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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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어릴때 버릇이 예순한살까지 가오니 댓글:  조회:4503  추천:6  2012-01-05
-위생환경 대한 시민의식 제고 급선무   얼마전 연길시는 "아무곳에나 가래침 뱉거나 담배꽁초를 던지면 5-10위안 벌금시킨다"고 규정내렸다. 이는 바로 연길시를 국가급 위생도시로 부상시키고, 위생환경관리를 강화하고, 도시 품위를 인상시키기 위해 출범한 조치라 보아진다.   규정에 따르면 애완동물을 망라해서 아무 곳에나 대소변을 보아도 벌금범위에 속한다. 필자는 일전에 시내버스에서 애완견이 의자에 척 앉은걸 본적이 있는가 하면 버스안에서 마음대로 쏘다니다가 오줌을 싸는 것도 본적이 있다.여객들은 코를 찡그렸지만 애완견 주인은 좋다고 웃어댔다. 하루 새벽 필자 조깅을 나갔는데 마주오던 애완견이 배변하는 것을 봤다. 애완견을 데리고 나온 젊은 여성이 인차 휴지를 꺼내기에 그래도 문명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웬걸 애완견의 뒤를 씻어주고 그 휴지를 길바닥에 버리는 것이었다.    화초를 꺾거나 잔디밭을 짓밟는 행위도 역시 처벌표준에 들어있다고 한다.그런데 연길시 일부 아파트앞에 화단을 보면 정성스레 심어놓은 나무,꽃을 뽑아버리고 남새를 심는다.  이런 정경을 보면 한창 미소 지으며 다가오던 문명이 '홱' 하고 돌아설 것이 분명하다.   남새는 지은 사람이 먹지만 나무,꽃은 만백성이 즐길 것이 아닌가?    한국에 가보면 한줌의 흙이라도 있으면 나무 심고 꽃을 심는다. 먹을거리가 없으면 그래도 이해가 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하고 싶은 말이다.    그런데  환경미화문화를 옮겨온 연변과학기술대학이나 연변한국국제학교에 가보면 환경미화가 어찌나 잘 되였는지 마치 공원에 온 듯한 기분이다.    물론 벌금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벌금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고 목적은 정갈하고 아름답고 산뜻한 거주환경,생활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자면 우선 시민들의 위생환경의식을 제고시키는 것이 급선무로 나서고 있다. 사람들의 위생환경의식을 높이자면 조기교육이 중요하며 가정,학교,사회가 화합하여 어릴적부터의 교양을 앞세워야 한다고 보아진다.    연길시 모  중점  중학교 대문 앞에 서서 보느라면 상학기간 닫아놓은 철문으로 남여 학생들이 뛰여넘는 현상이 꼴불견이고 학교대문에 와서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학교대문을 나서기만 하면 담배를 꼬나무는 학생들을 보면 참 억이 막히고 가슴이 아프다.   이른바 중점학교라는 자체가 이러하니 말이다.   한가지 실례를 들겠다 필자와 가깝게 지내는  정모모는 유치원 다니는 아들이 차문을 열고 휴지를 버리자 인츰 차를 급정거시키고 뒤걸음질 쳐가서 애더러 휴지를 주어 쓰레기통에 버리게끔 채찍질했다.참으로 이 광경을 본 필자는 내심으로 감탄했다.   몇년전에 연변새벽대학에 한국 교수 한분이 왔는데 학생들의 뒤를 따라가다가 한마디 질책없이 조용히 그들이 버리는 휴지나 담배꽁초를 주어서 쓰레기통에 넣군했다.이러한 교양방법이 대학생들을 놓고 볼 때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지 말라"고 열번 선전하기보다 훨씬 더 좋은 효과를 자아내게 하였다. 감독원들이 벌금을 시키더라도 가만히 숨어있다가 달려 나와서 벌금시키는 것은 벌금을 위한 벌금이기에 명지하지 못한 처사라 하겠다.    연길시는 지금 국가급 위행도시로 부상하기에 급급해한다. 비록 작은 연길시라 할진대 수만명의 감독원을 풀어보라, 어찌 가래침 뱉고 휴지를 버리는 현상을 근절시킬 수 있으랴!    우리들의 교육체제에서 우선 문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어른들이 솔선수범해 위생을 지키지 않는 현실에서 어릴 때 버릇이 예슨한살까지 갈수밖에 없지않겠는가?!    
18    사냥개. 똥개. 애완견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5087  추천:61  2011-12-05
군인들이 기르는 개는 군견이라 하고 지금 시내에서 총애를 받으며 기르는 개는 애완견이라 하고 개가 미쳐버리면 광견이라 한다. 전문 사냥을 하는 개는 사냥개이고 농촌에서 아무거나 줏어먹으며 사는 개는 똥개라 한다. 내가 태여난 고장은 형편없는 산골이다. 룡정의 평두산이라는 곳인데 멧돼지며 노루가  특히 많았다.물론 연변은 어느 고장이나 모두 시골이니 말이다.그래서 연변은 그제날은 물론 오늘도 자연이 잘 보존되여 있는 고장이라 하겠다. 거두절미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그 시기만 해도 동물보호법이 실행되지 않았기에 겨울이면 메돼지 잡으러 오는 수렵군들이 많았다. 그들은 사냥개 5ㅡ10여마리씩 데리고 와서 사냥을 하군 했다. 보지도 못하던 사냥개가 오면 동네 똥개들이 몰려와서 마구 짖어댔다. 똥개들이 아무리 으르렁거리고 미친듯이 짖어대도 사냥개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너무 짖어대면 시끄러운지 한번만 눈을 흘기면 똥개들은 제바람에 무서워 달아나군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냥개가 똥개와 싸워봤댔자 상대가 안되는건 물론,그래도 함께 뒹군다면 겨나 똥밖에 묻을것이라는게 사냥개의 심리였을것이라고 판단한다.그러니  똥개들이 아무리 짖어대도 사냥개는 바위돌처럼 끄떡없다. 아마  쓰거워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나 본다. 우리 집에서 사냥개 새끼를 사왔는데 제멋대로 바라다니다 보니 그만 똥개로 변했다.수렵군들은 우리 집 개를 찬찬히 보더니 훈련시키면 사냥개로 쓸 수 있다면서 한번 사냥에 데리고 갔다.영리하고 경험있는 사냥개들은 절대 멧돼지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고 뒤로 덮쳐 엉뎅이를 문다. 멧돼지가 홱 돌아서면 엉뎅이를 물던 사냥개는 피해버리는 한편 다른 사냥개가 달려들어 엉뎅이를 엇갈아 물군 했다. 헌데 우리 집 개는 멧돼지한테 정면으로 달려들다가 한번 띠인 것이 배가 터져 그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똥개는 어디까지나 똥개지 사냥개로 쓸수 없는가 본다. 즉 사냥개 종자라 해도 똥개로 길렀으니 말이다.그 누가 비유한것처럼 “걸레를 암만 빨아도 걸레지 양복을 해 입을수 없다”는 도리이다. 사냥개나 똥개보다 더없이 영리한건 애완견이다. 애완견은 사냥개처럼  용맹하지는 못해도 정만은 너무 많다.하기에 유럽에서는 애완견을 집식구처럼 취급해 준다고 한다. 한번은 내 조카가 친구집에서 애완견을 갖고 왔다. 먼저 나하구 친했는데 내가 집에 없을 때면 안해 곁을 떠나지 않지만 일단 귀가하면 내 곁을 뱅뱅 돌면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애완견도 먼저 친한걸 알고있다. 밤늦게라도 내가 1-2층에 들어서면 4층에 있는 애완견은 냄새를 맡는지 아니면 발자국소리를 알아듣는지 문에 매달리면서 짖어 댄다. 아마 환영의 전주곡이런듯.... 또 심부럼 잘하는 애완견도 있다고 들었다. 주인이 광주리에 돈하고 상품명을 적어주면 애완견은 광주리를 물고 슈퍼로 달려간단다. 슈퍼주인이 물건과 거스름돈을 광주리에 놓으면 집으로 곧추 달려온단다. 옛날에 양반과 상놈 그리고 묘한놈이 구분되듯이 사냥개,똥개,애완견이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지금 사람들속에서도 똥개처럼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개", 아무일도 못하면서 짖기만 하는 "개", 남이 잘되면 배가 아파서 허망 물기만 하는 "개"들이 있다. 명지하고 현명한 사람은 이러저러한 "개"들이 짖든 물든 개의치않고 욕도 안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으면서 대범하게 자기 일만 잘 한다. 사냥개와 똥개가  명확히 구분되듯이 명지한 사람과 무지한 사람의 차이가 이처럼 뚜렸다는것은 오늘 사회에서 재삼 거론할 필요성을 느낀다.  
17    시드니를 떠나면서 댓글:  조회:4904  추천:1  2011-12-05
시드니기행14 시간의 촉박으로 우리는 많은 명소를 찾지 못했다.1987년에 설립된 주립 도서관이며 파워 하우스박물관,옛 흔적을 자랑한다는 패디턴, 1909년에 설립된 웨일수 미술관 그리고 시드니 동부 교외의 킹스크로스... 킹스크로스는 유명한 유흥가로 수많은 나이트클럽과 카페들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역시 가보지 못하고 하회로 미룰수 밖에 없었다. 26일 아침이다. 가이드 전승훈선생이 일찍이 호텔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3일 동안의 문화관광에서 우리는 전승훈선생과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눌수 있었고 친숙해 졌으며 무척 정이 들었다. 우리가 언어가 안통하는걸 고려해서 그는 시드니공항까지 들어와서 수속절차를 다 밟아주고 짐까지 부쳐주었다. 나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도 전승훈선생처럼 극진히 열심히 뜨겁게 해주는 가이드를 처음 보았다.또한 내가 시드니 기행문을 탈고할수 있은것도 전부 그의 덕분이다.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나는 우리 일행을 대표하여 전승훈선생한테 또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는 바이다. 흔히 아무리 명소라 해도 가보지 않았을 때는 유감이고 한번 가보면 후회한다고 하지만 시드니만은 그렇지 않았다.시드니는 몇번 더 가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것 같았다. 우리의 시드니 비자가 일년이기에 다시 시드니로 올것을 기약하면서 시드니를 향해 손을 저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니 시드니는 한폭의 수채화를 방불게 했다.  
16    모래산에서 즐거움 댓글:  조회:4062  추천:2  2011-11-30
시드니기행13 우리들의 시드니 일정은 이틀이 회의이고 이틀이 문화관광이다.헌데 비행기표가 26일이기에 25일 일정이 비였다. 황인숙이 시드니 모래산에 가자고 제의했다. 저마다 관광기일이 짧다고 아쉬워하던 차라 적극 호응해 나섰다. 황인숙이 가이드 전승훈선생과 합의를 보았다. 원래 연길에서 떠날 때 뉴질랜드도 가려고 했다.헌데 뉴질랜드 화산재가 시드니에 침범해 오고 뉴질랜드에 아직도 여진이 멈추지 않다하기에 뉴질랜드관광을 포기해 버렸다. 모래산까지 288킬로메터 4시간이 소요되된다고 했다. 우리는 경건한 심정으로 관광차에 올랐다.시드니는 어디를 가나 아름답고 자연환경과 기후가 좋은것이 큰 장점이다. 우리가 5일간 시드니에 머무르는 기간에 구름 한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바다가에 가야만 잔잔한 바람을 느낄수 있는 정도였다. 전승훈선생은 이날따라 중절모에 선글라스를 걸고 왔는데 풍채가 름름했다. 시드니에서 여러날 차를 타고 다니면서 느낀것이 운전기사들은 행차중에 핸드폰이 울려도 받지않거나 간혹 받으면 "운전중이니 나중에 제가 전화 하겠습니다."한마디 하고는 핸드폰을 끄는것이였다. 차가 선다음 여러곳으로 전화를 한다. 그리고 붉은등 앞에서 멈춰섰다가 푸른등이 켜지면 박자를 맞추듯 가속기를 밟았다. 모래산으로 가는 길에 포트스테판을 경유하게 된다. 포트스테판이란 포도가 많이 난다는 뜻이다. 포도의 산생지기에 여기서 와인을 대량 생산하고있다. 와인도 호주가 세계적으로 5번째 국가라 한다. 우리는 가게에 들려 여러가지 색갈의 와인을 한잔씩 맛보앗다. 전승훈선생은 우리를 보고 와인은 그저 훌쩍 마시는것이 아니라 우선 그 향기에 취해보면서 기분좋게 한잔 부딪치며 또 힘차게 "위하여"를 부르며 즐겁게 혀로 음미하며 목을 천천히 추긴다음에야 벌컥벌컥 마시는것이라 했다. 우리 일행이 여기서 선물용으로 여러가지 와인을 사가지고 왔다. 마침내 모래산에 도착했다.먼곳에서 바라보니 모래산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 놓은것 같았다.어쩌면 모래가 이렇게 쌓여있는지 아무리 살펴보아도 괴상하기만 했다. 호주는 75%가 사막지대이다.해변가의 모래산은 바람에 의해 수시로 형태가 변한다고 했다. 대통로에서 모래산까지 천메터 잘 되였다.건장한 사나이처럼 생긴 녀기사가 짚차로 우리를 모래산까지 운송해 주었다. 해빛과 바다바람에 그슬러 그의 얼굴은 완전히 동구리색이였다. 유럽녀성의 기질을 갖춘 운전기사는 푹푹 빠지는 모래밭길을 매우 쉽게 차를 달렸다.모래산의 높이가 50ㅡ60메터 잘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썰매를 갖고 모래산에 올랐다가 미끄러져 내려오는것이였다. 우리도 모래산에 올랐다.속도가 빠르면 두손으로 량켠에 모래를 깊숙히 긁으면서 내려와도 넘어지는 사람이 많았다.일단 넘어지면 온 몸이 모래투성이 되고 만다.처음 미끄러져 내려올 때 좀 겁이 났지만 몇번 오르내리고 하니 담도 커지고 재미있고 성수가 났다.우리는 완전히 동심세계에 빠져들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웃거리고있다. 전승훈선생이 인제는 돌아가야 한다고 몇번이나 재촉했지만 재미에 흠뻑 빠져 모두 떠날념을 안했다. 한국 청주대학교 임반석교수가 저녁 비행기로 한국에 가야하기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모래산을 떠났다. 차에 올라서도 여럿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재미를 털어놓으며 웃으며 떠들었다.  
15    불루 마운틴 댓글:  조회:3080  추천:5  2011-11-28
시드니기행12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에코 포인트"전망대에서 세자매바위를 보았다. 이 세자매바위는 원주민의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옛날 먼 옛날 아보리지날(호주 원주민. 지금부터 5만년전 마지막 빙아시대 때 동남아시아에서 배타고 호주에 도착한것으로 알려져 있음)전설에 따르면 블루 마운틴에 아름답고 예쁘기 그지없는 세자매가 살았다고 한다. 세자매가 절색이란 소문을 들은 마왕은 슬하에 자식이 없던차라 아름답고 예쁜 세자매를 유괴하려고 음모를 꾸미였다. 이 음모를 알게 된 세자매는 너무 놀라 마술사를 찾아가서 자기들을 잠시만 바위로 만들어 달라고 청을 들었다. 그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 마음씨 착한 마술사는 마술을 리용하여 세자매를 과연 바위로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마왕은 너무 분통이 터져 마술사를 단칼에 찍어죽였다. 세자매는 마술사가 죽은것을 전혀 모르는지라 언젠인가 마음 착한 마술사가 찾아와서 자기들을 다시 인간으로 만들어주기만 기다린다. 이렇게 안타깝게 기다린것이 어언간 5만년이 흘렀다고 한다. 우리는 43명씩 타고오르는 궤도렬차 매표소에 이르렀다. 기념품매장이 여러개 있었지만 손님이 별반 없어 복무원들은 한가했다. 어떤 복무원은 연신 하품을 해대고있었다. 겨울철이여서 그렇지 성수기면 궤도열차를 타는데 반시간 지어 한시간 남짓이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 여길 미국관광객이 제일 많이 온다고 했다. 우리는 궤도렬차에 앉아 수직 52도각도로 250메터 하행하여 산책길에 들어섰다. 독특한 바위형상과 울창한 푸른 숲이 이루어 낸 삼림은 과연 장관을 이루고도 남음이 있었다. 여기서 150년 이상 자란 고목이 너무 많았다. 산책길 옆에 이전에 파던 석탄입구며 광부들이 사용하던 밀차, 모자, 괭이가 놓여져 있었으며 광부의 오두막도 볼수 있었다. 호주는 지하자원이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광산자원의 왕이라 한다. 전 세계가 자원이 고갈된 다음에 엄청나게 고가로 자원을 팔려고 지금은 자국의 지하자원을 다치지 않고 대부분 수입해 온다. 이 울창한 삼림숲에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폭풍우 대피소 5개를 만들어 놓았다. 산책하다가 보니 남정애변호사가 한국에서 비싸게 산 선글라스가 없어졌다. 계곡에서 올라온 후 우리가 여러곳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이때 전승훈선생이 히죽이 웃으면서 선글라스를 갖고 오는것이였다. 누가 주어서 카운터에 보관시켰던 것이다.미국에서는 떨어진 물건을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자리에 놔둔다고 한다. 다치면 주인이 찾지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얻어본 물건을 흔히 카운터에 바친다고 했다. 또 하루가 지났다. 심신은 피곤하였지만 전날 본다이 비치에 취해버린것처럼 오늘도 대자연의 정취에 취해 블루 마운틴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면서 우리는 길을 재촉했다.  
14    야생동물원의 캥거루, 코알라와 댓글:  조회:3458  추천:2  2011-11-25
시드니기행․11 야생동물원에 이르니 에뮤, 캥가루, 코알라, 타르마니아 데블, 웜 벳 등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희귀한 동물이 많았다. 동물원에서는 코알라를 촬영용으로 하나 내 놓았다. 몇시간에 한번씩 교대를 한다. 손으로 만져도 성격이 무척 온순하였다. 제먹는데만 정신이 팔려 남들이 어째도 모르는척 하였다. 코알라는 임신 30ㅡ36일에 탄생하여 250일가량 에미등에서 살고 330일부터 독립한다. 코알라는 참대곰 비슷하게 생겼는데 원숭이처럼 나무가지에서 훌쩍훌쩍 뛰여다니기도 했다. 코알라는 전문 유칼리투스나무잎을 먹는다. 나무잎에 20%의 알콜이 슴배여 있어 새끼가 먹으면 중독된다. 하여 반년동안 에미의 똥을 먹으면서 차차 적응시킨다. 산속에 있는 코알라는 소녀처럼 수집어서 낮이면 자고 밤이라야 나온다고 한다. 두더지는 엉뎅이로 웬만한 동물들을 잘 죽인다고 했다. 캥가루도 흰것이 있었다. 캥가루새끼는 에미주머니안에서 6개월 산다. 닭, 꿩도 수컷이 더 크고 멋진것처럼 캥가루도 수컷이 덩치가 더 크고 보기 좋았다. 전승훈선생은 "저 캥가루들을 보세요. 사람들의 손때가 너무 묻었기에 아무리 다쳐도 모르는척 하지요. 우리 모두가 숙녀, 신사인줄 알기에 시름놓고 편안히 자고있습니다."라고 롱조로 말했다. 보니 네각을 뻗고 세상과 상관이 없이 자는 놈들이 많았다. 도마뱀은 텔레비에서 보던것처럼 무척 컸다. 마치 공룡같았다. 3메터 반이나 되는 뱀은 완전히 구렝이 같았다.이날 악어가 나오지 않아 보지 못했다. 괴상한것은 악마란 놈이다. 마치 메돼지새끼 비슷하게 생겼는데 온종일 뛰여다니기만 했다. 한쪽 모서리에 작으마한 우물을 파놓았는데 악마는 꼭 우물을 한바퀴 돌구는 작은 산마루처럼 만들어 놓은 산주위를 뛰는것이였다. 이걸 보고 남정애변호사는 "하나 둘, 하나 둘"하고 박자를 맞추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악마는 더 성수나서 뛰는것 같았다. 악마는 원래 심술이 많다고 했다. 그 놈이 가만히 서 있어야 촬영을 하겠는데 일초도 서있지 않아 끝내 촬영을 하지 못했다.  
13    블루 마운틴국립공원에서 댓글:  조회:2967  추천:2  2011-11-21
시드니기행10 우리가 더 들리페지의 땅을 돌아보고 차있는 곳으로 오니 관광차 몇대가 서 있었다. 우리의 말투를 듣고 한 운전기사(한국인)는 "여러분들은 연변에서 오시지 않았나요?"라고 묻는것이였다. 우리가 옳다고 대답하자 그는 "백청강의 고향에서 오셨군요. 참 반갑습니다."라고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시드니에서 백청강을 잘 알고있다는것이 자랑스러웠다. 한시간 반쯤 달리니 불루 마운틴국립공원에 이르렀다. 블루 마운틴이란 푸른 산이라는 뜻이다. 블루 마운틴공원은 지정된 산악지대로서 시드니에서 빼놓을수 없는 관광명승지로 되고있다. 모든 산을 뒤덮은 유칼리 잎이 강한 태양빛에 반사되여 마치 푸른 안개처럼 보인다. 호주는 지형상에서 평면을 유지하는데 이곳은 해발 1017메터 높이의 구릉이 이어져 계곡과 폭포, 기암 등이 계절에 따라 기복을 이룬다. 이곳만은 날씨가 변덕이 많고 때로 눈이 오고 바람이 분다. 블루 마운틴의 전경을 다 볼수 있는 "에코 포인트"라느 전망대로 년간 100여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든다니 엄청난 수자이다. 우리가 이른 곳은 켑파크(GAP PARK)라 하는데 원래 군사 요충지이다. 벼랑바위우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바위그림자가 드리워 검푸른 물결이 무시무시하기만 했다. 옛날에는 죄수들이 자살했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자살하는 벼랑바위이다.5년전에 로처녀 명배우가 이 벼랑바위에서 자살했는데 로총각들이 너무 애수해서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이런 자살을 막기 위해 지금은가시철망을 둘렀다. 블루 마운틴에는 700여종의 유칼리투스나무가 있는데 여기에만 92종이 있다.세계적으로 유칼리투스나무가 가장 밀집되 곳이기도 하다.이 유칼리투스나무에서 증발된 유액이 공기중에 있는 산소와 해빛에 의해 산화작용을 일으켜 유액과 유액속에 포함되여 있는 알콜을 연소시키면서 푸른 안개가 산 전체를 푸른색으로 보이게 하는 원리이다. 점심식사를 현지식이라 했다. 구운 소고기가 나왔다. 딱 마침하게 구운 소고기라 했지만 정작 칼로 썩 베니 피가 벌겋게 흘렀다. 그걸 보고나니 나는 더 먹을수 없었다. 곁눈질해보니 다른 사람들은 맛갈지게 자시는것이였다. 시드니는 육식과 빵이 주식이다.  
12    산악지대를 국립공원으로 댓글:  조회:3095  추천:3  2011-11-17
시드니기행 9 6월 24일 아침이다. 간밤에 마신 술이 채 깨지못해 정신이 흐리멍텅했다. 천연자연 유산중의 하나인 시드니 서부에 위치한 블루 마운틴 국립공원을 향해 차가 달린다. 여기는 바다가 산처럼 보이고 산이 바다처럼 보인다. 오염이 없는 나라로서 하늘이 푸르고 땅이 푸르고 바다가 푸르러 과연 록색의 나라임이 분명했다. 시드니 시내를 벗어나니 길에서 사람의 그림자도 볼수 없었다. "인가가 이렇게 많은데 왜 사람을 전혀 볼수 없을가요?" "네. 호주의 면적은 774만평방킬로메터이고 인구는 2천 백만명 좀 넘습니다.시드니에 4분의 일이 살고있지요. 호주를 놓고말하면 지구상에서 6번째로 큰 나라지만 세계적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국가이기도 합니다.매 평방킬로메터당 2명이 살고있습니다.자식들은 시내에 들어가거나 외국을 가지요.로인들이 집을 지킵니다.여기 로인들은 건강을 지키고 세계관광을 하는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답니다. 어느 한쪽이 세상 뜨면 림시파트너를 찾아 려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나의 물음에 전승훈선생의 대답이다. "자, 여러분 등산을 합시다."이말에 우리 모두가  "와ㅡ"좋다고 환성을 올렸다. 어제부터 차시달림에 저마다 몸이 지긋지긋해 났던것이다. 등산이란 기실 45도각에 높이 20메터 되는 언덕이였다. 언덕에 오르니 넓은 벌판이 나타났다. 더 들리페지라는 호주사람이 일찍 이 넚은 벌판을 사놓고 축구장을 만들고 집을 지었다. 그는 죽을 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첫째, 여기를 최고의 관광지를 만들라. 둘째, 자기집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짓게 말라. 셋째, 이 땅을 절대 팔지 말고 국가의 소유로 하라. 이와같은 혹독한 유언으로 해서 친손자는 기막히고 화가 나서 지금까지 45년동안 여기를 와보지 않았다고 한다. 손자는 자기한테 그 땅을 물려주었더라면 얼마나 잘 살겠는가 하면서 끝없이 한탄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재간은 물려줘도 재산은 물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주면 자식들이 분발하지 않고 게을러진다는것이다. 하기에 여기는 어려서부터 독립생활에 적응하도록 교양받기에 커서 모든 일을 자체로 해결할수 있다. 전승훈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국 한 편벽한 산골에 부부가 농사를 지어 5억을 모았다. 그들은 아들 다섯한테 1억씩 나누어 주었다.결국 자식들은 이 돈을 거의 탕진해 버렸다. 부모는 하는수 없이 양로원으로 가게 되였다. 전승훈선생은 "한국에서도 호주의 이런 교양방법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했다.  
11    시드니의 이모저모 댓글:  조회:3664  추천:2  2011-11-14
    시드니기행 8 호주는 법규가 엄명하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 더 달라해도 만취죄에 걸리고 주인이 매상고 올리겠다고 취한 사람한테 술을 더 팔아도 만취죄에 걸린다.해양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낚시질 할 때도 낚시크기와 고기마리수를 제한한다. 이 규정을 위반하면 벌금시킨다. 건축물을 지을 때에도 5메터 밖에 반드시 풀,꽃,나무를 심어야 하고 공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되여 있다.길가에 나무 풀이며 꽃은 나라에서 심어주지만 주민들이 가꾸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되여 있다. 세관통과시에 반드시 신고해야 되는 물품중에 료리나 과자류, 음식재료가 들어있었다. 우리들은 이런 규정을 알지못하고 과자며 료리, 김치, 누렁지 등 많이 갖고 갔는데 운이 좋아서인지 무사히 통과되였다. 이런 규정을 뒤늦게야 알게 된 우리들은 가슴이 섬찍하였다. 언어도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좀이라도 걸리면 우환이 생기는 법이다. 그런 규정이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는 시드니에 도착한 날 저녁에 호텔에서 맛있게 한때를 먹었다. 내가 연길에서 갖고 간 "된장 술"한병은 나와 량승만사장이 병을 비웠다. 시드니는 생각밖으로 집값이 눅고 세가 비쌌다. 류동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힘이 있을 때 여기 와서 분투해서 벌고 늙으면 공기나 물, 환경이 좋은 고장에 가서 향수를 누린다는것이 여기 사람들의 관념이다. 큰 수술외는 치료가 전부 면비다.90세에도 차를 몰게 하는데 70세부터 정기적으로 면비로 신체검사를 한다. 이민들의 경우 아이 셋을 낳기만 하면 국가에서 보조금을 발급하는데 그 보조금으로 평생 먹고 살수 있다. 몇년전에 한국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리운석원장은 동생과 함께 시드니에 이민수속을 넣었다.리원장한테 장애인 딸이 있다. 장애인 하나  멱여살리려면 엄청난 자금이 지불되기에 동생은 이민으로 갔지만 리원장은 불허가가 나왔다. 시드니의 상업용건물임대료는 미국의 뉴욕과 홍콩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한다. 중국의 광주가 세계11위,상해가 20위를 차지한다. 시드니 철도역 근처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여 있어 이 거리로 수많은 아이안 레스토랑과 식품점이 즐비하다. 한어로 씌여진 당인거리(唐人街)는 상점이 많고 식당이 적은 편이다. 이 거리는 달링 하버로 급속히 퍼져나가고있다. 새로 건립된 달링 하버는 상점, 레스토랑, 수족관, 중국화원, 산책가, 전시관 등이 밀집되여 있는 화려한 거리이다. 우리가 시드니에 있는 기간에 중국 국가위생부 부부장이며 국가중의약관리국 국장인 왕국강이 중국의료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동인당 시드니분점을 시찰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다. 시드니에 "한국일보", "서울경제"등 한글신문사가 6개나 된다.  
10    사랑있는 곳 천국, 사랑없는 곳 지옥 댓글:  조회:2599  추천:2  2011-11-11
며칠전 연변텔레비방송국 '사랑으로 가는 길' 제130회가 텔레비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였다.   과거 텔레비에서 수차 '사랑으로 가는 길' 프로를 시청했지만 정작 촬영현지에 참가하니 분위기나 감각이 완전히 달랐다.   이날 3명 학생의 불우사연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우리 신변에 눈물겨운 불우의 사연이 있구나.) 이런 놀라움과 함께 나는 다음회부터 다문 얼마라도 헌납하려는 결심을 굳히게 되였다.   연변성보백화에서 만원, 성보상인들이 2만원 기증했고 서시장 고추가루매대, 2000년 노래방, 그외 이름을 밝히지 않는 여러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이 륙속 전해왔다. 과연 감격이 없이는 지나쳐 버릴수 없는 장면이였다. 더우기 무겁고 다소 쓸쓸히 울려나오는 아나운서들의 목소리에 코마루가 찡해 났다.   사회 각계 사람들의 뜨거운 손길과 후더운 마음에 감동을 먹으면서 다른 생각이 뇌리를 치는것이였다. 이 세 학생을 불우의 길로 몰아넣은 임자가 바로 부모가 아니겠는가? 이들 부모 모두가 리혼한 처지였다. 물론 아버지가 세상 뜨고 중풍에 걸려 운신하지 못하는거야 어쩔수 없지만 외지로 외국으로 돈벌러 갔다는 어머니는 모두 종무소식이란다. 물론 남편이 밉고 지어 원쑤가 되였다 할지라도 자식이야 자기의 태줄을 받은게 아닌가?! 예로부터 자식을 부모생명의 연장체라 했다. 옥이야 금이야 하면서 낳은 자식, 들면 날아날가 쥐면 부서질가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이 매일 매시마다 고달픔에 모대기는걸 어머니들은 알고나 있는지?   연길시조양천태양학교 김룡학생은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며 공부를 한다. 고중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아버지를 모시면서 공부하겠다는 김룡학생, 힘들 때면 어머니가 너무 그립다면서 눈물을 쏟는 길룡학생의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수 없을 지경이였다.   연변성보백화 정영채회장은 말한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그 어떤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고. 그리고 남아서 남을 돕는다는것은 절대 될수 없는 일이라구."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아글타글 벌어서 모은 돈을 선뜻이 성금한다. 이날 7명의 소학생마저 30원, 50원, 100원씩 보내왔다. 그들한테 무슨 돈이 있으랴? 부모들한테서 가진 소비돈에서 절약했을것이다. 이런 사연을 그 세 학생의 어머니들은 알고나 있는지?!   우리 조선족녀성은 어질고 선량하며 마음씨 고운 미덕을 갖고있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다. 이것은 결코 봉건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긍지로 느껴야 할것이며 고스란히 이어나가야 할 전통이라고 본다.   자식에 대해 모성애라는 말은 많이 쓰지만 부성애라는 단어는 별반 언급하지 않는다. 바로 녀자로 태여난것을 행복으로 느끼는 그런 녀성, 최상의 기품을 완수하는 부드럽고 고상한 어머니야말로 순결과 우아함의 상징인 녀성이 아니겠는가? "낳자고 해서 낳았는가 생기니 낳았다는" 무책임성, 자기가 낳은 자식마저 거들떠 보지않는 이런 녀성들 앞에서 어찌 도덕과 품성, 그리고 참다운 인간미를 론할수 있으랴?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함함한다고 한다. 이 속담은 누구나 다 제 자식을 고와한다는 뜻으로 쓰이고있다.   연변텔레비의 "사랑으로 가는 길" 프로는 불우 학생들이 웃음과 용기를 잃지않고 아름다운 삶을 이룩하도록 이끌어주고 고무해주고있다.   사랑을 주자. 하늘에 사랑이 가득 채워지면 우리의 희망도 꿈도 채워질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꽃을 심어가고 키워가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 
9    가이드 전승훈씨 댓글:  조회:3980  추천:3  2011-11-10
시드니기행 7 저녁식사는 한식점에서 마련되였다. 마침 가이드 전승훈선생과 나란히 앉아 술 한잔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전승훈선생은 시드니 이민 오기전에 한국 금성사(LG)에서 12년 근무하다가 시드니에 와서 줄곧 관광업에 종사했다고 말했다. "시드니는 금융중심지로서 사업활동이 대단합니다. 19세기 지어진 웅장한 중앙우체국건물과 빽빽이 들어선 건물사이에 위치한 마틴 플레이스가 시드니 주요 상권의 하나입니다. 시내중심에서 상업활동이 벌어지고 시내외곽은 여가활동의 중심지로 되고있지요."  "시드니에 한국인이 얼마나 되나요?"  "호주에 20여만명 되는데 시드니에 12만 정도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호주에 진출해서 처음에 많은 진통을 겪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비록 영어를 잘한다 해도 호주의 방언이 따로 있고 생활습관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호주에서는 우리가 간다는것을 온다고 하고 바지나 와이셔츠를 꼭 거꾸러 널어놓고 말리우며 남양집 안사고 북향집을 산단다. 북향집이 해가 온종일 집안에 들어온다. 한국인이 처음 호주에 와서 습관그대로 남향집을 샀는데 해가 인차 넘어가고 겨울이면 춥고 집안에 곰팽이가 낀다. 지금 한국인들이 호주에 와서 자기처럼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고 했다. "호주는 법이 무서운 나라입니다. 일단 차사고나도 죽은 사람이 애매할뿐입니다. 어디가서 보상도 못 받아요." 이 말은 시드니공항에서 호텔로 올 때 접대차 운전기사도 이 말을 한적이 있다. 승훈선생은 처음 시드니에 와서 차운전이 습관 안되여 2년간 무척 애를 먹었다고 솔직이 말했다. 지금 시드니에 한 가정에 4-5대의 차가 있다.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이 차를 몰고 학교에 간다. 그러니 중심거리는 차량이 북실나듯이 할수 밖에 없다. 파라마탕이라 하는 자동차판매시장이 길 량켠으로 약 20리가량 늘어져 있다. 파라마탕이란 뱀장어처럼 길다는 뜻이다. 차량이 그렇게 많지만 우리가 5일동안 머무르는 기간에 차사고 한번 못 보았고 경적소리 한번 듣지 못했다.그들의 말에 의하면 경적소리를 낼 리유가 없다는것이다. 비상에 걸리면 간단히 한번 울릴뿐이다. 차의 매연이 심하지 않고 소음이 적어 너무 좋았다. 버스마다 "O 40"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일체 차량은 버스한테 양보해야 한다는 표시란다. 학교주위는 오후 2.30분부터 4시까지 시속 40길로메터를 초과 못한다. 초속이면 무조건 250달러를 벌금시킨다. 공중도덕은 다만 대중의 자각성에만 의거해서는 판판 부족이다. 호주는 옛날에 영국에서 죄인을 추방시키던 곳이다. 죄인들이 갇혀있던 건물이 아직도 종적을 감추지 않고있다. 허지만 현재 호주의 질서는 너무나 정연하다. 민중의 도덕이 고상해서만이 아니라 정부의 봉사직능이 제대로 발휘된것도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했다. 이날 저녁 전승훈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호주, 시드니에 대해 많은것을 알게 되였다.  
8    예술의 전당과 바다 댓글:  조회:3592  추천:2  2011-11-07
시드니기행 6 오후는 세계적인 예술건축물이자 호주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오페라 하우스와 본다이 비치 관광코스이다. 오페라 하우스는 시드니에서 절대 빼놓을수 없는 명소이다. 이 건축물은 1959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973년에 준공하였다. 14년 걸린 긴 공사와 총공사비 1억 200만 달러를 들여 건설된 오페라 하우스는 106만 5천장의 타일로 요트모양으로 만든 지붕이 너무 가관이다. 가이드 전승훈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이 건축물은 1957년 정부에서 개최한 국제공모전에서 32개국, 232점의 경쟁을 물리치고 선발된 덴마르크의 건축가 요른 우측의 디자인 작품이다. 이 건축물은 큰 행사가 없이는 관광객을 접대하지 않기에 우리는 가이드의 소개를 들을수 밖에 없었다. 주위를 돌며 우리는 많은 촬영기념을 남겼다. 건축물 내부구조는 콘서트홀을 중심으로 4개의 커다란 홀로 나뉘여져 있다고 했다. 1500여명을 용납할수 있는  오페라극장을 비롯하여 2900여명이 들어설수 있는 콘서트홀이 있고 544개 좌석의 드라마극장,288개 좌석의 스튜디오,400석의 연극무대로 구성되여 있다고 했다. 오페라 하우스는 음악당으로서 오페라뿐만아니아 쩨즈, 발레, 고전음악 등을 연주한다.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는 호주 최초의 농장이였던 왕립식물원이 있는데 4천여종의 식물이 재배되고있다고 했다. 식물원 북서쪽에 식민지 시대의 력사를 유지해 온 총독관저건물이 자리잡고있다고 한다. 이는 식민지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산으로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있다. 시드니 중부에서 차를 타고 약 반시간 달리니 본다이 비치에 이를수 있었다. 본다이 비치는 또 다른 하나의 매력을 과시하고 있는데 비치관광에 저도 모르게 취해 버린다. 본다이는 원 주민어로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라는 뜻이다. 본다이는 일명 "토플리스"라 하는데  남녀모두가 하체만 가리워도 된다는 뜻으로 토플리스차림의 녀자들을 쉽게 볼수 있다고 했지만 겨울철이여서 그런지 우리 눈에는 하나도 안보이고 10여명 잘되는 남녀들이 수영하는것이 보이였다. 본다이 비치는 시드니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 휴양지로 거대한 백사장을 자랑한다. 넓은  백사장과 바다의 거친 파도가 조화를 이루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주말이면 인파를 이룬다고 했다. 이날도 맨발로 백사장을 뛰여다니는 남녀 여라문명은 보았다. 백사장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마음도 넓어졌다. 연길공원치과병원 원장 강신애는 시드니 향발하기 며칠전에 친정어머니가 세상 떴다.검푸른 파도 앞에 머리를 쳐들고 넓은 바다를 바라보니 속이 확 풀리면서 울적하던 마음이 많이 개운해 졌다고 말했다. 최화심총경리는 몇년전에 한국 사람한테 1천 2백만(인민페)을 사기당했다. 그 엄청난 금액으로 최화심은 많은 경제고생과 심리타격을 받았다.그도 울부짖는 파도를 향해 "한국의 김아무개야 콱 잘 살아라." 한마디 울분을 토하고나니 속이 시원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본다이 비치는 이름그대로 파도가 강하여 위험하고 격렬한 운동을 즐기는 호주사람들한테 해양스포츠가  제격이고 일광욕이나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는데 그보다 더 좋은 멋진 곳이 없을상 싶었다. 원래는 1850년에 창립된 시드니대학도 참관하기로 되었다. 본다이 비치에 취하다보니 시드니대학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어둠이 깃들었다. 시드니대학은 들어오기는 쉬우나 나가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시드니대학 주위를 돌아보았다. 건축물이 우중충하고 고전형태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정원은 너르고 공윈은 정결하였다. 이 대학에 류학 온 북경청년 왕강영을 만나서 형편을 물으니 호주는 교육체제가 매우 완정하고 환경이 아름다워 다 좋고 음식도 입에 맞는데 다만 적적한것이 흠이라고 속심을 털었다. 시드니대학은 내 조카 김화가 2년간 석사연구생 공부를 한 대학이기에 더 정다왔다.  
7    시드니, 호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도시 댓글:  조회:4557  추천:3  2011-11-04
시드니기행 5 시드니의 아름다운 항구와 초현대적이고 인상적인 건축물은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다. 오페라 하우스,하버 브리지와 같은 명물을 자랑하는 시드니 항구, 자연동식물로 가득한 로얄 보타이가든이 자리잡고있다. 시드니는 관광객들이 몹시 찾고 싶어하는 국제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기에 사람들은 호주의 수도가 시드니라고 잘못 알고있다. 기실 호주의 수도는 뉴 싸우스 웰스에 있는 캔버라이다.  시드니의 도시 이름은 당시 영국의 각료였던 시드니경의 이름을 딴것이라 한다. 그 후 시드니는 호주개발의 중심지로 발전했는데 섬유, 제분, 피혁 자동차, 조선, 정유, 제지, 농기구 등의 공업이 대폭 활발하다. 더우기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보다 더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음했고 세계적도시 평의에서 련속 3년간 최고의 도시로 평가받았다. 우리는 이틀간 회의를 마치고 23일 아침 8시에 짐을 챙겨가지고 로비로 오니 가이드가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는 파크 로얄파라마티호텔로 자리를 옮겼다. 가이드는 시드니에 이주온지 18년이나 되는 한국인 전승훈선생인데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몹시 열정적이이며 말이 또한 청산류수였다.   우리 일행 8명과 한국 충주대학교 중국통상과 교수 임반석, MBC재단 방송문화회 정상모이사 부부간 해서 11명이였다. 우리는 제일 먼저 시드니 타워에 이르렀다. 시드니 타워는 시드니의 시내를 비롯하여 멀리 블루 마운틴까지도 보일만큼 높은 전망대이다. 이 전망대 높이는 324.8메터이다. 2층에서 엘레베이트를 타고 40초 되니 전망대 꼭대기에 도달했다. 눈뿌리 아득하게 바라보이는 황홀한 전경에 우리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 졌다. 동쪽에는 태평양,서쪽에는 블루 마운틴, 남쪽에는 월동공, 북쪽에는 팜 비치까지 바라볼수 있었다.빽빽이 들어선 고층건물도 대단했지만 하버즈 다리가 경관이였다. 가이드 전승훈선생이 그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다리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다리로서 총길이가 1149메터입니다. 시드니교통에서 없어서는 안될곳으로 1923년에 시공하여 9년이란 세월끝에 완공되였습니다." 전승훈선생은 한구절 말하고는 "야ㅡ"하고 감탄사를 뽑아내군 했는데 참 재미있는 분이였다. "저길 보십시요. 가장 높은 부분의 높이가 134메터입니다. 거대하지요? 야ㅡ" 거대한 아치형다리로 시드니만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보위도를 걷느라면 아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시드니 타워에서 내려와 얼마 안가니 수족관에 이르렀다. 시드니 수족관은 거센 파도를 련상케하는 건물이다. 이 수족관은 시드니에서 가장 큰 수족관으로서 650여종류의 1만 2천개 이상의 해양동물이 전시되여 있다.   "아십니까? 워낙 여기는 촬영이 금지되여 있습니다. 제가 한국과 중국 연변에서 전부 모모한 분들이 왔다고 하니 이번만은 촬영이 허가되였습니다." 가이드 전승훈의 말에 우리는 더없이 기뻤다. 호주에만 서식한다는 오리너구리가 너무 괴상했다. 상체는 오리부리와 물갈퀴가 오리 비슷하였고 하체는 발톱을 갖고 있어 너구리  같은 감이 들었다. 오리너구리는 알을 낳는 수상 포유동물이다. 두공이란 우리가 말하는 인어공주였는데 먼 옛날 배사공과 해적들이 그 두공을 보고 인어공주라 이름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두공은 실질적으로 소목 (SEA COW)으로서 바다밑에 있는 미역이나 다시마를 먹고 산다고 한다. 예로부터 고기를 먹는 동물은 독하고 풀을 먹는 동물은 순하다고 했다. 상어는 마치 비행기 같았다.전 세계적으로 3분의 2의 상어가 호주근해에서 서식하고있는데 그중 몇종류만 이 수족관에 전시되여 있다.   푸른 바다를 끼고 런천크루즈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였다. 런천크루즈란 배를 타면서 식사를 한다는 뜻이다. 배에 탑승하고 선상 뷔페식 식사를 나누었다. 일년에 천만명 이상 되는 관광객이 오르내리고 하는 배라고 하지만 너무 깨끗하고 든든했으며 음식 또한 우리들의 구미에 맞았다.
6    영어를 몰라서 댓글:  조회:3650  추천:20  2011-11-03
시드니기행 4 북경외국어학원에서 영어교원으로 있는 조카 김화가 늘 “삼촌 영어는 꼭 배워야 해요.” 하고 거듭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귀등으로 흘려버렸다. 이번 시드니기행에서 조카의 말을 안들은것을 많이 후회하였고 조카의 말의 참의를 깊이 느끼게 되였다. 연길을 떠날 때 항상 부지런하고 이모저모 잘 생각하는 황인숙이가 간단한 영어를 타자해서 매 개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처음 뵙습니다.”, “만나 반갑습니다.”, “저의 명함장입니다.”등등 간단한 대화였다. 허지만 낯설고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시드니에선 이것으로만 판판 부족이였다. 회의기간에 녀성 몇분이 24시간 복무하는 버스에 앉았다. 그 버스는 온종일 고정된 로선을 따라 달린다. 길도 모르지 영어도 모르는 그들은 운전기사나 옆에 사람들과 물어볼수도 없고 함부로 내릴수도 없었다. 운전기사가 뭐라고 하는것을 그들은 "저것 봐라 운전기사가 우릴 쫒는거 같다. 절대 내리지 말자." 이렇게 약속하면서 서너시간을 남직이 달렸다. 그러다보니 방광이 터질지경이였다. 관광길에 화장실을 못 찾는것만이 안타까운 일이 어디 더 있으랴? 마침 곁에 앉았던 사람이 내렸다 다시 원래 표를 갖고 버스에 오르는것을 보게 되었다. 이때야 그들은 차표 한장이면 아무곳에서 오르내릴수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마침 버스에서 내리고보니 자기들이 든 호텔이 눈앞에 있었다. 미국에 가서 1ㅡ2년 있어도 화장실이 어디있는가 물을줄 몰라 궤춤을 쥐고 쩔쩔 매는 사람이 있다더니 시드니에 처음 온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혼을 뗏겠는가?!  후에 집에 돌아와서도 간혹 이 말이 나오기만 하면 한바탕 폭소가 터지군 했다. 1992년에 나는 태국으로 관광간적이 있다. "오케", "노" 두마디로 한달동안 그래도 가볼데를 다 가보았다.그때 나이 안많은지라 집에 가면 꼭 영어를 배우리라 결심내렸다. 정작 집에 오니 그 결심이 물거품되고 말았다. 황인숙원장과 남정애변호사는 돌아가면 선차적인 과업이 영어강습반에 참가하는것이라 했는데 지금 강습반을 다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든 호텔은 5성급 포 포인트호텔이다. 우리는 호텔에서 손시늉으로 복무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동련화방의 전등이 고장나서 전등을 가리키니 눈치빠른 복무원이 제꺽 알아맞히었다. 엘레베트를 탔는데 아무리 5자를 눌러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복무원이 달려와서 우리의 방키를 제꺽 꽂는것이였다. 우리는 방의 키를 꽂아야 엘레베트가 올라간다는것을 몰랐던것이다. 이전에 들었던 재미있는 말들이 생각난다. 연변사람이 러시아에 가서 기차역전을 몰라 택시기사를 보고 "뿡- 칙칙 푹푹"음내를 내니 기사가 인차 알아차리더란다. 또 한국분이 연길에 와서 공항으로 가야하는데 언어가 안통하니 두손을 날개처럼 펼치고 "윙- " 소리를 내며 택시차를 한바퀴 나는 동작을 하니 한족운전수가 공항까지 실어주더란다. 이럴 때면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수 있다. 기실 호주 영어발음이 그리 긍적적이 아니라고 한다. 미국식 영어가 아닌 영국식의 영어를 섞기때문에 딱딱한 발음은 다소 미국식의 부드러운 영어와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언어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 8명이 시드니 공항에 내렸을 때이다. 동춘희가 "내 려권이 어디 갔나"하고 놀란 소리를 했다. 낯선 고장에 와서 려권을 잃으면 큰일이 아닐수 없다. 동련화는 동춘희의 언니이다. 동련화가 동춘희를 가리키며 "자대밑에ㅡ"(겨드랑이)하고 소리쳐 어찌나 웃었던지 모르겠다. 누군가 화장실 갔다오면서 "금방 대배질번 (넘어질번) 했다"고 해서 또 웃었다. 우리들만이 알아들을수 있는 조선말, 우리들만 리해할수 있는 방언이 무시로 튕겨나와 웃음으로 스쳐버리니 피곤도 깡그리 사라졌다. 
5    시드니에 내려 댓글:  조회:3097  추천:3  2011-11-01
시드니기행 3 우리가 탄 비행기는 마침내  시드니의 하늘에 이르렀다. 마침 앞에 앉았던 연길신덕동업유한회사 총경리 최화심과 연길동창림의학미용병원 원장 동련화가 빵을 갖고 우리한테로 다가왔다. 집에서는 빵에 전혀 눈길도 안주는 나였지만 속이 촐촐하여 두개를 게눈 감추듯 삼켜버렸다. 연변중항량자생물산품무역회사 사장 량승만과 연길공원구강병원의 원장 강신애는 부부간이다. 그들도 빵을 맛나게 자시였다.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하였다. 몇 분이면 착륙하는데 비행기는 바다우로 한번 순회하는것이였다. 밖을 내다보니 비행기 날개가 바다에 젖는것 같았다. 얼마나 놀랐던지 모르겠다. 나는 안 볼걸 공연히 보았다고 후회하면서도 긴장하여 눈길을 돌릴수 없었다. 나는 숨이 한줌만해서 손에 땀을 쥐고 있는데 아마 호주로 자주 다니는 사람들인지 “하, 하!”웃으며 담소를 나누었다.내 옆에 앉은 한족분은 북경 모 무역회사에 출근하는데 시드니로 열몇번 다녀왔다고 말했다. 리려라고 부르는 공중아가씨는 고향이 흑룡강이였다. 내가 흑룡강신문사 연변지사라 하니 그도 무척 반가와하는 기색이였다. 공중아가씨들마다 모두가 인물체격이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리려가 제일 출중했다. 몇년 되는가 물었더니 그는 “딱 4년이예요. 저도 처음에 당장 하늘에서 떨어지는줄 알았어요.”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손님들은 기내에서 오갈 때 비칠거리지만  공중아가씨들은 온당한 걸음걸이로 봉사하는것이였다. 이것이 아마 기술파악이고 련마의 결과일것이다. 시드니에 내려보니 활주로가  바다가를 끼고있었다. 여기 최고온도가 14도라 했다. 시드니는 한창 겨울철이라 해도 최저기온이 6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했다.풀이나 나무는 푸른색을 벗지 않았지만 땅속에서 올리미는 랭기는 무척 쌀쌀했다. 접대차 운전기사는 한국인이였다. 운전기사는 "이 호주는 한국과 모든것이 반대라고 보면 됩니다."라고 했다. 운전석도 우측에 있고 좌측통행이였다. 길도 반대고 물도 반대라 했다.마주오는 차량과 당장 부딪치는거 같은데 용하게 살살 빠져나갔다.  
4    시드니로 향발 댓글:  조회:2986  추천:1  2011-11-01
시드니기행․2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는 태평양의 남서쪽 대륙에 있는 영국 연방에 속하는 나라이다. 정식 이름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이다. 어원은 라틴어 오스트랄리스(Australis, '남쪽'을 의미함)이다. 정식 국호는 오스트레일리아 연방(Commonwealth of Australia)이다. 그러나 이름이 너무 길고 비슷한 이름의 오스트리아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아 흔히는 한자 음역인 “호사태랄리아(濠斯太剌利亞)”를 줄인 “호주(濠州)”라는 이름이 더 많이 통용되고있다. 호주 시드니는 언녕부터 가고팠던 고장이다. 시드니는 내 작은 조카 (형님의 둘째 딸) 김화가 석사학위를 따낸 고장이기도 하다. 몇년전에 형님과 형수가 작은 딸의 덕택으로 시드니관광을 다녀왔는데 자랑이 너무 구구하기에 시드니에 가볼 의향이 더 불붙었다. 2011년 6월 21일 국제한민족포럼이 시드니에서 개최되여 우리가 초청받고 시드니로 갈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병원 원장, 경리, 변호사, 사장 이렇게 무어진 우리 일행이 8명이였다. 연길에서 비행기편으로 북경을 경유하여 시드니에 도착해야 한다. 19일 오전에 북경에 도착하니 북경동씨의료미용병원의 동춘희원장이  한상 푸짐히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있는 남정애는 한국에서 직접 비자를 받았지만 우정 북경에 와서 우리와 합류하였다. 식사전에 면목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 (김명록)를 단장으로 연길동창림미용병원 업무원장 황인숙을 부단장으로 뽑았다. 기실 황인숙이가 모든것을 도맡아 했다. 연길부터 북경까지 두시간 정도, 북경ㅡ시드니까지 11시간 50분이 걸린다. 호주는 북경보다 2시간 빠르다. 시드니 비행기에 탑승하면 금발머리며 코대 큰 서양인들인줄 짐작했는데 생각밖으로 절대분이 한족이고 한국인도 별반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올라 밖을 내다보니  구름천지이고 땅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많은 시간을 바다우로 비행하는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살며시 잠이 들었는데 "량해를 구합니다. 지금 소독제를 뿌리니 신경이 예민한 분들은 잠깐 눈을 감았다나면 됩니다." 하는 방송소리에 깨여났다. 호주정부의 요구에 따라 기내에 소독제를 뿌리는데 인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민감한 분은 련속 재채기를 해댔다. 시계를 보니 호주시간으로 새벽 4시였다. 동녘은 이미 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푸른 바다가 보이고 호주의 땅도 보이였다. 우리는 이제 호주의 하늘로 날아왔던 것이다.   
3    남십자성 하늘 아래로 댓글:  조회:3206  추천:3  2011-11-01
시드니기행1   가을의 깊어가는 밤하늘에서 북두칠성이 빛나고있다. 북두칠성은 밝고 뚜렷한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항해의 지침으로 쓰이거나 여행의 길잡이로 이용되었으며 밤에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에 쓰이기도 했다. 또한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일주운동을 하고 북반구에서는 사계절 어느 때나 볼 수 있으므로 그 위치를 보면 밤에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민간신앙에서는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은 매우 흔한데 이는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칠성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는데, 칠성은 비, 수명, 인간의 운명 등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 칠성단을 쌓고 그 위에 정화수를 놓아 빌기도 했고 “칠성님께 명(命)을 빈다.”는 말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반구의 하늘에는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빛나고있다. 천구(天球)의 남반구에 있는 이 별자리는 세 면이 센타우루스자리, 남쪽이 파리자리로 둘러싸여 있다. 이 별자리를 남십자라고 하는 것은 남십자자리에 있는 ‘十’ 자 모양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十’자 모양이 정확히 정남쪽의 방향을 가리키는건 아니지만 매우 근접해 있기에 대항해시대 이래 뱃사람들의 방향 확인의 길잡이가 되어 왔다. 남극성이 될 만한 눈에 띄는 별이 없기 때문에 남십자성의 알파성과 감마성을 사용하여 남극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러 남반구 나라들에서는 남십자성이 국기 등의 상징에 많이 사용되는데 뉴질랜드, 니우에, 브라질, 사모아, 오스트레일리아, 파푸아 뉴기니아 등 여러 나라국기에 남십자성이 그려져 있다. 이 별자리는 우리나라와 한국, 일본 등 북반구지역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북반구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남십자성은 신비로운 동경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는 볼 수없는 별, 그러나 이 땅의 반대쪽에 가면 빛나는 별을 찾아 가보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의 꿈이었다. 그 꿈이 이제 곧 이뤄지게 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즉 호주 시드니로 날아갈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2    좋은 사람은 오래오래 앉으라 댓글:  조회:2788  추천:8  2011-11-01
사람의 죽음에는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도 있고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도 있다.어떠한 죽음이 태산보다 무겁고 깃털보다 가볍다할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 평범한 사람이 죽은 후에 평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추도회에 참가했다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추모하러 온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당정간부들도 있고 노인, 젊은이, 여성들...여직 추도회에 참가한 중에 사람이 가장 많은 추도회였다. 이는 그 분이 살아 생전에 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분이 위대해서가 아니고 직위가 높아서도 아니다. 지구급 방송국의 국장, 신문사 사장을 하셨던 분이다. 그는 인격이 고결하고 명망이 높았다. 자기 앞에 와서 침을 튕기며 좋은 말만 하고 아부하는 사람을 보고는 "발바리"라고 했고 뒤에서 자기를 욕하지만 덕을 겸비한 사람이면 중용하였다.   그는 너그러이 수용하는 허심한 아량을 구비했던 것이다. 재능이야 있든 없든 자기 눈에 잘 보이기만 하면 중용하고 아첨이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직심으로 일만 하는 사람을 배격하는 그런 지도일꾼에 비한다면 너무나 천양지차이다. 우리 신변에 자기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자기를 나무란다고 고깝게 생각하면서 재능있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전근하지 않으면 자리를 내놓게 만드는 지도일꾼이 적지 않다고 본다. 이런 지도일꾼은 자리를 내놓으나 현직에 있으나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기가 높은 급에 앉아 있을 때 주위사람들에게 덕을 많이 베풀어주어야 한다. 직위가 높든 낮든 관계없이. 어떤 사람은 자기가 국장, 사장으로 지낼 때 눈에는 아부하는 사람만 보였는데 자리를 내놓고 아첨하는 사람 하나 없어지니 아첨쟁이를 비난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아마 그때는 선글라스를 써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사망한 그 분은 평시에 돈후한 덕성과 너그러운 인품으로 하여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 받들린 것이다. 하여튼 퇴직한 후에도 아무 장소에서나 남여노소 할 것 없이 받들렸던 것이다.   진주와 보석은 아무곳에서도 눈부신 빛깔과 고귀한 기질을 변함없이 발산하는 법이다. 비록 그 분이 세상을 떠났지만 가치관이나 도덕관은 그의 인품과 신념을 여실히 알려주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마다 비록 살아서 위대하지 못하고 죽어 영광스럽지 못하다 할지라도 죽은후에 "참 아깝다", "참 좋은 분이었다"라는 평판을 들어야지 "그 사람 잘 죽었다"는 말은 절대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인사도 일종의 베품이다 댓글:  조회:3498  추천:3  2011-11-01
인사는 서로 주고 받는것으로서 사람들이 서로 만나거나 헤여질 때에 안부를 묻고 례의를 지키는 감정교류의 매우 좋은 교제술이다. 이전에 노인들이 아침에 만나면 "밤새 무고하셨습니까?", "밤새 별고 없으셨어요?" 하고 오가는 인사를 많이 들어 왔다. 그때 당시 노인들의 최상의 인사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저녁까지 펀펀하던 양반이 밤새 저세상으로 가는 페단이 푸술했으니 말이다. 지금 젊은이들은 흔히 "급을 얼마나 췄나?", "돈을 얼마나 벌었나?" 하는 인사가 오간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인사의 내용과 형식이 다를 뿐이지 인사법도는 별로 변하지 않은줄로 알고있다. 인사의 목적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는 자세를 갖게 하는것이다. 내가 인사하면 대방에서 곱도록 인사를 해온다.내가 먼저 인사를 한다면 내가 먼저 마음을 주는것과 같다. 남에게 준다는것은 언제나 남한테 받는것보다 더 즐거운것이다. 타인에게 베푼 례의,은혜는 결코 자기한테 되돌아온다는것이 인지상정일것이다. 우리 민족은 깨끗하게 살오온 민족으로서 례의를 중히 여기는 례의지민족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언어도 문자도 옷차림도 몸가짐까지 례의를 벗어나면 욕먹는다. 헌데 지금보면 인사법이 많이 무드러진것 같다. 하기에 노인들은 지금 젊은이들이 인사법을 전혀 모른다고 나무람한다.이런 나무람이 전혀 지나친건 아니다.앞뒤집에서 아래 웃층에서 자주 만나면서도 서로 외면한다.서로간에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살아가는것이다. 아마 이상들이 서로 인사를 모르고 살아가니 젊은이들이 따라배우는가 본다. 나이 분명 아래면서도 이상이 인사를 먼저하기를 기다리면서 빤히 쳐다만 볼 때면 쓰겁기 그지없다. 학생들이  인사 안하는건 그런가 지나쳐 버릴수 있지만 이상앞에서 담배대를 꼬나문것을 보면 발칵 역증이 생기군 한다.  60년대 농촌의 학생들이 짚차를 보면 길옆에 서서 소선대경례를 하던 일, 교원을 보면 사회적으로 깍듯이 인사하는 일, 면목을 몰라도 이상한테 공손히 인사올리던 일들이 그리워지면서 생각을 40년-50년전으로 치달아오른다. 인사가 계기가 되여 서로간에 정이 오간다. 정을 나눔에 있어서 선차적인것이 인사가 아닐가? 급별이 따로 없이 이상제하가 따로 없이 서로 인사를 나눈다면 누구라도 기분이 즐거울것이다.  아침에 인사받으면 온 하루가 즐겁고 점심에 인사받으면 점심밥이 맛있고 저녁인사 받으면 밤잠이 잘올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아침,점심,저녁인사가 다른지 모르겠다. 버스에서 학생이나 젊은이들이 노인한테 자리를 권하는것이 지금 예사로운 일로  되고있다. 헌데 노인들은 그저 응당하다고 여기는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권하는 자리에 않는다. 그들이 자리를 권하는 "행동인사"에 "고맙다"는 말인사 한마디 해주면 얼마나 좋을가?! 젊은이들이 늙으면 이런 본새대로 행할가 걱정된다.  참 돈도 안받는 인사야 왜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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