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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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한국에 시집온 나어린 조선족처녀들의 비극 댓글:  조회:5244  추천:57  2007-12-13
한국에 시집온 나 어린 조선족처녀들의 비극 -재한조선족 칼럼니스트 김정룡 필자는 한국인과 조선족사이 국제결혼에 있어서 드러나는 문제점 가운데서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나 어린 조선족처녀들이 겪고 있는 비극이라 생각한다. 연길에서 온 김양(26세)은 4년 전(22세) 16세 연상인 한국인 박모와 결혼했다. 그녀는 한국에 도착한 10일 만에 남편이 7세 여자애를 강간하여 징역3년 6개월 형을 판결 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고 신혼초기부터 남편이 없는 시댁에서 80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남편의 사랑도 부부생활도 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3년 넘게 사느라 우울증에 걸렸다. 하여 가끔 시어머니가 뭐라 하시면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말대꾸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출옥을 앞둔 1개월 전 어느 하루 이상 시누이와 시누이 남편이 그녀가 시어머님에게 말대꾸하는 것을 목격하고 올케가 못돼 먹었다고 나무라면서 한바탕 그녀를 두들겨 팼다. 본래 우울증이 심했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크게 얻어맞고 나니 정신이 완전히 이상해져 자립생활을 할 수가 없어 서울에 있는 고모가 데려왔고 치료해주었다. 남편이 출옥한 후 정신이 나간 그녀를 한 번 만나보고 다시는 연락을 끊었다. 그녀의 고모가 그녀를 대신해서 이혼소송을 제출했는데, 남자가 3년 6개월 수감생활을 보내다보니 돈이 없고 시어머니도 국가보조금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위자료를 받지 못하고 치료비 150만원 만 받고 이혼했다. 길림시에서 온 서양(25세)은 3년 전(22세) 18세 연상인 한국인 강모와 결혼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힘든데다 남편이 그녀가 친구와 만나는 것과 한국에 와 있는 친인척들과 왕래하는 것을 가로막고 심지어 명절 때 시댁식구들과의 접촉도 차단해 버려 그녀는 너무 고독하고 힘들어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그녀는 지난 01월 20일 위자료 600만원을 받고 협의이혼을 하기로 했지만 법정에서 두 부부가 말을 제대로 못해 이혼이 무산되었다. 현재 법원에 소송이혼을 제출해놓은 상태이다. 용정에서 온 장양(22세)은 지난 3월 16세 연상인 한국인 주모와 결혼했다. 당시 결혼당사자인 남자가 자기 앞의 말도 제대로 못해 남자의 부친이 아들을 데리고 중국에 가서 혼사를 성사시켰다. 그때 남자가 중국에 머물면서 여자와 호텔에서 3일 밤 묵었는데 성생활이 없었다고 한다. “남자가 성기능장애라는 의심을 해보지 않았냐?”고 물으니, “그냥 젊잖아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녀는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후에도 남자는 성생활을 못하는 병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자는 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마누라를 사랑해줄 줄도 모르고 남편의 의무를 지키지 못하는 ‘불량남편’이다. 그 사이 그녀는 여러모로 노력을 하였으나 남편은 여전히 개변이 없이 그 꼬라지 그 꼬라지였다. 이 와중에 그녀는 친정부모를 한국에 초청해 H-2비자를 받아 본격적인 돈벌이에 들어갔고 더 남편한테 바랄 것 없어 1천만 원을 받고 협의이혼 했다. 훈춘에서 온 심양은 지난 5월에 20나이에 19세 연상인 한국인 이모와 결혼했다. 헌데 그녀는 한국에 온 이튿날 바로 가출했다.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마음에도 없는 남편이 싫다는데 기어코 ‘덮쳐’들어 무서워서 도망했다고 한다. 하느님 맙소서! 납치결혼도 아닌 제 눈으로 보고 왔는데 남편이 첫날밤에 강간도 아니고 정당한 ‘잠자리’를 하려는 것을 거절하는 신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열 받은 남편이 휴대폰 위치추정으로 그녀를 붙잡았고 1년 내에 3천만 원을 남자에게 물어준다는 각서와 여권을 저당 잡히고 풀려났다. 20살 나는 여자애가 어떻게 1년에 3천만 원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일본 땅에 가서 매음하면 모를까? 한국에서 몸을 팔아도 그 돈을 벌지 못한다. 그녀는 실로 18층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현재 한국에 시집온 나 어린 조선족여성 중에 1~6개월 혹은 1년 사이 가출해 헤매는 수가 적지 않다. 한국에 시집오는 나 어린 여성들의 공통점은 한국인 배우자와의 연령 차이가 보통 10~20세이다. 이는 젊고 괜찮은 한국총각들이 중국여자를 데려올 리가 없고 당연히 이래저래 한국 내에서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불량품’들이 ‘중국산’에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필자가 보기엔 외모가 괜찮아 중국 내에서 천천히 훌륭한 신랑감을 만나 결혼할 수 있는 처녀들이 ‘불량품’인 한국인에게 시집와서는 지옥과도 같은 삶을 보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부모들이 딸을 앞세워 잇따라 한국에 와서 한 몫 잡으려는 계산이 압도적일 것이다. 한국바람에 의해 “아들을 둔 집은 망하고 딸을 둔 집은 부자가 된다.”는 유행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 시집온 처녀들 당사자와 그들의 부모들이 부자가 된 사례가 많을 것으로 짐작되나, 필자는 한국현지에서 조선족들의 이혼 사건을 접하면서 나 어린 조선족처녀들의 비극적인 가슴 아픈 사연을 많이 보았다. 돈이 뭔지? 옛날 사람들은 “개도 안 먹는 돈”이라 했지만 지금은 그 돈을 위해 나 어린 조선족처녀들이 자신의 가치를 망가뜨리고 결혼으로 도박하거나 정신병에도 걸리고 도망 다니고 벼라 별 비극이 다 벌어지고 있다. 한중동포신문(2007-12-12) 114호 김정룡
45    "출국확인서 갖고도 재입국 못할뻔 했어요." 댓글:  조회:5241  추천:54  2007-12-12
출국확인서 갖고도 재입국 못할 뻔 했어요. -최영금 구술, <김정룡의 상담 이야기> 2006년 4월 17일 한국법무부는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 실시 공고>를 발표했는데, 요지는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위장결혼자 등 불법입국자들이 자진귀국 의사를 밝히고 출국 시 공항과 항만의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받고 귀국해서 1년 후에 재외공관(영사관)에 비자신청을 하면 재입국이 된다는 것이었다. 법무부의 이 정책은 재한조선족사회에 큰 혜택이었으며 복음이었으며 실제로 무려 3만에 달하는 조선족이 한국정부의 정책에 호응하여 귀국했고 그 중 절대다수는 별 탈이 없이 재입국했다. 허나 극소수이기는 하겠지만, 연길시 하남가 최영금(53세)씨는 당당하게 출국확인서를 갖고도 비자가 기각되어 지난 수 개 월 동안 뚠 눈으로 속 태우다가 겨우 우회곡절 끝에 12월 4일 재입국하는데 성공했다. 아래는 그녀의 코리안드림을 이루기 위한 노력에 얽힌 사연이다. 최씨는 1999년 12월 01일 한국에 가서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브로커에게 인민폐 9만원을 지불하고 이경숙이란 이름으로 여권을 위조하고 허위부모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3년 7개월 체류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 2003년 한국정부에서 불법체류자를 합법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여 합법체류자로 당당하게 한국에서 살 수 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10월초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찾아갔는데 뜻밖에 허위초청으로 한국에 입국한 사실이 들통 나 감금되었고 최영금이란 신분을 확실하게 밝히고 진짜 이름으로 2003년 10월 15일 강제퇴거조치를 받고 중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중국에 돌아와 보니 물가가 많이 올랐고 아이의 생활비와 교육비도 만만찮게 들고 또 한국에 갈 때 타인으로부터 빌린 돈과 이자를 갚고 나니 별로 남은 것이 없어 여전히 살기가 막막했다. 하여 할 수 없이 또다시 한국에 갈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최영금이란 본명으로 강제퇴거조치를 받았고 동시에 입국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 갈 수 없어 2004년 08월 10일 브로커를 통해 인민폐10만원을 내고 최춘화란 이름으로 여권을 위조하여 한국에 재입국하는데 성공했다. 두 번째로 한국에 입국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2003년도에 여권을 위조하여 체류하다가 강제퇴거조치를 받은 적이 있어 늘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2006년 04월 17일 한국정부에서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을 실시공고>를 발표하였는데 여권위변조자도 구제대상에 포함되어 실로 복음이었다. 한국정부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정부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자진귀국 하였다가 1년 후 재입국하여 당당한 합법체류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자진귀국을 위해 주한중국대사관에 가서 여행증을 발급받고 귀국비행기표도 끊어 갖고 2006년 07월경 군포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가 여권위변조에 대한 범죄사실을 자수하여 조사를 받았다. 2007년 08월 11일 수원지방검찰청으로부터 <불기소이유 통지>라는 처분결과를 받고 귀국준비에 서둘렀으며 2006년 08월 30일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받고 중국에 귀국했다. 출국확인서의 유의사항에 따르면 귀국한 일자부터 1년이 경과한 날부터 3개월 이내에 대한민국재외공관에 사증발급을 신청할 수 있다. 하여 지난 09월 19일 연길시 소재 서광여행사를 통해 주중심양영사관에 사증발급신청을 제출(접수번호 : 1878175)하였는데 뜻밖에도 기각(기각번호 : SEP272007)되었다. 기각이유를 물었더니 답복에 의하면 2003년 10월 15일 강제퇴거조치를 받을 때 출입국에서 제정해놓은 입국규제가 현재까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무부의 <2006. 4. 17.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 공고>에 의하면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등 공고발표 이전에 불법체류신분인 중국동포와 러시아동포는 모두 자진귀국 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1999년 12월 01일과 2004년 08월 10일 두 차례 여권을 위변조하여 한국에 입국하였다가 첫 번에는 강제퇴거조치를 받았고, 두 번째는 한국정부의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실시정책>에 호응하여 자진귀국하기로 결심하고 정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관련 수속절차를 착실히 밟았다. 그런데 정부정책에 호응하여 자진귀국하기 위해 한국경찰에 자수해서 조사를 받았고, 한국검찰청으로부터 불기소이유 통지라는 천분결과를 받고, 자진귀국 했으며, 특히 경찰조사 시 2003년 10월 15일 여권위변조로 강제퇴거조치를 받은 사실도 자수해서 조사 자료에 기재되었다. 정부에서 요구하는 대로 밟을 절차를 다 밟고 마지막에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받고 귀국했는데 이제 와서 2003년 10월 15일 강제퇴거가 문제되어 재입국사증발급을 기각하니 억울하다고 생각되었다. 한국정부에서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불법입국자를 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되며 그래서 적극적으로 정부정책에 호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저의 과거가 문제되어 재입국사증발급을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최 씨는 행여나 하고 한국에 있는 조카한테 부탁해서 법무부 장관님 앞으로 편지를 쓰게 했더니 돌아온 답은 “그럴 수 없으니 다시 신청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다시 신청해 보았으나 여전히 기각되었다. ‘앞문’으로 재입국할 수 없으니 이번에는 지프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편법을 생각했다. 즉 허위로 한국에 있을 때 동거했던 한국인을 불러들여 심양영사관의 영사님과 면담을 하면 혹시 비자가 허락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만 수 백 만원을 쓰고라도 시도해보자. 결국 이 어처구니없는 편법도 주위의 만류에 의해 포기하고 나니 별 다를 뾰족한 수가 없어 속만 태웠다. 그래저래 시간은 10월이 다 지나가고 재입국은 물 건너간 것 같아 속이 재가 된다. 또 다시 타인의 이름으로 여권을 위조하여 한국에 갈까? 이렇게 과거 범죄를 되풀이 할 궁리를 하고 있던 중, 한국에 있는 친구가 신화보사 김선생을 찾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와 최후의 희망을 안고 연락했다. 과연 11월 9일 김선생이 전화로 법무부 장관 명의로 입국규제를 풀었다는 소식이 왔다. 아울러 공문을 심양영사관에 팩스로 보냈고 원본은 나의 앞으로 보냈으니 이번에는 틀림없이 비자가 허락될 것이라 했다. 당시 분명히 확실한 답을 들었으나 꿈인지? 생인지? 어리둥절해났다. 너무 혼나고 나니 비자를 손에 쥐기 전에는 누구의 말도 믿기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김선생이 시키는 대로 추진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우회곡절 끝에 지난 12월 4일 재입국에 성공했다. 늦게나마나 진통 끝에 비자가 나왔고 재입국에 성공했으니 한국정부에 감사하고 김선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이 지면을 통해 전하고 싶다. 끝으로 한국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가령 앞으로 제3차 자진귀국 프로그램을 실시하려면 법무부와 재외공관의 엇박자로 나처럼 우회곡절을 겪는 일이 발생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44    '종군위안부'의 유래 (김정룡) 댓글:  조회:5684  추천:116  2007-12-08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7'종군위안부'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종군위안부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흔히 제2차 대전 시, 한국이나 중국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짓밟혔던 사실을 떠올리며, 일본인이 사상 처음으로 혹은 유일무일 하게 저지른 만행의 산물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종군위안부가 역사무대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중국춘추시기였다. 춘추시대 말기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정벌할 때 장수와 병사들이 가족을 그리워하여 군대의 사기가 저하된 것을 보고 여성 위문단을 모집하여 전선으로 보냈다. ‘중국의 남자와 여자’의 저자 역중천(易中天)은 “이것은 중국 최초의 종군위안부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 후 중국에서 종군위안부가 하나의 제도로서 정착되었던 것은 한무제 때었다. 당시 종군위안부를 ‘군영의 기생’이라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영기(營妓)’라 불렀다.  ‘세상사’가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폐단이 존재하기 마련인 것과 같이 ‘영기’제도가 정착되기 이전에는 종군위안부는 임시방편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복잡했다. 즉 우선 종군위안부는 분배가 문제였다. 그래서 죄인의 아내나 딸들을 강제로 군사들에게 짝지어주는 제도도 생겨났는데, 이 또한 가족이 생기고 아이를 낳고 해서 너무 비대해져 통솔과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모든 병사들이 다 여자를 소유할 수는 없어 내부 갈등도 심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겨난 것이 곧 ‘영기’ 제도였다. ‘영기’ 제도는 모든 군사들이 공평하게 여자를 접할 수 있고 또 관리하기도 쉬웠으며 이동도 편리했다.  ‘영기’ 제도는 송나라 때까지 성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쟁이 없을 때에는 ‘영기’가 지방 관리들의 노리개로 전락되면서 관리들의 부패를 부추기는 요소로 지목되었다. 그리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영기’ 제도를 폐지하고 건도교(乾道橋)와 무정교(武定橋)에 관영기원, 즉 공창을 두었으며 관리들이 기생과 잠자리를 하는 것을 금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하지만 공창 또한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 강희(康熙) 12년(1673년)에 문을 닫았다.  종군위안부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적을 무너뜨리려고 미인계를 쓴다든가, 전쟁에서 패하면 승전국에게 미녀들을 바치는 것도 역시 위안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夫差)에게 서시(西施)를 바쳤고, 한나라 때 왕소군(王小君 : 흉노로 가는 도중에 자살했음. 왕소군은 서시, 초선,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에 속한다.)을 흉노에게 바치는 등, 이들 미녀들이 곧 위안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중원이 주변 이민족에게 전쟁에서 패하면 미녀들을 상대에게 바친 사례가 허다하다. 그리고 1635년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청에 60만의 인질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중 90%이상이 젊은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청에 가서 사실상 위안부 노릇을 했다.  20세기에 들어 종군위안부가 기본상 사라졌지만 일본인이 종군위안부를 두려고 자국 내 여성들을 모집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등 주변국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일본인의 이런 만행은 규탄 받아야 하며 반드시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허나 아이러니한 것은 1973년 한국문화관광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일본인 관광객을 한국에 끌어들여 외화를 벌어들이려고 관광업계에 일본인을 상대로 기생관광판촉(선전)에 적극 나설 것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만행에 대해 규탄하는 것이 마땅하나 한국인은 스스로 자신의 수치스런 행위에 대해서도 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한국의 양심 있는 학자들의 지적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일본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위안부문제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 국제사회는 일본을 양심 있는 사과를 하라고 촉구하고, 일본은 강제성이 없었다고 뻗히고 있다. 이번에는 미국이 지난 26일 ‘위안부 결의안’을 하원 외교위원회에 통과시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돌아가는 국제형세를 지켜보며 종군위안부의 역사적 유래를 한번 살펴보았다.
43    탱자가 된 조선족 이름 댓글:  조회:6487  추천:48  2007-11-15
탱자가 된 조선족 이름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朴光石’이 왜 ‘피아오광스’인가? 150년 지킨 이름 인정 못한다니··· 중국에는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가 있다. 현재 조선족 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에 와서 이상한 ‘탱자’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 중국 지명과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서 중국어발음을 따른다. 이 때문에 조선족이고 밀양 박씨인 ‘박광석(朴光石)’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라고 표기한다. 조선족의 중국 신분증은 위에 우리글로 ‘박광석’, 그 아래 한자로 ‘朴光石’이라 적혀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선 ‘박광석’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박광석’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이유는 ‘박광석’을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으로 보고, 조선족이 갖고 있는 ‘박광석’이란 자체 고유이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조선족은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조선족은 먼 옛날 고국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을 애써 지켜 왔지만, 정작 고국에 와선 그‘이름’을 인정받지 못한다니 참 기가 막힌다. 한국은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이름만 아니라, 한국에 시집 온 조선족들의 이름도 이상하게 표기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 시집오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한국 호적에 오르게 된다. 이때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李花子는 중국에서 ‘리화자’로 불리고, 한국에선‘이화자’라 부른다. 그런데 호적에는 ‘리후아지’로 기재된다. 한국이 조선족 자체 고유이름을 탱자식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우리글, 우리말을 지켜온 조선족에 대한 무시, 나아가 모독이다. 한국인이 진정 조선족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한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먼저 조선족이 지켜온 자체 고유이름을 존중하고, 이상하고 엉뚱하게 표기하는 일을 당장 중단하기 바란다. *아래의 문장은 위 글의 원문입니다. 탱자가 된 조선족이름 중국에는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가 있다. 현재 조선족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에 와서 이상한 ‘탱자’로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참으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지난 10월 31일 경기도 고양시는 중국 옌지시와 우호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2006년 10월 피아오광스 옌지교육국장이 고양시를 방문하여 고양시장 접견 시 양 도시 우호교류를 제안했다. ······” 이는 수일 전 한국00신문기사의 한 대목이다. 현재 한국은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표기함에 있어서 중국어발음을 따르고 있다. 위 문장에서 ‘옌지’는 延吉, ‘피아오광스’는 朴光石의 중국어발음을 따른 것이다. 필자는 본문에서 한국인이 중국지명과 인명 중국어발음표기법에 대해선 논하지 않고 조선족이름표기법에 관해서만 소견을 말하려 한다. 朴光石은 조선족이고 분명히 우리말, 우리글로 ‘박광석’이다. ‘박광석’이란 이름은 한반도의 고유이름을 따른 것이고, 현재 반도사람들이 본을 갖고 있는 것처럼 조선족인 ‘박광석’도 밀양 박이라는 본을 갖고 있다. ‘박광석’과 마찬가지로 중국 내 조선족은 중국에서 미국거주인의 ‘린다 김’ ‘골든 창’ 등 미국식을 따르거나, 러시아의 고려인처럼 ‘안드레’ ‘알렉산드’라 부르거나 혹은 일본국적을 가지려고 ‘야마다’ ‘나카무라’ 등 창씨개명을 하지도 않는다. 조선족은 위에 우리글로 ‘박광석’이고 아래에 한자로 ‘朴光石’라 적힌 신분증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이상하게 우리말, 우리글로 표기할 수 있는 ‘박광석’이란 이름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한다. 한국인이 ‘박광석’을 ‘피아오광스’로 표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에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박광석’을 조선족이 아닌 ‘중국인’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족이 자체고유이름인 ‘박광석’이란 표현을 갖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이 먼 옛날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아온 자체고유이름이 할아버지 고향인 고국에 오면 그 ‘이름’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박광석’이 이상한 ‘피아오광스’로 불리우고 있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한국인은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이름만 이상한 표기법을 쓸 뿐 만 아니라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들의 이름도 역시 이상하게 표기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 시집오면 한국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한국 호적에 올라 반은 한국인이고 반은 ‘중국인’이 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조선족은 분명히 자체고유이름이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또 한국호적에 오르면 반은 한국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적등본에 이상하게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李花子는 중국에서는 ‘리화자’이고 한국에서는 ‘이화자’라 부른다. 두음법칙에 의해 일부 성 ‘리’가 ‘이’로, 이름자 ‘룡’이 ‘용’으로 발음되는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으나 ‘리화자’도 아니고 ‘이화자’도 아닌 ‘리후아지’로 호적등본에 기재된다. 만약 ‘리후아지’로 등록된 사람이 한국 내 서류에 ‘리화자’나 ‘이화자’로 하면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李花子가 이혼소송을 제기할 때 원고의 이름을 ‘리화자’나 ‘이화자’로 쓰면 안 되고 반드시 ‘리후아지’로 써야 한다. 왜냐하면 호적등본에 등록된 이름과 일치해야 되기 때문이다. ‘리후아지’는 ‘李花子’를 중국어발음에 따라 옮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중국어발음을 따르겠으면 ‘리후아지’가 아니라 ‘리화즈’로 옮겨야 하는데 중국어발음을 모르고 멍청하게 나름대로 옮겨 엉뚱한 발음으로 표기되고 있으니 참으로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조선족들의 이름이 귤이 아닌 탱자가 되어버리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朴光石’도 ‘피아오광스’가 아니라 ‘퍄오꽝스’로 옮겨야 한다. 한국인은 이런 엉뚱한 식으로 중국지명과 인명을 나름대로 옮겨놓아 누가 보아도 쉽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이런 엉뚱한 발음으로 중국인과 대화하면 아예 알아듣지 못한다. 중국의 지명과 인명 그리고 조선족자체고유이름마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옮김 법으로 나름대로 표기하고 있어 읽기도 불편하고 듣기도 거북스럽고 적잖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고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대체 이런 엉뚱한 발상을 누가 만들어냈는지? 또 누구를 위해 만들어냈는지? 李花子의 한국남편이 자기 아내를 부를 때 ‘리후아지’라 할까? 천만에! 한국인은 조선족이 갖고 있는 고유이름을 부르지 절대 이상하고 보기에도 그렇고 듣기에도 메스꺼운 ‘탱자 식’ 발음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나 호적등본에 ‘피아오광스’, ‘리후아지’로 표기하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는 것이다. 한국인이 조선족자체고유이름을 탱자 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우리글, 우리말을 지켜온 조선족에 대한 무시 내지 모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진정 조선족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려면 말로만 하지 말고 우선 먼저 조선족이 지켜온 자체고유이름을 존중하고 이상하고 엉뚱한 표기법을 버리기를 바란다. * 본문은 조선일보 2007년 11월 15일 A33면에 '조선족 이름 표기'제하에 요약되여 발표되였습니다.
42    막판까지 말썽 많은 무연고방취제 댓글:  조회:5118  추천:81  2007-11-05
막판까지 말썽 많은 무연고방취제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1년 동안 조선족사회 가장 큰 화제로서 아마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는 한국정부가 조선족사회에 베푼 혜택인 만큼 처음부터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한다는 취지하에 추진되어왔다. 시행 초반에 시험을 치게 하느냐, 마느냐? 는 시비가 많았지만 결국 시험을 치르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도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조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청도 인터넷으로, 추첨도 인터넷으로, 합격자발표도 인터넷으로 추진되었으니 한국정부입장에서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조선족의 입장에서 보면 무연고동포도 한국에 가서 취업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음이었으나 한국 땅을 밟기까지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톡톡히 대가를 치른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합격자들이 마지막 관문인 비자발급에 관해서 한국정부재외공관의 투명성을 크게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합격자가 가장 많이 집결된 관할 공관인 주중심양영사관이 합격자들의 비자발급은 개인접수를 거부하고 대행여행사를 지정하여 접수를 받는다고 한다. 헌데 요즘 대행업체로 지정받은 연변00여행사는 고객들에게 비자발급요금 640원에 대행수수료 260원 해서 900원을 내면 1년이 걸릴지 언제 될지 모르니, 5,000원을 내면 1개월 이내에 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 혼란과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중 각 한국영사관에서 합격자들의 서류가 구비되고 비자발급비 640원을 내면 5일 이내에 비자를 발급해준다고 한다. 5,000원 얘기는 해당 여행사가 임의로 결정하고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고객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다. 즉 과거 영사관의 비리관행을 미루어 보고 여행사가 영사관을 끼고 짜고 치는 고스톱일 것이라 본다는 것이다. 5,000원의 행방이 어떠하든지 무연고동포들 가운데 80% 이상이 컴맹이어서 그 중 신청 시에 100~500원을 내고 남을 통해 신청하는데 성공했고, 1,000~5000원을 팔고 한국어학습을 했고, 시험 보는데 여비와 숙식비 1,000~2000원을 썼고, 비자발급에 5,000원, 신체 검사비 300원, 비행기 값 2,600원을 합치면 많이 쓴 자는 20,000원을 넘게 팔아야만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시험신청비 200원, 여권신청비, 200원, 비자신청비 900원, 신체검사비 300원, 비행기표값 2,000원 도합 3,600원, 의외의 경비를 합쳐도 4,000원이면 족하다. 그런데도 20,000원을 넘게 팔았으니, 이는 애초 한국정부가 브로커를 통해 거액의 돈을 쓰고 불법 입국하는 것을 막고, 재외공관의 비리를 막고, 조선족사회 형평성을 감안하여 돈을 아주 적게 들이고 골고루 고국에 방문하여 취업시켜려는 공정성과 투명성의 취지와는 조금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막판의 비자발급에 있어서 혼란과 불안이 재외공관에 의혹을 갖게 만든 것을 빼고는 대다수는 조선족사회 내 자체로 조성된 문제이다. 즉 시험교육사기, 여권발급사기, 2~3만원이면 시험을 보지 않고 ‘뒷문’으로 한국행을 이루게 한다는 사기행각, 수험장배치문제로 혼란과 불안이 조성되고 경제적인 부담이 커진 것 등등은 한국 측과는 무관하게 중국과 조선족 자체의 문제이다. 2007년 무연고동포방취제는 처음으로 실행된 프로그램으로서 막판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럭저럭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고 60%의 성공이었다고 점수를 매길만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41    풍류도와 ‘멋’, ‘맛’, ‘판’ (김정룡) 댓글:  조회:6342  추천:77  2007-11-02
16. 풍류도와 ‘멋’, ‘맛’, ‘판’   김정룡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 구분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외모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며, 곧 민족마다 나름대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이다. 예하면 한중일 세 나라 사람이 모이면 외모로는 구분이 안 된다. 또 유럽백인이나 아프리카 흑인이 모였을 경우 마찬가지로서 외모로는 민족구분이 되지 않는다. 오직 언어로서 구분이 가능하다.  민족과 민족 간의 언어차이는 곧 문화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인 가세히데아키(加漱英明)는 저서 ‘추한 한국인’에서 “멋이란 낱말은 중국어와 일본어에 없는 유일하게 한국인만 사용하는 어휘이다.”라고 지적했다. 비록 ‘추한 한국인’이 얄밉기는 하지만, 필자는 그의 이 ‘멋’에 대한 지적에서 크게 힌트를 얻었다. 즉 필자는 한중일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말 ‘멋’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할 경우 대충 의역(意譯)은 가능하나 완벽하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는 해당 어휘가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하면 ‘멋’은 중국어로 ‘美’, ‘瀟洒’, ‘帶勁’, ‘意思’, ‘浪漫’ 등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멋’의 뜻을 완벽하게 나타내지 못한다. “야, 너 대가리는 멋으로 달고 다니느냐?”에서 멋은 중국어와 일본어로 정확히 옮길 수가 없다.  ‘풍류도와 한국인의 종교사상’의 저자 유동식 교수는 ‘멋’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규정하는 말이 곧 멋이다.” 그는 또 “멋은 풍류도의 기본정신이며 기본 넋이다.”라고 말했다. 고대우리민족은 교리교의가 있는 종교가 없었으므로 풍류도가 우리민족의 종교역할을 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과거 조선족에 관한 여러 편의 글에서 “우리민족은 멋의 민족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가 있다. ‘맛’이란 낱말도 중국어와 일본어로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다. 예하면 중국인은 우리말 ‘맛’을 ‘미도(味道)’, ‘풍미(風味)’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중국의 도교와 풍류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은 ‘맛이 있다’를 ‘먹기 좋다’는 뜻으로 ‘하오츠(好吃)’라고 하는바 이 ‘好吃’는 우리말 ‘맛’의 뜻을 그대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일본어에 우리말 ‘맛’에 해당되는 어휘로서 ‘아지(味)’가 있는데 ‘아지(味)는 우리말 냄새라는 뜻에 가깝다. ‘판’이란 낱말도 역시 우리민족만이 특이하게 사용하는 어휘이다. 예하면 ‘노래판’, ‘춤판’, ‘술판’, ‘오락판’, ‘도박판’, ‘싸움판’, ‘난장판’, ‘개판’, ‘X판’ 등 ‘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이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場’으로 번역할 수는 있으나 이 ‘場’은 우리말 ‘판’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우리말 ‘판을 치다’, ‘판이 깨지다’, ‘판을 흐리다’, ‘판에 뛰어들다’ 등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하기 매우 힘들다.  우리민족은 세상에서 그 어느 민족보다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고전음악에 ‘판소리’라는 것이 있는데, 이 ‘판소리’는 곧 고대 우리민족이 풍부하고 다양한 여러 가지 ‘판’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판소리’가 중국고전음악과 일본고전음악에 비해 독특한 한민족의 특성을 반영하는 민족음악이라 할 때, 우리민족이 얼마나 ‘판’의 문화를 중시해왔는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어 말해서 ‘멋’, ‘맛’, ‘판’이란 낱말은 우리민족만이 지어낸 말이며, 이것이 곧 문화적으로 타민족과 구분되는 요소이며 이는 고대우리민족의 종교가 아닌 종교, 즉 풍류도에서 유래되었다.    
40    연길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댓글:  조회:6190  추천:121  2007-11-01
연길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현재 중국의 대다수 도시가 그러하듯이 연길도 자고 깨나면 변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바야흐로 변하고 있다. 우선 연길공항은 40만의 인구를 가진 소도시에 걸맞지 않게 진출인구가 대단해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관광버스도 전에 보지 못했던 대형호화외제차들이 줄을 지어 달리고 있고, 5성급대우호텔이 4성급으로 강급 되니 국제호텔이 5성급의 자격으로 문을 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40만 소도시에 5성급호텔이 들어서고 또 기타 관광호텔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은 아마 세상에서 연길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도로는 전에 비해 아주 시원스럽게 넓어졌고 길 양옆의 올망졸망 나름대로 복잡하게 들어섰던 문시방(門市房)들은 사라져 도시환경이 한결 깔끔해졌다. 건널목의 지시등은 초수까지 밝혀주어 서울보다 더 선진적인 감이 든다.   부르하통강과 연집강은 아주 아름답게 꾸며놓아 밤이면 훌륭한 관광지로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정부청사부터 일반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컴퓨터화가 되어 세계조류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고 있다.   물건은 당지 값싼 것부터 질이 좋고 브랜드가 좋은 고차원을 따지면 한국에 있는 것이면 연길에 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래방의 실내장식과 음향시설은 서울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 웬만한 음식점들의 실내장식도 한국보다 훨씬 호화롭다.  젊은 여인네들이 아침저녁이면 호화외제차를 끌고 애를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수가 수년 전에 비해 굉장히 많아졌다.   도시건축물과 시민들의 소비를 보면 연길은 부자도시임에 틀림없다. 확실히 연길이 많이 또 크게 변화했다.   하지만 필자는 엄청난 변화 뒤에 숨겨진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을 보아내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것을 하드웨어(硬件)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소프트웨어(軟件)라 부르는데, 연길을 놓고 보면 하드웨어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으나 소프트웨어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즉 연길은 도시건축을 비롯해 눈에 보이는 것은 크게 변하고 있으나 시민의식은 변화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사람들이 전에 비해 경제적인 경쟁의식과 남녀관계의 개방화 등등이 변화된 것들도 있지만 선진적인 시민의식 같은 소프트웨어는 전혀 개변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연길에서 4일 동안 머물면서 일을 본 것은 정부를 비롯한 공공기관과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부서였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실로 실망이었다.    연길에서 지식인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00기관에 가서 노크하고 들어갔더니 ‘주인’은 몸을 의자에 뒤로 기댄 채 손님을 맞고 말하는 태도도 마치 죄인을 대하는 것처럼 혹은 자기한테 뭘 빌려 간 것처럼 굉장히 쌀쌀하다.   어떤 기관의 공무원은 사무실에 전화로 00를 찾는다고 말하면 “아무개를 찾는 전화를 왜 여기에 거는가?” 고 버럭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어버린다.    한국의 어떤 은행에서는 웃는 얼굴로 손님을 서서 맞은 다음 업무를 처리해주는데 비해 연길의 은행 사무원들은 인사는커녕 마치 자기한테 신세를 지러 간 것처럼 손님을 쌀쌀하게 대한다. 기타 공공기관도 손님을 외면하고 자기네끼리 한담을 하는 등 거의 다 서비스태도가 예전과 같이 쌀쌀하다.    하루는 친구 집에 갔다가 우연하게 싸움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사연은 이러했다. 친구 밑에 층에 사는 집의 전원이 끊겼다. 그 집에서는 전기세를 다 지불했는데 사무원이 그 옆집이 전기세를 납부하지 않은 것을 바꿔 잘못 전원을 끊어놓았다. 억울하게 당한 주인이 전기공사사무원에게 따지고 드니 그 사무원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죄송하다고 사과할 대신 “전기를 보고 못 보는 것은 나의 손에 달린 것이니 시끄럽게 떠들면 전기를 주지 않겠다.”고 윽박찌른다.   공공기관의 사무원들은 아직도 시민들에게 서비스를 한다는 의식이 없이 마치 전기, 수돗물 등 시민들의 필수적인 것들을 관리하는 사무원들은 자기의 개인재산이나 되는 것처럼 권세를 부리고 있다.    일을 보자면 먼저 전화연락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일부연길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참으로 기분이 잡친다. 연길의 전화문화는 제고되지 않고 확실히 낙후되어 있다.    선진국의 기준은 경제가 발달해야할 뿐만 아니라 시민의식이 제고되어야 한다. 시민의식의 제고는 당연히 공공기관의 사무원들이 앞장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연길은 도시건축이 발달했고 도시환경이 많이 변화되었으나 시민의식이 변하지 않았다.   물론 시민의식 제고의 문제는 연길의 문제만은 아니다. 수년 전 필자가 심양출판사에 일보러 갔을 때 편집장이 하는 말이 “중국에 차가 엄청 많이 늘어났지만 차문화가 형편없이 낙후되듯이 중국의 하드웨어는 엄청난 변화가 있으나 소프트웨어는 변화된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고 했다.     필자가 이번 중국에 갈 때 장춘으로 갔는데, 인천공항에서 장춘행비행기는 먼 곳에 세워놓고 버스를 타고 탑승한다. 버스 안에 공중아가씨 두 명이 의자에 앉아 서로 희희닥닥 거린다. 만약 외국의 공중아가씨라면 자리를 손님에게 내어주는 것이 기본적인 태도일 것이고, 손님들 앞에서 떠들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 공중아가씨라면 고차원의 서비스교육을 받았을 터인데 그러하니 일반 백성들이야 더 말해 뭘 하랴!    한국에 돌아올 때 장춘공항에서 한 조선족유학생이 짐이 초과되어 나 보고도와 달라고 해서 선뜻 대답했는데 탑승수속을 맡은 아가씨가 나보고 그 학생의 이름을 묻는다. 나는 난생 초면의 사람의 이름을 알 리가 없어 떠듬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 학생을 도와주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공항의 규칙이 그러하기에 의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만약 당신이 이 분을 계속 도와주려하면 오늘 한국에 갈 수 없다.”고 나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나는 참으로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 오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적인 여권에 한국법무부가 내준 비자로 수속에 문제가 없는데 타인의 짐 때문에 내가 한국에 올 수 없다는 것은 말이나 되는가는 것이다. 마치 공항이 자기네 집 것이고 나의 운명이 자기 손에 달려있는 양, 중국사무원들의 의식수준이 참으로 한심하기가 그지없다.    연길도 그러하지만 해마다 10%의 경제성장을 자랑하고 있는 중국이 겉보기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는 듯 하지만 국민의식은 제고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에서 여러 해 동안 묵어 있던 사람들이 고향에 가면 여러모로 불편을 느낀다. 먼지가 많은 것은 그려러니 하고 각오하지만 사람들의 행동거지와 언행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당지 사람들은 한국나들이를 하는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꼴깝 떤다고 얄궂게 본다. 이 때문에 알게 모르게 갈등이 일어난다. 고향에 간 사람들이 한사코 하루빨리 한국에 오려고 발버둥치는 데는 이러한 원인이 한몫을 하고 있다. 한국생활이 여러모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의 하드웨어가 변화하는 것도 좋지만 소프트웨어가 개선, 변화되어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 흩어진 조선족들이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2989351');
39    중국 달 탐사와 달속 여신-상아 댓글:  조회:5973  추천:99  2007-10-25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중국 달 탐사와 달속 여신-상아(嫦娥奔月)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24일 중국에서 발사한 달 탐사 우주선의 이름을 상아(嫦娥)1호라 지은 데는 심오한 역사적인 유래가 있다. 고대원시인은 전쟁, 자연재해, 의술결핍 등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생존율이 50% 미만이었다고 한다. 우리조상들은 머리 좋게 불가항력적인 객관적인 요소와 무리하게 싸운 것이 아니라 아이를 많이 낳는, 즉 생식력을 높이는 것으로서 부족의 생존을 도모했으며 이로서 생식숭배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1990년 중국학자 趙國華 선생이 중국문화는 생식숭배를 핵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내용으로 <<생식숭배문화사상>>이란 책을 출간한 후 중국의 대다수 학자들이 그의 이 관점이 동의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는 여기서 본 주제와 관련하여 생식숭배문화의 초기형성과정을 살펴보자. 고대원시인류의 생식숭배는 일차적으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 부위, 즉 ‘여음’을 숭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허나 일정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음’은 근근이 신체의 한 개 부위에 국한되어 있어 ‘여음’만의 숭배는 다산을 기원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여음’과 닮은 자연물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곳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외형상(두 마리 잉어를 포개놓으면 ‘여음’과 신통하다)에서 ‘여음’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한 번 알을 쓸면 수백, 수천마리의 새끼를 생산한다. 따라서 원시인류는 물고기에게 열심히 제사를 지내고 기도하면 물고기의 놀라운 생식신력이 인간의 몸(여성)에 전이되어 다산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을 ‘漁祭’라 하며 ‘어제’는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고대 귀부인이 타는 가마를 ‘漁軒’, 연애편지를 ‘漁信’, 보름달밤의 등불을 ‘漁燈’, 음력설을 맞아 문 어구에 붙이는 “年年有餘”란 주련이 본래 “年年有漁”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가정집에 걸어놓는 오동통한 남자애가 큰 잉어를 안고 있는 그림도 풍요다산을 비는 의미가 있다. 원시인류는 이렇게 ‘여음’을 숭배하던 데로부터 점차 여성이 임신하면 배가 불어나고 해산하면 배가 줄어드는 현상이 개구리와 비슷하고 아울러 개구리는 하루아침 봄비를 맞아 수천 개의 올챙이를 생산하는 것에 매혹되고 다산의 숭배대상으로 되었다. 중국신화에 인간을 창조했다는 여신의 이름이 여와(女娲)인데, 娲란 글자는 여와에게만 전문 쓰는 것이고 실제로 娲는 본래 蝸이다. 그러므로 여와는 개구리의 화신이다. 고대중국인은 이렇듯 개구리에 대한 숭배사상이 강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고대원시인은 생식숭배의식을 거대한 우주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는데 하늘도 개구리와 같은 속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전체 하늘은 개구리의 배와 같고 개구리 배의 반점은 밤하늘의 별과 같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현상이 개구리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임신기에 배가 불어나고 해산하면 배가 줄어드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참으로 교묘한 것은 여성의 생리 주기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주기와 똑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성의 생리를 ‘달거리’ ‘월경’ ‘월수’ 등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달의 주기와 여성의 생리주기가 똑 같다면 필시 달 속에 생식을 관장하는 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신을 개구리로 확정하게 되었다. 즉 본래 개구리는 고대음으로 ‘첨여(幨蜍)’이고 이것이 점차 ‘창어(嫦娥)’로 바뀌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달 속에 생식을 관장하는 신이 있고, 그 신을 상아라 부르고, 상아는 개구리의 화신이다. 개구리의 화신인 달 속의 상아는 두 말할 것 없이 여성성 신이며 후대에 내려오면서 상아는 미녀를 상징하여 ‘미녀상아’란 말이 생겨났고 여성의 이름에도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진시황제를 독살했다는 여인의 이름이 곧 상아이다. 그녀가 하도 예쁘게 생겨 진시황이 파격적으로 연 3일 밤을 데리고 잠을 잤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독살 당했던 것이다. 달은 원시인이든 현대인이든 모두 신비한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원시인은 달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신비한 존재로 인식했고, 현대인은 신비한 존재를 과학적으로 밝혀보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모든 것을 역사와 단절시킬 수는 없다. 중국이 달 탐사 우주선의 이름을 상아라 지은 것은 수천 전에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가 달 속에 달려갔다(嫦娥奔月)는 전설이 있고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드디어 달 속의 상아를 만나러 간다는 뜻 깊은 의미가 있다. 중국의 유구한 민간전설과 ‘상아1호’에 담긴 오랜 숙원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이 글을 간단히 끝낸다.
38    구리다는 말의 유래(김정룡) 댓글:  조회:6206  추천:102  2007-10-23
15. 구리다는 말의 유래 김정룡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을 저질러 놓고 뒤가 켕기거나, 똥과 같이 더러운 냄새거나 퀴퀴하게 안 좋은 냄새를 흔히 구리다고 말하는데, 이 구리다는 말의 유래는 아래와 같다.  중국역사에서 진(秦)에 이어 두 번째 통일왕조였던 한조(漢朝)는 서한과 동한을 거쳐 선후 400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한조 초기 ‘문경지치(文景之治’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 의학 등 다 방면에서 전례 없던 발전을 가져왔고 한무제 때 강토가 전례 없이 넓어졌으며 본래 화하제족(華夏諸族)이 하나의 통일민족인 한족(漢族)으로 통합되었다. 지금 중국인을 한족, 중국어를 한어, 중국문자를 한문, 중국의학을 한의학이라 부르게 된 것이 곧바로 한조의 전례 없는 업적에 의해 얻어진 호칭들이다.  그렇듯 강성했던 한조가 후한(後漢) 말기에 이르러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졌고, 관리들이 부패했으며, 붕당(朋黨)이 심해 갈기갈기 분열되었고, 내시들이 권세를 잡고 배만 채웠으며, 수만 명의 신도를 보유한 태평도(太平道)라는 사교집단이 사처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국고는 거덜이 났다.  재정난에 허덕이게 된 조정은 벼슬자리를 팔아 돈을 모으려 했다. 당시 감투 값은 벼슬자리에 따라서 값이 매겨졌다. 영제(靈帝) 때 관직을 파는데 값을 매겨놓고 공개입찰(招標)까지 있었다. 가격은 4백 석짜리 벼슬이면 4백만금, 2천 석짜리 지방장관이면 2천만금, 이렇게 1석에 1만금씩 가격을 높였고 임명되면 절반 값을 먼저 지불하고 나머지 반은 부임한 후 백성들을 수탈해서 문다.  최열(崔烈)이란 돈 많은 부자가 5백만금을 주고 사도(司徒:지금의 문교부장관에 해당함)관직을 사게 되었다. 그런데 아마 이 양반이 양심이 있었던지 아무래도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는 눈길로 보는 것 같이 느껴져 아들 최균(崔鈞)에게 “이상한 소문이 없더냐?”고 물었다. 아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별로 나쁜 소문은 없었으나 사람들이 사도자리에서 구리 냄새가 난다고 하더랍니다. 아마 구리 냄새가 싫은가 보지요.” 이 말을 들은 최열이 아들놈이 제 아비를 놀린다고 곤장으로 때리려 드니 최균이 뺑소니쳤다. 더 열 받은 최열이 최균에게 “아비의 매를 피하는 것은 불효가 아니냐?”고 하자, “당년에 대순(大舜)이 아버님을 모실 때 작은 곤장으로 때리면 맞고 큰 곤장으로 때리면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래도 대순은 효자였지요.”라고 최균이 당당하게 말했다. 이에 최열은 할 말을 잃었다. 왜냐하면 돈 주고 관직을 산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구리 냄새는 당시 돈이 구리로 만든 동전이었기 때문에 돈 냄새라는 뜻이다. 지금 5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 돈이 구리로 만든 것이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세 때(철)’ 로 만들어진 돈을 동전이라 말하는 것이 곧바로 옛날 돈은 모두 동전인데서 유래된 것이다.  아무튼 후한 때 돈이 구리로 만든 것이고, 돈 많은 최 열이 금전으로 관직을 산 것이 께름직하고 뒤가 켕겨 사도자리에 구리 냄새가 난다는 말이 생겨났고, 이 이야기가 세세대대로 전해지면서 구리다는 말이 일상 언어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위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에 실려 있는 고사이며, 이것이 중국문화권에 속해 있던 한반도에 전해져 구리다는 말이 일상 언어로 되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리고 조선족은 뒤가 켕기거나, 똥 냄새거나, 퀴퀴하게 안 좋은 냄새를 ‘쿠리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상욕을 쌍욕, 상놈을 쌍놈이라 된소리로 발음하는 것과 같이 ‘쿠리다’는 구리다에서 유래된 것이다.   
37    성녀와 기녀의 유래 (김정룡) 댓글:  조회:6662  추천:111  2007-10-23
14. 성녀와 기녀의 유래 김정룡    현대인의 의식속의 성녀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교양적이고, ‘남자를 모르고’, 세속풍진(風塵)에 물젖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깨끗한 여성이다. 허나 현대인이 성녀의 유래를 알게 되면 이러한 성녀의 이미지가 많이 다운(삭감)될 뿐만 아니라 놀라 자빠질 수도 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쳐들어갔을 때, 이미 그곳 토착민(土着民)들은 바알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로 불리는 농사를 지어먹을만한 가나안땅이 있다. 그런데 그곳은 사막에 둘러싸여 내내 가뭄이 심하다. 가뭄이 심하면 농사가 잘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바알신앙을 갖게 되었다. 즉 남정네들은 바알림, 아낙네들은 바알롵을 상징하고 교회에 모여 열심히 성교를 한다. 왜 그랬을까? 남자의 정자는 비를, 여자의 몸은 밭을 상징하고 열심히 또 많이 성교를 하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농경에 의해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보다 더 성스러운 일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성교행위는 성사(聖事) 중의 으뜸으로 꼽히는 성사였다. 그래서 어떤 여성들은 항시 교회에서 대기하면서 장정들이 찾아오면 열심히 성교를 제공하는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한다. 물론 아무런 금전거래도 없었으며 성교를 더 많이 하는 여성이 성녀중의 성녀로 인정받았다.  성녀란 이렇게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은 조선시대까지도 성황당에서 풍년을 빌기 위해 남녀가 모여서 성교행위를 감행했다.  현대 개별 학자들은 옛날 성황당은 매음굴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문화에 대한 왜곡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매음행위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뿐더러 성스러운 일을 수행한다고 믿었었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吳天明)은 “일본의 농촌에서는 지금도 모내기가 끝나면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논두렁 위에서 청년남녀들이 성교를 행한다.”고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인간의 몸은 세월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중국인의 관점에 따르면 칠칠사십구 해서 여자 나이 49세면 생리가 끝나고 성교행위도 시들어 간다. 또 개별적으로 몸건강이 좋지 못하면 49세 이전에 성교행위를 할 수가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에서 성교를 제공하던 성녀가 성스러운 무대에서 퇴장하게 되면 밥줄이 끊기게 된다. 인간은 감정동물이라 본래 그녀들과 성교행위를 하던 장정들이 개인적인 교분에 의해 찾아서 생계를 도와준다. 이때부터 남자는 돈과 재물로 여자의 몸뚱아리와 교환하는 사회현상이 생겨난다. 기생이란 이렇게 유래되었던 것이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의 견해에 의하면, “고대로마의 여신인 비너스는 로마인의 어머니였으며, 혼인을 관장하는 수호신이었으며, 동시에 창기의 여신이었다. 로마인들이 정조를 강구한 이후로 그녀는 정조수호신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매년 4월 1일이면 로마인들은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고, 4월 23일이면 호객기녀라 불렀다.”고 한다.  중국에서 기생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역사기재가 없어 알 수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2600년 전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이 800여 명의 기생을 둔 공창(公娼)을 세웠다. 이것이 중국에서 최초로 되는 기원이다.  기녀란 ‘기’는 본래 기술 ‘技’였다가 후대에 오면서 계집변인 ‘妓’로 변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기녀는 본래 청루의 여인들처럼 외모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악기도 다루고, 노래도 부르고, 시를 짓고 읊었으며, 지식도 풍부해서 풍류문인, 고관대작들과 지음(知音)으로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다종다양한 재주가 있는 여인들이었다.  명나라 때부터 ‘技女’가 ‘妓女’로 완전히 전락되어 오늘과 같은 기생모습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36    한국에 '화교'는 있어도 '조선족'은 없다. 댓글:  조회:5362  추천:86  2007-10-22
한국에 ‘화교’는 있어도 ‘조선족’은 없다. -재한조선족연구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 수는 2만 명이고 한족이 11만 명이며 조선족의 수는 26만 명이다. 그러니까 화교와 한족을 합쳐봐야 조선족 수의 반밖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분명한 객관적인 수치를 두고 ‘한국에 화교는 있어도 조선족이 없다’고 말한다면 독자들은 황당한 소리라고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 아래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한국의 화교들은 자신들을 ‘舊僑’라 하고 개혁개방 이후 한국에 온 한족을 ‘新僑’라 부르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화교들은 무릇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한국에 온 사람들의 민족을 불문하고, 쉽게 말해서 조선족까지도 ‘新僑’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잠시 논외로 하고 우리는 화교들의 넓은 가슴과 그들의 포옹력에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화교협회를 이끌고 있는 韓晟昊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어의’를 맡았었고, 1992년 중한수교에 다리 역할을 했던 분이며 중국에 가면 후주석의 접견을 받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필자는 그가 주최하는 장소에 두 번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의 넓은 의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는 지난 8월 19일에 있었던 ‘중국 각 성 동향회성립 축하’모임에서 그는 “2020년에 가면 지구촌에 유동하게 될 중국인(56개 민족 포함)이 5억 명에 이를 것이니 세계는 우리 것이다.”라고 했다. 두 번째는 지난 9월 초 산동성화교사무실을 주최로 성 정부 일행이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오늘 모임에 7개 민족이 모였는데 앞으로 한국 땅에서 56개 민족이 다 모이는 날을 기대한다.”고 발언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족이고 만족이고 조선족이고 하는 민족구분이나 차별의식이 없이 무릇 중국에서 온 사람은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華’이며 한 집안 식구라는 것이다. 이렇듯 그가 넓은 가슴으로 포옹력과 친화력을 갖고 있기에 한국의 화교들 은 그의 주위에 똘똘 뭉쳐 있고, 그가 지지하고 후원하는 한문판<<신화보>>의 책임자가 조선족(조명권, 화교연의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음.)이다. 그리고 그와 <<신화보사>>가 주최하는 모임에 많게는 300명, 적게는 70~80명의 참석자 중 조선족이 70%를 차지한다. 이에 비해 현재 26만에 달하는 재한조선족은 자체의 조직도 없고, 자체의 언론도 없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 아래와 같은 이유를 살펴보았다. 첫째 우리 재한조선족 내부의 문제 가. 단합심 부족 우리 재한조선족은 단합이 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지역과 지역 간의 출신에 따라 서로 물고 뜯고(<연변내기와 연변사람>, <우리동포들끼리 서로 헐뜯지 맙시다.>를 참조)하고 귀한동포연합회는 설립 초기부터 내홍이 심했다. 이에 비해 재한 화교와 한족사회에서 출생 연고를 갖고 서로 헐뜯는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며 조직에 큰 내홍이 있다는 소리를 덜어보지 못했다. 나. 인재가 없다. 26만에 달하는 재한조선족 중에 인재가 없다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으나, 실제로 재한조선족을 리드할 인재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목자가 없는 양떼와도 같다는 것이다. 혹자는 재한조선족은 역사가 짧아 자체 조직이나 언론을 갖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미, 재일조선족사회에 눈을 돌려 보라. 그들도 우리와 시간이 비슷하지만 모두 자체 조직을 갖고 있으며 구심점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재미조선족은 3만여 명이며 자체협회를 구성하고 내부조직이 탄탄하며 각종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어 조선족의 안식처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에는 대학교수인 조선족이 회장을 맡은 중국조선족연구회가 있는데 국제적인 학술대회를 주최하고 해외에서 초빙한 참석자 수십 명의 왕복비행기표, 숙식을 책임질 정도로 빵빵하게 잘나가고 있다. 둘째 한국 측의 문제 옛날 속담에 소경(맹인)이 넘어지면 막대 탓을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문제를 한국 측에 돌린다면 억지를 부리는 듯한 감이 없지 않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1990년대에 연변대학 졸업생을 비롯한 조선족이 한국에 석 박사 유학 오자 면 언어시험을 봐야했는데 한국대학들에서는 한국어수준이 조선족의 발바닥에도 못 미치는 한족들은 수천 년 동안 어쩌다 처음으로 ‘한국’을 알아주고(역사적인 맥락에서 하는 말) 유학까지 오니 귀엽게 봐주고 패스시킨 반면 조선족에게는 혹독할 정도로 엄했다. 그 이유는 조선족이 아무리 연변대학 ‘우리말학부’를 졸업해도 배운 것이 조선어이지 한국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우상열의 <韓流는 漢流더라.>를 참조). 그 언어가 그 언어이고 다 같은 조상들에게서 배운 말이건만 두음법칙이 다르고 문법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민족보다 못하게 대하는 한국학교당국에 조선족유학생들은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 한국 측으로부터 이러한 차별적인 냉대를 받았던 조선족이 유학생활을 마치면 한국에 남을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어 중국에 돌아가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는 조선족이 대학교수 혹은 기타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국사회에서 교환교수를 맡은 조선족은 있어도 뿌리를 내리고 활약하는 유명한 조선족교수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기타 분야도 마찬가지다. 모두어 말하자면 한국은 비록 동족이고 고국이지만 조선족이 빛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다. 이것을 재한조선족사회에 인재가 없는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자치주정부의 문제 전체 조선족인구의 13%가 현재 한국에 살고 있고, 연변경제가 돌아가고 있는 데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벌어가는 돈이 크게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치주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재한조선족사회를 중시하고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재정 돈으로 후원해서 자체 조직도 만들어주고 언론매체도 만들어주고 재한조선족연구회도 만들어야 한다. 혹자는 왜 굳이 자체조직, 자체언론매체, 자체연구회가 필요하냐고 물을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해답은 이렇다. 재한조선족사회의 흐름을 살펴보면 과거 교회나 일부 민간단체들이 조선족 을 대변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어 정부에서 중국동포에 대한 정책이 많이 완화되고 개선되었으나 그들 단체의 보스들이 모두 한국인이어서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폐단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진정 조선족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등 심리를 모르고 일방 적으로 밀어붙이거나 신문을 만들어도 조선족들의 심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없는 것도 사실이다. 2003년 00교회가 추진했던 국적회복파동 때문에 5천 명을 위하려다 200만의 조선족 입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실례가 한국인이 조선족을 모른다는 증거이리라. 조선족이 아무리 한국생활이 10여년 되어도 한국과 한국인을 제대로 모르는데 하물며 중국생활도 해보지 못한 한국인이 조선족을 대상해서 일하고 있으니 그들이 조선족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는 것이다. “중국에 수박이 있나요?”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조선족을 대상하는 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그들이 조선족에 대해서 구경 무엇을 알고 있는가는 것이다. 조선족의 코리안드림이 어언간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람의 나이가 20세이면 성인이다. 그 동안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을 법도 하지만 재한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유소년기에 처해 있고 변한 것이 별로 없다. 혹시 양적인 변화는 있었을지 몰라도 질적인 변화가 없었다는 의미다. 조선족의 일은 조선족이 나서 해야 하고 또 그럴 시기가 왔다고 나는 본다. 또한 재한조선족은 앞으로 중국조선족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주력군이며, 아울러 주력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소질을 제대로 갖추게 하려면 재한조선족사회에 필요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인이 할 수 없다. 오직 자치주정부가 나서서 재한조선족사회와 손을 잡고 추진해 나아가야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 화교사회(한족을 포함한)는 리더가 있고 자체조직과 자체언론이 있어 구심점이 있는데 비해, 우리재한조선족사회는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아 한국에 조선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35    여자를 ‘꺾다’와 ‘따먹다’는 말의 유래 댓글:  조회:8144  추천:117  2007-10-2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3여자를 ‘꺾다’와 ‘따먹다’는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남자들이 판을 치는 부권제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나무신(樹神)은 남성신(男性神)으로 변모되었으나, 까마아득한 옛날에는 나무신은 여성신(女性神)이었다. 이는 나무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과 여자가 아이를 낳는 동일한 생산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로부터 나무, 특히 바람에 하느적거리는 나무가지는 여자를 상징하고 여자를 나무가지에 비유하는 문화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남자가 여자와 하는 성행위를 ‘여자를 꺾는다’는 표현이 유래되었다.  <<시경·정풍(詩經·鄭風)>>장중자(將仲子)편에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바라옵니다 도련님, 우리 마을을 넘지 마소서, 내가심은 구기자나무가지를 꺾지 마소서······”, “바라옵니다 도련님, 우리 집 담을 넘지 마소서, 내가심은 뽕나무가지를 꺾지 마소서······”, “바라옵니다 도련님, 우리 안채 뜨락을 넘지 마소서, 내가심은 박달나무가지를 꺾지 마소서······”  이 시구는 2500년 전 정나라의 한 아릿다운 순박한 처녀가 이웃마을 총각에게 사랑을 애절하게 고백하는 ‘연애편지’이다. 여기서 ‘구기자나무가지’, ‘뽕나무가지’, ‘박달나무가지’는 여자를 상징하며 ‘꺾지 말라’는 것은 여자가 남자한테 ‘나를 취(娶)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반어법의 표현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남자가 여자와의 성적행위를 ‘여자를 꺾는다’고 하는 표현이 이미 2500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여자를 따 먹다”는 말의 유래를 살펴보자.  아득히 먼 페미니즘(남성주의) 사회에서 남성들이 먹는 것(食)과 성행위(色)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告子曰; 食性, 人之本也.)이라고 여기고 동일한 패턴으로 보았다. 아울러 여성을 열매에 비유하고 열매가 여성을 상징한다고 여기고 여자와의 성행위를 여자를 따먹는다는 표현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가 농작물재배시대에 들어 고추, 가지, 바나나, 옥수수와 같은 열매들은 남자의 성기모양과 비슷하지만, 인류가 채집시대의 원초적인 열매 즉 복숭아, 사과, 배, 딸기, 앵두, 호두 등 절대다수의 열매가 외형상에서 여자의 성기와 신통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원시인류는 현대인처럼 사변적 사유(思辨性思維)가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사물에 대한 관찰에 있어서 대부분 외형적인 특징에 집착하여 문화를 창조하였다. 예하면 인류가 본능 상에서 모든 동물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동물을 숭배하고 닮고 싶어 하는 욕망에 의해 신화가 생겨났고 종교가 생겨났고 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고기(잉어)가 외형상에서 여음과 닮았고 알을 많이 쓸기 때문에 물고기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면 그 신력이 인간(여성)의 몸에 전이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시인류는 채집시대에 주먹거리인 열매가 외형상에서 여음을 닮았으므로 열매를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또 열매의 생산성과 여성의 생산성과도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남자들은 신의 과일(神實)인 복숭아(桃實)와 같은 여음을 가장 신통하게 닮은 열매를 많이 먹으면 성욕도 강해지고 “씨도 건실하게 뿌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서왕모가 제신(諸神)들을 모아놓고 3천년 묵은 복숭아를 먹이면서 번도 연회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여기서 복숭아는 곧 서왕모를 상징한다.  그리고 열매도 맛있는 것과 맛없는 종류가 있는 것처럼 여자도 외형상에서 남자들의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떨어지게 만드는 부류가 있다. 여자와의 성행위를 ‘맛이 있다’, ‘맛이 없다’, ‘굶었다’, ‘군을 뗐다’라고 하는 표현법도 열매가 여자를 상징하고 여자를 열매에 비유하는 데서 유래되었다. 
34    어설픈 조선족 경어에 대하여 댓글:  조회:5979  추천:87  2007-10-21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3부  조선족의 언어변화실태에 대하여     1. 어설픈 조선족 경어에 대하여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은 독특한 언어문화를 형성해오면서 본래 조상들이 쓰던 경어를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국 문이 열리면서 상호 내왕이 빈번해짐에 따라 경어가 회복되어가는 추세인데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런데 이 회복단계에 처해 있는 조선족 경어는 매우 어설프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언어표현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럼 여기서 먼저 조선족사회가 경어를 상실하게 된 이유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19세기 60년대부터 만주 땅에 이주해간 조선족 1세들은 조선시대에 자연재해와 조정의 부패 때문에 파산된 농민 출신이였다. 그러므로 지식수양이 매우 결핍한 그들은 후대들에게 체계적이고도 예의적인 경어 교육을 전수해 줄 수가 없었다. 일제 시대에 훌륭한 지식인들이 만주 땅에 많이 갔었으나 그들은 해방을 맞아 절대다수가 한반도로 돌아갔고 남은 사람들은 피땀으로 개간한 땅이 아쉬워 떠나지 못했던 농민출신이여서 역시 경어를 후대들에게 정확히 가르칠 수준을 갖지 못했다. 둘째 조선족 1세들은 타향에서 정착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자식을 귀워여 하였을 뿐 ‘회초리’로 엄하게 다스리지 않았고, 따라서 조상들이 사용해왔던 경어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셋째 특히 연변조선족은 함경도 출신이 대다수인데 함경도언어는 사투리가 심하고 경어가 취약하다.  넷째 경어체계가 없는 한족들과 어울려 살면서 점차 언어체계도 동화되어 조선족은 자체의 경어를 상실하게 되었다.  다섯째 10년 동란이라 일컬어지는 문화혁명을 겪은 조선족은 가뜩이나 취약했던 경어가 완전히 박산나고 말았다. 당시 제자가 스승을 타도하고 자식이 부모를 적으로 대하고 형제간에도 등을 돌리는 등 전통예의는 설자리를 완전히 잃게 되었고 따라서 경어는 씨베리아 한파를 맞아 시들어 버렸다. 이상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경어를 상실했던 조선족은 한국인과의 상호 왕래를 통해 경어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으나, 경어가 한국말이라는 착각을 갖고 한국말을 흉내내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조선족의 경어표현이 서툴고 심지어 코미디 같은 언어표달이 튀어나와 웃음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다.  현재 조선족들의 잘못된 경어표달에 관해 아래와 같은 몇가지로 정리할수 있다.  첫째 ‘씨(氏)’의 개념을 모르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  씨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경어다. 예를 들어 성에다 씨를 붙여 ‘김씨’ ‘이씨’ ‘최씨’라 할 때, 이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경어이다. 허나 조선족들은 흔히 상대가 “성이 뭐냐?”고 물으면 “저의 성은 ‘정씨’, ‘유씨’”라고 대답하는데 이는 실례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의 성을 말할 경우 성에다 씨를 붙인다면 자신절로 자신을 높이는 꼴이 되기 때문에 마땅히 “저의 성은 ‘김갗, ‘임갗”라고 대답해야한다.  그리고 이름 뒤에 씨를 붙일 경우도 마찬가지로 상대를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경어이다. 때문에 상대에게는 이름 뒤에 씨를 붙일 수 있으나 자신을 상대에게 소개할 경우 절대 자기 이름 뒤에 씨를 붙여서는 안된다. 허나 조선족들은 전화할 때와 타인 앞에서 자기 소개할 경우 “저는 신옥화 씨예요.”라고 하는데, 이는 매우 실례되는 말이다. 또 타인 앞에서 “저는 신옥화 씨 언니예요.”라는 표현도 실례되는 말이다.  둘째 ‘분’의 개념을 모르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  “여보세요, 저는 한국분인데요.” “한국분이 아니라 조선족이구만.” “어머, 어떻게 아세요?” “한국사람은 저절로 00분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분’도 ‘씨’와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사용하여 존경을 나타내는 경어이다. 허나 조선족들은 흔히 “제가 방금 전화했던 분이예요.”, “이분이 나의 동생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언어표현이다.  셋째 ‘나’와 ‘저’의 구분  조선족사회는 ‘저희’라는 말이 이미 사라진지가 오래되었다. 아무리 상대가 교수이든 할아버지벌이든 전부 ‘나’ ‘내’라는 말을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최근 10여 년래 ‘저’ ‘저희’라는 말이 살아나고 있기는 하나 아직도 매우 서툴다. 낯선 사람이거나 윗사람 앞에서는 ‘나’를 쓰지 말고 ‘저’ ‘저희’라는 표현을 사용해야한다.  넷째 ‘님’의 표현이 익숙치 않다  조선족사회는 본래 선생을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 ‘님’을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최근 들어 ‘님’이란 말도 다른 경어와 마찬가지로 살아나고 있으나 역시 매우 익숙치 않아 ‘님’을 사용하면 마치 상대를 아부하기 위한 표현으로 간주하여 웬만해서는 사용하기를 꺼린다.  다섯째 ‘하시다’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  “여보세요, 제가 지금 신문사에 찾아가시려고 하는데,” 이는 분명히 틀린 말이다. 지난 겨울 필자는 연길아리랑방송을 청취하면서 아나운서마저‘하시다’라는 경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즉 아나운서가 청취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하는 말이 “우리도 크게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또 기자가 노래클럽을 취재할 시 “이 클럽에 다니신지가 얼마되었습니까?”라고 물으니 “예, 제가 다니신지 벌써 3개월이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또한 필자가 중국동포타운센타에서 동포들로부터 “내 아침에 가셨던 분임다.” 와 비슷한 표현의 전화를 많이 받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하시다’는 상대를 높이기 위한 경어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여섯째 ‘요’를 붙이면 한국말이 된다는 착각  10년 전에 연변의 코미디 배우 오선옥이 “한국말은 뒤에다 ‘요’만 붙히면 한국말이 된다는 내용의 소품을 연기한 적이 있다. 이는 조선족사회의 보편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이런 소품도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는 분명히 틀린 인식이다. 한국어의 표준경어는 우리 조선족언어와 마찬가지로 역시 ‘습니다’ ‘습니까?’이며 ‘요’는 상투적인 일반언어일 뿐이다. 대다수 동포들이 한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 말 끝에다 ‘요’만을 쓰고 표준경어를 사용하지 않아 상대로 하여금 반감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경어는 우리 조상들이 사용해왔던 것이지 결코 경어는 곧 한국어라는 인식을 버려야하며, 경어란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생겨난 언어체계이기 때문에 나 자신의 행위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경어는 예의민족의 필수적인 언어체계이기 때문에 경어를 잘 사용하면 사회생활이 원활해지지만 잘못 사용하면 웃음꺼리가 되어버린다.  
33    여성을 꽃이라 하는 유래 댓글:  조회:6365  추천:94  2007-10-2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2여성을 꽃이라 하는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현대인은 보편적으로 꽃이 아름답고 여성이 아름다운고로 꽃이 여성을 상징하고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피상적인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은 마치 중국 전족(纏足:쫑발)문화가 도가(道家) 성숭배에서 유래된 것을 여성들이 도망가는 걸 막기 위한 궁여지책에 의해 생겨났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여성을 꽃이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을 꽃이라 하는 것은 꽃과 여성의 외형상의 아름다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아이를 낳고 꽃이 열매를 맺는 동일한 생산성에 의해 유래된 것이다. 아래에 그 논거를 살펴보자.  꽃은 태고시대부터 아름답다. 허나 여성은 본래부터 외형상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부권제시대에 진입하여 여성도 재물과 같이 남성들의 분배대상이 됨에 따라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을 하기 시작해서부터 여성이 외형상 아름답게 변모되었던 것이다. 만약 여자들이 화장을 하지 않고 옷을 가지각색, 다양한 디자인으로 화려하게 입지 않고 머리모양을 가꾸지 않은 원초적 모습이라면 남자들에 비해 결코 아름답지가 않다. 이는 마치 암컷인 까투리가 수컷인 장꿩보다, 암소가 수소보다······ 모든 자성(雌性)이 웅성(雄性)에 비해 외형이 아름답지 못한 것과 같다.  더욱이 모권제시대 여성의 이상형은 서왕모이거나 선문대할망의 거녀 모습이었다. 모권제시대의 서왕모는 표범의 얼굴에 키가 구척이며 팔다리는 집기둥처럼 굵고 손발은 코끼리를 연상케하고 한 번 소리를 지르면 천지가 진동했다고 한다. 선문대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발이 목포 앞바다에 닿았다고 하며 내의를 지어 입는 데 100통의 비단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러한 여성상이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으며 꽃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권제시대의 흉측한 모습(오늘의 여성의 아름다움 기준으로 하는 말)을 지닌 여왕들을 꽃신(花神)이라 했던 데로부터 꽃은 여성을 상징하고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하나의 문화가 생겨났는데 이는 어찌된 영문일까?  <<회남자·천문훈(淮南子·天文訓)>>에 이르기를, “여이(女夷)가 북치고 노래 부르면서 하늘의 조화를 관장하고 백곡, 금수, 초목을 생장케 한다.”고 했다. 고유(高誘)가 주를 달기를, “여이는 봄과 여름의 생장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했으며, 풍응경(馮應京)은 그의 <<월령광의(月令廣義)>>에서 “여이는 곧 화신(花神)”이라고 말했다. <<중국신화연구>>의 저자 오천명(吳天明)은 “이른바 여이, 화신이란 곧 원시모권제시대의 부족두령과 제사를 겸한 여신”이라고 지적했다.  원시모권제시대 인류의 가장 큰 사명은 아이를 낳는 것과 먹거리  생산(채집)이었다. 그래서 동일한 생산성을 지닌 아이를 낳는 여성과 열매를 생산하는 꽃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왕을 화신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여음(女陰)을 ‘꽃잎’이라 하는데, 이는 여음이 꽃잎처럼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여음과 꽃이 동일한 생산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임어당(林語堂)은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어린애를 손잡고 정답게 걷는 어머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대문화의 본질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은 꽃이 될 자격이 없다. 
32    투화(套話)의 유래 댓글:  조회:4837  추천:65  2007-10-2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1투화(套話)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수일 전 나는 친구와 함께 서울 모 대학의 00학술시상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수상자로 한국인과 조선족 학자 각각 1명씩 당선되었고, 그 분들은 수상소감을 발표했다. 그런데 한국 분은 원고 준비도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섞어가며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족 분은 원고를 들고 역시 중국식으로 ‘투화(套話)’만을 말했으며 좀 지나친 비유이긴 하나 얼굴에 웃음 끼가 전혀 없이 마치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비쳐져 아주 자연스럽지 못하고 딱딱하게 보였다.  시상식이 끝난 후 나와 친분이 있는 한국 분이 나에게 “중국에서는 수상소감을 저런 식으로 말하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글쎄요.”라는 말로 얼버무려 넘겼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수상자인 조선족 분은 원고도 준비하지 말고 중국식 ‘투화’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자기 것을 지켜가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며,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 왕래(교류) 이야기 등등을 말했더라면 훨씬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또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의 친화감도 생기고···이런 식으로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국문인들은 대체로 조선족들의 작품을 재미없다고 평가한다. 진짜로 작품이 재미가 없어 이런 결론이 나왔을까? 나는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의 어색하고 딱딱한 이미지(조선족의 어투는 한국인에 비해 딱딱하고 투박하다.)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참고로 중국‘투화’의 유래에 대해 간단히 말해보려 한다.  중국문화는 예의를 매우 중시하는 문화이다. 예의는 일정한 형식과 격식을 필요로 한다. 100년 전 미국선교사 아더·스미스는 저서<<중국인의 소질>>에서 “낫 놓고 기윽(ㄱ) 자도 모르는 중국농부가정의 예의는 그 형식과 격식이 유럽의 궁중예의를 초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비교적 실리적이지만 공중장소에선 형식과 격식을 갖춰야만 체면이 선다고 인식해왔다. 중국인이 공중장소에서 시끌벌쩍하게 떠드는 습관도 체면문화와 희극문화에서 유래되었다. 즉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체면이 서는 것이라 생각해왔다는 뜻이다.  아더·스미스는 “중국인의 유일한 오락인 희극이 시작되기 전에 사회자나 어떤 보스가 나타나 ‘투화’를 지나치게 늘여놓아 막을 열기도 전에 관객들을 짜증나고 지쳐 도망가게 만드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그는 또 “중국인은 사람마다 희극적인 본능을 갖고 있는데 희극은 불필요한 형식과 격식을 요구하며 따라서 중국인은 말할 때 ‘투화’를 좋아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인이 본래 역사적으로 ‘투화’에 능숙한데다가 문화대혁명 때 이념과 사상에 충성하면서 ‘투화’는 필수로 되어버렸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족속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살아온 조선족도 ‘투화’에 물들어 버렸다.  시대는 날마다 변화되어가고 있다. ‘투화’가 우리 실생활과 동떨어진 불필요한 것이라면 우리조선족은 이젠 과감하게 버리고 인간의 본연으로 돌아가 ‘사람 냄새얘기’를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 아닐까?
31    복숭아와 잉어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유래 댓글:  조회:6464  추천:114  2007-10-21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010. 복숭아와 잉어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우리민족은 세상에서 제사를 가장 중시한다. 제사를 치르자면 제사상부터 갖춰야 하고 제사상을 차릴 때 여러 가지 금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복숭아와 잉어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금기의 유래에 관해 얘기해보려 한다. <<이조각문헌 풍속관계자료요지>>에 의하면 “도(桃)와 리(鯉)를 제사에 사용치 않는 것은 <공자가어(孔子家語)>와 황씨설(黃氏說)에 의한 것이라 했다. 후세인이 이 이자(二者)를 쓰지 않는 것은 속기(俗忌)에 의한다. 즉 도는 귀를 쫓고 리는 화룡(化龍)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중국 일부 학자들은 공자님이 복숭아와 잉어는 ‘여음’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물건(東西)이므로 남자를 계보로 하는 조상제사에 올리는 것을 금기로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럼 복숭아와 잉어가 어떻게 ‘여음’을 상징하게 되었는가는 유래에 대해 먼저 잉어부터 살펴보자.  원시인들은 질병,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인하여 평균수명이 20세 좌우였고 생존율은 50% 미만이어서 부족생존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원시인들은 부족생존을 위해 무리하게 불가항력적인 요소와 싸운 것이 아니라, 후대를 많이 번식시키는 것으로서 즉 아이를 많이 낳는 방법으로 부족생존을 도모하였다.  이렇게 원시인류는 생식숭배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이는 여자가 낳는다. 그래서 여자가 숭배대상이 된 동시에 따라서 일차적으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구체적인 부위인 ‘여음(女陰)’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신체 한 개 부위인 ‘여음’에 대한 숭배만으로는 다산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원시인류는 특정 자연물을 골라 제사를 통해 그의 신력을 빌어 인간의 다산을 촉진시켜려고 했다. 그 자연물이 외형상에서 ‘여음’과 신통하게 닮은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한번 알을 쓰면 수백, 수천 마리 새끼가 생겨난다. 다산의 상징이다. 더욱이 물고기 가운데서 두 마리 잉어를 포개놓으면 ‘여음’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하여 잉어는 전형적인 ‘여음’의 상징이 되었다. 중국에 가면 가정집에 오동통한 남자애가 풍만한 잉어를 안고 있는 그림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가문의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다음 원시인류의 주요 먹거리는 열매였다. 생식숭배 의식이 강했던 원시인류는 복숭아가 외형상에서 여자의 ‘여음’과 가장 닮았다고 보고 복숭아에 대한 숭배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중국에는 유명한 번도(嬏桃) 전설이 있다. 즉 서왕모가 수천 년 묵은 나무에 열린 번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먹으면 장생불로해진다고 한다. 서왕모가 삼황오제와 여러 신의 우두머리들을 모여 놓고 번도 연회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곧 생식숭배로 인한 복숭아에 대한 숭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복숭아가 ‘여음’을 상징하는데서 남자의 여자 관계운을 ‘도화운(桃花運)’이라 하고, 남녀가 연애로 몸을 그르치는 일을 ‘도화’라 비유하고, 남녀가 치정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도화안(桃花案)’이란 말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도실(桃實)에 대한 숭배는 전체 도목에 대한 숭배로 확대되었으며 따라서 도목은 나무 중에서 으뜸으로 가는 신목(神木)으로 꼽혔다. 원시인류는 인간이 병드는 것은 사기(邪氣:귀신)가 침입한 결과라 보고 귀신을 쫓으면 병이 낫는다고 여겼다. 예를 들면 정신병환자는 동쪽으로 향한 도기(桃枝)로 머리를 때리면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에서는 ‘목주(木主)’를 도목으로 만들고, 도교와 불교 사찰에서 ‘인부(印符)’를 도목으로 했으며, 도궁(桃弓)은 진사(鎭邪)한다는 등등의 전설이 많다.  이렇게 도실은 신실(神實)이요, 도목은 신목이라는 인식으로부터 복숭아가 귀신을 쫓는다는 유래가 생겨났고, 이는 일차적으로 여성숭배와 생식숭배에 의해 복숭아가 ‘여음’과 가장 닮은 고로 ‘신격화’된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복숭아와 잉어가 ‘여음’, ‘여성’을 상징한다는 데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남자를 계보로 모신 조상제사에 복숭아와 잉어를 올리지 못하는 금기풍속은 또 하나의 남존여비 관습을 반영한 강력한 증거이다.
30    조선족과 한국인사이 이혼절차에서 드러나는 문제점 댓글:  조회:5663  추천:77  2007-10-20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7. 조선족과 한국인사이 이혼절차에서 드러나는 문제점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요 몇 년 동안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 국제결혼 건수가 급증함에 따라 이혼율도 급상승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예측에 의하면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 국제결혼에 있어서 위장결혼 수가 60% 넘을 것으로 보고, 진짜 결혼으로 왔으나 가출하여 별거상태에 있는 자가 많아 잠재적 이혼이 굉장히 많을 것으로 짐작되어 실제 큰 말썽이 없이 살고 있는 비례가 20% 미만일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미 이혼했거나 현재 이혼 중에 있거나 앞으로 잠재적으로 이혼할 수를 합치면 80%나 된다는 얘기가 된다.  필자는 일선에서 결혼자들과 상담하고 실제 일처리(이혼)를 해준 경험을 소재로 조선족(한족을 포함해서)과 한국인 사이 국제결혼의 폐단에 관해 이미 칼럼이나 기사 형식으로 10여 편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이혼하는데 있어서 알아야 할 상식과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지적해보려 한다.  가. 서류준비  이혼에 필요한 서류, 이를테면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국인 배우자의 주민등록번호도 모르고 있다. 이럴 경우 중국에서 호구변경수속을 밟을 때 당지 파출소에 한국인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이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복사해서 보내오면 된다. 나. 이혼여부를 모를 경우  가출하여 일정한 시간이 지났으나 자신이 이혼되었는지 여부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을 Ep어 보면 알 수 있다. 다. 이혼절차를 모를 경우 이혼에 관한 법적인 상식을 모르면서 무작정 법원에 이혼소송을 접수할 경우 불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으므로 반드시 법무사 혹은 변호사를 찾아 자문을 구하거나,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문턱이 높아 접근하기를 꺼려한다면 조선족을 위해 일을 하는 신문사나 단체의 도움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 라. 결과문제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출할 경우 결과는 판결 혹은 화해권고조정으로 나온다. 판결은 피고의 귀책사유(잘못)가 뚜렷해야 되고 그렇지 못할 경우 화해권고조정으로 나온다. 마. 원고의 의지문제 피고의 귀책사유가 뚜렷하더라도 위자료를 청구하지 않으면 판결이 아니고 화해권고조정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만약 위자료를 청구하였으나 원고가 의지가 약해 법정에서 위자료를 포기한다고 답변할 경우 역시 화해조정으로 끝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바. 판결과 화해권고조정이 어떻게 다른가?  화해권고조정은 실질적으로 협의이혼과 같은 성질이며 원고는 한국에 계속 체류할 명분이 없어지며 더욱이 귀화신청을 제출할 수가 없게 된다. 만약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고 싶고 귀화신청까지 바란다면 피곤하더라도 끝까지 싸워 판결을 얻어내야 한다. 사. 국적취득문제  만약 만 2년이 되지 않았거나 이미 귀화신청을 제출해놓은 상태에서 이혼할 경우 반드시 판결을 얻어내야 국적취득이 가능하다. 아. 협의이혼문제  어떤 경우든지 협의이혼을 하면 한국에 남아 있을 수 없거니와 귀화신청이 불가능하다. 만약 협의이혼을 하고 또 다시 다른 한국인과 재혼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자. 위장결혼문제  위장결혼사실이 법적으로 밝혀지면 한국에서 이혼 후 다른 남자와 혼인신고는 되지만 체류변경은 불가능하다. 오직 귀국했다가 다시 남편의 초청으로 재입국해야 한다. 차. 체류연장문제  체류연장이 되지 않아 불법이 된 자들은 이혼소송을 제출하고 법원의 접수증명원을 갖고 한국국적이 있는 분의 신원보증을 받으면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3개월씩 연기가 가능하다. 다만 불법시간을 따져 벌금을 물어야 한다.  위의 지적 외에도 이혼은 복잡한 법적절차가 있기 때문에 충분한 자문을 구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카. 한국에 혼인신고가 되어있으나 비자가 기각되어 한국에 오지 못해 호적정리 할 경우  만약 원고가 한국인이고 피고가 중국인(조선족)일 경우 이는 국제이혼에 속하므로 서울가정법원에서만 접수가 가능하고 시간이 1년 반 정도 걸린다. 만약 원고가 중국인(조선족)이고 피고가 한국인일 경우 원고가 한국에 합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친인척에게 소송대리위탁(중국 측에서 공증을 거쳐야 함)을 해야 하며 한국인 배우자에게 소장부분이 송달되면 6개월 이내에 끝나고 소장부본이 송달되지 않을 경우 1년 정도 걸린다.
29    夏商周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습니다. 댓글:  조회:5119  추천:64  2007-10-15
夏商周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습니다. -김정룡의 史論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夏商周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다고 말하면 상당한 어폐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역사문화이야기는 신문에 연재로 실린 글이고, 신문 특성상 편폭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방대한 말들을 매우 함축성 있게 줄여 써야 하므로 어떤 구절은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공자를 유교의 교주라고 하는데 사실 이 관점도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맞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유교는 종교의 의미로서 한나라 때 경학통치가 수립됨에 따라 본래 하나의 학파였던 유가가 하나의 종교인 유교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교의 전신은 유가라는 얘기이지요. 유가의 창시자가 공자인듯하나 공자는 “술이불작(述而不作)”, 즉 나는 선인들의 것을 종합해서 말했을 뿐 내가 창작한 것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말한 선인은 멀리는 요임금이고 가깝게는 주공이었습니다. 삼황오제는 한나라 때부터 나타난 전설이고 공자시대에는 요임금이 가장 최초의 조상이라 인식했으며 요임금은 훌륭한 성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화의 뿌리가 요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아울러 요임금의 문화적인 주축이 ‘儒’라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주공이 지은 <<周禮>>는 요임금 시대부터 夏商에 걸쳐 흘러온 맥락에 의해 창작된 것이고, 아울러 주공의 이념과 사상이 3천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왔습니다. 주공의 이념과 사상이 곧바로 ‘儒’였습니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으면서 堯-周公-孔子-孟子 및 자신에 이르는 하나의 도통을 세우려고 애썼던 것을 보면 한나라 때부터 종교로 자리매김 되었던 유교의 뿌리가 요임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夏商周시기에 “유교”가 있었다는 표현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 도교도 한나라 때부터 하나의 학파였던 도가가 하나의 종교인 도교로 전환되었습니다. 한나라 시기 학자들은 도가의 뿌리는 黃帝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황제와 노자를 한데 묶어 ‘黃老之學’이라 명명했습니다. 임어당은 “중국인은 본능적으로 도가를 받들고 문화적으로 유가를 숭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인간은 문화보다 본능이 우선이라 할 때 중국인의 본능을 지배해온 ‘道’는 ‘儒’보다 많이 앞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외학자들은 한결같이 “중국문화는 先秦시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선진시기가 바로 夏商周를 의미하며 중국문화의 주축이 바로 ‘儒’와 ‘道’였다고 본다면 “하상주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다.”는 저의 표현이 틀린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의 글 <<이판사판이란 말의 유래>>를 관심 있게 읽으시고 “夏商周시기에 유교와 도교가 있었나요?”라는 질문을 해주신 연암 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8    "조선족은 단군의 후예, 한국인은 고종의 후손?" 댓글:  조회:5302  추천:54  2007-10-15
“조선족은 단군의 후예, 한국인은 고종의 후손?” -<<한국인은 왜 ‘조선족’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갖는가?>>에 대한 반론 김정룡의 시론 지난 10월 9일 나의 글 <<세종대왕이 발명한 문자는 한글일까? 조선글일까?>>이 발표되자, 많은 조선족 관련 사이트에서 게재했고, 워낙 민감한 화두여서 네티즌들 간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네티즌들은 조선족과 한국인으로 뚜렷하게 두 개 파로 서로 첨예하게 맞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그들의 논쟁은 논쟁이라 하기보다 싸움으로 번지고 있어 안타깝다. 논쟁의 요지를 살펴보면 조선족들은 조선,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이란 표현을 옹호하는 입장이고, 거꾸로 한국인들은 조선족들의 입장을 반대하고 기어코 한국, 한국인, 한인, 한국어, 한글 표현이 맞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어떤 한국인은 ‘조선족’이란 호칭마저 부정하려고 들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 유감이다. 여기서 한국인들의 주장을 전개해서 말하자면, 첫째 조선이란 국호는 치욕이라는 것이다. 조선은 이성계가 명나라로부터 얻은 국호이기 때문에 치욕의 역사로서 부정해야 마땅하고 또 그래서 고종이 조선을 버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둘째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근거로 모든 우리 겨레는 무조건 韓의 표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거의 100%에 달하는 한국인들은 韓의 표현의 당위성을 대한제국이란 존재와 그 후 일부 조직, 일부 단체, 일부 서류에서 간간히 나타난 韓을 들먹이면서 우리 겨레를 통 털어 韓으로 표현해야 옳다는 주장이다. 한 한국인네티즌이 조선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인용한 문장의 일부를 발췌한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이전, '大韓帝國'이란 나라가 분명, 한국인과 재중동포 역사 속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순수 한족이나 일본인이 어떻게 호칭을 하든지, '大韓帝國' 後孫(現 朝鮮族, 現北韓人, 現南韓人)들 스스로가 자신과 자신의 동질의 집단을 호칭할 때, '조선족'이나 '조선인'이라 부른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정확히 호칭을 한다면 '韓國人'이며 약칭해서 '韓人'이라 불러야 옳다. 한반도에 근대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에 분명 대한제국이었므로 그때부터 호칭을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윗 문장에서 現 조선족들은 또 다른 주장과 반론을 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단순 명료하게 예를 들자면, '大韓帝國' 後孫(現 朝鮮族, 現北韓人, 現南韓人) 들 스스로가 자신을 '조선족'이나 '조선인(조센징)'이라 부른다는 것은 '한족'들이 '현 조선족'에게 '꼬리빵즈'라고 부르는 의미와 똑같을 뿐이다. 그것은 자기 조상을 욕보이는 짓일 뿐이다. '大韓帝國' 後孫(現 朝鮮族, 現北韓人, 現南韓人) 들은 스스로 '대한인'. '한인', '한국인'이라 불러야 함이 옳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조선'이나 '조선족'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갖는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現 중국동포들이 이런 역사적 전후 사유를 살펴 보지도 않고 , 단군 조선과 중세 조선왕조까지 연관시켜 현 조선(북한)이란 국호만 집착하는 자가당착을 하고 있으며 나아가 착각과 이상한 유추까지 하고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에 '조선'이란 왕조가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존재하였는데, '族'은 '國家' 보다 하위 개념이고 중국정부가 명명해준 '조선족'이란 명칭을 선뜻 받아 들일 수 있는 한국인은 아마 드물 것이다. 1949년 모택동이 쟝제스하고 벌인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 '대한제국'의 후예를 흡수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서 명명한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1945년 해방 이후, 北이 '대한민국'란 국호을 쓰고 南이 '조선'이란 국호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지금의 '조선족' 은 '한국족'이란 호칭을 쓰고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중국에 남아있던 '韓人'들이 '朝鮮族'이란 호칭으로 명명된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더욱, '단군조선' 과 '중세조선' 이라는 민족 역사의 큰 물줄기를 저 머나먼 아프리카 초원의 부족같은 뉘앙스로 만들어버렸으니, 한국인 입장에서는 '조선족'이란 호칭이 썩 달가워 할리 없으며 몰상식하게 보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조선족'이란 호칭은 '조선(北)'의 호칭을 가져다가 명명한 정치적 명사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現 '중국동포' 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적 연유는 '중국동포'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大韓帝國’ 後孫(現朝鮮族, 現北韓人, 現南韓人) 들은 스스로 '韓人’, '韓國人’이라 호칭해야 옳다. (독자/이해불가 연변통보 2007-08-05) 윗 문장은 정치적 입장으로 보나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나 학문적인 견지에서 보나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친 소리로 들려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이 한 푼도 없다. 실로 한국인은 대한제국에 광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이런 꽉 막힌 한국인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만 조선족이란 호칭의 유래를 한번 명확히 알려 주고 싶다. 현재 조선족은 19세기 중반부터 연변을 발판으로 동3성에 자리 잡게 되었다. 본래 연변은 만주족이 자신들의 발상지라고 여기고 17세기 중반부터 200동안 봉금령을 내렸다가 러시아의 위협에 직면하여 땅을 개척하고 인구를 늘리기 위해 19세기중반부터 조선인의 이주와 관내 한족의 이주를 허락했다. 그때 만주 땅에 간 조선인은 현재 조선족의 1세이다. 당시는 대한제국이란 존재도 없었고 한국, 한국인, 한인이란 표현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조선반도로부터 만주 땅에 이주해간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 조선인이라 칭하고 무리를 지어 마을을 이루고 공동체생활을 해왔다. 그 후 일제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는데 그들도 역시 자신들을 조선인이라 생각했을 뿐 한인이란 표현에 익숙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소수 운동가를 제외한 대다수는 머리에 한이란 개념이 없었다. 모택동 시대에 들어 조선족이라 칭하게 된 것은 우리민족공동체가 조선시대(대한제국이전)부터 이주해왔고 또 중국인은 우리를 조선인이라 여긴데서 민족호칭을 조선족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래된 조선족을 그 무슨 미친 소리 같이 대한제국의 후손이기에 마땅히 한인, 韓족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주장이다. 더욱이 조선족이 조선족이라 하는 것이 조상을 욕보이는 짓이라 매도하는데 그렇다면 한국인은 대한제국의 존재 하나를 물고 늘어지면서 朝鮮을 부정하고 韓을 주장하는 것은 조상을 욕보이는 행위가 아닌가? 그래서 일부 조선족네티즌들은 “조선족은 단군의 후예이고, 한국인은 고종의 후손?”이란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족이 왜 한국 땅에서 시기와 냉대를 받을까? 단순히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보다 한국인의 내면인식 속에 ‘조선족’이란 호칭을 거부하고 따라서 조선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인이 말로는 조선족이 동족이고 뭐고 하지만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의 조선족은 韓이 붙지 않은 자기네와 다른 이방인일 뿐이다. 현재 한국인들의 이런 사고방식(韓만을 고집하고 朝鮮을 부정하는 사상)을 갖고 남북통일을 말하기는 너무 요원해 보인다. 앞으로 남북이 통일하려면 남과 북의 정치가들과 학자 및 사회 원로들이 모여 국호, 민족호칭 등을 반드시 논의해야 하는데 현재 한국인들의 꽉 막힌 사고방식을 갖고 논의에 임한다면 통일은 고사하고 서로 적대감만 늘어갈 것이다. 한국인은 분단을 말할 때 쩍하면 외세를 들먹인다. 다 아시다시피 외세의 영향은 줄어가고 있으나, 거꾸로 한국인의 범민족적인 트인 사고방식이 매우 경직되어가고 있다. 조선족이란 호칭 하나를 수용 못하면서 남북통일을 말한다? 참으로 더 할 말이 없다. 필자의 견해는 이렇다. 조선이란 표현이 역사가 유구하고 한이란 존재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민족도 조선과 한이란 표현에 서로 거부감내지 적대감을 갖지 말고 중국인이 華와 漢의 표현을 유연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조선과 한의 표현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통일이 된다면 국호와 민족호칭을 ‘고려’로 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김일성 주석이 ‘고려연방’을 제안했고, 또 어차피 영어권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에서 KOREA로 부르고 있는 마당에, 고려라는 호칭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27    “우리 동포끼리 서로 헐뜯지 맙시다.” 댓글:  조회:5656  추천:82  2007-10-1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6. “우리 동포끼리 서로 헐뜯지 맙시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단합심이 부족한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를테면, 옛날 조정에서는 외적을 눈앞에 두고도 당파싸움에 빠져 있었고, 한반도는 남북으로 쪼개졌고, 남쪽에서는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하면서 차별을 두고, 일본열도에서는 조총련과 민단이 대립해온 역사가 있다.  조선족사회는, 조선족이 집결된 연변사람들이 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내의  타지방(이하 연변을 제외한 조선족을 타지방 조선족이라 표현함)에 살고 있는 조선족을 ‘아니’라 하고 타지방 조선족들은 연변사람이라 하면 나쁜 허물만 캐기 일쑤다. 이러한 서로 흉보기는 수도 북경의 조선족사회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한반도내에서나 일본열도에서 자민족끼리 서로 다투는 데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향토적 원인이 있겠으나 조선족사회는 그러한 요소를 떠나서 그냥 사소한 허물을 갖고 서로 흉을 보면서 단합되지 않는 것 같다. 조선족사회의 단합되지 않는 기풍이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사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조선족동포끼리 헐뜯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예를 들면 연변사람은 약아빠지고, 사기치고, 남의 등을 쳐 먹기 좋아하고, 한탕치기를 하고, 거짓말을 일삼는다며 심하게 헐뜯기도 하고, 심지어 중국식품가게에서 목격한 일인데 흑룡강 사람끼리 이렇게 헐뜯는 것이었다.  “너 왜 약속을 안 지켜, 너 연변사람이냐?”  문제는 연변사람에 대한 이런 편견 때문에 연변출신 사람들이 한국에서 적지 않은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취직할 때 속이고 흑룡강성이나 요녕성에서 왔다고 꾸며댄다고 한다.  실제로 필자가 이러한 사람을 몇 명 만나보았는데, 왜 연변출신이라는 것을 속이느냐고 물었더니  “여기서는 연변사람을 쓰게(곱게) 안 봐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연변사람도 마찬가지다. 타지방 조선족의 흉을 보는 경우가 있다. 타지방 조선족은 다수가 남선(南鮮)출신이어서 연변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는 이유로 한국인 행세를 하면서 연변사람을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서로 흉보기는 사소한 일로 인하여 생겨난 편견이라고 본다. 사람은 다 허물이 있기 마련이고 또 연변사람이 갖고 있는 허물이 타지방사람에게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한두 사람의 허물을 갖고 마치 전체가 다 그러한 것처럼 매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타지방 조선족은 나 보고 “연변사람은 소문과 다르네요. 착실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연변남자를 애인으로 소개해 주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타지방 조선족들이 이 분들처럼 연변사람에 대한 편견을 바꿀 수 없을까? 마땅히 바꿔야 한다. 연변사람도 마찬가지로 타지방 사람에 대한 편견을 바꿔야 한다. 이런 편견을 버려야 만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사회가 뭉칠 수 있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은 앞으로 고향에 돌아가 전반 조선족사회를 바꾸어 나아갈 주역이다. 마땅히 한국인이 IMF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귀걸이, 목걸이, 장롱속의 금부치를 나라에 바치는 단합정신과 2002년 한일월드컵 때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한국인의 똘똘 뭉치는 응집력도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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