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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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북경인의 “에덴동산” 주구점(周口店) 댓글:  조회:3270  추천:126  2007-06-18
[중국탐방] 북경인의 “에덴동산” 주구점(周口店)     주구점에 들어서자 금세 나지막한 산들이 앞을 막아섰다. 산기슭을 감도는 메마른 주구하(周口河)와 시뿌연 연기는 어딘가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따금 지나는 화물기차는 마치 타임머신이 되어 내처 수십만년전의 세상으로 달려가는 듯 하다.   북경  서남쪽에서 불과 50㎞ 상거한 주구점은 고대 원인(猿人)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주구점 원인 유적지는 일찍 1987년에 세계문화재로 등재되었다.   이전에 사람들은 주구점 서쪽의 자그마한 산에서 고대동물의 화석을 자주 발견, 이런 것들을 만병통치의 중약재로 썼다고 한다. 중의들이 이런 화석을 용골(龍骨)이라고 불렀기에 이 작은 산은 용골산(龍骨山)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러고 보면 약재에 조상의 뼈가 섞여 있는 셈이네요.” 일행 가운데 누군가 뼈 없는 농담을 던졌다.   가이드는 웃음으로 대답을 흘려보내며 일행을 비탈길로 안내한다.   용골산은 옛 동굴과 박물관, 그 사이를 이은 포장길 등으로 고대와 현대를 한데 어우른 이색적인 그림을 하늘과 땅 사이에 그리고 있었다. 발굴자들의 사진이 양켠에 도열한 비탈길을 수십미터 올라가니 왼손 편에 30~40미터 깊이의 큰 구덩이가 나타났다. 이 구덩이는 원래 동서 길이 140미터의 거대한 동굴이었다고 한다. 동굴은 맹수의 공격을 피하려는 원인들의 주거지로 뛰어난 곳이었다.   1921년, 스웨덴의 학자 안데르손이 처음으로 이 구덩이를 발견, 1927년 캐나다 학자 D․블랙이 정식발굴을 하면서 인간의 이빨화석 3점을 발견하고 "중국원인 북경인종(種)"이라고 공식 명명한다. 1929년, 중국학자 배문중(裴文中)은 최초로 보존이 완전한 "북경인"의 두개골을 발견하여 세상을 들썽케 했다.   그때 현장사진을 찍던 카메라맨은 흥분한 김에 두개골화석을 안고 있는 "발굴자"를 두동강 내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화석 두개골은 큼직하게 찍었는데 발굴자의 두골은 화면 밖에 냅다 버렸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접시 크기의 이 두개골 화석에 달라붙은 진흙 따위를 제거하는데 장장 4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의 노고를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을 에피소드였다.   일행은 구덩이에서 한식경을 머물렀다. 가로세로 그어진 흰 선, 낙서하듯 쓰인 아라비아 숫자들… 아직도 아스라한 흙벽에 새겨져 있는 발굴흔적은 그제 날의 현장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더듬게 했다.   1921년 이후 선후로 계속된 동굴의 발굴 작업에서 총 3만㎡의 퇴적물을 처리, 두개골 6개와 하악골 15개, 치아 153개 그리고 상당수의 팔다리뼈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은 모두 다양한 연령층의 40여명 남녀로 구성된 골각이다. 이런 발견은 동시대 인류화석으로는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가이드의 말에는 어딘가 힘이 실리고 있었다. "북경원인은 과학계에서 호모 에렉투스(直立人)가 인간인가 아니면 원숭인가 하는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했어요."   호모 에렉투스는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중간 고리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호모 에렉투스의 전형은 여전히 주구점 북경원인이라고 한다.   북경원인은 20~50만년전에 생활, 뇌 용량이 현 인류의 2/3 수준인 것으로 밝혀졌다. 동굴에는 여러 개의 잿더미 유적과 불에 탄 많은 짐승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 발굴로 인간이 불을 사용한 역사는 수십만년 앞당겨졌으며 당시 북경원인은 이미 각종 석기를 다듬어 도구로 활용하는 방법과 불씨를 보존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는 게 입증되었다.   산에는 앙상한 벽과 바위만 남은 발굴지들이 적지 않았다. 군데군데 작은 입구의 동굴들은 인간 기원의 비밀을 간직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1933년, 용골산에서 또 1.8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화석이 발견된다. 이 화석이 바로 "산정동인(山頂洞人)"이다. 산정동인은 원시몽고인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체질적으로 현대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다. 또한 장식품 제조기술이 상당히 발전된 것으로 보아 시기적으로 구석기 말기에 해당하는 문명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5년부터 중국학자 가란파(賈蘭坡)의 주도로 발굴 작업은 용골산에서 계속되었다. 이듬해 북경원인이 두개골 화석조각이 3점이나 발견되어 학계를 놀랜다. 그러나 이런 발굴 작업은 1937년 주구점 근처인 노구교(盧溝橋)에서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인간의 전쟁은 수십만년전의 인골 화석에도 역겨운 화약 냄새를 풍겼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이 시작된 후 일본이 중국 내의 미군 기지를 점령하는 과정에 북경원인과 산정동인의 유골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지금 중국에는 "북경원인 두개골 화석 수색사업위원회"가 설립되어 두개골 화석의 선색을 찾고 있지만 이 미스터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북경원인은 세상에 얼핏 존재를 확인한후 재차 수십만년의 깊은 미궁에 빠진듯 하다.   그러나 용골산의 유물 발굴은 뒤미처 또 개선가를 울린다. 1973년, 50만년전의 북경원인과 1.8만년전의 산정동인 중간 단계에 해당하는 10만년전의 시기로 추정되는 신동인(新洞人)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용골산의 전설은 부근에도 나타났다. 2001년, 용골산 유적지의 서남쪽에서 수㎞ 떨어진 전원(田園) 동굴에서 39종의 포유동물 뼈와 6개의 이빨이 붙어있는 턱뼈를 포함, 많은 유골 화석이 발견되었다. 전원 동굴의 화석은 3~4만년전에 고인류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주구점의 용골산은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일까?   "그때는 북경의 위치가 북위 35도로, 지금의 북위 39도에서 4도나 남쪽으로 더 치우쳤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소개이다.   그때 북경은 간빙기(間氷期)에 속해 있었으며 지금의 날씨보다 훨씬 더 따뜻했다고 한다. 주구점은 적어도 20만년전까지 삼림이 무성하고 초원이 펼쳐진 곳이었다는 것. 북경원인 동굴에서 발굴된 200여점의 동물화석에 따르면, 이곳에는 사슴들이 떼를 지어 뛰어다니고 코끼리와 코뿔소 등 북방온대 지역의 포유류 동물이 서식하고 있었다.   하늘은 지변(地變)으로 북경원인의 말일을 예시한듯 하다. 약 30만년전 북경원인이 기거하던 동굴은 문득 천정이 내려앉는다. 그래도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동굴을 사용하던 북경원인은 드디어 약 23만년전에 용골산에서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로부터 10여만년의 세월이 흐른 뒤 용골산 주변에는 선후로 신동인, 전원인, 산정동인이 나타난다. 그들은 진짜 북경원인의 후손일까? 아니면 타지역에서 찾아온 정체불명의 이주민일까?… 역사는 띄엄띄엄 연결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세인들에게 우주와 같이 무한한 연상의 공간을 던져주고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전원동굴의 화석이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부터 시작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졌다는 정설과 달리 여러 대륙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생 인류는 약 15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6만년전부터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드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발견된 유골의 수량이 적어 현생 인구가 여러 곳에서 기원했다는 방증은 되지만 이것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천년, 만년이 되는 일을 어떻게 알아요?" 일행가운데 누군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이다.   인간이 멸종되면 불과 20만년후 인간의 생활흔적은 지구에서 가뭇없이 소실된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옛날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화석은 이름 그대로 태고적의 이야기를 적은 천서(天書)인 셈이다.   산길을 돌아 나오니 산중턱에 주구점 유적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은 주구점 북경원인의 발굴과정과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에 놓인 북경원인의 동상은 말없이 멀리 평야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굴 대신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과 짐승 떼 대신 무수히 오가는 차량… 천지개벽의 이 엄청난 변화를 두고 북경원인은 뭔가의 상념에 깊숙이 빠져 있는 듯 하다.   일행은 북경원인의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박느라 잠깐 법석을 떨었다. 낮고 평평한 두개골과 돌출한 광대뼈를 가진 북경원인의 동상은 이상한 헤어스타일과 복색의 현대인들에게 둘려 사뭇 괴이한 화면을 만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천손(天孫)민족의 신화가 시공에 드린 커튼을 젖히고 불쑥 실체로 현신(現身)할듯한 별스런 착각이 들었다. 웅녀의 인간 환생, 알에서 깨어난 시조 왕… 전설 같은 옛 이야기들이었다.*
1    치우괴수(蚩尤怪樹), 그 천년의 비밀 댓글:  조회:3778  추천:127  2007-05-22
    넓은 황야에 병풍처럼 둘린 민둥산과 드문드문 나타나는 촌락… 싯누런 황사에 덮인 탁록(涿鹿)은 그렇게 황량한 모습으로 처처히 다가왔다.   먼 옛날 황제(黃帝)와 치우(蚩尤)가 대전을 벌인 싸움터로 유명한 탁록은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120㎞ 떨어져 있다. 탁록의 벌판에는 황제묘(黃帝廟), 정차대(定車臺), 토탑(土塔), 치우채(蚩尤寨) 등 고대 전장의 흔적이 적지 않다.   치우채는 이름 그대로 치우가 설치한 군영이라는 뜻이다. 5천년 전의 역사가 지명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우채는 생각처럼 찾기 쉽지 않았다. 지명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았고, 도로에는 안내표시도 없었다. 근처를 오르내리다가 아예 “황제성(黃帝城)”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황제성은 관광풍경구로 도로에 안내판이 있었고, 또 관광지라면 십중팔구 가이드를 찾을수 있을 듯 싶었다.   “치우채를 찾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요.” 가이드는 약간 괴이쩍다는 표정이었다. 이 며칠째 내가 첫 손님이란다. 후문이지만 치우채에는 1년에 대여섯번 정도 한국 관광팀이 찾아온단다. 그리고 황제성을 다녀가는 홍콩, 마카오 사람들도 이곳을 드물게 찾는다고 한다.   이윽고 차는 가이드의 안내로 용왕당촌(龍王塘村)을 찾아 마을 중심가의 빈터에 멈춰 섰다. “치우채”라는 글자를 새긴 돌비석이 유표하게 안겨 왔다. 마을사람들이 40~50년전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동네 어구의 벽에 모신 토지신과 농가의 바깥벽에 옴폭하게 자리를 파고 모신 신상(神像)은 여느 시골과는 어딘가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해묵은 소나무가 마을 빈터의 한 귀퉁이에 서있고, 졸졸 흘러나오는 물가에는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 물은 부근의 치우천(蚩尤泉)이 있는 샘터에서 흘러나온다고 한다. 치우천이 있는 서너 평 크기의 뜰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이전전(李佃全, 42세) 촌장이 소식을 듣고 금방 달려왔다. “애들이 들어와서 장난을 칠까봐서요.” 그는 자물쇠를 열면서 변명조로 이렇게 말했다. “방문객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평소에는 문을 잠그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치우천은 “탁록지전(涿鹿之戰)”때 치우부족의 인마(人馬)가 물을 마시던 곳이다. 샘은 3m 정도의 둘레에 4~5m의 깊이었는데, 돌로 쌓여 있었고, 밑바닥에는 물이 한두 뼘 정도로 차있었다. 몇 년전만 해도 물은 사시장철 샘물터의 언저리에서 찰랑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철을 제외하고 거의 말라있는 상태라고 한다.   치우천의 앞뒤에는 각기 천년고목이 서 있었다. 고목 앞에는 모두 돌로 된 제대(祭臺)가 있었다. 제대에는 누가 놓고 갔는지 붉은 점을 찍은 만두가 놓여 있고, 타다 남은 향대가 향로 삼아 놓은 모래 대야에 꽂혀 있었다.   “이걸 잘 보세요.” 이전전씨는 그 중 앞쪽에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뭐가 비슷하게 보여요? 모두들 이 나무에는 신령이 현신했다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무 밑둥에 박힌 옹이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흡사 뿔이 돋친 짐승의 머리가 나무에 박혀 있는 듯 했다. 전설에 따르면 치우는 81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동(銅)으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갖고 있었고, 머리에는 긴 뿔이 돋쳐 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치우의 신령이 샘터의 고목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말라드는 샘물과 더불어 4천여년 전의 위용이 역사 속에 영영 사라질까 두려워 진짜 치우가 현신할 걸까…   치우의 군사가 숙영했던 군영이 근처라고 해서 대끔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치우천 북쪽의 수십 미터 되는 곳에 자그마한 산 둔덕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치우가 담을 쌓고 군대를 주둔했던 숙영지라고 한다. 이곳은 치우의 북쪽 군영이라는 뜻의 치우 북채(北寨)라고 부른다. 고증에 의하면 그때 치우의 군영은 남, 북, 중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남채(南寨)는 후방의 공급기지, 중채(中寨)는 지휘중심, 북채(北寨)는 전연진지었다.   우리 일행은 반달음으로 둔덕에 올랐다. 둔덕 기슭에는 한그루의 고목이 있고, 그 뒤로 흙담이 있는데 고대 전장의 잔재한 성벽이라고 한다. 저쪽 둔덕은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금방 발끝에 닿일 듯 했다. 이런 둔덕의 뒤쪽은 산에 막혀 있고, 앞쪽에는 들판이 펼쳐졌다.   4,700여년 전, 황제의 부족은 염제의 부족과 연합하여 치우의 부족과 이곳에서 대결전을 벌였다. 전쟁에서 황제는 천녀(天女) 발(魃)과 응룡(應龍), 풍후(風後), 구천현녀(九天玄女)의 도움을 받고, 치우는 과부족(夸夫族)인, 풍백우사(風伯雨師), 이매망량(魑魅魍魎)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대진(對陳)을 보아도 범상하지 않는 이 싸움은 중국의 신화에서 제일 유명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치우는 연기를 빨아들이고 안개를 뿜으며, 공중을 날고 험한 곳을 뛰어넘는 재간을 갖고 있었다. 치우의 법술로 천지간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자 황제의 군사는 방향을 잃는다. 황제는 나중에 “지남차”를 만들어 인도를 받는다. 싸움에서 패한 치우는 황제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한다. 그의 피는 도리깨를 물들여 단풍 수림을 이뤘다고 전한다.   지금 탁록의 고대 전장 유적지에는 치우의 무덤이 3기나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현지인들은 그중 남쪽의 치우무덤이 진짜 무덤이라고 말한다. 황량한 들판에 있는 자그마한 흙둔덕에 천년의 비밀이 숨어 있다니 전설인지 신화인지 언뜻 분간이 되지 않는다.   바로 이 대전에서 치우를 전승한 황제는 많은 부락의 옹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어 염제(炎帝)의 부족도 황제의 부족과 충돌이 발생하여 탁록 부근의 판천(阪泉)에서 싸움을 벌인다. 승전한 황제는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중원지역의 부락연맹 수령이 되었다. 염제의 하족(夏族)이 황제의 화족(華族)과 근친이고, 또 한데 융합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자기들을 염황(炎黃)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결국 “탁록지전(涿鹿之戰)”에서 패한 치우의 부족은 이 지역을 떠났다고 한다. 중국 중부의 황하(黃河)유역에 살던 묘족(苗族)은 이때 서남부로 이주했다. 묘족 역시 한민족처럼 치우를 선조로 섬기며, 치우를 “우공(尤公)”이라고 부른다. 치우의 부족인 동이구려족(東夷九麗族)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한 단락이다.   중국에서는 치우의 부족이 점차 염제와 황제의 부족에게 융합되어 염황자손의 일부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의 초반, “황제성”에 세워진 “중화 삼조당(三祖堂)”이 바로 그런 학설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 3조는 황제, 염제, 치우가 중화민족의 선조라는 뜻이다. 중국 사책에서 짐승의 몸을 갖고, 인간의 말을 하는 “수신인어(獸身人語)”의 악인으로 기술되었던 치우는 이로써 비천한 신서를 고치게 된 것이다.   혼전을 벌이던 인마와 창칼의 마찰음은 모두 전장을 뒤덮었던 온무처럼 가뭇없이 광야에 사라졌다. 아, 이 들판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산 둔덕에 서있는 고목은 멀리 들판을 굽어보며 수호신처럼 묵묵히 전쟁터를 지키고 있었다.   이 고목은 수령(樹齡)이 천년을 훨씬 넘는다고 하는데, 모양은 느릅나무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상한건 도대체 수종이 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렇든 말든 해마다 가을철이 오면 나무에는 또 앵두 크기의 노란 과일이 수두룩하게 달린다고 한다.   “그림속의 떡이죠. 식용이 불가능하니까요.” 이전전 촌장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현지인들은 이 이상한 나무를 “치우 괴수(怪樹)”라고 부른단다. 어쩌면 전세(前世)의 인물 치우가 수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천년의 괴수로 현령(顯靈)한듯 했다. 치우의 신상에 얽힌 수두룩한 비밀은 지금 무명(無名)의 과일로 응고되어 세상에 뭔가 하소연하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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