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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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도올 선생의 ‘원화관(源花觀)’에 대한 나의 이견(異見)  김정룡    필자가 전문루트를 거치지 않고 동서양의 역사, 종교, 문화, 철학 등 많은 지식을  빨리 습득하게 된 지름길이 바로 도올 선생의 40여 권의 저서와 모든 TV강의를 빼놓지 않고 보고 들은 덕분이 크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도올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 하지만 나는 주제넘게 도올 선생의 일부 학술에 대해 이견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그이의 ‘원화관’에 대해 나의 소견을 말해보려고 한다.  ‘원화’란 신라 화랑의 전신이며 화랑도는 우리민족역사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는 “화랑을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는 것은 마치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처럼 우매하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까지 화랑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화랑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과 억측이 난무한 실정이다.  도올 선생은 저서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원화’의 기원을 동양의 신화, 종교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불교의 연꽃에 연관시켜 풀이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우선 우리는 ‘화랑’이 되었든 ‘원화’가 되었든 그 주요한 이미지가 ‘꽃’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꽃’이란 무엇인가?······이 꽃의 이미지는 인도의 고유한 브라만교의 세계관에서 유래되는 것인데, 우주의 태초에 큰 바다 속에서 비슈누신이 출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천개의 꽃잎이 달린 금색의 연꽃이 피어나는데 그 연꽃 속에서 분천왕이 출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생류를 낳았다는 신화로부터 그 이미지가 발전한 것이다.······화랑은 곧 화엄(華嚴)의 랑이며 즉 ‘화랑세계’에 출현한 깨끗한 어린 영혼인 것이다. 그 화랑을 최초에 여성으로 했던 것은 곧 신라풍교의 무속과 관련이 있으며 또한 여성의 특수한 감수체계와 관련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강신무당의 주류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1)   이상 도올 선생의 ‘원화관’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폐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 도올 선생은 원화와 화랑을 구분하지 않고 혼동해서 언급했다고 본다. <<삼국유사>>에 “왕(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크게 신선을 숭상하고 낭자의 아름다운 자를 가리어 원화로 받들었다.1)”라는 대목이 있다. 이병도의 역주에 의하면 ‘원화제의 시초는 진흥왕(534~576) 때가 아니라 훨씬 오랜 옛날에 속했을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병도의 이 관점에 동의한다.  만약 원화제가 진흥왕 때에 앞서 훨씬 오래되었다고 한다면, 불교가 법흥왕(?~540) 집정 시에 정식으로 국교(527년)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원화는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신라원시종교신앙의 산물이라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나. 도올 선생은 원화와 화랑의 ‘화’가 모두 불교의 연꽃과 관련된다고 해석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라 생각한다. 만약 화랑이 불교가 한참 발흥하기 시작할 때 세상에 등장했다 손치더라도 화랑의 전신이 원화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화’가 불교의 연꽃에서 유래되었다고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 도올 선생이 화랑이 최초에 여성이었던 것을 신라의 고유무속과 연관시켰고, 그것을 여성의 특수한 감수성, 또한 강신무당이 여성이 주류라는 현상과 맞물리는 것으로 풀이했는데, 이는 역사적 유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원화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유래되었을까?원화는 한문으로 ‘源花’이다. ‘源’은 근원 즉 ‘뿌리’를 뜻하며 ‘花’는 꽃을 의미한다. ‘원’과 ‘화’의 합성어인 원화는 꽃의 시초(시조)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꽃은 자연의 꽃이 아니라 여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신라의 원화는 여성의 시조, 즉 선비(先妣)이다. 선비(先妣)를 또 여이(女夷)라 한다. 여기서 ‘夷’는 오랑캐란 뜻이 아니라 근본, 근원 즉 최초라는 뜻이며 여이(女夷)는 최초의 여성을 지칭한다. 하지만 후세에 내려오면서 선비(先妣)와 여이(女夷)는 모계시대의 여왕을 의미하는 호칭으로 되었다.  <<회남자·천문훈(淮南子·天文訓)>>에 이르기를, “여이(女夷)가 북치고 노래부르면서 하늘의 조화를 관장하고 백곡, 금수, 초목을 생장케 한다.1)”고 했다. 고유(高誘)가 주를 달기를, “여이(女夷)는 봄과 여름의 생장을 관장하는 신1)”이라고 했으며, 풍응경(馮應京)은 그의 <<월령광의(月令廣義)>>에서 “여이(女夷)는 곧 화신(花神)”이라고 말했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吳天明)은 “이른바 여이(女夷), 화신(花神)이란 곧 원시모권제시대의 부족두령과 제사를 겸한 여신1)”이라고 지적했다.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꽃이 여자를 상징하는 것은 여자가 아이를 낳고 꽃이 열매를 맺는 동일한 생산성에 의해 유래된 것이다. 이런 의미로부터 볼 때 원화는 곧 여이(女夷)이며, 화신(花神)이며 만물의 생장을 주재하는 선비신(先妣神)이다.  헌데 모권제시대의 선비신(先妣神)의 이미지는 서왕모의 본래 모습처럼 사납고 흉측한 반인반수형이었다. 그러다가 부권제시대에 진입하면서 서왕모를 비롯한 선비신(先妣神)들은 양귀비처럼 아릿다운 모습으로 변모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연나라 때 젊고 예쁜 ‘여중의 여’를 물색하여 원화로 삼고 국선으로 모시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는 모계시대 여성숭배의 잔재현상이다. 일부 학자들은 신라의 원화제가 연나라의 원화 풍속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원화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진흥왕 때 원화제를 폐지하고 젊고 영준하게 생긴 남아를 골라 남분여장시켜 ‘화낭(花娘)’이라 불렀으며 원화를 대신케 했다. 그러다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대량협공에 의해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젊은이들의 전의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여자를 상징하는 ‘화낭(花娘)’을 ‘화랑(花郞)’이라 고쳐 부르고 본격적으로 화랑도를 진흥시켜 수많은 젊은 장수를 배출해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 데는 물론 당제국과 연맹을 맺은 것이 주요하지만 신라 자체가 화랑도를 통해 강대해졌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신라의 원화와 화랑은 도올 선생이 주장한 것처럼 불교와 관련이 없이 동양의 고유한 신화와 종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주해 1. 도올 김용옥 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통나무, 1989년, P201.       2. 第二十四眞興王······天性風味, 多尙神仙, 擇人家娘子美艶者, 捧爲源花.        3. 女夷鼓歌, 以司天和, 以長百谷, 禽獸, 草木.        4. 女夷, 主春夏長養之神也.        5. 吳天明著, <<中國神話硏究>>, 中央編譯出版社, 2003年, P90.  
65    "‘生母’한테 ‘養母’ 흉 보면 못난 자식…" (김정룡) 댓글:  조회:5705  추천:74  2008-02-15
4. "‘生母’한테 ‘養母’ 흉 보면 못난 자식…"  김정룡    “얘야, 인간이 똑똑하다는 기준이 뭔지 알아? 매사에 앉을 자리 설자리를 제대로 똑바로 알고 처신하는 자가 똑똑한 거야!” 이것은 내가 어릴 때 마을에 ‘교수’라는 별명을 갖고 계시는 식(識)이 뛰어난 노인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말을 예수의 어록처럼 받들고 살아왔다.  사실 인간이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우선 나의 처지부터 똑바로 인식해야만 앉을 자리 설자리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조선족은 참으로 자신의 처지(정체)에 대해 혼란스럽고 처신하기가 쉽지 않다.  故정판룡 교수는 조선족의 정체를, 한반도에 친정을 두고 중국에 시집온 며느리와 같다고 지적하면서 시댁에서 소외되지 않게끔 며느리 노릇 잘하려면 친정에만 치우치지 말고 시댁의 법도를 잘 지키고 시댁식구들과의 화목에 노력하라고 충고했다.  김강일 교수를 비롯한 소장학자들은 우리조선족은 엄연한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서 응당 주인공 의식을 갖고 떳떳하게 살아야지 웬 눈치 보는 ‘며느리’를 들먹이느냐면서 반박하고 나섰다.  필자는 이상의 학계 어르신님들 간의 논쟁에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다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진리라면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 더 크다는 또 하나의 진리를 지키면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이 우리조선족의 입장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개별적인 조선족지성인들은 키운 정을 헌 신발을 버리듯 하면서 ‘양모’의 흉을 보고 있는 것에 좀 싱거운 소리를 해보려 한다.  <<한겨례신문(2007-03-12)>>에 <우리말 소설근원은 소수민족 슬픔>이란 제목의 글에 조선족 작가 허XX의 다음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중국이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펴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그렇다. 소수민족 우대정책이란 것 자체가 실은 완전히 중국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역설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늘 소수자의 외로움, 고독을 느낀다. 우리 문학을 우리말로 써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실은 그게 슬픔이다. 차라리 중국인으로 태어나거나 한국인으로 태어났어야지. 난 뭔가? 중국 주류도 한국 주류도 될 수 없는 이방인이다.”    소수민족으로 태어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따라서 조선족이 정부당국으로부터 우대정책을 받고 사는 것도 역시 좋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이 으뜸이라는 것을 세인이 모두 긍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감사한 맘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이 표면적인 것이라고 폄하해서는 안 된다. 허XX 씨의 말대로 “조선족이 영원히 한족이 될 순 없는 존재다.” 조선족이 한족이 될 수 없을 바엔 우대정책을 받고 사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필자가 이해력이 모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허XX씨는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 ‘사실본질이 그것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것으로 불만을 갖도록 부채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서글프다.  허XX 씨는 우리말로 문학을 하는 것이 슬픔이라 했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말로 문학을 하는 것은 개개인의 취미에 따른 것도 있겠으나, 이는 ‘우리 것’을 지켜가는 데 소중한 기여이기도 하다. 만약 그것을 슬픔으로 표현한다면 시장이 너무 좁아 아무리 써내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조선족 작가들이 원고료를 상징적으로 받네 하고, 단행본을 내려면 후원이 없이는 매우 힘들고 어렵게 책을 내도 팔리지 않아 돈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윤림호와 같은 쟁쟁한 작가도 가난에 쪼들려 딸애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글쓰기를 못하게끔 쥐어 패면서까지 말렸다고 한다. 가령 조선족 작가들이 돈을 팡팡 벌 수 있다면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상기 신문기사에 따르면 허XX 씨는 국가 1급 작가로서 환화로 환산하면 25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어마어마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뭐가 모자라서 ‘양모’에 대해 불평을 부리고 있는지? 그녀는 이렇듯 엄청난 대우를 받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3개월만 있으면 한국에 오고 싶어 못 견디고 1년에 적어도 3개월 비자로 2번 정도 한국에 온다고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인정이 많고 아기자기하고 서비스도 좋고 남자들이 너무도 친절한(중국에 비해) 한국은 천국”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녀의 한국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작가라면 한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족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도 알아보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즉 한국에 온 대다수 조선족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정이 메마르고 무시와 냉대와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허XX 씨는 한국을 중국에 비해 천국이라고 칭찬했는데, 그렇다면 중국은? 중국에서 250만 원 정도의 녹을 받고 있는 그녀가 중국을 여지없이 보고 한국을 천국이라고 칭찬한 것은 지나친 행위가 아닐까?  상기 신문에 실린 허XX 씨의 지나친 언행들이 본의 아니게 잘못 전달 되였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으므로 필자는 그저 신문만 보고 느낀 것을 두서가 없이 적었을 뿐이다. 그리고 가령 허XX 씨와 같은 지나친 언행들이 조선족의 입에서 나왔다 손치더라도 한국 언론들은 중한교류, 나아가서 남북통일의 가교역할을 할 조선족을 ‘생모’와 ‘양모’ 사이에서 잘 처사하게끔 밀어주는 것이 올바른 처사가 아닐까? 그렇지 않고 반세기 떨어져 있던 ‘생모’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을 찾아온 자식이 ‘양모’의 흉을 보는 것을 귀엽다고 떠든다면 잘 대해주었던 ‘양모’가 얼마나 서러울까? 이런 일이 잦아지면 결국 ‘양모’는 키웠던 애를 멀리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나는 한국 언론이 자기 목적을 위해 특정인을 너무 띄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임도 250만원이 아닌 25만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나저나, 언론에 보도된 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나는 허 작가에 대해 반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  앉을 자리 설자리를 살피면서 산다는 것이 피곤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우리 조선족의 운명이라면 스스로 똑똑하게 살기에 노력할 수밖에!…                               
64    공자의 ‘별칭’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 (김정룡) 댓글:  조회:4796  추천:54  2008-02-14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공자의 ‘별칭’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  -일부 한국민족주의학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대하여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20세기 초 소장학자로서 중외(中外)에 명성을 떨쳤던 호적(胡適)은 “대담하게 가설하고 소심하게 증거(증명)를 구하라(大膽假設, 小心求證).”는 의미심장한 명언을 남겼다. 곽말약(郭沫若)은 “기상천외한 발상을 갖되 실사구시 해야 한다(卽異想天開, 又實事求是).”고 말했다.  학문이 발전하자면 기상천외한 발상을 갖고 대담하게 가설해야 한다. 하지만 학문은 어디까지나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소심하게 증거를 구하고 실사구시 해야 한다. 허나 한국의 일부 민족주의학자들은 소심하게 증거를 구하지 않고 기상천외하게 가설만 내놓고 마치 그 가설이 정설인 것처럼 떠들고 있다.  아래에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사례 1> 이일봉(李一峰) 씨는 저서 <<환단고기실증>>에서 “동아세아 땅은 한민족의 땅이었고, 아세인은 한민족의 후예이고, 환인이 동아세아를 지배했던 우두머리였고, 도교는 한민족이 지어낸 것을 중국에서 역수입해서 사용했고······” 등등의 증거도 명확치 않은 주장을 어처구니없이 수두룩하게 펴냈다. 너무도 한심한 주장이라 반박해야 할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 그대로 ‘분서처리(焚書處理)’되어야 마땅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례 2> 1980년대 중 후반에 한국에서 공자가 한국인이라는 주장이 설치다가 무의미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례 3> 요즘 한국에서는 증거도 없이 청동기역사 연대를 500년 앞당겨 서술하는 것을 고교국사 교과서에 넣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다. 허나 민족주의학자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중국동북공정에 맞서는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발상이다. <사례 4> 단군에 대해 대다수 학자들은 신화로 취급하는 데 반해 일부에서는 단군은 실존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단군이 신화인물이냐? 실존인물이냐? 는 논쟁에 끼어들어 어느 ‘입장’에 손을 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군에 대해 신화를 말하던 실존을 운운하던 역사, 종교, 신화 등 다방면의 풍부한 지식을 갖고 논하는 것이 옳은 처사가 아닌가는 소견을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단군이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서 강무학(姜武鶴) 씨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강무학 씨는 <<세시풍속(歲時風俗)>>, <<단군은 실존했다>> 등 많은 저서를 펴낸 학자이다. 그런데 필자는 강무학 씨의 저서들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민족 선사(仙史), 풍류도,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등에 대한 이해가 매우 결핍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자와 노자의 ‘별칭’조차 모르고 단군의 실존을 서술하다보니 설득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보아내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강무학 씨가 어떻게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을 잘못 해석했고 또 이로 인해 그가 얼마나 우리민족역사에 대한 인식이 잘못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최치원(857~950?)은 통일신라 말기 사람으로서 12세에 당나라에 유학 갔고 당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라 있다가 29세에 귀국하여 저물어 가는 신라를 구해보려고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저서로는 <<토황소격문(討黃巢激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 20여권이 있으며 특히 <난랑비서문>이 후세사람들에게 남긴 영향이 가장 크다. <난랑비서문>의 원문: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虛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번역문 :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일러 ‘풍류도’라 한다. 그 가르침의 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삼교(유 불 도)가 이미 자체 내에 들어 있어 모든 군생을 감화시킨다.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공자의 가르침과 같다.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다.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의 가르침과 같다. 강무학 씨는 이 <난랑비서문>을 완전히 주관억측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현묘’란 낱말은 한나라 초기부터 도가에서 흔히 쓰던 말로서 당나라에 와서는 그 낱말의 뜻이 좁아져 오두미교(五斗米敎)와 방술 등을 현묘한 도라고 했다······.  ‘현묘지도’란 한나라 초기부터 있은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시대부터 있어왔던 말이다. <<장자>>에서 ‘득의망상(得意妄象)’, ‘득의망언(得意妄言)’을 제창하면서 ‘언’은 도구이고 ‘의’는 목표라 보고 ‘의’를 얻으면 ‘언’을 버리라 했다. 여기서 ‘언’은 말을 지칭하고 ‘의’는 현묘한 도의(玄妙之道意)를 뜻한다. 그러므로 현묘지도란 말은 ‘의’를 뜻하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강무학 씨는 계속해서 ‘노사구(魯司寇)’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라서 다음과 같이 엉뚱하게 해석했다.   이 문사에서 선생(최치원)은 ‘사구’라고 했는데, ‘사구’는 죄인을 다스리는 지금의 법무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중간에서 사도의 ‘도(徒)’가 잘못되어 ‘구(寇)’자로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도라면 더욱 좋을 듯싶다······.  이 해석은 필자가 접해본 중 가장 엉망으로 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중국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자가 노나라에서 잠깐 ‘사구’직을 맡은 적이 있었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무슨 사도가 어쩌고저쩌고 할 것 없이 ‘노사구’란 곧 공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면 그만이다. 원문을 이해 못해 무엇이 잘못되었다느니 어떻게 하면 좋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왜곡하는 것은 학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무학 씨는 ‘노사구’가 공자를 뜻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주주사(周柱史)’가 곧 노자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도 역시 몰라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위’라는 말을 썼을망정 유교적 입장에서 설명한 사상이 짙다. 또 ‘주주사지종(周柱史之宗)이란 주나라의 역사를 꾸미는 기둥과 마루라고 했다. 이 문사는 존주사상이 짙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해석이 너무 한심하다. ‘주(周)’는 주나라를 뜻하고 ‘주(柱)’는 기둥역할이라는 의미이고 ‘사(史)’는 역사가 아니라 곧 사관이다. 옛날에는 관리를 ‘사관(史官)’과 ‘무관(巫官)’으로만 나누었다. 노자는 당시 주나라 ‘중앙도서관’ 관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문에서 ‘주주사’는 주나라 으뜸가는 사관이라는 뜻이며, 이는 곧 노자를 지칭한다. 강무학 씨가 ‘역사를 꾸미고’, ‘존주사상이 짙다’는 등의 해석은 완전히 얼토당토한 억측에 불과하다.  강무학 씨는 <난랑비서문>의 해석 끝 부분에서 최치원을 사대주의자로 몰아붙이면서 “선사와 풍월은 단군의 선사라는 것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나무랐다.  사실 최치원은 강무학 씨의 견해와 완전히 달리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민족주의자였다. 최치원이 <난랑비서문>에서 공자를 ‘노사구’로, 노자를 ‘주주사’로 표현한 것은 공자와 노자가 별로 대단한 것 없이 그저 공자는 노나라의 일개 관리였을 뿐이고, 노자는 일개 도서관 관장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중원문화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벗어나 우리민족이 주체성을 갖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이다.  또한 최치원은 우리민족역사를 타민족역사와 다르게 선사로 규명하고 따라서 선사는 풍류도를 맥으로 흘러왔고, 풍류도에는 삼교의 종지가 다 들어 있으며, 단군으로부터 시작되고 화랑으로 이어졌으며 민족의 ‘얼’을 형성시킨 역사는 독특한 ‘풍류의 멋’의 역사라는 것을 알리려고 <난랑비서문>을 함축성이 강하게 지어놓았던 것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해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역사를 연구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단군실존을 확실하게 말하려면 최저한도로 <난랑비서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곤란하다.  그리고 우리선조들은 역사기재를 별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중국고경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국고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역사를 운운할 수 있다. 강무학 씨처럼 ‘노사구’가 공자를, ‘주주사’가 노자를 가르키는 말인 줄도 모르면서 단군실존을 말한다면 아무런 설득력도 얻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독자들로부터 조소를 받게 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63    23. "거시기가 꼴리지 않는 자에겐 돈을 빌려주지마라" 댓글:  조회:5331  추천:54  2008-02-12
  23. “거시기가 꼴리지 않는 자에겐 돈을 빌려주지마라”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아침에 이불 밑에서 거시기가 꼴리지 않는 놈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유행어가 있다.  성인 사내는 보편적으로 아침에 자고깨나 눈을 뜰 무렵이면 거시기가 꼴려 있다. 만약 거시기가 꼴리지 않으면 성적기능에 문제가 있다. 그런데 왜 위의 유행어가 생겨났을까?  사내는 삼대 욕(慾)이 있어야 한다. 즉 식욕, 성욕, 일욕이다. 이 삼대 욕 중에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며 일욕은 후천적인 것이다. 한 인간이 식욕이 떨어지면 성욕도 떨어지고 따라서 일욕도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먹는 것은 병신을 포함해 그 어떠한 인간도 다 먹고 산다. 먹는 인간이라 해서 모두 성생활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잘 먹는 인간도 거시기를 잘 못 쓰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남자가 남자다운 가장 기본조건이 거시기를 잘 쓰는 것이다. 만약 거시기를 잘못 쓰는 인간은 마누라에게 구박당할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주눅이 들어 자신감이 사라지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거시기를 잘못 쓰는 자는 다른 일에서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거시기를 잘 쓰는 사내는 마누라에게도 큰소리 치고 밤일을 잘해주면 아침 밥상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고, 또 밖에 나가서도 모든 일에 자신감이 있고, 또한 그러한 사내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거시기를 잘 쓰는 사내는 아침에 이불 밑에서 거의 100% 꼴린다. 거꾸로 거시기를 잘 못 쓰는 자는 아침에 이불 밑에서 꼴리지 않으며, 이러한 남자에게는 희망이 없으므로 돈을 빌려주면 돌려 받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거시기가 잘 꼴리고 성생활을 잘하는 것을 ‘정력이 좋다’ ‘정력이 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력이란 말은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음양설에 의하면 인간은 양인 하늘기와 음인 땅기에 의해 생겨났으며 따라서 인간의 몸은 음양으로 나눈다. 즉 혈은 음이고 기는 양이며, 백은 음이고 혼은 양이며, 정은 음이고 신은 양이다. 혼비백산이란 말이 있는데 혼은 양이기 때문에 하늘로 날아올라가고 백은 음이기 때문에 땅에 흩어진다. 혼은 양이고 몸은 음이고 땅에서 왔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시체는 땅에 묻는다.   ‘정(精)’은 쌀 미(米)와 푸를 청(靑)으로 합쳐졌다. 옛날 사람들은 정자(精子)를 곡정(穀精)이라 했다. 즉 남자의 정자는 쌀에서 오기 때문에 곡정이라 했던 것이다.  서양문화가 동양에 유입됨에 따라 칼로리가 어떻고 에너지가 어떻고 하는데, 동양문화에서는 영어 칼로리나 에너지에 해당되는 것이 곧 정(精)이다. 그런데 이 정(精)이 바로 곡식섭취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굶으면 온몸이 기력이 없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러다가 뭔가 먹으면 정신이 벌쩍 든다.  우리는 영어 ‘mind’를 우리말로 정신이라 무분별하게 번역하고 아울러 정신을 단순히 두뇌의 그 무엇으로만 이해하고 있는데, 기실 동양음양사상으로 말하자면 정신이란 정과 신이 합쳐진 것이며, 정은 땅에서 오고 신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며, 신은 정이 받침 되어야 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양사상으로 말하면 신은 독립적인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정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자를 고단백질이라고 말하는데 인간이 곡식을 섭취해서 몸 안에 남는 것 중에 가장 알맹이가 바로 정자라는 뜻이다. ‘정확(精確)’, ‘정통(精通)’, ‘정병(精兵)’, ‘정소(精巢:고환)’, ‘정수(精髓)’, ‘정수(精粹)’, ‘정밀(精密)’ 등등에서 ‘정’은 알맹이라는 의미이다.  현대인은 지나친 화학성분에 휩싸여 생활하고 있고, 식생활에도 문제가 있거니와 정신적인 노동에 너무 시달려 발기부진 자가 많다고 한다. 여자들이 조기폐경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평균수명은 길어졌지만 남자나 여자나 제구실하는 데는 옛날사람들보다 못하다.  아침에 거시기가 꼴리지 않는 사내들은 돈을 빌려줄 사람이 없을 터이니 분발해서 꼴리기에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62    천박한 일부 조선족문인 댓글:  조회:4760  추천:44  2008-02-10
천박한 일부 조선족문인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며칠 전 나의<<조선족의 최대 비극은 지식의 빈곤에 있다.>>는 글이 조글로에 발표되자 일부 소위 조선족사회 문인이라 하는 자들이 매우 흥분, 아니 격분해 하고 이지를 잃고 저를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데 이는 결코 지식인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식인은 반드시 지식인의 체신을 지켜야 하고 최저한도로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 상식을 갖춰야 한다. 나는 글을 많이 쓰고 남의 글을 많이 읽지만 종래로 타인의 글에 댓글을 달지 않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아울러 나의 글에 그 어떠한 입장으로 댓글을 달든지 간에 나는 대응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예하면 나의 글은 주로 조선족문제를 다루는 글과 역사문화이야기인데 후자에 대해선 별로 반응이 없지만 전자에 대해선 찬반양론이 격렬하고 심지어 조선족대모임카페, 모이자 등 일부 사이트 네티즌들(사회 어중이떠중이들)은 나를 천하의 때려죽일 놈이라고 인신공격을 해도 여지껏 일률로 대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번 소위 조선족 문인이라 하는 자들이 함부로 나를 ‘망발’이니, 김문학이 어쩌고저쩌고 싸가지 없는 인신공격에 대해선 결코 참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생각되어 나도 어쩔 수 없이 독은 독으로 치라는 식으로 이 글을 쓰는 바이다. 우선 지식인이라면 타인의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斷章取義’해서 타인을 매도하고 인신공격을 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천박해지는 결과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글에 대해 요약해 말하자면 첫째 나는 결코 조선족언어와 문화 무용론을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딸애를 연길시 신흥소학교부터 연변일중을 졸업시켜 대학에 보냈을 만큼 결코 조선족언어를 무시하거나 더욱이 무용론자가 아니다. 다만 연변대학 김강일 교수와 나의 사례를 볼 때 조선족학교는 소학교까지만 다니고 초중부터 한족학교를 다녀도 여전히 조선족언어로 글을 쓰고 그 누구 못지않게 조선족청체성을 비롯한 조선족문제에 관한 글을 많이 써내고 있는 사실을 보면 반드시 소학교부터 고중 그리고 연변대학이나 중앙민족대학 조선어학부를 나와야 만이 조선족정체성이 있고 애족심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둘째 내가 말하는 예수, 부처 등은 결코 단순한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식의 범주에서 한 말이다. 아직도 일부조선족문인들은 예수, 부처 하면 종교로만 사고하는 것이 참으로 가소롭다. 문학작품을 싸내도 예수, 부처, 공자, 마호메트, 노자 등을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세상만사의 지식으로 습득하고 작품에 반영한다면 세계성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 조선족문인들은 자신들이 조선족언어로 글을 쓰기 때문에 중국 시장 나아가 세계 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비애라고 변명하고 있는데 이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세계성적인 명작을 써내는 문인들이 결코 여러 가지 언어를 반드시 구사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언어로 쓰든지 간에 작품성만 인정되면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출판이 가능하다. 관건이 세계성적인 지식습득이다.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600 여명이 된다고 하는데 <<연변문학>>잡지가 300부만 달랑 찍어낸다고 하니 그래 우리 조선족문인들이 왜 요 지경 요 꼴이 되었는가는 것에 전혀 반성이 없이 내가 조선족 지식인들이 세상만사의 지식을 습득하라고 한 것에 대해 그토록 흥분하고 인신공격을 해야만 답이 나오는가? 셋째 연변사회분위기에 먹고 마시고 노는 풍토가 분명히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부인한다면 애족자가 아니라 반민족자이다. 이에 대해선 많은 분들이 지적이 있었기에 생략하겠다. 넷째 조선족사회 교육에 분명 여러 가지 문제가 존재해 있다. 교육이란 학교, 가정, 사회 삼위일체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분명히 가정과 사회교육이 후대양성에 문제가 많다. 이를 부인하는 자는 연변사람이 아니라 진공 속에서 사는 인간이다. 다섯째 연변도서관 관장의 방송강의에 의하면 연길 00지식인들이 모인 직장 직원들이 1년 평균 책 한 두 권을 읽으나 마나한 통계가 있다고 한다. 내가 조선족 지식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문제를 지적했다고 한국이 어떻고 타민족이 어떻고 하는 식의 변명을 하는 문인이야말로 억지춘향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의 글은 조선족 사회가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만 더 큰 도약을 이룰 수 있다는 취지에서 쓴 것이지 결코 일부 문인의 지적처럼 자기 민족을 팔아먹는 망나니가 아니다. 나의 글 뜻도 모르고 나를 두 번째 김문학으로 몰어부치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머리로 작품을 읽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앞으로 나의 글에 대해 토론은 허락하나 인신공격은 용서치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둔다.
61    한국인은 왜 조선족호칭을 싫어할까? 댓글:  조회:4817  추천:43  2008-02-05
한국인은 왜 조선족호칭을 싫어할까?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한국학자들과 조선족학자들이 한국에서 조선족호칭에 관한 주재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한국학자들은 조선족호칭을 부정하려 하고 조선족학자들은 조선족호칭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서로 엇갈린 주장을 했고, 결국 아무런 결론이 없이 유야무야 하고 말았다. 요즘 들어 한국에서 가장 큰 신문인 조선일보가 또 조선족호칭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섰다. 필자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학자 및 언론인들이 조선족호칭에 시비를 걸거나 부정하려드는 태도가 옳지 않다고 본다. 먼저 한국인들의 주장요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조선족이란 호칭 자체가 중국이란 대국에서 소외의 이념에서 폄하의 의미로 붙여진 것이므로 못 마땅하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이나 일본에 간 우리 겨레를 재미동포, 재일교포라 부르는 것처럼 조선족이라 하지 말고 중국동포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주장은 하나는 조선족이 왜 조선족인가는 본질적인 문제를 떠나 대국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출발하여 소외의 논리로 접근하려는 데서 기인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이란 명칭이 붙은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데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조선족의 유래를 간단히 살펴보자. 17세기 중반에 전체 중국을 장악하게 된 청 정부는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 지역을 자신들의 발상지라 여기고 봉금령을 내렸다가 19세기 들어 짜리러시아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자 봉금령을 풀고 인구의 이주를 허락하고 개간을 촉진했다. 19세기 60년대부터 조선의 조정의 부패무능과 자연재해에 시달린 백성들이 희망의 땅인 속칭 만주 땅에 이주하기 시작했고, 일제시대에 일부는 살길을 찾아 일부는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에 갔다. 지금의 연변 땅은 주로 산동반도의 한족이 동북에 진출과 조선인이 공동 개발한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조선인이 19세기 60년대부터 1949년 10월 0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까지 동북 3성과 내몽골지역에 정착하여 개간한 땅이 조선반도의 두 배나 된다. 그런데 토지소유권이 문제였다. 중화민국정부가 그 어마어마한 땅의 토지소유권을 조선인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지소유권을 갖지 못하면 조선인은 안식처를 잃게 되고 조선반도로 쫓겨 갈지 모를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 생사존망의 문제를 공산당이 해결해주었다. 즉 조선인이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에 나선다면 전승 후 토지소유권을 주겠다는 약속이었고, 공산당은 정권을 잡게 되자 약속을 지켰고, 1952년 09월 03일에 조선족자치정부까지 수립케 했다. 이렇게 조선인은 정치상 공식적으로 다민족국가의 한 개 민족으로 등록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 되었고, 자체 민족 언어, 문자, 풍속습관 등을 지켜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족의 역사는 미국이나 일본에 이민 간 우리 겨레처럼 남이 닦아놓은 터전에 발을 들여놓은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스스로 삶의 터전을 개척하고 당당하게 공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나 일본에 간 우리 겨레들은 그 거주국에서 정치적으로 하나의 ‘族’으로 등록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학자와 언론인들은 중국에서 조선인이 하나의 ‘족’으로 등록된 것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족’은 가족, 친족, 부족, 민족 등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살아가는 집단공동체에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조선족’이란 ‘족’은 정치적으로 소외의 이념에서 유래되었다는 엉뚱한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체 민족인 한족도 자신들을 하나의 ‘족’으로 말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중국에서는 인적사항을 적는 모든 등기부에 반드시 민족을 밝히는 칸이 있는데 조선족을 포함한 55개 소수민족만 적는 것이 아니라 주체민족인 한족도 반드시 적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중국은 56개 다민족국가이고 정치적으로 ‘족’을 사용하는 것은 민족마다 자신들의 문화를 갖고 의미 있게 살아가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한국인은 복잡다단한 중국의 실정과 조선족의 유래를 살펴보지도 않고 피해의식으로 소외의 논리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 유명 00여교수는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중앙에서 00프로를 진행하면서 음악회에 조선족을 포함한 기타 소수민족을 참여시킨 것을 “중국정부가 소수민족을 가면으로 끌어안는 척하는 쇼를 부리고 있고, 여기에 시키는 서방질하는 조선족이 불쌍해 마음이 씁쓸하다.”고 했다. 참 어이가 없는 발언이다. 중국에서는 거국적인 행사에 반드시 소수민족을 참여시키고 있다. 이는 중앙정부가 다민족국가를 다스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정책(전략)이다. 중국실정을 모르고 남의 일에 이렇쿵 저렇쿵 하면서 중앙정부와 조선족사이를 이간질하는 듯 한 발언을 삼가기 바란다. 다음 조선족은 조선시대부터 이주했고, 중국에서 확실하게 하나의 ‘족’으로 등록하고 민족 집단공동체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조선인을 조선족으로 부르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는 것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중국동포라 불러도 무방하지만 왜 조선족호칭자체에 시비를 걸고 부정하려 하는지? 여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만약 조선족이 ‘韓族’으로 등록되고 ‘韓族’으로 불리운다면 한국인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 한국학자와 언론인들은 조선족호칭을 없애고 한인, 한민족, 한국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춘향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국인들이 조선족호칭을 싫어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韓’이 아닌 ‘朝鮮’이 붙여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1992년 08월 24일 한중수교 이전에는 조선족들이 한국을 남조선이라 부르다가 현재는 한국, 한국인이라는 말을 자연스레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인은 ‘조선’이란 개념을 싫어하다보니 조선족호칭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상대의 존재를 존중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면 될 것을 왜 문제 삼고 떠들고 있는지?
60    조선족의 근본문제는 ‘경(經)’이 사라진데 있다(김정룡) 댓글:  조회:4256  추천:54  2008-02-04
  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 3.조선족의 근본문제는 ‘경(經)’이 사라진데 있다(김정룡)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족정체성문제가 열점화제로 불거진 지도 어언간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 동안 수많은 조선족문인학사들이 관심을 갖고 다각도로 연구 끝에 일부 좋은 견해들을 내놓았으나 문제의 본질을 떠나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헛다리짚기,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발표된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어 유감으로 느껴진다.  필자는 조선족의 최대 비극은 지식의 빈곤에 있고 조선족의 근본문제는 ‘경(經)’이 사라진데 있다고 본다.  ‘경(經)’이란 실 사변과 줄기 경자가 합쳐진 글자로서 본래 날실을 뜻하는데서 유래되었다. 천을 짤 때 먼저 내리 줄 즉 날실을 세워놓고 가로 줄 즉 들실을 끼워놓는다. 옛날 시골에서 구차할 때 초대(草袋: 벼 짚 가마니)를 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잘 알고 있겠지만, 먼저 틀에다 날줄을 세워놓고 벼 짚 한 오리씩 끼워 넣는다. 천을 짜거나 초대를 짤 때 그 날실을 세우는 것이 곧 ‘경(經)’이다.  이 날실에서 유래된 ‘경(經)’은 무수한 뜻을 갖고 있으나 대체로 기본, 규칙, 권위, 진리, 원칙, 원리를 의미한다.  인류가 야만시대로부터 문명시대에로 전환된 징표가 바로 ‘경(經)’의 수립이다.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도교 등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자체 교리교의를 갖고 있는데 그 교리교의가 담겨진 책을 ‘경전’이라 하며 ‘경전’으로 인간사회 윤리, 도덕, 질서 및 일상생활의 규범을 만든 것을 ‘경(經)’이라 한다.  우리 조선민족은 단군시대부터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사상이 ‘경(經)’으로 자리매김 되어왔으며, 기자의 홍범구주, 한4군(漢四郡)시기부터 유가와 도가가 도입되었고, 1600년 전 불교가 유입되어 고려 말까지 불교가 전반 사회 ‘경(經)’으로 되었다.  불교는 집단적 파워보다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고 고려시대는 불교일색이었던 탓으로 사회는 횡적인 패턴이었기에 매우 혼란스러웠다.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립은 곧 고려시대 불교로 인한 횡적사회패턴을 유교적인 수직사회패턴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조 500여년을 통해 유교를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뼈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받아들여 전반 사회 구서구석에 침투되어 유교가 강력한 ‘경(經)’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정치면에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문신독재(文臣獨裁)’, ‘유생권위(儒生權威)’, ‘사농공상(士農工商) 계급분화’ 등등이고, 문화면에서 ‘배불존유(排佛尊儒)’, ‘선비숭상’, ‘주자학 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등등이고, 생활면에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지키고, 가족 내에서 제사를 높이 받들고, 종가문화가 확실하게 정착되고, 가부장적문화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등등이다. 이 외에도 ‘남존여비’, ‘칠거지악’, ‘이혼불갗, ‘재혼불갗 등 결혼관, 정조관이 모두 조선조 500여년을 통해 철저하게 확립되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봉건사상’, ‘봉건습관’이 절대다수가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유교의 수립에 따라 확립된 것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150년 전부터 조선반도의 획일적인 유교의 ‘경(經)’을 갖고 중국에 가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살아오는 과정에 점차 중국문화를 흡수하면서 ‘이중문화’를 갖게 되었고, 또한 중국의 시대환경의 변화에 따라 조선족의 ‘경(經)’이 많이 변화되고 심지어 무너져가고 있는 단계에 처해 있는 것이 조선족의 현주소이다.  조선족이 한 때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꼽히게 되었던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자체 훌륭한 ‘경(經)’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조선족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이란 10년 동란 시기에 ‘경(經)’이 깨지기 시작해서 개혁개방이후 현재 ‘경(經)’이 박산 직전에 이르러 조선족사회가 크게 휘청거리고 있다.  문화혁명시기에 이른바 ‘파4구(破四舊)’운동으로 인하여 조선민족의 미풍양속으로 전해온 제사를 비롯한 전통풍속이 타파되었고, 스승과 제자는 한 전호 속의 전우라는 ‘미명’하에 학생이 선생에 대한 존경이 사라졌고, 노인에 대한 존경도 많이 사라졌으며, 노선투쟁에 뛰어들어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고 형제간에 반목하고 친척끼리 등을 돌리고, 기타 소수민족에 비해 조선족은 가장 혁명의 선두에 서서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아무튼 조선족은 ‘연변은 마레의 고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상이 지나치게 빨개 갖고 대국혁명의 선두에 서다보니 조선족사회가 쑥대밭이 될 지경으로 전통적인 ‘경(經)’이 박산나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의 후유증이 채 가셔지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개혁개방을 맞이한 조선족은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우선 ‘문화혁명이란 호랑’이가 사라지자 본래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하는 조선족이 마치 고삐가 풀린 말처럼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력을 몰두하여 정신세계가 피폐해졌고, 농촌에서 한족들은 농한기에 싸리 광주리를 튼다든가 비를 짜는 등 쉬지 않고 일을 하여 돈을 버는 반면에 조선족은 그 기나긴 겨울철에 화토놀이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었다. 도시에서도 한족들이 조선족의 돈을 번다는 얘기가 있듯이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두 배되는 땅을 개간하던 근면의 정신이 오간데 없이 일하기 싫어하는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뭐니 뭐니 해도 조선족이 개혁개방을 맞아 전통적인 윤리도덕을 벗어나 모든 것을 돈으로 행세하고 돈으로 도배하려하고 돈으로 해결하려하고 돈을 위해서라면 양심과 체면과 도덕을 버리는 등 유교적인 것과 공산주의적인 것들로 이루어졌던 아름다운 ‘경(經)’이 소실되어 조선족사회는 ‘천박’한 사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예하면 청렴의 상징이었던 조선족‘선비(교원)’들은 학부모들로부터 돈이나 받아먹는 손가락질 당하는 대상이 되었고, 학부모들은 저마다 제 아이만을 위해 선생한테 돈을 주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가장 신성한 교단이 돈거래로 얼룩지게 되었다.  자식교육에 있어서 귀한 자식 한 매 더 때리라는 ‘회초리 교육’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해주고 어처구니없게도 세배 돈을 천원, 만원씩 퍼주는 등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일본이 아무리 잘살아도 애들이 자전거나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되도록 걸어서 등교하게 한다. 이와 반대로 연길시 각 학교(특히 소학교) 정문 앞에는 등교와 하교시간이 되면 택시들이 줄을 늘여 서고 있다. 학생들이 택시 타고 학교를 다니는 현상만 본다면 연길시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여튼 현재 조선족의 자식교육은 여러 면으로 볼 때 ‘경(經)’이 없이 되는대로 자식을 키우고 있다.  그다음 조선족은 유교적인 ‘경(經)’으로 형성되었던 결혼관과 정조관은 돈을 위해서 다 박산나고 있는 중이다. 멀쩡하게 잘살던 부부가 일방이 한국에 가기 위해 이혼하고, 부부가 조금만 갈등이 생기면 한국에 가기위해 이혼을 서두르고, 처녀애들이든 아줌마들이든 돈을 위해서라면 혹은 한국에 갈수만 있다면 노인한테도 주저없이 옷을 벗는다.  더욱 한심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조선족은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결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남자 한 명이 조선족 여성 10여 명을 선 본다. 이럴 경우 한국인이 잘나고 조건이 훌륭하고 조선족여성들이 볼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다. 구매자(조선족 여성)는 줄을 섰는데 물건(한국인 남자)이 턱 없이 부족하고 또 구매자는 물건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사기만 하면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여성들은 한국인 남자한테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국 땅을 밟기 위해 ‘한국’과 결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진짜 결혼으로 온 여성들 중 국적신청 때문에 한국인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거나 정말 도무지 유지될 수없는 혼인생활도 국적 때문에 참고 견디고 있는 현상도 역시 조선족 여성은 한국인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한국’과 결혼한 증거라 말할 수 있다.     모두어 말해서 현재 조선족은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여러 가지 추태들이 출연되고 있고 전반 조선족사회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데, 그 근본원인이 조선족사회가 전통적인 ‘경(經)’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통적인 ‘경(經)’이 사라져가는 현상이 우리 조선족만의 일은 아니다. 서구에서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을 때 1900년에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포했고, 1919~1922년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을 발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동양에서 서구배우기에 앞장섰던 일본이 19세기 말에 ‘전통’이냐, ‘외제품’이냐를 놓고 피비린 다툼까지 있었다. 중국도 20세기 초 ‘전반서화(全盤西化)’바람이 불었고, 마레주의 도입과 더불어 문화혁명까지 겪고 난 후 전통문명이 단절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국은 광복 후 기독교가 급격히 확산되는 바람에 전통문명과 크게 마찰을 빚게 되었다. 더욱이 동양은 물질문명의 공세에 밀려 전통적인 가치관과 도덕관이 무너져가고 있는 추세이다. 허나 동양 삼국은 한바탕 ‘문명의 충돌’을 거치고 나서 모두 ‘제자리(전통을 살리는 것)’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고 있다.  문제는 우리 조선족은 본래 뿌리가 취약한 소수민족이란 신분으로 민족주체성을 상실해왔으며, ‘경(經)’이 취약한 조선족은 개혁개방을 맞게 되자 모든 것은 ‘돈을 위하여’로 변질되어 전반 조선족사회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나 한국은 어찌되었든 전통적인 ‘경(經)’을 회복할 수 있는 역사적인 파워를 갖고 있는데 비해, 우리조선족은 ‘경(經)’이 상실되면 회복시킬 능력과 파워를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현재 우리 조선족은 ‘경(經)’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목자를 잃은 양떼와도 같아 모래알처럼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조선족의 ‘경(經)’을 회복하고 바로 잡고 우수한 민족이란  타이틀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목전 조선족 사회 지성인들이 머리를 짜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59    조선족의 최대 비극은 지식의 빈곤에 있다(김정룡) 댓글:  조회:4532  추천:62  2008-02-04
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 2.조선족의 최대 비극은 지식의 빈곤에 있다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은 한 때 세상에서 가장 스케일이 크고 사이즈가 넓다고 할 수 있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문화가 제일이고, 위생이 제일이고, 체육이 제일이고, 등등 가장 우수한 민족이란 아름다운 렛델을 달고 자랑스럽게 살아왔다.  이렇듯 자타로부터의 공인 속에 가슴 뿌듯이 살아오던 조선족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시댁’과 ‘본가의 가운데 입장(정판룡 교수의 논리)에서 방황하게 되자 “우리는 누구냐?”는 정체성논란이 일어 크게 몸살을 앓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는 조선족공동체해체라는 위기의식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최근 들어 어떤 학자 분들께서는 "조선족이 사느냐 죽느냐는 생존기로에 서있다"고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조선족사회가 이토록 크게 흔들리게 된 원인은 농경문화중심으로 살아오던 조선족이 개혁개방의 물결에 따라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민족으로 탈바꿈 하게 되어 중국 내 대도시와 연해도시 및 해외진출 수가 급증하는 단향적인 인구유동 때문이라고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다.  조선족이 1세와 2세들이 피땀으로 가꾸어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유동이 인구감소, 교육위기, 이혼율상승, 자녀교육 등 일련의 부작용을 불러오고 있는 것만은 그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엄연한 조선족사회문제를 둘러싸고 혹자는 무작정 고향을 떠나지 말라고 호소하고, 혹자는 떠나는 것이 일시적이고 또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도기 현상이므로 미래 조선족발전에 ‘폐(弊)’가 아니라 ‘이(利)’가 된다고,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좀 더 전개해서 말하면 무작정 고향을 떠나지 말라고 호소하는 분들은 물론 여러 가지 좋은 견해를 갖고 있겠으나, 주요하게 어릴 적부터 고중까지 순수 우리말, 우리문화로 교육받아야 민족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거꾸로 조선족이 몸이 어디에 가 있고, 무슨 언어와 문화로 교육을 받든지 간에 선진적인 것을 배우고 장끼를 부리고 살거나, 혹은 선진적인 것을 갖고 고향에 돌아간다면 미래 조선족사회는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필자는 이미 여러 잡지와 신문지상에 위 두 가지 주장 중 후자의 편에 서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가 있다. 나는 조선족의 최대비극은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유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빈곤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 한다.  한 민족의 문화는 곧 그 민족을 우수하게 만드는 관건적인 요소이다. 조선족이 한 때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받았던 이유가 바로 조선족문화가 훌륭한 문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족문화가 우수했다고 하는 것은 폐쇄되었던 중국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우수했던 것일 뿐, 결코 세계화시대에서도 우수한 문화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아울러 조선족문화는 폐쇄된 언저리문화로서 현시대에 뒤떨어진 문화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족문화는 그 뿌리를 한반도에 두고 있음에도 옛날 조상들의 역사문화를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 적으며, 중국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중국역사문화를 잘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며, 또한 기독교나 불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조선족문화는 일종 폐쇄된 언저리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폐쇄적인 언저리 문화를 아직도 우수한 문화라고 착각하고 고집한다면 조선족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부 조선족지식인들이 어릴 적부터 고중까지 우리말 우리문화로 교육받아야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 인정받고 있는 유태인 중 걸출한 인물인 맑스, 막스·베버,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챠플린 등이 히브리어를 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유태인은 자민족의 언어와 문화는 중요치 않고 종교적으로 아이텐티를 보존하고 타민족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중앙 cctv8채널에서 방송하고 있는 <<엄마의 장국집>>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인 김인옥 씨는 조선족이 없는 통화시 광구에서 나서 자랐고 후에 장춘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조선 글, 조선말을 아예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필경 조선족이기 때문에 한반도역사에 관한 소설도 여러 편 써냈을 뿐만 아니라 오직 조선족이라야만 쓸 수 있는 조선족의 삶을 반영하는 드라마도 써냈다.  연변의 일부 조선족 지식인들의 주장대로라면 김인옥 씨는 조선글, 조선말을 전혀 몰라 이미 한족으로 동화된 조선족으로서 조선족정체성을 다 잃어버렸을 것이다. 허나  정반대로 김인옥 씨는 그 누구 못지않게 조선족정체성을 잘 살려내고 있다.  나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관건이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반드시 우리말, 우리문화로 교육받아야만 하는 것이 유일한 조건이거나 대안은 아니라 본다. 솔직히 조선족 자치지역에서 자라 연변대학이나 민족대학을 나온 조선족 졸업생들보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한족집거지에서 나고 자랐고 소학교는 조선족학교, 중학교부터 대학까지는 한족학교를 다녔으며 연변 밖의 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시야가 더 넓고 장악한 지식도 더 많으며, 또 조선족정체성에도 관심이 더 많은 현상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음은 조선족은 학교교육이나 사회 환경에 문제가 많으며 가정환경도 문제가 많다. 중국에서 살면서도 공자, 맹자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더러 명색이 조선 사람이지만 단군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러니 예수, 부처는 더 말할 나위 없다.  일전에 조선족문단에서 중견작가로 꼽히는 00분마저 한국에서 글을 발표하면서 ‘사서오경’을 읽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정도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천박하다.  실제로 조선족 대다수는 학교 때 협소한 지식을 전수받고 어른이 된 후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지식에 눈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어른들이 책을 읽지 않고 있기에 술상에 앉거나 모이면 한다는 얘기가 ‘돈이요, 애인이요, 출국이요 ’등등 말뿐이다. 어른들이 이 꼴이면서도 애들한테는 공부하라고 한다. 이러한 ‘천박한’ 환경에서 보고 배우고 자라는 우리 조선족 후대들의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작년 겨울 연길에 갔을 때이다. 명색이 배웠다는 친구 여섯과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술상에서 오가는 말 전부가 ‘탸오펑(調風:남녀가 끼여 앉는 자리정돈)이요, 누구네는 마누라(혹은 남편)가 출국하고 없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좋겠다느니 마작을 놀아 돈을 얼마 잃었고 땄다느니, 어느 노래방 아가씨들이 예쁘더라는 등 잡소리  뿐이었다.  필자가 우리민족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고 있는 말의 유래에 관해 역사문화 이야기 형식으로 말했더니 모임이 끝날 무렵 좌중의 여성들은 “술 모임에 많이 참석해봤어도 오늘처럼 의미가 있는 장소는 처음이다. 연변사람들의 술 모임도 앞으로 이런 분위기로 바뀌어 나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는 것이었다.  조선족의 문화수준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이미 호랑이 담배피울 때 얘기다. 조선족 지식인들은 분발하여 세상만사 지식을 습득하고 후대들에게 전수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조선족 미래가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대만 여류작가 경요는 6세 때 이미 당송 300수 시를 외웠다고 한다. 요즘 중앙TV <백가강단>에 “논어를 말하다”는 프로로 ‘치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우단(于丹)은 어릴 적에 부모가 <<논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한족들은 어릴 적부터 역사문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란다. 이와 반대로 우리 조선족은 역사문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고 유치원에서 구구단을 외우고 철자를 읽히면 마치 천재인양 떠들어 대고, 소학교부터는 매번의 성적표에만 ‘목숨’을 걸뿐이다. 때문에 조선족 작가들은 중국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중국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자기네끼리 쓰고 자기네끼리 읽고 자기네끼리 평론하고 자기네끼리 상을 주고 하면서 자기네끼리의 잔치로 끝나고 만다.  김인옥 씨가 중국에서 70후작가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어쩌면 조선 글, 조선말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성공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만약 그녀가 조선족집거지에서 나고 자라고, 우리글 우리말로 교육을 받았더라면 죽었다 깨도 오늘날의 김인옥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두어 말해서 조선족지성인들은 지금까지 조선족정체성에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얘기를 하고 있고, 또 현재까지 조선족이 문화수준이 높다고 자평할 뿐, 조선족의 최대비극이 바로 지식의 빈곤이라는 지적하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조선족이 중국에서도 인정받고 한국에서도 인정받고 나아가서 일본이나 구미대륙에서까지도 인정을 받으려면 세상 만방에 많이 뻗어나가야 하고, 따라서 세상 만사 지식을 많이 습득해야 한다. 그래야만이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렇게 결론짓고 싶다.  첫째 우리글, 우리문화만의 교육이 조선족정체성을 지켜내는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둘째 조선족문화는 폐쇄된 언저리문화로 세상을 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셋째 조선족사회가 바뀌려면 ‘우리 것’만 고집하지 말고 어릴 적부터 타민족의 역사문화를 배워야 한다.  넷째 조선족사회 최대 비극은 단향적인 인구유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식의 빈곤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8    사십대의 조선족‘노인층’, 인생설계 다시 해야 댓글:  조회:5066  추천:80  2008-02-03
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 1. 사십대의 조선족‘노인층’, 인생설계 다시 해야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1889년, 프로시아를 통일했던 비스마르크 총리는 당시 독일인의 평균수명이 60세가 되나마나 한데도 '65세 정년퇴직 법'을 제정했다. 이에 비해 현재 조선족은 평균수명이 75세가 넘는데도 45세이면 노인으로 취급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실로 조선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그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가. 1990년대 중반부터 연변에서는 은행을 비롯한 일부 공공기관에서 45세 기준으로 직원을 퇴직시키는 바람이 불었다.  나. 연길 시에는 골목마다 노인활동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데(총 1000여 곳), 간판을 보면 노인들이 모이는 곳이라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남여젊은이(노인이10% 정도)들이 모여 마작을 노는 장소이다. 이런‘풍경’은 용정, 도문 등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아마 전 세계에서도 연변이 가장 진풍경일 것이다. 노인활동실에 모이는 사람들은 돈내기를 하는데 가끔 경찰에 신고를 당할 때가 있다. 경찰은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한다. 만일 45세 이상이면 그 자리에서 풀어주고 45세 이하이면 연행해서 자료도 씌우고 50위안의 벌금을 안긴다. 뜻인즉 45세이면 노인활동실에 출입할 자격이 된다는 것이다. 다. 연길시내 도로변에는 장기판을 벌려놓고 '장군, 멍군'하는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런 장소에도 45세 중장년들이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라. 연길시 근교에 개인 양로원이 많이 섰다. 헌데 양로원에 노인들만 가는 것이 아니라 부인이 한국 간 45세 이상의 남자들도 한 달에 500원을 내면 양로원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위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조선족은 45세가 되면 노인 취급당하고 있다. 이런 비극이 생겨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객관적으로, 시베리아 한파처럼 불어 닥친 구조조정에 의해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데 있고, 재 창업이 마땅치 않아 적지 않은 이들이 할 일을 포기한데 있다.   주관적 원인은, 개혁개방 후 조선족들이 무작정 도시에 밀려들거나 한국 등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는 도시에다 집을 사놓고는 할 일이 없어 '노인' 노릇을 하게 된 데 있다. 큰일은 못하고 작은 일은 시시하게 여기며, '새우벌이'는 우습게 여기고 덕대(한국어로는 선반이라고 함)돈만 바라보고, 없어도 폼을 잡만 잡고 오늘이랴 내일이랴 허망하게 한국행을 꿈꾸고 있는 데 있다. 근래에는 재입국으로 머물면서 놀고 있는 등 하도 놀고 있는 사람이 많아(중국 각 지방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평균 실업율이 3~4%이지만 조선족의 실제 실업률은 평균수치의 10배도 될 것이다.) 아예 45세가 되면 노인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원래 근면하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났던 조선족들이 반은 놀부가 되고, 45세이면 노인취급당하는 현상은 이제 크나큰 비극이고 악재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조선족의 평균수명은 근 80세, 45세이면 겨우 인생 반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님은 40대면 불혹(不惑-2~30대에 닦아놓은 토대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살아간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조선족사회 40대는 불혹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게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40대이면 아래로는 자식이 커가고 위로는 부모를 모셔야 하는 등 어깨가 무겁고 의무가 막중하며, 지나간 세월을 총화하고 앞날을 보람 있게 보낼 계획을 해야 할 연령대이다. 설령 퇴직을 했다고 해도 제2의 인생에 도전해야 마땅한 것이다. 허나 적지 않은 조선족 40대는 자식과 부모를 책임질 의무와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제2의 인생도약에 전념하지 않고 허황하게 세월을 보낸다. 조선족사회 이혼율이 급증하는 데는 40대 남자들이 제 노릇을 못하는 원인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참'한 처지를 타개해 보려고 외국으로 떠나는 40대 조선족도 많다. 물론일부는 외국에 나가 피와 땀으로 열심히 돈도 벌고 선진문화도 배우면서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40대의 조선족은 한국에 와서도 열심히 일하지 않고 마작이나 경마, 다단계 판매 등에 빠져 자신의 신세를 망치고 있다. 또 한국에 온 일부 40대 지식인과 공무원출신의 조선족들은 묵은 터에서 이밥 먹던 흥타령이나 하면서 자존심만 내세우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환상만 갖고 살아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40대는 우리 조선족사회의 기둥이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의 역할을 못한 채 노인 아닌 '노인'으로 전락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40대여, 인생은 이제 막 시작이란 것을, 당신의 경험과 지식이 새로운 인생의황금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57    ‘계산’이면 어떻고 ‘결산’이면 어떠냐? 댓글:  조회:4859  추천:58  2008-01-30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3부  조선족의 언어변화실태에 대하여     4. ‘계산’이면 어떻고 ‘결산’이면 어떠냐?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며칠 전 나는 내가 한턱 쏠 일이 있어 한국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모두 기분 좋게 먹었다. 헌데 식사가 끝나고 자리를 뜰 무렵 나는 내가 돈쓰고도 기분이 되게 나쁜 일을 당했다. 사연은 이러했다. 식사가 끝나자 내가 “결산합시다.”고 말했더니 좌중의 한국인들이 “계산이지, 뭐 결산이요?”라고 나를 나무랬다. 나는 화가 나서 “계산이든 결산이든 다 중국어 단어에서 온 말이지 순수 우리말이냐? 같은 중국어에서 온 말을 습관상에서 한국에서는 ‘계산’이라 하고 조선족은 ‘결산’이라고 할 뿐이지 내 말이 뭐가 틀렸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날 나는 마치 변을 시원하게 보지 못해 뒤가 찜찜한 기분이었다. 나는 1990년부터 여행사 일을 시작해서 현재까지 한국인과의 접촉이 많아 한국인의 언어습관에 대해 알고 있다. 예하면 한국인은 일상생활에서 사소하게 돈을 지불할 때 ‘계산’이란 말을 쓰고 연말총결 같은 ‘거창’한 일에 ‘결산’이란 말을 쓴다. 이렇게 같은 중국어에서 온 단어지만 조선족과 한국인이 다르게 사용하는 말들이 많다. 허나 평생 나의 몸에 배어온 ‘조선어’가 한국인과의 대화에서도 많이 튀어나온다. 이는 인지상정이다. 이런 것 때문에 콤플렉스를 갖고 살 필요가 없고 위축될 필요성은 더욱 없다. 언어표현은 습관상의 문제일 뿐 한국말이 맞고 조선족의 말이 틀렸다는 도리는 없다. 같은 언어도 지역공동체에 따라 서로 표현법이 다르며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렸다는 법은 없다. 언어란 서로 표현법이 달라도 알아들을 수 있고 의사소통이 되면 그만이다. 조선족도 분명히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때문에 조선족의 언어가 틀리고 한국말이 맞다는 법이 없다. 문제는 한국인은 조선족을 대함에 있어서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것이다. 연변대학 우상렬 교수는 본 학교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1993년 한국에 와서 어학시험을 봤는데 불합격이었다고 한다. 이유는 조선족이 배운 것은 조선어지 한국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조상의 언어를 물려받았으나 단지 지역 언어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한국인은 조선족을 마치 다른 민족을 대하듯 이질감을 갖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인은 조선족이 자신들과 언어표현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조선족은 촌스럽고 한국인은 세련되고, 조선족을 마치 ‘맛이 없는 중국산’처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 가지 부질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 한국인이 통일을 원하지만 앞으로 조선족을 대하듯 북조선인민들을 대할 것은 뻔한데······. 
56    “조선말이 중국어가 아닌가요?” 댓글:  조회:4333  추천:62  2008-01-21
“조선말이 중국어가 아닌가요?” -한국의 문화혁명에 대하여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12월 중순 어느 날 저녁 한국의 한 공직에 계시는 분이 한턱 쏜다고 해서 한국인 셋, 조선족 셋 여섯 명이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음식이 올라오기 전에 20대 후반의 한국 아가씨가 같은 또래 조선족처녀보고 “00씨는 한국말이 편해요? 중국말이 편해요?” 고 묻는다. 조선족처녀 왈 “가장 편한 말은 그래도 조선말이지요.” 이 말을 들은 한국 아가씨가 느닷없이 “조선말이 중국어가 아닌가요. 뭐 조선말이 따로 있어요?”라고 말해 좌중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너무 어이가 없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말이 조선말이고 중국어는 중국어이지 어떻게 조선말이 중국어입니까? 조선말은 단군고조선 아니 썩 전부터 동이(東夷)의 일부였던 한 부족이 쓰던 말이 고조선이란 ‘국가실체’에 의해 자리매김 되었고 부여, 고구려, 고려 등을 거쳐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고, 518년의 조선시대를 통해 오늘과 같은 모양새를 갖춘 민족 언어가 아니냐! 특히 조선말이란 개념은 고조선과 조선의 유구한 역사에 의해 오늘날까지 보존된 것이지요.” 조선말이 중국어라고 여기는 것은 한국 아가씨 한 개인의 무지문제가 아니라 나는 본다. 이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래, 특히 6.25를 거치고 나서 남과 북이 철천지원수가 됨에 따라 서로 韓과 朝鮮이란 나라, 민족, 언어, 문자 등 호칭사용을 부정하고 이남에서는 이북을 북한, 이북에서는 이남을 남조선으로만 부르게 만들었던 기성세대들의 잘못된 이념과 사상교육 때문에 빚어진 어린세대들의 무지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은 6.25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뺨치는 문화혁명운동을 추진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중국 문화대혁명은 처음에는 권력투쟁에서 시작해서 ‘파사구(破四舊:낡은 사상, 낡은 풍속, 낡은 문화, 낡은 습관)’을 거국적으로 한바탕 떠들썩하게 크게 벌여 황하대륙이 쑥대밭이 되었으나 조상대대로 이어온 민족을 아우르는 ‘華’의 개념과 자부심만은 버리지 않았다. 1978년 잠자던 중국이 대외문호를 개방하자 해외에 흩어졌던 ‘華人, 華僑’들이 적극 발을 들여놓았고 특히 1989년 천안문동란으로 구미와 일본인의 대중국투자가 주춤할 때 그들이 주저 없이 많은 투자로 중국의 시장경제정착에 도움이 컸다. 현재까지 해외에 있는 중국계인은 자신을 ‘화인, 화교’라 하고 중국인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으며 아울러 ‘화인, 화교’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중국어라 하기보다 ‘華語’라 말한다. 중국어란 개념은 외국인의 입장에서 하는 말일뿐 중국에는 중국어란 말이 없다. 전체인구의 93%를 차지하는 주체민족인 한족이 쓰는 말을 유방의 한조에서 유래된 한어라 하고 일본과 한국처럼 국어란 말도 없다. 세상에서 국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뿐인데 일본인이 자신들의 언어가 중국과 조선반도와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지어낸 말을 한국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중국이란 국명은 중원을 천하의 중심이라 여기고 주나라 시기부터 있어왔으나 역사적으로 줄곧 사용되어왔던 것이 아니고 19세기부터 구미인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본격적으로 ‘CHINA’와 ‘CHINESE’를 주제로 연구하고 책을 펴냄에 따라, 또 청나라 후기 국민과 중화민국 국민들이 해외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스스로 자신을 중국, 중국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므로 200년 역사도 되나마나 하다. 그러므로 중국이 말하는 5,000년 역사란 곧 ‘華夏’의 역사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국가란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 같은 문화를 공유하면서 살아남은 집단체야말로 영원한 실체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중국인의 ‘華’에 해당되는 개념이 곧 ‘朝鮮’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해체되고 조선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국명, 예하면 대한민국 같은 국명을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조선’이란 개념은 버리지 말아야 역사를 지키는 도리일 것이다. 허나 한국의 현실을 보면 마치 한때 ‘동무’라는 말이 이북에서 쓰는 것이라고 해서 사용을 금지시켰던 것처럼 ‘조선’이란 표현에 굉장히 거부감을 갖고 이북을 북한, 해외겨레를 한인,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한국어, 문자를 한글 등 천편일률로 ‘韓’을 붙인다. 얼마 전 중국중앙조선말방송 조선족아나운서 박일천 씨가 우수상을 탄 사실을 한국에서 보도하면서 조선말방송을 한국어방송이라 임의로 고쳐 보도했다. 한국의 모든 언론매체와 출간물들에서 전부 이런 식으로 조선말을 한국어라 옮겨놓으니 대학을 나왔다는 20대 젊은이들이 세상의 우리 민족 언어는 ‘한국어’만 존재하고 다른 표현으로 없는 것으로 알고 조선말이 중국어 아닌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따져보면 한국어란 개념은 현재 38선 이남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일 뿐(1990년대 초반 연변대학조문학부를 졸업한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언어시험을 봤을 때 불합격을 맞은 사례가 많았는데 그 이유로서 한국 교수분들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족이 배운 것은 조선어이지 한국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체 이북과 해외동포들이 사용하는 말을 한국어라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조선말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선’이란 표현은 우리민족역사를 아우르는 개념이 될 수 있으나 한국이란 표현은 우리민족역사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말이 중국어 아닌가?’라는 한국 20대 젊은이의 질문은 소위 단군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신세대들의 비극이라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 비극은 기성세대들의 잘못된 이념과 사상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현재 20대 젊은이들은 앞으로 남북통일의 주인공이 될 터인데 이북과의 교류에서 ‘韓’만 고집하고 ‘조선’이란 표현을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빤한 일이 아니겠는가?
55    중국인이 반지를 '戒子'라 부르는 유래 댓글:  조회:4010  추천:77  2008-01-15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22 중국인이 반지를 ‘戒子’라 부르는 유래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고대중국인은 여성의 생리는 이칠 십사에 시작해서 칠칠 사십구에 끝난다고 보고 여성이 50대에 들어서면 여자구실을 상실하게 된다고 인식했다. 아울러 고대중국인은 여성의 생리주기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주기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생리를 ‘월경’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월경은 생명과도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여성은 월경이 있어야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월경이 있어야 성욕이 생기고 성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월경이 여성을 여성답게 만든 동시에 또 여성은 월경이 있어 천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이에 따르는 금기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원시인은 현대인처럼 패드(생리대) 사용이 없어 생리가 오면 가랑이에 피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 했다. 원시인은 피를 보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하여 생리 중에 있는 여성을 밖에 다니지 못하게끔 감금했다. 서양에 가까운 중동발 기독교에서 생리 중에 있는 여성을 교회출입을 금지시킨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하나님이 피를 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생리에 대한 또 하나의 금기로서 생리 중에 있는 여성과 성생활을 삼가는 것이다. 고대원시인은 생리 중에 있는 여성과 교합하면 아이를 배는 확률이 높다고 인식하고 열심히 해댔다고 한다. 허나 인류가 문명시대에 진입한 이래 생리 중에 있는 여성과는 교합하지 않는 것이 상식으로 굳어져왔다. 일부 인류문화학자들은 일부일처제사회에서 생리 중에 있는 여성(부인)과의 교합을 금기시하는 ‘관습’이 축첩제와 기방출입 문화가 생겨나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본문주제와 무관하므로 더 전개하지 않겠다. 아무튼 인류가 문명시대에 들어서 월경 중에 있는 여성과의 교합을 금기시하는 것만은 하나의 룰로 되어왔다. 그런데 보통 부부들은 여성이 생리가 오면 남편과 말할 수 있어 자연스레 교합이 금기될 수 있었으나 수천 명의 궁녀가 군집해 사는 궁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즉 궁녀들이 자신이 생리가 왔다고 대놓고 황제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개 궁녀가 하늘과 같은 존재인 황제에게 직접 대화할 수 없는 이유도 있겠고, 더욱이 여성들이 스스로 생리를 불결하게 여기고 아울러 불결한 생리를 감히 입으로 황제에게 폭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옛날 궁중 궁녀들이 생리가 오면 손가락에 은반지를 끼는 것으로 자신이 생리 중이라는 것을 황제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본래 여성이 반지를 끼는 것이 생리 중이기 때문에 교합을 할 수 없다는 금기의 뜻을 전달하는 메시지 도구였다. 고로 반지를 금기라는 의미의 ‘戒子’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반지가 금기의 뜻을 전달하는 메시지 도구였으나 언제부터인가 남녀와 연령을 불문하고 하나의 장식품으로 되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戒子’를 아무렇게나 마구 착용한다. 특히 조선족들은 이 면에 대해 아무런 상식도 고려하지 않고 되는 대로 ‘戒子’를 끼고 다닌다. 필자가 장춘에서 공부할 때 있었던 일이다. 한 조선족 여학생이 약지(藥指)에 반지를 끼고 다녔다. 한족남학생이 나보고 “저 여학생이 결혼했는가?”고 물었다. “NO”라고 하니, “그럼 왜 약지에 반지를 끼고 다니는가?”고 토를 다는 것이었다. 뜻인즉 한족들은 약지에 반지를 끼는 것이 곧 결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 언론매체에서 00여성단체의 00여성이 ‘올케’의 어원이 오빠의 계집에서 유래되었다 하여 여성을 차별하는 이 호칭을 폐지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필자는 그 보도를 보고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대다수가 옛날부터 전해온 온 것이고 또 그 어원을 따져보고 현대인의 시각으로 불합리하다고 인식하고 폐지해야 한다면 이 세상에 남을 언어가 별로 없게 되고 그 대안으로 새로운 명사를 지어낸다면 세상은 뒤주박죽이 될 것이다. 위에서 말한 ‘戒子’란 말도 폐지하고 다른 말로 예하면 ‘金環’, ‘銀環’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인사법도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인은 악수가 가장 흔한 인사법이다. 그런데 악수는 호전적인 서양인이 자신이 손에 살상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리는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00여성의 주장에 따르면 악수란 인사법도 폐지해야 마땅하다. 지난밤에 중국고서를 읽다가 위 보도를 떠올리게 되어 오늘 낮에 ‘戒子’의 유래를 정리해보았다.
54    “자기야"…"메스껍다” 댓글:  조회:5582  추천:57  2008-01-13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3부  조선족의 언어변화실태에 대하여     3. “자기야"…"메스껍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필자는 작년 겨울 조선족문제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취재 차 사람들이 모여서 마작을 노는 연길시 00노인활동실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거기서 다음과 같은 눈길을 끄는 광경을 목격했다.  한국에서 수년 간 체류하고 귀국한 젊은 두 조선족여성이 한국말 어투로 대화를 나눈다. 곁에 있던 한 남자가 “저것들이 한국에나 갔다 왔다고 한국말 하면서 티를 내는 꼬락서니를 못 봐주겠다.”라고 싱거운 소리를 한다. 잠시 후에 두 젊은 남녀가 들어오더니 서로 “자기야”하면서 말을 주고받는다. 다른 한 남자가 “저것들도 한국에 다녀왔다고 메스껍게 노네(조선족들은 비위에 거슬리는 언행을 메스껍다고 표현한다).”라고 면박을 준다. 또 다른 한 남자가 “우리 안까이(아내)두 한국에 갔는데 전화 오면 글쎄 나를 ‘자기야’고 부른다니까, 더러워서 나 원 참.”라고 떠든다.  이는 조선족들이 한국나들이를 통해 언어가 변화되어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족의 고유 말과 한국어 사용이 갈등을 격고 있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언어도 문화와 같이 물의 흐름처럼 높은 곳(선진적인 것)에서 낮은 곳(후진적인 것)으로 유입됨에 따라 ‘힘이 센 언어’는 점점 넓게 퍼져가는 데 반해 ‘힘이 약한 언어’는 점차 유실되어가는 사례가 허다하다. 물론 이 과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이 소요되며 또 이 과정에서 자 언어와 타 언어 간의 갈등이 심각하게 드러난다. 10여 년래 조선족은 200만 중에 한국에 다녀간 사람과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을 합치면 무려 50만 명이 된다. 이 어마어마한 수자가 한국나들이를, 또한 많은 한국인이 중국나들이를 통해 한국어가 조선족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조선족언어가 점차 한국화 되어가고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추세이다.  문제는 한국어도 장단점이 있고 조선족언어도 마찬가지로 장단점이 있다. 그러므로 조선족들이 일방적으로 한국말을 받아들이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말하자면 부부간의 “자기야”라는 호칭은 서로 “야, 자.”하는 내림 말을 사용하는데서 생겨난 것을, 부인이 남편에게 존대 말을 쓰고 남편이 부인에게 보통 말(소, 오)을 사용하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자기야”라는 호칭에 대해 거부감이 크게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들도 보편적으로 부모들에게 “야, 자”라는 내림 말을 사용한다. 한국위성방송이 조선족가정안방에 침투되었고 한국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이 왕창 늘어남에 따라 조선족어린이들도 부모에게 “야, 자”라는 어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이 현상이 잘못된 언어흡수라고 본다. 왜냐하면 조선족어린이들이 본래 부모에게 존대 말을 쓰는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서 계속 지켜가야 ‘미풍양속’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국인 친구한테서 들었던 얘기다. 그 친구는 15세와 9세의 아들딸이 있는데 절대 부모에게 내림 말을 사용 못하게 교육시켰다고 한다. 어느 날 네 식구가 택시 타고 가는데 애들이 하도 부모에게 꼬박꼬박 존대 말을 쓰니까 택시기사가 “요즘 세월에 이런 애들이 참 드물다”고 칭찬하면서 택시요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독자들도 잘 알리라고 믿는다.  현재 조선족이 한국을 본받아 ‘스트레스’, ‘섹스’ 등등의 외래어를 쓰는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한국 말 어투를 사용하거나 본래 조상의 언어가 상실되었던 어휘의 회복, ‘저, 저희’와 같은 낮춤 말, ‘드리다, 하시다’와 같은 존대 말의 회복은 바람직하다. 허나 조선족 언어에 족보가 없는 “자기야”라는 호칭이거나, 아이들이 부모한테 내림 말을 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53    “독신주의는 문명의 변태이다.” 댓글:  조회:5959  추천:76  2008-01-10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21“독신주의는 문명의 변태이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임어당(林語堂)은 “동양중(불교의 스님과 비구니)이든 서양중(천주교의 신부와 수녀)이든 모두 문명의 변태이다.”라고 지적했다.  임어당의 이 지적은 인도, 유럽문명과 중국문명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중국문명전통은 음양조화가 핵심이기 때문에 독신주의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불교의 유입과 기독교의 유입에 따라 독신주의 문제가 불거졌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독신주의의 원시적인 유래와 독신주의 이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인류가 일부일처제 가족제도가 생겨난 이후로 독신상태의 발생이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즉 여자가 임신 중이거나 분만 후 일정 기간(중국인은 100일 동안 섹스를 금함) 남자는 독신상태로 살아야 한다. 도올 선생은 그의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사실 인류학적으로 상고해보면 오늘 신부, 수녀, 비구, 비구니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쎌리바시(독신상태)의 형태는 이 해산전후 쎌리바시의 확대해석에서 생겨난 전통들이지만 물론 그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의미는 제각기 다르다.”고 지적했다.  도올 선생은 이어서 쎌리바시를 성립시키는 네 가지 철학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기독교의 경우 거룩함과 관련해서 외재적 측면이 강한바, 신부는 하나님과 예수가 모두 독신이기 때문에 독신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자 공경이라 인식한다. 수녀는 하나님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속세의 남자들과의 혼인과 정사를 불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도문명의 경우는 신성이 존재자로서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속에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즉 성교를 하지 않고 그 에너지를 나의 몸에 정결하게 축적시킴으로써 어떤 신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둘째 심신이원론에 의하면 육체는 인간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다. 섹스는 이런 감옥을 계속 생산하는 행위임으로 저주의 대상이다.  셋째 도덕성과 비범성의 문제 측면에서 볼 때 주기적으로 성교를 해서 생리적 욕구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짓이라는 것이다. 거꾸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음으로서 보통사람이 못하는 어떤 도덕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런 도덕성은 비범한 어떤 신적 모습으로 독신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넷째 생활의 번잡성 문제이다. 즉 가정이라는 제도를 나의 몸에 얽매게 되고, 이 가정이라는 제도는 근원적으로 사심이 발생하게 되어 종교적 생활과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상 독신주의 이념이 아무리 성스럽다 해도 이는 인도와 유럽인들의 것일 뿐, 음양의 조화가 핵심으로 된 중국문명은 “남자가 장성하면 장가가고 여자가 장성하면 시집가는 것(男大當婚, 女大當嫁)”이 천륜이었다.  허나 오늘날 이 천륜이 종교적, 철학적 이념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여지없이 깨져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30~40대 노총각과 노처녀들이 수 없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인데,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경제시대에 먹고살기 힘든 문제도 있고, 다른 한 방면으로 볼 때 오직 자신들의 편리와 개성을 위해서 독신주의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상은 인구감소 문제가 대두되고, 불륜문제가 사회의 잇슈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모택동시대까지만 해도 시집장가를 못가는 폐단이 없었으나, 개혁개방이후 독신자들이 생기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의 00교수는 “2020년이 되면 중국에 장가가지 못하는 노총각이 4,500만 명이 될 것이므로 그들의 범죄를 막으려면 정부에서 마땅히 공창을 세워 그들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사실 이들은 독신주의자가 되고 싶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회 빈부격차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독신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는바, 시골총각과 도시 하층민 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해 중국, 몽골, 동남아 등지로부터 여자를 데려오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새로운 3고 여성(三高女性) 독신주의자들이 새로운 한 사회족속으로 살아가고 있다. 3고 여성이란 고학령, 고전문직, 고소득자인 노처들을 말한다. 그녀들은 시집가지 않고 혼자 살면서 남자생각이 나면 임시 만나 식사하고 섹스를 즐기고 하면서 그 어떠한 남자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부담 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편리한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3고 여성들은 종교적 이념을 지닌 독신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냥 번잡하고 거추장스런 삶을 회피하고 나만 편리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이 3고 여성 독신주의 현상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조류(흐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독신주의자들의 출현과 흥행 현상이 또 하나의 새로운 현대문명의 변태라고 본다.   가령 현재 추세대로 독신주의자들이 늘어난다면 사회질서는 더 문란해지고 인구는 감소되고 인류사회는 최악의 저조기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52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의 유래 (김정룡) 댓글:  조회:6029  추천:81  2008-01-10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20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나라가 망하면 여자의 탓이라고 구차하게 변명해왔으며 그 죄를 여자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예하면 하나라(夏朝)는 매희(梅姬)가 망쳤고, 은나라(殷朝)는 달기(妲己)가 망쳤으며, 주나라(周朝)는 포사(褒姒)가 망쳤다고 했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양귀비로 말미암아 일어났으며, 청말 8국의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쑥대밭이 된 것은 자희태후(慈喜太后)가 시비를 불러일으킨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를 암탉에 비유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높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의미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왔고 또 속담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속담은 언제 어떻게 어떤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널리 전파케 되었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고대사회에서 왕조가 교체될 때, 전 왕조를 뒤엎으려면 반드시 명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주무왕(周武王)이 은주(殷紂)의 정벌에 나서면서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분을 걸고 호소했다.  “나를 따른 제후와 용사들이여, 이제 창과 칼을 들어라.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지금 주왕(紂王)은 여색에 빠져 스스로 제 집안을 망치고 백성을 못살게 굴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나는 삼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주왕을 치러하는 것이니라.······”  주무왕이 이런 명분을 내건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은의 주왕은 하의 걸(傑)처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있었다. 걸왕에게 매희가 있었다면 주왕에게는 달기가 있었다. 이 두 여인은 모두 유소씨 나라에서 헌상한 절세의 미인이었으며 욕망은 끝이 없었다.  주왕은 달기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걷어 들이고 무자비하게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해 들였다. 이리하여 궁중에는 재물이 가득 차게 되었고 술은 못을 이루고 고기는 숲을 이룰 정도로 넘쳐났다. 또 호화찬란한 궁전을 짓고 동산과 못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음탕한 음악에 맞추어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젊은 남녀들이 주지(酒池)를 돌면서 서로 쫓고 쫓기며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지면서 연못의 술을 들이 키고 숲의 고기를 미친 듯이 뜯어 먹는다.  이런 미친 짓을 구경하면서 주왕의 몸에 자신을 맡기는 달기는 그제야 얼굴에 음탕한 만족의 빛을 드러냈다. 이 미치광이의 연화는 120일이나 주야로 계속되어 이를 ‘장야의 음(長夜之飮)’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옛날 고구려, 부여, 마한, 진한, 동예 등 동이족이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있었던 ‘연일음주가무’는 ‘장야의 음’에 비해 새발의 피였다.  600년 역사를 자랑하던 은왕조가 주왕이 달기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주려는 데서 썩을 대로 썩어 결국 주무왕에 의해 전복되고 말았다.  위 이야기는 <<사기>>에 실려 있으며, 본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매희나 달기처럼 무릇 왕에게 방탕하고 음탕한 욕망을 채우려고 청하는 말을 왕이 다 들어주기 위해 나라를 망쳐 먹은 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훗날 유교가 정착됨에 따라 현모양처들의 올바른 말일지라도 남존여비의 무기를 들고 무작정 여성들을 억누르려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사용해왔다.  요즘에는 ‘수탉이 홰를 치면 먼지만 날리지만 암탉이 울면 알이라도 남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금알을 낳는다.’는 등 말들이 유행되고 있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참여도가 높아짐에 따라 여권이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모권제사회로부터 부권제사회에로 이행되어 남자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살아오던 것이 다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니 세상이 돌고 돈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51    상놈(常奴), 타마비(踏麻妣), 빠가(馬鹿) (김정룡) 댓글:  조회:6430  추천:89  2008-01-10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9상놈(常奴), 타마비(踏麻妣), 빠가(馬鹿)   김정룡   언어가 생겨나기 전의 인류는 화가 나면 흔히 화나게 만든 상대방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어가 생겨나면서 화날 때면 상대방을 욕을 하는 것으로 화를 풀어 살인현상이 많이 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류의 욕은 동서를 막론하고 성을 기본으로 이뤄진 것이 보편적이다. 영어에서 원래 수탉의 뜻인 ‘cock’가 속어로는 음경을 가리켜 욕이 된 것이 한 예이다. 동양, 특히 한국인과 중국인은 ‘X’이 가장 보편적인 욕으로 되어왔다.  우리민족은 ‘씨팔 새끼’와 ‘씨팔 년’이란 욕을 많이 하며 다음으로 ‘상놈’, ‘상년’, ‘상것들’이다. 우리민족도 조선시대 이전에는 성을 위주로 욕문화가 있었다가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인(常人)간의 차별이 하도 심해짐에 따라 ‘상(常)이 붙은 새로운 욕문화가 보급되었던 것이다. 거꾸로 “니네는 양반가문이 아니다.”라는 말도 치명적인 욕으로 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니 에미 씨팔’이란 말은 중국어 ‘操你媽’와 같은 뜻인데, ‘내가 너의 엄마와 X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제 에미와 X을 할 망종새끼’라는 의미다. ‘씨팔 년’도 ‘너는 제 애비와 X을 할 여자다.’라는 뜻이다.  중국인은 성을 위주로 욕을 하는데, 우리민족과 다른 점이라면 중국인은 조상을 곁들어 욕하는 경우가 많다. ‘너의 조상 할배, 할매와 X을 한다.’라고 걸쭉하게 욕한다. 이는 중국인에게 있어서 조상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또 일상생활에서 ‘씨팔’, ‘씨부랑께’라는 뜻으로 ‘타마비’, ‘타마디’란 욕을 많이 하는데 한자로 ‘他媽妣’, ‘他媽的’가 아니라 ‘踏麻妣’, ‘踏麻的’이다. 타(踏)는 밟는다는 의미로서 동물들이 성교 시 수컷이 앞발로 암컷을 ‘밟는 행위’에서 유래되었으며, 고대 중국동남지역 일부소수민족들은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청춘남녀들이 나란히 줄을 서서 서로 손잡고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를 ‘타거(踏歌)’라 했고, 행사가 끝나면 남녀가 짝을 지어 음산한 곳을 찾아 야합(野合)하는데 ‘踏’은 남녀성행위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마(麻)는 삼베 마인데 원시인류의 생활필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상징물이며 선비(先妣)의 상징물이며 여신(愛神)의 상징물이며 여음의 상징물이며 생식력과 생명력의 상징물이었다. 비(妣)는 여음을 뜻한다.  한중일 삼국에서 일본인의 욕문화가 가장 ‘문명적’이다. 다 아시다시피 일본인의 보편적인 욕은 ‘빠갗와 ‘칙쇼오’로서 ‘성’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짐승과 연관되어 있다. ‘칙쇼오(畜生)’는 모든 짐승을 뜻하며, ‘빠갗는 한자로 ‘馬鹿’라 적는다. 왜 말과 사슴으로 사람을 욕할까? 그 유래는 아래와 같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가 조작하여 영정(嬴政)의 둘째 아들 호해(胡亥)를 황위에 올려놓고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는 자신이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어느 하루 조고가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려고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폐하, 이것이 말이옵니다.”라고 말하면서 신하들의 동태를 살폈다. 어떤 자는 말이 옳다고 했고, 어떤 자는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바른 말을 했다. 당연히 거짓말을 한 자는 살아남았고 거꾸로 사슴을 사슴이라고 바른말을 한 자는 모가지가 날아났다. 이로부터 중국에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指鹿爲馬)는 고사성어가 생겨났으며, 뜻인즉 진실을 왜곡하여 억지를 부린다는 의미도 있고 다른 하나는 말과 사슴마저 분간하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지록위마(指鹿爲馬)란 고사가 일본열도에 전해지면서 일본인은 억지를 부리거가 멍청하거나 바보를 가리켜 말과 사슴마저 가리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서 ‘빠가(馬鹿)’라는 욕이 보급되었던 것이다.
50    한국식, 조선족식, 피곤하다 댓글:  조회:6394  추천:92  2008-01-05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3부  조선족의 언어변화실태에 대하여     2. 한국식, 조선족식, 피곤하다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인간의 몸에는 관성의 체계라는 것이 있다. 오른손 왼손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밥 먹고 글을 쓰는 등 주요하게 오른손에 의해 움직인다. 가령 오른손이 탈이 나서 부득불 왼손을 사용하면 습관이 되지 않아 나의 몸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이 인간의 몸에 배인 관성의 체계이다. 우파(기존의 체제를 답습하려는 보수세력)와 좌파(기존의 체제를 개혁 혹은 뒤엎으려는 혁명세력)라는 개념이 곧 인간의 오른손 왼손의 관성체계에 의해 유래된 것이다.  인간은 몸에 배인 관성의 체계가 유지되면 편안하게 살 수 있는데 반해 관성의 체계가 파괴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괴롭다.  우리민족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고 따라서 남과 북 및 조선족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문자가 다르다. 이리하여 조선족은 관성의 체계가 파괴되는 체험을 많이 하게 되며 삶이 고달프다. 지난 4월 중순 연변 <<문학과 예술>>잡지 조일남 사장으로부터 내가 작년 2월 기고한 <<성과 씨의 구분>>이란 글을 2007년 2기(격월간)에 실으려고 하는데 원고를 다시 한 번 손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의 손에 그 원고가 없으니 보내 달라고 했더니, 조선족문장식으로 타이핑해서 이메일로 보내왔다. 다시 말해서 어휘선택, 철자, 두음법칙, 뛰어 쓰기, 부호용법 등 많은 면에서 한국에서 쓰는 문장과 조선족식이 많이 다르다.  나는 한국에서 주로 글을 쓰다 보니 한국식이 이미 몸에 배어버려 갑자기 조선족식의 문장을 접하니 읽고 쓰기가 갑갑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국식으로 손을 보아 보내면 틀림없이 조사장이 다시 조선족문장식으로 고쳐야 한다. 나는 이런 점을 고려해 아예 힘들더라도 조선족문장식으로 맞춰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게 엄청 힘들었다. <<문학과 예술>>은 문화연구 중심을 취지로 하는 유일한 조선족인문잡지이며, 기고자들은 모두 연변대학과 중앙민족대학 교수, 출판사와 신문사의 유명지식인 및 쟁쟁한 조선족작가들이다. 나와 같은 무명인은 눈을 씻고 봐도 나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작품에 신경을 많이 쓰지만 이런 요인은 내가 글을 쓰기로 맘을 먹은 이상 나에게 스트레스는 아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한국식과 조선족식을 오가려니 나의 몸에 배인 관성체계가 파괴되면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글을 발표하려면 우리민족을 조선민족이라 해야 하고 따라서 이북을 조선, 우리글을 조선글 등등 ‘韓’을 쓰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글을 쓰려면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글 등 사용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글을 쓰는데 글 자체가 다른 것에 신경을 써야 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인소’까지 감안해야 한다. 이렇게 조선족은 타민족이 겪지 않고 있는 문화적,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우리 조선족 몸의 관성체계를 파괴시키고 억제시킨다. 또 이러한 몸의 관성체계가 파괴되고 억제되는 과정을 오래 겪게 되면 조선족은 주체성과 정체성을 잃게 될 것이다.  참으로 비극이다. 이것은 조선족만의 비극이 아니라 전체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나는 이것이 분단민족의 비극적인 문화라 생각한다. 문장을 쓰는데 있어서 남이 다르고 북이 다르고 조선족이 다른 것처럼 우리민족의 현실이 분열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상을 탓하는 자는 가장 못된 놈이라는 도리를 알고 있지만 나는 조상들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종대왕이 1446년에 만들어 낸 훈민정음이 유생들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보급되지 못했다. 일제시대에 이르러서야 한문과 병행해서 쓰게 되었고, 우리글이 완벽한 정착이 되기도 전에 분단되었으며, 남이든 북이든 70년대 후반부터 우리글사용 단일화가 실시되었으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제나름대로 놀다보니 오늘과 같은 비극이 초래되었다. 앞으로 남과 북이 본격적으로 교류하게 되면 홍역을 치르듯이 서로 한바탕 관성의 체계가 파괴되는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조선족의 언어문자는 이북을 따랐으나 이북과도 다른 점이 많다. 나는 조선족이 비록 남과도 다르고 북과도 다르나 어떤 방식으로든 자체언어문자를 지켜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굉장히 보귀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민족이 타민족들이 겪지 않는 괴로움을 겪고 있으니 안타까움을 토로할 뿐이다.
49    중국인이 공처가(恐妻家)가 많은 이유 댓글:  조회:6745  추천:84  2008-01-0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8중국인이 공처가(恐妻家)가 많은 이유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일요일, 필자는 서울가리봉동에서 고향에서 온 친구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다. 한참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쯤, 어찌어찌 하다가 공처가에 대한 화제가 나오게 되었다. 좌중의 한 친구가 “중국인이 마누라를 무서워하는 관습이 어찌 보면 앞선 문화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해 모두들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는 계속해서 “본래 남권절대주의로 살아왔던 우리민족과 일본인도 지금은 중국인처럼 마누라를 무서워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느냐!”는 ‘논거’를 덧붙였다.  위 에피소드에 대한 견해와 이해는 독자들한테 맡기기로 하고, 필자는 본문에서 먼저 중국인의 대표적인 공처가들에 대한 고사를 말하고, 또 과거 중국과 같은 유교문화권이었던 조선과 일본은 남권절대주의로 흘러온데 비해 유교의 본산지인 중국이 오히려 공처가가 많은 이유를 밝혀보려 한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공처가로서 당나라 초기 어사대부를 지낸 배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며, 그가 공처가로 유명해진 이유는 다음과 같은 공처가 이론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세 가지 무서운 것이 있소. 젊고 예쁠 때는 마치 살아 있는 보살 같으니 그것이 무섭소. 세월이 지나 자식들이 집안에 가득할 때는 똑 마치 구자마모(九子魔母:불경에 나오는 여신으로 동자를 잡아먹는다고 함)처럼 변하여 무섭소. 그리고 50살이나 60살쯤 되면 온통 검은 얼굴에 분을 발라 마치 구반도(鳩盤茶: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다는 불경 속의 귀신)처럼 보이는데 어찌 무섭지 않겠소.”  당시 궁중의 광대가 중종(中宗)과 그의 황후(韋氏) 앞에서 “세상을 살면서 공처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네. 밖에는 배담이 있고 안에는 황제가 계신다네!”라는 대사를 읊었다.  당나라 때 공처가로 소문난 황제가 많았으며 그중에서도 고종 이치(李治)는 아예 국사마저 황후 무측천에게 맡겨버렸다.  송나라 때 아내가 소리 지르면 마치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것처럼 두려워한다는 ‘하동사후(河東獅吼)’와 아내를 연지 바른 호랑이처럼 무서워한다는 ‘연지호(臙脂虎)’ 등 공처가에 대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리고 여정기(呂正己)는 아내를 무서워해 관직까지 박탈당했다.  이렇듯 황제로부터 대신 및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공처가가 많았으니 일반 백성들이야 공처가가 많은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필자가 중국에서 40여년 살아온 체험에 의하면 중국남자 중 십중팔구는 공처가이다. 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인은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대다수가 여자를 무서워한다. 이는 조선족사회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왜일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은 수천 년의 유교전통을 지닌 나라였다. 그렇다면 ‘삼강오륜’, ‘삼종사덕’, ‘칠거지악’ 등 유교윤리에 의해 마땅히 남권절대주의 사회로 흘러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여자를 무서워하고 십중팔구가 공처가로 된 이유가 바로 도교문화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어당(林語堂)은 그의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하지만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든다.”고 지적했다.  유교와 도교의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여성을 억압하는데 비해 후자는 여성을 숭배한다. 전자는 상제가 절대적 권위라 보는데 비해 후자는 도(道)를 절대적 권위라 여기고, 아울러 노자는 도를 여성의 ‘음부’에서 찾았으며 장자는 남녀교합이야말로 진정하고 지고한 도라고 보았다. 또한 중국문명은 생식숭배를 핵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생식숭배는 곧 여성숭배가 핵심이며, 따라서 이것도 도교문화에서 유래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교는 부권제확립과 실시에 역점을 둔데 비해 도교는 여성주체인 모권제사회를 숭상한다.  인간은 문화보다 본능이 우선이라 볼 때 중국인의 뼈 속에는 유교적 요소보다 도교적 요소가 훨씬 더 많이 스며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분석해 보면 왜 중국인이 공처가가 많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48    이명박 당선이 재한조선에게 득일까, 실일까? 댓글:  조회:8168  추천:71  2007-12-24
이명박 당선이 재한조선족에게 득일까, 실일까? -재한조선족 칼림니스트 김정룡 재한조선족이 비록 선거권은 없지만 한국 대선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마 지난 제16대 대통령선거 때부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회창이냐, 노무현이냐에 따라 재한조선족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보수 대변자인 이회창 후보가 불법체류외국인을 1%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는데,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재한조선족이 무더기로 강제추방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선족들이 길거리에 나서 이회창을 반대하는 데모를 했고 동시에 직접 선거에 참여할 수 없어 간접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노무현을 찍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제16대 대선 결과는 조선족들의 바람대로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현시점에서 노무현정부에 대해 한국국민들은 냉혹할 정도로 점수를 낮게 매기고 있으나 어찌되었든 지난 5년 동안 노무현정부가 조선족에 대해선 너그러운 정책을 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족은 대체로 보수적인 한나라당을 달가와 하지 않았던 반면에 진보적인 열린우리당에 우호적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족들의 이러한 ‘입장’이 제17대 대선에 그대로 반영될까? 필자는 이것이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제17대 대선이 다가오기 전에 귀화한 조선족들에게 누구를 찍을 것이냐? 또 중국국적을 갖고 있는 재한조선족에게 만약 당신이 선거권이 있다면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가운데서 누구에게 투표할 것이냐는 ‘설문조사’를 해보았다. 결과는 20%가 정동영을 지지하고 나머지 75%는 이명박의 손을 들었으며 5%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희한한 것은 이회창을 옹호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판세’는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온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한국국민들이 지역대결, 이념대결, 세대갈등 등등이 희미해진 것과 같이 조선족들의 한국 대선을 바라보는 관념도 비슷했다. 즉 20%만이 대통합민주신당이 집권해야 조선족들에게 더 폭 넚은 너그러운 정책을 펼 것이고, 거꾸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불이익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75%는 가령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이만큼 열렸는데 설마 조선족에 대한 정책을 졸아 붙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고, 허나 이회창이 집권하면 반드시 조선족에게 불이익이 닥칠 것이라는 관념은 변함이 없었다. 조선족이 한나라당에 너그러운 생각은 결국 당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명박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감에서 생겨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한나라당은 이명박 때문에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결국 가령 이회창이 한나라당 후보였다면 조선족은 이번에도 죽어라 한나라당을 반대했을 것이다. 다행히 5년 전에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를 그만두었고 이번에는 이명박이라는 실용주의적이고 실력이 있는 후보의 출마로 조선족에게는 큰 희망으로 다가왔고 한나라당에 대한 편견도 많이 사라졌다. 조선족들은 왜 이명박을 좋아할까?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은 두 가지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명박은 말보다 실력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거꾸로 정동영은 실력보다 말로만 재잘거린다. 이명박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분명한데 반해 정동영은 자신의 비전이 없이 이명박을 헐뜯고 올라가려는 전략이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5년 전 아니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족 대다수가 정동영을 좋아했었는데 선거가 막판으로 다가올수록 그에 대한 인상이 점점 나빠졌고 이명박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둘째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조선족들의 일자리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다못해 대운하가 실행되면 수많은 조선족들이 일거리가 생기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리고 경제가 좋아지면 조선족이 따라서 여러 분야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이명박의 집권이 조선족에게 하나의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곧 홍콩문회보가 예측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을 가까이 하고 중국을 멀리하는 親美遠華’인데, 그렇게 되면 따라서 재한조선족에게도 ‘너그럽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다. 이는 한나라당에 대한 선입견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는 지난 5년 동안 조선족에 대해 많은 너그러운 정책을 실시해왔는데 이를테면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의 합법화,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의 자진귀국지원정책 프로그램, 무연고동포시험제, 3년 만기 재입국자의 2년 연장 등등인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기존의 정책보다 마이너스 시킬 것이라는 우려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명박의 당선이 조선족에게 득보다 실이 더 크고 심지어 큰 악재라 볼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명박은 실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인물이기에 한중가교역할과 미래 남북통일의 가교역할 담당자인 ‘귀한 재부인 조선족’에 대해 노무현 정부보다 더욱 너그럽고 좋은 정책을 펼 것이라 생각한다. 이명박 당선이 조선족에게 실인 것이 아니라 득일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정부에 거는 기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말할 수 있다. 첫째 2008년 봄에 제3차 자진귀국지원정책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다.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거쳐 불법체류조선족이 대폭 줄어들어 현재 불법체류조선족인수를 3만 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2005년에 단순불법체류자를 구제했고, 2006년에는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결혼자를 구제대상에 포함시켰으나 조선족들이 정부정책에 반신반의했고, 중국 측에서 여권을 새로 내주지 않는다는 등 유언비어가 난무해 주저하고 눌러 앉은 자가 많았는데 만약 제3차 자진귀국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호응하겠다는 자가 절대다수이다. 가령 2008년 봄에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불법체류조선족이 기본상 사라질 것이다. 둘째 한국정부에서 조선족에게 한국에 올 수 있는 문을 대폭 열어놓고는 조선족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재입국이든 처음 한국 땅을 밟든 간에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는데 3만원, 취업교육비 10만 7천원이다. 가령 한국정부의 정책에 따르면 고용계약까지 맺고 일을 시작할 때까지 모든 절차를 마치려면 2개월이 소요되며 이 기간 일을 하면 불법취업으로 간주하고 단속에 걸리면 100만원의 범칙금을 물어야 하고 2차로 잡히면 강제추방이다. 하여튼 1년에 한국법무부와 노동부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 수자이다. 얼핏 주먹구구로 따져보자. 재입국자와 초입국자 및 외국인등록증을 번잡하는 자를 합치면 5만이라 할 때 1인당 3만원이면 15억이고, 취업교육자가 3만이라 할 때 1인당 10만 7천이면 37억이고, 국민연금 사대보험 귀국보험 등을 합치면 얼마 될지 알 수 없다. 물론 국민연금을 돌려주고 귀국보험 40만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돈을 돌려받지 못하고 귀국한 자가 굉장히 많다. 또 불법취업으로 100만원의 벌금을 낸 자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이것도 역시 1년에 수억 원은 족히 될 것이다. 바라건대 이명박 정부는 재한조선족의 경제적인 부담을 줄여주고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여기서 거창하게 이중국적이 어쩌고저쩌고 거론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명박 당선자께 위에서 말한 ‘소박한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 하는 부탁을 하고 싶을 뿐이다.
47    크리스마스는 왜 12월25일까? 댓글:  조회:7889  추천:66  2007-12-24
크리스마스가 왜 12월 25일까? -김정룡의 역사문화 이야기 크리스마스란 예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예수가 성인이므로 예수가 탄생한 12월 25일을 우리말로는 성탄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가 역사적 실존인물이냐 아니면 가공해낸 신화인물이냐는 논쟁이 2000년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왔으며 따라서 예수의 탄생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 (주장)이 있다. 즉 예수가 태어난 날이 12월 25일 이다. 아니다. ‘1월 6일’이다. 무슨 소리냐? 봄이 한창인 ‘3월’이다. 틀렸다. ‘4월’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려 오다가 중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의 탄생일이 12월 25일로 확정되어 왔다. 왜 예수의 탄생일이 최종적으로 12월 25일로 확정되었을까? 여기에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지금은 12월 22일이 동지(冬至)이지만 2000년 전에는 12월 25일이 동지였다. 그 이유는 2000년 동안 세차(歲差)에 의해 동지 날이 3일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의 탄생일을 일부러 동지 날로 꿰맞춰 놓은 연유로 인하여 성탄절이 12월 25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 전 서양은 동양처럼 24절기와 같은 세시풍속(歲時風俗)은 없었으나 하지(夏至)나 동지(冬至) 등 천문학적 개념은 있었다. 하지는 1년 중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으며 양(陽)이 쇠하고 음(陰)이 성하기 시작하며, 동지는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며 음이 쇠하고 양이 성하기 시작하는 날이다. 중국의‘성경’으로 불리우는 <<주역(周易)>>에 의하면 동지 날의 괘(卦)는 다음과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위의 다섯 개 효(爻)는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 음(실제로는 여자를 뜻하는 데서 유래되었음)을 뜻하고, 제일 밑의 여섯 번째 효(爻)는 쭉 뻗은 작대기 모양이 양 (실제로는 남자를 뜻하는 데서 유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지 날은 온통 음으로 차있는 천기(天氣)에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양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양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음산하고 세상에 광명과 희망을 가져다주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탄생은 종교적으로 인간을 암흑세계로부터 광명의 세계에로 인도해주는 구세주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일을 위에서 말한 의미를 갖고 있는 동지 날로 확정짓게 되었던 것이다. 거꾸로 예수의 등장을 세상에 알린 세례 요한은 하지에 태어났고 늙은 어미 뱃속에서 나왔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우러러 보게 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요한은 매우 하찮은 존재요. 이제 내 뒤에 오는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위대해서 나는 그의 신발 끈을 감당할 자격도 없노라!” 과연 세례 요한은 예수의 도래를 세상에 알려놓고는 인츰 죽었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동지 날에 태어났고 처녀뱃속에서 나왔다. 과연 예수는 인류역사 이래 가장 큰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위인으로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본래 서양인의 가장 큰 명절이다. 하지만 19세기부터 기독고가 동양에 전파됨에 따라 지금은 동양에서도 서양인 못지않게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허나 동양인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상식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탄생일이 12월 25일로 확정된 유래를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여기서 부연적으로 한 가지 더 설명하자면 지금 2007년이라고 하는 연대(年代 )가 곧 예수가 2007년 전에 세상에 태어난 데서 유래되었으며, 2007년 전을 기원전(AD)이라하고 그 뒤를 기원후 (BC)라고 하는 것도 역시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생겨난 것이다. 동양에서는 본래 왕의 연호(年號)에 따라 연도(年度)를 불렀으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양식 연대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불과 100년 역사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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