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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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6. 내 사유의 둥지, 혹은 알 댓글:  조회:3829  추천:23  2013-01-29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6. 내 사유의 둥지, 혹은 알 11살 때 인가 나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이 부러웠다. 새들은 날개가 있는데 인간은 왜 날개가 없을까 제법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고리키의 산문시 을 읽으면서 격량을 가르며 창공을 비상(飛翔)하는 새들에 대하여 사색하는 일은 그 작품 감상만큼 재미있었다. 쉬는 날에 나는 참새를 잡아서 날개의 모양을 관찰하려고 반나절이나 야외에서 참새를 쫓아 다녔다. 나는 놈에게 뛰는 놈이 당해내랴! 그때 나는 날개와 인간의 양각(兩脚)의 운니의 차이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래서 결국 할머니가 기르는 퇴화된 날개를 갖춘 닭을 잡아서 날개를 찬찬히 관찰 하였다. 닭은 놀라서 고꼬댁 거렸고 안간 힘을 쓰다가 닭털을 많이 뽑혔다. 나중에 질겁한 닭이 줄기차게 똥을 배설하는 바람에 내 얼굴에 에노구 (수채물감) 같은 그림을 그려 놓았다. 골계의 장면을 바라 본 할머니는 몹시도 꾸지람 하셨다. 그것도 씨암탉의 날개털이 뽑힌 “봉변”을 할머니는 가만 둘리 없었다. 나는 할머니를 피해서 집으로 들어와서 책을 찾았다. 아무래도 책 속에 그런 비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날 내가 읽은 책속에는 새들이 나는 날개의 비밀이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홀로 그것을 깊이 사색 하는 길 밖에 없었다. 닭털을 뽑은 나, 새를 쫒아 다니던 내가 지금 돌이켜 보아도 꽤 어리석은 아이였다고 생각 한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다. 11살의 나에게도 사색이라는 “둥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면서 많은 독서와 사유를 통해 나는 깨달음과 상상의 날개를 키울 수 있었다. 지성과 미성의 둥지를 꾸준히 마련해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기에 뭐든지 다 스스로 궁리하고 개척 해나가야 했던 운명이었던가 보다. 형이 있는 급우생들이 부러웠지만 한편 나는 형이 있는 동생을 생각하면 나의 兄長의 날개가 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개척하는 날개, 이것이 내 가족적 ,그리고 운명적 인생 도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편했다. 자고이래로 새는 곧 날개를 갖추어서 창공을 날아가는 동물로서 혼과 정신의 승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이는 지상의 동물이 고정, 정착된 물리적인 것의 상징과 대조를 이룬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날개를 갖춘 인체의 神들이 사랑과 승리, 행복의 관념을 나타냈다. 에집트 문화에서도 새는 인간의 얼굴을 지닌, 인간 사후의 육체에서 이탈된 혼을 상징했다. 힌두교에서도 새는 태양에서 탄생된 神 그자체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새는 원래 男根의 심벌로서 그것이 이윽하여 승화를 이루어 정신적 사랑의 행동을 의미하게 됐다고 한다. 우화나 동화, 만화 속에도 새는 은인이나 연인이 되어 나타나서 지상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스토리가 수없이도 많이 등장하지 않은가. 새가 넋을 의미하는 민화(民話)역시 많은 유럽민족들 사이에서 정시(呈示)된다. 새의 날개는 사유, 상상력과 지성(知性), 천사를 상징한다. 인간이 새들보다 더 발달되고 위대한 “날개”를 갖게 된 것은 사유, 상상과 지성이라 불리는 것들이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날개”를 키운 것은 아무래도 “둥지”의 덕분이다. 그 둥지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이런 천진난만한 사유의 문제를 사유하기를 즐긴다. 동심으로 문제를 사고하노라면 의외로 성인들의 굳어진 사유보다 더 유난하여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성인들은 자신의 경험 자체가 자신의 행위를 규정짓는 모종의 감옥이 되기 십상이다. 견고한 담벼락의 감옥같이 사유의 유연성과 분방성을 막기에 맞춤이다. 이런 두터운 담벼락의 콘크리트둥지에서 유연한 발상이 탄생하기는 지난(至難)하다. 어렸을 때 중국에서 자라면서 받은 교육은 거의가 두터운 담벼락이 둘러쌓인 “이념”에 맞추기를 강요한 요소가 다수였다. 내가 문학공부를 했을 때였다. 애써 쓴 습작을 어떤 어른에게 가져가 보이니, 그는 “글이란 이렇게 쓰는 게 아니야. 글 속에 반드시 우리 시대의 이념, 공산주의 빛나는 사상을 불어 넣어야 제대로 된 작품이 될 수 있다....” 라고 가르쳤다. 결국 나는 이날까지 이념이요, 공산주의 빛나는 사상이요 하는 것이 내 사유의 반경 속에 비치되지 못한 까닭에, 그 어fms이 요구하는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로 성장되지 못한다. 소학교 때 나는 암기는 잘 했으나, 억지로 암기하여 그것의 틀에 맞춰야 한다는 위로부터의 (由上而下)강요가 그렇게 싫었다. 거기에는 “왜? 무엇을 위해? 그래서”? 하는 등등의 사유에 해답 줄 만한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 사람이 그 옛날 죽은 글을 암기하고 모방해다 하고 그 틀은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는 주입식 교육방식에 나는 질리고 말았다. 대학시절에 문학공부를 하면서 송정환 선생님 댁으로 자주 찾아가서 시 공부를 했다. 역사학자이며, 시인인 송 선생님은 중한 당뇨병 탓으로 손수 주사기로 인슐린을 맞아 가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간 지식인이었다. 인자하시고 사유 또한 학식과 감성을 경비한 유연한 것이 있어서 나는 문학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죽은 공부를 하지 말고 산 공부를 해야 한다” 송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시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송 선생님의 이 교시에서 나는 당시 “죽은 사유의 둥지는 죽은 사유의 말밖에 부화시킬 수 없다” 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다. 만들어 놓고 보니 제법 그럴 싸 했다. 그때 같이 같던 연인에게 이 말을 했더니, “음, 멋있는 말이네요. 철학자다운 맛이 있어서 좋아요.” 하고 반겼다. 나는 나름대로 내 사유의 둥지를 틀어가면서 암탉같이 알을 낳는 격으로 사색하고 책 읽고 또 글을 써내려 왔다. 지금도 나는 중국 자유주의 지식인으로서 40대에 아깝게 타계한 왕소파(王小波)의 작품과 사상을 좋아한다. 미국에서 유학 공부해온 그는 동시대 지식인들 중에서 발군의 유연성 사고를 갖춘 엘리터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지식인에게 있어서 사유의 엘리트로 되는 것이 도덕의 엘리트로 되는 것보다 퍽 중요하다.” (1994) 사유가 도덕 즉 정치적 이념, 주의를 강조하는 윤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참 심원한 의의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글쓰기를 그냥 글 쓰는 자체, 문장력, 단어력, 구성 등 문필활동에 노정된 외곽에서만 사유, 터치하고 있다. 기실 나는 글쓰기에 있어서 무엇보다 선행적 역량, 능력은 글쓰기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글 쓰는 작가의 머릿속 즉 사유라고 생각한다. 문장은 곧 사고가 글자의 뀜으로 표현 되는 것이다. “글쓰기의 비결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잘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글쓰기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유 사고한 내용을 글로 표현하는 것 뿐이다 라고 대답해준다. 글쓰기를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은 사유도, 구상도 잘 하지 않고 또는 설익은 사고로 쓰는데 급급해 하는데 이것은 본말 전도이다. 사유를 깊이 하고 구상을 익히면 사실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그 차적이며, 또 잘 써내려 갈수 있다. 산모가 10개월을 회임하고 고생한 뒤라야 하루아침에 출산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사유가 있으면 어떤 글이 태어난다. 경직한 사유자는 그냥 죽을 때까지 경직한 글만 양산한다. 결국 쓰레기에 가까운 글을 쓰면서도 주옥같은 명문을 쓴다고 하는 이들이 바로 경직된 사유의 작자들이다. 대조적으로 유연사유의 작자는 늘 신선하고 독특한 견해를 듬뿍 담은 글을 써내기 마련이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유연한 사랑은 유연한 인생을 살게 되며, 경직한 사람은 경직된 인생을 살아간다. 유연하지도 경직하지도 않은 사람은 또 유연하지도 경직되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나는 이 세상이, 이 우주가 꼭 인간이 생각하는 “과학적으로 이렇다” 라는 “상실적”인 사유에 매인 사유로 보지는 않는다. 과학은 세계를 풀어가는 많은 열쇄와 코드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간조 한다. 따라서 과학은 “절대유일”의 기준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 근거”로 풀지 못하는 사상(事象)은 수 없이도 많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능력으로서는 아직 그 수수께끼를 풀 코드, 방법을 찾지 못했거나 눈앞에 있는데도 경직된 상식의 사유탓으로 보고도 안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과학까지도 일종 가설(假說)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 가설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눈에 가시적으로, 손에 가촉적이기 때문에 무한한 사실(事實)에 가까운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인식하는 3차원 세계 밖에도 4차원, 5차원의 세계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가설로서 말이다. “가설”이야 말로 모든 과학의 기본일 것이며, “가설”이 되면 “과학”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관, 학교에서 배운 것, 국가가 정부가 세뇌하는 것, 모든 상식, 통념, 모든 것을 가설에 불과하다. 나는 이런 사유를 토대로 세계를 인식하고저 한다. 그래서 터브를 부수고 가설을 부수거나 또는 입증하려고 하는 자세가 나의 인생과 글쓰기, 학문의 기본자세이며 방식이다. 글쓰기에만 한정해서 이야기 하자면, 나의 글쓰기는 사유의 작은 둥지에서 알을 낳는 것이다. 내가 자주 암닭이라 자신을 비유한 레토릭은 이 “둥지가 있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알이 부화되면 아마 또 병아리가 태어나고 병아리가 자라면 또 암탉으로 성장하여 알을 낳을 것이다. 낳다보면 노란 자위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낳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 심히 우려하지 않는다. 다음번 더 좋은 알을 낳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인터넷에 발표되는 자신의 졸문 아래 많이 달라붙는 댓글에 대해서 요즘에야 조금씩 읽게 되었다. 그야말로 “안화요란(眼花瞭亂)”의 댓글이 줄줄이 끝없는 포도송이 같이 달리고 또 달린다. 읽다보니 그것도 일종 낙(樂 )이 된다. 그중에 최근 등장한 “최수정”이란 닉넴의 댓글이 하나 재미있어서 여기에 옮겨보겠다. 내가 암탉이라 배유한 데 대한 평가적인 댓글이다. “최수정”님은 이렇게 쓰고 있다. “김 선생님이 단지 계란만 낳는 암탉이 아닌 부화하여 삐악〜거리는 병아리를 거느리는 母情이 강한 엄마 암탉이라는 便命感을 지니세요.... 책임감 있고 사명감 있는 암탉이 되어 보다 영양가 있는 계란을 낳아 부디 나머지 병아리들을 견실히 잘 키워주세요! 병아리들이 8색 조로 성장하여 조선족의 신지평을 열어주세요!” 그리고 작가에 대한 건강에도 신경써주는 매너와 배려가 돋보인다. “계란 부화 성공하시고” “영양실조에 유의하여 스스로 영양가 식단 배분을 잘해드시길.!” 고마운 댓글이다. 아마 용의주도한 배려까지 잊지 않은 것을 보면 여성분일까 생각된다. (따라서 오늘 이 졸문을 빌어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독자들. 생명부지의 조선족 독자 제현씨께 심심한 고마움의 말씀 전하고 싶다.) “최수정”님 진정어린 성원과 기대가 좀 부담스럽다. 내가 그런 “사명감”을 갖춘 암탉으로 성큼 성장 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독자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을 해야겠다는 마음은 오늘도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괴테는 “오, 신비로운 동양의 힘이요!” 하고 노래했는데 나는 “오, 사랑스런 내 사유의 둥지여!” 하고 읊어 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이어진다. “둥지에서 알을 부지런히 낳고 또 부지런히 부화 시켜야지.”   물론 나는 둥지가 오래돼서 구조적으로 썩기 전에 새 둥지를 만들겠다. 또한 욕심 같아서는 천사 같은 병아리들을 키워내고 싶다.
14    2-5. 서의 마음, 서의 정신 댓글:  조회:3946  추천:23  2013-01-18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5. 서의 마음, 서의 정신   나는 자신이 전통적 문인취미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이라는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그 안에는 동양적 문인취미의 또 다른 裸身이 드러난다. 연구와 글쓰기는 주업이고 그림그리기와 서예, 글쓰기의 서화의 여기(餘技)로서 즐긴다. 文,書,畵,琴이 조선말기와 식민지 초기, 청말민초(淸末民初) 다이쇼(大正), 쇼오와(昭和) 초기까지의 동양3극 전통적 文人(文化人, 知識人)의 조화를 이룩한 하나의 입체적 세계였다. 내가 자신을 문인취미를 혹애하는 문인이라고 함은 21세기의 포스트모던사회의 하이데클노로지ㆍ디지털의 거세찬 소용돌이 속에서도 육필로 글쓰기를 견지하는 구식의 20세기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서나 화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 여기로 직접 붓글을 쓰거나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음악 예술적 의미의 琴은 전혀 문외한이나 남들 따라 어울려서 “카라오케”라 칭하는 노래방에서 몇 곡 부르는 것뿐이다.   “文人趣味”에 참혹된 나는 20대부터 서화, 고완에 침취하기도 했는데 지금껏 제법 수집한 근대 동아시아 명사문인의 유묵과 문방 4우의 硯ㆍ墨 ㆍ筆ㆍ紙도 수십 점에 이른다. 내 서제를 文學書房, 또는 文學山房이라 하며, 실제로 명사의 한 두점 서화가 걸려있다. 물론 절대다수는 전문 서고가 있어 거기에 보관하고 있다. 서화가 없는 서재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지인이나 특히 문화인의 자택이나 서재를 방문할 때, 먼저 보는 것이 서가와 벽에 서화가 걸려 있나를 둘러보는 버릇이 있다. 서나 화가 걸려 있지 않은 서재는 노랑자위가 없는 계란같이 보인다. 아니 방초가 없는 공원이며, 오아시스가 없는 사막으로 보인다. 서가 있는 풍경, 그것은 지성과 지혜와 예수의 별들이 총총히 박혀서 앞 다투어 반짝이는 찬연한 밤하늘의 공간이다. 윤동주가 읊었던 가을밤의 별 하늘이다.   소학교 때부터 습자시간과 작문시간이 제일 좋았다. 주판을 치는 산수시간은 별재미가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묵향이 풍기는 먹물을 붓에 듬뿍 찍어서 선지에 글을 박아 쓰는 습지. 먹즙의 청향이 좋아서 나는 지금까지 붓을 쥐고 습지하는 습관을 버리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서에 대해서 스승에게 사사하여 특별히 배운 적은 없다. 지금도 어느 문파(門派)에 들어가서 습득할 생각이나, 또 특정 서가를 私淑할 예정도 없다. 顔眞卿(안진경), 玉羲之, 歌陽詢, 손과정(孫過庭), 조맹부(趙孟頫), 동기창(董其昌)의 書, 書法의 章法에 대해서 눈동냥도 해왔으나, 특별히 못하거나 모방하지는 않았다. 모방으로서 나 자신의 서가 이룩되리라고는 믿지 않아서였다. 서법에는 용필(用筆), 문가(問架), 풍신(風神)이라는 3요점이 있고 구체적으로 筆墨, 章法, 氣韻이라는 필법이 있다고 손과정은 에서 가르친다. 우선 필묵, 용필에서는 먹색, 먹의 농담에 주의하여 필을 사용하며 그 농담5색이 적당해야 함을 강조한다. 장몀, 서간이란 글자의 구조, 일점일획의 규준에 따라 글자와 글자 사이의 호응, 결체의 서밀, 용필의 경중, 지속, 용묵의 건습, 농담에 따라 하나의 서폭세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풍신, 기운이란 구체적 설명은 어려우나 글자체를 통해 풍겨내는 분위기, 정신적, 추상적 멋을 말한다고 한다. 문징명(文徵明)의 小楷는 娟秀秀朗하여 왕택(王澤)의 1장2척의 대폭은 勁健雄獨하며, 풍신은 다르나 일종 느끼는 감동은 비슷하다. 그래서 글씨 서체나 필자의 독특한 개성에 따라 그 소질에는 雅秀, 濕潤雄渾 沈深蒼凉, 淸越, 龍飛 등 특색으로 감명을 환기한다고 한다. 요컨대 서에다 일종의 영성을 부여하여, 氣를 불어넣어, 글을 쓴다고 한다. 書가 일종 “修神養氣”의 방법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에는 찬동한다. 글쓰기가 막히거나 기분이 침울하거나 답답할 때 나는 책도, 필도 팽개치고 붓을 쥐고 묵향을 맡으면서 선지위에다 붓글을 써내려 간다. 수십장 쓰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참 이보다 양호한 특효약이 내게는 없는 것 같다. 2006년에 병마에 시달리며 투병중일 때 나는 늘 서를 쓰는 것으로 투명생활에서 낙취를 찾았고 안정을 이룩했다. 그때 나는 고완 수집가인 독자(80대의 망년지교)로부터 청나라 때 왕근성(王近聖)의 제자 제작했다는 고묵(古墨)한편을 선물 받았다. 나는 소장하고 있는 청조시기 말기의 벼루에 갈아서 썼는데 묵향이 온 서재를 감미롭게 감돌아 기분이 하는 나는 백학 같았다.   투병에 이런 고묵, 고연은 참 좋은 약이었다. 병은 몸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맘에서 생긴다. 맘이 평온하고 따스하면 몸의 병도 스스로 물러난다. 나는 또 명사의 서를 걸어놓고 응시하면서 그 명사의 필적에서 “오라”를 흡취한다. 만나지도 못함 백년전, 수백년전의 명사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삶의 고락, 의지와 신념을 가르쳐 준다. 사람의 묵적(墨蹟)을 보는 것은 그 개인 개인의 마음을 읽는 것과 같다. 그들의 정신을 읽는 것과 같다. 그들의 얼굴이 다른 것 같이 개성과 정신도 다 다르다. 그 묵적이 무엇을 썼든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차라리 나는 묵적을 읽는 것이 아니라 묵적을 본다. 훌륭한 묵적은 호흡이 흐르고 그래서 살아있다.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것은 모사, 임서(臨書)를 해서 형태는 본 따 낼 수 있으나 대가의 마음, 정신세계는 절대 쉽게 본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불멸의 의사 안중근의 목적에서 나는 강건. 雄渾의 의지를 본다. 그리고 안중근의 육혈포에 절명한 이토히로부미의 목적에서 나는 한학 유교소양의 깊은 모락가의 활달한 마음을 본다.   추사 김정희의 유묵에서는 자유분방한 미학을 보고, 동심 金農의 예서에서는 고귀한 치졸의 미학을, 손문의 書에서는 인류를 사랑하는 고고한 흉금을 읽는다.   이완용의 묵적에서는 동양3국 명사에서 최고수준의 달필이상의 분방한 초서의 멋을 본다.“매국노”이든 “애국노”이든 그의 정신세계는 단순히 오명으로 싸잡아 매도할 수 없는 고상한 정치가, 선비의 품격이 있다. 나이토고난의 서에서는 일류 거물학자의 박학과 통찰력을, 이어령스승의 만필이 아닌 글씨에서는 소탈의 지성, 얼굴을 본다. 그리고 余秋雨의 글씨에서는 수려한 글 솜씨에 담긴 英知를 본다.   대저 “文如其人”이라 하는데 나는 그 말보다 “書如其人”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글은 많이 쓰니까 本人얼굴이 흐리워지는 때도 있으나, 서예는 본인의 글씨가 그대로 마음(성격)씨를 배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맘씨와 글씨의 씨는 직결되어 있지 않은가.   서에 대한 동양 3국의 명칭도 각기 다르다. 본가 중국에서는 서법이라 하여 글씨 쓰는 章法, 格法에 치중한다. 일종의 형식, 규범을 중히 여기는 서의 세계이다. 한국은 서예라 하여 서법을 예술의 하나로 보고 있다. 일본은 書道라 하여 즐기는 茶道, 花道와 같이 “三道”를 이루어 “茶禪一味”의 정신세계를 이룬다. 중한일의 서를 보면, 본가의 중궁의 서는 격식에 매인 규범적 미, 기준적미가 주류이고, 한국은 중국의 규범을 지키면서 좀 더 분방한 예술의 경계에 있다. 일본은 더욱 자연적 정서적 원리원칙을 깬 “道”를 자유 활달의 선의 맛이 있다. 이것이 내가 3국의 서를 즐겨 보면서 인상적으로 느낀 “비교3국서론”이다. 이 “서론”적 양상은 3국의 문학, 미술, 예술, 문화전반에 흐르는 특징이다.   정치도 문학도 문화도 중국은 보다 유연성이 있고 분방해 보이나 기실은 너무 격식, 규범에 스스로 메어 이탈하지 못하는 결함을 많이 안고 있다. 이데올로기 정치에 종속된 문예전통은 오늘도 중국은 여전하고, 정도는 약하나 한국에서도 그것이 보이며 일본은 하이구와 같은 시나, 소설에서도 거의 정치적 이념으로 글을 쓰는 전통은 보이지 않는다. 노신, 이광수의 작품에서는 계몽, 정치이념, 민족의 이념이 농후하게 깔려있으나 나츠메소세키의 소설에는 이같은 이념이 배제된 인간중심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예술에서 꽃 하나를 묘사해도 꼭 꽃에 무슨 이념, 계몽, 사상을 인공적으로 부여시키고 그 꽃을 순수한 예술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 중국과 한국이다.   이념의 원리세계 중한과 이념 부재의 美의 세계의 일본의 정신 구조적 이질성, 3국에서 역사관이 이질성이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역사문제가 진짜 충돌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역사는 역사학으로서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검토 연구할 학문의 세계이지만, 역사를 정치이념에 이용하는 얄팍한 위정자. 정치꾼들의 농락에 놀아난 것이다. 왜 역사가 이념에 이용당해야 하는가? 역사를 교과서로, 거울로 삼는다면 역사를 더 소중히 하고 존중하며, 적어도 왜곡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이념으로 역사를 “소녀같이 임의로 분장”시키고 왜곡도 불사하는 행동에 “역사를 거울로 삼는다”는 말은 거짓말 밖에 아니 된다. 역사 그 자체의 불행인 것이 아니라, 역사를 정치로 해석, 이용하려는 그 심산이 불행을 끌어온다. 지난 역사로 오늘을 괴롭히는 우(愚)는 이제 억제해야 할 것이다. 서의 말에서 어떻게 역사 문제로 좀 비약했나?   먹을 갈고 붓글을 쓰면서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먹이 사람을 간다. 따라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실은 글이 사람을 쓴다. 인간은 술에 사람이 취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술이 사람에 취하는 것이다. 어떤 것에 도취된 사람은 그 상대화 自他가 아니라 실은 자기 同一體로 一體를 이루는 법이다. 해서 같은 술을 먹어도 취함에서 나타나는 人格은 천차만별이다.   나는 서에서는 “格에 들어가 격을 나오는 ”방법이 좋다. “격은 있으되 격을 깨는” 그런 경지, 이것이 나의 서의 사상이며 정신이다. 뿐만 아니라 내 정신세계, 나의 인생에 관통한 하나의 굵직한 主義이다. 나는 서를 쓰지만 그 누구의 격에 들어선 맞춘 글씨가 아니라 나만의 개성을 살린 글을 쓰고 싶다. “자유분방, 경묘소탈”의 정신세계, 그리고 미학, 격식과 고상을 겸비한 왕부지나 안진경의 교과서적 서체보다 나는 오히려 격식이 없는 격식을 깬 추사 김정희나, 일본의 會八一, 中村不折의 분방한 서체, 그리고 副島種臣의 격을 일탈한 서체가 좋다. 일본인이라서가 아니다. 그 누구의 얼굴이 아니라 그 서체가 좋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일탈과 이단의 서, 나는 글쓰기에서도, 나의 정신세계에서도 이는 궁극적으로 목적이면서도 방법이기도 하다.
13    2-4. ‘미완’의 사상 댓글:  조회:3753  추천:30  2013-01-12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4. ‘미완’의 사상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완벽한 글도 있을 수 없다.”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 왔으며, 그래서 나는 자신이 쓴 글이 비록 쓸 당시에는 흡족한 글이었더라도 수성상이 지나고 다시 再讀해 보면 구석구석에 흠이 보이고 그때 좀 더 잘 썼을 것을 하고 지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원리, 상식상의 오유가 아니라면 나는 거의 지난 글에 손을 대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과거의 얼굴 사진이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수정하지 않듯이.   “미완(未完)”의 결함, 그것이 다음은 좀더 잘 하지고 자신을 밀어주게끔 약속한다. 미완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글쓰기에 있어서도, 그리고 인간의 행동양식의 내면에 있는 의식세계로서의 사상에 있어서도 하나의 결함적인 우정이 아닐까.   나는 자신을 미완성의 인간, 미성숙의 남자라고 자안한다, 내 심성의 발로인 글과 달리 실생활의 나는 少年같은 치기와 童趣에 머물러 있다. 소년과 같은 “미성연”의 치졸함과 동심은 내가 글쓰기에 충실하여 스스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영구히 즐겁게 뒷받침해 주는 에너지로 되고 이는 것이다. 당연히 연령적, 육체적 의미의 미완성 뿐 만이 아니다. 나는 내 행동양식의 총설계사인 내면의 思想 역시 항구히 “未完”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나는 너무 성숙되고 완벽하고, 완성된 모든 事象에 대해 천연적으로 거부감과 위압감을 느낀다. 차라리 흠이 많아도 독특한 뭔가를 지닌 것에 더 공감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학생들 작문, 레포터의 채점도 사려가 없고 멋있고 완성된 구성의 문장보다도 미숙하고 결함이 있는 글이라도 그 중에 독특한 사고, 기발한 견해, 관점이 있다면 높이 평가한다. 노란 자위가 없는 계란은 아무리 크고 빛깔이 화려해도 영양가는 평가하기 어렵지 않은가.   술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다. 酒香 이 있으면 나는 그런 술이 더 좋다. 유명브랜드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의 유니크한 개성이 있는 물건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그쪽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도 그러하다. 너무 완벽한 미인, 너무 똑똑한 (체하는) 여성에게서는 오히려 모종의 고압감이 있어서 마음이 부담스러워진다. 오히려 썩 미인은 아니더라도 어딘가 독특한 품위와 멋, 센스가 풍기는 知的향이 있는 여자가 나는 좋다. 내가 20,30대에는 용자단려한 미인을 선호했으나 40대에 들어서니 좀 철이 들었는지 “용모보다 마음”의 미인을 선호하게 되어가고 있다.   흠이 있어서 아름답다. 세상은 추가 있어서 미가 더 돋보이듯이, 사람들은 흔히 “옥에 티”라고 흠을 꺼리는 경험이 있으나 오히려 과히 깨끗하고 미끄러질 듯 매끈한 옥보다도 미인의 아래턱에 점이하나 붙어 있듯이 그런 “티”가 있어 더 섹시하고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일까 洪自誠의 에서도 “花看半開, 酒飮微醉” 즉 “꽃은 절반 핀 꽃이 좋고, 술은 약간 취함이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구절 뒤에는 “영만(盈滿)”을 바라는 자는 심사국려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 꽉 차지 않고 어딘가 빈 칸이 있고 결점이 보이는 미완의 사상, 이것이 나의 삶을 지배하는 主義중의 하나이다. 만약 내게 사상이 있다고 한다면, 나의 사상은 늘 변하는 흐름의 과정에 있다고 해야 함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는 프로세스, 언제 어떻게 어떤 方向으로 바꿀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내 사상을 “미완”으로 규정해도 좋을 만큼, “미완”그것을 즐기기도 한다. 무릇 사물이나 인물이나 그 사상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도중에 있을 때가 보람 있고 멋있게 보인다.   완숙한 사물은 결국 종식을 의미한다. 죽음의 종식이다. 이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나는 완숙한 紅柿가 무르익어서 땅에 떨어져 완숙의 죽음을 구가하는 기껍고도 애달픈 모습을 목격했다. 또 대학 근처의 은행나무 잎들이 샛노랗게 물들고 빨갛게 단풍이 든 가로수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낙엽으로 떨어지는 풍경을 보았다. 이처럼 자연의 만물들도 완숙의 고봉 기에 달하면 곧 그것으로 해서 사라짐의 그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짐이 죽음이 아니 더 라면, 오 헨리의 의 존시가 그렇게까지 병상에 누워 한 잎 남은 나뭇잎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존시를 위해 마지막 잎새를 그려준 베어면의 마음씨도 아름답거니와 사라질 때 사라지는 낙엽들도 아름답다. 낙엽들이 아름다운 까닭은 자신의 죽음으로 봄이 오면 신록이 피는 희망을 묻었기 때문이리라.   “희망”은 죽음에서도, 미완에서도 괴어나는 것이다. 내가 자신의 연구, 글쓰기에서 부지런히 꺾기지 않고 견지할 수 있는 굵은 심(芯)이 있다면 그 어떤 관념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완성된 완숙이 아닌 미숙, 미완의 사상이다. 아직 부족하다. 아직 모자라다. 아직 골똑 차지 못한 빈구석이 너무 많다. 그러니 좀 더 잘 쓰고 좀 더 많이 써야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연구하고 독서하고 글쓰기를 해왔다. 빈칸의 계단, 그 계단의 공백을 매우면서 한층 한층 위로 오르는 희열, 변하고 또 변하는 자신, 왜 변해야 하는가고 물으면 나는 변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준비해 둔다. 나는 “코스모폴리탄”, 한중일 3국을 다 조국으로 사랑하는 인간이다. 협애한 민족, 국가관의 애국주의의 포로가 아닌 이념의 좌우를 넘어선 티브를 깨고 벌거벗은 왕님을 벌거벗었다고 하는 어린이와 같은 진실을 말하는 인간이다.   아마 나 같은 左와 右를 넘어서, 조국을 3개 갖고 있다는 말에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를 왜곡하는 것은 나는 싫다. 사람은 그냥 사람으로 보지 않고 꼭 무슨 이념의 색깔로 보는 그런 것이 말이다.   또 한해의 무르익은 성숙의 가을이다. 5층 서재의 창가에 서면 울긋불긋 늦가을의 색깔을 장식하는 단풍잎이 보인다. 그리고 탐스럽게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성숙하는 가을 풍경은 눈요기에도 너무나 풍요롭기만 하다. 익어 떨어진 감들의 시해들이 무참하게 시야에 안겨온다. 인간의 시해라면 백골화된 참경(慘景)이겠지.... 릴케는 꽃이 만발하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다. 꽃이 지는 열매가 맺는 “완숙”의 봄을 슬퍼했던 것일까. 그가 가장 좋아한 꽃은 화왕이라 불린 장미꽃이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장미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장미에게도 무서운 흠이 있었던 것이다. 그 가시에 찔려 릴케는 죽는다. 그의 시처럼 그 죽음도 수많은 소녀들의 심금을 울렸다.   나는 릴케처럼 죽으면서도 소녀들을 울린 그런 시도 쓸 줄 모른다. 더구나 나는 완숙을 거부하는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이 人間的으로 미숙한 자신을 알고 있다. 이것저것 허울을 다 벗기고 나면 나는 앙상한 명태와 같은 마른 사람이다. 아니 피 흐르는 미이라이다.   성격은 오팍 한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혼자 있기를 즐기고, 나긋나긋 말랑말랑해 보이면서도 땅땅 할 때는 땅땅해서 자기 줏대를 아니 굽힌다. 인정이 박하고 냉정하며 생긴 얼굴같이 새 차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른다. 게다가 자중(자기중심)적이며 표현옥이 왕성하고 자존심, 자부심이 강해서 자찬으로 에스컬레이트 하는 면이 많다. 생활에서는 자유분방, 방종형이지, 먹는 데는 입이 발아서 까다롭지, 몸이 또 유년시절 때부터 병약해서 약골인 주제이니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다. 그래서 굳이 우익(右翼)이니 좌익(左翼)이니 하는 날개가 따로 필요 없다. 한마디로 결점 투성의 인간이다. 이런 나는 한곳에 오래 있으면 아니 된다. 여기저기 경계에서 살아야 내 특성을 발휘 할 수 있다. 다름 아닌 “미완인”이기에 자기에 대해 자부하면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自信하면서도 不滿型 사나이다. 자부는 있되 자족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미완의 공백, “빈칸메우기”라는 말을 즐긴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놀트 겔렌은 )1904)에서 “인간은 생리학적 결함을 文化的行動으로 메우고 있는 존재로서, 원숭이 태아가 문화적으로 훈육된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결함動物”의 인간은 누구나 그 결함에 메우는 행동을 하도록 숙명을 타고 난 생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빈칸 메우기”의 설법 같이 나는 자신의 미완의 “빈칸”을 한 칸 또 한 칸씩 메우는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한 칸 한 칸씩 사상은 바뀌고 인간은 변한다.   빈칸은 많터 그래서 할 일은 많다. 조급히 우물에서 숭늉 찾는 성급함보다 나는 “Festina lente”(천천히 서두는) 행동원리를 준수한다. 준비 안된 성급함은 금물이다. 거북이 같이 “서서히”, 토끼같이 “서두는”나 자신만의 미완의 길을 걷는다. 그래서 결국 그 한마디다. 완숙한 紅柿가 되기보다는 떫은 미완의 靑枾이고 싶다.
12    2-3. 反컴퓨터론 댓글:  조회:6996  추천:25  2012-12-22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3. 反컴퓨터론   안경을 쓴 버마재비를 아시는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가로 막으려고 언감생심 나섰다” 라는 그 버마재비(사마귀)ㆍ당치도 않은 그런 버마재비를 우리는 一策로 부하고 냉소한다. 나는 오늘 큰맘 먹고 그 버마재비가 되어보려고 덤빈다. “컴퓨터時代”라 칭해지는 오늘의 시대에 가로막는 담론을 하려고 한다. 컴퓨터시대의 수레바퀴를 “잠깐!”하고 내 길고도 가는 손을 내밀고 세워 보련다. 물론 “反 컴퓨터론”이라 하여 이 시대를 부정, 反動으로 거부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컴퓨터시대라고 구가 하는 최첨단정보시대, “정보화 사회”를 相 化시켜 반추와 성찰을 하자는 소박한 異見일 뿐이다.   오늘 컴퓨터, 통신정보기술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하루가 멀다하게 발전을 하고 있다. 누가 상상을 할 수 있었던가? 컴퓨터가 인간의 삶의 필수품으로서 사회의 모든 분야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되고 있는 오늘 같은 시대를. 근무시간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인터넷, 컴퓨터 작업으로 처리되고 있다. 회사 서류작성, 발신, 수신, 대학생들의 리포트, 논문작성이나 작가의 글쓰기, 일반사무의 처리와 연락사항, 연애편지와 친구에 전하는 소식, 시골의 양돈장에서 돼지새끼가 한꺼번에 10마리를 낳았다든가, 오늘은 저녁메뉴를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든가 하는 것까지도, 우리들이 컴퓨터의 딧,플레이 화면에 등장한다. 친구와 금방 헤어졌는데 이메일이 우선 먼저 상대방의 귀가보다 빨리 도착한다. 말하자면 21세기 우리의 일상의 식사처럼 중요한 일과로 되었으며 휴대폰까지 가세하며 일상의 거의 초단위로 컴퓨터化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들의 매개인의 “컴퓨터가 있는 풍경” 그자체이다. 보다시피 인터넷기술은 우리의 정보를 물(物)에서 이탈시키는 큰 역할을 한다. 15세기 구텐베르쿠가 금속 활판인쇄를 발명이후 계속 되 온 인쇄술, 활자와 종이에 의한 정보의 시스템(즉 물질에 의한 정보전달방식)을 일거에 쇄신시키는 革命이라 할 수 있다. 보브 메트가표의 법칙에 의하면, 인터넷의 효용은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를 2승(二乘)에 비례된다고 한다. 즉 100명이 참가하는 네트워크에서는 이 네트워크를 통하여 남은 99명과 접속, 교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간단한 원리이다. 200명이라면 199명이 되며, (100명의 네트워크의 약 2배로 증폭됨) 결국 2배의 2배 즉 4배 (2승)이 된다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전 세계의 인간을 한꺼번에 연결시키는 기세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모든 생활기반으로서 자리 잡는다고 한다. 즉 일, 공부, 오락, 쇼핑. 인간사이의 연락, 통신, 정보수집, 발신과 수신... 이 모든 것에 인터넷이 사용되며 인간의 생활은 지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바. 이는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다. 피터ㆍ드럭커거교수는 “20세기는 체력노동자의 생산성이 50배 향상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21세기는 지식노동자의 생산성이 50배 향상되는 기간이다. 컴퓨터에 의존하여 그 향상이 달성한다는 것이다. 금후 기술이 발달되면 인간의 두뇌의 사고를 이길 수 있는 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한다. 현재 상태의 컴퓨터는 아직 미완성의 기술제품인바, 지금의 컴퓨터는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컴퓨터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컴퓨터가 사용하기 어려운 결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나 같은 컴맹에게 이 말은 반가운 말이다. 앞으로 성능이 고도로 정비된 쓰기 쉬운 컴퓨터가 등장하면 나처럼 손재간이 없는 멍청이도 자유자재로 컴퓨터를 부릴 수 있을 것일까. 그때가면 우리의 주위에 어디나 존재하는 컴퓨터는, 컴퓨터로서의 흔적이 안 보인다고 한다. 지어 “컴퓨터를 쓰고 있다”는 의식마저도 없어진다고 한다. 참 아름다운 장밋빛의 미래이다. 그 미래에 가면 현재의 형태의 컴퓨터가 아닌 수백배 발전된 것으로서, 아무튼 책상위에 놓여 우리가 쉬운 장난감 다루도록 다룰 수 있는 “컴퓨터”라 칭하지 않는 첨단의 도구가 나타난다고 예측하고 있다. 유토피아 같은 미묘한 “정보사회”라고 한다. 이 같은 “정보화사회”를 꿈꾸는 우리들은 누구나 “기술이 인간 사회를 바꾼다” 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보기술과 사회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나는 이 미묘한 앞날에 대해 전부 믿기 보다는 왜서인지 회의적이다. 당연히 컴퓨터가 몰고 올 정보기술의 내일은 무상의 매력을 발하고 있다. 인간의 이날까지의 기술 도구로서는 상상을 절하는 편리함과 기계문명의 낙(樂 )을 구가하고 있다. 그 매력 앞에 누구나가 무력한듯하다. 그러나 이 매력에 눈이 어두워 진짜 보아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느낌을 나는 떨칠 수 없다. 19세기 말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지본주의를 사회를 대체 한다는 인류의 유토피아 공산주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일종의 이상적 유토피아로 종식되지 않았던가! 과학철학자 칼ㆍ보퍼(1902-94)의 말을 빌리면 “공산주의는 과학이 아닌 것”이다. 실체로서의 공산주의는 아직 멀고 먼 미래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미래는 기나긴 암흑의 터널같이 좀처럼 잡혀 질 조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는 “정보기술이 인간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장밋빛 꿈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회의적이며, 오히려 반대로 인간사회의 구조가 기술 양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인간사회의 발전을 자연사회-농업사회-공업사회-그리고 오늘의 정보사회로 파악하고 그것을 그대로 종교 신앙처럼 믿어 의심치 않는 작금, 나는 이런 “신앙”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이유가 있다. 인간의 만든 컴퓨터, 정보기술은 레토릭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만든 옷과 비슷하다. 인간의 복장은 이 날까지 여러 가지로 변화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어떤 시내든 옷을 걸친 인간 주체가 변했는가 하면,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그 자체이다. 변한 것은 인간의 사고, 발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복장을 개발하고 창조해 온 복장 그 자체일 뿐이다. 내가 금방 인간은 안변한다고 했는데, 인간이 변한다고 하면 오히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컴퓨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그것이다. 그것은 일종 병태로 되어 기계와 기술의 노예로 전락되는 현실이다. 마치 “신(神)”을 만들어 놓고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에 예속되는 것 같이, 또는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 침몰하는 격이 되고 만다. 인간사회, 인간의 위험이라면 컴퓨터 자체가 아니라, 컴퓨터 기술에 의존 증에 걸린 인간의 의존 병이다. 인간들이 “정보화 사회”를 소리높이 구가하는 언행에는 벌써 “기술결정론”이란 “인공낙원”을 찾아 거기로 도피하는 도피주의가 보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인간의 취약한 도피행위 심리가 보인다. 술과 같이, 마약과 같이 인간들은 인터넷, 휴대폰에 마비되어 가고 있다. 하루라도, 아니 한시각이라도 컴퓨터, 휴대폰을 못 떠나서 못 살 것 같은 도취, 그 강박감으로 충만 된 자신의 행위를 억제 못하는 그 자체가 기묘한 원숭이처럼 보인다. 기계를 쓰는 원숭이들의 세계다. 실제로 앳 마크인 @를 독일인들은 ‘원숭이 꼬리’라고 부르고 폴란드인들은 ‘원숭이 새끼’라고 부른다. 사실 @에서 발신하여 @로 수신되는 정보는 컴퓨터의 조작으로 인해 허위 情報와 허위 사실이 ‘진실’로 위장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인터넷 자료 인류학, 문화론 정보를 검색해 보아도 눈에 띄게 현저한 거짓정보와 신빙성이 낮은 정보들이 난무했다. 이런 것이 규제 없이, 여과 없이 용이하게 전파되니 거짓을 진실로 믿는 폐해는 지대하다. 그러니 웨브, 인터넷 정보는 말 그대로 玉石混淆(옥석혼효)의 세상이다. 또 한 통계에 따르면 하루에 수신하는 메일 중 80% 이상이 스팸메일이라 한다. 그것을 지우는데도 많은 시간과 정력이 소모된다. 메일 발신 법을 모르는 나의 메일에도 하루에 수십 통이 들어온다. 어디서 내 메일주소를 알았는지 수상할 정도로 정체불명의 잡다한 내용이 침범해온다. 이는 개인 주택으로 말하면 “불법침입” 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런 불법 침입 죄가 아무런 법적수속도 없이 당당하게 행해지니 함구 할 수밖에. 인터넷에 통효한 친구를 불러다 방법을 댔는데도 잠시 일뿐 또 다시 침입해 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보시대는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라기보다 쓰레기의 홍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이 “가짜”로 되고, 가짜가 쉽게 “진실”로 둔갑하는, 지구규모로 그것이 급속히 가능한 것이 또 컴퓨터 인터넷의 造化가 아닌가. 그러니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 장 보드리아르의 “시뮬라시옹이론”를 플러스시점으로 보는 것과 함께, 마이너스 시각으로도 보아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마크의 이야기를 하자. 나는 시각적으로 영어의 첫 번째 기호인 이 a를 둥근 원으로 둘러싼 로고가 신비스럽게 느끼고 보기도 좋다. 이유는 딱히 모르겠다. 디자인 감각으로 해석 할 수 있을런지? 한국에서는 “골뱅이”라고 하는데 독일에서는 ‘원숭이꼬리’라 하며 폴란드나 동유럽국가에서는 “꼬마 원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달팽이”라 하고 터키에서는 동물의 “키”라고 한다. 그런데 핀란드는 “고양이 꼬리”로 보이고, 중국은 “쥐”라고 비유한다. 러시아에서는 “개”로 변한다. 한편 스웨덴은 “코끼리의 몸”이다. 참 흥미로운 것은 골뱅이에서, 쥐로 그리고 코끼리로 크게 달라지니, 이 자체를 곰곰이 생각하면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문화, 사고방식에 따라 같은 사상(事象)도 달리 보이고 달리 해석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글러벌(세계화)의 홍수에 휘말리는 시대에, 아무리 정보화 디지털 시대라 해도 그의 역방향으로 쏠리는 로컬화(지역화), 자기스스로의 문화를 가지고 전자 文明에 대항하려는 골계이다. 이 모순을 컴퓨터 전자문명의 희극으로 볼까, 비극으로 볼까? 차라리 나는 두 가지가 다 겸했다고 보고 싶다. 인터넷 문명의 천만까지 편리와 하이테크놀로지의 승리를 구가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강조해도 과도 하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치명적인 결함과 약점을 본다. 정보의 잡다성, 허위성, 옥석혼효성, 그리고 인간을 같은 사고나 행동으로 매어놓는 획일성, 따라서 가상성(假想性)에 침혹되어 상상력을 말살당하는 우(愚), 과다한 도상(圖像)과 가상적 이미지 표상에 포로 되어 思考가 정지 되는 아이들.... 편리성만큼이나 위구성도 증폭될 것이다. 이 편리성과 위구성의 양가성 모순, 대립(代立)을 구경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스무드하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상상하면 장미꽃 미래 속에 뜨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다시 장미꽃을 피운 가지의 가시에 찔려 피 흘리는 모습이다. 이어령선생은 나와의 대담 중 이런 재미난 말씀을 했다. “정보(情報)의 특징은 정(情)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여 정(情)을 알리는 것 (報)이 정보(情報)가 된다” 라고 결국 아무리 기술이 변하고 외부 환경이 바뀐다 해도 우리 인간이 주체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정보가 발달해도 인간은 밥을 먹어야 하고 배설을 해야 하고 잠을 자야하며 서로 만나고, 만나서 식사도 하고 횡설수설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다. 아무리 인터넷에서 정보를 전달, 수신한다 해도 역시 “만나서 얘기하자”로 얼굴을 봐야한다. 정을 나누고 정을 알리는 정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부터 反時流的 회의적인 성질이 있어서 “通說과 通念은 꼭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라고 항상 생각하는 인간이다. 우리가 지극히 상식, 통념으로 백 프로 믿는 곳에는 기필코 反 이 있는 법일 수 있다고 나는 믿어 왔다. 지어 세계와 인간이 “99,9%는 일종의 가설 일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 한다 ”인터넷의 정보는 방대한 좋은 정보가 있다“ ”인터넷의 커뮤니케이션을 멋있다.“ “인터넷의 집합적인 지(知)” “인터넷은 인간의 인생을 바뀐다” 등등... “인터넷 찬미론”이 신종플루처럼 무진장 만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터넷이 얼마나 인생을 바꾸는 가는 대저 믿지 못하겠다. 그리고 인간이 변한다는 통념에서 오히려 “기술결정론”의 맹점을 읽게 된다. 기술이라면 인터넷보다도 나는 알랙산더ㆍ 그러함ㆍ벨리 1876년에 발명한 전화가 정보혁명의 획기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터넷은 전화이후의 제2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인터넷이 편리한 것은 백만 번 언급해도 되지만 정보 혁명에서 이미 전화가 인터넷의 기능을 구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일테면 무슨 동창모임이 있어 전화로 알리는 것이나 인터넷으로 송신하는 것이나 그것은 육성과 文化의 차이 일뿐이다. 인터넷을 열지 않으면 오히려 전화보다도 못하다. 인터넷의 기술을 맹신하듯, 그의 편리를 예찬하듯이, 인터넷을 사용한다 하여 인간이 능력이 하루아침 비약적인 향상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이 있든 없든, 쓰든 안쓰든 인간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인터넷을 왕좌로 모시고 그 기능과 편리함이 노예가 되기보다는, 그것을 전화나 FAX와 같이 편리한 도구, 방법으로서 이용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컴퓨터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他者”이다. 이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이 창조한 망치나 낫과 같이, 펜과 검과 같이 우리 인간의 능력의 보조선, 대체로서 사용되고 있으나 도구를 사용하는 주체는 언제나 우리 자신들이다. 컴퓨터라는 첨단의 “他者”를 통해 굴절된 우리 자신의 욕망을 기탁하려는 近代的기술은 매력으로 충만 되어 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자신이 만든 도구에 유혹되어 의존중 같은 노예로 된다면 본말전도의 아이러니에 빠져 버리고 말게 된다. 진실하고 생동한 인간, 인간의 삶은 컴퓨터에 있지 않고 인간자체에 있다. 우리인간의 사회에 있다. 자, 컴퓨터를 일단 버려라. 그리고 거리에 나서라. 살아있는 인간들 속으로.
11    2-2. 초식동물적 생활방법 댓글:  조회:5003  추천:25  2012-12-01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2. 초식동물적 생활방법   1. 그대는 이런 풍경을 보았는가? 소 한 마리가 풀을 뜯어먹고 있다. 유유자적 하게 소는 열심히 풀을 먹고 있다. 멀리 숲으로부터 봄바람이 노래같이 불어온다. 그리고 전원(田園)의 어디선가 목동의 피리소리도 들려온다. 소는 봄바람 노래와 피리소리를 흠상한다. 소는 경 읽기는 싫어하나 피리소리 노래 가락은 즐긴다. 음〜매〜 하고 짖는 소리는 좋다〜 하는 기쁨의 말이다. 소등위에는 등에가 내려앉아서 봉봉거리며 소를 깨문다. 그러나 소는 등에를 내쫒지 않고 그냥 둔다. 등에가 가려운데를 긁어주기라도 하듯, 소는 여전히 유유자적 풀만 뜯는다. 이따금 시누런 오줌을 줄기차게 배설한다. 그리고 빵 같은 커다란 똥도 눈다. 분뇨는 다시금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유와 함께 분뇨는 소가 大地에 남기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소가 되고 싶다. 나는 십우지도(十牛之圖)의 선화(禪和)에 나오는 소가 되고 싶다. 明禪師의 放牛圖頌(방우도송)그림이 뇌리에 떠오른다. 소와 목동으로 인간의 깊은 깨달음을 상징한 선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소가 망아(忘我)의 세계인에 진입하여 유유자적 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부럽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화나 근대 극화의 대화백 李苦禪(이고선) 선생의 소의 방목도는 선의 사상을 활사 하고 있다. 제백석(齊白石)도 무척 좋지만, 선우(禪牛)도 만큼은 천하의 제백석도, 오창석(吳昌碩)도 이고선을 따르지 못한다. 이 유연한 소의 망아(忘我)지경을 서양의 근대 철학자 니체까지도 동양사상으로서 크나큰 매력을 느꼈으며 너무 선망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니체가 살았던 독일의 시골에도 소가 풀 먹는 광경이 흔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나도 어렸을 적 심양 근교의 마을에서 자라면서 소가 풀 뜯는 풍경을 자주 보아왔다. 만약 내가 저 소였다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풀을 열심히 먹을까 하고 중학생인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 기억이 있다. 풀 뜯는 소를 바라보면서 풀판에 누워서 책장을 번지던 소년시절은 꿈도 많았다.   2. 철저하게 시간에 쫓기는 삶, 공리성과 실리성을 따지고 物慾에 팽배된 인간사회에서 인간은 소의 유유자적한 자유, 여유를 빼앗긴지도 오래다. 그리고 지견과 관점이 다른 他者를 포용이 아닌 공격으로 자신의 모종의 실리, 공리를 절취하려고 필사적으로 목숨을 건다. 그게 신물 나도록 질린다. 공격성에 노출된 암퍅스러운 앙심을 품은 앙칼지고 방정스러운 모습이 나는 싫다. 타자에 대한 공격, 그 공격성을 인간의 또 하나의 지대한 “추악”이다. 인근의 타자와의 싸움을 불교, 기독교를 비롯한 동서양의 모든 종교는 “악”으로 간주한다. “공격성”을 인간이 짊어진 “본능”이라고 한 철학자,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그리고 근대란 극한의 생활 속에서 숙명적 반응으로서 “공격성”을 설명한 서양사상가들이었다. 1920년-30년에 프로이트, 로렌츠, 등 세계적 연구자들이 획기적인 연구업적을 쌓았다. 구조주의적 정신분석의 시각에서 잭크ㆍ라칸은 인간의 공격성이 본능으로부터 아마고으로의 매트릭 변화에 있음을 갈파한다. 즉 인간의 공격성은 공격의 지향으로 노정된 신체해체의 심상(心像)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로렌츠 역시 인간의 공격성은 友情이 잠재돼 있으며, 우정은 공격성을 기반으로 한다고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나는 이 가설이 설립된다면 공격성은 우정과 같이 소실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훗날 미국의 EㆍO 윌슨은 에서 로렌츠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평화적 포우류라고 했으나, 그래도 인간은 동물만큼은 아니지만 때로는 동물이상으로 상상을 절(絶)하는 공격과 살육과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가. 전쟁이 그렇고 폭력이 그렇고 국가적 정치폭력, 문화인의 언어폭력, 인신공격.... 이 모두가 우리 인간 스스로를 괴롭히는 공격성의 “추악”이 아닌가! “악은 악으로 치고 독은 독으로 뺀다.” 라는 격언(格言)이 있으나, 다른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나는 지식인 사이의 상호인식공격을 말한다면 오히려 이전투구와 가치 없는 소모전으로 비생산적이고 우리 모두의 지적생활과 지적 생산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데 섣부른 대응이 아닌 소가 풀 먹는 식으로 유유자적 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면서 지적생산, 지적창조의 삶을 즐기고 있다. 당연히 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에 知的으로 오만불손의 경향이 있는 흠 많은 미완의 인물이다. 소가 오만해서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등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풀 뜯기에 여념이 없기에 등에 한 마리 쯤 하등 자신의 집중력을 환산시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역시 나에 대한 공격을 하고 있는 상대를 나는 “등에”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에는 때로는 소가 손이 못 닿는 가려운 부분을 따끔하게 긁어주는 쾌감을 가져다주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공격자든 피격자든 다 안전요해의 “합작성(合作性)” 공모자의 운명에 있다고 본다.   3. 생태학과 문화 인류을 결합시킨 학제적 연구에서 양의 동서 思想을 초식(草食)과 육식(肉食)의 사상으로 규정한 학자가 있다. 일본의 저명한 비교사학자 사바타 토시유키(鯖田豊之ㆍ1926-)교수는 등 일련의 저작에서 인간중심의 기독교에 기반을 둔 서양인이 목축문화 풍토에서 걸러낸 동물과 인간의 단절된 인간절대주의 사상을 지적했다. 동시에 비교되는 동양의 미식(米食)문화, 즉 초식문화(한반도, 북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 포괄)는 자연에 의존한 자연과 조화된 자연숭배사상, 자연파괴 공격성 원리가 아닌 조화, 융합사상을 창출했다. 실제적으로 벼농사일은 인간의 개인적 활동이 아닌 여럿이 일손을 맞추어 어우러져서만 되는 합동, 협력, 융합의 과정이기도 하다. 서양적 원리주의에 대치된 동양적 조화, 융합의 사상에 대해 나는 요즘 심대한 공감을 느낀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명의 융합, 공론에서 인류 문명의 미래 비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이분법 원리 아닌 조화, 융합만이 인류의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수년전 쿄토에서 있은 나와의 문명대담에서 이어령선생은 이솝우화의 를 지금 21세기에서는 일하는 것 (work)과 노는 것( play), 생산자 대 소비자의 흑백구도가 아닌 양자의 상호결합의 상태를 주장했으며 그것을 가리켜 “개짱이”로 불렀다. 서로 대극에 있는 노동과 놀이를 노동〓놀이를 일직선으로 연결하여 “뽕도 따고 님 도 본다”는 속담같이 “쉬엄쉬엄 일하다” 라는 말과 같이,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같은 리듬 안에서 공존 한다고 이야기 하셨다. 그래서 개미와 베짱이가 하나로 매시업되어 ”개짱이“란 新造語를 탄생시켰다. 나는 고희를 넘으신 이어령선생의 유연한 사고에 경복을 금치 못했다. 이와 같은 발상으로 일찍 1980년, 쿄토대학의 서양사학자이여 문명비평가로 명성을 떨친 아이다 유지(會田雄次) 교수는 에서 생화양식을 민족적으로 보아 유럽인은 육식동물적 생활, 라이온(사자)처럼 생활을 하고 있으나, 일본인은 원숭이적 생활을 하고 있다고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서양인은 일을 할 때는 집중적으로 지력, 체력, 의지력을 전부 가동시킨다. 그런 다음 잠자는데 열중한다. 노동, 놀이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동양인)은 옛적부터 쌀밥이 주식이며, 백인종에 비해 장(腸)이 긴 체질로 되었다. 원숭이적 생활이란 원숭이가 늘 먹는 나뭇잎인데, 절반은 놀면서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면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먹는다. 채식(採食)에 전력 집중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일본인은 이처럼 무한히 질질 끄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구미인 수렵 목축민족으로 육식동물 삶을 해 온 것에 반해, 채집 순농(純農)적 생활을 해온 까닭이라고 밝힌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인은 질질 끌면서 근무하는 근무적 민족이다. 이리하여 일본인의 사고방식도 일하는 육체동작과 같이 질질 끌고 손발을 쉬고서 생각 하는 것이 아닌, 일하면서 사고하는 양식이다. 20년전, 아이다교수가 미처 어떤 수준의 학자라는 것을 모른채, 그의 탁발한 비교 문화론 저작을 읽었을 무렵에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워낙 일본을 대표하는 당대의 문명비평가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과 놀이, 이 둘은 나를 나름대로 “일놀이”로 신조어를 만들어 본다. 그때 이미 다 선생이 원숭이적 “일 놀이”의 삶을 일본인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일하면서 사고하는” “하면서 사색” 하는 것이야 말로 일본인의 사고방식이라고 상찬했다. “하면서 사고하는 것”은 육체와 도구가 함께 움직이는 것 그리고 사색사고 하는 것이 융합, 조화된 통일체이다. 그중에서 비약, 아이디어가 탄생된다. “하면서 주의”-- 나는 일본에서 언제나 전차 안에서 독서하며, 통근하면서 독서, 사색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고착시켰다. 그리고 서재에서 나는 음악 CD. 테이프를 틀어놓고 귀로 들으면서 독서 집필한다. 명상을 즐기는 나는 아예 책장을 접어놓고 전차 안에서, 화장실에서 사색에 잠기곤 한다. 그리고 글을 구상하기도 한다. 사실 늘 이런데서 아이디어, 발상이 떠오른다. 글감, 쓸거리가 생긴다. 롤댕의 “사색하는자”를 패러디해서 말하면 “사색하는 자는 항상 화장실에 앉아 있는다” 이다. 나의 서재의 고물 탁상위엔 책, 원고지, 필묵, CD, 레코오트 이외에도 음료수, 과자, 캔디, 크림, 티슈, 휴대전화, 카메라 등이 잡다하게 널려있다. 탁상위의 “일상용품 잡화점”이다. 색연필, 볼펜, 만년필, 연필로 필만해도 수십개를 놓고 쓴다 왜 그런가 하면 일하면서 사고 하늘, 또는 보면서 들으면서, 또는 먹으면서 마시면서 하는 보조적 필수품들이기 때문이다.   4. 땔나무를 지게로 지고 걸어가면서 독서하는 동상이 있다. 니노미야의 동상이다. 니노미야 손도쿠(二 宮尊德 1787-1856), 일본인과 식민지시대 조선인에겐 익숙한 인물이다. 에도(江戶)시대의 農政家이며, 도덕과 경제의 융합사상을 전 일본에 보급시킨 위대한 괴짜이다. 일하면서 공부를 하는 그의 “일놀이” 사상적 실천은 가히 동양 스타일의 우수성을 구현한 인물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 딱딱한 합리주의적 사고보다 융합법, 조화법 사고가 보다 유연적이다는 것은 서양의 결함을 메울수 있는 대안이 된다. 괴테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 신비한 역량이여! 둘이면서도 하나인 동얀의 나무 은행잎이여!” 서양과 동양의 전통적 문화를 레토릭으로 표현하면, 서양의 문화는 돌(石)이고 동양의 문화는 나무(木)이라 할 수 있다. 또 동양의 문화는 물(水)이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러운 것, 유동하는 것, 돌같이 금속같이 굳어 있지 않은 부드러운 사고양식의 문화이다. 유교가 주장하는 인은 언제나 두 사람, 상대적인 것이고 부드러운 화(和)의 사상이다. “1아니면 2다” 하는 대립, 충돌의 이념이 아닌, 대립을 넘어서는 유연한 역학이다. 같이 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유연한 공생, 공존의 사상엔 칼날같이 이질적인 타자를 베 버리는 차갑고 무서운 사상이 아니, 그것을 초월한 공존학이 있다. 5. 다시금 소의 이야기로 돌아선다. 만약 서두에 등장하는 “십우지도”의 그 풀뜻는 소에 대하여 식민지를 찾아 혈안이 돼서 서두르는 서양인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영락없이 서양인들은 소를 잡아서 식용의 스테이크로 요리해서 먹어치웠을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구로부네(黑船)”라 불린 상선을 이끌고 일본에 상륙 했을 때, 그들은 무조건 일본인들에게 소 십여마리를 요구했다. 왜서 일까? 그때까지만 해도 쇠고기, 돼지고기를 肉食으로 하거나 우유를 먹는 식생활이 더구나 없었던 일본인들은 “풀도 없는 배안에서 어찌 소를 기를 수 있느냐?” 라고 의아쩍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 뒤 서양문물을 신속히 수용, 소화시킨 그들은 쇠고기, 육식과 우유를 식생활의 당당한 메뉴로 정착한다. 서양식 문명대로 서양을 본 따서 식민주의의의 칼을 물고 이웃나라를 우마처럼 지배하지 않았던가! 한국이 기나긴 육식문화를 자랑하면서도 한 번도 서양적 근대의미의 침략을 하지 않은(못한)것은 비운일까 행운일까? 육식문화의 원리와 초식문화의 원리를 융합시킨 것은 한국 문화의 원리가 아닌 원리이었다. 구운 쇠고기에 상추를 싸먹는 한국문화는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중국문화와 한국문화의 내실에는 일본과는 달리, 서로 유사한 친근성이 존재하는 것은 육식문화를 공유해온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동양 3국이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문화를 공유한 문화적 콘텐츠는 소와 소등에 앉아 피리를 부는 목동과도 같은 자연중앙의 묵가적인 또는 天人合一의 사상과 불교, 도교적 요소들이 다분히 유교와 함께 들어있다. 서양적 근대의 합리주의와 속력을 추구하는 “드로몰로지”(질주학)논리에 지금은 소들마져도 꼬리를 깃발로 추켜들고 말처럼, 자동차처럼 질주해야 하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 자칫하면 그런 드로몰로지의 무한한 경쟁, 배제사회에서 소의 뿔은 타자를 공격하는 문명충돌의 예리한 칼로 변할수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사고, 사색의 절주를 한 박자, 두 박자 줄여서 천천히 일하면서 사고하고 싶다. 悠然하게 우보(牛步)를 걸으면서 사고하고 지식의 풀을 섭취하여 소화시켜서는 유연한 아이디어, 발상의 여과를 거쳐 정신적 우유로 배설 하고 싶다. 피자 같은 지짐 같은 우분(牛糞)도 맥주, 막걸리 같은 우뇨(牛尿)도 도도하게 배설하면서. 섭생도 배설도 소와 같은 유연(悠然)과 유연(柔軟)이란 “쌍유”의 라이프 스타일 이어야 한다. 소처럼 즐기면서 놀면서 책을 읽고 사고(思考)하고 글을 부지런히 쓰겠다.
10    2-1. 내 사상의 계보학적 흐름 댓글:  조회:5425  추천:26  2012-11-26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제2장 내 사상의 계보 1. 내 사상의 계보학적 흐름 0.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고유의 “생일”이 있는 법이다. 이 탄생에 이르는 고유의 궤적, 흐름 적 “과정”을 되돌아보는 문맥을 통해서 만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정”을 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 자신의 “사상”이 태어난 “생일”의 “과정”에 대한 망각이었다. 만약 나에게 “思想”이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글쓰기에서 표현 됐거나, 또는 내 내면의 의식 속에서 있다고 가정하는 세계, 사회, 인생에 관한 나름대로 의식 내용일 것이다. 기실 “思想”이란 것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의식세계로서, 그 자체를 말과 글로 표현, 표달하기는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편의적으로 표현 해보는 시도는 그래도 있다. 나는 내면의식 세계로서의 사상을 독서를 통한 나의 계보학(系譜學)적 흐름으로 짚어보는 것으로 표명해 보기로 하겠다. 1. 1989년 5월 하순. 만 26살의 나는 북경에 있었다. 세계를 진감한 “6ㆍ4 천안문 사건” 전야였다. 나는 북경 모 출판사의 요청으로 그때 내가 집필한 책과 일본책 번역 교정일로 십여일 간 잠깐 휴강을 하고 북경에서 체류했다. 천안문과 인근 거리에 있는 출판사 근처의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나는 하루 작업을 끝내고 나면 매일 천안문광장에 가서 산보하는 것이 일과였다. 5월 하순에서 말에 접어들자 북경시내의 여러 대학교 학생들의 데모가 점차 더 큰 규모로 백열전에 달했다. 민주와 자유주의를 정부에 호소하는 충천 하는 대학생들의 열의는 그때 대학 강사로 있던 젊은 나의 가슴에도 와 닿았다. 5월 31일 나는 일을 마치고 곧 심양으로 돌아와 출근을 했다. 그런데 저녁에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나는 허리를 다쳤다. 그리하여 이내 집에서 쉬면서 조선족 종교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때 학생운동의 열기는 전국으로 파급되었는데, 심양의 수많은 대학생들도 민주화 데모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뿐이 아니라 대학의 젊은 교사, 교수들 그리고 일반인 청년들도 데모에 가담하여 온 시내의 교통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전화를 걸어오는 한족 지식인, 작가 친구들이 많았다. “너는 왜 청년지식인으로서 잠자코 있냐? 이런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 뛰어 들자!” 라고 상대방들은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나는 데모에 나가지 않았다. 두문불출 글쓰기를 했다. 왜냐하면 나의 사상에는 “데모”를 형태로 하는 “주의, 이데올로기”의 행동이란 “프로그램”이 결여 했던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어디까지나 글쓰기를 통한 행동이다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노신의 후기의 이데올로기에 편향했던 것과 달리 호적의 “주의를 담론 아니 하고 정치를 불문 하는” 학문주의, 인문주의적 사상에 공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중국에서 태어난 마이너리티(소수민족) 지식인으로서, 문화적으로는 아무래도 아웃사이더 인만큼, 정치에다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기 보다는 학문, 문학으로 불태우겠다는 인문주의적(?)사상이 근저에 있었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언어를 총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글 쓰는 발화행위가 바로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데모를 하는 것도 그 자신의 자유요, 안하는 것도 내 자신의 자유로 생각하고 나는 글쓰기로 인생에서 승부하는 자신이라고 결의를 더욱 굳힌 것도 그때인 것 같다. 적성적으로 따지면 나는 정치인적인 기질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며, 오히려 이념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주의 지식인, 연구와 글쓰기 쪽이 내 기질, 성격에 맞다 는 것을 일찍 알았기 때문이다. 2. 아마 내가 기억하건데, 나의 사상의 탄생의 시발점에는 중국에서 아동기 때부터 받아온 “맑스주의”, “모택동사상”으로 칭해지는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사상”일 것이다. 물론 막연하고 어렴풋한 폭력, 투쟁, 계급 등 키워드로 연결된 미완의 “사상”이었다. 그리고 특별히 반시류, 반골정신이 있었던 내게서 매일 같은 계급투쟁의 사상주입에 대해 거부감, 기피 감을 느낀 것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일본의 서적을 통해 나는 이 세상에서는 맑스주의, 모택동사상 외에도 너무나 풍부하고 다양한 사상이 존재함을 알고 경탄하며, 그 사상의 이해와 수용에 탐닉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은 계급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라고 갈파했다. 모택동은 “정권은 총구멍에서 나오며, 인간은 계급투쟁을 멈추지 말아야 된다는 독재적 폭력투쟁사상을 고안해 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기실” 자신이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모르고 사고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동시대의 사상가, 철학가 니체는 인간은 “자신이 外在적 규범의 노예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도 모른다” 라고 단언한다. 고전문선학자로 출발한 니체는 “계보학”적 사고를 원용하여 “자신을 모르는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 바보로 되었나?”를 관통시켜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언설을 펼치고 있다. 내가 니체의 사상에서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어떤 시기에 있어서 사회적 감수성이나 신체감각 같은 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파악할 수 없다. 과거나 타자(이방)의 경험을 내면에서 살리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철저한 자료적 기반과 대담한 상상력과의 유연한 지성이 필요하다” 라고 한 사고이다. 이 사고는 “계보학적” 사고로 명명한 현대 프랑스의 역사학자, 철학자 푸코에 의해 전승, 발전되는 듯하다. 3. 1980년대의 세계적(서양적) 포스트모터니즘 사상 격랑의 여파가 아직도 강렬하게 동아시아에서 불고 있던 1991년 초, 나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물론 그 한 해 전에는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등 유럽 나라를 일주하게 되는 행운도 차지하였다. 내가 일본에서 발견한 세계는, 100년 전 중국 지식인 노신이나 주작인의 언설에서 노정되고 있는 “일본에서 발견 되는 중국 당풍(唐風)문화”가 아니었다. 일본은 전통의 일본이란 고층(古層)외에 중후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은 세계문화, 사상의 “도가니”, 즉 지적도가니라는 것이었다. 서양의 근대, 포스트모터니즘의 일체 사상, 지적 조류가 여기서 회합하고 집결하여 강열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 나는 경이로 왔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일본문화와 조우는 나에게서는 일본문화인 동시에 일본에서 층층으로 파문같이 크고 작은 원을 형성하고 있는 역동적인 서양문명, 근대의 사상이었다. “국제화”로 칭해진 일본의 글로벌화 진척은 나의 사상과 지견을 변용시키는 거대한 용광로가 되었다. 나는 중국에서 대학생 때 읽기 시작했던 일본어 서적(번역서)을 통해 사상을 읽었다. 근대 및 포스트근대의 사상을 하나하나씩 접촉, 반추, 수용, 배제의 여과장치를 거쳐 내 넋 속의 사상으로 층층의 동심원을 이르며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기술의 편의를 위해 시대별로 나의 이 “층층의 동심원(同心圓)”에 대해서 계보적, 궤적으로 그려 보기로 하겠다. 4. 중국에서 대학공부를 할 때,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혁명사, 중공당사, 철학과를 통해 배웠지만, 근대 특히 1980년으로부터의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완전히 교양과목에 결락 된 공백의 세계였다. 다행히도 나는 일본에서 펜팔들이 (일본의 대학 교수, 작가 및 대학원생) 우송해 주는 책으로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수 있었다. 일본에 와서 나는 1980년대 격량을 일으킨 포스트모던 사상을 “근대 계몽사상의 종식”을 선고 하는 식으로 접했다. 포스트모터니즘의 선열한 사상을 나에게도 충격적이었다. 특히 프랑스 사상가 프랑소와, 리오타르(1924-98)의 영향은 지대했다. 1977년 출간된 그의 에서 저가는 근대적 “장대한 이야기”가 종식됐다는 시대로서 포스터모던을 정의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근대(모던)란 인간주체의 해방, 자본축적의 이론, 정신의 변증법등 “장대한 서사”가 지배한 시대였는바, 현대는 그 같은 “대서사”에 향해 불신감이 팽창된 시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가 바로 근대를 넘어선 포스트모던의 시대라는 것이다. 사르트르(1905-80) 같은 반체제 지식인이 언설로써 시대의 정치체제와 맞서 싸워 대중의 크나큰 호응을 얻었으나, 포스트모던 시기에는 이런 지식인의 역할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사르트르적 반체제지식인의 실존주의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리오타르의 지적대로, 나는 그의 이론이 열린 다양성의 사상, 창출을 꾀했다는 면은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대한 이야기”가 끝났다고는 찬동할 수 없었다. 왜냐면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련 공산주의 사회의 붕괴, 등 대사건이 그의 이론을 정면에서 부정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을 정면에서 반론을 든 독일의 유명한 사회철학자 하버마스 (1929-)와. 그는 커뮤니케이션적인 행동이론 (1981) 노작을 출간하기에 앞서 라는 글 (강연)에서 근대계몽사상은 아직 유효하며 그 정면 적 유산을 수정하면서 계승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까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미셸ㆍ푸코는 1984년생을 마감하지만, 오늘날까지 하머마스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과시한 사상가ㆍ역사학자이다. 내가 푸코를 존경하는 이유는 푸코의 니체이래 “계보학”적 방법으로 학문연구를 역사적 팩터로 복합적으로 행한 공적이다. 《감옥의 탄생 (감시와 형벌)》, 《광기의 역사》, 《知의 고고학》등 저작을 통해 역사적, 사회적 넷트웍으로 관찰 한 점이 보인다. 그는 인간의 신체도 사회의 의미에 의해 엮여진 “사회제도”라고 갈파한다. 그래서 국가가 신체를 조작한다는 원리를 발견하는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푸코는 휴머니즘(인간주의)을 “지금, 여기, 나”라는 주의로 설정하여 인간주의적 진보사관을 부정하며 역사는 직선적으로 추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갈파한다. 푸코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 관찰하는 것으로 인간이 안고 있는 여러 “상식”을 깨부수고 있다. 그가 “상식깨기”에서 인간의 정신질환에서 “정상과 이상”의 경계란 개념을 깨고 狂氣(광기)에 대해 새로운 조명을 하고 있다. 그가 말년에 쓴 대작 《성의 역사》는 “인간을 왜 성에 대해 이처럼 정열을 몰부어 담론하는가?”에 답을 주는 저작이었다. “성을 억압된 문법으로 담론하려하는 우리들의 정열의 안(眼)이 지탱해준다” 라고 그는 답을 찾았다. 많은 충격을 받으면서 읽은 푸코의 저작들은 이 지구위의 인문, 사회과학 연구자의 필독 문헌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회의”로부터 출발한 방대한 푸코의 지적 言說은 회의의 사상을, 그리고 계보학적 지의 사상을 나에게 심어준 스승이기도 하다. 5. 신자유주의 사상은 또 나에게 영향을 준 사상이었다. 1980년대 “네오리벨라즘”이라 칭해진 사상의 고안자인 하이예크 (1897-1992)는 그의 경제사상을 이렇게 전개했다. “북구형 복지국가를 포괄한 중앙집권적 경제가 인간예속이라 하고, 개인의 자유를 토대로 한 시장경제로 의해서만이 사회 번영이 가능해진다” 라는 독특한 학설을 주장했다. 영국의 사처수상이 1980년대 실시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기실 하이예크의 사상이었다. 90년대 중국 사상계, 지식계에서도 이 “新自由主義” 사상이 급속히 전파되면서 신자유주의 지식인을 많이 생성시켰다. 1990년 이후 세계적 규모로 전파된 “글러벌 산지유주의”는 미국에서 다시 생긴다. 그중에도 나는 킴릿카(1962-)가 제시한 “多文化的市民” 사상, 마이너리티와 개인의 자율성과 평행을 이룬 국민국가론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찰스테일러 (1931-)의 “국내에서 다양한 문화를 승인하는 多文化主義사상을 나는 읽으면서 찬성하는 면이 많았다. 1990년에서 현재까지 인류역사는 리오타르가 “대서사의 종식”이 아닌 오히려 그 반대쪽으로 “대사건”이 빈발하는 쪽으로 흘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련연방의 해체, 이라크 전쟁, 그리고 냉전체제의 해체, 9ㆍ11 사건... 잇따라 미국의 일본계 미국인 3세인 푸랜시스ㆍ후쿠야마(1952-)의 공산주의 종식과 자유주의 이념의 승리를 선고한 《역사의 종말》이 등장했다. 그리고 사뮈엘헌팅턴(1927-2008)의 유명한《모명의 충돌》, 그는 세계문명을 8개의 문명권으로 구분시켜, 문화권에 의해 문명의 저항관계를 주축으로 국제질서를 해독했다. 흥미로운 이론의 제시였으나, 문명지간의 상호융합조화라는 원리를 배제시킨 편견이 있어 문화, 문명의 상호학습, 영향에 대한 주지를 노정시켰다. 증오를 선정적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고, 한편 그의 치명적 결합에는 많이 실망했다. 그때 상쾌하게 등장한 것이 “반헌팅턴 구상”이라는 부제로 나온 하랄트 뮐러(1949-)의《문명의 공존》이었다. 독일 프랑크트대학의 국제관계학 교수인 뮐러는 1998년에 출간한 이책에서 “충돌”을 전면에서 비판하고 “충돌”보다 매력적인 “공론”이 미완의 근대 속에서 가능하며 또 그런 전망은 밝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주장한 이론에는 서구 중심적 가정(假定)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999년 토머스 프리드먼(1953-)의《렉서스와 올리브 나무》가 출간된다. 《뉴욕타임스》의 중동전문가로 출발한 칼럼니스트인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것을 통해 세계화(글러벌) 至上主義자의 바이불로 꼽히는 이 책을 집필했다. 나는 2001년 12월《장백산》에서 주최한《김문학작품 연구심퍼지엄》에 참석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책 (한국어판)을 읽었다. 책 제목 “렉서스와 올리브나무”가 가치관의 충돌을 의미한다. 렉서스는 일본 토요타의 고급 자동차브랜드, 즉 세계화를 상징하고, 반면 올리브나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전통을 상징 한다 즉 지방적인 것을 상징한다. 그는 세계화 (글러벌)와 지역의 모순을 이야기 하면서 세계화의 큰길을 달리는데 올리브 나무가 걸림돌이 되기에 세계는 불안하다.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글러벌리즘과 로컬리즘을 사고하는데 좋은 텍스트였다. 이 양자에 대한 사고 역시 내가 줄곧 사고하고 있는 일종 사상적 테제이기도 하여, 이 영역에 대해서는 졸문의 뒤 부분에서 재의하기를 하겠다. 6.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래 가장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제국론”을 통해 자본주의세계의 작동메카니즘의 역사를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설명한 거작이었다. 바로 네오마르크스주의자 지식인 안토니오네그릿(1933-)이다 이탈리아 좌파 지식인인 그는 1979년 테러유도 협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200년 미국 듀크대학 모학 쇼수 파이클 하트 (1960-)의 공저로 된 을 출판한다. “끊임없이 달 중심화 하는 권력의 넷트웍으로서의 제국”으로 세계를 통권 하는 주권력을 해석하면서 제국의 탈근대적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제국적 권력에 직적 대항하여 전 지구적 주장하며 대중의 절대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가능할 수 있으며, 이 가능성을 최선봉으로 통일유럽이라고 직언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는 확실히 마르크스주의가 실행했던 인터내셔널운동을 계승하는 의미가 엿보인다. 마르크스주의, 사상, 헤겔의 진보사관 등에 대해서는 생략하지만, 일본에도 기실은 근대사를 펼치면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로 지칭된 사상가들 일테면 요시노사쿠조(吉野造作 1878-1933)가 헤겔의 영향을 받은 프로티스탄이 실재했다. 그리고 야마가와 (山川均)ㆍ카와카미 하지메(河上肇)등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에게 정도 부동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에 바로 유학했던 진독수, 이대소, 주은래의 마르크스사상 육성에 큰 영향을 행사한 것으로 실제로 중국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운동은 공화혁명을 일으킨 손문과 같이, 역시 일본의 영향 하에서 전개되는 사실(史實)을 인식해야 한다. 화제가 약간 옆으로 샜다. 근대성에 대해 즉 모더니즘에 대해 서양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후 슈펭글러(1880-1936)가 명저 《서양의 몰락》등의 영향 있는 문명비평론의, 그리고 유명한 하이데거(1889-1976)의 근대비란이 등장한다. 그 뒤 아드르노가 계몽의 변증법기를 출간하여 “비판적 이성”을 제의하면서 근대 계몽을 재고하였다.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인간 사고의 결락으로서의 악(惡)으로 나치스적 전체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녀의 사상은 전체주의의 악을 비판하는데 있어서 근원적 사고결여,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사고의 결여”로서 이를 읽으면서 나는 현재 존재하는 중국의 티벳에 대한, 위글 족에 대한 소수민족 탄압이 나 인민의 생명을 경시하는 북한의 전체주의에 대해 새롭게 재고하게 되기도 했다. 7. 근대, 포스트 근대, 문화적 근대성, 이것들은 내가 근 10여년간 항상 관심을 안고 사고 해온 거시적 제들이다. 미국이나 프랑스, 일본과 같이 근대의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구가하는 시회가 있는가 하면, 또한 북한이나 중국 같이 여전히 근대민주주의, 자유주의 원리를 배제한 전 근대적 요소를 다분히 내표한 사회도 존재하고 있다. 어떤 근대, 어떤 근대성이 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는 묻지 않아도 自明한 문제이다. 특히 근대성, 문화적 근대성을 다시 재고하면서 읽었던 마셜ㆍ버멘의 는 저작을 근대성의 모호함과 애매성에 흥미로운 접근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근대성을 남성이나 여성에 공통된 경험, 즉 시공적 경험, 자기와 타자의 경험, 생명가능성과 위험성의 경험, 등 양식이라는 것이고 규정하며, 이 일련의 경험을 즉 “근대성”이라 한다. “근대적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신과 세계 대해 모험, 힘 ,기쁨, 성장, 변신을 약속함과 동시에 인간이 갖고 있는 것, 아는 것,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위험이 있는 환경의 몸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근대적 환경 경험이란 지리, 민족적 경계선, 국적, 계급의 경계선,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경계선을 모두 뚫고 지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성은 모든 인간을 통일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逆設적 통일, 不統의 통일이며, 인간전체를 영구한 파괴와 재생, 투쟁과 대립, 애매함과 고통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다. 즉, 근대적이라는 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견고한 모든 것을 공중에 용해시키는” 우주에 속한다. 물론 앤드슨과 같은 지식인은 “견고한 것은 모두 용해 된다” 라는 중심사상을 “발전”이라 포착하기도 한다. 근대란 자본주의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의 과정을 내포하지만, 버멘은 “자기발전”이기도 하며 근대적 경험이기도 하다고 직언한다. 버멘의 근대성을 거론하면서 존ㆍ톰 린슨이란 영국의 비평이론 연구자는 1991년에 쓴《문화제국주의》에서 서양적 발전관을 재고해야 한다고 力說한다. 현재의 근대 자본주의 발전은 목적을 잃어버린 문화가 세계에 획일적으로 침투하고 있는바, 이를 글러벌리제이션이라고 칭한다. 글로벌의 근대적 확산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획일성을 띠면서 확산시키는 문화 그 자체가 무목적성이 있다고 제기한다. 문화가 어디로 가야하냐는 문제에 대해 많은 심사숙려를 자아내는 책이었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융합, 조화를 이루는 “세계인”의 사상,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에 지대한 관심을 안고 있다. “관심”이란 낱말을 월등히 넘어서, 나 자신의 일본유학 이후에는 1990년해 형성, 훈육된 코스모포리더니즘 사상은 김문학 사상, 주의의 社와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1795)《인륜의 形而上學》(1797)등에서 창안한 세계시민법 사상에서 나는 감명을 받았다. 칸트의 동시대인 프랑스에서는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으로 인권선언이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독일의 피히테(1762-1814)는 《독일 국민에게 고(告)함》에서 “교양 있는 국민”사상을 전개하면서 “저항력 내셔널리즘”을 창도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피히테의 애국주의 민족주의는 그 뒤 미국 윌슨 대통령(1856-1924)과 소련에 의해 “민족自決” 이 1910년(조선 일본식민지 시작되는 해)에 승인되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독립운동의 사상적 지침으로 고착된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 우리 민족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들도 역시 “민족자결” 사상의 영향으로 자주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물론 그 운동이 자력에 의해 일본 식민자를 제거하지 못한 채 미국과 중국 국제세력으로 일본이 항복하는 것으로 시원치 않은 민족독립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근대 일본의 자유주의적 내셔널리스트 사상가는 후쿠자와 유카치로 시작되는, 최근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1996)의 계보로 이어진다. 20세기가 이념 사상의 대결구도로, 이데올로기의 세기라는 것은 민족자결의 독립해방, 그리고 냉전체제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 인류 최대의 이념의 세기였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인류이념의 가장 큰 실험장, 도가니로서 20세기의 세계를 규정지어도 과언은 아니리라. 1990년 이래 최근까지, 세계를 나는 이념보다도 이념을 초월한 “문화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념에 의해 가리워진 문화, 민족, 종교의 팩터가 일거에 노출되면서 문화의 요소가 인류를 이끄는, 인류쟁점 충돌의 제일 요인으로 부상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이해”가 사상이상으로 중요한 시대라고 나는 믿는다. 비교문화를 하는 역할 역시, 인류의 오늘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이 현현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9. 나는 인류의 문명의 미래는 일원적이 아닌 “多元文化, 文明의 變化”라는 史觀사상으로 “비판적 대화”, “比較論적 해석학” 및 文明論사상으로 共生ㆍ共存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20세기 까지 지어 오늘 21세기 10년이 되는 이날까지 세계는 행인지 불행인지 서양 中心적 진보사관에서 이탈하지 못한 채로 있다. 서양 중심의 근대적 사상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 개인 역시 서양의 근대 사상 포스트근대 문화에 물젖었고 영향 받은 지식인이다. 그러나 현재 서양의 중심, 단일적 진보사관 사상을 여전히 많은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을 감안 할 때, 이를 해탈하여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 해왔다. 나는 비교문화를 근간으로 문화인류학적 이론을 전공으로 했기 때문에 문화인류학자로 부터의 문제의식에서 사고의 실 머리를 찾고자 한다. 20세기 후반 세계적 문화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 인류학의 비조인 레버스트로스의 사상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구조인류학을 창안한 그는 《야생의 사고》등 저작으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을 분쇄시켰다. 방대한 필드워크의 실증을 기반으로 그는 “미개인의 사고”:와 “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원래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하여 우열을 논하는 자체가 무의마하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 리얼한 세계”라 여기며, 他人이 보고 있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일그러진 세계”라고 착각하며 他者를 경멸한다. 자신이야말로 우월한 “문명인”이며 세계에 대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일수록 이 착오를 범하기 쉽다. 그래서 그는 유럽을 문명지역이고 다른 지역은 후진의 미개지역으로 보는 편전에 대해 준열한 비판을 가한다. 2005년 11월 파리의 유네스코헌장 채택 60돐 기념식전에서 98세의 고령인 스트로스는 강연을 한다. 그는 서구의 인문주의의 지대한 오유를 세계에 실존하는 문화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자신을 우월성으로 특권화 시키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생물의 다양성처럼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며 그 속에서 사는 인간, 민족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발했다.《문명은 무지개의 대하이다》(핫토리 에이지ㆍ 2009년)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트로스는 근대의 단선적 진보사관을 비판함과 동시에 미래의 전망이 결여된 비관적 문화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방도로서 18세기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비고(1686-1744)의 “螺旋狀적인 발전사관”을 원용하였다. 서양 중심의 문화관 역사관을 넘어서야 한다고 거듭 지적한다. 스트로스와 같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문화인류학자 기어츠 역시 서양 중심주의적 학지(學知)를 비판하며 래디컬한 언설을 발한 학자였다. 그는 선배격인 크랙 폰의 학문을 비판하면서 서양 중심주의를 해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자신이 쳐 놓은 의미적 그물에 걸려있다”로 포착하여 그 “그물”을 문화로 보고 있는 문화관을 지니고 있다. 그물로서의 문화의 열기설기 복잡한 다양성, 문맥성 의미를 섬세히 이해, 해석하고 “두껍게 기술(記述)”하는 것이 인류학자의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해석인류학” 및 “상징인류학”의 방법이론으로 문화를 분석 이해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서양의 “보편주의” 사고에 대항하는 것으로 “로컬 나렛지”라는 콘셉트를 구사하였다. 그는 보편적 학지는 공허한 것으로서, 의례히 언제어디서의 바라보는 방법을 제기했다. 다양한 문화를 해석학적으로 두껍게 기술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대화적세계(유니버스)의 확대”를 꾀하는 것을 창도했다. “문화상대주의”의 함정에서 탈출하여 글러벌 수준에서 상호간의 대회적 이해를 통해 서양 중심의 문명진보사관을 탈피한 것을 호소했다. 사실 “탈 서양 진보주의 사관”의 루트는 유명한 막스 베버(1864-1920)에 있다. 베버는 명작 (1904)등에서 근대적 계몽주의를 관통해온 “진보사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상세하게 살펴볼 여유가 없어서 간략하지만, 베버는 아무튼 비유럽의 유고, 도교, 및 이슬람, 힌두교등의 가치 자유적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물론 동기도 좋지만, 빈약한 자료를 근거로 유교등을 인식하려 했기 때문에, 대만 출신의 유명한 사상사가, 역사학자인 余英時(1930-)에 의해 그 오류를 지적당했다. 10. 서양 중심의 편견사상을 통일하게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1935-과007)교수의 을 비롯한 당대 세계의 최고의 문명비평가의 책은 나의 생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975), , 등 많은 저작을 통해 사이드는 서양인 중심의 동양에 대한 우월성, 편견, 무지를 비판하면서 동서양 문명의 충돌을 화해로 연결하는 사상을 전개시킨다. 내가 사이더에게서 공명을 환기시킬 수 있는 까닭은, 한국의 비평가가 지적하다시피 “아웃사이더와 경계를 넘는 글쓰기”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의 문화에만 속하지 않는 두 세계에 다 속한 아웃사이더”라고 자칭한 사이더의 고백을 같은 처지의 나를 동화시키는 역량은 불언지명(不言之明)의 파워가 있었다고 해야 좋겠다. 도 그러하거니와, 그의 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보다 훨씬 다양한 주제 이론,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 좋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로 “나의 주요 목표는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시키는 것이다. 나는 철학적, 방법론적 이유로 문화라는 것은 혼종, 혼합이며 순수하지 않다는 그리고 문화적 분석이 현실에 맞추어 재현해야 할 시기가 왔다는 점에 관심을 모아왔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제국주의”에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노정했던 푸코적인 담론 결정론적 자세에서 해탈되어 식민과 탈식민의 이분법을 광정하고 다원적이고 역동적으로 어프러치 해 간다. 요컨대 사이드는 1990년대의 세계정세를 “新自由주의적 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세계화 시대로 특정 짓는다. 따라서 이에 적응한 대안, 이젠더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종 결론으로 그는 유색인종들의 저항적 감수성, 탈식민지론을 통하여 계급 결정론, 경제결정론 및 정치학을 초월하는 유연하고 관용한 이주와 월경의 새로운 타입의 地域文化 창출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는 추상적인 면들도 있으나 많은 면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섭취하였다. 11. 이상에서 나는 자신의 독서, 사고의 기나긴 “과정”을 진술함으로써, 내가 지니고 있는 “사상”(사상이라 하기 보다는 내면의 의식, 학지)의 모태로 된 부분에 대해서 써왔다. 사실 인간의 의식이나 사상은 지층에서 용솟는 샘물같이 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생성되는데는 절대다수가 생활의 경험이 아니면 독서, 타자로부터의 영향을 통해서만 이룩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문화를 습득하는데 “문화화” 과정과 같이 “사상화” 과정을 겪어서 서서히 또는 급격히 육성, 발전 변화돼간다. “당신은 무슨 사상을 갖고 있냐?” 라고 질문하면 나는 서슴없이 답을 제시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사상은 보다 복잡하고 또는 정체불명의 의식 세계로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 지적 삶속에서 괴어 오른 것, 그리고 자신이 의식적으로 갖추기를 원한 것들이 혼합적으로 혼효하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프랑스의 철학자 리크루의 해석에 따르면 “모종의 기호에 따라 매개(媒介)된 文化的, 歷史的 존재자로 간주”하며, 그 기호를 해석 하는 것이 영위를 통해서만이 진정한 “自己一他者一世界”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계를 “자신에게는 이질된 타자”로서,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자신과 세계를 발견으로 직결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리크루가 테마로 삼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이해”와 “미래의 투입”, 이외에 여러 가지 역사적, 문화적 문맥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자기-타자-세계”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상은 세계이해의 지침이지만, 이는 세계 이해의 대화중에서 생기는 “계란과 병아리”의 변증법적 관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중국의 노장사상, 유교, 및 禪에 관한 사상을 밑거름으로 해왔다고 자신을 간주한다. 물론 책을 읽은 경험을 통해서 섭취한 것뿐이다. 이것을 서양에서 발설하는 사상, 철학, 역사, 인류학 등 저작 읽기를 통해, 동서양의 共時的구조를 비교 석출 할 수 있다고 나는 비교문화학자의 시각으로 직감해왔다. 나는 비교사상가나 사상학자가 아니므로 사상체계에 대해서는 전공부분야가 아니다. 그 방대한 작업은 그 전문 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할 수 밖에 없으며, 나는 단 이 글에서 나의 “사상”의식 계보를 정리 해 본데 지나지 않는다. 동양의 사상은 서양에서 발하는 근대, 포스트모던의 사상, 철학같이 시선을 혼동케 하는 현람함은 결해도 일상에, 가슴속에 항상 숨결과 같이 살아있는 영구의 공시성을 갖고 있다. 나는 서양사상가들이 말하는 “지평의 융합”으로서, 동서양의 학지(學知)가 늘 “지평의 융합”으로 융합된 “사상”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나의 “사상”을 형태로 포획하라면, 나는 지극히 평명하고도 단순한 말로 나열해 보겠다. ○ 나는 코스모폴리탄 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조국도 고향도 복수의 디아스포라의 사상, “세계인”사상을 지니고 있다. ○ 나는 월경의 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국경만 아니라, 학계, 문화의 경계, 사고의 경계, 모든 틀의 경계를 “월경”하는 “월경”의 사상이다. ○ 나는 세계의식을 위한 타자와의 대화사상을 지니고 있는 지식인이다. 自他와 話를 통해 항상 문화의 경상(鏡像)을 만들고 세계를 보는 동시에 자신의 모습도 점검한다. ○ 나는 인류의 평화사상을 숭앙하는 지식인이다. 평화를 위한 상호의 이해 문화의 인식이 앞서야 하며 “상대주의”의 절대적 함정을 피해, 자타를 이해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사료한다. ○ 나는 多元주의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일원적 절대 가치관을 넘어서 많은 타자들과 共存 共生의 대안이 인류의 미래를 구하는 방도이다. ○ 나는 自然 숭배주의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자연과의 공생, 자연을 경외하는 동양사상의 체현이야 말로 자연의 파괴에서 인류의 파멸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나는 자유주의와 이성주의를 결합시킨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자유주의에 이성주의를 합친 방향이야 말로 인간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 나는 진보주의사상보다 변화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지식인이다. 인간의 문명이 직선적이 아닌 나선 상태로 변화하는 복잡한 문명의 메카니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 나는 변(變),진(眞),파(破)사상을 지닌 지식인이다. 3者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자신의 學 知를 行으로 실천하는 글쓰기를 한다.
9    1-7. 나의 여성관ㆍ연애론 댓글:  조회:4939  추천:55  2012-11-17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7. 나의 여성관ㆍ연애론   남자는 두뇌로 사고하지만 여자는 자궁으로 생각한다. 남성은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같이 노출된 채로 소리를 낸다. 여성은 화원 속에 감춰진 미궁(迷宮)같이 미스터리의 세계다. 그리고 그 미궁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영원한 고향이다. 그래서 인가. 남자에게 있어서 그곳은 항원의 매력이고 유혹이며 신비의 궁전이다. 그 신비의 미궁을 찾아 남자는 영원히 미쳐있다. 화원을 침범하고 그 기나긴 촉촉한 복도를 거쳐 자신이 왔던 흔적을 남기려고 낙서를 한다. 물론 잘된 낙서는 작품으로 결실되고, 잘못된 낙서는 쭉정이로 사라진다. 그때만은 남성은 성난 남성이 된다. 성난 무소의 뿔처럼 충천(沖天)한다. 작품 탄생의 흰 먹물을 뿌리고 나면 그 찰나에 시들어 든다. 말랑말랑한 찰떡같이 우리 노래에 있듯이 “고개 숙인 옥경이”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여성은 어떠할까? 대조적으로 그녀들은 항상 미궁으로 통한 복도는 촉촉한 감촉으로 젖어 있다. 이는 영원한 감수성의 天國이다. 그런 감수성의 유연함은 샘물과 같이 생명을 탄생시킬 化力이 있으며, 그 사색 역시 유연하고 촉촉하다. 그래서 남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촉촉이 감싸주는 유연한 보자기의 부드러움에는 이기지 못한다. “以柔克剛”의 역할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 여성은 남성을 포근히 감싸주는 보자기와도 같다. 그 보자기의 모양은 예쁘다. 꽃 같이, 이파리 같이 아리땁고 종소리 같이 은방울같이 감미로운 美聲을 낸다. 세상의 動物들은 죄다 수컷이 화려하고 예쁘지만 인간은 여성의 용모와 스타일이 더 아름답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조화력인지, 여성 그 자신의 조화력인지 모르겠다. 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동물 행동학자 디즈몬드ㆍ모리스는 동물이 주위의 위험성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무까지나 돌맹이나 풀색 같은 색깔내지 모양으로 몸을 변신 하는 것으로 적을 “속이는” 천성을 지적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인간의 여성이 아름다운 입술과 매력적인 유방은 기실 제각기 발정한 성기와 커다한 엉덩이의 이태(異態)라고 한다. 성기와 엉덩이는 4각(脚)으로 걸어 다니는 암원숭이와 수컷을 유혹하는 중요한 신호 장치였다. 그런데 인간이 직립하여 보행하기에 뒤에 감춰진 성기는 가리워진다. 대신 인간의 여성의 입술과 유방이 성기 대신의 구실을 한다고 한다. 逆說的으로 여성의 매력은 “기만”으로 이룩됐다는 견해다. 그러나 그 “기만”은 역시 아름다운 덩어리이기 때문에 남성은 영원히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는 것이 아닐까? 生物的, 動物的적인 유물시각으로부터 나는 여성과 남성의 異質性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이질 되기 때문에 “異性”이라 칭하지 않은가. 여성과 남자의 복잡한 이성적 코드를 푸는 작업은 아무래도 物体로서의 異質性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면 다른 그 위의 形而上學的인 담론은 모래성 같이 순간에 무너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여성과 남성의 세계는 그 생물적 기초로 두고 긴 세월동안 육성되어온 심리, 정신적 문화의 세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함에 있어서 “性”에 대한 최초의 감성적 인식은 유년시기로부터 낳아 길러준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통해서 시작 되는 것이다. 어렴풋하고 막연하나 그 성의 이질적 性 을 느낀다. 어머님은 병약한 체질이었으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분이며 똑똑하고, 독서를 별로 안 하셨지만 비평적인 기질을 가지셨다. 그리고 아량이 넓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그런 관찰력이 뛰어나신 분이셨다. 그런 어머님은 한번 도 체벌을 하신적도, 강제로 공부하라고 횡설수설 하신 적이 없다. 아버님은 대조적으로 건강하셨으며 40대에도 20ㆍ30대와 같이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회 때 단거리를 달리셨다. 독서를 즐기시고 과묵하셔서 변재는 무디었으나, 글씨는 달필이셨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리고 實容하셔서 너그럽고 타인 탓을 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누구나 좋아하는 “老好人”의 타입이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큰 결점은 언어설복력이 약한 탓이어서 그랬는지 타이름 대신 작은 일에도 손을 대고 하셨다. 그런 것이 나나 동생들에게는 꽤나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님과 할머님께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것으로 위안을 받곤 했다. 할머님과 어머님이 그런 아버님을 말로 몰아 부칠 때 나는 쾌감적인 위안의 보상을 느끼곤 했다. 모택동의 전기를 보면, 소년시절 때 맹호 같은 아버지의의 질타가 두려웠던 모택동의 “모성의존증”(mother complex)이 보인다. 아버지의 꾸지람이나 체벌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의 등 뒤에 서서 불만의 눈초리로 쏘아 보면서, 어머니의 구원을 얻었다. 실제로 성년의 모택동의 자백에도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했고 어머니의 등 뒤에서 숨는 자신의 모친착종(母親錯綜)증상에 대해 기탄없이 얘기했다. 나는 성년이 된 다음에도 역시 어머니를 이탈하지 못하는 정신적 “모성의존증” 증상이 약간 보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동성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의례 여성, 모성에서 그 “공격받는” “상처”를 치유하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여성은 어머니의 모성과 같은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처럼 간주된다. 거물 원세개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수많은 공격을 받고 그 억울함의 상처가 아플 때면 사랑하는 애첩의 유방에 머리를 묻으면 아이처럼 흐느끼는 드라마의 신을 보면서 나는 심히 감명을 느꼈다. 동양 남자에게 있어서 아내는 어머니와 아내와 이성의 3자 역할을 한다는 말은 이래서 생긴 것이다. 남자는 약자이다 제 아무리 근육질의 건장한 체격을 하고 제 아무리 도도히 호언장담을 해도, 제 아무리 고고한 품성을 자랑해도, 제 아무리 청운의 뜻이 있다하더라도 워낙 남자는 약자이다. 인간은 착각의 동물이다. “상식”이라는 내용에 일정의 회의도 없이 “여자는 약자, 남자는 강자” 라는 착각에서 살고 있다. 사실 생물학적 지견에서 보아도 나약해 보이는 여자가 더 강하다. 의사들의 고백에 따라도, 여성은 “아픔”에 대해 남자보다 월등 강하다고 한다. 여자가 “아픔”에 대해 약해 보이는 것은 작은 “아픔”에도 남자보다 빈번히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진짜 크고 깊은 대통(大痛)에 있어서 여자는 오히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감수하며 그 인내력은 남자보다 수십 배 강하다. 출산의 산고는 남자들은 모르지만, 진통 속에서 3천g의 아기를 그 가냘픈 여체가 낳는 것은 남성은 상상하지 못한다. 십 개월의 임신기, 출신의 진통, 1년의 보육, 그 고통의 연속과 복잡함을 겪고도 여성은 또 다음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본질적인 생명력이라는 점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강하다. 남성이 강한 것은 순발력 체력뿐이었지 이는 지속적 생명력과 무관 하다” 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여성이 강한 이유는 (1) 여성은 아픔에 둔감한 것 (2) 출혈 상처에 강한 것, (3) 환경 적응력이 우수한 것 이 3점을 들고 있다. 대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라는 책에서 “여자가 없었다면 우리 남성들의 생활은 처음엔 원조에서, 다음엔 열락(悅樂)에서, 마지막엔 위안에서 탈락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내가 이 말에 동감인 것은 어머님의 강인한 생활력과 사랑에서, 그리고 나와 결혼한 아내들과 연애를 해온 복수의 여성을 통해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 보다 더 실감했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여성은 교과서를 지니지 않은 선생님이시다. 여성을 통해 교과서적 지식이 아닌 삶의 방법, 정신적 에토스의 강인함, 관용 등살아 있는 철학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공지식인”으로서의 나는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과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런 공격의 그물망에 포로 되지 않고, 그 그물망을 나의 여가를 즐기는 테니스 라케트로 즐기는 지혜와 여유는 모두 어머님의 母校와 함께 여성의 아픔에도 견딜 수 있는 생명력 넓은 부드러운 감성을 배웠기 때문이리라. 남성은 사회적으로도 스트레스에 약하고 굶주림, 아픔, 추위 따위의 생리적 스트레스에 여성보다 훨씬 약하다. 여성의 염색체는 두 개의 X가 서로 보완해 주며 생명유지를 위한 중요한 유전자가 많이 구비돼 있다고 과학연구 결과가 있다. 게다가 여성의 몸은 쓸 때 없는 소모가 없고, 작은 에너지로 생명유지가 가능하게끔 돼있다고 한다. 또한 여성은 성이나 신체에 리듬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리듬은 달(月)의 리듬으로서, 발신원은 체내 시계이며, 그곳에서 정보를 받아서 난소가 달의 리듬을 갖는다고 한다. 태양계에서 사는 생물로서 달의 리듬을 지닌 여성이 유순하고도 강한(柔剛)의 자연체 구조를 이룬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약해 보이나 기실은 강한 여자와 강해 보이나 기실은 약한 남자. 여자와 남자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로 같다고만 인식하는데서 여자와 남자는 오해가 생기고 충돌이 생긴다. 여자는 “自然”이고 남자는 “文化”라는 서양의 말도 있다. 남성우월주의의 발상이지만, 결국 자연에 적응하는 가운데 육성된 적을 양식이 곧 문화가 아닌가. 그리고 보면 이 말에는 여자가 남자를 훈육시킨다는 진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자연과 文化의 대조만큼 이질적이다. 화성인과 목성인인 만큼 다른 것으로 나는 본다. 좀 과한 표현이지만 이질화된 두 세계이다. 30년대 활약한 귀재 이상의 지교였던 역시 일류의 문장가인 이태준(李泰俊ㆍ1904-?)은 명작 에서 이렇게 이성을 말하고 있다. 참 재미있는 비유로 남녀의 이질성을 설명하고 있다.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처럼 최대, 그리고 최적의 상이물(相異物)은 없다. 같은 조선 복색이되 우리 남자에게 여자의 의복은 완전히 이국복(異國服)이다. 우리가 팔 하나 끼어 볼 수 없도록 완전히 이국복이다. 같은 조선어 이지만, 우리 남자에게 있어 여자들의 말소리는 또한 먼 거리의 이국어(異國語)이다. … 우리에게 여성은 완전한 이국(異國)이다.” 그러면서 이태준은 “같이 아는 정도라면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여자를 만나는 것이 우리 남성은 늘 더 신선하다” 라고 고백한다. “다른 것끼리가 즐겁다” 라는 이유를 밝힌다. “이성끼리 쉽사리 석탄같이 열이 생기고, 동성끼리는 돌맹이어서 마찰이 잘 생긴다” 라고 한다. 따라서 “남성끼리의 십년 정보다 이성끼리의 일 년 정이 더 도수를 올릴 수 있는 석탄화 작용” 이라고 갈파한다. 이태준의 말들은 나의 심정을 대변 한 것 같아서 좋다. 남자에 대해 여자는 자기인식의 거울이다. 적어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험을 통해 “여성이 자기 발견의 계기와 경상(鏡像)이 되었다. 마치 달린 것과 감추어진 것. 불룩 나온 것과 민민한 것, 화원과 검... 이러한 차이로부터 남자와 여자는 서로 상대의 他者성에 눈 뜨며 자신을 있는 것과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구체적인 기술은 삼가 하지만, 농담 적으로 말해 문자 그대로 나는 여성의 덕분에 남성으로 설 수 있었다. 좀 노골적인 치졸한 표현이긴 하나, 나는 여성들에게 더욱 사랑 받기 위해, 대장부 남아로서 출세해야 되고 더 좋은 글도 써야 하겠다는 원동력(原動力)이 생기기도 했다. 남자는 아마 출세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에베레스 정상을 정복한 힐러리 경이 “왜 산에 오르냐?” 라는 물음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 라고 답했던 것처럼 출세주의는 무조건 등산 같은 남자의 삶의 방식이다. 남자는 아무튼 그대로 두어도 뭔가 길과 계단을 선택하여 오르기를 하는 생물이다. 남자가 높은 곳을 바라고 오르는 “등산”타입이라면, 여자는 높이가 아닌 평면의 서로 횡적 비교 하는 나열식 동열(同列)을 즐기는 평지(平地)타입이다. 출세보다도 평지에서 걸어가는데서 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스트레스의 덩어리인 남자에 비해 유연한 동열지향의 즐거움은 참 부럽기만 하다. 여자의 감성적 지혜에 남자의 고놀적인 출세주의적인 이성(理性)은 때로는 오히려 너무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너무 높은데 오르려다 떨어지거나 하면 남자들은 많이 다친다. 그리고 실의의 슬럼프에 빠지기에 십상이다. 다만 남자는 그런 것들을 짐짓 여자 앞에서 감추거나 티를 안내려고 할 뿐이다. “남자대장부”라는 소제지에 붙여도 먹을 수 없는 알량한 자존심, 강박감 때문에. “여자는 단지 일종의 天便, 여장부, 妖女, 女獸 혹은 인간전형이 아니라, 무한하게 열린 것을 기다리는 인간 실존으로서, 남성은 부단히 그 미지의 자기를 열어가는 무수의 열쇄이다.” 일본의 작가 武田泰淳의 말이다. 때로는 작가의 싶은 문학적 체험담은 학자의 연구보다 투철하고도 명징한 결론에 닿기도 한다. 여자에 의해 남자가 성장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도 남자에 의해 “개발”되고 성적으로도 성숙된 여성으로 성장된다. 여성과 남성은 생리적으로 성의 구조가 이질 될 뿐 아니라, 그에 비롯된 성차, 성애, 연애 및 결혼에 대한 감성, 인식도 이질적이다. 여성은 일단 성적 쾌락을 알았다면 그 성교시의 쾌락은 남자의 수십 배나 된다고 한다. 마치 귀 구멍이 가려울 때 손가락으로 후비면 시원하고 기분 좋은 것은 귀 구멍이냐 손가락이냐 하면 당연히 귀 구멍이다. 이것을 알면 남녀의 성적 쾌락의 차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성은 솔직히 성감 그것을 쾌락으로 빠져 느낀다. 그래서 여성들은 성교 때 눈을 감고 그 무비의 쾌락의 절정을 즐긴다. 그러나 남성은 눈을 뜬 채 여성의 쾌락을 느끼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 하려한다. 여자의 성감과 달리 남자의 성은 육체적 쾌감보다도, 오히려 자신에 의해 여성에게 쾌락을 안겨준다는 정복감, 탐험의 스릴 따위에서 쾌감을 더 느낀다. 조물주는 그래서 성의 쾌락을 남자보다 수십 배의 절정을 준 동시에 그에 대한 “벌”로서 출산의 고통을 부여해 주었다. 사실 곰곰이 살피면 성교시 여성의 절정에 달한 절교는 분만 시의 그 절교와 거의 똑같다. 나는 서양의 영향 하에 근년대 여성의 “해방”과 여성의 권리 신장을 외치는 “페미니즘”의 여성들은 왕왕히 성적 쾌감을 맛보지 못한 성의 무지에서 오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만일 그녀들이 좋은 남자에게서 성적 쾌락을 느끼고 만족했다면 적어도 그렇게 까지 페미니즘에 신경을 안 쓴다고 여긴다. 성차를 무작정 팽창, 확대시켜 성차별, 성천시로 불려도 결국 여성과 남성의 이질성을 무시한 愚를 법하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생리적으로 이질 된 남녀에게는 서로의 능력이 있는 만큼, 결함도 있기 때문에 서로 상호 보완이 되는 플러스, 마이너스의 양극을 이루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사랑이란 애정에 대해서도 여자는 애정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것은 아름다운 심정, 염원이긴 하나 너무 감성적이다. 그래서 나는 여성은 자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남성은 영원한 사랑을 여자처럼 깊숙이 믿는 편이 아니다. 20대에는 믿었으나, 나이가 들어 경험이 쌓임에 따라 애정이 영겁불변으로 지속한다는 착각에 눈을 뜬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혼은 그것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몽테뉴는 “결혼은 새조롱과 같아서 밖에 있는 새들은 들어가고 싶어 하나, 안에 있는 새들은 밖으로 나가려고 필사적이다” 라고 갈파했다. 같은 말로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격언도 있다. “영원한 사랑의 생명은 불륜에 있다.” 라는 말도 역시 이를 두고 한 말 일 것이다. 사랑이 일종의 열병이라면, 그 열병은 오로지 결혼으로 치유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결혼 후 사랑은 식고 남는 것은 일상의 냉철과 지극히 평범한 안정이다. 대체로 4년, 내지 7년에 결혼은 파탄의 위기를 맞게 된다. 남자의 성은 한 특정된 이성에 고착돼있지 않다. 성감의 농도가 박약하기에 특정적 파트너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없다. 오히려 미지의 새로운 여성을 상대로 하는 정적 긴장감에서 흥분하고 쾌감을 느끼고자 한다. 그래서 “여성은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족하지만, 남성은 본능에 맡긴다면 곧장 아내에 대한 배신으로 직결된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남편의 그런 “배신”은 꼭 아내가 생각하는 것처럼의 “배신”만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않다하더라도 성적으로 “외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히 있다. 창녀와의 일이 그렇다. 창녀의 직업이 인류의 최고(最古)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남자들은 그래서 “일부다처제”를 창출해냈던 것이며, 요즘도 “불륜은 남자의 앞가슴에 단 훈장이다” 라고도 한다. 물론 일부일처제의 현시대에 무모하게 “불륜”을 정당화 시킬 생각은 추호만큼도 없다. 일탈한 귀재 근대의 학자 고홍명은 “일부다처제”를 수호하는 명언을 남겼다. 서양의 여성기자가 그에게 일부다처제의 이유를 질문했을 때 한 답이다. “차 항아리가 하나고 찻잔이 여럿인 것은 있어도, 찻잔이 하나고 차 항아리가 많은 것 봤어요?” 그 영국 여기자의 답이 또 걸작이다. “그럼, 한 찻잔 안에 여러 숟가락을 넣어서 잘랑잘랑 소리 안 나는 거 봤어요.” 일부다처제속의 처첩들의 옥신각신 시기와 싸움을 두고 한 말이다. 물론 지금 같은 시대에 “일부다처제”는 지구위에 지극히 개별적 민족을 제외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변상적인 양식은 제도가 아닌 실제 행위를 남자들 (지위, 관리, 부유를 장악한 남자)가운데 실존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세상이란 늘 이렇게 수평면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수평면하의 진실이 병행되었다. 황차 사랑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영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즉 문화의 하나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굳이 이래라 저래라 제3자가 간섭할 바는 아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부딪치는 큰 문제 중에 이성과의 만남, 사랑은 탈락시킬 수 없는 덕목이다. 나는 욕심 같아서는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많은 여성을 만나고, 또 사랑도 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성은 동성에게서 배울 수 없는 많은 他者적의 것을 가르쳐 주고 또 나 자신의 향상을 밀어주는 에너지로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자신을 이성의 거울로 비추어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복사꽃”이라 하겠다. “復數(복수)의 사랑을 꽃 피우며” 자신을 완성해가는 자기동일성의 확인과 그 작업의 프로세스. 앤소니 기든스는에서 이성과의 사랑은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만들어 가고, 동일성속에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규범이라” 라고 했다. 서로 상대의 정체성, 이질을 승인하면서 공존(共存)의 감정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사랑이다. 두달전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門)의 기자가 인터뷰중, 나에게 문득 “좋아하는 여성의 타입은 어떤 것인가?” 라고 물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깊은 사색 없이 나는 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야마구치모모에(山口白惠合)라고 말했다. 썩 미인은 아니더라도 청초하고 유순하고 부드러운 보이는 여성이 좋다. 너무 완벽한 미인에 나는 주눅이 들고 위압감으로 기가 못 필 것 같다. 왜냐하면 10층에서, 아니 18층엣 떨어진 메주같이 생긴 내가 어찌 완벽한 미인과 언감생심..... 그리고 청초, 유순에 지성이 겸비된 여성, 일테면 요시나가사유리 (吉永小白合) 아니면 사카이노리코(酒井法子)형, 한국 여성으로 말하면 오연수 아니면 강수연 전도연 쯤이나 될까? 중국 한족여자는 美人일수록 너무 강해서 어딘가 공포감을 느낀다. 그냥 멀리서 보는 것으로 눈요기나 하면 그만이다. 버마재비를 아는가? 그것의 암컷은 수컷과 교미 할때, 수컷의 머리부터 먹기 시작한다. 먹히울수록 머리가 갈기갈기 찢기 우는 수컷은 더 활발한 교미를 하면서 죽는다. 단 한 번의 사랑을 위해 숫 버마재비를 암컷은 무자비하게 먹어치운다. 인간으로서는 상상을 절(絶)하는 잔혹한 행위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크게 쾌감을 느낀다고 하는 동물행동학자의 연구가 있다. 휘트먼의 시에 “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늙은 여인이여!” 라고 읊은 구절이 있으나, 나는 늙은 여인, 즉 年上의 여인과 사랑 해 본 경험도, 해볼 애정도 없다. 나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年下의 여성이 좋다. 아마 30세의 선비였던 할아버지가 15세의 할머니와 결혼한 것처럼 우리 가족사에서 보면 옛적부터 전승해온 DNA탓일까? 나는 지금의 아내도 12세 연하, 그리고 연애 해 온 여성도 거의 다 10세 연하였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나 자신도 명확히 준비된 답이 없다. 연애, 사랑은 확실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것이 아니고, 마음 따라 발길 따라 가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바람에 부는 대로 책장이 번져 지듯, 번져 진 페이지의 내용을 읽으면 된다. 바람은 글을 몰라도 언제나 책장을 번지니 아 아니 소탈한가! 연애도, 결혼도, 그리고 글쓰기도 어쩌면 이같이 자연의 정해진 숙명적인 것이 있다고 나는 감으로 믿는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문학영역뿐만 아니라 박물학, 물리, 생물, 역사, 고고학, 등 영역에서 많은 실적을 남긴 일류의 대형 “지적거인”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연애의 왕자이기도 했다. 그의 생을 지적 창조와 함께 연애의 행각이 울긋불긋한 색깔로 장식된 생이기도 하다. 83세에게도 19세의 아가씨를 추구했던 그는 문화와 성호(性豪)를 경비한 희대의 천재였다. 나는 성공한 인물에서 공통성을 발견한다. 비범한 지적창조, 많은 방대한 작품, 일탈한 성격, 병약 아니면 변태, 그리고 범인을 초월한 성욕, 성적능력, 물품의 성능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진짜 性能이다. 성(性)이란 文字그대로 살아있는 마음이 아닌가. 마음이 살면 인생이 산다. 삶의 에너지가 자연 왕성해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성인류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지적인 일을 하고 있는 인간일수록 상옥이 강하다는 것이다. “발정기에서 해방된 원숭이”로서의 인간은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대뇌신피질의 정신에 활동에 영향 받기에, 쾌락을 위해서만 이라도 성적 욕망이 강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며 체험적으로 납득이 간다. 지적 창조의 짜릿한 쾌감은 어딘가 꼭 성적 쾌감과 유사한데가 있다. 그런 ‘幸福’을 중국인들은 ‘性福’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괴테는 자신의 풍부한 성편력 체험으로 이런 격언을 남겼다. “영원의 여성은 우리를 인소하고 간다” 라고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은 참 멋있는 명언이다. “남존여비”의 유교적 영향을 별로 받지 않은 나는 이것이 나의 연애, 여성관의 굵은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고백한다. “원래 여성은 기실 태양이었다” 라고 한 여성이 있다. 1911년 일본의 신여성의 등장을 선고한 기백 있는 명언이다. 신여성 지식인의 대표인 히라츠카라이데우가 여성잡지《靑踏(청답)》창간호 권두언에다 쓴 말이다. 그렇다. 여성은 태양이다. 인류의 고향이다. 이 태양의 따사로운 빛 발아래서 나는 영원히 아이, 미성년의 소년이다. 나는 양광의 부드러운 애무를 받으면서 죽을 때까지 홀로서기(獨立)한 지적 少年이고 싶다. 전세계 남성들이여, 태양의 밑에서 일치 단합하여 우리의 여성을 사랑하라!    
8    1-6. 나의 독서방법 댓글:  조회:4994  추천:16  2012-11-12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6. 나의 독서방법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책을 읽는가?” “독서에 무슨 방법을 사용하십니까?” 독자나 학생들, 기자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다. 이는 마치도 “밥 먹는데 어떤 방법으로 먹는가? 라고 하는 질문과 같다. 기실 평소에 거의 생각하지 않는 문제이다. 독서법 같은 것은 나중에 반추하여 귀납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의식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모든 방법론도 역시 이 같은 반추성찰의 결론이 되겠다. 독서를 흔히 식사로 비유하는 발상이 있다. 여러 종류 메뉴의 요리를 골고루 먹음으로서 다양한 영양가를 섭취하는 것 좋다. 책 역시 여러 종류의 분야, 장르를 폭 넓게 읽으면서 정신적 에너지를 섭취하게 된다. 이는 지식인들이 독서생활에서 걸러낸 독서의 지혜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독서란 방법으로서의 방법이기 보다는 생활방법의 하나이다. 정신적 공간을 한 칸 한 칸씩 메워가는 정신적 삶의 방법, 기교의 큰 덕목이다. 독서가 없는 나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상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독서는 자신에게 없는 정신세계, 세계관을 만나는 일이며, 이질화된 가치관을 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타자란 텍스트를 읽는 것으로 멀리 존재했거나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 정신의 타자들과 한번 또 한 번씩 만나면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인간이 문화생물인 것은 타자와의 접촉(교육, 전승, 학습 등) 을 통해, 문화를 이어 받아 문화를 전수받는 “문화화(文化化)” 의 프로세스를 통해야만 문화인으로 육성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文化화” 프로세스 중에서도 혼자 진행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며, 이 같은 혼자 있기, 홀로서기(獨立) 를 통해 인간성이 육성, 시작된다. 독서는 인간성의 내면세계를 구축하는 정신적인 것과 행동적인 것의 결합이며 폭 넓은 독서는 어느 하나의 고집된 절대적 가치관의 함정에 빠지지 아니하고 넓은 시야에서 사고정지를 방지하며 자신의 사고양식의 부단한 탈피를 형성하게 된다. 인간의 지적 세계의 공간이 커지면 그릇도 크게 한다. (器)가 큰 인간이 큰일을 해낸다. 나는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마음은 커야 한다” 라는 어머님의 모교를 나름대로 실천 해왔다. 내게 있어서 독서는 훌륭한 타자와 만나는 행위였으며, 이런 훌륭한 타자를 흉금에 많이 포용하고 있을수록 마음은 더 커지게 된다고 믿는다. 실생활에서 주위에 훌륭한 인간이 많으면 그것은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책은 그 아쉬움을 메우는 구실을 하는 법이다. 좋은 책은 훌륭한 스승처럼 인간성 형성과 향상을 자극 주며 인간의 품위를 높일 수 있다. 인간의 향기는 독서라는 꽃을 통해 나타내기도 한다. 독서는 아득히 멀리 있는 타자와의 대화를 시켜주고, 그 사이의 무한한 시 공간은 삽시에 사라진다. 2천년전의 공자를 만나는 일은 그의 를 위시로 한 저작을 읽는 것으로 쉽사리 이루어진다. 세상에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이런 기적적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즐거움이 또 어디 있으랴! 독서가 습관 된 인간에게 있어서 독서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이 궁핍한 생활이다. 가령 나는 무인도에 방치 당했다 해도 먹을 수 있는 식량과 책이 있으면 만족한다. 가끔 나는 무인도에서 독립생활을 상상해 본다. 가장 필요한 필수용품이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는 줄로 안다. “讀書立人”을 신봉하는 나는 그 역설로 “立人卽郡讀書”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서는 인간을 키우고, 인간이 되려면 독서한다는 사상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독서의 방법”, “독서의 기술”은 어떤 것일까? 하면 나는 주로 아래와 같은 일들을 통해서 “독서의 세계” 를 즐기고 있다. 내가 존경하는 일본의 당대 문화인류학의 대가 우메사오 타다오(梅棹忠夫, 1920-2010) 는 이런 말을 남겼다. “독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저자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서 자신의 사상을 개발시켜 육성시키는 것이다.” 우메사오 교수는 독서를 “발견”을 위한 촉매작용을 한다고 갈파한다. “나는 독서란 전류의 감응현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의 코일에 전류를 흘리고 또 하나의 코일에 감응전류라는 전혀 이질 된 전류가 발생한다. 양자의 직접 연결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처음 흐르는 전류가 아니라 그 다음의 감응전류이다. 이를 잘 이용하기만 한다면 모터는 비로소 회전하게 된다.” 우메사오에게 있어서 독서는 자신의 창조적 행위의 “발견”, 사상을 개발하는 방법으로 되고 있다. 나는 이 방법에 대해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 타자의 책을 읽으면,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왕왕히 그 단 한마디의 글귀 절, 그 전체적 주제, 모티브, 사상에서 “아! 그렇구나” 하는 발견, 재발견의 섬광이 번뜩인다. 책에서 자신의 사고 속에서 잠재된 씨앗을 “발견”하게 되고 그 씨앗을 심으면 이내 또 다른 책이 탄생된다. 특히 글쓰기, 연구를 생업으로 하는 직업적 프로패셔널 지식인에게 있어서, 독서는 자기의 “창조적 지적 생산”으로 직결 되어 있다. 닭이 계란을 낳고 계란이 또 병아리를 낳고, 이런 순환반복이 작품탄생의 영구한 프로세스도 흡사하지 않은가. 직업이나 목적에 따라 독서의 방법과 기술은 제각기 달라도 독서가 각자의 정신적 식량이나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독서법을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이는 내 자신이 지금까지 행해온 독서법을 귀납해 볼 것이다. 나의 “독서12법”이다.   (1) 단숨독법, 즉 단숨에 책을 내리 읽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방법은 책의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좋다. 일단 읽기 시작했다면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읽어 버린다. 책은 저자가 구축한 하나의 독립적 세계로서 이 세계를 인식함은 그만한 정열을 투입시켜야 한다. 나는 보통 200-300페이지 분량의 책은 줄 창 내리 읽어 글 전체상황을 파악한다.   (2) 필기독법, 읽으면서 중요한 구절이나, 신선한 대목, 관점에 대해서는 책의 상하여백부분에 자신의 감상이나 그 내용요약, 등을 작은 글씨로 적어 넣는다.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 이 부분을 다시 체크하면 책의 주요 주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효하다.   (3) 방선독법, 책 행간에 방선을 긋는 방법이다. 새 책에 방선 긋기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으나 저자의 말하려는 포인트, 또는 자신이 멋있다고 느끼는 부분에 방선을 긋는다. 또한 빨강색, 파랑색으로 중요한 부분과 재미있는 부분을 긋는다. 이 줄을 그는 것으로 책은 자신의 책으로 안긴다. 마치 미지의 세계에 지도를 그리듯 이 책은 지도같이 환하게 안겨온다. 방선법과 필기 법을 병용하면 더 효과적이다.   (4) 사선독법, 여기서 사선(斜線)이란 책을 빗으로 모발을 쭉 훑듯이 신속이 시선을 이동시켜 시선에 걸리는 문구를 포착한다. 독서의 양이나 질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이 방법을 실행 가능하며 꼭 전체 페이지, 전부를 읽지 않고서라도 그 요점을 파악 할 수 있다.   (5) 목차독법, 새 책을 처음 읽을 때 우선 머리말과 후기를 쭉 읽으면 이 책의 내용이 대개 잡힌다. 먼저 서문, 후기를 읽는 것은 아주 유효한 독서법이다. 그리도 다음으로 목차만 훑어보고, 자신이 필요한, 흥미가 가는 목차의 페이지를 펼치고 읽는다. 시간이 긴박하거나 없을 경우 이것은 최고의 방법이다. 나는 대체로 서점의 매장에서 이런 방식으로 책을 보고 구매여부를 결정한다. 이는 또 써서 보기에 입독(立讀)이라고도 한다.   (6) 축적독법, 책을 일단 서가나 책상에 쌓아둔다. 관련서적을 몇 권내지 십여 권 쌓아 두었다가 읽고 싶을 때 한권, 한권씩 읽어 내려간다. 쌓아두면 눈에 뜨이기 때문에 읽기를 망각하는 실수 없이 자신에게 읽는 압력을 가하게 된다. 구체적 읽는 방법은 자신이 정한다.   (7) 통독법(通讀法) 통근의 전차 안에서 읽는 방법이다. 나는 자가용 운전을 할 줄 몰라 십여년 동안 대학 근무처로의 교통도구는 전차, 또는 버스를 이용한다. 통근의 전차 안에서 책을 미리 준비했다가 독파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통독”으로 일일일책(一日一冊)을 매일 실행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에는 一日三冊, 五冊이 되는 경우도 있다. 통근 공간과 시간을 유효하게 이용하는 독서법은 매우 좋다. 그러나 너무 몰두하여 목적 역을 지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도 망각하지 말 것. 하기야 다시 돌아오는 차에서도 책을 읽으면 되지만.   (8) 반독법(反讀法) 책의 내용에 관한 이야기인바, 책의 내용과 기술에 대해 그 견해를 백 프로 믿지 않는 것이다. “꺼꾸로 읽는 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늘 “이건 아닌데” “정말 그럴까?" "그 역설을?” 하는 의문을 품고 거꾸로 생각해 보고 뒤집어 생각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반독법, 역독법을 늘 실천해 와서 늘 어른들이나 선생님의 핀잔을 듣곤 했다. 중학교 때 중국의 항일 영화 “지뢰전”, “지도전” 을 자주 보았는데, 중국 농촌이 민병들이 빈약한 자작 지뢰작탄으로 정예무기로 전부 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싸워 이기는 내용이었다. 나는 민병이 일본군을 이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선생님께 터놓자, 선생님은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이런 얘길 다시 하지마라. 너 반동파로 몰린다” 라고 하셨다. 내가 그 뒤 중국 역사서, 근대사를 읽으면서 이런 反 독법으로 문제를 발견하면 그를 증명하는 문헌자료를 다시 찾아내고 읽었으며 또 하나의 새로운 “발견” 연구과제, 글쓰기로 이어졌다. (9) 난독법(亂讀法), 연구서, 전문서만 읽는 것이 아니라 폭 넓게 여러 장르, 영역의 책, 잡지, 신문을 눈길이 가는대로, 닥치는 대로 읽는다. 학자, 전문가는 흔히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관심이 가는 약점이 있는데, 나는 자신의 전공부야의 수백 배 이상의 타 분야를 읽기를 좋아한다. 어느 한 분야나 가치관에만 편 합되면 그것만 절대시 하는 위험성에 스스로 침몰되기 십상이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전문바보” 라고 한다. 폭 넓은 독서를 통해 넓은 지견과 가치관을 접하면서 자신의 지견과 가치관, 사고를 넓은 시야에서 관조 할 수 있으며, 또한 독서의 경묘소탈의 묘미를 체득 할 수 있어 좋다. 이를테면 나는 전문영역 외에도 자연과학, 수학, 물리학, 골동관계, 서예 미술고서, 진서, 포르노그라픽, 춘화, 성애론, 에로스관계 책, 잡지와 글을 많이 수집하고 읽는다. 이런 분야를 읽다가 또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신저작이 생기는 수가 많다. 난독, 잡독은 인생과 일의 일대 묘미이다.   (10) 분독법(分讀法), 자신의 전공, 일에 관계된 필요 서적은 맹렬한 스피드로 읽는다. 그러나 한편 전공, 일에 관계있는 책을 흔히 읽기에 어려운 책에 봉착하며 지겨울 때도 있다. 이때는 차라리 분독 법을 구사한다. 그래서 잠깐 전공분야의 책을 제쳐놓고 의식적으로 본 테마와는 멀리 하면서 일에 핑계 대는 책을 읽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知적 거인”이라 불리는 다치바나타가시(立花陸)의 방법론이기도 한데 책을 읽다가 거기서 또 새로운 아이디어 발상이 탄생한다. 이것이야말로 망외(望外)의 기쁨이다.   (11) 추독법(追讀法), 필요한 책, 자신의 관심분야의 책을 읽고 미지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래도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때 나는 그 책의 저자가 책 뒤에 로 즉 나열 해놓은 책 리스트를 곰곰이 읽어본다. 그 속에는 오히려 이 책이 탄생된 지탱해준 우수한 책, 자료가 매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다 라는 책을 따라 추적하여 찾아 읽는다. 이 방법은 용이한 방법으로 매우 유효한 수단이다. 그리고 어느 작가나 지식인의 저작이 좋아서 읽고 나서 계속 추적하여 그 한사람의 저작을 추종하여 읽는다. 나는 “연쇄독법”이라고 명명하는 바, 하나 또 하나의 고기 꿰임을 먹는듯한 지적 자극을 연쇄적으로 받게 된다.   (12) 매독법(買讀法), 나는 책이란 자신이 돈으로 구매하여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도서관이나 자료실 따위를 이용하는 것도 좋지만, 나는 외려 자신이 구매하여 읽는 편이 좋다. 혹자가 공영도서관을 “시민의 식생활 같이 공영식당에서 식사 시킨다” 라는 발상으로, 시민의 독서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전 발상을 나는 우습게 본다. 독서는 지극이 개인적인 정신생활이며, 자신이 먹는 정신식사의 대가는 자신이 치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신이 선택하고 제 돈을 내고 사서 자신의 서가나 침상 옆에 놓아두는 것이어야 한다. 학생이면 몰라도, 그만한 돈 마저 쓰기 아까워하는 정신적 구두쇠는 책의 진가를 모른다. 제 돈 들여서 산 책 이라야 더 소중히 하고 읽을 맛이 나며 또 읽게 된다.   마치도 여성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연인은 너무 가까이 하면 도망가지만, 책은 너무 가까이 해야 도망가지 않는다. 연인은 가까이 두면 잔소리가 많고, 책은 가까이 두면 지성이 많아진다. 그대여, 연인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책을 사랑하라!
7    1-5. 至福의 독서편력 댓글:  조회:4408  추천:16  2012-11-02
김문학《나의 정신세계 고백서》 1-5. 至福의 독서편력   책에 대해서 만 큼은 할 말이 얼마든지 많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活字中毒者 아동이었다. 내가 기억 하는 한 8살 때부터 인가 하도 글을 좋아해서 땅바닥에 있는 신문지나 종이조각에 박힌 활자라면 다 주워 읽는 버릇이 있었다. 시골서 자랄 때다. 재래식 측간(화장실)에서 지금 같은 고급스러운 화장지가 아니라 신문지로 화장지를 대신해서 썼다. 그 똥 묻은 신문지에 찍힌 글을 읽다가 마저 읽으려고 그것을 집안으로 들고 와서는 수돗물에 씻어서 읽곤 했다. 그러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어이없는 놈이라고 웃고 계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책이 너무 좋아서 아직 글을 모르는 유아시기에도 책을 쥐고 읽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아마 내게 있어서 책보다 더 좋은 완구는 없었을 것이다. 소학교에 입학 전부터 나는 어머님이 시내 나갔다 오시면 장난감이나 맛있는 과자 따위보다도 그림책(만화)을 사 달라고 졸랐다. 이 버릇을 잘 알고 계신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숙부는 서점에 들러서 그림책을 사다 주곤 했다. 원체 병약한 나는 병으로 자주 앓아서 집에서 쉬는 일이 많았는데, 나는 누워서 언제나 책을 읽었다. 겨울이면 밖에 나가셨다 돌아오시는 어머님을 기다렸다. 시내에 가신 어머님이 꼭 책을 사오시기 때문이었다. 앓아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없는 나는 어머님이 들어오실 때의 그 신선한 찬 공기가 좋았다. 그리고 의례히 그림책에서 나는 인쇄잉크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코끝에 갖다 대고 몇 번이고 잉크의 향을 맡고 나서야 책장을 넘겼다. 빈한한 농가인 우린 집에서 사실 책이 몇 권 없었다. 그 나마 10년 위인 숙부가 학생이어서 교과서와 그가 읽던 책 수십 권이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 즐겨 보았다. 한자를 모르면 도감이나 그림이라도 보는 것이 나는 즐거웠다. 소학교 때 도 나는 책이 좋아서 늘 책하고 벗했다. 실제로 친구와 어울려서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운동선수로 훈련을 하는 것 외에는 나는 늘 홀로 책 읽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지금도 나는 낙(樂)이라 하면 독서보다도 즐거운 낙을 느끼지 못한다. 읽고 쓰는 것이 나 생애의 전부 인 것 같다. 소학교 3학년 땐가 나는 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숙부의 책장 속에서 몰래 들추어내서 읽었다. 그때 읽었던 줄거리를 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3국연의》는 뒤 부분이 많이 페이지가 떨어졌는데 나는 친구 누나에게서 빌려서 결락된 수백페이지분량을 전부 만년필로 베껴냈다. 친구 누나가 놀라서 혀를 두르며 “너 커서 유명한 작가가 되겠구나” 라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나는 책 읽는 것이 즐거웠고, 책 읽는 것만이 가장 고결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역시 인생의 至福은 “매일 책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4학년 때 숙부의 장서에 있던 시 누렇게 퇴색한 을 찾아서 읽은 기억은 오늘도 선명히 남아있다. 그리고 를 읽으면서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에 감탄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시들을 줄줄 외우기도 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글귀가 너무 좋고 낭송하기에도 너무 음률이 좋아서 김소월을 너무도 좋아했다. 그 뒤 모방해서 쓴 시 몇 수를 국어선생님께 보였더니 너무 멋있다고 어디서 베낀 것이 아닌가 하고 혀를 찼다. 모르는 미지의 세계, 하나의 수수께끼의 답을 알게 되는 것은 축복이다. 쉐익스피어의 명언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충실 하라” 라는 말이 있다. 자기 양심에 부끄럼 없이 처신하라는 뜻이 되겠다. 진부해보이지만 이런 진리적 교훈은 영구히 값진 말이다. 독서에서 말하면 영어의 세계에는 “지적정직(知的正直=인테럴츄얼. 오네스티)”이란 단어가 있다. 알면 알고, 모르면 아는 척하지 않는 정직함을 이르는 말이다. 모르는 미지, 또는 알고 있었으나 틀린 지식, 착각들, 이런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에 충만 된 나는 알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 감동되거나 재미난 책은 읽고 읽고 또 읽기도 했다. 소학교 때 주위로 부터나 반급의 급우로부터 “신동” 또는 小老師(꼬마선생)“ 으로 불린 나는 급우들이 늘상 질문하는 문제를 답하기 위해서도 하여간 많은 책을 가장 많이 빌린 학생도 나라고 도서실 관리자인 인자하고 예쁘게 생긴 여선생은 나를 귀여워 해주셨다. 방학후면 귀가해서도 생산대(마을) 집회소에 있는 신문, 잡지를 보러가곤 했다. 그리고 급우들에게 말하여 각기 제집에 있는 책을 한권씩 갖고 오라고 한 아이디어도 나 스스로 고안하기도 했다. 반 급장이었던 ”권리“와 ”명성“을 나는 활용했던 것이다. 그때 만난 것이 “노신”이었다. 노신의 소설 와 이었다. 조선어판 이었는데 판본은 북한의 책이라 기억된다. 미치광이, 사람 잡아먹는다, 아이들을 구하라, 등등 난잡하고 괴상한 말들로 점철된 노신의 소설을 읽으면서 세상에 이런 어려운 책도 있었구나 하면서 그것을 읽어내려 갔으나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께 노신 소설에 관해 질문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은 “야, 네가 벌써 노신을 읽느냐” 고 하시면서 매우 경이 로와 하신다. 그 뒤 노신을 조금 이해하게 된 때는 중학을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교과서에 노신작품을 배우면서 부터였다. 소학, 중학 시기는 난독(亂讀)시기였다. 무어나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 나는 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계열의 책도 좋아했다. 그때 상해인민출판사에서 나오던 아동자연과학시리즈 “10만 가지는 무엇 때문에?” 를 거의 다 읽었다. 그리고 미니 전동모터를 구입해서 나무판자로 배를 만들어 물에 띄우는 실험도 해보고 개구리를 잡아다 생체해부도 해 보았다. 육상 단거리용 스파이크가 없어서 비닐 신바닥에 못을 박아서 실험해보기도 했는데 어른들은 어이없는 놈이라고 웃었다. 문화대혁명이 한참이던 1970년대 소학교를 다닌 나는 세계 명작은 거의 접촉하지 못했다. 그때 노신 외에 모든 중국작가나 세계작가는 금지 된 시기였기에 명작은 다 “분서갱유” 의식으로 불살라버리고 형적을 감추었다.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의 개국(開國)책을 실시한 것은 1978년 이후 등소평의 노선이 탄생된 후 부터였다. 그때 중학3학년인 나는 고문 텍스트로 유명한 (고문관지)를 사려고 시내 신화서점에 가서 아침부터 줄을 서서 5시간을 기다려서 겨우 한권 샀다. 처음 세계 문학명작을 접하게 된 것도 80년대 이후부터였다. 거의 중국어판으로 읽었다. 등을 읽은 것도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대학수험준비로 여념 없는 때였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많은 책을 탐독하면서 오히려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수험공부보다 월등히 즐거웠다. 담임선생님께서 “지금 어느 때인데 이런 책을 읽느냐? 시험공부에나 열심히 해?” 하고 몇 번이나 불러내어 귀띔해 주실 정도였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는 성미인 나인지라, 나는 아랑곳 않고 낮에는 수험공부, 밤에는 명작탐독을 병행시켰다. 그 무렵 나는 장차 문학가가 되느냐 화가가 되느냐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책이 좋아서 책을 쓰는 글쓰기의 학문세계, 또는 문학세계로 용왕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이름이 문학인만큼 어떤 숙명적인 인연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문학이란 이름은 그대로 읽으면 문학이요, 거꾸로 읽으면 학문이 되니, 나는 장래 이양자의 경계를 오가는 지식인이 되고 싶은 것이 꿈이었다. 13살에 개인 작품집을 간행한 나는 문학 소년이었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지원서를 쓸 때도 중국문학부냐 조선 문학부냐, 아미면 일본문학부냐는 삼자택일을 두고 고민 했다. 결국 나는 “하나의 외국어를 아는 것은 하나의 이질 된 문화를 아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일본 언어문학과를 지원하여 일본어교육레벨이 전국 일류인 동북사대에 입학했다. 물론 그때 총점수로 북경의 일류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점수였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나의 독서생활이 수준이나 질적 의 의미에서 지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 동북사대 일어일문과 입학 후 부터였다. 왜냐면 이 일본어라는 문화무기가 나에게 방대한 지적(知的) 생활, 생산의 수단이었고 또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방법으로서의 일본어”를 활용해갔다. 대학4년을 나는 교실 -도서관- 교실 3각형의 순환을 이루며 심한갈증을 해소하는 사람 물마시듯 독서를 했다. 학부 도서실에는 일본 직수입의 일본어 도서들이 풍부히 장서돼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일본의 여러 명 펜팔을 통해 우송 되 오는 일본어 서적을 탐독했다. 그 시기 중국에서 미처 번역 출간하지 못한 서양의 명작, 사상, 철학서를 일본 서를 통해 나는 지독하게 많이 읽었다. 니체, 미셀푸코, EㆍHㆍ카, 스펜서, 그리고 포크나 로렌스, 가르시아 마르케스, 릴켈.... 일본의 나츠메소세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후쿠자와 유치키, 무라카미 하루키...등등 이러한 서적은 마치 내 빈 정신적 공간에 영양가 풍부한 식량같이 많은 것을 채워주었다. 대학 4년을 독서 4년의 자신에 충실한 시간이었다. 2학년 학기부터 고향의 1년 후배인 여학생과 연애를 하면서도 나는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때 또 읽은 책에는 일본의 펜팔이 보내준 어어령의 라 한국어로 된 에세이 등 여러 권과 이문열, 김소운 등의 작품이 있었다. 이상의 같은 시와 같은 소설도 접하면서 나는 이어령과 이상의 팬이 되기도 했다. 고백하면 나는 이어령 선생님께 이미 그때 사숙(私淑) 한 것이었다. 작가, 글쓰기와 연구자로 되는 꿈을 키우면서 나는 왠지 특히 모터니즘 계열의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TㆍSㆍ 엘리엇, WㆍB예이츠의 시와 함께 김소월의 시를 외우기도 했다. 그리고 조이스의 그리고 카프카, 토머스만,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책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헤세 등 서양 작가와 지식인의 책들은 나의 넋을 진감하는 문화파워가 되어 폭발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중국문학부의 선배가 “대학4년에는 조급하게 글을 써서 발표 하는게 급히 하기 보다는 부지런히 읽고 축적을 해야 한다”고 한 말에 나는 동감했다. 물론 나는 4년 동안 글쓰기를 많이 했으나, 책 400권을 목표로 (그것도 중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서양의 작품, 사상서와 일본인 작가, 지식인의 서적들) 많이 읽었다. 중문학부와 외국어학부에 급급히 시나 소설을 쓰던 많은 친구들은 결국 졸업 후 한 둘씩 도중하차해 버리고 몇 명 남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던 친구들은 역시 학자나 작가로 오늘까지 명성을 날리고 있다. 내가 중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포기하고 일본 유학을 택한 것은 대학시절 일본의 책을 통해 일본 같은 자유의 학문의 나라에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싶은 것이 큰 이유의 하나이다. 말 그대로 일본 유학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독서와 글쓰기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신적, 지적 창조의 일에 종사하는 지식인, 작가는 책읽기가 정신적 식량이며, 지적 자극과 충전을 하는 유일무이의 방법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 “독서立人” 이란 숙어를 고안했다. 책이 인간을 육성한다는 논리이다. 독서는 늘 홀로서기 (獨立)의 사고력을 육성하는 기반이 된다. 정신 적 자극, 긴장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의 진폭을 넓혀준다. 셀티에ㆍ가 바록이 쓴 “독서의 역사”에 따르면 일본은 에도시대, 명치시대를 걸쳐 세계일류의 독서대국이 되었으며 식자 율이 세계최고에 독서량도 질도 일류에 달했다. 지금도 일본의 연간 4만 종류에 달하는 15억 책 서적이 도도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고도로 세련되고 정비된 출판사만 해도 무려 5000여사나 된다. 그리고 독서판매에도 적합한 1억 3천만의 인구, 독서 인구는 중국보다 많으며 신문판매량도 요미우리신문 같은 경우 무려 천만부이상의 세계 최대 신문이 있다. 일본의 근대, 포스트 근대의 문화역을 지탱한 곳은 이 엄청난 국민의 독서력이다. 이런 독서왕국, 출판대국에는 찾으려고만 하면 다 찾을 수 있는 서적, 정보 학문적 자료문헌이 정비되어 있다. 나는 마치 만경창파를 질주하는 고래마냥 서책의 해양에서 많은 서책을 탐독하면서 지식인에 필요한, 또는 나 자신에 필요한 지적 영양을 섭취했다. 독서의 여러 종류 영양가는 독서의 폭을 넓히고 여러 장르, 영역을 섭렵하는 것에서 온다. 독서의 폭이 좁으면 하나의 지식에 절대시 하는 치명적 함정을 파게 된다. 하나의 기성지식을 절대시하는 것은 결국 사고정지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마치 하나의 종교에 빠져 절대시 하면 다른 종교와 신앙을 무시하고 타자를 부정하는 사고정지, 절대가치관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조선족의 지식인 중에 그런 패턴의 사람이 흔히 있는바, 어느 하나의 가치관을 절대시 해 버린 나머지 사고정지에 빠져 타자를 무조건 부정, 반대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내가 그런 지식을 상대하지 않는 이유는 지식의 폭이나 사고 면에서 정면대결의 가치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공 외에도 특히 사상, 역사분야의 책을 많이 읽는다. 일본의 나이토고난(內藤湖南)의 중국사연구와, 마루야마 마시오(九山 男) 의 의 문명론적인 일본인에 대한 고찰, 인류학자 梅棹忠夫(우메사와 타다오) 의 등 일본인이 제기한 “세계사 모델”의 시야에 대해 큰 공감을 느꼈다 .에서 개발을 얻은 나는 최근 이란 일본어 저작을 집필했다. 그리고 사상영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리오타르의 하버마스의 와 푸코의 일본어명 을 위시로 한 일련의 대작들, 그리고 신자유주의 하이예크 등 근 20년래의 사상서에서 많은 자기 형성의 정신식량을 획득했다. 식민지주의 영역에서는 에드워드ㆍ사이드의 명작등 저작을 탐독하면서 제3자로서 타자와 자신의 경계를 살아가는 월경의 지식인의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근 10여년동안 역사, 특히 한중일 근대사 사료, 문헌을 읽고, 발굴, 수집하면서 근대사의 “왜곡”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 “왜곡”에 대한 비판, 성찰작업이 나의 글쓰기와 연구의 굵은 아이템이 되기도 했다. 왜냐면 역사는 문명사로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놓은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사를 알고 진실을 밝히는 성찰작업은 타자인식과 함께 중요한 자기 인식의 불가결의 작업이다. 책은 자기인간형성의 정신적 에너지이다. 독서를 배제한 정신적 에너지는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순수한 농도 100%의 “독서인” 이다. 그리고 나는 간단없이 변하는 자신을 꿈꾼다. 독서야말로 내 자신이 인간형성이 완성되는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요즘은 컴퓨터시대, 휴대폰시대로 일컬어진다. 인간은 이미 컴퓨터와 휴대폰의 노예로 디지털의 지배하에 떨어져 있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구태의연한 책의 시대의 독서인이다. 책의 노예가 되고 싶다. “산이 좋아 산에서 사네” 하고 읊은 시인과 같이, “나는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 를 읊는다. 책을 대체 할 수 있는 至福의 희열을 나는 아직 모른다.  
6    1-4. ‘고완’주의 댓글:  조회:4903  추천:21  2012-10-21
4. ‘고완’주의   고전(古典)주의는 아니다. 더구나 고환(睾丸)주의는 아니다. 새것에서는 卽今적인 젊음의 감흥을 느끼지만, 옛것에서는 시간이 침전된 古遠의 역사 감을 느낀다. 그래서 새로운 新香도 좋지만 나는 오래된 古香이 좋다. “옷은 새것이 좋고 벗은 오래된 것이 좋다”라는 말과 같이. 새 옷은 새로 돈 주고 사면되지만, 옛 벗은 돈 주고 못 산다. 옛 물건도 그러하다. 옛 물건이 옛 물건다운 것은 그 옛 사람들과 함께 같이 숨 쉬고 손때가 묻은 시공의 중후(重厚)가 축적 돼 있고, 거기에 배인 것은 윤택 나는 인간의 덕성과 지성 그것이다. 내게 있어서 이것이 고완(古玩)의 낙취(樂趣)일 것이다. 나의 고완 이력은 어언 25년이 가까워 온다. 30대에는 광기(狂氣)이다시피 고완 에 심취돼 있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당시 별로 고완 의 낙을 여의케 하는 사회적 풍토나 여건이 결여 했으나 일본에 와 보니 고완 의 문화 분위기가 매우 농후해 있었다. 일본에서의 신발견은 고완 의 옛 발견에 이어진 묘미가 있었다. 명문장가 주작인(周作人)은 일본에서 중국 唐風의 옛 문화를 발견 했다고 쾌재를 불렀으나, 나는 중국 뿐 만 아닌 옛 조선의 고완 을 즐길 수 있는 보지(宝地)여서 무등 희열했고 열광했었다. 골동(骨董)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다. 알고 보니 “골동”이란 어원이 중국어의 “古董”이라 했는데 뼈자 붙은 것보다 나는 고색창연, 역사의 옛 정취가 묻은 “古”자가 더 좋았다. “古董”은 “古銅”의 음전이라 하니, 중국 문명의 기물은 뭐니 해도 古銅으로 주조된 것들이 도자기 이상으로 옛 됨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적으로 나는 古銅器의 청동녹이 쓴 창연한 모습에서 어떤 육중한 문명의 감각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도자기에서 감지되는 옛 사람의 그런 따스한 숨결과 체온이 감지된 온기(溫氣)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화려하고 사치의 극을 나타낸 중국의 명청의 도자기보다도 나는 송나라의 비취색의 자그마한 화병과 연병(硯屛)에서 더 잔잔하고 은은한 부드러운 정취의 미를 느낀다. 그러나 중국 도자기보다도 나는 감정상으로, 아니면 본능적으로 인지 우리 겨레의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에서 인간의 정과 옛 선조들의 땀 냄새와 따사로운 몸의 체온을 느껴서 너무 좋다. 하다못해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이조(李朝)의 난초가 그려진 연적(硯滴)이라도 좋다. 막 청색이 괴어오르는 듯 한 흰 색이에 또는 계란껍질 바탕에 청색으로 그려진 심플한 아름다움, 여백의 미! 균형을 잃은 일그러진 조선항아리에서 우리 할머니들의 등급은 키 낮은 모습을 방불케 함, 그것이 나는 너무 좋다. 이들이야말로 만날 수도 없는 몇 세대 몇 십 세대의 옛 겨레들과 만나는 대체물인 것이다. 내가 고완 을 사랑하게 된 계기는 전적으로 우리 집에 “가보(家寶)로 전해 내려오던 조부의 애용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단계(端溪)벼루이다. 유학자로서의 조부는 한(漢) 의학자(醫學者)이기도 했는데, 31세에 16세의 조모를 만났으며 43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조부님의 얼굴은 사진에서나 보아온 나였지만, 백의의 두루마기를 입으신 조부님은 오세창의 풍모가 풍기는 선비였다. 만주 봉천에 건너온 강릉출신의 이민 1세로 해방 전에 봉천에서 약국을 경영하기도 하다 시골로 내려갔다가 집중 호우를 만나 洪水에 떠내려가셔 水鬼로 돌아가셨다. 못 다하신 많은 일들을 두고 무한의 限을 안고 돌아가셨을 것이다. 할머님께서 장롱에서 조심스레 보자기로 싼 벼루를 꺼내 보이시며 “니 할배가 쓰던 것으로는 이것과 넥타이 밖에 없다” 라고 하신다. 넥타이는 일본의 식민지시절 벗으로부터 받은 줄무늬의 모양이 멋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유학으로 올 때 그것을 소중히 지니고 왔다. 강릉김씨의 장손인 내가 이 家寶들을 일본에서 특별히 오동나무 함을 얻어서 잘 소장하고 있다. 古人의 苦樂과 땀띠와 숨결이 숭배인 것이 어찌 내 선조의 한 개 벼루뿐이랴! 나는 그래서 대학 졸업 후 부터 古人들의 물건을 존경하게 되었다. 유학생으로 수입이란 장학금이었다. 행운스럽게 얻은 20여만 엔의 장학금은 많은 액수였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서도 제법 유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하는 대신 다신 京都의 고사찰, 정원을 배낭 메고 답사하였다. 만약 내 발자국이 도장이라면 온 쿄토시내의 구석구석에 내 신발자국의 붉은 도장으로 도배했을 것이다. 또 짬이 나면 古書街와 골동 가를 돌아다니면서 사냥물을 노리는 사냥꾼 같이 맘에 드는 것들을 사들여서 수집하곤 했다. 특히 書畵(서화)에 애착을 느낀 나는 근대 조선 인물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의 서화 족자를 많이 보고 때로는 사들이기도 했다. 고완 의 공부는 진짜 진품이나 명품 또는 명진품이 아니더라도 진짜를 사놓고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직접 느껴야 마음에서 느끼는 법이다. 삶의 모든 것은 상응한 대가를 안 치르고 쉽게 얻으려는 요행은 허용하지 않는 법이다. 얻은 만큼 지불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고완 은 이런 의미에서 인생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묘미가 있다. 나는 이중에서 또 많은 것을 배웠다. 고완 의 길은 기실 배웅의 길이었다. 나는 서울 인사동의 고색창연한 옛 거리와 청계천의 먼지 묻은 고서들에 풍기는 책장의 냄새가 좋았다. 북경의 유리창의 영보재나 중국서점의 화려하고도 중후 장대한 文化의 그 古色이 좋았다. 그리고 동경의 간다(神田)의 고서점가를 거니는 문화의 길이 좋았다. 노신과 곽말약과 근대의 중국 문화거인들이 거닐었던 그 발자취를 느낄 수 있어서 또 유쾌했다. 육당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발자취를 느껴서 좋았다. 누가 지식인, 학자가 가난하다고 했는가? 나는 이 모든 문화의 옛 재부들은 한꺼번에 마음에 담은 듯 하여 좋다. 억만장자의 거액도 어찌 이런 문화재부에 비길 수 있으랴?! “學富5車(학부5거)”란 말이 너무 좋다. 책이 지루해질 때 필이 막힐 때, 신심이 고단할 때, 고서화와 연적, 벼루와 연병을 바라보거나 닦아주는 것이 가장 유쾌하다. 부부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나에게는 벼루를 닦아주고 연병(硯屛)의 먼지를 터는 일이 더 좋겠다. 아글타글 안 되는 일을 궁리하기 보다는 차라리 서화를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기는 멋이 더 좋다. 안 되는 글을 억지로 짜내기 보다는 차라리 고묵(古墨)의 묵향을 맡는 것이 더 좋다. 한밤중 뗠쳐 버릴 수 없는 고뇌에 불면하기보다는 차라리 고서의 책장을 번지는 일이 더 좋다. 2005년 11월 나는 위독한 간염질환에 걸린 것을 건강진단 때 발견되었다. 오랫동안 입원, 약물치료로 나는 2006년 봄부터 수개월간 격심한 약물반응에 고생하게 되었다. 체중 12kg감량, 모발이 탈락하고 전신(全身)이 끔찍한 두드러기가 나고 또 나고... 부작용은 나를 오히려 죽음으로 몰았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책 읽기와 글쓰기를 견지했다. 물론 주위 독자들의 성원과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아 참 고마웠다. 나는 병상에 누워서도 수집해온 고완(古玩)을 바라보고 어루만지면서 힘을 얻었다. 지루하게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고완(古玩)은 나에게 빛살 같은 밝음을 선물해 주었다. 지금도 피골상접 동연의 나의 체중은 2005년의 수준으로 돌아서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여유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체중이나 그런데 신경을 덜 쓰고 나를 자신하는 연구와 일에 몰두하게끔 하는 마음의 여유, 나는 그것을 고완 을 통해 얻은 것만 같다. “筆量精良 人生一樂”라는 말이 있다 거기다 나는 한마디 더 보태고 싶다 “博覽群書 人生大福”라고 하는 말이다. 나는 늘 자신이 21세기를 살지만 시대와 어울리지 않은 전통적인 文人趣味의 남자라고 느낀다. 나는 문인취미로 서재를 꾸려 놓기도 하고, 아호(雅號)도 몇 개 갖고 있다. 일테면 海東(해동) 怪人(괴인), 曉靜(효정) 居士(거사), 무한(無澣) 老師, 秋月堂主人 등등. 그리고 장서, 印章, 閑章(한장) 등 만해도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다른 30여개를 갖고 있다. 책의 사이즈, 내용에 따라 자서장을 박는 재미는 별미다. 요전번에 히로시마의 한 문화재단에서 내가 소장한 유묵으로 명사 유묵 전을 열자는 제안이 들어왔는데 나는 완연히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 일은 나중에 공개해도 좋으니, 지금은 역시 나의 취미의 “비밀보고(宝庫)”로서 고이 지킬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누구나 자가 자신에만 속한 비밀은 있어야 한다. 마음을 키우는 지성의 샘물 같은, 비밀의 화원 같은. 지난 9월에 나의 애독자가 “고완 이 왜 그렇게 좋은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고인과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 좋다” 라고. 그렇다. 고완 은 내게 있어서 취미를 넘어, 수집벽을 넘어선 일종 옛 문화와의 만남이다. 만남이란 것은 연인이나 아는 친지들과 얼굴 맞대고 오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는 그런 생신(生身)의 만남만은 아니라. 만나지도 못한, 아예 생각지도 못한 옛 물건, 그리고 그를 곁에 두고 애용하던 옛 사람과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을 고완 의 몫이다. 수백 년, 수천 년의 고인의 넋과 호흡과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상심열목(賞心悅目)인가! 그러나 완물상지(玩物喪志)란 말과 같이 너무 탐닉하여 스스로 품은 바 뜻을 잃어버리면 본말전도의 “우(愚)” 가 아닌가! 우리의 선대들은 이미 완물상지의 교훈을 남겼으며, 그를 “완물생지(玩物生志 )”의 에너지로 바꾸는 지혜를 또 가르쳐 준다. 아무리 제언(贅言)을 늘어놓아도 고완 이라 “상심열목” 과 “상심생지” 의 즐거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리하여 재력에 넘치는 진품명품을 수집하는 것으로 허영심을 채워주는 고완 은 나는 싫다. 그보다 賞心悅目과 賞心生志의 “以堂主義”가 내가 추구하는 고완 의 진가이다. 이런 고완 주의는, 내게 있어도 글쓰기와 또 다른 知的축적과 머나먼 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知的方法의 하나이기도 하다. 고완 에 흥취가 없으신 이들은 아마 나의 이런 “고완 주의” 를 잘 체감 할 수 없을 것이다. 고완 주의 때문에 나와 생활, 지적 창조의 삶은 나름대로 윤택이 난다. 고전문화를 사랑하듯 나는 고완 을 사랑한다. “고(古)는 역사 문화의 古이기도 하며, 또 考,故,高,孤,唐,稿,鼓,苦와 이어져 있다. “玩”은 完,緩,浣,頑, 라도 통한다. 이 모든 글자의 키워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지적 세계, 정신적 세계, 時空의 세계를 이룬 것이 곧 古玩의 美이다. 고완 을 통해 나는 또 時空을 넘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5    1-3. 나의 수공업주의 댓글:  조회:4109  추천:20  2012-10-16
3. 나의 수공업주의   나는 컴퓨터가 아닌 육필로 원고를 쓴다.   “21세기 최후의 手工業者”라고 자조 할 만큼 나는 수공업주의를 철저하게 견지한다. “왜 컴퓨터로 쓰지 않느냐?” 라고 수도 없이 많은 물음에 나는 이런 반문을 준비해 놓았다. “왜 내가 꼭 컴퓨터로 써야만 하냐?” 라고.   지금껏 나는 작가가 파소콤(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기실 원고가 탈고 되면 편집부를 거쳐 인쇄소에 가면 곧장 활자로 변신한다. 컴퓨터로 타자하면 작가 자신이 인쇄소를 경영하는 것과 같아서, 뭐 자비로 지하 출판사를 경영할 작정도 아닌 데야 왜 컴퓨터로 타자할 이유가 있는가? 나는 글쓰기의 프로패셔널로서 자기 자신, 즉 작가가 발표를 위한 목적으로 쓴 글은 그 글 자체 내용이지, 꼭 활자체로 입력해서 써야 한다든가, 입력하여 편집자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이유가 없다.   책 제작의 프로세스를 간략화 하기 위해 작가가 편집 일까지 거들어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작가가 다 편집해 주면 편집은 뭘 하는가? 실제로 내가 하루 글 쓰는 속도는 컴퓨터로 타자하는 속도에 뒤지지 않는다. 나는 하루에 적어도 만자 내지 2만자는 쉽게 써 내려간다. 게다가 나는 단숨에 써내려감으로써 삭제하거나 보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글쓰기의 프로라면 적어도 이런 내공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 를 미리 구상해 놓으면, 구체적 언어사요, 단어선택, 문장구성, 글의 흐름은 내 두뇌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동으로 도도히 흐르고 흐르는 강물마냥 쏟아져 흐른다. 그래서 중국어로 인간의 두뇌를 모방했다고 컴퓨터를 ‘전기두뇌’로 칭하지 않는가, 내 머리가 곧 전기두뇌와 같은데 왜 하필이면 컴퓨터를 사용하여야 하는가? 황차 전기도 절약 하는데 말이다.   누구한테서 들은 에피소드인데, 어떤 컴퓨터 연구에 몰두 하는 호사가 있었다. 이 양반은 컴퓨터에 인간의 방귀(소리와 냄새)를 저장, 재생산 하는 연구를 하다가 결국 숱한 컴퓨터를 폭발시키고 방귀냄새(폭발로 인한 악취)를 맡고서야 질려서 관두었다고 한다. 컴퓨터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관념의 노예로 된 그 호사가 취미는 방귀의 악취보다 더 구린 것이 아닐까?   나 같으면 차라리 비닐 봉 다리를 특제해서 거기에 엉덩이를 대고 바지를 벗고 쏜 다음 0.3초 내에 밀봉해 버리겠다. 그런 단순한 수공업이 오히려 더 생산적이 아닐까? 어쩌다 말이 새서 구린 “방귀소리”가 나왔네. 그럼 방귀소리 그만 스톱하고 다시 본제로 돌아서자. 컴퓨터로 타자하는 기계문명의 우월성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쓰기 쉽고 고치기 쉽고 저장하기 쉬운.... 천 가지의 우월성을 강조해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거기엔 천편일률의 차가운 컴퓨터 활자가 그냥 재생산될 뿐, 나 자신만의 글줄, 그 행간 속에서 발산하는 잉크의 향은 코에 확대경을 써도 안 보인다. 근대 문명의 승리에도 도취된 대다수는 나의 이런 행위나 변명자체가, “눈에서 고기비늘이 나온다” 라는 격이 될 만큼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나는 그런 웃기는 내가 좋다. 전기적(電氣的)인 기계의 처리로 내 개성의 향기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이처럼 기계문명을 창조해 놓고 오히려 자신이 만든 기계 문명의 노예로 되는 것을 망각한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닐까.   1999년 20세기를 마감하는 해 영화 가 우리의 안구(眼球)를 자극하여 세계를 석권했다. 이 영화는 근 미래 인류문명의 암담을 암시한 것으로, 인간이 만든 기계는 결국 인간을 통제하고 육성하고 있다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이상적인 가상현실을 설정해 놓고 인간들로 하여금 그것에 빠지게 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완벽하게 조종, 통제하는 아이러니.   미국 작가 파츠제럴드의 소설 에도 인간의 여러 주제와 함께 순수한 녹색의 꿈을 꾸던 주인공 개츠비가 인간의 기계주의, 상업주의에 의해 희생당하는 비극을 반영하고 있다. 순수한 인간 개츠비는 꿈도 이루기 전에 기계(자동차)로 인해 사고를 당하며 또 기계(총탄)에 의해 살해된다. 기계문명주의에 빠진 인류에 경종을 소설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기계가 의지를 지닌 인간에 적대하는 테마로서란 영화 역시 “기계가 인류를 멸망시키는 적”이 된 근 미래를 명시해주고 있다. 이런 기계 문명, 컴퓨터, 휴대폰을 주무르는 모습이 유난이 우습꽝스러운 광경으로 내 시야에 안겨온다. 한시라도 휴대폰이 없으면 못살 것만 같이 안절부절 못하는 젊은이들, 누군가가 그런 일본인을 “휴대폰을 든 원숭이”로 야유한 지식인이 있다.   수업 시간에서 보면 나의 학생들 속에도 휴대폰을 주무르는 모습이 유난이 우습꽝스러운 광경으로 내 시야에 안겨온다. 한시라도 휴대폰이 없으면 못살 것만 간이 안절부절 못하는 젊은이들, 누군가가 그런 일본인을 “휴대폰을 든 원숭이”로 야유한 지식인이 있다. 휴대폰이 그런 젊은이들을 조종하는 것이 분명하다. 마치 신(神)이 인간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떠날 수 없어 하는 관념과 같이 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꼭 컴퓨터로 써야 한다는 관념에 너무 익숙해져 육필로 글을 쓸 수 없다는 인간이 대다수다. 기계 의존 중에 걸려, 실제로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글을 써주는 격이 되었다. 결국 또 하나의 기계문명의 노예로 돼서 본말전도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원고지와 펜으로 작문, 리포토를 써내려가 는 지 작업을 잘 시킨다. 연필을 쥐는 자세도 (컴퓨터 건판을 치는 식으로)이상한 학생들까지 속출하니 말이다.   반시류적 기질이 농후한 나는 글 쓰는 내용만이 아니라 글 쓰는 스타일 역시 반시류적이다. 나는 컴퓨터로 때리면 글이 안 나올 것 같다. 글은 써서 나오는 것이지, 때려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릴 줄 모르지만, 컴퓨터를 치는 이는 打家(타가)이지, 손으로 손수 쓰는 作家(작가)는 아니다. 굳이 작가라는 명칭을 붙이자면 그 앞에 “타가적”이라는 3자를 부착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컴퓨터로 쓰시는 제현들을 아유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명을 향유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적 인물인 나 자신의 자조적 익살이다. 일개 헨진(戀人)의 타령 일뿐이다. 그래도 내겐 동조자가 예나 지금이나 숱하게 많아서 위안을 느낀다. 내가 숭경하는 소설가 헤밍웨이는 “연필 두 자루 정도는 닮아 없어져야 하루 일을 충분히 다 한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글을 써왔다.   존 스타인백은 하루 종일 글 쓰는 연필을 깎는 시간을 절약하려고 자동연필깎이 가 필요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수십 개의 연필을 두고 그날그날의 기분과 천기에 따라 다른 연필을 골라 썼다는 에피소드 또한 유명하다.   붓, 펜, 연필, 만년필, 볼펜... 이것이 있어서 “펜은 검보다 강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건판이 검보다 강하다고” 하면 감동이 안 온다. 차라리 건판이 “정치판보다 강하다”로 해야 할 것인가.   세계의 무라카리 하루키도 여전히 몽브랑 만년필로 소설을 쓴다. 그리고 요시모토 바나나도 도 그리고.... 나도 역시 수성볼펜으로 쓴다. 그것도 나만 쓰는 일본제 uniball.sig NO GP의 0,5미리 직경 수성 펜이다. 원고지도 횡선 35행간의 A4사이즈의 것이다.   나는 고려 최고의 문호이며 안빈낙도의 삶을 즐긴 이규보(李奎報)의《슬견설》에 나오는 “벼루에 부치는 글(小硯銘)이 좋다. ”벼루여! 벼루여! 나의 무진장한 뜻을 쓰게 했으니, 나는 그대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함께 하리오.“ 그리고 천재 이상과 절친했던 당대 일류의 문인 이태준(李泰俊)이 만년필을 “만세필”롤 부르며. “촉긴 붓과 향기로운 먹만 있으면 어디든 정토(淨土)일 수 있다” 라는 말이 좋다. 이 선각자들의 말 한마디에 나의 뜻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계 문명의 노예를 거부하는 나는 여전히 수공업주의를 견지한다. 내 손때 묻은 펜으로 잉크 향 그윽한 나만의 글을 쓴다.   수공업주의의 나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육필로 쓴다.
4    1-2.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댓글:  조회:4749  추천:22  2012-10-10
2.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왜 밥을 먹는가?”와 같이 나에게 있어서 이는 지극히 우문(愚問)이다. 밥 먹고 술 마시고 배설하고 자고 일어나고 걸어가고 말하고 호흡하는 것 같이 글쓰기는 나 자신의 삶의 방식이다.   살아가는 생 그 자체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왜 글 쓰는가? 반문자체가 무의미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은 쓰는 것이고, 써내려가야 하므로 왜 쓰는가? 의 허들은 판터지 소설속의 무명의 요괴같이 불현듯 튀어나와 가끔 나의 사색을 유혹할 때가 있다.   나의 글쓰기의 사숙 스승 이어령 선생님은 옛날에 이미 정채로운 명언을 남겼다. “나는 호흡처럼 글을 써 간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나 방법이 아니라 생존 바로 그것이다.” (1969년)   그리고 이 선생님은 (1996)의 서문에서 글쓰기를 낙서에도 비유하기도 하면서 글쓰기를 설명한다. “조금 슬프다는 이유로, 조금 괴롭다는 이유로, 조금 심심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가끔 흰 종이 위에 낙서를 한다. 그것이 때로는 소설이 되기도 하고 시가 되기도 한다.”   “그저 하나의 통곡처럼, 분노처럼 쓰기만 했다. 들어줄 사람이 없어도 좋았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이 선생님은 자신은 계속 “생각하고 그리고 쓸 것이다.”라고 명언한다. “모든 공공기물(법원, 시청, 병영등...)에 낙서하는 것이 나의 문학이다”라고 이어령 선생님은 공언한다. 그러면서 “문학을 정치이데올로기로 저울 질 하는 ”오늘의 한국에서 “비평가들은 문학자체의 그 창조적 의미를 제거해 버린다”라고 침을 놓는다. 경계를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어 글쓰기를 호흡처럼, 낙서처럼 해 오신 이어령 선생님은 모종의 의미에서 나 자신 글쓰기의 귀감이다. 이런 “당대동아시아의 지적거인”을 사숙한 나는 행운아라고 간주한다.   나는 가끔 홀로 있으면서 이런 사색에 빠져보곤 한다.   글쓰기를 생활 그 자체로 하고 있는 내가 만일 아무도 없는 외딴 무인도 같은데서 살게 된다면 그래도 그냥 글을 쓸 것인가? 라고 대답부터 말하면 yes다. 물론 조건이 하나 딸린다. 그것은 무인도에 생활의 식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이와 팬도 있어야 하고, 원시인처럼 식량획득과 야생과일 채집과정을 나는 운명으로 감수하고서 즐기면서 그 실 체험을 짬짬이 써 내려갈 것이다. 세상과 격리된 이곳은 자연의 “감옥”이거니와 “낙원”이다. “감옥으로 생각하는 의식을 나는 우선 뇌리 속에서 제거해 버린다. 그 누구의 감시도 간섭도 관심도 모든 거추장스러운 인간문명의 장치를 제거 해 버린 ”낙원“에서 나는 글쓰기생활을 즐기겠다.   나의 “낙서”같은 글을 읽어주는 사람도 없다. 나의 “배설”같은 작품을 관심하는 그 누구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나”가 있다. 그 “나”가 나의 유일한 충실한 독자가 되어준다. 물론 이 독자가 읽어주지 아니해도 상관없다. 있어 주는 것만으로 괜찮으니까.   차라리 근대적 모던에서의 도피로 인해 나는 지고 무상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 사상가, 철학자 푸코를 연상한다. 만년의 푸코는 모던의 테크놀로지의 발달, 증대와 권력관계의 강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살아가 는 것의 위험성을 자각했다. 그 대처의 처방으로 “자기의 통치”“자기에 향한 배려”를 깃발로 들었다. 자신에 향한 배려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언어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언어”는 감옥도 없고 법원도 없고 타자도 없는 “무인도”의 지경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알몸 같은 뇌리 속 을 바라보면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또 이런 상념을 하기에 이른다. “무인도” 적 절대적 “낙원”은 그 역설적 의미에서 결국은 너무 자유로워서 두려운 자유로운 “감옥”이라고. 역시 내면의 진실함을 추구하는 언어를 찾은 다음 해야 할 일은, 이 “무인도”의 낙원을 탈출하여 자신이 아닌 수 많은 타자들이 있는 인간사회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절박감, 그것을 이룩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같은 환경에 오래 눌러 있으면 그 자체가 사상을 죄이는 “감옥”이 된다. 흐르지 않는 썩은 물같이 온갖 해로운 병균을 발생시키는 온상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가 무인도를 탈출하는 이유는 충분히 주어져있다. 수많은 타자들이 사는 인간의 사회에서 타자와 대화를 나누며 나를 개변시키고 또 사회에 무언가 흔적을 남긴다.   내가 글 쓰는 것은 타자와의 대화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나의 정신적 구원, 변함의 방식을 추구 하고자 한다. 따라서 화자로서의 내가 던진 글들이 타자의 반응이 있으면, 그것만으로 나는 의식했던, 또는 무의식했던 “모종의 것”이란 단어를 쓰고, “목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나는 굳이 “목적”을 필요하기 보다는 이 자체가 모종의 생활방식인 까닭에서였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나는 글쓰기를 일개인의 언설적(言說的) 발설이라 생각한다. 그 글이 타자가 읽어도 안 읽어도 상관없다. 나는 글쓰기가 어떤 나라나 민족을 위한 영웅이요, 전투요 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관념, 주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이 읽히고 많은 독자의 공명을 일으키거나 매료 된다면 글쓰기의 망외(望外)의 희사 일뿐이다.   그렇다고 글 쓰는 사람을 우상화 하거나 정치적 적, 반역자로 내모는 것도 다 아니다. 작가가 늘 수난 당함은 작가 자신의 일이 아니라, 타자의 모종의 욕망과 의도에서 빚어지는 비운이다. 정치적인 수요로 작가, 지식인의 글을 모독, 왜곡하고 정치의 제사상에 제삿물로 올리는 비극은 오늘도 번번히 생기고 있다. 정면이든 반면이든 제삿물로 전략되는 것은 지식인의 최대의 비극이고 치욕이기도 하다.   이런 “감옥”-- 정치기구의 인간의 자유, 인권을 말살하는-- 푸코가 언급한 정치장치가 작가, 지식인은 물론 전 대중을 불행하게 하기 때문에 나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의 지적(知的) 글쓰기로 이 정치적 감옥을 부수고 급속히 다수 대중을 계몽하는 작업은 “상미기한이 지난”것이 아니라 여전히 필요, 유효하다고 사료된다. 물론 내가 쓰는 글, 그 많은 글들은 사회를 향한 나 자신의 넋두리, 타령이고 낙서로 양산 한다. 좀 문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知的)생산의 글이 대중에게 수용되든 안 되든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못 된다. 나는 글쓰기만 하는 정신제품의 생산자이다. 계란을 낳는 암탉이다. 계란이 맛있으면 잡수시고 맛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독자들의 평판은 자유이지만, 저자를 과도하게 탓하여 암탉 잡는 일은 독자의 권한을 벗어난 “광기”이다. 이 “광기”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시 정치적 탄압의 마살 행위에 가세하는 격이 되고 만다.   중국인으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고행건(高行建.1940년--)은 자신의 문학관, 글쓰기에 관해서 “냉문학(冷文學)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자신의 ”냉문학“을 이렇게 해석 했다. ”냉문학은 일종의 도망이며 그것으로 생존을 구하는 문학이다. 사회의 말살을 피한 정신적 자기구원의 문학이다. 체제의 정치적 박해를 받아온 그가 “비공리성 문학” “비정치성, 이념성문학”을 추구하는 심경은 너무나 납득이 간다. 나 역시 그의 수상작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위구하는 것은 고행건의 “냉문학”은 자칫하면 “냉소주의”에 빠져 극단적으로 네거티브한 “사소설”의 취미에 편향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사소설”, “비공리성 문학”마저 용인되지 아니하는 사회는 절대로 정상적인 문화의 나라가 아닐 것이다. 나는 고행건의 “주의가 없는 주의”에 깊은 동감을 느끼면서도 한편 좀 더 밝은 문학, 항상 하는 포지티브의 문학관이 더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싶다.   문학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지식인의 폭넓은 글쓰기에 대해서 담론 할 때, 왜 글 쓰는가? 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로 금수문장(錦수文章)을 써 내려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거짓이고, 모종 체제에 발라맞추기 위한 장치로서 작용했다면 그것은 죽은 글이다. 아니 살아서 독해를 뿌리는 최고의 악문이 된다. 지식인의 사명이 있다하면 나는 진실을 쓰고 진실을 밝히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참된 사명의 제1위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진실을 포장한 모든 허위의 포장지를 째버리거나 불살라 버리는 글쓰기를 한다. 나는 늘 자신을 엷은 포장지에 쌓인 검으로 생각한다. 언제라도 기필코 포장지를 뚫고 나올 것 이라고 믿어 왔고 또 믿고 있다. 이 검에 대해 “귀재”라는 높은 평가를 내린 이들도 있고 반대로 “매국노”로 매도한 이도 있다. 이런 찬반 양면의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는 것은 내가 일을 했기 때문이다. 글을 써 왔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여 나는 그런 평가들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다. 왜냐면 나는 오로지 독서하고 사색하고 글쓰기로 꽉 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세상이 많은 거짓으로 포위된 사회라면 나는 사회의 모든 티브에 도전을 걸 수밖에 없다. “팬을 검으로 삼는다” 라는 말이 이때같이 유용한 일은 없다. 역사의 허위성, 민족, 국가에 관한 거짓, 티브 이런 것들이 내 글쓰기의 반경(半徑)안으로 많이 들어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으로 끝날 내가 아니다.   왜 글을 쓰는가? 의 물음에 준비된 답은 “월경하는 글쓰기”이다. 나는 이 7글자의 말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나의 주의는 어쩌면 “월경하는 글쓰기 主義” 9자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비좁은 조선족만이 아닌, 동아시아 (한, 중, 일) 3국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비교문화론의 깃발을 내걸고 행해지는 “김문학주의”라는 글쓰기. 이는 나의 숙명이다. 한중일 3국어, 3국 문화 그리고 3국을 통 털어 바라 볼 수 있는 시야, 누구도 할 생각은 있으나 하지 못한 글쓰기를 나는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마냥 바쁘다.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꼭 조선족이 했을 것이다. 조선족만 가능한 동아시아적 시야의 월경하는 글쓰기. 그 글쓰기에 나는 생의 가장 큰 보람을 느끼며, 또 비장한 “사명감”같은 느낌마저 들어서 좋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나 내가 하는 일은 한중일을 통 털어 첫 번째 일일뿐만 아니라, 조선족의 척박한 문화 풍토 속에서 항상 거의 첫 보습을 들이대는 작업이 된다. 나는 이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글을 쓰고 또 쓰게 지탱해 준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는다. 욕먹는 일도 이제는 즐겁기만 하다. 농담이지만 오히려 욕하는 사람이 없어질 까봐 우려 할 때도 있다. 욕도 일종의 타자와의 대화이다. 좋든 나쁘든 그 욕이 내 심성에 퇴적비료같이 지성과 품성을 키우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가 배짱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내게 있어서 글쓰기는 세계지도에 색채를 칠하는 것과 같다. 이질 된 他者의 인식과 세계관과의 대화로써, 나 자신의 세계관 주의주장을 24色, 또는 48색, 또는 그 이상의 색깔도 하나 또 하나씩 색칠해가는 手工業적인 작업이다. 나는 지구위에 페인트 도배공이다.   세계의 지도에는 나의 색 연필이 기다리고 있는 구석구석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펜은 쉬지 않는다. 이 문화, 타자와의 대화의 방법으로서의 나의 글쓰기, 그것은 오색영롱한 색깔로 도배돼 있는 그림이고 싶다.   밥 먹는 것과 같은, 숨 쉬는 것과 같은, 심장이 박동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배설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 나의 글쓰기이다.  
3    1-1. 김문학 주의(主義) 댓글:  조회:5806  추천:47  2012-10-05
    제1장 金文學主義     1. 김문학 주의(主義)   인간은 누구나 독립적인 “나”이다.   아니, 독립적인 “내”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나”로서 살아가는 데는 나름대로 “나” 자신의 살아가는 방식, 삶의 스타일과 세계관, 가치관이라 칭해지는 신조, 주의주장이 있는 법이다.   이 졸문은 내가 살아가는 주의 주장이 있는 “풍경화”이다. 파스켈로 그려진 마음의 풍경화 스케치는 내가 “나”로서 독립할 수 있는 나만의 유니크한 “김문학 主義”에 관한 간악한 連 일 것이다.   대저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마음(흉금)은 커야 한다” 라는 작고하신 어머님의 母敎가 그대로 내생에 관통된 신조의 굵은 아이템이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갓 출생시 매우 약소한 영아였다고 한다. 현대의 건강한 아기와 같이 거의 3000g 넘는 복상스러운 돼지 같은 아기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 약골로 태어났기 때문에 심히 가엽게 여겼다고 하신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를 회임하셨을 때 공교롭게도 3년 재해의 피크에 달한 시기라서 식량, 먹을거리가 없는데다가 또한 본디 허약체질인 어머니는 입덧이 과히 심해서 음식을 변변히 드시지 못했다. 그때 가장 맛있게 드신 것이 능금 한 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남인 내가 이렇게 시대의 산물 “약골아”로 태어난데 대해 늘 가슴 아파하시고 나를 3남매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셨다. 어머니는 여동생과 남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시켰지 나에겐 마치 “큰 도련님”으로 아무것도 시키지 아니하시고 공부만 하게 두었다.   내가 나이를 들자 어머닌, 늘 상 “사람은 작아도 통은 커야 한다” 라고 가르쳤다.   이래서 나는 학년 전 때부터 세상에서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고 그것이 지고무상의 인간사라고 알았다. 학교가기 전 집에서 숙부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글을 마치고 한어병음과 한자를 많이 익혔으며 짧은 작문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신의 신체적으로 ‘왜소’ 함에 대해서 크나큰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또 한편 나는 오기가 발끈 불어나서 내가 무엇이던지 이 작은 체구로나마 나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유년의 반발심은 엄청난 용수철같이 나의 분발을 지탱해주었다. 나는 병약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어머님의 유전인지 나는 병약해서 유년 때부터 위장이 몹시 약한 터라. 늘 설사를 하곤 했다. 할머니가 “내 손이 약손이다〜 ” 는 중얼거림 가운데서 그렇게 나는 자랐다. 그리고 나는 근시에, 중이염에, 시력이 나쁜데다 청력이 나쁘고 또 간장까지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왜소한 몸은 역시 “병약”으로 전신 무장되어 있는 “병문학”이다. 왜소하고 병약한 내가 무엇으로 내 신체적 역량을 보일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소학교 첫 체육 시간에 60M 달리기를 하였는데, 그날 반 전체 아이들과 체육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내가 반 전체에서 속력이 제일 빨랐던 것이다. 나 자신의 경이로운 “발견”이었다.   10여년전 제67회 아카데미 영화수상작 (중국어로 )의 주인공 소년이 신체적 핸디캡을 박차고 달리기와 뭇볼 선수로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천진난만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공명을 일으키고 숱한 눈물을 흘렸다. 주인공 검푸는 신체적 핸디가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파워를 낳는다는 점을 과시하는 감동적 인물이었다. 그 뒤로 나는 전교 60M, 100M 단거리 선수로 선발돼 5학년까지 같은 학년조의 단거리 기록을 세우면서 구 대표, 시 대표 선수로 뛰기도 했다. 또한 육상의 속력을 살려서 축구도 좋아 했는데 많은 드리블 테크닉을 시와 구 소녀업여체육 학교에서 배우기도 했다.   이렇게 약골 신체로도 운동선수가 되어 활약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첫 학생으로 전교의 본보기가 되었다. 지금도 소학교 모교의 스승님과 만나면 “우리는 언제나 자네이름을 거론하면서 공부도 운동도 그림도 잘 한 학교의 모범생으로 기억하며 자랑하고 있다네” 라고 싱글벙글 말씀하신다. 소학교 때 나는 흔히 “신동”이라 불렀다. 나는 2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3학년 때 쓴 작문들이 늘 5학년의 작문 범문으로 얽히기도 하여 “문학신동”으로 불렀다. “김문학 모르면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다” 라고. 그림에도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나는 미술과는 항상 만점이었으며 1975년 가을 “批林批孔” 운동이 일고 있을 무렵, 공자의 인생에 관한 만화를 50여장 그려 전시하였고 소학생을 상대로 “개인 그림전”을 펼쳐 이름을 날렸다. 그해 전시 소학생 統一考試에서 5과목 500점의 점수로 조선족 소학생의 스타로 다시 유명해졌다. 우리 반의 한어 교원이 당시(군에서 재대한) 민영교원이었는데 국영교원이 되려는 문화시험이 있었다. 그중에 한어 작문이 있었는데 미리 제목을 주고 기한 내에 제출하면 되었다고 한다. 그 한어선생님은 “한어 작문이라면 네가 더 잘 쓰니 써달라” 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틀 후에 명제작문을 탈고하여 드렸다.   이 일이 언제 있었나 하듯 싶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 선생님이 나를 찾는 것이었다. “아, 문학이 너 너무 대단한 놈이다. 네가 쓴 작문이 초고 우를 맞았단다. 네 덕분에 내가 진짜 나라 봉급 타먹는 선생이 됐다. 너무 고맙구나....” 나는 쑥스럽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한마디 했다. “아, 그럼 정말 잘됐네요. 축하드립니다. 근데 밀크사탕이래든가 뭐 장려 같은 거 없습니까?” 선생님도 웃었다. “짜식, 밀크사탕이 대수냐? 저기 시내 환뗀(판점)에 가서 꿔뽀우러우(튀긴 고기만두의 일종) 사주마,”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꿔뽀우러우는 고사하고 개 눈깔사탕 한 알 얻어먹지 못했다. 핫하하...   꿔뽀우러우 보다 더 반가운 희사가 생겼다. 이는 처음 공개하는 소학시절의 에피소드이다. 나의 습작이 시에서 인정받아 향토교재 독물로 시와 학교에서 을 책자로 출간해 주었다.   이것이 13세인 나의 첫 처녀작 출판이다. 그런데 너무 유감스러운 것은 그 책이 지금 내 손에 한권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당시 우리 담임선생님 전 선생님께서 나의 일기책 몇 권과 같이 이 작문 집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행방이 깜깜하다. 전 선생님께서 내가 성인이 된 다음 반환한다고 약속했으나 그 분께서 돌발의 병으로 작고하셨다. 그 뒤 사모님을 찾아가 수소문해 보았지만, 사모님 역시 모르고 계셨다. 아, 내 13살의 처녀작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소실됐단 말인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그때 내가 표지 디자인을 했다. 거대한 대포 같은 붓을 오른손에 쥔 소년인 나 자신의 모습을 만화로 그린 것이었다. 아마 당시 문혁(文革)시기의 선전화 포스타를 모방하여 “글 쓰는 문인”이랍시고 표상화 했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가끔 그 그림을 떠올리면서 지구위에 서 있는 나 자신의 붓을 들고 “월경하는 지식인”이랍시고 곧 잘 희화하고 있다. 3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그른데 없다.   이는 28세인 내가 발표한 에세이다. 흑룡강 신문 진달래부 간에 1990년인가 일본 오기 직전에 쓴 내 포부를 이야기 한 글이다. 내가 원래 시대를 거스르는 반골적인 반항아적 기질이 있음을 발견, 이제부터 모난 사나이로 화살같이 뾰족한 날로 이 사회, 문화의 부조리에 용감히 저항하는 젊은이,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주의주장을 펼치겠다는 20대의 팡세였다. 아니 20대의 “성언” 그 자체였으리라.   내가 소학교 때 그려낸 자신의 미래성은 (1) 글 쓰는 작가, (2) 그림 그리는 화가, (3) 운동하는 운동선수였다. 이 3글자를 다 겨냥했으며 다 어우른 욕심쟁이 야심소년.   약골의 신체적 조건으로 아무리 운동신경이 발달했다 해도 (3)은 아니라고 나는 13살에 깨우친 것 같다. 결과 남은 것은 (1)작가냐 (2)화가냐의 양자택일이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거듭 이라면, 선택 앞에서 왕왕 우유부단은 금물이다. 결과 내가 (1) 글쓰기의 지식인으로 택한 것은 초종3학년의 비오는 여름날이었다.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나는 미술전문학교에 수험할 결심으로 내가 소학교 때부터 사사해오던 미술스승을 찾아 갔다. 미술 선생의 “추천장”이 수험생의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스승은 뜻밖에 솔직한 말씀을 터놓았다. “자네는 그림보다 글재주가 더 좋으니까 그 방향으로 선택 하는 게 무척 좋겠다. 노신이나 파금 같은 그런 글쓰기에 더 자네 적성이 맞네. 소학생으로서 이미 ‘개인전’도 하고 ‘개인 작품집’도 냈을 정도니, 그림을 부업으로 공부를 주업으로 하길 권장하네. 글로써 이 어지러운 세상을 깨우쳐주게.......” 나는 스승의 권장에 깊이 동감을 느끼며, 이날까지 흔들린 선택의 갈림길에서 마침내 선택의 길을 찾았다는 희열이 팽배 히 치밀었다.   귀로에 여전히 폭풍우가 쏟아졌다. 천둥 속에서 나는 저 미래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붓을 쥐고 지구를 밟고 선 자신의 “문인상”이었다.   그 뒤 나는 내가 가장 숭경하는 파금(巴金)과 沈從文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스승으로 모시고 문학 공부, 글쓰기를 배우겠다는 조선족 소년의 절절한 심경을 토로한 한어 편지였다. 그러나 정확히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에게서부터 일일3추로 고대하는 답장은 오지 않는다. 한 달이 지나도 반년이 지나도 오지를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많은 글을 쓰고 또 썼다. 1978년에 나는 십만자 분량의 중편소설 을 탈고했다. 이것 또한 학교의 뉴스로 되었다. 1979년에 신문에 육속 발표된 산문으로 인해 학교에서는 나를 “문학가”로 불렀다. “문학소년”에서 “문학청년”으로의 성장이었다.   파금과 심종문 대가들의 편지 대신, 나는 동년 급이나 아래반의 팬들의 편지를 십 여 통이나 받았다. 길림성 흑룡강 성에서 날아온 편지도 있었으며, 그중에는 지금도 文友로 사귀는 펜팔이 있다. 1979년 신문에 발표된 산문작품의 원고료가 10원이었다. 그 무렵 교원 월급이 38원 이었으니 당시의 시가로 따지면 학생인 나에게 있어서 거액의 돈이었다. 나는 어머님께 약을 사드리고 책 몇 권을 산후 친구들과 식당에서 외식을 하였다. 그리고 꿔뽀우러우 사주시겠다는 소학교 한어 선생님을 찾아가 내가 선생님께 식당가서 꿔뽀우러우를 사드렸다.   그 뒤 요녕민족출판에서 처음으로 츨간 하는 에 내 글이 3편이나 실렸다. 그때 나는 노트장에다 “나는 장래 중국 조선족 최고봉의 작가로 되겠다” 라는 문구를 적었는데, 그 뒤 이 노트를 문학을 즐기는 후배 여학생이 몰래 보고 나에게 심심히 감복했다면서 나를 따랐다. 바로 그 여학생이 나의 첫 연인으로 첫 아내가 되었다. “조선족 최고봉의 작가”를 놓칠 수가 없었다고 그녀가 훗날 고백한다. 말수가 적었던 나는 젊은 청춘의 광기와 패기로 “청운”을 품었다. 나는 조선족의 호적과 임어당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노신을 숭경하다가 대학에 들어가서는 오히려 유연한 자유주의자 호적, 임어당에게 더 매력을 느꼈다.   첫 연인의 말을 마저 하자., 그녀 덕분으로 나는 대학 4년을 애정의 꿀을 만끽하면서 지식의 감노수를 많이 섭취할 수 있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녀는 나의 심심에 靑春의 자극과 흥분을 준 여인이었다. 얼굴이 백설같이 하얗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백설희라 닉네임을 지어 주었다. 그녀는 백설희가 난장이와 연애한다고 곧잘 나를 익살로 놀려대곤 했다. 치정이다 시피 내게 심취했던 그녀는 생활에서 하도 “도련님”식의 자립능력이 모자라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마지막 황제 부의보다 좀 낫다면 신 끈을 맬 줄 아는 것 뿐 이예요” 했다 그래서 생활상에서는 자모와 같이, 알뜰한 누님같이 모든 걸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원고의 첫 번째 독자로서 언제나 중문학부 전공생답게 비평을 해 주었다.   대학교 때 길림성 대학생 산문부분에서 내가 길림대나 동북사대 수많은 중문학계 문학 지망생을 누르고 최우수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뒷바라지의 공이 컸다.   라일락향기가 물씬 풍기는 4월에 시작된 우리의 애정이 10여년 후 일본 쿄토에서 사쿠라가 우수수 지는 같은 4월에 막을 내릴 때, 우리는 서로 울었다. 그러나 어차피 사랑도 인연도 수명이 있으니 그 수명이 다 하는 운명 앞에서 우린들 무엇으로 당해내랴! 그녀와 갈라질 무렵에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미안해. 내가 조선족의 최고봉 작가가 된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어서 말이다. 난 거짓말쟁이야. 이제 더 이상 이런 말을 믿을 네가 사라지니 가슴 아프다” 라고. 그 말에 그녀는 흐느끼며 울었다. 내 빈약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하지만 당신은 이제 조선족이란 테두리를 벗어난 지식인으로 성공했잖아요.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때 한 약속 보다 수백 배 큰 인물로 성장되고 있잖은 가요!” 핑크빛 눈꽃같이 산산이 흩날리는 사쿠라 꽃잎은 우리의 영구한 이별을 축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랑의 나무에 목을 메여 죽고 싶다” 라고 나는 그 시구를 그녀에게 써준 적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지도 못한 채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아마 우리 애정의 사정(射程)은 애 언약을 기다릴 만큼 짧은 것이었나 보다.   당시 우리 애정의 종식은 나에게 지대한 충격을 주었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서 하는 사랑마저도 우리는 스스로 지배 해 나갈 힘이 없다. 운명의 女神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말이다. 20세기 희대의 독재자 모택동도 그 자신의 운명 앞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강청과 왜 이혼을 안 하는가” 라고 한 측근의 물음에 그는 “낸들 어디 가서 법적으로 기소하겠냐!”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운명의 女神앞에서 절대적으로 굴종하지 않는 습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失望속에서도 希望을 품고 분투하는가 하면, 가령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지푸라기도 부여잡고 사신의 운명과 치열한 고투를 벌이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운명과 싸우는 일은 기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운명과 격투, 운명을 애어 싼 주의, 사회 환경과 격투, 그런 도전은 인간이 살아가는 주어진 환경에 대한 최적의 적응상태로 삶의 양식을 창조해나간다. 이 삶의 양식에서 걸러낸 지대한 지성의 감노주(甘露酒)가 곧 “주의주장”이다.   나는 내가 삶의 양식(문화)에서 나를 정신적으로 컨트럴하는 주의(主義)가 있다면 그것을 차라리 “金文學主義”로 표현, 명명하고자 한다.   獨立的 “人”으로서의 김문학, 그가 내거는, 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정표처럼, 깃발처럼 내걸고 실천의 지침 같은 그것.   “것”이라고 굳이 표현한 까닭은 수학공식이나, 헌법의 조목처럼 표현의 불가능한 내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실을 진술하기에 앞서 서두에서 얘기하던 어머님의 이야기를 그 전제적 조건으로 해야겠다. 어머님께서 자주 들려주던 胎夢에 관한 이야기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나를 회임하시기 직전 태몽을 꾸셨다. 마을 중앙의 古木밑에 우물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건져 올렸다. 그런데 그 속에 물이 아닌 엄청나게 거대한 구렁이가 반거하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어머니는 그 두레박을 버리고 어머나! 하면서 비명 지르며 집으로 뛰어 왔다고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그 태몽을 이렇게 해몽하셨다. “동네 유식한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그 구렁이는 용인데 장차 출세할 남자애란다. 그 구렁이가 담긴 두레박을 집으로 갖고 왔다면 어머니 신변에서 늘 살 수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밖으로 버렸기 때문에 너는 나를 떠나 멀리 날아가 산다더구나. 참 지금 보면 그 해몽이 신통하잖니. 네가 세 나라에서 날아다니면서 지식인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태몽의 해몽대로 나는 나의 운명이 이미 정해졌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나는 대학 수험시 문학청년으로서 의례 지망해야할 중문계를 선택지에서 탈락시키고 스스로 일본문학부를 지망했던 것이다. 당시 담당의 중국어 선생님, 조선어 선생님과 일본어 선생님은 나의 지망 때문에 서로 옥신각신 자기의 언어 쪽으로 전공해야한다고 다투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으로 일본어를 택했다. 언어를 하나 더 아는 것은 문화를 하나 더 아는 것이다. 장래 일본 유학과 일본에서의 비교 문화연구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주의”는 이렇게 태몽에서부터 시작한다. 일본을 활동거점으로 삼아 연구하고 국제적으로 월경의 글쓰기를 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고 싶었다. 지금 나 자신의 월경의 글쓰기가 국제적으로 주목 받는 것은, 나 자신의 일이란 가테고리를 넘어서 “공공지식인”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니까 그만큼 찬반양론의 시비도 많은 것이다. 자, 수자풀이 노래로 엮어보자.   1,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2, 이상하게 생긴 김문학이 3, 삼국문화 비교를 4, 사시장철 써내는데 5, 오해 곡해 받으면서 6, 육십 권을 펴내고 7, 칠전팔기 주의 주장 굽힘없이 8, 팔굉(八紘)에 팔뚝 걷고 격투하니 9, 구나방은 구리 텁텁 구각춘풍(口角春風)이요 10, 십만억토 신나는 신바람 일으키네.   여기서 나는 7의 “칠전팔기 주의 주장 굽힘없이”란 문구에서 나의 모습이 그대로 노정됐다고 생각한다. 7이 럭키숫자이다 라고 하는바, 칠전팔기해도 주위와 주장을 굽힘없이 견지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나는 20대 “모난 사나이”의 화살을 들고 세상과 도전하는 반시류적 표상을 보는 듯하다. 나는 스스로 “조선족”의 “좁은문”에서 빠져나와 팔굉(八紘)이라는 국제적 무대에서 월경을 하면서 드넓은 시야에서의 연구와 글쓰기를 벌이기를 대학 때 이미 결의 했다.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흉금은 넓고 커야 한다” 라는 母敎를 실천으로 보이고 싶었다. 어머님은 생전에 늘 16층 아파트의 창가에 서서 언제면 해외에 있는 아들 녀석이 집에 돌아올까 바라면서도, 그럼에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우리걱정은 말고” 라고 하셨다. 아마 어머님은 하늘나라에서도 혼이 되셔서 나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어머님은 늘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그러면 된다. 앞뒤 너무 재는 것도 안 좋다. 할 때 하면 그것이 곧 좋은 일이다. 네가 혼인에서도 일본여자와 살든 조선족 여자와 살든 좋을 대로 하라” 라고 말씀 하셨다. 이 같은 개명한 어머님이 등 뒤에 계셨기에 나는 늘 행복했다. 어머님의 육신은 갔지만 그 모교는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신문기자들이 언젠가 나의 “좌우명”은 무엇인가 취재시 질문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口吐三國語言, 脚踏三國大地, 手書三國文化”   동아시아 3국을 조국으로 간주하고 3국 문화를 읽으며 3국 문화를 쓰는 것, 이것은 또 나의 주의속의 “3국 文化主義”이다.   자주 거론 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격언이 있다.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연약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모든 나라들 다 자기 조국같이 좋아하는 사람은 강한 어른과도 같다. 하지만 세상전체를 다 자기 조국같이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   12세기 유럽의 사상가 성(聖) 비터휴고가 남긴 명언이다. 자신의 민족, 자신의 나라만 최고로 간주함이 아니라, 타자의 문화를 수용하고 이해하여 자신의 문화처럼 기꺼이 포용하는 자야 말로 성숙된 어른이라는 뜻이다. 그 옛날 12세기에 이미 이런 세계적 시야의 수용력과 통찰력을 갖춘 사상가가 있었다니 놀라울 일이다. 21세기의 오늘날에도 자기민족, 자기 지방, 자기나라에만 국한돼 그 같은 “좁은문” 속에 갇혀 타자를 경시하는 개방된 시기의 중세기식 사고양식의 인간이 어디 한 둘인가. 따라서 나는 방편을 위해 “3국”이란 표현을 쓰지만, 나는 시야를 동아시아를 넘어서 지구촌 규모로 확대시킨다. 현재 내가 연구의 사정(射程)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며, 우선 여기서 주의 주장대로 활동하노라면 언젠가 그 사정은 유럽, 서양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한중일 언어적 우세와 활동적 우세를 우선 활용하여 우리의 선대들이 못 미친 영역에서 보습을 박고 있다는 자부심은 다 나의 “주의”를 실천하는 에너지로 되고 있다. 이래서 나는 자신을 “新 조선족”으로 자부한다. 누가 우리 조선족의 文化風土가 이다지 척박하다 했나? 그것을 말로만 지탄하기보다 우선 행동으로 뭔가 해나 가 는 것, 일을 하는 것이 나의 행동적主義이다.   2000년 중국인 노벨문학상 최초의 수상자 高行健 (1940-)은 “중국현대 문학예술의 탁월한 대표인물”로 꼽힌다. 그의 수상작 ,
2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차례 댓글:  조회:3317  추천:15  2012-10-05
차 례     머리말   제1장 김문학 主義   1. 김문학 主義 / 12 2. 나는 왜 글을 쓰는가? / 30 3. 나의 수공업주의 / 36 4. ‘고완’ 주의 / 41 5. 致福의 독서편력 / 46 6. 나의 독서방법 / 54 7. 나의 여성관 연애론 / 60   제2장 내 사상의 계보   1. 내 사상의 계보학적 흐름 / 74 2. 초식동물적 생활방법 / 91 3. 反컴퓨터론 / 98 4. ‘미완’의 思想 / 105 5. 서의 사상 서의 정신 / 110 6. 내 사유의 둥지, 혹은 알 / 115 7. ‘죽음’에 관한 명상 / 121   제3장 역사란 何오   1. 역사란 何오? / 136 2. 조선 말기 사회진상은 어떠했는가? / 162 3. 일제식민시기 조선의 일상생활 / 165 4. 검디검게 먹칠한 조선지도 /168 5. 한중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비교 / 171 6. 한복을 입은 이토히로부미 / 174 7. 100년 전 서양은 한국을 어떻게 평가했나? / 177   제4장 민족ㆍ 국가의 신화를 넘어서   1. 131세의 사상가 안중근을 만나다 / 182 2. 백년의 눈물 / 201 3. 反애국론 / 213 4. 노신과 이광수 / 234 5.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 239 6. 중국 ‘비적원리’의 발견 / 242 7. 한국인과 조선족의 문화갈등 해결방법 / 245   제5장 월경ㆍ자유ㆍ비판ㆍ문명   1. 나는 즐거운 디아스포라 / 254 2. 나와 일본 문화와의 만남 / 257 3. 내 손이 말한다 / 266 4. 나는 왜 반론을 안 하는가? / 270 5. 鬼才는 누구인가? / 283 6. 이어령과의 대담 : 동아시아 문화, 융합과 미래의 방정식 / 289
1    《나의 정신세계 고백서》머리말 댓글:  조회:3576  추천:16  2012-10-05
머리말      우선 이 책에 대하여 몇 마디 설명하고 싶다. 이 책은 자유주의 지식인, 그리고 월경하는 지식인, 모든 이데올로기를 冷策적으로 관망, 또는 넘어서면서 살아가는 나 자신의 정신적 세계에 대한 고백서이다. 회화의 장르로 말하면 아마 섬세하고 리얼리한 유화나 소묘(素描) 보다도 만화, 또는 스케치(速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나의 내면세계, 나의 생활양식, 글쓰기로부터 독서, 역사관, 사상에 관한 개인의 정신사적인 작은 반추이다. 개중에는 내 사고속의 편견과 독단으로 충만 된 숙아 같은 것들도 드러내 놓고 있다. 나 자산의 벌거숭이 稞身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를 벗 길수 있는 자는 오직 나 자신뿐이다. 파스칼은 에서 “인간은 자연 중에서 가장 약한 갈대”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의 존엄은 사고에 있다고 갈파했다. 내가 내 자신 일수 있음을 지탱해주는 가장 큰 요소는 아무래도 내 정신적 사고의 내면세계가 아닐까 한다. 나의 내면세계의 알몸을 벗겨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온 것에 나는 만열한다. 이 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다. 서울에 있는 열성팬들은 내가 이 글을 쓴다는 말을 듣고 빨리 보고 싶다고 재촉이다. 마치 원고마감일을 지키지 않을까봐 작가에 대한 편집의 사랑어린 독촉같이. 이 보잘것없는 책을 흔쾌히 출간해 주시는 백암출판사의 정문식 사장님 배려에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다. 한국 출판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개 학자에 대한 사심 없는 물심양면의 성원에 감격한다. 한중일 국제 감각이 뛰어나신 정 사장님의 출판문화의식에 늘 공감하며, 이런 외우(畏友)가 무척 자랑스럽다. 나는 유연한 “草食動物”이라고 자신을 즐겨 비유한다. 그래서 사고방식이 다른 타자(他者)의 공격마저도 풀 먹는 소와 같이 수용해서는 서서히 저작하고 소화시켜 버린다. 지적 세계의 초원을 찾아 어디든지 달려가는 방랑의 소와 말이다. 思想하는 우마, 환언하여 “자기주장을 하는 자신”을 이야기함으로써 세상의 타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 모든 누구와는 다른 나 자신만의 사상, 방법, 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그러면서 이런 주의주장을 통해 他者와의 상호 이해, 인식을 기하며 더불어 살고 싶다. 나는 나에게는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욕하는 자 일지라도, 단지 나와 견해나 입장이 다른 他者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러는 他者를 거울로 삼아 나 자신을 비추어 보련다. 이 책을 이 세상의 나를 사랑해주는 독자와 나를 비판하는 모든 이에게, 그리고 낯선 유럽의 독자들에게 드린다. 세계를 살아가는 인식의 방법이나 인생의 의미에 조금이나마 일조가 되었다면 나는 다행으로 간주한다.     2011年 7月 5日 일본에서 金 文學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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