 총질하여 어미오리를 잡아버렸다.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나는 어미를 잃고 숲속으로 사라진 새끼오리들이 매우 가련해 보였다. 새끼를 위해 목숨 잃은 어미오리가 너무 불쌍하여 그 포수가 얼마나 밉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알라는 그 옛날 부모들이 조선에서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에 살아갈 수 없어 1934년에 이민으로 중국의 만주땅에 발을 붙여 천년 묵은 황무지 개간으로 시작된 곳이었다. 당시 알라를 개척하신 분들로는 남현호(길림에서 사업함), 정광호(정병수의 아버지), 고판동(고윤범의 큰아버지), 장도관(장분덕의 아버지), 배원직(배명수의 아버지), 주상열, 최갑봉(최주이의 큰아버지) 등 일곱 분들이었다.   집은 주위 가까운 한족툰에 림시로 집을 잡았고 처음으로 논을 풀기 시작한 곳은 알라사람들이 말하는 팔로땅이다. 철뚝 북탄산 서쪽 언덕아래는 샘물터가 많았고 또 그 물량이 많아 그 물을 리용하여 농사 짓기로 작정했다(지금도 물이 난다).   처음으로 지은 벼농사는 “일본 북해도”라고 하는 붉은 털벼였는데 무상기가 짧고 밥맛은 특별히 좋았지만 산량이 낮아 정작 뼈 빠지게 농사 지은 사람들은 입쌀밥을 먹을 형편이 못되어 잡곡죽과 나물로 기아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알라에 조선족들이 살게 되었는데 그 후 한 두호씩 더 모여서 조선족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제일 먼저 있은 집은 워팡인데 (지금 동네에 들어서면 썩 훗날 집지을 때 모래를 판 구덩이자리, 지금의 양어장 자리인데 원래는 마을에서 지대가 제일 높은 지대였다) 앞은 포자였고 다음으로는 영매팡자(후알라로 가는 길 퇴수 도랑 옆), 장가팡자와 버들팡자에 점차적으로 주민이 불어나면서 동네가 형성되었다.   인구가 불어나 논을 더 풀려고 하니 물이 모자라 후알라 북쪽 산비탈 물을 받아 곡강을 튀웠지만 그래도 물이 모자라 할 수 없이 알라에서 10리 떨어진 화수강에 보를 막아 오대툰(五代屯) 뒤로 도랑을 내어 알라까지 물을 끌어왔다.   마을이 점점 커지면서 학교도 세웠고 학교가 있게 되니 전단툰(前团屯)에 조선족이 약 20호가 살고 있었다(홍두섭, 남천수, 박두섭, 주상열 등). 오대툰(五代屯)도 근 20호(서윤택, 배리환 등), 화수촌 10여 집, 서양무에도 근 30여호(전중열, 손명호, 리기용, 김성동 등), 동양무 조가툰, 고산툰 등에 수십호(손승익, 오월분, 한영기, 김무일 등)가 살았는데 동양무와 조가툰(30리 거리) 학생들은 알라에 기숙하였고 다른 곳의 학생들은 모두 점심을 싸가지고 통학하였다.   그후 기차가 통하면서 막석, 깡요일대 그리고 길림 합달만과 기반가 일대의 조선족 학생들은 모두 알라학교에 다녔는데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을 키싸쓰각새이라고 불렀다. 당시 학생들은 200명이 넘었다.   나는 그때 소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었지만 일본놈들이 침략하여 식민지처럼 통치하고 있어 학교에서는 조선말을 근본상 할 수 없었고 만약 무심결에 한마디 하는 것이 들통 나면 벌을 서야했다. 당시 조선족교원으로는 장경렬 등 조선족이 대부분이었다.     2. 고난의 생활   1941년부터 3년 사이 전국적으로 전염병(홍진과 장질부사)이 심하게 돌아 알라에는 사람들이 많이 사망되었고 백성들을 공포 속에서 떨게 하였는데 당시 우리 집에서도 어머니와 누님은 괜찮았으나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남동생, 녀동생까지 네 사람은 전염병에 걸려 아버지는 머리가 많이 빠졌고(후에 다시 자라났다) 나도 사경에서 겨우 헤어나와 목숨을 부지했지만 다섯살 되는 녀동생 시남이와 두살짜리 남동생 정환이는 돈이 없어 아무 방법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다가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 당시 너무도 가난하여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쌀미음 한 숟가락 먹이지 못하고 그저 앙가슴을 쥐어뜯으며 죽어가는 자식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 마음을 지금 생각해 보면 가슴이 저미는 듯 짜릿하게 아프다.    당시 알라에는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가정에 재앙이 덮쳐들었는데 어떤 가정은 아이 하나만 남기고 부모가 다 전염병으로 저 세상으로 떠나 가버린 집도 있었다. 그 때 알라에서 40-50여명이 사망되엿고 전염병이 돌고 있을 때는 사람들의 왕래가 금지되여있었지만 우리 민족들은 죽음을 꺼리지 않고 마을의 초상집 장사에는 술을 많이 마시고 소독하는 의미에서 서로간에 후사를 도와주곤 했다. 고통스러운 생활에 또 놓여진 재앙 앞에서 알라사람들은 굽힘 없이 헤어 나왔고 전염병이 좀 뜸하자 부지런히 일하여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있을 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철뚝길에는 소련군인의 자동차, 대포 및 군대들이 지나갔으며 뒤숭숭한 그 세월에 조선족부녀들은 얼굴에 검뎅이를 바르고 헤어진 옷을 꿰매지 않은 채 람루하게 입고 다녔다. 낮에는 강냉이밭에 숨어지냈는데 영문 모르는 어린 나이의 나는 그저 어른들의 행동이 우습게만 생각되엿다.   그런중에도 도둑이 기승을 부려 대낮에도 헌옷가지와 조금밖에 없는 식량, 콩이며 팥 같은 것들도 보이는 것이면 남기지 않았다. 도둑들은 사람은 해치지 않고 물건만 빼앗아갔는데 옷도 헐벗었고 생활이 너무 가난하여 살기 힘든 알라 주위의 한족들이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알라사람들에게 새로운 봉변이 닥쳐왔다. 비록 전국적으로 해방은 되엿지만 팔로군과 국민당의 전쟁이 계속되어 밤과 낮이 구별 없이 총소리 그칠 새 없었다.    알라의 사람들은 전쟁의 공포 속에서 부득불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에 늘어선 피난민들은 지계에 이불이나 또 짐 위에 아이들을 얹어 가지고 가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가는 사람, 걱정 어린 얼굴에 힘없이 걸어가는 피난민들의 움직임은 정말로 처량해보였다.    그날도 하루 종일 항요(缸窑)까지 걸어가 비어있는 큰 량식창고 같은 곳에서 몇십명이 밤을 새우고 아침에는 냄새 나는 강낭가루 푸대죽으로 요기를 하였는데 항요 서쪽에서 총소리가 계속 나며 국민당이 쳐들어오기에 또 떠나서 서란(舒兰),신개림(新开林) 등 곳으로 서로 갈라져 피난길에 나섰다. 당시 우리 집은 황니허자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 곳은 아주 깊은 산골이라서 모기와 쇠파리가 얼마나 많은지 소에는 땡파리가 피를 빨아먹고 간 자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대낮에도 쑥불을 머리에 달고 일하는 것을 보았다.     3. 또 다시 알라에로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디로 가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지방의 원래 본토배기들은 당지생활에 습관되여 조금 괜찮았지만 우리는 얼굴이 부어나며 수토에 적응하지 못해 견딜 수 없어 얼마간 있다가 원래 살았던 곳인 알라로 다시 돌아왔다.     알라로 돌아와 보니 집은 그대로 있었으나 이불 하나 없이 물건이란 건 다 없어진지라 텅 빈 집에서 어구들은 옷가지에 발을 밀어넣고 밤을 지새워야만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산나물과 풀뿌리로 연명했는데 그릇이란 바가지뿐이였고 반찬이란 소금뿐이어서 날마다 밥과 반찬이 따로 없는 나물죽이었다. 나도 나이가 어렸으나 살림에 도움이 되려고 들판에 나가 쑥대 한단씩 하거나 마른나무를 주으러 다녔다.   1947년 가을, 울라가(乌拉街) 해방전쟁이 끝나자 그 해 겨울에 정부에서는 연변에서 100여호 조선족을 이사시켜 알라에는 200여호의 조선족이 살게 되였고 후에 점차 북길림, 항요, 화전, 심양일대 사람들까지 이사를 와 알라에는 300여호의 조선족마을로 되였다. 그 때 한족은 한호도 없었다.   그 시기 촌장은 남영달씨였다. 근로하고 소박한 알라사람들은 부지런히 황패했던 습지와 갈대밭을 옥토로 개간했고 벼농사로 나라에 공헌이 많아 1956년에 촌장 리종원(李钟元)씨는 전국농업모범대회에 참가하여 북경에 가서 영광스럽게 모주석 등 중앙령도 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그해 10월에 배원직(나의 아버지) 씨는 렬군속모범으로 전국 소수민족참관단에 참가하여 모택동, 류소기 등 당중앙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다.             길림시인대 상무위원과 함께 인민대회당 앞에서 왼쪽으로부터 리충환, 박광현, 김룡구, 배명수 그 외 박기순씨는 1965년 국경절, 청년관람대에 참가하였고 모주석 등 국가 령도동지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김룡구 서기는 중공중앙 제10차 대표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나는 제3차, 제4차 길림시당대표대회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은 알라 사람들의 끊임없는 분투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보람찬 알라 사람들의 영광이 아닌가.   1962년의 통계에 의하면 울라가공사(乌拉街公社)는 전 영길현에서 제일 큰 공사인데 27개 생산대대에서 알라의 렬군속이 47호였고 그 인수는 전공사의 1/4을 차지했으니 알라 사람들이 우리 나라 해방전쟁에서도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잠깐 올라가 해방전쟁의 과정을 이야기 하려 한다. 1947년 8월의 어느 날 울라가 해방전쟁을 하게 되는 총소리가 요란스럽게 났지만 걱정 말라는 구정부의 통지로 알라사람들은 태평한 세월이 올 것이라는 마음에 모두 기뻐하였다.   그때 나는 저녁을 먹고 동무들과 함께 달도 없는 저녁에 학교 쪽으로 갔을 때 장로(张老)방향에서 총소리가 드문드문 났다. “옳다, 이제 울라가를 해방하는 것 같다.”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점점 총소리는 잦아지고 하늘에는 빨간색, 푸른색 신호 총알이 날기 시작하여 우리는 호기심에 촌공소 제일 높은 곳인 지붕위에서 멋도 모르고 그 장면을 구경했다. 철 없던 어린 시절 류혈의 해방전쟁에서 많은 친인들을 잃을 수 있고 네가 사느냐? 내가 사느냐? 하는 참혹한 전쟁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후에 어른들이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는 했다.   이튿날 날이 새기도 전에 담가에 부상병 8명이 실려 학교마당에 왔다. 뒤에는 군대 둘이 따르고 부상병들을 메고 온 사람들은 국민당 포로들이었다. 부상병중 어떤 사람은 앓음소리를 냈는데 그중 한사람은 작탄에 맞아 엉덩이 살이 다 떨어졌는데 얼굴에 덮인 옷을 제껴보니 이미 희생되였었다. 전우가 희생되어 한 군인은 격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부상병을 메고 온 국민당 포로를 총으로 쏴죽이려 하자 알라 사람들은 후과를 고려하여 제발 죽이지 말라고 말렸다.   알라 사람들은 이 참담한 장면에 마음이 끌려 미음을 끓여와 부상병들에게 대접하려 했지만 상처가 너무 엄중해 그들은 한 숟가락의 미음도 넘기지 못했다. 알라 사람들은 안타까운 나머지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아침 먹을 무렵 아버지는 주섬주섬 옷을 주어입으시며 담가대로 전선에 간다면서 죽만 조금 마신 뒤 우리 남매에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부탁을 하고 나가셨다. 그 때에도 울라가에서는 계속 요란한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나고 있었다. 우리 집은 4월말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버지와 누님 그리고 나까지 세식구가 사는 어머니가 없는 썰렁한 빈집이었는데 아버지까지 담가대에 가신다고  하니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남매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 것도 모르지만 외로움의 공포로 울지도 못하고 말없이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날 12시가 넘어 총소리가 뜸해지더니 총소리가 멎었다. 누님과 나 둘이서 하루종일 집안에서 아버지를 기다렸으나 오시지 않았다. 이튿날 점심때가 좀 넘어서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기척에 문을 차고 나가 아버지를 맞았으나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멍하니 계시다가 나에게 “뒷집에 사는 삼촌에게 아버지가 돌아왔다”고 이르고 불러 오라 하셨다.   얼마 안지나 삼촌과 숙모, 그리고 또 몇이 왔는데 아버지가 고개를 떨구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번 담가대에 갔다가 시한이(나의 형님)가 희생된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왔다.”라고 하시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였다. 삼촌은 억이 막혀 “이런 일이 어디 있냐.”며 실색하는데 누님의 흐느끼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오고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배명수의 어머니                  배명수의 아버지(배원직)   며칠 지나 아버지와 삼촌 그 외 몇 사람이 울라가에 형님묘지를 찾아갔다. 절간 동쪽 평지인데 많은 묘들이 줄지어있었는데 풍속에 따라 조선족 묘는 땅을 파서 묻었고 한족렬사는 관체를 땅위에 놓고 그 위에 삽으로 흙을 파 몇 삽 떠서 묻어놓았는데 아마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그랬던 것 같았다. 묘지를 관할하는 사람이 장부책을 가져와 첫번째 묘는 세 사람이 묻혀 있는데 첫번째 사람은 성이 배 씨라고 하여 삽으로 좀 파보니 연필로 배시환(裴时焕)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때에 아버지는 형의 이름이 적힌 글자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쉰 후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나도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형의 묘지에 술을 부어주며 “전우들과 함께 잘 있어라."하고는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울라가양진묘(阳珍庙)에 갔는데 제일 치렬한 전투가 마지막으로 끝난 곳이라고 했다. 그리 높지 않고 삿갓처럼 생긴 산 우에 절간이 한채 있고 뒷벽은 포탄에 맞아 큰 구멍이 뚫려졌다. 중간에는 아름드리 붉은 기둥이 있는데 절반이 짜개져 겨우 지붕을 받들고 있었으며 집은 모두 검은 내화벽돌로 쌓았지만 벽돌에는 총알에 맞은 상처로 온전한 벽돌은 아예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울라가전투에 참가한 형님은 언덕을 넘다가 총알에 맞아 “악”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져 희생되였다. 이 사연은 다리에 총알을 맞아 부상당한 홍두섭(알라 사람) 씨의 얘기에서 전후를 상세히 알게 되었다.                                            울라가에는 길림의 국민당군대 주력이 있어 울라가를 해방하지 않고는 길림 해방은 불가능하기에 당시 울라가 해방 계획은 꼭 실현해야 했다. 계획은 저녁부터 강을 건너 밤 사이에 울라가 주위의 적들을 소멸하고 날이 새면 울라가 개성을 해방할 계획이었다. 비록 많은 군대를 투입시켰지만 당시 무기가 우세였던 국민당이 양진묘방어가 너무나 세어서 전쟁은 계획대로 순리롭지 않았다.   배명수의 아버지가 계실 때 1930년의 가족사진      양진묘의 동북으로는 큰 토성이 둘러쌓여있고 토성 밑은 사람들이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를 팠으며 구덩이 밑에는 날창을 꽂아놓아 사람이 빠지면 날창에 찔리게 해놓았다. 두차례 진공은 실패로 많은 살상자를 냈다. 세번째 진공임무를 장교덕이 거느리는 부대에 맡겼다. 장교덕영의 5, 6, 7련은 대부분이 조선족이고 알라 사람들이 제일 많은 부대다(홍두섭, 배시환, 최주이 아버지, 김해근, 배수환, 배리순, 배리순 남편, 유춘호, 리만식 형 등…).   장교덕부대는 임무를 맡고 토성 밑까지 갔으나 머리만 들면 적들은 양진묘의 높은 곳에서 기관총을 내려 쏘기에 진공하기 힘이 들었다. 이 때 장교덕이 권총을 빼들고 신속히 토성을 넘어가지 않으면 군사처벌을 하겠다고 호령하고 일제히 토성을 넘기로 명령했다. 그리하여 사상자도 많았지만 성공적으로 양진묘를 탈취하여 마지막 승리를 쟁취했다. 그 때부터 장교덕(원 영길현병원 원장 장인덕의 동생, 길림시로년협회 비서장 장성학의 삼촌) 씨는 이름을 날린 조선족지휘관이었다.   중국 해방전쟁이 기본상 끝날 무렵 조선의 김일성이 소련, 중국을 방문하고 조선 통일을 위하여 조선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의 조선족부대 두개사를 비밀리 조동시켜 두만강을 건너 인민군 복장을 갈아입힌 후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장교덕씨는 4,4,10련대 대대장으로 전쟁에서 크게 이름을 날린 군사지휘관이었다.   알라 배룡환씨는 울라가전쟁부터 장교덕씨와 같이 있었고 또 조선전쟁까지 갔다가 제대했는데 돌아올 때는 중성 한개를 단 퇀장급 군관이였다. 장교덕씨는 조선전쟁에서도 명성을 날렸지만 불행히 적의 폭격에 희생되였다. 그가 희생되자 중국신문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알라에서도 영웅의 사진을 걸어놓고 성대한 추도식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계속)  
8    6. 나의 가정 댓글:  조회:489  추천:0  2020-11-26
6. 나의 가정   남아가 크면 장가 가고 녀자가 크면 시집을 간다. 나는 1962년 12월에 우리 마을의 처녀 리춘자와 부부가 되어 46년을 보냈다. 그동안 부인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두 아이를 키우느라 많은 고생을 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꾸준하고도 열심히 살림을 꾸리면서 나의 사업을 지지하였다. 그런 연고로 나는 언제나 미안하고 량심의 가책을 받는다.                            우리는 결혼한 후 두 곳에서 생활을 하였다. 부인은 큰 아들이 10살, 작은 아들은 3살 때까지 친정에 있으며 아이들을 키웠다. 아무리 친정부모라 하지만 시집 가서 십여년을 부모에게 의탁하여 사는 것은 어느 정도로 고통스럽고 처가집에 말할 수 없는 부담을 주었다.    내가 사업의 수요로 해외방문을 갔기에 1년에 한번의 가족방문휴가를 받을 기회도 없다. 1972년 여름, 두 지역의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5.7”간부학교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정식으로 조직에 전근신청을 했다. 반년이란 어려운 기다림 끝에 조직에서는 끝내 나의 전근신청을 비준하였다. 1972년 12월 26일, 연구소 인사부문은 길림시 혁명위원회의 동의를 거쳐 1973년 1월 3일에 나의 당안을 길림시혁명위원회에 부쳤다. 길림시혁명위원회의 연구를 거쳐 1월 9일에 전근령을 내렸고 나는 1973년 3월에 길림시 혁명위원회 생산지휘부 계획조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두 지역의 생활은 해결했지만 발을 붙이고 잘 집이 없어 나는 시혁명위원회 남성숙사에, 부인은 녀성숙사에서 잠을 자고 밥은 식당에서 먹었다. 부인은 길림시 룡담구 제3초등학교(기반가)에서 글을 가르쳤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야 돌아왔기에 몹시 힘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단위 숙사에서 1년 넘게 계속 두 곳 생활을 하였다. 1974년 여름에 조직에서 두칸짜리 집을 나눠주어 결혼후 처음으로 집이 있게 됐다. 우리의 살림은 아주 단촐하였기에 이사하는 날에 니야까(手推车)를 빌려 두 사람의 옷과 책 같은 물건을 한차에 실었다. 그리고 북산 석탄소매부에서 석탄 한 니야까를 샀다. 밥상과 장롱을 사고 싶었는데 결혼증을 내놓으라 한다. 그러나 동란시기 결혼증을 어디에 놓았는지 찾을 수 없어 구들 우에 종이장을 깔고 밥상을 차렸다. 그래도 심정만은 좋았다. 이 광경을 본 장인은 느릅나무로 서랍이 3개가 달린 책상과 작은 의자 4개를 만들어주었다.             약혼사진                        회갑때 부인과 함께   가을이 되면 석탄배(煤坯)를 디디야 하며 가을배추를 사야하는 일들이 많아 바삐 서둘렀다. 우리 집에서 기관으로 출근을 할 때 자전거가 없어 매일 40분을 걸어야 했다. 기관의 마흥주는 이 광경을 보고 나에게 자전거를 살 수 있는 표를 주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월급은 56원, 부인은 37원이니 156원을 달라는 봉황패 자전거를 사기에는 무척 어려웠다. 나는 사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나의 부담을 들려고 부인은 처가에 가서 돈 100원을 꾸어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장인이 일찍 세상을 떠서 갚아주지 못하여 감개무량하다.          가난하면 손님이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더니 내가 중년이 되여서야 완전한 집이 있게 되니 친척과 친구들이 집 구경하러 많이 왔다. 한달에 매인당 육류 반근과 콩기름 석냥을 공급했으니 손님 대접에 부인이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해야 했을가...   70년 동안 온갖 풍파를 겪고 나니 나는 이미 황혼에 접어들어섰지만 자손들은 대성황이다. 두 아들은 공무원이고 두 며느리는 직원이며 손녀는 대학을 다니고 두 손자는 초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만리장성에서 부인과 함께                 천지에서 부인과 함께                                      나의 작품- 이 곧 마무리를 하게 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태산 같은 당의 은덕이다. 만약 당이 없었다면 나의 일체가 없다. 나는 또 내가 행운아라고 생각된다. 나의 경력은 험난했지만 항상 험난한 어려움 속에서 전화위복이었다. 나는 또 근심걱정이 없고 자손이 가득하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나는 만족하며 비록 생활은 부유하지 않지만 아무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대사기   1936년 7월 6일(음력 5월 18일)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창길 3리에서 출생. 1943년 1월, 안평면 국민우급초등학교 입학. 1944년 4월, 영길현 오리하자향 백마부촌으로 이사. 1944년 4월, 오리하자향중심완소에 입학.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고 휴학 1945년 9월, 집에서 일함. 1946년 가을-1948년 3월, 백마부촌에서 아동단 단장을 맡았다. 1948년 4월, 오리하자중심완전소학교에 다시 들어가 공부했다. 1950년 12월, 오리하자중심완전소학교 졸업. 1951년 2월, 길림시조선족중학교에 입학 1951년 12월 신민주주의청년단에 가입. 1953년 7월, 길림시 조선족중학교 초중졸업. 1953년 9월, 길림시 조선족중학교(고중)에 입학. 1956년 7월, 길림시 조선족중학교 (고중) 졸업. 1956년 9월, 중국인민대학 농업경제학부에 입학. 1957년 6월, 반우파투쟁에 참가. 1960년 7월, 중국인민대학 졸업. 1960년 8월, 대학 졸업할 때 중국과학원 세계경제연구실에 분배. 1961년 8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1961년 10월, 하북성 창려현 통계과에서 기층단련. 1961년 10월, 모친 리화로(李花露 1893년 5월 25일-1961년 10월 6일)별세. 1962년 12월, 리춘자와 결혼. 1964년 3월, 중국기업고찰단 비서. 통역으로 조선 방문. 1964년 5월, 중국무역대표단 통역. 1964년 9월, 북경세계과학토론회 통역. 1964년 11월, 료녕성 금현 대고산공사에서 “4청”사업대를 책임짐. 1965년 10월, 북경 방산현 남상악공사에서 “4청”공작대 지도원. 1966년 6월, 중국과학원 세계경제연구소에서 문화대혁명에 참가. 1970년 3월, 하남 식현 “5·7” 간부학교에서. 1970년 9월, 아버지 박재성(1892년 12월 27일-1970년 9월 13일) 별세. 1971년 6월, 하남성 명항에서 계급대오 청산에 참가. 1972년 6월, “5·7” 간부학교에서 중국과학원 세계경제연구소에 돌아옴. 1973년 3월, 길림시 계획위원회로 조동. 1983년 7월, 길림시 계획위원회당조 성원, 부주임.  1985년 5월, 길림시 계획위원회당조 서기, 주임. 1986년 9월, 미국 방문. 1989년 3월, 한국, 태국, 홍콩, 오문 방문. 1990년 12월, 투자유치를 위해 한국 방문. 1991년 6월, 《대외경제 업무지침》이란 책을 편찬함. 길림성과학기술출판사에서 발간. 1992년 12월, 로씨야 방문.  6, 7, 13차 시당대표대회 대표, 7차 중공길림시위원회 위원, 시10, 11차 인민대표, 시 7차 정협위원. 시택시협회, 시통계협회, 시환경과학협회 명예회장, 시장애인협회 부회장, 시경제계렬 기술직무(职称)평가위원회 주임. 1993년 1월, 11차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당조성원. 1996년 8월, 로씨야 방문. 1998년 7월, 퇴직. 2000년 3월부터 2014년까지 길림시차세대관심위원회 주임   프로필   이름: 박규식(朴奎植)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창길 3리에서 출생. 길림시 조선족중학교(6년제) 졸업. 중국인민대학 농업경제학부 졸업. 중국과학원 세계경제연구실 사업. 길림시 계획위원회당조 서기, 주임. 길림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당조 성원. 2000년 3월-2014년 길림시 차세대관심위원회 주임. 
7    5. 계급투쟁 댓글:  조회:320  추천:0  2020-11-26
5. 계급투쟁 계급사회에서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철이 들면서 눈으로 보았거나 경과한 계급투쟁은 수차례나 된다. 인상이 비교적 깊은 것은 토지개혁, “3반”, “5반”, 반혁명 진압, “4청”운동, 문화대혁명과 계급대오 청산 등이다. 1957년 여름, 내가 대학 1학년때에 한차례 열렬한 반우파투쟁이 시작되였다. 법률학부 3학년인 녀동학 림희령(林希翎)은 학교 례당에서 공산당을 반대하고 흐루쑈브의 “비밀 보고”를 격정적으로 연설했고 공업경제계의 갈패기(葛佩琦) 선생은 공산당은 “일당독제”이기에 자본주의의 “량원제(两院制)”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급투쟁은 육친도 가리지 않는다. 공업경제학부에서 공부하고 있는 오옥장이 가장 귀여워한 외손자도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대자보를 써 붙였다. 우리 학년의 몇몇 학생들도 농업고급사는 너무 빨랐고 쏘련의 원동 100여개의 마을은 원래 중국의 령토라는 등의 대자보를 써 붙였다. 잠깐 사이에 대명대방(大鸣大放)이였고 대자보와 대변론이 란무했다. 조용하던 교정은 질서가 란잡했으며 선생님은 강의를 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수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명대방이 지난 뒤 우리 반을 제외한 우리 학년의 기타 3개 반에서 6명이란 우파를 잡아냈다. 전 학년 학생의 5%를 차지한다. 당시 나는 중국어능력과 문자수준이 낮아 회의에서 발언도 하지 않았고 대자보를 쓰지도 않아 나의 관점은 피력되지 않았기에 다행으로 재난을 피면하게 되었다. 이번 반우파투쟁에서 우파로 인정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우파로 내세우는 바람에 계급투쟁이 확대하였고 지식인들은 감정을 상하게 되였다. “4 인무리”를 분쇄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의 모자를 벗기고 정책을 시달했다. 1964년 가을부터 1965년 여름까지 나는 두차례 농촌 사회주의교육운동 즉 “4 청(정치, 경제, 사상과 조직을 청산)”에 참가하였다. 제1차는 료녕성 김현(金县)에 갔었다. 시험적으로(试点) 가는 인원이 방대하였고 단장은 료녕성당위 백잠(白潜) 부서기였고 분단장은 우리 연구소 부소장인 하석린(何锡麟 행정 8 급)이였다. 나는 대련 감정자(大连甘井子) 파출소 최보성(崔保盛) 소장과 함께 대고산공사 우툰(于屯)에 분배받았다. 우리는 “4청”지휘부의 요구대로 농민들과 같이 자고 먹으며 같이 일을 하고 “다섯가지를 먹지 말라"는 지시에 따라 입쌀, 물고기, 고기, 알(닭알, 오리알, 거위알 등)과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곤난방문을 통해 빈하중농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군중을 발동하여 생산대의 장부, 사원의 공풀장부를 조사하면서 생산대 간부들을 모두다 “층계를 디디고(上楼)”, “손발 씻기(洗手洗脚)"를 진행했다. 실제로는 생산대 간부들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다. “4청”운동의 조직처리단계에서 나는 대량적인 내외 조사재료와 정책에 근거하여 한 “력사반혁명분자”의 모자를 벗기고 한 “반 사회주의 청년”도 규정했으며 한 “부농자제”도 혁명군인성분으로 고쳐주었다. 두번째 “4청”운동은 북경시 방산현(房山县) 남상악(南尚乐)공사 진강영(镇江营)에서 지도원직무를 맡았다. 여기의 “4 청”운동은 1기와 같아 조직처리단계에서 1938년 공산당에 가입한 로당원을 정책적으로 제명했다. 그는 나쁜 일이라면 다하는 온갖 악한이였다. “4청”은 극좌 로선의 지도하에 “당내에서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처리하는 일이였지만 사실은 문화대혁명이 농촌에서 예고된 것이다. 계급투쟁시대에 부분적인 사람들의 한을 시정하고 나쁜 사람을 다스리는 일은 큰 위험성이 존재했다. 그러기에 나는 문화대혁명기간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그래도 무사했기에 내가 한 것은 옳았다고 본다.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나는 방산에서 “4청”운동을 하고 있었다. 1966년 6월에 연구소에서는 우리에게 연구소로 돌아와 문화대혁명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발송했다. 나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문화대혁명의 메시지를 좀 알고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은 문화예술계의 일이지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연구소에 돌아와 보니 상황은 달랐다. 가는 곳마다 연구소 당조직에 질문을 들이대는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전에 정치 표현이 그다지 좋지 않는 사람들은 팔장에 홍위병 완장을 차고 위풍을 부리며 거들먹거려 짙은 계급투쟁의 화약냄새가 풍겼다. 내가 연구소로 돌아온 이튿날 오전에 연구소 당조(所党组)확대회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당조회의에서 어떻게 문화대혁명을 이끌고 어떻게 군중을 발동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회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홍위병과 반란파가 회의장에 몰려와 이 회의는 문화혁명을 파괴하고 혁명군중운동을 진압하는 “검은 회의(黑会)”라고 당조직을 비난했다. 반란파와 회의참가자들은 이튿날 새벽까지 격렬한 쟁론을 하였다. 그들은 당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모두 자기의 관점을 밝히란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당조직의 회의는 반혁명회의라고 했지만 나는 이번 당조직의 회의는 절대 “감은 회의”가 아니라는 태도를 명백히 표시하였다. 이 태도로 인해 내가 문화대혁명에 참가한 이튿날 나는 당위를 보호하는 “보황파”란 모자를 썼다. 이번 회의가 끝나자 당조직은 옆으로 물러섰다. 운동이 심입되자 운동을 령도하기 위해 상급에서 공작대를 파견했다. 한번은 공작대를 철소하는가 아니면 계속 남아있겠는가에 대해 변론이 있었다. 나는 변론대회에서 공작대는 많은 일을 했으니 응당 우리와 함께 계속 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공작대 보호자”란 문화대혁명의 두번째 모자를 쓰게 되였다. 당시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웠으며 지나친 억압에 문화대혁명에서 “출신이 좋지 않았던” 우리 몇 사람도 “홍기전투대”라는 홍위병조직을 건립했다. 전투대가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7년 여름, 우리 전투대의 류진방(刘振邦)이 쓴 대자보를 나더러 붓글씨로 쓰라 했다. 내가 얼핏 보니 대자보는 강청(江青)을 비판한 문장으로 언어가 너무 공개적이여서 상대방에게 꼬리 잡힐 가능성이 많았다. 일부 동지들과 상의를 거친 후 문자에 약간의 수정을 하였는데 말투가 좀 완화되였으나 얼핏 보아도 야심가와 음모가 강청을 비판한 것임이 한눈에 안겨 왔다. 대자보를 그날 저녁에 천안문 성벽에 붙여놓았다. 이 대자보는 큰 일을 저질렀다. 이튿날 북경이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우리는 “반동조직”으로 몰렸고 반란파들은 우리 전투대원들을 잡으려 날뛰었고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우리는 다시는 연구소에 있을 수 없어 어떤 사람은 숨어있었고 어떤 사람은 달아났다. 나는 반석 처가집에 가서 석달 넘게 숨어있었다. 나는 극심한 심리적 압력과 두려움으로 몇날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신이 황홀하여 반년간 진정제를 먹지 않으면 안 되였다(실제는 정신병환자가 먹는 약). 나의 머리는 큰 손상을 받았고 기억력이 감퇴되여 경상적으로 이것저것을 잃어버리곤 한다. 하여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령혼을 촉진하는 문화대혁명은 나를 병신으로 만들었으며 나의 똑똑한 머리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혼란한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1969년, 상급에서 로동자, 해방군 모택동 선전대를 파견하였다. 우리 연구소는 전체 직원이 106 명이 되였으나 “중재구(重灾区)”로 선전대 인수가 무려 52명이나 된다. 거의 1대 2의 비률이다. 선전대로 온 사람들은 만만치 않아 문제를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려 했다. 그들이 주둔한 후 첫번째 명령은 우리를 집중시켜 땅바닥에서 자란다. 이전에 우리는 푹신한 침대와 의자가 있는 서이호텔 북배루(西颐宾馆北配楼)에서 기숙하여 조건이 좋았다. 그들은 우리 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이렇게 좋은 데서 사니 모두 수정주의 싹이지!” 그들이 온 후, 두파의 군중을 련합시켰고 연구소도 군의 명칭대로 련대(连队)라고 고쳤으며 식사할 때도 줄을 섰다. 우리는 매일 아침에 청시하고 저녁이면 회보하였으며 어록을 외우고 충절무를 추었으며 낮에는 부근 공사에 가서 로동 “개조”를 해야 했다. 내가 처음으로 계급대오를 청산하는 운동에 참가한 곳은 하남성 식현(息县) “5·7”학교이고 후에는 하남 명항(明港)의 한 병영이었다. 림표 1호 호령으로 북경에 있는 정치위험분자와 리기분자를 외지로 분산시켰다. 류소기, 등소평 등은 이런 배경하에서 외지로 쫓겨 갔다. 중직기관“中直机关”을 “5.7”대학교라는 이름으로 모두 외지로 분산시킨 것은 실제는 고대 류배(流放)의 변종이였다. 우리 “5.7”학교는 하남 식현 동악(东岳)공사에 있었다. 식현 경내에 몇십개의 이러한 중직기관간부학교가 있었다. 동악은 내가 가본 지역중 자연조건이 가장 나쁜 고장이다. 회하범람구(淮泛区)에 속해 끝없는 평지로 봄이면 7, 8급 이상의 바람이 불어 지붕이 날려갈 념려로 마을 사람들은 흙벽돌로 쌓은 나지막한 집을 지었다. 남쪽방향에 세수대야만한 구멍 하나를 남겨 햇빛이 쬐여들도록 했다. 여름철 기온은 40℃까지 접근하여 밤중 전에는 잠을 잘 수 없었고 밭일은 해가 뜨기 전과 해질무렵에 했다. 어느 날 오후 조끼를 입고 채소밭 일을 하는데 뜨거운 해빛에 쪼여 등에는 팥알만한 빨간 물집이 총총히 튕겨났다. 그곳은 점토땅였고 비가 자주 왔다. 비가 오면 질척한 흙이 발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걷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비만 그치면 땅땅해진 땅은 곡괭이날도 찍혀 들어가기 힘들다. 낡은 풍습에 전기가 없었으며 식량창고도 없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볼 수 없었다. 공사간부들의 로임은 매달 30원도 안되였으며 손목시계를 찬 공사간부가 아주 적었다. 그곳은 목재가 없어 학생들의 책상, 걸상과 농민의 량식 저장창고도 모두 점토로 만들었다. 돼지우리도 없어 돼지와 사람이 한 집안에 있다나니 주방도 돼지우리 같았다. 너무 가난해서 도적이 욱실거리였는데 50대 사람들은 거의 다 도적질을 하였다. 그들은 문학연구소에서 집을 지으려는 목재를 하루밤 사이에 훔쳐갔다. 공사를 통해서야 비로소 잃어버린 목재를 찾아올 수 있었다. 우리는 낮에는 벽돌을 구워 집을 짓거나, 농사를 하거나 채소를 심었으며 저녁에는 계급대오를 청산했다. 잔혹한 투쟁과 무정한 타격으로 전체 간부학교에서는 7~8명이나 자살을 했다. 어떤 사람은 목매여죽고 어떤 사람은 층집에서 떨어져 죽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팔을 베였다. 가장 비참한 것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 싫어 끓는 물을 입에 부어넣어 혀와 목이 익어 다시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일이였다.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학교는 시체를 삿자리에 둘둘 감아 그 자리에 묻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한 사람은 국경절에 술을 마실 수 있는 틈을 타서 한번에 술 두근을 마셔 알콜중독에 걸렸고 일주일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깨어났을 때는 벌서 페인이 되여있었다. 이번 계급대오 청산은 모두가 심사대상이었고 그중 5분의 1은 중점심사대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각종 정치모자를 쓰고 징벌을 받았다. 물론 당의 11기 3차 전체회의에서 오류를 바로 잡았고 정책을 시달하였지만 이것은 뒷이야기다. 나는 간부학교에서 후근패(后勤排) 취사반에 분배받아 구매와 채소 심는 일을 하였다. 취사반장은 장씨로서 장문천(张闻天)의 전문료리사였다. 조직에서 장문천을 외지로 쫓아내자 그는 우리를 따라 이 학교로 왔다. 장문천은 준의회의때부터 중공중앙 총서기 직무를 맡았으나 려산(庐山) 회의 문제로 모주석의 동의하에 우리 경제연구소에 와서 특별연구원으로 되였다. 그의 사무실은 우리 사무실 옆에 있었고 그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여 우리는 그를 “문천동지”라고 불렀다. 나는 장반장의 요구대로 가까운 시장에서 채소를 사오군 했다. 그곳은 저울에 달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눈짐작으로 값을 매겼다. 나는 책에서 돼지의 목, 키, 길이와 배를 보고 통돼지의 무게를 계산하는 공식을 본 적이 있어 내가 사온 돼지는 항상 돼지 머리와 내장이 더 남았다. 하여 상급의 칭찬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돼지 한마리를 사서 돌아오는데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차에서 깜빡 졸다가 전신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깜짝 놀랐다. 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극도로 긴장한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돼지 찾으러 내려갔다. 다행이 다리가 묶인 돼지는 달아나지 못하고 달빛 아래에서 꿀꿀거리고 있었다. 너무 기쁜 나는 “'돼지할아버지’, 당신은 나의 목숨을 구했소!”라고 소리 질렀다. 이것은 내가 간부학교에 와서 가장 기쁜 일이였다. 간부학교에서도 재미 있는 일과 우스운 일이 있다. 이 지방은 비료가 없으면 곡식이 자라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광주리를 등에 메고 돌아다니며 거름을 준다. 어느 날 그들이 문학연구소 주둔지에 오니 작은 키에 머리가 큼직한 로인이 변소 옆에 작은 걸상에 앉자 책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변소에 들어가 분변을 퍼내고 있었으나 그는 못 본 척 하였다. 그들은 그 로인이 바로 모주석이 지명하여 비판한 중국의 홍학(红学)권위 류평백임을 알자 거기에 와서 분변을 훔쳐가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많았다. 류평백이 변소를 지키니 문학연구소의 변소는 날마다 깨끗해졌다. 그후 주총리의 의견에 따라 류평백을 북경으로 모셔왔다. 북경으로 돌아온 그날 류평백은 왕부정(王府井) 식당에서 북경오리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당당한 학문권위가 밥 먹다가 죽었다고 하니 참으로 비참한 일이였다.  
6    4. 기타 사업 댓글:  조회:267  추천:0  2020-11-26
4. 기타 사업    외사사업   나는 사업의 수요로 로씨야, 미국, 조선, 태국 등 국가와 홍콩, 오문 그리고 기타 외교사업과  통역사업도 했다.    외국 기업의 관리경험을 배우라는 박일파 부총리의 지시에 따라 국가경제위원회가 조직을 맡고 국가경제위원회(国家经委)에서 고찰단을 조직해 철도부, 농기계부, 기계부, 방직부 등 몇개 부,사(국)로 구성된 중국 기업관리 고찰단을 만들어 1964년 음력설을 쇠고 조선의 대안전기공장에 가서 3개월 동안 기업관리를 고찰하였다. 단장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 동신(董晨)이였고 당시 28세인 나는 번역 겸 비서사업을 맡았다. 우리는 조선에서 아주 높은 대우를 받았다. 조선정부 김일 제1부수상이 전체 대표단원을 접견하고 기념사진을 남겼으며 목란봉극장에서 가무를 관람시켰다. 이어 1964년 6월, 나는 중국무역대표단을 따라 조선 경내에서 두달간의 고찰을 하였다. 외무부 부장 리강을 단장으로 내가 통역을 맡았다. 조선정부 리주연(李周渊) 부총리는 고찰단의 주요한 인원을 접견하고 기념촬영을 했으며 회담에도 참석했다.       조선에서 김일 제1부수상과 함께              외사 활동   방문기간에 리강 부장이 쓴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시를 내가 번역하였고 조선로동당 중앙기관지 《로동신문》의 제1면에 실렸다. 그러나 몇년후 이 시는 리강 부장에게 큰 우환거리로 되였다. 시비를 전도하는 문화대혁명 년대였던 1970년 여름, 외무부 리강동지의 안건을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군대표가 우리 “5.7” 간부학교 군대표 리자옥(李子玉)의 안내로 나를 찾았다.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리강은 3반(三反) 분자로 이미 붙잡았으며 그가 조선에서 외국과 내통하였으며 조선수정주의를 추겨 올리는 시를 내가 변역하였기에 리강의 문제를 철저하게 적발하라 했다. 리강동지는 장기적으로 주총리의 신변에서 사업하였으니 취흥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들이 리강을 타도하는 것으로 주은래 총리를 타도하자는 추악스런 목적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나는 “모릅니다.” 혹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란 말로 그들의 질문을 거절하였다. 나의 견결한 태도를 보고 “五七” 간부학교 군대표는 나의 당적을 제명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분노한 나는 그들과 론쟁이 벌렸다. 하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당신들은 나의 당적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통역사업은 힘 들고 긴장하며 자칫하면 실수할 위험성이 컸다. 1964년 가을, 우리 나라에서 “북경세계과학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는 건국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국제학술토론회로서 국가에서는 전문적으로 북경에다 규모가 거대한 과학회당을 지었다.    이 토론회에서 나는 곽말약과 화라경 등 유명인들에게 통역을 하였고 대회 개막식 주석의 통역도 맡았다. 개막식은 장엄한 인민대회당에서 14개 언어로 동시통역을 했다. 개막식은 조선대표단 단장이 주최하였고 나는 동시통역의 제1번역이여서 내가 한마디를 번역하면 기타 어종이 나의 번역에 따라 동시번역을 하였다. 번역실은 크지 않지만 초가을이라 실내는 무더웠다. 비록 선풍기는 돌아가지만 온몸은 땀투성이로 되었다. 개막식의 오전 행사가 끝나고 회의 집행주석이 휴식을 선포하자 나는 “북경세계과학토론회 페막”이라고 번역하였다. 비록 한글자 차이지만 이것은 내가 여태껏 통역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너무 긴장하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기타 동료들이 정신을 가다듬어 나의 잘못을 뒤따르지 않았기에 엄중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다.    통역사업은 가뿐하고 즐거울 때도 있다. 나는 통역으로 주은래, 진의, 곽말약, 리사광 등 지도자들이 주최한 연회에도 참가했다. 장엄한 인민대회당에서 우리 나라 각지의 명료리를 먹어보았고 외국 손님을 모시고 조국의 명승고적과 아름다운 풍경도 구경했었다. 1973년 북경에서 길림으로 조동해온 후 나는 시대외경제련락판공실에서(내부적으로는 계획위원회의 한 직능 부문이다) 사업을 하였다. 이 부문은 우리 시의 대외경제 원조와 기타 방면의 원조 업무를 책임졌다. 원조를 받는 국가는 우리 나라와 우호적인 국가였다. 대외원조의 내용은 제품 및 물자 지원, 실습생 양성과 의료대 파견 등이다. 우리 시에서 지원하는 기업과 단위는 국가, 성, 시를 포함한 대중기업과 일부 단위이다. 나의 직책은 지원하는 기업과 단위가 제때에 훌륭히 임무를 완성하도록 조직, 협조, 지도하고 지정한 기간과 질을 보장하며 대외원조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 시가 원만히 대외원조임무를 완성하는 것은 원조를 받는 나라와의 우정과 단결을 증진시키고 우리 나라의 국제지위를 높여줌에 일정한 작용을 했다.    투자유치는 경제업무이자 중요한 대외업무이기도 하다. 개혁개방의 끊임없이 심화됨에 따라 우리  시 경제건설은 신속하게 발전했고 투자유치임무는 더욱 긴박하고 번중하였다. 투자유치를 잘하기 위해 나는 시계획위원회에 투자유치처를 설립하고 주관하여 우대정책을 정하고 시정부에서 발표하고 실시하였다. 나는 여러번 외국에 가서 대상 인입과 투자유치 등 활동을 하였고 시내에서 각국의 외국 상인들과 여러차례 협상하였고 그중 일부 대상은 이미 락착되였다. 우리 시의 투자유치를 촉진하고 규범적이고 투자유치의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나는 “대외경제 업무 지침”이란 책을 편집하여 1991년 6월에 길림성과학기술출판사에서 출판, 발행하였으며 동업자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민족사업   우리나라는 다민족 국가로서 민족사업을 잘하는 것은 국가의 통일과 단결, 사회 안정과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과 정부에서는 언제나 민족사업을 중요한 위치에 두고 관심이 컸다. 우리 시는 소수민족이 모여사는 지역으로 35개의 민족에 소수민족이 43만명이나 되며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한다. 그중 조선족이 17만명으로 조선족의 산재지역중 조선족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그들은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서 피땀을 흘렸으며 새중국의 건립과 조국보위에 불멸의 공훈을 세웠다. 사회주의혁명과 건설, 개혁개방시기에 부동한 각도로 자신의 총명과 재질을 기여했다. 조선족들은 민족의 언어, 문자, 문화와 풍속습관 등을 잘 보존하고 있다. 나는 국가 간부로서 그들을 위해 힘과 능력을 이바지하는 것은 나의 책임과 의무이다.    1987년초 시당위에서는 시계획위원회에 영길현 춘등(春登) 공사 흥광(兴光)촌이란 빈곤한 마을을 지원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임무를 받은 나는 관련 부서의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마을에 가서 고찰했다. 흥광촌은 50여호 인가로  60-70헥타르의 수전이 있으며 모두가 조선족이다. 이 마을은 원래 유명한 량식 생산촌이며 현에 큰 공헌을 했었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물도랑에 물이 없고 가뭄이 들어 련속 2년간 량식 한알도 거두지 못했다. 사원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종자도 없고 먹을 것도 모자랐으며 심지어 간장과 소금 살 돈도 없는 형편에 17만원이란 빚까지 걸머지고 있었다. 하여 마음이 흩어지고 정서가 극단적으로 떨어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기근으로 인한 피난민으로 전락되렸다. 당지부도 마비되다 싶이 되여 춘경시기가 닥쳐왔는데도 그 해의 생산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제를 료해한 후 나는 기관에 돌아와 주임사무회를 소집하고 빈곤을 퇴치할 방안을 제출하였다. 구체적인 방안은 펌프우물(机井) 두개를 파서 관개할 물을 해결하고 만근의 식량배급표를 모아 량식을 농민들에게 주고 보통 가격의 비료를 얻어오며 도로에서 촌으로 가는 길을 닦고 종자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농업을 주관하는 담당주임 세명의 사업일군들을 거느리고 마을에 주둔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주둔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농촌사업에 익숙하였으며 그중에 나는 일부러 동복항(佟福恒)을 파견하여 빈곤 구제를 맡도록 하였다. 동복항은 문화혁명때 작은 실수가 있었기에 입당 토론도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가 농촌에 내려가면 빈하중농의 재교육 받는 데 도움이 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특장을 발휘하여 빈곤을 퇴치하는 데도 리로웠다. 50세에 가까운 그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농민들과 함께 펌프 우물 두개를 팠다. 이 우물은 생명수였으며 풍년의 물이었다. 이 마을은 당년에 풍년을 맞이하였고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당시 길림시 시장  왕운곤과 함께                    길림성당위 하죽강 서기와 류수림 부성장과 함께      남은 문제는 어떻게 치부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심중하게 고려한 후 나는 계획위원회에서 가장 젊은 부처장 손량언(孙良彦)을 뽑았다. 그는 길림재정경제학원을 졸업했고 자질이 좋았으며 경제적인 두뇌가 있었고 경제방면의 지식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착실하게 일하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대담하게 산나물 가공공장을 차리고 양어장과 다양한 민속관광시설을 만들었으며 식당도 운영했다. 그러나 어떻게 관광객을 확보하기 위해 고민하던중에 그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농촌에 오시기를 바랍니다!"란 구호를 제출했다. 그리고 시 외사 및 관광부문과 련락하여 관광객을 모집하였다. 얼마 안 지나 관광객들의 발길은 흥광촌에서 끊어지질 않았다. 마을의 수입이 증가됨에 따라서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전변되었으며 흥광촌은 끝내 빈곤에서 해탈되였다.   손량언은 빈곤촌을 퇴치한 공로로 상급기관에서 여러 차례 칭찬을 받았고 선후로 영길현 부현장, 시계획위원회 부주임으로 발탁되였다. 중국의 농민은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사람을 잊지 않았다. 흥광촌 촌민들은 시계회위원회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여러차례나 나를 초청했다. 나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구실로 거절했지만 그들은 단념하지 않고 다시 몇 차례나 나를 초청하였다.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병원에서 흥광촌으로 갔다. 생각밖으로 마을 사람들은 명절옷을 입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마을 입구까지 마중 나왔다. 감사의 말과 나의 신체건강을 바란다는 표어가 가득 붙었고 심지어 양어장벽에 벽돌로 이러한 표어들이 박혀 있었다. 이것은 내가 겪었던 각종 환영식중에서 가장 성대하고 열렬한  환영식이여서 영원히 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에는 조선족사업단위와 기업이 적지 않다. 그들은 우리 시의 조선족교육과 문화사업, 경제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발전중에서 여러가지 어려움과 문제를 봉착했다.    나는 시조선족유치원을 새로 짓고, 시조선족실험초등학교의 개조와 확대, 시조선족중학교의 확대와 건설, 시조선족군중예술관의 개조와 건설, 시조선족백화상점과 랭면옥 건설 등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광범한 농촌 동포들의 병을 보는 것이 어려워(이들 중 상당한 사람은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하다) 하는 문제점에 비추어 조선족병원을 짓고 싶었으나 퇴직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5    3.일터에서 댓글:  조회:385  추천:0  2020-10-20
3.일터에서 나는 1960년 8월에 사업에 참가하여 1998년 7월에 퇴직하기까지 옹근 38년간 사업했다. 국가 최고 과학연구기관에서 4년간의 대학생활을 거쳐 나는 1960년 7월에 오옥장 교장의 손도장이 찍힌 졸업장을 받았다. 그때 졸업생들은 통일분배를 실시하였지만 매개 졸업생들은 자기의 일생에 관련되는 졸업분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졸업분배 전에 학부(系)에서 한 달 동안 '하나의 붉은 마음으로 두가지 준비를 하고 기층으로 가고 조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자'는 사상교육이 있었다. 학부의 령도는 매개 학생들을 찾아 개별담화로 졸업생의 사상과 희망을 료해하고 졸업배치표를 학생 자기가 쓰기로 하였다. 학부의 령도는 학생들이 작성한 지원서를 종합적으로 균형을 잡아 매개 학생이 가야하는 곳을 정하고 대회에서 통일적으로 공포하였다. 나와 상해에서 온 동창 서경생(徐更生)이 중국과학연구원 경제연구소 세계경제연구실(1964년 세계경제연구소로 고쳤음, 세계경제 연구실을 간칭으로 세경실이라 하겠음)에 배치 받았다. 서경생은 선후로 세계경제연구소 소장, 전국정협 상무위원으로 되였다. 연구소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나의 졸업분배가 반년 전에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당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 외사계통(外事系统)은 졸업 전에 수선 먼저 각 대학교에 가서 대학생을 선발할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연구소는 비록 중국과학원의 소속 부문이었지만 외사부문에도 속했었다. 때문에 반년 전에 나의 당안을 연구소로 가져간 것이다. 나는 내가 세경실에 선출된 것은 정치적 조건외에 학습성적이 비교적 돌출하고 조선문을 잘 알며 자전을 통해 로씨야와 일본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과학원 세계경제연구실 문 앞에서 중국과학연구원 세경실은 같은 업종 중 국가 최고의 연구기관이며 그때 중국과학원의 원장은 덕망이 높은 곽말약이었고 경제연구소 소장은 저명한 경제학자 손야방(孙冶方)이었다. 이곳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학술적으로 조예가 깊고 우리 나라 학술 권위자들이 대부분 여기에 모여있었다. 세계경제연구에 종사한 동지들은 대부분이 귀국 류학생이다. 그들은 하나의 외국어에 능통하며 그 외도 두세개의 외국어를 장악한 지식분자들이다. 세경실은 사회제도에 따라 조를 나누었는데 나는 사회주의조에 분배받았다. 연구업무를 잘하기 위해 나는 매일 맑스-레닌의 저작을 학습했으며 또 대량의 해외 신문과 론문재료를 읽고 급히 수요될 때를 대비해 찾기 편리하도록 카드를 만들었다. 이곳의 사업은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머리를 써야하지만 비교적 지루하고 무미건조하였다. 내가 세경실에서 첫 번째로 작성한 자료는 통과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사민(史敏)조장이 나에게 재료제목과 원고 바칠 시간을 교대하였다. 나는 내가 장악하고 있는 재료에 대해 정력을 몰두하여 자료를 준비해 사전에 보냈지만 이튿날 연구실 주임 학일진(郝一真)이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는 “당신이 쓴 재료는 불합격이요. 돌아가서 새로 쓰시오. 재목과 완성시간은 변동 없소.”하면서 내 앞에서 나의 원고를 찢어 버렸고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돌아온 나는 조장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조장은 “이 제목은 한 중앙 령도가 제출한 것인데 이런 제목은 론문과 달라 정확성, 시기성과 문자가 간결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제야 나는 깨닫게 되었다. 내가 준 재료는 경제론문형식으로 쓴 것인데 문장이 길고 의론도 많이 했다. 뚜렷한 일은 중앙 령도가 시간을 할애하며 길고도 터무니 없는 문장을 볼 리 없었다. 나는 조장의 지시대로 새로 쓴 문장은 제때에 바쳐 첫 관을 넘게 되었다. 세경실에서 사업하는 기간 이러한 임무는 거의 절반 일을 차지하였다. 그후 이런 문제를 만나면 모두 요구에 따라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내가 연구실에 쓴 적지 않은 론문은《광명일보》, 《대공보(大公报)》,《경제연구》,《세계지식》,《시사수첩(时事手册)》 등 신문 잡지에 실려 우리 나라의 경제건설과 수많은 독자를 위해 자신의 마땅한 공헌을 했다. 내가 세경실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1961년 8월 24일, 25세에 나는 영광스럽게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이것은 나의 정치생활 중 극히 중대한 일이었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나의 다년간의 추구와 소원이었고 내가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바라고 바라던 꿈이었다. 그 시대에 지식인들에 대한 당의 정책은 “단결, 교육, 개조”였다. 특히 1957년 반우파투쟁 이후 지식인들의 입당은 상당히 엄격했다. 세경실에는 다년간의 적극분자가 있었지만 반우파투쟁후 한명도 발전하지 않아 반우파 투쟁후 나는 세경실에서 처음으로 입당한 사람이다. 지부서기인 왕화염(王火炎, 나의 입당 소개자 중 한 사람)이 나더러 입당지원서를 써라 할 때 나는 정말 생각 밖이었다. 지부 대회에서 나의 입당 지원서는 통과하였지만 두 달이 넘도록 상급 당조직의 비준이 내려오지 않아 나는 답답하고 괴로웠으나 또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상급 당조직이 나의 입당지원서를 심사할 때 나의 국적은 중국인가 아니면 한국인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조직에서 대량적인 조사를 거쳐 나의 국적을 밝혔고 지부대회에서 통과한 날짜로 나의 입당을 비준하였다. 3년 경제곤난시기, 도시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경실의 일부분 간부들이 기층으로 내려가 단련하라는 상급의 정신이 있었다. 금방 입당한 나도 그 명단에 올랐다. 나에게도 기층에서 단련하고 시련을 겪을 기회가 주어졌다. 1961년 초겨울, 나와 기관의 몇 동료들은 하북 창려현(河北昌黎县) 인민정부에서 1년 동안 단련을 받았다. 나는 쏘련에서 류학한 양미렴(杨美廉)과 함께 현통계과(县统计科)에 배치 받았다. 과장은 고금명(高金明)이고 모두 6 명이 있었다. 창려는 각종 과일과 해산물이 많이 나지만 곤난한 시기여서 맛도 보지 못 했다. 자주 먹은 것은 과채대(瓜菜带)이고 좀 좋다는 음식은 고구마 떡이지만 공급하는 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인차 배가 꺼져 기아로 허덕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난처한 감을 느꼈다. 판공실에는 계산기와 현대화한 수단이 없어 그 많은 통계수자를 모두 주산으로 튕겨야 했다. 나는 대학에서 통계학을 배운 적이 있어 통계표 설계와 통계수자 분석에는 숙련하지만 수판에는 깜깜 무지였다. 숫자를 통계할 때면 나는 손을 댈 수 없어 한과의 동지들이 수판을 칠 때 나는 숫자만 읽고 통계숫자가 나오면 베껴 쓰거나 통계분석을 하는 것뿐이었다. 1961년 말 현에서는 당년의 경제 형세를 종합분석하고 1962년의 경제 예측을 하라고 했다. 고(高)씨 과장은 사업경험은 풍부하지만 지식수준과 문자수준이 높지 않아 매우 난처해하였다. 고 과장은 나와 양동무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임무를 접수한 우리는 기업과 공사에 깊이 내려가 대량의 조사연구를 하였고, 과에서 장악한 통계숫자로《1961년 창려현 국민경제 형세와 1962년의 전망》이란 제목으로 약 만자를 썼다. 현정부에 보고한 후 현장은 이 보고를 보고 높이 평가하였고 또 하북성 정부에 추천하여 성 지도자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며 1961년 하북성 사회과학류의 론문 일등상으로 표창과 장려를 받았다. 1년간의 기층단련은 사상상에서 단련과 제고를 받았으며 실천과정에서 사업경험을 쌓았고 업무도 많이 제고되었다. 나는 1960년부터 과학연구기관에 근무했다가 1973년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13년간 사업했다. 그간 경제리론과 지식을 배워 경제현상과 경제를 분석하는 방법을 장악하였고 실천사업기초를 닦았다. 계획전선에서 나의 업무경력 중 길림시계획위원회에서 근무한 시간이 가장 길었다. 1973년 봄부터 1993년 초까지 도합 20년간 사업했기 때문이다. 또한 10년간의 길림시계획위원회(市计委,간결하게 라 하겠음) 령도직무를 맡았다. 계획경제시기 계획위원회사업은 아주 중요하며 임무가 중하고 책임도 아주 컸다. 그는 정부의 중요한 기능부문으로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의 종합부문이고 정부의 중요한 참모부였다. 시(市)의 인력, 자금, 외화(外汇), 물자 등 4대균형을 통해 원경계획을 기획하고 계획을 통해 년도원경계획을 실시하는 것이다. 시계위의 업무는 다종다양하여 전시의 경제발전과 사회사업의 모든 방면을 포함한다. 로동자 모집, 학생 모집, 대학과 중등전문학교 졸업생 분배, 제대군인의 배치와 분배, 은행 대출, 시 재정자주기금(财政自筹基金)의 사용과 배치, 공업, 농업과 도시건설, 에너지 건설, 교통운수, 교육, 과학, 문화, 위생사업 등에 대한 배치, 외환의 사용과 배치, 강철, 세멘트, 목재 등 3대건축재료의 생산과 분배 및 유색금속, 페품 금속재료의 분배와 자동차의 갱신… 그리고 공업의 생산과 공급, 판매, 농업과 목축업의 생산과 공급, 판매, 에너지 산품과 광산품의 생산, 공급, 판매, 생육 계획과 인구발전 등이다. 계획은 정부에서 제출하고 인민대표대회에서 심사, 비준하여 계위에서 계획을 각 부문으로 시달한다. 계위가 내린 계획은 지령성적 계획이어서 어떠한 지방과 부문을 막론하고 모두 계획내에서 활동하고 노력하여 계획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으로 보아 계위사업이 얼마나 번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사업의 수요로 계위에는 필요한 기관이 많았고 인원이 많았다. 계위에는 비서, 종합, 공업, 에너지, 농림수(农林水), 기초건설(고정자산 투자), 재무(财贸), 사회사업, 물자, 절약, 투자유치(招商引资, 광고와 선전으로 상가들의 경영을 흡인하고 외지역의 자본을 끌어들이는 일), 국토, 광산, 제3산업 등의 처실(处室) 및 정보센터(信息中心) 등 16개의 부문으로서 인원은 100여명이나 되였다. 계위의 업무를 잘 처리하려면 반드시 당의 방침 정책과 상급 의도를 파악하는 것 외에 하급부문의 상황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상급의 상황이란 주요하게 성과 국가의 계획부문을 말한다. 오직 상급기관의 계획동향을 똑똑히 파악하면 우리 시를 위해 더 많은 항목, 자금과 계획을 쟁취할 수 있다. 나의 노력과 국가계위에서 근무하는 대학교목동반 동창인 왕춘정(王春正, 료양 사람, 선후로 국가계위의 상무부주임, 중앙재경 판공실주임을 담임했음)의 방조로 우리 시는 매년 국가로부터 몇억원의 자금을 얻어왔다. 내가 계위의 령도 직무를 담임한 이래 국가로부터 도합 수십억원의 자금을 지급받아 우리 시의 경제와 사회사업의 발전에 사용했다. 상급 계위부문의 사업을 잘하기 위해 나는 매년 상급기관에서 활동한 시간이 적어도 두달이 넘었다. 아래의 상황이란 시(市)의 상황을 정확히 장악하는 것이다. 시의 상황을 정확히 장악해야만 자신이 있고 계획이 객관에 부합될 수 있다. 나는 자주 기업과 농촌에 내려가 조사연구에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계위업무를 잘하려면 성실해야 하며 덤비지 말고 가짜를 조작하지 말고 실사구실하여야 한다. 과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원칙을 견지해야 하며 시기를 다투고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어떤 때는 개별적 령도가 결정했거나 교대한 문제가 합리하지 않고 과학적이 못된다고 판단되면 나는 절대 그의 의사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하여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일하기 힘든 사람(难办事), 로팔판(老八板), 혹은 상급에 대항(抗上)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계위사업의 성질과 특점을 모르고 하는 말이였다. 일단 계위의 실제상황을 알게 되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행동이 옳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계위의 일은 너무 힘이 들어 재간이 있는 사람은 하지 않고 능력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 말은 도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리붕, 추가화, 고디 등 령도와 함께 나는 계위에서 지도자로 일하는 동안, 길림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의〈6.5〉계획과〈7.5〉계획을 주최하여 제정하고 실시하였다. 주요 대상으로는 길림섬유공장(化纤厂)과 반도체공장의 확대와 개조, 화단맥주와 점분공장의 새 대상 건설과 확대, 길림제지공장 개조와 오프세프 신문지 대상의 기술 도입, 소형자동차공장 확충 건설, 기술 도입과 제1자동차공장과의 련합 회담, 분진(奋进)기계, 동풍화공, 영녕선반기수리공장 등 작은 3선 기업의 이사(搬迁)와 계획, 성시 내의 강(江) 구역의 홍수 제방 건설, 대중형 땜의 새 항목 건설과 개조, 기본 농전건설, 길림대가(吉林大街)를 개통하고, 길풍(吉丰) 동선을 건설하고, 길림1중, 5중, 시 실험소학교 등 일부 중소학교의 새 항목 건설과 재건 개조, 서관호텔, 강성호텔 등 관광호텔의 건설, 중심병원, 중서의결합병원 등 병원 확대와 개조… 이런 대상건설은 내가 모두 직접 주체했으나 사업 중에서 예상 치도 않은 각종 곤난을 극복하며 심혈을 기울여서 실현한 것이다. 이런 대상들은 지금도 길림시 경제건설과 사회사업 중에서 여전히 역할을 발휘하고 있음에 기쁘고 위로로 되니 바친 로동과 심혈은 지당한 것이다. 그리고 계위는 시위, 시정부가 제출한 경제정책과 경제조치 등 경제면에서 참모역할을 잘해야 한다. 례하면 권리를 하급기관에 부여해 기업의 생기를 쟁취할 정책, 경제개발구의 건설과 시계획구조 조절, 송화강물을 장춘으로 끌어올리는 등 중대한 경제문제상의 조치는 내가 주도하여 쓴 것이다. 그 외에 정부에서 맡긴 응급사무도 제때에 완성하였다. 1987년 여름, 길림이 큰 홍수로 풍만수력발전소는 긴급경보를 울렸다. 당시 국무원 부총리인 리붕(李鹏)동지가 길림으로 시찰온다는 소식은 그가 출발하기 전날에 통지한 것이다. 회보보고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시 간부와 명필들이 서관호텔에 모여 바삐 서둘렀다. 그러나 경제문제를 작성할 때 난처했다. 리붕동지가 도착하려던 날 새벽 3시에 나는 집에서 서관호텔로 불려갔다. 나는 호텔의 메모지(便笺)로 경제문제에 대한 보고요점을 완성했다. 오광재 시장이 내가 쓴 보고의 요점대로 리붕 동지에게 보고했을 때 부총리의 긍정을 받았다. 1990년 가을, 시인민대표대회에서는 오광재 시장의 경제에 관련된 문제를 들으려 했다. 보고 작성 임무가 계위에 떨어졌다. 당시 나는 출장을 가서 기관에 있지 않아 집에 있는 동지가 보고원고를 작성하였다. 나는 돌아와 정부상무회의에서 원고대로 보고하였다. 이 원고는 주제에 어긋나서 전혀 쓸 수 없었으나 시인대가 요구하는 시간은 하루 반밖에 남지 않았다. 오광재 시장은 조바심으로 랭정하지 못하였다. 나의 회보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오시장은 듣기 거북한 말로 나에게 퍼부었다. 방금 북경에서 돌아와 아무런 상황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했다. 회의에서 오시장이 한마디 하면 나도 한마디로 대꾸하다 화가 나서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날 시정부상무회의는 그만 아무런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흩어지고 말았다. 점심때가 다 되어 오시장은 전화로 오후 1시에 그의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내가 제때에 도착하니 오시장은 사무실 입구에서 친절하게 나를 마중하였고 또 나의 어깨를 도닥이며 "오전에는 너무 랭정하지 못해 죄송하오. 마음에 담아두지 마오.” 그의 주동적인 사과에 나의 화는 반으로 가라앉았고 나도 나의 잘못을 사과하였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오시장은 회보재료의 전후 사연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이 재료는 인대상무위원회에서 제출한 제목으로서 인대상무위원회가 회보를 받은 기초하에 심사, 결의를 거쳐야 하는 매우 엄숙한 일이었다. 약간의 착오도 허용되지 않는다. 임무는 중요하지만 원고를 바칠 시간이 촉박했다. 그리고 이 재료는 계위에서만 완성할 수 있고 다른 부문에서는 아무른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나는 오시장이 조급하고도 애타하는 심정을 보고 그 자리에서 오시장에게 질을 보증하면서 제 시간에 임무를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시장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임무를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담화가 끝난 후, 나는 오후부터 집에서 재료를 쓰기에 서둘러 밤새도록 재료를 작성하여 이튿날 출근하여 오시장에게 재료를 바쳤다. 오시장은 자세히 원고를 보고 전화로 “재료를 참 잘 썼소, 한마디도 보충하지 않고 수개하지도 않았소. 이미 인쇄공장에 보냈소.” 우리 둘은 전화에서 즐겁고 통쾌하게 크게 웃었다. 그때 나의 웃음은 나의 심혈로 이루어진 성과에 대한 자호감과 긍지였지만 대방의 웃음은 나에 대한 리해와 믿음의 웃음이었을 것이다. 이 재료는 내가 계위에서 사업한 기간에 걸친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원만하고 심혈을 기울인 일이었다. 이런 긴급한 임무는 경상적이어서 나의 사상은 언제나 전쟁준비상태에 처해 있었고 고도의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계위 령도로 부임한 것은 어느 정도로 희극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급의 지시에 따르면 1983년 상반기에 우리 시에서 정치체제 개혁을 실시하고 간부의 4화(四化)정책을 실행하며 자격과 서열을 따져 등급, 대우 등의 고저를 결정하는 일을 타파하여 능력에 따라 간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내가 계위 부주임으로 부임되였고, 계위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내가 계위 령도로 될 수 있는 것은 당시 계위 당조 한부(韩斧) 주임의 역할이 컸다. 한부 주임은 항일 간부로서 20세에 퇀장, 28세에 심양군구 공군작전부장 대령이었다. 그는 애매한 사건으로 제대하여 길림에서 사업하였다. 정책을 락실한 후 1983년에 시정협 부주석으로 임명된 덕망이 높은 혁명가였다. 1981년 계위당조에서 나를 부처장으로 임명하기로 상급에 올렸으나 초령관계로 시위는(계위는 큰 부문으로 처장은 반드시 시당위상무위원회에서 심사하고 비준함) 비준하지 않았다. 1983년, 47세인 나는 시계위 부주임으로 제발할 년령을 초과하였다. 현(퇀)급 간부 제발의 한계 나이는 45세다. 처장을 거치지 않고 나이가 넘는 사람을 제발한다면 자연적으로 심사와 평가가 엄격하였다. 나를 평가하기 위해 시평가조는 한달기간에 계위에 3진 3출하였으며 내가 사업했던 북경에 가서 조사도 하였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시위 제1서기 리진강과 제2서기 원추(原秋)는 단독적으로 나와 담화하면서 문제를 제출하고 나의 견해를 료해했다. 담화과정에 우리는 부동한 의견에 대해 론쟁을 하였고 어떤 문제에 한해서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쟁론할 때도 있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지식분자와 친구를 사귄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나를 평가하고 면접시험을 하는 것으로 마지막 최후의 평가였다. 누가 말하 듯이 정말로 사위를 선택하는 것 같았다. 나는 로켓식으로 승진한 간부이기에 기관 내부에서 경력이 깊고 경험이 풍부한 로동지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얕잡아 보았으며 관망하는 사람, 라태한 사람, 지어 나를 실각시키려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난제를 만들어 웃음거리를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이것은 리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이상하게 여길 것 없었다. 나는 줄곧 공평하고도 내심적으로 청백하며 사업을 참답게 하는 것을 나의 인간도덕원칙으로 삼아왔기에 조금도 꿀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업 중에서 나는 나를 반대했거나 지지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대했으며 간부를 임명하는 기준을 견지하고 원칙을 견지했다. 특히 감정적인 색채를 뒤섞지 않았고 공정하게 처사했다. 그리고 대외적인 일이나 계획 배치, 대상과 자금의 배치를 과학적으로 공평을 견지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견지했다. 자신을 엄하게 다스리고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청렴결백에 주의를 돌렸다. 계위는 실권부문이다. 특히 가격에 대해 두가지 제도를 병행하는 시기여서(双轨) 만약 내가 조그마한 암시가 있었다면 정책에 어긋나지 않고도 빨리 “치부”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사업을 한다면 나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장춘을 두번이나 뛰였으며(그때 한 번 가는데 기차가 빨라도 2시간이 넘게 소요되였다) 북대하에 휴양할 기회도 포기하였고, 완전한 공휴일과 명절도 쉰 적이 없었다. 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노는 데만 정신을 돌리는 사람을 멸시한다. 오직 사업에 열중하고 성적을 내야만 상급을 대할 면목이 있으며 동지들에게도 떳떳이 설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실천이 증명하다싶이 나의 이 선택은 옳았으며 상급과 동지들의 믿음과 존중을 받았다. 령도의 틀로, 권력으로 사람들을 굴복시켜 권위를 가지려 한다면 절대 사람을 탄복시킬 수 없고 오래 갈 수도 없다. 이는 지도간부가 드팀없이 견지해야 할 원칙이다. 총적으로 내가 계위에서 일한 기간에 비록 힘은 들었지만 마음은 유쾌하고 순리로웠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과 난감한 일도 있었다. 내가 계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문화대혁명에서 표현이 “좋지 않다”는 아주 나쁘게 쓴 감정(鉴定)으로 몇달 동안 당비만 내고 당의 조직생활에는 참여시키지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1976 년에 주총리의 “유언”을 추궁하는 중점심사대상이었고 시공안국에 가서 “자수”도 하였고 기관지부 서기가 나를 찾아 담화를 하며 나의 당적을 제명하겠다는 등 이는 특수한 년대에 발생한 불쾌한 일이지만 내가 20년간 계위 사업 중 자그마한 에피소드(插曲)일 뿐이다. 지금까지 나는 계획위원회에의 사업이 아직도 나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며 잊혀지지 않고 계위의 모든 동료들도 나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계위의 매 한가지의 일을 회억하면 오늘까지도 회상할 가치가 있다. 지방기관에서 내가 시계위에서 20년 사업한 후 지방 최고 권력기관인 길림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사업을 했다. 이곳은 1993년 1 월부터 1998년까지 5년간 나의 사업 경력 중 마지막이자 가장 짧은 기관이였다. 시인민대표대회 11차 제1회 전원회의 차액(差额) 투표에서 나는 높은 표수로 시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선거되었다. 주요 원인은 내가 시계위 주임의 신분으로 매년 인민대표대회에서 길림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계획보고를 하여 많은 대표들이 나의 보고를 들은 적이 있어 어느 정도로 인지가 있었다는 것이였다고 보아진다. 시인대대표대회에서 중국인대 고수련 부주임과 함께 시인대상무위원회는 시인민대표대회가 페회기간에 그 기능을 행사하는 지방의 최고 권력기관이다. 그 곳의 사업방법은 행정기관과 달라 명령을 내려 직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1부 2원” 즉 정부, 검찰원과 법원에 대한 감독과 지방법규(法规)를 제정하고, “1부 2원”의 구성인원에 대해 인사면제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한다. 인대(人大)상무위원회의 일상업무는 주로 각 전문위원회를 통해 실현한다. 전문위원회에는 내무사법(内务司法)위원회, 재정경제위원회, 농업위원회, 도시건설환경위원회, 교육과학문화(教科文)위원회, 민족교무외사(民侨外)위원회와 인사대표선거위원회 등이 있다. 나는 인대상무위원회에서 도시건설환경보호전문위원회와 민족교무외사전문위원회를 맡았다. 몇년간, 나는 인대상무위원회에서 지방법률규칙을 제정하고 “1부 2원”에 대해 법적 감독을 실시했다. 지방법률규칙을 제정하는 것은 시인대상무위원회의 중요한 기능이고 극히 중요한 일이다.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시장경제가 지속적으로 개선될 때 특히 박절하고 중요하다. 지방의 법률규칙을 세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시인대상무위원회의 립법(立法)계획에 따라 시인대전문위원회와 정부 관련부문이 공동립법을 진행하기 전의 각종 조사연구, 그리고 선진지역에 가서 고찰하며 정부가 이미 내놓은 행정규칙과 각종 자료를 열독하고 참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상에서 정부 관련 부문에서 법규(法规) 초안을 작성하고 정부에서 심사한 뒤 정부의 명분으로 인대상무위원회에 립법을 제기한다. 인대상무위원회는 정부의 요청을 받고 수선 전문위원회가 관련되는 전문가와 학자, 정부 관련부문이 참여하는 전문위원회의 첫 심의(初审)를 진행한다. 첫 심의를 진행할 때 전문위원회를 주관하는 인대 상무위원회의 부주임이 참석하여 참석자들과 함께 심의(审议)한다. 그후 관련 전문위원회는 인대상무위원회에 첫 심의한 법규와 상무위원회 분관 부주임의 설명을 심의해 줄 것을 제출한다. 인대상무위원회는 전체 인대상무위원이 참석한 상무위원회에서 심의를 하고 투표하여 통과한 다음 성인대상무위원회에서 비준을 받아 실시한다. 보다시피 립법절차는 치밀하고 과학적이다. 지방의 법규의 립법을 위해 나는 경제특구와 경제가 발전한 연해지역을 고찰하여 보귀한 경험을 얻었다. 동시에 관련되는 부문과 기업에 가서 조사하였으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시장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였다. 몇년간 내가 주장하여 새롭게 제정했거나 수개를 거친 지방성 법규가 13부에 달하여 해마다 평균 두부가 넘는다. 주요한 법규로는 도시전망계획(城市规划), 시정설비 관리, 열공급(供热)관리, 파가이주(拆迁) 및 관리, 환경보호, 원림록화 및 시정 환경위생관리 등이다. 이런 지방적 법규는 정부가 법적 행정에 따라 우리 시의 도시건설과 법적 관리를 궤도에 올려 놓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외에 나는 기타 전문위원회가 인대상무위원회에게 심의를 신청하여 각종 지방성 법규를 제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응분의 작용을 발휘하였다. “1부 2원”의 법적 감독은 주요하게 두 가지 방면에서 체현된다. 하나는 매년 인민대표대회에서 시장의 정부사업보고를 심의, 비준하고, 계획과 재정부문의 보고를 심의, 비준하며, 검찰원, 법원의 업무 보고를 심의하고 이에 상응되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 인대대표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법규를 집행하는 검사조를 구성하여 “1부 2원”에 대해 법적으로 법규를 실행한 상황을 검사하여 법에 의거해 위법하면 반드시 다스려 법률의 존엄과 권위를 지켰다. 몇년간 내가 참가하여 법규를 집행하고 검사한 방면은 도시전망계획, 환경보호, 파가이주(拆迁), 도시환경위생, 관광과 종교 등 계렬적인 법률과 법규들로서 유력하게 "1부 2원"의 법률과 법규로 행정 수준을 높이였다. (계속)
4    2. 학생시대 댓글:  조회:433  추천:0  2020-10-08
2. 학생시대   학생시대는 지식이 증가되고 능력을 키우는 시대이다. 나는 비교적 좋은 학교에서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았다.     길림시조선족중학교에서    길림시조선족중학교는 길림시가 해방후 얼마 안되어 일부 조선족 저명인사들이 돈을 모아 건립된 민반학교였고 건국이후 공반학교로 되었다. 길림조중은 1949년 4월 1일에 건립되였고 지금 길림5중 자리였다. 당시 전 시에서 한개 조선족중학교였기에 모집하는 학생수는 적고 입학하려는 학생은 많아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1951년 1월 나와 기타 학생들은 20킬로미터를 걸어서 구전에서 기차를 타고 길림조중에 와 시험을 치렀다. 입학하는 데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학습성적은 반에서 늘 1등을 했으며 1950년도 전 현의 통일시험에서 성적이 앞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적을 공포하는 날에 학생들은 길림조중에 가서 입학되었는지를 확인했으나 나는 우리 집에서 나를 공부시킬 지가 걱정되었다. 입학상황을 보고 온 애들이 내가 입학되었다고 알려주어도 기쁘지도 않았다. 부모님도 걱정스런 모습이었다. 해방후 우리 집은 생활수준이 좀 높아지기는 했지만 형님들이 모두 참군하여 농사일은 늙으신 부모님이 하다 보니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고 어려웠다. 거기에다 여섯째형님이 길림조중에서 공부를 하기에 한 집에서 두 학생의 공부를 책임진다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개학이 가까워오자 어느 날 늦은 저녁에 여섯째형님이 길림에서 집으로 와 아버지를 설득하고 자기는 퇴학하고 나를 공부시키는 조건으로 아버지가 동의하였다. 이로하여 나는 중학교 문을 두드렸다. 학교 기숙사에 가보니 기숙사조건은 너무나도 한심하고 40-50명의 학생들이 한 침실을 써야 했다. 잠자리는 두층인데 벼짚으로 만든 짚방석이었고 석탄난로를 지피고 저녁에 난로가 꺼지면 온도가 급강하여 추위에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당시 항미원조 시기라 저녁에 경보소리가 나면 잠결에 깨어나 방공동굴에 가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어머니가 손수 만든 광목이불을 덮었는데 이불 하나로 나와 형님이 같이 사용하니 늘상 발이 이불 밖에 나왔다. 이때는 나의 손과 발이 얼어들었고 엄중할 때는 마치 잘 익은 도마도 같이 부었으며 가려워 부주의로 긁으면 누런 물이 나기도 했다. 형님은 나를 계속 공부시키기 위해 퇴학하고 사업에 종사했다. 이로부터 나 혼자 쓸 수 있는 이불이 생겼다. 평시 먹는 것은 수수밥에 붉은 콩이었고 채는 무우, 배추국이었다. 화식을 개선할 때는 수수쌀에 입쌀을 섞어지은 밥이며 돼지비계를 좀 넣어 끓인 배추국이었는데 한달 화식비는 7.50원이었다.   우리 집 생활이 곤난하여 학교에서는 매달 3원치의 조학금을 주었는데 이 돈이 바로 나의 한달 화식비와 생활비였다. 1952년 모내기를 하는 계절에 나는 반의 곤난한 학생 몇사람과 연통하여 청가도 하지 않고 교구 이도향 어느 농가 집에서 일을 해주었다. 한무의 벼모를 꽂으면 3원을 벌었다. 우리는 농가집에서 먹고 자고 하며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해가 질 때까지 일하다 보니 하루에 네댓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내가 어릴 때 늘상 수전에서 일하다 보니 경험이 있고 일할 줄도 알아 40여원을 벌었다. 비록 힘들고 곤한 일이지만 돈을 탈 때 그 기쁨은 말할 때가 없었다. 학비문제가 해결되니 실학하지 않았다. 학교에 돌아오니 큰 일이 났다. 학교의 흑판보에 뚜렷하게 통고가 붙어있었다. 일하러간 학생들에게 엄중경고처분을 내렸는데 내 이름이 제일 앞에 있었다. 중국공청단 단원이고, 학생회 초중분회 간사이고 소선대 대대장인 내가 학생을 조직한 고수였기에 수악자를 처분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1953년 7월 학제개혁이 되며 2년반 만에 조중을 졸업했다. 승학시험을 치던 날 끝이 보이지 않는 비가 내릴수록 더 크게 내려 큰물이 났는데 이것이 바로 1953년의 대홍수였다. 기차도 멎고 많은 길과 다리는 물에 쓸려갔다. 학교는 방학기간이라 식당문이 닫히고 돈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나는 촌에서 온 두 학생과 걸어 집으로 가려했다. 학교에서부터 백마부까지 45킬로미터였는데 우리 셋은 일찍 일어나 행장을 메고 길을 떠났다.    여름의 땡볕 아래 온 몸은 땀으로 젖었고 행장은 갈수록 무거워 혼탁한 도랑물을 마시고 굶으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집에 도착하니 저녁이었다. 집에 가보니 두 발에는 물집이 나고 두 어깨는 행장끈에 깊게 파여서 몹시 아팠다. 이렇게 나는 초중생활을 마치고 고중시험에 합격했다. 1953년 9월 개학은 했지만 집이 너무 곤난해 제때에 학교를 가지 못하고 한달 이상 집에 머물렀다. 우리 촌의 고3학생인 허진해가 우리 반주임 김창수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비로소 고중공부를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김선생님과 허선배에 대해 감지덕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김선생님은 조선으로 가고 허진해는 외지에 계셔 감사의 정을 표달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고중을 다닐 때 길림조중은 규모가 크고 학생숫자도 1700명에 달했다. 길림시 뿐만 아니라 성내, 성외에서도 학생들도 오는 바람에 기숙하는 학생이 1500명에 달했다. 학생들의 교내외 생활을 잘 관리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두개 학생조직을 설립했다. 하나는 학생회이고 다른 하나는 기숙사 사감실이다. 학생회는 학생들의 공부할 시간인 낮일을 책임지고 사감실은 하학후 기숙사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감실의 일들이 학생회보다 더 번중하고 구체적이었다. 학교 령도는 덕망이 높은 김성묵 선생님을 사감으로 모셨다. 고중학생들 중 5-6명 학생을 선발해 사감실을 구성하고 사감선생님의 령도하에 기숙생들의 저녁 자습, 아침 체조, 위생, 화식과 안전 및 규률을 책임지고 관리했다. 내가 고중 1학년때 학교는 나를 지명하여 사감실에 가서 위생을 책임지고 저녁자습 후 출석부를 부르는 일을 고중 졸업할 때까지 했다. 기숙사는 전문 한 침실을 비워 사감실로 만들고 우리 몇 학생 간부들이 함께 먹고 자며 다른 기숙생보다 생활이 좋았다. 사감실은 단독으로 밥을 타오고 주방 아저씨들도 잘 대해 주어서 다른 기숙생들보다 먹는 것이 좋았다.               고중 2학년때 모습을 담은 사진                  고중 졸업 사진   나는 학교에서 장기 놀기를 좋아했지만 체육과 문예활동은 좋아하지 않았다. 장기를 두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웠는데 처음 놀 때는 아버지에게 늘 졌으나 오래 놀다보니 익숙해져 나의 기술은 급속도로 성장하며 아버지를 이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른들과도 겨루게 되면서 장기수가 늘어 오리하에서는 명성이 꽤나 높은 편이였다.   중학교에서도 이런 애호가 있어 선생님들과 장기를 두었고 인이 박혀 학기 중간시험은 물론 지어 기말시험 전에도 기회가 있으면 시험준비를 하지 않을망정 장기만은 몇판 두었다. 체육운동은 나의 약한 종목으로 초중때는 키가 너무 작아 늘상 첫줄에 앉았고 몸도 너무나 야위어 체육시험은 겨우 합격이었다. 이상하게도 고중 3학년이 되니 키가 커지고 운동세포도 급성장했다. 전교 운동대회에서 높이뛰기와 멀리뛰기에서 1등을 했다. 높이뛰기에는 1.60미터, 멀리뛰기는 5.80미터였다.   1956년 상반년에는 대학시험 전이었다. 본기졸업생들은 대학시험 전에 총복습을 하였지만 나는 학교 체육대표대에 선발되어 시 중학생 운동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오전에는 복습을 하고 오후에는 집체로 운동훈련을 했다. 비가 내려 5월에 하기로 한 운동대회는 6월 중순으로 미루었다. 이번 운동대회는 나에게 큰 손실을 주었고 운동대회에서의 성적도 평시 훈련 성적에 미달했다. 더욱이 복습에 영향을 주었으며 대학시험성적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나는 예술세포가 없어서인지 노래, 춤 등에는 흥취가 없었다. 고중 3학년에 올라가니 생각 밖에도 학교에서 문예회연을 하게 되였는데 매 반에서 문예종목을 내놓으라고 했다. 내가 있는 고중 3학년 6반은 화극종목(话剧节目)을 내었는데 어문선생인 김서량(金曙良) 선생님이 편극하고 인물을 물색하고 감독까지 맡았다. 극의 주제는 어느 중학교 졸업생이 당의 호소를 받들어 농촌에 뿌리 박고 빈하중농과 잘 어울리는 길을 선택한 이야기이였다. 생각 밖에 김선생님은 나를 졸업생 아버지 역을 하라고 했다. 내가 성숙되어 보이고 늙은이 역할을 하는데 맞춤하다고 생각했다. 김선생님의 지도하에 한달 넘게 무대련습을 하여 회보공연에서 우리의 화극이 출연되었고 일등상을 탔다. 우리가 이런 영예를 가지게 된 것은 우리들의 연기수준이 높다기 보다 정치사상을 강조하는 그 시대의 정신에 초점을 맞춰 정치성과 사상성을 돌출히 한 결과였다.   중국인민대학에서   중국인민대학은 1937년 섬북공학(公学)의 기초에 화북련합대학과 합병되여 세워진 학교이고 우리 당이 건립한 첫번째 대학이며 우리 나라 문과류 종합대학 중 최고 학부이다. 교장은 모주석께서 존칭하는 “5로”중의 한분으로 저명한 교육가인 오옥장(吴玉章)이었다. 교원으로는 하천지(何千之), 상성(尚鋮) 등 당사 권위들과 쏘련 전문가들이 양성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였다.    1955년 전에 반수 이상의 학생들은 조직에서 배치한 사람들이다. 그중에 적지 않은 사람은 현(퇀)급 직무의 령도간부들이며 전국인민대표, 전국정협위원 그리고 각종 전선에서 온 영웅 모범들도 있었다. 례하면 학건수(郝建秀), 고옥보(高玉宝), 고아도(顾阿桃)등도 있었다. 학교는 주요하게 당의 리론간부와 사회주의건설 관리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췄다. 졸업생이 제일 많이 취직하는 곳은 중앙직속기관이었다. 인민대학의 졸업생이 사(司,局)급 간부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성(省,部)급 령도직무를 맡았으며 개별적인 사람은 국무원 령도직에 오르기도 했다.   1956년 학생 모집 때 조직에서 배치한 사람외에 본기졸업생도 모집했다. 우수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1956년 7월 1일, 중국인민대학은 전국 범위에서 사전에 단독으로 학생 모집을 했다. 7월 10일 각 성 신문에 합격자 명단을 공포하고 합격되지 못한 학생은 7월 15일에 전국통일시험을 보아야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인민대학에 지원하는 학생이 아주 많았는데 문과생들은 한번 시험해 보자는 마음으로 인민대학에 입학지원을 했다. 길림조중를 보아도 졸업생과 재직교원들까지 합하여 신청자가 수십명이나 되였으며 문과생들은 거의 다 신청했다. 인민대학은 길림성에 두개 시험장를 설치했는 바 하나는 장춘이고 다른 하나는 길림이다. 길림시험장에는 길림시외에 통화와 연변지구에서 온 수험생을 대상으로 했다. 기타 지역의 시험생은 장춘에서 시험을 보았다.    인민대학은 길림시험장에서 20명을 모집하였고 나의 시험번호는 600번호가 되었으니 얼마나 치렬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희망이 아주 희박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뛰어든 것은 두렵지 않았다. 한것은 합격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국통일시험에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7월 1일 오전, 제때에 시험장에 도착해 오전에 어문시험을 치르게 되였는데 시험지를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의 한 문제도 알 수 없었는데 지금까지도 두개 문제만은 인상 속에 뚜렷히 남아있다. 하나는 고문(古文)을 백화문(白话文)으로 번역하고 표점부호도 써야 했다. 고문을 백화문으로 하는 번역은 아예 하지도 못했고 표점부호는 매 구절의 고문 뒤에 빈자리가 있는 곳에 모두 쉼표(逗号)를 쓰고 한구절이 끝나면 마침표를 찍었다. 다른 하나는 "고무되는 한가지의 일(一件令人鼓舞的事)"이란 제목으로 작문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공사합영의 배경을 두고 작문을 지었다. 정치, 사상성을 강조하는 당시의 년대에 이렇게 쓰면 제목 주제를 리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시대의 요구에 순응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글자는 몰라 병음자모로 글자를 대신했다. 내가 인민대학에 입학하여 우리 학부의 비서인 형로(邢路) 선생님이 나의 어문 대학 입학성적은 24점이라 했다. 소학교부터 고중졸업할 때까지 조선족학교를 다닌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였다. 이번 대학입시시험은 내가 공부를 하기 시작한 후로 제일 나쁜 시험이어서 나는 실망하고 입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7월 10일 길림일보에 입학 소식을 발표하는 그 때 나는 신문을 보지도 않았다. 어떤 학생들이 신문에서 내가 입학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기뻐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롱담으로 들으며 믿지 않았다. 내가 내 눈으로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믿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입학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수학성적이였다. 내가 신청한 학과는 농업경제여서 경제류는 일반 문과와 달리 수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총점은 120점이였는데 나는 대학시험에서 아주 높은 성적을 따내였다. 높은 점수를 맞았기에 각 과목 평균점수가 68점이였다. 입학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튿날 학생모집 책임자 송덕민(宋德敏,길림성 유수(榆树)사람으로 일찍 직업에 종사하고 농업경제학부 학부 부주임이며 후에 전국정치협상회 부비서장, 비서장을 담임했다)을 찾았다. 송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나를 대해주면서 나에게 축하하고 입학통지서와 북경으로 가는 차비를 주었다. 그 기쁨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대학에 가게 되니 부모님은 더 말리지 않았다. 1956년 8월 말, 나는 길림에서 기차의 일반석에 올라 32시간 동안 부대끼며 북경의 영정문(永定门)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신입생을 영접하는 선배 동학들의 인솔을 받아 장자충로 철사자호동 1호에서 입학등록을 했다. 인민대학은 철사자호동, 해운창과 서교 3개의 캠퍼스를 갖고 있었다. 수속을 끝내고 교구캠퍼스로 가보았다. 이 캠퍼스는 제일 큰 캠퍼스로 토지 점유 면적이 100헥타르에 달했으며 해전구(海淀区)에 속했다. 북측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이고 남측은 북경공업학원, 중앙민족학원과 린접한, 환경이 우아하고 학습하기 좋은 곳이였다.   4년이라는 학습이 시작되였다. 우리 학년에서는 100여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4개반으로 나누었고 나는 2반에 속했다. 우리 반에는 조국의 각 지역 방방곡곡에서 모여온 재직간부, 본기졸업생에다 쏘련과 윁남에서 온 3명 류학생도 있었다. 조건은 좋지 못했고 우리 숙소는 북측에 있는 4호 기숙사 2층 회색 벽돌집이였다. 6명이 한 침실에서 지내며 두층으로 된 침대가 마련되여있었으며 겨울에는 석탄난로불을 지펴야 했다. 화식은 아주 좋았다. 입쌀과 밀가루를 위주로 매끼마다 2-3개 주식에 부식도 좋았으며 매일 고기료리가 있었다. 화식을 개선하는 때는 밥과 채가 더욱 풍성했다. 중학시절과는 비할 수 없이 훨씬 좋았고 수수쌀 밥, 배추, 무우국을 먹을 우려가 없어졌다. 곤난한 학생에게 매달 16원 50전의 보조금을 주었으며 화식비 12.5원을 삭감하고 나서도 4원이 남았다. 그 돈을 학용품과 영화표, 목욕과 리발 등에 사용했다. 매 학생들에게 휴대용 접이식 의자가 주어졌으며 이는 광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보고를 청취하는 데 사용되였다.      중국인민대학에서              졸업사진       대학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언어관이였다. 처음 대학에 와서 이런 웃음꺼리가 있었다. 한반의 장지견(张志坚)을 윁남 류학생으로 보았다(장지견, 초웅(楚雄)인이고 생김새가 광동사람 같았으며 말투가 우스꽝스러웠다. 학교때는 반급단지부 서기였고 졸업후에는 선후로 인사부 상무부부장, 중편판공실 주임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내사위 부주임위원). 1956년 국경절이 되어서야 반에서 문예오락이 있을 때 비로소 그가 한족임을 알았다. 처음으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 학생들이 밥그릇을 들고 식당으로 가는 것을 보고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들을 따라 식당으로 갔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식당으로 갈 수 없었다. 제일 곤난한 일은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는 일이였다. 대학수업은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수업을 했다. 전 학년의 100여명 학생들을 큰 교실에 집중해 수업을 듣고 필기를 했다. 우리들에게 정치경제학과 맑스-레닌주의 기초과는 모두 남방 에서 온, 표준어를 구사할 수없는 선생님이여서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필기도 불가했다. 학교에는 강의책도 주지 않았고 필기를 못하니 복습도 할 수 없었다. 학부 령도들이 이 일을 발견하고 특수한 조치를 내렸다. 하학후 3명 류학생과 나를 학부판공실에 불러다가 표준어를 할 줄 아는 선생님이 우리 네 학생에게 다시 한번 수업을 반복했다.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은 선생님께 물어보며 학습 곤난을 해결했다. 따라서 내가 류학생의 대우를 받은 셈이다. 초기에 어떤 학생들은 내가 조선 류학생으로 착각했다. 기말시험에서 정치경제학과 맑스-레닌주의 기초과는 시험을 답변 형식으로 치렀다. 학생들이 시험장에 들어간 후 높이 쌓은 시험지에서 임의로 한장을 뽑아서(시험문제는 학과의 모든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보통 한개의 큰 문제, 한 개의 작은 문제로 되여있었다) 지정한 곳에서 20분간 기다렸다가 시험관에게 답변을 하고 점수를 주었다. 시험관은 학부 주임이나 교수, 수업을 맡았던 선생들로서 학생이 답변할 때 답이 완전하지 못하거나 틀린 것이 있을 때는 시험관이 문제를 제출해 학생이 답하게 하거나 변론을 하였다.    시험생이 첫번째 뽑은 시험문제가 자신이 없으면 다시 한번 시험문제를 뽑을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도 점수 1점을 깎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갔다. 운수가 좋아 두번 뽑은 시험지가 내가 아는 문제여서 두 과목 모두 5점을 맞았다. 첫 시작이 좋아 대성황이었다. 들으니 그때 두 과목을 모두 5점을 맞은 학생은 단 둘이였는데 다른 한 학생은 상해에서 온 서문탁(徐文倬)이였다. 그 번 시험을 치르고 나는 류학생 대우가 취소되였고 다시는 특수대우를 받지 못했다.   1958년, 대약진시기에 "사람 담량이 얼마 만큼 크면 얼마만한 산량을 낸다"는 호언장담과 어디가나 "위성"을 올리는 황당한 일들도 더러 있었다.    학부에서는 우리 학년에서 보리 “위성전(卫星田)”을 꾸리라고 했다. 학교에는 꽃 재배에 사용하던 온실이 있었는데 약 3푼지기(3分地)땅이였다. 우리는 더위를 무릅쓰고 생토가 나올 때까지 한자 깊이를 팠다. 거름이 없어 화장실의 똥을 퍼 와 풀과 섞어서 삭히지 않고 그대로 뿌리고 보리를 심었다. 많이 나라고 씨도 많이 뿌렸다. 보리싹이 빈틈 없이 자랐다. 우리는 통풍이 잘되라고 선풍기를 켰고 광선을 많이 받으라고 저녁해가 지면 탐조등을 켜 놓았다. 수확의 계절에 우리는 한 알이라도 흘릴세라 손으로 보리를 훑었다. 하지만 정성 들여 가꾼 “위성전”이였으나 무당수확은 700근도 안 되였다.    1958년 가을 우리는 북경 교구 사계청공사(四季青公社)에서 밭을 깊이 파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식당에서 밥을 먹지만 돈은 내지 않았다. 한번은 어떤 이가 누가 밥을 많이 먹는가는 시합을 하자고 제의했다. 나는 하나에 두냥이나 되는 찜떡을 네개 먹었으니 여덟냥을 먹은 셈이다. 일등을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몸집도 크며 일도 잘하는 생산대의 부녀주임이였다. 단꺼번에 찜떡 여덟개를 먹었으니 한근 여섯냥을 먹은 셈이다. 뿐만 아니라 큰 고구마 세개까지 덤으로 먹어치웠다.   학생들에게 있어서 방학을 기다리며 오래동안 보지 못했던 부모님 곁으로 가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고 피로에 젖었던 두뇌를 쉬워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복이 없었다. 4년간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본 적은 두번 밖에 없었다. 한번은 대학 일학년때 학기시험을 끝마친 후였고 다른 한번은 1959년 여름방학에 중병 중의 어머니를 보러 간 것이였다. 기타 방학기간에는 학교에 남아 학교를 지키면서 방학기간에 돈벌이를 했다. 학교에는 삼합토(三合土)로 닦은 롱구장이 많았는데 매년 방학기간에 손질했다. 운동장을 수리하는 것은 기술일이 아니고 순 체력일이었고 수리하는 순서도 간단했다. 흙을 파고 흙덩어리를 분쇄하며 석회가루와 모래를 넣고 물을 부어 평평하게 고른 다음 돌연자로 다지면 되였다. 운동장을 수리하는 일은 학교의 행정처에서 책임지었으며 처장은 로당원이였고 2만5천리장정에 참가했던 간부였다. 그는 로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많이 관심하고 동정했다. 우리가 힘들까봐 걱정해 주고 식당에 지시하여 우리에게 좋은 음식을 공급했다. 운동장 수리는 일공(일당 3원)으로 취급했으며 행정처에서 주었다. 여름방학기간 나는 60-70원의 돈을 벌었다. 이는 적지 않은 돈으로 매월 4원의 생활보조금과 합하면 집에서 돈을 주지 않아도 2년을 지낼 수 있었다. 체력로동은 비록 힘겨웠지만 돈을 벌 수 있었고 신체단련도 되였다.      따라서 이런 생활은 충실하고도 의미가 깊었으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계속)
3    1. 겪어온 지난 세월 댓글:  조회:392  추천:0  2020-10-08
격어온 지난 세월 박규식 박규식 전 길림시계획위원회 당조서기 주임 전 길림시인대 부주임, 당조성원 전 길림시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2008년12월       최근 나는 허리 병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받았다. 퇴원후 병은 좋아졌으나 다리와 발의 움직임이 불편하고 걷는 것이 좋지 않아 실외활동도 할 수 없어 실내에서 조용히 쉬어야 했다. 책도 보고 텔레비전도 보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지루하여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쉬었다. 인간이란 일단 일이 없으면 생각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세상의 온갖 고초를 격은 지난 일들이 생각되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직도 펜을 들 수 있을 때 이런 것들을 기록하여 두뇌도 단련시키고 할 일이 없어 나타나는 공허함도 보충하며 자손들에게 선조들의 지나간 이야기들을 료해하는데 도움이 되여 이로서 쉽게 오지 않은 오늘의 행복을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이 글을 쓰자 하니 어디로부터 펜을 대야 할지 모르겠고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력사의 순서 따라 자서전 형식으로 쓰는 것이 순리로울 것 같아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나는 대로 쓰다 보니 인상이 비교적 깊은 것만 쓸 수밖에 없어 빠뜨린 것은 피면할 수 없고 어떤 것은 생각했지만 여러가지 사안으로 쓸 수 없기에 내용이 완전하지 않아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지난 일들을 잘 서술하자면 일정한 문자수준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인식하기에는 문자실력은 고중졸업을 하면 기본적으로 정해진다. 나의 모어는 조선어이고 소학교부터 고중졸업까지 모두다 조선어로 수업을 받아서 한어문자로 배운 것은 없다.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배우다 보니 무미건조한 경제학어휘만 배워 한어문자수준을 제고하는 데 큰 도움이 못 되었다. 마침 내가 쓰는 것은 문학 작품도 아니고 지난 일들을 회억하고 사실대로 쓰는 것이며 내가 겪었던 일과 사건을 진실 그대로 쓰면 되니 아주 높은 문자 실력이 크게 필요 없다. 나의 경력이 나와 비슷한 년령층에서 대동소이(大同小异)하여 별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은 없어 기록할 필요가 없지만 이런 경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나의 자손들에게는 신선한 일들이라 믿으며 여기에서 어떠한 개발을 받으리라 믿는다. 이는 바로 내가 ‘나의 지나간 이야기’를 쓰게 되는 초심이었다.     1. 나의 가정사와 동년시기      자녀들을 많이 둔 가정    1936년 7월 6일(음력 5월 18일) 나는 한국 경상북도(성) 의성군(현) 안평면(향) 창길 3리(촌)의 한 빈곤한 농민의 집에서 태어났다. 조부 박천수(朴天寿)는 5대 독자였지만 조모 리월금(李月琴)과 4남 3녀를 낳았으며 아버지는 셋째였다. 아버지대에 와서 아버지 박재성(朴在诚,另叫焕诚, 1892년-1970년), 어머니 리화로(李花露, 1893- 1961)는 도합 열두 자녀를 낳았다. 셋째 딸과 열둘째 아들은 일찍 숨지어 실제로는 여덟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나는 열째 막내였다. 자손들이 성하니 박씨 선조들에게는 크게 좋은 일이였고 대대손손 이어가는 일은 좋은 일이었으나 빈곤한 사람에게는 근심걱정만 더해지는 걱정스런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나의 부모는 아주 빈곤했고, 빈곤할수록 자식들을 많이 낳으니 자식들이 많을수록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는 일자무식이고 큰 키에 몸이 튼튼하고 특별히 고통과 어려움을 잘 견디었다. 매일 일찍 일어나 해가 저물 때까지 밭에서 일하고, 산에 올라가 화목을 지어오고 소나무 껍질이나 도토리를 주어왔다. 전 가족들의 밥을 굶기지 않기 위해 어떤 때는 20리 산간 오솔길을 오고 가며 돌아올 때 작은 자루에 좁쌀을 집에 가져 왔을 때는 이미 이튿날 새벽이었다.  부모님 사진 어머니도 무식자였고 키 크고 곰보였으며 근면하고 재질이 총명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기 좋아했다. 가정이 곤난하고 의사나 약이 극히 없는 상태에서 열명의 자녀들을 키우고 풍부한 아동병을 치료하는 경험을 가지었다. 촌의 아이들이 병이 생기면 린근의 촌민들은 어머니를 불러 병을 보고, 어머니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어서 촌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다. 나의 어머니는 이 많은 아이들을 키우는 데 특유의 발명과 비결이 있었다. 아이가 배고파서 울 때 쌀겨술을 먹였다. 나의 형제자매들은 년년생이어서 먼저 난 애가 젖이 떨어지기 전에 또 하나의 아기를 낳아서 먼저 낳은 애가 손해를 보았다. 애가 젖을 달라고 할 때 어머니는 쌀겨술을 먹이니 애는 술에 취하여 잠이 드니 더 이상 시끄럽게 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손을 놓고 일하러 갔다. 그래선지 우리 형제자매들은 술령이 아주 길고 술령이 거의 자기의 년령과 비슷하였다. 우리 형제자매들의 위장은 다 좋지 못한데 어릴 적부터 술을 마신 것이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손재간이 좋아 삼베와 솜베를 짜고 비단도 짰으며 이로 하여 온 가족의 입는 문제를 해결했다.   우리 집 열 형제자매 중 큰누님 박달식은 출가후 20세기 20년대 말에 중국 영길현 오리하자향 백마부촌으로 이민했고 큰형님 박해식은 20세기 30년대에 목단강의 벌목장으로 가 로동자가 되였으나 1946년 여름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세균에 감염되여 상한병에 걸려 비명으로 죽었다(듣는 바에 의하면 한국의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나 고증된 바 없음). 둘째형님 박삼식은 막걸리공장에서 일하다가 1942년 일본놈들로 인해 사할린탄광으로 잡혀 가서 석탄을 캐는 힘든 일을 하였다. 셋째형님 박경만은 석탄을 캐는 일과 벌목을 하는 일을 하였으며 29세때 중국인민지원군에 입대하여 조선으로 가 전쟁에 참가하였다. 넷째형님 박종식은 석탄을 캐다가 1947년 민주련군에 가담하여 기관총수가 되였고 국민당군대와 포격전에서 불행하게 부상을 입고 장애자가 되여 귀가 먹었다. 둘째누님 박귀순은 한국 경기도 성남시에 있으며 다섯째형님 박춘식은 1946년 동북민주련군에 가담하여 장춘과 사평전역에 참가했고 항미원조에도 참가했다. 여섯째형님 박유식은 1951년 초 초중 2학년때 사업에 종사하여 시공안국에서 일생을 다 보내었다. 일곱째형님 박태식은 1950년 12월 열여섯의 나이로 중국인민지원군에 가담하여 항미원조에 참가했다.    나의 시조는 아주 이름난 력사적인 인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로서 그는 조선반도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병립되었을 때 신라왕조를 건립한 임금으로 박씨가족의 시조이며 나는 박혁거세의 31세 적손이다.   한국 “삼국사기(三国史记)”에 의하면 여러 백성들이 여섯개 마을에서 살았는데 고헌촌장 소벌공이 양산기슭 나정 옆의 수풀 사이에서 말이 엎드려 울고 있음을 수상히 여겨 그 말이 우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말은 어디론가 달아나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커다란 알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알을 깨 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들어있는지라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0살이 되자 기골이 장대하고 숙성하여 비범한 재질이 있으므로 여섯개 촌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오던 중 이때에 이러러 그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진한 사람들은 호(瓢)를 박이라 하였는데 그 알의 크기가 박만한 크기였다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고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아버지는 늘쌍 자기는 “량반(문 무 량반(两班),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를 말함)”이라 하면서 향촌 촌민들도 아버지를 존칭하여 “양도어른(阳道大人)”이라 불렀는데 아마 이런 연유로 그런 것 같다.    이름난 가세의 우리 집이지만 풍자적인 사실로 이미 아주 가난한 집으로 전락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세칸짜리 초가집으로 편벽한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비탈에 지은 집으로 뒤는 산이고 소나무가 가득 자랐고 집 앞에는 면(향)으로 가는 작은 길이 있으며 좀 더 앞으로 가면 작은 냇가가 흐른다.     2007년 5월, 내가 한국려행을 가는 기회에 처음으로 출생지를 찾아갔다. 초가집은 그대로인데 너무 낡고 볼품이 없으며 서쪽의 감나무는 모두 베여버리고 동쪽의 우물도 메꾸어서 처량하고 가엾는 꼴이었다. 집에는 3-4무의 밭이 있었는데 척박한 땅이라 일년 고생을 하여도 공량을 바치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았다. 살아가기가 무척 힘들어 해마다 좁쌀과 나물죽을 먹었다. 1942년-1943년에 한국에서는 큰 흉년이 들었다. 마침 대동아전쟁시기여서 전쟁의 수요로 일본인은 농민들의 손에서 전부의 량식을 략탈하고 집들마다  굴뚝 연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회갑연    그들은 어떤 집에서 굴뚝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하면 달려와서 솥에다 재를 뿌리거나 아예 솥을 부셔버렸다. 그리고 솥과 동그릇, 동수저들을 빼앗아갔다. 우리 집은 좁쌀 야채죽도 먹지 못하게 되자 겨와 나물로 만든 떡이나 상수리나무 가루로 만든 음식, 소나무 껍질이나 풀뿌리, 그리고 야채들을 먹었다. 하여 거러지가 욱실거렸고 굶어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학교로 가는 길가 보리밭에 적지 않은 굶어죽은 사람을 나는 직접 보았다. 손에는 금방 싹이 튼 보리를 움켜쥐고 입에는 아직 넘기지 못한 푸른 보리대가 보였다.    1943년 봄, 위만주국 황제 강덕(康德)이 이미 곰팡이 낀 두병을 한국에 구재한 일이 있었다. 소식을 듣고 두병을 나누어주는 그 날에 나는 3킬로미터나 되는 촌공소까지 뛰어가서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곰팡이 낀 두병 한줌을 훔쳐 먹었다. 생각밖에 촌간부에게 발각되어 욕질을 당하고 손과 발로 때리고 차던 일들이 오늘까지도 눈앞에 생생히 기억된다. 그때 입는 옷은 어머니가 베틀로 짜준 옷인데 그것마저도 깁은 옷이고 팬티와 러닝셔츠도 없어 잠을 잘 때 옷을 벗으면 알몸으로 이불에 쏙 들어갔다.    1943년 1월 나는 면(향)에서 유일한 소학교-안평면국민우급소학교에 입학했다. 학생래원은 많고 모집학생은 적어 면접시험에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학교와 우리 집은 3킬로미터 거리인데 여름에는 맨발로 학교를 다니고 겨울에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짚신을 신고 다녔으며 점심은 거의 굶었다. 선생님의 성은 이토(伊藤)인데 내가 공부를 잘했기에 나는 반장이었다. 일어로 수업하고 학교내에서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주의 부족으로 조선말을 하는 것이 발각되면 욕질이나 벌책을 받아야 했고 중할 때는 매를 맞기까지 했다. 학교에 들어가면 일본성을 가져야 했는데 나의 이름도 아라이게이쇼크(新井奎植)였다. 매일 아침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일본이 있는 동남방을 향해 “천조대신(天照大神)”에게 제배를 하는 굴욕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의 결정    1942-1943년 큰 재황으로 많은 사람들이 타지방으로 피난 갔다. 살기 위해서 고향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일본이나 동남아나 더 많은 난민들은 만주(동북)로 피난 갔다. 이때 아버지는 과감하게 만주로 가는 중대한 결정을 했다. 아버지의 결정은 두가지 근거가 있었는데 일찍 만주로 간 큰 누님이 있어 첫 자리를 마련하는 기반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리유는 다섯째형님이 16세로서 병역년령이 되었기에 병역이란 무서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이 중대한 결정은 나의 전도와 운명을 결정하고 내가 위대한 중화민족의 일원이 되게 한 큰 일이었다. 아버지의 이 결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굶어죽는 귀신이 될 번 했고 설사 굶어 죽지 않아도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는 나에게 큰 행운이며 큰 재난이 큰 희사로 되게 했으니 이것 역시 운명이 아닐까? 내가 출생한 집 앞에서 1944년 초봄, 대략 3월말이나 4월초쯤 되었다. 아버지는 초가집과 몇 무 안 되는 척박한 밭을 오 씨라는 옆집 사람에게 맡기고(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기에 집과 밭을 팔지는 않았다.) 전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갔다. 우리가 20킬로 산간 작은 길을 가서 안동렬차역에 도착했다. 안동역에서 렬차를 타고 서울-평양-신의주-봉천(심양)역에 도착하여 심양역에서 심길(심양-길림)기차를 타고 영길현 구전에 도착했다. 큰 누님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한 마차길이고, 해동시기여서 길의 표면층이 녹았지만 밑은 아직도 얼음판이여서 질쩍하고 미끄러웠다. 그 해에 동북에는 많은 눈이 내렸고 얼음이 녹은 물도 많아 도처에 길은 봉쇄되였다. 이틀 동안 기차에서 흔들리며 지내다 보니 이미 극도로 피로하였고 설상가상이었다. 구전에서 두시간 걸으니 이미 점심시간이 되여 배고프고 목도 마르며 너무 힘겨워 발을 떼기도 힘겨웠다.    우리는 관마산(官马山)의 한 농민 집에 들어 손짓 발짓을 해가며 물을 좀 달라 했다. 이 농호는 한족집으로 우리가 입은 옷을 보고 한국에서 피난 온 사람이라고 정확히 판단했다. 이 농호는 물을 끓이고 큰 쟁판에 따끈한 기장쌀경단을 손짓으로 배부르게 먹으라고 열성적으로 우리를 대해 주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대민족인 한족과 대국인의 기질을 느끼였고 처음으로 한족 음식문화를 체험했다. 한국에서는 더운 물을 마시는 습관이 없고 직접 랭수를 마신다. 특히 기장쌀경단은 말똥 같은 색갈이고 발효하여 만들었기에 쉰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기아에 허덕이던 나였지만 경단을 입에 넣고 먹어보니 먹기 힘들어 한입도 먹지 못했다. 휴식후 계속 갈 길을 걸었는데 나는 기장쌀경단을 “말똥알”이라고 비꼬아주었다. 길에서 웃고 떠들며 저녁이 되어서야 큰누님 집에 도착했다. 이미 온다는 소식을 접한 큰누님은 저녁밥을 지어 놓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를 굶은 나는 게걸스럽게 먹고 밥상을 물리기 전에 그 자리에서 넘어져 자버렸다. 너무나 힘들고 피로 해 밤에 일어나지 못하고 온돌방에 오줌지도를 그려 부끄러웠는데 그때 내 나이가 여덟살이었다.    백마부(白马夫) 촌은 모두 30여호가 살았는데 몇십헥타르의 밭이 있지만 우리 나라 동북에는 이 촌은 자그마한 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편벽한 산골에서 온 나에게는 광활한 천지처럼 보여 눈이 번쩍 뜨이었다. 백마부에 도착하니 우리 집은 이름 그대로 집도 없고 땅도 없는 알거지였다. 돈이 없어 집도 임대할 수 없어 전 가족이 큰 누님의 북측 온돌구들에서 옹기종기 잠을 자야했고, 땅이 없어 지주의 몇무 수전을 임대하여 농사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세금을 주고 공량을 내고나면 남은 량식이 거의 없어 생활은 아주 곤난하고 어려웠다.    나는 오리하중심소학교에서 소학을 다녔다. 백마부와는 4킬로미터 거리이다. 학교 다닐 때 점심밥은 거의 없었고 어떤 때는 누룽지를 조금 가져갔으며 여름에는 맨발로, 겨울에는 아버지가 삼은 짚신을 신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한국에 있을 때나 엇비슷했다. 다르다면 동북은 기후가 너무 추워 짚신을 크게 만들어 신에다 벼짚들을 쑤셔 넣고 헌 천으로 발을 싸매어 보온효과를 보는 것이다(우라신을 신는 것과 흡사함). 하학후 집에 오면 벗은 짚신을 부뚜막에 말리워 이튿날에 신었다.     1944년 겨울, 춘절 때가 다가오자 마을의 아이들은 다 새 헝겊신을 신어서 너무도 부러웠다. 나는 아버지에게 헝겊신을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아무른 내색도 내지 않았다. 속이 탄 나는 여러번 졸랐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어느 하루 아버지에게 끝장지기로 헝겊신을 안 사주면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큰 일을 저질렀다. 노기찬 아버지는 나의 옷을 몽땅 벗겨놓고 회초리로 때린 후 알몸둥이인 나를 창밖 눈 내린 땅에 던져버렸다. 너무 놀라고 얼어버린 나는 기절을 했다.    3일 만에 내가 깨어났다. 아버지가 내 옆을 지키고 있다가 눈을 뜬 나를 보더니 눈물이 글썽해서 “깨여났다!”고 소리 질렀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도리가 있는가? 이 일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호된 처벌이었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만악의 구사회를 공소하고 규탄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나의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일이고, 너무나 아버지에게 미안하며 너무 철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여덟살에 불과했다.    1946년 여름에 나는 아버지와 형님을 따라 논에 나가 일하고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집으로 오자면 강을 건너야 하는데 강은 깊지는 않으나 물살이 세고 물속의 조약돌은 푸른 청태가 끼여 아주 미끄러웠다. 강을 건널 때 배가 고파 다리에 힘이 없었다. 게다가 불조심으로 청태 낀 조약돌을 밟아 넘어지고 말았다. 키 작고 몸도 약해 물속에서 30메터나 떠내려갔다. 형님이 발견하고 쫓아 와 나를 구해주었으나 숨이 막히고 너무 놀라 기절해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내 나이는 열살이었다. 두 차례나 죽음의 문턱에서 시대의 불행한 아이를 가엽게 여긴 사신(死神)은 나를 계속 아름다운 인간세상에 남겨놓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63년 만에 모교 방문    1945년 8월 일본제국주의가 투항을 했으니 우리의 고난은 곧 끝을 보게 되리라 여겼는데 실은 이렇지 못했다. 일본은 투항했어도 사회질서는 여전히 혼란하여 무정부상태였다. 각종 검은 세력들이 기승을 부렸고 백성들의 리익에 해를 끼치는 각종 도적무리들이 욱실거렸다. 그들은 농가의 돈과 량식을 략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하며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러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다. 도적을 막기 위해 촌마다 청장년들을 집중하여 저녁에 순시하며 촌을 지켰다. 창을 만들어 자기를 보호하였지만 로인, 부녀와 아동들은 마른 도랑에 숨어 밤을 지새웠다.    국내해방전쟁시기 우리 집 고향은 국민당군대와 민주련군이 왔다갔다하는 곳이었고 투쟁은 아주 잔혹하고 결렬하였다. 국민당군대가 오면 우리는 집과 15킬로미터 먼 조양보에 있는 작은 촌으로 피난했다. 국민당군대는 촌에 와서 못하는 짓이 없었고 1947년 초 우리 촌의 여섯명 농회간부를 잡아 옷을 몽땅 벗기고 눈길에 끌고 다녀 얼어서 다리가 굳어 걷지 못하니 모두 총살했는데 그중에 나의 친척도 한 명 있었다. 우리 군이 적을 물리치자 촌민들은 촌으로 돌아왔으며 전선을 지원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1946년 우리 촌에서는 공산당의 령도하에 농회를 건립하고 회장은 산동사람인 왕조공(王兆恭)이었다. 농회는 우리 당의 기층정권으로 전선을 지원하는 외에 군중들을 발동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성분을 매기고 지주와 부농을 투쟁하며 밭과 집을 분배했다. 우리 집은 빈농으로 획분되였고 열몇무의 비옥한 밭을 분배 받았으며 큰 집도 분배받아 4년에 네차례 집을 옮겨야 하는 류랑생활을 종결했다. 농회는 민병, 부녀조직과 아동단 등 많은 조직이 있었는데 나는 아동단 단장이 되였다. 그때 나이가 10세였다. 아동단원들은 손에는 붉은 숱이 달린 창을 들고 허리에는 나무로 만든 권총을 차고 촌락의 각 도로입구에 서서 보초를 섰다. 통행증을 검사하고 지주와 부농을 투쟁하며 혁명노래들을 배우고 불렀다. 그리고 게으른 자를 적발하고 부녀들을 해방시켰다(구사회 일부 다처제의 첩들을 해방하는 일). 농회는 아동단의 사업을 지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썰매 한대를 주었다. 자랑스런 일은 통행증을 조사하다가 국민당정탐을 잡아 농회에서 처리하게 한 일이다.   1948년 3월, 길림시가 해방되자 우리 아동단의 사업도 결속되었다. 나는 아동단에서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조직에서는 혁명사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기 계속)
2    길림시《기록》친목회 소개 댓글:  조회:495  추천:0  2020-10-08
길림시《기록》친목회 건립과《기록》간행물 창간 설명 한직능   존경하는 래빈 여러분과 회원 여러분:   오늘은 양력 28일, 음력 12일, 무엇을 결성하는 참 좋을 길일입니다. 저는 이 길일에 길림시《기록》친목회 건립과《기록》간물 창간을 선언합니다.  방금 전경업 관장께서 귀하신 말씀을 하셔서 다시 한 번 큰 박수로 경의를 표시합니다. 조선족의 본격적인 이민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어 1945년 광복이전까지 지속되었고, 특히 1910년 한일합방으로 반도가 식민지로 되면서 일제의 혹독한 통치에 못 이겨 정든 고향을 등지고 피눈물을 뿌리며 광복전야까지 무려 200만이나 되는 조선민족이 중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우리 민족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 재배에 성공하며 민족의 뿌리를 이 땅에 깊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광주기의, 남창기의, 북벌전쟁, 2만5천리장정, 항일전쟁, 해방전쟁 등을 겪으면서 피와 땀으로 나라를 지키고, 가장 높은 교육열과 전통문화와 언어의 지킴으로 당당하게 56개 민족의 구성원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력사는 매차 기술혁명이나 산업혁명이 일 때마다 인류의 문명은 발전했으나 대신 엄청나게 민족의 소멸, 언어의 소멸을 맞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 년 전 현재의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로 이어지는 중동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밀을 재배하면서 정착생활을 시작했고, 인류의 운명을 바꿔놓는 농업혁명을 일으켜 부와 세력을 축적했습니다. 유럽의 방직산업이나 와트전동차의 산업혁명으로 세계는 크게 발전했으나 아편전쟁과 여러 차례 큰 전쟁이 일어나고 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을 지키지 못한 종족들은 정복당하고 소멸되었습니다. 15세기 탐험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참혹함이 무수한 언어와 민족을 말살시켰습니다. 탐험시대 초기 지구에는 약 15000개의 언어가 존재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언어는 6000개에 불과합니다. 500년 사이에 9000개가 없어졌습니다. 오늘 남아있는 언어도 빠른 속도로 없어져 100년 내에 현존 언어의 90%가 소실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의 현실은 더욱 참담합니다. 기를 쓰고 민족의 언어와 전통문화를 지키자고 했지만 많은 유치원 중소학이 문을 닫았습니다. 적지 않은 신문지, 잡지들을 만들어 민족문화의 꿈을 살려보자고 하나 변화하는 4차혁명시대를 맞으며 역부족입니다. 량자시대, 5G시대, 인공지능시대가 오면서 우리들의 자손들은 언어는 물론 문화자신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문화자신을 맘속에 품는다면 설사 언어가 소실되고 글자가 소실되더라도 그 전통은 살아남습니다.   하북성 진황도시 청룡현의 박씨촌민들은 명말 청초 만주 8기에 소속된 사람들로 근 300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가졌기에 비록 언어, 문자 등이 동화됐지만 1982년 전국 인구조사에서 자원적으로 조선족으로 변경했습니다.    또 하북성 풍윤현에서는 고려포가 있고, 근 400년이 지났지만 500세대가 살면서 김씨, 리씨, 박씨등 성씨로 구성되고, 자기들의 선조가 조선민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후세는 어떠합니까? 지금 우리들의 일세들은 다 돌아가시고 이세들마저도 많이 돌아가거나 로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삼세, 사세들은 민족 자신감, 민족문화에 대한 의지가 현저하게 떨어졌고, 력사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의기투합한, 기록에 큰 관심이 있는 분들이 길림시조선족예술관 전경업 관장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2018년 3월 28일 길림 시《기록》친목회를 설립하고,《기록》간행물 창간식을 가졌으며, 전경업 관장이《기록》간행물 설명 보고를 하였습니다.   《기록》간행물은 오래된 력사적 기록이나 자신이 겪었던 삶의 현실을 그대로 글로 기록하고, 오래된 사진, 유물들을 현실 그대로 기록문에 삽입하여 력사기록의 무형문화제로 남기자는 것입니다.   《기록》간행물은 세 가지 내용을 주로 합니다. 1. 실화코너: 글자 제한 없이 몇 천자, 수 만자, 지어 그보다 더 큰 폭으로 쓸 수 있고, 문학적인 뉘앙스보다 사실 그대로 써야 하며, 조상 때부터나 혹은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사실들을 사진, 유물 등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한개 지역의 력사를 쓸 수도 있고, 본인이 경과한 잊지 못할 의미심장한 한 가지 사실이라도 쓸 수 있습니다. 실화코너의 점유률은 최저 60%로 합니다.   2. 문학코너: 이 부분은 문학을 즐기는 분들을 배려하는 목적입니다. 간물의 중점방향이 '기록'이지만 소설, 수필, 시, 순수문학작품도 취급합니다.    3. 독자 기고 코너: 이 부분은 아주 짧은 기록 글로서 글쓰기를 잘하지 못하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역시 사진이나 유물들을 글에 삽입하여 본인이 못 쓰면 친목회의 유관 책임자들이 대필도 할 수 있고, 전산타자도 해드립니다.   '기록' 문장이 길면 련재도 하고, 전 한기가 모두 '기록' 문장으로 되기도 합니다.   《기록》은 그 가치가 시간이 길수록 높아집니다. 다이아몬드나 순금은 너무나 적기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보통 50년 지난 물건을 고물이라 여기며 백년이 지난 물건을 보물이라 여깁니다. 단군신화나 황제, 염제신화 등도 신화가 현실인 것처럼 되었을 뿐인데 우리의 자손들이 여러 세대를 거쳐 남겨둔《기록》은 선조들이 친필로 남긴 것이므로 그들이 볼 때는 전설처럼 여길지 모르나 진실함은 우리의 자손들이 민족자긍심과 민족자신감을 가지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참 힘들게 시작했습니다. 돈도 없고, 능력도 미흡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견지는 승리이고, 행복은 분투하는 사람에게 옵니다. 견지와 분투는 우리들의 력사적 소명입니다. 우리는 기록할 가치를 가진 사회각층 인사들이 적극 응원하기 바라며 많은 기록 문장을 보내주었으면 합니다.   길은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힘든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의《기록》간행물이 진보하면서 오솔길이 넓은 신작로가 되고, 고속전철이 되고, 비행기처럼 온 누리에 퍼졌을 때 진정으로 분투의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꼭 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꼭 해낼 것입니다.     
1    차례 댓글:  조회:1031  추천:1  2020-09-27
차례 2018년 1기 통권 1호   실화코너   002 박규식  겪어온 지난 세월 054 편집부  항일 명장 리홍광 065 길림조중  길림시조선족중학교가 걸어온 길 082 한직능  령혼에 깃든 추억 117 리오로  빨간 마크 119 최광엽  항일영웅 이범석 장군 142 배명수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 189 구동촌위원회  구동촌의 어제와 래일 203 김성숙  장백의 어머니 223 신희호  망우하일대의 수전 개간 228 박영자  아버지를 회억하여 266 회  령  강남촌 275 리오로  기차의 변천 278 양상태  내가 살아온 인생길   문학작품코너   291 박상복  뜬 쌀 80근 301 전석풍  짓밟힌 사랑 339 남산송  버릴 수 없는 사랑  344 배정록  3500년 전의 “금면왕조” 350 박명옥  우리 집의 보배 옷장 354 한직능  길림시《기록》친목회 건립과《기록》간행물 창간 설명 358 전경업 《기록》간행물을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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