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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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상)
2019년 08월 24일 11시 38분  조회:2450  추천:38  작성자: 김문학
 <33의 신사유>문화대담 
 
"문화행자"는 어떻게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나?(상)
 
 
여추우(余秋雨 ) 김문학
 
0. 들어가면서
 
여추우( 余秋雨 ,1946년생)는 당대 중국 산문의 거봉이며, “문화대사(大师 )”로 존경과 흠모를 자아내는 거물이다. 전세계 화인, 중문작가중 최대의 문화거장으로 명성을 날린 여추우는 한편 가장 중상과 비방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970년대 <<세계희극학( 世界戏剧学 )>>이란 사계(斯界)의 권위적 교재를 써내어 당시 본보기극 ( 样板戏 )의 문화독재에 향해 반기를 들었다. 1990년대 상해희극대학 학장직을 사직하고 중국문명유적탐방을 쓴 《文化苦旅》로 전국 내지 세계 화인 독서계에서 열렬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문화대산문”이란 문체를 창립하였다.
 
나는 당시 히로시마대학원 박사생으로 있었는데, 《文化苦旅》를 《중국문화답사기》란 타이틀로 한국어로 번역, 감수를 받아 출간하는 계기로 여추의선생과 망년지교로 되였다.
 
 
 
 
2008년 8월 3~4일 강연차로 일본을 방문한 여추우와 초대면 하면서 긴 대화를 나누며 두터운 우정을 쌓게 되였다.
 
 
그뒤 여추우 선생은 "보행하는 문명행자"로 나서 바빌론, 아랍, 인도 등 세계 문명유적지를 답사하여 지금까지 세계최초로 이 문명답사를 완성한 인문학자로 되었다. 답사중,그는 당대 세계문명에 대하여 참신한 제언을 하여 국제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의 20여권의 저작은 장기간 전세계 중문서적의 베스트 원 위치를 차지하였다. 대만의 유명작가 백선용( 白先勇)은 “여추우 선생은 유일하게 전 지구 중문독자의 환영을 받으면서 인기가 식지 않는 대륙작가이다”고 격상하였다.
 
 
여추우 선생은 또 대륙에서 근년래 전국 고층독자앙케트조사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당대작가”에서 늘 제1위를 독차지했다.
 
 
여추우 선생은 수십년간 독립지식인의 자세로 중국문화를 "공간" "시간"  "인격"  "심미"등 "4차원의미의 중국"이란 과제로 나누어 독창적인 연구와 글쓰기 업적을 남겼다.
 
 
북경대학, 유엔 과학교육문화조직에서는 여추우를 “글쓰기, 학문, 철학적 사고와 강연 등 영역에서 높은 업적을 쌓은 당대의 거장”이라 높이 평가 했다.
 
그리고 상해시 교육위원회에서는 또 그를 위해 특별히 "余秋雨大师工作室"을 설립해 주고, 중국예술문화원에서는 "余秋雨书院"을 설립했다.
 
내가 여추우 선생과 18년만의 재회를 이루게 된것은 2018년 8월22일 상해의 아담한 다방에서였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 통화를 하거나 조수를 통해 서로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우리의 대담은 일체 매스컴을 차단하고 비공개로 진행되었는바, 그뒤 작년 10월과 금년 3월에도 부부동반으로 회식을 하면서 대담을 나누었다.
 
대담은 서로의 글쓰기, 비교문화, 세계문명과 중국문화 인생살이 서예미술 등 다 분야에 걸쳐 구애없이 진행되었다. 우리의 대담은 마치 시나리오 각본을 써놓기라도 하듯이 서로 척척 대화가 맞아들어 통쾌하고 자유로웠다.
 
여추우 선생은 "우리는 서로 넘 통하는데가 많아서 기쁘다. 서로 미움받은 적수도 많고, 대응하는 방법도 유사하고 서예, 미술을 애호하는 공동언어도 많다”고 연속 말했다.
 
아래 우리의 수차례 대담을 간추려서 정리하는 바이다.
 
 
1. "문화대산문"의 개척자
 
김:여서생님, 이렇게 18년만에 재회하니 감개무량합니다. 2000년 8월 초 히로시마서 선생님과 초대면 했을 때는 ,제가 만 37살이었고 선생님이 55세 연강역부한 중년이였는데, 벌써 제가 그 당시 선생님의 나이가 되었고 선생님은 72세 고희의 줄기에 들어섰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지 연세보다 젊고 활기에 찬 선생님의 모습을 접할수있게 돼서 너무 반갑고 기쁩니다. 유명한 중년 학자, 작가로부터 이미 전세계 화인의 사랑을 받는 문화대사( 大师 ), 거장으로 되신 선생님, 오늘은 제가 많은 화두를 지니고 여러 분야에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벌써 18년이 흘렀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그때 애송이 청년학자인 김선생도 이미 “동아시아 귀재”라 불릴 만큼, 동아시아 비교문화계의 제일인자로 성장했으니 대단하지요. 그 사이 나도 김선생의 중문학 책을 사서 읽었기 때문에 “이 친구 참 잘하는군”하고 속으로 언젠가는 만나고 싶었어요. 근데 오늘 상해서 이렇게 상봉하니 (웃음) 감회 새롭군요!
 
김: 고맙습니다! 대사께서 칭찬해주시니(웃음)
 
선생님, 그때 《文化苦旅》를 번역감수하면서 제가 감탄한 것은 정말 지금까지 중국산문사에서 없었던 미증유의 "문화대산문"을 개척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세계 화인세계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킬수 밖에 없었지요!
 
이 책에서 선생님 "답사 (旅)"를 통해 자연과 유적을 중국 인문, 역사의 신발전과 그것을 철학적 심미영역으로까지 확산시켰습니다.
 
여: 1986년 ~1991년 까지 나는 상해희극학원(대학) 학장으로 재직했는데 전국에서 가장 젊은 학장으로 많은 영예를 안았어요. 그런데 나는 성격상 행정직에 매이는게 싫어서 1991년 사직을 하고 단신으로 서북고원으로부터 시작하여 계통적으로 중국문화의 중요한 유적을 답사했습니다. 당시 나는 이국의 한 노교수의 계발을 받고 이 결정을 내리게 되었지요. 이 교수님은 연로한 체구를 끌고 중국서남 소수민족지역을 모험적으로 답사했어요.
 
여기서 힌트를 받은 나는 새롭게 중국 땅을 밟고 중국문화에 대한 사고와 추적을 노렸습니다.나의 문화고행(苦旅)은 이렇게 시작됐어요. 내가 답사주제를  "백년의 혈류를 답사하여 천년의 휘황을 찾아낸다”(穿越百年血泪,寻找千年辉煌 )고 했었지요.
 
김: 이로부터 "문화대산문"이 탄생되며 《文化苦旅》《山居笔记》등 책들이 전세계 중문독서계에서 "최대의 인쇄량을 자랑하는 문화서적"으로 부상했으며 선생님도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중문작가의 한사람으로 거듭났지요. 그리고  "문화행자( 文化苦旅 )"로서 사명감으로  세계문명유적지를 답사하게 되는데 언제 부터이시죠?
 
 
 
2 “문화행자”의 기나긴 노정
 
여: 1999년부터이지요. 《文化苦旅》는 초기작품이라서 답사연구의 요령은 있었으나, 구체적 행문에서는 글쓰기 흔적이 너무 많았어요.
 
 
《文化苦旅》는 내가 국내에서만 답사연구했는데 많은 문제에 봉착했기때문에, 이런 담벼락을 넘는 방법으로 중국문화권을 뛰어넘어서 세계로 나아가야 된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이 익숙한 문화권을 벗어나서 세계의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야 자신이 몸 담근 중국문화에 대해 잘 파악할수있지 않겠습니까.
 
이 점은 유명한 비교문화 학자인 김선생도 너무 잘 알고있으리라 믿지요!
 
김: 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제가 25살때부터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으며 동아시아 비교문화영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하면서 심심히 느낀것은 타문화의 비교, 대조가 "문화의 거울"구실을 한다는 것이었어요. 거울을 통해 타문화만 인식할뿐만아니라 자기 자신도 알수있게끔 하니까요.
 
선생님의 《文化苦旅》《山居笔记》가 중국 인문과 인격, 중국문화의 정신적 귀속과 사회적 재난등을 탐구했다면《千年一叹》《行者无疆》은 세계의 문화와 중국문화에 대해 이성적인 비교고찰을 했다는것이 돋보입니다.
 
여: 1999년부터 시작하여 홍콩의 봉황위성TV국에서 세계대문명유적에 대한 역사적 고찰하는 프로를 갖게 됐어요. 애급에서부터 출발하여 중동으로까지 수만 킬로미터를 보행하면서 촬영,보도, 관찰을 하고 중계하는거예요.
 
 
처음 우리 집사람 마란(马兰 )은 반대했어요. 중동지역에는 전쟁이 빈발하니 위험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하두 굳세게 나오니까 동의를 하더라구요.
 
김: 그렇지요! 목숨을 걸고 하는 문화탐험이니까요!
 
여: 맞어요. 그 시기를 기록한게 《千年一叹》인데 이야말로  탐험하는 글쓰기였습니다.(웃음) 북아프리카, 중동, 중아시아에서 남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이 테러와 공포로 휩싸인 곳이였고 날마다 납치당할 위험성이 대단히컸지요! 매일 어디서 식사하고 주숙하는지조차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내 문장이 매일 한편씩 위성을 통해 세계각지 중요한 중문신문에 연재됐기에 중단을 할수 없었어요. 그래서 황야의 암석위에 엎드려 쓰거나 짚차 차륜에 엎드려 쓰군했는데 체크할 사이도 없이 발표해나가군 했습니다.
 
《行者无疆》은 유럽답사기록인데 테러위험은 없지만 글쓰기 상황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 한편씩 쓰면서 발표했거든요. 나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만킬로를 뛰면서 위험한 지구를 답사한 인문학자이기도 합니다.
 
 
3.중국 ,거대한 비만증과 같은 …
 
김: 일본《아사히 신문》에서 2000년 "세계를 뛰어넘은 10대국제인물"로 선정한것도 선생님의 업적을 평가 한것이지요.  일개 문명비평가, 비교문화학자로서 저는 선생님의 경계를 뛰어넘는 문화고찰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대륙문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러벌 시대 중국에는 세계를 향해 이거라 할 만한 문화를 갖고 있나요?
 
여: 오늘의 중국에 대해서 나는 중국이 하두 비대하여져서 시장거리에 홀연 나타난 거대한 비만의 거인처럼 사람들에게 생소감과 긴장감을 주고있다고 봐요.
 
중국문화가 미국이란 대국처럼, 위압감을 주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의 매력도 발산하는 것과 같은 그런 문화적 정신적 가치를 과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비만의 거인처럼 체통은 웅장하지만, 세인을 감복시킬 가치관, 정신적 매력이 없다는 말씀이시네요?
 
여: 그래요! 유감스럽게도 중국문화가 문화적 정신가치보다도 겉치례의 이벤트처럼 화려하고 방대하지만, 실속이 없고 지금 시체말로 하면 격(格局 )이 작다는 겁니다.
 
결과, 정신적 가치가 결여하고 얄팍한 세속의 가치관만 난무하게 됐어요.
 
자, 보세요. 민간에서 숭배하는것은 "성공"이고, 관계(官界 )에서는 민수( 民粹)이며, 학계에서는 "국학( 国学)"을 떠 받들고 있습니다.
 
이 삼자가 바로 중국이란 거인의 성격인바, 사실 이런 "성공"으로 인해 공리성만 따지고, "민수"로 인해 떠들고,"국학"으로 인해 진부합니다.
 
이런한 거인이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도 누구나 존경하고 매력을 느낄수 없지요!
 
 
4. "국학",여기가 문제다
 
김: 좋은 지적이십니다. 방금 얘기중에서 "국학"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십시요.
 
여: 나는 "국학"이란 말에 이의( 异议)를 갖고 있어요. "국학"을 만일 그냥 "중국학" "중국문화"등으로 부른다면 정상이지요. 그런데 굳이 학문을 "국기" "국가( 国歌)"와 같은 정치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 담론하는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국가주의"가 "국학"이 추구하는 권위가 돼버렸다면 "배타주의"로 기울어지고 일련의 논리적인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지요.
 
 
김: "국학"이 배타적 "국가주의"의 장치로 된다면 그건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른바 국 ( 国 )자가 붙은 국어, 국문, 국학…등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시, 19세기 중후기 20세기 초에 유럽과 일본에서도 성행했는데 "국학"이 그런 맥락에서 발현된다면 문제이지요.
 
여: 그렇지요. 중국안에 많은 민족문화 일테면 선비문화, 돌궐문화, 서하문화, 만주족문화, 몽골문화도 있는데 이를 배척하는것도 문제지요.
 
그리고 이른바 "국학"이라고 떠드는 걸 보면 대개 복고문화( 复古文化 )이예요. 일체 문화의 생명력은 창조적인 창신문화에 있는데 그걸 방치하고 옛것에 집착하면 창발력이 방치됩니다. 요즘 TV도 그렇고 많은 분야에서 복고주의가 성행하고 있는데, 복고문화는 극도로 자신감 있어 보이지만 그 뒤에 은거하고 있는 것은 극도의 자신감 결여이지요!
 
여기에 매달려 세계의 기타문화와 대등한 대화의 가능성이 감퇴되고, 자신에 매달려 자미자취( 自美自醉 )된다면, 이것은 사실 개혁개방후 중국문화의 후퇴입니다. 그러니 이런 유치하고 우매한 행위나 사고방식은 사실 우리를 세계와의 교류를 차단시키는 함정을 판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5. 중국문화의 약점과 병페는 무엇인가?
 
김: 그럼 선생님은 중국문화에 존재하는 병페나 약점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여: 간략해서 말한다면 3가지 약점을 지적하고 싶어요. 첫째, 공공공간 ( 公共空间 )의식이 결여하거나 생소한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보면, 외국에 여행간 중국인들이 도처에서 가래침을 뱉고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호텔에서 마작을 놀거나 도박을 하는 등 저열한 행위는 외국인이 "도덕성이 없는 중국인"이다 비평을 하잖습니까!
 
외국인의 비평을 받아도 할말 없지요. 분명 공공공간의 룰을 모르기때문이지요. 사실 그 책임은 중국문화에 있지요.
 
김: 문화인류학에서 인간관계를 동심원(同心圆)으로 표시하는데 맨 안이 인정권, 중간이 의리권 맨 밖이 공공권입니다. 일본인이 공공권, 한국인이 의리권, 중국인이 인정권에 속해있는데, 이는 중국문화가 공공공간의식이 결여하고 아는 사람, 자족 등 자기인( 自己人)에 익숙돼 있고 이 안에서는 질서 도덕이 잘 유지되지만 밖에 나가면 공공권의 사람은 外人(외인)이고 질서유지가 엉망이지요. 공공권문화에 익숙돼 있지 않는건 그 만큼 현대화가 안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 재미난 말씀이네요. 두번째 약점은 실증의식(实证意识)이 결여 한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황인우(黄仁宇)교수가 지적하다시피 중국역사의 최대의 폐단은 "수자화 관리가 결핍한것"이지요. 우리 나라에서 한때 성행했던 "무당산량이 20만근"등 한 없이 부풀린 수자 통계가 어느 하나 실증 된거 있나요?(웃음)
 
김: (웃음)그렇지요!
 
여: 사실 실증의식의 결여는 과학의식의 결여를 의미합니다. 이런 경향은 중국문화로 하여금 줄곧 "충간만 따지고 진가를 불문하는 (只问忠奸,不问真假 )"진흙탕속에 빠지게 했습니다. 진가를 따지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건 다 기초를 상실하고 말지요!
 
가짜제품, 허위는 어느 나라나 있겠지만, 중국에서는 너무 창궐하고, 루머도 중국에 제일 빈번하지요. 이런 원인은 죄다 중국문화속에 진가를 가르고, 위조품을 제거하고 루머를 해제시키는 장치와 기능이 없기때문입니다.
 
김: 맞는 말씀이예요.
 
여: 세번째 약점은 법제관념이 결여한겁니다. 난 정치적 각도가 아닌 문화적 각도에서 이 문제를 말하고 싶어요. 법보다 주먹이라는《수호전》호걸에서 보여주다시피 "법외영웅"을 우리는 숭배하지요. "강호"는 법과 멀리있고 "양민"은 줄곧 고수를 하고, "청관(清官)"은 법외에서 호인역을 맡아요.
 
중국문화는 법률관념에 생소하고 이럼으로 중국의 여러 대중들이 현대화에 들어서는데 크나큰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김: 완전 동감입니다. 사실 중국문제는 본질적의미에서 "인간문제" 즉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교양, 소질문제에 귀결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체제의 탓을 하는데 일리가 있지만 역시 어디까지나 인간, 국민의 소질, 교양이 체제를 결정하는 하나의 가장 굴직한 근간이지요. 국민의 소질, 교양이 상승되면 문화의 질, 삻의 질도 향상되고 중국문화의 질이 존경받을수 있는 쪽으로 상승할 것이라 믿습니다.
 
 
6. 당대 80년대 중국문학의 대기상( 大气象)
 
 
그럼 이번에는 중국문학, 특히 당대문학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여: 현대문학에 비해 나는 당대문학을 더 높이 평가해요. 내가 매번 뉴욕에가서 강연을 할 때면 하지청(夏志清 )교수님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청강하러 오군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친구로 되었어요. 하선생이 내게 자기는 노사(老舍)의 소설을 싫어 한다는 고백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나는 하선생님이 《중국소설사》에서 극력 추천한 전종서(钱钟书 )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기지( 机智 )를 자랑하는것 같다고요. 그리고 하선생님이 추천한 장애령( 张爱玲)의 소설에는 너무 지나친 의도적인 자질구레함이 많아서 좋아하지 않습니다"고 말했어요.
 
그리곤 우리는 술잔을 들고 대소했습니다.
 
 
 
김: 저 역시 당대문학의 실적이 현대보다 크다고 봅니다.
 
여: 80년대 당대문학은 매우 중요한 황금시기라고 생각해요. 그 시기 중국의 문학예술은 대기상( 大气象)으로 박력있고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매력이 있었고 총제적으로 "5.4"시기를 훨씬 초월했습니다.
 
김: 지당한 말씀입니다. 전번에 제가 가평요(贾平凹 )선생과 만났을 때, 여선생님과 친하다고 하시던데, 중국문인, 작가들과 친교가 많으신가요?
 
여: 나는 사실 산문작가이지만, 문인들과 별로 사귀지 않아요. 그러나 당대소설가중에 가평요, 막언(莫言 ),풍기재(冯骥才),여화( 余华), 장위(张炜) 등 과는 친구이고, 연장자로서는 정현량(张贤亮),왕몽(王蒙)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행건(高行健 ), 류진운( 刘震云),마원(马原 )등 작가들과도 친교가 있지요.
 
산문계에서는 주도(周涛)와 친우이고, 해외에는 김용(金庸),백선용(白先勇 ),여광중(余光中) 등이 모두 친구입니다.  용응대(龙应台)와도 본래 친구였고 , 한때 가평요와 우리 삼인이 "풍격이 판이한 3문우"를 결성했었어요. 그런데 그녀가 교관이 되였으니 계속 친구로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웃음) 문학에서는 직위가 너무 높으면 우정에 장벽이 되니까요.
 
 
7. "문화차이를 기뻐하라"
 
김: 동아시아비교문화학자로서 저는 선생님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글쓰기를 해온 선생님의 주장과 지견에 동감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한 정치학자 사무얼 헌팅턴 교수의 《문명의 충돌》이란 테제가 인구에 화자했습니다.
 
그러나 여선생님은 그의 "문명의 충돌"론에 반기를 들고 문화차이를 긍정하고 차이를 흠상하며 차이로 하여금 세계평화의 뿌리로 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 그래요! 2004년 유엔에서 발표한 "인류발전리포트"를 보면 "문명충돌론"을 부정했어요. 나는 유엔 개발기획부서의 초청으로 이 리포트에 관한 연구심퍼지엄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심퍼지엄중에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가 영어 difference (차이), diversity (다양성) 이 두개의 D에 또 하나의 D가 증가됐는데 남아프리카 대주교 투투의 그 유명한 말 “Delight in our differences”(우리는 차이를 기뻐한다)입니다.
 
자, 보세요, 투투의 말은 그냥 차이에 대한 관통이나 양해가 아니라 차이를 즐거워하고 향수하고 갈구하는 뉴앙스이지요.
 
김: 이 말에 인류문와의 포용성과 평화공생공존의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여: 문화의 다양성, 다원화는 목적이 아니지요. 목적은 선택의 자유를 주는것인데, 문화적 신분(아이텐티티)의 선택도 포괄돼있어요.
 
아무 문화든 자신의 우월성을 과장하거나 타문화의 위혐성을 과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 두가지 과장은 모두다 타문화의 생존권과 전파권을 박탈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사람의 선택권을 박탈하는것과 같습니다.
 
기쁜마음으로 다원성을 향유하고, 소심하게 대립을 경계해야 만이 우리가 문화의 매력적인 정체적 생명을 파악할 수 있어요..
 
8. 왜 끊임없이 "탈출"하는가?
 
김: 대산문작가로서, 문명비평가로서 여선생님의 근원적인 특질의 하나는 "여행" "답사"를 통한 문화적 탈출(出走 )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出走를 통해 문명을 읽고 문화의 차이와 동질성을 발견하고 또 그 사색의 여과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문명의 파중군"으로서 선생님의 중국문화사에서의 족적은 선명하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선생님의 " 出走"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네요.
 
 
여: 좋은 화제를 꺼냈습니다.(웃음) 나는 답사, 여행을 일종의 철학적 고도에 끌어올려 "생명적 탈출" 또는 "탈출적 생명"으로 명명하고 싶어요.
 
김: 과연 좋은 명명이시군요.
 
여: 여행, 답사란 우리개인의 협애한 생명을 확대시키고 향상시킬수 있고, 또한 원생명에 대한 돌파와 초월이기때문에 나는 그것을 일종의 "생명의 탈출(出走)"이라고 불러주고 싶어요.
 
곰곰히 색각해보면, 우리의 생명상태가 겉보기엔 매우 멋있어 보이지만, 기실 매우 비좁고 작아요.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의 유능한 고전문학교수가 있다고 칩시다. 일반인에게서 그는 지위가 있는 "성공인사"이지만, 사실은 그의 평생의 생명적 스케일(格局 )은 점점 갈수록 축소되어 버리지요. 그가 대학입학후 이 전공을 선택한후,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종신직업을 한정해 버렸지요. 그후 그의 매차례 진급은 오히려 그의 한정된 범위를 점점 더 좁게 몰아버립니다. 박사 전공이 당나라문학이고 어느 당시인을 연구과제로 삼았다면 그 외에는 손을 대지 않고 무지하지요.
 
이런 "성공인사"는 너무나 일찍 생명의 범주를 틀에 박아 놓았고 이것으로 자신의 지위와 대우를 확립시겼습니다. 그 지위나 대우가 높다해도 그 생명의 스케일과 활력은 사실 너무 작은겁니다.
 
많은 공무원, 기업인, 직장인들도 별다름 없어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직업,직장,회사와 겹겹의 인관관계속에 예속시켜 놓았습니다. 그들의 생명에는 이탈, 일탈, 자기 반역이 없으며, 정신적 자유의 공간이 적어지고 재선택의 가능성이 없어집니다.
 
 
김: "자기폐쇄" "자기답습"의 상태에서 생명을 태워버리고, 자신이 하고싶은 그런 유열, 만열감 내지 행복감이 없습니다.
 
여: 그래서 이런 폐쇄와 답습을 해탈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出走(탈출)입니다. 내가 일생에서 거듭 끊임없이 탈출한 것은 자신의 사상, 의식 내지 생명력을 보전하고 세계와 대화를 나누면서 생명의 의미를 실현하는것이지요.
 
 
내가 만일 번마다 "탈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원히 오만하고 실적을 별로 올리지 못한 문인이었을겁니다.
 
 
내가 "탈출"이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 쇠사슬을 벗어나 여행하는 사나이, 국제교재편찬자, 대학학장, 문화유적지 현장해설자, 인류문명의 강연자…로 거듭 날수 있었지요.
 
김: 너무 잘 알만합니다. 저 역시 자기 탈출로 자신의 글쓰기, 사색과 독서, 그리고 국경을 ,경계를 뛰여넘는 학자로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근데 선생님 때로는 탈출 후 되돌아보면 탈출전의 자신이 생소한 감이 없지 않나요?
 
여: 물론 있지요. 매번 "탈출"은 바로 생소한 자신을 찾고 생소한 자신을 만들며 그러고나선 그 자신을 향수하는 겁니다.(웃음)
 
김: (웃음) 그렇네요. 탈출을 통해 경계를 넘는 길이야 말로 자기 진화의 길이라 생각해요. 죽은 물 같이 부동하는 인생, 사심과 생명은 협소한 틀안에서 자멸을 자초하기 십상이니까요.
 
여: 문화의 중대한 책임의 하나가 바로 자신과 타인을 협소한 틀속에서 경계속에서 탈출하도록 인솔하는 것입니다.
 
 
 
9. 도필문화 (刀笔文化 )
 
김: 여선생님은 당대 중국문화사에서 드높은 명성을 획득한 동시에 가장 찬반양론으로  펨훼당하고 중상,모독 당한 문인이기도 합니다.제가 수집한 여선생님에 대한 비판서적만 해도 20여종이나 되고 어느 통계데이터를 보면 여선생을 비판한 문장이 무려 1만 6천여편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여선생님을 에워싼 중국 당대문화계의 살풍경이 아닌가 합니다.(웃음)
 
여: (웃음) 이게 다 어디서 비롯된지 아세요? 바로 중국문화속의 도필문화(  刀笔文化 )에서 기인된 거예요!
 
김: "도필문화"라면 필로 인신공격을 하는건가요?
 
여: 맞아요. "도필문화"는 또한 공간(攻奸)문화,비방문화, 참부(谗父)문화, 주심(诛心)문화, 비수(匕首)문화,정인(整人)문화라고도 칭할수 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무슨 뜻인지 알만하지요. 이런 문화는 전통적으로 고대로부터 형성됐는데, 근대에 와서 크게 대성합니다.
 
  "도필문화의 요람은 근대 상해에서 출판편집된 잡지 신문이지요. 이로부터 개방된 소수 도시나 반 개방도시에 전파되였습니다. 도필이 문화로 될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의 논리를 구성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논리는 인간을 휘말려 들일 수 있어요.
 
첫째는 진공으로 정의를 자칭하는 겁니다. 무릇 도필은 자칭 정의( 正义 )라하고, "정의를 위해 진공한다"고 부르짖지만, 강도적 논리입니다. "너를 강탈하는데는 니가 강탈당한 자원이 구비됐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너는 강탈을 당해야 한다."
 
내가 장기간 관찰한데 의하면, 한 인간이 인신공격을 당했다면 평생 뒤집어 쓰게 되며 자신의 필생의 저주가 됩니다.
 
그리고 허위로 진공하고, 날조도 불사합니다. 도필문화가 사람들에게 용감한 인상을 주지만 큰 위험성은 없거든요. 중국 현재 상황하에서 "명예훼손침해"로 소송당했다 해도 인치사회에서 법적으로 가해자가 상당히 안전해요.
 
여하튼 도필문화는 중국문화의 현대적 재난입니다. 현재 중국의 경제 발전이 현저하고 잘 살게 되였지만, 사회문화풍기와 문화건설은 우려를 자아냅니다.
 
여기엔 절반은 "도필문화"와 관계있어요. 문명이란, 이러한 도필문화, 폭격 악투에서 해탈 되는 것입니다.
 
김: 사실 여선생님은 중국 "도필문화"의 큰 패해자이지요. 저도 조선족 100년사상 민족사회내부에서 가장 큰 "도필문화"의 피해자 입니다. 여선생님이 한문화권속에서의 큰 피해자이 듯이, 전 조선족문화안에서 가강 큰 피해자로서, 그 영향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습니다.(웃음)
 
여: 내가 아는 김문학선생은 당대 조선족이 배출한 국제적 시야와 독립적 사고를 갖춘 초고의 기재(奇才)입니다. 그런 기재인만큼 "도필문화"의 공격은 받기 마련이지요.
 
김: (웃음) 감사합니다. 저도 그런 가해자에게 한편 감사합니다. 왜냐면 그들이 나를 늘 의식하고 살고 있으니까 이런 마이너스 팬도 팬이 아닙니까?
 
18년전 히로시아에서 대담할 때 선생님은 사람이 유명해지면 공격을 받기 마련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저에게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10. "천리마는 발목의 진사를 아니 싰는다"
 
여: (웃음) 많은 사람들이 인신공격을 대처하는 "호신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내 비결은 바로 "천리마가 달리는데 발목에 묻은 진사를 아니 싰는다"( 马行千里,不洗尘沙 )이예요.
 
 
 
이건 또한 선배로서 후배에 향한 조언이기도 합니다.
 
1.무함에 대해 절대로 반박, 해석, 권고하거나 거들떠 보지 말기. 일단 대응하면 상대가 반은 이긴 것이니까요.
 
2. 무함자와 대화, 화해 할 생각 말고 방관자의 동정, 연민을 살 생각 절대 마시길. 그런데 신경쓰면서 생명의 가치를 폄훼시킬 필요 없어요.
 
3. 만일 무함이 당신에게 손해를 주었다 해도 그냥 그대로 접수하기. 무함은 바로 당신의 "인생청결제"이기도 합니다.
 
4. 무함을 조우했다하여 절대로 자신의 창조적 활동을 멈추지 말것. 더구나 자신의 일이 무의식중 무함자에 대한 대꾸나 반박으로 되지말 것.
 
5. 그림자 없는 고층빌딩은 아직 채 짓지 못한 것이요. 등나무가 휘감지 않은 거목은 아직 기상이 모자란 거다. 이런 기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6. 무함을 받은 사람은 "해를 보배로 전화(化害为宝)”시키며, 내심속에 계율을 세워야 합니다. 일테면 필생에 선량에 대해 공격하지 않고, 미지에 대해 공격하지 말아야 합니다.
 
 
김: 과연, 구절마다 선생님의 실제적 체험속에서 걸러낸 대응법의 "좌우명"같은 말씀입니다.
 
저도 기실은 저를 십여년동안 무함, 공격하는 자에게 한 번도 곁눈판적 없어요. "만경창파를 가르는 바다의 고래가 언제 개울 물의 미꾸라지에 곁눈 판적있나?" 이게 저의 대응 방법입니다.
 
선생님, 한때 중국 사회와 언론계, 문화계에서 떠들썩 했던 여선생님의 문화대혁명시기 집필그룹 석일가(石一歌 )의 성원이었다는 비판, 일명 "석일가사건"에 대해 그 진상을 알고 싶습니다.
 
 
 
 
 
11. 석일가( 石一歌 )사건의 진상
 
여: (웃음)상세히 말하자면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간략해서 말씀드릴께요. 내가 쓴 《문공(门孔)》이란 책에 전문 <"석일가"사건>이란 글이 있어요. 다음 번 그 책을 한 권 드릴꺼니까 한번 읽어보시면 알게 될겁니다.
 
1990년 12월 내가 동남아시아 고대문명 유적지를 답사할 때, 북경대학 학생 여걸( 余杰 )이 북경에서 "여추우, 당신은 대 참회를 안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하여 내가 문혁시기 상해의 석일가(石一歌 )란 글쓰기 단체에 가담하여 수십편 정치문제가 있는 글을 발표했기 때문에 "문혁잔여" "문화망나니"라고 공격했어요.
 
김: 네, 그렇군요.  저도 그의 책을 읽은 적 있어요. 신예비평가, 수필가로서 대학가에서 이름이 나있었지요.
 
여: 그때 난 내일이 바빠서 그런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가, 2000년 1월 네팔 경유하여 사천에 들어와서 한 기자한테 부탁하여 여걸씨한테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뒤 그 기자가 편지를 공개해 버렸네요. 나는 가벼운 심정으로 혈기왕성한 여걸에게 루머를 믿지 말고 진심을 알고 글을 써야 하며, 내 자신도 문혁시기 조난 당했던 일을 밝히면서 그 "석일가"의 진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김: 그렇군요. 문혁, 경험자가 아닌 70년대생 여걸이 선생님을 전문 연구한 적은 없으니, 일시 만용으로 그럴수도 있겠네요.
 
여: 1971년 10월 10일 주은래 총리의 지시로 상해에서 로신연구를 목적으로한 《로신전>》편찬소조와 각 대학에서 추천한 성원으로 구성된 “석일가(石一歌 )”글쓰기 소조가 탄생됐어요.
 
나는 《로신전》편찬소조에 가입했다가 중퇴했습니다."석일가"는 복단대학, 상해사범대 등 교원으로 구성된 교재편찬소조의 필명이었거든요.
 
 
김: 당시 선생님은 어떤 글을 쓰셨습니까?
 
여: 나는《새로 발견된 노신의 일문(佚文)을 읽기》 와 《호적전》의 첫머리만 썼습니다. 다 내 이름 "여추우"석자로 발표했는데 전혀 "정치문제"가 없지요(웃음)
 
여걸씨가 내게 쓴 사죄문을 공포하고 자신이 문혁식으로 현재의 지식인을 공격했다고 사죄하고 나의 관용한 아량에 탄복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뒤 무슨 이유인지 여걸이 또 나를 비난하고 고원청(古远清) ,손광선(孙光萱),여개위(余开伟)  등이 나름 집중포격했습니다. 그 중에 친구문인 사엽신도 들어있었어요.
 
그러나 난 한마디도 반격도, 변명도 안했어요! 그 땐 전국의 공공지식인들도 누구 하나 나를 위해 변명해 주는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 다수도 이 집중표격전에 가담하였으니, 이게 바로 중국의 일부 "공공지식인"의 생존지도(生存之道)이니까요.
 
김: 선생님이 쓰신 공개현상문(悬赏文)이 재미있던데요(웃음)
 
여: 결국 내가 한가지 방안을 고안해냈지요. 신문에다 당당히 "현상"문을 발표했어요.
 
  "나를 공격하는 자 중에 증거를 내놓아, 내가 그때 “석일가”란 이름으로 문장 한편, 한 단락, 한 구절, 한 줄이라도 그대들이 비탄한 그런 글을 썼다는 사실을 표명만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자신의 일년 수입, 인세를 지불할 것이며, 또한 그 증거들을 전국 매체에다 전부 공개 발표하겠습니다." 동시에 나는 이 "현상"을 처리하는 변호사의 성명까지 공개했어요.
 
이 "현상"책은 "석일가"성원에 해를 주지 않고, 공격자들도 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위해 난 정말 고심했답니다.(웃음)
 
12. 거목이 바람을 부른다.
 
김: 그러네요(웃음) 정말 많은 곤혹을 치르셨습니다.
 
여: 그 뒤 "석일가"사건이 종연됐고 그 누가 한마디 대꾸도 없었답니다.(웃음)
 
김: 무언의 사실은 소리높은 웅변보다 수백배 유력하지요! 저도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공격자에게 "공로상"상패를 드린다고 공개 했어요. 물론 농담으로 한번 가볍게 웃겨본 것이지요(웃음)
 
여: 이제는 별로 나를 공개적으로 인신공격하는 자가 없습니다.물론 뒤에서 쉬쉬 하겠지만 , 아마 "여추우사건"은 종말됐나봐요(웃음)
 
김: 거목이 바람을 부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웃음)
 
미국의 예일대학 법학원의 로도(鲁淘)선생이 전문 이런말을 했어요. "(여추우사건)은 이대로 결속짓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집중적으로 중국의 공인 명예권, 인신권의 법적보호가 극도로 박약함을 노정시겼다. 이 사건의 수많은 참여자, 그들의 문장을 발표해준 신문잡지, 출판사도 포괄하여 정상적인 법치국가라면 모두 형사죄책을 져야 한다. 어떤 자는 매우 엄중한바 일테면 그 고원청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비교적 전면적인 반면교재로서 후세들에게 중국 당대 사법사의 매체사연구의 분석, 해주를 제공해준다.”
 
자, 그럼 이번에는 화제를 바꿔서 선생님의 가족얘기, 행복한 가정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사모님(16세연하) 마란(马兰)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황매극(黄梅戏)명배우고, 선생님과의 금슬이 좋기로 "잉꼬부부"로 소문났잖습니까?
 
 
 
여추우 부부(중간)와 김문학 부부(좌우)
 
13. 잉꼬부부
 
여: 김선생도 아시다 시피, 마란(1963년생)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황매극 배우지요. 18살에 홍콩에서 유명해지고 20살에 전국인민대표로 선출되고 신문매스컴에서 "사랑하는 배우" 전국앙케트조사중 번마다 1위를 차지했어요.
 
김: 사진에서도 보았지만, 오늘 실제로 만나보고 나니 미인이셔서 놀랐습니다. 두분은 남재여모(男才女貌))의 본보기가 아닐까요!
 
여: 그런 거대한 명성을 자랑하는 마란이 내게 경탄을 자아내게한 것은 우선 뛰여난 배우로서의 연기력이었어요. 내가 상해서 처음 그녀의 연극을 보았을때 느꼈지요. 나의 《예술창조공정》이란 책이 우리들의 인연을 맺어준 셈입니다.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예술 전문가의 말에 마란이 이 책을 읽고 나와 만나자 했습니다.
 
그녀의 연극을 보고 초대면 하게 되었고, 서로 상대의 인격, 재능에 매료되였습니다.
 
어느날 내가 그녀에게 "내 생각에 마란은 내 아내로 되는게 적합할 것 같아"고 말하자 그녀도 즉석에서 "내 생각에도 당신이 내 남편이 되는 게 좋다고 느껴요!"하고 대답했지요 .(웃음) 이게 프로포즈인 셈이지요.
 
김: (웃음) 간결한 프로포즈가 멋있네요!
 
여: 그녀는 명예, 성취, 지위를 아랑곳 않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었어요. 그러나 한가지 용서하지 않는 건 인간을 공격하고 상처를 주는 자, 아첨하여 득세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상견한만( 相见恨晚 )하게 느낀 건, 마란의 무사(无私)한 성품이었답니다. 무사함은 그녀의 본능인 것 같았어요. 이렇게 첫번 째 혼인에서 실패한 나에게 정말 지기를 찾게 했어요.
 
늘 기자의 인터뷰에서 "두분은 누가 먼저 따랐나요?"하고 물으면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대답해요. "그건 필요없으니까요!"
 
아시다시피 내게 명성이 따른 만큼 폄훼, 비방, 중상하는 자도 수 많이 따랐지요. 번 마다 마란이 위안해주고 나를 격려해 주었어요. 내가 마란에게 의존하는 의존도는 정말 높아요. 
 
내 생활의 전부가 원고지, 여행답사, 마란 이 3자로 구성돼있지요.
 
김: 선생님은 휴대폰도 없으시고, 메일도 하지 않으시니 외계와의 연락은 부인이 맡으시지요.
 
여: 마란에게 의존하는 게 바로 일절 대외 연락은 그녀가 맡아서 하는거지요. 내게 있어서 그녀가 없으면 외계가 없지요. 이런 일을 많은 사람들이 이해 못하겠다는데, 내 이유는 너무 간단하고 충분해요. 마치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편벽하고 고요한 작은 섬을 선택하여 사는데, 이따금 작은 배가 외부에서 음식물을 날라다 주면 되니까요. 이 하나만으로 족해요. 딴건 필요 없다니까요.(웃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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