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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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행문]대포산(김철호) 댓글:  조회:1402  추천:31  2008-09-01
기암괴석 아름다운 산꽃 심산속 같이 청신한 전설의 산 대포산은 룡정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7킬로메터쯤 떨어져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대포산은 마치 포신이 없는 대포같다. 대포산은 비암산과 마주하고있는데 그 중간 협곡으로 해란강이 유유히 흘러지난다. 유서깊은 약수동샘물터 대포산 바로 밑 동네가 수침툰(水枕屯)이라는 마을인데 마을뒤로 뻗은 골짜기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약수동광천수공장이고 4킬로메터 남짓이 더 올라가면 수칠골-약수동샘물원지가 있다. 약수동광천수공장 공장장 리영국씨가 세멘트집으로 보호해놓고있는 샘터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알고보니 이 샘물은 1885년 조선이주민들에 의해 발견된 유서깊은 샘이였다. 리공장장의 긍지에 찬 설명이였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파란 새이 밑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이 알렸다. 리공장장은 대포산을 오르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괴상한 암벽 신기한 벼랑 잡목림속에 난 오솔길을 따라 산정에 오른후 리공장장이 가리켜준대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릉선을 따라 줄곧 걷다가 일행은 너무도 멋진 암석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탄성을 올렸다. 다듬은것 같은 네모번듯한 바위가 얹어놓은듯 탑처럼 외톨로 솟았는데 아주 름름해 보였다. 맨우의 바위는 아슬아슬 굴러떨어질것처럼 얹혀져있었다. 다시 릉선을 타고 한창 가니 갈림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길을 버리고 잡목림을 뚫으면서 대포산으로 짐작되는 산정을 바라고 걸었다. 이상한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위는 바위인데 콩크리트같은 바위들이였다. 세멘트에 자갈을 섞어 다진 콩크리트가 신통했다. 바위에는 수많은 자갈이 박혀있는데 틀림없는 자갈바위였다. 이번에는 성벽같은 절벽이 나타났다. 그 절벽도 자갈과 세멘트로 다져진것같은 절벽이였다. 절벽은 그닥 높지 않았고 어떤 곳은 층계가 나있어 손쉽게 절벽우로 오를수가 있었다. 한쪽은 수림이고 한쪽은 절벽모서리여서 아래가 환히 내다보였다. 얼마 안가니 절벽끝이였다. 다들 의아한 눈길로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저 몇길 되는 절벽뿐이였다. 아래로 통하는 통로가 있어 내려간후 절벽끝을 바라고 앞으로 걸어갔다. 우에서 볼 때와 판 달랐다. 몇길되는 절벽바위가 군함처럼 앞으로 뻗고있었는데 제법 기세가 있었다. 앞으로 갈수록 바위산은 커다란 함선이였다. 정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래를 향해 손을 젖는 모습이 멋있었다. 닻줄을 올린 기선이 망망한 바다를 향해 금방 출항할것만 같아보였다. 절벽 맨 앞은 뿌죽히 나와있었는데 과연 포신이 불러진 대포같았다. 대포산전설 이 대포산은 원래 대포처럼 을 추켜든 멋진 산이였다고 한다. 지금 이 허리가 불러진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일제를 반대하는 항일봉화가 연변 각지에서 세차게 타오르는 때였다. 룡정의 왜놈령사관이 반일용사들에 의해 불에 타버렸다. 령사관이 불에 타버린후부터 왜놈령사는 알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만 했다. 하여 령사를 소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되여 온 령사도 똑 같은 괴상한 병으로 꼼짝 못하고 들어누웠다. 그래서 일본놈들은 점쟁이와 무당을 불러들여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여 악귀를 쫓는다고 야단을 쳐댔다. 부름을 받은 점쟁이가 눈을 지긋이 감고 입속말로 무엇을 중얼거리더니 하고 소리쳤다. 그 말에 일본놈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자기들이 이 땅을 감점하기 위해 하늘에 사무치는 만행을 저질렀음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살인, 방화, 강탈을 일삼은 일제놈들은 령사관을 세울 때에도 만큼한 땅만을 요구한다고 앙큼한 수작을 꾸며 그 한 장의 소가죽을 가위로 천오리 만오리 오려 이어서 끝내 2,503평방메터의 땅을 강점했던것이다. 그래도 안되니 풍수를 불러다 터자리를 살피게 했는데 그 풍수가 고 했다. 망루에 올라 만원경으로 서남쪽을 바라보던 왜놈부관이 덴겁한 소리를 질러댔다. 그말에 놈들은 땅에 납죽 엎디면서 와들와들 떨었다. 간신히 일어난 령사가 망루에 올라가 만원경으로 부관놈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고보니 그것은 대포가 아니라 대포처럼 생긴 바위산이였다. 대포산을 화근이라고 생각한 놈들은 산을 향해 대포를 쏘았으며 나중에는 비행기까지 출동시켜 폭탄을 수없이 퍼부었다. 하여 대포산은 이 부러진 산이 되고말았다. 대포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제법 멋있다. 룡정시가지가 지척으로 보이고 비암산, 말발굽산, 모아산, 산봉동산 등도 눈에 안겨든다. 해란강이 발밑으로 굽이쳐 흐르고 세전벌이 아득히 뻗어있다. 겨울이면 해란강이 얼음강이 되어 은뱀처럼보이지만 봄, 여름, 가을에는 뭇산들을 비껴안고 거울처럼 반듯하게 흐른다. 전설이 있고 괴암괴석이 있고 아름다운 산꽃과 심산속같은 청신한 공기, 시원한 약샘이 있는 대포산은 룡정의 명산임이 틀림없다
9    [기행문]천혜의 절경 선경대(김철호) 댓글:  조회:1540  추천:26  2008-09-01
기봉 기송 기암 기화요초로 화려한 천혜의 절경 기봉, 기송, 기암, 기화요초가 어울린 천혜의 절경 선경대앞에 서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압도된다. 화룡시 덕화진경내의 선경대는 연길에서 100킬로메터, 길이 잘 닦아져있어 당날치기로도 선경대의 아름다움을 실컷 만끽 할수 있다. 감로수와 칠성암 선경대에 가면 맨처음 감로수와 만나게 된다. 감로수는 높이 24메터, 폭 42메터 되는 칠성암이라고 불리우는 아찔한 절벽밑의 바위혹에서 솟고있는데 누군가 장난감같은 작은 드레박을 만들어 달아놓아 길어마시기가 한결 즐겁기만 했다. 칠성암 앞에 흰대리석불상이 모셔져있고 그 주위를 화단으로 가꾸느라 일군들이 분주히 돌아치는 모습이 보였다. 여름밤, 이 절벽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북두칠성이 신통히도 절벽우에 떠있어 지어진 이름이 칠성암, 옛날에 이 칠성암앞에 한채의 절당이 세워져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당을 북두칠성절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발견된 유적을 보면 조선식 6간구둘집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1885년 하홍락, 유희춘, 황경숙(녀) 등 중과 비구니가 조선에서 건너와 여기에 절당을 짓고 선교를 했다고 한다. 자라봉과 고려봉은 다정한 련인마냥 가지런히 솟았는데 자라봉잔등에는 한 마리 자라가 하늘로 기여오르려다 한쉼 쉬려는듯 멈춰서있는 모습의 커다란 바위가 굳어져있다. 칠성암 오른쪽비탈을 꺾어도니 산으로 오르는 통로가 나진다. 독야청청한 고솔과 잡목사이로 한오리의 좁은 길이 열렸을뿐인데 많이는 반석을 쪼아낸 층계길이다. 기이한 소나무 한 모퉁이를 돌면 다시 한 모퉁이가 다가서고 한 굽이를 지나면 또 한 굽이가 나타나면서 굽이굽이 돌아치는 고려봉 오르는 길, 굽이마다에서 기이한 소나무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면서 발목을 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낭떠러지에 뿌리를 한절반 드러낸채 금방 떨어질것만 같은 기송이 흙 한줌없는 츠렁바위에 뿌리를 뻗고 푸르싱싱 자라는 모습은 엎드린듯, 허리굽힌듯, 가로누운듯, 비탈린듯... 각양각생이였다. 뚝 끊어져 쓰러져버렸댔는데 완강한 생명력으로 다시 허리를 펴고 궁(弓)자형으로 살아난 궁룡송(弓龍松), 땅에 머리를 쳐박았다가 다시 하늘로 오르려고 우뚝 머리를 치켜든 룡의 기상같기만 했다. 뿌리를 바위틈에 박고 그 틈새로 비물과 이슬을 받아마시며 200여년 자랐다는 반룡송(盤龍松), 뿌리우에 얹힌 2톤되는 암석이 뿌리의 자라는 힘에 의해 35센치메터나 들려있었다. 참으로 자연의 기적이 아닐수 없었다. 처자암과 신선궁 반룡송이나 궁룡송처럼 완강한 의력으로 산다면 만사가 통할수 있다고 하여 두 소나무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괴석을 만사통암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약간 올랐다 다시 내려오면 느슨한 길이 된다. 왼쪽은 낭떠러지, 오른쪽 아츠랗게 쳐다보이는 층암절벽을 천자암(千姿岩)이라 하는데 천가지 형태로 보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보살의 큼직한 귀가 그대로 바위에 새겨져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기다란 코를 척 드리운채 굳어져있기도 했다. 너구리, 올빼미, 매부리코... 얼핏 보아도 10여종의 형태를 인차 발견할 수가 있었다. 아츠라니 뻗은 절벽우에 금방 떨어질 것 같이 간들 얹혀져있는 큼직한 바위덩이, 쳐다보노라니 가슴이 다 섬찍해난다. 그러나 정작 그 바위까지 올라가 굴러보면 고착된 듯 끄떡 안는다. 신비한 절벽을 자꾸자꾸 되돌아보면서 10메터쯤 톺아오르니 절벽 벽에 인공으로 파놓은듯한 커다란 홈이 패여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난다 해도 그 속에 몸을 숨기면 비맞을 근심이 없다고 한다. 네댓이 앉아도 넉넉할 바위혹속은 안방처럼 아늑해 보이기까지 한다. 옛날 신선이 이 바위혹속에 앉아 도를 닦았다는 전설로부터 신선궁(神仙宮)이라는 이름이 달아졌다고 한다. 기기괴괴한 바외와 기기괴괴한 소나물ㄹ 숱해 바라보면서 걷노라니 깎아지른듯 아츠라운 자라봉석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절벽밑을 더듬으로 100메터쯤 오르니 자라봉과 고려봉 두 다리 사이였다. 자라봉은 새가 아니고는 오를수 없는 사면절벽이여서 고려봉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정상에 오르기는 그리 힘겹지가 않아서 조금 쉬였다가 단숨에 올랐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선경대의 정경은 말그대로 절승경개이다. 삼형제봉이 장관이고 자라봉도 금방 눈앞에 다가선듯해 손을 내밀면 잡힐듯 싶었다. 고려봉정상에서 바위혹이며 맨 바위우에서 자란 소나무, 진달래, 너비 1메터, 깊이 9메터, 길이 30메터 패여 하늘이 한갈래로 보인다는 일선천(一線天)을 구경하느라면 시간가는줄 모를지경이다. 선경대의 해돋이 그런데 여지껏 등반이 선경대의 한모퉁이를 오른데 불과하며 그 절경도 절반쯤 구경하나마나 하다고 한다. 선경대풍경명승구의 총면적은 12평방킬로메터이며 봉우리가 16개, 주봉인 삼형제봉은 해발 921메터라고 한다. 도합 200여곳의 신기한 경관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주봉에도 오르지 못했고 또 선경대의 신기한 해돋이도 구경못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선경대의 해돋이는 독수봉(獨秀峰)에 올라야 진짜 구경할수 있다고 한다. 이튿날이였다. 아직 어둠이 밀리지 않은 이른 새벽, 손전지를 갖춰들고 운해일출의 경관을 보여준다는 독수봉을 향해 떠났다. 해뜨기전의 푸름을 가르고 산을 오르노라니 그 해돋이에 대한 동경이 더 커지기만 했다. 자매다리를 건너 얼마간 톺아오르니 절벽밑에 시커먼 석굴이 나타난다. 장수동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높이 1메터, 너비 2메터쯤 되어보이는 장수동은 45도각으로 올리빠진 석굴이였다. 손전지를 켜고 들어가니 가운데가 좁아지다 다시 널어지는데 마치 룡이 대가리를 틀어박고 하늘을 오르려 솟구친 자리같아 보였다. 장수동은 22메터나 깊었다. 장수동으로부터 구불구불 뻗은 길은 마치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같다. 날이 밝아짐에 따라 주위도 똑똑히 보인다. 금방 꿩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온갖 새들이 화답이라도 하듯이 삐쫑삐쫑, 따르르따르르... 별의별 소리를 다 내면서 동화의 세계를 꾸며준다. 가는곳마다에서 나타나는 울뚝불뚝, 오목뾰족한 바위가 괴이하기만 하다. 발길에 걸리는 소나무뿌리가 바위를 감싸안고 몸을 비탄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바로 독수봉이란다. 좌우에 20메터 깊이의 깎아지른듯한 벼랑을 두고있는 좁은 바위길이여서 건너기가 아슬아슬했으나 거기에 가야 해돋이를 맘껏 구경할수 있다고 하기에 소나무가지를 갈아쥐면서 끝에까지 나갔다. 선경대명승관리국 윤갑송국장에 따르면 선경대라는 이름은 발해국 3대왕 문왕 대흠무가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서고성에 도읍이 정해진후 14년간 발해국을 통치해온 기간 철주(鐵州)에 대한 시찰을 끝이지 않았는데 철주가 지금의 조선 무산일대, 선경대는 바로 무산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기에 이곳을 지나면서 그 아름다움에 끌려 산정에 올랐으며 또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해돋이까지 구경했다고 한다. 독수봉에 올라서니 어느새 동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아득히 보이는 산정이 불그스레해지다가 점차 진붉게 변하는데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꽃구름은 무시로 붉은 빛, 노란 빛 온갖 빛깔로 무늬를 새긴다. 드디여 일점홍의 태양이 방긋 얼굴을 내미는데 손바닥에라도 담을듯 귀여워보였다. 그 태양을 손바닥에 담는 모습을 취하면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만약 파랗게 개인 날이라면 피빛의 동녘우로 하늘이 밀어놓은듯 파랗게 깔려있어 더욱더 황홀하다고 한다. 선경대의 주봉 각이한 형태로 복잡다양한 조각품을 이루는 바위들이 앞뒤에 굴러떨어질듯이 솟아 그 사이를 지나는 마음 천경을 밟는 심정이였다. 큰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독수봉과 삼형제봉은 더욱 가관이라고 한다. 비물이 츠렁바위를 타고 폭포로 쏟아지는데 웃층바위에서 아래 바위로 계단식으로 쏟아지는가 하면 몇길씩 되는 낭떠러지에 창살같이 내리꼰지며 흰갈기를 날리기도 하는데 그야말로 폭포천국을 이룬다는것이다. 해발 921메터의 주봉인 삼형제봉에서 고려봉과 자라봉이 손잡힐듯이 바라보이는데 높은데서 마주 바라보는 기품이 더욱 름름하고 어엿했다. 삼형제봉은 기상이 거칠고 험악하여 고려봉과 자라봉의 탈속한 고운 모습과 같지 않았다. 고려봉을 억만겁 숨었다가 몸을 씻고 갑자기 나타난 미녀상이라면 삼형제봉은 하늘을 지켜선 완력한 대장부의 기상이였다. 쓰러진 아름드리 고송을 가로타고 건너고 금방 굴러떨어질것만 같은 바위를 안고돌면서 주봉의 맨끝인 절벽가에까지 가려고 이상한 바위벽에 매달려보니 바위벽에 말발굽같이 보이는 자국들이 수없이 찍혀있었다. 제일 큰 말발굽자리는 30센치메터, 움푹움푹 패인 자국은 볼수록 괴이하기만 했다. 여기서 저 멀리 락타봉과 선태봉이 한눈에 안겨왔다. 서역 사막지대의 락타가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을가. 어찌하여 여기에 멈춰서서 주봉을 바라보면서 더 다가서지 못하고 있을가. 보면볼수록 락타가 신통하고 이상스럽기만 하다. 가보고싶어도 길이 멀고 험하여(아직 개발하지 않았음)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경대는 산 전체가 그대로 수석(壽石)이였다. 설사 사람이 임의대로 그린다해도 자유분방한 산의 골격과 그 골격에 뿌리를 뻗은 소나무를 그리기에는 붓끝이 부디기만 할것이다. 때문에 천혜의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태여난 선경대는 봄, 여름, 가을뿐만아니라 겨울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을 유혹하여 련민의 애틋함을 맛보게 한다고 한다.
8    [기행문]부르하통하(김철호) 댓글:  조회:1371  추천:31  2008-09-01
부르하통하는 연길을 지나면서 미모를 한껏 자랑하게 된다. 물막이언제의 성공적인 완공으로 작년 9.3부터 큰 강으로 변모되였기 때문이다. 이로하여 무려 89.2만평방메터의 인공수면이 있게 되여 연길시는 한결 우아해지게 되였다. 부르하통하는 지금 한창 큰 변신을 꿈꾸고 있다. 연변춘추려행사에서 개발한 표류코스는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이 합류하는 연길시 하룡촌에서 출발하여 마반산까지 가는데 스릴을 즐기는 사람들의 재미있는 놀이장소로 될것이다. 이제 유명한 성자산산성유적지를 개발하기까지 한다면 부르하통하 중류지대는 강의 덕을 톡톡히 입을것이다. 취재차는 새로 뺀 강변도로를 달린다. 찬란한 아침해살을 다붐이 받아안은 커다란 거울같은 조용한 수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강변길을 산책하는 시민들의 얼굴은 신나기만 하다. 사과배의 고향 오늘 취재는 연변인민출판사 편집부 주필 김현순씨와 김세웅씨가 동행해주었다. 김현순씨는 안도현출신이라 부르하통하를 잘 알고있다면서 큰소리다. 차는 어느새 아득히 펼쳐진 로투구벌에 접어들었다. 내가 연변의 자랑 사과배의 탄생지가 로투구의 소기촌이라고 하자 다들 흥미진진해 하면서 귀를 강구었다. 1916년 19세의 최창호는 아버지를 따라 로투구진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남쪽으로 5킬로메터쯤 떨어져있는 소기골에 첫 사람으로 말뚝을 박았다. 1921년 동생 범두가 방학에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조선 북청의 사과나무 겹가지 6대를 가져왔다. 최창호는 동생이 가져온 이 여섯대의 사과가지를 벼짚에 사서 김치움에 보관하였다. 이듬해 봄 울안에 있는 2-3년생 돌배나무에 이 여섯 대의 가지를 가접하였다. 5월이 되자 사과가지들에서는 새싹이 파릇파릇 돋았다. 가을이 되자 최창호는 묘목이 얼가 저어되여 마른풀로 가접부위를 덮고 흙으로 잘 다졌다. 그랬건만 이듬해 봄이 오자 세대가 동상을 입어 죽고 겨우 세구루만 요행 살아남았다. 그로부터 7년후 그 접한 나무가지에 열매가 달리였다.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닌 처음보는 과일이였다. 이 열매는 배처럼 색깔이 노란 바탕에 한쪽은 사과같이 붉은 색을 띠였고 그 맛은 배와같지 않아 당분과 수분이 많고 시원하였다. 당시 최창호네는 이 과일을 , 라고 불렀는데 1952년 길림성과수품종조사조가 이 새로운 품종을 보고 라고 명명하였다. 소기골에서 뻗어나온 사과배는 연변땅을 뒤덮었으며 흑룡강, 길림, 료녕, 북경, 하북, 섬서 등 북부지구는 물론 조선, 로씨야, 구라파 등 수십개의 나라에까지 보급되면서 조선민족의 자랑으로 세계에 이름떨치게 되었다. 최창호가 맨처음 재배해낸 세그루의 사과배나무는 지금도 소기골에 건재해있다. 룡정시정부에서는 이 모수앞에 라는 비돌을 세웠다. 유적지가 많은 강역 로투구의 만인갱은 한때 세상을 들썽해놓았다. 일본제국주의 자들에게 탄광로동으로 무자비하게 학대받다가 죽은 광부들의 해골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쇠사슬에 얼매인 해골, 머리가 박살난 해골, 륵골이 불러진 해골... 현지를 참관한 사람들은 인간도살장이였던 만인갱의 몸서리치는 정경을 영원히 기억할것이다. 만인갱유적지는 지금도 보전되여있다고는하나 보러오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긴지는 퍽 오래다고 한다. 연변의 금강산이라고 불리우는 유수천을 지나면 오호령 긴턴넬을 만난다. 턴넬을 지나면 오호령이 나타나는데 산아래 마을들에서는 일명 오봉산이라고 부른다. 다섯봉오리가 험준하게 솟은 오봉산은 석문벌을 지키는 다섯 장수마냥 위엄있게 솟아있다. 부르하통하는 서쪽의 좁은 협곡을 우회하며 흐른다. 유명한 오호산산성이 이 오봉산에 있다. 산성은 제2봉오리로부터 제4봉오리사이의 산등성과 두 봉오리가 서남쪽으로 뻗은 지맥의 산등성에 수축되여있다. 지금도 성문자리, 성벽, 망대, 치 등 유적지가 남아있다. 저명한 력사학교수 방학봉선생은 오호산산성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명월구 안도현소재지 명월진에서 우리를 맞아준 민간이야기수집가 리룡득선생과 함께 일행은 이룡산에 올랐다. 리룡득선생이 들려주는 이룡산의 신비한 전설을 들으면서 걷노라니 어느새 이룡산 등허리에 다달았다. 량옆에 강을 껴안고있는 이룡산은 물속에 누워 자맥질하는 한 마리의 룡같았다. 오른쪽으로 흘러내려가는 강은 복흥하이고 왼쪽으로 흘러내리는 강은 량병하-즉 부르하통하의 원줄기라고 한다. 두 강은 서서히 합치면서 토월산을 에돌아 흘러오는 장흥하와 다시 손잡는다. 리룡득선생의 고향자랑은 끝이 없었다. 2만6천년전 상고시대 인류생존의 첫 자취를 떠올린 석문산 안도원시인유적지와 북편의 옹성라즈, 토월산기슭의 신선동과 장수샘, 석문산석비... 리룡득선생은 명월진전설을 손수 수집정리한 민간이야기집 를 건너여주면서 읽어보면 명월진의 아름다운 유래를 속속들이 알수있을것이라고 했다. 명월구의 원지명은 옹성라즈라고 했다. 시내 한복판에 난데없이 치솟아있는 절벽이 옹성라즈인데 거기로부터 기원된 지명이였다. 후에 일본사람들이 철로를 놓으면서 역전이름을 명월구라고 해서 명월구로 된 것이다. 그번 회의후 연변에서의 항일투쟁은 더욱 치렬했으며 안도현에서도 선후로 침략자를 무찌르는 혁혁한 업적을 쌓았는바 부르하통하상류에서의 경도선렬차습격전 등이 그것이다. 발원지는 예쁜 옹달샘 량병진 고수촌의 농민시인 김일량씨네집에서 점심을 먹은 일행은 김일량씨와 함께 부르하통하발원지탐사에 나섰다. 김일량씨도 발원지를 가보지 못했는지라 좀 답답한 표정이였다. 차가 량병벌 막바지에 닫자 괜찮게 큰 마을이 나타났다. 남구촌이라는 마을이였다. 김일량씨는 마을에 들어가서 당지부서기를 찾은후 사연을 말하고 조선말을 한마디도 할줄 모르는 리일남이라고 부르는 조선족청년을 길잡이로 데려왔다. 리일남은 류창한 한어로 말했다. 마을을 벗어난 취재차는 좁은 산골수레길을 기다싶이 하면서 들어갔다. 좁은데다가 호박길이여서 차가 몹시 들춤질했지만 든든한 길잡이가 생긴지라 일행은 기분이 맑아있었다. 잡목들로 우거진 산자락과 그 밑의 콩밭은 벌써 가을빛이 비끼기 시작하고있었다. 시누런 콩밭아래에 개울물이 흐르는데 바로 부르하통하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버드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사이로 소택지가 펼쳐져있었다. 풀이 무성한 소택지에는 갖가지 가을꽃들이 다정스럽게 피여있었다. 소택지는 좀 더 넓어지고 풀대신 지난 홍수때 쌓였을 모래둔덕이 여기저기 거칠게 널려있었다. 자그마한 언덕에 집한채가 있는데 개가 몹시 짓어대면서 낯선 길손을 저어했다. 마당에는 많은 벌통이 질서없이 놓여있는데 멀리서도 벌들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였다. 우리는 리일남의 뒤를 따라 소오줌물같은 작은 물줄기를 바라고 계속하여 앞으로 반달음을 쳤다. 리일남의 목소리에 일행은 풀을 걷어차며 정신없이 달려갔다. 3호동막바지의 자그마한 산굽이에서 가냘프지만 정다운 옹달샘 하나가 파랗게 눈뜨고 일행을 바라보고있었다. 둬바가지 퍼내면 밑굽이 들어날것만 같은 작은 샘터,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디선가에서 쉴새없이 모여드는 맑은 샘줄기가 있었다. 발밑으로 숨어내리는 가냘픈 물줄기는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끊임없는 흐름을 약속하고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만보고있던 일행은 갑자기 손바가지를 해서 샘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샘이였다. 저녁녘이고 보슬비까지 와 사위는 어둑어둑했다. 그러나 샘줄기에서 흘러내린 자그마한 물줄기는 신비한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다우치느라고 하얀빛을 번득거리고있었다. 해란강과 손잡고 가야하를 껴안으면서 도문에서 수줍게 두만강의 품에 안길 때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달려야 하는 부르하통하의 178키로메터의 첫 발자국은 이렇게 떼여지고있는 것이다.
7    [기행문]도문의 명산 일광산(김철호) 댓글:  조회:1534  추천:34  2008-09-01
금강산일각 옮겨온듯 기암괴석 멋있는데 울긋불긋 단풍물결 산자락에 넘실거린다 일광산은 도문시의 명산이다. 가을이면 단풍때문에 더욱 자색을 뽐내는 일광산은 거의 일색인 참나무단풍으로 노랗게 물드는데 이따금 한두그루 섞여있는 고로쇠나무의 빨간 나뭇잎들이 연지 찍은듯 눈에 유표해 즐겁다. 10월에 금방 잡아들었던 얼마전에 찾아간 일광산은 말그대로 울긋불긋한 단풍물결로 산자락이 너넘실거리고있었다. 범진령 십리고개 청줄마대 박아싣고 여량수레 줄을 지어 흥겹게 령넘어가네... 이 노래는 한때 연변에 널리 류행되던 라는 노래이다. 일광산을 찾아갈 때마다 저도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광산을 오르려면 노래에 나오는 범진령고개를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도문시가지를 벗어나 남쪽을 바라고 가다가 언덕에 오르면 유명한 가 누워있다. 그러나 나무 한그루 없는 밋밋한 언덕과 밭사이의 수레길을 가볍게 생각하고 걷다가는 맥진할수도 있다. 여북했으면 고 하여 이라는 이름이 달아졌겠는가. 바로 그 령을 오르면 탐방객들에게 탄성과 스릴을 가득 채워주는 일광산이 대기해있다. 먼저 멀리서부터 눈길을 앗아가는 괴상한 석봉이 바라보인다. 가까이 갈수록 그것은 하나의 생명체같이 느껴진다. 이때 탐방객들의 입으로 한결같이 하는 탄성이 터져나온다. 바위산은 심통히 였다. 거북 한 마리가 산언덕을 기여오르다가 잠간 쉬고있는 모습이다. 지금 거북바위는 단풍에 한껏 젖어있다. 하여 꽃천으로 옷을 지어입은 로 변해버렸다. 여기서부터 일광산은 자신의 신비한 모습을 하나하나 벗어보인다. 서쪽으로부터 동쪽 두만강기슭에까지 전부 깎아지른듯한 괴암절벽으로 병풍쳐져있는 일광산은 수려하고 멋들어져 한폭의 산수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더구나 일광산을 휘여잡고 흐르는 두만강은 산과 조화를 이루고있어 신비한 운치를 돋혀준다. 첫봉에 올았을 때에는 여기가 제일이라고 느껴진다. 아츠라니 내려다보이는 절벽! 여름에 한껏 우거져있던 살진 숲이 황금의 가을을 맞아 빨갛고 노란 색채로 물들어져 단풍의 찬란한 세계가를활짝 펼치고있다. 둘째 봉에 올라보면 더구나 입이 벌려진다. 뿌죽뿌죽 삐여진 바위, 바위우에서 자라고있는 소나무, 산비둘기, 산매들이 발밑에서 날아예는 모습이 참으로 그림같기만 하다. 셋째봉, 넷째봉에 오르면 저마다 희광(喜狂)을 터뜨린다. 오를수록 더욱 신비한 경개가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일광산에서 지척으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이 유명한 삼툰자(三屯子 지금의 도문시 월청향 마패촌 제7촌민소조)마을이고 삼툰자 대안의 자그마한 역전마을이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강양동철도역과 마을이다. 삼자툰을 간평 혹은 새불이라도 부른다. 이 마을은 1920년 당시에는 화룡현 월신사에 귀속되여있었댔는데 유명한 봉오동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1920년 6월 4일 아침 5시, 독립군 신민단소속 박승길부대 30여명이 삼툰자에서 출발하여 도강한후 강양동의 일본군초소를 습격, 일본군 4-6명을 감쪽같이 섬멸하고 강을 건너 돌아왔다. 이렇게 불이 붙은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마지막에는 봉오동에 가서 고조를 이루게 되는데 그번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은 수많은 일본군을 살상하고 많은 총을 로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봉오동전투는 반일부대들이 계획적으로 매복전을 벌려 일본침략자들을 격파시킨 중국에서의 첫 전투였고 첫 승리로서 중국의 반일무장투쟁의 첫 발단을열어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평범해 보이는 저 간평마을이 이럴듯 대단한 사연을 갖고있는줄을 잘 모르고있을것이다. 아름다운 산정에서 선렬들의 장한 이야기가 깃들어있는 마을을 바라보는것도 또한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은 도문-개산툰 국도를 따라 곧바로 산굽이에 이르러 아츠란 절벽사이에 난 등산코스를 택할수도 있다. 그러면 단풍구경과 함께 짜릿한 모험을 느낄수도 있다. 국도옆의 수십길이의 아츨한 절벽은 운남의 석림을 련상시킨다. 다람쥐도 발붙이기 힘들어보이는 절벽은 누가 억척 장검으로 깎아놓은듯 미끈해보인다. 하늘에서 내려온 장수가 창을 비껴들고있는 듯 위무당당하게 솟은 기암, 처녀마냥 곱게 다듬어진 바위... 이런 바위들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화려한 가을을 맞아 울긋불긋 단풍물이 곱게 들어있는데 마치 화려한 옷을 갈아입고 떨쳐 나서서 장고치고 춤을 추며 손님들을 맞아주는 선남선녀들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런 바위산 틈새에 산을 톺을수 있는 골짜기가 째져있다. 골짜기에 들어서서 바라보는 일광산 또 다른 풍치이다. 사람의 발길이 크게 닿아보이지 않은듯 어렴풋이 알리는 산길을 톺아오르면 곧바로 일광산주봉의 석벽밑이 된다. 얼핏 보기에는 아츠란 절벽을 톺아오를 방법이 없는듯해보이나 찬찬히 살펴보면 들쑹날쑹한 바위굽에 발을 능히 붙일수 있는 곳이 있다. 어지간한 동산객이면 바위를 딛고 나무가지를 휘여잡으면서 절벽을 오를수 있다. 물론 아슬아슬하고 위기일발의 시각을 깜짝깜짝 맞을 단단한 마음가짐이 없으면 모험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일광산주봉은 해발 390.7메터이다. 주봉에는 여람이 편안히 앉아 즐길수 있는 널직한 너적바위가 있다. 우리가 간 날 마침 도문시의 어느 소학교 친구들이 등산을 와있었는데 식료품 비닐주머니랑 마구 던지면서 산을 깨끗이 챙기지 않고있어서 안스러웠다. 우리가 산에 와서 쓰러기를 이렇게 마구 던지는 사이에 산은 더러워지고 망가질수도 있는것이다. 그래도 너적바위에 동그랗게 모여앉아 신나게 점심을 먹는 붉은넥타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너적바위에 앉아 사위를 살펴보니 과관이였다. 도문이며 조선의 남양, 멀리 개산툰쪽으로 흘러오는 두만강이며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특히 두만강의 은검에 의해 갈라진 도문과 남양은 일광산우에서 바라보기가 그처럼 아담할 수가 없었다. 주봉옆에 큼직한 바위덩이가 간들간들 붙어있는데 보기에 너무도 신비스럽기만 하다. 툭 밀면 금방 무너져 굴러떨어질것만 같아 막 달려가 붙잡아주고싶어진다. 듣는 말에 의하면 저 간평마을의 한 사람이 쇠꼬챙이를 챙겨가지고 와서 이 바위를 굴러내려보내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쇠꼬챙이로 뚜지고 어쩌고 해도 바위가 끄떡 안더라고 한다. 바위는 아마도 산에 깊숙히 뿌리내린것 같다. 바위는 사람이 올라서서 쿵쿵 굴러도 끄떡 안는다. 아니 벼락이 쳐도 끔쩍 안는다고 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간들간들 매달려있었지만 루루천년을 끄떡 않고 박혀있는 괴암일것이다. 때마침 화사히게 비쳐오는 일광에 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일광산은 미상불 금강산 일각을 옮겨온듯 싶다. 해종일 햇볕을 품는다고 하여 일광산이라는 멋스러운 산명을 가진 일광산, 일광산은 이 가을을 맞아 금빛 찬란해 보였다.
6    [기행문]가야하(김철호) 댓글:  조회:1316  추천:30  2008-09-01
아름다운 전설의 강 유서깊은 어머니 강 천교령에서 북에서 내려오는 강과 동에서 흘러드는 강이 다급히 합류하고있었다. 북에서 내려오는 강이 더 크고 물살도 드세여보여서 가야하의 본류라고 생각하고있는데 우리를 인도하고있는 왕청현문련 주석 장문일씨는 작고 물결도 유연해보이는 동에서 내려오는 강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가야하의 줄기라고 알려주었다. 이쪽 강은 춘양하라는것이였다. 가야하의 전설 장문일씨가 물어왔다. 먼 옛날 이 고장에서는 큰 가뭄으로 농사도 지을수 없게 되었다. 아름다운 천희처녀와 용감한 만복총각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흔아홉령을 넘고 여든하나의 산을 오르내리면서 강줄기를 찾아 헤매이다가 물이 있어보이는 한 산자락에서 행장을 푼후 바위를 마스면서 산을 파들어갔다. 한메터, 열메터, 백메터... 어느 날 갑자기 큰 진동소리가 나더니 쏴ㅡ하고 큰 샘줄기가 터지고야말았다. 그런데 그 샘줄기가 마구 범람하면서 용솟는 통에 오히려 물란리가 날판이였다. 이때 산속에 있던 온갖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뛰쳐나와 샘줄기를 인도하여 바위를 피하게 하고 산을 에돌게 하면서 강곬을 내주었다. 강곬을 따라 흘러가는 푸른 강가에서 새들과 짐승들은 , 마음껏 노래를 불렀다고 하여 가야하라고 한다는것이였다. 나무로 꽉 들어선 산자락의 오솔길을 오르노라면 불현 듯 맑은 샘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가야하의 시작을 알리는 샘줄기라고 한다. 샘은 골짜기를 타고 내리면서 이골저골의 맑은 물과 합류되여 금방 큰 개울로 둔갑해버린다. 유서깊은 강 발원지에서 50키로메터 흘러 천교령에서 춘양하와 합수한 가야하는 대흥구, 쌍하에서 계관하, 하마탕하와 합류하면서 제법 강모습을 자랑하게 된다. 가야하는 이름처럼 아름답고 얌전한 강이지만 성깔을 부릴라치면 사납기가 사자와 같아서 량안 사람들은 장마철이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가야하를 바라본다고 한다. 이고장 사람들은 1960년 대흥구물란리를 잊지 않고있다. 가야하는 야성을 들어내여 하루새에 대흥구를 밀대놓았다. 그때 받은 인명피해로 지금도 가슴에 못박고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 왕청교외에서 가야하는 소왕청하와 대왕청하를 포용하면서 서위자, 중안, 배초구, 신흥, 석현, 곡수 등을 에돌아 도합 78개의 크고작은 강을 합류시킨다. 그 류역면적은 6500평방키로메터이다. 가야하류역에는 서위자원시문화유적지, 배초구원시유적지가 있는가 하면 유명한 항일전적지도 있다. 가야하는 김일성, 주보중, 진한장, 양정우 등 저명한 항일영웅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유서깊은 강이기도 하다. 한때는 우리 해방군 토벌대가 가야하를 넘나들면서 토비 마희산을 소멸하는 전투를 격렬하게 벌리기도 했는데 곡파의 장편소설 의 현장이기도 하다. 석현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면 초모자를 방불켜 하는 산이 있는데 유명한 초모정자산이다. 일명 갈모자산이라고도 하는 이 산은 50년대 임효원선생이 지은 노래 로 더 유명해졌다. 바로 그 산 저쪽에 유명한 봉오동항일전적지가 있다. 가야하의 백미-만천성 왕청을 떠난 가야하는 80리 배초구벌을 적셔주면서 흐르다가 잠간 걸음을 멈추게 된다. 연변에서 가장 큰 저수지-만천성이 옥소반을 받쳐들고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장문일씨는 만천성유람구를 가리키며 감개무량해 한다. 그는 왕청현 광관국 국장으로 있을 때 이 유람구를 구상하고 설계, 건설하는데 유력한 작용을 했었댔다. 때문에 그는 만천성을 손금보듯 환히 꿰뚫고있었다. 풍경구에는 36개 명소가 있다. 총면적 56.7평방키로메터, 호면은 10.49평방키로메터이다. 멀리서도 유표하게 눈에 안겨오는 조선족녀인상인 백의녀 조각상은 높이 18메터, 무게 500톤이다. 룡구도산정에 건설한 유람릉선을 올라보지 않고는 만천성의 아름다움을 느낄수 없을 것이다. 조금만 올라도 량옆의 물파란 호면이 발아래에서 보인다. 산정은 파란 물에 둘러싸여있는 하나의 섬이다. 저 멀리서 유람선이 조용한 호면을 금그으면서 괴물처럼 흘러오는 모습은 더욱 장관이다. 잔재간을 피우는 뽀트는 재봉사가 가위로 푸른 비단을 가르듯이 호면을 가르면서 쏜살같이 미끄러져간다. 이제 이 룡구도에 종고쌍탑, 천메터문화장랑, 성급호텔, 민속박물관, 식물원, 기원당, 민속촌, 명인관, 천녀각, 스키장 등을 건설하여 연변의 일류 유람구로 건설할 타산이라고 한다. 고향의 강에 대한 장문일씨의 애착은 각별했다. 가야하는 만천성에서 휴식을 마치고 석현을 향해 줄달음치다가 도문시 홍광향 향양촌과 하가촌 사이를 말없이 지나 부르하통하속으로 살아져버린다. 이로써 로야령에서 샘솟은 한줄기의 생명수는 216키로메터의 로정을 맞히게 되는 것이다.
5    [기행문]이룡산(김철호) 댓글:  조회:1314  추천:29  2008-09-01
두갈래 강 감돌아 흐르는 도심속의 아름다운산 도심의 산 이룡산은 안도현 소재지 명월진 도심속에 우뚝 솟아있다. 안도땅을 밟아보는 사람치고 이룡산에 매료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좌우가 깎아지릇듯한 절벽인데다가 그 절벽밑으로 맑고 청아한 두갈래 강이 유유히 감돌면서 흘러가는 모습은 천하절승이 아닐수 없다. 고층건물우에서거나 멀리 산정에서 바라보면 이룡산은 물속에 누워 자맥질하는 한 마리의 룡같다. 머리를 산중턱에 틀어박고 꼬리를 허우적거린다고 할가. 아니면 꼬리를 산중턱에 묻은 대가리 없는 룡이 꿈틀거린다고 할가. 볼수록 기이하여 눈길을 뗄수가 없다. 좌우 절벽기슭을 적시면서 흐르는 강은 부르하통하(일명 량병하)와 복동하다. 철길쪽으로 산을 톺으면서 보면 오른쪽 강이 부르하통하고 왼쪽 강이 복동하다. 복동하는 백두산아래의 유명한 명월저수지로부터 흘러오는 강이고 부르하통하는 량병벌 막바지 남구의 3호동골 옹달샘에서 솟아 흘러온 강이다. 두 강은 재미있게 이룡산을 감돌면서 서서히 손잡다가 인츰 토월산쪽으로 흘러오는 장인하와 몸을 섞는다. 이룡산에 오르려면 여러 갈래 길이 있는데 그래도 철길쪽으로 오르는것이 제일 편리할것이다. 높지 않는 절벽기슭에 좁은 길이 간신히 째져있다. 손을 잡아당기고 등을 밀어주고 하면서 오르면 손쉽게 오를수 있다. 절벽에 오르면 명월구가 한눈에 확 안겨오고 비석봉도 잡힐듯이 코앞에 다가선다. 삼면이 절벽인 자그마한 산우에 혁명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어서 그 산을 《비석봉》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산을 《여의주》라고도 한다. 룡 두마리가 여의주 하나 놓고 싸우다가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그대로 굳어진것이 《비석봉》이 되였다는것이다. 그러니 이룡산은 두 마리 룡중 한 마리이고 이룡산을 오르려고 첫 코스를 밟고있는 곳은 룡의 목덜미인셈인것이다. 이룡산을 놓고 전설도 많지만 그중 사람을 해치던 흑룡이 백두장수에게 녹아난 이야기가 가장 정채롭다. 멀리서 날아와 생긴 룡산 지금 이룡산이 자리잡고있는 곳이 옛날엔 복동하와 량병하 합수목이였다고 한다. 다시말하면 산이 아니라 넓은 개활지였다는것이다. 그때 백두산기슭에 부지런한 농군들이 살고있었다. 그런데 백두산천지에 흑룡 두 마리가 나타난후부터 이들에게 재앙이 들씌워졌다. 흑룡은 봄마다 제물로 쳐녀 둘을 바치지 않으면 조화를 부려 비 한방울 내리지 못하게 하였던것이다. 하여 농부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는 딸들을 죽음터로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느해 봄이였다. 량친부모를 모신 무남독녀들인 꽃분이와 이쁜이라는 처녀가 제물로 나서게 되었다. 마을사람들과 영별을 고한 두 처녀는 백두산천지가에 세워놓은 제단에 나섰다. 사람들이 두 처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있을 때 시뻘건 아가리를 벌린 흑룡 두 마리가 천지물을 쫙 가르면서 헤염쳐와 쳐녀들을 덮치려 했다. 바로 이때 갑자기 땅을 구르는 요란한 소리가《꽝!》하고 났다. 바라보니 번쩍이는 철갑투구를 쓰고 갑옷을 떨쳐입은 남아장수가 제단앞을 우뚝 막아서고있었다. 그의 손에는 열자세치되는 긴 장검이 쥐여져있었다. 체구가 어찌도 육중했는지 돌이 밟히면 돌이 모래알처럼 부서지고 칼을 휘두르면 칼끝에서 번개치고 우뢰가 《꽝꽝》 터졌다. 사람들이 오매에도 그리던 백두장수가 나타난것이였다. 《백성을 못살게 구는 이 괴물들아, 칼을 받아라!》 삽시에 천지우에 물안개가 일고 백두장수의 번뜩이는 칼날과 흑룡이 이발을 마주치는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장수도 힘셨지만 흑룡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장수가 이기기를 바라면서 함성을 울렸다. 드디여 백두장수의 칼이 열두번째로 우뢰를 불러오고 번개를 잡아다가 흑룡의 두 머리를 잘랐다. 꽃분이와 이쁜이는 잽싸게 치마폭에 모래와 재를 담아다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룡의 머리에다 콱콱 뿌렸다. 이때였다. 대가리를 잃은 두 흑룡은 백두장수를 천지물에 쓸어넣으려 몸을 미친듯이 뒤채였다. 찰라, 백두장수는 장검을 번쩍 휘날려 한칼로 두 흑룡의 몸퉁이를 쿡 꿰지른후 번쩍 추켜들었다. 백두장수의《억!》하는 소리와 함께 대가리 떨어진 룡의 두 몸뚱이가 반공중에 사라져버렸다. 그때로부터 재앙의 화신이였던 백두산천지의 흑룡 두 마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백두장수가 장검에 꿰여 뿌린 두 흑룡의 몸둥아리는 도대체 어디로 날아갔을가? 바로 북으로 300여리 날아와 복동하와 량병하 합수목 개활지에 철렁 떨어져버린것이다. 그렇게 날아와 떨어진 몸뚱아리 하나가 지금의 이룡산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 몸뚱아리는 명월구의 서북쪽 영월산기슭에 떨어졌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절벽산 그러니 이룡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결국 대가리없는 룡의 허리를 밟고있는 셈이였다. 대가리가 있던 없던 이룡산은 좌우에 끼고있는 두갈래 강 때문에 살아서 꿈틀거리는것만 같다. 금방 벼랑에 올랐을 때의 너비가 10여메터쯤 되어보이던 너럭바위가 오르면서 점점 좁아지는데 손폭이 큰 사람은 좌우벼랑가를 한아름에 안을만큼 폭이 좁아진다. 그렇게 좁아진 벼랑우에 난 길을 걷는다는것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그러던 벼랑등성이가 점점 넓어져 룡의 허리가 되는데 갑자기 두세길쯤 되는 곰처럼 생긴 바위에 길이 막히운다. 그러나 근심할 필요가 없다 곰바위를 톺아오를수도 있으나 벼랑 바로 옆으로 길이 비좁게 빠져나간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벼랑을 안고 돌면서 앞으로 걸어가면 금방 곰바위를 넘을수가 있다. 앞으로만 걷지 말고 가끔 뒤돌아보면서 걸으면 이룡산 풍치를 더욱 만끽할수 있다. 룡의 허리통을 가로타고 앉아 금방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은 저도몰래《정말 절승이야!》하고 경탄하고만다. 오른쪽 발밑으로 흐르는 복동하와 왼쪽 발밑으로 흐르는 량병하에 갇힌 가엽은 룡은 어디로 빠져나갈래야 나갈수가 없는 신세가 되여 허우적거리는것 같기때문이다. 울퉁불퉁 벼랑길이 끝나면 차분한 오솔길이 나진다. 걷기 편한 흙길이다. 오솔길은 넓은 산등성이의 중간을 요리조리 돌면서 록음이 우거진 숲속으로 파고들어간다. 그러던 오솔길이 벼랑가로 되돌아가는데 그런 곳마다에 정자가 세워져있다. 정자에 앉아 밑을 내려다보면 량병하가 발밑으로 곧추 내려다 보인다. 굽이마다에 이런 정자를 많이 만들어놓아 소풍 즐기는 사람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고있었다. 차들의 경적소리가 지척에서 들리고 지어 거리에서 사구려를 불러대는 소리마저 산정에서 똑똑히 들을수있는 이룡산, 빨래하는 녀인들과 낚시질하는 나그네의 손짓발짓마저 또렷이 내려다 보이는 도시속의 이룡산은 산이라면 산이고 공원이라면 공원이였다.
4    [기행문]토월산(김철호) 댓글:  조회:1390  추천:27  2008-09-01
금은보화 있었다는 신비한 신선동 달을 토한다는 아름다운 전설의 산 후지산 닮은 산 안도현소재지 명월진은 아름다운 산간도시이다. 칼바위산, 영월산, 처녀봉 등 뭇산이 빙 둘러있는데 그 중에서도 시가지 동쪽에 우뚝 솟은 토월산(吐月山)은 각별이 눈길을 끈다. 맑은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 산너머로 아침해가 방긋 솟고 저녁이면 휘영청 밝은 달이 두둥실 뜬다고 한다. 아침 안개가 토월산허리에 휘감길 때면 산은 틀림없는 일본의 후지산을 닮은 모양이다. 뿌죽한 웃수리가 아래로 점점 넓어지면서 금자탑의 모양을 만드는데 명월진을 둘러싸고있는 뭇산중의 왕자산이다. 잘 다져진 오솔길이 예쁜 가리마처럼 산우를 향해 곱게 뻗어있는데 어찌보면 시가지에서 토월산을 오르는 유일한 오솔길인 것 같았다. 오솔길은 무성한 숲에 묻혀있는데 그 숲속에서 숱한 이름모를 잡꽃들이 노랗게, 빨갛게 웃고있다. 가끔가다 눈길을 앗는 보라빛 도라지꽃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바위틈새에 뿌리를 박은 도라지꽃은 손을 뻗치면 금방 꺾을수 있을만큼 지척에서 피고있었지만 등산객들은 그 꽃을 다치지도 않고있었다. 꽃철이면 연길의 모아산에는 한아름씩 꽃을 꺾어가지고 오는 사람들로 줄쳐있다. 그러니 땀을 철철 흘리는 등산객들의 옷자락에 부딪치여 한들거리는 저 도라지꽃이랑 잡꽃들은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산중턱까지 오르면 평지길이나 별반 다름없는 느슨한 길이 나타난다. 가쁜 걸음을 쉬우며 뉘엿한 길을 몇분간 걸으면서 숨을 돌릴수 있었다. 그러나 인차 다시 가파로운 길이 나타난다. 맑은 날에 산에 오르면 명월진의 모습을 완벽히 볼수 있다고 한다. 토월산을 에돌아 흐르던 장흥하가 이룡산쪽에서 흘러오는 복흥하, 량병하(부르하통하 원줄기)와 손을 잡는 모습도 산우에서만이 그림보듯 볼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은 안개가 꽉 낀 날이여서 도시의 소음만 들릴뿐이였다. 《토월산이라는 토자는 토한다는 토자입니다. 시가지에서 보면 항상 달이 이 산의 등뒤에서 솟는데 마치 산이 달을 토하는것 같아 보이지요.》 토월산 정상에서 만난 한 한족등산객의 토월산에 대한 설명이였다. 달을 토하는 산 아름다운 산에 전설이 없다면 이상할것이다. 물론 토월산에도 전설이 있다. 옛날 국자가(지금의 연길)에 있는 한 사또가 옹성라자(명월구의 옛이름)관아로 장기시찰을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작자는 열까지도 셈을 셀줄 모르는 반편중의 반편이였다. 대신 술마시고 놀아대는데는 이골이 나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 아래서 흥나게 놀아야겠는데 왜 달이 없는고? 이상한 고장이로다!》 그 말에 수하 관원은 어안이 벙벙해났다. (아니, 이게 어느때라고 달을 찾는담? 음력 초하루날에 달을 찾는걸보니 무지무식하기 짝이 없군. 오라, 이런 놈은 좀 골려주어야해.) 《해해... 저 달을 보시려면 선심을 쓰셔얍죠.》 《달을 보는데 웬 선심이라는거냐?》 《저기 둥글 넙죽한 산이 있잖습니까. 예, 예... 그산 말입죠. 돈을 주어야 달을 토해낸단말입네다.》 《산이 달을 토해낸다고? 그거 신기하구나. 그런데 그것도 돈을 주어야...》 사또는 재밌다는 듯 씨익 웃더니 5백냥이 든 돈주머니를 던져주면서 그렇게 해보라고 일렀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관원이 돌아왔다. 《네 이놈! 달돈을 언녕 갔다 주었겠는데 왜 상기도 달이 뜨지 않느거냐?》 《성 내시지 말고 얼른 산쪽을 보셔요.》 사또가 턱을 잔뜩 들고 바라보니 과연 녀인의 눈섭같은 달이 산마루에서 솟고있었다. 《오 달을 토해내는구나. 흐흐흐.. 그런데 저 달이 왜 저리도 희미하고 작으냐 말이다?》 《사또님께서 5백냥 주셨으니 그 돈에 맞게 토해내는겁죠.》 급해난 사또는 천냥 든 돈주머니를 던져주면서 더 큰 달을 토해내게 하라고 령을 내렸다. 관원은 돈을 챙겨가지고 얼싸 하고 자리를 떴다. 다시 이레만에 관원이 나타났다. 지난번같은 사또의 질문에 관원은 동산을 가리켰다. 사또가 바라보니 산은 전보다 훨씬 큰 달을 토해내고있었다. 《천냥을 받았으니 천냥만큼한 달을 토해주는겁죠.》 《아직 멀었어. 시원치 않단말이야. 만월이여야 하는데 저게 뭔가? 저게...》 머리를 내저으며 두덜대던 사또는 1천5백냥이 든 돈주머니를 던져주면서 어서 커다란 달을 토해내게 하라고 호통쳤다. 음력 보름이 되던날 관원은 싱글벙글 거리면서 사또 앞에 나타났다. 《사또님 저 산을 보십시오.》 산뒤로부터 휘영청 밝은 달이 환한 얼굴을 내밀고있었다. 그것을 본 사또는 무릎을 탁 치면서 흥겨워했다. 《저 놈의 산이 돈을 많이 먹더니 과시 큰 달을 토해내는구나. 으하하...》 그때로부터 이산을 토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선동이 있는 산 쉬지 않고 꼬박 톺으면 산정상까지 오르는데 30여분 걸린다. 가파로운 산길이라 오르고나면 사우나실에 들어앉은듯 땀벌창이 되고만다. 산정엔 너럭바위가 있는데 등산객들은 그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하면서 산아래 시가지를 내려다 본다. 《아마 저쪽 산자락에 신선동이 있을겁니다.》 언젠가 한번 가본적이 있지만 방향이 잘 생각나지 않아 한 등산객에게 신선동을 물었더니 동쪽산기슭아래를 가리켜주었다. 토월산기슭에 자동차가 통할수 있는 흙길이 오른쪽으로 빠져있는데 그 길을 따라 한창 가면 채석장이 있고 채석장 뒤로 토월산 중턱까지 오를수 있는 토들막 오솔길이 있다고 했다.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아 풀에 쌓여있는 길을 찾아 한창 오르면 원시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 큼직한 동굴이 있다. 신선동이라고 부르는 동굴이다. 40평방메터쯤 되어보이는 동굴안은 가장 높은곳이 4메터 남짓 되고 보통 2-3메터는 되어보였다. 이 동굴에도 역시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있다. 옛날 풍달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도박에 미쳐 재산을 탕진하다보니 알가난뱅이로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백발로인을 만났는데 로인은 많은 재산을 줄터이니 다시는 도박놀이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로인을 따라 산밑에 이르러 보니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벽을 살살 둟으니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속에 금은보화가 많으니 가질만큼 가지고 나오게.》 동굴속에는 과연 금은보화가 기수부지였다. 풍달은 있는 힘껏 금은보화를 지고나왔다. 수중에 돈이 있고보니 또 옛병이 도졌다. 1년도 채 안되여 빈털털이로 된 풍달이는 또 로인을 찾았다. 로인은 이번엔 돈을 꼭 좋은데만 쓰라고 당부했다. 금은보화를 가지게 된 풍달은 다시 옛병이 도져 돈을 망탕 써버렸다. 그래서 또 로인을 찾았다. 로인은 풍달이를 데리고 산에 오른후 한 바위에 앉게 했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더니 숱한 귀졸들이 몰려들어 풍달을 묶어가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하늘에서 옥황상제에게 문초를 당한 풍달은 이번에 지옥에 떨어져 염라대왕의 단죄를 받았다. 손이 발이 되게 빌고빌어서야 염라대왕은 회과자신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풍달을 놓아주었다. 옹성라즈에 돌아온 풍달은 다시는 놀음에 빠지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운좋으면 을 구경할수도 있습니다.》 산정에서 만난 한족등산객 부부가 새벽에 산정에 올라 해뜨기를 기다리느라면 이상한 광경을 볼수 있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를 등지고 산아래를 바라보면 동그란 칠색무지개속에 자신의 모습이 담겨지는 광경이 나타나는데 산밑을 감돌아흐르는 장흥하의 조화라는것이였다. 그런 정경을 《화광》이라고 부르는데 운이 좋아야 만날수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안개가 감돌아 근본상 보이지 않는 산밑에 눈길을 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나 구름이 유유히 감돌아 흐르는 하늘산에서 노니는것만 같아 기분을 돋굴수가 있었다
3    [기행문]선바위(김철호) 댓글:  조회:1422  추천:24  2008-09-01
아름다운 전설 민족의 숨결 슴배여있는 명산 웅위로운 바위산 룡정에서 륙도하를 거슬러 15킬로메터쯤 올라가노라면 갑자기 앞을 콱 막아서는것 같은 웅위로운 바위산을 만나게 된다. 땅속에서 솟아오른듯이 수직으로 우뚝 솟은 바위산은 마치 석공의 다듬이망치에 의해 원만히 완성된 조각품같기도 하다. 룡정-삼합 도로가 바로 바위산밑을 스치며 뻗어있는데 처음 이 구간을 지나치는 차들은 속력을 내여 달리다도 이 산앞에 와서는 속력을 늦추거나 아예 차를 정차시킨다. 차손들은 차에서 내려 소소리 치솟을 바위산을 손채양을 해가지고 바라보며 감탄을 감추지 않는다. 카메라를 챙겨갖고 온 사람이라면 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기를 주저하지 않을것이다. 이 바위산이 바로 유명한 선바위이다. 선바위를 오르려면 정면으로는 아예 불가능하다. 아마 다람쥐라해도 산을 톺기를 저어할것이다. 여름이면 이따금 독수리가 바위산 중턱에서 유유히 날아예는것을 바라볼수 있을뿐이다. 도로옆에 룡정뻐스를 기다리는 농민 서넛이 선바위을 바라보면서 경탄해하는 우리 일행을 재미있게 바라보고있었다. 우리의 물음에 60좌우 되어보이는 농민이 힐끕 선바위를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농민은 깍아지른듯한 주봉옆의 허물어진것처럼 보이는 벼랑에 손가락을 겨냥면서 혀를 끌끌 찼다. 농민의 말에 의하면 지금 아츠랗게 보이는 주봉곁에 더 멋진 바위산이 있었다고 한다. 집채같은 바위가 층으로 얹혀 탑처럼 쌓여 있었는데 가관이였다고 한다. 농민은 무척 속상한듯이 측은한 눈길로 바위산을 응시했다. 무지했던 년대의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 밑천으로 전락되여버린 아름다운 산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우리는 등반을 서둘렀다. 농민은 고맙게도 길을 차근차근 가리켜주었다. 과연 농민이 가리켜준대로 산을 톺다가 머리를 뒤로 돌리면서 저쪽켠 산허리를 바라보니 심통히도 범같아 보이는 바위가 있었다. 웅크리고 앉은 모양이 금방이라도 하고 허리를 펼것만 같아보였다. 농민의 말처럼 산으로 오르기가 그닥 가파롭지가 않았다. 우거진 잡목림속엔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의해 잘 다져진 오솔길이 곱게 뻗어있었다. 아름다운 전설 선바위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있었다. 옛날 이 고장사람들은 장마철이 되면 오랑캐령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의 조화로 재해를 입군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살진 돼지와 소를 잡아 오랑캐령 괴물에게 제를 지내면서 액운을 면하게 해달라고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들여 제를 지내도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수염이 허연 풍수령감이 지나가다가 라고 했다. 그해 여름 과연 큰 홍수가 감때스럽게 덮쳐들어 세상없는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마을에는 마침 칠칠하고 아름답게 생긴 소녀가 셋이 있었다.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세 소녀는 오랑캐령 괴물에게 제물이 되기를 자진해나섰던것이다. 어느날 세 소녀는 곱게 단장하고 떠날 차비를 했다. 세 소녀는 고향과 정든 사람들곁을 떠나는 일이 가슴찢어지듯 애통했다. 더구나 세 소녀들에게는 사랑하는 총각들이 있었다. 한마을에게 함께 자란 름름한 총각들이였다. 그러나 그 총각들은 지금 강제부역에 뽑히여 머나먼 곳으로 가고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밤 머나먼 곳에서 고역에 시달리고있던 세 총각이 꼭같은 꿈을 꾸었다. 세 소녀가 큰물에 휘말려들어가 구원을 청하는 꿈이였다. 소녀들의 애끓는 울음소리에 꼭같이 깨여난 세 총각은 그 길로 부역장에서 도망쳐나와 두주먹을 불끈 쥐고 마을을 행해 달려왔다. 어느 한 고개마루에서 난데없는 까치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나무가지에 한발 되는 구렝이가 까치둥지에 기여오르고있었다. 세 총각은 지체없이 박달나무몽둥이로 구렝이를 후려쳐 요정낸후 다시 가시덤불을 헤치며 령을 오르고있는데 웬 백발로인이 나타났다. 백발로인은 세자루의 장검을 젊은이들의 손에 쥐여준후 표연히 사라졌다. 그들이 마을의 고개마루에 금방 올라섰을 때였다. 세 소녀가 숱한 사람들의 울음소리속에서 마을을 떠나 오랑캐령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번개처럼 뛰여간 세 총각은 소녀들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세 총각을 장검을 꼬나들고 오랑캐령 깊고 험한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천년이끼를 뒤집어쓴 대가리 아홉개 달린 괴물은 한창 자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세 젊은이는 약속이나 한듯이 괴물의 대가리를 향해 장검을 날렸다. 대가리 셋이 떨어져 퐁퐁 뛰다가 도로 다시 가서 붙었다. 괴물은 천둥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생사결단을 하고 달려든 세 젊은이는 괴물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지 않고 삼면에서 일시에 접어들어 모가지를 연거퍼 내리 찍었다. 목이 떨어져나가는 족족 거기에다 마른 흙을 뿌렸다. 하여 괴물의 흉물스러운 대가리 여덟 개가 땅에 나뒹굴었다. 남은 대가리 하나를 내려치려는 순간 멀리 동해바다 룡왕이 괴물한테 무더기비를 보내주었다. 소낙비에 그만 모가지에 묻은 흙이 말끔히 씻기면서 대가리들이 눈깜작할 사이에 제자리에 가 붙었다. 맥진한 세 젊은이는 감탕물에 휘말리게 되었다. 산악같은 파도를 일으키며 괴물은 동구밖 언덕아래에 이르렀다. 갑자기 먹장구름이 뒤덮힌 하늘에서 아홉갈래의 번개가 번쩍번쩍 내리꽂히고 벼락이 치며 천둥이 울었다. 그 소리에 정신차린 세 젊은이는 한데 뭉치여 세 개의 바위로 변해 우뚝 솟았다. 홍수를 따라 내려오던 괴물은 세 바위에 부딪쳐 아홉 개의 대가리가 물주머니가 되고 홍수도 바위에 막혀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생겨난 선바위는 지금도 아름다운 전절을 전하면서 이 고장의 자랑으로 되고있다. 민족혼이 숨쉬는 바위산 꼬불꼬불한 오솔길로 한창 오르면 먼저 중간 봉우리에 닿게 된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때 허물어버렸다는 절벽이 뽀죽한 벼랑으로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그 바위는 마치 원숭이가 재주를 피우는것처럼 재미있었다. 오른 편으로 난 절벽길을 따라 오르면 다른 한 바위산인데 바라보기만해도 아슬아슬 위험해 보였다. 머리를 번쩍 들고 왼편을 바라보면 주봉인 선바위가 하늘을 가로막는 장벽처럼 시커멓게 시야에 안겨온다. 산우에 먼저 오른 친구들이 두손은 번쩍 들고 환성을 올리고있었는데 그들은 작은 인형처럼 보였다. 왼편으로 굽이돈 오솔길을 따라 계속 오르니 주봉으로 오르는 벼랑길이 나타났다. 손을 당기고 등을 밀고 하면서 마지막 벼랑길을 톺으니 드디여 주봉에 닿을수 있었다. 주봉에는 20-30명은 둘러앉을만한 헌헌한 공간이 있었다. 내려다 보니 차량들이 발밑에서 매미처럼 달린다. 멀리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아츠랗게 보이는데 자그마한 벌레들이 움직이는것 같기만 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소리들이였다. 누군가 동쪽을 가리키면서 하고 소리쳤다. 동쪽으로 아득히 보이는 산맥이 오랑캐령이였다. 동쪽에서 흘러온 산맥은 빙 둘레를 치면서 선바위를 스쳐갔다. 아직 완연한 봄빛은 아니지만 오랑캐령에서 흘러오는 륙도하는 파랗게 감뛰고있었다. 동쪽으로 마주서서 바라보이는 첫 마을이 장재촌이였다. 장재촌에서 길하나를 사이두고 좀 더 올려다보이는 마을이 유명한 명동촌, 강을 건느면 수남촌, 수남촌에서 좀 더 올려다보면 소풍락동, 그 뒤로 대립자, 대풍락동, 다시 륙도하를 건너 바라보면 오룡재마을 성교촌, 중영촌이다. 모두가 유명한 마을들이지만 쟁재촌과 명동이 더 유명한것은 중국조선족근대문화를 발족시킨 고장이기 때문이다. 1901년 연변의 저명한 교육가이며 반일지사인 규암 김약연선생은 장재촌에 규암재란 서재를 꾸렸다. 후에 김약연선생은 부근의 10여개 마을을 련합시켜 공동체를 이루어놓은후 ㅡ밝은 조선민족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마을을 통칭하게 했다. 규암재, 소암재 등 서재를 합병해놓은 명동서숙을 라 개칭했으며 학교에서는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명동학교는 15년간 경영되였는데 수많은 반일투사와 문학가, 예술가를 배출시켰다. 마진, 남세극, 최기학 등 저명한 반일 간부들과 조선영화의 창시자인 라운규, 저명한 민족시인 윤동주, 저명산 소설가 김창걸 등 인물들도 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였다. 멀리 명동촌앞머리에 백양나무에 가리여있는 윤동주생가가 어럽풋이 보인다. 강을 따라 내려오면 허름한 초가집이 보이는데 그 곁에 점같은 하얀 비석이 있다. 바로 소설가 김창걸선생의 문학비이다. 그리고 금방 올랐던 벼랑길을 되돌아 한창 걸은후 올라왔던 오솔길을 버리고 곧추 장재촌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밟다가 수례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규악 김약연선생의 묘소가 지금도 건재해있다. 민족의 이러한 령재들은 시간만 있으면 바로 이 바위산에 모여서 국운을 론했고 민족을 앞날을 걱정하면서 진리를 탐구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바위산을 그저 바위산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바위산은 민족의 숨결이 슴배있는 력사의 산임이 틀림없다. 그래서일가 높은 봉에 올라 주위를 바라보는 마음 한결 숙연해지며 멀리 보이는 뭇산과 전야가 한결 정다워보인다.  
2    [기행문]구수하(김철호) 댓글:  조회:1807  추천:25  2008-09-01
항일의 피어린 발자국이 찍혀있는 력사의 량안 4200헥타르 농경지를 적셔주는 영원한 생명수 삼도만시가지에서 하발령산맥이 멀리 보인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흘러온 구수하(조양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싣고 78.3키로메터의 숨가쁜 려정을 시작하게 된다. 련련히 뻗은 하발령산맥처럼 구수하의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1 구수하는 얼마나 많은 항일투사들의 갈한 목을 축여주었던가. 김일성, 최현, 김정숙, 림춘추, 박성철, 려영준... 이들의 그림자가 구수하강반에 비끼여있다. 구수하량안에는 팔도항일유격근거지, 삼도만항일유격근거지,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가 있었으며 중공동만특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등이 일제침략자를 쳐부수기 위해 피어린 펼전의 활동을 펼쳤다. 삼도만시가지는 보기에도 함지처럼 생긴 천혜의 전략요충지이다. 높고 험한 산봉으로 사면을 둘러친 지리적위치는 항일투사들의 혜안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가지를 벗어난 맑은 구수하는 앞이 막힌것 같은 깊은 골짜기를 뱀처럼 구불구불 빠져나간다. 버들숲에 몸을 감추기도 하고 절벽밑을 휘돌기도 하면서 구수하 맑은 물은 몸을 살지우며 내처 흐른다. 팔도구항일유격근거지는 구수하량안에서 가장 력향력이 큰 근거지의 하나였다. 1932년 일제는 연길현 각지에 대한 을 감행하여 봉림동, 대마록구, 신흥동, 소팔도구, 영창동 등지에서 류혈사건을 빚어냈다. 항일유격활동을 광범위하게 벌리기 위하여 팔도, 태양, 연집, 연길 등지의 항일군민 천여명을 석인구, 부암촌과 장재촌에 이동시켜 창설한 것이 팔도항일유격근거지이다. 둘레길이는 10-15킬로메터에 달하였다. 로동촌 상룡수평과 구수하 서쪽 기슭에 로동촌렬사순난유적지가 있다. 바로 마을앞에 있는 자그마한 늪인데 지금까지도 원 모양대로 보전되여있다. 그런데 유적비가 헐망하여 쓰러질것만 같던 것이 요즘엔 종적마저 감춰버리고말았다. 이 늪에서 지하당원 4명이 살해당했으며 후에는 작탄을 만들기 위해 화약을 훔쳤다는 오봉금광의 20여명 광부들이 살해당한 곳이기도 하다. 옛날엔 여기서부터 금방아가 강안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섰댔는데 멀리서도 쿵쾅쿵쾅거리는 금방아소리가 귀맛좋게 들렸댔다고 한다. 지금도 저기 오봉산에서는 금을 캐고있지만 전성기일 때에는 비할바가 못된다고 한다. 금광을 바라보고 얼마나 많은 광부들이 모여들었는지 모랐다. 일제가 마수를 뻣친후부터는 금광을 화약을 얻는 노다지판으로 리용하였기에 더욱 소문나기도 했다고 한다. 2 구수하반의 명주는 오도저수지이다. 팔도진 로동촌과 삼도만진 오도촌사이, 구수하중류에 위치해 있는 오도저수지는 가뭄에 물이 말라 많이 줄어있는 상태였으나 그래도 바람결에 푸른 물결을 힘있게 일구면서 류람객들을 맞아주고있었다. 고 오도저수지기념석비에 새겨져있다. 오도저수지의 총용적은 6천300만립방메터이고 언제높이는 46.5메터이며 공사건축비용은 9천200만원에 달한다. 저수지는 해마다 도시에 물 3천700백만립방메터씩 공급할수 있고 농경지 근 4천200헥타르를 보상관개할수 있으며 년간발전량은 500만킬로와트시이다. 저수지는 1989년에 착공, 1992년에 준공되였다. 오도저수지를 내리면서 바라보는 구수하벌은 한포기의 그림같아보였다. 형제바위가 위용있게 오봉산기슭에 솟아있고 천주교성당이 우뚝 솟은 팔도진을 배경으로 푸른 논벌이 펼쳐지고있는데 보기만해도 흥이 난다. 병풍산 굽이돌아 흐르는 구수하 형제바위 지나 70리벌을 적시누나 형제민족 한맘으로 밭갈고 씨뿌리는 아, 아름다운 구수하반 살기좋은 내고향... 1950년대에 이 고장에서 불러지던 노래이다. 참으로 향토심이 물씬 풍기는 노래이다. 구수하에 의해 노래가 많이 지어졌을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전설들도 많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형제바위이야기며 금방아이야기, 적암동이야기... 그 중에서 자나무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본다. 룡정시 조양향 광석촌의 서북쪽기슭을 감돌아흐르는 구수하언덕에는 세아름되는 신비한 비술나무 한구루가 있다. 신통히도 자형으로 푸른 가지를 치며 자라 유난히 눈길을 끈다. 옛날 이 고장에는 푸른 늪이 있었다고 한다. 늪에서 핀 련꽃향기는 천궁까지 풍겨올라갔다. 천궁의 칠선녀들은 향기에 취하여 아버지 옥황상제를 졸라 하천하게 된다. 칠선져들은 늪에서 맘껏 미역을 감았다. 그런데 갑자기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세찬 소낙비를 무더기로 쏟아놓았다. 급기야 언덕으로 달려나온 선녀들은 자기들의 날개옷이 새초로 엮은 우장속에서 비 한방울 맞지 않고있음을 발견한다. 마음착한 목동이 선녀들의 옷을 챙겨준것이였다. 그후 선녀들은 짬만 있으면 늪에 와 미역을 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동해바다와 서해바다의 흑룡이 선녀들을 빼앗아 룡궁에 바치려 했다. 선녀들이 한창 미역을 감고있는데 흑룡들이 번개를 일구며 덮쳐들었다. 목동이 채찍을 울리자 흩어졌던 양들이 7개의 무리를 지어 몰켜섰다. 흑룡들은 양무리속에 숨은 선녀들을 찾을수 없자 벼락을 내려 목동을 죽여버렸다. 옥황상제는 씨앗 하나를 선녀들에게 주어 목동을 기리여 구수하기슭에 심게 했다. 씨앗은 싹터 이상하게도 자형으로 가지를 뻗으며 자랐다. 사람들은 어린 목동이 저승에서도 선녀들을 못잊어 그리는 모습이라고 하여 이 나무를 나무라고 불렀다. 지금도 광석촌에 가면 국도옆에 이 나무가 름름히 서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 3 구수하는 민담구술가 황구연선생이 있어 더욱 소문났다. 황구연선생은 중국민간문예가협회 회원으로 천여컬레의 이야기를 구술한 민간이야기대왕이다. 이 이야기대왕을 찾아낸분은 원룡정시문련주석이며 민간이야기수집가인 김재권선생이다. 김재권선생은 황구연선생을 찾던 그때를 회상하기만 하면 감개무량해 한다. 민간이야기를 수집하기 위해 김재권선생은 조사조를 거느리고 개산툰, 팔도하자 등지를 참빗질하다가 팔도구 룡수평에 들렸는데 1툰에 박식하고 력사이야기를 잘 하는 로인이 있다고 하여 찾았는데 그가 바로 황구연로인이였다. 김재권선생은 20여차나 되는 기회를 빌어 그에게서 옛말과 민요를 들었는데 세상을 뜨기전까지 730컬레의 신화, 전설, 설화와 300여컬레의 민요, 동화, 우수운 이야기, 수수께끼를 수집하게 되였다. 그가 구술한 이야기로 묶은 , , (한어)이 연변인민출판사, 민족출판사, 중국민간문예출판사에 의해 출판, 전국을 들썽해놓았다. 1987년 12월 15일, 79세로 세상을 뜬후 길림성민간문예가협회,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룡정시민간문예가협회에서는 백옥으로 다듬은 비석을 황구연선생의 묘비앞에 세워주었다. 맺는 말 구수하는 깨끗한 흐름으로 조양천진 태동촌 강가의 쓰레기장을 간신히 스쳐 부르하통하와 합류한다. 고향의 맑은 물은 바다를 향한 걸음을 재우치다가 부르하통하의 품에 안기는 운명을 갖지만 그만큼한 로정에서도 순결을 지킨것으로 하여 자랑을 느껴야 할것이다. 고향의 강들이 저마다 구수하처럼 맑고 깨끗했으면 얼마나 좋으랴.  
1    [기행문]말발굽산(김철호) 댓글:  조회:1548  추천:26  2008-09-01
상처입은 명산 그래도 전설과 옛모습 있어 좋다 말발굽산 샘터 연길에서 뻐스를 타고 모아산고개를 넘어서면 유표하게 눈길을 끄는 바위산이 있다. 룡정의 명산 말발굽산이다. 석질이 좋아서 채석장으로 사용되여 산이 몹시 파손된 모습이 멀리서도 알린다. 그러나 의연히 말발굽같은 모양를 보전하고 있어 찾는이들이 있다고 한다. 말발굽산으로 가자면 연변대학 농학원뻐스정류소에서 내려 농학원길을 따라가면 된다. 빤히 보이는것 같아도 정작 산기슭에까지 가자면 꽤나 걸어야 한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말발굽산은 웅장해보였다. 깍아지른듯한 벼랑으로 만들어진《말발굽》과 그 속에서 자라고있는 잡목들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고 한창 밭일을 하고있는 농민에게 말발굽산으로 쉽게 가려면 어떻게 갈수 있는가고 물었더니 왕청같은 소리를 한다. 《샘치물(샘물) 뜰라(길으러) 감둥?》 《말발굽산에 샘물이 있습니까?》 《좋은 샘치가 있습죠.》 말발굽산에 좋은 샘터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 초문이라 무척 귀가 솔깃해졌다. 《그 샘터 어디에 있습니까?》 《산너머에 있는데 과수원을 지나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있지유. 아마 찾기가 쉽잖을거우다.》 《멉니까?》 《한시간쯤은 걸어야 할건데유.》 농민의 말을 들으면서 말발굽산을 바라보니 등산객들의 모습이 알렸다. 이따금 뭐라고 웨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등산을 즐기는이들이 한창 산을 돞고있는 모양이였다. 산굽을 휘돌아 지나고있는 조개선(조양천-개산툰)철길을 건넌후 산으로 곧게 통하는 길을 버리고 오른쪽 돌밭길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카메라샤타를 연신 누루는데 웬 로인 한분이 다가왔다. 멜가방이며 비닐통을 든 모양이 샘물길으러 가는 로인같았다. 나는 먼저 산 정상에 오른후 샘터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먼저 샘터부터 가보려고 마음을 고쳐먹고 부지런히 로인의 뒤를 따르면서 샘터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윤씨성을 가진 로인은 농학원에서 교수사업을 하다가 정년퇴직한분이였는데 올해 70세였다. 산길을 씨엉씨엉 걷는 모습은 50대의 장년같아 보였다. 《하루 건너 한번 꼴로 물길으러 가는데 물맛 참 좋지요.》 샘을 발견한지가 꽤 오래 된다고 했다. 샘물이 있다는것을 안후부터 줄곧 샘을 길어마셨는데 이젠 몇 년 잘된다고 한다. 로인을 따라 걷다보니 말발굽산을 반바퀴 빙 돌면서 산 뒤에 이르렀다. 산정에서 한창 떠들던 등산객들이 산뒤의 백양나무숲을 바라고 내려오고있었다. 백양나무숲은 인공숲이였다. 일매지게 자란 백양나무는 련병장에 정연히 줄서있는 씩씩한 병사들같아 보였다. 너무 아름답고 멋진 나무숲이였다. 그 숲을 지난후 사과배과수원을 꿰지르니 내리막 길이였다. 황토와 모래로 섞인 땅이여서 비가 와도 길이 질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소나무숲을 지나야 했다. 로인은 앞에서 지팽이로 풀을 툭툭 치면서 쉽게 길을 줄였다. 아름다운 잔디밭이 펼쳐졌다. 잔디가 왕성하게 자라지 않아 아직 누런 흙이 많이 보이기는 하지만 가쯘한 잔디를 밟는 감각 무척 즐거웠다. 멀리서 양떼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있었고《꺼겅, 껑...》하고 꿩이 우는가 싶더니 이번엔 뻐꾹새가 《뻐꾹뻐꾹》한다. 로인은 오불꼬불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사람들 발길에 곱게 다져진 오솔길이였다. 소나무 한 그루가 오솔길을 가로 막았다. 그 소나무를 안고 도니 바로 샘터였다. 말발굽정상부근에서 예가지 오는데 12분나짓이 걸렸다. 비닐꼭지를 해놓은 수도관으로 샘이 졸졸졸 흘러나오고있었는데 비닐관은 바위속에 박혀있었다. 몇길되는 바위벽 맨 밑에 박혀있는 비닐꼭지로는 물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있었다. 한모금 마셔보니 시원하고 달았다. 련신 몇모금 마시니 그동안 걸어오면서 흘린 땀이 다 식는것 같았다. 참으로 좋은 샘이였다. 《겨울에도 샘이 마르지 않지요. 물수량도 변함없구요. 오늘은 사람이 적습니다. 어떤 때에는 저기 산등성이에까지 줄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윤로인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상점에서 사가지고 간 광천수를 다 털어버린후 그 병에다 샘물 가득 채운후 로인과 인사하고 목적지인 말발굽산정상을 바라고 자리를 떴다. 말발굽산전설 생김생김이 신통히도 말발굽같아 말발굽산이라고 부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이 산을 말발굽산이라고 부르는데는 그럴만한 전설이 있었다. 아득히 먼 옛날의 이야기다. 지금의 말발굽산은 그때엔 그저 좀 높은 산언덕이였을뿐이였다고 한다. 그 산언덕밑에 넓고 깊은 십리늪이 있었고 늪아래와 남쪽에 기름진 벌이 펼쳐져 있었다. 늪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는데 이 벌을 차지하고 사는 큰부자의 집이였다. 어느해인가 부자가 퇴마루에 앉아 볕을 쬐고있는데 한 헌걸찬 젊은이가 지게를 지고 마당으로 성큼 들어서는것이였다. 젊은이가 하는 말이 부모량친 다 잃고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이 집을 찾아왔으니 일이라도 시켜준다면 백골난망이겠다는것이였다. 깍쟁이로 소문난 부자는 어진간한 사람은 머슴으로 두지 않았지만 이 젊은이는 어깨가 너럭바위같고 뼈마디가 굵직굵직한것이 마치 꼬리없는 황소같아 보여 마음이 동했다. 《좋아! 일만 잘하면 장차 장가까지 보내줄수도 있지.》 젊은이는 힘도 세거니와 일솜씨 또한 날래였다. 남들이 밭머리에서 어정어정 할 때 벌써 호미날이 번쩍 하더니 저쪽 밭머리까지 나갔다. 게다가 하루 종일 일해도 아프다거나 맥없나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꼴단이나 나무단을 지고 마을에 들어설 때 보면 큰 산이 움쭐움쭐 걸어들어오는것 같아 보였다. 부자에게는 아주 예쁘게 생긴 무남독녀 외딸이 있었다. 처녀는 부지런하고 어엿하게 생긴 머슴총각에게 반해버리고말았다. 총각도 처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것을 먼저 눈치챈 부자마누라는 끙끙 속만 태웠다. 령감이 알면 야단을 칠터이고 그렇게 되면 망신을 톡톡히 당할터이였다. 그러나 종이로 불을 감쌀수는 없었다. 드디여 부자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끼를 찾아쥔 부자는 머슴을 죽여버리겠다면서 펄펄 뛰였다. 마누라는 간신히 령감을 말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 단단히 잡도리를 했다가 몰래 죽인후 저 못에 쳐넣읍시다요.》 그런줄도 모르고 총각은 밭에서 부지런히 일만 하고있는데 난테없는 백마가 먼지를 뽀얗게 일구면서 화살처럼 달려왔다. 말잔등에 앉은이는 부자집 딸이였다. 《어서 타요. 집으로 돌아가면 그대로 죽게 되니 도망치자요.》 《죽다니? 그게 웬 말이오?》 처녀는 아버지, 어머니가 꿍꿍이를 꾸민 얘기를 다 털어놓았다. 《그대는 귀한 몸이거늘 이 비천한 인간을 따라 고생함이 타당치 못하오. 내 비록 싸우다 죽기는 할망정 잡히지는 않을테요. 아가씨 마음 변함없거든 황청에서라도 다시 만나기오.》 《사람에게 빈부귀천이 따로 없거늘 소녀 한번 먹은 마음 어찌 변하오리까. 저승으로 가실려거든 소녀 함께 데려가소이다.》 머슴총각이 딸과 함께 도망친다는것을 눈치챈 부자는 숱한 사람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쫓아왔다. 처녀의 애원이 불같고 쫓아오는 사람들이 서리같은지라 총각은 할수 없이 백마에 뛰여올랐다. 앞에서는 총각과 처녀가 탄 말이 달리고 뒤에서는 부자가 탄 말이 뒤쫓았다. 한창 달리니 눈앞에 십리늪이 나타났다. 넘자니 날개없어 넘을수 없고 건느자니 늪이 너무 깊어 건널수 없었다. 그렇다고 되돌아서자니 칼과 도끼를 든 무리들이 있었다. 두 사람이 망설이고있을 때 부자네패거리들이 다가왔다. 《사랑이 죄가 되었사오니 창천은 부디 굽어 살펴주옵소서.》 두 사람은 이렇게 웨치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이때였다.뒤발로 땅을 차면서 하늘공중에 솟아오른 백마는 단숨에 십리늪을 날아넘은후 늪맞은켠 산마루를 콱 박차면서 또다시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때 백마가 남긴 발자국이 바로 지금의 말발굽산이 되었다고 한다. 뒤따르던 부자네들은 닫는 말을 미처 멈춰세우지 못해 그대로 다 눞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아직도 미모의 산 말발굽산은 뒤에서 보기에는 집안현의 고구려태왕릉처럼 보인다. 부서진 바위들이 밑에 널려있고 둥두렷한것이 도굴당한 커다란 왕릉같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강한 바위볏이 솟은것이 날카로와 보인다. 나무 한 그루가 산마루 가까이에 초병처럼 서있을뿐 말발굽산정상은 벗은 모습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우선 농학원과 농학원마을이 잡힐듯 보인다. 멀리 룡정시가지도 지척으로 안겨온다. 해란강이 흰검으로 갈라놓은 세전벌은 두쪽이 나있는데 벌써 모살이가 다 되어 벌이 푸른색을 띠고있었다. 물론 가을이면 황금의 파도가 설레일것이고 겨울이면 아득한 은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유서깊은 세전벌은 연변의 곡창으로 소문높다. 룡정-연길도로로 차들이 실북나들듯이 오가고 밭에서는 경운기 소리가 통통 난다. 인형처럼 작게 보이는 농민들이 전간에서 한창 밭일에 바쁘고있었다. 남쪽으로 비암산과 대포산이 바라보이고 북쪽으로 돌아서니 모아산이 안길듯이 다가온다. 그 뒤로 삼봉동산이 손짓한다. 말발굽산은 이런 산 가운데서 제일 낮은 산이기는 하지만 그 중심에 솟아있어 여러 산들 거느린 형국이다. 푸름이 꽉 찬 만무가원의 가관은 말발굽산에서 보아야 진미일 것이다. 모아산으로부터 시작된 과원은 릉선을 따라 내려오기도 하고 산허리를 휘돌기도 하면서 끝없이 뻗고뻗어있다. 연변지구에 5개의 만무과원이 있는데 그중 3개가 말발굽산을 중심으로 하는 룡정에 있다고 한다. 말발굽산주위를 에둘러있는 룡정과수농장은 아시아주에서 제일 큰 과수원이다. 룡정시의 과수면적은 8600헥타르, 사과배나무면적은 6800헥타르다. 사과배는 우리 민족이 배육해낸 우량종이다. 사과배는 지금 세계시장에 나가 우리민족을 자랑하고 있다. 말발굽산주위의 농장에서 생산되는 사과배는 1987년에 벌써 농업부의 량질제품으로, 오염, 공해없는 록색식품으로 평의되였다. 말발굽산정상에서 일망무제한 만무과원의 풍모를 바라보는 멋 얼마나 장쾌한지 모른다. 말발굽산은 비록 채석장으로 활용되여 많이 파괴되긴했어도 의연히 미모가 남아있다. 우에서 내려다보면 성벽처럼 벼랑이 둘어선 가운데 거뭇하게 홈이 패인곳이 바로 머슴총각의 백마가 힘차게 박차고 뛰여나간 발자국자리였다. 거기는 잡목이 우거져 멀리서 보기에 더욱 우묵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몇길되는 절벽 벽이 닭볏모양으로 빙 둘레를 치고있는데 옛날 허물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앞이 조금 트였을뿐 완전한 원형을 거의 이루었다고 한다. 《너무너무 예뻤었지요. 동그란것이 정말 말발굽같았어요.》 아까 샘물터까지 동행했던 윤로인의 말이 떠오른다. 윤로인은《지금은 볼멋을 다 잃었다》고 개탄했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그래도 옛미모가 많이 남아있어 잘 보호하면 찾아줄 사람이 많을 산으로 될것 같아 보였다. 채석일군도 없고 근년들어 돌을 캔 흔적도 없는걸로 보아 채석을 금지시켜 놓은것 같아 다행스럽다. 말발굽산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상처입은 명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볼수록 그래도 말발굽같아 보여 즐겁기만 하다. 이제라도 더는 사람손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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