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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년세계》잡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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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고모부 댓글:  조회:518  추천:0  2020-11-06
고모부 요시화 고모부가 암으로 입원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어머니한테서 전해듣는 순간 나는 망연자실한 채 할 말을 잃었다. 반평생을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며 아낌없이 모든 걸 베풀어오던 분이였는데 이런 몹쓸 병에 걸렸다고 하니 실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떨리는 손으로 고모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맞아.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혈액암이래. 너희들이 걱정할가 봐 비밀에 붙이라고 단단히 일러주었는데 어떻게 너까지 알게 되였어?” “감기도 아니고 이렇게 큰 병을 숨기려 하시다니요? 고모부가 저한테 어떤 의미인지 잘 알면서… 적어도 저한텐 숨기지 말았어야죠.” 아직도 나를 어린애 취급 하는 고모가 하도 야속해서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하긴 그 진정을 모르는 건 아니더라도 이제 고모부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만 애꿎은 고모한테 화를 내고 만 것이다. “치료를 다그치고 있으니 이제 차도가 보일 거야. 그나저나 고모부가 누구보다 씩씩하게 항암치료를 잘 견뎌내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고모는 연신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나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하지만 항암치료가 어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인가. 살이 타는 듯한 모진 동통과 머리카락이 뭉청뭉청 빠지는 아픔, 게다가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심했을가. 지금껏 가족들 몰래 두분이 참고 견뎌왔을 힘든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나에게 있어 고모부는 혈육이나 다름없는 가족이였다. 류하와 사평이란 두곳에 멀리 떨어져있던 두분이 한창나이에 지인의 소개로 결혼을 하게 되면서부터 고모부와 우리 가족의 끈끈한 인연, 그리고 처가부터 배려한 고모부의 희생이 시작되였다. 인품 좋고 수더분하기로 소문난 고모부는 국영농장에 출근하고 있었던 터라 가족 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먹여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처가집에 객식구가 여럿이나 딸려있다보니 늘 살림살이가 넉넉치 못했다. 내가 아홉살 되던 해 부모님은 리혼하면서 나의 양육권을 두고 한동안 줄당기기를 해왔다. 혹여 어린 나이에 상처라도 입을가 봐 늘 마음을 조이고 있던 고모부는 삼촌한테 부탁해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그 때 고모네는 우로는 년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어린 아들 둘을 키우고 있다보니 넉넉한 형편이 아니였다. 그러니 어린 조카인 나를 데려가는 게 결코 쉬운 용단은 아니였다. 하지만 고모부는 한번도 나를 객식구같이 서럽게 군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부모님과 떨어져서 지내는 나를 측은하게 여겨 친자식보다 더 아껴주었다. 반년 쯤 지나 엄마의 손에 이끌려 고모네 집을 떠나 연변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나는 이십여년간 친가와는 련락을 끊고 지내다싶이 했다. 친가와 어렵사리 다시 련락이 닿게 된 건 나의 결혼식을 치르던 무렵이였다. 꿈속에서마저 그리워하던 고모부가 늙고 쇠약해진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나는 어린애마냥 하염없이 눈물부터 흘렸다. 고모부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그동안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여태 련락도 못하고 지냈구나. 너무 미안하다…”라며 말끝을 맺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오열했다. 친가를 대표하여 나의 결혼식에 참석한 고모와 고모부가 아버지 없이도 어엿하게 자라 이렇게 시집을 간다면서 나의 손을 부여잡고 어찌나 서럽게 우시는지 많은 하객들이 새색시의 부모님으로 오해했다는 게 후문이다. 두분의 진정어린 눈물을 보면서 그동안 친가에 품었던 원망과 섭섭함이 봄눈 녹듯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도 그 때였다. “이보게, 자네를 사위라고 불러도 되겠지? 못난 고모부이긴 해도 늘 맘속에 딸처럼 품어온 조카라오. 자격이 없는 줄 알면서도 우리 시화를 잘 부탁합세… 고생스레 자란 아이니… 앞으로는 부디 행복하게 살도록 잘 아껴주오.”라고 목 멘 소리로 새신랑한테 나를 부탁하는 고모부의 눈가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모부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너무 썰렁하게 느끼지 않고 혼례를 올릴 수 있었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삼촌 두분도 만나뵐겸 오랜만에 이루어진 고모부와의 짧은 만남이 아쉬워 나는 일부러 신혼려행지를 두 삼촌과 고모네가 살고 있는 북경으로 잡았다. 만감이 서린 얼굴로 고모네 집에 들어선 나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지경이였다. 강산도 두번 바뀔 만한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고모네 살림살이는 전혀 나아진 기미가 없어보였다. 아니, 어쩌면 예전보다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와닿았다. 비좁은 세집에서 성가한 두 아들네 내외간이 얹혀지내고 있는 것도 모자라 작은삼촌네 딸까지 십여년째 맡아키우고 있다보니 숱한 식구가 한집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게다가 몸이 성치 않은 큰삼촌네 살림까지 거의 맡아하다싶이 하는 상황이였다. 그제서야 고모부가 그동안 나를 찾지 못했던 까닭을 조금이나마 알아갈 수 있었다. 집이 비좁은 데다 식구까지 많다보니 집과 퍽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세차 일을 하는 고모부는 아예 그 곳에서 살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난방조차 안되는 곳에서 힘들게 일하며 지내는 고모부의 처지를 알고 나니 고모네 집에 얹혀사는 객식구들이 괜히 야속해났다. 그보다도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꾸역꾸역 희생만 하는 고모부가 참 답답해났다. 한두해도 아니고 수십년간 넉넉치 못한 형편에 처가 식구들까지 거들어주느라 한몸을 혹사하면서 아득바득 애면글면하는 고모부를 도무지 리해할 수가 없었다. “고모부, 왜 만날 고모부만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느냐구요?” 삼촌들과 두 사촌형제에 쏠리는 원망까지 담아 나는 쩍하면 고모부를 닥달했다. “괜찮아. 일복이 터진 팔자인 걸 어떡하니. 그래도 아직 몸이 튼튼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특유의 악센트가 강한 말투로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는 고모부는 이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편안한 모습이였다. 2년후, 감감무소식이던 아버지마저 문득 나타나 고모네 집에 눌러앉게 되니 가뜩이나 가냘파진 고모부의 어깨에 무거운 짐 하나가 더 얹혀지게 된 셈이였다. 그래도 고모부는 이제서야 가족이 한데 모여 지낼 수 있게 되였다면서 오히려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렇게 몇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고모네 내외는 북경을 떠나 한국으로 돈벌이를 가게 되였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더니 한국에 간 지 얼마 안되여 또 사달이 나고 말았다. 한국에서 일하던 작은삼촌이 그만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치료비용은 물론 재활치료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고스란히 고모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였던 것이다. 환자가 사전에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터라 그 비용이 어머어마하였지만 고모부는 그번에도 말없이 모든 비용을 대주었다. 고모부 내외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준 덕분에 작은삼촌은 다행히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제는 조금 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심양에서 홀로 지내던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또다시 고모부를 힘들게 할 줄이야. 평소에 모아놓은 돈이라곤 전혀 없는 아버지였으니 병치료에 드는 비용은 역시나 고모부의 몫이 되여버렸다. 아버지의 병세가 심해질 때마다 고모부는 빚까지 지면서까지 비싼 약을 구해다 주었다. 병세가 한동안 안정되자 아버지는 고모부의 고향 류하에 있는 한 경로원에 들어가 지내게 되였다. 그 뒤 아버지의 병세가 다시 위독해졌다는 기별을 받은 고모부는 고모와 함께 아버지의 림종을 지켜주려고 일마저 그만두고 무작정 귀국길에 올랐다. 오랜만에 밟은 고향땅에서 고모부는 그리운 친척과 지인들을 만나 쌓인 회포를 풀 틈도 없이 아버지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다. 내가 아버지 곁을 지키겠다고 나서자 젊은 녀자가 맡기에는 고단한 일이라며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도 고모부는 고인에게 손수 수의를 입혀주었는가 하면 객지라 다른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우리의 사정을 헤아려 자신의 옛 전우들을 불러 제일 힘든 후사를 모두 떠맡아주었다. 언젠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란 글을 본 적 있다. 나무는 자신의 모든 걸 깡그리 내주면서도 한번도 누군가에게 그 대가를 바란 적 없었다. 그렇듯 아낌없이 내주는 나무와 반평생 처가를 아낌없이 받들어온 고모부가 참 많이 닮아보였다. 한번은 고모부에게 처가를 이렇게 챙기는 리유가 뭔지, 고모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가고 롱담삼아 물어본 적 있다. “네 고모가 날 믿고 시집 왔으니 처가 식구면 내 식구인 거야. 제 식구를 챙기는 데 무슨 리유란 게 필요하겠어?” 고모부의 담담한 대답이였다. “고모부, 그 때 엄마가 날 데려가지 않았으면 난 고모부네 집에 그냥 있었을가요?” “당연하지. 이렇게 잘 컸을지 장담은 못하겠다만 어련히 내 몫이 되였을 테지.” 오래동안 품어온 궁금증을 풀려고 넌지시 던진 질문이였는데 고모부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어린 답복을 주니 어릴 적부터 가족애에 그토록 목 말랐던 갈증이 시원히 가시는 것 같았다. 딱딱한 장알투성이의 거칠거칠한 손을 살며시 잡으니 투박한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마음마저 훈훈해났다. 이런 고모부한테 모진 시련을 안겨주었으니 하늘도 참 무심하지… 병원측으로부터 항암치료를 꾸준히 받고 골수이식까지 받으면 괜찮아질 거라면서 요즘은 자신의 골수로 골수이식이 가능할 만큼 의학기술이 발달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놀란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픈 고모부를 어떻게든 살리겠다며 가족 전체가 떨쳐나섰다. 평생 처가를 위해 걱정해온 고모부의 로고가 이렇게나마 위로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갑갑하던 가슴이 빠금히 뚫리는 것 같다. 요즘에 귀국해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고모부는 가족들이 걱정할가 봐 쩍하면 그 걸걸한 목소리로 “괜찮아. 지금 보니 암도 별것 아닌걸. 왜 다들 이렇게 호들갑 떨어?”라고 너스레를 떨군 한다. 평생 아낌없이 주기만 했던 고모부에게 이제는 우리 가족이 거센 비바람을 막아줄 든든한 우산이 되여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17    단오날이면 더 그리운 오빠 댓글:  조회:521  추천:0  2020-11-06
단오날이면 더 그리운 오빠 정정숙 밤은 소리없이 흘러가는데 침대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쉽사리 잠들 수가 없다. 가슴이 갑갑해나면서 평소 귀맛 좋게 들려오던 시계 초침소리마저 귀에 거슬린다.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창가에 다가가 휴— 하고 길게 한숨을 뽑았다. 무겁게 드리운 카텐을 열어젖히고 창밖을 내다보니 삼라만상이 꿈속에 잠긴듯 고요한 가운데 멀리 밤하늘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눈에 안겨왔다. ‘아, 저 별이 혹시 오빠가 아닐가? 오빠가 별이 되여 이렇게 날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닐가?’ 밤하늘에서 명멸하는 그 별빛이 방불히 사랑으로 가득한 오빠의 눈빛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이제 몇분만 지나면 단오날, 바로 오빠의 77세 생일날이다. 예로부터 록음방초가 우거지고 부드러운 미풍이 부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오날은 천중가절로 불리우며 우리 민족의 가장 성대한 명절중 하나로 전해내려왔다. 마침 오빠의 생일날과 겹쳐 나에게는 색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날이기도 했는데 그런 단오날이 너무나도 쓸쓸하고 허전한 날로 바뀌여버린 건 오빠가 저세상으로 떠난 3년전부터이다. 매번 단오날이 오면 나는 오빠가 사무치게 그리워 몸부림을 치군 한다. 쓰린 가슴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려고 책상을 마주하고 탁상등을 밝혀놓고 오빠한테 보내는 편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그리운 오빠, 오빠가 살아계셨다면 이제 몇시간만 지나면 오빠랑 생일단설기 둘러싸고 오손도손 생일파티를 할 건데… 오빠가 곁에 없다는 게 너무 슬프네요… 아, 참, 기쁜 소식을 전해줄게요. 요즘 연변축구의 재기를 위해 몇몇 축구로장들이 일떠나섰어요. 그중에는 오빠가 그처럼 애지중지 아끼던 친구도 있어요…” 어느덧 젊은 시절의 오빠 모습이 환히 떠오른다. 반곱슬머리, 짙은 눈섭, 예지로 빛나는 두 눈, 단단한 몸집… 영화배우 못지 않은 영준한 외모와 축구장에서의 눈부신 활약으로 숱한 처녀들의 애간장을 무던히도 태웠던 미남이였다. 1943년 단오날,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태여난 오빠는 축구명장을 여러명 배출해서 소문이 났다는 연길현 덕신공사(지금의 룡정시 덕신향)에서 잔뼈가 굵어졌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령리했던 오빠는 일찌감치 축구에 푹 빠져버렸는데 평소에는 성격이 부드럽다가도 축구장에만 들어서면 맹호처럼 날쌔고 용맹한 모습으로 바뀌여 어려서부터 ‘뽈개지’라는 별호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공부를 퍼그나 잘하는 아들이 학업에 몰두하여 출세의 길에 오르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념원도 오로지 축구만을 지향한 오빠의 굳건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축구경기를 할 때면 운동장 여기저기서 “그래도 종섭이로구나!”, “종섭이 최고야!”라는 오빠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터져나오군 했다. 오빠의 꿈은 드디여 현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친구와 함께 국가팀에 선발된 기쁨도 잠시, 얼마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오빠는 어쩔수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후 길림성축구대, 심양부대축구팀에서 선수생활하면서 맹활약한 오빠는 왼발차기라는 남다른 특기를 보여주어 팬들 사이에서 ‘왼발의 맹수’로 불리웠다. ‘축구의 고향’이라 불리는 연변에서 축구는 우리 민족의 위상이고 명함이고 자존심이기도 하다. 오빠는 연변축구의 발전을 위해 그야말로 일생을 깡그리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선수에서 은퇴한 뒤 오빠는 연변축구팀 코치를 맡게 되였다. 승패는 병가상사임에도 자신이 이끄는 팀이 패배의 고배를 마실 때마다 오빠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서러움을 속으로 씹어 삼키며 퇴장하군 했다. 그런 오빠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했으면 선수시절에는 아들이 자랑스러워 종주먹을 쥐고 축구장을 찾았던 어머니마저 안스러운 마음에 축구장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었으랴. 오빠는 팀이 경기에서 진 날이면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 경기 전략을 고민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남 모르게 수없이 많은 고역을 치르며 모진 마음고생에 심신이 고달픈 나날들이 이어지자 선수시절에는 강건한 풍골을 자랑하던 오빠의 몸이 눈에 뜨이게 쇠약해져갔다… 성격이 무뚝뚝해도 례의가 바르고 마음이 따뜻한 오빠는 제자들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맏형 같은 선배이자 존경을 받는 코치였다. 특히 시종 축구인재양성에 정열을 불태웠던 오빠는 훌륭한 제자들도 수두룩이 두고 있는데 그중 국가축구팀 선수로 활약한 애제자 김광주는 나중에 오동축구팀 주장, 연변축구팀 코치 중임을 맡기도 했다. 선수시절에는 몸을 바쳐 축구장에서 뛰고 연변축구팀 코치가 된 후로는 팀의 번영을 위해 불철주야 고심한 오빠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삶을 살았다. 축구장이란 화려한 무대를 떠나 은퇴한 뒤에도 오빠의 축구사랑만은 달라진 게 없었다. 신문이나 텔레비죤을 통해 연변축구팀의 소식을 꼬박꼬박 챙겨들으며 연변축구팀과 희로애락을 함께 나눴다. 만년에 오빠는 집 베란다에 화초를 가득 키웠는데 매번 새싹이 뾰족뾰족 돋아나거나 탐스러운 꽃봉오리가 맺힐 때마다 “축구새싹들도 이렇게 파릇파릇 돋아나야 할 텐데 말이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축구에 대한 끈끈한 미련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평생 축구밖에 몰랐던 우리 오빠, 이제는 훌훌 시름을 내려놓으세요. 오빠의 바람 대로 우리 민족의 축구 씨앗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서 민족을 위해 위상을 떨칠 날이 곧 다가올 테니까요. 지금 이 시각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16    운명을 바꾸는 생각의 차이 댓글:  조회:490  추천:0  2020-11-06
운명을 바꾸는 생각의 차이  박일 3개월전, 고향친구 A군이 림파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서로 다른 도시에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퇴직후 여러번 만난 적 있고 가끔 통화하며 지내던 가까운 친구라 마음이 더 알알해났다. 지체할세라 위문전화를 하고 약간의 위로금을 보내고 나서 조만간 한번 찾아가겠노라고 단단히 약속을 해두었다. 그런데 거퍼 한달도 안되여 A군이 돌아갔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였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A군이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자마자 맥이 풀려 식음까지 전페하다싶이 했다는 후문이였다.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간 A군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난다.  살다 보면, 더구나 나이가 들면 종종 이런저런 질병이 찾아와 심신이 고달파지는 게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싶다. 가끔씩 찾아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행복이나 기쁨이 귀빈같이 반가운 존재라면 불쑥 찾아와 우리의 심신을 고단하게 하는 질병은 불청객처럼 전혀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 무탈하게 지내다가 몸이 아플 수도 있고 몸에 고장이 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그만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한창 자라는 청소년이나 혈기가 왕성한 청장년과 달리 몸의 기능이 서서히 퇴화되고 있는 로인들에게 있어 만성 질병에 시달리거나 몸의 여기저기에 ‘좀’이 먹는 건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예방을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로년에 접어들면 관절염,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 치매, 골다공증 같은 질병에 쉽게 걸리게 되는데 대체로 조기발견이 어려운 데다 근치가 거의 불가능하다보니 만성으로 넘어가기가 십상이다. 지어 동시에 여러가지 질병을 앓고 있어 ‘종합병원 환자’나 다름없는 처지로 살아가고 있는 로인들도 수두룩한 상황이다. 아무 질병이 없이 건강한 몸으로 만년을 즐길 수 있다면 자식들한테도 짐이 되지 않아 좋으련만 현실은 늘 생각처럼 록록치 않다. 그만큼 로년에는 불쑥불쑥 찾아오는 질병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엇갈릴 수 있다. 찌는 듯한 폭염 아래서 사막을 걸어가는 두 청년이 있었다. 몸에 지닌 식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려고 물병을 들여다보니 똑같이 반병씩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 물병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태도는 판판 달랐다. 한사람은 “아직 반병이나 있네.” 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대신 다른 한사람은 “물이 반병밖에 없구나.” 하며 한숨을 풀풀 내쉬였다. 생각의 차이에 따라 두 사람이 삶을 대하는 자세와 기분도 완전히 갈라지게 된 것이다. 전자는 신심과 용기로 몸에서 힘이 솟구치는 반면에 후자는 불만과 실망에 젖어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세상만사가 마음가짐에 달려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갑작스레 찾아든 질병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대개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몸에 큰 탈이 생겼다고 두려움을 앞세우고 쩔쩔매면서 뒤걸음질만 친다면 질병은 당신을 얕잡아보고 더욱 감사납게 당신의 몸을 갉아먹으면서 간단없이 괴로움과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모진 병을 앓더라도 마음을 다잡고 ‘괜찮아. 꾸준히 치료받다 보면 나아질 거야. 치료만 잘 받는다면 언젠가는 꼭 나을 거야. 요즘은 의학이 발달한 데다 부모형제가 든든히 곁을 지켜주고 있는데 문제없을 거야.’라는 밝은 자세로 나온다면 위험한 고비도 훌쩍 넘길 수 있다. 우리의 주변을 보더라도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병마와 꿋꿋하게 싸우는 로인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질병을 우리의 심신을 갉아먹는 악마라고 무작정 몰아붙이면서 등을 돌릴 필요는 없다. 병이란 ‘병’자에 마귀라는 ‘마’자를 붙여 ‘병마’라고 저주할 것이 아니라 ‘병’자 뒤에 친구라는 ‘우’자를 붙여 ‘병우’라는 새로운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용기와 아량을 가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우에서 언급했다싶이 관절염, 고혈압, 당뇨병 등은 대부분이 만성 질병인 데다 완치가 쉽지 않은 질병이다. 우리가 아무리 미워하고 싫어한들 고분고분 물러갈 병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현실을 직시하고 질병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겨내는 건 어떠냐 하는 이야기이다. 질병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도 훨씬 편해지게 된다. 머리가 아프면 이마를 짚고 심장이 아프면 가슴을 누르면서 “너 그 쯤에서 좀 살살 하면 안되겠냐?”, “고맙다, 오늘은 네가 나를 별로 귀찮게 굴지 않아줘서.”라며 질병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자세를 갖춘다면 질병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지레 뒤걸음질 치는 일은 사라지고 따라서 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불끈 솟구칠 것이다. 몸이 편해진다면 뭔가 하고 싶은 의욕이 절로 생기게 될 터이니 삶의 질도 따라서 좋아지는 건 시간문제가 아닐가. 이 쯤에서 또 고향친구 A군이 떠오른다. 만약 암 말기란 진단을 받고 지레 맥을 놓지 않았더라면, 더 나아가 무척 힘들더라도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질병을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졌더라면 혹여 지금 쯤 그리운 그 얼굴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진한 아쉬움이 갈마든다.
15    안해와 더불어 살아온 30년 댓글:  조회:483  추천:0  2020-11-06
안해와 더불어 살아온 30년 김태호 시간이 흘러흘러 내 나이 어느덧 5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섰다. 그렇다고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추억을 더듬으며 살아갈 나이는 아님에도 요즘 들어 옛추억에 빠져드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노라니 후회되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혼 하나만은 참 잘했구나 싶어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보겠다고 안해와 함께 앞만 보고 달려온 30년 세월, 강산이 세번 변할 만큼 긴 그 시간을 우리 부부는 고생을 락으로 삼으며 동고동락해왔다. 우리 부부는 고중시절에 만났다. 고중을 졸업하고 나서 나는 연변대학에, 안해는 길림재무학원에 입학한 뒤로 4년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을 쌓다가 졸업한 이듬해 설에 혼례식을 치르게 되였다. 삼대가 어울려 사는 집안에 맏며느리로 들어선 안해는 우로는 시할머니와 시부모님, 아래로는 시동생, 시누이와 한집에서 살게 되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되여 안해는 임신을 하게 되였다. 사회 초년생인지라 로임봉투가 얇았던 우리 부부는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 부모님의 반대도 무릅쓰고 아이를 지웠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로임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진황도의 한 사영기업에 들어갔다. 로임이 두둑한 데다 보너스도 많았으나 기업의 경영분위기가 하도 살벌해서 매일 살얼음 우를 걷는 기분이였다.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단호하게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서 며칠 쉬며 쌓인 피로를 풀고 나니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삐 돌아치는 안해의 모습이 눈에 안겨왔다. 더 이상 빈둥대며 밥만 축내다 정말 백수가 되여버릴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정신을 차리고 구직의 길에 올라 우여곡절 끝에 교통부문에 취직하게 되였다. 그 무렵 안해가 떡두꺼비 같은 아들애를 안겨주니 그야말로 경사가 겹쳐 집안에서는 매일 웃음소리가 터져나왔고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얼마 뒤, 직장에서 아담한 아빠트를 분배받은 우리 부부는 세간 나 딴살림을 차렸다. 아들애 돌이 지난 얼마 뒤의 어느 날, 쉬는 날이 없이 장사하러 시장에 나가던 어머니가 목이 켕기고 허리가 결린다면서 드러누웠다. 그렇게 누운 어머니는 종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연변병원을 찾아가 세밀한 검진을 받은 결과 페암말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나와 안해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다. 당시 어머니의 년세가 57세였으니 따져보면 딱 지금의 내 나이였다. 진단이 나서부터 세상 뜰 때까지 통증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 우리는 근 5개월 동안 눈물로 얼굴을 씻다싶이 하며 우울하게 보냈다. 림종시 어머니는 나와 안해를 옆에 불러놓고 가쁜숨을 몰아쉬면서 자식 둘을 맡겨두고 떠나는 게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가 세상 뜬 후 부모님이 살던 집을 팔고 식구들은 우리 집으로 옮겨왔다. 병원비로 빌린 돈에 어머니가 생전에 장사를 하면서 냈던 빚이 더러 남아있었던지라 그걸 갚아야 했다. 워낙 크지 않은 집은 어른식구 네명이 불어나니 더 비좁게 느껴졌다. 안해는 매일 퇴근하자 바람으로 대가족의 식사준비를 하느라 돌아치면서도 한번도 부르튼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 뜬 후로는 워낙에 활달하던 아버지는 진종일 우울하게 보냈다. 그런 아버지를 안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로인활동실 같은 데로 나가서 기분이라도 바꿔보라고 권했다.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이던 아버지가 글쎄 몇달후 우리를 불러놓고 새 가정을 이루겠다고 알리는 게 아니겠는가? 어머니를 여읜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아 그다지 내키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을 비웠다. 아버지가 새어머니한테로 옮겨간 뒤로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지냈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아무런 구속 없이 편히 지내셨다. 낮에 우리가 출근하면 우리 부부의 침대에서 낮잠을 주무셨는데 년로한 분이다보니 누웠던 자리에 비듬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방안에서도 벽을 짚고 다녀야 하는지라 새하얀 벽에 여기저기 손자국이 남았음에도 안해는 언제 한번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1년 쯤 뒤, 두 동생이 취직하고 연길로 떠나자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설득하여 할머니를 모셔갔다. 하지만 긴 세월을 두고 정을 쌓아온 사이도 아닌 고부간이 한집에서 부대끼자니 아무래도 불편한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어느새 그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안해가 나서서 할머니를 도로 집으로 모셔왔고 그 뒤로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게 되였다. 300원밖에 안되는 월급으로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두 동생까지 책임져야 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당시로서는 출국해서 돈 버는 것이 유일한 지름길이자 출로였다. 나는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류학비자를 받고서 부푼 가슴을 안고 출국길에 올랐다. 마치 다람쥐 채바퀴 굴리듯 매일 바삐 돌아치는 나날이 이어졌다. 오후에는 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초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식당에서 일하고 난 뒤 오전에 쪽잠을 잤다. 일을 마치고 세방에 들어서는 순간 피곤이 몰려와 말 한마디 못하고 폭 고꾸라져 굳잠에 빠져들었다. 일하러 다니던 식당은 항상 손님들로 붐벼서 홀서빙에 설겆이까지 하다 보면 허기가 지는 일이 다반사로 되였다. 때로는 주방에서 일하다가 배고픔을 참느라고 두 손으로 싱크대를 부여잡고 꿇어앉아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배가죽이 허리에 달라붙고 눈앞이 새노랗게 된다”는 말의 진의를 깊이 실감했던 나날이였다. 이를 앙다물고 버텨내던 그 어려운 나날에도 집에서 시할머니를 모시고 어린 아들애를 키우며 굳세게 살아가는 안해의 모습과 아들애의 귀여운 얼굴, 연길공항에서 내 이름을 웨치며 배웅하던 아버지와 동생들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서 얼른거려 기운을 찾군 했다. 1년 동안 죽기내기로 일했는데도 학비를 물고 생활비를 빼고 나니 남는 게 별로 없자 아쉬운 대로 공부를 접고 돈을 버는 데만 전념하기로 했다. 다행히 운 좋게 중의안마기술을 접하게 되였고 솜씨가 어느 정도 손에 익자 〈중국기공정체원〉이라는 안마원을 차렸다. 이 때로부터 그나마 돈이 한푼두푼 쌓여졌다. 야무진 안해는 내가 보내준 돈을 한푼이라도 허투루 쓸세라 꼼꼼하게 모아두었다. 돈이 얼마간 모이자 안해는 아버지 앞으로 집을 마련해드리자고 했다. 얼마 뒤 안해와 토론 끝에 아버지 앞으로 방 세개에 객실이 딸린 120평방메터짜리 아빠트를 갖추어드렸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새집으로 모셔갔다. 그 뒤로 모든 일들이 마술처럼 술술 잘 풀려나갔다. 남동생과 녀동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근사한 직장으로 전근하더니 각자 훌륭한 혼처를 구해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안해는 저세상으로 간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맏며느리로서의 자리를 흠 잡을 데 없으리 만치 튼튼히 지켰다. 그제야 어깨가 가벼워진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귀향길에 올랐다. 간만에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한동안 쉬고 난 뒤 이번에는 한국에 나가 중국어학원을 차렸다. 그럭저럭 학원 운영이 잘되니 우리 가족의 생활도 전례없이 윤택해졌다. 한창나이에 15년이라는 세월을 떨어져 보낸 우리 부부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무색할 만치 마음속에 서로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간직한 채 늘 서로를 그리워했다. 일본에 있을 때나 한국에 있을 때나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왔는가?’ 하는 생각을 한시도 접은 적 없었고 안해 역시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꿈 꾸며 원망없이 외롭고 힘든 날들을 용케 버텨냈다. 결혼 30주년을 맞은 요즘, 장가 갈 나이가 된 아들을 보면서 세월이 덧없다는 생각마저 갈마든다. 결혼생활의 반을 떨어져 지내다보니 커가는 아들애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 짙은 아쉬움이 가슴 한구석에 깔려있다. 아들애의 변성기는 언제 쯤이였는지, 사춘기는 또 어떻게 넘겼는지… 이제 우리 부부가 오손도손 잘살아갈 일만 남았다. 이제 더 이상 서로 떨어져서 그리워하는 일 없이 오손도손 함께 천륜지락을 누리면서 안해와 더불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
14    혜나네 콩이야기 댓글:  조회:689  추천:0  2020-11-06
혜나네 콩이야기 김홍남 서울에서 생활한 지 근 20년째 되던 어느 하루,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짐을 챙겨 지방으로 내려오라는 안해의 ‘불호령’에 나는 그동안 동거동락했던 직장 동료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 충북 혁신도시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얼마전, 안해는 외동딸의 이름을 따서 〈혜나네 콩이야기〉라는 가게를 차렸다. 그런데 주방에서 일하던 아줌마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일손이 딸린다면서 인건비도 아낄겸 내려와서 좀 도와주면 어떻겠느냐는 청을 보내왔다. 10년 넘게 주말부부로 살아왔던 터라 안해의 제의에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20년 넘도록 국가미용관리사로만 일해온 내가 과연 식당 운영이라는 낯선 일을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없는 건 아니였다.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안해랑 같이 식당을 운영할 거라고 말하자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였다. 우선 딸애부터 반대해나섰다. “아빠, 서뿌른 결정은 금물이예요. 엄마랑 같이 일하면 엄마가 꼬박꼬박 월급을 줄 것 같아요? 아빠가 돈이 없으면 제 용돈은 누가 챙겨주나요? 엄마는 제 용돈을 끊은 지 오래됐다구요.” 직장 동료들도 “금슬 좋던 부부도 일단 함께 일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던데 그냥 여기서 일하는 것이 편할 거예요.”라며 조언해주었다. 심지어 소꿉시절 친구마저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겠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허둥지둥 찾아와서 안해와 함께 일하면 싸울 일만 남는다며 부부는 한곳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고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이런저런 조언을 듣고 나니 더구나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바로 그 때 안해한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오라고 할 때 곱다라니 내려오세요. 지금 내려오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안해가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이 나오니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안해의 말 대로 오라고 할 때 내려가야지 아니면 나중에 꿔온 보리짝 신세가 돼도 어디 가서 한탄할 데조차 없을 거라는 예감에서였다. 한편 20년 넘게 이어온 직장생활에도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안해한테 가려고 뻐스에 몸을 맡기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녀자들한테나 익숙할 법한 설겆이, 홀서빙과 같은 일을 내가 과연 잘해낼 수 있을가? 직장동료와 친구들의 말처럼 같이 일하면서 안해랑 자주 다투지는 않을가? 그러다 정말 정이 멀어지면 어떡하지?’ 그렇게 기대와 걱정을 반반씩 안고 우리 가게가 있는 고장에 도착하였다. 나는 가게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주방에서 설겆이, 채소 다듬기, 바닥청소, 쓰레기 버리기 등 안해가 시키는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나갔다. 딱 하루를 일했는데 저녁이 되니 삭신이 쑤셔났다. 이렇게 힘든 일을 여태 안해가 혼자서 도맡아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짠해났다. 식당 운영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퍽 고된 일이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건 매일 필수로 해야 하는 두부 만들기였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은 어지간히 힘든 게 아니였다. 하루 동안 물에 불린 콩을 전기매돌로 간 다음 바가지로 갈아놓은 콩을 베천으로 만든 큰 주머니에 부어넣고 두 손으로 밀가루를 반죽하듯 콩물 진액을 짜면서 콩비지를 걸러내야 한다. 진액을 짜면서 콩비지를 걸러내는 이 작업은 온도에 맞춰 여러번 반복해야 콩비지를 깔끔하게 걸러낼 수 있다. 큰 쇠물통 우에 채반을 얹고 나서 짜낸 콩물을 부어넣은 후 40~50분 쯤 끓여준다. 그 다음 베천으로 된 흰 보자기를 나무틀에 깔고 새하얀 순두부들을 넣은 뒤 간수로 바다물을 반 소래 쯤 부어주면 응고된다. 조금전에 끓이고 남은 물을 양동이에 꼴딱 담아 틀 우에 얹어놓으면 물기가 빠지면서 두부가 서서히 굳어진다. 마지막으로 베천과 틀을 걷어내고 찬물을 부어주면 두부가 완성된다. 하지만 가끔은 두부의 모양새가 망가질 때도 있다. 콩물을 끓일 때 잠시만 눈을 팔아도 끓어넘칠 수 있기에 가스불 온도를 조절하며 노를 젓듯이 자주 저어줘야만 넘쳐나지 않는다. 모양새가 엉망인 두부는 순두부로 밖에 쓸 수 없기에 그런 날에는 다시 두부를 만들어야 했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재료가 바로 간수로 쓰이는 바다물이다. 안해는 차로 왕복 7시간이 걸리는 강원도 주문진 부근의 바다물만 고집했기에 가게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하면 정오가 넘어서야 가게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가게가 쉬는 날이 없다보니 두달에 한번씩 바다물을 길으러 가는 날이 안해에게는 모처럼 찾아오는 ‘휴일’ 날이였다. 하지만 밤 늦게까지 일하고 나서 새벽같이 일어나 7시간 동안 운전을 해서 먼길을 오가야 하니 이 또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가까운 인천이나 서해 충남 바다에 가라고 여러번 타일렀는데도 안해는 고집을 꺾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가게에는 메뉴가 꽤 많았는데 전부 두부와 관련이 있는 음식이였다. 그런데 이 모든 메뉴들이 안해가 직접 고안해낸 것이라고 하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안해는 처음부터 음식솜씨가 야무진 편은 아니였다. 손에 물 한번 묻혀본 적 없던 안해가 신혼초 처음으로 손님들을 모신 자리에서 느끼하기 그지없는 메기찜을 상에 올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당황케 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 뒤 식당에서 일하는 와중에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료리솜씨를 익혀갔는데 요즘은 ‘장금이’가 울고 갈 실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식은 정성이 반이라고 했다. 안해의 이런 정성 덕분에 두부가 맛 있다고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우리 가게는 거의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식당출입을 꺼려하는 고객들의 걱정에 안해는 또 배달써비스까지 추가하여 단골손님들이 집에서 안전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안해의 정성과 배려를 딛고 식당은 나날이 번창해갔다. 식당일은 전에 내가 해오던 일과 전혀 달랐다. 하루종일 분주하게 돌아쳐도 몸이 두개가 아닌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가게에 손님이 북적일 때면 혼자서 홀과 카운터를 봐야 했다. 또 메뉴마다 앞접시와 수저를 놓는 방식이 달라서 헛갈리기 일쑤였다. 특히 손님들이 몰려드는 점심, 저녁 때면 어찌나 바쁜지 정신이 헛갈릴 정도였다. 진작에 식당일에 길들여진 안해는 추호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직장동료와 친구들의 걱정 대로 안해와 싸우는 일도 잦았지만 웬만한 일은 지혜롭게 넘어가다 보면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다. 우리 집은 가게와 5분 거리에 있었기에 한가할 때면 잠시 집에 들려 눈을 붙일 수 있는 ‘사치’도 있었다. 예전에 서울에서 출근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안해의 말 대로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안해는 “당신, 마누라를 잘 만나서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요즘 세상에 이런 늘어진 팔자 어디 있다구요?”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달 쯤 지나니 나도 식당일에 나름 미립이 트기 시작했다. 제 집 가게라서 그런지 직장에서 일할 때와 달리 책임감도 배로 늘어났다. 요즘도 우리 부부는 장사를 하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언성을 높이다가도 부부싸움이라야 칼로 물베기라는 아량으로 언제 그랬느냐는듯 금방 화해를 한다. 싸움 끝에 정이 붙는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부부의 정도 점점 더 돈독해지는 것 같다. 안해의 말처럼 우리 부부는 다툼을 즐기는 체질인가 보다. 세월의 부대낌으로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 안해를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하지만 안해가 어떻게 변하든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전혀 변함이 없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알콩달콩 두부를 만들면서 우리만의 ‘혜나네 콩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13    천년송을 바라보며 댓글:  조회:446  추천:0  2020-11-06
천년송을 바라보며 류서연 그 날, 오래간만에 바람도 쏘이고 기분전환도 할겸 문우들과 함께 가까운 산으로 봄나들이를 갔다. 차에 몸을 싣고 30여분을 달려 우리 일행은 드디여 목적지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리니 산바람 특유의 내음이 물씬 풍겨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너무 싱그러워 한껏 산바람을 들이마시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났다. 몇달을 고스란히 집에만 들어박혀있다보니 자연의 싱싱함이 무척 그리웠던 모양이다. 문우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한편 살랑살랑 나무가지를 흔드는 바람의 상쾌함을 온몸으로 만긱하며 산속을 걸어가노라니 금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직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맑고 시원한 공기, 그 고요한 흐름 속에 반가운 선배문우들과 함께 있다는 것에 마음 끝자락까지 즐거워진다. 그동안 답답하게 내 마음을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일시에 빠져나가는듯 후련해졌다. 도시의 탁한 바람과는 달리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싱그러운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고 그 기분은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벌써 짙은 록음으로 푸름을 토해내는 산, 이름 모를 산새들이 아름다운 목청을 돋구어 봄을 노래하고 여기저기 피여난 들꽃들이 별처럼, 눈동자처럼 반짝인다. 산은 그렇게 자연의 풋풋한 냄새가 그리워 찾아온 우리를 품에 포근히 안아주었다. 이 때, 평시에도 감성이 풍부했던 문우 한명이 갑자기 탄성을 올렸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문우가 가리키는 한그루의 천년송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헉—” 내 입에서도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나왔다. 세월의 두께와 년륜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타래떡처럼 빙빙 타래져 줄기줄기 뻗은 뿌리가 지면에까지 울퉁불퉁 일각을 드러냈고 무성하게 자란 가지는 하늘을 떠이고 있는 듯하였다. 세월의 무게를 한몸으로 감당하면서 뿌리를 깊이 박고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폭염과 혹한과 칼바람을 견뎌왔으면 저렇게 비틀리고 또 비틀리며 자랐을가? 뼈저리게 비장한 생명의 이악스러움, 그런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그 강인한 모습에 가슴이 젖어들었다. 나는 넋을 잃고 천년송을 보고 또 보았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온갖 인내로 시련을 딛고 억세게 자라난 소나무는 초록빛으로 적막이 흐르는 산에 한줄기 생기와 생명을 부여해주는 것 같았다. 넋을 잃고 천년송을 바라보노라니 저 나무가 어쩌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네 인생과 너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새삼스레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게 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의 삶에는 즐겁고 행복한 일도 많았겠지만 고달픔과 아픔 때문에 몸서리치도록 괴로웠던 적도 참 많았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서 병치레가 잦았던지라 동년에 대한 추억을 꼽으라면 아팠던 기억밖에 없는 듯하다. 지금도 페니실린주사를 맞을 때마다 겪었던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아픔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고 잔등에 따가운 뜸을 뜨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기억이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후에 교원이 되여 강단에 오르고 중매결혼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가슴 벅찬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출국붐이 산간 도시에도 불어치면서 아리랑가락에 울고 웃으며 행복을 피워오던 수많은 단란한 가정들이 리산의 아픔에 허우적거리는 비운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였다. 우리 가족도 례외가 아니였다. 마흔 고개를 바라보던 남편은 잘살아보겠다는 꿈을 안고 결연히 출국의 길에 올랐다. 남편이 없는 내 삶은 삽시에 맹물처럼 슴슴해졌다. 웃음과 행복이 사라진 집안에는 고독과 외로움의 그림자만 길게 드리워져있었다. 그래도 한번 맺은 부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내 가족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20여년 동안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걸 감내해왔다. 생활의 세파에 비틀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외로움과 슬픔을 가슴 속에 꾹꾹 묻어두고 고독을 잘근잘근 씹어삼킬 수 있었던 건 가족의 의미와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남편이 열심히 돈을 벌어 살 만해지니 운명이 나를 희롱할 줄이야. 2017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유선암이라는 진단 앞에서 나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고개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대로 물앉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을 위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아직 채 이루지 못한, 미치도록 하고 싶은 일들이 남아있었기에 삶의 끈을 단단히 부여잡고 가족이라는 뿌리에 발을 꼭 붙인 채 이를 악물고 수술에 이어 여섯차례의 힘든 항암치료를 이겨내고 드디여 내 생의 새봄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 순간, 남편도 언니도 아들도 나를 붙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다시 태여난 듯한 희열과 감격에 흠뻑 젖어 남은 인생은 누구보다도 멋지게 살려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있었는데 운명은 거짓말처럼 또 한번 나를 조롱했다. 아들이 벌려놓은 사업이 위기를 맞으면서 거의 백만원에 달하는 빚을 떠안게 되였다. 하루아침에 낭떠러지에 선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거액의 빚은 커다란 올가미가 되여 내 목을 죄여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러저리 치이고 끌려다니는 삶은 그야말로 아픔과 외로움과 괴로움의 련속이였다. ‘이번의 위기는 또 어떻게 넘기지?’라는 걱정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나날들이 하루, 이틀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통장에 넣어둔 비상금을 탈탈 털어 급한 불부터 끄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2년 동안 고통에 몸부림치고 가쁜숨을 헐떡이며 거의 백만원에 가까운 빚을 다 갚고 나니 어느덧 통장은 텅텅 비여있었고 내 몸은 군데군데 멍이 들어 만신창이가 되였다. 그래도 마음은 여느때보다 후련했다. 내 몸을 지지리 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위돌을 드디여 내려놓았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토록 힘든 시련들을 용케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그 이름 하나 때문이였다. 나는 다시한번 얼기설기 비틀리며 자라난 천년송을 바라보았다. 땅속 깊이 파고든 뿌리 덕분에 소나무는 천년 세월이 흐르도록 끄떡없이 푸름을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다. 살아오는 동안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가족이라는 든든한 뿌리가 지켜주었기에 나 역시 그 어떤 시련도 넉근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삶의 무게가 바위처럼 어깨를 짓눌러도,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더라도 가족이라는 뿌리가 있는 한 결코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도리를 세월의 년륜을 고스란히 한몸에 안은 천년송을 보면서 깨달았다. 이후에도 가족이라는 이 뿌리를 꽉 부여잡고 주어진 하루하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많이 베풀면서 여생을 살아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된다. 이 시각 다시한번 줄기줄기 타래지고 얼기설기 비틀린 뿌리를 딛고 자란 천년송을 보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내 삶의 뿌리를 땅속 깊이 단단히 박는다…
12    [천우컵] 큰시누이의 특별한 외출 댓글:  조회:464  추천:0  2020-11-06
큰시누이의 특별한 외출 최선자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는 8월의 어느 날, 나의 70세 생일을 축하해주기라도 하는듯 해살은 유난히 눈부셨고 싱그러운 바람까지 솔솔 얼굴을 간지럽혔다. 나는 가족과 친지들의 뜨거운 축복 속에 백산호텔에서 생일파티를 가지게 되였다. 좌석을 둘러보니 초대한 사람은 다 자리에 앉은 것 같아 모임을 시작하려고 할 때 복무원아가씨가 손님 한분이 더 오셨다고 알려주었다.   ‘누굴가? 올 사람이 더 없을 텐데.’ 하면서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더니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왜소한 체구의 한 녀인이 서있었다. 뜻밖에도 큰시누이였다. 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우두망찰 굳어져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놀란 나머지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잊은 채 멀뚱멀뚱 그녀만 쳐다보았다.     큰시누이로서는 수십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가족모임이였다. 구겨진 종이처럼 제멋대로 쪼그라붙은 몸과 얼굴, 화상이 남긴 흉터로 온통 볼품없이 되여버린 그 끔찍하다 할 만한 모습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변함이 없어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젊은 시절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1968년, 하향지식청년으로 화룡현 로과공사에 내려갔다가 그 곳에서 처음으로 큰시누이를 만났다. 맞춤한 키에 유난히 까맣고 반짝거리는 눈매와 오목조목 또렷한 이목구비, 총명한 데다 마음마저 따뜻했던 큰시누이는 나보다 한살 우였다. 그녀와 나는 마음이 잘 맞아 인츰 친한 친구로 지내게 되였다. 그러다가 그녀가 부대에서 복무중인 둘째오빠를 나한테 소개해주면서 우리는 친구에서 올케와 시누이 사이로 되여 한가족이 되였다. 그 뒤 나 역시 큰시누이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주었는데 연분이 없었던 건지 두 사람은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하였고 얼마 뒤 큰시누이는 같은 생산대에 있는 농촌남자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남자는 지독한 술고래였다. 돈만 나지면 술을 사마셨고 심지어 집에 있는 식량까지 팔아가면서 술을 사먹을 정도로 알콜에 푹 절어있었다. 결국 술 때문에 간경화복수로 시름시름 앓던 큰시누이의 남편은 41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홀로 나게 되니 소학생, 중학생인 두 아들을 키우는 것이 오롯이 큰시누이의 몫이 되였다. 그 때로부터 큰시누이는 낮에는 논일과 밭일을 하고 새벽에는 두부를 앗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느라 억척스레 살았다.   1990년의 어느 가을날, 이른새벽에 일어난 큰시누이는 그 날 따라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나고 머리가 어질어질해나는데도 국경절 전날에 아침, 점심으로 거퍼 두번 두부를 앗아 팔다보니 몸에 무리가 갔던 모양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편히 쉴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아픈 몸을 끌고 이를 악물고 두부를 앗으려고 문지방을 넘어섰다.   가마에 콩물을 붓고 불을 지핀 다음 콩물이 가마에 눌어붙지 않도록 정신을 바싹 가다듬고 나무주걱으로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주걱에 묻은 콩물에 손이 미끌면서 주걱을 놓쳐버렸는데 순간적으로 쏠리는 힘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고단한 몸이 그만 펄펄 끓고 있는 콩물가마에 그대로 미끌어 들어가고 말았다. 입구가 한메터 반이나 되는 ‘한족가마’에 빠진 큰시누이는 사력을 다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으나 야속하다 할가 아무도 그 처절한 울부짖음을 듣지 못했다. 날도 밝지 않은 꼭두새벽이였던지라 아이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고 이웃들도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살겠다는 본능 하나로 사력을 다해 익어서 살갗이 다 벗겨져버린 손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가마언저리를 짚으면서 곤두박질치며 겨우 가마 안을 빠져나온 큰시누이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날이 밝아와 잠에서 깨여난 아이들이 인사불성으로 쓰러져있는 엄마를 보고는 놀랄 새도 없이 대대위생소의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가 큰시누이의 속옷을 벗겼더니 익어서 물렁해진 살점들이 옷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게 실로 눈 뜨고 보기 힘든 장면이였다. 환부가 너무 큰 데다 환자 상태가 심상치 않으니 현병원에서 인차 연변병원으로 이송했고 그 뒤로 큰시누이는 지방의 부대병원에 옮겨졌다.   밀페된 유리관 안에서 맨몸으로 장장 45일간 무균상태로 치료를 받고서야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만 다시 눈을 뜬 큰시누이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예쁘장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살갗이 마구 엉켜붙어있었고 사지 또한 마음대로 펴지도 굽히지도 못할 정도로 한데 쪼그라들어있었다. 매일 온전한 정신으로 흉측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와닿아 큰시누이는 사람과 마주치기를 꺼려하면서 대문 밖을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부터 친척들은 명절이거나 크고 작은 가족모임에서 더 이상 큰시누이 얼굴을 보지 못했고 약속이라도 한듯 그녀를 부르는 일도 적어졌다. 따뜻한 위로와 관심이 큰시누이한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나름 대로의 판단에서였다. 상처를 입은 새처럼 몸을 잔뜩 옹송그리고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큰시누이를 멀거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 가족들도 마음이 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그녀가 가족모임에서 빠지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상사로 되여버렸다.   이런 큰시누이가 나의 생일파티에 불쑥 나타났으니 나는 물론 객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흉터가 많이 나아져서 나타났나 싶어 찬찬히 훑어보아도 별로 달라진 데라곤 없었고 오히려 세월의 흔적까지 덕지덕지 붙은 초로의 모습이였다. 나는 반갑다는 인사마저 잊은 채 큰시누이를 부여잡고 어찌 된 일인가부터 두서없이 다그쳐물었다.   “왜서라니요? 그냥 올케가 보고 싶어서 온 거지요.”    해맑은 얼굴로 슬쩍 롱담까지 건네는 큰시누이를 보면서 그제서야 내가 실수를 했구나 하는 생각에 아차하면서 게면쩍게 웃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큰시누이의 방문이 못내 반갑고 고마운 한편 마음 한구석이 알짝지근해났다. 술주정뱅이 남편 때문에 새각시 시절부터 지지리도 속을 끓이더니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것도 모자라 끔찍한 변고까지 당한 뒤로는 아예 세상과 담을 두르고 다른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 만치 아프고 힘든 날들을 혼자 속으로 씹어삼키면서 보내온 가련한 큰시누이였다. 흉측하게 변해버린 겉모습 때문에 극심한 대인기피증에 모대기고 있다는 걸 알고 난 뒤로부터 늘 잊지는 못하면서도 떨어져 지켜보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나름 대로 믿고 바라보기만 했던 지난 시간들이 무거운 죄책감이 되여 사정없이 가슴을 허비였다. 생일파티가 끝나자 나는 큰시누이의 손을 꼭 잡고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 외롭게 버텨오면서 속으로 삼켰을 하많은 고충을 차근차근 들어주면서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위로받은 건 그녀가 아니라 나일 줄 누가 알았으랴.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를 풀어가는 큰시누이의 얼굴에서는 불행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을뿐더러 놀랍게도 그녀의 자태에서 여유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불행한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였던지라 그녀가 이렇게 환골탈태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였는지 무척 궁금해났다. 그래서 진작 품고 있던 의혹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혹시 남자라도 생긴 거 아니오? 너무 행복해보이오.”   큰시누이는 말없이 웃을 뿐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새 사람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하긴 고생만 하다가 늘그막에 기댈 수 있는 동반자가 나타난 거라면 이보다 더 큰 희사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론 은근슬쩍 걱정부터 앞섰다. ‘어떤 남자가 큰시누이같이 가진 거라곤 없는 데다 외모마저 볼품없이 이그러진 녀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려고 할가? 괜히 상처만 주고 도망 갈 남자면 어쩔가?’라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마음이 착잡해났다.     “요즘은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 여태껏 지금처럼 마음이 편안해본 적이 없었다니까.”    나의 마음을 읽은듯 큰시누이가 그제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지. 만나는 남자가 있구만. 어떤 사람이요?”   큰시누이의 말에 확신을 얻은 나는 조바심이 들어 다그쳐 물었다.   “있지, 그것도 한둘이 아니야…”    뜬금없이 튀여나온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나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말뚱말뚱 큰시누이를 쳐다만 보았다.    이런 나의 모습이 무척 재미 있었는지 큰시누이는 시물시물 웃기만 했다. 이윽고 웃음을 거둔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남자는 아니고 요즘 료양원에 봉사활동하러 다니고 있어. 거기서 운신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식사를 도와주고 옷을 빨고 목욕도 시켜주는데 글쎄 내가 하루만 가지 않아도 보고 싶다고 전화까지 와서 독촉한다니까. 내 이 못난 얼굴이 보구 싶다나.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그렇게 이쁘대. 나를 보고 싶다는 어르신들의 ‘고백’을 들을 때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생겨나. 진정 아팠던 사람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읽을 수 있다는 리치를 깨쳤다고 할가. 지금은 내가 도움을 드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기분이야…   그제서야 엉켰던 실뭉치가 시원스레 풀리면서 기분이 약간씩 가벼워졌다. 지옥이나 다름없는 암담한 그늘을 벗어나 밝게 웃으면서 성큼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도록 그녀를 떠밀었던 비결을 알고 나니 새삼 만감이 교차하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긴 자신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다시 세상을 마주할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가 아닐가? 료양원에서의 봉사활동을 통해 긴긴 시간을 잔뜩 움츠리고 살아왔던 큰시누이가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의미와 가치 그리고 즐거움까지 되찾았다는 말에 그동안 무겁던 마음이 훨씬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한오리의 불행, 참담이란 회색빛도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밝게 빛나는 큰시누이의 얼굴이 전처럼, 아니, 전보다 더 예쁘게 안겨온다. 그동안 가시덤불만 헤치며 아프고 힘든 길을 외롭게 걸어온 큰시누이가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는 속에서 더불어 자신의 아픔도 덜어가며 누구보다도 더 행복하고 당당하고 밝은 삶을 살아가는 게 감격스러웠다. 《로년세계》  
11    버려도 남는 여유 댓글:  조회:438  추천:0  2020-11-06
버려도 남는 여유  박철산 북적북적한 도심에서 살다가 공기가 맑고 전경이 좋은 강뚝 옆의 엘레베터가 달린 새집에 이사 가게 되면서 또 한번 이사짐을 싸게 되였다. 꼬박 15년 만에 하는 이사임에도 나에게는 몸에 배인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다. 이순의 문턱을 넘어선 지 이슥한 나에게 이사는 잦았던 전근과 정비례될 만치 그 차수가 많았다. 손으로 꼽아보니 이번이 자그만치 14번째다. 여러개의 향진과 기관의 여러 부문을 돌면서 사업하다보니 전근이 잦았고 그만큼 이사도 잦았다. 매번 이사짐을 꾸릴 때마다 쓰던 물건을 버리는 일이 제일 곤혹스러웠다. 결혼할 때 친구들이 선물한 수십년 된 기념품, 세간 날 때 부모님들이 사준 가스렌지, 아들애 돌생일 때 갖춘 밥상… 세월이 흘러 이젠 대부분이 색 바래고 시대에 한창 뒤떨어진 고물이 되여버렸지만 손때 묻고 정이 오르고 기념적인 의미가 있다는 핑게를 둘러대면서 번마다 고생스럽게 꿍져서는 새집으로 날라갔다. 옷장 문을 열고 옷부터 챙겼다. 계절에 맞춰 빼곡하게 줄을 세워놓은 옷들이 옷장 가득 넘쳐났다. 정장만 해도 몇벌 된다. 출근할 때 몇번 입어보고 퇴직한 후에는 가끔 례식장에 갈 때나 한번씩 걸칠 뿐 평소에는 전혀 입을 일이 없다보니 옷장을 지키는 병사가 따로 없을 만큼 머쓱하게 걸려만 있었다. 꺼내서 입어보았더니 마치 빌려입은 옷처럼 엉성하였다. 몇번 걸치지도 못한 정장을 그대로 버리자니 아깝고 남한테 주자니 탐탁치 않게 여길가 봐 입을 만한 옷들을 골라 세탁소에 맡겨 깨끗이 빨았다. 그리고 나서 옷들을 네거리에 걸어놓고 “수요되는 분들은 가져가세요.”라는 글이 적혀있는 패말을 그 옆에 걸어놓았다. 과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옷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책장을 정리하면서 불필요한 책들은 페품수매소에 팔아넘겼고 글쓰기에 필요한 공구서적과 명작들만 남겼다. 책만 해도 수십상자 되리라 짐작했는데 선별작업을 거치고 나니 달랑 서너상자가 남았다. 옷견지와 책, 신발 등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이사짐이 퍼그나 간편해져 마음도 따라 홀가분해졌다. 이립의 나이에는 무엇이나 얻고 가지고 잡으려고 아둥바둥하며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다. 하루빨리 승진해서 로임이 오르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예쁜 안해를 얻어 근사한 아빠트에서 자식들을 낳아 키우면서 알콩달콩 행복한 생활을 이루기 위해 미친듯이 일만 했다. 하지만 이순의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사유가 달라졌다. 퇴직과 함께 생활반경이 점차 좁아지면서 심미관과 가치관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저도 모르는 사이 실용주의라는 척도에 맞춰 생활을 재단해나가게 되였던 것이다. “벗이 많으면 길이 더 넓어진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격, 취미가 서로 엇비슷한 친구끼리 만나는 게 더 편해졌다. 퇴직 초기에는 그래도 이런저런 협회에 가입하여 여러가지 활동에 참가했지만 요즘은 다 접고 작가협회 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워이신 친구들을 정리하면서 예전에 가입했던 불필요한 그룹에서 모두 나와버렸다. 이렇게 하니 의미가 없는 모임에 참가하는 차수가 줄어들고 술상을 마주하는 일들이 적어지면서 독서와 글쓰기에 더 많은 정력을 들일 수 있었다. 무언가를 버리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어쩌면 인생은 더하기와 덜기의 련속이나 진배 없다. 빈주먹에 왔다가 한줌의 흙으로 자연에 돌아가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전반전에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아글타글했다면 인생의 후반전부터는 하나, 둘 비워가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고 한 누군가의 말이 오늘따라 새삼스럽다. 당신이 젊은 시절에 얼마나 잘 나갔든 나이가 들어서는 과거에만 련련해하지 말고 현실에 립각하여 진부한 사유와 가치관, 탐욕과 허영심, 부정적인 언행과 묵은 습관을 대담하게 버리길 바란다. 주어진 삶에 항상 만족하고 꾸준히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새 사물을 받아들이는 진취적 습관을 키워가면서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매너 있게 늙어가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버리며 살아가는 지혜를 갖출 때 우리의 황혼길에도 비로소 더 아름다운 꽃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도 나무처럼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쓸데없는 굵은 가지, 병든 가지, 제멋대로 자란 가지 등을 잘라내면 나무가 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매한가지이다. 이사짐을 정리하며 마음까지 정리된 것 같아 한결 홀가분하다.
10    잘 있으라, 뉴몰든이여! 댓글:  조회:796  추천:0  2020-11-06
잘 있으라, 뉴몰든이여! 안수옥 “여보!” “엄마!”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밤 11시 반, 공항에 도착한 나는 출입구에서 꽃물결을 련상케 하는 수백송이 빨간 장미꽃다발을 한품에 안은 남편과 딸애의 목멘 소리를 듣기 바쁘게 사처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끌고 나오던 짐차와 크고 작은 트렁크들을 죄다 팽개친 채 엎어질듯 출구를 빠져나와 미친듯이 달렸다. 어느 사이 우리 세식구는 자석처럼 한데 뒤엉켜 붙었다. 마치 누가 갈라놓기라도 할가 봐 두려운듯이 우리 세식구는 그렇게 서로를 꽉 부둥켜안은 채로 울고 웃으며 그 동안의 그리움을 달랬다. 장장 16년 만의 기나긴 기다림 끝에 이뤄진 눈물어린 애절한 상봉이였다.  “여보, 많이 야위였구만. 얼굴에 주름도 늘고. 그동안 고생만 시켜서 실로 미안하오.” “엄마, 하도 보고 싶고 그리워서 밤마다 엄마 사진을 보며 아빠 몰래 가만가만 이불 속에서 울었어요. 다신 외국에 안 가실 거죠?” 어느덧 반백을 넘어서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남편과 스무살을 훌쩍 넘긴 딸애의 거짓 없는 실토정이다. 고향땅을 다시 밟은 것도 꿈만 같은 일인데 오매불망 그리던 가족들을 마주하는 순간 내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흘러내렸다. 어차피 해야만 했던 귀국이였음에도 나로서는 실로 쉽지 않은 선택이였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그토록 찾아헤맸던 가족들에 끌려 나는 단연하게 귀국의 길을 선택했다. 런던의 히드로공항에서 북경까지, 북경에서 다시 연길까지 장장 열네시간도 더되는 고된 려정 끝에 나는 드디여 금쪽같이 소중한 가족과의 상봉의 꿈을 이루었다. 2005년 봄, 나는 겨우 열살 난 딸애와 남편의 배웅 속에 리별의 눈물을 휘뿌리며 연길공항에서 북경에 가는 려객기에 몸을 실었다. 북경에서 다시 미국으로 날아가기로 되여있었는데 여섯개 나라를 경유해 미국으로 날아간다던 려객기는 결국 영국에 머물렀다. 거금을 내고 일확천금을 꿈 꾸며 떠났던 나로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맹랑하고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여 짐을 푼 곳은 뉴몰든이라고 하는 영국 런던의 한인타운이였다. 한국관, 수라관 등 여러 한국식당들을 전전하며 일을 했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일했던 곳은 뻐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일분 거리에 있는, 갈비탕과 꽃게장으로 유명해진 〈진고개〉라는 한국식당이였는데 히드로공항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부대끼며 귀국전까지 옹근 7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힘들지 않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눈빛으로나 손동작으로도 대화가 잘 통했다. 일하는 과정에 간혹 연변에 있는 식구들과 워이신으로 영상통화할 때가 있었는데 피부와 머리칼 색갈은 물론 사용하는 언어마저 우리와 전혀 다른 동료들의 모습이 비낄 때마다 식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맙게도 나의 동료들은 그 때마다 그들의 특유의 미소와 매너로 답례를 하군 했다. 런던은 또 세계에서 부동산 가격이 높기로 소문난 곳으로서 그만큼 집값과 집세 또한 어마어마하다. 100평방메터 남짓한 아래웃층으로 되여있는 집을 거의 10칸으로 나누어 세를 주는데 한칸의 집세가 한달에 인민페로 치면 7,500원 좌우였다. 제일 싸구려라도 6,000원 정도였다. 지출을 줄이려고 우리는 방 한칸을 세내여 함께 간 동료들이 같이 들었다. 매일 다람쥐 채바퀴 굴리듯 하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용케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언젠가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신념이 받쳐줘서였다. 국제전화비용이 엄청난 데다가 중국과 영국의 시차가 7~8시간 좌우였던 까닭으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가족들과의 통화가 아주 드물었다. 내가 일하고 있을 때면 가족들이 단잠에 빠져있을 때라 고충이 있어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 엄청 힘들었다. 그래서 집에 컴퓨터를 마련해놓고 늦깍이 나이에 그 조작법을 익히겠노라 얼마나 모지름을 썼는지 모른다. 나와 영상통화를 하려고 남편도 집에 컴퓨터를 마련하고 나서 스승까지 모시고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컴퓨터로 영상통화가 가능해지자 우리 가족은 서로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컴퓨터에 붙어 살다싶이 하며 그동안 쌓였던 회포를 푸는 한편 외로움을 달랬다. 시간은 살같이 흘러갔다. 처음 3년간은 딸애와 가족들이 그리워 눈물로 밤을 지새다싶이 했지만 그 뒤론 돈을 벌어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악착같이 일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30대의 싱싱한 푸르름을 넘어서서 초로의 오십대 언덕에서 점차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게 되였다. 소학교에 다니던 딸애도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을 다니게 되였으며 평생을 기탁한, 결혼할 남자까지 생겼다고 알려왔다. 사실 이번에 귀국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원인도 딸애의 결혼식 때문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들이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서 1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지금은 그냥 지나간 추억이라 웃어넘길 수도 있다만 그동안의 마음고생이야 어찌 한두마디로 추려낼 수 있으랴! 정상적인 체류가 아니다보니 귀국할 기회가 없어 수시로 갈마드는 그리움을 몰아내기 위해 모지름을 써야 했고 몸이 아파도 정규적인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지어 어느 한번은 비상검사를 피하느라고 랭장고에 몸을 숨긴 적도 있었다. 고된 로동에 열 손톱이 다슬 대로 다슬어 물건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발목뼈가 쑤셔나도 그 통증을 씹어삼켜야 하는 고된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끝까지 이를 악물며 버텨냈다. 다행히도 이곳은 로동법이 잘되여있어 정규적인 휴식일이 있는가 하면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무조건 가게 문을 닫아야 했기에 시름 놓고 휴식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객지생활에 서서히 습관되여갔다. 런던에 집을 사서 가족들을 초청해 함께 사는 동료들도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워이신으로 딸애의 문자가 날아왔다. 남자친구가 청혼을 했다며 딸애는 무척 들떠있었다. 그동안 딸애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결혼식만은 남부럽지 않게 잘 치러주고 싶었다. 달력을 펼쳐보니 결혼까지 앞으로 시간이 약 일년 쯤 남아있었다. 결혼비용에 조금이라도 더 보태려고 좀더 머물러있다가 결혼식 한달 전 쯤에 귀국하겠다고 딸애와 약속했다. 하지만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얼마 뒤 딸애로부터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별을 전달받게 되였다. 사태가 례사롭지 않다는 걸 짐작한 나는 서둘러 귀국수속을 밟았다. 마땅한 사람을 구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던지라 가게에 미리 사직서를 냈다. 가게 사장님과 사모님은 불에 데기라도 한듯 와뜰 놀라했다. 그동안 쌓은 정이 있는 데다 주방보조로 일하며 가게를 거의 도맡아 관리해온 내가 하루아침에 그만둔다고 하니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다고 언젠가는 리별하게 되리라 짐작은 했다만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 몰랐다며 사장님은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가게는 대뜸 죽가마처럼 끓어번졌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마저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일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서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8개월만 더 일하면 보너스까지 얹어주겠다는 사장님의 후한 권유마저 물리치고 나는 서둘러 귀국을 선택했다. 우리 식구가 잘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였던 만큼 천금을 준다 해도 남편의 소중한 생명과 딸애의 행복과는 바꿀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결심을 내리고 나서 2020년 1월 9일에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티켓을 끊었다. 내가 드디여 귀국한다는 소식이 약이 되였던지 남편의 병도 날을 거듭하면서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수고대 끝에 우리 가족은 드디여 가족사에서 한페지로 남게 될 상봉의 날을 맞이하게 되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거늘 강산이 두번이라도 변했을 법한 16년 만에 고향땅을 밟았으니 실로 감구지회가 컸다.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 따뜻한 몸, 꺼슬꺼슬한 턱수염과 무르익은 능금 같은 딸애의 얼굴을 이렇게 지척에서 맘껏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행복에 겨워 눈물을 걷잡기 어려웠다. 귀국전, 이제 돌아가고 나서 후회할지도 모른다며 넌지시 귀띔해주는 동료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와보니 고향은 그렇게 낯설지도 락후하지도 않았다. 고속철도가 통하고 있고 택배업, 통신수단이 더할나위없이 편리해졌으며 거리도 한결 산뜻하게 와닿았다. 구역관리도 엄청 잘되여있어 비닐봉지가 사처로 날려다니며 거리를 휩쓸던 살풍경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그동안 외국에서 번 돈으로 남편한테는 자가용차를, 딸애한테는 살림집을 선물로 마련해주었는데 남편이 직접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연변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십여년전에 촘촘히 들어섰던 초가집들은 아담한 주택으로, 조선족동네는 민속촌으로 태반이 바뀌여있었다. 도시의 변화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눈에 띄우는 아빠트단지마다 록화가 잘되고 관리가 잘 따라가서인지 아늑하고 정갈했다. 아빠트 정원에서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고 있었는데 요즘은 정책이 좋아져서 둘째까지 보는 젊은이들이 날로 늘어난다고 남편이 흐뭇해하며 들려주었다. 내가 출국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집 한채 마련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였는데 16년 만에 고향땅을 다시 밟고 보니 저마다 현대적인 아빠트에다 외제 자가용차까지 갖추고 남부러울 것 없이 잘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모바일시대라 핸드폰 하나로 모든 결제가 가능했다.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부지런하면 어디서든 잘살 수 있는 게 요즘 세태가 아닌가 싶다. 아직도 뉴몰든에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20년도 넘게 품팔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소리높이 웨치고 싶다. 돌이켜보니 뉴몰든은 지구촌의 여러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삶의 공식을 새롭게 창조하는 공간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태여나서 자란 고향은 말 그대로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정감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였단 걸 고향땅을 다시 밟으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잘, 있으라, 뉴몰든이여! 그리고 고마워, 고향이여!
9    파란만장의 장사길 댓글:  조회:464  추천:0  2020-11-06
파란만장의 장사길 김시린 흔히 중년에 접어들면서 우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을 어엿하게 키워야 하는 중임을 짊어지게 된다. 우리 부부도 례외가 아니였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깬다고 철밥통이라 굳게 믿고 있던 직장이 없어지면서 우리 부부는 하루아침에 백수로 나앉게 되였다. 가슴에서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지만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 무렵 농촌에도 한창 개혁의 물결이 출렁일 때라 우리 부부는 고심 끝에 장사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장사를 하자면 우선 먼저 무슨 장사를 할지를 정해야 하고 그 뒤로는 장소를 정해야 했다. 자금이 딸리는 신세라 남들처럼 영업집이나 매대를 세 맡을 엄두는 못 내고 장사군들이 띄염띄염 널려있는 장마당 부근 길옆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서 친분이 있는 사람을 통해 국영상점에서 잘 팔리지 않는 비닐제품을 외상으로 내다 팔기로 했다. 소래나 물통 같은 비닐제품은 가볍기는 해도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지라 밀차가 아니면 운반하기 어려웠다. 아침에 밀차에 물건을 싣고 장마당 길옆에 나가서 팔다가 점심이 되면 다시 밀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밀차를 끌고 장사하러 나가는 날들이 반복되였다. 그렇게 몇달이 지났지만 물건을 넘겨받을 때 가격이 워낙 높았던지라 떨어지는 게 별로 없었다. 그 무렵 돌공장을 운영하던 형님이 3천원짜리 은행수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아무 때나 현금으로 갚으면 되니 힘들 때 보태라며 내 등을 다독여주는 형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돈을 꼬박꼬박 제때에 갚으니 국영상점에서는 자꾸 저희들 물건을 가져가라 했지만 이미 번 돈에 형님이 가져온 돈까지 있으니 배짱이 두둑해져서 연길이나 심양에 가서 물건을 해오기로 했다. 작은 돈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의 노력으로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그런데 돈을 좀 버는 것 같으니 인차 배 아파하는 경쟁자들이 나타나 가격을 내리는 바람에 우리도 덩달아 가격을 낮추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는 바람에 품종을 늘이지 않고는 죽벌이도 안되였다. 고민 끝에 사발과 바가지 그리고 수저와 같은 생필품들을 더 늘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1년 사이에 품종이 500여가지로 늘어났다. 전혀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던 우리 부부에게 장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어떤 날은 온하루 앉아있어도 관심을 갖고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별로 떨어지는 게 없는 장사인데 아주 렴치없이 값을 흥정하는 고객을 만나는 날이면 “왜 그냥 가져가시지 그래요.”라고 한마디 콱 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고객인지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혼잡한 틈을 타서 하나를 사고 두세개씩 훌쩍 쥐고 달아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치다보니 거스름돈을 더 줄 때도 많았는데 늦게나마 찾아와서 돈을 다시 돌려주는 마음씨 고운 사람들도 있어 마음이 훈훈해났다. 어느 하루, 여느때와 같이 길옆에 난전을 벌려놓고 앉아있는데 농촌에서 온 듯한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생산재료상점이 어디냐며 물어보았다. 내가 좀 멀리 떨어져있는 층집을 가리키며 바로 저 건물이라고 알려드렸더니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래서 “어느 층집, 어느 층집?”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아까부터 일감을 기다리고 있던 삼륜차부를 불러 “이 할머니를 저 생산재료상점까지 모셔다 드리오.” 하면서 돈 2원을 꺼내 삼륜차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삼륜차부가 “바로 코앞인데 무슨 돈까지 주느라고. 오늘 선심 한번 거하게 베푼다고 생각합지.” 하며 한사코 거절하더니 이내 로인을 싣고 떠났다. 나처럼 하루 벌어 하루 쓰는 장사군한테 2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였을 텐데 그걸 굳이 마다하는 삼륜차부가 대뜸 거인이 돼보였다. 그렇게 몇해가 흘러 우리 이 지방에도 출국바람이 불면서 장사를 하던 조선족 장사군들도 하나둘씩 출국길에 올랐다. 외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순간 귀가 솔깃한 적도 있었지만 자식들을 위해 평생 고생을 한 부모님에게 차마 우리 자식까지 맡아달라고 입을 열 용기가 없었다. 나서자란 고향땅에서 어떻게든 아이들을 출세시켜보겠다는 오기로 작은 장사를 꾸준히 견지해갔다. 그런 우리 부부가 믿음직스러웠던지 친척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외국으로 가면서 수중에 있던 돈과 외국에서 번 돈마저 선뜻 우리한테 맡기면서 보관해달라고 청을 들었다. 음력설 기간을 제외하고 일년 내내 등이 휘도록 돌아치는 내가 안스러웠던지 어느 하루 안해가 이렇게 일하다 언제 지쳐 쓰러질지 모른다면서 이미 모은 돈에 사촌들이 우리에게 맡긴 돈까지 합쳐 영업집을 꾸리는 게 어떠냐며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진작 안해랑 똑같은 마음이였던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소문한 끝에 마음에 드는 영업집을 마련했다. 집이 헐망하니 수리해야 할 곳도 많았는데 이젠 제 집이나 다름없으니 구석구석 알뜰하게 손질을 봐야 했다. 집을 허무는 공지에 찾아가 널판자를 헐값에 구매하여 대패질을 해서 덕대를 만들었다. 뼁끼칠을 해야 하는데 간판까지 포함해서 적어도 10통은 필요했다. 당시 뼁끼 한통에 12원이였으니 10통이면 120원이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색종이를 사기로 했다. 한장에 1원씩 하는 색종이를 사서 밀가루 풀로 붙였더니 제법이였다. 그렇게 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드디여 우리에게 속하는 영업집을 갖추었다. 이젠 추운 겨울에 두툼한 솜옷에 털모자를 눌러쓰고 진종일 길옆에서 뼈속까지 스며드는 엄한에 발을 동동 구르는 고역도 없게 되였다. 여름 내내 뜨거운 해빛을 등지고 땀을 훔치며 싸구려를 웨칠 일도 없게 되였다는 희열에 나와 안해는 그 날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마련한 영업집에서 우리는 그 뒤로도 별별 고객들을 상대하며 몇십년 동안 장사를 이어나갔다. 결코 쉽지 않는 선택이였음에도 덕분에 참을인자의 진정한 의미를 깨쳤고 우리의 삶에는 그래도 해살이 가득하다는 걸 깨닫게 되여 참 다행스러워난다.
8    [천우컵] 가난에 삐걱이던 우리 집 밀차바퀴 댓글:  조회:526  추천:0  2020-11-06
가난에 삐걱이던 우리 집 밀차바퀴 김동진 가난을 패물처럼 허리에 차고 아글타글 살아본 사람에게는 가난에 찌든 추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빈곤은 죄가 아니다”라고 한 G.허버트의 말로 자신의 가난을 위안하면서 가난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살아온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는 서글픈 에피소드이다. 나의 생활환경에 변화가 생긴 건 1980년대 무렵이였다. 성동이라는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내가 녕안현조선족문화관의 책임자로 임명이 되여 현성에 가서 살게 된 것이였다. 마을에서는 나에게 출세 길이 열렸다고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나 또한 현성에 가면 여러모로 편하리라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있었다. 돌이켜보아도 객관현실과 주관욕망은 조화가 되지 않는 하나의 커다란 모순덩어리였다. 시골사람이 기회를 잡아 시내로 갔다고 살림이 하루아침에 확 펴리라는 건 사치였다. 오히려 시골에서 살 때보다 경제적으로 더구나 쪼들려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색이 세대주라고 한해가 지나 시골에 두고 온 식솔들을 데려다 시내살림을 차렸는데 식구가 자그만치 여섯명이나 되였으니 말이다. 100원에 꼬리가 조금 붙는 나의 로임을 가지고 골증식으로 허리마저 펴지 못하는 엄마와 직업이 없는 안해 그리고 중학교와 소학교를 다니는 세 아이가 살아가야 했으니 우리 집은 어쩔 수 없이 빈궁의 모자를 쓴 도시빈민의 대렬 속에 끼우고 말았다. 그래도 고마운 사람은 안해였다. 푼돈도 쪼개 써야 하는 궁핍한 살림살이를 하면서도 언제 한번 짜증을 내거나 눈물을 짜거나 바가지를 긁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빈궁으로 하여 겪어야 하는 가정주부의 모든 괴로움과 서러움을 자강과 자존의 힘으로 이겨내려고 모지름 쓰는 외유내강의 녀인이였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상황이 그렇다보니 궂은일, 마른일을 가려 할 처지가 못되였다. 안해는 마늘을 뽑는 채소대의 계절공으로 일했는가 하면 2백여리 상거한 얼짠(尔站)의 산발을 타고 산나물 부업도 해보았으며 개체호 식당의 복무원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길을 박은 게 짠지장사였다. 하긴 먼저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 한물이 지나갔다만 장사에 미립이 튼 역빠른 장사군들이 바야흐로 남방의 연해도시로 진출하여 새로운 짠지시장을 개척하면서 비여있는 그 자리가 안해한테는 기회가 되였던 것이다. 마음을 다졌으니 곧바로 실천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안해는 우선 호주머니를 털어 밑반찬감을 사오고 밀차도 한대 마련하였다. 무거운 반찬그릇을 보자기로 싸가지고 장마당까지 날라가려면 무엇보다 운반도구가 필수적이였다. “큰마음 먹고 30원을 주고 하나 샀어요.” 밀차를 사온 날, 안해가 나를 들으라고 한 말이다. 알고보니 그 30원짜리 밀차는 보기에 허술해도 ‘수입제’였다. 강 건너 나라에 친척방문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 가지고 와서 파는 걸 안해가 사왔던 것이다. 쌀 한주머니 정도의 짐을 싣고 다니도록 각철로 무어 만든, 폭이 좁은 밀차였는데 바퀴는 직경이 한자 가량 되는 통고무로 되여있었다. 바람을 넣을 일이 없으니 섬약한 그녀의 체질로 다루기에는 안성맞춤한 간이밀차였다. 안해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공치는 날이 없이 그 밀차를 밀고 부지런히 거리로 나갔다. 남들이 먼저 우려먹은 자리에서 뒤늦게 시작한 장사인지라 하루 수입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을 찾지 못해 집에 앉아있기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번 푼돈으로 세 아이의 공부 뒤바라지에 보탤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가고 두달이 지나가고 한해가 지나갔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날마다 꼭두새벽에 밥을 지어놓고 나서 짠지보따리를 싣고 나갔다가 가로등이 길을 환히 비추는 늦은 저녁에야 돌아오는 그녀의 행색은 한마디로 ‘초라함’ 그 자체였다. 여름날 해볕에 그을려 까맣게 탄 얼굴, 바람과 소금물에 갈라터진 손등도 궁상인데 겨울이면 낡은 솜저고리에 아들애가 입다가 내놓은 낡은 골덴옷을 껴입고 얼음 깔린 아스팔트길에서 한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빨갛게 언 두 손을 입김으로 녹이다가 돌아오는 안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신의 무능함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언제 한번 팔을 걷고 나서서 도와주지 못한 나도 참으로 답답하고 꽉 막힌 남편이였다. 출근을 해야 하고 회의를 가야 하고 하향을 해야 하고 집에 있는 날이면 습작을 해야 하는 남편인지라 안해도 웬만해서는 나의 손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밀차바퀴를 도적 맞히는 일이 벌어졌다. 그 날, 헛간 곁에 밀차를 세워놓고 집에 들어와 점심을 먹고 난 안해가 다시 나가 보았더니 밀차바퀴 하나가 없어졌다. 손이 거친 어느 량반이 진작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기회를 엿보아 손을 쓴 게 분명했는데 인기척에 놀라 한쪽 바퀴만 뽑아가지고 달아났던 모양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였다. “약한 다리에 침질”이라더니 하필이면 가난한 집의 소중한 물건을 훔쳐가다니… 문제는 ‘수입산’이라 그런 바퀴는 상점에도 파는 것이 없었다. 밀차가 굴러가지 못하는데 짠지장사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목 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급해난 안해가 며칠 뒤 방법을 찾아냈다. 풋면목을 익힌 용접공을 찾아가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서 크기가 비슷한 쇠바퀴를 하나 만들었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우리 집 밀차는 한쪽은 고무바퀴, 다른 한쪽은 무쇠바퀴로 된, 세상에 둘도 없는 특이한 밀차로 변신했다. 고무바퀴는 소리없이 굴러갔는데 무쇠바퀴는 아무리 윤활유를 발라도 “삐익, 삐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귀청을 아프게 때렸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저 바퀴소리가 창피해서 못해먹겠어요.” 안해의 푸념을 들으면서 나는 하도 부끄러워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안해한테 변변한 밀차 하나 갖춰주지 못하면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안해의 곁을 지켜준단 말인가? 하긴 내 마음이라고 가벼운 것은 아니였다. “지갑이 가벼우면 마음이 무겁다”고 한 B.프랭클린의 말을 제대로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말로는 창피하다고 하면서도 안해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밀차를 그대로 밀고 다니면서 짠지장사를 이어갔다. 밀차바퀴 소리야 하늘을 찌르든 말든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이 무탈하게 자라고 공부도 척척 잘해서 아마도 그게 창피스러움을 이겨내는 정신적인 힘으로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녕안진의 남쪽 켠, 동서로 넓게 트인 포장도로 우에서 날마다 이른새벽과 늦은 저녁이면 시간을 어길세라 삐익 하며 울어대던 우리 집 밀차바퀴 소리! 그것은 안해의 고달픈 가슴을 허비는 소리였고 무능한 나를 꼬집는 소리였다. 좀 다르게 표현한다면 축을 갉아먹는 무쇠바퀴의 ‘삐익’ 소리, 그것은 우리 집의 가난을 서러워하는 절규였다. 어쩌면 안해는 그 소리마저 숙명으로 받아들인듯 용하게 참아내고 있었다. 아무튼 그녀는 가난 앞에서 비굴하지 않고 가난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았으며 왜소한 몸으로 가난을 딛고 일어설 줄 아는 전통적인 외유내강의 조선족녀인이였다. 우리 집의 보잘것없는 재산목록에 등록되여 “삐익삐익—” 아츠러운 소리를 만들어내던 30원짜리 밀차는 번화거리에 소음을 보탠 잘못은 있다 해도 돈잎을 만져보겠다고 밤잠을 설치는 안해의 일손을 도와 옹근 다섯해를 굴러다녔으니 공로까진 몰라도 고생을 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런 밀차와 ‘빠이빠이’한 것은 1992년, 내가 신형의 변경 개방도시―훈춘을 내 삶의 새로운 요람으로 선택하고 사업전근을 하면서였다. 트럭이 와서 이사짐을 싣는데 보기에도 궁상맞은 짝짝이바퀴 밀차를 차마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없어 망설이는데 마침 달라는 사람이 있어 그대로 줘버렸던 것이다. 우리 집은 이렇게 쇠를 갉아먹는 소리로 가난에 삐걱이던 밀차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이사 초기에 우리는 낯선 고장에서 집이 없는 고생도 해보았고 고용일군 노릇도 해보았다. 안해는 한동안 산간의 림장마을에 가서 바닥재와 목편을 생산하는 사영기업의 검측원 겸 출납으로 일하였고 또 단기비자로 한국 로무도 다녀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가정과 자식을 위한 그녀의 애면글면은 헛되지 않았는바 후날 아들딸 셋이 모두 대학공부를 마치고 직장에서 중견으로 활약하게 되였다. 아이들이 자립하면서 우리 집도 점차 의식주에 근심걱정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되였다. 좋은 세월에 좋은 시책을 만난 덕분으로 고진감래의 길에 오른 것이다. 나와 안해는 식탁에 마주앉을 때마다 이따금 가난에 삐걱이던 우리 집 그 밀차바퀴를 외우면서 오늘의 이 여유로운 생활의 소중함을 다시금 다듬질해보군 한다. 《로년세계》
7    안해에게 바치는 글 댓글:  조회:451  추천:0  2020-11-06
안해에게 바치는 글 성송권 우수, 경첩이 지난 지가 퍼그나 되는데도 올해는 그냥  눈이 추적추적 내린다. 오늘도 운무가 비낀 하늘이 흐려오더니 아침부터 게사니털 같은 눈이 약간씩 휘날리다가   정오 무렵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내렸다. 며칠째 이어지는 고뿔 때문에 눈물, 코물 쥐여짜다가 끝내는 안해의 성화에 못이겨 병원걸음을 하게 되였다. 흰 눈을 방불케 하는 하얀 보가 깔려있는 침대 우에 몸을 맡긴 채 적점주사를 맞으며 창밖에서 내리는 봄눈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배동한다고 따라나선 안해가 병실 벽에 걸려있는 텔레비죤을 보다 말고 벽에 기댄 채 쪽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는 살며시 텔레비죤을 끄고 나서 단잠에 빠져있는 안해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안해의 얼굴은 온통 잔주름으로 덮여있었고 곱던 파마머리도 반나마 흐트러져있었다. 조금이나마 젊어보이고저 깔끔하게 빗어올린 머리와 달리 옷은 영낙없는 시골아줌마 차림이였다. 저도 모르게 코마루가 찡해났다. 한창 나이에는 세월이 흘러가는 걸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 들어 세파에 부대낀 흔적들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안겨온다. 37년전의 3월 18일이 바로 우리 부부가 결혼한 날이다. 그 해 봄에도 눈이 참 많이 내렸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잔치 전날에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는데 봄눈은 풍년을 기약한다고 로농들은 기뻐서 야단이였으나 부모님은 근심걱정에 싸여있었다. 안해의 집이 왕청에 있다보니 내가 살고 있던 량수천자에서 60리를 달려 도문까지, 도문에서 다시 렬차로 바꿔타고 왕청까지 가야 했는데 눈길에 뻐스가 끊겼으니 말이다. 토의 끝에 나젊은 막내사촌누나와 매형이 나를 배동하여 왕청까지 걸어가기로 용단을 내렸다. 무릎까지 넘는 눈을 헤치며 힘겹게 걸어서 까울령산고개 밑까지 이르렀는데 누나가 더 이상은 못 걷겠다며 폴싹 주저앉았다. 몸에 지니고 온 음식으로 요기를 하며 한참을 쉬고 나서 나와 매형이 누나의 두 팔을 붙잡고 까울령을 넘어 렬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세시였다. 그 렬악한 환경에서 장장 다섯시간을 걸은 셈이였다. 그 다음날 왕청에서 아침상을 받고 나서 첫날 이불 한채만 달랑 메고 다시 도문에 도착하니 뻐스가 여전히 통하지 않고 있었다. 훈춘 대팔령의 눈 치기 작업이 한창인 모양이였다. 붐비는 대합실에서 우리는 행운스럽게도 우리 동네에 석탄을 실어나르는 도문 원림처의 허기사와 마주쳤다. 우리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나서 고맙게도 선뜻 도와나섰다. 그렇게 신부와 대반을 허기사의 차에 태워보내고 오후 4시에 차가 통하여 집에 도착하니 해가 서산을 훌쩍 넘어간 6시였다. 살며시 신부 방문을 열어보니 기다리다 지친 안해가 지금처럼 벽에 기댄 채 몸을 옹송그리고 쪽잠에 빠져있었다. 안해는 바로 그 때부터 쪽잠과 인연을 맺은 것 같다. 1995년, 우리가 살고 있는 변강의 조그마한 오지 향도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새로운 탈바꿈을 꾀하게 되였다. 안해가 출근하던 백화점이 문을 닫으면서 그녀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워낙에 성격이 서글서글하다보니 마음속에 넣지 않고 훌훌 털어버릴 줄 알았는데 일자리를 잃고 나서 안해는 몰라보게 변해갔다. 쩍하면 애들한테 화를 냈고 성격도 날을 거듭하면서 날카로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로씨야에 가서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루 건너 려행사를 드나들던 안해가 드디여 사증을 받았다며 만면에 미소를 띠며 싱글벙글거렸다. 하지만 들떠있는 안해와 달리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때 나는 향정부에 출근했는데 봄, 가을에는 호림방화, 여름에는 홍수방지를 뛰느라 하향해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였다. 더구나 당시 농업판공실에서 다각경영 조리로 일하다보니 과수원, 약재재배호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안해가 로씨야로 간다면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워야 한다는 말인데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났다. 하지만 안해의 의지는 흔들림없었다. 밤낮으로 얼리고 달랬는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안해가 로씨야로 간다는 소식이 어느새 왕청에 계시는 이모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느 날 저녁, 이모님께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어미야, 여기서도 열심히 장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 험한 길을 선택하냐? 애들은 그래도 어미가 곁에 있어야지. 어린 것들이 어찌 어미 없는 설음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내가 힘껏 밀어줄 테니 만물상 장사를 한번 해보는 게 어때?” 한참 침묵을 지키던 안해가 결국 이모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제서야 나도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1995년 4월에 안해는 시장에 30여평방메터에 달하는 방을 세 맡고 제법 장사를 시작했다. 왕청의 제일 큰 백화점에서 오래 동안 구입원으로 일해온 이모님과 림업국에서 일했던 이모부도 일자리를 뿌리치고 안해의 장사에 합류했다. 손에 쥐고 있는 돈이 얼마 되지 않다보니 이모님께서 장춘, 심양 등 대도시에서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와서 판 후 두달 뒤에 돈을 갚는 형식으로 장사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장사는 잘되였다. 비닐장판, 비닐로 만든 쌀함지, 물통은 물론 각종 철물도 매대에 진렬하여 팔았는데 말 그대로 뭐나 다 있다 할 만물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몇년 고생한 보람으로 안해도 장사에 어느 정도 미립이 트게 되였고 장춘, 심양 등 도시에 홀로 물건을 구입하러도 오고갔다.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느라고 안해는 렬차를 타도 자리표가 없는 티켓을 끊었다. 내가 뭔 고생을 사서 하느냐며 핀잔을 줘도 안해는 쪽걸상에 앉아 잠간 눈을 붙이면 금방 도착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사를 하다보니 별의별 손님들이 다 있었다. 어느 하루, 향소재지에 사는 할머니 한분이 가게를 찾아왔다. “요즘 세월에 믿을 게 하나도 없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네. 어쩜 이런 가짜 상품으로 사람을 속일 수 있어?” 가게문을 들어서면서부터 할머니는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며칠전에 가게에서 건전지를 사갔는데 가짜가 틀림없다는 것이다. 안해가 건전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꼭지 부분의 비닐 딱지가 그대로 붙어있었다. 그래서 직접 어떻게 쓰는지 보여주자 검으락푸르락해서 이런 걸 왜 진작에 말해주지 않았느냐며 한마디 더 뱉더니 건건지를 홱 낚아채서 밖으로 나가더란다. 또 한번은 안해가 가게에서 새로 들여온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데 60여세 돼보이는 고객이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콩을 가는 믹서기가 들려있었는데 다짜고짜 물려달라고 야단을 부렸다. 물건을 물리겠다는 리유도 참 가관이였다. 열흘전에 사간 건데 한번 갈면 량이 너무 많아 랑비라나. 기계를 이미 사용했고 품질에 하자가 없는 이상 물릴 수 없다고 하니 한번밖에 돌리지 않았고 파손된 것도 아닌데 왜 물릴 수 없냐며 제 쪽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내심하게 설명해도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절대 물릴 수 없다고 거세게 나왔더니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가서 마당에 정연하게 배렬해놓은 상품들을 발로 차고 손으로 쥐여 뿌리며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보다 못해 주위에 몰려들었던 구경군들이 파출소에 신고를 하겠다고 전화를 꺼내드는데도 안해는 꾹 참고 조용히 넘어갔다. 그 날 저녁, 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한다는 남성이 집사람과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다. 소개를 듣고 보니 오전에 가게에 와서 란리를 친 로인의 아들 내외였다. 너무 미안하다며 어쩔 바를 몰라하는 교장 내외를 안해는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 두집은 오히려 인연이 되여 지금도 명절이면 서로 맛 있는 음식을 나누면서 정을 돈독히 이어가고 있다. 향소재지에서 장사를 하다보니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 중 대부분이 농민이였다. 봄이면 농약, 비료, 농기구 비닐박막, 가을에는 집수리에 필요한 건축재료, 쌀가마니, 낫 등을 구입해야 했는데 수중에 돈이 모자랄 때가 많았다. 그 때마다 그들은 안해의 가게를 찾았다. 적게는 50여원, 많을 때에는 1,000원씩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음씨가 비단같이 고운 안해는 언제 한번 거절하는 법이라곤 없었다. 그래서일가, 안해의 가게는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나를 막론하고 멀리 오지마을에서 온 어른들은 짬만 나면 안해의 가게에 모여서 한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 때마다 안해는 강냉이죽이나 국수 같은 음식들을 주문해서 어르신들에게 대접했다. 그 뒤로 로인들은 올 때마다 취, 더덕, 도라지 등 여러가지 산나물을 가져다주었다. 가을이면 또 찰옥수수쌀이요, 좁쌀이요, 기장쌀이요 하며 한가득 안고 왔다. 어느 해인가 령북에 계시는 할머니 한분이 40대가 되여보이는 아들 내외와 함께 안해의 가게를 찾았다. 아들 내외가 한국으로 로무수출을 떠나게 되였는데 수속이 다 끝난 마당에 비행기 티켓을 끊을 돈이 없어 이렇게 찾아왔다며 안타까운 사정을 터놓았다. 아들며느리 모두 말없이 일을 잘하는 데다 무던한 사람이라 한번만 믿고 돈을 꿔줄 수 없겠느냐며 통사정했다. 안해는 이번에도 두말없이 필요되는 돈을 할머니한테 드렸다. 그 해 가을, 할머니는 꾼 돈과 함께 집에서 기르던 황둥개를 잡아왔다. 덕분에 아들며느리가 한국에서 돈을 잘 번다며 안해가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가게에 두고 갔다. 2000년, 내가 도문시정부로 전근한 후에도 안해는 도문에서 통근차로 량수를 다니면서 장사를 접지 않았다. 아침이면 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메고 가게에 가서는 춘하추동 쪽걸상에 몸을 기댄 채 한나절 몰려오는 피곤을 쪽잠으로 쫓으면서 열심히 일했다. 해마다 나라에 세금을 꼬박꼬박 바쳤고 잊지 않고 재해지구에 사랑의 마음을 전달해주었다. 그러니 두번씩이나 도문시 개체근로자모범으로 당선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였다. 안해는 자식농사도 참 잘 지은 것 같다. 딸애는 중앙민족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상해에서 근무하고 있고 아들도 장춘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일본류학을 거쳐 지금은 공무원 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도문시 정부기관에 취직하였다.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내밀 때마다 안해는 그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 것 뿐인데요 뭐.” 하며 어깨를 낮추었다. 안해가 남들과 달리 코리안이나 로씨야 드림을 포기하고 무에서 유를, 작은 데서 큰 데를, 모르는 데서 아는 데로 장사를 이어나갔기에 우리 부부는 남들처럼 리별의 설음도, 시련도 없이 하루도 떨어질세라 두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을 차곡차곡 쌓아나갈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도 함박눈이 우리 가정, 우리 부부를 축복하는 양 펑펑 내린다. 한평생 우리 가족을 가슴에 넣고 고생한 안해를 보면서 언제부터 뭘 쓰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그 소원을 이룬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난다.
6    [천우컵] 노을이 사라지기 전에 댓글:  조회:742  추천:0  2020-10-09
노을이 사라지기 전에 조려화   ‘부친절’이라며 남편이 량가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하러 밖으로 나가잔다.    년중의 잡다한 명절에 집안 어르신들 생신, 거기에 이런저런 집안행사까지 겹치다보니 한달에도 몇번씩 외식을 해오던 터라 그 말에 시큰둥해서 중얼거렸다.   “우리 명절도 아닌데 꼭 쇠야 할가요?”   실은 몸이 고단하니 그냥 넘겨버리고 집에서 푹 쉬고 싶었다.   “당신이 힘든 건 아는데 그래도 모시고 나가면 로인들이 즐거워하지 않겠소?”   남편의 말에 일리가 있는지라 할수없이 지친 몸을 끌고 량가 부모님을 모시고 신선로집에 찾아갔다. 식당 안은 우리처럼 가족 단위로 온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해두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자리가 없을 번했다.   이윽고 료리가 상에 오르자 나와 남편은 부모님들의 잔에 술을 따라올렸다.   “‘부친절’이라 식사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두분 아버님, 항상 건강하십시오.”   “어머님들도 모든 걱정을 훌훌 내려놓고 만년을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세요.”   량가 부모님은 싱글벙글하며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고맙구나. 우린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챙겨줘서…”   “그러게 말이예요. 너희들이 이렇게 마음을 써주니 실로 고맙다.”   부모님들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 맛갈스레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어느새 피곤이 싹 가시면서 모시고 나오길 참으로 잘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천천히 많이 드세요.”   “어머님, 이것도 드셔보세요.”   평소에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느라 음식을 가리던 시부모님도 연신 맛 있다고 치하하면서 골고루 드셨다. 친정부모님도 사돈어른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반가운 모양인지 술잔을 기울이면서 조곤조곤 얘기를 잘 나누셨다.   아이들처럼 기쁨에 들떠있는 어른들을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짠해나는 한편 평소에 효도를 입버릇처럼 외우면서도 걸핏하면 바쁘다고 핑게로 미룬 자신이 더없이 부끄러워났다. 이어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속에서 굽이를 쳤다. 진정한 효도란 무엇일가? 부모님을 물질적으로 만족시켜주고 출세해서 체면을 세워드리는 것만일가? 물론 자식이 돈을 잘 벌거나 벼슬이나 한다면 부모로서 가슴이 뿌듯하겠다만 그런 성공과 효도는 별개의 개념일 것이다. 그냥 수수할지라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차근차근 갚아가고 기쁨을 드리는 게 진정한 효도일 거라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집에 돌아와 위챗을 확인해보니 출국했거나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자식들이 보내온 선물을 자랑하느라고 올린 사진들로 모멘트가 온통 도배되여있었다. 문득 명절 때마다 외국에 있는 자녀들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마음 한구석이 시려난다며 쓸쓸한 미소를 짓던 한 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값진 선물도 나무랄 데 없겠다만 부모님의 허전한 가슴을 메워드리는 데는 소박한 음식일지라도 옆에서 자식과 함께 나누는 자리를 가지는 게 더 따뜻한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얼마전, 친구가 홀로 시골에서 살고 있는 시어머니가 못내 걱정이 된다면서 고충을 털어놓았다. 집에 모셔오려고 하니 사정이 여의치 않고 시어머니가 끼니나 제때에 드시는지 알 수 없다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럼 양로원에 모시지 그래? 요즘은 시설이 근사한 양로원들이 많다던데.”   “자식들이 퍼렇게 살아있는데 양로원에 모실 수는 없다면서 시동생이 막아. 그게 마음에 걸리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야.”   요즘 세월에 이만해도 일말의 효심이 어린 마음가짐이라 볼 수 있다. 평생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걸 아낌없이 쏟아붓는 게 바로 부모이다. 그 태산같은 은혜를 가슴에 아로새기고 정성껏 부모님을 섬기는 걸 자식 된 도리로, 미덕으로 믿고 이를 대대로 받들고 이어온 게 우리 민족이다. 그러니 부모님을 양로원에 모시는 걸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라고 여기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주위를 살펴보면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효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돈 벌러 외국으로 떠나면서 어린 자식을 년로한 부모님에게 떠맡기는 게 이제 흔하디흔한 세태로 번져버렸다. 그러다보니 편히 보내야 할 로년에도 어린 손군들의 뒤치닥거리에 숨을 톺는 로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머리발이 희끗희끗한 로인들이 어린 손군의 책가방을 대신 메고 학교 대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하학시간에 맞춰 학교 대문 밖에서 기다리다 집에 데려와 숙제를 시키고 저녁밥을 지어 먹이고 씻기고 재운다. 애들은 다 알아서 큰다고 쉽게 말해도 어린 손주를 돌보는 게 어디 그리 호락호락한 일인가? 자칫 애가 다치거나 몸에 탈이 생기거나 학교에서 친구와 다투거나 성적이 떨어져도 괜히 자신의 탓인 것 같아 마음을 조이기가 일쑤이다. 말썽을 부리는 손군을 두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로인들을 볼 때마다 안스러워난다. 단지 생활비를 넉넉히 보내는 걸로 도리를 다했다고 안도하면서 부모님의 여생을 외면하게 되면 나중에 그의 어린 자식들이 커서 자신의 부모를 외면하게 되는 악순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물론 부모님이 건강하고 자청해서 손주를 맡아준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식의 짐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부모님의 여생은 고달픔 그 자체이다. 시름없이 노래교실에 다니거나 려행을 다니는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겨야 할 대신 손군을 돌보느라 여생의 즐거움은 포기한 거나 다름없다.   《제자규(弟子规)》의 첫장을 보면 효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 몸을 낳아 키워준 은혜를 잊지 말고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기본도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경》에도 “낳아 길러주신 어버이의 은덕을 갚고저 하나 하늘 같아 끝이 없다.”고 이르지를 않았던가. 반포지효(反哺之孝)라고 까마귀도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거늘 하물며 우리 인간임에랴.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리유로 년로하고 운신이 불편한 부모님을 양로원에 모시거나 부모님들이 병원에 입원해도 간병인을 부르는 게 류행처럼 되여버렸다. 물론 양로원에 부모님을 모시거나 병원에서 간병인을 쓰는 걸 무작정 불효로 몰아붙이려는 건 아니다. 다만 년로하고 힘없고 몸이 아픈 부모님 곁을 지켜주는 게 자식의 마땅한 도리가 아닐가 싶다.   집 근처의 보건소가 어디론가 옮겨가고 그 자리에 양로원이 들어섰다. 몇년전만 해도 시골이나 교외에서 볼 수 있던 양로원이 이제는 시내 한복판에 떡하니 들어섰다. 내가 살고 있는, 인구가 2만명이 되나마나한 자그마한 현소재지에서도 양로원이 유치원보다도 더 흔하게 눈에 안겨온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효를 모든 행위의 근본으로 삼아왔다. 연변의 조선족들도 일찍 수십년전에 8월 15일을 로인절로 정하고 꾸준히 효문화를 선양하고 실천해왔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내려온 우리의 미풍량속이 갈수록 색이 바래지는 현실이 안타깝고 앞 못 보는 아버지를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의 이야기와 같은 가슴 따뜻한 사연을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지 까마아득하다. 부모님은 우리가 효도하기를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중에 잘되면, 잘살면, 성공하면 그때 가서 효도하려 하지 말고 부모님 살아생전에 정성으로 섬기는 게 진정한 효이다.   내 몸은 조금 피곤해도 량가 부모님이 그토록 흐뭇해하시니 마음만은 흐뭇하다. 친정엄마는 날로 기력이 쇠하고 시어머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서 경한 치매증상을 보인다. 시아버님 역시 백내장으로 재수술까지 받았다. 세월을 따라 늙어가는 건 자연의 순리이니 거스를 수는 없다만 그래도 더불어 잔잔한 추억 하나 더 쌓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어버이 살아계실제 섬기기를 다하라.”는 선조들의 말씀을 명기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부모님이 계실 때 례와 의를 갖추고 효도하리라. ‘부친절’이 우리 명절이 아니면 어때서. 다시한번 효를 되새기고 행하게 한 데 의미를 둔 하루였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8호 
5    [천우컵] 돼지고기 먹는 날이 명절날이였다 댓글:  조회:596  추천:0  2020-10-09
돼지고기 먹는 날이 명절날이였다   김동욱   작년은 기해년, 60년 만에 돌아온 황금돼지해라며 년초부터 세간이 떠들썩했다. 민간에서 돼지는 복과 재물을 상징하는 동물로 통한다.   돼지 하면 몇십년전, 내가 살던 마을에서 떠돌았던 우스운 일화 하나가 떠오른다. 한 할머니가 시장에 새끼돼지를 사러 갔다가 마침 새끼돼지를 팔고 있는 한족 남자를 만났다. 손짓, 몸짓 해가며 건네는 할머니의 말이 실로 걸작이였다.   “얼둬디 버치 이양디, 텁석텁석 츠디, 니 이양디 마이!” 귀가 버치처럼 크고 먹새가 좋은 새끼수퇘지를 사겠다는 뜻이였다. 일장 폭소 끝에 할머니는 결국 마음에 드는 돼지새끼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세월에 우리 마을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산대일에 참가하면서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부업이 돼지치기였다. 그 때 생산대에서는 일년 량식을 분배하면서 꼭 벼겨를 같이 나누어주었다. 돼지를 기르는 데 벼겨 만한 사료가 없었다. 돼지는 그야말로 먹새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죽을 먹어대는 게 특히 가관이였다. 처음에 그 커다란 주둥이로 건데기부터 텁석텁석 먹어대는데 그 소리가 요란할 뿐만 아니라 주둥이 량옆으로 죽물이 쭉쭉 뿜겨나온다. 큰 건데기를 다 먹고는 주둥이를 죽 속에 들이박고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작은 건데기를 우물우물 먹어치운다. 나중에 벼겨를 죽 우에 고루 뿌려주면 죽물을 쭉쭉 들이켜 어느새 구유가 밑바닥이 드러난다. 죽을 다 먹고는 네 다리를 쭉 뻗고 해볕쪼임을 하면서 쿨쿨 잠을 자는데 그런 상팔자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 세월에 돼지를 기르는 일은 그야말로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이 먹을 식량마저 빠듯하고 지금처럼 사료가 흔치 않다보니 주로 풀을 뜯어서 겨와 함께 삶아서 먹였다. 아낙네들은 생산대일을 하면서 쉴 참에 짬짬이 돼지풀을 뜯어서는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머리에 이고 오는데 그 거리가 멀 때에는 7, 8리도 넘었다.   당시 우리 집에도 돼지가 한마리 있었는데 안해는 생산대일을 하는 짬짬이 돼지풀을 뜯고 나무잎을 훑어서 돼지먹이로 주었다. 어느 날, 배추를 겨에다 삶아서 돼지한테 먹인다는 것이 그만 식히지 않고 뜨거운 것을 그대로 주는 바람에 돼지가 중독이 되여 바닥에 쓰러졌다. 귀를 베여 피를 흘리게 하면 독이 빠져 살아난다던 어르신들의 말이 갑자기 떠올라 그대로 해봤더니 과연 돼지가 숨을 고르게 쉬더니 어정어정 일어났다. 다시 살아난 돼지가 하도 대견스러워 나와 안해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다가가 돼지 등을 도닥여주었다.   이튿날, 안해가 생산대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글쎄 돼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두살 된 아들애를 둘쳐업고 네살 난 딸애 손을 잡고 마을을 거의 훑다싶이 하며 안해는 돼지를 찾아다녔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담임을 맡고 있다보니 집안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안해가 마을 어구에서 중등 크기의 검정 돼지를 발견했다. 발악을 하는 돼지를 억지로 몰고 집으로 가겠노라 진땀을 빼고 있는데 딸애가 옆에서 엄마의 옷자락을 잡당겼다.   “엄마, 이거 우리 돼지 아니야.”   “너 어떻게 알아?”   “귀에 벤 자국이 없잖아.”   “맞아, 우리 돼지가 아니구나.”   결국 그 날, 안해는 돼지를 잃어버렸다는 실의에 빠져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마당에서 안해의 새된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우리 돼지가 찾아왔어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바지도 입지 않은 채 달려나갔다. 꿀꿀거리며 먹이를 달라고 안해 바지가랭이 주위를 맴도는 돼지를 보는 순간 저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자래운 돼지를 결국엔 팔아버렸다. 당시 우리 집으로 말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였다. 그 때 우리 세대는 돼지를 키워 판 돈으로 세가지 중기—재봉침, 자전거, 시계를 갖추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이 세가지를 다 갖춘 집은 그야말로 부자나 다름없었다. 우리 집은 가난뱅이 교원가정이다보니 이 세가지중 한가지도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살림이 어찌나 팍팍했던지 안해가 교원한테 시집 가겠다는 처녀가 있다면 밥을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겠노라고 롱담 삼아 말한 기억도 지금까지 생생하다. 그런데 돼지를 팔아서 목돈을 쥐였으니 이젠 그중에서 하나 쯤은 장만해도 괜찮지 않을가 하는 욕심이 생겨났다. 그 당시 몸값이 장난이 아니였던 손목시계는 몰라도 벽시계는 살 수 있겠다 싶어 흥분되여 밤새껏 상론하다 늦게야 잠들었던 일이 어제일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그 쇠 같은 돈을 안해가 잘 건사한다고 어딘가에 숨겨놓았는데 후에 쓰려고 보니 찾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집에 있는 트렁크를 몽땅 뒤지고 옷이란 옷은 전부 찾아서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돈은 온데간데 없었다. 한번은 식사를 하다가 혹시 까래 밑에 있지 않나 해서 훌 들어보고 나서 울상이 되여 밥도 채 먹지 않고 일하러 나가던 안해의 뒤모습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그러던 어느 날, 안해가 빨래를 하려고 이불거죽을 벗기니 그 안에서 돈이 무더기로 나올 줄이야! 이게 웬 떡호박이냐며 입을 다물지 못하던 안해는 그길로 달려가 돼지고기를 사왔다. 그 날 돼지고기와 당면을 함께 넣고 끓인 장국을 둘러싸고 우리 집은 명절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 때 나와 애들 둘은 도시호구이고 안해 혼자 농촌호구로 생산대량식을 탔기에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잡곡밥을 먹었다. 점심도시락을 그냥 잡곡밥으로 해서 싸들고 다니는 안해를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동네 아줌마들은 늘 자기가 들고 간 입쌀밥을 안해에게 밀어주군 했다. 그 당시 생산대에서는 도시호구가 있는 집엔 입쌀을 가져다주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했다. 하지만 순박하고 마음씨 고운 동네 아줌마들은 입쌀밥 우에 옥수수밥을 얹어서 우리 집에 가져다주군 했는데 그 고마움이야 어찌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이밥 먹게 되였다고 손벽 짝짝 치며 기뻐하던 어린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반죽된 감정을 억누를 길 없어 가슴은 고동친다.   그 세월에는 돼지고기를 먹는 날이면 바로 명절날이나 다름없었다. 아글타글해서 키운 돼지를 판 날은 어쩌다 목돈을 만지는 날이였고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장국을 먹을 수 있는 날이였으니 실로 설을 쇠는 기분이였다.   그 당시 생산대에서는 흔히 모내기가 끝나면 돼지를 잡아서 집집마다 고기를 나눠주었다. 창고 밑바닥에 올망졸망 널려있는 돼지고기 덩어리 우에는 세대주의 이름과 돼지고기의 무게가 적혀있는 종이장이 놓여있었다. 그 때는 삼겹살을 선호하는 시기가 아니였던지라 엉덩이살이나 목살이 차례지면 모두들 입이 함박 만해졌다. 삼겹살이 많이 차례졌다고 얼굴이 푸르딩딩해서 고기를 나눈 사람과 목에 피대를 세우고 걸고드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집은 안해만 농촌호구였기에 달랑 한줌 되는 고기가 차례지군 하였는데 그것도 부위를 알 수 없는 아주 볼품 없는 것이였다. 그 작은 고기를 네식구가 나눠먹으려면 간에 기별도 안 갈 만치 보잘것없더라도 소중했다.   또 돼지를 잡는 날에는 청년조, 중년조, 로년조로 나눠서 고기를 나눠주기도 하였는데 그 때마다 우리는 함께 모여앉아 추렴을 벌리군 했다. 술이 둬순배 돌아가니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렸겠다, 팀끼리 흥겨운 노래소리에 맞춰 춤판이 이어졌다. 북장단, 바가지장단, 접시장단에 맞춰 어깨춤, 엉덩이춤, 양걸, 댄스까지 저마다 장기껏 별의별 춤을 다 추어대는데 어데 가도 구경할 수 없는 시골풍경이였다. 얼굴이 땀벌창이 되여도 춤판은 그냥 이어졌고 그 열기가 자정을 넘어서도 식을 줄 몰랐다. 조무래기들도 오구작작 모여들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흥겹게 놀아댔다.   그 때 우리 청년조에서 돼지고기소를 듬뿍 넣고 만든 입쌀만두는 그야말로 별미였고 광주리에 담아 바줄로 매서 김아바이네 우물에 담갔던 맥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달콤한 감로수였다.   “오늘은 뭘 해먹을가요?”, “드시고 싶은 거 있음 말해보세요.” 요즘따라 종종 듣는 말이다. 생활이 풍요로워진 만큼 배에 비게가 들어앉았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돼지고기 볶음채가 한상 가득 올라도 웬지 저가락이 그 쪽으로 가지 않는다. 날마다 명절이더라도 함께 즐길 사람이 없어서 참 쓸쓸하다. 다 나은 삶을 살겠노라 제각기 흩어져 지내니 한데 모여 북적거리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 거기에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일년에 겨우 한번이나 만날 수 있던 자식과 친척들과도 여직껏 영상통화로만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데다 동네에 나가도 저만치 떨어져서 마스크 너머로 인사를 해야 하니 더구나 인정이 그립다. 가난했어도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과 오구작작 모여 행복을 꽃 피웠던 시절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리워나면서 돼지고기 먹던 날이 명절날이였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8호
4    [천우컵] 안해의 바람 댓글:  조회:370  추천:0  2020-10-09
안해의 바람 김경조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다. 몇달 전부터 안해의 눈을 피해가며 도적담배를 피웠는데 끝내는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올봄의 어느 하루, 안해가 밖으로 일 보러 나간 틈을 타서 능숙하게 뒤창문을 열어제끼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안해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피우던 담배를 미처 숨길 새도 없는 데다 입과 코로 짙은 담배연기가 마구 뿜어나오는데 변명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안해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한달음에 달려와 내 등을 사정없이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담배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또 담배생각이 난답니까?”   안해는 내 병의 근원이 담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긴 내가 워낙에 골초다보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3년전, 페암 판정을 받고 한쪽 페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다시 담배를 입에 대는 남편이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다.   녀자들은 40세가 넘으면 목청이 점점 높아진다는 사실을 나는 그 날 일을 겪고 나서 확신하게 되였다. 여직껏 살아오면서 내 앞에서 언성 한번 높인 적 없던 안해가 그 날 따라 지붕이 날아갈 듯 고함을 지르며 나를 나무랐는데 마치 뭔가 끝장을 내려고 작심한 것 같았다.   “가요! 살기 싫으면 자식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우리 둘 같이 바다에 뛰여들어요!”   우리 집이 마침 바다와 10분 거리에 있는지라 안해의 머리속에 가장 먼저 바다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내 팔을 인정사정없이 잡아끄는 안해의 눈에서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술후 몸을 겨우 가누는 남편을 살리겠다고 3년이 넘도록 그 비싼 해삼과 전복으로 영양식을 만들어 올리는 안해의 정성을 뒤로 한 채 그녀가 그토록 질색하는 담배를 다시 찾았으니 어찌 환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안해의 모습에 놀란 것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 지경이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나는 그동안 지켜왔던 자존심을 내려놓고 안해를 와락 끌어안으며 진심으로 잘못을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젠 정말로 담배를 끊을게!”   아무도 참여하지 않은 우리 둘만의 ‘전쟁’에서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고 안해가 내놓은 3가지 조항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의사를 전달하면서 ‘전쟁’은 소리없이 마무리되였다. 그 3가지 조항은 이러했다. “첫째, 담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둘째, 술은 냄새도 맡지 않는다, 셋째, 아침저녁으로 한시간씩 걷는다.”   패자의 운명은 늘 그렇듯 ‘참담’했다. 하루 사이에 우리 집의 위계질서는 ‘녀명남복(녀자의 명에 남자가 복종하다)’으로 바뀌고 말았다. 나는 안해의 엄격한 감독하에서 이 3가지 조항을 어김없이 지켜야만 했다.   3년전 내가 수술을 받던 날, 수술실로 들어가는 나를 바래는 안해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두 다리를 덜덜 떨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안해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페를 도려내는 수술은 고도의 정밀성이 요구되는 대수술이였던지라 장장 6시간 뒤에야 나는 비로소 수술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행운스럽게도 나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마음을 조이며 애 타게 나를 기다리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다시 보는 순간 안해는 허둥지둥 달려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도 큰 수술이였던지라 나는 수술실에서 나오는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튿날 아침 8시, 면회실로 들어오는 인파 속에서 나는 안해와 아이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하도 반가워 희죽 웃었다. 일반 병실이 아닌 중환자실로 실려간 내가 걱정되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가슴을 조이였는데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모든 불안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며 안해는 지금도 외운다.    한동안의 병원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안해는 지극 정성으로 나를 돌봐주었다. 몸에 좋다는 영양식을 정성껏 만들어서는 하루 세끼 꼬박 대접했고 내가 입맛이 없어 둬술 뜨네마네하고 수저를 내려놓으면 “한술만 더!” 하면서 얼리고 달래기도 했다. “어쩜 외손녀를 키울 때보다 더 힘드네요.”라며 응석을 부리는 안해 앞에서 수저를 다시 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안해는 한밤중에 자다가도 몇번씩 일어나 맥없이 자고 있는 내 얼굴에 대고 숨소리를 확인해보군 하였다. 행여나 이상한 증상이 있을가 봐 마음을 조이며 불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안해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수술한 지 3년 뒤에 이루어진 정밀검사에서 회복이 빠르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였고 지난 여름부터는 낚시동호회 친구들과 낚시질을 다닐 정도로 나의 건강은 몰라보게 좋아지고 있다.   60년 가까운 세월을 안해와 함께 하면서 그녀에게 마음의 빚을 너무 많이 지면서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언제 한번 뭉치돈을 가져다 안해의 손에 쥐여준 적 있나, 그렇다고 평생을 살면서 안해한테 화장품 한번 선물해준 적도 없었다. 철따라 류행되는 예쁜 옷 한벌 내 손으로 사주지 못했고 안해의 손을 잡고 려행 가본 기억도 없다. 돌이켜보면 나라는 남자는 안해에게 지지리도 못난 남편이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해는 나를 만나 살아온 60년 가까운 세월이 너무나도 보람 있고 내가 지금까지 자기 옆에서 버팀목이 되여주어 얼마나 행복하고 든든한 지 모른단다. 다음 생에도 어김없이 나를 찿아와 남편으로 모시고 지금보다 더 멋지게 살아보겠단다. 어쩌면 나는 돈을 버는 복은 없어도 처복 하나는 있는 사람인가 보다. 안해의 진정어린 고마움에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난다. 한편 안해의 일편단심에 보답은 고사하고 항상 실망만 안겨주어 부끄럽고 미안하기 그지없다.   3년전 내가 수술실로 들어갈 때 내 손목을 꼭 잡고 “누워있어도 내 곁만 지켜주면 돼요.”라고 흐느끼며 말하던 안해의 애절한 목소리가 지금도 내 귀전에서 메아리친다.   안해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 한 채 잠시잠간씩 갈마드는 담배의 유혹에 빠져 안해의 여린 마음에 소금을 뿌렸으니 지청구가 아니라 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다.   그 어려운 시기에 나 하나를 믿고 시집을 와서 애들을 낳아 키우며 가정을 꾸리느라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고달프게 살아온 안해,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운 정, 미운 정 쌓으며 살아온 안해는 말 그대로 나의 조강지처이다.   “찌그러진 오막살이라도 제 집이 좋고 꼬부랑 할멈이라도 제 할멈이 제일이다.”라고 한 선인들의 철리가 담긴 말의 참뜻을 뒤늦게라도 깨달았으니 참 다행스럽다.   젊어서 안해의 왼쪽자리를 지켜주었다면 이젠 안해의 오른쪽 자리에서나마 내가 살아서 숨 쉬는 소리를 들려주며 안해를 즐겁게 해주련다. 나에겐 안해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 나를 위해서, 안해를 위해서.   2020년 9호 
3    [천우컵] 우리는 까치둥지마을에서 살았다 댓글:  조회:472  추천:0  2020-10-09
우리는 까치둥지 마을에서 살았다 남옥란    토박이가 아닌 우리 엄마는 조양천에서 유명하다 할 ‘수레집’의 딸이였고 아버지는 철로에서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면서 입살이나 하던 막일군이였다.    해방 난 이듬해, 아버지는 한분 뿐인 백부를 따라서 구수하마을로 이사를 했고 그 곳에서 우리 다섯 남매를 낳아 키우셨는데 예쁘지만 키가 작은 엄마를 닮아서인지 다섯 남매는 모두 일매지게 키가 작달막했어도 생김새만은 야무졌다. 우로는 언니와 나 그리고 밑으로는 남동생 둘, 막내녀동생 이렇게 줄줄이 다섯을 두었다.    우리 형제는 이렇게 구수하벌 까치둥지마을에서 뒹굴면서 자랐다. 우리 집 동쪽 논밭에는 백년된 아름드리 백양나무가 있었는데 우듬지의 가지 사이에 역시 아득히 오래돼보이는 까치둥지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까치둥지마을이라고 불렀다. 또 물이 아홉갈래로 흐른다고 해서 구수하라고도 불렀는데 수전과 한전이 반반인 산간지대였다. 우리 마을은 학교, 위생소, 촌공급판매합작사를 구전하게 갖추고 있었다. 마을에서 도보로 40분 정도 가면 조양천 기차역에 닿을 수 있어 교통이 편리한 데다 쌀밥을 먹을 수 있고 학교도 가깝고 동네사람들의 인심 또한 좋은 살기 좋은 시골마을이였다.    이렇듯 흑백사진처럼 진한 풍경이 안겨오는 내 고향마을에는 도합 30여가구가 오붓하게 모여서 살았다. 마을의 맨 뒤끝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터밭이 운동장 만큼이나 넓었다. 터밭 중심에는 20평방메터 남짓한 초가집이 큰 버섯송이처럼 댕그라니 솟아있었다. 집 동쪽에는 큰길이 나있었고 큰길과 터밭 사이로 도랑물이 졸졸 쉬임없이 흘렀다. 동생들의 기저귀며 온집 식구들의 옷이며 흙이 게발린 신이며 농기구들은 모두 도랑에서 말끔하게 씻어냈고 터밭에 가물이 들어 곡식들이 폴싹 고개 숙이면 퍼내도 퍼내도 마를 줄 모르는 그 도랑물로 메마른 터밭을 적셔주었다. 그러면 농작물이 금시 푸르싱싱하게 생기를 띠고 고개를 쳐들었다. 가축들에게도 그 도랑물을 먹이였다. 아홉살 난 큰남동생이 소고삐를 쥐고 앞에서 걸으면 소는 엉기적엉기적 따라나서서 도랑에 머리를 푹 파묻고 바닥이라도 낼 것처럼 걸탐스럽게 도랑물을 들이켰다.    집에서 기르는 가금, 가축이 어지간히 많은 게 아니였다. 오리, 닭, 게사니, 집 지키는 누렁이, 외양간에는 동생이 물을 먹이던 생산대의 소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봄부터 산란기에 들어선 오리와 게사니는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아무때나 알을 낳았다. 닭들처럼 널판자로 된 다락 우에서 자는 것도 아니고 외양간 구석에 벼짚으로 틀어 덩그렇게 달아맨 둥주리 안에서 알을 낳는 것도 아니였다. 그래서 보다 못한 아버지가 여섯살짜리 남동생의 키 만큼한 높이로 집 동쪽의 벽에 기대게 해서 굴 하나를 지어주었는데 거기에서 꽥꽥거리면서 게사니와 오리가 동무하며 춘하추동을 지냈다. 봄부터는 가금알을 받아서 삶아서도 먹고 염장을 해서도 먹고 일부는 동네에서 가깝게 지내는 이웃에 바가지에 담아서 나누어도 주면서 이웃끼리 오고가는 정 가득히 오붓하게 지냈다.   마을과 조금 동떨어진 우리 집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봄이 되니 마당에는 초록색 풀들이 뾰족뾰족 돋아났고 메꽃이 그 큰 마당을 가득 채웠다. 민들레도 노란 꽃을 떠이고 수줍게 서있었고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를 노랑나비, 흰나비가 한들한들 춤을 추고 구제비도 옛집을 용케 찾아와서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를 키웠다. 짚으로 이영을 올린 음달진 쪽은 참새떼들이 날아와 터를 잡고 사시절 살아갔다. 여섯살짜리 남동생과 세살짜리 녀동생은 싸리나무가지를 손에 쥐고 나비를 쫓아다녔고 마당에 내려앉아 꼬리를 달싹거리며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새떼들을 쫓느라고 재미나서 깔깔 웃고 떠들었다. 강아지도 덩달아 애들과 섭쓸려서 엎어지고 뒹굴면서 신나게 놀아댔다. 파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흰구름송이가 시름없이 떠도는데 우리 집 풍경과 어울려서 한폭의 생생한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아늑하게 안겨왔다.   봄은 파종계절이다. 채소 씨앗은 동네에 사는 여러집들에서 서로 바꿔가며 심었다. 엄마가 콩종자를 순희네 집에 주면 순희네는 우리 집에 없는 수수종자를 보내왔고 뒤집에 사는 한족색시 왕연이는 오이가 크고 산량이 많으니 심어보라면서 오이씨를 들고 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늘 숨 돌릴 새도 없이 바삐 움직였다. 앞마당에는 오이, 고추, 상추, 마늘, 도마도, 가지를 심고 서쪽 마당에는 옥수수, 수수, 콩 등 늦가을 곡식을 심었다. 동쪽 마당에는 감자, 무우, 배추, 키낮은 떡호박이며를 옹기종기 심어놓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큰길이 동쪽으로 나있기에 시야를 가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는 화학비료를 별로 안 쓰고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의 배설물을 흙에 섞어서 만든 유기농 비료를 쓰던 때라 토지가 깨끗하고 비옥했다.   록색이 짙어가는 여름이 오면 우리 집 터밭과 울바자 주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아롱다롱 곱게 피여나 꽃내음이 뜨락에 차고넘쳐났다. 모닥모닥 피여난 새하얀 감자꽃, 노란 호박꽃, 하얀 완두꽃이 있는가 하면 울바자 밑에는 아버지가 심어놓은 봉선화, 가지가 무성한 분꽃, 수수한 란초꽃, 가을국화와 ‘꽃중의 왕’이라 불리우는 모란꽃, 키다리아저씨 같은 해바라기꽃도 있었다. 이젠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말 그대로 꽃바다였다. 이 때가 되면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서 돌에다 봉선화를 짓이겨 손톱에 바르고는 버들잎으로 동여매고 물들기를 기다린다. 반시간 쯤 지나서 버들잎을 풀어내면 손톱은 연분홍빛으로 물 들어있다. 서로들 제 손톱이 더 이쁘다고 뽐내면서 자랑을 한다. 분꽃은 까만색 씨앗이 맺히는데 그 씨앗을 터치우면 하얀 분가루가 쏟아져나온다. 그것을 손톱으로 후벼서는 얼굴에 문지르면 얼굴은 대뜸 새뽀얗게 된다. 화장품이 없었던 우리에게 대자연이 준 선물인 셈이였다.   어디 이뿐이랴. 먹을거리도 마당 가득했다. 울바자 안에는 오롱조롱 탐스럽게 열린 빨간 도마도, 한족색시가 준 씨앗이라고 해서 한족 오이라고 부르던 빨래방치 같은 오이들이 주렁주렁 보기 좋게 달려 있다. 다른 채소들은 언제 크는지 전혀 신경이 안 쓰였지만 날것으로 먹을 수 있는 오이 만큼은 우리들의 눈에서 빠져나가기가 어려웠다. 엄마 몰래 도적고양이마냥 살금살금 오이밭에 기여들어가서는 올리훑고 내리훑고 한다. 노란꽃이 떨어지기 바쁘게 남자애 ‘고추’ 만한 크기의 오이가 달린다. 이틀이 지나면 중지 길이 만큼 자라고 또 며칠이 지나면 드디여 먹을 수 있게 커진다. 꼼꼼하고 령리한 큰남동생은 오이를 따서 먹고도 모르쇠를 대군 했다. 입가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면 폴폴 풍기는 오이냄새에 금방 들켜버리면서 말이다. 엄마는 우리가 오이밭을 드나드는 것을 보지 못하고도 오이넝쿨 모양새만 보고 감쪽같이 알아맞추었다. 오이는 따도 괜찮으나 넝쿨은 잡아채듯 다치지 말라, 그러면 넝쿨이 상해서 오이가 열리지 못한다고 늘 똑같은 잔소리를 하군 하셨다. 아무튼 파랗고 싱싱한 오이는 한달 가량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오이가 늙으면 그냥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매일매일 한 구럭씩 따서는 세 동생들의 어깨에 지워서 이웃집에 보냈다. 그래도 며칠이 지나면 팔뚝 같은 누런 오이들이 넝쿨 여기저기에 달려서 밭고랑에 척척 드러누워 잠을 청한다.    개꼬리가 올리솟으면 옥수수 알이 잉태하기 시작한다. 옥수수 이삭들은 금발 같은 수염을 곱게 드리우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 모양새로 그 자리에 서있는다. 그래도 매일이 다르게 통통하게 살이 찐다. 중복이 지나면 따먹을 수가 있는데 엄마는 세살짜리 막내동생에게 간식으로 먹이려고 매일 새벽이면 나가서 손톱으로 껍질을 살짝 벗기고 알맹이를 꼬집어본다. 어지간하게 여물었다 싶으면 딱 하나를 따다가 밥가마 한쪽에 넣고 삶아서 막내에게 먹이군 했다. 살짝 여문 옥수수의 단물이 감칠맛이 있어서인지 막내는 그렇게도 맛나게 냠냠 먹어주었다.   드디여 감자, 고구마를 먹을 수 있고 호박이 영글고 옥수수도 마음 대로 따먹을 수 있는 수확의 계절이 왔다. 그 무렵이면 이웃집 엄마들이 우리 집 마당에서 기쁨의 잔치를 벌린다. 영이 엄마, 순이 엄마, 정금이 엄마, 미선이 엄마, 원석이 엄마가 아침부터 갓 젖을 뗀 아이와 젖먹이를 업고 안고 우리 집 앞마당에 모여든다. 정금이 엄마는 중복에 심은 배추 이파리로 담근 물김치를 들고 왔고 원석이 엄마는 고추장을 사발에 담아들고 왔다. 순이 엄마는 정원에서 갓 익은 오얏을 따가지고 왔는데 애들이 신이 나서 한웅큼씩 쥐고서 맛나게 먹었다. 동생 셋은 꼬마들이 많이 와서 좋다고 야단법석이다. 엄마들은 왁작 웃고 떠들면서 여름 내내 밖에 걸어놓았던 딴가마에 먼저 옥수수를 안치고 그 우에 호박과 고구마, 감자를 올려놓는다. 드살이 센 순이 엄마가 마른 쑥대를 안아다가 불을 지핀다. 한시간 가량 지나면 가마 안에서 구수한 냄새와 함께 단김이 가마뚜껑 틈으로 새여나오는데 마치 증기를 내뿜는 기관차 같다. 애들은 빨리 먹고 싶어서 군침을 질질 흘리며 엄마한테 졸라댄다. 우리 아버지가 마당 한가운데 여름 내내 해볕에 말리웠던 쑥단을 풀어서 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 우에 둥그렇게 모여앉는다. 엄마는 집안의 크고 작은 그릇들을 모조리 들고 나와서는 가마 안의 음식들을 꺼내여 보기 좋게 담아 조무래기들에게 먼저 나눠준다. 때마침 지나가는 이웃동네 분들에게도 맛 보라고 손에 듬뿍 쥐여주었는데 농가의 인심은 그렇게도 풋풋했다.    까치둥지마을에서 살다보면 산해진미라도 당기는 게 없고 무릉도원이 부러울 게 없었다. 고된 일을 마치고 속이 출출할 때 먹는 상추쌈은 왕의 수라상도 저리 가라 한다. 남정네들은 한켠에서 마늘, 파, 가마에 쪄낸 가지, 풋고추를 토장에 꾹꾹 찍어서 술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옛말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땅거미가 아물아물 밀려오면 아버지는 모기떼를 쫓느라 쑥을 태우고 동생과 동네 조무래기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반디불을 쫓느라 여념이 없다. 외양간의 누렁소와 기타 가축들이 기척없이 조용해진다. 하루 동안 먹거리를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엄마들은 밤이 깊어 잠투정을 하는 애들을 데리고 각자 자기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동네 조무래기 친구들과 하루종일 즐겁게 뛰놀았던 동생들도 머리가 베개에 닿기 바쁘게 단잠에 빠져든다.    그렇게 까치둥지마을에서 우리 남매들도, 동네의 조무래기들도 대자연의 품속에서,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는 모두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백년된 까치둥지는 력사의 견증인으로서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 그 곳에서 마을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해주고 있다. 아, 꿈속에서도 가고 싶은 고향의 초가집, 태를 묻고 잔뼈를 굳히고 꿈을 키웠던 내 고향 까치둥지마을이여, 새하얀 억새풀이 들녘에서 춤을 추며 우리를 지켜보던 자랑스러운 구수하벌이여, 대를 이어 천년만년 길이길이 전해가리.   2020년 9호 
2    [천우컵] 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 댓글:  조회:510  추천:0  2020-09-21
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 한영철 지난해에 우리 집 세식구는 한국에 가서 음력설을 쇠게 되였다. 그전까지 공무차로든 친척방문차로든 한국에 여러번 다녀왔지만 거기서 음력설을 쇠기는 처음이였다. 하긴 뭐 요즘에는 형님을 비롯한 형제들과 조카들 그리고 친척들 대부분이 한국에 머물러있는지라 설명절이나 련휴 때면 발걸음이 저절로 그리로 움직이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에 간 지 얼마 안되여 형님은 이번 걸음에 아버지의 고향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물었다. 아버지의 고향을 한번 다녀오는 것이 오랜 념원이였던지라 나는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정월 초사흗날, 형님, 누나, 조카 그리고 나까지 넷이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떠났다. 평택에서 떠난 차는 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달렸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온통 산이였다. 차가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공연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버지의 동년의 발자취와 청춘의 숨결이 남아있을 땅을 밟게 된다는 격동과 더불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북받쳐오르는 이름 모를 감동 때문이였다. 사전에 우리가 간다는 소식을 전해받은 큰집의 형수님이 우리가 어떻게 오고 몇시에 도착하는가고 여러번 전화로 문의해왔다. 그러고도 걱정스러웠는지 포항에 있는 딸한테 전화를 해서 우리를 마중해서 모시고 오라고 분부까지 했다. 차는 경주에 들어서기 전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버지의 고향인 산내면 쪽으로 달렸다. 조상들의 뼈가 고스란히 묻혀있는 고향과 가까워질수록 초조감 때문에 나는 차창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길옆에 무심히 자란 일초일목마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을 차창 쪽으로 바짝 밀어붙이고 더욱 유심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떤 곳일가? 옛날에는 어떠했을가? 지금은 또 어떤 모습으로 되여있을가?’ 나로 말하면 조상들의 넋이 슴배여있고 그들의 숨소리가 은은하게 다가올 것만 같은 고향에 다가선다는 그 자체가 감동이고 격동이였다. “다 왔어. 여기야!” 그 소리에 흠칫 놀라서 깊은 사색에서 깨여났다. 차에서 내려보니 시골 내음이 다분한 오붓한 동네였다. 우리가 찾아간 사촌형님네는 새로 지은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자못 아담해보였다. 널판자로 울타리를 빙 둘렀고 뜰안에는 경운기 한대와 네바퀴 오토바이가 세워져있었다. 집 뒤에는 참대나무가 빼곡이 자라있었다. 대문을 열고 뜨락에 들어서는데 사촌형님과 형수님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뛰여나온다. 큰아버지네 아들과 며느리 되는 분이니까 우리 가문의 종가집 후손들이였다. “아이고야, 너들이 왔고나…” “형수님, 안녕하셨습니까?” 한바탕 수인사가 끝나고 나서 사촌형님 내외가 정좌하자 우리는 례법 대로 큰절을 올렸다. “너그들이 오니 참으로 반갑다야. 오노락꼬 욕 보았다.” “많이들 기다렸다. 고생들 했다.” 처음으로 듣는 한씨 집안만의 고유한 남도말투였다.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듯했지만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말투가 떠올라서 그랬던지 그 소리가 듣그럽게 들리지 않았다. ‘아, 이것이 바로 혈통이라는 거구나. 옛말이 그른 데 없다더니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구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에 어느덧 저녁 때가 되였다. 형수님은 75세의 고령이였지만 제사와 같은 대소사를 자주 치르는 종가집 며느리라 그랬는지 저녁 차리는 솜씨가 여간 잽싼 게 아니였다. 년세에 비해 목소리도 챙챙하고 기억력도 아주 좋았다. 저녁상을 둘러싸고 식사하는 내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큰아버지는 생전에 중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보낸 편지를 받고 엄청 즐거워했단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중국에 간 우리 아버지가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큰아버지랑 삼촌들이랑 함께 아버지 제사까지 지냈다니 그 심정을 가히 헤아릴 수 있었다. 이런 얘기들을 그전에 인편으로 듣기는 했다만 이번에 아버지의 고향에 와서 직접 들으니 그 충격은 배로 늘어났다. 정든 고향을 떠나 부모형제와 생리별을 하게 된 것도 엄청 고통스럽고 서러운 시련이였을 텐데 한몸이 성한 채로 퍼렇게 살아있는 데도 부모와 형제들은 그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어 제사까지 지냈다고 하니 너무나도 억이 막혔다. 순간 이국타향에서 혼자서 향수를 달래며 죽도록 고생만 해온 아버지의 얼굴이 우렷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1921년, 한국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에서 한씨 가문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한일합병’으로 일제의 치하가 시작되여서부터 침략자의 마수는 조선 팔도강산 그 어디든 뻗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편벽한 시골 오지인 아버지의 고향도 영낙없이 일본놈들의 압박과 착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면에 주둔한 일본경찰은 마을에 있는 청년들을 강제로 징병하기 위해 시골 오지인 아버지의 고향 산내면까지 쫓아왔다. 식구가 많아서 내남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 동네에는 저 북쪽에 땅이 넓고 사람이 적은 중국의 동북평야가 살기 좋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런 와중에 일본놈들의 징병 위험까지 들이닥치자 아버지는 18살 되던 해에 혼자서 불철주야 북상하여 두만강을 건넜다.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들 중의 남도(南道) 이주민 1세의 반렬에 오르게 되였다. 정작 건너오니 동북땅도 호락호락한 고장은 아니였다. 가진 게 없는 사람에게는 어디로 가든 똑같은 세월이였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몰랐던 아버지는 이국타향의 허허벌판에서 탄광과 벌목장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했고 그 과정에 별의별 고역을 다 치렀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 투항을 선포하던 그 무렵 아버지는 연길에 계셨다. 그 뒤, 아버지는 지인의 소개로 인물 곱고 마음씨 착한 처녀를 만나 지금의 연길시 근교의 소영촌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 아버지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이런 자식들이 중국에 정착한 남도 이주민 2세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식구들의 생계를 위하여 마른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평시에는 농사일을 하는 한편 농한기에는 부업으로 소방목도 하고 양봉업도 했다. 식구들을 배를 곯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신념 하나로 아버지는 억척스레 일하며 평생 고생에 부대꼈다. 그러다가 1985년, 파상균감염으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6~7년만 더 앉았어도 꿈속에서도 사무치게 그리던 고향땅을 밟아볼 수 있었으련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다. 우리가 사는 소영촌에는 남도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기에 마을에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경상도사투리를 들으면서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동네에서는 아버지를 남도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혈혈단신으로 중국에 건너왔기에 우리한테는 사촌과 같은 가까운 친척들이 없었다. 어린시절, 내 또래 친구들은 쩍하면 오늘은 할아버지네 집이요, 래일은 큰집이요 하면서 하루 건너 친척집에 다녀왔지만 우리가 드나들 수 있는 친척집이라곤 외삼촌네 집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우리에게 당신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조전리(枣田里)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대추가 유명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늘 언젠가는 우리 식구 모두를 데리고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셨다. 하지만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난 지 40여년이 되도록 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40년은 인류력사의 긴 강으로 말하면 일순간에 불과할지 몰라도 한 사람의 인생으로 말하면 반평생에 가까운 세월이다. 그동안 아버지는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고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들과 친척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가? 지난 세기 70년대말부터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서신거래가 잦아졌다. 그 때 우리 마을의 누구네 집에서도 한국에 있는 친척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친척의 주소를 모르는 사람들은 방송에서 나오는 리산가족찾기 프로그람을 듣군 했다. 당시 아버지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늘 그 방송프로그람에 귀를 기울이군 했다. 아버지는 또 둘째형님한테 부탁해 연길시에 살고 있는 한××가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찾는다는 내용으로 메아리방송에 편지를 보내게 했다. 그 편지를 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더욱 메아리방송에 신경을 기울였다. 얼마후 한마을에 사는 사람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 있는 큰아버지가 우리가 보낸 소식을 전해들었다는 내용이 메아리방송에 나왔다는 것이였다. 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듣고 나서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가족을 찾았다고 자랑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자청해서 술까지 한잔했다. 오매불망 애 타게 기다리던 고향소식에 아버지는 어린애마냥 즐거워했다. 얼마후 한국에 있는 큰아버지가 혈육의 정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주소도 아버지가 기억한 것과 거의 비슷했다. “아우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로 알았던 네가 살아있다니 지금도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기쁘기가 한량없구나. 타향에서 고생은 또 얼마나 했고…” 그 날 아버지는 큰아버지가 고향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후일 우리 집안의 소중한 력사기록물로 남을 만큼 조심스럽게 간직되고 있는 편지이기도 하다. 지난 세기 90년대초부터 한국방문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어떤 집들에서는 친척방문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허나 우리 집의 사정은 좀 특별했다. 아버지가 망인으로 기재된 것이 화근이였다. 그런 상황이니 큰아버지도 우리를 요청할 수 없었다. 2001년, 큰형님은 요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고 그 뒤 한국에서 쭉 일하면서 생활하게 되였다. 그 당시 큰형님은 우리 집의 대표로 처음 아버지의 고향집을 찾았다. 그 때 아버지의 형제 분들은 이미 다 돌아가고 산내면에는 사촌형님네 내외간만 살고 있었다. 사촌형님은 아버지의 고향에 찾아온 사촌동생을 그토록 반갑게 반겨주었단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이 집안제사 때면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했다. 진짜 가슴이 미여지도록 아픈 이야기였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삼촌의 제를 지내주었다니 감격에 목이 메는 순간이였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갑산집이요, 룡포동집이요 하는 조상들 고향마을 이름을 붙인 집들이 많았다. 그 법 대로라면 우리 집은 조전리집이였을 것이다. 남도 사람들의 생활 특징은 우리 집에서도 려과없이 나타났다. 과거에 동네에서 고추장을 담그는 집은 우리 집이 유일했다. 아버지는 비빔밥도 좋아하고 랭국도 반겼다. 학교에서 들놀이 갈 때 내가 고추장을 발라서 구운 더덕반찬을 가져갔더니 모두 맛 있다고 야단이였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도 어언 35년이 된다. 그 사이 나도 한국에 여러번 다녀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육이였기에 40여년의 리별 속에서도 서로 잊지 않고 끈끈한 정을 이어오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수천수만명의 이주민 력사중의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리별과 상봉, 슬픔과 환락이 어우러져있는 진실한 력사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남도 조상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강들이 모여서 주야장천 바다로 흘러가듯 쉼없이 엮어지고 있다.   2020년 9호 
1    [천우컵] 꽃 피는 춘삼월은 지나갔어도 댓글:  조회:571  추천:0  2020-09-21
꽃 피는 춘삼월은 지나갔어도 김옥자 살구꽃 활짝 피는 춘삼월이면 나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생일을 맞게 된다. 연분홍 살구꽃, 눈송이처럼 흰 배꽃, 휘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파랗게 돋아난 연록색 잎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늘어나는 나이를 다시한번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나는 대자연 속의 모든 생물체들이 기지개를 켜며 대자연을 맞이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무작정 좋다. “인간 칠십 고래희”란 말이 무색해질 만큼 곳곳에서 ‘백세시대’를 높이 웨치고 있다. 80 고개를 지척에 두고 있는 나 역시 요즘 따라 여생을 어떻게 보낼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질 때가 많다.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은 하늘의 구름마냥 흘러가고 붉은 해살 따라 걸어가는 여생엔 웃음의 꽃, 행복의 꽃이 만발하길 기대하며 또 한번의 춘삼월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올해 춘삼월에는 꽃도 어김없이 피고 화창한 봄날도 왔건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신종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가 송두리채 흔들리고 말았다. 요긴한 일이 아니면 될수록 집 밖을 나가는 걸 자제해야 했고 거리에 나가도 전부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린 무표정한 얼굴들이 태반이였다. 꽃 피는 춘삼월은 그렇게 적막과 공포 속에서 우리 곁을 소리없이 스쳐지났다. 자식들이 그립고 보고 싶어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겨끔내기로 전화를 걸어와서 안부를 묻는 딸들한테 엄마는 괜찮으니 너희들 몸이나 잘 챙기라고 부탁하고도 전화를 끊고 나면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한동안 멍하니 있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렇게 홀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니 머리 속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이렇게 멍청하게 생활의 노예가 되여 나를 걱정해주는 친인들에게 걱정만 끼칠 수는 없었다. 수많은 무명 영웅들이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사투를 벌리고 있는데 나만 성 쌓고 남은 돌처럼 이렇게 집에 붙박여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지 않는가? 하루를 살더라도 후회없이 살아야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나서 이튿날부터 곧바로 움직였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잠시 접었던, 십여년간 꾸준히 익혀온 태극권부터 골랐다. 별다른 장비가 필요 없는 운동인지라 실내에서도 넉근히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시간에 맞추어 온라인 수업을 시청했다. 건강상식, 방역 등 방면의 내용을 시청하면서 관련 지식들을 습득했고 독서와 글쓰기를 날마다 놓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또 텔레비죤을 시청하면서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최신 동향들을 살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보람차게 지나가는 가운데 생일날이 소리없이 다가왔고 내 머리 속엔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집에 갇혀있어도 초라하게 무너지고 있는 파파 할머니가 아니라 꾸준히 도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멀리에 있는 자식들, 근처에 있어도 만날 수 없는 친지, 동료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이내 동영상을 찍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한곳에 모아놓았다. 아무리 저울질해봐도 실내에서 태극권을 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아내는 게 자신 있었다.                                    실내인지라 제일 얇은 태극권 복장을 골라입고 창문을 열어젖혀도 흐르는 구슬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운동을 마치고 나면 땀에 흠뻑 젖은 옷들은 물자루가 되였다. 그래도 동작 하나하나 제대로 하느라 나름 대로 신경을 가다듬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십여벌도 넘는 태극옷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입고 정성 들여 화장하였다. 몇달 동안 다듬지 못한 흰머리는 가발로 가리웠다. 이어 사위한테 부탁하여 동영상 제작에 들어갔다. 생일 전날, 내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워이신을 통해 여러 친인들에게 보내주었다. 저녁에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더니 감동을 먹었다는 메시지들로 꽉 차있었다. 메시지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나의 눈가도 어느새 촉촉히 젖어들었다. 주변의 긍정과 응원이 이토록 큰 힘이 될 줄 미처 몰랐기에 그 감동이 곱절로 와닿는 순간이였다.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머나먼 복건땅에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먼 사돈 벌 되는 조카가 99원의 훙뽀(红包)와 함께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돈할머니, 생일을 축하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앉으라는 의미에서 99원의 훙뽀를 함께 보냅니다.”     “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심양에서 지내고 있는 외손녀가 문자를 보내왔다. “외할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 500원은 할머니한테 드리는 생일선물입니다. 내 생에 처음으로 탄 월급을 음력설에 할머니 집에 가서 절을 올리면서 드리려고 했는데 바이러스 때문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너무 아쉽네요. 이 돈으로 맛 있는 걸 사드세요. 그리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앉으세요.”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 생일이라고 인생에서의 첫 수확을 이렇게 메시지와 함께 보내오니 그 순간 울컥하며 목이 메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은 이미 황혼에 접어들었더라도 혹독한 역경 속에서도 꽃 피는 춘삼월에 생일을 변함없이 즐길 수 있었던 건 마음속에 늘 푸른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020년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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