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http://www.zoglo.net/blog/jinhulin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기획기사(내가 바라본 세상)

장백산, 발해 남쪽의 신선의 산
2014년 11월 12일 22시 58분  조회:3459  추천:4  작성자: 김호림
   ( 고조선계열 11) 
 

   옛날 신선이 살던 장백산의 이야기는 발해 남쪽에서 시작된다. 이 장백산은 산동성의 수부 제남濟南에서 동쪽으로 불과 7,80㎞ 상거한 추평현鄒平縣 경내에 있다. 그러나 제남의 사람들은 장백산 하면 곧바로 바다 건너 발해 북쪽의 명산으로 알고 있다.

  하긴 일명 백두산이라고 하는 이 명산이 바로 장백산의 실체로 세간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추평현 현성에서 만난 장씨 성의 택시 기사도 약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지금 농담을 하는 거죠? 장백산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지요?”

  정말이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어느 정도 이해할 법 한다. 장백산은 산동성의 지도에서 마가령摩訶嶺이라고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가봉摩訶峰은 해발 8백m로 100리 장백산의 3백여 개 봉우리에서 단연 으뜸을 자랑한다.

  이 장백산은 일찍 1,800년 전의 옛 문헌에 나타난다. 진(晉 ,265~420) 나라의 도인 갈홍(葛洪, 284~364)은 저서 《포박자抱朴子》에서 “장백은 태산의 부악副岳이다.”라고 적고 있다. 후대의 북위(北魏,386~577) 시기 지리서 《수경주水經注》도 “어자골漁子溝의 물은 남쪽으로 장백산…에서 흘러나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작 발해 북쪽의 명산의 이름으로도 등장하는 건 7백여 년 후의 일이다. 여진인은 장백산을 그들의 발상지로 간주하고 이곳에 사찰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금사․세기金史․世紀》에 따르면 세종 완앙옹完顔雍은 대정大定 12년(1172) ‘장백산’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책봉한다. 장백산은 이로써 문헌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장백산의 별칭인 백두산이라는 이름도 실은 여진족이 지은 걸로 알려지고 있다. 여진족의 말 “Goromin Sanggiyan Alin”을 의역했다는 것. 누군가의 억지주장이 아니다. 《이조숙종실록李朝肅宗實錄》은 “장백산은 호인胡人이 백두산이라고도 불렀다.”라고 명명백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호인은 여진족을 칭하는 말이다.

 어찌됐거나 두 장백산은 지질학적으로는 일맥의 산으로 일컫는다. 발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호응하는 ‘형제의 산’인 것이다. 남쪽의 장백산은 해발고가 북쪽 장백산의 허리에 미치지 못하지만, 생성연대는 무려 7천만년이나 앞서는 등 형 맞잡이로 되고 있다.

  공교롭다고 할까, 북쪽의 장백산에 백운산白雲山이 있듯 남쪽의 장백산에도 백운산이 있다. 또 이 동명의 산은 각기 장백산의 두 번째 산봉우리이다.

  “산꼭대기에 늘 흰 구름이 감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요?” 장씨 성의 기사가 추측조로 하는 말이다.

  “우리 고장의 전설에요, 옛날 백운 선녀가 있었다고 전하지요.”

  장씨 성의 기사는 이렇게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백운산 기슭에 전한다고 하는 이 전설은 그렇게 택시에 실려 신명나게 달려왔다.

  어느 해 여름, 백운산 일대에는 전무후무한 큰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곡식이 불볕에 타서 땅에 풀썩 물앉을 지경이었다. 농부들은 밤낮으로 비가 내리길 하늘에 빌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고 검은 구름이 밀려오더니 삽시에 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대지에는 또다시 푸른 생기가 돌았다. 얼마 후 날이 개이고 하늘가에서 흰 구름이 두둥실 날아왔다. 구름 위에는 예쁜 선녀가 서있었다. 선녀는 구름과 함께 백운산 산꼭대기에 사뿐 내려앉았다. 이 선녀가 단비를 내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백운白雲 선녀라고 불렀으며 이 산을 백운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운산의 전설은 아름답지만 필경 진실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전설에 선녀가 등장하듯 실화에도 신선이 등장하고 있었다. 장백산이라는 이 이름은 수행자들이 제일 먼저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도인 갈홍이 장백산을 수련의 명산 명부에 넣었고, 당나라의 도인 사마자미司馬子微는 장백산을 동천복지洞天福地의 순위 61번째에 놓았다.

  그렇다고 이 산에서 최초로 신선의 도를 닦은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실제상 선진先秦 시기의 도인 백토자白免子가 산의 첫 주인이다. 백토자는 당요唐堯 시기의 인물 팽조彭祖의 제자이다. 전설에 따르면 팽조는 그 후 하나라와 상나라, 하나라까지 거치면서 장장 880년을 장수했다. 백토자는 팽조로부터 신선의 비법을 전수 받아 산속에서 도를 닦은 후 흰 토끼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토공白免公이라고 불렀다. 백토공은 스승 팽조처럼 장수한 신선이었다. 도가에서는 신선의 이름으로 산의 이름을 짓는다.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을 장수長壽 백토공의 산이라고 불렀으며 약칭 장백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예전에 장백산 기슭에는 백토자의 동상이 있었으며 명나라의 유명한 화가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쓴 비문이 새겨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볼 때 장백산은 분명히 상고 시대부터 항간에서 불리던 옛 이름이다. 옛 문헌에 지명으로 정식 입적하기 전 이미 ‘신선’과 함께 등장하여 선계와 인간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전설의 백운 선녀가 백토공의 버금으로 유명한 ‘신선’으로 떠오르며, 이에 따라 백운산은 장백산의 다른 이름으로 되었다. 그렇다고 장백산의 별칭은 이 하나뿐만 아니었다. 제남의 학자 왕사정(王士禎, 1634~1711)의 《장백산록長白山彔》 등 옛 문헌은 장백산이 또 숙신산肅愼山, 숙연산肅然山, 상재산常在山 등으로 불린다고 기술하고 있다.

  숙신肅愼은 요순堯舜 시대에는 식신息愼이라고 하였으며, 은주殷周 시대에는 숙신肅愼, 직신稷愼이라고 하였다. 기실 이들은 이름만 다를 뿐이지 모두 하나이다. 아쉽게도 숙신이 어떤 계통의 종족이며 생활방식이 어떠했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잘 전하지 않는다.
선진先秦 시기의 문헌인《좌전·소공구년전左傳․昭公九年傳》은 “숙신, 연,·박은 우리의 북토이다.肅愼、燕、亳、吾北土也.”라고 기록, 숙신이 선진 시기에는 주周나라의 북쪽지역에 있었다고 밝힌다.

  숙신은 한漢나라 이후의 기록에서는 읍루挹婁를 가리키고 있다. 읍루는 또 말갈, 여진족으로 이어지는 만주족의 선조이다. 이처럼 읍루, 말갈, 여진족 계열이라면 숙신은 중원을 멀리 떠나 녕고탑寧古塔 부근에 있어야 한다. 숙신이 살고 있는 ‘주나라의 북쪽지역’은 만주의 북부일대를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발해 남쪽에 나타나는 숙신은 땅위에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를 그리고 있다. 그들도 동명의 장백산처럼 역시 남북에 선후로 나타나는 일맥의 종족일까…

  마침 《국어國語》에 숙신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설화가 실려 있다. 《국어》는 선진 시기의 문헌으로 중국의 첫 국별체國別体 사서이다. 이에 따르면 노魯나라의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 갔을 때 매 한 마리가 궁정에 날아와 떨어져 죽었다. 매의 몸뚱이는 화살에 꿰뚫려 있었다. 진나라 국왕은 화살의 정체가 궁금하여 사람을 보내 박식한 공자에게 물었다. 이때 공자는 매가 아주 멀리서 날아왔다고 말하면서 숙신이 쓰는 화살이라고 알려준다. 숙신의 화살은 주나라가 공물로 받은 후 진나라에도 나눠줬고 이 때문에 진나라 궁정의 창고에 있어서 금방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생긴다. 화살의 관통상을 입은 매가 어떻게 수천 리 밖의 만주 땅에서 날아올 수 있을까?

  이때 매가 천계의 신조神鳥가 아니라면 진나라 부근인 산동성 북부와 하북성 남부의 지역에서 날아올 수밖에 없다. 장백산의 별칭인 숙신산은 바로 좌표계처럼 매가 화살을 맞은 대략적인 위치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숙신은 동이부족처럼 역시 발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주한 옛 종족일 수 있다. 혹자 숙신은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문헌에 보이는 동명의 종족이 아닐 수 있다.

  청나라 때의 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따르면 숙신의 옛 이름은 주신珠申이며, 주신은 다스리는 지경 안의 땅을 의미한다. 이 주신을 자칫 만주족의 별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상 그렇지 않다. 1635년, 황태극皇太極은 등극할 때 “우리나라에 원래 만주滿洲… 등 이름이 있으나, 여태까지 무지한 사람들은 늘 주신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지금부터 모두 단지 만주 원명을 부르고 이전의 잘못된 이름을 계속 불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조선이라는 이 국명이 ‘주신→ 숙신→조선’의 변화과정을 거쳤다고 하는 단재 신채호의 주장에 한결 무게가 실리는 부분이다. 숙신은 주신과 더불어 기실 조선의 어원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첫 기전체 사서 《사기史記》에는 발식신發息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식신은 숙신의 첫 이름이다. 발식신은 두 형태어의 합체 ‘밝+식신’으로, 발해 남부의 장백산 부근에 있는 ‘밝’ 나라들을 연상시키고 있다. 식신 아니, 숙신, 주신도 결국 선진 시기 ‘조선’의 별칭일 수 있는 얘기이다.

 실제로 숙신의 이름은 선진 시기부터  벌써 장백산과 한데 이어진다. 선진 시기의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은  “대황大荒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不咸이라고 부르며 숙신의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 불함산은 발해 북쪽의 장백산을 지칭한다고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저러니 불함산이 장백산의 최초의 이름이라는 데는 학계에서 별로 이의가 없다. 그러나 ‘불함’ 두 글자의 확실한 의미는 지금까지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붉음’이라는 의미의 우리말 고어로 해석하며 또 몽골어 ‘부르칸’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부르칸은 몽골어로 어르신 혹은 무당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따르면 ‘불함산’은 ‘신선의 산’이라는 뜻으로 되겠다.

  진짜 그럴 법 한다. 이 불함산 역시 북해라는 지명처럼 서쪽의 바이칼호에 나타난다. 바이칼호의 알혼(Olkhon) 섬에는 ‘부르칸산’ 즉 ‘불함산’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조상의 무덤을 모시는 선산이다. 이 때문에 일부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이 부르칸 산에서 찾고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불함산이라는 이 지명은 발해 북쪽의 장백산이 아니라 남쪽의 장백산을 지칭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남쪽의 이 장백산 부근에서 용산龍山 문화와 대문구大文口문화가 흥기했기 때문이다. 또 장백산 산체에도 옛 유적이 적지 않다. 예전에 산봉우리의 절벽에는 큰 돌 고리가 달려있었고 많은 산꼭대기에는 철로 부어 만든 쇠기둥이 있었다. 또 산중에는 대홍수 시기의 선박 화석도 있었다고 전한다. 박달족의 선대의 ‘신선’은 상고 시기부터 이곳에서 ‘도’를 닦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옛 지명 ‘불함산’의 원주인을 자처하는 북쪽의 장백산에는 이런 ‘신선’의 유적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백설과 부석浮石으로 하얗게 뒤덮인 백두의 봉우리에는 ‘신선’이 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나중에 흥기한 인간의 거주지는 원래의 거주지와 멀리 떨어질 수 있다. 한 부족의 이주는 거개 원유의 산 이름과 강 이름 그리고 선조의 전설을 새로운 거주지로 옮겨간다. 훗날의 지명에서 선조의 옛 거주지의 연원과 삶의 형태를 조명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백산 일대의 박고국이 멸망한 후 원주민의 일부는 발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만주 북부에는 부여국夫餘國이 건립되며, 동남부에는 또 옥저沃沮라는 부족이 나타난다. 발해 북쪽의 명산 장백산은 그 지명의 연원을 남쪽에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옛 지명의 진실한 의미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후대의 일부 부족에게는 남고 또 일부 부족에게는 변형 지어 소실될 수 있다. 장백산은 동북아의 최고의 산이지만 최초의 지명 ‘불함’이 단지 몽골어로 해석되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일이 있다. 장백산은 지명이 생긴 수백 년 후 박달족과 다시 만난다. 611년, 장백산 기슭에서 왕박王薄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농민봉기는 수나라를 뒤엎는 전주곡으로 되었다.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동정東征 때 조정의 강압적인 징병과 수탈이 그 원인이었다. 이 농민봉기로 하여 장백산은 고구려와 얽혀 사서에 또 한 번 기록되는 것이다.

  잠깐, 더구나 재미있는 일이 있다. 부악副岳 장백산에 박달족의 그림자가 비껴 있다고 한다면 종산宗山 태산에는 박달족의 나라 ‘발조선’의 이름이 떠오른다. ‘발조선’은 중국의 황제가 태산의 하늘 제단에 올리는 둘도 없는 제물이 되고 있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4 ]

4   작성자 : 억지
날자:2015-10-13 21:02:40
"옮긴글"대로라면 중국인의 글 주장을 도둑질했네요. 중국인들이 우리말 고대어와 고조선, 부여...를 연결시켜 연구하고 있다는건데요. 베끼고 말고를 떠나서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3   작성자 : 옮긴글
날자:2015-09-28 08:08:28
泰山副岳长白山历史文化之谜 글에서 언급한 주장을 옮겨온 글
2   작성자 : 후사모
날자:2014-11-14 05:53:48
너무 생각밖이고 놀랍습니다.
김호림기자는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못해내는 일들을 해내고 있군요.
이제 수많은 역사책들을 다시 써야 되는건가요?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5천년을 산 신선이 계셨으면 이 모든것을 낱낱이 밝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을 잘 읽었고,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어떤 글을 올리게 되겠는지 기대됩니다.
1   작성자 : 김혁
날자:2014-11-13 09:34:49
좋은글 마니 보고있습니다. 나 역시 근년래 인물과 력사기행에 빠져 있다만 호림선생의 글에서 많은걸 배웁니다.
연계한번 해주세요. 멜주소는 어떻게 되는지?
긴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나의 핸폰 번호는 13704483299 입니다.
Total : 1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6 월궁의 선녀 상아가 여기에 묻혔다니? 2015-10-13 2 2576
15 장백산, 발해 남쪽의 신선의 산 2014-11-12 4 3459
14 까마귀바위에 울린 빨찌산의 나팔소리 2014-02-13 1 1899
13 고종의 어의가 잠적했던 ‘너페’ 2014-01-30 2 2003
12 박달족의 이름은 왜 그곳에 나타날까 2014-01-04 12 2160
11 고려하, 북경의 옛말로 흘러간 이야기 2013-10-23 15 2540
10 걸만의 채 꺼내지 못한 이야기 2013-10-18 2 2602
9 연변 땅을 파면 역사가 묻어나온다 2013-10-16 2 3010
8 지명으로 읽는 연변 100년 력사 2013-10-08 2 2917
7 모아산, 초모자에 숨은 한마리의 용 2013-04-21 3 2578
6 양천 허 씨의 마을 조양천 2013-02-18 4 2816
5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 2012-03-26 4 4053
4 산해관에 나타난 조선역관 2011-12-05 2 6840
3 [관내유적]십만 무사의 원혼이 서린 법원사(法源寺) 2011-02-01 37 3939
2 낙양성 십리 허에 2010-08-21 46 4956
1 야래자(夜來者) 설화와 한왕(汗王)산성 2009-09-21 49 469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