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강>2021년1호
중편소설
서른 살,그 해 가을
박명선
1.
현우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도쿄 신쥬쿠(新宿)에서였다.한국 유학생 준호와 같이 키노쿠니야(紀伊国屋)서점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신쥬쿠역에 왔을 때 광장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경쾌한 선율에 이어 중후한 노랫소리가 울려왔다.저녁 무렵이면 신쥬쿠에 밴드의 거리공연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아르바이트시간이 늦다며 먼저 가겠다는 준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현우는 사람들을 비집고 제일 앞줄에 들어섰다.서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 외국인들이 이름 모를 타악기를 두드리며 일본어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관중들 가운데는 조소를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고,동전을 뿌려주는 사람들도 있었다.요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바로 여기서 촬영된 게 아닌가 싶었다.
"저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요?"
현우는 옆에 있는 한 여인에게 서슴없이 물었다.
"이란인들이에요."
이란인들이라고 대답하고 여인은 흥미가 없다는 듯이 사람들 속을 빠져나갔다.
국적을 분간키 어려운,30대 좌우의 날씬하고 예쁜 여인이었다.
2.
도쿄 시교 작은 시 변두리에 위치해 있고 전철역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 3쵸메(丁目) 2번지.방값이 싼 곳을 찾다 보니 도쿄에서 여기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저녁 아홉 시를 금방 넘긴 이 시각,집 골목을 드나드는 승용차 몇 대만 보일 뿐 행인의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다.조으는 듯한 가로등과 커튼으로 흘러나오는 아빠트들의 희미한 불빛으로나마 사람 사는 동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베란다에서 멋쩍은 동네야경을 바라보던 그녀는 갈아입을 속내의를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욕실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이웃집은 어둑컴컴했다.이웃집에 주민이 없는 듯 보였다.그녀는 창문을 열어놓고 낯선 욕실에 적응하기 위해 잠깐 욕실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샤워를 마친 뒤 욕실전등을 끄고 방에서 주스를 마시다가 욕실창문을 닫으려고 다시 욕실에 들어갔을 때 이웃집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이웃집 2층에 주민이 있었구나.주인이 금방 집에 들어온 것일까?
그녀는 욕실창문을 도로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저녁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준호는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주방에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주방창문으로 이웃집 전등불빛이 환히 비쳐왔다.준호가 여기서 산 지도 이젠 1년이 되었다.비록 지금까지 얼굴도 모르고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도 모르지만,한달 전까지만 해도 이웃집에서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고 예의인 듯 창문을 꽁꽁 닫아걸고 어슴푸레 보이는 집안에서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다.헌데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창문이 활짝 열려져있었다.
혹시 집주인이 밤중에 와서 창문을 열어놓고 환기시키고 있는 중일까?
이상하게 여긴 준호는 반투명유리로 된 주방창문을 빼꼼히 열고 이웃집을 건너다보았다.
이게 뭔가!
아슬아슬한 속옷차림을 한 젊은 여인이 눈에 띄었다.하얀색 팬티를 손에 쥐고 무슨 물건을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처음 보는 여인이었다.집주인일까?그리고 저기는 침실일까?이웃집 실내구조는 알 수 없었다.여인은 이웃집 남자가 어둠 속에서,불과 다섯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자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죄의식을 느낀 준호는 더 이상 여인을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얼른 방으로 들어와 낮은 소리로 한참 동안 티비를 보다가 다시 주방으로 갔다.여인은 보이지 않고 불빛만 그냥 비쳐왔다.주방전등을 켜면 스스로 자신을 노출시킨다고 생각되어 전등을 켜지 않고 되도록 소리를 작게 내며 라면을 끓였다.끓인 라면을 그릇에 담아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준호는 하마트면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얼핏 창밖을 내다보았더니 여인이 흰 타올로 젖은 알몸을 닦고 있었다.창문으로 더운 김이 새어나오는 걸 보아 여인이 아까 욕실에서 샤워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금방 샤워를 마쳤던 것이다.그러고 보니 라면을 끓이느라 잘 듣지는 못했지만 이웃집에서 물소리가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준호는 삽시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보고 만 사람처럼 덴겁하여 방으로 뛰어들어갔다.여인이 인기척을 느끼고 창밖을 내다보면 어쩌랴 제꺽 방전등을 꺼버렸다.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티비 화면불빛을 빌어 라면을 먹었다.주방 안에 있는 냉장고를 열면 빛이 흘러나갈까봐 김치도 꺼내 먹지 못했다.
다 먹은 라면그릇을 들고 주방에 간 준호는 이번에도 주방전등을 켜려고 하지 않았다.이웃집 욕실전등은 이미 꺼져있었지만 주방전등을 켜면 여인이 금세 알아차릴 것 같아서였다.
여인은 갓 이사 온 이웃임이 틀림없었다.
주방창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온 준호는 그제야 방전등을 다시 켰다.아까 방으로 뛰어들어오는 바람에 라면국물이 흘러내려 타타미가 여러 군데 얼룩져있었다.준호는 어둠 속에서 라면을 끓여먹은 자신이 바보스러웠고,여인의 몸매를 훔쳐본 자신이 음흉스러웠다.
아니,내가 보여달라고 했나.여인 절로 보여준 거지.그런데 언제까지 주방전등도 켜지 못하고 죄를 진 사람처럼 어둠 속에 숨어서 살아야 할까?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을 굴리던 준호는 후다닥 일어나 주방에 가서 전등을 켰다.지금 주방전등을 켜지 않으면 내일 이 시간에 발가벗은 여인이 또다시 창문가에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엔 이웃집에도 주민이 있다고,창문을 열어놓으면 다 들여다본다고,다 보인다고 여인에게 떳떳하게 선호하고 싶었다.
아랫집 창문에 입거자모집이라고 써붙인 종잇장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비행기도,여자도 타보지 못했다는 40대 샐러리맨이 독신으로 1층에 살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인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그래도 한국어도 배워주고 색다른 음식을 하면 몇 번이나 불러서 같이 술도 마셨잖은가.하여간 일본 것들이란 관건적 시각이면 나몰라라 한다니깐.이번엔 또 어떤 게 들어올런지.헌데 이쁘장하게 생겼고 30대 좌우로 보이는 이웃집 여인은 뭘 하는 여자일까?
샤워나 하려고 욕실에 들어가려던 준호는 그대로 잠자리에 누웠다.욕실 안에 공기창이 있는데 공기창으로는 이웃집 바람벽만 휑하니 내다보일 뿐이다.하지만 오늘은 누가 들여다보기라도 할 것 같아 샤워를 하고 싶지 않았다.
준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예쁜 이웃집 여인의 누드를 머릿속에 다시 떠올려보았다.
3.
이튿날 저녁,전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려던 준호는 앞에서 잰걸음을 놓고 있는 여인이 이웃집 여인임을 알아보았다.
왜 이사 온 이튿날 늦게 귀가할까?잔업을 마친 회사 직원일까?
준호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그녀가 집 부근 패밀리마트로 들어가자 멈춰서서 눈에 티가 들어간 척 눈을 비비며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볼까고 궁리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밤중에 이웃집 여인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 같아 머쓱한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이웃집에 젊은 여인이 살고 있다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가 벌써부터 궁금해지고 괜히 들떠지려고까지 하는 이상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 엊저녁에 켜놓았던 주방전등이 켜진 대로 기다리고 있었다.아침에 집을 나가면서 전등을 끄는 걸 깜빡 잊었던 것이다.이웃집 1층에는 늙은 부부가 살고 있어 전등은 진작 꺼져있었고,그녀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2층에도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독신일까?그녀가 오늘도 욕실창문을 열어놓는가고 좀 있다가 봐야지!
준호는 주방전등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윗옷을 벗어 옷장에 넣으려다가 그녀한테 정신이 팔려 아침에 전철역까지 타고 간 자전거를 그만 자전거 정류소에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는 전철역까지 걸어가야겠구나!
뒤이어 집 대문에 들어선 그녀는 이웃집 2층 거실전등이 켜져있는 걸 보았다.이웃집 거실과 베란다는 북쪽에 있고,층계는 남쪽에 있었다.구조가 다른 두 아빠트 사이에 그래도 경계선으로 담장까지 세워져있지만 어떤 고명한 건축설계사의 아이디어인지 이웃집과 이마를 거의 맞댄 욕실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집에 들어온 그녀는 패밀리마트에서 사온 빵과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잠깐 생각에 잠겨있었다.오전에 출근하면서 1층 노인들한테는 인사를 드렸다.두 노인은 87세 동갑인데 할아버지는 많이 편찮아 보였다.할머니가 대문까지 바래다주면서 며칠 후에 아들이 와서 두 노인을 노인복지센터로 모셔갈 것이라고 했다.이웃집 1층에는 주민이 없으니 내일 아침 2층 주인에게도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젠 샤워를 하려고 그녀는 욕실에 들어갔다.이웃집은 어제처럼 어둑컴컴했지만 창문은 열려고 하지 않았다.창문을 열지 않으면 이웃집에서 들여다볼 수 없지만 혹시나 하여 창문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샤워를 마치고 아침에 통풍시키느라 열어놓은 창문을 닫으려고 베란다로 갔을 때 불시에 창문이 부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지진인가?
주위는 고요하고 창문으로 불어들어오는 바람에 집안의 커튼이 하느작거릴 뿐이었다.
호~
그녀는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같은 시각.
양말을 씻어 베란다 빨랫줄에 널어놓고 주방에 들어간 준호는 이웃집 욕실창문은 닫겨있고 불빛만 비쳐오자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냈다.엊저녁에 주방전등을 켜놓았더니 과연 효력을 보았구나 얼굴에 미약한 미소를 피워올렸다.내일 스케줄을 생각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집이 약간 움직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주방의 그릇들이 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움찔 몸을 떨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밖은 예전처럼 어둑시그레하고 조용하기만 했다.큰 지진은 아닌 것 같았다.티비를 켜보니 지진속보문자는 아직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일본에 와서 준호의 가장 큰 변화는 여느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사물의 움직임과 소리에 대해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다.이른 새벽 길옆 쓰레기통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쥐나 고양이가 아닌 까마귀들이 날카로운 부리로 비닐주머니를 헤집어대는 소리이고,깊은 밤 아랫집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소리는 샐러리맨이 허튼 상상을 하면서 가만히 AV비디오를 보는 소리라는 것도 알아낼 수 있었다.
아까 싱크대 옆에 얹어놓은 그릇들의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들려온 것은 고요한 정적 때문일 것이리라.
갓 이사 온 그녀도 얼마나 놀랐을까?
준호는 티비 볼륨을 조금 높여놓았다.
4.
비가 내릴 듯 흐릿한 이튿날 아침,준호가 학교에 가려고 골목길에 나섰는데 이웃집 대문 앞에 앰뷸런스 한 대가 서있었다.달려가 보았더니 이웃집 1층 할머니가 올봄에 한 번 인사를 나누었던 할머니의 아들에게 사연을 얘기하고 있었다.할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것을 뒤늦게 발견한 할머니가 방금 전에야 아들한테 전화를 했던 것이다.길 건너편 동넷집 사람들은 강 건너 불 보 듯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준호는 노인들을 한 두 번 밖에 들여다보지 않았는데도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는 할머니의 아들을 보기가 무척 송구스러웠다.앰뷸런스 뒤를 따라 달리는 승용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을 때 뒤에서 급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무심코 뒤돌아보니 이게 누구인가!
그녀였다.
정작 맞닥뜨리고 나니 일순 어찌할 바를 몰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려는 준호한테로 그녀가 다가와서 고운 목소리로 먼저 물었다.
"미안해요.이 부근에 살고 계시는 분이시죠?"
"네.저기 2층에 살고 있습니다.김입니다.잘 부탁드립니다."
준호가 가리키는 아빠트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생긋 웃었다.가쯘하고 하얀 이빨이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해주었다.그녀도 자기 집을 가리켰다.
"2층에 갓 이사 온 모리타(森田)에요.앞으로 잘 부탁드려요.김상은 재일한국인인가요?"
재일한국인인가는 그녀의 뜬금없는 물음에 준호는 타이완 유학생이라고 골려주려다가 한국 유학생이라고 사실 대로 신분을 밝혔다.
"반가워요.헌데 1층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요?"
"할아버지가 의식을 잃었다고 합니다.아드님이 와서 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그렇군요.어제 금방 인사를 드렸는데......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에요?"
책가방을 멘 준호를 의아스레 쳐다보며 그녀가 다시 물었다.
"학교로 가는 길입니다.혹시 전철역까지 가시면 같이 걸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준호와 같이 걸었다.준호도,그녀도 처음 만난 이웃과 전철역까지 같이 걸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준호는 엊저녁에 자전거를 전철역 자전거 정류소에 두고 온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고,그녀는 인사하러 나오는 길에 때마침 이웃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자전거를 탔더라면 준호는 15분 정도 늦게 집에서 나왔을 것이고,과일점에 들려 과일이라도 사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반시간 정도 늦게 집에서 나왔을 것이었다.그랬더라면 그들은 서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15분 동안 그들은 서로에 대해 초보적인 요해가 있었고,전화번호도 서로 휴대폰에 저장해두었다.
“저는 쇼와(昭和)49년생(1974년생)입니다만......"
그녀의 나이가 다시 궁금해진 준호가 웃으면서 자기의 출생년호를 말했다.
"그럼 서른 살 동갑이네요."
그녀도 반갑다는 듯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몇 시에 퇴근해요?"
"오후 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하기에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습니다.불편하지 않으시면 저녁에 식사라도 같이 할까요?"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그러지요."
플랫트홈에서 상행선 전차에 먼저 오른 그녀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준호도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날 저녁 전철역 부근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택시에 앉아 집으로 가는 길에서였다.준호가 아무 말도 없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강아지나 고양이를 좋아하세요?"
준호는 별로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그건 왜 묻죠?"
"어제 아랫집에 인사하러 갔더니 귀여운 고양이가 있더군요.저도 이제 고양이나 한 마리 키워보려구요."
한달 전부터인가,몸뚱이에 흰 점이 박힌 검고 큰 고양이가 이웃집 마당에서 어슬렁대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낮에 보기와는 달리 퇴근길에 어둠 속에서 노려보는 듯한 그 놈의 시퍼런 눈빛이 맞혀올 때면 준호는 뒷덜미가 서늘해져 정신없이 집안으로 뛰어들어갈 때도 있었다.
"그 고양이 숫컷인가요,암컷인가요?"
그녀가 입을 싸쥐고 키득키득 웃었다.
"암컷이래요.그건 왜 묻죠?"
"그저 알아두려고요."
둘이 주고받는 말이 재미있는지,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머리가 희끗희끗한 택시기사의 빙그레 웃는 옆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집앞에서 택시를 내렸다.여덟 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일찍 주무십시요."
"저는 조금 더 얘기하고 싶은데요.우리 저기 걸상에 잠깐 앉아요."
대문 옆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앉아있던 긴 나무걸상이 그대로 놓여있었다.늦은 시간도 아니기에 준호는 그녀와 같이 걸상에 나란히 앉았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저의 몸 봤죠?"
식사를 하면서 그녀가 그저께 저녁 전등불빛에 대해 물어보자 준호는 라면이나 끓여먹으려고 주방전등을 켰을 뿐이었다고 대답했었다.
"몸을 봤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준호는 짐짓 모르쇠를 놓았다.
"봤다고 생각하는데요."
"못 봤습니다."
준호가 딱 잡아떼자 그녀가 호호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이에요.헌데 1층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요.거의 1년 이웃에 살고 있었지만 전화번호도 몰라요."
"여긴 다 그래요.오늘 대접 잘 받았어요.그 답례로 내일 차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어요.내일이 토요일이잖아요."
오늘 같이 식사를 했는데 내일 또 차를 마신다는 게 어떻게 생각해봐도 아닌 것 같았다.준호는 어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은 좀 바빠서 미안합니다."
"김상은 아들이 세 살이라 했죠.한국의 부인은 언제 데려와요?"
저쪽 큰길에서부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쳐왔다.
"그럼 내일 다시 뵈요.잘 주무세요."
골목을 지나가는 동넷집 자동차 불빛에 얼굴이 드러날까봐서인지 그녀는 몸을 돌려 대문안으로 들어갔다.
5.
비몽사몽 꿈결에 젖어들기 좋은 토요일 아침,아르바이트도 없는 날이라 늦잠이나 실컷 자려던 준호는 빗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여덟 시 반이었다.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북쪽 큰길에는 우산을 펼쳐든 행인들이 오가고 있었다.다시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빠금히 열고 이웃집 동정을 살펴보았다.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마당에 심어놓은 감나무에서 나뭇잎들이 빗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신가?
집문을 나가서 층계를 절반 내려가야 담장 너머로 이웃집 1층과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보인다.슬리퍼를 껴신고 층계를 내려가보려다가 준호는 집문을 도로 닫았다.팬티바람에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화장실에 들렸다가 방에 들어와 아침은 뭘 먹을까고 궁리하고 있는데 똑똑 집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지난 토요일 아침에는 외국인등록증을 보여달라며 위엄 있는 경찰 두 명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경찰들이 또 찾아왔는가.청바지를 주어입고 집문을 여니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작은 선물함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그녀가 서있었다.
"오하요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인사하러 다시 왔어요.과일을 사려다가 이걸 샀어요.받아주시면 고맙겠어요."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이게 뭔가요?"
"떡이에요."
떡을 사가지고 집을 찾아온 사람을 문밖에 서있게 할 수 없어 준호는 그녀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이 깨끗하군요.이 동네는 보기와는 달리 너무 고느적하네요.김상은 중국인 친구도 있어요?"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중국인 친구는 1년 선배 밖에 없어요.”
“1년 선배는 중국 어디서 왔어요?”
“동북에서 왔습니다.”
“동북 어디서 왔어요?”
그녀가 바투 물었다.
“연변입니다.그 친구는 조선족입니다.”
“아,연변이군요.일본에 온 조선족들이 많죠.그런데 저쪽은 여기보다 주민들이 많아 보이네요."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열려진 창문으로 북쪽 큰길을 내다보았다.
"그 쪽엔 아빠트단지와 상가들이 많습니다.어서 앉으세요."
"아니에요.저 이만 실례하겠어요.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주방에 가서 창문 너머를 기웃거리고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층계를 내려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준호는 그녀가 사온 알록달록한 색상의 일본떡들을 맛보려다가 잠깐 생각해보았다.그녀가 인사하러 다시 온 것 같지 않았다.그럼 주방창문으로 이웃집 욕실을 훔쳐볼 수 있는가고 확인하러 온 걸까?헌데 왜 엊저녁에는 묻지도 않던 중국인 친구가 있는가고 물어볼까?왜 중국인 친구가 어디서 왔는가고까지 물어볼까?
둬 시간이 지났을까,준호가 보던 참고서적을 놓고 화장실에 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그녀였다.
"저에요.찻집에 갔다가 점심식사를 같이 하려고 했는데 비가 더 크게 내리네요.저의 집에서 차 한 잔 할까요?"
집 구경도 할 겸 준호는 별로 사양하지 않았다.
"그럼 인츰 갈게요."
준호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집으로 뛰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그녀는 반색하며 맞아주었다.그녀가 주방에 가서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 코드를 꽂으며 방에 들어가 좀 기다리라고 웃으며 말했다.
준호는 방으로 들어갔다.반 쯤 열려진 옷장 안에는 그녀의 옷가지들이 걸려있었고 책상 위에는 그녀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찍은 사진이 놓여있었다.몇 년 전에 찍은 사진 같아 보였다.남자의 팔을 겯고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약간 기댄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헌데 이게 어딘가?
백두산 천지가 아닌가!
허허,이 여자가 중국에 다 갔다왔군.
베란다에는 방금 전에 씻은 듯한 속내의들이 널려있었고 창턱에는 빈 화분통 두 개가 놓여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찻잔을 받쳐들고 방에 들어왔다.
"제가 욕실을 좀 보고 올게요."
준호는 노란 일본차를 따라놓고 욕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지척에서 배고픈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울려왔다.이 동네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처음 듣는 준호는 바짝 귀를 강구었다.잇따라 울려오는 것은 기괴스럽고 앙칼진 웬 짐승의 울음소리였다.아랫집 암코양이가 틀림없었다.마치 그 놈이 왜 여자 혼자 사는 윗집에 들어왔는가고 울부짖으며 당장 천정을 뚫고 엉덩이를 물어뜯을 것 같아 머리카락이 쭈삣 곤두섰다.그와 동시에 아랫배에 통증이 오며 뇨기를 참을 수 없었다.아까 화장실이 바빴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집에서 뛰쳐나왔던 것이다.
욕실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 같았다.욕실에서는 물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려왔다.
저 여자가 손님을 방에 앉혀놓고 샤워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아까 떡을 사가지고 우리 집에 왔다가 집에 돌아와서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려다가 나한테 전화를 한 게 아닐까?왜 지금 샤워를 하고 있을까?
암코양이 울음소리가 또다시 아츠랗게 울려왔다.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었다.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집문을 열고 아랫집 고양이가 발자국소리를 들을세라 발볌발볌 층계를 내려와 대문 밖으로 나왔다.집이 코앞인데도 집에 들어서기 전에 바지에 싸지를 것만 같았다.집으로 뛰어가려 했지만 뛸 수도 없었다.비가 내려서인지 골목에는 행인도,차량도 보이지 않았다.일본에 와서 시퍼런 대낮에 밖에서 소피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처음이건 대낮이건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
준호는 담장 앞으로 한 발 다가가 바삐 허리띠를 풀어헤쳤다.
후~
긴 날숨과 함께 갇혀있던 수돗물이 기분 좋게 터져나왔다.이제야 살 것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담장을 더 질펀하게 적셔놓으려고 오줌발을 더 높게 올리쏘고 있을 때 호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이 울렸다.준호는 한 손으로 비스듬히 내려진 바지를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모시모시."
"슈퍼에 가셨어요?"
슈퍼는 무슨 개떡 같은 슈퍼?비 내리는 밖에서 용무를 보고 계시는 거지.
속으로 그렇게 대답하며 준호는 전화에 대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친구한테서 전화가 와서 지금 전철역으로 가는 길입니다."
통화를 마친 준호는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바지춤을 올렸다.무거운 것을 부리우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준호는 집으로 뛰어올라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방금 전의 일을 생각해보니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부지중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준호는 성급히 중국에서 온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6.
현우는 경주에서 중학교 교원을 하다가 일본에 온 준호의 1년 선배이지만 준호와 동갑이고 집도 세 정거장 거리여서 준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준호는 현우의 첫 번째 한국친구이기도 했다.
구질구질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전, 현우가 아르바이트 휴식시간에 캔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준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오늘은 저녁 다섯 시에 아르바이트가 끝나기에 오랜만에 준호와 술도 한 잔 할 겸 현우는 퇴근길에 준호네 집에 가기로 약속했다.
준호네 집에는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패밀리마트에서 맥주를 들고 계산대로 간 현우는 자칫 앞에 있는 여성손님에게 인사를 건넬 뻔했다.
며칠 전 신쥬쿠에서 만났던 그녀였다.
계산대에서 값을 치른 그녀가 먼저 패밀리마트를 나갔다.큰길을 건너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현우는 그녀가 준호네 이웃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우두망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친구 이웃집에 살고 있은 여자였구나.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묘한 일도 다 있을까?
준호는 저녁준비로 삼겹살에 김치를 볶아놓고 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의 이웃집 여자가 신쥬쿠에서 만났던 여자더구나.며칠 전에 우리가 신쥬쿠에 갔을 때 내가 공연을 보려고 제일 앞줄에 들어섰는데 그 여자가 내 옆에 있더라.서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공연을 하기에 저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고 물었더니 이란인들이라고 대답하고 자리를 뜨더라.오늘 패밀리마트에서 다시 만났는데 그 여자가 나를 눈치 채지 못했기에 인사는 건네지 않았다."
현우가 먼저 그녀의 얘기를 꺼냈다.
"그래?그 여자가 왜 이사 온 날 신쥬쿠에 갔을까?"
"신쥬쿠에 갈 수도 있지."
"그 여자 우리와 동갑이던데 사진을 보니 남편은 40대 후반이더라."
“40대 후반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는 게 아니냐?"
현우가 웃자 준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정색한 표정을 짓고 왼손 중지로 밥상을 톡톡 두드렸다.뭔가를 생각할 때면 준호가 습관적으로 취하는 동작이었다.
"남편이 나가노(長野)지사에 파견되어갔기에 도쿄 시나카와(品川)에서 방값이 싼 여기로 이사 왔단다.그건 그렇다 해도 참 이상한 여자야.엊저녁에 같이 식사하면서 고향이 어딘가고 물으니 우물쭈물하면서 오사카라고 대답하고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여행사에 근무하는가고 물으니 얼굴을 붉히며 관광전문학교를 졸업했다면서 인츰 화제를 돌려버리더라.오사카에서 태어났다면......"
“너 추리소설을 자꾸 보더니 무슨 탐정이라도 되겠나?”
“탐정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엊저녁에 애가 몇 살인가고 물어보니 그저 다섯 살이라며 나에게 애가 몇 살인가고 인츰 되물어오더라.오늘 오전에는 떡을 사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중국인 친구가 있는가고 묻기에 1년 선배 밖에 없고 연변 조선족이라 했더니 연변인가며 일본에 온 조선족이 많다고 하더라.연변은 어떻게 알고 일본에 조선족이 많은 건 또 어떻게 알지?”
“여행사에 근무하니깐 알겠지.”
“그런데 40대 후반 남자와 백두산 천지에서 사진을 찍었더구나.”
“천지가 아니겠지.일본 어느 관광지일 수도 있잖아.”
“내가 천지도 알아보지 못하겠어?”
정전되었던 집안에 갑자기 전등불이 환히 켜진 듯한 느낌이었지만 현우는 내색을 내지 않고 있었다.
“일본 여행사에서 백두산 뿐만 아니라 설악산에도 갈 수 있는 거지.”
그녀의 얘기를 하며 마시다 나니 어느새 맥주가 거덜나고 말았 다.
"오늘은 맥주도 잘 마시고 우스운 얘기도 잘 들었다.내일은 아르바이트가 일찍 끝난다고 했지?나도 내일 일찍 퇴근하니깐 내일 저녁 우리 집에 오라."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자리에 되앉았다.
"내일 저녁 그 여자와 같이 밖에서 저녁 먹으면 어떻니?"
"그럼 너도 여자를 데려와야 하잖아."
"대학교 여동창생을 부를게."
현우가 준호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자 준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대문을 나와서 현우가 골목을 벗어나려 할 때 맞은켠에서 한 여인이 전화를 받으며 마주오고 있었다.현우는 어두운 뉘집 담장 옆으로 비켜 걸었다.
"......여행사는 그만뒀어요.저를 다시 찾지 말아요.저 지금 센다이에 와있어요."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의 임자는 모리타,그녀였다.그녀를 외면하고 스쳐지난 현우는 멈춰서서 밤하늘을 무연히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센다이(仙台)인가?내가 지금 동북대학이 있는 센다이에 와있는가?그만뒀다는 여행사는 어느 여행사일까?
그녀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휴대폰이 경망스레 울렸다.
"모시모시."
"이웃집 김입니다.밤중에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친구와 저녁을 먹고 금방 집에 들어왔어요."
"다름 아니라 지금 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인데 친구가 저더러 예쁜 일본여성 한 명을 요청해서 내일 저녁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모리타상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친구는......"
"친구는 대학교 여동창생을 부르겠답니다."
어느 나라 친구인가고 그녀가 물어올 것 같아 준호는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앞질러 대답했다.
"내일 약속은 없긴 하지만......"
"그럼 같이 가는 걸로 알겠습니다.장소는 내일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
한편,준호의 전화를 받은 현우는 내일 저녁 여섯 시에 우에노역에서 만나자고 준호와 약속하고 곧바로 최한테 전화를 걸었다.
현우와 대학교 동창생이고,금년 봄에 도쿄 모 대학 연구생으로 온 최는 두 달 전에 도쿄역에서 현우를 만났다.심양역에서 만나 반갑다는 현우의 말을 최는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현우가 웃으면서 생각나지 않는가고 말해서야 대학 2학년 후학기에 일본인 교수가 만주철도부설역사를 강의하면서 심양역은 도쿄역을,대련역은 우에노역을 본 따서 지었다던 기억이 떠올랐었다
"내일 저녁 여섯 시에 대련역에서 다시 만나요."
최는 유머러스한 동창생이구나 속으로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7.
도쿄 우에노(上野)역 동남쪽에는 이전부터 재일동포들이 김치골목이라고 불러왔다는 요코쵸(横丁)시장이 있다.그 시장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현우 아버지의 특산물회사와 거래가 있는 무역회사가 있다.재작년 어느 날,일본에 금방 온 현우는 아버지가 부탁한 선물을 가지고 회사를 찾아가서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요코쵸시장 근처 불고기점에서 사장님과 같이 식사를 했었다.
현우가 그 불고기점에 가려고 한 것이다.
다음 날 저녁 무렵,우에노역에 도착한 최는 출구를 나오기 바쁘게 역사부터 둘러보았다.우에노는 오늘이 처음이었다.도쿄역과 심양역이 비슷했는데 어쩌면 우에노역과 대련역이 또......
"대련역에서 또 만났구만."
"어맛!"
갑자기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최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현우가 웃으며 서있었다.
"오랜만이네."
"저는 동창생을 만날 때마다 놀라요.오랜만이지만 오늘 분위기를 보고 먼저 집에 갈 수도 있어요."
"허허,같이 식사하면 되는 걸 가지고......"
"그런데 저 여자는......"
최가 의아한 눈길로 출구 쪽을 보며 말하자 현우는 얼결에 머리를 돌렸다.그녀가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대고 종종걸음으로 출구를 나오고 있었다.현우는 최의 팔을 당겨 옆으로 비켜 서있었다.
그녀가 옆을 스쳐지나면서 출구 앞이라고 말하더니 뒤돌아섰다.
그 순간,셋의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현우는 모르는 척 다시 돌아서서 출구 쪽을 바라보았다.사람들 속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준호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다!"
현우가 손을 흔들자 준호가 웃으며 달려나왔다.현우가 두 사람을 소개하고 나서 그녀한테도 인사를 건네려는데 이게 웬 일인가.
하늘에 솟았는가!땅에 꺼졌는가!
그녀는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다.
"모리타도 도착했다고 금방 전화 왔더라."
"그래?그럼 어디 있는가 전화해보렴."
발신음은 옆에서 또렷이 들려오는데 대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럼 우리 먼저 천천히 걸어가자."
현우의 말에 준호는 발걸음을 옮겨놓으면서도 휴대폰은 그냥 귀에 가져다대고 있었다.
"이 여자 참 이상하네.휴대폰을 꺼버렸구나."
"배터리 나갔겠지.좀 있다 전화 올 거다."
현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집에 가겠다고 하는 최를 현우는 기어코 말렸다.
불고기점에서 맥주 첫잔을 마시고 있을 때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준호가 밖에 나가자 현우는 다급히 최에게 물었다.
"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그 여자를 알아요?"
"그 여자 우리 이웃집에 있던 여자에요."
"뭐?!"
현우는 용수철이 튀어오르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못 본 게 아니지?"
"아니,4년 전에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한다고 하던데 이사 간 후에 집주인한테서 들을라니 베이징에 갔다던데요.그 여자 중국어도 일본어도 잘한다고 했어요.동창생의 친구가 여행사에 근무하잖아요?"
"일본이 아니구 베이징에 갔다구?그 여자 성씨와 이름은 알아요?남편은?그리고 애는?......"
자리에 되앉으며 현우가 다시 물었다.
"내가 이전의 그 셋집에 든 지 얼마 안 돼 이사 갔기에 성씨도 이름도 몰라요.그저 둬 번 인사말이나 해봤어요.남편은 좀 뚱뚱했고 애는 아직 없다고 하더군요.오늘 일본인 여자와 같이 식사하면서 무슨 얘기를 나누면 좋을까고 아까 오면서도 궁리해봤는데 이웃집에 살던 조선족 여자일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그 여자의 신분을 밝혀내려고 친구와 짜고든 건 아니에요.그 여자가 나오지 않을까봐 친구한테 우리의 신분은 알려주지 말라고 귀띔했을 뿐인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요?"
현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본인과 결혼했으면 일본인 성씨를 가질수도 있죠.그런데 그 여자 왜 우리를 피했을까요?우리를 만나기 싫어하는 것일까요?그리고 아까부터 보니 동창생은 한국 친구를 모르게 하려는 눈치던데 저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네요."
밖에 나갔던 준호가 들어오기에 둘은 대화를 끊었다.
"불시에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되돌아갔답니다.오늘 미안합니다."
"괜찮아요.그럼 두 분께서 천천히 드세요.저 먼저 갈게요."
최가 일어서려고 하자 준호가 최의 술잔에 맥주를 따르고 맥주병을 최에게 건네주었다.
"아닙니다.현우와 가까운 사이이기에 편히 대해주세요.저도 한 잔 주세요.앞으로 시간 되면 연변에도 놀러 가겠습니다."
"너 모리타도 데리고 가라."
현우의 말에 준호가 웃으며 최에게 해석했다.
"오늘 오겠다던 모리타라는 여자는 저의 이웃집에 사는 일본인입니다.현우가 오늘 꼭 모시고 나오라 해서......"
"그 모리타라는 일본인 여자가 오셨더라면 분위기가 아주 멋졌겠어요.참으로 유감스럽네요."
현우는 웃음을 참지 못해 그만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우에노역에서 최와 헤어져 전차에 오른 현우는 그녀가 집에 와있는가고 준호와 같이 가보려다가 먼저 전차에서 내렸다.
8.
그러던 이튿날 늦은 오후였다.
지도교수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차에서 내려 출구를 금방 나온 현우는 뜻하지 않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못 본 척 스쳐지날 수는 없었고,그녀도 발걸음을 멈추기에 웃으며 먼저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말 반가워요.”
그녀도 웃으며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왔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친구 만나러 왔어요.여기에 집이 있어요?”
“네.”
“지금 시간 괜찮은가요?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나눌까요?”
그녀가 궁금했던 터라 현우는 그러자고 대답했다.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잖아요?”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럼 차보다 맥주를 마시는 게 더 좋잖아요?”
그녀와 맥주를 마시지 못할 것도 없었다.현우는 그녀와 같이 전철역 앞 신호등 건너편에 있는 중국요리점으로 들어갔다.오후 네 시를 금방 넘긴 시간이라 가게에는 손님들이 적었다.
현우가 칭죠러우스(青椒肉丝)를,그녀가 야키교자를 주문했다.현우가 아사히맥주 아니면 키린맥주를 마실까고 물으니 그녀가 칭도우(青岛)맥주를 마시자고 했다.중국요리점들에서는 중국에서 칭도우맥주를 수입해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맥주를 따르고 현우와 잔을 부딪쳤다.
“한은숙이에요.고향은 흑룡강성 ××이에요.”
“강현우입니다.고향은 연길입니다.”
“어제는 미안했어요.자,건배해요.”
그녀가 잔을 비우자 현우도 잔을 비웠다.
“어제는 김상의 요청을 받고 우에노에 갔다가 망신했네요.연길 이웃집에 살던 일본어선생님과 신쥬쿠에서 만난 현우씨일 줄은 몰랐거든요.두 분 대학교 동창생이세요?”
“네,헌데 망신이라고 생각하나요?”
“김상과 한국어를 하지 않고 일본어로 대화를 했죠.성씨도 모리타라 했죠.”
“왜 모리타라 했죠?”
“제가 잘 아는 일본인이 모리타에요.도쿄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데 중국에 여행팀을 거느리고 왔을 때 제가 가이드를 했고 그 분 덕분에 일본에 오게 되었거든요.”
“일본에는 언제 왔어요?”
“2000년11월13일에 왔어요.지금 9월 초니깐 4년이 거의 되네요.11월13일은 모리타의 생일이어서 일본에 온 날짜가 잊혀지지 않아요.”
이번엔 현우가 맥주를 따랐다.
“그 날 무슨 일로 신쥬쿠에 갔어요?저는 키노쿠니야서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여행사가 신쥬쿠에 있어요?”
“여행사는 이케부쿠로(池袋)에 있어요.그 날 오후에 이사 왔어요.동료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해서 신쥬쿠에 갔어요.”
“그랬군요.이전에 연길 ××여행사에 근무했어요?”
“네,아시는 분 있어요?”
현우는 친구가 있지만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없어요.한 잔 합시다.”
둘은 다시 잔을 비웠다.그러고 보니 그녀는 예쁘기도 하고,성격도 쾌활하고,술도 잘 마시고,심플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남자들이 첫눈에 반할 타입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김상한테 저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어요.불법체류하다가 쥬죠(十条)입국관리국에서 자진출국수속을 하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러 우리 여행사에 찾아오는 조선족들도 있었어요.그들을 보니 조선족 위신이 떨어지는 것 같아 스스로 얼굴이 뜨거워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쥬죠는 이케부쿠로와 한 정거장 거리였다.
조선족 위신?
불법체류하고 있는 조선족들도 있겠지만 일본에서 떳떳하게 살고 있는 조선족들도 많잖은가!
조선족 위신 때문에 김상한테 신분을 알려주지 않았는가고 물어보려던 현우는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였고 어제는 어색한 장소를 마련해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는 미안한 생각도 들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
“어제는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다 저의 잘못이죠.김상한테는 그냥 모르는 척 해주세요.”
그녀가 맥주를 다시 따를 때 준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현우는 쉿!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방금 전에 1층 할머니의 아들을 만났다.할아버지는 그 날 저녁에 돌아가셨단다.2층에 한 독신녀가 새로 이사 왔더라고 말했더니 모리타라는 중년남자가 부동산 사무실에 와서 자기 이름으로 입거수속을 했다더라.2층 집주인은 다름 아닌 할머니의 아들이더구나.”
그럼 그녀가 다시 찾지 말라고,센다이에 와있다며 통화를 하던 남자는 누구일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구?2층 집주인이 할머니의 아들이라구?”
현우의 말을 그녀가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할머니의 아들 말 대로라면 입거수속을 한 모리타라는 중년남자가 사진에서 보았던 그 남자는 맞는 것 같다.그런데 나가노지사에 파견되어갔다는 남편이 입거수속하러 여기까지 왔겠어?왔다면 며칠이라도 같이 있어야 되잖아?그 여자에게 도쿄 어느 여행사인가고 물어보지 않은 게 후회된다.할머니의 아들에게 그 여자를 아는가고 물어보기도 그렇더라.어떻게 하면 좋겠나?”
현우는 정색을 하고 심각한 어조로 준호에게 말했다.
“이젠 이웃집 일본인 여인한테 신경 쓰지 말라.나 지금 전차 안이니 이만 끊는다.”
통화를 마친 현우에게 그녀가 급히 물어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네.”
“이젠 김상네 이웃집에 있지 못할 것 같네요.김상을 다시 만나기 부끄러워서요.”
“앞으로 예의적인 인사만 하면 되죠.그렇다고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다른 곳에 이사 가겠어요?”
“사실은 오늘 셋집 구하러 여기에 왔는데 현우씨를 면바로 만났네요.우연일까요,인연일까요?”
그녀가 맥주를 다시 권하자 현우는 그녀에게 요리를 권했다.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더니 자기의 신상을 숨김없이 터놓았다.
그녀는 모 전문대 일본어학과를 졸업하고 연길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하면서 결혼도 했지만 애가 생기지 않아 남편과 이혼을 하고 일본에 와서 모리타가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중한부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아들이 대학 3학년생이고 부인이 6년 전에 병으로 돌아간 모리타와 4년 동안 시나카와에서 동거하고 있었는데 요즘 새 부인을 맞이하게 된 모리타가 이젠 그만 나가라며 방값이 싼 준호네 이웃집 셋집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이었다.
현우는 그래서 그녀가 준호에게 남편이 나가노지사에 파견되어갔다고,애가 다섯 살이라고 말했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집에 오겠다고 모리타한테서 아까 전화가 왔댔어요.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오늘은 여행사에 나가지도 않았어요.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현우는 그녀가 준호에게 어떻게 말했든,그녀가 모리타의 애인이었든 일본에 온 같은 조선족으로서 그녀에게 뭔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다.하지만 어떤 도움을 줘야 하는지 궁리가 떠오르지 않아 안타깝기만 했다.
최는 지금 어느 대학원이며 어디서 살고 있는가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고 나서 현우는 요즘 최와 셋이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현우씨는 애가 몇 살인가요?아들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현우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저......아직......애가 없어요.”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에 결혼했지만 재작년에 일본에 올 때까지 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요?같은 처지군요.자,건배해요.”
둘은 다시 잔을 비웠다.
이 말 저 말 나누며 맥주를 마시다 나니 어느새 맥주 여섯 병이나 마셨다.가게에 손님들이 들어오고 있었다.그녀가 화장실에 갔다오는 사이에 현우는 맥주 두 병을 더 주문했다.자리에 다시 앉은 그녀가 웃으면서 맥주를 따랐다.
“오늘 제가 살게요.”
“아닙니다.마실 수 있어요?”
“마시죠.일본에 와서 오늘처럼 기쁜 날이 없었어요.”
그녀가 휴대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면서 모리타한테서 금방 전화가 왔었는데 지금 친구 집에 와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둘은 연거푸 건배했다.
이번엔 그녀가 맥주 두 병을 더 주문했다.
“진짜 괜찮아요?”
“오늘은 좀 마시고 싶어요.제가 중국에서 애가 없은 건 남편 문제였어요.제가 일본에 가겠다고 하자 남편이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서 이혼하자고 했기에 이혼했어요.현우씨가 애가 없은 건 부인 문제인가요?”
“그건......검사하지 않아 모르겠어요.”
“애가 없었기에 모리타가 새 부인을 맞았는지도 몰라요.”
서글프게 웃으며 그녀가 맥주 한 컵을 쪽 들이켰다.
“모리타가 애가 생기면 결혼하자고 했는데 저는 애를 가지려 하지 않았어요.”
“왜요?”
“일본이 좋긴 하지만 일본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가게에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나머지 맥주를 다 마시자 그녀가 이젠 그만 가자며 먼저 일어서더니 계산대에 가서 값을 치렀다.
밖에 나오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현우는 술값을 치른 그녀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불빛이 환한 맞은켠 빌딩을 가리켰다.
“우리 저 노래방에 가요.”
“현우씨 노래 듣고 싶네요.그럼 가요.제가 오늘 다 할게요.”
“아니요.노래방은 제가 할게요.”
노래방에 들어와서 현우는 몇년 전부터 유행된 <上を向いて歩こう>(위를 향해 걷자) 라는 일본노래를 먼저 불렀다.박수를 치며 잘 부른다고 칭찬해주는 그녀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며 한 곡 부탁한다고 했더니 그녀는 <머나먼 고향>이라는 한국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여가수 못지 않게 노래도 잘 부르는 그녀였다.현우는 멍한 눈길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저도 모르게 고향생각에 눈굽이 젖어들었다.노래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그녀의 두 눈에도 눈물이 글썽해있었다.현우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녀도 고향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녀는 한국노래 뿐만 아니라 일본노래들도 엄청 잘 불렀다.둬 시간 노래시합을 하던 둘은 음악에 맞춰 사교무를 추기 시작했다.현우는 쪽 빠진 체격에 향긋한 체취를 풍겨오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은숙씨,이젠 열한 시가 거의 돼요.마지막 전차를 놓치면 택시로 집에 가겠어요?”
“오늘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우리 집에 갈까요?”
“......”
“자,이만 가요.”
현우는 그녀를 데리고 노래방에서 나왔다.
현우네 집은 중학교 옆 아빠트단지 3층 5호실에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현우는 서둘러 옷을 벗고 그녀의 옷도 벗겨내렸다.일본에서 다른 여자를 사귀지 않겠다고 아내한테 한 약속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일본에 와서 처음이었다.
현우는 마치 가뭄에 물이 없어 허덕이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나게 물 속을 헤엄쳤다.
9.
이튿날 아침,둘은 침대에서 다시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현우는 그녀와 매일 정사에 빠져있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다.
일을 마친 뒤,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현우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가 집에 있으니 좋긴 한데 가지 않고 그냥 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한담?그냥 있어도 좋잖은가?중국에서는 일본에 간 남자들을 모두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바엔 그녀와 동거하는 것도 나쁠 게 없잖은가?
그녀가 수줍은 듯 두 팔로 젖가슴을 가리고 방에 들어와 현우 옆에 다시 누웠다.
“모리타 외에 다른 남자는 없었어요?”
현우는 애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는데 4년 동안 모리타와는 어떻게 했는가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옹졸한 남자로 보일까봐 다른 걸 물었다.
“여행사에 한 번 왔다간 어느 회사 사장이 저를 좋아했어요.그 사장과는 식사만 여러 번 했을 뿐이에요.며칠 전에 어느 호텔에서 만나자기에 여행사를 그만두고 센다이에 와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날 저녁 센다이에 와있다고 그녀가 누군가에게 말했구나 생각하던 현우는 이웃집 김상과는 하고 싶어서 김상을 집에 불러놓고 샤워부터 했는가고 다시 물어보려다가 입을 열면 웃음부터 터져나올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오늘 모리타한테 여행사를 그만둘 것이니 김상 이웃집 셋집을 물려달라고 할까요?”
“그럼 은숙씨는 어디에 있을 거에요?여기에 있자고 그래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여기에 있어요.전 은숙씨가 좋아요.오전에 그 셋집에 가서 물건들을 가져와요.”
“고마워요.현우씨.”
현우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우아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그녀를 날마다 끌어안고 있었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오전 아홉 시 반 쯤,학교 도서관에 가려고 대문을 나선 준호는 마주오는 그녀를 면바로 만났다.
“오하요고자이마스.”
“오하요고자이마스.그저께는 미안했어요.”
그녀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괜찮습니다.헌데 이제야 집에 돌아오는 길인가요?”
“아니죠.아까 집에서 나왔다가 물건을 두고 와서요.”
그녀가 바삐 스쳐지나려 하자 준호가 다시 말을 건넸다.
“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럼 김상 집에 들어갈까요,우리 집에 들어갈까요?”
“모리타상네 집에 들어갑시다.”
준호는 그녀와 같이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준호와 마주앉은 그녀가 먼저 물었다.
“저한테 궁금한 게 뭔가요?”
“저......그저께는 그렇고......”
“저의 신분이 궁금한가요?”
그녀가 정색해서 다시 물었다.
“네.저 사진은 백두산 천지에서 찍은 사진이 아닌가요?”
준호가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맞아요.헌데 무슨 일이 있어요?백두산 천지에서 사진 찍으면 안 되는가요?”
“그게 아니라.......아,실례했습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의 집에 들어올 때는 물어볼 말들을 다 생각해놓았는데 정작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준호가 일어서자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김상,왜 이래요?앉으세요!”
한풀 꺾인 준호가 자리에 되앉았다.
“사진과 저의 신분이 궁금한 게 아니라 저의 몸이 궁금한 거죠?”
“아,아닙니다.”
준호는 대번에 얼굴이 지지벌개졌다.
“제가 이사 온 날 밤 주방창문으로 저의 몸 훔쳐본 게 맞죠?아닌가요?그래서 며칠 후 김상을 집에 불러놓고 샤워를 하는 척 했었어요.왜 도망갔어요?오늘 마음 대로 해보세요.김상이 저를 어떻게 하는가 보고 싶어요.어서요!”
그녀가 윗옷 단추를 벗기려 하자 준호는 벌떡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뛰어가서 신발을 껴신고 단숨에 밖으로 달려나왔다.
후~
어쩌면 저렇게 무서운 일본여인도 다 있을까?
준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괜히 그녀의 집에 들어갔다고 후회하면서 한숨까지 내쉬었다.이젠 이웃집 일본인 여인한테 신경 쓰지 말라던 현우의 말이 맞았다.오늘 일을 현우한테 말할 수는 없었다.그녀를 다시 만나기가 두려워졌다.이제부터는 그녀를 맞닥뜨리지 않도록 저쪽 골목으로 다녀야겠다고 준호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준호가 집을 나간 뒤 그녀는 엉엉 목놓아 울었다.
내가 남자들에게 마음 대로 몸을 주며 사는 여자란 말인가?일본에 온 여자들이 모두 나처럼 사는 것일까?그렇지 않을 것이다.나 만이 이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타타미를 두드리며 한참 울고 난 그녀는 옷장에서 트렁크를 꺼내 옷가지들을 집어넣었다.책상 위에 놓여있는 모리타와 찍은 사진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려다가 옷가지들 속에 감춰넣었다.그래도 모리타 덕분에 일본에 오게 되었고,그의 여행사에서 4년간 근무했잖은가?비록 모리타가 새 부인을 맞이하고 나를 버렸지만 그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모리타에게 전화를 걸었다.4년 동안 정말 고마웠고 오늘부터 여행사를 그만두겠으니 며칠 전에 입거수속을 한 셋집도 물려달라고 했다.일자리는 찾았는가,어디에 있는가는 모리타의 물음에 일자리는 찾으면 되는 것이고,친구 집에 있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입거수속 시 부동산 사례금과 한 달 방세를 모리타에게 줬지만 저축이 많이 남아있기에 앞으로 살아가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사례금과 방세를 내기는 처음이었다.일본에 온 여자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방세를 지불하는 돈을 나는 사무상에 앉아 일하면서 저축하고 있었다.4년간의 방세만 해도 엄청난 돈이잖은가.월급도 높았고 보너스도 꽤 많았기에 ××에 계시는 부모님들한테 송금도 하고 있었다.돈을 많이 벌어서 베이징에서 개인여행사를 세우려고 내가 일본에 오지 않았던가!이제 비자는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여행사를 그만뒀으니 모리타가 비자연장은 해주지 않을 것이다.비자를 연장하고 그만두려고도 생각했었지만 모리타의 첩으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이사 온 지 며칠 밖에 안 되지만 이웃집 김이 신분을 궁금해하기에 이 집에도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여유에 여행 삼아 베이징에 한 번 가볼까?
그녀는 집안을 둘러보지도 않고 집문을 나섰다.
10.
그녀가 집을 나간 뒤 현우는 잠을 자고 있었다.엊저녁부터 체력소모를 여러 번 하고 나니 피곤했던 것이다.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샤워를 하려다가 문득 친구한테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국에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이구나.한 가지 물어보자.이전에 여행사에 한은숙이라는 일본어 가이드 있었나?”
“한은숙?잘 모르겠다.왜?”
“일본에 온 여자가 그렇게 말해서 물어보는거다.”
“아,혹시 사장님의 여동생이라는 분이 아닐까?”
“사장님의 여동생이라니?”
“일본어를 잘하는 흑룡강성 친척 여동생을 몇년 전에 가이드로 받았다던데 베이징 어느 여행사에서 요구해서 베이징에 보냈다더라.”
전화를 마치고 현우는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녀한테 속은 것일까?아니,그녀의 이웃집에 살던 대학교 동창생 최도 그녀가 베이징에 갔다고 말했잖은가?그럼 베이징에 갔다는 ××여행사 사장의 친척 여동생일까?
열한 시가 되어오자 현우는 전기밥가마 취사버튼을 누르고 침대에 다시 누워있었다.반 시간이 지나 그녀가 트렁크를 끌고 집에 들어왔다.현우는 일어나서 그녀의 트렁크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비었으니 트렁크는 여기에 두고 옷가지들은 옷장에 넣어요.”
“고마워요.헌데 조금 피곤해 보이네요.”
“어쩌다 운동을 했더니 피곤해서 아까 좀 잤어요.”
그녀가 웃자 현우도 따라 웃었다.
삑~삑~
전기밥가마에서 귀맛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밥 지었어요?”
“네,요리는 어떻게 할까 생각중이에요.”
“요리는 제가 할게요.오후에 맛있는 걸 많이 사올게요.”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갔다.냉장고 안에는 달걀과 토마토,김치와 소시지,돼지고기와 새우가 있었다.얼마 안 되어 세 가지 요리가 밥상에 올랐다.돼지고기만 볶은 요리가 맛있었다.간장만 넣은 것 같은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참말로 맛있었다.달걀과 소시지를 볶은 요리와 기름에 튀긴 새우도 맛있었다.
“요리들이 정말 맛있어요.요리전문가네요.베이징에는 가본 적 있어요?”
베이징 일이 궁금해서 현우가 물었다.
“연길 ××여행사에 있다가 일본수속을 넣고 비자가 내리기를 기다릴 겸 베이징에 가서 반년 있었어요.”
“그래서 베이징에 갔어요?”
“연길 ××여행사 사장이 저의 외사촌 오빠인데 오빠 친구가 베이징에서 개인여행사를 꾸렸어요.그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했죠.왜요?”
“그저 물어보는 거예요.”
현우는 맛있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이젠 시름이 놓였던 것이다.그녀를 거의 알만 했다.그녀가 그냥 집에 있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어제는 물어보지 않았는데 부인은 어디에 근무하는 분이세요?”
그녀가 새우를 와사비양념에 찍어 현우 입에 넣어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중학교 교원이에요.”
“부인을 일본에 데려오지 않아요?”
“일본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요?현우씨는 석사과정을 마치면 박사과정도......”
“지금 같아선 박사과정은 생각도 안 해요.”
“졸업하면 중국에 돌아가서 뭘 하시려구요?일본어교원을 그냥 하시려구요?”
졸업하고 중등전문학교에서 일본에 오기 전까지 일본어교원을 하던 현우였다.
“아니요.개인사업을 해보려구요.까짓 월급 받고 어떻게 살아요?”
“그건 그렇네요.남자들은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죠.저는 이제 베이징에서 개인여행사를 세우려고 해요.”
현우는 젓가락을 놓고 눈이 휘둥그래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앞으로 여사장님이 되시네.미리 축하해요.은숙씨는 꼭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마워요.당신.”
“아,여보.하하.우리 진짜 부부 같네.”
“진짜 부부면 정말 좋겠어요.저 요즘 베이징에 한 번 갔다오려구요.”
“네?왜요?”
현우의 눈이 다시 휘둥그래졌다.
“여기서 새 일자리를 찾기 전에 베이징 여행사들의 정황을 한 번 알아보고 싶어서요.오후에 입국관리국에 가서 재입국수속을 하고 베이징 티켓도 알아보려구요.이제 한 달이 지나면 재입국수속은 할 수 없다고 들었어요.”
현우는 그녀가 머리회전도 빠르고 무슨 일이든 잽싸게 처리하는 날랜 여자라고 느껴졌다.오늘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왠지 그녀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없다는 서운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베이징에 며칠 있으려구요?”
“두 주일 쯤요.같이 갈까요?비행기 티켓과 비용은 근심 말아요.”
정말이지 수도 베이징에 가보고 싶었다.베이징에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현우였다.하지만 그녀와 같이 간다는 게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요즘은 지도교수의 강의가 많기에 안 돼요.미안해요.베이징에서 일 잘 보고 와요.”
“그럼 이번에는 저 혼자 갔다올게요.앞으로 우리가 베이징에서 살 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이 나쁘게는 들리지 않았다.현우는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우리 정말 잘 만난 것 같아요.”
“전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요.우리 서로 변치 말기를 약속할까요?”
“은숙씨는 중국에서 이혼했지만 난......아내는 어쩌죠?”
“그건 당신의 결정에 따를게요.”
“지금으로서는 약속이 좀 그렇네.잘 생각해볼게요.”
“그래요.제가 베이징에서 돌아오면 답복 주세요.오후에 학교에 간다고 말했잖아요?”
“아,이젠 나가야 해요.”
현우는 시계를 보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설거지를 하고 일 보러 나갈게요.저녁에 몇 시에 들어와요?”
“오늘은 아홉 시에 아르바이트가 끝나니 아홉시 반 쯤에 들어올 것 같아요.나를 기다리지 말고 저녁 먹어요.”
“아니요.맛있는 걸 해놓고 기다릴게요.”
그녀는 가방을 메고 문을 나서는 현우의 볼에 살짝 가벼운 키스를 했다.
11.
평소보다 십여 분 늦게 집을 나온 현우는 전철역으로 반달음을 쳤다.
일본에 온 후 대부분 남자들은 1년 후에 부인과 애를 일본에 데려오지만 나는 데려오고 싶어도 아내가 오지 않겠다는데 방법이 없잖은가?지금 본가에 들어가 살고 있는 아내한테 전화를 한 지도 보름이 넘었다.애도 없는 우리가 혹시 이러다가 이혼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을까?아내를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현우를 바래주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 집문을 나섰다.재입국수속을 마치고 내일 베이징 티켓을 사가지고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르바이트하러 가는 길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은 현우는 두 주일도 아닌 열흘 왕복티켓이라 하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혹시 그녀가 일본에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닐까고 조금은 근심도 했던 것이다.이제 열흘 후부터 정식으로 같은 조선족이고,생일도 같은 8월 말인 동갑내기이고,지금까지 본 여자들 중에서 제일 예쁜 그녀와 동거하는 것이 어쩌면 하늘에서 내려준 복인 것 같았고,두 사람의 운명인 것 같기도 했다.
전철역 앞 마트에서 물건들을 사가지고 그녀가 현우네 집에 들어서니 다섯 시였다.
그녀는 현우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를 이해해주는 현우가 정말 고마웠다.정직한 현우한테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 안 되는것이다.현우를 이혼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다.부인도 일본에 오지 않고 애도 없는 현우가 그동안 얼마나 적적하고 답답했으랴.현우는 지금 우리 둘의 사이를 불륜이라고 생각할까?헌데 오늘 현우네 집에 들어온 내가 내일 베이징에 가다니?현우가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녀는 둬 달에 한 번씩 국제전화를 하며 연락을 끊지 않은,이전에 가이드로 근무했던 베이징 ××여행사 박사장한테 내일 베이징에 간다고,오빠 여행사에 복귀하고 싶다고 전화를 걸었다.이번에 박사장의 여행사에 복귀하는 게 아니라 박사장을 통해 베이징 여행사들의 정황을 알아내려는 것이었다.박사장이 공항에 마중 나오겠다는 걸 사촌 언니가 마중 나오고 제일 늦은 비행기이기에 공항에 나오지 말라고 부탁했다.
통화를 마치고 그녀는 내일 준비를 하려고 옷가지들을 트렁크에 넣었다.현우가 보면 어쩌랴 싶어 모리타와 찍은 사진은 트렁크 안에 감춰넣었다.여권과 비행기 티켓은 핸드백에 그냥 넣고 공항에 나가는 것이고,박사장한테 드릴 위스키와 담배는 공항 면세점에서 사면 되는 것이다.
아홉 시가 되자 그녀는 부근 슈퍼에 가서 캔맥주를 사다가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는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우도 병맥주를 사가지고 집에 들어섰다.여느 때와 달리 집안에서 구수한 요리냄새가 풍겨왔다.
“돌아오셨어요?수고했어요.”
그녀가 주방에서 달려나와 현우의 가방을 받았다.
“샤워하고 식사하겠어요?”
“식사부터 하죠.”
현우는 냉장고를 열어보고 허허 웃으며 옷을 갈아입고는 그녀와 밥상에 마주앉았다.
“청주를 사왔어요.오늘 청주를 마실까요?”
“캔맥주도 사왔더군요.청주는 은숙씨가 돌아오면 마시죠.”
그녀가 웃으며 현우가 사온 병맥주를 따랐다.
“맛있는 요리들이 밥상에 넘쳐나는군요.일본에 와서 처음이에요.은숙씨 정말 고마워요.”
“저는 당신한테 미안한 생각 뿐이에요.저를 나쁜 여자로 생각할까봐서요.”
“은숙씨를 나쁜 여자로 생각하지 않으니 미안한 생각은 버려요.”
“고마워요.자,건배해요.”
둘은 잔을 비웠다.그녀가 양파를 넣고 고슬하니 볶은 쇠고기를 스키야키 소스에 찍어 현우 입에 넣어주었다.
“음,정말 맛있어요.솜씨 정말 대단해요.내일 오전 열 시 비행기라 했죠?내일 오전에 중요한 수업이 있는데 공항까지 바래다주고 오자면......”
“아니,괜찮아요.공항에 혼자 갈게요.”
“미안해요.출국하는 사람을 바래주지도 못해서......”
“별 말씀을요.다음 번에 같이 가면 되잖아요.”
병맥주 세 병 마시고 나니 열 시 반이 되었다.
“아르바이트하고 피곤하시겠는데 일찍 주무세요.”
“은숙씨도 내일 일찍 공항에 가야 하기에 우리 일찍 자요.”
현우는 그녀를 도와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하는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내일 베이징에 간다니 서운해요.”
“미안해요.더 일찍 올 수도 있어요.”
그녀는 설거지를 하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깨끗하게 씻어놓은 그릇들과 컵들을 보며 현우는 무슨 일이든 다 잘한다고 그녀를 칭찬해주었다.
둘은 침대에서 다시 치열한 몸싸움을 벌리기 시작했다.일이 끝나서 그녀가 같이 샤워하지 않겠는가고 묻자 현우는 피곤해서 먼저 자겠다고 침대에 돌아누웠다.
그녀가 욕실에 들어가기 바쁘게 현우는 일어나서 트렁크 옆에 있는 그녀의 핸드백을 열었다.여권과 비행기 티켓이 들어있었다.한은숙,여권 이름이 맞았다.비행기 티켓을 보니 일시도 맞았다.여권을 다시 펼쳐보았더니 오늘 신청한 일본 재입국비자 다음 페이지에 대한민국 비자도 있었고,다른 페이지에 김포공항 입국도장과 출국도장도 찍혀있었다.일시는 재작년 10월과 작년 8월 어느 날이었다.다른 페이지를 보니 베이징 입국도장은 없었고 출국도장만 찍혀있었다.출국일시는 2000년11월13일이 맞았다.그녀는 일본에 온 후 중국에는 가지 않고 한국에 두 번 갔다온 것이었다.
욕실 물소리가 멎자 현우는 여권과 티켓을 핸드백 안에 도로 넣어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방에 들어온 그녀가 옆에 눕자 그녀의 머리 밑에 팔을 밀어넣고 한국에 가보고 싶은데 한국에는 간 적이 있는가고 물었다.
“연길 오빠가 잘 아는 한국인이 서울에서 여행사를 하고 있어요.오빠의 소개로 모리타와 두 번 갔다왔어요.지금 모리타는 그 여행사와 자주 연락을 하고 있어요.금년 말에 우리 한 번 한국에 갔다올까요?”
“그래요.”
그녀는 얼마 안 되어 쿨쿨 잠자는 현우의 품에 안겨 내일 베이징에 날아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학교로 가는 길에서 현우는 준호의 전화를 받았다.
“방금 전에 이웃집 1층 할머니의 아들을 다시 만났다.어제 오후 모리타가 부동산 사무실에 와서 2층 셋방을 물렸단다.”
“그럼 그 여자는?”
“어제 이사 갔단다.”
“그래?그 여자가 아직도 궁금하냐?”
“아니,그저 알리는 거다.”
통화를 마친 현우는 준호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꺼내지 말기를 바랐다.만약 그녀가 준호네 이웃집에 그냥 있으면 언젠가는 준호한테 신분이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면 준호가 나를 나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 온 조선족들을 비난할 수도 있는 것이다.그래서 내가 그녀를 우리 집에 오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준호가 이제 우리 집에 놀러오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참말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2.
베이징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대 앞에 줄을 선 그녀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일본인 남자가 옆에서 인사를 건네오기에 웃으며 맞인사를 했다.그 남자가 학생들을 면접하러 베이징에 왔다면서 그녀에게 명함장을 건네주었다.도쿄 ××일본어학교 사무국장 키무라(木村)였다.그녀도 이전의 명함장을 키무라에게 드리면서 베이징 여러 여행사들에 볼일이 있어 왔다고 했다.명함장을 보던 키무라가 일본인인 줄 알았는데 중국인인가며 무척 놀라는 기색이었다.
출구를 먼저 나온 그녀는 택시로 이전에 한국손님들을 주숙시켰던,박사장 회사와 멀지 않은 호텔에 와서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와서 먼저 ××에 계시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고 현우에게도 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튿날 오전,그녀는 약속시간 대로 박사장 회사를 찾아갔다.이전과는 달리 사무실에는 나젊은 여직원들이 정장을 입고 사무를 보고 있었는데 부모와 학생 같아 보이는 분들이 여럿이나 소파에 앉아있었다.
박사장이 그녀를 사장실에 안내했다.
“4년간 일본에 있더니 더 예뻐졌네요.어느 호텔에 들었어요?”
“하얼빈에 있던 큰 사촌 언니가 공업대학에 입학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려고 작년부터 여기에 와서 셋집을 잡고 있었어요.그 언니네 집에 있어요.”
그녀의 큰 사촌 언니는 지금 하얼빈 중앙대가(中央大街)에서 한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박사장과 성관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어느 호텔에 들었다고 하면 박사장이 찾아올까봐서였다.
여직원이 가볍게 노크하고 커피 두 잔을 들여왔다.
“커피 드세요.3년 전부터 출국유학회사도 하고 있어요.주로 일본유학인데 올해 10월 신청생 18명 중 15명의 비자가 내려왔어요.”
일본유학이면 어제 만난 키무라와도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도쿄 일본어학교들에 학생들을 추천하는가고 박사장에게 물었다.
“도쿄 일본어학교들 뿐만 아니라 대학원들에도 대학본과 졸업생들을 추천하죠.”
그녀의 머릿속에 현우가 퍼뜩 떠올랐다.현우를 통하면 대학본과 졸업생들을 여러 대학원에 추천할 수도 있잖은가?
“여행사도 잘 나가고 있겠죠?저는 여행사에 흥취가 있는데요.”
“암,여행사도 잘 나가죠.비행기 티켓 수입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죠.지금 이 여행사와 유학회사를 누구한테 맡기려고 해요.”
“네?왜요?”
“지금 다른 사업도 하고 있어요.비자는 언제까지인가요?”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어요.이번에 일본에 돌아가서 정리를 해놓고 베이징에 영영 돌아오려구요.이제 다시 와서 정식으로 근무할까요?오빠 여행사에 근무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거든요.혹시 다른 사업을 하시면 회사는 팔지 않아요?”
“하하,일본에서 돈을 많이 벌었나 보군요.저의 여행사에 근무하는 것이 꿈이라면 일본 여행사에도 근무한 은숙씨를 믿고 회사를 맡기고 싶네요.일단 은숙씨를 부사장으로 임명할게요.구체적인 것은 다음에 상의해요.은숙씨 같은 젊고 예쁜 여자가 여행사를 하면 잘 나갈 거예요.유학회사도 잘 나갈 것이구요.”
“고마워요.”
박사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 시 반?그럼 오후에 다시 만나서 얘기합시다.”
열두 시가 되자 둘은 회사 근처 베이징오리점에서 점심식사를 했다.그녀는 박사장한테서 베이징 여행사들에 대한 정황을 상세하게 요해했다.돌아오는 길에서 박사장이 아까 손님을 만나야 한다며 같이 회사에 들어가자는 걸 그녀는 페를 끼치지 않겠다고 대답하고는 이전의 가이드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다른 여행사들을 찾아가보았다.
저녁 일곱 시,그녀는 박사장의 단골가게라는 왕징(望京) 어느 불고기점에서 박사장과 맥주잔을 부딪쳤다.
“오늘 제가 살게요.오빠,건배해요.”
“베이징에 와서 사양 말아요.그럼 언제 일본에 돌아가려구요?”
“일이 결정됐으니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오빠 여행사에서 티켓을 바꿔줄 수 있어요?”
“그럼 내일 오전에 오세요.”
이튿날 오전 그녀는 박사장 회사에 다시 가서 사흘 후인 월요일 오후 한 시 티켓으로 일정을 바꿨다.이제 일본에서 비자를 연장하지 못하고 중국에 영영 돌아온다 해도 일자리는 근심하지 않아도 되었고,박사장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기회를 봐서 박사장 회사를 손에 넣거나 새 여행사를 세우려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월요일 점심 무렵,그녀는 베이징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마치고 도쿄 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비행기에 오르니 옆 좌석에 키무라가 앉아있는 게 아닌가!
키무라를 다시 만날 줄은,그것도 옆 좌석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다시 인사를 하고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었다.
“제가 이전에 근무하던 여행사에서 일본유학도 하고 있어요.이번에 그 여행사 사장님도 만나뵈웠어요.사장님한테 이제부터 학생들을 선생님의 학교에 많이 추천하라고 부탁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우리 학교에서는 중국과 한국에서 학생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며칠 전에 중국담당이 사직했기에 지금 직원을 급히 구하려고 합니다.한상은 중국 조선족이고 일본에서 회사 용무로 한국에 두 번 갔다오셨다고 했죠?중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한국어도 잘하시는 한상을 학교에 소개하려고 합니다.비자도 학교에서 연장해줄 수 있습니다.내일 교장한테 말씀드릴까요?”
그러잖아도 비자연장을 근심하고 있었잖은가!이제 비자를 연장하면 앞으로 일본과 중국을 마음 대로 드나들 수 있어 얼마나 좋은가!
그녀는 정말 고맙다고,잘 부탁드린다며 키무라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키무라는 마흔 세 살이고,재작년에 이혼했는데 열다섯 살 난 딸애는 전처가 부양하기로 했고,지금 도쿄 아사쿠사(浅草)에서 싱글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리타공항에서 두 사람은 같은 방향이기에 스카이라이나로 우에노역까지 와서 헤어졌다.내일 전화를 하겠다며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키무라에게 그녀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13.
그녀가 전차를 갈아타고 현우네 집에 오니 현우가 요리 몇 가지를 볶아놓고,장국도 끓여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우가 청주를 술잔에 따랐다.
“수고했어요.은숙씨가 사온 청주에요.”
둘은 웃으면서 술잔을 마주쳤다.
“이번에 수확이 컸어요.제가 이전에 가이드를 했던 여행사에도 들렸는데 연길 오빠 친구인 박사장이 출국유학회사도 하고 있더군요.대학본과 졸업생들을 일본 대학원에 보낸다는데 당신이 여기서 대학원을 소개할 수 있잖아요?”
“소개할 수 있죠.”
“제가 돌아오면 답복 달라고 했는데 오늘 답복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현우는 그제야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현우를 곱게 흘겨보며 방그레 웃던 그녀가 장국을 먹어보더니 참 맛있다면서 현우의 술잔에 청주를 따랐다.
“베이징에서 여행사를 세우려는 일은 어떻게 됐어요?”
“도쿄와는 달리 베이징에서 여행사 영업허가를 내려면 수속절차가 복잡하고 여러 부문을 통해야 하더군요.박사장이 다른 사업도 하기에 여행사와 출국유학회사를 저한테 맡기고 싶다고 했는데 잘 생각해봐야겠어요.비자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일부터 새 일자리를 구해보려구요.비자는 연장하고 싶어요.”
“비자를 연장하면 좋죠.”
그녀는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키무라를 만났다는 말은 현우에게 할 수 없었다.
“베이징에서 같이 가이드를 하던 친구가 요코스카(横須賀) 어느 물류회사에 취직했어요.아까 오면서 전화를 했더니 내일 와보라더군요.”
“요코스카?”
갑자기 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준호였다.
어디에 있다고 말해야 할까?
현우는 그녀의 기색을 살펴보며 통화버튼을눌렀다.
“맥주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했다.”
“그래?아르바이트가 끝나서 전차에서 금방 내렸다.지금 어디냐?”
“나도 전차에서 금방 내렸다.집에 가려다가 전화를 한다.”
“그럼 여기로 오거라.전철역 앞에서 기다릴게.”
현우는 김상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그녀에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게 와요?”
“피곤할 테니 먼저 자요.”
전철역 앞 야키토리맛집에서 준호는 그녀의 말은 꺼내지 않고 있었다.준호와 맥주를 마시고 좀 늦게 집에 들어오니 그녀는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었다.현우는 방전등을 끄고 그녀의 옆에 가만히 누웠다.
맑게 개인 이튿날 아침,현우는 샤워를 하고 학교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뒤늦게 일어난 그녀가 아침밥도 짓지 못해 미안하다며 현우를 문밖까지 바래주었다.현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다시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오전 아홉 시 쯤,그녀가 집 청소를 하고 있는데 키무라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오후 두 시에 면접 보러 오라는 키무라의 말에 그녀는 하늘을 날 듯이 기뻐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키무라가 면접에 합격한 그녀를 데리고 아사쿠사 번화한 네거리에 있는 스시점으로 갔다.
“좋은 직원을 소개했다며 교장이 아주 기뻐하더군요.취직을 축하합니다.건배합시다.”
키무라가 큰 호프잔을 절반이나 비웠다.그녀는 한 모금만 마셨다.
교장은 연세가 있고 병환에 계시기에 학교 사무는 자기가 결정한다고,앞으로 자기가 교장이 될 거라는 키무라한테 그녀는 고맙다고 다시 인사를 올렸다.내일은 학교 교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두 주일 후에 같이 베이징에 학생 면접하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키무라가 호프잔을 그냥 들고 웃으며 쳐다보자 그녀도 웃으며 절반 마셨다.
“정말 예쁘고 맥주도 잘 마시네요.”
키무라에게 스시를 권하고 그녀가 호프잔을들었다.
“정말 감사해요.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이번엔 중국식으로 건배하죠.”
그녀가 잔을 다 비우자 키무라는 통쾌하게 웃으며 잔을 비우고 호프를 더 주문했다.
스시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온 키무라가 택시를 불러세웠다.
“저의 집에 갑시다.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앞으로 키무라를 통해 비자도 연장해야 하고 키무라의 신세도 많이 져야 하기에 키무라의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키무라와 같이 택시에 앉았다.
키무라네 집에 들어온 그녀는 키무라가 화장실에 들어간 틈을 타서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요코스카에 있는 친구 집에 와있어요.친구가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하기에 오늘 갈 것 같지 못해요.내일 다시 전화할게요.잘 주무세요.”
집 부근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고 집에 들어온 현우는 한참 동안 티비를 보다가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이 뒤숭생숭해지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처연하고 애달파 보이는 달이 밤하늘에 떠있었다.
현우는 불안감과 허탈감에 잠긴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같은 시각.
그녀는 키무라의 애무를 받고 있었다.사랑하기에 이제 결혼하자는,오늘부터 우리 집에 같이 있자는 키무라였다.그녀도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앞날이 창창한 키무라와 결혼도 하고 싶었다.서른 살이 된 나도 이젠 안정된 가정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튿날 오전,학교 교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게 된 그녀는 현우네 집에 들어와서 옷가지들을 트렁크에 다시 집어넣었다.트렁크를 정리하고 현우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요코스카에 있는 물류회사에 취직하고 친구 집에 있는데 자주 연락하겠다고 쪽지를 써놓고는 부랴부랴 집문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키무라가 트렁크를 승용차 뒷좌석에 넣었다.
승용차가 서서히 떠나갔다.한 주일만에 현우와 헤어질 줄은,현우네 집에서 나올 줄은 그녀로서도 천만뜻밖이었다.그녀는 현우가 이해해주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저녁에 어머니 집에 갑시다.아버지도 반가워할 겁니다.오늘 부모님께 인츰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두 사람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담뿍 어려있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온 현우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쪽지를 읽고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일시적인 충동을 못 이겨 그녀를 집에 데려오고 그녀와 동거하고 있었단 말인가?서른 살 문턱을 갓 넘어선 금년 가을은 여느 가을보다 더 풍성할 거라 여겨왔던 내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었던가!바다 건너 아내의 감시레이더 영향권을 멀리 벗어났다고 일본에 온 남자들이 모두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까?그렇지 않을 것이다.나 만이 아내한테 미안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오늘 따라 아내가 무척 그리워났다.
현우는 중국에 전화를 걸었다.세 주일만이었다.
14.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토요일 오후였다.
한학급 일본인 친구 집에서 점심을 먹고 지하철역으로 가던 현우는 낙엽이 바람에 나뒹구는 작은 공원 앞에서 한 여인과 마주쳤다.
“현우씨!”
현우는 눈앞에 클로즈업된 여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현우씨,저에요.은숙이에요.”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요코스카가 아니고 아사쿠사에 있었어요?”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공원 안에 놓여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우리 저기 가서 얘기해요.”
현우는 공원에 들어가서 그녀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일본인 친구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왔어요.”
“그래요?사실은 베이징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도쿄××일본어학교 사무국장을 만났어요.마흔 세 살이고 이혼했는데 중학생인 딸애는 전처가 부양하고 있었어요.그의 소개로 일본어학교에 취직하고 그와 인츰 결혼식도 올렸어요.미안해요.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생각 못했어요.”
현우가 아무 말도 없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베이징 박사장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하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베이징에서 개인여행사를 세우자니 힘들어 보였어요.일본에 그냥 있고 싶었고 비자도 연장하고 싶었어요.일본인을 믿을 수 없다던 제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 일이었었구나!
현우는 목소리 톤을 높였다.
“일본인과 결혼할 수도 있죠.좋은 일본인들도 많으니깐요.”
“그 후 현우씨한테 전화를 하지 못해 정말 죄송해요.스스로도 나쁜 여자라고 생각되어 전화를 할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그 사이 현우도 그녀한테 전화를 하지 않고 있었었다.
그녀의 휴대폰이 급작스레 울렸다.그녀가 인츰 집에 가겠다고 대답하는 걸 보아 남편한테서 걸려온 전화인 것 같았다.
“그럼 이만......”
“오늘이 일본에 온 지 꼭 4년이 되는 날이에요.저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주실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11월13일이었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있는 공원 안이고 행인들도 보이지 않기에 현우는 그녀를 살며시 껴안았다.
“지금도 가끔씩 현우씨 집을 나갈 때 꿈을 꾸기도 해요.”
그녀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 서로 지난날을 깨끗이 잊어요.”
“고마워요,현우씨.”
“저도 많이 반성했어요.은숙씨가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아내를 일본에 데려오려 했겠어요?며칠 전에 아내의 가족체재 비자가 내려왔어요.”
양가 부모님들의 권고와 현우의 가족요청을 받아들인 아내였다.
“잘했어요.그리고 축하해요.저 임신 3주에요.아까 산부인과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축하해요.이젠 그만 집에 들어가요.”
현우는 두 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웃으면서 헤어져요.”
눈물이 글썽해 있는 그녀에게 웃어보이고 먼저 공원을 나온 현우는 탄식 비슷한 한숨을 내쉬고는 지하철역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15.
그 날 밤,현우는 꿈속에서 신쥬쿠에 다시 와있었다.
전차에서 내려 출구를 나오니 광장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현우는 사람들을 비집고 제일 앞줄에 들어섰다.전번과는 달리 공작새처럼 머리를 염색하고 구멍 난 청바지에 배꼽걸이까지 훤히 드러낸 젊은 일본남녀들이 열광적인 공연을 하고 있었다.오늘은 웬 일인지 관중들이 야멸찬 눈길로 현우를 쏘아보고 있었다.쓰나미처럼 무시무시한 공포에 더럭 겁이 난 현우는 황망히 사람들 속을 빠져나갔다.경쾌한 선율에 이어 한 여인의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았더니 그녀였다.
현우는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퀭하니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흐느끼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여자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그동안 홀로 모든 것을 이겨내면서 너무나도 힘들게 살아왔던 그녀가 앞으로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젠 그녀를 그만 잊고 아내를 영원히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거의 같은 시각.
그녀도 잠든 남편 옆에서 현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현우씨를 만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나왔다.일본에 온 지 어느덧 4년,이 4년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키무라를 만난 것은 나의 운명이었을까?
현우씨가 앞으로 부인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희끄무레한 달빛이 방안으로 비쳐들어오는 밤,현우도 그녀도 서른 살 이 가을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돌이켜보면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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