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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년세계》잡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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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보람 있는 인생 댓글:  조회:736  추천:0  2020-12-29
보람 있는 인생 김인섭 어제저녁 녘, 먹빛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우뢰를 동반한 소나기가 퍼붓더니 야밤에는 장대비로 홀변하여 쏟아져내렸다. 그런데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시꺼멓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듯 해맑게 뒤바뀌고 창공은 푸르다 못해 감청색을 토하며 쨍쨍한 초가을의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끌리기라도 한듯 부랴부랴 뒤산으로 산책을 떠났다. 수림 속에 들어서니 나무잎새 사이로 불어드는 시원한 바람과 땅에서 풍겨나는 부식토 냄새가 풀향기, 꽃향기, 솔향기와 한데 어우러져 야릇하게 후각을 건드려왔다. 무성하게 우거진 각가지 활엽수와 침엽수들은 이름 모를 관목, 화목들과 키재기를 해가며 수풀을 이루었고 빽빽한 진록색 잎사귀들은 바야흐로 다가오는 세찬 대사순환을 예고하고 있었다. 가을의 이 신기한 연출이야말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며 인간에게 하사하는 대자연의 선물더미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인간세상에 태여나 한살, 두살 나이를 먹다보니 어느새 내 인생에도 가을빛이 짙어지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는 건 본시 피치 못할 생명법칙이거늘 그래도 무병장수를 기대하게 되는 게 사람의 본능인가 보다. 요즘 사람들이 100세 시대란 말을 끼니 때 밑반찬처럼 입에 올리고 있는 세태도 이런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유하여 적지 않은 친구들이 60대는 새로운 황금기인 만큼 나만의 꽃을 다시 피워야 한다고 소리높이 웨친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요즘 들어 육신이 자꾸 무거워지고 운신이 시원치 않은가 하면 아련해져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혼신을 버둥거려야 할 상황에 처해버린 것 같다.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고 리유없이 우울해지는 날들이 늘어만 가고 따라서 희로애락이 점철된 세상을 애타게 살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오가는 차수도 많아진다. 어쩌면 인생의 가을은 대자연의 가을과 좀 다른 이색 풍경을 연출하는듯 싶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소속된 집단을 사랑하였고 남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리치로 자신을 채찍질했다고 자부한다. 나름 대로 목표를 만들고 모범생처럼 살아보려는 료량으로, 부모님과 우수한 인물들을 귀감으로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며 살았다고 자식들과 자랑하기도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아, 빈곤, 고독, 질병, 슬픔, 리별, 유혹 등 구곡간장을 녹이는 구간을 수없이 넘나들었지만 때로는 환희로 넘치는 넓은 평야를 지난 기쁨도 있었다. 이젠 사회활동이 대폭으로 줄어들고 어깨에 놓인 부담도 그만큼 적어지자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머리에 자주 떠오르면서 나이가 들면 추억에 산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아침해살이 대지를 비추고 더위가 몰려오니 부랴부랴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에 시장에서 때거리와 찬거리를 마련해오는 이웃집 할머니를 만나 짐을 들어주고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 타지에 출장 갔다 2개월 만에 돌아와 만나는데 무척 반가워하면서 오늘은 돌아간 남편의 소상 준비로 제물을 사오는 참이라며 이야기보따리를 열어제꼈다. 듣고 보니 할머니의 남편은 작년 이맘때에 별세하셨고 그 때 역시 해외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와서야 그 소식을 전해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뒤로부터 나는 홀로 계시는 할머니의 신변사에 관심을 갖게 되였으며 만날 때마다 가담항설로 환담을 나누었는가 하면 부탁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으라고 호언장담까지 했다. 최근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아침시장에 나가는 할머니를 도와 물건을 들어드리는 수호천사로 나섰다. 간단한 배려라도 하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후련해났다. 할머니와 이같이 친해지게 된 계기는 내가 이 동네로 이사 온 바로 그 때부터였다. 이사 온 지 딱 2주 만에 나는 3년 남짓한 기간을 외지에 가 근무하게 되다보니 집에는 여든을 넘긴 로모가 손자를 보살피며 남아있게 되였다. 로모가 일가 살림을 떠메고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야채를 비롯한 식재료나 소비품 등 생필품들을 사들이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지나지 않았다. 로모에게는 하루중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가장 유쾌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정도 외출이면 건강한 사람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일 수 있더라도 로모에게는 상당한 고역이 동반되였다. 집과 시장의 왕복 거리가 대략 1,000메터인데 그 사이에 150메터 정도의 완만한 경사로가 있다는 게 골치거리였다. 늙으신 몸으로 이 구간을 지나가려면 적어도 두번 이상은 쉬여야 했으니 로모로 말하면 고난의 행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할머니의 남편이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는 시간만 되면 늘 그 언덕길에서 짐을 받아서는 집까지 모셔다 드리군 했는데 내가 부재한 몇년간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르신의 은혜로운 처신에 더없이 감동을 받고 내가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려고 몇번이고 말을 건넸는데도 아는 체하고는 낯선 사람 피하듯 옆걸음 치며 가버리군 하는 것이였다. 그래도 락심하지 않고 인사라도 할가 해서 로모한테 슬쩍 물었더니 술은 마시는 걸 못 봤는데 담배를 그렇게 자주 피운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권연 몇갑 챙겼다가 피우라고 드렸더니 담배라곤 입에 대지도 않는다며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였다. 그렇게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 전해주지 못한 채 존경스러운 어르신과 영영 리별을 하고 말았다. 어르신도 즐거운 만남이 나쁘진 않았을 텐데 아둔한 내가 다가가는 방법에 서툴러서 이런 애석함을 남긴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젠 나의 진정을 전할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이름 못할 회한이 감돌군 한다. 그래서 그 보귀한 인연을 소중한 추억으로 가슴 속에 간직하기로 했다. 어둠이 내리면 홀로 계시는 할머니의 집 창문을 멀리서 바라보는 습관이 생겨난 것도 그후부터였다. 창문에 불빛이 어른거리면 안심이 되고 어둠에 싸여있으면 이름 모를 걱정에 휩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작은 수고로움이 어쩌면 할머니의 외로움이나 어려움을 얼마간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어르신이 하던 방식 대로 할머니가 아침시장에 갈 때마다 물건을 들어서 집까지 바래주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되였다. 그렇게라도 할머니한테 나의 온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어르신이 생전에 베푼 진정에 얼마간이라도 보답을 한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뿌듯했다. 물질의 대소가 인간 뉴대관계의 강약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는 세월이다. 심지어 친척,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도 친정과 애정을 전달하는 방식에 실리적 수단이 따르지 못하면 연분이 희박해지는 시대가 되였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금전만능의 시대라도 순수한 마음 하나만은 절대 잃지 말기를 바란다. 떠나는 친구를 위해 준비한 물 한병, 빵 한조각 그리고 손수건 한장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이란 게 녹아있다. 아무리 간단한 배려일지라도 진정만 담겨있다면 받는 사람의 감동도 배로 늘어나게 되여있다. 요즘 우리는 물질적으로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그로부터 즐거움과 안위를 느끼는 사람들 앞에서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눈이 어두웠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난다. 이젠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날을 량적으로 계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을 확실히 헤아려야 한다는 의식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다. 포부를 높이 웨치면서 무엇을 시도하기보다 자기의 분수에 알맞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갈수록 명확해진다. 특히 육신의 부분품들이 하나둘 신음을 하는 상황에 몰리고 보니 자기의 처신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의 후반전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열어가야 할 것인가? 물론 매개인이 처한 상황과 삶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에 그 감수도 천태만상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재부, 정감, 건강의 완미한 결합이라는 일반론도 있지만 이런 존재들이 행복과 절대적인 등호를 이루는 건 아니다. 지난날 남겨진 후회나 앙금을 최소화시키고 세세한 삶의 현장에서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가? 인생의 가을은 만화(晚花)를 피우는 귀중한 시간이다. 고마운 이들을 잊지 말고 이미 맺은 인연을 잘 지켜나가며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어가는 것, 이러는 과정에서 나만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으려 한다. 《로년세계》2021년 1호
37    아버지는 익모초 댓글:  조회:732  추천:0  2020-12-29
아버지는 익모초 방금숙 셋째딸의 병을 치료해주느라 생전에 정성을 다한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도 딸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했는지 양지바른 묘지 우에 익모초로 피여났다. 70년대 중반, 내가 집체호에 나갔을 때의 일로 기억된다. “공업에서는 대경을 따라배우고 농업에서는 대채를 따라배우며 전국에서는 해방군을 따라배워야 한다.”는 모택동동지의 지시에 좇아 전국 농촌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 고조가 기세 드높게 일어났다. 우리 공사에서도 그 지시를 높이 받들고 ‘자력갱생, 간고분투’라는 대채정신에 따라 제1생산력인 청년돌격대를 조직하여 대채전을 만드는 농토 기본건설이 궐기하였다. 나는 공사의 요구에 좇아 공정지휘부의 방송사업을 맡게 되였다. 낮에는 여러 대대 로동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취재를 하고 밤이면 원고를 써서 이튿날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을 리용하여 방송을 했다. 취재와 방송의 편리를 위하여 나는 공정지휘부와 가까이에 있는 한 집체호에 거처를 정하게 되였다. 십평방메터가 되나마나한 작은 방에서 글을 쓰면서 잠을 자군 했는데 내가 자는 잠자리는 온돌이 아닌, 랭기가 심한 차디찬 세멘트바닥이였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내왔지만 한달이 지나니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쑤셔났다. 더군다나 매달 월경이 올 때면 일을 할 수 없으리만치 생리통이 극심했다. 그래도 일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던지라 신경을 쓰지 않고 요행을 바랐다. 헌데 날이 갈수록 증상이 점점 심해져 아예 꼼짝을 못하게 될 줄이야! 마지못해 병원에 갔더니 몸이 몹시 랭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나중에 결혼을 해도 잉태를 못한다나? 녀자로서 임신을 못한다는 게 얼마다 끔찍한 일인지 어린 나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였지만 부모님 립장에서는 딸의 혼사가 달린 문제인지라 소식을 전해듣고는 란리도 아니였다. 셋째딸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아버지가 손 놓고 가만히 앉아있을 리 만무했다. 여기저기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대증을 하고 약을 지어오는가 하면 수소문하여 랭증에 좋다는 토방법을 알아보고 약을 만들어준다면서 동분서주하였다. 어느 날, 내가 취재를 끝내고 점심 때가 다되여서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집체호까지 찾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뜻밖의 상봉이였던지라 반가운 나머지 나는 어린애마냥 달려가 아버지 품에 폴싹 안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초조하고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얼굴이 적잖게 축이 갔구나. 익모초를 달여 만든 거다. 잊지 말고 하루에 세번씩, 한번에 대여섯알씩 챙겨먹어라. 그리고 이건 토끼 가죽으로 만든 방석이다. 토끼가죽이 습기를 막아주는 데 그저그만이라고 하더라. 잘 때는 허리 밑에, 앉아있을 때는 엉덩이 밑에 깔고 있거라.” 약과 방석을 받아안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아버지가 그동안 새벽 이슬에 구슬땀을 흘려가며 익모초 한아름을 등에 지고 구불구불한 산비탈길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화면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익모초 잎과 줄기를 깨끗하게 다듬은 후 해볕에 살짝 말리워서 엿처럼 끈적끈적하게 달인 다음 귀한 피나무꿀을 얻어다 넣고 찹쌀가루를 뿌려 반죽하고 나서 동그랗게 환을 지으면 익모초환약이 된다. 익모초가 환약으로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이 깃들었을지 나름 짐작이 가기에 가슴이 더 알짝지근해났다. 하루중 토끼가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가장 즐겁다던 아버지였다. 닭 모가지 한번 비틀어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이 딸을 위해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를 손수 잡아 가죽방석을 만들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조용히 머리를 돌렸다. 마침 점심 무렵이라 나는 아버지를 잡아끌고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졸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페를 끼치기 싫다면서 기어코 내 손을 뿌리치고 둘째큰아버지 댁으로 갔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버지의 뒤모습을 보노라니 마음이 더없이 아련해났다. 그 날 처음으로 아버지의 뒤모습이 그렇게 쓸쓸해보였다.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왼손에 쥐여있는 손수건으로 가끔씩 땀을 훔쳤다. 직업병으로 인해 약간 올라간 오른쪽 어깨, 훌쩍 걷어올린 바지가랭이, 색 바랜 국방색 운동화… 아버지는 이따금씩 뒤돌아보며 나 보고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여덟 식솔의 생계를 짊어진 아버지는 아픈 몸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가족을 위해 한몸을 바쳤다. 재단사로 일하면서 낮에는 무거운 가위를 들고 하루종일 힘들었을 법도 한데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닭을 치고 돼지먹이를 만들어주느라 밤중까지 쉬지 못하면서 나와 오빠의 대학공부 뒤바라지까지 해주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의 손바닥은 온통 장알투성이였다. 얼마 뒤 나는 집체호를 떠나 대학에 가게 되였는데 숙사생활을 하면서 다시한번 랭증이 도졌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제철이 되면 익모초를 뜯어다 약을 만드는 일이 아버지의 일상이 되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때가 되면 미리 만들어두었던 약을 나에게 보내주군 하였다. 그 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여 떡두꺼비같은 아들까지 보게 되자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손주까지 보았으니 아버지도 이젠 천륜지락을 누릴 일만 남았으려니 했는데 아이를 낳으면서 제왕절개 수술을 했던 수술자리에 염증이 생긴 데다 산후풍까지 겪으면서 신음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다시한번 수심에 잠겼다. 산후 후유증으로 허리통증이 심하여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고 심지어 아이를 안지도 업지도 못하였다. 나의 산후병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는 여기저기에 부탁하여 곰열을 얻어왔고 또다시 딸을 위해 익모초환약을 만들어주었다. 1984년 4월 30일, 이 날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겨 약보따리를 이고 새벽차로 룡정에 있는 우리 집으로 왔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선 지 얼마 안되여 갑자기 우리 교연실 조장선생님이 찾아왔다. “방선생 어머님, 금방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방선생 부친이 갑자기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답니다…” 나는 와들짝 놀라 조장선생의 팔을 잡고 다시한번 물었다. “예? 뭐라구요?” “방선생 아버지가 금방 돌아가셨답니다.” “아니, 새벽까지도 멀쩡하던 분이 이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어머니도 믿을 수 없다는듯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를 바래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나는 조장선생님의 손을 잡고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고 여러번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터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뻐스 정류소로 달려갔다. 거동이 불편하여 아버지 장례식에마저 참가할 수 없었던 나는 집에 홀로 남아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가 몇해전부터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머니가 곁에 계셨더라면 이렇게 돌아가지 않았을 거야… 그래, 다 내 탓이야. 내가 이렇게 드러눕지 않았어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을 거고 어머니가 오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도 돌아가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 때문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나서 내 삶이 힘들다는 핑게로 아버지가 그토록 즐겨 마시는 술 한번 사드린 적 없고 반반한 옷 한견지 해드리지 못한 채 아버지를 이렇게 떠나보내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여름이였다.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갔던 어머니는 눈앞의 광경에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묘지가 온통 익모초로 덮여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딸의 아픔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가 라는 생각에 어머니는 그 익모초를 베여다 달여서 약을 만들어 나에게 보내주었다. 어느 해 추석, 나는 오래간만에 동생네 내외와 함께 고향의 앞산 양지바른 언덕에 모신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가 아버지의 묘는 온통 익모초로 덮여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달려가 묘 앞에 꿇어앉았다. 흘러간 세월 동안 가슴에 맺힌 한과 아픔이 눈물비가 되여 볼을 타고 쏟아져내렸다. 우리는 익모초꽃을 조심스레 베여 아버지 묘지 주위에 둥그렇게 둘러놓았다. 이윽고 아버지가 생전에 즐겨 드시던 음식과 과일들을 제사상에 올려놓고 삼배를 올리였다. 그렇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나도 어느덧 60 고개를 흘쩍 넘겼지만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골수에 사무친다. 올해도 아픈 딸이 걱정되여 어김없이 묘지에 익모초를 피워주신 아버지, 아버지의 산소가 자리한 동남쪽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하해같은 그 사랑에 다시한번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멘다. 그 사랑 이름하여 익모초라 부르고 싶다. 《로년세계》2021년 1호
36    외할머니 손맛 댓글:  조회:612  추천:0  2020-12-29
외할머니 손맛 한미화 년초부터 느닷없이 들이닥친 코로나 사태로 인해 행정적이라 할 만한 두문불출이 이어지다 나니 거미줄 치던 주방은 어느덧 나의 손길로 번쩍번쩍하게 변신했다. 끼니마다 밥을 하느라 매일 주방에서 살다싶이 하노라니 저도 모르게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되는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상에 숟가락만 달랑 얹는 호강을 부리거나 배달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다가 갑자기 이 번잡하고 고단한 작업을 맡게 되면서 비로소 주부의 고달픔을 실감하게 되였다. 외할머니는 태여날 때부터 오른쪽 팔다리는 크고 굵었지만 왼쪽 팔다리는 작고 가늘어서 무겁고 처진 오른쪽 몸 때문에 항상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뚱해졌다. 이런 신체적 원인으로 외할머니는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불편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일터인 가마목에서만은 날아다니는 고수였다. 어릴 적부터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농사일로 바쁠 때면 외할머니는 나와 동생을 보살피랴, 온 가족의 끼니를 마련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외할머니의 아침은 닭이 홰를 치는 새벽에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부엌에는 큰솥, 중솥 그리고 평가마가 걸려있었는데 외할머니는 먼저 큰솥에 감자를 깎아서 가지런히 놓은 후 그 우에 미리 씻어놓은 입쌀과 다른 곡물들을 얹어 밥을 지었다. 철에 따라 곡물들도 원두콩, 열콩, 찰옥수수 등으로 바뀌였다. 갖은 잡곡과 감자가 한데 어우러져 밥맛이 유난히 구수했고 찰졌다. 그래서 그랬는지 누룽지도 별맛이였다. 다음은 차례 대로 중솥에는 찌개를 끓이고 평가마에는 료리를 볶았다. “딱딱딱”, 도마에서 야채 써는 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오면 우리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는다. 외할머니는 썰어놓은 야채를 차례 대로 가마에 넣고 주걱으로 휘리릭 저어놓고는 부엌 아궁이에 내려간다. 잘 마른 부지깽이를 아궁이에 밀어넣고 탁탁 치면 금세 불길이 거세지고 솥은 쌕쌕 뜨거운 김을 토해낸다. 구수한 밥 냄새와 자글자글 끓는 찌개 냄새, 그리고 제철 야채를 볶을 때마다 꼭 잊지 않고 한두점씩 넣었던 삼겹살이 기름에 볶아질 때마다 풍기는 고소한 냄새, 이런 ‘냄새들의 향연’은 그야말로 아침잠을 삽시간에 걷어가는 도적이였다. 나와 동생이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면 할머니는 갓 구운 찹쌀지짐은 엿에 발라서, 감자지짐은 양념간장에 찍어서 우리 입에 넣어준다. “옜다, 요거 맛 좀 보거라.” 외할머니는 늘 음식을 손으로 휙 뜯어서 우리 앞에 내밀었는데 그 때마다 나와 동생은 앞다투어 잘도 받아먹었다. 또 외할머니가 국자로 국물을 떠서 한입 간을 보고 다시 우리더러 맛 보라고 하면 우리는 아기제비처럼 목을 길게 빼들고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손맛이 더해져서 그랬는지 외할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은 그야말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꿀맛이였다. 사탕이나 과자, 과일과 같은 간식들이 귀한 시절이라 떡은 시골 애들에게는 귀하디귀한 먹거리였다. 외할머니는 멥쌀가루나 찹쌀가루, 밀가루, 옥수수가루나 녹두가루, 아무튼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가루를 비닐봉지에 넣어 비상용으로 잘 보관해두었다가는 우리가 배고파할 때면 간식으로 전을 부쳐주군 했다. 팥앙금이나 콩가루도 외할머니가 떡을 만드는 과정에 빼놓을 수 없는 주재료였다. 식구들이 아침상에 마주앉으면 외할머니는 습관처럼 자신의 그릇에서 밥을 덜어서는 외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그릇에 얹어놓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번거롭게 왜 그러시느냐고 한사코 사양했지만 밥상에서의 이 관행은 늘 변함이 없었다. 외할머니의 식탁에는 늘 찌개, 볶음료리, 김치가 빠짐없이 올랐고 음식에 들어가는 양념은 눈으로 어림짐작해서 손으로 한줌 쥐여서 훌훌 뿌렸다.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밥상에서는 새로 볶은 반찬에서 김이 몰몰 피여오르고 있었다. 식탐이 많은 나와 동생이 간혹 식탁에 오른 음식에 먼저 손을 대기라도 하면 외할머니는 우리의 손을 탁 치면서 어른들이 저가락을 들기 전에는 절대 먼저 먹으면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군 했다. 우리 집 가마목에는 늘 따끈따끈한 음식을 담은 남비가 놓여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 오누이한테 그 남비는 가장 반가운 존재였다. 남비 안에는 항상 떡이나 주먹밥, 삶은 고구마나 옥수수, 감자누룽지 같은 음식이 푸짐하게 들어있었다. 가끔 입이 간질거리고 심심할 때면 외할머니는 소금을 뿌려 말린 미꾸라지나 돌종개에 밀가루옷을 입혀 기름에 달달 볶아서 주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초저녁에도 외할머니의 가마목은 분주하기만 하다. 외할머니는 뜨거운 열기가 한풀 꺾인 평가마에 콩이나 해바라기, 찰옥수수알을 볶는가 하면 감자나 고구마를 펴놓고 대야를 덮어놓고 군고구마나 군감자를 만들어 식구들의 입을 호강시켜주었다. 외할머니는 특정된 직업이 없어도 한평생 가마목을 직장으로, 주부를 전업으로 삼아왔다. 외할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가고 홀로 남겨져 치매에 시달리던 시절에도 외할머니는 가마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해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면서 밥상을 엎지 않나, 새로 장만한 전기밥솥에 솥을 넣지 않은 채 씻은 쌀을 그대로 넣어 대형사고가 일어날 번한 적도 있었다. 전기밥솥이나 전자렌지 같은 신형의 가정용 전기제품들은 음식 본연의 맛을 살릴 수 없다며 여름에도 굳이 밖에 딴가마를 걸겠다고 우기는가 하면 홀로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바지를 태운 적도 있다. 그 뒤 우리가 사는 고장에도 출국바람이 불면서 아버지는 외국으로 떠났고 나와 동생도 잇달아 타향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단둘이 남아있는 가마목에서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시끌시끌한 풍경을 찾아볼 수 없게 되였다. 그러니 외할머니가 밥상이 조촐하다고 화를 낼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가마목을 늘 차지하고 있던 가마솥도 이젠 소임을 다해서 바통을 전기밥솥이나 가스렌지, 전자렌지 등 신형의 전자제품에 넘겨주었고 외할머니도 평생을 바친 가마목에서 은퇴했다. 부엌 아궁이에서 마른 장작이 타는 소리, 가마가 쌕쌕 뜨거운 김을 토해내던 소리 그리고 그 옆에서 귀맛 좋게 들리던 칼도마 소리도 이젠 그냥 한가닥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있을 뿐이다. 가족들에게 맛 있고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겠노라 하루도 빠질세라 가마목과 아궁이를 넘나들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삼삼하다. 그 투박한 손끝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엔 정녕 가족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있었기에 지금도 외할머니의 손맛이 배여있는 음식들이 그토록 그리운 모양이다.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거처를 옮기면서 고향의 맛을 찾을가 해서 수많은 음식점들을 누비고 다녔는데도 신선한 유기농 식재료만 고집했다는 음식도, 훌륭한 료리사의 손끝을 거쳐 탄생했다는 특급료리도 외롭고 지친 나의 오감을 달래주지 못했다. 그 익숙한 맛이 하도 그리워서 집에서 밥을 한답시고 인터넷에 널려있는 레시피를 본 따 어설프게 흉내를 내보았지만 외할머니의 손맛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넙죽넙죽 받아먹을 때는 그것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 줄 몰랐지만 나도 한가정의 밥상을 책임지는 주부가 되여보니 외할머니의 로고에 새삼 때늦은 감사를 드리게 된다. 《로년세계》2021년 1호
35    응달에도 해빛이 들 때가 있다. 댓글:  조회:753  추천:0  2020-12-29
응달에도 해빛이 들 때가 있다.  박향선 금년은 도문시가 자치주의 현급 시로 된 지 55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천지개벽의 변화를 거듭하며 날로 아름답게 변모하는 고향을 바라보면서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공화국이 창건되던 해 도문에서 태여난 나는 70여년 인생을 고향과 고락을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래희 나이를 넘긴 오늘 눈부신 변화를 가져온 고향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희비로 얼룩진 지나온 세월들이 가슴에 사무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세기 60년대, 기근에 시달리던 그 시절 누군들 고생하지 않았으랴만 공장에 출근하던 아버지가 급작스레 세상을 뜨는 바람에 우리 가정은 하루아침에 천길나락으로 굴러떨어지게 되였다. 어린 삼남매를 먹여살리는 무거운 짐이 갓 서른을 넘긴 어머니의 어깨를 고스란히 짓누르게 되였다. 하루하루 눈물로 얼굴을 적셔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어머니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녀성이였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집에 있는 쓸 만한 기물들을 죄다 팔아 버티다가 나중에는 살림집을 판 돈에 여기저기서 빌려온 돈을 보태 길거리에 자그마한 복장점을 차리였다. 말이 복장점이지 작은 단칸방에 간막이를 하고 반은 살림집으로 써야 하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코딱지 만한 방에 불과하였다. 그래도 이젠 살길이 생겼다고 어렵사리 갖춘 재봉틀을 만지작거리는 우리들의 기쁨은 한량없었다. 그 때로부터 어머니는 복장점 일에만 몰두하고 맏딸인 내가 어머니의 한팔이 되여 집안일을 거들게 되였다. 두 남동생이 아직 어리다보니 가내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였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물을 길어들이고 밥을 짓고 설겆이를 하고 빨래를 하는 등이 어느새 나의 일상으로 굳어졌다. 주말이 와도 다른 애들처럼 신나게 뛰여놀 수가 없었다. 철길에 널린 석탄을 쓸어오고 목재공사에 가서 땔감을 끌어와야 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힘들었던 건 사놓은 석탄을 집까지 날라오는 일이였다.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한번에 100근씩 사서 두번에 나누어 큰 양철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날랐는데 어찌나 무거웠던지 마치 바위가 정수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임을 내려놓고 잠간이라도 숨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어도 그렇게 앉았다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곧장 집에 돌아오고 나면 온몸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하지만 언제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다시 양철대야를 들고 돌아서야 했다. 나머지 석탄을 마저 옮겨와야 했으니 말이다. 그 시절 나는 어머니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는 지어 학교 가는 날마저 나 보고 점심시간에 강변에 나가 빨래를 해오라고 일을 맡겼다. 저녁에 책을 펼쳐놓고 숙제를 좀 할라치면 굶어죽을 판에 무슨 공부냐며 책을 와락와락 걷어서 부엌에 집어던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울면서 부엌에 내려가 책을 주어오군 했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영화관람을 자주 조직했다. 한번에 10전만 내면 볼 수 있었는데 친구들이 웃고 떠들면서 영화구경을 떠날 때면 나는 구석에 숨어 눈물을 훔치군 했다.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어머니한테 맺힌 게 많았다. 초중시절의 일로 기억하고 있다. 체육시간인데 옆구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후에도 으슬으슬 몸이 떨려나는데도 티를 내지 않고 그런대로 하루하루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병원으로 가보자고 어머니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밤마다 끙끙거리며 신음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걱정하다가 간밤에 열이 펄펄 끓어오르자 덴겁한 모양이였다. 그길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았더니 륵막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후로 날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번마다 주사기로 옆구리에서 누런 물을 반병씩 뽑아냈는데도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면서 더럭 겁이 났다. 나중에 어머니가 용하다는 어느 중의를 찾아가 초약 60첩을 구해다 달여주어 먹고 나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돈을 금싸락같이 아끼던 분이 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여기저기 친척들한테 손을 내미는 역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음은 확 달라졌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따뜻한 사랑이 모성애란 걸 심심히 느끼게 되였다. 어린시절, 가난의 설음을 진저리 치도록 겪으면서 나의 마음속은 온통 하루빨리 이 구질구질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였다. “어려서 고생하던 계집애는 시집 가서도 고생하더라.”라며 주위사람들이 모여서 흉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어디 두고봐요. 이제 꼭 시집을 잘 가서 누구보다 잘 먹고 잘살 거예요.’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였다. 한바탕 병치레를 하고 나서 학교로 나간 지 얼마 안되여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미구하여 어머니의 복장점은 ‘자본주의꼬리’라는 딱지를 달고 문을 닫아야 하는 운명을 맞이했고 그 바람에 우리는 또 살길이 막막해졌다. 그나마 1968년 여름, 동학들은 모두 집체호로 내려갈 때 나만 ‘극빈호’ 명단에 올라 공장에 로동자로 추천받아 ‘철밥통’이나 다름없는 로동자가 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여 천만다행이였다. 하지만 복장점이 문을 닫고 하루아침에 무직자가 된 어머니가 농촌동원 대상이 되여 농촌에 내려가게 되다보니 그 때로부터 두 동생을 돌보는 짐이 가냘픈 내 어깨에 떨어지게 되였다. 몇년 지나자 나에게도 슬슬 혼사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처녀들이 가장 선호하는 결혼대상은 부대 군관이였는데도 나는 속으로 은근히 대학생을 점 찍고 있었다. 부대군관이요, 당원간부요, 고급기술원이요 하며 여기저기서 소개가 들어와도 대학생이 아니라는 리유로 나는 전부 거절해버렸다. 그러자 농촌에 계시던 어머니마저 달려와 “어느 눈 먼 대학생이 동생이 둘씩 딸린 처녀를 데려가자 하겠느냐? 꽃도 한철이라고 이러다가 좋은 사람 다 놓친다.”라며 안달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은 보람이 있다고 할가, 마침내 나는 맘에 꼭 드는 대학생 총각을 만나게 되였다. 하지만 년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조건이 마음에 걸린다면서 어머니는 한사코 막아나섰다. “동생을 둘씩 달고 어떻게 늙은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산단 말이냐? 당장 헤여져라.” 어머니의 불같은 성미를 잘 알고 있었던지라 나는 싹 트지도 못한 첫사랑을 마음 속에 깊숙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잘 듣던 나는 처음으로 어깃장을 부리면서 이미 약혼했다고 거짓말을 둘러대고 모든 청혼자들을 거절해버렸다. 일년 쯤 지나니 청혼이 점점 뜸해졌다. 다급해난 어머니는 나 몰래 그 대학생 총각을 찾아갔다. 어머니의 성격에 쉽지 않은 선택이였으련만 딸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은 모양이였다. 지난 세기 70년대초, 내가 24살 나던 해 우리는 검소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우리의 신혼은 년로한 시어머니와 나의 두 동생들과 함께 오구작작 붐비는 비좁은 집에서 시작되였다. 지금은 물론 그 세월에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이였다. 너나없이 쪼들리며 살아가던 그 년대에 나는 달마다 단위 호조금을 당겨쓰면서 두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 두 동생을 부양하는 누나로, 시어머니를 모시는 무던한 며느리로 무탈하게 가정을 꾸려나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 부부가 손 잡고 드팀없이 가정이란 이 ‘둥지’를 알심 들여 지켜왔기에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몇년이 흘러 농촌으로 내려갔던 어머니가 지천명의 나이에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세파를 겪을 대로 겪은 어머니는 어느덧 그 곱던 얼굴이 온통 주름투성이로 겉늙어버렸다. 할빈 지역에서 자란 어머니는 한족말이 막힘없는 데다 머리도 잘 돌아 큰 장사는 몰라도 작은 돈벌이에는 미립이 터있었다. 집매매가 성행하던 당시 어머니는 위치가 괜찮다 싶은 낡은 집을 사서 수리해 넘겨팔아 점차 손에 목돈을 쥐게 되였다. 후에는 또 위치가 괜찮은 도문 6거리 삼각지대에 〈신춘상점〉이란 간판을 내걸고 조석이 따로 없이 아등바등 돈을 벌어들여 일찍 도문시내에서 ‘돈 많은 로친네’로 소문이 났다… 누군가 인생은 달리는 렬차와 같다고 했다. 캄캄한 턴넬 같은 날들이 지긋지긋하긴 해도 참고 버텨내기만 하면 그 앞에서는 항상 밝고 아름다운 세상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으니까. 《로년세계》2021년 1호
34    어머님의 늦바람 댓글:  조회:778  추천:1  2020-12-29
어머님의 늦바람 박은자 “며느리는 얼마나 좋겠소? 나가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글도 쓰고… 너무 부럽소!” 그러는 어머님께 당신도 잘살아오셨다고 하면 한뉘 가마목 운전수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어머님은 나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인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에 왕청현 송림동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딸로 태여났다. 한창 꿈을 키울 사춘기에 접어들어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형편상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원이 되는 게 시어머님의 꿈이였다. 어린시절, 성적이 우수하여 ‘꼬마선생님’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다녔는데도 가난 때문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접어야만 하는 숙명과 부딪쳤다. 담임선생이 하도 아쉬워서 집까지 찾아오셔서 청을 들었지만 남자아이라면 어떡하나 방법을 대보겠는데 녀자는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된다면서 선생님을 다시 돌려보냈다. 흑룡강에 가면 이밥과 고기를 매일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연변에서 흑룡강으로 이사 간 지 얼마 안되던 무렵이였고 학비가 고작 1원 50전이였는데도 그것마저 대줄 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님은 열여섯살 때부터 어른들과 함께 생산대 일에 땀 뿌렸으나 나이가 어려서 일을 아무리 악착같이 해도 어른들과 같은 공수를 받기 힘들었다. 19살 나는 해, 어머님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다시 훈춘으로 이사 가게 되였다. 그 때가 바로 ‘3년 재해’로 온 국민이 겨떡으로 배를 채우는가 하면 희멀건 죽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고난의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시외할머니께서 임신을 하게 되였다. 하루는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님을 불러놓고 생산대 일을 며칠 못 나오더라도 벼이삭을 주어 쌀을 좀 준비하라고 시켰다. 산모가 출산을 하고 나서 필요할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해놓으라는 당부였다. 그렇게 이튿날부터 날이 밝아오기 전 어두운 새벽이면 어머님은 남의 눈을 피해 이삭주이를 다니는 할머니들을 따라나섰다. 엄동설한에 솜옷도 없이 홑옷바람으로 20리 새벽길을 걸어갔다. 논밭에서 눈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온종일 벼이삭을 주었는데도 량이라야 얼마 되지도 않았다. 겨떡 하나로 점심을 에때우고 계속하여 벼를 주었는데 저녁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거의 녹초가 되여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멀건 죽물 한사발로 저녁을 때우고는 주어온 벼이삭을 손매돌로 갈아 벼껍데기를 벗겨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쌀을 다섯근이나 모으게 되였다. 시외할머니는 엄동설한 날씨의 새벽에 아이를 출산하였다. 석탄불을 피워 산모한테 대접한다고 밥을 지어놓고 숟가락을 얹어놓았는데 잠 자던 4살짜리 남동생이 어디선가 밥냄새가 난다며 벌떡 일어나니 모두가 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쌀밥이라고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그 세월, 얼마나 배고팠으면 밥냄새에 잠을 깨였을가 하며 어머님은 지금도 그 세월을 회억할 때면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군 한다. 21살에 소개로 아버님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시집도 역시나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는 형편이였다. 림장의 부기원인 아버님이 산으로 들어가있는 시간이 많았던지라 어머님은 치매로 앓고 계시는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혼자서 돌보아야 했다. 하도 외롭고 무서워서 주위가 고요한 밤이면 친정집이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가난해도 다섯 형제가 시끌벅적하던 친정이 그리워 남몰래 눈물을 흘린 밤이 기수부지였다. 2년 터울로 세 아이가 태여나면서 어깨에 놓인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 싶어 어머님은 농사일이 끝나면 아이들만 집에 남겨둔 채 부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된 육체로동으로 다리가 성할 날이 없었는데 추운 겨울이면 그 통증이 더 심해졌다. 아이들이 점차 자라고 생활이 펴이면서 숨을 돌릴 만하니 아버님이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렸다. 하지만 어머님은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였으며 아버님이 돌아가는 날까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에 욕창 하나 생길세라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18년전,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어머님은 한동안 남편과 사별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생의 동반자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오래도록 헤여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이모님께서 어머님을 로인대학으로 이끌었다. 로인대학의 시간표는 꽤나 알찼다. 노래교실, 건강교실, 하모니카교실… 어머님은 일주일에 세번씩 열심히 로인대학을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인가 반에서 반장으로 당선되였다. ‘모범학생’이라고 칭찬을 해줬더니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님한테도 귀여운 데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를 청하였더니 이모님이랑 두 손을 맞잡고 진지하게 나섰다. 은방울자매가 따로 없었다. 살짝 웃는 칠순 넘는 노인의 얼굴에서 나는 수줍고 약간 들떠있는 소녀의 감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음정에 맞춰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어머님을 보면서 꽃보다도 더 고왔을 청춘, 가족을 받드느라 끝없는 희생으로 취미도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을 과연 누가 미봉해줄가 하는 이쉬움이 들면서 눈시울이 촉촉해났다. 가사가 너무 좋다며 설명절에 만나면 며느리인 나에게도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한뉘 고생만 했으니 아버님을 보내고 나서 그 힘든 병수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셨다 했는데 어머님의 마음은 그게 아니였다. 두분이서 함께 했던 지난 시절이 그리도 그립단다. 유족하지 못해도 다섯식구가 단란히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픈 몸이여도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얼마나 좋겠느냐며 애석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님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났다. 로년대학을 드나들며 자신만을 위한 여생을 디자인하며 삶을 꽃 피우던 어머님께서 결국에 자식을 위해 로년대학교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오시게 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서 직장생활을 하는 외손녀의 뒤바라지로 북경행을 결심하게 되였던 것이다. 시누이네 부부가 20년 동안 로씨야 장사를 하다보니 시조카는 돌이 지나서부터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님의 슬하에서 자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동네에 살게 되였다만 출근한다는 핑게로 자주 들여다보지 못하고 가끔씩 색다른 음식을 만들 때면 어머님과 조카를 부르군 했다. 연변에서 살다가 한족동네에 오신 어머님이 인차 적응을 할 수 있을는지 은근히 걱정부터 앞섰다. “성 쌓고 남은 돌”이라며 혹여 자식들에게 짐이 될세라 어머님은 매일 운동하느라 움직였고 조카한테 부탁하여 한어공부 책까지 주문하였다. 가족들이 함께 외식을 할 때마다 어머님은 식당간판에서 아는 한자를 찾아내 손녀들 앞에서 글자를 맞추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자기관리를 잘하시고 긍정적으로 로후를 보내니 자식으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였다. 어머님께 북경에 있는 로인회관을 추천했더니 고향처럼 지척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차들이 많아서 자신이 없다고 한사코 사양하셨다. 조카가 출근하면 빈집에 혼자 계실 게 뻔했는데 우리도 평시에는 출근을 하다보니 주말에나 가끔씩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만나기만 하면 지나간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님의 며느리로 20여년을 살면서 어떤 이야기는 열번도 더 들어 달달 외울 지경이다. 문득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학공부를 함께 하자고 청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어머님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나의 제안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책장에서 뽑아준 수필집을 가지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 어머님께서 육필로 열페지나 되는 원고를 써가지고 오신 게 아니겠는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써내려간 글을 보면서 하마트면 인재를 놓칠 번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니 정말 글로 낼 수 있느냐며 재차 확인을 하셨다. 스토리는 좋으나 문맥을 잘 다듬어야 한다고 수정의견을 드렸다. 여러번의 퇴고에도 끄덕없이 다섯번의 수정을 거쳐 어머님의 처녀작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 일흔다섯〉이 《연변녀성》에 실렸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 큰 보물을 얻기라도 한듯 어머님은 잡지를 받아들고 감격해마지않았다. 허리에 힘이 들어간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어머님께서 잡지를 머리맡에 소중히 두고 하루에도 몇번씩 펼치는지 모른다며 조카가 만날 때마다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들려주었다. 그 뒤로 어머님은 글쓰기에 아주 푹 빠져버렸다. 어떤 날은 맛 있는 반찬까지 해놓고 이 ‘선생님’을 청해서 수정을 부탁하는가 하면 독후감을 써서 공유하기도 했다. 어느 날 함께 문학교실로 가자고 팔을 끌었더니 무식쟁이 로친네가 그런 데를 어떻게 가느냐며 어머님은 한사코 도리질을 했다. “배움에 나이가 있나요?”라고 류행가요 가사까지 곁들여가며 유혹했더니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척을 했다. 조용히 청강하는 모습이 영낙없는 모범학생이였다. 세상 참 좋다며, 무식쟁이 할미도 교수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옆에 앉아서 사진 찍는 영광을 누렸다고 입이 함박 만해졌다. 가슴 속에 꽁꽁 묻어두었던 욕망 때문이였던지 어머님의 열정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내가 바쁘다는 핑게로 어머님이 써온 원고를 한켠에 놔두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조카가 결혼하면서 어머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고가 어떻게 됐느냐고 슬쩍 물어봐서야 부랴부랴 원고를 찾아 훑군 하였다. 여러번 다시 돌려보내도 언제 한번 락심하거나 수정을 미루는 법이 없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했기에 타자는 내가 해서 투고를 하기로 하였다. 쓰는 원고마다 채용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수 있지 않겠느냐며 힘을 넣어주었다. 어머님이 고향에 돌아가신 후의 어느 날, 잠간 여유가 나져서 어머님이 썩전에 보냈다는 원고를 찾아보았는데 오간 데 없었다. 온 가족이 움직여 둘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아도 없었다.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같았다. 하필이면 그 때 어머님한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몇마디 안부인사가 오가고 어머님은 원고가 어떻게 됐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바쁜 사람에게 괜히 늙은이가 주책이라며 도리여 미안해하는 어머님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해났다. 다행히 수정전의 육필원고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여 안도의 숨이 나왔다. 어머님은 원고를 다시 수정하여 핸드폰으로 찍어 나한테로 보내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투고한 원고 3편이 선후로 잡지에 모두 채용되였다. 잡지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람으로 어머님은 추운 겨울날 눈길도 마다하고 친구와 함께 책가게에 다녀왔다. 어머님은 글쓰기로 지난날의 고된 삶 속 응어리를 풀어내고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계셨다. 원고가 선정되였다는 소식에 본인이 쓴 글이 활자로 찍혀나올 그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가 설레였던 시간들이였을 것이다. 딸애의 일이라면 그렇게 등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쁘다는 리유로 어머님의 기다리는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다는 건 누가 봐도 너무나 볼품없는 변명이였다. 글을 어느 정도 쓰고 나면 기가 빠지고 귀찮아서 포기할 줄 알았다.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다 쏟는 게 젊은이들만의 특권인 줄 알았는 데 그게 아니였다. 어머님을 보면서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79세 고령임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어머님은 나한테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벌써 봄이다. 개나리며 벗꽃이 앞다투어 피여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노란색, 하얀색, 핑크색으로 사람들의 오감을 유혹하는 꽃들도 예쁘지만 묵은 가지에서 빠끔히 돋는 연초록색 새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울긋불긋 피여나 어여쁨을 뽐내는 꽃이야 이리 봐도 곱고 저리 봐도 곱지만 오늘따라 묵은 가지에서 돋는 새싹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리유는 무엇일가? 20여년전, 고부간으로 만나 어머님의 사랑 속에서 모난 마음을 갈아 둥글게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시집 와서 받은 첫 선물이 어머님이 그동안 소중히 모아둔 《생활안내》신문이여서 새삼 놀란 적도 있었다. 딸애를 출산하고 나서 병실에서 나오니 어머님이 등을 내밀어 나를 업어주었다. 백살까지 살게 해준다고 70일 동안 손에 물 한방울 못 대게 하고 엄동설한에 재래식 시골집에서 산후조리에 정성을 다하신 어머님이다. 가끔은 남편에게 서운해 일러바치는 나에게 “남자는 죽을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며 언제나 내 편이 되여 서리가 내린 내 마음을 다독여주신 것도 어머님이였다. 친정엄마가 없는 나에게 각별한 사랑을 준 어머님에게 해드린 것이 없는 나다. 이제라도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켜 글쓰기 공부를 함께 하면서 당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따스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꼭 발표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가 아니여도 좋다. 소중한 꿈 하나를 수중에 간직함으로써 마음속에 어여쁜 꽃들을 가꾸어내 그 아름다운 정기를 다 받아들여 밭고랑 같은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였으면 좋겠다. 꿈은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늦바람을 응원한다고 전화를 드려야겠다. “며느리는 얼마나 좋겠소? 나가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글도 쓰고… 너무 부럽소!” 그러는 어머님께 당신도 잘살아오셨다고 하면 한뉘 가마목 운전수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하신다. 어머님은 나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인생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에 왕청현 송림동 산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딸로 태여났다. 한창 꿈을 키울 사춘기에 접어들어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형편상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원이 되는 게 시어머님의 꿈이였다. 어린시절, 성적이 우수하여 ‘꼬마선생님’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다녔는데도 가난 때문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접어야만 하는 숙명과 부딪쳤다. 담임선생이 하도 아쉬워서 집까지 찾아오셔서 청을 들었지만 남자아이라면 어떡하나 방법을 대보겠는데 녀자는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된다면서 선생님을 다시 돌려보냈다. 흑룡강에 가면 이밥과 고기를 매일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연변에서 흑룡강으로 이사 간 지 얼마 안되던 무렵이였고 학비가 고작 1원 50전이였는데도 그것마저 대줄 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님은 열여섯살 때부터 어른들과 함께 생산대 일에 땀 뿌렸으나 나이가 어려서 일을 아무리 악착같이 해도 어른들과 같은 공수를 받기 힘들었다. 19살 나는 해, 어머님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다시 훈춘으로 이사 가게 되였다. 그 때가 바로 ‘3년 재해’로 온 국민이 겨떡으로 배를 채우는가 하면 희멀건 죽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고난의 시대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시외할머니께서 임신을 하게 되였다. 하루는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님을 불러놓고 생산대 일을 며칠 못 나오더라도 벼이삭을 주어 쌀을 좀 준비하라고 시켰다. 산모가 출산을 하고 나서 필요할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해놓으라는 당부였다. 그렇게 이튿날부터 날이 밝아오기 전 어두운 새벽이면 어머님은 남의 눈을 피해 이삭주이를 다니는 할머니들을 따라나섰다. 엄동설한에 솜옷도 없이 홑옷바람으로 20리 새벽길을 걸어갔다. 논밭에서 눈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온종일 벼이삭을 주었는데도 량이라야 얼마 되지도 않았다. 겨떡 하나로 점심을 에때우고 계속하여 벼를 주었는데 저녁때가 되여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거의 녹초가 되여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멀건 죽물 한사발로 저녁을 때우고는 주어온 벼이삭을 손매돌로 갈아 벼껍데기를 벗겨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쌀을 다섯근이나 모으게 되였다. 시외할머니는 엄동설한 날씨의 새벽에 아이를 출산하였다. 석탄불을 피워 산모한테 대접한다고 밥을 지어놓고 숟가락을 얹어놓았는데 잠 자던 4살짜리 남동생이 어디선가 밥냄새가 난다며 벌떡 일어나니 모두가 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쌀밥이라고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그 세월, 얼마나 배고팠으면 밥냄새에 잠을 깨였을가 하며 어머님은 지금도 그 세월을 회억할 때면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군 한다. 21살에 소개로 아버님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시집도 역시나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는 형편이였다. 림장의 부기원인 아버님이 산으로 들어가있는 시간이 많았던지라 어머님은 치매로 앓고 계시는 시어머니와 시동생을 혼자서 돌보아야 했다. 하도 외롭고 무서워서 주위가 고요한 밤이면 친정집이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가난해도 다섯 형제가 시끌벅적하던 친정이 그리워 남몰래 눈물을 흘린 밤이 기수부지였다. 2년 터울로 세 아이가 태여나면서 어깨에 놓인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 싶어 어머님은 농사일이 끝나면 아이들만 집에 남겨둔 채 부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된 육체로동으로 다리가 성할 날이 없었는데 추운 겨울이면 그 통증이 더 심해졌다. 아이들이 점차 자라고 생활이 펴이면서 숨을 돌릴 만하니 아버님이 젊은 나이에 중풍에 걸렸다. 하지만 어머님은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였으며 아버님이 돌아가는 날까지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에 욕창 하나 생길세라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18년전,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어머님은 한동안 남편과 사별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생의 동반자를 잃어버린 슬픔에서 오래도록 헤여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에 이모님께서 어머님을 로인대학으로 이끌었다. 로인대학의 시간표는 꽤나 알찼다. 노래교실, 건강교실, 하모니카교실… 어머님은 일주일에 세번씩 열심히 로인대학을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인가 반에서 반장으로 당선되였다. ‘모범학생’이라고 칭찬을 해줬더니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님한테도 귀여운 데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를 청하였더니 이모님이랑 두 손을 맞잡고 진지하게 나섰다. 은방울자매가 따로 없었다. 살짝 웃는 칠순 넘는 노인의 얼굴에서 나는 수줍고 약간 들떠있는 소녀의 감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음정에 맞춰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어머님을 보면서 꽃보다도 더 고왔을 청춘, 가족을 받드느라 끝없는 희생으로 취미도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을 과연 누가 미봉해줄가 하는 이쉬움이 들면서 눈시울이 촉촉해났다. 가사가 너무 좋다며 설명절에 만나면 며느리인 나에게도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한뉘 고생만 했으니 아버님을 보내고 나서 그 힘든 병수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셨다 했는데 어머님의 마음은 그게 아니였다. 두분이서 함께 했던 지난 시절이 그리도 그립단다. 유족하지 못해도 다섯식구가 단란히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픈 몸이여도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얼마나 좋겠느냐며 애석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님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났다. 로년대학을 드나들며 자신만을 위한 여생을 디자인하며 삶을 꽃 피우던 어머님께서 결국에 자식을 위해 로년대학교를 포기하고 북경으로 오시게 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혼자서 직장생활을 하는 외손녀의 뒤바라지로 북경행을 결심하게 되였던 것이다. 시누이네 부부가 20년 동안 로씨야 장사를 하다보니 시조카는 돌이 지나서부터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머님의 슬하에서 자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동네에 살게 되였다만 출근한다는 핑게로 자주 들여다보지 못하고 가끔씩 색다른 음식을 만들 때면 어머님과 조카를 부르군 했다. 연변에서 살다가 한족동네에 오신 어머님이 인차 적응을 할 수 있을는지 은근히 걱정부터 앞섰다. “성 쌓고 남은 돌”이라며 혹여 자식들에게 짐이 될세라 어머님은 매일 운동하느라 움직였고 조카한테 부탁하여 한어공부 책까지 주문하였다. 가족들이 함께 외식을 할 때마다 어머님은 식당간판에서 아는 한자를 찾아내 손녀들 앞에서 글자를 맞추고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자기관리를 잘하시고 긍정적으로 로후를 보내니 자식으로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였다. 어머님께 북경에 있는 로인회관을 추천했더니 고향처럼 지척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차들이 많아서 자신이 없다고 한사코 사양하셨다. 조카가 출근하면 빈집에 혼자 계실 게 뻔했는데 우리도 평시에는 출근을 하다보니 주말에나 가끔씩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만나기만 하면 지나간 이야기들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님의 며느리로 20여년을 살면서 어떤 이야기는 열번도 더 들어 달달 외울 지경이다. 문득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학공부를 함께 하자고 청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어머님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나의 제안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책장에서 뽑아준 수필집을 가지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 어머님께서 육필로 열페지나 되는 원고를 써가지고 오신 게 아니겠는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써내려간 글을 보면서 하마트면 인재를 놓칠 번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니 정말 글로 낼 수 있느냐며 재차 확인을 하셨다. 스토리는 좋으나 문맥을 잘 다듬어야 한다고 수정의견을 드렸다. 여러번의 퇴고에도 끄덕없이 다섯번의 수정을 거쳐 어머님의 처녀작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 일흔다섯〉이 《연변녀성》에 실렸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 큰 보물을 얻기라도 한듯 어머님은 잡지를 받아들고 감격해마지않았다. 허리에 힘이 들어간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어머님께서 잡지를 머리맡에 소중히 두고 하루에도 몇번씩 펼치는지 모른다며 조카가 만날 때마다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들려주었다. 그 뒤로 어머님은 글쓰기에 아주 푹 빠져버렸다. 어떤 날은 맛 있는 반찬까지 해놓고 이 ‘선생님’을 청해서 수정을 부탁하는가 하면 독후감을 써서 공유하기도 했다. 어느 날 함께 문학교실로 가자고 팔을 끌었더니 무식쟁이 로친네가 그런 데를 어떻게 가느냐며 어머님은 한사코 도리질을 했다. “배움에 나이가 있나요?”라고 류행가요 가사까지 곁들여가며 유혹했더니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척을 했다. 조용히 청강하는 모습이 영낙없는 모범학생이였다. 세상 참 좋다며, 무식쟁이 할미도 교수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옆에 앉아서 사진 찍는 영광을 누렸다고 입이 함박 만해졌다. 가슴 속에 꽁꽁 묻어두었던 욕망 때문이였던지 어머님의 열정은 한결같았다. 하지만 내가 바쁘다는 핑게로 어머님이 써온 원고를 한켠에 놔두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조카가 결혼하면서 어머님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고가 어떻게 됐느냐고 슬쩍 물어봐서야 부랴부랴 원고를 찾아 훑군 하였다. 여러번 다시 돌려보내도 언제 한번 락심하거나 수정을 미루는 법이 없었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했기에 타자는 내가 해서 투고를 하기로 하였다. 쓰는 원고마다 채용된다는 보장은 없더라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수 있지 않겠느냐며 힘을 넣어주었다. 어머님이 고향에 돌아가신 후의 어느 날, 잠간 여유가 나져서 어머님이 썩전에 보냈다는 원고를 찾아보았는데 오간 데 없었다. 온 가족이 움직여 둘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아도 없었다. 기다리고 계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같았다. 하필이면 그 때 어머님한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몇마디 안부인사가 오가고 어머님은 원고가 어떻게 됐느냐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바쁜 사람에게 괜히 늙은이가 주책이라며 도리여 미안해하는 어머님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해났다. 다행히 수정전의 육필원고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여 안도의 숨이 나왔다. 어머님은 원고를 다시 수정하여 핸드폰으로 찍어 나한테로 보내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투고한 원고 3편이 선후로 잡지에 모두 채용되였다. 잡지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바람으로 어머님은 추운 겨울날 눈길도 마다하고 친구와 함께 책가게에 다녀왔다. 어머님은 글쓰기로 지난날의 고된 삶 속 응어리를 풀어내고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계셨다. 원고가 선정되였다는 소식에 본인이 쓴 글이 활자로 찍혀나올 그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가 설레였던 시간들이였을 것이다. 딸애의 일이라면 그렇게 등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쁘다는 리유로 어머님의 기다리는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했다는 건 누가 봐도 너무나 볼품없는 변명이였다. 글을 어느 정도 쓰고 나면 기가 빠지고 귀찮아서 포기할 줄 알았다.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다 쏟는 게 젊은이들만의 특권인 줄 알았는 데 그게 아니였다. 어머님을 보면서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79세 고령임에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어머님은 나한테 너무 많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벌써 봄이다. 개나리며 벗꽃이 앞다투어 피여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노란색, 하얀색, 핑크색으로 사람들의 오감을 유혹하는 꽃들도 예쁘지만 묵은 가지에서 빠끔히 돋는 연초록색 새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울긋불긋 피여나 어여쁨을 뽐내는 꽃이야 이리 봐도 곱고 저리 봐도 곱지만 오늘따라 묵은 가지에서 돋는 새싹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리유는 무엇일가? 20여년전, 고부간으로 만나 어머님의 사랑 속에서 모난 마음을 갈아 둥글게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시집 와서 받은 첫 선물이 어머님이 그동안 소중히 모아둔 《생활안내》신문이여서 새삼 놀란 적도 있었다. 딸애를 출산하고 나서 병실에서 나오니 어머님이 등을 내밀어 나를 업어주었다. 백살까지 살게 해준다고 70일 동안 손에 물 한방울 못 대게 하고 엄동설한에 재래식 시골집에서 산후조리에 정성을 다하신 어머님이다. 가끔은 남편에게 서운해 일러바치는 나에게 “남자는 죽을 때까지 가르쳐야 한다”며 언제나 내 편이 되여 서리가 내린 내 마음을 다독여주신 것도 어머님이였다. 친정엄마가 없는 나에게 각별한 사랑을 준 어머님에게 해드린 것이 없는 나다. 이제라도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켜 글쓰기 공부를 함께 하면서 당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따스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꼭 발표를 목적으로 하는 글쓰기가 아니여도 좋다. 소중한 꿈 하나를 수중에 간직함으로써 마음속에 어여쁜 꽃들을 가꾸어내 그 아름다운 정기를 다 받아들여 밭고랑 같은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였으면 좋겠다. 꿈은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늦바람을 응원한다고 전화를 드려야겠다. 《로년세계》2021년 1호
33    돋보기 댓글:  조회:717  추천:0  2020-12-29
돋보기 현명규 책을 보다가 잠간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책상 우에 놓아둔 돋보기의 한쪽 다리가 부러져있었다. 보나마나 개구쟁이 손자놈의 ‘걸작’이였다. 하도 아까워서 부러진 부분에 접착제를 발라 고정시킨 후 테프로 단단히 동여놓았다. 모양이 좀 어수선해서 그렇지 사용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딸애가 몇푼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궁상을 떤다며 새걸로 바꿔드릴 테니 당장 버리라고 야단이였다. 걸고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집구석에서 사용하면 되는 걸 가지고 구태여 새것을 살 필요가 없다면서 나는 끝까지 우겼다. 기실 이 돋보기는 오래전 딸애가 선물한 거였다. 56세 생일을 앞두고 있던 어느 하루, 북경에 있는 큰딸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이번 생일엔 무슨 선물을 보내드릴가요?” “선물은 무슨… 너희들이 오손도손 잘살면 그게 나한테는 가장 큰 선물이다.” 전화를 끊고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며칠 뒤 딸애가 보낸 물건이 도착했다. 꽤나 묵직했는데 열어보았더니 옷 한벌과 안경 한틀이 들어있었다. 물건과 함께 엽서 한장도 들어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아버지, 생일을 축하합니다. 책을 즐겨보시는 아버지한테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돋보기를 부쳐보냈습니다…” 실은 지천명을 넘어서면서 시력이 예전 같지 않아 부담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 큰 활자로 된 글씨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작은 글씨는 희미하게 보여서 책을 볼 때마다 여간 힘든 게 아니였다. 그런데 큰딸이 이렇게 돋보기를 보내주니 설중송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되여 한국에 있는 작은딸도 돋보기를 부쳐보냈다고 전화로 알렸다. 언니가 금방 보내왔는데 뭘 하러 돈을 랑비하느냐며 핀잔을 줬더니 자기가 사보낸 건 외국명품이라느니, 인민페로 저그만치 이천원은 한다느니, 문학창작에 도움이 된다느니 하면서 안경을 받으면 꼭 걸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동안 조카들이 선물한 것까지 두루 합쳐보니 집에 있는 돋보기가 저그만치 아홉개나 되였다. 그럼에도 다리가 부러진 돋보기를 버릴 수 없는 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우리 집은 3대가 한집에서 사는 대가족으로서 어머니의 어깨에는 온 집안의 가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실려있었다. 더우기 밤늦게까지 쉬지도 못하고 식구들의 해진 옷이며 양말, 장갑 등을 손바늘로 한뜸한뜸 기워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어머니한테는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환갑을 넘긴 지 이슥한 어머니가 피발이 선 눈으로 옷감들을 코끝에 들이대고 바느질을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해났다. 끄덕끄덕 졸다가 가느다란 바늘끝에 손가락을 찔리는 바람에 놀라서 깨났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난데없는 백통테 돋보기를 걸고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게 되였다. “어머니, 웬 돋보기예요?”라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뒤집 사돈할머니가 빌려주었어. 돋보기를 걸구 있으니 신선이 된 거 같다야. 눈앞이 훤하니 일이 척척 잘되네.”라며 연신 감탄하셨다. 사돈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마실을 왔다가 어머니가 일하는 모습이 하도 보기가 딱해서 돋보기를 빌려준 모양이였다. 제대로 된 돋보기 하나 갖추는 게 어머니의 평생의 소원이였을 수도 있겠다만 나는 장가를 든 이듬해까지도 어머니의 그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했다. 생산대에서 대장이 시키는 일이나 굽석굽석 해오다가 호도거리가 시작되자 농사경험이 적은 데다 밭까지 메마르다보니 넉넉치 않은 소출로는 근근히 호구나 할 형편이였다. 푼돈도 좁쌀처럼 쪼개 써야 하는 형편인지라 돋보기 사는 일은 자연히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딸애가 네살 때 급성위장염에 걸렸는데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는 바람에 탈수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인데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도 아무도 돈을 선뜻 빌려주지 않았다. 아파서 눈물을 똑똑 떨구는 딸애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은 칼로 에이는듯 아파났다. 어쩔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무렵 앞집의 할머니가 비방 하나를 알려주었다.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했더니 설사가 기적같이 뚝 멎었다. 귀인을 만난 셈이였다. 그 때부터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마을을 떠나 출세를 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일년 내내 힘겹게 농사를 해봤자 식구들이 먹을 량식을 제외하고는 남는 거라곤 없는 밭농사에 마냥 발을 묶이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자면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였다.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1987년 10월, 나는 안해한테 모든 것을 맡기고 지인의 소개로 막하로 떠났다. 대흥구역전에서 떠나 기차를 세번 갈아타는 역사를 치르면서 북쪽 한끝에 있는 막하에 도착하였을 때는 찬 겨울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오후였다. 막하역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지난해에 느닷없이 덮친 특대삼림화재로 큰 몸살을 치르고 난 거무칙칙한 수림이 시야에 안겨왔다. 내가 행장을 풀어놓은 곳은 일군들을 위해 벽체만 남은 집에 림시로 지붕을 얹고 문짝을 대수 맞추어놓은 벽돌집이였다. 이튿날부터 바로 일에 달라붙었다. 불길이 스쳐간 나무를 베여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규격 대로 쌓아놓는 게 우리가 할 작업이였다. 불길이 핥고 지나간 나무를 베여버리지 않으면 병충해가 만연되여 삼림이 훼멸적인 타격을 받는다니 책임이 무거워졌다. 11월 중순까지는 그럭저럭 일을 하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소설이 지난 후부터는 검뿌옇게 흐린 하늘에서 찬 기류를 타고 매일같이 싸락눈이 흩날리는가 하면 이따금 로씨야 쪽에서 불어오는 성난 하늬바람이 나무초리를 흔들며 거세차게 불어쳤다. 더우기 씨비리의 한류가 날칠 때에는 낮기온이 령하 40도 이하로 뚝 떨어져 손발이 얼어서 오그라들고 얼굴이 찡찡 저려났다. 막하는 중국에서 낮이 제일 짧고 밤이 제일 긴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 일행은 내몽골에서 온 얼굴이 검스레한 곽씨, 할빈에서 온 장씨 등 두루두루 해서 11명이였는데 오전 9시 쯤 일하러 떠나면 오후 2시전에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더 늦게까지 일하려고 해도 매서운 추위 때문에 용빼는 수가 없었다. 그보다 하루세끼 밀가루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야 하는 게 나한테는 더없이 큰 고역으로 다가왔다. 간혹 돼지고기가 상에 오를 때도 있었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량이였다. 김치, 된장국이 그리워 속이 곪아터질 지경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밀가루음식에 길들여졌다.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턴넬처럼 이어졌지만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 나 하나만 믿고 기다리는 가족들을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렸다. 그렇게 2개월 동안의 고난의 려정을 뒤로 하고 양력설을 며칠 앞두고 나는 귀로에 올랐다. 할빈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부근에 있는 안경상점에 들렸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저 돋보기 하나를 골랐다. 그렇게 벼르면서 사야 할 만큼 비싼 물건도 아닌데 이제서야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드리게 되여 후회가 갈마들었다. 그래도 늦게나마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렸다는 생각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둥둥 뜬 기분으로 달리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초저녁 때가 다되여서야 나는 집에 들어섰다. 미리 알리지 않았던 터라 기별도 없이 찾아온 나를 보고 식구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해있었다. 이불을 덮고 방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잔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몸져누울 정도로 심해졌을 줄은 몰랐다. 내가 떠난 지 열흘 되던 날, 돼지죽을 주러 나간 어머니가 그만 돼지굴 모서리에 가슴을 박는 사고가 일어났는데 그 때부터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안해가 조용히 알려주었다. 이젠 갈 때가 되였으니 소용이 없다면서 어머니가 병원으로 가자는 안해의 손을 뿌리쳤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자식한테 루가 되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태연한 모습이 되려 화살이 되여 나의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돋보기를 꺼내 어머니한테 건넸다. 어머니는 힘없는 손으로 돋보기를 오래도록 어루만졌다… 아들이 선물한 돋보기를 써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가슴 아픈 아련한 추억과 자식들의 효도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돋보기를 손에 쥔 채 오늘도 나는 돋보기를 걸고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본다. 《로년세계》2021년 1호  
32    고향의 우물 댓글:  조회:799  추천:0  2020-12-29
고향의 우물 리삼민 장장 10년 만에 고향에 다녀오게 되였다. 대련에서 내가 살던 흑룡강 동녕으로 가려면 렬차를 타고 12시간을 달려 목단강 역에서 내린 후 다시 뻐스를 갈아타야만 닿을 수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사이 강남 갔던 제비들이 돌아와서 둥지를 틀고 지지배배 노래를 부르던 초가집들은 온데간데 없고 벽돌기와집들만 즐비하게 늘어섰다. 우쑤리스크로 향하는 동녕해관을 건설하면서 농민들이 풍년가 부르면서 오르내리던 흙길도 어느새 너비가 7메터가 되는 세멘트길로 바뀌여져있었다. 그나마 소학교 옛 건물과 운동장이 남아있기에 내가 살던 옛집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 다행이였다. 집 근처에 이르니 80대로 되여보이는 로인이 큰 대통을 입에 물고 끄덕끄덕 졸면서 해빛쪼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 웃집에서 살던 신윤칠로인이였다. 길고 짧은 대통이 6개나 되여 ‘신대통’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나는 천천히 로인 앞으로 다가가 “어르신, 그간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올렸다. “엉? 이게 리정사녀사의 셋째아들 아닌가?” 로인은 나를 인차 알아보면서 나의 손을 꽉 잡아주셨다. 신로인에게 마을 사람들의 안부를 물었더니 그는 허허 웃으면서 “다 가버렸소.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고 이 아래 우물물도 어디로 흘러갔는지 보이질 않소.”라고 대답했다. 우물 말이 나오니 나의 추억의 실타래도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 50년대초로 기억된다. 귀농으로 모여온 고향 사람들은 일본놈들이 버리고 간 낡은 관사에다 대수 나무를 걸어 집을 짓고 정부에서 내려보낸 두병의 좁쌀로 굶주린 창자를 달랬다. 그런데 마실 물이 없는 게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나와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땅밑으로 9메터 가량 파내려가니 시원하고 깨끗한 샘물이 모래를 뚫고 퐁퐁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환성을 올리며 샘터 주위에다 돌을 쌓고 용드레까지 걸어놓았다. 밑에 내려갔던 일군들이 땀벌창이 되여 올라오자 동네 아낙네들은 새참을 준비하느라고 바삐 서둘렀다. 닭알을 삶아오는가 하면 터밭에서 오이와 고추를 따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쌍가매할머니는 손수 걸러낸 막걸리를 바가지에다 듬뿍 담아가지고 와서 수고했다며 일군들에게 권했다. 윤털보로인은 어느새 강변에 가서 수양버들 한그루를 떠다 우물가에 심어놓았다. 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이 물로 만든 두부는 하들하들한 것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고 오이랭국, 청주, 막걸리를 만드는 것은 물론 향병원에서도 이 우물을 주사기 소독용으로 길어갔다. 콩 한알도 서로 나누어먹던 시절,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에 모이면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낙네들도 그 주위에 모여 흥겨운 가락을 뽑아냈다. 〈아리랑〉, 〈도라지타령〉, 〈농부가〉… 가사가 똑똑히 기억나지 않지만 가락이 구슬펐던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있다. 어렵던 과거의 향수를 달래듯 마을 사람들은 드레박질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한 드레박, 두 드레박 물을 길어올리며 불렀던 노래는 때론 조용히 흐르는 물처럼, 때론 요동치는 파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적셨다.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가 피로를 쫓는 쑥향기에 취해 자고 있을 때 쯤 하루일에 지친 농부들은 또 우물 주위에 모여 신대통로인의 구수한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졸음을 몰아냈다. “옛날에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가진 방랑시인이 있었지…” 신대통로인이 한창 흥에 겨워 옛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뿅하는 방귀 소리가 들려왔다. 둘러보니 바로 내 옆에 앉아있던 누나 벌 되는 김희숙이였다. 누나가 부끄러워서 어쩔 바를 몰라하는데도 신대통로인이 “또 이러면 시집 못 갈 줄 알아.”라고 일부러 골려주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웃음보를 터뜨렸다. 내가 소학교 6학년 때 일로 기억하고 있다. 밤에 숙제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온몸에 열이 나는가 싶더니 배까지 아파났다. 그 때 구급약이라야 정통편뿐이였다. 어머니가 준 약을 부랴부랴 삼키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안달이 난 어머니는 이른새벽에 신대통로인을 불러왔다. 마을에 큰일이 있을 때면 밤중이라도 주저없이 나서는 후더운 로인이였다. 신대통로인은 나의 머리와 배를 만져보더니 “속에 내혈이 들었으니 얼음덩어리가 필요하오.”라고 말했다. 그 때는 이른봄이였고 랭장고도 없는 시절이라 어디 가서 얼음덩어리를 얻어온단 말인가? 페암으로 아버지를 보낸 고통이 채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집에 또 이런 불행이 닥쳤으니 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저 우물벽에 아직까지 얼음이 얇게 붙어있을지도 모르네.”라는 말을 남긴 채 신로인은 쌩하고 밖으로 나가더니 한식경이 지나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들고 와서 나의 배꼽 우에 올려놓고 나서 머리에 침을 놔주었다. 신통하게도 한시간도 안되여 열이 내리고 통증도 씻은듯이 사라졌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 다시 우물에 깃든 이야기들을 떠올리니 감회가 남달랐다. 새 농촌 건설이 시작되면서 마을에 있던 숱한 우물들은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우물가에서 달을 보며 소원을 빌던 마을 사람들도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아마도 각자 새 삶터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꿈을 이뤄가고 있겠지. 고요한 달빛이 흐르는 우물터에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장작불에 구워낸 옥수수를 나누어먹던 추억은 점점 기억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샘물처럼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던 인심과 이웃과도 아우나 형님처럼 무랍없이 지냈던 그 세월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리워난다. 적어도 후덕하고 진실했던 농촌 인심만은 저 우물처럼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로년세계》2021년 1호
31    보따리 같은 내 령감 댓글:  조회:1009  추천:0  2020-12-08
보따리 같은 내 령감 김춘실 엄마 또래들이 모여앉으면 항상 빠지지 않는 화제가 있었으니 바로 제 남편의 흉을 보는 것이였다. 엄마 친구들이 너나없이 남편 흉을 보는 모습에 나는 그저 실실 웃기만 했다. 처녀인 나로서는 도무지 리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지붕 아래에서 한이불 덮고 사는 남편이 저렇게도 미울 수가 있을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흘러 어느덧 나도 환갑나이를 넘기고 보니 그제서야 처녀시절에 남았던 그 의문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와닿으면서 저도 모르게 공감이 갔다. 요즘 들어 “령감이 미우니 소리없는 총이라도 있으면 쏴고 싶다.”던 엄마의 어느 친구 분의 말에도 얼마간 수긍이 갔다.        개인위생에 등한한 령감 “세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꼭 우리 집 령감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소학시절, 개인위생을 검사하는 날이면 령감은 한쪽 발만 씻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씻은 발만 보여주어 얼렁뚱땅 통과했단다. 실로 허구픈 웃음만 나온다. 그 때의 그 습관이 지금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니 아마 안해인 내가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만 그 습관이 고쳐주기란 여간한 일이 아니다. 매일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발을 씻는 기본적인 위생습관을 남편은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독촉만 하지 않으면 며칠이고 할 념을 하지 않는다. 이 ‘불량한’ 습관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갈수록 심해져갔다. 심지어 이제는 아무리 일러주어도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내가 더운물에 샴푸며 수건을 다 갖춰놓고 닥달해서야 성화에 못이겨 씻는 척한다. 요즘은 귀에 습진이 생겨 매일 약을 넣고 있는데 머리를 감으면 귀에 물이 들어간다면서 아주 당당한 핑게거리까지 만들어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만 나왔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였다. 싫은 대로 남편더러 량손으로 두 귀를 단단히 막게 한 후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머리를 감겨주었다. 나는 평생 같이 살면서 그런 대로 습관되여 어느 정도 봐줄 수 있다만 밖에서도 집에서 하던 대로 행동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근년에 손녀가 보고 싶어 천진에 사는 아들집에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 량주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아들집에 갔는데 글쎄 령감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린 손녀의 침대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간 민망해서 며느리의 눈치를 슬쩍 살펴보니 며느리도 적잖게 당황한 기색이였다. 며느리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령감이 너무 밉살스러워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령감은 아들집에 가서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일관성이 있다고 해야 되나 싶은 게 어이가 없었다. 집에서도 함께 사는 식구에 대한 배려심이라고는 눈곱 만큼도 찾아볼 수 없이 자기가 편한 대로 아무 곳에나 양말을 벗어던지고 또 사용한 물건은 종래로 원래 위치에 놓는 법이 없더니 아들집에 와서도 그 모양새였다. 아들집에 머무르는 동안 그야말로 령감 때문에 만날 신경이 바싹바싹 곤두서니 여간 힘든 게 아니였다. 보다 못해 나는 살며시 령감한테 “여기서는 좀 행동에 주의를 돌리세요.”라고 귀띔을 했더니 글쎄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오히려 제 쪽에서 버럭 화를 내며 “여기도 앉지 말라, 저기도 앉지 말라. 그럼 날아다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기분이 잡친다느니 어쩌니 하며 란리였다. ‘어이구, 저 령감은 차라리 집이나 지키고 따라오지나 말 것이지.’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번 했지만 외출할 일이 있다 하면 먼저 채비하고 나서는 령감인지라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였다. 아들집에 있는 내내 나는 밉상스러운 령감 때문에 바늘방석에 앉은 심정이였다.   화를 잘 내는 령감 성질이 불같은 령감은 언제나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버럭 화부터 내는 편이다. 이런 령감의 성격 때문에 젊었을 적에 우리는 종종 얼굴을 붉히군 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몇번 지나도록 령감의 불같은 성격은 여전하다. 사람은 늙으면 기력이 쇠해지면서 당연히 성질도 누그러들 것 같은데 령감은 다른 건 몰라도 그 성질머리 하나만은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래도 젊었을 적에는 내가 토라지면 슬며시 다가와 달래주는 멋이 있었고 다툰 후에는 서로 마주앉아 알콩달콩 ‘화해주’를 마시는 재미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랑만조차 야속한 세월에 좀이라도 먹은듯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고 했건만 령감은 말을 이쁘게 못하는 병에라도 걸렸는지 똑같은 말도 듣는 사람의 기분이 상하게 하는 재주가 남다르다. 며칠전에 있은 일이다. 령감은 나 보고 침실의 문고리가 고장 났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명심하느라 했는데 방문을 열면서 그만 고장난 문고리에 손을 댔더니 그걸 알아차린 령감이 단통 노발대발하며 언성을 높이는 것이였다.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령감이 너무 얄미워 맞서다보니 그 날 우린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그러고 나니 령감과 말도 섞기 싫고 얼굴도 보기 싫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령감은 가끔 밥상에 마주앉아 코물을 흘릴 때가 있다. 한번은 내가 얼른 코물을 닦으라고 일러주었더니 “알어!” 하고 짜증을 부리는 것이였다. “당장 입안에 들어갈 것 같아 알려주는데 왜 짜증을 내요?”라고 했더니 “지금 막 닦으려고 했어!”라며 소리소리 고함을 지른다. 그럴 때는 철부지 애들만도 못한 어른이라는 한심한 생각이 든다.   엉덩이 무거운 령감 “일이 사랑이다”라는 말을 노래처럼 들려줬건만 령감은 늘 한쪽 귀로 듣고는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엉덩이 무거운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여태껏 함께 살면서 령감이 자진해서 일을 찾아하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령감은 오뉴월에도 손이 시려나는지 일을 시켜도 하는 둥 마는 둥 항상 건성으로 하는 척만 한다. 며칠전, 여름내 사용한 선풍기에 낀 먼지를 닦아내려고 령감한테 선풍기를 해체해달라고 청들었는데 웬걸, 베란다에 나가 도라이바를 가져오더니 선풍기 뚜껑만 달랑 떼내고는 쏘파에 들어앉아 신문과 한몸이 되여버렸다. 그럼 그렇지. 뚜껑을 열었으니 그대로 선풍기 날개를 닦으면 된다는 의미였다. “나사를 틀어주면 날개랑 부속품은 모조리 분리시킬 수 있겠는데…”라고 내가 한마디 했더니 “그렇게 잘하면 당신이 해보구려!”라고 톡 쏘아붙이는 것이였다. 어쩔 수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힐끗 보니 쏘파에 누워 신문을 보고 있는 령감의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라곤 눈곱 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 한번은 화장실 전등이 나가서 불편하다고 말했더니 령감이 쓰고 있는 글을 다 쓰면 봐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발생했다. 글쎄 화장실 세탁기 우에 탁상등이 놓여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글 쓰는 열정의 십분의 일 만큼이라도 가정에 신경을 쓴다면 얼마나 감지덕지하며 살랴.   곁을 지켜주는 령감 며칠전, 나는 워이신에서 퍼그나 재미나는 영상 하나를 보았다. 오랜만에 동창모임에 다녀온 할머니가 옛친구들을 만나 기뻐하는 기색이 력력해야 하는 반면 얼굴색이 어두운 채 집으로 돌아오자 령감이 궁금해하면서 물었다. “다른 녀편네들이 명품가방을 자랑합데?” 할머니는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령감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해외려행을 간다고 합데?” 이번에도 할머니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도 아니면 자식들이 용돈을 많이 준다고 합데?” 할아버지가 이렇게 묻자 할머니는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땅이 꺼지도록 한탄을 하더니 “친구들은 령감이 다 죽었는데 나만 령감이 살아있더라구요!”라고 하였다. 나는 이 영상을 보자마자 배를 끌어안고 깔깔 웃었다. 과장이 섞인 영상이 하도 웃겨서 가까운 친구에게도 공유하려고 영상을 전송했다. 이제 곧 친구한테서 깔깔 웃는 이모티콘이 오겠지 했는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 할매하고 넌 행복한 사람인 줄 알어라!” 몇년전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친구이다. 친구의 메쎄지를 보고 나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온종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말동무가 없어 마치 벙어리가 되는 것 같은 심정을 넌 아마 모를 거야. 난 가끔씩 외출하고 집에 들어오면 빈방에 대고 ‘나 왔어!’라고 큰소리로 말하기도 해. 넌 그런 적 없지?”라고 친구가 음성메쎄지를 보내왔다. 나는 친구의 목소리에서 그간 그녀가 겪은 외로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밥을 해도 같이 먹어줄 사람이 없고 화가 나도 편 들어줄 사람이 없는 그 고독함과 쓸쓸함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모를 거야. 그러니 좀 깨끗하지 못하고 성질이 괴퍅하고 게으르면 어떠냐? 그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인 줄 알아라.” 친구의 진심어린 조언을 듣고 보니 그렇게 얄밉던 령감이 차츰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자식보다 만만하고 허물이 없어 언제든지 비빌 수 있고 화풀이할 수 있는 상대가 바로 령감이 아닌가? 실로 고운 정, 미운 정 고루 쌓으며 살아온 30여년 세월, 모든 것이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것 같다. 이제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짧은 우리의 인생, 남은 황혼길에 같이 걸어줄 령감이 있다는 것, 여전히 밉살스럽게 굴더라도 내 삶에서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고 나니 이제는 웃으면서 오손도손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30    늘그막 재미 댓글:  조회:666  추천:0  2020-12-08
늘그막 재미 서광억  젊은 시절에는 로인들이 “자식보다 손군이 더 곱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리유를 잘 몰랐다. 하지만 귀여운 손녀가 태여나 할아버지가 되고 보니 그 참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손녀가 재롱을 부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재미에 푹 빠져 하루해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른다. 내남없이 어렵게 살았던 젊은 시절에는 일에 빠져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다보니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제대로 살필 여유마저 없었다. 하지만 퇴직을 하고 나서 여유가 생긴 후로부터 손녀가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그 모습이 눈에 삼삼 밟혀오니 어쩔 수가 없다. 요즘 손녀를 키우면서 세월이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내 자식은 두돌이 다되여서야 말을 하기 시작한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손녀는 태교 덕분인지 아니면 태여나서부터 영양을 골고루 잘 섭취해서 그런지 돌이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문이 트이는가 싶더니 음악을 틀어주면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덩실거리며 춤을 추고 노래하느라 야단이였다. 늘그막에 손녀라는 ‘선물’에 흠뻑 빠져 우리 량주는 매일매일 손녀의 재롱을 보는 행복에 젖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른다. 손녀가 우리 집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량주는 매일 적적하고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집안에 아들녀석이 둘이나 되는데 맏아들이 장가 들어 시가지에 따로 살림을 차리면서부터 집안이 점차 적적해지는가 싶더니 둘째녀석까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분가를 한 뒤로 집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였다. 주변에서는 자식농사를 잘 지어 근심 걱정 없어 참 좋겠다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왔지만 고독함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충은 여간한 것이 아니였다. 아무리 사이가 애틋한 부부라도 늘그막에 밤낮없이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서로 지겨워나는 모양이다. 한뉘 밭일로 늙어온 안해는 낮이면 동네에 나가 돌아다니고 밤이 되면 가마목에 꼬부리고 새우잠을 청했다. 나 역시 놀음판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다보니 낮에는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거리고 저녁이면 텔레비죤을 보다가 잠자리에 들군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손녀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돌봐줄 수 없겠느냐며 큰아들 내외가 청들었다. 적적함에 메말라있던 우리 량주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급시우 같이 반가운 소식이였다. 손녀가 집에 도착한 날, 안해는 손녀를 안고 입이 함박 만해졌고 나도 덩달아 벙글거렸다. 손녀는 그야말로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복덩어리 같은 천사였다. 그런데 정작 손녀를 돌보려니 손이 어지간히 가는 게 아니였다. 우리 시대의 육아리념 대로 하려고 들었더니 그건 시대에 떨어진 교육이라고 아들 내외가 우리 량주를 나무람했다. 예전에야 자식이 많다보니 울면 손에 누룽지를 쥐여주고 콜록거리면 포대기를 덮어주면 그만이였는데 요즘은 집집마다 자식을 하나만 키우니 진짜 금지옥엽, 보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육아리념이 많이 달라져 예전의 굳어진 습관부터 하나하나 고쳐야 했다. 지금도 아들내외가 아이를 보러 우리 집에 왔을 때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평소 대로 저녁을 마치고 나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내 무릎에 앉아있던 손녀가 담배연기에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 것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며느리가 다급히 애를 안아가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님, 애가 있을 땐 담배를 피우지 마세요. 애들에게 담배연기가 그렇게 해롭답디다.” 아이에게 해롭다는 말에 나는 게면쩍게 웃으며 제꺽 담배불을 꺼버렸다. 나의 무안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눈치가 무딘 안해가 손녀애의 먹성이 좋다며 자랑 삼아 늘어놓았다. “에구, 요놈 계집애 어찌나 잘 먹는지 하루에 똥을 세번씩이나 눈다네…” “어머니, 어른이나 아이나 대변은 하루에 한번 정도 보는 게 가장 좋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건강을 위하여 이 《건강상식》 책을 한번 보세요.” 로친의 자랑은 건강상식을 환히 꿰고 있는 며느리 앞에서 본전도 못 찾고 말았다. 그 날 이후, 우리 량주는 손녀 ‘덕분’에 예전과는 판이한 생활을 이어가게 되였다. 나는 40여년 피워온 담배를 끊었고 안해는 고중을 졸업한 후로부터 한번도 만져본 적 없던 책을 몇십년 만에 다시 집어들었다. 남편이 그래도 아마츄어작가라고 책 한페지라도 더 보게 하겠노라고 집안일을 전부 혼자 떠맡았던 안해가 요즘은 손녀를 위해 나의 돋보기를 척 걸고 열독 삼매경에 빠졌다. 나 또한 손녀가 오면서부터 한뉘 못해본 화장실청소에까지 팔소매를 걷고 나섰으니 이 정도면 우리 집에서 손녀의 무게를 가히 짚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며느리가 추천해준 책이라 그냥 그런가 하며 들여다봤는데 책을 정독하고 나서 우리 량주의 생활에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책을 통해 아이의 성장발달에 유익하다는 수면 시간대를 장악하고 나서 그 시간에 맞춰 잠을 재웠고 아이의 지력발달을 위해 음악을 틀어놓고 사지를 제멋대로 놀려가며 손녀와 률동하면서 놀아주었다. 춤을 추고 있는 서로의 모습이 하도 해괴망측하여 웃음보를 터뜨린 적도 있었다. 시간이 류수처럼 흘러가는 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손녀도 어느덧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1중을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련리공대학의 어엿한 대학생이 되였다. 그 사이 나랑 수십년간 동거동락을 해온 안해는 나 먼저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여태껏 재롱 부리던 손녀마저 외지로 떠나버린다니 마음 한구석이 텅 비는 같아 마음은 산란하기 그지없었다. ‘이제는 무슨 락으로 살지?’라는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 갑자기 머리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대학입학통지서를 안고 찾아온 손녀와 아들내외를 불러놓고 아래와 같이 선포했다. “우리 손녀가 좋은 대학에 붙었으니 앞으로 4년 동안의 학비와 생활비는 모두 이 할아버지가 지원하겠다!”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손녀가 제꺽 좋다며 찬성하였다. “할아버지,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생공부까지 할 겁니다. 아니 박사공부까지 할지도 모르니 할아버지 적어도 한 10년은 나의 학비를 지원해주셔야 합니다.” 그 말에 며느리가 대뜸 당황해하며 “얘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할아버지 월급은 할아버지가 용돈으로 쓰셔야지. 아버님, 나영이 학비는 우리가 얼마든지 댈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라며 손녀를 말렸다. 바로 그 때 손녀가 “할아버지가 저의 학비를 지원하는 락이라도 있어야 오래 앉을 수 있는 거 아니예요.”라며 혀를 홀랑 내밀며 익살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니 말이 맞다. 우리 손녀한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90살까지 살아보련다!” “아니, 할아버지, 90살이라뇨. 100세까지는 앉으셔야죠!”라고 말하며 손녀는 내 품에 와락 안겼다. 귀엽고 야무진 손녀 떡분에 나는 오늘도 늘그막에 열심히 운동하고 좋아하는 글을 쓰는 재미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고 있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9    행복의 추억보따리 댓글:  조회:685  추천:0  2020-12-08
행복의 추억보따리 박영희 코로나19 사태로 집에 갇혀 한가롭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지인이 인터넷으로 직접 편집해서 인쇄한 려행사진첩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말로만 들었던 사진책을 펼쳐보고 있노라니 매 한장의 사진에서 전해지는 행복바이러스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뒤미처 나도 내 마음과 사랑이 담긴 인터넷사진첩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퇴직후 내가 가볍게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하고 가장 의미 있는 행복 찾기가 아닐가 라는 짐작이 들었다. 이튿날, 나는 지인이 알려준 방법 대로 인터넷에서 관련 시스템을 다운받아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가족에게 보여줄 행복의 추억보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니 마냥 즐겁기만 하고 흥분이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나는 매일 행복한 추억려행을 하는 기분으로 사진첩을 만드는 일에 깊이 매료되여 밤을 지새우면서 나만의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실행해나갔다. 몇달 동안 혼자서 울고 웃으면서 드디여 인터넷사진첩의 인쇄과정까지 모두 마쳤다. 나는 비로소 들뜬 추억 속에서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나의 심혈이 깃든 세권의 사진첩을 손에 받아쥐고 보니 사진효과부터 맑고 안성맞춤하게 도톰한 종이재질, 무엇보다도 저렴한 인쇄비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책 세권을 받아드니 지난해 문학상 대상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쁘고 기분이 허공에 붕 뜨는 것 같았다. 책을 만드는 과정은 행복 그 자체였다. 사진을 모으고 사진 한장, 한장에 담긴 추억을 글로 써서 반복적으로 수개하고 편집하는 과정은 인생을 다시한번 체험하는 현장이였다. 첫번째 책 제목은 《사랑의 리레》였다. 주로 근년에 내가 여러 잡지에 발표한 가족사랑을 주제로 한 수필과 수기를 모아 보충, 정리하고 문장에 매치되는 친인들의 사진들을 넣었다. 〈전설처럼 살다 가신 할머니〉, 〈똬리와 할머니〉, 〈한쌍의 베개모에 깃든 할머니의 숨결〉 등 6편중 4편은 작년에 응모상을 받은 글들이였다. 그중 〈전설처럼 살다 가신 할머니〉는 ‘해외동포문학상’ 수기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이였다. 이처럼 내 인생에 귀한 사진과 상패, 증서를 감사의 마음과 함께 사진책으로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두번째 책 제목은 《사랑의 뉴대, 행복의 요람》이였다. 우리 가족의 사랑과 행복이 오래오래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이 책에 유독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부었다.                ‘나의 가족’이란 주제에는 조부모와 외조부모 그리고 부모님과 시부모님의 가족사진을 위주로 가족의 화목과 효 그리고 그 분들의 로년의 행복한 모습을 주선으로 하였다. ‘나의 가정’, ‘나의 집’의 주제에는 각각 아들과 딸, 남편과 나의 행복한 성장과정을 차례로 배렬하였다. 한장한장의 사진을 펼쳐보노라면 우리 가족이 걸어온 발자취가 일목료연하게 안겨오고 가족의 끈끈한 사랑에 가슴이 설레이고 행복에 흠뻑 도취되여 쉽게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세번째 책 제목은 《생활의 발자취》였다. 주로 내가 퇴직하기 전후 5년간 걸어온 아름다운 발자취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편집하였다. 이 속에는 기쁜 일이 있을 때나 궂은일이 있을 때나 항상 곁에서 함께 웃고 울면서 힘이 되여준 친구, 지인, 동료들의 얼굴이 있는가 하면 아들과 딸 그리고 남편과 함께 한 사진들 그리고 나의 취미생활의 발자취들이 들어있다. 사진을 통해 내가 최근에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에 흠뻑 빠져있고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긍정적 에너지를 전달하려는 게 나의 최종 목적이였다. 모든 일에 감사해하고 행복해하고 사랑받는 모습으로 파란만장한 인생길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매 단계의 큰 대사와 과정을 준비 있게 맞이하려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지난 5년 동안은 크고작은 경조사가 빈번했던 만큼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아들 결혼식, 손자의 출생과 돌잔치, 60세 생일파티, 퇴직모임, 시아버지의 장례식 등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진정으로 기뻐해주고 말없이 도와주며 내 곁을 지켜준 친구들이 있었기에 낯설고 물선 타향에서 사람 사는 달고 쓴 맛을 감칠나게 맛 보면서 지금의 사랑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되였다.  퇴직하던 날의 사진 몇장을 보면서 나는 그 날의 추억려행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날, 대학교의 조선족친구들이 퇴직하고 떠나는 나를 위하여 깜짝이벤트로 ‘영사모(영희를 사랑하는 모임)’ 모임을 준비했다. 내가 약속장소인 고급레스토랑에 들어서자 꽃보라며 오색줄을 뿌리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향기로운 꽃다발을 안겨주면서 따뜻하게 포옹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사람마다 직접 써준 편지가 가장 큰 감동으로 와닿았다. 애틋함과 서운함, 추억과 사랑이 엇갈려 눈물을 글썽이게 하는 글들이였다. 이 아름다운 추억들을 책으로 만들어 남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귀한 보물이 어디 있으랴. 또 잊을 수 없는 일을 꼽는다면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다.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운명 소식에 우리 부부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마침 대학교 교수직을 맡고 있는 친구가 한국 출장중에 우리 시아버지가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급급히 귀국하여 공항에서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와 나의 남편과 함께 운명한 시아버지의 몸을 닦아드렸고 례의를 갖추어 수의를 입혀드렸다. 조선족의 전통풍습에 따라 처음부터 장례식이 마무리될 때까지 두 발로 뛰여다니며 자기 일처럼 열정적으로 해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은 실로 말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고마울 따름이였다. 여러 친구들도 상주로 되여 병원에서 관을 메여 움직이고 끝까지 옆을 지켜주었다. 사진 속의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노라니 감동으로 목이 메여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났다. 가족 그리고 친구는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이고 행복의 원천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고 하지만 이 두가지 귀중한 재부 만큼은 꼭 마음에 담아 저 하늘 끝까지 갖고 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행복에 흠뻑 젖어들게 해준 이 소중한 행복의 추억보따리를 어루만지면서 힘찬 하루를 시작한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8    이루지 못한 첫사랑 댓글:  조회:661  추천:0  2020-12-08
이루지 못한 첫사랑 한직능 50여년간 가슴에 묻어둔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필을 들어본다. 1969년 12월, 나는 내몽골 울란호트 고성촌에서 란주군구 중형폭격기부대 36사 레이다병으로 입대하였다. 입대한 지 9개월 만에 위장에서 유구촌백충이 발견되여 서안시에 있는 공군451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아마 부대농장에서 일하면서 돼지고기를 먹은 게 화근이였던 것 같다. 내가 든 병실은 4인실이였는데 환경이 아주 깨끗하고 정결한 데다 간호사들도 예쁘고 친절했다. 입원은 했다만 남들처럼 운신이 힘든 것도 아니고 다만 장에 기생해있는 유구촌백충을 깡그리 제거하기만 하면 되는 병인지라 별로 불편한 점이 없었다. 매일 여러가지 검진을 받고 나면 별로 할 일이 없었는지라 살만 피둥피둥 찌는가 싶었다. 우리 층을 책임진 간호사는 도합 두명이였는데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제일먼저 하는 일이 청소였다. 간호사중 한명은 20대 중반이였고 다른 한명은 키가 크고 이쁘장하게 생긴 처녀였는데 그 때 나이가 18살이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병원복도는 넓고 길었는데 매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간호사들을 볼 때마다 여간 안스러운 게 아니였다. 그 뒤로부터 나는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화장실 청소부터 복도 청소까지 깔끔하게 해놓고는 다시 침대에 돌아가서 자는 척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쁘장하게 생긴 간호사가 우리 병실에 드나드는 차수가 많아졌을뿐더러 우리 병실 청소에 유독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느 날, 예쁜 간호사가 나한테 다가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지농(참군시기의 이름은 한지농이였음.)씨, 당신이 매일 아침마다 우리를 도와 청소를 하고 있다는 걸 다 알아요. 고맙지만 이제부터라도 제발 그만두세요. 환자가 청소를 한 사실이 발각되면 저희가 비평받습니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비껴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도와주려고 했는데 결국엔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병실에서 내가 가장 젊고 ‘건강한’ 환자였으니 나를 의심 대상으로 간주한 것도 당연한 일이였다. 이튿날 아침, 간호사가 탕약을 가져오더니 그것을 먹고 변을 보면 유구촌백충이 배출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과연 약을 먹고 한참후에 화장실에 갔더니 유구촌백충이 거침없이 배출되였다. 온몸이 맑고 깨끗해지는 느낌이였다. 몸이 건강해졌으니 보란듯이 청소를 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병실에 들릴 때마다 예쁜 간호사는 주동적으로 말을 걸기도 했다. 알고보니 그녀는 란주군구 고급장령의 딸이였는데 아버지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바람에 이곳에 오게 되였다고 한다. 나는 조선족이고 농민의 아들이라고 말했더니 자신의 아버지가 항미원조에 갔다 온 분이라면서 조선족은 노래도 잘 부르거니와 춤도 잘 추는 민족으로 알고 있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국경절이 다가올 무렵, 란주군구 문공단 단장이 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원에서 마침 문예선전대를 무으려던 참에 문공단 단장을 만나게 되자 그에게 부탁하여 젊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젊은 환자들 중에서 20여명을 골라 림시 ‘문예선전대’를 만들기로 하였다. 나와 예쁜 간호사도 그중에 포함되여있었다. ‘문예선전대’는 저녁이면 린근 대대나 공장에 가서 공연을 했다. 어느덧 입원한 지 2개월이 되여갔다. 그 사이 예쁜 간호사와 함께 ‘문예선전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정이 퍼그나 들게 되였다. 예쁜 간호사가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그윽히 바라볼 때면 심장이 막 방망이질했다. 퇴원을 며칠 앞두고 예쁜 간호사가 나를 찾아와서 입을 열었다. “지농씨, 모레 떠난다고 했죠? 앞으로 서안에 올 기회가 된다면 꼭 병원에 들려주세요. 그간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전사로서 응당히 해야 하는 건데요 뭐.” “서안에 온 김에 시내에 들려 구경이나 하세요. 볼 거리가 많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대안탑(大雁塔)과 고성벽 그리고 양러우포머(羊肉泡馍)는 꼭 드셔보세요.” “제가 길을 잘 몰라서…” 길치가 아니였지만 예쁜 간호사가 함께 가주었으면 하는 속내로 나는 슬쩍 내뱉었다. “평일이라서 청가를 맡기 어렵습니다. 시내에 가서 물어보면 다 알아요. 시내에 가는 김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가요? 제1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제가 찍은 일촌짜리 증명사진을 찾아주실 수 있어요?”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리는 것 같았다. 이런 사적인 부탁을 한다는 건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넘겨짚으니 기분이 날 것만 같았다. 예쁜 간호사와 동행할 수 없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간호사가 준 ‘중임’이 있으니 예정 대로 이튿날 서안 시내를 돌기로 하였다. 나는 대안탑과 고성벽을 둘러보고 나서 유명한 양러우포머 식당을 찾았다. 서안의 대표적인 음식답게 식당 안은 점심전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양러우포머 네그릇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나서 곧추 사진관으로 향했다. 사진을 찾고 병원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다섯시가 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그녀는 함께 산책을 하자며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흥분된 가슴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서 나는 그녀와 함께 산책길에 나섰다. “사진을 드릴게요.” 나는 사진관에서 찾은 사진을 꺼내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사진이 너무 작아서 그런지 잘 나오지 못했네요.” 그녀는 나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하얗고 맑은 얼굴에 초롱초롱한 큰 눈을 가진 그녀는 누가 봐도 둘도 없을 만한 미인이였다. “이제 돌아가면 언제 쯤 다시 올 수 있어요?” “병이 나지 않고서야 한번 오는 게 어디 그리 쉬인 일이겠어요.” “휴일도 없어요?” “주말에는 보통 쉽니다.” “아, 좋네요. 그럼 주말에 놀러 오세요. 아 참, 오늘 시내 구경은 잘했나요?” “네, 잘했어요. 맛 있는 음식도 많고 구경거리도 진짜 많더라구요.” 우리는 이렇게 서안의 지방명물로부터 조선민족의 민속에 이르기까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웃고 떠드는 가운데 잊지 못할 추억으로 적막한 밤 산책길을 아롱다롱 수 놓았다. 종달새처럼 꺄르륵 웃어대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났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뒤 그녀가 9시전에는 병실로 들어가야 된다면서 분홍색 혀를 낼름 드러내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메롱 하더니 급히 병원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내가 떠나던 날, 그녀는 나와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고무격려까지 해주며 다음의 상봉을 기약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진을 잘 보관하여 달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았다. 그제야 그 날 밤, 그녀가 꺼내 보여준 사진 한장을 돌려주지 않은 게 생각났다. 내가 설명을 하려고 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더니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부대에 돌아온 뒤 가끔 삶이 힘들거나 외로울 때면 그녀의 사진과 그녀가 남긴 고무격려의 말을 떠올리면서 외로움을 달래군 했다. 부대 특성상 외지로의 출장이 거의 불가능하였기에 그리움과 외로움이 겹칠 때마다 지방 우전국에 가서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입당하고 대학교에 진학하여 자신을 부단히 무장해야 했다. 1971년 6월 28일, 나는 800명 신병 가운데서 제일먼저 입당을 했고 네차례의 기술혁신으로 장려까지 받았다. 그 시기에 기무대대(机务大队)는 립공상(立功奖)은 없고 장려를 많이 받을수록 간부 승진이 더 빨랐다. 모든 게 순리롭게 나아가는가 싶었는데 간부 진급을 위해 가족조사를 하던 중 해외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치심사가 무척 까다로운 특종병 간부 진급에서 아쉽게도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나는 4년 병역의 마지막 해 년말에 퇴역명령을 받았다. 일이 이렇게 되니 도무지 그녀에게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병역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그녀에게 퇴역한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다. 나의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듯 여러번 반복해서 물었다. 그동안 항상 좋은 소식만 전했으니 그녀가 이토록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였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내가 어떤 신분이든 나라는 사람이 좋으니 꼭 함께 있고 싶다는 속내를 비치였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부탁해 일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말까지 꺼냈다. 하지만 나는 서뿔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전화를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망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많이 실망했을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에이는듯 아팠지만 고향에는 환갑나이에 외동아들의 종군을 허락한 년로한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기에 사랑과 효라는 갈림길 앞에서 나는 효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한테 다시 전화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채 미처 싹트지 못한 첫사랑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영영 묻어버리고 말았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7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댓글:  조회:591  추천:0  2020-12-08
[천우컵]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리정화 나는 친척언니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있는 엄마이다. 남편은 7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20살 때 아버지가 억울한 루명을 쓰게 되면서 온 가족이 변방에서 내륙지구로 강제 이주를 하게 되였다. 이주한 후에도 수모와 박해는 줄어들지 않았다. 맏이인 남편은 어린 남동생 둘과 아버지를 보살피느라 힘든 나날을 보냈다. 불우한 어린시절에 겪은 고통의 후유증 때문이였을가? 남편은 성격이 칼날 같았고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눅잦히지 못해 곧잘 역정을 부리군 했다. 이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바로 하루가 멀다하게 잦은 남편의 술주정이였다. 후일 시아버지가 명예를 회복하게 되자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는 념원을 내비치면서 우리는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하게 되였다. 고향에 돌아가면 남편의 술주정도 좀 나아지려나 싶었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남편의 술주정은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남편의 고향에는 몇집을 빼고 대부분 남편의 형제들 아니면 친척들이다보니 하루가 멀다하게 술상이 벌어졌는데 저녁에 술상에 마주앉으면 이튿날 날이 밝아서야 파하기가 다반사였다. 남편은 매일같이 술에 푹 절어있었고 집안은 사흘이 멀다하게 아수라장이 되였으며 가난은 칡넝쿨처럼 칭칭 감겨들었다. 어느 마가을의 새벽녘, 장밤 술을 마신 남편은 고주망태가 되여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왔다. 태산같이 쌓인 집안 일에는 나 몰라라 하면서 하루가 멀다하게 술에 절어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남편을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나는 눈살이 꼿꼿해서 남편을 쳐다보며 “일은 하지 않고 만날 술독에 빠져있으면 어떻게 살아요? 이러다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이렇게는 못살겠으니 리혼을 해요.”라고 고함을 질렀다. 활화산마냥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끝내는 참지 못하고 ‘리혼’이란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리혼하자는 말에 남편은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내 인생에는 절대 리혼이란 게 있을 수 없어!”라며 고함을 지르더니 옆에 놓아두었던 솥뚜껑을 집어들었다. 술에 취하면 손에 무엇이든 잡히면 마구 들부시는 남편인지라 그 순간 머리 속에는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뿐이였다. 덴겁해서 “엄마, 가지 마세요.”를 연신 웨치면서 내 다리를 붙잡고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두 딸애도 뿌리친 채 허겁지겁 도망쳐나왔다. 신발을 신을 틈도 없이 맨발로 뛰쳐나와 마을의 계곡물을 첨벙첨벙 건너던 그 해 두 딸애의 나이는 고작 일곱살, 여덟살이였다. 맨몸으로 뛰쳐나왔던지라 손에 한푼도 없이 휘청거리는 두 다리에 의지해 현성으로 가는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걷다가도 인기척 소리가 들리면 혹여라도 시집 식구들이 뒤쫓아오는 게 아닌가 싶어 숲속에 잠간잠간 몸을 숨기기도 했다. 나는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초들초들한 입 속으로 삼키며 힘겨웁게 굽이굽이 여덟 고개의 대팔령을 허영허영 올라갔다. 드디여 대팔령 봉우리에 올라섰다. 벼랑 끝에서 죽음의 사자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아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스쳤고 소름이 돋는 전률에 나는 눈앞이 캄캄해나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마치 세상에 버림받아 숲속 한가운데 버려진 고아라도 된듯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았지만 문득 엄마를 찾아 헤매는 어린 두 딸애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귀전에서 울리는 듯하여 가슴이 미여지게 아파왔다. 마침 참나무에서 도토리 한알이 떨어지더니 또르르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주으려는 순간 멀지 않는 곳에서 반짝이는 두 눈과 마주쳤다. 자세히 보니 앙증맞은 다람쥐였다. ‘다람쥐도 자기 새끼들의 겨울나이를 위하여 량식을 장만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자식을 버리고 비겁한 도망자가 되다니 참으로 한심하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저려났다. 쌉쌀한 도토리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나서 나는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평소에는 걷기 쉽던 내리막길이였건만 이미 맥이 빠질 대로 빠졌던지라 마치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는 것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길을 걷는듯 발걸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한걸음한걸음 내디뎠다. 그 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타박타박 40킬로메터나 되는 길을 걸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현성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며칠 쉬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쥐여준 돈 백원을 들고 무작정 다시 길림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다. 길림에 도착한 나는 친구의 소개로 식당에서 림시로 주방보조일을 하기로 하였다. 지낼 곳이 마땅치 못하다보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식당 한쪽에 있는 어둑침침한 작은 방에서 지내야 했다. 매일 일을 마치고 나서 저녁이 되면 지친 몸을 웅크리고 앉아 넋 놓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아기별들은 마치 어린 두 딸애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 같았고 그 눈물은 고스란히 내 가슴으로 흐르고 흘러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두둥실 떠오른 달님을 바라보노라니 친정엄마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친정엄마는 만성 위병에 시달리면서도 우리 여섯 자매를 반듯하게 키워낸 강한 분이였다. 가냘픈 몸으로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엄마였다. 그런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내가 한창 엄마의 사랑이 절실한 내 자식을 버리고 이렇게 도망을 나온 비정한 엄마로 되다니… 하루를 일년 맞잡이로 보내면서 겨우 한달간 버텨 수당을 받자마자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나의 빈자리를 느끼고 마음을 돌리기라도 한 건지 남편은 전례없이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술주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가 오는가 싶더니 한달이 좀 지나자 그 상이 장상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은 현성에서 40여킬로메터, 향정부에서도 20여킬로메터 떨어진 심심산골이라 애들을 공부시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였다. 이 참에 남편의 술버릇도 뗄겸 우리는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기로 용단을 내렸다. 이사짐을 싣던 날, 줄곧 우리와 함께 생활해왔던 시아버님은 두 눈을 부릅뜨며 “못난 자식, 이 애비를 버리고 떠나겠다구? 못 간다, 못 가!” 하며 날이 퍼런 도끼를 들고 이사짐을 싣는 맏아들을 향해 불호령을 내렸다. 시아버지의 눈에서는 불티가 튕겼고 남편은 얼굴이 숯덩이처럼 까맣게 질린 채 망부석마냥 굳어져있었다. 시아버지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면서 란리를 부렸다. 나는 도끼를 들고 있는 시아버지의 서슬에 기절초풍한 나머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심장은 당금이라도 튀여나올듯이 들뛰였다. 죽을 만큼 무서웠지만 이대로 굽어들면 영영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면 아버님은 아들과 함께 사세요. 저는 제 새끼를 데리고 가겠어요.” 어떻게든 자식들을 지켜야겠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용기를 내여 시아버지께 강경하게 맞섰다. 나의 당돌한 모습에 잠시 주춤한듯 싶더니 얼마 안되는 이사짐을 싣고 떠나려는 순간, 시아버지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남편의 발등을 도끼로 푹 내리 찍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식간에 남편의 발은 온통 피범벅이 돼버렸다. 나는 숨이 꺽 막혔고 심장이 벌렁거리며 하늘땅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몸을 가누고 입술을 앙다물고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면서 옷섶을 찢어 남편의 상처를 싸맸다. 그렇게 시아버지의 거센 반대도 무릅쓰고 갖은 고통과 상처만 안겨준 시집마을을 미련없이 떠나 맨주먹으로 언니가 살고 있는 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렇게 새로운 도시에서 세집살이를 하면서 아득바득 일하여 열심히 애들을 키웠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고 온갖 사랑과 노력을 몰부어 뒤바라지를 했더니 큰딸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인민교사로 되였고 작은딸은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서 석사공부까지 마치였다. 현재 두 딸은 모두 행복한 가정을 뭇고 각자 자신의 일터에서도 맡은 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딸들을 모두 성가시키자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황혼리혼’이란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남편의 그 우락부락하는 성격을 참고 견디는 데 적응되였다고 스스로 위로하다가도 가끔씩 폭발하는 그 괴퍅한 성격을 더 이상 수용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잘살아가고 있는 자식들에게 나 때문에 친정이 산산조각이 나는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부부가 화목하게 잘살아야 복이 들어온다.”고 입이 닳도록 일러주던 엄마인 내가 해서는 안될 선택임은 자명한 일이였다. 저울의 한쪽에 지구를 올려놓고 다른 한쪽에 엄마를 올려놓는다면 저울은 엄마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는 무거웠지만 나에게 더없는 행복과 보람을 선물해주었고 힘든 인생길에서 수없이 많은 가시덤불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엄마’라는 그 이름의 무게를 깨달았기에 지금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모든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며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단단히 지킬 수 있었다. 나는 오늘도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지고 노을지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설익은 필묵으로 한송이 소담한 먹꽃을 피우며 지난날 고난의 광야를 헤쳐온 마음속의 지난 응어리를 뜸질해본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6    두 '엄마'를 모시는 아들 댓글:  조회:625  추천:0  2020-12-08
두 '엄마'를 모시는 아들 허강일 “자기의 부모를 모시는데 무슨 비결이 있겠습니까? 그저 두분 다 똑같이 모시는 게 전부지요.” 여든 고령의 친모와 70세를 바라보는 장모를 한집에 모시고 산다는 소문을 듣고 김학철씨를 찾았을 때 그가 쑥스럽게 던진 첫마디였다. 1971년생인 김학철씨는 김씨 가문의 4남매중 막내로 흑룡강성 가목사에서 태여났다. 총명하고 령리한 막내의 출생으로 온 가족은 환희에 차넘쳤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이였다. 느닷없이 고열에 시달리던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일어나지 못하게 되였던 것이다. 병원에 갔더니 소아마비후유증으로 영원히 장애자로 살아야 한다는 무서운 진단이 떨어졌다. 가족에서는 어떻게든 그의 다리를 치료하려고 가목사 일대의 병원을 전전했지만 결국 포기해야만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옵니다. 불편한 다리를 갖고도 저렇듯 씩씩하게 잘 자랐는데 가령 그 때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김학철씨의 로모 백옥숙(84세)녀사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끝을 흐리였다. 화남현중학교를 졸업한 뒤 김학철은 림업국 종업원 가속으로 가목사림업국 산하 저가락공장에 출근하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몸이 불편한 남자가 저가락공장에 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열심히 맡아나갔다. 김학철씨는 차츰 능력을 인정받아 출근 반년 만에 직장 주임으로 승진하였다. 그가 맡은 직장도 선진직장으로 평의되였다. 김학철은 일약 공장의 스타로 뜨면서 많은 처녀들의 관심을 끌다가 1996년, 이쁜 한족처녀 전동매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얼마 뒤, 국가의 림업정책에 따라 저가락공장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떠나면서 락담하고 있을 무렵 김학철은 위기를 기회로 잡아 화남시에 〈아리랑노래방〉을 차렸다. 김학철의 판단은 빗나가지 않았다. 노래방은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김학철은 화남에서 알아주는 노래방 사장으로 뜨게 되였다. 몇해전부터 김학철은 화남보다 더욱 큰 곳에서 꿈을 이뤄보려고 가족을 이끌고 청도에 진출하였다. 그는 청도농업대학 서쪽 켠에 비즈니스호텔을 차렸는데 인츰 큰 인기를 몰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두번째 호텔을 오픈하게 되였다. “호텔을 찾는 모든 손님들을 가족이라 생각하고 맞아주고 대해준 것밖에 없습니다.” 김학철씨는 단골손님들이 많이 생긴 리유를 오는 사람마다 동등하게 맞아준 격의 없는 ‘가족식’써비스에서 찾았다. 혹간 손님의 신분을 등록하다가 생일을 맞은 고객을 만나게 되면 잊을세라 생일을 축하해주었고 명절이면 손님들의 방안에 선물을 보내드리리만치 자상하게 배려해주었다. 2018년, 김학철씨는 형님네 집에 계시던 로모를 모셔오겠다고 서둘렀다. 당시 형제들은 장모님을 모시고 있던 그가 친모까지 모시려 하자 부담이 너무 크다면서 로모를 양로원에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며 설득하였다. “자식이 있는데 왜 양로원에서 만년을 보내게 해야 합니까? 안됩니다. 제가 꼭 모실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딸과 사위와 함께 살고 있던 장모가 딴살림을 차리고 나가 살겠다고 하였다. 두 로인을 함께 모시겠다고 나선 사위가 한편 대견스러우면서도 자식들한테 부담이 될가 봐서였다. 김학철은 장모의 손을 꼭 잡고 간곡하게 말했다. “장모님, 제가 장모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저의 로모를 모셔오려는 것은 장모님을 저의 집에서 나가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장모님과 저의 로모 모두에게 효도를 하기 위해서라구요.” “한사람을 모시는 것도 힘에 부치는 일인데 어찌 나까지 자네한테 부담을 끼칠 수 있겠나.” 김학철의 장모는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사위의 호의를 거절하려 했다. “아닙니다. 사위가 반자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장모님을 항상 저의 친엄마처럼 생각해왔습니다. 많이 부족한 줄 알지만 최선을 다해 두분에게 효도할 것이니 제발 저의 곁에 남아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한분도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장모의 우려를 잘 알고 있었던 김학철은 그 당장에서 고향에 계시는 로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로모에게 사연을 밝히면서 두 로인이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며 넌지시 물었다. 항상 사람이 그리웠던 김학철의 로모는 아들의 제의를 냉큼 받아들였다. “나야 좋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지금 운신하기 힘든 상황이라 안사돈한테 페가 되지 않을런지 걱정이구나…” 세월의 무게에 눌리워 많이 지쳐있는 사돈의 목소리를 전해들은 김학철의 장모는 인츰 사위의 손에서 전화기를 가져와서 말을 이었다. “언니, 걱정 말고 오세요. 제가 아직은 젊었으니 언니를 잘 돌봐드릴게요.” 장모가 자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이자 김학철은 인츰 고향에 내려가 로모를 모셔왔고 그 때로부터 한집에서 민족이 서로 다른 두 사돈이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게 되였다. 김학철의 로모 백옥숙은 운신이 불편하였다. 화장실 출입은 물론 식사할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였다. 백옥숙의 목욕, 식사대접, 화장실 출입은 모두 사돈인 상아금이 맡아하게 되였다. 김학철은 장모가 자신의 로모에게 음식을 한술 한술 대접하는 모습이야말로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묘사했다. “저는 언니를 사돈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냥 저의 친언니라 생각하고 인생 끝까지 잘 돌봐줄 겁니다.” 백옥숙의 입에 잣죽을 떠넣어주던 상아금이 옆에서 한마디 곁들였다. “저의 남편은 정말 효자입니다. 두 로인을 깍듯이 섬기는 그 마음에 거짓 한점 없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김학철의 안해 전동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저는 인젠 사돈 없이는 못살 것 같습니다. 사돈과 함께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니까요.” 김학철의 로모 백옥숙도 사돈 상아금의 손을 잡고 감격에 젖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먼저 장모와 로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밖에서 돌아와서는 먼저 장모와 로모의 손을 잡고 낮에 보고 들었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김학철한테는 이미 버릇처럼 굳어졌다. 지난해부터 시작하여 김학철은 약소군체와 어려운 이웃을 위한 공익사업에 나섰다. 그는 친한 친구 류장보와 함께 ‘성양사랑의 빛’ 공익협회를 설립하여 자신이 상무부회장 직을 맡았다. 이 공익협회는 근 400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데 지난 8월 1일에만 하여도 영예군인가족 12세대를 선정하여 후원금과 물품을 보내주었다. “김학철의 인격에 매료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우리 협회에 뭉쳐 함께 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학철씨는 우리 모두가 공인하는 효자입니다. 그는 우리 협회의 홍보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성양사랑의 빛’ 공익협회 회장인 류장보의 치하이다. 공익단체에서 김학철에게 매달 일정한 로임을 지불하기로 하였는데도 그는 일전 한푼 받지 않고 모두 공익사업에 돌리였다. 김학철은 평소에도 “사랑에는 계선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외우다싶이 하면서 살았다.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건 자식으로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로서 그 의무를 포기한 사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두분입니다. 저의 로모가 저한테 생명을 주셨다면 저의 장모님은 안해를 저한테 선물해주신 분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우러러 모셔야 할 분들이지요.” 김학철씨는 로모와 장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김학철씨는 대련민족대학에서 시장마케팅 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외동딸이 자기들보다도 더욱 극진하게 로인들을 섬기고 있다면서 대견한 미소를 지었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5    아버지의 서류함 댓글:  조회:571  추천:0  2020-12-08
아버지의 서류함 안금화 지난 6월의 어느 날, 나는 파가이주를 기다리는 옛집에 들려보게 되였다. 부모님이 떠나간 후로는 줄곧 비여있는 옛집이건만 작은오빠가 가꾸면서부터 터밭의 남새는 여전히 부모님의 손길이 닿은듯 예전처럼 싱싱하고 파랗게 잘 자라고 있었다. 낯익은 뜨락도 부모님들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여 낯설지 않고 정겨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버지의 손때 묻은 책상과 늘 앉아계시던 낡은 의자가 제일먼저 눈에 띄였다. 샘물처럼 솟는 그리움을 붙안고 의자에 앉으니 아버지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여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젖어왔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용케도 참아오시고도 아버지는 70세도 못 넘기고 우리 곁을 떠나간 아쉬움을 남겼다. 1988년 9월, 아버지는 30여년을 몸 담고 있던 연변농업과학연구소에서 정년퇴직하였다. 다른 건 다 마다하면서도 아버지는 자신과 몇십년 함께 해온 책상과 의자만은 날라다가 웃방에 놓고 매일 그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쓰군 했다. 아버지의 책상은 먼지 한점 앉을세라 깨끗하였고 책상 우에 놓여있는 책꽂이에는 서류함 여러개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었다. 뭐가 들어있나 늘 궁금했으면서도 감히 열어보지 못했던 서류함들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 서류함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서류함들에는 아버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서류함들을 확인하면서 나는 아버지를 새롭게 읽어갈 수 있게 되였다. 서류함마다 제일 앞에는 목록이 적혀있었고 그 뒤의 내용들은 목록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순서 대로 차곡차곡 놓여있었다.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앞부분에 있는 몇개의 서류함에는 30여년래 아버지가 이루어놓은 많은 업적들이 일목료연하게 정리되여있었다. 성급 과학연구성과상 3개, 주급 과학연구성과상 2개와 성급 이상 잡지에 발표한 학술론문 20편, 《대중과학》 등 잡지에 발표한 과학기술보급문장 300여편을 비롯하여 편집, 출판한 저작도 9권이나 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연변농학회 비서장으로 있으면서 중일농업기술교류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했고 북경에서 열린 중미대두(中美大豆)쎄미나르에도 참석한 적도 있었다. 한전연구실 주임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콩재배연구를 위해 농촌 출장이 잦으셨다. 토지의 선택과 그에 맞는 선종, 옳바른 파종기술, 합리적 시비(合理施肥),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책 등 콩재배기술을 아낌없이 농민들에게 전수하면서 농촌경제발전을 위해 땀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총화해낸 새로운 지식들을 알기 쉽게 글로 옮겨 농민들에게 알려주었다. 언젠가 개산툰 광소에서 아버지의 강의를 여러번 들었다는 로농이 “안선생님은 누구보다 구수하고 알아듣기 쉽게 강의를 하셨죠. ‘콩박사’거든요.”라고 말씀하셔서 많이 뿌듯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맨 마지막 서류함엔 아버지의 입당서류들이 들어있었다. 입당신청서며 당조직에 바친 여러편의 사상회보며 여러 사람을 울렸다는 리력서까지… 아버지는 60세에 가까워서야 당조직에 입당신청서를 바쳤다. 솔직히 그 때 우리 가족들은 이런 아버지를 리해하기 힘들었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숱한 루명을 쓰고 농촌에까지 쫓겨갔던 아버지가 파란만장한 세파를 겪으면서 당을 향한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버렸을 거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아버지는 “내가 힘들어하거나 괴로워할 때마다 조직에서 잊지 않고 나를 불러주었고 마음껏 기량을 펼치도록 배려해주었다.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입당하지 못한 게 지금에 와서 제일 큰 유감으로 남아있구나.”라고 말씀하면서 자원적으로 당조직에 입당신청서를 바쳤다. 1986년초부터 아버지는 길을 걷다가도 무시로 몰려오는 통증에 멈춰서서 장딴지를 한참씩 주물군 했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은 밤낮없이 아버지를 괴롭혔다. 맥관염이란 병이였는데 치료해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고 어느새 발가락부터 썩어들어갔다. 하지만 그 비상시기에마저 아버지는 수시로 몰려오는 극심한 아픔을 참아가면서 어김없이 중일농업기술교류대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하셨다. 아버지의 불타는 사업심과 병마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완강한 의력은 사람들을 경탄케 했다. 조직에서도 깊은 중시를 돌려 물심량면으로 배려해주었는데 전문인원까지 두명 파견하여 아버지를 북경 협화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배려를 베풀어주었다. 허나 병이 이미 많이 악화되여 발등까지 썩은 상태인지라 아버지는 부득불 오른쪽다리를 허벅지 부위까지 절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버지가 파리한 얼굴로 쌍지팽이와 한쪽 다리에 몸을 의지한 채 다시 우리 앞에 섰을 때 내 가슴은 갈가리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날의 정경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우리 집 뜨락은 아버지를 보러 온 많은 문안객들로 꽉 차있었다. 아버지는 문안객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내가 다리 하나를 잃어서 우는 거라고 생각 마시오. 당의 배려 덕분에 다시 살아나 여러분을 만나볼 수 있고 다시 함께 할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할 뿐이요.” 수술자리가 아물자 아버지는 휴식도 마다하고 휠체어에 앉아 출근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굳건히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마음속 깊숙이 새겨둔 신념 때문이 아닌가 싶다. 1987년 6월 22일, 아버지의 오랜 념원이 드디여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되였다. 파란만장한 리력서를 읽을 때 아버지는 물론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이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 날 우리 집은 명절을 맞이한 기분이였다. 1999년 8월 11일, 일생을 농업연구사업에 바친 아버지는 뇌하수체종양으로 69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100세 시대라 하는 요즘, 한껏 누리지도 못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으면서도 살아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애대를 한몸에 받아안은 아버지의 값진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아버지의 그 대바르고 자신감 넘치며 어떤 풍상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성품은 우리 가족이 세세대대로 물려받아야 할 보석 같은 재부임을 이 서류함을 보면서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4    인생의 여유 댓글:  조회:583  추천:0  2020-12-08
인생의 여유 남명철 인생에는 련습할 겨를이 없다는 도리가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게 요즘 심리이다. 사람이 같은 강물에 두번 들어설 수 없듯이 왕복승차권도 주어지지 않은 인생렬차가 일사천리로 달려가니 련습은커녕 뒤돌아볼 틈도 없다. 하지만 인생의 어떤 목표를 이뤄내려거나 어떤 단계를 무난히 넘기려면 달리는 도중에도 행위의 반복적 실행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련습이라고도 한다. 인생초년의 배움 단계를 힘든 애벌김같이 보는 사람들도 있다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적응단계 역시 만만치 않다.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은 교원의 지도와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렸더라도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게 사회일인 만큼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명지하면서도 여유로운 자세이다. 마치 역은 토끼가 굴 세개를 뚫어놓고 있듯이 말이다. 예전에 시골에서 한때 광범하게 사용되였던 ‘666분’이라는 농약이 있는데 이 농약은 666번의 끈질긴 실험을 거쳐 완성되였기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였다고 한다. 그 뜻인즉 665번의 실패를 거쳐 세상에 빛을 보게 되였다는 말이 되겠다. 훈련이라면 특히 국방의 중책을 맡고 있는 군인을 떠올리게 된다. “오랜 시일을 들여 군대를 육성하는 것은 유사시를 대비한 것이다.”라는 말과 같이 평소의 훈련이 제대로 따라가야 실전에서 피를 적게 흘리고 적병을 무찌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한사람의 인생에서 여유로운 생활자세가 보여지는 관건적인 단계는 인생의 대부분 시간을 몸 바쳐 일해오던 사업터와 친숙한 동료들을 떠나 퇴직할 때를 꼽을 수 있다. “오뉴월 겨불도 쬐다 나면 서운하다”는 속담도 있는데 하물며 수십년간 청춘과 정열을 불태웠던 사업터를 떠나면서 마음이 호수처럼 고요할 이가 과연 몇이나 될가? 하지만 누구나 거쳐갈 수밖에 없는 퇴직의 문턱에서 어떤 이는 달관의 자세로 자기 정서를 여유롭게 조절하면서 재직 때 미처 누리지 못했던 취미생활도 하고 려행도 하며 즐겁게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나가지만 어떤 이는 마치 인생의 종말이 닥쳐오기라도 한듯 풀이 죽어 소침하게 지내거나 심지어 우울증세까지 보인다.  일찍 어느 단위의 한 직원은 다른 사람보다 거의 10년을 더 출근했으면서도 정년퇴직 송별석상에서 목이 꺽 메여 말을 잇지 못하더니 급기야 몇달후 병으로 드러눕고 일년도 안되여 돌아가고 말았다. 자신을 지혜롭다고 믿는 인간이 오히려 어리석다는 말도 있듯이 또 어떤 사람은 국가정책에 따라 내부퇴직을 했음에도 매일같이 단위에 나와서는 할일없이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공짜 점심이나 먹고 가는가 하면 년말 총화 때 례의적으로 청하는 데도 눈치없이 쭈르르 찾아가서는 술잔이 다 식도록 영양가 없는 장편연설을 늘어놓기도 한다. 사람마다 퇴직단계에서의 심리가 각이하듯 년령의 제한을 별로 받지 않는 정상급 수령인물들의 퇴직시 모습 역시 천차만별이다. 온 국민의 애대를 한몸에 받았던 말레이시아의 총리 마하틸은 73세 되던 해에 돌연히 사직을 선포했고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에로 이끌었던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톤도 한 임기를 마치고는 단연히 은퇴하고 미련없이 자기 농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무가베 대통령은 나라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92세의 고령에도 그냥 련임한다고 로망을 부리다가 결국 비류혈 정변에 의해 무가내로 밀려나고 말았다. 시와 때를 가리지 못하고 마지막 한모금 들숨이 남을 때까지도 권좌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는 사람들의 로욕은 왕왕 광채롭지 못한 법이다. 우리들 중 과학자, 연구학자, 작가거나 자유경영인, 정치인 등 특수군체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은 퇴직나이가 기본적으로 정해져있다. 그렇다면 지천명의 나이인 50대에 들어설 무렵부터 마음으로부터 퇴직준비를 하고 서서히 취미를 키워가거나 제2의 직업을 준비하는 등 대비를 하는 것이 마땅한듯 싶다. 이 세상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마지막 단계가 있으니 바로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워질 때라고 할 수 있다. 사멸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공포스러운 존재로 다가갈 수 있더라도 영원한 인생이 없는 만큼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어느 땐가는 세월의 파도에 떠밀려 일초일목도 소지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가게 되여있다. 누구나 비껴갈 수 없는 인생의 종착역에서 차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여있느냐 않느냐에 따라 한사람의 평생 영욕이 판이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요즘 87세까지도 강건하시던 모 회장님이 며칠 편찮다가 갑자기 돌아갔단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연변에 와서 재미 삼아 사업을 했고 또 이곳에 별장까지 마련하여 여름마다 한번씩 꼭꼭 들리던 분이였다. 건강 만큼은 자신이 있다면서 장담을 하시던 분이였고 또 사업을 함에 있어서도 자식들과 소통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하면서 만일의 경우에 일절 대비하지 않았던 터라 창졸히 돌아가고 보니 풀어놓은 자금은 오리무중이 돼버렸고 단돈 일원도 빚진 적 없는 분이였는데 돌아가고 나서 난데없이 빚군들까지 모여들었다고 한다. 60 고개를 넘어서도 마치 이팔청춘인양 사망이라는 말을 기피하면서 상례장소와 상례음식마저 꺼리는 로인들이 있는가 하면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 신체 상황이 눈에 띄게 내리막길을 걷는 데도 강건하다는 걸 과시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로인들도 적잖게 보아왔다. 그러다보니 정작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서는 마지막 소원이나 하고 싶은 말조차도 변변히 남기지 못해 유감을 남기는 경우가 푸술하다. 하지만 이와 달리 우리 주변에는 생로병사의 자연섭리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현명한 로인 분들도 적지 않다. 미리 유상이나 수의를 준비해두기도 하고 굳이 유언이라 이름 짓지 않고 자기의 마지막 소원을 말해두기도 한다. 나의 친구 어머니는 팔십을 넘기고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니 어느 날 자기 유언을 록음해두도록 아들을 불렀다. 많지 않은 저금이지만 손군들에게 똑같이 나눠주고 형제끼리 화목하게 지내라는 덕담도 해주었다. 몇년전, 친구의 어머니는 돌아갔지만 로인의 소원을 담은 그 육성은 부모 없이도 형제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계약서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나의 한 후배는 려행하기를 무척 즐기는데 매번 길을 떠날 때면 간단한 유언장을 만들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뒀다가 돌아오면 찢어버리군 한다. 이제 갓 50살을 넘긴 데다 몸도 건강하지만 우로 어머니, 아래로 딸을 둔 몸인지라 만일을 대비해서라고 해석했다. 어느 한번 길을 떠난 후 늙으신 어머니가 그 유언장을 발견하는 통에 크게 놀라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기실 이는 명지한 처사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항일투사이자 문학거장이신 김학철선생의 마지막 행보를 들어 알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선생은 86세로 타계할 때 비석을 세우지 말고 골회는 두만강에 띄우게 했고 모든 절차를 간단히 진행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유명을 아들에게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상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남기는 고귀한 인생의 선언서였던 것이다. 이 세상 행운과 축복을 받고 태여난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 잠시잠간 소풍하러 나온 유객일 뿐이다. 생로병사가 자연섭리일진대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맞이하는 련습은 어느 때부터 하는 게 가장 적합할가? 사람마다 신체상황이 각이하고 특히는 인생의 종점에는 전후 순서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마디로 찍어 말하기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내 나이 금방 마흔을 넘었을 때 어느 날 간부위가 짜릿짜릿 아파나기에 검사해보았더니 희읍스름한 반점 몇개가 사진에 나타났다.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돌려보는 의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간암이 아닐가?’라는 불길한 예감이 갈마들었다. 늙으신 부모와 두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알른거리면서 마음이 무거워났다. 나중에 다행히 간결석으로 진단났지만 그 때에야 내 몸이 나 하나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였음을 절감하게 되였고 인생종착역에서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걸 실감하게 되였다. 어떤 일에서 두서를 찾기 어려울 때는 그래도 옛것을 참조하는 게 가장 명지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추정되는 평균수명이 삼사십세밖에 되지 않던 춘추시기에 유교의 기틀을 잡았던 공자는 자고로 “인생 칠십년이 고래에 드무나니(人生七十古来稀)”라는 명구를 남기였다. 그 세월에 칠십살까지 살면 오늘날 백세를 산 것처럼 희귀했다는 말이 되겠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평균수명이 이미 76세에 달하고 싱가포르나 일본 같은 장수국가의 평균수명은 이미 팔십세 중반에 이르렀다. 다시말하면 칠십 중반이 되면 거의 절반의 인구가 유명을 달리한다는 말이 되겠고 생존한 고령인중에도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오십대의 한창나이에 작별인사도 없이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생명의 취약성을 페부로 느끼게 된다. 백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너나없이 백살까지 사는 것도 아니고 인생 칠십을 넘기면 아무리 강건한 사람이라도 가을나무 가지의 색조 선명한 단풍잎이라 락엽귀근의 시기를 언제라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자기가 사회적 공인으로 나라를 위해 공헌하는 시공간이 마련되여있고 누구나 자기 테두리를 알고 있다. 그만큼 주어진 시간에 혼신을 쏟으면서 지혜를 빛내 나라와 이웃에 기여하고 자기의 가치를 뿌려야 한다. 그리고 물러날 때가 되면 서슴없이 물러나는 지혜를 보여줘야 한다. 몇십년을 일하고 나서 이제야 뭔가가 알리는가 싶은데 가야 한다면서 입을 쩝쩝 다신다면 이건 분명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이러한 마음가짐이라면 그 뒤로 또 몇십년이 주어져도 그 상이 장상이다. 허다한 젊은이들이 취직에 목 말라하는 이 때 물덤벙술덤벙하는 량반들에게 그냥 자리를 맡기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다. 거뜬히 자리를 내고 다른 인생을 열어나가는 게 가장 명지한 선택이다. 여덟 신선이 저마끔 장기 펴서 다리 건너는 풍경이 연출돼야만 우리의 가치를 그 여느때보다 더 잘 실현할 수 있다. 우리한테 인생은 한번뿐이라는 것, 그래서 편안하게 인생을 마주해야 한다는 여유로운 자세를 가질수록 우리의 인생을 더 잘 후려잡을 수 있게 되는 법이다.  한 인간의 삶의 가치는 자기가 맡은 배역에 어느 만큼 충실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한 백년도 살기 어려운 인생살이 고개마다에서 주어진 내 삶에 부끄럽지 않도록 나름 대로 모든 단계에 공을 들인다면 너나없이 한세상 살다 가는 길에 유감이 적지 않을가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3    양봉장에서의 나날들 댓글:  조회:445  추천:0  2020-12-08
양봉장에서의 나날들 윤종기 매번 달콤한 꿀을 먹을 때면 20여년전 한국에서 고달프게 양봉을 하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 나는 친척의 요청으로 한국에 가게 되였다. 그리고 행운스럽게도 한국에 도착하자 바람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런데 1997년에 금융위기가 들이닥치면서 수많은 건설회사들이 부도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물론 내가 다니던 건설회사도 예이제없이 그 직격탄을 피해가지 못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하여 여러곳을 전전했지만 본 나라 사람들도 일자리 하나 얻기 힘든 시국이니 곤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렇게 한동안 방황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강원도 린제군에 위치한 어느 양봉장으로 가게 되였다. 평생 농사일만 해온 터라 양봉업은 고사하고 양봉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내가 과연 양봉장의 일을 거뜬하게 할 수 있을런지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 같은 불경기에 일자리를 찾은 것만 해도 불행중 다행인데 찬밥, 더운 밥 가릴 신세가 아니였다. 1998년 5월 1일, 서울에서 떠나 강원도 린제군 뻐스터미널에 도착하자 사전에 통화했던 양봉장의 김사장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수인사를 나눈 뒤 김사장이 몰고 온 소형 화물차에 몸을 싣고 오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양봉장에 도착하였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양봉장에는 몇백상자는 족히 돼보이는 벌통들이 줄느런히 늘어섰는데 그 주변은 온통 윙윙 날아다니는 벌천지였다. 5월 한달은 한국 국내에서 이동양봉을 하여 아카시아꿀을 채집하는 시기로 이 때 벌어들인 수입만 해도 일년 수입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한다. 내가 양봉장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저문 저녁 무렵이였다. 저녁이 되면 벌들은 보금자리인 벌통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김사장 그리고 기타 두명의 일군은 벌들이 벌통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300상자 되는 벌통을 10톤 용량의 트럭에 실어놓았다. 그리고 채밀에 필요한 여러가지 공구와 식량, 채소, 생수, 천막을 걷어서 전부 차에 실었다. 이게 바로 이동양봉을 하는 데 필요한 준비작업이였다. 무거운 벌상자를 두시간 동안 등에 지고 날랐더니 온몸은 땀벌창이 되였다. 모든 물건들을 트럭에 다 싣고 나니 저녁 아홉시가 되였다. 트럭은 밤길을 헤가르며 남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우리가 새벽에 도착한 곳은 경상남도 통영의 어느 한 산골이였다. 아카시아나무들로 빼곡한 산에는 꽃들이 만개하여 온 산이 새하얀 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적이 드문 청정지역으로 싱그러운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밀원이 풍부한 곳이였다. 우리는 숨 돌릴 새도 없이 300상자의 벌통들을 다시 하나하나씩 들어내려 다섯줄로 정연하게 줄 지어놓았다. 그리고 천막을 쳐 우리 일군들의 잠자리와 취사칸을 만들었다. 날이 희붐히 밝자 부지런한 꿀벌들은 벌집에서 나와 윙윙 하늘을 날아예며 꿀을 채집하느라 분주하게 돌아쳤다. 며칠간 무덥고 맑은 날씨가 이어지면서 올해에도 꿀풍년이 들 것 같다며 김사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덕분에 우리들도 성수나게 일을 하여 꿀을 듬뿍 채집할 수 있었다. 양봉장에서 일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30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 방충모를 쓰고 장갑을 낀 채 채밀을 하는 작업이였다. 하루는 고사하고 잠간만 있어도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벌들이 옷 사이로 들어와서 콕콕 쏘아대니 얼굴이 퉁퉁 붓고 온몸에 벌독이 퍼져 근질거려 초보자인 나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30년을 양봉장에서 뼈를 굳힌 김사장은 꿀벌에 대해 아는 지식이 많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도 척척 일을 잘해나갔다. 벌들이 손등에 붙고 얼굴에 붙어도 벌독을 타지 않았는데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였다. 이건 30여년간 쌓아온 경험과 그동안 벌들과 쌓아온 애틋한 정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마음속으로 나름 대로의 판단을 내렸다. 나는 김사장의 세심한 가르침을 받는 한편 시간이 나는 대로 양봉에 관한 서적을 읽으면서 양봉기술을 익혀갔다. 나중에 귀국하면 양봉전문가가 되여 밀원이 풍부한 고향땅에서 양봉업을 해보자는 야무진 꿈도 꿔보았다. 꿀이 아미노산, 효소, 호르몬, 당분 등 많은 성분이 함유된 으뜸 가는 건강식품이라는 건 이번 양봉일을 하면서 알게 되였다. 꿀 한근을 빚자면 꿀벌들이 몇만송이 꽃에서 채집해온 화분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달콤한 꿀은 부지런한 벌과 인간의 신근한 로동의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듯 싶다. 30여년간 오직 양봉업에 골몰하여 두 자식을 대학공부시키고 널직한 아빠트를 장만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김사장은 부지런한 꿀벌과 닮은 데가 참 많았다. 꿀벌의 부지런한 정신과 김사장의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끈질긴 정신은 내 삶의 본보기가 되였다. 김사장처럼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판다면 누구든지 자기가 하는 일에서 삶의 희열과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며 역경 속에서도 자기 나름 대로의 목표에 따라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 수 있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였다. 3년간 양봉장에서 일하면서 그 어려운 시기에도 남부럽지 않게 목돈을 챙기고 그보다도 꿀벌처럼 부지런히 사는 인간이 되여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여 지금도 그 세월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울렁거리군 한다. 거의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김사장과의 인연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2    세월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삼촌 댓글:  조회:934  추천:0  2020-12-08
세월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삼촌 한경애 밤하늘의 뭇별마냥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 속에서도 가장 고맙고 행복했던 추억을 꼽는다면 당연히 안흥룡삼촌과의 추억을 짚고 싶다. 수십년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삼촌의 모습이 우렷이 떠오른다. 보통키에 뚱뚱한 몸집, 배는 항상 남산처럼 불러있었고 짙은 쌍겹눈과 유별나게 두툼하고 넙적한 귀방울은 마치 부처님의 귀를 방불케 했는데 거무스름하고 둥글넙적한 얼굴은 그렇게 인자할 수 없었다. 삼촌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 가족은 지금도 모여앉으면 어김없이 삼촌과의 이왕지사를 떠올리며 행복한 추억려행을 떠나군 한다. 안흥룡삼촌은 아버지와 피를 나눈 친형제는 아니더라도 우리 사이에는 피보다 진한 두터운 정으로 맺어진 인연이 있었다. 삼촌은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이자 우리 집을 지켜준 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촌과 아버지의 끈끈한 우정은 동란의 세월 속에서 그 진가를 더욱 유감없이 드러냈다. 아버지와 삼촌의 첫 인연은 50여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해림현 시하진 동풍촌이라는 180여호가 살고 있는 작은 조선족마을에도 광란의 거센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 때 당시 아버지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매일 모진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타박상을 입고 숨이 간들간들해진 아버지는 이대로 있다간 생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예감에 기회를 봐서 밤도와 8리 떨어진 신안진의 삼촌네 집으로 피해버렸다. 하도 혼란한 시국인지라 아버지를 숨긴 사실이 들통나는 날엔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무사하지 못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삼촌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를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삼촌은 의사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채에 숨겨둔 채 석달 동안 매일같이 중약을 달여 대접하고 고약을 붙여주면서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마음씨 착한 삼촌댁은 삼시 알뜰하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석달 내내 그렇게 살얼음판 우를 걷는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신경을 조이며 지냈겠으니 그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그러니 우리 가족에서 평생 동안 기억하고 고마워해야 할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삼촌 내외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온 세상이 나를 등지고 떠날 때 나를 품어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다.”라는 말처럼 아버지에게 삼촌은 둘도 없는 소중한 은인이였다. 내가 태여나던 해, 삼촌이 우리 마을에 와서 의사로 일하게 되면서 우리와 삼촌네는 서로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면서 가깝게 지내게 되였다. 내가 다섯살 되던 해, 삼촌은 다시 신안진으로 옮겨갔는데 부모님 산소가 우리 마을에 있었던지라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성묘차로 왔다가 꼭꼭 우리 집에 들리군 했다. 째지게 가난했던 우리 사정을 누구보다 환히 꿰뚫고 있었던 삼촌은 올 때면 늘 돼지고기며 내가 좋아하는 ‘개눈깔사탕’이며 과자를 량손 가득 들고 왔다. 손도 어찌나 컸던지 돼지고기는 항상 다섯근이 푼히 넘게 사오군 했는데 돼지고기 먹는 날이 명절날이나 다름없던 그 시절, 나는 삼촌이 오는 날을 늘 손꼽아 기다리군 했다. 삼촌이 돼지고기를 사오면 엄마는 처마 밑에 달아두었던 시라지를 넣고 돼지고기시라지장국을 끓였다. 삼촌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시라지쌈이였다. 한소끔 푹 끓여서 삶아낸 시라지는 쌈으로, 돼지고기는 두툼하게 썰어서 수육으로 상에 올렸다. 그렇게 삼촌이 사온 돼지고기로 상이 차려지면 그 날은 실로 설을 쇠는 듯한 분위기였다. 푹 삶은 돼지고기를 양념 간장에 찍어먹으면 입안에서 고기가 살살 녹으면서 고소한 향이 입안가득 퍼져나갔다. 가난했던 우리는 그렇게 삼촌이 사온 돼지고기로 쌓였던 썰썰함을 달래군 하였다. 삼촌은 넙적한 시라지잎을 한장 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 우에 이밥과 찐 된장을 한술 얹어 큼직하게 쌈을 싸서 볼이 미여지게 드셨다. 복스럽게 쌈을 싸서 잡수는 삼촌을 옆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삼촌을 따라 시라지를 손바닥에 척 얹는다. 유난히 땀을 잘 흘렸던 삼촌은 목에 흰 수건을 두른 채 땀을 연신 훔치면서 시라지쌈을 부지런히 잡수셨다. 그러더니 “숱한 장을 먹어봐도 우리 아즈마이 만든 된장이 최고요! 돼지고기는 된장국에 삶아야 제맛이구. 돼지고기와 된장이야말로 천상배필이지. 형님, 안 그렇소?”라고 칭찬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러면 아버지도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허허—” 하며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가 “생원, 시라지쌈만 들지 말구 고기도 좀 잡수오.”라며 고기가 담긴 접시를 삼촌 앞으로 밀어놓으면 삼촌은 “아즈마이, 난 고혈압에 심장도 안 좋아서 고기는 적게 먹어야 하오. 아즈마이 많이 잡수오.”라며 고기접시를 엄마 앞으로 도로 밀어놓고는 “오늘 시라지쌈 덕에 생일을 쇴소. 허허—” 하며 넉살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삼촌이 사온 돼지고기로 밥상에 오구작작 모여앉아 행복의 꽃을 피우던 일이 어제일인듯 기억에 생생하다. 삼촌은 내 인생의 선배이자 스승이였다. 내가 결혼할 때 삼촌은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손수 나에게 편지를 써주었다. 편지에는 시부모님을 잘 공대하며 남편과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는 삼촌의 진정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나중에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는 종종 삼촌의 편지를 꺼내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얻고 힘을 내군 했다. 아버지는 생전에 “짐승도 은혜를 입으면 갚는데 사람은 더욱 그래야 한다. 은혜도 모르는 건 사람된 도리가 아니다. 삼촌의 고마움을 잊지 말고 꼭 갚아야 한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늘 째지게 가난했던 우리는 항상 받기만 했을 뿐 삼촌에게 제대로 된 보은을 하지 못하였다. 삼촌은 59세 되던 해 심장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뭐가 그리 급했던지 삼촌은 우리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아버지는 삼촌을 잃은 충격으로 매일 밤잠을 설쳤고 나도 긴 시간 동안 삼촌을 잃은 실의감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삼촌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전하지 못한 아쉬움은 오랜 세월을 거듭하면서 앙금으로 굳어 나의 가슴을 후비고 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늘 가난했어도 삼촌이란 친구를 둔 덕에 누구보다 풍요로운 마음의 부자로 살았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쯤 두분은 하늘나라에서 재회해 힘들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정답게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월은 류수처럼 흘러 모든 것이 다 변하더라도 내 추억 속의 삼촌만은 항상 변함없이 내 마음속 한구석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날개를 퍼덕일수록 더 높이 난다 -도문구강병원 조철우 원장의 인생멜로디 문인숙 도문시 도문구강병원과 연길시 신세기구강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조철우 원장, 그의 성공 스토리가 궁금하여 일전 필자는 연길 신세기구강병원을 찾았다. 지난 40여년간 치과(구강과)라는 한 우물만 파온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노라면 끊임없는 자기 수련을 딛고 세련된 가치관과 만족할 줄 모르는 정열적인 추구가 성공을 이끌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직한 수련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다 “우직한 수련이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군 합니다. 비록 70 고개를 바라보고 있지만 사업이나 생활에서 50대들에게 뒤지고 싶지 않구요.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는 끈질긴 성미가 한몫을 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조철우 원장은 서글서글한 성미답게 자부심 또한 강한 분이였다. 1968년 10월, 중학생이였던 그는 ‘지식청년들은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시대 흐름을 타고 농촌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그는 농촌에서 근 3년간 일하다가 1971년 10월, 추천을 받아 도문시병원에 들어가게 되였다. 첫 일터는 병원 물자보급(后勤)과였는데 빈틈없는 일본새로 그는 인차 지도부와 동료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당시 도문시병원에는 치과(구강과)는 물론 전문의도 없었다. 병원 지도부에서는 그 공백을 메우려고 합당한 사람을 물색하던 중 조철우를 적임자로 꼽았다. “조직의 배치 대로 치과에서 일하게 되였지만 문외한인지라 막막하기 그지없었지요. 당시 농촌에는 하방(下放)된 지식인들이 많았어요. 마침 홍광위생원에 일제시대 일본인 치과의사한테서 치과를 배운 적 있는 의사가 있다고 해서 나는 그 분한테서 약 1년간 치과의술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 분한테서 배운 의술로는 태부족이였습니다. 그래서 1974년에 연변병원으로 연수를 떠났지요. 그리고 그 곳에서 1년 동안 부지런히 의술을 익혔습니다. 그 뒤 1983년, 길림성인민병원 구강과에서 1년간 연수하면서 치과의술을 한 차원 끌어올렸습니다.” 조철우는 도문시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의술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이처럼 배움의 길에 올랐다. 1988년 2월, 연길시에 노블구강병원이 설립되였다. 노블구강병원은 외국의 선진적인 설비와 치과의술을 도입한 연변의 첫 전문병원이였다. 이런 병원이라면 보다 고차원의 의술과 설비를 접할 수 있지 않을가 라는 생각에 그는 결연히 17년간 몸 담고 있던 도문시병원을 떠나려고 작심했다. 하지만 전문대학을 나오지 못한 데다 높은 학위가 없다는 문턱에 걸렸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할 조철우가 아니였다. 그는 연수라도 좋으니 노블구강병원에서 치과 관련 지식을 배울 수만 있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저의 간절함이 통했나 봅니다. 일단 연수생으로 노블구강병원에 남게 되였지요. 그리고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하였지요. 학력은 비록 다른 의사들한테 미치지 못했어도 그동안 쌓은 경험과 배움에 대한 끈질긴 추구가 병원측에 진심으로 다가갔나 봐요. 그래서 1년 만에 전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연변의학원에서 반공반독(半工半读) 형식의 치과학과 학생을 모집하였다. 조철우에게는 가뭄에 단비나 다름없는 소식이였던 만큼 바로 응시하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는 공부였던지라 독학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걸탐스럽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2년간의 학업을 원만히 마치였다. “처음으로 대학교에 발을 들여놓는 그 설레임은 한마디로 형언키 어려운 거였어요. 책과의 씨름은 자신과의 겨룸이기도 했지요. 오직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열심히 흘린 땀은 노력한 자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학기마다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였습니다.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이 들더라구요.” 조철우는 1988년 3월부터 1992년 5월까지 근 5년간 노블구강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고학력의 엘리트들과 경쟁하면서 나중에 주임직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인생은 모험 속에서 일매진다  “인생에는 모험이 필요합니다. 주어진 삶에서 주춤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봅니다. 나의 삶도 어쩌면 한차례의 큰 모험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블구강병원에 취직했으니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고 주임직까지 맡았으니 ‘벼슬’을 한 셈이지만 창업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억누를 수 없었으니까요.” 당시 노블구강병원은 인기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할 조철우가 아니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의 고향에도 이런 병원을 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형편에 무슨 돈으로 창업을 한단 말인가?’ 당시 조철우의 로임이라야 주임 수당금까지 합쳐서 고작 400원밖에 안되였다. 이 돈으로 세집값을 지불하고 가정살림에 보태고 나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나는 무작정 도문시정부를 찾아갔지요. 도문에 치과를 설립할 의향을 상세히 피력하고 나서 나의 주머니 사정을 얘기했지요. 마침 전문 치과병원이 필요했던 차라 정부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주었지요. 그 덕에 17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었구요. 당시 17만원은 천문학적 수자였습니다. 꿈이 아닌가 싶어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습니다.” 연길에다 구강병원을 앉히지 않고 도문을 선택하게 된 리유를 조철우 원장은 이렇게 밝혔다. “사실 연길에서 창업했더라면 사업이 지금보다 더 번창하고 규모도 더 커졌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도문을 선택한 리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 첫번째 리유가 바로 도문은 나의 두번째 고향이라는 데 있습니다. 태여난 곳은 아니지만 그 곳에서 자라고 그 곳에서 처음으로 치과를 접했는가 하면 가정을 이루고 한 가정의 세대주가 되였기 때문이지요. 두번째로 도문 시민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이였지요. 세번째로 그래도 노블구강병원에서 많은 의술을 익혔는데 연길에서 노블과 경쟁한다는 것은 도의적으로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번째로 당시 도문은 교통요로여서 지리적으로 위치가 괜찮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조철우는 밑천 17만원을 가지고 100평방메터짜리 건물을 임차하고 필요한 설비를 갖추어놓은 다음 경험자들을 우선으로 하는 직원모집에 나섰다. 오직 조철우라는 한 인간의 됨됨이와 능력을 믿고 바로 응해주는 이들이 있어서 며칠 사이에 직원 모집을 끝낼 수 있었다. 이렇게 도문의 첫 구강전문병원인 도문구강병원이 정식으로 오픈하게 되였다. 조철우 원장은 낮에는 환자들을 보고 저녁에는 직원들 강습에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창업 초기여서 집을 마련할 여건이 안되여 병원 한쪽에 칸을 막고 세식구가 살았다. 10평방메터도 안되는 작은 단칸방이라 침대 하나를 겨우 들여놓을 수밖에 없어서 침대 우에 다락을 만들어 아들의 침대를 마련해주었다. 겨울이면 벽에 서리가 하얗게 한층 앉을 만큼 집이 추웠기에 잘 때마저 손에 장갑을 껴야 했다. 직원 대여섯명의 점심과 저녁 밥상도 식탁이 변변치 않아 침대 우에 차려야 했다. “개원하여 1~2년 동안은 새벽 3시전에 잠자리에 든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낮에는 진료하고 저녁에는 직원들 강습에다 낮에 끝내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다른 데 곁눈을 팔 사이가 없었지요. 그 때 병원 맞은편에 한창 노래방이 흥성하고 있어서 가끔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싶었지만 사업에서 꼭 성공해야 한다는 강한 오기로 모든 유혹을 물리쳤지요.” 도문은 물론 연길, 화룡, 왕청에서도 입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찾아왔다. 환자들은 자체로 담배종이에 번호를 적어 차례를 기다리기도 했다. 어렵게 시작한 창업이였지만 의술이 뛰여나고 봉사태도가 좋은 데다 전체 직원들이 똘똘 뭉쳐 열심히 일한 덕에 3년 만에 대부금 17만원을 다 갚는 아름찬 쾌거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대출을 받고 대출을 갚고 하면서 1992년부터 2010년까지 9년 사이에 병원 건물을 4번이나 옮기며 규모를 조금씩 늘여나갔다. 현재 도문구강병원의 영업 면적은 1,000평방메터에 달한다. 조철우 원장은 연길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이 각별히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2006년, 연길에 500평방메터 규모의 신세기구강병원을 설립하고 의학원을 졸업한 아들(조춘일)에게 경영을 맡기려 했다. 그런데 아들은 자신을 아직 더 무장해야 한다면서 한국류학의 길을 선택했고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느라 5년후에야 귀국하는 바람에 조철우 원장은 연길과 도문을 오가면서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몸살을 앓아야 했다. 물론 지금은 아들이 신세기구강병원 원장을 맡고 있지만 말이다.   인생은 줄타기 사업하는 사람 치고 고생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을가? 조철우 원장도 사업에서 늘 탄탄대로는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자금난과 직원관리가 제일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대출을 받고 대출을 갚는 과정에서 신용을 무엇보다 중히 여겼기에 한고비 또 한고비의 자금고비를 헤쳐나갈 수 있었고 넓은 아량과 긍정적인 마인드로 직원들을 대했기에 그들과 10~20년이나 한솥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조철우 원장의 직원 사랑은 남달랐다. 자신은 세집에 살지언정 직원들에게는 따뜻한 안식처를 마련해주고 싶다면서 1998년 60만원을 대출받아 도문시에다 3층짜리 직원아빠트를 지었다. 조철우 원장은 10년 혹은 20년 동안 함께 해온 직원들이 창업하겠다고 나갈 때마다 섭섭해하면서도 돈을 꿔서라도 밀어주는 ‘괴짜형’ 보스였다. “‘바보’라는 소리도 듣고 핀잔도 많이 들었습니다. 직원들도 날개가 굳어지면 날아가기 마련입니다.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나한테서 배운 기술로 치과를 꾸렸으니 나 자신은 또 새로운 기술로 자신을 ‘무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또 한국 연수의 길에 오르군 했지요. 기술이나 설비 면에서 늘 앞서가기에 왼심을 써왔습니다. 그러했기에 제자들은 또 스승이라고 찾아와서 새로운 가르침을 받고,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에 더불어 성장하게 된 거죠.” 조철우 원장은 함께 있는 동안만은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직원들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줄타기이다. 빠른 변화 속에서 자칫하면 경쟁의 선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큰 성장을 이룰 수 없음을 감안한 조철우 원장은 1998년, 연변조선족자치주구강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협회가 기반을 다질 때까지 4년간 협회를 이끌어왔다. 조철우 원장은 협회를 설립한 후 쎄미나르를 조직하고 경험을 교류하는 한편 한국 치과 업계와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새로운 정보를 공유했는가 하면 후배들이 한국에 나가 연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는 등 많은 일들을 했다. 협회가 설립된 지 어느덧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학술단체로서의 그 빛을 예이제없이 찬란하게 뿌려가고 있다.   ‘안해표’ 도시락과 황혼의 로맨스 성공한 사람의 뒤에는 늘 헌신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조철우 원장은 오늘이 있기까지 묵묵히 뒤바라지를 해온 안해의 공로가 크다며 특히 ‘안해표’ 도시락이 힘의 원천이였다고 말한다. “직원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그래도 ‘1등 공신’은 바로 안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소에 무뚝뚝한 내가 사업을 한답시고 가정의 모든 일을 안해한테 떠맡겼으니 말입니다. 안해의 헌신적 정신과 알뜰한 살림살이로 오늘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안해는 그동안 무뚝뚝하고 일밖에 모르는 나한테 불평 한번 내비친 적이 없습니다. 하루에 두세번씩 도시락을 싸야 하고 병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대로 쏟아부을 때도 있었지만 안해는 늘 불평없이 받아주고 묵묵히 기다려주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열 때면 밥과 반찬의 향, 안해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힘이 솟는다는 조원장, 원체 무뚝뚝한 성미인지라 지금까지 살뜰하게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단다. “안해 자랑을 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하지만 저는 이 자리를 빌어 한번 쯤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안해(박경자)는 우리 조선족녀성의 미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다정한 안해, 훌륭한 엄마로, 병원에서는 직원들의 훌륭한 누이로, 엄마로 이미지가 각인됐습니다. 부모가 없는 직원에게 짝을 무어주고 몸소 달아다니며 결혼준비를 해준 사람입니다. 내조의 녀왕이지요.” 나이 들면서 안해와의 대화 시간을 늘이려고 일부러 다가가고 있다는 조원장, 한주에 두시간씩은 학원일정이다. 안해는 가야금학원, 조원장은 바이올린학원에 다닌다. 이 시간 만큼은 사업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즐거움을 맛 본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안해는 가야금을 타고 조원장은 바이올린을 켜면서 음을 맞추며 늘그막 사랑을 무르익혀가고 있다. 이게 사는 멋이다. 예술을 의학에 접목시키듯 삶도 예술에 접목시키니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조원장, 취미생활로 전에는 골프를 쳤고 최근에는 바이올린을 배우느라 땀동이를 쏟고 있다. 골프를 쳐도 허리 나갈 정도로 쳤고 바이올린 역시 프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해도 조만간 프로가 되기 위해 열정을 불태운다. “70 고개를 바라보지만 늘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가서 절정에 이르렀다가 뚝 떨어지는 순간이 올지라도 하는 일에, 배움에 최선을 다하렵니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보람을 느끼지요.” 조원장은 구강협회 년말총화 때 그동안 갈고 닦은 바이올린 연주솜씨를 선 보였다. 젊은이들도 많은데 나이 많은 늙은이가 무대에 오르겠느냐면서 거절했다가 각 현, 시와의 겨룸에서 도문지회가 뒤질가 봐 결국 무대에 나서게 되였다고 한다. 쑥스러움도 잠간, 황혼의 로맨스가 바이올린 선률을 타고 장내를 가득 메웠다. “취미생활은 누구한테 자랑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삶의 질을 향상하고 성취감을 느끼기 위한 데 있습니다.” 이처럼 조철우 원장은 오늘도 삶이라는 항아리에 하나하나의 성취감 넘치는 스토리를 채워가고 있다. 《로년세계》2020년 12호
20    [천우컵] 효도의 의미 댓글:  조회:629  추천:1  2020-11-06
효도의 의미  송향옥 시간처럼 빠르고 덧없는 게 또 있을가. 어머니가 영영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2년이 되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 날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쓰리고 아려온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열흘전이였다. 아침에 딸애를 학교에 보내놓고 방안을 거두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웬만하면 한번 다녀가렴. 어머니가 널 무척 보고 싶어하는구나.” 여느때와 달리 피곤기가 잔뜩 실린 아버지의 목소리는 퍼그나 가라앉아있었다. 남편이 출국한 뒤로 홀로 딸애를 키우고 있는 나를 배려해서 웬만해서는 전화를 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리 속을 스치면서 가슴이 방망이를 쳤다. 어머니의 병세가 갈수록 깊어가서 핸드폰소리만 울려도 깜짝깜짝 놀라군 하던 무렵이였다. 하던 일을 멈추고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친정으로 달려가보니 아버지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침대머리에 앉아있었다. 여느 날 같으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막내딸이 왔구나.”라고 하면서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었을 어머니는 침상에 힘없이 누워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침대가로 다가가 앙상하게 여윈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해쓱하고 홀쪽하니 꺼져들어간 어머니의 얼굴을 보노라니 은연중 가슴이 아려오고 눈굽이 젖어들었다. 이윽고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베개 밑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 받아. 이제껏 살면서 널 든든하게 낳아주지 못한 게 늘쌍 속에 걸렸단다. 엄마의 마음이니 얼른 받아. 나중에 약 사먹는 데 조금씩 보태렴.” 내가 한사코 밀어내는데도 어머니는 기어이 내 손에 봉투를 쥐여주었다. 야윈 어머니의 손과 두툼한 돈봉투를 엇갈아 보고 있노라니 뜨거운 눈물이 보뚝 터진 강물마냥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그만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어린애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겨릅대처럼 야윈 손으로 내 잔등을 하염없이 쓰다듬어주었다. “울긴,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아프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는 거란다…” 기진한 몸으로 두 눈을 꼭 감은 채 힘없이 누워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물에 가려 흐리마리하게 안겨왔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식에게 주고 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늘 미안해하는 어머니의 한량없는 사랑 앞에 목이 꺽 메면서 지난 일들이 영화필림마냥 생생하게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딸애의 돌이 지난 지 얼마 안되여 남편은 잘살아보겠다는 소박한 꿈을 안고 출국길에 올랐다. 그 때부터 나는 한창나이에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서 혼자 딸애를 키워야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였는데 정작 홀몸으로 애를 키우려니 힘에 부치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 무렵 나의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몸이 워낙에도 허약했던 나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며 아예 우리 집으로 옮겨와 어린 딸애를 돌봐주었다. 유난히 몸이 약했던 딸애는 잔병치레가 끊이질 않아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을 제 집 드나들듯 찾았다. 한밤중에라도 딸애가 갑작스레 열이 나면 어머니는 두말없이 애를 둘쳐업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고 딸애가 점적주사를 다 맞을 때까지 온몸이 땀벌창이 되도록 품에 안아 달래주면서도 언제 한번 원망 같은 걸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나깨나 늘 딸 걱정, 외손녀 걱정을 달고 살았다. 이 딸이 마흔 고개를 넘도록 해마다 꼬박꼬박 생일을 챙겨주는가 하면 두번씩이나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을 때에도 70 고령의 년로한 몸으로 헐금씨금 병원으로 달려와 넉넉치 못한 살림살이에서도 뭉치돈을 내 손에 쥐여주면서 안스러워 눈물을 훔쳤던 어머니이다. 여태껏 살기 바쁘다는 핑게로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한 이 딸을 오로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포근히 감싸주고 너그럽게 한품에 안아주었던 어머니, 매일 등교하는 외손녀를 챙겨주랴, 앓는 나의 병수발을 들어주랴, 하루 세끼 병원으로 밥을 지어 나르랴 한달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치던 어머니는 내가 퇴원할 즈음에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있었다. 그런데도 이 철 없는 딸은 “왜 나만 이렇게 건강하게 낳지 못했느냐.”고 볼 부은 소리를 뱉어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박박 긁어댔으니… 지난 일들을 하나 둘 떠올리노라니 밀려오는 자책감과 미안함에 북받치는 회한을 금할 길 없었다. 효도는 못할망정 허구한 날 년로한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고 그 가냘픈 어깨에 무거운 짐만 잔뜩 지웠던 나는 실로 한심한 딸이였다. 어머니가 간절한 눈빛으로 좀더 앉아있다가 가라고 만류하는데도 애 하교 시간이 다가오니 아쉬운 마음으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삭정이처럼 바짝 마른 모습으로 누워서 나를 향해 힘없이 손을 젓는 어머니를 돌아보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딛는 내 눈에서는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흘러내렸다. 돈봉투가 든 가방이 묵직하게 느껴졌고 어머니의 다함없는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났다. 돌아가는 길에 차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병상에서조차 이 딸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애면글면하는 늙고 아픈 어머니에게 나는 과연 무엇을 해드렸던가? 여직껏 받기만 하고 살기 바쁘다는 핑게 아닌 핑게로 징징대면서 효도려행 한번 보내드린 적도, 값진 옷 한벌 사드린 적도 없었다. 고작 생일날에 돈 몇백원씩 드리는 걸로 넘기고 병수발마저 늙은 아버지에게 떠맡겨버렸으니… 그런데 그번 만남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 어찌 알았으랴… 불혹의 고개를 넘어서야 부모님이 계실 때 종종 찾아뵙고 살뜰하게 위로하고 즐거움을 안겨드리는 게 진정한 효도라는 걸 깨달았으니 나란 인간은 실로 무심하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불효자였다. 문득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의 가사가 무거운 채찍으로 둔갑하여 나의 마음을 호되게 때린다. “부모가 열번 생각할 때 자식이 부모를 한번 생각해도 효자”라는 우리말 속담이 나의 귀전을 아프게 울린다… 《로년세계》  
19    [천우컵] 청산은 만고에 푸르르며 댓글:  조회:509  추천:0  2020-11-06
청산은 만고에 푸르르며 홍성빈 타고난 음치로 노래 한곡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던 내가 어찌하다보니 시조창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였다. 십여년전, 우연하게 시조 명창 괴암 백원호선생이 부르는 〈청산은 어찌하여〉를 들은 게 그 발단이 되였다. 고요한 느림 속에 우아함이 물결치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긴 가락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숨 죽여 경청하노라니 조상들이 견뎌온 지난 시간에 대한 고백을 듣는 듯했고 앞날에 대한 벅찬 희망의 숨결이 가슴에 와닿는 것 같았다. 그 때부터 나는 시조창의 깊은 매력에 풍덩 빠져들었다. 멋스러운 우리 시조창을 널리 전파하고 민족의 뿌리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2008년 5월, 국내 최초로 사단법인 연길시 중국조선족시조창협회를 설립했다. 초창기 멤버는 아홉명이였다. 다들 열정은 하늘이라도 찌를듯 높았다만 제대로 시조창을 부르는 이는 단 한명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였다. 우리는 대한시조협회의 도움을 받아 교재를 구했고 사비를 털어 한국에서 선생님을 모셔왔다. 자금난 때문에 교실을 마련할 수 없었던지라 공원이나 광장에서 련습했고 추운 겨울이나 비 오는 날이면 회원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교재가 닳고 테프가 늘어지도록 시조창을 불렀다. 초반에는 주위의 반응이 다소 시큰둥했다. 본연의 맛을 살리지 못하면 자칫 곡소리로 들리기 십상인 시조창 특유의 곡조 때문이였다. 실제로 공원에서 시조창을 부르다 시민의 신고로 경찰이 달려온 적이 있는가 하면 회원의 집에서 부르다 초상을 치르는 줄 알고 아빠트 경비원이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 회원들 가족들도 귀에 거슬리는 그런 소리를 하느라고 사비까지 털어야 하느냐며 우리의 열성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는수없이 집에 있을 때면 화장실이나 이불 밑에서 식구들 몰래 련습했고 밖에 나가서도 민페가 될가 봐 소리를 잔뜩 죽여가며 시조창을 불렀다. 이런 힘든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시조창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2010년 12월 3일, 우리 협회 회원 7명은 한국 경상남도 함안에서 펼쳐지게 될 한중일시조창경창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대련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있었다. 처음 참가하는 국제대회인 만큼 다들 무척 긴장한 모습이였다. 그래도 중국을 대표해서 참가한다는 긍지와 해외 고수들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가슴은 한껏 부풀어있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심사일군이 관광비자로 한국에 돈벌이하러 가는 사람들로 넘겨짚고 우리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협회 사단법인등록증과 한국 주최측의 초청장을 보여주면서 국제시조창경창대회에 참가하러 간다고 입이 마르도록 설명해도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시조창이란 게 뭡니까?” 의심이 덕지덕지 실린 얼굴로 출국심사일군이 물었다. 어떻게 해석해야 알아들을 수 있을가 고심하다가 중국의 전통음악극 경극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700년 력사를 자랑하는 조선전통음악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경극처럼 유구한 력사를 가진 전통 문화유산이지요.” 그래도 심사일군은 여전히 아리숭한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 이러다가 자칫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간 우리는 차라리 시조창을 들려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출입국 심사 창구 앞에 나란히 서서 당나라 시인 최호의 7언률시 〈황학루〉를 개작한 〈석인이승〉을 합창했다.   옛사람 황학 타고 이미 가버려 땅에는 쓸쓸히 황학루만 남았네 한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흰구름 천년을 유유히 떠있네 개인 날 강에 뚜렷한 나무그늘 앵무주에는 봄풀들만 무성하네 해는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인가 강의 물안개에 시름만 깊어지네   출입국 심사구역에서 느닷없이 울려퍼진 노래소리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꿋꿋하게 끝까지 시조창을 불렀다. 불현듯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다른 회원들도 어느새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결코 슬픔이나 원망이 아닌 이름 못할 긍지감과 자부심 그리고 쾌감 같은 게 녹아있는 눈물이였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열성을 다해 시조창을 불렀다. 그제서야 심사일군이 미안해하며 우리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우리 일행은 한시간 십오분 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또다시 얄궂은 일이 벌어졌다. 한국 출입국관리소 직원도 우리를 돈 벌러 한국을 찾는 사람들로 오해하고 입국 허가를 거부했다. 행색으로 보아 형편이 넉넉해보이지 않는 데다 나이도 지긋한 사람들이 시조창을 부르려고 한국까지 왔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대한시조협회의 초청장과 서류들을 다 보여주었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설 수는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였을가, 아니면 서운함 때문이였을가. 우리는 다시 서로 손을 잡고 입국 심사대 앞에 나란히 서서 리황의 시조 〈청산은 어찌하여〉를 합창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류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하리라   이번에도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대련공항에서와는 달리 슬픔과 설음이 담긴 눈물이였다. 가슴을 허비듯 애틋한 시조창이 인천공항에서 울려퍼졌다. 눈물을 흘리면서 시조창을 부르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진정을 읽었던 건지 심사일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우리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중국에서 오신 분들이 저희들한테도 서먹한 시조창을 참 멋지게 부르시네요. 진작에 알아보지 못해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국 심사를 끝냈지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왜서 꼭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났다. 그번 한중일시조창경창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갑부, 특부, 명창부, 국창부 장원을 휩쓸면서 그나마 얼어붙었던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후 우리는 해마다 우수 회원을 선정하여 한국으로 3개월간 연수를 보냈고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회원이 다른 회원들을 이끌어주는 방식으로 시조창을 점차 보급시켜나갔다. 그리고 짬짬이 학교나 경로당에 가서 무료로 시조창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런 끈질긴 노력 끝에 시조창의 열기가 국내에서 피여오르고 있고 조선족시조창은 지방무형문화재로 등록되였는가 하면 중화음송학회 영구보존항목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오로지 소리 하나로 국경을 뛰여넘어 하나가 될 수 있있던 지난날 일화들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다. 어스름을 헤치고 눈부시게 빛을 뿌리는 아침해살처럼 우리 문화가 이 땅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만고상청하기를 기원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운명처럼 시조창을 부른다. 《로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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