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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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리랑방송)청명성묘를 이렇게 하십시요! 댓글:  조회:2035  추천:0  2016-04-04
  프로그램명 --청명특집 방송날자 2016년 4월4일 아침 7시 40분까지 연길시방송국 3층 아리랑생방송실 도착 주     제 청명의 유래, 풍속, 옯바른 청명문화 등. 래     빈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 책임편집 강순선 --13179080088 사회자 박성국, 서윤옥   ---프로그램 节目头---     남; 오늘은 4월 4일 우리의 전통명절인 청명절입니다. 주로 조상을 추모하는 청명절은 성묘나 제례 등 향해지는 주요 전통의식과 문화적 의의도 남다른데요.  녀; 오늘 저희 “FM88, 좋은 세상”프로에서는 청명절을 맞아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뵙는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저 청명절의 풍속, 옳바른 청명문화 등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고저 합니다.   남; 지금 생방송실에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의 현용수회장님께서 나와 계시는데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주급, 성급 무형문화재《조선족장례 풍속》 의 보호책임단위이며 현용수회장은 《조선족장례풍속》의 대표성 전승인입니다.  녀;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 기대합니다. ---로고송---    ********************************************************************** 1.    먼저 오늘 청명절을 맞아 생방송실까지 찾아주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님과 인사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현회장 ; 인사나누기…   1.   그럼 먼저 청명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 주시렵니까? 현회장;1;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서 립춘으로부터, 다섯번째 절기가 됩니다.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약15도씩 움직이면 한절기가 드는데, 청명이면 지구가 립춘을 원점으로 이미 약60도 움직였고, 동지를 원점으로 하면 바로 약105도 움직인 위치입니다.   3. 청명을 일명 한식이라고도 부른데요. 그 유래도 알고 싶네요? 현회장; 청명은 우리민족 전통적으로 한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기실 청명과 한식은 계산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한식은 동지날 부터 계산하여 105일이 되는 날입니다. 한식을 기념하게 된 유래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자추(介子推) 설이 비교적 대표적입니다. 중국 춘추시기에 진문공(晉文公)이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 임금이 되기전에 한번은 내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방랑길에서 굶고 지치여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한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서 살려냈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신하들의 추천으로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지금의 山西綿山)에 들어 갔으므로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 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부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4; 청명에 왜 성묘를 하는지요? (간단히) 현회장; 성묘란 주로 부모나 조상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겸사 산소를 살피고보수하는 일인데요, 동방의 전통문화에서 부모의 은덕을 잊지않고, 자기 뿌리를 잊지않기 위하여 해마다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입니다. 5. 청명과 추석 모두 산소를 찾아 성묘하는데요. 어떤 다른점이 있는지요?  현회장; 전통적으로 추석성묘에서는 제사소물을 햇곡식과 햇과일을 주체로 하였고, 낫으로 여름내 산소에 자란 잡초를 깨끗이 베여버립니다. 이것을 “벌초”라고 합니다. 이에 대비해 청명성묘에서는 제사소물을 육류나 어류를 주체로 하였는데, 지금은 여기에 구애될 필요가 없이 간단하게 성의껐 차리면 되겠구요, 삽으로 겨우내 망가진 산소를 보수하고 흙을 올립니다. 이것을 “가토”라고 합니다.   6. 언제부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이 생겨났는지요? 한회장;1; 청명풍속은 중국 춘추시기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은 공자에 의하여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2500여년이 되지요. 그러다가 당나라 개원년간 당현종때에 와서 청명성묘를 한식성묘로 공식적으로 고쳤습니다. 당시의 조선반도는 통일신라시기였는데, 당나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의하여 한식성묘 문화가 신라에까지 받아 들여진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송나라때에 와서 중국에서는 한식성묘가 다시 청명성묘로 복귀되였지만,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한식은 이미 설, 단오, 추석과 함께 우리민족의 4대명절로 확고히 고정되여 있었습니다. 우리 조선족이 중국에 건너온 초기에만 하여도 여전히 한식을 쇠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장기적인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 와서는 한식의 개념은 거의 없어지고, 청명개념으로 일반화 되였습니다.   7. 우리민족의 청명절 풍속과 한족들의 청명절 풍속에는 어떤 차이점들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소개 주시렵니까? 현회장;1; 주로 청명성묘풍속에 대하여 말씀 드리면 그 문화래원이 중국이였기 때문에 한족들의 풍속과 형식상 대체로 비슷하지만 구체적 내용상에서는 평소 생활풍속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컸습니다. 한족들의 청명성묘풍속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관할 필요가 없구요, 주로 우리의 청명성묘풍속과 그 방법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산소에 도착하면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간단히 지냅니다. 묘제를 지낼때마다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는데, 이것은 땅을 파고 초목을 베기 전에 묘를 지켜준 산신령한테 례를 올리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로서 자연에 대한 존중를 표시합니다. 그다음 삽으로 가볍게 묘소를 손질하면서 잔디를 입히기도 하는데, 속칭 가토 혹은 개사초(盖莎草)라고 합니다. 가토가 끝나면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묘제를 지냅니다. 먼저 사회자가 술을 따르고 다함께 절를 세번 하는데 降神이라고 합니다. 즉 이미 신령으로 되신 고인께서 제사받으려 내려오신다는 뜻이 되겠죠. 그다음 제주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따르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獻酌이라고 합니다. 헌작에는 初獻, 亞獻, 終獻, 添酌 등 절차가 있습니다. 소유의 사람들이 모두 헌작이 끝난후, 사회자가 숟가락으로 메밥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넣고, 저를 옮겨 놓으면서 신령의 식사를 시중드는 동작을 하는데, 侑食이라고 합니다. 유식을 끝내고는, 숙주(냉수) 한잔 따르고, 모두 다 함께 절을 세번 올리는데, 이것을 辭神이라고 하며, 이것으로 성묘가 끝납니다. 성묘가 끝나면 자리를 정하고 모여앉아, 갖고간 제물들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8.만약 한자리에 조상들의 묘가 여러자리 있을때에는 어떻게 성묘하는지요? 현용수;1. 한곳에 조상들의 묘가 여러자리 있을 경우에는, 부모묘에 먼저 성묘하고, 그다음 윗대 순서에 따라 성묘하는데, 후토제는 부모묘에서 한번만 지냅니다. 이미 당사자가 성묘한 묘에는 관계자가 다시 성묘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물은 여러자리 성묘에서 련속 쓸수 있지만, 메밥과 수저만은 묘자리에 따라 각기 준비합니다. 상업성 현대식 능묘에 가서 성묘할 경우에는 능묘를 포함하여 주위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가토를 대신하고, 제사 지내는 방법은 위의 절차를 참조하면서 조절하여 지내면 되겠습니다. 현대에 와서 제사상을 꽃으로 대신하는 분들도 있는데, 제창할 바입니다.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였을 경우에는 이날에 골회함을 찾아내와 적당한 자리를 정하고, 위의 제사지내는 방법을 참조하면서 조절하여 간단하게 지내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것은 골회함을 꺼내 올때나, 제사 끝내고 다시 넣을때 물건취급 하지말고, 산사람처럼 공경하면서 자리를 옮길때마다 반드시 경견히 인사의 말씀을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말씀 올리고 싶은것은, 지금 많은 분들은 성묘할때 한족들을 본받아 종이돈을 살으는데, 이것은 우리의 성묘문화가 아닙니다. 이 풍속은 미신색채가 짙고, 방화기에 페단이 많으므로 정부에서도 단속하는 풍속입니다. 우리가 구태여 한족들의 나쁜풍속까지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9.제사상 차리는 방법에 대해 상세히 알려 주시렵니까?  현용수; 준비할 제물종류 필수품; 메밥, 수저, 물, 물그릇, 술, 술잔, 과일류; 대추, 밤, 감 각기 얼마간, 사과배 사과 오렌지 등 과일 각기 세알, 어육류; 명태 낙지 각기 세꼬리, 익은 돼지고기 적당량… 이외에 자기 마음에 물어보아 봉공하고 싶은 물품으로 갖추되, 개수는 홀수로 하고 짝수로 하지 않습니다. 제사는 음에 속하고, 홀수는 양에 속하므로 음양을 평형시킨다는 원칙입니다. 제물은 많이 갖추기 보다, 간단하면서도 정성들여 갖추는 것이 원칙입니다. 사과한알을 골라도 가장 크고 고운걸로 고르고, 허물이 없는지를 자세히 살피며, 종이에 싸서 상하지 않도록 조심히 다룹니다. 금기로는 전통적으로 복숭아, 개고기, 칼치, 멸치 등은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제사상 차리는 방법 진설규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李枾. 구체적으로 제사상 좌향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제사상 마주하여 오른손편을 동으로 취급합니다. 진설방법; 맨앞 첫줄에는 메밥과 물그릇 술잔을 놓고, 제사 시작하여 강신이 끝나면 메밥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아놓고, 물그릇에 저가락을 얹어 놓습니다. 두번째줄에는 반찬류와 어육류를, 세번째 바깥줄에는 과일류와 부식품류를 놓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 많은 규칙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많은 번거로운 규칙들을 일일히 모두 따를 수는 없습니다. 총체적인 분포규칙을 지키고, 신위와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고, 제물 종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고, 정연하게 차리면 되겠습니다.   10. 우리민족의 청명절 풍속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습니까? 현용수;1; 전통적-청명절 풍속에서는 들놀이, 연날리기, 활쏘기, 식수, 성묘? 가장 중요한 풍속은 성묘/ *;현재 우리민족의 청명풍속에는 주요하게 성묘와 들놀이 ./  성묘라고 하면 또 청명날에 연변각지 소학교 학생들의 렬사비 성묘활동을 빼 놓을수 없다./성묘를 끝내고, 마음을 정화   (11);요즘 보면 청명을 맞아 제사법이 간소화되는 등 전통장례제사문화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나고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요?  현회장; 1; 상례법이 간소화 된것은 시대의 추세라고 봅니다. 이 방면에서 중국이 한국보다 많이 앞섰죠. 그리하여 적지않은 한국분들이 중국식 상례법을 부러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려되는 점이라면 상례법이 간소화 되면서 우리의 전통 효도문화가 색이 바래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효도문화를 잃게되면 우리민족은 자기의 전통문화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반드시 전사회가 중시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12):길림성 무형문화재 조선족장례제사풍속》보호책임단위로서 이런 옳바르 지 못한 청명문화리념을 어떻게 바르게 잡기 위해 어떤 노력과 타산을 갖고 있는지요? 현회장; 1. 상례법이 간소해 진 형편에서 어떻게 우리문화를 지키겠는가? 하는 방면에서 지금 많이 탐색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디지텔 성묘관, 인테넷 성묘… 등이죠. 그리고 상례문화 산업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지금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산업화 할수없는 문화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오직 산업화만이 문화를 살릴수 있습니다.   ***********************************************************************결속어; 남; 지금까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을 모시고 청명절의 유래와 성묘방법, 풍속 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녀; 도움이 될 좋은 말씀 주신 현룡수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 에게 조상을 기리는 마음과 가정이 화합할수 있는 청명이 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접겠습니다.      이 시간 책임편집에 강순선이였습니다.
17    (연변방송) 우리민족 단오 세시풍속 댓글:  조회:2221  추천:0  2015-06-17
단오 특집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주제:《우리 민족 전통명절 단오의 유래와 세시풍속》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현룡수 회장: 답례, 반갑습니다.)  이제 며칠이면 음력 5월5일 단오가 다가 옵니다. 단오는 음력설, 한식, 추석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로 불리웁니다. 먼저 현회장께서 단오에 깃든 유래에 대해서 들려주시죠?       현룡수 회장: 단오의 유래는 중국 전국시기의 초나라 회왕(懷王)때에 비롯되었다고 전합니다. 굴원(屈原)이라는 애국사상이 있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을 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습니다. 그 후 해마다 굴원을 위하여 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조선반도에 전래되어 단오가 되었다고 합니다. 단오는 중국과 우리민족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중요한 명절의 하나라고 합니다.   단오는 우리민족 고려시대에는 9대명절중의 하나였고, 조선시대에는 4대명절(설, 한식, 단오, 추석) 중의 하나였습니다.   단오의 어원: 단오는 일명 수릿날[戌衣日·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합니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간지에서도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합니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일년중의 중심으로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로 풀이됩니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양(陽)의 수' 라 하고, 짝수[隅數]를 '음(陰)의 수' 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습니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1월 1일)· 삼짇날(3월 3 일)· 칠석(7월 7일)· 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陽數)'를 '길수(吉數)'로 여기는 기수민속(奇數民俗)들입니다.      김동선 기자: 단오를 수리날이라고 부르게 된데는 어떤 유래가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조선 후기에 간행된  5월 조의 기록에서 전합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또한 수리란 고(高), 신(神) 등을 의미하는 우리민족의 고어인데, '신의 날', '최고의 날'이라는 뜻에서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오월은 여름철 세시풍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단오날이 가장 대표적인 명일이라 들었습니다. 단오는 일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여 여러 가지 풍속과 행사가 행해졌다고 들었습니다. 단오에는 주로 어떤 행사들이 있었습니까?    현룡수 회장: 이날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단오차례(茶禮)를 올리며,지방에 따라 그 풍속이 다르긴 하지만, 그네뛰기. 씨름놀이. 가면무용. 사자무(獅子舞). 가면극(假面劇). 우인극(偶人劇) 등의 행사들이 진행됩니다.   창포에 머리감기: 전통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했습니다. 또 단오날 새벽 상추밭에 가서 상추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어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믿었습니다. 남자들은 단오날 창포뿌리를 칼처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이는 병사의 효험을 기대하는 믿음에서 비롯되였다고 합니다.   단오날 중에서도 오시(오전11시~오후1시)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해볓에 말리여 두기도 했습니다. 말려둔 약쑥은 농가에서 홰를 만들어 일을 할 때에 불을 붙여놓고 담배불로 사용하였으며, 저녁에 한곳에 모여 덕담하면서 모기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네뛰기와 씨름대회: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로 그네뛰기와 씨름을 들수 있습니다. 그네뛰기는 단오날 여성들의 대표적인 놀이입니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보면, 한복을 차려 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노라면 창포꽃 피는 단오날에, 남정들이 동네어귀에 있는백년묵은 비슬나무 가지에 그네줄 높이 높이 매어 놓으면,  젊은 녀인들이 붉은댕기 비단치마 바람에 나붓끼며, 영샤! 영샤! 그네 뛰던 옛고향의 옛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단오 시절 모르고 지낸지도 이미 너무 오래 되였습니다.     녀성들의 그네뛰기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남성들의 놀이로는 씨름대회가 있습니다. 남성들의 씨름대회에서는 이기는 사람에게는 관례로 황소를 상품으로 주는데, 경기방식은 요즘과 같이 토너먼트식이 아니라 도전자들을 모두 이겨 상대자가 없게 되면 우승을 하게 됩니다.    부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조의 기록에 의하면 "공조(工曹)에서는 단오선(端午扇)을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다."고 전합니다.부채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로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찾아오니, 이날 부채를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한 것을 '단오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날에는 공조에서 단오선을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 또한 진상받은 부채를 직접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부채는 순수한 우리말로, 손으로 부처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자와, 가는 대나무라는 뜻의 자가 어우로진 말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라는 뜻입니다. 부채를 한자로는 "선(扇)"이라고 하는데,이는 집을 뜻하는 호(戶)자와 날개를 뜻하는 우(羽)자가 어우러진 말입니다.   전통사회에서 단오의 세시풍속은 더운 여름철의 건강을 유지하는 지혜와 신체단련을 위한 방법, 재액을 방지하기 위한 습속, 풍농을 바라는 의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시목욕: 단오 전날 저녁 물을 길러 두었다가 단오날 오시에 무병장수를 바라며 목욕을 하였습니다.      단오제와 단오굿: 지역민들의 일체감을 고취시키는 의례로서 단오제와 단오굿이 있습니다. 단오제와 단오굿은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모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입니다. 해마다 이날이면 마을마다 축제를 열어 마을의 풍년과 안복을 빌었습니다. 특히 강릉지방의 강릉단오제와 강릉단오굿, 경남 영산의 문호장굿, 경북 자인의 한장군놀이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례들은 각종 놀이 및 행사들과 접목되어 현재 지역민의 축제로 발전하였습니다.      단오장: 전통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였다.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농가에서는 대추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고 합니다.   부적: 나쁜 귀신을 쫓아 버리기 위해 이날에는 집집마다 부적을 그려서는 가택의 기둥이나 대문에 부쳐 놓습니다.   김동선 기자: 단오에 먹는 주요 음식들로는 어떤것이 있는지요?    현룡수 회장: 조선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조의 기록에서는 "궁중의 내의원(內醫院) 에서는 옥추단(玉樞丹)과 제호탕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는 궁중풍속을 전합니다.   옥추단은 일종의 구급약으로 여름철 곽란이 났을 때 물에 타서 마십니다.    제호탕은 오매육(烏梅肉)과 사인(砂仁), 백단향(白檀香), 초과(草果) 등을 곱게 빻은 다음, 꿀에 버무려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 일종의 청량음료입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더위를 피하게 하고 갈증을 그치게 하며, 위를 튼튼하게 하고,  장의 기능을 조절함과 동시에 설사를 그치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주 재료인 오매는 껍질을 벗긴 매실을 짚불 연기에 그을려 말린 것으로서 소갈(당뇨), 설사, 기침에 효험이 있습니다. 매실에 들어있는 구연산은 더위로 손상된 체내 독소를 제거하고 산성화된 몸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단옷날 먹는 음식은 그 풍성함의 절정을 이룹니다. 제 철을 맞아 약효가 최상인 쑥이나 수리취를 이용한 수리떡, 앵두편, 앵두화채 등 절기식을 이웃과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이 단오 음식들은 미각을 돋울 뿐 아니라 여름을 건강하게 날수 있는 영양식이라는 점에서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민간에서는 예로부터 단옷날 오시(午時)에 익모초(益母草)를 뜯어 해볓에 말리워 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 때가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때로서 익모초의 효능이 최상에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를 돕는 풀’이란 뜻의 익모초는 월경과다, 산후출혈, 생리통,  생리불순 등 각종 부인병과 위장질환 치료에 효과적입니다.    떡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쑥이나 수리취를 넣고 만든 절편에 수레바퀴 문양의 떡살을 박은 차륜병은 단오 분위기를 물씬 나게 하는 특급 도우미입니다. 단옷날에 쓰기 위해 말려 둔 쑥잎으로 쑥차를 만들어 먹으면 위장병과 변비, 신경통 등 치료에 특효가 있다고 널리 전해집니다.    단오하면 바로 떠오르는 ‘창포’는 그 우러난 물에 머리를 감는 풍습 외에도 창포 뿌리로 건강을 도모했습니다. 창포 뿌리는 위장을 튼튼하게해주는 건위제나 가래를 그치게 하는 거담제로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단오의 시절음식으로는 수리떡과 약떡이 있습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서는 "이 날은 쑥잎을 따다가 찌고 멥쌀 가루 속에 넣어 반죽을 하여 초록색이 나도록 하여 이것으로 떡을 만든다. 그리고 수레바퀴 모양으로 빚어서 먹는다."라는 풍속을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약떡은 전라남도 지역에서 전하는 시절음식입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평소에 떡을 별로 하지 않지만, 단오날만은 5월 4일 밤 이슬을 맞혀두었던 여러가지 풀을 가지고 단오날 아침에 떡을 해 먹는데, 이를 약떡이라고 합니다. 앵두가 제철인 단오 무렵이면 앵두화채를 만들어 먹기도하며, 아이들의 주전부리로 옥수수나 쌀 등을 튀겨 주기도 합니다. 또 이날은 새 쑥을 넣어 만든 떡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보릿가루에 누룩을 섞어서 부풀게 만든 기루떡과 곤떡· 새미떡· 인절미· 표적· 율적· 해어· 실과 등을 제물로 사용합니다.      도행병(桃杏餠): 복숭아와 살구가 무르익었을 때 만드는 계절 음식입니다. 초여름에 나는 각종 과일을 즙을내어 쌀가루에 버무려 설기를 쪄 먹습니다.      앵두편과 앵두화채: 앵두(살구, 모과)를 살짝 쪄서 굵은 체에 걸러 살만 발라 설탕을 넣고 졸이다가 녹말을 넣어 굳힌 것입니다. 생률과 함께 담아 냅니다. 앵두화채는 단오날 민가에서 즐겨 만들어 먹는 청량음료입니다. 앵두를 따서 깨끗이 씻어 씨를 빼서 설탕이나 꿀에 재워 두었다가 먹을 때 오미자 국물에 넣고 실백을 띄워 냅니다.       준치만두와 준치국: 준치는 생선 가운데 가장 맛있다는 것이라 진어(眞魚)라고도 합니다. 준치는 유난히 가시가 많은 생선으로 그것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맛있는 준치만 잡아가서 준치는 멸종의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용궁에서는 묘책으로 여러 물고기들이 자기의 가시 한개씩을 빼서 준치에게 박아 주면 사람들이 쉽게 잡지 않으리라는 의논이 모아져 결국에는 준치가 유난히도 가시가 많은 생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준치 머리 쪽의 뼈를 모아 맞추어 새의 형상을 만들어 앵두를 주둥이에 물려서 처마 끝에 매달아 두면 새가 된다는 풍습이 있어 할머니들은 그냥 가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준치의 가시를 바르는 방법은 준치를 통째로 쪄서 윗부분의 살을 가만히 나무저로 들어 내고, 가운데 가시를 들어 낸 다음 다시 고운 체에 살을 올려 두고 나무 주걱으로 내려서 잔가시를 골라야 합니다. 살만 발라 둥근 완자를 만들어 국을 끓이거나, 밀가루에 여러번 굴려 준치만두를 만듭니다.      김동선 기자: 단오날에 성묘를 지내거나 조상제사도 지낸다고 하던데요. 성묘는 어떻게 하고 또 조상제사는 어떻게 지내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단오제는 우리의 향토민속 축제일뿐만 아니라. 우리민족4대가례중의 제사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축제의 경우, 단오제 행사는 고대 제천행사의 유풍으로서, 주로 풍농제, 풍어제, 마을수호, 행로안전, 재액방지 등의 기원을 겸한 소위의 신에게 올리는 종합적 향토신제였으며, 전통적으로는 단오굿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제사의 경우에는 청명, 추석, 중양, 등을 포함한 4대묘제의 일종으로서, 산소를 찾아가 묘자리가 있는 모든 선조와 부모의 묘를 다듬고, 먼저부모의 묘에 제사를 올리고, 그다음 맨 윗대의 조상의 묘부터 차례로 내리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은 청명과 추석에만 산소에 가서 묘제를 올리고, 단오와 중양에 가는 경우는 드믑니다.     김동선 기자: 성묘때나 조상제사를 지낼때 어떤것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까?      현룡수 회장: 지금은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하여도 그 누가 어떻다 할수는 없지만, 일단 지낸다면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상관 상식을 알고, 반드시 정성스럽게 지냈으면 합니다. 조상제사는 미신이 아니라, 자기의 뿌리를 숭배하는 문화행사로서 비난할바가 아닙니다.    보우를 바라는 립장에서도 예수나 보살에게 백번 기도하고 참배하기보다 자기 조상에게 한번제사 지내는 것이 훨신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예수나 보살은 생면부지의 당신을 특별히 보우하여 줄 아무런리유도 없지만 당신의 조상은 당신을 보우하여 줄수 있는 충분한 리유가있습니다.   우리민족 제사문화가 다시 회복되는 날이면, 해이해진 우리민족 기강이 다시 회복되는 날일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성묘를 할때나 조상제사를 지낼때 금기시하는 것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주로 어떤것을 금기시 해왔습니까?       현룡수 회장: 지금은 조상제사를 지내는 사람조차 별반 없는데, 금기를 말했댔자 부질없는 일입니다만, 그 언젠가에 가서는 우리민족도 다시기강을 회복하고, 자기 조상을 찾을 날이 올것이라고 믿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인 단오때가 되면 날씨도 좋고 기후도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고 좋기에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이면서 경축하면서 기념해야 할텐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이런 전통명절의 색이 점점 바래져가고 있는거 같아서 참으로 가슴아픕니다.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 단오날을 명절로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국가에서도 명절로 지정하고 정식휴식도 하지 않습니까? 현회장께서는 이러한 기회를 빌어 단오명절의 분위기를 잘하려면 정부에서는 어떤 조치를 대야 한다고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나라에서는 이미 “비물질문화유산법”을 제정하고 실시하고 있습니다. 단오명절과 같은 의의있는 전통적 명절을 살리기 위하여정부측에서는 우선 민간 문화시장을 개방하고, 민간 문화단체의 활동을 장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전업단체에만 의거해서는 민족문화를 살려낼수 없습니다. 반드시 문화시장을 개방하고 전민이 참여하고, 사람마다 유익한 문화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민간단체나 기업차원에서는 단오를 진정한 명절로 부활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지금 명절이라 해 봤자 하루 휴식하는것이 고작인데, 단오를 진정한 명절로 부활시키려면 반드시 민간에서 주최하는 자발성적인 축제같은 행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우선 우리민족 전체적으로 전통을 이어가려는 강력한 민족의식이 있어야 하며, 이런 축제를 책임지고 조직할 능력이 있는 민간단체 핵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이 두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리하여 단오를 진정한 명절로 부활시키려면 아직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김동선 기자: 가족내에서도 부모와 자녀들이 단오를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로 기념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우선 솔선수범해서 단오를 의의있고 유익하게 쇠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현룡수 회장: 지금 전통적 의미에서의 완미한 가족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가족에서는 식구들이 세계 각지에 뿔뿔히 널려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중요한 것은 후대들에게 단오의 개념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자리에 모여서 단오를 쇨수는 없지만, 단오를 리유로 서로 문안 전화나 문안 메시지를 보낼수는 있습니다. 부모들이 우선 솔선수범해서 전통명절 단오를 리유로 타향에 있는 자식들에게 전화를 쳐 주어 의의있고 유익하게 단오를 쇠라고 긔뜸해 주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16    (연변방송) 청명제사로 사색하여 본 우리민족 댓글:  조회:2717  추천:0  2014-04-09
(연변방송) 이밤을 함께 합니다. 방송날자: 2014년 4월 8일 방송시간: 21:05부터 21:45까지 방송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회장          --- 개 시 곡 (开始曲-我们的话题)---       안녕하십니까? 김계월입니다. 여러분 모두 청명절련휴 잘 보내셨습니까? 청명절기간 이 세상을 살다 간 선인들의 묘소를 찾아 뜻깊은 시간 보내셨겠죠?     그런데 해마다 청명이나 추석이 되면 유난히 마음이 더 씁슬해난다는 분이 계시는데요. 사연은 이러합니다.     (해마다 청명이나 추석이 되면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고역을 치러야 한다. 가문의 산소에 가서 일일이 가토도 하고 벌초도 하고나면 손에 물집이 생기고 가시덩쿨에 찔려 피가 나군 한다. 옛날에는 청명이나 추석이면 삼촌이나 형님가족들까지 떠들법석하며 가문의 산소를 찾아 함께 둘러앉아 선인들의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었는데... 세차게 불어닥친 한국바람으로 친척들이 한명두명 이국타향으로 나가다보니 이 몇해째는 그냥 달랑 우리 세식구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 집 상황은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다. 우리 집 산소부근 적잖은 이웃들의 산소가 이젠 주인을 잃은지 오래다. 청명과 추석이면 찾아들군 하던 익숙한 얼굴들도 못본지 오래다. 사람손이 가지 않은 키를 넘는 황량한 풀숲에 묻혀있는 임자 잃은 봉분들을 보노라면 참 마음이 안타깝다.     일년에 한번 두 번 산소를 찾는 일, 결코 형식에 그치지 않는 고인들에 대한 추모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준 선인들을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키우고 세세대대 효도문화를 이어가는 한 개 방식인데 이것이 어딘가 점점 색바래져 가는 것 같아 자못 가슴이 아프다. )     그래요, 고인들을 기리는 명절인 청명이나, 추석, 이 명절문화 핵심은 효문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에서 말하는 사연 결코 한두집에서만 생기는 특별한 사례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수 있는 사례라고 할수 있는데요.     오늘밤에는 우리들이 현시대 숨가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효문화를 잃어가고 있는건 아닌지 한번 사색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가 합니다.               --- 간 주 곡 (间奏曲-我们的话题)---     물음(1): 청명에 산에 다녀오셨죠. 정말 앞에 남성분이 얘기했던 이런 사례, 저 역시 해마다 청명이나 추석이면 겪는 사연인데요. 그래서 참 공감이 가더라구요? 대답1: 저는 청명에 사유가 있어서 이틀 앞당겨 산에 갔었습니다. 자고로 제사는 미루지 않는다고는 했습니다만, 경우에 따라 조금 앞당기는 것은 저승의 분들도 이승의 바쁜 일상을 잘 알고 계시니 량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물음(2): 특히 앞의 그분도 얘기했지만 주변의 주인 잃은 봉분들을 바라볼 때면 저 속에 묻힌 고인들의 후대들은 내 뿌리마저 잃고 살아가는 것 같아 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대답2:  주인 잃은 봉분의 임자들은 현재 눈앞의 일상에 바쁘시다 나니, 뿌리같은 것은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는가 봅니다. 조상의 뿌리부터 확실하게 하면서, 가문을 열심히 운영해 나간다면, 모든 난제들이 방향성 있게 더욱 잘 풀릴수 있다는 도리를 그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깝죠.         물음(3): 그런데요, 돌아가신 부모님들, 혹은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보통 어떤 소망을 실현시켜달라고 기원하는데, 너무 자사적인 것이 아닌가요? 대답3: 제사의 본의가 바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거나, 불가능한 어떤 소기의 념원의 실현을 위하여, 제물을 차려놓고, 의식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으로는 의지 교류가 불가능한 초자연적, 초인간적 대상과 의지 교류를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소위의 초자연적, 초인간적 능력을 리용하려는 문화적 수단이였습니다. 바로 기독교에서의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와 비슷한 개념이죠. 제사문화는 이미 몇천년을 내려 오면서 우리 인류의 문명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으며, 과학이 세계를 통치하는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막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인간능력의 보충수단이며, 신앙과 정감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내면서 자기의 어떤 소망을 기원하는 것을 너무 자사적이라고 나무랄바는 아닙니다. 바로 제사를 통하여 고인에게 추모와 감사의 마음를 보냄으로써 그 혜택으로 자기로서는 어쩔수 없는 어떤 소망을 실현할수 있다고 믿는 거기에 제사의 존재 리유가 있는것입니다.   물음(4):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죠, 한줌의 재로 된 고인들이 술을 부은 들 뭘 알겠고 절을 한들 뭘 알겠냐고, 장례니, 제사니 그냥 미신형식이 아닌가고 얘기하는데요.     우리 민족의 장례, 제례문화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짚어주시겠습니까? 대답4: 우리들의 장례, 제례문화는 유교의 한개 중요한 내용으로서, 2500여년전에 공자가 창시하였습니다. 그 핵심은 효도인데, 효도란 가정에서 자식들이 부모들을 대하는 기본 도리로서, 천여년래 가정을 안정시키는 점착제였으며,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는 중요한 수단이였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닙니다. 시작을 알수없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완강히 생존, 생육하시면서 생명인자를 한세대 한세대 이으시여 오늘 당신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자기를 어렵게 키워 준 부모에 대해선 왕왕 감격할줄 모르고, 보답할줄 모르며,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효도가 필요하게 된거죠. 제사는 효도의 보충이며, 감사의 마음을 키우고 표현하는 수단이며, 조상들과 당신, 그리고 당신의 후손들을 이어주는 뉴대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해 할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불효자식이 사회에 나가서 남들의 존중을 받고, 남들과 우호롭게 지내면서 큰 일을 해낼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민족의 장례, 제례풍습의 핵심인 효도사상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다. 나가서 효도사상이 한 민족의 세세대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물음(5): 그런데 우리 지역사회의 대도시진출 및 해외진출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멀리 떠나 타관객지에서 살다보니 앞에서와 같은 사례들도 생기는데요.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례들도 적잖게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님의 부고를 받고서도 내가 외국에서 비싼 비행기표값을 팔아가며 달려간들 부모님이 다시 일어날 수 도 없는데 하면서 부모님이 마지막 가는 길마저도 제대로 바래드리지 못하는 자식들도 있잖습니까? 그러다보니 요즘 어떤 상가집을 가면 유난히 더 썰렁한 집들도 있잖습니까? 우리 현대인들이 너무 실용주의에 빠져 효도문화가 점점 더 색바래져 가는건 아닌지 생각을 잠간 해보게 되더라구요? 대답5: 이것은 주요하게 우리의 장례 복무체제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장례를 한 군체의 공동대사로 여기고 조직적으로 처리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장례가 완전히 개인적인 일로 되였으며, 해외진출붐으로 주변에 친척, 친우가 없는 상황에서 조선족 상가에선 장례가 무서울 정도로 어려운 일로 되였습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그 시대에 맞게 우리의 장례 복무체제를 건립하고, 그 공능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근본열쇠라고 인정합니다. 정부에선 이미 《조선족 장례》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고, 대표 전승인인 제가 지금 정부의 허가를 받고 한창 방법을 대고 있으니, 이제 곧 연길에 《조선족 빈소》가 따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맞게 조선족 장례 복무체제가 건립될 것이며, 조선족 장례문화도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성원하여 주십시요.       물음(6): 이쯤 이야기 나누고보니 또 에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네요. 중년층의 대도시진출 혹은 해외나들이 등 영향으로 고향에 홀로 남겨지는 로인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있는데요. 요즘 저의 한 친구가 이런 고민을 앓고 있습니다. 아들이 금방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어 장가를 보내려고 하는데 결혼비용을 장만하기 위해 몇년만이라도 외국에 나가 돈을 벌었으면 하는데 80을 넘기신 어머님이 딸의 발목을 잡는다는것입니다. 다른 자식들이 모두 곁에 없고 이젠 하나 남은 딸마저 나를 두고 떠나버리면 나는 어떻게 사냐며 곁을 못떠나게 하고있다고 한답니다. 양로원에 모시려고 해도 죽어도 양로원에는 안간다고 하는데요. 선생님께서 이와같은 경우에 맞띠운다면 어떤 선택을 하실건가요? 대답6: 물론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모셔야죠. 우리는 이렇게 할것을 호소합니다. 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부담으로만 여기지 마시고, 관념을 바꾸어 혜택이라고 여겨 보십시요. 그러면 그에 따른 더욱 훌륭한 문제 해결책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모님 년대에는 어려운 전쟁 피난길에서 노문한 부모를 힙겹게 업고 다니면서도 감히 버릴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정도 정이려니와 부모를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는 의식이 그들의 머리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이들은 천벌이란 것을 근본 믿지를 않습니다. 천벌이란 기실 인과보응을 말하는데 반드시 있지요. 없을수가 없습니다.       물음(7): 그래요, 여기에서 꼭 가야 한다 가지 말아야 한다 정답이야 어디 있겠습니까만 발목을 잡는 년로하신 어머님의 의사를 거역하고 굳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난다고 할 때 불효는 피할수 없는거지 않겠습니까? 대답7: 이런 경우를 가리켜 현대판《高麗葬》이라고 합니다. 옛날 고려때에 한 농부가 자기 아버지가 노문하여 일을 할수없게 되니 쪽지게에 져서 산에 가져다 그대로 버렸습니다. 돌아 오려는데 그 농부의 아들이 그 쪽지게를 기어이 가지고 가자고 조릅니다. 왜서냐고 물었더니 그 아들이 하는 말인즉, 이제 아버지가 늙으시면 역시 이 지게로 져서 버려야 하는것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 말에 농부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잘 모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사에서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고 있다는 최근에 와서 우리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 봅시다; 필생의 정력으로 자식들을 다 출세시켜 보내고 나니 세집에 덜렁 버려진 늙으신 아버님들, 외국에 돈벌이 간 자식들을 망연히 기다리며 빈집을 지키고 계시는 허약한 어머님들,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고독한 할아버지들, 치매에 걸린후 싸구려 양로원에 장례비까지 이미 맡겨진 불쌍한 할머님들, 빈집에서 혼자 사망한후 며칠후에야 발견된 불행한 망령들… …, 현재 우리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수있는 이런 현상들이 그래 현대판《高麗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물음(8): 청명절을 금방 보내고나서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와 더불어 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우리들이 바쁜 일상을 핑계로 효문화를 잃어가고있는건 아닌지 시시각각 검토해봐야 하지 않을가요? 대답8: 극히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검토를 효과적으로 가동시키려면 사회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풍기가 형성되여야 합니다. 이 방면에서 저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심심히 느낌니다. 《조선족 장례》대표 전승인으로서 하루속히 새로운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새로운 장례풍기를 형성시켜, 멀리 떠난 우리의 효자, 효녀들을 다시 불러 들이겠습니다.
15    (연변방송) 우리민족 장례문화 현존 문제점--2013년 댓글:  조회:9230  추천:0  2013-09-23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2013 추석특집 《우리민족 장례문화》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현룡수 회장: 답례) 2013년 추석이 갓 지나고 이제 오래지 않아 우리 민족의 이묘같은 많은 장례문화가 집중되여 진행되는 중양절이라고 불리우는 음력 9월 9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여 이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 민족 장례문화를 깊이있게 조명해보고자 우리 민족 장례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현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현회장께서는 우리 중국조선족 장례문화에 현존하는 문제점은 어떤것들이 있다고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현재 우리 중국조선족 장례문화에 존재하는 문제점들로는 첫쩨; 우리민족 장례규범에 대하여 익숙히 알고 계시던 분들은 이미 모두 사망하시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가문에 상사가 나도 구체적으로 장례를 지도하여 줄 분들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장례는 문화적 색채가 없어지고, 단순히 부패되여 가는 유체를 처리해 버리는 《환경위생》사무로 전락되였습니다. 둘째; 출국 로무인원이 많아지고 대성시에 간 분들이 많아 지면서 빈집을 지키고 있는 노인들이 많아 졌습니다. 그리하여 고독사, 임자없는 주검, 사망후 며칠후에 발견 등 현상들이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장례를 한개 군체의 집단적인 행사로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처리하여 왔으며, 종래로 사적인 개인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 장례는 완전히 사적인 개인일로 되여 버렸으며, 친척이나 친구들이 대부분 외국에 나가있는 형편에서 가문에서 장례 치르기가 상당히 딱하게 되여, 부득불 민간의 도움 인원을 찾아 대충처리해 버릴수 밖에 없습니다. 세째; 우리 연변을 전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라고는 하지만 현재 연변경내에는 병원부터 빈의관까지 조선족 장례를 대상으로 한 복무항목이 한가지도 없으며, 조선족 풍속으로 장례를 치를수 있는 장소나 시설이 한곳도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이제부터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뿌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현룡수 회장: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뿌리를 찾아보면 바로 중국 송조(기원960~1279)때의 《朱子家禮》이며 원시조는 곧바로 朱熹(기원1130~1200)가 되는 것입니다. 14세기말 고려국(기원918~1392)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유교의 례의서 《朱子家禮》(家禮혹은 文公家禮라고도 함)를 들여 왔습니다. 그후 조선왕조 (기원1392~1910)가 성립되여 태종12년 (기원1412)에 조정에서는 전국에 령을 내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모두 중국 유교의 례의서 《朱子家禮》 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성종16년(기원1485)에 《經國大典》이 정식 출범하면서 조선왕조의 조정과 민간에서는 장례와 제사를 포함한 일체 행위표준과 례의규범이 모두 중국 유교의 례법에 기준하게 되였습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은 중국고대의 유교문화 원고유존들을 비교적 완정하게 보존하고 있는데, 이런 원고유존들은 바로 오늘의 중국 중원문화에서는 이미 거의 찾아 볼수 없는 것들입니다. 조선왕조 중기의 학자인 申義慶(기원1557~1648)은 《喪禮備要》라는 책을 써서 《朱子家禮》의 상례에 상관되는 부분들에 상세하게 주석을 달았으며, 조선왕조 말기의 학자인 李縡(기원1680~1746)는 《朱子家禮》에 기초하여 거기에 또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가례 풍속과 리념을 보태여 넣으면서 《四禮便覽》이란 책을 써서 조선민족의 《冠婚喪祭》례의 규범들을 전면적으로 저술하였습니다. 이것으로 《朱子家禮》의 우리 민족화가 최종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의 기본리념은 유가의 사상으로서 그 핵심은 “효도”이고 그 주체는 “례의”입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풍속에서는 “효도”와 “례의”의 리념이 집중적으로 표현됩니다. 조선족 전통 장례활동은 문화적 의미에서 “효도”와 “례의”를 원만히 하고 계승하는 과정으로 됩니다. 중국 조선족 선민들 대부분은 1850년 이후에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 동북지구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였는데 100여년 력사의 연혁을 거쳐 점차 당대 중국의 한갈래 소수민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중국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여러지역에서 들어왔는데 그들이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장례풍속도 지역에 따라 정도 부동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특정된 환경에서 장기간 공동히 생활하는 가운데서 점차 중국특색의 조선족 장례문화가 형성되였습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장례제도를 실행하였는데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조선족 전통장례에서 썼던 운구 공구, 香徒, 灵輀라고도 함)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막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 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족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 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는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장례제도를 극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미신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습니다. 그후로 부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80년대부터 시작하여 나라에서는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모두 유체를 화장 할것을 제창하였습니다. 1997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국무원의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 시키면서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유체를 화장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나라에서《조례》를 제정하여 화장제도를 실시하게 된것은 시대가 발전했다는 상징으로서 자손만대에 덕을 쌓는 좋은 일이며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의 기본리념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자연발생적 힘에 의하여 간신히 지탱해 오던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더는 사회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암담해져 가면서 오늘에 와서는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였습니다. 만일 시급히 조치를 대여 구급하지 않는다면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철저히 매몰되고 말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에는 초상, 안장, 제사, 이렇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초상이란 사람이 사망하여서부터 안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며, 안장이란 사망한 유체를 매장, 혹은 화장하는 과정을 말하며, 제사란 유체를 안장한후에 진행되는 일련의 의식들과 기념행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상례문화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가례 지침서인 “사례편현(四禮便覽)”은 모두 8권으로 되여 있는데 상례부분만으로 5권을 차지합니다. 우리민족의 선인들은 우리민족의 전통습속과 전통리념을 정리하여 상례에서 집중적으로 표현시켰는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례문화는 우리민족의 대표성 문화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핵심은 효도사상입니다. 효도사상은 유교의 대표성 사상으로서 천백년래 사회질서와 가정관계를 유지시킨 기본적인 도덕 준칙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孝为百行首” 라고까지 하였는데 그 뜻인즉 효도가 모든 행위중에서 첫번째로 지켜야 할 준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상제문화에서는 효도사상이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조심스럽게 술을 붓고 무릎꿇고 절을 하는 등의 동작은 바로 효도의 대표성적인 표현동작입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바로 장례를 통하여 효도사상을 전수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효심이 부족하고 민족의식이 담박하게 된것이 어찌보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가 쇠퇴된것과 관련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효도라는 “孝”자는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를 업고 있는 형태로 이루어 졌는데 그 뜻인즉 부모를 공경하고 잘 받들어 모시라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은 평소에 자기 인생의 개척을 위하여 분투하면서 부모에게 많은 미안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에서 일정하게 성공을 거둔후 다시 부모를 생각하게 될때에는 부모는 어느덧 늙어서 사망하게 되거나 언녕 사망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례와 제사는 부모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부모한테 전달하고 반성하며 용서를 비는 역활을 합니다. 효도사상은 동방사상의 정수이며 우리민족의 보귀한 정신 유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를 보호하고 발양시켜려는 기본 목적이 바로 효도사상을 보호하고 발양시키려는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현재 우리들이 지킬수 있는 조선족 전통장례로는 어떤것들이 있다고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병원에서 사망하여 화장하는 경우를 기준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친인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염습을 해야 하는데 이 절차는 될수록 전문인원이 하도록 하십시요. 우리 장례 복무열선에 련락하면 됩니다. 2, 염습이 끝나고 령구를 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영결례를 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 세번 허리굽혀 인사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객실, 혹은 례당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습니다. 조문객이 와서는 먼저 그 령좌앞에 가서 술을 붓고 세번 인사합니다. 상주는 하루밤 령좌를 지키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날 장의관에 가서 고별식을 할때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 (主妇)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기들의 특수신분을 나타냅니다. 유가속 기타의 녀성들은 머리에 몽상을 달고 남성들은 팔에 상장을 두르는데 사망자가 남성일 경우 왼쪽에 달고, 사망자가 녀성일 경우 오른쪽에 답니다.장례에 손님으로 참석할때 녀성분들은 될수록 꽃무늬 없는 단색옷을 입고 남성분들은 될수록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5, 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안신제에서는 제사상 차리고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상주와 주부,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 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기름냄새를 피우는데 기름떡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운 다음 제단의 제물들을 치우고 기름떡만 올려놓고 술도 붓지말고 상주와 주부가 절을 세번하면 됩니다. 제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불길하므로 모았다가 지정한 소각로에 가져다 태웁니다.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보관처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인사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고혼의 안정을 바라는 의미에서 제사때마다 번번히 골회함을 움직일 필요가 없으며, 꼭 움직일 경우에는 먼저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움직이는것이 례의입니다.    김동선 기자: 계속해서 우리 민족 전통장례의 하나의 중요한 내용인 염습의 기본 절차를 알아보지요? 현룡수 회장: 조선족 장례 - 염습(연변에서는 매시라고도 함)은 현재까지 보유되고 있는 조선족 장례 습속에서 가장 중요한 습속의 하나입니다. 전통적으로 염습은 동네의 덕망이 높은 분이 와서 하게 되였는데 가속에서도 협조할수 있습니다. 현재 병원에서 염습할시에는 극히 제한된 시간내에 질량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염습 실시 인원이 반드시 두사람 이상이여야 하며 먼저 소독을 하고 고인한테 한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엽습을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시호와 성명을 부르고 “복-, 복-, 복-”하고 웨침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령침에 넣어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줍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아래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그다음 아래벌을 세벌 입히고 제쪽씩 발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버선을 신긴다음 그 종이봉지를 버선목에 넣어 줍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제쪽씩 손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악수를 끼우고 그 안에 넣어 줍니다. 그리고는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주는데 녀성의 경우에는 오른쪽에, 남성의 경우에는 왼쪽에 감습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줍니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주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침니다. 전통적으로는 구슬이나 은전같은 것도 넣었댔으나 지금은 넣지 않습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줍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입니다. 6, 小殓: 전폭의 염포로 유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으며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밑에 지요(地褥)을 깔고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汉字)로 씁니다. 남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學生”으로 쓰는데(시호만은 반드시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 례를 들어 남성 사망자가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위의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녀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녀성 사망자의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이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써 놓은 명정을 고인의 유체우에 덮습니다. 8, 永決礼: 염습이 기본상 끝나면 령구차가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가속들을 모두 불러 고인의 유체옆에 모이게 하고는 함께 세번 허리굽혀 영결례를 시킵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은 성시에서 일률로 화장을 하기 때문에 관을 쓰지 않으므로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주머니를 보기좋게 여며 놓아야 하며 담가에 담고 반드시 머리로 부터 바깥으로 나가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김동선 기자: 현재 중국조선족 장례에서 존재하는 문제점들로는 어떤것을 짚을수가 있을까요? 현룡수 회장:추도식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할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류행되는 조선족들의 장례에 대하여 몇가지 지적할것이 있습니다. 1, 부모상의 경우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킨후 상주는 부모님의 마지막 하루밤만은 곁에서 지켜드리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정성들여 올리는것이 자식된 기본의 도리입니다. 이 방면에서 한족분들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는데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2, 장례의 매개 절차마다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 인사를 올리는 것이 우리의 례의입니다. 염습이 끝나면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고, 랭동상에 령구를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며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고인한테 매번 인사를 올릴때마다 당신의 령혼은 한층 깨끗하게 되며 숭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지금과 같은 번개식 장례에서 상복제도를 전부 회복한다는것은 어려움이 많겠지만 앞으로의 조선족식 장례에서는 그래도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신들의 특수신분을 똑똑히 나타내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방면으로 조건을 창조할것입니다. 4, 아직까지 우리 연변에는 우리 조선족식의 고별청이 없는것이 큰 유감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는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는데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를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5, 사회적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지금 가문에서 상사가 나면 가속에서는 몹시 당황하고 조급하게 됩니다. 지금은 시장경제 시대인데 계속 이렇게 어렵게 장례를 치룰순 없습니다. 유가속에서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만 걸면 모든 장례 행사가 OK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시대상조 장례복무 중심을 설립하였는데 도움이 필요한 노인과 환자들을 등록하고 매일 문안전화 형식으로 추적봉사를 하여 드리며, 사망하였을 경우 회원의 우혜표준으로 장례를 치려 드립니다.   김동선 기자: 현재 보유되고 있는 전통제사로는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제사란 원래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칭송하고 근본을 되새기며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의식으로서 자손 된 도리와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지내 왔으며 근본을 잊고 조상의 제사를 소홀히 하면 가문이 망한다고 철칙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전통제사는 특별히 엄격하였으며 우선 목욕제계를 하고 냄새가 나거나 자극성 있는 음식을 삼가 하면서 제사를 위하여 정성것 준비하였습니다. 제사는 크게 1,기제(忌祭); 2,시제(時祭); 3,묘제(墓祭). 이렇게 세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그 구체적인 분류에는 또 많은 종류들이 포함되여 있었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연변지구에서 보유되고 있는 제사 행사들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있습니다: 기제(忌祭)에 소상(돐제); 대상(삼년제)이 남았고, 시제(時祭)에 청명제; 추석제; 환갑제가 있으며, 묘제(墓祭)에 면례; 합장; 비석제, 등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이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 지내는 법에는 어떤 순서나 절차가 필요합니까? 현룡수 회장: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먼저 제사상을 차리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에도 많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많은 번쇄한 규칙들을 일일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체적인 분포 규칙에 대하여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왕에 제사상 차릴 바에는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정성을 넣어 제물을 차리며 제물 종류가 합리하고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게 정연하게 차립니다. 제사상은 보통 장방형으로 된 네모상에 차립니다. a, 상우에 먼저 흰 종이를 한벌 펴 놓습니다. b, 령좌 안쪽 중간에 지방과 유상을 놓습니다. c, 령좌 량옆에 그릇을 놓고 초불을 달아 각기 그 안에 세워 놓습니다. d, 유상 앞 첫줄에는 각기 메밥, 국, 수저, 술잔, 등을 놓습니다. e, 중간에는 고기류, 생선류와 기타 반찬들을 놓습니다. f, 바깥줄에 과일류, 과자류와 기타 부식품들을 놓습니다. g, 령좌 아래에 술병과 퇴주 그릇을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않고 기수로 합니다. 제사 종류에 따라 이 기본방법을 참조하면서 적당하게 조절하여 차리면 됩니다. 첫돐제사나 삼년제사와 같이 집에서 올리는 제사는 출입문을 조금 열어놓고 그 제사와 상관되는 축문을 읽은 다음 효자(상주가 제사에서는 효자)와 주부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술 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청명제나 추석제와 같이 산에 가서 올리는 제사는 먼저 후토를 찾아 간단한 제물을 놓고 후토제를 올립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통보하여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그다음 봉분을 조심스레 정리하는데 청명때는 삽으로 흙을 올리니 가토라고 하고, 추석때는 낫으로 풀들을 베니 벌초라고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 다음 가지고 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술을 붓고 세번씩 절을 올립니다. 마지막에 술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아름다운 덕담들을 나눕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족 장례 제사에서 금기시해야 할 사항들로는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A, 도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염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고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 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딸은 장례에 참석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 그리고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웁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장례 용품이나 제사 소물을 살때는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보충 부조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 합니다. K, 친인이 객사 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고사리, 복숭아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N,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 해에 자기 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 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O,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재차 혼인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P,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김동선 기자: 현재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져 가는 현상을 어떤 면에서 찾아볼수 있을까요? 현룡수 회장: 우선, 지금 우리민족의 많은 젊은이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장례개념은 별로 없고 한시 급히 화장하여 시름을 놓으려 하며 이듬해 부모의 제사날이 돌아와도 자식으로서 반드시 부모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도리를 모릅니다. 다음, 우리민족은 성씨앞에는 모두 본이 붙습니다. 례를 들면 “김해김씨요”, “전주리씨요” 할때의 “김해”요 “전주”요 하는 그 부분들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성씨보다 본을 더욱 중시하여 왔습니다. 중국의 호적부에서는 성씨만 다루고 본은 다루지 않지만 조선족 성씨에서는 본이 있으므로 하여 같은 성씨의 여러가지 혈통을 구분할수 있습니다. 조선족 성씨의 본은 한족 성씨제도보다 우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망자의 명정을 쓰면서 보노라니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기 성씨의 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성씨의 본을 모른다는것은 자기 가문의 근본을 잊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며 자기의 민족특성을 버리기 시작한 첫번째 행동입니다. 셋째: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장례에서는 상복차림은 근본 찾아볼수 없고 상주도 일반 조문객들과 마찬가지로 겨우 상장이나 두르는 정도이고 많은 경우에는 심지어 상장도 두르지 않습니다. 네번째: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초상이 나면 유체를 인차 염습한후 이불로 덮어 놓고 병풍이나 만장으로 가리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통일식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지는 원인을 어떤 면에서 찾아보고 계십니까? 현룡수 회장: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변혁기에 접어들면 필연코 많은 전통 문화들이 충격을 받고 매몰되게 됩니다. 5.4운동에서는 공자의 사상이 충격을 받았고 문화혁명 동란 시기에는 “전통”이란 수사가 붙은 모든 문화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그후의 개혁개방, 역시 사회의 대변혁이라고 할수 있는데 사상위주의 사회가 경제위주의 사회로 바뀌여지면서 또 많은 전통 문화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진 전통문화를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회복시킬수 있습니다.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는 전통문화들은 다시 발굴하여 찌꺼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하여 회복시키고 보호하고 발양시킴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위하여 더욱 훌륭히 복무하게 할수 있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도 우리의 혼례문화나 회갑문화와 마찬가지로 회복될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당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상층계층과 지식계층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하는 사람조차 없게 되였으며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서, 4대 장의관중의 그 어느 한곳에서도 조선족 유가족들을 대상하여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한곳이 없습니다.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십년이 지난후 우리민족은 다시금 우리의 전통장례문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의식하게 되였으며 지난해에는 조선족 전통장례가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진다면 그 위해성이 참으로 클줄로 압니다. 현룡수 회장: 민족이라는 것은 인류의 장기간의 력사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그리고 공동한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한 온정된 공동체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 류동이 가속화 되면서 지금 와서는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이라는 조건은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 조건만을 가지고 한개 민족을 평가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한 민족의 특색이라는것은 주요하게 공동한 문화, 그리고 이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민족습관, 공동한 민족심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시기는 민족의 대 융합을 촉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각 민족의 발전을 촉진하는 시기입니다. 그 어느때 가서는 일부 비슷한 민족들끼리 융합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모두가 중국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모두가 중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개 민족이 자기의 존재를 나라에 선전하고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이 주요하게는 문화입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문화, 즉 자기이 특색을 잃는다면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기본문화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인데 우리민족이 첫돐생일문화, 결혼문화, 회갑문화, 등에서 이미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상제문화에서 자기의 체계를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민족이 상제방면에서 자기의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족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됩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은 두개 방면으로 보아낼수 있습니다, 한 개 방면은 민족의 발전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하여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민족의 특색을 보호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증강하며 민족의 동일성을 가강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민족의 소질제고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효도문화를 발양하여 우리민족의 사회를 화목하고 질서있는 사회로 건설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민족 장례문화에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면 어떤 과제들이 우선돼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목전의 우선적인 과제로는 우리민족식의 장례시설을 설치하고 우리민족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습니다.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에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장례복무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면 조선족 유가족에서 조선족 장례규범에 대하여 잘 모른다 하여도 자기 민족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향만 있으면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을 걸어 모든 장례행사가 우리 민족식으로 OK가 될수 있습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내부건설을 가강하면서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백화상조 (장례) 복무중심을 설립하였는데 정부와 사회 각 계층의 다함없는 지지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족 장례문화를 보호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현룡수 회장: 2009년 6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와 《조선족 전통장례》을 각각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非物质文化遗产)로 지정하였으며 연변주 문화국이 주관부문으로 되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구체적인 보호사업을 책임진 보호단위로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조선족 전통 상제문화는 보호가치와 발양의의가 있는 민속 문화라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였습니다.그러나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우리 연구회의 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반드시 정부의 유관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사회의 상관 계통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전사회적인 참여가 실현되여야만 기정한 목적에 도달할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연구회는 사회의 상관 계통, 특히는 의료계통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상당히 힘들게 공작하고 있습니다. 의료계통의 많은 분들, 특히는 주요 책임자들이 우리의 공작에 대하여 리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작은 더욱 힘들게 되며 우리 공작의 진전은 더욱 꿈뜨게 됩니다. 나라에 아직 정식으로 무형문화재 보호법이 나오지 못한 조건하에서 우리들의 공작은 부득불 많은 길을 에돌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내부적으로 “조선족 장례와 제사 실용편람”을 정리해 냈습니다. 우리의 장례복무 중심에서는 지금 이 실용편람에 근거하여 복무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충분한 실천을 통하여 고칠것은 고치고 보충할것은 보충하면서 연변의 민속연구 학자나 전문가들과 함께 “조선족 장례와 제사 규범”을 편찬해 낼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조선족의 상제문화도 자기의 체계를 확고하게 수립하게 되며 우리민족의 문화재부가 더욱 묵직하게, 더욱 찬란하게, 더욱 완벽하게 될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김동선 기자: 맺는말 본 민족의 특색과 전통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여기는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당과 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의 특색문화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제정하여 실행하고 있지만, 우리 민족 자신이 도리여 자기민족 특색문화의 보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꺼리낌 없이 하나, 둘,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특색이 없이는 민족 대단결이 있을수 없으며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릴수록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게 됩니다. 민족특색이 짙을수록 자기의 합법성이 더욱 완벽하게 되며 세계적 경쟁력이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의 전통적 상제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적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입니다. 만일 조선족 민속문화에서 상제문화가 빠진다면 조선족의 전반 민속문화는 자기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잔페문화로 전락할수밖에 없을것입니다. 조선족 상제문화를 보호하고 계승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 한 부문이나 어느 한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수 없는 계통공정입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계속 자기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고 시종 자기의 민족 특색을 확보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더욱 밝을것입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2013년 9월 21일
14    (연변방송) 추석에 깃든 전통문화의 향연--2013년 댓글:  조회:3391  추천:0  2013-09-16
2013년 추석 맞이 특별기획 《추석에 깃든 우리 민족 전통문화의 향연》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문화연구회 현룡수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사흘후면 우리 민족 전통명절인 추석입니다. 추석은 우리 민족 4대명절의 하나로 그 력사가 참 길다고 볼수 있을것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주급, 성급 무형문화재《조선족장례풍속》의 보호책임단위이며,현룡수회장은 《조선족장례풍속》의 대표성 전승인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산하에는 또 상조기구도 갖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주로 어떤 단체이고 또 산하의 상조기구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맡아하고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주 문화국의 령도를 받는 사회 단체로서 무형문화재 《조선족 장례풍속》 보호단위입니다. 무형문화재 보호는 원래 정부 차원의 공작인데, 우리는 정부 유관부문의 위탁을 받고 상관되는 문화정리공작과 보호전승공작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연구회 산하에 《시대상조 복무중심》이 있는데, 조선족의 장례문화 보호와 시대적인 조선족 장례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취지로 세워진 기구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 노인협회, 주 노령위원회 등과 공동으로 연변 황도계 성립을 준비하고 있으며, 연변에 조선족 장례장소와 시설을 갖추는 문제를 가지고 유관부문과 교섭중입니다. 세계적으로 60세이상 노인 비례가 10%를 넘으면 노령사회라고 합니다. 연변 호적에 따른 노령 비례는 원래10%정도였는데, 현재 연변의 실제 노령비례는 30%에 육박합니다. 우리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원래 80만으로 집계되여 있는데, 외국에 나가 노무에 종사하는 인구, 북경, 청도, 등 대성시에 나간 인구, 그리고 각 대학과 전문학교에 간 학생을 포함하면 이미 50만의 연변적 조선족 인구가 바깥에 나가 있으며, 연변에는 30만 정도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비하여 노인과 병자들은 기본상에서 모두 연변 본지에 남아 있는 형편이며, 이로하여 현재 연변에 남아있는 조선족들 중 세명중에 한명은 노인이 아니면 병자인 셈입니다. 특히 빈집을 지키는 노인들이 많아 지면서, 고독사, 임자없는 주검, 사망후 며칠후에 발견 등 현상들이 자주 발생하며, 가문에 상사가 나도 장례치르는 것이 큰 난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장례를 한개 군체의 집단적인 행사로 인정하고, 서로 도우며 처리하여 왔으며, 종래로 사적인 개인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조선족 장례는 완전히 사적인 개인일로 되여 버렸으며, 단지 유체를 처리하는 《환경위생》차원의 사무로 전락되였습니다. 이것은 기실 우리민족의 사회적 위망에 대한 엄중한 위협으로 됩니다. 친인이 사망하여 그 존엄을 쓰레기처럼 처리해 버리는 그런 유가족이 사회에 나가 아무리 제노라고 우쭐한들 그 수준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이렇게 자기 친인의 죽음존엄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민족에 대하여, 나라에서 존중할들 얼마나 존중하겠습니까. 장례문화는 꺼리고 피하기만 할것이 아니라, 싫은대로 중시하지 않으면 안될 일입니다. 산사람들의 도덕수준과 우리민족의 존엄과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상조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노인과 병자들을 등록하고 매일 문안전화 형식으로 추적 봉사를 하여 드리며, 일단 사망하였을 경우, 회원의 우대 표준으로 장례를 전부 책임져 드립니다. 이미 30여명이 등록하였습니다.   김동선 기자: 사흘후면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 추석입니다. 현회장께서 먼저 추석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주시죠? 현룡수 회장: 추석은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의 하나로써 해마다 음력 8월 15일로 중추절(仲秋節), 가위, 한가위라고도 한다.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 때에 왕녀 두사람이 6부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7월 15일부터 한달 동안 매일 일찍 모여서 길쌈을 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서는 그 성과의 많고 적음을 살펴 진 쪽에서 술과 음식을 내놓아 승자를 축하하고 가무를 하며 각종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그 말이 변하여 가위가 되었다. 가배라는 말은 가운데 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곧 음력 8월 15일은 만월이므로 이것을 뜻한 것으로 볼수 있으며, 진편에서 이긴 편에게 잔치를 베풀게 되므로 갚는다는 뜻에서 나왔을 것으로도 유추된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의 추석음식들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추석에 중국의 한족들은 월병을 먹는것이 특징이고,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은 소고기를 먹는것이 특징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 추석의 대표적인 절식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편속에는 콩· 팥· 밤· 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것으로 한다. 열 나흗날 저녁 밝은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드는데,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며,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 총각들은 송 편을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한, 임신부의 태중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궁금할 때에는 송편 속에 바늘이나 솔잎을 가로 넣고 찐 다음, 한쪽을 깨물어서 바늘의 귀쪽이나 솔잎의 붙은 곳(나무에 붙었을 때의 접착부분)을 깨물면 딸을 낳고, 바늘의 뾰족한 곳이나 솔잎의 끝쪽을 깨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이를 점치기도 한다.   특히 올벼로 만든 송편은 올벼 송편이라 부른다. 추석의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술이다.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는데, 햅쌀로 빚었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한다. 추석 때는 추수를 앞 둔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풍족해진다.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해서 추석 때에는 서로 술대접을 하는 수가 흔하다. 또 이 때의 가장 넉넉한 안주로 황계(黃鷄)를 들 수 있는데, 봄에 알을 깬 병아리를 길러서 추석 때가 되면 잡아먹기에 알맞게 자란다.  또 옛날에는 명절에 어른에게 선사하는 례물에 닭을 많이 썼다. 친정에 근친을 하러 가는 딸은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갔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도 닭을 선물했으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손쉬운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특히 사위가 찾아오면 장모는 닭을 잡아 대접하는 일이 흔했다. 녹두나물과 토란국도 추석의 절식이다. 녹두나물은 소양(消陽)한다고 하지만 잔치상에 잘 오르고, 토란은 몸을 보한다고 해서 즐긴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추석에는 주로 어떤 행사와 놀이를 해왔습니까? 현룡수 회장: 추석에 행해지는 세시풍숙으로는 벌초, 성묘, 차례, 등이 있고,민속놀이로는 닭싸움, 소놀이, 거북놀이, 강강수월래, 줄다리기, 원놀이, 가마싸움, 씨름, 반보기, 올게심니. 밭고랑 기기, 활쏘기 등을 들 수 있다.  (1) 벌초와 성묘   추석에 조상의 무덤에 가서 여름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주는데, 이를 벌초라 한다. (성묘에 대해선 아래에 구체적으로 설명.)  (2) 차례    추석에 산으로 벌초하려 가지 못할 경우, 집에서 추석차례 지내는 것이 바람직 하다. 전통적으로는 추석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하며, 고조 이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3) 소놀이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는 진행된다. 먼저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상쇠의 선도에 따라 한바탕 신나게 풍물을 울리며 어우러져 놀다가 소놀이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멍석을 뒤집어 씌우며, 뒷사람은 큰 새끼줄로 꼬리를 달고, 앞사람은 막대기 두 개로 뿔을 만들어 소이 시늉을 한다.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한다. 소를 앞세우고 일행은 앞마당으로 들어가 농악을 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면 주인집에서는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 놀다가 다시 소를 끌고 다른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여러 집을 찾아가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논다.  (4) 원놀이.   옛날 서당 교육은 훈장을 초빙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절이 되면 훈장도 고향에 가서 차례. 성묘를 하게되므로 서당은 며칠 ㅜ시게되고 학동들은 자유롭게 놀 수가 있다. 이럴 때에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와 가마싸움이 있게된다.   원놀이란 학동들 중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재치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은 뱃성이 되어 원님께 소장을 내어 그 판결을 받는 놀이인데, 오늘날의 대학에서 모의 재판과 유사하다.  (5) 반보기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끼리 장소와 날짜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마련하여 한나절 동안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이와같이 반보기란 서로 중간 지점에서  한나절 동안만 상봉하여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6) 올게심니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 묶어 기둥이나 대문위에 걸어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마련하여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풀기도 한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종자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서 올렸다가 먹었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염원의 뜻이 담겨져 있다. 이외에도 추석과 관련된 많은 민속놀이가 있지만 시간 관계로 소개를 략함.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추석에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비롯해서 이미 타계하신 가족의 어른신들을 찾아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또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현회장께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주시죠? 현룡수 회장: 답; 산소에 찾아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일은 후토를 찾아서 산신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명태 한꼬리나 과일 세알을 제물로 놓고 술을 한잔 따라 올리고 세번 절을 하면 되겠습니다. 흙을 파고 초목을 베기전에 먼저 산신의 허락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대자연에 대한 존중을 표시합니다. 그다음 낫으로 조심조심 벌초를 시작합니다. 많은 분들의 경우 먼저 벌초를 하고 후에 후토제를 지내는데 크게 틀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도 대자연의 한 성원이라는 리념에서 대자연에 대한 숭배를 조상에 대한 숭배의 앞순서에 놓는것이 리치에 맞습니다. 산소는 신성한 곳으로서 그곳에서 함부로 흙을 파고 함부로 나무를 찍고 풀을베고 하는것은 삼가하여야 할 바입니다. 산소에 가서 벌초를 깨끗이 끝내고는 갖고간 제물들은 제단에 차려 놓습니다. 제물을 차린후 일동이 그앞에 정연히 서서 제주주부부터 시작하여 항렬의 순서에 따라 나와서 술을 붓고 세번씩 절을 합니다. 제사순서에는 초헌, 아헌, 종헌, 첨작 등 순서가 있지만 지금 조선족 장례와 제사가 많이 간소하여진 형편에서 구태여 순서에 구애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남자재배 즉 두번절, 녀자 쌍재배 즉 네번절 규례가 있었는데 우리 연변에서는 종래로 세번절을 하였왔으므로 계속 그대로 남녀 구분없이 세번절을 하면 되겠습니다. 매사람의 헌작이 끝난후 제주가 메밥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놓고 반찬도 조금 집어 놓으면서 식사시중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 일동이 기립한채로 9초동안 묵도합니다. 그다음 숙주 즉냉수 한그릇 혹은 술한잔 부어 올리고 일동이 다 함께 세번 절을 올립니다. 이것으로 제사는 끝납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정하여 일동이 모여앉아서 제물들을 음복하면서 재미있게 덕담들을 나눕니다. 그다음 납골당에 가서 골회함을 놓고 제사 지내는 경우를 말씀 드립니다. 납골당 보관상에서 골회함을 꺼내올때 먼저 세번 경례를 올리고 낮은 소리로 “오늘 추석제사 올리려고 함을 잠시 움직이오니 부디 놀라질랑 마십시요!” 하고 여쭙니다. 그리고 골회함을 조심스럽게 안고 나와 합당한곳에 안치하여 놓은후 그앞에 간단히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순서는 우에서 말씀드린 산에 가서 성묘하는 순서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제사가 끝나면 골회함을 다시 보관상에 모시고 낮은 소리로 “다음번 다시 찾아 뵐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요!”하고 인사하고 물러갑니다.  추석제사상 차리는 방법 추석제사상 차리는 방법을 말씀드리면 제일 안쪽 중간에 메밥과 물그릇, 수저, 술잔 등을 놓고 그앞에 고기류, 생선류와 여러가지 반찬들을 놓으며 제일 바깥줄에 과일류와 과자류 기타 떡류와 부식품들을 정연하게 보기좋게 차려 놓습니다. 한가지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한고 단수로 합니다. 제사상 차리는 규칙으로는 “홍동백서, 생동숙서, 어동육서, 두동미서, 조률시리…” 등이 있는데 자기가 묘소를 마주하여 서서 묘소의 위치를 북으로 인정합니다. 한곳에 묘소가 여러자리 있을경우 다른 제물들은 여러번 쓸수 있지만 메밥과 수저만은 제각기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총적으로 제사상 차릴때 가장 중요한것은 성의입니다. 성의만 있었다면 그까짓 규칙같은 것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한들 크게 문제될것이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리는 제물에 대해서는 어떤 주의할점이나 또 제사나 차례 지낼때 금기시해야 할 사안은 없습니까? 현룡수 회장: 답;1;복숭아와 삼치, 갈치 꽁치 등 끝에 '치'자다 든것은 사용하지 않습니다….어째서…? 답; 복숭아는 사랑의 상징이므로 제사에 합당치 않고 ‘치’자는 전통적으로 임금의 통치에 도전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금지되였음. 2. 고춧가루와 마늘양념을 하지 않습니다….왜서?... 답; 초상부터 삼년제까지의 魂제사에는 고추가루 마늘양념을 쓸수 있지만 그후의 차례, 묘제등 神제사에서는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민간신앙에서 붉은색은 귀신이나 신령을 쫓아 버리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신령이 제사받으려 내려 왔다고 붉은색을 보고 공연히 쫓겨 나지요. 그리고 고추나 마늘은 또 자극성 음식이므로 신령들이 그 제물을 먹을수 없습니다. 3. 붉은 팥을 안쓰고 흰고물을 사용합니다….왜서?... 답:… 차례 음식에 붉은 고추가루를 쓰지 않는것과 같은 도리. 4.전통적으로 제사에 쓰는 과일은 조율시리라고 하였으니 대추, 밤, 감, 배가 그것이며 이것들을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옛날의 일이고 지금은 거기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겠습니다. 계절에 따라 사과, 수박, 참외, 석류, 귤 등의 여러가지 과일중에서 편리한대로 자유롭게 몇가지 준비하면 되겠습니다. …   김동선 기자: 추석에 산소에 가서 성묘할때 주의할점들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산소에 가서 성묘할 때 우선 안전에 주의해야 합니다. (1) 산불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뱀이나 벌에게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3) 추석에 산소에 가서 술마실수도 있으니 음주운전해서는 안된다. (4) 교통안전에 주의를 돌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5) 이외 음식안전에 주의하라 (6) 이외 기타 보충 설명 ■독사에 물린 경우    ■벌초하다 베인 경우  답;… 재수가 없어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자체로 응급조치를 하고 지체말고 병원으로 최고 속도로 달려가야 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장례문화에서 지켜야 할것들은? 현룡수 회장: 장례문화, 특히 제사에서 지켜야 할 것들;  제사는 선조와 사망한 부모들과 마음으로 교류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정성이 있어야 제사가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인들은 자고로 제사에 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목적이 바로 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하고, 정성을 다 하게 하려는 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오늘 부모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과 부모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정감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조상 음덕의 혜택과 유익한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고, 가문의 뉴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제사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의가 없는 제사는 지내지 않은편이 좋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9월 16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13    (연변방송)이밤을 함께 합니다. 댓글:  조회:3176  추천:1  2013-04-16
연변인민방송국 《이밤을 함께 합니다.》 2013 년4월4일 저녘9시 프로기획:한태익 아나운서:윤련월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룡수   안녕하십니까? 윤련월입니다. 오늘이 바로 청명절이네요. 24절기의 하나인 청명은 음력설, 단오명절, 추석명절과 함께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로 되고 있습니다. 청명에는 조상이나 돌아가신 친인들의 산소에 가서 가토를 하면서 고인들을 기립니다. 청명절을 맞으며 오늘밤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을 모셨는데요. 우리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는데 여생을 바쳐가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방송사연 들으시고 전화참여 하시려는 분들은 생방송실 전화 2561111번이 열려 있으니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간주곡___ 인사나누고 (1) ;아나운서: 어느 민족에게나 다 자기 민족특색에 맞는 장례문화가 있지요. 현회장께서는 어떤 특수한 인생기회에 의하여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에 접근했고, 어떻게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사업을 맡게 되였는지요? 현회장: 저의 고향은 화룡 팔가자 약암동이란 곳인데, 가정의 제 11번째 아이로 태여났습니다. 저의 앞에서 이미 열명의 형님, 누나들이 홍역에 걸려 요절되였습니다. 제가 태여나게 되자 자식을 이미 열이나 잃고 붕괴의 변두리에 처한 아버지께서는 당지의 용한 의원을 찾아 방토를 실시하였습니다. 하여 제가 태여나자마자 어머니에게는 보이지 않고, 포대기에 싸서 이미 약정되여 있는 양모에게 가져갑니다. 그리고는 그집 소 외양간에 가서 포대기에 소똥을 묻히면서 소똥을 밀어내는 구멍으로 빼 내오고 “쇄지야! 음매!”하고 부릅니다. 쇄지란 송아지란 뜻이죠. 그때부터 모두들 저의 이름을 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며칠전의 력서장을 한장 뜯어서 포대기에 넣어 줍니다. 저의 출생부란 뜻이랍니다. 그당시에 전문 아이들만 업어가는 “어베”라는 귀신이 있었는데, 우리집에서 이미 아이 열이나 업어 가서 재미를 붙였으니, 그 귀신이 저를 가만 놔둘리 없지요. 그리하여 제가 태여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귀신이 그날 저녁에 또 저를 업어가려고 옵니다. 그런데 이번에 와서는 그 귀신이 갈피를 잡을수 없게 됩니다: 이름을 들어보니 짐승 이름이고, 또 확실히 소똥냄새도 나고, 생일을 보니 이미 며칠전에 태여난 송아지인지라, 결단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유예하는 사이에, 어느덧 새벽이 되여 수탉이 울면 그 귀신도 돌아 가야 합니다. 이렇게 백날을 속이니, 귀신도 단념하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방토였지만, 다행히도 그후부터 우리집에서는 다시는 아이들이 요절되는 일이 없었으며, 제아래에 또 두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성공적으로 살아나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물론 시대가 발전한 혜택이였지요. 그 당시 마을밖에는 도가집란것이 있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들어 내가는 상여를 넣어두는 집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베라는 귀신이 그집에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도가집을 상당히 무서워 하였죠. 그러던 1967년도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저는 소학교 마당복판에서 상여가 불에 활활 타는것을 보았습니다. 어디서 온 반란파들인지 마차에 상여를 실어와서 태웠습니다. 그무슨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한다고 하였습니다. 개팔이라는 한 얼치기가 상여가 타는 불속에서 무엇을 건져내려 하다가, 덜미를 잡혀 교단에 끌려 올라가, 머리가 땅에 닿게 허리 굽히고 벌을 받다가, “개팔이를 타도하자!”고 열번 웨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문화혁명전까지만 하여도 마을에서 명정과 만장을 앞세우고, 호호탕탕한 상여행열은 민속놀이 못지않은 경관이였습니다. 숱한 아이들이 따라가며 구경했죠. 그 상여군들속에서 저는 저의 아버지도 여러번 보았습니다. 저의 고모의 말씀에 의하면 저의 할아버지가 바로 집사였는데, 목단강 지역에서 장례제사를 맡아 주지하시던 분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16병진년에 일본 보안대원들한테 집단폭행을 당하고 억울하게 사망하셨습니다. 제가 늙으막에 와서 역시 장례문화를 다루게 되였는데, 아마도 우리 가문의 숙명인가 봅니다. 제가 할아버지의 의발을 이어 받았죠.   (2);아나운서: 어떤방면의 것을 깊이 연구하고 성과를 내자면 연구학자들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지지도 매우 주요합니다. 남편이 전문 조선족 장례문화를 다루니 안해는 어떤 태도였습니까? 뭐라 안 하던가요? 현회장: 다행스러운것은 그당시 저의 안해는 한국에 가고 저의 옆에 없었습니다. 많은 시끄러움을 덜었죠. 제가 하고싶은 대로 할수 있었으니깐요. 지금도 그 사람은 제가 하는 노릇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캐여 물어면 이것 저것 얼버무려서 관을 넘지요. 실상을 알고나면 앞으로 무서워서 저의 옆에 오지 않을가봐 걱정입니다. 그래서 안해를 파악있게 설복시킬 묘한 방안을 한창 연구중인데, 이미 효과가 있음직한 방안을 몇가지 연구해 냈습니다.   (3);아나운서: 자제분들은 아버지의 사업에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현회장; 저는 딸이 없고, 아들놈이 둘입니다. 두번째 놈이 또 고추를 달고 나오자 정신을 바싹 차리게 되였습니다. 아들이 둘이란 것은, 잘 키우면 룡 두마리, 잘못 키우면 승냥이 두마리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휘초리를 휘두르며 두놈을 공부에 몰아 넣었습니다. 이미 두놈 모두 대학필업 시켰고, 큰놈은 중국과대 연구생까지 마쳤습니다. 많은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 저의 뜻을 따라 주었으니 고맙죠. 저의 안해는 아들난 죄로 그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또 북경에 집까지 사 주다나니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물론 저도 조금은 고생을 했지만도. 아이들이 크면서 세대차이가 있다나니 사회에 대한 관념상에서 자주 충돌이 생깁니다. 저는 전통적인 사유이고, 아이들은 현대적인 사유이니 조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사업에 너무 집착하니깐 아이들도 인젠 리해를 표시하면서 여러방면으로 관심하고 협조합니다.   (4);아나운서: 조선족례의연구회를 조직한 초기에는 여러가지 애로사항들이 매우 많았겠는데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요?  연구회 성립초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금 문제였습니다. 연구회를 하기전에 기술개발유한회사를 꾸리고 “종합제설기”라는 설비를 자체로 설계하여 특허을 받은후, 결국 자금이 모자라 개발을 못하고, 헐값으로 양도하다나니, 많은 자금을 손실 보았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이 도와주고, 정부의 지지에 힘 입어서 무형문화재 등록신청에도 성공하였고, 성공적으로 유관 세미나를 개최하여 주민정국, 주위생국, 등20여개 부문대표가 참석하였으며, 이름있는 민속학자들이 참석하여 8편의 무게가 있는 론문을 발표하여 연변 민속보호 사업의 합리성과 가능성을 론증하였습니다. 연변 문화사에서 조선족 장례풍속 세미나는 처음이였죠. 지금은 정력을 집중하여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편찬하고 있는데, 바야흐로 완미중에 있습니다.   (5);아나운서: 요즘 조선족들이 출국이 많아지면서 독거로인들이 많게 되였지요. 그리고 가문에 상사가 나면 조선족들은 여러방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런 실정에 비추어 장례대행 기구도 내왔다면서요? 현회장:그렇습니다. 조선족 장례문화가 쇄퇴된것이 큰 문제일 뿐만 아니라, 조선족들이 장례치르기 어려운 문제도 시대적 난제로 나서고 있습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현대 로인들의 가장 큰 특점은 자식들과 갈라져 사는 것인데, 반려가 함께 있는 로인들은 그런대로 서로 등이라도 긁어줄수 있지만 독거로인들은 감기에 걸려도 물 한컵 떠다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집에서 고독사 한 로인들, 사망되여 며칠후 발견된 망령들을 자주 접촉하게 됩니다. 지금 시대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니까 젊은이들이 부모를 옆에 모시고 있으면서 보살필 사이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리가 어려운 로인들은 보통 경로원에 맡겨지는데 정부에서 꾸린 경로원은 그런대로 사람 사는곳 비슷하지만 개인적으로 꾸린 경로원은 그 정황이 상당히 복잡합하다. 시대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미 한참 왔지만, 우리들의 현재 장례봉사체제는 고대보다도 더 락후합니다. 그리하여 연구회 산하에 “시대상조(장례)복무중심”을 설립하게 되였습니다.   (6);아나운서: 조선족 장례에 대하여 연구하고, 또 장례대행사를 경영하면서 여러가지 안타까운 현상들을 보았다는데 어떤일들이 가장 인상적이였습니까? 현회장: 인상에 남는 일들이 많지요. 한번은 서른살 좌우의 젊은 색시가 아이를 업고 와서 자기 아버지가 사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장례치를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괜찮은 형편이죠. 한번은 철남의 한 사회구역에서 련락이 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썩은내가 코를 찌르고, 사처에 마이고 버린 술병과 먹다남은 명태낙지가 널려있었으며, 시체는 이미 며칠전에 사망한 망령이였습니다. 참 딱한 일이죠. 이런 망칙한 꼴을 피면하기 위하여, 한 불치병 독거로인은 자기 죽을 시간을 미리 계산하고는 절로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후 시간에 맞춰 불시에 죽으니 가속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장례봉사체제가 이 꼴입니다. 장례문화를 살리려면 먼저 장례 어려움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7);아나운서: 조선족 장례문화를 어떻게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현회장: 우에서 이미 말씀 드렸다 싶이 우리의 장례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면 먼저 조선족들의 장례치르기 어려운 시대난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어도 장례치를 사람조차 변변치 못한데 장례문화 발전이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죠. 현재 우리 연변에는 병원으로 부터 빈의관까지 조서족 장례풍속을 존중하여 설치한 설비나 항목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장례봉사체제는 고대보다도 더 락후합니다. 고대에는 마을마다 상여계, 황두월이라는 민간 상조 조직이 있어서 집에 상사가 나도 별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집 장례는 제가 책임져야 하니, 주위에 친척, 친구가 없는 분들의 경우 참으로 딱한 사정입니다. 부득불 한족수의상점에서 일을 보는 조선족 직원들을 고용하여 쓰는데, 비용이 비싸고 복무가 규범적이지 못하며, 질량 보장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미 주민정국, 주위생국, 연변병원 등 유관부문에 제출하였는데 이제 곧 해결방안이 나올겁니다.   (8); 아나운서: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이 주급, 성급 문형문화재로 지정되게 하기 위하여 어떤면에서 노력을 기울였는지요? 현회장: 조선족 전통장례가 주급 성급 무형문화재로 되였는데, 제 혼자의 노력으로 된것이 아닙니다. 수선 정부 유관부문에서 지지하고, 유관 학자들이 협조한 결과입니다. 2009년은 나라에서 무형문화재 등록을 시작한지 이제금방 두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족을 포함하여 전국의 57개 민족중에서 장례문화를 무형문화재로 신청한것은 우리 조선족이 유일하였습니다. 장례문화는 좀 특수한 문화지요. 그리하여 그 신청의 합리성에 대하여 주의 주관부문 주요령도자들까지도 의심을 표시하게 되였습니다. 저는 합리한 도리와 충분한 리유를 찾아 가지고 그이들과 내심하게 교섭하여 끝내는 정부측의 지지를 쟁취하였습니다. 제가 주장한 리유라면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는 중국의 그 어느 다른 민족의 장례풍속과는 달리, 고대중국 유가문화의 원고유존으로서, 원래는 중국에서 기원하였는데, 현재의 중국에선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찾아 볼수 없는 아주 보귀한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민족의 가례문화가 고대중국의 유교문화를 오늘까지 보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족 장례문화가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지요. 그런데 아직 성급에 그쳤는데, 앞으로 더 노력하여 나라급으로 승급시킬 타산입니다.   (9);아나운서: 현회장님께서는 우리 민족 전통 장례제사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 이미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요. 이방면에서 앞으로 어떤 바램과 타산들이 있는지요? 현회장: 수선먼저 조선족 장례문화를 현재의 락후한 민간차원으로 부터, 시대적이고, 전업적이고, 민족적인 고급차원으로 승급시켜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금후의 계획과 목표가 있습니다: 첫째; 시대상조를 효과적으로 운영하여, 조선족 장례봉사 사회적 기제를 건립하고, 조선족 장례 봉사인원 배양기지를 건립한다. 둘째;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완성한다. 셋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나라급 무형문화재로 승급시킨다. 넷째; 조선족 장례풍속 전승기지를 건립한다.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아직은 비밀입니다. 여기의 일곱가지 계획과 목표만 완성하자 하여도, 아마 백년은 걸려야 할것 같습니다. 제가 죽을때까지 죽을힘을 다 하여 분투하여도 다 완성할수 없는 아름참 계획과 목표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백년의 목표를 바라고 매일매일 열심히 출근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어느날에 염라왕님께서 “이번에는 당신이 죽을 차례요!”하고 통지를 보내오면, 저는 “예! 알겠습니다!”하고는 흔쾌히 사신을 따라서 저승에 가겠습니다.   간주곡---- 아나운서: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제사문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여생을 바쳐가고 계시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님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오늘 방송을 들으시고 어떤 감수가 있는지요? 전화참여 하시려는 분들은 생방송실 전화 2561111번을 눌러 주시길 바랍니다.   아나운서 맺음말; 해마다 청멸절이 돌아오면 혁명렬사들을 추모하고, 조상들을 기리는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이고, 미덕입니다. 오늘날 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회장님과 같은 분들이 있어, 우리 조선족 장례문화가 대를 이어 계승,발전할수 있을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 되였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방속 기대하여 주십시요. 안녕히 계십시요.     2011년4월4일        
12    (중앙방송)청명특집 인터뷰 답변고 댓글:  조회:2752  추천:1  2013-04-03
중앙인민방속국 조선말 방송 청명특집 인터뷰 답변고   1. 청명의 유래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서 립춘으로부터 다섯번째 절기가 됩니다.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15도씩 움직이면 한절기가 듭니다. 청명이면 지구가 립춘으로부터 이미 60도 움직인 위치입니다. 이미 일년의 1/6이 지나간 셈이죠. 송조때의《歲時廣記》에는 “청명이란 만물이 청신하고 명려하다는 뜻이니라.(清明者,谓物生清净明洁)”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청명은 또 습관적으로 한식이라고도 하는데, 기실 청명과 한식은 계산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동지날 부터 105일이 되는 날이 바로 한식인데, 보통 청명 전날에 들며, 또는 청명날과 청명이튿날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식의 유래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자추(介子推) 설이 비교적 대표적입니다. 중국 춘추시기에 진문공(晉文公)이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력사상 유명한 춘추 7패중의 두번째 패왕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임금이 되기전에 한번은 국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굶어서 허기져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한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 살렸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들어 갔으므로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2. 언제부터 청명절을 쇠는 풍속이 생겨났는지요? 청명풍속은 중국 춘추시기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은 공자에 의하여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2500여년이 되지요. 그러다가 당나라 개원년간 당현종때에 와서, 중국에서는 청명성묘를 한식성묘로 공식적으로 고쳤습니다. 당시의 조선반도는 통일신라시기였는데, 당나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의하여 한식성묘 풍속이 신라에까지 받아 들여진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송나라때에 와서 중국에서는 한식성묘가 다시 청명성묘로 복귀되였지만,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한식은 이미 설, 단오, 추석과 함께 4대명절에 속하게 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한식날에 주로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성묘를 합니다. 우리 조선족이 중국에 건너온 초기에만 하여도 여전히 한식을 쇠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장기적인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 와서는 한식의 개념은 거의 없어지고, 청명개념으로 일반화 되였습니다. 3. 한족과 대비할때 우리민족의 청명절 풍속에는 차이점이 존재하는가요? 있다면 어떤 차이점들인지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청명풍속은 주나라때에 중국에서 기원하여, 통일신라때에 우리민족에게 접수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의 청명풍속은 형식상에서는 중국과 기본상 비슷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상에서는 차이가 컸습니다. 그 차이는 주요하게 성묘하는 방법상에서 표현됩니다. 현재에도 한족들의 성묘방법과 우리민족의 성묘방법은 많은 다른점을 나타냅니다. 우리민족의 성묘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소에 도착하면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지냅니다. 그다음 삽으로 가볍게 묘소를 손질하는데, 속칭 가토라고 합니다. 그다음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사회자가 술을 따르고 다함께 절를 세번 하는데 강신이라고 합니다. 그다음 제주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따르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헌작이라고 합니다. 헌작에는 초헌, 아헌, 종헌, 첨작 등 절차가 있습니다. 소유의 사람들이 모두 헌작이 끝난후, 사회자가 신령의 식사를 시중들어 끝내고는, 숙주 한잔 따르고, 모두 다 함께 절을 세번 올리는데, 이것을 사신이라고 하며, 이것으로 성묘가 끝납니다. 성묘가 끝나면 자리를 정하고 모여앉아, 갖고간 제물들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능원에 가서 성묘할때에도 이 방법을 참조하며 적당히 조절하여 지냅니다. 골회함을 찾아내와 제사지낼때에는 후토제가 취소됩니다. 한자리에 조상들의 묘가 여러자리 있을때, 부모묘에 먼저 성묘하고, 그다음 윗대 순서에 따라 성묘하는데, 후토제는 부모묘에서 한번만 지냅니다.   4. 우리민족의 청명절 풍속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습니까? 전통적으로 청명절 풍속에서는 들놀이, 연날리기, 활쏘기, 식수, 성묘 등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풍속은 성묘였습니다. 중국 송나라때에 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에는 그당시 민간의 청명풍속이 생동하게 표현되여 있습니다. 현재 우리민족의 청명풍속에는 주요하게 성묘와 들놀이가 있습니다. 성묘라고 하면 또 청명날에 연변각지 소학교 학생들의 렬사비 성묘활동을 빼 놓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묘를 끝내고, 새봄맞은 산길을 밟으면서,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도 참으로 기분이 좋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5.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전통풍속을 그대로 계승할수도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고스란히 계승할수 있고, 또 어떤 내용들은 현단계 실정에 맞게 개량할수 있는것들입니까? 우리민족은 중국에서 “례의민족”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우리민족 장례제사문화의 핵심은 효도이고, 그 주체가 바로 례의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전통 장례제사문화에서 보호하고 계승해야 할것이 바로 효도와 례의입니다. 자고로 “효도가 행위의 으뜸이요, 례절이 만사의 먼저니라.(孝为百行首,礼当万事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이 효도와 례의를 잃는다면 조선족이 아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민족의 “효도”와 “례의”의 우량한 전통은 시대의 충격에 의하여, 지금 많이 색바래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민족 장례제사 방법은 많이 간소화 되였는데, 원래 우리것이 아닌 미신적인 찌꺼기들이 많이 섞이여 있습니다. 례하면 종이돈를 살은다던가, 종이집을 살은다든가 하는 것들이지요. 우리는 길림성 무형문화재《조선족장례제사풍속》보호책임단위로서 현재의 혼란한 조선족 장례제사 방법을 정리하고, 간편화, 규범화, 민족화시킬 목표를 내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민간차원의 락후한 조선족 장례제사문화를 시대적이고 전업적이고 민족적인 문화로 승급시킬 것입니다. 이 목표를 위하여, 우리는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편찬하고 있는데, 지금 진일보 완미중에 있습니다.   6. 현재 청명절에 대해 사회적으로 어떤 그릇된 인식이 존재하는가요? 청명절에 대한 인식이라면 주로 제사에 대한 인식입니다. 현재 사회적으로 제사에 대한 옳다고 할수없는 인식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제사에 대한 미신적 인식이고, 또 하나는 제사 무용론입니다. 제사를 한장의 민속종이라고 한다면, 정면에는 문화라고 씌여있고, 반면에는 미신이라고 씌여 있습니다. 문화적 태도로 제사를 지내면 유익한 신선효과를 얻을수 있지만, 미신적 태도로 제사를 지내면 해로운 마귀효과를 얻을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 무용론자들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제사 문화론을 비난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그들의 제사무용론을 존중할 것입니다.   7. 어떻게 하면 옳바른 청명문화리념을 수립할수 있습니까? 청명문화리념이란 곧바로 제사문화리념이지요, 우리민족의 제사문화는 단지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잊지않고, 또 자손들에게 효도의 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영원히 필요한 것이며, 없어서는 안되는 민속문화라는 리유로 민족과 함께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새롭게 성행하는 생화 증정이나, 인테넷 추모 등 방법에 대하여, 물론 아주 시대적이고 신사다운 방법이지만, 어디까지나 민족 제사문화의 보충으로 될수 있을 뿐, 민족 제사문화를 대체할수는 없다고 인정합니다. 제사는 일종 마음을 표시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없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만 강조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정성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마음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유익한 방조와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답변고 2013-04-03
11    (연변방송) 2013청명과 한식문화 댓글:  조회:3770  추천:0  2013-04-01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2013 청명절 특집 방송주제:《청명과 한식문화 및 장례문화, 성묘객들이 주의할 점》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룡수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들: 답례) 반갑습니다. 올해는 4월 4일에 청명이 들었습니다. 청명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혹은 릉원으로 성묘하러 갑니다. 성묘 때문에 산에 들어가거나 릉원에 찾아갈 때 화재예방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조그마한 불씨라도 대형 화재를 불러올수 있다는 점을 명기해야 할것절입니다. 오늘은 청명과 한식에 깃든 우리 민족문화와 장례문화 및 이러한 문화를 어떻게 전승, 발전시킬가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보기 위해 현회장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청명은 원래 24절기의 하나로서 다섯 번째 절기가 시작되는 날을 말하고 한식은 조선시대에는 설과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는 명절이라는 점에서 구별이 있습니다. 현회장께서 먼저 청명에 깃들어 있는 문화를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현룡수 회장: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서 립춘으로부터 다섯번째 절기가 됩니다. 립춘을 원점으로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15도씩 움직이면 한절기가 듭니다. 청명이면 지구가 립춘으로부터 이미 60도 움직인 위치입니다. 이미 일년의 1/6이 지나간 셈이죠. 《세시백문》에 이르기를 “만물이 이때에 이르러 생장하는데 모두 청신하고 명려하다”고 하였습니다. “청명”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온것이라고도 합니다. 청명은 또 습관적으로 한식이라고도 하는데 기실 청명과 한식은 계산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동지날 부터 105일이 되는 날이 바로 한식인데, 보통 청명 전날에 들며, 금년과 같이 청명과 같은날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식은 조선왕조시기에 설, 단오, 추석과 함께 4대명절에 속했습니다. 한식날은 조상의 무덤을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성묘의 날입니다. 한식날에 성묘하는 풍속은 중국 당나라때에 조선반도의 신라에서 받아 들인것으로 추정됩니다.   김동선 기자: 한식은 우리 민족 4대 전통명절로써 여기에는 많은 유래와 민속문화가 동반되여 있습니다. 현회장께서 계속하여 한식의 유래에 대해서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한식 유래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두가지 설이 비교적 대표적입니다. 한가지는 개자추(介子推) 설입니다. 중국 춘추시기 진문공(晉文公)이 임금이 되기전에 국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허기져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한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 살렸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綿山)에 들어가고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한가지 설은 改火설입니다. 고대에서는 지금처럼 성냥이 보급되지 않아 민가에서 불을 사용할때에는 부엌이나 화로에 상기적으로 보관해 두었던 불씨를 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불씨가 오래되면 활력이 없어진다고 여기여 불씨를 일년에 한번씩 바꿉니다. 이때면 조정에서 의식을 가지고 마른 버드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일으켜 그 불씨를 각 지방관청에 나누어 줍니다. 그러면 각 지방관청에서는 책임지고 그 불씨를 관활지역의 가가호호에 나누어 주는데, 전통적으로 이날이 바로 동지후의 105일째 되는 날이였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민간인들을 장악하고 관활하는 일종의 통치수단이 였습니다. 순수한 새 불씨를 받기 위하여, 집집마다 하루전부터 낡은 불씨를 철저히 청리하고 기다렸다고 하였으니, 이날에는 부득불 찬음식을 먹을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이날을 한식이라고 하게 되였답니다. 이외에도 몇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략합니다.   김동선 기자: 제사를 지내거나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차림에 있어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산소에 찾아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일은 후토를 찾아서 후토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명태 한꼬리나 과일 세알을 제물로 놓고 술을 한잔 따라 올리고 세번 절을 하면 되겠습니다. 흙을 파고 초목을 베기전에 먼저 산소를 지켜준 후토신에게 인사하고, 허락을 받는다는 뜻으로서, 대자연에 대한 존중을 표시합니다. 그다음에 삽으로 조심조심 가토를 시작합니다. 많은 분들의 경우, 먼저 가토를 하고 후에 후토제를 지내는데, 크게 틀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도 대자연의 한 성원이라는 리념에서 대자연에 대한 숭배를 조상에 대한 숭배의 앞순서에 놓는것이 리치에 맞습니다. 유가의《가례》에서는 꼭 이렇게 하여야 한다고 씌여있지는 않지만,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리념에서 산소는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신성한 곳으로서 그곳의 일토일석, 일초일목에는 모두가 우리 조상들의 령기가 슴배여 있으므로, 그곳에서 함부로 흙을 파고, 함부로 나무를 찍고, 풀을베고 하는것은 조상들 앞에 엄숙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능묘에 가서 제사 지낼때에도 먼저 후토제 지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골회함 찾아 놓고 제사 지낼때에는 후토가 없으니 이 절차가 없어집니다.   김동선 기자: 제사법에서 어떤 점에 주의를 돌려야 합니까?   현룡수 회장: 제사는 일종 마음을 표시하는 의식입니다. 아무렇게나 술을 붓고 절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죠. 가장 중요한것은 정성입니다. 속담에 "냉수 한그릇도 자기 정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부모생전에 그이들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그렇게도 많은 보귀한것들을 가졌는데, 부모들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돈도 안드는 정성에 린색할 리유가 없습니다. 제사소물을 갖출때부터, 많이 갖추기 보다는 매 가지마다 정성들여 갖추며, 제사를 지낼때에도 형식에 그치지 말고, 산사람 뫼시듯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속 관념과 마음의 뉴대를 건실하게 할수있으며, 또 그로부터 유익한 방조와 계시를 받을수 있으며, 후대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수 있습니다. 성의가 없는 제사는 차라리 지내지 않은편이 좋습니다. 우리민족의 재래의 제사법에는 엄격한 절차 구분이 있었습니다. 크게는 강신, 초헌, 아헌, 종헌, 첨작, 사신, 이러한 절차입니다. 여기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지만, 그 기본절차에 대하여 알아두고, 될수록 따르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강신이라는 것은 신령이 제사받으려 내려온다는 뜻으로, 제주가 술을 붓고 다 함께 절을 하는 절차이고, 초헌은 주부가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절차이며, 아헌은 가족들의 차례가 되겠고, 종헌은 친척들의 주요 성원의 차례가 됩니다. 종헌이란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올리는 술이란 뜻이 되겠으나, 지금은 가문 성원들이 모두 술을 올리고 인사하려는 요구에 만족주기 위하여 차수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종헌후에 붓는 술은 첨작이라고 하는데, 주로 가속과 친척외의 손님들의 차례로서, 재래식 제사법에서는 역시 세번을 초과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사신이란것은 제사가 끝났으니 인젠 신령을 돌려 보낸다는 뜻으로, 이때는 제주가 술 대신에 숙주(랭수) 한그릇 올리고, 메밥을 조금 떠서 물에 놓고, 잠간 기다렸다가, 다 함께 세번인사하고 제사를 끝냅니다. 김동선 기자: 제사를 지내거나 차례상을 차릴때 금기시해야 할 것들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금기사항들이 많았으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금 와서는 많이 취소되였습니다. 하지만 장례와 제사는 어디까지나 슬픔과 불행을 처리하는 엄숙한 행사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자연히 신중한 태도를 가지게 되며 잘못을 범할가봐 조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에 기초하여 지금도 사회적으로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적지않은 금기사항들이 보류되여 있거나 새롭게 생겨나고 있습니다. 아래에 우리민족 장례,제사와 상관하여 현존하는 금기사항들 가운데서 몇가지 정리하여 적었습니다. A, 성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염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고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임신한 딸은 장례에 참가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 처리하며,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 가운데서 특히 중요한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기지 않고 처리합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보충 부의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합니다. K, 친인이 객사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장례용품이나 제사소물을 살대 시장식 흥정 삼가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복숭아와 토마토는 제물로 쓰지 않으며 제사음식에 고추가루, 마늘, 파 등을 쓰지 않습니다 N, 제사상에 찰떡을 놓을 경우 붉은 팥고물을 쓰지 않으며 흰 열콩고물이나 콩가루 고물을 씁니다. O,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해에 자기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P,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새로운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Q,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김동선 기자: 지금 새로운 청명절에 고인을 추모하는 방법 즉 제사법이 많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생화 증정이나 인터넷 추모 등 방법이 전형적인데요. 이런 제사방법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장례와 제사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잊지않고, 또 자손들에게 효도의 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영원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으로 태여난것은 결코 우리들이 능력이 아닙니다. 바로 조상들과 부모들의 덕분이지요. 인류가 다른 동물보다 진화가 빠르게 된 원인의 하나가 바로 인류라는 이 고급동물은 보은의식이 특히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은공을 모르는 자를 보통 짐승보다 못하다고 욕합니다. 새롭게 성행하는 생화 증정이나 인테넷 추모 등 방법에 대하여, 물론 아주 시대적이고 신사다운 방법이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민족 제사문화의 보충으로 될수 있을 뿐, 민족 제사문화를 대체할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제사문화는 단지 고인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되는 민속문화라는 의미에서 민족과 함께 계속 존재할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요즘 우리 주 각급 해당 주관부문과 각 업체들에서는 우리 민족문화 특히 민속문화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서 많은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듣자니 이번 청명을 계기로 현회장께서 주요직책을 맡고 있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는 우리 민족장례문화와 성묘문화를 규범화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청명, 한식기간에 적지 않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하던데요? 주로 어떤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는 주관 부문의 건의에 의하여 매년 3월 5일부터 4월 5일, 즉 청명날까지의 한달을 “조선족 전통장례문화 선전월”로 하였습니다. 금년에는 장례문화 선전을 주요하게 인테넷을 통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연변 “조글로”에 우리 연구회의 공간을 설치하였는데, 장례문화 전업지식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민속문제도 다루고, 봉사정보도 제공합니다. 인테넷에 들어와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란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혹은 “조선족전통장례”라고 쳐서 넣으면 즉각 우리 공간에 들어 올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공간에 들어와 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우리 민족문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의 하나인 민속문화를 발전장대시키려면 각급 당위와 정부 각 해당 부문의 중시가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많은 연구부문과 전문가, 학자들의 노력이 있어야 할것이고 또 민속문화 관련 업종 기업소들에서도 자기의 맡은바 책임과 의무, 사명을 다 하여야 하지 않을가요?   현룡수 회장: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 문화국의 지도하에 《조선족 전통장례》세미나를 주최하여, 20여개 정부부문과 유관단위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참석하였으며. 8명의 민속학자들이 여덟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우리주 민속문화 보호에 리론적 지침을 확정하였습니다. 민속문화 보호에서 정부가 중시하고, 유관부문이 노력하고, 전반 민족이 참여하여야 하는데, 이 몇가지 요소를 보장하려면 말로만이 아니라 반드시 실제적으로 정부에서 유관 정책을 제정하여야 하며, 구체적인 조직조치가 따라가야 하며, 필요한 투자가 보장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연변의 병원부터 빈의관까지의 전반 빈장과정에 조선족 풍속을 위한 시설이나 항목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민속보호방면의 유관 조례를 내오기가 상당히 힘들며, 책임단위로서의 우리의 공작도 유관부문의 협조와 배합이 잘 되지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며, 필요한 투자란것은 꿈도 꿀수없는 형편입니다. 앞으로 민속문화 보호방면에서 해야할 일들이 아주 많고 점점 간거할것 같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는 우리 민족 민속문화연구 기지라고 할수 있는 연변조선족례의문화연구회와 민속문화의 보급과 발전을 추구할수 있는 창구도 운영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분으로서 앞으로 우리 민족문화 특히 민속문화의 전승, 발전장대를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할 타산입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는 주요하게 세가지 방면으로 사업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미 간편하여진 조선족 장례방법을 견지하면서, 거기에 민족특색을 첨부하여, 실용적이고도 민족적인 《조선족 장례제사 편람》을 편찬하고 있는데, 지금 진일보로 완미중에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이미 유관 인민대표위원을 통하여 주 인민대표대회에 “조선족 빈장관리 조례”를 제정할데 관한 건의를 제출하였으며, 주 민정국, 주 위생국, 연변병원 등 유관 부문에 《조선족장례풍속》을 보호할데 관한 구체적인 건의들을 제출하여 적극적인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세째, 우리는 산하에 《시대상조 복무중심》을 설치하였는데, 종지는 조선족들의 장례치르기 어려운 시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대는 언녕21세기에 들어섰지만 우리민족 장례제사문화는 아직도 락후한 민간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족들의 출국인원이 많아 지면서 집에는 홀로사는 로인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고독사, 사망되여 며칠후 발견, 장례에 사람 모자라는 등 현상이 비일비재입니다. 우리는 무릇 조선족 장례제사와 상관되는 모든 방면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가장 우질적인 봉사를 제공하면서 조선족 장례가 진정으로 간편하고도 문화적인 민속 활동으로 되게끔 노력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민간차원의 락후한 장례문화를 현대적이고 전업적인 고급차원의 문화로 승급시킬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조선족 장례제사 자문전화: 138-9438-7438 조선족 장례제사 복무열선: 203-2224 연구회주소: 연변병원동대문남쪽정차점 맞은켠 5층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기자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3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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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변방송) 2012장례서비스 시장이 무엇이 문제? 댓글:  조회:2589  추천:0  2012-09-13
연변방송국 프로그램 9-15일 프로 현회장님 인터뷰 내용: (15분 좌우)   ※(2009년에 연변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장례풍속》을 각기 주급과 성급의 무형문화재로 확정,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보호책임단위로 지정되였고, 현용수 회장이 대표성 전승인으로 지정되였음)   현재 주내 상조시장의 현황 (상조시장발전력사, 현존의 상조관련 업체 경영상황, 장례용품시장현황,상조서비스내용 등등)   【답】중국에서 이라고 하면 좀 생소한 술어입니다. 相助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서로 돕는다’는 뜻입니다. 상조서비스는 1947년에 일본에서 기원하여 1982년에 한국에 인입되였으며 혼인이나 장례 등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관혼상제 행사에 따르는 비용부담을 줄이기 위해 월부 형식으로 일정한 금액을 일정기간내에 납부하고, 나중에 행사가 있을 때 가입한 업체로부터 상관사무에서 우대표준으로 제공받는 종합적인 서비스를 말합니다. 상조업체들은 원래 장례는 물론이고 결혼이나 돐잔치, 회갑 등 가족행사를 모두 다루었지만 대부분은 수익이 가장 높은 장례서비스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라고 하면 보통 장례업체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연변에서도 과거에 민간에 황두월이요, 상여계같은 장례호조 조직이 있었는데 상조서비스업의 원시적인 연변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에서는 현재 장례항업을 정부 민정부문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1997년에 국무원에서 를 반포하고 일부 소수민족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화장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체운반, 유체보관, 유체화장 등은 기본 빈장항목으로 규정하고 정부에서 주관하는 빈의관에서 책임지고 집행하며 그외의 선택성 항목(장례용품, 염습, 장례의식 등)은 원칙상에서 시장관리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부분이 바로 소위의 상조업체들에서 할수있는 일들입니다. 현재 연변의 장례항업의 현황을 살펴보면 정부에서 화장터, 빈의관, 납골당 등을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으며, 민간의 장례업체라고 말하자면 각 지방에서 한족들이 경영하고 있는 상시옷 상점들이 전부인데 장례서비스 업체로서의 규모와 공능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족 고유의 장례풍속은 오늘에 와서는 거의 소실되여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변조선족은 이 근년에 출국하고 관내로 간 사람들이 많아 지면서 지방에는 혼자사는 로인들이 대량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연변에는 아직 장례서비스 사회기제가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일단 상사가 나면 아직도 가정에서 책임지고 구체 장례사무를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망한지 며칠후에 발견되거나 유체의 가속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이런 딱한 사정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에 비추어 조선족 장례서비스 사회기제를 건립하는 것이 당면의 급선무로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조선족들은 상시옷과 염습에서는 자기의 장례풍속을 희미하게 나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시옷을 비롯한 장례용품은 개인상점에 가서 높은 값으로 사야만 하고, 염습 등 장례서비스는 아무런 훈련도 받은적 없고 아무런 예속도 없는 민간인에게 맡겨 처리되기 때문에 그 질량을 보증하기 어렵고 비용표준을 장악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주내 상조시장에는 어떤 문제점들이 존재하는가?   【답】현재 주내 상조시장이라고 말하자면 각 지방에서 주로 한족들이 경영하고 있는 상시옷 상점들인데 장례서비스 업체로서의 규모와 공능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문제점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첫째; 상시옷 품목이 구전하지 못합니다. 둘째; 상시옷 구조가 합리하지 못합니다. 세째; 상시옷 가격이 합리하지 못합니다. 네째; 조선족 염습의 기술상에 표준이 없습니다. 다섯째; 조선족 장의사 배양과 관리기제가 없습니다. …………………………………   주내 장례서비스비용은 엄청나다. 상조시장의 용품가격이 비싼 반면, 서비스는 전면적이지 못하고 만족도가 낮은데, 이렇게 상조시장이 규범화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답】첫째; 조선족 장례서비스 사회기제가 건립되지 못하였습니다. 내지의 대중도시의 정부 빈의관에서는 운구, 보관, 화장 등 기본빈장항목만 취급하고 기타의 장례사무는 기본상에서 가두판사처를 단위로 하는 빈의복무소를 통하여 처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변에는 아직 이런 사회기제가 없습니다. 둘째; 조선족 장례서비스 항목이 아직 규범화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례업계에서 합법적 지위가 없습니다. 빈의관에서 한족들의 장례서비스 항목은 모두 항업표준이 있고 장의사 합격증 관리기제가 있으며 정부에서 규정한 수금표준까지 있지만 조선족 장례서비스 항목은 이런것이 없습니다. 세째; 조선족 장례풍속을 보호하는 구체적인 법률의거가 없습니다. 1997년에 국무원에서 《빈장관리조례》를 반포하고 빈장개혁을 실시한 이래 각 성, 시, 자치구로부터 각 지방의 지급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의 《빈장관리방법》을 제정하고 있는 형편에서 소수민족 민속문화 보호과제가 특히 복잡한 우리 연변에서는 오히려 오늘까지도 자기의 《빈장관리방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의 조선족 빈장관리는 부득불 조선족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는 《길림성빈장관리방법》에 기준하여 실시되기 때문에 조선족의 장례문화는 자기의 합법적 지위를 잃게 되였으며 조선족의 장례시장은 규범화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내에는 전문적인 상조회사가 없이 장례용품상점에서 장례서비스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상조시장이 혼란스럽고 규범화되지 못한 원인중 하나다. 앞으로 우리 주에도 전문적인 상조회사가 필요하지 않은가?   【답】우리는 앞으로 우리 주에서도 전문적인 상조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인정되여 지금 각 방면으로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 우리 주에서 상조서비스를 실시하자면 먼저 적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조건이 구비되여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 연변에서 장례서비스 사회기제가 건립되여야 합니다.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 상관부문과 함께 연길시 지역별로 《빈의복무소》설립사항을 토론하고 있는 중입니다. 둘째; 《연변조선족자치주빈장관리조례》가 나와야 하며 조선족 장례풍속을보호하고 관리하는 상관 세칙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주 인대에서 해야할 일들입니다. 세째; 조선족 장례풍속이 간편화, 규범화, 합법화 되여야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조선족 장례,제사 지도서》를 편찬하고 있는데 지금 진일보 완미중에 있습니다.   현재 주내 상조시장의 구체적 상황에 비춰 정부부문의 어떤 감독관리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답】선택성 장례서비스는 시장관리를 실시하기 때문에 정부에서 보통 지나친 간섭을 하지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자면 우선 장례서비스 사회기제를 건립하고 장례서비스에 종사하는 형식을 개인상점 차원에서 《빈의복무소》나 《유한책임회사》차원으로 승급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장례서비스 시장을 효과적으로 감독관리할수 있습니다.   주내에 전문적인 상조회사가 나타난다면 우리 주 실정에 맞춰 어떻게 경영해야 한다고 보는가?   【답】상조업무는 어느정도 보험업무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 약정금액을 완전납부전에 행사치르게 되면 모자라는 부분을 일차성으로 내야합니다. 둘째는 나라의 상관 《보험법》이 적용되지 않으며 회사가 파산되거나 페업할 경우 보상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상조업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의 리익과 관계되기 때문에 우선 엄격한 사회관리기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본이나 한국의 모식을 그대로 옮겨와 실시할것이 아니라 우리 중국과 연변의 실정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고 봅니다. 조선족 장례서비스 사회기제를 건립하고 앞으로 상조서비스 업체를 운영하여 보고 싶은 분들은 우리와 련계하여 주십시요.   이상.
8    (연변방송) 2012우리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에 관하여 댓글:  조회:3644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음력설 특집(두번째 시간) 《전통과 현대의 융합》 방송주제:《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에 관하여》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절연구회 현성원 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련휴가 끝났지만 아직도 전통명절인 정월보름을 약 일주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오늘은 음력설특집 두 번째 시간으로 《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은 혈연관계로 맺어진 한집안 - 친족의 그 계보를 도표식으로 적어둠으로써 가족의 변화상황을 적어둔 족보를 과거에는 아주 중하게 여겼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족보에 대한 개념이나 관심이 조선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족보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가족 모든 구성원들의 변화를 적어둔 전체 가족의 족보의 모든 것은 제쳐두고라도 자기 한 가족의 구성원들의 변화양상을 적어둔 가족의 변화양상을 기록해두고 후대에게 전해주는것 또한 현대인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특히 오래전에 시작된 핵가족시대, 자기 한가족구성원들의 변화마저 후대들에게 남겨주지 못한다는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가 생각합니다. 하여 오늘은 전통명절기간을 리용해 우리 민족 족보의 의미와 중요성을 짚어보고 우리 민족 성씨와 호칭을 알아보는것도 전통문화를 살리는 중요한 사안이라고 봅니다. 먼저 현회장께서 족보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주시죠? 현룡수 회장: 족보란 지금말로 하면 한 가족의 기본 력사당안자료입니다. 우리는 족보에서 자기가족의 시조를 알수있고 자기가족의 전통을 알수 있으며 그 시조로부터 어떻게 발전하여 오늘까지 오게 되였는가? 하는 전반과정을 알수 있으며 자기친척의 범위와 갈래 그리고 그 관계를 가계보를 통하여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께서 이어서 족보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서 거론해주시겠습니까? 현룡수 회장: 일찍 삼국시기 신라에 벌써 족보 비슷한것이 생겨나 왕공귀족들이 리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족보란 계급사회의 등급제도의 산물로서 그 의의는 주요하게 자기가문의 정통성과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그후 고려에서는 양반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양반이란 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문무관원들을 일컬으는 말입니다. 지금말로 하면 국가공무원인 셈이죠. 고려에서는 文宗(기원1047년)때부터 상놈도 제한적으로 자기성을 가질수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 가문에서 그누가 조정에 등용되여 벼슬을 하게되면 그 가문은 곧 출세하여 량반가문이 되므로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거나 또는 선조명이나 출신지역의 지명으로부터 성을 결정한후 그사람을 시조로 하고 그사람에게 봉해진 식지혹은 출신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계보를 작성하여 기록하여 내려 오는데 그것이 후에와서 족보가 되는 것입니다. 식지란 봉지라고도 하는데 봉건사회에서 벼슬을 하게되면 벼슬의 급별에 따라 봉해주는 토지와 관리구역으로서 양반가문 경제수입의 주요래원이였으며 세습할수 있었습니다.     김동선 기자: 과거에는 족보가 지배층 즉 귀족이나 왕실에서 신분을 가려보기 위하여 피줄의 갈래를 잊지 않으려고 기록한 비망록의 기능을 하고 또 한 가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도표식 책으로서 그 부작용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만민이 평등해진 오늘날에 와서 족보를 신분상승의 어떤 원인으로 될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족보의 가치를 다르게 리해하는것이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하는데 현회장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족보의 가치는 신분증명보다는 가족의 뿌리를 알고 가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며, 가족과 친척의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가족관념을 가강하고 가문의 뉴대를 형성시키며 가문의 매개성원들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한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연변 조선족 가정의 족보는 문화혁명때에 훼멸성적인 타격을 받아 이미 기본상 근절되였습니다. 개혁개방을 하고 한국과의 국교가 맺어지고 한국의 종친회와의 련계를 다시 회복하게 되면서 적지않은 가문에서는 다시 자기의 족보를 가지게 되였으며 선조와의 련계점을 성공적으로 찾고 자기가정 성원들을 족보에 보충하여 기입해 넣은 가정도 적지 않습니다.      김동선 기자: 족보는 가족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이 있고 또 그 체계는 어떻게 정해져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족보는 가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체계는 비슷합니다. 맨 앞에 가문을 자랑하는 서문이 있고 시조를 포함해 주요한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밝혔으며 시조와 조상들가운데서 력사에 《이름난 인물》의 사적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시조 아무개로 시작하여 가문성원들의 이름을 세대를 나누어 항렬의 순서에 따라 적고 매 사람의 이름에 곁붙여 자, 호, 생졸년월일 그리고 생전에 지낸 대표적인 벼슬, 간단한 략력, 안해의 본과 성씨, 무덤의 위치 등을 적어넣었습니다.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보통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어떤 가문에서는 사위의 성과 이름을 밝히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성이 모두 같으므로 이름만 적었으며 그것도 적서의 구별을 두어 본처의 자식은 《적》으로, 첩의 자식은 《서》로 갈라 적었으며 외손자인 경우 보통 밝히지 않지만 또 일부 밝힌 가문도 있습니다.   보통 족보는 해당 문중에서 스스로 자기 문중의것을 작성하였고 이밖에 족보와 성질은 같지만 형식과 내용이 약간씩 다른 가첩과 가승이란것도 있었습니다. 가첩이란 직계친족만 적어둔것이며 가승은 가문의 직계친족과 그 가문의 사적을 적어놓은것입니다. 족보를 중요시함에 따라 해당 가문의 종친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종보와 그중 어느 한갈래의 종친만을 밝힌 지보란것도 생겨났습니다.   왕실에서는 왕족의 족보를 전문 다루는 부서를 내오고 전체적으로 총괄하였는데 그것을 종부시라고 불렀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말에 친척이란 말과 인척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하여 나온 것입니까?   현룡수 회장: 친척이란 피줄과 결혼관계로 련결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친척은 크게 친족, 인척 두가지 부류로 나눕니다. 친족은 피줄관계로 련결된것인데 흔히 집안이라고 합니다. 인척은 결혼관계로 련결된것을 말합니다.   친족안에는 직계와 방계로 구분되는데 직계는 할아버지, 할머니-아버지, 어머니-아들, 딸-손자, 손녀-증손자, 증손녀 등과 같이 피줄이 직접 잇달아 물린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가족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방계와 구별하기 위하여 《친할아버지》, 《친손자》 등 《친》자를 붙여 부르기도 합니다. 방계는 큰(작은) 할아버지-큰(작은) 아버지-조카 등과 같이 몇 대우에서 갈라져나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척가운데서 어머니켠을 외켠(외척), 안해켠을 처켠(처척)이라고 하였으며 시집간 딸은 친족성원에서 빼버렸으나 사실상 고모, 고모부, 고모사촌 등은 실제생활에서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되여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이런 친척을 우리 민족은 그 관계의 멀고가까움을 밝히는데 하나의 척도로 써왔는데 그것이 바로 촌수입니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촌수를 밝히기 시작하였습니까?   현룡수 회장: 우리 민족이 촌수를 밝히기 시작한것은 대체로 고려시기부터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4세기 문인 리색이 《4촌회》라는 말을 쓴것도 있고 또 《고려사》에 외사촌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쯤으로 추증하는것이 옳을것 같습니다.     김동선 기자: 촌수는 어떻게 나누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촌수는 부부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세대를 한촌으로 셉니다. 때문에 부부사이는 촌수가 없고 대수가 점차 벌어짐에 따라 촌수는 많아집니다. 따라서 촌수가 적을수록 가까운 친척이고 촌수가 많을수록 먼 친척으로 됩니다.   직계에 속하는 친척은 대수가 곧 촌수인데 부모와 자녀사이는 1촌이고 할아버지와 손자사이는 2촌입니다. 그러나 부를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으며 증조할아버지와 증손, 고조할아버지와 현손사이도 촌수는 각각 3촌, 4촌이지만 부를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습니다.   방계(곁갈림)에 속하는 친척의 촌수는 먼저 어느 조상에서 갈라졌는가를 따져보고 그 조상과 자신과의 촌수에다 알려고 하는 대상과 그 조상과의 촌수를 합하면 됩니다. 례를 들면 조카와 자신과의 촌수는 이렇게 캘수 있습니다. 조카는 형 혹은 동생의 자녀로서 자신과는 아버지를 통하여 련결된 곁갈림입니다. 그러므로 조카와 자기와의 촌수는 자기와 아버지의 촌수에다 조카와 아버지와의 촌수를 합하면 됩니다. 즉 자기와 아버지와는 1촌이고 조카와 자기 아버지(조카에게는 할아버지)는 2촌이므로 자신과 조카는 3촌이 됩니다.     김동선 기자: 촌수는 친족뿐만 아니라 인척을 가릴때에도 쓰이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외켠의 친척은 어머니와 그 친척과의 촌수에다 자기와 어머니와의 촌수(1촌)을 합한 수와 같은 촌수입니다. 례를 들면 어머니의 남동생은 어머니와 2촌이므로 자기와는 3촌 즉 외삼촌이 됩니다. 처켠에 대해서는 알아보려는 사람과 자기 안해와의 촌수를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례를 들어 안해의 작은 아버지는 안해의 3촌이므로 처삼촌이라고 부릅니다.   촌수로 친척의 멀고가까운것을 나타내는데 형제벌의 친척은 4촌, 6촌, 8촌과 같이 짝수(우수)로 나가며 큰(작은)아버지, 조카벌의 모든 친척은 3촌, 5촌, 7촌과 같이 홑수(기수)로 나갑니다. 이것은 촌수가 련결마디를 나타내는것으로서 세대와 세대사이에는 그를 낳은 부부가 끼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5촌형, 칠촌아우, 6촌조카, 8촌조카라는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만약 촌수의 척도로 재면서 친척을 따져나가면 수없이 많고 그 갈래도 대단히 복잡할겁니다. 그럼 대체 어느 범위까지 친척을 보는것이 바람직할가요?  현룡수 회장: 고려와 리조시기에는 서로 범위에서 얼마간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 친족은 7~10촌까지, 인척은 5~6촌까지를 친척으로 보았으며 리조시기 법에는 친족이 10촌까지로 되어 있으나 실제생활에서는 대체로 8촌까지 보았습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의 범위에는 친족, 외켠, 처켠외에 사돈도 친척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우리말에 사돈이 한호적이란 말도 있습니다.《아언각비》란 책에 《친척》이란 《척》에는 외척, 처척, 인척을 들고 있는데 여기의 이 인척이 곧 당시 사돈집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돈은 친척가운데서 제일 먼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돈의 팔촌》이라 하게되면 친척이라고 할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먼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생활에서 사돈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매부와 처남사이는 일반적으로 매우 가깝습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의 촌수를 안후 그 호칭이 따로 있는데 이것을 친척호칭이라고 하면서 일상생활가운데서의 말차림에서 극히 조심하며 례절을 지키려고 애쓰는것이 우리 민족의 우수한 품성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민족 친척호칭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지요. 먼저 직계친족을 부르는 말로는 어떤것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현룡수 회장: 예, 그러지요. 3대 할아버지, 할머니는 《증조》를 붙여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며 3대 손자, 손녀는 《증손》을 붙여 증손자, 증손녀라고 부릅니다. 4대 할아버지, 할머니는 《고조》를 붙여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로 부르고 4대 손자, 손녀는 《현손》을 붙여 현손자, 현손녀로 부릅니다. 5대이상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는 대수를 그대로 붙여 5대할아버지, 6대손자 등으로 부릅니다. 직계친족가운데서 형의 안해를 흔히 형수, 아우의 안해를 제수라고 부르며 누이의 남편을 매형, 혹은 매부라고 부릅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방계친족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방계친족을 부를때에는 같은 항렬에 속하는 4촌, 6촌, 8촌형제를 친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종형제, 재종형제, 삼종형제 등으로 부릅니다.   아버지항렬에 속하는 큰아버지를 백부, 작은아버지를 숙부라고 부르며 흔히 숙부를 삼촌이라고 하는데 직접 촌수로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런 친삼촌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촌, 칠촌, 구촌백부와 숙부는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부릅니다. 이것은 할아버지항렬을 부를때에도 할아버지와 구분하여 할아버지의 형제를 종조부로 부르며 따라서 증조할아버지의 형제를 재종증조부, 고조할아버지의 형제를 삼종고조부로 부릅니다.   아들, 손자항렬에서도 친조카와 오촌, 칠촌, 구촌조카 그리고 친손자와 형제의 손자를 구별하기 위하여 《당》, 또는 《종》, 《재종》, 《삼종》등을 붙였습니다. 이를테면 사촌의 아들은 5촌으로서 당질(오촌조카)이며 륙촌동생의 아들은 7촌으로서 재종질(칠촌조카)이며 팔촌의 아들은 9촌으로서 삼종질(구촌조카)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추리로써 형제의 손자는 6촌으로서 재종손, 륙촌의 손자는 8촌으로서 삼종손이라고 부릅니다. 누이의 딸은 생질, 고모사촌은 고종형제라고 합니다. 이밖에도 친족을 부르는 말에는 넛할아버지(아버지의 외삼촌), 넛손자(누이의 손자), 올케(오빠와 남동생의 안해) 등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인척을 부를때에는 어떻게 부릅니까?   현룡수 회장: 인척을 부를때에도 촌수를 캐는 법은 같으나 부를때, 외켠에는 《외》, 어머니의 자매는 《이모》, 처켠에는 《처》를 붙여 부르며 안해의 부모를 장인, 장모로 혹은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로 부릅니다. 이모의 아들딸은 이모사촌이 되고 처남과 처형제의 아들딸들은 처조카로 되며 안해의 삼촌은 처삼촌으로 부릅니다.   우리 민족은 친척교제에 있어서 비록 구분은 우에서 말한것처럼 촌수가 밝혀져 있으나 직접 상대하여 말할때는 될수록 가깝게 부르는 풍속이 있습니다. 즉 례를 들면 구촌조카를 당면해서 부를때 《구촌조카 왔는가?》하지 않고 《조카 왔나?》라고 하는 식입니다. 웃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함경도나 연변 등지에서는 《아바이》, 《클아배》,《아매》,《맏아매》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지역적으로 혹은 방언적으로 친척, 가족내에서 친근감을 줄수 있으나 많은 장소에서는 소개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좋기는 소개는 구체적으로 촌수에 따라 하고 부를때는 장소를 고려하여 해당된 표준어를 쓰는것이 좋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연변에서는 형의 안해 즉 《형수》를 직접 대면하여 부를때  보통 《아주머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보다 친근감을 줍니다. 《아주머니(아줌마)》라는 말은 그전에는 외삼촌어머니와 고모, 이모 등과 자기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한 녀들을 부를때 쓰이였으나 지금은 주로 형수,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 또는 젊은 남의 안해를 부를때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형의 안해》를 공식적인 장소에서 남에게 소개하거나 또는 직접 부를때에는 타인의 안해와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수》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연변에서는 또 언니의 남편을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역시 친근감은 있지만 제대로 부르려면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아저씨》라는 말도 그전에는 외삼촌과 고모부, 이모부 등과 자기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들을 부를때 쓰였으나 지금은 주로 여자들이 언니의 남편, 혹은 친척관계가 없는 젊은 남자들을 부를때 씁니다. 때문에 《자기 언니의 남편》을 공식적인 장소에서 남에게 소개하거나 또는 직접 부를때에는 타인의 남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부》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동서끼리 혹은 시누이와 올케가 서로 부를때 《형님》, 《언니》, 《동생》등으로 부르며 특히는 여자들이 시형과 시아우를 자기 자식들이 부르는대로 《큰아버지》, 《삼촌》 등으로 부르는것은 친근감을 돋구는 친척호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련의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제대로 촌수에 따라서 정확히 부르는것이 바람직합니다.     김동선 기자: 친척관계를 나타내는 말가운데 항렬이라는것이 있습니다. 항렬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현룡수 회장: 항렬이란 친족가운데서 세대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데 어떤 사람의 자손가운데서 세대수가 같아서 형제벌되는 사람들을 같은 항렬이라고 하며 그들의 아버지벌되는 사람들을 아버지항렬, 아들벌되는 사람들을 아들항렬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은 재래로 이름을 지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썼습니다. 이 《항렬자》에 근거하여 성과 본이 같은 사람끼리 이름만 보고도 대체로 항렬을 가릴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짛을때 《항렬자》즉 《돌림자》를 쓰지 않고 각각 제멋대로 짓는 현상이 수두록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년세 많은분이 집안에 계시는 경우, 항렬자를 따져서 이름을 짓는 집도 있기는 합니다.     김동선 기자: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민족 족보와 촌수, 친척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봤는데요. 아래에 계속해서 우리 민족 성씨에 대한 개념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부계를 중심으로 하여 각기 자기의 성씨를 갖고 서로 융화하며 발전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일반인을 가리켜 한자말로 《백성》이라고 하였는데 그뜻인즉 《백가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나오기 썩 오래전인 원시사회나 노예사회, 봉건사회초기때만 해도 성씨가 많지 않았고 그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에서만 사용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이 없는 일반인들은 《천민》혹은《상놈들》이라고 불리였으며 이름은 《돌쇠》나 《똥애》처럼 아무렇게나 지어 부르는것이 고작이였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평등의식이 강조되고 인격존중이 하나의 사회적 원칙으로 됨에 따라 점차 누구나 성씨를 갖게 되었습니다.      김동선 기자: 한 인간을 부를때 특정된 호칭은 보통 이름을 부르는것이 통례인데 대개 사람들의 이름은 언어에 따라, 민족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조선, 중국을 비롯한 적지않은 나라들에서는 이름앞에 성씨를 붙여 부르며 일부 서방국가들에서는 성과 부칭, 이름을 붙여서 부릅니다. 우리 민족은 성씨에는 주로 몇가지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우리 민족의 경우, 이름앞에 붙이는 성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족속을 나타내는 칭호인데 한문투를 따서 보통 무슨 《씨》, 무슨 《가》라고 합니다. 이를테면 《허》란 성을 부를때면 《허씨》,  혹은 《허가》라고 합니다.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지 조선민족의 성씨는 100가지를 훨씬 초과해 수백가지에 달합니다. 옛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65성이 기록되여 있고 그후에 나온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근 5백가지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한국은 1975년 국세조사에서는 249가지 성으로 되어 있으며 김씨가 전체 한국인구의 21.9%, 리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한국총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에 고대사회에서 조선 고유말로 된 성이 있었을수도 있지만 아직 고증할 문헌기록이 없습니다.     김동선 기자: 조선의 력사문헌으로서 가치가 가장 큰 문헌중의 하나로서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를 들수가 있을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사람의 앞에다다 출신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혈연관계 혹은 지방소속관계를 밝힌 사실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옛날 백제왕실의 성인 《부여》같은것입니다. 백제왕실은 고구려왕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자연 이 두 왕실의 출신지방이 같은 《부여》였기 때문입니다.   백제왕실의 《부여》란 성외에도 사, 연개, 협, 해, 진, 국, 목, 백 등 큰 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성은 《고》씨인데 고구려에는 이밖에도 장, 양, 리, 오, 두, 왕 등 큰 성이 있었으며 이런 큰 성을 가리켜 우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신라왕실의 성은 박, 석, 김이 위주였고 그 외에 최, 안, 설, 남, 손, 정, 배, 리 등 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헌에 나오는 이러한 성씨들은 대부분이 왕실귀족의 성씨였지 백성들의 성씨는 아니였습니다. 《삼국사기》에 고위계층 즉 왕실이나 귀족들가운데서는 성씨가 점차로 보급되여 가고 있었으나 백성(인민대중)들은 성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숱한 평민들은 이름만 나오고 성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온달, 신라의 계백과 관창, 고구려의 창조리, 백제의 도미, 신라의 솔거, 지은 등 평민들에게는 그것이 성씨인지 이름만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에서 례를 든 왕실의 성씨들을 내놓고도 을지문덕, 연개소문, 명림담부 등의 을지, 연개, 명림 등 성씨가 나오는데 그 뜻이 아마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로 되어 있는것 같고 한자를 그대로 쓴 성이 아닌듯 싶습니다. 조선에서 한자성을 널리 쓰기 시작한것은 아마도 후신라때부터라고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중국과의 군사, 정치, 외교래왕이 전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 잦았을뿐만 아니라 후기신라 귀족들의 한자말이 열도가 올랐었기 때문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은 당시 신라의 지명을 모두 한자식 이름으로 고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신라의 귀족들은 모두 한자성을 붙였습니다. 이로부터 고려, 리조에 이르기까지 한자성이 위주로 널리 퍼졌고 왕실이나 귀족들내에서 한자성씨를 숭상하고 그 유래를 신비화했거나 또는 한자성씨를 국가의 공로자에게 상으로 주는 이른바 《사성》이라는 제도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백성들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일반백성들의 경우에는 성씨가 보급되지 못하고 이름만 붙여 불리운것이 조선력사 반만년에 깔리운 하나의 상황이였습니다. 고려文宗(기원1047년)때부터 비양반가정에서도 자기성을 가질수있었다고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였으며 지어 리조말기에 이르러서도 성이 없는 백성들이 상당수준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전국적범위내에서 통일적으로 호적등기를 하게 되자 조선반도 전 국민이 비로서 성씨를 다 쓰게 되었던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성씨를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성씨가 봉건사회에서 혈연관계 즉 피줄을 상징하는외에도 계급적 차원에서 신분의 귀천을 상징하는 표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특히 리조시기에 들어와서 유교가 국교로 됨에 따라 남존녀비와 《3강5륜》사상이 풍조로 되었으며 따라서 혈통관념이 보다 강하게 성씨에 깃들게 되었으며 정통이냐? 아니면 갈래이냐? 하는것을 무섭게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에 앞서 한 성씨안에서도 시조가 누구냐 그리고 그 시조가 발상한 고을이름이 어떠냐에 따라 《본》이란 개념이 생기게 되고 엄격이 그것을 준수하여 벌써 리조초기에 귀족들은 한자성앞에다가 발상지명을 덧붙여 《전주리씨》, 《밀양박씨》하고 불렀습니다. 시조의 발상지는  출신지역이 될수도 있고 또 벼슬하여 받은 봉지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고대에 있어서는 성씨 자체가 발상지 이름으로 된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름앞에 선조의 발상지(원래의 성)을 붙이는것이 거의 통례로 되었는데 한자성씨가 보급됨에 따라 발상지 이름이 따로 《본》이란 명칭으로 성씨앞에 붙게 되였습니다. 그후 한 종족에서도 그누가 벼슬하게 되면 따로 가보을 창설하고 성은 원래의 성을 그대로 쓰고 본은 자기의 봉지명으로 고쳐서 따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주요하게 자기의 공덕 혹은 근친의 공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같은 성씨에 여러가지 본이 생겨나게 된것입니다. 그때로부터 본이란 기실 한 가족의 발상지만 대표하게 되였으며 지금은 같은 성씨의 다른 종친을 구분하는 의거로 많이 리용됩니다. 이것을 《본관》혹은 《관향》, 《향관》이라고 합니다.   사회, 력사적 변천으로 하여 본관의 이름이 지금은 없어졌거나 또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여진것도 허다합니다. 이를테면 문화 류씨, 가주 한씨, 반남 박씨, 무송 윤씨 등입니다. 《문화》는 신천군안의 옛고을이였고 《가주》는 정주군 가산고을의 별칭이며 《무송》은 고창군 무장고을의 별칭이며 《반남》은 라주군 소속에 있던 별칭이다. 하지만 이런 변천은 성씨의 본관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상기 본관의 개념이 바로 혈연갈래를 가르는데 두고있기 때문에 그냥 옛날지명을 그대로 부르면서 련속되여 왔던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오늘 끝으로 한마디 마무리 말씀을 해주시 바랍니다.   현룡수 회장: 기록에 의하면 리조시기에 본이 가장 많은것은 김씨였는데 499본에 달하였고 리씨는 451본에 달하였으며 최씨는 326본에 달하였고 박씨는 309본에 달하였습니다. 장씨는 245본, 림씨 216본, 조씨 200본 등의 차례로 선보입니다. 본이 많다는것은 그만큼 력사적으로 벼슬을 한사람이 많다는 방증이 되겠죠.   리조후기부터 시작하여 같은 본끼리도 서로 멀고가까운것을 현상이 많아졌는데 족보를 캐여 같은 본안에서 그 문벌이 누구의 자손인가 그리고 자기 혹은 타인과 어떤 관계인가를 밝히였습니다. 하여 본안에 또 파가 생겼습니다.   그러던것이 일본인들이 조선반도를 침입하자 강산도 나라도 잃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이처럼 소중히 하여오던 성과 이름마저 《창씨개명》을 당하게 되었으니 일본제국주의자의 눈에는 조선민족의 성씨와 본, 이름이 하나의 민족적 얼을 받침해 주고 있는 《문화재》로 보였을것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식민주의자들이 그 숱한 약소민족과 약소국가를 침략하고 략탈하고 유린한 민족적죄행중에서도 유독 일본제국주의자가 다른 식민주의자들도 못했던 죄악 즉 피압박민족의 성씨와 이름까지 빼앗은 추행을 저질러 침략만행에서 간악성의 으뜸으로 꼽히였습니다.   이렇듯 치욕스러운 력사도 끝나고 오늘날에는 끔찍스러운 추억으로 남았으나 하나의 리치 즉 나라, 강산, 민족, 성씨, 피줄 등 개념이 민족재생과 번영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노는가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 맺 음 말 - M     오늘 《클릭, 우리 사는 세상》코너에서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을 모시고 임진년 음력설특집 《전통과 현대의 융합》두 번째 시간으로《우리 민족 족보와 성씨, 호칭》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봤습니다. M      오늘날에 일컫고 있는 우리 민족의 성씨는 무려 230여가지나 됩니다. 일설에는 270여가지로도 말하는데 그중에는 흔히 볼수 있는 리, 김, 최, 안, 정, 박, 윤, 석, 조, 한 등 성씨가 있는가 하면 인, 맹, 공, 탁, 호, 예, 단, 이, 반, 요 등 이른바 벽성도 있으며 황보, 독고, 제갈, 선우, 서문, 동방 등 복성도 있습니다.   슬기로운 우리 민족이 성씨를 쓴 력사는 이미 천년도 넘는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민속학적인 의미에서 볼때 대대로 성을 물리면서 피줄의 흐름을 이어온 자체가 하나의 력사이며 조상들의 지혜로운 유산입니다. 때문에 일제가 《동조동근》을 강요하면서 창씨개명까지 협박했던 그 살벌한 민족수난의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자기의 성씨를 잊지 않고 따라서 자기가 조선민족임을 잊지 않고 줄기차게 살아왔던것입니다.   물론 글로벌화된 오늘날에 와서 종친이요, 한 성씨요 하는 혈연개념이 희박해질수도 있고 또 그 어떤 다른 목적에 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각도에서, 력사적인 흐름에서 성씨의 유래를 캐여보는것은 력사지식면에서도 하나의 도움이 될수 있을뿐만 아니라 세계가 날로 좁아져서 마침내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를 평가하는 오늘날, 우리 친지들이 가족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다시 한번 새겨보는데서 또 한자리에 마주앉아 담소하는데서나 혹은 기타 교제장소에서나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앞으로 우리는 자신의 족보와 촌수, 호칭, 성씨를 더욱 더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M   이 시간 프로기획과 진행에 김동선이였습니다. 즐겁고 유쾌한 월요일 보내십시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2년 1월 30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2년 1월 18일  
7    (연변방송) 2013음력설 효도문화특집 댓글:  조회:2534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2013년 계사년 음력설 특집 M 오늘은 두번째 시간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께서 나와 주셨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우리민족 효도와 장례문화 책임보호단위로서 산하에 《장례효도 연구사무실》을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장례와 효도문화의 구체문제에 해석을 드리며 《시대상조》를 설치하고 장례와 효도의 구체 어려움을 해결하여 드립니다. 김동선 기자: 안녕하십니까? (현룡수 회장: 답례) 오늘 현회장님을 모시고 《유가 효도사상의 세가지 핵심요소로부터 본 우리 민족 효문화를 짚어보고 효행을 어떻게 실천할것인가?》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현회장께서 먼저 유가 효도사상의 세가지 요소에 대해서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현룡수 회장: 사람들이 효도라고 하면 흔히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이 자녀가 부모에게 효성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실 유가 효도사상은 부모에 대한 효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두개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상에 대하여 숭배하고 제사 지내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를 낳아서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내용입니다. 일찍 은상 시기 갑골문에서 이미 《효(孝)》한자가 발견되였는데 《효(孝)》한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글짜로서 《로(老)》의 략자가 위에 있고 《자(子)》자가 아래에 있습니다. 《효(孝)》한자의 문자형상으로 부터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이 구상할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손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형상, 둘째는 아들이 로부모를 업고 있는 형상, 셋째는 손자가 할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형상…등이며, 그 함의를 구상해 볼때 첫째는 조상을 숭배한다는 의미로, 둘째는 부모를 잘 모신다는 의미로, 셋째는 가문의 대를 이어간다는 의미로 구상할수 있습니다. 《효(孝)》한자의 바로 《로(老)》와 《자(子)》의 이런 원발생적인 형상을 통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가 심각한 효문화를 해석할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가 효도사상의 본질은 바로 생명에 대한 존중의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효를 크게 세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는 지난 생명에 대한 숭배, 둘째는 지금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애호, 세째는 앞으로의 생명에 대한 책임 등입니다. 지난 생명에 대한 숭배는 조상에 대한 숭배와 제사로 체현되고 지금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애호는 부모에 대한 효성, 형제간의 화목, 자기 건강에 대한 확보 등으로 체현되며 앞으로의 생명에 대한 책임은 자식을 낳아 키워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것으로 체현됩니다.   김동선 기자: 방금 현회장께서 유가 효사상의 첫번째 요소는 선조에 대한 숭배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어떻게  해석할수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인류가 문명사회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점차 생명의 보귀함을 인식하게 되였습니다. 당시의 생산력은 극히 락후하였고 사람들의 생명력도 상당히 취약하였으며 그로하여 사람들은 점차 선조에 대하여 숭배하고 감격하면서 선조영령에 기원하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얻기 어려운 리상적인 보우를 희망하는 의식이 생기게 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이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니며 선조들이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어서 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선조의 은덕을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기본인성을 갖추지 못한 짐승보다 못한것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서주시기의 금문중에서 이미 적지않은 효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되였는데 대부분 여러가지 제사활동 기록중에서 나타났으며 그때의 효의 기본뜻인즉 바로 제사지난다는 뜻이였습니다.   김동선 기자: 일찍 상고 은상 시기에 중국에서는 천지를 숭상하고 선조를 숭상하는 원시종교가 성행하였었는데 춘추말기에 와서 천지를 숭상하는 의식은 로자에 의하여 도교로 발전하였고, 선조를 숭상하는 의식은 공자에 의하여 유교로 발전하였는데 유교는 또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을 핵심으로 효도사상을 창립하고 발전시켜 유교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체계적으로 제고시키지 않았습니까?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공자는 《론어》에서 효를 담론하면서 춘추의 새사상을 계승하여 효를 사람들의 선조와 부모에 대한 진실한 감정으로 환원시켰으며 효의 규례에 합리한 륜리적 의거를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그당시에 이미 부모 작고후의 《삼년상례》라는 것이 성행하였는데 공자왈:《자식을 낳아서 삼년이 지나서야 부모품에서 떨어지더라. 무릇 삼년상례는 천하의 보편규례이니라. 보답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부모의 삼년사랑에 보답할수 있지 않느냐?》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부모 작고후의 《삼년상례》는 그 어떤 성인의 뜻에 의하여 결정된것이 아니라 이미 작고한 부모의 낳아서 키워주신 은덕에 보답하기 위한 구체적 수요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장기적인 력사 대변혁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의식에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 났는데 효도에서 선조에 대한 감은위주의 제사의식은 점차 선조영령으로 부터의 보우위주의 제사의식으로 발전하였고 또 그로부터 효도의 선조에 대한 제사의식은 일종의 사회성 제도로 발전하였다고 하던데요.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효도사상은 점차 동방문화권에서 일체 사회행위의 근본준칙으로 되였으며 일체 사회활동에 종사하는 기점으로 되였습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선조에 대한 제사활동 과정에서 엄격한 집행제도와 번쇄한 순서규범들을 제정하여 놓았는데 그 목적은 제사의 엄숙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선조에 대한 성의를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사람들은 성의를 다하여 선조에게 제사 지내면 선조신령으로부터 바라는 바의 보우를 받을수 있으며 현실에서는 근본 불가능했던 효과가 산생하여 만사가 태평할수 있고 가족이 번영창성할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지금의 관념으로부터 볼때 선조에 대한 제사가 정말로 그렇게 큰 신통력를 갖고 있는가 하는것에 대하여 앞으로 더 연구하여야 할 과제이지만 선조에 대한 제사가 가족성원들의 가족관념을 증강시키고 우량한 전통을 전수하며 가족의 화목을 추진시키는 등 방면에서는 확실하게 적극적인 작용을 할수 있다는것만은 완전히 긍정할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부모를 잘 모신다는것은 유가 효도사상의 핵심요소의 하나가 아닙니까? 이것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현룡수 회장: 효라는 것은 우선 부모를 잘 모시는 것입다. 이것은 살아있는생명을 존중함에 있어서 첫번째 내용입니다. 《효경》에도 《무릇 효라는 것은 부모를 잘 모시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기록되여 있습니다. 또 《론어 리인》에도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부모의 년세에 주의돌리지 않을수 없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데 기쁜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 부모가 아직 건재하여 계시기 때문에 시시로 효성할수 있는 그것이고, 걱정이 되는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 부모가 이미 늙어서 오래오래 효성을 다하지 못할가봐 그것이다. 그리하여 말했더라: 사망후 제사를 풍성히 차리느니 살아 계실때 검소하게 잘 모시기만 못하고, 사망후 통곡하느니 살아 계실때 웃으며 효순하기만 못하며, 무뚝뚝하게 시중만 드느니 확실하게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기만 못하며, 사망후 슬퍼 하느니 살아 계실때 정성을 다하기만 못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효에는 두가지 내용이 있는데 하나는 형제간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형님은 동생을 사랑하고 일깨워 주고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 하고 동생은 형님을 존중하고 순종하며 도와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효도에서 주장하는 표준적인 형제관계입니다. 또 한가지 내용은 자기 신체에 대한 보호입니다. 우리의 신체는 부모한테서 전수받은 것으로서 자기 생명만 담겨있는것이 아니라 부모와 전반 종족의 발전희망과 유전인자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위하여 전반 종족을 위하야 자기건강을 확실하게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자녀는 당연히 부모의 제한된 생명을 아끼면서 될수록 오래 장수하시게끔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부모에게 효성하고 부모가 오래 장수하게끔 하려면 물질적으로 충분히 보장하여 드려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정신방면에서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합니다. 부모에게 효성하는 실질은 사랑에 있으며 존중에 있지 않을까요? 현룡수 회장: 예, 그렇습니다. 공자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르칠때 항상 자녀 마음속의 진실한 감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항상 맑은 표정》을 하고 《부모의 질환을 근심하여 드리는 것》은 효도의 기본 태도입니다. 제자 자유(子游)가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지금 효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양만 하면 되는것으로 여기는데 기실 우리는 개나 말도 사양하고 있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부양만 한다면 개나 말을 사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와 같이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물질적 충분한 보장은 효의 한개 면에 불과하며 그 토대우에서 반드시 부모에 대하여 진정으로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살아 계실때는 례의에 맞추어 잘 모시고 사망하면 례의에 맞추어 장례지내고 례의에 맞추어 제사 지내야 합니다. 또 효자가 부모를 잘 모신다는 것은 집에 계실때에는 존경을 드리고, 부양함에 있어서는 즐거움을 드리며, 몸에 병이 나면 치료하여 드리며, 사망하면 애도를 들이며, 제사를 지낼때는 숭엄함을 드리는 것입니다. 총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행에는 여러개의 층차가 있는데 핵심은 부모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증자가 말한것 처럼 《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제일 큰효는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고, 그다음이 부모를 괄시하지 않는 것이며, 제일 아래가 부모가 죽지않을 정도로 부양만 하는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력사적으로 볼때, 중국이나 조선이나를 막론하고 력사에 길이 남을 효자, 효녀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김동선 기자: 예, 그렇습니다. 중국력사에 효자이야기가 많습니다. 옛날에 중국의 효자 《로래자》는 여든이 된 나이에도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때때옷을 입고 어리광을 부렸다고 합니다. 위대한 사상가인 공자님은 《부모님이 살아계실때는 먼 길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부모님에게 근심걱정을 끼쳐드린다고 걱정해서 그랬던것입니다. 중국고대의 《곽거》라는 효자는 자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어린 자기 아들을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땅에 묻으려고 땅을 파다가 많은 금은보화가 발견되여 아이도 살리고 모두 잘 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지만 부모는 죽으면 다시 없다는 고대의 효도 관념이지요.   김동선 기자: 조선 신라시기에 효녀 《지은》이라는 녀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의 몸을 노비로 팔아서 늙고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는 력사기록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남아있습니다. 이외에도 조선력사기록에는 많은 효자, 효녀들이 있는걸로 압니다.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조선력사책에는 《손순》이라는 효자가 있는데 그도 중국의 《곽거》처럼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서 자기 어머니의 밥그릇을 다투는 철없는 자기의 아들을 버리려고 구덩이를 파다가 돌로 만든 종을 발견하였는데 그 종을 매달아놓고 치니까 그 소리가 궁궐까지 전해졌습니다. 임금이 그 소리를 듣고 가보라고 해서 신하들이 달려가서 알아보고 돌아와서 그 사연을 국왕에게 알리자 국왕은 손순의 효심을 높이 사서 국가적으로 효자 《손순(孙顺)》을 포상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신라시대에 《향득사지(向得舍知)》라는 효자는 흉년이 들어 아버지가 굶어서 거의 죽게 되자 자기의 허벅지살을 베여 삶아서 대접시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조에 와서는 유교가 국교로 정해졌기 때문에 효자, 효녀들의 이야기가 더구나 많습니다.   김동선 기자: 과거날에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그렇게 중시하고 제창해 왔던 효문화가 현재에 와서는 시대발전변화에 따라 좀씩 색바래져 가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현회장께서는 이 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지요? 현룡수 회장: 예, 가정을 단위로 하는 농경문화의 바탕우에서 생겨난 효 사상은 전통유가사상의 핵심적인 사상의 하나로 되었습니다. 서방문화의 강력한 충격하에 유교문화권에서의 지도리념이던 유가사상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유가사상중의 효사상도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화, 도시화가 가속화되여 농경사회가 해체됨에 따라 대가족제도도 점차 핵가족화되여 가게 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효사상이 색바래지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김동선 기자: 물론 현실생활속에서 과거날의 효자, 효녀들처럼 효행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울것입니다마는 그래도 방법이나 방식, 또는 정도는 부동하더라도 우리 민족 고유의 효문화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현회장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효문화는 우리의 훌륭한 문화전통이므로 계속 발양하고 이어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생활방식에 맞게 효행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심청이처럼 림당수에 몸을 던진다거나 손순처럼 어린 자식을 버리려고 해서는 안되는거지요.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면 3년동안 부모산소에 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한다는것은 현대사회에서는 도저히 행할수도 없거니와 행해서도 안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삼년제사만 제대로 지내도 효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마땅히 현대생활의 방식과 생활의 리듬에 맞게 효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의 24효 이야기나 우리민족의 많은 전통 효자이야기들은 어찌보면 효도를 극단화 우매화 기형화 시켰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옛효 이야기들에서 찌꺼기를 버리고 좋은것만 채납하여야 하겠습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어떻게 효를 행해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많은 방법이 있을것입니다만 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배우자와 자녀를 데리고 자주 부모님 찾아뵙기 2. 명절과 휴일을 부모님과 자주 보내기 3. 부모님을 위한 생신 축하연 마련하기 4. 부모님에게 직접 음식 만들어 드리기 5. 매주 부모님에게 전화하기 6. 부모님에게 용돈 넉넉히 드리기 7. 부모님에게 카드(교통카드, 전화카드 등) 만들어 드리기 8. 부모님의 과거 이야기 경청하기 9. 부모님에게 인터넷하는 법 가르쳐 드리기 10. 자주 부모님 사진 찍어 드리기 11. 부모님에게 사랑 표현하기 12. 부모님의 마음 헤아리기 13. 부모님의 여가 활동 돕기 14. 혼자 사시는 부모님의 재혼 돕기 15. 정기적으로 부모님 건강검진 해드리기 16. 부모님에게 알맞은 보험 들어드리기 17. 부모님과 자주 마음 속 이야기 나누기 18. 부모님을 모시고 중요한 행사 참석하기 19. 부모님에게 자식이 다니는 직장 보여드리기 20.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 혹은 전에 살던 곳 찾아가기 21. 부모님과 함께 운동하기 22. 부모님 일에 적당히 참여하기 23. 부모님을 모시고 옛 친구분 방문하기 24. 부모님과 옛날 영화 함께 보기   김동선 기자: 효행에서 중요한 두 번째 요소인 형제간에 친밀하게 지낸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수 있을까요? 현룡수 회장: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효에서 두번째가 되지요. 가정의 기본관계는 부모, 자식, 형제, 부부 등으로 공동히 구성되였는데 그중 형제관계가 가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전통적으로 형제관계에서 륜리의 기본규범은 첫째는 사랑하며 관심하라는것입니다. 둘째는 너그럽게 대하며 깨우쳐 주라는것입니다. 셋째는 본보기를 보이며 이끌어 주라는것입니다. 본보기란 시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도덕상의 본보기, 특히는 이상 어른들의 솔선수범 작용을 특별히 중시하여 왔습니다. 형님은 동생의 본보기로서 자기의 영향력을 말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행동으로 체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김동선 기자: 형님이 동생에 대하여 이상의 륜리규범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생도 형님에 대하여 이하의 륜리규범을 준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룡수 회장: 그렇습니다. 전통적인 륜리규범에서 동생에게도 역시 다음과 같은 전문적인 륜리요구가 제기됩니다. 첫째는 존경하라는것입니다. 동생으로서 문제에 부딛치면 될수록 먼저 양보하면서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하며 이로써 형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는것인데 이것이 바로 형제간의 친밀한 관계를 보증하는 원칙입니다. 둘째는 순종하라는것입니다. 《동생》이라는 이름 본신에 이미 순종의 함의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륜리규범들은 모두 동생이 형님에게 순종하라는 도리를 말하였는데 그렇다고 무원칙하게, 무조건 순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도리가 없으면 순종하지 않을수도 있겠죠.   김동선 기자: 유가 효사상의 세번째 핵심요소는 자손에 대한 양육이라는 점은 어떻게 해석이 가능합니까? 현룡수 회장: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부모에게 효성하며, 형제자매간에 친밀하게 지내고, 자기를 완벽하게 보전하는 것은 효도사상중의 몇개 내용입니다. 여기에 또 가족의 생명이 부단히 연속되게끔 담보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큰 효라고 할수 있습니다. 생명은 언제나 한세대 한세대 이어지는 가운데서 연속되는데 이것은 역시 인류의 유한생명이 무한생명에 대한 일종의 추구입니다.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 효도를 하는 길중에는 자기의 자식을 낳아 잘 기르는것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삼천가지 불효중에 자식이 없는것이 제일 큰 불효》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지금 적지않은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극도로 자사적인 무책임한 경향이라고 비평하고 싶습니다. 자기의 자식을 잘 키우고 가르쳐서 이 세상에서 유용한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드는것은 기실 사람으로서의 기본의무의 하나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3년2월 11일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163.com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3년 2월 7일
6    (연변방송) 2011정월보름 특집 댓글:  조회:3018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정월보름 특집 《전통과 현대의 융합》 방송주제:《우리 민족 전통명절 정월대보름 세시풍속》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 전통명절 정월보름입니다. 우리 민족의 주요한 전통명절 정월 보름은 음력 정월 15일로서 대보름 혹은 상원절로도 불리웁니다. 상원이라는 낱말은 어떻게 나왔으며 그 유래는 어떻습니까?   현룡수 회장: 음력 1월 15일을 정월 보름, 혹은 대보름이라고 하며 또 상원절이라고도 합니다. 상원절이란 도교계에서 부르던 명절명칭인데 이에 대응하여 음력 7월15일을 중원이라 하고 음력 10월15일을 하원이라고 합니다. 보름명절은 보통 14일부터 시작하여 16일 까지입니다.   김동선 기자: 정월 보름 사금갑조 신일(愼日)이라고도 하던데 어떻게 되어 이렇게 부르게 되었고 또 력사기재에는 어떤 기록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음력 정월의 쥐날[子日]·용날[辰日]·말날[午日]·돼지날[亥日]은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입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신라 경주(慶州) 습속에 정월 첫 번째 쥐날·용날·말날·돼지날을 신일로 여겨 조심하고 삼가서 일을 접어둡니다. 원래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488) 정월 대보름날, 까마귀·쥐·용·말·돼지의 기이한 예조(豫兆)가 있어 왕이 거문고상자[琴匣]의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쥐·용·말·돼지의 날을 신일로 삼았던 데에서 유래하였다. 속담에도 달도(怛忉)라 하며, 슬퍼하고 근심하며 금하고 꺼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달도가(怛忉歌)'라는 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정월 16일 시골 풍속에 어떤 활동도 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물건을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으며 기일로 여기니 역시 경주의 유풍(遺風)을 이은 것 같다”라 하여 조선시대에는 16일을 기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금갑(琴匣)의 화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사금갑조(射琴匣條), 혹은 서출지(書出池)의 고사를 뜻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의 정월 보름 명절행사는 그 전날이 14일날부터 시작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14일날의 풍속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정월 14일을 작은 보름이라고도 하는데 전통적으로 이날에는 가난한 집에서 부자집 비자루를 빌어다가 자기집 마당을 쓴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인즉 부자집의 운을 빌어서 자기집의 가난운을 말끔히 쓸어버리고 새해부터 좀 셈평이 펴이라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날에는 벼짚으로 왼새끼를 꼬아서 대문, 창고문, 출입문의 문고리에 매놓는데 재물이나 복이 들어만 오고 나가지 말라는 뜻이고, 황토를 물에 풀어 대문, 창고문 혹은 농기구에 복자를 써놓는데 액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뜻입니다.   평소에 밖에 그대로 지저분히 놔 두었던 농기구나 공구들을 이날이면 모두 창고에 넣어 건사하는데 새해에 재수없는 일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날에 치는 점이 새해를 대표한다고 하여 윷돌이나 해몽의 방법으로 새해의 운수를 점쳐 보기도 한답니다.   일부지방에서는 14일에 명절를 쇠고 15일부터는 일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옛날 량반들이 가난한 서민들과 명절을 함께 쇠기 싫어서 보름날에는 일군들에게 밥을 아홉그릇 먹이고는 나무를 아홉짐 해오게 하였다는 풍속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정월 보름이 시작되는 15일의 풍속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정월보름 혹은 대보름을 전통적으로 烏忌日이라고 하는데 까마귀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오기일의 유래에 대하여 조선의 권1에는 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 제21대왕 비처왕(소지왕)이 즉위한 지 10년인 무진년(기원488)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습니다. 그때 까마귀와 쥐가 나와 앞길을 막으며 울어댔습니다. 쥐는 사람의 말을 하면서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시오.” 그리하여 왕은 말을 탄 기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뒤쫓도록 하여 남쪽 피촌에 이르렀는데 두 마리 메돼지가 나와서 서로 싸우니 그장면이 신기하여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의 소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기사가 말을 타고 길가에서 배회하고 있을 때 갑자기 길가의 못이 쫙 갈라지며 어떤 노인이 나와 책을 꺼내어 바치는 것이였습니다. 그 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기사는 이책을 가져다 왕에게 바쳤습니다.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열어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느니만 못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한문관이 급히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임금님인줄로 압니다”라고 하니 왕은 그러히 여겨서 그책을 열어보았습니다. 그 책속에는 “거문고 갑을 쏘아라(射琴匣).”하고 씌여 있었습니다. 왕이 궁궐로 들어가 거문고갑을 찾아 궁수들을 명하여 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평소에 내전에서 분향하던 까까머리중과 궁주가 들어 몰래 사통하면서 왕을 사살할 간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까마귀 때문에 그만 발각되여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亥일, 상子일, 상午일 등의 날에는 온갖 일을 삼가고 꺼려서 감히 하지 않았으며 점차 전반 정월을 愼重月로 삼아 매사에서 조심하였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삼아 찰밥으로 제를 지냈으며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인이 나와서 책을 주던 그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 한국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그 옛못입니다.   이외에도 보름행사로 또 소나 말, 닭의 울음소리 내기, 떡돼지 만들기, 싸리나무로 불때기 등 많은 풍속들이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정월보름 명절행사에는 아주 풍부한 음식문화와 놀이문화들이 포함돼 있는걸로 압니다. 정월 보름날 주요 음식들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보름날의 전통음식은 오곡찰밥입니다. 신라 비처왕은 까마귀 덕분에 큰 액을 모면하고 그 은공에 보답하고저 매년 정월 15일에 까마귀에게 제사 지내기로 결정하고 문무백관들에게 까마귀가 무슨 곡식을 좋아하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누구도 알지 못하니 할수없이 쌀, 보리, 조, 기장, 콩 등 다섯가지 알곡을 한데 섞어서 밥을 지어 까마귀 제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보름날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는 풍속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월 보름날에는 또 귀밝이술을 빼놓을수 없습니다.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는 보름날에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대보름날 아침에 어른신께 데우지 않은 찬술을 한잔 드시게 하여 귀가 밝아지길 바라고 또한 일년 내내 좋은 소식만 들을수 있기를 기원하였는데 이를 '귀밝이술(이명주:耳明酒)'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부럼깨기행사가 있었습니다. 부럼이란 일종의 견과류(단단한 껍데기의 열매)인데 추석에 선산에서 벌초하면서 뜯어다가 건사하였다가 대보름날 아침에 깨물면서 "일년 열두달 내내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원합니다. 부럼을 깨물때 '딱'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소리는 부스럼 잡귀가 가장 싫어하는 소리여서 잡귀들은 모두 도망간다고 합니다. 부럼이 없는곳에서는 날밤, 호두, 잣, 땅콩 등으로 대체합니다. 또 평안도 의주의 풍속에 젊은 남녀가 이른 아침에 엿을 씹는데, 이것을 '이굳히엿'이라 하며, 부럼깨기와 비슷한 행사입니다. 이외에 대보름의 시절 음식과 나물들로는 오곡, 즉 찹쌀, 찰수수, 팥, 차조, 콩을 섞어 밥을 지어 먹습니다. 대보름엔 아홉 가지 나물에 아홉 번 밥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집 이상의 성이 다른 사람 집의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합니다.     정월대보름날은 오곡에 보통 먹는 멥쌀 대신 찹쌀을 넣습니다. 찰밥은 멥쌀밥보다 영양분이 풍부하고 차진 기운이 많아 소화도 잘 된다고 합니다. (卷 第一)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보면 신라 제 21대 소지왕(炤智王)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가 왕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래서 보름날 까마귀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정월대보름을 「까마귀 제삿날(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나물들로는 봄이 오면 풀과 나무 그리고 온갖 동물들이 힘찬 도약을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몸이 나른하고, 자꾸 졸리며, 입맛도 없어져 공부나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겨우내 푸른 채소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한 우리 몸은 부신피질호르몬(항(抗) 스트레스 작용을 함)을 만들어내는 비타민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날씨가 따뜻해져서 갑자기 체온이 올라가게 되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피부혈관이 확장돼 피가 살갗 쪽으로 몰리면 자연히 내장의 피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소화액의 분비도 떨어져 식욕부진이 생기는데 이게 ‘춘곤증’이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는 자연에게서 그것을 보충할 수 있는 복이 있었습니다. 새봄이 오자마자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온 들판에는 파릇파릇 온갖 나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면 요즘 우리가 먹는 나물은 산나물 96종류, 들나물 60종류, 재배채소 23종류에 달한다고 전합니다. 겨우내 부족했던 비타민과 무기질을 보충하기 위한 우리 조상들의 나물먹기는 슬기로움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정월 보름이면 많은 전통민속놀이들이 있는데 례를 들면 줄다리기, 망월, 달집태우기, 놋다리 밟기, 고싸움놀이, 차전, 석전, 나무쇠싸움, 홰불싸움, 연띄우기, 윷놀이, 다리밟기 등이 있고 또 중국조선족들의 보름날 민속놀이에는 주로 성주풀이, 망월, 다리밟기, 얼음판뒹굴기, 윷놀이, 홰불싸움, 연띄우기, 줄다리기 등이 있지 않습니까? 먼저 조선반도에서 전해져 온 줄다리기부터 알아보겠는데요. 줄다리기 놀이속에는 어떤 문화가 슴배여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충청도 풍속에 동네별로 편을 갈라 동아줄을 서로 힘껏 잡아당기는 시합을 벌이는데, 이것을 줄다리기, 혹은 줄싸움이라 합니다. 줄싸움에서 줄을 끌어간 편이 이기는 것이며, 그 동네가 풍년을 차지하게 됩니다. 줄다리기에서 이기려면 줄을 당기는 사람들이 힘에 세야 할뿐만 아니라 지휘를 잘 해야 하며 또 응원도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줄다리기 놀이와 비슷합니다. 경기지방 풍속도 이와 같았고, 또 승려들도 이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달집태우기 민속놀이는 어떻게 진행되며 또 어떤 문화적 함의가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달집태우기는 어른들의 불놀이입니다. 이 달집은 달이 막 떠오르는 순간에 불을 붙여 태워야 하는데 달집에 먼저 불을 붙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립니다. 맨 먼저 달집에 불을 지르면 총각들은 장가를 가고 득남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달집 불에 콩을 구어 먹기도 했는데 그러면 한 해 동안 이빨을 앓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달집의 불이 활활 잘 타고 연기가 많이 날수록 마을이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산불위험으로 불가능한 놀이입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놋다리 밟기 놀이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현룡수 회장: 일종의 살막이 놀이인데 안동지방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부녀자들 중의 늙고 허약한 사람들이 성 밖으로 몰려나와 차례로 길게 한 줄로 죽 늘어 엎드린 다음 한 어린 소녀를 선녀로 선출하여 좌우에서 손을 잡아 붙들어 부축하면서 그 위를 왔다갔다 걷게 합니다. 그러면 어린 소녀가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의 등을 딛고 걸어 다닙니다. 그 어린 소녀가 "이것이 무슨 다리인가?" 하고 유창한 가락으로 선창을 하면 엎드려 있는 부녀자들은 일제히 "청계산(淸溪山) 놋다리지" 하고 후창(後唱)을 합니다. 이렇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다 갔다가 하면서 놀다가 새벽닭이 울어야 그칩니다. 금년 연변텔레비 음력설야회에 이 놋다리 밟기 장면과 비슷한 춤이 있은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고싸움놀이는 어떤 놀이입니까?   현룡수 회장: 원래 “고”라는 것은 저고리 고름을 맸을때 동그란 고리모양을 말하는데 고싸움의 고란 바줄과 벼짚으로 크게 둥그런 고리 모양을 만든후 룡처럼 몸체을 길게 늘인것을 말하며, 두개의 고가 서로 맞붙어 싸움을 벌인다 해서 고싸움이라 부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놀이는 정월 초순경 10세좌우의 어린이들이 길이 5∼6 m의 고를 만들어 애들 고싸움부터 시작됩니다. 다음날에는 아래 ·위 마을 15세 가량의 어린이들이 합세하고, 이를 구경하던 20여 세의 청년들까지 참가하여 점차 규모가 커집니다. 이때가 대개 정월 10일경이 되는데,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고싸움 분위기에 휩싸여 두 마을의 책임자들이 모여 대항전을 벌이기로 합의하고 대형고를 만들며 준비에 들어갑니다. 대형고가 완성되면 14일 밤에 각기 당산제(堂山祭)를 지내고 15일은 쉰 다음 16일에 고싸움을 벌이는데, 오전에는 두 마을 합동으로 농악굿을 하고, 오후에 고를 메고 싸움터에 집결합니다. 고를 멘 줄패장들이 돌진하여 상대방의 고를 찍어 눌러 땅에 닿게 하는데, 먼저 땅에 닿는 편이 지는 것으로 합니다. 그 사이 농악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싸움은 격렬하게 전개됩다. 싸움은 20일까지 계속되는데, 승부가 나지 않으면 2월 초하룻날 줄다리기로 결판을 냅니다.   김동선 기자: 이번에는 차전과 석전 놀이에 대해서 설명을 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차전놀이는 동네별로 편을 갈라 외바퀴 수레를 밀고 나와 싸웁니다. 승부를 겨루어 그 해의 풍년을 점치는데, 쫓기는 편이 흉년이 든다고 합니다.   석전(石戰) 놀이는 두마을 사람들이 두 패가되어 몽둥이와 돌을 들고 맞서 함성을 지르며 싸움을 벌이는데, 패하여 달아나는 편이 지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놀이이므로 인명피해가 나지않게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속설에 이기는 지방에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나무쇠싸움은 어떻게 하며 이 놀이를 통해서 우리 민족은 어떤것을 추구했습니까?   현룡수 회장: 나무쇠 싸움은 목우전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나무로 만든 소끼리 싸움을 한다는 민속놀이로 매년 음력 정월보름을 기하여 초순경부터 시작됩니다.   줄다리기가 서로 당기는 것인데 대비해, 나무쇠 싸움은 그와 반대로 서로 밀어부쳐 상대를 눌러버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삼각형으로 아름드리 소나무를 얽어놓고 거기 직각이 되게 가로대를 얽어놓으면 마치 대형 탱크처럼 웅장합니다. 이 나무쇠를 30여명이 어깨로 받쳐들고 그 위에 대장·중장·소장 등이 타고 나무쇠를 지휘합니다. 정월 13일경 두편은 서로 풍악을 울리고 시위를 하는데 기발을 날리며 호호탕탕하게 부락을 돌고, 말을 탄 장군들은 서로의 우세함을 과시합니다. 14일 밤은 술과 풍악으로 각각 사기를 돋군뒤 15일이 되면 아침부터 풍악과 기, 서낭대를 앞세우고 앞뜰인 갯벌로 나갑니다. '오왜승전이요'하고 소리 높이 외치며 두 나무쇠를 서로 겨루다가 서로 높이 들어 맞부딪칩니다. 그리고 밀어서 한편을 땅에 닿게 누르면 이기게 되는 것인데,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술을 사고 대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왕의 9.3축제에서 고싸움 놀이와 이 목우싸움놀이 표현이 있었던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홰불싸움은 어떤 놀이입니까? 현룡수 회장: 청장년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불이 잘 붙는 싸리나무 묶음에 삼대를 섞어 홰대를 만들어 가지고 달맞이하기 좋은 산으로 올라가 농악을 울리면서 한바탕 놉니다. 그러다가 보름달이 솟아오르면 저마다 홰불을 붙여들고 농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기세를 올립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춤을 추고나서 맞은편 산의 홰불군들과 신호를 주고받은 다음 량편에서 환성을 지르며 들판으로 달려나가 논밭으로 이리저리 뛰여다니면서 저마다 넓은 면적의 잡초에 불을 지르거나 혹은 상대편의 홰불을 두들겨 꺼버리기도 합니다. 홰불놀이는 홰불군들이 일제히 달려나가 상대편 진지를 먼저 빼앗는 편이 이기는것으로 됩니다. 이긴 편의 홰불군들은 다시 농악을 울리면서 홰불을 들고 춤을 추며 승리를 경축합니다.   정월보름날에 전통적으로 진행된 홰불놀이는 의례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힘과 용기를 돋구는 경쟁놀이였으며 겨울을 난 들쥐들과 메뚜기알, 해충의 번데기, 돌피와 잡초의 씨를 태워버리는 등 농사에 해를 끼치는 모든것을 태워서 없애버리는 유익한 놀이이기도 하였습니다. 홰불놀이를 《들불놀이》, 《쥐불놀이》라고도 합니다.   김동선 기자: 연띄우기는 어떻게 하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다양한 종류의 연(鳶)에 얼레를 만들고 거기에 연줄을 감아 연을 공중에 띄워 바람의 방향에 따라 연을 날립니다. 연놀이는 겨울부터 시작하여 늦봄까지 즐기는 놀이로 우리민족 풍속에서는 연을 겨울부터 정월 보름까지 날립니다. 속설에 의하면 고려 때 최영(崔瑩) 장군이 탐라(眈羅)를 정벌할 때 연을 만들어 썼다고 합니다.  연을 날리다가 다른 사람의 연줄과 서로 맞걸어 남의 연줄을 끊어 놓으면 이겼다고 좋아하는데, 이것을 연싸움이라 합니다. 연싸움을 심하게 하는 사람은 사금파리 가루나 구리 가루를 연줄에다 바르기도 하는데, 그러나 연줄을 거는 방법과 연을 날리는 방법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중국조선족의 정월 보름날의 주요한 민속놀이의 하나인 먼저 성주풀이에 대해서 알아볼가요?    현룡수 회장: 성주풀이에 대하여 전번의 음력설 특집에서 간단히 언급한적이 있습니다. 우리연변의 안도현 장흥향 신툰촌에서는 오늘까지도 해마다 설과 보름이면 성주풀이를 진행하여 왔다고 하는데 참으로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촌에서 농악대를 조직하여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집집을 찾아다니며 축복하여 줍니다. 매 집 앞마당에 이르러 “이집문 좀 여소, 문안열면 아니 간다오.”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그집에서 접시에 기름을 담아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답니다. 그다음 대야에 쌀을 담고 등잔을 그우에 놓고 밖으로 들고 나와 마당에 상을 놓고 그 우에 놓습니다. 그러면 농악대 성원들이 그 상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는데 한 사람이 높은소리로 성주풀이를 부르며 그집을 축복하여 줍니다.   농악대는 마당복판에 놓은 상주위를 돌면서 한바탕 성수나게 춤을 추고는 또 다음집으로 찾아 갑니다.   우리민족의 神에는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숭상하는 가택신(家宅神)이 있고, 부락에서 숭상하는 부락신(部落神)이 있으며, 무속에서 숭상하는 무신(巫神)과 그 밖의 잡신 등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숭상하는 신으로는 성주신, 조왕신, 문신, 측신, 지신, 업신, 삼신, 제석신, 조상신, 왕신(王神), 정신(井神) 등 11종이 있으며, 마을신에는 136종이 있고, 무신으로는 114종이 있습니다. 이밖에 잡신들 까지 모두 합치면 민간신앙에서 숭상되는 신은 지금까지의 통계에 모두 273종이나 됩니다. 그중 성주신은 가택을 주관하는 신으로서 가택의 령혼입니다. 한가문의 안택과 번영은 사람들의 노력만이 아닌 가택의 인소에도 원인이 있다는 이런 리념이겠죠. 해마다 성주신을 존중하고 축복하여 주어야 그 집에 복이 깃든다고 전통적으로 믿어왔습니다. 자기가 살고있는 집을 건출물로서가 아니라 신으로 높이 모셔 받들라는 뜻입니다.   김동선 기자: 망월 즉 달바라보기도 정월 보름의 중요한 민속놀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망월은 주로 어떻게 진행됩니까?   현룡수 회장: 보름날에 동산에서 휘영청 떠오르는 둥근달을 구경하는 것을 망월, 혹은 달맞이라고 합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 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그해에 재수가 좋다"고 적혀 있습니다. 망월놀이는 보통 앞에서 언급한 달집태우기와 함께 진행합니다. 달이 뜨기 전 뒷동산에 올라가서 생솔가지를 꺾어 모아 불은 지로고, 그 연기로 달을 그을린다고 합니다. 달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달을 본 사람이 "달 봐라"라고 고함을 지르면,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달을 향해 큰절을 하며 각자의 소원을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놀이는 산불위험이 있어서 한국에서도 이미 금지했다고 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보름달이 떠오르는 그 순간을 리용하여 망월제를 지내기도 합니다. 망월제는 보통의 망월놀이보다 좀 엄격하고 고급적인 행사로서 새해에 대한 축복도 보다 체면스럽고 다방면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정월 보름이 되면 다리밟기라는 민속놀이도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다리밟기에 대해서 설명을 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다리밟기를 踏橋라고도 하는데 달이 뜰 무렵에 다리밟기를 하면 그해에 내내 다리가 튼튼하다고 합니다.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지역의 크고 작은 다리를 모조리 찾아가서 건네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또 열두다리만 골라 건네는 방식도 있고, 또 다리[橋]가 있는 곳으로 가서 자기 나이 수만큼만 다리를 밟는 방식도 있습니다.   다리밟기는 본래 중국의 설날 풍속이라고 하는데 한나라때부터 시작하여 북경일대에서는 청나라때에도 아주 성행했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얼음판 뒹굴기는 어떻게 하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달맞이가 끝나고 다리밟기가 끝나면 강에 나가 얼음판 우에서 실컷 딩굽니다. 그러면 주로 허리병이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한어에서 얼음을 氷이라 하고 병도 病이라 합니다. 발음이 같은것을 리용하여 얼음신을 속여서 귀찮은 내몸의 병을 얼음우에 떨어놓는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김동선 기자: 윷놀이는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놀이의 하나인데 그속에는 어떤 문화적 함의가 포함돼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윷놀이는 조선의 삼국시대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놀이로서 아마도 선사시대의 부족이나 씨족의 명칭인듯 합니다. 네개의 매를 던져서 도, 개, 걸, 윷, 모라는 결과를 얻는데 이는 각기 돼지, 개, 양, 소, 말 등 가축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해마다 년초에 농사의 풍흉을 占치는 卜術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윷을 던져서 주역의 64괘를 도출해 낼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가족, 친척,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마당, 안방, 시장의 빈터에서 남녀노소가 어울려 즐기는 놀이거리가 되어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정월 대보름에 16일날 풍속에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보통 보름행사는 14일에 시작하여 16일에 끝냅니다. 연변의 조선족들은 보름날이 아닌 16일을 까막닭의 날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烏忌日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찌하여, 언제부터 하루 밀리게 되였는지는 아직 해명할수가 없습니다.   저의 기억에 의하면 과거 저의 어머니는 보름날 저녁에 오곡밥을 지어서는 굴뚝목에 가져다 놓고, 16일 신새벽이 되면 명심하고 일어나서 급히 부엌에 내려가 아궁이에 짚단을 하나 넣고 불을 지폈습니다. 그 연유를 물은즉 까마귀는 굴뚝에서 가장 먼저 연기나는 집부터 찾아가 까마귀밥을 먹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집은 그해 내내 별탈이 없이 무사할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보편적으로 까마귀를 흉조로 여기고 각 방면에서 싫어하며 까마귀 울음소리만 들려도 퉤- 하고 침을 뱉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烏忌日 문화의 또 다른 변종이라고 생각됩니다.   김동선 기자: 정월 보름 명절에 금기시하는 금기사항같은것은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대보름 금기로 김치가 있는데, 그맛있는 김치도 보름날에는 먹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물, 눌은밥, 고추가루를 먹으면 그해에 벌이나 벌레에 쏘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찬물을 마시면 여름내 더위를 먹고 놉을 얻어 일을 할 때마다 소나기가 오기 때문에 찬물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비린 것은 여름에 파리를 불러오고 몸에 부스럼이 생긴다고 여겨서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나물도 먹지 말라고 하는데 첫술에 나물을 먹든지 또는 나물을 많이 먹으면 그해 논밭에 잡초가 무성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속설이니까 상관하지 마시고 그냥 드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농사와 관련된 금기사항이 수없이 많습니다. 보름날 아침에 키가 작은 사람이 찾아 오면 그해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지 못한다고 여겨 경북 지방에서는 금기입니다. 또 보름날엔 음식을 장만해도 칼질을 하지 않는다던가, 빨래를 널지 않는다던가 하는것도 풍년농사와 관련된 금기입니다. 그리고 보름날 물동이를 이면 그해 큰소나기로 인해 홍수가 져서 농사를 망친다고 하였으며, 보름날 머리에 빗질을 하면 편두통이 생긴다고 하며 이런것도 금기에 들어 있었습니다. 하여튼 아까 까마귀 전설에서 언급했듯이 전반 정월은 愼重月이므로 매사에서 조심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연연사: 감사합니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5    (연변방송)2011음력설 특집--2 댓글:  조회:2090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2011년 신묘년 음력설 특집 (두번째 시간) 방송주제:《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세배돈을 정확히 알고 쓰게 할것인가?》 출연연사: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조선언어문학학부 학부장 우상렬 교수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회장     김동선 기자: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우리 민족 전통명절 음력설과 정월보름이 방금 지났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이미 받은 세배돈을 다 썼을수도 있고 또 지금 한창 세배돈을 어떻게 쓸가 고민하는 아이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2011년 02월 15일자 흑룡강신문에 할빈시 향방구에 사는 한 어린이가 설기간에 받은 세배돈 1만3500원을 이틀새에 다 써버렸다는 기사가 실렸더군요. 전 그 기사를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또 한 어린이는 자신이 받은 세배돈을 부모님이 다 빼앗아 건사했다고 법원에 이건 불법이라면서 신고한다는 전화를 했더라는 사연도 들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현상들이 비일비재인거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두분을 모시고 자녀들이 세배돈의 의미을 정확히 알고 올바르게 쓰게 하자는 취지에서 이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두분께서는 이런 현상을 보고 어떤 느낌을 갖고 있습니까?   우상렬 교수: 교육자의 각도에서 이런 현상을 보고 느낀 점을 간단하게 3분 정도 말씀주십시오. (세배돈사용에서 틀린 점을 주로 거론해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설이면 본격적으로 아이들한테 세배돈을 주기 시작한것은 아마도 개혁개방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문화혁명전에도 설에 세배하는 풍속은 있었지만 세배한 후에는 치하의 덕담이나 듣고 콩알사탕이나 엿가락 같은 것을 얻어 먹을수 있었으며 간혹 새학기 학용품으로 연필이나 필기장, 혹은 책가방같은 것을 선물 받을수 있었습니다. 그당시 경제수준은 락후하였지만 돈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높아서 십전이면 콩알사탕을 사서 온동네 아이들이 모두 나눠 먹을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생활형편이 많이 좋아졌으며 사회의 모든 세포가 돈으로 운영되는 세월이므로 설에 아이들한테 세배돈을 얼마간씩 주면서 금전관념과 소비관념을 심어 주는것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설문화라고 생각됩니다. 탈은 세배돈을 너무 많이 주어서 생깁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너무 많으면 탈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부모의 천성일진대 자고로 자식에 대한 사랑에도 현명한 사랑과 아둔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세배돈을 너무 많이 주는것은 현명한 처사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잘못하면 자기의 자식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방금 우에서 말한 현상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바가 아주 큽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설에 웃어른에게 세배를 하면 어르신들은 세배를 한 자녀나 손자, 손녀 혹은 마을청년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세배돈을 주지 않았습니까? 여기에는 어떤 문화가 내포돼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세배돈이라는 것은 기실 현대에 와서 새롭게 산생한, 아직 그리 성숙되지 못한 우리민족의 례물문화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족들은 옛날부터 명절이나 생일이면 아이들한테 “红包”라는 것을 줍니다. “红包”라는 것은 돈으로 주는 례물인데 아이들에게 줄때에는 단지 용돈의 의미뿐만이 아니라 좋은 행운을 만나서 앞으로 많은돈을 벌라는 보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한어에서 红이라는 것은 행운을 상징하며 리익을 의미하므로 붉은색갈은 전통적으로 한족들이 특별히 사랑하는 색갈입니다. 그리하여 명절이나 희사를 치르는 행사때에는 주위가 온통 붉은 색갈입니다. 우리민족의 주요한 문화의 뿌리는 모두 한족들과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데 세배돈이라는 이 신생 례물문화도 기실 한족들의 “红包”문화에서 배워 온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배돈의 진정한 함의는 새해에 아이들에게 많은 행운이 차례지라는 어른들의 바램입니다.     김동선 기자: 지금 사람들, 특히 젊은 부모나 그 자녀들은 이 세배돈의 의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것 같습니다. 조부모나 부모들은 그저 세배돈을 많이 주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것 같고 또 세배를 하는 어린이들은 세배돈을 많이 받으면 좋은줄로만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되면 원래 세배돈의 의미가 퇴색되고 변질되는게 아닙니까?   우상렬 교수: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세배돈이라는 것이 아주 선진적인 문화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어느정도 시대를 반영하는 문화입니다. 이제 금방 우에서 언급 하였다 싶이 세배돈의 진정한 함의는 새해에 아이들에게 많은 행운이 차례지라는 어른들의 바램입니다. 세배돈 자체가 벌써 행운의 시작이지요. 아이들의 행운을 가동해 주는겁니다. 중국 사람들은 화는 단독으로 오지않고 행운이 오면 쌍으로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어른이 오늘 아이들의 행운을 가동해 주었으니 후에 이 아이들에게 더 큰 행운이 적어서 한번은 꼭 차례진다는 일종의 믿음에 가까운 바램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부유한 집 어른들은 행운 시작의 첫 차원을 높이는 의미에서 아이들의 예상을 초월하여 세배돈을 엄청나게 많이 주게 되는 것입니다. 행운이란 바로 뜻밖의 기쁨을 의미하죠. 사전에 예상했던 일은 대단히 좋은 일일지라도 행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민족의 세배돈 문화는 반드시 진정으로 아이들의 건강성장에 유리한 방향에로 발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그럼 이제부터 우리 부모들이나 조부모들이 자녀나 손자, 손녀들에게 세배돈을 줄때 어떤 면에 주의를 돌려야 할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지요?   우상렬 교수: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도대체 아이들에게 세배돈을 얼마쯤 주어야 적당량인가 하는 표준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세배돈을 주겠으면 자기집 형편에 따라서 적당히 주되 그 표준은 자기로 정해야 할것입니다. 좋기는 세배돈과 례물의 형식을 결합하여 세배돈은 상징적으로 하고 례물을 주체로 하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봅니다. 형편이 좋아서 많이 주었다고 하여도 결코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내돈을 내자손들에게 선물하는데 그누가 간섭합니까? 관건은 아이들에게 적극적인 금전관념과 소비관념을 심어주는 동시에 창업관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부자집에서는 아이들에게 부자집 조건에 부합되는 기업관념, 사회관념, 자선관념을 심어주고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우선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간고하게 창업하여 꼭 성공해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줍니다.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에 서로 비기면서 주눅이 들수도 있는데 경쟁의식을 심어줌에 있어서도 질줄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이길줄 모르게 된다는 도리를 가르쳐 줍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부모들은 흔히 자녀에게 세배돈을 준후 그 돈을 전부 몰수하여 대신 건사하였다가 일부만 자녀에게 주거나 또는 전혀 주지 않고 자신들이 전부 써버리는 경우도 있는데요. 계속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자녀들의 불만을 야기시킬수가 있고 모순이 격화될수도 있으며 또 할빈시 향방구의 손강어린이처럼 극단적인 세배돈 사용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녀들이 세배돈을 올바르게 관리하게 하고 정확하게 사용하게 하는것은 우리 부모님들의 책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우리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배돈을 준후 그 세배돈 관리를 어떻게 하게 인도하여야 할지를 주제로 본격적인 토론을 하도록 하지요? 먼저 우교수님부터 말씀주십시오.   우상렬 교수: 교육자의 립장에서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우리민족은 중국에 들어와서 생활한지도 이미 백여년의 력사가 있고 이미 한족들을 포함한 여러민족들과 평등한 공민이라는 것을 헌법으로 보장받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이민의 근성을 완전히는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주요표징의 하나가 바로 우리에게는 아직 한족들의 그런 강렬한 금전의식이 결핍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대부분 한국에 가서 돈벌이 하기 때문에 본지방에서 풋돈을 벌면서 어렵게 장사하는 한족들보다 비교적 돈벌기가 쉽습니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돈에 대한 애착심이 한족들보다 못합니다. 조선족들은 한국에서는 소처럼 벌어서 중국에 와서 정승처럼 쓴다고 하는데 세배돈도 이런 의식의 한가지 표현이라고 봅니다.   현유의 교육체제에서 아이들을 전혀 단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선 우리의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우리가 자랄때의 그 시대의 아이들과 완연히 다릅니다. 그당시 금전사상은 사악한 사상으로 취급되여 시대적 비판을 받았지만 지금은 금전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영웅이요 강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세배돈 사용문제에서도 간섭하고 제한하기 보다 적극적인 방면으로 인도하는 편이 현명한 처사라고 봅니다.     해답 요점: 우상렬 교수님께서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세배돈 관리가 어려운 경우에는 부모가 대신 관리하되 아이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고 또 세배돈 관리가 가능한 자녀에 대해서는 올바른 관리방법과 사용방법을 알려주면서 아이가 세배돈을 정확하게, 올바르게 사용하게 하도록 적극 인도하는 쪽과 구체 교육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주십시오.   현회장님께서는 세배돈에 깃든 민속문화에 대해서 자녀에게 설명해주면서 세배돈을 올바르게 알고 관리하게 하는 면에서 구체적 교육방법을 설명주십시오.     김동선 기자: 그럼 우리의 자녀들은 세배돈을 어떻게 유익하게, 올바르게 써야 할까요?   우상렬 교수: 자녀들의 립장에 서서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공부하는 의무외에 아직 사회적 의무가 없기 때문에 돈으로 자체로 할수있는 일이 그리 많지 못합니다. 학비를 댄다던가, 학용품을 산다던가, 컴퓨터를 산다던가 하는 문제는 모두 어른들의 일이고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깁니다. 아이들은 세배돈을 받아서 대부분 경우에 유희나 오락에 다 써 버립니다. 유희나 오락은 바람에 날려보내는 연기와도 같아서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탕진할수 있습니다. 유희나 오락에 돈을 많이 썼다고 하여도 그 당시 감수가 조금 다를수 있지만 결코 건강지수거나 지력상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오락에 빠져들면 오히려 파괴성 흔적만 남기고 자기이 심신을 해치게 됩니다. 어른들은 세배돈을 준후 이 점을 반드시 아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며 적당히 단속과 인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끝으로 두분께서는 세배돈의 정확한 관리와 사용에서 올바른 방향을 간단하게 짚어주십시오.   우상렬 교수: 이 면에 대한 견해 약 3분 정도 설명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세배돈이 많으면야 유익하게 쓸곳이 많고도 많습지요. 제가 만약 세배돈을 유익하게 쓰는 자문위원회에서 사업한다면 수선 권장하고 싶은것은 여러가지 보험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식을 사는것도 좋은 일입니다. 결국 몽땅 밑졌다 해도 유희장에 처넣는 돈보다는 훨씬 가치있게 소비한 셈입니다. 돈을 버는 시험을 해 봤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명승지 유람이나 외국 유람을 하는것도 아이들의 성장에 아주 유리한 일입니다. 잠시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아이의 이름으로 은행에 저축하였다가 후에 그 어느때에 좋은 착상이 불시에 떠오르면 그 돈을 찾아내와 실시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연연사: 감사합니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1년 2월 21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1년 2월 21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1년 2월 17일
4    (연변방송)2011음력설 특집--1 댓글:  조회:2944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음력설 특집 (첫번째 시간) 방송주제:《우리 민족 전통명절 음력설 세시풍속과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출연연사: 연변주당학교 정보연구실 천만수주임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회장   김동선 기자: 두분, 안녕하십니까? (출연연사: 답례) 반갑습니다. 이제 사흘만 있으면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입니다. 우리 민족의 주요한 전통명절은 력사시기에 따라 부동하지만 음력설은 그 어느 시기에나 최대의 전통명절로 되었다고 하던데요? 현룡수 회장: 이미의 史料고증에 의하면 신라때에 우리민족은 이미 설을 명절로 삼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양, 동지 등 날을 9대 명절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설이 중요한 명절로 자리잡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설의 어원에 대해서 설명해주십시오. 현룡수 회장: 설의 어원에 대하여 많은 설법들이 있는데 완전하게 고증된 설법은 아직 없습니다. 저는 별도로 歲日(혹은 歲一)說을 주장합니다. 설이란 나이를 한살 더 먹는 날이라는 뜻에서 한어문구로 歲日이 됩니다. 그리고 설이 한해의 제일 첫날이라는 뜻에서 한어문구로 歲一가 됩니다. 우리민족 구전문화의 규률에 대비할때 이 날이 오랜후에 날로 되는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근근히 저의 견해이므로 참고로 제공하는 바입니다.   김동선 기자: 력사기재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어느때부터 설을 쇠였다고 기록되여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설날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명절로 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고증할수는 없으나 우선 태음력법(历法)에 기준한다는 점을 감안할때 6세기 좌우에 중국으로부터 태음력법을 받아들인후의 일이라는 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한편 력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수 있습니다. 신라편에는 “신라진덕왕 5년 봄, 정월 초하루날 왕이 조원전에 나앉아 백관들의 신년축하를 받았다. 이때부터 왕에게 새해를 축하하는 의례가 시작되였다.”고 씌여있고, 중국의 '수서(随书)'에는 신라인들은 “매년 정월초하루날 아침에 서로 축하를 올리며 왕은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에게 제사를 올린다”고 기록되여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민족은 신라때부터 이미 설을 명절로 하였다는 것까지는 확실하게 고증이 된 셈이죠.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음력설 명절행사는 섣달 그믐날부터 시작된다고 들었는데요. 섣달 그믐날 행사는 주로 어떤것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전통적으로 섣달그믐날이면 집안팍을 깨끗이 청소하고 묵은 먼지를 말끔히 떨어 냅니다. 그리고 설그림을 사서 붙입니다. 섣달 그믐날부터 주부들이 설날 음식을 만드느라 아주 분주하지요. 바깥어른은 윷돌이나 화투를 가지고 새해 운수를 점쳐 보기도 합니다. 그믐날까지 가족들이 기본상 다 모이게 되므로 집안이 특별히 흥성하여 명절기분을 한결 짙게 합니다. 지금은 온가족이 모여앉아 여러가지 놀이도 놀고 또 을 보면서 각자의 새해 운수를 찾아 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오락이지요.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음력설이면 설날 첫 행사로 세상 뜬 4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차례를 지내던데요. 우리 연변지역에서는 잘 지내지 않지만 조선반도나 기타 다른 지역에서는 다 지내고 있습니다. 차례는 어떻게 지냅니까? 현룡수 회장: 생활형편이 좋아지면서 우리 연변에도 지금 설날에 차례를 지내는 집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병풍이나 만장을 둘러치고 그 앞에 차례상을 진설하고 설음식을 갖추어 놓는데 밥과 국은 놓지 않습니다. 차례에서 제사지낼 조상은 4대 조상까지라고 하지만 지금은 2대조상까지라도, 즉 할아버지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있는 가문이라면 대단한 효자가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조상의 신주는 위패로 할수도 있고 지방으로 할수도 있으며 또 유상으로 할수도 있는데 병풍에 걸어 놓거나 제상우에 세워놓습니다. 그다음 한잔술을 세번 나누어 부어 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나와서 남자는 두번절을 하고 녀자는 네번절을 합니다. 그리고 부부 함께하는 절일 경우에 세번절을 하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사에서 절이라 하면 일률로 세번절을 하는데 우리민족의 제사문화가 장기간 무시 당하면서 아마 한족들의 삼국궁(三鞠躬)을 모방한것 같습니다. 금후부터 다시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차례가 끝나면 자손들이 부모와 조부모에게 세배를 드리던데요. 우리 민족 음렬설 행사가운데서 이 세배 역시 아주 중요한것 같던데요? 현룡수 회장: 차례는 새해를 맞아 돌아가신 조상들을 참배하는 행사이고, 세배는 새해를 맞으며 살아 계시는 분들이 서로 참배하는 행사입니다. 절은 상대방에게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동작으로서 우리민족 행위례절의 기본이므로 반드시 남자절, 녀자절을 구분하여 제대로 익혀 두어야 합니다.   세배시 류의해야 할 사항   - 세배 순서는 부부간 세배를 제일 먼저 해야 합니다.   - 다음에 집안의 제일 어른과 배우자가 자리에 앉으면 그 아래 가족이 모두 함께 동시에 세배합니다.   - 다음으로 집안의 어른 순서대로 세배를 드리는데 제일 아래사람 즉 손군은 절을 가장 많이 해야 하지만 세배돈을 가장 많이 가질수 있으니 역시 우쭐할 일입니다.   - 세배는 병으로 누워있는 어른에게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 명령조인 “앉으세요”, “세배 받으세요”이렇게 말은 하지 않으며 “세배 드리겠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것이 좋습니다.   - 세배를 할때에 절하는 자체가 인사이므로 아무말없이 절을 한후 덕담을 기다리여 어른의 덕담이 끝나면 이에 화답하는 례로 겸손하게 축하의 얘기를 하는것이 좋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설날이 되면 아래 사람들이 웃어른에게 세배를 한후, 웃어른들이 세배돈은 주면서 덕담도 하지 않습니까? 현룡수 회장: 덕담이란 설날 아침에 서로간에 주고 받는 인사의 말, 혹은 축하의 말입니다. 보통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혹은 “새해 부자 되세요!” 아러한 말들입니다. 어른한테 세배를 올리면 어른들은 세배돈을 주면서도 역시 덕담을 하십니다. 보통 하시는 덕담으로는 “새해에는 공부를 더 잘해서 대학갈 차비 해야지!” 혹은 “새해에는 또 키 한뼘은 커야지!” 이러한 말들입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동네의 다른 집 로인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올리는 것을 동네세배라고 합니다. 동네세배는 일반적으로 남성 중청년들이 많이 하는데 "로인님께서 과세에 안녕하십니까?" 하고 절을 올리면 세배를 받는 로인들은 "새해에 장가갈 꿈이나 꿨는가?" 혹은 "새해에 횡재할 꿈이나 꿨는가?"하고 답례합니다. 그리고는 세배를 올린 사람에게 엿가락 혹은 술을 선물합니다. 최근에는 동네 세배풍습이 전화로 서로 인사를 올리는 형식으로 바뀌였으며 가정세배에서도 어린아이들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를 드립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이 되면 우리 민족은 깨끗한 옷이나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 혹은 세장이라고 하던데요. 이 면에서는 어떤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정월 초하루날 아침에는 남녀로소 구분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岁粧)이라고 합니다. 이 설빔은 보통 한번 입어서 대보름날까지 입습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 아침에 먹는 음식은 세찬이라고 하는데요. 주로 어떤 음식들이 들어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해마다 설이 돌아올 무렵이 되면 집집마다 엿을 달인다, 두부를 앗는다, 술을 곤다, 떡을 친다 하며 매우 분망히 보냅니다. 특히 섣달 그믐날이나 설날 아침에 들려오는 찰떡치는 소리는 명절의 기분을 한결 돋구어 주었습니다. 잡거지구에서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음력설용으로 돼지를 한 마리 길러 설무렵에 잡거나 시장에 나가 돼지고기 100킬로그람 정도 사서 설과 보름기간에 먹습니다. 설명절에 먹는 음식은 다채롭고 풍성합니다. 그중 가장 전통적인 음식으로는 떡국입니다. 때문에 상대방에게 자기의 나이를 말할 때 "떡국을 몇그릇 먹었습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변일대를 비롯한 함경도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지방에서는 떡국보다 찰떡을 먹는것이 오랜 습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상도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설날에 만둣국을 먹는데 만두를 따로 만들지 않고 한족식 죠즈를 싸서 고기국에 넣고 끓입니다. 압록강 류역에서 살고있는 평안도사람들은 칡뿌리가루에 쌀가루를 섞어서 만든 칡뿌리 설기떡을 설날의 특별음식으로 먹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고정적이고 통일적인 세찬이 없이 저마다 자기가 즐기는 음식을 먹으며 지난날처럼 많은 공력을 들여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나가 음식을 사들이거나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죠즈를 설날의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 아침에 마시는 술은 세주라고 하던데요. 세주에는 어떤 문화가 포함되여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세찬을 먹을 때 새해를 의미하는 세주라 하여 누구나 다 술 한잔씩은 마입니다. 재래적인 습관에 세주불온(歲酒不穩)이라 하여 설날 아침에는 찬술을 마입니다. 이것은 봄을 맞는 의미에서 생긴 풍습이라 합니다. 지난날 설날에 마시는 술로는 청주, 탁주, 토주 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자기 집에서 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상점에 가서 자기가 마시고 싶은 흰술이나 맥주를 사서 마입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설날 아침에 집집마다 대문에 그림을 붙이는데 이것을 세화라고 하던데요. 세화에는 어떤 문화가 함유되여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일반적으로 복을 부른다는 의미로 장생불사를 의미하는 열가지 길상물의 그림을 붙였습니다. 그 열가지 길상물들로는 태양, 산, 강물, 바위,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백학, 사슴 등입니다. 어른중에 누가 삼재가 들었을 경우에는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여 액막이를 합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호랑이나 매의 그림은 양기가 너무 강하여 삼신을 해한다고 인정되여 정부나 회사의 사무실로 옮겨지고 가정의 액막이에는 처용의 화상이나 부적으로 대체합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이 다가오면 우리 민족은 집집마다 세첩을 붙이는 풍속도 있던데요? 현룡수 회장: 설날에 대문에 써 붙이는 주련이 세첩(歲帖)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설을 춘절이라고 하는데 봄의 명절이라는 뜻입니다. 해마다 설은 립춘을 사이두고 비슷하게 드는데 금년은 립춘 바로 전날이 설이 됩니다. 지금도 설날이면 한족들은 명심하고 문에 세첩을 붙이는데 춘련이라고 하며 한족 가정의 특유한 경관으로 되여 있습니다. 력사자료에는 우리민족도 옛날에는 세첩을 부쳤다고 기재되여 있습니다: 立春大吉, 人間五福來, 開門百福來, 萬事亨通 등 글을 쓴 붉은종이를 대문에 붙이는 풍속이이요. 지금은 세첩을 붙이는 조선족 가정이 많지 못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설명절 민속놀이에는 여러 가지가 있던데요. 주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설명절의 전통적인 민속 놀이로는 성주풀이가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놀이패를 조직하여 단장을 괴상하게 하고는 징, 꽹과리, 북과 장단 등을 치면서 동네의 잘사는 집을 돌아 다니며 광대춤도 추고 지신 밟기도 하면서 새해의 풍농과 안택을 기원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면 축복을 받은 집에서는 쌀과 엿가락같은 것으로 사례하였습니다. 성주신은 우리민족의 집터를 관리하는 신으로서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민요 가 바로 이 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노래가락입니다.    윷놀이 윷놀이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명절놀이입니다. 둥근 나무토막이나 열콩 따위로 한쪽을 깎아서 네쪽으로 만들고 이것을 던져서 엎어지고 잦혀지는 모양을 셈하여 말을 쓰는 놀이입니다. 보통 많이 사용하는 장작윷은 길이 15~20센티미터, 직경3~5센티미터 정도의 륜목(轮木) 두개를 각각 반으로 쪼개여 만듭니다. 놀이방법은 윷판을 놓고 쌍방이 각각 윷을 던져 나온 결과대로 말 네개를 진행시켜서 최종점을 통과하는 편이 이기는것입니다. 과거에는 윷놀이를 통해 농사의 흉풍이나 전쟁의 승패를 점치기도 하였습니다.   고누놀이 별 다른 놀이감이 없던 시절,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익히는 놀이였습니다. 제 말이 나란히 셋이 되면 상대것을 하나씩 떼여내는 놀이입니다.단 들어낸 곳엔 다시 말을 놓을수 없습니다.이렇게 해서 말로 다 채워지면 빈곳으로 움직여 말을 셋으로 정렬시키면서 다시 상대것을 따먹는 놀이입니다.   제기차기 남녀로소 누구나 쉽게 할수있는 놀이입니다.발을 한번씩 딛고 차는 ‘맨제기’,제기를 차는 발을 바닥에 딛지 않고 계속 차는 ‘헐렁이’,두발을 바꿔가며 차는 ‘쌍발차기’가 있습니다.   널뛰기 조선조 량반사회에서는 녀자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해 왔으므로 널뛰기는 순전히 서민계층 녀자들의 놀이로서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널 량끝에 한사람씩 올라와서 줄을 잡고 천천히 뛰기 시작합니다. 이때 널 가운데 한사람이 앉아 널을 널 받침우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가장 높이 뛴 사람이 이기거나 상대편을 떨어뜨리면 이기게 됩니다.   팽이치기 팽이에는 아래쪽은 뾰족하게 깎고 우는 평평하게 깎아 만든 보통 팽이와 아래우 모두 뾰족하게 깎아 만든 불팽이가 있습니다. 얼음판이나 땅바닥에 손으로 팽이를 돌린 다음 가는 막대기에 헝겊 또는 삼실을 달아 만든 팽이채로 쳐서 세게 돌리는데 여러 아이들이 저마다 팽이를 힘껏 친후 일제히 팽이채를 거두고 가장 오래 도는 팽이를 장원으로 뽑습니다.   이외에도 연띄우기, 쥐불놀이, 농악놀이 등 여러가지 놀이가 있었습니다.   김동선 기자: 설날 저녁무렵에 우리 민족은 대문이나 출입문에 채를 걸어놓는 등 행사가 있던데요. 이 행사들은 주로 어떻게 합니까? 현룡수 회장: 설날 아침 또는 그믐날 밤에 조리를 벽에 걸어두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조리라고 합니다. 이는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서 취한다는 뜻에서 비롯된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설날밤이 되면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내려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고는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만일 누가 신을 잃어버리면 그 신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다고 합니다. 이날 밤에는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우에 체를 걸어두고 마루우의 신을 모두 집안으로 들여 놓습니다. 이것은 야광귀가 셈을 셀때 두개밖에는 셀줄 모르므로 체의 구멍을 세여보면서 하나둘, 하나둘 하노라면 시간이 흘러가 새벽닭이 울어 신도 신어보지 못하고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께서는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세시풍속의 우월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십니까?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세시풍속이란 길고긴 세월속에서 형성된 풍속인 만큼 우리 민족 전통문화의 화석이라고 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명절인 음력설 세시풍속을 통하여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무한한 희망속에서 살아 왔으며 일년대계의 첫시작을 특별히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현재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도 과거에 비해 그 의미가 크게 부여되지 않고 있을뿐만 아니라 또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우리의 전통명절이 점점 색바래져 가는것 같아 참으로 가습아픕니다. 두분께서는 이 면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지금은 옛날의 자유농경시대가 아니라 고도로 긴장화 된 시장경제시대이기 때문에 시대에 맞지않는 많은 세시풍속들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잊혀졌던 세시풍속들을 다시 찾아내여 거론하는것은 옛시대를 미련해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뿌리를 잊지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표성적인 세세풍속에 대하여 정부로부터 조치를 대여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께서는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전통문화가 점점 색바래져 가는 문제의 원인을 어떤 면에서 찾아보고 계십니까?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물론 가장큰 원인은 시대의 변화겠지요. 시대가 변하니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고 인품도 변하고 습관도 변합니다. 그다음 정부의 관심여부에도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백성들은 자연 민간인이 아니라 일정한 정부체제속의 군체이기 때문에 정부의 인도가 특히 중요한 인소로 되여 있습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께서는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음력설 세시풍속에 깃든 문화의 우수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고 또 어떤 방법으로 우리 민족 전통문화를 전승하고 발전장대시켜 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대표성적인 세시풍속에 대하여 정부에서 선택성 있게 발굴하고 보호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세시풍속들이 특별히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 그런 세시풍속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특색을 살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색을 잃으면 민족을 잃게 됩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 최대의 전통명절 음력설 문화를 전승, 발전시키려면 정부 각 해당부문과 민간단체, 사회 구성원들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각 부문과 각 단체, 사회구성원들은 응당 어떤 노력을 해야 할가요? 천만수 주임: 현룡수 회장: 설날 휴가가 되면 전면 휴식할것이 아니라 유관 부문에서는 조직적으로 대표성적인 세시풍속들을 표현시키여 우리민족 민속문화를 더욱 다채롭게 꾸미여 가는것이 바람직 하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두분,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연연사: 감사합니다.   ※ 주해: 여기 구체 방송내용과 발언시간을 나름대로 정해두었습니다. 꼭 이대로 하시라는것은 아닙니다. 보충할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고 약 33~34분정도로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코 너 명: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일시: 2011년 1월 31일 월요일 아침 7시 20분 도착시간: 2011년 1월 31일 월요일 아침 6시 50분까지 도착지점: 연변병원 동대문 동쪽, 연변라디오TV방송국 대문 련 계 인: 김동선 부장 (주임) 련계전화: 251-6545 (사무실) 139-0448-0109 (휴대폰) 이 메 일: dxkim0109@hanmail.net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부 2011년 1월 27일
3    (아리랑방송)2010조선족전통장례의식에 대하여 댓글:  조회:2422  추천:0  2012-07-16
프로그램명 > 도착시간 10월 27일 수요일 아침 7:40분 시방송국 3층 방송날자 2010년 10월27일 수요일 아침 8:00~8:40 주 제 조선족전통장례의식에 대하여 래 빈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성원 책임편집 황경옥 사 회 자 림영권, 서윤옥 심 열 태 장 총 편 편집부주임 담당 PD 김명신 김정길 김건호 강순선 ---프로그램 节目头--- 남: 조선족들의 많은 풍속습관, 명절등이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점점 풍요로워지고 조선족들만의 특색이 있는 문화유산으로 이어져나가고 있습니다. 녀: 하지만 유독 조선족장례의식에 대한 관념만이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교체하면서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남: 아침부터 부득불 장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니 불쾌하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조선족전통례의문화를 계승시켜 나가려면 모든 조선족들의 동참과 관심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는 생각이 듭니다. 녀: 그리하여 저희 >프로에서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주 회장님을 생방송실에 모시고 점점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살아지고 있는 조선족전통장례의식에 대하여 알아볼수 있는 좋은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을 기대합니다. ---프로그램 로고송---- ********************************************************************* 물음: 1. 지금 조선족전통장례의식을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련다고 들었는데요. 준비상황은 어떠합니까? *조선족 전통장례는 지난해 전국적 제2차 비물질문화유산 항목 등록시에 이미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 되였습니다. 이제 명년에 전국적 제3차 비물질 문화유산 항목 등록공작이 있게 되는데 우리는 이 기회에 조선족 전통장례를 나라급으로 승급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2. 현시대 조선족들이 장례에 대한 의식은 어떠합니까? *한개 민족으로서 자기의 장례문화가 없다는 것은 장례보다 더욱 슬픈 일입니다. 자기의 장례문화가 없는 민족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민족이 아니면 한창 퇴화되는 민족입니다. 나라의 “빈장관리 조례”의 원칙하에서 장례를 자기민족식으로 치르려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민족자치의 기본권익입니다. 지금의 걸음바쁜 경제시대에서도 절대 다수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장례를 될수록 자기민족식으로 치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기민족의 전통장례에 대한 견해가 다르고 사회적으로 아직 장례복무체제가 완비하지 못하며 우리식 장례시설이 부족한 등등의 원인으로 하여 지금 우리민족 장례의 기본권익은 아직 완미한 보장을 받지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3. 장례에 대하여 연구한다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것 같은데요. 어떤 계기로 이 방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되였습니까? *저는 원래 연변성원기술개발유한회사를 운영하면서 투자를 유치하여 국가 특허항목들을 개발하는 사업을 하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민족의 전통장례 문화령역이 완전 무정부 상태라는것을 놀랍게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무작정 뛰여 들었죠. 이제 60을 다 먹고 무슨 재수고 운수고 상관이 없습니다. 죽기전에 민족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유익한 일을 할수 있다면 그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4.지금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어떤 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민족이 자기식으로 장례를 치르려면 주관상에서 객관상에서 많은 제한들을 받고 있습니다. 주관상에서는 장례의 민족적, 사회적 의의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장례를 될수록 간단하게, 될수록 빠르게 치르려는 관념이 앞서게 됩니다. 객관상에서는 사회적으로 장례복무체제가 아직 완비하지 못하며 우리식 장례시설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조선족들이 치르는 장례는 문화적 함의가 사라지고 사무적인 의의만 남았습니다. 5. 어르신들은 조선족전통장례의식에 대하여 알겠지만 특히 현시대의 젊은이들은 이에 대한 관심이 적을듯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조선족 전통장례에 대하여 알고 계시는 분이 물론 많지 못합니다. 그런데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장례의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의의가 거의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현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장례는 단지 사무적인 행사일 뿐입니다. 현시대의 젊은이들한테 전통적인 관념을 접수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전수의 방법보다는 사회적으로 전통문화 봉사체제를 건립하고 장기적으로 견지하는것이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6. 비록 연변지구에 같이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지만 지방마다 장례를 치르는 방법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어떠한지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였지만 지금은 연변지역에서 주류적으로 화장을 실시하기 때문에 그 차별을 가려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조선족 전통장례를 보호함에 있어서 지난해 길림성 정부에서 공포한 무형문화재 “조선족 전통장례”의 범례를 기준으로 합니다. 7. 예전부터 조선족례의에 대하여 연구해온 분들도 많았을것 같은데요. 그들의 연구재료가 많은 도움이 되였을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난해 조선족 전통장례를 무형문화재로 신청할때 선배님들의 연구성과들이 물론 큰 도움이 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족 전통장례를 보호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어떻게 현실에 맞게 실시하는냐? 하는 문제입니다. 학자들은 력사적, 문화적 차원에서 민속을 연구하였다면 이 민속을 어떻게 현실에 결합시켜 보호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과제입니다. 8. 조선족전통장례의식을 이어 받자고 하여 예전의 고정된 장례의식을 그대로 옮겨 받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의 현시대에 알맞게 하기 위하여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가 지금 보호하는 것은 조선족 전통장례의 전통의식인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 부분입니다. 조선족 전통장례문화의 핵심은 효도사상인데 당전의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효도사상은 아주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의 공작은 시종 이 효도사상을 발양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9. 조금은 슬픈 문화라고도 할수 있는데요. 이에 대하여 연구, 보급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들도 많았을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중국에는 홍백희사라는 설법이 있는데 결혼하는것을 홍희사라고 하고 사람이 죽은것을 백희사라고 합니다. 결혼하는것을 희사라고 하는것은 누구나 모두 찬성하는 상식이지만 사람이 죽은것도 희사라고 하는것은 사람들이 좀 접수하기 어려워 합니다. 그러나 변증법적으로 문제를 본다면 사람들이 한편으로 죽는것이 확실히 일종의 희사입니다. 세상은 마치도 공공뻐스와 같이 승객들이 부단히 바뀝니다. 먼저 뻐스에 오른분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림으로써 또 다른분들이 오를수 있게 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죠. 먼저 이 세상에 오신분들이 일정하게 생존하신후에 기꺼히 사망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여 생존할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옛날의 공자나 진시황같은 분들이 오늘까지도 장생불로약을 먹으면서 죽지않고 모두 살아 계신다면 이 지구는 지금 발을 옮겨디딜 자리도 없을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례문화는 혼례문화와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틀리는 관념에 의하여 사회상에서 장례문화는 확실히 기시당하고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슬픈일입니다. 10. 어떤 문화든 보급하려면 자신으로만의 연구보다는 사람들이 받아들일수 있어야만 늘리 보급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장례의식에 대한 생각을 더욱 잘 보급시키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우리는 연구회 산하에 “백화상조(장례)복무중심”을 설립하고 무릇 조선족 장례와 상관되는 모든 행사에서 합리한 가격으로 정성껐 봉사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조선족 유가족에서 유사시 우리 복무열선에 전화 한통만 걸면 그가문의 전반 장례행사는 우리민족식으로 원만하게 OK입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외지의 장례손님들도 우리민족의 장례범절을 료해하게 됩니다. 이 봉사체제를 장기적으로 견지하여 나간다면 우리의 장례문화도 장기적으로 보호받게 됩니다. 11. 지금의 조선족들은 자식들이 고향을 떠나 돈벌이를 하면서 로인들이 혼자 계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에 대하여서는 어떤 조치가 없으신지요? 가속에서 위탁만 하신다면 우리는 가속에서 요구하는 차원에 따라 전반 장례를 도맡아 치러드립니다. 그리고 전반 장례과정을 비디오 촬영하여 가속에게 드립니다. 12. 조선족장례의식을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는데 대하여 정부나 각 단위에서의 지지정황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주로 세가지 방면으로 공작을 진행합니다. 첫째는 조선족 전통장례문화에 대여 발굴하고 연구하며, 둘째는 정부나 사회의 유관부문에 합리한 건의를 제출하며, 세째로 전통장례에 대한 지도와 봉사를 진행합니다. 우리 연구회의 주관부문이 바로 연변주 문화국인데 우리들은 각 방면에서 상당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연변주 민정국, 연변주 위생국, 그리고 연길시 위생계통에서도 우리들의 공작에 대하여 많은 협조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길시 문체국과 연길시의 여러 가도 판사처의 적극적인 협조하에 우리는 이미 세차례 강연을 조직하였으며 또 앞으로 계속 조직할것입니다. 특히 연변방송국과 연길아리랑방송의 지지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계속 열심히 공작하여 유관 각 부문의 지지와 협조를 쟁취할것입니다. 13. 많은 분야의 업종을 선택할수 있는데도 마다하고 누구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업종에서 일을 하시면서 마음이 무거울때도 많았을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한사람이 사회를 위하여 할수있는 역활은 극히 제한되여 있습니다, 저희들의 노력에 의하여 우리민족의 한부분 전통문화가 성급 무형문화재 자격을 가지게 되였다는것은 아직 만족할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안위를 느끼게 됩니다. 계속 노력하여 국가급 자격까지 따내야 합니다. 14. 조선족의 전통례의문화를 더욱 잘 이끌어 나가기 위하여 앞으로의 어떤 계획과 작은 소망이 있으시다면 말씀주시렵니까? 지금 많은분들은 민족특색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착각합니다. 나라에서는 소수민족 문화특색을 보호하게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내 놓았지만 우리들이 도리여 자기 문화특색의 보귀함을 모르고 하나, 둘 꺼리낌없이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의 불행이 아닐수 없습니다. 조선족 전통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한 단체의 힘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지지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정부나 사회의 주요 직능부문에서 공작하시는 분들중에 우리민족의 운명을 관심하시는 분들이 좀 많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결속어: 시대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모든것을 전통적인것보다는 편리한것을 좋아하지만 조상들이 후세대에게 남겨준 문화는 버리지 말고 이어받아 나가야 하지 않는가고 생각됩니다. 이 시간 책임편성에 황경옥이였습니다.
2    (연변방송)2010추석특집 : 우리민족 장례문화-2 댓글:  조회:2559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추석특집 생방송: 우리민족 장례문화-2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회장 발언부분)   1,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져 가는 현상 (2분) 첫번째: 지금 우리민족의 많은 젊은이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장례개념은 별로 없고 한시 급히 화장하여 시름을 놓으려 하며 이듬해 부모의 제사날이 돌아와도 자식으로서 반드시 부모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도리를 모릅니다. 두번째: 우리민족은 성씨앞에는 모두 본이 붙습니다. 례를 들면 “김해김씨요”, “전주리씨요” 할때의 “김해”요 “전주”요 하는 그 부분들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은 성씨보다 본을 더욱 중시하여 왔습니다. 중국의 호적부에서는 성씨만 다루고 본은 다루지 않지만 조선족 성씨에서는 본이 있으므로 하여 같은 성씨의 여러가지 혈통을 구분할수 있습니다. 조선족 성씨의 본은 한족 성씨제도보다 우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망자의 명정을 쓰면서 보노라니 지금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기 성씨의 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성씨의 본을 모른다는것은 자기 가문의 근본을 잊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며 자기의 민족특성을 버리기 시작한 첫번째 행동입니다. 세번째: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장례에서는 상복차림은 근본 찾아볼수 없고 상주도 일반 조문객들과 마찬가지로 겨우 상장이나 두르는 정도이고 많은 경우에는 심지어 상장도 두르지 않습니다. 네번째: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초상이 나면 유체를 인차 염습한후 이불로 덮어 놓고 병풍이나 만장으로 가리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통일식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2,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지는 원인 (3분)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변혁기에 접어들면 필연코 많은 전통 문화들이 충격을 받고 매몰되게 됩니다. 5.4운동에서는 공자의 사상이 충격을 받았고 문화혁명 동란 시기에는 “전통”이란 수사가 붙은 모든 문화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그후의 개혁개방, 역시 사회의 대변혁이라고 할수 있는데 사상위주의 사회가 경제위주의 사회로 바뀌여지면서 또 많은 전통 문화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진 전통문화를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회복시킬수 있습니다.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는 전통문화들은 다시 발굴하여 찌꺼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하여 회복시키고 보호하고 발양시킴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위하여 더욱 훌륭히 복무하게 할수 있습니다. .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도 우리의 혼례문화나 회갑문화와 마찬가지로 회복될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당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상층계층과 지식계층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하는 사람조차 없게 되였으며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서, 4대 장의관중의 그 어느 한곳에서도 조선족 유가족들을 대상하여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한곳이 없습니다.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십년이 지난후 우리민족은 다시금 우리의 전통장례문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의식하게 되였으며 지난해에는 조선족 전통장례가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3, 우리민족 장례문화에서 민족특색이 사라진 위해성(3분) 민족이라는 것은 인류의 장기간의 력사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그리고 공동한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심리소질을 소유한 온정된 공동체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인구 류동이 가속화 되면서 지금 와서는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이라는 조건은 많이 파괴되기 때문에 이 조건만을 가지고 한개 민족을 평가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한 민족의 특색이라는것은 주요하게 공동한 문화, 그리고 이 문화에서 표현되는 공동한 민족습관, 공동한 민족심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시기는 민족의 대 융합을 촉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각 민족의 발전을 촉진하는 시기입니다. 그 어느때 가서는 일부 비슷한 민족들끼리 융합될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모두가 중국 경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모두가 중국 공민의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개 민족이 자기의 존재를 나라에 선전하고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이 주요하게는 문화입니다. 한 민족이 자기의 문화, 즉 자기이 특색을 잃는다면 다른 민족들과 단결하고 합작하고 경쟁할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는 우리민족의 기본문화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인데 우리민족이 첫돐생일문화, 결혼문화, 회갑문화, 등에서 이미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상제문화에서 자기의 체계를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민족이 상제방면에서 자기의 확고한 특색적인 문화체계를 수립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족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됩니다.   4,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 (2분)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할 필요성은 두개 방면으로 보아낼수 있습니다, 한개방면은 민족의 발전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 특색을 부여하여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민족의 특색을 보호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증강하며 민족의 동일성을 가강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다른 한 방면으로 민족의 소질제고의 수요로 부터 우리민족의 장례를 우리식으로 치르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효도문화를 발양하여 우리민족의 사회를 화목하고 질서있는 사회로 건설하는데 적극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5, 우리민족 장례에 민족특색을 부여하려면 우선적인 과제 (3분) 당전의 우선적인 과제로는 우리민족식의 장례시설을 설치하고 우리민족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습니다.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에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면 조선족 유가족에서 조선족 장례규범에 대하여 잘 모른다 하여도 자기 민족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는 의향만 있으면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을 걸어 모든 장례행사가 우리 민족식으로 OK가 될수 있습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내부건설을 가강하면서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백화상조 (장례) 복무중심을 설립하였는데 정부와 사회 각 계층의 다함없는 지지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6, 조선족 장례문화를 보호하려면 어떤 노력이? (3분) 작년 6월에 조선족 전통장례는 이미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선족 전통장례문화의 적극적인 의의에 대하여 충분히 긍정한것이며 반드시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발굴하고 보호하고 발양해야할 필요성을 제시하였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조선족 전통장례의 보호단위로 지정 되였는데 지금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발굴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업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보호하는 사업은 전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우리 연구회의 노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반드시 정부의 유관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사회의 상관 계통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전사회적인 참여가 실현되여야만 기정한 목적에 도달할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연구회는 사회의 상관 계통, 특히는 의료계통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상당히 힘들게 공작하고 있습니다. 의료계통의 많은 분들, 특히는 주요 책임자들이 우리의 공작에 대하여 리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공작은 더욱 힘들게 되며 우리 공작의 진전은 더욱 꿈뜨게 됩니다. 나라에 아직 정식으로 무형문화재 보호법이 나오지 못한 조건하에서 우리들의 공작은 부득불 많은 길을 에돌수 밖에 없습니다.   7, 우리민족의 현실적인 장례문화를 구축하려면 어떤 노력이? (3분) 우리 연구회는 이미 내부적로 “조선족 장례와 제사 실용편람”을 정리해 냈습니다. 우리의 장례복무 중심에서는 지금 이 실용편람에 근거하여 복무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충분한 실천을 통하여 고칠것은 고치고 보충할것은 보충하면서 연변의 민속연구 교수님들과 함께 “조선족 장례와 제사 규범”을 편찬해 낼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조선족의 상제문화도 자기의 체계를 확고하게 수립하게 되며 우리민족의 문화재부가 더욱 묵직하게, 더욱 찬란하게, 더욱 완미하게 될것입니다.    2010-09-26
1    (연변방송)2010추석특집 : 우리민족 장례문화-1 댓글:  조회:3400  추천:0  2012-07-16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방송 추석특집 생방송: 우리민족 장례문화-1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회장 발언부분) 1, 조선족 장례문화의 현존 문제점: (3분) 현재 우리 중국의 조선족, 특히는 연변 조선족 장례문화의 현 상황을 살펴본다면 한마디로 두리뭉실하게 되여 있습니다. 이 두리뭉실한 장례를 문화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저 최근의 류행이라고 말할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나라에서는 “빈장관리 조례”를 내오고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화장제도를 실시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후손만대에 복을 마련하고 덕을 쌓는 훌륭한 제도입니다. 우리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가 오늘처럼 이렇게 두리뭉실하게 된것은 결코 화장제도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는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이미 제모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엄중히 훼손되여 있었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라에서 개혁개방 동풍이 불면서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도 우리의 혼례문화나 회갑문화와 마찬가지로 회복될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상층계층과 지식계층에서는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하는 사람조차 없게 되였으며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로서의 연변에서, 4대 장의관중의 그 어느 한곳에서도 조선족 유가족들을 대상하여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한곳이 없습니다. 부모의 장례를 자기 민족식으로 치르는 것은 자기민족의 얼과 존엄을 지키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민족이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이점을 알지못하고 있습니다.   2, 우리민족 전통 장례문화의 뿌리 (3분) 조선족 전통장례문화의 산생과정과 발전사를 살펴 본다면, 그의 본질은 기실 중국의 유교사상에 기초하여 조선족의 전통 습속과 리념을 표현시킨 유기적인 결합문화 라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15세기초,  리조 조선이 성립된후 태종12년(기원1412년)에 조정에서는 전국에 령을 내려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모두 중국 유교의 례의서 《주자가례》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성종16년(기원1485년)에 《경국대전》(经国大典)이 출범하면서 리조의 조정과 민간에서는 정식으로 상제례의를 포함한 일체 행위규범과 례의활동에서 모두 중국 유교의 례법에 기준하게 되였습니다. 유교의 상제례법을 실행하여 몇백년을 내려 오면서 거기에 또 조선 민족의 많은 우량한 전통습속과 리념을 보충해 넣으면서 점차 조선민족 자체의 독특한 상제문화가 형성 되였습니다. 중국 조선족 선민들 대부분은 1850년 이후에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였는데, 100여년 력사의 연혁을 거쳐 점차 당대 중국의 한갈래 소수민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조선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 상제제도를 실행하였는데, 마을마다 향두월(香徒月)이요 상여계(丧舆契) 같은 민간 상조 조직들이 있었으며,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이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문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전해지도록 보증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시작된후 1967년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는 운동이 터지면서 연변각지의 상여는 거의 같은 시간에 당지의 학교마당에 끌려나와 두들겨 부서지고 모조리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후에는 간단한 운구용 소수레로 상여를 대체하고, 장례제도를 최저한도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미신색채를 띤 장례 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습니다. 그후부터 당시의 락후한 경제조건하에서 각지의 조선족 주민들은 점차 간단하게 치르는 이런 장례제도에 습관되였으며, 조선족 전통 상제문화는 점차 빛을 잃게 되였습니다.   3,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 (3분)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기본내용에는 초상, 안장, 제사, 이렇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초상이란 사람이 사망하여서부터 안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며, 안장이란 사망한 유체를 매장, 혹은 화장하는 과정을 말하며, 제사란 유체를 안장한후에 진행되는 일련의 의식들과 기념행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관혼상제 문화에서 상례문화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가례 지침서인 “四禮便覽”은 모두 8권으로 되여 있는데 상례부분만으로 5권을 차지합니다. 우리민족의 선인들은 우리민족의 전통습속과 전통리념을 정리하여 상례에서 집중적으로 표현시켰는데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례문화는 우리민족의 대표성 문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민족 상제문화의 핵심은 효도사상입니다. 효도사상은 유교의 대표성 사상으로서 천백년래 사회질서와 가정관계를 유지시킨 기본적인 도덕 준칙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孝为百行首” 라고까지 하였는데 그 뜻인즉 효도가 모든 행위중에서 첫번째로 지켜야 할 준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 상제문화에서는 효도사상이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조심스럽게 술을 붓고 무릎꿇고 절을 하는 등의 동작은 바로 효도의 대표성적인 표현동작입니다. 우리의 선인들은 바로 장례를 통하여 효도사상을 전수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여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이 효심이 부족하고 민족의식이 담박하게 된것이 어찌보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가 쇠퇴된것과 관련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효도라는 “孝”자는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를 업고 있는 형태로 이루어 졌는데 그 뜻인즉 부모를 공경하고 잘 받들어 모시라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은 평소에 자기 인생의 개척을 위하여 분투하면서 부모에게 많은 미안한 일들을 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에서 일정하게 성공을 거둔후 다시 부모를 생각하게 될때에는 부모는 어느덧 늙어서 사망하게 되거나 언녕 사망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례와 제사는 부모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부모한테 전달하고 반성하며 용서를 비는 역활을 합니다. 효도사상은 동방사상의 정수이며 우리민족의 보귀한 정신 유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 전통 장례문화를 보호하고 발양시켜려는 기본 목적이 바로 효도사상을 보호하고 발양시키려는 것입니다.   4, 현재 우리들이 지킬수 있는 조선족 전통장례 (3분) 병원에서 사망하여 화장하는 경우를 기준하여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친인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염습을 해야 하는데 이 절차는 될수록 전문인원이 하도록 하십시요. 우리 장례 복무열선에 련락하면 됩니다. 2, 염습이 끝나고 령구를 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영결례를 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 세번 허리굽혀 인사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객실, 혹은 례당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습니다. 조문객이 와서는 먼저 그 령좌앞에 가서 술을 붓고 세번 인사합니다. 상주는 하루밤 령좌를 지키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날 장의관에 가서 고별식을 할때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 (主妇)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기들의 특수신분을 나타냅니다. 유가속 기타의 녀성들은 머리에 몽상을 달고 남성들은 팔에 상장을 두르는데 사망자가 남성일 경우 왼쪽에 달고, 사망자가 녀성일 경우 오른쪽에 답니다. 장례에 손님으로 참석할때 녀성분들은 될수록 꽃무늬 없는 단색옷을 입고 남성분들은 될수록 검은색 양복을 입습니다.  5, 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 안신제에서는 제사상 차리고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상주와 주부,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 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기름냄새를 피우는데 기름떡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운 다음 제단의 제물들을 치우고 기름떡만 올려놓고 술도 붓지말고 상주와 주부가 절을 세번하면 됩니다. 제사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불길하므로 모았다가 지정한 소각로에 가져다 태웁니다.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보관처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인사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고혼의 안정을 바라는 의미에서 제사때마다 번번히 골회함을 움직일 필요가 없으며, 꼭 움직일 경우에는 먼저 세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움직이는것이 례의입니다.   5, 염습의 기본 절차 (3분) 조선족 장례 염습(연변에서는 매시라고도 함)은 현재까지 보유되고 있는 조선족 장례 습속에서 가장 중요한 습속의 하나입니다. 전통적으로 염습은 동네의 덕망이 높은 분이 와서 하게 되였는데 가속에서도 협조할수 있습니다. 현재 병원에서 염습할시에는 극히 제한된 시간내에 질량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염습 실시 인원이 반드시 두사람 이상이여야 하며 먼저 소독을 하고 고인한테 한번 허리굽혀 인사한 다음 엽습을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에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먼저 고인의 시호와 성명을 부르고 “복-, 복-, 복-”하고 웨침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령침에 넣어 고인의 머리밑에 베여 줍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아래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그다음 아래벌을 세벌 입히고 제쪽씩 발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버선을 신긴다음 그 종이봉지를 버선목에 넣어 줍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고름은 매지 않으며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제쪽씩 손톱을 깎아서 종이봉지에 담아 접었다가 악수를 끼우고 그 안에 넣어 줍니다. 그리고는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주는데 녀성의 경우에는 오른쪽에, 남성의 경우에는 왼쪽에 감습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더운물로 깨끗이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줍니다.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주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하고 외침니다. 전통적으로는 구슬이나 은전같은 것도 넣었댔으나 지금은 넣지 않습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줍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입니다. 6, 小殓: 전폭의 염포로 유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으며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밑에 지요(地褥)을 깔고 유체우에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汉字)로 씁니다. 남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學生”으로 쓰는데(시호만은 반드시 번체자 그대로 씁니다.) 례를 들어 남성 사망자가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위의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녀성 사망자 경우 시호를 일반적으로 “孺人”이라고 씁니다. 례를 들어 녀성 사망자의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그의 명정에는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쓰며 다른 본관에 다른 성씨이면 이 격식에 맞추어 바꾸어 써 넣으면 됩니다. 써 놓은 명정을 고인의 유체우에 덮습니다. 8, 永決礼: 염습이 기본상 끝나면 령구차가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가속들을 모두 불러 고인의 유체옆에 모이게 하고는 함께 세번 허리굽혀 영결례를 시킵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은 성시에서 일률로 화장을 하기 때문에 관을 쓰지 않으므로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주머니를 보기좋게 여며 놓아야 하며 담가에 담고 반드시 머리로 부터 바깥으로 나가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6, 현재 조선족 장례에서 존재하는 문제점 (3분) 추도식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할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류행되는 조선족들의 장례에 대하여 몇가지 지적할것이 있습니다. 1, 부모상의 경우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킨후 상주는 부모님의 마지막 하루밤만은 곁에서 지켜드리면서 夕奠、夜奠、朝奠만은 정성들여 올리는것이 자식된 기본의 도리입니다. 이 방면에서 한족분들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는데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2, 장례의 매개 절차마다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 인사를 올리는 것이 우리의 례의입니다. 염습이 끝나면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고, 랭동상에 령구를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하며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고서도 세번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고인한테 매번 인사를 올릴때마다 당신의 령혼은 한층 깨끗하게 되며 숭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민족의 전통 장례에서 유가속들은 모두 상복 차림을 하였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우량한 전통입니다. 지금과 같은 번개식 장례에서 상복제도를 전부 회복한다는것은 어려움이 많겠지만 앞으로의 조선족식 장례에서는 그래도 상주는 머리에 상모를 쓰고, 주부는 머리에 베천오리를 동이여 자신들의 특수신분을 똑똑히 나타내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방면으로 조건을 창조할것입니다. 4, 아직까지 우리 연변에는 우리 조선족식의 고별청이 없는것이 큰 유감입니다. 우리민족의 전통장례에서는 친인의 유체를 남들한테 보이는것을 제일 꺼려 왔는데 지금 우리는 통일식 고별청에서 장례를 치르다 나니 어쩔수없이 친인의 유체를 많은 사람들 앞에 전람시키게 됩니다. 우리 연구회는 이미 연길장의관에 조선족식 고별청을 설치할데 관한 건의를 주 민정국 유관부문에 제출하였는데 주 민정국에서는 이미 문건을 내여 우리의 건의를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의가 하루속히 현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5, 사회적 장례복무 체제를 건립하고 건전히 해야 합니다. 장례복무 체제를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 가서도 우리민족의 장례문화는 장기적으로 보전될수 있게 됩니다. 지금 가문에서 상사가 나면 가속에서는 몹시 당황하고 조급하게 됩니다. 지금은 시장경제 시대인데 계속 이렇게 어렵게 장례를 치룰순 없습니다. 유가속에서 장례복무 기구에 전화 한통만 걸면 모든 장례 행사가 OK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백화상조 장례복무 중심을 설립하였는데 합리한 수금 표준으로 정통적이고 높은 질량의 전면복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7, 현재 보유되고 있는 전통제사 (2분) 제사란 원래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칭송하고 근본을 되새기며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의식으로서 자손 된 도리와 살아있는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지내 왔으며 근본을 잊고 조상의 제사를 소홀히 하면 가문이 망한다고 철칙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전통제사는 특별히 엄격하였으며 우선 목욕제계를 하고 냄새가 나거나 자극성 있는 음식을 삼가 하면서 제사를 위하여 정성것 준비하였습니다. 제사는 크게 1,기제(忌祭); 2,시제(時祭); 3,묘제(墓祭). 이렇게 세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그 구체적인 분류에는 또 많은 종류들이 포함되여 있었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연변지구에서 보유되고 있는 제사 행사들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있습니다: 기제(忌祭)에 소상(돐제); 대상(삼년제)이 남았고, 시제(時祭)에 청명제; 추석제; 환갑제가 있으며, 묘제(墓祭)에 면례; 합장; 비석제, 등이 있습니다.   8, 제사상 차리고 제사 지내는 법 (3분)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먼저 제사상을 차리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에도 많은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많은 번쇄한 규칙들을 일일히 따를 필요는 없지만 총체적인 분포 규칙에 대하여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기왕에 제사상 차릴 바에는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정성을 넣어 제물을 차리며 제물 종류가 합리하고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게 정연하게 차립니다. 제사상은 보통 장방형으로 된 네모상에 차립니다. a, 상우에 먼저 흰 종이를 한벌 펴 놓습니다. b, 령좌 안쪽 중간에 지방과 유상을 놓습니다. c, 령좌 량옆에 그릇을 놓고 초불을 달아 각기 그 안에 세워 놓습니다. d, 유상 앞 첫줄에는 각기 메밥, 국, 수저, 술잔, 등을 놓습니다. e, 중간에는 고기류, 생선류와 기타 반찬들을 놓습니다. f, 바깥줄에 과일류, 과자류와 기타 부식품들을 놓습니다. g, 령좌 아래에 술병과 퇴주 그릇을 놓습니다. 제물의 개수는 짝을 지우지 않고 기수로 합니다. 제사 종류에 따라 이 기본방법을 참조하면서 적당하게 조절하여 차리면 됩니다. 첫돐제사나 삼년제사와 같이 집에서 올리는 제사는 출입문을 조금 열어놓고 그 제사와 상관되는 축문을 읽은 다음 효자(상주가 제사에서는 효자)와 주부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붓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가속(상제), 친속(복인), 사돈, 단위조문객, 친구조문객, 기타조문객, 이런 순서로 합니다. 마지막에 술 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청면제나 추석제와 같이 산에 가서 올리는 제사는 먼저 후토를 찾아 간단한 제물을 놓고 후토제를 올립니다. 이것은 땅을 파 헤치고 초목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산신한테 통보하여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입니다, 그다음 봉분을 조심스레 정리하는데 청명때는 삽으로 흙을 올리니 가토라고 하고, 추석때는 낫으로 풀들을 베니 벌초라고 합니다. 봉분을 잘 정리한 다음 가지고 간 제물들을 제단에 차려놓고 가문의 항렬 순서에 따라 술을 붓고 세번씩 절을 올립니다. 마지막에 술한잔 다시 붓고 다 함께 절을 세번 하고는 제사를 끝냅니다. 제사가 끝난후 자리를 찾아 일동이 둘러 앉아서 제물을 음복하면서 아름다운 덕담들을 나눕니다.   9, 조선족 장례 제사와 상관되는 금기 사항 (1분) A, 성시의 병원이나 아빠트에서 친인이 사망하였을 경우 크게 소리내여 울지 않습니다. B, 어린 아이들은 죽은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염습할때 다른 곳에 피신 시킵니다. C. 농촌의 경우, 상가집에서는 초상기에 부엌 아궁이를 막아 놓고 불을 지피지 않습니다. D, 령구를 내 갈때 문턱이나 문설주를 다치지 않습니다. E, 가문에 상사가 났을 때 임신한 며느리나 딸은 장례에 참석 시키지 않습니다. F,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입던 옷과 덮던 이불, 그리고 평소에 쓰던 일용품들은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웁니다. G, 장례나 제사에 가서는 불길한 말을 하지 않으며 누구와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H, 장례 용품이나 제사 소물을 살때는 흥정을 하지 않습니다. I, 장례나 제사가 지난후에는 보충 부조금을 받지 않습니다. J, 장례나 제사에 참석할때 화려한 옷과 진한 치장은 삼가 합니다. K, 친인이 객사 하였다면 사망한 지역에 가서 장사 지내고 시신을 집으로 옮겨오지 않습니다. L, 제사상 제물은 짝을 지우지 않으며 홀수로 합니다. M, 제사상에 개고기와 이름에 “치”자가 붙은 물고기, 그리고 고사리, 복숭아는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N, 상주와 주부는 장례를 치른 해에 자기 생일을 쇠지 않으며 친척이나 친구집의 희사 잔치에도 가지 않습니다. O, 자기의 배우자가 사망하였을 경우 삼년제 지나기 전에는 재차 혼인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P, 가정에서 큰 희사를 치른 해(결혼잔치를 치렀거나, 새집을 샀거나, 아이가 태여난 해)에는 보통 장례집에 조문을 가지 않으며 제사집에도 가지 않으며 청명이나 추석에 자기집 산소에도 가지 않습니다(특별한 경우 제외).   10, 총 결 어 (3분) 2009년 6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전통 상제례의》와 《조선족 전통장례》을 각각 주급과 성급의 무형 문화재(非物质文化遗产)로 지정 하였으며 연변주 문화국이 주관부문으로 되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가 구체적인 보호사업을 책임진 보호단위로 되였습니다. 이로부터 조선족 전통 상제문화는 보호가치와 발양의의가 있는 민속 문화라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였습니다.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리는것을 현시대의 개방사상이라고 여기는것은 틀리는 생각입니다. 당과 정부에서는 소수민족들의 특색문화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우대정책과 사업조례들을 제정하여 실행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도리여 자기민족 특색문화의 보귀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 꺼리낌 없이 하나, 둘, 버리고 있습니다. 민족특색이 없이는 민족 대단결이 있을수 없으며 자기의 민족특색을 버릴수록 점점 시대의 멸시를 받게됩니다. 자기의 민족특색이 짙을수로 자기의 합법성이 더욱 완벽하게 되며, 세계적 경쟁력이 더욱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 조선족의 전통적 상제문화는 우리민족의 전통적 관혼상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구성부분의 하나입니다. 만일 조선족 민속문화에서 상제문화가 빠진다면 조선족의 전반 민속문화는 자기의 완미성을 잃게 되며, 잔페문화로 될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족 상제문화를 보호하고 계승하는 사업은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서 어느한 부문이나 어느한 단위의 노력만으로는 완성할수 없습니다. 반드시 전 사회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계속 자기의 우량한 전통을 발양하고 시종 자기의 민족 특색을 확보한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더욱 밝을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01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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