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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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전승(傳承), ‘왕조’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17년 07월 26일 10시 10분  조회:2013  추천:0  작성자: 김호림
 누군가는 이 이야기가 첫마디부터 거짓말이라고 했다. 주인공의 출생지라고 하는 그 건물은 소설처럼 꾸며서 만들었다는 것. 그러나 김씨는 그가 분명히 용정의 시정부청사 동북쪽 귀퉁이의 그 관사(官舍)에서 태어났다고 고집하듯 말하고 있었다.

“집에는 집무실과 화식실(火食室)이 따로 있었고 수세식 화장실이 놓여 있었지요.”

부친이 집을 샀던 1945년 경 관사는 벌써 우물을 긷지 않고 수돗물을 쓰고 있었다. 그때는 물론 그 후 오랫동안 시가지에서 뜨르르했던 호화판의 건물이었다. 관사의 북쪽 ‘영국더기’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관사의 마당 앞을 지나고 있었고 또 시냇물 기슭에는 버드나무와 비술나무가 자라고 있었다는 것.

용정은 예전에 조선인 이주민의 중심지였으며 정부청사는 한때 악명이 자자했던 간도 일본총영사관의 유적지이고 ‘영국더기’는 지난 세기 초 외국인 선교사 등이 살고 있던 ‘치외법권’의 조계지이다. 관사는 마치 그 무슨 상징물처럼 여러 명소를 한데 아우르고 있었다.
사실상 관사는 오래전에 벌써 철거되었다. 시냇물도 오래전에 벌써 사라졌다. 실제 현지의 토박이가 아니면 전부 거짓말로 치부할 듯하다.

1940년대, 부친 김봉구(金鳳九)는 흑룡강성 목단강 지역에서 생활, 그때로서는 드물게 중서의를 결합한 의사였으며 남다른 의술로 현지에 명망이 높았다. 1945년 여름, 김봉구는 조부가 계시는 용정에 이주했다. 관사는 그때 부친이 사재를 털어서 산 가옥이었다. 관사는 시초에 총영사관의 어느 일본인 간부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의 기억은 관사와 더불어 김홍선(金弘善)의 머리에 한 채의 성을 쌓고 있었다. 조부는 그 무렵부터 손자를 손에 잡고 다니면서 가족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의 시조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김부(金傅)라고 전합니다.”

김부 즉 경순왕(敬順王)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비운의 왕으로 935년 고려에 귀부(歸附)한 후 고려 초의 문신으로 살다가 978년에 생을 마쳤다.

그때부터 약 천년이 지난 김인상(金仁象)의 세대는 더는 왕족과 인연이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김인상은 또 다른 왕조의 시조 ‘국왕’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1800년대에 있은 일이다.

김홍선(金弘善)은 현조부(玄祖父) 김인상이 가문의 제1대 전승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부님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과 길주 지역의 명의였다고 하는데요, 의술과 점술에서 동네방네 소문이 났다고 가문에 전하고 있습니다.”

김인상이 언제부터 또 어떻게 가문의 침구 비방을 보유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문에서 몇 대를 내려 전승하던 옛 의서, 사진, 기록물 등 실물은 ‘문화대혁명’ 때 일부 소각되었거나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어찌됐거나 가문의 제4대 전승자인 조부 김장욱(金長郁) 역시 젊은 나이에 벌써 재간 있는 ‘침쟁이’로 고향인 명천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장욱은 30대에 두만강을 건너 용정시 용신향으로 이민을 단행했다고 한다. 그때 그 시절이라고 하면 일제 치하에 고향을 등지던 이민의 애절한 행렬을 떠올리지만 적어도 김씨 가문에 전하는 조부의 이주 역사는 살길을 찾아 떠난 나그네의 행보가 아니었다.

“조부님은 중의학(中醫學)을 더욱 깊이 공부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한의학(韓醫學)만 배워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거지요.”

얼마 전 김홍선은 의학총서 《조선족의약학발전사》에서 조부 김장욱이 1915년 4월 연길현 제8구 용천촌에서 중의를 배웠다는 진기록을 찾는다. 약 50년 전 저 세상으로 떠나간 조부를 문자로 다시 만난 것이다.

김홍선은 작은 초가에 늘 병자들이 몰려와 한 구들을 채우던 정경을 다시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단박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병자는 수레에 실려서 왔다가 며칠 후이면 닭 모가지를 잡고 떡 대야를 멘 채 두 손으로 씽씽 걸어오고 있었다. 백발의 조부는 마법사처럼 은침으로 하나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자그마한 침통에 요술 막대기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언제인가 조부처럼 마법의 그 주인으로 되고 싶었다. 조부는 호기심이 많은 손자에게 경맥을 짚어주고 약초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었다. 조부의 이 형상은 혈위(穴位)처럼 김홍선의 기억의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전통적인 침술 혈위는 몸에 361개 정도 된다고 하지요. 기혈(氣穴)은 오늘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저는 조부님으로부터 대부분의 혈위와 그 사용법을 익혔습니다.”

혈위는 인간의 몸에 생리나 병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특정 부위로서 혈 자리라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희미한 그림자 같은 존재의 이 혈위는 오래 전부터 김홍선에게 한 장의 생생한 그림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병이라고 하면 김홍선의 눈앞에는 금방 그 어느 혈위의 부위로 둔갑하고 있었다.

“조부님은 환자에게 우선 기순혈삼침법(氣順穴三針法)으로 침을 놓고 이어 비방의 탕약을 곁들였는데요, 피부병이나 중풍 후유증의 병자는 대개 6일이면 증상이 확연하게 호전이 되었지요.”

알고 보면 기순혈은 실은 아시혈(阿是穴)과 비슷한 말이다. 아시혈은 일찍 당(唐)나라 때의 의학자 손사막(孫思邈)의 침구법에서 유래된 혈위이다. 정식 경혈의 자리가 아니지만 침구에 의해 기혈이 소통되고 병이 낫는 혈 자리라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침구에 입문한 침술사라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혈 자리이다. 이 아시혈을 국부(局部)에 나타난 동통 자리라고 하면 기순혈은 병변 반응으로 나타난 동통 부위이다. 꼭 만져야 발견되는 피하 결절(結節)과 변색된 피부반점, 피부껍질이 벗겨지거나 피부 표면이 오목하게 들어가며 또 특정 부위에만 기포가 생기고 붓기며 마비되고 저리는 등 현상은 모두 기순혈의 범주에 속한다고 김홍선은 설명하고 있었다.

김홍선의 말에 따르면 김씨 가문의 선인들은 여러 병의 원인을 풍수가 조화되지 않은데서 찾고 있었다. 여러 병적 변화에 의하여 생긴 몸 표면의 위치와 형태에서 각종 반응 자리를 찾고 그것을 ‘기순혈(氣順穴)’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

“기순혈을 정확히 찾고 거기에 양혈(陽穴)과 음혈(陰穴)에 각기 일침을 가하여 삼침(三針)을 놓으면 대뜸 효과가 생깁니다.”

한마디 빠뜨린 게 있다. 침을 찌르기 전에 조부는 먼저 명문(命門)과 신궐(神闕) 두 혈위를 안마했다고 한다. 남녀 음양설의 원리에 따라 명문과 신궐 두 혈위를 안마하는 순서도 달랐다. 안마와 침술, 탕약을 망라한 일명 ‘음양기순(氣順)의 삼침’ 요법은 김씨 가문에만 전승되는 민간요법이었다. 조선민족의 민속 문화로 형성된 이 비법은 현재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학이라는 이 마법의 성에는 백년의 전승은 백년의 고독을 잇고 있었다. 부친 김봉구는 단지 제5대 전승자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조부처럼 30대의 나이로 홀로 고향을 떠나 바다를 건넜다. 일본 오사카의 전문학교에서 반공반독으로 이른바 양학(洋學)이라고 하는 서의학을 배웠다.

“가문의 전승에만 그치고 싶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새로운 의학인 서의학을 배우고 싶은 거죠, 그때로서는 한의와 서양 의약을 결합시킨다는 게 큰 혁명이었습니다.”

한의학과 중의학, 동의학과 서의학은 미구에 하나의 ‘성’에서 만나고 있었다. 동양 음양오행과 풍수설의 문화는 복음을 앞세운 서양 복의(福醫) 문화와 물처럼 한데 어울리고 있었다. 종국적으로 ‘김씨 왕조’의 가보(家寶) ‘음양기순의 삼침법’에는 천지인(天地人)이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김봉구는 동북지역에서 한의와 서의를 겸비한 첫 의사로 등극하고 있었다. 그가 발전시킨 가문의 비법은 제6대 전승자인 김홍선에게 이르러 어섯걸음부터 새롭게 전수되고 있었다. 1971년, 김홍선은 중의학의 기초이론부터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 무렵 조부가 세상을 뜨면서 부친은 가문에 대를 이어 전하는 민간요법을 외동아들에게 빨리 전승해야 할 긴박성을 느낀 것 같았다.

“부친님은 늘 의서(醫書) 공부는 만 번, 천 번은 못되더라도 백번 소리를 내면서 읽고 외우라고 주문했지요.”

정말이지 소학교 시절의 조무래기로 다시 돌아간 듯 했다. 집구석에 앉아 고서를 와글와글 읽었고 종종 방을 기웃거리는 부친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김홍선은 의술과는 한동안 멀어지는 듯 했다. 선후로 연길시과학기술연구소 소장과 연길 시정부 공무원으로 있었던 것. 이 20여 년 동안 김홍선은 시종여일하게 가문의 의술 전승 과정을 답습하고, 의술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와중에 의사가문의 전승자이며 의학지식이 해박하고 침술에 능하다는 소식은 입소문을 타고 주변에 널리 전하고 있었다.

정작 동네방네 소문을 놓은 것은 김홍선이 퇴직을 한 후였다. 그맘때 김홍선은 암에 걸려 수술대에 오르려다가 병원을 나섰다. 가문의 침술과 탕약을 연구하여 사용하고 조제, 종국적으로 조기암 치료에 성공했다. 병실에 함께 있던 다른 두 명의 암 병자는 수술을 선택했지만 나중에 암세포 확산으로 사망되었다. 뒷이야기이지만, 몸으로 직접 실험한 비법을 문자로 정리한 김홍선의 “항암 면역 증강제-CHAGA”는 나중에 전국민족 민간 전문병 학술협회의 우수논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고 보면 가문의 백년 비법은 제6대에 이르러 또 하나의 마법의 ‘성’을 쌓은 것이다.

이 ‘성’을 찾아 병자들이 찾아왔다. ‘삼침법’은 뒤미처 ‘음양’의 ‘기순’ 요법을 마법처럼 현시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버리고 보행으로 귀국한 좌골신경통의 사나이, 관절막염으로 고생하다가 팔을 번쩍 추켜들며 문을 나선 아줌마, 중풍 후유증이 심했다가 어눌한 말을 고친 할머니… 이번에는 병자가 아니라 금기(錦旗)가 우승기처럼 김홍선을 찾아와 벽에 걸렸다.

김홍선은 현재 모 중의진료소의 침구강사로 있으면서 침구인재의 양성과 조선족 민간요법의 수집, 집필 작업에 정진하고 있다. 참고로 2017년 새로운 중의법(中醫法)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통과, 이에 따라 민간의 중의와 민족의약 유산을 보호, 전승하는 사업은 갈수록 탄력을 받고 있다. 일명 조의(朝醫)의 조선족의학은 일찍 2011년부터 대륙에서 자격증 시험을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음양설을 기초로 하고 풍수설에 이르기까지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체질의 사상(四象)의학을 연구하는 조선족의학은 아직도 중국에서는 잘 모르며 연변에서도 별반 알려지고 않고 있다.

조선족의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김씨 가문의 비법은 더구나 중국에서 거의 소실될 위기에 처한 ‘궁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족의학 인재가 희소하고 또 후속 인재가 더 희소한 현 주소에서 더구나 희귀한 무형의 실증자료로 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김홍선은 이 비법을 연변 무형문화재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로 신청했다. “김씨 ‘삼침법’은 가문의 전승 방식으로만 유전(流轉)되고 있지요. 그래서 자칫 유실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김홍선은 결코 거기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아들 김성무(金星武)와 조카 김영관(金永冠)은 제7대 전승자로 되어 오래전부터 벌써 김홍선의 수하에서 가문의 비법을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2백년을 이은 그 ‘마법의 성’ 이야기는 이로써 또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것.

“가문의 김씨 ‘삼침법’이 저의 세대에 와서 끊어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건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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