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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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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중편) 가을비 댓글:  조회:1577  추천:0  2022-11-29
2022년11호       중편소설   가을비     박명선         쾌청한 날씨가 련며칠 지속되더니 비가 내린다.토요일이라 늦잠이나 실컷 자려던 나는 비소리에 잠에서 깨여났다.아홉시를 넘은 시간이였다.가을비가 내릴 때면 어쩐지 모르게 기분이 울적해진다. 나는 팔베개를 하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느덧 일본에 온 지 8년이 되였다.먼저 일본어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우체국은행에 취직했다.한주일 전 증권회사 면접에 합격하여 우체국은행을 그만두고 도꾜에서 사이다마현 가와구찌시로 이사를 왔다.가와구찌(川口)역과 도꾜 아까바네(赤羽)역은 한 정거장 거리이다.철교 건너편 아까바네에 아버지가 일하던 숯불갈비점과 스즈끼리에의 옛집이 있다. 스즈끼리에(鈴木理恵),내가 일본에 올 때 신원보증인이 되여준 일본녀인이다.당시 나는 아버지로부터 아버지가 일하는 회사의 사장님이 신원보증인이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 대학시험도 보지 않고 일본어학교 류학수속을 했는데 일본에 와서야 숯불갈비점 점장인 그녀가 나의 신원보증인이고 주방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그녀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였다.3년 전 아버지는 그녀의 고향인 시즈오까(静岡)에 가서 그녀와 같이 해산물가게를 경영하고 있다. 중국에서 대학시험을 보지 않은 것이 다시 후회되였다.고중 3학년 후학기에 들어와서도 나는 성적이 좋았기에 중점대학은 문제없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그때 성적이 비슷하던 고중동창생들이 중점대학을 졸업하고 큰 도시 좋은 회사들에 취직한 것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나도 그들처럼 중국의 큰 도시에서 발전하고 싶다. 증권회사는 우체국은행보다 업무가 적성에도 맞고 재미도 있었지만 마뜩잖으면 때려버리고 중국에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만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다가 방에 들어와 텔레비죤을 켰다.날씨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다가 한 젊은 녀인이 눈물을 머금고 어린 아들의 생일케익에 초불을 켜는 장면이 나오기에 멈추었다.재방송하는 어느 드라마인 것 같았다.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소학교 4학년 때 려행사 대표팀 일원으로 일본에 려행을 갔다.같이 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한 내에 귀국했지만 아버지는 어딘가로 도망갔다고,그 후 아버지는 려행사에서 해고당했고 아버지 때문에 려행사도 큰 손실을 입었다고 어머니한테서 들었다.어머니는 아버지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였다.나도 아버지가 혹시 일본에서 사고를 당해 죽지나 않았을가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이였다. 전화벨소리에 옆에서 주무시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방전등을 켜고 수화기를 들었다.밤 열한시였다.나는 대뜸 아버지라고 짐작했다. “...동우 아빠,왜 이제야 전화해요?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과연 아버지였다. “...동우는 잘 있어요.지금 자고 있어요...려행사에서 찾아온 사람은 없었어요...려행사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여기서 다른 회사를 찾으면 되잖아요?...그럼 언제 와요?...흑흑흑...” 수화기를 맥없이 놓은 어머니는 베란다에 가서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찬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비물이 집안까지 튕겨왔다. “어머니,감기에 걸리겠어요.”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어머니한테 다가갔다. “안 자고 있었나?동우야,엄마는 지금 밖에 나가 비라도 콱 맞았으면 좋겠다.너 먼저 자거라.” 나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려는 어머니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요.저를 봐서라도 이러지 말아요.우리 누워요.” 어머니는 누워서 나를 꼭 끌어안고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아버지 언제 온대요?” “나도 몰라.” 어머니의 눈물이 나의 얼굴에도 흘러내렸다.뜨거운 눈물이라 하지만 어머니의 눈물이 가을비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날 밤,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왜 사람들이 일본에 가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일본에 간 한 학급 학생들의 부모들도 여럿이 있었고 부모의 요청으로 일본에 간 학생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커서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일본에 가서 아버지를 꼭 찾고 말겠다고 결심을 내렸다. 제약공장 로동자인 어머니는 밤대거리를 할 때도 많았다.어머니가 밤대거리를 할 때면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외삼촌이나 이모네 집에 가라고 했지만 나는 혼자 집에 있겠다고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두주일이 지난 금요일은 나의 생일이였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가 료리들을 밥상에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생일 축하한다.아침에 미역국은 잘 먹었나?” “네,잘 먹었어요.” “저녁엔 네가 좋아하는 소고기료리도 해놓았다.어서 옷을 갈아입거라.” 아침에는 어머니가 엊저녁에 끓여놓고 간 미역국을 덥혀 먹었다.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간 후에 집에 들어오고 내가 집에 들어오기 전에 공장에 나가군 했다. 옷을 갈아입고 주방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케익에 초불을 켰다. 열한개 초불이였다. “생일 축하해요.사랑하는 내 아들 생일 축하해요...” 생일축하노래를 부르는 어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있었다. “눈 감고 두 손 모아 바라는 걸 속으로 말해보거라.” 나는 아버지가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고 속으로 말하려다가 제꺽 초불을 불어 껐다. “어머니,나 공부를 잘할게요.”  “그래,공부를 잘해서 이제 좋은 대학에 가야지.오늘은 네가 집에 들어오는 걸 보고 출근하겠다고 했다.지금 공장에 가야 한다.래일은 쉬고 모레부터 다시 낮일을 한다.생일인데 엄마가 미안하구나.” “저를 근심하지 말고 빨리 일하러 가세요.” 어머니가 집문을 나간 지 얼마 안 되여 아버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동우야,생일 축하한다.” “일본이 그렇게 좋아요?” 나의 입에서 인사 대신 곱지 않은 말이 나갔다. “일본이 좋아서 있는 게 아니다.네가 크면 돈을 많이 주려고 있는 거다.” “돈은 커서 절로 벌 테니 빨리 돌아와요.저는 돈이 필요없어요.아버지가 필요해요.” “어머니는 아직 퇴근 안 했나?오늘이 생일인데 저녁은 뭘 먹나?” “어머니는 요즘 밤대거리를 하고 있어요.제가 오늘 뭘 먹든 상관하지 말아요.말하기도 싫어요.” “너 오늘 왜 이러니?너 성격이 변했구나.아버지 때문이니?” 아버지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속시원하련만 아버지와 먼저 약속을 하고 싶었다.지금까지 약속을 잘 지킨 아버지였다. “오늘 저와 약속해요.언제 와요?” “언제 갈지 모르겠구나.미안하다.저 그리고...” “약속하지 않으면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어요.” “너 오늘 진짜 왜 이러니?” “이제 제가 커서도 오지 않으면 아버지를 찾으러 일본에 가겠어요.” 나는 수화기를 덜컥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끊겼다가 다시 울리기를 여러번 반복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베란다에 비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늦게부터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선생님과 학생들한테서 선물도 받았다.작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이 뀀점에도 갔다. 생일날에 쓸쓸한 가을비도 내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니 울고 싶었다.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밖에 나가 비라도 콱 맞을가? 문득 술이나 마셔볼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오늘은 제정신으로 혼자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3분의1 정도 남긴 술병을 꺼내 유리컵에 술을 따랐다. 열한살 생일은 꼭 기억해두리라! 나는 술을 조금 마셔보았다. 와,독하다!이런 독한 술을 어떻게 마시지? 입안이 쓰거워나고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안주를 먹어야지! 나는 소고기를 먹었다.소고기가 여느 때보다 구수하고 맛있었다. 그래,술과 고기를 먹으니 나도 이젠 사내가 다 되였구나!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집안이 들썽하게 미친 듯이 웃고 싶었다. 이번엔 건배해야지! 나는 단숨에 술잔을 굽내버렸다. 생일날에 약속도 하지 않은 아버지가 미웠다.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이 술은 마실 수 없잖은가.까짓 술을 남겨선 뭘 하겠는가. 나는 나머지 술을 유리컵에 몽땅 쏟아부었다. 이튿날,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여났다.왜 케익과 료리들은 먹지 않고 술만 마셨는가고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여 우시는 어머니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나도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그 후부터 나는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담배도 피우지 않았다.열심히 공부만 했다. 일본에 온 날 밤,아사히(朝日)맥주를 처음 마셨다.   원룸이고 3층으로 된 아빠트,나의 집은 3층 1호실이다.2호실은 비여있고,3호실에는 브라질에서 온 30대 초반 부부가 살고 있고,4호실에는 외국인을 혐오하는 듯한 50대 중반 뚱보녀인이 혼자 살고 있다. 점심무렵에 비가 그쳤다. 드라마를 한참 보는데 밖에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창밖을 내다보니 파란 유니폼을 입은 남자 셋이 길옆에 세운 이사센터차에서 이사짐을 부리우며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었고 여나문살 돼보이는 남자애의 손을 잡은 키 큰 녀인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본에 와서 지금까지 이사센터차를 보면 오늘 누가 오는가,누가 가는가 무심히 지내왔다.한 아빠트에 살면서도 층계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그저 례의적인 인사만 하고 스쳐지나기에 누가 오든 누가 가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집에 있기 싫어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갔다.    “곤니찌와(안녕하세요).2호실에 이사 온 스기모도(杉本)예요.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일군들을 층계까지 바래주고 뒤돌아선 녀인이 집문을 나온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염색하지 않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30대 중반을 넘어선 갸름한 얼굴의 예쁜 녀인이였다.   “하야시(林)입니다.잘 부탁드립니다.” 일본에 온 첫날부터 림씨인 나를 모두 하야시상이라 불렀다.일본 성씨 중에도 하야시라는 성씨가 있었다.이젠 일본어도 잘하기에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나를 외국인으로는 여기지 않고 있었다.그렇다고 일본인이라고 자칭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야시상은 언제 여기에 이사 왔어요?” “한주일 전에 이사 왔습니다.” “가족은요?” “독신입니다.” “하야시상은 대학원생인가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라와에 있는 증권회사에 근무합니다.” 사이다마현 현청소재지인 우라와(浦和)는 가와구찌에서 네 정거장 거리였다.우라와에서 세방을 구하려다가 가와구찌에서 구하게 되였던 것이다.일본에서 네 정거장 거리는 먼 거리가 아니였다.    “그래요?” 4호실에서 뚱보녀인이 나오더니 이쪽으로 뚱기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인사하고 층계를 내려갔다. 오늘 스기모도라는 녀인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남편이 출장이라도 갔을가? 동네를 한바퀴 빙 돌고 슈퍼에서 점심에 먹을 두부를 사가지고 층계를 다시 올라오니 2호실 출입문은 닫겨있었지만 식기 전에 빨리 먹으라고 아들에게 하는 그녀의 말소리가 열어놓은 주방창문으로 들려왔다. 집에 들어온 나는 두부를 그릇에 담아놓고 어머니를 그려보았다. 어머니는 내가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되여 제약공장에서 인원감축을 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게 되여 이듬해에 천진에 갔고 지금 천진 어느 약업유한회사에서 일하고 있다.우체국은행에 취직한 해에 나의 요청으로 일본에 와서 열흘간 있다가 중국에 돌아갔다.일본에 온 이튿날 저녁,내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가 떡볶이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일본에 와서 떡볶이는 처음이였다.전차에서 내려 20분이면 집에 들어간다고 전화를 했더니 내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해놓은 것이였다. “슈퍼에서 떡볶이도 팔더구나.식기 전에 빨리 먹거라.” 어머니가 포크로 떡볶이 두개를 집어 나의 입에 넣어주었다. 뜨거워서 호호 불며 먹는 떡볶이는 세상 별미였다. “정말 맛있어요.옛날 그 맛이예요.어머니 료리솜씨 정말 좋아요.” “녀자친구나 빨리 사귀거라.” 어머니도 웃고 나도 웃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밥이나 국을 떠놓고는 식기 전에 빨리 먹으라고 했다.중학교 3학년 어느 추운 겨울날,퇴근길에 산 군고구마가 식을가 봐 가슴에 꼭 끌어안고 집에 달려와서 식기 전에 빨리 먹으라며 껍질을 제꺽 바르고 아직도 김이 몰몰 피여오르는 군고구마를 나의 입에 넣어주었다.나는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에 목이 메여 어머니 몰래 눈물을 훔쳤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다른 얘기를 나누다가 아버지를 만나보지 않겠는가고 웃으며 어머니에게 물었다.어제 오후 어머니를 마중하러 나리다공항에 가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버지는 요즘 가게도 바쁘고 스즈오까에 갈 준비도 해야 하기에 만날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어할 거라고,만나겠다면 래일 저녁 어머니를 모시고 숯불갈비점을 찾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가락을 밥상에 내려놓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지금 상처한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고 터놓는 것이였다.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아버지가 그동안 한번도 중국에 가지 않았고 내가 일본에 온 후에는 어머니와 완전히 련락을 끊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는 아버지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같은 도꾜에서 일본녀자와 같이 살고 있다고 사실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일본에 와서 어머니한테 두번째로 전화를 할 때 아버지는 지금 도꾜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예감은 언녕 들었지만 난 그래도 너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은 아닐 거라고 믿었고 늦어도 네가 대학시험을 보는 해에는 일본에서 돌아올 거라고 기다리고 있었다.네가 일본에 간 후에야 너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그래서 공장에서 밀려나왔기에 천진에 간 고향친구의 소개로 약업유한회사에 들어간 거다.이전의 제약공장보다 로임도 더 많고 한 회사에 다니는 그 분도 정직하고 선량한 분이시기에 나의 근심은 하지 말거라.” 나의 두 손을 꼭 잡은 어머니의 눈굽이 젖어들었다. “동우야,나와 너의 아버지는 꼭 후회할 거다.못난 부모를 만난 너도 불쌍하지만 너는 앞으로 안해를 영원히 사랑하고 자식을 잘 키우면서 잘살아야 한다.” “어머니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가 나의 손을 놓고 화장실에 들어갔다.수도물을 틀어놓고 한참이나 있다가 나와서 아무 일도 없은 듯이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나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화장실에서 울고 있었다는 것을 어머니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그날 밤에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나는 세수나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까악~까악~ 화장실을 금방 나왔을 때 난데없이 창밖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이사 와서 처음 듣는 까마귀 울음소리였다. 나는 방에 뛰여들어가 창밖을 내다보았다.까마귀들은 어디로 날아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쳐서인지 아니면 도꾜와 사이다마현을 이어놓은 철교 밑을 흐르는 강이 있어서인지 아까바네에 있는 스즈끼리에의 집에서도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었다. 나는 아버지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일본에 온 이튿날 아침,나는 까마귀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여기가 누구의 집일가?시계를 보니 여섯시도 안 된 시간이였다.중국에서는 까마귀를 미워했고 소학교를 졸업하는 해에는 어머니와 같이 농촌에 계시는 외할머니 집에 갔다오는 길에서 까마귀를 보고 침까지 뱉었기에 까마귀가 밉살스럽게 생각되였다.배가 슬슬 아파났다.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나와보니 꽤 큰 집이였는데 문이 좀 열려져있는 옆칸이 화장실인 것 같았다.옆칸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두 남녀가 창문 옆 침대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웃통을 벗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스즈끼리에였다. 나는 못 본 척 화장실을 찾아들어갔다. 어제 나리다공항에 도착하니 저녁 일곱시가 거의 되였다.마중 나온 아버지의 핸드폰으로 먼저 어머니에게 무사히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고 아버지와 같이 주차장에 가니 웬 녀인이 하얀색 승용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얼굴이 통통한,밉지도 곱지도 않은 40대 초반의 실눈을 가진 녀인이였다. “하야시상,곤니찌와.” 입국심사를 마친 후 컨베이어벨트에 실려나오는 트렁크를 찾아가지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전신무장을 한 경찰관이 다가와서 려권을 보여달라더니 하야시상은 짐이 이것 뿐인가고 상냥하게 웃으면서 저쪽으로 가라고 알려주는 것이였다.나를 린상이라 부르지 않고 하야시상이라 부르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도 나를 하야시상이라 불렀다. “곤니찌와.” 나는 그녀에게 그저 한마디 인사만 했다.아버지가 숯불갈비점에 가서 저녁을 먹자며 그녀의 차에 앉아 고속도로로 오다 나니 어디가 어딘지 동서남북도 분간키 어려웠다.숯불갈비점에 들어서니 열시를 넘었다.아르바이트생들이 점장님이라 부르는 걸 보고 그녀가 이 가게의 점장이라는 걸 알았고 아버지가 주방에서 일한다는 걸 알았다.손님들이 가고 종업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도 퇴근하자 그녀와 아버지가 맞은켠에 같이 앉았다. “하야시상,왜 갈비를 안 드셨어요?우리 맥주 한잔 같이 할가요?” 배가 고팠지만 나는 아르바이트생이 구워주는 갈비는 먹지도 않고 아버지와 그녀만 생각하고 있었었다. 그녀가 아버지와 나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아사히맥주였다. 아버지가 그녀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이 분이 바로 너의 신원보증인인 스즈끼리에이다.스즈끼점장님의 덕분에 네가 일본에 온 거다.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거라.” 나의 신원보증인이 어느 회사 사장님이 아니고 숯불갈비점 녀점장이였단 말인가!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신원보증인이 되여주셔서 고맙습니다.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외국어학원에서 석달간 일본어를 배우고 왔기에 이 정도 일본어는 할 줄 알았다. “일본어 발음이 좋으시네요.” 그녀가 웃으며 나의 접시에 잘 구워진 갈비를 집게로 집어놓았다. “동우야,아버지와 같이 한잔 할가?” 아버지가 잔을 들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잔을 비워버렸다.일본맥주가 맛있다고 들었지만 무슨 맛인지 몰랐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는 일본어를 잘하는 것 같았다. 어느 진 중학교 일본어교원을 하다가 내가 태여난 해에 큰 도시 려행사에 들어갔고 일본에 가기 전까지 해외부 부장직을 맡았던 아버지였다. 스즈끼리에가 나의 잔에 맥주를 다시 따랐다. “하야시상,갈비를 빨리 드세요.” 나는 스즈끼리에의 말을 못 들은 척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으로 우산을 펼쳐든 행인들이 보여왔다. 오늘도 비가 오는가. 가을비,그것도 일본에 온 첫날이라고 생각하니 저으기 불쾌해졌다. 거의 세시간 되는 비행기에서 눈도 붙이지 못했고 숯불갈비점에서 정신적으로 피로했는지 처음 마시는 맥주를 얼마나 마셨고 어떻게 가게를 나왔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화장실을 나와서 방에 들어가자 아버지가 따라 들어왔다. “동우야,너 어제 많이 취했더구나.아버지는 지금 스즈끼리에와 같이 살고 있다.여기가 스즈끼리에의 집이다.숯불갈비점에서 멀지 않다.” “왜 일본녀자와 같이 살고 있어요?그리고 그 녀자가 왜 저의 신원보증인인가요?” “일본인이 신원보증인이 되면 비자가 잘 나오잖아.” 아버지가 회사 사장님이 신원보증인이고 일본어학교 입학원서는 비서가 대필해준다고 하기에 나의 서류만 일본에 보냈었다.중국측 신원보증인의 수입증명서와 은행잔고증명서 등 서류에 신빙성이 없다고 일본법무성 입국관리국의 비자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아버지는 이젠 림씨가 아니고 스즈끼인가요?일본녀자한테 시집 갔어요?” “일본에 있자면 방법이 없잖아.후에 말해줄게.여기에 같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일본어학교를 다니기 불편해서 스즈끼리에가 학교와 가까운 곳에 세방을 구해놓았다.일본어학교도 스즈끼리에가 소개한 거다.엊저녁에 세방에 가려고 하다가 여기에 왔다.우리 아침 먹고 세방에 가보자.” “아침은 여기서 먹지 않겠어요.지금 세방에 가요.” 아버지가 아무 말도 못하고 방을 나가자 나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이웃집 지붕들과 여러 갈래로 뻗은 골목길들은 물기를 촉촉히 머금고 있었고 여러 색상의 차량들과 나이 지긋한 로인 몇명이 낚시용으로 보이는 가방을 메고 빨간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까마귀들은 어디로 날아가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는 도꾜 어디일가? “여기는 도꾜도 북구 아까바네(東京都北区赤羽)다.철교 건너편은 사이다마현이다.” 아까바네역까지 걸어나오면서 아버지가 하는 말에 류학서류를 보낸 주소와 수신인의 일본어 한자들이 언뜻 머리속을 스쳤다.나는 그제야 스즈끼리에의 집에 류학서류를 보냈다는 걸 알아차렸다.수신인이 녀자이기에 회사 사장님의 비서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너 엊저녁에 맥주만 마시더구나.배고프겠는데 우리 소바나 먹자.” 메밀국수를 일본어로 소바라 부른다. 아까바네역 작은 우동집의 소바는 국물이 시원했고 소바 우에 얹어놓은 덴뿌라도 맛있었다. “맛있나?” “네.” “아버지도 일본에 온 이튿날 덴뿌라소바를 먹었다.참 맛있더라.” 피는 속이지 못하는가,내가 아버지를 닮았는가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까바네에서 일곱 정거장인 우구이스다니(鶯谷).전철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2층 아빠트. 그날부터 나의 일본에서의 독신생활이 시작되였다. 한 정거장인 우에노(上野)에 있는 일본어학교를 다니다가 ××대학 경제학부 국제금융학과에 입학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이께부꾸로(池袋)에 있는 우체국은행에 취직했다.한주일 전 증권회사에 취직하여 3년 남짓 근무한 우체국은행을 때려버리고 가와구찌에 이사를 온 것이다. 세월이 빠르다더니 8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늘은 덴뿌라소바를 먹고 싶었다.아까바네 그 우동집을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두부를 랭장고에 넣어두려고 주방에 들어가려다가 벽에 걸린 카렌터에 눈길이 갔다.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있는 다음 주 토요일은 아버지의 생일이다.음력으로 생일을 쇠는 아버지의 생일날자에는 해마다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놓군 했지만 한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어머니가 중국에 돌아가고 아버지가 시즈오까에 간 후부터는 아버지의 전화도 받지 않았고 메세지 회답도 하지 않았다.아버지는 지금 내가 증권회사에 취직하여 가와구찌에 이사를 온 것도 모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생일날인 다음 주 토요일이 일본에 온 지 8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아까바네에 가서 오랜만에 아버지한테 전화도 하고 덴뿌라소바도 먹을가?   나는 주방에 다시 들어가 두부국을 끓였다.엊저녁에 남은 밥을 전자레인지에 덥혀 김치에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점심을 먹고 나니 피곤기가 몰려와 잠자리에 누웠다. 증권회사 면접합격통지를 받은 날,우라와에서 세방을 구하려고 부동산 홈페지를 뒤적이다가 가와구찌역에서 멀지도 않고 원룸이고 방세도 합리한 세방이 있기에 부동산사무소에 문의했더니 가전제품들은 재작년에 사놓고 열흘 전에 이사를 간 사람이 두고간 걸 사용해도 된다고 하기에 그날 오후 집주인을 만나서 통쾌하게 합의를 보았다.우구이스다니 2층 아빠트는 1년이 지난 후부터는 한달에 한번씩 방세를 지불했기에 집주인에게 그저 래일 이사를 간다고,가전제품들은 모두 두고간다고,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전화를 했다.처음 이사를 하는 나는 토요일인 그 이튿날 옷가지들과 필수품들만 트렁크와 가방에 넣어가지고 마치 해외출장을 가는 샐러리맨처럼 양복차림에 전차에 앉아 가와구찌에 왔다.주방용품들과 이불과 요와 베개는 이사를 와서 새것을 사놓았다. 한주일 전 집주인에게 사례금,보증금과 반년치 방세를 지불했다.지금까지 지불한 방세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자였다. 그래도 일본에 금방 온 1년간은 방세도 지불하지 않았잖은가. 일본에 온 이튿날 아버지와 같이 우구이스다니 세방에 갔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세방에 들어서니 집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여있었고 가전제품들과 주방용품들은 물론 이불,요,베개와 카텐들도 새것으로 갖춰져있었다.일본전통식 다다미방이 두칸인 세 식구가 살아도 될 만한 집이였다. “모두 스즈끼리에가 마련해놓은 것이다.방세도 1년치를 지불했다.한달에 5만8천엔이다.일본어학교는 여기서 한 정거장인 우에노에 있다.월요일인 모레 오전에 보증인인 스즈끼리에가 너를 데리고 입학수속을 하러 갈 거다.우리 좀 있다가 시내에 나가서 쌀도 사고 맥주도 사자.점심에 한잔 해야지.” “점심에 가게에 안 나가요?” “오늘은 저녁에 나가도 된다.” 트렁크를 정리하고 아버지와 같이 시내에 나갔다가 점심에 집에 들어왔다.아버지가 료리 몇가지를 만들었다.중국에서 료리사자격증을 따고 큰 식당에서 료리사를 겸하던 아버지는 집에서도 료리를 자주 만들었었다. 아버지를 도와 밥상을 차렸다. “동우야,오늘부터 너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앞으로 좋은 대학에도 진학하고 좋은 회사에도 취직하기를 바란다.아버지는 너 밖에 없다.전력을 다해 도와줄게.자,건배!” 아버지가 나와 잔을 부딪치고 잔을 굽냈다. 까짓 맥주도 마시지 못할가!오늘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웠다. “스즈끼리에는 어떻게 알게 되였어요?” 스즈끼리에를 빨리 알고 싶었다.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었다. “좋은 날인데 맥주나 한잔 더 마시자.” 나는 아버지의 잔에 맥주를 다시 따랐다.캔맥주 한개가 어느새 거덜이 났다.잔을 다시 비우고 아버지가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너 담배는 안 피우나?” “안 피워요.” 아버지가 라이터로 마일드세븐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모금 길게 빨고는 천정을 올려다보면서 한숨과 같이 담배연기를 내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네살 때 아버지는 북경에 갔다.어느 려행사에서 반년간 가이드를 했는데 한번은 북경에 온 일본인 려행팀의 통역을 내가 맡게 되였다.스즈끼리에는 그때 알았다.작은 꽃방을 꾸리고 있고 중국료리를 특별히 좋아한다는 스즈끼리에는 어머니보다 두살 어리고 결혼도 했는데 애는 아직 없다더라.스즈끼리에가 일본에 돌아간 후  편지거래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련락을 끊지 않고 있었다.일본에 가고 싶었지만 학력과 나이 때문에 류학으로는 갈 수 없었다.그러다가 네가 소학교 4학년 때 일본에 려행을 가게 되였는데 스즈끼리에와 스케쥴 때문에 일본에 도착한 이틀 후에 만나자고 약속했다.그때까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으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스즈끼리에를 만난 날 저녁에 애도 없는 스즈끼리에가 이미 리혼했고 오빠가 하던 불고기점을 지금 숯불갈비점으로 변신시키고 있는데 사흘 후에 오픈한다는 걸 알게 되였다.그날은 려행팀이 주숙한 호텔에 돌아갔다.후지산에 갔다온 이튿날,그러니깐 숯불갈비점 오픈식이 있던 날 오전에 꽃을 사가지고 축하하러 갔는데 주방에 일손도 적고 주방장도 아직 없기에 내가 거들어주었다.그날 밤 스즈끼리에의 집에 갔고 자기를 영원히 사랑한다면 결혼해주겠다는 스즈끼리에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튿날부터 정식으로 스즈끼리에를 도와주었다.스즈끼리에가 감격해하면서 나를 주방장으로 채용하겠다고 신원보증인으로 나서서 먼저 나의 비자를 연장해주었고 후엔...” “그럼 스즈끼리에는 지금도 애가 없어요?” 혹시 아버지와 스스끼리에 사이에 애가 있지 않을가 궁금해난 나는 다급히 물었다. “스즈끼리에는 애를 낳지 못하는 녀자다.애가 생기지 않아 남편과 리혼한 거다.” 조금은 시름이 놓였다고 할가! 아버지와 스즈끼리에 사이에 남자애가 있으면 나와 형제간이 되는 것이다.배다른 형제,그런 형제는 싫었고 없기보다 못했다. “이번엔 내가 한잔 따라주마.” 나는 맥주를 따르는 아버지를 의혹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네가 중국에서 대학시험을 보지 않고 일본에 빨리 오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스즈끼리에한테 부탁했더니 어느 일본어학교 사무국장과 친구라면서 쾌히 동의하더구나.” 아버지가 피우던 담배를 빈 맥주캔 안에 떨궈넣었다.맥주캔 안에서 바지직 소리가 나더니 연기는 더 피여오르지 않았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나?일본에서 처음 집에 전화를 했을 때 너의 어머니에게 지금 중국에 돌아가면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기에 일본에 있겠다고 했다.너의 생일날에 전화를 하고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제 커서도 오지 않으면 아버지를 찾으러 일본에 가겠다던 너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아버지가 많이 미웠지?” 아버지가 허허 웃으며 절로 따른 잔을 들었다. 어릴 때 일이 생각난 나는 아버지 먼저 잔을 비워버리고 잔을 탁 소리나게 밥상에 내려놓았다. “제가 일본에 온 건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어요.어머니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기에 대학시험은 명년에 보기로 하고 아버지와 같이 중국에 돌아가려고 했어요.그잘난 일본어학교를 다니고 싶어 일본에 온 게 아니란 말이예요.중국에서 대학시험을 봤더라면 지금쯤은 어느 중점대학에 갔을 거예요.아버지가 일본녀자와 결혼했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아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아요?어머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아버지가 크게 놀란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성격이 정말 변했구나.다 큰 너한테 숨길 것도 없지.실은 너의 어머니와 이전부터 감정이 맞지 않았다.몇번이나 리혼하려다가 너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많이 참으면서 살아왔다.아버지는 좋아하는 녀자도 없었고 려행사 로임카드도 너의 어머니한테 맡겼다.식당에서 나오는 돈으로 너한테 옷도 사주고 책도 사줬다.부부간은 감정이 맞아야 같이 살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스즈끼리에와 결혼하고 지금도 일본에 남아있다는 말이 아니다.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지금도 생각하면 꿈만 같다.그래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집에 자주 련락을 했고 너의 어머니한테 생활비도 넉넉히 보냈다.너를 위해서였다.네가 돈에 쪼들리지 않고 공부를 잘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였다.공부를 잘하면 먼저 일본어학교에 왔다가 좋은 국립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잖아.생일날에 했던 너의 그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그래서 네가 고중 3학년 후학기에 들어서자 류학수속을 하라고 한 거다.네가 이젠 일본에 왔기에 아까도 말했지만 아버지는 너 밖에 없다.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지금 일본녀자와 같이 살고 있으니 좋은 남자를 빨리 만나라고 전화를 해도 된다.너의 어머니가 나를 증오하든 다른 남자를 찾든 상관하지 않겠다.생활비도 더이상 보내지 않겠다.” 아버지가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퀭하니 천정만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툼질하느라 집안 꼴이 말이 아닐 때도 많았다.그럴 때마다 나는 꽥 소리를 지르고 방에 들어가거나 옆집에서 다 들으라고 집문을 활 열어놓군 했다.다른 집 부모들과 달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목한 부부가 아니라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유순해보이지만 성격이 나쁜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많이 참았다는 건 사실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어머니와 감정이 맞지 않았다고 해도 어떻게 일본녀자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그럼 스즈끼리에라는 일본녀자와는 그렇게도 감정이 잘 맞았단 말인가? 엊저녁에 메뉴를 보니 몇가지 중국료리들도 있었다.스즈끼리에가 아버지를 리용하려는 것이였고 아버지도 일본에 있기 위해 스즈끼리에와 결혼한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본에 간 후에는 아버지와 다툰 일을 몹시 후회하면서 지체장애인인 작은고모와 같이 농촌에서 살고 계시는 할머니한테 아버지가 있을 때보다 자주 다녔고 할머니와 작은고모를 집에 모셔와서 명절을 같이 쇠기도 했다.고중 1학년 음력설날,할머니는 전화가 걸려온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훌륭한 며느리라고 칭찬하면서 빨리 돌아와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말씀하셨다.내가 할머니의 눈물을 본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할머니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시고 그해 여름에 돌아가셨다.할머니의 장례식날,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슬프게 통곡했다. 이런 말을 아버지에게 해야 하는가? 나는 할머니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불법체류이기에 일본에서 오지 못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기 싫어서 중국에 오지 않은 것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화해시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너무나도 늦어버린 뒤였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가,슬프다고 해야 할가? 덩그러니 혼자 남은 어머니만 불쌍하게 생각되였다. 그래도 어머니가 나를 키워오셨잖은가?이제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아버지가 일본녀자와 같이 살고 있다고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가? 아버지가 자리에 되앉아 나에게 맥주를 다시 따르려고 하자 나는 제꺽 아버지에게 맥주를 따랐다. “지금까지 너의 어머니와 너를 속여서 미안하다.” “그 후 숯불갈비점은 장사가 잘됐어요?” 나는 화제를 돌려버렸다.방금 전에는 미안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인기가 있어 1년 내에 스즈끼리에의 오빠한테서 빌린 돈을 다 갚았다.이제 스즈끼리에의 목표는 고향인 시즈오까에 가서 큰 해산물가게를 경영하는 것이다.” 그럼 아버지도 시즈오까에 가는가고 물으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가 가방에서 1만엔짜리 지페 열장을 꺼냈다. “먼저 이번 달 생활비로 쓰거라.스즈끼리에가 일본어학교에서 입국관리국에 올려보낸다는 경비지불서에 한달에 5만엔씩 1년간 생활비를 지불하겠다고 싸인하고 도장까지 찍었다.돈 근심은 하지 말고 먼저 일본어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를 잘 배우거라.아버진 네가 일본에 오니 정말 기쁘다.자,한잔 멋지게 마시자!” “저녁에 일 보러 가시기에 맥주는 그만 마세요.” “일본에 와서 낮술은 오늘 처음이다.그럼 이 한잔만 마실가?” 별안간 아버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목소리를 들으니 스즈끼리에였다.아버지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스즈끼리에가 저녁은 너와 같이 먹고 싶다는구나.지금 손님들이 많기에 가게에 가야겠다.” “저녁은 여기서 혼자 먹겠어요.일 보러 가세요.” “저녁에 아버지와 같이 잘가?” “오늘은 혼자 자고 싶어요.” “그럼 래일 다시 올게.”     아버지를 큰길까지 바래주고 집에 들어온 나는 10만엔을 어떻게 쓸가 궁리해보았다. 그 무렵 10만엔은 인민페로 7천원이 넘는 돈이였다. 3만엔만 이번 달 생활비로 남겨두고 7만엔은 어머니에게 보내드리고 싶었다.올여름부터 공장이 불경기여서 한달에 두주일 밖에 공장에 나가지 못하는 어머니였다.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한 첫 로임이라고 하면 어머니도 기뻐하실 것 같았다.아직 학생증도 발급받지 못했고 일본어도 잘하기 못하기에 당분간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겠지만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생활비를 더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했으니 이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내가 앞으로 어머니한테 다달이 생활비를 보내드릴 것이다! 돈은 후에 어머니에게 보내드리기로 하고 나는 주방에 들어가 료리들을 맛보았다. 빨간 당근과 파란 피망을 넣어 색상이 보기 좋은 돼지고기료리와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에 감자를 넣은 료리는 참말로 맛있었다.오징어볶음도 맛있었고 달걀파전도 맛있었다.이전에 집에서 먹던 아버지가 만든 료리들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났다. 전기밥가마에서 취사완료음이 들려왔다. 오늘은 밥도 맛있었다.일본입쌀은 고향입쌀처럼 맛있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은 나는 접시들에 랩을 씌워놓고 집문을 나섰다.모레부터 매일이다싶이 드나들 우에노에는 가지 않기로 하고 전철역에서 로선도와 료금을 보고 도꾜역까지 가는 티켓을 끊었다.도꾜역에서 내려 역전광장이며 부근의 멋진 풍경들을 한참 구경하고 다시 신쥬꾸(新宿)역에 가서 서너시간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어둑컴컴한 밤에야 집에 들어왔다.좀더 일찍 들어올 수도 있었는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신쥬꾸역에서 야마노데센(山手線) 상행선과 하행선을 구별하지 못해 두번이나 전차를 갈아타다 나니 거의 한시간이나 지체했던 것이다. 나는 촌놈이구나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점심에 남은 밥과 나머지 료리들을 한데 비벼서 배가 터지게 저녁을 먹었다.저녁을 먹고 나서 텔레비죤을 한참 보다가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스즈끼리에는 도대체 어떤 녀자일가?아버지가 스즈끼리에한테 모든 걸 고스란히 바치고 있는 게 아닐가? 어쩐지 나의 앞날보다 아버지가 더 근심되였다. 아버지를 그냥 미워해야 하는가?일본에 류학으로 온 바엔 일본어학교를 다니다가 좋은 대학에도 진학하고 좋은 회사에도 취직해볼가? 나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자정이 거의 되여서야 잠들었다. 일본에 온 이튿날 신쥬꾸역에서 야마노데센을 두번이나 갈아탔던 일을 오늘 다시 생각해보니 저도 모르게 허구픈 웃음이 흘러나왔다. 낮잠이나 자려고 했는데 잠기는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나는 일어나서 방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반시간이 지났을가,집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에 문을 여니 옆집 스기모도였다.그녀의 손에 곱게 포장한 선물함이 들려있었다.이사를 왔다고 이웃에 나눠주는 선물인 것 같았다. “하야시상,보잘 것 없지만 받아주시면 고맙겠어요.3호실에는 누구도 없더군요.4호실 다나까상한테는 드렸어요.” 4호실 뚱보녀인의 성씨가 다나까인지 나까다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3호실에는 브라질에서 온 부부가 살고 있어요.어제 요꼬하마에 놀러간다더군요.미안하지만 이게 뭔가요?” “소까센베이예요.” 소까(草加)센베이는 사이다마현 소까시에서 만드는 일본의 유명한 과자였다. “고맙습니다.” 나는 선물을 받았다. “하야시상은 저의 동생과 나이가 비슷해보이네요.동생은 스물일곱살이예요.” “저도 스물일곱살입니다.” “그렇군요.부모님은 지금 어디에 계세요?” “아버지는 지금 시즈오까에 있고 어머니는 중국에 있습니다.” 나는 그저 시즈오까에 있다고 대답했던 걸 인츰 후회했다. “어머니가 중국에 계세요?” “네.” 그녀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저의 어머니도 중국에 있어요.지금 북경에 있어요.” “저의 어머니는 천진에 있습니다.헌데 스기모도상의 어머니는 왜 북경에 계세요?” “북경이 고향이예요.” 환한 빛줄기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지났다. “하야시상은 고향이 어딘가요?” 나는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웃으며 중국어로 말했다. “저의 고향은 길림성 연변입니다.저는 림동우라고 합니다.” 그녀가 흠칫 놀라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네?하야시상을 일본인으로 알았어요.그럼 류학으로 왔다가 증권회사에 취직했어요?” 그녀도 중국어로 물었다. “네,저는 중국 조선족입니다.” “그래요?반가워요.저는 장미진이라고 해요.일본인과 결혼했지만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듣기 좋았다. “정말 반갑습니다.괜찮으시면 커피라도 같이 마시면서 얘기를 좀더 나눌가요?전철역 앞 큰길 건너편 빌딩 2층에 커피숍이 있더군요.” “그래요.그럼 거기서 만나요.” 그녀가 돌아가자 나는 다시 옷을 챙겨입고 집문을 나섰다. 전철역 앞 큰길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면 영어로 멋지게 휘갈겨 쓴 간판이 한눈에 안겨오던 커피숍. 조용하고 고풍스러운 커피숍에는 잔잔한 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창문 옆 테블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20대 초반 녀학생 셋이 책을 보고 있었고 구석 쪽 테블에는 40대 남녀가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웨이트리스가 자리를 안내했다. 얼마 안 지나 그녀가 커피숍에 들어섰다. 나는 아메리카노를,그녀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아드님은 몇살인가요?이름은 뭔가요?” “열한살이예요.이름은 히꼬(彦)예요.” “히꼬 아버지는 오늘 보이지 않던데요.출장 가셨어요?” “석달 전에 차사고로 그만...” “네?”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다나까상도 물어보기에 애아빠가 오사까지사에 파견되였다고 했어요.다나까상과는 둬마디 인사만 나눴을 뿐이예요.부모님은 지금 뭘 하세요?” “아버지는 지금 스즈오까 어느 해산물가게에서 일하고 있고 어머니는 천진 어느 약업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먼저 간단히 자아소개를 했다.그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저의 고향은 북경 순의구(顺义区)예요.저도 먼저 일본어학교에 왔다가 ××대학 경영학부에 진학했어요.대학을 졸업하고 도꾜 이다바시(板橋)에 있는 마케팅회사에 취직했어요.히꼬 아버지인 스기모도는 저의 대학 2년 선배였어요.결혼해서 아까바네에서 13년 살았어요.히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출퇴근할 때마다 히꼬 아버지와 같이 거닐었던 추억이 떠오르면서 자꾸만 눈물이 나오고 동네사람들을 보기도 힘들었어요.히꼬도 이사를 갔으면 좋겠다기에 오늘 가와구찌에 이사를 온 거예요.” “정말 안 됐군요.집은 아까바네역 서구 쪽에 있었어요?” “네,왜요?” “아,아닙니다.이전에 서구 쪽에 한번 가본 적이 있어서요.” 숯불갈비점이 서구 쪽에 있었던 것이다. 주문한 커피가 올라왔다. 나는 잠간 그녀의 아들 히꼬를 생각해보았다. 내가 열한살 때 아버지가 일본에 갔지만 히꼬는 열한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어린 히꼬가 마음의 상처를 입었겠어요.” “히꼬가 불쌍하죠.” “히꼬를 이 동네 소학교에 전학시키는가요?” “한 정거장이니 괜찮겠지만 이제 전학시키려고 해요.히꼬는 중국어도 잘해요.저는 스기모도미진으로 호적에 등록되여있지만 히꼬한테도 어머니는 중국인이라고,이름은 장미진이라고 말해요.” “일본인과 결혼한 외국인 대부분이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누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는 그녀를 누님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누님이라 했어요?고마워요.그럼 저도 동우씨를 친동생처럼 대하겠어요.”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지금 북경 모 전력회사에 다녀요.저보다 네살 어린 녀동생 혜진은 소학교 교원이예요.한가지 여쭤봐도 될가요?지금 녀자친구 있어요?” “없습니다.커피 드세요.” 그녀가 커피 한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의 사촌녀동생이 지금 사이다마대학에 다녀요.명년 3월에 졸업해요.” 사이다마대학은 국립대학인데 우리와에서 한 정거장인 기다우라와(北浦和)에 있었다. “그 애 이름은 장예진이예요.예쁘고 동우씨보다 세살 어려요.아까 집을 나오면서 오늘 가와구찌에 이사를 왔다고 전화를 했더니 오늘 저녁 우리 집에 놀러오겠다더군요.한번 만나보지 않겠어요?” 나는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라 시무룩이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웃는 걸 보니 만나보고 싶어하는군요.만나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와 말해요.헌데 아까는 왜 집이 아까바네역 서구 쪽에 있었는가고 물어보셨어요?” “그건 다름 아닌 아버지가 일하던 숯불갈비점이 서구 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아버지는 제가 열한살 때 일본에 와서 숯불갈비점 점장인 일본녀자와 결혼했습니다.주방장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3년 전에 점장과 같이 시즈오까에 갔습니다.” 그녀가 다시 놀라워했다. “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숯불갈비점이 있었는데 점장이 녀자였어요.1년에 한두번 꼴로 다녔기에 인사를 나눌 정도는 아니였지만 성씨가 스즈끼라는 건 알아요.” “맞습니다.스즈끼리에입니다.” “그렇군요.그럼 키가 크고 잘 생기신 분이 동우씨 아버지였군요.두분이 같이 걸어가는 걸 여러번 봤어요.그러고 보니 동우씨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군요.” “지금도 그 숯불갈비점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스시점으로 되였어요.그럼 오늘 저녁 예진이와 같이 거기로 갈가요?예진이가 스시를 좋아해요.” 나는 거기로 가보고 싶었다.장예진이라는 녀자를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였다.오늘 아까바네에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된 일이였다. “그럼 그럽시다.저녁에 히꼬도 데리고 오세요.” 커피숍을 나와서 나는 서점에 들러보겠다고 말하고는 전철역 주위를 한참 거닐다가 집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약속시간 먼저 아까바네역에 도착하니 플랫트홈에서부터 그 옛날 우동집의 덴뿌라소바냄새가 풍겨오는 듯했다.플랫트홈에서 계단을 내려가니 우동집이 보였다.이 시간대에도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며 서서 우동이나 소바를 먹는 사람들이 대여섯명이나 있었다. 덴뿌라소바는 다음 주 토요일에 먹기로 하고 출구를 나온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거리의 풍경이 너무나도 낯설었다.숯불갈비점이 어느 위치에 있었던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길치도 아닌 내가 왜 이럴가? 한참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그제야 기억이 떠올라 앞으로 내처 걸었다.이제 저 앞 자주색 빌딩을 지나 왼쪽으로 굽어들어 다시 노란색 빌딩이 보이는 큰길에서 신호등을 건너면 된다. 신호등을 건너 다시 앞으로 걷다가 오른쪽으로 굽어드니 옛 숯불갈비점이 보여왔다.간판은 이미 스시점으로 바뀌였다.      장장 8년만이 아닌가! 가게 문앞에 서있노라니 스즈끼리에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일본에 온 지 사흘이 되던 날 오전,그녀와 같이 일본어학교 입학수속을 마치자 간단한 일본어시험이 있었다.초급,중급,상급반을 편성하는 시험이였다.시험이 끝나서 밖에 나오니 그녀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뒤좌석에 다시 앉았다.그녀가 시험이 어떻게 되였는가고 묻자 상급반이고 래일부터 정식으로 학교에 간다고 대답했다.차가 학교 골목을 벗어나 드넓은 신작로에 들어서자 그녀는 룸미러로 나의 기색을 살펴보면서 쉴새없이 주절거렸다. “학교가 마음에 들어요?” “네.” “선생님들도 상냥하시죠?” “네.” “상급반은 오후 세시 반에 수업이 끝난다고 들었어요.맞아요?” “네.” “아버지가 하야시상을 일본에 데려오겠다고 하기에 제가 신원보증인으로 나섰어요.아까 만난 사무국장은 저의 친구예요.” 사무국장은 그녀와 나이 비슷한 녀자였다. “입학원서는 일본어학교 중국담당이 대필했어요.”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신원보증인의 서류는 사무국장이 시키는 대로 작성했어요.중국에서 하야시상을 만난 걸로 했어요.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죠?” 아버지가 고중졸업예정증명서,성적표,일본어학습증명서 등 서류와 나의 증명사진 외에 어머니의 사진도 필요하기에 몇년 전에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도 보내달라고 했다.그래서 재작년에 어머니와 같이 백화상점에 갔다가 거리에서 찍은 사진을 보냈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나를 만났다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작년에 볼일 있어 대련에 갔다왔어요.저의 려권 복사본도 입국관리국에 제출했어요.그 사진을 유용하게 사용했어요.무슨 뜻인지 알만 하죠?” 나는 무슨 뜻인지를 인차 알아차렸지만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일본에 왔으니 그 사진의 내막을 몰라도 좋아요.저는 하야시상의 아버님을 존중하고 사랑해요.하야시상을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 받아들이고 싶었어요.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요.” 자기를 어머니라고 불러달라는 소리가 아닌가! 왠지 그녀의 목소리마저 듣기 싫어졌다. 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춰섰다. “학생증은 발급받았죠?” “네.” “보여줘요.” 나는 책가방에서 학생증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버지보다 더 멋지군요.아버지도 젊었을 때는 이렇게 멋졌겠죠?” 나는 아무 말도 없이 학생증을 받아서 가방에 도로 넣었다. 그녀와 같이 외국인등록수속도 하고 은행카드도 신청하고 핸드폰도 사다 나니 열두시가 거의 되였다. “숯불갈비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으면 오늘 저녁부터라도 좋아요.” “아닙니다.” 아르바이트를 빨리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가게에서는 하기 싫었다. “호호호,그럴 줄 알았어요.” 그녀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럼 지금 저와 같이 가요.” “어디로요?” “가보면 알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가,한참 차를 내달리다가 그녀가 어느 주유소 앞에서 차를 멈춰세웠다. “같이 들어가요.” 노란 유니폼에 노란 모자까지 쓴 주유소 종업원들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그녀와 같이 사무실에 들어갔다. “아까 말하던 학생을 데리고 왔어요.하야시상,나오끼사장님이예요.” 핸드폰을 사고 화장실에 갔다가 주차장에 왔을 때 그녀가 누구한테 전화를 하면서 시급은 얼마인가고 물어보는 건 들었지만 주유소 사장한테 전화를 할 줄은 몰랐었다. “중국 류학생 하야시입니다.잘 부탁드립니다.” “나오끼입니다.어서 앉으세요.” 나오끼사장은 40대 좌우의 열정적이면서도 겸손해보이는 미남이였다. 나는 스즈끼리에의 분부 대로 려권과 학생증을 꺼냈다.그녀가 금방 외국인등록수속을 했다고 덧붙였다. 나오끼사장이 려권과 학생증을 복사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래일부터 나오라고 했다.아르바이트시간은 오후 다섯시부터 저녁 열시까지였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나는 나오끼사장에게 허리 굽혀 고맙다고 인사를 올렸다. 그녀가 조수석에 앉으라고 하기에 마지못해 조수석에 앉았다.그녀가 나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려고 하자 나는 절로 안전벨트를 채웠다.차가 다시 속력을 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조수석에 앉으니 뒤좌석에 앉았을 때와는 달리 우핸들이고 좌측통행하는 차가 중앙선을 날아넘어 마주오는 대형트럭과 충돌이라도 할 것 같은 막연한 착각까지 들었다. “시급도 일본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800엔이예요.” “여기가 어딘가요?” “우구이스다니에서 두 정거장인 다바다예요.” 나는 주유소가 전철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 아르바이트시간이 늦어지지 않을가 못내 근심되였다.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윽하여 그녀가 다바다(田端)라는 전철역 간판이 보이는 큰길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춰세웠다.주유소는 다바다역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이번 달 생활비예요.” 그녀가 돈지갑에서 1만엔짜리 지페 다섯장을 꺼냈다. “제가 한달에 5만엔씩 1년간 생활비를 지불하겠다고 경비지불서에 싸인하고 도장까지 찍었어요.이제 카드가 나오면 카드번호를 알려주세요.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사양 마시고 전화하세요.” 아버지도 그녀도 거짓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나는 돈을 받았다. “오늘은 모든 일이 순조로왔군요.하야시상은 운도 좋고 돈복도 있군요.아,벌써 오후 한시가 넘었네요.우리 점심 먹으러 가요.” 숯불갈비점에 가려는 게 아닐가? 나는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아닙니다.저는 배고프지 않습니다.일 보러 가세요.여기서 내려도 되나요?” “여긴 안 돼요.저 앞에 가서 내려요.” 신호등을 지나서 그녀가 길옆에 차를 세웠다. “아버지도 기다리고 있는데요.” “괜찮습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어버리고 오늘 고마웠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몇번 밖에 만나지 않았다.숯불갈비점에는 가지도 않았다.아버지도 그녀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였다.주유소 아르바이트는 한주일 하다가 우에노에서 다른 아르바이트를 절로 구했기에 때려버렸다.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오자 생활비도 이젠 필요없다고 했다.그녀에게 내가 어떤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오늘 막상 여기에 오니 생각이 달라졌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년에 한번씩 비자를 연장할 때마다 신원보증인이 되여준 스즈끼리에,취직했으니 이젠 신원보증인의 임무를 완성했다며 홀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에 돌아가겠다던 스즈끼리에,3년 전 아버지와 같이 시즈오까에 간 스즈끼리에...   “니호우!” 어린이의 목소리에 와뜰 놀라 뒤돌아보니 히꼬였다.스기모도 옆에 날씬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녀자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히꼬쨩이 일본어가 아닌 중국어로 인사를 하는구나.” 나는 웃으며 히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제가 삼촌이라 불러도 되나요?” “되구말구.히꼬쨩이 중국어를 정말 잘하는구나.” 스기모도 옆의 녀자가 곱게 웃었다. “림동우입니다.” “장예진이예요.반가워요.” “반갑습니다.자,들어갑시다.” 가게에 들어서니 테블마다에 낮게 드리워져있던 환풍기가 보이지 않고 테블이 새로 바뀌였을 뿐 구조도 변함이 없었고 카운터와 주방도 예전했다.천정에 달린 전등들과 벽에 걸린 장식품들도 그대로였다.안내하는 자리에 앉고 보니 면바로 이전에 내가 앉았던 자리였다. 나는 히꼬를 옆에 앉혔다. 주문을 하면서 스기모도가 뭘 마시겠는가고 나에게 묻자 나는 예진에게 물었다. “예진씨는 뭘 마시고 싶어요?청주 마시겠어요,아니면 맥주 마시겠어요?” “저는 청주는 마실 줄 몰라요.” “그럼 맥주 마실가요?” “그래요.” 주문한 스시들이 올라왔다.나는 맥주를 따르고 잔을 들었다.손님들이 있기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 누님과 예진씨를 만나서 반갑습니다.중국어도 잘하는 히꼬는 정말 귀엽습니다.자,마십시다.” 내가 절반 마시자 스기모도와 예진이도 절반 마셨다. “스시를 드세요.” “네.” 예진이가 저가락을 들었다.스기모도는 나와 예진이를 번갈아보면서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히꼬쨩도 많이 먹어.” “하이.” 히꼬의 입에서 하이,라는 말이 나왔다. 나는 히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일본어로 물었다. “소학교 몇학년생이니?” “4학년생입니다.” 스기모도가 잔을 들었다. “이 잔을 마시고 제가 한잔 따를게요.예진이도 마셔.” 셋은 잔을 비웠다.스기모도가 맥주를 따랐다. “오늘 동생을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요.자,마세요.” 스기모도가 잔을 비웠다.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괜찮으세요?” “오늘은 좀 마시죠.예진이도 다 마셔.” 옆에서 부지런히 스시를 집어먹던 히꼬가 다시 일본어로 말했다. “어머니는 어제밤에도 마셨어요.”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스기모도가 일본어로 히꼬를 꾸짖었다. “그만 마셔라고 말렸는데도 아까바네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면서 맥주를 마시다가 울면서 위스키까지 마셨어요.저도 위스키를 마시고 싶었어요.어제밤에는 저도 취하고 싶었어요.” 예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히꼬를 데리고 밖에 나갔다. “오늘 동생 앞에서 망신했네요.” “아닙니다.누님.” “저를 한잔 주세요.” 나는 스기모도에게 맥주를 따랐다. “동생과 한잔 하고 싶어요.원샷해요.” 그녀가 단숨에 잔을 비우자 나도 잔을 비웠다. “예진이가 마음에 들어요?” 나는 속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예진씨는 좋은 녀자로 보입니다.사귀고 싶습니다.” “예진이에게 동생의 얘기를 했어요.예진이도 만나보고 싶어하더군요.” 예진이가 히꼬를 데리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히꼬쨩,빨리 먹어.” 히꼬는 먹을 념을 하지 않고 뿌루퉁해있었다.예진이도 웃으며 빨리 먹으라고 했지만 못 들은 척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히꼬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주었다. “저 먼저 갈게요.둘이 재미있게 얘기 나눠요.” 그녀가 히꼬의 손을 잡아끌고 가게를 나가려다가 카운터 앞에서 멈춰섰다.뒤따라간 나는 결산하려는 그녀를 말렸다. “삼촌,또 만나요.안녕히.” 밖에 나가서 히꼬가 다시 중국어로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나는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그녀와 히꼬의 뒤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녀는 오늘 나와 예진이를 위해 오고 싶지 않은,어제까지 13년 살았던 집 부근에 있는 이 가게에 온 것이였다.비록 8년 전 내 나이는 열한살이 아닌 열아홉살이였고 오늘 비도 내리지 않고 스즈끼리에가 앉았던 자리에 예진이가 앉아있었지만 히꼬의 모습이 스즈끼리에의 말을 못 들은 척 창밖만 내다보고 있던 그때의 나를 방불케 했다.히꼬가 방금 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알만 했다. 그만 뒤돌아서서 스즈끼리에의 옛집에 가보려고 앞으로 걸어가던 나는 예진이가 기다리는 것 같아 가게에 다시 들어갔다. “오늘 미안해요.언니는 형부를 잃고 나서 많이 속상해했어요.” “저는 누님을 리해합니다.누님은 좋은 분입니다.” “히꼬는 언니한테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어요.혜진언니가 중국에서 소학교 어문교과서를 보내와요.” “누님의 녀동생이 소학교 교원이라더군요.” “네,아,제가 한잔 따라드리죠.” 나는 맥주를 따르는 예진이를 눈여겨보았다. 옅은 화장만 했고,귀걸이도 걸지 않았고,매뉴큐어도 바르지 않았지만 정말 예쁘고 마음에 쏙 드는 녀자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먼저 우체국은행에 취직했다가 우라와에 있는 증권회사에 취직했다고 들었어요.좋은 대학 경제학부를 나오셨군요.” “예진씨는 사이다마대학 어느 학부인가요?” “문학부예요.명년 3월에 졸업하는데 지금 석사시험준비를 하고 있어요.” “문학부면 혹시 소설을 쓰는가요?” “소설에 흥취는 있지만 아직 한편도 발표하지 못했어요.” 예진이가 잔을 들자 나도 잔을 들었다. “저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요.절반 마실게요.” 나는 웃으며 잔을 비웠다.예진이가 고개를 돌리고 절반 마셨다. “예진씨도 고향이 북경인가요?부모님은요?” “저의 고향은 북경 창평구(昌平区)예요.아버지는 고중 어문교원이고 어머니는 중학교 수학교원이예요.미진언니가 신원보증인이 되여 먼저 일본어학교에 왔다가 사이다마대학에 진학했어요.” “누님이 신원보증인이였군요.” “네,언니의 신세를 많이 졌어요.” 나도 신원보증인인 스즈끼리에의 신세를 많이 졌잖은가. 예진의 말에 나는 얼굴이 뜨거워났다. “저의 학급에 길림성 연변에서 온 조선족 녀학생도 있어요.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는 리(李)상과 룸메이트예요.저는 지금 리상한테서 조선어를 배우고 있어요.조선어가 정말 재미있어요.” “그래요?리상과 기숙사에 같이 있는가요?” “세방에 같이 있어요.미진언니가 처음에 오오미야에 세방을 구해줘서 3년간 독신으로 있다가 금년 봄에 기다우라와에 이사를 오면서 리상과 같이 있어요.” 기다우라와에서 세 정거장인 오오미야(大宮)역은 우라와나 가와구찌역보다 규모가 엄청 컸다.작년에 볼일이 있어 오오미야에 두번 갔었다.   “그렇군요.오오미야역은 굉장히 크더군요.” “사이다마현에서 제일 큰 전철역이예요.” 얘기만 나누다 나니 예진이가 스시를 좋아한다던 스기모도의 말을 그만 잊고 있었다. “어서 스시를 드세요.” “스시를 좋아하세요?” 스시와 사시미를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합니다.같이 먹읍시다.” 예진이와 같이 먹어서인지 오늘은 스시가 맛있었다.오늘처럼 맛있는 스시는 처음이였다. 식사를 마치고 아까바네역에 도착했을 때 예진이의 핸드폰이 울렸다.예진이가 집 가는 길이고 나중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는 걸 보아 스기모도한테서 걸려온 전화로 짐작되였다. 나는 예진이와 같이 기다우라와역에서 내렸다. “사이다마대학은 동구 쪽에 있는가요?” “서구 쪽에 있어요.” “그럼 예진씨 집도 서구 쪽에 있는가요?” “동구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저는 괜찮으니 이젠 돌아가세요.” “괜찮습니다.집앞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예진이네 집은 우라와고중을 지나 패밀리마트가 있는 큰길 건너편 골목 안에 있었다. “다 왔어요.저기 2층이예요.” 예진이가 가리키는 2층을 올려다보니 전등이 켜져있지 않았다. “리상은 아르바이트하러 갔어요?” “네,열시 넘어서 들어와요.오늘 고마웠어요.” 나는 예진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예진씨를 좋아합니다.” “저도 오늘 많이 생각해봤어요.솔직히 저는 석사학위를 따면 중국에 돌아가서 교원을 하고 싶어요.” “그럼 저도 중국에 돌아가겠습니다.일본에 그냥 있고 싶지 않습니다.중국 큰 도시에서 발전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북경이면 더 좋죠.예진씨와 언제든지 같이 있고 싶습니다.” “동우씨,고마워요.” 나는 예진이를 꼭 끌어안았다. 첫눈에 반한 장예진을 사랑하고 싶었다.앞으로 장예진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예진씨를 사랑합니다.” 나는 입술을 천천히 예진이의 입술에 가져갔다. 처음 만난 련인들이 키스를 할가? 뜨거운 첫 키스였다.   이튿날 아침,나는 히꼬를 데리고 전철역 플랫트홈에서 예진이가 탄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어제 예진이가 스시점에서 히꼬를 밖에 데리고 나가 오늘 도꾜 디즈니랜드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스기모도는 오늘 집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겠다며 저녁에 예진이와 같이 집에 와서 식사를 하라고 했다. 마이하마(舞浜)에 있는 디즈니랜드에는 대학 1학년 때 한 학급 중국 류학생들과 같이 한번 와본 적이 있었다.히꼬도 두번째였지만 예진이는 처음이였다.일요일이여서 사람들이 많았다.먼저 히꼬가 다시 보고 싶다는 여러 곳에 갔다가 점심은 야외바베큐를 먹었다.철판에 구워진 소바를 예진이가 하는 대로 포크에 돌돌 감아서 먹는 히꼬를 보면서 나는 이제 어디에 가서 더 놀고 싶은가고 물었다. “락타를 타보고 싶어요.” “그럼 예진씨가 히꼬를 안고 같이 타요.” “동우씨가 타요.저는 락타가 무서워요.” 내가 웃자 히꼬도 깔깔깔 웃었다. 디즈니랜드에서 히꼬를 데리고 재미있게 놀다가 스기모도네 집에 도착하니 저녁 다섯시가 넘었다.내가 사양하자 스기모도가 빨리 들어오라고 하고 히꼬도 나의 손을 잡아끌기에 할 수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 나는 예진이와 같이 전철역으로 걸어가면서 아버지와 스즈끼리에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아버님께서 많이 노여워하시겠어요.그리고 스즈끼상도 서운해하잖을가요?” “저도 지금 마음에 걸려요.다음 주 토요일은 아버지의 생일인데 제가 일본에 온 지 8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해요.그날 아침 아까바네에 가서 아버지한테 전화도 하고 덴뿌라소바도 먹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스즈끼리에와도 통화를 해야죠.같이 갈가요?” “그래요.” 예진이는 오오미야역 동구 쪽에 있는 어느 세븐일레븐에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흘간은 매일 예진이에게 문자도 보내고 전화도 했지만 예진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금요일 저녁,예진이와 같이 기다우라와역 서구 부근에 있는 회전스시점에서 저녁을 먹고 밖에 나온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전화를 한 지 한주일이 되네요.오늘 좋은 소식 알려드릴게요.저 지금 녀자친구를 사귀고 있어요.북경녀자예요.” “그래?정말 반가운 소식이구나.우리나라 수도 북경의 녀자를 사귀면 좋지.대학생이니?” “네,명년에 졸업해요.제가 전화를 바꿔드릴게요.” 회전스시점에서 예진이의 동의를 거쳤던 것이다. “그래,목소리라도 빨리 듣고 싶구나.” 나는 예진이에게 전화를 바꿔주었다. “어머님,안녕하세요.장예진이예요.” 옆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흥분된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흐뭇한 심정으로 주위의 야경을 둘러보았다. 몇분이 지나서 예진이가 나에게 전화를 바꿨다. “아버진 잘 있나?” 어머니가 아버지를 물어보는 건 천진에 간 후 처음이였다. “잘 있겠죠뭐.이젠 전화를 한 지도 3년이 돼요.” “뭐야?그러면 되나?그래도 친아버지가 아니냐?래일이 아버지의 생일이다.래일은 꼭 전화도 하고 저녁에 같이 식사도 하거라.” 어머니는 아버지가 시즈오까에 간 걸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 오늘 왜 이러세요?” “혼자 있으니 너의 아버지가 생각난 거다.” “혼자라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며칠 전에 그 분이...뇌출혈로 불시에 돌아가셨다.” “네?...” 어머니가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어떻게 위안했으면 좋을지 몰라 잠간 생각해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머니,그럼 일본에 오세요.제가 모실게요.” “아니야.일본어도 모르는 내가 일본에 가서 뭘 하겠나?중국에 그냥 있겠다.오늘은 이만 끊어.” 어머니가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이제 어머니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러던 토요일 아침이였다. 일기예보에서 오늘 큰비가 내린다고 했다.밖에 나와보니 먹장구름이 머리 우로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예진이와 같이 아까바네역에서 내렸다. 사실 그동안 덴뿌라소바를 먹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일본어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도 여러번 먹었지만 일본에 온 이튿날 아버지와 같이 먹었던 덴뿌라소바보다는 맛없었기에 덴뿌라소바 대신 다른 소바나 우동을 먹었었다. 오늘도 우동집에는 사람들이 많았다.계단을 내려가려다가 사람들이 없는 플랫트홈 제일 구석 쪽으로 걸어갔다. “아버지를 놀라게 하고 싶어요.예진씨 핸드폰을 빌려줘요.” 나는 예진이의 핸드폰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버튼을 누르는 나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모시모시.” 아버지의 목소리는 예전과 달리 약간 석쉼했다. “아,아...” 3년만에 하는 전화여서일가! 아버지라는 세 글자 쉬운 말도 나가지 않았다. “모시모시.” 나는 이번엔 힘내서 말했다. “아버지!” “동우?내 아들 동우 맞나?” “네,아버지.생일 축하해요.그동안 전화를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해요.” “생일?오늘이 나의 생일인가?고맙다.전화번호를 바꿨구나.그러기에 전화도 받지 않지.” “아니예요.지금 녀자친구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요.” “녀자친구 있나?” “네,사이다마대학 문학부 4학년생인 북경녀자예요.” “북경녀자?참 좋구나.며느리를 지금이라도 만나보고 싶구나.근데...” “아니예요.다음 주 토요일에 같이 시즈오까에 가서 인사를 드리기로 했어요.” 아까 오면서 다음 주 토요일에 시즈오까에 가보려고 한다고 했더니 예진이도 같이 가겠다고 했었다. “여기에 오지 말라.” 아버지의 노여움이 아직 가셔지지 않았을가?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래일 갈게요.오늘은 좀 일이 있어서요.오늘 어떻게 보내세요?” 오늘 저녁 스즈끼리에가 집에서 해산물들을 푸짐히 차려놓고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아버지와 같이 어느 고급레스토랑에서 즐겁게 보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지금 어딘가요?혹시 편찮으신가요?” “내가 아니라 스즈끼리에가...” “스즈끼리에가 왜요?” “지금 병원이다.석달 전에 스즈끼리에가 페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네?해마다 건강검진을 하잖아요?페암 말기라니요?” “여기에 온 후 일이 바빠서 검진을 하지 않았다.이제 며칠 남지 않은 것 같다.마지막으로 전화를 바꿔줄게.” 예진이가 불안한 기색으로 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나는 예진이에게 스즈끼리에의 병세를 알려주고 래일 시즈오까에 가보자고 말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핸드폰에서 스즈끼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야시상?” “네.” “북경녀자를 사귀고 있다고 아버지한테서 들었어요.축하해요.” 스즈끼리에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겨우 알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결혼은 언제 해요?” “몇년 후에 하려고 합니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댔다. “그럼 결혼하는 걸 보지 못하는군요.제가 이전에 하야시상을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했죠...오늘 저를 어머니라고 한번만 불러줄 수 있어요?...흑흑흑...” 아버지가 스즈끼리에를 안정시키고 다시 전화를 바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다 후회된다.이제 모든 걸 깨끗이 정리하고 중국에 돌아가려고 한다.북경 왕징(望京)에서 작은 음식점이라도 차리고 싶구나.동우야,어제밤 꿈에 너의 어머니를 보았다.어머니가 울고 있더구나.지금 이 시각 너의 어머니가 보고 싶구나.어머니와 같이 음식점을 차리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그 분과 잘 보내고 있나?” 아버지가 시즈오까에 가면서 어머니를 물어보기에 어머니는 지금 천진 어느 약업유한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상처한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 분이...” 나는 목이 메여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예진이도 눈물이 글썽해있었다.핸드폰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예진이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저 장예진이예요.지금 동우씨와 같이 시즈오까에 갈게요.” 전차가 서서히 플랫트홈에 들어섰다. “도꾜역에서 신깐센을 타면 되나요?” 나는 예진이의 물음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엊저녁에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아버지도 어제밤 꿈에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인가! 그 분은 이미 갔고 스즈끼리에도 이제 갈 것이다.결국엔 어머니도 혼자 남았고 아버지도 혼자 남게 되였다. 전차 지붕을 사정없이 두드려대는 비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이 몇년간은 가을비가 내릴 때면 울적한 기분에 잠겨있었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눈물이 걷잡을 수없이 흘러내렸다.전차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어린애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소리높이 부르고 싶었다. 아버지!어머니! 찬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비물이 플랫트홈까지 튕겨왔다. 그 옛날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비물이 집안까지 튕겨오는 베란다에 서서 밤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다시 안겨왔다. 어머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가?내가 오늘 아버지에게 전화도 하고 저녁에 아버지와 같이 식사도 할 거라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을가?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방금 하셨던 말을 전해드리면 좋을가? 예진이가 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가 중국에 돌아가겠대요.어머니와 같이 북경 왕징에서 음식점을 차리고 싶대요.” “그러면 어머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동우씨,아버님과 어머님이 잘될 것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나와 예진이는 서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이제 비는 그칠 것이고 하늘도 다시 맑게 개일 것이다.나와 예진이가 중국에 돌아갈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불렀다. 아버지!어머니! 이제 우리 함께 수도 북경에서 살아요!저와 장예진이 결혼해서 아들딸을 낳아 잘 키우는 모습을 늘 웃으며 지켜보세요!...       박명선 길림성 룡정시 출생.연변대학 일본어학부 졸업.요꼬하마국립대학 교육학 석사과정 졸업.연변작가협회 회원.중단편소설 다수 발표.현재 광주에 거주.  
13    (단편) 회귀(回归) 댓글:  조회:1416  추천:0  2022-01-19
2022년1호 단편소설     회귀(回归)     박명선             1   아내 미화가 집문을 나서자마자 진우는 잠자리에서 일어났다.자고 있은 게 아니였다.자는 척하고 있었다.아침에 아내가 왜 그토록 아프게 잔등을 때려놓고 그 여자와 몸이라는 말을 했는지 속궁리하고 있었다. 안해가 사쿠라이(桜井)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진우는 사쿠라이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사쿠라이가 입사하여 한달이 넘던 어느 날 부장님이 마련한 회식장소가 끝나자 사쿠이가 한잔 더 하자고 하기에 둘이서 어느 이자카야(居酒屋)에 들어갔다. 사쿠라이는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발레리나처럼 체격이 쪽 빠진 이쁜 여자였다. 이 말 저 말 나누다가 그녀가 남편의 불륜 때문에 작년에 이혼했고 여덟 살 난 아들은 남편이 부양하기로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작년에 아버지도 돌아가셨다는 그녀는 잠시 요코하마 중구(中区)에 있는 어머니 집에서 산다고 했다. 그 날은 아무 일도 없이 헤어졌다. 그러던 아내가 마트에서 일하는 첫날인 지난 토요일 점심무렵이었다. 아내가 아침에 끓여놓은 장국을 덥혀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에요.통화 불편하잖아요?” “괜찮습니다.” “저 오늘 츠루미에 이사 왔어요.저의 집에서 같이 점심을 먹을까요?” 아내가 오늘부터 일하는 마트도 츠루미(鶴見)에 있기에 오랜만에 츠루미에도 가볼 겸 집이 어딘가고 물었다. “동구 광장 맞은켠 낮은 언덕으로 200미터 쯤 올라오시면 길 오른쪽에 보라색 ××맨션이 보여요.503호실이에요.맛있는 걸 해놓고 기다리겠어요.”  소카(草加)센베이((일본유명과자)를 사가지고 츠루미역 동구를 나온 나는 아내가 일하는 마트가 어느 쪽에 있을까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오셨어요?센베이를 사오셨군요.고마워요.” 문을 열고 센베이를 받는 그녀의 젖은 웨이브머리에서 샴푸냄새가 물씬 풍겨왔다.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않아 젖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연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걸 보아 금방 샤워를 마친 것으로 짐작되었다. 어떻게 이런 차림새로 손님을 맞이한단 말인가? “어서 들어오세요.” 집에 들어서니 작은 원룸이었다. “다른 사람은 없어요?” 그녀와 사이가 가까운 키무라 여직원과 다른 직원들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누구랑 오는가고 묻지도 않은 나였다. “다른 사람한테는 알리지 않았어요.오늘은 우리 둘이에요.어서 앉으세요.”  밥상에 스시와 사시미,구운 소고기와 과일모듬 그리고 마른 안주들이 놓여있었다. “오늘 위스키 마실까요?” “아닙니다.제가 맥주를 사올게요.” 맥주 사러 밖에 나간 척했다가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화를 하고 집에 돌아갈 작정이었다. “맥주도 사놓았어요.그럼 맥주를 마시죠.” 그녀가 병맥주와 맥주잔을 가져오기에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부인님은 오늘 몇 시에 퇴근해요?” 그 날 저녁 부인이 어디서 일하는가 묻기에 스시점을 그만둔 아내였지만 집 부근 스시점에서 일한다고 대답했었다.오늘부터 츠루미에 있는 마트에서 일한다고 말하려다가 저녁 다섯 시에 퇴근할 거라고 대답했다. 맥주를 따른 그녀가 잔을 부딪쳤다. “원샷해요.” 그녀가 잔을 굽내자 나도 잔을 비웠다. “내가 한잔 따르죠.” 맥주를 따르고 나는 집이 참 멋지다고,이사 온 걸 축하한다고 그녀와 잔을 부딪치고 다시 건배했다. “그래도 거의 1년간은 어머니와 같이 있어 좋았는데 오늘부터는 혼자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적적하고 쓸쓸하네요.” 이럴 때는 어떻게 위안해야 하는가?위안할 것도 없잖은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맥주를 따랐다. “요리들을 많이 드십시요.이러다가 취하겠습니다.” “오늘은 좀 마시고 싶어요.이 소고기를 드세요.스키야키소스를 가져올까요?” “아닙니다.” “자,이번에도 건배해요.” 천천히 마시자고 말하려는데 밥상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어머니......근심 마세요......오늘은 손님이 있어요.내일 오전에 놀러오세요.” 그녀가 전화를 마치자 나는 시계를 보며 오늘 약속을 그만 까먹었다고 말하고는 제꺽 자리에서 일어났다.더이상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미안합니다.지금 가봐야겠습니다.” “무슨 약속이 그리도 급한가요?” 문을 열려는 나의 허리를 그녀가 뒤에서 끌어안았다.나는 천천히 그녀의 두 팔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보았다. “사쿠라이상,이러면 안 됩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저도 알아요.하지만 오늘은 킨(金)상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아요.제가 나쁜 여자로 보여요?우리 오늘......” 나는 문을 콱 열고 나와버렸다. 어디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 장국을 다시 덥혔다.보글보글 끓는 곱돌장국에 아내가 만든 김치와 짠지들을 곁들여 따뜻한 밥을 먹으니 스시고 사시미고 구운 소고기고 뭐고 세상에 이보다 맛있는 음식이 더 없을 것 같았다. 아내가 이 일은 모를 것이다. 그럼 엊저녁 러브샷 일로 화를 낸 것일까?......       2   봄볕이 따스한 4월 초였다. 미화는 전철역으로 걸어가면서 엊저녁 일을 돌이켜보았다. 어제 오후 남편이 회사동료들과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겠다고 하기에 아르바이트를 일찍 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준비를 하고 있었다.손님을 집에 청하기는 처음이었다.퇴근한 남편이 곤도와 후지하라라는 남자 두 명과 사쿠라이라는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정성껏 만든 요리들로 술상을 차렸다. 술상이 끝나서 손님들을 바래주러 밖에 나간 남편이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질 않았다. 손님들을 전철역까지 바래주는 것일까? 설거지를 마친 나는 베란다에 가서 전철역으로 가는 서쪽 큰길을 내다보았다.저 앞 뉘집 담장 옆에서 두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 가로등불빛에 안겨왔다. 다름 아닌 남편 김진우와 사쿠라이요시코라는 여자였다. 순간,나는 정수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더이상 보기 두려워졌다.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나는 벽을 짚고서야 겨우 몸을 지탱하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천정을 퀭하니 올려다보며 사쿠라이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녀의 권고에 나는 마지못해 남편 옆에 잠간 앉아있었다.그녀는 술상에서 남자들과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큰소리로 웃기도 했다.성격인지 매너인지는 몰라도 남자들의 비위와 술상 분위기를 잘 맞추는 여자임은 틀림없었다.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자기가 다시 술을 따르겠다면서 차례로 술을 따르더니 이번엔 러브샷하자며 남편의 목에 팔을 감았다.나는 러브샷하는 둘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 요리를 더 가져오겠다고 말하고는 주방에 들어가 한참 서 있었다. 아무리 성격이 쾌활하고 담대한 여자라 해도 어떻게 내 앞에서 다른 남자도 아닌 남편과 러브샷할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 회사동료들이 회식할 때는 이럴 수도 있잖을까 생각을 고치고 요리들을 더 가지고 다시 방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이번엔 밖에 나가서 방탕한 쇼를 연출하다니?헤어지기 그리도 아쉬울까?이것들이 애인사이가 아닐까? 남편이 들어오면 밖에서 뭘 했는가,사쿠라이와 무슨 사이인가 따져묻고 싶었지만 술을 마신 남편에게 오늘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두고보리라 속으로 윽벼르면서 방전등을 꺼버렸다. 20분이나 지나서야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오늘 수고했소.벌써 자는 거요?”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옷을 벗고 옆에 누운 남편이 안으려고 하자 피곤한 척 돌아누웠고 몸을 더듬어오자 잠결인 척 손을 밀어냈다.언젠가 전차에서 어떤 치한이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기에 손을 탁 쳐버리고 홱 돌아서서 뭘 하는가고 꽥 소리도 질렀지만 남편이 더 건드리지 않기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 아침,남편이 뒤척이는 바람에 이불이 침대에서 흘러내렸다.여느 때와 달리 남편의 몸을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던 나는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어 남편의 잔등을 찰싹 소리나게 때려놓았다. “그 여자 당신 몸 봤지?” 남편이 눈도 뜨지 못한 채 얼떨떨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 여자라니?” “그 여자 있잖아.그 여자 당신 몸 알지?” “아침부터 무슨 허튼소리이고 반말이요?” “그럼 아직 몰라?” “뭐욧!” 남편이 버럭 성을 내자 나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속이 좀 풀린 것 같았다.남편이 성내는 걸 봐선 둘이 아직 애인사이가 아닐 수도 있지만 엊저녁에 서로 끌어안고 있는 걸 본 이상 여기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둘의 관계를 꼭 알아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알아낼 수 있을까?혹시 곤도와 후지하라는 언녕부터 알고 있은 게 아닐까? 그렇다고 회사를 찾아가서 곤도와 후지하라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처음에 요리들을 날라다주면서 어디서 일하는가 웃으며 물어보기에 그저 스시점에서 일한다고 대답했다.그녀에게 남편은 어디서 근무하는가,애는 몇 살인가 이것 저것 물어보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문득 그녀가 츠루미에 살고 있다던 말이 생각났다. 츠루미는 가와사키(川崎)에서 한 정거장 거리였다.지금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트가 면바로 츠루미역 동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그녀의 집이 츠루미역 동구 쪽에 있는지 서구 쪽에 있지는 몰라도 전철역 부근에서 만날 날이 꼭 있을 것이다.만나기만 하면 붙잡아놓고 추잡한 짓거리를 그만하라고 울면서 손을 싹싹 빌 때까지 훈계할 것이다.그 날이 빨리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퇴근하면 요코하마역에서 같이 전차를 타고 한몸처럼 붙어있다가 세 정거장인 츠루미역에서 먼저 내리는 그녀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다시 화가 치밀어올랐다. 대충 세수를 하고 화장실을 나오니 일곱 시가 거의 되었다. 출근시간이 여덟 시이기에 좀 있다가 집을 나가야 했다. 나는 이불을 꼭 덮고 돌아누워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서 죄인처럼 취조하려다가 냉장고에서 우유와 빵을 꺼냈다.괘씸한 남편 때문에 아침을 굶을 수는 없었다. 아침을 먹고 간단히 화장을 하고 나서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마트는 종업원 급식이 없기에 점심휴식시간에 집에 왔다가기도 불편해서 매일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다시 주방에 들어가 도시락통에 엊저녁에 남은 나머지 밥을 몽땅 퍼담고 요리들도 듬뿍 담았다.남편이 일어나면 몇 젓가락 밖에 남지 않은 요리들만 전자레인지에 덥혀먹겠지 생각하면서 장국은커녕 아침밥도 짓지 않고 집문을 나섰다.       3   토요일 아침이라 전차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자리를 찾아앉은 미화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은행에 근무하던 나는 ××대학 경영학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요코하마 모 증권회사에 취직한 남편의 가족요청으로 3년 전에 일본에 왔다.남편이 몇 년 후에 딸애를 데려오자고 하기에 일곱 살 난 딸애는 본가집에 맡겨두었다.딸애는 올해 열 살,다음 학기면 소학교 3학년생인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손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일본에 온 이튿날 남편이 나를 데리고 요코하마에 갔다.나는 장에 나온 촌닭처럼 어리벙벙해졌다.아찔하게 치솟은 초고층빌딩들을 올려다보니 하늘이 빙빙 도는 듯한 현기증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실북 나들 듯하는 차량들을 보니 동서남북도 분간키 어려웠다.일본에 오기 전에 외국어학원에서 일본어도 배웠지만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이 너무 빨라서 영어로 말하는지 일본어로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행인들의 발걸음도 너무 빨라서 일본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저리도 바쁠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일본은 모든 절주가 다 빨라 보였다.여기서 살면 수명이 짧아지는 게 아닌가고 웃으며 남편에게 물었더니 일본인들의 수명이 세계에서 으뜸이라기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한 달 후부터 차츰차츰 여기 생활환경과 언어환경에 적응되기 시작했다.남편이 소개한 도시락점과 스시점 아르바이트는 각각 1년 남짓씩 하다가 그만두었다.도시락점은 후에 들어온 두 일본여인이 첫날부터 내가 못마땅한 듯 이러쿵저러쿵 군소리하면서 무턱대고 중국을 얕잡아보기에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즉석에서 그만두었고 스시점은 새로 온 주방장이 자꾸 집적거리더니 어느 날 저녁 혼자 남아서 청소를 하는 나를 끌어안으려고 하기에 장대걸레로 콱 밀어놓고 이튿날 점장에게 그만두겠다고 전화를 했다.아르바이트는 다시 구해야 했다.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쉽다고들 하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구하기 여간 힘들지 않았다.마트 아르바이트는 한주일 전에 절로 구한 것이였다.상품포장을 하고 상품들을 날라다가 여러 코너에 배열해놓는 일인데 이 일도 쉬운 게 아니였다. 츠루미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에 미화는 정신을 차리고 전차에서 내렸다. 마트를 향해 걸어가면서 거리를 둘러보았더니 오늘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하던 벚꽃은 마치 며칠 후면 스러질 듯이 활짝 피어있었다. 벚꽃을 보고 있노라니 부지중 고향의 살구꽃이 떠올랐다. 나와 남편은 한 고향은 아니지만 모두 작은 진 출신들이었다.후에 ××시에서 서로 알고 결혼하고 딸애도 보았는데 딸애가 한 돐이 지나서 남편이 일본에 갔다.연애할 때 내가 옛집 마당에 살구나무가 있었다고 했더니 남편도 옛집 마당에 살구나무가 있었다고 했다.내가 근무하는 은행 주위에 가로수로 심어놓은 살구나무들이 있었다.은행 정문 바로 앞 살구나무 옆에서 남편이 살구꽃이 필 때 결혼식을 올리자며 나에게 결혼반지를 선물했고 일본에 갔다가 중국에 놀러왔을 때는 그 살구나무 옆에서 어린 딸애를 안고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곤 했다.살구꽃이 피는 봄철이었는데 살구꽃이 벚꽃보다 더 이쁘다고,벚꽃을 볼 때마다 살구꽃이 그립다고 말했다.그래서 그 살구꽃 옆에서 결혼식 날 남편과 찍은 사진과 남편이 중국에 놀러왔을 때 딸애와 셋이서 찍은 가족사진은 지금도 사진첩에 소중히 보관해두고 있었다. 이 몇 년간은 내가 왜서 좋은 직업 버리고 일본에 와서 이따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나 당장이라도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활 날아가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고 딸애가 너무 보고 싶어 중국에 전화를 하고는 엉엉 소리내어 울 때도 있었다.그럴 때마다 남편이 위안해주고 힘이 되여주었기에 남편 한사람만 믿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런데 남편이 지금 나를 배신하고 일본여인을 좋아하고 있잖은가? 사쿠라이(桜井),그러고 보니 벚꽃과 우물이 아닌가! 남편이 이젠 살구꽃보다 벚꽃을 더 좋아하는 것인가?벚꽃이 피어있는 우물가에서 나몰래 우물물도 맛보는 것인가?남자들은 다 이런가? 어느새 마트가 눈앞에 보여왔다. 면접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매일 상냥하게 대해주는 미남인 마트 사장님이 나를 좋아하는 눈치던데 나도 일본남자를 친해볼까?......       4   “오하요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엊저녁에는 힘들었겠습니다.” 어제 오후 남편의 전화를 받고 남편의 회사동료들이 저녁에 집을 방문하기에 좀 일찍 퇴근할 수 없겠는가고 물었더니 그럼 지금 퇴근하라면서 사시미(생선회)세트까지 주던 우치다(内田)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의 따뜻한 인사말을 들으니 얼었던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미화는 사장님께 다시 인사를 올렸다. “사장님 덕분에 요리를 갖추기 수월했습니다.정말 고마웠습니다.” “오늘은 계산대에 나와주세요.직원 한 명이 나오지 못합니다.제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계산대에 서기는 처음이었다.대형마트라 계산대가 여섯 개 있었는데 같이 일하는 일본여인들은 지금까지 계산대에 선 적이 없다고 했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오늘 계산대에 선다고 했더니 부럽다며 더 힘내라는 여인들도 있었고 낮은 소리로 수군덕거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사장님이 바코드를 찍는 방법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계산대 화면에 나오는 금액을 보고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손님한테 드리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은행에 근무한 나의 적성에 맞는 일이기도 했다. 아홉 시에 영업이 시작되었다. 비록 앉아있을 시간은 없었지만 한주일간 해왔던 일보다는 힘들지 않았다. 매니저가 교대시간이 되었다고 하기에 시계를 보니 어느덧 열두 시였다. 미화는 휴식실에 들어가 아침에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고 다시 계산대로 나갔다.헌데 사장님이 계산대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좀 더 휴식하고 나오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리(李)상이 다른 직원들보다 성격이 깐깐하고 빈틈없이 일한다더군요.내일부터 여기서 계속 일해주십시요.” 누구한테서 들은 것일까,아니면 감시카메라로 내가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은 것일까? “감사합니다.” 사장님이 다른 코너에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미화는 다시 일손을 다그쳤다. 오늘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다섯 시 퇴근시간이 되자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와 큰길을 건너려는데 사장님이 큰길 옆에 세워둔 차에서 내려 집까지 모셔다주겠다기에 전차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그랬더니 자기 집이 가마타(鎌田)에 있기에 같은 방향이라며 웃으면서 차에 오르라기에 차에 올랐다. 가마타는 도쿄도(東京都)에 속하는데 가나가와현(神奈川県) 가와사키에서 한 정거장 거리였다. 미화는 사장님이 나를 데리고 러브호텔에라도 가려는 게 아닐까 가슴을 졸이며 창밖만 주시해보았다.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를 할까요?” 식사라는 말에 미화는 살며시 숨을 내쉬고 부인님이 집에서 기다리지 않는가고 물었다. “집사람한테 저녁 먹고 집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리상이 저의 가게에서 오래동안 일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달리 생각 마십시요.” 오늘은 늦게 집에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미화는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 되어 차가 레스토랑이라는 영어간판을 내건 빌딩 앞에서 멈춰섰다. 미화는 사장님을 따라 잔잔한 경음악이 흘러나오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사장님이 화장실에 갔다오는 사이에 핸드폰을 무음모드로 설치해놓았다.이 시간대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남편 밖에 없었다.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주문한 사장님이 요리를 더 주문하라고 하자 미화는 이거면 된다고,술은 와인이 좋지 않는가고 묻자 운전하는데 술을 마셔도 괜찮은가고 물었더니 대리기사를 부르면 된다기에 그러자고 대답했다. 웨이트리스가 와인과 요리들을 올리고 멋진 동작으로 와인을 따르자 사장님이 잔을 들었다. “좋은 가게들도 많겠지만 저의 가게에서 계속 일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자,건배합시다.” “저를 이렇게 대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열심히 일하겠습니다.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레스토랑 분위기도 좋고 요리들도 맛있고 와인도 맛있었다. “외국인유학생이 증권회사에 취직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리상의 남편은 참 훌륭한 분이시군요.이력서를 보니 따님이 계시던데 따님은 일본에 데려오지 않아요?” “몇 년 후에 데려오려고 합니다.실례이지만 사장님은...” “저는 중학교 1학년생인 아들이 있습니다.” “일본에 온 지 3년이 되었는데 일본어를 잘하지 못합니다.미안합니다.” “아닙니다.발음도 좋으시고 일본어를 잘하십니다.처음 만난 사람은 일본인이라 생각할 겁니다.” “고맙습니다.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일본에서의 건배는 중국처럼 술잔을 굽내는 것이 아니였다. 미화는 절반 정도 내려간 사장님의 와인잔에 와인을 조금 따랐다. “중국 주소와 리상과 남편의 이름이랑 보니 혹시......” “네,저는 중국 조선족입니다.” “그렇군요.저의 어머니가 재일한국인이었습니다.일본인인 아버지와 결혼한 겁니다.” “네?” 미화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쿄 뿐만 아니라 요코하마와 가와사키에도 재일한국인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머님이 재일한국인이었군요.부인님은 일본인인가요?” “네,집사람은 일본인입니다.어릴 때 어머니한테서 한국어를 배웠는데 크면서 일본어를 그냥 하다 나니 한국어는 그저 알아들을 정도입니다.작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국과 중국에 다녀왔습니다.저도 중국에 가보고 싶습니다.” “그래요?오늘 사장님을 다시 알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사장님이 웃으며 잔을 마주쳤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사양 마시고 알려주십시요.” “네.” “그리고 매니저가 저의 누나입니다.매일 저녁 아홉 시에 퇴근합니다.” “그런가요?” 미화는 다시 놀랐다. 사장님과 매니저가 그저 같은 성씨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두 분 얼굴이 많이 닮아있었다.매니저는 첫인상부터 좋은 분이었다.오늘 오전에는 에스카레터 옆에서 손님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손님들을 안내하기도 했고 내 옆에 한참 서 있기도 했다.내가 일하는 모습을 사장님이 감시카메라로 살펴보고 있은 것이 아니라 매니저인 누님한테서 들은 것이리라. 와인을 마시며 둬시간 얘기를 나누다가 사장님이 이젠 가자고 하기에 레스토랑을 나왔다. 밖에 나오니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사장님이 택시를 불렀다. 대리기사를 부르겠다고 했는데 왜 택시를 부를까?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자동문이 열리자 미화는 사장님과 같이 뒷좌석에 앉았다.사장님이 대리기사가 늦게 오기에 택시를 불렀다며 집 주소를 묻기에 주소를 알려줬더니 10분도 안 되어 집 부근에 도착했다.택시기사에게 좀 기다려달라고 말하더니 사장님도 같이 내렸다.내일부터 잘 부탁드린다면서 손을 흔들며 다시 택시에 오르는 사장님에게 고맙다고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여덟 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아까는 사장님이 나를 택시에 앉혀가지고 어디로 가려고 할까 다시 두려워했는데 막상 집 부근에서 혼자 내리고 보니 왠지 아쉽고 서운해나면서 기분이 울적해졌다. 밤중에 들어갈 곳은 집 밖에 없었다. 미화는 사장님이 왜 나를 두고 갔을까,왜 어디든지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오늘은 들어가고 싶지 않은 집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5   티비를 보던 진우는 아내가 집에 들어서자 웃으며 방에서 달려나왔다. “오늘은 좀 늦었구만.술 마셨소?” 미화는 눈을 부릅뜨고 남편을 쏘아보았다. “멋진 남자와 레스토랑에서 술 마셨지.왜 집에 있어?그 여자 집에 안 가?” “그 여자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요?” 주저하지 말아야 했다.지금 말해야 했다. 미화는 엊저녁부터 마음 속에 억눌러왔던 말을 그냥 반말로 내쏘았다. “사쿠라이를 말하는 거지.그 여자와 애인사이 맞지?그 여자 그렇게 좋아?” “오늘은 당신이 참 무섭구만.우리 방에 들어가 얘기하기오.” 방에 들어가 타타미에 앉은 진우는 침대에 걸터앉는 아내를 보고 껄껄 웃었다. “곤도와 후지하라는 회사선배이지만 동갑이고 사쿠라이는 두 달 전에 다른 회사에서 전근해온 후배요.어제 오후 휴식시간에 곤도가 퇴근하면 요코하마중화가(横浜中華街)에 가서 샤브샤브를 먹자고 하기에 그러자고 대답했소.후지하라가 샤브샤브보다 중국요리가 먹고 싶다고 하자 사쿠라이가 중국요리는 킨상의 부인님이 맛있게 만들 거라고,오늘 부인님의 요리솜씨를 맛보는 것이 좋잖은가 하더군.곤도와 후지하라가 눈치를 살피기에 그럼 퇴근해서 우리 집에 가자고 선뜻 대답하고 당신에게 전화를 한 거요.이젠 츠루미 마트에서 일하는 당신과 츠루미에서 살고 있는 사쿠라이가 서로 알고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요.사쿠라이는 당신보다 두 살 어리오.” “그 여자 집이 츠루미역 동구 쪽에 있는가요?” 진우는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건 내가 모르지.” “그 여자 집에 간 적 없어요?” “내가 무슨 일로 그 여자 집에 다 가겠소?헌데 왜 반말을 하지 않소?” 미화는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그 여자 남편은 뭘 하는 사람인가요?” “모르오.직원들한테서 이혼했다고 들었소.” “애는?” “애는 남편이 부양한다더군.” “그럼 그렇겠죠.가정이 있고 단정한 여자라면 술상에서 러브샷하겠어요?그것도 내 앞에서 다른 남자도 아닌 당신과 말이에요.” “그러잖아도 러브샷한 자기를 당신이 나쁘게 생각할 거라면서 미안하다며 잘 말해달라더군.” “평소 술 마실 때도 그 여자가 당신과 러브샷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요?” “어제 처음이요.입사해서 한번 회식하고 어제 두번째로 같이 술 마시는데 나도 놀랐지 뭐요.당신 앞에서 미안했지만 러브샷하자는 걸 주인인 내가 안 된다고 거절할 수도 없잖소.” 러브샷 일은 이쯤에서 끝내는 것도 좋을 듯했고 이젠 중요한 걸 물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미화는 물이나 한 모금 마시고 와서 다시 물어보려고 주방에 들어갔다. 쓰레기통 안에 컵라면 한개가 들어있는 걸 보아 남편이 컵라면을 먹은 것 같았다.아침에 조금 남긴 요리들은 랩을 씌운 그대로 식탁 위에 놓여있었고 전기밥가마도 텅 빈 그대로였다.냉장고를 열어보니 햄이며 소세지며 김치며 반찬들도 아침 그대로였다.엊저녁에는 처음에 청주를 마시다가 캔맥주를 마셨다.그럼 동료들이 사온 캔맥주를 다 마셔버리고 온종일 자빠져 자고 있었을까?냉장고 옆에 놓여있는 캔맥주상자를 내려다보니 엊저녁에 남은 캔맥주 세개가 제자리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컵라면 한개로 삼시 세끼를 때울 수는 없잖은가? 오늘 어디에 갔을까? 이것들이 또......   진우는 주방에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쿠라이는 월요일에 출근하지 않았다.오후에 키무라에게 물었더니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며칠 보살펴야 한다면서 사흘간 청가를 맡았다는 것이었다. 그저께 전화를 걸어온 그녀의 어머니가 어제는 그녀의 집에 놀러갔잖은가? 보나마나 나 때문에 출근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혹시 내가 다시 집을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집을 찾아가지도 전화를 하지도 않았다.그녀한테서도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목요일 오전,그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얼굴색이 안 좋아보였지만 그 일이 없었던 듯이 웃으며 아침인사를 하기에 나도 웃으며 맞인사를 했다.한참 일을 보다가 회사 뒷골목에 있는 덮밥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점심시간이 거의 되자 먼저 회사를 나와 덮밥집에 가서 돈부리덮밥 두개를 시켜놓고 핸드폰을 보는데 그녀가 가게에 들어섰다. “어머님께서 입원하셨다던데 병세는 괞찮아요?” “어머니가 입원한 게 아니였어요.그렇게 청가를 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나도 솔직한 그녀였다.나는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저 때문인가요?” “아니에요.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덮밥이 올라오자 둘은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회사에 들어갔다. 퇴근해서 회사 문앞에서 어머니 집에 들러보겠다며 웃으면서 내일 다시 만나자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 나는 시름을 활 놓고 퇴근길에 올랐다. 만약 어제 오후 그녀가 아내의 요리솜씨를 맛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집에 가자고 대답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그 일은 이미 끝났기에 동료들에게 아내의 요리솜씨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엊저녁에 술상이 끝나서 밖에서 넷이 얘기를 좀더 나누었다.곤도와 후지하라는 멀지 않은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곤도와 후지하라가 이젠 가겠다며 자리를 뜨자 그녀와 같이 전철역으로 걸어갔다.그녀가 멈춰서서 할 말이 있다기에 어느 집 담장 옆으로 다가갔다. “오늘 킨상과 왜 러브샷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부인님이 보라고 일부러 러브샷한 건 절대 아니에요.제가 요즘 많이 이상해진 것 같아요.부인님이 저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집에 들어가면 부인님께 잘 말해주세요.” “그건 근심 마세요.” “저번에는 정말 부끄러웠어요.미안해요.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잖아요.” 집 골목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불빛이 비쳐왔다.그녀가 돌아서자 나도 동네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볼까봐 돌아서서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차 여러대가 잇따라 지나가는 바람에 한참 말없이 가만히 서 있다가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자 전철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저를 한 번만 안아줄 수 있어요?” 나는 잠간 망설이다가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이쁜 부인님이 있어 행복하겠어요.저는 행복한 가정을 보면 부러워요.킨상이 앞으로도 그냥 행복하기를 바라요.” “고맙습니다.사쿠라이상도 좋은 남자를 빨리 만나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아내의 휴일날이면 우리 집에도 놀러오세요.” “고마워요.” “이젠 전철역으로 갑시다.”  나는 그녀를 전철역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들어왔다......     진우는 주방을 살펴보고 베란다에 가서 서쪽 큰길을 내다보았다. 혹시 아내가 여기서 나와 사쿠라이가 포옹하고 있는 걸 보았을까? 오전에 슈퍼에서 오니기리(주먹밥)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곤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테니스를 치자고 하기에 그 길로 테니스장에 갔다가 오후 늦게 집에 들어와 컵라면을 먹고 피곤해서 한잠 자다 나니 다시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다. 아내가 이제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6   ”거기서 뭘 해요?” 미화는 베란다에 서 있는 남편을 불러서 제자리에 도로 앉혔다. “오늘은 뭘 먹었어요?” “아침은 굶었소.밥도 없고 요리도 얼마 없더군.점심은 오니기리를 사서 먹었고 곤도와 테니스를 치고 집에 와서 저녁은 컵라면을 먹었소.이제야 남편이 뭘 먹었는가 근심되어 물어보는 거요?전화도 받지 않더구만.” “그건 그렇고 엊저녁에는 왜 늦게 들어왔어요?밖에서 뭘 했어요?” “넷이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사쿠라이를 전철역까지 데려다주었소.곤도와 후지하라는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테니스장 부근에 살고 있소.”  “사쿠라이와는 무슨 일이 없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겠소?” “내 입에서 더러운 말이 나오기 전에 솔직히 말해요.” “그 물이나 주오.” 미화는 들고온 물컵을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진우는 단숨에 물을 벌컥벌컥 다 들이키고 허허 웃었다. “그래도 술보다 이 물이 맛있군.” “그 물보다 우물물이 더 맛있잖아요?” “우물물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진우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벚꽃이 피어있는 우물가를 잘 알잖아요.그 우물 안의 물 말이에요.” “아,벚꽃이 아닌 살구꽃이 피어있는 우물가를 말하는군.연애할 때 우리 집 부모들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살구꽃이 피어있는 우물가에서 내가 길어올렸던 그 우물물을 말하는 것이구만.수돗물보다 시원하고 정말 맛있다고 당신도 말했지 뭐요.” “핑계를 대겠어요?” “핑계라니?” “사쿠라이를 말하는 거에요.벚꽃과 우물이 아닌가요?” “사쿠라이라?아,당신은 상상력도 정말 풍부하구만.헌데 우물물이 더 맛있잖은가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요?” “그냥 모르는 척할 거에요?왜 사쿠라이를 끌어안고 있었어요?내가 못 본 줄 알아요?그 우물물이 맛있던가,물맛이 좋던가는 뜻이에요.” 진우는 물컵을 내려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우물물이고 물맛이고 함부로 말하는 거요?나와 사쿠라이는 동료사이일 뿐이지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요.” “내가 어떻게 믿어요?” “사쿠라이는 보기와는 달리 불쌍한 여자요.작년에 이혼한 후에 아버지도 돌아가셨다오.잠시 어머니 집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는데 츠루미에 이사 와서 얼마 안 되어 어머니마저 병원에 입원해서 출근도 못하고 있다가 목요일부터 출근했소.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사쿠라이가 어제 우리 집에 와서 당신이 만든 맛나는 요리를 먹고 술도 마시니 너무 기뻐서 나와 러브샷했다고 생각하오.탤렌트처럼 이쁘고 요리도 잘한다며 당신을 칭찬하더구만뭐.” 남편의 말이 그렇듯하게 들렸지만 미화는 바투 들이댔다. “그만 해석하고 왜 끌어안고 있었는가는 물음에나 대답해요.” “그럼 이 물이나 더 가져다주오.” 남편이 물컵을 건네주자 미화는 물컵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 사이에 어떻게 대답할까 꿍꿍이를 꾸미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요.빨리 말해요.” 진우는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건 내가 잘못했다면 잘못한 거요.곤도와 후지하라가 먼저 간 후에 저 앞 뉘집 담장 옆에서 사쿠라이와 얘기를 좀 나누었소.내가 좋은 남자를 빨리 만나라고,당신의 휴일날이면 우리 집에도 놀러오라고 말했더니 고맙다면서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끼는 게 아니겠소?불쑥 이혼한 누이동생이 생각나더구만.그래서 살며시 껴안고 어깨를 다독여주었소.사쿠라이가 여자로 보이지 않더구만.지금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당신한테 정말 미안하오.” “진짜 그런 일이었어요?이제 확인해봐야겠어요.” “사쿠라이의 핸드폰번호를 알려줄 테니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보오.” “둘이 짜고들었는지 누가 알아요?오늘은 내 옆에서 자지 말아요.거기에 이불을 펴놓고 자요.” 진우는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럴게.오늘 여기서 잘 테니 당신은 침대서 잘 자오.그리고 나와 사쿠라이가 애인사이라면 내가 사쿠라이를 집에 데려올 수 있겠는가를 잘 생각해보오.내가 그런 사람인가는 당신이 알아서 판단하오.까짓 일 가지고 정말 기분 상하게 노는구만.” 진우는 이불장에서 이불과 요를 꺼내 타타미 위에 펴놓고 돌아누웠다. 미화는 잠간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쩌면 남편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애인사이라면 그녀를 집에 데려올 수 있을까?애인은 숨겨둔다는 말도 있잖은가? 지금까지 남편이 나한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오늘 내가 듣기 좋게 과장해서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누이동생이 생각나서 사쿠라이를 살며시 껴안았다는,사쿠라이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남편을 이해할 만도 했다.시누이도 남편이 애인이 있었기 때문에 이혼했고 한 돐이 안 된 아들은 남편이 부양하기로 했다.중국에 놀러왔을 때 갓 이혼하고 남방도시로 떠나가는 누이동생을 공항에서 껴안고 눈물을 흘리던 남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신경이 너무 예민해진 것일까? 아니,그런 광경을 본 여자들은 다 나처럼 생각할 수도 있잖은가? 침대에 걸터앉았던 미화는 타타미에 내려앉았다. “일어나요.우리 얘기 좀더 나눠요.” 진우는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앉았다. “왜?얘기 끝나면 같이 자자구?” “좋은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오늘 거짓말을 한 게 아니죠?” “내가 언제 당신한테 거짓말을 했소?” “그럼 모두 사실이란 말이죠?” “암,사실이구말구.” “지금 사쿠라이한테 전화를 해보겠어요.”  미화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액정에 부재중 전화 세 통이 현시되어있었다.모두 남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남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통화버튼을 누르는 척하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왜 전화를 하지 않소?” 전화를 해서 확인하려는 게 아니였다.남편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중떠보려는 것이었다. 미화는 아닌 보살을 하며 남편을 슬쩍 흘겨보았다. “밤중에 전화를 하겠어요?” “그럼 내일 전화를 해보오.내 말을 믿거나 말거나 당신 마음 대로 하오.” “한가지만 더 물어볼게요.당신은 벚꽃을 좋아해요,아니면...” “살구꽃을 좋아하지.” 아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우는 앞질러 대답했다. “오늘은 이만 됐어요.여기서 잘 자요.” 아내가 욕실에 들어가자 진우는 이불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늘 아내한테 샛빨간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아내의 속을 풀어주려면 이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둘러대야 아내도 동료인 사쿠라이를 나쁜 여자로 오해하지 않을 게 아닌가.그리고 사소한 일을 가지고 가정불화를 일으킬 필요는 없잖은가.금슬 좋은 부부사이로 다시 돌아가야 하잖은가! 다른 남자라면 오늘 어떻게 말했을까? 그 날 사쿠라이의 집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오늘 아내 앞에서 당당할 수가 없었다. 사쿠라이(桜井),한자 뜻풀이를 하면 아내 말 대로 벚꽃과 우물이 맞는데 아내 입에서 우물물과 물맛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천만뜻밖이었다. 아내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런 말까지 다 했을까?어느 여자가 남편이 바람 피우는 걸 좋아하겠는가? 일본에 온 지도 어느덧 8년,3년 전에 일본에 온 아내가 지금 얼마나 고생하는가를 모르는 내가 아니지.이쁜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좋아할 내가 아니지. 벚꽃과 살구꽃? 물론 살구꽃이 벚꽃보다 더 이쁘지! 언제 봐도 살구꽃이 벚꽃보다 더 아름답지! 아,살구꽃,살구꽃... 진우는 스프링처럼 탄력있게 몸을 일으켰다. 창문 옆 책장 안에 있는 사진첩에서 사진 두 장을 꺼내가지고 다시 이불 위에 앉아 사진을 한참동안 눈여겨보았다. 오늘 따라 고향의 살구꽃이 무척 그리워났다. 다른 사람들도 벚꽃보다 살구꽃을 더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나와 아내는 살구꽃에 애틋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나와 아내는 어릴 때부터 마당의 살구꽃이 피기를 손꼽아 기다렸고,살구꽃이 피는 봄철에 결혼식을 올렸고,결혼식 날 아내가 근무하는 은행 정문 앞에서 아내의 머리에 살구꽃을 꽂아주고 기념사진도 찍었고,중국에 놀러갔을 때도 살구꽃 옆에서 딸애 소연이와 셋이서 가족사진도 찍었다. 살구꽃을 사랑하는 부부여서인지 딸애도 살구꽃이 피어나는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에 태어났잖은가. 오늘은 소연이가 더욱 보고 싶었다. 헌데 욕실에 들어간 저 여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7 미화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까 집 부근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사장님이 그런 사람은 아니겠지만 나를 집이 아닌 러브호텔에 데리고 갔더라면 나는 거절했을까,아니면... 남편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사쿠라이를 다시 만나면 그저 예의적인 인사만 하자.그녀도 나를 만나면 쑥스러워할 테니깐 우리 집에 놀러오라는 말도 하지 말자.그리고 사장님과도 이젠 같이 식사를 하지 말자.사장님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재일한국인이었기에 내가 자기 가게에서 오래동안 일해주기를 바란 게 아닌가.여하튼 사장님은 고마운 분이시다......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미화는 부드러운 어조로 남편에게 물었다.  “그 사진은 왜 꺼냈어요?” 진우는 수건을 머리에 감싼 아내를 한심하다는 듯이 힐끗 올려다보았다. “살구꽃이 그리울 때면 이 사진 두 장을 보는 나를 아직도 모르는구만.헌데 오늘은 누구랑 같이 저녁 먹었소?” “저......” “멋진 남자와 레스토랑에 갔다고 했지.멋진 일본남자들을 많이 친하오.친해도 반드시 내가 모르게 친해야 하오.발각되기만 하면 그땐 끝장이오.” 미화는 얼굴이 화끈 뜨거워났다. “오늘 사장님이 여러분들이 수고한다면서 몇 명 동료들을 청했어요.식사를 하면서 사장님의 어머니가 재일한국인이었다는 걸 알았어요.사장님은 어려서 어머니한테서 한국어도 배웠다는데 지금은 한국어를 알아들을 정도라 하더군요.” “아버지는 일본인이겠군.” “네.” “아버지가 일본인이니깐 그럴 수도 있겠지.사장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우리 소연이를 일본에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애들이 너무 어려서 일본에 오면 우리말을 잃기 때문이오.도쿄에 있는 나의 친구 영호와 당신 친구 금희의 애들도 이젠 일본어 밖에 할 줄 모르잖소?애들이 우리말을 잃으면 안 되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면서 미화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딸애를 곁에 두고 싶지만 어린 나이에 데려왔다가 앞으로 일본어 밖에 할 줄 모르면 어쩌나 근심되어 남편을 재촉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연이가 이젠 열 살,다음 학기면 소학교 3학년생이니깐 일본에 와도 우리말은 영원히 잃지 않겠군.이 몇 년간은 중학교 조선어문 교원으로 퇴직한 장인과 장모님께서 소연이를 키우시느라 정말 수고 많았소.” “그럼 소연이를 언제 데려오자구요?” 미화는 드라이기를 화장대에 내려놓고 남편과 다시 마주앉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당신 결정에 따를게요.” “그럼 이번 학기가 끝나면 데려오는 걸로 하기오.소연이를 데려오는 수속을 밟을 때 장인과 장모님도 같이 요청할 생각이요.두 분께서 유람도 하시고 온천욕도 하시면 좋을 것 같구만.” “고마워요.” “나한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오.다른 남자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오.” “그건 무슨 말씀이에요?” 미화는 남편이 혹시 베란다에서 아까 택시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본 게 아닐까 속이 꿈틀해났다. 진우는 아내를 마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농담도 못하오?” “이제부터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요.제가 그런 여자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요.” “당신도 내가 꽃중에서 살구꽃을 제일 좋아한다는 걸 잘 알잖소.지금도 마찬가지요.다른 꽃에 곁눈 파는 내가 아니니깐 시름 놓소.” 미화는 시름이 놓였다는 티를 내지 않고 인차 화제를 돌렸다. “오늘 테니스는 잘 쳤어요?” “참 오랜만이었소.테니스 규칙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도 룰이 있는 거지.” “그렇죠.부부간이 살아가는 데도 룰이 있는 거죠.서로 반칙은 범하지 말아야 하고 원칙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꼭 지켜야 하는 거죠.” “당신 오늘 참 이쁘구만.” “어제는 미웠어요?” “어제도 이뻤지.수고 많았소.앞으로 다시는 회사동료들을 집에 청하지 않겠소.일본인들이 왜 집에 손님을 청하지 않는가를 알게 되었소.” “친구들이나 귀한 손님들은 집에 청할 수도 있죠.” 진우는 창문 너머 서쪽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헌데 몇 년 전부터 소연이와 살구꽃이 필 때면 간다고 했는데 소연이가 나를 거짓말쟁이 아빠라고 하지 않을까?” “다음 학기에 소연이를 데려오면 되잖아요.소연의 생일이 다가와요.그 때 제가 잘 말할게요.일본에서 살아도 고향의 살구꽃은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피어있을 거에요.” “그렇구말구.아,오늘은 벚꽃 때문에 괜히 진땀을 뺐구만.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에 봉착할 때도 있고 부부간에 서로 의심할 때도 있는가 보오.부부간은 서로 믿고 존중하면서 살아야지.” “맞아요.우린 영원히 사랑하는 부부죠.어제 일은 그만 잊겠어요.” “고맙소.우리 제자리로 돌아왔구만.” “호호호...” “하하하...” 훈훈한 봄바람이 솔솔 불어들어오는 방안에서 다정한 부부간의 웃음소리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박명선 길림성 용정시 출생.연변대학 일본어학부 졸업.요코하마국립대학 교육학 석사과정 졸업.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회원.중단편소설 다수 발표.현재 광주 거주.  
12    (단편) 해후(邂逅) 댓글:  조회:1468  추천:1  2021-09-17
2021년 5호 단편소설 해후(邂逅) 박명선 도꾜에는 겨울이라도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지만 동북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台)에는 고향처럼 하얀 눈이 내린다. 폭설이 퍼붓는 어느 날,준이는 아오바구 오오마찌(青葉区大町)의 크고작은 거리며 골목들을 샅샅이 훑으며 돌아다녔다.발신인 주소는 씌여있지 않았지만 편지봉투 뒤면에 아오바구 오오마찌라는 우편국 날인이 찍혀있었던 것이다.불고기점들에도 들어가 중국에서 온 녀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가고 문의해보았다.한나절이나 헤매던 끝에 경찰서를 찾아가려다가 현지한테 불길한 일이라도 생길가 봐 길옆 어느 뻐스정류소 걸상에 털썩 주저앉아 펑펑 쏟아져내리는 눈송이들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지금 현지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가? 준이와 현지는 북경에서 처음 만났다. ××공업대학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미쯔비시(三菱)중공업회사에 취직한 준이가 한주일 휴가기간에 고향에 놀러왔다가 일본에 돌아가려고 저녁 비행기로 북경에 도착하여 공항에서 가까운 수도공항호텔에서 체크인을 마쳤을 때 일본에서 류학하고 있던 현지도 고향에 놀러오면서 호텔에 들어섰다. 캐리어를 밀고 카운터에 다가선 현지를 보고 준이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문화서점에서 일하던 분 맞죠?" 현지는 자기를 알아본 준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를 어떻게 아세요?" "이전에 문화서점에 많이 다녔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류학 가려고 일본어를 배우던 외국어학원 서쪽에 문화서점이 있었는데 예쁜 처녀점원을 보아두고 자주 드나들다가 남자친구가 있어보이기에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던 준이였다.  "그러고 보니 많이 보던 분 같네요.헌데 북경에 출장 나오셨어요?" "아니,일본에 돌아가려구요." 일본이라는 말에 현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웠다. "일본에서 오셨어요?저는 류학생인데요.방금 전에 일본에서 온 비행기를 내렸어요." "그런가요?" 준이는 명함장을 현지에게 건네주면서 크리스마스이브날인데 저녁식사라도 같이 할가고 물었다. 명함장과 성실하고 정직해보이는 준이를 번갈아보던 현지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새해에 들어선 어느 날,준이가 퇴근해서 집문을 열려고 하는데 현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왔어요?" "네,금방 집에 들어왔어요." "그럼 오지역에서 만나요." 현지는 오지(王子)에서 살고 있었고 준이는 오까찌마찌(御徒町)에서 살고 있었다. 준이는 정신없이 전철역으로 달려갔다.오지까지는 게이힌도호꾸센(京浜東北線)으로 일곱 정거장 가야 했다.전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나오는 준이에게 현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현지한테 뛰여간 준이는 사람들이 보는 것 같아 꼭 쥐고 있던 현지의 두 손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저녁을 먹어야죠.” 둘은 전철역 신호등 건너편에 있는 중화료리점에 들어갔다.준이는 료리 몇가지와 맥주를 주문했다.현지가 맥주를 마시는 걸 알고 있었다.그날 저녁 수도공항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북경올림픽대회 개막식이 열리게 된다는 새둥지(鸟巢) 부근에 와서 주위를 거닐다가 북경오리점에서 맥주를 같이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다.준이보다 세살 어리고 아직 결혼 전인 현지는 도꾜 ××일본어학교에 류학 왔는데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중국에 한번 와보고 싶었다는 것이였다. 처음에는 북경에서 만났고 두번째는 도꾜에서 다시 만났다.이런 걸 인연이라는 걸가?연분이라는 걸가?일본에서 한고향 조선족 처녀를 만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부모님들도 같은 조선족과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잖은가? 준이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흐뭇하고 저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아직 녀자친구가 없는 준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착해보이는 현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말저말 나누다가 준이는 궁금한 듯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이젠 스물네살인데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나이는 아니잖아요.비자는 3월 말까지예요.비자 때문에 근심되고 무섭기도 하지만 비자가 만료되면 불법으로 있으려고 해요." 불법으로 있으면 안 되지,하고 말하려다가 준이는 결단을 내린 듯한 현지의 표정을 읽고 잠자코 있었다.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나이가 아니라는 현지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였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불법으로 있다가 경찰에 잡히기나 하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몰려왔다. 어떻게 하면 좋담? 불쑥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쳐왔다. 결혼? 결혼하면 현지도 가족체재비자로 넘을 수 있잖은가?헌데 석달 사이에 일본에서 결혼수속을 밟아야 할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파났다.결혼서류들은 어떻게 작성하고 결혼식은 또 어디서 올린단 말인가?그렇다고 금방 일본에 왔는데 다시 중국에 돌아갈 수도 없잖은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방법이 없나 생각해봤어요." 현지의 얼굴에 처음 보는 수심 같은 것이 어려있었다. "북경에선 처음이여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이제 일자리도 다시 구해야 해요."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가요?" 준이는 자신의 무능함이 부끄러웠다. "시험 볼 수 있는 대학들도 아직 있으니깐 부담 갖지 마세요.저도 좀더 깊게 생각해볼게요." 둘은 한참 마시다가 중화료리점을 나왔다. 그러던 사흘이 지난 저녁이였다. 아홉시가 넘어서야 퇴근준비를 하던 준이는 현지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이제부터 학교는 가지 않기로 했어요.대학도 포기했어요.저 지금 센다이에 있어요." "네?방금 뭐라 했죠?센다이라구요?" 준이는 조금 당황해났다. "네,오늘 센다이에 왔어요.좋은 일자리가 생겨서요.저의 근심은 하지 마세요..." 전화기에서 현지의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현지씨.” 현지가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으로 현지를 보던 순간을 생각하니 준이는 가슴이 꺽 막혀오는 것 같았다.어떻게 만난 인연인데 그저 이렇게 헤여지다니? 현지한테 전화를 했지만 휴대폰은 이미 꺼져있었다. 새로운 업무에 바삐 보내다 나니 사흘간은 현지한테 전화를 할 시간도 없었다.오늘 아침에라도 전화를 해야 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가? 한편,휴대폰을 꺼버리고 친구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누운 현지도 이리뒤척 저리뒤척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요며칠은 준이와 같은 우수한 남자를 만난 것이 나한테는 너무 과분하지 않나,준이에게 보따리를 짊어지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준이를 다시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이제 비자를 연장하려면 대학에 입학해야 했다.레스토랑 주방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을 이제 학비로 내자니 진짜 아까웠다.류학이고 뭐고 돈 벌러 일본에 온 게 아닌가.학업을 포기하고 지금 아르바이트에만 열중하고 있는 친구들도 많았다.수입이 많은 풍속점에서 몸을 파는 류학생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따위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흘간 고뇌하면서 이곳저곳에 있는 친구들한테 일자리를 문의했더니 어제 오후 센다이에 있는 친구한테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불고기점 주방아르바이트를 소개할 수 있다며 잘 생각해보라는 련락이 왔다.한동네에 살던 고중 동창생인데 금년 봄에 동북대학을 졸업하는 친구였다.친구들 중에서 일본어학교에 류학 왔다가 유일하게 대학에 입학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센다이에 가면 어쩌나?이러면 내가 뺑소니 치는 격이 되고 준이와는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닌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병환에 계시는 어머니와 고중 2학년생인 남동생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내가 도꾜에 그냥 있으면 준이한테는 부담 밖에 되지 않는다.준이는 꼭 나보다 더 좋은 녀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센다이로 가는 신깐센에 앉아 차창으로 스쳐지나는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준이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던 현지는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준이씨,미안해요.저도 사랑해요. 동북대학을 비롯한 10여개 대학들이 있고 멋진 항구도 있으며 중국 동북처럼 사계절이 선명한 일본 동북지방의 중심도시인 센다이. 센다이에 온 현지는 친구의 소개로 불고기점에서 오전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단 하루도 준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준이가 나 때문에 괜히 고민하면서 출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닐가 근심되기도 했다. 열흘이 지난 어느 날,현지는 친구가 학교에 나가자 용기를 내서 필을 들었다.지금 친구 집에 잠시 머물고 있고 불고기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인 녀사장님도 중국 조선족이라고 살뜰히 대해주기에 근심 말라고,이젠 그만 나를 잊고 좋은 녀자를 만나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눈물을 흘리며 써내려갔다.준이의 명함장 회사 주소 대로 수신인 주소와 이름을 쓰고 나서 다시 발신인 주소를 쓰려다가 멈칫했다. 집 주소 대로 썼다가 혹시 준이가 찾아오면 어쩌나? 집 부근 패밀리마트와 가게 부근에도 우체통이 있었지만 센다이에 온 이튿날 친구와 같이 새 휴대폰번호를 사러 오오마찌에 가면서 보았던 우편국이 생각났다.현지는 반시간이나 걸어서 오오마찌우편국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다시 전철역으로 향했다.가게는 한 정거장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이튿날 금요일 오전,준이가 휴식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발신인 주소가 씌여있지 않는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를 읽고 준이는 래일 센다이로 찾아가기로 결심을 내렸다. 시속 300키로로 내달리는 도호꾸신깐센(東北新幹線),도꾜에서 센다이까지는 한시간 반이 걸렸다...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뻐스정류소라 준이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젠 도꾜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면 고향처럼 하얀 눈이 내리는 이 아름다운 거리를 현지와 같이 거닐었으면 얼마나 좋을가? 신호등을 건너 도로표식 대로 오른쪽으로 굽어들어 전철역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준이는 오뎅(おでん)이라는 간판을 보고 그제서야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동북 센다이에 와서 뜨끈뜨끈한 오뎅을 먹고 싶었다.시계를 보니 오후 네시였다.시간은 충분했지만 현지도 찾지 못한 마당에 혼자서 오뎅을 먹는다는 자체가 너무나도 못난 짓으로 생각되였다.전철역에서 도시락을 사가지고 신깐센에 오르면 되기에 음식점을 스쳐지나버렸다. 그때였다. 헤어솝으로 보이는 저 앞치 가게에서 두 녀인이 나오더니 마주오고 있었다. “사장님 헤어스타일 정말 예뻐요.” “저녁에 카운터를 잘 봐주세요.”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였다. 준이는 눈이 휘둥그래서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두 녀인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자 웃으며 물었다. “안녕하세요.한국인이세요?” “네,한국서 오셨어요?” 머리를 화려하게 치장한,사장님으로 보이는 30대 중반 녀인이 웃으면서 묻기에 준이는 중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럼 중국 조선족이군요.반가워요.여기에 살고 계세요?” “도꾜에 살고 있는데 회사 일로 출장 나왔습니다.” “그래요?지금 좀 바빠서요.미안해요.그럼...” 사장님이 허리를 약간 굽혀 인사하고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녀인과 뭔가를 소곤거리면서 골목 안에 세워놓은 하얀색 승용차로 다가가는 것이였다. 혹시 불고기점 사장님이 아니신가고,중국에서 온 현지를 아시는가고 물어보려 했는데 무슨 일이 바쁠가?불고기점 사장님이 아니겠지.어느 노래방이나 술집 사장님이겠지.사장님 옆의 녀인도 한국인일가? 오늘 센다이에 와서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고 그저 헛탕만 치고 돌아가는구나! 준이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같은 시각. 현지는 불고기점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다.설겆이를 마치고 나서 저녁준비를 하려고 남새들을 한창 다듬고 있는데 카운터 유니폼을 입은 친구가 주방에 들어와서 주방장과 종업원들에게 인사를 하기에 일손을 멈추었다. 3년 전부터 이 가게의 홀서빙을 해왔다는 친구는 주방장과 종업원들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장님의 총애도 받고 있었다.졸업을 앞둔 터라 가끔씩 가게에 와서 홀서빙을 하기도 하고 카운터를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가게에 나온다는 말도 없던 친구가 왜 가게에 나왔을가? 현지는 옆에 다가온 친구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넌 왜 왔니?” “아까 사장님이 전화 왔더라.그럼 수고해.” 오후 세시 쯤에 사장님이 볼일이 있다며 가게를 나갔었다. 친구가 주방을 나가자 현지는 다시 일손을 다그쳤다.둬시간이 지나 화장실에 가면서 가게를 둘러보았더니 거의 만석인 좌석들에서 손님들이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고 일본인 알바생들이 분주히 홀서빙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는 카운터에 서있었다. 퇴근해서 같이 집에 들어온 현지는 친구에게 물었다. “사장님이 오늘 저녁에 나오지 않았더구나.무슨 일로 너한테 전화 왔더니?” “오늘 저녁에 남동생이 녀자친구를 데리고 어머니 집에 인사하러 온다면서 카운터를 봐달라고 전화 왔더라.지금 어딘가고 묻기에 졸업론문 때문에 서점에서 참고서적을 보다가 집에 가는 길인데 사장님 집 부근이라고 했더니 가게에 있는 줄로 알았던 사장님이 자기도 지금 집 부근 헤어솝에 있다면서 들어오라더라.한국인이 운영하는 그 헤어솝에는 사장님과 두번 간 적이 있다.그래서 헤어솝에 들렸다가 사장님과 같이 나왔다.사장님이 승용차로 나를 가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래?” “아,이제야 생각나는구나.사장님과 같이 헤어솝을 금방 나왔을 때 어떤 남자가 우리가 한국어로 얘기를 주고받는 걸 듣고 사장님께 인사를 올리더라.사장님이 여기에 살고 있는가고 묻자 도꾜에 살고 있는데 회사 일로 출장 나왔다더라.조선족 남자더구나.” “조선족 남자?” “응,나도 인사를 하려 했는데 사장님이 자리를 뜨기에 인사는 하지 못했다.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토요일에 도꾜에서 센다이에 출장 나왔다는 게 좀 이상하구나.” 현지는 친구에게 바투 물었다. “어떻게 생긴 남자더니?” “훤칠한 키에 허여멀쑥하게 생긴 미남자더라.키는 175센치 좌우이고 짙은 눈섭에 부리부리한 쌍겹눈이더라.” “...” 크게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없는 현지를 친구가 의아스레 쳐다보았다. “너 왜 그래?그 남자를 아니?” “아,아니.내가 그 남자를 어떻게 알겠니?” 현지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며 준이를 한참 생각하다가 랭장고에서 쥬스를 꺼내가지고 방에 다시 들어왔다. “현지야.오늘은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 “그래,친구지간에 할 말은 해야지.” 현지는 친구에게 쥬스를 따라주었다. “네가 여기에 올 때는 일본어학교가 겨울방학이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라고 했잖아.그리고 비자는 3월 말까지이고 여기서 대학시험도 보겠다고 했는데 요즘 너의 눈치를 가만히 살펴보니 대학시험도 보지 않고 비자가 만료되면 불법으로 있을 것 같더구나.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니?” 친구의 말이 불법으로 있을 생각이라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는 말로 들려왔다. 못된 계집애 같으니라구! “요즘 고민중이다.너한테 페는 끼치지 않을 테니깐 근심 말거라.” “헌데 방금 전엔 왜 바삐 화장실에 들어갔니?” “너 참,화장실이 바빠서 들어간 거지뭐.” “화장실이 바쁘긴?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더구나.너 남자친구 있지?여기에 온 날 저녁에 남자친구한테 전화를 하고 집에 들어와 밤 늦도록 못 잔 게 아니니?오늘 내가 만난 그 남자 맞지?” 머리회전이 빠르고 센스가 뛰여난 친구였다. “사귀던 남자가 있은 건 맞는데 그날 저녁에 밖에 나가서 헤여지자고 전화를 한 거다.너의 말을 듣고 나도 처음엔 그 남자인가 해서 놀랐지 뭐야.그런데 화장실에 들어가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더구나.휴대폰번호도 바꿨고 집 주소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오겠니?안 그래?그리고 이젠 열흘도 넘었잖아.오늘은 이만 하자.너 일찍 자려무나.나도 오늘은 일찍 자고 싶다.” “그럼 우리 누워서 얘기 나누자.오늘은 같이 자자.나 샤워할 테니 잠간만 기다려라.” 친구가 욕실에 들어가자 현지는 침대에 누워 준이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친구 말 대로라면 준이가 틀림없었다.어제 편지를 받고 토요일인 오늘 센다이에 찾아올 수도 있었다.발신인 주소를 쓰지 않았으니 집을 찾아올 수는 없었다.가게도 찾아올 수 없었다.사장님과 친구를 만났다는 헤어솝은 오오마찌에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폭설이 퍼붓는 오늘 준이가 나를 찾으려고 그 번화한 오오마찌를 돌아다녔단 말인가?내가 편지를 잘못 보낸 게 아닌가?지금 준이는 어디에 있을가?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친구가 옆에 누웠다. “넌 아버지를 일찍 여의다 나니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생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어머니는 그냥 시름시름 앓고 계신다고 했지?남동생은 금년에 대학입시니?” “명년에 대학입시인데 공부를 잘하고 있다.이번에 고향에 갔을 때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중점대학은 문제없을 거라고 하더라.” “중점대학에 입학하면 정말 좋지.졸업하면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구.” “너 졸업하면 취직하고 싶다고 했는데 회사는 찾았니?” “다음 주에 어느 회사 면접을 보기로 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넌 면접에 꼭 합격할 거야.” “고마워.헌데 너 아까부터 나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니?” 현지는 잠간 침묵에 잠겨있었다. 오늘은 친구를 괘씸하게 생각했는데 친구는 진정으로 나를 위해서였다.좋은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불법체류의 길에 들어서려는 나를 되돌아서게끔 일깨워준 친구가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가!그리고 준이가 오늘 찾아온 것도 친구한테서 알게 되였잖은가! 친구가 무슨 대답이 나올가 기다리는 것 같아 현지는 낮은 소리로 침묵을 깼다. “아니야.나 대학시험을 잘 생각해볼게.”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깐 잘 생각해봐.나도 여기서 대학들을 알아볼게.그리고 아까 그 일인데 그 남자가 너를 좋아하기에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닐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구나.나라면 그 남자를 놓치지 않겠다.너 래일 전화해보렴.” “그 남자 아니라니깐.피곤하니 난 자겠다.잘 자.” 창문 쪽으로 돌아누운 현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도꾜에 돌아온 준이는 전차를 갈아타고 대학 선배님 집에 가려고 고단다(五反田)역에서 내렸다.신깐센에 오르려고 할 때 선배님한테서 토요일인데 저녁에 술 한잔 하자며 집에 놀러오라는 전화가 걸려왔었다.선배님은 지금 도꾜 모 대학 박사과정 재학중인데 부인이 다섯살 난 아들을 데리고 며칠 전에 중국에 놀러갔다는 것이였다. 맥주를 사가지고 선배님 집에 들어서니 선배님이 상냥하고 인자해보이는 30대 초반 남자를 소개했다. “도꾜 ××회사 강사장님이시다.여기는 저의 대학 후배인데 미쯔비시에 근무해요.” 준이는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리준입니다.반갑습니다.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영화배우 같은 분이시군.반가워요.어서 앉으세요.미쯔비시에 언제 취직했어요?” “작년에 취직했습니다.” “강사장님은 나의 대학원 동창생인데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3년 전에 간다(神田)에 IT회사를 차렸어.고향은 심양이야.” 간다는 준이가 살고 있는 오까찌마찌에서 두 정거장 거리였다.준이는 무릎을 꿇고 강사장님과 선배님 술잔에 맥주를 따랐다.강사장님이 준이의 술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편히 앉으세요.자,한잔 합시다.” 강사장님이 준이와 술잔을 부딪치고 맥주를 굽내자 준이도 잔을 비웠다.센다이에 부질없이 갔다온 오늘은 실컷 마시고 싶었다. “연변과 길림 그리고 할빈 조선족들과는 달리 우리 심양 조선족들은 평안도 말투를 사용해요.나의 말이 듣기 이상하잖아요?” “아닙니다.심양에서 온 대학 동창생과 사이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래요?난 네살 난 딸애가 있어요.준이씨는요?” “저는 결혼 전입니다.실례이지만 부인님도 조선족인가요?” “그래요.대련 조선족인데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아사히은행에 근무해요.우리 조선족들이 어디서 살든 모두 잘 살아야죠.남들이 비웃지 않도록 떳떳하게 말이예요.이번엔 내가 한잔 따르지요.” 강사장님의 모습이 참말로 름름하고 당당해보였다. “자,우리 민족을 위하여!” 강사장님이 술잔을 추켜들었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선배님이 높이 웨치자 준이도 따라 웨쳤다. 오늘은 여느 때와 다른 술상 분위기였다. 이번엔 선배님이 맥주를 따랐다. “강사장님은 일본에 오기 전에 대련에서 교원을 하면서 무역회사도 차렸었어.나와 강사장님은 일본에 와서 사이가 제일 가까웠어.강사장님의 회사는 유한회사가 아닌 주식회사야.직원들도 많아.일본인 십여명에 싱가포르에서 온 외국인 그리고 상해에서 온 중국인과 한국인 녀비서가 있어.” “그런가요?정말 대단하십니다.” 선배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이제 강사장님 회사에 취직하려고 한다.” “선배님의 말을 롱담으로 들으세요.” 강사장님이 껄껄 웃었다. 둬시간 재미있게 마시다가 준이는 강사장님과 같이 선배님 집을 나왔다. 이튿날 아침. 현지는 아침상을 차려놓고 친구와 밥상에 마주앉았다. “너처럼 장학금도 있고 학비도 싼 국립대학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다음 달까지 시험 볼 수 있는 사립대학들에는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센다이보다 도꾜에 대학들이 많기에 도꾜에 돌아가려고 한다.” “너 여기서 대학시험 보겠다고 했잖아.아,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구나.” “아니야.사실은 일본어학교가 래일부터 개학이다.지금까지 출석률은 낮지 않았지만 출석률이 높아야 비자를 연장할 수 있잖아.그리고 작년 12월 초에 도꾜 몇개 대학들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어.그 대학들의 시험을 보기 위해서야.” “그건 좋은데 돌아가겠다고 하니 서운하구나.내가 엊저녁에 하고 싶은 말을 꺼내서 네가 간다고 생각하니 너한테 미안하기 그지없구나.” “나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말라.일자리도 선뜻이 소개해주고 작은 원룸이지만 불편하다는 티 내지 않은 너한테 고마울 뿐이다.” “난 지금까지 여기서 친구도 없이 홀로 보내왔어.네가 가면 난 또 어떻게 보내야 하니?” 친구가 눈물이 글썽해있었다.현지는 잠간 뜸을 들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그만두겠다고 사장님께 얘기하려 한다.너도 사장님께 잘 말해주렴.” “그럼 언제 도꾜에 가려구?” “오늘 가련다.” “뭐?...” 친구가 멍하니 현지를 쳐다보았다. 오전 아홉시 반에 현지가 가게에 들어서니 기다렸다는 듯이 홀에 서있던 사장님이 카운터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영미한테서 들었어요.” 친구 이름이 영미였다. 현지는 좋은 친구가 있어 여기에 왔는데 여기 대학들의 학비가 생각보다 비싸고 도꾜 몇개 대학들의 시험이 다가오기에 도꾜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면접할 때와 달리 오늘 그만두게 되여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괜찮아요.그럼 대학시험 잘 봐요.” 사장님이 계산대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현지에게 건네주었다. “로임이예요.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보너스 겸 왕복 교통비로 2만엔 더 넣었어요.”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현지는 사장님께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가게를 나왔다. 열흘 남짓 아르바이트를 한 가게였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가게였고 다른 가게 사장님들과는 완연히 다른 한국인 녀사장님이였다.친구가 이 가게에서 줄곧 아르바이트를 해온 리유도 알만 했다. 집에 들어서자 친구가 현지를 부둥켜안았다.다가올 리별을 앞두고 둘은 어린애들처럼 엉엉 목놓아 울었다.고향이 그립고 아무리 힘들었어도 이렇듯 서럽게 운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한참 후,친구가 현지의 어깨를 다독였다. “좋은 소식 기다릴게.힘내.” “고마워.나 잘할게.” 센다이역에서 친구와 헤여져 신깐센에 오른 현지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 도꾜에 돌아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달 방세는 중국에 가기 전날 집주인 은행구좌에 입금했었다.집주인한테 집을 나가겠다는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였다.그렇지 않으면 오늘 어디에 있는단 말인가.그래도 들어갈 집이 있으니 한시름이 놓였다.래일 개학이기에 학교에 나가야 한다.작년에 입학원서를 제출한 여러 대학들의 시험준비도 해야 한다.헌데 준이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가? 도꾜에 도착하여 전차를 갈아타고 집에 들어오니 오후 두시였다.현지는 트렁크를 정리하려다가 피곤기가 몰려와 그대로 잠자리에 누웠다. 얼마나 잤을가,현지는 집전화벨소리에 잠에서 깨여났다. “오랜만이다.너 휴대폰은 왜 안 돼?중국에 갔다가 언제 왔나?” 재작년에 어느 일본어학교에 류학 왔다가 지금 불법체류하고 있는 친구였다. “며칠 전에 왔다.” “오늘 저녁에 아까사까(赤坂)에 가자.일본 남자들과 저녁도 같이 먹고 노래방에도 같이 가자.” “지금 밖에 나가야 한다.미안하다.이만 끊는다.” 현지는 수화기를 덜컥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이젠 갈 길이 다르잖은가. 네시를 넘긴 시간이였다.점심을 거른 탓에 배가 고팠다.랭장고를 열어보니 닭알 몇알과 중국에서 가져온 된장 밖에 없었다.슈퍼에서 감자를 사가지고 와서 장국이나 끓여먹고 싶었다.주방에 들어가 먼저 밥을 지어놓으려다가 쌀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쌀도 사야 했다.쌀은 전철역 앞 마트에 가서 사군 했다.마트는 중화료리점 건너편에 있었다.문득 중화료리점에 같이 들어갔던 준이가 생각났다. 현지는 방에 들어와 침대 우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손에 들고 창문가에 다가섰다. 준이한테 전화를 하는 게 옳은가?어제 센다이에 찾아온 걸 뻔히 알면서도,오늘 도꾜에 돌아와서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례의에 어긋나는,결례를 저지르는 행위가 아닌가? 오늘 차라리 이젠 다른 녀자를 만나라고 마지막으로 전화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현지는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준이의 휴대폰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모시모시.” “저예요.” “현지씨?” 준이의 놀라워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현지는 가슴이 찌르르 저려왔다. “네,오늘 도꾜에 돌아왔어요.래일부터 일본어학교가 개학이여서요.” “그래요?그럼 만나서 얘기해요.저...니시닛뽀리(西日暮里)역에서 만나요.” 준이가 전화를 끊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해있고 한국 음식가게들도 많은 니시닛뽀리는 오지와 오까찌마찌 중간역에 있었다. 창문가에 서있던 현지는 전화에서 하지 못한 말을 해야 하는가 궁리하면서 집문을 나섰고,베란다 빨래줄에 빨래를 널다가 현지의 전화를 받은 준이는 현지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면서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만날 사람은 다시 만나는 것인가?다시 만날 이 날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던가? 준이는 개찰구를 나온 현지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꿈인지 생시인지 눈앞에 있는 준이를 마주보며 현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갑군요.” 전철역 출구를 나와서 준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국 음식점들이 많기에 여기서 만나자고 했어요.뭘 먹고 싶어요?다섯시가 넘었는데 저녁을 먹으면서 얘기 나눠야죠.” 준이를 다시 만나고 보니 이젠 다른 녀자를 만나라는 말은 입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준이가 정말 멋지고 훌륭한 남자로 보였다.친구 말 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이제 대학에 입학하고 비자를 연장하면 되잖은가. 현지는 잠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오뎅 먹을가요?” “오뎅?하하,오뎅은 센다이 오뎅이 맛있잖아요?” “센다이에 간 날 친구가 먹자는 걸 나중에 먹자고 했어요.” “그래요?아오바구 오오마찌의 어느 오뎅집이 맛있어보였는데 다시 갈 수도 없군요.” “그건 무슨 말씀인가요?” 모르쇠를 놓는 자기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려는지 준이가 말없이 쳐다보기에 현지는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요?” “저...혹시 어제 오후에 오오마찌 어느 헤어솝 앞에서 두 녀자를 만나지 않았어요?” “그건 어떻게 알아요?” “다름 아닌 불고기점 사장님과 저의 친구였어요.친구한테서 들었어요.” “네?그런 일이였군요.어제는 내가 현지씨를 찾으러 센다이에 가고 오늘은 현지씨가 나를 만나러 도꾜에 왔군요.” “일본어학교가 래일부터 개학이여서 왔다고 말했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지는 오늘 준이를 잘 만났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갑자기 꼬르륵 하고 배속에서 소리가 났다.방금 전에 얼굴이 화끈 뜨거워났는데 이번엔 이런 망신까지 다 하다니?다행히 소리가 낮아서인지 준이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작년에 회사 직원들과 같이 갔던 육회집 옆에 오뎅집이 있더군요.그럼 거기로 가요.” 현지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겨놓으면서 준이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유끼노후루마찌오(雪の降る街を)...” “일본노래네요.” “어제 센다이에 큰눈이 내렸죠.현지씨와 눈 내리는 거리를 손 잡고 걸었으면 했어요.오늘 도꾜에 눈은 내리지 않지만 이 노래가 생각나는군요.” 현지는 곱게 웃으며 준이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오뎅집에서 둘은 술잔을 부딪쳤다. 오늘 오뎅이 참말로 맛있었다.오늘처럼 오뎅이 맛있을 수가 없었다.현지와 같이 먹으니 이보다 맛있는 음식이 이 세상에 더 없을 것 같았다.어제 오뎅집에 들어갔더라면 오늘이 있었을가! 준이는 현지와 얘기를 나누면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일본어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출석률 같은 건 모르지만 래일부터 매일 학교에 가요.그리고 대학에 입학하면 학비는 근심 말아요.” “아니예요.그러면 제가 미안하죠.” “미안할 게 없어요.현지씨를 사랑하니깐요.” “저를 진짜 사랑해요?” 현지는 자기를 진짜 사랑하는가고 묻고 싶었다. “네,사랑해요.영원히 사랑할게요.” “저보다 더 좋은 녀자들이 많잖아요.부모님들이 저를 동의하겠어요?” “부모님들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근심 말아요.” “고마워요.” 이튿날부터 현지는 매일 학교에 다녔다.고중을 졸업한 지 5년이 되였지만 다들 수월하다고 말하는 외국인류학생대학시험도 보지 못할가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하면서 여러 대학들의 시험을 보았다. 찬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오는 어느 날,현지는 어느 대학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답안을 채 쓰지 못하고 시험장을 나왔다.풀기 어려운 고중수학시험이였던 것이다.대학시험은 생각 외로 만만치가 않았다.1월 말과 2월 초에 본 세개 대학도 어떻게 될지 알 바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가?이제 시험 볼 수 있는 대학은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이러다가 어느 대학에도 입학하지 못하면 어쩐단 말인가?작년에 선생님들의 권고에 여러 대학에 입학원서를 제출하면서 괜한 돈을 팔지 않았는가?이제 비자를 연장하지 못하면 중국에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불법체류를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이번엔 누구도 모르는 오사까나 교또 아니면 후꾸오까 쪽으로 멀리 도망가버리고 싶었다.그러면 어렵사리 다시 만난 준이는 또 어쩐단 말인가? 헛갈리는 심정을 가까스로 달래며 아빠트 계단을 올라왔을 때 집 우체통에 1월 말에 시험 본 대학 편지봉투가 들어있었다. 현지는 집에 들어와 편지봉투를 뜯었다. 이게 뭔가! 입학허가서였다. 아,대학에 입학했구나! 대학에 입학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줄줄 흘러내렸다. 현지는 눈물을 훔치고 학비내역을 보았다.학비입금은 다음 달 초까지였다.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조금 모자랐다.그렇다고 준이한테 학비에 관한 말은 할 수 없었다.준이한테 이 대학은 아직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모레 시험 보는 대학은 이 대학처럼 학비가 비싸지 않았다.이미 시험 본 대학들의 입학허가서도 기다려볼 판이였다. 현지는 입학허가서를 책가방에 정히 넣어두고 모레 시험준비를 하려고 다시 책상에 마주앉았다. 한편,준이는 현지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가,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가 근심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던 현지가 마지막 대학시험을 보는 날 점심 휴식시간이였다. 현지를 생각하면서 회사 근처를 산보하던 준이는 선배님 집에서 만났던 강사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인 녀직원이 남편 따라 나고야(名古屋)에 가게 되는데 비서직으로 입사할 수 있는 한국 녀성 아니면 조선족 녀성을 소개할 수 없는가며 회사에서 비자연장도 해줄 수 있다는 것이였다.그날 저녁 선배님 집에서 강사장님이 녀자친구는 있겠죠,하고 묻기에 아직 없다고 대답하기도 무엇해서 한고향 조선족이고 지금 일본어학교에 다니는 녀자친구가 있는데 대학입시준비를 하고 있다고 능청스레 대답했었다. 혹시? 준이는 아는 한국 녀성은 대학원 동창생 밖에 없고 지금 전자회사에 근무한다고 말하고 나서 어떤 조선족 녀성을 수요하는가고 물었다.일본어학교를 다니는 조선족 학생도 괜찮다며 녀자친구는 지금 대학입시준비를 하고 있는가고 묻기에 오늘도 대학시험을 보는데 취직준비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그랬더니 래일 오전 아홉시에 녀자친구를 회사에 면접하러 보내줄 수 없는가는 것이였다. 과연 강사장님이 현지를 비서직으로 입사시키려는 것이였구나! 그런데 현지가 비서직을 해낼 수 있을가?비서직 같은 건 배우면서 얼마든지 해낼 수도 있잖은가! “감사합니다.그럼 래일 강사장님 회사에 보내겠습니다.잘 부탁드립니다.”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준이와 현지는 조용한 스시점에서 만났다. “시험 잘 봤어요?오늘이 마지막 시험이라 했죠?” “네,이젠 시험 다 봤어요.수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그래요?입학허가서가 내려온 대학은 없어요?” 현지는 아직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책가방 안에서 그저께 입학허가서를 꺼냈다.입학허가서와 학비내역을 보던 준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괜찮은 대학이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군요.시험이 끝났는데 맥주나 마시죠.” 현지는 혼자서 맥주를 마시는 준이를 의아쩍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학비가 비싸도 왜서 축하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수고했다는 말도 없을가?혹시 학비 때문에 마음이 변한 게 아닐가? 준이가 정색을 하고 현지에게 물었다. “무엇때문에 학비가 비싼 사립대학에 들어가려고 해요?” 현지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내가 사립대학들의 시험을 보는 걸 번연히 알면서 오늘은 왜서 이렇게 나올가,내가 왜서 그 어려운 대학시험을 보기 위해 오늘까지 밤낮없이 참고서적들을 뒤적이며 고생해왔을가 생각하니 서러움이 앞서면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올랐다.학비는 절로 해결할 테니 근심 말라고 말하려다가 내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대답했다. “학비가 비싸도 경제학과를 배우고 싶어서요.” “경제학과를 배워서 뭘 하려구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졸업하면 좋은 회사에 취직하려구요.” “한가지 더 물어볼게요.학비를 기한내에 입금할 수 있어요?” 역시 학비 때문이구나! 현지는 래일부터 아르바이트를 구해보겠다고 말하려다가 바꿔 말했다. “네,학비입금은 문제없어요.” 준이가 하하 하고 소리내여 웃었다. “롱담해서 미안해요.래일 오전에 어느 회사 면접을 봐요.” “네?아까부터 롱담이였어요?놀랐잖아요.방금 면접 보라고 하셨어요?제가 어떻게 회사 면접을 다 봐요?제가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거야 현지씨 수평에 달린 거죠.” 현지는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일본에서 취직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헌데 무슨 회사예요?왜 이제서야 말하세요?” “오늘 점심에 전화 왔더군요.” 준이는 강사장님 회사와 오늘 점심 통화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강사장님 참 고마운 분이시군요.” “센다이에 갔다온 날 저녁에 선배님 집에서 강사장님을 처음 만났어요.강사장님이 녀자친구가 있는가고 묻기에 일본어학교를 다니는데 지금 대학입시준비를 하고 있다고 술김에 대답했어요.오늘 점심에 전화 왔을 때는 취직준비도 하고 있다고 말했어요.제가 그 말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저 강사장님 회사에서 비서직을 할 수 있어요.준이씨한테 미안하지 않도록 래일 면접 잘 볼게요.” 준이의 술잔에 맥주를 따르고 현지가 잔을 들었다. “건배해요.오늘은 저도 마시고 싶어요.” 얼굴도 예쁘장하고 목소리도 고운 현지가 비서직 면접에는 통과될 거라고,대학입학허가서도 있기에 강사장님도 흔쾌히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준이는 웃으며 현지와 술잔을 마주쳤다. 이튿날 저녁,강사장님과 부인님 그리고 선배님과 같이 시나가와(品川) 어느 불고기점에서 식사를 하고 밖에 나온 준이와 현지는 강사장님께 다시 인사를 올렸다. “강사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사장님 정말 고마워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조선족들이 일본에서 서로 힘을 합쳐 잘 살아야죠.” 부인님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준이와 현지한테 한발 다가섰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려요.천상배필이네요.” “우리 가요.” 강사장님이 부인님과 같이 택시를 타고 먼저 자리를 떴다. “준이와 같이 이제 우리 집에도 놀러오세요.저도 일이 있어 가봐야겠어요.” 선배님이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뒤돌아섰다. “오늘 면접에 합격되니 정말 기뻐요.” 사람들이 보건 말건 준이는 현지를 꼭 끌어안았다. “현지씨를 다시 만나지 못하는 줄로 알았어요.편지를 받고 센다이에 찾아갔지요.현지씨가 도꾜에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고 대학시험을 보겠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어요.그동안 현지씨 정말 고생 많았어요.수고했어요.취직 축하해요.” “준이씨 고마워요.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현지씨가 걸어온 길이 어쩌면 굴곡적인 곡선 같군요.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성공했다고 말해야겠죠.” “지나온 날들이 정말 꿈만 같아요.오늘이 있은 건 준이씨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예요.” “이젠 대학생이 아닌 월급 받는 회사 직원이 되였군요.오늘은 참 좋은 날이군요.우리 좀 걷죠.” 한쌍의 련인이 화려한 네온불빛이 명멸하는 밤거리를 나란히 거닐며 앞날을 약속하고 있었다... 박명선  길림성 룡정시 출생.1987년 연변대학 일본어학부 졸업.요코하마국립대학 교육학 석사과정 졸업.일본류학시절 칼럼 을 마이니치신문에  발표.한국 ‘문학의 강’ 단편소설부문 신인문학상 수상.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회원.중단편소설 다수 발표.현재 광주 거주.
11    (중편)서른 살,그해 가을 댓글:  조회:1620  추천:0  2021-03-05
2021년1호 중편소설   서른 살,그 해 가을     박명선           1.   현우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도쿄 신쥬쿠(新宿)에서였다.한국 유학생 준호와 같이 키노쿠니야(紀伊国屋)서점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신쥬쿠역에 왔을 때 광장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경쾌한 선율에 이어 중후한 노랫소리가 울려왔다.저녁 무렵이면 신쥬쿠에 밴드의 거리공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아르바이트시간이 늦다며 먼저 가겠다는 준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현우는 사람들을 비집고 제일 앞줄에 들어섰다.서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 외국인들이 이름 모를 타악기를 두드리며 일본어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관중들 가운데는 조소를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고,동전을 뿌려주는 사람들도 있었다.요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바로 여기서 촬영된 게 아닌가 싶었다. "저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요?" 현우는 옆에 있는 한 여인에게 서슴없이 물었다. "이란인들이에요." 이란인들이라고 대답하고 여인은 흥미가 없다는 듯이 사람들 속을 빠져나갔다. 국적을 분간키 어려운,30대 좌우의 날씬하고 예쁜 여인이었다.     2.   도쿄 시교 작은 시 변두리에 위치해 있고 전철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 3쵸메(丁目) 2번지.방값이 싼 곳을 찾다 보니 도쿄에서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저녁 아홉 시를 금방 넘긴 이 시각,집 골목을 드나드는 승용차 몇 대만 보일 뿐 행인의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다.조으는 듯한 가로등과 커튼으로 흘러나오는 아빠트들의 희미한 불빛으로나마 사람 사는 동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베란다에서 멋쩍은 동네야경을 바라보던 그녀는 갈아입을 속내의를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욕실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이웃집은 어둑컴컴했다.이웃집에 주민이 없는 듯 보였다.그녀는 창문을 열어놓고 낯선 욕실에 적응하기 위해 잠깐 욕실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샤워를 마친 뒤 욕실전등을 끄고 방에서 주스를 마시다가 욕실창문을 닫으려고 다시 욕실에 들어갔을 때 이웃집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이웃집 2층에 주민이 있었구나.주인이 금방 집에 들어온 것일까? 그녀는 욕실창문을 도로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저녁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준호는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주방에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주방창문으로 이웃집 전등불빛이 환히 비쳐왔다.준호가 여기서 산 지도 이젠 1년이 되었다.비록 지금까지 얼굴도 모르고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도 모르지만,한달 전까지만 해도 이웃집에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고 예의인 듯 창문을 꽁꽁 닫아걸고 어슴푸레 보이는 집안에서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다.헌데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창문이 활짝 열려져있었다. 혹시 집주인이 밤중에 와서 창문을 열어놓고 환기시키고 있는 중일까? 이상하게 여긴 준호는 반투명유리로 된 주방창문을 빼꼼히 열고 이웃집을 건너다보았다. 이게 뭔가! 아슬아슬한 속옷차림을 한 젊은 여인이 눈에 띄었다.하얀색 팬티를 손에 쥐고 무슨 물건을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처음 보는 여인이었다.집주인일까?그리고 저기는 침실일까?이웃집 실내구조는 알 수 없었다.여인은 이웃집 남자가 어둠 속에서,불과 다섯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자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죄의식을 느낀 준호는 더 이상 여인을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얼른 방으로 들어와 낮은 소리로 한참 동안 티비를 보다가 다시 주방으로 갔다.여인은 보이지 않고 불빛만 그냥 비쳐왔다.주방전등을 켜면 스스로 자신을 노출시킨다고 생각되어 전등을 켜지 않고 되도록 소리를 작게 내며 라면을 끓였다.끓인 라면을 그릇에 담아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준호는 하마트면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얼핏 창밖을 내다보았더니 여인이 흰 타올로 젖은 알몸을 닦고 있었다.창문으로 더운 김이 새어나오는 걸 보아 여인이 아까 욕실에서 샤워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금방 샤워를 마쳤던 것이다.그러고 보니 라면을 끓이느라 잘 듣지는 못했지만 이웃집에서 물소리가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준호는 삽시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고 만 사람처럼 덴겁하여 방으로 뛰어들어갔다.여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창밖을 내다보면 어쩌랴 제꺽 방전등을 꺼버렸다.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티비 화면불빛을 빌어 라면을 먹었다.주방 안에 있는 냉장고를 열면 빛이 흘러나갈까봐 김치도 꺼내 먹지 못했다. 다 먹은 라면그릇을 들고 주방에 간 준호는 이번에도 주방전등을 켜려고 하지 않았다.이웃집 욕실전등은 이미 꺼져있었지만 주방전등을 켜면 여인이 금세 알아차릴 것 같아서였다. 여인은 갓 이사 온 이웃임이 틀림없었다. 주방창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온 준호는 그제야 방전등을 다시 켰다.아까 방으로 뛰어들어오는 바람에 라면국물이 흘러내려 타타미가 여러 군데 얼룩져있었다.준호는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여먹은 자신이 바보스러웠고,여인의 몸매를 훔쳐본 자신이 음흉스러웠다. 아니,내가 보여달라고 했나.여인 절로 보여준 거지.그런데 언제까지 주방전등도 켜지 못하고 죄를 진 사람처럼 어둠 속에 숨어서 살아야 할까?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을 굴리던 준호는 후다닥 일어나 주방에 가서 전등을 켰다.지금 주방전등을 켜지 않으면 내일 이 시간에 발가벗은 여인이 또다시 창문가에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엔 이웃집에도 주민이 있다고,창문을 열어놓으면 다 들여다본다고,다 보인다고 여인에게 떳떳하게 선호하고 싶었다.  아랫집 창문에 입거자모집이라고 써붙인 종잇장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비행기도,여자도 타보지 못했다는 40대 샐러리맨이 독신으로 1층에 살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인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그래도 한국어도 배워주고 색다른 음식을 하면 몇 번이나 불러서 같이 술도 마셨잖은가.하여간 일본 것들이란 관건적 시각이면 나몰라라 한다니깐.이번엔 또 어떤 게 들어올런지.헌데 이쁘장하게 생겼고 30대 좌우로 보이는 이웃집 여인은 뭘 하는 여자일까? 샤워나 하려고 욕실에 들어가려던 준호는 그대로 잠자리에 누웠다.욕실 안에 공기창이 있는데 공기창으로는 이웃집 바람벽만 휑하니 내다보일 뿐이다.하지만 오늘은 누가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 같아 샤워를 하고 싶지 않았다. 준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예쁜 이웃집 여인의 누드를 머릿속에 다시 떠올려보았다.     3.   이튿날 저녁,전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려던 준호는 앞에서 잰걸음을 놓고 있는 여인이 이웃집 여인임을 알아보았다. 왜 이사 온 이튿날 늦게 귀가할까?잔업을 마친 회사 직원일까? 준호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그녀가 집 부근 패밀리마트로 들어가자 멈춰서서 눈에 티가 들어간 척 눈을 비비며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볼까고 궁리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밤중에 이웃집 여인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 같아 머쓱한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이웃집에 젊은 여인이 살고 있다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가 벌써부터 궁금해지고 괜히 들떠지려고까지 하는 이상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 엊저녁에 켜놓았던 주방전등이 켜진 대로 기다리고 있었다.아침에 집을 나가면서 전등을 끄는 걸 깜빡 잊었던 것이다.이웃집 1층에는 늙은 부부가 살고 있어 전등은 진작 꺼져있었고,그녀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2층에도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독신일까?그녀가 오늘도 욕실창문을 열어놓는가고 좀 있다가 봐야지! 준호는 주방전등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윗옷을 벗어 옷장에 넣으려다가 그녀한테 정신이 팔려 아침에 전철역까지 타고 간 자전거를 그만 자전거 정류소에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는 전철역까지 걸어가야겠구나! 뒤이어 집 대문에 들어선 그녀는 이웃집 2층 거실전등이 켜져있는 걸 보았다.이웃집 거실과 베란다는 북쪽에 있고,층계는 남쪽에 있었다.구조가 다른 두 아빠트 사이에 그래도 경계선으로 담장까지 세워져있지만 어떤 고명한 건축설계사의 아이디어인지 이웃집과 이마를 거의 맞댄 욕실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집에 들어온 그녀는 패밀리마트에서 사온 빵과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잠깐 생각에 잠겨있었다.오전에 출근하면서 1층 노인들한테는 인사를 드렸다.두 노인은 87세 동갑인데 할아버지는 많이 편찮아 보였다.할머니가 대문까지 바래다주면서 며칠 후에 아들이 와서 두 노인을 노인복지센터로 모셔갈 것이라고 했다.이웃집 1층에는 주민이 없으니 내일 아침 2층 주인에게도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젠 샤워를 하려고 그녀는 욕실에 들어갔다.이웃집은 어제처럼 어둑컴컴했지만 창문은 열려고 하지 않았다.창문을 열지 않으면 이웃집에서 들여다볼 수 없지만 혹시나 하여 창문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샤워를 마치고 아침에 통풍시키느라 열어놓은 창문을 닫으려고 베란다로 갔을 때 불시에 창문이 부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지진인가? 주위는 고요하고 창문으로 불어들어오는 바람에 집안의 커튼이 하느작거릴 뿐이었다. 호~ 그녀는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같은 시각. 양말을 씻어 베란다 빨랫줄에 널어놓고 주방에 들어간 준호는 이웃집 욕실창문은 닫겨있고 불빛만 비쳐오자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냈다.엊저녁에 주방전등을 켜놓았더니 과연 효력을 보았구나 얼굴에 미약한 미소를 피워올렸다.내일 스케줄을 생각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집이 약간 움직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주방의 그릇들이 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움찔 몸을 떨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밖은 예전처럼 어둑시그레하고 조용하기만 했다.큰 지진은 아닌 것 같았다.티비를 켜보니 지진속보문자는 아직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일본에 와서 준호의 가장 큰 변화는 여느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사물의 움직임과 소리에 대해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다.이른 새벽 길옆 쓰레기통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쥐나 고양이가 아닌 까마귀들이 날카로운 부리로 비닐주머니를 헤집어대는 소리이고,깊은 밤 아랫집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소리는 샐러리맨이 허튼 상상을 하면서 가만히 AV비디오를 보는 소리라는 것도 알아낼 수 있었다. 아까 싱크대 옆에 얹어놓은 그릇들의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들려온 것은 고요한 정적 때문일 것이리라. 갓 이사 온 그녀도 얼마나 놀랐을까? 준호는 티비 볼륨을 조금 높여놓았다.     4.   비가 내릴 듯 흐릿한 이튿날 아침,준호가 학교에 가려고 골목길에 나섰는데 이웃집 대문 앞에 앰뷸런스 한 대가 서있었다.달려가 보았더니 이웃집 1층 할머니가 올봄에 한 번 인사를 나누었던 할머니의 아들에게 사연을 얘기하고 있었다.할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것을 뒤늦게 발견한 할머니가 방금 전에야 아들한테 전화를 했던 것이다.길 건너편 동넷집 사람들은 강 건너 불 보 듯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준호는 노인들을 한 두 번 밖에 들여다보지 않았는데도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는 할머니의 아들을 보기가 무척 송구스러웠다.앰뷸런스 뒤를 따라 달리는 승용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을 때 뒤에서 급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무심코 뒤돌아보니 이게 누구인가! 그녀였다. 정작 맞닥뜨리고 나니 일순 어찌할 바를 몰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준호한테로 그녀가 다가와서 고운 목소리로 먼저 물었다. "미안해요.이 부근에 살고 계시는 분이시죠?" "네.저기 2층에 살고 있습니다.김입니다.잘 부탁드립니다." 준호가 가리키는 아빠트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생긋 웃었다.가쯘하고 하얀 이빨이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해주었다.그녀도 자기 집을 가리켰다. "2층에 갓 이사 온 모리타(森田)에요.앞으로 잘 부탁드려요.김상은 재일한국인인가요?" 재일한국인인가는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준호는 타이완 유학생이라고 골려주려다가 한국 유학생이라고 사실 대로 신분을 밝혔다. "반가워요.헌데 1층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요?"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었다고 합니다.아드님이 와서 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그렇군요.어제 금방 인사를 드렸는데......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에요?" 책가방을 멘 준호를 의아스레 쳐다보며 그녀가 다시 물었다. "학교로 가는 길입니다.혹시 전철역까지 가시면 같이 걸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준호와 같이 걸었다.준호도,그녀도 처음 만난 이웃과 전철역까지 같이 걸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준호는 엊저녁에 자전거를 전철역 자전거 정류소에 두고 온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고,그녀는 인사하러 나오는 길에 때마침 이웃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자전거를 탔더라면 준호는 15분 정도 늦게 집에서 나왔을 것이고,과일점에 들려 과일이라도 사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반시간 정도 늦게 집에서 나왔을 것이었다.그랬더라면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15분 동안 그들은 서로에 대해 초보적인 요해가 있었고,전화번호도 서로 휴대폰에 저장해두었다. “저는 쇼와(昭和)49년생(1974년생)입니다만......" 그녀의 나이가 다시 궁금해진 준호가 웃으면서 자기의 출생년호를 말했다. "그럼 서른 살 동갑이네요." 그녀도 반갑다는 듯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몇 시에 퇴근해요?" "오후 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하기에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습니다.불편하지 않으시면 저녁에 식사라도 같이 할까요?"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그러지요." 플랫트홈에서 상행선 전차에 먼저 오른 그녀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준호도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날 저녁 전철역 부근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택시에 앉아 집으로 가는 길에서였다.준호가 아무 말도 없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강아지나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준호는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그건 왜 묻죠?" "어제 아랫집에 인사하러 갔더니 귀여운 고양이가 있더군요.저도 이제 고양이나 한 마리 키워보려구요." 한달 전부터인가,몸뚱이에 흰 점이 박힌 검고 큰 고양이가 이웃집 마당에서 어슬렁대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낮에 보기와는 달리 퇴근길에 어둠 속에서 노려보는 듯한 그 놈의 시퍼런 눈빛이 맞혀올 때면 준호는 뒷덜미가 서늘해져 정신없이 집안으로 뛰어들어갈 때도 있었다. "그 고양이 숫컷인가요,암컷인가요?" 그녀가 입을 싸쥐고 키득키득 웃었다. "암컷이래요.그건 왜 묻죠?" "그저 알아두려고요." 둘이 주고받는 말이 재미있는지,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택시기사의 빙그레 웃는 옆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집앞에서 택시를 내렸다.여덟 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일찍 주무십시요." "저는 조금 더 얘기하고 싶은데요.우리 저기 걸상에 잠깐 앉아요." 대문 옆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앉아있던 긴 나무걸상이 그대로 놓여있었다.늦은 시간도 아니기에 준호는 그녀와 같이 걸상에 나란히 앉았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저의 몸 봤죠?" 식사를 하면서 그녀가 그저께 저녁 전등불빛에 대해 물어보자 준호는 라면이나 끓여먹으려고 주방전등을 켰을 뿐이었다고 대답했었다. "몸을 봤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준호는 짐짓 모르쇠를 놓았다. "봤다고 생각하는데요." "못 봤습니다." 준호가 딱 잡아떼자 그녀가 호호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이에요.헌데 1층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요.거의 1년 이웃에 살고 있었지만 전화번호도 몰라요." "여긴 다 그래요.오늘 대접 잘 받았어요.그 답례로 내일 차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어요.내일이 토요일이잖아요." 오늘 같이 식사를 했는데 내일 또 차를 마신다는 게 어떻게 생각해봐도 아닌 것 같았다.준호는 어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은 좀 바빠서 미안합니다." "김상은 아들이 세 살이라 했죠.한국의 부인은 언제 데려와요?" 저쪽 큰길에서부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쳐왔다. "그럼 내일 다시 뵈요.잘 주무세요." 골목을 지나가는 동넷집 자동차 불빛에 얼굴이 드러날까봐서인지 그녀는 몸을 돌려 대문안으로 들어갔다.     5.   비몽사몽 꿈결에 젖어들기 좋은 토요일 아침,아르바이트도 없는 날이라 늦잠이나 실컷 자려던 준호는 빗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여덟 시 반이었다.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북쪽 큰길에는 우산을 펼쳐든 행인들이 오가고 있었다.다시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빠금히 열고 이웃집 동정을 살펴보았다.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마당에 심어놓은 감나무에서 나뭇잎들이 빗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신가? 집문을 나가서 층계를 절반 내려가야 담장 너머로 이웃집 1층과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보인다.슬리퍼를 껴신고 층계를 내려가보려다가 준호는 집문을 도로 닫았다.팬티바람에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화장실에 들렸다가 방에 들어와 아침은 뭘 먹을까고 궁리하고 있는데 똑똑 집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지난 토요일 아침에는 외국인등록증을 보여달라며 위엄 있는 경찰 두 명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경찰들이 또 찾아왔는가.청바지를 주어입고 집문을 여니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작은 선물함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그녀가 서있었다. "오하요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인사하러 다시 왔어요.과일을 사려다가 이걸 샀어요.받아주시면 고맙겠어요."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이게 뭔가요?" "떡이에요." 떡을 사가지고 집을 찾아온 사람을 문밖에 서있게 할 수 없어 준호는 그녀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이 깨끗하군요.이 동네는 보기와는 달리 너무 고느적하네요.김상은 중국인 친구도 있어요?"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중국인 친구는 1년 선배 밖에 없어요.” “1년 선배는 중국 어디서 왔어요?” “동북에서 왔습니다.” “동북 어디서 왔어요?” 그녀가 바투 물었다. “연변입니다.그 친구는 조선족입니다.” “아,연변이군요.일본에 온 조선족들이 많죠.그런데 저쪽은 여기보다 주민들이 많아 보이네요."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열려진 창문으로 북쪽 큰길을 내다보았다. "그 쪽엔 아빠트단지와 상가들이 많습니다.어서 앉으세요." "아니에요.저 이만 실례하겠어요.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주방에 가서 창문 너머를 기웃거리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층계를 내려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준호는 그녀가 사온 알록달록한 색상의 일본떡들을 맛보려다가 잠깐 생각해보았다.그녀가 인사하러 다시 온 것 같지 않았다.그럼 주방창문으로 이웃집 욕실을 훔쳐볼 수 있는가고 확인하러 온 걸까?헌데 왜 엊저녁에는 묻지도 않던 중국인 친구가 있는가고 물어볼까?왜 중국인 친구가 어디서 왔는가고까지 물어볼까? 둬 시간이 지났을까,준호가 보던 참고서적을 놓고 화장실에 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그녀였다. "저에요.찻집에 갔다가 점심식사를 같이 하려고 했는데 비가 더 크게 내리네요.저의 집에서 차 한 잔 할까요?" 집 구경도 할 겸 준호는 별로 사양하지 않았다. "그럼 인츰 갈게요." 준호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집으로 뛰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그녀는 반색하며 맞아주었다.그녀가 주방에 가서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 코드를 꽂으며 방에 들어가 좀 기다리라고 웃으며 말했다. 준호는 방으로 들어갔다.반 쯤 열려진 옷장 안에는 그녀의 옷가지들이 걸려있었고 책상 위에는 그녀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찍은 사진이 놓여있었다.몇 년 전에 찍은 사진 같아 보였다.남자의 팔을 겯고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약간 기댄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헌데 이게 어딘가? 백두산 천지가 아닌가! 허허,이 여자가 중국에 다 갔다왔군. 베란다에는 방금 전에 씻은 듯한 속내의들이 널려있었고 창턱에는 빈 화분통 두 개가 놓여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찻잔을 받쳐들고 방에 들어왔다. "제가 욕실을 좀 보고 올게요." 준호는 노란 일본차를 따라놓고 욕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지척에서 배고픈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울려왔다.이 동네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처음 듣는 준호는 바짝 귀를 강구었다.잇따라 울려오는 것은 기괴스럽고 앙칼진 웬 짐승의 울음소리였다.아랫집 암코양이가 틀림없었다.마치 그 놈이 왜 여자 혼자 사는 윗집에 들어왔는가고 울부짖으며 당장 천정을 뚫고 엉덩이를 물어뜯을 것 같아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섰다.그와 동시에 아랫배에 통증이 오며 뇨기를 참을 수 없었다.아까 화장실이 바빴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집에서 뛰쳐나왔던 것이다. 욕실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 같았다.욕실에서는 물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려왔다. 저 여자가 손님을 방에 앉혀놓고 샤워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아까 떡을 사가지고 우리 집에 왔다가 집에 돌아와서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려다가 나한테 전화를 한 게 아닐까?왜 지금 샤워를 하고 있을까?   암코양이 울음소리가 또다시 아츠랗게 울려왔다.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었다.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집문을 열고 아랫집 고양이가 발자국소리를 들을세라 발볌발볌 층계를 내려와 대문 밖으로 나왔다.집이 코앞인데도 집에 들어서기 전에 바지에 싸지를 것만 같았다.집으로 뛰어가려 했지만 뛸 수도 없었다.비가 내려서인지 골목에는 행인도,차량도 보이지 않았다.일본에 와서 시퍼런 대낮에 밖에서 소피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처음이건 대낮이건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 준호는 담장 앞으로 한 발 다가가 바삐 허리띠를 풀어헤쳤다. 후~ 긴 날숨과 함께 갇혀있던 수돗물이 기분 좋게 터져나왔다.이제야 살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담장을 더 질펀하게 적셔놓으려고 오줌발을 더 높게 올리쏘고 있을 때 호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이 울렸다.준호는 한 손으로 비스듬히 내려진 바지를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모시모시." "슈퍼에 가셨어요?" 슈퍼는 무슨 개떡 같은 슈퍼?비 내리는 밖에서 용무를 보고 계시는 거지. 속으로 그렇게 대답하며 준호는 전화에 대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친구한테서 전화가 와서 지금 전철역으로 가는 길입니다." 통화를 마친 준호는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바지춤을 올렸다.무거운 것을 부리우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준호는 집으로 뛰어올라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방금 전의 일을 생각해보니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부지중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준호는 성급히 중국에서 온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6.   현우는 경주에서 중학교 교원을 하다가 일본에 온 준호의 1년 선배이지만 준호와 동갑이고 집도 세 정거장 거리여서 준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준호는 현우의 첫 번째 한국친구이기도 했다. 구질구질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전, 현우가 아르바이트 휴식시간에 캔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준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오늘은 저녁 다섯 시에 아르바이트가 끝나기에 오랜만에 준호와 술도 한 잔 할 겸 현우는 퇴근길에 준호네 집에 가기로 약속했다. 준호네 집에는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패밀리마트에서 맥주를 들고 계산대로 간 현우는 자칫 앞에 있는 여성손님에게 인사를 건넬 뻔했다. 며칠 전 신쥬쿠에서 만났던 그녀였다. 계산대에서 값을 치른 그녀가 먼저 패밀리마트를 나갔다.큰길을 건너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현우는 그녀가 준호네 이웃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두망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친구 이웃집에 살고 있은 여자였구나.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묘한 일도 다 있을까? 준호는 저녁준비로 삼겹살에 김치를 볶아놓고 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의 이웃집 여자가 신쥬쿠에서 만났던 여자더구나.며칠 전에 우리가 신쥬쿠에 갔을 때 내가 공연을 보려고 제일 앞줄에 들어섰는데 그 여자가 내 옆에 있더라.서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공연을 하기에 저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고 물었더니 이란인들이라고 대답하고 자리를 뜨더라.오늘 패밀리마트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 여자가 나를 눈치 채지 못했기에 인사는 건네지 않았다." 현우가 먼저 그녀의 얘기를 꺼냈다. "그래?그 여자가 왜 이사 온 날 신쥬쿠에 갔을까?" "신쥬쿠에 갈 수도 있지." "그 여자 우리와 동갑이던데 사진을 보니 남편은 40대 후반이더라." “40대 후반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는 게 아니냐?" 현우가 웃자 준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정색한 표정을 짓고 왼손 중지로 밥상을 톡톡 두드렸다.뭔가를 생각할 때면 준호가 습관적으로 취하는 동작이었다. "남편이 나가노(長野)지사에 파견되어갔기에 도쿄 시나카와(品川)에서 방값이 싼 여기로 이사 왔단다.그건 그렇다 해도 참 이상한 여자야.엊저녁에 같이 식사하면서 고향이 어딘가고 물으니 우물쭈물하면서 오사카라고 대답하고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여행사에 근무하는가고 물으니 얼굴을 붉히며 관광전문학교를 졸업했다면서 인츰 화제를 돌려버리더라.오사카에서 태어났다면......" “너 추리소설을 자꾸 보더니 무슨 탐정이라도 되겠나?” “탐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엊저녁에 애가 몇 살인가고 물어보니 그저 다섯 살이라며 나에게 애가 몇 살인가고 인츰 되물어오더라.오늘 오전에는 떡을 사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중국인 친구가 있는가고 묻기에 1년 선배 밖에 없고 연변 조선족이라 했더니 연변인가며 일본에 온 조선족이 많다고 하더라.연변은 어떻게 알고 일본에 조선족이 많은 건 또 어떻게 알지?” “여행사에 근무하니깐 알겠지.” “그런데 40대 후반 남자와 백두산 천지에서 사진을 찍었더구나.” “천지가 아니겠지.일본 어느 관광지일 수도 있잖아.” “내가 천지도 알아보지 못하겠어?” 정전되었던 집안에 갑자기 전등불이 환히 켜진 듯한 느낌이었지만 현우는 내색을 내지 않고 있었다. “일본 여행사에서 백두산 뿐만 아니라 설악산에도 갈 수 있는 거지.” 그녀의 얘기를 하며 마시다 나니 어느새 맥주가 거덜나고 말았 다. "오늘은 맥주도 잘 마시고 우스운 얘기도 잘 들었다.내일은 아르바이트가 일찍 끝난다고 했지?나도 내일 일찍 퇴근하니깐 내일 저녁 우리 집에 오라."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자리에 되앉았다. "내일 저녁 그 여자와 같이 밖에서 저녁 먹으면 어떻니?" "그럼 너도 여자를 데려와야 하잖아." "대학교 여동창생을 부를게." 현우가 준호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자 준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대문을 나와서 현우가 골목을 벗어나려 할 때 맞은켠에서 한 여인이 전화를 받으며 마주오고 있었다.현우는 어두운 뉘집 담장 옆으로 비켜 걸었다. "......여행사는 그만뒀어요.저를 다시 찾지 말아요.저 지금 센다이에 와있어요."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의 임자는 모리타,그녀였다.그녀를 외면하고 스쳐지난 현우는 멈춰서서 밤하늘을 무연히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센다이(仙台)인가?내가 지금 동북대학이 있는 센다이에 와있는가?그만뒀다는 여행사는 어느 여행사일까? 그녀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휴대폰이 경망스레 울렸다. "모시모시." "이웃집 김입니다.밤중에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친구와 저녁을 먹고 금방 집에 들어왔어요." "다름 아니라 지금 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인데 친구가 저더러 예쁜 일본여성 한 명을 요청해서  내일 저녁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모리타상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친구는......" "친구는 대학교 여동창생을 부르겠답니다." 어느 나라 친구인가고 그녀가 물어올 것 같아 준호는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앞질러 대답했다. "내일 약속은 없긴 하지만......" "그럼 같이 가는 걸로 알겠습니다.장소는 내일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한편,준호의 전화를 받은 현우는 내일 저녁 여섯 시에 우에노역에서 만나자고 준호와 약속하고 곧바로 최한테 전화를 걸었다. 현우와 대학교 동창생이고,금년 봄에 도쿄 모 대학 연구생으로 온 최는 두 달 전에 도쿄역에서 현우를 만났다.심양역에서 만나 반갑다는 현우의 말을 최는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현우가 웃으면서 생각나지 않는가고 말해서야 대학 2학년 후학기에 일본인 교수가 만주철도부설역사를 강의하면서 심양역은 도쿄역을,대련역은 우에노역을 본 따서 지었다던 기억이 떠올랐었다 "내일 저녁 여섯 시에 대련역에서 다시 만나요." 최는 유머러스한 동창생이구나 속으로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7.   도쿄 우에노(上野)역 동남쪽에는 이전부터 재일동포들이 김치골목이라고 불러왔다는 요코쵸(横丁)시장이 있다.그 시장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현우 아버지의 특산물회사와 거래가 있는 무역회사가 있다.재작년 어느 날,일본에 금방 온 현우는 아버지가 부탁한 선물을 가지고 회사를 찾아가서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요코쵸시장 근처 불고기점에서 사장님과 같이 식사를 했었다. 현우가 그 불고기점에 가려고 한 것이다. 다음 날 저녁 무렵,우에노역에 도착한 최는 출구를 나오기 바쁘게 역사부터 둘러보았다.우에노는 오늘이 처음이었다.도쿄역과 심양역이 비슷했는데 어쩌면 우에노역과 대련역이 또...... "대련역에서 또 만났구만." "어맛!"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최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현우가 웃으며 서있었다. "오랜만이네." "저는 동창생을 만날 때마다 놀라요.오랜만이지만 오늘 분위기를 보고 먼저 집에 갈 수도 있어요." "허허,같이 식사하면 되는 걸 가지고......" "그런데 저 여자는......" 최가 의아한 눈길로 출구 쪽을 보며 말하자 현우는 얼결에 머리를 돌렸다.그녀가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대고 종종걸음으로 출구를 나오고 있었다.현우는 최의 팔을 당겨 옆으로 비켜 서있었다.  그녀가 옆을 스쳐지나면서 출구 앞이라고 말하더니 뒤돌아섰다. 그 순간,셋의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현우는 모르는 척 다시 돌아서서 출구 쪽을 바라보았다.사람들 속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준호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다!" 현우가 손을 흔들자 준호가 웃으며 달려나왔다.현우가 두 사람을 소개하고 나서 그녀한테도 인사를 건네려는데 이게 웬 일인가. 하늘에 솟았는가!땅에 꺼졌는가! 그녀는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다. "모리타도 도착했다고 금방 전화 왔더라." "그래?그럼 어디 있는가 전화해보렴." 발신음은 옆에서 또렷이 들려오는데 대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럼 우리 먼저 천천히 걸어가자." 현우의 말에 준호는 발걸음을 옮겨놓으면서도 휴대폰은 그냥 귀에 가져다대고 있었다. "이 여자 참 이상하네.휴대폰을 꺼버렸구나." "배터리 나갔겠지.좀 있다 전화 올 거다." 현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집에 가겠다고 하는 최를 현우는 기어코 말렸다. 불고기점에서 맥주 첫잔을 마시고 있을 때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준호가 밖에 나가자 현우는 다급히 최에게 물었다. "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그 여자를 알아요?" "그 여자 우리 이웃집에 있던 여자에요." "뭐?!" 현우는 용수철이 튀어오르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못 본 게 아니지?" "아니,4년 전에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한다고 하던데 이사 간 후에 집주인한테서 들을라니 베이징에 갔다던데요.그 여자 중국어도 일본어도 잘한다고 했어요.동창생의 친구가 여행사에 근무하잖아요?" "일본이 아니구 베이징에 갔다구?그 여자 성씨와 이름은 알아요?남편은?그리고 애는?......" 자리에 되앉으며 현우가 다시 물었다. "내가 이전의 그 셋집에 든 지 얼마 안 돼 이사 갔기에 성씨도 이름도 몰라요.그저 둬 번 인사말이나 해봤어요.남편은 좀 뚱뚱했고 애는 아직 없다고 하더군요.오늘 일본인 여자와 같이 식사하면서 무슨 얘기를 나누면 좋을까고 아까 오면서도 궁리해봤는데 이웃집에 살던 조선족 여자일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그 여자의 신분을 밝혀내려고 친구와 짜고든 건 아니에요.그 여자가 나오지 않을까봐 친구한테 우리의 신분은 알려주지 말라고 귀띔했을 뿐인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요?" 현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본인과 결혼했으면 일본인 성씨를 가질수도 있죠.그런데 그 여자 왜 우리를 피했을까요?우리를 만나기 싫어하는 것일까요?그리고 아까부터 보니 동창생은 한국 친구를 모르게 하려는 눈치던데 저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네요." 밖에 나갔던 준호가 들어오기에 둘은 대화를 끊었다. "불시에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되돌아갔답니다.오늘 미안합니다." "괜찮아요.그럼 두 분께서 천천히 드세요.저 먼저 갈게요." 최가 일어서려고 하자 준호가 최의 술잔에 맥주를 따르고 맥주병을 최에게 건네주었다. "아닙니다.현우와 가까운 사이이기에 편히 대해주세요.저도 한 잔 주세요.앞으로 시간 되면 연변에도 놀러 가겠습니다." "너 모리타도 데리고 가라." 현우의 말에 준호가 웃으며 최에게 해석했다. "오늘 오겠다던 모리타라는 여자는 저의 이웃집에 사는 일본인입니다.현우가 오늘 꼭 모시고 나오라 해서......" "그 모리타라는 일본인 여자가 오셨더라면 분위기가 아주 멋졌겠어요.참으로 유감스럽네요." 현우는 웃음을 참지 못해 그만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우에노역에서 최와 헤어져 전차에 오른 현우는 그녀가 집에 와있는가고 준호와 같이 가보려다가 먼저 전차에서 내렸다.     8.   그러던 이튿날 늦은 오후였다. 지도교수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차에서 내려 출구를 금방 나온 현우는 뜻하지 않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못 본 척 스쳐지날 수는 없었고,그녀도 발걸음을 멈추기에 웃으며 먼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말 반가워요.” 그녀도 웃으며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왔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친구 만나러 왔어요.여기에 집이 있어요?” “네.” “지금 시간 괜찮은가요?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나눌까요?” 그녀가 궁금했던 터라 현우는 그러자고 대답했다.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잖아요?”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럼 차보다 맥주를 마시는 게 더 좋잖아요?” 그녀와 맥주를 마시지 못할 것도 없었다.현우는 그녀와 같이 전철역 앞 신호등 건너편에 있는 중국요리점으로 들어갔다.오후 네 시를 금방 넘긴 시간이라 가게에는 손님들이 적었다. 현우가 칭죠러우스(青椒肉丝)를,그녀가 야키교자를 주문했다.현우가 아사히맥주 아니면 키린맥주를 마실까고 물으니 그녀가 칭도우(青岛)맥주를 마시자고 했다.중국요리점들에서는 중국에서 칭도우맥주를 수입해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맥주를 따르고 현우와 잔을 부딪쳤다. “한은숙이에요.고향은 흑룡강성 ××이에요.” “강현우입니다.고향은 연길입니다.” “어제는 미안했어요.자,건배해요.” 그녀가 잔을 비우자 현우도 잔을 비웠다.  “어제는 김상의 요청을 받고 우에노에 갔다가 망신했네요.연길 이웃집에 살던 일본어선생님과 신쥬쿠에서 만난 현우씨일 줄은 몰랐거든요.두 분 대학교 동창생이세요?” “네,헌데 망신이라고 생각하나요?” “김상과 한국어를 하지 않고 일본어로 대화를 했죠.성씨도 모리타라 했죠.” “왜 모리타라 했죠?” “제가 잘 아는 일본인이 모리타에요.도쿄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데 중국에 여행팀을 거느리고 왔을 때 제가 가이드를 했고 그 분 덕분에 일본에 오게 되었거든요.” “일본에는 언제 왔어요?” “2000년11월13일에 왔어요.지금 9월 초니깐 4년이 거의 되네요.11월13일은 모리타의 생일이어서 일본에 온 날짜가 잊혀지지 않아요.” 이번엔 현우가 맥주를 따랐다. “그 날 무슨 일로 신쥬쿠에 갔어요?저는 키노쿠니야서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여행사가 신쥬쿠에 있어요?” “여행사는 이케부쿠로(池袋)에 있어요.그 날 오후에 이사 왔어요.동료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해서 신쥬쿠에 갔어요.” “그랬군요.이전에 연길 ××여행사에 근무했어요?” “네,아시는 분 있어요?” 현우는 친구가 있지만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없어요.한 잔 합시다.” 둘은 다시 잔을 비웠다.그러고 보니 그녀는 예쁘기도 하고,성격도 쾌활하고,술도 잘 마시고,심플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남자들이 첫눈에 반할 타입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김상한테 저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어요.불법체류하다가 쥬죠(十条)입국관리국에서 자진출국수속을 하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러 우리 여행사에 찾아오는 조선족들도 있었어요.그들을 보니 조선족 위신이 떨어지는 것 같아 스스로 얼굴이 뜨거워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쥬죠는 이케부쿠로와 한 정거장 거리였다. 조선족 위신? 불법체류하고 있는 조선족들도 있겠지만 일본에서 떳떳하게 살고 있는 조선족들도 많잖은가! 조선족 위신 때문에 김상한테 신분을 알려주지 않았는가고 물어보려던 현우는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였고 어제는 어색한 장소를 마련해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는 미안한 생각도 들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 “어제는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다 저의 잘못이죠.김상한테는 그냥 모르는 척 해주세요.” 그녀가 맥주를 다시 따를 때 준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현우는 쉿!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방금 전에 1층 할머니의 아들을 만났다.할아버지는 그 날 저녁에 돌아가셨단다.2층에 한 독신녀가 새로 이사 왔더라고 말했더니 모리타라는 중년남자가 부동산 사무실에 와서 자기 이름으로 입거수속을 했다더라.2층 집주인은 다름 아닌 할머니의 아들이더구나.” 그럼 그녀가 다시 찾지 말라고,센다이에 와있다며 통화를 하던 남자는 누구일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구?2층 집주인이 할머니의 아들이라구?” 현우의 말을 그녀가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할머니의 아들 말 대로라면 입거수속을 한 모리타라는 중년남자가 사진에서 보았던 그 남자는 맞는 것 같다.그런데 나가노지사에 파견되어갔다는 남편이 입거수속하러 여기까지 왔겠어?왔다면 며칠이라도 같이 있어야 되잖아?그 여자에게 도쿄 어느 여행사인가고 물어보지 않은 게 후회된다.할머니의 아들에게 그 여자를 아는가고 물어보기도 그렇더라.어떻게 하면 좋겠나?” 현우는 정색을 하고 심각한 어조로 준호에게 말했다. “이젠 이웃집 일본인 여인한테 신경 쓰지 말라.나 지금 전차 안이니 이만 끊는다.” 통화를 마친 현우에게 그녀가 급히 물어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네.” “이젠 김상네 이웃집에 있지 못할 것 같네요.김상을 다시 만나기 부끄러워서요.” “앞으로 예의적인 인사만 하면 되죠.그렇다고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다른 곳에 이사 가겠어요?” “사실은 오늘 셋집 구하러 여기에 왔는데 현우씨를 면바로 만났네요.우연일까요,인연일까요?” 그녀가 맥주를 다시 권하자 현우는 그녀에게 요리를 권했다.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더니 자기의 신상을 숨김없이 터놓았다. 그녀는 모 전문대 일본어학과를 졸업하고 연길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하면서 결혼도 했지만 애가 생기지 않아 남편과 이혼을 하고 일본에 와서 모리타가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중한부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아들이 대학 3학년생이고 부인이 6년 전에 병으로 돌아간 모리타와 4년 동안 시나카와에서 동거하고 있었는데 요즘 새 부인을 맞이하게 된 모리타가 이젠 그만 나가라며 방값이 싼 준호네 이웃집 셋집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이었다. 현우는 그래서 그녀가 준호에게 남편이 나가노지사에 파견되어갔다고,애가 다섯 살이라고 말했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집에 오겠다고 모리타한테서 아까 전화가 왔댔어요.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오늘은 여행사에 나가지도 않았어요.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현우는 그녀가 준호에게 어떻게 말했든,그녀가 모리타의 애인이었든 일본에 온 같은 조선족으로서 그녀에게 뭔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하지만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 궁리가 떠오르지 않아 안타깝기만 했다. 최는 지금 어느 대학원이며 어디서 살고 있는가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고 나서 현우는 요즘 최와 셋이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현우씨는 애가 몇 살인가요?아들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현우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저......아직......애가 없어요.”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 결혼했지만 재작년에 일본에 올 때까지 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요?같은 처지군요.자,건배해요.” 둘은 다시 잔을 비웠다. 이 말 저 말 나누며 맥주를 마시다 나니 어느새 맥주 여섯 병이나 마셨다.가게에 손님들이 들어오고 있었다.그녀가 화장실에 갔다오는 사이에 현우는 맥주 두 병을 더 주문했다.자리에 다시 앉은 그녀가 웃으면서 맥주를 따랐다. “오늘 제가 살게요.” “아닙니다.마실 수 있어요?” “마시죠.일본에 와서 오늘처럼 기쁜 날이 없었어요.” 그녀가 휴대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면서 모리타한테서 금방 전화가 왔었는데 지금 친구 집에 와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둘은 연거푸 건배했다. 이번엔 그녀가 맥주 두 병을 더 주문했다. “진짜 괜찮아요?” “오늘은 좀 마시고 싶어요.제가 중국에서 애가 없은 건 남편 문제였어요.제가 일본에 가겠다고 하자 남편이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서 이혼하자고 했기에 이혼했어요.현우씨가 애가 없은 건 부인 문제인가요?” “그건......검사하지 않아 모르겠어요.” “애가 없었기에 모리타가 새 부인을 맞았는지도 몰라요.” 서글프게 웃으며 그녀가 맥주 한 컵을 쪽 들이켰다. “모리타가 애가 생기면 결혼하자고 했는데 저는 애를 가지려 하지 않았어요.” “왜요?” “일본이 좋긴 하지만 일본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가게에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나머지 맥주를 다 마시자 그녀가 이젠 그만 가자며 먼저 일어서더니 계산대에 가서 값을 치렀다. 밖에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현우는 술값을 치른 그녀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불빛이 환한 맞은켠 빌딩을 가리켰다.  “우리 저 노래방에 가요.” “현우씨 노래 듣고 싶네요.그럼 가요.제가 오늘 다 할게요.” “아니요.노래방은 제가 할게요.” 노래방에 들어와서 현우는 몇년 전부터 유행된 
10    (단편)어느 봄날의 기억 댓글:  조회:1795  추천:0  2020-08-05
 2020년4호       단편소설     어느 봄날의 기억  박명선     출장차 도꾜에 온 지 한주일이 되던 어느 날,승호는 저녁 약속시간 전에 옛집에 가보려고 일찌감치 전차를 탔다.3년 만에  비지네스로 일본에 다시 온 것이다. 승호가 살던 집은 도꾜에서 멀지 않은 사이다마현 모 시에 있었다.전차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까지 아직 반시간이 남아있었다.이제 반시간 후면 전철역으로 되돌아와 사사끼와 다나까를 만나야 한다.사사끼와 다나까는 3년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한 작업장 동료들이다.아침에 사사끼에게 먼저 전화를 하려다가 다나까에게 전화를 했다.다나까와 친밀한 사이는 아니였지만 사사끼에게 깜짝쇼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동료들 중에서 동갑인 다나까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오랜 친구를 만난 듯 무척 반가워하는 다나까에게 귀국해서 취직한 일본독자기업의 용무로 출장을 오게 되였다고 말하고 나서 오늘 저녁 사사끼와 셋이서 식사를 하면 어떤가고 물었다.다나까가 사사끼를 꼭 데리고 오겠다고 흔쾌히 동의하기에 여섯시에 전철역 광장 앞에 있는 불고기점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내가 일본에 다시 왔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이제 만나면 누구인지 알 것이라고 사사끼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해놓았다. 옛집 동네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우체국,세븐일레븐,야구훈련장,유치원,과일점,남새점 그리고 곱게 피여난 길가의 벚꽃마저도  3년 전과 여전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벚꽃이 화려함을 자랑하던 날이였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낮다란 아빠트들 속으로 옛집이 보여왔다.왠지 올 때와는 달리 다시 찾아와서는 안되는 집이기라도 하듯 가슴이 세차게 높뛰였다. 옛집 대문 앞에 당도하자 지난날의 기억이 오버랩되여 머리속에 다시 떠올랐다. 3년 전 화창한 어느 봄날이였다. 우습깡스럽고 어눌하게 말하는 사사끼를 속으로 웃으면서 작업장에 들어선 승호는 동료들에게 아침인사를 건네려다가 주춤 멈춰서버렸다.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동료들이 한데 모여서 낮은 소리로 수군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눈빛들이 이상했고 분위기가 석연치 않았다.혹시 자신의 언어나 행동이 동료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았나 어제 있었던 일들을 곰곰히 되새겨보았지만 딱히 잡히는 곳이라고는 없었다.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는가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휴식시간만 되면 어린애처럼 졸졸 묻어다니던 사사끼가 오늘은 휴식실 창문가에 앉아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있었고 항상 웃음 짓던 엔도과장도 퇴근 무렵에 작업장에 한번 들어왔다가 그저 머리만  끄덕여보이고는 나가버렸다. 다들 왜 이럴가?이젠 내가 싫어진 것일가?아니면 스스로 알아서 래일부터라도 출근하지 말라는 암시일가? 불쾌하고 찜찜한 마음으로 퇴근하여 공장 대문을 나오니 방정맞게도 아침부터 공장 뒤켠 나무숲으로 모여들던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소리를 내지르며 머리 우를 날아지나갔다.일본에서는 까마귀를 흉조로 간주하지 않지만 오늘은 왠지 저 까마귀들이 아침부터 불길한 징조를 불러온 듯이 느껴졌다.그러면서도 가끔씩 이런 날도 있겠지,래일이면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오겠지 생각하며 사사끼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 부근에 이르러 큰길에서 골목으로 금방 굽어들어갔을 때였다. 뒤에서 자동차소리가 들려오기에 옆으로 비켜 자전거를 달리는데 동네집 자동차가 아닌 경찰차 한대가 느린 속도로 옆을 스쳐지나갔다.싸이렌 등불을 켜지 않은 걸 봐선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경찰차는 아닌 듯 싶었다.경찰차가 집앞을 지나가는가 했더니 얼마 가지 않고 길옆에 멈춰서는 것이였다. 순간,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자기를 붙잡으러 온 것 같아 다리힘이 빠지고 자전거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렸다.집 대문으로 들어가려던 승호는 정신을 가다듬고 앞으로 자전거를 내몰았다.뒤돌아가면 경찰들이 뒤쫓아와서 검문할 것이고 집에 들어가면 경찰들이 당장 들이닥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아니나 다를가,조수석에서 거무틱틱하게 생긴 경찰과 뒤좌석에서 서류를 손에 든 경찰이 내리더니 지나가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목구두 발소리를 요란스레 울리며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승호는 전철역 방향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이대로 경찰들한테 잡힐 수는 없었다.전차를 타고 어딘가 먼 곳이라도 가고 싶었다. 헌데 어디로 갈가? 황황해서 내빼다 나니 갈 곳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승호는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자전거를 돌려세웠다.집 골목을 지나면서 곁눈으로 보니 두 경찰이 차에 오르고 있었다.집 골목으로는 되들어갈 수 없었다.경찰들의 눈을 피해 큰길 건너편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후에야  조심스레 집으로 들어왔다.집에 들어서자 아까부터 조여있던 탕개가 풀리면서 두 다리가 삶아놓은 듯 허물어져내렸다. 잡히면 죽이겠나.기껏해서 벌금이나 좀 시키고 중국에 돌려보내겠지.벌금?돈이 없다고 하면 그만이지.내가 사람을 죽였나,도적질을 했나.불법체류로 몇년간 일본에 있었을 뿐이 아닌가. 방금 전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어떤 오기가 불끈 치밀어올랐다. 위스키 한병이 구석진 창턱에 그대로 놓여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작년 년말 어느 날  저녁,일일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날이 밝으면 자백하러 가려고 위스키를 술병 채로 마시던 장면을 보고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저런 날이 오지 않을가 싶어 세븐일레븐에 달려가서 사다놓은 것이다.드디여  그 주인공처럼 위스키를 마실 날이 오고 만 것인가.이 날이 이렇듯 빨리 찾아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펑~ 위스키 병마개를 따는 귀맛좋은 소리와 함께 알싸한 위스키 향기가 풍겨왔다.승호는 고개를 젖히고 위스키를 꿀꺽꿀꺽 몇모금 들이켰다.독한 위스키가 덜컹거리는 가슴에 불을 질러놓은 듯 금세 온몸이 활활 타번지는 것 같았다. 누가 밀고한 것이 틀림없었다.엔도과장이나 사사끼는 아닐 것이고 며칠 전 퇴근길에 맥주도 같이 마신 다나까도 아닐  것이다.그리고 50대 중년인 스즈끼와 이가라시도 아닐 것이다.그럼 이시이가 퇴근하자마자 밀고한 것이란 말인가? 이달 로임은 이틀 전에 이미 입금되였으니 래일 당장 공장 일을 때려치운다 해도 아쉬울 게 없었다.이 공장에서 일한지도 2년이 되였으니 미련 따위는 더욱 없었다.그리고 방세는 다음 달 중순에 반년치를 지불하게 되였으니 래일 집주인한테 다른 곳에 이사 갔다고 말하면 그뿐인 것이다.이 집에 있은지도 이젠 2년,불법체류자인 걸 알면서 2년 동안 눈을 감아준 집주인에게 따뜻한 인사말은 꼭 전해야 했다. 위스키를 마셔서인지 속이 갑갑해나면서 집안의 공기마저 뜨겁게 느껴졌다.창문을 열려다가 그만두었다.저녁노을에 곱게 물든  벚꽃풍경이 그림처럼 예쁘고 아름다웠다.이렇게 좋은 날에 산책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밖으로 나가면 경찰들과 맞닥뜨릴 것 같았다.오늘 밤중이나 래일 아침에 경찰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경찰차에 실려가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기 전에 빨리 이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한담? 그제야 매형과 철이가 생각났다.그럼 지금 매형네 집에 갈가?아니면 철이네 집에 갈가?아무 집에나 며칠간 얹혀있으면서 다른 집과 일자리를 구해볼가? 철이는 일본어학교에 함께 류학을 왔다가 대학에 진학한 친구인데 지금 닛뽀리에서 살고 있었고, 대학원에 다니는 매형은 가마다에서  살고 있었다.여기서 도꾜 닛뽀리까지는 반시간,가마다까지는 한시간이 걸린다.매형네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거리가 멀어서가 아니였다.매형이 내가 지금까지 불법체류하고 있은 걸 알면 래일 당장 자진출국수속을 하고 중국에 돌아가라고 으름장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였다.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이 동네를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혹시 려인숙에서 하루밤 묵을 수도 있으니 려권을 지참해야 하지 않을가?비자연장을 하지 않은 외국인등록증은 어디서나 보여줄 수 없었다. 승호는 옷장 안에 넣어둔 트렁크에서 려권을 꺼내 펼쳐보았다.일본류학비자와 대련 출국도장 그리고 나리다 입국도장만 찍혀있는 새로 발급받은 듯한 려권이다.려권을 가방에 챙겨넣고 옷가지들을 트렁크에 집어넣었다. 평소 집 청소를 하면서 버릴 만한 것은 자주 내다버려서인지 가지고 갈 물건이 별로 없어보였다.랭장고는 메고 갈 수도 없고 텔레비죤과 전기밥가마는 안고 갈 수도 없었다.이불과 요와 베개도 카텐을 뜯어서 싸들고 갈 수는 없었다.랭장고에서 엇저녁에 사두었던 콜라와 쏘세지를 꺼냈다.길에서 요기는 해야 했다.먹다 남은 김치와 닭알은 두고 가자.집주인이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집에 가져다가 먹고 싶으면 먹어라지.많지는 않지만 주방에 있는 입쌀과 기름과 라면도 두고 가자.그리고 그릇들이며 수저들이며 컵들도 죄다 두고 가자.아,맞다.매형이 사준 세탁기는?세탁기도 두고 갈 수 밖에 없었다.또 뭐가 있더라?화장실 안의 목욕타올이며 샴푸며 두루마리종이들도 그냥 두고 가자.신발장 안의 신발 몇컬레는 집주인이 알아서 처리하라지.전기세,수도세,가스세는 다음 달까지 여액이 충분히 남아있으니 집주인한테 미안할 것도 없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막상 이대로 떠나자니 보내온 나날들이 그리워났다. 일본에 금방 와서 철이와 함께 일본어학교에서 배정해준 기숙사에 1년간 있다가 졸업이 가까워오자 이젠 우리 집에 들어오라는 매형의 권고도 마다하고 공장 아르바이트를 구해놓은 이튿날 이사를 온 집이였다. 그래도 20대 젊은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자취집이 아니런가. 집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텔레비죤 옆 책상 우에 일본어학교를 다닐 때 쓰던 필기장이 펼쳐진 채로 놓여있었다.필기장에는 사사끼가 그려달라던 전투기 그림이 있었다. 사사끼를 잠간 떠올려보았다. 열흘 전,사사끼와 같이 일하게 된 첫날 점심시간이였다.공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실에 들어와 테블 우에 엎드려 낮잠을 좀 자려는데 사사끼가 옆에 다가와서 절친한 친구처럼 무람없이 어깨를 툭툭 치더니 호주머니에서 종이장을  꺼내 펼쳐들었다.큰 칼을 든 경찰이 자동차를 막고 있는 그림이였다.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친구가...그려준...그림이다.” 오전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검사할 상자들을 절로 날라다가 품질검사를 하고 나서 이시이의 체크를 받은 상자들을 다시 날라가는 사사끼가 일할 줄도 알고 힘꽤도 있어보였지만 일손이 얼마나 필요했으면 공장에서 저런 자식까지 받아들였을가 반신반의하고 있던 중이였다. “난...서른살이다...넌...몇살이니?” 나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아까부터 누구한테 반말이냐고,내가 몇살이든 알려줄 줄 알았냐고 쏘아붙이려다가 잠자코 있었다. "여기에...비행기...그려줘." 다른 사람들한테는 감히 다가가지도 못하고 말도 옳바르게 못하는 이 바보천치가 나를 얕잡아보고 하는  수작일가.공장이다 보니 사회하층인들이 많았지만 사사끼와 같은 인간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사끼가 아니꼽고 귀찮았지만 측은한 생각도 들어 그가 건네주는 볼펜으로 자동차 우에 비행기를 대충 그려놓았다.소학교시절 미술써클에 참가한 적이 있어 비행기 정도는 쉬이 그릴 수 있었다. "와...진짜...비행기...같다." 좋아라고 손벽까지 치며 하나 더 그려달라고 졸라대는 사사끼에게 어이없이 웃어보이면서 경찰 머리 우에 비행기를 하나 더 그려넣었다. “경찰관이...꿈이였는데...스무살에...교통사고...당했다.” 그래서 친구한테 이런 그림을 그려달라 했냐고 물어보려다가 다른 말을 다시 건네올 것 같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온역 피하 듯 자기를 피한 줄도 모르고 그후부터 사사끼는 내가 화장실에 가도, 물 마시러 가도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녔고 퇴근길에도 같이 자전거를 타고 전철역 앞 큰길까지 와서 “오늘...재밌었다...래일...또...만나.”하고 웃으며 헤여지군 했다. 문구방에서 사왔다며 채색도화지에 큰 비행기를 그려달라던 사사끼,휴식시간에 공장 마당에서 이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놀러 간다며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내던 사사끼,전차에 앉아서도 맞은켠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보여준다던 사사끼...이젠 그런 사사끼에게 비행기도 그려주지 못하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해났다. 먼저 철이한테 전화나 해보려고 하는데 똑똑 집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승호는 와뜰 놀랐다.불안한 시선이 출입문께에 가 꽂혔다.독안에 든 쥐처럼 꼼짝달싹도 못하고 경찰들한테 생포당하게 된 자신이 너무나 가련하고 비참하게 생각되였다. 창문을 뛰여넘고 싶은 충동이 번개처럼 뇌리를 쳐왔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경찰들도 무단침입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며 발볌발볌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 숨을 죽이고 문밖의 동정에 귀를 강구었다. "사이(崔)상,계세요?" 다시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하라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호는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문을 열었다. "돌아오셨군요.아까 경찰들이 찾아와서 옆집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가 묻기에 제가 이사 와서부터 방이 비여있더라고 했어요.언제 이사 왔는가 다시 묻기에 한주일이 된다고 했더니 이 부근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신고하라더군요." "감사합니다." 하라다가 돌아간 다음에야 40대 초반 녀인이 옆집에 이사 왔는데 누가 물어보면 옆집은 비여있다고 대답해달라고 부탁했다던 집주인의 말이 생각났다.자기의 리익 때문이겠지만 오늘은 집주인이 목숨을 구해준 은인처럼 고마울 수가 없었다.그리고 경찰들 앞에서 자신을 감싸준 하라다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하라다는 어느 레스토랑 점장인데 이사 온 날 인사를 나누면서 며칠간 조용히 휴식하고 싶다고 했다.집주인과 옆집을 잘 만난 덕분에  그래도 위험한 고비는 무사히 넘긴 셈이였다.  그나저나 경찰들이 신고를 받고 찾아온 것 만은 틀림없었다.그렇지 않고서야 경찰들이 이 동네에서 다른 집도 아닌 우리 집을 곧바로 찾아올 리가 있겠는가.집에 사람이 없으니 옆집에 물어본 걸 봐서라도 꼭 집을 아는 사람이 밀고한 것이 분명했다. 집을 아는 사람은 매형과 철이,사사끼와 다나까 그리고 이시이일 뿐이다.이시이 밖에 밀고할 사람이 없었다. 트렁크에 넣어가지고 가려다가 집주인이 마셔라고 창턱에 도로 올려놓은 위스키에 눈길이 가자 이시이가 다시 생각났다.  하라다가 이사 오기 전날인  한주일 전 오후 휴식시간에 이시이가 퇴근길에 사이상의 집에 가서 한잔 하면 어떠냐고 다나까와 사사끼에게 물었다.이시이와 다나까는 승호가 오기 전에 입사한 정사원이고 사사끼는 알바생인데 열흘 전부터 넷이 새로 세워진 작업장에서 같이 일하게 되였다.사사끼는 헤벌쩍 웃으며 어머니에게 청가를 맡겠다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하고 있었고 다나까는 말없이 안경 너머로 셋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이시이가 술은 자기가 살 테니 중국료리 한가지면 갖춰놓으면 된다기에 마지못해 동의했다.새로 알게 된 동료들과 집에서 술 한잔 못할 리유가 없었던 것이다. 집 부근 세븐일레븐 앞에서 이시이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얼마 안되여 량손에 맥주를 사들고 나왔다.이시이가 셋을 집앞에 부리워놓고 차를 집에 두고 오겠다며 되돌아갔다.이시이가 오는 사이에 사사끼의 부탁 대로 필기장에 전투기를 그려주고 료리도 몇가지를 만들어놓았다.  "참 맛갈스런 료리들이군.헌데 평소에 비싼 위스키를 마셔?" 술이 둬순배 돌아가자 이시이가 창턱에  놓여있는 위스키를 보며 물었다. "전번 일요일에 매형이 놀러 오면서 사온 거야.마실려면 마셔." 작년에 사놓은 위스키이지만 승호는 전번 일요일에 매형이 사온 거라고 했다.술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는 매형이 음력설에 놀러 왔을 때도 중국에 돌아가서 친구들과 마시려고 미리 사두었다고 능청스레 둘러댔다. "난 독한 위스키는 못 마셔.매형이 있어?지금 어디에 있어?" "도꾜에 있는데 대학원에 다닌다고 말했잖아." 언젠가 이시이가 일본에는 어떻게 왔는가 묻기에 도꾜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매형이 신원보증인이 되여 일본어학교에 류학왔다고 말했었다.이시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랬던가?매형은 지금 누나와 같이 있겠지?" "아니,누난 중국에 있어.여섯살 난 아들을 데리고 지금 어머니 집에 같이 있어." "중국에서는 결혼한 녀자가 남편이 외국에 가면 본가집에 들어가 있는구나."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그래." "그러니깐 어머니를 보살피려고 누나가 일본에 오지 않는 거구나.매형이 혼자서 힘들겠다.매형이 예쁜 일본녀자라도 봐두면 어쩔려구." 이시이의 시까스르는 말에 기분이 언짢아졌다.병환에 계시는 어머니를 보살펴드리려고 누나가 일본에 오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시이가 간섭할 일이 아니잖은가.그리고 가족요청을 하고 싶어 하는 매형의 심정을 내가 모르는 바도 아니다. 이시이와는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말아야겠다고 생각되였다.처음 만난 날  어느 학교인가,학교는 다니지 않는가고 이시이가 물어봤을 때도 그저 학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만 대답했는데 오늘은 저도 모르게 집안일을 꺼내고 말았다.다른 동료들은 자기 일만 꾸준히 하며 신상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는 듯이 묻지도 않는데 이시이만은 꼭 뭔가를 알아내려는 속셈으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사흘 전에는 학교에서 찾지 않는가고 억지웃음을 빼여물고 중떠보기까지 했다.그래서 다른 작업장에 보내달라고 요즘 엔도과장에게 부탁해보려던 참이였다. 사사끼는 게걸스레 료리를 집어먹고 있었고  다나까는 가만히 앉아서 두 사람의 얘기만 듣고 있었다. 승호는 화제를 돌리려고 다나까를 보며 물었다. "다나까,넌 몇살에 결혼할 생각이니?" 승호와 동갑인 다나까가 시무룩이 웃었다. "서른이 되면 결혼하려구.아직 5년이나 있으니 지금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승호보다 두살 이상이고 이미 결혼도 했고 딸애도 두살인 이시이가  다나까에게 말을 건넸다. "너 사사끼한테 녀자를 소개해주렴." 사사끼가 입안의 음식물들을 사처에 튕기며 으흐흐 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녀자?나도...녀자...사귀고...싶다." "하하하.너 쉰살이 돼도 녀자가 있겠나?" 사사끼가 갑자기 성난 수사자처럼 눈을 부릅뜨고 이시이를 쏘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나...고중...때...야구를...했다...전국대회에도...참가했다...녀학생들...다...나를...좋아했다...너...나쁜...사람이다.” 맥주를 여러잔 마신  사사끼가 아주 멀쩡하게 단어를 구사하고 있었다.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지만 기억상실증은 전혀 없어보였다. "롱담도 못하냐?" 한풀 꺾였던지 이시이가 사사끼를 외면하고 다나까와 다른 말을 주고받았다. 승호는 멍한 눈길로 사사끼를 쳐다보았다.성낼 줄도 모르는 사람으로만 여겨왔던 사사끼의 사나운 눈빛을 처음 보는 승호였다.사사끼가 보기와는 달리 너무나도 무서웠다.하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지 않는가. 한시간이 지나 술상이 끝났다.집 대문을 나가면서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던가고 이시이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묻기에 아까 알려주지 않았냐고 면박을 주려다가 주소를 다시 알려주었다. "주소...알아선...뭘...하자구?" 사사끼가 휘청거리면서 이시이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이시이는 여기서 한 정거장,다나까와 사사끼는 서너 정거장을 사이둔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럼 집 주소도 알고 내가 불법체류자인 걸 이미 눈치챈 이시이가 밀고한 게 맞단 말인가. 아마 그때  벌써 밀고할 속타산이 있었던 것 같았다. 불법체류자인 내가 너의 밥통을 빼앗았나,나를 밀고하면 후한 상금이라도 타나? 으깨지게 깨문 어금이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헌데 오늘 아침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은 것일가? 출근카드를 찍고 화장실에 들렸다가 좀 늦게 작업장에 들어서자 이시이가 다나까 그리고 이가라시와 스즈끼에게 귀속말로 뭔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농촌 할아버지처럼 늙수그레하고 점심밥값이 아까워 너덜너덜해진 헝겁가방에 도시락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이가라시와 반년간 같은 작업장에서 일했고 사사끼를 막내동생처럼 관심해주는 곱사등이인 스즈끼는 젊은 정사원인 이시이에게 잘 보이려고 굽신거리는 반편들이였다.사사끼는 끼이지 못하고 그들 뒤에 우두커니 서서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이시이가 동료들을 모아놓고 나를 밀고하려고 꾀를 꾸미고 있은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오늘은 리유없이 누군가에게 잔뜩 두들겨맞은 듯이 몸과 마음이 피로했다. 침대에 좀 누워있으려는데 갑작스레 핸드폰이 울려터졌다.승호는 움찔 몸을 떨었다.벨소리가 세번 울리더니 꺼졌다.벨소리가 세번 울리고 꺼지면 중국에서 걸려온 전화이다.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지 음력설이 지난 후에는 중국에 전화도 하지 못했다. 중국에 인츰  전화를 했다.어머니가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누나의 말에 승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싸쥐였다. 어머니와 누나와 매형은 내가 일본에서 정상적인 류학생활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일본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학통지서를 받은  날 고민 끝에 학업을 포기하기로 했다.매형한테는 대학에 입학했다고,어머니와 누나한테도 어엿한 대학생이 되였다고 자랑을 해놓고  전자부품제조공장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재작년에 매형이 신원보증인과 대학등록금 건으로 찾아왔을 때는 새로 이사 온 아빠트 집주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있으면 4년간 신원보증인이 되여주겠다고 답복했기에 보증인은 근심 말라고,지금 좋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에 학비도 근심 말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후 당뇨병합병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이미 결혼한 누나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고중까지는 다녔다.고중을 졸업하고 몇년간 사회에서 떠돌아다니다가 매형 덕분에 일본에 와서 처음엔 대학도 다니고 졸업하면 좋은 회사에 취직도 하려고 했다.하지만 1년간 일본어학교를  다니면서 피땀으로 번 돈을 대학등록금으로 밀어넣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아 입학수속을 하지 않았 던것이다. 내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었던가! 대학마다 외국인류학생장학금제도가 있기에 등록금은 아까워하지 말라고,불법체류하면서 남들의 비웃음은 절대 사지  말라고 매형이 신신당부했을 때라도 정신을 차리고 입학수속을 했더라면 오늘 경찰들이 집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래일 중국에  갔다가  다시 일본에 돌아올 수도 있었을 것이였다. 이제 와서 다시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오늘은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소식까지 들을 줄은 천만뜻밖이였다. 아들의 근심은 하지 말라고,아들이 중국에 돌아갈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라고 자주 문안전화를 드리면서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이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어머니를,이 못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가로등 불빛이 집안으로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집에 사람이 있는 걸 알고 부근에 숨어있던 경찰들이 문을 박차고 뛰여들어와 다짜고짜 수갑을 채워서 수용소에 처넣을 것 같아  방전등을 켤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동네집 전등불이 다 꺼진 한밤중에도 전등을 환히 켜놓고 텔레비죤을 보면서 수많은 밤들을 지내왔었는데 오늘은 전등을 켜는 즉시로 동네사람들까지도 경찰들과 같이 달려들 것 같아 숨쉬기마저 가빠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가?래일 자진출국수속하러 갈가? 어쩌면 불법체류하고 있는 나를 이젠 중국에 돌아가라는 하늘의 뜻일지도,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시이가 괘씸하고 밉살스럽다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네가 밀고하지 않아도 때가 되였으니 중국에 돌아간다고 전화로라도 한바탕 욕설을 퍼부어놓으리라 속으로 윽별렀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매형이였다. "누나한테서 들었다.래일 입국관리국에 가서 재입국수속을 하고 나와 같이 중국에 갔다오자." 이젠 매형한테 불법체류를 하고 있었기에 재입국수속은 할 수 없다고 이실직고해야 했다. "지금 우리 집에 오거라.집에 와서 얘기하자." 전화기에서 매형의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매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승호는 트렁크와 가방을 가지고 부랴부랴 집문을 나섰다.택시를 타고 전철역까지 와서야 옆집 하라다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르스름하게 동터오는 새벽,승호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매형과 통화가 끝나자마자 어두운 집에서 나왔는데 집 전등이 환히 켜져있었다.집으로 달려가보았더니 책상 우에 있던 필기장을 손에 쥔 사사끼를 이시이가 가로막고 있었고 이미 얼근해진 스즈끼가 집주인인양 올방자를 틀고 앉아 혼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다나까와 이가라시는 보이지 않았다.승호가 들어온 걸 보고 이시이가 사사끼의 손에서 필기장을 와락 빼앗아 발로 마구 짓밟아놓고는 씩씩거리면서 가버렸다. “나쁜...놈...너를...가만놔두지...않겠다.” 이시이의 뒤통수에 대고 욕하는 사사끼를 스즈끼가 데리고 나갔다.스즈끼의 잔등이 더욱 구부정해 보였고 사사끼는 스즈끼의 배려에 사뭇 감격해하는 듯이 보였다.남의 집문을 쾅 닫고 나가는 그들은 마치 은행에서 저축한 돈을 찾아가는 사람들처럼 당당하기까지 했다.이미 집에 갔으리라 생각했던 사사끼가 집문을 탕탕 두드리고 있었다. “사사끼!” 승호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여기가 어딘가? 창밖을 내다보니 매형네 집이였다.집문을 두드리는 소리는커녕 주위는 파도가 멈춘 바다가처럼 고요했고 옆방에 누운 매형도 일어날 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까짓 필기장을 두고 와서 사사끼의 꿈을 다 꾸는 것일가?그리고 위스키도 두고 와서 스즈끼까지 꿈에 나타난 것일가?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사람도 없는데 누군가가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큰 죄를 짓고 허둥지둥 도망친다는 생각도 들면서 머리속은 헝클어진 삼검불처럼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승호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제와는 다른 아침해가  떠오르면 입국관리국 대문에 절로 발을 들여놓아야 할 것이다. 오전에 자진출국수속을 마친 승호는 집주인과 다나까한테 어머니가 위급하여 중국에 돌아가야 한다고 전화로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이시이한테도 며칠 후 중국에 돌아간다고 전화를 했다.이시이가 그러잖아도 오늘 네가 출근하지 않아서 전화를 하려 했다며 자기도 공장을 그만뒀다고 하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고 물었더니 어제 출근하자 엔도과장이 자기가 선거될 줄 알았던 반장이 다른 사람이 선거되고 래일부터 새 반장이 우리 작업장을 관리한다고 인사발령을 전달하기에 오늘 사표를 냈다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되려 인사를 하는 것이였다. 어제는  그런 일이였었구나! 엔도과장이 퇴근 무렵에 작업장에 들어왔다가 머리만 끄덕여보이고 나간 것은 직원들의 정서에 파동이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구나. 그러고 보니 각 작업장에는 반장들이 있었지만 새 작업장만은 아직까지 반장이 없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럼 이시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밀고했단 말인가? 사사끼는 절대 아닐 것이고 말수도 적고 듬직한 다나까도 결코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공장 동료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집주인도 아닐 것이고 매형과 철이도 아닐 것이다. 불현듯 옆집 하라다가 생각났다.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으면 래일부터라도 좋다며 핸드폰번호까지 알려주던 하라다가 한주일간 옆집에 살고 보니 외국인불법체류자인 내가 불편해서 암암리에  배척하고 싶었을가?그래서 어제 내가 집에 들어올 시간에 맞춰 밀고했다가 경찰들이 돌아간 후에 일부러 집을 찾아온 게 아닐가?그저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 밖에서 매일 이 시간이면 퇴근하는가고 묻기까지 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진정으로 나를 혐오하는 기색이 력력히 드러나있었다. 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귀가중 자전거에 고장이 생겨 자전거방에 들리다나니 평일보다 반시간이나 늦게 집에 도착하게 되였다.만약 어제도 평일처럼 제시간에 집에 들어갔더라면 어떻게 되였을가? 내가 집에 들어온 걸 확인하고 나서 전화를 해도 늦지 않았을 걸,내가 경찰들에게 잡혀가는 걸 직접 보았더라면 속이 후련했을 걸 하고 그녀는 지금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가 왜서 하라다는 생각도 못했을가? 밀고자가 누구였는지 이젠 알만 했다. 하라다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누구였든 이미 다 끝나버린 일이였다.누가 밀고하지 않아도 어머니가 위급하다면 오늘 자진출국수속을 했을 것이였다.쇠창살 신세를 면한 것만 해도 다행이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누구를 의심할 자격도 없었다.모든 것이 바보 짓을 한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체념하고 하라다에게 전화를 하려던 승호는 철이한테 매형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전화를 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대형기업들의 통역아르바이트를 해서 두툼한 보수를 받고 있는 철이이다.중국에 가면 할 일이 많을 거라고 위안해주는 철이의 말을 듣고 그동안 공장에서 수걱수걱 일만 하면서 휴일에도 사복경찰들이 있음직한 공중장소에는 나다니지도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철이보다 여러 방면에서 뒤떨어졌음을 뼈저리게 늬우쳤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불법체류자라고 주말 아르바이트만 하는 일본인 학생들보다도 낮은 시급을 받은 것이 원통하기만 했다. 일본에서 좋은 인생수업을 받고 중국에 돌아간다고,중국에 돌아가면 더 이상 후회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드디여  출국날이 다가왔다. 나리다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른 승호는 검은 출국도장이 찍힌 려권을 보면서 긴 한숨을 쏟아냈다. “며칠 전 새벽에는 사사끼라고 웨치고 엇저녁에는 누구한테 음성메세지를 남기는 것 같던데 너 혹시 무슨 일이 있은 게 아니냐?” 엇저녁에 화장실에 들어가 사사끼한테 여러번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서 래일 중국에 돌아간다고 메세지를 남겼 던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매형의 물음에 승호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경찰들이 집을 찾아온 사실을 매형이 알면서 넌지시 물어보는 것 같았다.경찰들의 이야기는 끝까지 비밀에 붙여두어야 했다.매형 뿐만 아니라 누나도 어머니도 절대 알아서는 안되는 일이였다. 승호는 웃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하고는 려권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섰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이젠 사용하지도 못할 핸드폰을 그만 꺼버린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신호가 인차 끊길 거다.너를 잘 아는 일본녀자일지도 모르니 빨리 받거라." 매형이 웃으며 하는 말에 혹시 옆집 하라다가 아닐가고 화면을 보니 사사끼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오후 1시  비행기라 했더니 어쩌면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을가? 일본을 영영 떠나는 나에게 전화라도 해주는 사람은 사사끼 밖에 없구나 싶은 생각에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승호는 제꺽 통화버튼을 눌렀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전화였다. "사사끼구나.나 지금 나리다공항이야.엇저녁에 전화를 하니 받지 않아서 래일 오후 1시 비행기로 중국에 돌아간다고 메세지를 넣었다...나인 줄 알고 받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반장이 선거된 날 스즈끼상이 이시이가 그만둘 거라고,내가 불법체류자라고 가만히 알려주더라구?..." 비행기가 속력을 가하더니 하늘을 향해 솟구쳐올랐다. “모시모시...” 핸드폰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게 웬 일인가?그럼 스즈끼가 밀고했단 말인가? 반년간 같은 작업장에서 일해오면서 아무런 알륵도 없었던  스즈끼가 사사끼에게 내가 불법체류자라고 알려준 저의는 알 수 없었다.이시이가 아니였다면 하라다라고 짐작했는데 스즈끼라니?전화내용을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경찰관이 꿈이였다던 사사끼일 가능성도 있어보였다.그럼 그 날 스즈끼한테서 내가 불법체류자임을 알아차린 사사끼가 휴식실 창문가에 앉아서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있은 것은 나를 밀고하려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은 것이란 말인가? 이젠 그만 잊자고 했던 악몽 같은 지난날이 다시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도대체 누구일가? 내려다보이던  풍경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로도 한참을,승호는 멍하니 기창 밖만 응시할 뿐이였다. 두달 후,승호는 중국 연해 모 도시에 있는 일본독자기업에 취직하였다.당시는 중국에 진출한 일본기업들에서 일본어에 능숙한 젊은이들을 긴급히 수요하던 시기였다.비록 대학은 나오지 못했지만 스물다섯살 젊은 나이에 일본류학경험도 있는 승호는 몇년간의 꾸준한  노력을 거쳐 회사의 엘리트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00년대초 어느 봄날,일본에 출장가게 되였던 것이다. 집 대문이 조금 열려져있었다.대문에 걸어놓은 우체통에 하라다가 아닌 다른 이름이,담장 벽에 걸어놓은 우체통에도 최가 아닌 다른  이름이 적혀있었다.옛집 주방에서 환기를 시켜놓고 물고기를 굽는 냄새가 어렴풋이 풍겨오고 옆집에서도 젊은 부부간이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하라다가 다른 곳에 이사 간 모양이였다.승호는 가방에 넣은 선물함을 만지작거렸다.가방 안에는 하라다에게 선물로 드리려고 중국에서 사가지고 온 우롱(乌龙)차가 들어있었다.하라다가 우롱차를 즐겨 마신다고 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여섯시가 되였다.이젠 그만 전철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승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며시 대문을  닫아놓고 집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전철역으로 향했다.그 날 저녁처럼 하라다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로. 2년간 살면서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불고기점,지나면서 군침만 꼴깍 넘기군 했던 불고기점,언젠가는 꼭 들어가보려고 마음 먹었던 전철역 앞 불고기점에서 사사끼를 다시 만나게 되였다. "사사끼,오랜만이다." "어...어...설마...사이상...맞아?"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진 사사끼,여전히 말도 어눌하게 하는 사사끼는 그동안 몸보양을 잘해왔는지 피둥피둥 살까지 쪄있었다.저도 모르게 허구픈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나다." 승호는 사사끼의 어깨를 가볍게 쥐여박고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해 서있는 사사끼와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다나까에게 명함장을 건네주었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구나.자,건배!" 3년 만에 동료들과 다시 모인 술상이였다. "이시이는 잘 보내고 있어?" "지금 부인과 같이 마트를 경영하고 있어." 꿈인지 생시인지 다나까와 얘기를 주고받는 승호를 별나라에서  날아온 우주인처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사사끼는 쑥스럽게 웃고만 있었다. "다나까상이...지금...우리...작업장...반장이다." "축하한다.스즈끼는 잘 있겠지?" 이젠 스즈끼를 물어볼 차례가 되였다.스즈끼가 아니면 사사끼 밖에 밀고할 사람이 없었다.  스즈끼라는 말에 사사끼의 얼굴이 구워진 불고기처럼 지지벌개졌다. "잔등...때문에...나오지...못한다...그 땐...미안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직 밀고사건에 대해선 모르고 있는 다나까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어머니가 위급해서 중국에 돌아간다고 이전에 말했잖아." 사사끼가 손을 후들후들 떨며 다시 입을 벌렸다.  "내가...경찰에...신고해서...잡혀간...게...아니였니?" 과연 네놈이였구나.다른 사람도 아닌 멍청한 녀석한테 밀고당했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다나까가 매서운 눈길로 사사끼를 흘겨보았다.그 서슬에 사사끼는 고개를 푹 수그려뜨리고 있었다. "지나간 말을 하자고 만난 게 아니다." 사사끼한테서 승인을 받았으면 족한 것이다.승호는 웃으면서 다나까와 사사끼에게 다시 맥주를 권했다. “이번엔...일본에...오래...있겠지?" "며칠 후 중국에 돌아간다." 공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여덟시가 되였다.사사끼의 핸드폰이 울리기에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다나까가  볼일이 있다며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단둘이 남은 절호의 기회에 사사끼를 어두운 골목에라도 끌고들어가 한바탕 두들겨패줄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번에 사사끼를 만난 것은 분풀이나 추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였다.마지막으로 한번 만나는 것으로 이전의 불법체류자 신분이 아닌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사끼와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아무 말도 없이 먼저 전차에 오른 승호에게 사사끼가 서운한 듯이 전차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출국날 오후,우에노에서 스카이라이나로 나리다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을 때 아침에 통화를 했던  다나까한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오늘 출근길에 사사끼가 전차에서 치한현행범으로 체포되였다는 것이였다. 승호는 멀거니 기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날 불법체류자를 밀고했던 사사끼가 오늘날 경찰에 잡혀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안쓰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렇다고 통쾌한 기분도,홀가분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늘도 화창한 어느 봄날,비행기는 다시 구름 너머 저켠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9    (중편)꿈 댓글:  조회:1632  추천:1  2020-08-04
2020년4호     중편소설   꿈   박명선       1.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전차가 사막에 멈춰서버린 꿈이었다.일본은 사막이 없는 나라인데 왜서 전차가 사막에 왔을까?전차를 탔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었다.저쪽 출입문 옆에서 웬 남자가 머리를 숙이고 걸레가 들어있는 물통 안의 물을 정신없이 들이키고 있었다.아무리 목이 말라도 어떻게 저런 더러운 물을 다 마신단 말인가?전차에서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기모노를 입고 이목구비가 수려한 여인이 물병을 들고 웃으며 앞에 서있었다.그는 여인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밖에 나와 보니 차바곤에 7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물은 어디에 있을까?가없이 펼쳐진 사막 가운데에 푸른 오아시스가 보였다.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가다가 꿈속에서 깨어났다... 일본에 와서 어쩌다 낮잠을 잤더니 이게 웬 꿈일까? 2000년대초 어느 해 2월 중순 토요일 오후였다. 오랜만에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지만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룸메이트였던 찬이가 이사를 간 집에 혼자 있기도 멋적게 생각되어 그는 운동복을 차려입고 집문을 나섰다. 오전과는 달리 바람도 불지 않고 따스한 햇빛이 비쳐왔다.집과 가까운 곳에 큰 공원이 있었지만 찬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유소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주유소를 지나 집 동네를 벗어나는 길목에 작은 공원이 있었던 것이다.그 공원을 지나 옅은 강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신작로에 닿는다.작년에 한달간 비닐제품제조공장에서 주말아르바이트를 할 때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 보았던 공원이었다.오늘은 웬 일인지 그 공원에 가보고 싶었다. 주유소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걸린다.주유소에 거의 왔을 때 하얀색 승용차 한 대가 주유소를 나와 앞으로 내달리는 게 보였다.주유소를 지나려던 그는 맞은켠 길옆에 잠깐 멈춰섰다.노란 유니폼에 노란 모자까지 쓴 종업원들을 보노라니 두주일 전까지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찬이를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았다.화물차가 무섭게 옆을 스쳐가서야 다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아까 하얀색 승용차가 공원 앞에 멈춰있었다.동네를 둘러보면서 공원에 도착하니 승용차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공원 구석진 곳에 놓여있는 벤취에 선글라스를 건 남자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여자가 햇볕쪼임을 하는지 큰길 쪽을 등지고 앉아있었다.말하고 있는 남자는 30대 후반으로 보였고,웃고 있는 여자는 꽤 젊어보였다.그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내처 앞으로 걸었다.나왔던 김에 강변까지 가보고 싶었다.바쁜 일상을 보내다 나니 산책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강변을 거닐다가 돌계단에 앉아 잘금잘금 물결이 일렁이는 강물을 굽어보면서 집 생각을 하고 있었다.엇저녁에도 이제 몇 밤 자면 오는가고 딸애가 묻기에 백 밤만 자면 간다고 말했다.이젠 백 밤이라는 말을 어린 딸애한테 몇 번이나 했는지도 모른다.일본에 온 지 1년이 넘었다.애엄마와 딸애의 얼굴은 사진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돈지갑에 넣은 사진을 꺼내보았다.이제도 몇 년 더 있어야 귀국할 수 있는데 그 때면 애엄마도 딸애도 나를 보고 낯선 사람 만난 듯 서먹서먹해하지 않을까고 생각해보니 마음이 서글퍼졌다. 한참 앉아있다가 공원에 다시 이르렀을 때는 승용차가 보이지 않았다.벤취는 하나 뿐이었다.그는 아까 그들이 앉았던 벤취에 가서 앉았다.두 팔을 벤취에 올려놓고 따스한 햇살에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부인과 딸애를 일본에 요청하여 한주일 전에 이사를 간 찬이가 부러웠다.찬이는 하얼빈 모 대학 일본어학부 동창생이고,일본어교원을 같이 하다가 일본에도 같이 유학을 온 친구였다.일본에 금방 왔을 때 이제 서로 가족요청을 하면 동갑인 애들이 같은 유치원에 다닐 수도 있겠다던 찬이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찬이처럼 가족요청을 하고 싶었지만 학업을 마치면 귀국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정부 공무원인 애엄마를 일본에 꼭 오라고 강요할 수도,일본에 데려다가 아르바이트를 시킬 수도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그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멀지 않은 쓰레기통 옆에서 까마귀 두 마리가 하얀 비닐주머니 안의 알포트 쵸콜렛봉투를 헤집어대고 있었다.그들이 먹다가 버린 음식쓰레기 같았다.그는 까마귀들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눈앞에서 까마귀를 보기는 처음이었다.충격적인 정경에 그의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까마귀들은 찾아낸 먹이를 제각기 먹는 게 아니였다.주둥이를 맞대고 서로 먹이를 먹여주고 있었던 것이다.그를 눈치챘는지,먹을 만큼 먹었는지 얼마 안되어 까마귀들은 검은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까악까악 소리를 내지르며 시가지 쪽으로 날아갔다. 까마귀들이 헤집어놓은 비닐주머니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려던 그는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본 듯 되돌아서버렸다.비닐주머니 안에 빈캔이며,쵸코렛 부스러기며,빨간 립스틱이 묻은 티슈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앉았던 벤취에 멍청하니 앉아있었다는 게 께름직하게 느껴졌다.옷에 뭐가 묻지 않았나 옷잔등과 바지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를 떴다.오늘 괜히 여기를 찾아오지 않았나 싶었다.아까 차를 눈여겨보았다.도요다차였고,도꾜 차번호였다. 주유소를 다시 지나 번화한 네거리에 왔을 때 그 도요다차가 마주오다가 전철역 방향으로 굽어들어 길옆 주차장 안에 멈춰서는 게 눈에 띄었다.그는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가지 않고 차를 향해 걸어갔다.선글라스와 노란 머리가 같이 내리더니 멀지 않은 세븐일레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그들이 부부간이 아님은 틀림없었다.뒤따라 세븐일레븐에 들어선 그는 가게 안을 살펴보았다.선그라스도,노란머리도 보이지 않았다.이것들이 화장실에 또 같이 들어갔을까?지금까지 다녀본 패밀리마트나 세븐일레븐에 화장실은 없었다.텔레비전 광고에서 나오던 샴푸를 찾아가지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서려는데 그 남자가 카운터 안에 서있었다.유리창문으로 비쳐들어오는 햇빛에 야마시다(山下)라는 명찰이 반짝이고 있었다.이윽하여 노란머리도 카운터로 통한 휴게실이라고 써붙인 문으로 나왔다.둘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던 것이다. 오오쯔끼(大槻)라는 명찰을 단 노란 머리가 40대 여점원에게 인사를 하고 계산대에 바꿔섰다.교대시간이 된 모양이었다.시계를 보니 오후 세시였다. 야마시다가 오오쯔끼에게 바코드를 찍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오오쯔끼가 아르바이트하는 첫날인 것 같았다. 점장일 수도 있는 야마시다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오오쯔끼,공원에서 세븐일레븐으로 날아들어온 두 까마귀. 그는 샴푸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2. 이튿날 아침,호랑이도 간담이 서늘해 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대문이 바람에 닫기는 소리였다.대문의 진동에 한 겹 창문들이 덜컹거리고 주방의 그릇들이 딸락거렸다.일본에 온 지 얼마  안되던 어느 날 밤중에는 갑자기 집 전체가 마구  흔들거려 지진에 집이 무너져 깔려죽지 않겠나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방안으로 찬바람이 불어들어오고 있었고 잔뜩 들린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커튼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창문부터 닫았다.어제 오후 통풍시키려고 조금 열어놓았던 창문을 자기 전에 닫는 걸 깜빡 잊었던 것이다.대문이 닫기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집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는 문을 도로 닫았다.한달 전,증권회사에 근무한다는 오오무라(大村)가 독신으로 1층에 이사를 왔다.그보다 나이도 어리고,성격도 쾌활하고,웃을 때면 덧니가 유표하게 드러나는 그녀와 가끔씩 농담도 주고받았었지만 찬이가 이사를 간 후부터는 예의적인 인사만 하고 스쳐지나군 했다.외국인을 상대하기 싫어하는 듯한 중년 부부가 한동안 1층에 살고 있었는데 작년 연말에 어디론가 이사를 갔다.1층이 비어있을 때는 아랫층에 내려가서 대문을 닫을 때도 있었지만 이젠 오오무라가 있기에 아랫층에 내려갈 필요가 없었고 혹시 비좁은 대문 안에서 오오무라를 만나면 어설픈 인사를 하기도 싫어서였다.    오늘도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다.어쩌다 이틀 쉬게 되어 오늘은 찬이네 가족을 집에 요청하여 저녁식사나 같이 할까고 어제부터 속궁리하고 있었다.찬이가 이사한 날,전자레인지를 이사선물로 사주고 찬이네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그들 부부에게 말했던 것이다.어제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치는 날씨라 오늘은 찬이네 가족을 부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었다.군데군데 비어있는 하얀 냉장실이 굶주린 짐승의 뱃속처럼 느껴졌다.오늘 점심에 전철역 앞 마트에 가서 불고기용 쇠고기랑 찬이의 딸애가 좋아한다는 치킨이랑 카레를 한꺼번에 사려고 어제는 달걀도 사놓지 않았다.김치와 쏘세지 한 개와 달걀 한 알 밖에 없었다.달걀을 볶아서 아침이라도 먹고 싶었다. 그는 달걀을 사려고 다시 집문을 나섰다.집 부근에 패밀리마트가 있었지만 세븐일레븐으로 자전거를 내달렸다.일요일 이른아침이고 바람도 부는 날씨라 가게에는 손님이 서너 명 밖에 없었다.달걀과 사과쥬스를 사가지고 나가려던 그는 가게에 손님이 없는 걸 보고 계산대에 되돌아섰다.세븐일레븐 로고가 새겨진 황토색 에프런을 앞가슴에 걸친,30대 중반으로 보이고 어느 드라마에서 나오던 탤런트처럼 이쁘게 생긴 아까 여점원에게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생을 수요하는가고 물었다.여점원이 웃으면서 그의 신상에 대해 먼저 묻더니 밤 열두시부터 새벽 다섯시까지 하는 시간대가 비어있다고 말할 때 휴게실 문으로 야마시다가 나왔다.여점원이 야마시다의 옷소매를 내려주는 걸 보고 그들이 부부간임을 알아차렸다. 야마시다가 입국심사관처럼 그의 전신을 위아래로 쓱 내리훑어보고 나서 이것저것 묻더니 오늘 밤부터 나올 수 없는가고 묻기에 지금 좋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야간아르바이트인데 시급이 낮다고 능청스레 대꾸했다.야간아르바이트 시급이 1,000엔이면 높은 레벨이었다.야마시다가 와이프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면서 100엔을 인상해주겠다는 것이었다.마침 방학기간이고 점심 열두시부터 저녁 아홉시까지 하는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집에 가서 좀 누워있다가 시간을 맞춰 다시 와도 되었다.그는 선선히 동의했다.부인의 분부 대로 종업원명보에 인적사항을 적어넣었다.7,8명 되는 아르바이트생 대부분이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오오쯔끼만은 두 정거장을 가야 하는 곳에 살고 있었다.찬이네 집 부근인 것 같았다.야마시다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돌아서려는데 부인이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건네주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해달라고 하기에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집에 들어온 그는 방금 전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내가 오늘 왜서 세븐일레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자고 했을까?야마시다와 오오쯔끼 때문일까?그들이 무슨 사이든 상관할 일이 아니잖은가?까짓 달걀을 사려고 세븐일레븐을 찾아갔단 말인가? 어제 그 공원을 찾아갔던 것처럼 오늘도 괜히 세븐일레븐을 찾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제 꿈에 보았던  7숫자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어쩌면 세븐일레븐과 야마시다부인일지도 몰랐다.부인의 황토색 에프런과 에프런에 달린 파란 호주머니가 사막과 오아시스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전국각지에 점포가 널려있고 슈퍼들 중에서 매출량이 상위라는 세븐일레븐,일이 이렇게 된 바엔 집에서 멀지 않은 세븐일레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좋을 상 싶었다.    3. 세븐일레븐 아르바이트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도시락을 산 손님에게는 덥혀드릴까요,컵라면을 산 손님에게는 더운 물을 부어드릴까요,하고 물어봐야 했다.계산대에서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돌려주는 일은 그나마 수월했지만 혹시 물건을 훔치지 않는가고 모니터로 손님들의 거동을 주시해봐야 했다.물건을 가만히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손님들도 있다고 한다.창고에서 상품들을 날라다가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넣어야 했고,가져간 상품들을 기록부에 기록해야 했다.그뿐만이 아니였다.빵,샌드위치,스시,도시락,오니기리(주먹밥)와 같은 유통기한이 짧은 식료품들은 밤 열두시가 지나면 소비기한을 재확인해야 했고,마사진 달걀이나 과일은 처분하고 새 것으로 다시 내놓아야 했다.그리고 식료품배달트럭이 들어오면 식료품들을 날라다가 냉장코너에 진열해놓아야 했다. 야마시다가 한시간 정도 가게에 있다가 파트너인 혼다(本田)와 잘 협력하라고 부탁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부인은 나오지 않았다.그들 부부는 매일 여기에 주숙하지 않는 걸로 짐작되었다. 둬시간은 허리를 펼 사이도 없었다.휴게실 안에 창고도 있었고,창고 옆에 탈의실과 화장실도 있었다.카운터로 나가는 문 왼쪽에 작은 미닫이방이 있었다. 새벽 세시가 되니 손님이 적었다.대학 2학년생인 혼다가 걸상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그는 시계를 자꾸 올려다보았다.오늘부터 몇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하루에 두 곳 아르바이트를 어떻게 할까,버텨낼만 할까 근심이 스멀스멀 몰려왔다.계산대 옆에 붙여놓은 일정표를 보았더니 오오쯔끼는 오후 세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한주일간 오까다라는 여성과 파트너로 되고 있었다. 매장 안을 한바퀴 둘러보다가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밖으로 나갔다.가게 옆에 설치한 공중전화기가 전화줄에 매달린 채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누가 전화를 하고 전화기를 제대로 올려놓지 않은 것이었다.새벽바람에 으스스 몸이 떨려 전화기를 도로 올려놓고 가게로 달려들어가면서 큰길을 얼핏 건너다보았더니 멀지 않은 가로등 아래에 파란색 승용차 한 대가 멈춰있었다.그가 가게에 들어와서 얼마 안되어 마스크를 착용하고 코트 깃을 올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섰다.그는 감기에 걸린 손님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그런데 우유와 샌드위치를 들고 카운터에 와서 값을 치른 여자가 야마시다부인이 오지 않았는가고 물어보는 것이었다.그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야마시다부인한테 전해달라면서 호주머니에서 웬 편지봉투를 꺼내 카운터에 내밀며 야마시다부인한테 전화를 할 것이니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카메라에 얼굴이 찍힐까봐서인지 머리를 숙이고 총망히 가게를 나갔다.그와 혼다는 인사말도 건네지 못하고 의아한 눈길로 여자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편지봉투 수신인과 발신인 난에는 이름도,주소도 씌어있지 않았다.혼다가 웃으며 돈이 들어있지 않을까고 묻기에 돈은 절대 아닐 거라고 대답했다.편지봉투를 만져보았더니 사진이 몇 장 들어있는 것 같았다.혼다도 편지봉투를 만져보고 여자손님이 수상하다며 부인한테 어떻게 전해드리면 좋을까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파란색 승용차가 움직이더니 전철역 방향으로 씽하니 가버렸다.여자는 아까부터 차안에서 동정을 살펴보고 있다가 가게에 들어온 것이었다. 혼다는 한주일 전부터 여기서 일하고 있어 야마시다부부한테 소학교 3학년에 다니는 딸애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편지봉투를 창턱 꽃병 옆에 놓아두었다. 새로 들어온 식료품들을 진열해놓고 어제 남은 오니기리 네 개를 광주리에 담아들고 카운터에 돌아가려는데 부인이 가게에 들어섰다.부인이 아침인사를 하면서 이젠 퇴근하라고 했다.시계를 보니 다섯시가 다 되었다.그와 혼다가 옷을 갈아입고 카운터에 다시 나오니 부인이 롱코트를 입은 채로 계산대에서 돈을 점검하고 있었다.뒤돌아보던 부인이 집에 가서 아침이라도 먹으라면서 그와 혼다에게 오니기리 두 개씩 나눠주었다.그가 얼마인가고 묻자 웃으면서 2천만엔이라며 점장이 몇시에 퇴근했는가고 묻기에 새벽 한시 쯤에 퇴근했다고 대답했다.왜서 남편이 몇시에 집에 들어간 것도 모르고 있을까?혼다도 멍하니 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그가 혼다에게 창턱을 눈짓하자 혼다는 눈을 껌벅거리고는 돌아서버렸다. 그는 새벽 세시 쯤에 마스크를 착용한 여자가 부인한테 전해달라며 부탁한 것이라고  창턱의 편지봉투를 부인에게 건네주었다.웬 여자가 새벽에 편지봉투를 가져왔을까고 의문스러운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던 부인이 알았다면서 수고했어요,내일 다시뵈요,하고 카운터에서 그들을 바래주었다. 어머니와 누나와 같이 살고 있다는 혼다는 저녁에 다시 만나자며 집 방향이 다르기에 먼저 가겠다면서  자전거를 냅다 몰고 벌써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그보다 나이도 어리고,일본인인 혼다와 똑같게 오니기리를 나눠준 부인이 고마웠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이제 부인한테 무슨 큰 불행이라도 닥쳐오지 않을까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집에 들어오니 소르르 졸음이 몰려왔다.오니기리를 먹으려다가 가방에 넣어두었다.배가 고팠지만 눈이 내려와 먹을 것 같지 못했다.평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는 전차로 반시간 가야 하기에 열한시 전에 일어나야 했다. 얼마나 잤을까,자지러지게 울려대는 휴대폰 벨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일곱시였다.그는 누운 채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모시모시,저예요.주무시는데 전화를 드려 미안해요.통화 불편하지 않아요?” 야마시다부인이었다. “괜찮습니다.” “녹화를 보았는데 그 여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혼다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그 여자 몇 살 쯤 돼보였어요?그 여자를 뒤따라 나가보지 않았어요?” 혼다는 새벽부터 몹시 당황해했고,부인한테서 전화가 걸려오니 자기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을 수도 있었다.혼다에게 먼저 전화를 한 부인에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파란색 승용차를 몰고 가더라고만 대답했다. “차번호는 기억했어요?” “불빛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습니다.” “김상한테 한가지 일을 부탁하고 싶은데 직접 만나서 얘기할 수 없을까요?지금 집인가요?” “네,집입니다만...” “그럼 지금 집에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이 여자가 집앞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4. 어제와는 달리 따스한 햇살이 방안으로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여자가 집을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다.그는 바삐 옷을 주어입었다.이불을 개어놓고 집문을 열었다.그녀는 아까 옷차림 그대로였다.  “편히 앉으세요.” 방에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에게 그는 웃으면서 방석을 건네주었다. “이 자세가 더 편해요.” 그녀가 방석을 무릎 밑에 깔고 그를 보며 정색해서 말했다. “집까지 찾아와서 미안해요.오늘 밤 그 여자가 다시 가게에 올 수 있으니 잘 살펴봐주세요.” “알겠습니다.헌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그 여자가 익명신과 함께 사진도 석 장 보냈더군요.사진 보여드릴까요?아니,더러운 사진은 보여드리지 않겠어요.” 익명신의 내용은 몰라도 무슨 사진인지는 알만 했다.그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화제를 돌려버렸다. “지금 점장님이 가게를 보고 있겠지요?” “아직 오지 않았어요.어제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그녀가 시계를 보더니 몇시에 집을 나가는가고 물었다. “열한시 전에 집을 나가야 합니다.그 여자가 부인한테 전화를 하겠다고 하던데 전화가 왔던가요?” “전화가 올 리 없죠.” “커피라도 드릴까요?” 주인의 예의를 갖춰 물어봤을 뿐인데 뜻밖으로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하는것이었다.그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가스불을 켜서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하품이 쉴새없이 나왔다.선자리에서라도 잠깐 눈을 붙이고 싶었다.그녀가 점장이 오면 내가 어디에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해달라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커피 두 잔을 타서 방으로 들어왔다. “커피 드십시요.” “고마워요.” 그녀가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어요.오늘 출근하면 점장이 있을 거예요.점장이 퇴근할 때 가만히 뒤를 밟아주시겠어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나한테 부탁하다니? “미안하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수도 없고 부탁했다가 가게에 소문이 날까봐 그래요.제가 김상을 믿고 하는 말인데 저를 한 번 도와주시면 안되겠어요?저는 지금 분을 참지 못하겠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녀가 얼마나 격분했으면 나를 다 찾아와서 이런 부탁까지 할까 싶었지만 지금 자신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들고 있다는 불쾌한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먼저 5만엔 드릴게요.” 그녀가 핸드빽안의 돈지갑에서 만엔짜리 지페 다섯 장을 꺼내 그의 커피잔 앞에 내놓았다. 내가 치사한 일을 하면서 돈을 받는 남자인 줄 알았는가. “이러시면 저는 가게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는 돈을 그녀의 손에 도로 쥐어주었다. “그럼 오늘은 드리지 않을게요.점장이 어디로 갔는가만 확인해주시면 그 때 더 드릴게요.저는 그 여자를 용서할 수 없어요.어떻게 저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는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여자가 가정을 파괴하려고 간계를 꾸민 게 아닐까요?” “익명신을 간계라고 쳐요.그럼 왜서 두 사람의 알몸과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을 석 장이나 보냈겠어요?사진 일시는 작년 11월말이던데 가위로 여자의 얼굴을 베어낸 걸 보아 사진 속의 여자가 그 여자 같아요.작년부터 그 사람을 의심하긴 했지만 증거가 없었기에 지금까지 참고 있었어요.그 사람은 법적으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증거를 남긴 야마시다가 못나도 너무 못난 바보라고 생각되었다.아무리 못나도 어떻게 사진을 증거로 다 남긴단 말인가?헌데 사진은 그들이 스스로 찍은 것일까,아니면 그 여자나 누군가가 몰래카메라로 찍은 것일까? “점장님이 혹시 그 여자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요?” “그럴 수 없어요.서로 미친 듯이 좋아했겠죠.” 그 여자는 아마야마시다의 오랜 애인일 수도 있었다.그러다가 야마시다가 자기를 차던지고 어쩌면 오오쯔끼일 수도 있는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는 걸 눈치채고 야마시다가 자기와 같이 놀던 방탕한 사진을 동봉하여 부인에게 보여준 것이다.그렇다고 그 사진을 보여달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편지내용도 알고 싶지 않았다. “부인을 도와드릴 수 없어 미안합니다.” “김상이 저를 도와주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나가지 않겠어요.” “?...” 일순 그녀를 어떻게 집에서 내보내야 하는지 궁리가 나지 않았다.답복할 수는 없었다.불쑥 머릿 속에 뭔가 떠올랐다.그는 입을 막고 하품을 하는 척했다. “정말 미안합니다.저는 조금 자야겠습니다.자지 않고 이대로 밖에 나가면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그럼 쉬세요.” 그녀가 무릎을 세우더니 침대에 가서 이불을 펴놓았다.이젠 그만 가겠는가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그녀가 커피잔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그는 침대에  돌아누웠다.노곤해진 몸을 뉘니 절로 눈이 감겨졌다.내가 자는 걸 보면 알아서 가겠지... 비몽사몽 꿈결에 누가 이불을 덮어주는 느낌에 눈을 뜬 그는 와뜰 놀라고말았다.그녀였다.그는 이불을 차고 일어났다. “미안합니다.깜빡 잠들었습니다.” “조금 더 쉬셔도 되는데요.” 시계를 보니 열시반이었다.내가 세시간이나 잤나? “아직 가지 않으셨...” 그는 말끝을 흐리웠다. “김상이 일어나는 걸 보고  가려고요.저의 부탁 들어주시는 거죠?” “이미 말했습니다.저는 이젠 집을 나가야 합니다.같이 나갑시다.” “아니요.전 여기에 그냥 있겠어요.” 억울하고 기가 막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있겠으면 있으라지.언제까지 있는가 두고볼 테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가방과 웃옷을 쥐고 혼자서 집문을 나갔다. 저녁에 좀 늦게 퇴근했다.집 골목에 들어서자 집 전등이 환히 켜져있었다.전등을 켜놓고 나가지는 않았다.그녀가 여직껏 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다.그녀의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더니 그녀는 침대에 모로 누워있었다.그녀가 입고 왔던 롱코트는 옷걸이에 걸려있었고 창문 커튼들도 쳐져있었다.그녀는 자는 척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누가 안아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숨소리에 따라 반팔 회색 스웨터 위로 오르내리는 몰캉한 젖가슴,허벅지에 꽉 낀 곤색 바지 위에 윤곽이 드러난 몽클한 엉덩이...황토색 나일론 양말에 눈길이 멎자 사막과 오아시스가 다시 생각났다. 사막에 멈춰서버린 전차에서 내려 물 마시러 오아시스로 달려가다가 꿈속에서 깨어났는데 오늘 눈앞에 이렇듯 경이로운 광경이 펼쳐질 줄이야 어찌 상상인들 했으랴. 낮꿈은 개꿈이라더니 내가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보려고 그런 꿈을 꾸었단 말인가?내가 보려던 오아시스는 이것이 아니었잖은가? 헌데 오아시스에는 어떤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을까?어떤 마을이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5. 침대 앞에 서있던 그는 주방에 가보았다.주전자가 싱크대 옆에 놓여있을 뿐 라면을 끓여먹은 흔적도 없었다.쓰레기통도 그대로였다.그녀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이다.며칠 입은 적삼이나 씻자고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쓰레기통 안에 두루마리종이 여러 장이나 던져져있었다.종이도 많이 쓰는구나 속으로 웃었다.문득 왜서 생리기도 아닌 그녀를 집에 두고 야마시다가 어제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남자들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지금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그녀는 깨끗한 여자일까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내가 왜서 저것들 때문에 에로틱한 상상까지 해야 하는가고 다시 생각해보니 화가 치밀어올랐다.와락와락 적삼을 씻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씻은 적삼을 베란다에 널어놓고 발자국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돌아오셨군요.언제 오셨어요?” 그녀의 말소리가 마치 금방 잠을 깬 아내가 늦게 퇴근한 남편한테 하는 인사말처럼 들렸지만 그는 언성을 높였다. “지금 남의 집에서 뭘 하고 있어요?부끄럽지도 않는가요?이웃들에서 내가 어떤 여자와 동거하는 줄로 알겠어요.” 그녀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면서 입을 열었다. “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말했어요.저는 김상을 남자로 생각하지 않아요.저의 동생과 동갑이더군요.” 그녀가 인적사항에 적어놓은 내역을 본 것이다. “그럼 왜서 동생집에 가지 않고 여기에 왔어요?동생한테 부탁하면 되잖아요?” “동생한테 알리고 싶지 않아서요.” “저한테 왜서 이렇게 집착해요?무슨 이유라도 있는가요?” “이유 같은 건 없어요.김상한테 부탁하면 꼭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예요.” “저는 못합니다.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할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예요.” 낯빤대기도 두꺼운 여자,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겨우 삼켰다.그녀를 문밖에 콱 내쫓고 싶은 것도 참고 있었다. “저녁은 드셨어요?몇시에 들어올지 몰라 여덟시까지 기다리다가 패밀리마트에 가서 도시락 두 개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어요.” “저를 상관말아요.애는 어쩌구요?” 부지중 그녀의 딸애가 생각나서 그는 어망결에 물었다. “저녁에 외할머니집에 가라고 했어요.아참,전자레인지가 없는 걸 모르고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었네요.” 그녀가 몸을 일으키더니 냉장고로 뛰어갔다. 그녀가 정말 며칠이고 그냥 집에 눌러있으면 어떻게 한담?내일이면 아랫집 오오무라나 이웃들에서 알 수도 있었다.그녀를 그냥 집에 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야마시다가 오늘 밤 어디에 가는가고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도시락을 덥힐까요?” “아니요.” 그는 퉁명스레 대답하고 방에 있기 싫어 화장실에 다시 들어갔다.양말이라도 씻으면서 시간을 흘러보내고 싶었지만 도시락을 덥히지 말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방으로 되들어왔다.  “차갑지만 같이 먹어요.” 그녀가 도시락 두 개를 밥상 위에 가져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혼자 먹으라고 그녀를 더 이상 난처하게 만드는 것도 예의가 아니였다.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로 젓가락을 들 수 밖에 없었다. “빨리 드십시요.” “그럼 먹겠어요.언제 한 번 같이 식사해요.”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고 있는 그녀는 며칠 굶은 사람 같았다.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그녀가 인차 젓가락을 내려놓을 것 같아 맛있다고 말하며 같이 먹었다.진짜 맛있었다.오늘 도시락이 이처럼 맛있을 수가 없었다.고느적한 한밤중에 집에서 서너살 연상인 그녀와 도시락을 같이 먹는 이 야릇한 기분을 어떻게 형언했으면 좋을까! 그는 한바탕 웃어제끼고 싶었다.정신이상에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웃으면 그녀가 덴겁하여 밥도 채 먹지 못하고 허둥지둥 집에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시계는 정각 열한시를 가르키고 있었다.자전거를 타면 세븐일레븐까지 5분이면 도착한다.그녀가 잘 먹었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자 그도 따라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사과쥬스를 드릴까요?저는 커피를 마시겠습니다.” “그럼 같이 커피 마셔요.제가 커피 탈게요.” 그녀가 다 먹은 도시락 두 개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창밖을 내다보니 이웃집 전등들은 모두 꺼져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이번주 목요일이 가게오픈 3주년 기념일이라는 걸 알았다.기념일을 어떻게 보내는가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식료품들을 보내오는 음식제조공장들에 대해 물어보았다.그가 피로해보였는지 그녀가 좀 쉬라면서 시간이 되면 깨워주겠다고 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아까 전차에서 눈을 붙이긴 했지만 집에 와서 좀더 자려고 했다.오늘은 세븐일레븐에 나가지 않고 아침 늦게까지 폭 잤으면 세상에 이처럼 행복한 일이 더 없을 것 같았다. 주방에서 커피잔을 씻고 화장실에 들렸다가 방에 들어온 그녀는 그가 자는 걸 보고 방전등을 끄더니 바람벽에 기대 앉았다.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방안으로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실루엣처럼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오전에 내가 잘 때도 그녀는 저렇게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내가 깨어날 때까지 그녀는 코트도 벗지 않고 있었다.추워서가 아니였다.내가 자기의 몸매를 훔쳐볼까봐서였다.나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방금 전에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소리가 들릴세라 동시에 물을 내렸다.그녀는 지금까지 애엄마는 일본에 데려오지 않는가,혼자서 적적하지 않는가는 따위의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그녀는 옅은 화장만 했고,귀걸이도 걸지 않았고,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았다.이쁜 여자들이 인물값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런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아침에 편지봉투를 뜯어본 순간 그녀는 얼마나 놀랐을까?그녀한테는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일곱시에 나오는 종업원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익명신을 보낸 여자를 어떻게 찾아낼까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동생한테 알리고 싶지 않다던 그녀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그녀는 진심으로 나한테 부탁하려고 찾아온 것이다. 찬바람에 커튼이 춤 추 듯 흔들리고 있었다.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전등을 켰다.추운 데 있지 말고 침대에 가서 쉬라고 하자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겠다면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고 챈넬을 돌리고있었다.그녀의 얼굴에는 그가 이젠 같이 집을 나가지 않겠는가고 당장 물어볼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기색이 역역히 어려있었다.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었다.그는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오늘 밤 점장을 미행하려고 결심을 내렸다.그녀를 집에서 내보내려면 별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가게에 나가겠습니다.점장이 퇴근하면 어디에 가는가 살펴볼게요.” 그녀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발딱 일어서더니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말이 나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으면 나의 목까지 끌어안을까 싶어 그는 가만히 서있었다. “제가 혼자서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두려웠어요.점장과 가게에 오는 여자손님들을 잘 살펴봐주세요.저는 그 여자를 꼭 찾아내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녀가 침대 쪽으로 한 발 다가가더니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심장이 팔딱거리고 아랫도리가 후끈거렸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요.” “아닙니다.지금 가봐야겠습니다.” 그는 살며시 그녀의 두팔을 풀어놓았다. “근심말고 쉬세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는 스프링처럼 단숨에 밖으로 튕겨나왔다.   6. 가게에 들어서자 야마시다가 일찍 왔다며 웃으면서 반겨주었다.처음 보는 아르바이트생과 어제 인사를 나눈 젓가락처럼 생긴 근시안경과 교대를 마친 그는 계산대에서 일하다가 야마시다를 따라 창고와 매장을 돌아보았다.야마시다가 분부를 마치고 카운터에 다시 들어와서 시계를 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두는 것이었다.저녁에 다시 만나자던 혼다가 열두시가 넘어도 오지 않고 있었다.야마시다가 혼다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혼다가 겁을 집어먹고 그만둔 것 같았다. 손님 몇 명이 카운터에 다가왔다.맥주를 산 남자손님에 이어 타올을 산 여자손님에게 거스름돈을 돌려주며 인사를 한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랫집 오오무라였다.오오무라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생긋 웃고는 가게를 나갔다. 오오무라가 왜서 이 시간에 여기에 왔을까?왜서 나를 보고 당황해하지도,주저하지도 않을까? 가게에 온 오오무라가 심상찮아보였다. 손님들이 나가자 옆에 서있던 야마시다가 오늘 혼자서 가게를 볼 수 있는가고 묻기에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점장님께서 집에 돌아가서 주무시라고 했더니 좀 있다가 가도 된다면서 야마시다가 휴게실로 들어갔다. 야마시다는 그 여자가 가게에 왔다간 걸 알고 있을까?마누라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걸 알고 있을까? 그는 세븐일레븐 조끼 호주머니 안에 넣은 휴대폰을 진동모드로 설치해놓고 휴게실 문 가까이에 다가갔다.안에서 야마시다가 누구한테 전화를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방안에서 전화를 하는지,목소리를 낮춰서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방안에도 카메라가 있음직해보여 계산대로 되돌아섰다. 손님들이 다시 뜸해지자 바닥청소를 해놓고 카운터에 들어오니 야마시다가 자고 있는지 휴게실 안에는 아무 동정도 없었다.상품을 가지러 들어간 척 들어가보려다가 야마시다를 그대로 자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혼다가 오지 않았기에 이제 야마시다가 밖에 나간다면 가게를 비워두고 미행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두 번 다시 가게에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긴장의 끈은 놓을 수 없었다.자동출입문과 창밖을 수시로 내다보면서 이제 박두해올 시각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두시부터 세시사이에는 택시기사와 중년남자가 쥬스와 청주를 각자 사가고 세시부터 네시사이에는 도로공사 유니폼을 입은 노동자 대여섯 명이 시간간격을 두고 컵라면과 오니기리를 먹으러 여러번 드나들었을 뿐 여자손님이라곤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네시반이 거의 되었을 때였다. 웬 시꺼먼 그림자가 창밖에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다시 찾아온 유령 같아보여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다시 돌아서서 공중전화를 하는 그림자는 짧은 생머리 여자였고,검은색 웃옷에 검은색 바지까지 입고 있었다.어제 여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코트 깃을 올렸지만 긴 웨이브머리였기에 그 여자는 아닌 것 같아보였다.그런데 창밖의 저 여자는 집전화나 휴대폰이 없어서 새벽에 공중전화를 할까?혹시 그 여자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다시 찾아온 게 아닐까?후다닥 밖으로 달려나가보고 싶었지만 누가 문뒤에 숨어있다가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후려칠 것 같아 나가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이윽하여 여자가 전화기를 놓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그제야 그는 밖으로 달려나갔다.여자는 존재감을 생색이라도 내 듯 또각또각 구두발소리를 울리며 고요한 새벽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뒷모습이나 걸음걸이도 그 여자는 아니였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면 야마시다가 깨어날까봐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커피 한 잔만 마셨다.다시 카운터에 들어와 종업원들이 마셔라고 테블에 올려놓은 싸구려 인스턴트커피나 한 잔 더 마시려는데 야마시다가 휴게실에서 나왔다.같이 커피를 마시자며 손수 탄 커피 한 잔을 그에게 건네주고 걸상에 앉은 야마시다의 두 눈에 피발이 서있었다.야마시다가 웃으면서 개학은 언제이고,개학하면 수업이 많은가고 묻더니 혼다가 그만두었다면서 야간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더 구하기 전까지 매일 나와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나서 벽시계를 보며 물었다. “어제는 부인께서 다섯시에 나오셨더군요.오늘도 부인께서 일찍 나오세요?” “오늘은 다른 사람이 나와요.” 야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다가 통화가 되지 않는지 자리에 되앉았다.그녀에게 전화를 한 것 같았다.그는 다시 마주앉아 무슨 말을 하려다가 휴대폰을 뒤적이는 야마시다의 얼굴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를 집에 몰래 숨겨두고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뻔뻔스럽고 음흉스럽게 느껴졌다.야마시다가 얼굴을 들자 그는 경찰을 본 범죄자처럼 몸둘 바를 몰라했다.마침 음식배달트럭이 들어왔기에 자리를 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섯시가 되어도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있었다.야마시다가 퇴근하는 그를 문밖까지 바래주었다. 참으로 지겹고도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 동트기 전인 춥고 어두운 이 새벽에 그녀는 혼곤히 잠들어있을 것이다.오지도 않는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고 괜히 신경줄이 팽팽해지다 나니 가게를 들여다보던 여자를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알기나 할까?그 시꺼먼 그림자를 생각하면 집으로 달리는 자전거가 집어삼킬 듯한 동굴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늘 이불 안에서 바지를 벗고 자기만 해보지.오늘은 절대 가만놔두지 않을 테다! 집앞에 당도하자 방전등은 꺼져있었고 현관전등만 켜져있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살며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방전등을 켰더니 펴놓은 이불 안에는 그녀가 없었다.이불 안은 그녀의 온기로 따뜻했다.그녀가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주방과 화장실 안의 쓰레기주머니들은 새 것으로 놓여져있었고 타일바닥들은 깨끗하게 닦아져있었다.휴대폰은 꺼진 상태였다. 왠지 잠이 오지 않았다.벽시계 초침소리가 어제 아침 계단을 올라오던 그녀의 발걸음소리처럼 들려왔다.그녀의 체취가 풍겨오는 이불 안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창밖이 훤히 밝아서야 비로서 잠이 들었다. 비가 내릴 듯 흐릿한 오전,아르바이트하러 가려고 전차에 앉은 그는 요즘 보던 소설책을 가방에서 꺼냈다가 황급히 책으로 얼굴을 막았다.맞은켠에 앉은 사람들 속에 노란 머리가 있었던 것이다.오오쯔끼가  어느 역에서 전차에 올랐을까?일본에 와서 처음 느끼는 어색한 공기가 전차 안에서 감돌고 있었다.좀 지나서 얼굴을 막았던 책을 슬며시 내리고 보니 그녀는 출입문 쪽에만 눈길을 고정시키고 있었다.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그는 책을 내려놓고 태연스레 앉아있었다.두 정거장만 가면 그녀가 내리는 것이다.전차가 역에 도착하자 그녀가 먼저 내렸다.그도 전차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그녀가 찬이네 집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문구방을 지나 찬이네 집으로 가기 전인 오른쪽  골목으로 굽어들더니 어느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그는 그녀가 눈치채고 고개를 돌릴까봐 되돌아가지 않고 대문을 지나 동네를 에돌아서 전철역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이제 큰길에 다다르면 전철역이 보인다. 그 때였다. 하얀색 도요다차가 눈앞을 스쳐지났다.야마시다 차 같아보였다.큰길까지 뛰어가보았더니 차가 오른쪽으로 굽어들어갔다.그는 다시 확인하려고 달려가서 골목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야마시다가 차를 담장 옆에 바싹 세워놓고 그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과연 까마귀들이 여기에 새 둥지를 틀고 있었구나! 이러면 점장이 어디에 갔는가만 확인해달라던 그녀의 부탁은 들어준 것이고 미행도 여기서 끝난 것이다.   7. 내가 개인정탐이나 어느 영화에서 나오던 너절한 치들이 목표물의 뒤를 밟던 짓을 한 게 아닌가? 전차에 다시 앉은 그는 그녀가 이제 전화가 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궁리하고 있었다.방금 전에 목격한 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후과가 두려웠다.증인으로 경찰에 불리워갈 수도 있고 그러면 학교에 알려질 수도 있었다.그들 부부 일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자칫하면 자기만 낭패를 볼 수 있는 것이다.점장은 혼다가 오지 않아서 아침까지 가게에 있었다고,그 여자는 가게에 오지 않았다고 사실 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 여자를 꼭 찾아내겠다고 그녀가 윽벼르고 있지만 그 여자가 가게를 다시 찾아오지 않는 한,야마시다가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 한 그 여자는 영원히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저녁 무렵까지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가게전화로 두 번이나 전화를 해봤지만 휴대폰은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 나한테 언녕 전화를 해야 하잖은가?그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혹시 못된 마음을 먹고  자살이라도?...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전화를 해달라고 음성메세지를 남기려다가 경찰들이 그녀의 휴대폰으로 추적하면 어쩌랴 제꺽 종료버튼을 눌러버렸다. 아홉시가 되자 퇴근길에 올랐다.집 대문 앞에서 쓰레기주머니를 들고 나온 오오무라를 면바로 만났다.오오무라가 변명하 듯 먼저 말을 건네왔다. “제가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세븐일레븐에서 멀지 않은 레스토랑에서 열두시까지 카운터를 봐요.그리고 저의 친구도 세븐일레븐에서 일한다고 해서 친구가 있는가고 들려본 거예요.김상이 거기에 일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요?친구는 누군가요?” “오오쯔끼구미꼬예요.아시죠?” 그는 흠칫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대가 달라서 같은 가게에서 일해도 얼굴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오늘도 세븐일레븐에 나가요?” “네,그럼...” 오오무라가 걸레 같은 오오쯔끼의 친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그는 내일 날씨를 보려고 텔레비전을 켰다.지방챈넬에서 오락프로가 한창이었다.한국에 여행을 갔다왔다는 한 젊은 여인이 한국에서 사온 파란 때밀이타올을 들고 평소에는 몸에 때가 없는가 했는데 이 때밀이타올을 써보니 때가 가득하더라고 웃으며 자랑 삼아 떠벌이고 있었다.다른 챈넬을 보려고 리모컨을 찾던 그는 리모컨은 보이지 않고 웃음소리만 그냥 들려오자 발로 텔레비전 전원을 꺼버렸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한시간 넘게 잘 수 있었다.알람을 맞춰놓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는 다시 꿈을 꾸고 있었다.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거울을 마주하고 한 겹 한 겹 기모노를 벗고 있었다.하얀 목덜미,예쁜 허리...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여인이 천천히 돌아서더니 웃으며 그의 옆에 고스란히 누워 정답게 속삭이면서 부드러운 손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차츰차츰 아래로 내려가던 손이... 악! 그의 입에서 무서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비명소리와 거의 동시에 휴대폰이 경망스레 울려터졌다. “저예요.늦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그녀였다.늦게라도 전화가 오니 시름이 놓였다. “괜찮습니다.지금 어딘가요?” “약방,아,아니예요.지금 가게에 나가는 길이예요.그럼 가게에서 다시 뵈요.”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약방이라고 말했다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녀가 혹시 새벽에 집을 나갔다가 감기에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그는 샤워를 하면서 여인의  손길이  닿은 부위를 깨끗하게 씻었다.  열두시 전에 가게에 들어서니 그녀가 계산대에 서있었다.어제 왔던 아르바이트생이 퇴근하려고 카운터에서 나왔다.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탈의실에서 조끼를 갈아입고 카운터에 나오니 마침 아까 왔던 손님들이 나가고 그녀와 단둘이 남았다.회색 스웨터 위에 황토색 에프런을 걸친 그녀의 얼굴이 조금 초췌해보였다. 그는 아까 약방이라고 하셨는데 감기에 걸렸는가고 물었다. “괜찮아요.오전에 서류를 제출하고 점심시간에 어머니 집에 갔댔어요.두통이 심해 열시반까지 누워있다가 가게에 전화를 해봤더니 점장이 여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약방에 들렸다가 가게에 나온 거예요.근심 말아요.” 오전 열한시 쯤에 야마시다가 오오쯔끼집에 갔었다.오후 세시에 출근하는 오오쯔끼와 같이 나왔겠는데 야마시다가 지금까지 가게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얼굴색이 안 좋아보입니다.집에 들어가 주무십시요.” “혼다를 아침 일곱시에 노임 가지러 오라고 했어요.혼자면 힘들어요.같이 있을게요.” “괜찮습니다.점장님이 다섯시까지 나오지 않으면 제가 부인이 나올 때까지 남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좀 피곤하니 먼저 갈게요.”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수고하라는 말만 남기고는 가게를 나갔다. 어떻게 이대로 그냥 나갈 수가 있단 말인가! 온종일 휴대폰을 꺼놓고 있다가 야심한 밤중에야 전화를 걸어온 그녀,아무리 몸이 불편하고 가게에서 사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은  그녀가 괘씸하기 그지없었다.그녀가 원했던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사람을 어떻게 알고 제멋대로 부려먹는 수작인가 싶었다. 자신이 마치 밤중에 주문을 외우며 오아시스를 홀로 지키는 사막 어느 촌마을의 늙어빠진 촌장 같아보였다. 카운터에 서있던 그는 걸상에 앉았다.손님이 오면 일어나고 손님이 없으면 그냥 걸상에 앉아있었다.비어있는 공간에도 상품들을 채워넣지 않고 있었다.그 여자와 시꺼먼 그림자가 다시 나타난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야마시다나 그녀에게 어떻게 가게를 그만두겠다고 말해야 할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음식배달트럭이 실어온 식료품들을 냉장코너에 진열해놓고 시계를 보니 십오분전 다섯시였다.야마시다가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섯시가 되자 그녀가 가게에 들어섰다.그는 아침인사를 하면서 카운터에 들어온 그녀에게 맞인사도 하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무슨 일인가요?” 그녀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에는 지도교수님을 모시고 학급에서 모임이 있습니다.그리고 내일 저녁에도 약속이 있어 나오지 못하겠습니다.” 단도직입으로 가게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자신이 기본도 지키지 않는 무뢰한으로 보일까봐서였다. “그래요?내일은 가게 오픈 3주년 기념일인데요.” “미안합니다." “할 수 없군요.그럼 모레는 나오시는 거죠?” 그는 그녀를 마주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녀가 뭔가 알아차린 듯 인츰 되물어왔다. “혹시 그만두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남녀손님이  가게에 들어와서 서투른 일본어로 두부와 캐찹을 사고 싶다고 하기에 카운터에서 나와 손님들을 모시고 코너로 갔다.여자손님의 생머리와 복장을 보고서야 어제 새벽 가게를 들여다보던 여자임을 알아차렸다.저도 모르게 허구픈 웃음이 흘러나왔다.손님들이 나가자 새벽공기도 쐬일 겸 밖에 서있다가 다시 들어오니 계산대에 서있던 그녀가 탈의실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들어오라고 부르기에 휴게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더니 에프런을 걸친 그녀가 문앞에 서있었다.회색 스웨터를 그대로 입은 걸 보아 집에는 들어간 것 같지 않았다.  “가게에서 더 말하지 않겠어요.오전 열시반에 전철역 앞 마트 맞은켠에 있는 찻집에서 기다릴게요.그럼 퇴근하세요.” 그녀가 나가자 그는 옷을 갈아입고 그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가게를 나와버렸다.   8. 집에 들어온 그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차라리 오늘부터 그만두겠다고 속시원히 말했더라면 찻집에 가지 않아도 될 걸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열시십분에 알람이 울리자 대충 씻고 집 대문을 나섰는데 정장을 입은 오오무라가 부랴부랴 택시에서 내렸다.오오무라가 인사를 건네오자 벌써 퇴근하는가고 물었다. “오오쯔끼가 교통사고를 당했대요.집에 들렸다가 몇 명 친구와 같이 병원에 가보려구요.” “네?오오쯔끼상이 많이 상했어요?” “어느 리조트에 갔다오다가 화물차와 충돌했대요.” “친구들과 같이 놀러갔나 보군요.” “가게점장과 같이  갔대요.그럼...” 오오무라가 대문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리조트라면 하룻밤 묵을 수도 있었다.언제 갔는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야마시다가 오오쯔끼를 데리고 놀러간 것만은 분명했다. 까마귀들이 겁도 없이 화물차를 들이박다니? 전철역 자전거정류소에 자전거를 두고 그녀에게 전화를 해보니 휴대폰이 꺼져있었다.그녀가 아직 교통사고를 모를 수도 있기에 급한 일이 있어 가지 못하겠다고 말하려 했던 그는 할 수 없이 찻집을 찾아들어갔다. 그녀가 차를 시켜놓고 창문 옆 좌석에 앉아있었다.저쪽 테블에 남자손님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혼자 앉아있을 뿐 고풍스러운 찻집은 조용했다. 그가 휴대폰이 꺼져있더라고 말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대로 말할게요.그 날 아침 편지봉투를 뜯어보고 어쩔 바를 모르겠더군요.치밀어오르는 분은 눅잦힐 수 없고 가게 종업원이나 동생한테 부탁할 수도 없어서 막연하기만 하더군요.먼저 혼다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기는 잘 모르겠다면서 김상한테 물어보면 알 거라고 하더군요.김상 집에 갈 때는 김상한테 부탁도 할 겸 그 사람을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어요.그 사람이 미쳐서 날뛰고 있는데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말이예요.”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대담하게 나올 줄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새벽에는 김상과 함께 있는 상상까지 해봤어요.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복수하고 싶었어요.그러다가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되어 김상이 오기 전에 집을 나간 거예요.” 왜서 나를 기다리지 않았냐고,기다렸다가 함께 환락 속에 기껏 빠져있었으면 좋지 않았냐고 물어보려던 그는 남자손님 쪽을 건너다보면서 심드렁하게 물었다. “어제 새벽에 어디에 갔댔어요?” “어머니 집에 갔댔어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손님이 들어와서 남자손님과 마주앉았다. 회색코트,긴 웨이브머리,갸름한 얼굴,두쌍의 커다란 쌍겹눈,그리고 금빛 귀걸이...그 여자 같아보였다. 여자손님을 보던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다행히 그녀는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그는 여자손님한테 눈길을 더 주지 않고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낮은 소리로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그 여자의 오른손 중지에 기미가 있지 않았어요?” 편지봉투를 내민 그 여자의 오른손 중지에 좁쌀알만한 까만 기미가 있었던 것이다. “손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사진을 이미 경찰서에 제출했어요.왜요?그 여자가 가게에 왔댔어요?” 그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그녀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찻잔을 가볍게 테블에 내려놓는 그녀에게 하려던 말을 꺼냈다. “요며칠 저는 유학생신분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정말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미안하지만 오늘부터 가게를 그만두겠습니다.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녀의 얇다란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하네요.부탁한 일을 묻지 않아 기분이 나빠서 아침에 성낸 줄로 알았어요.그 일은 오늘 조용히 물어보려고 했어요.김상이 사례금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아까 전자제품가게에 들렸어요.내일 오전에 전자레인지와 전기포트가 도착할 거예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시만요.그럼 모레부터 새로 시작하신다고 생각하겠어요.시급을 인상해드릴 테니 오늘 먼저 사흘분 노임을 드릴게요.” 그녀가 돈지갑에서 만엔짜리 지페 두 장을 꺼내 테블에 올려놓았다.그도 돈지갑에서 천엔짜리 지페 석 장과 500엔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테블에 올려놓았다. “제가 일한 만큼 받겠습니다.더 많지도 적지도 않게 받고 싶습니다.모레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오늘부터 그만두겠습니다.” 그녀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했다. “제가 그 말을 해서  그러세요?” 아르바이트하러 갈  시간도,그녀가 휴대폰을 켤 때도 된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쪽 테블에 앉은 여자손님의 매서운 눈빛이 찻집을 나가는 그의 등뒤에까지 꽂히고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9. 그녀와 그 여자를 한데 남겨두고 밖으로 나온 그는 가게를 한 번 뒤돌아보고 전철역으로 걸어갔다.세븐일레븐은 집에서 거리가 제일 가까웠지만 사흘 밖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은 가게였다. 저녁에 퇴근해서 집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평소에는 꽁꽁 닫겨있던 오오무라네 집문이 빼꼼히 열려져있었다.대문을 들어오는 발자국소리를 들었는지 오오무라가 나들이옷차림으로 집문을 열고 나왔다. “돌아오셨어요?” 오오무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네,오오쯔끼상이 괜찮은가요?” “많이 다친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는 엄중하지 않대요.” “다행이군요.점장도 괜찮은가요?” “옆칸에 입원해있다는 점장은 잘 몰라요.헌데 점장과 오오쯔끼가 애인관계인가요?왜서 같이 갔을까요?친구들도 궁금해하더군요.” “점장이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저는 오오쯔끼상의 얼굴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가요?오늘도 세븐일레븐에 나가요?” “오늘 그만뒀습니다.” “그랬어요?무리하게 일하지 말아요.저의 어느 친구 남편은 너무 고되게 일해서 며칠 전에 입원까지 했어요.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이튿날 오전 열시 쯤에 택배가 도착했다.그녀가 보낸 전자레인지와 전기포트였다.그는 물건들을 들고 집문을 나섰다. 택시로 세븐일레븐에 도착하니 출입문어구에 꽃바구니 몇 개가 놓여있었다.가게에 들어서자 바겐세일이라는 표어가 매장 곳곳에 걸려있고 손님들이 북적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그는 처음 보는 여종업원에게 인사를 하고 야마시다부인한테 드려달라고 물건을 부탁했다.여종업원이 부인께서 인츰 오신다고 하자 볼일이 있어 그만 가겠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다시 택시를 타려다가 시간이 충분하기에 멀지도 않은 전철역으로 걸어갔다.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을 굽어들었을 때 꽃묶음을 안고 꽃방에서 나오는,어제 찻집에서 보았던 그 여자와 맞닥뜨리고 말았다.속이 꿈틀했지만 모르는 척 스쳐지나갔다. “미안해요.저...” 그 여자가 그를 부르자 그는 돌아서서 나를 불렀는가고 물었다. “네,실례이지만 세븐일레븐 종업원이 아니세요?” 그 여자는 그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줄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그는 속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그렇습니다만...” “오늘 가게오픈 기념일이지요?야마시다점장님께서 나오셨죠?”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점장님을 알고 계세요?” “네,저의 고중 선배예요.부인은 나오셨나요?” 그는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부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부인도 알고 계세요?” “부인과는 중학교 동창생인데 만난지 오래 됐어요.이제 다시 보니 어제 찻집에서 예쁜 여성과 차를 마셨죠?제가 그 찻집에 있었거든요.” 중떠보려고 불러세웠는지,그녀를 알아보고도 못본 척했는지 궁금해서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어제 찻집에 갔댔습니다.그 여성이 야마시다부인입니다.” “어머,저는 야마시다부인인 줄 모르고 인사도 건네지 않았네요.” 그는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핼끔핼끔 그의 눈치를 살펴보는 그녀에게 한술 더 떴다. “저만 알아보시고 중학교 동창생인 부인은 알아보지 못하셨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 손님과 얘기하다나니 알아보지 못했군요.” 그는 아까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는가고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교묘하게 꾸며대는 이 간사한 여자가 무슨 일로 부인과 같이 찻집에 갔는가고 되물어올 것 같아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런가요?지금 쯤이면 부인이 가게에 오셨을 겁니다.그럼...” 그가 돌아서려 하자 그 여자가 다시 말을 건네왔다. “점장님의 휴대폰이 그냥 꺼져있더군요.미안하지만 이 꽃을 점장님께 전해주시겠어요?지금 시간이 바빠서요.노자끼라고 말하면 알 거예요.” “죄송합니다.제가 이젠 세븐일레븐 종업원이 아니라서요.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보았다. 시간이 바쁘다면서 새끼 낳지 않은 암소처럼 늘짝늘짝 걸어가던 노자끼가 세븐일레븐 골목으로 굽어들지 않고 레스토랑이라고 큰 영어간판을 내건 빌딩 옆 골목 안에 세워둔 파란색 승용차로 다가가더니 꽃묶음을 뒷좌석에 던져넣고 운전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노자끼는 그들이 지금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고 가게오픈 기념일에 일부러 가게를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야마시다가 가게에 나오지 않았고 부인이 인츰 가게에 들어온다고 하니 꽃묶음을 부탁한 것이었다.찻집에서 그녀를 보고도 못본 척했을 것이고 야마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줄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헌데 노자끼는 나에게 괜히 인사를 건넸다고 후회하지 않을까? 성씨까지 알려준 아둔한 여자가 어떻게 그런 엉뚱한 짓을 저질렀을까 하고 그는 코웃음을 쳤다.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가게의 경영자등록변경수속을 밟으러 갔다가 돌아오니 가게에 왔다가셨다더군요.” 경영자등록변경수속? “그럼 이제부터 부인께서 가게를 경영하게 되나요?” “맞아요.3년 전에 제가 투자해서 점포 두 개를 세웠어요.지금 아버지가 맡고 있는 세븐일레븐도 장사가 잘돼요” 점포 하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다른 하나는 남편의 이름으로 등록했다가 지금 야마시다의 이름을 변경하는 수속을 밟는 중인 것이다.이제부터 점장은 그녀인 것이다. “점장으로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혹시 이전에 장사라도 했어요?” “고마워요.이전에 무역회사를 했어요.아버지가 오늘도 열두시부터 가게를 봐주시겠다고 하더군요.그런데 왜서 저의 선물을 받지 않았어요?” 야간아르바이트생을 아직 구하지 못했다는 말로도 들렸지만 그녀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성의는 고맙게 받았습니다.아까 길에서 부인의 중학교 동창생을 만났습니다.꽃묶음을 사가지고 가게로 가는 길이라고 하던데요.” “중학교 동창생들은 기념일을 몰라요.성씨는 물어보지 않았어요?” “노자끼라고 하면 안다고 하더군요.” “노자끼?잘 생각나지 않아요.어제는 그 여자의 오른손 중지에 기미가 있다고 했죠?그 여자와 노자끼라는 여자가 연관성이 있어보이던가요?어제는 상상도 못한 일이 발생했지 뭐예요.어떻게 가게의 여자와 또...” 그녀가 잠깐 말을 끊었다.그녀가 교통사고를 알고 있는 것이다. “저의 선물도 받지 않은 대신 오늘 저녁에는 시간을 꼭 내요.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싶어요.한 번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제가 말했잖아요.” “미안합니다.오늘 시간이 안됩니다.노자끼라는 여자는 긴 웨이브머리에 갸름한 얼굴입니다.그리고 쌍겹눈이고 금빛 귀걸이를 걸었습니다.” 찻집에서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노자끼를 알아볼 것 같이 감히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요?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노자끼라는 여자가 마음에 걸리는군요.확인해봐야겠어요.” 노자끼의 진상이 이제 곧 드러날 수 도 있었다. 그는 전차를 빨리 타야 하기에 그만 실례하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10. 며칠 후,공교롭게도  1년  남짓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가 문을 닫게 되어 그는 집에서 그동안 밀렸던 참고서적들을 뒤적이고 있었지만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감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새 일자리를 구하려고 매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중국 유학생이라고 여러 가게들에서 거절당했고,몇 명 점장들한테서는 동북 하얼빈에서 왔는가고 놀림까지 당했다.중국에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을 타먹으며 편안히 살 것이지 왜서 좋은 직업 버리고 일본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하나,이런 수모까지 당하나 싶었다.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활 날아가버렸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집 생각이 절로 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난 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던 2월  마지막 날 오후였다.  도꾜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전차에서 그는 오오쯔끼를 보았을 때보다 더 크게 놀랐다.출입문 옆 의자에 수염이 텁수룩하고,얼굴이 창백해진 야마시다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혼자 앉아있었던 것이다. 야마시다가 언제 퇴원했을까?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전차에서 내린 그는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던 전철역 서구로 향했다.서구는 동구보다 컸고,가게들도 동구보다 많았다.서구 광장 맞은켠 빌딩 아랫층에 중국요리점과 라면집이 있었다.오늘은 그 가게들에 문의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중국요리점을 찾아가는 길에서 뜻하지 않게 그녀를 다시 만날 줄이야. 그는 놀라는 기색도,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그녀가 그의 근황을 묻자 그는 사실 대로 대답했다. “그럼 저의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지 않겠어요?” 눈앞에 보이는 세븐일레븐이 그녀의 아버지의 가게였다. “요즘은 책도 좀 봐야 하기에 잠시 아르바이트를 할 것 같지 못합니다.감사합니다.” 그는 아닌 보살을 하며 그녀에게 피씩 웃어보였다. “개학은 4월이겠죠?그럼 아무때든 연락해요.저...오오쯔끼의 친구가 무슨 말을 하지 않던가요?” 그저께 오오무라한테서 오오쯔끼가 퇴원하는 길로 고향에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었다. “오오쯔끼가 고향에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요?그 사람은 오늘 나온다더군요.노자끼가 조사를 받았어요.김상 덕분에 그 여자를 찾았어요.” 야마시다가 오늘 퇴원한 것이었다.노자끼가 조사를 받았다고 해도 왠지 그 일이 잘 끝나서 통쾌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저는 김상을 믿어요.저의 아버지의 가게도 좋고 저의 가게에서 다시 일해도 좋아요.” “아닙니다.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상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만 해요.전화를 기다릴게요.그럼 또 뵈요.” 그녀는 웃으며 인사를 하고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려면 그녀의 아버지의 가게나 그녀의 가게에서 다시 일할 수도 있었다.그녀가 내심 고마웠지만 이왕이면 새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헌데 일자리도 아직 구하지 못한 마당에 점포 두 개나 갖고 있는 그녀와도 멀어졌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더욱 막막해졌다. 오후시간이어서인지 작은 라면집은 준비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중국요리점에 들어가려는데 오전에 면접을 보았던 도꾜 아끼하바라(秋葉原)전자가게에서 내일부터 나와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외국인 관광객들을 전문대상으로 도꾜에 세워진 전자가게였다. 그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았다. 만약 전자가게에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더라면,중국요리점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그녀한테 전화를 했을까?전자가게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 것은 전자레인지와 전기포트를 그녀에게 돌려줬기 때문이 아닐까?돌려주지 않았더라면 전자가게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길 건너편 그녀의 아버지의 가게에 손님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다시 발을 들여놓을지도 몰랐던 세븐일레븐,눈에 익은 세븐일레븐 로고,꿈에 보았던  7숫자... 불현듯 사막과 오아시스가 클로즈업되어 눈앞에 다시 안겨왔다. 그럼 그 날 꿈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을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온 것은 오늘 그녀의 요구를 뿌리치려는 것이였을까?그 더러운 물을 정신없이 들이키던 남자는 오늘 전차에서 머리를 숙이고 앉아있던 야마시다였을까?아까 물통은 보이지 않았다.더러운 것들이 사라졌으니 걸레가 들어있는 물통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잖은가?그리고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가던 내가 갈증을 못이겨 물병을 들고 있던 여인한테로 되돌아왔을까? 어렵사리 구한 새 일자리,아득하게만 보이던 오아시스,오늘 드디어 샘터까지 달려왔단 말인가? 두주일 전의 꿈,꿈 같은 오늘,오늘은 그 날의 꿈해몽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그 날처럼 다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음에도 생각할 수록 묘한 느낌이 들었다. 둥둥둥~ 난데없이 북소리가 울려왔다. 중국요리점 문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그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둥둥둥~ 북소리가 또다시 울려왔다. 겨울의 끝자락을 잡고 새봄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행사가 어딘가에서 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북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어서 깨어나 새 출발을 하라고 울려오는 듯했다. 이 좋은 날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불러내서 술도 같이 마시고 러브호텔에도 같이 가고 싶었다.그 날 밤의 연장전은 오늘 밤에 불꽃 튀는 접전을 펼쳐야 하잖겠는가.그 날 밤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쫓아가 아무 데서나 눕혀놓고 싶었다.하지만 그런 생각 뿐이지 남의 나라에 와서 못난 짓을 할 내가 아니지.그래도 제일 어려운 시기에 자기의 가게에서 다시 일해도 좋다고 선뜻이 말해준 고마운 점장이 아닌가.그녀가 집을 찾아온 일은 이젠 과거형으로 되었다. 그녀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전화를 하려는데 찬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그러고 보니 찬이와 통화를 한지도 두주일이 넘었다. “오랜만이구나.생일 축하한다.” “생일?”  “생일도 모르고 있었나?음력으로 오늘이 너의 생일이잖아.저녁에 전번에 갔던 그 이자까야(居酒屋)에서 만나자.” 통화를 마치고 그는 쿡쿡 웃었다. 생일을 몰라서가 아니었다.그녀에게 전화를 하지 못해서도 아니었다.전번에 갔던 이자까야가 생각나서였다.20대 젊은 두 여자가 같이 마셔도 괜찮은가고 묻기에 다짜고짜 얼마인가고 물었다.2만엔이라 하기에 너무 싸서 흥미가 없다고 거절했다.이자까야를 나오면서 보니 그 두 여자가 길 가는 남자들에게 흥정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며칠이 지나 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들을 만나게 되었다.어느 학부 학생들인지는 몰라도 일부 여대생들은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구나 속으로 웃었던 것이다.그리고 찬이에게 내일부터 아끼하바라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말만 하고 뒷말을 잇지 않아서였다.면접을 마치고 아끼하바라역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아침에 샤워를 하고 팬티를 뒤집어 입었다는 걸 보아냈다.전자가게 면접에는 통과되지 못했구나,내일부터는 옷을 제대로 입고 집을 나와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려는 생각에 얼마나 골몰했으면 팬티까지 뒤집어 입었으련만 어쩌다 팬티를 뒤집어 입으면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것인가. 좋은 일만 생긴다면 매일 팬티를 뒤집어 입으리라. 오늘은 참말로 재미있고 뜻깊은 날이었다.오늘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동구 쪽에서는 보지 못했던,꿈속에서 사막에 멈춰서버렸던 그 전차가 손잡이에 조롱조롱 매달린 사람들을 가득 싣고 이 겨울 마지막 날 오후의 햇살 속으로 유유히 미끌어져가고 있었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꿈이라는  것이 그런 꿈을 꾸지 말자고 해서 꾸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이제부터는 사막과 오아시스와 같은 꿈은 제발 다시 꾸지 말았으면 바랐다.     
8    (단편)그 여름날의 소낙비 댓글:  조회:1098  추천:0  2020-01-11
2019년12월호  단편소설 그 여름날의 소낙비  박명선  1. 아침해살이 낡고 칙칙해보이는 입국관리국 청사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저 대문은 얼마나 많은 외국인들의 불안하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눈꼴사납게 지켜보고 있을가.저 청사 안에는 수갑을 찬 외국인들이 몸서리치는 철창이나 감옥 안에 갇혀있는 게 아닐가? 도꾜 쥬죠(十条)에 있는 입국관리국은 출입국관련업무를 취급하는 여느 지방입국관리국들과는 달리 불법체류외국인들이 자진출국수속하러 오는 곳이기도 하고 불법체류외국인들을 감금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찰차 몇대가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대문 안에서 달려나오고 있었고 피부색과 복장색이 각양각색인 외국인들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대문 앞에 포로병들처럼 줄지어 서있었다. "이젠 너희들은 돌아가라.나 혼자 들어갈게." 병호가 나와 상준이를 멈춰세우고 혼자서 스적스적 앞으로 걸어갔다... 2. 그 날은 룸메이트인 상준의 생일이였다.상준이는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좀 앞섰다.우리 모두 작년 가을에 일본에 왔으니 일본에서 처음 맞는 상준의 서른살 생일인 것이다. 요꼬하마는 6월 중순부터 련며칠째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였다.바깥에서 몇분만 걸어도 얼굴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려고 보면 적삼은 허연 소금기에 얼룩져있었다.금년은 작년보다 더 덥다고 한다.엇저녁 뉴스에서 한 젊은 녀성이 점심시간에 어린 아기를 차안에 두고 빠찐꼬점에 들어가 십여분간 게임을 놀다가 불쑥 아기생각이 떠올라 주차장에 달려가보았더니 아기는 이미 차안에서 질식사했다고 보도했다.제일 더운 점심시간에,그것도 차안이라고 하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이렇게 무더운 여름철을 어떻게 보낼가.추위보다 더위에 약한 체질인 나의 머리 속으로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퇴근길에 집 부근 패밀리마트에서 상준이가 좋아하는 기린맥주를 사가지고 집대문에 들어서자 웬 남자의 웃음소리가 2층에서부터 들려왔다. "하하.조선족이라고?" 최형은 아니고 누구일가? 최형은 우리 집에 세번 놀러 왔기에 알고 있었다.최형은 상준의 고중선배인데 상준이가 최형,최형이라고 불렀기에 나도 최형이라고 따라 불렀다.최형은 재작년에 도꾜공업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 전자회사에 취직했는데 한국의 부인과 일곱살 난 딸애를 일본에 요청하여 지금 도꾜 니혼바시에서 살고 있었다. 집문을 열자 최형이 방에서 달려나와 맥주를 받으면서 경기도 한고향사람이고 상준의 소꿉친구라며 약하고 키가 작은 남자를 나에게 소개했다.아까 패밀리마트에 들어가려 할 때 큰길 건너편 골목에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던 남자였다. "신병호입니다." 히죽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하는 병호가 처음부터 눈에 거슬려 보이고 아니꼽기까지 했다.나는 례의적인 인사를 하고 상준이와 같이 신할머니가 주신 김치와 엇저녁에 사놓은 통졸임,쏘세지,마른 안주 등속으로 술상을 차렸다. 이윽고 넷은 술상에 둘러앉았다. 대낮의 열기가 빠지지 못해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면 다다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군 했다.하지만 다다미 냄새도,땀냄새도 아닌 고약한 냄새가 나의 옆에 앉은 병호한테서 풍겨왔다. 나는 가만히 상 밑을 내려다보았다. 헉!병호의 발가락 사이에 까만 때가 가득 끼여있지 않는가.아까 신을 벗으면서 보니 며칠이고 씻지 않은 듯한 회색 양말이 전복된 고기배처럼 뒤엎어진 운동화 옆에 나자빠져있었었다. 그의 발에서 냄새가 풍겨왔던 것이다. 더러운 발이나 씻고 술상에 앉으면 좋지 않느냐.너깟 자식이 아까 조선족이라고 웃어댔단 말이냐! 나는 속으로 병호를 꾸짖으며 냄새를 피해 좀 옆으로 옮겨앉았다. 최형이 먼저 맥주를 따르고 생일축하한다며 잔을 추켜들었다.꿀꺽 하고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삼키는 소리가 옆에서 울려왔다.최형과 상준이가 절반 마시고 잔을 내려놓기 바쁘게 병호는 단숨에 잔을 굽냈다. "연변은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에 시가지의 하늘이 새까맣고 비가 내리면 장화를 신고 다니고 사람들은 예나 응이 아닌 양이란 방언을 쓴다던데...양,양 하고...하하." 짐작 대로 병호가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너 연변을 잘 아는구나." 나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반말이 흘러나왔다. "저와 반말 했어요?" 병호가 어리둥절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와 반말 못할 게 뭐냐?" 나는 병호를 째려보며 목소리 톤을 높혔다. "그래,우리 셋이 동갑이니 서로 말을 놓아라." 성격이 과격한 나를 잘 알고 있는 상준이가 수탉처럼 싸우고 있는 우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자 병호는 나에게 힐끗 눈을 흘겼다. "그럼 그러지 뭐.헌데 말이야.재작년에 인천에서 같이 일해봤는데 지린과 하얼빈에서 왔다는 조선족들은 한국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더라.그리고 일본에 온 중국 류학생들은 돈이 아까워서 우동도 사먹지 않는다더라." 짜증이 잔뜩 어린 투로 나에게 한마디 더 내뱉더니 병호는 저가락을 들고 김치를 집었다. "음,이 김치가 참 맛있네.이렇게 맛있는 김치는 처음이야.재일한국인들이 만든 김치겠구나." 상준이가 나를 보며 다시 웃었다. "왜 웃어?아니야?그럼 일본사람들이 만든 거겠다." "재일조선인이 만든 거야." "뭐?방금 뭐라 말했지?" 상준의 말에 병호가 뜨악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상준이가 내가 지금 어디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가게주인인 재일조선인 할머니도 성이 신씨이며 그 가게에서 파는 김치라고 설명하자 병호는 들고 있던 저가락을 탁 소리나게 밥상 우에 내려놓았다. "중국 조선족이니깐 재일조선인 가게에서 일하겠지.안 그래?" "너 말 조심해!" 아까부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최형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일본에 와서 한민족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나 아직 중국에 가보진 못했지만 우리 회사 부장의 말에 의하면 매번 출장갈 적마다 중국은 몰라보게 변한다더라.일본과 한국은 지금 중국처럼 변하고 있나?앞으론 중국이야."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있는 병호가 곁눈으로 보였다. 나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최형이 아니면 병호에게 한마디 더 쏘아붙이려 했다.저 자식이 대놓고 조선족들을 괄시하다니?일본에서 같은 민족한테 수모를 당하긴 처음이였다.중국에서 온 내가 만만하게 보였단 말인가?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부아가 치밀어올랐다.지금이라도 방에 뛰여들어가 귀뺨 한대 갈겨놓았으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방에서 최형이 낮은 소리로 병호에게 뭔가 귀속말을 하고 있었다.주방에 오래 서있기 무엇하여 랭장고에서 맥주를 더 꺼내가지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좀 있더니 병호가 다시 방에 들어와 앉았다.발을 씻고 왔던 것이다.  병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한테 다가앉으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가게 주인도 성이 신씨라고?헌데 그런 가게는 어떻게 찾았어?일자리 찾기 힘든데..." 나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지금 어디서 살고 어디서 일하며 어느 학교에 다니는가고 되물었다. "아,저...아까바네에서 살고 지금...세븐일레븐에서 일하고 있어.그리고...일본어학교..." "자,우리 다시 건배!" 병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형이 술잔을 다시 들고 나를 보며 웃었다.이상한 느낌이 맞혀왔다.아까와는 달리 머뭇머뭇 대답하는 병호의 말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지만 술상 분위기를 봐서라도 더 따져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화제를 월드컵에 돌렸다.제15회 FIFA월드컵이 미국에서 열리고 있었다.오늘 새벽에 있은 스페인과의 첫 소조경기에서 홍명보와 서정원이 한꼴씩 넣었다고 내가 말할 때 병호가 다급히 물었다. "오늘 한국이 찼어?어떻게 됐어?나 요즘 일이 바빠서 축구경기도 못 봤어.혹시 한국과 중국이 차면 넌 어느 팀을 응원하나?" 나는 중국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한국과 일본이 차면..." "물론 일본이지." 병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자 최형과 상준이가 큰소리를 내서 웃었다. "너 롱담 하는 게 아니냐?" 병호가 게면쩍게 웃으면서 맥주를 따랐다. 잠간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병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밖에 나갔다오겠다던 그가 한식경이 되여서야 들어왔다. 그 사이 최형한테서 병호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병환에 계신다는 것과 고중을 졸업하고 인천 어느 물류회사에서 일하던 병호가 일본인과 결혼한 누나의 신원보증으로 작년 봄에 일본어학교에 류학왔는데 비자가 만료되여 지금 불법체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였다. 아홉시가 되자 최형이 거나하게 취한 병호를 부축하여 일으켜세웠다.주방 창턱에 놓여있는 한국수입제 진로소주도 가져와 혼자서 다 마셔버린 병호였다. 최형과 병호가 돌아간 다음 나는 신할머니를 떠올려보았다.오늘따라 반년 전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반년 전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나와 같이 대련외국어학원 일본어교원연수센터에 연수를 갔던 심양친구가 사이다마대학 연구생으로 온 지 석달이 된다면서 집에 놀러오라 하기에 오오미야(大宫)에 가게 되였다.전차에서 내려 개찰구 쪽으로 가려던 나는 계단 옆에 있는 가게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여러가지 장식품들로 실내를 깔끔하게 가꾼 가게에는 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60세 좌우의 할머니가 손님에게 물건을 팔고 있었다.가게에 다가선 나는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 번했다. 김치,떡국,평양랭면,신라면 그리고 고추가루도 있지 않는가! 손님이 가자 할머니가 가게를 나와서 진렬장 앞에 놓여있는 상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나는 고추가루 한봉지를 들고 할머니에게 물었다 "미안합니다.이 고추가루 얼마인가요?" 나는 고추가루를 일본어로 말하지 않고 우리 말로 말했다. "한국 류학생인가요?" 책가방을 멘 나를 보더니 할머니도 일본어로 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중국 류학생입니다." "중국 류학생인데 고추가루는 어떻게 알아요?" 나는 다시 일본어로 대답했다. "중국 조선족입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습니다."하고 우리 말로 말씀하시더니 나의 손을 덥썩 잡아주시는 것이였다.순간,나는 뜨거운 난류가 전신으로 흘러퍼짐을 느꼈다.할머니는 가게 안으로 나를 안내하면서도 두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가게에 들어와서 나는 할머니와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성이 신(申)씨이고 재일조선인 2세인데 남편은 도꾜 고다이라시에 있는 조선대학 교수이고 슬하에 아들과 딸이 있었다.할머니는 며칠 후에 요꼬하마역에 지점을 오픈한다면서 요꼬하마역 근처에 살고 있는 나를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는가고 물어보시는 것이였다.당시 나는 상준이와 같이 사진관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선뜻이 대답했다. 이렇게 나는 반년 전부터 재일조선인 할머니가 경영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였던 것이다. 나는 신할머니를 어머니라고,오오미야 본점을 맡고 있는 신할머니의 따님을 누님이라고 부른다.간혹 신할머니가 나오지 못하는 날이면 내가 오전부터 가게에 나갈 때도 있고 누님이 애들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날이면 내가 누님 대신 본점을 봐주기도 한다.신할머니는 내가 토요일과 일요일 밤이면 공장에서 일한다는 걸 알고 전번주부터는 토,일도 가게에 나오도록 해주셨고 상준의 생일이라고 말했더니 저녁 무렵에 일찍 교대하러 와서 김치도 나의 가방에 넣어주셨다. 중국 조선족이라고 나를 친아들처럼 사랑해주시고 관심해주신 할머니는 참말로 고맙고 영원히 잊지 못할 분이시다. 신할머니를 다시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주루룩 흘러내렸다. 3. 요즘은 지도교수가 학술연구회에 참석하여 한주일에 두번 뿐인 수업도 없었다.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전에는 수업도 많지 않았다.여름방학도 거의 다가왔다.그러니 지금부터 방학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kiosk(키오스크). 전철역 출입구나 프래트홈에서 신문,잡지,텔레폰카드 등을 파는 역전 가게인데 도꾜,우에노,요꼬하마와 같은 큰 전철역에는 역사 안에 스시점,도시락집,케익점 등 특수한 kiosk들도 많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신할머니의 가게도 요꼬하마역 역사 안에 있었다.본점과 지점에서는 모두 우에노에 있는 제일물산(第一物产)주식회사에서 제조한 김치,고추가루,고추장,새우젖,창란,평양랭면,떡국 그리고 한국물산점을 운영하는 재일한국인 민사장을 통해 들여온 한국의 신라면,너구리라면,홍삼차,돌김,인삼드링크 등 식료품들을 팔고 있다. 서남구 개찰구 쪽에 위치한 가게는 저녁 아홉시가 지나면 전차를 갈아타기 위해 가게 앞을 총망히 오가는 사람들은 많아도 정작 물건을 사는 손님은 별로 없기에 아홉시면 보통 문을 닫는다. 이튿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아홉시가 되여 가게 문을 잠그려고 할 때 등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반갑지도 않은 병호였다. "여기구나.요꼬하마역이 너무 커서 겨우 찾았다." "여긴 왜 왔어?" 나의 입에서 말이 곱지 않게 나왔다. "누나 집에 왔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들렸다." 내가 대꾸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놓으려 하자 병호가 나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 밖에 나가 술 한잔 하자.오늘 내가 살게." 내가 너 따위 자식과 술 마실 줄 알았어! 나는 병호를 가게 앞에 세워둔 채 개찰구 쪽으로 걸어갔다. 병호가 살고 있다는 아까바네는 도꾜 북구에 위치해있다.여기서 오오미야로 가는 게이힌도호꾸센(京浜東北線)을 타고 50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이다.그의 누나가 진짜 요꼬하마에서 살고나 있을가?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고 일부러 찾아온 거지. 나는 속으로 병호를 다시 욕하며 전차에 올랐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그 이튿날 저녁은 손님들이 있어 아홉시 반을 넘어서야 상자들을 정리하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미안합니다.김치를 사러 왔습니다." 부부로 보이는 손님들이 가게에 왔기에 나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김치 한봉지 주세요." "네." 나는 포장한 김치 한봉지를 가게전용봉지에 넣고 녀성손님이 건네주는 천엔짜리 지페를 받았다.그런데 남자손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아닌가. 이게 누구인가! 작년 11월 중순,지인의 소개로 쯔루미에 있는 레스토랑에 면접 보러 갔다. "우리 가게에서는 일본인 명찰을 달아야 합니다." "그럼 저한테 어떤 성씨를 주나요?" "이미 준비했습니다." 사무상 우에 놓여있는 기노시다(木下)라는 명찰을 보고 나는 점장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중국에서 교원을 하다 보니 이런 일엔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는 가게를 나와버렸다. 비록 아르바이트이지만 내가 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일본인으로 가장해야 한단 말인가!  쯔루미역 부근에 있는 레스토랑 가나이점장이 가게에 온 것이다. "박상?" kiosk 종업원 복장에 달린 나의 명찰을 보며 가나이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나는 못들은 척 거스름돈 100엔과 김치를 녀성손님에게 드리며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하고는 계산대에 눈길을 돌렸다. 가나이가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신상 오늘 안 나왔어요?" 그제서야 나는 대답했다. "네.오늘 안 나왔습니다." 와이프로 보이는 녀성손님이 가나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들이 개찰구 쪽으로 가서야 나는 적잖게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나이가 나를 알아봤구나.헌데 가나이가 왜서 여기에 왔을가?신할머니를 아는 걸 보면 이 가게의 단골손님일가?김치가 맛있다며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은 많았지만 가나이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그럼 내가 없는 사이에 자주 왔을가?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가면서 나는 입가에 랭소를 머금었다. 가나이가 나를 알아본들 어찌랴.내가 레스토랑이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할 가게가 없으랴.나의 명찰을 보고 얼마나 무안했으랴! 그 다음날 점심 무렵,할머니가 도시락통을 보자기에 싸들고 가게에 들어섰다.슈퍼에서 사온 오니기리(주먹밥)로 점심을 에때우군 하는 나에게 집에서 색다른 음식을 하면 자주 가져다주는 할머니이시다. "소고기장졸임을 했어.밥도 듬뿍 담았어.나 지금 누나를 교대해주러 갈게.그럼 수고!" "잠시만,어머니!" 나는 문을 나서려는 할머니에게 가나이가 어제 가게에 왔더라는 얘기를 꺼냈다.할머니는 대뜸 알아차리는 것이였다. "이전에 도꾜 닛뽀리에서 같이 살았어.헌데 가나이를 어떻게 알어?" 나는 작년에 레스토랑에 면접 갔던 일을 말씀드렸다. "그런 일 있었어?가나이의 어머니는 나와 동갑인데 지금도 가끔씩 와서 김치를 사가군 해." 내가 아무 말도 없자 할머니가 나를 보고 웃으셨다. "가나이가 민사장을 소개해주었어.여기는 장사하는 가게이고 가나이가 나쁜 사람도 아니니 앞으로 만나면 반갑게 대해줘." "네,알겠습니다." 배는 고팠지만 왠지 밥과 소고기장졸임이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가 가게를 나간 후에 나는 오래도록 생각해보았다. 가나이가 이제 가게에 다시 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가?가나이가 저번 일 때문에 나한테 복수라도 하지 않을가?야꾸자들을 시켜 나를 혼내지 않을가? 어제와는 달리 어느 날 귀가중 길거리에서 큰 봉변이라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등골이 서늘해났다. 4. 폭염의 기세는 전기세 걱정까지 몰아버리고 밤새껏 에어컨을 가동하게 만들었다. 며칠이 지난 아침,상준의 휴대폰이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터졌다. "오,병호구나.아침부터 웬 일이야?" 상준이가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았다.나는 그만 일어나 욕실에 들어갔다. 상준의 말소리가 욕실에서 들려왔다. "...너도 잘 알잖아?나한테 지금 없어..." 뭐가 없단 말일가?혹시 병호가 돈을 빌려달라는 게 아닐가? 상준이는 병환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달마다 한국에 송금하고 있었고 두주일 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국에 갔다오기도 했다.그의 수중에 돈이 얼마 없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그런 상준이한테서 병호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단 말인가?학교도 다니지 않고 불법체류하고 있으니 학비는 이젠 지불할 필요가 없을 테고 부지런히 일만 하면 돈은 엄청 모아질 게 아닌가. 나는 상준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누님이 한주일간 쉬기에 누님 대신 래일부터 오오미야에서 일하게 되여 그 날 저녁은 일찍 퇴근하게 되였다. 광장 부근 백화점에서 적삼을 사가지고 요꼬하마역으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공교롭게도 가나이점장과 맞딱뜨렸다.잘못한 일도 없는데 갓 낚아올린 물고기처럼 심장이 팔딱거렸다.가나이점장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는 걸 집에 손님이 와있다고 둘러댔다.불법체류하는 외국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으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말에 병호가 피끗 머리 속에 떠올랐지만 나는 그저 알았다고 대답했다.언제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자는 가나이점장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보니 호 하고 안도의 숨이 나왔다. 집에 들어오니 상준이가 장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한국에 갔다온 후부터 주유소에서 새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준이도 오늘은 일찍 퇴근했다.저녁을 먹으면서 상준이한테서 병호의 근황을 알게 되였다. "병호가 혹시 경찰에 잡히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글쎄다.잡히면 강제출국이라더라." "그래?근데 누가 신고라도 하겠나?" "거야 모르지.일본인들이 가만히 신고한다더라.병호 누나도 속상해서 나한테 몇번이나 전화왔더라." 비자가 만료된 병호는 일본인인 매형이 소개한 제과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어느 휴일날,같이 일하는 일본인과 경마장에 갔다가 의외로 짭짤한 수입을 맛본 병호는 그 후부터 아예 공장 아르바이트를 때려치우고 낮이면 경마장에 달려가고 밤이면 빠찐꼬점에 뛰여들었다.요즘은 돈을 퍼그나 날려버린 모양이였다.누나와 매형이 기미를 알아차리자 누나 집에는 감히 얼씬도 못하고 있다가 상준의 생일날에 최형의 전화를 받고 우리 집에 왔던 것이다. 아직 결혼 전이고 불법체류로 있는 병호이지만 상준의 얼굴을 봐서라도 앞으로는 병호를 너무 차갑게 대하지 말아야겠다고,친구도 별반 없는 여기서 최형의 말 대로 한민족끼리 사이좋게 지내야겠다고 나는 생각을 고쳤다. 한주일간은 오오미야에 있는 친구 집에서 가게를 다녔다.친구도 요즘은 학교에 나가지 않고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었다. 요꼬하마에서 다시 일하게 된 날은 국제교류기금센터에 오신 대학은사님께서 중국에 돌아가시기에 은사님을 배웅하려고 오전에 청가를 맡았다.친구 집에서 하루밤 더 묵고 이튿날 아침에 기다우라와(北浦和)에 갔다.기다우라와는 오오미야에서 두 정거장 거리인데 친구가 다니는 사이다마대학과 국제교류기금센터가 있는 시였다.오오미야에서 나리다공항까지 가는 리무진뻐스가 있었다.은사님을 모시고 택시로 오오미야까지 와서 공항뻐스터미널에서 은사님께 인사를 올리고 나서 누님을 한번 뵙고 가려고 역사 계단을 올라왔을 때 나는 깜짝 놀라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가방을 둘러멘 병호가 사이꾜센을 타는 방향으로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병호가 왜서 오오미야에 왔을가?가게는 반대방향에 위치해있었다.혹시 나를 또 찾아온 게 아닐가? 나는 그를 부르려다가 가게에 가서 누님과 잠간 얘기를 나누고 다시 요꼬하마로 가는 전차에 올랐다. 한주일간 뵙지 못했을 뿐인데 가게가 눈앞에 보여오자 나는 막 뛰여갔다. "어머니,돌아왔습니다.잘 보내고 계셨죠?" "그래,그래.수고했어." 할머니도 반가워서 나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 "오전에 가나이점장이 가게에 와서 한참 앉아있다가 갔어.가나이점장과 얘기를 나눌 때 성이 신씨인 한국남자가 찾아왔어.친구라 하던데 어떻게 알았어?" 병호가 가게에 다시 찾아왔던 것이다. "상준의 고향친구입니다.상준의 생일날에 처음 만났습니다.뭐라 하던가요?" "박상이 언제 나오는가고 묻기에 요즘 오오미야에서 일한다고 했지.오후부터 여기에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오오미야가 어디에 있는가고 다시 묻기에 사이다마현에 있다고 알려줬어.오오미야를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는데 말이야.걸상에 앉아있던 가나이점장이 그 친구를 안면이 있는 사람 같다고 하던데...그리고 모레부터 누나가 사정이 있어 나오지 못하니 다음 달 10일부터 이 가게는 그만두기로 했어.교통이 불편하더라도 나를 도와 오오미야에서 그냥 일해줬으면 고맙겠어.다른 알바생은 찾지 않겠어.그럼 래일은 마지막으로 여기서 일하고 모레부터 다시 오오미야에서 일해줘.더위에 주의하고 앞으로도 수고!" "네,알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미리 다른 아르바이트라도 구해놓았던 걸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한시간도 넘는 전차를 타고 아르바이트하러 갈 필요까지 있겠는가.하지만 할머니의 말씀 대로 오오미야에서 계속 일하리라 속다짐했다. 절주가 빠른 사회에서 래일 해고당하거나 회사가 파산되더라도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팽이처럼 돌아치는 일본인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였다.   5. 이튿날은 요꼬하마역에서의 마지막 아르바이트였다. 비록 짧디짧은 반년이였지만 그동안 이웃 케익점과 스시점 점장들과는 물론 일본인 알바생들과도 사이좋게 지내왔었다.손금 보듯 환한 가게 곳곳을 마지막으로 청소해놓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상준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나는 개찰구를 지나면서 역사 종업원들한테도 인사를 하지 않고 부랴부랴 전차에 올라탔다.병호가 집에 찾아온 것이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병호가 세수를 하는지 발을 씻는지 화장실에 있었다.  "병호가 래일 쥬죠입국관리국에 가겠단다." 상준이가 나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왜서 불시에..." 불시에 화장실 문이 벌커덕 열리더니 눈알이 째빨개진 병호가 방에 들어왔다.나는 다급히 병호에게 물었다. "너 무슨 일 있나?" "한국에 돌아갈란다.나 같은 사람이야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지." "그건 무슨 말이야?" 병호가 나의 두손을 꼭 쥐여잡았다.물기 있는 손이 싫긴 했지만 나는 손을 빼내려 하지 않고 그와 같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 작별인사 겸 사죄하러 왔다.오오미야에도 찾아갔는데 네가 없더라.전번엔 미안했다.마음에 두지 말라." "너 왜 이래?" 병호의 눈에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무슨 말을 다시 할듯 말듯 병호는 입술만 실룩거렸다. "불법체류라 해도 우리와 같이 있으면 좋잖아.너 이렇게 가면 다신 일본에 못 온다." 나의 말에 병호가 웃음을 터뜨렸다.고개를 젖히고 웃는 모습이 마치 실밥 터진 부대자루 같았다.어떻게 그런 웃음이 나오는지 놀랍고 어이없었다. "까짓 일본에 다시 못 오면 말지.일본인들한테서 얼마나 놀림을 당했는지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진다.돈이 뭔지 내 더러워서..." "누군들 여기에 있고 싶어 있나?나와 상준이도 다 참고 산다." 병호가 정작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하니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앞서면서 어떻게 하든 그가 일본을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고 싶었다. "같은 처지에 놓여봐야 안다고 한국에 와서 막일을 하는 조선족들이 이제야 리해된다.그리고 나처럼 한국에서 불법체류하는 조선족들도 이젠 알만 하다." "...?!" 병호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다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입을 하 벌리고 병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리 알아주니 감사하다.나 슈퍼에 가서 맥주를 사올게.오늘은 우리 셋이서 실컷 마시자.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일어서려 하자 병호가 나를 눌러앉혔다. "아니야.전차가 끊기기 전에 빨리 집에 가야겠다.나 이만 간다." 병호가 벌떡 일어나서 출입문 쪽으로 가더니 잽싸게 신발을 껴신고 집문을 나갔다. "병호야!" 눈 깜짝할 사이였다.나는 맨발바람에 뒤쫓아가려다가 슬리퍼를 찾아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어느새 집대문을 나갔는지 병호는 마침 집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저 멀리 사라져갔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골목으로 들어오기에 그만 돌아섰다.집에 들어오자 상준이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구나.래일 아침에 병호와 같이 입국관리국에 갈게.아까바네에서 사이꾜센을 타면 쥬죠까지 한 정거장이다." "래일부터 오오미야에서 일하게 되였다.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보자.근데 병호가 왜서 이렇게 불시에 떠난다니?" "경마장과 빠찐꼬점에서 손을 씻고 한주일간 일자리 찾으러 다녔다는데 일본어도 잘하지 못해서 뜻대로 되지 않았나 봐.방세도 다음 달 5일 전으로 반년치를 지불하기로 되였단다.전번날 아침에는 전화가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더라." 그런 일이였었구나. "그렇다고 훌쩍 한국에 가버리면 어떻게 하나?게임을 하면서 돈도 많이 날렸다는데 불법체류인 바엔 조심히 있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 말이다.” "오늘 일을 누나와 매형과 상론했겠지?매형한테 그 제과공장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말하면 좋잖을가?그러면 소개한 매형도 기뻐할 거고 매형과 사이도 좋아질 거고... " "그들한테 알린 것 같지 않다.사실 그 공장은 매형이 아니라 매형의 친구가 소개했다더라.어느 레스토랑 점장인데 소개비도 줬다더라." 레스토랑 점장? 어제 가게에 찾아온 병호를 가나이점장이 안면이 있는 사람 같다더라고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어디 레스토랑 점장이라더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고 병호가 올봄에 그 공장에 면접 보러 가니 그 사람이 사무실에 와있더란다.매형과 친구라며 공장장과 말해놓았으니 근심 말고 면접 보라면서 자리를 피했다고 하더라." “그래?병호가 잠시 우리 집에 와있어도 괜찮잖어?" "친구라 해도 불법체류하고 있으니 두렵기만 하구나.나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별수가 없다." 나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나 오늘은 좀 피곤하니 먼저 자야겠다." 자리에 누운 나는 벽에 걸려있는 카렌터에 눈길이 갔다. 오늘이 1994년6월29일 수요일.래일은 6월 마지막 날.그저께 한국이 2:3으로 독일에 패하여 16강진출에 좌절했으니 이젠 월드컵도 볼거리가 없게 되였다. 6. 병호의 뒤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던 나와 상준이는 쥬죠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땡볕에서 세차도 하는 상준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수척해보였다.나를 보고 서글프게 웃는 그의 눈시울에 처음 보는 이슬 같은 것이 반짝거렸다. 전차가 아까바네에 왔을 때였다. 난데없이 차창 밖에서 후두둑 비방울이 떨어졌다.전차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 마다에는 한차례 소낙비가 련며칠째 지속되던 무더위를 시원히 가셔준다는 희열의 미소가 담뿍 어려있었다.차창으로 흘러내리는 비물을 바라보며 나는 병호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몇번 만나지도 못하고 헤여지면서 우리는 왜서 원쑤라도 만난듯 다툼질까지 했던가.서로 마음에 두고 오래오래 후회할 것을.그리고 왜서 오오미야역에서 그를 보고 부르지 않았던가.점심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씁쓸한 위액이 되여 목구멍으로 차올라왔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친구야,잘 가거라.나도 오늘을 잊지 않을게. 전차는 어느새 도꾜와 사이다마현을 이어놓은 철교를 지나가고 있었고 하늘에는 또다시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7    프로필 댓글:  조회:749  추천:0  2019-09-14
필명:살구나무(杏の木).길림성 룡정시 출생.1987년 연변대학 일본어학부 졸업.대학시절 처녀작 시 를 장백산잡지에 발표.연변교육학원에서 6년간 일본어교원으로 근무.일본 요꼬하마국립대학 대학원 졸업.일본류학시절 칼럼 을 마이니찌신문에 발표.한국 ‘문학의 강’단편소설부문 신인문학상 수상.2016년 연변작가협회 제11기민족문학원 강습반 수료.2019년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입회.
6    (단편)달려라 자전거 댓글:  조회:1003  추천:0  2019-09-14
2019년3월호     단편소설       달려라 자전거     박명선       1.     방안에 켜놓은 텔레비죤에서 12시뉴스를 이어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오후부터 관동지방에 또다시 큰비가 내리겠습니다.각 지역의 예상 강우량은...” 요즘 들어 비가 자주 내리고 있었다.장마철에 들어선 것이다. 주방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나는 방에 뛰여들어가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먹장구름이 폭격기 편대처럼 머리 우로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지금 당장이라도 큰비를 퍼부을 기세였다. 베란다에 줄줄이 내놓던 동네집 화분들은 자취를 감추고 사람 사는 정취를 느끼게 하던 빨래건조대들에도 양말 한짝 널려있지 않았다.대신 오늘은 첩첩이 둘러쌓인 지붕들과 물기를 촉촉히 머금은 서쪽 큰길이 훤히 내다보였다. 큰길 건너편 자전거방 옆에 있는 남새점에서 장화를 신은 다까하시가 트럭 안의 상자들을 부리우고 있었다. 한주일 전 토요일 오후였다.오랜만에 상준이와 같이 외식을 하고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던 서쪽 큰길로 집에 오다가 우연히 남새점에 들리게 되였다.상준이가 햇감자로 장국을 끓여먹으면 맛있겠다며 감자 몇개를 골라 들고 계산대로 갔다. "이렇게 난전을 벌려놓은 남새점이 코앞에 있은 걸 몰랐구나." "그래 말이다." 슈퍼와는 달리 간소한 남새점에서는 남새들을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팔고 있었다.그렇다고 흙먼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 류학생들인가유?" 나와 상준이가 주고받는 말을 듣고 70세 좌우로 보이는 주인장이 상냥한 어조로 묻기에 나는 중국에서,상준이는 한국에서 왔다고 각자 대답했다.그러자 주인장이 환한 미소를 띄우더니 나에게 다시 물었다. "중국 어디서 왔수?언제 일본에 왔수?" "동북에서 왔습니다.작년 가을에 일본에 왔습니다." "일본에 온 지 반년이 되는군.동북에서?그럼 만주에서 왔군.혹시 봉천인가유?" 만주와 봉천이라는 주인장의 말이 귀에 거슬리게 들려왔다. "봉천을 알아요?봉천은 심양입니다." 나는 일부러 심양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유.아,지금 1994년이니 50년이 거의 되는군.오랜만에 다시 중국인을 만나는구려.허허." 나는 의아한 눈길로 주인장을 스캔해보았다.키는 크지 않아도 쩍 벌어진 어깨며 굵직한 팔뚝을 봐선 젊었을 때 유도라도 한 것 같았다. "나 스무살에 락하산병으로 봉천에 갔수다." 뭐라?락하산병?그럼 옛 일본군이 아닌가?! 순간,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용광로처럼 끓어번지며 온몸의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쳐올랐다.저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여졌다. 옛 일본군을 여기서 만나다니? 헌데 이 령감쟁이가 중국인 앞에서 락하산병이였다고 스스럼없이 지껄여대고 있지 않는가! "중국에 몇년 있었어요?" 상준이가 옆에서 묻는 바람에 나는 중국인을 만나니 어떤가고 목구멍에서 나오려던 말을 도로 삼키고 말았다. "내가 중국에 가서 얼마 안돼 전쟁이 끝났으니 두달도 되나마나하지우.난 전쟁터엔 나가보지도 못했수다.저,여보.여기 귀한 손님들이 왔소." 령감쟁이가 집안에 대고 소리를 지르자 "하이!"하는 대답과 함께 약삭바르게 생긴 녀인이 네댓살 어린애처럼 쫑드르르 달려나왔다. "마누라인데 같은 부대에 있었수다.간호원으로 몇년간 조선에 있다가 봉천에 들어왔수다.이 두분은 중국과 한국서 온 류학생들이요." "다까하시예요.만나서 반가워요." 령감쟁이의 녀편네가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해사한 웃음을 머금고 허리를 굽혀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옛 일본군 락하산병과 간호원이라? 나는 그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만 남새점을 뛰쳐나오려고 했다. "잠간만!" 령감쟁이가 나와 상준이를 불러세우더니 하얀 비닐주머니에 오이와 도마도를 넣어서 상준의 손에 쥐여주었다. "보잘 것 없지만 가져다 맛이나 보시우.아침에 터밭에서 따온 것이라 신선할 거우다.난 다까하시라 하우." "전 오라 합니다.이쪽은 박이구요." "박?박상은 고향이 어디우?지금 어디서 사우?" 나는 고향이 어딘가는 물음에는 못들은 척 맞은켠 골목을 턱질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기 2층 아파트입니다." 어느 학교이고 지금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가는 물음에 상준이가 고분고분 대답하자 다까하시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생들 하는구만.언제 시간 되면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천천히 얘기를 나눕세다." 다까하시 내외가 큰길까지 우리를 바래주었다.집 골목에 들어서자 나는 상준이를 흘겨보았다. "일본군한테서 까짓 남새를 다 받아가지고 너 참..." "일본군이라 해도 전쟁터엔 나가보지도 못했다잖아." "전쟁터에 나갔더라면 저 놈도 아마..." 토요일이여서인지 아니면 을씨년스러운 날씨때문이여서인지 큰길에는 자동차 몇대가 지나갈 뿐 행인들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이윽하여 자전거방 주인이 다까하시한테로 다가가 웃으며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지금 자전거방에 가보자! 큰길에 먼 시선을 주고 있던 나는 부랴부랴 나갈 차비를 했다. 전번주부터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에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구해놓았다.집에서 가까운 전철역에서 한 정거장을 지나 신작로 건너편에 위치한 미네랄제조공장인데 지난 일요일 밤에는 잔업을 하다나니 전차가 끊겨 반장이 차로 집까지 데려다주는 해프닝이 있었다.그래서 오늘 저녁부터는 자전거를 타고 공장에 가려고 어제 점심 자전거방에서 중고자전거 한대를 샀던 것이다. 자전거방에서 뭔가를 물어보는 척 하자.그러면 다까하시가 나한테로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넬 것이다. 어제는 남새점에 사람들도 별로 드나들지 않았고 다까하시도 어디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다까하시를 만난 지도 한주일이 지났다. 나는 층계를 내려와 마당에 세워놓은 자전거를 대문 밖으로 밀고 나갔다. 문득 이전에 중국에서 자전거를 처음 샀을 때 멀지 않은 변소에 가면서도 자전거를 탔던 생각이 떠올라 피씩 웃음이 나왔다.  자,일본군 적진을 향해 돌격!       2.     다까하시는 보이지 않고 트럭만 길옆에 세워져있었다. "자전거에 고장이라도 생겼어요?" 가느다란 체격에 도수 높은 근시안경을 건 50대 자전거방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웃으며 물었다. "아닙니다.지나가다가 들렸습니다." 어제는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보았다.중고자전거였지만 외관도 보기 좋았고 브레이크 성능도 좋았다.손전등처럼 깜찍한 전조등도 장치되여있고 변속기능도 있어 어두운 밤길과 가파른 길에서도 힘들지 않았다.평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서 집까지 오는 시간이 40분 정도 걸렸지만 전차에 앉아 언뜰언뜰 스쳐지나가는 바깥풍경을 묵묵히 지켜보기보다는 비가 내려 한결 시원해보이는 밤거리를 흥미롭게 드라이브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나는 다까하시물산이라고 차문에 파란 페인트칠을 한 트럭을 건너다보며 주인에게 물었다. "전번에 이 가게에서 남새를 산 적이 있습니다.남새가 신선하더군요.저 트럭은 남새점에 남새를 날라다주는 차인가 봅니다." "주인할아버지가 농촌에서 남새를 실어오는 차입니다.이전엔 물산점을 차렸는데 몇년 전부터 요꼬하마 시내 여러 슈퍼에 남새를 제공합니다." "그런가요?그 할아버지 아주 건강해보이더군요." "군인출신이니 그렇겠지요." "군인이였어요?" "네." 갑자기 우르릉 꽝 하고 하늘에서 우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굵은 비줄기가 장대처럼 쏟아져내렸다.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시까지는 아직 네시간이나 남아있었다.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때 비가 그치면 좋으련만 비가 계속 내리면 어떻게 할가? 나는 그만 주인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비옷모자를 올려쓰고 남새점을 지나며 자전거에 오르려는데 밖으로 나오는 다까하시와 면바로 눈길이 마주쳤다. "박상,오랜만이네.허허.비 오는데 웬 일로 여기를 지나우?" 마침 나의 생각대로 다까하시가 먼저 말을 건네왔다. "어제 산 자전거에 대해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자전거 타구 학교 다니려구?국대(요꼬하마국립대학)까지 가자면 여기서 멀겠는데...헌데 오늘은 혼자 왔수?오상은?" 기억력도 좋은 령감쟁이였다. "아버지가 편찮아서 그저께 한국에 갔습니다." 수요일 오전 상준이는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요꼬하마입국관리국에 가서 재입국수속을 하고 이튿날 오전 비행기로 한국에 갔다. "지금 시간 괜찮은거유?" "저녁 다섯시에 일하러 가니깐 시간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그럼 여기 들어오시구려.로친이 아까 도꾜에 살고 있는 딸집에 놀러 가고 지금 나 혼자 있수다." "그럼 잠간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다까하시를 따라 가게에 들어섰다. "여기라도 괜찮습니다." 남새상자들 옆에 걸상 두개가 놓여있었다. "그럼 변변찮지만 거기라도 앉으시우." 내가 앉은 자리에서 집안 한 구석이 들여다보였다.미닫이 옆 하얀 벽에 흑백사진액틀이 걸려있었는데 와후꾸와 기모노를 입은 젊은 남녀가 찍은 걸 보아 다까하시의 결혼사진 같았다. "박상은 결혼했겠지우?애는 몇살이우?그리구 고향은 어디우?" 다까하시가 걸상을 가져다 나와 마주앉았다. "네살 나는 아들이 있습니다.고향은 동북 길림성 룡정입니다.룡이라는 룡에 우물이라는 정입니다." "그럼 혹시 이전에 간도일본령사관이 있던 곳이 아닌가유?" "맞습니다.저의 집이 바로 령사관 동쪽마을에 있었습니다." "그렇군.내 나이 이젠 칠십이 되는데 박상의 할아버지보다는 좀 나이가 어리겠구려." 나는 참다 못해 큰소리를 내서 웃었다. "어려도 많이 어리지요.동생도 아닌 조카벌이나 되겠죠." 내가 웃는 걸 보고 다까하시는 쑥스러웠던지 인차 말머리를 돌렸다. "할아버지는 지금 건강하슈?할아버지는 고향이 어디유?이전에 령사관 주위에 조선인들이 많았다고 들었소만..." 성이 박씨인 내가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인 걸 뻔히 알면서 에둘러 물어보는 다까하시가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잘 아시는군요.저는 중국 조선족입니다.저의 할아버지 고향은 한국 경상도입니다.전 할아버지를 뵌 적 없습니다.아버지도 뵌 적 없다고 했습니다." "왜서유?일찍 돌아가셨는가유?" 나는 이번엔 정색해서 말했다. "아버지가 한돐이 안돼 일본군과 싸우다가 돌아가셨답니다." "억?!" 일본군이라는 말에 다까하시의 입에서 가벼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큰할아버지도 일본군과 싸우다 돌아가셨답니다." 다까하시의 얼굴이 졸지에 홍당무우처럼 빨개졌다. "어...어...참 안됐구려.일본이 조선과 중국에 많은 빚을 졌지유.저...쥬스라도 한잔 드릴가유?" "아닙니다.전 이젠 가보겠습니다." 나는 바둑시합에서의 승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가슴에 지지리도 맺혔던 저주와 원한을 한꺼번에 풀어버린듯 속이 후련해났다.지나간 옛일을 꺼내려고 가게에 들어온 것은 아니였다.하지만 정작 옛 일본군을 마주하고 보니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나는 비옷모자도 쓰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씽하니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네시. 읽던 참고서적을 놓고 큰길을 내다보니 남새점 앞의 트럭은 그냥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아마 오전에 트럭을 몰고 슈퍼들에 남새를 날라다준 령감쟁이가 지금 가게에서 남새를 팔고 있을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나한테서 받은 타격 때문에 머리를 싸쥐고 집안에서 끙끙 앓으면서 어디서 굴러온 죠센진(조선인) 후예가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는가고 투덜거릴 것이다. 오늘은 왠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싫어졌다.집에서 혼자 가만히 침대에 누워 텔레비죤도 보지 않고 깊은 명상에 잠겨있고 싶어졌다. 공장에 전화를 하려던 나는 들었던 수화기를 도로 놓아버렸다.일본에 와서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를 쉬여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택시를 타고 갈가? 비가 온다고 택시를 타고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바보도 있을가? 그럼 오늘은 전차를 타고 갔다가 다시 전차를 타고 오자.그 전철역에서 공장까지 걸어서 반시간 정도니깐 지금 집을 나가야겠구나.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우산을 들고 나가다가 창문을 닫으려고 밖을 다시 내다보니 트럭이 움직이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 다까하시가 어디로 갈가? 혹시 같은 방향일 지도 모르지.가다가 어디에 들리는가 봐야지. 나는 바삐 층계를 내려왔다.대문 안 벽에 걸어놓았던 비옷을 다시 껴입고 잽싸게 자전거를 밖으로 끌어냈다. 자,이번엔 일본군을 추격!       3.     생각과는 달리 다까하시의 트럭은 공장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허구픈 실소를 던지고 자전거를 돌려세웠다.반장과 같이 왔던 길이였고 거리를 봐서라도 공장까지는 반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절반 쯤 왔다고 짐작했을 때 광풍이 휘몰아치더니 비줄기도 점점 더 굵어지면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자동차 스몰라이트처럼 전조등을 켜고 달렸다.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왠지 비속에서 전조등이 썩은 오렌지 같아보였다.하여튼 오늘은 기분 나쁜 날이였다.하지만 나의 기분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듯이 하늘에서는 차거운 비를 사정없이 퍼붓고 있었다.하얀 선으로 이어진 차선 옆 자전거길을 따라 한참이나 달리다가 문득 아까 교차로를 지나 굽인돌이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반장의 차에 앉아올 때는 좁은 길이 아니라 경사진 넓은 신작로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제기랄!  신발과 바지는 물론 비닐비옷에서 안장으로 흘러내리는 비물에 팬티마저도 후줄근히 젖고 말았다.젖은 팬티가 사타구니에 달라붙어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였다. 이게 다 그 개 같은 다까하시 령감쟁이 때문이야.하필이면 내가 집을 나가려고 할 때 트럭을 몰고 갈 게 뭔가.전차를 타야 하는데 자전거를 타서 그만 물병아리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자전거를 타고 온 자신을 탓하지 않고 듣지도 못하는 다까하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비물이 질척거리는 신발과 젖은 걸레 같은 양말을 벗어 핸들 앞 바구니에 던져넣고 맨발바람에 다시 자전거에 올라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잘못 들어선 길에는 행인은커녕 오가는 차량조차 보이지 않았다.비바람을 맞받아가는 길은 아득하기만 하고 비옷과 길바닥을 두드려대는 비소리만 처량하게 들려왔다.불쑥 공동묘지라도 있음직한 길옆 어느 어슥한 곳에서 일본귀신이나 미친개라도 뛰쳐나오지 않을가 더럭 겁이 났다.숨을 헐떡거리며 황황해서 내달리다가 어디까지 왔을가 잠간 멈춰서서 얼굴에 흘러내리는 비물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요꼬하마에 원자탄이 떨어졌나 했더니 번개가 번쩍거렸다.그 번개빛 속으로 대여섯메터 앞 길옆에 도로표식이 신기루처럼 홀연히 솟아있었다. 아!왔구나! 저도 모르게 흥분과 감탄에 뒤섞인 환호소리가 입에서 터져나왔다. 나는 도로표식대로 공장방향으로 꺾어들어 라스트를 향해 질주하는 자전거선수마냥 부리나케 페달을 밟았다.  공장에 도착하여 출근카드를 찍으니 5분전 다섯시였다.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자고 보니 젖은 팬티 우에 파란 로동복바지를 그대로 입을 수는 없었다.바지앞섶이 젖은 걸 보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는가.그러잖아도 걸죽한 롱지거리를 잘하는 아줌마들이 여럿이나 있었다.그녀들이 왜서 바지앞섶이 젖었는가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가. 마침 탈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나는 가만히 팬티를 벗고 로동복바지만 입었다.감촉이 좋지 않았지만 별수가 없었다.바지가 흘러내릴 것 같아 허리띠를 졸라맸다.이러면 되겠군.팬티를 입지 않은 걸 누가 보아내겠나.나는 입가에 느슨한 웃음을 빼여물고 팬티를 쥐여짰다.팬티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그 빌어먹을 다까하시 령감쟁이를 다시 만나기만 해봐라.네놈도 이렇게 꽉 비틀어놓으리다.나는 팬티를 옷걸이에 걸어 보관함에 넣어두고 차간으로 들어갔다. 지난 토요일 저녁에 왔던 일본인 학생들과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누며 일하다나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오늘은 벌써 퇴근시간이 되였다.나는 제일 먼저 탈의실로 달려갔다.옷을 제꺽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반장이 집까지 실어주겠다고 하기에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웃으며 대답했다.낮일을 하는 두 알바생이 래일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그들 대신에 래일은 오전 여덟시부터 저녁 다섯시까지 낮일을 하는 영광이 차려졌다. 빨리 집에 가야지. 공장 대문을 나오니 비는 이미 그쳤다.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렸지만 채 마르지 않아 아직도 축축한 팬티와 바지는 거마리처럼 몸에 달라붙었다.   집골목에 들어서서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서쪽 큰길로 가보았다.남새점은 이미 문이 꼭 닫겨있었고 트럭도 나를 비웃는듯이 멈춰있었다.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와 입었던 옷과 바지를 벗어 세탁기 안에 집어넣고 팬티와 양말은 썩은 걸레 버리듯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리고는 샤워를 하고 나서 인차 잠자리에 누웠다.   새벽 네시. 병사들을 실은 트럭이 어느 마을로 돌진해들어갔다.시퍼런 총칼을 비껴든 몇명 병사를 거느리고 소대장이 어느 집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갔다.손전등으로 집안을 비추니 누데기이불안에서 어른의 머리 하나와 어린애의 머리 셋이 동시에 나왔다. "이불 안에 수류탄을 던져!" 내가 부들부들 떨고 있자 소대장이 나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었다. "저 놈들이 살아남으면 이제 너를 죽일 것이다.그래도 수류탄을 던지지 않겠는가.던지지 않으면 너를 먼저 쏴죽이겠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할 수 없이 수류탄을 이불 안에 던져넣고 밖으로 달려나왔다. 쾅!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땅! 뒤이어 들려오는 총소리에 다시 놀라 뒤돌아보니 소대장이 피투성이가 되여 이불 안에서 기여나온 한 어린애의 머리에 권총을 쏘았다...   얼마나 잤는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산 《한 병사의 수기》라는 책에서 나온 한 대목이 마치 금방 눈앞에서 펼쳐진 장면처럼 떠올라 그만 잠에서 깨여났다. 《한 병사의 수기》는 이미 칠십고개를 넘긴 옛 일본군병사가 열여덟살에 징병으로 끌려가 한달간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 하북성 전장에 가서 자신이 껶었던 처참한 사실들을 적라라하게 폭로한,몇해 전에 일본전국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문제작이였다.기자들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죽기 전에 일본군의 만행을 세상에 꼭 알리고 싶었을 뿐이였다고 토로했다.  다까하시를 자꾸 생각하니 꿈에도 옛 일본군 모습이 나타나는가 보다. 날은 이미 희붐히 밝아있었다. 상준이는 한국에 간 목요일 저녁에 전화가 오고 왜서 이틀이나 련락이 없을가.록음전화에도 음성메쎄지가 들어오지 않았다.아버지가 무사해야 할 텐데. 그런데 다까하시가 참 이상하지 않는가.다른 일본인이라면 중국인 앞에서 자기가 일본군이였다는 말은 감히 입밖에 꺼내지도 못하겠는데 왜서 락하산병이였다고 자랑 삼아 말할가? 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흐린 날씨였지만 비는 당장 내릴 것 같지 않았다. 아직은 텔레비죤도 나오지 않는 새벽이라 좀더 자고 일곱시 쯤에 일어나자. 나는 알람을 맞춰놓고 다시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까하시를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       4.     행인들의 우산이 기우뚱거리고 가로수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디스코를 추고 있었다. 일곱시반 전에 집문을 나선 나는 서쪽 큰길로 가지 않고 전철역으로 가는 길로 자전거를 내몰았다.큰길을 따라 달리다가 교차로를 지나니 반시간도 걸리지 않아 공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웬 일인지 직원 여러명이나 나오지 않았다.차간이 엉망이 되여 부장이 서슬이 시퍼렇게 화를 내는 통에 반장은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부장한테서 애매하게 꾸짖음을 당한 반장이 측은하게 생각되였다.한참이 지나서야 직원 셋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들어왔다.엇저녁에 술을 포근히 마신 얼굴들이였다.부장이 작은 유리창문으로 차간을 흘끔흘끔 들여다보군 했다. 휴식시간이 되자 담배가 마려웠던 직원들이 휴식실로 욱 쓸어들어갔다.휴식실 테블 우에 빵과 우유가 놓여있었다.지난 토,일 저녁에도 빵과 우유가 간식으로 나왔다.우유는 나의 체질에 맞지 않는지 마시기만 하면 장마철을 맞은듯 배에서 우뢰가 울려터지고 소낙비를 쏟아냈다.아침을 거른 채 출근한 내가 걸탐스레 빵을 먹고 있는데 부장실에 불리워갔던 반장이 들어와서 나의 옆에 앉았다. "퇴근길에 우리 둘이서 한잔 할가요?" 반장이 늦게 출근한 직원들이 들어라는듯이 나에게 말했다.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왔는데요." "그럼 먼저 집에 갔다가 제가 전화하면 큰길에 나와요.우리 오늘 멋지게 마셔보죠." 반장이 나를 보고 웃자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여섯시. 자전거방 앞에서 반장과 만났다.남새점 앞에는 트럭이 보이지 않고 고급스러운 승용차가 멈춰있었다.남새점을 지나려는데 다까하시의 녀편네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녀인과 마주쳤다.다까하시 녀편네가 반색하며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박상이군요.오랜만이네요." "오랜만입니다." 나의 입에서도 마지못해 인사말이 흘러나왔다.다까하시 녀편네가 옆의 녀인을 딸이라고 나에게 소개하고 나서 나의 신상을 잘 알기라도 하듯이 딸한테도 나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오까다입니다.박상은 중국에 살고 계시는 조선족이네요.만나서 반갑습니다." 대부분 일본녀인들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성씨를 바꿨다고 다까하시의 피가 흐르지 않겠는가.일본군 딸년이 나를 만나서 반갑다고?나는 하나도 반갑지 않다.그러니 괜한 인사치레나 수작 따위는 집어치워라고 기분이 언짢아지려 할 때 그녀가 두손으로 명함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다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지금 볼일이 급해서요.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명함장을 받아 그대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돌아섰다. 이자까야(居酒屋)에서 반장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안주도 들지 않고 술만 들이켰다.중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반장이 얼마 안되여 병든 닭처럼 앉은 자리에서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그만 반장을 부추켜서 밖에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웠다.정신을 좀 차린 반장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나의 말에 연신 손사래를 치면서 미안하다며 택시에 올랐다. 멋지게 마신다는 게 고작 이 수준인가.토요일 저녁에 반장을 만나면 한바탕 골려줘야지. 돌아오는 길에 저절로 웃음이 나오려 했다.지금까지 사귀여온 일본인들이 술에는 모두 약했던 것이다.하긴 중국에서 술을 련마했으니 일본인들 앞에서 끄떡할 리가 있겠는가.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때 우리는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였는가를 다시 한번 침통하게 느끼게 되였다. 집에 와서야 나는 호주머니에 넣었던 명함장을 꺼내보았다.   도꾜××국제일본어학원 오까다노리꼬 학원장   그 무렵 도꾜는 물론 요꼬하마에도 일본어학교가 우후죽순처럼 늘어가고 있었다.한국과 대만,홍콩을 대상으로 하던 일본어학교들에서 점차 대륙에 눈독을 들이고 중국 류학생들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명함장을 쓰레기통에 던지려다가 명함케이스에 넣어두었다.일본어학원의 전화번호 뒤자리수가 어쩌면 어머니의 생일날자와 같았기 때문이였다. 나는 베개밑에서 편지를 꺼냈다.베개밑에는 어머니의 날을 즈음하여 어머니한테 보낸 편지의 회답으로 어머니한테서 온 편지가 있었다.어머니의 날이라고 하니 몇주 전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골덴위크련휴가 지난 금요일 오후,레포트를 작성해가지고 지도교수연구실로 가다가 문옆에 써붙인 이라는 포스터를 보고서야 5월 두번째 일요일이 어머니의 날이라는 걸 알게 되였다.중국에 있을 때는 세상에 어머니의 날이라는 명절이 있는 줄도 몰랐다.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을 축복하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났다.비록 철자법이 조금씩 틀리고 소학교 산수용지에 쓴 어머니의 편지였지만 부모처자가 그립고 힘들 때면 베개밑에 넣아두었던 편지를 꺼내 읽어보면서 스스로 화이팅을 웨치군 했다. 눈꼬리를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만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주방청소를 하려다가 쓰레기통을 보니 이틀이나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래일 지도교수의 강의가 없기에 아침에 늦잠을 자면 쓰레기를 또 버리지 못하게 된다.양말도 살 겸 쓰레기를 버리자. 쓰레기를 버리고 패밀리마트로 발길을 돌리려는데 차문에 파란 페인트칠을 한 트럭이 큰길을 지나갔다.다까하시의 트럭이였다.큰길까지 뛰여가 보았더니 트럭은 굽인돌이를 돌아서고 있었다.남새점은 좀 가다가 왼쪽에 있었다.가로등불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트럭의 뒤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불현듯 돌격총 같은 자물쇠가 적재함에 달려있는 똑같은 트럭을 공장으로 가던 도중에 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아침에 공장으로 가면서 일부러 어제 잘못 들어섰던 길에 들어가서 잠간 주위를 둘러보았다.인적기가 드물고 수풀이 우거진 저 앞치 길옆에 신사(神社)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었고 돌격총을 멘듯한 트럭 한대가 거무틱틱한 대문 앞에 멈춰있었었다. 혹시 령감쟁이가 그 신사에 간 게 아닐가.일본고층정계인물들이 전쟁범을 참배하러 야스구니진쟈(靖国神社)에 자주 드나든다고 하지 않는가.그럼 저 놈도 신사참배하러 다니는 게 아닐가. 집에 들어오자 전화벨소리가 울려왔다.상준이였다.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상준이는 경기도에서 온 연구생인데 나와 같이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이 집에 이사를 왔다.일본에 금방 왔을 때 우리는 제일 값싼 라면도,일인분 도시락도 나눠먹었다.우리는 저녁이면 사진관에서 아르바이트도 같이 하고 이른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도 같이 했다.첫 월급이 나온 날 저녁 우리는 맥주를 사가지고 기숙사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그 날 상준이는 남북이 통일되면 자전거를 타고 중국에 와서 나를 만나겠다고 했다.상준이도 나처럼 네살 나는 아들이 있고 일본어교원을 하다가 일본에 왔는데 병환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달마다 부인한테 송금하고 있었다.상준이는 지금까지 나와 같이 고난을 껶어온 동갑친구이다. 상준이가 돌아오면 잘 위안해줘야지. 래일은 저녁에 평일 아르바이트를 하니깐 오후에 그 신사에 가볼가?다까하시가 신사에서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는지 꼭 알아내야지.일본군을 추격하다가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은가.그리고 자전거를 샀다가 집마당에 처박아두고만 있겠는가.상준의 야구모자를 꾹 눌러쓰고 선그라스를 척 걸면 령감쟁이가 나를 봐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게 아닌가. 오늘은 오전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반장과 멋지게 술까지 마셔서인지 소르르 잠이 몰려왔다. 다까하시,네놈은 이젠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였느니라. 오늘 밤은 좋은 꿈이나 꾸자. 래일도 달려라,나의 자전거.       5.     이튿날은 아침부터 비가 쏟아져내렸다. 비소리에 깨여나 시계를 보니 아직 일곱시도 되지 않았다.좀더 자려다가 나는 이불을 차고 일어났다.비 내리는 아침에 가만히 신사에 가보는 것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오후보다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자,전신무장하고 출발! 신사에 도착하자 비줄기는 많이 누그러들었다.주위는 인기척이라곤 들리지 않고 대문은 짐승의 아가리처럼 활짝 열려져있었다. 발볌발볌 대문 안에 들어선 나는 그만 제자리에 못박혀버렸다. 웬 거인이 눈앞에 우뚝 서있었다. 유난히 붉은 얼굴에 길고 빨간 코를 가진,광대춤을 추는지 손에는 부채를 거머쥐고 하늘을 나는지 어깨에는 날개가 솟아있는 무서운 요귀였다. 요귀,아니 일본귀신이였다. 일본귀신이 이렇게 생겼구나! 아연실색한 나는 대문 밖으로 질질 뒤걸음질쳐나와 자전거에 뛰여올랐다.일본귀신이 뒤쫓아와서 목덜미를 와락 낚아챌가봐 자라목처럼 목을 움추르고 자전거야 날 살려라 줄행랑을 놓았다.  "아이쿠!" 얼마 가지 못하고 나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큰길 길목에서 굽인돌이를 돌다가 자전거가 미끌어 자전거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오른쪽 팔꿈치와 엉덩이에서 심한 통증을 느꼈다. "박상 아니우?" 그 일본귀신의 부르짖음인가. 겨우 일어나 한쪽다리를 쩔룩거리며 넘어진 자전거를 일으켜세우려다가 소리 나는 쪽에 고개를 돌렸더니 언제 왔는지 다까하시가 트럭 차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마치 아까부터 여기서 나를 지켜보고 있은 듯했다. "박상 맞구려.박상이 웬 일로 여기에 왔수?" 젠장! 망할 선그라스는 나를 두고 벌써 어디로 내뺐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저...공장에서 야근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섰습니다.헌데 당신은 웬 일로 여기에 왔어요?" 나는 아닌보살을 하며 제쪽에서 큰소리로 되물었다.다까하시상이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불렀다. 다까하시가 트럭에서 내리더니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신사에 들려 덴꾸 주위를 청소해놓고 터밭에 가려구.비가 내려 나무잎들이 많이 떨어졌을 거유.신사 골목에 들어가려다가 누가 자전거를 타고 바삐 신사에서 나오기에 여기서 차를 세웠쥬.저기 보이는 게 터밭이우다." 다까하시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에 비닐박막을 씌운 하우스가 있었다.아낙네들처럼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장화를 신은 남정 몇명이 벌써부터 상자들을 나르고 있었다. "덴꾸?덴꾸가 뭔데요?" "하하.덴꾸를 모를 수도 있지.일본 대학생들도 모르던데..." 이 령감쟁이가 박식한 척 하지 않는가! "비가 오는데 차에 들어가 좀 쉬였다가 가시우." 그러잖아도 숨이나 돌리고 가려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할 수 없다는듯이 야구모자를 벗어쥐고 조수석에 들어가 앉았다. "덴꾸라는 게 하늘의 개란 뜻이우다." "아!" 덴꾸가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아차린 나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옛 일본군도 두려워하지 않던 내가 까짓 덴꾸가 두려워 정신없이 신사에서 뛰쳐나왔단 말인가.귀신도 아닌 덴꾸가 그렇게도 무서웠단 말인가. "덴꾸는 중국문화를 일본인들이 활용한 거지유.이제 날씨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찾아올 거우다.건강하고 날개도 있는 덴꾸에게 소원도 빌지유." "..." 오른쪽 무릎이 아파나기에 손으로 무릎을 주무르려던 나는 흠칫 놀랐다. "이 팔목..." 다까하시의 왼쪽 팔목에 흉물스러운 흉터가 있었다.칼자국 같아 보였다.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다까하시의 왼쪽 팔목이 보였던 것이다. "이 상처 말이유?" 다까하시가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지난날을 회억하듯이 말을 이었다. "내가 중국에 가서 얼마 안되던1945년7월 중순 어느 날이지유.그 날은 식료품과 약품들을 수송하게 되였는데 공중에서 내리뜨린 통졸임상자가 락하산이 펼쳐지지 않는 바람에 산기슭에 잘못 떨어졌지유.그래서 나와 동료가 락하산을 타고 그리로 갔는데 상자가 깨져 통졸임들이 흘러나왔더군.그 때 광주리를 멘 어린 남자애 둘이 지나갔는데 광주리엔 이름 모를 나물들이 들어있더군.중국인을 처음 본 나는 어릴 때 형과 같이 산나물을 뜯으러 갔던 생각이 나서 애들 광주리에 통졸임을 세개씩 넣어주었지유.그런데 그 애들이 초소를 지나다가 붙잡혀 내가 추궁을 받게 되였지유." "그래서요?" 호기심이 동한 나는 바투 물었다. "끌려가 호되게 맞았지유.귀뺨은 얼마나 맞았는지 귀가 먹먹하더군." "그럼 이 상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있더군.구두발에 짓밟혀 얼굴은 볼꼴없이 되였고 팔목에는 붕대가 감겨있더군.다리뼈가 부러져 이튿날부터는 지팽이에 의지하게 되였지우.그 동료의 말에 의하면 깨진 유리가 팔목에 박혀들어가 땅바닥은 피가 랑자했다더군.노자끼라는 간호원이 간호했는데 그 간호원이 바로 지금 마누라지유.그 후 일본이 7월말에 발포된 포츠담선언을 무시하자 8월초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을 떨어뜨렸지유.일본이 투항한 날 군관들은 하늘에 대고 총을 쏘면서 통탄했지만 병사들은 이젠 살아서 일본에 돌아간다고 속으로 기뻐했지유." 일하던 남정들이 하얀 수건을 손에 쥐고 비닐하우스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럼 저는 이젠 가보겠습니다." "그래유.야근을 하고 피곤할 테니 집에 가서 쉬시우.저...그리고...요꼬하마역 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 남새점을 오픈하우다.지금 남새점은 래일 그리로 옮기기로 했수다." 래일 이사를 하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 없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늘 다른 다까하시상을 알게 되였습니다." 나는 트럭에서 내렸다.다까하시가 자전거를 내앞에 가져다주었다. "주의해 가시우.그리고 몸 주의하시우." 이튿날 저녁무렵.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나는 아르바이트하러 가려고 집을 나가려다가 서쪽 큰길을 내다보았다.대낮에 이사를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남새점 앞에서 다까하시부부가 트럭에 오르는 모습이 보여왔다. 오늘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학교에서 보내다나니 다까하시한테 인사말도 하지 못했다.마지막으로 인사나마 올리려고 큰길까지 갔을 때 트럭은 서서히 떠나가고 있었다. 나는 멀어져가는 트럭을 오래도록 눈바램해주었다. 서쪽 하늘에서 한줄기 해살이 쏟아져나왔다.한동안 나를 혼란스럽고 곤혹스럽게 굴었던 장마철이 어느덧 물러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르바이트시간이 늦을가봐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장마철에서 벗어난 해탈감과 다가올 새 계절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달려라,자전거!       에필로그   귀국하여 외국어학원과 출국류학회사를 운영하던 나는 이듬해인 1998년 북경에서 열린 일본류학세미나에서 우연히 오까다를 만나게 되였다. 오까다의 일본어학원과도 교류하여오던 2002년 가을,출장차 도꾜에서 오까다를 다시 만났을 때 다까하시가 한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오까다는 아버지가 중국에 두번 다시 가보지 못한 것이 평생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병상에서도 여러번 말씀하셨다는 것이였다.        
5    (단편)귀뚜라미 울던 밤 댓글:  조회:1034  추천:0  2019-09-14
2019년4월호      단편소설      귀뚜라미 울던 밤       박명선     1. 언제 세워진 학교이기에 나무판자를 깐 복도에선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사람들의 신발이 얼마나 닿았기에 역시 나무로 만든 계단 가운데가 옴폭하게 패여들어갔을가. 집에서 영국더기를 올려다보면 2층부터 보이는 제4중학교 청사에 들어와보긴 용이로선 처음이였다. "구렝이다!" 3층까지 올라왔을 때 문호형님이 불시에 소리를 지르자 용이도 동네애들과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다.학교를 구경하러 왔다가 구렝이란 소리에 모두가 덴겁했던 것이다. "형님,구렝이가 뭐요?" "거짓말이 아니요?" 애들이 다투어 물어보자 용이네 뒤집에 살고 있는 문호형님이 숨을 몰아쉬고 나서 대답했다. "우리 반 어느 애 누나가 이 학교에 다니는데 며칠 전에 3층 교실에서 수업을 보다가 큰 뱀 같은 것을 보았다고 반학생들이 떠들썩했단다.그래서 내가 거짓말이라고 여기고 오늘 와봤는데..." "그럼 구렝이란 게 큰 뱀이란 말이요?" "그럼 아까 진짜 구렝이를 봤단 말이요?" "글쎄다.아까 시꺼먼 게 천정에서 벽구석으로 스르륵 기여들어가는 것 같더라.뱀 같은 게..." 문호형님의 말에 애들은 눈이 데꾼해졌다. "와,무섭다야." "그래 말이다.난 이제 크면 이 학교에 안 다니겠다." "나두 안 다니겠다."  "나두..." 용이는 말없이 애들을 번갈아 보았다. "자,우리 여기서 놀지 말고 저 앞에 있는 부대에 가서 멋진 전투놀음을 놀자.땅크도 있더라." 문호형님이 팔소매를 걷어올리더니 먼저 앞으로 달려갔다.문호형님을 따라 4중 롱구장을 지나 낮은 돌층계를 넘어서니 눈앞에 넓다란 축구장이 안겨왔다. "이 꼴문대에서 저 부대구락부 앞 꼴문대까지 너희들이 달리기시합해라.누가 일등하면 사탕을 준다.자,준비.포우(跑)!" 소학교 축구팀에 갓 가입한 용이는 다른 애들보다 더 빨리 달렸다. "너희들이 용이보다 한두살 더 많은데 달리기는 용이보다 못하구나." 부대구락부 앞 꼴문대에 제일 먼저 달려간 용이에게 문호형님이 웃으면서 따발사탕 한개를 건네주었다. "와,이렇게 큰 사탕 처음 본다야." "맛 있겠다.” “같이 먹자." 용이는 따발사탕을 이발로 깨물어 몇조각을 내서 애들에게 나눠주었다.영수는 맛 있다며 우둑우둑 소리까지 내며 먹었다. 부대구락부 뒤울안에는 하얀 적삼들이 길다란 빨래줄에 널려있었고 병영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보초병처럼 꼿꼿하게 줄지어 서있었는데 부대 동쪽 나지막한 산비탈에 진흙으로 만든 땅크와 구불구불하게 판 전호가 보였다.문호형님 말대로 전투놀음을 놀기엔 제격이였다. “형님,저 나무 우에 제기가 있소.저 제기를 가지고 놀고 싶소.” 영수가 가리키는 나무를 올려다보니 제기 하나가 나무가지 사이에 걸려있었다.다른 동네애들이 여기서 제기차기를 놀다가 제기가 나무에 올라간 것 같았다. “그럼 누가 전투영화에서처럼 나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라.” 애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자 용이가 문호형님의 어깨를 딛고 올라섰다.마주오던 몇명 군대아저씨들도 애들의 장난을 보고 웃으며 지나갔다.  "아가!" 갑자기 용이의 입에서 외마디소리가 터져나왔다.문호형님이 용이를 올리려고 일어서려다가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엉덩방아를 찧는 통에 용이도 나무에서 미끌어 떨어지면서 오른손이 뾰족한 나무가지에 긁혔던 것이다.  땅에서 일어난 용이는 손을 펼쳐보았다. 아뿔사!오른손바닥 아래부분이 뭉텅 살이 떨어져나간 게 아닌가! 하얀 속살이 들여다보이더니 삽시간에 빨간 피가 송골송골 샘물처럼 솟아나왔다. "이걸 어쩌니?" "현립병원에 가자면 여기서 먼데..."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애들은 어쩔 바를 몰라 쩔쩔맬 뿐이였다.위급한 상황에서는  그래도 문호형님이였다.그는 정찰병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결단성 있게 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부대 안에 꼭 병원이 있을 거다.빨리 찾아봐라!" 다행히 멀지 않은 빨간 벽돌집 1층에 위생소가 있었다.군복을 입고 쌍태머리를 한 젊은 간호원이 먼저 약솜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나서 조선영화 《기관사의 아들》에서 나오는 큰 낚시 같은 바늘을 용이의 손바닥에 가져다댔다.문호형님과 영수가 용이의 오른손을 붙들고 있었다.여덟바늘이나 꿰매는 동안 용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용케 참아냈다. "장하구나." 곱상하게 생긴 군대간호원이 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얀 붕대를 손에 감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용이는 잠간 멈춰서서 구렝이가 천정을 기여다닌다는 3층교실을 다시 올려다보았다.4중청사보다 더 높아보이는 주위의 늙은 백양나무들에서 나무잎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무섭게 들려오고 떨어져내리는 나무잎들은 바람에 실려 열어놓은 교실창문 안으로 날아들어가고 있었다. 백양나무뿌리들이 삐죽삐죽 영국더기 아래까지 뻗어나왔는데 혹시 구렝이라는 무서운 놈도 어느 날 밤에 가만히 우리 동네에 기여들어오지 않을가. 그 날 저녁 용이는 할머니한테서 제4중학교가 옛 은진중학교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구렝인 웬 구렝이냐?" 잠자리에 누운 용이는 할머니가 웃으며 하시던 말씀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신문지를 바른 천정을 올려다보면서 낮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풀모자를 만들어 쓰고 땅크와 전호가 있던 곳에서 전투놀음을 놀려고 했는데...그랬더라면 손도 상하지 않았을 걸. 붕대를 감은 손이 또다시 찡찡 저려나며 아프기 시작했다. 불현듯 집 주위 어딘가에서 웬 동물이 기여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찌르륵~찌르륵~ "저건 무슨 소리임까?" "귀뚜라미라는 벌레가 우는 소리란다.귀뚜라미가 귀뚤귀뚤 하고 울면 가을이 되였다고 한단다." "귀뚤귀뚤?..."   2.   10년이 지난 어느 날,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여 용이는 기숙사 옆 비단공장 앞에서 문호형님을 만났다. “형님,오랜만이요.” “너 용이구나.” “형님도 이 대학에 있소?” “아니,난 재작년에 재정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건설은행에 출근한다.너 그 손 괜찮니?” 문호형님이 용이의 오른손을 쥐여당겨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지금도 허물이 있긴 하지만 괜찮소.그땐 감사했소.” “괜찮다니 시름이 놓인다.그래 할머닌?” “형님네 연길로 이사 간 후에 돌아가셨소.” “그래?참 좋은 할머니였는데...나의 할머니가 너의 할머니를 언니라고 불렀잖아.나의 할머니도 이사 와서 얼마 안돼 돌아가셨다.” 용이가 손을 상한 며칠 후,문호형님네는 연길로 이사 가게 되였다.이사 가는 날,용이의 할머니와 문호형님의 할머니는 서로 두 손을 꼭 잡고 오래도록 얘기를 나누었다.이사짐을 실은 자동차가 떠나자 두 할머니는 서로 눈굽을 훔쳤었다. “자,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우리 생맥주나 마시며 옛말을 하자.” 문호형님이 용이를 길 건너 자그마한 식품상점으로 데리고갔다. “난 술은 처음인데...” 1980년대초,연길에는 생맥주가 흥성했다.대학가 주위의 식품상점들을 지날 때면 마른 명태를 안주로 생맥주를 마시는 대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상점주인이 크고 퍼런 비닐컵에 거품을 잔뜩 머금은 생맥주 두개를 담아들고 나왔다. “자,마시자.전번에 어쩌다 룡정에 갔다가 너의 집을 지나면서 볼라니 면목 모를 사람이 들었더구나.어디로 이사 갔나?” “소학교를 졸업하고 1중에 다니다가 아버지가 ×××진에 전근하면서 우리도 룡정을 떠났소.” “그랬구나.아,정말,그 때 그 구렝이는 후에 어찌 됐나?” “구렝이 말이요?” 구렝이란 말에 용이는 피씩 웃었다. “구렝이가 아니라 큰 쥐였다더구만.” “그래?하하하.” “체육선생님들이 큰 덫을 만들어 잡았다오.잡은 쥐를 체조시간에 학생들한테 보이며 이젠 겁을 먹지 말라고 했다더구만." "그런 걸 난 또..." "형님이 구렝이라니깐 모두가 깜짝 놀랐잖았소?" “하하.그러 게 말이다.그건 그렇고 너 그럼 ×××진중학교에서 대학시험을 쳤겠다.아까 어느 학부란 건 알았는데 몇점 맞았나?" "483점이요." "헉!올해 문과 483점이면 길림대학 아니,북경대학에도 갈 수 있었잖아?" "시험 전에 지원서를 잘못 썼소.반주임이 한해에 중등전문학교에 한두명 밖에 붙지 못하는 진중학교이기에 지망을 낮게 쓰라고 해서..." "쯧쯧쯧.너 룡정에 그냥 있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다.우리 동네에 있던 영수는 435점 맞고 장춘××대학에 갔다.영수 누나를 알지?영자도 올해 재정학교를 졸업하고 연길에 남으려고 지금 직장을 찾고 있는 중이다.” 영자는 의약공사 옆에 살고 있던 용이의 친구인 영수의 누나였다.영수 누나는 용이가 영수네 집에 놀러가면 누룽지에 사탕가루도 뿌려주고 용이를 친동생처럼 대해주었다.용이가 손을 상한 날,영수를 데리고 집닭들이 낳은 닭알을 바구니에 담아들고 문안까지 왔었다. “형님이 어떻게 영수네 집 일을 그렇게 잘 알고 있소?혹시...” 문호형님이 용이를 보고 게면쩍게 웃었다. “그래,내가 영자를 좋아한다.한동네서 살았고 또 한학교를 다니다보니...” "그렇구만.그럼 이제는 영수 누나를 내가 어떻게 불러야 하오?" "그것도 몰라서 물어보니?" "그냥 누나 아니면 아주머니?형수님?하하." 국경절이 다가오던 어느 날 저녁 무렵,문호형님이 기숙사에 찾아왔다.밖에서 누가 기다린다고 하기에 기숙사 현관까지 따라나갔더니 영수 누나였다. "용이야,오랜만이다." "누나구만.오랜만이요." 문호형님이 옆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용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전번날에는 말하지 않았는데 우리 지금 비단공장 서쪽에 세집을 잡고 있다.우리 돌아오는 10월3일에 결혼식을 올린다.아까 집으로 가는 길에 너한테 들린 거다.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자." 그 날 저녁,문호형님네 세집 뒤울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귀뚜라미가 우는 건 수컷이 암컷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신호를 보내는 거란다." 취기에 우스개소리인지 문호형님의 말에 영수 누나가 옆에서 웃으며 형님에게 눈을 흘겼다. "동생 앞에서 참..." 찌르륵~찌르륵~ 귀뚤귀뚤~ 용이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저 시무룩이 웃고만 있었다.   3.   그로부터 10여년이 다시 지난 어느 날 저녁이였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아홉시가 넘어 집에 들어온 용이가 집전화기를 체크해보니 저녁 다섯시에 들어온 메세지 한통이 있었다.록음재생버튼을 누르자 한 녀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이야,나 영수 누나다.지금 히가시가나가와(東神奈川)에 있는데 아마 내가 불법체류인 걸 알고 같이 일하는 일본인이 신고한 것 같다.아까 경찰차가 집 앞 큰길에서 멈춰서더니 두 경찰이 곧바로 우리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더라.그래서 지금 무서워서 전등도 켜지 못하고 있다.경찰들이 돌아간 다음에 너한테 전화하는데 나를 좀 도와주렴.너의 집에 며칠만 묵게 해주면 안되겠니?여기에 너 밖에 아는 사람이 없구나.제발 부탁한다.나의 전화번호는..." 영수 누나는 연변말씨가 아닌 서울말씨를 사용하고 있었다. 몇달 전에 중국에 있는 문호형님한테 안부전화를 했더니 한국에 갔다던 영수 누나가 지금 요꼬하마 어느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용이는 팔베개를 하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어떻게 해야 할가 궁리해보았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향친구의 누나이고 존경하는 형님의 부인이지만 30대 성인남녀가 어떻게 한집에서 밤을 지낸단 말인가.그것도 원룸인 작은 집에서 말이다.그렇다고 급히 도움을 청한 사람에게 모르는 척 회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아까 히가시가나가와라고 했지?그러고 보니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그럼 10시에 신꼬야스(新子安)역 동구 택시정류소에서 기다리겠소.한 정거장만 오면 되오.” 용이는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 영수 누나에게 전화를 하고 빨래감들을 세탁기 안에 집어넣어둔 다음 시간을 맞춰 집문을 나섰다. 전철역에 도착하자 선글그라스를 걸고 려행용가방을 손에 든 사람이 용이 앞으로 다가왔다.용이는 선글라스를 벗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영수 누나였다.그녀의 얼굴에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도 만난듯 흥분과 반가움이 뒤섞여 어려있었다. “감사하다,용이야.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은 줄 모르고 여직껏 전화도 하지 않았구나.일이 있으니 누나가 동생을 찾는구나.이게 몇년 만이니?진우가 소학교에 입학한 해에 보고 다시 못 봤잖어?” 진우는 문호형님과 영수 누나의 아들이였다.진우가 소학교에 입학한다는 말을 듣고 용이는 책가방을 사가지고 형님네 집에 찾아갔었다. “그게 91년도니깐 4년만이요.자,택시로 집에 가기요.” 용이는 왠지 가로등불빛이 환한 큰길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집까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너 이 집에서 혼자 사니?" 집에 들어온 그녀가 가방을 놓고 집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같이 있던 한국류학생이 한국에서 부인이 와서 반년 전에 다른 곳에 이사 갔소." 용이는 주인의 례의를 갖춰 랭장고에서 쥬스와 소세지 등속을 꺼내 간단하게 상을 차렸다. "좀 있다가 슈퍼에 가서 필요한 걸 더 사오겠소.형님한테서 누나 얘기를 듣긴 했는데...” "필요한 게 없다.배도 고프지 않고.나 한국에 일년반동안 있다가 아는 사람을 통해 올봄에 일본에 들어왔다.일본이 한국보다 돈 벌기 더 좋잖아.비자는 이미 만료됐다.헌데 애엄마는 안 데려와?" "정부에서 사업하는 사람이 공직을 버리고 어떻게 오겠소?저...누나가 신발공장에서 일한다던데 누가 신고라도 했소?" "응?아,형님한테 처음엔 신발공장에서 일한다고 말했지." 그녀는 쥬스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가게에 사까모도라는 관리원이 새로 왔는데 나한테 자꾸 칭얼거리면서 엇저녁에는 가만히 집까지 뒤따라왔더라.그래서 깜짝 놀라 집에 막 뛰여들어갔다.한참 지나서 문을 두드리기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그 사람이 아까 신고한 것 같다.어쩌면 저런 무서운 일본사람도 다 있니?"  "그럼 집에는 혼자 있소?" "한국에서 같이 온 한국인 친구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다른 일자리를 찾아 도꾜로 가는 바람에 지금은 나 혼자 있다." 용이는 일어나서 창문을 닫았다.목조건물이여서 옆집 말소리도 간간이 들려오고 아래집에서 텔레비죤을 보는 소리까지도 낮다랗게 들려오군 한다.몇달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조용하던 집에 오늘 밤은 웬 녀자가 왔을가고 소심한 이웃들에서 의심이라도 할가 봐 저으기 두려워났다. "앞으로 어떻게 할 예산이요?" 자리에 다시 앉으며 용이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글쎄다.다른 일자리를 찾자고 한다.래일 그 친구한테 먼저 전화를 하겠는데 너도 혹시 좋은 일자리가 있는가 알아봐주렴." "알았소.미안하지만 래일 오전에 지도교수의 강의를 들어야 하기에 난 먼저 자야겠소.랭장고에 김치도 있고 주방에 라면도 있소.그리고 누난 침대에서 자오.난 다다미에서 자겠소." 가게이름과 집주소를 묻고 싶었지만 밤도 깊어가는지라 용이는 상세한 것은 래일 물어보기로 하고 그만 자리에서 물러났다. "페를 끼쳐서 미안하구나." "아니요.너무 근심하지 마오.래일 점심에 다시 보기오." 용이는 이불장에서 이불과 요를 꺼내 자리를 펴고 창문을 마주하고 돌아누웠다. 창밖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의 뜨겁던 열기가 조금씩 물러가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요즘 들어 밤중이면 교향악연주를 하듯이 집 주위의 풀숲에서 귀뚜라미들이 울음소리 향연을 벌이고 있다. 한동안 혼자서 쥬스를 마시며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자니?" 용이는 자는 척 미동도 응대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그녀는 상 우의 쥬스통을 랭장고에 가져다 도로 넣어두고 주방전등을 켜더니 다시 돌아와 방전등을 껐다.주방에서 달그락거리며 컵과 그릇 몇개를 씻고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뒤이어 채 닫지 않은 화장실에서 쏴~하고 물줄기를 내뿜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열어놓은 화장실 공기창을 통해 귀뚜라미들의 울음소리가 더 자지러지게 울려왔다. 문득 이전에 문호형님네 세집에서 그녀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동생 앞에서 참..." 참,친동생도 아닌 동생 친구 집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다니.원룸이기에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소리가 다 들리는 줄 알 텐데 문이나 꼭 닫으면 좋지 않은가.집주인이 자더라도.  이윽하여 샤워하는 소리도 들려왔다.열려진 문틈 사이로 뜨거운 김이 방안으로 새여나왔다. 에잇! 용이는 이불을 머리까지 끄당겨 쓰고 중국에 있는 형님이 시름놓을 수 있을가 속으로 뇌까렸다. 오늘은 오전에 학교에서 지도교수한테 바칠 리포트를 작성하느라 바빴고 오후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해서인지 소르르 잠이 몰려왔다. 찌르륵~찌르륵~ 귀뚤귀뚤~ 저 귀뚜라미들은 언제면 울음을 그치려나.   4.   이튿날 아침,창밖이 훤해지자 용이는 눈을 번쩍 떴다.반사적으로 침대 쪽에 머리를 돌린 순간,저도 모르게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 번했다.보라색 팬티와 핑크색 브레지어차림에 허연 허벅다리를 이불 밖으로 드러내놓은 그녀의 몸뚱아리가 눈에 띄였다.본의 아니게 그만 그녀의 반라체를 본 용이는 흠칫 놀라 다시 돌아누웠다.괜스레 가슴이 후두둑 뛰기까지 했다.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군.어떻게 저럴 수가.마치 내가 침대에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처럼.저 녀자 원체 저런 녀자였던가? 별안간 심상치 않은 예감이 뇌리를 쳐왔다. 저 녀자의 정체는 무엇일가.내가 왜서 불법체류자인 저 녀자를 집에 데려왔을가.이웃들에서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가? 엇저녁에 수업이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금요일인 오늘은 수업이 없었다.배가 슬슬 아파나기 시작했다.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어쩐담?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소리에 그녀가 깨여나기라도 하면 방으로 들어오기 민망하지 않을가.시계를 보니 6시가 거의 되였다.전차 시발시간도 거의 되여왔다.그래,차라리 전철역 화장실에 들렸다가 전차를 타고 학교로 가자.학교로 가는 길에 캔커피를 사가지고 캠퍼스 벤취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보자.그리고 오후 1시부터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깐 점심때가 거의 되면 집으로 돌아오자. 용이는 가만히 일어나 샤워도 하지 않고 웃옷과 가방을 챙겨가지고 살며시 집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하요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 은행 녀직원인 아래집 기무라가 예쁜 강아지를 데리고 아침산보를 나왔다가 큰길에 나선 용이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하요고자이마스." 용이도 맞인사를 하고 바삐 스쳐지나려는데 기무라가 다시 말을 건네왔다. "오늘은 학교에 일찍 나가네요." "네.요즘 좀 바빠서요.그럼..." 용이는 전철역을 향해 반달음을 놓았다.집 화장실을 두고 이른아침에 전철역 화장실에 가다니?집주인이 제집 화장실에도 시름놓고 앉아있지 못하다니 이게 웬 일이야. 저건 또 뭐야. 점심때가 되여 집부근 골목에 들어서서 2층 베란다를 올려다 보니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던 적삼 두벌과 바지 그리고 팬티가 빨래줄에 널려있었다. "아침 일찍 나갔더구나.장국을 끓여놓았다.일본 된장은 맛없어도 간장이 맛있기에 장국에 간장을 조금 넣었다.나 지금 친구를 만나러 신쥬꾸(新宿)에 가야 한다.저녁에 올지 안올지 모르겠다." 집에 들어서자 그녀는 나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아,정말.너의 집주소와 휴대폰번호를 여기다 적어달라.일단 저 가방은 여기에 두고 간다." 집문을 나가면서 그녀는 휴대폰과 수첩을 핸드백 안에 넣고 용이에게 생긋 웃어보였다.그녀는 오늘따라 심플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곱게 꾸민 곱슬곱슬한 파마머리에 30대 중반 녀인으로선 꽤나 이쁘장하다고 곁눈질해보는 남자들도 많으리라 생각하며 용이는 문밖까지 그녀를 바래주었다. 다다미 우에 펴놓았던 이부자리는 이불장에 정연하게 놓여져있었다.침대에 걸터앉은 용이는 열려진 려행용가방 안에 눈길이 갔다.옷가지와 화장품들 사이에 대한민국려권이 들어있었다. 웬 한국려권일가? 호기심에 려권을 꺼내 펼쳐보았더니 그녀의 사진이 박혀있었다. 아니,한국국적은 언제 취득한 걸가? 층계를 올라오는 다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오자 용이는 려권을 도로 가방에 넣어두고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황망히 문을 떼고 들어와 잽싸게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려권을 핸드백에 넣어가지고 나왔다. "무슨 급한 일 있소?" "물건을 두고가서...저녁에 몇시 들어오니?" "아홉시 좀 넘어서." 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층계를 다시 내려갔다. 웬간한 녀자 아니구나.아니,무서운 녀자로구나. 용이는 습관적으로 침대에 가서 누웠다.지그시 눈을 감고 있노라니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서시장 부근 저축소에서 몇년간 근무하다가 아들 진우가 소학교에 입학한 후 청도 어느 한국기업 통역으로 연길을 떠난 그녀였다.그녀가 청도에 가기 전 어느 여름날 밤,백화상점 동쪽 어느 양꼬치점에서 영수와 함께 맥주를 마시다가 한국인으로 보이는 멋진 남자와 함께 백마강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면바로 알아보았다.영수는 누나인 줄 모르고 있었기에 이튿날 저녁에 문호형님한테 다른 일로 전화하는 척 하다가 형수님은 요새 잘 보내는가고 전화를 바꿔달라 했더니 청도에서 온 한국사장부부와 오늘도 저녁식사 하러 나갔다며 엇저녁에는 새벽 세시에 들어왔다는 것이였다. 청도에 있다가 한국에 간 지 불과 2년도 안되여 한국국적을 취득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침대에서 짙은 향수냄새가 풍겨오기에 그만 일어나려다가 용이는 려행용가방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저건 무슨 약통인가? 엇!피임약?! 이 녀자가?... 저녁에 아르바이트가 끝나서 집에 돌아오니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다.용이는 먼저 샤워부터 했다.예전의 생활패턴으로 되돌아온듯 기분이 상쾌해졌다.샤워를 끝내고 팬티바람에 랭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마시던 용이는 그녀가 불쑥 집에 뛰여들어올 것 같아 급히 청바지와 적삼을 다시 주어입고 이불장에서 이불과 요를 꺼내 자리를 펴고 누웠다. 전번주부터 매일저녁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를 보려고 텔레비죤을 켰지만 엇저녁에 보지 못해서인지 주인공 남성이 집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울고 있는 리유를 알 수 없었다.그만 텔레비죤과 방전등을 꺼버리고 현관전등만 켜놓았다. 토요일인 래일은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다.래일 한학급에 다니는 몇명 일본인 학생들과 전번에 갔던 신쥬꾸 볼링장에서 먼저 볼링시합을 하고 진 팀에서 저녁식사값을 치르기로 며칠 전에 약속했다. 그녀가 오늘 신쥬꾸에 간다고 하더니 지금 신쥬꾸에서 뭘 하고 있을가? 찌르륵~찌르륵~ 귀뚤귀뚤~ 창밖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또다시 울려왔다.   5.   얼마나 잤는지 용이는 문소리에 잠에서 깨여났다.그녀였다.다다미 우에 벗어놓은 손목시계 야광으로 새벽 1시가 넘었음을 알수 있었다.이 시간대면 전차는 진작 끊겼을 터인데 어떻게 집까지 왔을가? 그녀는 방에 들어와 살며시 용이한테 다가와서 용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용이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핸드백과 휴대폰을 침대에 올려놓고 나서 옷을 벗더니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 진동음이 울려왔다.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화를 받았다. "집에 들어왔어.별일 없으니 근심 말어." 아마 그 한국인 친구라는 녀자와 밤늦게까지 같이 있었던 모양이였다.작은 방이라 이불 안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지장없이 들려왔다.  "그래?요며칠은 괜찮아.8천엔이면 콘돔 아니고 안에 해도 돼.그럼 래일 오전부터 정식으로 손님들을 맞을게." 뭐라?! 저 녀자가 풍속점에서 일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그럼 히가시가나가와에 있는 집에서 다녔다던 가게도 풍속점과 관련된 그러루한 가게가 아닐가? 이튿날 아침,잠에서 깨여난 용이는 그녀가 먼저 집을 나가기를 기다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가만히 그녀의 뒤를 밟아볼가?아니야,사람들로 붐비는 신쥬꾸에서 미행한다는 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야.그녀가 가부끼쬬에 있다고 해도 그 수두룩한 풍속점들에서 어느 가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그리고 알아내선 또 어쩐단 말인가? 그러다가 오랜만에 문호형님한테 다시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이는 충전기에서 휴대폰을 뽑아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깨났구나.잘 잤어?" 그녀가 이불 속에서 용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제는 몇시에 들어왔소?" "친구와 술을 마시다나니 새벽에 들어왔다." 술냄새도 나지 않았는데 술은 웬 술인가. "갔던 일은 어떻게 됐소?" "오늘 오전부터 신쥬꾸에 있는 라면집에서 일하게 되였다.그 친구가 소개했다." "형님한테 좋은 소식을 알리오.나 슈퍼에 갔다올게." 용이는 가방에서 돈지갑을 꺼내가지고 집문을 나왔다. 참 뻔뻔스런 녀인이군.라면집에서 일하게 되였다구?가부끼쬬(歌舞伎町) 풍속점이 아니고 라면집? 용이는 조용한 길목 모퉁이에 와서 중국에 전화를 걸었다. "형수님한테서는 전화가 자주 오오?" "일본서 바삐 보내는 사람이 어떻게 자주 전화가 오겠나?아,정말.전번주 일요일에 룡정에 있는 고모집에 갔다가 진우를 데리고 부대구락부에 올라가봤다.네가 손을 상했던 그 나무를 보니 네가 다시 생각나더구나." "그랬구만.4중에서 구렝이는 나오지 않았소?" "하하.시간이 안돼서 부대울안만 진우를 구경시키고 그만 돌아왔다.진우가 요즘 엄마 목소리를 무척 듣고 싶어한다.그리고 장모님의 병세가 위급해졌다.사실 말이지 진우 엄마가 거의 두달이나 련락이 없다.그 약한 몸에 신발공장에서 일한다던데 어디 아프지 않는지 앓지나 않는지 근심스럽구나.전화번호를 알려주면 네가 전화해보고 오늘 저녁 다시 나한테 알려주겠나?"  문호형님이 알려준 전화번호는 휴대폰번호가 아니라 지역번호가 요꼬하마인 집전화번호였다. 집에 들어오자 그녀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침대 우에는 벗어놓은 것인지 바꿔입을 것인지 알고도 싶지 않은 브레지어와 팬티가 놓여있었다.용이는 려행용가방 안에 그것들을 마구 집어넣고 가방을 출입문 쪽에 팽개치듯 던져버렸다.그리고는 돈지갑에서 5천엔짜리 지페 한장과 천엔짜리 지페 석장을 꺼내 들었다. 이윽하여 목욕타올로 몸을 감싼 그녀가 얼굴이 발그레해서 방에 들어왔다. "어머,너 이렇게 빨리 왔구나.이걸 어쩌나.금방 샤워했는데...아니,침대 우에 있던 내..." "저기에 있소." 용이가 가르키는 출입문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대번에 낯색이 변했다. "용이야.너 웬 일이야?" 용이는 지페 넉장을 침대 우에 확 날려보냈다. "8천엔이면 로비는 되겠구만." "뭐?너 혹시 밤에 나의 전화를..." "어머니 병세가 위급한다는 것도 모르는 녀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소?" "너 아까 밖에서 형님한테 전화했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오.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소." "용이야.그럼 사실대로 말해줄게.나 한국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형님 몰래 위조서류를 만들어가지고 청도 사장과 결혼했지만 한국에 와서 시집살이에 시달리고...그 집에서 탈출하려고 같이 일하던 친구와 일본에 온 거다.형님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녀가 두 손을 내밀어 용이의 팔을 잡았다.순간,목욕타올이 다다미 우에 흘러내렸다. "듣고 싶지 않소."  용이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가방과 웃옷을 가지고 홱 돌아서서 집문을 나왔다. 어디 형님 한사람한테만 미안한 일인가.여기 일본어학교에 류학을 온 조선족녀학생들을 보라.동생이나 조카벌 되는 그애들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는 모습을 보면 부끄럽지 않는가.풍속점에서 일한다는 자체가 창피스럽지도 않는가.그리고 부모님과 어린 자식한테도 미안하지 않는가? 저도 모르게 전철역까지 걸어나온 용이는 고반(交番-역전경찰서)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지금 경찰서에 들어가 신고하면 그녀는 당장 체포되여 수용소에 갇히거나 강제출국 당할 수도 있다. 강제출국? 그럼 그녀는 어느 나라로 가야 하는가.한국려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경찰서 앞에 서있던 용이는 역사로 발길을 돌렸다.계단을 올라가는데 가방에 넣은 휴대폰이 울렸다.그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용이는 호주머니에서 정기권을 꺼내 개찰구 쪽으로 걸어갔다. 오후 3시에 학급 친구들과 볼링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기에 직접 신쥬꾸로 가자.기노구니야(紀伊国屋)서점에서 요즘 새로 나온 소설책 한권을 사가지고 부근 차집에서 차나 마시며 약속시간까지 소설이나 읽어보자. 전차에 앉은 용이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보았다.음성메세지 도착을 알리는 빨간 불이 쉼없이 반짝거렸다. "용이야.오전 내로 너의 집에서 나갈 테니 경찰에 신고는 하지 말라.아까 형님한테 전화했다.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부탁하고 싶다.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은 형님한테 절대 비밀로 지켜달라." 그녀의 목소리는 전차 안의 안내방송과 잡음에 뒤섞여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소리처럼 귀찮게 들려왔다.   6.   도꾜 신쥬꾸.일본이라면 도꾜,도꾜라면 신쥬꾸라고 한다. JR신쥬꾸역으로 몰려드는 전차 안에는 녀자들의 엉뎅이를 만지작거리거나 불룩한 바지춤을 고의적으로 녀자들의 몸에 가져다대는 치한들도 많다.동구 출구를 나와 대형전자가게를 지나면 도꾜에서 제일 큰 기노구니야서점이 있고 가부끼쬬에 들어가면 시간과 료금 간판을 내건 별의별 풍속점들이 공작새가 제 깃을 자랑하듯 알록달록한 불빛을 서로 뽐내고 있다. 볼링장은 가부끼쬬에 있는 극장 남쪽 빌딩 3층에 있었다.시합을 마치고 부근에 있는 일식점에서 식사값을 치르고 밖에 나오니 일곱시가 되였다. 한학급 학생들과 헤여진 용이는 올 때와 다른 방향으로 신쥬꾸역에 가려고 맞은켠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언젠가 한국류학생들과 같이 한국에서 온 할머니가 경영하는 라면집에 왔다간 기억이 떠올라서였다.그 라면집 맞은켠에도 풍속점들이 있었다.이제 저 골목에 이르러 왼쪽으로 굽어들면 라면집이 보인다.라면집을 지나 계속 앞으로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 한참 걸어가다가 다시 큰길을 건너 좀더 가면 신쥬꾸역 동구에 도착한다. 골목을 굽어들었을 때 어느 한 풍속점에서 두 녀인이 나오더니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걸어갔다.용이는 머리를 염색한 녀인과 그 옆에서 걸어가는 곱슬곱슬한 파마머리를 한 녀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둬걸음도 걷지 못하고 용이는 지뢰를 밟은듯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녀였다. 오전부터 가게에 나간다더니 이젠 퇴근인가.아니면 손님이 있으면 접대하고 없으면 밖에 나와도 되는 것인가? 그녀들은 불빛이 환한 빌딩 아래에 세워놓은 차한테로 다가갔다.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가는 녀인은 그녀와 나이가 비슷해보였다.그녀가 말하던 친구 같아 보였다.이윽하여 그녀가 앉은 차는 씽하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비록 그녀의 뒤를 밟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가부끼쬬 풍속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였다. 이제 형님한테 어떻게 전화를 할가.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가.그리고 말한대로 집을 나갔을가? 전차에서 내려 집까지 거의 왔을 때 슈퍼 쪽으로 가려던 기무라가 용이를 보고 다가왔다. "박상.오전에 박상 집에서 한 예쁜 녀자가 가방을 들고 나오더니 길옆에 세워놓은 차에 앉아 가더군요.그 녀자 누구세요?" "아,도꾜에 있는 친구 누나입니다.휴일이라 김치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요?난 또 박상의 녀친인가 했어요." "아닙니다."  집에 들어온 용이는 침대보며 베개수건이며 화장실 목욕타올들을 벗겨서 한데 뭉쳐가지고 길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내다던졌다.그리고는 슈퍼에 들려 타올 몇개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진우엄마한테서 오전에 전화가 왔더라.토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이제 또 공장에 일하러 나간다더라.당분간은 중국에 못온다고 하니 섭섭하더구나.그래도 네가 전화를 한 덕분에 오랜만에 진우엄마 목소리도 들었다." "미안하오.난 전화를 하지 않았소." "그래?그럼 진우엄마가 우리가 보고 싶어 오늘 전화를 한 게구나.헌데 너 지금 어디기에 귀뚜라미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리나?" "집이요.귀뚜라미 맞소." "허허.일본에도 귀뚜라미가 있나?" 진우가 콜록콜록 기침을 깇는 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왔다. "진우 아프오?" "감기에 걸렸는지 요새는 밥도 잘 안먹는다.애들은 엄마가 있어야 하는데...언제면 이 전투놀음이 끝나겠는지." "그럼 후에 다시 전화하겠소." 전화를 끊고 용이는 창가에 멍하니 서있었다.전투놀음이라는 형님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오르며 오른손을 펼쳐보았다.수십년이 지났어도 여덟바늘을 꿰맸던 자리는 지금도 상처로 남아있다.하지만 이제 문호형님한테는 이보다 엄청 더 큰 마음의 상처가 깊게 남게 될 것이리라.비록 지금까지 형님은 모르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부탁하고 싶다.내가 어디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은 형님한테 절대 비밀로 지켜달라." 형님은 지금도 그녀가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찌르륵~찌르륵~ 귀뚤귀뚤~ 오늘 밤 저 귀뚜라미들의 울음소리는 왜서 여느 때와는 달리 이다지도 구슬프게 들려오는가.         发自我的 iPhone 返信返信 転送転送 移動 印刷 迷惑メール 削除 操作
4    (단편)비닐우산 댓글:  조회:966  추천:0  2019-09-14
연변문학 2018년8월호 민족문학 2018년6호(전재)     비닐우산   박명선 1. 1993년10월 중순,내가 일본에 온 이튿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여덟시경.나는 시내 언덕에 자리잡은 학교로 찾아가는 큰길에서 우산을 들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드넓은 차도에서는 거북이걸음으로 꾸물댈 것 같았던 차량들이 굴레벗은 말들처럼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자동차바퀴와 사람들의 신발에 짓밟힌 더러운 흙탕물이 튕겨올 줄 알았는데 아스팔트길에 쏟아져내리는 비물은 파도처럼 하얀 물결을 일구며 하수구구멍으로 세차게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사이에 파란 신호등으로 바뀌였다.신호등에서 울려오는 귀맛좋은 초침소리와 우산에 떨어지는 비소리를 함께 들으며 횡단보도를 거의 건너왔을 때 가벼운 물체가 나의 발길에 걸채이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 비닐우산이였다. 경사진 아스팔트길이였고 비바람이 불어와 우산은 펼쳐진 채로 하수구까지 밀려갔다.혹시 앞서 가던 사람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나 살펴보았지만 사람들은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걸음을 놓고 있었다.누가 버린 우산이 아니라 떨어뜨린 우산이 분명했다.이 우산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느 행인이 주어가지 않으면 청소부의 집게에 집혀 쓰레기장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그리고 하수구구멍이 막힐 수도 있었다. 나는 누가 자기의 우산이라고 찾으면 돌려줄 생각으로 친구집에서 들고왔던 삼단식우산은 카바를 씌워 가방에 넣고 그 비닐우산을 들고 언덕길을 올라갔다.학교로 올라가는 언덕길 우에 두 녀학생이 하얀 비닐우산 하나를 쓰고 달려가는 모습이 뒤늦게 보여왔다.  교무과에서 등록을 마치고 지도교관한테 인사를 드리려고 도서관 옆에 위치한 청사에 들어섰다.여기 출입문 옆에도 신발장처럼 보이는 우산꽂이시렁이 놓여있었다.교무과에서처럼 우산꽂이시렁에 우산을 꽂으려는데 제일 안쪽에 똑같은 비닐우산 하나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띄였다.복도 저켠에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도수 높은 안경을 건 한 교수님이 두 녀학생에게 뭔가를 분부하고 있었다. 2층 지도교관연구실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분은 사진에서 보았던 상냥하고 인자하신 교수님이였다.일본에 온 목적이며 연구분야며 가정상황 그리고 추천한 교수님과의 인연 등을 다시 낱낱이 체크하고 나서 석사과정에 입학한 남학생이 없기에 녀학생이 앞으로 진학에 도움이 될 학습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지도교관에게 인사를 마치고 층계를 내려가는데 아까 복도에서 보았던 그 교수님과 두 녀학생이 층계를 올라오고 있었다.나는 허리를 약간 굽혀 교수님께 인사를 올리고 옆을 스쳐지나려는 녀학생을 훔쳐보았다.스물서너살 쯤 되여보였고 왼쪽 팔소매가 약간 젖어있었다.청아한 눈빛에 청순한 녀고생 같은 짧은 머리를 한 하얀 얼굴의 그녀도 나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닐우산을 들고 출입문을 나서려다가 그녀의 우산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 좀 기다려서 우산임자를 확인해봐야겠다는 충동이 생겼다. 비줄기는 좀전보다 많이 수그러들었고 하늘을 쳐다보니 금세 비가 그칠 것 같았다.언덕에 위치한 학교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날렸다.나는 캠퍼스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건넬가 궁리하면서 기다렸다.얼마 안 되여 두 녀학생이 두툼한 책 한권씩 지니고 나왔다.그녀 옆 녀학생이 하얀 비닐우산을 펼치려는 걸 보고 나는 그녀에게 한발 다가가며 물었다. "저...혹시 이 우산이 당신의 우산이 아닌지요?" 나보다 대여섯살 어렸지만 학생이라고 부르자니 실례인 것 같아 당신이라고 존칭했다.당신이라고 불러놓고 좀 쑥스러웠던지 나는 게면쩍게 웃었다.그녀는 경계하는 눈빛 하나 없이 나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글쎄요.아까 학교 언덕 아래에서 떨어뜨리긴 했지만..." "네.바로 학교 언덕 아래에서 주웠습니다.두 분이 우산 하나를 쓰고 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녀는 우산을 살펴보더니 별로 서슴치 않고 자기 우산이 맞다며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옆에 있던 녀학생도 일본녀성다운 덧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웃어보였다. "어느 학부 학생인가요?" 나는 인츰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교육학부입니다.그 쪽은요?" "네.저도 교육학부입니다.금방 입학수속을 마친 류학생입니다." 나는 묻지도 않는 대답을 했다. "아,그럼 연구생이겠네요.한국에서 오셨어요?" 류학생이라고 하니 내가 한국에서 왔는가 생각했던 모양이였다.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오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가끔씩 한국어가 귀에 들려오기에 이 대학에 한국류학생이 많을 거라 짐작은 했었다. "아닙니다.중국에서 왔습니다." "그래요?처음 뵙겠습니다.4학년생 고하다(木幡)입니다.이쪽은 한반 친구 스즈끼 (鈴木)입니다." "박입니다." "박?소박하다는 박 아닌가요?한국인들 가운데 박씨 성이 많지 않아요?" "네.중국에도 박씨 성이 많습니다." "..." 그녀가 좀 어리둥절해하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중국 조선족입니다." "아,그렇네요.만나서 반갑습니다.지금 수업시간이 다돼서요.그럼..." 고하다는 다시 인사를 하고 스즈끼와 얘기를 주고받으며 테니스장이 보이는 북쪽 청사로 달려갔다.하얀 비닐우산과 하얀 샤쯔가 유난히 어울려 보였다.고하다의 뒤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문득 고하다가 입었던 바지가 생각났다.아까 얼핏 보았더니 고하다는 무릎살이 약간 들여다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무릎이 왜 나왔을가?왜 구멍난 청바지를 입었을가?일본녀인들이 집에서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고 앉는다더니 그래서 바지무릎이 닳아서 구멍이라도 생긴 것일가? 헌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청바지는 너무나 멀쩡했다.그럼 혹시 가위로 성한 바지에 구멍이라도 낸 게 아닐가?설마 통풍이 잘 되라고?이것도 일본젊은이들의 시체멋인가? 청바지라 해도 구멍난 청바지는 처음 보는 나였다.저도 모르게 머리가 갸우뚱해졌다.   2. 미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여 잠시 친구집에 머물러있기로 했다.나보다 반년 먼저 일본에 온 친구였다.학교 기숙사에 주숙하려고 기숙사에 가보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이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새벽에 들어올 지도 모르고 지친 몸으로 언덕길을 어떻게 올라오랴 싶었다.2~3만엔 쯤 하는 값싼 세방을 시내에서 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거의 되여 학교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전철역으로 가는 길 아니면 요꼬하마(横浜)역에서 전차를 갈아탈 때 출구를 나와 역전 부근에 부동산이라도 있는가 살펴봐야지. 허참, 내가 다시 학생이 되다니?서른이 되도록 학생딱지를 벗지 못하다니?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큰길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왔다. 물이라도 사마시려고 꽃가게 옆 패미리마트에 들어선 나는 그만 멈칫했다.문 옆에 우산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는데 비닐우산이 300엔이였다.보통우산은 1,000엔이였고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우산들은 2,000엔이였다. 나는 비닐우산임자였던 고하다를 떠올려보았다.아침에 친구집을 나설 때는 작은 비가 내렸기에 우산을 꺼내들지 않았지만 전차에서 내려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비줄기는 제법 굵어졌고 비바람도 몰아쳤다.비닐우산이 세개 팔린 것으로 보여졌다.아마 고하다가 아까 여기를 지나다가 비가 쏟아져내리니 이 패미리마트에 들려 스즈끼와 같이 비닐우산을 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00엔짜리 비닐우산이라?그래,까짓 비닐우산이야 길바닥에 떨어뜨려도 크게 아쉬울 건 없지 않겠는가? 문 옆에 오래 서있기가 무엇하여 가게 안을 한바퀴 돌고나서 물 한병을 골라들고 계산대로 갔다.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일본이란 나라는 하루 절반의 시간은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는 일에 소진하지 않나 싶었다.돈을 치를 준비를 하려고 가방을 들추다가 지도교관이 전화번호를 적어준 메모지가 보여서야 학습파트너라는 녀학생한테 련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병을 들고 밖에 나오니 무엇보다도 담배생각이 간절해졌다.깔끔하게 포장한 마이르도세븐 한갑이 220엔이였다.방금 전에 담배 한갑을 사려다가 앞으로 300엔짜리 값싼 비닐우산이라도 갖추려고 그만 나와버렸다.나는 대롱대롱 값이 달려있는 비닐우산들을 슈퍼 창문너머로 다시 들여다보았다. 중국에서 사가지고 온 담배를 가방에서 꺼내 한대 피우고 싶었지만 공중장소이고 또 아르바이트를 해서 로임을 받기 전에는 중국담배 한보루를 집에서만 피우리라 다짐했던 것이 생각나 그대로 패미리마트 옆 공중전화청으로 갔다. 학습파트너의 전화번호는 집전화가 아니라 핸드폰 전화번호였다.학생들도 학교에서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도 갖추고 싶어졌다.학습파트너는  다음 주 월요일 오전 두번째 수업시간에 지도교관이 본과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강의를 하는데 연구생들도 방청한다고 하면서 수업 전에 **청사 3층계단교실 문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면 월요일에 고하다를 다시 만날 수도 있구나. 전화를 마치고 보니 오늘이 수요일이였다.래일도 모레도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였다.석사과정에 진학하기 전의 공부가 수월하다던 말이 실감이 났다. 나흘이라 주어진 시간내에 빨리 세방부터 구해놓아야지.  우산이고 담배고 핸드폰이고 뭐고 세방과 일자리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일본에 올 때 값싼 세방에서 살면서 아무 일이나 닥치는대로 하리라 결심한 나였다. "그럼 면접 보러 오세요.지금 어딘가요?" "바로 가게 옆에 있습니다." "그럼 들어오시지요." 요꼬하마역 출구를 나와 무작정 큰길을 따라 부동산이 있는가 살펴보며 걷다가 한국인이 경영해 보이는 듯한 불고기점 유리창에 이라고 써붙힌 광고를 보고 장난 삼아 전화를 했더니 면접 보러 들어오라고 할 줄이야.  규모가 굉장히 큰 가게는 한국전통식 불고기점이였는데 점장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눈이 시원스럽고 가슴이 풍만한 젊은 일본녀자였다.눈빛이 애교스러워 면접을 보면서 나는 몇번이나 눈길을 돌렸다.점장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금방 발급받은 학생증을 보더니 외국인등록증도 보여달라고 했다.외국인등록증은 아직 신청하지 않았다고 려권을 보여주려고 하자 점장은 괜찮다고 웃으며 학생증만 복사해두라고 공작새처럼 머리를 염색한 홀경리인 듯한 녀성에게 상냥하게 분부했다.그리고는 홀서빙보다 먼저 주방에서 일할 수 없겠는가고 물었다.나는 쾌히 승낙했다.시급은 일본인학생들과 마찬가지로 900엔이고 시간은 오후 네시부터 저녁 열시까지 여섯시간인데 언제부터 나올 수 있는가고 다시 묻기에 오늘저녁부터라도 좋다고 대답했다.그랬더니 점장은 내가 도리여 미안해질 정도로 고맙다고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문밖까지 바래주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일본녀인들을 만나는 날인가? 일본에 온 이튿날에 일자리를 구하다니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운 일인가?! 아까 점장이 아끼야마(秋山)라고 자아소개를 했다.아끼야마.가을의 산.내가 일본에 온 것도 가을이고 학교도 산은 아니지만 언덕에 있지 않는가? 야릇하고 교묘한 느낌이 들었다.아끼야마가 귀인처럼 느껴졌다. 하찮은 식당 주방일을 구하고서도 왠지 저절로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렸다. 세방을 먼저 구하자고 했는데 일자리를 먼저 구하다니?  아무래나 좋았다.세방도 이제 곧 구해질 것이리라.  인행도를 걸으면서도 자아승리감에 젖어 웃음이 실실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이상한 사람이지 않나 나를 흘겨볼 사람도 나를 아는 사람도 여기에는 없다.길 옆 나무가지에 앉아있던 까마귀 몇 마리가 비에 젖어 더욱 반들반들해 보이는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깍깍 하고 내 머리 우로 날아갔다.처음 보는 일본까마귀들이다.일본에서는 까마귀를 불길의 상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까마귀는 왜 울가?》라는 일본노래가 생각났다.까마귀가 왜 우는지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바삐 걸어가는 저 정장차림인 일본인샐러리맨이나 지나가다가 뒤돌아서서 예쁜 녀자들의 몸매를 아래우로 지꿎게 훑어보는 저 일본인아저씨나 알겠지 내가 어찌 알겠나? 다시 전철역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3. 여전히 잔뜩 흐린 오후였다.  알람을 맞춰놓고 좀 자려고 누웠는데도 좀처럼 흥분이 가셔지지 않으며 잠이 오지 않았다.그만 일어나서 화르륵 창문을 열었다.축축한 공기가 집안으로 들어왔다.하늘에서는 회색구름이 흘러가고 있었고 앞집 마당에 있는 이름 모를 과일나무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나무잎에 맺혔던 비물이 락엽 우에 툭툭 소리내며 떨어졌다.길 옆 쓰레기상자는 깨끗하게 비여졌는데 까마귀 몇 마리가 땅에 내려앉아 먼가를 부지런히 쪼아먹고 있었다.이전엔 까마귀라는 새를 증오하였는데 오늘은 왠지 이상하리만치 과자부스러기라도 있으면 던져주고 싶은 마음이다. 《까마귀는 왜 울가?》라는 노래를 다시 흥얼거리며 책상에 쪽지를 써놓고 일찌감치 집문을 나섰다. "일찍 나오셨네요." 아끼야마점장이 반색하며 맞아주었다. "그럼 먼저 탈의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대청에 손님상이 한상 있었고 주방을 지나며 보니 흰 주방복을 입은 대여섯명 일본인들이 분주하게 돌아치고 있었다.탈의실은 창고 옆에 있었다.아끼야마가 남자탈의실까지 들어와서 카운터에서 들고온 하얀 주방복과 까만 바지를 건네주며 롯카를 알려주었다.12번 롯카에 나의 성씨가 씌여있었다. "주방에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팬티바람에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주방에 가있었을 아끼야마가 문 옆에 서있었다. 엇!혹시 내가 옷을 벗는 걸 보지 않았을가? "사이즈를 몰라서요.바지가 좀 커보이네요.래일 좀 작은 사이즈로 바꿔드릴게요." 아끼야마가 웃으며 나의 바지 앞섶을 손으로 당겨보며 말했다.손이 거기에 거의 닿을 번 했다. 주방장은 오십이 넘어보이는 이시이 (石井)라는 남자였고 주방보조도 모두 남자들이였다.설겆이도 남자들이 하는가?그럼 내가 아낙네들처럼 설겆이를 해야 하는가?주방에서는 모두 장화를 신어야 했다.장화를 바꿔신은 나에게 주방장의 지시를 따르라고 말하고 아끼야마는 그제야 대청으로 나갔다. 팔자형 코수염을 기른 이시이주방장의 말투는 거칠었다. 불고기 철판을 닦아내는 일이 나에게 차려졌다. 펄펄 끓어넘치는 큰 가마에 시꺼멓게 탄 철판들을 넣어 소독한 후 꺼내서 수세미로 깨끗이 닦아낸 다음 옆 가마에 넣어 재소독해서 기름칠을 먹여 철판전용시렁에 올려놓는 일이였다.전기로 물을 끓이는 가마 옆에 철판들이 어지럽게 쌓여져있었다.지금 대청에 한상 밖에 없는데 웬 철판들이 이렇게 많을가?내가 온다고 점심의 철판들을 닦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아끼야마도 알고 있을가? 뜨거운 가마 옆에서 처음 해보는 일을 하다나니 반시간도 안 되여 그만 땀벌창이 되고 말았다.주방장이 옆에서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한참 하다가 그만 손맥이 풀려 화장실에 갔다오겠다고 일어섰다.주방장은 머리를 끄덕였다.화장실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니 아직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찬물에 세수를 하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5시를 좀 넘겼다.가게 출입문으로는 손님들이 륙속 찾아들어오고 있었다. 주방에 다른 한 사람이 와있었다.스물둬살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약하고 키 큰 남자였다.나는 그에게 웃어보이고 다시 가마 옆에 앉았다.그러는 나를 그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주방장이 그에게 오늘은 야채를 다듬고 설겆이를 하는 일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가?아끼야마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박상이 이 일을 해요?" 나는 주방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네.히구찌(樋口)와 바꿔해봐야죠.주방일은 모두가 익숙해야 하고 서로 협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경스러운 태도로 그럴 듯하게 말하는 주방장이였다.아끼야마가 뒤에서 다시 말했다. "래일 모레 준비는 다 되였겠지요?아,그리고 박상,모레는 점심 열한시부터 나와줄 수 있겠어요?" 모레는 큰 예약이라도 있는 것인가?나는 일어서려다가 그러겠다고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갖가지 모양의 크고작은 그릇들이며 철판들이 주방으로 가득 날라져왔다.몇명 남녀대학생들이 서로 웃으며 나르고 있었다.삽시간에 나의 눈앞에 철판이 산더미처럼 쌓여졌다.설겆이는 두 사람이나 하고 있었다.히구찌가 나한테로 다가와 일손을 도우려고 하자 주방장이 그를 불러세웠다. 아까는 협력이라고 했지? 흥!나 혼자서라도 할 수 있다.아무튼 열시가 되면 나는 다 하든 못 하든 일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니깐!그러면서도 일손은 늦추려고 하지 않았다. "식사시간!" 둬시간이 지나서 주방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근이며 풋고추며 여러가지 야채들을 넣어서 볶은 색상이 고운 비빔밥이 주방탁상에 올라왔다. "박상도 빨리 와서 식사하세요." 다들 나를 부르는데 주방장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집에서 먹고 왔습니다." 나는 주방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주방장과 얼굴을 맞대고 같이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철판은 쉴새없이 들어왔다.이젠 일도 점점 손에 익어갔다.100장은 몰라도 6,70장 철판은 나의 손에서 깨끗하게 닦아지고 손님상으로 나갔으리라.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가? "휴식!" 이번에도 주방장이 소리를 질렀다.마침 나의 일도 끝났다.벽시계바늘은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청소를 하는 사람들 곁에서 호프잔을 쳐들고 내가 일을 끝내자마자 휴식이라고 소리를 지른 주방장을 나는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대청에서도 종업원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자고 보니 손바닥은 소고기육회처럼 발가스름해졌고 손마디는 몇 군데가 하얗게 껍질까지 벗겨져있었다. 집에서 물걸레질 한번 하지 않은 내가 오늘은 애들처럼 물장난을 심하게도 했군.저녁을 긂은 것도 오늘이 처음이군. 종업원들이 하나 둘씩 아끼야마에게 인사를 하고 출입문을 나섰다. 탈의실로 가려는데 아끼야마와 마주쳤다.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면 안 돼요.일이 힘들잖아요?"  "괜찮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퇴근할 때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같은 길입니다." "아닙니다.절로 가겠습니다." 밖에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다.한참 역으로 걸어가는데 아끼야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서 타요." 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볼가 두려워 나는 얼른 차에 올랐다.고급스럽고 널찍한 토요타차였다.일본에서는 차량들이 좌측통행이라더니 핸들이 오른쪽에 있었다. "쯔루미(鶴見)역 동구 쪽이라고 했죠?" "네." "우리 어디 가서 술 한잔 하며 얘기를 할가요?" "미안합니다.친구에게 열한시 전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요?친구와 같이 있으면 불편하시겠네요." "그렇잖아도 세방을 구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제가 구해드릴가요?부동산을 하는 친구가 있거던요."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아끼야마가 쳐다보았다. "어머,그 손 보세요.고무장갑 주지 않던가요?" "괜찮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내가 저도 모르게 자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아끼야마가 눈치를 챘던 것이다.무척 안스러워하는 기색이였다. "그럼 오늘은 피곤할테니 일찍 들어가 쉬세요.모레 저녁으로 약속해주세요." 나는 거절할 래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쯔루미역 동구 앞 큰길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집앞까지 모셔다주겠다는 아끼야마를 극구 만류하고 차에서 내렸다. 4. 집 부근 세븐일레븐에서 사들고온 맥주를 친구와 같이 마시며 모레 저녁에는 회식이 있어 많이 늦어질 거라고 능청스럽게 말했다.친구가 가게에 대해 물어보자 주방장의 얘기만 꺼냈다.일본에 와서는 많이 참아야 한다며 성격이 나쁜 나를 친구가 근심조로 타일렀다.맥주 두컵을 마시니 소르르 피곤기가 몰려왔다.잠자리에 누워서도 아끼야마가 자꾸 머리 속에 떠올랐다. 아끼야마가 왜서 처음 보는 중국류학생인 나를 이렇게 친절하게 대할가?리혼한 녀자일가?탈의실에서의 행동을 봐선 남편이 있더라도 욕구불만인 녀자인 것 같기도 했다.아니면 내가 조선족이라고?한국전통식 불고기점을 운영하고 있는 걸 보면 아끼야마의 부모 중 어느 한 분이 재일한국인일가? 모레 저녁에는 내 생애에 결정적인 순간이 닥쳐올 지도 모를 일이였다. 낮게 켜놓은 텔레비죤에서 래일도 흐리고 가끔씩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고했다.비가 내린다는 말에 오전에 만났던 고하다와 비닐우산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던 금요일이였다. 어제는 사타구니에 딱 들어붙은 바지를 입었더니 불편함도 있었지만 앉을 때마다 바지가 터지면 어쩌랴 여간 조마조마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아끼야마에게 다시 바꿔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오늘 점심에는 한국려행단체팀의 예약이 있었다.아끼야마가 나를 홀서빙으로 나서라고 했다.대청종업원의 복장으로 갈아입으니 바지가 편하여 좋았다. 만약 한국손님들이 웃웃에 달린 명찰을 보고 물어보면 한국어로 대답해도 좋다는 아끼야마의 말에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를 점심부터 나오라고 했을가? 한국손님들은 나이가 지긋한 한국 어느 지방에서 려행을 나오신 분들 같아 보였다.모두들 나의 존재는 의식하지 못한 듯 명찰도 살펴볼 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가끔씩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지만 가이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며 일이 있으면 부르겠다고 했다. 한시간 쯤 되여 손님들이 가게를 나갈 때 아끼야마가 웃음 띤 얼굴로 손님들에게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발음도 아주 정확했다.가이드에게 봉투를 넘겨주며 큰길까지 같이 나가면서도 한국어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한국어를 잘 하시네요." 가게로 들어오면서 나는 아끼야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조금은 할 줄 알아요.자,식사하러 갑시다." 오늘은 아끼야마가 주방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40대 가정주부가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점심시간에 가게에 나와 설겆이를 돕는 아줌마인 듯 했다.주방장은 창고를 점검해야 한다며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다. 오후에는 철판을 닦는 일을 계속 해야 했다.바지는 모두 까만 바지였기에 웃옷만 갈아입었다.  가게에 한국손님들이 찾아오고 한국어를 아는 걸 보면 아끼야마의 부모 중 어느 한 분이 재일한국인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철판을 닦으며 생각하다가 주방장이 들어오기에 그만 생각을 집어치웠다.저녁에도 예약상이 있어 모두들 자기 일에 분망했다.주방장이 설겆이를 하는 아줌마한테로 다가갔다.열심히 일하는가 살펴보며 옆을 스쳐지날 줄 알았는데 멈춰서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아줌마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아줌마는 몸을 피하면서도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닦던 철판을 들었다가 바닥에 쾅 하고 내리뜨렸다. "뭐야?" 주방장이 나를 보고 큰소리를 질렀다. 나는 모르는 체 철판을 계속 닦았다. 한참 지나서 시간이 되였는지 그 아줌마는 일손을 놓고 나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주방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주방을 나갔다. 오늘도 어느덧 퇴근시간이 다 되였다. 아끼야마와의 약속이 있기에 주방장이 주방을 나간 후에도 호스로 바닥 구석구석에 물을 뿌리며 늦장을 부렸다.탈의실에 들어서려는데 여직껏 뭘 하고 있었는지 주방장이 뒤늦게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롯카 안에 벗어두었던 바지와 가랭이가 조금 젖은 바지를 벗어 잘 개여서 가방 안에 넣었다.  "가방 안의 것이 뭔가?" 내가 문을 나서려고 하자 주방장이 다짜고짜로 물었다. "바지가 더러워져서 집에 가서 씻어가지고 오려구요." 나는 아니꼬운 눈길로 주방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근데 왜 바지가 두개인가?" "점심에 홀에 나가지 않았습니까?그 바지를 입고 철판을 닦았습니다." "그래?앞으론 바꿔입는 걸 명심해." 내가 응대를 하지 않자 주방장이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남자탈의실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다. "수고했어." 낌새가 좋지 않아 보였던지 주방장이 바삐 문을 나섰다.탈의실을 나가는 주방장의 뒤통수에 주먹 한대 안겨주고 싶었다. 옆칸 녀자탈의실에서 두 녀대생이 나오며 "수고했어요"하고 나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지나갔다. 대청의 전등불은 대부분이 꺼져있었다.아끼야마가 카운터에서 명세서를 보고 있었다.내가 옆을 지나자 낮은 소리로 말했다. "큰길에서 기다려요." 나는 밖에 나와 천천히 걸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뇌리를 감돌고 있었다.      5. 한참 달리다가 어딘지 모를 레스토랑 앞에서 아끼야마가 차를 멈춰세웠다.열시가 넘었는데 가게에는 아직도 손님들이 있었다.자리에 앉은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괜찮아요?차운전이 있지 않아요?" "차는 두면 되지요.오늘 기분이 좋네요.아참,중국에 있는 부인과 아들은 일본에 언제 데려오나요?" 아끼야마의 물음에 나는 안해와 네살난 아들을 생각해보았다.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지금은 생각하지 않습니다.헌데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지요?" 맥주를 따르며 내가 묻자 그녀는 비밀이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한테서 배웠어요.사실은 어머니가 재일2세이거던요.어머니도 성이 박씨였는데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아버지 성씨를 따랐지요.아버지는 일본인이고 퇴직한 후부터 불고기점을 운영했는데 장사가 잘 되였어요.그러니 이젠 십년도 넘네요.저도 요꼬하마국립대학 경제학부를 나와 사꾸라은행에 취직했다가 작년부터 불고기점을 맡아보고 있어요.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서요." "결혼은 하셨겠지요?" 나는 바투 물었다. "아직 결혼 전이예요.명년이면 서른여덟이 돼요.박상과 여덟살 차이네요." 결혼 전이라니 뜻밖이였다. 아끼야마가 한숨을 내쉬고나서 맥주 한컵을 쪽 마시더니 두 손으로 빈 컵을 내게 내밀었다. "어머니와 같은 박씨이고 저의 모교에 류학 오신 박상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어요.중국에서 일본어교원을 하셨다지요?한국엔 갔다오셨어요?전 어머니와 같이 여러번 갔다왔어요."  "네.금년 봄에 아버지와 같이 처음 갔다왔습니다." "중국에서도 한국에 갈 수 있어요?한국에 친척이 있어요?" "네."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다 보니 벌써 여러 병이나 마셨다. "저...한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뭔데요?" 드디여 정체를 들어내보이려나? "저의 가게에서 오래동안,아주 오래동안 일해줄 수 있어요?그러면 박상한테 잘 해드릴게요."  이런 일이였구나. 이런 일을 가지고 난 또...내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말 속에 다른 뜻이 있어 보였다. "생각해볼게요." "그러세요.전 애도 없구 형제도 없구 남자도 없어요.앞으로 불고기점을 같이 운영해나갈 남자가 필요하거던요.전 그 남자한테 모든 걸 다 줄 수 있어요." "인젠 열두시가 넘었습니다.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마시지요."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시계를 보며 말했다.  "전차도 인젠 끊겼어요." 옆의 손님들이 보는 것 같아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끼야마가 약간 비칠거리며 계산대로 가는 걸 막지 않았다. "집까지 모셔다드리지요." 밖에 나오니 마침 지나가는 빈 택시 한대가 보였다.나는 급히 손을 들었다. "아니요.저기에 호텔이 보이지 않나요?" 길 건너 거무스레한 빌딩 속에 어슴푸레한 간판이 보였다. 러브호텔? "그럼,호텔에서 쉬고 가세요." 아끼야마는 나를 놓칠세라 제법 나의 팔짱까지 끼고 호텔로 들어갔다.이런 곳에 들어오자면 이렇게 애인처럼 다정스럽게 보여야 하는가? 생각 밖으로 러브호텔은 체크인이 간단했다.방키를 가지고 2층에 올라가 방을 찾아 들어서니 이인용침대 옆에 커다란 거울이 가로놓여있었다.마치 섹스씬이라도 서로 감상하라는 듯이 보였다. 아끼야마가 욕실로 들어갔다.뒤이어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난 나는 밤고양이마냥 호텔방을 가만히 나와 발볌발볌 층계를 내려왔다.카운터를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안경을 걸고 신문을 읽던 경비아저씨가 아는체 모르는체 앉아있더니 내가 혼자서 호텔문을 나서려고 하자 다급히 뒤쫓아왔다.  "저...미안합니다.그 녀성분은요?" 문득 이전에 읽었던 어느 일본추리소설에서의 러브호텔살인사건이 떠올랐다. 괜히 의심받을 일은 하지도 말아야지. "쥬스라도 좀 사가지고 들어가려고요." "랭장고 안에도 있는데요.자판기는 호텔 옆에 있습니다." 경비아저씨는 자판기까지 따라와서 내가 쥬스 두개를 뽑아가지고 층계를 다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카운터에 들어가 앉았다. 레몬쥬스를 사들고 방에 다시 들어온 나를 보자 아끼야마는 실망 속에서 헤여나온 듯 웃으며 나에게 안겼다.나의 손에서 쥬스가 떨어졌다.금방 샤워를 끝낸 아끼야마의 몸에서 향긋한 체취가 풍겨왔다. ”씻고 오세요.” 아끼야마가 나의 목에서 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욕실에 들어간 나는 마치 절벽 우에 서있는 사람처럼 눈앞이 아찔해났다.스스로 눈이 감겨졌다.떨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주체하며 샤워기를 틀었다.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져내려 그나마 긴장했던 탕개를 풀어주었다. 후~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였다.하지만 이 시각이 너무나 돌연스럽게 들이닥친 감이 들었다. 그래,남자라면… 샤워를 마쳤다.샤워를 마쳤지만 선뜻 방으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망설이던 끝에 욕실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이 문을 열면,이 문이 열리면 나는 곧 다른 남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6. 나는 넋 잃은 사람처럼 욕실문 밖에 서있었다. 환각이였나? 아끼야마는 없었다. 나는 쏘파에 가서 풀썩 주저앉았다.탁자에 레몬쥬스 두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아끼야마가 마셨을 쥬스를 흔들어보았다.절반도 마시지 않은 걸 보아 급한 일이 있어 밖에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그걸 사러 갔을가?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저녁은 주방장이 있어 먹지도 않았고 레스토랑에서는 부실하게 맥주만 마셨더니 배가 고팠다.랭장고를 열어보았다.캔맥주 두개와 쥬스며 물병들이 들어있었다.쥬스나 물을 마시랴 싶어 맥주 하나를 꺼내 딱 소리나게 땄다. 맥주를 치켜들고 낯선 손님을 내려다보는 천정을 올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여나왔다. 아끼야마가 왜서 방을 나갔을가?나처럼 뺑소니 치고 싶었을가?아니면 그런 나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었을가? 에잇,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닌가? 그 일을 마치면 근심거리라도 생기지 않았을가?그리고 그녀의 덫에 걸려 앞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되지 않았을가? 맥주 한모금 마시고 생각해보니 자신이 무시 당하고 조롱 받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이럴 때는 슬퍼져야 할가 생각하다가 그만 욕설이 튕겨나오고 말았다. 괘씸한 녀자.갈보 같은 녀자! 전화가 걸려온 건 그 때였다. 들고 있던 캔맥주를 탁자에 올려놓으려는데 옆의 전화기가 손님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낮다랗게 울렸다.나는 대번에 누군지 알아차렸다.카운터 경비아저씨가 아니고 아끼야마일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수화기를 손에 들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박상.지금 택시로 급히 아버지집으로 가는 길이예요.카운터에 얘기했어요.남자손님도 인츰 내려올 것이라고..." 그랬다.아끼야마였다. "무슨 일 생겼어?이 밤중에..." 말이 곱지 않게 나갔다.전화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쓰러졌대요." "?..." 그런 일이였구나. 헌데 하필이면 이 때에 아버지가 쓰러지다니?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지.암,아버지가 무사해야 할 텐데... 방금 전까지도 꼿꼿해졌던 기분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나는 아래도리를 가리운 목욕타올이 바닥에 떨어진 줄도 몰랐다.급히 당겨 앞을 가려놓고 지지대를 잃은 오이처럼 다시 쏘파에 허탈하게 너부려졌다.침대 옆 거울 속에 웬 멍청한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마주보고 있었다. 바보 같은 남자. 정신 있는 놈인가? 정신 있는 놈이라면 3,000엔을 내고 러브호텔에 들어와 아무 노릇도 못하고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단 말인가?3,000엔이면 값싼 닭고기라도 푸짐히 살 수 있지 않는가?그러면 이런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집에서 닭탕을 끓여 뜨끈한 국물이라도 마실 수 있지 않는가?그리고 3,000엔이면 비닐우산은 열개라도 살 수 있지 않는가? 문득 이틀 전의 비닐우산이 다시 생각났다.나는 하수구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던 우산이 마치 지금의 자신이라는 착각 속으로 빠져들었다.나 또한 버려져도, 다시 찾지 않아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진 않을가? 그 우산을 줍지 않았더라도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괜스레 죄없는 고하다마저도 밉살스러워났다. 그럼 그 때 그 우산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했단 말인가?경찰서에라도 가져다 바쳐야 했단 말인가?전선주에 우산 찾는 광고라도 써붙혀야 했단 말인가? 나는 그만 벌떡 일어나 아끼야마가 마셨던 쥬스를 욕실에 들고가서 변기에 쏟아넣었다.들들하고 시큼한 냄새가 풍겨왔다.변기의 물을 콱 내리고나니 직성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빈 캔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고 그제야 옷을 챙겨입었다.방안에 들어가 탁자 우의 레몬쥬스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메뉴에 써놓은 맥주값 300엔을 되물고 호텔문을 쾅 닫고 나와버렸다. 밖에 나와 다시 생각해보니 레몬쥬스 두개 값을 빼고도 오늘은 3,300엔이나 써버렸다.아까는 비닐우산 열개라고 생각했는데 열한개가 된 셈이였다.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겨놓으려는데 호주머니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은전 몇개가 철썩철썩 부딪치는 소리가 귀찮게 들려왔다. 에라잇,택시라도 타자. 오늘 밤에 아무 것도 타지 못하면 너무 분통하지 않는가?일본에 와서 지금까지 택시도 타보지 못했지 않는가? 택시 한대가 골목에서 기여나왔다.취객처럼 손을 휘휘 내저어 멈춰세웠다.차 뒤문을 열려는데 문이 자동으로 열려졌다. 엇!하마트면 실례를 할 번 했군. 허구픈 실소를 던지고 차안에 들어가 반사적으로 문손잡이를 쥐여당기려는데 문이 또 자동으로 닫겨졌다. 또 실례를 할 번 했군. 일본택시도 나를 비웃는가? “쯔루미역 동구까지 부탁합니다.” 택시는 어두운 골목을 나와 가로등불빛이 환한 거리를 내달렸다.새벽 한시를 넘은 거리에는 나를 또다시 놀리는 듯 노란 시그널을 뱅글뱅글 괘씸하게 돌려대는 청소차 한대가 벌써부터 바라나와 길바닥을 핥고 있었다. 7. 오후 네시. 가게에 나오니 카운터에는 공작새머리 홀경리가 처음 공원에 나온 공작새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있었다.씻어가지고온 바지를 갈아입고 대청에 나와 다시 살펴보았지만 아끼야마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가? 순간,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끼야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제 이 가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혹시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진 않을가?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다.벙어리 랭가슴 앓듯 혼자서 끙끙거리다가 레스토랑에서 아끼야마가 수첩에 적어주던 핸드폰전화번호가 생각났다. 퇴근하면 전화를 해야지. 여덟시가 좀 지나 주방장이 전화를 받으러 대청에 나갔다가 늙은 수사자처럼 어슬렁어슬렁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그만 퇴근하고 래일 점심 열한시에 출근하라." 아끼야마의 지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아끼야마가 지금 어디에 있을가? "...좀전에 집에 들어왔어요.제가 가게에 전화했어요.지금 가와사끼(川崎)역까지 와주실래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나한테서 전화가 걸려오리라고 믿었던 아끼야마였을 것이다. "알겠습니다.지금 곧바로 가겠습니다." 공중전화청에서 전화를 마친 나는 전철역으로 헐레벌떡 뛰여갔다.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가와사끼역은 쯔루미 다음 역이였다.요꼬하마에서는 네 정거장만 가면 되는 거리였다. 동구 택시정류소 앞에서 아끼야마가 하얀 비닐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아끼야마는 나의 어깨에 살며시 얼굴을 가져다댔다.왠지 어제밤과는 달리 측은하고 비애스러운 생각이 들었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끼야마는 호화롭고 멋진 고급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앞으로 가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겠지요?" "네.관심해주셔서 고마워요.가게를 넘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모든 서류들이 저의 이름으로 되여있고 누구의 경제지원도 받지 않았으니깐 대수롭지 않아요." 안도의 숨이 나왔다.아까부터 주방장이 혹시 나쁜 심보를 품고 있지 않나 은근히 근심하고 있었다. "며칠 후면 인사변동도 있을 거예요.자, 우리 위스키나 마십시다." 아끼야마가 위스키 한병을 들고 나왔다.넓다란 거실에 놓여있는 푹신한 쏘파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이 집은 작년에 내가 가게를 맡을 때 아버지가 선물로 사준 거예요." 그녀의 눈시울이 젖어들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온 남자는 아버지 외에 지금까지 박상 밖에 없어요."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처음 마시는 위스키는 술향은 좋았지만 빈속에 마시기엔 너무나도 독했다.알싸한 위스키향이 입안에서 맴돌고 속은 타들어갈 듯이 뜨거워났다.술잔이 또 채워졌다.그녀가 이런 독한 술을 어떻게 마시랴 싶었다. "그만 마셔요.이러다 취하겠어요." "괜찮아요.오늘은 취하고 싶네요.어제는 미안했어요." 아끼야마의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내가 지금 이 녀자한테 미안해지려 하고 있지 않는가?  "자,우리 원샷해요." 아끼야마가 다가앉아 나의 목에 팔을 감았다.몰캉한 젖가슴이 팔에 닿았다.불에 덴듯 흠칫 놀랐다.그녀가 나와 술잔을 부딪치고 물 먹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뒤로 젖혔다.나도 다 마시자 술잔을 놓고 와락 나의 목을 껴안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혀가 나의 입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침범자를 밀쳐내려다가 악을 쓰며 달려드는 이 일본녀자의 솜씨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나의 웃웃 단추를 하나하나 벗기고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이 차츰차츰 아래로 더듬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녀의 손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릴 즈음,나는 그녀를 일으켰다. 눈앞에 먹이감을 붙잡아놓은 맹수처럼 당장 그녀를 뜯어먹고 싶은 강렬한 식욕이 불끈 살아났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약간 흐트러져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려주었다.그녀의 얼굴에서는 철판을 소독하는 가마처럼 뜨거운 열기가 확확 뿜겨나왔다. "점장님,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언제까지일 지는 몰라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럼 언젠가는 그만둔단 말이예요?" 리해할 수 없다는 듯 아끼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네.그럴 수도 있습니다.중국에 가정이 있으니깐요." 아끼야마는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다시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다. 그래.오늘은 취하도록 마셔보자. 술병을 빼앗아 그녀의 술잔에 절반 따르고 나의 술잔에는 그득하게 채웠다. "일본남자들은 결혼 후에도 풍속점을 드나들거 던요.일본에서는 녀자들이 불쌍할 뿐이지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아끼야마는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어요?일본남자들 중에도 좋은 남자들이 많지 않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제 좋은 일본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아끼야마의 술잔에 나의 술잔을 가볍게 부딪쳤다.그러는 나를 곱게 흘겨보고 그녀가 웃으며 조금 마시자 나는 단숨에 술잔을 비워버렸다.나의 웃웃 단추를 도로 채워주고 그녀가 다시 술을 따랐다. "일본에 정착할 생각은 없어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저의 가게는 요꼬하마에서 손꼽히는 불고기점이예요.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어요.명년에는 지점도 몇개 두려고 해요.박상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도 많아요." 내가 가만히 듣고만 있자 아끼야마도 잠간 침묵을 지켰다.먼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친구집에 있기 불편하면 여기에 와있으세요." "아닙니다.지금 여러 부동산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보니 아버지를 잃은 아끼야마를 위안할 대신 아까부터 랭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갈마들었다.그러다가 점장인 그녀의 환심을 사려거나 그녀의 요구를 전부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속으로 뇌까렸다. 아끼야마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부동산을 하는 친구한테 문의해 볼게요." "감사합니다.오늘은 피곤하실테니 일찍 주무세요.래일 점심에 다시 뵙겠습니다." 내가 일어서자 아끼야마가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한참 후에야 손을 내려놓았다. "그래요.오늘은 이만 해요.이 비닐우산을 가지고 가세요.아까 녀동생이 저를 데려다주고 잠간 앉아있다가 집으로 가면서 두고간 거예요." "녀동생이 있어요?" "네.작은 이모의 둘째딸이예요.국대 교육학부 4학년생이예요." 엘리베이트에서 내려 1층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몸이 휘청거렸다. 위스키 몇잔 마시고 내가 취했나? 귀가를 스치는 바람이 휘파람소리처럼 들리고 주위의 모든 것이 실루엣처럼 보였다.아파트의 전등불빛들이 간사하게 유혹하는 골목을 겨우 빠져나와 큰길 인행도에 들어섰다.  머리에서 비방울이 굴러떨어지기에 비닐우산을 펼쳐들었다. 방금 전에 아끼야마가 뭐라 했더라? 아,맞다.이 비닐우산이 교육학부 4학년생인 작은 이모의 둘째딸의 우산이라고 했지 않았나? 그럼 아끼야마의 이모사촌 녀동생이 혹시 한국인들 가운데 박씨 성이 많지 않는가고 묻던 그 비닐우산임자였던 고하다가 아닐가? 그럼 이 비닐우산이?...     8.   이튿날 점심. 아끼야마는 별다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가게에 나온 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니 시름이 놓였다.오늘도 홀서빙에 나서라고 하면서 래일은 가게의 휴일이고 시간이 있는가고 물었다.래일 오전에 학교에 가야 한다고 대답하자 학교가 끝나면 부동산에 가보자고 했다. 부동산을 하는 친구한테 벌써 련락을 했나? 점심이 지나서 대청이 조용해지자 아까야마가 카운터 안으로 나를 불러들였다.무슨 말을 하려는가 했더니 가게의 근황과 금후의 지점설립계획 등에 대해 말하고 다음 주말에는 여러 회사,상사의 사장들과 회식을 할 예정이라면서 앞으로 접촉기회가 많을 사람들이기에 회식에 꼭 참가해달라는 것이였다. 주방장은 웬 일인지 오후 늦게야 가게에 들어섰다. 저녁 여섯시가 되자 대청에 알바생들이 많아졌다.나는 주방에 가서 히구찌를 도와 철판을 닦아야겠다고 아끼야마에게 말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했다.창고 옆을 지나는데 탈의실 안에서 "이걸 놔요."하는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황급히 탈의실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방장이 한 녀대생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왜서 탈의실에서 늦게 나가는가 했더니 이 놈이 이 수작을 부리려고 했구나. 나는 녀대생의 손을 잡아당기고 주먹으로 주방장의 가슴팍을 강타해놓았다.그렇잖아도 아니곱게 보아왔던 주방장이였다.주방장이 뒤로 둬걸음 비틀거리다가 벽구석에 가서 넘어졌다.어릴 때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삶은 메주콩을 발로 짓밟 듯이 주방장을 마구 짓밟아 뭉개놓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경찰을 부를가?" 정작 으름장을 놓고 보니 경찰을 어떻게 부르는지 아직 모르고 있는 나였다.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나를 보고 주방장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며 손을 싹싹 빌었다.나는 그 녀대생에게 앞으로 혼자서 탈의실에 들어오지 말라는 부탁을 남기고 남자갱의실에 들어섰다. "점장님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십시요.비밀을 꼭 지켜주십시요."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나의 뒤를 따라나오며 주방장이 존경어로 몇번이나 나에게 간청했다.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주방장 이 놈이 그래도 아끼야마를 두려워하고 있구나,가게에서 잘리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흡족해났다. 여덟시도 안 되여 주방장은 집에 일이 있어 먼저 가겠다고 주방을 나갔다. 오늘은 열시 전에 일을 마쳤다.래일은 휴일이여서인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벽시계를 쳐다보며 퇴근할 시간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모두들 퇴근하시지요." 아끼야마가 고양이처럼 작은 주방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도 퇴근길에 아끼야마가 차를 몰고 뒤따라오지 않을가 저어되여 길 건너 인행도를 걸었다.아니나 다를가 좀 지나 아끼야마의 차가 천천히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한참 가던 차가 멈춰섰다가 다시 뒤로 오고 있었다.나는 길 옆 공중전화청에서 전화를 했다. "오늘은 피곤해서 택시로 역까지 왔습니다." "그래요?래일 부동산에 같이 가봐요.학교가 끝나면 인차 전화해요.돈 근심은 하지 마세요." 무슨 뜻인지 알만 했다.요 며칠은 오전시간을 리용하여 서너집 부동산중개회사에 가보았다.친구 말대로 사례금이며 보증금이며 반년 혹 일년 방세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수자였다. 이튿날 월요일도 흐린 날씨가 계속되였다. 아침 일찍 비닐우산을 들고 학교로 갔다.고하다도 만나고 싶었고 수업 전에 학교 기숙사에 들려 재확인도 해보고 싶었다. 기숙사는 불편한 점은 있지만 부동산처럼 사례금이요,보증금이요 하는 쓰잘데없는 비용은 면제였고 값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며칠 전에 만났던 기숙사관리원이 나를 데리고 1층 5호실로 갔다.이인용으로 된 작은 기숙사 안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고 머리가 좀 긴 남학생이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오상준입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이말저말 주고받는 와중에 나와 상준이는 같은 교육학부 연구생이였고 나이도 동갑이고 생일도 같은 달이라는 걸 알게되였다. "그럼 우리 서로 친구처럼 말을 놓읍시다." 삼일내로 입거여부를 결정하겠다고 관리원에게 말하고 상준이와 같이 계단교실을 찾아갔다.가는 길에 상준이가 자랑이라도 하듯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너 핸드폰 갖고 있네." "응.아르바이트를 한 첫로임으로 산 거야." "지금 어디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선배들의 소개로 학교에서 멀지 않은 사진관에서 일하고 있어." 나는 짐짓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척 물었다. "그래?나도 빨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은데 그 사진관에 소개해줄 수 없겠어?" "그럼 사장한테 물어볼게." 계단교실 앞에서 상준의 소개로 학습파트너 이가라시(五十嵐)를 만나고 셋은 교실에 들어가 앉았다.학생들 속에 고하다도 와있는가 좌석을 둘러보다가 녀학생들을 곁눈질해보는 것 같아 이가라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지도교관이 무엇을 강의하는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아끼야마가 소개한 집에 들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가?친구의 부인이 이달말에 일본에 온다고 하니 친구집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차라리 상준이와 같이 기숙사에 주숙하는 것이 좋지 않을가?  수업이 끝나자 지도교관이 석사생들과 연구생들을 불러놓고 간단한 회의를 소집했다.자아소개를 하고 금후의 진학예정 등에 대해 각자 발언했다.이번 주는 목요일 오전에 지도교관연구실에 한번 다녀가고 도서관에서 이가라시를 만나 참고서적들을 추천 받으면 되였다. 밖에 나와 지도교관과 이가라시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상준이에게 부탁했다.  "그 사진관 아르바이트를 잊지 말고 꼭 알아봐줘." "알았어.근데 조건이 있어." 상준이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데?" "나와 같이 기숙사에 있으면..." "자―식!그래,며칠 기다려.나 오늘 일이 있어 먼저 간다.일자리를 소개하면 술 한잔 살게." "래일 낮에 전화해봐." 학교에서 내려오면서야 고하다가 다시 생각났다. 오늘 고하다도 만나지 못하고 비도 내리지 않는데 비닐우산을 괜히 들고 왔지 않나?     9.   아끼야마를 만난 곳은 조용한 차집이였다.차탁에 사진 몇장과 열쇠 하나가 놓여있었다. "어머니를 보러 갔다가 친구한테 들려 먼저 사진을 가지고 왔어요.어느 집이 마음에 드는가 보세요.마음에 들면 인차 친구한테 가서 수속하면 돼요." 눈이 휘둥그래졌다.8,9만엔씩이나 하는 집들이였다. "미안합니다.학교 기숙사에 주숙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결정이라도 내린 듯이 아끼야마에게 말했다. "돈 근심은 하지 말라고 했지 않아요.학교 기숙사에 주숙할거면 저의 집에 와있으세요.집열쇠예요." 아끼야마가 차탁의 열쇠를 나한테 밀어놓으며 말했다. "성의를 받아들일 수 없어 미안합니다." "왜 이래요?저를 믿지 못하겠어요?" "그런게 아니라..." "알고 있어요.그러니깐 제가 도와드리는거죠.그럼 좀 더 싼 걸로 바꿔달라고 친구에게 부탁할게요." "아닙니다.기숙사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나는 기숙사에 주숙하기로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 우산 돌려드립니다." 나는 비닐우산을 아끼야마에게 건네주었다.비닐우산을 보던 아끼야마가 불시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말했다. "아,깜빡 잊을 번 했네요.저의 녀동생하고 셋이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약속했어요.녀동생이 벌써 와있을 지도 모르겠네요.박상과 한 학교이니 편하리라 생각했어요.집은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얘기해요.자,빨리 가요." 더 이상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례의에 어긋나는 일이였다. "그럼...그렇게 하지요." 나의 짐작대로 차이나타운 어느 중화료리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끼야마의 녀동생은 고하다였다. 고하다와 반갑게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서로 아는 사이인가고 묻는 아끼야마에게 고하다가 며칠 전에 있었던 비닐우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끼야마가 웃으며 고하다에게 비닐우산을 돌려주었다.학교에서 혹시 고하다를 만나면 이 비닐우산임자를 알아맞춰보라고 우스개소리로 물어보려 했다.고하다가 모르겠다고 하면 아끼야마의 이름을 말해야 하지 않나 하다가 머리를 가로 저었었다.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그녀들은 훈둔(馄饨)을,나는 짜장면을 시켰다.내가 불고기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하다도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불고기점에서 일하겠다며 아끼야마에게 청을 들었다.텔레비죤에서 인기녀탤렌트가 년하인 야구선수와 결혼하는 뉴스를 부러운 듯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아끼야마는 그저 머리만 끄덕여 보였다. 고하다가 아끼야마와 나를 신기하게 번갈아보며 자꾸 웃고만 있었다.머쓱해진 나는 어색한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해 메뉴에 써놓은 훈둔을 가리키며 물었다. "완딴면이라는 완딴, 중국어로 무슨 뜻인지 알아요?"  "모르겠는데요.무슨 뜻이죠?" 내가 웃으며 해석하자 그녀들도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가다가나로 훈둔(馄饨)발음을 완딴(完蛋)으로 메뉴에 써넣었던 것이다. 오후에 수업이 있어 나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료리점을 나오면서 아끼야마에게 인사를 하고 고하다와 같이 학교로 가는 전차를 탔다. 큰길 횡단보도를 지나기 전에 있던 패미리마트가 눈앞에 보여왔을 때였다. 고하다가 무엇을 사려는지 어느 가게에 들렸다.나는 혼자서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고하다가 나의 뒤를 따라왔다.같이 횡단보도를 건너 학교언덕길을 올라가려다가 그녀의 손에 비닐우산이 들려있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우산은?" "어마나,아까 그 가게에 두고나왔네요." "내가 가서 가져올게요.가게이름이 뭔가요? "괜찮아요.좀 아는 가게예요." "그 가게를 알아요?" "음...어머니와 친척이 되는 분이 하는 가게예요.” “어머니와 친척인가요?” “네.친척이지만 들려본 지 오래 되였어요.어머니가 큰 이모부의 부고를 알려드리라고 해서요.아침에는 스즈끼가 있어 들리지 않았어요."  "그럼...그 분이 한국인이겠네요." 고하다가 머뭇거리며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나도 더 캐묻지 않았다. "허,그러고 보니 그 비닐우산을 몇번이나 잃어버릴 번 했네." 내가 웃으며 화제를 돌리자 고하다도 호호 하고 따라 웃었다. 기숙사입거수속을 마쳤다.기숙사에 찾아들어온 나를 보고 상준이는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같이 일하던 알바생이 엇저녁에 그만두었기에 문제없을 거라며 저녁에 사진관 사장한테 물어보겠다고 했다.래일 오전에 짐들을 챙겨 다시 오겠다고 상준이에게 말하고 나는 학교에서 내려왔다. 횡단보도를 건너 문득 아끼야마가 친구에게 다시 부탁하겠다던 말이 생각나 공중전화청으로 갔다. 아끼야마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전화였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궁리하다가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번호판을 눌렀다. "꼭 기숙사에 들어야 되는군요.성격하고는..." "미안합니다.그리고 미리 말씀 드립니다.가게와 거리가 멀기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지 모르겠습니다.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박상,왜 이래요?박상..." 전화를 놓고 나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마치 절규하는 듯한 아끼야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귀전에 들려왔다. 전철역으로 가면서 나는 일본에 와서 한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머리 속에 떠올려보았다. 고하다와 비닐우산,아끼야마와 불고기점에서의 아르바이트,설겆이를 하는 아줌마와 그 녀대생에게 보여준 주방장 놈의 역겨운 추태극,그리고 러브호텔과 아끼야마 집에서의 유치하고 아슬아슬했던 스릴들이 다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까부터 내릴 듯 내리지 않을 듯 갈피를 잡을 수 없던 하늘에서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르게 그만 패미리마트를 지나온 나는 비닐우산을 사야겠다고 뒤돌아섰다. 패미리마트를 향해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받쳐입은 소녀가 책가방을 달랑거리며 어느 가게 안으로 뛰여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하얀 저고리 까만 치마! 나는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 번 했다. 소녀가 들어간 가게에 가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말린 물고기류들을 파는 간소한 간어물점이였는데 가게 안에 작은 살림방이 있었다.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칠십세를 훨씬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밖에 내다놓은 상자들을 안으로 걷어들이고 있었다. "책상 우에 빵이 있네라." 할아버지가 소녀에게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어가 아니라 우리말이였다. 나는 가게로 한발 다가섰다.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행인들을 위해 밖에 놓은 것인지 갖가지 모양의 우산들이 출입문 밖에 가지런히 세워져있었다.제일 앞에 하얀 비닐우산 하나가 있었다.  나는 비닐우산을 들고 할아버지에게 일본어로 물었다. "미안합니다.이 비닐우산 얼마인가요?" 할아버지가 돌아서서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값이야 뭘요.쓰고 가셨다가 여기를 지날 때 놓아두시면 되겠습니다." 나는 패미리마트에서 사려고 했던 100엔짜리 은전 세개를 가방에서 꺼내 상자 우에 올려놓고 우리말로 말했다. "감사합니다.중국에서 온 조선족 류학생입니다." 한참 가다가 뒤돌아보니 그 할아버지가 소녀의 손목을 잡고 웃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비닐우산을 펼쳐들었다. 이 비닐우산임자가 누구인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10.   며칠 후,고하다가 찾아왔다. 기숙사 현관 앞에서 아끼야마점장의 부탁을 받고 왔다며 나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그러면서 언니가 지금 학교 정문에서 기다린다고 했다.마지막으로 언니를 한번 만이라도 만나달라는 고하다의 말을 무시하고 잠시만 기다리라고 기숙사에 들어가 비닐우산을 들고 나왔다. 나는 그 날 그 가게에서 찾아왔다고 비닐우산을 고하다에게 되돌려주었다.그 할아버지를 만나면 꼭 문안을 드려달라고 했더니 고하다는 가벼운 미소를 남기고 돌아서서 맥없이 걸어갔다. 봉투 안에는 편지 한장과 다섯날 월급이 들어있었다.   ―박상.이 봉투에 로임을 넣어드리는 것을 용서하세요.더 많이 넣어드리고 싶지만 프라이드가 높은 박상한테서 되돌려받을가 생각되여 제대로 결제했습니다.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중국에서 오신 박상한테 친근감을 가지게 되고 박상을 가까이에 두고 싶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박씨 남자들은 모두 프라이드가 높은가 봅니다. 어머니의 오빠가 국대 부근에서 살고 계시는데 지금도 박씨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친척 사이에 래왕이 적어진 리유는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그 분을 다시 찾아뵙고 박상과 고하다와 같이 식사라도 하려 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럽네요. 그리고...작년까지는 아버지가 저의 생일을 축하해주셨는데 올해는 케이크를 함께 먹을 남자 한분도 없네요. 편지가 길어진 것 같네요. 일본에서 순리롭기를 바랍니다. ―헤이세이(平成)5년10월23일   아끼야마리에(秋山理恵)    요 며칠은 해빛이 따스하게 비쳐와 몸과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는데 그것도 잠시일 뿐이였다.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는가 싶더니 또다시 비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그만 기숙사에 들어가려다가 웃옷을 벗어쓰고 학교 정문으로 가보았다. 아버지가 일본인이여서 일본인으로 된 두 녀자가 비닐우산을 함께 쓰고 정문을 나가는 모습이 아련하게 안겨왔다...       发自我的 iPhone 返信返信 転送転送 移動 印刷 迷惑メール 削除 操作 次前
3    (단편)돌아갈 수 없는 강 댓글:  조회:822  추천:0  2019-09-14
《도라지》2018년4월호     단편소설   돌아갈 수 없는 강                               박명선       청명절 전날 저녁무렵. 집에 들어온 녀자는 쏘파에 앉아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고중 3학년에 다니는 딸애가 있다니? 한주일 전이였다.그 날은 퇴근해서야 오후수업 때문에 보지 못한 위챗을 훑어보았다. ―아니, 얘가 어떻게 이 남자와?… 아들 진이의 모멘트를 보고 녀자는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 번했다. Y시 고속철 역전광장에서 진이와 함께 사진을 찍은 남자를 알아보았던 것이다.그 남자가 지금 Y시에서 살고 있지만 진이와 아는 사이가 되였다는 것은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였다. 어쩌면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단 말인가? 둘은 기차에서 만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북경에서 취직면접을 보고 집에 들렸다가 학교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까지 진이는 그 사람을 몰랐다.녀자는 진이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언제 어디서 알게 된 사람이냐고 문자를 보냈다. 녀자의 추측이 맞았다.과연 둘은 기차에서 만났던 것이였다.  ―왜 그래요?아는 사람인가요?  ―아니야. 녀자는 바느질하듯 진이의 뒤말을 꿰매버리고 다른 면접회사들에서는 소식이 없던가고 화제를 돌려버렸다. 문자를 마치고나니 왠지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그 동안 어떻게 보내고 있었을가 궁리하다가도 진이보다 다섯살 이상인 아들과 이쁜 안해와 잘 살고 있겠지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 아빠트 현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걸려온 진이의 전화에 녀자는 바늘에라도 찔린 듯 몸을 움찔 떨었다.요 며칠 간신히 잊고 있었던 그 남자가 또다시 머리 속에 튀여올랐다.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던 중에 진이의 입에서 그의 말이 터져나왔던 것이다.대학 기숙사 맞은켠 슈퍼 앞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반갑다면서 고중 3학년에 다닌다는 딸애를 인사시키며 같이 식사하자는 것을 사양했다고 한다.밥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뭔가를 좀 더 알아볼거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진이가 눈치를 챌가 봐 내색은 낼 수 없었다. 녀자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고중 3학년에 다니는 딸애가 있다면 애가 둘인가?그럼 큰 애와 몇살 차이지?혹시 다른 녀자와 사는 것은 아닌지?그럼 다른 녀자가 낳은 딸이란 말인가? 아니야.녀자는 아니라고 단정했다. 손가락을 꼽으며 세여보았다.그럼 애들이 여덟살 차이겠구나.그러니깐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인츰 딸애를 본 것이구나. 불쑥 애엄마는 곁에 없던가고 물어본다는 것을 그만 까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아들과 딸을 키우며 오붓하게 살아가는 남의 집 일에 참견하면서 말이다. 녀자는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죤을 켜려다말고 아들의 모멘트를 뒤져 사진을 다시 눈여겨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것은 두돐이 지난 진이를 어머니한테 맡겨두고 일본에 온 지 한주일이 되던 어느 날이였다.나보다 먼저 일본에 온 고모사촌동생 철수가 숨이 턱에 닿아 집문을 열고 들어섰다. ―누나, 아까 김형을 만났어.형님이 인츰 중국으로 간대.래일 우에노(上野)공원에서 만나자는데 누나 괜찮지?  ―김형이라니? 나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터져나왔다. 철수가 돌아간 후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이젠 남남이 되였는데 다시 만나서 뭘 한단 말인가?그런데 내가 일본에 금방 왔는데 그 사람은 일본을 떠난다니? 도꾜 주위의 각 역전들이며 번화한 거리들에 아직 익숙치 못한 나는 지도를 펼쳐놓고 우에노공원을 찾았다.집에서 가까운 역에서 대여섯 정거장을 지나 다시 지하철을 바꿔타고 몇 정거장 가면 되는 거리였다. 이튿날 오전 아홉시에 나는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을 안고 약속장소인 우에노공원을 찾아갔다.대문 옆에 있는 작은 사진관에 이르러 대문 쪽을 바라보다가 우두망찰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그가 대문 앞에서 시계를 보며 오가는 사람들을 주시해보고 있었다.그와 눈길이 마주칠가 봐 나는 사진관 옆에 얼른 몸을 숨겨버렸다.콩닥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10년이 되는구나. 10년 전, 나는 S시 모 중학교에서, 그는 Y시 모 학원에서 일본어교원을 하고 있었다.우리는 학원에서 열린 일본어교학연구회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사흘간의 회의를 마치고 S시로 돌아온 나는 그에게 서로 전근하기가 힘들기에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며칠이 지난 함박눈이 쏟아지던 날, 그가 나를 찾아왔다.교장실에서 교장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들어오자 교장선생님께서는 웃으면서 우리들에게 자리를 피해주었다.그는 회답하려다가 이제 일본에 같이 가면 전근이고 뭐고 필요없지 않겠는가며 앞날에 대해 신심으로 가득 차있었다.금방 졸업한 그와 나는 일본에 류학 가려는 똑같은 갈망을 하고 있었다.그 날 저녁, 우리는 머리카락에 함박눈을 함뿍 이고 눈꽃이 곱게 핀 거리를 거닐었고 모주석동상이 있는 중산광장 앞에서 다정하게 기념사진도 남겼다.그 때 나는 통근하기 힘들어 학교 기숙사에 잠시 주숙하고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민망스럽지만 우리는 학교 기숙사에서 그 날 밤을 보냈다. 겨울방학이 되자 나는 다가오는 고모의 생신도 축하할 겸 Y시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이튿날 오후 늦게야 고모집에 도착했다.저녁을 준비하던 고모가 식사를 같이 하자며 철수를 학원 초대소에 주숙하고 있는 그한테로 보냈다.철수가 혼자 집에 들어오자 나는 밖에 나가서 그를 기다렸다.고모집 옆 문화극장 앞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를 알아보고 막 달려나갔다.요즘 무슨 고민거리라도 생겼는지 그의 얼굴색은 조금 어두워 보였다.우리는 공원다리 쪽으로 거닐었다.그에게 중산광장에서 찍은 사진도 보여주고 일본류학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이젠 일본에 갈 수 없게 되였구만. 그가 정색해서 하는 말이였다. 대학시절 은사이신, 와세다대학 문학부 교수님께 연구생으로 받아달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며칠 전에 교수님한테서 다음 학기부터 한국 모 대학에 몇년간 가있게 된다는 회답을 받았다는 것이였다. 아쉬움과 실망이 가득 어린 그의 표정을 읽고 나는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가?일본에 가지 못하게 되여서… 그가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일본에 가지 못할 바엔 다른 곳에라도 가야지. ―네?다른 곳이라니요? 혹시 우리 학교에 전근해온단 말일가?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었다.알듯말듯한 눈길로 쳐다보는 나에게 그가 대련외국어학원 연수통지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대련외국어학원은 나의 모교였다.거기에는 일본어교원연수센터가 있었다. ―와!참 잘 되였네요. 통지서를 보고 나는 너무 좋아서 애들처럼 퐁퐁 뛰였다. 그도 당분간에는 일본에 갈 수 없지만 이제 연수를 가면 다른 일본인 교수님들을 알게 되여 앞으로 일본에 가게 될 기회가 많아질 거라고 기뻐했다. 상점에 들려 식료품들을 사가지고 우리는 고모집에 들어섰다.철수는 물론 고모도 그를 무척 반가워했다.저녁을 먹고 우리는 다시 거리를 거닐면서 앞날을 속삭이였다. 며칠 후, 그와 같이 대련으로 가는 기차를 함께 탔다.S시에서 헤여져 개학이 다가올 즈음, 대련에서 그를 한번 만난 뒤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는 대련에서 앓는 어머니도 돌봐드려야 하고 대학입시를 맞는 녀동생 향옥이의 뒤바라지도 몇년간 해야 하기에 나를 그만 잊고 좋은 녀자를 만나라고 그에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내가 감당하기 너무도 어려운 시기였던 것이다. 결혼한다는 그의 편지를 읽은 날, 나는 온밤 울었다… 눈물범벅이 되여 다시 대문 쪽을 내다보려고 했을 때는 그가 어느새 내 앞에 와있었다.그의 눈굽도 젖어있었다.나는 조금 낯설어했다.그가 생전 본 적 없는 남자라는 생각까지 들며 나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잠시 후 우리는 공원으로 들어갔다.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초였다.처음 보는 벚꽃광경은 그야말로 예쁘고 아름다웠다.이른 오전시간이여서 공원 안은 아직은 한적했다.한참 거닐다가 그가 가방에서 캔커피 두개를 꺼냈다.우리는 벤취에 앉아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서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공원의 벚나무 사이로 따스한 해살이 비쳐오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공원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그 때 그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이제 딸애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나머지 커피를 애들처럼 입안에 털어넣으며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랬구나. 녀자의 입가에서 부러움 비슷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부엌에서 낡은 랭장고가 작동하는 둔중한 굉음이 울려왔다.뒤이어 옆집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도 느닷없이 들려왔다.엇저녁에는 뭔가가 박살나는 소리까지 났다.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부부간의 싸움이 또 벌어진 것이다.어린애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갑자기 두려워졌다.오늘도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한다는 예감에 벌써부터 신경이 곤두선다. 오늘 아침, 옆집 녀자와 대여섯살 되여보이는 남자애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나를 보기 미안해서인지 그 녀자는 애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오른쪽 눈등이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남자애와 눈길이 마주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어렸을 때 진이의 눈빛이 떠올랐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여섯살이 된 진이를 매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이 일상이 되였다.국제려행사에서 해외팀 팀장으로 일하고 있던 남편이 사표를 내고 개인려행사를 차렸는데 한 시기 잘 나가던 려행사가 운영이 잘 되지 않자 남편은 시어미역정에 개배때기 찬다고 종종 나에게 리유없이 짜증을 내거나 행패를 부렸다. ―아빠, 엄마.싸우지마! 번마다 진이는 나의 뒤에 숨어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이젠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나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였다.나는 점점 남편의 패도에 지쳐갔고 부부간의 사랑도 식어가기 시작했다.혹시 나의 과거사를 알아차리고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게 아닐가 하는 생각도 곱씹어해보았지만 남편은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남편한테는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시종여일했다.그래서 전생에 엄청난 빚이라도 진 것처럼 남편한테 수그러든 것만은 사실이였다. 언제인가 고모와 철수가 병환에 계시는 어머니를 보러 왔다가 얼굴을 상해 학교에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알아보았다. ―내 그 새끼를… 철수는 이빨까지 뿌드득 갈며 주먹을 움켜쥐고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내뱉았다. ―어찌겠나.진이를 봐서라도 그냥 참고 살아야지.에구, 그래도 김선생 그 사람이 좋았는데… 고모의 한숨 섞인 푸념이였다. 진이는 나의 옆에 가만히 앉아 불안한 눈길로 우리들을 번갈아볼 뿐이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여 남편은 일언반구도 없던 새 려행사를 세운다며 한국으로 떠나갔다.뒤늦게야 알았지만 남편이 려행사의 직원이였던 녀자를 데리고 한국으로 갔다는 것이였다.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그저 진이를 생각해서라도 남편이 자주 련락할 거라고, 사업이 잘 안 되면 돌아올 거라고 믿고만 있었다. 그렇게 덧없는 세월을 몇년간 흘러보내던 어느 날이였다. 중학교 2학년생이 된 진이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웬 녀자한테서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진이 아버지가 종양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지금 병세가 위급하다는 것이였다.나는 더 이상 물어볼 생각도, 주저할 겨를도 없이 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비록 그 동안 전화 한통 없었고 아무리 다른 녀자와 같이 산다고 해도 분명 지금까지는 진이 아버지이고 나의 남편이 아닌가? 병원에 도착하자 산소호흡기를 입에 건 남편이 가쁜 숨을 톺고 있었다.진이 아버지라고 몇번 불러서야 남편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나는 진이를 남편 앞에 내세우며 아버지라 부르라고 했다.정작 제 아빠를 눈앞에서 보자 진이는 낯설고 거부감을 느꼈던지 아버지란 말은 하지 못하고 미동도 없이 뚫어지게 지켜만 볼 뿐이였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남편이 우리를 알아보더니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산소호흡기에 막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진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간이 좋지 않았던 남편이였다.남편은 8년 만에 한국에서 돌아와 병원에서 림종시에야 나와 진이를 한번 보고 눈을 감았다. 사실 그 사이에 천번도 만번도 넘게 남편과의 통화를 시도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였다.시부모님들은 남편에 대해 물으면 그저 한숨만 풀풀 내쉴 뿐이였고 남편이 한국에 가기 전까지는 하루가 멀다하게 전화를 하며 수다를 떨던 두 시누이도 이젠 완전히 련락을 끊어버렸다.녀편네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만은 지금 어떻게 자라고 있을가, 얼마나 컸을가 언녕 알아보고 잘 챙겨주련만 여직껏 진이와도 아무런 련락이 없었던 남편이였다. 도대체 어떤 녀자와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가 많았지만 나 혼자서라도 진이를 남부럽잖게 잘 키워서 어디 한번 보여주고 싶은 오기 같은 것이 굴뚝처럼 치솟아오를 때가 더 많았다. 법원에 기소하면 리혼수속이 자동으로 이루어질 거라며 이젠 다른 남자를 찾으라고 친구들이 권유할 때마다 나는 친구들의 말을 귀등으로 스쳐보내군 했다. 그 날 저녁, 그 녀자 옆에 네댓살 되여보이는 남자애가 우두커니 서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조용해졌다. 녀자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상쾌한 공기를 타고 마지막으로 그와 주고받았던 대화가 귀전에 들려오고 그를 바라보던 내 모습도 다시 안겨왔다. 도꾜타워 야경을 구경하고 전차를 타는 플래트홈에서 그가 집에 가서 보라며 웬 봉투를 나의 가방 속에 밀어넣었다.리별의 시각이 다시 다가왔다.지금까지 나에게 웃어 보이고 있지만 이제 전차가 떠나면 돌아서서 맥없이 걸어갈 그를 바라보니 눈물이 글썽해졌다.그런 나를 그가 꼭 껴안았다. ―영원히 사랑하지 못해 미안해요.꼭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네.항상 행복하세요. 전차가 서서히 떠나자 이젠 그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만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집에 돌아와서 봉투를 열어보니 편지 한장과 20만엔이 들어있었다. ―달리 생각 말아요.일본에 금방 오면 누구나 이러저러한 곤난에 부딪치기 마련입니다.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였으면 합니다.힘 내세요.그리고 항상 행복하세요. 녀자는 서재로 들어갔다.서랍을 열고 제일 밑층에 보관해두었던 봉투를 꺼냈다.이젠 색이 누렇게 변해가기 시작한 편지봉투이다. ―덕분에 일본에서 바쁜 고비를 잘 넘기고 학업도 순리롭게 마쳤습니다.감사합니다.저는 지금  S시 ××대학 외국어학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여 Y시로 가면서 혹시 거리에서 만나면 드리려고 준비했습니다.직접 찾아가서 드려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녀자는 봉투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4년 전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진이가 대학에 입학할 때 나는 오랜만에 Y시로 가게 되였다.녀동생 향옥이가 Y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여름방학이여서 딸애를 데리고 려행 삼아 북경으로 갔다.녀동생 남편이 북경에서 사업하고 있었다.고모님은 이젠 년로하시고 철호는 상해의 무역회사에서 부장직을 맡고 있었다.진이를 데리고 Y시로 간다고 했더니 철호가 지난 휴가에 고향으로 갔을 때 시내에서 그를 만났는데 내가 잘 있는가고 문안하더라는 것이였다.나의 정황을 알려주려다가 옆에 누님 같아 보이는 분이 있어 말하지 않았다며 만나보고 싶으면 그의 친구인 사장님한테서 전화번호를 알아보면 될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짝 잃은 외기러기신세인 나는 그를 만나볼 엄두는커녕 전화를 할 용기조차 없었다.그러다가 혹시나 하여 서재 서랍에 보관해두었던 봉투를 꺼내 편지를 써넣고 가방 안에 정히 넣어두었다. 기숙사에서 진이의 끌신과 일상용품 몇가지가 더 필요하여 혼자서 백화상점으로 갔다.물건들을 사가지고 나가려다가 중학교 2, 3학년 쯤 되여보이는 녀자애의 손을 잡고 회전문으로 들어오는 한 남자에게 눈길이 멎었다.남자는 녀자애와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으며 옆사람은 곁눈질도 하지 않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춰버린 듯 했다.그러다가 녀자애와 같이 에스카레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는 그 남자의 뒤모습을 다시 보고 생각을 고쳐 했다. 내가 착각한 것이겠지.중학교에 다니는 딸애가 아니라 아들은 이미 대학도 졸업했잖겠는가? 이제 생각해보니 그가 틀림없었다.진짜로 다시 만난 그와 스쳐지났다는 사실이 나에게 허무함과 허전함만 안겨주었다. 그인 줄 알았더라면… 허나, 어찌 보면 그 때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만약 그 때 우리가 정말 다시 만났더라면 어떤 얘기부터 나누었을가? 그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진이에 대해 물어보다가 남편을 물어보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했을가? 헌데, 오늘은 내가 왜 이러지?  래일이 청명절인데 왜서 자꾸 그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가?   창밖에서는 사람들이 환한 가로등불빛 속에서 즐겁게 웃으며 거닐고 있다. 나도 거리에 나가 혼자서라도 실컷 걸어보고 싶다는 어줍잖은 생각은 문자도착벨소리에 무산되였다. 철수한테서 위챗문자가 왔다. 저번 리력서를 보냈던 진이의 취직면접회사에서 면접날자통보가 왔는데 지금 회사이기에 퇴근하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한다.회사라는 말에 녀자는 엉겹결에 그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이윽하여 철수가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 녀자는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전번을 하나하나 누르고 통화버튼을 터치했다.발신음신호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 그만 전화를 끄고 말았다. 내가 지금 부질없는 기대감을 안고 경솔하게 행동한 것이 아닌가?평화로운 저녁식사시간에 남의 집에 가정불화라도 일으키진 않았을가? 잠시 후, 핸드폰이 울렸다. 그의 전화였다.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쿵쿵 뛰였다.방금 전의 용기와는 달리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학생처럼 숨을 죽이고 핸드폰화면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전화벨소리가 뚝 멎었다.  녀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점도록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따라 고층빌딩의 눈부신 전등불빛들이며 저 멀리 전파탑에서 깜빡이는 점멸등이며 밤공기마저 그 날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나는 지금도 떨리는 이 가슴의 진동을 나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위챗음성전화벨소리가 울렸다.녀자는 꿈속에서 소스라쳐 깬 듯싶었다. 철수였다. ―누나.이번에 진이가 면접 보게 될 회사는 김형의 친구인 사장님이 소개한 회사야. ―그래? ―김형의 전화번호는 사장님한테서 알았어.무슨 일 있어? ―일은 없구 그저 전화번호나 알아두려구. 녀자는 짐짓 전화를 하지 않은 척했다. ―새삼스럽게 난 또…한가지 중요한 일이 있어. ―뭔데? ―며칠 후 출장용건 때문에 아까 사장실에 다시 갔다가 사장님과 김형이 통화하는 걸 들었어. 녀자는 귀가 솔깃해졌다. ―김형의 아들은 지금 남방에서 출근하고 있고 딸애는 올해 대학시험이래. 그의 딸애가 고중 3학년임을 알고 있는 녀자는 뒤말이 듣고 싶었다. ―그런데?… 전화기에서 대답이 없다. ―그런데 왜 말이 없어? ―새 부인을 맞이했는가고 사장님이 물어보기에… ―그건 무슨 말이야? ―김형의 부인이… 철수가 말을 잇지 못했다. ―부인이 왜?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몇해 전에 병으로… ―뭐?!… 핸드폰을 쥔 녀자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청명절 오전.  산소에서 내려오는 길이였다. 시내로 내려가는 뻐스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주차장으로 가던 남자는 사람들 속에서 한 녀자를 발견했다.딸애의 통학 때문에 며칠 전에 학교 부근에 이사를 온 남자였다.이사하던 날, 차에서 짐들을 꺼내는데 상자에 넣었던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옆을 지나가던 40대후반의 날씬하고 피부가 하얀 녀자가 땅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상자에 넣어주었다.  남자는 그 녀자한테로 다가갔다.인기척을 느끼고 머리를 돌린 녀자도 남자를 알아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서 또 만났네요.저의 차로 집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남자가 혼자인 것을 알고 녀자는 잠간 망설이다가 미안쩍게 고개를 끄덕였다.차 뒤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녀자에게 남자가 조수석문을 열어주었다. 차는 천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의 집은 ××아파트 4층에 있습니다. ―그래요?저는 맞은켠 아파트 3층에 있어요. 남자는 웃으며 다시 녀자에게 물었다.  ―애가 1중에 다녀요?  ―네.딸애가 1중에 입학해서 학교 근처에 이사왔어요. ―그렇군요.저도 딸애 때문에 며칠 전에 이사왔습니다.딸애는 몇학년 몇반인가요? ―3학년 7반입니다.선생님 딸애는요? 녀자는 남자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3학년 6반입니다.저…오늘 부모님 산소에 왔나 봅니다. ―시부모님 산소에 왔어요. 남자는 약간 뜸을 드린 뒤에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혼자 오셨어요? 남자의 물음에 녀자는 차안의 향수병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네.헌데 선생님은 오늘… ―애엄마 산소에 왔습니다. ―네?… 녀자는 다소 뜨악한 얼굴로 운전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늘나라에서 딸애의 대학시험을 미리 잘 봐달라고 부탁하고 왔습니다. 분위기를 감지하고 남자가 웃으며 말하자 녀자도 옆에서 웃었다. ―참 대단하군요.선생님은 장사하는 분 같지 않고 교원 같아 보이는데요. ―네.이전엔 교원이였습니다.어디서 사업하세요? ―저도 교원이예요.근데, 애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갔어요? 남자는 마른 입을 추기려고 물병을 들어 물 한 모금 마셨다. ―네…암으로 돌아갔습니다. 녀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가만히 앉아서 남자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신호등을 지나서 차가 1중 방향으로 굽어들었다. ―집 부근에 커피솝이 있던데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같이 합시다.애들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집도 이웃이니 앞으로 편하게 대하세요. ―…네. 남자는 차를 커피솝 옆 골목 안에 세웠다.      작은 커피솝은 점심 전이여서인지 아직 손님들이 없었다.남자는 창문 옆 테블로 녀자를 안내했다. ―애어머니는 아니, 사모님은 언제… 녀자는 궁금한 듯 물었다. 커피솝까지 같이 들어온 녀자한테 비밀로 붙일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들이 고중 3학년이고 딸애가 소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애가 둘인가요?그럼 이젠 7년 아니, 8년이 지났네요.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뭘.나보다 애들이 더 힘들었겠지요.아들은 그래도 그해에 무사히 중점대학에 입학하고 지금 남방에 취직하고 있습니다. ―잘 되였네요.녀자들도 애 둘을 키우기 힘든데 남자들은 더욱 힘들겠지요. 주문한 커피가 올라왔다. ―고향은 어딘가요? ―S시예요. ―여기서 학교를 다녔어요?  ―네.여기 대학을 나왔어요. 녀자는 대학시절에 지금 남편과 사귀였는데 졸업하여 이곳 중등전문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였고 딸애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남편이 북경에 가서 미디어회사를 차렸다고 한다. 녀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손 씻으러 갔다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남자는 녀자와의 대화가 즐겁다고 느꼈다.녀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남자는 쏘파에 허리를 묻고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천정의 밝은 전등불빛이 밤하늘의 뭇별처럼 반짝거렸다. 그 날 저녁, 애들의 옷가지들을 챙겨가지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다시 향하던 남자는 차가 신호등에 막혀서야 숨을 돌리며 차창 밖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하늘에는 뭇별들이 총총하다.뭇별들 속에서 북두칠성이 안겨왔다. ―저 국자모양으로 생긴 일곱개 별을 북두칠성이라 한단다. 하나, 둘, 셋…할머니의 손길을 따라 고향집마당에서 별들을 헤여보며 북두칠성 별자리를 알게 되여 무척이나 흥분되였던 소년시절이 떠올랐다. 병원대문에 들어서니 아들이 딸애의 손목을 잡고 나와 있었다. ―왜 여기 나와 있어?대학시험이 당장인데…그리고 넌 숙제를 다 했어? ―예.엄마가 오빠와 같이 밖에서 아빠를 기다리라 해서요. 아빠를 기다릴 건 뭐냐, 엄마를 지켜줄거지 하는 눈길로 애들을 흘겨보던 남자는 좋은 날씨이니깐 밖에서 소풍하다 들어오라고 애들에게 말하고 병실에 들어섰다. 병실에는 애엄마가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열어젖힌 창문으로 솔솔 불어들어오는 바람에 카텐이 하느작거렸다.침대 곁에 다가앉은 남자를 의식하고 애엄마가 반쯤 눈을 뜨고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방금 전에 꿈을 꾸었어요.당신과 우리 애들 다 잘 되게 내가 하늘에서 지켜봐주는 꿈을요. 남자는 바퀴가 달린 침대를 창문가로 밀고갔다. ―저기 북두칠성이 보여. 창밖을 내다보는 애엄마의 눈동자가 순간 별처럼 빛났다. ―애들을 데리고 별구경도 잘 했지요.아빠 별 엄마 별 애기 별 헤여보며…근데 이제 엄마 별이 사라지게 되여 어떡해요? 애엄마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당신께 미안해요.어떻게 혼자서 애들을 키워내겠어요?아들은 다 컸지만 딸애는 아직도 소학생이니… 애엄마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 애들 잘 키워줘요.어미 몫도 채 하지 못하고…미안해요.그리고…좋은 녀자 만나세요. 다른 병실에서 간담을 서늘케 하는 환자의 절망에 가까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난 저렇게 아프지 말고 갔으면…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두렵다고 남편을 찾지도 않은 녀자.통증이 심해져도 입술을 꼭 깨물고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은 녀자.남편 앞에서 공포에 떠는 모습은 보이지도 않던 애엄마였다. 복도에서 아들과 딸애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창문으로는 밝은 별빛이 그냥 내리비추고 있었다. 그 날 밤, 애엄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들이 대학시험장에 들어가는 것만은 꼭 보고 싶다던, 다가오는 결혼 20주년기념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애엄마가 이렇게 빨리 이 세상을 저버리다니… 테블에 올려놓은 녀자의 핸드폰 벨소리에 남자는 회상에서 깨여났다.다시 테블로 다가앉아 무심코 핸드폰을 건너다 보았다.최진이라는 이름이 액정에 현시되여있었다. 최진? 화장실에 갔다온 녀자는 핸드폰을 출입문 쪽으로 들고가서 낮은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진이야.금방 깨났어?아니, 괜찮아.은영이는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지금 집에서 자고 있을 거다.저녁에 이모집에 놀러와.맛 있는 걸 해줄게. 녀자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조카예요. ―조카? 남자는 의아한 눈길로 녀자를 쳐다보았다.녀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S시에 있는 언니 아들이예요.여기 대학에 다니는데 올해 졸업해요. 환한 빛줄기 같은 것이 섬광처럼 남자의 뇌리를 스쳐지났다.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가슴 속에서 전례없던 강렬한 에너지 같은 소용돌이가 일며 짜릿함이 온몸으로 전해왔다. 녀자는 진이의 이모였다.진이의 이모, 그러니깐 현옥의 동생이였다.만난 적은 없지만 현옥한테서 네살 어린 동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잠간 다녀오겠다고 녀자에게 말하고 남자는 화장실에서 천정을 올려다보며 다시 상념에 잠겼다.      지난 주일, S시에 출장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철에서였다.차에 오르니 창가에 앉아있던 스물두어살 쯤 되여보이는 젊은이가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왔다.령리하고 단정하게 생긴 젊은이는 ××대학 4학년생이였다.마침 고향역까지 동행이라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학생이 위챗 친구요청을 보내오자 나는 인츰 수락하였다.조금 지나서 피곤해서인지 학생은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조용히 미끄러져가는 차안에서 나는 학생의 모멘트를 보기 시작했다.학생의 이름은 최진이였다.모멘트의 사진들을 흥미진진하게 보다가 학생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이게 누구인가? 수십년이 지났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나는 옆에서 자고있는 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그러고 보니 학생이 현옥의 얼굴을 많이 닮은 같기도 했다. 그 때도 나는 오늘처럼 기차에서 현옥의 얼굴을 그려보고 있었다. 대련에서 연수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현옥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현옥이는 지금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이튿날, 학원에 나와보니 사무상에 현옥의 편지가 놓여있었다.편지를 읽고 나는 밖에 나와 비속에 서있었다.왜서 그저 현옥이와 같이 일본에 가기만 하면 된다는 외딴생각만 하고 현옥의 학교에라도 전근할 생각은 하지 못했던가?만약 그랬더라면 지금 쯤 우리는 같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현옥의 어머님을 옆에서 보살펴드릴 수도 있을 것이고 동생의 대학입시에도 도움이 될 텐데… 뒤늦게야 모든 것이 후회되고 이젠 정말 현옥이를 잃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비줄기처럼 줄줄 쏟아져내렸다. 연수가 끝나면 고모집에 한번 다녀와달라고 대련에서 부탁하던 현옥의 말이 떠올라 그대로 현옥의 고모집을 찾아갔다. ―에구, 그렇잖아도 엇저녁에 현옥이가 옆집에 또 전화왔더랬소.현옥의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걸 어찌겠소.이젠 현옥이를 그만 잊구 좋은 녀자 만나오… 새 청사에 입주한 학원에서 명년에 집분배가 있게 되는데 독신교원은 제외된다는 소문이 돌았다.얼마 안 되여 나는 정부 공무원인 은희라는 녀자를 만나게 되였다.학원 기숙사에 그냥 있을 수도 없어 세방살이를 몇달간 하다가 낡은 집이라도 한 채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10평도 안 되는 작은 세방을 얻어놓은 날, 나는 생각 끝에 현옥한테 편지를 하였다. ―이제 결혼하게 돼요.미안해요.이 못난 사람을 잊고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세요.정녕 다시 만날 그 날이 있을런지?… 아들이 세돐이 되던 해에 나는 일본으로 떠났다.4년간의 류학을 마친 어느 따스한 봄날 오후, 신쥬꾸(新宿)에 있는 중국려행사에서 대련으로 가는 티켓을 사가지고 큰길에 나왔을 때였다. ―형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멈춰섰다.일본 도꾜에서 나를 형님이라 부를 사람이 없는데?… 뒤돌아보니 나한테로 달려온 사람이 다름아닌 철수였다.반가웠다.이국타향에서 철수를 만나서 반가웠고 그가 나를 기억해주어 더욱 반가웠다. ―너 언제 일본에 왔어? ―한달 전에 일본어학교에 류학 왔습니다. 우리는 부근에 있는 차집으로 들어갔다. ―누나도 일본에 온 지 한주일이 됩니다.누나는 일본문학을 전공합니다. ―어?그래?… 몇해 전에야 결혼하고 두돐이 지난 아들을 어머니한테 부탁하고 일본에 왔다는 현옥이였다.며칠 후 중국에 돌아간다는 나의 말을 듣고 철수가 뭔가를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가기 전에 누나를 만나보시지요? 사실 그 사이에 현옥이가 무척 보고 싶었다. 일본령사관 비자를 받아쥐려고 S시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현옥의 학교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중산광장에 가서 현옥이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자리에 멍청하니 서있었다.일본으로 떠나가는 날도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현옥의 학교에 전화하려다가 언젠가는 영영 떠나야 하고 그래야 현옥의 아픈 상처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여 들었던 수화기를 할 수 없이 놓고 말았다. 지금 만나지 못하면 언제 다시 만날가?  ―난 괜찮은데 누나는 어떨지? 나는 철수의 얼굴색을 가늠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누나도 반가워할 겁니다. ―그럼 래일 오전 아홉시에 우에노공원 앞에서 기다릴게. 철수와 헤여져 집으로 가는 전차에서 나는 대련에 연수를 갔을 때의 일을 머리 속에 떠올려보았다. 300원도 안되는 석달 월급을 타가지고 대련에 와서는 멋진 양복은커녕 변변한 바지 한벌 사입기도 힘들었다.어느 날, 대련에 온다는 현옥의 전화를 받고 기쁜 나머지 예쁜 세타라도 선물하려고 추림(秋林)상점에 갔다가 돌아갈 로비가 걱정되여 빈손으로 기숙사에 돌아오고 말았다.그 날 저녁에는 하도 기분을 삭일 수가 없어 친구와 같이 작은 음식점에서 말린 물고기 한봉지에 취하도록 마셨다.빈 맥주병들이 기립자세로 쭉 줄지어있는 걸 보고 음식점에 찾아들어온 손님들이 우리를 흘끗 쳐다보고는 괴한들이라도 마주친 듯 덴겁하여 뒤걸음질쳤다.   무역회사나 려행사에 다니는 친구들은 어디에 가서도 호주머니를 척척 잘 털어놓는데 우리 교원들은 그렇지 못했다.그렇다고 그들이 부럽지는 않았다.그러면서도 호주머니 사정이 조금만 더 넉넉해졌으면 하는 생각은 자주 하군 했다. 그 때도 어머니의 병치료에 보태라고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얼마 안되는 월급으로 앓는 어머니와 대학시험을 눈앞에 둔 녀동생을 혼자서 돌봐야 하는 현옥인들 얼마나 속상했으랴! 이튿날, 우에노공원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현옥이와 철수는 나타나주지 않았다.시계를 보니 아홉시가 넘었다.어제 철수한테서 소식을 듣고 고민하던 끝에 나를 만나지 않기로 마음 먹은 현옥일 것이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으로 이젠 그만 가려고 돌아서려는데 출입구에 있는 작은 사진관 옆에 한 녀인이 혼자 서있는 것이 보여왔다. 그 녀인을 바라보는 나의 눈시울이 삽시간에 뜨거워났다. 일본을 떠나기 이틀 전에 나는 도꾜에서 첫사랑 녀인을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우에노공원에 들어와서야 철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는 한참 거닐다가 벤취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어머님 병세는 어떠해요?그리고 동생은?… ―어머니는 그냥 시름시름 앓고 계세요.향옥인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Y시 중등전문학교에서 근무해요. ―그래요?향옥이 잘 되였네.그럼 한 시내에서 만날 수도 있겠네.근데 본 적이 없으니 만나도 누군지 모르겠구만. 그래, 맞아.그 때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현옥이도 따라 웃었다.      제자리로 돌아온 남자는 녀자가 성이 리씨임을 번연히 알면서 넌지시 물었다. ―아, 정말.인사를 나눌 경황도 없었네요.저는 김씨입니다. ―전 리씨예요. 입을 곱게 오무려뜨리며 웃는 녀자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고보니 현옥이와 비슷한 데가 있기도 했다. ―저…사모님은 첫사랑이였어요? ―네?저… 불쑥 물어온 녀자의 질문에 남자는 난감함이 앞섰다. ―아까부터 물어보려 했는데요.선생님은 지금 혼자예요? ―아, 네… 커피잔을 다시 든 남자는 이번에도 선뜻 대답을 못했다.  ―애들도 다 키웠는데 이젠 좋은 녀자 만나야지요.다름 아니라 저의 언니 말인데요. ―언니요? 남자는 도적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당황해났다. ―네.형부도 몇년 전에 병으로 돌아갔어요. ―형부가 돌아갔어요? 남자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네.이젠 8년이 되였어요.언니는 지금도 혼자예요. ―네?!… 남자는 하마트면 커피잔을 떨어뜨릴 번했다.   언제 어떻게 집까지 왔을가? 커피 한잔 마시고 이토록 대취한 듯 필림이 끊겨보기는 처음이였다. 쏘파에 털썩 주저앉은 남자는 한동안 떨떠름해 있다가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급히 S시에서 걸려왔던 전화번호를 찾아 위챗검색을 해보았다.옥이라는 닉명이고 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프로필로 되여있었다.진이의 모멘트에서 보았던 사진이였다. 현옥이였다. 헌데 현옥이가 나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가?진이가 알려주었을가?진이는 아닐 것이다.그럼 누구일가?철수? 남자는 철수라고 대뜸 짐작했다.일본에서 금방 돌아왔다는 그를 언제인가 만났는데 큰 도시에 취직하고 싶다 하기에 일본과 무역거래가 있는 상해의 친구회사에 소개했다.그 후 친구에게서 철수의 평판이 좋다고 들어왔고 몇해 전에는 시내에서 우연하게 만난 적도 있었다. ―오래간만이구나.회사에서 일을 잘 한다더구나.그래 어머님은 건강하시구? ―네.휴가여서 놀러 왔습니다.어머니는 건강합니다. ―현옥이는 이젠 일본에서 돌아왔겠네.지금 잘 있는거지? ―네.일본에서 돌아는 왔는데…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는 그를 보고 나는 괜히 물었나 후회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현옥한테 그런 일이 있었던 게로구나. 철수가 친구한테서 나의 전화번호를 안 것이 틀림없었다.헌데 왜서 나의 전화번호를 현옥한테 알려주었을가?그럼 현옥이도 이젠 나의 일을 알아차린 게 아닐가?… 남자는 현옥이를 알아보았을 때처럼, 아니, 그 때보다 심장박동이 더 빨라짐을 느꼈다. 어쩌면 우린 동병상련의 처지일가? 어쩌다 우린 같은 해에 둘 다 이런 꼴이 되고 말았을가? 이런 못난 사람들 같으니라구. 씁쓸하고 슬프고 괴로웠다.기가 막히고 억울해나기까지 했다.지나간 일들이 다시 후회되면서 설음이 북받쳐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밖에 뛰쳐나가 미친 놈처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지금 현옥한테 전화를 해볼가? 지금 당장 현옥이를 찾아갈가? 점심 하학종소리가 뜬금없이 울려왔다. 저 1중 종소리는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날에도 저렇게 제멋대로 울리는가? 남자는 반사적으로 딸애 방에 눈길을 돌렸다.래일부터 대학입학모의시험이 있는데도 오늘중으로 교실벽보를 꾸려야 한다며 오후 늦게 들어온다던 딸애였다. 몇해 전부터 아들은 물론 딸애마저도 새어머니를 맞으라는 말을 자주 해왔다.애들이 커서 이젠 애비 마음도 헤아려주는구나 싶은 기특한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때마다 너희들이 출세한 다음 하고 웃으며 대답하군 했다.사실 좋은 녀자가 있다며 만나보라는 친구들의 권장도 번마다 마다한 남자였다.《장화홍련전》에 나오는 허씨 계모 같은 녀자는 없다고 손쳐도 애가 둘이 달린 남자를 좋아하는 녀자가 지금 어디 있겠는가?부담없이 편하게 살아갈 궁리들만 하고 있지 않는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여나왔다. 근년에 와서 사업상 관계로 S시에 자주 출장을 다니게 되였다.현옥이는 지금 어떻게 보내고 있을가 궁금하여 현옥이가 근무하던 학교에 일부러 전화를 해본 적도 있었다.현옥이라는 교원이 없다고 하기에 일본에서 돌아온 후 다른 곳으로 전근했으리라 믿고 있었다.현옥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지만 친구한테서 철수의 전화번호를 알아보기도 그렇고 또한 그런 나를 현옥이는 먼 별나라에서 날아온 우주인처럼 생각하지 않을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아 있었다. 진이의 모멘트에서 현옥이를 알아보았을 때 나는 자다가 불에 덴 사람처럼 와뜰 놀랐다.그러다가 고향역에 도착하여 역전광장에서 진이와 같이 사진을 찍고 시내로 들어가면서 현옥이가 지금 외국어학원에서 일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여 속으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싶다던 사람은 교육학을,교육학을 전공하고 싶다던 사람은 일본문학을 전공하게 되였네.  ―진짜 그렇네요. 우에노공원에서 현옥이와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던 지난날이 다시 생각났다. 그나저나 현옥이도 참 안되였구나! 딸애와 같이 저녁을 먹고 피곤하다며 일찍 자리에 누워서도 남자는 이리 궁싯 저리 궁싯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 저녁무렵에는 딸애를 데리고 대학 부근에 있는 음식점으로 가는 길에 진이를 다시 만났다.아들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지만 진이가 올린 모멘트를 보고 진작부터 현옥이가 나를 알아보지 않았나 속은 두방망이질 하고 있었다. 이제 진이가 우리들의 사이를 알게 되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가?그리고 이웃에서 살고 있는 향옥이도 알게 되면 나를 어떻게 대할가? 비록 우리가 그 사이에 남들이 껶지 않은 가정불행을 가슴 아프게 서로 경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현실이 아니겠는가?운명의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라도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련만.이 세상에 상처 하나 없는 사람 어디 있으랴. 그 누구에게도 말못할 애절한 사연들이 가끔씩 우리들을 힘들게 하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서로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예전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때론 혼자서 옛 추억들을 회억해보기도 하면서. 남자는 새벽녘에야 가물가물 잠이 들었다.     청명절 이튿날 아침. 남자는 회사에 나가려고 커피솦 옆 골목에 세워두었던 차한테로 갔다.골목을 나와 문득 얼굴에 와닿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맞은켠 큰길을 건너다보았다.뻐스정류소에 익숙한 두 얼굴이 서있었다.아까부터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웃으며 서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남자는 차를 멈춰세우고 인사말이라도 건네려다가 옅은 미소만 지어보이고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그대로 차를 앞으로 내몰았다. 어제는 차로 모시겠다고 선뜻 다가가지 않았는가? 미안한 생각이 들어 백미러로 보니 처제로 될 수도 있었던 향옥이와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하게 될 진이가 멀어져가는 차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큰길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량들이 줄지어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벨소리가 울려왔다.처음 보는 상해의 전화번호였다.남자는 핸들에 달린 통화버튼을 눌렀다.   ―김형, 오래간만입니다. ―철수? ―네.며칠 전에야 그 사이에 있은 일들을 사장님을 통해 알게 되였습니다.참말로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사실은 저의 누나도… 남자는 철수한테서 현옥의 남편이며 진이의 모멘트며 4년 전 백화상점에서 있었던 일들을 듣고만 있었다. 그 사이에 이런 일도 다 있었구나. 그리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진이와 향옥이를 만났고 어제야 비로서 현옥의 일을 알게 되였다는 말들은 입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에 누나한테 다시 전화하겠습니다.그럼 누나한테 어떻게 전해드릴가요? 잠자코 있는 남자에게 철수가 다시 물어왔다. ―김형…여보세요… ―미안해.난 이미 새가정을 꾸렸어. ―네?!… 무덤덤하게 전화를 끊은 남자는 자못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철수한테서 전화가 걸려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만약 철수가 아니였더라면 일본에서 현옥이를 만날 수 없었다.이번에도 철수한테는 천번 고마워하고 만번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재회의 기회를 아쉽게 놓쳐버렸다고 결코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때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이 봄날 새순처럼 숫진 첫사랑을 속삭이였던 녀인이였다면, 궁핍한 가정형편때문에 헤여지자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녀인이였다면 지금 내가 다시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가? 지나간 일들을 다시 터놓을 수 있는 옛 련인일가, 매일 밥상에 마주앉아 맛있는 음식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는 새 가족일가 아니면 그 동안 무지근하게 축적된 성이라도 나눌 수 있는 애인일가? 우리의 만남이 더없이 순결하고 신성한 만남이였다고 스스로 억지를 부려도 우리가 이제 다시 만난다면 세상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할 것이고 하늘에서도 불륜자들이라고 욕설을 퍼붓을 것이다. 뒤에서 울려오는 경적소리에 놀라 남자는 그제야 차를 움직였다. 신호등이 다시 바뀌였다.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남자의 심정을 헤아리기라도 한듯 차거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속을 내달리는 차안에서 남자는 20년 전 어느 날 한 녀인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던 슬라이드를 다시 떠올려보고 있었다. ―영원히 사랑하지 못해 미안해요.꼭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이 세상 어느 남자인들 첫사랑 녀인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차창에서는 비물들이 사정없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남자의 두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라도 좋은 남자 만나세요.그렇게 믿고 있을 게요.사랑했어요.그리고…진이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향옥이도 딸애가 대학시험을 잘 치르기를 바랄 게요…    ----------------------------------------------------------   창작후기   우린 어떻게 하면 좋았을가?     고작 몇 편의 소설밖에 발표하지 못한 나로서는 소설창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공정’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 이 소설을 쓰려다가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나 시시하고 또한 발가벗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유치해보여 포기하려 했다.그러다가 철수한테서 들은 이야기에 근거하여 그녀를 상상해보면서 이전부터 쓰고 싶었던 첫사랑 이야기와 결부시켜 결국 다시 쓰기로 했다. 봄볕이 따스하게 느껴지던 지난 3월말, S시에 출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철에서 우연하게 첫사랑 현옥의 아들 진이를 알게 되였다.그런데 며칠이 지난 청명절에는 현옥의 동생 향옥이도 만나게 되였다.진이한테서 현옥이가 지금 외국어학원에서 일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일보다 더 기뻐하고 있었는데 향옥이를 만나서 현옥이도 남편을 잃었다는 끔찍한 소식을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되였다.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슬프고 측은하고 애틋하고 비애스러운 감정이 순식간에 몇 갈래의 강한 전류처럼 온몸으로 퍼져왔다. 나는 그래도 남자로서 애엄마를 잃은 것은 참고 견딜만한데, 원체 마음이 여리고 천성이 착한 녀자인 현옥한테도 이런 불행이 닥쳐올 줄은 진정 몰랐었다. 우리는 그 때 왜서 헤여졌던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였던가? 만약 우리가 헤여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뿐더러 지금은 어느 가정보다도 더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겠는가? 80년대말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원으로 배치받은 우리가 경제상 부유하지 못한 그 당시 멀리 내다보는 시야를 키워내지 못했던 것일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헤여져야 했던 그 시절을 다시 회억해보게 되였다. 중국과 일본의 경제적격차가 드높았던 90년대는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위를 따내기란 남자들도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였다.하물며 녀자인 현옥임에야. 이미 바다 건너 안해의 감시레이더 영향권을 멀리 벗어나 있는 나였지만 옛사랑을 만나 앞날을 약속한다던가 성을 나눈다던가 그런 따위식 만남은 결코 아니였다. 철수를 만나고 나는 곧추 은행으로 달려갔다. 도꾜타워를 구경하고 플래트홈에서 현옥의 가방 속에 돈봉투를 밀어넣은 것은 첫사랑 녀인이 일본에 금방 와서부터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어쩌면 병환에 계시는 현옥의 어머님과 대학입시를 맞는 동생한테 일전 한푼 도움을 주지 못했던 지난날의 반성이기도 했다. 만약 그 때 현옥이가 일본에 온 지 오래 되였다고 들었더라면 만나려고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귀국 후, 나는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깡그리 잊고 사업과 가정에만 충실해왔다.정부 접대처 처장으로 사업이 분망한 애엄마를 도와 집안일도 거들어주면서 아들과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애써왔다.   애엄마를 잃은 뒤 S시에 출장을 다니면서 현옥이를 만나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충동을 여러번 느낀 것만은 사실이였다. 이번에도 일본에서처럼 현옥이를 언제 만나자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철수한테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미 새가정을 꾸렸다고 철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철수가 난감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 잘 된 일이였다.현옥이가 진정 이제부터라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그래야 했다.그래야만 서로 착잡한 감정 속에서 하루 빨리 떨쳐나올 수 있고 옛사랑과의 해후를 더 이상 바라지 않기 때문이였다.물론 현옥이도 철수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나한테 미련을 가지지 않으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사랑은 미련도 동정도 필요없고 이미 건너온 강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독자들의 반응이 무척 궁금해지는 한편,현옥이도 진이도 향옥이도 철수도 그리고 나의 아들도 성인이 된 딸애도 이 글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인연이라면 또다른 인연이겠는데...모두들 리해해주고 응원해줄 텐데...참 아쉬운 일이 아닌가?다시 만났더라면 좋지 않았는가? 언젠가는 그들도 나의 심정을 리해해주리라 믿는다. 과연 우린 어떻게 하면 좋았을가? 내가 너무 무정했을가?너무 잔인했을가?이런 방법 밖에 없었을가? 솔직히 창작후기를 쓰면서도 애엄마와 첫사랑 녀인을 다시 한번 그려보게 되였다.아마 나는 오늘도 래일도 두 녀인을 그리워하며 살지 모른다는 못난 생각이 들면서 또다시 서글퍼지기도 한다.              
2    (단편)우동집 댓글:  조회:1435  추천:0  2017-12-23
우동집   박명선         우동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栗良平)의 《우동 한 그릇》에서 나오는 북해정 우동집과 동정심이 많고 배려심이 깊은 점장을 련상할 것이다. 내가 일본에 류학하고 있을 때, 북해정 우동집과 반면대비를 이루는 한 우동집이 도꾜 시교의 U역에 있었는데 귀국하여 오랜 세월 속에서 까맣게 잊고 지내왔던 그 우동집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며칠 전 어느 날이였다. **대학 졸업20주년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나는 먼저 한국으로,한국에서 상준이와 함께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날,공항에서 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래간만이다.그 동안 잘 있었나?" "네?누구신지요?" "목소리 들으면 몰라?" 어디서 듣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반말까지 쓰는 걸 보아선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한데 도무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았다.다시 누구인가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하여 혹시 잘못 거신 전화 아닌가고 되물었다. "아니,잘못 걸지 않았어.네가 오늘 한국에 온다는 것도 알아." 그러고보니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아까 탑승수속을 마치자 핸드폰이 급작스레 울리기에 화면도 제대로 보지 않고 폴더를 열었던 것이다.내가 오늘 한국에 온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누구일가?혹시 어느 공포영화에서 나오던 협박전화라도 아닐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당황해나기까지 했다.   "당신 누구야?" 나의 입에서 퉁명스런 말이 튕겨나왔다. "한국에 온다는데 서울에 있는 상준이는 잘 알겠지?" "상준이야 잘 알지." "그럼 일본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장춘사람 생각 안나?우동집은 생각 나겠지?좀 있다 만나자. " 대방에서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아까 장춘사람이라고?그리고 우동집이라고?... 그제야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억의 문이 자물쇠 풀리 듯 스르륵  열려졌다.                                           1.   1997년1월 중순 어느 금요일 점심,아르바이트안내책자를 훑어보다가 한 광고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토,일야근 일당 1만3천엔! 도꾜 시교에 있는 포리마데크라는 핸드폰부품을 제조하는 공장에서 발포한 구인광고였다.당시 도꾜의 시급이 800엔좌우였는데 일당 1만3천엔이면 수입이 짭짤한 알바라고 할 수 있었다.먼저 전화로 문의했더니 알바시간은 저녁 여덟시부터 이튿날 아침 여섯시까지 열시간이며 구체적인 내용은 면접하러 와서 확인하라고 했다.     면접시간에 맞춰 한국 류학생 상준이와 함께 그 공장을 찾아갔다.     야마구찌라고 자아소개를 하는 공장장이 직접 면접을 보았는데 래일저녁부터 나와달라고 부탁하면서 우리 공장에 이젠 외국인 류학생까지 있게 되였다며 환한 미소를 띠우더니 레이저실로 가보자는 것이였다.레이저실에 들어서니 파란 모자에 파란 로동복차림을 한 일본인들이 책상에 앉아 열심히 품질검사를 하고 있었다.그 중에는 60세가 되여보이는 녀성도 두 명이나 있었다.차간 뒤켠에서는 고드로운 기계소리가 잔잔히 울리고 파란 레이저불빛이 작은 유리창문으로 들여다 보이는 하얀 기계 앞에서 크고 검은 안경을 건 사람이 용광로에서 불덩이를 꺼내 듯이 레이저에 찍힌 부품판을 꺼내는 것이였다.차간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는 척도 하지 않고 열심히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일본인들이 인상적이였다.공장장이 기계 앞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가 먼가 귀속말로 말하자 그 사람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우리한테로 오는 것이였다.그 사이에 공장장이 대신 안경을 걸고 숙련된 솜씨로 기계를 조작했다.반장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여러가지 주의사항들을 설명하고 갱의실까지 안내하며 래일부터 사용하게 될 롯카도 알려주는 것이였다. 공장장과 같이 사무실로 돌아와 등록을 마치고 대문을 나오는데 도수 높은 안경을 걸고 가느다란 체구의 웬 남자가 대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30대초반,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는데 대문으로 들어갈가 말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얼핏 보기에도 외국사람 같았다. "중국사람 같은데." 눈썰미가 빠른 상준이였다.나도 그런가 보다 하며 스쳐지났다가 혹시 저 남자도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류학생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 뒤돌아서서 “니호우!” 하고 인사말을 건넸더니 과연 그 남자도 웃으며 너도 중국사람인가며 반색했다.일본에 온지 얼마 안 되고 장춘에서 왔다며 성은 리씨이고 이름은 건이라고 했다.그러면서 광고를 보고 이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 전화도 하지 않고 찾아왔는데 일본어도 잘 모르고 긴장하다며 같이 들어가줄 수 있냐고 청을 드는 것이였다.건이를 데리고 상준이와 같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같이 온 친구라고 소개하자 뜻밖으로 공장장이 뜸도 들이지 않고 연신 고맙다며 건이의 등록수속도 해주는 것이였다. 이튿날 저녁,갱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건이가 들가방을 들고 들어왔다.도꾜의 겨울은 춥지 않아 좀 두꺼운 바지 한벌만으로 겨울을 지낼 수 있었다.헌데 건이는 회색 겨울내복과 빨간 뜨개바지 두벌이나 입고 있었다.뜨개바지를 보니 저도 모르게 빨갛고 노랗고 파란 털실들을 한데 모아 뜨개로 뜬 바지를 입었던 어린시절이 생각났다.그 때는 눈무지에 오줌을 갈기거나 침을 뱉아도 인차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였기에 솜바지도 입고 털모자도 쓰고 장갑도 끼고 다녔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상준이도 입을 하 벌리고 장춘이 몹시 추운가고 물어보았다.건이가 추위에 약한 체질로 보이긴 했지만 한족들이 겨울철 몸단속을 잘 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우리가 팬티바람에 로동복바지를 갈아입자 건이도 마지못해 뜨개바지와 겨울내복을 벗는 것이였다. 레이저실에 들어서니 반장이 우리들을 소개하고 자리를 배치했다.그리고는 질량검사를 가르치기 위해 나와 상준이에게 일본인 한 명을 붙여놓고는 건이한테로 다가갔다.이건 토시바요,저건 노키아요,그리고 북경이라는 경자가 찍혀 있는 건 쿄세라요 하며 열심히 부품품종을 설명하는 반장 앞에서 건이는 알아들었는지 그저 “하이!하이!”하며 어줍게 연신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상황파악을 잘 하지 못하는 건이인 줄 알아차리고 반장이 웃더니 나더러 설명해주라고 했다.나의 옆구리를 가볍게 찌르며 건이는 귀속말로 반장이 하는 말이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했다. 12시, 식사시간이 되였다. 함께 일하는 일본인들은 슈퍼에서 사온 도시락들을 밥상에 올려놓고 나와 상준이는 오니기리(주먹밥)를 꺼내놓았다.건이는 들고왔던 가방에서 손수건에 싼 도시락통을 꺼냈다.알루미늄으로 만든 하얀 중국 도시락그릇이였다.손수건 매듭을 풀고 덮개를 여니 돼지고기에 감자를 볶은 먹음직한 료리와 새하얀 쌀밥이 그득 담겨 있었다.그만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집에서 절로 해왔느냐,맛있어보인다며 옆에서 다들 칭찬해주었다.상준이가 힐끔힐끔 건너다보자 돼지고기 한 점 집어달라는가고 나더러 물어보란다.상준이가 웃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자 건이는 맛있는 료리를 만들어줄테니 아침 퇴근길에 자기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너희들을 만나 반갑고 너희들 덕분에 일자리를 찾았으니 집으로 청하고 싶다는 것이였다. 새벽 두시가 지나자 졸리고 눈이 자꾸 내려와 죽을 지경이였다.하품을 짝짝 해대는 나를 보고 나이 지긋한 일본인이 반장이 언녕 퇴근했다며 엎드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했다.너무나도 고마웠다.고마웠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뒤돌아보니 건이는 질량검사를 하는 척 오른 손을 이마에 갖다대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이러면  안 되는데. "어험,어험!" 상준이가 웃으며 헛기침을 깇자 건이는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세수를 하고 들어와서 우리를 보고 싱긋 웃었다. 휴식시간에 우스운 얘기들을 많이 나누다나니 잠끼도 없어지고 일본인들과 사이도 가까와졌다.휴식을 마치고 다들 차간으로 다시 욱 쓸어들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복도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교대시간이 되였나.시계를 보니 5시50분이다. 와!이제 10분이 지나면 열시간 밤일을 끝내고 퇴근이구나!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하루밤에 어디 가서 1만3천엔을 벌 수 있는가? 교대를 마치고 갱의실에 들어서니 창밖은 이미 희붐히 밝아 있었다.캄캄한 밤에 공장으로 들어올 때는 난생처음인 밤일을 열시간동안 하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나 않을가 두렵고 근심이 태산 같았는데 그래도 무사히 나가게 되는구나! 바닥에 주저앉아 엇저녁에 벗어두었던 겨울내복과 뜨개바지를 다시 껴입는 건이를 나와 상준이는 웃으며 기다렸다. 아침공기는 꽤나 쌀쌀했으나 유쾌한 심정으로 시험장을 나서는 학생들처럼 우리는 공장대문을 나왔다.                                     2.   역전에 도착하자 마침 아침전차 시발시간에 닿았다.건이의 집은 두 정거장만 가면 된다고 했다.U역이라는 역에서 내렸다.프랫트홈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는데 계단 밑에 우동집이 보였다. 출구를 나와 건이네 집 부근 슈퍼에서 나는 맥주를 사고 상준이는 사과를 사들고 나왔다. “에잇,서울깍쟁이 같으니.좀 많이 살거지.” 상준의 손에 달랑 사과 세알이 들려있었다. “이제 로임 받으면 많이 살게.” 건이도 우리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맥주와 사과를 번갈아 보고는 웃으며 집으로 안내했다. 건이의 집은 목조로 된 2층 아파트였다.한겹 창문이여서 바깥과 집안의 온도가 별반 차이가 없었다.집안에 웬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겨울에 한족들이 사는 집에 들어가면 료리를 볶는 기름냄새가 코를 찌르던데 그런 냄새는 아니고 분명 김치냄새였다.주방을 들여다보니 창턱에 김치그릇이 놓여 있었다. "료리 몇 가지 인차 만들테니 좀 기다려." 배가 고팠던지 맥주를 빨리 마시고 싶었던지 상준이가 캔맥주 하나를 딱 소리나게 땄다 "먼저 시원한 맥주나 한잔 씩 하자구." 상준이가 나와 건이에게 캔맥주를 하나 씩 건네주었다. "자,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건배!" 건이가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통졸임 몇개와 김치그릇을 들고오는 것이였다.100엔짜리 애완동물먹이용 통졸임이였다.집안에 강아지나 고양이도 없는데 설마 값이 싸다고 반찬거리로 잘못 알고 산 게 아닐가?고양이를 키우냐는 상준이의 물음에 건이는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의아한 눈길로 이 통졸임이 무슨 통졸임인가고 소심하게 물어보았다.나도 일본에 금방 와서 슈퍼에서 깜찍하고 값 싼 통졸임을 잘못 알고 하마트면 몇개나 사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양이먹이용 통졸임이라고 하자 건이는 “이것도 맛있는데 뭘 그래.”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것이였다.옆에서 웃던 상준이가 김치그릇을 가리키며 한족들도 김치를 먹는가고 물어보았다.고개를 끄덕이던 건이가 불시에 하하 웃어댔다. "미안.나도 조선족.몰랐지?" "뭐,뭐얏?" 건이가 조선족이란 말에 나와 상준이는 화들짝 놀랐다.상준이는 입 안에 넣었던 맥주까지 입 밖에 내뿜고 말았다. "너 진짜 조선족 맞어?" "응." "근데 왜 우리말 하지 않았어?" "잘 못해.상준이 웃을가봐." 상준이도 조금 우습게 발음하는 건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우리말 하는데 내가 왜 웃어?그럼 우리들이 한 말을 다 엿들었겠네." "뭘.욕도 않았는데.나 한국말 못해.한국말 바빠.한족말 절반 한국말 절반 할게." 분위기를 감지하고 상준이가 다시 건배를 웨쳤다. "장춘에도 조선족들이 많은데,그래 부모님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조선족이." 건이의 집은 장춘 시교의 어느 작은 진에 있고 부모님들은 어느 공장에서 퇴직했으며 어릴 때부터 동네애들과 중국어를 하다보니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대학 계산기학과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지금 일곱살 난 딸도 있다.컴퓨터회사에 근무하다가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누님한테 신원보증인을 위탁하여 작년 10월에 도꾜의 일본어학교에 왔는데 두살 이상인 누님이 평일에도 시간이 되면 먹을거리도 곧잘 사온다며 이 김치도 며칠 전에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재작년에 누님은 한반에 다니는 한국류학생과 결혼했는데 매형의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난처할 때가 많더라며 머리를 긁적였다.계산기학과를 졸업했으면 앞으로 일본 IT회사에 취직하면 좋지 않느냐는 물음에 누님과 매형도 그런 의도를 밝혔지만 취직하려면 일본어도 잘 해야 하고 학위도 따야 하는데 일본에 좀 있어보다가 진로를 다시 결정하겠다는 것이였다.그러면서 이젠 공부 할 나이도 아니고 학교는 가고 싶지 않으니 그 공장에서 매일 일할 수 없겠는가 물어봐달라는 것이였다. "둘이 얘기 나눠.나 좀 자야겠다." 상준이가 캔맥주 하나를 비우고는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는 료리 인차 할게.먹고 자요." "아니야." 먹고 자요 라는 말투가 재미있어서 상준이는 웃으며 침대에 가서 누웠다. 그 날 저녁,공장대문을 들어가는데 공장장 사무실 등불이 환히 밝아 있었다.마침 잘 되였다고 공장장을 찾았다.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는 저녁알바코스가 있는데 시급은 1,000엔이며 열시간 밤일을 할 수 있겠는가고 묻는 공장장의 물음에 건이는 너무나 기뻐서 입도 다물지 못하며 쾌히 승낙하는 것이였다.밤일이지만 시급이 1,000엔이면 좋은 일자리가 아닌가?일자리가 사처에 널려 있다고 하지만 일자리를 찾기가 말이 그렇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차간으로 들어가면서 건이는 어린애들처럼 좋아했다.이 공장에서 일하기 전까지 U역 우동집에서 시급 650엔을 받으며 아침 5시부터 오후 1시까지 우동면을 삶고 튀김을 하고 채소를 다듬는 일이며 설겆이들을 하는 주방보조알바를 해왔다는 것이였다.그러면서 우동집 알바를 이젠 그만두어야겠는데 점장하고 어떻게 얘기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며 일요일과 월요일은 알바를 쉬는 날이기에 래일 아침 퇴근길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나를 믿고 한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허물없이 자신을 터놓는 건이가 너무나도 정직하고 솔직해 보였다.비록 첫 눈에 조선족임을 알아볼 수 없었고 일본의 언어환경과 생활습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일본류학 초년생인 건이였지만 지인이 얼마 없는 일본에서 같은 조선족과 같이 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동갑내기인 건이가 더 없이 소중한 존재로 느껴졌다. 오늘 저녁은 두 사람이나 결근했다.야마구찌 공장장이 차간에 들어와 살펴보더니 따끈한 캔커피를 뽑아가지고 와서 한사람 씩 건네주고는 건이를 보고 웃으며 힘을 내라고 했다. 일을 하면서 건이는 혼자서 시무룩히 웃다가도 한참은 무슨 고민이 있는지 수심에 잠겨 있기도 했다.휴식시간에 우동집에서 세주일간의 로임을 지불해줄가 근심조로 묻기에 만약 로임을 주지 않으면 자기가 찾아주겠다고 상준이가 말해서야 시름이 놓이는 듯 얼굴에 평온함이 깃들어 보였다. 알바를 마치고 셋은 U역에서 함께 내렸다.6시반이였다.프랫트홈에 있는 우동집에서 풍겨오는 우동냄새에 군침이 스르르 돌았다.서너 명 손님들이 서서 우동을 먹고 있었다.건이가 상준이와 같이 우동집으로 걸어갔다.어제 아침에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우동집을 스쳐지나기 무엇했던지 전차에서 내리자마자 건이는 우동집이 보이는 서쪽 계단으로 가지 않고 우리를 반대방향인 동쪽 계단으로 안내했다. 자-식.나는 씨익 웃으며 스적스적 뒤를 따랐다.우동집 옆 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상준이와 건이가 낮다란 뒤문을 열고 나오더니 메모지에 적은 전화번호를 나에게 보여주었다.우찌다라는 점장의 핸드폰 전화번호였다.점장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고 로임은 점장한테 물어보라는 것이였다.7시도 되지 않은 시간대에 전화를 하는 것이 실례인 것 같아 오전중으로 알아볼테니 점심시간에 전화해달라고 말하고 그 길로 나와 상준이는 다시 학교로 가는 전차에 올랐다. 전차에 올라서 나는 우동집을 뒤돌아보았다.건이가 알바를 하고 있는 U역 우동집.시급이 650엔밖에 되지 않는 저 가소로운 우동집. 건이가 여기서 알바를 그만두기를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3.    "그럼 다음 주 일요일 아침 7시30분에 우동집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우찌다 점장과 전화통화를 마치고 얼마 안되여 건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감사하다.그럼 다음 주에 다시 만나." "그래,몸 주의해.너무 무리하면 안돼." 그러던 그 다음 주 토요일 저녁이였다.한주일만에 건이를 다시 만나게 되고 래일 아침이면 우동집의 로임도 받아 건이에게 준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흥분되였다.헌데 출근하니 건이가 나오지 않았다.고된 밤일을 하고 낮에 잠에 곯아떨어져 자다가 제시간에 잠을 깨지 못한 모양이라 생각하고 좀 있으면 오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아홉시가 넘어도 건이는 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나? 반장한테 물어보았더니 이젠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이였다.알바를 그만둘 건이가 아니고 하여 다시 물었더니 경찰에 잡혀갔다는 것이였다. 경찰에 잡혀갈 리가 있는가? 반장한테 다시 물었더니 자기도 잘 모른다는 것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일가? 상준이도 골똘히 생각하다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며 퇴근하여 공장장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했다. 이튿날 퇴근하자마자 공장장 사무실로 달려갔다.야마구찌 공장장은 이미 출근하여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건이의 일에 대해 물어보자 누가 신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목요일 오전에 경찰서에서 건이를 련행하여 공장에 와서 확인하고 갔다는 것이였다.그러면서 앞으로는 일본어학교학생이 아닌 일본어를 잘 하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을 소개하면 좋겠다고 덧붙히고는 일 보러 나가야 한다며 차간으로 들어갔다. 아니,불법체류도 아니고 비자도 아직 남아있는데 경찰서라니? 불현듯 한주일 전에 우찌다 점장이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불시에 일자리를 그만두면 가게가 혼란에 빠지는데 적어도 며칠 전에 알려야 하지 않겠냐며 중국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상식을 모르는가고 시까스르던 말이 떠올랐다.알바를 그만둘 경우 미리 상대방에 알리는 것이 상식이지만,우찌다 점장의 말에 일리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중국사람들이 상식을 모른다는 말에는 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렇지만 할 수 없이 건이를 대신해 사과한다고 말해서야 뒤말들을 나눌 수 있었다.다음 주 일요일에 로임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였다. 그렇다면 혹시 우찌다 점장이 경찰서에 신고한 것은 아닐가? 먼가 례사롭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쳐왔다.겉으로는 웃으며 그럴 듯이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본인들이 아닌가? 돌아가는 길에 건이의 집에 들려보자는 상준의 말에 나는 시계를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우찌다 점장과의 약속시간인 7시30분까지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 U역에서 내려 일부러 우동집을 지나면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흰 코크모자를 쓴 뚱뚱한 중년남성이 한창 우동면을 삶고 있었다.어디서 본 얼굴 같았다.우찌다 점장이 틀림 없을 것이다.약속시간 전에 벌써 나와 있구나.이제 좀 있으면 다시 만나리라. 출구를 나오기 바쁘게 우리는 건이의 집으로 잰걸음을 놓았다.2층에 올라가 문을 두드리니 집안에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보증인인 누님도 알고 올 거라 생각하고 메모지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문틈에 끼워놓고 층계를 내려가는데 문을 빠금히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돌아다보니 건이였다.온밤 자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는지 건이의 두 눈은 벌겋게 피발이 어려 있었고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꺼칠한 몰골은 말이 아니였다. "건이야!" 나와 상준이는 환성을 올리며 층계를 막 뛰여올라가 건이를 부둥켜 안았다. "너희들한테 미안하구나." 우리는 잠간 방에 들어가 건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목요일 오전,퇴근하여 집에 와서 아침도 먹지 않고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여나 눈을 비비며 누님이 왔는가 하고 문을 열어본 순간, 그만 그 자리에서 혼절이라도 할 듯 휘청거렸다.두 경찰관이 서있는 것이였다.경찰관들은 다짜고짜로 외국인등록증과 학생증을 보여달라며 지금 어디서 알바를 하는가 물어보았다.우동집은 그만두었기에 지금 알바를 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사실대로 말하라 하기에 며칠 전부터 포리마데크에서 밤일을 한다고 고스란히 대답했다.한 명은 젊은 경찰관이였는데 중국어도 좀 할 줄 알기에 서투른 일본어에 중국어를 섞어서 대화를 했다.보증인의 련락처를 물어보기에 누님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알바하는 공장에 같이 가보아야 한다고 하여 옷을 챙겨입고 파토카에 앉아 공장까지 끌려갔다.겨울방학이여서 주말에만 밤알바를 하는 중국류학생이라고 설명하는 공장장한테서 확인을 마치고 공장을 나와 집까지 오면서 앞으로 다시 신고가 들어오면 비자가 남아 있어도 입국관리국에 넘겨 처리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는 경찰관들에게 인사하고 파토카에서 내려 황망히 집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였다. 어쩌면 그 사이에 이런 일도 있었단 말인가? 일본정부에서 발급한 에는 하루에 네시간으로 알바가 규정되여 있다.학교에 다니지 않고 알바만 하다가 경찰에 잡혀 강제출국 당하는 류학생들도 있었다. 공장의 리익을 위한 일방적인 주장이긴 했지만 주말에만 밤알바를 한다고 건이를 두둔해서 말해준 야마구찌 공장장이 고맙게 생각되였다. "그런데 공장알바 이젠 못하게 되잖니?" 건이의 목소리는 아직도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게 뭐 대수냐?사람이 무사하면 된거야." 상준의 말이 옳았다.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눈 앞에 앉아있는 건이를 보니 안도의 숨이 나왔다. "그리고 이젠 학교에 다녀야 될 것 같다." 일본어학교에서 지금까지 출석률이 20%도 안 되는 건이에게 몇 번이나 통보하고 보증인한테도 사실을 알렸지만 건이는 여전히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다.그 날 경찰관들이 학교에 바로 전화하여 물어보면 어쩌랴 속이 두근두근했는데 다행히 그것은 물어보지 않더라며 누님한테서 늦지 않으니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학교에 다니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였다. "그래.짧은 겨울방학도 지났으니 요즘 먼저 학교나 착실히 다녀라.일본어를 못하면 의사소통이 안 되여 알바하기도 힘들잖아." 상준의 말에 건이는 그리 하겠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우리는 집을 나와 약속시간 전에 역전에 도착하여 우동집과 좀 떨어진 프랫트홈에 있는 벤취에 앉아서 기다렸다.안개가 자욱한 프랫트홈에는 옷깃을 세운 사람들도 많았다.우동집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저 우동집에서 일하던 건이가 나 때문에 알바를 그만두게 되여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갑작스레 몰려오면서 미안한 마음이 안개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옛날 일본군 군모 비슷한 누런 헝겁모자를 눌러쓴 늙은 청소부가 청소도구를 들고 땅바닥을 훑으며 우리 옆을 지나다가 멈춰서서 비가 내릴 것 같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뜬금없이 말을 걸어오기에 비가 내릴 시기는 아니지 않은가고 건성으로 대꾸해버렸다.왠지 모르게 고운 말투가 나가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7시30분이 거의 되였다.우찌다 점장이 일이 바빠서 나오지 못하는가 생각되여 우리는 일어나서 우동집으로 갔다.우동집 안에는 종업원 세 명이 분주히 돌아칠 뿐이였다.아까 우동면을 삶고 있는 점장을 보았는데 그 사이에 화장실에라도 갔나?가방에서 점장의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꺼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발신음신호가 가는데 대방에서 받지 않는다.좀 있더니 음성전화로 련결되였다.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약속시간을 까먹을 일본인들이 아닌데?... 이 때였다. 출구계단 쪽에서부터 전신무장을 한 경찰관 한 명이 손에 곤봉을 쥐고 목구두 발소리를 기세 당당히 울리며 어깨에 달린 무선전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리로 오고 있었다. 경찰관이 우리 앞에 와서 우뚝 멈춰서더니 미안하지만 누구를 기다리는가 물어보았다.그 서슬에 건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우동집 점장한테서 로임을 받으러 왔다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누구의 로임인가 물어보자 옆에 있는 건이를 가리켰다.건이를 흘끗 쳐다보던 경찰관이 외국인등록증을 보여달라고 했다.그러면서 나와 상준이에게 건이와 어떤 사이인가 검문을 들이댔다.친구라고 하자 건이에게 외국인등록증을 돌려주며 별일 아니더라고 무선전에 대고 말하더니 자리를 뜨는 것이였다. 우찌다,이 나쁜 놈! 네놈이 건이를 신고한 것이 맞구나! 건이한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그리고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방금 전에 역전 경찰서에도 신고한 것이구나! 으깨지게 깨물었던 어금이에서 뿌드득 소리까지 났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우동집을 한참 노려보았다.                                  4.       건이가 자기 집으로 기어이 가자고 했다.역전에서 기분 나쁜 일도 있었고 다시 만난 건이와 얘기도 더 나눌 겸 우리는 서둘러 U역을 나와 다시 건이의 집으로 갔다. 엇저녁에 누님이 와서 끓였다는 장국을 덥혀서 건이가 밥상을 챙겼다.오랜만에 먹어보는 장국은 그야말로 구수하고 향기로왔다.맛있게 먹고 있는 우리의 기색을 살피며 점장한테 다시 전화해보면 어떻겠냐고 건이가 물어보았다.아마 오늘은 점장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상준이의 말에 건이는 머리를 끄덕였다.지금 다시 전화해도 받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였다. 건이가 아침에 근심스레 물어보던 공장알바얘기가 언뜻 떠올라 나는 숟가락을 놓고 밖에 나와서 공장에 전화를 했다.사무실 당직직원이 잠시만 기다리라며 전화를 야마구찌 공장장에게 바꿔주었다.사연을 듣고 어떤 결정이 나올지 불안했는데 나와 상준이가 련대보증인이 되면 건이를 다시 받아주겠다는 공장장의 말을 듣고 건이한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 것 같아 그만 코마루가 찡해났다.어쩌면 건이가 다시 일을 못한다고 하면 나도 이 공장알바를 때려치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마치고 집주위를 거닐면서 건이가 직접 점장한테 얘기했더라면 되였을 간단한 일을 나와 상준이가 끼여들어 괜히 점장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지 않았나,그래서 수상한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점장이 역전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았나 돌이켜보기도 했다.그런데 그에 앞서 건이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낮은 임금을 지불하며 장기간 고용하고 싶었던 건이가 불시에 알바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건이에 대한 보복심이 생긴 것이고 이참에 외국인들을 한번 혼뜨검 내주려는 악한 마음을 품은 것이 틀림 없는 것이다.그렇지만 위엄 있는 일본경찰들이 우리한테서 범죄행위와 같은 혐의를 잡아내지 못할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다시 집에 들아와 건이에게 저녁에 같이 공장에 가보자고 했다.공장사람들을 보기 미안해서 요며칠 일하러도 나가지 않았다며 건이는 다른 알바를 찾겠다고 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상준이가 눈치를 채고 동갑 셋이 함께 일하면 재미있지 않냐고 해서야 아까 공장에 전화를 했는가고 물어보았다. "며칠 전의 일도 있었고 세 분이 친구이기에 잠시 평일 밤알바는 하지 말고 토일 밤알바만 같이 하도록 합시다." 수완이 좋은 야마구찌 공장장이 련대보증인 말은 꺼내지도 않고 결단성이 있게 간단하게 말하고는 레이저실로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레이저실에 들어서니 모두들 건이를 에워싸고 다시 왔구나,이젠 괜찮냐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근심 어린 어조로 위로해주었다.누가 신고한 것이라고,나쁜 놈들도 많기에 앞으로 매사에 주의하라는 말들에 건이는 눈시울을 붉혔다.건이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는 공장장이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노라니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구나 하는 생각이 갈마드는 것이였다. 이튿날부터 건이는 학교에 다녔다.대학원과는 달리 일본어학교에서는 출석률이 80%이상이여야 비자를 연장할 수 있다. 며칠이 지났을가 건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우리에게 두번 다시 페를 끼치기 미안해서 혼자 점장을 찾아갔는데 로임을 절반밖에 주지 않더라는 것이였다.그러면서 도꾜 K역 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동집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서 알바를 하면 나머지 로임을 지불해주겠다고 했다. 정말 미치고 환장한 놈이구나. 일본은 로임체불이란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알고 있었다.언제인가 상준이한테서 한국에서는 로임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제대로 주지 않는 일도 있다고 들었지만 4년째 일본에 있으면서 이런 일은 듣다 처음이였다. 그래 어떻게 대답했는가고 물었더니 이젠 개학이여서 학교에 매일 다녀야 하기에 잠시 알바를 못하겠다고 거절하자 중국사람들이 돈 벌려고 일본에 온 것이 아니냐고 거리낌없이 빈정대더라는 것이였다. 토요일 저녁에 다시 만나 얘기하자고 전화를 놓고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K역이라?역전 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동집? 그럼 이전의 그 우동집이 아닌가? 나의 머리속으로 지나간 일이 빠른 슬라이드로 지나갔다. 꼭 2년 전인 어느 날 밤,나는 K역 서구를 나와 네온등불빛이 눈부신 거리로 찾아갔다.상준이한테서 들은 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러브호텔이며 AV비데오점이며 성인완구점이며 그리고 성감맛사지방이며 풍속점들로 빼곡히 들어앉은 골목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침내 눈 앞에 보이는 우동집에서 멈춰섰다.출입문 손잡이 옆 유리창에 작은 간판이 버젓이 걸려 있었다. -중국사람과 개는 들어오지 못한다! 과연 말 그대로구나.이 개 같은 놈들.아니,개보다 못한 짐승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흔이 넘어보이는 뚱뚱한 놈이 주방에서 하품질하고 있었고 옆에는 마누라인지 첩인지 모를 계집년이 몸을 비꼬아대며 아양을 떨고 있었다. "기쯔네우동 한그릇." 나는 뽑아쥔 우동표를 카운터에 탁 소리나게 올려놓았다.그리고는 온수기에서 더운 물이 아닌 찬물 한 컵을 받아 테이블에 가져다놓고 메뉴판을 살펴보았다.값은 여느 가게와 다를 바가 없다. 잠시 후 우동이 올라왔다.나는 젓가락도 대지 않고 반말로 쏘아주었다. "이 가게 우동 비싸지 않은가?맛도 없으면서.그렇잖은가?" "네?..." 놈은 의아한 눈길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옆의 계집년은 덴겁하여 놈의 옆에 딱 붙어섰다.나는 보라는 듯이 우동 우에 찬물 한 컵을 그대로 철철 넘치게 쏟아놓았다.땅바닥에 굴러떨어진 우동 면발들을 발로 짓밟아 뭉개놓고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리가도고자이마시다." 가늘게 떨리는 두 년놈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전차에 오른 나는 라는 간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피가 꺼꾸로 솟구쳐 올랐다.그 놈에게 귀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나왔던 걸 하고 후회했다. 며칠이 지난 후 상준이한테서 그 우동집을 지나면서 간판이 보이지 않더라는 말을 들었다.그 무렵,도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는데 그 날 새벽에 중국류학생들이 뛰쳐나와 부근의 사람들과 개들을 살려주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는 것이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 했는데 이제 보니 2년 전의 그 놈이 맞구나.일이 참 묘하게 번져가는구나! 그럼 그 놈도 나를 알아볼 것이다. 그런데 그 놈이 아직도 나쁜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건이를 얕잡아보고 기껏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 났구나.중국사람들을 업신 여겨도 분수가 있는거지. 어떻게 하면 좋을가? 남의 나라에 와서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이미 전과가 있는 건이한테 더 이상 피해를 주면 강제출국 당할 수 있다. 나는 가방에서 우찌다점장의 전화번호를 적었던 메모지를 꺼내 한참 보다가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이튿날 아침, U역으로 가는 전차를 탔다.전차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7시30분이 거의 되였다.오늘도 프랫트홈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사람들이 정연하게 줄을 서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동집에서 우찌다가 일하고 있었다.주문한 우동을 한 젓가락 먹다 말고 옆의 손님이 나가자 인츰 카운터 안으로 우동그릇을 들이밀며 말했다. "우동을 먹지 않았으니 절반 값은 받아야겠소." 그리고는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내 우찌다에게 흔들어 보이고 그대로 우동그릇 안에 던져넣었다. "손님...저..." 나를 알아본 것인지 우찌다가 뒤말을 잇지 못했다.옆의 종업원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서 있었다. "절반 값을 받으러 또 올거요." 나는 우동집을 나와 전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걸어갔다.                                5.                                   졸업론문 때문에 도서실에서 참고서적들을 뒤적이느라 바삐 보냈던 금요일 오후,음력설도 다가오고 오늘이 작은 설(小年)인데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상준이와 같이 일찍 집으로 와달라는 건이의 전화를 받았다.건이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여 있었다. U역에서 내려 우동집을 지나며 보니 한가한 시간대인지 종업원 둘 만 있고 가게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출구를 나와 고반(交番.역전 경찰서)앞을 지나는데 전번에 만났던 경찰관이 서아세아에서 온 듯한 외국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마주오는 우리를 알아보고 머리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너희들을 나쁜 사람으로 잘못 알았다는 듯한 눈빛이 흘러왔다.우리도 그냥 알은 체 하며 옆을 스쳐지났다.평시에는 저렇듯 상냥하고 친절한 경찰관이 일단 신고가 들어오면 위엄 있게 나서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건이의 집은 전번보다 깨끗하게 정리되여 있었다.아무렇게나 벗어던진 바지며 내복이며 양말짝들이 방안 이리저리에 널려 있어 엉덩이를 붙일 자리조차 찾기 힘들었는데 오늘은 마치 깨끗한 일본인 교수님 집에 초대라도 받은 기분이다. 날자에 빨간 동그라미를 표시한 달력를 가리키며 건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세주일간의 로임 7만8천엔에서 먼저 4만엔을 받았으니 나머지 로임은 3만8천엔이라고 한다.3만8천엔.일본에서는 그닥 눈에 차지 않는 돈이지만 당시의 환률로 따져보면 중국에서는 나또래 출근족들의 반년월급을 훨씬 초과하는 액수였다.오후 수업이 끝나서 건이는 우동집에 다시 들려보았다.며칠이나 보이지 않던 우찌다가 오늘은 면바로 나와 있었다.종업원들이 들을가봐 두려웠는지 우찌다가 건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서 로임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나머지 로임을 인차 지불하겠다고 한다.그러면서 지금 하는 알바를 그만두고 K역 우동집에서 일하면 시급을 800엔으로 인상해주겠다는 것이다.이번엔 건이도 강하게 맞섰다.내가 일한 만큼 받는데 무슨 잘못이 있는가,나도 일본의 로동법을 잘 알고 있다,로임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는 건이의 말에 우찌다는 흠칫 놀라더니 겉웃음을 지으며 오늘 가져온 돈이 얼마 되지 않기에 래일 오전에 다시 오라는 것이였다. “잘 했다.학교에 다니더니 이젠 일본어를 잘 하는구나.” 상준이가 웃으며 칭찬해주자 건이도 기분이 좋아 따라 웃었다. 우찌다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가? 간만에 흡족해하는 건이의 얼굴을 보니 이젠 정말 시름 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건이가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누님과 매형이 중국에 와서 결혼식을 올릴 때 찍은 사진이였다.누님과 매형이 괜스레 근심할가봐 아직 말하지 않았다며 이제 월급을 다 받으면 두 분한테도 알리고 부모님과 애엄마한테도 얼마간 송금하겠다고 했다.그러면서 딸애한테 고운 옷을 사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왔는데 엇저녁에는 딸애가 너무 보고 싶어 잠도 이루지 못했다며 안경을 춰올리고 눈굽을 찍는 것이였다. 나도 그만 가슴이 뜨끔해났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일본에서 로동의 대가로 받는 첫 로임인데 운도 나쁘게 악덕업주를 만나 이런 고초까지 껶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우찌다가 더욱 괘씸하고 가증스럽기 그지 없었다. “자,이젠 맛있는 료리를 할게.” 건이가 다시 웃으며 팔을 걷어올리고 주방으로 갔다. 사실 지금까지 많은 곳에서 알바를 해왔지만 우찌다와 같은 점장은 진짜 처음 보았다.중국 류학생도 일본인 학생과 동등한 시급이라며 차별하지 않고 알바를 그만둘 때에도 아무 때나 다시 찾아와도 좋다던 여러 가게 점장들의 선량한 얼굴이 다시 안겨왔다. 우찌다,어쩌면 네놈만은 마음씨 착하고 외국인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많은 일본인들과 이다지도 다르단 말이냐? 똑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주방에서도 먼가 떨어지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주방에 들어가보니 작은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 “뭘 그렇게 또 깜짝 놀래?” 상준이가 웃으며 문께로 갔다.상준의 말에 나도 그만 웃음이 나왔다.   “아니야.내가 열게.” 텔레파시라도 통했는지 건이가 젖은 손을 바지에 쓱 닦고 문을 열자 건이의 누님과 매형이 들어섰다. “안녕하세요.선배님께서 어떻게...” 건이의 매형을 보던 상준이가 꾸벅 하고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건이의 매형이 상준의 한국 **대학 3년선배였던 것이다.상준의 말을 듣고 그제야 알아본 듯 건이의 매형도 상준의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세상이 작다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던가.건이의 누님도 우리를 보고 너무 반갑고 고맙다며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저녁을 먹고 래일이면 건이가 나머지 로임을 다 받는다고 기뻐하며 나와 상준이는 역전으로 향했다.아홉시가 거의 되여서인지 우동집은 이미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이튿날 저녁,건이가 갱의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으며 반겨줄 거라 생각했는데 건이의 낯빛은 밝은 전등불빛에서도 그늘이 진 듯 어두워 보였다.오늘 오전 우동집에 몇번 가보았지만 우찌다가 나오지 않았고 전화도 몇번이나 했지만 받지 않더라는 것이였다. 일이 끝난 줄로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였구나. U역 우동집을 다시 찾아갈가?아니면 K역 앞에 있는 그 우동집을 찾아갈가? 아니다.이번엔 건이의 말대로 우리가 경찰서에 신고해보자. 옳아.직접 U역 경찰서로 찾아가자! 그 이튿날 아침,셋은 다시 U역에서 함께 내렸다.먼 발치에서 보니 우찌다가 있었다.우리는 서쪽 계단으로 가지 않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출구를 나와 경찰서를 찾아갔다.작은 경찰서 안에는 경찰관 두 명이 있었다. “안녕하세요.무슨 용건이 있어요?”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중년 경찰관이 기립자세로 일어서며 물어보았다. “나쁜 놈을 신고하러 왔습니다.” 건이가 선뜻 대답했다. 교대하러 금방 들어왔는지 돌아서서 복장을 갈아입던 다른 경찰관이 우리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그 경찰관이였다. “당신들이네.무슨 일로 찾아왔어요?” 이번엔 상준이가 나섰다. 상준이가 진술하는 사연과 우찌다의 전화번호를 서류에 기록하고나서 그 경찰관이 곧바로 우찌다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였다. “하이!하이!” 전화기에서 우찌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마치고 그 경찰관이 량측이 여기서 대면하기로 했기에 우리를 밖에 나가서 좀 기다리라고 했다. 따끈한 캔커피라도 사려고 나는 택시정류소 건너에 보이는 세븐이레븐(24시간영업슈퍼) 밖에 설치된 자판기로 갔다.캔커피 세개를 뽑아가지고 다시 경찰서로 가려는데 경찰서 앞에 있던 건이와 상준이가 보이지 않았다.우찌다가 호출령을 받고 헐레벌떡 벌써 찾아들어간 모양,경찰서에 들어서니 우찌다가 허리를 굽히고 연신 사죄하고 있었다.책상에는 로임봉투가 놓여 있었다.마지막으로 그 경찰관이 서류에 사인하라고 하기에 건이가 먼저 사인하고 우찌다도 뒤이어 사인했다. 허리를 굽힌 채로 질질 뒤걸음질치며 경찰서를 나가려던 우찌다가 문 옆에 서 있는 나와 그만 부딪치고 말았다. 뒤늦게야 나를 알아본 우찌다는 억-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였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두 경찰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밖에 나오니 오늘 따라 겨울의 아침해살이 유난히 눈부시고 따스해 보였다.                                6.   한주일이 지난 금요일은 음력설이였다. 일본에서 보내는 명절날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쳤다.일본인들은 음력설을 쇠지 않지만 일본에 있는 류학생들은 설날에 한데 모여 친구들과 회포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즐겁게 설명절을 보냈다. 엇저녁에 다른 알바가 있어 누님집에서 설을 쇠자는 건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와 상준이는 점심시간을 리용하여 건이와 같이 차이나타운으로 갔다. 요꼬하마 차이나타운(横浜中華街). 이 곳에 거주하는 중국사람들은 몇천명으로서 몇백개나 되는 점포를 가지고 있다.향을 꽂은 큰 항아리며 불상들을 높이 모신 레스토랑과 차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에 대만료리,홍콩료리,광동료리,복건료리,상해료리,북경오리,천진물만두 그리고 짜장면이며 샤브샤브 등 음식가게들이 사이 좋게 이웃을 하고 있었다.하얀 젖통 같은 커다란 만두며 구운 밤이며 각종 중국식 떡들을 밖에서 파는 가게들도 많다.음식종류가 다양하고 가격도 합리하여 외국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처음 바다를 보는 사람처럼 건이는 차이나타운에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물가게에서 건이는 빨간 리봉과 교묘하게 수를 놓아 만든 손수건을 고르며 며칠 전에 산 옷과 함께 딸애한테 보내겠다고 했다.딸애한테 보낼 색다른 선물을 사들고 즐거워하는 건이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요즘 매일 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더니 이젠 제법 우리하고도 일본어로 대화를 하는 건이였다. 구경을 마치고 상준이가 음식점으로 안내했다.료리를 몇 젓가락 집다말고 학교에 가야 한다며 먼저 역전으로 뛰여가는 건이의 뒤모습을 나와 상준이는 흐뭇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느덧 졸업도 막바지에 이르러 포리마데크 알바를 그만두게 되였다. 마지막 밤알바를 마치고 일요일 아침 우리는 건이의 집으로 다시 향했다.U역에 도착하여 우동집을 지나면서 건이가 녀종업원들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우찌다는 보이지 않았고 가게에는 아직 손님이 없었다. “로임 다 받았어요?” 건이의 로임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그 중의 한 중년 아주머니가 낮은 소리로 건이에게 물어보았다.건이가 웃으며 다 받았다고 대답하자 모두들 박수를 보내는 것이였다. 건이의 집에 들어와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잔을 높이 추켜들었다.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묵묵히 앉아 있던 건이가 불시에 화장실로 갔다.방금 전에 역전 화장실에 들렸던 건이였다.수도물을 틀어놓고 한참이나 있더니 방으로 들어와 짐짓 세수를 한 척 보였으나 빨개진 두눈은 감출 수가 없었다. 비록 한달 남짓한 짧디 짧은 시간이였지만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함께 곤난을 이겨내며 지내왔다.정작 리별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아쉽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비여버린 듯 서운함을 이루다 형언할 수 없다.아까 오면서 생각해놓았던 그 많고 많던 말들은 어디로 다 도망을 가버렸는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그저 건이가 낯 설고 물 설은 일본땅에서 린색하고 비렬한 우찌다 그 놈과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자신을 더욱 굳세게 다져가길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점심에 학교모임이 있기에 좀 지나서 나와 상준이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역전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건이를 만류하고 큰길까지 나왔다가 뒤돌아보니 건이는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나는 건이에게 오래도록 손을 저어 보이고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그 후부터 나는 건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건이와 나는 서로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꼭 20년만이였다. 옆에 있던 상준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한주일 전에 건이의 매형을 어느 모임에서 우연하게 다시 만났는데 오사까 모 회사 해외부 부장직을 맡고 있는 건이가 요즘 한국에 출장을 나온다는 것이였다.어제 밤 건이를 만나 나도 래일 한국에 온다고 알려주었더니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료량으로 아까 공항으로 마중 나오기 전에 호텔 커피솦에서 건이가 그런 전화를 했던 것이였다. “너 많이 변했구나.” 나는 건이의 어깨를 가볍게 쥐여박았다. “너희들 덕분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IT회사에 취직하게 되였다.그 동안 너희들과 련락이 안 되더니 오늘 마침 잘 만났구나.저녁은 내가 한턱 낼게” 건이와 헤여진 후 얼마 안 되여 나와 상준이는 졸업하고 각자 귀국하였다. 건이는 매형이 한국에 가있는 사이에 누님 집에 있으면서 슈퍼 알바와 포리마데크 토일 밤알바를 겸해 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다. 서울로 달리는 차안에서 건이가 정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정말.그 우동집 어떻게 되였을가?우찌다 그 놈은 지금도 계속 나쁜 짓을 하고 있을가?” 건이는 아직도 U역 우동집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날 밤,도꾜 시교에 주숙한 호텔에서 불야성을 이룬 밤거리를 내다보다가 이번 일본행에는 먼저 U역에 들려보고 행사에 참가하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나는 오랜만에 U역에 서 있다. 증권회사,은행,우체국이며 빠찐꼬,마크도날드,살롱 그리고 세븐이레븐과 역전 경찰서며 세월이 흘렀어도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는 역전광장 모습들이였다. 다시 역사에 올라가 전차를 기다리는 홈층계를 내려선 나는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계단 밑에 있던 우동집은 어느 새 모르게 깔끔한 케익점으로 업그레이드되여 있었다.마치 어디론가 증발이라도 해버린 듯 우동냄새는 말끔히 사라져버리고 가게에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예쁜 케익들이 오밀조밀하게 진렬되여 있었다. 전차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을 리용하여 우동을 먹던 사람들이 바삐 젓가락을 놓고 출근행렬 속에 줄지어 서던 예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가게를 둘러보거나 가게 안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로 주위는 북적거렸다. 그 일이 있은 뒤 우찌다가 이 케익점을 새로 오픈한 것일가 아니면 이 곳에서 낯판대기를 쳐들고 다닐 수 없어 다른 곳으로 전이한 것일가? -곧 2번선에 전차가 들어섭니다.위험하므로 노란 선 밖에서 기다려 주십시요. 귀에 익은 안내방송을 이어 파란색 전차가 서서히 홈에 들어섰다. "뭘해.빨리 타지 않고..." 먼저 전차에 오른 상준이가 웃으며 나를 불렀다. 발차시간이 거의 되여서야 나는 전차에 뛰여올랐다.그리고는 사람들로 빼곡한 전차 안에서 다시 한번 옛 우동집을 뒤돌아보았다. 우동집.요꼬하마에서 도꾜 도심을 가로질러 사이다마현으로 가는 게이힌도혹꾸센(京浜東北線 ) U역 프랫트홈에 있던 우동집. 20년이 훌쩍 지나간 지금,우찌다는 과연 어떻게 변했을가? 어느 나라에든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전차가 요꼬하마로 달리는 도중에도 나의 머리 속에는 그제날의 일들이 그냥 맴돌이치며 잊혀지지 않았다.                               2017년12월호                
1    [수필] 살구꽃 필무렵 (박명선) 댓글:  조회:2427  추천:0  2016-06-21
살구꽃 필 무렵   박 명선          큰길 옆 살구나무에 꽃망울들이 빠금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살구꽃이 필 무렵이다.      화창한 봄날에 피는 꽃은 많고도 많다.      진달래꽃,사과배꽃,복사꽃과 같이 살구꽃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살구꽃을 제일 좋아한다.      사람들은 흔히 살구꽃을 이쁜 소녀로,치장을 곱게 한 젊은 녀인으로 비유하지만 나는 살구꽃을 보면 어쩐지 할머니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어릴 때 자란 옛고향집 마당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학교 갔다 올 때나 영화 보고 올 때 큰길에서 집골목에 들어서면 저기가 우리 집임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집을 나설 때면 잘 갔다오라고 바래주고 집에 돌아올 때면 반갑다고 맞아주는 듯했다.눈보라와 비바람 속에서도 훤칠하게 잘 자라는 살구나무를 보면 나도 하루 빨리 키가 크고싶었다.       할머니는 추운 겨울이면 헛간에 보관해두었던 낡은 이불을 꺼내 살구나무를 덮어주고 한여름이면 손수 일군 밭에서 일하고 돌아와서는 시원한 뽐프물을 나무에 뿌려주셨다.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서인지 토질이 좋은 땅에서 자라서인지 아니면 할머니의 정성이 고마워서인지 해마다 살구가 많이 달려 살구나무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살구가 입안에 떨어질 정도였다.       할머니는 파란 살구들은 따로 쌀독안에 깊숙히 넣어두셨다.며칠이 지난 후 꺼내보면 노랗게 잘도 익어갔다.할머니는 노란 바가지에 노랗게 잘 익은 살구를 가득 담아 이웃들에 나누어주고 영국더기(룡정시가지 남쪽 작은언덕)너머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전사들한테도 갖다주군 했다.당시는 《영웅 아들딸》 등 영화가 상영되여 전사들도 할머니를 "아마니!"라고 친절하게 불렀다.할머니는 적으나마 소박한 인정을 베풀어 서로 돕고 사는 도리를 나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해마다 살구꽃이 필 무렵이면 나는 꽃망울들을 바라보며 올해도 살구가 많이 달리기만 바랬다.살구가 많이 달려야 살구씨먹기놀음을 많이 놀수 있기 때문이였다.나의 책가방안이며 필통안이며 서랍안에는 보물로 간직해둔 살구씨가 가득하였다.누가 살구씨를 깨먹자고 하면 몇알씩 주기도 했지만...       그러던 어느날,할머니가 "지금까지 모았던 살구씨를 모두 내놓거라.의약공사에 바쳐야 한다."라고 하셨다.의약공사는 바로 우리집 뒤에 있었다.살구씨가 기침약 등 약재에 쓴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까워서 깨먹지도 않고 모아둔 살구씨를 정작 내놓자니 여간 내키지 않았다.우물쭈물 내놓기 아쉬워하는 나를 바라보시더니 할머니는 웃으면서 "올해도 살구가 많이 나면 다시 모으면 되지." 라고 나를 위안해주셨다.나는 할머니와 같이 여직껏 모아두었던 살구씨를 의약공사에 몽땅 가져다 바쳤다.할머니 말씀대로 그해는 살구가 주렁주렁 신기하게도 많이 달렸다.       그 날도 살구꽃이 필 무렵이였다고 기억된다.       학교에 갔다가 집마당에 들어섰는데 할머니가 홍위병 완장을 낀 고중생 몇이와 말다툼하고 있었다. 홍위병들 손에는 톱과 도끼가 쥐여져있었다.       "아니,이놈들이..."하면서도 나는 더럭 겁이 났다.       들어보니 소자산계급의 뿌리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였다.         "살구나무를 베기전에 담이 있거든 저것부터 떼가거라."       할머니는 하얀 벽에 달려있는 붉은 꽃다발을 가르키셨다.지난 청명절에 현정부에서 《혁명렬사가족》이라는 빨간 문패위에 달아준 꽃다발이였다.그것을 본 홍위병들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뿔뿔이 도망가버렸다.반혁명분자들을 족친다며 사처로 쏘다니며 우쭐렁대던 홍위병들도 할머니의 위엄있는 말씀에 주눅이 든 것을 보고 나는 기뻐서 퐁퐁 뛰였다.       봄볕이 따스하던 어느 날이였던가, 동네애들과 소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저녁 늦게 집에 왔더니 살구꽃이 활짝 피여나고 있었다.나는 하얀 구름송이가 빨간 노을 속에 비껴있는 듯한 살구꽃을 눈자리 나도록 올려다보았다.밥상을 갖추는 할머니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여있었다.그날 저녁 할머니는 살구를 먹으면 장수하고 과거에 급제하며 장가 들면 아들 낳는다며 우스운 이야기들도 많이 들려주셨다.       시가지의 소학교들에서는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엔 거의 로동을 하였다.옥수수 영양단지를 만든다, 해란강뚝 철길옆에 새 체육장을 짓는다, 행장을 메고 십여리 떨어진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다 하며 어린 나이에도 갖가지 일들을 경험하였다.      살구꽃이 피고 지며 또다시 찾아온 어느 봄날이였다.로동을 하고 맥없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거리에서 반혁명분자들을 트럭에 싣고 투쟁대회를 하는것을 구경하였다.그런데 아뿔싸! "일본특무"라는 간판을 목에 건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겠는가!와뜰 놀란 나는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와 할머니 무릅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아,그날도 살구꽃이 필 무렵이였지!      그 일이 있은 어느날 밤중에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씀에 잠에서 깨여났다.      아버지가 왔구나!      나는 벌떡 일어나 아버지에게 인사드리려 하다가 아버지의 굳은 얼굴표정을 보고 꼼짝않고 자는척 하였다.      "네가 뭘 잘못했다고..."      "철남이도 남조선특무로 잡혀들어왔습니다."      아버지가 말하는 철남이라는 분은 나의 친구의 아버지인데 현문화국의 령도였다.       "언제 떠나나?..."       "래일아침 철남이랑 함께 갑니다."       "..."       아버지가 로동개조하러 어딘가 먼 탄광으로 간다는 것이였다.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쭈루룩 흘러내리며 베개를 적셨다.       며칠후 할머니는 그만 몸져 누으셨다.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누워계시는 할머니의 얼굴이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살구꽃이 안폈지?"      "아니,폈습니다."      살구꽃이 피지 않았다고 하면 할머니가 서운해 하실까 봐서였다.살구꽃이 아직 피지 않은줄을 번히 아시는 할머니는 가까스로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이제 필 살구꽃처럼 웃으며 살아야 한다!"      할머니의 말씀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내 마음 속에서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다.       한돐이 채 안된 아버지를 둘쳐업고 항일하다 전사하신 할아버지 뒤를 이어 탄약을 나르셨다는 할머니,억울한 루명을 쓰고 투쟁 받는 아버지를 면회하면서 견강하게 버텨내야 한다던 할머니,가도부녀들을 동원하여 비누공장을 세운다며 밤낮없이 보내는 어머니의 등을 밀어주며 집근심은 하지 말라던 할머니...       그해 살구꽃은 할머니를 추모하는지 다른 해보다 더 하얗게 피여보였다.       이듬해 살구꽃이 필 무렵에 우리 집은 아버지의 전근으로 작은 진마을로 이사가게 되였다.이사 가는 날,나는 할머니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이 똑똑 떨어지는 비방울 속에 점점 멀어져가는 살구나무를,할머니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그리며 이제 슬프게 피여날 살구꽃을 오래토록 바라보았다...       그후부터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도시생활을 하면서 살구꽃을 거의 잊고있던 어느해 봄, 한국 수원시 어느 한 주택가에서 마당에 서있는 살구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여기보다 한두달 계절이 빠른 원인인지 살구꽃이 피여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살구꽃을 다시 본 나는 너무 반가와 찰칵 하고 잊을수 없는 순간들을 카메라에 남겨두었다.살구꽃이 피여있는 집이 마치도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집같아 보여 자꾸 그리로  눈길이 끌리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아 한참이나 서성이였다.            몇해 전부터 작은 이 도시에서는 도시의 상징으로 살구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개발구에서 공항까지 동서로 뻗은 길거리와 주간통로에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살구나무들에 이제 곧 연두색 살구꽃이 곱게 피여나리라.         오늘도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살구나무를 올려다본다.       꽃이 필 무렵인데 달콤시큰한 고향집 살구맛이 입안에 가득 고이며 군침이 꼴깍 넘어가는것같고 할머니의 말씀이 다시 귀전에 울려오는 것 같다.        이제 필 살구꽃처럼 웃으며 살아야지!        (2016년  제5월호)                                                                                                                  옥수수와 소년   빨간 토성 현정부 옆 초대소 바자 밖에 애어린 옥수수 몇 포기가 비술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라고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은 학교 갔다오는 길에 옥수수 두 포기를 조심조심 파가지고 집에 왔다.한달 전에 물만두처럼 빚은 옥수수 영양단지를 들고 줄지어 어딘가 먼 산간마을 학교텃밭에 가서 처음 보는 길고 구불구불한 밭고랑에 소조별로 파고, 심고, 묻고, 물주고 하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소년은 헛간에 남겨두었던 진흙과 마당에 널려있는 닭똥을 반죽해 만든 영양단지에 옥수수를 넣어서 마당에 심어놓고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겠지.이 옥수수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보여줘야지!) 손자의 거동을 지켜보던 할머니도 웃으며 물을 떠다주었다. 두 포기 옥수수는 마당에 있는 오이랑 가지랑 고추랑 같이 매일 잘도 자라갔다.초대소 바자 밖에서 자라던 나머지 몇 포기는 비에 씻겨갔는지 며칠 후에 온데간데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여름날,학교텃밭에 참관하러 와서 영양단지에서 자란 옥수수와 농가의 옥수수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하는 선생님의 물음에 학생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학교텃밭의 옥수수가 농가의 옥수수보다 훨씬 더 빨리 자랐던 것이다. (학교텃밭과 내가 심은 집마당 옥수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빨리 자랄까?그리고 우리 집 밭의 옥수수는 또 어찌 되였을까?...) 집 남쪽 영국더기에 위치한 부대를 지나 작은 산비탈에 할머니가 밭을 일구고 옥수수를 심었던 것이다.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집에 가다 말고 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4중 운동장을 지나 부대 구락부까지 거의 왔을 때, 할머니가 닭먹이 세투리를 가득 캔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오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이 더운데 찾아왔냐?" 소년은 옥수수를 보러 왔다 하기엔 우습게 생각되여 '아님다.그저...'하고 시무룩히 웃으며 할머니의 보자기를 받아 내려놓았다. 몇달 후,헐렁한 로동장갑을 끼고 학교텃밭의 옥수수를 따러 갔다.5.7분교 식당에서 삶아낸 옥수수를 맛 보면서 소년은 집마당의 옥수수는 언제 먹을수 있을까 궁리해보았다.집마당의 옥수수들도 거의 여물어가고 있었다.학교에 갔다오면 옥수수껍질을 조금씩 벗겨보며 살펴보군 했던 것이다. 한 열흘이 지났을까, 학교 갔다 집에 오니 할머니가 가마에 옥수수를 가득 삶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집 밭의 옥수수 맞지 예?" "그래." 소년은 너무 기뻐 입이 함박만 해서 옥수수를 먹었다. 삶은 옥수수를 맛 있게 먹고나니 마당의 옥수수가 다시 생각났다.이젠 딸 때가 다 되였는데... 며칠 후, 초대소를 지나오는데 어느 집에서 옥수수를 굽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옥수수를 구워먹으면 맛 있겠다.풍로불에 구워볼까?) 집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두부장을 풍로에 보글보글 끓이며 맛 있게 먹던 것을 보고 언제인가 장난 삼아 진흙으로 쬐꼬만한 풍로를 하나 만들어 헛간에 두었다. 소년은 옥수수 한 이삭을 따서 껍질을 벗겼다.샛노랗고 통통하게 잘도 여물었다. 와!그 냄새 참 좋다! 젓가락을 옥수수에 찔러넣고 한참 풍로불에 옥수수를 굽고있는데, 어머니가 웬 키다리 젋은이 둘을 데리고 집마당에 들어섰다.가도 부녀주임직을 맡은 어머니였다. "상해 지식청년이란다.형님이라 인사하거라." 형이 없다보니깐 동네의 키꼴이 큰 젊은이들을 자주 형님이라 불러왔다. "형님...아니,거거 니호우?" 두 형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구운 옥수수가 맛 있겠다 라는 뜻으로 웃으며 서로 말하는 것 같았다.어머니는 옥수수를 절반 뚝 끊여서 형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형님들은 옥수수를 이리저리 빙빙 돌려보며 흠흠 냄새까지 맡더니 처음 먹는 사람처럼 맛나게 훑어먹는 것이였다. 상해에는 까짓 옥수수도 없을까 생각하면서 소년은 군침을 꼴깍 넘기며 아까워서 지금껏 먹지도 않은 옥수수인데 하는 눈길로 두 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건 못 먹어!" 한참 후, 소년은 송치까지 먹으려 하는 형님들의 손을 와락 잡아당겼다.그러자 형님들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더니 서로 마주보며 멋적게 웃는 것이였다.소년은 너무나 우스워서 배를 끌어안고 깔깔깔 웃어댔다. 그 날, 소년은 두 형이 쌍둥이란 것을 알았고 동네애들한테는 상해에서 온 형님들이라고 우쭐렁거리기도 하고 저녁에는 같이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았다. 두 형은 인재였다.큰 형은 하모니카를 아주 잘 불었고 작은 형은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반짝이는 붉은 별》, 《영웅 아들딸》, 《갱도전》의 주제가뿐만 아니라 조금 발음이 우스웠지만 《꽃파는 처녀》에서 나오는 노래도 너무나 잘 불렀다. 두 형은 낮이면 동산자락에 위치한 길흥대대에 가서 일하였다.팔토시를 끼고 일하러 나서는 형님들의 모습이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 저녁이면 두 형의 하모니카와 노래소리가 울려퍼져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마당에 모여들군 하였다.그럴 때면 소년은 옆에서 옥수수 송치를 하모니카 연주하듯 흉내 내며 동네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옥수수를 삶고 있는 할머니한테서 홍범도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어머니가 형님들과 같이 바삐 집에 들어오더니 행장부터 차리는 것이였다. 형님들의 어머니가 사망하여 상해에 돌아간다는 것이였다. 눈물이 글썽하여 전보문을 다시 보던 큰 형이 가방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소년에게 주면서 뭐라고 몇 마디 부탁하더니 '짜이짼!'하고는 집문을 나섰다.소년은 할머니가 신문지에 감아준 삶은 옥수수와 하모니카를 량손에 쥐고 멀어져가는 두 형의 뒤를 초대소 대문까지 쫓아가며 울면서 불렀다. "니먼 짠쭈.샹하이 거거먼!..." 집에 돌아와 소년은 보자기에 싸두었던 나머지 옥수수 한 이삭을 풀어헤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형들이 떠나는 줄 알았더라면 이 옥수수도 마저 구웠던 걸 그랬어!) 이듬해 봄,할머니는 집마당에도 옥수수를 심었다. 할머니는 소년이 남겨둔 옥수수 한 이삭과 같이 겨울 내내 벽에 걸어서 말려두었던 옥수수들을 손으로 부셔서 물에 불려 씨앗을 틔워냈다. 비가 내려 땅이 촉촉하게 물기에 어려있던 해볕이 좋은 날, 소년은 할머니와 같이 집마당에 옥수수를 심은 그 길로 집밭에 갔다.할머니가 호미로 흙을 파내면 소년이 씨앗을 뿌려넣고 흙을 도로 묻어주고 하였다.할머니의 손마디는 남자들 손처럼 굵직하다 못해 마디마디가 굳은살 투성이였다. "왜서 세알 씩 뿌려라 함까?" "하나는 새가 먹고 하나는 벌레가 먹고..." "?..." 작년 봄에 학교텃밭에서 영양단지를 심을 때는 물 길으러 몇 번이나 갔다온 터라 몇 알 뿌려넣었던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맞지! 손기음을 매러 왔을 때 선생님이 마을의 년장자인,흰 수염을 날리는 할아버지 한 분을 모시고 와서 두 세개씩 자란 포기 가운데서 큰 것을 남기고 옆의 작은 것은 손으로 가볍게 뽑아낸 다음 흙을 꼭꼭 다독여주는 방법을 배워주셨지. 학교텃밭보다는 작은 밭이였으나 한나절이 걸려서야 옥수수를 다 심었다. 어느 여름날,발목을 상한 할머니 몰래 소년은 호미를 들고 밭에 와서 혼자 기음을 매면서 닭먹이 세투리도 한 자루를 캤다.비록 많이 지치기는 했어도 할머니를 대신해 어른들처럼 큰일을 해놓은 듯 마음이 뿌듯해나고 가슴 한켠에는 벌써부터 풍작을 거둔 기쁨이 신선하게 넘쳐있었다. "야커시 야커시 따자이디 뽀미 쩌머양디 창예..." 문득 옥수수 수염을 달고 노래를 부르던 샹하이 작은 형과 하모니카를 주고간 큰 형이 생각났다. (쌍둥이 형님들은 잘 있는지?...) 그 해는 무슨 영문인지 보릿고개라는 계절에 소년의 집도 쌀고생에 시달리며 옥수수떡에 푸대죽까지 먹은 나날들도 있었다.배 고파서 옥수수대를 물짜서 먹었다던 할머니의 말씀에 얼마나 배 고팠으면 그런거까지 다 드셨을까 속으로 웃었던 소년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설음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를 그때에 알았다. 그 때가 1974년이였으니 소년이 열살 되던 해의 일이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이 벌써 네 번도 바뀌였다. 오늘 소년은 아니,이젠 중년이 된 그 때 그 소년은 지금은 많이 낮아 보이는, 아직도 빨간 토성인 시정부 옆 옛적 초대소였던 자리를 지나면서 소년시절의 옥수수와 샹하이 형님들을 마음 속에 다시 그려본다.                                                                               《청년생활》 2016년 7월호                                           떨어진 단추 하나     꽃샘추위가 한창인 어느날 아침, 출근하려고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걸치려는 순간, 딸랑 하고 단추 하나가 떨어졌다.  채우고 벗기고 드바쁜 일상에서 빠져나오고싶었을가. 나는 떨어진 단추를 다시 달기 시작했다. 쉰고개를 넘긴 남정이 바느질을 얼마나 잘 하랴만 한뜸한뜸 열심히 꿰나간다... 코물 훌쩍거리며 뛰놀던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손수 지은 솜옷저고리에 똑딱단추(호크라고 불렀다)를 달아주셨다. 새 솜옷저고리보다 똑딱똑딱 소리나는 단추가 더 신기해 애들 앞에서 뚜루룩~ 기관총처럼 단추를 벗기기도 하고 똑딱똑딱 채우기도 하며 자랑을 해댔다. 그러던 어느날, 단추 하나를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단추 하나가 떨어져버리니 저도 모르게 남은 단추들이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추운 겨울밤이나 무더운 여름밤에도 할머니는 곧잘 돋보기를 걸고 양말이며 옷가지들을 깁고 집안의 옷들을 하나하나씩 단추가 떨어질세라 꿰매군 하셨다. 그러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려다가 돌덩이 하나가 비어 졸지에 당황했던것처럼, 자리 하나가 비여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그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되여 울음보를 터뜨렸었다. 작년 여름 어느 날 저녁, 야시장에 나갔다가 40대 중반의 사나이가 단추난전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진렬장에는 까만색, 빨간색, 흰색, 노란색, 파란색, 갈색 등 가지각색 크고작은 사이즈의 단추들이 놓여있는가 하면 금속, 유리, 플라스틱, 나무 등 재질들 뿐만 아니라 수공으로 만들어져 보이는 천단추까지 있어 진렬장은 그야말로 한폭의 멋진 수채화를 방불케 하였다. 각종 단추들은 그 어떤 옷에도 어울릴수 있게끔 준비되여있다는 듯이 자신감들로 차넘쳤다. "장사 잘 되나요? 사는 손님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큰장사 바라는 거 아니지요. 허허!" "네?..." "멋진 디자인에 값진 옷도 단추 하나가 떨어지면 입지 못하게 되지요. 그런 단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꼭 찾아오거던요." "아!" 감탄 비슷한 것이 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느 해인가 한국출장 다녀오면서 롯데백화점에 들려 안해가 좋아하는 자주색 봄가을철 세타를 사왔다. 평시에 그렇게 아껴입어오던 세타였는데 어느 날 가슴앞섶의 갈색무늬 단추 하나가 그만 떨어져나갔다. 안해는 며칠동안이나 백화며 시장이며 복장점들을 돌아다니다가 비슷한 단추를 찾다못해 "그 아까운 옷을 그저..."하고 많이 아쉬워했다. 그때 안해가 이런 단추전문난전을 만났더라면 오죽 좋았으랴 싶었다. 지금은 옷가지들마다 여벌단추가 달려있고 옷장에 옷들이 넘쳐나 까짓 단추 하나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간혹 떨어진 단추 하나가 면바로 눈에 띄였거나 달랑 실오리 하나 남아 떨어질 번한 단추를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집에 와서 다시 꿰맬 때는 새옷이라도 사입는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단추 하나가 어느 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곁을 떠난 것을 보면 뭔가를 다시 뉘우치게 되고 그 사나이의 말처럼 단추를 찾아다니게 되지 않을까. 평시에는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단추일지라도 정작 잃고난 다음에는 아쉬워지고 그리워진다. 텔레비죤이나 자동차의 리모콘, 엘리베이터의 버튼, 컴퓨터의 키보드 등에 단추 하나가 비여있으면... 명절날 오손도손 모여앉은 부모형제 친척들가운데 어느 누가의 자리가 하나 비여있으면, 오래간만의 즐거운 친구들 모임에 한 친구가 자리를 비우면 과연 어떻까?  우리는 단추를 잘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끊기지 않는 실과 깨지지 않는 단추처럼 좋은 인연을 계속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서로를 동여맨 실이 지탱끝에 풀려 쓰라린 리별의 바닥에 떨어져 아픈 상처로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는가? 떨어진 단추 하나는 다시 달면 되겠지만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소중한 그 무언가를 떨어뜨리고도 깨닫지 못하고 앞섶을 훤히 열어젖힌채 걷고있는 건 아닌지? 느슨해진 마음을 단단한 실로 다시는 풀려지지 않게 꽁꽁 끄러매는 아침, 제자리를 다시 찾아 고개를 번쩍 쳐들고 동그란 눈을 대롱거리는 단추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더없이 흐뭇했다.   2016년제4월호                                                 니 춥지 않니?   "니 춥지 않니?" "나 안춥다."   조명희의 소설 "락동강"에 나오는 한 대화대목이다. 고중 다닐 때 조선어문수업시간에 을 랑독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김호와 키득키득 웃었다. 대화 군데군데에 사투리가 많이 섞여있어 재밌고 우스워서였다. 우리 둘은 과문을 본따서 "니 춥지 않니?" 하고 물으면 "나 안춥다."하고 대답하고 "니 춥지 않니?" 되물으면 "나 안춥다."하고 대답을 주고받군 했다. 그후부터 우리는 이런 유머스런 말투로 많은 날들을 보내왔다.  농촌티를 약간 벗어난 진중학교 겨울철난방은 난로였다. 국경절기간에 불쏘시개로 싸리나무 세단이라는 임무가 내려졌다. 어느날, 나와 김호는 낫을 들고 강건너 깊숙한 산으로 싸리나무하러 갔다. 빨갛고 노랗게 단풍이 물든 산중턱에 올라섰다. "니 맥없지 않니?" "나 안맥없다." 둘은 나지막한 풀숲을 찾아 앉았다. 10월의 따뜻한 해볕이 내리쬐여 겉옷으로 입고있던 군복을 벗어버렸다.그리고는 사과배를 꺼내 먹었다. "니 맛있니?"  "나 맛있다." 작은 진을 둘러싸고있는 과수원에 풍년이 들어 사과배는 귀한 과일이 아니였다. 한참후 싸리나무를 베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단이 되면 꽁꽁 묶어서는 눈에 잘 띄이는 큰 나무밑에 갖다놓군 했다. 세단이 거의 되여갈 무렵, "아가!"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호가 나무가지에 손이 찔린것이다. "니 일없니?"   "나 일없다." 다가가서 보니 크게 찔리지는 않았다.우리는 나무지게를 해서 싸리단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그해 겨울은 지독하게도 추웠다.교실에서 손을 호호 불며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다. "니 춥지 않니?" "나 안춥다." 이듬해 대학시험에 우리는 모두 락방하였다. 눈앞이 캄캄해났다. 군대에 갈가 하다가 재학하기로 했다. 김호는 현성고중복습반을 택하고 나는 그냥 남아서 문과를 하기로 했다. 김호가 현성고중에 가는 전날밤 저녁, 나와 김호는 처음으로 상점에서 락화생을 놓고 독한 흰술을 마셨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자꾸 치밀어오르는 것같아 쓴것을 그대로 쏟아넣군 했다. "니 취했지 않니?" "나 안취했다."  둘은 서로 반짝이는 이슬을 쳐다보다가 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이듬해 우리는 모두 대학에 입학했다. ... 졸업후 나는 ××학원에, 김호는 ××병원에 배치되였다. 하해(下海)붐이 일던 그 당시에도 교원과 의사는 사회존중을 받는 좋은 직업이였다.남편으로, 아빠로, 교사로 보내오던 몇해후엔 좋은 집이라 말할 수 없어도 세방과는 "안녕!" 할 수 있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층집도 차려졌다. 한해에 고작 한명이 대학에 입학하나마나하는 작은 진마을에서는 "개천에 룡이 났네", "촌놈이 성공했네" 하고 떠들썩하며 야단법석이였지만 나한테는 오히려 부담이라 할가 앞으로 성큼 미래를 향해 더 이상 발을 내딛지 못할까 봐 어정쩡한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좋은 자리에서 철밥통을 꼭 끌어안고 국가봉금을 계속 타먹으며 퇴직할 때까지 편안하게 보낼 것인가? 지금은 젊은이들을 많이 중용하는 시기인데 승진도 노려볼 것인가? 아니다. 고민 끝에 일본류학을 결정했다. 대학일본어시험출제번역과 채점도 몇년간 하였고 학위를 따고오면 외지대학 일본어학부에 들어가는데도 큰 지장이 없잖겠는가? 지금은 통신이 발달하였지만 그땐 사무실전화도 변변찮아 친구를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직접 집이나 직장에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서로 직장생활에 바삐 보내다보니 작은 시내에서도 나와 김호는 만날 사이가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나와 김호는 조용한 식당에서 만났다. "니 잘 있었니?" "나 잘 있었다." 오래간만에 다시 주고받는 말이라 서로 소리내여 한바탕 웃었다.  "나 며칠후 일본에 류학간다." "그래?" "석사공부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어서..." "좋은 일이지. 나도 병원에 계속 있자니 경쟁도 심하고..." 오래간만에 어쩌다 만났다가 좋은 얘기들을 나누지 못하고 며칠후 일본에 간다고 말을 꺼내자 어쩐지 마음이 서글퍼졌다. "학원은 어쩌고?" "글쎄, 갔다와서 보지뭐." 정작 몇년간 열심히 일해온 학원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니 괜찮니?" "나 괜찮다." ... 일본에서 돌아온 날, 훤한 대낮인데도 수도공항이 어두워 보이고 세관인원들의 오만한 태도와 거치른 말투에 와락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비행기를 갈아타고 집에 오니 기분이 좋고 소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무척 커보였다. 몇년 안되는 사이에 여러 중점중학교들에서 일본어과목대신에 영어를 많이 설치하였다. 일본어교원이 넘쳐나 교무처나 도서실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래도 조선족학생들은 대학시험에서 영어보다 일본어가 우세가 아니였던가? 이렇게 되면 앞으로 학원의 업무도 대폭으로 줄어들 것은 뻔한 일이다. 한편 지방대학 일본어학부에서도 학생들이 줄어들어 일본어기초가 없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령기점"(零起点)반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외지 대학에 가려고 생각해보니 그동안 혼자서 애를 키우며 고생한 안해한테 차마 말을 꺼내기가 거북하고 미안한 감도 들었다. 마침 대학시절 은사였던 일본어학부장님의 요청이 있었다.  나는 며칠동안 밤늦도록 안해와 토의하고 고려하다가 결국에는 외국어양성학원을 설립하기로 했다.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 그리고 컴퓨터학과를 설치하고 일본류학도 겸하였더니 인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한창 30대 초반이라 어느 가능성으로던지 길은 다 열려져있는 것처럼 세상이 커보이고 매일 매일이 에니메이션처럼 신비롭고 재밌는 그림책을 한장한장 넘기듯 신선한 흥미에 넘쳐있었다. 이듬해에 딸이 태여났다. ... 일본류학이 한창이던 어느 날, 한국에서 금방 박사학위를 따고온 김호가 퇴근길에 사무실로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쉴새없이 걸려오고 류학비용이요, 학비송금이요, 비자신청이요 업무에 분주히 보내는 직원들로 사무실은 북적거렸다. "너 참 바삐 보내는구나.나 요즘 ××의과대학부속병원 전근수속중이다. 여기보다 조건이 많이 좋아서..." "오. 김박사 축하!" 친구들중에서 김호가 유일한 의학박사였다.기실 나도 일본에서 박사과정까지 생각해보았지만 당시는 옆에서 진로를 일깨워주는 지인도 없고 돌격대처럼 혼자 앞장에 나섰다가 전투가 끝나자 곧바로 전장을 수습하고 본영에 되돌아왔었다.   그날 저녁 나와 김호는 밤깊도록 술을 마셨다. "니 이전에 모교일본어학부에 들어가지 않은 걸..." "그건 왜?" "니 후회하지 않니?" "나 안후회한다." 김호의 말에 얼굴이 약간 뜨거워났다. "앞으로 어떻게 하자고?" "이대로 밀고나가다가 보지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나를 한참 지켜보더니 김호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니 변했지 않니?" "나 안변했다." ... 딸애가 소학교 3학년, 아들이 고중2학년이던 어느 해 봄, 정부에서도 제일 분망한 부문인 접대처에서 처장으로 일보던 안해가 신체검사에서 그만 페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말기라는 것이다. 청천벽력이였다. 해마다 여름철은 업무분망기여서 새벽 일찍 나갔다가 저녁늦게 들어오면서도 기침 한번,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던 애엄마가 아니였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창 사업할 나이에 큰 봉변이 닥쳐온 것같아 못마땅하고 억울하게 생각되여 한심한 나의 처지에 경악하면서도 그동안 안해를 더 따뜻하게 사랑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되고 부끄러워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들의 대학시험까지만 보아도 한이 없겠다던 애엄마를 꼭 살려야 한다!  나는 항암치료를 받는 안해를 보살피는 한편 이곳저곳 수소문하여 좋다는 밀방약들을 구해들이고 김호도 다른 큰병원에서 지방병원에 없는 고급약들을 알선해주었다. 허나 병마는 너무나도 무정하였다. 아들의 대학입시 열흘을 두고 안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업 하랴, 안해 병시중 들랴,두 아이의 아빠 할랴, 엄마대신 할랴 그동안 바삐도 보냈던 나 자신이 마치 삶의 온갖 전선을 걸치며 고군작전하다가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패잔병처럼 느껴졌다. ...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내보내고 아픈 추억만이 찢겨진 가슴에 스며들어 우울하고 어두운 날을 묵묵히 보내는 사람들도 많이 보아왔다. 남들이 껶지 않는 싫은 경험에 모대기며 험난한 처경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어찌 나 혼자뿐이랴. 나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였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은 앞길에 수없이 가로놓인 난관과 도전을 하나하나 헤쳐가는 과정이 아닐까? 살다보면 아스팔트가 깔린 탄탄대로만 걷는 것이 아니라 때론 자갈길이나 비탈진 길도 걸으면서 내성을 더욱 튼튼하게 키워가는 것이 아닐까? 내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어느 날 어머니가 "에구, 그만 정신 차리거라. 그러다 몸을 상하겠다. 이젠 애들을 잘 키워야지. 쯔쯔쯔..."라고 푸념하신다. 나는 굳게 의지를 다짐하면서 다시 사업에 뛰여들었다.  3년전에 아들은 북경 모 중점대학을 졸업하고 딸은 명년이면 대학시험을 치른다. ... 생의 전반전은 낯선 상대를 만난 것처럼 어영부영 보내왔지만 후반전에는 보다 열렬하게 사업과 현실의 잔디밭에서 지금껏 익혔던 인식과 정열을 한껏 쏟으며 열심히 뛰고 싶다. 세상을 한참이나 얼궈놓았던 찬바람이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새들이 시름놓고 하늘을 나는 걸 보니 따뜻한 봄도 다가온가보다. 며칠전에 저 멀리 김호한테서 연락이 왔다. 래일이면 휴가를 맡고 고향에 놀러온 김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옛날 김호와 주고받던 대화가 언뜻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니 춥지 않니?" "나 안춥다." 그래, 난 춥지 않다. 나에게 항상 웃음을 주고 뜨거운 힘이 되여주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 소중한 친구들과 나에게 수많은 하트를 보내주는 이들이 있기에...   2016년4월호                       갓 담근 배추김치  김치는 우리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김치가 없으면 입맛이없고 무언인가 텅 비여있는 것 같다. 그야말로 김치는 "그대없인못살아"인가 보다.   누가 말했던가.김치는 정성과 사랑의 손맛이라고.   나뭇잎들이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뒹굴어대는 퇴근길에 갓 담근 배추김치를 가져가라는 누님의 전화를 받았다. 며칠 전에 한국에서 돌아온 누님이다.   누님은 집에서 한창 나긋나긋한 배추들에 양념을 바르고 있었다. 큰 그릇에 차곡차곡 담겨있는 배추들과 그 옆에 놓여있는 빨간 양념이 고운 빛깔로 잘 어울려 김치라고 하기보다는 멋진 가을의 풍경을 방불케 한다.   "맛이 어떤가 보렴." 여리고 노란 배추속잎 하나를 뜯어 양념을 묻혀 나의 입에 넣어주는 누님은 나의 입에서 무슨 퉁명스런 말이라도 나올까봐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음, 맛있네."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간은 맞나?"   "딱 좋은 같은데..."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시장이나  슈퍼에서 파는 김치들과는 확실히 뭔가 다른 오묘한 조합이다.   "어떻게 만들었어?" 음식솜씨가 좋은 누님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짐짓 모르는 체 물었다.   "어머니한테서 배운거지 뭘." 웃으며 말하는 누님을 보니 저도 모르게 구수한 옛 추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김장철이면 나와 누님은 어머니를 도와 눈물에 콧물까지 흘리며 마늘을 바르고 절구에 고춧가루와 마늘을 빻았다. 어머니는 양념에 묻힌 배추속잎을 아버지와 누님과 나에게맛보게 한다. 아버지가 조금 짜다고 하면 김치 사이에 무우 몇 쪼각을 밀어넣고 누님이 싱겁다고 하면시집이나 빨리 가서 간을 잘 맞추라며 농담조로 말한다. 옆에서 허허 웃고만 있던 아버지도 어머니를 도와 움에 내려가서 김치들을 한 포기,한포기 씩 김치독안에 넣는다.     어머니는 식장 옆에 놓아두었던 김치와 남은 양념들을 학교숙소에 가지고 가서 먹으라며 양념을 통조림통에 가득 넣어주신다. 잘 먹이지 못하는 자식들에게 김치라도 맛있게 먹일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아버지와 빨갛게 물든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웃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저녁이면 김치를 쭉쭉 찢어 뜨끈뜨끈한 밥에 올려놓고 한입에 쑥 넣어보면 김치의 새콤달콤한 맛이 혀끝에 감겨든다. 갓 담근 김치를 맛나게 먹던 그제날의 밥상이 머릿속에 다시 안겨온다.   지금은 김치냉장고가 있어 김장철을 따질 필요도 없고 시장이나 슈퍼에 가면 언제나 맛있는 김치를 사먹을 수 있기에 집에서 김치를 담글 필요도 없지만 누님은 그래도 집에서 어머니처럼 절로 양념을 만들어 김치를 담근 것이다.   한국에서도 해마다 김장철이면 집집마다 김치를 담그기에 여념이없다. 그래서 누님도 손수 김치를 담근 것인가.   "택배번호를 아나?"   어느새 김치 두 봉지가 주방에 놓여있다. 보나마나 외지에서 근무하는 아들과 조카한테 보내려는 것이다.   "애들은 괜찮은 같은데..."   "김치라도 맛있게 먹이고 싶어."   조카와 아들이 요즘은 외식하지 않고도 집에서 뜨끈뜨끈한 밥에 어머니와 큰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누님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의 음식문화는 이렇게 세세대대로 이어받고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밖에 나와 올려다본 창문에는 누님이 그냥 서있는다.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귀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김치를 가지고가는 나의가슴속으로 늦가을의 밤바람이 훈훈하게 스며든다.   요사이 나는 누가 밥먹자고 해도 그다지 내키지 않을 것 같다. 갓 담근김치만으로도 만족스런 밥상이 되니깐.   이보다 맛있는 음식이 이세상에 또 있을까. ♡   편집︱흥경선비   2016년10월27일 하나로           장꼬박   장꼬박? 혹시 밤을 꼬박 새가며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사람을 말하는가,아니면 누구의 별명인가? 아예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장독대! 이렇게 말하면 장독대면 장독대지 무슨 장꼬박인가?하고 눈을 흘길 것이다. 집마당에 된장을 담은 크고작은 항아리들을 돌이나 널판자로 받쳐 올려놓는 장독대. 지금은 도시생활을 하면서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손쉽게 된장이랑 구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거의 집집마다 집에서 된장을 만들었고 집마당에 들어서면 장독대가 보였다.어렸을 때 나는 장독대 뒤에 숨어 애들과 숨박꼭질도 했고 올망졸망 모여앉은 항아리들 위를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장난질도 했다.여름이면 마당에 심어놓은 풋고추며 오이들을 뜯어 된장에 찍어먹기도 하고 눈 내린 겨울아침이면 장독대 뚜껑 위에 눈이 몇 센치나 쌓였는가 재보기도 했다.할머니가 장독대를 장꼬박이라 불렀기에 나는 그런 줄로 생각했는데 장독대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된 건 중학생이 되어 홍명희의《임꺽정》을 읽고나서였다. 어느 날, 옆집에 사는 형님이 마루에 앉아 무슨 책을 열심히 읽고있기에 가만히 뒤에 다가가서 책속을 들여다보았다. ...돌석이는 장독대에 뛰어올라가 작은 항아리 하나를 번쩍 들어 내던졌다.된장을 담은 항아리가 김씨의 머리에 맞아 깨지면서 된장물이 쏟아져나왔다... "아이구. 깜짝이야!" 인기척에 놀란 형님이 책으로 나의 머리를 가볍게 쥐여박는다. "형님, 무슨 책이요?" "오. 임꺽정이라는 소설책인데 너같은 애들은 봐도 몰라." "형님, 그 책을 빌려주면 안되겠어?" "내일 또 봐야 한다." "그럼 내일 돌려줄게." 나는 이튿날 아침까지 책을 다 읽고 형한테 가져다주었다. "벌써 다 읽었어? 엇저녁 자지 않고 읽었어?" "아참, 형님, 이전에 할머니가 장꼬박이라 했는데 이 책 보고 장독대라는 걸 알았어. 왜서 장꼬박이라 했을까?" "장꼬박이라? 음...글쎄다. 너처럼 밤을 꼬박 새웠다는 꼬박인데..."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장꼬박을 그만 까먹고 있던 며칠 전이었다. 경주에서 번역컨설팅을 하는 친구가 출장차 연길에 왔다. 일본에 함께 유학하면서 중국에서는 기름기가 많은 음식만 먹는가 했다며 된장찌개를 맛나게 먹는 나를 놀란 눈길로 쳐다보던 친구였다. 친구가볼일을 마친 날, 우리는 시교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다. 겨울철이라 음식점 마당에 들어서자 담장아래에 눈 덮힌 장독대가 줄지어 서있는것이 보였다. "아, 장꼬박!" 장독대 쪽으로 뛰어가며 친구가 외치는 것이었다. "장꼬박을 여기서 다시 보네!" 장독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친구의 입에서 감탄이 쏟아져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지?"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장꼬박. 허허. 여기서는 이런 말을 안하지?" 나는 시무룩이 웃으며 친구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아까 한 장꼬박 말인데 이젠 수십년동안 들어보지 못했네. 이전에 할머니가 그냥 장꼬박이라 하셨거던." "그래? 장꼬박은 경상북도 사투리인데 그럼 할머니도 경북출신인가 보네." "그렇네. 근데 장꼬박이 경상북도 사투리였어? 왜서 장꼬박이라 부르지?" "글쎄 말이네. 방언이라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 경북에서는 그렇게 부른다네. 80고령의 어머니도 가끔 장꼬박이란 말을 쓰고 계신다네. 언젠가 아버지한테 물어봤더니 도자기를 만드는데 쓰는 흙덩이라고도 하던데..." "흙덩이라고?..." 그날 저녁 나는 장꼬박을 검색해보았다. 장독대의 경상북도 방언이 맞았다. 헌데 왜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꼬박"을 붙혔을까? "꼬박 밤을 새웠다.", "꼬박 며칠이 걸렸다.", "꼬박 이틀이나 잤다.", "꼬박꼬박 챙겨먹다.", "매년 꼬박꼬박 상위권에 오른다." 등등의 꼬박을. 세세대대로 내려오면서 각지에서 사용된 우리말 방언의 진의를 알 수는 없었지만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여기저기서 자료를 뒤적여 보았다. 지방에 따라 장꼬박, 장꽝이, 장뚝간, 장독거리 혹은 장독곳 등 방언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옛날 궁궐에서는 "장고" 라고도 불렀는데  "장고마마" 라고 하는 장을 담는 일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상궁도 따로 있었다 한다. 비록 그럴 법한 해석은 찾지 못해 조금은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시골집 장독대를 보고 친구와 함께 포근한 옛 고향집 된장 냄새를 서로 다시 떠올린 것만으로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된장은 잘 발효시킨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이며 조상들의 지혜이다. 맛있는 된장을 만들려고 메주를 써서 장독대에 넣고 매일이다싶이 뚜껑을 열어 햇볕을 쪼이고 바람이 들게 하고 비가 올까 싶으면 빨래보다 장독대 뚜껑을 먼저 닫던 할머니의 정성과 물 한 그릇 떠넣고 춧불 한 대 켜놓고 천지신명님께 자식들이 잘 되라고치성을 드리던 어머니의 숨결이 어려있는 장독대가 아니던가?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 그 할머니들의 오랜 전통과 정성을 이어받고 이어가는 오늘 날,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미국 등 세계각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치고 된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오래 먹어도 평생 먹어도 싫증 나지 않고 세월이 흐를수록 새록새록 정이 드는 된장은 항상우리의 식탁에서 빠질줄 모른다. 이튿날 나는 귀국하는 친구에게 우스개를 건넸다. "한국 가서 장꼬박의 유래를 잘 알아보시게." 그러자 친구도 농담조로 대답한다. "알았어. 박형도 밤을 꼬박 새지 말고 밥도 꼬박꼬박 챙겨먹으며 잘 알아보시게." "하하하."  공항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우리는 온 시내가 들썽하게 웃었다. 하늘의 햇님도 장꼬박의 얘기를 들으며 오늘도 구수한 된장 맛을 내느라 서로의 마음이 모여 빛을 반짝이는 장독대에 눈부신 햇살을 한껏 비춰주는듯 했다.   2016년12월18일 서울동북아신문                                 작아지는 공간   기차가 홈에 들어서자 나는 호주머니 안의 담배를 매만졌다. 네시간 남짓한 고속철에서 담배생각이 무척 났었다. 소리도 크게 없이 미끌어오던 조용한 차안과는 달리 밖에 나오니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새해의 첫눈이다.나는 흡연장소를 찾아 담배를 피우려다말고 려객들을 따라 출구를 나와 자그마한 커피솦을 찾아들어갔다.이제 갈아탈 고속철시간까지 한시간이나 남아있기 때문이였다.커피 한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아까부터 쉴새없이 울리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담배 피워도 되나요?" 마담한테 물어보려는데 금방 올라온 뜨거운 커피에 하고싶던 말을 삼켜버렸다. 코끝에 피여오르는 너무 좋은 커피향이다.커피를 마시며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흘러간 세월을 돌이켜보는 기분 또한 멋져 보인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부터 난다고 몰라도 좋을것은 일찌감치도 배워버린 우리 시대가 아니였던가? 아버지 담배를 한대 가만히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변소에서 피우다가 옆집 아저씨한테 발각되여 아버지가 알면 어쩌랴 두려웠던, 담배에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찼던 중학시절은 참 우습기도 하다. 대학에 입학한 첫날 저녁, 열명씩배치된 침실에서 익살쟁이 ‘남도치’ 동창생이 담배는 이렇게 피워야 한다며 코구멍으로 연기를 뿜어내며 시범동작까지 해보였다. “칙칙폭폭-“ 하고 기차가 석탄연기를 길게 내뿜는 모습 같기도 하고영화에서 멋진 동작으로 뭔가를 사색하던 명배우가 련상되여 그 친구가 얼마나 우러러 보였던지. 결혼하여 첫아이가 태여나 부엌에서 불을 지피면서 아이한테 담배연기가 날려갈가 봐 아궁이에 후- 하고 담배연기를 불어넣던 모습은 지금도 새록새록 안겨온다. 오전 첫수업을 마치고 아침밥을 거른 허기찬 몸에 주임선생님이 준 담배를 한대 피웠다가 그만 머리가 윙 하고 어지러워나며 얼굴까지 벌개지면서 기침을 깇던 일을 생각하면 그때 왜서 진작 담배를 끊지 않았던가 싶다… 비록 골초는 아니지만 담배와 인연을 쌓은 몇십년 사이에 여러번 담배를 끊으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으나 남자가 담배도 피우지 않으면 너무 쫀쫀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담배를 끊지 않고 출장길엔 꼭 담배 한갑은 지니고 다녔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실내외를 구분하지 않고 어디를 가나 거의 모든 장소에서 흡연이 가능하였다. 말그대로 흡연자들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았고 눈치 볼 일도 없이 아주 당당하고 자유로웠다. 뻐스나 기차에서는 물론 심지어는 비행중인 기내에서까지도 꺼리낌없이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들도 있었다.한번은 비행기에서 어느 손님이 담배를 피운 것을 모르고 좁은 화장실에들어갔다가 미처 빠지지 못한 매캐한 담배연기와 지독한 냄새에 그만 화장실에서 뛰쳐나오고말았다. 그 순간,문득 내가 피웠더라면 다른 손님들한테 얼마나 피해를 주었을가 하는 생각이 호되게 뇌리를 때렸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축구장이거나 뻐스정류소에서 바람에 날려오는 담배연기는 나도 여간 싫은 것이 아닌데 옆에 있는 아주머니들과 어린애들은 어떨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축구경기가 있은 날 저녁, 친구들과 홈장승리를 축하하고 집 울안에 들어섰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닌 여름 밤중에 우리 집 창문 옆에 웬 반디불이 반짝이고 있지 않는가? 자세히 보니 옆집에 살고있는 아저씨가 창문을 빠금히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였다. 새로 장식한 집안이 연기에 그을릴까 봐서일가 아니면 바가지를 긁는 안해가 두려워서일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럴것이 요즘 들어 많은 공중장소가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여있어 흡연장소를 찾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애간장을 태우고있지 않던가? 간접흡연이 몸에 더 해롭다는 집식구들의 인식으로 집안에서 피울 수가 없어 창문 밖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어야 하는 세상으로 바뀌였으니 그 심정인들 오죽하랴! "밖에서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데 제집에서까지도 마음대로 피우지 못하면 어쩌란 말인가?" 옆집 아저씨의 불만에 가까운 목소리가 담배연기를 타고 귀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촌놈"은 촌에서 살았다고 "촌놈"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작년 가을 고속철이 개통된 지 얼마 안되여 한 려객이 화장실 안에서 가만히 담배를 피워 어느 차량에 화재가 발생하였는가 하여 기차가 중도에서 정차하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로 하여 얼마나 많은 려객들이 시간이 지체되여 안달복달했을가? 시대가 발전하고 공중문화도덕수준이 날따라 제고되여감에 따라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작아지거나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다. 외국은 물론 지금 큰 도시에서는 전면금연까지 시도하고 있다. 커피솝을 나오면서 나는 아까 호주머니 안에서 매만지던 담배를 다시 생각해보았다.눈이 내려 한결 깨끗해보이는 광장, 높다란 간판들, 새해의 하늘 향해 치솟은 빌딩들,실북 나들듯 오가는 차량들… 탁 트인 바같에 나오니 작아지는 공간속의 담배가 더없이 초라해보였다.   2017년1월호                                미역국을 끓이며    오늘은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딸애의 열아홉살 생일날이다.  아침 일찍 미역국을 끓이며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흐르는가 보다. 딸애가 언제이렇게 훌쩍 컸을가?   8년전 딸애의 생일날 아침이였다.   "엄마, 일어나 이 죽을 드세요."   병원식당에서 죽을 사가지고 병실에 들어온 딸애가 침대에 누워있는 안해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 이쁜 딸, 생일 축하한다. 엄마 미안해. 생일날에미역국도 끓여주지 못하고..."   딸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안해의 눈가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혀있다.   "괜찮아요.미역국은 엄마가 다 나은 다음 명년에 맛있게 끓여줘요."   뜨거운 죽을 호호 불며 한숟가락 한숟가락씩 안해의 입에 떠넣어주는 딸애를 지켜보던 나는 그만 가슴이 찡 하게 저려왔다.   명년 생일날에 너의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제 곧 엄마를 잃게 될 이 불쌍한 것아!    그래도 엄마를 위안하느라 이런 야무진 말까지 다 하다니.   작년에 페암말기 진단을 받은 안해가 요즘 들어 병세가 위급해졌다. 이제 얼마동안이나 엄마 곁에 있을지 두려움과 불안에 쌓인 눈길로 하루에도 몇번이나 나의 귀에 대고 가만히 물어보는 딸애, 밤이면 엄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나오는 울음을 참고저 화장실에 들어가 수도물을 틀어놓고 한참동안 서있고는 아무 일도 없은 듯이 다시 엄마 곁에 다가가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주던 딸애이다.   제일 기뻐해야 할 생일날 아침에 어린 딸애는 미역국 한모금도 먹지 못하고 학교에 가야 했다. 그러는 딸애를 생각해보니 마음 한 구석에 바위만한 멍울이 응얼져 좀처럼 내려가지를 않는다. 여느 때와는 달리 몹시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둘쳐메고 뻐스정류소로 달려가며 눈굽을 훔치는 딸애의 뒤모습을 지켜보고서야 머리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녁에 집에 가서 미역국을 끓여가지고 병원에 가자!   그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간은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무슨 양념을 넣어야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어 한식경이나 조리하다보니 뜨거운 열기에 얼굴은 땀으로 흥건하였다.   보온병에 미역국을 담아가지고 병실에 들어서니 마침 대학입시를 몇달 앞둔 아들이 와있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며 안해에게 들려주는 딸애도 함께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 네 식구는 병실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안해는 맛있다는 말은 몇번이나 하면서도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냥 주체하지 못한다. 옆에서 엄마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를 부르는 딸애를 안해는 꼭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모녀간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혈육과의 리별의 시각을 하루하루 기다려야만 하던 딸애의 열한살 생일날이였다.   그로부터 어언간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해마다 딸애의 생일날이면 나는 안해 대신 이른아침에 미역국을 끓여왔다.    딸애가 중학교 1학년이던 그해 생일날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은 사무가 분망하여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놓고 오후시간을 타서 미리 딸애의 저녁밥을 집에 가져가고는 다시 회사로 나갔다. 밤 늦게 집에 돌아와 식탁을 보니 오후에 사다놓은 케익과 햄버거는 남아있고 아침에 끓인 미역국은 다 먹고 없었다. 침실에 들어가 전등을 켜고보니 딸애는 몇해전에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꼭 끌어안고 자고있는 것이였다. 엄마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사진을 안고 자고 있을가? 딸애의 두 눈은 퉁퉁 부어있고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는지 얼굴에는 눈물자욱이 선명했다. 생일날 밤 엄마를 그리며 울다가 잠든 것이였다. 이튿날 오후 반주임선생님한테서 딸애의 작문을 반급에 공포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하도 궁금하여 저녁에 귀가한 딸애에게 물었더니 딸애는 수줍게 웃으며 작문을 꺼내놓고는 방에 들어가 흐느끼는 것이였다. 작문제목을보니 "아빠의 미역국"이였다. 엄마가 병환에 계실 때 나는 생일날에 미역국도 먹지 못하는가 생각되여 혼자서 서럽게 울었는데 그날 저녁 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여가지고 병원에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미역국을 잊지 못한다. 엄마가 돌아가신후부터 아버지는 매일 나를 어떻게 키울가 끼니를 어떻게 맞출가를 념려하신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가 끓여주신 맛나는 미역국을 먹으며 아버지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려고 이제부터 집안일도 도와드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중점고중과 중점대학에 입학하겠다는 내용이였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미역국을 끓이며 언제면 딸애가 클가 언제면 대학에 갈가 근심과 조바심으로 한해두해 보내왔는데 오늘은 왠지 예전과는 달리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을 이루다 형언키 어려워진다.   딸애가 나의 곁을 떠날 날이 꼭 올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어도 정작 이제 언제 다시 미역국을 끓여주랴 생각하노라니 저도 모르게 목이 메여오며 속이 휭하니 비여버린다.   그 사이 딸애를 친척집에 맡겨두고 큰 도시나 외국에 가서 사업하려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딸애의 장래가 걱정되여 오늘 이때까지 묵묵히 딸애의 옆을 지켜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딸애가 공부에 열중하도록 한 선택에 나는 조금만한 후회도 없다.   구수한 미역국 냄새가 풍겨온다.    비록 별다른 음식은 아니지만 오늘은 딸애에게 뜨끈한 미역국이라도 먹이고 싶다.    나는 미역국 한 그릇을 먼저 식탁에 떠다놓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는 딸애를 깨우려고 방에 들어간다.   우리 이쁜 딸,생일 축하한다!   미역국을 맛있게 먹고 이제 다가오는 대학입시를 잘 맞이하거라!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여 내 곁을 떠나게 될 딸애를 오늘은 한번 안아주리라!   지금껏 너무나 잘도 자라준 딸애가 이 시각 더없이 고맙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사랑한다. 나의 딸아!     2017년3월17일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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