려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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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 한국을 떠나며 댓글:  조회:2439  추천:1  2012-08-16
조선족으로 산다는 것은 (1) 한국을 떠나며 서언 올해는 중한수교 20주년을 맞는 해이다. 내가 처음 한국에 간 것은 바야흐로 중한수교가 맺어지던 1992년 5월이었으니 중한수교 20년 세월을 몸소 체험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청계천에서 조선간첩들이 살포한 삐라를 주어들고 아연실색하던 일이며 멋모르는 조선족들이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러 경찰에 연행되던 일이며 ‘불법체류 강제추방 반대’운동과 조선족사회의 말초신경을 건드렸던 ‘국적회복운동’등 사건을 지켜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과거가 오늘 이글을 쓸 수 있는 밑거름으로 되었고 그 과거가 오늘 조선족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온 지 벌써 3년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연변도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고 사람들의 정신세계도 일사천리로 내달리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 또 중한동포지간에는 여전히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중국에 살면서도 여전히 해외조선족의 입장과 견해를 버리지 못하고 산다.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해외조선족들의 마음이 내가 쓰는 글의 관점으로 통하는 것도 의심할 바가 없다. 1,인천으로 ‘이민가방’을 끌고 버스정류소로 향하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말 그대로 한국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다. 바래주는 사람도 작별할 사람도 없지만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니 외롭지도 원망스럽지도 않다. 며칠 전에 8년 가까이 한국생활을 하면서 손때 묻은 물건들을 원룸 앞에 내 놓으며 이웃들에게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나 버렸다. 그러고 나서 동대문과 남대문 명동과 종로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딸애와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고 교보문고에 들려서 중국에서는 살 수 없는 책들을 한 아름 안고 나오니 ‘이민’ 준비가 완료되었다. 텅 빈 방에 돌아와 이민가방을 마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일치감치 인천에 가서 여관방에서 하루 밤 묵고 다음날 귀향길에 오르는 것이 좋을 법했다. 시간을 보니 아직 막차가 남아 있는 시간대다. 버스정류소에 도착하니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나 되었다. 이맘때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저녁회식자리에서 술을 거친 사람들이라 나처럼 멀쩡한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 둘씩, 셋씩 끼리끼리 모여서 저녁에 못다 나눈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지간에 얽힌 오해소지를 해명하느라고 모두들 바쁘고 바쁘다. 한국은 술 취하는 것이 흉이 아니다. 그렇다고 술 안 마신 사람들이 너그러워서도 아니다. 그저 훗날 자기가 취할 때를 대비해서 선심을 쓴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아저씨, 몇 시요?” 아까부터 만취해서 혼잣소리로 중얼대던 아저씨 한 분이 나를 응시하면서 더듬더듬 물어온다. 버스정류소 팻말에 간신이 기댄 몸이 큼직한 가랑잎처럼 흐느적거린다. “버스 올 때가 다 됐어요.” 그렇게 말 한 마디를 내 뱉은 것이 고주망태아저씨랑 인연이 되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이민가방’을 버스 트렁크에 넣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이미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빼곡했다. 버스가 자국을 떼자 고주망태아저씨가 사단을 일으켰다. 손잡이도 잡지 않은 채 여자들 속에 서있던 아저씨는 차가 흔들리자 이 여자를 ‘안아’주고 저 여자를 ‘업어’주다 보니 여자들이 덴 겁을 하고 비명을 지른다. 그러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은 그녀들의 남자일행이다. 소리를 질러보고 손으로 밀쳐 봐도 소용이 없자 멱살 잡기로 이어졌다. 당황한 것은 고주망태 아저씨다. 가뜩이나 몸 건사가 안 되는데다 주변사람들이 단합하여 덤벼들자 당황망조한 아저씨는 고의가 아닌데 왜 난리들이냐며 맞받아 주먹을 날린다. 버스 안은 금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긴 아저씨한테는 술을 과음하여 몸을 주체 못한 죄 뿐이다. 더 물을 것이 있다면 그 몸으로 택시를 잡지 못하고 발디딜자리 없는 버스에 올라탄 불운일 것이다. 옆에서 보노라니 아저씨는 여자들을 ‘안아’주고 ‘업어’주었지만 음흉한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빨리 집에 도착하여 골아떨어지고 싶은 초조함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다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만해!” 나는 급기야 아저씨를 낚아채며 젊은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던 싸움이었는지라 금시 조용해 지면서 나의 뒷말을 따를 심산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태수습의 기대를 자기들보다는 선배벌이고 고주망태아저씨의 ‘편’을 들어주는 나한테 걸어온 것이다. 이럴 때 나 몰라라 하는 한국인은 없다. 물론 나 몰라라 하는 조선족도 없다. 가끔 고향에서 한국인들이 도움을 청해올 때면 한국에서 당한 것이 하도 쌓여 모르쇠를 댈가하다가도 결국은 도움을 주고 만다. 한국인들로부터 받은 모욕과 비하, 속된 인간취급을 받은 세월을 생각하면 한국인이 눈앞에서 죽어나간다고 해도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가도 어느 순간 봄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젠장.......)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아저씨를 어디에 처치할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때 눈치 빠른 아주머니 한 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아저씨를 끌어다 그 자리에 눌러 앉히고는 옆에 지키고 섰다. 그런데 뒤늦게 얼굴에 긁힌 피자국을 발견한 아저씨는 분통이 터진다며 벌떡 일어났다. 간신히 아저씨를 자리에 눌러앉히니 아저씨는 다시 용을 쓰며 일어난다. 그렇게 일여덟 번을 제압했더니 아저씨는 그제서야 주눅이 들어 버렸다. 좀 뒤에는 아예 그 지저분한 얼굴을 나의 몸에 묻고 곤히 잠들어버렸다. 그때야 주변의 젊은이들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말 한마디 없이 광기를 부리는 아저씨를 제압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존경어린 눈매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평온을 찾는다. 혹자는 끄덕끄덕 졸고 혹자는 소곤소곤 일행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버스가 정류소에 정차할 때마다 젊은이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고마움을 표하고는 하차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생활에서 한국인들이 내가 조선족임을 의식하지 못하던 때가 가장 살맛났던 시간들이었다. (moraean@hanmail.net)
22    조선족의 명예와 자존심을 찾자 댓글:  조회:4823  추천:3  2011-10-21
뿌리가 같고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자기의 생활방식을 추구하고 자기의 언어문자를 고집하고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민족의 속성이다. 그러나 누가 춤추자고 말하는 사람도, 노래를 부르자고 말하는 사람도, 아이들을 조선족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조선족이니까 민족의 전통문화와 풍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없다. 민족자치의 정당한 사업도 행해지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조선족은 줄 끊어진 연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서로 나 몰라라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모이면 서로 믿음이 없고 웬만한 일을 가지고도 서로 삐지다 보니 불편하게 만나느니 서로 안보고 사는 게 편하다며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산다. 당연히 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조선족 노래를 듣고 조선족 춤을 추는 것만 보아도 눈물이 글썽해진다.   어제 연변박물관에서 주덕해의 일생을 담은 사진전을 보면서 그가 자치주의 창립을 이끈 일등공신이고 연변대학과 새벽농민대학을 비롯한 당대 조선족교육의 창시자이고 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했던 조선족사회의 지도자였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아직도 그의 혁명정신만 고취되고 그의 인간성, 민족에 쏟은 애정은 홍양(弘扬)되지 않고 있다. 조선족간부들이 주덕해를 본보기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방법을 터득했으면 좋겠다.   문화인들은 타협하지 않고 애증이 분명한 창작과 민족을 사랑하고 불의에 맞서 싸운 김학철 선생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서울에서 “너희들이 한국에 시집을 다 와 버리면 우리네 농촌총각들은 어떡하냐.”고 낙루하시며 마지막 모습을 남긴 김학철 선생이 요즘 따라 자나 깨나 그립다. 오늘의 조선족문화인들이 김학철 선생을 본보기로 문화인으로써 소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선족들에게는 3강5륜을 다시 한 번 정중히 권장하는 바이다. 부자유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친함이 있어야 하듯이 서로 도리를 알고 장유유서, 어른과 어린이는 차례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졌다고 연장자, 손위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고 손아래 사람을 사랑하여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붕우유신, 벗과 벗은 서로 믿음이 있어야지 괜한 일로 오해와 불신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껌 씹듯 씹는 버릇과 습관도 고쳐야 한다.   알고 보면 조선족처럼 정이 많은 민족도 없다. 심성이 착하고 밝고 사람을 진투로 대하여 일찍 남들이 부러워하며 존중해마지 않는 민족이었다.   비록 늦었지만 역사적 환경과 시대적 환경에 걸맞게 주변 정리부터 잘하고 작은 일에서부터 착수하여 조선족의 명예와 자존심을 찾아야 한다.
21    "앙까" 연변 조선족 말은 사투리, 바른말 고운말은? 댓글:  조회:12487  추천:7  2011-10-13
 국경절기간에 연변TV에서 조선말 영화 ‘부모’를 내 놓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소 흥분되었다. 한국TV,한국드라마의 충격과 중국대륙, 홍콩, 대만 등 한어(중국어)영화, 드라마의 가세로 자기 것을 내세우기 어려운 조선족의 문화예술이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모’는 연변어를 대담하게 기용한 것 외에는 별다른 진전을 보아낼 수 없다. 연변어의 어원은 함경도방언이 청나라와 ‘만주’ ‘간도’땅에서 한족과 만족, 회족 등 민족과의 접촉과정에서 많은 어휘 낱말들이 첨가되고 일부 변형을 보이면서 형성된 연변지역언어이다. 연변어는 조선인들의 이주사와 조선족의 형성발전의 역사가 담겨진 언어이지만 어휘들이 잡다하고 구성이 불규칙적이고 어두어말이 조잡하고 상스럽기까지 하여 문화인들로부터 배제되어왔다. 과거 평양어가 조선족의 언어, 문자생활의 기준으로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연변어가 공중에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한 것은 '연변소품(연변개그)'에서다. 연변어의 사용은 조선족들에게 친근감을 더해 주었고 특히 상스러운 속어들의 대량 등장으로 개그효과가 절정에 달했으며 ‘연변소품’과 소품배우들은 조선족사회에서 인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연변소품’의 성공은 연변어의 활발한 사용을 추진하였고 최근에 백청강의 ‘앙까’는 다시 한 번 연변어가 조선족사회에서 주목 받게 하였다. 조선족끼리 연변어로 대화하면 친근감이 들고 의사소통이 잘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연변어는 체계가 갖춰진 언어가 아니고 더구나 조선족의 표준어로 영화, 드라마, 신문, 간행물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교육자들은 일상에서도 연변어사용을 삼가야 한다. 물론 작품에서 특정인물의 성격을 부각하고 특정 환경을 돋보이게 씌어 일종 향수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러나 연변어는 연변방언의 한계를 벗어날 수도 벗어나서도 안 된다. 왜냐면 우리민족에게는 평양어와 한국어와 같이 다수 민족이 애용하는 체계를 갖추고 품위 있는 언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현재 다수 조선족들의 언어문자생활이 평양어에서 한국어로 이행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연변어 과대망상증에 걸려 조선족의 언어문자생활을 혼란스럽게 한다면 민족에 무책임한 행위이며 저지를 받고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일전에 연변국제무역(延边国贸)에서 연길시 북쪽에 새로 오픈한 유원지에 간 적이 있다. 골짜기로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인공폭포 앞 광장에서 한족들이 한참 연지곤지 찍고 해괴한 옷차림을 하고 팔다리를 너풀너풀 거리면서 양걸 춤을 추고 있었다. “쟁쟁” “쾅쾅”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두드리는 북소리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금방 자리를 뜨고 말았다. 아래로 내려오니 수목원 앞에서 정년퇴직한 조선족 아줌마, 아저씨들이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한참 노래하고 춤추며 흥에 겨워 있었다. 자기민족의 노래와 춤이어서가 아니다. 조선족의 율동과 리듬을 타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 타민족이 없고 도취되지 않는 이방인이 없다. 관중석에서는 숱한 내지관광객들과 외국관광객들이 황홀한 눈길로 공연을 보면서 연신 샷타를 눌러대고 있었다. “쿵더덩 쿵덩” 이번에는 경쾌한 북소리가 울리자 관중석에 앉아서 박수를 치며 어깨를 으쓱으쓱하던 한 무리 또 한 무리 조선족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춤판을 벌리며 “좋다!” “좋아!”를 외친다. 이것이 조선족의 모습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조선족의 선율과 리듬이고 민족의 취향이며 민족의 낭만과 긍지이다. 한족을 왈가불가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조선족의 선율과 춤사위는 한족에 앞서 있고 문화와 전통도 서로 다르면서 한결 밝다. 뿌리가 같고 취향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자기의 생활방식을 추구하고 자기의 언어문자를 계승하고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민족의 속성이다. 그러나 누가 춤추자고 말하는 사람도, 노래를 부르자고 말하는 사람도, 애들을 조선족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조선족이니까 민족의 전통문화와 풍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도 없다. 민족자치의 권리도 내 팽개치고 민족자치의 정당한 사업도 행해지지 않는다.   ▲ 주덕해 민족문화를 전파하고 민족문화의 매체작용을 해야 하는 조선족문화관들이 구실을 못하고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야 하는 문화인들이 선전부와 안전부의 눈치를 보느라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하며 조선족간부들은 천안문만 바라보고 아이들은 한족학교에 보낸다. “애들이 한족 애들을 닮아 꽛꽛해서 어디 쓰겠읍데.”라고 넌지시 말하면 “중국에 사는데 어쩌겠소.”라고 씁쓸하게 대답해 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조선족은 줄 끊어진 연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서로 나 몰라라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모이면 서로 믿음이 없고 웬만한 일을 가지고도 서로 삐지다보니 불편하게 만나느니 서로 안보고 사는 게 편하다며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산다. 당연히 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 오르고 조선족노래를 듣고 조선족 춤을 추는 것만 보아도 눈물이 글썽해진다. 어제 연변박물관에서 주덕해의 일생을 담은 사진전을 보면서 그가 자치주의 성립을 이끈 장본인이고 연변대학과 새벽농민대학을 비롯한 당대조선족교육의 창시자이고 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신 조선족사회의 지도자였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아직도 그의 혁명정신만 고취되고 그의 인간성, 민족에 쏟은 애정은 홍양(弘扬)되지 않고 있다. 조선족간부들이 주덕해를 본보기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방법을 터득했으면 좋겠다.   ▲ 김학철  문화인들은 타협하지 않고 애증이 분명한 창작태도와 민족을 사랑하고 불의에 맞서 싸운 김학철선생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서울에서 “너희들이 한국에 시집을 다 와 버리면 우리네 농촌총각들은 어떡하나.”고 낙루하시며 마지막 모습을 남긴 김학철선생이 요즘 따라 자나 깨나 그립다. 오늘의 조선족문화인들이 김학철선생을 본보기로 문화인으로써 소임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선족들에게는 3강5륜을 다시 한 번 정중히 권장하는 바이다. 부자유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친함이 있어야 하듯이 서로 도리를 하고 장유유서, 어른과 어린이는 차례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졌다고 연장자, 손우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말고 손아래사람을 사랑하여 존중을 돌려받을 줄 알아야 하며 붕우유신, 벗과 벗은 서로 믿음이 있어야지 괜한 일로 오해와 불신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껌 씹듯 씹어 버릇하는 습관도 고쳐야 한다. 알고 보면 조선족처럼 정이 많은 민족도 없다. 심성이 착하고 밝고 사람을 진투로 대하여 일찍이 중국사회가 부러워하며 존중해마지 않는 민족이었다. 비록 늦었지만 역사적 환경과 시대적 환경에 걸맞게 주변정리부터 잘하고 작은 일에서부터 착수하여 조선족의 명예와 자존심을 찾아야 한다.    
19    멍든 조선족의 예와 윤리 댓글:  조회:3938  추천:4  2011-09-29
오랫동안 객지생활을 하다가 고향에 돌아오니 아는 사람을 만나기가 무섭다. 과거 서로 어울려 추억을 만들고 이상을 담론하고 세상을 걱정하던 배운 사람들이 건만 마주 앉으면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다. 먹거리가 넉넉하고 입을 거리도 푼푼하건만 무슨 욕심이 그리도 많은지 온통 돈 얘기들뿐이다. 돈에 환장하다 보니 덕담은 고사하고 다른 사람의 얘기를 찬찬히 들어주는 자세도 아량도 없다.   객지에서 보고들은 얘기를 해주면 별로 내켜 하지도 아니한다. 머리에 남은 것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고 긁어모으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고 도덕적 규제를 받지 않는 무정부, 무절제, 무차원의 자유주의에 빠져 있다.   당연히 예의를 말하는 사람도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도 없다. 예의와 윤리도 이미 문화대혁명시기에 ‘낡은 사회의 멍에’로 규정짓고 무시해 버린지 오래다.   설상가상으로 시장경제가 몰고온 부에 대한 탐욕으로 가정과 사회 전반이 돈으로 사람을 저울질하고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버릇이 생겼다.   자연 부에 따라 열이 지어지고 힘에 따라 전후가 가려지고 눈만 뜨면 돈 생각하고 돈만 보면 게눈 감추듯 삼켜버리고 돈만 주면 지아비 노릇도 부모자식 노릇도 다 한 것으로 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니 아이들이 무얼 보고 철이 들겠는가. 길거리에서 아들 같은 아이들에게 반말을 하면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고 입으로 뭐라고 씨부렁거린다. 그리고 아이들이 위아래가 없고 어른을 보면 인사하는 법이 없고 그나마 우물쭈물하는 정도면 봐줄 만한 편이다.   서로 얕잡아보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기본이고 좀 나이를 먹었다는 연장자들도 돌아서면 상대를 ‘애(갸,개,쟤)’로 칭한다. 애아비가 된지 오래 된 사람들이 다른 집 애아비를 애로 칭하는 것이다.   온 사회가 돈밖에 모르고 특히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들인 조선족의 예의와 윤리가 바닥이나 있다.   늦었지만 다시 ‘공맹지도’를 논하고 삼강오륜으로 부자유친하고 장유유서하고 붕우유신 하는 것부터 배워 서로 겸손하고 신의를 지키고 덕을 쌓아 화목한 조선족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18    연길에는 돈부자는 있어도 마음의 부자가 없다 댓글:  조회:4927  추천:6  2011-09-06
▲ 연길시 시가지 풍경         서울에 오래 살다가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과거 가난하고 낙후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고향사람들의 의식주행이 눈에 띄게 향상되고 마음이 펴이고 표정들이 밝아졌으며 씀씀이가 넉넉해졌다. 그 동안 부자들도 엄청 늘어나 옛날처럼 생각하고 짚었다간 망신하기 일쑤다. 곤충류로 알았는데 조류로 되어있고 파충류로 알았는데 어느새 포유류로 되어있다.   그런데 연길의 부자들에게는 남다른 특색이 하나 있다. 포식하고는 배설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임을 무수히 소문 내놓고는 내분비문란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남들에게서 부자로 인정받고 존중받기를 원한다. 어떤 부자들은 남들이 부자로 알아주지 않으면 존중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나오기까지 한다. 부자로 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부자로 인정받지 못하니 여간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부자로 인정받으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라. 2003년, 서울에서 조선족들로 ‘한마음협회’를 설립하여 회비를 모아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에 입학금이 없어 대학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성금을 보낸 바 있다. 연길에서 전달식이 있던 날 회원들은 감격에 울먹이면서 사회에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작은 정성이지만 마음을 열고 보니 마음의 부자가 된 것이다.   꾸준히 공적을 쌓으라. 주변사람들에게 술 한 잔 사주고 입던 옷 몇 벌주는 것도 좋지만 작은 것에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찾으라. 재한조선족들에게는 훌륭한 전통이 있다. 애초에 조선족유학생들이 발기하고 조선족노무자들이 가세한 고향의 불우이웃돕기는 이미 1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족모임, 동아리, 사이트와 카페에서 어김없이 진행하는 활동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평소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보이라. 조선족들은 한국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기 때문에 한국인과 어울리기 싫어한다. 그러나 재한조선족들은 한국의 불우이웃을 도와 ‘장애인의 집’과 노인정 등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위문하고 의무노동을 하며 재해지구에 가서 봉사활동도 빠짐없이 한다. 평소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보이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다.   부자들은 불우이웃돕기와 봉사활동 등 자선사업을 떠나서는 부자임을 인정받을 수 없다. 또 고용창출과 사회 환원의 의무도 저버릴 수 없다.   한국에서 감동을 받은 이야기 중에 ‘행남자기(瓷器)’에 대한 미담이 있다. 2001년, 행남자기는 경영실적이 미진한 목포공장을 폐쇄하면서 오갈 데 없는 60명 종업원에게 맛김공장을 차려 일자리를 보존해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윤만 생각했으면 부가가치가 높은 김포자공장을 차릴 수 있었지만 김포자공장은 종업원 10명으로도 충분하기에 부가가치를 내기는 어렵지만 60명 종업원을 쓸 수 있는 맛김공장을 차렸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행남자기의 이야기는 연길처럼 실업자가 많은 도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자리창출은 정부와 관리들의 책임도 중요하지만 부자들이 사회 환원의 환절로 생각하고 일자리를 만드는데 정성을 들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과 자립능력이 약한 장애인, 노인을 부양할 의무가 있는 자녀들에게 먼저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만큼 사회적 부가가치가 큰 것도 없다.   사회주의 건설시기는 젊고 건장한 청장년들이 솔선수범하여 사회적 의무를 감당하는 시기였다면 시장경제시기는 부자들이 사회적 의무를 감당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부자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민심이 뒤숭숭해지고 각박해지며 인정이 메마른 사회로 전락한다. 또 자칫 지주, 자본가출신 부자들에게 빈하중농출신 부자들의 용속하고 옹졸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안방에 동그라미가 무수히 붙은 적금통장이 있다고 누가 부자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나누고 베풀고 배려하면서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면서 부자다운 매너와 부자다운 인간미를 보여줄 때 뭇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중을 받을 수 있으며 부자의 가치와 부자의 성취감도 동시에 얻을 수 있으며 마음의 부자로 거듭날 수 있다. 그때면 아마 이 사회도 인정미가 넘치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을 것이다.
17    일그러진 연길의車문화 댓글:  조회:4294  추천:2  2011-08-22
중국의 선물옵션(期货)시장에서 타이어에 쓰이는 고무가 전체시장의 향방과 환급을 가리는 주도주로 자리를 잡았다면 중국의 자가용열기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자전거로 15분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연길이 승용차로 15분에 도착할 수 없는 시대를 맞고 있다. 도로는 물론 인도와 주택가 구석구석이 승용차로 몸살을 앓고 있다. 조선족들의 허영심과 사치로 전국에서 인구비율로 제일 많은 택시를 보유하고 있는 소도시가 이제는 급격한 자가용의 보급으로 무질서 무절제의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벌써 번화가는 매일 주차 때문에 전쟁을 치른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연길에서는 인도가 곧 주차장이다. 행인들은 요리조리 차를 피해 인도와 도로를 오르내리면서 차가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기를 반복하면서 걷다보니 보행이 '장애물경주'로 되었다. 주택구역의 주차공간도 초읽기에 들어가 저녁 늦게 귀가하면 차를 댈만한 공간이 없어 도로가에 주차하기 일쑤다.   최근 들어 도로사정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자가용의 보급 속도에 비하면 어린애의 배꼽정도다. 도로사정이 좋아진 곳은 외곽에 치우치고 실제 번화가의 낡은 도로개조는 별로 개선이 없다. 도로노면이 울퉁불퉁하고 도처에 파놓고 마무리되지 않은 흔적들이 남아있으며 중앙선이 없고 차선이 없는 도로가 기지부수다. 간선도로 사정이 그렇다보니 지선도로는 대부분이 자전거와 리어카도로로 안성맞춤이다.   불편한 도로사정은 도로교통법을 해이하게 만들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요즘 사람들의 자기중심주의만 키워주는 꼴이 되었다. 하다 보니 양보를 무시당하는 정도로 알고 있다. 운전자들은 악을 써서라도 아슬아슬하게 질러가고 차선변경 시 깜빡이를 켜는 것은 사치로 알며 제멋대로 U턴하고 제멋대로 주차하고 시도 때도 없이 경적을 울린다. 운전 중에 전화를 받는 것은 물론, 전화를 하는 것도 뒤에 차가 밀리든 말든 아무런 주저도 없다.   도로사정이 탐탁하지 않지만 차는 자꾸만 늘어나고 달려야 할 승용차가 거북이걸음을 하니 모두들 달리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 있다.   오늘날 시민들의 생활수준은 눈에 띄게 향상된 반면, 정신세계는 동이나버렸다. 자기밖에 모르고 괜한 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남아서 버릴지언정 남한테 주지 않으며 타인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은 더더구나 바보천치쯤으로 안다. 이런 궁핍한 정신세계를 핸들과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가 보여주고 있다. 무질서 무절제의 차 문화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늦었지만 차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우선, 주행 시 다음 신호를 기다릴 수 있는 넉넉한 마음가짐으로 운전에 임해야 한다. 안전거리확보와 자연스럽게 차 흐름을 타는 습관이 안전운행과 올바른 차 문화의 발단으로 된다. 급한 일이 있어 앞차를 추월 시에는 손이라도 저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격한 감정을 유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통화가 필요할 시에는 도로변에 정차시키고 깜박이를 켜야 하며 음주운전은 '살인미수행위'라는 개념 확립이 필요하다.   주차는 꼭 행인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주차공간은 짧게 작게 점유함으로써 다음 차량의 주차를 배려하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하다. 임시주차 시에는 구역주민 혹은 가게주인에 양해를 구해야 하며 미처 양해를 구하지 못했을 시에는 메모지에 핸드폰번호를 적어서 눈에 띄는 곳에 두어 필요 시 연락이 닿도록 해야 한다.   경적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횡단보도와 주택구역은 보행자구역이므로 경적을 울려 보행자를 닦달하는 것은 보행자의 권익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부득이 경적을 울려야 할 경우에도 은근슬쩍 쳐주어 상대방으로부터 깍듯한 반응을 돌려받을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차의 청결을 확보하여야 한다. 불결상태의 차는 운전자의 이미지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도시의 미관을 떨어뜨리고 뭇사람들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차 소지자들을 보면 옷도 자주 갈아입지 않고 양말 한 켤레도 며칠씩 신고 세수는 고양이세수를 하고 이도 자주 닦지 않는 불결사유의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사회는 차를 보는 시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당장 폐차를 앞둔 차일지라도 도로교통법을 모범적으로 준수하고 행인을 염려할 줄 알며 기다릴 줄 알고 양보할 줄 알며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운전자의 바른 성품과 바른 예의가 존중받아야 한다. 그 때면 좁은 길도 뻥 뚫리고 유쾌한 운전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16    해외조선족의 ‘귀국정착사업’의 필요성 (려호길) 댓글:  조회:4776  추천:63  2010-05-14
해외조선족의 ‘귀국정착사업’의 필요성 려호길 moraean@naver.com   오늘 날 조선족집거지의 해체 민족교육의 부진, 나아가서 조선족사회의 존폐위기는 고향을 떠난 해내외조선족의 귀국귀향정착사업(이하‘귀국정착사업’)과 연결하여 해결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회귀본향의 섭리에 맞으며 중국의 미래발전전망에도 부합되는 사업으로써 연변의 ‘연룡도’선도구사업과 두만강하류개발계획,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중조경제교류 등 조선족지역경제발전사업과 맥을 같이하여 진행할 수 있다. 조선족의 해내외진출은 이미 20여년의 세월을 맞았다. 그동안 해내외조선족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당년에 끌끌하던 장정들은 노동의 한계를 느끼는 노년에 접어들었고 당년에 혈기왕성하던 젊은이들은 가족과 친지 고향이 그리운 중년에 접어들었으며 많은 조선족들은 귀향하고 싶지만 고향에 돌아와 정착할 방법을 찾지 못하여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 이는 ‘귀국정착사업’의 필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조선족사회가 회생할 수 있는 기회임을 시사해 준다. 해내외조선족들은 정도부동하게 자산을 구비하고 있다. 금융위기와 환율하락 투자처미확보로 해내외은행에 방치된 그들의 자산은 가히 천문학적 수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의 자산이 안전하고 합리하게 고향에 투자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면 구태여 해외자본을 유치하느라 동분서주할 필요가 없다. 고향을 떠난 해내외조선족들에게도 개인의 발전과 귀국정착의 꿈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해내외조선족의 ‘귀국정착사업’은 아직 화제로 거론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해내외조선족들이 고향에 돌아오면 외국의 가건물 같은 저 품질의 아파트를 사서 인테리어를 하고 눌러 앉으면 곰처럼 동면에 들어가 애꿎은 발만 핥아야 했다. ‘아무거나’ 찾아하고 싶지만 신통한 ‘아무거’가 없다. 몇 해 발을 핥다가 무맛일 때는 집을 팔지 않으면 세를 주고 다시 기약 없는 타향 길에 오른다. 오늘 날 조선족사회의 위기는 수많은 조선족들이 해내외로 산출(散出)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그러므로 해내외조선족들이 다시 민족사회로 돌아와 자기의 터전에 재정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만큼 ‘위기’극복과 조선족사회의 회생은 없다. 그들에게 정책적으로 편의를 제공하고 안전한 창업과 투자를 부추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면 충분히 그들의 애국애족애향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조선족의 ‘귀국정착사업’을 아래의 몇 가지로 제안한다. 우선, ‘귀국정착사업’의 법제정이 필요하다. 고향을 떠난 해내외조선족들은 조국과 지역사회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 때는 가난하여 혹은 발전하려고 고향을 등지고 객지에 나가 외화를 벌어들여 가족과 동네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에 기여했다. 이제 그들이 시름 놓고 조국과 고향에 돌아올 수 있도록 관련법을 제정하여 예우하는 것은 국가와 지방정부의 밀어버릴 수 없는 책임이다. 둘째, 외자유치의 차원에서 ‘세금감면 장려 대부금’등 우대정책을 도입해야 한다. 개혁개방이래 중국은 외자유치를 위해 해외기업에 많은 혜택을 주었고 또 필요시에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아주는 등 지방정책을 결부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이제 자국민의 ‘귀국정착사업’에 그 관례를 쓴다고 정책이 틀렸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더 막고 더 감아줌으로써 그들의 원만한 재정착에 편의를 도모해야 한다. 셋째, 창업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현재 귀국창업성공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는 자금부족의 원인도 있겠지만 현지실정의 부적응과 관련부서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장려해주는 외자유치사업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마땅히 정부와 재계가 손을 잡고 ‘귀국창업연수교육’을 비롯하여 이들에게 투자환경과 투자대상에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사업계획을 제정해 주는 등 마케팅사업이 따라가야 한다. 넷째, 다양한 투자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귀국정착사업’은 해내외로 산출(散出)된 국민의 귀환이라는 차원에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고향을 떠난 해내외조선족들의 경제사정은 천태만상이다. 이들 중에는 백만 부자도 있지만 돌아와서 몇 해 먹고 나면 남을 것이 없는 빈곤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조국과 고향의 품속으로 돌아온다는 긍지감을 가질 수 있도록 지방정부와 지방은행이 담보와 창구역활을 하여 직접투자(주식)와 간접투자(펀드)의 방법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 다섯째, ‘귀국정착사업’으로 조성된 기업과 경제실체는 귀국정착민들에게 취업우선권을 줘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도오도 못하고 객지에 머물고 있는 해내외국민들에게 먼저 취업기회를 주어야 한다. 또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고 직장문제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유학생들을 대담하게 관리인원과 간부로 기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어능력시험’에 합격되어 추첨을 기다리는 자들 중 새로이 이산가족이 되고 저 하는 국민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주어 미리 출국을 차단함으로써 가정의 비극을 막아야 한다. 해내외에 산출한 조선족은 민족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귀국정착사업’은 조선족사회의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는 영단묘약이 될 수 있다. 자치정부와 지방정부 민족간부와 재계 지성인 언론계는 합심하여 ‘귀국정착사업’을 민족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과제로 삼고 추진해 나간다면 민족의 미래는 기필코 밝을 것이다.   2010년5월13일 연길에서
15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 댓글:  조회:4730  추천:53  2009-09-28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려호길   조선족사회가 한국의 조선족 로무자들을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 한중수교 전 후에는 한국로무자들이 귀국하면 벌떼처럼 모여들어 주면 게 눈 감추듯, 부으면 밑 빠진 항아리 같았던 사람들이 최근 중국경제의 고성장과 그로부터 두둑해진 월급봉투에 힘입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안하무인격으로 한국의 조선족로무자들을 깔보고 배척하고 있다. 물론 이는 경사스러운 일이다. 개혁개방과 시장경제가 성과를 올리고 그것이 혜택으로 두둑한 월급봉투로 돌아오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한국의 하루 일당도 안 되않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아가면서 한국의 조선족 로무자들의 씀씀이가 얼마나 부러웠으며 그로부터 받은 위축감과 정신적 번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나라살림이 좋아지고 가정살림이 꽃피게 되었으니 좀 흥분하고 좀 유달라졌다 하여도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국의 조선족로무자들이 소외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개혁개방 이후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로무자들은 고향의 지역경제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고 가정에서는 식탁을 윤택하게 했고 자식들의 뒷바라지와 부모공양 등 조선족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를 했다. 또 정부가 안고 가야할 일자리문제와 빈곤구제사업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갈수록 험악하다. 초기에는 ‘가짜 한국 놈’, ‘서울깍쟁이’로 통하던 한국의 조선족로무자들이 요즘 들어서는 ‘일하는 사람들’, 한국서 ‘빈민굴’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냉혹한 시선과 언사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인격을 짓밟고 있다. 배운 사람들이 더 하다. 일찍이 소설가 박은 선생이 한국로무 행을 할 때만 해도 ‘노다지판’에 간다고 했지,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중국과 한국의 경제격차가 좁아지면서 최근에 한국로무 행렬에 가담했다가 지난해 작고하신 소설가 류원무 선생은 문인들의 차가운 시선과 손가락질에 엄청 곤혹을 치렀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다. 성망 있는 분이 천박한 사람들한테서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가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동정심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로무가 조선족사회생활의 일부분이 된 이상 작가로서 민족의 사명감을 안고 대중과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비난받을 대상이 아니다. 하긴 그런 연고로 중국에는 할 일없는 작가가 버글버글 돌아가고 한국에는 조선족의 사연이 버글버글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많은 학자, 지식인, 작가들은 공개석상에서 스스럼 없이 ‘일하는 사람’들을 폄하하기를 꺼리 지 않는다. 한국에 와서도 ‘일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폼을 잡고 다닌다. 그것은 20여 년 동안 한국경제와 한국인, 한국의 조선족로무자들로부터 위축을 받으면서 살아왔던 콤플렉스이다. 또 지난날 고농(머슴)이 부러웠던 시대에 대한 환멸이며 대대로 일하며 가난했던 사람들이 일에 대한 거부감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매일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과 주방을 오가면서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가정주부한테 일하지 않는다고 하면 펄쩍 뛸 것이다. 또 부부의 성생활도 요즘은 ‘밤일’이라고 보다 현실적으로 말하는 세상이다. 행여 밤일도 일이라고 안 하는 건 아닌가. 그들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서 볼펜을 까딱대면서 부하직원을 부려먹는 것을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또 “출근해서 할 일 없어 논다.”가 제일 멋스러운 말이다. 놀고먹고 놀고 돈 받는 것이 그들의 희망사항이다. 물론 많은 지식인과 작가들은 해외로무와 로무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김관웅선생은 해외로무자들을 볼 때마다 “해외로 나간 조선족들이 고생했기에 연길에 아파트가 숲을 이룰 수 있었다.”며 감사해 한다. 또 지난 미국발 금융위기 때에는 “환율이 자꾸 떨어져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큰 걱정이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영향으로 그의 주변 학자 문인들은 해외로무자들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사회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린 집단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 조선족 해외로무자들이다. 그들은 개혁개방을 맞아 선진국에 진출하여 낙후한 조선족사회에 훈훈한 봄바람을 몰고 왔으며 자신들의 청춘과 인생을 바쳐 가족과 민족사회에 공헌한 공신들이다. 하여 그들은 조선족사회의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해외로무자를 비하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아파트 그늘 밑으로 다니지 마라. 저녁에 술 취해서 아파트바람벽에 방뇨하지도 마라.
14    통일을 말하라 댓글:  조회:2909  추천:57  2009-08-26
통일을 말하라려호길   ‘햇볕정책’으로 한반도에 화합의 화촉을 밝혀주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민주와 인권 통일에 바친 일생이었다. 그의 서거는 남북과 함께 통일을 염원하는 해외동포들의 손실이며 민주와 인권을 사랑하는 세계인의 손실이기도 하다. 일찍이 1973년 ‘김대중납치사건’으로 중국동포들은 신문지상으로나마 인간 김대중을 알게 되었다. 유신체제를 반대하고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를 부르짖는 그의 담찬 행동에 사람들은 놀랐다. 가물에 씨 날 듯 간혹 가다 신문 모퉁이에 짧게 실리는 ‘남조선’의 쿠데타와 학생운동 민중항쟁의 뉴스들을 접하면서 중국동포들은 ‘김대중’, 그 범상치 않은 이름을 기억하였다.  그러던 1998년, 김대중은 한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사에서 그는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가능한 분야부터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는 등 햇볕정책의 기조를 이루는 ‘대북한3대원칙’을 밝힘으로써 남북관계의 평화적 해결을 제시하고 남북 간 긴장국면을 완화시킴으로써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중국동포사회를 환락으로 들끓게 하였다. 특히 남북정상의 포옹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동포가 없었다. 이제 곧 통일이 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수십 년 동안 남북이 대치상태에서 서로 힐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중국동포들은 자나 깨나 민족화합과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래왔다.   과거 6~70년대는 어려운 시기에 조선으로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았고 개혁개방에 이어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한국은 중국동포들이 품팔이를 할 수 있는 생활터전으로 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언제나 조선의 부모형제들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산다. 그저 남북이 하루 빨리 통일되어 옛말하는 그날만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릴 뿐이다.   동포들의 환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0년 9월 16일 남북 간의 합의에 따른 역사적인 경의선 연결 기공식이 있던 날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분단으로 반세기동안 동강난 허리를 경의선으로 이어가고 동북아경제권이 형성되면 편벽한 시골인 연변은 명실공이 그 중심에 서고 고국과의 끈끈한 경제적 문화적 연대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 투기자들은 두만강 압록강 변을 누비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재한중국동포들은 진작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판문점에 가면 분단선을 넘어가고 싶은 충동을 받는 중국동포들이다. 그 익숙한 땅과 사람들을 경계하는 남쪽사람들이 얄미울 뿐이다. 이제 경의선이 연결되면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평나선과 함북선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 환의는 참여정부까지 쭉 이어졌다. 햇볕정책은 한반도의 안정과 화해협력을 이끌어냈으며 이산가족 상봉 개성공단건설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등 실질적인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중국동포들은 그 꿈이 허황한 것임을 깨달았다. 금강산광관 개성관광이 중단되고 경의선열차가 멈춰버리고 개성공단이 존폐위기에 놓이는 등 남북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10년 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말 그대로 ‘잃어버린 10년’이 되고만 것이다.   이럴 때 민족의 웃어른이시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혼신을 다 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다. 대들보가 내려앉고 기둥이 넘어가는 느낌이다. 병상에서나마 집안을 지켜봐주시던 어르신의 텅 빈 자리를 바라보노라니 서글픔만 더해간다. 통일의 시침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보시고도 총망히 떠나셔야 했다니 원망스럽기만 하다. 누가 그 자리를 메워주고 햇볕 없는 어둠속에서 통일의 대업은 어찌 이룬단 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용서와 화해를 미덕으로 알고 살았다. 그의 그런 인간애는 실질적인 대북정책으로 이어져 남북의 골 깊은 한을 풀어갔으며 그것이 신뢰로 쌓여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할 수 있었다. 남과 북 여 야와 진보 보수 해외동포를 포함한 한민족사회는 어떤 이유로도 통일대업에 걸림돌이 되거나 이해득실을 따져 민족의 대업인 통일을 지연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통일을 저애하고 통일을 말하지 않는 개인과 단체 정당은 ‘악의 편’이다.                                                                          2009년8월25일 서울에서  
13    '바보 노무현' 댓글:  조회:4225  추천:46  2009-07-08
노무현전대통령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의 서거는 한국과 한국국민들의 손실이며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세계한민족사회의 손실이며 중국동포사회의 손실이기도 하다. 그가 지향했던 열린 정치 깨끗한 정치 허심탄회한 대화, 남북의 화해와 발전을 도모하고 해내외동포들을 고루 아우르는 지도자의 덕목은 민족리더로써 손색이 없었다.   한국은 700만 해외동포들의 반쪽 고국이며 해외동포들을 보듬는 성품과 인내력을 가진 나라와 정부 국민이어야 한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탈냉전시기 이념의 장벽을 넘어 한중수교는 이뤄냈지만 중국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도 중국동포문제는 수수방관하면서도 귀국동포로부터 불법체류기간여하에 따라 월 10만원의 벌금을 매기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하여 거금을 내지 않으려고 경범죄를 범하고 강제퇴거 당하는 중국동포들도 있었다.   김대중 정부시절은 국제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이 중시를 받던 시기였지만 중국과 CIS지역동포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대국을 의식하는 바람에 성과가 미흡했다. 오히려 중국과 CIS지역동포, 일본의 무국적동포를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중국동포들이 “잘 사는 나라 동포만 동포냐?”며 서울거리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다. 결국 중국동포들의 피눈물 나는 집회와 시위 헌법소원을 거쳐 ‘재외동포법’은 헌법불일치 판결을 받게 되었다.  ‘불법체류’, 이는 한국정부의 안일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중국동포들의 출입국이 잦아지면서 고국을 찾는 동포에 대한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야 했지만 어느 정권에서도 대국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도피하는 바람에 고국을 찾은 중국동포들이 10여 년간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고 노무현전대통령은 일찍이 변호사시절에 한국 여성과 동거하여 아이까지 낳은 중국동포의 국적취득문제를 취급하면서 한국에서의 중국동포의 법적지위를 고민한 적이 있었다.   “우리 사이엔 쌓여온 역사와 국제질서가 가로막혀있지만 마음은 통하고 있습니다.”   2003년10월29일, 고 노무현전대통령은 15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불법체류중국동포들을 찾아 위문하는 자리에서 한국대통령으로써는 처음으로 심경을 밝혔다. 노무현전대통령의 중국동포방문으로 중국과 CIS지역동포의 관련법제정에 청신호가 켜졌으며 동포들의 오랜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 노무현전대통령의 중국동포사회에 대한 공헌은 우선, 불법체류 합법화조치에서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기존의 밀입국과 여권위변조자를 포함한 불법체류동포들에게 '동포귀국지원프로그램'을 실시함으로써 재입국을 통하여 합법화시켰으며 그들이 새로운 꿈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다음, 방문취업제의 실시에서 볼 수 있다. 방문취업제는 ‘재외동포법’에서 소외된 중국과 CIS지역동포들에게 입국문호와 취업기회를 확대해주기 위해 실시된 제도이다. 방문취업제의 실시는 무연고동포의 한국행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60세 이상 동포들의 자유방문도 가능하게 함으로써 동포사회에 고국의 위상을 높여주었고 동포들이 고국으로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셋째, 중국동포들에게 노동법 등 관련법을 적용시킴으로써 한국근로자와 동등한 노동대우를 받게 하였다. 과거 중국동포의 노무활동은 불법체류라는 열악한 신분 때문에 법적보호를 받을 수 없었으며 임금과 인권 산재에 노출되어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노동자와의 동등한 노동법이 적용되고 노동3권 등 노동자의 제반 권익이 적용되면서 인권이 향상되고 생활에 보장이 있게 되었다.   노무현전대통령이 중국동포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또 하나의 이유는 단식농성으로 시들어가는 불법체류중국동포들을 방문하였기 때문이다. 고향의 동포사회도 덩달아 불법체류자라고 얕잡아 보는 판에 일개 나라의 대통령이 그들을 찾아 손을 잡아주고 건강을 챙기라고 위로해 주는 것을 보고 한국의 중국동포사회는 서럽게 울었으며 중국의 동포사회는 대통령의 ‘당돌한 행동’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여 그때를 경험한 단식농성자 4700명과 한국의 중국동포들은 노무현전대통령의 이름 만 들어도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노무현전대통령의 서거로 중국동포사회는 비통에 잠겼다. 모두들 ‘한국이 어찌 그런 분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느냐.’며 분개해 한다. 무어든 다 내주고 싶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싶었던 소탈하고 솔직담백한 노무현전대통령의 모습에서 중국동포들은 전에 없는 고국의 온정을 느꼈으며 고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키웠다. 중국과 CIS지역동포들에 대한 참여정부의 배려는 동포포용정책의 선례가 되었으며 노무현전대통령이 계승 발전시킨 ‘햇빛정책’은 ‘10.4선언’과 함께 남북통일을 이끌어내는 기본방법으로 높이 평가받을 것이다. 2009년7월7일 용인에서
12    한국노무의 어제와 오늘 댓글:  조회:4513  추천:64  2009-05-20
조선족의 한국노무는 지난 90년대 초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지면서부터다. 산삼 녹용 웅담에 불로초 그리고 거시기를 좋아하는 한국아저씨들의 기호에 맞추어 호랑이와 사슴의 거시기를 들고 홍콩을 거쳐 한국을 찾은 조선족들은 보릿고개를 넘어서 자기 몸뚱이를 챙기려는 한국인들로부터 뜻밖의 횡재를 하게 된다.   그때로부터 한국은 개혁개방을 맞은 조선족들에게 기회로 다가왔고 세종대왕을 프랭클린으로 바꾸고 프랭클린을 다시 모택동으로 바꾸는 일은 조선족들의 소망으로 인생역전의 기회로 되었다.   그러나 풀뿌리와 짐승 뿔, 쓸개와 거시기가 마냥 많을 수만은 없었다. 물동량이 줄어들자 약장사군들은 저질의 중국내지산과 몽골산 러시아산을 연변산으로 조선산으로 둔갑시켜 내속을 모르는 한국행 조선족들에게 팔아넘겼고 호랑이 거시기도 제조단계에 들어섰다.  한약재와 거시기의 효능이 떨어지자 한국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중국동포들이 가짜 약을 갖다 판다’는 것이다. 결국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는 저질의 약재와 거시기의 소동으로 여지없이 실추되었고 지하서울역과 경동시장주변에서 난전을 벌이던 조선족약장사군들은 일제히 단속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고국의 특수를 놓칠 수 없었다. 그 시기 한국행을 하는 조선족들은 가족내부에서도 인물로 뽑혔고 특별히 이산가족이 아닌 다음에는 내 노라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넥타이를 풀고 중산복을 벗은 아저씨들은 지하철공사장과 빌라 연립주택 등 건설현장에 투입되었고 여성들은 식당 등 서비스업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중국동포 노무자사회가 형성되었다.   노동의 대가도 톡톡했다. 90년대 초 건설현장잡부의 일당이 4~5만원이었고 한화 대 달러 환율은 800:1로써 세종대왕 한 장이면 지금의 모택동 한 장과 맘먹었다. 결국 노가다 하루 일당이 당시 중국 일반 노동자의 반년 월급수준이었고 대졸자의 4개월 월급을 웃돌았다. 당연히 고향에 돌아가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로 되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진짜와 가짜로 되는 비지너스와 친척방문, 결혼이 이뤄지면서 조선족의 한국행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또 그들이 벌어들인 돈은 다시 ‘재생산’에 투입되어 그들 가족의 한국행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한국은 조선족들의 천국으로 부상되었고 조선족은 한국이 있어 개혁개방이후 중국에서 다시 잘 나가는 민족으로 될 수 있었다.   1997년 IMF금융위기로 한국특수는 잠간 주춤했고 한국체류조선족들은 위기를 맞았지만 한국행은 여전히 매력을 잃지 않았다.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재입국과 방문취업제가 실시되고 무연고동포의 한국방문이 가능해지면서 막차를 타려는 ‘농민공’들과 도시빈곤층들로 붐비면서 한국노무는 차츰 매력을 잃기 시작했다. 게다가 중국경제가 지속적인 두 자리 수의 발전을 유지하고 중국이 발전도상국에서 중도국으로 거듭나면서 한국은 ‘떼돈을 버는 나라’로부터 ‘돈 모으기 어려운 나라’로 탈바꿈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태평양을 넘어온 미국발 금융위기는 조선족의 한국노무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지난겨울 연길암시장에서는 한화 대 인민폐환율이 한때 만원에 44원까지 떨어져 만원에 74원하던 전 해에 비해 30원 가량 떨어지는 이변을 연출했다. 한국노무자들과 그들 가족들은 밤만 자면 떨어지는 한화가치로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다. 그들은 한화가 가치를 회복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며 감히 환전도 송금도 못하고 꼭 필요한 돈도 빌려 쓰고 아껴 쓰면서 저마다 경제공부에 전념하는 모습이다.   몇 년 전부터 중국에서는 한국행이 더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괜히 남들 앞에서 한국으로 유난을 떨다간 “아직도 한국이냐?”고 핀잔받기 일쑤다. 그래서 한국행은 도둑고양이 동네나들이 다니듯 조용히 떠났다가 조용히 귀가해야 구설수를 피할 수 있다. 또 한국행 조선족들은 되도록이면 한국에 일하러 가는 사실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노무는 중국의 수많은 농민공들이 남방으로 연해도시로 이웃동네로 품팔이를 떠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셈이다.   조선족들은 한국행을 자제할 때가 되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과거 한국이 일본노무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발전된 국내 산업에 힘입었지만 조선족들의 고향은 낙후한 산업구조와 낙후한 사회시설, 낙후한 사회의식으로 해외노무자들이 외화를 보내기에는 적합한 곳이지만 그들의 귀국창업과 재취업 노후설계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고장이다. 그럼에도 촌사람들이 서울 사는 조선족들을 대하고 품이 맹랑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머리를 조아려 아부하고 차별을 받으며 얻은 40만개의 일자리다. 비록 3D업종이고 잡다한 일이지만 많은 조선족가정에는 생계형 일자리임이 틀림없다. 이제 한국노무로 떼돈을 버는 시절은 지났다. 오늘날 조선족노무자들은 한국에 일자리를 찾아 왔고 먹고 살기 위해 왔고 언어와 문화와 풍속습관이 통하는 고국에 살러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2009년5월17일 서울에서  
11    한국노무의 위기 댓글:  조회:3738  추천:48  2009-03-01
미국발 금융위기로 일자리와 먹고 사는 문제가 세계인의 화제로 되었다. 미국이 기침만 해도 독감에 걸린다는 한국경제도 그 여파로 반년 넘게 불경기로 이어지면서 펀드는 반 토막이 나고 코스닥 코스피는 연일 하락하고 환율은 한국은행의 개입으로 몇 번 온정 세를 보이는가 싶더니 지난 2월20일에는 1500선이 무너졌다. 당장 한국의 조선족노무자사회가 문제다. 그들의 송금을 기다리는 '한 집 건너' 조선족가정들에는 진작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년 넘게 환율이 오름세를 유지하고 인민폐는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이면서 한국노무자들의 수입은 반 토막이 나고 송금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환율의 상승은 물가의 상승으로 이어져 지출이 턱없이 늘어난 데다 내국인들의 호들갑에 언제 일자리를 내주어야 할지 모르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제 건설업이 풀가동되는 3월이 고비가 될 전망이다. 고향으로 겨울나러 갔던 조선족들과 한국어능력시험합격자들이 몰려오고 서비스업과 제조업에서 밀려난 조선족들이 가세하면서 일자리사정은 최악으로 치달을 전망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정부가 3월부터 내국인의 일자리마련을 위해 건설업쿼터를 도입하면 기존 추산 15만개의 조선족건설업일자리는 상당량 떨어져 나갈 전망이다. 한국행에 신중을 기할 때이며 40만 명에 달하는 기존인력도 구조조정과 파산 폐업 인건비절하로 부분적노무자들의 귀향이 불가피해졌다. 작년부터 조선족 가에는 ‘아들이 아비의 일자리를 빼앗고 아비는 아들의 눈치를 본다.’는 유머 아닌 유머가 유행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누가 남고 누가 떠나는 문제가 되겠지만 ‘한 집 건너’ 한국에 부모 또는 자식, 남편 혹은 아내를 두고 있는 조선족사회실정으로 미루어볼 때 한국노무의 위기는 곧 조선족사회의 일자리와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된다. 조선족들의 한국행이 자제되어야 하고 조선족노무자들의 귀국과 일시귀국을 유도해야 한다. 동시에 조선족사회의 일자리와 먹고 사는 문제, 빈곤구축과 민족균형발전문제를 두루 아우르고 가야 한다. 이는 조선족사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정부의 중국동포정책과 갈라놓을 수 없다. 첫째, 경제기반을 갖춘 조선족노무자들이 고향에 돌아와 창업할 수 있도록 우대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많은 해외노무자들은 정부가 밀어주면 충분히 귀국하여 창업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이다. 비록 소규모투자를 피치 못하겠지만 외자유치의 차원에서 세금감면혜택과 금융혜택을 주어 적극성을 발휘시킴으로써 민족기업으로 육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게 해야 한다. 둘째, 조선족노무자들이 고향에 돌아와 재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 많은 조선족들은 고향에 돌아오고 싶지만 귀국정착이 어려워 차일피일 미룬다. 이는 민족의 귀환으로써 민족사회의 운명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조선족사회의 중시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정기적으로 출국노무자들에게 취업박람회 등 기업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사회공감대를 형성하며 언론사들은 해외노무자들의 귀국정착사례 재취업사례와 창업사례들을 소개하고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민족의 귀환을 이끌어내야 한다. 셋째, 빈곤가정의 한국행이 이뤄져야 한다. 귀국노무자들이 비운자리는 빈곤가정의 한국행으로 이어져 민족균형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무연고동포의 방문취업제는 빈곤층 조선족을 우선해야 한다. 또 그들을 걸러내는 방법은 선별력이 없는 한국어능력시험이 아니라 중국민정당국이 인정하는 빈곤가정으로 하고 한국정부가 확인하는 순서로 할 수 있다.  넷째, 영주권제도를 확대실시하여야 한다. 한국처럼 영주권에 인색한 나라는 없다. 한국에서 10년 15년 살고도 검거되면 하루아침에 퇴거되는 일은 있을 수없는 일이다. 한국생활을 하는 동안 가정이 파탄되는 등 고향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자, 한국생활이 오래되어 귀국정착이 어려운 자들의 한국사회의 공헌을 인정하고 체류자격여하에 관계없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영주권을 주어야 한다.지난 1월8일 중국 상무부는 한국행을 신중이 할 것을 당부했다. 이는 한국 실정을 잘 간과한 메시지다. 출국인원들은 일자리를 수소문한 뒤 출발하며 당장 한국행이 급하지 않는 자들은 한국행을 유보하며 기존의 노무자들도 일자리가 탐탁치 않으면 일시 귀국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자칫 한데 엉켜 비용만 쓰고 애간장만 태우다 돌아올 수 있다. 물론 이는 한국정부가 비자와 체류문제를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해야 가능하다.  2009년2월28일 연길에서
10    ‘건강증’이 부른 불 건강사회 댓글:  조회:4366  추천:58  2009-02-18
  일전에 ‘연길공항, 건강증 없어도 출국 길 막지 않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검역당국이 출국 시 ‘건강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출국을 막거나 벌금’을 물게 하던 데로부터 ‘관련 법규를 선전하고 교육'하는 것으로 ‘사업지도사상’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기사는 실정을 모르는 출국여행자들이 아직도 옛날처럼 생각하고 브로커들에게 수수료를 주고 관시를 이용한다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만약 검역관들에게 비리가 있으면 감독전화로 신고해 달라는 것이다.  ‘건강증’이란 ‘국경위생검역법’의 규정에 따라 출국여행자들이 출국 전 건강검진과 예방접종을 받고 ‘건강증’, 즉 ‘국제여행건강증명서’와 ‘국제예방접종증명서’를 내는 것을 말한다. ‘건강증’제도는 중국정부가 자기공민의 건강을 국제사회에 책임지는 존중받을 만한 행위이다.   과거 ‘건강증’제도는 의무화되어 연변지역 출국여행자들은 출국 전 새벽차를 타고 도문해관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고는 두만강공원을 거닐면서 검진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당일로 ‘건강증’을 받아오곤 하였다.   물론 그 때도 ‘건강증’없어 출국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염우려환자들과 발병우려환자들이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아무개와 아는 사이요.” 혹은 아무개의 쪽지를 건너 주고 혹은 “좀 봐줍소.”하면서 인민폐 2~300원을 찔러주면 ‘건강증’이 바로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강검진과 예방접종을 받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대신 공항으로 직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건강증’없이 출국장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공직자와 사업가 관시후(戶)’ 검역관들의 친인척, 심지어 먼발치에서 검역관의 방뇨를 구경한 사람들도 관시라고 빈손으로 서 있는다. 출국장에 줄을 섰다가도 검역관과 눈을 맞추고는 쪽지를 건네주고는 혹은 통화중인 핸드폰을 건네주고는 꼬리를 내리고 안으로 새버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자리 하는 사람들과 돈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첨과 사기와 협박 등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들이다. 하여 일반 출국여행자들은 ‘건강증’ 생각만 하여도 화가 치밀고 연길공항만 떠올려도 밥맛이 잃어진다. 법을 만들었으면 제대로 지키든가 아니면 폐지하든가 분명히 할 것이지, 출국할 때 마다 잘난 척을 하는 사람들과 볼썽사나운 해괴한 몰골들을 보게 만든다. 검역당국은 출국여행자들의 ‘건강증’수수료가 어디로 새는 가를 ‘안타까워’하지 말고 검역관들의 사상교육과 직업교육에 힘쓰기 바란다. 그리고 출국여행자들의 괴춤에 침을 흘리고 공짜를 좋아하는 구질구질한 검역관과 ‘영도’ 앞에서 목이 메어 말을 못하고 허리를 펴지 못하는 검역관들을 과감히 배제해야 한다.   여행사 등 티켓 판매 창구의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 지난 몇 년 사이 여행사들이 티켓 예매 시 2~300원을 주면 ‘건강증’ 없이도 검역을 통과시켜준다고 공개적으로 홍보하고 나섰다. 그들이 소개하는 브로커들을 살펴보면 검역관과 내통하고 혹은 검역관들의 허점을 이용하여 수수료를 챙기고 여행사와 검역관들과 나눠 먹는 일당들이다.  공직자들의 특수화가 출국장비리를 불러오는데 빌미를 제공해주었다. 눈에 자주 띄고 표가 나는 것이 공직자들이다. 출구를 별도로 만드던가 아니면 맨 나중에 나가던가 할 것이지 꼭 대기자들을 비집고 혹은 거간꾼들을 앞세우고 나간다. 그렇게 야유와 조소로 찍힌 얼굴을 내 두르는 것이 두렵지 않는 공직사회가 불가사의할 뿐이다.  법치국가에서 국가가 폐지하지 않은 법을 준수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경우는 있을 수 없으며 '관련 법규를 선전하고 교육'하는 것으로 ‘건강증’을 대체한다는 것 또는 국법을 무시하는 불법행위이며 새로운 ‘사업지도사상’은 비리로 얼룩진 출국장을 만회해보려는 하책에  불과하다.2009년2월12일 연길에서
9    한국사, 우리에겐 무엇인가 댓글:  조회:3988  추천:78  2009-01-12
중국동포들에게 있어서 한국(조선)사는 ‘조선역사’ ‘조선 문학사’ 등으로 대학교과정에서 잠간 배울 뿐 중, 고 졸업자들은 ‘옛 이야기’와 속담 성구 등 과외독물로 한국사를 어설프게 접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는 중국동포들이 한국사회를 요해함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게 할 뿐더러 민족문제에 있어서도 우왕좌왕하고 한국동포들로부터도 적지 않은 편견을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한국을 찾는 중국동포들은 한국의 고궁과 역사유적지들을 돌아보고는 중국의 고궁과 역사유적지에 비해 “볼 것이 없다.”고 푸념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무지를 말해줄 뿐이다. 중국의 금 은박에 자색 칠을 한 고궁과 역사유적지들은 한족 등 다른 민족의 역사지만 한국의 고궁과 역사유적지들은 비록 초라한 초가삼간이고 흙탕물이 튕기는 개울가일망정 선조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가슴 뭉클한 감동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일 전에 귀한동포회가 ‘중국동포들이 알기 쉬운 한국사’ 책자를 편찬할 목적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그런데 회의장은 시종 중한역사학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명 ‘동북공정’에 대한 진실공방으로 이어졌다. 또 세미나에 참석한 한국동포들은 중국동포들이 당연히 한국과 입장을 같이 해야 하지 않느냐는 식이어서 곤혹스러웠고 미처 입장정리가 되지 않은 중국동포들의 당황한 모습도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한국사논쟁은 중조 중한 사이에는 ‘동북공정’이 제시하는 문제 등이 될 것이고 남북 사이에서는 ‘6.25전쟁’이 남침인가 북침인가 하는 소박한 문제로부터 분단사 전반에서 입장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중국동포들에게는 中 朝 韓 어느 나라 시각으로 한국사논쟁을 보느냐는 문제 또는 어떤 독자적인 시각으로 한국사논쟁을 대하느냐는 문제가 남아있다. 중한관계는 오랫동안 힘의 논리로 얽혀져 내려왔다. 한반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을 의식하면서 자기 것을 지켜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서글픔이 한국사 전반에 관통되어 있다. 냉전이 종식되고 중한관계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한 오늘, 중조 중한 두 나라 세 나라 사이에는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고 앞으로도 많은 문제들이 양상될 조짐이다. 그 때마다 입도 뻥긋 못하고 눈치껏 1인 3역을 하는 중국동포들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요령껏 사는 재간’이 답습되어서도 안 된다. 한국사논쟁은 외면하고 속을 끙끙 앓기보다는 주동적으로 중재자로 나서는 것이 중국동포들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한국사는 한반도사이기 앞서 한민족사이고 중국동포들의 몸에서 흐르는 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문제도 중국동포들에게는 민감한 사항이다. 남북이 기술하는 분단사는 서로 다르고 근접된 것들도 입장차이가 크다. 북에서의 분단사는 ‘혁명적 업적’을 기리는 것을 치중했다면 남에서의 분단사는 “빨갱이가 싫어요.”라는 냉전시기 분위기에 맞춰져 혐오감을 준다. 거기서 중심을 택하거나 객관성을 추구하기란 쉽지 않다. 필자도 결국 외국인들이 쓴 기사와 자서전 그리고 그 시대를 반영한 문학작품 다큐멘터리 영화 등 많은 간접자료들을 보고서야 분단사의 흐름과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중국동포들은 어떻게 한국사에 접근해야 하는가. 우선, 편견을 버리고 냉정하게 분석하고 취사선택하는 객관적 역사관으로 진실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한국사논쟁에서 완충지대를 이룸으로써 학자들이 한국사논쟁에서만큼은 중국동포들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는 차원에 도달해야 한다. 물론 이번 귀한동포회가 만들려는 한국사책자는 3개국의 논쟁을 다룰 만한 수준의 책은 아니다. 우리는 순수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역사, 고조선으로부터 3국시기 고려시기와 조선시기 일제강점기와 오늘의 분단사를 알리는 것으로 족하다. 오늘날 한국사는 중국동포들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한국생활상식으로 다가와 있다. 특히나 문화대혁명에서 족보를 불살라버리고 바야흐로 본관마저 잃어가고 있는 중국동포들에게 있어서 한국사를 배우는 과정은 민족의 의미와 고국의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이 되며 조선족이라는 열악한 민족을 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로 될 것이다. 2009년1월12일 연길에서 수개
8    '한국어능력시험'은 폐지되어야 한다 댓글:  조회:6092  추천:78  2008-12-24
어려서부터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어머니를 도와 가사 등 집안일에만 전념하여 부모님들을 걱정시켰던 넷째누나가 한국어능력시험을 보았는데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맞았단다. 그런 누나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어째 한국 사람들이 조선족을 놀리(놀리다=장난치다)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네티즌은 한국어능력시험을 보기 위해 1주간 기차를 타고 중국의 남단 廣州로 떠나는 모습을 담은 수기를 보내왔다. 중국 전역 19개 성시에 분포되어있는 시험장으로 가는 중국동포들의 민족대이동을 보니 조선반도를 떠나던 할아버지 아버지들의 서럽던 모습이 상기되어 울화가 치밀었다. 나라를 잃고 버림받아 '만주'로 떠나던 민족이 1세기만의 고국방문길이 다시 옛 모습을 재현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고국을 찾는데 왜 시험이 필요하나. 청나라와 '만주'국 일제식민지치하 어느 시대에도 봇짐 하나 들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조선반도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동포와 구소련동포들의 대량입국을 일시 수용할 능력이 없어 쿼터제가 필요하다지만 "한국에 오니 우리말을 써서 좋다"는 중국동포들에게 '한국어능력시험'을 보게 하는 것은 고국의 수치이고 동포들에게는 모욕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국행을 원하는 중국동포들은 돈 없고 빽이 없는 사람들만 남았다. 더는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이리 당하고 저리 당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중국전역으로 내몰아 '체조'시키는 것은 못 사는 해외동포들에게 취업기회를 주려는 방문취업제의 본의를 거스르는 조치이다. 중국에서는 여행사를 비롯한 '협력단체'에 뜯기고 입국해서는 '취업교육'으로 시간과 돈을 낭비해야 하고 직업소개소를 찾아 받아보지도 못한 월급의 10%를 소개비명목으로 먼저 주고 거기다 노동부가 내놓은 번거롭고 버거운 고용절차로 고용주를 찾아 헤매고 숙소라고 찾아 엉덩이를 붙였을 때는 "벌어서 갚아 줄께."를 몇 번이고 외친 다음이다.   며칠 전 법무부는 한국생활과 체류문제 기초생활소양을 답안지에 반영하여 한국어시험을 개선할 것임을 밝히면서 합격선도 50점에서 70점으로 인상한다고 선포했다. 한국생활과 체류문제 기초생활소양문제는 이미 '취업교육'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취업교육'에서 얼마든지 확대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문제로써 '한국어능력시험'의 명분을 세우려는 의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생활과 체류문제 기초생활소양을 '한국어능력시험'에 반영하려면 '취업교육'을 중국에서 실시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합격점수 선을 높이는 것은 낙방자가 없다는 사회여론에 맞춰진 억지에 불과하다.   문제는 어려서부터 조선어문과정을 이수한 중국동포들에게 '한국어능력시험'을 치게 해 기초선발대상자로 선정하는 것이다. '한국어능력시험'은 중국동포들에게 있어서 조무래기들이 울바자를 마주하고 서서 누구의 오줌발이 굵고 길게 나가는 가를 비겨보는 놀이에도 못 미치는, 허공에 먹을거리를 던지고 입으로 받아먹기 식의 무의미한 놀이에 불과하다.   선발방법의 실패는 선발대상자의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 못 사는 동포들에 대한 방문취업제의 선발대상은 못 사는 동포들로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 이치다. 그들을 걸러내는 데는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출입국관리국은 출입국관리들이 포함된 조사단을 중국현지에 파견하여 마을별 동네별로 중국동포들을 모아놓고 생활형편이 어려운 가정부터 비자를 주어 한국행을 시켜야 한다. 어렵겠지만 동포사회와의 유대강화와 동포사회의 민족정체성유지 고국의 방문취업제의 혜택을 폐부로 느끼게 할 수 있는 1석3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지난 9월, 산업인력공단에서 개최한 '동포취업박람회'에 김경한 법무부장관이 나와 일일이 체크하고 관련인사들을 모아놓고 좌담회를 가지는 모습을 보고 심히 감동을 받았다. 출입국관리국과 노동부 산하 관련부처들도 동포도우미 동포거간꾼들의 말만 듣지 말고 서울에서 중국에서 구소련에서 동포당사자들을 만나 '조사연구'를 함으로써 최적의 동포정책과 노동규범을 만드는데 일조해 주기 바란다. 
7    중국동포와 ‘외국인등록증’ 댓글:  조회:4683  추천:70  2008-12-16
‘외국인등록증’은 합법체류외국인에게 주는 신분증이다. 그러나 과거 친척방문과 비지너스 등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노동 등 취업활동을 한 중국동포들은 일정기간이후 불법체류자로 전락되기 때문에 ‘외국인등록증’은 엄두도 못 내고 체류유효기일이 지난 여권과 유효기일이 지난 여권이 유일한 신분증이었다. 그러나 여권은 불법체류 증빙서류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지참을 꺼리게 되었다. 지하철과 버스터미널 검문소에서 불심검문을 받을 때면 초청자에게 전화를 걸어 신원확인을 했으며 연락이 되지 않거나 의혹되는 부분이 있으면 곧바로 파출소와 출입국사무소로 연행되어 강제퇴거를 당해야 했다. 그때 중국동포들에게는 상응한 신분증을 얻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하여 모 신문사에서는 동포들의 실정에 맞추어 년 회비를 받고 ‘회원증’을 발급(신문사가 신원보증인이 됨)하였고 모 교회에서는 3차 이상 교회에 출석하는 조건으로 ‘교인증’을 발급(교회가 신원보증인이 됨)하였는데 대기인원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2003년8월16일,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불법체류중국동포들은 합법화 되어 오매에도 그리던 신분증인 외국인등록증의 소지자로 될 수 있었다. 이는 재한중국동포사회가 불법체류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되었다. 그러나 외국인등록증을 지참하는 즐거움도 잠깐, 한국적동포들은 신분증사용을 생활화하고 있지만 외국인등록증은 취직할 때와 핸드폰 구입 시 불심검문과 출입국시에만 필요할 뿐 거의 지참의 가치가 없었다. 또 지갑을 열 때마다 한국적동포들에게 외국인으로 낙인찍히고 야릇한 눈총을 받는 것도 싫었다. 이는 한국적동포들의 외국인과 외국적 동포에 대한 결례에서 찾아볼 점이다. 최근, 출입국사무소와 경찰 등 법계에서는 중국동포들의 ‘외국인등록증’불 지참으로 공무집행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한다. 물론 중국동포들의 신분증에 대한 이해 차이도 불지참의 원인으로 되고 있다. 한국은 1968년 5월에 주민등록법을 개정하여 주민등록증제도를 도입하였지만 중국은 1985년에 ‘주민신분증조례’가 시행되면서 신분증제도가 도입되었다. 또 한국은 신분증번호가 노출되면 경제상 명의상 피해를 입을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아직도 실제 나이와 주소지가 노출되는 것 때문에 꺼리는 정도이다. 2003년, 한 중국동포여성이 외국인등록증을 받고 환호하던 모습이 새삼스럽다. 한국에서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제주도였는데 불법체류신분 때문에 3년이 되도록 못 가 봤다는 것이다. 이제 합법화 되고 외국인등록증을 받았으니 제주도를 가볼 수 있어 얼마나 좋으냐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어제 일인 듯 눈앞에 생생하다. 당시 모 교회에서는 필자가 쓴 기사를 보고 해마다 제주도 단체관광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신분증이 없어 애간장을 태우던 과거의 중국동포들을 돌이켜 보면 오늘날 중국동포들은 복 받은 집단이다. 우리가 고국의 동포포용정책으로 수혜자가 되었으면서 고국의 법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현행‘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에 관한 법률'은 그 동안 논란이 되었던 불심검문을 제도화하였으며 단속활동을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 방해하거나 기피한 자에 대한 벌칙규정도 신설했다.신분증(외국인등록증)지참을 생활화하는 것은 선진화사회의 일상이다. 해외동포로써 고국의 법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는 것은 해외동포의 의무이다. 우리는 지난날 동료동포들의 쓰라린 추억이 담긴 신분증을 소중히 지참하는 것으로부터 준법의식을 제고하고 보다 개선되고 완성된 해외동포정책을 기대해야 한다. 2008년12월15일 서울에서
6    조선어와 조선말의 위기를 두고 댓글:  조회:5030  추천:108  2008-10-22
중국동포학자들이 오랜 세월 방치하여 온 조선어의 위기를 두고 논쟁에 들어갔다. 피치 못 할 ‘조선말규범집’개정이 부른 논쟁이라지만 늦게나마 생각을 모으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관련기사에 따르면 한국어를 표준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남과 북의 언어를 공동 유입해야 한다는 주장, 중국동포사회의 수요에 따라 남과 북의 표기법을 일부 유입해야 한다는 주장, 앞으로 남북이 공동 편찬하는 ‘겨레말 큰 사전’에 준하자는 주장으로 엇갈리고 있다. 조선말은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사회에서 형성되었고 ‘만주’지역 타 민족들과의 교류와 곡절 많은 중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변화 발전하였으며 중국동포사회의 150여 년 환난의 역사가 반영되고 민족정서가 묻어 숨 쉬는 언어이다. 비록 오랜 세월동안 중국어 유입이 상당해지고 표현형식과 내용이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훈민정음의 체계를 잃지 않은 한반도의 언어의 일종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조선어는 평양어에 준하고 있지만 조선말은 연변(목단강일부지구 포함)은 함경도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기타 산재지구에서는 지역단위로 과거 전라도 경산도 충청도 등 한반도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를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진 100여 년 전의 한반도 언어가 많다. 이는 과거 한반도의 언어를 연구함에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있을 뿐더러 조선인들의 ‘만주’이주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동포들의 조선어사용을 살펴보면 교과서는 평양어에 준하고 있지만 ‘연변일보’를 비롯한 연변에서 출판되는 간행물들은 함경도언어와 그로부터 파생된 ‘연변말’을 적지 않게 사용하고 있고 기타 산재지구의 간행물들은 ‘남도’언어의 영향으로 평양어와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다가 최근 들어서는 연변보다 한 발 앞서 한국어 유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동포사회가 ‘조선말규법집’으로 진통을 느끼고 있은 것은 한국어사용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이미 중국동포들의 문자와 언어생활에 상당량 유입되었고 문화 교육 예술분야의 학자 지식인 작가들도 한국어사용으로 시체를 따르고 있다. 이는 한국어를 표준어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의 당연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한국말사용은 아직까지도 겉치레일 뿐 중국동포들이 모이는 곳이면 중국 현지의 지역적 차이(연변 요녕 흑룡강 몇 개 지역 등)를 조금씩 보이는 조선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중국동포사회는 조선어와 조선말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좋은 환경이다.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동북3성(省)의 각 현시에서 온 동포들이 함께 어울려 노동하고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끼리 모이면 신나게 조선말을 주고받다가도 한국인만 보이면 조선말을 뚝 끊고 잠자코 있거나 할 수 없이 잘 되지도 않는 한국말로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한국을 처음 찾는 중국동포들은 한국어를 몰라 ‘반벙어리’가 되고 언어장애로 기가 죽어 감히 한국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실도 주목할 바이다. 이는 한국어를 배우기에 앞서 한국에서 조선말사용의 필요성을 시사해 주며 아울러 중국동포들의 몸에 밴 조선말의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한국어가 중국동포사회에 준 영향은 조선어와 조선말의 위기를 불러온 주원인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를 걸러낸 한국어를 ‘조선말규범집’에 수록해 봤자 실제로 알파벳에 ‘풍덩’빠져 허우적거리고 영어를 생활화하고 공교육화 하고 있는 한국어를 터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차라리 영어를 배워 한국인들과 ‘맞바람’을 피우는 것이 한국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중국동포들의 체질에 맞는 문자와 말은 아무래도 독자적인 조선어와 조선말사용이라고 하겠다. 또 ‘아’다르고 ‘어’다르고 수다스러운 한국어는 점잖고 말수더기가 적은 중국동포들의 체질에도 잘 맞지 않는다. 중국동포들의 특성에 맞는 조선어와 조선말을 살려 민족의 ‘DNA’를 유지하고 민족의 컨디션을 회복하여 ‘신토불이’하는 것이 중국동포들의 건강에 유리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평양어만 고수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고 현실을 방관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다. 또 남북이 공동 편찬하는 ‘겨레말큰사전’으로 요행을 바라는 것도 중국동포들의 실정에 맞지 않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조선말규범집’은 과거 평양어의 기초에서 피치 못할 한국어를 유입하면서 이참에 장기간 중국어문화권에서 형성 발전된 중국동포사회의 언어형식과 내용을 반영하여 중국동포 스스로의 규범집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 한국에서 경산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 말들과 함께 조선말도 ‘간도어’혹은 ‘중국동포언어’로 통할 수 있는 여건마련이 시급하다. 이는 ‘동포포용정책’의 일환으로 되어야 하며 중국동포사회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한국정부와 국민의 중시를 받아야 하며 한민족공동체 구성의 필요한 환절로 인정받아야 한다. 또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들은 스스로 심리부담과 모멸감을 버리고 내 언어를 지키고 민족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철면피하고도 담차게 조선말을 사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조선말사용이 현실화 될 때 그 현상은 중국동포사회에 역행하여 사춘기소녀의 허영심 같은 ‘한국말 따라 하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잠재울 수 있으며 중국동포의 문자와 언어생활이 반영된 조선어와 조선말을 보존할 수 있다.  2008년10월10일 서울에서
5    "노무현 자리" 댓글:  조회:4341  추천:105  2008-08-06
요즘 서울의 중국동포문인들이 자주 가는 곳이 있다. 그곳이 다름 아닌 ‘노무현 자리’이다. 풀어 쓰면 ‘노무현이 앉았던 자리’ ‘노무현이 머물렀던 자리’이다. 노무현이 임기 중 앉았던 자리, 머물렀던 자리가 얼마나 많으랴만 중국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에 앉았던 ‘자리’는 중국동포들에게 있어서 각별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그 자리를 탐낸 지 오래지만 나는 아직 그 자리에 앉아 보지 못했다. 그건 중국동포문인들이 모일 때마다 고향과 한국의 귀한 손님들을 배동하기 때문이다. 그 귀빈들을 당연히 ‘노무현 자리’에 모시고 나면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보기’를 하고 ‘바라는 눈길’은 받아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남들 없을 때 가야지.) 휴일 날 홀로 식당을 찾아 떠났다. 인천에서 용산급행에 몸을 실으니 벌써 마음이 설렌다. 웬만해서는 눈시울을 적시는 법이 없는 나지만 외롭고 괴롭던 한국생활에 마음이 엷어져 인젠 자주 눈물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조그마한 일에도 자주 감동을 받고 가슴을 들먹인다. 하긴 못사는 나라동포로 차별을 받다가 해빙기를 맞아 오늘날 방문취업제로 어깨 펴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중국동포로 거듭나기까지는 중국동포들의 절절한 애원과 동포애를 지닌 한국인들의 피타는 노력이 동반한 역사였다. 그 암울한 역사의 끝자락에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나서서 동포들의 한을 풀어주고 더불어 살아가는 대한민국으로 거듭났다. 하여 노무현전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이다. 신도림역에서 2호선을 기다리노라니 다시 감동이 온 몸을 전율한다. 2004년 당시 5700명에 달하는 중국동포들이 강제추방을 반대해 ‘고향에 돌아와 살기’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 단식농성에 들어가던 그 나날들은 재한중국동포들이 실망으로 눈물짓던 시기였다. 그 때 서울조선족교회 단식농성장의 침울한 공기는 여기 신도림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김빠진 공 같고 삶아놓은 시래기같이 여기저기 널 부러진 농성자들이 이제나 저제나 하고 한국정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가슴이 후둑후둑 뛴다. 마치 노무현전대통령의 집무실에 접근하는 기분이다. 신발을 벗기 바쁘게 미닫이문을 열고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노무현대통령이 앉았다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한테 사양할 일도 없다. 누구 눈치를 볼 일도 없다. 뒤미처 홀써빙이 쫓아왔다. “물 냉 하나요.” “저.......” 아가씨는 냉면 한 그릇 먹자고 안방까지 들어오나 하는 고까운 눈치였다. 나는 연변말로 “그럴 일이 좀 있소”하고 밀막아 버렸다. 아가씨가 나가자 나는 다시 자세를 고치고 앉았다. 누구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없다. 노무현전대통령이 왔을 때는 경호원들로 둘러졌을 방 주변에는 고향에서 맡던 음식냄새만 짙게 풍긴다. 2평 남짓한 작은 방에 네모난 나무식탁이 가운데를 점하고 ‘노무현 자리’옆에는 빨강방석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나는 노무현대통령이 이곳 중국동포식당에 왜 왔는지 모른다. 부근의 조선족교회단식농성장을 방문한 것은 오전시간이었다. 오전시간에 특별히 식당에 들릴 이유가 없다. 그럼 식사가 아니고 다른 일로 혹은 다른 시간에 찾았던 것일까. 나는 안면 있는 식당주인을 불러 문의해 보니 “글세, 왔다갔소.”라고 짤막히 대답할 뿐 자세한 사연은 회피하는 것이다. 주인은 소문을 내지 않는 것이 자기를 돕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노무현 자리’로 족했다. 이 자리에 앉아보고 싶어 특별히 인천에서 찾아온 것이 아닌가. 방바닥이 차츰 따스해 나기 시작했다. 노무현대통령이 서울조선족교회단식농성장을 찾았을 때는 국내적으로 여기저기에서 파업이 단행되어 참여정부가 엄청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거기다 불법체류 중국동포들이 단속 기일을 하루 앞두고 과천정부청사 앞에서 농성을 벌리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출하고 서울조선족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에 나뉘어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 어려운 시국에 불법체류 중국동포들에게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란 결코 용의한 일이 아니었다. 노무현대통령은 저 만주에서 말달리던 겨레들의 말발굽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만주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이제 뒤늦게 찾아온 그들 후손들을 강제추방으로 몰아낼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내친걸음이었을 것이다. “맞고요. 맞고말고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중국동포들은 그 경산도 입말을 자주 흉내 내곤 하였다. 그러면서 터프하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지닌 노무현대통령을 각별히 좋아했다. 조선족교회강단에 나타난 노무현대통령을 보고 동포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드디어 단식농성이 풀리고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보안대책으로 재입국정책이 나오고 방문취업제가 도입되면서 불법체류자들을 비롯한 중국동포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노무현 자리’에 앉아서 냉면을 후룩후룩 집어넣는 내 눈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이것이 중국동포들이 고국 땅에서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고 싶다. 지난날 이 아름다운 강산에 걸맞지 않은 차디찬 시선들, 성에 같은 음성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있다. 그 아픈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고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해외동포로 살아가는 길만이 재한중국동포사회를 기다리고 있다. 2008년 7월 13일 인천에서
4    중국동포의 인간관계의 변화 댓글:  조회:4276  추천:115  2008-08-04
지난 9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도경을 거쳐 입국한 중국동포들은 한국정부와 국민들의 차별과 배척을 받으면서 중국동포사회를 형성하였고 속절없는 불법체류강제추방의 외국인노동자정책에 편입되어 오히려 방대한 규모로 발전하였으며 뒤늦은 동포포용정책으로 다수의 불법체류중국동포들이 은둔생활을 마치고 지푸라기처럼 간간히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이는 중국동포의 인간관계에도 여러 차례 변화를 보여 주었다. 초기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지하철(서울도시철도5~8호선)공사를 비롯한 노동시장에 투입된 중국동포들은 대부분이 불법체류자로 전락되었기에 그들 사이에는 특별한 모순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가치관의 힘을 입어 중국에서의 골 깊은 3대차별(도시와 농촌의 차별, 노동자와 농민의 차별, 체력노동자와 뇌력노동자의 차별)에서 해탈되어 “한국에 오면 모두가 똑 같다.”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평등한 동포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다양한 장기체류비자의 출현으로 동포들 사이에는 합법체류냐 불법체류냐를 놓고 양극화 되어 갔다. 불법체류동포들은 한국인으로부터 오는 냉대와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동시에 합법체류중국동포들로부터도 찬밥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는 중국동포사회의 모순을 양상 시켰고 합법체류를 위한 공문서위조와 국적취득을 위한 가짜 결혼을 부축인 주원인으로 된다. 진짜와 가짜로 시집오는 중국동포여성들의 증가로 중국동포사회는 국적취득자(혹은 대기자)와 합법체류자, 불법체류자라는 3개의 계층으로 구분 되었다. 이는 중국동포들이 중국사회에서의 신분을 뒤집어놓는 자본주의혁명이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데려가는 남자가 없어 시집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여자가 어느 눈썰미 좋은 한국총각한테 시집가서는 국적취득자랍시고 엉덩이를 비비 꼬며 다니는가 하면 공부와는 담을 쌓은 ‘유학생’이 합법체류자라고 괜스레 경찰들을 지껄이고 다니고 고향에서는 내 노라던 동포들이 오히려 ‘빨치산’이 되어 지하로 잠적해서는 빈번한 ‘빨갱이색출작전’에 걸려 수갑을 차고 연행되는 형국을 맞았다. 사과를 차디찬 북방의 돌배에 접해야만 했던 민족이 사과배로 고국에 돌아오니 이제 너희는 배니 사과와는 무관하다는 앙탈을 부린다. 그러나 재입국을 통한 불법체류합법화조치와 방문취업제의 실시, 노동3권의 적용으로 중국동포들의 인권은 향상되었고 국적취득여하와 체류자격여하로 우열을 따지던 ‘신분제도’에서 간신히 해탈되어 가치창조를 위한 경쟁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불법체류자에 대한 화제는 남아있다. 그러나 과거의 비난과 조소, 차별을 넘어 안타까움이다. 왜 한국정부가 여러 차례 합법화 조치를 시행하는데도 기어이 불법체류를 하느냐는 것이다. 또 재입국이 불가능한 불법체류동포에 대한 너그러움도 보여준다. “한국에 오래 살다보니 중국에 돌아가면 재정착에 어려우니 그럴 수밖에!” ‘체류기간이 얼마 남았느냐’는 화제도 남아있다. 그러나 체류기간과 체류자격으로 우열을 따지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만큼 중국동포들의 한국사회에서의 지위는 한국정부의 동포포용정책과 중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중국동포들이 만나면 수입의 높낮이를 따지고 전세냐 월세냐는 주거환경의 차이를 따지고, 중국에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의 대소를 따진다. 서비스업과 건설업에서 새롭게 등장한 ‘중국동포사장’들은 자가용의 유무를 따지고 투자환경과 투자가치를 따지면서 한국인들과 은근슬쩍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앞으로 중국동포사회는 합법체류와 장기체류로 탈태 환골할 전망이다. 이는 동포가의 형성과 발전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며 또 ‘중국동포사장’들의 다량출현은 동포가의 상업과 서비스업을 부추길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중국동포들의 입지를 굳건히 해 줄뿐더러 중국 현지의 동포사회의 안정에도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동포들의 인간관계는 체류자격과 국적취득여하로 좌우되던 과거의 맥락에서 해탈되어 행복과 자유와 가치를 추구하는 건강한 인간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2008년 7월 30일 光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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