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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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가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조선족 댓글:  조회:3991  추천:10  2012-10-18
나의 조선족 이야기2 내가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조선족   김광림    1980년대부터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이래, 중국속의 조선족의 제일 뚜렸한 변화가 전통적인 거주지인 동북지역을 떠나 연해지역으로, 해외로 이동하는 현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조선족의 가치관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고, 현대의 조선족들은 보다 열린 환경에서, 다원문화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숙명처럼 되여가고 있다. 이런 환경의 대변화속에서 우리 조선족들은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돈을 많이 겪게 되고, 지금까지 잘 유지돼왔던 민족공동체에도 위기가 많이 생겼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조선족의 새로운 성공모델을 찾아서 거기서 희망을 찾아보는 경향이 비교적 짙다. 그 성공모델이란 회사경영으로 사업에 성공했다거나, 연구분야에서 중국이나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았다거나, 음악이나 체육분야에서 명성을 많이 떨쳤다거나 하는 얘기로 많이 귀결된다. 또는 과거의 조선족  유명인물들의 사적들을 발굴하여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경향도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내가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몇 명의 조선족들은 아직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옯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겠는가 하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나는 2009년9월부터 2011년8월까지 대학교의 연구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2년간 체류하면서 현지에서 여러명의 조선족을 만나고,알게 되였다. 그 가운데서 5명의 조선족을 소개하려 한다. 글의 내용이 보다 진실성을 띠게 하기 위하여 여기서 소개하는 5명의 조선족에 대하여 실명을 들려고 한다. 틀린 점이 있으면 이들과 독자들의 아량(雅量)을 바라는 바이다.    나는 2009년 9월부터 1년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버클리에 거주하면서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 UC Berkeley) 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그런 가운데서 주말마다 버클리의 한인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조선족 출신인 김 태호, 조 정희 박사부부를 알게 되었다. 이 두분은 40대 후반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었는데, 연변출신으로 길림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북경대학교에서 석, 박사공부를 마치고 나서 90년대에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에서 다시 박사공부를 마쳤던 것이다. 남편인 김 태호박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부인인 조 정희박사는UC Berkeley의 한 연구소에서 종신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미국에서 두 딸애를 키우고 있었고, 가족이 미국영주권을 취득하고, 고급주택가에 집을 구입하여 살고 있었다. 학력을 보아도 가히 조선족출신들 가운데서 최고이며, 미국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정착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 부부한테서 받은 좋은 인상은 단지 이들이 학력이 높다거나 미국에서의 정착이 순조롭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들이 확고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흔들림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였다.     나는 거의 1년 가까이  버클리의 한인교회에 다니면서 김 태호, 조 정희 박사부부와 접촉을 많이 했고, 김 태호박사와 종교에 관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김 태호박사는 부모가 오래전부터 기독교신자였다고 하고, 본인은 북경에서 대학원에 다니면서 신앙활동을 시작했고, 부인인 조 정희박사도 남편의 영향으로 북경에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미국에서 유학하는 기간에도 주말이면 꼭 교회에 다녔다고 하는데, 어떤 때는 지하철을 여러번 바꾸어타면서 교회에 나가고, 간혹 주말에 여행나갈 때는 행선지의 교회에 들러 꼭 예배를 본다고 했다. 나는 이들의 집에 초대받아 가봤는데 집안 여기저기에 기독교와 관련되는 그림이나 문구가 걸려 있어 기독교신앙이 완전히 생활화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들 부부와 접촉을 하면서 이들이야말로 독실한 기독교신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마음깊이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신앙을 생활의 근본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종교을 믿는 것도 자유이고, 안 믿는 것도 자유이며, 어떤 종교를 믿는가 하는 것도 각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올바른 종교를 믿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확고한 신념이 생기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김 태호, 조 정희 박사부부처럼 오랫동안 고향과 친지들을 떠나서 먼 이국에서 생활하면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그 힘에 의하여 그들이 많은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내고 있다고 나는 믿고 싶었다. 또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기에 강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들이 미국사회에서 신뢰받고, 자신들도 성공적으로 미국에서 정착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김 태호박사는 기독교신앙에 관하여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내가 성경에서 어떤 말을 제일 좋아하는가 물으니, 그는 다음의 구절을 들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구약성서, 신명기28장)    나는 진실로 이들이 축복받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는 2010년 8월부터 UC Berkeley를 떠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미국 동부의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보스턴에는 누구고 아는 사람이 없어 어떻게 새로운 거처를 찾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미국생활체험을 연재하고 있는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약칭≪조글로≫)에서 미국생활에 관한 글을 쓰고 있던 조선족 김 만수 박사를 찾게 되었다. 김 만수박사는 그 때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관련 포스터닥( 박사과정을 마친 후의 연구원과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메일을 보내니 대뜸 전화까지 걸어주면서 미국에서 같은 조선족을 알게 된 반가움을 표시하고  내가 보스턴에서 거처를 찾는 문제를 크게 도와주었다. 내가 보스턴에 옮겨갈 때도 역전까지 마중을 해주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연구를 하는 조선족연구원들을 모아서 나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적인 교분에서 내가 김 만수박사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나는 김 만수박사의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싶었다. 김 만수박사는 연변출신으로, 연변대학교 농학원에서 수의학을 공부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기후(岐阜)대학교에서 수의학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의 국립연구소에서 몇 년간 연구원생활을 하다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서 포스터닥이라는 신분으로 4년간 동물의료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연구하는 기간에 김 만수박사는 연구성과를 많이 내고, 특허를 두개나 따내게 되었으며, 그런 성과가 인정받아 2011년 초봄에 약관 40세의 나이에 중국과학원동물연구소의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김 만수박사는 처음부터 최고의 엘리트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고, 근면한 노력과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한단계씩 발전한 인물이라 생각된다. 그가 일본에서 미국에 옮겨가는 과정에서 영어공부를 하느라고 집안 구석구석에 영어메모장을 붙혀놓고 있었다 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4년간 연구하는 기간에 불철주야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이 김 만수박사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 것같다. 연변의 농촌마을 출신으로 부모의 후광을 크게 입은 것도 아니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가면서 연변대학교에서 일본유학을 하고, 다시 하버드대학교에까지 가게 되고, 중국 최고의 과학연구기관에서 당당하게 연구원, 박사지도교수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2년간 체류하면서 미국생활을 여러 미디어에 연재하게 되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미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인너넷사이트인  ≪조선투데이≫의 운영자인 박 영애 원장를 알게 되었다.     박 영애원장은 중국 길림성의 중의학교, 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지방의 여러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연변대학교 의학원을 졸업하고, 북경의 중의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나서 1990년부터 미국에 이민으로 건너가서 필라델피아에서 중의원을 개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 영애원장은 중의원을 경영하면서 미국에서 더 공부를 하여 중의학박사학위를 받게까지 되었다. 그녀의 이런 경력을 보면 상당한 학구열과 근면한 노력이 있었음을 쉽게 보아낼 수 있다. 특히 한명의 여성으로서 두 자식을 미국에서 키워서 공부시키고, 자신은 병원경영으로 성공했다는 자체가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박 영애원장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그의 사업에서의 성공보다, 그가 사업에서 성공하고 나서 나눔의 정신을 솔선하여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 영애원장은 미국에서 딸애가 대학교를 다니던 과정에 방학이면 민간인들이 기부한 장학금으로 연수를  많이 다니는 것을 보고 본인도 그런 좋은 사업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겼다고 한다. 생각해보다가 자신이 미국에서 병원경영을 하는 과정에 재미한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따져보면 결국 자신이 중국에서 조선족학교에 다니면서 조선어와 민족교육을 제대로 받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여 길림성 교화시 외곽에  있는 모교인 조선족소학교에 기부를 하여 우수학생과 우수교사를 지원하고, 강의용품들을 사도록 하였다. 몇 년간 모교에 기부를 해오다가 그 모교가 학생래원이 줄어들어 페교가 되자, 연변적십자회와 상의하여 도문시 농촌의 조선족소학교를 재정적으로 돕는 사업을 진행하였고, 연변1중에도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연변대학교에 장학금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하고, 연변대학교에서 조선족민족박물관을 짓게 되자 거기에도 자금지원을 했다.박 영애원장은 지금까지 길림성의 조선족학교와 연변대학교에 인민페로 수십만원이 넘어되는 기부를 해왔다. 미국에서 중의원을 경영한다고 하지만 수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금이 척척 남아도는 상황도 아닌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조선족의 민족교육에 대한 장학사업에 대단한 열성과 자긍심을 가지고 그 사업에 많은 시간과 재력을 들이고 있다.     박 영애원장은 필라델피아에서 20여년간 살아오면서 이 지역을 찾아오는 조선족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재미연변대학교학우회 후원사업도 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수년전에 다른 분이 하고 있던 재미조선족의 최대인터넷사이트인  ≪조선투데이≫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박 영애원장이 운영사업을 맡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원경영을 하면서 자신의 자금을 들여가면서 이 인터넷사이트의 유지에도 애를 쓰고 있다.    중국에서도, 해외에서도 사업에서 성공한 조선족은 적지 않다. 그러나 박 영애원장처럼 민족의 교육사업 후원에 발 벗고 나서고, 조선족공동체의 공익사업에 열성을 붓는 사업가들이 너무 많은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런면에서 나는 박 영애원장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나는 작년 6월부터 3개월간 영국의 런던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했는데, 그런과정에서 영국에서 또 한명의 조선족을 만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나와 연변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동료로 있던 박 송림 선생을 영국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박 송림선생은 연변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있다가 1990년대에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중부지역에 있는 Lancaster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교에서 연구직으로 취직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에 유학한지 10여년이 넘어되고, 이미 영국에서 국적을 취득하고   Lancaster시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아들애가 영국중부의 대도시인 만체스터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부부간이  Lancaster에서 주택을 구입하여 비교적 안정된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 송림선생의 요청으로 나는 작년 7월에 3박4일간 Lancaster에 여행가서 박 송림선생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내가 그 한테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 박 송림선생이 영국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면서 정직하게 살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이다. 그는 여러 번 영국에서는 사회생활에서 정직함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며, 요령을 부리거나 거짓이 이 사회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런 영국의 사회환경에서 살면서 박 송림선생은 우직하다고 할만큼 정직한 삶을 추구하는 것 같았고, 또 그 때문에 그의 영국에서의 이민생활은 순조로울 것 같았다. “정직함이 지혜라는 책의 제1장” 이라는 토머스 제퍼슨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의 말이 있다 싶이,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기본자세일 것이다.    이상 내가 미국과 영국에서 만난 5명의 조선족들은 박 영애원장을 제외하고는 조선족들 가운데서 거의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올바른 삶을 살고 있거나, 정직하게 살고 있거나,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사는 방식, 근면하게 노력하면서 사는 방식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거치면서 가치관과 정체성에서 혼돈을 많이 경험하는 조선족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2012년4월4일)
6    일본에서의 조선족 단체의 활동 댓글:  조회:3461  추천:13  2012-10-15
나의 조선족 이야기1 일본에서의 조선족 단체의 활동  김광림                                                                                                                              나는 1988년에 일본에 유학왔다. 25살 나이에 일본에 와서 이제 사십대 마감에 들어섰으니  20여년 넘어되는 세월을 일본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일본생활중에서 나 나름대로 보람을 느낀 것이 90년에 여러 조선족단체의 설립에 참가하여 많은 우리민족의 훌륭한 분들과 만나고 의미있는 일들을 같이 한 것이다. 아마 일본에서 거의 처음으로 조선족의 규모가 큰 단체활동이 시작된 것은 동방학우회 모임부터 일 것이다. 1990년5월에 도쿄에서 연변대학교 교수출신자들과 북경에서 온 조선족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동방학우회》라는 유학생,학자모임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임이 생기면서 도쿄지역에서 조선족들이 자주 모여 친목회를 했다. 이 모임이 생길 때 지금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에서 활약하시는 김 호웅선생이 통지가 가능한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그 편지글에 ‘자! 백의동포들이여! 우리 손잡고 뭉칩시다!!’ 하는 글귀가 참으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때는 유학생, 학자들마다 전화가 있은 것도 아니어서 편지로 통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메일로 손쉽게 모든 통지를 할 수 있는 지금이 신선같은 시대이다.     이 모임의 보람찬 활동가운데의 하나가 1990년 여름에 오사카에서 개최된 국제고려학회에 참가한 것이고, 또 하나 같은 해 여름에30여명의 유학생,학자와 가족들이 같이 한국으로 10여일간의 모국방문을 다녀온 것이다. 그 때 고베에서 배를 타고 밤중에 대마도를 지나 아침녁에 부산항에 도착던 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대부분의 일행이 그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부산, 포항, 경주, 서울, 판문점을 방문했는데 그 때 같이 한모임에서 활동하던 조선족들중에서 중국의 학계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고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조선족에 인재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나는 자꾸 하게 됐다. 그런데 이 동방학우회는 성립되어서 1년 정도 활동이 많았지만 초기의 골간들이 일본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면서 활동이 차츰 뜸해졌다. 이 모임이 1년만에 활동이 뜸해진 또 하나의 이유가 일본에서 활동하시던 한국의 유력한 인사가 연변대학교에 일본유학장학금을 후원해주면서 동방학우회를 부추겨 세운 면이 있어 꼭 조선족의 자체의 힘으로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 때 이분이 모임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식사를 대접하면서 결국엔 경제적으로 장기적인 후원을 하기 여려워졌다. 그러다니 자연히 모임이 오래가지 못했다. 순수하게 자신들의 실력으로 만든 단체가 아니고 보면 결국 이런 결과가 도래하게 된다.   동방학우회 모임이 뜸해지면서 1992년 여름경에 일본에 유학, 또는 연구하던 연변대학교 교수들이《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를 새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나서 정기적으로 공부모임, 친목모임, 여행을 조직했는데《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는 그 때부터 오늘 이때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연변대학교라는 틀속에서 활동하기에 일본에 있는 조선족전체의 모임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일본에 연변대학교 출신자들이 많기에 이 모임이 끈끈하게 이어져오고 있고, 참가자가 꽤 많은 셈이며, 봄이면 야유회, 연말이면 망년회를 하고, 연변대학교에서 관계자들이 찾아올 때 같이 잘 모이고 있다. 1995년경부터 도쿄의 고락쿠료라는 중국유학생, 학자전용회관에 들어있던 조선족 여러명이 같이 모이면서 《천지클럽》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차츰 도쿄지역의 조선족들중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98년 봄부터 《천지클럽》과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멤버들이 손잡고《천지클럽》을 일본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 때《천지클럽》이 내건 슬로건이 <교류, 협력, 공동발전> 이었는데 30대 초반에서 중반되는 조선족들이 이 모임의 골간이 되어 일본속에서 명실상부한 조선족 단체를 만들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 때도 초기에는 온라인 시대가 아니어서 많은 통지를 편지나 엽서로 했는데 그 때의 통지문들이나 회의기록문들을 지금 다시 읽어봐도 다들 얼마나 진지하게 《천지클럽》을 키우려 했느지 생생한 감동이 아직도 전해진다.    나는 초창기의《동방학우회》와 《재일연변대학교학우회》의 모임에 참가하다가 1998년에《천지클럽》의 확대, 발전기에 같이 참가하면서 이 모임이 조선족 사회에서 아주 신선하고 희망적이 요소들을 지니고 있음을 느꼈다. 일본사회에서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조선족단체를 키우려는 의지가 명확했고 조선족들이 모이면 술이나 마시는 기풍을 없애려고 술모임을 거의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모일때마다 참가비 500엔을 거두어 일부수익금을 중국의 조선족 청소년들의 장학금에 쓰기로 했다. 《천지클럽》은 1998년경부터 수년사이 좋은 활동들을 진짜로 많이 조직했다. 정기적인 교류회, 취직,성공경험교류회, 무도회, 야유회, 망년회 등 모임을 많이 가졌는데 그 때부터 꽤 오랜 기간 도쿄지역의 조선족사회의 중심단체로서의 역할을《천지클럽》(이후《천지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이 톡톡히 했다. 이  모임의 초창기에 같이 활동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온 20, 30대의 젊은이들이었는데 다들 꿈이 많고 조선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그 때 같이 활동하던 멤버들을 보면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왔다.  나로서 이 모임에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천지인문이》이라는 잡지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모두들 무보수로 밤늦께까지 잡지를 같이 만들고 때로는 자기들 돈을 들여가면서 잡지를 발행했던 것이다. 그 때 일본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의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의욕이 다들 대단했고, 순수하고 좋은 내용의 잡지를 2년정도 유지했던 것이다. 1999년에는 일본에 유학하던 연변대학 교수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조선족연구회》를 설립하여 조선족에 대한 연구활동을 진행하다가  2007년에《중국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였는데 이 모임은 주로 학자, 대학원생들이 모이면서 일본에서 조선족연구단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규모가 큰 학술모임도 자주 하고 있다.     나는 2000년 봄부터 니가타의 대학교에 조교수로 취직을 하면서 도쿄지역의 조선족 모임에 자주 참가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부터 조선족단체가 다양하게 생겨나고,《쉼터》같은 온라인중심의 활동이 많아졌다. 이제는 조선족 모임들이 진짜 많아졌고 다양해지고 있으며  저마다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최근에 조선족 페이스북 사용자들로 만들어져가고 있는《3NEW》네트워크에 주목하고 싶다. 아직 어떤 모임으로 발전할지 더 지켜볼 필요는 있지만, 내가 1998년경에 체험해 본 확장, 발전기의《천지클럽》같은 그런 신선한 느낌을 이 네트워크에서 받고 있다. 그리고 온라인시대의 총아답게 그때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조선족의 글로벌네트워크가 형성하여 가고 있어, 일본, 한국, 미국등의 조선족을 순식간에 하나로 이어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침《3NEW》의 첫페이지에 백두산천지 사진이 붙어있다. 우연한 일치인지, 《천지클럽》과《3NEW》는 모두 백두산천지를 자신들의 싱징으로 하고 있었거나 있는 것 같다. 1998년부터 나는《천지인문》잡지를 편집하면서《천지클럽》이 백두산천지처럼 ‘높고, 맑고, 깊기’를 바라는 엣세이를 쓴 적이 있다.  《3NEW》에도 같은 소망을 보내보고 싶다. 즉 천지처럼 높은 기개와 자존, 젊은 사람들의 모임답게 천지처럼 맑고 깨끗함, 천지처럼 깊은 사고력과 지혜를 지닌 모임으로 거듭나기를《3NEW》바라면서 자그마하지만 나도 이 모임에 도움이 되고 싶다.   (2011년12월12일)  
5    스티븐 잡스의 명연설 댓글:  조회:3993  추천:3  2011-10-09
 스티븐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 축사   I'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for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저는 오늘 세계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의 학위수여식에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이 제가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와본 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려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세 개의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eighteen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인생의 전환점)들을 잇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칼리지를 6개월간 다니다가 자퇴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 청강생으로 18개월 정도를 더 머물렀죠.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ve got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This was the start in my life.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저의 생모는 미혼의 어린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죠. 제 생모는 제가 대학 졸업자에게 입양되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나면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도록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자, 바로 마지막 순간에 변호사 부부는 여자아이를 입양하기 원한다고 결정한 것만 제외하고 말이죠.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던 저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이렇게 묻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남자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입양하시겠습니까?” 양부모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 나중에 제 생모는 저를 입양하기로 한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과 아버지는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모는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죠. 몇 달 후에 저를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양부모로부터 받아낸 뒤에야 생모는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And seventeen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ï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ay.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그리고 17년 후에 저는 정말로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퍼드 대학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죠. 노동자 계층이셨던 부모님께서 저축해온 돈 전부가 제 수업료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지나도 저는 대학을 다니는 일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몰랐고, 또 대학이 그것을 알아내도록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부모님께서 평생 모아온 돈 전부를 축내면서 이곳, 대학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척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은 제가 내렸던 최고의 결정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퇴한 순간부터는 흥미 없던 필수과목들을 수강하지 않아도 되었죠. 그대신 훨씬 더 흥미로워 보이는 과목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five-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seven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하지만 생활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숙사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 방의 바닥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사기 위해 콜라 병들을 반납하며 5센트씩 보증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또한, 맛있는 한끼 식사를 얻어 먹으려고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일요일 밤마다 하레 크리슈나 사원까지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걷곤 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르면서 마주치게 된 많은 일들이 나중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당시에 리드 칼리지는 아마도 미국에서 최고의 컬리그래피 강좌를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붙은 포스터와 서랍의 라벨들은 손글씨체로 아름답게 적혀 있었죠. 저는 자퇴를 해서 정규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컬리그래피 강의를 듣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우기로 했습니다. 삐침이 있는 글꼴과 삐침이 없는 글꼴에 대해, 서로 다른 문자 조합들의 간격을 다양하게 조절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멋진 글꼴을 멋지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으로는 표현할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으로 정교한 것이었죠. 저는 그것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at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10 years later.  이러한 어떤 것도 제 삶에 실제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그것은 전부 저에게 되돌아왔고, 우리는 그것들을 전부 맥 안에 담아 설계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글꼴을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다양한 글꼴과 자간이 비례적으로 조절되는 서체를 절대 갖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는 그저 맥을 베낀 것이기 때문에 어떤 퍼스널 컴퓨터(PC)도 그런 글꼴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요. 만약 제가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 컬리그래피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퍼스널 컴퓨터(PC)들은 오늘날의 아름다운 서체들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미래를 보며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했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because believing that the dots will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ence.  다시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들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과거를 되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미래에 점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이어질 것이라는 걸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언가에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 본능이든 운명이든 삶이든 인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점들이 연결되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마음을 따르도록 하는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마음을 따르는 일이 여러분을 탄탄대로에서 벗어나게 할지라도. 그리고 그로 인해 인생의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twenty. We worked hard, and in ten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the Macintosh, a year earlier. And I'd just turned thirty,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And so at thirty,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일찍이 제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니까요. 워즈와 저는 스무 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 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후에 애플은 달랑 두 명뿐인 차고에서 4,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20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바로 전 해에 우리는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었죠. 그때 저는 막 서른이 되었고, 그리고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될 수 있을까요? 음... 애플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해갈 매우 재능 있어 보이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첫 1년 여 동안에는 모든게 순조로웠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갈라지게 되었죠. 우리가 갈라서자 회사의 이사진은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 서른에 저는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제 성년기 인생 전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사라졌고, 저는 참담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간은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바톤이 제게 전달되는 순간 그걸 떨어뜨렸다고, 그래서 제가 이전 세대의 기업가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 그토록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애썼습니다. 저는 공공연한 실패자였습니다. 심지어 실리콘 밸리를 아주 떠나버리는 것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하던 일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죠. 애플에서의 일들은 그 마음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거절당했지만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in my life.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국 애플에서 해고된 일이 제 인생에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성공에 대한 부담감은 다시 초심자의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조금은 덜 확신하게 되었죠. 그것은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들어가도록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and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o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후 5년 동안, 저는 ‘넥스트’라는 회사와 ‘픽사’라는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가 될 멋진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잘 나아가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랄 만한 반전으로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오늘날 애플의 르네상스를 이루어낸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함께 멋진 가정을 이루었죠.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s going to hit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and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매우 확신합니다.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독히도 입에 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는 그런 약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걸 압니다. 때로는 벽돌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시련도 있기 마련입니다.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제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준 유일한 힘은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한 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할 만한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연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work)’에도 적용되는 진실입니다. 그 ‘일’은 여러분 인생의 큰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단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도 다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 그러므로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17세 때 이렇게 시작되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마치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분명이 옳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고, 그때부터 지난 33년간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던 일을 과연 하기를 원할까?” 그 대답이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아니오’일 때마다, 저는 무언가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곤 하죠.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제가 아는 한, 인생의 큰 결정들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오직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긴 채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잃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한 제가 아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and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ten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약 1년 전에 저는 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오전 7시 30분에 단층촬영을 받았는데, 췌장에 붙어있는 종양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췌장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거의 치유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고,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만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 주치의는 집에 돌아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사들의 신호이죠. 이 말은 앞으로 10년간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단지 몇 달 동안에 다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서 가족들이 가능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thankfully, I am fine now.  저는 그 진단과 함께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늦게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내시경을 목 아래로 넣어 위와 장을 지나 췌장 안에 바늘을 찔러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종양에서 몇 개의 세포들을 떼냈습니다. 저는 마취된 상태였는데, 그곳에 있던 제 아내가 나중에 말해주더군요. 현미경 아래에 있는 세포들을 검사할 때 주치의가 울기 시작했다고. 매우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이어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고맙게도 저는 지금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때가 제가 죽음을 가장 가까이 직면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수십 년간 살아가는 동안에 죽음을 가장 가까이 마주했던 경우이기를 소망합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죽음이 유용하긴 했지만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더 확신을 갖고 여러분께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s quite true.  그 누구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조차도 천국에 가고자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죠. 죽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해 옛 세대를 처분합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존재는 여러분이죠. 하지만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머지 않은 장래에 여러분도 점점 옛 것이 될 겁니다. 그리고 사라지고 말겠죠. 너무 극단적이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느라고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도그마의 덫에 빠지지 마십시오. 도그마에 빠지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결론에 맞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서 나온 잡음이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압도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u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sixtie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thirty-five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릴 적에, 라고 하는 대단한 간행물이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에게는 권위 있는 책 중의 하나였죠. 그 카탈로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멘로 파크에 살던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PC나 데스크탑이 출시되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용해 만들어졌죠. 35년 전의 문고판 구글과도 같았습니다. 구글이 등장하기 전의 일이었죠. 그 카탈로그는 이상적인 사고들과 깔끔한 장치들,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넘쳐흘렀습니다.  Stu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를 몇 회 더 발간하다가 어느 정도 출간되었다 싶었을 때 최종호를 내놓았습니다. 때는 1970년 중반이었고 제가 여러분의 나이쯤이었습니다. 최종호의 뒷면에는 이른 아침의 시골길 사진이 있었습니다. 모험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를 그런 종류의 사진이 있었죠. 그 아래 문구가 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그들이 발행을 마치며 남긴 고별 메시지였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계속 갈구하십시오. 미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십시오.) 저는 제 자신이 항상 그렇게 살기를 바라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졸업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소망해 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계속 갈구하십시오. 미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진으로 보는 스티븐 잡스  
4    너무나도 많이 변했던 북경 댓글:  조회:3469  추천:37  2011-01-18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2)                                                           외부와 내부의 시각으로 본 오늘의 중국(2) 너무나도 많이 변했던 북경2009년 8월1일 곤명에서 5일간의 국제회의 일정을 마치고 북경에 가서 3박을 하면서 친척과 지인들을 만났다. 곤명을 떠나 북경에 도착한 첫 인상이 마치도 완전히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발전도상국에서 선진국에 온 것 같았다. 북경공항부터 크고 화려하여 이제는 어느 나라의 공항에 비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공항에서 차로 시내에 들어가면서 보니 2003년에 마지막으로 가본 북경과 비해도 엄청나게 변했었다. 교통이 사통발달한데다가 보통 길이 너르고 도로 양측에 호화로워보이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도시가 여유로움과 풍요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이제는 북경이 국제대도시중에서 어느나라에도 못지않고 북경이나 상해만 보면 중국을 발전도상국이라 할 사람이 오히려 적을 것 같다. 2005년에 일본에서 상해에 다녀왔는데 그 때 상해의 번화하던 모습을 보다가 일본에 돌아가서 도쿄의 우에노역에 내리니 마치도 어느 지방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토록 북경이나 상해는 변화가 빠르고 도시가 활기가 있었다. 근년에 북경의 모습이 엄청나게 바뀐 것은 2008년에 개최된 올림픽과 관계가 깊다. 도쿄와 서울이 올림픽을 통하여 도시가 크게 탈바꿈 한 것처럼 북경도 올림픽 덕을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다. 2010년에는 상해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으니  상해의 변화도 엄청날 것이라 예상된다. 북경에 도착한 후 먼저  ‘새 둥지’라고 불리우는 북경올림픽주경기장을 보러 갔다. 때마침 큰비가 쏟아져 가까이에 다가가 보지 못하고 차로 그 주위를 둘러봤는데 소문대로 규모가 어마어마한 경기장이었다. 경기장주변에는 중국 전통건축물의 특색을 지닌 고풍스러우면서도 호화스러운 호텔이 여러개 들어섰다. 저녁에는 북경에 있는 지인의 초대로 세계최대급쇼핑센터라는 골덴리소수쇼핑몰(金源時代購入物中心)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이 쇼핑센터의 규모도 가히 놀랄 정도였다. 부지 면적이 68만 평방미터라니 서울 여의도의  8배, 일본 도쿄돔의  15배가 되는 셈이다. 이 쇼핑센터에는 식당만 100개가 넘고 백화점, 슈퍼, 스포츠센터, 영화관 거의 모든 상업시설이 다 들어있다고 한다. 식당에 가봐도 대체 어느 식당이나 규모가 큼직큼직하여 이 큰데 손님이 다 모일 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보면 쇼핑센터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이처럼 큰 곳을 본 적이 없다. 미국에 와보니 규모가 큰 상업시설이 꽤 보이기에 대륙국가들의 스케일이 큰 것은 공통점것이라 납득이 갔다. 중국의 고도(古都)인 서안에서 본 진시황병마용(兵馬傭)박물관도 보통크기의 체육장 3개 정도였기에 일본이나 한국에 비하면 역시 대륙국가의 스케일이 크다는 실감이 갔다. 스케일이나 센스, 상업적 수요에 따라서 규모가 큰 시설을 짓는 것이 흠점은 아니지만 현재의 중국에서는 질보다 양을 많이 따지고 국가의 위세를 과시하는 모양으로 대표적인 건물들은 세계최대규모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꼭 규모가 커서 좋은 것이 아니고 지나친 규모는 자원낭비, 환경파괴가 뒤따르기에 좋다고만 볼 수 없다. 북경의 도시의 외모가 거창하고 화려한데 비하면 치안에는 문제가 있는것 같았다. 내가 찾아가 본 고층아파트에는 건물마다 경비원이 있고 아래층들에는 창문에 쇠창살을 해넣고 문도 보통 열쇠를 이중으로 잠근다고 들었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에 비춰보면 아파트마다 경비원이 있는 것이 이상해보였고 그만큼 치안이 좋지 않다는 방증인 것 같다. 북경에서 3일간 머무르면서 도시 외곽에도 가봤는데 식수(植樹)를 많이해서 어디가도 수림이 우거져 있었다.  1980년대부터 북경주변에서 식수를 대대적으로 한다고 들었는데 이제와서 그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에서는 지인들을 여러명 만났는데 대체 중국의 발전과 더불어 본인들도 괄목하게 변했다. 북경의 명문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대학교동창생 두명을 만났는데 두명 다 이제는 중국학계에서 중견학자로 자리잡고 있었고, 해외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도 많이 다니고 일본이나 한국에 나가 객원교수도 경험하였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모습이 스스로 초라해보였다. 일본에 유학하여 힘들게 공부를 마치고 대학교 교수로 취직하였지만 자그마한 지방대학교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직장이 불안하고 학계에서도 별로 활약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급속하게 성장해가는 중국에서 자리를 잘 잡고 본인들도 나라의 발전과 같이 성장해가는 모습이 20년 가까이 거의 정체상태에 머물러있는 일본에서 별로 발전을 이루지 못한 나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망경에서 생각해본 한중관계     북경에서는 3일간 망경(望京)에서 숙박했다. 잘 알려져있다싶이 망경(왕징)은 중국내에서 한국인들이 최대로 모여사는 곳이고 북경에 사는 조선족도 여기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니 연변을 제외하면 중국내의 최대의 코리아타운이고 한국인과  조선족을 합쳐서 최대 약 10만명이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을 둘러보니 말 그대로 코리언의 세계이고 한국것이 들어와 있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한국화된 지역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가 한국식 레지던스호텔이었는데 방내 비품이 거의다 한국제품이고, 텔레비를 틀면 한국방송이 나오고, 텔레비옆에는 북경거주 한국인들이 발행하는 잡지가 놓여있어 오히려 한국의 호텔들보다도 더 한국적이었다. 현재 중국에는 약 100만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중화권인 홍콩과 대만을 제외하면 외국인이 중국에 거주하는 수자로는 한국인이 제일 많을 것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수가 2005년의 통계에 약11만명으로 나오는데 그 이후에도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 같지 않다. 그러고보면 일본인보다 9배정도는 더 많은 것이다. 중국속에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가 거의 없지만 한국은 이미 북경, 청도, 연태 등 도시에 코리아타운이 들어섰고 중국의 조선족까지 합치면 중국속에서의 코리언의 존재감은 일본인보다 훨씬 크다. 망경의 코리아타운을 보면서 통일신라시기의 당나라 연해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신라방(新羅房)이 생각났다. 그때 신라인들은 당시의 세계최대강국중의 하나인 당나라에 진출하여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사실상 주도했다. 북경의 지인한테서 들으니 한국인들은 중국사회에 깊게 파고들고 중국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사이가 되는데 일본인들은 어쩐지 중국인들과 그렇게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하기 쉬운 것은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앞서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지리적으로도 중국과 가깝고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 한가지 현재의 중국에 200만 가까운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이 중국과 접근하고 교류하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인적자원이었다.      이미 잘 알려져있다싶이 2003년에 한국의 대중수출은 양적으로 대미수출을 초과했고, 이제는 대미, 대일수출보다 대중수출이 더 많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장기적으로 흑자를 내는 많지 않은 나라가운데의 하나이다. 1990년대부터 20년정도 중국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해가는 과정에서 한국은 중국의 발전을 최대한 잘 활용한 나라이다. 1997년의 IMF위기의 단기간의 극복이나 2008년의 미국발 세계경제위기를 잘 넘기것도 중국의 경제성장을 잘 활용한 것과 관계가 깊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장기간의 정체상태에 빠지면서 한국에 비하면 중국의 발전을 그리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고, 정랭경열(政冷經熱)이라는 말이 생겨나다싶이 양국의 외교적인 관계에서는 마찰이 자주 일어났다. 한국의 장점은 아직도 세계최강인 미국과의 외교적, 경제적관계를 잘 유지하면서그러면서도 지금까지는 중국과 뚜렸한 대립을 피하면서 관계를 잘 발전시켜왔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세계최강의 대국들인 미국도, 중국도 동시에 잘 활용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인 것 같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는조선(북조선)이라는 변수가 크게 작용하고, 또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절묘하게 평형을 유지해나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조선반도(한반도)의 남북관계가 잘 풀려야 하고 궁극적인 통일을 지향해가면서 그 통일이 조선반도와 중국 양측에게 서로 윈윈게임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지혜를 짜야 한다. 예술촌으로 봐뀐 공장북경의 망경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 생긴 예술촌으로 알려진 ‘789예술구’이 있어 찾아가봤다. 원래는 ‘789연합공장’이라 불리우던 군수, 방직공장이 이전을 하면서 비게된 공장의 넓은 공간을 예술가들이 창작에 활용하면서 어느사이 유명한 예술촌으로 거듭났다. 꽤 넓은 공간에 170여개의 갤러리나 아틀리에가 모여있다고 하고 유명해져가는 과정에서 아트샵, 카페같은 것이 많이 모이면서 종합오락공간으로 변모해가고 있다고 한다. 전시된 작품중에는 전위적인 것이 많아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의 반항적이고 거침없는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유리창에 둘러싸여 관람자들의 구경거리가 된 천안문, 미국의 마돈나를 옆에 끼고 싱글벙글하는 모택동, 이런 작품들속에서는 기존의 권위나 우상이 형편없이 깨여져가고 있었다. 한때는 용도폐기될번 했던 공장터가 기발한 아이디어와 창조적인 사고에 의하여 세간의 주목을 끄는 예술공간으로 탈바꿈했고, 이런 변화는 중국의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닌 문화적인 활력도 보여주고 있었다.   (2011년1월15일)     
3    기차로 횡당해본 미국(2) 댓글:  조회:3290  추천:36  2010-09-07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2)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2)   거목 세쿼이아 7월25일, 기차가 버클리를 떠나 약 두시간 동안 캘리포니아의 평야지대를 달리다가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인 Sacramento 를 지나면서 구릉지대가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산림지대에 들어섰다.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약 4시간 동안 기차가 줄곧 산림지대를 달렸다. 지도를 보면 캘리포니아를 남북으로 횡단하는 Sierra  Nevada 산맥의 중간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는 기후가 건조하고 강우량이 적은 지역인데 의외로 산림이 많았다. 통계자료를 보면 캘리포니아 전체면적의 약 45%가 산림이라고 한다. 달리는 기차에서 차창으로 관찰해보니 산에 소나무가 많고,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원시림이 많았다. 캘리포니아의 산림중에서도 자랑거리가 되고, 좋은 관광자원이 되는 것이 세쿼이아수이다. 세쿼이아(Sequoia)는 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자라는 삼나과의 수종인데 오래된 나무들은 수령 400년에서 1300년 정도가 많고 평균 높이가 80m가 된다고 한다. 해안에 인접한 지역의 세쿼이아는 보통 키가 크고, 깊은 산속의 세코이아는 몸체가 큰 것이 특징이다. 세계에서 키가 제일 큰 나무로 알려져 있는 세쿼이아는 캘리포니아주의 북쪽 해안가의 Redwood(紅木)국가공원에 있는데 키가 115m가 넘는다고 한다. 세계에서 몸체가 제일 크다고 알려져 있는 세쿼이아는 역시 캘리포니아주의 Sequoia국립공원에 있는데 직경이 11,1m, 둘레가 31,3m, 높이가 84m로 알려져있다.  또 캘리포니아의 산속에는 수령이 4847년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세쿼이어와 관계되는 다섯 개의 국립공원중 두곳을 둘러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해안을 따라 차로 한 시간 쯤 가면 Muir Redwood라는 국가공원이 있는데 이 공원속에 수백년에서 천년을 넘어되는 세쿼이아가 자그마한 골짜기를 따라 수두룩하게 서있다. 거목 세쿼이아는 북부캘리포니아 지역에 무수히 많았던 것 같은데 19세기 후반에 이 지역이 개발되는 과정에 많이 람벌되었다. 그런 것이 안타까워 1905년에 세코이아가 많이 자라는 산을 하나 개인 사업가 부부가 구입하여 국가에 헌납한 것이 현재의 Muir Redwood국립공원의 유래이다. 가히 현대 환경보호사업의 시초라 할 수 있겠다. 세쿼이아수의 보호를 둘러싸고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97년에 캘리포니아의 어느 사유지에 있는 세쿼이아 수림을 목재회사에서 벌채하려 했는데 Julia Hill이라는 23살 되는 여성이 벌채하려는 나무 외에 올라가 거기서 2년간이나 기거하면서 저항운동을 하여 끊내 목재회사가 세쿼이아 수림 벌채를 단념하게 만들었다. 그 여성은 2년사이 나무에서 한번도 내려오지 않았고 음식은 지원자들이 정기적으로 나무위에 올려주었다 한다.  또 한 곳 세쿼이아를 내가 직접 본 것이 Yosemite국립공원에서이다. 여기에도 수령 천년이상의 세쿼이아가 여기저기 많았는데 이 공원에서 수령이 제일 오래된다는 1800년 정도의 세쿼이아를 보니 말 그대로 신령이 들어있는 신목을 보는 것 같았다. 천년풍설을 이겨내고 하늘높이 우뚝 서있는 모습에 보는 이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세쿼이아 수림을 둘러보면 기묘한 자연현상도 발견하게 된다. 수령이 수백년에서 천년이상 되는 세쿼이아가 두 세 그루씩 나란히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 세쿼이아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있는 분의 설명을 들으니 이런 나무들은 땅위에서는 서로 다른 나무이나 실상 뿌리는 같다는 것이다. 나무들도 땅속의 제한된 자양분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수단으로 이런 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조물주가 내려준 생명의 원리인지, 생명체가 스스로 터득하는 생존비결인지 아무튼 자연현상의 오묘함은 인간의 지혜로 다 해석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세쿼이아공원을 둘러보면서 나는 미국과 동아시아와의 문화적 차이에 주의를 돌렸다. 천년씩 넘어되는 고목이고 보면 애니미즘 숭배가 깊은 일본 같으면 그런 고목을 신목(神木)이라 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할 것이고 한국이나 중국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을 수 있다. 즉 신목에 빌면 장수한다든가, 소원성취한다든가 하는 민속신앙이 충분히 이런 고목앞에서 행해줄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런 현상을 볼 수가 없다. 기독교문화 권이다 보니 이런 우상숭배가 애당초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의 산들을 다녀보면 어디에도 자연숭배의 현장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어떤때는 오히려 동아시아의 산신당이나 산사(山寺) 에서 손을 모아 비는 그런 정경이 그리워진다.    사막에 핀 꽃-카지노사업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의 네바다주 측에 있는 도시 Reno(인구 20만명 미만)를 지나면서부터 네바다주의 대사막지대를 기차가 달렸다. 버클리를 떠난 7월25일 오후 5시경부터 기차안에서 잠들기 시작한 밤 12시까지 차창을 내다보니 줄곧 거의 비슷한 사막의 풍경이었다. 나는 26일 아침 5시반경에 기차에서 깨어났는데 그 때보니 산악지대가 보이고 기차가 이미 유타주 경내의 럭키산맥에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가 네바다주의 사막에서 달린 시간을 계산해보니 25일 오후 5시부터 내가 잠들기 시작한 12시경까지 7시간, 그리고 기차에서 잠자는 사이에도 지도를 보니 아마 5시간 정도는 네바다주와 유타주 경내의 사막지대를 달린 셈이다. 장장 12시간 정도 기차가 사막을 달렸으니 그 크기를 상상할 만 하다. 25일 오후 5시부터 12시 사이에 관찰해본 사막의 풍경은 다음과 같았다. 드넓은 대지에 건조한 모래와 돌맹이가 쫙 깔리고 그 위에 힘겹게 솓아나온 메마른 풀과 키가 낮은 관목이 자라고 있었다. 가끔 가다 지면에 소금이 스며나와 풀도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모래땅도 보였다. 산도 가끔 보였는데 나무가 거의 없었고, 한 여름인데도 높은 산의 정상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이 지역이 해발이 높은 고원지대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인가가 보이는 사막 속에 목초지가 나타나고 밭도 보였는데 아마 관개를 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금년 2월말부터 3월초에 미국서부지역을 1주일간 버스로 여행하면서 캘리포니아주, 애리조나주, 네바다주의 사막지대를 달려봤는데 대체 내가 기차에서 본 풍경과 비슷하였다.  사막이라 해서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처럼 식물이 거의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대체 메마른 풀과 키가 작은 관목은 자라고 관개를 한다면 농사도 지을만 하였다. 그래도 사막지대이니 기후가 극히 건조하고 사람살기가 쉽지 않아 어디를 가도 인가가 드물다. 이번에 기차로 네바다주와 유타주의 사막지대를 통과하면서 약 12시간 달리는 사이 정차한 기차역이 두곳밖에 없었고 그 것도 다 작으마한 시가지이었다. 캘리포니아의 번영하는 도시와 농촌지역을 보다가 이런 사막지대를 보니 환경이 인간의 생활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들었다.  하나 그런 사막속의 작은 시가지에도 지극히 미국적인 풍경이 있으니 그것인즉 햄버거점이다. 미국은 어디가도 햄버거점이 없는 시가지가 없을 정도로  같은 양식의 햄버거점 안내판이 높이 붙어있다.    그러면 거의 사막밖에 없는 네바다주의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알고보니 네바다주는 광산업, 농목축업, 관광산업이 주요산업인데 관광산업은 대부분 카지노에 의지하고 있었다. 소문을 들으니 네바다주에 그럴만한 산업이 없기에 미국연방정부에서 네바다주에 특별히 카지노산업을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기차로 통과한 Reno도 그렇거니와 라스베가스는 카지노에 의지해 번영하고 있다고 절대 과언이 아니다. 나는 금년 2월말에 라스베가스를 방문했는데 찾아가기 전과 찾아본 후의 인상이 전혀 달랐다. 라스베가스를 찾아가기전에는 국제적인 관광도시인 라스베가스의 멋진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는데 라스베가스 주변을 버스로 돌면서 황량한 사막의 풍경을 먼저 보고나서 라스베가스에 들어서니 전에 가졌던 멋진 이미지가 많이 사라졌다. 라스베가스의 주변은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황량한 산으로 둘러쌓이고 평야도 사막뿐이다. 시내도 수원이 모자라 가로수나 잔디들은 물이 주지 않으면 자라지 못한다고 한다. 아마 여름에는 대단히 더운 도시일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오니 그것도 흥미로운 일 아닌가? 카지노만이 느낄수 있는 짜릿한 긴장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주변 사막의 황량한 풍경과 최고급호텔에서 즐기는 카지노, 그 어떤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라스베가스의 중심가에는 최고급호텔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거리공연이나 극장의 쇼 등 볼거리가 많다. 거기다가 명품가게가 많아 돈 많은 사람들이 쇼핑도 즐길 수 있다. 도박산업이라 카지노는 다가가기 어려운가 생각했더니 라스베가스 시내의 어디에서도 손쉽게 카지노를 할 수 있었다. 또 소문을 듣고 제 눈으로 관찰해본데 의하면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업계에는 중국계 직원이 아주 많았다. 라스베가스를 찾는 관광객중에 중국대륙이나 홍콩, 대만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관계라고 한다. 중국계 여행사의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금년 봄에 중국의 어떤 부자가 카지노를 하려고 라스베가스에 찾아왔는데 샌프란시스공항에 도착하니 카지노업자가 소형전용기로 마중해서 라스베가스에 모셔갔다 한다.  그만큼  라스베가스의 카지노업에도 중국의 존재가 커지고 있다. 실지 내가 라스베가스를 방문했을 때 마침 중국의 구정( 설) 기간과 겹치는 관계도 있어서인지 호텔마다 중국어 춘련을 붙혀놓고 중국식의 붉은 색의 등롱을 걸어놓고 있었다. 좀 과장적인 표현을 한다면 라스베가스가 중국인에게 점령당한 그런 감이 들었다. 물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챙긴다는 속담이 있다싶이 결국 외국에서 번 돈을 미국에 와서 쏟아놓고 가는 셈이다.        럭키산맥의 경관 7월25일에 버클리를 떠나서 하루 밤을 기차에서 지내고 26일 아침 5시반경에 깨어나보니 기차가 이미 유타주 경내에 들어섰고 사막은 이미 않보이고 산들이 나타났다. 차창으로 멀리보니 높은 산맥이 보인다. 럭키산맥이 틀림없었다. 여지껏 황량하던 사막과는 달라 산에는 수림이 꽤 보이고 협곡에는 녹음이 우거지고 목초지가 여기저기 나타났다. 유타주의 주도(州都) 는 Salt Lake City라고 하는데 기차가 통과하기로 돼 있었다. 인구 약 18만 정도의 도시이고 2002년에는 여기서 동기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미국의 신흥종교조직 몰몬교의 총본산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하기에 달리는 기차에서라도 한번 보고 지나고 싶었는데 내가 잠들다가 깨어나기 직전인 새벽 5시경에 기차가 거기를 통과해버려 아쉬움을 남겼다. 유타주의 주도인 Salt Lake City로부터  콜로라도주의 주도인 Denver에 이르기까지 럭키산맥을 통과하는 구간인데 미국의 철도노선중에서도 자연경관이 제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리고 차창밖으로 흘러지나는 자연경관을 관찰했다. 기차가 Salt Lake City를 지나서 몇시간은 산악지대이고 수림이 보였는데 오전 8시경에 유타주의 Helper라는 산속의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이번에는 사막이 아닌 모래산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그런 모래산에는 수목이 거의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협곡에는 자그마한 강들이 흐르고 있었고 강가에는 수풀도 자라고 가끔 가다 협곡에 밭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모래산의 경관은 황량하기는 한데 산의 모습이 천태만상이이고 미국 서부영화에서 자주 보던 낭만을 자아내는 그런 풍경이었다. 그럴조건이 된다면 멋진 말을 타고서 그런 모래산이 있는 산악지대로 마음 껏 달려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오전 11시반경에 기차는 Grand Junction이라는 산속의 자그마한 시가지에 정차했다. 알고보니 이 역부터는 이미 콜로라도주였다. 이 역을 지나면서부터 모래산이 거의 안보이고 꽤 높은 산들이 보이는데 그래도 나무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메마른 산들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평야나 협곡에는 밭과 목초지가 보이는데 강냉이, 채소, 포도, 기타 과일들을 재배하고 있었다. 협곡에서는 계속 강이 흐르고 있어 수원이 모자라는 문제는 없어 보인다.  오후 한시반경에 콜로라도주의 Glenwood Springs 라는 협곡속에 자그마한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불시에 산이 높아지고 협곡이 졻아졌다. 럭키산맥의 제일 깊숙한 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여기의 협곡은 기차가 겨우 지날 것 같은 좁은 곳이고 손을 내밀면 차창밖의 벼랑가에 손에 닿을 정도였다. 협곡이 굉장히 깊어지고 협곡아래로는 맑고 가늘한 벽계수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협곡속의 어느 곳을 통과할 때 협곡에 온통 기암절벽이고 아름다운 소나무가 어우러지는 절경이 나타났다. 아마 금강산이 바로 이런 모습일거라고 감탄하면서 절경구경에 흠뻑 취했다. 기차를 타고 미국횡단 여행을 결단한 나에게 주어진 특전이 아니냐 하는 정도로 기뻤고 럭키산맥의 깊은  속살을 혼자서 본 것같이 도취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보니 이렇게 험한 협곡에 어떻게 철도를 부설했는지 그 때의 노동자들의 피땀과 희생을 잊고 지날 수는 없었다. 19세기 중기에 미국의 대륙횡단 철도를 부설하면서 중국 광동지역에서 노동자를 많이 모집했고 그 들중에 힘든 고역과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 서부지역의 철도가 중국인들의 노동과 희생에 의하여 개통됐다고 하여고 너무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공로가 인정받아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번화가에 차이나타운 설치를 허가받았고 샌프란시스코지역에서는 중국인들의 그런 공로를 상당히 인정해주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고 들었다.  25일에 기차가 버클리를 떠날 때도 기차안의 방송에서 이 철도에 대하여 소개를 하면서 이 철도건설에는 중국인들의 공로가 아주 크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이런 솔직한 모습이 좋았다. 제2차대전때 일본군의 진주만습격을 받고나서 미국서부지역에 있던 일본계인들을 아리조나주 등지의 사막지대에 강제수용했던 과거사를 훗날에 미국연방정부가 사죄하고 개인들에게 보상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일본에도 일제때 많은 조선인들이 징용당하여 광산을 개발하고, 홋카이도 철도부설에 동원됐고 그런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런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추모비라도 제대로 세워주었는지 의문스럽다. 오후 5시반경에 협곡이 사라지고 기차는 서서히 럭키산맥의 동쪽구간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부터 산과 산 사이에 넓은 분지가 나타나고 녹음이 우겨졌다. 럭키산맥의 서부가 대체 건조하고 수목이 잘 자라지 못하는데 비하면 동부는 습윤하고 수림이 울창하여 완전히 서로 다른 산같았다.  좀 가다가 Fraser-Winter라는 산속의 자그만한 시가지에 기차가 정차했는데 목재를 적재한 트럭이 보이기에 다시 산들은 쳐다보니 어디나 수림이 울창하여 임업이 충분히 가능하겠다고  짐작했다. 정말이지 럭키산맥의 서부와 동부는 자연조건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서부 사막이나 모래산의 황량한 모습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울창한 산림속을 기차가 한시간 이상 달리면서 긴 터널을 여러개 지나니 불시에 드넓은 평야가 멀리 산아래에 나타나고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이는 콜로라도주의 주도 Denver 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보니 오후 7시경이었다. Denver 는 도시배후에 웅대한 럭키산맥이 자리잡고 앞면에는 광활한 중부의 대평야가 펼쳐지는 인구 약 47만명의 도시인데 맑은 날씨가 많아 청천하늘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럭키산맥에서 기차 차창으로 내려다본 도시풍경도 가히 장관이었다. 시내 중심에 멋진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주변의 도시전체가 녹음에 뒤덮인 그런 모습이었다. 기차가 Denver역에 들어서니 오후 8시가 거의 되었다. 26일 아침 5시쯤부터 기차가 럭키산맥의 서쪽끝에 있는 유타주의 주도 Salt Lake City 들어섰는데 오후 8시경에 럭키산맥을 다 통과하여 콜로라도주의 주도 Denver에 도착하기까지 장장 15시간이 걸렸다. 미국의 철도노선중에서도 자연경관이 제일 아름답다는 구간을 이렇게 하루 종일 구경하면서 통과하였다. 기차가 Denver에서 약 40분 정차하고 다시 출발할때는 어둠이 깃들어 차창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잘 보면 기차가 대평야를 달리고 있었고 가끔가다  대형정미소 건물이 보였다. 이제부터 중부의 대평야에 들어서는데 밤이 깊어가니 더 볼수 없어 오후 12경에 잠 들었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중부의 대평야에 있는 Nebraska라는 주를 달리고 있었다.                                             (2010년9월6일)    
2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1) 댓글:  조회:4046  추천:46  2010-09-04
                                             ~동아시아와 미국의 교차로에서~                                                                                김 광림의 보스턴통신(1)                       기차로 횡단해본 미국(1)   정든 고장을 아쉽게 떠나면서 나는 일본에서 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작년 9월부터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UC Berkeley)의 동아시아연구소에서 1년간 방문학자로 체류했다. 1년만으로는 자신의 연구를 충실하게 하고, 영어의 벽을 넘어서기까지는 너무 짧은 시간이어서 금년 8월부터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에서 방문학자로서 1년간 더 체류하기로 했다. 그래서 7월말에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서 매사추세츠의 보스턴에 이사하게 되었다. 버클리는 미국 태평양연안에 있는 서부의 도시이고, 보스턴은 대서양연안에 있는 동부의 도시이다. 즉 미국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중국으로 말하면 신강의 서쪽 끝 도시 호탄에서 대련으로, 또는 해남도에서 연길로 이사하는 정도의 먼 거리이다. 버클리에서 보스턴까지의 거리는 대체로 4,700km인데 비행기로 6시간 정도 걸린다. 미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사하는데 비행기를 타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지난 다는 것은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번쯤은 광활한 미주대륙을 기차로 횡단해보고 싶은 꿈이 나의 마음에 꿈틀거렸다. 그리하여 버클리에서 보스턴까지 기차로 가는 방법을 알아봤더니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Emeryville역에서 기차를 타고 52시간이 걸려서 미국 중부의 대도시 시카고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기차를 바꾸어타고 또 23시간 걸려서 보스턴역까지 토착하게 된다.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시간만 75시간 정도이니 옹근 3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거기다 침대차는 워낙 가격이 비싼데다 침대 두개나, 세개가 달린 침대방 하나를 통채로 구입하는 방식이기에 혼자서 여행하면서 침대차를 타기에는 처음부터 무리가 따랐다. 나이가 40대 후반에 들어선 내가 침대도 없는 기차에서 3일간이나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혹시나 병이 들지 않겠는가 하는 근심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좋은 기회에 미주대륙을 횡단해보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었다. 여러 생각끝에 기차로 보스턴에 가기로 했다.  7월25일 오전, 버클리에 1년 체류하는 사이 물심양면으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한국 출신의 김 선일박사 (UC 버클리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는 연구원)가 자가용차로 기차역까지 바래주었다. 오전 10시경에 내가 몸을 담은 시카고행 기차가 샌프란시스코 외곽의Emeryville역을 출발했다. 정작 기차가 서서히 떠나니 1년간 살았던 버클리에 대하여 수많은 감회가 떠올랐다. 영어도 변변히 통하지 않고, 아는 지인도 없는 낮선 곳에 공항에서 마중해주는 사람도 없이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찾아왔던 것이 바로 1년전이었는데, 와보니 너무나 좋은 곳이었고, 1년간 방문학자로 체류한 UC 버클리는 정말 좋은 대학이었다. 버클리는 인구 10만명 정도되는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도시인데 태평양을 바라보는 느슨한 산비탈을 타고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1년 사계절이 마치도 가을과도 같이 서늘하고 태평양에서는 언제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일본에서 준비해간 1년 사계절  옷을 서로 바꾸어 입을 필요 없이 항상 가을 옷만 입고 지냈다. 아마 자연조건만 따진다면 이 지역만한 도시가 미국에서 그리 흔하지도 않을리라.   UC 버클리는 학생이 약 3만5천명 정도의 종합대학교인데 미국내에서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대학이기에 해외에서도 많은 유학생, 학자들이 모여오는 대학교이다. 1년간 나는 UC 버클리의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수십번 이상 다양한 학술활동에 참가하면서 동아시아연구의 최신연구동태를 알게되고, 미국과 중국, 한국, 일본에서 온 학자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학문을 하는 경우도 자기 혼자서 책을 보고 사색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고 거기서 계발받고 아이디어를 얻는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UC 버클리의 대학생, 대학원생 수업도 자주 방청했는데 수업중에 토론이 많은 점이 동아시아의 대학들과의 다른 점이었다. 교수가 강의를 하는 도중에 학생들이 불쑥 질문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교수들도 그런데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학생들이 다양한 인종이나 국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미국 대학교의 특색이라 할 수 있겠다. UC 버클리의 교실앞에서는 수업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복도의 바닥에 않아서 공부를 하는 모습이 일상적으로 목격된다. 역시 미국 대학생들은 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고 있었다. 수업을 방청하면서 재미있는 현상도 목격했다. 아무리 미국의 대학생들이라도 항상 수업이 재미있을 수만 없지 않는가? 그럴 경우 일본의 대학생들은 핸드폰을 가지고 문자메시지를 전하거나 다른 장난을 친다. 여기 학생들은 컴퓨터를 켜놓고 인터넷을 검색한다. 교수보기에는 수업에 열중하는 것 같고 본인들은 지루함이 없이 시간을 보내는 묘책같다. 버클리 성인학교의 영어교실도 나에게는 좋은 추억을 남긴다. 1년간 저녁마다 거기에 나가서 영어공부를 했는데 영어공부도 중요했거니와 중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나 난민들과 격의없이 지내면서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좀 고상하게 말하면 이문화를 제대로 체험했던 것이다. 버클리의 YWCA (세계기독교여자청년회)의 영어회화자원봉사프로그램도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존재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통하여 나는 정년 퇴직한 미국 노인과 매주 한번 씩 영어회화연습을 할 수 있었다. 이 노인은 나만이 아니라 매주 대여섯 명의 외국인을 상대로 무료로 영어회화파트너를 해주고 있었다. 자원봉사란 바로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한두번의 이벤트를 통한 남에게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고, 또 조용하고 꾸준하게 남이 꼭 필요한 일을 해주는 그런 것이 참다운 자원봉사라 하겠다.      버클리에 1년간 있는 사이에 여러 기회가 생겨 미국 서부지역을 두루 관광하였다. 가까운 곳에 있는 샌프란시스코에는 여러번 다녀왔고, 로스안젤스, 샌디에고, 라스베가스에 가보고 서부의 유명한 자연경관인 그랜드캐니언, 요세미테 (미국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유명한 산) 도 구경하고 태평양 양안에서만 생성하는 세계에서 제일 높이 자라는 나무라는 세쿼이아 (평균 나무 높이 80m)도 보았다. 수령 1800년이 된다고 하는 세쿼이아수는 나무 그 자체에 신령이 들어있는 것 같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었다. 필경 나다니면서 구경하는 것, 그 자체도 하나의 좋은 공부이었다.   1년간 정든 버클리에 여러가지 상념에 젖는 사이 기차는 캘리포니아의 평야를 한창 달리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농업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태평양의 바닷물이 내륙으로 깊게 파고들어와 넓은 만(灣)을 이루고 있다. 기차가 출발하여 한창동안 왼켠에 호수처럼 보이는 만이 이어지고 그 다음 Sacramento라고 불리우는 큰 강이 내륙지역에서 바다를 향하여 흐르고 있었다. 버클리에 있을 때에는 산업시설이 거의 보이지 않아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버클리를 좀 벗어나면서부터 만과 강 연안에 석유정제시설이 많이 보이고 바닷물과 강을 따라 대형 석유탱크가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다음부터 캘리포니아의 풍부한 곡창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버클리를 좀 벗어나면서부터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가 있는 Sacramento를 지나기까지 기차로 2시간 정도를 달리는 사이 만이나 강물외에는 드넓은 평야이고 여기저기에 채소밭, 과수원, 화혜농장, 그리고 목초지가 펼쳐진다. 목초지에서는 대체로 검은 색의 소들이 무리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다. Sacrament의 평야지대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유명한 곡창지대인데 여기서 남쪽으로 수백킬로 이상 평야를 따라 Central Valley라고 불리우는 거대한 농업지대가 이어진다. 나는 금년 2월말부터 3월 초순사이에 중국계 여행사의 버스를 타고 1주일간 미국 서부지역을 관광했는데 샌프란시스코 남쪽에서 고속버스로 온 낮을 달려도 드넓은 평야에 끝없이 펼쳐지는 전원풍경에 감탄을 금치못했다. 이른 봄철에 여기저기 과수원에서 과일 꽃이 피어나는데 그 끝머리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이번에는 버클리에서 기차를 타고 동북쪽으로 북상하면서 또 다시 캘리포니아의 곡창지대를 보게 된 것이다.    Sacrament 주변을 기차가 통과하면서 눈여겨 보았더니 논밭이 나타났다. Sacrament주변은 수원이 풍부하여 논농사를 많이 짓고 있고,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 쌀은 대부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한다. 아시아 농업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논밭을 미국땅에서 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러나 알고보면 미국도 세계적으로 쌀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이라면 사람들은 실리콘밸리의 하이테크산업이나  로스안젤스에 있는 헐리우드의 영화산업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알고보면 캘리포니아의 제일 큰 산업은 농업이다. 캘리포니아는 주 하나의 면적이 일본이나 조선반도 전체의 국토면적보다 휠씬 더 크다. 캘리포니아주의 GDP가 세계 제10위라 하고(어떤 자료에는 제9위라고도 함), 농업규모가 세계 제6위라고 한다. 내가 직접 제 눈으로 본Central Valley라고 불리우는 캘리포니아주의 중심에 위치한 분지형의 곡창지대만도 남북길이가 아마 800km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이만하면 어지간한 나라의 국토면적에 맞먹는다. 이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농축산품도 그 종류가 미국에서 제일 많다고 한다. 곡물부터 과일, 화혜, 소고기로 대표되는 가축류, 웬만한 것은 거의다 여기서 생산된다고 한다. 다만 캘리포니아 농업에도 걱정거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 것인즉 수원의 부족이다. 캘리포니아지역이 워낙 건조하고 강우량이 적기에 멀리서 수로로 물을 끌어다 하는 관개농법이 보편적이다. 그 때문에 물부족이 캘리포니아 농업을 제약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국가경쟁력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이 농업과 대학교육이라고 본다. 대학교육은 시대에 따라서는 다른 나라에 뒤질 수도 있겠으나 농업만큼은 미국의 천혜의 자원이어서 어느 나라가 쉽게 대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지구의 온난화가 이어지고 이상기후 때문에 장래에는 식량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제일 중요한 이슈로 떠오를 수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은 장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일 것이다. 최근에 조글로포럼에서 어느 분이 조선족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농경문화를 페쇠적이고 낙후한 것으로만 취급하고, 그런 관점에서 구조선족, 신조선족 운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 관점이 극히 천박하며 조선족의 미래에 전혀 책임감이 없는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조선족이 피땀으로 개척하고 목숨으로 지켜온 소중한 땅을 기약없이 버리고 도시에 들어가서 떠도는 영세민으로 살아야만 현대적이고 문명개화인가? 또는 제땅을 다버리고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 노무자로 다녀야 행복한가? 일본의 재일교포가 도시에 산다고 다 행복했는가? 전후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은 도시의 최하층에서 페물수거로 생계를 유지했고, 오늘날에도 직업적으로 기시를 받는 빠찐꼬업으로 살아가는 교포가 허다하다. 미국의 한인들도 세탁소나 채소가게가 이들의 주요업종이다. 이들이 꼭 일본이나 미국의 농민들보다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나는 중국 조선족들도 물론 도시에도 진출해야 하지만 지혜를 살려서 되도록 농촌의 생활터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연변지역은 그런 농촌이 있어서 조선족 공동체가 기능하고 조선족자치주가 존립해온 것이 아니겠는가.                                                           (2010년9월3일)
1    스트브 잡스의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축사 댓글:  조회:3727  추천:30  2010-01-02
       설명-제가 전번에 「뜻깊게 지낸 추수감사절」이라는 글에서 미국  휴렛패커드(HP)회사의 대학생 창업자들이 민간주택의 차고를 빌려 사업을 시작한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분이 댓글에서 애플컴퓨터의 최고경영자 스트브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축사 (2005년)가 좋은 글이니 읽어보라고 강력추천하기에 인터넷에서  이 축사를 찾아서 경인년 새해 첫날에 읽어봤습니다. 한 인간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이기에 조글로를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 축사를 같이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시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인터넷에서 퍼 온 것을 양해를 바라며 내용의 정확성을 기하여 영문과 한글로 같이 올렸습니다.                                                                         경인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김 광림 올림  스트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축사    I'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for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저는 오늘 세계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의 학위수여식에 함께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이 제가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와본 겁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려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세 개의 이야기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eighteen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인생의 전환점)들을 잇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칼리지를 6개월간 다니다가 자퇴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 청강생으로 18개월 정도를 더 머물렀죠. 왜 제가 자퇴를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ve got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This was the start in my life.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저의 생모는 미혼의 어린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죠. 제 생모는 제가 대학 졸업자에게 입양되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나면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도록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자, 바로 마지막 순간에 변호사 부부는 여자아이를 입양하기 원한다고 결정한 것만 제외하고 말이죠.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던 저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이렇게 묻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남자아이가 하나 생겼는데 입양하시겠습니까?” 양부모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나중에 제 생모는 저를 입양하기로 한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과 아버지는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모는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죠. 몇 달 후에 저를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양부모로부터 받아낸 뒤에야 생모는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And seventeen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ï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ay.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그리고 17년 후에 저는 정말로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퍼드 대학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죠. 노동자 계층이셨던 부모님께서 저축해온 돈 전부가 제 수업료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지나도 저는 대학을 다니는 일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몰랐고, 또 대학이 그것을 알아내도록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부모님께서 평생 모아온 돈 전부를 축내면서 이곳, 대학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척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것은 제가 내렸던 최고의 결정들 중 하나였습니다. 자퇴한 순간부터는 흥미 없던 필수과목들을 수강하지 않아도 되었죠. 그대신 훨씬 더 흥미로워 보이는 과목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five-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seven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하지만 생활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숙사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 방의 바닥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사기 위해 콜라 병들을 반납하며 5센트씩 보증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또한, 맛있는 한끼 식사를 얻어 먹으려고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일요일 밤마다 하레 크리슈나 사원까지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걷곤 했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르면서 마주치게 된 많은 일들이 나중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당시에 리드 칼리지는 아마도 미국에서 최고의 컬리그래피 강좌를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붙은 포스터와 서랍의 라벨들은 손글씨체로 아름답게 적혀 있었죠. 저는 자퇴를 해서 정규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컬리그래피 강의를 듣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우기로 했습니다. 삐침이 있는 글꼴과 삐침이 없는 글꼴에 대해, 서로 다른 문자 조합들의 간격을 다양하게 조절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멋진 글꼴을 멋지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으로는 표현할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으로 정교한 것이었죠. 저는 그것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at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10 years later.   이러한 어떤 것도 제 삶에 실제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설계할 때, 그것은 전부 저에게 되돌아왔고, 우리는 그것들을 전부 맥 안에 담아 설계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글꼴을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다양한 글꼴과 자간이 비례적으로 조절되는 서체를 절대 갖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즈는 그저 맥을 베낀 것이기 때문에 어떤 퍼스널 컴퓨터(PC)도 그런 글꼴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요. 만약 제가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 컬리그래피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퍼스널 컴퓨터(PC)들은 오늘날의 아름다운 서체들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대학을 다닐 때에는 미래를 보며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에 과거를 되돌아보니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했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because believing that the dots will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ence.   다시 말씀 드리지만, 여러분들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과거를 되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미래에 점들이 어떻게든 연결되어 이어질 것이라는 걸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언가에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 본능이든 운명이든 삶이든 인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점들이 연결되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마음을 따르도록 하는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마음을 따르는 일이 여러분을 탄탄대로에서 벗어나게 할지라도. 그리고 그로 인해 인생의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twenty. We worked hard, and in ten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the Macintosh, a year earlier. And I'd just turned thirty,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And so at thirty,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일찍이 제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니까요. 워즈와 저는 스무 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 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후에 애플은 달랑 두 명뿐인 차고에서 4,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20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바로 전 해에 우리는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었죠. 그때 저는 막 서른이 되었고, 그리고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될 수 있을까요? 음... 애플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해갈 매우 재능 있어 보이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첫 1년 여 동안에는 모든게 순조로웠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갈라지게 되었죠. 우리가 갈라서자 회사의 이사진은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 서른에 저는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제 성년기 인생 전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사라졌고, 저는 참담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간은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바톤이 제게 전달되는 순간 그걸 떨어뜨렸다고, 그래서 제가 이전 세대의 기업가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 그토록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애썼습니다. 저는 공공연한 실패자였습니다. 심지어 실리콘 밸리를 아주 떠나버리는 것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가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하던 일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죠. 애플에서의 일들은 그 마음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거절당했지만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in my life.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국 애플에서 해고된 일이 제 인생에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성공에 대한 부담감은 다시 초심자의 홀가분한 마음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조금은 덜 확신하게 되었죠. 그것은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들어가도록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and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o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후 5년 동안, 저는 ‘넥스트’라는 회사와 ‘픽사’라는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가 될 멋진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잘 나아가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오늘날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랄 만한 반전으로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했고, 저는 애플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오늘날 애플의 르네상스를 이루어낸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함께 멋진 가정을 이루었죠.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s going to hit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and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매우 확신합니다.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독히도 입에 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는 그런 약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걸 압니다. 때로는 벽돌로 뒤통수를 얻어 맞는 시련도 있기 마련입니다.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제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준 유일한 힘은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한 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할 만한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연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work)’에도 적용되는 진실입니다. 그 ‘일’은 여러분 인생의 큰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단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마음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도 다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 그러므로 계속 찾으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제가 17세 때 이렇게 시작되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마치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분명이 옳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고, 그때부터 지난 33년간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던 일을 과연 하기를 원할까?” 그 대답이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아니오’일 때마다, 저는 무언가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곤 하죠.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제가 아는 한, 인생의 큰 결정들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오직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긴 채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잃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한 제가 아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and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ten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약 1년 전에 저는 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오전 7시 30분에 단층촬영을 받았는데, 췌장에 붙어있는 종양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췌장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거의 치유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고,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만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 주치의는 집에 돌아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사들의 신호이죠. 이 말은 앞으로 10년간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단지 몇 달 동안에 다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서 가족들이 가능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thankfully, I am fine now.   저는 그 진단과 함께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늦게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내시경을 목 아래로 넣어 위와 장을 지나 췌장 안에 바늘을 찔러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종양에서 몇 개의 세포들을 떼냈습니다. 저는 마취된 상태였는데, 그곳에 있던 제 아내가 나중에 말해주더군요. 현미경 아래에 있는 세포들을 검사할 때 주치의가 울기 시작했다고. 매우 희귀한 형태의 췌장암이어서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고맙게도 저는 지금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때가 제가 죽음을 가장 가까이 직면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수십 년간 살아가는 동안에 죽음을 가장 가까이 마주했던 경우이기를 소망합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죽음이 유용하긴 했지만 순전히 지적인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더 확신을 갖고 여러분께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s quite true.   그 누구도 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조차도 천국에 가고자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이죠. 죽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해 옛 세대를 처분합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존재는 여러분이죠. 하지만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머지 않은 장래에 여러분도 점점 옛 것이 될 겁니다. 그리고 사라지고 말겠죠. 너무 극단적이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느라고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도그마의 덫에 빠지지 마십시오. 도그마에 빠지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결론에 맞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서 나온 잡음이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압도하도록 두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u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sixtie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thirty-five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릴 적에, 라고 하는 대단한 간행물이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에게는 권위 있는 책 중의 하나였죠. 그 카탈로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멘로 파크에 살던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PC나 데스크탑이 출시되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이용해 만들어졌죠. 35년 전의 문고판 구글과도 같았습니다. 구글이 등장하기 전의 일이었죠. 그 카탈로그는 이상적인 사고들과 깔끔한 장치들, 기발한 아이디어들로 넘쳐흘렀습니다.   Stu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를 몇 회 더 발간하다가 어느 정도 출간되었다 싶었을 때 최종호를 내놓았습니다. 때는 1970년 중반이었고 제가 여러분의 나이쯤이었습니다. 최종호의 뒷면에는 이른 아침의 시골길 사진이 있었습니다. 모험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를 그런 종류의 사진이 있었죠. 그 아래 문구가 있었습니다.“Stay hungry. Stay foolish.” 그들이 발행을 마치며 남긴 고별 메시지였습니다.“Stay hungry. Stay foolish.”(계속 갈구하십시오. 미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십시오.)저는 제 자신이 항상 그렇게 살기를 바라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졸업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소망해 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계속 갈구하십시오. 미련하더라도 계속 도전하십시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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