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http://www.zoglo.net/blog/sy10088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민족력사

전체 [ 19 ]

19    우리민족 성씨가 보급되던 과정 댓글:  조회:3971  추천:0  2013-01-30
★ 우리민족 성씨가 보급되던 과정 ★ 조선초만해도 성씨있는 양반은 10%밖에 안되었는데 조선중기 양반계급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부터 평민들도 각 씨족 별로 구전 해오던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토착민들은 지역별 연결에 따라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이거나 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조선후기에는 양반들의 도움으로  성 하나 만은 가지게 되었고.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천민들에게 다시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일제가 주었는데,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 이, 박 등등"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성이 더욱 흔해지게 된 것이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이들에게 신청하는 대로 유명성씨의 호적을 준 것은 조선의 양반 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나온 것이고, 노비를 양민화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   일례로 김좌진 장군댁 노비 100명도 안동 김씨 호적을 만들어 가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양반집 법도는 엄격한 유교의 윤리로 교육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으로 행세하기는 행동거지가 참으로 어렵고 엄했다고 한다.   따라서 천민은 흉네 낼 수도, 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는 사회였다. 그리하여 품성과 관계없이 성씨만으로 양반입네 떠들던 사람들은 혹시 원래는 양반집의 "돌쇠"었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다.   양반은 항상 따르는 권속들에 대한 책임감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중압감을 느끼며 생활하였으며 자신의 행동이 가문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오늘같은 막된 행동이나 막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지역사회에서 한번 쌍놈의 가문으로 찍혀지면 자녀들의 출가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에 성씨가 그 사람의 품행을 구속했다고 한다.   법도와 예를 생명같이 여기고 살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점에서 양반사회는 순기능 역활도 했다고 판단된다. 성씨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하여 아래의 자료를 첨부해 본다.   2000년에 조사한 우리 나라의 성씨별 인구가 통계청 홈페이지에 떴는데, 1985년 발표 당시보다 성씨의 숫자가 12 개 늘었다.   그 때는 274개였는데, 이번은 286개가 되었다. 우리 나라 10대 성씨의 순위는 변화가 없었다.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   “김(金)” 씨는 우리 나라 인구의 21.6%인 992만 여 명으로 여전히 제일 많았다. “이(李)” 씨는 그보다 훨씬 적은 14.8%로 679만 여 명으로 조사되었다. “박(朴)” 씨는 또 그보다 훨씬 적은 8.5%로 389만 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잇는“최(崔),정(鄭)”씨는 4% 대이고, “강(姜), 조(趙), 윤(尹), 장(張)”씨는 2% 대, 그리고 “임(林)”씨부터 21위“전(全)”씨까지 1%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씨별 인구 수가 거의 일정한 차이를 유지하며 계속 나열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성씨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가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 특정 성씨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다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만 1, 2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아진 것은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법이 시행될 때 “양반이 되고 싶은”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기형적인 분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때에 “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 정책을 시행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나 동네의 특징을 살린 성씨를 만들어서 가졌다고 한다.   “田中, 中村, 松下...” 등 다양하게 창씨된 성씨의 숫자가 순식간에 8만 개나 되었는데....   일본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특정 성씨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는 없다고 하며... 또한 성씨만 가지고는 가문의 역사 같은 것은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를 논할 때 성씨가 무언가 하는 것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착 같은 것이 거의 없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여기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일본이 우리 나라, 즉 대한제국에 와서도 계급을 타파한다면서 “신분 표시가 없는 호적법”을 시행하였고, 여기에서도“전 국민의 성씨 가지기”운동을 전개하여 전 국민으로 하여금 성씨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결과는 일본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 들은 일본처럼 새로이 성씨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이들 대부분이 그 동네 지주나 양반들에게 부탁하여 그 “양반님”들의 성씨를 얻어 와서는 관청에 신고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 때에 김(金) 씨나 이(李) 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 성씨가 총 인구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양반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던”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난,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여튼 우리나라는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양반화”가 자연스러이 이루어졌고, 옛날 이야기에 그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구월이...”의 자손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슨 무슨 정승, 판서의 몇 대 손”이 되어 버렸고, 오로지 양반의 후손만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덕분에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양반이 많은 나라가 되었고, 또한 제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불과 100 여 년 전만 해도 “성씨도 없는 쌍놈들”은 제사고 차례고 지낼 수가 없었는데, 요즈음은 집집마다 장손이면 모두 명절날 차례를 지낸다.   참고로 5000년 전부터 성씨를 사용해 온 중국의 경우를 보면 성씨별 인구 1, 2, 3위의 비율은 각각 7.4%, 7.2%, 6.8%로 되어 있어서, 특정 성씨로 몰리는 현상은 없다. 중국은 인구 0.1% 이상을 차지하는 성씨가 모두 129개로 나타났는데, 이 129개 성씨의 인구 합계는 중국 인구의 87%라고 한다.   이는 2006년 1월 10일 중국과학원에서 중국역사상 가장 정밀한 자료조사를 거쳐 발표했다는 “100대 성씨”에 근거한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인구기준 성씨순위”가 1987년의 발표자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표본조사한 기초자료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1987년 조사는 겨우 57만 명 정도를 표본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고, 이번 조사는 그 때에 비하여 500배도 넘는 약 3억 명을 표본 조사하여 순위를 매긴 것이기 때문에 그 정밀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번 조사에서 중국 10대 성씨는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陳), 양(楊), 황(黃), 조(趙), 주(周), 오(吳)”로 판명되었다.   이 순위는 자동적으로 전세계의 10대 성씨가 되기도 한다. 이 중 “李”는 중국 인구의 7.4%인 9천 60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679만여 명을 합치면 “李”씨는 1억 명을 넘어 가는 세계 유일의 성씨가 된다.   약 900년 전인 서기 1100년대에 북송(北宋)에서 발표한 『백가성(百家姓)』이란 책자가 최초의 성씨 조사 기록이었고, 명(明)나라의 『천가성(千家姓)』, 청(淸)나라의 『백가성(百家姓)』 등이 뒤를 이었으나 이 책들은 모두 성씨별 인구수를 기준으로 서열을 매긴 것은 아니었다.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趙錢孫李周吳鄭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인구수 순위가 아니었다.   “조(趙)”는 북송을 건국한 황제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 성씨였고, “정(鄭)”은 그 왕후의 성씨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인 “남당(南唐)”의 국왕 성씨였던 것인데... (중국의 1100년대는 송나라가 약간 힘이 강한 정도였고, 고만고만한 나라들로 나누어져서 도토리 키재기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인구 순이 아니라 예우(?)를 받아야 할 성씨의 순위였고, 최근 중국 일부 신문에서 보도한 “900년만에 조(趙)가 1위에서 8위로 밀렸다”는 내용은 옛날 기록의 특징을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나라 성씨의 순위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 성씨 순위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金 : 21.59%, 한국 1위 (중국 64위) 한국 발음이 현재는 “김”이지만 옛날에는 “금”으로 읽었다는 주장도 있음. 현재 중국 배우 중에도 이 성씨를 가진 배우가 있는데 “금성무”라고 보도되고 있음 이 글자의 현대식 중국 표준발음은 “찐”임   李 : 14.78%, 한국 2위(중국 1위 7.4%) 한국, 중국 합하면 1억이 넘어 가는 전 세계 단 하나의 성씨임 중국, 북한에서는 “리”라고 하는데, 남한에서만 “이”라고 읽고 있음. 그런데, 남한 사람들도 영어로 쓸 때에는 대부분 “Lee(리)”라고 하는 버릇이 있음   박 : 8.47%, 한국 3위(중국 100위 내에서는 안 보임) 한자로 “朴”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바가지”란 뜻의 순우리말 토종 성씨임. “박혁거세”의 “박”은 “박만큼이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은 말임 영어로 "Park" "Pak" 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으나 "Paak" 이라고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함.   최(崔) : 4.72%, 한국 4위(중국 58위) 정(鄭) : 4.37%, 한국 5위(중국 21위) 강(姜) : 2.27%, 한국 6위(중국 50위) 조(趙) : 2.14%, 한국 7위(중국 8위) 윤(尹) : 2.06%, 한국 8위(중국 95위) 장(張) : 2.00%, 한국 9위(중국 3위) 임(林) : 1.66%, 한국 10위(중국 17위/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오(吳) : 1.54%, 한국 11위(중국 10위) 한(韓) : 1.53%, 한국 12위(중국 26위) 신(申) : 1.52%, 한국 13위(고려태조가 하사한 성씨,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일족이 있음)   서(徐) : 1.51%, 한국 14위(중국 11위) 권(權) : 1.42%, 한국 15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황(黃) : 1.40%, 한국 16위(중국 7위) 안(安) : 1.39%, 한국 17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송(宋) : 1.38%, 한국 18위(중국 23위) 유(柳) : 1.31%, 한국 19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홍(洪) : 1.13%, 한국 20위(중국 99위) 전(全) : 1.07%, 한국 21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고려 왕씨 유래설이 있음) 고(高) : 0.95%, 한국 22위(중국 19위) 문(文) : 0.93%, 한국 23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손(孫) : 0.90%, 한국 24위(중국 12위) 양(梁) : 0.85%, 한국 25위(중국 20위) 배(裵) : 0.81%, 한국 26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조(曺) : 0.79%, 한국 27위(중국 27위) 백(白) : 0.76%, 한국 28위(중국 79위) 허(許) : 0.65%, 한국 29위(중국 28위) 남(南) : 0.56%, 한국 30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우리 나라 31위 이후의 성씨는 다음과 같음.   31-40 심(沈) 유(劉) 노(盧) 하(河) 전(田) 정(丁) 성(成) 곽(郭) 차(車) 유(兪) 41-50 구(具) 우(禹) 주(朱) 임(任) 나(羅) 신(辛) 민(閔) 진(陳) 지(池) 엄(嚴) 51-60 원(元) 채(蔡) 강(康) 천(千) 양(楊) 공(孔) 현(玄) 방(方) 변(卞) 함(咸) 61-70 노(魯) 염(廉) 여(呂) 추(秋) 변(邊) 도(都) 석(石) 신(愼) 소(蘇) 선(宣) 71-80 주(周) 설(薛) 방(房) 마(馬) 정(程) 길(吉) 위(魏) 연(延) 표(表) 명(明)   81-90 기(奇) 금(琴) 왕(王) 반(潘) 옥(玉) 육(陸) 진(秦) 인(印) 맹(孟) 제(諸) 91-100 탁(卓) 모(牟) 남궁(南宮) 여(余) 장(蔣) 어(魚) 유(庾) 국(鞠) 은(殷) 편(片) 101-110 용(龍) 강(疆) 구(丘) 예(芮) 봉(奉) 한(漢) 경(慶) 소(邵) 사(史) 석(昔) 111-120 부(夫) 황보(皇甫) 가(賈) 복(卜) 천(天) 목(睦) 태(太) 지(智) 형(邢) 피(皮) 121-130 계(桂) 전(錢) 감(甘) 음(陰) 두(杜) 진(晋) 동(董) 장(章) 온(溫) 송(松)   131-140 경(景) 제갈(諸葛) 사공(司空) 호(扈) 하(夏) 빈(賓) 선우(鮮于) 연(燕) 채(菜) 우(于) 141-150 범(范) 설(?) 양(樑) 갈(葛) 좌(左) 노(路) 반(班) 팽(彭) 승(承) 공(公) 151-160 간(簡) 상(尙) 기(箕) 국(國) 시(施) 서문(西門) 위(韋) 도(陶) 시(柴) 이(異) 161-170 호(胡) 채(采) 강(强) 진(眞) 빈(彬) 방(邦) 단(段) 서(西) 견(甄) 원(袁) 171-180 방(龐) 창(昌) 당(唐) 순(荀) 마(麻) 화(化) 구(邱) 모(毛) 이(伊) 양(襄)   181-190 종(鍾) 승(昇) 성(星) 독고(獨孤) 옹(邕) 빙(?) 장(莊) 추(鄒) 편(扁) 아(阿) 191-200 도(道) 평(平) 대(大) 풍(馮) 궁(弓) 강(剛) 연(連) 견(堅) 점(占) 흥(興) 201-210 섭(葉) 국(菊) 내(乃) 제(齊) 여(汝) 낭(浪) 봉(鳳) 해(海) 판(判) 초(楚) 211-220 필(弼) 궉(?) 근(斤) 사(舍) 매(梅) 동방(東方) 호(鎬) 두(頭) 미(米) 요(姚) 221-230 옹(雍) 야(夜) 묵(墨) 자(慈) 만(萬) 운(雲) 범(凡) 환(桓) 곡(曲) 탄(彈)   231-240 종(宗) 창(倉) 사(謝) 영(永) 포(包) 엽(葉) 수(水) 애(艾) 단(單) 부(傅) 241-250 순(淳) 순(舜) 돈(頓) 학(?) 비(丕) 영(榮) 개(介) 후(侯) 십(?) 뇌(雷) 251-260 난(欒) 춘(椿) 수(洙) 준(俊) 초(肖) 운(芸) 내(奈) 묘(苗) 담(譚) 장곡(長谷) 261-270 어금(魚金) 강전(岡田) 삼(森) 저(邸) 군(君) 초(初) 영(影) 교(橋) 순(順) 단(端) 271-280 후(后) 누(樓) 돈(敦) 소봉(小峰) 뇌(賴) 망절(網切) 원(苑) 즙(?) 증(增) 증(曾) 281 삼(杉) : 282 우(宇): 소(肖)예(乂) 빙(氷) 경(京) : (이상 총 286개 성씨)   이 중 최근에 새로 생긴 성씨 중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잘못 기재하여 그리 된 것도 있고, 국제 결혼으로 우리 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남아 또는 중국 사람들의 성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중국의 주요 성씨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 : 중국 7.4%, 중국 1위(한국 2위)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개국공신들에게 “李”를 하사했고, 나중에 후위(後魏)의 선비족(鮮卑族)에서도 “李”씨로 바꾸어 사용한 사람들이 많음. 중국인들은 영어로 표기할 때 "Li"를 주로 사용하며, 미국 "Lee"와의 관계는 불명확함   王 : 중국 7.2%, 중국 2위(한국 83위) 중국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사이의 신(新)나라 때 황제 왕망(王莽)의 성씨임. 중국 사람이라 하면 “비단장사 왕서방”이라 할 정도로 중국에 왕 씨가 많았음 한국에서도 고려시대 왕족이 “왕건(王建)”의 왕씨였으나 고려 멸망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춤.   張 : 중국 6.8%, 중국 3위(한국 9위) 장삼이사(張三李四 : 중국인들은 대개 張씨네 셋째 아들 아니면 李씨네 넷째 아들이라는 뜻)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張씨가 많았음. 지금도 “장가계(張家界)”는 관광지로 유명함.“왕삼이사(王三李四)”란 말이 생기지 않은 것은 “왕이 셋이면..”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됨.   劉(유) : 중국 4위(한국 32위) 陳(진) : 중국 5위(한국 48위) 楊(양) : 중국 6위(한국 55위) 黃(황) : 중국 7위(한국 16위) 趙(조) : 중국 8위(한국 7위)   周(주) : 중국 9위(한국 71위) 吳(오) : 중국 10위(한국 11위) 徐(서) : 중국 11위(한국 14위) 孫(손) : 중국 12위(한국 24위) 朱(주) : 중국 13위(한국 43위)   馬(마) : 중국 14위(한국 74위) 胡(호) : 중국 15위(한국 161위) 郭(곽) : 중국 16위(한국 38위) 林(임) : 중국 17위(한국 10위) 何(하) : 중국 18위(한국에는 없음)   高(고) : 중국 19위(한국 22위) 梁(양) : 중국 20위(한국 25위) 鄭(정) : 중국 21위(한국 5위) 羅(나) : 중국 22위(한국 45위) 宋(송) : 중국 23위(한국 18위)   謝(사) : 중국 24위(한국 233위) 唐(당) : 중국 25위(한국 173위) 韓(한) : 중국 26위(한국 12위) 曹(조) : 중국 27위(한국 27위) / 한국에서는 “曺(조)”란 글자를 주로 사용함 許(허) : 중국 28위(한국 29위)   鄧(등) : 중국 29위(한국에는 없음) 蕭(소) : 중국 30위(한국에는 없음)   중국 31위부터 100위까지는 다음과 같음   31-40 馮(풍),曾(증),程(정),蔡(채),彭(팽),潘(반),袁(원),于(우),董(동),余(여), 41-50 蘇(소),?(협),?(여),魏(위),?(장),田(전),杜(두),丁(정),沈(심),姜(강) 51-60 范(범),江(강),傅(부),?(종),?(노),汪(왕),戴(대),崔(최),任(임),?(육) 61-70 廖(료),姚(요),方(방),金(금),邱(구),夏(하),?(담),?(위),?(가),?(추) 71-80 石(석),熊(웅),孟(맹),秦(진),?(염),薛(설),侯(후),雷(뢰),白(백),?(용) 81-90 段(단),?(학),孔(공),邵(소),史(사),毛(모),常(상),万(만),?(고),?(뢰) 91-100 武(무),康(강),?(하),?(엄),尹(윤),?(전),施(시),牛(우),洪(홍),?(공)   중국 측 발표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성씨는 56개 종족에 약 12000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13억 인구 전부를 조사 못해서 이런 추정치라는 것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신판 『중국성씨대사전(中國姓氏大辭典)』에는 무려 23000개의 성씨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나 인식들에 대하여 약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의 성씨관...   중국은 예로부터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원래 성(姓)이라 함은 모계제 사회의 흔적으로 “어머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씨(氏)는 “출생한 뒤에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모두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황제(黃帝)”의 경우 성(姓)은 “희(姬)”이고 씨(氏)는 “헌원(軒轅)”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황제(皇帝), 즉 천자(天子)가 내려 주는 것은 성(姓)이라 했고, 제후(諸侯) 또는 국왕(國王) 정도가 내려 주는 것은 씨(氏)라 했다.   언제나 성(姓)이 한 단계 위의 개념이었는데, 보통 성(姓)은 한 글자였고 씨(氏)는 두 글자가 많았다.   그리고 한(漢) 나라 때에 족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천자가 각 제후나 공신들의 자제들에 대한 특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천자가 만든 족보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가 권력의 유무를 판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성씨는 남자들만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Y염색체의 유전 상황을 표시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중국의 성씨는 역사가 5000년이 되었고, 성씨는 문화의 전승과 남성 혈통의 흐름을 연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성씨이면 무조건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관습이 자연스러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혈연 관계는 인간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성씨관...   원래 우리 나라의 토착민들은 성씨가 없었다고 한다. 계속적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일부 고위 관리들에게서 성씨를 가진 자들이 간간이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서는 국력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왕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스스로 만들어서 가졌다.   그래서 왕족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고 없는 먼 조상님들(혁거세, 알지 등등)에게도 소급해서 성씨를 만들어 붙이고 했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보다 쌍놈들이 더 많았고, 성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절 일본의 압력 덕분에 호적에 성씨란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많았지만,“만들어 올렸다”는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가문의 비밀”로 숨겨 두어야 했다.   성씨의 유무와 관련한 성씨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우리 백성들은 양반제도가 비록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40년대에 일본이 “이제 조선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한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고, 앞으로 성씨로 인한 조선인, 일본인 간의 차별대우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성씨 자체를 “가문의 역사”로 생각하는 많은 우리 백성들은 당연히 반대하였고, 성씨의 역사가 불과 50년밖에 안 되어 성씨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던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들의 반대를 보고 “거참, 이상하다. 그깟 성씨 가지고 왜들 저러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성씨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씨를 만들어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신청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신고하였는데, 이광수가 만든 성씨는 “일본 천황 고향의 뒷산인 향구산(香久山)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향산(香山)이었다.   이광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성씨란 건 별 것 아니야”라는 자기네들의 전통적 인식을 한국식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전 세계의 남자들이 한국인들에게 깜짝 놀라는 것이 두 가지라 하는데, 한 가지는 부인의 성씨 문제이고 또 한 가지는 “부인이 남편 통장을 관리”하는 것이라 한다. “자다가 벌떡 깨어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는 한국은 거의 구제불능성 선천적 여성천국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성씨관...   일본은 우리 한반도의 영향을 받아 백제와 교류할 때부터 성씨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고, 오랜 기간 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가물에 콩 나듯 하는 중국과의 교류도 크게 활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성씨의 위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19세기말 미국이 군함을 밀고 들어오고, 일본 청년들이 세계일주도 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패밀리 네임”이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을 보니 자기네들의 직업을 가지고 만든 성씨도 있고, 자기네 마을의 특징을 살려서 만든 성씨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도 성씨란 걸 만들어서 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에게 물어 보니 동양 문화권에서는 성(姓)이라는 것도 있고 씨(氏)라는 것도 있는데.. 성(姓)이란 것은 황제가 직접 만들어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백성이 한두 명도 아닌데 어느 세월에 만들어서 준단 말인가... 그냥 일본은 씨(氏)를 만들어서 쓰기로 하고 창씨(創氏)하는 업무는 각 사무라이들에게 그냥 맡기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순식간에 수만 개의 씨(氏)가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일본은 어떤 장부이든지 “성명(姓名)”이란 칸은 없고 어디든지 모두 “씨명(氏名)”이란 칸만 있다. 19세기 말 갑자기 시행된 창씨(創氏)였기 때문에 각자의 씨(氏)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청일 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게도 성씨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호적법을 만들어 창씨(創氏)의 기회를 주었으나, 조선인들은 이상하게도 창씨(創氏)는 않고 기존 양반들의 성(姓)을 빌려 와서 관청에 신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글자 짜리인 성(姓)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국 또는 조선인이고 두 글자 짜리 씨(氏)를 쓰는 사람은 일본인.... 어찌 되었든 간에 국적 구별이 쉬워서 좋기는 했다.   조선을 삼키고 난 뒤에 조선인들로부터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 놓고는 차별대우가 너무 심하다”는 등 불만사항이 많이 접수가 되었지만, 우선 이름에서부터 출신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니 일본 정부로서도 별로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그냥 대충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가고... 조선인들이라도 군인으로 뽑아서 내보내야겠는데 차별대우 해소를 위한 근본대책을 세우라고 매일 투덜대는 저 조선인들을 그냥 일본군으로 들여 보냈다가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 보고 질 것 같고... 일본정부는 착잡해졌다.   누군가 묘안을 냈다. 일본식으로 창씨(創氏)할 기회를 한 번 더 줄 터이니 이 참에 일본식으로 제대로 창씨를 해라... 어차피 얼굴 생긴 것도 똑같고.. 조선 출신을 차별대우하고 싶어도 조선 출신이란 표시가 없으니 못할 것 아니냐... 그러나 그대신 조선 청년들 군대에 좀 가 줘야 되겠다.... 이렇게 하여 1940년대에 창씨(創氏)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어떻게 그 동안 써 오던 성(姓)을 버리고 그보다 격이 낮은 씨(氏)를 쓸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법적으로 양반이란 것도 없어졌고 문벌이란 것도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는데 허울만 남은 성(姓)을 가지고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차별대우 철폐란 것이 어차피 민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문제이고 정책 차원에서 조선출신이라는 표시가 안 나게 해 주겠다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불만에 대해 잘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강제 창씨를 계속 밀고 나갔다. (이 때 林, 柳, 南씨 일부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 하여 새로 창씨를 하지 않았다고 함).... 그리고 조선인들을 일본군으로 받아 들여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사람들만 일본군복을 입은 채로 애매하게 죽은셈이 되어 버렸고 몇 년 후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1945년에 전쟁도 끝이 나고 살림살이도 일본 내부로 축소되었으니 일거리도 줄어들고 오히려 편해졌다. 일본인들도 이제 성씨를 사용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간다. 100년 동안 의 짧은 역사가 일본인들에게 성씨에 대한 관념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씨에 대한 뚜렷한 자부심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일본인은 성씨의 종류는 8만여 가지로 무지하게 많지만 성씨별 인구 수에 대해서는 아직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양반의 자손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일본인은 "근본도 모르는 쌍놈들"일 뿐이다.   ○ 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        
18    배달민족이란? 댓글:  조회:3907  추천:1  2012-09-16
배달민족이란?   첫번째 설: 배달은 우선 순수 우리말이 아니라 한문입니다. 배달=倍達 이렇게 표기하죠.   상고시대 이래로 우리나라·우리민족을 지칭할 때 사용되어온 '배달(倍達)'이란 말의 어원이 정립되지 못하고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듯 합니다. 설이 다양하다는 것은 곧 정설이 아직 확립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나라와 민족·역사에 관계되는 용어에 대한 어원정립이 제대로 이우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배달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견이 있으나 가장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분의 견해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죠(대종언어연구소의 박대종님의 견해입니다). 대표적인 학설들을 조사해본 결과, 어느 학설은 반은 맞지만 나머지 반은 틀려 있거나 설득력 면에서 미진했으며, 또 다른 학설은 그와는 반대되는 현상을 보였다. 따라서 배달(倍達)에 관한 한, 이들을 체계있게 통합하면 그 어원은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차근차근 풀어보도록 하자. 먼저 배달(倍達)할 때의 배에 대해서는『桓檀古記』의 번역자인 임승국 선생께서 예를 잘 들어놓았기 때문에 그것부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의 음운법칙이 박·백이 배로 변하는 실례가 많은 바, 백천(白川)이 배천(白川온천), 박고개[赤峴] 혹은 붉고개가 배오개(동대문시장)로 변하는 지명의 실례가 있고..." (한단고기; 1992, p.19) 그분의 견해는 우리말 '밝다'의 어간 밝이 배달(倍達)할 때의 배로 변했다는 것인데, 만약 밝이 백(白)의 변음임을 알았더라면 밝보다는 白(백)과의 관계에 더 주목했을 것이다. 동방문자 白(흰/환할/밝을 백)의 자음 백이 종성 ㄱ이 탈락되어 배로 변한, 이른바 'ㄱ음 탈락현상'은 다음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①復(돌아올 복, 다시 부) : 復歸(복귀), 復活(부활) ②讀(읽을 독, 구두/이두 두) : 讀書(독서), 句讀(구두) ③惡(나쁠 악, 미워할 오) : 善惡(선악), 憎惡(증오) ④食(밥/먹을 식, 밥/먹일 사) : 食氣(사기), 食鼎(식정) 위 내용들을 요약하면, 배달(倍達)할 때의 배는 백(白)의 종성 ㄱ이 탈락된 것이며, 여기서의 倍는 白(백)의 생략음 배를 표기하기 위해 임시로 빌어쓴 가차자이다. 우리가 白의 음 백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밝다'의 어간 밝과 영어 bright, speak, speech 등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보다 자세한 사항은『나는 언어정복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제 1권(1999, p.107) 참조요.) 다시 말해 白의 음 백이 모음변형된 것이 박이요, 이 박 음에 윤활자음 ㄹ이 첨가된 것이 '밝다'의 어간 밝이다. 白: 1. 백 → 박 → 밝(bright) 2. 백 → 배 (ㄱ 탈락) 이상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국조 檀君단군과 관계있는 '박달나무[檀단]'의 어원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으니, 곧 박달나무[檀단]는 다른 말로 배달나무이자, 단군 및 단군족의 나무라는 사실이다.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명이 그곳을 지키고, 나무를 베어 뗏목 8만개를 만들어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떠내려보내 사해 제족을 초청케 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보고 차례차례 모여들어, 박달(朴達)나무 숲에 신시(神市)를 크게 열고 악심을 다스려 마음을 정화한 다음 천상(天象)을 살펴 마고의 계보를 정리하고 그 족속의 근원을 밝힘과 아울러 천부의 음에 준하여 어문을 정리하였다...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필히 신시를 여니 이에 어문이 통일되고 천하가 하나로 평정되어 인간세상은 크게 화합하였다... (부도지 제 14장 중에서; 필자 新解) 우리말[동방어]에서는 '檀(단)'을 일러 '박달(朴達)' 혹은 '백달(白達)'이라고 한다... (『규원사화』'단군기' 중에서; 東語謂檀曰朴達, 或曰白達) 위의 문구들에서와 같이 그 음을 취해 통상 朴達박달 식으로 표기하고 있는 박달나무의 바른 동방문자 표기는 白達백달이라는 중간결론과 함께, 이번에는 白에 뒤이어 배달(倍達)이란 말의 뒷부분에 위치한 달(達)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배달(倍達)의 달(達)을 풀이할 때, 그간 많은 학자들은 우리말 응달[陰地]·양달[陽地]을 예로 들며 땅[地]으로 풀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견해를 달리한다. 배달(倍達)이란 말은 응달·양달과는 달리 상고시대 이래로의 말이기 때문에 상고시대 달(達)이 어떤 뜻을 나타내었는지 조사해야 한다. 상고시대 우리 조상들의 언어자료를 보여주는『삼국사기』지리지 권 35, 37 등에 실린 達 관련, 자료원문은 다음과 같다. 達 : 土山縣本高句麗息達 / 高木根縣本高句麗達乙斬 위 자료를 근거로 남한의 이기문·박병채 교수, 북한의 언어학자 류렬·김수경씨 등은 삼국시대 당시까지 山과 達은 동의어였음을 밝히고 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국시기까지의 달(達)은 山 또는 高의 뜻이지 땅[地]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언어학적 사실을 간과하고 상고시대의 언어인 배달(倍達)의 달(達)을 山이 아닌 땅으로 풀이하는 경향이 많으니, 이것이 바로 배달의 어원이 왜곡되게된 주요 원인이다. 『三聖記全』상편 첫머리에는 우리 白衣백의민족의 시원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 (어느날 동남동녀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왔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도출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배달(倍達)은 백달(白達)의 음운변형이고, 박달(白達)은 백달(白達)의 모음변형이며, 백달(白達)은 백산(白山)의 다른 표기이다.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배달)민족, 곧 백두산 민족이다. 이 백산(白山)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외에, 중국 대륙의 태백산과 심지어 히말라야산까지 연관짓는 경우가 있는데, 필자는 백두산으로 본다.     두번째 설: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 한민족이란 말보다 배달민족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한민족이란 말에는 웬지 반도사관적인 냄새와 함께 소위 단일민족이라는 미명의 순종혈통주의의 편협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사용되어진 말이기도 하다. 그럼 배달민족은 무슨 뜻인가. 배달은 바로 환웅이 환국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신시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나라를 말한다. 이른 바 환국-배달국-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 겨레 국통의 중추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신화는 이걸 일개 3대부자父子 가계사로 전락시킨 망령에 불과하다. 흔히 古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알고 있는 '홍익인간 제세이화 광명이세'는 배달국의 건국이념이다. 배달국 말기 흐트러진 종족연방체를 재규합하여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께서 배달국의 국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며 이를 다시 건국이념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아울러 조선도 그랬지만 배달국은 바로 다수민족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 형태였다. 중국측 사료를 포함한 고대사료를 보면 우리 민족을 칭한 다양한 호칭을 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주 빈번하게 보이는 명칭이 구이九夷, 구환九桓 등의 이름이다. 여기서 구이九夷란 9개의 이夷족을 뜻하는데 즉 풍이, 양이, 견이 등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민족은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다고 보면 된다. 후일 처음에 십제로 출발한 백제도 이런 식의 조어법이다. 그리고 구이 등은 구려, 구리, 고리 등과도 관련이 있고 고구려란 이름도 구려에 높은 고高를 붙인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우리민족의 고대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인터내셔널적이었다. 이夷는 원래 큰 대大 자에 활 궁弓 자를 합친 말로서 '큰 활을 가진 용맹한 민족'을 뜻한다. 이걸 후대에 중국역사가들이 오랑캐라고 비하하였고 여기에 우리의 사대주의자들이 부화뇌동한 것이다. 중국이 자신들을 중원에 놓고 사방부족을 칭했던 이름인 동이 남만 서융 북적은 모조리 짐승을 뜻하는 부수가 붙어 있는데 다만 유일하게 이夷만큼은 그 어근이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민족이 동이족이라고 불리웠던 시기는 배달국 15대 자오지환웅(치우천황) 때부터이다. 이때의 사료를 보면 중국의 시조인 황제와의 전투에서 배달국은 '대로'라고 하는 초대형 활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대로는 지금의 최첨단 미사일 쯤 되는 무기였다. 배달겨레에서 갈라져 나간 민족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말을 아주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틍틀어 기마종족이라고도 한다. 몽골, 여진, 돌궐, 거란, 선비, 흉노 등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민족의 고구려 벽화를 보면 말을 타고 활로 호랑이 사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상 고구려는 이들과 배달국 이후 조선의 범아시아 연방체에 속했던 형제였다고 보면 된다. 후일 조선의 연맹체가 깨지면서 북부여 외 열국으로 갈라지지만 여전히 형제국으로서 유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이르러 우리민족이 한민족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그들과의 연대를 잘라내기 시작하였다. 이에는 당연히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중화족에 대한 사대의식이 작용했던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거란이 요를 세울 때 제일 먼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형제국으로서 연대를 회복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조정의 사대주의자들이 송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고 망발을 하며 거란의 호의를 철저하게 무시해버린다. 이런 식의 넋빠진 행태는 그 이후로 주욱 이어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배달이란 말에 담긴 의의를 다시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일이다.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없이는 그 어떤 역사찾기도 빈껍데기일 수밖에 없다. 아니면 편협한 국수주의에 빠지든지 말이다. 정리도 안되고 거의 나오는대로 끄적인 글이다. 원래 내가 하고자 했던 얘기도 지금은 어디로 새버렸는지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그대로 올린다. 역사란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는 건지 한번 숙고할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세번째 설: 배달(倍達)의 어원은 원래 단군 조선 이래의 고구려말 밝달(빛의 산)에서 온 것이다. 우리 나라의 역사는 단군 조선 이후 삼국인을 중심으로 배달 민족을 규정하며 서술되어왔다. 그러나 통일신라가 세워진 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배달 민족의 개념은 한반도 거주인으로 국한되고 말았다. 사실 신라는 백제를 병합하며 그 국토와 백성을 흡수하였으나, 실제로 고구려를 정벌하여 통일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의 후손인 우리는 고구려를 상실하면서 배달민족도 남북으로 반분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엄밀히 따지면 큰형이 집을 떠나 따로 살림을 차린 셈이다. 한사군의 설치로 조선이 멸망한 후 우리 민족은 당분간 제대로 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다가 제각기 분리 독립된 국가들이 요동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정립되고, 비록 당나라의 후원을 받았지만 삼국의 통일을 신라가 이루었다. 그러나 당의 압력을 물리치고 백제의 대다수 유민과 국토는 신라가 차지하였지만, 대 고구려의 수많은 유민과 방대한 국토는 신라가 흡수하지 못하였음으로 이 통일은 한반도의 일부만을 포함한 불완전한 민족 통일이었다. 고구려의 백성과 영토는 안동도호부의 설치로 잠시 당나라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가, 다시 고구려인을 주축으로 역시 동이족으로서 우리 한 겨레 지맥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말갈인을 흡수하여 세워진 발해의 통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리면서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그 위세를 떨치다가, 역시 이족의 하나인 선비족으로 구성된 거란의 요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발해가 망하였다고 해서 그 유민들이 다 죽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후손들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붕괴에서 보듯이 다시 부락단위로 흩어져 살다가 후에 금나라를 세우게 되고, 다시 청나라를 세워서 마침내 동이족의 힘에 의하여 중원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말갈 여진이란 명칭이 결국 만주족으로 불려지듯이 민족의 개념이란 결국 삶의 터전인 영토와 결부되며, 역사가 진행되면서 계속 분열되어 세계적으로 현재 3,000여종이나 된다. 사실 삼국 이전의 역사를 파괴당하고 상실한 우리는 현재 우리의 민족 호칭조차 중국 사서에 의하여 명명되어 있다. 중국은 사방 변방의 민족을 각각 동이 서융 남만 북흉이라 하여 모두 오랑캐라 부르며, 그들 민족을 화족(華族)이라고 하여 스스로 세계최고의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소위 동이족이라 불리는 우리는 고조선의 영토를 중심으로 성립되어 배달민족이라 자칭하며 수천년동안 중화족과 세력을 겨루어욍다. 동이족으로 본다면 단군 통치아래 동방 조선의 구이가 모두 한 겨레이며, 말갈 여진뿐만 아니라 일본도 왜이족으로서 여기에 포함된다. 비록 역사가 진행되면서 배달민족이 분열되어 현재는 만주족과 한족 그리고 일본족으로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는 또한 우랄 알타이 언어 계통의 퉁구스 몽골인종에 속하므로, 더 올라가면 선비족이나 흉노족의 나라로 불리는 북방의 거란과 몽고뿐만 아니라 서방의 티베트 헝가리까지 소위 광역 이족(夷族)에 의해 세워진 나라로서 동족개념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다.     네번째 설: 배달이라는 말을하기전에 흉노를 알지못하면 설명할수가 없다. 흉노의기원은 제3대단군 가륵임금이 자신의 동생인 색정을 흉노의 지역에 보내 흉노의 우두머리가 된이후로 색정은 흉노의 시발이 된다. 기원전 2177년전에 색정은 이렇게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배달이라는 말의 기원은 흉노제국이 생긴 기원전 204 ~207년에 박타르(바타르)가 건국하고 BC 207~ 216년에 모돈선우가 전조를세워 중원을 누비던시기에 생겨난것이다. 거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한 박타르(bakttar)는누구인가? 유라시아의영웅이며 전유럽을 재패했던 그야말로 흉노의 영웅중의 영웅이다. 흉노(shun-nu)는 슝누/순-누 라고불렀으며 고대 알타이어로는 하늘또는 해를뜻한다. 즉 하늘의겨례 태양의족속의 의미를 shun 이라고 불렀다. 슝/순의 정확한발음은 (ㅎ슝)이다 ㅎ과 ㅅ 발음이 섞여불렀다. 때로는 훈,슝,순,슈-웅, 이라고 불렀던것이다. 선비는 AD 216~349 년에 선비씨에의해 후조가 세워진이래, 선비모용씨의 전연 AD 349~370 년에 건국한 모용황은 동호로 불리웠다. 후연 AD 370~ 386 또한 부여 고구리계의 동호가 세운 선비국이었다. 선비,오환족이세운 북위는 AD 386 ~534 년에 단석괴가 세워 통치했었다. 선비 (shun-bi)=슝비,순삐.의 bi는 유일 ,하나라는뜻으로 유일한태양, 유일한천손 이라는뜻이다. 고대알타이어에 하늘과태양을뜻하는언어로 호(hor)(호르)가 있다. 중국화하족이 이호를 昊로 표기했었는데 이것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황 皇으로 대항해서 사용했다. 동이의 태양과천신을 의미하는 호 (昊 )에 대항해서 지나가( 皇)을사용 함으로서, 중국에는 황제 (皇帝)가 있었고, 동이족에게는 호천제 昊天帝가 있게 된것이다. 이호(昊)라는 동이계열의발음은 정확하게 ㅋㅎ~ㄹ 이다. ㅋㅎ~ㄹ (ㅋ=高 忽)고~홀 자와 같이 쓰였던 것이다. 그러다 호 ~ㄹ 은 방언체계를가져서 chor ,zor, sor, 등으로 불리게된다. 촐/졸/솔/ ==은 홀본, 졸본, 솔본이 된것이다. 즉 하늘의 태양의 의미이다. 고조선은 원시 알타이어를 사용했다. 흉노(슝노/순노) 선비(순삐/슝삐) 조선(朝鮮)은 chor- sun 초 ~ㄹ 순, 호~ ㄹ 순(hor-shun)또는 소 ~ㄹ순/슝(sor- shun)으로 불렀다. =즉 하늘의 빛나는 태양 이라는뜻이다. 태양의자손 하늘의천손을 자부하는 흉노(슝누), 선비(순삐), 조선(초~ㄹ순) 등 shun계와 또다른 태양족 천손을 자부하는 고제씨(高帝氏)인 쿠리(구리)(코리) qori 계열이 단군왕검(tangur agahan)을 모시고 중국대륙을 위협했다. 이것은 중국의 태양신 황(皇)과 동이의 태양신 호(昊)간의 상징적인대결 이었다. 중국의 화하족이 이 (昊)를 오랑캐호(胡)로 바꿔 써버린것이다. 흉노 (匈努), 선비(鮮卑)처럼말이다. 슝누역시 여러종족이 있었고, 순삐역시여러종족, 촐순/초~슝또한 여러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태양신 단군(tangur 탕그르,텡그르)의 후예들이었으며, 태양새(qori 코리)(쿠리)를 똑같은이름으로 부르며 숭배했다. 그리고 玄鳥 qori (코리/쿠리)는 고구려(qori)의 또다른 이름이었고, 화하족의 용과 자웅을 겨뤘던 봉황의 또다른 분신이었다. 그들은 중국에도 있었고 한반도에도 있었으며 일본, 서역, 시베리아 로마, 아메리카, 아프리카에도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었던간에 그들은 바타르게레(batar-gere)(배달겨례) 로서 영웅족을 이루어 때론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상무정신과 기상이 우리피속에 흐르고있다. 그래서 배달(baedal)이란말은 흉노제국을 건설한 유라시아의 절대영웅 바타르(batar)에서 온것이며, 그뜻은 영웅이란뜻이다. 몽골의 수도가 울란바타르(현대어=울란바토르)는 울란=붉은, 바타르(현대어 바토르)는 영웅 이라는뜻이된다. 퉁구스어족에는 아에 자신을 batar (바타르)라고 부르는 민족도 있다. 겨례는 고대알타이어 게레(gere)에서온말이다. 그뜻은 민족 이라는뜻이다. 그래서 바타르게레 (batar - gere)는 영웅민족 이라는 뜻이되는것이다. 바타르게레 (batar - gere) 라고 부르면 우리는 영웅민족 이라고 외치는것이된다. 몽골에가서 바타르-게레 라고 외치면 유식한몽골인들은 금방알아듣는다. 고대알타이어(바타르- 현대몽골어로는 바토르) 게레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어 다 알아듣는다.
17    한국인사가 정리한 <중국의 개혁, 개방사> 댓글:  조회:2961  추천:0  2012-08-08
중국의 개혁, 개방사 중국의 15억정도 되는 인구는 대단한 자원임과 동시에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은, 진, 한, 오호십육국, 수, 당, 송, 원, 명, 청,나라시대에 그들이 세계의 중심국가라고 했던만큼 아시아지역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중의 하나가 서양의 물문을 빨리 받아들임의 요인도 속할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로 닫혀있던 중국이 자유화 물결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대 중국의 개방·개혁의 진행과정과 홍콩반환후의 모습 후 변화된 중국의 모습을 알아 보겠다. 또한 이러한 기회를 통해 중국의 개방사를 알게해준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1.배경 1)개방전의 중국 ♠1949년~1952년 1949년~1952년까지의 경제회복기를 통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한 후 1953년 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함으로써 소련의 스탈린주의식 개발전략인 '불균형 성장모델'을 모방하여 중공업 우선 발전 전략의 계획경제 체제를 채택하게 된다. 1949년 이전의 중국경제는 8년간의 항일 전쟁과 약 4년간의 국공내전으로 파탄상태에 있었으며 농촌은 극히 피폐되어 있었다. 1951년 평화적으로 태베트를 해방하고 나자 타이완과 진먼.횡후.마주등이 섬과샹깡.아오먼만을 제외한 중국대륙 전체는 통일이 되었다. 1950년 겨울부터 개혁.개방전의 중국은 우선재산 소유제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종전의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사회주의 공유제라는 공유재산제를 도입하였다. 이는 중국농촌의 정치,사회.경제.사상에서의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대대적인 반혁명적 세력의 진압을 실행하여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를 공고히 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내전이 폭발하였고,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펑떠화이를 사령관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여 북한지원에 투입되었고, 1953년 7월 정식으로 정전협의가 타결되고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1950년과 52년사이에 중국에서는 정권의 안정분야에서 「공동강령」의 원칙에 따라 민주정치를 통해 지방의 각급 정권을 수립하는 동시에 위로부터 아래로 국가 기본제도로서의 인민대표대회 제도가 건립되었다. 이어서 국가기구의 편제를 정비하여 간소화하는 작업도 이어지게 되었다. 중화민공화국의 건국 후 중국정부는 소수민족 지구에 민족적인 자치구역 정책을 실행하여 민족의 평등.단결.공동발전을 실현한 것이다. 1951년 겨울부터 다음해 봄에 국가기관과 경제부문, 각 기업과 사업의 단위마다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를 추방하는 '3방운동'을 전개하는 정치를 해나가기 시작하였고, 1952년 중국 정부는 국유화과정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불법적인 개인기업가들을 소멸해 버리기 위해 '5반운동'을 전개한다. 이때는 또한 농업과 기타 중요한 농·공업 생산성과는 모두 역사상 최고기록을 초과하고 있으며, 국내외무역도 모두 신속한 회복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1953년~1957년 1953년 중국은 계획적으로 대규모의 근대화를 향한 발전에 착수했는데, 그 발전 방침은 중국공산당이 제출한 '과도시기의 총노선'이라는 것이었다. 즉, 마오쩌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완성하기까지는 하나의 과도시기이다. 이 과도시기에서의 당의 총노선과 총임무는 상당히 긴 시간을 필요할 것이며, 기본적으로 국가의 공업화와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적 상업의 사회주의에로의 개조를 실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53년~57년)이 소련의 도움으로 실시되었다. 이 계획은 농·공업의 연평군 성장률은 11.9%에 달하였고, 그 가운데 공업은 연 18%, 농업은 4.5%, 경공업은 연 12.9%, 중공업은 25.4%의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1차5개년 계획 동안 중국지도자들은 노동력 활용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집약적 공업투자에 치중하여 실업문제가 야기되었고, 농업부문의 성장률을 저하시켰으며 국제수지 불균형의 문제를 악화시켰다. 1954년은 제1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켜서, 중국이 법치국가로 나가는 중요한 지표가 제시되었다. 1955년 런따 제2계 제2차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 병역법」과 법규.조례를 통과시켜, 인민군의 의무병역제, 계급제, 봉급제를 실행하여 인민군 정규화의 중요한 조치와 지표를 마련했다. 여름이후로는 개체농업과 수공업과 자본주의적 상공업을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급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56년에는 농촌지역에서는 토지개혁, 농업합작화, 농촌인민공사등의 방식을 통하여 소유제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도시에서는 국민당정부가 운영하던 공영기업은 몰수, 사영공상기업은 '공사합영'으로, 개인수공업은 '합작화'방식으로 소유제를 개조하여 사유재산제도를 기본적으로 폐지하였고 해마다 공유제의 비중을 높여 갔다. 1957년 2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전국에 5백만 이상의 지식인들이 있는데, 그가운데 10%이상은 우파라고 추산하여, 재능있는 지식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을 제거하였다. ♠1958년~1960년 1958년에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는 것이 목표였고 모택동은 농.공업 분야의 침체일소와 비약적인 발전을 목표로 한 2차5개년 계획(1958~62년)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대약진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노동력이 조직화되어 농촌지역에서는 '농촌인민공사'가 조직되었고 농촌의 집체화를 통한 '정사합일'체제가 확립되었다. 농민의 재산은 모두 인민공사에 헌납하여 공동소유로 하였고 생활은 남녀 공동 합숙소에서 생활하였는데 1959년부터 3년간의 홍수, 가뭄, 해충등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농업생산량이 격감하는 등 실패를 맞게 되었다. 1960년7월 소련정부는 갑자기 일방적으로 몇 백개에 달하는 계약을 철회하고, 자연재해로 인하여 60년에서 51년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참고]집체소유제 : 사회주의적 전민소유제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적 성격을 가지는형태. ♠1961년~1965년 대약진운동은 많은 문제점들을 남기고 실패함에 따라 중국 당국은 대약진 정책을 수정하였는데, 모택동이 후퇴하고, 등소평이 전면에 나서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62년말이 되자 상황이 많이 호전되면서 농업생산력과 생산 수준도 더이상 하락하지 않았다. 1963년에서 65년까지 다시 지속적인 조정이 있어서 공업총생산은 국민소득과 국가재정수입, 주요농업, 공업 생산량에 있어서 1957년을 초과하였다. 이에따라 경제적 장려제도가 부활되고 정권수립 후 처음으로 농업부문의 성장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자유시장제가 도입되고 전문관료와 기술자의 경영 참여가 허용되었으며, 농업생산성이 향상되는 등 정책은 비교적 성공적이어서 중국경제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모택동이 권력회복을 위하여 유소기와 등소평을 주자파로 몰아 처절한 권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경제상황을 마비시키게 된다. ♠1966년~1976년 문화대혁명시기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시의 실세 권력자인 유소기. 등소평등 소위 실무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으킨 문화적 정풍운동으로 시작 되어 모택동과 그 추종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1975년 당시 총리인 주은래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 기술의 '4개현대화'를 제시하였고, 주은래 및 모택동의 사망후 화국봉이 이를 승계 추진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은 등소평 집권 후 중국을 개혁.개방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1976년 9월9일 사망한 모택동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은 명백히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였다. 화궈펑은 요즘의 강택민처럼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 중앙군사 위원회 주석, 국무원 총리 등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모조리 독점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강택민이 최고 실력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회의의 막후 실력자는 따로 있었다. 11기 3중전회는 덩 샤오핑의 뜻대로 진행됐고, 덩샤오핑의 뜻에 따라 개혁개방 정책이 결정됐다. 화궈펑의 집권시 중국공산당은 66년부터 76년까지 10년동안 계속 된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의 어수선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홍위병들 이 중국 대륙 전역을 누비며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문화대혁명은 76 년 1월8일저우언라이(주은래)총리가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종말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4월5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베이징 중심부의 천안문광장에 홍위병 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의 손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시민들은 잠시후 자신들이 가 져다놓은 꽃다발을 치워버리려는 공안경찰 인민해방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에는 1만여명의 공안경찰과 인민해방군이 출동, 곤봉으로 광장에 모여있던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해 해산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1차 천안문사태였다. 9월9일에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7월6일에는 주 더가 세상을 떠났다. 중국공산당 1세대를 이끌던 세 개의 '큰 별'이 잇달아 떨어진 것이었다. 10월6일 중국공산당은 화궈펑에게 당중앙 주석과 당중앙 군사위원 회 주석을 맡기는 결정을 내렸다.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궈펑이 무력을 쥐고 있는 예지엔잉 당시 국방부장과 잘 '협의' 한 결과였다. 10월14일 중국공산당은 4인방이 '분쇄'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화궈펑은 당·정·군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국면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인방을 분쇄해놓고도 문화대혁명은 찬양하는, 헷갈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요즘도 중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베스트셀러 '교봉'은 "4인방이 없는 문화혁명이 계속되던 시기" 라고 표현, 중국 지도자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그런 분위기에서 77년 7월에 열린 제10기 3중전회는 등소평을 당 부주석과 중앙군사위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군을 쥐고있는 예지엔잉이 "덩샤오핑 동지 같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손해"라면서 복권을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1977년~1978년 1978년 10개년 경제개발계획을 확정하고 급속한 발전을 추구하는 급진정책을 계획하였다. 농업의 기계화 및 120개의 대형 프로젝트건설 추진 등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킨다는 의욕적인 계획으로 부족한 자본과 기술을 서방이나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겠다는 방침이었으며 '양약진'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비현실성으로 경제를 더욱더 어렵게 하였으며, 농업생산량은 저조하였고, 경공업투자부족으로 생필품은 품귀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경제를 중시하는 실용주의노선 표방과 양약진 추진 동안 실무파들의 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1978년 12월 당 11기3중전회에서는 사회주의 현대화,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기본방침이 채택되어 등소평 노선이 확정되고 1979년 4월 중앙공작회의에서 '조정.개혁.정돈.향상'의 신팔자 방침을 채택함에 따라 중국은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을 포기하고 혁명보다는 경제 건설에 치중하는 실용주의 노선에 의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기 간 부분간 우선순위 기술선택 지원수단 유인체계 1차5개년 계획기(1953~57) 중공업, 경공업, 농업 자본집약적 대규모 소련원조 물질적유인 대약진기(1958~65) 중공업, 경공업, 농업 노동집약적 소련원조 중단 자력 갱생 비물질적 유인 경제조정기(1961~65) 농업, 경공업, 중공업 자본,노동집약적 자력 갱생 물질적요인 문화대혁명기(1966~76) 중공업, 농업, 경공업 노동집약적 자력 갱생 비물질적요인 2)중국의 개혁,개방후 ♠농업개혁시기(1979년∼83년) 경제개혁을 농촌에서부터 시작한 이유는 첫째가, 중국최대 다수의 인구인 70%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였고 농민과 농업문제가 중국혁명과 건설의 근본 문제이다. 둘째로, 농촌인민공사 체제는 실행과정에서 생산효율의 저하로 농업생산의 정체를 가져와 중국 경제발전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었다. '농업생산 책임제'는 생산대 소유의 토지를 여러종류의 청부생산제하에 분배하는 방식으로 토지는 여전히 공유제이나 농민이 자주적으로 생산 및 경영하도록 하는 거이다. 1980년 중국정부는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농업생산 책임제를 실시토록 하여 2~3년 후에는 약 90%이상의 생산대대에서 농가생산 책임제가 시행되었다. 또한 이중 경영체제를 수립하여 집체경영과 개인경영을 다같이 중시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농촌경제개혁은 1980년대 중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도시상공업개혁시기(1984년∼88년) 도시를 중심으로 한 개혁으로서 1984년 10월 당 12기 3중전회에서 경제개혁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채택하였다. 첫째로, 기업의 활성화를 중심 고리로 하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는 자주권을 확대시키며, 기업경영과 관리방식을 개혁하여 공장장에게 생산.일반관리 권한을 주고 기업활동의 전반에 걸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공장장책임제가 실시되었다. 둘째로, 시장메커니즘의 제한적도입으로 상품가격과 노무가격의 왜곡과 가격체제를 조정 개혁하였고, 셋째로는 기존의 경제체제하에서 국가가 기업의 관리라는 미시적 경제활동에 따라 거시적 경제 관리 업무에 소홀히 하였던 바, 거시경제 조정체계를 수립.건전화시키는 일이다. 넷째는 공유제를 주체로 한다는 전제하에 다양한 소유제경제를 발전시키고, 마지막으로는 국가.집단.개인간 그리고 중앙과 지방간의 합리적인 국민수입분배국면을 형성한다. ♠치리정돈시기(1988년∼91년) 1988년 봄 가격개혁의 실시단계에서 소매몰가의 폭등으로 인플레이션심리가 만연되어 상품 사재기, 예금인출등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하반기에는 물가가 상승하여 '경제환경에 대한 처리, 경제질서에 대한 정돈'이라는 조정정책을 실시하였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를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한 보수파는 정권 및 테제 불안의 비상시국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치리정돈'정책을 이용하여 비교적 안정되었다. 또한 1991년에는 북경 아시아게임의 성공적 개최로 유리하게 작용되었고, 1991년 8월3년간의 긴축정책을 종결하였다. ♠개혁심화·개방확대시기(1992년∼1997년) 1992년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확대와 심화를 독려하는 내용의 소위 '남순강화'를 발표하였고, 이를 위하여 경제발전을 가속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이 담화는 1992년 2월 당 중앙 2호 문건으로, 1992년 3월 당정치국 전체회의에서 당 중앙 4호 문건으로 구체화 되어졌다. '남순강화'의 '개혁.개방 가속화'요구 내용은 당 14기 전국대표 대회에서 그대로 수용되어 경제운용 기본노선의 근간이 되었으며, 현재 중국이 추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경제체제 개혁에 있어서 국유기업의 경영체제를 시장 대응형으로 전환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였으며, 대외개방에 있어서는 '4년개방'으로 불려지는 전 방위 지역 개방과 무역, 금융, 백화점 등 3차 산업을 개방하고, 무역체제 개혁을 통한 시장개방작업을 추진하였다. 강주석과 주부총리는 '상해방'은 연고지인 상해를 향후 95계획의 중점발전지역으로 밀어붙여 광동성등 다른 연해지역과 내륙지방의 반발을 샀으며, 특정지역에 대한 편파적인 특혜라는 분위기가 지도부내는 물론 다른 지방에 팽배해 있었다. 등시대에는 지방에 대폭 경제권한을 위임하는 방임자세를 취했지만 3세대 지도자들은 중앙의 권위강화가 바로 체제의 안정과 지결된다는 판단에서 위임권한의 회수에 전력하였다. 즉, 95계획안은 각 파벌과 지방세력이 자기의 이익을 위한 힘겨루기 이며 장기발전전략보다는 지역적인 파당권익만이 반영되는 비효율적인 타협안이었다. ♠개혁·개방 연표 ▲77년 7월=덩샤오핑 복권 ▲78년 12월=11기 3중전회에서 4개 현대화노선 채택 ▲79년 1월=미국과 수교 ▲79년 2월=리셴녠,계획경제를 위주로 시장경제를 보조수단으로 하는「주보론」수립 ▲79년 6월=제5기 전인대 2차회의,「조정·개혁·정돈·제고」현대화8자 방침 결정 ▲80년 8월=선전 주하이 산터우 경제특구 지정 ▲84년 10월=제12기3중전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영 사태로 자오쯔양 총서기실각.장쩌민 총서기 취임 ▲91년 3월=국민경제·사회발전 10개년계획(1991~2000)발표 ▲92년 2월=덩샤오핑,남순강화로 개혁·개방 촉진 ▲92년 10월=당 14전대회,「사회주의 시장경제」표현 결정 ▲93년 3월=헌법개정안 채택 ▲93년 6월=주룽지 국무원 부총리,인플레억제책 시행 ▲94년 7월=회사법,대외무역법 제정.주룽지 제1부총리 경제대권 장악 ▲97년 9월=세계은행, 2020년 중국 GDP규모 미국,일본이어 세계3위 전망 ▲98년 3월=주룽지 총리 취임 3)중국의 이론 피라미드 '사회주이 초급단계론'이 전체의 기본을 이룬다. 그리고 사회주의이기는 하나 아직 생산력이 낮은 초급단계에 처해 있는 중국에서 채택해야 할 목표노선으로서 이 하나의 중심과 두 기본점이 제출되었다. 그 내용은 경제건설이 모든 활동이 중심목표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 노선이 네가지 기본 원칙과 개혁.개방의 견지라는 것이다. 지금하나의 중심과 두 기본점이 목표하는 바는 경제발전 수준을 낮은단계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점에 있어서는 경제건설이 지상명제이고, 그 방법론은 네가지 기본원칙으로 공산당 독재의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개혁.개방으로 경제발전을 꾀한다고 한다. 2.중국의 개혁, 개방후 1)등소평사망에 따른 중국 등소평<1904∼1997>의 죽음은 중국경제에 대혼란 사태는 오지 않았다. 중국경제는 등소평이 없어도 자생력이 있으며, 정권승계되 이미 다 이루어진 상태여서 강택민체제가 갓 출범한 정권이 아니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었다. 오히려, '세계 최대의 개발도상국'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고, 등소평에 이어 개방정책기조를 그대로 이어받는게 확실했다. 새 정권은 과거의 계획경제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다.되돌아가면 국민들의 불만은 폭발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개혁 그 차체가 빚은 급격한 사회변화도 다른 불안 요인으로 지적된다. 국영기업 효율화 등의 여파로 실업자 1억명 이사이 발생, 대거 도시로 몰려들고 있어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등소평이 평소 시장 경제의 '필요악'이라고 지적해온 빈부차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관료의 부패와 권한 남용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고 있다. 강택민 주석을 비롯한 3세대 후계지도자들은 고도성장 위주의 등소평 노선으로 인한 부작용을 시정하는 차원으로 인플레억제, 지역간 경제격차 해소,농업중시,국유기업 활성화등의 정책을 적극실시,등이후 시대의 체제안정을 확보하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등소평 등소평은 중국을 부국을 향한 시장경제 사회로 개방한 인물로서 위대하다. 1980년 이후 등소평이 제시한 중국의 3단계발전전략은 주효했다. 첫단계로 1980년부터 1990년까지는 GNP를 2배로 성장하여 의식주를 해결하고, 두 번째 단계로 1991년부터 2000년가지는 GNP를 두배로 늘려 개발 도상국가의 중간 정도로 끌어올리며, 마지막 단계로 21세기의 중엽까지는 중국을 현대화한다는 것이 등소평이 미국 기자들에게 한말이었다. 키도작고 서방경제에 그리 해박해보이지도 않는 부도옹등소평이 이런 구상을 발표하면서 중국의 GNP를 4배로 성장하여 1인당 GNP 1,000달러인 제2단계를 2000년에 마무리짓겠다고 할 때에 믿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등소평의 구상을 5년이나 앞당겨 1995년에 달성하여 세계7위의 경제 대국이 된 위대한 날, 위대한 국민이라 할 수 있다. 등소평이 개혁이전이 중국은 전형적인 계획경제국가였다. 상품소매가격의 97%를 국가가 결정했고, 공업용 원자재 출고가격의 100%를 국가가 결정했다. 그러나 등소평의 개혁 정책 추진이후 1994년 중국 상품 소비가격의 국가 결정론은 7.2%로 줄어들었고, 국가가 가격을 지도하는 부분이 2.4%로, 중국이 시장경제에 가격을 자유화시킨 비율은 물 90.4%가 되었다. 공업용원자재도 국가가 가격을 결정하는 부분은 14.7%, 국가가 가격을 지도하는 부분은 5.3%로 시장에서 자유롭게 가격이 결정되는 부분이 80%로 늘어났다. 이쯤되면 완전 개방이라고 해도 좋다. 등소평의 개방과 개혁 정책이 수행되면서 1995년가지 중국에는 10만개에 이르는 각종시장이 생겨났다. 이 중 농산물 도매 시장이 2100여개, 공업용 도매 시장이 600여개, 생산품 원자재 시장이 800여개, 그리고 소규모 상업 체인망은 무려 1천 400만개나 늘어났다. 이리하여 1995년 현재 중국은 시장 상품 가격 지배율이 90%가 넘는 국가가 되었다. 대외개방은 4개의 연해 지역에서 경제 특구와 해남 대특구라는 이름으로 시험적으로 시작되었다. 4년 후에는 대외개방 경제 특구가 열 네 곳으로 늘어났다. 1985년에는 양자강과 주강, 그리고 민남의 세 삼각주로 개방했다. 이어서 1988년에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그리고 환발해 지역을 개방하여 연해 지역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였다. 뒤이어 중국은 장강 내륙14개 도시를 개방하여 연해 지역은 물론이고 내륙 국경 지역에 이르는 전 중국 개방을 단행했다. 2)홍콩반환 ♠영국의 홍콩강점 홍콩은 원래 광동성, 신안현에 속하며 주강구 연해의 작은 어촌이다.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은지 10여년후 청조가 태평천국(1853-1864)의 난에 의해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아편무역을 합법화하기 위해 1856년 10월 광주의 황포에서 청조 관헌이 영국 국기를 걸고 있던 중국인 소유 상선 "애로우호"에 타고 있는 해적을 체포하자 영국의 광주주재 영사는 이 배는 영국선이라고 우기며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와 공동 출병, 1957년말 광주를 침략하여 소위 '제2차 아편전쟁'을 발동했다. 1858년 5월 영불 연합군이 천진 입구의 대고의 포대를 함락하자, 청조 함풍제(재위 1851-1861)는 영국·프랑스와 각각 을 맺었다. 그러나 후에 이를 내심 반대한 청조의 공격에 후퇴당했던 영불은 다시 1860년 7월 2만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9월 천진을 점령, 명·청간의 번영을 상징했던 북경 근교의 황궁 원명원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10월 북경을 함락, 청조를 굴복시켜 각각 을 체결했는데, 영불은 이 에서 일체를 다시 인정받아 천진을 추가로 개항시키고, 또 영국은 홍콩섬 맞은편 '구룡사지방'(현재 구룡반도 남부의 계한가 이남의 영토)을 할양받고, 영불 연합군은 군사비 배상으로 각각 800만냥을 받기로 결정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 강화를 중간에서 조정한 대가로 1858년의 에 이어 1860년 11월 에 의거 동북지역인 흑룡강 이북의 영토와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 및 쿠릴열도(사할린)를 포함한 100만㎞²의 광대한 영토를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획득했고, 이후 19C말까지 서북지역의 51만 Km2를 또 획득해 갔다. 그외에도 중국은 상해로부터 서쪽으로 양자강 상류까지의 주변 일대는 영국의 세력하에, 대만과 복건성 및 만주와 한반도는 일본 지배하에, 산동 일대는 독일의 세력하에, 만주 위쪽과 외몽고·내몽고 일대의 긴 북쪽지역은 러시아의 세력하에, 그리고 남쪽 광동·광서·해남도·곤명 일대는 프랑스의 세력하에 각각 배타적으로 편입되었다. 게다가 1895년 청이 중일전쟁 패전이후 열강이 다투어 중국에게 '조차'를 요구할 때, 영국은 1898년 6월 9일 다시 홍콩 부근을 광동일대의 프랑스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하에 북경에서 중·영란 것을 체결하여 지금 심천 이남의 신안현의 심천하 이남과 구룡반도 계한가의 이북지구의 넓은 지역과 이 부근에 속한 235개 도서를 99년간 조차해 갔다. 후에 이 중국대륙과 연결된 지역을 '신계' 즉,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칭해지게 되었는데, '신계'의 빌리는 기간은 1997년 6월까지로 했다. 위의 모든 할양받은 지역과 빌린 지역을 합쳐 간단히 '홍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신계' 지역은 홍콩 전체 면적의 92%를 점할 정도로 크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댓가로 어떤 보상도 받은 바 없다. 이처럼 힘없는 중국은 완전히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지게 되고 열강은 엄청난 이익을 중국을 포함해 전세계로부터 탈취해 간 것이다. ♠홍콩중국에 반환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됨에 따라 중국대륙은 50년동안 1국가 2체제(일국양제)유지를 약속을 했지만, 적지않은 홍콩인들과 외국자본이 해외로 빠져 나갔으며, 중국정부가 상하이등 연안도시들을 무역항으로 집중육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홍콩이 '자유항'으로써의 이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하였지만, 반환이 된 후 증시는 좋았고, 부동산 경기 또한 좋았다. 즉, 경제력만 놓고 보면 홍콩은 중국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중국의 자본이 홍콩으로 진출하였고, 중국과 화안이 합작으로 설립한 은행도 생겨났으며, 홍콩의 부족한 인력난을 인건비도 싼 중국 출신 인력이 매워졌으며, 문화적 동질성까지 공유하여 홍콩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3.중국의 개혁, 개방 후 문화 현대 중국인의 색생활은 아침 일직 북경의 거리를 나가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거리 곳곳에 있는 유조 또는 유배라 불리는 밀가루 음식과 조로 쑨 죽 또는 두장을 사서 먹거나 집으로 가지고 가서 먹는다. 점심 또한 마찬가지이고, 저녁은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서 먹지만 현대 생활에 그럴 시간적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북경을 비롯한 중국의 대도시에는 외식 산업이 성업중이다. 중국의 노점상들은 현대화를 정돈된 도시로 파악하는 정부정책에 밀려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이 그렇듯 국가도 세금 걷기에 불리한 노점상을 고깝게 볼 리가 없다. 더욱이 공산화 50주년을 맞아 가로사업을 대대적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노점상들의 어려움은 적지 않다. 또한 개방과 함께 할인마트인 '까르프'의 중국식 표기인 지아러프는 '가정에 기쁜 복'이라는 특유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한국에서 '이마트'나 '킴스클럽'으로 알려진 대형할인마트는 중국 대도시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아러프의 성공이후 '홈클럽'이라는 할인마트가 생기는 등 종류도 다양해 졌다. 이곳도 한국의 할인마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가전제품에서 식료품까지 모든 것을 구비해 놓고 있다. 백화점, 이제는 시들어가지만 그래도 천진은 중국에 여행온 여행객들이 쇼핑을 위해 들리는 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건이 싸고, 종류가 많은 곳이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대형백화점과 거리시장이 있는 '빈장다오'(濱江道)다. 이곳은 중국을 대표하는 쇼핑공간중에 하나다. 특히 빈장다오의 거리를 타고 길게 뻗어있는 노점상은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리상점이었다. 하지만 이곳도 중국공산화 50주년을 맞아 완전히 현대식 상가로 변모했다. 우선 좌판 자체가 금지되면서 상점들이 완전히 상가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규모에서의 위용은 잃지 않아, 지금도 거대한 상가가 밀집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남대문을 생각나게 한다. 중국에서도 백화점은 이미 쇄락해가는 조루현상을 보이고 있다. 할인마트 등 가격이나 질에서 급격하게 도전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화점은 모든 제품이 안정적인 품질로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할인마트와는 변별력을 갖고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서 이혼율은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들어 급증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신장된 여권과 여성의 고등교육화로 인한 결혼 필요성 감소, 경제적 독립이 늘어가면서 더욱 심해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4.중국의 현시점 1999오늘의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이 설계하고 장쩌민이 시공하는 새로운 역사적 실험이 진행중이다.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실험은 자주 대신 개방을,투쟁대신 개혁을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자본주의는 경쟁이나 투쟁이 아닌 협력과 모방의 대상이며 부의 축적은 전체보다 개인이나 소집단에 의해 선도될 수 있다는 참으로 혁명적인 발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1997년 말 기준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60달러에 달해, 사상처음으로 '저 소득 국가(785달러 이하)'에서 벗어나 '중등소득 국가(786∼3125달러)'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국민총생산(GNP)도 1조달러를 돌파, 국가별 순위에서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7위 에 올랐다. 지난 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채택이래 중국의 발전은 실로 눈부시다. 79년부터 97년까지 중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9.8%에 달한다. 지난 78년 대외무역액은 206억달러로 세계 27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난해는 3251억달러를 기록, 10위로 껑충 뛰어올랐다.78년 1억 7000만달러에도 못미쳤던 외환보유고는 97년말 1399억달러로 불어나, 일본에 이어 세계 2위가 됐다. 여기에 홍콩의 외환보유고(928억달러)를 합치면 중국은 외화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된다. 세계의 투자가 중국으로 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문화혁명의 대혼란에서 벗어나 경제 건설을 국가 제1목표로 설정 한 뒤, 12억 중국인들은 20년만에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경제 기적' 을 이룩했다. 이들의 고도 성장세는 이미 한국을 추월한지 오래이고, 세계경제강국의 대열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97년 여름부터 아시아를 휩쓴 경제위기에도 끄덕하지 않고, 올해 8%에 육박하는 성장을 이룩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무서운 '성장의 관성'은 향 후 수년 동안 쉽게 무너질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다 주룽지(주용기)정부는 올 초 국유기업과 정부개혁, 금융개혁 등 3대 개혁과제를 설정하고, 3년내에 이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에 따라 올 한해 국유기업과 정부부문에서 수많은 실업자가 쏟아져나오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주룽지 정부는 개혁 드라이브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미 중국은 일부 품목에서 세계 제1, 2위의 '공장'이 돼 있다. 컬러TV의 경우 중국은 세계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차이홍 캉자 등의 전자업체는 세계적인 TV수출업체로 발돋움하고 있다. 냉장고 에어컨 VCR VCD 컴퓨터 등 중급기술 제품들도 생산능력 과 기술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시멘트도 중국이 최대 생산국이며, 화학비료는 세계 2위이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연간 소득 1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이 3000만명에 달하고, 3000달러 이상의 중산층이 1억에 달하는 엄청난 내수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이 거대시장은 외국인 투자를 부르는 가장 큰 흡인력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대중국 투자의 감소세를 말하기 도 하지만, 이 시장을 외면할 기업은 별로 없다. 이에따라 21세기에 도 중국의 '세계 공장'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북대태평양과기발전센터는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1,2,3층 수천평 매장은 IBM, 컴팩, 삼성,LG등 외국유명 업체와 리엔샹 베이다팡정등 국내 업체들로 가득차 있으며, 2002년까지 이 건물 옆에 20층짜리 ‘연구개발빌딩’이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은 전시-계약-판패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미래 정보산업의 메카가 될것이다. 군사면에서 중국은 21세기에도 지속적인 군사력 강화를 추진할 것이지만,'경제 우선'의 원칙에 따라 '다극화'와 '평화공존'의 외교 노선을 견지할 것으로 관측된다. 중국은 그동안 '경제를 먼저 발전시키면,군사 현대화도 가능하다'는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내부적으로 군사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왔다. 중국은 이 군사력을 '전쟁 억 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경제를 '중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당분간 국가 에너지를 몰두할 것으로 예상된다. 급속한 경제발전 혜택이 중국 전지역에 골고루 미치지 못했다.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21세기 첨단산업과 우마차를 이용하는 운송수단스카이 라인이 화려한 도시와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농촌이 공존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부유 도시에는 호화 빌딩과 호텔들이 즐비하고 승용차가 자전거전용도로를 점령할 정도로 급증한 반면 이에 비례해 매연과 범죄,매춘,노동착취,마약문제도 폭증했다. 중국인들은 모든 사람이 가난한 것은 참아도, 불평등한 것은 참지 못하는 심리가 있다. 지역간의 지속적인 경제불균형은 사회불안요소로 이어질 수 밖에없다. 따라서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부연해지역과 서부내륙지역의 경제 격차를 해소하는것이 시급하다. 5.중국과 우리나라 지난해 홍콩에 대해서는 100억 달러의 흑자를, 중국에 대해서는 28억 달러의 흑자를 보았다. 2000년에는 홍콩과의 교역규모는 250억 달러, 중국과의 교역규모는 450억 달러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이중 홍콩으로부터는 230억 달러의 흑자를, 중국으로부터는 30억 달러의 흑자를 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는 최근 교역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00년에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 의존도가 26.3%, 2005년에는 33.4%, 2010년에는 39.9%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중국과 홍콩을 합칠 경우 우리 수출의 17.4%를 차지해 미국을 제치고 최대시장으로 부상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이는 한국의 대 중국 의존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향후 중국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통찰하고 대 중국정책을 펴나가야 한다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의 생산력과 홍콩의 자본·기술·관리·마켓팅 능력등이 합쳐지면 곧바로 한국 제품과의 경쟁범위가 확산될 것이 예상되고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며 우리의 최대 경쟁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더구나 중국은 매년 유치되는 외자가 400억 달러에 이르러 한국의 외자유치가 시작된 1962년부터 1995년까지 투입된 외국자본 총액인 180억 달러와 비교할 때, 중국 1년간 외국인의 투자액이 30여년간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액 보다도 2배 이상 많다는 놀라운 점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홍콩 사이의 관계는 날로 긴장될 것으로 전망되므로 한국은 제품의 가격·품질·기술면에서의 경쟁력 제고와 합리적인 기업운영, 국제경쟁력 및 협상능력 제고, 정부의 올바른 경제정책, 정치적 신의와 역량증대 등으로 중국과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반드시 중국과 선린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강화해 남북한의 힘을 집중·단결하고 경쟁력을 제고해서 우리의 대 중국 경쟁능력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6.중국의 미래성 중국은 지난 96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21세 기 '중국경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9·5계획과 2010년 장기목표 요강(이하 요강)'을 채택했다. 이 '요강'은 제9차 5개년 계획기간 (1996년∼2000년) 동안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8%로 유지하고, 오는 200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지난 80년의 4배 수준(약 1000달러)으로 끌어올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2010년까지는 국민총생산(GNP)을 2000년의 2배로 배증시킨다 는 계획이다. 이에 앞서 지난 87년 중국은 '3단계 발전 전략'을 통 해 21세기 중반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중진국 수준(약 4000달러)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결국 중국은 1인당 국민소득을 2000년까지는 1000달러로, 2010년까지는 2000달러로 끌어올려 '소강(약간 여유가 있음)'을 실현한다 는 계획이다. 한국과 대만 등이 이미 여러해 전에 달성한 경제 목표를 중국은 21세기중반까지의 과제로 설정한 셈이다. 하지만 '요강'에는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중국인들의 경제적 욕구만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요강'은 중국의 '전통적인 계획경제 체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과 경제성장 방식을 '조방형'에서 '집약형'으로 전환한다는 2개의 체제전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전자는 '생산관계'의 개혁을, 후자는 '생산력의 발전'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울러 '요강'은 농업에서부터 교통운수 통신 에너지 기계 전자 석유 자동차 건축 등 각 산업 분야와 과학기술 교육 국유기업 개혁 등 장기 개혁 과제를 설정하고 있다. 경제구조의 근본을 바꾸고, 사 회 모든 부문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이다 중국은 최근까지 연평균 12%의 경제성장률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2010년까지 8~9%, 2020년까지 8%의 성장을 지속한다면 2020년의 중국은 국민총생산이 미국을 능가하여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과 앞으로 20년이면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전국토를 벤처기업과 첨단지식경제의 동부, 자원공급지역인 서부, 서부개발을 지원하고 동부의 산업을 이어주는 중부를 각각 특색있게 개발한다는 전략하에 전국토 3분대게발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목표는 건국100주년인 2050년까지 8,000-1만달러 수준까지 끌어 올려 부강하고 문명하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중국경제가 세계경제호조, WTO가입,확대재정정책 효과 등에 힘입어 올해를 기점으로 상승기조로 전환될 것이라는 중장기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 중국의 미래는 그러나 온통 장밋빛만은 아니다. 향후 수 년간 중국지도자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실업과 정치 민주화 문제가 될 것이다. 2000만명을 넘는 실업자들은 생존권 확보를 위한 시위에 나서는 등, 이미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불안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들의 불만은 대학생 지식인 기업인 등의 정치 민주화 요구 와 결합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주도의 정치체제를 고 수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길게 보면 중국은 한 세기 전 서구 열 강의 '반식민지' 상태로부터, 21세기를 앞두고 세계사의 전면에 다 시 등장하는, '100년만의 대반전'을 이룩했다. '중국의 세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7.에필로그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한국의 속담이 있다. 정말 중국은 10년 동안에 1인당 국민 소득을 2배로 올린 세계의 유일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통계에서 보면, 일본은 35년이 걸렸고, 미국은 50년, 한국은 17년이나 걸린 것을 중국은 단 10년에 달성한 나라이다. 그들의 15억인구의 힘은 이렇듯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좀더 잘 살기 위해 개방을 택한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힘을 발휘하였다. 요즘 내가 느끼는 중국은 모든 물건에 MADE IN CHINA로 새겨 놓았다. 즉 그들은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여 모든 물품의 공급의 기지가 되어버린 듯 하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욱 더 심화 될 추세일 것이다. 21세기의 중국은 중국인 자신들만 자기 나라에서 먹고 입고 사는 시대가 아니라, 중국인이 만든 모든 제품이 전 세계인에게 공급되는 시대일 것이다. 거기다가 세계제일의 자유무역을 자랑하는 홍콩까지 포함하니 그거대한 땅과 거대한 노동력이 나는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중국인에게 바라고 싶은 점이 있다면, 잠시나마 회사에 머무르고 있던 시절 중국과 거래를 하였는데, 행동이 타국에 비해 좀 느리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좀더 민첩해 지는 것과 더불어 우리나라와 중국간의 사이에 있는 북한과의 관계가 평화와 번영을 함께 달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도록 최대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끝으로, 중국에관한책과, 홈페이지등의 자료등이 무수히 많은 것을 보고 놀랐고, 사회주의로만 인식하고 있던 나에게 중국의 개혁·개방사는 중국의 새로운 면을 보는사고전환의 기회를 주었다.   출처: 서적참고
16    한국역사 대사기 댓글:  조회:3618  추천:0  2012-08-08
한국역사 대사기 【1】 ※ 12해리 영해 선포:1978 대한 민국의 영해를 12해리로 한다고 널리 세계에 알린 일. 한국의 영해 범위는 1978년 4월 30일부터 발효된 영해법에 따라 12해리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제주 해협에서 만종전과 같이 3해리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제주 해협 및 모든 영해에 무해 통항(無害通航 : 외국의 배가 어떤 나라의 평화, 안전, 질서를 해치는 일이 없이 그 나라의 영해를 지나가거나 항구에 출입하기 위해 영해를 지나가는 일)원칙이 적용된다. ※ 2·8 독립 선언:1919 1919년 2월 8일에 일본의 도쿄에서 조선의 유학생들이 선포한 독립 선언. 일본의 도쿄에 있던 조선 기독 청년 회관에서 유학생 600여명이 친목회 명목으로 모여서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여, 그것을 일본 의회에 보내는 한편, 일본에 있던 외국 외교 기관과 언론 기관 등에 배포한 항일 투쟁 사건이다. 그 결과 대표자 60여 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8 독립 선언은 사전에 국내 각계 지도자들에게 은밀히 알려져 있었던 일로서 그 뒤에 일어난 3·1 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 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은 이광수로 알려져 있다. ※ 3·1 운동:1919 1919년 3월 1일에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에 맞서서 일어난 온 겨레의 항일 민족 독립 운동. 기미 독립 운동이라고도 한다. 1910년 일본의 강압으로 주권을 빼앗긴 뒤 국민의 항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을 즈음, 국내에서는 종교계, 교육계 지도자들 사이에 은밀히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진행되어 크리스트교 측 16명, 천도교 측 15명, 불교 측 2명의 33인이 민족 대표로 선정되고, 총대표로 손병희를 추대하였다. 마침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 : 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예상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려고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학생과 시민들이 탑골 공원에 모여들었고, 하오 2시에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낭독이 끝나자 2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시위로 들어갔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 운동은 3월과 4월에 걸쳐 절정에 이르렀으며,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지로까지 퍼져 나가 이 운동이 시작된 지 3개월 동안 211곳에서 200여 만 명이 참가하였다. ※ 4·19 의거:1960 1960년 4월 19일에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 부패와 부정 선거에 항거하여 일으킨 전국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의 책임 문제 등으로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국회를 통한 대통령의 간접 선거를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탄압하여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직접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뒤 1954년의 총선거와 1960년 3월 15일의 총선거에서도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시켜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와 같은 일당 독재와 부정 부패 및 부정 선거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이 4·19 의거로 폭발하게 되었다. 학생과 시민의 시위는 곧 다른 지방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 민주 정치의 발전을 기대하는 애국적인 학생과 시민들의 거센 시위는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승만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 5·16 군사 혁명, 민주당 정권 붕괴:1961 제2공화국을 맡은 민주당이 처음부터 신파와 구파의 세력 다툼으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가져오자 군부 내의 일부 인사 중 박정희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 내의 혁명 세력은 조직을 규합했다. 드디어 1961년 5월 16일 새벽을 기해 행동을 개시하여 무혈 혁명으로 장면의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서울 중앙 방송국을 통하여 혁명 공약 6개 조항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혁명 정부는 6개 조항의 공약대로 군정을 펴나갔으며, 1963년에 접어들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끝내고 민정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3일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이로써 ‘제3공화국’의 탄생을 보았다. ※ 6·10 만세 운동:1926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항일 만세 운동. 본래 이 날은 전국적인 항일 만세 운동을 일으킬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그래도 학생들이 주동하여 황제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격문을 뿌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민중들이 합세하여 시위 운동이 확대되었는데, 이 운동은 3·1 운동이래 주권 회복을 바라던 우리의 민족 정신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킨 것으로 뒷날의 광주 학생 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 8·15 광복으로 주권 회복:1945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1910년 이래 일제의 지배를 받아 오던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에 주권을 되찾게 되었다. 광복의 직접적인 계기는 연합군의 승리에 있었다. 연합군은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일본이 그 선언의 내용을 거부하고 항쟁을 계속하자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게 되었고, 그 결과 일본은 마침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은 결코 연합군의 승리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간접적으로는 국내에서의 끈기 있는 독립 투쟁과 국외에서의 항일 무력 투쟁, 그리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이 뒤따랐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오랜 독립 투쟁의 결과 연합국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고, 1943년 11월의 카이로 회담과 1945년의 포츠담 선언에서 독립을 보장받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중·일 전쟁 이후 중국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 간도 참변:1920 1920년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한 사건. 경신참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조선 내의 일본군과 관동 지방에 파견된 일본군 및 연해주 지역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동원하여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 급진 개화파 갑신정변 일으킴:1884 급진 개화파는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민씨 세력이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빨리 근대화를 이루려는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자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 갑오개혁 단행:1894 갑신정변의 실패로 세력이 꺾였던 개화 세력은 동학 운동의 반발을 계기로 다시금 내정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 동학군의 진압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성공하자 조선 정부에 대해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그들의 개혁 요구에 대해 이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거절하며 일본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출동시켜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세력을 몰아 낸 다음, 개화파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개혁을 단행하였다. 1894년 7월, 새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은 개혁 추진 기관인 군국 기무처를 설치하고, 3개월 동안에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친 208건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개혁의 기본 정신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마련하여 그것을 고종이 공포하도록 하였다. ※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1876 강화도 조약은 강화도에 침입한 일본의 군함 운요호에 대한 우리 포대의 발포 사건을 구실로 일본의 강요에 의해 1876년에 맺어졌다. 한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을 맺음으로써 쇄국 정책을 버리고, 일본에게 부산, 인천, 원산의 세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침략의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유럽 여러 나라들도 적극적으로 한국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경부 고속 도로 개통:1970 서울과 부산 사이를 잇는 경부 고속 도로는 1968년 2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0년 7월 7일에 완공 개통되었다. 도로의 규모는 길이 428km, 너비 22.4m인 4차선 도로이다. 이후 이 도로는 수도권과 영남 공업 지역, 부산과 인천의 2대 수출입항을 잇는 산업의 대동맥구실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과 부산 사이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어 지역 간의 균형 있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 경인 고속 도로:1968 서울과 인천을 잇는 고속 도로. 정식 이름은 ‘서울∼인천 간 고속 국도’이다. 도로의 규모는 길이 29.5km, 너비 20.4m인 4차선 도로이다. 1967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68년에 개통된 한국 최초의 고속 도로이다. 이 도로의 완성으로 서울과 인천의 산업 기능을 더욱 긴밀하게 묶어 하나의 큰 공업권으로 발전시켰다.   【2】 ※ 경인선 개통:1899 경인선은 서울(구로)과 인천을 잇는 길이 27km의 복선 철도로, 1899년 9월 18일에 먼저 제물포(인천)와 노량진 사이가 개통되었고, 이듬해에 한강 철교의 준공과 함께 나머지 구간이 연결되었다. 날로 늘어나는 교통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1965년에 복선으로 만든 데 이어 1974년에는 전철로 바뀌었다. 1964년 11월에 경인선 개통일인 9월 18일을 ‘철도의 날’로 정하여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 고구려, 태조왕 즉위:53 고구려는 고대 왕국 중의 하나로,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다스렸다. 국민성이 억세고 날쌔어 중국과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민족의 방파제 구실을 하였다. 태조왕은 고구려의 제6대 왕(재위 53∼146년)이자 유리왕의 손자인데, 신하들이 추대하여 7세에 왕위에 올랐다. 56년(태조왕 4년)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고구려 영토를 넓혔으며, 국가 체제를 부족국가 형태에서 중앙 집권 형태로 바꾸는 등 강력히 대외 발전을 꾀하여 고대 왕국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 고려:918 중세의 통일 왕조. 왕건이 후삼국의 분열을 수습하여 세운 나라이다. 918년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뒤로부터 1392년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기까지 34대 475년간 계속된 왕조이다. 태조 왕건은 본래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태봉(후고구려)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궁예를 몰아 내고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918년). 건국 후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통일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흡수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초기에는 호족 세력이 강성하여 왕권이 위협당하기도 했으나, 광종 때에 이르러 신구 세력의 교체를 통해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 성종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문종 때에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뒤 밖으로 여진의 압력을 받은 데다가 안으로 사회 모순이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 같은 내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내란이 수습되기도 전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그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약을 틈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권문 세가의 방해로 실패하고, 그 동안 지방에서 성장해 온 중소 지주층의 신진 사대부 세력은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과 연합하여 권문 세가의 세력을 꺾어 새 왕조 조선을 열게 되었다(1392년). ※ 팔만 대장경 완성:1251 팔만 대장경은 1011년(고려 현종 2년)에 거란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어려움에 빠지자,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안전을 꾀하려고 만든 것이다. 처음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무려 24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제1차로 처음으로 펴낸 대장경은 과 두 가지이다. 제2차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피란한 고려 조정이 또다시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고 세력을 물리치려고 대장경판을 만든 것이다. 1236년(고종 23년)에 강화도에 장경 도감(대장경을 펴내기 위한 임시 관청)을 두어 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1251년(고종 38년)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곧 오늘날 남아 전하는 이다. 의 경판수는 모두 8만 1,258판인데, 앞뒤로 새겨져 있어서 면수로는 모두 16만여 면에 이른다. 판목의 크기는 세로 24cm 안팎, 가로 69.6cm 안팎, 두께 2.6∼3.9cm로 후박나무에 새겨져 있다. 이는 해인사 대장경판이라 하여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한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 멸망:BC108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조선반도 최초의 국가로, 단군 왕검이 세웠다고 한다. 주위의 부족을 정복하면서 강대해져, 기원전 4세기경에는 중국의 연(燕)나라와 맞설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만주 남서부 일대와 요서, 조선반도 북부 지방에서 그 세력을 떨치다가 기원전 2세기경 이주민인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위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배 계급은 토착 세력과 연맹을 맺고, 중국과 조선반도 남방 사회와의 중계 무역을 통해 강성해졌다. 그러나 요동 지역에 대해 위협을 느낀, 한(漢)나라의 침입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기원전 108년). ※ 고종 퇴위:1907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63∼1907년) 고종은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세자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었다. 가장 혼란한 시기에 왕위에 올라 명성 황후(민비)와 대원군의 정치 싸움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동학 운동, 을사조약 등 큰 사건이 잇달았다. 1907년에 일본의 압력으로 제위에서 물러났으며, 1910년 조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뒤에는 이태왕으로 불리었다. 1919년에 일본의 음모로 독살당하였다. ※ 광주 학생 운동:1929 1929년 11월에 전라 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 운동.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본 한국 남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때림으로써 두 나라 학생들 사이에는 편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학생들끼리의 싸움이었던 것이, 광주 일보의 공정하지 못한 보도와 일본 경찰의 일방적인 한국 학생의 탄압을 계기로 차차 민족 감정으로 번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929년 11월 3일). 당시의 민족 단체였던 신간회는 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게 하는 데 힘썼으며, 그에 따라 학생들도 스스로 그들의 운동을 한 단계 높여 민족 운동화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마침 광주 장날인 11월 12일을 기하여 일제히 시위 운동에 들어가, 독립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 구석기 시대:BC500000년경 조선반도에서의 구석기 시대는 약 50만 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한반도의 전국 각지에서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의 구석기인들이 전국에 넓게 퍼져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기 구석기의 유물은 평남 상원군 검은모루,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남 공주군 석장리, 충북 제천군 점말 동굴과 청원군 두루봉 동굴 등지에서 출토되었고, 후기 구석기의 유물은 충남 공주군 석장리와 함북 웅기군 굴포리에서 출토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옮겨 다니면서 사냥과 고기잡이로 생활하였고, 불을 사용했으며, 소박한 원시 미술도 남겼다. ※ 국채 보상 운동:1907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운동. 1907년에 서상돈, 김광제 등이 대구에서 금주와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 보상회를 조직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등 언론 기관의 협조로 일반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펴 나갔으나, 일진회의 방해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우리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 정신을 발휘한 구국 운동이었다. ※ 귀주 대첩 승리:1019 1019년(현종 10년)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3차로 침입해 오자 고려군은 곳곳에서 그들을 잘 막아 싸웠다. 이에 소배압은 사잇길로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강민첨의 군사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이 길목을 지키던 강감찬이 귀주에서 그들을 맞아 싸워 거의 전멸시켰는데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하며, 이 때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 김구(암살):1949 백범(白凡) 김구는 1893년 18세에 동학당에 가입해, 접주가 되어 이듬해 해주에서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1896년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감형된 뒤에 탈옥하였다. 3·1 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으로 있으면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한편 장개석[蔣介石]의 국민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온 힘을 기울이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애쓰던 중 1949년에 암살당하였다. 저서에 가 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당선:1992 김영삼은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나, 1947년 경남 고등 학교를 거쳐 1952년 서울 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제3대 총선 때 26세로 최연소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60년 제5대 국회 의원에 재선된 이래 제14대까지 모두 9차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84년에 민주화 추진 협의회 공동 의장, 1986년에 신민당 상임 고문을 역임하고87년에 민주당을 창당, 총재가 되어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1990년에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의 3당이 통합되어 민주 자유당이 창당되자 민주 자유당 대표 최고 위원이 되었고, 1992년 8월에 민주 자유당 총재에 취임하였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7·4 남북 공동 성명:1972 1972년 7월 4일 한국과 조선 당국은 남북 조절 위원회를 구성 운영할 것을 합의하고 발표한 공동 성명. 7·4 남북 공동 성명이라고도 한다. 평화적 통일을 전제로 한 여러 문제를 민족 주체성에 입각한 남북 간의 직접 대화로 해결하고자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하에 남북 간 사전 교섭을 거쳐 이루어졌다. 통일 원칙으로서 외세의 간섭이 없는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해결을 들고 있다. 또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을 것과 군사적 충돌을 방지할 것 등 여러 가지가 나타나 있다. ※ 남북 상호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1974 1974년 1월 18일,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한국 정부의 조선에 대한 제의. 주요 골자는 ① 통일 수단으로 무력이나 폭력을 상호 포기할 것 ② 남북은 서로 내정 간섭을 하지 않을 것 ③ 현행 휴전 협정의 효력을 유지할 것 등이다. ※ 남북 적십자 회담:1971 남북간 이산 가족 찾기를 목적으로 열린 남북의 적십자사 대표자 회담. 1971년 8월 대한 적십자사의 ‘1천만 이산 가족 찾기 운동’제의에 따라 남북 적십자 대표가 서울과 평양에서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다. ※ 노량 해전 이순신 전사:1598 노량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운 마지막 해전으로, 1598년 (선조 31년)에 노량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른 싸움을 이른다. 이 싸움에서 왜적의 전함 400여 척을 쳐부수고 적군을 물리쳤으나, 이순신 장군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마지막으로 조선과 왜국 사이에 벌어진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3】 ※ 목판 인쇄물 다라니경:751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나온 불경. 본래의 이름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1966년에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을 복원 공사하던 중 탑 안에서 발견되었다.이것은 8세기 중엽(751년) 이전에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로서 신라 시대에 이미 인쇄술이 발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단군(고조선 건국):BC2333 에 따르면, 단군은 천제(天帝:하느님)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 : 곰이 변하여 된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에 평양성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후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箕子)를 임금으로 삼은 다음,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 그 때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 한다. 이후 오늘날까지 단군을 겨레의 시조로 받들고, 환인이 환웅을 인간 세상에 보낼 때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하다(弘益人間)’고 판단한 것을 건국 이념으로 새기며, 오늘날 교육의 기본 정신으로 삼고 있다. ※ 대동여지도:1861 조선 말기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조선반도의 지도. 1861년(철종 2년)에 김정호 자신이 판목에 새겨 초판을 펴내었고, 1864년(고종 원년)에 다시 펴내었다. 특히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전도를 22첩으로 나누어 각 첩을 책처럼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용할 때는 2개 또는 3개씩 펴 놓고 볼 수도 있고, 모두 다 펴 놓고 전도를 한눈에 볼 수도 있다. 각 첩은 가로 8, 세로 12로 나눈 모눈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모눈 하나가 사방 10리가 되게 하였으므로, 각 첩은 가로가 80리(32km)로 결국 축척 16만분의 1지도가 되는 셈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든 다음, 다시 27년 동안 조선반도를 몸소 걸어다니면서 실제로 측량하여 만든 지도로서 그 정확함이 오늘날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 대한 광복군 정부 수립:1914 러·일 전쟁 10주년을 맞은 1914년에 러시아인들의 반일 감정이 높아지자,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들은 러시아인들과 연합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이상설,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은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이상설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만주에 사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 대한 민국 정부 수립:1948 광복 후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북위 38°선을 경계로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에 조선반도의 합법 정부로서 대한 민국이 수립되었다.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 총리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그 동안 남한을 통치했던 미 군정은 새 정부에 통치권을 이양하였다. 대한 민국 정부는 그 해 12월 12일에 유엔 총회에서 승인을 받았고, 다음해 1월 1일에 미국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민주 공화국이었다. ※ 대한 민국 임시 정부:1919 1919년 4월 13일에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조국 광복을 위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민족의 지도자 수십 명이 임시 정부를 세우기로 약속한 뒤 상하이 보창로에 임시 독립 사무소를 설치하고, 각 도의 대의원 29명이 의정원에 모여 헌법적인 임시 헌장 10 개조를 초안, 심의하여 민주 공화 정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헌장(헌법)과 나라의 국호, 연호가 선포되어 1919년 정식으로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원칙적으로 임시 정부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립 형태의 민주 공화 정부임을 분명히 밝히고, 1945년까지 27년 동안 유지되었다. 임시 정부는 중경[重慶]까지 여덟 번이나 옮겨다니면서도 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1948년의 대한 민국으로 연결되었다. ※ 대한 제국 성립:1897 1897년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 자신을 황제라 일컬어 자주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근대 국가로의 발전을 기약하여 관제를 개혁하고, 사회, 경제적인 자강 운동을 펴는 한편 민의가 반영되는 개혁 정치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끝내 자체 내의 모순과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 대한 항공 여객기 피격 사건:1983 1983년 9월 1일 승객 269명을 태운 대한 항공(KAL) 여객기가 소련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해역에 추락한 사건. 이 사건으로 승객 269명(15개국 국민)이 모두 사망하였다. 소련은 아무런 방비가 없는 민간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한 야만적인 행동에 대하여 세계의 모든 자유민들로부터 크게 규탄을 받았다. 피격된 지 1주년이 되는 1984년 9월 1일, 충남 천안군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 독립 신문 발간:1896 1896년 4월에 독립 협회에서 발행한 독립 신문은 처음으로 발행한 현대식 일간지로서,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서재필이 주동이 된 독립 협회의 기관지로서 자유 민권의 성장과 국민 계몽을 목표로 하여 국민들에게 근대 사상을 일깨우는 데 이바지하였으나, 정부의 독립 협회 탄압으로 유명 무실화하였다. ※ 독립 협회 성립:1896 독립 협회는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서구 근대 사상과 개혁 사상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조직되어, 민중을 계몽하고 온 겨레의 자주적 노력으로 자주 독립과 자유 민권의 성장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독립 협회의 급진적 개혁 요구와 세력의 신장에 점차 위협을 느껴, 오히려 독립 협회를 비난하면서 보부상을 중심으로 조직된 황국 협회를 앞세워 그 활동을 탄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단체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자, 그것을 핑계로 독립 협회를 모함하여 해산시키고 그 간부를 투옥시켰다(1898년 11월). ※ 동의보감:1610 1613년에 한의학자이며 전의이던 허준이 엮은 동양 의학서. 1596년(선조 29년)에 선조의 명에 따라 엮은 것으로 1610년(광해군 2년)에 완성하여 1613년에 펴내었다.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용은 내과학인 내경편 4편, 외과학인 외형편 4편, 유행병과 부인병·소아병 등을 다룬 잡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 목록 2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해 놓았다. 이 책은 동양 의학의 기본 이론에다 풍부한 임상 경험을 더하여 체계적이며 실용적으로 엮은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의학술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 최제우가 동학 일으킴:1860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에 최제우(崔濟愚)가 일으킨 종교이다. 당시 세도 정치로 말미암아 사회가 매우 어지러웠고, 외국 세력이 들어와 민심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최제우가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천주교)에 반대하고, 예부터 내려 오던 하느님 숭배 사상과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이룩한 것이 동학이다.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을 기본 교리로 하는 이 동학이 삼남 지방을 비롯하여 경기, 황해도 지방까지 크게 퍼지자 나라에서는 이를 사교(邪敎)로 규정,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이어 최시형(崔時亨)이 다시 교조가 되어 교세를 크게 넓혔다. 동학은 1894년(고종 31년)에 발생한 동학 운동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조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고쳐 계속 교세를 넓히기에 힘썼다. 한편, 동학은 이 때부터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로 갈리었다. ※ 동학 운동:1894 1894년에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중 운동. 갑오 농민 전쟁 또는 동학 혁명이라고도 한다. 역사상 외국의 세력에 대한 항쟁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면서 편 가장 큰 민중 운동이다. 동학 운동의 핵심은 악정(惡政)에 대한 항거, 내정 개혁 요구, 외국 세력의 배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의 싸움에서 동학군이 패전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동학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동학 운동의 의의는 부패한 지배 계급에게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민중의 자각을 크게 높인 데 있다. 그리고 외국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굳건히 심어 놓은 데 있다. ※ 마라난타, 백제에 불교 전함:384 에 따르면 인도의 스님이었던 마라난타는 384년(백제 침류왕 1년)에 중국의 진(晋)나라를 거쳐 백제에 와서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고 한다. 그 후로 백제에 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마산 3·15 의거:1960 1960년에 자유당 정부의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여 일어났던 의거. 1960년 3월 15일에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규탄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발포하여 사태를 진압하였다. 같은 해 4월 11일, 앞서 희생된 김주열(金朱烈) 학생의 시체가 바닷가에 떠오르자, 이에 흥분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다시 궐기함으로써 4·19 의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대전 엑스포 개막:1993 산업 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각 나라의 생산품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만국 박람회(엑스포)는 1851년에는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한국이 최초로 국제 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1889년(고종 26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였다. 그 때 출품한 것은 갓, 모시, 돗자리, 가마 등이었다. 1993년에는 사상 최대 규모의 대전 엑스포가 8월 7일 개막하여 11월 7일까지 93일 동안 성황리에 계속되었다. ※ 만적의 난:1198 고려 신종 1년(1198년)에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 운동. 만적은 개성의 북산에 공사 노비가 모인 자리에서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우리네도 상전 밑에서 고생만 할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면서 난을 일으킬 것을 의논했다. 이에 여러 노비가 찬동하여 관노는 관청에서, 사노는 성내에서 들고일어나 권신과 상전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살라 버린 뒤에 정권을 잡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한 사노의 밀고로 계획이 사전에 드러나, 노비 해방을 위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망이·망소이난:1176 1176년 고려 명종 때 충청 남도 공주의 명학소에서 일어난 천민의 난. 천민 수공업자의 집단 거주 지역인 명학소에 살던 천민들이 망이·망소이의 주도 아래 일으킨 신분 해방 운동이다. 고려 무신 정권하에서 일어난 천민의 저항 운동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은 공주를 점령한 후 북진하여 1년 반 동안 청주와 아산 등 충청도 일대와 경기도 남부까지 휩쓸었다. 정세유가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난을 계기로 정부는 향·소·부곡 등 천민 거주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는 등 천민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게 되었다. ※ 명량 해전:1597 1597년(선조 30년) 9월 16일에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왜군 함대를 크게 쳐부순 싸움. 적의 함대 133척이 조수(潮水)의 흐름을 따라 명량으로 쳐들어온 것을, 12척의 병선으로 맞아 격전 끝에 적선 31척을 쳐부순 싸움이다. 그 싸움으로 우리 수군이 빼앗겼던 제해권(制海權)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고, 왜적의 기세를 크게 꺾어 놓았다.   【4】 ※ 묘청의 난:1135 고려 인종 때(1135년) 묘청이 일으킨 난. 당시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한 데다 밖으로는 새로 일어난 금나라가 고려에 압력을 가해와 사회가 크게 불안하였다. 이에 서경 출신 귀족들은 개경파 귀족을 몰아 내고 개혁 정치를 실시하고자 서경 천도와 금나라 정벌,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 등 보수적인 개경파 귀족들이 이에 적극 반대하므로, 묘청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묘청의 무리는 한때 자비령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김부식의 토벌로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 난이 있은 뒤 고려 지배층의 보수화가 더욱 심해져 북진 정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 무신의 난:1170 고려 때 무신들이 일으킨 변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풍조와 무신에 대한 여러 가지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났다. 좁은 뜻으로는 정중부의 난(1170년)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고려 시대에 있었던 무신의 난 모두를 가리킨다. 무신의 난이 처음 일어난 것은 현종 때의 김훈, 최질의 난이며, 그 뒤 정중부의 난으로 본격화하여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등이 잇달아 집권자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여 무신 정권 시대를 이루었다. ※ 문익점 원나라에서 목화씨 가져옴:1363 고려 말기의 학자, 문신인 문익점은 1363년에 사신의 한 사람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그 곳에서 처음으로 목화밭을 보았고, 솜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를 인도에서 들여온 지 오래지 않은 터여서, 목화씨나 그 재배 방법이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막고 있었다. 그런데 문익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심어 가꾸어 그 재배에 성공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세종 22년에 영의정 벼슬이 내려졌다. ※ 물산 장려 운동:1923 1923년부터 물산 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우리 민족 경제 자립 운동. 일본에 빼앗긴 경제권을 회복하려는 경제 자립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입어라, 먹어라, 써라.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구호 아래 자급 자족, 국산품 애용,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의 실천 요강을 마련하고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 발해 멸망:926 발해는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이 말갈족을 이끌고 지금의 만주 지방 부근인 길림성돈화현 동모산에서 자립하여 세운 나라이다(698년).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였는데 뒤에 발해로 고쳤다. 국력을 크게 떨쳐 한때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중기 이후 계속된 왕위계승을 둘러싼 지배층의 내분이 피지배층인 말갈족을 자극하여, 그들이 차차 발해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면서 힘이 약해져 228년 만인 926년에 거란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926년). ※ 백제, 16관등과 공복 제정:260 백제는 고구려·신라와 더불어 삼국 시대를 이룬 조선반도 고대 왕국 중의 하나이다. 고구려의 한 갈래인 위례 부락에서 시작하여 3세기 말인 고이왕 때 고대 왕국의 기틀을 마련, 260년에는 왕 아래에 16등급의 관리를 두고 등급에 따라 옷 색깔을 달리 하기도 하였다. 이후 4세기부터 크게 발전하여 경기도·충청도·전라도와 황해도·강원도의 일부까지 차지하는 등 세력을 뻗쳤으나, 계속되는 고구려의 압력과 신라와의 투쟁에 밀려 660년에 소정방과 김유신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에게 서울이던 사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하였다. ※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마라톤 우승:1936 베를린 올림픽은 1936년에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렸던 제11회 올림픽 대회로, 49개 나라에서 4,308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특히 올림픽의 꽃이라고 불리는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였고, 남승룡 선수가 3위를 차지하여 우리 민족의 장한 기상을 온 세계에 떨쳤다. ※ 병인양요:1866 1866년(고종 3년)에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대원군이 카톨릭 교도들을 박해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죽임을 당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열고자 로스(Ross)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일부는 서울로 쳐들어왔으나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부대에 패하여 한 달 만에 물러갔다. 그 결과 프랑스의 위신은 크게 떨어지고, 이에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 더욱 쇄국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 보장왕 때 고구려 멸망:668 보장왕은 고구려의 제28대 왕(재위 642∼668년)으로, 영류왕의 아우였는데,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그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은 뒤 668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평양성이 함락되자, 대신들과 함께 항복하여 고구려는 70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 뒤 당나라에 잡혀 갔으나 사평대제백원외동정(司平大帝伯員外同正)에 책봉되고, 677년에 요동주 도독으로 조선왕에 봉해졌으나 말갈족과 함께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다가 귀양가 여생을 마쳤다. ※ 봉오동 전투:1920 1920년에 조선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 홍범도가 지휘하는 간도의 대한 독립군이 국내에 들어와 큰 전과를 올리자, 일본군은 이를 보복하려고 대한 독립군의 본부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던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와 합세하여 일본군을 간도 왕청현 봉오동으로 유인, 포위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것은 독립군이 조직된 이래 첫번째로 거둔 통쾌한 승리로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출동한 일본군을 다시 크게 무찌른 전투가 청산리 대첩이다. ※ 부여 멸망:346 기원전 1세기경 부여족이 세운 나라인 부여는 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 북부의 눙안과 장춘 지방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5부족 연맹체로서,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업과 목축을 겸한 생활을 했다. 풍습에는 영고라는 제천 의식이 있었고 정치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마가, 저가, 구가, 우가라 불리는 부족장들로 구성된 귀족들이 맡아 보았다. 뒷날 부여 왕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국호를 동부여라 고쳤다. 346년에 전연의 모용황에게 멸망하였고, 그 후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되자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 사사오입 개헌:1954 1954년 11월 29일에 사사오입 원칙을 적용하여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불법으로 통과시킨 사건.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헌법 개정안이었는데, 국회의 표결에서 재적 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재적 의원 3분의 2인 136표에 1표가 모자라 부결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이틀 후에 203명의 3분의 2는 사사오입하면 135명으로 충분하다는 이론을 내세워 가결되었음을 다시 선포하였다. 그 표결 과정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한 내용 모두가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우리 헌정사상 큰 오점을 남긴 개헌이었다. ※ 살수 대첩:612 612년에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의 침입을 맞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무찌른 싸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구려를 누르려 했으나, 고구려가 먼저 돌궐을 몰아 요서 지방을 공격하자 양제가 몸소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제는 먼저 요동성을 공격하는 한편, 따로 30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직접 평양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맞은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하여 그들을 평양성 부근까지 유인한 다음, 그들이 속은 것을 알고 후퇴할 때 살수에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 때 살아 돌아간 수나라 군사는 불과 2,7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며, 그 비참한 패전으로 수나라는 내란이 일어나서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1145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김부식이 임금의 명을 받아 엮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책으로, 오늘날 남아 전하는 우리 민족 역사책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기전체로 된 것으로 내용은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류(志類), 열전(列傳)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50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고려 때 간행된 것 가운데서 7권만이 성암 고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이계복이 간행한 목판본이 경주의 옥산 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 삼국유사:1285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一然)이 엮은 역사책. 지은 연대는 대개 1281∼1283년(충렬왕 7∼9년) 사이로 보고 있다. 그 내용은 고조선, 대방, 부여 등의 역사를 간략히 기록한 후,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가 정사(正史)인데 대해 는 야사(野史)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정사에 빠진 사실들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전설, 설화 및 불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고, 또한 신라 향가 14수가 실려 있어서 고대 어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 고려 때의 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1512년(조선 중종 7년)에 이계복이 다시 펴낸 것이 전한다. ※ 신라, 삼국 통일:676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우리 민족을 통일한 일. 화랑도 정신으로 국민 정신을 통일하고 한강 유역 점령으로 경제적인 힘을 갖춘 신라는 660년(무열왕 7년)에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 668년(문무왕 8년)에는 고구려마저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 내어 3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만 차지하게 되어 고구려 영토이던 중국 동북 지방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하여 그 전까지 정치, 사회, 문화를 달리했던 우리 민족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할 수 있게 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었다. ※ 삼별초의 난:1270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가 몽고의 세력에 저항하여 일으킨 반란. 몽고의 침략 아래서의 조정에 대한 반란이자 항몽의 싸움이었다. 최씨의 무인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도에 피란해 있던 조정은 환도 문제로 논란이 심했다. 개경환도(開京還都)는 몽고에 굴복하는 일이라 하여 삼별초에 속하는 무신들은 환도를 주장하는 문신들과 맞서게 되었다. 몽고에서 굴욕적인 약속을 하고 돌아온 왕이 삼별초를 설득하였으나 그들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환도가 결정되고 삼별초를 해체시키자는 조정의 결의가 있었다. 이에 삼별초는 몽고의 공격을 예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1,000여 척의 배로 강화에 있는 가족들과 재물을 싣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군은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잡았으나, 관군과 몽고군에 밀려 일부는 달아나고 일부는 탐라(제주도)로 들어가 저항하였다. 조정에서 회유책을 써 보았지만 그들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합군의 탐라 공격으로 결국 삼별초는 항몽 정신만 남긴 채 저항하다가 진압되고 말았다. ※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 인쇄:1234 상정고금예문은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국가나 사삿집의 예문(예법을 밝힌 글)들을 모아 엮었다는 책으로, 이라고도 한다. 이규보의 문집인 에 이 책을 1234년(고종 21년)에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책은 전하지 않는다. ※ 새마을 운동:1970 지역 주민들의 생산 기반과 생산 능력을 개발하여 소득 수준을 높이고, 의식 개혁으로 인간 정신의 계발과 사회 개발을 촉진하는 국민 대중 운동. ‘새마을 만들기 운동’, 또는 ‘잘 살기 운동’이라고도 한다. 새마을 운동은 한국에서 1970년 4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하여 이듬해인 1971년부터 범국민 운동으로 전개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져 운동의 이념과 전개 방법을 직접 배워 가기도 했다.   【5】 ※ 서울 아시아 경기 대회 개최:1986 1981년 11월 26일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 연맹(AGF) 임시 총회에서는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할 것을 만장 일치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서울에서 제10회 아시아 경기 대회인 서울 아시아 경기 대회가 열렸다. 86 아시안 게임이라고도 한다. ※ 서울 올림픽 대회:1988 1988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 경기 대회. 1981년 9월 30일에 독일의 바덴바덴시에서 열린 제84차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대 27의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제24회 올림픽 대회를 서울로 유치하게 되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그리고 세계에서는 열여섯 번째로 올림픽 대회를 여는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대회는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서울을 비롯하여 수원, 부산, 대전, 대구, 광주, 성남시 등의 여러 경기장에서 열렸다. 운동 경기 외에도 국제 회의, 한국 도자기전, 한국 복식전, 한국 회화전, 민속놀이 등 27종의 각종 문예 행사가 개최되었다. ※ 세종 즉위:1418 세종은 조선의 제4대 왕(재위 1418∼1450년)으로, 이름은 도,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충녕 대군으로 있다가 2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곧 이어 왕위에 올랐다.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청렴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대한 자문과 왕실의 교육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궁중에 정음청(正音廳)을 두어 1443년에는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과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편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다. 과학 기술 부문에도 관심을 가져 장영실로 하여금 측우기를 만들게 하고, 궁중에 흠경각을 세워 과학 기구들을 비치하게 했다. 그 밖에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고, 역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전제 상정소를 두어 전제와 세제를 정비했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북방 변경 지방을 개척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 상류에는 4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일본과는 제포, 염포, 부산포의 3포를 열어 무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국교를 지속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英陵)이다. ※ 항일 운동, 소작 쟁의:1921 소작 쟁의는 일제 시대에 한국인 소작인들이 일본인 지주들에 대해 벌였던 쟁의이다. 노동 쟁의와 더불어 항일 운동의 하나를 이루었으며, 1921년 이후에 발생해서 1930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한국인에게 강제로 토지를 빼앗은 일본인은 소작권 박탈과 소작료의 부당 징수를 요구했다. 이에 항거하여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 순도, 고구려에 불교 전함:372 순도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에서 귀화한 승려로, 372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의 명령으로 사신을 따라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들어왔다. 그것이 조선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시초였다. 고구려에서는 그에게 초문사(肖門寺)라는 절을 지어 주었다. ※ 시월 유신 선포:1972 시월 유신은 1972년 10월 17일을 기하여 단행된 일종의 자체 혁명으로서, 이를 계기로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이 체제는 유신 헌법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 1972년 12월 27일부터 시작되어 1981년 3월 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끝이 난 셈이다. ※ 항일 운동 단체, 신간회 조직:1927 신간회는 1927년에 조직된 민족 최대의 항일 운동 단체로, 민족의 단결과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를 배격하는 등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앞서 1920년대에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와 이를 따르는 여러 단체가 조직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서로 다투게 되었는데, 민족주의자들이 이러한 대립을 피하기 위해 민족 단일 조직을 갖기로 하고 이상재를 회장으로 조직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교묘한 탄압과 사회주의 계열의 중상 모략으로 만주 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에 해산되었다. ※ 신라:356 고대 왕국 중의 하나.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삼국 시대를 이루었다. 진한의 한 나라였던 경주 평야의 사로(斯盧)가 발전한 나라로서, 사로는 초기에는 박, 석, 김씨의 세 부족이 연맹하여 지도자인 이사금을 선출하였으나, 이들이 주체가 되어 점차 사로 6촌이라는 6부족 연맹체를 이루고, 1세기경에는 기마 전투 기술을 도입하여 주변의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 왕국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내물왕 즉위 해인 356년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쓰는 등 왕권을 강화해 나갔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화와 토착 문화를 잘 융합시킴으로써 힘을 길러 삼국을 통일하였다. 통일 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워 평화와 번영을 누리다가 8세기 후반부터 여러 가지 사회 제도의 모순이 드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못하고 10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고려에게 나라를 넘겨 줌으로써 신라 천 년의 영화는 끝이 났다. ※ 신미양요:1871 1871년(고종 8년)에 미국 군함이 강화도 일대에 쳐들어온 사건. 1866년(고종 3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하자고 대동강으로 와 소란을 피우자 평양 군민이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하여 미국은 조선을 책망하고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북경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 아시아 함대를 출동, 강화도 일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미국의 군함은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을 공격하였다. 그 때 조선은 무장 어재연(魚在淵) 등이 나서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양쪽 군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미군은 물러갔다. 그 결과 흥선 대원군은 의기 양양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폈다. ※ 일본에 신사 유람단 파견:1881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기수와 김홍집 등이 일본의 근대 문물 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부에서는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으로 신사 유람단을 조직, 1881년(고종 18년)에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약 4개월 간 일본에 머무르면서 근대 시설과 여러 가지 제도 및 산업 시설까지 두루 살피고 돌아와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함으로써 개화 정책의 추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신석기 시대:BC4000년경 우리 민족은 대체로 기원전 4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초기에는 주로 해안이나 강변에서 어로, 수렵, 채집으로 생활하였으며, 말기에 이르러 조, 피, 수수 등의 곡식을 생산하는 농경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 신재효:1812 1812∼1884 조선 말기의 가인(歌人). 호는 동리(桐里)이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중년 이후의 여생을 판소리 연구에 바쳐 많은 판소리 사설을 썼다. 고종 때에는 그 때까지 계통 없이 불려 오던 소리를 통일하여 등의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화 어구도 고쳐 독특한 판소리 문학을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 는 광대의 경전이라 일컬어지며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 아관 파천 사건:1896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1년을 지낸 사건. 일본은 청·일 전쟁이 끝난 후 명성 황후가 침략적인 태도를 취하자, 1895년에 명성 황후를 시해하고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세웠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 황제는 일본의 만행을 피해 1896년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가 1년을 머무르면서 그 곳에서 모든 정치를 행하였다. 그 동안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에 넘어갔다. ※ 황영조, 히로시마에서 마라톤 우승:1945 아시아 경기 대회는 아시아 지역 국가 간의 우호와 친선 및 평화를 목적으로 4년마다 올림픽 대회의 중간 해에 열리는 것으로, 한국은 6·25 전쟁으로 제1회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제2회 마닐라 대회부터 참가하였으며, 특히 1986년에 열린 제10회 대회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한편 1994년에 일본에서 열린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을 하기도 하였다. ※ 안익태, 애국가 작곡:1937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는 일본 구니타치 음악 학교를 졸업한 뒤 1936년에 유럽에 건너가 작곡을 공부하였고, 1937년에 를 작곡하였다. 그 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름 있는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으며, 결혼한 뒤에는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여러 번 귀국하였고, 3회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 음악제를 개최하였다. 생전에 그는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의 200여 교향악단을 지휘함으로써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로 이름을 떨쳤다. 1965년 문화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등의 작품이 있다.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저격:1909 안중근은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을 팔아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에 대한 의군 참모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함경 북도 경흥까지 쳐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일제 침략자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역에 내리자, 그를 쏘아 죽이고 이듬해 려순 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묵을 남겼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옥포 해전:1592 임진왜란 때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 함대를 무찌른 해전. 옥포 싸움이라고도 한다. 1592년(선조 25년) 5월, 경상 남도 장승포의 옥포 앞바다에서 우리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함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동서로 포위하여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함들에게 맹렬히 포격을 가하여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적함 26척을 격침시키는 큰 전과를 올림으로써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 날 하오에는 합포(合浦) 앞바다에서도 적의 대형함 5척을 발견하고, 이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 운요호 사건:1875 1875년(고종 12년)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경기만에 불법으로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강화 수비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 강화도 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굳게 지키자 일본은 무력으로라도 문호를 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군함을 보내어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도 물길을 따라 초지진 포대에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이에 강화도 수비군이 포를 쏘아 위협하자, 그들도 맞서 포를 쏘면서 초지진을 부수고 영종진까지 부순 다음, 군사와 주민들을 죽이고 무기와 그 밖의 물자를 빼앗아 돌아갔다. 일본은 이듬해 이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군함을 앞세우고 나타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게 되었다. ※ 최초의 근대적 학교 원산 학사 설립:1883 원산 학사는 최초의 근대적 학교로, 1883년에 함경 남도 덕원 주민들이 원산에 세웠다. 문예반 50명, 무예반 200명으로, 산수, 물리, 양잠, 외국어, 법률, 지리, 국제법 등 근대 학술과 무술을 가르쳤다.   【6】 ※ 위만 조선 건국:BC194 위만은 부하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한 중국 연나라 사람이다. 고조선의 준왕은 그를 믿고 후대하여 북방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에 위만은 유민(流民)들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을 쫓아 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위만 조선을 세웠다. ※ 위화도 회군:1388 고려 말에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킨 사건. 우왕이 즉위한 뒤 고려가 친원 정책으로 기울자, 명나라는 원나라가 다스리던 쌍성총관부 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분개한 고려에서는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론이 일어나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는데, 처음부터 이에 반대하던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 이르러 진군을 멈추고 회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회군을 단행하여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귀양보내어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이어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우면서 신흥 사대부들이 세력을 얻어 조선을 여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 ※ 윤봉길(폭탄 투척):1932 항일 의사인 윤봉길은 1930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상하이의 홍구(紅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서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등을 죽이고, 노무라 해군 대장과 시게미쓰 공사 등 많은 일본군 병사들을 부상하게 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오사카로 붙잡혀 간 뒤, 결국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을 받았다. ※ 을미개혁:1895 을미사변 후 일제에 의해 수립된 친일 내각에서 추진한 개혁. 갑오개혁의 정신을 이은 것으로 그 내용은 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소학교 설립, 우편 제도 실시, 연호 사용, 군제 개편과 단발령 시행 등이다. 그러나 을미사변 후 크게 악화된 배일 감정으로 국민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단발령은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해쳐 그 때문에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을미사변:1895 1895년(고종 32년)에 일제가 명성 황후를 살해하고 일본 세력의 강화를 꾀했던 정변. 삼국 간섭 후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크게 줄어든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회하려 했으나, 명성 황후 등 민씨 세력이 침략 정책을 고집하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 등 침략 세력을 죽인 다음, 친일파 인물들로 내각을 꾸며 갑오개혁 후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단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잔인 무도한 일본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배일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러한 배일 감정을 틈타 침략 세력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 을사사화:1545 1545년(명종 1년)에 왕실 외척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사화. 중종은 장경 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문정 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는데, 두 왕후에게 모두 동생이 있어 그들이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하자 그 외숙인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을 많이 등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뜻을 이루지 못한 사림들은 명종의 외숙 윤원형의 밑에 모여 기회를 엿보다가,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즉위하여 윤원형이 득세하게 되자 윤임 일파를 모함하여 모두 제거하였다. 그것이 곧 을사사화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었는데, 윤원형 일파의 모함으로 그 여파는 그 후에도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 의자왕 백제 멸망:660 백제의 마지막(제31대) 왕(재위 641∼660년)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무왕 33년(632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641년에 왕위에 올랐다. 642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미추성 등 40여 성을 빼앗고, 윤충을 시켜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쳐서 성주인 품석(品釋) 등을 죽였다. 그 뒤에도 당항성, 요차성(지금의 상주)을 쳐서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늘그막에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며, 성충과 같은 충신의 말을 듣지 않다가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계백 장군으로 하여금 황산벌에서 싸우게 하였으나 패하였다. 그 뒤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 그 곳에서 병으로 일생을 마쳤다. ※ 이봉창이 일본 국왕에게 폭탄 투척:1932 서울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가정이 어려워 국민 학교를 중퇴하고 점원과 기관차 운전 수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19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 직공이 되었다. 그는 일본 사람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그들의 횡포와 압박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1931년에 중국 상해로 건너가 김구가 지도하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 일본 천황 암살을 결심하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32년에 일본 천황이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로 끝나고 붙잡혀 사형당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을 받았다. ※ 이승만 대통령 취임:1948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배재 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민영환의 도움으로 1904년에 7년 만에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대학 등에서 배우고,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9년에 상해에 임시 정부가 세워지자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었고, 1933년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총재와 민주 의원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48년에 제헌 의회 의장에 뽑히고,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그 해 광복절에 취임하였다. 제2대,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장기 집권과 자유당 정권의 부패로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 의거가 일어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하와이에 망명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이차돈(순교):527 이차돈은 신라 법흥왕의 가까운 신하로 일찍부터 불교를 믿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려 하였으나, 고유 신앙과 고유 습속에 젖은 뭇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이차돈만이 불교를 받들 것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순교할 것을 자청하여,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에 반드시 기적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목이 잘리자 과연 그의 예언대로 젖빛같은 흰 피가 솟구치고 천지가 캄캄해지더니 꽃비가 쏟아져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한다. 이에 모두 놀라고 감동했으며, 527년에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률사의 석당(石幢)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며, 그 곳에 자세한 사실이 적혀 있다. ※ 인조 반정:1623 조선 인조 1년인 1623년에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과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를 몰아 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인조)으로 모신 사건. 광해군의 실정으로 비롯된 서인들의 무력 정변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으나 당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자신을 옹립한 대북파들의 문란한 정사에 말려들어 자포 자기 상태가 되었다. 이이, 정인홍 등의 모함으로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 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 대비마저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의 이귀, 김자점, 김유, 이괄 등이 반정을 모의 거사하여 성공하고, 인목 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을 왕으로 받들었다. ※ 임오군란:1882 1882년(조선 고종 19년) 6월에 일본식 군제(軍制)와 민씨 정권에 반항하여 일어난 구식 군대의 병란.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와서 난을 간섭하게 되고, 일본과 강제로 제물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 임진왜란:92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온 싸움.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정유년에 또다시 쳐들어온 싸움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조선은 선조 때에 접어들어 양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으면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는데, 이처럼 조선이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와 대륙 침략을 꿈꾸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정군을 편성하여 1592년(선조 25년)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5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고 6월에 평양을 빼앗겼으나, 해상에서는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거북선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내륙에서는 각계 각층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항전하였다. 그러나 7년 동안 계속된 전란으로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에 조정은 유비 무환을 깨닫고 훈련 도감을 만들어 무예를 닦게 했고, 각 지방에도 교관을 두어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도 재래식에서 개량, 발명하여 대비하게 되었다. ※ 고려 중기에 전주 관노들의 난:1182 전주 관노들의 난은 고려 중기에 일어난 천민의 난이다. 명종 12년(1182년) 경대승 집권시 전주의 사록(司錄) 진대유와 상호장(上戶長) 이택민이 백성을 수탈하자, 기두(旗頭)였던 죽동 등이 중심이 된 전주 관노들이 난을 일으켜 한때 전주를 점령하였다. 정부에서는 박유보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일품군과 승병들이 이를 진압하였다. ※ 정묘호란:1627 1627년(조선 인조 5년)에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싸움. 광해군을 몰아 내고 즉위한 인조가 친명 배금 정책을 쓰고,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철산의 가도에 진을 치고 요동 회복을 꾀하자,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후금이 그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침입했다.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의 폐위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의주, 정주, 곽산을 거쳐 황해도 평산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 정봉수와 이입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적과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조는 강화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본래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조선과 쉽게 화약이 이루어져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 정유재란:1597 1597년(선조 30년)에 조선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과의 싸움. 임진왜란의 3년여에 걸친 화의가 깨지자 왜군이 다시 침입하였는데, 이 때에는 이미 조선 관군과 의병이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명나라의 원군도 곳곳에 와 있어서 쉽게 막을 수 있었다. 다시 기용된 이순신의 활약으로 본국과의 연락이 어렵게 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을 핑계로 달아남으로써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게 되었다. ※ 제5공화국 성립:1980 1979년 10월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후,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새 헌법의 발효로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81년 2월 25일에 제11대 전두환 대통령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3월 3일에 취임하고, 그 해 3월 25일의 총선거로 제11대 국회가 구성됨으로써 출범하였다. 대통령 선거인단 선출에 의한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여 중임을 금하였다. 주요 정책은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 사회 건설, 정의 사회 구현, 교육 혁신과 문화 창달로 집약될 수 있다. ※ 일본과 제물포 조약 체결:1882 임오군란으로 공사관이 불타고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은 군란 후 군함과 병력을 보내어 제물포에 상륙시킨 다음, 조선에 대하여 임오군란의 책임을 묻고 협상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이유원을 보내어 협상을 하고 제물포 조약을 체결(1882년)하게 하였는데,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을 주둔시키도록 하는 한편,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가면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7】 ※ 제암리 학살 사건:1919 3·1 운동 때 일본 군대가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을 집단 학살한 사건. 수원 제암리 무차별 학살 사건 또는 수원 예배당 사건이라고도 한다. 1919년 4월 15일에 아리타라는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본 군경이 제암리에 몰려와서 크리스트교인, 천도교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한 뒤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또한 일제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렀으며, 인근 교회와 민가 등 31호에 불을 질러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일제의 이러한 만행은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였으며, 스코필드는 현장의 참상을 사진에 담아 미국에 보내어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1982년에 당시 문화 공보부(현재의 문화부)에서는 제암리 학살 현장의 유물 발굴과 조사에 나섰으며, 같은 해 10월에 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하였다. ※ 고려 멸망, 조선 건국:1392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사대부 세력의 도움을 받아 반대 세력을 물리친 다음,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1392년). 마지막 왕조였던 조선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 관료 사회를 이룩하였으나, 중기 이후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서유럽 열강의 문호 개방 요구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건국 후 519년 만에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1910년). ※ 조선어 학회 사건:1942 1942년 10월에 우리말의 말살을 꾀하던 일제가 조선어 학회의 회원을 민족주의자로 몰아 검거 투옥한 사건.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학술 단체임을 가장한 비밀 결사라고 거짓으로 사건을 꾸며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하다가, 8·15 광복을 이틀 앞두고 공소를 기각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학회는 해체되고, 편찬하려던 원고의 많은 부분이 없어졌다. ※ 중종 반정:1506 1506년(연산군 12년)에 성희안,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을 왕으로 세운 사건. 연산군이 여러 번의 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죽이고 나라를 어지럽혀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지자, 연산군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관직에서 쫓겨났던 성희안은, 박원종, 유순성 등의 도움을 얻어 연산군을 내쫓고 진성 대군을 새 임금으로 세울 것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훈련원에 장사들을 모은 후 먼저 왕의 외척인 신수근 형제를 죽이고, 궁중으로 들어가 대비의 명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 대군을 왕으로 세웠다. 이 왕이 곧 중종이며, 이로써 연산군은 강화도의 교동으로 쫓겨났다. ※ 진주 민란:1862 1862년(철종 13년)에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을 겪던 농민들은 새로 부임한 진주 병사(兵使) 백낙신이 가혹한 탄압과 착취를 일삼자, 양반 출신의 농민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관아를 습격하고 환곡을 불태우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보내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난을 계기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 진주성 싸움:1592 임진왜란 때에 진주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큰 싸움. 제1차 싸움은 1592년(선조 25년) 10월 5일에 일어난 싸움으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며, 진주성 대첩이라고도 한다. 약 3만의 왜군이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자, 진주 목사 김시민은 성을 타고 오르는 왜군에게 화약, 끓는 물, 돌 등을 퍼부어 6일간의 대접전 끝에 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달아났다. 이 싸움에는 의병 대장 곽재우의 응원의 힘이 컸다. 이 싸움의 승리는 적으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제2차 싸움은 논개(論介)의 죽음으로써 잘 알려진 싸움이다. 제1차 싸움에 크게 패한 왜군은 이를 복수하려고 1593년 6월에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에 명하여 5만의 왜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왜군은 귀갑차 등 특수한 병기로 물밀듯이 쳐들어와 치열한 공방전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진주성은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자 김천일을 비롯한 수십 명의 의병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의로운 논개는 적장을 안고 남강에 빠져 죽었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싸움으로 성 안에 있던 군인과 백성 등 약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천리 장성 축조:642 천리 장성은 고구려 시대에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다. 당은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였으나, 태종이 즉위한 뒤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에서는 이에 대비하여 천리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장성은 북부의 부여성(지금의 승안 지역)과 남부의 비사성(지금의 뤼다 지역)을 잇는 방어선으로서 연개소문이 총책임자가 되어 다스렸다. ※ 철기 시대:BC400년경 한반도에는 기원전 400∼기원전 300년경에 중국 계통의 청동기와 더불어 철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2세기 초기에는 대동강 유역 지방에서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쓰였으며, 기원전 1세기 말에 한사군이 설치되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철기가 발달하여 북방 군장 국가로부터 남방 군장 국가로 퍼져 나갔다. 철기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은 옛 돌무덤이나 널무덤 따위에서 나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 청동기 시대:BC1000년경 한반도에서 청동으로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 쓴 시기는 기원전 1000년경에 해당한다. 청동기 시대라 하여 생활 도구를 모두 쇠붙이로 만들어 쓴 것은 아니고, 농사에는 여전히 나무로 만든 도구, 석기 등을 쓰고 있었다. 다만 청동기 시대에는 토기나 석기가 많이 발달되어 그 모양이 청동기의 모양과 비슷해져 간 것이 특색이다. ※ 청산리 싸움:1920 1920년 10월에 만주 지방에 있던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의 독립군이 화룡현 청산리계곡에서 5만의 일본군을 맞아 크게 쳐부순 싸움. 이라고도 한다. 1920년 8월 하순에 왕청현 서대파에 주둔하고 있던 북로 군정서의 주력 부대가, 일본군이 독립군에 대해서 협공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을 총사령으로 삼아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삼림 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3면으로 청산리를 포위한 일본군의 일부가 백운평 삼림으로 들어섬으로써 첫 전투가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500여 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독립군은 그 날 밤으로 포위망을 뚫고 갑산촌에 이르러 다시 천수평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거의 섬멸하였다. 이어 일본군의 사단 사령부가 있던 어랑촌을 전격적으로 공격하여 일대 혈전을 벌인 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 청산리 싸움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3,300여 명에 이르렀고, 우리 독립군도 1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 싸움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그 뒤 그 곳의 우리 동포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해 왔다. ※ 최씨 무신 정권 시작:1196 무신의 난 이후 서로 정권을 다투던 무신들 가운데서 최충헌이 1196년(명종 26년)에 아우 최충수와 함께 권신 이의민 일당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 뒤 그는 민중의 저항 운동과 사원 세력을 억누르고 최씨 일문의 독재 정치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4대 60여 년 간 최씨 일가는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그 장관이 되어 정치 권력을 휘잡고, 도방과 삼별초 등 사병 집단을 키워 세력을 넓히면서 정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서울을 옮기고 독재를 행하다가, 1258년(고종 45년) 최의가 유경, 김인준 등에게 살해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다. ※ 측우기:1441 비가 내린 양을 재는 기구. 조선 세종 23년(1441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했고, 그 뒤 개량에 힘써 세종 24년(1442년)에 측우기라고 이름하였다. 이 측우기는 무쇠를 써서 깊이 42.5cm, 지름 17cm의 둥근 통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천문 관계 일을 맡아 보던 관상감(觀象監)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아 비가 그친 다음에 그 둥근 통에 담긴 빗물의 깊이를 재었다. 이 측우기는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만든 측우기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자연 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농업 생산에 이용하는 한편, 자연 재해를 이겨 내려고 애쓴 조선 시대 과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 태극기(국기 반포):1883 한국 국기인 태극기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고종 19년(1882년)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갈 때 처음으로 사용한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한국 국기로서 태극 도형을 사용하기로 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정해졌을 것이다. 태극기를 국가에서 공식적인 국기로 반포한 것은 고종20년(1883년) 음력 1월 27일인데, 이 때는 오늘날과 같이 그 규격과 도식이 분명하지 않았고, 다만 태극을 가운데 두고 네 귀에 건(乾), 곤(坤), 감(坎), 이(離)의 4괘를 배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조국이 광복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49년에 국기 제정 위원회가 구성되어, 여러 번의 회의 끝에 그 해 3월 25일에 음양과 4괘의 배치안을 확정했다. 이어 국기봉도 한국의 꽃인 무궁화 봉오리를 상징한 것으로 하고, 색깔은 국기 깃면의 색깔과 조화를 이루 도록 금색으로 하였다. ※ 판문점 휴전 회담:1953 6·25 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판문점에서 유엔군측 대표와 조선측 대표가 만난 회담. 휴전 회담은 처음 1951년 7월에 개성에서 열린 회담을 시작으로 하여 같은 해 10월에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으며,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1973 평화 통일을 위한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을 밝힌 선언. 6·23선언이라고도 한다. 곧 1973년 6월 23일에 한국 정부가 ①남북조선은 서로 상대방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도발 행위를 하지 않는다. ②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북한이 국제 연합을 비롯한 국제 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③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라 하더라도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문호를 개방한다고 밝힌 선언이다. ※ 한·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1882 미국은 1880년에 슈펠트 제독을 부산에 보내어 일본 영사를 중개자로 하여 수교 요청을 하였으나 조선쪽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조선에 영향력이 있던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에게 수호 통상을 알선해 주도록 요청하여 1882년(고종 19년) 3월에 슈펠트는 청나라 사신 마건충, 정여창과 함께 인천에 들어와 조선 정부의 전권 대관 신헌, 부관 김홍집과 4월 4일에 전문 14관으로 이루어진 한·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 따라 1883년 5월에 초대미국 전권 공사 푸드가 입국하여 비준서를 교환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도 전권 대신 민영익, 부관 홍영식을 미국에 보내어 양국의 역사적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서양 여러 나라들 중 미국은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 한·영 수호 통상 조약 체결:1883 1882년에 한·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청나라의 알선으로 체결되자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 웨이드가 청나라 북양 대신 이홍장에게 한·영 수호를 청탁하여 한·영 회담이 열렸다. 그 결과 량국은 앞서 체결한 한·미 수호통상 조약과 같이 14개조로 작성하여 양국이 조인했으나,영국 정부는 이 조약이 한·일 수호 통상 장정(章程)과 차이가있다는 이유로 비준을 보류하고, 청나라 주재 공사 파크스를 전권 대신으로 보내어 조선 정부의 전권 대신 민영목과 더불어 수정을 가하여 전문 13관의 한·영 수호 통상 조약과 그 부속 통상 장정 3항목을 작성, 조인하였다. 이에 따라 1883년(고종 20년) 4월에 파크스가 다시 와서 비준 교환을 마치고, 총영사로 애스턴을 상주하게 함으로써 양국의 국교가 시작되었다. ※ 한·일 신협약:1907 1907년(융희 1년)에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기 위한 마지막조처로서 강제로 맺은 조약. 정미 칠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본이 통감의 권한을 강화하여 국권을 완전히 빼앗으려고 맺은 조약이다. 조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곧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하여 통감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조처로 대신 아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였고, 경찰권을 빼앗았으며, 경비 절약을 구실로 한국군을 해산하기까지했다. 또 언론을 탄압하고 집회, 결사의 자유권마저 빼앗는 등 국권을 완전히 빼앗음으로써 사실상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말았다. ※ 한·일 의정서:1904 1904년 2월 23일에 한국은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합의한 외교 문서. 러·일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한국은 엄정중립을 선언하였는데, 일본은 그것을 무시하고 한반도를 그들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억지로 합의하게 한 약정이다. 6개조로 된 의정서의 내용은, ① 한국 정부는 일본의 시정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②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꾀해야 한다. ③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 ④ 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 사태가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곧 대처하며, 한국 정부는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다. ⑤ 한국은 일본의 승인없이 제3국과 이 협약에 위배되는 협약을 맺을 수 없다는 등이다. 이 의정서에 따라 1904년 5월에 러시아사이에 맺었던 모든 조약을 폐기시켰고, 경인선, 경의선철도 부설과 통신망 가설 등의 이권을 그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8】 ※ 한일 합방:1910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이 이른바 한일 합방 조약을 강압적으로 맺게 하여 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빼앗은 일.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한다.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맺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일본이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자 1904년에는 한·일 의정서를 억지로 약정하여 고문 정치로써 한반도를 자기네 세력권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1905년에는 다시 을사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두어 보호 정치로써 침략에 박차를 가하였다. 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정미 7조약을 맺게 하여 통감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사실상 식민지화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09년 10월에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사에게 암살당하자 일본의 침략 정책은 더욱 구체화하고 가속화해 갔다. 먼저 송병준이 이끄는 친일 단체 일진회를 앞잡이로 내세워 한일 합방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는 1910년에 3대 통감 데라우치가 ‘합방 후의 대한 통치 방안’을 가지고 부임하여 총리 대신 이완용 등과 비밀리에 합방 공작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22일에 형식적인 어전 회의를 거쳐 그 날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조인하고, 8월 29일에 합방 조약을 공포함으로써 조선은 개국 519년 만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 한산 대첩:1592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서 왜군을 무찔러 크게 이긴싸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이다. 1592년 7월 8일 당시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좁은 견내량(통영 수도)에 정박중인왜군의 함대를 유도 작전에 의해 외해(外海)로 끌어내었다. 이것은 견내량이 좁아서 큰 싸움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군이 모두 외해로 나왔을 때 이순신은 공격명령을 내려 학익진(학이 날개를 펴듯이 진을 치는 전법)으로 적을 포위하는 한편, 거북선을 앞세우고 각종 포를 발사하여 적선 6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왜군이 남해를 돌아 황해로 나가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중요한 싸움이었다. ※ 행주 대첩:1593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은 한성을 되찾기 위해 1593년(선조26년)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행주로 들어갔다. 그러자 차차 퇴각하여 한성으로 모이고 있던 왜군은 3만여 명의 군사로 9차례에 걸쳐 맹공을 가해 왔다. 그러나 권율은 몸소 물을 떠 나르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부녀자들까지 치마에 돌을 담아 날라 군사들을 도움으로써 왜군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이 때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잘라 돌을 담아 나른 데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의 3대첩의 하나이다. ※ 헤이그 특사 사건:1907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비밀리에 보내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무력적 침략의 부당성을 주장하려던 사건. 헤이그 밀사 사건이라고도 한다. 1905년에 일제는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럴 즈음인 1907년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4월에 고종 황제는 이상설과 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가서 만국 회의에 나가 실상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들은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 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친서를 전하고, 그 곳에서 러시아 공사관서기였던 이위종과 함께 6월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를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 위원으로 회의에 참석할 것과 일본의 협박으로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의 파기를 회의 의제로 삼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 참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해 그 곳에서 자결하였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의 강요, 구한국 군대의 해산이 잇달았다. ※ 홍경래의 난:1811 조선 순조 11년(1811년)에 평안도 출신인 홍경래가 일으킨 반란.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의 우군칙 등과 더불어 서북 지방에 대한 정부의 차별을 구실로 난을 일으켜 스스로 평서 대 원수라 일컬었다. 4개월 동안 계속된 홍경래의 난으로 한때 청천강 이북의 땅이 그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마침내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난은 하층 양반과 중소 상인 및 유랑 농민이 합세하여 부패한 조정에 항거한 사건으로, 그 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민란에 영향을 끼쳤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19세기 초에 서북 지방을 뒤흔들어 놓은 대규모의 농민 항거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 황산 대첩 이성계:1380 1376년에 침입했다가 홍산싸움에서 최영에게 크게 패하고 물러난 왜구가, 1380년에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금강 하구)에 침입, 충청·전라·경상3도의 연안 지방을 마구 약탈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이르렀다. 이 때 최무선 등의 장수가 화통,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하여 모두 불태워 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구는 더욱 발악하여 그 피해가 매우 컸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도 순찰사로 임명하여 이 지방의 방위를 맡겼다.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이끌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여 황산 북쪽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은 최영의 홍산 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 길이 빛날 만한 싸움으로, 이 싸움을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뜸해졌다. ※ 황산벌 싸움:660 660년에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의 군대를 맞아 싸운 싸움. 신라의 군대가 탄현(지금의 대전 동쪽)을 넘어 황산(연산)을 공격하자, 백제의 계백 장군은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을 지키면서 신라군을 4차례나 무찔렀으나, 끝내 패하여 죽고 말았다. 이 싸움의 패배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 후고구려:901 신라 말기에 궁예가 세운 나라. 신라·후백제와 함께 후삼국을 이루었다. 북원의 호족 양길에게 의지하던 궁예가 세력을 길러 양길을 물리치고 901년에 세운 나라로, 904년에는 나라 이름을‘마진’이라 하였다가, 911년에는 ‘태봉’으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의 대부분과 평안도·충청도의 일부까지 아울러 후삼국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으나, 궁예의 성격이 포악하여 부하에게 쫓겨나고,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세웠다(918년). ※ 후백제 건국:900 후백제는 신라 말기(900년)에 남서 해안을 지키던 장군 견훤이 신라의 혼란을 틈타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독립한 나라로, 신라·후고구려와 함께 후삼국을 이루었다. 중국의 오나라·월 나라와 통교하면서 영토를 넓혀 고려와 패권을 다투었으나, 935년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은 고려에 투항하고, 이듬해 아들 신검이 선산과 황산 싸움에서 고려에 크게 패함으로써 멸망하였다. ※ 훈민정음:1443 조선 제4대 세종이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46년(세종28년)에 창제 반포한 글자(한글), 또는 그것을 해설한 원본 이름.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한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이에는 ① 우리말을 적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하겠다는 자주 정신 ② 일반 백성이 다 쓸 수 있게 해야겠다는 민본·애민 정신 ③ 누구든지 일상생활에 쉽게 쓸 수 있게 해야 겠다는 실용 정신이 담겨져 있다. 초성(자음)은 발음 기관을 본떠 ‘ㄱ,ㄴ,ㅁ,ㅅ,ㅇ’과 같은 기본 글자를 만들고, 이에 획을 더하여 모두 17자를 만들 었고,중성(모음)은 하늘, 땅, 사람의 3재(三才)를 기본으로 하여 ‘촵,ㅡ,ㅣ’를 만들고, 이를 위아래와 좌우로 어울러 모두 11자를 만들었다. ※ 흥선 대원군:1863 조선 왕조 고종 때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철종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자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어릴 때 이름)이 왕위에 오르자, 1863년 대원군이 되어 실권을 잡고 대신 정치를 보살폈다. 그는 우선 안동 김씨의 세력을 몰아 내고,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였으며,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썼다. 그리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세금을 내게 하며, 사치와 낭비를 금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다. 그의 과감한 개혁정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국민 생활의 안정에 이바지하기는 했다. 그러나 경복궁의 재건으로 재정을 무리하게 지출했고, 서원의 철폐로 유생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어 카톨릭교를 박해하는 등, 쇄국 정치를 고집하다가 며느리인 명성 황후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1907년(광무 11년)에 대원왕(大院王)에 봉해졌다. ※ 최초의 통신 방송 위성, 무궁화 1호 발사:1995 무궁화 1호는 한국 최초의 방송·통신 복합 위성으로, 크기는14.2×17.4×19.6cm이고, 무게는 발사 중량 1,463.3kg, 위성체 635kg의 최첨단 디지털 방송·통신 위성이다. 정부가 국내 최초의 방송·통신 복합 위성을 발사하기로 하고 지난 1990년 7월 한국 통신에 위성 사업단을 설치, 맥도널 더글라스, 록히드 마틴 등 발사팀과 공통으로 설계, 제작했으며 5년만인 1995년 8월5일 미국 플로리다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 기지에서 델타2호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무궁화 위성은 동경 116°, 적도 상공 3만 6,000km에서 정지 궤도로 위치하고 있고, 형태는 3축 자세 제어 방식의 날개형이며, 4∼5개월 간의 궤도 시험을 거쳐 1996년 초부터 통신 및 방송 분야의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수명은 10년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발사체 책임 회사인 맥도널 더글라스사가 정상적인 발사에 실패함으로써 그보다 훨씬 짧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무궁화 위성의 위성 방송 시청 지역은 조선반도, 중국 연변, 산동 반도, 일본 오키나와, 러시아 연해주에 이르러 중국, 러시아 등지의 동포들에게 한국 방송을 보내 줄 수 있기도 하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22번째로 방송·통신 위성 보유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 최초의 인공 위성, 우리별 1호 발사:1992 우리별 1호는 한국 최초의 인공 위성으로, 정식 명칭은 킷샛(KITSAT)이고, 크기 50×80cm, 무게 50kg의 소형 과학 위성이다. 1989년부터 한국 과학 기술원 인공 위성 연구 센터가 영국의 대학과 공동으로 설계, 제작했으며, 1992년 8월 11일 중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 우주 과학 기지에서 위성 발사체인 아리안 42P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우리별 1호는 지구 상공 1,325km에서 적도면과 66도 기울어져 원에 가까운 궤도를 그리며 110분에 지구를 한 바퀴씩 도는데, 하루에 6번, 한 번에 15분 정도 우리 지구국과 통신이 가능하다. 지구 표면 촬영, 우주선 측정, 음성 데이터, 화상 정보 교신 등의 실험을 하게 된다. 수명은 5년이며, 수명이 다 하면 낙하하면서 소각되어 사라진다. 한편, 1993년 9월 26일에는 순수 한국 기술로 설계, 제작된 우리별 2호가 아리안 V59로켓에 실려 쿠루 기지에서 발사되었다. 이것은 지구 궤도에 5년간 머물며 101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씩, 하루 14번 돈다. ※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1991 남북한은 1991년 12월 31일, 한반도를 비핵화 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 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하였다. 비핵화 공동 선언의 주요 내용은 ①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配備), 사용의 금지 ②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③ 핵 재처리 시설 및 우라늄 농축 시설 보유 금지 ④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해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에 대한 상호 사찰 ⑤ 공동 선언 발효 후 1개월 이내에 남북 핵 통제 공동위 구성 등이다. 이 공동 선언은 남북이 각기 발효에 필요한 내부 절차를 거쳐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문서를 교환했다. ※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 서울 개최:1990 남북 고위급 회담은 1988년 조선의 연형묵 총리가 정치 군사 문제에 대한 협의를 하기 위해 제안한 것으로, 1990년 7월 남북 고위급 회담에 대한 의제와 시기 등이 합의되어 마침내 남북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제2차(1990.10 평양), 제3차(1990.12 서울), 제4차(1991.10 평양) 회담을 거쳐 제5차(1991.12 서울) 회담에서는 남북 합의서를 채택, 서명했고 제6차(1992.2 평양) 회담에서는 합의서 문건을 정식 교환하여 발효시켰다. 이 회담은 제7차(1992.5 서울) 회담을 거쳐 현재 제8차(1992.9) 회담까지 이루어진 상태이다. ※ 경부선 개통:1905 경부선은 1901년(광무 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05년에 개통되었다. 일제 때에는 부산과 선양, 부산과 베이징까지 연장 운행되어 일제의 대륙 침략에 이용되었다. 지금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간선 철도로서 수도권과 영남 공업 지역간의 대량 수송을 맡고 있으며, 길이는 444.5km이다. 1974년에는 서울과 수원 사이가 복복선 전철로 바뀌었다. ※ 대조영, 발해 건국:698 대조영은 발해의 시조(재위 699∼719년)로, 왕호는 고왕(高王)이다. 668년에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의 대장군이 해고의 군사를 천문령에서 크게 쳐부수고,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들을 모아 읍루의 동모산에 홀한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다(699년).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북쪽에 있는 돌궐과 손을 잡고 당나라를 견제하면서 안으로 말갈족의 통합에 힘써, 옛 고구려 땅의 대부분과 지금의 연해주 지방에 걸치는 커다란 나라를 이루었다. ※ 신한 청년단 조직:1919 신한 청년단은 1919년 상하이에서 서병호, 여운형, 김구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가장 오래 된 해외 독립 운동 단체로서 ‘신한 청년보’를 발행하여 교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게 하는 등 외교 활동에도 힘썼다. ※ 안시성 싸움:645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에 침입했을 때 안시성에서 벌어졌던 당나라와의 싸움. 당 태종은 고구려의 요충지인 안시성을 함락시키고자 하루 5∼6회씩 60여 일에 걸쳐서 포위, 공격했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성 주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후퇴할 때 당태종은 양만춘에게 송별의 예를 다 했다고 야사에 전해내려 온다. ※ 이괄의 난:1624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일어난 난. 이괄은 인조 반정에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에 봉해지고, 그 뒤 평안도병마 절도사로 좌천되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다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이 잡혀 가자 부하인 기익헌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난했으나 서울 점령 하루만에 정부군에 패하여 이괄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달아나 선동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15    우리말의 력사 댓글:  조회:2372  추천:0  2012-08-08
"한국어의 역사" 분류에 속하는 문서 다음은 이 분류에 속하는 문서 19개 가운데 19개입니다. ㄱ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구결 근대 한국어 ㄴ 노걸대 ㄷ 대한문전 동국정운 ㄷ (계속) 두시언해 ㅂ 박통사 발해어 ㅅ 석보상절 소학언해 ㅇ 이두 ㅈ 중세 한국어 ㅊ 취음 ㅎ 하오체 한국어 운동의 역사 한국어족 향찰
14    <桓檀古記>나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댓글:  조회:2804  추천:1  2012-07-30
나 의 사료적 가치; 필자(筆者)는 어떤 고기(古記)가 있을 경우 그 고기의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책 전체를 일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 고기에 적혀 있는 개개 문구별로 사료로서의가치를 평가한다. 그럴 경우 개개 문구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지 않거나 또는 일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더라도 다른 정사(正史) 문구와는 부합하는 경우 다른 여러 사료를 분석하여 그 고기 문구가 신빙성(信憑性)이 있다고 판단될 때만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런데 필자(筆者)는 고기(古記) 문구를 인용(引用)할 경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인용하면서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인용하지 않는다. 이는 필자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사료적(史料的) 가치를 아주 낮게 보기 때문이다. 강단사학자(講壇史學者)들은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모두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들어와 위작(僞作)한 것이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나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위작(僞作)이 아니므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도 규원사화(揆園史話)나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제한없이 인정하는 견해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견해로 나누어 진다. 혹자는 필자에게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모두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많은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제한적이지만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래에 필자가 왜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지 그l 이유를 설명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조선 숙종 2년)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쓴 책으로 서문(序文),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 단군기(檀君記), 만설(漫說) 순서로 적혀 있다. 서문(序文)에는 저자(著者)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참고하여 지었다고 적혀 있고, 조판기(肇判記)에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天地)를 개창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神政)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으며, 태시기(太始記)에는 환검(桓儉) 이전 환웅(桓雄)의 역사가 적혀 있고, 단군기檀君記)에는 환검(桓儉)부터 고열가(古列加)까지 47명 단군과 그 재위기간 및 1,195년간의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으며, 만설(漫說)에는 유학자(儒學者)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민족의 주체의식(主體意識)을 고취하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강단사학자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는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든 위서(僞書)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 근거는 19세기 이전에는 규원사화(揆園史話) 원본(原本)이나 필사본(筆寫本)이 존재하지 않았고,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 점, 규원사화(揆園史話)나 그 저본인 진역유기(震域遺記)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진서(眞書)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일부 내용이 처음 인용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를 통해서이지만,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인용된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大東史綱)에서 인용되었고, 1940년에는 양주동(梁柱東)이 필사본(筆寫本)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뒤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북애자의 원본 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筆寫本)을 구입하여 1972년에 귀중본(貴重本)으로 등록하였고,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으므로 진서(眞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현존하는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설사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단군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대비해 보면, 같은 점은 47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이 B.C 2333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각 단군에 대한 일부 역사적 사실이고, 다른 점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B.C 1139년에 끝났다고 적혀 있는 반면에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B.C 238년에 끝났다고 적혀 있다. 즉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과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사서(史書)에 모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세 왕검(王儉) 단군에 관한 내용, 4세 오사구(烏斯丘) 단군이 순시하다가 영초를 얻었다는 내용, 8세 우서한(于西翰) 단군이 수확물에 대한 세금 비율을 정하였다는 내용(세율이 규원사화에는 90분의 1, 단군세기에는 20분의 1), 10세 노을(魯乙) 단군 때 짐승을 우리에 넣어 길렀다는 내용, 15세 대음(代音) 단군이 수확물의 80분의 1로 세율을 바꾸었다는 내용, 23세 아홀(阿忽) 단군이 동생 고불가(固弗加)에게 낙랑골(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熊乫孫)으로 하여금 은(殷)나라를 남정(南征)하는 군사를 살펴보게 하였다는 내용, 30세 나휴(柰休) 단군이 청구를 둘러 보고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諸侯國)의 한(汗)을 만났다는 내용,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 때 단군조선이 멸망했다는 내용 등등이다. 그렇다면 2 사서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왜 47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일부 같은 것이 적혀 있을까? 이는 단군세기(檀君世紀)나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짓기 이전에 존재한 저본사료(底本史料)에 48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그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사서(史書) 모두 이 저본자료를 이용하여 사서(史書)를 만들면서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48명 단군의 역사를 B.C 2333년부터 B.C 238년 사이에 적어 넣고, 규원사화(揆園史話)는 48명 단군의 역사를 B.C 2333년부터 B.C 1139년 사이에 적어 넣었다. 그러면서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로는 너무 빈약하니까 단군세기는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참조하여 각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였고, 규원사화는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참조하여 각 단군(檀君)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두 사서 모두 중국의 사서 문구를 연도에 맞추어 인용해 놓았다. 그 결과 단군세기(檀君世紀)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각 단군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단기고사(檀奇古史)나 진역유기(震域遺記)에 적혀 있는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많이 전사(傳寫)되어 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어느 정도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어느 정도 들어 있을까?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대비하면 계연수나 이유립은 북애노인이 지었다는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필사하면서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 전사(傳寫)된 문구 중 역사적 문화발달 정도에 맞지 않은 내용은 많이 걸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아직도 문화발달 정도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과장(誇張)된 내용은 그 시대 문화발달 정도에 비추어 가려낼 수 있지만, 가필(加筆)된 내용은 어느 것인지 가려낼 수 없다. 따라서 단군세기(檀君世紀) 문구는 다른 사서 문구와 비교 검토하여 개개 문구의 신빙성(信憑性)을 판단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규원사화(揆園史話) 문구는 어느 정도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어느 정도 들어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규원사화는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정도가 아닌 통채로 사서가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에는 전승(傳承)된 설화(說話)와 중국의 사서(史書)를 인용(引用)한 내용이 들어 있다. 전승된 설화가 주(主)이기 때문에 신빙성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는 신빙성(信憑性)에 있어 심히 문제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과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 존재하였다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실존(實存)한 나라인지 여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滅亡)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그 성격으로 나누면 전기(前期), 중기(中期), 후기(後期)로 나누어지고, 전기단군조선(前期檀君朝鮮)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적혀 있는 어국(御國) 1,500년(실제는 1,048년인데 약 1,050년을 1,500년으로 잘못 오기하였다.)이다. 그리고 중기단군조선(中期檀君朝鮮)은 수명(壽命) 1,908년에서 어국(御國) 1,048년을 뺀 860년이다. 후기단군조선(後期檀君朝鮮)은 수명(壽命) 1,908년 이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일어날 때까지 대부여(大夫餘) 시대 188년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사서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1,048년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1,048년은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의하면 왕검(王儉) 단군부터 소태(蘇台) 단군까지 전기단군조선(前期檀君朝鮮)의 역년이다. 이 견해는 왕검(王儉)이 세운 전기단군조선을 색불루(索弗婁) 단군이 무력(武力)으로 빼앗았기 때문에 전기단군조선과 중기단군조선(中期檀君朝鮮)을 별개의 나라로 본 것이다. 이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혈통(血統)이 바뀌었으므로 같은 나라로 볼 수 없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고려 때 지어진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에도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다고 적혀 있고, 북부여기(北夫餘紀)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일어났을 때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멸망했다고 적혀 있다. 해모수(解慕漱)가 일어난 해는 B.C 239년이므로,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은 B.C 239년경까지 존속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과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병존(倂存)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견해와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에도 존재하였다. 그런데도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에는 왜 단군조선이 기자동래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을까? 그 대답은 이렇다. 아직 사대주의 사상이 강하기 전인 고려말(高麗末) 이전에 지은 책들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이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대로 1908년(삼국유사) 또는 2,096년(단군세기)으로 적었다. 그러나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이 강한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 지은 책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면서 단군조선의 역년을 기자동래 이전으로 임의로 확 줄여 버리고, 조선은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부터 중국왕조의 후국(侯國)이 되어 중국왕조의 교화(敎化)를 받은 나라로 적었다. 규원사화(揆園史話) 저자도 단군기(檀君記)를 지으면서 당시 조선시대 시류(時流)의 영향을 받아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원래의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대로 1,908년 또는 2,096년으로 적지 않고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한 것처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확 줄이고, 그 역년 안에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 47명의 단군 이름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집어 넣어 놓았다. 규원사화에 의할 경우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기자동래(箕子東來) 이전에 멸망하였고, 그 이후 존재한 조선(朝鮮)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아니라 주(周) 나라의 후국(侯國)인 조선(朝鮮)이라는 것이다. http://203.208.37.104/search?q=cache:bFw4H-7dpA0J:home.megapass.co.kr/~hsg8689/zz224.htm+桓檀古記의+가치&hl=zh-CN&ct=clnk&cd=1&gl=cn&st_usg=ALhdy28ayhhaK_zjjUK-xDPLxTpqgOSW5A 桓檀古記에 관하여; 우리 고대사를 알아가다 보면 말도 안됀다 싶을 정도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우리의 민족 역사의 시작은 기원전 9200년 경이고 이때 천부인이 완성되었고 나름대로의 사상체계도 갖추었다 하며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7199년의 환국(한국)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나라는 기원전 3898년의 배달제국이구요.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약 11200여년 경이고 국가의 형태로서 존재 한것은 9000여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부인에는 365일의 개념과 4년주기의 삭과 판현상(노르웨이 최북단에서 일어나는 길게는 육개월간 해가 지지 않는 현상, 남극의 동지 무렵의 기후 이상현상)을 비롯해 역법까지 모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환국에는 12개의 나라가 나누어 져 있었다 하고 오색인종을 아우른 나라 였다 합니다. 한단고기에 수록된 내용 보다도 신빙성 없어보이나 달리 보면 믿어지는 이야기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 짧아 제가 자주 가는 홈의 글을 붙이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보시길.; 유목민 마을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조금 퍼온 글입니다. 桓檀古記의 가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민족의 시련기가 되면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한 민족사(民族史)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인물위주의 영웅사관(英雄史觀)에 입각하여 서술한다든지, 혹은 국난극복의 종교적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고통극복사관(苦痛克服史觀)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예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사의 경우는 이러한 예와 달랐다. 국난극복이라는 면에서는 궤적을 같이하고 있으나, 잊혀진 사실을 발굴하려는 노력으로 또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내용에 다소 과장된 부분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줄거리에 대한 검토없이 과장된 부분만을 확대해석하여 내용전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의 기성사학계에서 일관되게 견지되어 온 이러한 의식은 분명 수정되어져야 한다. 최근에 등장하여 이러한 경향을 지닌 우리의 민족사로, 『한단고기(桓檀古記)』,『규원사화(揆園史話)』,『단기고사(檀奇古史)』,『신단실기(神檀實記)』,『부도지(符都誌)』 등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단고기(桓檀古記)』인데 다른 책들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고 또한 각 시대별로 서술된 여러권의 책들을 합친 것이다. 분명 『한단고기(桓檀古記』(‘환(桓)’을 ‘한’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는 새로운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어 충격적이기도 하고 일견 거부감마저 들기도 한다. 여태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혹은 신화로만 여겼고 배워왔던 상고시대 고조선(古朝鮮)의 역사와 그 이전시대 한인·한웅의 민족기원까지 구체적인 사실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막연하게 동경하여 왔던 대륙에서의 선조들의 활약상이 너무나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자칫 꾸며낸 이야기처럼 여겨질 우려마저 안고 있다. 현재의 역사연구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한반도에서 만주대륙으로 확대되어 지고 있고 고조선의 실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고조선의 담당자로서의 단군조선 문제나 그 이전 단계인 한인·한웅시대 문제가 역사적 사실로 거론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한인·한웅시대가 신화적 차원으로 머물러 있고서야 진정한 의미의 고조선연구는 본질을 망각한 형체가 되엉 버릴 우려가 있어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러한 결과는 워낙 자료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한단고기』와 같은 역사서들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배격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이러한 신화들을 신확 아닌 사실로 기록하고 있어 오히려 더 연구할 가치가 있을 터인데, 위작으로만 몰아부칠뿐 구체적인 고찰을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한가지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이른바 재야사학계에서 민족사복원이라 하며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우리의 역사는 반도가 아닌 대륙을 무대로 했던 역사’라고 하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은 다소 위험한 발상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현재 우리의 삶의 터전을 부인하고 과거의 영광에만 사로잡혀 있는 듯한 오해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물론 부정적 시각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을 탈피하자는 의미에서 ‘대륙사관(大陸史觀)’을 강조하다 보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러한 잘못 때문에 오히려 기성사학계가 더욱 한반도중심의 역사관을 고수해왔는 지도 모른다. 대륙이 우리의 주무대였다는 논리는 자칫 현재의 한반도지역에 대한 애착감을 상실하게 만들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고대의 한반도 또한 대륙과 연계되어 한반도 자체가 선사시대이후부터 뿌리내려온 역사의 터전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은 경계해야 하고, 선조들의 대륙생활사는 한반도라는 한민족의 현재으 활동무대를 축으로 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기원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연구되고 밝혀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남의 땅이 되어 버린 곳을 되찾겠다고 성그히 주장하기 보다는 우리의 본래모습, 곧 “민족사의 원형”을 재구성한다는 취지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한반도지역 내부에서만의 연구로는 원형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륙과 연계해야만 올바른 정립이 가능하다는데 의의를 두고 한민족 삶의 터전에 대한 변천과 이동의 역사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한단고기를 부정하는 이유로는 크게 용어사용의 부적절 인용서적의 불분명 저술연대와 저자 문제를 들수 있습니다. 다시 유목민 마을 주인장님의 글을 보여 드리자면 『한단고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편찬자가 유명한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저술연대와 저자들에 대해 의심을 하고, 용어사용의 부적절함을 내세워 내용전체를 위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해 왔지만 비전문가에 의한 편찬과 정서(正書)에서 잘못된 용어사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 내용의 검증이다. 다행스럽게도 『한단고기』에서 기술한 중국관련 기록들이 실제 중국측 사서들과 서로 일치하거나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중국사서와의 일치된 부분을 놓고 그 전후의 사건들을 모두 꾸며내었다고 주장한다면, 『한단고기』의 작자는 정말로 위대한 소설가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작자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중국의 고대사서를 철저히 분석하고 대단한 상상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야 가능한 방대한 내용을 『한단고기』는 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고시대의 철학과 사상 등에도 해박한 정도가 아닌 꿰뚫는 혜안이 있어야 가능한 내용도 담겨져 있으므로, 분명히 오랜 기간에 걸친 역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한단고기』이외의 다른 루트를 통해 알려진 책들(『단기고사』,『규원사화』등)과도 내용과 줄거리가 유사하다는 점도 위작이라는 논리하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중국문헌과의 비교검토 중국측에는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25史’외에도 『죽서기년(竹書紀年)』,『설문(說文)』,『춘추좌전(春秋左傳)』,『자치통감(資治統監)』,『산해경(山海經)』 등의 고서(古書)들이 있고, 『맹자(孟子)』,『논어(論語)』,『시경(詩經)』,『서경(書經)』등의 유가경전에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편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한민족에 관한 기록은 한나라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이후의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등에 와서야 「동이전(東夷傳)」이나 「조선전(朝鮮傳)」으로 체계화되지만, 그 이전시대에는 중국중심의 역사서술에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거나 사물의 기원, 이민족의 풍습 등을 소개할 때 간혹 등장하곤 한다. 우선 중국내륙지역과 가장 접촉이 빈번했던 시기로 알려지는 고조선의 실체인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의 기록을 검토해 보자. 이는 단군조선의 건국(B.C.2333)이후 중국내륙인 중원지역에 왕조라 인정할 夏·殷·周·春秋戰國時代 등이 전개되어 중국의 역사기록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1) 기독교의 구약성서에는 홍수설화가 있는데 밝혀진 바로는 슈메르문명(기원전 3천년경의 메소포타미아지방)의 홍수설화와 유사하며, 지질학적으로도 기원전 2천년전에 지구에 큰 홍수가 있었다고 한다. 홍수에 관해서는 동양의 고대사에도 유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단고기』중의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番韓世家)편에 1세 단군왕검때(丁巳50년, B.C.2284) 큰 홍수가 있었는데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치수사업을 성공시켜 이를 극복하고 그 비법을 중원지역 요순시대(堯舜時代) 순(舜)이 파견한 우(禹)에게 태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 파견하여 치수를 위한 삼보(三寶)를 전해주고 국경을 정해 유영지방(幽營地方:북경일대)과 회대지방(淮垈地方:산동지역과 양자강하류역)의 동이(東夷)제후들을 평정하여 직접 분조(分朝)를 두어 당시의 중원정치를 감독하게 하고 직접 5년마다 순수하시어 순(舜)이 네번이나 조근(朝覲)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때 전해준 삼보로는 ‘王土의 篆(문자의 일종)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는 신침(神針) 일매’, ‘험하고 중요한 곳의 물을 진압할 수 있는 황거종의 보물’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적은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주었는데,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금간옥첩을 창수사자(蒼水使者)가 夏의 禹에게 준 치수의 비결”로 기록되어 있어 대비된다. 중국고대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가 있었는데 삼황으로는 염제신농, 태호복희, 황제헌원 등이다. 『한단고기』중 『삼성기』나 『태백일사』「신시본기」등에는 삼황의 인물들이 모두 한웅시대의 후손으로 중원지역에 발달된 문화를 전파하고 정착한 것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오제의 인물들도 역시 같은 계보를 지닌 것으로 나와있다. 순임금도 동이계통으로 확인되는데, 『맹자(孟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에, - 순은 제풍에서 나고, 부하로 옮겼으며, 명조에서 졸하였는데, 동이의 땅이고, 순은 동이인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名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 라 하였고, 『한단고기』에는 순의 아버지 유소씨(有巢氏)가 단군조선의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에서 분조를 두고 산동지방 낭야성에 5년마다 순수하였다는데, 이에 대해 『서경(書經)』虞書 舜傳을 보면, - 2월, 동쪽으로 순수하여 대종에 이르러 시일을 협의하고 협의하고 도량형을 맞추며 오례의 법을 닦고 다섯가지 옥과 세가지 비단, 두가지 산짐승과 한가지 죽은 짐승의 예물을 정리하였고, 다섯가지 제기는 제사가 끝난뒤 되돌려 주었다.(歲二月,東巡守之于岱宗,協時月正日,同律度量衡,修五禮五玉三錦二生一死執如五器卒乃復) - 고 하였다. 중국에서 최초의 왕조로 불리는 하(夏)의 시조 우(禹)가 치수사업에 성공하여 그 공으로 군장위를 이어받았는데, 우의 성공비결은 창수사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중국사람들의 춘추필법(春秋筆法:중화중심의 역사관)은 창수사자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진실을 가리고 있지만, 『한단고기』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단히 명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현재의 중국사에서는 산동지방과 양쯔강일대 평야지대에 옛부터 동이족들이 터전을 마련하고 생활해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북방에서 이주해 온 종족이며, 황하문명을 꽃피운 은(殷)나라도 이들 동이계통이 세운 고대국가였다. 이러한 결론에는 중국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큰 몫을 담당하였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동이관련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를 『한단고기』의 기록들과 비교검토해 보자. 『단군세기』 4세단군 오사구(烏斯丘)조를 보면, - 임인19년(B.C.2119) 하나라 주 상이 덕을 잃어 단군께서 식달에게 명하여 남·진·변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그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어, 동이인들이 모반을 시작하였다. 註에 태강은 익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註,太康...爲익所퇴也) - 라고 되어 있고, 『죽서기년(竹書紀年)』夏王 相元年(B.C.2146)조에는 - 원년에 견이를 정벌하고, 2년에 풍이와 황이를 정벌하고, 7년에 우이가 내빈하였다.(元年,征犬夷,二年,征風夷及黃夷,七年,于夷來賓) - 라고 되어 있다. 夏의 태강과 상은 각각 다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단군세기』는 이에 대해 두사람을 한사람으로 혼동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규원사화』「단군기」에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연대설정이 『한단고기』와 다르지만, 내용상의 흐름은 『한단고기』와 유사하여 상호 참고될만 하다. 『규원사화』「단군기」3세단군 가륵조와 4세단군 오사구조를 보면, - (가륵조)때에 夏王이 失德하여 그 신하중 찬역(왕을 추방)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로 하여금 남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를 정벌하니 국위가 더욱 빛났다. (오사구조) 夏王 后相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고 서로 통교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건의 개요를 보면 동이가 하왕 태강을 정벌하여 이겼지만 상에게는 진 것으로 되어 있고, 이는 중국의 사서들과 같은 내용이다. 중국의 고대사서에는 동이족을 구이(九夷)로 나누어 불렀다. 견이(犬夷), 풍이(風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양이(暘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현이(玄夷:鳥夷 혹 北夷) 등인데 조이(북이)의 위치가 발해북안지대일 것으로 보는 외에 다른 이족들의 중국내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대개 이들 구이는 산동반도와 회대지방(양쯔강하류역)에 분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3) 하나라와의 관계사를 한가지 더 보자. 『단군세기』 11세단군 도해(道奚)조에 - 丁卯38년(B.C.1854)... 徵民가운데 장정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고 選士 20인을 夏의 도읍으로 보내 처음으로 國訓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 고 하였는데, 중국측 『죽서기년』 夏王 發 원년(B.C.1837)조에 - 發 원년, 諸夷들이 왕에게 인사하고 夷人들이 춤을 추었다.(帝發元年,諸夷賓于王門...諸夷人舞) - 라고 하여 단군조선과 하나라와의 친선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연대도 유사하고 있다. 4) 夏나라는 은나라에게 멸망하였는데 은나라를 구성한 종족은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으며 한자(漢字)의 기원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한 종족으로 북쪽에서 내려온 동이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중원지역에서는 하와 은의 교체기에 동이족이 권력구도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한단고기』상으로는 단군조선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군세기』 13세단군 흘달(屹達)조에, - 甲午16년(B.C.1767) 겨울, 殷人이 夏나라를 정벌하니 夏의 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末良으로 하여금 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殷의 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命을 내려 군대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夏의 桀王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력으로 길을 차단하며 약속을 깨려하였다. 이에 殷人들과 함께 夏의 桀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于亮을 파견하여 견이(夷)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關中의 분기땅에 점거하여 관제를 설치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구환은 구이를 말한다. 이는 환인,환웅의 자손이라는 의미이다. 낙랑은 고대 발해서북지역 지명이고 관중의 분기는 섬서성일대를 지칭한다. 이에 대한 중국측 기록인 전한(前漢)의 유향(劉向:B.C.77~)이 저술한 『설원(說苑)』夏王癸(桀)52년(B.C.1767)條에 보면, - 탕이 걸을 토벌하려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사죄하였다.(湯欲伐桀,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湯乃謝罪) 라고 되어 있고, 계속하여 53년조에 보면, - 탕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다시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군사를 일으켜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토벌하여 남쪽변두리로 추방하였다.(湯不貢桀起九夷之師,九夷不起,湯乃興師伐之,遷桀南巢)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사를 보면 구이(九夷)가 세력향방의 변수로 작용할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춘추필법으로도 감추지 못할 사건의 결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죽서기년』夏王 癸(桀)條에서는, - 계(걸)3년(B.C.1816)...견이인이 岐땅에 들어와 모반을 일으켰다. 6년(B.C.1813) 기땅에서 물러나고 사죄하였다.(帝癸三年...(田犬)夷人于岐以叛...六年岐踵戒來賓) - 라 하여 걸왕때 견이가 岐에 들어와 夏에 반하였다는 내용이 일치되고 있다. 『단군세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규원사화』에는 분기땅에서 철수하는 기사가 있는데, 철수이후의 기록이 또한 『단군세기』에 전해지고 있다. 단군조선이 殷을 도와 夏를 멸망시킨 후 근 4백여년 동안 은과 지속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규원사화』 단군 흘달(벌음)조에는, - 商王 湯이 어진 정치를 크게 베풀었으므로 단제께서 말씀하시기를 ‘德이 있는 임금으로 가히 서로 침범할 수 없다’하시고 이에 그 군사를 거두시고 후에 화해하였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15세단군 벌음(흘달)조에는, - 庚辰元年(B.C.1661) 殷主 小甲(B.C.1672~)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 라고 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商湯元年(B.C.1766)條에, - 앞서 桀의 난리때 빈기사이의 땅에 침입하여 점거하고 있던 견이를 쳐서 물리쳤다.(先是,后桀之亂,(田犬)夷入居빈岐之間,成湯...興伐而攘之) - 라고 되어 있어 서로 비교된다. 5) 은나라와 지속된 4백년간의 친선관계가 단군조선 내부의 정변(政變)을 틈탄 은의 세력확장으로 깨어지고 정변을 수습한 단군조선은 마침내 은나라 내지(內地) 깊숙이 들어가 분국(分國)을 설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역사에서 수수께끼의 나라로 전해지는 이른바 엄국(奄國)과 서국(徐國)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부분으로 동양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단군세기』 21세단군 소태(蘇台)조를 보면, - 甲辰元年(B.C.1337) 殷왕 武丁(B.C.1339~B.C.1280)이 鬼方을 쳐서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索度,令支 등을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22세단군 색불루(索弗婁)조에는, - 丙申元年(B.C.1285) 11월, 제께서 몸소 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殷의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상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弁韓의 백성들을 淮垈(양쯔강하류유역)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乙卯20년(B.C.1266) 때에 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孤竹君과 함께 여러 적들을 쫒아내고 南으로 이동하여 奄瀆忽에 머물렀으니 殷의 경계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땅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黎라 칭하고 西戎과 함께 殷의 제후들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단제의 교화는 멀리 恒山(하북서부지방)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 라고 되어 있다. 계속하여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조에, - 甲申元年(B.C.1237) 황숙인 固弗加에게 명하여 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걸손을 보내 藍國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로 하여금 殷나라 땅에 대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乙酉2년(B.C.1236) 藍國君 今達이 靑邱君,九麗君과 周?에서 회합하고 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殷나라의 城柵을 쳐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淮垈의 땅을 평정하더니 浦古氏를 奄땅에, 寧古氏를 徐땅에, 邦古氏를 淮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 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록들은 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동일하다. 전통적으로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인 양쯔강하류의 비옥한 평야지대인 회대의 땅에 단군조선 초기의 분조(分朝)보다 더 대규모인 분국(分國)을 설치하였는데 이 분국들이 은나라 후대의 주(周)나라와도 지속적으로 세력을 다투게 된다. 『후한서』「동이열전」 - (商王)仲丁六,征于藍夷 - 『후한서』「동이열전」殷王武乙條 - 東夷寢盜,分遷淮垈,漸居中土,所謂徐夷是也 - 『후한서』「동이열전」周王勵條 - 勵王無道,淮夷入寇,王命괵仲,征之,不克 - 『후한서』의 기록에서처럼 동이의 강성함이 은나라와 주나라와 대등하면 대등하였지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알수 있는데, 이후의 『단군세기』에는 특히 周나라와의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한편,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의 초(楚),제(濟),조(趙) 등의 나라와도 관계를 맺고있는 것으로 나오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특히 연(燕)과의 관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비롯한 주대(周代)이후의 문헌에도 동이구족(東夷九族)을 대표하여 ‘淮夷’,‘徐夷’등이 주나라와 춘추시대 제후국들과 지속적인 투쟁의 관계를 맺고 있음이 보이고 있다. 중국내륙에서의 동이족의 활동을 중국사서와 비교해서 보았는데, 중국측 문헌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언급없이 중원의 왕조와 관련되는 사건에 대해서만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순임금때부터 서주(西周)까지 간간이 등장하는 ‘숙신(肅愼)’에 대한 전거가 단군조선의 ‘조선(朝鮮)’에 대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 중국내 동이족과의 관련면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숙신’과 ‘조선’을 같은 명칭에 대한 다른 시대적 한자표기로 여기고 있지만, 종족구성에 있어서는 ‘숙신’을 퉁구스계통으로 보는 등 아직 일치하지 않고 있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숙신’은 읍루(邑婁)와 물길(勿吉)로 이어지는 만주지방에 있던 고대의 종족명칭이고 호시((木苦)矢:싸리나무화살),석노(石弩:석궁)가 유명한 곳으로 알려진다. 춘추시대이후의 문헌에는 ‘조선’이란 국명이 정식으로 등장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과거의 한반도위치설에서 요녕지역으로 중심지가 이동되어지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문헌상에서도 조금씩 해석상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한단고기』의 고조선에 대한 역대단군들의 상세한 치세기록은 이러한 불확실한 역사에 대해 실로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고, 또한 사실들에 대한 기록이 중국과도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그 가치를 재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헌적 비교검증외에도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한단고기』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입증하고 있으며, 특히 이 책의 천문기록에 대한 과학적 검증은 『한단고기』를 단순한 위작이 아닌 명백한 실제기록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부분적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전반적인 검토가 더 중요한 시점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평어;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과연 "주류"라는 자존심 가지고 이런 책에 대해 관심을 안 기울였을까요 ? 그건 터무니없는 낭설입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사회과학에 대해 공부하신다면,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발전되어왔는지 아신다면 한단고기의 내용은 "전부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정도는 아셔야죠. 한단고기의 내용대로라면 대륙에서 "근대국가에" 걸맞는 대제국을 한민족이 세우고 놀았다는 건데 이게 맞는 소리일까요 ? 우선 '민족'이란 것을 따져봅시다. 민족이란 개념은 이십세기 '식민통치'란 압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한민족이라는 '자각'도 일제 식민통치나, 그 이전의 몽골제국 통치에서 비롯한 것이란 말입니다. 조선시대에 언제서부터 우리가 민족 타령했습니까 ?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화두는 "중화"였습니다. 성리학적 세계관은 민중들까지 지배하였단 말입니다. 그리고 고대 시대에 무슨 민족타령입니까 ? 종족이라면 몰라도 민족이란 말은 우스꽝스럽습니다. 게다가 한단고기의 내용을 읽으면 가장 중요시되는 "하부구조"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누가 누굴 지배했느니 쳤다느니하는 기독교식 서술이 나왔지, 생산구조가 어떠하였고 세금은 어떻게 걷었으며 농사는 무얼로 지었고 하는 식의 "현실적인 얘기"는 거의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적어도 근대적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있어야 제국이고 말고 언급이나 하지, 그 당시처럼 정착농경도 발전하지 않았을 무렵에 무슨 제국 타령입니까 ? 몽골제국 같은 경우도 전세계적으로 각 국가의 생산력이 일정 수준 이상 발전한 것을 착취하고 빼앗고 소유함으로써 유지하였습니다. 이런 얘기로만 보자면 한단고기는 그 서술방향부터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부분적인 진실은 있을 터, 어디까지 참고용으로 그리고 그 진위성 증명 과정을 통해서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사대주의적 역사관이 드러나고 일부 왜곡이 있되, 중국 중심의 서술 부분에 있어선 기막힌 진실성을 보여주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비하면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기분이 좋으면 다 역사책입니까 ?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일본서기를 마땅히 인정해야하며,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는 임나일본부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하며, 그리스 신화조차 예날엔 정말 신이 있구나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야죠. 혹은 이런 반론도 있을 것입니다. 김부식과 기타 무리들이 옛날 고사서를 불태우지 않았냐고. 맞는 얘기입니다. 소위 춘추필법이라는 "날조된 서술방식"이 있었고, 김부식은 자신이 참조하였던 많은 역사서를 보존조차 안 한걸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김부식이 스스로 취재 및 현장조사를 하여 역사서를 적어나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참고서적들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가 주목받은 것은 그 내용보다도 "그나마 객관적으로 사실(史實)을 서술하고 차례차례 기술해나가는 역사서술의 방식을 확정지은 데"에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역사서술방식이 과연 정확하였을 까요 ? 늑대 한마리 잡아서 부족이 나눠먹은 얘기가 수백년이 가다보면 무시무시한 괴물을 물리쳐 영웅이 되었다라고 윤색되기 십상인 것 아닙니까 ? 문제는 한단고기가 딱 이런 수준의 얘기를 따라가고 있단 것입니다. 한단고기의 서술방식은 과학적이지 않으며, 흠을 잡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고등학교 지리부도에서조차 우리 조상들의 강역은 중국 북부에 뻗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대책없이 중국 전체가 한민족의 터전이었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백제가 중국 동부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말해서 백제의 상인들이 중국 동부에서 그 세력을 구축하였다는 것으로 보지, 군사적으로 먹어치웠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라면 미국도 주한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니 한국 역시 미국 땅이겠죠 ? 한단고기를 보고 가치있다 여기면 스스로의 역사지식을 의심해보십시오. 서술방향부터 이상한 책은 일단 의심하고 그 진위성부터 따져보되, 부분적인 진실을 추려내야합니다.  
13    桓檀古記(한단고기) 댓글:  조회:4014  추천:0  2012-07-30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    단군세기    붑부여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한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번한세가   소도경전본훈   천부경 삼일신고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   삼신관련어귀  *역자후기*        한단고기 해제 한단고기는 이 땅이 식민지로 접어든후인 1911년 계연수桂延壽라는 분에 의해 편찬 되였다.그 내용은 삼성기와 단군세기,북부여기 그리고 태백일사의 4종의 사서史書를 하나로 묶은 것이다. 삼성기는 신라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권과 하권으로 구분하여 합친 것이니,한인· 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우리민족의 시발인 한국시대의 한인으로부터 7세 한인 까지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 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하권에 신시역대기가 덧붙여있다. 단군세기는 고려때 행촌선생 이암 문정공이 전한 책으로 ,아사달에 도읍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한 단군님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1세 단군 왕검으로 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기간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했다. 북부여기는 고려말 학자인 범장이 전한책이다.국사책에서의 고구려 건국년대는 B.C.37년으로 되어있으나,실상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이 보다 두갑자(120년) 내지는 세갑자(180년)가 앞선 것으로 생각되는데,몇가지 기록상의 공통점 등으로 보아 이 북부여기가 바로 고구려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상권·하권·가섭원부여기로 구성되는데,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108년의 역사이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때 학자인 이맥이 전한책으로,한국桓國 ,신시시대神市時代로부터  고려에 이르기 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여기엔 삼신오제본기· 한국본기· 신시본기· 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고려본기가 포함되여 있는데,삼한관경본기에는 마한세가 상·하와 번한세가 상·하가 담겨있다.특히 소도경전본훈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실어,우리 민족의 정통적 종교와 철학 및 문자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이 한단고기는 고대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신앙·풍습·정치·경제·철학·교육·지리·예술 등에 관한 풍부한 자료가 담겨있다. 그리고 조국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할점을 제시하고 있다.일예를 들면 주체의식의 입장에서 볼 때, 늘 우리의 귀에 익어온 발해라는 이름도 본명인 대진국大震國으로 돌아가야 될 것이다.왜냐하면 발해라함은 남이 부르던 이름일 뿐 ,사실은 대진국임을 한단고기는 입증하고 있음이다.한가지 더 예로 들면 우리는 우리의 임금을 왕이라 말해왔다.그 왕이라는 칭호는 제후들에게나 사용하는 것으로서 역사 교육을 통해 우리는 제후나라 백성이라고 암시 받아왔던 것이다.그러나 보라.한단고기의 어디에 왕의 칭호가 있는가? 엄연히 고려시대까지 내내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실상 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은 이미 우리 조국의 고대사가 대륙의 역사임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그렇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내용의 허구를 의심할 것이다.이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것이,그간 우리가 배워왔던 국사와는 너무나 엄청난 차이를 이 한단고기는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삼국시대가 최초의 국가 형태를 갖춘 고대국가라고 간주했던 식민시대의 학설에 반해,그 이전에 이미 찬란한 한인·한웅·단군시대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한단고기이며,또 그 역사의 주도가 매우 주체성 있는 강국의 면모를 갖추고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필자는 이책을 번역해 가면서 평소에 주장해왔던 바 ,한반도만이 우리의 강역이라는 반도사관과 스스로 강국임을 포기하고 주체성을 상실한 식민사관의 말살을 염두에 두고,그내용의 예증에 최대의 역점을 두었다. 그어느 책보다도 많이 읽혀져야할 이러한 책이 왜 그토록 묻혀있었던가 하는 의문은,역시 우리의 사가들이 젖어있었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심지어는 이책에 포함된 일부의 사서史書에서도 인습에 젖어있던 그간의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 있으니,잘못된 역사관의 해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결코 이 한단고기를 근거가 불확실하다던가,신빙성이 없다던가,편찬자들의 학문적 업적이 뚜렸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내팽개 칠 수는 없다.그러한 선입견 자체도 논리적 근거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것이다.적어도 이책에 실린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도 이책은 한국인에게 중시되어야 하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들먹이며 문화민족임을 자랑하는 우리가 제대로된 상고사 하나 변변하게 전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또는 고려사 만이 우리의 역사책일리가 없는 것이다.우리 조상들은 분명히 숱한 역사책을 편찬했고 전해왔다.그것들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던 것은 또다른 못난 조상의 탓이라고 할수밖에 없다.이 한단고기는 그렇게 사장되어온 일부의 사서들을 모은 책이다. 자국의 역사에 대해 긍지를 갖고, 그것을 자랑하며,그 얼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 또 이를 통해 민족정기를 부추기고자 하는 것은 하등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이제 이책 이 한단고기 한권을 읽어 마칠 때 쯤에는 우리의 참 된 역사와 전통,하나님 나라 백성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맥박이 고동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역자 후기에서의 로 미룬다.)                                          번역 및 주해자    임승국 (林承國)                                                                                           한단고기 범 례 *고기古記인용의 시작은 저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史》로부터라 할 수 있다.그러나 지금 그 고기古記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을 한 책으로 묶어 《한단고기桓檀古記》라 이름하였다. *《삼성기三聖紀》는 두 종류가 있어 비슷하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안함로安含老씨가 찬撰한 것으로 우리 집안에 전해 오는 책을 이제 《삼성기 전 상편  三聖紀 全 上篇》이라 하고 원동중元董仲씨가 찬撰하고 태천泰川의 백진사白進士 관묵寬默씨로부터 얻은 것을 이제 《삼성기 전 하편  三聖紀 全 下篇》으로 하여 통틀어 《삼성기 전  三聖紀 全》이라 한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흥행촌의 노인이 엮은 것으로 행촌杏村선생 문정공文貞公이 전한 책이다. 이 책도 역시 백진사白進士로부터 얻은 것이다. 진사進士의 집은 글로써 전통이 알려졌던 오래된 가문으로 본래 많은 책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제 두 종류의 사서史書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왔다 함은 어찌 다만 백 사람의 벗이 주는 선물에 비길 수 있을 건가? 조국에 만장의 광채를 비춤이라 할 것이다. *《북부여기 상ㆍ하北夫餘紀 上ㆍ下》는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찬한 것이다. 본래 《단군세기 합편檀君世紀 合編》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이 있었던 바 삭주朔州의 이동梨洞 이진사李進士 형식亨拭의 집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백진사白進士가 간직했던 것과는 글자 하나의 차이도 없다. 이제 또 별본別本이 있어 세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있지만, 이는 그 내용이 앞의 책과는 매우 다른바가 있을 뿐만아니라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일십당一十堂 주인 이맥李陌이 펴낸 것으로 해학海鶴 이기李汽 선생이 간직했던 책이다. 대저 한단桓檀 이래로 서로 전하여 온 교학 경문을 모두 사용한 전거가 한번 보아도 뚜렷한 것들이다. 또 저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두 책의 전문이 함께 편중編中에 있어 실로 낭가朗家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의 대학 중용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오호라! 한단桓檀 이래로 전하여 온 삼일심법三一心法은 참으로 이 책에 있는 바, 모름지기 태백진교太白眞敎가 다시 일어날 토대가 되지 않을 것인가? 손도 저절로 춤을 추고 발도 저절로 춤추고 흥겨워 소리지르고 싶으니 기쁨에 미칠 지경이로다. *《한단고기桓檀古記》 모두 해학海鶴선생의 감수를 거치고 또 내가 정성 근면을 다하여 옮겨 쓴 것이다. 또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의 두 벗이 돈을 내어 여러분에게 부탁하여 인쇄해 내는 바, 하나는 자아自我인간의 주성主性발견으로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민족문화의 표출 이념이 됨으로써 크게 기뻐하며, 하나는 세계 인류의 대합對合공존으로써 크게 기뻐하는 바이다. 신시개천神市開天 5808년,즉 광무光武15년의 신해 5월 광개절廣開節에 태백太白의 유도遺徒 선천宣川의 계연수인경桂延壽仁卿이 묘향산 단굴암에서쓰다.                              *林承國;1928년생.고려대 정치학과졸업 동 대학원 문학박사취득. 경희대 영문학과교수,숭실대 영문학과교수,명지대에서 한국 고대사를 강의,한국 사학회 회장,공군 정신 연구원교수,새마을 연수원 교수를 지냄.중국25사에도 능통한 그는 동양제국의 역사를 두루 비교,검토하여 고대 우리민족의 찬란했던 역사를 객관성있게 입증하는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출처: bigstar http://bluecabin.com.ne.kr/  
12    揆 園 史 話 (규원사화) 댓글:  조회:2489  추천:0  2012-07-30
서(序)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紀) 단군기(檀君紀)       만설(漫說)       단군 관련 기사 교감기(校勘記 )         교감표(校勘表 ) 揆 園 史 話 (규원사화) [역사로 기록된 고조선 이야기] ▷ 北崖子 著□ ▷ 金聲九 譯注 옮긴 이의 말 이 글은 우리의 역사를 알고 싶은 마음에《揆園史話》의 내용을 풀어 옮기고, 본서에 언급된 韓,中 史書의 관련 기록을 그 주석으로 첨가한 것이다.본서가 편역의 과정에서 이미 앞서 이루어진 책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음에, 본서 또한 이어서 이루어질《揆園史話》의 더 나은 내용을 엮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 가운데 일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나의 책으로 내어 놓는다. 김 성 구. < 일러두기 > ▶본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원본《규원사화》(도서열람번호: 貴629, 古2105-1)를 저본으로 하고, 동 도서관 소장의 필사본《규원사화》(도서열람번호: 2121.3)를 참고하여 원문을 교감한 뒤, 번역과 주석을 한 것이다. < 일러두기 > ▶원문에는 구두점과 기타 표점을 사용하였으며, 그 용례는 일반적인 용법에 준하였다. ▶원문의 인명과 지명 및 고유명사에는 밑줄을 사용하였으며, 서적명에는 꺾음 겹괄호를 사용하였다. ▶원문의 교감에 사용된 특별 부호와 그 용도는 다음과 같다. ㉮ 원괄호와 격자괄호([原](筆)): 교감에 이용된 판본의 종류를 나타낸다. 즉, 교감 대상의 두 판본간 異字를 표시하며 원본《규원사화》의 글자나 문장은 격자괄호를 사용하고, 필사본《규원사화》의 내용은 원괄호를 사용하였다. ㉯ 윗첨자의 사용((棄)[取]): 교감의 내용을 나타내는 부호로 사용되었다. 즉, 교감의 결과 버리는 문장이나 단어는 윗첨자로 표시하고, 취하는 문장이나 단어는 정상 글씨체를 사용하되, 각각의 판본 종류를 표시하였다. 두 판본의 내용이 함께 잘못된 경우에는 모두 윗첨자로 처리하고, 정정된 새로운 내용은 정상 글씨체를 사용하여 표기하였다. ㉰ 정상 글씨체의 원괄호나 격자괄호가 단독으로 사용되어진 경우는 상대편 판본에 없는 글자 또는 문장임을 말한다. < 참 고 서 적 > 기 본 서 적 《揆園史話》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한뿌리사 영인). 1990. 《揆園史話》 손진태 소장본(고려원 영인). 1989. 참 고 서 적 《史記》(2版12刷) 1992.《漢書》(1版6刷) 1990. 《後漢書》(1版5刷) 1991.《三國志》(2版11刷) 1992. 《遼史》(1版4刷) 1991. (이상 中國·中華書局校編本) 《삼국유사》 (北)리상호 옮김. 신서원 影印. 1990. 《檀君實史에 관한 考證硏究》 李相時 著. 고려원. 1990. 《神檀實記》 金敎獻 著, 이민수 譯. 한뿌리. 1987. 《揆園史話》 北崖 著, 고동영 譯. 한뿌리. 1992. 《한국고대사》 尹乃鉉 著. 삼광출판사. 1991.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徐熙乾 編著. 고려원. 1989. 《說苑全譯》 劉向 著, 王鍈·王天海 譯注. 中國: 貴州人民出版社. 1992. 《滿洲源流考》 淸·阿桂 等撰. 서울: 홍익재 影印. 1993. 《東北民族源流》 孫進己 著, 林東錫 譯. 서울: 東文選. 1992. 《說文解字經》 段玉裁 著. 臺灣: 蘭臺書局. 1977. 《中國史序說》 李春植 著. 서울: 敎保文庫. 1991. 《산해경》 鄭在書 譯註. 서울: 民音社. 1993. 《山海經校注》 袁珂校注. 中國:上海古籍出版. 1991. 《中國古代史地圖冊》 中國:中國地圖出版社編. 1991. -본 편집물은 商用出版을 제외한, 어떠한 형태로의 사용에도 그 제약이 없습니다.- HOME다음
11    부도지(符都誌) 댓글:  조회:2653  추천:0  2012-07-30
부도지符都 誌 부도지는 징심록 상교 제1지라고 하며, 우리의 상고사를 기술한 사서중에 가장 오래전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히 기술한 문헌으로 서기 1953 년(단기 4286 년 )박 금선생의 프린트본으로 세상에 알려진 책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서의 저자는 영해 박씨의 시조인, 신라 눌지왕때, 치술령 망부석의 주인공인 관설당 박 제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도지의 내용을 율과 려, 음과 성, 음상과 향상, 5 음 7 조의 율려등으로 이치를 설명한 것으로 보아, 부도지는 박 제상의 아들이며 방아타령의 대악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 지어서, 사회적으로 이름있는 아버지 박 제상의 이름으로 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해 박씨의 시조인 관설당 박 제상은 또한, 천부경을 아들인 백결선생 박 문량에게 전하였고, 백결선생 박 문량은 신선사 마애불상들이 있는 단석산 깊은 곳에서 이를 해독하여, 다시 아들 박 마령간에 전하였으며, 아들 박 마령간은 이 천부의 이치를 김 유신에게 가르쳐서 김 춘추와 삼국을 통일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전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주대첩의 박 서장군도 영해 박씨의 후손이며, 근세조선의 태조, 이 성계의 왕사인 자초 무학대사도 영해 박씨의 후손이며, 세종대왕을 도와서 아악을 정리한 박 연도 영해 박씨의 후손으로, 근세조선 초기에 영해 박씨를 중하게 등용한 이면에는 풀리지 않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천부경의 내용이 적힌 징심록은 세조 반정때 숨어 버리며, 후에 금오신화의 저자인 매월당 김 시습이 이를 풀이한 금척지를 영해 박씨 문중에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 부도지가 박 금선생에 의하여 전해진 것을 보면 그것 또한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 부도지는 김은수님의 해설을 겸한 역서인데 제가 처음 읽을 때 좀 혼란스러운 면이있어서 해설 부분을 제외하고 본문 부분만을 발췌한 것입니다. 김태형님의 부도지 해설서 가 비교적 정리가 잘되어 있어 함께 싣습니다. *女神 마고' 21세기에 환생 제 1장 : 마고(麻故)의 시대-김은수역- 第一章 마고성(麻姑城)은 지상(地上)에서 가장 높은 성(城)이다. 천부(天符)를 봉수(奉守)하여, 선천(先天)을 계승(繼承)하였다. 성중(成中)의 사방(四方)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을 쌓아 놓고, 음(音)을 만드니, 첫째는 황궁(黃穹)씨요, 둘째는 백소(白巢)씨요, 셋째는 청궁(靑穹)씨요, 넷째는 흑소(黑巢)씨였다. 두 궁씨의 어머니는 궁희(穹姬)씨요, 두 소씨의 어머니는 소희(巢姬)씨였다. 궁희와 소희는 모두 마고(麻姑)의 딸이었다. 마고는 짐세(朕世)에서 태여나 희노(喜怒)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가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았다. 궁희와 소희도 역시 선천의 정을 받아, 결혼을 하지 아니하고, 두 천인(天人)과 두 천녀(天女)를 낳았다. 합하여 네 천인과 네 천녀였다. 麻姑城은 地上最高大城이니 奉守天符하야 繼承先天이라, 成中四方에 有四位天人이 堤管調音하니 長曰 黃穹氏오 次曰 白巢氏오 三曰 靑穹氏오 四曰 黑巢氏也라. 兩穹氏之母曰穹姬오 兩巢氏之母曰巢姬니 二姬는 皆麻姑之女也라. 麻姑ㅣ生於朕世하야 無喜怒之情하니 先天爲男하고 後天爲女하야 無配而生二姬하고 二姬ㅣ赤受其精하야 無配而生二天人二天女하니 合四天人四天女야라. 第二章 선천(先天)의 시대에 마고대성(麻姑大城)은, 실달성(實達城)의 위에, 허달성(虛達城)과 나란히 있었다. 처음에는 햇볕만이 따뜻하게 내려 쪼일 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오직 8 여(呂)의 음(音)만이 하늘에서 들려 오니, 실달성과 허달성이, 모두 이 음에서 나왔으며, 마고대성과 마고도, 또한 이 음(音)에서 나왔다. 이것이 짐세(朕世)다. 짐세 이전에, 율려(律呂)가 몇 번 부활하여, 별들(星辰)이 출현하였다. 짐세가 몇 번 종말을 맞이 할 때, 마고가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아, 두 딸로 하여금, 오음칠조(五音七調)와 음절(音節)을 맡아보게 하였다. 성중(城中)에 지유(地乳)가 처음으로 나오니, 궁희와 소희가, 또 네 천인(天人)과 네 천녀(天女)를 낳아, 지유를 먹여, 그들을 기르고, 네 천녀에게는 여(呂)를, 네 천인에게는 율(律)을 맡아보게 하였다. 先天之時에 大成이 在於實達之上하야 與虛達之城으로 ?列하니 火日暖照하고 無有具象하야 唯有八呂之音이 自天聞來하니 實達與虛達이 皆出於此音之中하고 大城與麻姑ㅣ赤生於斯하니 是爲朕世라. 朕世以前則律呂幾復하야 星辰巳現이러라. 朕世幾終에 麻姑ㅣ生二姬하야 使執五音七調之節하다. 城中에 地乳始出하니 二姬又生四天人四天女하야 以資其養하고 四天女로 執呂하고 四天人으로 執律이러라. 第三章 후천(後天)의 운(運)이 열렸다. 율려(律呂)가 다시 부활하여, 곧 음상(音象)을 이루니, 성(聲)과 음(音)이 섞인 것이었다. 마고가 실달대성(實達大城)을 끌어당겨, 천수(天水)의 지역에 떨어드리니, 실달대성의 기운이 상승하여, 수운(水雲)의 위로 덮고, 실달의 몸체가 평평하게 열려, 물 가운데에 땅이 생겼다. 육해(陸海)가 병렬(?列)하고, 산천(山川)이 넓게 뻗었다. 이에 천수의 지역이 변하여, 육지가 되고, 또 여러 차례 변하여, 수역(水域)과 지계(地界)가 다 함께 상하가 바뀌며 돌므로, 비로서 역수(曆數)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5]기(氣) 화(火) 수(水) 토(土)가 서로 섞여 빛이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을 구분하고, 초목(草木)과 금수(禽獸)을 살찌게 길러내니, 모든 땅에 일이 많아 졌다. 이에 네 천인이 만물(萬物)의 본음(本音)을 나눠서 관장(管掌)하니, 토(土)를 맡은 자는 [6]황(黃)이 되고, [7]수(水)를 맡은 자는 [8]청(靑)이 되어, 각각 궁(穹)을 만들어, 직책을 수호 하였으며, [9]기(氣)를 맡은 자는 백(白)이 되고, 화(火)를 맡은 자는 흑(黑)이 되어, 각각 소(巢)를 만들어, 직책을 지키니, 이것으로 인하여 성(姓氏)이 되었다. 이로부터 [10]기(氣)와 화(火)가 서로 밀어, 하늘에는 찬 기운이 없고, 수(水)와 토(土)가 감응(感應)하여, 땅에는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음상(音象)이 위에 있어, 언제나 비춰주고, 향상(響象)이 아래에 있어, 듣기를 고르게 해 주는 까닭이었다. 後天運開에 律呂再復하야 乃成響象하니 聲與音錯이라. 麻姑ㅣ引實達大城하야 大城之氣ㅣ上昇하야 布幕於 水雲之上하고 實達之?ㅣ平開하야 闢地於凝水之中하니 陸海?列하고 山川이 廣圻이라. 於是에 水域이 變成地界而雙重하야 替動上下而斡旋하니 曆數始焉이라.以故로 氣火水土ㅣ相得混和하야 光分書夜四時하고 潤生草木禽하니 全地多事라.於是에 四天人이 分管萬物之本音하니 管土者爲黃하고 管水者爲靑하야 各作穹而守職하고 管氣者爲白하고 管火者爲黑하야 各作巢而守職하니 因稱其氏라. 自此로 氣火共推하야 天無音冷하고 水土感應하야 지무흉戾하니 此는 音象이 在上하야 常時反照하고 響象이 在下하야 均布聽聞姑也라. 第四章 이 때에, 본음(本音)을 관섭(管攝)하는 자가 비록 여덟 사람이었으나, 향상을 수증(修證)하는 자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물이 잠깐 사이에 태여 났다가, 잠깐 사이에 없어지며, 조절이 되지 못하였다. 마고(麻姑)가 곧, 네 천인과 네 천녀에게 명하여, 겨드랑이를 열어 출산(出産)을 하게 하니, 이에 [11]네 천인이 네 천녀와 결혼하여, 각각 [12]삼남(三男) 삼녀(三女)를 낳았다. 이가 지계(地界)에 처음 나타난 인간의 조상(人祖) 였다. 그 남녀가 서로 결혼을 하여, 몇 대(代)를 지내는 사이에, 족속(族屬)이 불어나, 각각 3000명의 사람이 되었다. 이로부터 [13]12사람의 시조는 각각 성문(城門)을 지키고, 그 나머지 자손은 향상(響象)을 나눠서 관리하고, 수증(修證)하니, 비로서 역수(曆數)가 조절되었다. 성중(城中)의 모든 사람은, 품성(稟性)이 순정(純精)하여, 능히 조화(造化)를 알고, 지유(地乳)를 마시므로, 혈기(血氣)가 맑았다. 귀에는 오금(烏金)이 있어, 천음(天音)을 모두 듣고, 길을 갈 때는, 능히 뛰고, 걷고 할 수 있으므로, 내왕(來往)이 자재(自在)하였다. 임무를 마치자, 금(金)은 변하여 먼지가 되었으나, 그 성체(性體)를 보전하여, 혼식(魂識)이 일어남을 따라,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을 하고, 백체(魄體)가 때에 따라 움직여, 형상을 감추고도 능히 행동하여, 땅 기운(地氣) 중에 퍼져 살면서, 그 수명(壽命)이 한이 없었다. 是時에 管攝本音者ㅣ雖有八人이나 未有修證響象者故로 萬物이 閃生閃滅하야 不得調節이라. 麻姑ㅣ乃命四天人四天女하야 ?脇生産하니 於是에 四天人이 交娶四天女하야 各生三男三女하니 是爲地界初生之人祖也라. 其男女ㅣ又復交娶하야 數代之間에 族屬이 各增三天人이라. 自此로 十二人祖는 各守城門하고 其餘子孫은 分管響象而修證하니 曆數始得調節이라. 城中諸人이 稟性純精하야 能知造化하고 飮?地乳하야 血氣淸明이라. 耳有烏金하야 具聞天音하고 行能跳步하야 來往自在라. 任務己終則遷化金塵而保己性體하야 隨發魂識而潛能言하고 時動魂體而潛能行하야 在住於地氣之中하야 其壽無量이러라 제 2장 : 부도(不渡)의 시대 第五章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유천(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나 되었다. 곧 돌아와 소(巢)에 오르니, 배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 귀에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의 넝쿨에 달린 [31]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곧 소(巢)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 [넓고도 크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한다. 이 어찌 도(道)인가!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소씨의 말을 의심하였다. 지소씨가 참으로 좋다고 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포도를 많이 먹었다,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에 제족이 포도를 많이 먹었다. 白巢氏之族 支巢氏ㅣ與者人으로 往飮乳泉할새 人多泉少어늘 讓於諸人하고 自不得飮而如是者五次라. 乃歸而登巢하야 遂發飢惑而眩倒하니 耳嗚迷聲하야 呑嘗五味하니 卽巢欄之蔓籬萄實이라. 起而偸躍하니 此被其毒力故也라. 乃降巢闊步而歌曰浩蕩兮天地여 我氣兮凌駕로다. 是何道兮요 萄實之力이로다. 衆皆疑之하니 支巢氏曰眞佳라하거늘 諸人이 奇而食之하니果若其言이라.於是에 諸族之食萄實者多러라. 第六章 백소씨(白巢氏)의 사람들이 듣고 크게 놀라, 곧 수찰(守察)을 금지하니 이는 또 금지하지 아니하되, 스스로 금지하는, 자재율(自在律)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열매를 먹는 습관과 수찰을 금지하는 법이 시작되니, 마고가 성문을 닫고 수운(水雲)의 위에 덮혀 있는 실달대성의 기운을 거두어버렸다.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齒)가 생겼으며, 그 침(唾)은 [32]뱀의 독(毒)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이는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수찰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눈이 밝아져서, 보기를 [33]올빼미 같이 하니, 이는 사사로이 공률(公律)을 훔쳐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의 혈육이 탁(濁)하게 되고, 심기(心氣)가 혹독하여져서, 마침내 천성을 잃게 되었다. 귀에 있던 오금(烏金)이 변하여 토사(兎沙)가 되므로, 끝내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발은 무겁고, 땅은 단단하여, 걷되 뛸 수가 없었으며, 태정(胎精)이 불순하여, 짐승처럼 생긴 사람을 많이 낳게 하였다. 명기(命期)가 조숙(早熟)하여, 그 죽음이 천화(遷化)하지 못하고 썩게 되었으니, 이는 생명의 수(數)가 얽혀 미혹(迷惑)하게 되고,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白巢氏之諸人이 聞而大驚하야 乃禁止守祭하니 此又破不禁自禁之自在律者也라. 此時에 食實之習과 禁祭之法이 始하니 麻姑閉門撤冪이러라. 已矣오 食實成慣者ㅣ皆生齒하야 唾如蛇毒하니 此는 强呑他生故也오 設禁守祭者ㅣ皆眼明하야 視似치目하니 此는 私 公律故也라. 以故로 諸人之血肉이 化하고 心氣ㅣ酷變하야 遂失凡天之性이라. 耳之烏金이 化作兎沙하야 終爲天聲하고 足重地固하야 步不能跳하며 胎精不純하야 多生獸相이라. 命期早熟하야 其終이 不能遷化而 하니 此는 生命之數ㅣ 惑 縮故也라. 第七章 이에 사람(人世)들이 원망하고 타박하니, 지소씨가 크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져서, 권속(眷屬)을 이끌고 성을 나가, 멀리 가서 숨어 버렸다. 또 포도의 열매를 먹은 자와, 수찰을 하지 아니한 자도, 역시 모두 성을 나가,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가니, 황궁(黃穹)씨가 그들의 정상을 불쌍하게 여겨 고별(告別)하여 말하기를, [여러분의 미혹(迷惑)함이 심대(甚大)하여 성상(性相)이 변이(變異)한 고로 어찌할 수 없이 성중(城中)에서 같이 살 수가 없게 되었오. 그러나, 스스로 수증(修證)하기를 열심히 하여, 미혹함을 깨끗이 씻어, 남김이 없으면, 자연히 복본(復本) 할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시오.]하였다. 이 때에 기(氣)와 토(土)가 서로 마주치어, 시절(時節)을 만드는 광선(光線)이, 한 쪽에만 생기므로, 차고 어두웠으며, 수(水)와 화(火)가 조화를 잃으므로, 핏기 있는 모든 것들이 시기하는 마음을 품으니, 이는, 빛을 거둬들여서 비추어 주지 아니하고, 성문이 닫혀 있어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於時에 人世ㅣ怨咎하니 支巢氏ㅣ大恥顔赤하야 率眷出城하야 遠出而隱이라. 且氣慣食萄實者와 設禁守祭者ㅣ亦皆出城하야 去各地하니 黃弓氏ㅣ哀憫彼等之情狀하야 乃告別曰 諸人之惑量이 甚大하야 性相變異故로 不得同居於城中이라. 然이나 自勉修證하야 淸濟惑量而無餘則自然復本하리니 勉之勉之하라. 是時에 氣土相値하야 時節之光이 偏生冷暗하고 水火失調하야 血氣之類ㅣ皆懷猜忌하니 此는 冪光이 卷撤하야 不爲反照하고 城門이 閉隔하야 不得聽聞故也라. 第八章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혼탁(混濁)이 지극하여, 청정(淸淨)을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황궁(黃穹)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물러나와 [34]제족(諸族)에게 고하기를 [오미의 재앙이 꺼꾸로 밀려오니, 이는 성을 나간 사람들이 이도(理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혹량(惑量)이 불어 났기 때문이다. 청정(淸淨)은 이미 없어지고, 대성(大城)이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이 때에 [35]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본전하고자 하므로, 황궁씨가 곧 천부(天符)를 신표(信標)로 나누어 주고, [36]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37]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復本)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已矣오. 出城諸人中悔悟前非者ㅣ還到城外하야 直求復本하니 此未知有復本之時所故也라. 乃欲得乳泉하야 掘鑿城廓하니 城址破損하야 泉源이 流出四方이라. 然이나 卽化固土하야 不能飮철이라. 以故로 城內에 遂乳渴하니 諸人이 動搖하야 爭取草果하니 混濁至極하야 難保淸淨이라. 黃穹氏ㅣ爲諸人之長故로 乃束身白茅하고 謝於麻故之前하야 自負五味之責하여 立誓復本之約이러라. 退而告諸族曰五味之禍ㅣ反潮逆來하니 此出城諸人이 不知理道하고 徒增惑量故也라. 淸淨已破하고 大城將危하니 此將奈何오. 是時에 諸天人이 意決分居하야 欲保大城於完全하니 黃穹氏ㅣ乃分給天符爲信하고 敎授採葛爲量하야 命分居四方이라. 於時에 靑穹氏ㅣ率眷出東間之門하야 去雲海洲하고 白巢氏ㅣ率眷出西間之門하야 去月息洲하고 黑巢氏ㅣ率眷出南間之門하야 去星生洲하고 黃穹氏ㅣ率眷出北間之門하야 去天山洲하니 天山洲는 大寒大險之地라. 此는 黃穹氏ㅣ自進 難하야 忍苦復本之 盟誓러라. 第九章 [38]분거제족(分居諸族)이 각 주(洲)에 이르니, 어느덧 [39]천년이 지났다. 옛날에 먼저 성을 나간 사람들의 자손이 각지(各地)에 잡거(雜居)하여,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거의가 그 근본을 잃고, 성질이 사나와져서, 새로 온 분거족을 보면, [40]무리를 지어 추격하여 그들을 해하였다. 분거족이 이미 정주(定注)하니, 바다와 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왕이 거의 없었다. 이에 마고가 궁희와 소희와 더불어 대성을 보수하여, 천수(天水)를 부어 성내(城內)를 청소하고, 대성(大城)을 [41]허달성(虛達城)의 위로 옮겨버렸다. 이 때에 청소를 한 물이 동과 서에 크게 넘쳐 [42]운해주의 땅을 크게 부수고, 월식주의 사람을 많이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지계(地界)의 중심(重心)이 변하여, 역수(曆數)가 차이가 생기니, 처음으로 삭(朔)과 판(?)의 현상이 있었다. 分居諸族이 繞倒各洲하니 於焉千年이라. 昔世出城諸人之裔ㅣ難居各地하야 其勢甚盛이라. 然이나 殆忘根本하고 性化猛獰하야 見新來分居之族則作群追跡而害之러라. 諸族이 已定住하니 海阻山隔하야 來往이 殆絶이라. 於時에 麻故與二姬로 修補大城하고 注入天水하야 淸掃城內하고 移大城於虛達之上이러라. 是時에 淸掃之水ㅣ大漲於東西하야 大破雲海之地하고 多滅月息之人이라. 自此로 世界之重이 變化하야 曆數生差하니 始有朔?之象이라. 第十章 황궁씨가 [43]천산주에 도착하여, 해혹(解惑)하여 복본(復本)할 것을 서약하고, 무리에게 수증(修證)하는 일에 근면하도록 고하였다. 곧 장자(長子) 유인(有因)씨에게 명하여, 인세(人世)의 일을 밝히게 하고, 차자(此子) 와 삼자로 하여금 모든 주(洲)를 순행(巡行)하게 하였다. 황궁씨가 곧 천산(天山)에 들어가 돌이 되어, 길게 [44]조음(調音)을 울려, 인세의 혹량을 남김 없이 없앨 것을 도모하고, 기어이 대성 회복의 서약을 성취하였다. 이에 유인씨가 [45]천부삼인(天符三印)을 이어 받으니, 이것은 곧 천지본음(天地本音)의 상(象)으로, 그것은 진실로 근본이 하나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유인씨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나무를 뚫어서 마찰을 시켜 불을 일으켜서 밝게 비춰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물을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치니, 모든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유인씨가 천년을 지내고 나서, 아들 [46]한인(桓因)씨에게 천부를 전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47]계불을 전수(專修)하며 나오지 아니하였다. 환인씨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크게 밝히니, 이에 햇빛이 고르게 비추고, 기후가 순조로와 생물들이 거의 안도함을 얻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48]괴상한 모습이 점점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는 3세(황궁, 유인, 환인)가 수증하기 [49]삼천년에 그 공력이 거의 없어질만큼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黃穹氏ㅣ到天山洲하야 誓解惑復本之約하고 告衆勸勉修證之業이라. 乃命長子有因氏하야 使明人世之事하고 使次子三子로 巡行諸洲러라. 黃穹氏乃入天山而化石하야 長嗚調音하야 以圖人世惑量之除盡無餘하고 期必大城恢復之誓約成就러라. 於是에 有因氏ㅣ繼受天符三印하니 此卽天地本音之象而使知其眞一根本者也라. 有因氏ㅣ哀憫諸人之寒冷夜暗하야 鑽燧發火하야 照明溫軀하고 又敎火食하니 諸人이 大悅이라. 有因氏千年에 傳天符於子桓因氏하고 乃入山하야 專修契불不出이라. 桓因氏ㅣ繼受天符三印하야 大明人世證理之事하니 於是에 日光均照하고 氣侯順常하야 血氣之類ㅣ庶得安堵하고 人相之怪ㅣ稍得本能하니 此는 三世修證三千年에 其功力이 庶幾資於不 者也라. 제 3 장 : 배달국 시대 第十一章 환인씨의 아들 환웅씨는 태여날 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 삼인을 계승하여, 수계제불 (修계除불) 하였다. 천웅(天熊)의 도를 수립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래한 바를 알게 하였다. 어느덧 인세(人世)가 의식(衣食)의 일(業)에만 편중하므로, 환웅씨는 무여율법(無餘律法) 조(條)를 제정하여, 환부(鰥夫)로 하여금 조절하게 하였다. 1조는, 사람의 행적(行蹟)은, 때때로 깨끗하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생귀(生鬼)가 되지 않게 하고 번거롭게 막혀, 마귀(魔鬼)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통명무여일장(通明無餘一障)하게 하라. 2조는, 사람의 취적(聚積)은, 죽은 뒤에 공을 제시하여, 생귀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게 하고, 함부로 허비하여, 마귀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보흡무여일감(普洽無餘一憾)하게 하라. 3조는, 고집이 세고 사혹(邪惑)한 자는 광야(曠野)에 귀향을 보내, 때때로 그 사옥함을 씻게 하여, 사기(邪氣)로 하여금, 무여어세상(無餘於世上)하게 하라. 4조는, 죄를 크게 범한 자는 섬도(暹島)에 유배시켜 죽은 뒤에 그 시체를 태워서, 죄집(罪集)으로 하여금, 무여어지상(無餘於地上)하게 하라 였다. 또 궁실(宮室)을 짓고, 배와 차(車)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거주(居住)하고, 여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환웅씨가 바다에 배를 띄워 시승(始承)하여 [64]사해(四海)를 순방하니,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제족의 소식을 소통하여 근본을 잊지 않을 것을 호소하고, 궁실을 짓고, 배와 차를 만들고, 화식(火食)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었다. 환웅씨가 돌아와 8음2문(八音二文)을 수학하고, 역법(曆法)을 정하고 의약술(醫藥術)을 수업하며,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를 저술하니, 홍익인세(弘益人世)였다. 이는, 세대는 멀어지고, 법은 해이하여져서, 모든 사람들이 몰래 사단(詐端)을 모색하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에, 일용(日用)하는 사물 사이에서, 근본의 도를 보전하여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비로소 학문을 하는 풍조가 일어나니, 인성(人性)이 혼매(昏昧)하여, 배우지 않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桓因氏之子桓雄氏ㅣ生而有大志하야 繼承天符三印하고 修계除불하고 立天雄之道하야 使人知其所由러라. 於焉人世ㅣ偏重於衣食之業하니 桓雄氏ㅣ制無餘律法四條하야 使鰥夫로 調節하니 一曰人之行蹟은 時時淸濟하야 勿使暗結生鬼하며 煩濟化魔하야 使人世로 通明無餘一障하라. 二曰人之聚積은 死後堤功하야 勿使陳垢生鬼하며 濫費化魔하야 使人世로 普洽無餘一憾하라. 三曰頑 邪惑者는 謫居於曠野하야 時時被其行하야 使邪氣로 無餘於世上하라. 四曰大犯罪過者는 流居於暹島하야 死後焚其尸하야 使罪集으로 無餘於地上하라. 又作宮室舟車하야 敎人居旅러라. 於是에 桓雄氏ㅣ始乘舟浮海할새 照證天符修信하고 疏通諸族之消息하며 訴言根本之不忘하고 敎宮室舟車火食之法이너라. 桓雄氏ㅣ歸而修八音二文하고 定曆修醫藥하며 述天文地理하니 弘益人世라. 此는 世遠法弛하야 諸人之暗취摸 이 增詐端故로 欲保根本之道於日 用事物之間而使昭然也라. 自是로 始興修學之風하니 人性昏昧하야 不學則不知故也라. 제 4 장 : 임검(壬儉)씨 시대(조선시대) 第十二章 환웅씨가 [75]임검(壬儉)씨를 낳았다. 때에 사해의 제족(諸族)이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혹(迷惑)속에 빠져, 세상이 고통스러웠다. 임검씨가 천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천웅의 도(天雄之道)를 닦아, 계불의 의식을 행하여,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갈고, 심고, 누에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交易)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임검씨가 뿌리를 먹고, 이슬을 마시므로, 몸에는 털이 길게 나가지고, 사해를 널리 돌아다니며, 제족을 차례로 방문 하였다. 백년사이에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해혹복본(解惑復本) 할 것을 맹서하며, 부도(符都)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은 멀고 소식은 끊어져, 제족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로 변하여 서로 다르게 되었기 때문에, 함께 모여 협화(協和)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여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후일에 회강(會講)의 실마리가 되니, 인사가 번거롭고 바빠, 강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桓雄氏生壬儉氏하니 時에 四海諸族이 不講天符之理하고 自沒於迷惑之中하야 人世因苦라. 壬儉氏懷憂於天下하고 修天雄之道하며 行계불之儀하야 繼受天符三印이라. 敎耕稼蠶葛陶 之法하고 布交易稼 錄之制러라. 壬儉氏ㅣ啖根吸露하고 身生毛 하야 遍踏四海하야 歷訪諸族하니 百年之間에 無所不往이라. 照證天符修信하고 盟解惑復本之誓하며 定符都建設之約하니 此는 地遠信絶하야 諸族之言語風俗이 漸變相異故로 俗講天符地理於會同協和之 而使明之也라. 是爲後日會講之緖하니 人事煩忙하야 不講則忘失故也라. 第十三章 임검(壬儉)씨가 돌아와 부도(符都)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다. 즉 동북의 자방(磁方)이었다. 이는 2와 6이 교감(交感)하는 핵심지역이요, 4와 8이 상생(相生)하는 결과의 땅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십방으로 갈리어 나가니, 즉 9와 1의 끝과 시작이 다하지 않는 터전이었다. 삼근영초(三根靈草)와 오엽서실(五葉瑞實)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이 금강(金剛)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려, 전 지역에 두루 가득하니, 이는 1과 3과 5와 7의 자삭(磁朔)의 정(精)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곧 태백산 밝은 땅의 정상에 천부단(天符壇)을 짓고 사방에 보단(堡壇)을 설치 하였다. 보단의 사이에는 각각 세 겹의 도량길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길의 사이는 천 리였으며, 도랑길의 좌우에 각각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는 마고본성(麻故本城)에서 그 법을 취한 것이었다. 부도의 하부를 나눠 마을을 만들었다. 삼해(三海)의 주위에 둥그렇게 못에 잠기었다. 사진(四津)과 사포(四浦)가 천 리 간격으로 연결되어, 동서로 줄을 지어 둘러쌌다. 진(津)과 포(浦)사이에 다시 6부를 설치 하였다. 6부에는 제족(諸族)이 살았다. 부도가 이미 이루어지니, 웅려(雄麗)하고 광명하여 사해를 총화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제족의 생맥(生脈)이었다. 壬儉氏ㅣ歸而擇符都建設之하니 卽東北之磁方也라. 此는 二六交感懷核之域이오 四八相生潔果之地라. 明山麗水ㅣ連선萬里하고 海陸通涉이 派達十方하니 卽九一終始不 之其也라. 三根靈草와 五葉瑞實과 七色寶玉이 托根於金剛之臟하야 遍滿於全域하니 此一三五七磁朔之精이 會方成物而順吉者也라. 乃築天符壇於太白明地之頭하고 設保壇於四方이라. 保壇之間에 各通三 道溝하니 其間이 千里也오 道溝左右에 各設守關하니 此取法於麻故之本城이라. 劃都坊於下部之休하고 圖涵澤於三海之周하니 四律四浦ㅣ連隔千里하야 環列於東西라. 律浦之間에 又設六部하니 此爲諸族之率居也라. 符都 成하니 雄麗光明하여 足爲四海之總和요 諸族之生脈 第十四章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곧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흘려 보내, 사해의 제족을 초청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 숲에 신시를 크게 열고, 수계정심(修?淨心)하여, 천상(天象)을 살핀 후, 마고의 계보(系譜)를 닦아 그 족속(族屬)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문(語文)을 정리 하였다. 또 북진(北辰)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전(奠)을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악(樂)을 연주하였다. 제족이 방장산(方丈山) 방호의 굴(方壺之堀)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여 칠난(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반듯이 신시를 여니, 이에 어문(語文)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로 되어, 인세가 태화(太和)하였다. 인하여 바닷가에 성황(城隍)을 지어 천부에게 전을 올리고, 제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 第十五章 또 예와 양(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팔택(八澤)에 해시(海市)를 열어, 매년 10월에 조제(朝祭)를 행하니, 사해의 제족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의 제족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제족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76]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공진하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하였다. 이를 가개르켜 조선제(朝鮮祭)라 하였다. 이 때에 산악과 해양의 제족이 물고기와 육(肉)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이 거개가 저린 어물과 조와 가죽류이기 때문에 곧 희생제(犧牲祭)를 행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 하고, 공에 보답하게 하였다. [77]피에 손가락을 꽂아 생명을 성찰하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을 보답하니, 이는 물체가 대신 오미의 잘못을 보상하여, 재앙을 먿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즉 육친고충의 고백이었다. 언제나 세제(歲祭) 때에는 물화(物貨)가 폭주 하므로 사 진과 사 포에 해시를 크게 열고, 몸을 깨끝하게 하여, 지리(地理)를 거울 삼아,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며, 물성(物性)의 근본을 분별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 또 부도 팔택의 모양을 본떠서 뭇을 파고, 곡수(曲水)의 사이에서 보새(報塞)를 지내고, 회연(會燕)하여 제물(濟物)하는 의식(儀式)을 행하였다. 제족이 봉래산 원교봉(圓嶠峯)에서 오서(五瑞)의 열매를 얻으니, 즉 잣나무 열매였다. 봉래 해송(海松)이라 하여, 은혜롭게 오행(五幸)을 얻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사해가 산업이 일어나서 교역이 왕성하게 되므로, 천하가 유족하였다. 第十六章 시(市)에 온 사람들은 영주(瀛州) 대여산(岱與山) 계곡에서 삼영근(三靈根)을 얻으니, 곧 인삼이었다. 그것을 영주 해삼이라 하였으며, 능히 삼덕(三德)을 보전하고 돌아갔다. 대개 인삼이 그 수격(數格)을 갖추어, 자삭방(磁朔方)에서 난 것은 반드시 장생하니 40세(歲)를 1기로 휴먼하고, 13기를 1삭(朔)으로 축정(蓄精)하고, 4삭을 경과하여 씨(子)를 맺어 화(化)하니, 이러한 것은 부도의 지역이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방삭초(方朔草)라 하니,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 혹 작은 뿌리라도 부도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 영효(靈?)가 있으므로, 시(市)에 온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구하였다. 대저 삼근영초(三根靈草)의 인삼과, 오엽서실(五葉瑞實)의 잣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의 부인은 진실로 불암삼역(不咸三域)의 특산이요, 사해제족(四海諸族)의 천혜(天惠)였다. 제 5 장 : 오행(五行)의 화(禍) 第十七章 이 때에 도요(陶堯)가 천산(天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다. 일차로 출성(出城)한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堡)의 간(干)에게서 도(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수(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수5중(九數五中)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중5(中五) 이외의 8은,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내(內)로써 외(外)를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오행(五行)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有因)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壬儉)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갔기 때문에, 비어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흩어졌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중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명협(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하여 부도(符都)의 역을 버리니, 이는 인세 두번째의 큰 변이었다. 第十八章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을 하고, 공순하게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유호씨가 부도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오미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보다 나이를 100여살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업(業)을 이어, 임검씨를 도와, 도를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사자(使者)가 되어, 완미(頑迷)한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有舜)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딴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 주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마침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第十九章 이 때 유호씨가 수시로 경계를 하였으나, 순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요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하였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하였다. 유호씨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으므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을 가리어, 수사(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세(人世)가 곤고(困苦)하여 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 곧 차자(次子)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권사(勸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하였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서 죽고,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가 순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한다고 말하고, 상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第二十章 우가 마침내 부도를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壇)을 설치하였다. 서남 제족을 정벌하여, 제후(諸候)라 하고, 도산에 모이게 하여, 조공을 받았다. 이는 부도 제시(符都際市)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나, 폭돌(暴突)한 것이었다. 이에 천하가 시끄러워, 부도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우가 곧 수륙(水陸)의 길을 차단하여, 부도와 연락을 끊고, 내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감히 부도를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에 유호씨가 서벙에 살면서, 묘예(苗裔)를 수습하여, 소부와 허유가 사는 곳과 통하고, 서남 제족과 연락하니, 그 세력이 심히 왕성하여, 스스로 읍(邑)을 이루웠다. 유호가 곧 권사(權士)를 보내, 우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요는 천수(天數)를 몰랐다. 땅을 쪼개서 천지를 제 멋대로 하였다. 기회를 틈타 독단(獨壇)을 만들고,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기 위하여, 사람을 몰아낸 후, 자칭 제왕이 되어, 혼자서 처리 하였다. 세상은 토석(土石)이나 초목처럼 말이 없고, 천리(天理)는 거꾸러 흘러, 허망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거짓으로 천권(天權)을 훔쳐, 사욕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이 만약 천권을 대행하는 것이라면, 능히 일월(日月)을 개폐(開閉)하여, 만물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제왕이란 수의 요체(數諦)요,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다만 사기와 허망의 나쁜 장난이 될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증리(證理)요, 세상의 일이란 그 증리한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이외에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도의 법은 천수의 이치를 명확하게 증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무(本務)를 수행하게 하고, 그 본복(本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비록 선후는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하고 생소한 것은 있으나, 끌어들이고 몰아내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해가 평등하며, 제족(諸族)이 자행(自行)하는 것이다. 오직 그 오미(五味)의 죄책을 보속(報贖)하는 것과, 대성의 일(大成之業)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일인 희생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요, 여러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이 일은 예로부터 세상 일(人世之事)에 섞이지 아니하였다. 황궁(黃窮)씨와 유인(有因)씨의 예가 바로 이것이다. 第二十一章 또 그 소위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수(天數)의 이치에 이러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방위(方位)의 중앙 5는 교차(交叉)의 뜻이요, 변행(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1로부터 9까지 이므로, 5는 언제나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윤회하여, 율(律)과 여(呂)가 서로 조화를 이룬 후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기수(基數)를 이르는 것이요, 그 5,7이 크게 번지는 고리(大衍之環)에 이르면, 그 자리가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4,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순역(順逆) 생멸(生滅)의 윤멱(輪冪)은 4요, 5가 아니니, 즉 원수(原數)의 9는 불변수이기 때문이다. 또 윤멱이 한 번 끝나는 구간은 2X4=8 사이의 7이요, 5가아니다. 또 그 배성지물(配性之物)은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다섯 중에서 금(金)과 토(土)를 왜 따로 구별하는가. 그 약간의 차이 때문에 구별을 하고자 한다면, 기(氣)풍(風)초(草)석(石)따위는 어찌 같이 들지 않는가. 그러므로, 다 들자면, 수가 없는 것이요, 엄별해서 들자면, 금,목,수,화 혹은 토,목,수,화의 넷이요, 다섯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 물성(物性)을 어떤 이유로 수성(數性)에 짝지우는가, 수성지물(數性之物)은 그 원수가 9요, 5가 아니다. 그러므로 5행의 설은, 참으로 황당무괘한 말인 것이다. 이로써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무혹(誣惑)하여, 곧 천화(天禍)를 만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第二十二章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못하고, 거북이나 명협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는 또 무슨 속셈인가. 천지의 만물이 다 수에서 나와, 각각 수를 상징하고 있는데, 하필 거북과 명협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물사(物事)에, 각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이라는 것은 역사(歷史)다. 그러므로, 요의 역제는, 즉 거북과 명협의 역이요, 인간의 역이 아니니, 그것이, 인세(人世)와 불합(不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삼정(三正)을 번복하여, 구차스럽게 맞추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하늘의 죄를 끌여들였다. 역(曆)이라는 것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이므로, 그 수는 몸소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증합(證合)하여 복이 되고, 역이 바르지 못하면, 천수에 어긋나 화가 되니, 이는 복은 이(理)가 존립(存立)하는데 있고, 이는 정증(正證)에 존립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인세 화복(禍福)의 발단이니, 감히 삼가 하지 않을 것인가. 옛날, 오미(五味)의 화(禍)가, 한사람의 미혹에서 나와서, 만대의 산사람(生靈)에게 미치고 있는데, 지금 또 다시 역의 화가, 장차 천세(天世)의 진리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기만 하구나. 第二十三章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종시(終始)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 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니, 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曜)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4,7성수(性數)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5,8법수(法數)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半)에 대회(大晦)에 구가 있으니, 구는 시(時)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가 되니, 묘는 구가 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刻), 분(分), 시(時)가 1일이 되니, 이는 3,6,9의 체수(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쳐서, 이수(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저 요의 이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僞)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 실위(實爲)의 도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허위는, 안에서 이(理)가 불실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실위는, 이(理)가, 나를 언제나 만족하게 하여, 스스로 함께 존립한다. 第二十四章 유호(有戶)씨가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일러서,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위협이고, 모욕이라 하여,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차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모산(茅山) 진지(陣地)에서 죽었다. 이에 하중(夏衆)들이 비분하여, 죽기를 원하는 자가 수 만이였다. 이는 거의가 우와 함께 치수(治水)를 한 무리들이었다. 우의 아들 계(啓)가 이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으로 진격하여 오니, 유호씨의 군은 불과 수 천이었다. 그러나, 하군(夏軍)이 싸우면 반드시 패하여, 한번도 전적을 거양하지 못하였다. 계가 마침내 두려워서 퇴진하고, 다시 공격하지 못하자, 그 무리가 격양되었다. 이에 유호씨가 하중(夏衆)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차 서남제족(西南諸族)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제 6 장 : 잃어버린 부도의 법 第二十五章 이로부터, 천산(天山) 남쪽 태원(太原)의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주인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소위 장님은 백성이 되어, 암흑이 중첩하였다. 강자는 위에 있고, 약자는 아래에 있어, 왕과 제후를 나라에 봉하고, 생민(生民)을 제압하는 풍폐(風幣)가 만연하여 고질이 되고 마침내 서로 침탈하기에 이르니, 헛되게 생령(生靈)을 죽이고, 한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하은(夏殷)이,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유호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성생(月息星生)의 땅에 들어가니, 즉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여,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마고(麻姑)의 일은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형적이 아주 없어지니, 유호씨가 두루 제족의 지역을 돌고, 마고와 천부의 이(理)를 설(說) 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 전고자(典古者)가 송구스럽게 일어나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유호씨가 본리(本理)를 술회하여, 그것을 전하였다. 第二十六章 임검씨가 유호씨의 행상(行狀)을 듣고, 그 길을 장하게 여겨, 유호씨의 족(族)에게 교부(敎部)에 취업하게 하여 살도록 하였다. 이때에, 임검씨가 하토(夏土)의 형세를 심히 걱정을 하고, 마침내 입산(入山)하여, 해혹복본(解惑復本)의 도를 전수(專修)하였다. 임검씨의 아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천지가 하나의 이치가 되는 것을 증명하여, 인생이 일족(一族)이 되어, 크게 부조(父祖)의 도를 일으키고, 널리
10    조선족 성씨 본관 한조 대조표 댓글:  조회:5729  추천:0  2012-07-17
※ 본 자료는 성씨와 본관의 한자표기를 돕기 위한 자료입니다. 따라서 본관의 종류에 있어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이미 통합된 구본관이 한자표기의 참고를 위해 포함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 姓 본관(本貫) 가씨 賈氏 소주(蘇州) 간씨 簡氏 가평(加平) 갈씨 葛氏 남양(南陽) 감씨 甘氏 회산(檜山) 강씨 姜氏 금천(衿川) 진주(晉州) 康氏 순천(順天) 신천(信川) 영강(永康) 용인(龍仁) 재령(載寧) 진주(晉州) 彊氏 진주(晉州) 개씨 介氏 여주(驪州) 견씨 堅氏 천녕(川寧) 甄氏 황간(黃磵) 경씨 慶氏 청주(淸州) 景氏 태인(泰仁) 해주(海州) 계씨 桂氏 수안(遂安) 고씨 高氏 개성(開城) 고흥(高興) 안동(安東) 용담(龍潭) 장흥(長興) 전주(全州) 제주(濟州) 횡성(橫城) 곡씨 曲氏 면천(沔川) 용궁(龍宮) 공씨 公氏 김포(金浦) 孔氏 곡부(曲阜) 곽씨 郭氏 선산(善山) 의령(宜寧) 청주(淸州) 해미(海美) 현풍(玄風) 구씨 丘氏 평해(平海) 具氏 능성(綾城) 창원(昌原) 邱氏 은진(恩津) 국씨 鞠氏 담양(潭陽) 궉씨 鴌氏 순창(淳昌) 선산(善山) 권씨 權氏 안동(安東) 예천(醴泉) 근씨 斤氏 청주(淸州) 금씨 琴氏 봉화(奉化) 기씨 奇氏 남원(南原) 덕양(德陽) 행주(幸州) 길씨 吉氏 선산(善山) 해평(海平) 김씨 金氏 강릉(江陵) 강서(江西) 강진(康津) 강화(江華) 개성(開城) 경산(慶山)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산(光山) 광양(光陽) 광주(廣州) 교하(交河) 금산(錦山) 금산(金山) 금화(金化) 김녕(金寧) 김제(金堤) 김해(金海) 나주(羅州) 낙안(樂安) 남양(南陽) 남평(南平) 당악(唐岳) 당진(唐津) 대구(大邱) 덕수(德水) 도강(道康) 도주(道州) 동래(東萊) 명주(溟州) 무장(茂長) 문화(文化) 밀양(密陽) 배천(白川) 보령(保寧) 보은(報恩) 부안(扶安) 부평(富平) 분성(盆城)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산(商山) 상주(尙州) 서흥(瑞興) 선산(善山) 선성(宣城) 설성(雪城) 수안(遂安) 수원(水原) 순천(順天) 시흥(始興) 신주(愼州) 신천(信川) 아산(牙山) 안동(安東) 안로(安老) 안산(安山) 안성(安城) 안악(安岳) 양근(楊根) 양산(梁山) 양주(楊州) 언양(彦陽) 여수(麗水) 연기(燕岐) 연안(延安) 영광(靈光) 영덕(盈德) 영동(永同) 영암(靈巖) 영양(英陽) 영월(寧越) 영천(永川) 영해(寧海) 예안(禮安) 예천(醴泉) 오성(筽城) 오천(烏川) 옥천(沃川) 용궁(龍宮) 용담(龍潭) 우록(友鹿) 우봉(牛峰) 울산(蔚山) 웅천(熊川) 원주(原州) 월성(月城) 은율(殷栗) 의성(義城) 장연(長淵) 전의(全義) 전주(全州) 정산(定山) 정주(貞州) 진도(珍島) 진례(進禮) 진잠(鎭岑) 진주(晉州) 진천(鎭川) 창원(昌原) 청도(淸道) 청주(淸州) 청풍(淸風) 춘양(春陽) 태원(太原) 파평(坡平) 풍산(豊山) 함창(咸昌) 해평(海平) 해풍(海豊) 희천(熙川) 나씨 羅氏 군위(軍威) 금성(錦城) 나주(羅州) 능성(綾城) 수성(壽城) 안정(安定) 남씨 南氏 고성(固城) 영양(英陽) 영양(穎陽) 의령(宜寧) 남궁씨 南宮氏 함열(咸悅) 내씨 乃氏 개성(開城) 노씨 盧氏 경주(慶州) 곡산(谷山) 광산(光山) 광주(光州) 교하(交河) 김해(金海) 만경(萬頃) 밀양(密陽) 신창(新昌) 안강(安康) 안동(安東) 의주(義州) 장연(長淵) 파주(坡州) 풍천(豊川) 해주(海州) 路氏 개성(開城) 魯氏 강화(江華) 광주(廣州) 밀양(密陽) 함평(咸平) 뇌씨 雷氏 교동(喬桐) 단씨 段氏 연안(延安) 당씨 唐氏 밀양(密陽) 대씨 大氏 밀양(密陽) 도씨 道氏 고성(固城) 都氏 성주(星州) 팔거(八莒) 陶氏 풍양(豊壤) 독고씨 獨孤氏 남원(南原) 돈씨 頓氏 목천(木川) 동씨 董氏 광천(廣川) 동방씨 東方氏 진주(晉州) 두씨 杜氏 두릉(杜陵) 만경(萬頃) 마씨 馬氏 목천(木川) 장흥(長興) 麻氏 영평(永平) 만씨 萬氏 강릉(江陵) 강화(江華) 개성(開城) 광주(廣州) 영풍(永覽) 익곡(翼谷) 진강(鎭江) 홍주(洪州) 매씨 梅氏 충주(忠州) 맹씨 孟氏 신창(新昌) 명씨 明氏 서촉(西蜀) 모씨 牟氏 함평(咸平) 목씨 睦氏 사천(泗川) 묵씨 墨氏 광령(廣寧) 요동(遼東) 문씨 文氏 감천(甘泉) 강릉(江陵) 개령(開寧) 남평(南平) 명주(溟州) 안동(安東) 장연(長淵) 정선(旌善) 창원(昌原) 취성(鷲城) 門氏 송림(松林) 인동(仁同) 인천(仁川) 미씨 米氏 재령(載寧) 민씨 閔氏 여흥(驪興) 박씨 朴氏 강릉(江陵) 개성(開城)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주(廣州) 구산(龜山) 군위(軍威) 나주(羅州) 노성(魯城) 면천(沔川) 무안(務安) 문의(文義) 밀양(密陽) 반남(潘南) 봉산(鳳山) 비안(比安) 사천(泗川) 삼척(三陟) 상산(商山) 상주(尙州) 선산(善山) 성주(星州) 순창(淳昌) 순천(順天) 여주(驪州) 영암(靈巖) 영해(寧海) 운봉(雲峰) 울산(蔚山) 웅진(熊津) 월성(月城) 은풍(殷豊) 음성(陰城) 음죽(陰竹) 의창(義昌) 의흥(義興) 인제(麟蹄) 전주(全州) 정선(旌善) 죽산(竹山) 진원(珍原) 창원(昌原) 춘천(春川)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인(泰仁) 평산(平山) 평주(平州) 평택(平澤) 함안(咸安) 함양(咸陽) 반씨 潘氏 거제(巨濟) 광산(光山) 班氏 개성(開城) 고성(固城) 평해(平侮) 방씨 房氏 남양(南陽) 수원(水原) 용성(龍城) 方氏 상주(尙州) 온양(溫陽) 龐氏 갈양(褐陽) 개성(開城) 대원(大原) 배씨 裵氏 경산(京山) 경주(慶州) 곤산(昆山) 김해(金海) 남해(南海) 달성(達城) 대구(大丘) 분성(盆城) 성주(星州) 영암(靈巖) 협계(俠溪) 흥해(興海) 백씨 白氏 남포(藍浦) 대흥(大興) 수성(隋城) 수원(水原) 양산(梁山) 임천(林川) 직산(稷山) 태인(泰仁) 해미(海美) 범씨 范氏 금성(錦城) 변씨 卞氏 개성(開城) 밀양(密陽) 초계(草溪) 팔계(八溪) 邊氏 원주(原州) 장연(長淵) 황주(黃州) 복씨 卜氏 면천(沔川) 봉씨 奉氏 하음(河陰) 鳳氏 경주(慶州) 부씨 夫氏 제주(濟州) 빈씨 彬氏 담양(潭陽) 대구(大丘) 빙씨 氷氏 경주(慶州) 사씨 史氏 거창(居昌) 임강(臨江) 장사(長沙) 전주(全州) 진주(晋州) 청주(靑州) 사공씨 司空氏 효령(孝令) 상씨 尙氏 목천(木川) 서씨 徐氏 남양(南陽) 남평(南平) 달성(達城) 당성(唐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연산(連山) 이천(利川) 장성(長城) 절강(浙江) 평당(平當) 서문씨 西門氏 안음(安陰) 석씨 昔氏 월성(月城) 石氏 양주(楊州) 충주(忠州) 해주(海州) 홍주(洪州) 화원(花園) 선씨 宣氏 보성(寶城) 선우씨 鮮于氏 태원(太原) 설씨 卨氏 경주(慶州) 薛氏 경주(慶州) 순창(淳昌) 偰氏 경주(慶州) 섭씨 葉氏 경주(慶州) 성씨 成氏 창녕(昌寧) 소씨 蘇氏 진주(晉州) 邵氏 가량(加良) 경주(慶州) 공주(公州) 남양(南陽) 인천(仁川) 전주(全州) 청산(責山) 평산(平山) 손씨 孫氏 경주(慶州) 나주(羅州) 밀양(密陽) 부평(富平) 수주(樹州) 안동(安東) 월성(月城) 일직(一直) 청주(淸州) 평해(平海) 송씨 宋氏 김해(金海) 남양(南陽) 덕산(德山) 문경(聞慶) 서산(瑞山) 신평(新平) 야성(冶城) 양주(楊州) 여산(礪山) 연안(延安) 영주(榮州) 용성(龍城) 은진(恩津) 진천(鎭川) 청주(淸州) 합천(陜川) 홍산(鴻山) 홍주(洪州) 松氏 화순(和順) 수씨 水氏 김해(金海) 운제(雲梯) 순씨 舜氏 임천(林川) 파주(坡州) 荀氏 연곡(連谷) 임천(林川) 창원(昌原) 홍산(鴻山) 승씨 承氏 광산(光山) 연일(延日) 昇氏 송도(松都) 시씨 施氏 절강(浙江) 柴氏 금화(金化) 능향(綾鄕) 태인(泰仁) 신씨 愼氏 거창(居昌) 申氏 고령(高靈) 아주(鵝洲) 영월(寧越) 영천(永川) 영해(寧海) 은풍(殷豊) 죽산(竹山) 천안(天安) 평산(平山) 辛氏 영산(靈山) 영월(寧越) 심씨 沈氏 부유(富有) 삼척(三陟) 청송(靑松) 풍산(豊山) 안씨 安氏 공산(公山) 광주(廣州) 동주(洞州) 순흥(順興) 안산(安山) 안성(安城) 죽산(竹山) 지곡(池谷) 충주(忠州) 탐진(耽津) 태원(太原) 흥녕(興寧) 애씨 艾氏 연풍(延豊) 전주(全州) 한양(漢陽) 야씨 夜氏 개성(開城) 봉성(峯城) 석천(石淺) 원평(原平) 양씨 樑氏 남양(南陽) 梁氏 남원(南原) 남해(南海) 제주(濟州) 청주(淸州) 충주(忠州) 楊氏 남원(南原) 밀양(密陽) 제주(濟州) 중화(中和) 청주(淸州) 하음(河陰) 慈氏 자요(遼陽) 어씨 魚氏 충주(忠州) 함양(咸陽) 함종(咸從) 엄씨 嚴氏 경원(慶源) 영월(寧越) 여씨 余氏 의령(宜寧) 呂氏 곡산(谷山) 성주(星州) 함양(咸陽) 연씨 延氏 곡산(谷山) 燕氏 곡산(谷山) 덕원(德原) 영평(永平) 전주(全州) 정평(定平) 평주(平州) 連氏 나주(羅州) 전주(全州) 염씨 廉氏 곡성(曲城) 봉성(峰城) 서원(瑞原) 파주(坡州) 영씨 永氏 평해(平海) 예씨 芮氏 남양(南陽) 부계(缶溪) 수원(水原) 의흥(義興) 청풍(淸風) 오씨 伍氏 부흥(復興) 吳氏 고창(高敞) 군위(軍威) 금성(金城) 나주(羅州) 낙안(樂安) 동복(同福) 두원(荳原) 보성(寶城) 연일(延日) 울산(蔚山) 장흥(長興) 전주(全州) 평해(平海) 함양(咸陽) 함평(咸平) 해주(海州) 화순(和順) 흥양(興陽) 옥씨 玉氏 의령(宜寧) 온씨 溫氏 봉성(鳳城) 옹씨 邕氏 순창(淳昌) 옥천(玉川) 雍氏 옹진(饔津) 파평(坡平) 왕씨 王氏 강릉(江陵) 개성(開城) 안동(安東) 제남(濟南) 청주(淸州) 해주(海州) 용씨 龍氏 홍천(洪川) 우씨 于氏 목천(木川) 禹氏 단양(丹陽) 원씨 元氏 원주(原州) 袁氏 비안(比安) 위씨 韋氏 강화(江華) 魏氏 장흥(長興) 유씨 柳氏 경주(慶州) 고흥(高興) 문화(文化) 서산(瑞山) 선산(善山) 영광(靈光) 유주(儒州) 전주(全州) 정주(貞州) 진주(晉州) 풍산(豊山) 흥양(興陽) 兪氏 강진(康津) 고령(高靈) 금산(金山) 기계(杞溪) 무안(務安) 인동(仁同) 창원(昌原) 천녕(川寧) 劉氏 강릉(江陵) 강화(江華) 거창(居昌) 문화(文化) 배천(白川) 중원(中原) 충주(忠州) 한양(漢陽) 庾氏 무송(茂松) 육씨 陸氏 옥천(沃川) 윤씨 尹氏 기계(杞溪) 나주(羅州) 남원(南原) 무송(茂松) 서흥(瑞興) 양주(楊州) 영천(永川) 예천(醴泉) 옥과(玉果) 칠원(漆原) 파평(坡平) 포주(抱州) 함안(咸安) 해남(海南) 해주(海州) 해평(海平) 은씨 殷氏 행주(幸州) 음씨 陰氏 죽산(竹山) 이씨 伊氏 은천(銀川) 태원(太原) 李氏 가평(加平) 가평(嘉平) 강릉(江陵) 강양(江陽) 강진(康津) 강화(江華) 강흥(江興) 개성(開城) 견주(見州) 결성(結城) 경산(京山) 경원(慶源) 경주(慶州) 고령(高靈) 고부(古阜) 고성(固城) 공주(公州) 광산(光山) 광양(光陽) 광주(廣州) 금구(金溝) 금마(金馬) 금산(金山) 길주(吉州) 김포(金浦) 나주(羅州) 남평(南平) 농서(隴西) 단성(丹城) 단양(丹陽) 담양(潭陽) 대흥(大興) 덕산(德山) 덕수(德水) 덕영(德永) 덕은(德恩) 도안(道安) 문의(文義) 벽진(碧珍) 보령(保寧) 봉산(鳳山) 부안(扶安) 부여(扶餘) 부평(富平) 사천(泗川) 상산(商山) 서림(西林) 서산(瑞山) 서천(舒川) 설성(雪城) 성주(星州) 수안(遂安) 수원(水原) 수주(樹州) 순천(順天) 신평(新平) 아산(牙山) 안산(安山) 안성(安城) 안악(安岳) 양산(梁山) 양성(陽城) 양주(楊州) 여주(驪州) 여흥(驪興) 연안(延安) 염주(鹽州) 영성(靈城) 영월(寧越) 영주(永州) 영주(瀛州) 영천(寧川) 영천(永川) 영해(寧海) 예안(禮安) 옥구(沃溝) 온양(溫陽) 완산(完山) 용구(龍駒) 용궁(龍宮) 용인(龍仁) 우계(羽溪) 우봉(牛峰) 울산(蔚山) 원율(原栗) 원주(原州) 월성(月城) 음죽(陰竹) 익산(益山) 익양(益陽) 인제(麟蹄) 인주(仁州) 인천(仁川) 임강(臨江) 장기(長鬐) 장수(長水) 장천(長川) 재령(載寧) 적성(積城) 전의(全義) 전주(全州) 정선(旌善) 정읍(井邑) 지평(砥平) 진보(眞寶) 진성(眞城) 진안(鎭安) 진위(振威) 진주(晉州) 진천(鎭川) 차성(車城) 창녕(昌寧) 천안(天安) 철성(鐵城) 청송(靑松) 청안(淸安) 청양(靑陽) 청주(淸州) 청해(靑海) 초산(楚山) 충주(忠州) 태안(泰安) 태원(太原) 통진(通津) 평산(平山) 평양(平壤) 하빈(河濱) 한산(韓山) 함안(咸安) 함평(咸平) 홍주(洪州) 흥양(興陽) 異氏 밀양(密陽) 인씨 印氏 교동(喬洞) 연안(延安) 임씨 任氏 관산(冠山) 장흥(長興) 정안(定安) 평산(平山) 풍산(豊山) 풍천(豊川) 林氏 경주(慶州) 금성(錦城) 길안(吉安) 나주(羅州) 보주(甫州) 부안(扶安) 선산(善山) 안동(安東) 안음(安陰) 안의(安義) 예천(醴泉) 옥구(沃溝) 옥야(沃野) 울진(蔚珍) 은진(恩津) 익산(益山) 장흥(長興) 전주(全州) 조양(兆陽) 진천(鎭川) 평택(平澤) 풍천(豊川) 회진(會津) 장씨 張氏 결성(結城) 구례(求禮) 나주(羅州) 단양(丹陽) 대원(大元) 덕수(德水) 목천(木川) 무안(務安) 부안(扶安) 순천(順天) 안동(安東) 예산(禮山) 옥구(沃溝) 옥산(玉山) 울진(蔚珍) 인동(仁同) 장연(長淵) 전주(全州) 지례(知禮) 진안(鎭安) 진천(鎭川) 청송(靑松) 평양(平壤) 풍덕(豊德) 해주(海州) 홍천(洪川) 흥덕(興德) 흥양(興陽) 흥해(興海) 章氏 거창(居昌) 莊氏 금천(衿川) 장연(長連) 蔣氏 아산(牙山) 전씨 全氏 감천(甘泉) 경산(慶山) 경주(慶州) 기장(機張) 나주(羅州) 부여(扶餘) 성주(星州) 옥산(玉山) 옥천(沃川) 완산(完山) 용궁(龍宮) 정선(旌善) 죽산(竹山) 천안(天安) 팔거(八莒) 평강(平康) 함창(咸昌) 황간(黃澗) 田氏 개성(開城) 남양(南陽) 남원(南原) 담양(潭陽) 연안(延安) 영광(靈光) 우봉(牛峰) 태산(泰山) 평택(平澤) 錢氏 문경(聞慶) 점씨 占氏 한산(韓山) 정씨 丁氏 금성(錦城) 나주(羅州) 압해(押海) 영광(靈光) 창녕(昌寧) 창원(昌原) 程氏 하남(河南) 鄭氏 경주(慶州) 고성(固城) 광산(光山) 금성(錦城) 김포(金浦) 나주(羅州) 동래(東萊) 봉화(奉化) 삼가(三嘉) 서산(瑞山) 야성(野城) 연일(延日) 영덕(盈德) 영일(迎日) 온양(溫陽) 장기(長鬐) 장흥(長興) 전주(全州) 진주(晉州) 창녕(昌寧) 철산(鐵山) 청산(靑山) 청주(淸州) 초계(草溪) 팔계(八溪) 하동(河東) 함평(咸平) 합천(陜川) 해주(海州) 제씨 諸氏 칠원(漆原) 제갈씨 諸葛氏 남양(南陽) 조씨 曺氏 가흥(嘉興) 옥천(玉川) 용담(龍潭) 장흥(長興) 창녕(昌寧) 탐진(耽津) 趙氏 광주(廣州) 김제(金堤) 배천(白川) 상주(尙州) 순창(淳昌) 양주(楊州) 옥과(玉果) 옥천(玉川) 임천(林川) 직산(稷山) 진보(眞寶) 창녕(昌寧) 태원(太原) 평산(平山) 평양(平壤) 평일(平一) 풍양(豊壤) 한산(韓山) 한양(漢陽) 함안(咸安) 횡성(橫城) 종씨 宗氏 니파(泥彼) 모압(毛押) 인의(仁義) 임진(臨律) 통진(通津) 황원(黃原) 鍾氏 두원(荳原) 영암(靈岩) 정의(旌義) 천안(天安) 통진(通津) 풍덕(豊德) 하음(河陰) 좌씨 左氏 청주(淸州) 주씨 周氏 상산(商山) 상주(尙州) 안의(安義) 철원(鐵原) 초계(草溪) 朱氏 신안(新安) 나주(羅州) 능성(綾城) 장수(長水) 전주(全州) 준씨 俊氏 청주(淸州) 지씨 智氏 봉산(鳳山) 池氏 청주(淸州) 충주(忠州) 진씨 晉氏 기계(杞溪) 남원(南原) 秦氏 중원(中原) 진주(晉州) 풍기(豊基) 陳氏 광동(廣東) 양산(梁山) 여양(驪陽) 청주(淸州) 차씨 車氏 연안(延安) 창씨 倉氏 아산(牙山) 여산(礪山) 장성(長城) 昌氏 강릉(江陵) 공주(公州) 아산(牙山) 여산(礪山) 장성(畏城) 채씨 菜氏 영양(穎陽) 蔡氏 인천(仁川) 진천(鎭川) 평강(平康) 采氏 여산(礪山) 척씨 拓氏 곡산(谷山) 천씨 千氏 금계(金溪) 영양(潁陽) 天氏 연안(延安) 우봉(午峯) 초씨 楚氏 파릉(巴陵) 肖氏 제주(濟州) 최씨 崔氏 간성(杆城) 강릉(江陵) 강화(江華) 개성(開城) 경성(鏡城) 경주(慶州) 계림(鷄林) 고부(古阜) 곡강(曲江) 공주(公州) 광주(廣州) 괴산(槐山) 나주(羅州) 낭주(郎州) 동주(東州) 등주(登州) 명주(溟州) 무주(茂朱) 부안(扶安) 삭녕(朔寧) 상원(祥原) 상주(尙州) 수성(隋城) 수원(水原) 승령(僧嶺) 아산(牙山) 양주(楊州) 양천(陽川) 여수(麗水) 연풍(延豊) 영암(靈巖) 영주(永州) 영천(永川) 영흥(永興) 완산(完山) 용강(龍崗) 용궁(龍宮) 용주(龍州) 우봉(牛峰) 원주(原州) 월성(月城) 전의(全義) 전주(全州) 직산(稷山) 창원(昌原) 천녕(川寧) 청송(靑松) 청주(淸州) 초계(草溪) 충원(忠原) 충주(忠州) 탐진(耽津) 통천(通川) 하동(河東) 한남(漢南) 해주(海州) 화순(和順) 황주(黃州) 회령(會寧) 흥해(興海) 추씨 秋氏 전주(全州) 추계(秋溪) 탁씨 卓氏 광산(光山) 탄씨 彈氏 진주(晋州) 해주(海州) 태씨 太氏 남원(南原) 영순(永順) 협계(陜溪) 판씨 判氏 해주(海州) 팽씨 彭氏 용강(龍崗) 절강(浙江) 편씨 片氏 금천(衿川) 절강(浙江) 평씨 平氏 충주(忠州) 포씨 包氏 풍덕(豊德) 표씨 表氏 신창(新昌) 풍씨 馮氏 임구(臨胊) 피씨 皮氏 괴산(槐山) 홍천(洪川) 필씨 弼氏 대흥(大興) 하씨 夏氏 달성(達城) 河氏 진주(晉州) 한씨 漢氏 충주(忠州) 韓氏 곡산(谷山) 단주(湍州) 당진(唐津) 대흥(大興) 삼화(三和) 서원(西原) 신평(新平) 안변(安邊) 정평(定平) 청주(淸州) 한양(漢陽) 함씨 咸氏 강릉(江陵) 양근(楊根) 항양(恒陽) 해씨 海氏 김해(金海) 허씨 許氏 공암(孔巖) 김해(金海)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현씨 玄氏 남원(南原) 성주(星州) 수원(水原) 순천(順天) 연주(延州) 창원(昌原) 천녕(川寧) 팔거(八莒) 형씨 邢氏 진주(晉州) 호씨 扈氏 보안(保安) 전주(全州) 胡氏 토산(兎山) 파릉(巴陵) 홍씨 洪氏 남양(南陽) 당성(唐城) 부계(缶溪) 염주(鹽州) 청주(淸州) 풍산(豊山) 회인(懷仁) 화씨 化氏 진주(晉州) 황씨 黃氏 단양(丹陽) 덕산(德山) 상주(尙州) 성주(星州) 우주(紆州) 의창(義昌) 장수(長水) 제안(濟安) 창원(昌原) 평해(平海) 항주(杭州) 황주(黃州) 회덕(懷德) 황보씨 皇甫氏 영천(永川) 황주(黃州)    
9    조선왕조 실록 댓글:  조회:2345  추천:0  2012-07-16
조선왕조 실록 ○ 태조실록 ○ 정종실록 ○ 태종실록 ○ 세종실록 ○ 문종실록 ○ 단종실록 ○ 세조실록 ○ 예종실록 ○ 성종실록 ○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 인종실록 ○ 명종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군일기(정초본) ○ 인조실록 ○ 효종실록 ○ 현종실록 ○ 현종개수실록 ○ 숙종실록 ○ 숙종실록보궐정오 ○ 경종실록 ○ 경종수정실록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순조실록 ○ 헌종실록  ○ 철종실록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순종실록부록        
8    발 해 고 댓글:  조회:2510  추천:0  2012-07-16
발 해 고 유득공 원저 머 리 말 고려가『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후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족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때에 고려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발해사』를 써서,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 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 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누가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쓰겠는가?"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십여 만 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십여 만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 내가 규장각의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의 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왕, 신하, 지리, 관청 및 관직, 의식 및 복장, 물산, 국어, 국서, 후예 국가에 관해 고찰하는 아홉 목록의 글을 지었다. 이를 세가, 전, 지로 삼지 않고 고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서 완성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진년(1784) 윤삼월 이십오일 [왕에 관한 고찰] 걸걸중상 (대중상) 걸걸중상은 성이 대씨로 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대씨가 대정씨에서 나왔고, 배달족에 대씨가 있게 된 것은 대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8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걸걸중상은 아들 대조영과 함께 집안 식솔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가 사리라 칭하였다. 사리란 부락의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거란 말이다. 효소왕 5년(696)에 거란족인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영주를 함락시키고 도독 조문홰를 죽였다. 이에 걸걸중상이 두려워하여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고, 오루하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측천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를 시켜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다. 이 무렵에 걸걸중상은 이미 사망하였다. 고왕 고왕의 이름은 조영으로 걸걸중상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 장수가 되었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걸걸중상이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패하여 죽자 대조영은 이를 피하여 도망하였다. 이해고가 그를 뒤쫓아 천문령을 넘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크게 격파하여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으니,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다. 마침내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를 맺고, 부여·옥저·고조선·변한 등 바다 북쪽의 십여 국을 정복하였다. 동쪽으로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 거란에 이르고, 남쪽으로 신라와 이하를 경계로 이웃하였다. 그 나라 땅은 사방 각 오천 리에 달하였고, 호구는 십여 만 호였으며, 정예의 병사가 수만 명이었다. 또 중국의 문자를 잘 익혔으며, 풍속은 고구려·거란과 대체로 비슷하였다. 효소왕 7년(698)에 나라 이름을 진이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진국왕이 되었다. 홀한성을 쌓아 살았으니 영주에서 동쪽으로 이천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때에 해와 거란이 모두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서 도로가 가로막히자 측천무후가 발해를 침략할 수 없었다. 당나라 중종이 즉위한 뒤에 시어사 장행급을 발해에 파견하여 대조영을 위로하고 어루만지자, 고왕도 아들을 보내 중종을 모시도록 하였다. 16년(713)에 말갈이란 칭호를 버리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부여부에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비하였다. 22년(719)에 왕이 사망하였다. 당나라에서 좌문감솔 오사겸을 보내 조문하였다. 무왕 무왕의 이름은 무예로 고왕의 아들이다. 왕은 연호를 인안이란 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풍속에 따라서 관과 역을 두지 않고 곳곳에 촌락을 두었다. 말갈을 백성으로 삼았고 큰 촌락의 책임자로 도독을 두었으며, 그 다음은 자사, 그 아래는 수령이라 하였다. 동북의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신하가 되었다. 인안 8년(726)에 흑수말갈의 사자가 당나라 현종을 알현하자, 현종은 그 땅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를 파견하여 감독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무왕이 신하들을 불러, "처음에 흑수말갈이 우리의 길을 빌려서 당나라와 통하였고, 또 다른 때에는 돌궐에 토둔을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먼저 알린 뒤에 우리 사신과 동행하였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와 공모하여 우리를 앞뒤에서 치려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동생 문예가 외삼촌 임아상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흑수말갈을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예는 간하면서 따르지 않다가 당나라로 도망가 버렸고, 이 때문에 당나라와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인안 9년(727)에 고인의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인안 14년(732) 9월에 왕은 대장 장문휴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육군은 따로 마도산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가게 하였다. 등주자사 위준을 죽이고 선왕의 치욕을 씻었다고 하였는데, 사실은 문예 사건에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현종이 크게 노하여 우령군장군 갈복순에게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침략하게 하였다. 인안 15년(733)에 현종은 다시 문예로 하여금 유주의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침략하게 하였다. 또 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성덕왕에게 부절을 주며 발해 남쪽 변방을 침략하게 하였다.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등 네 명의 장군을 시켜서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만나 공격하도록 하였다. 마침 눈이 십 척이 넘게 내리고 산 길이 험준해서 얼어죽은 병사가 반이 넘자 중도에 포기하고 되돌아왔다. 이듬해에 신라인 김충신이 당나라에 글을 올려서, 현종의 뜻을 받들어 귀국하여 발해를 토벌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현종이 허락하였으나 끝내 아무 성과도 없었다. 흑수말갈의 땅이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자, 일본 사신 아송 무시마로가 왔다. 인안 18년(737)에 왕이 사망하였다. 문왕 문왕의 이름은 흠무로서 무왕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대흥으로 연호를 고쳤다. 왕은 국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대흥 2년(738)에 당나라에서『당례』,『삼국지』,『진서』,『삼십육국춘추』를 필사해 왔다. 대흥 3년(739)에 약홀주도독 서요덕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0년(756)에 전 해 11월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을 피해 상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평로유후 서귀도가 과의도위 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 장원간을 발해에 보내서 "금년 10월에 안녹산을 칠 것이니 발해왕은 군사 4만 명을 징발하여 역적을 평정하는 데에 돕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서귀도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고 의심하여 장원간을 억류시켰다. 12월 병오일에 서귀도가 과연 유정신을 북평에서 죽이고, 몰래 안녹산 및 유주절도사 사사명과 함께 당나라를 공격하고자 공모하였다. 안동도호 왕현지가 그 공모를 알고 정예의 병사 6천여 명을 이끌고 유성을 함락시켜 서귀도를 참수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평로절도라 칭하며 북평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대흥 22년(758) 4월에 왕현지가 장군 왕진의를 발해에 보내서, "천자가 이미 서경으로 돌아왔고, 피신해 있던 태상황을 촉에서 맞이하여 별궁에 거주하게 하였으며, 적의 무리를 소탕하게 됨에 따라 저를 보내어 아뢰게 하였습니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왕이 그 말을 믿지 못하여 왕진의를 머무르게 하고, 따로 사신을 보내서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였다. 숙종이 왕에게 칙서 한 권을 보냈다. 행목저주자사 양승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3년(759)에 현도주자사 고남신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대흥 28년(764)에 당의 사신 한조채가 발해에서 신라로 갔다. 대흥 35년(771)에 일만복을 사신으로 보내 스스로를 천손이라 칭하고 양국 관계를 외삼촌과 조카 사이로 규정하였다. 대흥 38년(774)에 유신의 일환으로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으로 고쳤다. 보력 3년(776)에 사도몽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보력 4년(777) 정월에 왕이 일본 무희 11명과 토산물을 당나라에 보냈다. 4월에 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가 사망하였다. 정원 연간(785∼805)에 다시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대흥 56년(792)년 2월에 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가 사망하였다. 왕이 11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 사신 조신전수, 기촌전성, 양후사영구, 연익마려, 무생조수, 조신전계가 왔다. 대흥 57년(793) 3월 4일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원의 문왕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 문왕의 일가 동생인 원의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있은 지 1년만에 의심이 많고 잔인하다 하여 국인들이 죽였다. 성왕 성왕의 이름은 화여로서 굉림의 아들이다. 국인들이 원의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은 중흥으로 연호를 고치고 상경으로 도읍을 되돌렸다. 중흥 원년(794)에 왕이 사망하였다. 강왕 강왕의 이름은 숭린으로 문왕의 작은아들인데, 즉위하여 정력으로 연호를 고쳤다. 정력 원년(794)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 정력 2년(795)에 여정림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정력 4년(797)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정력 5년(798)에 일본에서 6년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대창태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왕이 두 차례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일본 사신 진인광악, 숙미하무, 숙미선백이 왔다. 정력 16년(809)에 왕이 사망하였다. 정왕 정왕의 이름은 원유로서 강왕의 아들인데, 즉위하여 영덕으로 연호를 고쳤다. 영덕 2년(810)에 두 번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영덕 4년(812)에 왕이 사망하였다. 희왕 희왕의 이름은 언의로서 정왕의 동생인데, 즉위하여 주작으로 연호를 고쳤다. 정왕이 사망하자 왕이 임시로 국가 업무를 맡았다. 이 해 9월에 신라가 숭정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내왔다. 주작 2년(813) 정월 경자일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 주작 4년(815)에 전 해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왕효렴이 돌아왔다. 주작 6년(817)경에 왕이 사망하였다. 간왕 간왕의 이름은 명충으로 희왕의 동생인데, 즉위하여 태시로 연호를 고쳤다. 태시 2년(818)에 왕이 사망하였다. 선왕 선왕의 이름은 인수로 간왕의 숙부이고, 고왕의 동생 대야발의 4세손이다. 즉위하여 건흥으로 연호를 고쳤다. 간왕이 사망하자 왕이 임시로 국가 업무를 담당하였다. 왕은 남쪽으로 신라를 침략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락을 경략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건흥 3년(820) 윤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다. 건흥 7년(824)에 일본이 12년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건흥 11년(828)에 일본이 발해 사신과의 사사로운 교역을 금지시켰다. 건흥 13년(830)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이진 선왕의 손자이다. 아버지 신덕이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이듬해를 함화 원년으로 삼았다. 함화 4년(834) 9월에 당나라의 사신 장건장이 발해에 왔다. 함화 11년(841) 윤9월에 하복연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함화 27년(857)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건황 이진의 동생이다. 함화 26년(857) 2월 계미일에 왕위를 이었다. 3년(859)에 오효신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장경선명력을 전했다. 5년(861) 4월에 이거정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했다. 15년(871)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현석 건황의 아들이다. 왕 건황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2년(872)에 오소도가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12년(892)에 고원고가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24년(894)경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위해 현석의 아들이다. 왕 위해가 죽자 왕위를 이었다. 13년(906)경에 왕이 사망하였다. 왕 인선 발해는 당나라 때부터 자주 학생들을 파견하여 수도의 태학에서 고금의 제도를 익히게 함으로써,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후량 및 후당 30년간에 빈공과에 합격한 사람이 10여 명이 될 정도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고 많았다. 7년(912)에 왕이 신라 등의 나라들과 비밀리에 연계를 맺었다. 12년(917)에 왕이 요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 이듬해에 요나라가 요양의 옛 성을 수리하고 발해 호구를 잡아다가 채웠다. 19년(924)에 왕이 군대를 보내서 요나라를 공격하여,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그곳의 백성들을 빼앗아 돌아왔다. 20년에 장군 신덕 등 5백여 명이 고려로 들어왔다. 이 때부터 발해인의 고려 망명이 시작되었다. 12월 을해일에 요나라 왕이 서쪽은 제거했으나 동쪽은 제거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침략해 왔다. 기유일에 요나라 군대가 살갈산에 도착했고, 정사일에 고령에 이르렀으며, 이 날 밤에 부여부가 포위되었다. 21년(926) 정월 기미일에 흰 기운이 태양을 관통하였다. 경신일에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성을 지키던 장수는 전사했다. 또 동평부가 함락되었다. 병인일에 늙은 재상이 이끄는 군대가 패하였다. 이 날 밤에 홀한성이 포위되었다. 기사일에 왕이 항복을 청하였다. 신미일에 왕이 소복을 입고 새끼줄로 몸을 묶고 양을 끌고서 신하 3백여 명과 함께 나와 항복하였다. 요나라 임금이 이들을 예우한 뒤에 돌려보냈다. 병자일에 요나라 임금이 측근 신하인 강말달 등 13명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 병기를 수색하도록 했는데, 발해 순라군이 이들을 살해하였다. 정축일에 왕이 다시 성을 수비하자 요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함락되어 요나라 임금이 성에 들어왔다. 왕이 그의 말 앞에서 죄를 청했고, 요나라 임금은 왕과 왕족들을 병사로 호위시켜서 성을 나왔다. 2월 병오일에 요나라가 발해국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바꾸었다. 또 자신의 태자인 야율배를 인황왕으로 임명하여 통치하도록 했다. 요나라 임금은 임황 서쪽에 성을 쌓고 왕을 그곳에 거주시키고, 왕에게는 오로고라는 이름을, 왕후에게는 아리지라는 이름을 내렸다. 오로고와 아리지는 요나라 태조와 그의 부인이 발해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때에 탔던 두 마리의 말 이름이다. 출처:한국기독교 성서 포럼
7    중국 25사(조선편) -중국고서 찾아보기 댓글:  조회:2990  추천:0  2012-07-16
중국 25사 조선편 http://bluecabin.com.ne.kr/ 중국 역대 왕들의 연대기인 본기(本紀)와 저명한 개인의 사적(事績)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요소로 하여 기전체(紀傳體)에 따른 중국 역대의 역사. 그 밖에 연표(年表)·계보(系譜) 또는 제도를 기록한 지(志, 또는 書) 등을 포함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왕(武王) 때까지 기록한 "사기(史記)"에서 시작되는데,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 가 만들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고,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왕(乾隆王)은 이에 더하여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내어 24사 로서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인행(印行) 하였는데, 합하여 3,243권에 달한다. 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사 기-조선전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상고시대의 황제(黃帝)로 부터 한나라 무왕까지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통사.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紀傳體)의 효시로서, 본기(本紀) 12편, 세가(世家) 30편, 서(書) 8편, 표(表) 10편,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었다. 한서-조선전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역사서. 전 120권. 한나라 유방(劉邦)부터 왕망(王莽)의 난(亂)까지 12대(代) 230년간의 기록으로, 12제기(帝紀)·8표(表)·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구성되었다. 후한서-동이전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북옥저, 예, 한, 왜 중국 후한(後漢)의 정사(正史). 120권.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송(宋)나라의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으로, 후한의 13대(代) 196년간의 사실(史實)을 기록하였다. 기(紀) 1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80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지(志) 30권은 진(晉)의 사마표(司馬彪)가 저술한것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 한, 왜 중국의 위(魏)·촉(蜀)·오(吳) 3국의 정사(正史).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것으로,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이다. 위 서- 열 전 고구려, 백제, 물길, 실위, 두막루, 지두우, 고막해, 거란, 오락후 북제(北齊) 사람 위수(魏收)가 저술한 역사서. 114권(本紀 12권, 志 10지, 列傳 92편)으로 되어 있다. 문선왕(文宣王) 천보(天保) 2년(551)에 만들어졌고, 현재 전하는 것은 잃어버린 부분을 송(宋)나라 때 보완한 것이다. 송 서 - 열 전 고구려, 백제, 왜 중국 남조(南朝) 송(宋)의 정사(正史). 제기(帝紀) 1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60권, 도합 100권. 487년 남제(南齊) 무왕(武王)의 칙명(勅命)에 따라 심약(沈約)이 488년에 편찬을 완성한 것으로 송나라 60년(420∼478)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진 서- 동이전 부여, 마한, 진한, 숙신씨, 왜, 비리등10국 당나라 이세민의 지시로 방현령(房玄齡) 등이 찬한 진(晉)왕조의 정사(正史). 130권. 644년 편찬. 제기(帝紀) 10권, 지(志) 20권, 열전(列傳) 70권 외에 재기(載記) 30권이 있다. 주서-열 전 고려(고구려), 백제 주대(周代)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당대(唐代)의 영호덕분(令狐德)이 편찬했다. 628년(貞觀 2)에 영호덕분이 최인사(崔仁師)·잠문본(岑文本)과 함께 이 책의 편찬을 맡았으며, 진숙달(陳叔達)·당검(唐儉)도 참가하여 완성했다. 이 책은 북송(北宋) 말기에 손상을 입어 후세 사람이
6    고려사 댓글:  조회:2598  추천:0  2012-07-16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열 충선 충 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 우왕 창왕 공 양 고려사(高麗史)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으로 되어 있다. 1392년(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정도전과 정총(鄭摠)이 책임을 지고 예문춘추관의 신하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우선 통사인 이제현(李齊賢)의 《사략》,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역대 고려실록과 고려 말의 사초(史草)를 기본자료로 삼았다. 이것은 그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하륜(河崙)·남재(南在)·이숙번(李叔蕃)·변계량(卞季良)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6년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 왕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고, 마침내 19년(세종 1) 9월 유관(柳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制勅)·태자(太子) 등을 교(敎)·세자(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다가 23년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31년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42년 8월에 신개(申>)·권제(權)가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 이 책은 48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교감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배포가 곧 중지되었다. 세종은 다시 49년에 김종서·정인지·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최항(崔恒) 등이 열전, 노숙동(盧叔仝) 등이 기(紀)·지(志)·연표, 김종서·정인지 등이 교감을 맡았다. 열전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인쇄, 반포되었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에는, 본기(本紀)라 하지 않고 세가(世家)라 함으로써 명분이 중요함을 보이고, 거짓 왕인 신우(申禑) 부자를 열전에 내림으로써 분수 넘치는 것을 엄하게 처벌하고 충직하고 간사함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였으며, 제도를 나누고 문물을 헤아려서 비슷한 것끼리 모음으로써 계통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연대를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사적을 상세하게 하는 데 힘을 다하고,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고 바르게 하려 하였다는 편찬의 방침이 제시되고 있다. 이 방침은 다시 범례에서 각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세가에 관한 것을 보면, 왕기는 세가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넘는 칭호도 그대로 써서 사실을 보존하며, 일상적인 일은 처음과 왕이 직접 참여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하며, 고려세계는 실록에 있는 3대추증 사실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였다. 또한 우왕·창왕을 거짓 왕조로 규정하여 열전에 강등시켰으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제현 등의 평론을 그대로 실을 뿐, 따로 작성하지 않도록 하였다. 세가에서는 32왕의 왕기가 46권에 수록되어 전체 분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서술의 방식은 《원사(元史)》를 모방하여 첫머리에 왕의 출생, 즉위에 관한 것을 쓰고 끝부분에 사망, 장례 및 성품에 관한 것을 썼다. 왕의 연대는 실제로는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세가 다음에는 지(志)를 두었는데, 천문·역지·오행·지리·예·악·여복·선거·백관·식화·병·형법 등 총 12지 39권으로 되어 있다. 이 지(志)도 《원사》에 준하여 분류하였으며, 실록 등이 없어져서 빠진 곳은 《고금상정례》 《식목편수록》 및 여러 사람의 문집 등으로 보충하였다 한다. 그런데 실제 고려의 제도는 당나라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송나라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고유의 전통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원구(丘)·사직 등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토속적인 연등회·팔관회 의식이 중요시되었고, 중국의 아악(雅樂)과 당악(唐樂)을 사용하면서도 예로부터의 속악이 성행하였으며, 중국의 관제와 산관계(散官階)를 이용하였으나 또한 도병마사·식목도감 및 향직 등 독자적인 제도를 아울러 썼고, 당률을 채용하면서도 실제 고유의 관습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지의 맨 첫머리에는 편찬자의 서문이 놓여 있는데, 대개 일반론과 실제 사실에 대한 개설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설명의 큰 줄기는 태조 이후 문종 때까지의 고려 전기를 제도가 정비되고 국세가 번창한 시기로 보고, 무신란 이후 몽골 간섭기에 들어서는 제도가 문란하여 나라가 쇠망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먼저 연월일이 없는 일반 기사를 쓰고 그 뒤에 연대가 있는 구체적 사실을 열거하였다. 세가·지 다음으로 표가 들어 있는데, 실제 본문에서는 연표라 하여 하나의 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를 따랐다. 제일 위에 간지를 쓰고 그 아래 중국과 고려의 연호를 썼으며, 고려 난에는 왕의 사망과 즉위 및 중국과의 관계 등 중요한 일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표에 이어 마지막으로 열전을 두었는데, 후비전(后妃傳)·종실전(宗室傳)·제신전(諸臣傳)·양리전(良吏傳)·충의전·효우전·열녀전·방기전(方技傳)·환자전(宦者傳)·혹리전(酷吏傳)·폐행전(嬖幸傳)·간신전·반역전(叛逆傳) 등 총 50권, 1,009명으로 되어 있다. 열전의 구성은 역시 《원사》를 모방하였지만, 그 서문은 이제현이 쓴 제비전(諸妃傳)이나 종실전의 서문처럼 이미 있던 자료를 이용하였다. 그 내용 중 반역전에 우왕 부자를 넣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있고, 문신 위주, 과거 위주로 인물을 선정하여 조선 유학자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흥망사관에 입각하여 개국공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려고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종래의 편년체의 역사서술에서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는 첫째, 동양의 전통적인 왕조사 편찬방식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그 나름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사실을 있는 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러면서도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을 큰 원칙으로 하여 고려시대를 이해하고 있는데, 첫째, 흥망사관에 의해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둘째, 무인(武人)을 천하게 보는 관념과 왕실의 권리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셋째,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대명관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사 편찬자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기록된 고려사 속 사신(史臣)의 견해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여 있다. 넷째, 고려 말 개혁론자의 견해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에서 고려 당시의 사실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 (高麗史全文) 조선시대 세종의 명으로 찬진(撰進)된 편년체 고려시대사. 권초(權草)·홍의초(紅衣草)라고도 한다. 1438년(세종 20) 신개(申槪)·권제(權)·안지(安止) 등 춘추관의 사관에 의해 편찬작업이 이루어져, 42년 완성되고 48년 일단 인출되었으나, 일부의 인물평가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반포가 중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편찬과 개찬을 거듭한 《고려국사》, 개찬 《고려국사》, 《수교(校)고려사》에 이어 네번째로 시도된 고려시대사이며, 직서주의(直書主義) 원칙에 입각하여 고려시대 당시 사용한 용어를 원래의 기록대로 직서하는 등 이 앞의 사서가 범한 오류를 시정하였다. 또 고려실록을 통해서 소략한 기사를 상세히 보충하여, 역시 앞서의 사서보다 충실을 기하였다. 그러나 편찬에 참가한 권제가 남의 청탁을 받고 내용을 고치고 자신의 조상에 대한 기술을 사실과 다르게 쓰는 등 불공정의 문제가 제기되어 반포가 중지되고, 편찬에 참여한 권제·안지·남수문(南秀文) 등은 처벌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고려시대사 편찬은 《고려사전문》이 반포 중단된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에 착수되어 51년(문종 1)에야 마무리되었다. (高麗史節要)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시대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책. 활자본. 35권 35책. 김종서(金宗瑞) 등이 왕명을 받고 찬수(纂修)하여 1452년(문종 2) 춘추관(春秋館)의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인멸된 《수교고려사(校高麗史)》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것인데, 《고려사》만큼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나 거기에 없는 사실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또 《고려사》에 누락된 연대가 밝혀져 있는 것이 많다. 기전체(紀傳體)인 《고려사》와 함께 고려에 관한 기본사료로 쌍벽을 이룬다. 초판본의 완질(完帙)은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있으며, 서울대학교의 규장각도서는 11책이 낙질(落帙)된 것이다. 1932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규장각본을 영인하였는데, 이어 일본에 완질이 있음을 알자 1차 영인에 빠진 권1·권6·권18과 전(箋)·범례·수사관(修史官)·목록·발(跋) 등을 따로 영인하여 《고려사절요보간(高麗史節要補刊)》이라는 이름으로 38년에 간행하였다. 또한, 59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 규장각본을 위주로 영인 간행하였고, 68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국역 출판하였다. * 이곳에 실은 자료는 한국사료연구소 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힘. 이곳에는 을 비롯한 귀중한 자료가 많이 있음.병(兵)
5    삼국유사 댓글:  조회:1999  추천:0  2012-07-16
삼국유사 1,2권         삼국유사 3,4권 삼국유사 5권          삼국유사 전문   삼국유사(三國遺事) 출처:직지 프로젝트 삼국유사 해제 는 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古代) 사적(史籍)의 쌍벽으로 일컬어져 온다. 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사관(史官)이 저술한 정사(正史)로서, 체재(體裁)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유창하고 화려하다. 이에 비하여 는 선사(禪師) 한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서, 체재가 짜여지지 못했고 문사 또한 박잡(駁雜)하다 하겠다. 그러나 는 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는 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의 동이전(東夷傳)에 겨우 의존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는 당시의 사서 찬술이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재의 부정연(不整然)과 내용의 탄괴(誕怪)·잡다(雜多)함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되고 있다. 우선 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는 우리의 신화와 원형적 옛 전설의 모습을 알게 하는 유일한 책으로 가위 설화 문학(說話文學)의 보고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땅 최고(最古)의 정형 시가(定型詩歌)인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어 에 전하는 11수와 함께 주옥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국문학 관계로는 사서 이상의 귀한 보전(寶典)이 되고 있다. 수록한 향가의 수는 비록 많은 것이 못 되지만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진 이 전하지 않는 지금, 의 문학사적 가치는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에는 빠졌거나 또는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 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사관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 같은 책을 저술함에 있어, 더러는 인용서와 그 내용이 같지 않은 것도 있고,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을 그대로 수집·수록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책 자체가 그 서명(書名)이 말하듯이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인 것이기 때문에 따르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저자 일연(一然)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경산(慶山)에서 출생했다. 속성(俗姓)은 김씨요, 이름은 경명(景明), 자는 회연(晦然)이다. 9세 때 출가하여 남해(南海)의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22세 때에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54세 때에 대선사가 되었다. 78세 때 충렬왕(忠烈王)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왕명으로 국사의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굳이 이를 사양하므로 다시 근친의 장군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궁내로 맞이해 들였다. 그러나 그는 궁성에 있기를 싫어하여 노모의 병을 빙자하고 구산(舊山)으로 내려갔다. 84세 되던 1289년 7월 8일 제자로 하여금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여러 승려와 더불어 담소자약(談笑自若)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높은 덕과 깊은 학문으로 왕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상의 대상이었다 한다. 비문에 의하면 그의 저·편저로는, 어록 2권, 게송 잡서(偈頌雜書) 3권, 조동 오위(曹洞五位) 2권, 조도(祖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 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 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 점송 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등 불서(佛書) 80권이 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어찌 보면 그로서는 희작(戱作)이라 할 수 있어 비문에도 적혀 있지 않은 만이 유저(遺著)로 전해지고 있다. 는 모두 5권으로 다음과 같은 체재로 되어 있다. 제 1권: 왕력 제 1(신라·고구려·백제·가락 및 후삼국의 연대표), 기이 제 1(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삼국 이전의 신라의 유사) 제 2권: 기이 제 2(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약간의 유사와 가락국에 관한 유사) 제 3권: 흥법 제 3(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탑상 제 4(사기와 탑·불상 등에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레에 관한 기록) 제 4권: 의해 제 5(고승들의 행적) 제 5권: 신주 제 6(이승들의 전기), 감통 제 7(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피은 제 8(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효선 제 9(효행·선행·미담의 기록) 의 간행 연대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대체로 충렬왕 8년 전후, 즉 서기 1281∼1283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의 고판본으로는 중종 정덕본과 그 이전에 된 듯한 판각의 영본이 있고, 시간본으로는 일본 토교 대학본, 조선 사학회본, 계명 구락부에서 간행한 육당의 교감본과 또 육당의 증보본이 있다. 그 밖에 안순암 수택의 정덕본을 영인한 일본 교토 대학본과 고전 간행회본이 있다. 이 책의 번역은 중종 임신본(壬申本)을 원본으로 했다. 때문에 흔히 유행되는 육당 증보본과는 간혹 틀리는 곳이 있을 것이다. 원문이 너무도 난해한 구절이 많아 역자로서는 힘에 겨운 작업이었다. 특히 향가의 번역은 더구나 완벽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딴에는 충실히 다루려고 애썼다. 이번에 판을 바꾸어 내면서 먼저 판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이나 문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바로잡아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삼가 제언(諸彦)의 질정(叱正)이 있으시길 빈다. 이 민 수 씀
4    삼국사기 한글본 댓글:  조회:2660  추천:0  2012-07-16
삼국사기 한글본 고구려 본기 백제 본기 신라 본기 연표(29~31) 잡지(32~40) 열전(41~50 삼국사기(원문+한글)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연표(29~31) 잡지(32~40) 열전(41~50) 삼국사기 고(考) HOME 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다. 우리는 우리 고대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긍정과 부정 양측면을 다 가지고 있는 삼국사기를 연구 할수밖에 없다. 우리 고대 사서의 소멸로 인하여 삼국시대의 정사로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서로는 삼국사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다보면 가슴 찌뿌등하고 답답함을 느낀다.자신의 나라를 비하하고 중국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고구려 백제는 폄하하고 신라는 높이면서 편중되어 있다.본기 곳곳에 기술한 저자의 견해는 김부식의 사상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며 과연 김부식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스럽다.아무리 중국의 눈치를 본다고는 하나 너무 심하다.혹자는 그렇게 썼기 때문에 삼국사기가 오늘날 까지 살아남을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현실적으로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을 하게도 되지만 이나라 역사 왜곡의 단초를 삼국사기가 제공했다는걸 생각하면 차라리 없었던 편이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러면 다른 사서들이 존재 했을 것이고 역사 왜곡 또한 그리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삼국사기를 이유로 다른 사서들이 모두 멸실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우리민족의 얼과 혼을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다.반도 구석으로 몰아넣어 몸과 마음을 작은 나라에 약소국민으로 전락시켜 버려 사대주의가 당연시되는 관념의 틀을 고정시켜 버렸다.발해 멸망이후 1,000년동안 북벌을 주장한 사람은 묘청과 효종 두사람 뿐이다(TV 드라마 왕건에 나오던 궁예도 있었다).정신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고토회복의 기치는 고사하고 감히 중국을 넘본단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역사학자들을 비교해 보자 중국은 춘추기법으로 저희는 높이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상대방은 낮추고 간략하게 적는다.일본은 어떤가.이건 순 날조다.고대부터 현재까지 저희가 최고라고 우기고 거기에 필요한게 있으면 무엇이던지 조작, 날조, 훼손을 한다.그리고 철판 깔고 우긴다.아주 천재적이다.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두나라와는 반대로 내것도 우리것이 아니라고 하고 상대는 높이고 우리는 낮춘다.예의바른 민족이라 그런가 겸손이 미덕인 나라라 그런가 안타까운 마음 금할수 없다. 지난주 KBS 역사스페셜 5월26일 방송된편을 보면 이정기 장군이 불과 10만명의 군사로 당나라와 전투를 벌인다.아주 정벌해 버릴 작심으로 그리한 것이다.무릇 기가 살아 있어야 한다.기가 죽어있으면 아무리 군사가 많아도 질 수 있고,기가 살아 있으면 적은 인원 불리한 상황도 극복하고 승리할수가 있는 것이다.우리민족의 기가 죽은데에는 문인중심의 유교숭배사상과 사대주의와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크다하겠다.하루속히 올바른 우리 역사를 복원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의 불편 부당한 요소를 몇가지 들면 첫째 그당시 여러 우리 고대사서가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과 가야 발 해의 역사의 기사를싣지 않음으로서 우리 역사를 심각하게 훼손하여 오늘날 날 까지도 제모습을 찾지 못하게 한점. 둘째 전편에 걸쳐 중국을 숭상하고 우리를 비하하는 내용이 넘쳐나고 중국의 연호 호를 써야만이 연대를 알 수 있는양 빠짐없이 기술하였고 저자 견해라는 난을 통해 전편 곳곳에 중국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우리를 비하한점. 셋째 아시아 최강의 광개토대왕을 별볼일 없이 기술하고 연개소문을 난폭한 반신 으로만 묘사하고 중국의 동해안 일대 대부분을 지배하여 동이강국으로 까지 부상하였던 구태백제의 흔적을 없애버린점. 넷째 열전의 인물 50인 가운데 고구려인(7명)과 백제인(3명)은 10명뿐이고 나머지 지 40명을 모두 신라인으로 채우고 거기다 김유신편을 열전 열권중 3권에 걸 쳐실어 형평을 잃고 있으며 신라왕들에겐 문무대왕,신문대왕등의 대왕호칭 을 사용하면서 고구려나 백제의 왕들에겐 그런 호칭을 쓰지 않은점. 등 전체적으로 사대주의에 몰두하고 승자의 역사로 신라를 합리화 하고 있다.그리고 조공의 역사로 그리고 있다.삼국 공히 수백차례 조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걸 무역활동이라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외교활동이라고 두둔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 할 수 없다.무역은 동등한 위치에서 하는 상행위 이지만 조공은 안바치면 복속을 거부하는걸로 간주하여 쳐들어 오는 것이다.독립적인 외교활동이라고 보기도 힘들다.우리만 거의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고 지나족은 거기에 약간 답례를 할뿐이지 지나인들이 먼저 바치러 온적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그러나 한단고기 에 보면 하.은.주 시대에 지나족들이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기사가 여러번 나오지만 중국역사서에는 한번도 안나온다.지나족들은 저희들이 불리한 것은 다지워 버렸다.우리는 바본가 너무 솔직한건가 모두다 기재해놓고 있다.그런데 고구려 20대 장수왕조에 보면 재위기간 79년에 조공한 기사가 47회나 나온다.아주 도배하다 시피 했다. (遣使入朝貢)이 40회 (遣使入朝貢)이 3회 (遣使入朝貢)이 1회 그밖에원년 진나라에 한번,13년, 23년,43년 위나라에 3번더 나온다.조금 다른 문구로.장수왕 64년 에서67년 4년동안은 백제장군 연신이 투항한거 빼고 8차례에 걸쳐 조공한 기사로만 채워져 있을정도이다.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고 동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던 광개토대왕에 이은 장수왕조에서 곧바로 그렇게 허구한날 조공을 갖다 바쳤을까? 비하하기 위한 과장기사는 이닌지 의심이 간다. 그리고 民饑相食이란 기사가 나온다.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걸믿어야 할지 의심이 간다.고구려 14대 봉상왕 8년7월,17대 소수림왕 8년 9월, 18대 고국양왕 6년 봄등 3회.백제 시조 온조왕33년,3대 기루왕 32년,11대 비류왕 28년 7월,24대 동성왕21년 여름등 4회 등장한다.신라엔 없다.문무왕 11년 당나라 설인귀의 표문에 대한 답장속에 한건 비칠뿐이다.신라엔 없는일이 더 강하고 더부강했던 고구려 백제에서는 여러번 있었단 말인가? 동물들도 제종족은 먹지 않는다.아무리 굶주려 굶어 죽을지언정 제종족을 잡아먹는 일은거의 없다.하물며 인간이 그것도 대동방예의지국이요 군자의 나라 대단군의 자손들이 배고프다고 사람을 잡아먹었을까? 아마도 이기사도 제민족을 비하시키기 위해서 김부식이 자의적으로 삽입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이 믿을 수 없는 민기상식 기사와 단순 조공기사(작전상 조공이거나 전후 사연이 있는 조공 기사는 제외)와 김부식의 정도에 넘치는 사대 독소는 삭제하였다.그게 오히려 사실에 부합되는 기록 일지 모른다.원문+한글본엔 그대로 실어 놨으니 궁금한 독자는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삼국사기엔 메뚜기떼에 관한 기사가 여러번 나온다.우리나라에 메뚜기떼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삼국사기엔 왜 이렇게 메뚜기떼가 자주 출몰하는 것일까? 중국을 무대로하는 펄벅의 에 나오는 그어마어마한 메뚜기떼가 삼국사기엔 고구려 8회 백제 5회 신라 25회 출현하고 있다.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는 것이다.그것도 추수기인 8,9월(음력)이다.또 4,5월(음력)에 서리가 내려 추수기인 보리를 해쳤다는 기사도 나온다.음력 4,5월이면 양력 6,7월을 이야기 하는데 우리나라엔 늦가을에나 서리가 내리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삼국시대엔 초여름에 서리가 내렸단 말인가?서리에 관한 기사도 고구려3회 백제 6회 신라 26회 나온다.이밖에도 대해 즉 홍수가 나는 계절이 우리 한반도와 다른점등 우리강역의 기후 풍토와 부합되지 않는 자연 현상들이 너무도 많다.김부식이 사대주의에 절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황 이었지만 지금의 이 한반도가 우리의 강역이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우리 후손들에게 주고 있는건 아닐까? 실제로 서울대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의 일식 현상에 대한 연구로 그당시 관측위치를 연구 검토한 결과를 발표한적이있다.그의 결론은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 장소는 삼국 모두 현재의 중국으로 나왔었다. -삼국시대 위치 연구 박창범- 이상 제시한 사항들과 함께 더욱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 지기를 기대한다.역사에는 교수가 따로 없다.역사앞에는 모두가 학생이다.또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다.우리 모두의 것이다.각자 전공에 맞추어 미스테리한 부분을 밝혀 내는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또한 기대한다. 2001년 5월28일多慧 吳成泳 삼국사기(三國史記) 개설 고려시대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삼국의 역사서.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서 함께 작업했지만,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와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진삼국사기표〉에는 “사대부가 우리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 나라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편찬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구성은 크게 본기(本紀) 28권, 지(志) 9권, 연표(年表) 3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이루어졌다. 【본기】신라 12권(신라 5, 통일신라 7), 고구려 10권, 백제 6권으로 구성되어 신라에 그렇게 편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정치 부문은 축성(築城)과 순행(巡幸), 관제 정비와 인사 이동, 조상과 하늘에 대한 제사라는 종교 관례 등이 서술되어, 당시 삼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축성은 백제가 가장 많아 늘 전쟁을 치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순행은 1 2월에 많이 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수렵을 목적으로 한 것이 많았던 반면에, 신라는 구휼과 권농 및 수렵 등 다양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인사 이동은 신라에서 가장 빈번하였으며, 종교 관례는 백제에서 많이 하였다. 천재지변 부문은 혜성 유성 일식 가뭄 홍수 등 600여 회의 천재와, 지진 화재 등 330여 회의 지변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주로 정치적 사건을 예언하는 기능을 하였다. 전쟁 부문은 전체 440여 회의 전쟁이 발생하는데 대체로 고구려는 이민족, 백제는 신라와 전쟁하였다. 외교 부문은 620여 회의 교섭기록이 있는데 주로 조공(朝貢)을 중심으로 한 대중국 외교가 많았다. 물론 삼국은 독립국가로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며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연표】 상 중 하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이 소략하다. 상(上)은 BC 57년(박혁거세 즉위)부터 274년(미추왕 13), 중(中)은 275년(미추왕 14)부터 608년(진평왕 30), 하(下)는 608년(진평왕 30)부터 935년(경순왕 9) 신라가 멸망한 다음해인 936년 후백제의 멸망까지 기록되어 있다. 【지】 제1권은 제사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제3~5권은 신라 지리, 제6권은 고구려 백제 지리, 제7~9권은 직관(職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지리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통일 뒤에 넓혀진 영토 관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사지는 5묘(廟) 3사(祀)에 대한 설명이 많이 차지하고 있고, 악지는 악기 가악(歌樂) 무(舞) 악공, 직관지는 중앙관부 궁정관부 무관과 외직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열전】기전체의 역사서로서는 열전이 빈약한 편이다. 전체 69명을 대상으로 했지만 특별히 항목을 분류하지는 않았다. 제1~3권은 김유신 열전이고, 제4권은 을지문덕 거칠부 등 8명의 열전,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등 10명의 열전, 제6권은 강수(强首) 최치원 등 학자들의 열전, 제7권은 관창(官昌) 계백(階伯) 등 순국열사 19명의 열전, 제8권은 솔거(率居) 도미(都彌) 등 11명의 열전, 제9권은 연개소문 창조리(創助利) 등 반신(叛臣)의 열전, 제10권은 궁예 견훤 등 역신(逆臣)의 열전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이 책에서 가장 주목되어 왔던 것은 사론(史論)의 성격을 지닌 논찬(論贊)이다. 논찬은 신라본기 10개, 고구려본기 7개, 백제본기 6개, 열전 8개 등 모두 31개가 있다. 내용은 주로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를 견지한 것이지만 반면에 한국 역사의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신채호 등이 비난한 것처럼 사대적인 악서(惡書)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편찬된 시기와도 관련된다. 즉 이 책은 고려 귀족문화가 최고로 발전하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런 시대는 대체로 전 시기의 역사를 정리하는 때인데, 특히 당시에는 거란 및 여진과 전쟁한 뒤 강력한 국가의식이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지 유교정치 이념의 실현만이 아니라 국가의식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편찬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전근대 역사서의 특징인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성을 유지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고기》 《신라고사(新羅古史)》 《구삼국사(舊三國史)》 《삼한고기(三韓古記)》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및 김대문의 《화랑세기》 《고승전》 《계림잡전》과 《삼국지》 《후한서》 《위서(魏書)》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북사(南北史)》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오히려 한국 전근대 역사서술을 한 차원 높여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 점은, 첫째 삼국을 1세기부터 완성된 국가로 파악하고 국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천재지변과 인간활동을 연결시키면서 역사를 바라보고 국왕의 정치행동을 연결시켰으며, 셋째 역사를 교훈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넷째 강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였고, 다섯째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것에 잘 나타난다. 이 책은 1174년(명종 4) 사신을 통해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에 초판을 간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13세기 후반에 성암본(誠庵本)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일부만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으로 1394년(태조 3)에 3차 간행, 1512년(중종 7)에 4차 간행이 있었다. 4차 간행은 현재 완질의 형태로 옥산서원과 이병익(李炳翼)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1760년(영조 36)에 간행된 것이 있는데, 러시아과학원 동방연구소 상트페테르부르크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5년 서울대학 허성도(許成道)가 25년의 노력 끝에 CD-ROM책을 출판하였다. 삼국사기(권1∼50)(三國史記(卷一∼五十))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에 관하여 김부식(金富軾)이 찬진(撰進)한 역사서. 보물 제723호. 《삼국사기》 중 제1권부터 50권까지의 목판본. 50권 9책. 20.7×30.2`cm. 서울 종로구 동숭동 이병익(李炳翼) 소장. 1512년(중종 7) 중간(重刊)된 간본(刊本)으로, 고려시대 처음 새긴 원판과 그 후 조선 태조(太祖) 때 개각(改刻)한 것과 중종(中宗) 때 또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서로 다른 판이 섞여 있다. 원판이 이미 닳아서 복구불능이 된 것, 오자 탈자 등의 결점이 있으나, 현존하는 책 중 가장 완전하고 오래된 유물의 하나이다. 삼국사기(권44∼50)(三國史記(卷四十四∼五十))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에 관하여 김부식(金富軾)이 찬진(撰進)한 역사서. 보물 제722호. 《삼국사기》 중 제44권부터 50권까지의 목판본. 영본(零本). 7권 1책. 19.5×25`cm.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조병순(趙炳舜) 소장. 초각본(初刻本)에 의거한 복각본(覆刻本)으로, 비록 영본이기는 하나 이것을 바탕으로 조선 중종조(中宗朝) 간본(刊本)의 와오(訛誤)와 탈락된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각본(原刻本)에서 닳아 없어진 자(字)를 그대로 새겨서 글자 모양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상당히 많으며,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각판(刻板)한 곳도 있어, 원각본이 나온 후에도 오랜 연대가 지난 뒤에 복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판본을 고려 말기에 간각(刊刻)했을 것으로 보이며, 또 자획이 닳은 곳이 많아 간각 후 오랜 뒤에 인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로서는 가장 오래 된 유일한 진서(珍書)이다.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
3    연변조선족력사 댓글:  조회:2806  추천:0  2012-07-16
연변조선족력사 조선민족은 5천여년의 유구한 력사를 갖고 있다. 현재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19세기중엽부터 조선반도에서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련속되는 자연재해와 봉건폭정통치, 그리고 일제침략폭행에 못이겨 해마다 수천수만세대가 북으로 타향살이를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로씨아 프리모르스크변구일대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또 두만강과 압록강 북안일대에서 숨어 살았다. 두만강북안에서 대대손손 일하며 살아 온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한세기 남짓한 동안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었다. 그들은 피와 땀으로 이 땅을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또한 항일 및 해방전쟁에서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1949년 새 중국이 창건된후1952년에 연변조선민족자치구(후에 연변조션족자치주로 고쳤음) 가 창립되고 연변의 조선족은 민족구역자치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아래에 네개 부분으로 나눠 연변조선족의 백여년간 력사를 알아 본다. 제1부분 19세기 중엽부터 1910년까지 력대로 두 나라 변경지대백성들의 상호래왕은 잦았다. 더우기 조선변강백성들은 초기에 중국땅에서 계절적으로 거주하다가 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집을 짓고 장기적으로 정착 거주하는데로 발전하였다. 1860년이래 조선 북부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며 1869년에는 재해가 더구나 심하였다. 살길이 막힌 조선기민들은 온 가정, 지어 온 마을이 고향을 등지고 몰래 국경을 넘어서 농사를 지었다. 하여 조선이민이 날로 늘어났는데 조선족거주구역은 두만강북안으로부터 부르하통하, 가야하 류역에로 확대되였다. 1883년9월, 청나라정부는 조선이민들을 회유해 짜리로씨야의 침략세력과 싸우게 하기 위해 특히 을 제정하였다.이 규약에 근거해 1885년에 화룡욕에 통상국을 앉혔으며 광제욕(오늘의 광개향 광소툰)과 서보강(지금의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에 통상분국을 앉히고 조선의 회령, 종성, 경원 등지와의 통상사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같은 해 두만강이북 길이가 7백여리이고 너비가 40~50리인 지역을 조선이민특별개간구로 정하고 월간국(越垦局)을 설치해 전문 조선이민의 개간사무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조선이민들이 농사를 짓는데 편리를 조성해주었다. 이 시기 연변의 조선족들은 주로 황무지를 일구고 밭농사를 하였다. 1894년도에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4개 보 (堡) 에만도 한전 25,501정보(1정보는 약 15무에 해당함)가 있었다. 1900년도에 조선족들이 룡정 동북부의 세전이벌과 룡정남부의 대교동에서 벼농사를 하는데 성공한후로부터 연변에서 벼농사가 보급되였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을 강박해 을 맺고 조선을 이른바 일본의 로 만든데서 광범한 조선족인민들의 강렬한 의분을 자아내였다. 일본제국주의가 수천수만에 달하는 반일의병과 애국문화운동에 뛰여든 지식인들을 피비리게 탄압한데서 많은 반일의병과 애국지사 그리고 봉건통치를 반대하는 농민들이 망국의 비분을 안고 분분히 고향을 떠나 북으로 연변 등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들어왔다. 하여 1909년에 이르러 연변의 조선족이 9만8,000여명으로 늘아나 연변 인구의 76.6%를 차지하였다. 1907년8월, 일본이 공공연히 헌병대를 룡정에 파견하고 청정부가 연변지역에 설치한 행정기구를 무시하고 비법적으로 이른바 를 설치하였으며 이른바 를 건립하도록 발기하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각지의 조선족사립학교들을 위해 교과서를 편찬하고 반일사상을 주입하였다. 1906년도에 조선족반일지사 리상설이 룡정에서 반일사립학교인 서전서숙을 꾸리고 철저한 민족주의교육과 반일계몽교육을 실시한 이래 조선족반일사립학교는 연변 각지에 우후죽순마냥 건립되였다. 선후로 창립된 명동, 창동, 정동, 광성 등 많은 반일학교들은 모두 당지에서 반일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으로, 반일투쟁전개의 여론진지로, 행도중심으로 되였다. 거의 40년에 달하는 조선족인민의 곡절적인 반일투쟁이 이때로부터 서막을 열었다. 제2부분 1910년부터 1931년까지 1910년8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후 연변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거의 모두 일본제국주의 파쑈폭행에 견디지 못해 두만강을 넘어 중국에 이주했다. 1910년부터 1926년까지 도합 126,964명이 이주해왔고 1931년에 이르러 연변조선족인구는 406,341명으로서 동삼성 조선족 총인구의 64.6%를 점하였다. 조선인의 대량적인 이주는 연변지구 대면적수전개발에 인력 및 기술면의 담보를 제공하였다. 1926년에는 이미 155개소의 사립학교가 있었는데 재학생수가 3,829명에 달해 연변은 동삼성에서 학교밀도가 제일 높은 지방으로 되였다. 각 사립학교들에서는 반일으로 대량의 반일군정인재들을 양성했다. 1912년, 반일인사 서일은 왕청현에서 을 조직하고 반일민족주의를 전파했다. 1913년 지장훈, 강수희, 등 반일인사들은 동성용에서 를 건립했다. 같은 해 김약연, 리동춘, 백옥정, 김립 등 사람들은 의 토대우에서 를 창립하고 반일문화계몽운동을 광범위하게 벌렸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조선 반일독립운동의 추동하에 이미 상해와 로씨야연해주의 반일독립운동자들과 밀접한 련계를 확보하고 또 났들의 영향을 받은 연변의 반일인사들은 즉시 호응하여 반일대폭풍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그해 3월13일, 연변각지에서 온 30,000여명의 조선족농민과 사립학교사생들은 일본총령사관소재지 룡정에 모여 연변력사에서 규모가 전례없는 반일집회를 갖고 반일독립선언서를 읽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성토했다. 일부 한족학생도 시위행진대오에 가담했다. 일제의 압력하에 지방당국은 조선족인민의 평화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는데 당장에서10명이 숨지고 40명이 상했으며7명의 중상자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17일, 1,500명의 조선족군중은 수난자들의 시체를 들고 항의시위행진을 단행했다. 4월말까지 도합86,670여명의 연변조선족군중이 다지에서 반일집회와 시위행진에 함가했다. 관준언 등 형제민족반일인사들은 천방백계로 체포당하게 된 조선족반일인사들을 엄호하고 피신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일제군경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했다. 1920년 여름, 연변조선족반일부대 은 이미 2,900여명의 장병들과 2,600여자루의 보총을 소유하고있었다. 그중 홍범도, 박경철이 거느린 명월구의 의군단, 구춘선과 안무가 지휘하는 의란구의 국민회군, 최명록이 창립한 봉오동의 군대, 서일과 김좌진이 거느린 왕청현 서대파의 부대 등이 있었다. 1920년 6월7일, 홍범도와 최명록이 지휘한 반일부대는 봉오동에서 조선주둔 일본군제19사단에서 파견한 (260여명)를 매복습격하였고 수십명을 섬멸하였다. 는 조선족반일무력이 동북경내에서 일본정규군을 대량으로 소멸한 첫 전투였다. 봉오동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침략자들은 연변의 조선족반일부대를 소멸하기 위하여1920년10월2일에 을 꺼리낌없이 도발하고 2만명에 달하는 일본정규군을 무어 피비린 을 발동했다. 그들은 2,285명에 달하는 조선족민중을 살해했고 2,507세대에 달하는 민가를 불살라버렸다. 10월하순 홍범도와 김좌진이 거느린 반일부대는 화룡현 삼도구의 청산리, 이도구의완루구, 어랑촌 874고지 등 곳에서 일본군을 련속 전승하여 근 천명에 달하는 적을 섬멸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연변지구조선족인민들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영웅적기개를 과시하였다. 이 은 연변지구에서의 반일민족주의운동의 최고봉을 표징하였다. 1920년초에 조기 공산주의자인 리동휘 등이 상해에서 조선문인쇄공장을 세워 을 비롯한 많은 진보적 서적과 간행물을 번역출판하였다. 이런 서적과 간행물들은 곡절을 거쳐 연변에 전해와 갈수록 많은 청년학생과 농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 등 진보적 단체를 내와 맑스주의를 전파하고 로씨야10월혁명을 선전하였다. 1921년12월, 돈화에서 를 세웠는데 그 산하에 1,300여명의 당원이 소속되여있었다. 1923년에 또 고려공산당간도지방회 및 그 인 을 세웠다. 1924년12월에 박윤서를 위수로 하는
2    민족력사 알아보기 댓글:  조회:2492  추천:0  2012-07-16
※ 단군 신화 아득히 먼 옛날, 하늘 나라를 다스리는 환인 임금님이 여러 아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너희들중에 누가 세상에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으냐?" 여러 아들 중에서 환웅이 나서며 말했습니다. "저는 전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복이 되는 하늘 나라의 뜻을 펴서, 보다 아름답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 싶었사옵니다. 이제라도 아버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내려가 보고자 하나이다." "오, 그러하냐? 땅 위에 어느곳 사람들을 다스리고 싶으냐?" "동방에 사는 무리이옵니다. 그곳 사람들은 마음이 어질고 슬기로워 그들을 다스리면 땅 위의 으뜸이 될 것이라 여겨지옵니다." "기특한 생각이다. 그러면 네가 잘 깨우쳐서 밝고 고운 나라가 되도록 힘써 보아라." 하늘 나라의 환인 임금님은 아들 환웅의 뜻을 알고 바람을 다스리는 신 풍백, 비를 다스리는 신 우사, 구름을 다스리는 신 운사에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너희들은 동방의 나라에 내려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여라. " 환인 임금님은 신의 힘을 나타내는 천부인 세 개를 주며 말을 이었습니다. "환웅을 도와 천추 만 년까지 그 나라를 지키도록 하라." "예!" 모두들 입을 모아 답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소명을 받들어 길이 동방의 나라를 수호하겠나이다. " 환웅은 농경 생활을 다스리는 3신과 3,0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아득한 구름 속을 헤쳐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백성들은 듣거라. 나는 너희들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느니라. "환웅의 말에 사람들은 엎드려 절하였습니다."감사하옵니다. 보살펴 주소서! "환웅이 3,0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온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는 큰 시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중심지라는 뜻으로 환웅은 이 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습니다. "그대들의 슬기로움을 다하여 백성들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에게 백성들이 농사를 더욱 잘 짓게 도와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부하들에게는 병을 다스리고,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일, 악하고 착한 일을 가리는 일 등을 비롯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가지의 일을 맡겼습니다. 환웅이 신시를 열어 세상을 잘 다스린 덕으로 사람들이 더욱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나쁜 짓과 싸움이 없어졌습니다. 짐승들도 사람들을 본받아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무렵 평화로운 신시에서 그리 멀지않은 산속에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마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몹시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신단수 아래에 계시는 환웅님을 찾아가서 우리의 소원을 빌어 보자." "좋은 생각이야!" 곰과 호랑이는 환웅을 찾아가 엎드려 빌었습니다. "우리들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비나이다. "환웅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대답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하늘의 뜻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힘겨운 시련이 없이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없다." "어떤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통을 주며 말했습니다. "100일동안 굴 속에 들어가 햇빛을 보지 말고 이 마늘과 쑥을 먹으며 정성스럽게 기도하면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느니라. 이것은 오로지 하늘의 뜻으로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꼭 해내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그러나 먹이를 많이 먹는 호랑이와 곰이 쑥 포기와 마늘 쪽만으로 100일을 견디기란 힘겨운 시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미가 급한 호랑이는 겨우 37일을 견디다가 더 참지 못하고 굴 속을 뛰쳐나와 산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시련을 참고 견딘 곰은 100일째 되는 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저의 몸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제는 저와 맞는 짝을 이루어 주소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소원대로 뜻을 이루어 환웅과 결혼하였습니다. 단군 왕검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습니다. 이 때는 기원전 2367년경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입니다. 단군 왕검은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그 곳은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단군 왕검은 그 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이라는 말에는 우리 민족이 나라를 세운 참뜻이 들어 있습니다.단군은 다시 자리를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가 산신이 되어 무려 1,908년이나 살았다고 합니다] ※ 고조선. 위만조선. 기자조선 1) 고조선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지금은 단군이 건국한 조선과 위만조선을 포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른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단군신화에서는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술하였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건국연대를 위로 끌어올린 이유는,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왕조는 권위가 있으며 민족도 위대하다는 인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뒤 진(秦)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BC 222),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할 무렵 진(秦)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漢)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水)로 재조정하였다. 2) 위만조선 BC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위만(衛滿)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나라에 살던 조선인으로 보고 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BC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위만은 유이민집단과 토착 고조선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漢)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漢)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고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은 고조선의 일부지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한사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려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래서 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후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삼한사회(마한, 진한, 변한)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 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3) 기자 조선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 (…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가 아니라 한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 고려 숙종때 평양에 축조)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 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예 ] 행주 기(奇)씨 , 서(徐)씨 , 태원 선우(鮮于)씨 , 청주 한(韓)씨 [ 기자와 같이온 성씨 ] 해주, 태인 경(景)씨 , 토산 궁(弓)씨 , 봉화 금(琴)씨 , 밀양, 함평 노씨(魯)   ※ 신라(新羅, B.C.57~935, 992년간, 총 56대)-박(朴)씨 10왕, 석(昔)씨 8왕, 김(金)씨 38왕     代 왕명 재위기간 성 약사 1 박혁거세(朴赫居世, BC69~AD4) BC57~ AD4 朴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2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 4~24 朴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 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3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 24~57 朴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인 '도솔가' 등을 지음 4 탈해이사금(脫解, BC19~80) 57~80 昔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탄생. 5 파사이사금 (婆娑, ?~112) 80~112 朴 유리왕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6 지마이사금(祗摩, ?) 112~134 朴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 7 일성이사금(逸聖, ?) 134~154 朴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8 아달라이사금(阿達羅, ?~184) 154~184 朴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9 벌휴이사금(伐休, ?~196) 184~196 昔 탈해왕의 손자 10 나해이사금(奈解, ?~230) 196~230 昔 벌휴왕의 손자. 11 조분이사금(助賁, ?~247) 230~247 昔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12 첨해이사금(沾解, ?~261) 247~261 昔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13 미추이사금(味鄒, ?~284) 262~284 金 김씨 왕가의 시조 14 유례이사금(儒禮, ?~298) 284~298 昔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15 기림이사금(基臨, 289~310) 298~310 昔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16 흘해이사금(訖解, ?~356) 310~356 昔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17 내물마립간 (柰勿麻立干, ?~402) 356~402 金 중국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18 실성마립간(實聖, ?~417) 402~417 金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19 눌지마립간(訥祗, ?~458) 417~458 金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20 자비마립간(慈悲, ?~479) 458~479 金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21 소지마립간(炤知, ?) 479~500 金   22 지증왕(智證, 437~514) 500~514 金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23 법흥왕(法興, ?) 514~540 金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24 진흥왕(眞興, 534~576) 540~576 金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25 진지왕(眞智, ?) 576~579 金 휘는 사륜(舍輪) 26 진평왕(眞平, ?~632) 579~632 金 휘는 백정(白淨) 27 선덕여왕(善德, ?) 632~647 金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28 진덕여왕(眞德, ?~654) 647~654 金 휘는 승만(勝蔓) 29 무열왕(武烈, 604~661) 654~661 金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30 문무왕(文武, ?~681) 661~681 金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31 신문왕(神文, ?~692) 681~691 金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32 효소왕(孝昭, 643~702) 692~702 金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33 성덕왕(聖德, ?~737) 702~737 金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34 효성왕(孝成, ?~742) 737~742 金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35 경덕왕(景德, ?~765) 742~765 金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36 혜공왕(惠恭, 765~780) 765~780 金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37 선덕왕(宣德, ?~785) 780~785 金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38 원성왕(元聖, ?~798) 785~798 金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39 소성왕(昭聖, ?~800) 798~800 金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40 애장왕(哀莊, 788~809) 800~809 金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41 헌덕왕(憲德, ?~826) 809~826 金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42 흥덕왕(興德, ?~836) 826~836 金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43 희강왕(僖康, ?~838) 836~838 金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44 민애왕(閔哀, ?~839) 838~839 金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45 신무왕(神武, ?~839) 839 金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46 문성왕(文聖, ?) 839~857 金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47 헌안왕(憲安, ?~861) 857~861 金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48 경문왕(景文, ?~875) 861~875 金 휘는 응렴(膺廉) 49 헌강왕(憲康, ?~886) 875~886 金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50 정강왕(定康, ?~887) 886~887 金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51 진성여왕(眞聖, ?~897) 887~897 金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52 효공왕(孝恭, ?~912) 897~912 金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53 신덕왕(神德, ?~917) 913~917 朴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54 경명왕(景明, ?~924) 917~924 朴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55 경애왕(景哀, ?~927) 924~927 朴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56 경순왕(敬順, ?~978) 927~935 金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항복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 고구려(高句麗, B.C 37 ~A.D 668, 705년간, 총28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동명성왕(東明聖, B.C 58~B.C 19) B.C37~ B.C19 성은 고(高), 원래 성은 해(解). 휘는 주몽(朱蒙).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와 배다른 형제라고도 한다. 동부여(동부여)의 금와의 아들 대소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졸본부여)라 함. 2 유리왕(榴璃, ?~18) B.C19~ A.D18 성은 해(解). 휘는 유리(榴璃). 동명성왕 아들. 왕22년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왕33년에 한(漢)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음. 유리명왕(榴璃明) 3 대무신왕(大武神, 4~44) 18~44 성은 해(解). 유리왕 셋째아들. 휘는 무휼(無恤). 동부여, 개마국을 쳐서 병합하고,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넓혔음. 낙랑군을 정벌함. 4 민중왕(閔中, ?~48) 44~48 성은 해(解). 휘는 색주(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대무신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려 대신 즉위함. 5 모본왕(慕本, ?~53) 48~53 이름은 해우(解憂),해애루(解愛婁). 민중왕의 형.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신하 두노(杜魯)에게 피살됨. 6 국조왕(國祖, 47~165) 53~146 7살의 나이로 즉위. 영토를 확장하고 부족국가의 틀을 벗어나 중앙 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태조왕(太祖王) 7 차대왕(次大, 71~165) 146~165 휘는 수성(遂成). 국조왕 동생. 태조로 부터 왕위 계승을 반대한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학정과 횡포를 일삼다가 신대왕에게 시해됨. 8 신대왕(新大, 89~179) 165~179 휘는 백고(伯固). 국조왕의 막내동생. 차대왕의 횡포로 산에 숨어지 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후 왕위에 오름. 9 고국천왕(故國川, ?~197) 179~197 휘는 남무(南武). 빈민 구제책으로 진대법을 실시함. 국양왕(國壤) 10 산상왕(山上, ?) 197~229 휘는 연우(延優), 위궁(位宮). 고국천왕의 아우. 고국천왕이 아들없이 죽자 즉위함. 11 동천왕(東川, ?~248) 227~247 휘는 우위거(憂位居). 산상왕의 아들. 248년에 신라와 화친함. 12 중천왕(中川, ?~270) 247~270 동천왕의 아들 13 서천왕(西川, ?~292) 270~292 휘는 약로(藥盧), 약우(藥友) 14 봉상왕(烽上, ?~300) 292~300 휘는 상부(相夫), 삽시루. 왕2년과 5년에 연나라 의 침입을 격퇴했으나 사치와 방탕에 빠져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폐위되자 자살함. 15 미천왕(美川, ?~331) 300~330 휘는 을불(乙弗), 우불(憂弗). 현도군을 공격하고 낙랑군을 점령하는 등 영토확장에 공을 세웠음. 호양왕(好讓) 16 고국원왕(故國原, ?~371) 331~371 휘는 사유(斯由), 쇠(釗). 백제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 전사함. 17 소수림왕(小獸林, ?) 371~384 휘는 구부(丘夫). 고국원왕 아들. 왕2년에 중국 전진(前秦)으로부터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자 이를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 18 고국양왕(故國壤, ?~391) 384~391 휘는 이련(伊連). 요동과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혔음 19 광개토대왕(廣開土, 374~413) 391~413 휘는 담덕(談德). 불교를 신봉하였고, 영토를 만주와 한강 이북을 차지하는 등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이룩함. 호태왕(好太),영락대왕(永樂) 20 장수왕(長壽, 394~490) 413~490 성은 고씨, 휘는 거련(巨連),연(璉). 광개토대왕 맏아들. 남하 정책을 착수 하여 왕 63년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음. 왕 68년에 신라의 7개성을 함락시킴. 21 문자명왕(文咨明, ?~519) 491~519 휘는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 왕3년에 부여를 멸망 시키고, 신라와 백제를 여러차례 침공하여 영토를 넓혔음. 명치호왕(明治好). 문자왕. 22 안장왕(安藏, ?~531) 519~531 휘는 흥안(興安) 문자왕의 맏아들. 백제와 두차례 싸움. 23 안원왕(安原, ?) 531~545 휘는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양(梁)나라, 동위(東魏)와 수교 하였음. 24 양원왕(陽原, ?~559) 545~559 휘는 평성(平成). 돌궐의 침입을 격퇴 하였으나 신라, 백제의 침공을 많이 받았음. 25 평원왕(平原, ?~590) 559~590 휘는 양성(陽城). 중국의 진(陣), 수(隨), 북제(北齊) 등과 수교함. 26 영양왕(瓔陽, ?~618) 590~618 휘는 원(元). 왕9년에 수나라 문제의 30만 대군을 격퇴. 왕23년에 수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을지문덕이 섬멸 하였음.평양왕(平陽) 27 영류왕(榮留, ?~641) 618~641 휘는 건무(建武). 외교를 잘하여 수양제에게 잡혀간 포로를 찾아왔으며, 도교(道敎)를 처음으로 받아들임.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살해당함. 28 보장왕(寶藏, ?~681) 642~668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오름. 당의 고종이 이세적(李世勣)을 보내 쳐들어오고 신라가 쳐들어와 고구려는 망하였음         ※ 백제(百濟, B.C 18~A.D660 , 678년간, 총31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온조왕(溫祚, ?~28) B.C 18~ A.D 29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함. BC 5년에 서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2 다루왕(多婁, ?~77) 28~77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3 기루왕(己婁, ?~128) 77~128 다루왕의 맏아들. 4 개루왕(蓋婁, ?~166) 128~166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5 초고왕(肖古, ?~214) 166~214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6 구수왕(仇首, ?~234) 214~234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수왕. 7 사반왕(沙泮) 234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8 고이왕(古爾, ?~286) 234~286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9 책계왕(責稽, ?~298) 286~298 고이왕 아들. 10 분서왕(汾西, ?) 298~304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 당함. 11 비류왕(比流, ?~344) 304~344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12 설왕( ,?~346) 344~346 분서왕의 맏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 ?~375) 346~375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14 근구수왕(近仇首, ?~384) 375~384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데 공이많음. 15 침류왕(枕流, ?~385) 384~385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16 진사왕(辰斯, ?~392) 385~392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 위해서 출정하다가 병사함. 17 아신왕(阿莘, ?~405) 392~405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18 전지왕(琠支, ?~420) 405~420 아신왕의 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 ?~427) 420~427 전지왕의 맏아들 20 비유왕(毘有, ?) 427~454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21 개로왕(蓋鹵, ?~475) 455~475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22 문주왕(文周, ?~477) 475~477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23 삼근왕(三斤, ?) 477~479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여금 토평 하게함. 24 동성왕(東城, ?~501) 479~501 이름은 모대(牟大).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25 무령왕(武寧, ?~523) 501~523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26 성왕(聖, ?~554) 523~554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27 위덕왕(威德, ?~598) 554~598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28 혜왕(惠, ?~599) 598~599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29 법왕(法, ?) 599~600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공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을 착수함. 30 무왕(武, ?~641) 600~641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파하였음. 31 의자왕(義慈, ?~660) 641~660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 가락시대(駕洛, 42~532 , 490년간, 총10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수로왕(首露, 42~199) 42~199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허황옥과 결혼함 2 거등왕(居登, ?~253) 199~259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3 마품왕(麻品, ?~291) 259~291 거등왕의 아들 4 거질미왕(居叱彌, ?~346) 291~346 마품왕의 아들. 5 이시품왕(伊尸品, ?~407) 346~407 거질미왕의 아들 6 좌지왕(坐知, ?~421) 407~421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7 취희왕(吹希, ?~451) 421~451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8 질지왕(?~492) 451~492 취희왕의 아들 9 겸지왕(鉗知, ?~521) 492~521 고이왕 아들. 10 구형왕(仇衡, ?) 521~532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 ※ 발해(渤海, 699~926 , 227년간, 총15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고왕(高, ?~719) 699-719 휘는 대조영(大祖榮).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동모산(東牟山, 길림성 동화)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함. 연호를 천통으로 함. 713년 고구려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국호를 발해로 고침. 2 무왕(武, ?~737) 719~737 휘는 대무예(大武藝).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교환하고 당나라를 공격함. 3 문왕(文, ?~?) 737~793 휘는 대흠무(大欽茂). 서울을 용천부(龍泉府)로 옮기고 관직제도를 정비 했으며 주자감(胄子監)을 설치하는 등 문화 발전에 힘씀. 4 대원의(大元義, ?~794) 793~794   5 성왕(成, ?~795) 794~795 휘는 대화여(大華與). 문왕의 손자.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고치고 상경(上京)으로 서울을 옮김. 6 강왕(康, ?~809) 795~809 휘는 대숭린(大崇隣). 문왕의 아들. 연호를 정력(正曆)이라 함. 일본, 당나라 등과 사신왕래, 문물교환을 활발히 함. 7 정왕(定, ?~813) 809~812 휘는 대원유(大元瑜). 연호를 영덕(永德)으로함. 8 희왕(僖, ?~817) 812~817 휘는 대신의(大言義). 연호를 주작(朱雀)으로 고침. 당나라와 교류하여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임. 9 간왕(簡, ?~818) 817~818 휘는 대명충(大明忠) 연호를 태시(太始)라함. 10 선왕(宣, ?~830) 818~830 중국으로 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는 전성기를 이룩함. 고구려의 옛땅을 대부분 회복하여 영토가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개원(카이위안), 남쪽으로는 함경남도 정평, 북쪽으로는 헤이룽강(흑룡강)에 이르렀음. 11 대이진(大彛震, ?~858) 830~858 선왕의 손자.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침. 12 대건황(大虔晃, ?~871) 858~871   13 대현석(大玄錫, ?~892) 871~894   14 대위해(大瑋?, ?~906) 894~906   15 대인찬(?~926) 906~926 103개의 성이 모두 거란에 점령되어 발해 멸망. ※ 고려시대(高麗,918~1392, 473년간, 총 34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태조(太祖, 877~943) 918~943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2 혜종(惠宗, ?~945) 943~945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3 정종(定宗, 923~949) 945~949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4 광종(光宗, 925~975) 949~975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5 경종(景宗, 955~981) 975~981 휘는 주(인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6 성종(成宗, 960~997) 981~997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7 목종(穆宗, 980~1009) 997~1009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8 현종(顯宗, 992~1031) 1009~1031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함. 9 덕종(德宗, 1016~34) 1031~1034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도 완성함. 10 정종(靖宗, 1018~46) 1034~1046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11 문종(文宗, 1019~83) 1046~1083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류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12 순종(順宗, 1046~1083) 1083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13 선종(宣宗, 1049~1094) 1083~1094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등 고려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14 헌종(獻宗, 1084~1097) 1094~1095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15 숙종(肅宗, 1054~1105) 1095~1105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 하여화폐 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16 예종(睿宗, 1079~1122) 1105~1122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17 인종(仁宗, 1109~1146) 1122~1146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 등을 격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18 의종(毅宗, 1124~1173) 1146~1170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19 명종(明宗, 1131~1202) 1170~1197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20 신종(神宗, 1144~1204) 1197~1204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21 희종(熙宗, 1181~1237) 1204~1211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22 강종(康宗, 1152~1213) 1211~1213 휘는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났다가 최중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23 고종(高宗, 1192~1259) 1213~1259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동안 항쟁 하였으나 결국 굴복함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24 원종(元宗, 1219~1274) 1259~1274 휘는 정(禎). 몽고에 굴욕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25 충렬왕(忠烈, 1236~1308) 1274~1308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26 충선왕(忠宣, 1275~1325) 1308~1313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에 힘을 씀. 27 충숙왕(忠肅, 1294~1339) 1313~30, 32-39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 에게 양위 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만에 복위함. 28 충혜왕(忠惠, 1315~1344) 1330~32, 39-44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29 충목왕(忠穆, 1337~1348) 1344~1348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30 충정왕(忠定, 1337~1352) 1348~1351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치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폐위됨. 31 공민왕(恭愍, 1330~74) 1351~1374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32 우왕(禑, 1364~1389) 1374~1388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33 창왕(昌, ?) 1388~1389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쫏은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만에 강화도로 쫏겨나 10세때 시해됨. 34 공양왕(恭讓, 1345~1394) 1389~1392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 조선시대(朝鮮,1392~1910, 518년간, 총 27대)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태조(太祖, 1335~1408) 1392~1398 휘는 성계(成桂). 고려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2 정종(定宗, 1357~1419) 1398~1400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3 태종(太宗, 1369~1422) 1400~1418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4 세종(世宗, 1397~1450) 1418~1450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 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5 문종(文宗, 1414~1452) 1450~1452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6 단종(端宗, 1441~1457) 1452~1455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7 세조(世祖, 1417~1468) 1455~1468 휘는 유. 국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수양대군(首陽大君). 8 예종(睿宗, 1441~1469) 1468~1469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9 성종(成宗, 1457~94) 1469~1494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초기의 문물 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10 연산군(燕山君, 1476~1506) 1494~1506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 병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임. 중종 반정으로 폐위됨. 11 중종(中宗, 1488~1544) 1506~1544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함. 12 인종(仁宗, 1515~1545) 1544~1545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활함. 13 명종(明宗, 1534~1567) 1545~1567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격음. 14 선조(宣祖, 1552~1608) 1567~1608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15 광해군(光海君, 1575~1641) 1608~1623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16 인조(仁祖, 1595~1649) 1623~1649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17 효종(孝宗, 1619~1659) 1649~1659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와 즉위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8 현종(顯宗, 1641~1674) 1659~1674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은 유신들이 희생됨.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19 숙종(肅宗, 1661~1720) 1674~1720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20 경종(景宗, 1688~1724) 1720~1724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21 영조(英祖, 1694~1776) 1724~1776 타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22 정조(正祖, 1752~1800) 1776~1800 휘는 성.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함. 23 순조(純祖, 1790~1834) 1800~1834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차레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24 헌종(憲宗, 1827~1849) 1834~1849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25 철종(哲宗, 1831~1863) 1849~1863 휘는 변.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26 고종(高宗, 1852~1919) 1863~1907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이 일어남 27 순종(純宗, 1874~1926) 1907~1910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1    성씨의 유래 댓글:  조회:3338  추천:0  2012-07-15
성(姓)의 연원(淵源)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모만 확실히 알 수 있고 부는 알 수 없는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母系)사회건 부계(夫系)사회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시사회를 씨족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씨족사회는 씨족 전원이 힘을 합하여 수렵·어로·농경에 종사하고 외구의 침입도 공동으로 방어 하였다. 그리고 씨족사회는 그 집단을 통솔하기 위하여 씨족원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덕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씨족장으로 삼고, 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씨족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였는데, 이 씨족회의는 자못 민주적이어서 씨족원은 누구나 다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하고 씨족 전원의 찬성으로 결정하였다. 씨족사회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히 같은 씨족중에도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개의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외적을 방어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부족사회라 한다. 부족사회에서는 씨족장들이 모여서 부족장을 선출하고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부족국가는 다시 부족연맹체를 조직하고 부족연맹의 왕을 선출하여 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오늘날 사회학·역사학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 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 산명, 강명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의 어머니가 신수(신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신씨(신氏)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姚氏)라 한 것은 이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의 유래 우리나라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등 우리나라 옛 사헌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하고, 주몽은 그 신하 재사(再思)에서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연거(연居)에게 소실씨(小室氏)의 성을 사성하였다 한다. 백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하며, 신라는 박(朴)·석(昔)·김(金) 3성의 전설이 있고, 제 3대 유리왕 때에 6부(6촌)에 사성하여 량부(알천양산촌)에 이씨, 소작부 : 돌산고허촌)에 최씨-崔氏(유사에는 정씨-鄭氏), 점량부(무산대수촌)에 손씨, 본피부(취산진지촌)에 정씨(유사에는 최씨), 한지부(금산가리촌)에 배씨, 지북부(명활산고랑촌)에 설씨의 성을 주었다고 하며, 김관가랑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신라 진흥왕 시대(540~576)에 건립한 경남 창령, 서울 북한산, 함흥 황초령, 단천 마설령에 남아 있는 진흥왕의 네 순수비(巡狩碑)와 진지왕 3년(578)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의 무수오작비(戊戍塢作碑)와 진평왕 시대(579~632)에 건립된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등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성(姓)을 쓴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각 비문에서 한 두가지 예(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창령비(昌寧碑 진흥왕 22년, 561년 건립), 마운령비(磨雲嶺碑 진흥왕 29년 건립) : 훼(喙)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훼(沙喙) 거사부지(居社夫智) 이간(伊干) 사훼(沙喙) 심표부지(心表夫智) 급척간(及尺干) 사훼부(沙喙部) 령력지(령力智) 간( 干) 촌주(村主)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 본부(本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 이상 표시한 것처럼 성(姓)은 없고 우리말로 된 이름 뒤에 그 사람의 본(本)이라 할 수 있는 소속부명 또는 촌명을 썼는데, 훼부(喙部)는 량부(梁部) 즉, 알천영산촌(閼川楊山村)이요, 사훼부(沙喙部)는 급량부(及梁部) 즉,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이요, 본 부(本 部)는 본피부(本彼部) 즉, 취산지지촌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 밑에 붙어 있는 지(智)· 지(知)는 존칭이오, 일척간(一尺干)·이간(伊干)· 간( 干)·대아간(大阿干)·내말(奈末)·대사(大舍)·소사(小舍)는 경위(京位) 즉 중앙관위요, 간( 干)·일벌(一伐)은 외위(外位) 즉 지방인에게 주는 관위다. 만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한 바와 같이 유리왕 때에 6부에 사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훼부(喙部)는 이씨(李氏), 사 부(沙 部)는 최씨(崔氏), 본피부(本 部)는 정씨(鄭氏)의 성을 써야 할 것인데, 성을 쓰지 않고 소속 부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6부의 사성(賜姓)은 진평왕 이후의 일일 것이며, 또 우리는 성보다 본을 먼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한서(漢書)≫ 이하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의 국왕과 기타 인명을 보면, 고구려는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주몽왕(朱蒙王)이 보이고,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에 추(騶)와 관(官)-태조왕· 성( 成)-차대왕(次大王)·백고(伯固)-신대왕(新大王)및 대가 승(大加 升)이 보이고, ≪삼국지≫ 고구려전·공손도전(公孫度傳)에도 추(騶)·관(官)· 성( 成)·백고(伯固)와 함께 이이모(伊夷模)-고국천왕(故國川王)·위관(位官)-산상왕(山上王)과 기타 대가(大加)·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등이 보이고, ≪진서(晉書)≫ 모용 전(慕容傳)에 소(고국원왕(故國原王))·安(광개토왕-光開土王) 이 보이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의 ≪상서(床書≫에 이르러 장수왕(長壽王)을 고련(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익(高翼)·마루(馬婁)·손수(孫漱)·구(仇)·동등(董騰)등 장수왕이 보낸 사신도 모두 성을 썼다. 그리고 백제는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여영(餘暎)-전지왕(典支王)·여비(餘毗)-반유왕(畔有王)· 여경(餘慶-개로왕(蓋鹵王)·여융(餘隆)-무령왕(武寧王)·여명(餘明)-성왕(聖王)·여창(餘昌)-위덕왕(威德王)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진서(晉書)·상서(床書)·남제서(南齊書)·량서(梁書) ·진서(陳書)·위서(魏書)·주서(周書)·남사(南史)·북사(北史)) 29대 무왕(武王)-부여장(扶餘璋) 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수서(隋書)·당서(唐書)),그리고 신라는 23대 법흥(法興)왕에 해당하는 임금을 ≪량서(梁書)≫에 모명진(募名秦)으로 기록하였는데, ≪남사(南史)≫와 ≪통전(通典)≫에는 이것을 성모(姓募) 명진(名秦)-모진(募秦)으로 기록하여 신라 왕실의 성을 모(募)씨로 표시하고 ≪북제서(北齊書)≫에 진흥(眞興)왕을 김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가 보인다. 이상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419~491)부터,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346~376)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듯하다. 백제는 마한(馬韓) 50여개국 중의 한 나라로서 오랫동안 부족국가 생활을하다가 4세기 초에 마한(馬韓) 여러나라를 통일하고 근초고왕 27년(372)에 처음으로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어중국과 교류하고, 신라도 진한(辰韓) 12국 중의 한 나라로서 오랫동안 부족국가 생활을 하다가 4세기 후반 내물(奈勿)왕 시대(356~402)에 려(麗)·제(濟) 양국과 접촉하였으나 국력이 미약하였다. 6세기 중엽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지금의 경상도 지방을 통일함과 동시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 진흥왕 25년(564)에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처음으로 직접 중국과 교류 하였으므로 신라는 진흥왕 시대,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으나,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3국 중에 지일 먼저 일어나고, B.C 107년에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현도군(玄도郡)이 고구려지방에 설치되어 건국 이전부터 중국인과 접촉하였으며, 전한(前漢) 말기 왕망(王莽)시대(9~25)부터 중국과 교통하여 전한(前漢)·후한(後漢)·위(魏)·진(晉)의 문화를 수입하고,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오고 또 대학을 설치하여 장수왕 이전의 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장수왕, 이후의 기록이기는 하나≪위서(魏書)≫(북조-北朝) 고구려전에 주몽의 전설을 자세히 기록하고 성을 고(高)씨라 하였으며,≪삼국사기≫에도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의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支), 좌보(左輔) 송옥구(松屋句), 태조왕 때의 좌우보(左右輔) 직도루(稷度婁)·고복장(高福章),신대왕(新大王)때의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 산상왕 때의 국상 을파진(乙巴秦), 동천왕 때의 국상 고우루(高優婁)·명림어수(明臨於漱), 봉상왕(烽上王)때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등 장수왕 이전에 성을 쓴 사람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고구려는 장수왕 이전에 이미 성을 쓴 듯 하나, 어느 때부터 성을 쓰기 시작하였는지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중국식 한자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 없으나, 대개 장수왕 시대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국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라 하였다가 무왕 때부터 부여씨(扶餘氏)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성(金姓)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에 귀족 관료층에서 사용하였는데,≪삼국사기≫와 ≪당서(唐書)≫ 이전의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三國)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는 고씨(高氏), 백제는 여씨(餘氏), 신라는 김씨(金氏)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고, 그 밖에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우(于)·주(周)·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 을지(乙支)등 10여종, 백제는 사(沙)·연(燕)·해(解)·진(眞)·국(國)·목(木)·묘(苗)의 8족과 왕(王)·장(張)·사마(司馬)·수미(首彌)·흑치(黑齒) 등 10여종, 신라는 박(朴)·석(昔)·김(金) 3성과 6부의 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의 6성 및 장(張)·요(姚) 등 10여종에 불과하다. 신라의 경우, 앞에 든 진흥왕순수비에 성을 쓴 사람이 하나도 없고, 또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아니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귀족·관료들도 다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람, 예를 들면 김인문(金仁問), 김정종(金貞宗), 박우(朴祐), 김지량(金志良),김의충(金義忠), 등과 같이 사신이 되어 당(唐)나라에 갔다 온 사람, 최치원(崔致遠)·최리정(崔利貞)·박계업(朴季業)· 김숙정(金叔貞)등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한 사람, 장보고(張保皐)와 같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야의 제해권(制解權)을 잡고 당나라와 일본에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신라 말기 후삼국의 대동란을 당하여 평민으로서 각지에서 일어난 상주(尙州)의 원종(元宗)·애노(哀奴), 죽주(竹州)-죽산(竹山)의 기명(箕蓂), 북원(原州)의 량길(梁吉)-良吉,태봉왕 궁예(弓裔)의 부장인 홍언(弘彦) 명귀(明貴), 후백제왕 견명(甄蓂)의 부장인 관흔(官昕)·상귀(相貴)·상달(尙達)·웅환(熊奐), 고려 태조 의 부장인 홍술(弘述)·백옥(白玉)·삼웅산(三熊山)·복사귀(卜沙貴)등은 모두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이 중에 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弘述)·백옥(白玉)·삼웅산(三熊山)·복사귀(卜沙貴)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서 각각 남양홍씨(南陽洪氏) 경주배씨(慶州裵氏)·평산신씨(平山申氏)·목천복씨(목川卜氏)등의 시조가 되는데, 그들이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장군(溟州將軍)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王)씨의 성을 주고, 발해태자(渤海太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또한 왕(王)씨의 성을 주고, 신라인 김신(金辛)이 태조를 보필하여 권능이 많은 까닭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 ≪동국흥지승람(東國興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이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午)·마(馬)·상(象)·돈(豚)· 장(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자로 성(姓)을 주었는데, 뒤에 우(午)는 우(于), 상(象)은 상(尙),돈(豚)은 돈(頓),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고려 초기부터 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 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시대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9년의 이 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성의 한 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성이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을쓰지 아니하였다.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특성 우리나라의 성씨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성명(姓名)의 구성과 개념에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은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家門)을, 명(名)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행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계대(系代)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男系)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한국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칭(共稱)이 아니라 원래의가계(家系)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이 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가(甲家)에서 을가(乙家)에 입적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처는 김(金)성 이고, 며느리는 박(朴)성이라는 식이다. 중국 역시 한(漢)나라때에는 그와 같은 방법을 쓰게 되엇는데, 그것은 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족(父族)과 부족(夫族)의,두 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잇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성을 다만 가정을 표징한 것으로, 가령 부모의 성이 김(金)이라면 자식의 성도 김(金),새로 온 며느리도 김(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안다. 한국의 그와 같은 성씨제도는 가족이 사회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출가하더라도 혈족 관념상 자기의 생족(生族)을 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이 또한 성씨 본래의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우기 한국에 있어서의 성씨는 다만 사람과 혈통의 표시에 끝나지 않고, 그 가족제도는 사회조직의 기초를 이뤄 사상·문화·도덕·관습의 근본이 되어 있는 극히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성씨제도의 하나인 사성(賜姓)은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나 귀화인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인 제도로 나타난 성을 볼 때 거기에는 대체로 세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유덕(有德)한 자를 표창하는 일종의 영전(榮典)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고, 둘째 봉건시대 제후(諸侯) 대우의 표준으로서 사용되었고, 세째 혼인을 정한 하나의 표준으로 사용되엇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지난날의 성에는 여러가지 존비(尊卑)의 계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성의 문제는 우리 나라에서는 이처럼 특수한 기원(起院) 연혁(沿革)과 복잡한 조직, 관습이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http://net-in.co.kr/02wd/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