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장, 과장, 화장이 이젠 정말 필요없다. 저절로 익어 빨갛고 노란 저 이파리들을 뚫고 일몰의 숨이 세게 뿜어져 온다. 가난한 아저씨는 오늘도 산 속 오솔길을 밟으며 뭔가 들어있는 무거운 멜가방을 자꾸 추썩거린다. 발에 밟히는 피그림자가 철벅거린다
시인이였던 그녀는 별로 그렇다할 시를 남기지 못하고 저녀노을 저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페가 부석부석 석회화 되는 괴이한 병이 시심(詩心)을 멈추게 한 것이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아련하기만 한데, 남자는 어떤 파티에서 물러나 그녀와 강변길 함께 걸은 적 있었다고 한다. 살그머니 손이 잡혀졌고 어느 순간 그녀의 차가운 갈쿠리가 남자의 목덜미에 감겼다. 역시나 랭랭한 입술이 포개져왔다... 그후 다시 그런 일 없었고 그녀는 죽었다. 그녀의 유상에는 입술만 있었다. 분홍립스틱의 부자연스러운 입술이 너무도 힘 있게 꽊 다물려있었다. 차갑기를 잘 했지! 남자는 속으로 외웠다. 그런데 부드럽기는 했었다는 느낌이였다. 부드러운 차가움이였다.
태일이가 갑자기 생각난다. 간암말기를 늦게 발견하고 병원침대에 구겨져있던 그가 나의 방문에 눈이 아가리 되여 소리쳤다. “니도 술 많이 퍼마시는데 왜 나만 감암이야, 왜?!” 하면서도 웃었다. 눈알에 노을이 꽉 차있었다. 헤여질 때 하던 그 한마디는 20년 지난 지금도 귀지로 되여있다. “잘 살아라, 영별이다!” 나는 그 자식보다 20년이나 더 살아있다. 노을이 어지럽다.
새
이제 너는 날 것이다
겨드랑이에서 돋는 날개를 쭉 펴고
저 고옥(古屋)의 숲을 향해!
아침이슬에 미끄러운 기와장 딛고
무릎에 파묻은 눈깔을 열면서
주저없이 죽으러 갈 것이다
화살이 되여 과녁에 가 꽂힐 때
숨 멎은 너는
옛성터의 눈동자 될터이니
오래오래 보리라,
날아온 한 갈래 길이
하늘에 하얗게 금 그어져 있는 것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금!
꽃
빛이 오기 전에 향기가 온다
색갈을 담은 향기가 온다
구태여 눈 뜰 필요가 없다
아름다움은
눈 멀어도 찬란하거늘!
나
내 속에서 내가 일어선다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며 내가 떠난다
그래도 묻어 따라오는 내가 있어서
툭툭 털어버리면
나의 팔이였던 팔이 떨어지고
나의 머리였던 머리가 떨어지고
나의 생각이였던 생각이 떨어진다
내가 다 없어질 때까지
내 속에서 내가 자꾸 떨어진다
저렇게 걷고 있는 나는 나를 다 버린 나다
나에게 내가 없다
내가 없는 내가 걷는다
살(肉)은 살(肉)의 무덤이다
“3.8”선은 좋아 한다
“3.8”선은 좋아 한다. 비무장지대라서 좋아 한다. 가끔은 총성, 칼부림 있었댔지만 그래도 좋아 한다. 8리나 되는 넓은 띠를 두르고 70년 살아왔지만 “3.8”선은 좋아 한다. 비무장지대라서 좋아 한다. 활주로가 없어서 좋아 한다. 자동차가 없어서 좋아 한다. 공장이 없어서 좋아 한다. 농경지가 없어서 좋아 한다. 사냥군이 없어서 좋아 한다. “3.8”선은 무장지대가 아닌 것에 다행스러워 한다. 무장지대였더면 대포, 미사일, 사드, 권총, 기관총, 도끼, 군도, 군화, 미친 오토바이의 소음, 둔중한 땅크바퀴의 주름, 퀴퀴한 군인들의 썩는 살 냄새, 쫓기는 짐승들의 불쌍한 울부짖음, 똥이 차고 넘치는 뒤간이 되였을 거다. 그러니 비무장지대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그래서 ”3.8”선은 좋아 한다. 뭍(“3.8”선도 뭍이긴 하지만)에는 없는 조류, 짐승, 꽃, 나무들이 “3.8”선엔 다 있어 좋아 한다. 뭍에 있는 소음, 연기, 지랄들이 “3.8선”에는 없어 좋아 한다. 그래서 “3.8”선은 자신이 장수하길 바란다. 100살은 금방이고 이제 백살만 더, 아니 또 오백살만 더 살아 오래오래 “3.8”선이기를 바란다. 남쪽도 북쪽도 다 “3.8”선이기를 바란다. 8리 너비가 800리로, 아니 그보다 더, 더 늘어나 두만강, 압록강까지 부산, 제주도까지 늘어나서 반도땅이 몽땅 “3.8”선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금은 욕심을 내려놓고 요만큼에 만족하며선 “3.8”선은 너털웃음을 웃는다. 요즘 “3.8”선은 “3.8”선을 늘굴 궁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체 한다. “3.8”선이 “3,8”섬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래도 유정(有情)
아버지, 바람소리가 들리시나요?
우린 어머니가 했던 바람의 이야기를 다 알거든요
나무잎 떨어지는 소리 보여요
눈 꼭 감고 있어도 보여요
아버지, 형체도 없는 당신이
바람 속에 섞여 있는 것이 보여요
어머니가 힘차게 풍구를 돌리시고 있어요
휘날리는 머리채에 하늘이 시커매져요
바람이 지나가니 어머니도 가버렸어요
잘 찾아보세요, 아버지
구름무지를 헤집고 별무리를 뚜져보세요
이제는 바람소리가 보이시나요?
바람에 담겨있는 그 많은 이야기가 보이시나요?
날숨만 있던 하늘에 들숨도 생겼어요
갈대의 뼈
갈대의 뼈는 유연하다
휘게 되여있다
휘였다가도 펴이게 되여있다
센 바람에 누울듯 휘였다가도
해볕 고우면 창대처럼 일어선다
갈대의 뼈는 강하다
유연하게 강하다
아무리 휘여져도 끊어지지 않게 강하다
갈대가 흐느적이는 것은
뼈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뼈가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뼈가 있기 때문이다
독주(獨奏)
시링크스는 목신(牧神)* 판에게 쫓겼다
짐승도 아니요 사람도 아닌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판의 사랑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시링크스는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이제 더는 도망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갈대로 변해버렸다
갈대가 시링크스라는 걸 알고 있는 판은
갈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사랑을 념원하는 피리소리가
판의 입김을 통해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판은 피리를 불고 또 불었다
판은 피리를 불고 또 불었다
판은 피리를 불고 또 불었다...
해 뜨고 해 지고 별 솟고 별 사라질 때까지
뾰족한 새싹이 돋아 나무로 커서 활짝 잎 피울 때까지
요람 속의 알에서 새새끼가 태여나 파닥 날개짓 할 때가지
피리소리는 끝이지 않고 울려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음악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신의 입술을 거쳐
대지에 차고 넘치였다
하늘에 차고 넘치였다
판의 마음 시링크스의 몸을 통해 음악으로 탄생하였지만
시링크스는 다시 시링크스로 변하지 않았다
*시링크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르카디아지방의 님프(精靈)이고 판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목신(牧神)이다. 판은 시링크스의 미모에 반하여 음심을 먹고 범하려 하지만 순결을 상징하는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본받으려 한 시링크스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도망치다가 라돈강가에 이르러 갈대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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