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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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상례문화, 얼마나 알고있는가? 댓글:  조회:3105  추천:0  2016-10-01
상례문화, 얼마나 알고있는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이 얘기하는 조선족 상례문화의 현주소 날짜  2016-9-29 16:40:40   조회  146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 예로부터 관혼상제는 인생대사의 기본으로 우리 조상들은 이에 대해 더없이 중요하게 여겼다.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가 다스려지던 과거에는 관혼상제가 단순한 의례 이상이였으며 지금에 와서도 관혼상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자못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회구조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오늘날 관혼상제중 많은 의례들은 간소화되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 역시 전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 가운데서도 상례와 제례는 그 문화적전승이 제대로 돼있지 못한 상황, 현대사회의 뒤안길에서 거의 잊혀져갈법한 위기를 맞았다. 이를테면 도대체 어느 민족의 상례인지 알아볼수 없을 정도의 정체불명한 의식들, 지나치게 간소화되고 형식적이여 초라하기까지 한 장례방식, 단순한 영리목적으로 운영되고있는 상조업체의 비정규적인 장례서비스가 란무하는것 등이 우리 지역 상례문화의 현주소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개변하고 상례문화가 맞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어진 단체가 있으니 바로 조선족상례풍속 보호책임단체인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용수씨는 길림성비물질문화유산-조선족상례풍속의 대표전승인으로 잊혀져가는 우리 민족 상례풍속을 전승,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있다. 현용수회장에 의하면 중국에서 장례개혁이 실행되기 시작한것은 지난 세기 80년대, 그러나 조선족의 상례풍속은 문화적차원에서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황이였고 그때문에 연변 지역내 병원이나 장의관에는 조선족의 장례시설들이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 장기간 조선족 상례문화가 중시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족 상례문화는 철저히 소실될 위기를 맞게 됐으며 그 존재의식도 엄중히 약화됐다. 2009년, 조선족 상례풍속이 길림성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조선족의 상례문화는 비로소 정부의 인정을 받게 됐고 민속문화로서의 자기의 자격과 체계를 초보적으로 갖게 됐다. “상례문화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기피하고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문화의 보호에 집착하는것은 이 문화에 우리의 뿌리가 묻혀있고 우리의 넋이 슴배여있기때문입니다.” 현용수회장은 이처럼 상례문화를 보호하고 널리 보급시키기 위한 조치로 “상례문화의 상업화”를 꼽았다. 특히 시장경제시대에 와서 산업화되지 못한 문화는 그 생명력을 유지할수 없다고 지적, “이대로 상례문화를 민간의 자연존재법칙에 맡겨놓는다면 이 문화는 곧 철저히 소실될것”이라며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또 “상례문화를 상업화한다는것은 단지 영리를 목적으로 상조업체의 건설에 국한되지 말고 정규적인 상례복무업체를 설립하여 국가의 유관정책과 시장기률을 준수하면서 인성화된 합리한 유상복무를 제공하는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업체의 체제를 건전히 하고 경영관리를 가강하며 장기적으로 견지해나간다면 우리의 상례문화는 살아남게 될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망자를 위한 장례는 단지 고인의 유체를 처리하는 실무수단뿐만아니라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고 은덕에 감사를 표시하며 민족(가문)의 전통을 이어받는 문화수단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한 민족의 고유한 넋이 고스란히 체현되며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바른 인식과 살아있는자들에게 삶에 대한 긍정적인 에네지도 함께 불어넣어주는 정중한 의례이기도 하다. 박진화 기자   QR코드를 스캔하여 위챗 모멘트에 공유하여주십시오. 저작권성명: 본 사이트 기사를 전재하실 경우에는 연변일보 사명과  기사 작성자명(기자명)을 반드시 표기하여주십시오.
21    노년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댓글:  조회:2368  추천:0  2016-06-25
노년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지식노트 내용 노년기에는 쉽게 상실감,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노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방법들을 알아본다. 노년기, 우울증과 자기연민에 빠지기 쉬워 가정에서 나이가 들수록 여성들은 독립적이며 능동적으로 변해간다. 여성의 경우는 감성적이고,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주위에 자기편이 되어 줄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반면 일 밖에 몰랐던 남편들은 퇴직과 함께 갑자기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자기 속옷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고, 식사를 거르는 경우도 있다. 경제력 상실과 함께 가족이 바라보는 눈이 사뭇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가족 위에 군림하려는 경우가 많아 노년기 갈등이 심해진다. 정년 이후의 소외감, 분노 등을 부인에게 쏟아냄으로써 갈등이 더욱 깊어지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이다. 노년준비 1 - 부부간 대화를 하자 자녀가 독립하고 부부만 남겨지게 되면 평생 함께 살아왔던 타인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주기에서 보면, 자식이 떠난 빈 둥지에 남겨진 두 사람만의 노년은 신혼기와 비슷하다. 신혼기는 서로 개성이 다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면서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고, 노년기도 마찬가지지만 오랜 시간 가정에서 또는 직장에서 서로 다른 생활을 해오다보니 이미 멀어져 버린 경우가 많다. 또한 신혼기는 애정으로 넘쳤지만, 노년기에는 살아오면서 실망하고 힘들었던 점이나 원망 등이 쌓여 부정적인 감정을 갖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부부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 불만 등은 가슴 속에 쌓아두지 말아야 한다. 대화를 많이 하는 부부라면 노년준비를 절반은 한 셈이다. 노년준비 2 - 새로운 친구를 사귀자 은퇴를 하고 사회활동의 폭이 줄어드는 노년기에 들어설수록 친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친구들의 부고가 들려올 때마다 의기소침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늘 같은 사람과 어울리게 되면 편협해지기 쉽고, 결국 혼자만 남겨질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적인 만남, 동호회를 통한 만남, 동창모임 등을 통해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생활에 생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노년준비 3 - 자기다움을 찾자 사람을 사귀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인 역할, 가족 내에서의 역할 등을 모두 벗어버리고 나면 내면적인 자아가 남는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이 둘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사회에서 대접 받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정년퇴직을 하거나 지위가 낮아질 때 큰 자아상실을 겪게 된다. 따라서 먼저 자기다움을 찾아야 한다. 타인이 정한 가치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노년준비 4 - 취미생활, 봉사활동에 참여하자 취미생활이나 지역 봉사활동에 참여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 곳에서는 자연인으로서의 매력이 평가를 받는다. 모임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능력이나 생활의 지혜, 타인에 대한 배려 등 그 사람 본래의 장점들이 주목받고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자원봉사는 노년기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자원봉사를 통해 퇴직이나 배우자 상실, 자녀의 독립 등 노년기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를 하면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새로운 기술도 습득하게 된다. 시간 가는 것을 잊게 할 정도로 즐거우면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유익한 활동은 바로 취미활동이다. 나이가 들면서 취미생활을 즐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여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년기에 취미를 즐기려면 지금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취미로 삼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노년준비 5 - 유언장을 쓰자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삶의 점검이 되고 삶을 충실히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따라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대답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로 귀착된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유언장을 써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며, 삶의 속도를 늦추고 미루었던 일을 시작하게 된다고 한다. 죽음이란 마지막 나눔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퇴직 후 막연히 죽음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노년이 아니라 이 때부터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라. 
20    창부타령 가사 총 모음 댓글:  조회:3634  추천:0  2016-05-21
창부타령(倡夫打令) 총 모음   *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 모진 간장(肝腸) 불에 탄들 어느물로 꺼주려나 뒷동산(東山) 두견성(杜鵑聲)은 귀촉도(歸蜀道) 귀촉도(歸蜀道) 나의 설음을 몰라 주고 옛날 옛적 진시황(秦始皇)이 만권시서(萬卷詩書)를 불 사를제 이별(離別) 두자를 못살랐건만 천하장사(天下壯士) 초패왕(楚覇王)도 장중(帳中)에 눈물을짓고 우미인(虞美人) 이별(離別)을 당(當)했건만 부모같이 중한 분은 세상천지 또 없건마는 임을 그리워 애타는 간장 어느 누가 알아주리 2.서산(西山)에 해 기울고 황혼(黃昏)이 짙었는데 안 오는 임 기다리며 마음을 죄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온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 떠서 짝을 불러 슬피울 제 원망스런 우리 임을 한 없이 기다리다 일경(一更) 이경(二更) 삼(三) 사(四) 오경(五更) 어느듯이 새벽일세 추야장(秋夜長) 긴 긴 밤을 전전불매(輾轉不寐) 잠 못들제 상사일념(相思一念) 애타는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 데 없는 이내 심사(心思) 어디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해도 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이라 차마 진정(眞情) 못잊겠네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3.진국명산만장봉(鎭國名山萬丈峰)이 청천삭출금부용(靑天削出金芙蓉)은 서색(瑞色)은 반공(蟠空) 응상궐(凝象厥)이요 숙기(淑氣)는 종영출인걸(鍾英出人傑)하니 만만세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라 태평연월(太平烟月) 좋은 시절(時節) 전조사(前朝事)를 꿈꾸는 듯 유유(悠悠)한 한강(漢江)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인왕(仁旺)으로 넘는 해는 나의 감회(感懷) 돋우는듯 4.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 알다가도 모를 사랑 믿다가도 속는 사랑 오목조목 알뜰 사랑 왈칵달칵 싸움 사랑 무월삼경(無月三更) 깊은사랑 공산야월(公山夜月) 달 밝은데 이별한임 그린 사랑 이내 간장 다 녹이고 지긋지긋이 애탠 사랑 남의 정(情)만 뺏어 가고 줄줄 모르는 얄민 사랑 이사랑 저 사랑 다 버리고 아무도 몰래 호젓이 만나 소곤소곤 은근(慇懃) 사랑 얼씨구좋다 내 사랑이지 사랑 사랑 참사랑아 5.요망(妖妄)스런 저 가이야 눈치없이 짖지 마라 기다리고 바라던 임 행여나 쫓을세라 임을 그려 애태우고 꿈에라도 보고지고 구곡간장(九曲肝腸) 다 녹을 제 장장추야(長長秋夜) 긴 긴 밤을 이리하여 어이 샐꼬 잊으려고 애를쓴들 든 정이 병이 되어 사르나니 간장이라 6.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가엔 들쭉 열매 아름답고 굽이치는 압록강(鴨綠江)엔 뗏목 또한 경(景)이로다 금강산비로봉(金剛山毘盧峯)엔 기화이초(奇花異草) 피어있고 해금강(海金江) 총석정(叢石亭)엔 넘실대는 파도(波濤) 위에 백조(白鳥) 쌍쌍(雙雙) 흥(興)겨 운다 배를 타고 노(櫓)를 저어 대자연(大自然)좋은 풍경 마음대로 즐겨 볼까 7.섬섬옥수(纖纖玉手) 부여잡고 만단정회(萬端情懷) 어제런 듯 조물(造物)이 시기(猜忌)하여 이별(離別)될 줄 뉘라 알리 이리 생각 저리 궁리(窮理) 생각 끝에 한숨일세 얄밉고도 아쉬웁고 분(?)하고 그리워라 아픈 가슴 움켜잡고 나만 혼자 고민(苦憫)일세 8.추강월색(秋江月色) 달 밝은밤에 벗 없는 이내 몸이 어둠침침(沈沈) 빈 방(房) 안에 외로이도 홀로 누워 밤 적적(寂寂) 야심(夜深) 토록 침불안석(寢不安席) 잠 못 자고 몸부림에 시달리어 꼬꾜 닭은 울었구나 오날도 뜬눈으로 새벽맞이를 하였구나 9.어지러운 사바세계(娑婆世界) 의지(依支)할 곳 바이 없어 모든 미련(未練) 다 떨치고 산간벽절 찾아가니 송죽(松竹) 바람 슬슬(瑟瑟)한데 두견(杜鵑)조차 슬피우네 귀촉도불여귀(歸蜀道不如歸)야 너도 울고 나도 울어 심야삼경(深夜三更) 깊은 밤을 같이 울어 새워볼까 *오호(嗚呼) 한평생(平生) 허무(虛無)하구나 인생백년(人生百年)이 꿈이로다 10.a귀(貴)치 않은 이내 몸이 사자 사자 헤매어도 세파에 부대끼어 남은 것은 한(恨)뿐이라 만고풍상(萬古風霜) 비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리어 노류장화(路柳墻花)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山中)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世上煩惱)를 잊어 볼까 b귀치 않은 이내 몸이 사자 사자 헤매어도 세파에 부딪끼어 남은 것은 한뿐이라.(추월춘풍 화개화락 몇몇성상이 지나갔나) 만고풍상 비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리어 노류장화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를 잊어 볼까. 11.세파(世波)에 시달린 몸 만사(萬事)에 뜻이 없어 모든 시름 잊으려고 홀로 일어 배회(徘徊)할 제 만뢰(萬?)는 구적(俱寂)한데 귀뚜라미 슬피 울어 다 썩고 남은 간장(肝臟) 어이 마저 썩이느냐 가뜩이나 심란(心亂)한데 중천(中天)에 걸린 달은 강심(江心)에 잠겨 있고 짝을 잃은 외기러기 운소(雲宵)에 높이 떠서 처량(悽?)한 긴 소래로 짝을 불러 슬피 우니 춘풍호월(春風晧月) 저문 날에 두견성(杜鵑聲)도 느끼거든 오동추야단장시(梧桐秋夜斷腸時)에 차마 어찌 들을건가 12.한 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落花)진다고 설워 마라 한 번 피었다 지는 줄을 나도 번연히 알건마는 모진손으로 꺽어다가 시들기 전에 내버리니 버림도 쓰라리거든 무심코 밟고 가니 근들 아니 슬플 소냐 숙명적(宿命的)인 운명(運命)이라면 너무도 아파서 못 살겠네 13.세상공명(世上功名) 부운(浮雲)이라 강호어용(江湖漁翁) 되오리다 일엽편주(一葉片舟) 흘리저어 임기소지(任期所之)하올적에 만경창파(萬頃蒼波) 넓은물에 호호탕탕(浩浩蕩蕩)떠나간다 주경(舟輕)하니 산사주(山似走)요 파급(波急)하니 야여주(野如走)라 은린옥척(銀鱗玉尺) 펄펄 뛰고 백구(白鷗) 편편(翩翩) 비꼈는데 청풍(淸風)은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波)는 불흥(不興)이라 좌우산천(左右山川) 살펴보니 경개무궁(景槪無窮) 좋을씨고 격안전촌 (隔岸前村) 양삼가(兩三家)에 저녁 연기(煙氣) 일어나고 반조입강번석벽(返照入江?石壁)에 거울 낯을 벌였는데 언덕 위에 초동(樵童)이요 석벽(石壁) 아래 어옹(漁翁)이라 창랑일곡(滄浪一曲)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엄릉(嚴陵) 여울 다다랐다 천척단애(千尺斷崖) 높은 곳에 창송녹죽(蒼松綠竹) 푸르렀고 칠리청탄(七里淸灘) 고요한데 쌍쌍(雙雙) 오리 높이 떴다 고기 주고 술을 사서 취(醉)케 먹고 달을 띠고 돌아오니 대장부(大丈夫) 세상자미(世上滋味) 이에서 더할소냐 *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네 인생백년(人生百年)이 좋을씨고 14.때는 마침 어느때뇨 춘풍(春風)이 화창(和暢)하니 양춘가절(陽春佳節)이 아니냐 만산홍록(滿山紅綠) 요염(妖艶)하여 금수병(錦繡屛)을 둘렀는 듯 백화(百花) 만발(滿發) 난만(爛漫)한데 꽃을 찾는 벌나비는 향기(香氣)를 좇아 날아들고 휘늘어진 버들새로 황금(黃金) 같은 꾀꼬리는 벗을 불러 노래하고 시냇물 맑았는데 낙화(落花) 동동 떠나가니 이도 또한 경(景)이로다 *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5.명년삼월(明年三月) 오시마더니 명년(明年)이 한(限)이 없고 삼월(三月)도 무궁(無窮)하다 양류청양류황(楊柳靑楊柳黃)은 청황변색(靑黃變色)이 몇 번(番)이며 옥창앵도(玉窓櫻桃) 붉었으니 화개화락(花開花落)이 얼마인고 한단침(邯鄲枕) 빌어다가 장주호접(莊周蝴蝶)이 잠깐 되어 몽중상봉(夢中相逢) 하쟀더니 장장춘단단야(長長春短短夜)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몽불성(夢不成)을 어이하리 16.a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새벽별 찬바람에 풍지(風紙)가 펄렁 날 속였네 행여나 임이 왔나 창문(窓門)열고 내다보니 임은 정녕 간 곳 없고 명월(明月)조차 왜 밝았나 생각끝에 한숨이요 한숨 끝에 눈물이라 마자마자 마쟀더니 그대 화용(花容)만 어른거려 긴 긴 밤만 새웠노라 b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새벽별 찬바람에 풍지가 펄렁 날속였네. 행여나 님이 왔나 창문 열고 내다보니, 님은 정녕 간곳없고 명월조차 왜 밝아서, (생각사록 눈물이라) 마자마자 마자해도 그대 화용만 어른거려 긴 긴 밤만 새웠노라. 17.간밤 꿈에 기러기 보고 오늘 아침 오동(梧桐) 위에 까치 앉아 짖었으니 반가운 편지(片紙) 올까 그리던 임이 올까 기다리고 바랐더니 일락서산(日落西山) 해는 지고 출문망(出門望)이 볓 번인가 언제나 유정(有情) 임 만나 화류동산춘풍리(花柳東山春風里)에 이별(離別) 없이 살아 볼까 18.봄이 왔네 봄이 왔네 무궁화(無窮花) 이 강산(江山) 새봄이 왔네 방실방실 웃는 꽃들 우줄우줄 능수버들 비비배배 종달새며 졸졸 흐르는 물소리라 앞집 수탉이 꼬끼요 울고 뒷집 삽사리 컹컹 짖네 앞논의 암소가 엄매 뒷뫼의 산꿩이 끼긱끽 물 이고 가는 큰애기 걸음 삼춘(三春)의 흥(興)에 겨워 사뿐사뿐 아기장아장 흐늘거리며 걸어가네 *.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삼춘가절(三春佳節)이 좋을씨고 19.하늘같이 높은 사랑 하해(河海)같이 깊은 사랑 칠년대한(七年大旱) 가문 날에 빗발같이 반긴사랑 구년지수(九年之水) 긴 장마에 햇볕같이 반긴 사랑 당명황(唐明凰)의 양귀비(楊貴妃)요 이(李) 도령(道令)의 춘향(春香)이라 일년 삼백 육십 일에 하루만 못봐도 못 살겠네 20.오늘도 화창하니 이삼요우(二三僚友) 작반(作伴)하여 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부여팔경(夫餘八景) 구경 가세 부소산(扶蘇山) 저문 비에 황성(荒城)이 적막하고 낙화암(落花岩) 잠든 두견(杜鵑) 삼천궁녀(三千宮女) 죽은 원혼(?魂) 쌍쌍이 짝을 지어 전조사(前朝事)를 꿈꾸느냐 고란사(皐蘭寺) 쇠북 소래 사자루(泗자樓)를 흔드는 듯 선경(仙境)이 방불(彷彿)하다 21.증경(증?=꾀꼬리)은 쌍쌍(雙雙) 녹담중(綠潭中)이요 호월(皓月)은 단단(團團) 영창롱(映窓?)인데 적막한 나유(羅惟) 안에 촛불만 도두 켜고 인(人) 적적(寂寂) 야심(夜深)한데 귀뚜람 소리가 처량하다 금로(金爐)에 향진(香盡)하고 옥루(屋漏)는 잔잔(潺潺)한데 돋은 달이 지새도록 뉘게 잡히어 못 오시나 임이야 나를 생각하는지 나는 임 생각뿐이로다 독수공방(獨守空房) 홀로 누워 전전불매(輾轉不寐) 장탄수심(長嘆愁心) 남은 간장(肝腸) 다 썩는다 22.날 찾네 나를 찾네 그 누구라 날 찾나 기산(箕山) 영수(潁水) 별건곤(別乾坤)에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날 찾나 백화심처일승귀(百花深處一僧歸)라 춘풍석교화림중(春風石橋花林中)에 성진화상(性眞和尙)이 날 찾나 청산기주(靑山?洲) 백로탄(白鷺灘)에 여동빈(呂洞賓)이가 날 찾나 도화유수무릉(桃花流水武陵) 가자 어주속객(魚舟屬客)이 날 찾나 수양산(首陽山) 백이숙제(伯夷叔齊) 고사리(採o) 캐자 날찾나 부춘산(富春山) 엄자릉(嚴子陵)이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다 하고 칠리동강일사풍(七里桐江日斜風)에 함께 가자 날 찾나 기경선자(騎鯨仙子) 이태백(李太白)이 풍월(風月)짓자 날 찾나 상산사호(商山四皓) 네 노인(老人)이 바둑 두자 날 찾나 기주(嗜酒)하던 유영(劉怜)이가 동배주(同盃酒)하자고 날 찾나 칠석은하(七夕銀河) 견우직녀(牽牛織女) 한포(漢浦)로 지나다가 함께 가자 날 잧나 차산중운심(此山中雲深)한데 부지처(不知處) 오신 손님 날 찾을리 없건마는 그 누구라 날찾나 23.그대 나와 사귈 적에 이별(離別)하자 사귀었나 백년(百年)살자 굳은 언약(言約) 일조허사(一朝虛事) 뉘라 알리 임을 그려 애태다가 상사(想思)로 병(病)이 되니 조물(造物)이 시기하여 날 미워서 준 병(病)인가 안타까운 이내 심정(心情) 억제(抑制)할 길 바이 없어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盃)에 몽롱(朦朧)히 취(醉)케 먹고 울적(鬱寂)한 빈 방안에 외로이 혼자 앉아 옛일을 생각하니 만사(萬事)가 꿈이로다 상사불견(想思不見) 우리 임을 어느 때나 다시 만나 그린 회포(懷抱)를 풀어 볼까 24.일년 삼백 육십 일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인데 꽃 피고 잎이 나면 화조월석(花朝月夕) 춘절(春節)이요 사월남풍(四月南風) 대맥황(大麥黃)은 녹음방초(綠陰芳草) 하절(夏節)이라 금풍(金風)이 소슬(蕭瑟)하여 사벽충성(四壁蟲聲) 슬피 울면 구추단풍(九秋丹楓) 추절(秋節)이요 백설(白雪)이 분분(芬芬)하여 천산(千山)에 조비절(鳥飛絶)이요 만경(萬逕)에 인종멸(人踪滅)하면 창송녹죽(蒼松綠竹) 동절(冬節)이라 인간칠십고래희(人間七十古來稀)요 무정세월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라 사시풍경(四時風景) 좋은 시절(時節) 아니 놀고 어이 하리 25.a일각(一刻)이 삼추(三秋)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三秋)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 시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肝腸) 봄눈(春雪)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되고 눈물은 비가 되어 우리 임 자는 영창(映窓)밖에 불면서 뿌려나 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저 아서라 쓸데 없다 마자 마자 마자 해도 그대 생각뿐이로다 b일각이 삼추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시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 봄눈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되고 눈물은 흘러 비가 되어 (세풍세우 흩날이며), 우리 님 자는 영창 밖에 불면서 뿌려 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저 아서라 쓸데없다 마자 마자 마자 해도 그대 생각 뿐이로다. 26.금풍(金風)은 소슬(蕭瑟)하고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임 생각을 잊으려고 아픈 마음 달랠 적에 야속할손 외기러기 북천(北天)으로 날아가며 처량한 울음으로 나의 심회(心懷) 돋워 주고 지는 달 새는 밤에 귀뚜라미 슬픈 울음 사창(紗窓)에 여읜 잠을 살뜰히도 다 깨운다 무인동방(無人洞房) 홀로 누워 이리 딩굴 저리 딩굴 잠 못자고 애태우니 안타까운 이 심정을 어느 누가 알아주리 27.a.공도(公道)라니 백발(白髮)이요 면(免)치 못할 죽음이라 요순우탕(堯舜禹湯) 문무주공(文武周公) 공맹안증(孔孟顔曾) 정주자(程朱子)는 도덕(道德)이 관천(貫天)하여 만고성현(萬古聖賢) 일렀건만 미미(微微)한 인생(人生)들이 저 어이 알아보리 강태공(姜太公) 황석공(黃石公)과 사마양저(司馬穰?) 손빈오기(孫?吳起) 전필승(戰必勝) 공필취(攻必取)는 만고명장(萬古名將) 일렀건만 한번 죽음 못 면했네 멱라수(멱羅水) 맑은 물은 굴삼려(屈三閭)의 충혼(忠魂)이요 상강수(湘江水) 성긴 비는 오자서(伍子胥)의 정령(精靈)이라 b.공도라니 백발이요 면치 못할 죽음이라 천황 지황 인황이며 요순 우탕 문무 주공 성덕이 없어서 붕 했으며, 말 잘하는 소진 장의 육국제왕을 다 달랬으되 염라왕은 못 달래어 한 번 죽엄 못 면하고, 그러한 영웅들은 사후 사적이라도 있건마는. 초로 같은 우리 인생 아차 한번 죽어 지면 움이 나느냐 싻이 나나.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잎 진다 설워 마라 명년삼월 봄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기 어려워라. 28.통일천하(統一天下) 진시황(秦始皇)은 아방궁(阿房宮)을 높이 짓고 만리장성(萬里長城) 쌓은 후에 육국제후(六國諸侯) 조공(朝貢)받고 삼천궁녀(三千宮女) 시위(侍衛)할 제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인(五百人)을 삼신산(三神山)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보낸 후에 소식조차 돈절(頓絶)하고 사구평대(砂丘平臺) 저문 날에 여산황초(驪山荒草) 뿐이로다 아서라 쓸데 없다 부귀공명(富貴功名) 뜬구름이니 아니 놀고 어이 하리 29.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 들어 가니 산은 높고 골은 깊어 두견접동(杜鵑) 날아든다 구름은 뭉게뭉게 상상고봉(上上高峯) 산(山)머리에 낙락장송(落落長松) 어려있고 바람은 슬슬 불어 구곡계변(九曲溪邊) 암석상(岩石上)에 꽃가지 떨뜨린다 경개무궁(景槪無窮) 절승(絶勝)하고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니 아니 놀고 어이 하리 30.망망(茫茫)한 창해(滄海)이며 탕탕(蕩蕩)한 물결이라 범피중류(泛彼中流) 떠나가니 일모향관하처시(日暮鄕關何處是)요 연파강상사인수(烟波江上使人愁)는 최호(崔顥)의 유적(遺跡)이라 봉황대(鳳凰臺) 나려가니 악양루(岳陽樓) 고소대(姑蘇臺)는 호상(湖上)에 떠있는데 동남(東南)을 바라보니 오산(吳山)은 천첩(千疊)이요 초수(楚水)는 만중(萬重)이라 반죽(斑竹)에 어린 눈물 이비한(二妃恨)을 아뢰는 듯 동정호(洞庭湖)에 비친 달은 상하천광(上下天光)이 일색(一色)이라 삼협(三峽)에 잔나비는 슬피 울어 호소(呼訴)하니 천객소인(遷客騷人)이 몇이런가 31.창외삼경세우시(窓外三庚細雨時)에 양인심사(兩人心事) 깊은 정(情)과 야반무인사어시(夜半無人私語時)에 백년동락(百年同樂) 굳은 언약(言約) 이별(離別)될 줄 어이 알리 동작대(銅雀臺) 봄바람은 주랑(周郞)의 비웃음이요 장신궁(長信宮의 가을달은 한궁인(漢宮人)의 회포(懷抱)로다 지척(咫尺)이 천리(千里)되어 은하(銀河)를 사이하고 까막까치 흩어졌으니 건너갈 길 바이 없고 어안(魚雁)이 돈절(頓絶)하니 소식인들 뉘 전(傳)하리 못 보아 병(病)이 되고 못 잊어 원수(怨讐)로다 가뜩이나 썩은 간장(肝臟) 이 밤 새우기 어려워라 32.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을 허송세월(虛送歲月) 옥중고생(獄中苦生) 망부사(望夫詞)로 울음울 제 춘풍(春風)이 눈을 녹여 가지가지 꽃이 피니 반갑고도 서러워라 꽃이 피고 잎이 나니 녹음방초(綠陰芳草) 시절(時節)이라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유상세지(柳上細枝) 늘어진 가지 구십삼춘(九十三春) 자아내고 잎이 지고 서리 치니 황국(黃菊)의 능상절(凌霜節)과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할제 송죽(松竹)의 천고절(千古節)을 그 아니 불워하리 33.인생천지백년간(人生天地百年間)에 부귀공명(富貴功名) 뜬구름이라 차라리 다 버리고 세상풍경(世上風景) 완상차(翫賞次)로 용문(龍門)에 장도(壯途)타가 구점연(九點烟)에 산하원기(山河元氣) 동정호(洞庭湖) 운몽택(雲夢澤)을 흉중(胸中)에 삼킨후에 낙안봉(落雁峰) 다시 올라 사조(謝眺)의 경인구(驚人句)를 청천(靑天)에 낭음(朗吟)하고 장건(張騫)의 팔월사(八月?)를 은하(銀河)에 흘려 놓아 장생술(長生術)을 익혀가며 세상진미(世上珍味)를 읊어볼까 34.정월(正月)이라 상원일(上元日)에 달과 노는 소년(少年)들은 답교(踏橋)하고 노니는데 이월(二月)이라 청명일(淸明日)에 나무마다 춘기(春氣)들고 잔디잔디 속잎 나니 만물(萬物)이 화락(和樂)하는데 우리 임은 어디 가고 봄이 온 줄 모르는가 삼월(三月)이라 삼짇날에 강남(江南)서 나온 제비 왔노라 현신(見身)하고 소상강(瀟湘江)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下直)한다 이화도화(李花桃花) 만발(滿發)하고 행화방초(杏花芳草) 흩날린다 우리 임은 어디 가고 화류(花游)할 줄 모르느냐 35.청려장(靑藜杖) 둘러 짚고 북향산(北香山) 찾아가니 백두산(白頭山) 내맥(來脈)이요 청천강(淸川江) 근원根(源)이라 월림강(月林江) 건너가서 향산동구(香山洞口) 다다르니 계변(溪邊)에 우는 새는 춘흥(春興)을 노래하고 암상(岩上)에 피는 꽃은 원객(遠客)을 반기는 듯 외사(外寺)목 넘어들어 좌우(左右)를 살펴보니 창송(蒼松)은 울울(鬱鬱)하고 녹수(綠水)는 잔잔(潺潺)이라 심진정(尋眞亭) 높은 집은 대소행차(大小行次) 영송처(迎送處)라 어화 이 좋은 풍경(風景) 아니 취(醉)고 어이하리 36.a.휘황월야삼경(輝煌月夜三更)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겨우 한잠 들었을 제 오매불망(寤寐不忘) 우리 임 만나 일구월심(日久月深) 그리던 회포(懷抱) 반이나 이루려니 베갯머리 귀뚜라미 겨우 든 잠 놀라 깨니 곁에 임 간 곳 없고 임 잡았던 나의 손길은 빈주먹만 쥐었구나 야속타 저 귀또리 네 짝 잃고 울 양이면 나의 원통(?痛) 이사정(事情)을 이다지도 모르느냐 b.휘황월야 삼경인데 전전반측 잠 못 이뤄 태고풍편에 오신 님 만나 그린 회포를 풀랴ㅆ더니, 벼갯머리 저 귀뚜리 서상가약을 그리느냐, 불승청원 실려 탄으로 귀똘귀똘 우는 소리 겨우 든 잠 놀라 깨니, 잡았던 님은 간곳 없고 들리느니 귀뜨람 소리 구곡간장 구비 구비 솟아 나느니 눈물이라, 야속하다 저 귀뚜리 네 짝을 잃고 울 양이면 남의 사정을 왜 모르나. 37.압록강(鴨綠江) 내리는 물 황해(黃海)로 돌아들고 한라(漢拏)에 이는 바람 백두(白頭)에 부딪쳐서 삼천리(三千里) 이 강산(江山)에 속속들이 불어온다 봄바람 따스할 제 꽃도 같이 보던 것을 여름날 시냇물에 서로 벗고 놀던 것을 철벽(鐵壁)에 가로막혀 못 본 지 몇몇 핸고 바람 불어 십년(十年)이요 물결쳐서 십년(十年)이라 언제나 다시 만나 이내시름 풀어 볼까 38.진상전(眞常殿) 해회당(海會堂)을 좌우(左右)로 살펴보니 만세루(萬歲樓) 올라서서 원근산천(遠近山川) 바라보니 남산(南山)의 웃는꽃은 춘색(春色)을 띠어 있고 청계(淸溪)의 맑은 물은 계곡(溪谷)을 둘러 있고 취운당(翠雲堂) 백운각(白雲閣)에 오작(烏鵲)이 쌍비(雙飛)하니 요지(瑤池)는 어디런지 선경(仙境)이 여기로다 여래탑(如來塔) 십구층(十九層)과 대보탑(大寶塔) 십이층(十二層)을 전후(前後)로 구경하고 대웅전(大雄殿) 들어가니 탑상(榻床)에 앉은 불상(佛像) 거룩하기 짝이없네 39.천황지황(天皇地皇) 개벽후(開闢後)에 인황구주(人皇九州) 분장(分張)하니 천만고(千萬古) 흥망사적(興亡事蹟) 남가일몽(南柯一夢)아니런가 홍몽일월(鴻?日月) 태고초(太古初)에 소박현풍(素朴玄風) 혼동(混同)하니 구목위소(構木爲巢) 순거곡식(?居穀食) 몇몇해나 지나간고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순(堯舜) 계천극립(繼天極立)하신후에 사도지직(司徒之職) 전악관(典樂官)이 상서학교(庠序學校) 열어내어 문장귀천(文章貴賤) 분별(分別)하고 예악교화(禮樂敎化) 선포(宣布)하니 인물(人物)이 혁혁(赫赫)하고 풍속(風俗)이 희희(熙熙)로다 40.응향각(凝香閣) 들어가서 오동향로(烏銅香爐) 구경하고 심검당(尋劍堂)과 관음전(觀音殿) 동림헌(東臨軒)과 미타전(彌陀殿) 망월루(望月樓)를 차례(次例)로 구경하고 유산(遊山)길 찾아가서 안심사(安心寺) 돌아드니 무수(無數)한 부도비(浮屠碑)는 도승(道僧)의 유적(遺跡)이라 명월(明月)은 교교(皎皎)하고 청풍(淸風)은 소슬(蕭瑟)이라 녹수청산(綠水靑山) 깊은 곳에 상원암(上院庵)을 찾아가서 대해포(大海浦) 구경하니 정신(精神)이 쇄락(灑落)하다 이층철사(二層鐵絲) 휘어잡고 인호대(引虎臺) 올라가니 송풍(松風)은 거문고요 두견성(杜鵑聲)은 노래로다 41.증광경과(增廣慶科) 택일(擇日)하여 문장(文章) 무사(武士) 다 모두어 초시회(初試會)를 설장(設場)하고 춘당대(春塘臺) 후원(後苑) 안에 대소과(大小科)를 창방(唱榜)하니 부(賦) 장원(壯元)에 굴원(屈原)이요 시(詩) 장원(壯元)에 이백(李白)이라 의(義) 장원(壯元)에 사마천(司馬遷)과 의심(義心) 장원(壯元) 한퇴지(韓退之)라 책문(策文) 장원(壯元) 동중서(董仲舒)요 표(表) 장원(壯元)에 왕발(王勃)이라 생원(生員) 진사(進士) 이백인(二百人)과 삼십삼인(三十三人) 호명(呼名)하니 반악(潘岳) 송옥(宋玉) 가의(賈誼) 유향(劉向) 반고(班固) 매승(枚乘) 조식(曹植)이요 두자미(杜子美) 송지문(宋之問)과 유자후(柳子厚) 두목지(杜牧之)와 가도(賈島) 잠삼(岑參) 맹동야(孟東野)와 백낙천(白樂天) 원진(元?)이라 구양공(歐陽公) 왕안석(王安石)은 소년성명(少年成名) 조달(早達)하고 소자첨(蘇子瞻) 소영빈(蘇潁濱)은 형제연벽(兄弟聯壁)호기(豪氣)로다 설문청(薛文淸) 이동공(李??)과 왕양명(王陽明)과 왕감주(王감州)라 문장재사(文章才士) 다 뽑으니 천하득인(天下得人) 영광(榮光)이라 *띠리리잇 띠리리 잇 띠리리리리리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2.임이별 해본 사람들 몇몇이나 덴다드냐 임을 잃든 그날밤이 어디가 아프고 쓰리드냐 배지나간 바다위에는 파도와 물결만 남아있고 임떠나간 내 가슴에는 그 무었을 남겼느냐 장미화 꽃이 곱다고 해도 꺽고보니 가시로다 사랑이 좋다고 해도 남되고 보면 원수로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3.a지리하구나 임이별은 생각사록 목이 메누나 인연없어 못보느냐 무정하여 그리느냐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일성중안 같이 살며 왜 이다지 애가타 그려사나 차라리 몰랐드라면 뉘가 뉜줄 몰랐을걸 사귄것이 원수로구나 b 지리하구나 님 이별은 생각사록 목이 메고 인연 없어못 보느냐 무정하여 그리느냐,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일성중 안 같이 살며 (오매불망 우리님을) 왜 이다지도 그려사나, 차라리 물랐더라면 뉘가 뉜줄 몰랐을걸 사귄 것이 원수로구나 정 많이 든 것이 대원수로다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도 님의 화용이 그리워서 (참아진정) 못살겠네.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4.a.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 정은 뺏어가고 제정 안주니 그것이 모두가 원수로다 심중에 타는 불을 그 뉘라서 꺼줄손가 신롱서를 꿈에보고 불끌약을 물었더니 임으로 하여 난병이니 임이 아니면 못끈다네 서리맞어 병든 잎은 바람이 없어도 떨어지고 임그리워 애타는 가슴 병 아니 든다고 내 어이 사나 b.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 정은 뺏어가고 제 정은 안주니 그것이 모두 다 원수로다 심중에 타는 불을 그 뉘라서 꺼줄소냐 신롱씨를 꿈에 보고 불 끌 약을 물었더니 인삼 녹용도 쓸데 없고 화타 편작도 소용이없네 님으로 연하여 난병이니 님이 아니면 못 끈다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5.잊어라 꿈이 로구나 모두 다 잊어라 꿈이 로구나 옛날 옛적 과거지사를 모두다 잊어라 꿈이로다 나를 싫다고 나를 마다고 나를 박차고 가신임을 잊어야만 올을줄을 나도 번연이 알건마는 어리섞은 미련이 남아 그래도 몾잊어 걱정일세 46.나 떠난다고 네가 통곡말고 나 다녀 올동안 마음 변치 말어라 제 몸에 병이 들었나 뉘게 잡히여 못오시나 해다저서 황혼이 되면 내 아니가도 제 오니 아마도 우리임은 남에 사랑이 분명하구나 47.지척동방 천리 되어 바라 보기 묘연하고 은하작교가 흩어졌으니 건너 갈 길이 아득하다. 인정이 끊텼으면 차라리 잊히거나, 아름다운 자태거동 이목에 매양 있어 못 보아병이로다. 못잊어 한이 되니 천추만한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워라. 48.창문을 닫쳐도 숨어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이냐 달빛이 사랑이냐, 텅 비인 내가슴엔 사랑만 가득 쌓였구나. 사랑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게 무엇이냐 보일듯이 아니 보이고, 잡힐듯하다 놓쳤으니 나혼자 고민 하는게 이것이 모두가 사랑이냐. 49. 바람아 광풍아 불지 마라 송풍낙엽이 다 떨어진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잎 진다 설워 마라. 동삼 석달 잠을 자다가 춘삼월이 다시 올제. 황금같은 꾀꼬리는 양류상으로 넘나들며 순제금을 희롱하고 탐화봉접이 춤을 출제 훈풍을 좇아서 또 피련마는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지는 못하리로다. 50.만리장공에 하운이 흩어지고 무산십이봉에 월색도 유정하더라 님이 저리 다정하면 이별인들 있을 소냐. 이별 마자고 지은 맹서 태산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망하여 (백년동락 굳은 언약이) 무너질줄 뉘라 알리. 무정하다 저 달 빛은 천리원정에 님 잃은 서름 너는 어이 모르냐. 51.바람 불어 누운 남기 봄 비 온다고 일어나며 님으로 연하여 얻은 병이 약을 쓴다고 낳을 소냐. 우황 웅담으로 집을 짓고 청심환으로 왕토를 치고, 인삼 녹용으로 구들을 놓고 삼신산 불로초로 약을 지어서 먹은 후에, 화타 편작이 갱생(更生)을 해도 님으로 연하여 애타는 간장 이내 병 낫기는 만무로구나. 52.인간 이별 만사중에 날같은 사람 또 있는가 천지만물 분연후에 설른 이별이 몇몇이냐. 강산에 떠 가는 저 배는 가는 곳이 그 어디메뇨, 만단수회 실은 후에 천리 약수 건너 가서 임계산 곳에 풀고지고, 장탄단우 이내 설움 구곡간장 맺힌 한을 어이하면 풀어볼까. 53. 동정호 지는 달도 그믐이 지나면 또 볼수 있고 북경 길이 멀다해도 사신행차가 왕래하고, 하늘이 높다 해도 오경전에 이슬이 오고, 무한년 정배라도 사만 있으면 풀리는데 황천길은 얼마나 멀게 한번 가며는 영절인가. 54.창해월명 두우성은 님 계신곳 바쳐 있고 회포는 심란한데 해는 어이 수이 가노, 잘새는 집을 찾아 무리무리 날아들고, 야색은 창망하여 달빛 조차 희미 한데 경경히 그리는것은 간장 썩는 눈물이라. 55.춘풍화류 번화시에 애를 끊는 저 두견아 허다공산을 다 버리고 내 창전에 와 왜 우느냐. 밤중이면 네 울음 소리 억지로든잠 다 깨운다. 잠을 자느냐 꿈을 꾸느냐 날 생각 하느라고 번민이냐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도 님의 화용이 그리워 뭇살겠네. 56.뉘라서 장사라더냐 죽음 길에도 장사가 있나 누누중충 북망산을 뉘 힘으로 뽑아 내며 봉리춘풍 빠른 광음을 어느 재사라 막아 내리 명황도 눈물을 짓고 왕후장상도 울었으니 오는 백발을 어이하리 진시황 한무제도 채약구선 못 하고서 여산황릉 갚은 골에 모연주초 뿐이로다 고왕금래 영웅 호걸이 백발이 공도 되어 속절 없이 묻혔구나. 57.님과 날과 만날적에는 백년을 살자고 언약을 하고 태산을 두고 맹서를 하고 하해를 두고서 언약을 하더니, 산수지맹은 간 곳 없고 다만 남은건 이별이라, 이별 두자 누가 내며 사랑 두자를 그 누가 냇나 이별 두자 내인 사람 날과 한 백년 원수로다. 박랑사중 쓰고 남은 철퇴 천하장사 항우를 주어 깨치리로다 깨치리라 이별 두 자를 깨치리라. 58.억만장안 남북촌에 영웅호걸 재자가인 명기명창 가객이며 가진풍류를 갖추어 싣고, 순풍에 돛을 달어 범피중류 내려 갈제, 벽파상에 나는 백구는 흥에 겨워 춤을 추고 고기 잡는 어옹(漁翁) 들은 어기여차 노래한다. 세상공명 다 떨치고 풍월 따라 희롱하니 이도 또한 좋을시고. 59.봄이 왔네 봄이 왔네 원근산천에 봄이 왔네 먼 산의 아지랑이 아롱아롱 뒷 내에 실 버들 하늘하늘, 불탄 잔디 속 잎이 나니 봄은 분명 봄 이로구나. 강남 갔던 저 제비도 옛 집을 찾아 다시 오고 개나리 진달화 만발하니 벌 나비 잡충이 춤을 춘다. 우리 인생도 저 봄과 같이 다시 젊지를 왜 못하나. 원수로구려 원수로구려 무정세월이 원수로구려 검던 머리 곱던 양자 어언간에 백발일세. 백발이 날 찾아올 줄 알았으면 한 손에는 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철퇴를 들고 오는 백발을 막을것을. 60.우연히 길을 갈적에 이상한 새가 울음을 운다 무슨 새가 울랴마는 적벽화전의 비운이라 하야구구(귀귀) 진토를 보고 설리 통곡 우는 모양 사람의 심리로서야 참아 진정 못 보겠네. 포연탄우 모진광풍에 천하장사 영웅호걸이 비명횡사가 몇몇일러냐. 일후에 그 원혼들이 와석종신 못 한 이한을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 하느냐 61.서산에 해 기울고 황혼이 짙었는데 안 오는 님 기다리며 마음을 죄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온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떠서 짝을 불러 슬피 울 제 원망스런 우리 님은 한없이 기다리다 일경이경 삼사오경 어느덧이 새벽일세. 추야장 긴 긴 밤을 전전불매 잠못 들제 상사일념 애타는 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데 없는 이내 심사 어디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 해도 욕망이 난망이라 차마 진정 못 잊겠네. 62.산은 적적 월황혼에 두견접동 슬피 울고 오동 우에 비낀 달은 이내 회포를 돋우는데, 야월공산 깊은 밤에 님 그리워 설이울제. 독대등촉 벗을 삼아 전전불매 잠못 들고 상사일염 애 태우니, 옥장의 깊은 곳에 잠든 님을 생각을하고 남가일몽 꿈속에라도 잠깐이나마 보고 지고, 짝을 잃고 우는 저 두견아 남의 원통 이 사정을 너는 왜 이다지도 모르느냐. 63.손목을 잡고 작별을 하려고 눈물 씻고 자세히 보니 홍도와 같이 고운 얼굴에 앵도와 같이 붉은 입술 검은 눈섭을 그린듯이 깍은듯이 가는 허리가 활대와 같이 휘였구나 노란 저고리 다홍치마에 붉은 깃에 남 끝동에 물명주 삼팔 수건을 눈결과 같이 휘여잡고 들며 날며 곁눈질에 돈 없는 건달 마음 산란하다.
19    우리 옷 '한복' 이야기 댓글:  조회:7635  추천:2  2016-02-07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 고유의 의복인 한복(韓服)은 조선옷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전통미(美)를 상징하는 한복은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화려하고도 단아한 자태를 풍긴다. 현대에 와서는 명절이나 결혼식 등 특별한 날에 주로 입는 예복이 되었으나, 최근 한복의 현대화·세계화가 많이 이루어져 부담스러운 옷에서 친숙한 옷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한복과 상식 한복 입을 일이 생겼을 때 입는 법이 헷갈릴 때가 많다. 다시 익혀두면 도움이 될 남녀 한복 입는 법과 옷고름, 대님 매는 법을 모았다. 여자 한복 입는 법 1. 속바지와 속치마를 차례로 입는다. 2. 겉치마를 입는다. 이때 왼손으로 치마꼬리를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겉치마 자락을 왼쪽으로 여며 입어야 한다. (사람들이 대부분 오른손잡이므로, 오른손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을 배려함, 왼손잡이라면 반대로 하면 된다.)  3. 속적삼을 입고 버선을 신는다.  4. 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맨다. 5. 필요에 따라 마고자(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나 두루마기를 입으면 된다. ※ 옷고름 매는 방법 ①왼손은 긴 고름을, 오른손은 짧은 고름을 아래서 받치듯 손으로 들어준다. ②오른손의 짧은 고름을 위로 가게 해 X자 모양으로 교차시킨다.  ③위로 올라간 짧은 고름을 긴 고름 아래에서 감아 위로 뽑는다. 이어 왼손을 위로 올려 짧은 고름을 잡은 다음, 둥근 원을 만든다. 오른손으론 밑에 있는 긴 고름을 둥글게 말아 접어 짧은 고름의 원 안으로 넣어준다.  ④양손으로 모양을 바로잡는다. 남자 한복 입는 법 1. 속옷(속고의, 적삼)을 갖춰 입은 후 바지를 입는다. 바지를 입을 땐 앞뒤를 구분해 큰 사폭(邪幅)이 오른쪽으로, 작은 사폭이 왼쪽으로 가게 입어야 한다. (사폭은 남자 한복 바지에서 허리와 마루폭 사이에 잇대어 붙이는 네 쪽의 헝겊을 말한다.) 이어 바지를 왼쪽으로 여며 허리띠를 맨다. 2. 대님(발목을 졸라매는 끈)을 맨다. 3. 저고리를 입고 고름을 맨 후 그 위에 조끼를 입는다. 4. 마고자를 입는다. 마고자를 입을 땐 저고리가 마고자의 소매 끝으로 보이지 않아야 깔끔하다. 외출할 땐 위에 두루마기를 걸치면 된다. ※ 대님 매는 법 ①가운데 솔기(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를 발 안쪽에 댄다. ②왼손으로 바짓부리를 잡고 발목을 한 번 돌려 앞서 누르고 있는 곳까지 와서 오른손으로 같이 잡는다. 남은 여유분은 왼손으로 잡고 뒤쪽으로 돌려 바깥쪽 복사뼈까지 가지고 간다. ③대님을 대고 두 번 돌린다. ④외코로 매어주면 끝난다. 반대 방향도 같은 방법으로 매면 된다. 두고두고 오래 입는 한복 관리법 한복을 장만했을 때의 멋스러움과 깔끔함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들이다.  세탁법 한복은 실크 소재이기 때문에 두세번 깨끗하게 입고 동정만 바꾸는 것이 가장 좋다. 드라이클리닝 등 세탁을 자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림질법 한복을 다릴 때는 반드시 다림천을 덧대야 한다. 스팀다리미는 부적합한데, 써야만 한다면 스팀을 끄고 다린다. 개는법 한복은 동정이 제일 중요하므로 여성, 남성 모두 동정이 꺾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보관법 습기와 해충에 약하고 쉽게 얼룩이 생기므로 상자에 넣어 햇볕이 들지 않고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 보관한다. ▶▶ 이 밖에 한복 관리법 자세히 알고 싶다면? /웨프 제공   생활화 · 현대화 되는 한복 생활에서 한복입는 사람 많아져… 전통 한복에 이어 좀더 편하게 바뀐 한복으로 '계량 한복'이 나왔지만 그동안의 계량 한복은 전통 도예가, 운동권 인사, 한식집 직원 등이 입는 이미지가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후 좀더 멋스럽게 바뀐 생활 한복은 현대인들의 생활 안에 한걸음 더 다가왔다. 한복이 점점 '생활 한복', '퓨전 한복' 등으로 다양화 및 대중화 되면서 최근에는 생활 속에서 한복을 입는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과거의 계량한복들 /조선DB   매일 아침 '한복' 입고 출근하는 삼성전자 여직원 벤츠 탄 사모님도 개량 한복 찾는다   한복을 즐기는 젊은이들 요즘엔 한복이 젊은이들의 패션 아이콘의 하나로 떠오르는 추세다. 특히 자발적으로 한복을 쇼핑해 입는 젊은 여성들이 늘었다. 명절 때 입거나 궁궐같이 전통적인 장소에 한복을 입고 가는 것은 기본. 한복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파티를 열고, 외국여행까지 다닌다. 그들 사이에서 '생활 한복'을 입은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게 유행하고, 이에 따라 전문 인터넷 쇼핑몰도 급속도로 증가해 젊은 층을 겨냥한 활동하기 편하고 다양한 디자인의 한복이 많이 나오고 있다. 국내 인기 여행지로 꼽히는 전주의 한옥 마을은 특히 10~20대의 여행 성지로 각광 받고 있다. 이 곳에 가면 대여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관광을 즐기는 젊은이로 가득찬 거리를 볼 수 잇다. [톱클래스] 한복 입고 어디까지 가봤나요? 2030 세대가 열광하는 '핫 패션 아이템', 생활한복의 진화 2015년 12월 9일 한복을 차려입고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이 한옥 툇마루에 앉아 있다. /김영근 기자 2015년 12월 9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방문객들이 전주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김영근 기자 2015년 9월 9일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신목고 3학년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고 있다. /성형주 기자 광복절을 앞두고 2015년 8월 5일 서울 경복궁 앞에 설치된 태극기 바람개비 앞에서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찾은 고등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종찬 기자 2015년 9월 9일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신목고 3학년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고 있다. /성형주 기자 2015년 9월 9일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신목고 3학년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고 있다. /성형주 기자 추석 연휴에 한복을 입고 서울 경복궁을 찾은 시민들이 셀프 촬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형주 기자 2015년 2월 10일 야간개장을 개시한 창경궁에서 한복을 입은 대학생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태조로 한옥마을에서 3.1절을 맞아 한복을 입은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플래쉬몹을 펼쳤다. /김영근 기자 이전다음 1 / 9 슬라이드 크게보기   한복 입기 다양한 행사도 열려 명절에 거리에서 한복을 입고 진행되는 전통놀이 행사는 물론, 학생들의 성인식 행사나 외국인 학생들의 한복입기 체험 행사 등 한복을 입고 진행되는 다양한 장(場)이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다. 2015년 9월 24일 오후, 남산골 한옥마을 국악당에서 열린 '외국인 주민과 함께하는 한가위 한마당'행사에서 외국인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절을 하고있다. /고운호 객원기자 /고운호 객원기자 2015년 9월 1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농협 하나로 클럽 양재점에서 열린 '어린이와 함께하는 추석 차례상 차리기'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한복을 차려 입고 절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2015년 9월 24일 오전, 광화문광장 앞에서 열린‘추석맞이 전통 한복입기 캠페인’에서 종로구 관내 어린이집 참가자들이 한복을 입고 광화문 광장에서 출발해 세종문화회관으로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고운호 객원기자 /고운호 객원기자 2015년 12월 9일 대전 유성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회 대전시교육청 성년식’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절을 하며 예를 올리고 있다. /신현종 기자 2015년 12월 9일 대전 유성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회 대전시교육청 성년식’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족두리를 쓰는 가례의식을 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2015년 10월 30일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길 일대에서 열린 야행축제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복체험을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이전다음 1 / 8 슬라이드 크게보기 젊은이 들이 직접 한복 입는 행사를 마련 "일본 축제를 보니 젊은 사람들도 기모노를 입던데, 저는 한복을 입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더라고요. 마땅한 계기가 없다면 '날'을 잡아 한복을 입자는 뜻에서 '한복데이'를 만들었습니다." 2014년 10월 부산에서는 2030세대 청년들이 '제1회 부산한복데이(Day)' 행사를 마련했다. 대학생과 대학을 갓 졸업한 직장인 40여명이 두 달간 준비해 전주, 대구, 울산, 대전 등에서도 동참해 이날 5개 도시에서 젊은이 1000여명이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이들은 2015년에도 부산 해운대구와 함께 해운대해수욕장에서 한복 패션쇼, 민속놀이, 국악 공연 등 한복을 입고 즐기는 행사를 진행했다. 2014년 10월 4일 '한복데이'를 앞두고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플래시몹 연습을 위해 광안대교 앞에 모였다. /부산한복데이기획단 제공   한복, 명절에만 입으란 법 있나요 유명인들의 한복 패션 박 대통령의 한복 패션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각종 행사나 외교 순방 때 다양한 한복 패션을 선보였다.  화마로 소실된 국보 1호 숭례문이 5년 3개월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5월 4일 오후 열린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왼쪽), 박근혜 대통령이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서 참석해 축사를 마친 후 단상을 내려가고 있다. /조선DB 우즈베키스탄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6월 17일 오후(현지 시각) 타슈켄트 대통령궁에서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과 만찬을 갖고 건배를 하고 있다. /조선DB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0월 15일 오후(현지 시각) 이탈리아 밀라노 팔라초 파리지호텔에서 열린 동포오찬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한 후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조선DB 국빈으로 캐나다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9월 20일(현지 시각) 오타와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동포만찬간담회에 인사말을 마치고 화사한 한복의 멤시를 드러내며 연단을 내려오고 있다. /조선DB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복을 입고 국민의 소망과 기원메시지가 담긴 복주머니 개봉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왼쪽), 박근혜 대통령이 복주머니 개봉행사 참석에 앞서 한복을 입고 어린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조선DB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9월 8일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경남하노이랜드마크 컨벤션홀에서 열린 한복ㆍ아오자이(베트남 전통의상) 패션쇼에 참석하였다. /청와대 제공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G20 정상회의를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9월 6일 오후(현지 시각) 러시아 마지막 일정으로 미하일로프스키궁에서 열린 동포 만찬 간담회 참석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동포 사회의 단합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와대 홈페이지 이전다음 1 / 7 슬라이드 크게보기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패션쇼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13년 9월 8일 베트남 하노이의 경남 랜드마크 72호텔에서 열린 '한복·아오자이(베트남 전통 의상) 패션쇼'에서 한복 모델로 데뷔했다. 양국 전통 의상인 한복과 아오자이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뜻깊은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행사 참관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모델이 되었다. /청와대 제공   런웨이 오른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 외교' 박근혜 대통령, 인도에서도 한복으로 '패션 외교' 펼쳐 한복 디자이너 이야기 한복 외길 40년…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80). 1994년 한국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쇼에 올라 저고리 없는 한복 치마를 선보였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패션전문기자 로랑스 베나임은 그 옷에 '바람의 옷'이란 별칭을 붙여줬다. 전통을 뒤집은 과감한 디자인이었지만 외국인들 눈엔 한복의 고운 선이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최고의 디자인이었다. 2010년 역시 한국에선 처음으로 세계 최고의 무대라 불리는 파리 오트쿠튀르(맞춤복) 쇼에서 한복을 소재로 한 컬렉션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2013년 11월 1일 독도 선착장에서 열린‘독도 사랑 이영희 한복패션쇼’에서 한복을 입은 모델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있다. 이번 패션쇼는 독도가 분쟁이 아닌 문화 예술의 섬이라는 점을 알린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모델 뒤로 독도의 모습이 보인다. /김지호 객원기자 /김지호 객원기자 2011년 8월 10일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거북바위에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패션쇼가 열렸다. 당초 이 패션쇼는 독도에서 열리기로 기획됐으나 기상 상황 악화로 독도에서 열리지 못하고 울릉도에서 개최됐다. /이태경 기자 /이태경 기자 2007년 5월 19일 하얏트호텔에서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 내 한국관 개관 기념으로 열린 이영희 한복 패션쇼. 이날 행사에는 스미스 소니언 아시아 역사 문화 담당 큐레이터겸 이사인 ' 폴 미셸 테이러 '가 개막 축하연설을 했으며, 이태식 주미대사 부인도 참석했다. /임희순 기자 이전다음 1 / 5 슬라이드 크게보기   한복을 입다? 문화를 입다! "삼각지붕 밑 그윽한 그림자… 내 色은 여기서 나왔어요" "쟤들은 맨날 벗는데 우리도 벗어볼까… 韓服 치마만 입은 모습 정말 섹시해" 그녀 자체가 곧 한복… 한복 디자이너 담연 이혜순 이혜순 디자이너는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쌍화점'(2008) 등의 의상 제작을 맡았고, 2010년 G20 정상회의에서 한복 패션쇼를 연 유명 디자이너.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20여년 전부터 평소에도 한복 차림으로 생활해 왔으며, 작년 4월 '신라호텔 한복 해프닝'의 주인공이다. 그는 '아트 마이애미(Art Miami)' 오프닝 행사에서 한복 12벌을 내놓고 패션쇼를 여는 등 미국에서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선보였던 인물이다.  담연 이혜순, "한복 한류 이전 우리 경험치가 중요하다" 담연 이혜순의 한복문화를 집 안에 들이다 한복이라는 틀, 그 이상…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과 외국 정상회담 때 입었던 한복을 지어 화제를 모았다.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부인 김윤옥 여사,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의 한복을 만든 국내 정상급 한복 디자이너이다. 김씨는 한복이라는 틀에 갇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한복장이를 넘어 한국인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한복을 짓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우리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말하고 알리는 것이다. 사극이나 영화 속에서만 보는 아득한 옛날의 전통이 아닌,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가 쓰다듬고 만졌던 우리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과거 전시회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본인의 소신을 밝혔다. 유물 같았던 할머니 베개… 오, 예술이네 세계화 되는 한복 아카데미賞 사전 행사에 초청받은 한복 "브라보" "원더풀" 박수갈채 2015년 2월 20일 로스앤젤레스 글렌데일에 있는 MGN 파이브 스타 극장, 의상 디자이너 제니퍼 목(목플러스), 김문경(필월 우리옷), 조진우(한국의상 백옥수), 조영기(천의무봉), 오인경(이노주단) 5명이 지은 한복 37벌이 영화관을 달궜다. 이틀 뒤 열리는 공식 시상식에 앞서 영화 관계자와 배우들, 현지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할리우드 트리뷰트 행사에서 한복 패션쇼가 열린 것이다. 주제는 '색동: 한국의 색에 동요되다 in Oscar'. 미국 기업체 협의회(US Business enterprise Council)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복진흥센터(센터장 최정철) 주관, 제니퍼 목이 총연출을 맡았다. ▶ 관련기사 2015년 2월 20일 오후 8시(현지 시각)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전행사로 마련된 한복 패션쇼에서 디자이너 제니퍼 목은 색동으로 여성의 몸을 감싼 한복 드레스를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복진흥센터 제공 한복의 향연, DDP '샤넬 크루즈 컬렉션 쇼' 칼 라거펠트가 색동에 영감을 받아 만든 드레스 /AP 뉴시스 2015년 5월 4일 저녁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수놓은 프랑스 패션 브랜드 '샤넬(CHANEL)'의 2015/16 크루즈 컬렉션 쇼는 우리 옷 한복과 함께한 '한복의 향연'이었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가 서울서 캐낸 창조의 씨앗은 한복이었다.  이브닝드레스는 저고리를 벗어던진 채 치마만 슬쩍 둘러 야릇한 미를 풍겼다. 조각보처럼 자투리 천을 성기게 이은 원피스, 승려들이 등에 지고 다닌 바랑처럼 끈으로 조여 어깨에 슥 두른 가방, 수영복 위에 걸친 두루마기 형태의 가운이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 버선처럼 생긴 양말을 신고, 자개·진주 같은 보석을 동백꽃 무늬로 작업한 브로치를 더해 동·서양의 상반된 분위기를 동시에 담았다. ▶ 관련기사
18    (탐구)한국성씨 대부분 위조된 가짜성씨라는데... 댓글:  조회:6355  추천:1  2015-11-03
(탐구)한국성씨 대부분 위조된 가짜성씨라는데...   문장래원;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1&docId=206099399&qb=7ZWc6rWt7ISx7JSo6rCA7Kec&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SBl71soRR18sscpmQmwsssssstN-374529&sid=zrloXeXd/+drTn3nW7gtqg==
17    성(姓)과 씨(氏)는 뭐가 어떻게 왜 다른가? 댓글:  조회:3016  추천:0  2015-10-18
성(姓)과 씨(氏)는 뭐가 어떻게 왜 다른가? ⊙ 원래 姓은 母系를 표시, 氏는 父系를 표시, 최초의 姓들은 모두 ‘女’ 부수 사용 ⊙ 周와 로마의 姓氏제도 유사, 姓은 로마의 ‘Gens’, 氏는 ‘Familia’에 해당 ⊙ 중국 史書가 최초로 기록한 법흥왕은 募씨로 되어 있어, 진흥왕순수비에도 신하들의 성씨는 보이지 않아 ⊙ 고려 이후에는 西域·東南亞 출신 귀화자 많아… 장순룡·인후 등은 정승 반열에 오르기도 글 | 김정현 역사저술가   黃帝가 탄생하는 모습. 황제의 어머니가 姬水에서 황제를 낳은데서, 姬라는 姓이 생겼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성씨(姓氏)’를 ‘성(姓)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예컨대, 김씨, 이씨 하는 말에서 김(金), 이(李)라고 하는 성에다 존칭으로 씨(氏)를 붙여준 것이 ‘성씨’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중국 주(周)나라 때에는 성과 씨가 별개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성의 기원(起源)을 주대(周代)에 두고 있었다. 주나라에서 혈통 표시로 일찌감치 등장한 것이 성이었다. 당시 주 왕실의 성은 희성(姬姓)이었다.      1955년에 조좌호(曺佐鎬) 동국대 교수가 펴낸 《동양사대관(東洋史大觀)》은 주대의 성씨제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존칭 ‘姬’는 원래 周나라 王室의 姓    神農氏의 姓인 姜은 그의 어머니가 姜水 가에서 신농씨를 낳은 데서 비롯되었다.   〈주의 성씨제도는 로마의 성씨제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주나라 사람의 성은 로마의 ‘Gens’에 해당한 것인데 여러 성 가운데 주 왕실에 속하는 희성(姬姓)이 가장 고귀하고 유력하였다. 성을 여러 씨(氏)로 나눴는데 씨는 주로 거주하는 지명 또는 세습하는 관명(官名)을 따서 붙였다. 씨는 로마의 ‘Familia’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귀족의 칭호는 성(姓)·씨(氏)·명(名) 세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보통 남자는 씨와 이름을 칭하고 여자는 성과 이름을 칭하였다. 가령 진(陳) 나라의 공실(公室) 성은 규(嬀)이며 씨는 진(陳)이었다. 일찍이 진나라 한 공자(公子)가 공실을 찬탈한 바가 있는데 춘추(春秋)에는 그를 진타(陳陀)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진은 씨이고 타(陀)는 이름인데 그가 남자(男子)이기 때문에 성인 규를 생략한 것이다. 그리고 진에서 위국(衛國)으로 출가한 여자가 있었는데 여규(厲嬀), 재규(載嬀)라 하였다. 그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성을 규(嬀)라 하였다. 이것은 로마에서도 같은 것으로 이름(persona), 성(Gens), 씨(Famillia)를 표시한 것인데 남자는 보통 성을 생략하였다.      주 왕실의 성은 희(姬)의 성인데 여자를 모두 희(姬)라고 불렀기 때문에 뒤에 희가 일반 여자의 존칭이 되었다. 주인(周人)의 성은 결혼에서 중요한 의의(意義)를 가진 것으로 그것은 동성간(同姓間) 결혼을 금(禁)하는 것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씨족제도가 문란해져서 성이 사실상 소멸하고 씨와 성을 혼용한 후에도 동성불혼(同姓不婚)의 법이 실제 동씨불취(同氏不娶)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 가령 장씨(張氏)와 장씨(張氏), 이씨(李氏)와 이씨(李氏)는 아무리 혈연이 멀다 하여도 서로 결혼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주나라의 왕실 성이 희(姬)라고 하였는데 왕실에서 제후(諸侯)로, 즉 봉건국가의 군주로 나가면 동일족으로 희의 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씨(氏)를 새로 갖는 것이 주의 성씨제도였다. 이 제도는 주의 종법(宗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주의 종법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이 있었다. 대종은 종갓집과 같은 것으로 처음의 시조(始祖)를 영구히 받드는 것이었다. 소종은 분가(分家)한 계보들을 말하였다.      제후국의 군주로 봉을 받아 소종이 된 맨 처음의 사람을 시봉자(始封者)라고 하였다. 시봉자는 새로운 성을 가졌다. 그것을 ‘씨’라 했는데, 이 씨를 가지고 다시 새로이 혈통을 표시한 것이다. 소종의 시봉자 후손들은 계속 이 ‘씨’를 이어 갔다. 그러다가 그들의 후손에서도 ‘씨’를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씨의 분출(分出)이다. 여기서 많은 종류의 ‘씨’가 등장하게 된다.      주나라 시대에 최초로 나타난 성들은 모두가 ‘계집 녀(女)’를 부수(部首·글자 변에 붙은 것)로 사용했다. 주나라 왕실의 성이라 하는 희(姬)를 비롯해서 강(姜), 규(嬀), 사(姒), 요(姚), 길(姞) 등이었다.      ‘희’는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라는 곳에서 자식을 낳은 데서 비롯했다. ‘강’은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자식을 낳았으므로 ‘강’을 성으로 삼았다. ‘요’는 우순(虞舜)의 어머니가 요허(姚墟)에 살았으므로 이를 성으로 한 것이다.      황제, 신농씨, 우순은 모두 중국 역사가 신화적 인물로 묘사하는 조상들이다. 이들 신화 속 인물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황제는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黃河)지역을 최초로 다스린 제왕이라는 의미다. 황제의 이름은 헌원(軒轅)이었다.      황제, 신농씨, 우순 같은 신화 속 인물들의 성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비롯했다. 성은 원래 모계(母系)를 표시하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반면에 제후국의 혈통을 표시하는 ‘씨’는 부계(父系)를 표시하는 것이다. 제후국의 군주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李’씨의 유래      중국 고대 성씨의 유래를 밝혀 주는 책들이 있다. 5세기에 나온 《위서(魏書)》 〈관씨지(官氏志)〉, 12세기에 나온 《통지(通志)》가 그것이다. 남송(南宋) 때 간행한 《통지》 씨족지(氏族志)에 나타난 이(李)씨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상(商)나라 때 이정(理征)이란 고위관리가 어떤 사건으로 폭군 주왕(紂王)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때 그의 부인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정(利正)을 데리고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 그 모자는 달아나면서 어느 나무 아래서 허기진 몸을 잠시 쉬었다. 이 나무는 오얏나무였다.   모자는 떨어진 오얏나무 열매로 배를 채웠다. 덕분에 모자는 허기를 면한 후에 무사히 딴 나라로 갔고 거기서 아들은 장성하였다. 이후 손자까지 두었고 그 손자는 진(陳)의 대부(大夫) 벼슬까지 올랐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생명을 구해 준 오얏나무를 잊을 수 없다고 하여 오얏나무 이(李)를 성씨로 삼았다.〉      위에 소개한 성씨의 연원을 소개한 책들을 보면, 성씨 가운데는 국명(國名), 지명(地名), 관직명(官職名) 등에서 씨의 글자, 즉 성씨가 된 것이 많았다. 정(鄭), 조(趙), 한(韓), 오(吳), 신(申), 조(曹), 정(丁), 성(成), 서(徐), 황(黃), 노(魯), 송(宋), 주(朱), 진(陣), 양(梁) 등이 나라이름에서 취한 성씨다. 백(白), 배(裵), 노(盧), 방(方), 소(蘇), 신(辛), 양(楊), 고(高), 유(劉), 원(元) 등은 식읍(食邑·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려준 지역)에서 따온 성씨다.   강(姜), 하(河), 임(林), 유(柳), 지(地), 천(千) 등은 지명과 관련한 성씨다. 벼슬이름, 즉 관직에서 따온 성은 장(張), 윤(尹), 최(崔), 홍(洪), 차(車), 추(秋), 사(史) 등이다. 자(字)와 시호(諡號)에서 유래한 성씨도 있는데, 이는 조상의 자나 시호에서 한 글자를 따서 성씨를 삼은 것이다. 손(孫), 문(文), 민(閔), 남(南), 공(孔), 유(兪), 전(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라는 單姓, 고구려·백제는 複姓      한국인의 성씨 기원은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알 수 있다. 물론 각 성씨의 문중들이 족보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반면에 《삼국사기》는 신라의 성씨 등장에 자세한 설명이 있고, 백제와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하고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잘 알려진 6촌의 성씨가 있었다. 그들 성씨는 최(崔), 정(鄭), 이(李), 손(孫), 배(裵), 설(薛)이다. 그리고 왕족 성으로 박(朴), 석(昔), 김(金)이 있다.      현 한국인의 성씨들 중에는 신라에 등장한 성씨가 인구수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고구려나 백제계 성씨는 오늘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씨(高氏) 성이면 우리의 역사에서 먼저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을 떠올린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고씨는 고구려 고씨가 아니라 탐라(제주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근래에 와서 뒤늦게 고구려 고씨에 기원을 둔다고 주장하는 고씨들이 있지만, 보학계(譜學系)에서는 기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사기》가 언급한 성씨들은 대개 한 글자로 된 단성(單姓)인데 비해, 백제와 고구려인의 성은 대개 두 글자로 된 복성(複姓)이라는 점이다. 신라는 중국 당(唐)나라 성씨제도에 영향 받아 주로 단성을 사용하였다. 당나라는 세족(勢族)들의 성씨가 대부분 단성이었다.      신라의 성씨 기원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비롯해서 3대 유리왕(儒理王) 때 6촌에서 등장하였다는 성씨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설(說)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중국의 사서(史書)에 대한 검토에서 비롯한다. 신라는 23대 법흥왕(法興王·514~540) 이전 왕들의 경우에는 시호(諡號)와 성씨도 없었다고 한다.   중국의 《양서(梁書)》와 《남사(南史)》는 신라의 경우 법흥왕 때 와서 비로소 성씨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법흥왕은 성씨를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고 기록했다. 《북제서(北齊書)》는 법흥왕 다음의 왕인 진흥왕(眞興王·540~576)을 김진흥(金眞興)이라 기록했다. 신라 임금을 김씨라고 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법흥왕 이전 신라왕의 시호와 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다고 한다. 문자가 없었으면 의당 성씨도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법흥왕이니 진흥왕이니 하는 시호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법흥왕 때부터 비로소 사용한 것으로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였다. 법흥왕 이전의 왕들은 니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법흥왕 이후 한자 성씨 사용한 듯      ‘신라가 한자 성씨를 갖게 된 것은 법흥왕 이후’라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는 진흥왕 순수비(巡狩碑)이다. 진흥왕은 새로 정복한 지역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기록한 신하들의 이름을 보면 성씨가 나와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경남 창녕(昌寧)에서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를 보자. 〈喙(훼) 居七智(거칠지) 一尺干(일척간) 沙喙(사훼) 心表夫智(심표부지) 及尺干(급척간) 村主(촌주) 麻叱智(마질지) 述干(술간)〉이라는 내용이 있다. 훼(喙)는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는 육부의 양부(梁部)를, 사훼(沙喙)는 최씨 성을 하사 받았다는 사량부(沙梁部)를 말한다.   촌주(村主)는 비를 세운 지역의 마을 촌장을 말하는데, 그의 이름이 마질지(麻叱智)인 것이다. 일척간(一尺干), 급척간(及尺干)은 중앙관리의 벼슬 이름이고, 술간(述干)은 지방관리의 벼슬 이름이다. 거칠부지, 심표부지, 마질지는 신라말 발음으로 표기된 신하들의 한문 글자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 비는 양부의 일척간 거칠부지, 사량부의 급척간 심표부지, 촌주 술간 마질지 3명을 공신(功臣)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진흥왕의 신하들이라면 신라 6부(六部), 즉 6촌(村) 사람들의 후예일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성씨가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결국 진흥왕 시대까지도 신라에 성씨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5대 진지왕(眞智王·576~579)과 26대 진평왕(眞平王·579~632) 때 세운 비에서도 신하들의 이름만 있었고 성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면, 신라가 박혁거세를 비롯해서 유리왕 때 6촌의 성씨, 그리고 탈해왕(脫解王)과 알지(閼智)에게 석씨(昔氏)니 김씨(金氏)니 하는 성씨가 실제로 그들 등장과 함께 나타난 것인지 의심스럽다.        濊의 同姓不婚 풍속      한반도의 성씨와 관련해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이 책은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있던 예(濊)의 풍속에 대해 언급하면서 “같은 성(姓)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에 동성불혼(同姓不婚) 풍속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예맥에서는 성씨가 있었다는 얘기다.   예에 구체적으로 어떤 성씨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후한서》는 중국 송(宋)나라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으로, 예뿐 아니라 부여와 초기의 고구려, 옥저(沃沮)에 관한 기록도 있다. 그런데 ‘동성불혼’에 대해 언급한 것은 예가 유일하다.      예에 성씨가 있었다면 그것은 중국 한(漢)나라가 한반도 북부에 설치했던 한사군(漢四郡·낙랑, 진번, 임둔, 현도)을 한동안 설치한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의 성씨는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예는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지역까지 남하했다. 예가 망했을 때 그 주민들은 진한(辰韓), 즉 신라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이때 그들이 사용하던 성씨가 신라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성씨는 대부분 신라에서 비롯한 것이다. 여러 문중의 족보들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설사 신라 토종(土種) 성씨가 아니더라도 중국 등에서 신라로 귀화(歸化)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라 왕족의 세 성씨나 6촌의 성씨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성씨가 신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라가 당나라의 성씨 문화와 그 제도를 본격적으로 전래 받기 시작한 것은 통일 이후였다. 《삼국사기》의 신라 관련 기록들을 보면 문무왕(文武王·661~681) 이후의 기사에서 성과 이름을 함께 표기한 인명이 부쩍 많이 등장한다. 이를 보면 그 이전까지는 높은 신하들의 경우에도 성씨를 갖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왕실에서만 혈족의 표시를 위해 성씨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신라와 당나라 간 교류가 활발했다. 당의 문물(文物)과 제도가 전파(傳播)되면서 성씨제도도 본격적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西域에서 온 歸化人들    베트남 리 왕조를 창건한 리 태조의 동상. 제공=박순교   신라 6촌의 성씨를 중국인의 성씨와 비교해 보면 배씨(裵氏) 성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주류(主流)라고 하는 백가성(百家姓)에 들어갔다.      중국의 성씨관계 자료를 보면, 박씨(朴氏) 성만은 한반도에서 등장한 성씨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성씨대전(中國姓氏大全)》 기록을 보면 고려에서 원(元)나라로 귀화한 환관(宦官) 박불화(朴不花)가 중국 박씨의 선조다. 그 뒤에는 ‘조선족이 이 성을 많이 갖고 있다(朝鮮族多此姓·조선족다차성)’고 기록해 놓았다. 반면에 ‘더러는 분명하지 않은 내용으로 고대 파군(巴郡)에 있었던 소수 민족의 수령인 박호(朴胡)한테서 비롯한 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 각 성씨의 문중에서 펴낸 족보들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없는 성씨들이 신라에서 비롯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姜), 남(南), 노(盧), 라(羅), 문(文), 방(方), 변(卞), 백(白), 부(夫), 사공(司空), 서(徐), 성(成), 소(蘇), 송(宋), 신(辛), 안(安), 여(呂), 오(吳), 위(魏), 유(兪), 육(陸), 윤(尹), 임(林), 장(張), 정(丁), 제갈(諸葛), 조(趙), 조(曹), 주(周), 차(車), 홍(洪), 황(黃) 등이 그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가운데 신라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유명 인물은 왜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들 성씨의 족보 기록을 보면 대개 귀화인, 그것도 중국에서 온 귀화인들인 경우가 많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귀화자들에 대한 기록이 역사서에 많이 나타난다. 건국 초에는 외래인, 특히 여진족, 거란족 출신의 귀화자가 많았다. 한족계(漢族系), 몽고족계도 많았다. 고려 후기로 들어오면 귀화자들의 출신지가 더욱 다양해지는데, 그중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 혹은 위구르 사람도 많았다.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1247~1308) 조에 귀화한 고위관리 장순룡(張舜龍)이 바로 그들 가운데 한 명이다.      《고려사》는 그를 회회인(回回人)이라 기록했다. 그는 원(元)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원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수행해서 고려에 왔다가 귀화했다. 장순룡은 원나라에 있을 때 이름이 삼가(三哥)였다. 그는 고려에 와서 낭장(郎將·정6품) 벼슬부터 시작해서 재상 반열의 첨의참리(僉議參理·종2품) 벼슬까지 올랐다. 그가 바로 덕수 장씨의 시조다.      장순룡과 함께 제국공주를 수행해 온 몽고인도 있었다. 그는 인후(印侯)로 본시 이름은 ‘홀라대’였다. 그도 무관 벼슬인 중랑장(中郞將·정5품)을 받게 되었는데 충렬왕이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그는 대장군 인공수(印公秀)에게 “내가 당신하고 친하니, 당신 성을 빌려 썼으면 한다”고 청했다. 인후는 검교정승(檢校政丞)이란 최고 관직의 자리와 함께 공신(功臣) 칭호까지 받았다.      설손(偰遜)이란 이름의 귀화인도 있었다. 그는 위구르인이다. 원나라에 귀화해서 백료손(百遼遜)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학식(學識)과 문장이 뛰어나서 원나라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얻었고, 원의 황태자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공민왕과 즉위 전부터 알고 있던 그는 공민왕을 따라와서 고려인이 되었다. 그의 출생지인 ‘설렌’의 첫 글자를 따서 설(偰)이라는 성을 취했다. 그의 아들 설장수는 이성계 밑에서 활약하다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東南亞 출신 귀화인들    베트남 박닌성 딘방(이씨 왕조 발상지)에서 매년 음력 3월 15일 이 태조의 창업을 기려 열리는 덴도 축제.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은 태조의 8대손이다. 제공=박순교(《화산군 이용상》저자)   동남아(東南亞) 출신으로 화산(花山) 이씨의 선조가 된 귀화인으로는 베트남 출신 이용상(李龍祥)이 유명하다. 고려 고종 때 귀화한 그는 안남국(安南國·베트남)의 왕족이었다. 당시 안남국도 한자(漢字)를 쓰고 있었고, 중국식 한자 성도 갖고 있었다. 그의 이씨 성은 고려로 귀화한 후 취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나라 왕실의 성씨였던 것이다.      동남아 출신 귀화인 중에는 27대 충숙왕 때 남만인(南蠻人) 귀화인 왕삼석(王三錫)도 있었다. 남만인은 동남아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왕삼석은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의술(醫術)에 재능이 있다고 하여 가까워졌다. 그는 아첨과 속임으로 왕의 사랑을 받아 측근 신하가 되었다. 《고려사》는 그가 성질이 경망스럽고 간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도 왕의 총애를 받아 왕실의 성을 하사받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이란 고위 벼슬 자리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국적의 귀화인이 있었다. 초기에 장사도(張思道) 외 20여 명이나 귀화해 온 일이 있었다. 장사도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예빈경(禮賓卿)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관직은 종3품 고위직이었다.      세종 때 귀화한 우신(禹信)이라는 남만인이 조선 여인을 얻어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밖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국인, 자바인, 타타르인 등이 귀화한 기록이 나온다. 《세종실록》에는 특히 회회인에 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멀리 중동지역에서 한반도까지 육로나 해로로 많이 왔던 것이다.      지금 일본 영토가 된 오키나와에서 온 귀화인 오보야고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그는 조선 여인에게 장가들려고 하였지만 조정에서 허가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결혼 후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까 하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이 혼자 와서 정착하는 경우이면 장가드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오보야고는 계속 조선에 살겠다는 조건으로 결국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歸化 倭人들    우록 김씨의 시조인 김충선의 초상과 유물.   조선은 홀로 온 귀화인 남자가 조선의 여자와 결혼하면 세금과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었다. 글을 잘 알면 관직도 주었다. 이런 배려가 있었음에도 가정을 꾸린 뒤 본래의 제 나라로 도망가는 자들이 있었다. 《세종실록》에 보면 신하들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이도을치(李都乙赤)가 귀화해 와서 벼슬이 4품에 이르렀는데도 임금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본래의 나라로 도망하였다. 이런 불충(不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흉악한 놈이므로 그의 처자(妻子)를 모두 천인(賤人)으로 만들어 뒷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소서.〉      또한 이런 기사도 있었다.      〈귀화 왜인인 변좌(邊左)와 그의 아들 변효충(邊孝忠), 변효생(邊孝生)을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국문(鞠問)을 하였다. 변좌 등이 자신들의 직위가 낮고 녹봉이 박하다는 이유로 본토에 돌아가려 한 것이다.〉      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왜인들이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해 문제를 일으켰다. 귀화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같은 성씨를 갖겠다고 조선 조정에 청을 올린 왜인도 있었다. 일본 구주(九州)지방에 살던 의홍(義弘)이란 왜인이었다.      〈저는 백제의 후손인데 조선인과 같은 성을 갖고 싶습니다. 청컨대 부디 성을 하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에서 귀화왜인들이 취한 성은 이씨(李氏) 성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사고소우 등 15명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8년 때 있은 일이었다. 그들은 화약제조, 포 쏘는 솜씨가 있는 왜인으로, 귀화해 조선인이 됐다.      중종 때는 귀화한 왜인 박산동개(朴山同介)가 있었다. 그는 거제도에 살면서 거제에 왜인들이 침입했을 때는 앞장서서 그들을 격퇴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귀화한 일본인의 후손으로 알려진 성씨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인으로 귀화해서 본관과 함께 알려진 성씨는 김충선(金忠善)이 시조인 김해 김씨(일명 우록 김씨)뿐이다.   본명이 사야가(沙也可)인 그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참전했으나, 조선의 문물을 흠모해 휘하 병사들과 함께 귀순했다. 임진왜란은 물론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웠다. 이를 기려 선조(宣祖)는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 성을 하사했는데, 원래 있던 김해 김씨와 구별해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 한다.        요즘 귀화인들은…      고려와 조선에서는 귀화인들이 우리나라의 관습과 제도를 따라 본관과 성을 만들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른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한글로 표기만 하되, 본래의 자기 성을 그대로 갖는 경우가 많다. 귀화인이 귀화국의 성씨 문화에 동화하지 않고, 원래의 성씨를 계속 유지하면 후대(後代)에게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동화되지 못했다는 이질감을 후손에게 남겨줄 수도 있다. 출처 | 월간조선 10월호  
16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도 중시해야... 댓글:  조회:2490  추천:0  2015-09-16
호스피스 운동본부 김명자 “‘웰다잉 권리’ 찾아줄 것” 시대 따라 다른 사망기준…“죽음도 삶만큼 독창적” 호스피스 비용 하루 2만원 안팎 낸다 말기암 환자 15일부터 호스피스 건보 적용…월 44만원 “암 아닌 말기환자도 호스피스 이용” 사랑 가득한 호스피스 병동…사별한 유족의 마음까지 치유 죽음이 곁에 있기에 오늘의 삶이 찬란한 것을
15    척추·관절건강, 뼈를 세워라 댓글:  조회:3532  추천:0  2015-07-11
척추·관절건강, 뼈를 세워라 직립보행은 인간에게 있어 혁명이었다. 동물과 달리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면서 손은 자유를 얻었다. 한결 편해진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이용할 수 있게 됐으며, 이는 문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게 세상의 이치. 직립보행을 하며 두 손은 자유로워졌지만 중력으로부터 받는 압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압력은 고스란히 척추와 관절에 전달됐고, 그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척추 뼈가 보이는 그림 역시 세월엔 장사가 없다. 오래도록 중력을 견뎌온 척추와 관절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문제를 드러낸다. 세월의 무게로부터 척추·관절건강을 지키는 방법은 따로 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올바른 생활습관을 기르며, 척추와 관절 주변 근육을 키워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자칫하면 몸을 지탱하는 기둥이 무너질 수 있기에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서는 뼈를 세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chapter1 . 세월의 무게를 견디는 척추와 관절 이미지 크게보기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206개의 뼈 중 몸의 기둥 역할 을 하는 26개의 뼈가 척추다. 척추는 위로는 머리를 받치고 아래로는 골반과 연결돼 목과 등, 허리, 엉덩이, 다리에 이르기까지 주요 골격을 유지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몸 을 꼿꼿하게 세우고 지탱해주며 평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더불어 척추 속 빈 공간에는 온몸의 움직임을 주관하는 척추신경인 척수가 지나고 있는데, 척추는 이 신경다발을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도 맡고 있다.    척추가 우리 몸의 구조를 담당한다면 우리 몸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것이 관절이다. 뼈와 뼈가 연결된 부분을 의미하는 관절은 척추를 포함한 온몸의 운동에 축으로 작용해 뼈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관절은 움직임 여부에 따라 못움직 관절(부동관절)과 움직관절 (가동관절)로 나뉘며, 관절 조직의 특징에 따라 윤활관 절, 섬유관절, 연골관절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림으로 보는 척추·관절의 구조 척추는 마치 하나의 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26개의 척추뼈(추골)를 탑처럼 쌓은 모양으로 경추, 흉추, 요추, 천추, 미추 등 크게 다섯 부위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위쪽에 위치한 경추(목뼈)는 7개의 척추뼈로 이뤄져 머리와 목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그 아래 갈비뼈와 연결된 12개의 척추뼈가 흉추(등뼈)며, 여기에 연결된 요추(허리뼈)는 5개의 척추뼈로 이뤄져 상반신 무게 전체를 지탱한다.  가장 아래쪽에는 천추(엉덩이뼈)와 미추(꼬리뼈)가 있는데, 태어날 때 각각 5개의 척추뼈로 따로 분리돼 있던 두 부위는 성인이 되면 각각 한 덩어리의 뼈로 합쳐진다. 이렇게 경추 7개, 흉추 12개, 요추 5개, 천추 1개, 미추 1개 총 26개의척추뼈가 척추를 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척추뼈 사이에는 디스크(추간판)라는 젤리처럼 말랑한 물질이 들어 있다. 작은 원반 모양을 한 디스크가 있어 우리는 자유롭게 고개를 움직이고 허리를 돌릴 수 있다.   관절 구조 그림 디스크가 척추뼈 앞쪽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면, 척추뼈 뒤에서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관절이다. 관절은 뼈 끝에 자리한 구조물로, 딱딱한 뼈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젤리 같은 재질의 연골이다. 관절은 연골과 관절낭, 윤활액, 윤활막 등 다양한 구조물로 돼 있다. 관절낭은 물 95%로 이뤄진 윤활액이 차 있는 부위다. 연골과 연골 사이에 위치해 뼈와 연골이 서로 맞닿아 닳지 않도록 완충작용을 하며, 융털같이 부드러운 재질의 윤활막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척추·관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 척추와 관절은 특히 우리가 움직이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종종 교통사고 등으로 척추를 다쳐 몸에 마비가 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척추 안에 들어 있는 중앙신경인 척수가 손상됐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길게 이어진 척수에서 나온 신경은 척추뼈 양옆의 작은 구멍인 추간공 사이로 빠져나와 온몸으로 뻗어나간다.  수많은 신경이 가지를 뻗어 뇌의 명령에 따라 온몸을 움직이게 하거나 몸의 다양한 감각을 뇌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척추를 다치면 온몸의 감각 및 운동 정보를 전달하는 신경이 손상돼 몸을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척추뿐 아니라 관절 역시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워진다. 관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딱딱한 뼈와 뼈가 맞물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설상 움직인다 해도 심한 마찰로 인해 걷기만 해도 뼈가 쉽게 부서지거나 변형된다. 관절은 우리 몸에서 유일하게 혈관이 닿지 않는 부분으로 한 번 손상되면 잘 회복되지 않는다. 세월의 무게가 척추·관절을 망친다 척추와 관절에 문제가 생기는 원인은 다양하다. 바르지 못한 자세를 취하거나 척추·관절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건강을 악화시킨다. 그런데 아무리 조심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노화다.  우리 몸은 20대부터 본격적으로 노화되는데, 척추·관절 역시 예외가 아니다. 피부가 50~60대에 들어서면서 두꺼워지고 생기를 잃듯, 척추와 관절에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 척추의 경우 노화가 시작되면 점점 두꺼워지는데, 이때 척추뼈에는 이전에 없던 불필요한 가시뼈들이 자라게 된다. 이 가시 모양의 뼈가 척추뼈 안의 중앙신경과 신경 가지를 눌러 다양한 척추질환을 유발한다. 노화에 따라 골밀도가 낮아지는 것도 문제다. 골다공증이 있으면 척추뼈에 구멍이 생겨 중력과 체중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쉽게 무너지고, 이때 튀어나온 척추뼈가 신경을 눌러 또 다른 질환을 야기하는 것이다. 척추뼈의 유연한 움직임을 책임지는 디스크와 관절 역시 노화에 따라 달라진다. 나이가 들면 디스크와 관절 속 수분이 점차 빠지게 되는데, 디스크와 관절이 딱딱해져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 척추나 관절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대와 힘줄, 근육 역시 딱딱해지고 두꺼워진다. 이 경우 인대와 근육, 힘줄이 척추뼈들을 단단히 잡아주지 못해 작은 충격에도 쉽게 균형을 잃게 된다. 결국 노화는 척추와 관절, 그리고 이들을 지탱해주는 구조물에 영향을 끼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숫자로 보는 척추·관절질환 연도별 허리 목디스크 입원 환자 수 99.04% 관절 환자들이 대부분 두 가지 이상의 관절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절전문 세정병원에서 2010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관절수술을 받은 환자 6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99.04%인 623명이 두 가지 이상 복합관절질환을 앓고 있었다. 관절질환 중에서도 특히 연골연화증과 퇴행성관절염 환자가 다른 관절질환을 함께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문가들은 관절질환자들이 관절질환을 방치하거나 잘못된 치료를 받아 또 다른 관절질환으로 이어진 것으로 설명했다.   스마트폰 그림 270만5566명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13년 디스크로 입원한 환자는 270만5566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4년 전 환자 수인 224만259명과 비교했을 때 연평균 5.3%씩 환자가 늘어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2010년 목디스크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전문가들은 이 시기에 스마트폰 사용이 본격화된 것을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엠블런스 그림 267만명 자세를 바꿀 때마다 "아이고 무릎이야"를 외치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무릎관절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이 2009년 235만 명에서 2013년 267만 명으로 약 1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깨통증질환 환자도 급격하게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오십견 등 어깨통증질환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사람은 210만 명으로, 2006년 137만 명에 비해 약 53% 증가했다. 척추와 의사 그림 73.1% 지난해 국내에서 입원 환자가 가장 많았던 질환이 기타 추간판장애(허리디스크)인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허리디스크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지난해 27만9000명으로 5년 전보다 11만8000명(73.1%) 증가했다. Chapter 2 당신의 이런 생활습관, 척추·관절을 망친다 물건 들 때의 모습 ◈ 물건 들 때 바닥에 있는 물건을 들어 올릴 때 허리를 앞으로 구부정하게 굽힌 채 팔을 몸에서 멀리 뻗으면 척추가 활처럼 휘면서 무게 부담을 더 크게 느끼는 상태로 변한다. 물건의 무게가 대부분 척추에 가해지는 것이다. 물건을 들 때는 허리를 곧게 펴고 한쪽 다리를 약간 앞으로 내민 뒤 무릎을 약간 구부려야 한다. 자전거 탈 때 ◈ 자전거 탈 때 자전거를 탈 때 페달에 놓인 발의 위치가 안쪽이나 바깥쪽을 향하면 무릎관절이 뒤틀려 부담이 가해진다. 페달을 굴릴 때 다리가 11자가 될 수 있도록 발을 똑바로 놔서 무릎이 자전거 안쪽이나 바깥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안장 높이도 잘 조절해야 한다. 안장에 앉아서 뒤꿈치를 페달 위에 올려놓고 최대한 펴거나 살짝 구부러지는 정도가 좋다. ◈ 걸을 때 발을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바깥을 향하는 팔자걸음은 발에 체중이 골고루 분산되는 것을 막는다. 이로 인해 무릎관절과 인대, 근육에 부담이 가해진다. 걸을 때마다 무릎 각도가 틀어지는 것도 문제다. 걸을 때는 양발이 평행하도록 놓고 뒤꿈치에서 발바닥으로, 발바닥에서 발가락 순으로 바닥에 놓이도록 해야 한다. 보폭은 자신의 키에서 100㎝를 뺀 것만큼을 유지하면 된다. 누울 때의 모습 ◈옆으로 누울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손으로 목을 받치면 목의 곡선이 비뚤어지면서 목뼈 주변 근육이 경직된다. 이런 자세를 오래 유지하면 목뼈를 지탱하는 인대나 근육이 손상될 수 있다. 누울 때는 천장을 보고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린 채 다리를 쭉 펴는 게 좋다. 옆으로 눕고 싶다면 베개를 베고 무릎을 조금 구부리거나 양 무릎 사이에 베개를 끼는 게 좋다. 앉을 때 모습 ◈앉을 때 바닥에 앉는 자세는 관절에 좋지 않다. 책상다리를 하거나, 무릎을 꿇고 앉거나, 쪼그려 앉으면 무릎관절이 과도하게 구부러지며 뒤틀려 부담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되도록 딱딱하면서 높은 의자나 소파에 앉고, 앉을 때는 다리를 직각보다 크게 펴는 게 좋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 침대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펴서 벌떡 일어나면 허리가 갑자기 격하게 구부러지면서 접질리기 쉽다. 누운 상태에서 양손을 옆으로 놓아 상체가 약간 돌아가게 만들고, 그 상태에서 팔에 힘을 주면서 무릎을 굽혀 일어나야 척추에 부담이 덜하다.  빨래 널 때 모습 ◈ 빨래 널 때 빨랫줄이 높이 있어서 머리 위로 팔을 자주 올리면 어깨에 있는 회전근개라는 근육이 상할 수 있다. 게다가 높은 곳에 그냥 손을 뻗는 게 아니라 빨래 너는 동작을 취하게 되므로 허리가 젖혀져 척추에도 무리가 간다. 높은 곳에 빨래를 널 때는 반드시 의자 등을 밟고 올라가서 빨랫줄이 어깨나 눈높이에 맞춰지도록 해야 한다. Chapter 3 척추·관절에 대해 궁금했던 몇 가지 Q 허리디스크가 있는데, 아팠다 안 아팠다 해요. 걷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가도 어느 순간 통증이 싹 가라앉아요. 그러다 잊어버릴 때쯤 다시 통증이 시작돼요. 치료가 필요할까요? 이승철(바른세상병원 척추센터장) 이승철(바른세상병원 척추센터장) 물론입니다. 허리디스크는 대부분 서서히 진행되며, 망가지기 전에는 증상이 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퇴행성질환이라 부르지요. 초기에는 통증이 있어도 휴식을 취하거나 물리치료만 받아도 쉽게 낫습니다. 이후 증상이 생겼다가 좋아지기를 반복하고, 갑자기 통증이 심해지거나 통증 기간이 길게 지속되곤 합니다. 대부분 이때 치료가 필요하다 느끼고 병원에 오지만 이미 병이 상당히 진행된 경우가 많습니다. Q 시중에 파는 척추 의료기기가 효과 있나요? 척추건강을 되돌려준다던데요   이승철(바른세상병원 척추센터장) 이승철 근본적인 치료를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허리건강을 유지하고, 척추질환을 예방하거나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기구입니다. 예를 들어 온열마사지기의 경우 혈액순환을 도와 허리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조기를 잘못 이용하면 오히려 허리건강에 안 좋을 수 있습니다. 보조기는 약해진 허리근육 대신 허리를 지탱해주는 효과가 있어 통증을 일부 완화할 수 있지만, 장기간 이용하면 오히려 허리근육을 약화시킬 수 있거든요. 따라서 전문의와의 상담 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Q 허리디스크는 가만히 두면 저절로 낫는다면서요. 너무 아파서 일상생활이 힘들 때 치료하면 된다던데 사실인가요? 이동엽 (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이동엽 (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허리디스크가 제자리를 벗어나 밖으로 튀어나왔더라도 우리 몸의 자가회복력에 의해 자연적으로 흡수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놔둔다고 무조건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환자의 병력, 상태 등에 따라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통증이 있을 때는 지켜보기만 하지 말고 정확한 검사를 통해 상태를 파악해야 합니다. Q 척추 치료법은 크게 비수술과 수술로 나뉘는 것 같아요. 차이가 뭔가요? 임재현(나누리서울병원 병원장) 이승철 수술은 신체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비수술요법은 신체 구조를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약물을 넣는 등의 처치를 하는 것이죠.  임재현(나누리서울병원 병원장) 질병을 풍선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부풀어 오른 풍선을 터뜨려버리는 것은 수술이라면, 풍선에 구멍을 내서 바람을 빼 크기를 줄이는 것은 비수술 요법입니다.  Q 허리병을 치료하는 곳이 너무 많아서 헷갈려요. 한의원, 대체요법시술소, 병원이 모두 다른 원리와 방법으로 치료해요. 병원 내에서도 신경외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가 모두 허리병을 보고요. 어느 분야의 어떤 치료법을 택해야 하나요?   신규철(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신규철(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각 분야마다 질병과 원인을 이해하는 원리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야별로, 진료과별로 치료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큰 원칙은 있습니다. 당장 신경 마비가 있으면 수술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상태를 봐서 비수술치료를 먼저 해볼 수 있다는 겁니다. 허리병 치료는 인체에 부담이 덜한 작은(비수술) 치료부터 큰(수술) 치료법으로 단계를 거치는 게 맞으니까요. 작은 치료는 수술을 제외한 추나요법, 카이로프랙틱, 한방요법, 비수술요법 등이 모두 해당되겠죠. 작은 치료 때는 환자가 원하는 원리와 방법을 택하는 게 좋겠습니다. Q 비수술요법 중 몇백만원이나 하는 신경주사가 있잖아요. 지인이 말하길 스테로이드성 진통제를 뿌려서 통증만 덜어주는 것이라던데 사실인가요? 그럼 병이 근본적으로 낫는 게 아니고 진통 효과가 끝나면 통증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 아닌가요? (입을 모아) 아닙니다. 신경주사에 쓰이는 스테로이드제는 단순 진통 효과뿐 아니라 신경의 부기와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를 내므로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합니다. 또 염증이 완화돼 통증이 줄어들면 아파서 못 펴던 허리를 펼 수 있게 돼 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아파서 못 하던 운동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척추를 지탱하는 주변 근육을 키울 수 있어 척추가 건강해집니다. 병 상태에 따라 신경주사를 맞고도 통증이 재발하는 경우가 있지만, 효과가 분명히 있고, 주사치료 자체가 몸에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충분히 시도해볼 만합니다. Q 50대인데 등이 약간 굽었어요. 자세만 바르게 하면 다시 곧게 펼 수 있을까요?  신규철(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신규철 허리 문제는 없는데 단순 자세가 불량해서 허리가 굽은 것이라면 자세를 교정하는 것만으로 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척추뼈가 구조적으로 이상하거나 척추 신경이 압박돼 허리를 펼 때 아프거나 허리를 펼 때 쓰이는 근육이 약화되는 등의 원인으로 인해 허리가 굽은 것이라면 근본 원인을 제거해야 허리를 펼 수 있습니다. Q 안마의자나 안마기기를 목이나 허리가 아픈 사람이 써도 되나요? 박예수(한양대구리병원 정형외과 교수) 박예수(한양대구리병원 정형외과 교수) 근육을 마시지하는 가벼운 안마 기능이라면 대체로 별 문제 없겠지만, 환자마다 병의 정도가 다르니 주치의와 상의 후 사용하는 게 안전합니다.  Q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나요. 딱히 통증은 없습니다. 관절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금정섭(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금정섭(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통증 없이 소리만 나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관절이 움직이면서 관절 속 압력이 달라져 기포가 생기고, 이게 터지면서 소리가 날 수 있습니다. 관절 주위 구조물이 서로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통증이나 불편함이 느껴지면 진료를 받아봐야 합니다. Q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이 너무 아파요. 무릎에 좋은 음식이 없을까요? 여우진(바른세상병원 관절센터장) 여우진(바른세상병원 관절센터장) 관절염 탓이라면 염증을 없애는 음식을 먹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건강의료정보 사이트 웹엠디(Web MD)가 관절염에 좋은 음식을 소개했는데요. 등푸른 생선인 청어, 정어리, 멸치에는 염증 유발 물질을 억제하는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호박, 고구마, 당근, 토마토, 고추, 오렌지 등에는 염증을 없애는 항산화제 플라보노이드와 카로테노이드가 들어 있고요. 통곡물인 현미나 보리를 많이 먹는 사람은 몸속 염증 수치가 현저히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리브오일은 염증 유발 물질 생성을 막는다는 연구가 있고요. 동시에 관절을 붓게 하는 염분 섭취를 줄이고 규칙적인 운동으로 염분을 배출해야 합니다. Q 관절염에 아쿠아로빅이 좋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근데 운동 후 오히려 무릎이 더 아파요. 이유가 뭔가요? 임동선(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임동선(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아쿠아로빅을 하면 물 밖에서 운동할 때보다 무릎에 실리는 체중 부담이 적어서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드니 좋습니다. 하지만 관절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운동 계획을 세우는 게 선행돼야 효과를 온전히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운동 방법 때문에 아플 수도 있고,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근육통이 생긴 탓일 수도 있습니다. Q 여름에 관절염이 심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인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습도와 관계가 없다고요. 사실인가요? 박예수(한양대구리병원 정형외과 교수) 박예수 기온과 기압의 변화에 따라 관절염 통증이 심해질 수 있다는 연구가 있지만, 반대로 날씨와 관절염 통증이 아무 연관 없다는 연구도 있어 논란이 되는 부분입니다. 해부학적으로 봤을 때 계절에 따라 관절염이 심해진다는 연구도 없습니다. Q 수영이 온몸에 좋다니 관절에도 좋을 거라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수영만 하면 어깨가 너무 아파요. 어깨에는 안 좋은 운동인가요?  손원수(나누리서울병원 관절센터 과장) 손원수(나누리서울병원 관절센터 과장) 수영은 전신과 관절 모두에 좋은 운동입니다. 걸을 때 사용되는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근력 운동도 되니까 요. 하지만 어깨가 잘 안 움직이면서 아프거나 회전근개가 찢어져 있는 등 어깨관절에 문제가 있으면 수영할 때 아플 수 있습니다. 정확한 어깨 통증의 원인을 파악한 후 수영을 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Q 어깨가 자주 빠져요. 많이 끼우다보니 요령이 생겼는지 점점 통증이 덜하더라고요. 이렇게 낫고 있는 게 맞는 거겠죠? 여우진 아닙니다. 어깨 탈구는 재발할수록 통증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증상이 더 악화된다는 뜻입니다. 어깨를 잘못 끼워 맞추면 주위 인대나 힘줄이 계속 자극받아 염증이 생기거나 근육이 손상돼 회전근개파열 등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처음 어깨가 빠졌을 때 팔걸이 등으로 어깨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즉시 병원을 찾아야 합니다. 전문의 도움 없이 빠진 어깨를 끼우다보면 파열된 어깨 조직이 원상태로 회복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습관적 탈구가 될 수 있습니다. Q 오십견이 있는데 밤만 되면 통증이 너무 심해져요. 어떻게 하면 통증을 줄여서 잠을 편히 잘 수 있을까요? 왜 밤에 더 심해지는 것인가요? 여우진 오십견 초기에는 어깨 관절을 감싸고 있는 관절낭에 염증성 혈관이 만들어지면서 통증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통증은 주로 밤에 나타나죠. 낮에는 어깨를 계속 움직이므로 근육이 풀리는데, 자려고 누우면 어깨 움직임이 없어지면서 근육이 굳어 통증이 심해지기도 합니다. Q 관절염이 있을때 붙이는 패치의 효과는 무엇인가요? 근본적인 치료에 도움이 되나요? 금정섭(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금정섭 통증을 줄이고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 패치는 관절염이 있을 때 먹는 소염제가 피부를 통해 흡수되도록 만든 제품입니다. 관절염 부위로 직접 스며들어 염증이 가라앉고 진통 효과가 납니다. 하지만 근본 치료법은 아닙니다. 관절염은 연골이 닳아 없어지며 생기는 증상이라 닳아 없어진 연골을 재생시키거나 관절 자체를 갈아 끼우는 시술 또는 수술이 근본 치료법입니다. Q 주말에 친구들과 야구를 했는데 팔꿈치가 아파서 쭉 펴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와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네요. 분명 너무 아파서 팔에 힘도 안 들어가는데요.  임동선(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임동선 팔꿈치에서 손으로 연결되는 힘줄 시작점에 염증이 생기면 그럴 수 있습니다. 통증이 심한데 초기에는 MRI에서도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골프엘보’ ‘테니스엘보’라 불리는 병입니다. 약물치료, 물리치료 혹은 주사치료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Chapter4. 척추·관절에 생기는 여러 가지 질환 [척추 편] 척추의 노화는 나이와 상관없이 찾아온다. 스마트폰을 오래 보고 있거나 허리를 구부리고 앉는 잘못된 자세, 구부정한 걸음걸이, 과도한 운동이 각종 척추질환을 유발한다. 척추질환은 척추뼈가 분리되거나 척추와 척추 사이에 있는 추간판에 문제가 생기거나 척추관이 좁아졌을 때 생긴다. 척추질환은 대부분 신경을 압박하기 때문에 통증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증을 잘 감지해 초기에 대처하면 허리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투과되어 척추가 보이는 그림 허리를 앞으로 굽히기 힘들면 '추간판탈출증(디스크)' 추간판이 돌출돼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추간판은 척추뼈와 뼈 사이에 있고, 척추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한다. 중앙에는 젤라틴 상태의 수액이 있고 주위에는 섬유륜(추간판을 감싸고 있는 조직)이 둘러싼 구조다. 척추뼈 사이에 있는 디스크가 노화되거나 충격을 받아서 추간판이 뒤로 밀려 신경근을 압박해서 통증을 일으킨다. 허리를 구부리는 잘못된 자세로 오래 앉아있거나 반복적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생기기 쉽다. 허리를 뒤로 젖히기 힘들면 '척추관협착증' 척추관이 좁아져서 허리에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척추관은 척추의 몸통과 뒷뼈 사이에 있는 둘째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다. 척수와 요추 부위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신경다발이 지나간다. 척추관이 좁아지는 원인은 노화다. 나이가 들수록 디스크의 수핵이 노화돼서 딱딱해진다. 이와 함께 척추를 감싸는 관절이나 인대도 두꺼워지면서 척추관이 좁아진다. 허리를 뒤로 젖히면 통증이 나타난다. 서 있을 때도 통증이 심한데, 척추관을 감싸고 있던 인대가 안으로 밀려 척추관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오래 걸으면 다리가 터질 듯 아프면 '척추전방전위증' 척추분리증이 심해지면 척추뼈가 흔들리면서 앞으로 미끄러진다. 이를 척추전방전위증이라 한다. 척추분리증이 아니어도 척추 주변의 근육과 인대가 약하면 척추뼈가 어긋나서 척추전방전위증이 생길 수 있다. 척추뼈가 앞으로 밀리면 추간판이 튀어나와 신경을 자극해 통증이 생긴다. 발병 연령층은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다. 허리부터 다리까지 통증이 있고 오래 걸으면 다리가 터질 듯 아파서 앉아서 쉬어야 통증이 사라지는 특징이 있다. 허리를 폈을 때 통증이 심하면 '척추분리증' 척추뼈와 뼈를 있는 ‘ㄷ’자 모양의 고리뼈가 끊어져 척추뼈가 분리된 경우를 말한다. 척추분리증이 있으면 척추가 불안정해 허리가 자주 아프고 불편하다. 앉거나 선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고 몸을 자주 뒤척인다. 태어날 때부터 연결 뼈가 붙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10대 환자들이 많다. 연결뼈가 끊어져 있어도 근육과 인대가 척추뼈를 받쳐주고 있어서 생활하는데 불편을 못 느끼는 환자도 많다. 심한 통증 없이 허리가 약간 뻐근하고 불편한 정도라면 물리치료만 받아도 충분하다. 허리가 앞으로 굽었다면 '척추후만증' 주위에 허리가 굽은 사람이 있다면 척추후만증 환자다. 척추후만증은 척추뼈가 뒤로 휘어져 있는 경우를 말한다. 주로 60대 이상에게 많이 나타난다. 나이가 들면서 척추를 받치는 인대와 근육이 약해지고 추간판이 납작해져 허리가 점점 으로 굽는다. 쪼그리고 앉아서 장시간 일하는 자세도 원인이다. 추간판탈출증이나 척추관협착증 같은 척추질환이 있는 환자는 시간이 지나면 척추후만증이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편한 자세를 취하다가 척추를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척추후만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구부정하게 앉는 자세를 버리고 틈틈이 허리를 뒤로 젖히는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좋다. [관절 편] 관절질환은 관절이 약해지거나 끊어져서 뼈와 뼈끼리 부딪혀 통증이 생긴다. 나이 들수록 관절이 약해져서 생기기도 하지만, 스포츠 활동을 하면서 관절에 손상을 입는 경우도 많다. 젊은 사람들은 운동하다가 다쳐도 그냥 방치해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관절질환도 척추질환과 마찬가지로 증상에 주의를 기울이면 초기에 잡을 수 있다. 여러 관절을 표시해 둔 전신 그림 책상다리를 할 때 무릎 안쪽이 아프면 '퇴행성관절염' 관절을 보호하는 연골이 점차 손상되고 노화로 인해 관절을 이루는 뼈와 인대에 손상이 일어나서 염증과 통증이 생겼을 때 나타난다. 등산이나 달리기를 하고 나서 무릎이 아프거나 무릎을 굽힐 때마다 뼈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난다. 책상다리를 하면 무릎이 굽은 상태라서 통증이 생긴다. 되도록 무릎에 과중이 실리는 행동은 삼가야 하고, 살이 찐 사람이라면 체중이 무릎 관절에 많은 부담을 주므로 조절해야 한다. 움직일 때마다 통증과 함께 ‘뚜둑’ 소리가 나면 '반월상연골판파열' 말 그대로 반월상연골판이 파열된 경우다. 반월상연골판은 무릎관절의 위뼈와 아래뼈 사이에 있으며 반달 모양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생긴다. 젊은 층은 과격한 운동으로 인해서 생기고, 40대 이상에서는 연골판에 퇴행이 일어나 찢어져서 통증이 생긴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통증이 있고, 무릎이 힘없이 꺾이거나 움직일 때마다 통증과 함께 ‘뚜둑’ 소리가 난다. 반월상연골판파열이 생기면 충격이 뼈에 그대로 전달돼 퇴행성관절염으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조기 치료가 중요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이 떨어져나간 느낌이 들면 '십자인대파열' 무릎 앞뒤에 십자 모양의 인대가 파열됐을 때 생긴다. 십자인대는 종아리뼈가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막고 무릎관절이 뒤로 꺾이거나 회전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십자인대파열은 점프하면서 착지를 잘못하거나 부딪쳤을 때, 운동하다가 넘어졌을 때 생긴다. 십자인대파열이 일어나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이 동반되고 무릎이 붓기 때문에 즉시 병원을 찾는 환자가 대다수다. 팔을 옆으로 들 때 아프면 '충돌증후군' 충돌증후군은 어깨관절뼈인 견봉과 어깨를 움직이는 회전근개근육 사이의 공간이 좁아져 서로 마찰하면서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무리한 어깨 사용으로 힘줄이 손상됐거나, 나이가 들어서 어깨의 힘줄이 약해졌을 때 나타난다. 팔을 높이 들 때나 뒤로 젖힐 때 통증이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 팔을 움직이면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 머리 위로 팔을 올리기 어려우면 '오십견(동결견)' 외부의 충격 없이도 어깨가 아프고 어깨 운동 범위가 제한되는 질환이다. 어깨관절을 둘러싼 조직에 염증이 생기거나 조직들이 달라붙어서 생긴다. 의학적 진단명은 ‘유착성 관절낭염’이다. 팔을 앞으로 들어 올리거나 바깥으로 회전하기 힘들다. 점차 어깨가 굳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50대 이후의 사람에게서 많이 발생한다고 해서 오십견이라고도 불린다. 어깨를 돌릴 때 바늘로 쿡 쑤신 것처럼 아프면 '회전근개파열' 어깨충돌증후군이 지속되면 회전근개근육이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게 바로 회전근개파열이다. 팔을 위로 들거나 뒤로 돌릴 때 아프다. 부분 파열일 때는 팔을 쓰는 데 불편함이 없지만 완전 파열일 때는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  Chapter5. 척추·관절질환은 시술해야 할까, 수술해야 할까? [척추질환 편] 추간판탈출증 대부분의 환자는 비수술적 치료로 좋아질 수 있다. 수술까지 하는 경우는 10% 미만이다. 탈출된 추간판이 오랜 기간에 걸쳐 흡수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증상이 없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물요법, 주사요법 같은 보존적인 치료로 효과가 없으면 수술이 필요하다. 추간판제거술이 대표적인 수술법이다. 비수술요법 몸이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 통증 등 증상을 완화시켜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 같은 약물을 사용하는 치료가 가장 흔하다. 약물로 호전되지 않을 때는 신경주사요법이 동원된다. 대표적인 주사요법인 경막외주사요법은 통증을 빨리 줄이는 효과가 있다.  스테로이드와 국소마취제를 척추신경을 감싸는 막 바깥쪽에 주입한다. 요즘은 주사치료의 일종인 신경성형술이 많이 시행된다. 꼬리뼈 끝 구멍에 가느다란 카테터를 넣어서 주사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인 주사보다 업그레이드되기는 했지만 신경을 누르고 있는 추간판은 직접 제거하지 못한다. 수술요법  약물과 물리치료, 주사치료 같은 비수술적인 방법을 6주 이상 했는데도 증상이 지속된다면 수술을 고려한다. 신경 압박이 너무 심해서 소변이나 대변 보는 기능에 마비가 오는 경우는 응급 수술을 해야 한다. 추간판탈출증의 대표적인 수술 방법은 추간판제거술이다. 추간판이 탈출한 부위를 제거해서 눌리고 있는 신경근을 풀어주는 원리다.  수술은 다양한 도구로 시도되고 있다. 많이 쓰이는 건 내시경과 현미경. 내시경 추간판제거술은 관절 내부를 보는 데 쓰는 내시경으로 척추 안을 보면서 탈출된 추간판을 제거한다. 조직 손상이 적다는 장점이 있지만, 가늘고 약한 기구만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제거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문제 부위에 내시경이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일 때 적용한다. 반면 현미경 추간판제거술은 대부분의 추간판탈출증 환자에게 시행되는 방법이다. 피부를 작게 절개하고 튜브를 삽입해 현미경으로 보면서 수술을 한다. 정밀하게 문제 부위를 제거할 수 있고, 피부 절개 부위가 작아서 회복이 빠르다.   척추관협착증 추간판탈출증과는 달리 비수술적 치료를 해도 잘 낫지 않는다. 허리 통증도 심하지만 다리까지 통증이 내려가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다.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약물치료, 물리치료, 운동치료 같은 보존적인 방법으로 완화시킨다. 이러한 치료로 효과가 없거나 통증이 심해서 걷는 것도 쉽지 않게 되면 수술이 필요하다. 비수술요법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다. 약물치료는 추간판탈출증과 비슷하게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를 사용한다. 신경조직 혈류를 개선시키는 약물을 추가로 쓰기도 한다. 이런 방법을 4~6주 정도 시행했는데도 호전되지 않으면 신경주사요법을 쓴다. 신경주사요법은 증상이 완화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협착이 심한 경우는 재발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몇 차례 시행했는데도 재발하면 수술을 고려하는 게 좋다. 수술요법 수개월 동안 비수술적 방법으로 치료했는데도 증상에 호전이 없다면 수술을 고려하는 게 좋다. 수술은 협착증 정도에 따라 방법이 달라진다. 단순하게 신경을 눌리는 곳을 넓혀주는 감압술과 감압술을 좀더 광범위하게 하면서 뼈를 고정하는 감압 및 유합술이 대표적이다.  감압술은 허리 피부를 최소 절개하고 현미경으로 보면서 신경관을 넓혀주는 수술이다. 신경 압박으로 생기는 척추관협착증은 단순감압술로도 호전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척추관협착증이라도 신경이 많이 눌려 있는 상태일 때는 관절까지 제거해야 한다. 이때는 척추가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감압술을 한 후 유합술을 시행한다.  유합술은 고장난 척추의 마디마디를 연결해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미 약해진 척추를 고정하려면 고도의 시술 능력이 필요하다. 예전엔 유합술을 하고 나면 회복에만 3개월 이상 걸렸지만 최근에는 기간이 단축됐다. 척추 안에 고정하는 기구가 발달해서 움직임에 필수적인 근육을 덜 건드리기 때문이다.   [관절질환 편] 퇴행성관절염 퇴행성 변화로 인해 관절을 이루는 연골이 손상되거나 닳아 없어져서 생긴다. 기계가 오래 쓰면 낡듯이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발생 자체를 완전히 정지시킬 수 없으며, 정상으로 복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치료 목적도 환자의 통증을 감소시키고  관절의 기능을 유지시키면서 더 이상 변형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변형이 이미 많이 진행된 경우는 수술로 교정해서 관절 손상이 더 빨리 진행되는 걸 막는다. 경과가 많이 지난 상황이라면 마지막 치료법인 인공관절치환술을 한다.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고 생활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비수술요법 보존적 치료 방법에는 운동치료, 약물치료, 주사요법이 있다. 운동은 근육운동 위주로 해야 한다. 근력이 강화되면 관절의 부하를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릎 관절염 환자는 허벅지 앞쪽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이 도움이 된다.  약물치료에는 진통 및 소염 작용이 있는 약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골관절염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확실한 약물이 없다는 게 문제다. 심한 통증이 계속된다면 관절 내 주사요법을 시행한다. 관절에 스테로이드 제재를 주입하면 일시적으로 통증이 감소하고 운동 범위가 늘어난다. 하지만 자주 사용하면 스테로이드가 관절 연골에 변성을 촉진시킬 수 있다. 3개월 이하의 반복 주사나 1년에 3~4회 이상 맞는 건 피하는 게 좋다. 수술 전 후 사진 수술요법 관절염에는 당장 수술을 권하지 않는다. 60세 이하 관절염 환자들의 경우라면 최대한 자기 관절을 보존하는 치료를 하고 난 뒤에 시행하는 게 좋다. 비수술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증상 호전이 없는 경우, 관절의 변화가 계속 진행돼 일상생활에 지장을 심하게 주는 경우라면 수술을 고려한다. 수술 방법은 관절염 정도에 따라 다르다.  퇴행성관절염 정도가 심하지 않거나 관절의 한 부분에서만 발생한 환자에는 절골술을 시행한다. 관절의 정렬을 바꿔줌으로써 체중이 가해지는 부분을 변경시키는 방법이다. 대개 60대 이전에 발생한 관절염에서 통증 완화의 목적으로 시행한다.  나중에 증상이 다시 나빠지면 인공관절치환술이 필요할 수 있다. 퇴행성관절염이 이미 많이 진행돼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경우엔 인공관절치환술을 고려한다. 닳아 없어진 무릎연골 대신 인체에 해가 없는 금속이나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인공관절을 넣는 방법이다. 통증이 효과적으로 감소하면서 변형된 관절이 교정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수명이 15~20년이라 향후 재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한다. 또 수술 후 감염이나 탈구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이 충분한 전문의와 상담 후 수술받는 게 좋다. 인공관절 수술 후에는 재활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재활운동은 인공관절 수명을 늘려주고, 관절 기능이 빨리 회복되도록 도와준다. 회전근개파열 만성적인 어깨 통증의 가장 흔한 원인인 회전근개파열. 어떤 원인으로 파열에 이르는 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심한 통증이 발생하므로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질환이다. 오랜 기간 방치하면 파열된 힘줄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 봉합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부분 파열의 경우는 일차적으로 비수술요법을 시행한다. 비수술치료를 해도 증상이 완화되지 않으면 수술치료를 고려한다. 관절경적봉합술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비수술요법 기본적인 비수술요법으로 약물치료 및 물리치료, 운동재활치료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재활치료다. 직접적으로 회전근개의 기능 회복을 돕기 때문이다. 운동재활치료는 먼저 수동적 운동으로 관절 운동 범위를 회복한다. 운동능력이 향상되면 점차적으로 주변 근육 간 균형을 잡으면서 근력을 증가시켜 나간다.  다만 무리한 재활운동은 오히려 회전근개 손상을 더 악화시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회전근개파열로 극심한 통증이 지속되는 환자에게는 스테로이드 제제를 주입하거나 신경 부위에 국소마취제를 주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테로이드 제제 주입은 회전근개파열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어 전문의와 상담을 거쳐서 결정하는 게 좋다. 수술요법 3~6개월 동안 비수술적인 치료를 했는데도 증상 호전이 없을 때 수술을 고려한다. 부분 파열이 아닌 전층 파열에 대해서는 수술치료가 기본이다. 수술은 관절경적봉합술이 일반화된 방법. 관절경적 봉합술은 피부에 4㎜ 미만의 작은 구멍을 두세 개 만들고, 초소형 카메라와 수술 기구를 삽입한 뒤 환부를 직접 살펴보면서 수술한다.  치료할 부위를 선명하게 확대해서 보기 때문에 정밀한 시술이 가능하다. MRI나 초음파로는 안 보이는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서 병의 진행 상태를 파악하는데도 용이하다. 절개 부위가 작고 정상 조직에 가하는 손상이 적어서 수술 뒤 회복이 빠르다. 수술 후에는 어깨관절이 굳는 것을 예방하는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어깨 힘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재활치료도 병행하는 게 좋다. /도움말 금정섭(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김재화(분당차병원 정형외과 교수), 박예수(한양대구리병원 정형외과 교수), 손원수(나누리서울병원 관절센터 과장), 신규철(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신동은(분당차병원 정형외과 교수), 여우진(바른세상병원 관절센터장), 이동엽(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이승철(바른세상병원 척추센터장), 이재철(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정형외과 교수), 이중명(분당차병원 정형외과 교수), 임동선(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임재현(나누리서울병원 병원장) /참고도서    
14    (참고자료) 2010년 조선족인구 통계분석 댓글:  조회:3082  추천:0  2014-11-25
2010年全国人口普查 - 朝鲜族人口统计分析 2014-01-21 朴光星、肖人夫 민족문화의 숲 ♦ 数据可以给我们的感性的认识带来一个清晰路径的呈现。本文以年龄、性别、地区、职业等角度提供了较为准确的数据,可以看出优势在哪里、问题在哪里、不足在哪里。   2010年全国人口普查 - 朝鲜族人口统计分析 朴光星、肖人夫(中央民族大学社会学副教授)   2010年朝鲜族分年龄、性别人口状况 年龄组 男 女 合计 性别比 人数百分比(%) 0-4岁 28930 27177 56107 106.5 3.1 5-9岁 23746 22575 46321 105.2 2.5 10-14岁 26218 25023 51241 104.8 2.8 15-19岁 42696 42723 85419 99.9 4.7 20-24岁 78947 78068 157015 101.1 8.6 25-29岁 74788 74053 148841 101.0 8.1 30-34岁 71074 66400 137474 107.0 7.5 35-39岁 81818 73874 155692 110.8 8.5 40-44岁 88666 82290 170956 107.7 9.3 45-49岁 96206 91797 188003 104.8 10.3 50-54岁 87015 85941 172956 101.2 9.4 55-59岁 73457 75919 149376 96.8 8.2 60-64岁 50959 55448 106407 91.9 5.8 65-69岁 33410 40731 74141 82.0 4.0 70-74岁 28431 36949 65380 76.9 3.6 75-79岁 15775 23684 39459 66.6 2.2 80-84岁 6030 11852 17882 50.9 1.0 85-89岁 1864 4505 6369 41.4 0.3 90-94岁 400 1081 1481 37.0 0.1 95-99岁 101 289 390 34.9 0.0 100岁及以上 4 15 19 26.7 0.0 总计 910535 920394 1830929 98.9 100.0 相关数据: 年龄中位数:42.12岁; 少儿系数:8.39%; 老年系数:17.01%; 出生性别比:108.3; 性别比:98.9 朝鲜族人口占全国总人口的0.137%,相对于2000年1923842人,占全国人口比例的0.155%。 2010年朝鲜族分地区、性别人口状况 地区 合计 男 女 人数百分比(%) 北京 37380 17437 19943 2.04 天津 18247 9303 8944 1.00 河北 11296 5358 5938 0.62 山西 663 316 347 0.04 内蒙古 18464 9016 9448 1.01 辽宁 239537 118896 120641 13.08 吉林 1040167 517257 522910 56.81 黑龙江 327806 164200 163606 17.90 上海 22257 10292 11965 1.22 江苏 9525 4920 4605 0.52 浙江 6496 3288 3208 0.35 安徽 1200 570 630 0.07 福建 2157 1088 1069 0.12 江西 543 226 317 0.03 山东 61556 31229 30327 3.36 河南 1457 664 793 0.08 湖北 1960 1025 935 0.11 湖南 1180 583 597 0.06 广东 17615 9118 8497 0.96 广西 2701 1417 1284 0.15 海南 973 456 517 0.05 重庆 637 331 306 0.03 四川 1548 787 761 0.08 贵州 664 318 346 0.04 云南 1343 698 645 0.07 西藏 26 18 8 0.00 陕西 1129 534 595 0.06 甘肃 559 273 286 0.03 青海 312 152 160 0.02 宁夏 403 207 196 0.02 新疆 1128 558 570 0.06 全国 1830929 910535 920394 100.00 2010年朝鲜族分年龄、性别人口状况(分城市、镇、乡村) 地区 城市 镇 乡村 小计 男 女 小计 男 女 小计 男 女 北京 35004 16203 18801 1385 706 679 991 528 463 天津 15971 8194 7777 1567 813 754 709 296 413 河北 5131 2517 2614 3693 1831 1862 2472 1010 1462 山西 543 264 279 77 33 44 43 19 24 内蒙古 8546 4136 4410 3605 1790 1815 6313 3090 3223 辽宁 166972 82205 84767 22379 11144 11235 50186 25547 24639 吉林 536972 262603 274369 185328 92808 92520 317867 161846 156021 黑龙江 109321 54028 55293 42267 21040 21227 176218 89132 87086 上海 18506 8439 10067 3527 1737 1790 224 116 108 江苏 8043 4132 3911 729 390 339 753 398 355 浙江 5071 2561 2510 1148 587 561 277 140 137 安徽 891 456 435 168 65 103 141 49 92 福建 1692 841 851 320 179 141 145 68 77 江西 262 107 155 218 86 132 63 33 30 山东 58215 29611 28604 1691 884 807 1650 734 916 河南 1216 567 649 109 52 57 132 45 87 湖北 944 453 491 317 151 166 699 421 278 湖南 908 448 460 144 76 68 128 59 69 广东 16873 8688 8185 408 233 175 334 197 137 广西 1786 949 837 710 364 346 205 104 101 海南 715 344 371 202 82 120 56 30 26 重庆 543 291 252 60 31 29 34 9 25 四川 914 457 457 365 195 170 269 135 134 贵州 417 191 226 96 49 47 151 78 73 云南 878 458 420 235 120 115 230 120 110 西藏 14 8 6 5 3 2 7 7   陕西 1010 477 533 98 44 54 21 13 8 甘肃 372 177 195 163 84 79 24 12 12 青海 242 118 124 48 24 24 22 10 12 宁夏 377 190 187 13 8 5 13 9 4 新疆 888 438 450 123 60 63 117 60 57 全国 999237 490551 508686 271198 135669 135529 560494 284315 276179 ------------------------------------------------------------------- 2010年朝鲜族15-64岁妇女平均活产子女数和平均存活子女数 15-64岁 妇女人数 活产子女总数 存活子女总数   小计 男 女 小计 男 女     55473 54870 28857 26013 54417 28563 25854   存活子女数占活产子女数的百分比:99.17 妇女平均活产子女数:0.99 妇女平均存活子女数:0.98 ------------------------------------------------------------------------ 2010年朝鲜族按生育孩次分的育龄妇女人数(2009.11.1-2010.10.31)   男 女 小计 百分比(%) 一孩 303 244 547 80.80 二孩 70 54 124 18.32 三孩 2 4 6 0.89 四孩 0 0 0 0.00 五孩及以上 0 0 0 0.00 合计 375 302 677 100.00 ------------------------------------------------------------------- 2010年朝鲜族分性别、行业的人口状况 行业 男 女 小计 百分比(%) 农、林、牧、渔业 11093 8049 19142 26.46 采矿业 323 85 408 0.56 制造业 5847 3364 9211 12.73 电力、燃气及水的生产和供应业 566 162 728 1.01 建筑业 3880 381 4261 5.89 交通运输、仓储和邮政业 2784 533 3317 4.58 信息传输、计算机服务和软件业 713 408 1121 1.55 批发和零售业 4831 5832 10663 14.74 住宿和餐饮业 3058 6042 9100 12.58 金融业 606 581 1187 1.64 房地产业 418 199 617 0.85 租赁和商务服务业 649 492 1141 1.58 科学研究、技术服务和地质勘查业 237 115 352 0.49 水利、环境和公共设施管理业 212 99 311 0.43 居民服务和其他服务业 981 1608 2589 3.58 教育 1268 1900 3168 4.38 卫生、社会保障和社会福利业 636 854 1490 2.06 文化、体育和娱乐业 555 346 901 1.25 公共管理和社会组织 1838 801 2639 3.65 国际组织 2 1 3 0.00 合计 40497 31852 72349 100.00 -------------------------------------------------------------------- 2010年朝鲜族分性别、职业的人口状况 职业 男 女 小计 百分比(%) 国家机关、党群组织、企业、事业单位负责人 2025 771 2796 3.86 专业技术人员 4527 5203 9730 13.45 办事人员和有关人员 3194 1533 4727 6.53 商业、服务业人员 9800 14057 23857 32.97 农、林、牧、渔、水利业生产人员 11034 8034 19068 26.36 生产、运输设备操作人员及有关人员 9868 2236 12104 16.73 不便分类的其他从业人员 49 18 67 0.09 合计 40497 31852 72349 100 ------------------------------------------------------------------- 2010年朝鲜族分性别未工作的人口状况   男 女 小计 百分比(%) 在校学习 5263 5641 10904 18.75 丧失工作能力 3269 4600 7869 13.53 毕业后未工作 967 784 1751 3.01 因单位原因失去工作 847 415 1262 2.17 因本人原因失去工作 1223 783 2006 3.45 承包土地被征用 239 163 402 0.69 离退休 7810 10110 17920 30.82 料理家务 949 9501 10450 17.97 其他 3348 2228 5576 9.59 合计 23915 34225 58140 100.00 -------------------------------------------------------------------- 2010年朝鲜族的死亡人口状况(2009.11.1-2010.10.31) 死亡人口 男 女 小计 城市 2717 1867 4584 镇 871 622 1493 乡村 2545 1715 4260 合计 6133 4204 10337 -------------------------------------------------------------------- 2010年朝鲜族分性别、受教育程度的6岁及以上人口   男 女 小计 百分比(%) 未上过学 5752 17037 22789 1.29 小学 97090 139782 236872 13.42 初中 390498 376501 766999 43.46 高中 235929 220637 456566 25.87 大学专科 69018 61621 130639 7.40 大学本科 73435 67907 141342 8.01 研究生 4727 4948 9675 0.55 合计 876449 888433 1764882 100.00 ------------------------------------------------------------------ 2010年朝鲜族分性别、婚姻状况的15岁及以上人口   男 女 小计 百分比(%) 未婚 18656 14401 33057 25.33 有配偶 39675 40137 79812 61.16 离婚 4057 3407 7464 5.72 丧偶 2024 8132 10156 7.78 合计 64412 66077 130489 100.00  
13    "중국공민"과 "중화민족" 댓글:  조회:3113  추천:2  2014-11-25
"中国公民"与"中华民族" : 一个朝鲜族青年对中国民族认同问题的思考 文/李旻 “新疆”话题反映的民族认同问题 凤凰卫视的著名评论员阮次山曾说过,对于新疆的恐怖活动,不应采用民族间关系的视角,而应该将其作为暴力犯罪来处理。3月1日的昆明恐怖袭击看似是这种暴力犯罪模式的延续,但在事发前后,有不少熟悉新疆内情的人开始撰文分析恐怖主义的社会根源和维吾尔族的社会危机,这些文章博得了一些人的赞同,但也有人抨击说这是在同情恐怖分子。诚然,任何“崇高”的政治目标或“迫不得已”的社会原因都不能为攻击无辜平民的行为提供辩护,但我们同样也不应该不分青红皂白地给那些分析社会根源的文章扣上“同情恐怖主义”的帽子,因为恐怖主义的产生确实存在着社会原因,如果我们将恐怖袭击全部归结为极端组织的策动和境外反华势力的支持,那就等于是违反了中学时期学得滚瓜烂熟的辩证法。事实上,这些文章在反映一个令人担忧的趋势,那就是:新疆的分离主义似乎日益得到维吾尔族的潜在支持,即正在获得某种群众基础。   这并非危言耸听,在这样一个信息飞速流动的时代里,我们对新疆社会状况的了解已远不限于官方宣传,很多人已经知道现实中的新疆和官方宣传中的民族大团结的景象相去甚远。民族间的和睦和团结是大家的共同愿望,但这种和睦和团结不应该建立在对现状的粉饰和回避上,而应该是建立在正视问题、解决问题的基础之上。前一阵网上介绍一本有关中国民族问题的博士论文时,采用了“他们为什么不认同中国?”这样一个标题。我觉得这种表达颇为切中要害。的确有一部分少数民族无法认同“中国”,而且比例一点也不小。这样一种“不认同”轻则导致对祖国的冷漠,重则会成为分离主义的温床。让我感兴趣的是,该文除了藏族和维吾尔族之外,还提到了我本人所属的群体——中国朝鲜族,也将其列入了不太认同“中国”的群体之中。 在我看来,一个民族内部的身份认同并不具有一致性。就拿朝鲜族来说,他们散居在全国各地,掌握本民族语言和汉语的程度参差不齐,不同的个体对中国的认同程度也是截然不同的,以偏概全地给他们的中国认同下定论显然不妥。但作为这个群体的一员,我在成长过程中可谓“阅人无数”,如果前面讲其他民族是道听途说、二手信息的成分比较多,那么对朝鲜族则是切身感受的成分比较多。所以我可以负责任的说,尽管不同个体间的差别巨大,但我们中的很多人都曾或多或少地经历过或正在经历认同方面的彷徨,对他们而言,“爱国”和“爱民族”都是一个不太清晰的图景。“是否爱国”是一个政治话题,大家不会否认“中国”,但我们可以在很多朝鲜族同胞的内心世界中感觉出他们对“祖国”、“母国”、“中国人”、“中华民族”等概念的迷茫。“他们为什么不认同中国?”或许是一个令人伤感的提法,但确实反映了中国的众多少数民族无法回避的认同问题。而要正确理解这个问题,恐怕要从解析“民族”概念的渊源开始。  “民族”为何物? 当前普遍使用的“民族”一词是源自西方的概念。在东亚的古典中,“民”和“族”常常是单独使用的,合二为一的“民族”一词却几乎不见踪影。我们知道,英文中的“民族”和“国家”都是nation这个单词。这说明,“民族”一词首先强调的是国民属性,而不是种族属性。根据西方的“一个国家、一个民族”原则,“民族”是一国公民之总和(尽管它通常有一个种族内核)。而对于一国内部不同血缘、不同文化的群体,西方人倾向于使用另一个概念——ethnic group,可译为“族群”、“族裔”等。按照这个标准,“中国人”是一个民族概念,而“56个民族”则是构成“中国人”的各部分的“族群”,这样的界定还是比较清晰的。但在实际使用中,“民族”、“族群”等概念很容易出现混淆,这让力求精确的西方人也频频挠头。  中国这边的情况就更复杂了。一方面,中国从西方引入了“民族”的单词(借自日语)和它的国民属性,但在界定民族概念的时候更倾向于斯大林的说法,即“民族是人们在历史上形成的一个有共同语言、共同地域、共同经济生活以及表现于共同文化上的共同心理素质的稳定的共同体”,也就是把拥有若干共同特性的历史共同体都算作民族。这样一来,“中国人”是民族概念,而构成中国人的56个族群同样是民族,造成了概念上的混乱。既然“中国人”是民族,而“56个族群”同样也是民族,这种同级别的概念之间就很容易造成相斥,而不是相容,而恰恰是这种概念上的混乱助长了中国少数民族的认同迷茫。在下面的分析中,我更倾向于使用西方的民族概念体系,毕竟是人家造出来的单词,这样可以尽量减少概念不清导致的混乱。同时,我也会努力兼顾我们中国对于“民族”的一般理解,不忽略它对“历史共同体”的强调。 被忽略的“中国公民” 现在,我们把关注点聚焦在“中国人”。上面已经提到,“中国人”是一个民族概念,它要求人们对其付出超出“国籍”的感情。与此同时,它首先又是公民概念,如果“中国公民”的认同不够牢固,那么作为民族的“中国人”也很难站住脚。首先从概念上讲,“中国人”这样一个民族无疑是“中国公民”的总和,这一点毋庸置疑。其次,从相互关系的历史上看,在欧美民族国家的发展过程中,公民身份和民族身份是相互推动的关系。“民族”在古代社会并不是人们最优先的身份,它常常被阶层认同所埋没,比如在欧洲的“贵族国际”时代,一个法国贵族宁可去认同日耳曼贵族,也不会把一个法国农民视为“自己人”。正是倡导平等的公民社会的发展,使人们不再受制于阶层身份,促使他们更加认同血缘和文化上的同胞。现代意义上的民族在政治层面的基本诉求就是民族内部成员之间的平等,这就需要广大的民众打破阶层的藩篱,从过去的臣民转变为公民,以平等的身份构建一个共同体。所以,民主革命和民族革命往往是遥相呼应的,一个国家的公民社会越成熟、人与人之间的平等越有保障,就越容易打造稳定的民族认同,这一点不管是在单一族群国家还是多族群国家均是如此。 公民身份和民族认同之间的这种共生关系放到今天的中国依然适用吗?我的回答是肯定的。如果一个民族国家内部的公民权利无法得到充分保障,民族成员之间存在着广泛的不平等,那么民族成员只能依靠自我牺牲的“高尚情操”来维系“爱国”、“爱民族”的感情,而如果民族认同只能依靠成员的道德自觉来维持,那必将是脆弱不堪的。有人可能会说,中国的历史进程有别于西方,民族认同的建构路径也不会一样。但要知道,目前我们使用的民族概念和民族国家的基本结构都是从西方引进的(连马列主义的民族观也可以视为西方的),我不认为中国可以绕开公民身份和民族认同之间的基本联系,独辟蹊径去构建中国特色的民族和谐。无论在西方还是中国,健康的民族认同都离不开公民意识的支撑,认同“中国公民”是认同“中国人”的基础。我们首先是通过“中国公民”这样一个共同的平台成为同胞的,如果剥离了这个平台,中国的各个族群会直接以“他者”、“异族”来看待彼此,作为民族统一体的“中国人”自然就会风雨飘摇。  所以,当中国的部分少数民族不认同中国,不愿当“中国人”的时候,必然是作为民族认同之根基的“中国公民”认同出了问题。更让人担心的是,公民意识淡漠不仅是部分少数民族的某些人所特有的问题,而是一个不分主体族群和少数族群的全民性问题。那些民族分离主义只是这一问题的极端表现,而作为主体族群的汉族又在多大程度上把中国公民身份当回事呢? 哪些因素导致中国人的公民意识如此淡漠?在这里,我只想谈两个显而易见的问题,一是教育,二是社会平等。中国的公民教育一直是被诟病的对象。政治课和思想品德课占据着中国的大量教育资源,但政治课的核心却不是公民权利和义务,思想品德课的核心也不是公民的良知,至于那么多教育资源都投入到哪里去了,大家心知肚明。公民意识是一个需要从小耳濡目染的东西,如果我们在课堂上听不到,在媒体上也看不到,那么我们的公民意识又从何而来呢?  “平等”是一个更为本质性的问题。如果脱离了法律和人格上的平等,脱离了权利和义务的平等,公民身份就会成为一个空壳。公民意识的匮乏在某种程度上就是中国社会存在普遍“不平等”的反映。我不是社会学家,不可能精确地说明中国社会怎么个不平等法,但个人认为,有一种东西比不平等的“现实”更可怕,那就是对不平等的“心理定论”。各种“X二代”文化、“屌丝”文化泛滥成灾,说明“起点不平等、机遇不平等”成为了很多民众心目中的“心理现实”。在这样一种社会环境下,中国人似乎依旧生活在古老的臣民模式中,尚未进入公民阶段。而且,随着经济条件的改善,人们通过频繁的国际交流发现中国的公民权利和国外的巨大差距,“中国公民”这样一种身份很难通过实实在在的公民权利来博得人们的认同。 社会平等问题不仅通过公民意识来影响民族认同,而且也会直接引发族群间的矛盾。中国当然存在着一些真实的民族不平等现象(比如限制某些少数民族持有护照,某些敏感职业不对少数民族开放等),但少数民族的心理放大作用也不容忽视。贫富差距扩大、特权阶层泛滥本是各个族群共同面对的问题,但这些不平等问题对主体族群和少数族群造成的心理影响却是不一样的。作为主体族群的汉族很自然地将其视为中国社会的普遍问题,但少数民族却很容易把普遍的不平等联想为局部的不平等,也就是民族差别待遇。顺便提一下马列主义的观点,按照其阶级分析思路,民族矛盾的根源在于阶级矛盾,只要阶级矛盾得到妥善解决,民族矛盾自然迎刃而解。这个看法显然是把问题简单化了,阶级身份和民族身份是各自独立的身份认同,即使以后进入没有阶级之分的“大同世界”,也不能消除人们心中那个“非我族类,其心必异”的心魔。但这个观点至少能给我们一个启示,那就是在一个阶层差别大大削弱了的、权利和义务基本实现了平等的公民社会,民族问题至少不会那么棘手。  被架空的“中华民族” 有人会问,我们不是还有一个“中华民族”概念吗?难道它就不能起到凝聚全体中国人的作用吗?我觉得,作为一个超民族的历史共同体,“中华民族”概念对于建构中国人统一的民族认同当然是有助益的。但正如我在前面提到的,现代意义上的“民族”和“公民”有着密不可分的内在联系,特别是像“中国人”这样的“国族(nation)”概念更是需要公民身份的平台,“中国公民”才是“中国人”的真正基础。如果“中国公民”这样一个基础认同都没有打好,那么其他构筑民族认同的方式都只能是空中楼阁。  事实上,前苏联也使用过一个超民族概念——“苏维埃人民”,但是当苏联在八十年代面临全面社会危机的时候,“苏维埃人民”并未能把苏联从崩溃的命运中解救出来。你可能会说,“中华民族”的历史根基要比“苏维埃人民”好得多,不至于那么不堪一击。的确,“中华民族”在一定程度上反映了客观历史事实,但它终究只是一种描述方式,而不是事实本身,甚至也不是全体中国人的共识(想起孙中山当年喊出“恢复中华”口号时,一开始是把其他族群排除在外的)。  极端民族主义者用阴谋论视角观察“中华民族”观念,认为它是民族同化政策的一部分,我无法认同这种看法。但即使我们用纯粹的善意去理解“中华民族”,它在整合“中国人”民族认同方面的功能也是值得怀疑的。它只不过是用一个外延更大的超民族历史共同体“包住”原先分散的族群认同,而正如前苏联的例子证明的那样,用这种灌输政治观念和历史文化观念的方式建构起来的民族认同必然经不起政治风向的转变。而且,对于藏、蒙朝这种自身拥有一套独立的历史描述体系的族群来说,过分灌输“中华民族”观念反而会适得其反。 通过上面的分析,我想要表达的是,中国解决民族问题的思路需要改变(不管是政府还是民众)。“中国人”是一个由很多族群组成的民族(或称国族)概念,它的基础是平等的“中国公民”身份。我们首先要通过法制建设和公民教育把“中国公民”这样一个认同基础打好,才能通过其他方式为民族认同添砖加瓦。但一直以来,我们连“中国公民”这个共同的平台都没搭好,就去用政治的、历史的、文化的方式搭建“中华民族”这个建筑,其结果常常是事倍功半,甚至是事与愿违。一个显而易见的道理是,公民的权利义务属于一般社会规则领域,在这个领域容易达成共识,而且也应该达成共识。但“中华民族”观念属于政治和文化领域,在这个领域很难达成共识,也不应该达成绝对的共识(如果还想保持国家的思想活力的话)。所以,如果国家舍弃“中国公民”这个必须达成共识的重要领域,而把过多的精力放在推广“中华民族”观念上,不仅会费时费力,而且还要承担遭遇反弹的风险。而在个人层面上,如果一个人(特别是少数族群)绕开“中国公民”这一基础而直接去思考“中华民族”,那只能面临更大的身份迷茫。 万事需要先打好基础再循序渐进,这是万古不变的道理。我们何不从认真培育中国公民意识做起呢?  小结 民族问题是这世上最复杂的问题,把它放到中国更是无比棘手。我不指望能用一个短短数千字的文章把中国民族问题的来龙去脉和解决方案说清楚,本文提供的只是一种思维角度,无法涵盖民族问题很多其他方面。但愿本文能为关心民族问题的读者提供有益的启发。 尽管本文主要谈论的是国家层面的问题,但在个人层面上,基本的道理也是一样的。国家需要先从“中国公民”开始打基础,个人也应该从基本的公民身份入手。相比于那些扑朔迷离的爱国主义和民族感情,公民的权利义务和良知都是确切而易于把握的。履行好自己的权利和义务,坚守公民的法律底线和道德底线,这些才是我们应该优先考虑的对象。在做好一个称职的“中国公民”的前提下,我们应该在民族情感方面享受更多的精神自由,无论你更喜欢自己的民族身份(中国人),还是更喜欢族群身份(**族),都是无可指摘的。最后,我希望中国所有的族群,特别是我自己的朝鲜族族群,不要去做被动等待社会变化的臣民,而是自觉培养公民意识、成为真正的公民、成为改变中国的正能量。
12    선인들의 품위있는 죽음 앞에서 배우는 것들 댓글:  조회:2826  추천:0  2014-09-17
한국인의 삶의 질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웰다잉(well dying)’이란 말이 유행한다. 그러나 이는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마무리는 아니다. 201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40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 조사에서 한국은 32위로 최하위권으로 평가됐다. 죽음에 무관심하거나, 이를 회피하거나 혐오하기 때문에 나온 결과로 보인다.   옛날로 돌아가 보자. 국난이 아닐 때 선비들은 어떻게 죽음에 품위를 부여했을까. 1836년 2월 16일, 경기도 조안군 능내리 마현. 병상의 다산 정약용은 편지를 쓴다. “…죽는다는 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버섯처럼 덧없는 것입니다. 생각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스스로 “두풍(頭風)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 썼듯 병마에 시달리던 때였다. 세상을 뜨기 6일 전 쓴 이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죽음을 의연히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품위는 어느 날 불현듯 생기지 않는다. 6년 전 그는 편지에 쓴다. “…인생이란 생각해보면 미리 정해진 것이 있는데, 무슨 후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천명에 붙이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군자의 도리입니다…”(『다산간찰집』)   퇴계 이황도 의연히 떠났다. “(경오년, 1570) 12월 병신일에 자제들에게 명하여 다른 이들의 서적을 기록해 돌려보내게 했다. …정오에 여러 제자들을 보았다. 선생은 ‘죽고 사는 이때에 아니 볼 수 없다’면서, 제자들을 불러 영결하며 말하기를 ‘평소 그릇된 식견으로 종일 강론한다는 것도 역시 쉽지 않았소’라고 했다. 경자일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도록 했다. 이날 아침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 하고 유시 초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일어나 앉아 편한 듯이 운명했다.”(『해동잡록』)   오늘날 선비의 전통이 끊어졌다지만 품위 있는 죽음의 전통이 가끔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사례 1=2007년 초겨울, 95세 김석기 옹은 눈길에 미끄러져 고관절이 부러졌다. 대수술 끝에 퇴원했지만 거동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인생 숙제가 얼추 끝났으면 의식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맞아야 한다’는 말을 나눴고 그날부터 식사량을 줄여나갔다. 이듬해 새봄이 올 무렵 목욕탕에 다녀온 뒤 음식을 끊고 물만 마셨다. 의식이 흐릿해지자 대학병원으로 옮겼지만 김옹은 링거를 못 꽂게 하고 큰아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안방에 누운 김 옹 옆에서 아들·손자들이 옛 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옹은 그만 가겠다면서 편하게 눈을 감았다. 96세. 장례 뒤 모인 자손들은 다시 통곡했다. 평소 그가 쓰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것들 때문이었다. 사망신고 때 필요한 절차 메모지와 통장·도장·주민등록증·금전출납부,그리고 주변 지인들과 얽힌 대소사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달력에도 졸(卒)한 날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런 모습은 죽음에 이르러 “나는 70세 이후 병이 있어도 약을 먹지 않았다. 대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평상의 일이다”라고 한 선비 기정진(1798-1879)과 비슷하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에게 죽음은 그렇게 품위 있게 찾아 오지 않는다.   #사례 2=L씨(76)는 2010년 여름에 동네 병원을 찾았더니 폐렴이라고 했다. 몇 달 치료해도 낫지 않아 정밀 검사를 받자 폐암 말기였다. 남은 시간은 6개월. 고령이라 수술도 안됐다. 가족은 그래도 항암치료, 방사능 치료를 했다. L씨는 점차 의식을 잃고 거동조차 못하는 상태가 됐다. 삭막한 병실에서 수개월 사투 끝에 그는 가족과 말 한 마디 못 나누고 숨을 거뒀다. L씨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하루 만이라도 여행하며 못 다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했지만 소원은 이뤄지지 못했다.   품격있는 죽음 맞이가 삶의 질 높여 정진홍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은 “우리 사회에서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고 말한다. “말년이 되면 우리 풍토가 죽음을 얼마나 황량하게 대하는지 절감하게 된다. 내 죽음이 존중받지 못하면 결국 살아온 삶이 평가절하되고 무화(無化)해 버린다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죽음이 정말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정진홍 편, 『웰다잉 전문지도 강사 매뉴얼』)  한림대 생사학 인문한국 연구단 오진탁 단장은 “진짜 문제는 사람들의 죽음 오해와 불행한 임종방식”이라고 했다.(‘의미있는 삶, 아름다운 마무리’ 창간호) 품위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가톨릭대 간호대학 박재순 교수는 존엄성·자기 조절·편안함·최적의 관계·적절성·죽음 준비·부담감소를 제시한다. 이런 방식이다.   “A씨(70)는 최근 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평소 1년에 한 번씩 유언을 작성했다(죽음 준비). 가족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솔직히 대화한 뒤 살만큼 살았다며(적절성) 적극 치료를 않고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자기 조절, 부담 감소). 잠시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 후 부인과 여행을 다녀왔고, 가족·친구·친지들과 감정을 나누고(최적의 관계) 재산 등에 대해 유언했다(죽음 준비). 임종 2주 전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의 도움으로 통증을 조절 받고 편안한 가운데(편안함) 죽음이 임박함을 인지하고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존엄성). 유가족들은 고인이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게 됐다.”(‘좋은 죽음의 개념 분석’)   그렇다면 한국 노인들은 ‘품위 있는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산정책연구원 아산서원 알럼나이 소모임 팀이 9월 6~10일 서울·경기·대구·부산·전북·경남 소재 경로당·노인정의 60세 이상 노인 74명을 대상으로 간이 조사를 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품위 있는 죽음이 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51.5%가 자연사·안락사·수면사를 꼽았다. 선조들은 품위사란 ‘죽음을 의식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임을 보여줬지만 오늘날은 ‘탈없이 죽는 것’ 정도로 격하된 셈이다. 품위사를 비교적 잘 아는 경우가 20.3%였다. 품위를 지키는 방식으론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연명 치료를 않는다”“죽음을 담대히 받아들인다”“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요란하지 않게 마무리한다”를 들었다.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다’는 답도 18.9%였다.   ‘품위 있는 죽음과 관련해 조상의 경험을 직접 접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거의 “없다”로 답했다. ‘품위 있게 죽기 위해 배우자나 자제와 대화하는가’라는 질문에 ‘없다’(64.9%)가 ‘있다’(31.0%)보다 많았다. ‘있다’고 한 경우 구체적으론 “치료 불가능하면 생명 연장만을 위한 처치는 말 것”“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 등을 함께 나눔. 나와 가족 모두 죽음을 천천히 준비하고자 함”“장례 절차나 비용에 대한 이야기를 함”“내가 아프게 되면 요양원으로 보내달라고 함”“죽으면 화장하라” 등이었다. ‘없다’고 한 이유는 “아프거나 특별히 죽음이 닥쳤다는 느낌이 없어서”“몸에 이상이 있다고 자식들에게 말하면 원할 때 죽지 못하게 할 것 같아서”“그냥 자다가 죽고 싶어서”“할 기회가 없어서”“말하는 게 두려워서”“자연스럽지 않아서” 등 다양했다.   죽음을 언급하기 어색해하며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분위기는 “삶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했던 공자의 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오늘날 고령화 사회는 품격 있는 죽음의 문제를 보다 자주, 공개적으로 언급하도록 요구한다. 알폰스 데켄의 말처럼 “죽음의 문제를 마주 대하는 것은 동시에 삶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됐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엔 잘 죽는 게 중요하다. 죽음을 관리하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다. [중앙일보 기사에서 발췌] (본문래원): http://www.memorialnews.net/mobile/section_view.html?no=5512
11    노부부의 황혼전쟁 댓글:  조회:3076  추천:0  2014-09-07
  노부부의 ‘황혼 전쟁’ ​ 은퇴 후 뒤집히는 집안 권력 … 남편은 화내는 아내 낯설고, 아내는 밥 달라는 남편 성가시다 …   자녀 독립 후 둘만의 19년, 준비 하시나요 한국 사회의 노인 인구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542만명(2010년)을 넘었다. ​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1인 노인 가구 못잖게 노인 부부가 함께 생존해 있는 기간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2010년 전체 가구에서 노인 부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39%. 자녀가 결혼 등으로 독립하고 부부만 함께 사는 빈 둥지 기간도 길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노부부가 서로 적응하지 못하며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한 집에서 살지만 대화도 식사도 함께하지 않는 ‘한 지붕 별거 생활을 하는가 하면, 뒤늦게 이혼을 고려하는70대 부부도 적지 않다. ​ 빈곤과 질환 외에 노년기 부부 갈등이 100세 시대의 또 다른 그늘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혼의 전쟁이다.   전문가들은‘100세 시대는 노년기가 길어지고, 부부가 둘이 지낼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라며 현재 노년기를 앞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 부부가 빈 둥지에서 함께 보낼 기간은 적어도 19년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 ★ 60∼70대 부부 ‘황혼의 전쟁’ 자녀들 출가 이후 둘만 사는 기간 평균 19년... "무슨 말만 하면 싸움, 날마다 지옥 따로 없어"   ★ 주부 이모(72)씨는 최근 제2의 권태기’라고 불릴 만큼 남편(74)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퇴직한 건 15년 전.   처음 4∼5년은 함께 여행 다니며 큰 갈등 없이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함께할 일이 없어졌다.   세 자녀가 모두 결혼하자 집에 둘만 있는 시간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씨는 복지관·주부대학을 나가며 활동반경을 넓혔다. ​ 반면 ‘복지관=경로당’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은 집안에 틀어 박혀 지내고 있다. 이씨는“집 밖으로 나갈 때 마다 남편의 잔소리가 심하다.   밖에 나갔다가도 집에 들어오기 싫어진다. 집에 아주 귀한애완견이 있는 것 같다”고 털어 놨다. 이씨 부부는 각 방을 쓴 지 8년째, 분가한 자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 이씨는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성격차이가 너무 심하다. 날마다 다투고 있으니 지옥이 따로 없다. 앞으로 갈등이 더 심해질것 같아 걱정”이라며 부부 관계 상담소를 찾았다. ​ ★ 공무원 출신인 정모(76)씨도 아내 한모(72)씨와‘한지붕 별거’생활 10년째다.   정씨는 연금으로, 아내는 가게 임대료를 받으며 돈 관리도 각자 한다.   텔레비전도 각 방에서 따로 본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주는 건 밥상을 차려주는 정도. 젊을 때부터 남편 정씨는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 ​ 아내에게 ‘끼어들지 마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한씨는 젊었을 땐 이런 말을 참고 견뎠다. 한데 이제는 달라졌다. 쌈짓돈을 모아 가게를 차리면서부터 목소리가 커졌다.   정씨가 무슨 말만 하면 같이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일쑤다. 아들·며느리·손자·손녀 등 10여 명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 정씨는 “무슨 말을 해도 싸움이 되니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 고령화 시대의 그늘은 질병과 빈곤만이 아니다. 부부 관계도 그중 하나다. 평균 수명이 늘고 자녀가 독립하고 부부만 사는‘빈 둥지 기간’이 늘면서 65세 이상 노년층 부부가 겪는 갈등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 ★ 100세 시대, 그리고 ‘빈 둥지 20년 시대를 맞아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2010년 인구 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542만 명. 5년 사이 노인 인구가 24% 급증했다.   노인 인구 비율은 11.3%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두 자리 숫자를 기록했다.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고령 사회(14∼20%)로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다. ​ 주목할 것은 고령화가 급속화 되면서 부부가 함께 생존하는 기간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2010년 기준 전체 부부 가구에서노인 부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39%인 것으로 나타났다. ​ ★ 한경혜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지난해 여성 정책 연구원이 ‘100세 시대 가족’을 주제로 연 여성정책포럼에서 (베이비붐)이전 세대는 자녀를 여러 명 낳고 수명이 짧아서 자녀가 독립한 뒤 남편과 아내 단둘이 사는 기간이 1.4년에 불과했다. ​ 그러나 소자녀, 수명 증가로 베이비붐 세대(55∼63년에 출생한 세대)의 경우 부부만 사는 기간이 19.4년 이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교수는 “자녀가 떠나고 부부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수명이 늘수록 부부 갈등과 이혼이 증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서울시 정보화기획단의 2011 혼인·이혼통계’는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 결혼생활 20년 이상의 황혼 이혼이 4년 이하 신혼이혼을 추월하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2011년 70대 부부의 이혼상담 건수는 모두 118건이었다.   전체의 2.28% 수준이지만 4∼5년 전만 해도 70대는 아예 건수를 셀 수 없었다. 100세 시대의 또 다른 그늘, ‘황혼의 전쟁’이다. ​ ★ 부부 고유의 관계로 남는 70대 고위 공무원 출신 70대 남편, 온화했던 아내 툭하면 불같이 화 내 남편은 자식들에게 "이혼하고 싶다', 40대 자녀 "이 정도인지 몰랐다" 당혹   ‘종심(從心)’.공자는 70세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어긋남이 없을 만큼 성숙하고 평온한 나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다르다. 70대 부부들의 갈등은 겹겹이 쌓인 세월만큼 더 두텁고 독설도 더 살벌하다.   고위 공무원 출신 임모(76)씨가 요즘 겪고 있는 갈등도 마찬가지.   최근 그는 분가해 살고 있는 자녀 2남2녀를 모은 자리에서 “요즘 너무 힘들다. 이혼하고 싶다”고 깊은 시름을 털어놨다. ​ 아주 사소한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아내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했다. 중년의 자녀들에게 ‘구조요청을 한 셈이다.   임씨의 차녀(45)는 “건강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가 몇 년 전부터 눈에 띄게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부모님 사이의 골이 이 정도로 깊은 줄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임씨는 또 “예전과 달라진 어머니의 변화도 당혹스럽고, 과거의 권위가 있던 모습은 온데 간데없이 하루하루를 힘겨워하는 아버지 모습을 보는 것도 안타깝다”고 했다. ​ ★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늘어 가는 고령 부부 65세 이상 542만 명, 5년 새 24% 증가65세 이상 부부도 전체 부부의 39%, 황혼 이혼이 신혼 이혼 추월   일단 부부가 둘이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크게 늘어난 것이 원인이라 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이호선 한국 노인상담 센터장(명지대 겸임 조교수)은 “현재 70대 부부들은 대부분 25세 전후로 결혼 했던 사람들인 만큼 평균수명을 80세로 볼 때 55년을 함께 사는 셈”이라고 말했다.   특히 70대 부부 관계는 50∼60대 때와는 현격히 다르다는 것.   50∼60대에는 은퇴 이후라도 경제적·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 자녀 결혼이라는 부부의 공동 과제도 남아 있다. 하지만 70대엔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두 사람이 보낼 시간이 늘어남으로써 부부 고유의 관계가 전면에 부각될 수밖에 없다. ​ ★ 은행원으로 정년퇴직한 정모(71)씨도 최근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경우.   정씨가 등산길에서 만난 50대 여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아내가 외도라고 여기면서 갈등이 심각해진 것.   하지만 아내는 “10년만 젊었어도 혼사 앞둔 애들 생각해서라도 덮었겠지만,   이 나이에 참고 살 이유가 없다며 강하게 이혼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개발원 최인희(노년학 박사) 연구위원은 “100세 시대는 인생의 후반기, 즉 노년기가 연장되고 가족생활 시기가 ​ 길어진다는 뜻”이라며, “노인 부부 가구가 증가하는 만큼 배우자와의 관계가 노년의 삶에 중요한 이슈로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정신적·신체적인 노화(老化) 역시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는 “흔히 나이 들면 사고가 더 성숙해지고 관대 해질 것이라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며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자기 고집이 세지고 잔소리가 심해진다”고 말한다. ​ 각자 많은 경험이 축적돼 있는 만큼 내가 옳다’는 생각이 더 굳어지고, 화를 낼 때조차 ‘나는 화를 낼만하다’고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노화로 두뇌의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감정 컨트롤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윤 교수는“노화로 두뇌 유연성이 떨어지면서 본래 경직된 성격인 사람은 경직성이 더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뇌세포 손상이 병적인 단계(치매)로 접어들면 감정 통제가 안 돼 공격적인 성향이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실제로 한 치매 환자는 처음에는 기억력이 나빠지는 정도로 증세가 나타났다가 급기야 부인을 구타한 경우도 있다.   치매가 아니더라도 우울증 스트레스 계에도 공격 성향이 높아지기도 한다.   남녀 호르몬의 변화로 여성은 나이 들수록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대범해지는 반면, 남성은 차분해지고 활동성이 줄고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 ★ 김종우 경희대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갱년기를 넘어서면 여자는 ‘양’으로 변하고 남자는 ‘음’으로 바뀐다”며 “70대 여성들은 화병이 많고, 남성들은 우울증이 많다”고 설명했다.   경제권의 변화도 갈등의 씨앗 문제의 원인, 여성 72% "남편 돌보는 기간 늘어 갈등" 자녀 출가로 완충공간도 사라져, 경제권   이전과 호르몬 변화도 한몫 남성들이 퇴직 후 경제권을 잃으면서 가정 내 권력 관계가 역전되는 것도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특히 남성이 부부 관계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다.   대부분의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힘(경제력)을 잃고 의식주 생활의 상당 부분을 아내에게 의지하고, 아내가 보살피는 불균형한 관계가 감정의 골을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이 남편-아내의 역할에 대한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갖고 있고, 가족생활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실제로 우리나라 여성 10 명 중 7명은 평균수명 증가로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부부간 갈등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 ★ 지난해 11월 보건사회연구원이 대통령소속 사회통합위원회와 공동으로 한‘저출산·고령화 사회갈등·국민인식 조사’에서 여성의 71.9%가 남편을 돌봐야 하는 기간이 길어져 부부갈등이 발생할 것’이라고 답했다.   ‘남편 돌봄’으로 갈등이 생길 것으로 내다본 남성은 66.4%로 나타나 남녀 의식 간에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로에게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보상 심리’는 드러나지 않지만 부부간의 골을 더 깊게 만든다. ​ ★ 전업주무 이모(71)씨는 30대 때 남편으로부터 겪은 상처가 크다. 당시 남편은 누가 봐도 외도로 오해할 만한 사건을 일으켰지만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넘어갔다.   이씨는 “남편이 그때 제대로 사과를 했더라면 이 정도는 아닐 거다. 그 일이 아직까지 항상 날 괴롭히고 화가 안 풀린다”고 했다.   이호선 센터장은 “부부가 떨어져 사는 기러기 생활 역시 노년에 이러한 보상 심리를 유발시키기 쉽다”고 지적했다.   그뿐만 아니다. 사회적으로 지금의 노년 세대는 격동의 한국사를 관통해온 특별한 세대다. ​ 해방 전에 태어나 1960∼70년대에 사회에 진출한 세대로, 가부장적 유교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국전쟁과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세대다.   남편은 가족과 대화하거나 여가를 즐기지 못했고, 아내는 가사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지난 30년 동안 사회가 크게 변했다. 여권이 신장하고 이혼도 급증했다.   윤성은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지금의 노년 세대, 특히 70대는 은퇴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취약한 사회적 안전망에 어느 것 하나 보장된 것이 없는 사각지대에 놓인 최초의 세대”라고 말했다. ‘노년의 삶에 대한 문화적인 각본 없이 노년을 맞아버린 세대’라는 것이다.   ★ 노후자금만으로 안 돼 … 돈만으로 안되는 노후준비, 남편들 가부장 탈피해 가사 나누고 밥세끼 집에서 먹으려하면 안 돼, 40∼50대부터   배려하는 능력 길러야 전문가들은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노년기 부부관계가 삶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정혜 고려대 부부상담센터소장(심리학 교수)은 과거 70대는 ‘인생의 마무리’로 인정받았고 부부관계도 조금만 참으면 종지부였다.   하지만 이제 70대 부부는 20년은 더 살아야 할 커플이다.‘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마음가짐으로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성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남편들이 가부장적 태도를 버리고 가사 분담에 적극 나서야한다는 것. ​ ★ 박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위원은 “남편은 아내도 나이 들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하루 세 끼를 집에서 챙겨 먹으려는 욕심은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직접 챙겨 먹기 힘들면 하루 한 끼쯤은 외식이나 복지센터에서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 ★ 윤대현 서울대병원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소통능력’과 ‘유연성’이다.   윤 교수는“노년 삶의 질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며 “노후 준비는 돈만으로 안 된다. 소통 능력은 갑자기 키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40∼50대 때부터 유연하게 사고하고,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는 능력을 키워야 노년의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말했다.   문제가 심각하다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각 지역 노인복지회관·사회복지회관· 건강가정지원센터에는 다양한 부부상담 프로그램이 있다.   우울증 단계에 있는 경우에는 전문의와 상담하고 약물 처방을 받아야 한다. ​ ★ 이호선 센터장은 “남은 삶을 어떻게 건강하고 의미 있고 성공적으로 보낼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상담에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적어도 1년 이상 투자를 한다는 마음으로 노력하면 반드시 좋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가족 단위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100세 시대를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사회적 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100세 시대=노년기 장기화라는 점을 감안해 세부적인 정책 준비가 필요하다.   ★ 장혜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10년 현재 전체 부부 가구에서 노인 가구가 39%였지만 2030년에는 54.2%에 이를 것”이라며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지역사회·범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고령자를 위한 일자리를 비롯해 다양한 지역사회 참여 프로그램, 노년기 부부관계 전문 프로그램 등을 적극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옮긴글 -  
10    행복한 노년, 아름다운 노화, 품위있는 노후. 댓글:  조회:3335  추천:0  2014-08-16
행복한 노년,  아름다운 노화,  품위있는 노후.    평생 경험해 왔듯이 삶에는 많은 파란과 굴곡이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즐거워야 한다. 노련한 경륜으로 현명히 대처해 나가면 아름다운 노경이 될 수 있다.    노령의 시간을 공포와 원망으로 얼룩지게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희망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1. 긍정적인 마인드 남은 시간을 죽음의 준비가 아니라 삶의 설계로 꾸며라    2. 자신에게 정성을 다해 향후 50년을 쓸 수 있는 몸을 만들어라.    3. 고독도 아름답게 인간은 누구나 홀로 태어났듯이 최후에도 홀로 남는 법을 익혀라. 모든 인연은 시절의 고리에 얽혀 있다가 고리가 풀리면 홀로가 된다.     4. 하고 싶은 일 사노라고 참고, 미뤄두었던 일의 궁금한 실타래를 주저 없이 풀어라 가보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었던 일, 먹고 싶은 것들을 망설일 필요가 없다.    노년에 망설이는 것은 문제가 된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5. 말년의 동반자 일의 동반자. 여행의 동반자, 사랑의 동반자, 담소의 동반자, 취미의 동반자, 함께할 때 즐거움을 더할 수 있는 친구는 노년의 보배다. 정성으로 관리하며 시간과 공간과 경제적인 덕을 지성으로 베풀어라.     6. 가족과의 관계 가족간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고 시간의 공유분을 만들어 소통의 거리를 좁혀라. 인간관계는 언제나 손익의 계산법이 서로 다르다. 섭섭함이 없도록 해야한다.    7. 飮水思源 살면서 죄 짓지 않은 이 있겠는가. 세상은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아낌없이 풀고 가라. 마음 편한 후편을 위하여 음덕과 은공에 보답을 하여 빚을 갚고 마무리를 하라.    8. 無財七施 안색은 편안하게, 눈빛은 온화하게, 말은 공손하게, 귀는 신중하게, 손발은 부지런하게, 마음은 너그럽게, 몸은 건강하게.     9. 노경의 디자인   아름다운 삶에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버릴 것은 버리고 비울 것은 비우고 다듬고 가꿀 것들로  잘 꾸미면 만종과 같은 명화가 될 수 있다.  계절을 따라 피고지는 풀꽃 같은 자연스러운 호흡은 부끄럽지 않은 희망이 아닌가.    노년의 삶을 잘 준비하자. 작년 한국 인구의 평균수명은 77세로 남자가 73세, 여자가 81세였다. 환갑을 넘기기 어려웠 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이제는 장수하는 것을 걱정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길어진 노년을 잘 보내는 것이 가족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노년은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고, 죽어서 가는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다. 어두운 밤을 맞기 전의 황혼이 아니라, 하루 중 가장 아름답게 하늘을 물들이면서 새로운 하루를 잉태하고 스러져가는 저녁 어스름과 같은 시간이다. 같은 시간도 보기에 따라서 영원히 사라지는 어둠으로, 새로운 탄생을 예비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노년은 한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사회적으로는 수입이 없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또 가정적으로는 더 이상 부모를 부양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국가의 복지정책도 충분하지 않고, 젊은 세대들이 노년인구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도 부족한 상태이기에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이다. 국가가 풀어야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하고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만을 살펴본다.   노년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노년기를 앞둔 중년기부터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 물질적인것 만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 홀로 있게 되는 긴 시간에 대한 준비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까닭이다. 주변에서 살펴보면 노년의 가장 큰 문제는 물질적 빈곤임을 알 수 있다. 노년을 존엄하게 보내기 위해 물질은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가 책임질 일도 많지만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는 현재의 방식도 수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준비해야 할 것은 건강쇠약과 활동의 감소에서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외로움에 대한 것이다. 과거처럼 자녀들이 모시거나 자주 찾아뵙는 환경이 아니기에 그 시간을 부부가 혹은 혼자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노인들이 큰 도움을 받는 것을 보면 신앙은 노년생활에 필수조건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건강이 허락된다면 다른 어느 시기보다 왕성하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므로 적극적인 봉사활동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궁극에는 부부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 대한 준비이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단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은 돈독한 부부애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부터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이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다. 특히 남성에게 이 상황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가족과 사회는 건사해왔지만 정작 자신을 건사하지 못하였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는 상황에 살고 있다. 생존자체가 문제였던 시절에야 당장 내일도 예측하기 어렵지만 이제는 적어도 20년 이상을 내다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잘 알수 있으므로 노년을 신앙 안에서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다.    - 가톨릭대 인간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박 문 수(프란치스코)  [출처] 노년의 삶.....파블로
9    노년을 행복하게 누리기 댓글:  조회:2459  추천:1  2014-08-13
[노년을 행복하게 누리기] 1 아들을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성인으로 인정한다. 2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3 지나친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는다. 4 특히 아들이기 때문에 생각을 강요하거나 따르도록 해서는안 된다. 5 아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조언을 할지언정 방해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1 같은 성(아버지 아들, 어머니 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2 함부로 대하거나 부정적인 감정표현을 하지 않도록 한다. 3 시집 간 딸의 궁금한 만큼의 집안 이야기(좋은 이야기만)를 해준다. 4 시댁의 안부도 묻는다. 5 사위의 좋은 점을 열거한다. 6 외손자녀를 칭찬한다. 7 외손자녀에게 딸의 좋은 점을 이야기해 준다. 1 뭐든지 터놓고 이야기 한다. 2 며느리의 취미를 살려 준다. 3 시어머니도 취미생활로 외출할 시간을 자주 갖는다. 4 고부가 같은 신앙을 갖는 게 중요하다. 5 역할분담을 하는 게 좋다. 6 며느리와 같이 아들 흉을 본다. 7 내 물건을 살 때 며느리 것도 산다. 8 딸들에게는 무관심하게 군다. 9 내 돈도 쓴다. 10 저녁식사 후엔 부르지 않는다. 11 가끔 며느리의 친정 안부에 대해 묻는다. 1 딸의 입장보다 사위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준다. 2 딸, 사위의 가정사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3 백년손님이라기보다 아들처럼 편하게 대한다. 4 사위의 취미에 동화한다. 5 가끔은 딸의 흉을 같이 본다. 6 외손자녀에게 아버지를 닮았다고 이야기한다. 7 가끔 사위가 쓸 일용품을 사 준다. 8 사위의 세상사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준다. 1 용돈을 준다. 2 욕심내는 것을 사 준다. 3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준다. 4 어딘가 가고 싶은 곳에 데리고 가 준다. 5 부모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 준다. 6 부모에게 꾸중을 들은 후 위로해 준다. 7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 8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9 소꿉장난이나 게임의 상대를 해준다. 10 좋은 성적에 대해 칭찬해 준다. 1 손자, 손녀에게 부모역할까지 하려 들지 않는다. 2 손자, 손녀와 자식이 다툴 때는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3 모두에게 편한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면서 조언은 그들이 원할 때만 한다. 4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5 손자, 손녀 앞에서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6 자식의 교육방식에 대해 무시하거나 훈계하려 들지 않는다. 7 자식에게 꼭 따져야 할 말이 있다면 따로 불러 대화한다. 8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마련해 즐긴다
8    노년을 행복하게 가꿉시다. 댓글:  조회:2708  추천:2  2014-08-10
노년을 행복하게 가꿉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Wellbing)이라고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을 웰다잉(Welldying)이라고 하며, 사람이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웰에징(Wellaging)이라고 합니다.   사람년령에는 자연년령, 건강년령, 정신년령, 등이 있습니다. 인생의 4분의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또 4분의1은 성숙하면서 보내며, 나머지 4분의2은 늙어가면서 보냅니다.   사람이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어려운것은 아름답게 늙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일이 아닙니다.   첫째,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 사업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보통 네가지 고통이 뒤따릅니다. 질병, 고독, 빈곤, 그리고 신체공능 퇴화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삶에 대한 열정을 잃게 됩니다.   노년을 초라하게 보내지 않고, 우아하게 보내는 비결에는 열정,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핵심적인 요소는 열정입니다.   옛날 강태공은 80세에 나라의 승상이 되였습니다. 그는 80년동안 낚시질만 하면서 허송세월 보내다가 80세에 천자를 도와 상나라를 뒤엎고 주나라를 세웠습니다.   노년기에 열정을 가지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수 있습니다. 세계 력사상의 불후의 업적들을 살펴보노라면, 35%는 60-70대 노인들에 의하여 이룩되였고, 23%는 70-80대 노인에 의하여 이룩되였으며, 6%는 80대이상 노인에 의하여 이룩되였다고 합니다.   결국 세계 력사상의 불후 업적의 64%가 60대 이상 노인들에 의하여 이룩된 셈입니다.   둘째,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 사람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초라하게 되지 않으려면 사람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즉 사람관계를 자기중심이 아닌 믿음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실패한 원인에 대하여 통계하여 보았는데, 기술이나 지식 부족의 원인은 15%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85% 원인은 모두 잘못된 사람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람관계는 살아가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리기주의가 강해집니다. 모든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성격이 거칠어 지고 자아도취에 몰입하면서, 영웅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또는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비관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늙음은 초라할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람관계는 중심축이 무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 물질중심 사람관계는 나이 들수록 빈궁해 지고, 2, 사업중심 사람관계는 나이 들수록 무능해 지며, 3, 자기중심 사람관계는 나이 들수록 고독해 집니다. 4, 타인중심 사람관계는 나이 들수록 따르는 사람이 많고 5, 믿음중심 사람관계야 말로 아름다운 늙음이라 할수 있습니다.   셋째,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 신앙관계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신앙의 여부가 삶의 질을 확 바꾸어 놓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에 의지하기 보다 신앙에 의지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까이 하면 정신년령이 더욱 젊어 집니다.   유난히 아름다운 저녁노을 우리는 황혼이 짙어 갈수록 더욱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후반생은 여생이 아니라 말그대로 후반생이며 비록 인생 내림길이지만 인생을 멋지게 마치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원만한 인생은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늙어서는 아름답게 죽는 것입니다.
7    <청명상하도> 전폭그림 흠상 댓글:  조회:5081  추천:0  2014-03-29
国画清明上河图全图欣赏 作者:秩名 来源:中国画艺国画清明上河图 清明上河图局部一 《清明上河图》画卷,北宋风俗画作品。作者张择端,字正道,东武(今山东诸城)人。宋徽宗时为宫廷画家。少年时到京城汴梁(今河南开封)游学,后习绘画,尤喜画舟车、市桥、郭径,自成一家。《清明上河图》是他的代表作,曾经为宣和内府所收藏。绢本、淡设色,纵24.8厘米,横528.7厘米,现藏北京故宫博物院。该图描绘了清明时节,北宋京城汴梁以及汴河两岸的繁华景象和自然风光。作品以长卷形式,采用散点透视的构图法,将繁杂的景物纳入统一而富于变化的画面中,画中人物500多,衣着不同,神情各异,其间穿插各种活动,注重戏剧性,构图疏密有致,注重节奏感和韵律的变化,笔墨章法都很巧妙。全图分为三个段落。   清明上河图局部二 清明上河图局部三 清明上河图局部四 清明上河图局部五 首段,汴京郊野的春光:   在疏林薄雾中,掩映着几家茅舍、草桥、流水、老树、扁舟。两个脚夫赶着五匹驮炭的毛驴,向城市走来。一片柳林,枝头刚刚泛出嫩绿,使人感到虽是春寒料峭,却已大地回春。路上一顶轿子,内坐一位妇人。轿顶装饰着杨柳杂花,轿后跟随着骑马的、挑担的,从京郊踏青扫墓归来。环境和人物的描写,点出了清明时节的特定时间和风俗,为全画展开了序幕。   清明上河图局部六   清明上河图局部七   清明上河图局部八 清明上河图局部九 中段,繁忙的汴河码头:   汴河是北宋国家漕运枢纽,商业交通要道,从画面上可以看到人烟稠密,粮船云集,人们有在茶馆休息的,有在看相算命的,有在饭铺进餐的。还有“王家纸马店”,是扫墓卖祭品的,河里船只往来,首尾相接,或纤夫牵拉,或船夫摇橹,有的满载货物,逆流而上,有的靠岸停泊,正紧张地卸货。横跨汴河上的是一座规模宏大的木质拱桥,它结构精巧,形式优美。宛如飞虹,故名虹桥。有一只大船正待过桥。船夫们有用竹竿撑的;有用长竿钩住桥梁的;有用麻绳挽住船的;还有几人忙着放下桅杆,以便船只通过。邻船的人也在指指点点地象在大声吆喝着什么。船里船外都在为此船过桥而忙碌着。桥上的人,也伸头探脑地在为过船的紧张情景捏了一把汗。这里是名闻遐迩的虹桥码头区,车水马龙,熙熙攘攘,名副其实地是一个水陆交通的会合点。 清明上河图局部十 清明上河图局部十一 清明上河图局部十二   清明上河图局部十三 清明上河图局部十四 清明上河图局部十五 清明上河图局部十六 后段,热闹的市区街道:以高大的城楼为中心,两边的屋宇鳞次栉比,有茶坊、酒肆、脚店、肉铺、庙宇、公廨等等。商店中有绫罗绸缎、珠宝香料、香火纸马等的专门经营,此外尚有医药门诊,大车修理、看相算命、修面整容,各行各业,应有尽有,大的商店门首还扎着“彩楼欢门”,悬挂市招旗帜,招揽生意,街市行人,摩肩接踵,川流不息,有做生意的商贾,有看街景的士绅,有骑马的官吏,有叫卖的小贩,有乘座轿子的大家眷属,有身负背篓的行脚僧人,有问路的外乡游客,有听说书的街巷小儿,有酒楼中狂饮的豪门子弟,有城边行乞的残疾老人,男女老幼,士农工商,三教九流,无所不备。交通运载工具:有轿子、骆驼、牛马车、人力车,有太平车、平头车,形形色色,样样俱全。绘色绘形地展现在人们的眼前。   总计在五米多长的画卷里,共绘了五百五十多个各色人物,牛、马、骡、驴等牲畜五、六十匹,车、桥二十多辆,大小船只二十多艘。房屋、桥梁、城楼等也各有特色,体现了宋代建筑的特征。张择端的《清明上河图》是一幅描写北宋汴京城一角的现实主义的风俗画,具有很高的历史价值和艺术水平。
6    장백조선족자치현 조선족장례문화 이어간다. 댓글:  조회:4723  추천:0  2013-08-23
장백현 우량한 조선족장례문화 이어간다 편집/기자: [ 최창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12-31 08:33:38 ] 클릭: [ ]   향도계지도일군 교체의식 해마다 거의 한번씩 열리게 되는 장백조선족자치현 현성조선족향도계 계원대회가 새해 양력설을 계기로 12월29일, 장백허씨네 식당에서 소집되였다. 회의는 지난 1년간의 향도계사업과 3년간의 향도계 리사회사업을 총화한 기초상에서 기바꿈선거로 새로운 지도부를 내왔다. 그리고 새해의 장례직책을 짊어질 리사회 리사장, 총도감, 도감, 총무와 유사명단을 공포함과 동시에 교체의식을 진행했다. 회의는 또 장백조선족들의 사망원인에 대해 분석하고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존재하는 문제와 부족점을 찾고 금후 우리 민족의 장례를 보다 문명하고 간편하게 치를데 대해 연구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장백현당위와 현인대, 현정부, 현정협의 지도일군들과 전임 현장들이 회의에 출석, 다년간 조선족향도계가 장례를 아주 문명하게 치르고있는데 대해 높이 찬성하고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장례문화를 세세대대로 이어나갈것을 요구했다. 장백조선족자치현 현성조선족향도계는 장백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이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를 계승발양하고 세세대대로 이어 나가기 위해 설립한 군중성적인 민간조직이다. 자치현성립과 더불어 5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장백현성 조선족향도계는 시종 문명하게 장례를 치르고 사망자가족을 위해 돈을 적게 쓰고 그들의 뒤근심을 크게 덜어주어 사회의 한결같은 호평을 받고있다. 알아본데 따르면 장백현은 지금까지 향도계조직에 가입한 호수가 무려 2568여세대에 달한다.   새해 총도감 남경호씨 새해 리사장 김성원씨 기여가 많았던 선배님들 장백조선족자치현 조선족장례문화 이모저모  (원문)중국조선족상장문화의 변천에 관하여 염송심   들어가는 말:    상장문화는 인간이 사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일련의 사회활동 즉 사망관 臨終배려 喪葬儀式 造墓 立碑 祭祀 등 제반활동을 의미한다. 상장문화는 민족전통문화의 중요한 내용으로써 환경의 변화와 시대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한다.    조선족은 19세기중엽부터 20세기중엽의 100년간에 자연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조선반도에서 중국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월경민족이다. 그들은 중국동북지역에 이주한 후 주로 압록강 도문강 송화강 목단강 등 하천의 유역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하면서 점차적으로 크고 작은 집거구역을 형성하였으며 비교적 온정하게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보존하여 왔다. 하지만 조선족은 조선반도의 부동한 지역에서 이주하였기에 그들의 풍속습관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함경도식 경상도식 평안도식으로 규납할 수 있다. 조선족상장문화의 기본내용과 형식은 조선반도에서 유래 되였지만 부동한 시기 중국의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특히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중한수교 등 중대한 역사시기를 거치면서 생사관 가치관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내용으로부터 형식까지 비교적 현저하게 변화 되였다. 총체적인 추세는 번잡하고 봉건미신적인 내용과 형식이 많이 사라지고 현실적 문명적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본문에서는 조선족상장문화 관련문헌자료를 정리하고 연구한 기초위에서 필자가 다년간 동북지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조사연구 자료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조선족상장문화의 변천 및 그 원인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보려고 한다. Ⅰ 20세기 60년대 이전 조선족의 상장문화    조선족은 예로부터 상장례의를 중시하여 왔는데 이것은 영혼불멸관념과 조상숭배사상의 반영이고 또한 전통儒學孝사상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60년대 이전 조선족은 기본상 조선반도 민족의 전통적 상장예의 습관을 지켜 왔다. 그 현저한 특점으로 상여계와 토장을 들 수 있다. 1. 상여계    상여계는 조선족들이 상장儀式을 치르는 민간조직이다. 20세기 6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족마을들에는 거의 모두 상여계가 있었는데 18세 이상의 남성들은 모두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작은 마을에서는 몇 개 마을이 공동으로 하나의 상여계를 형성하였다. 상여계에는 尊位 都監 執事 所任 등 직무와 喪具를 보관하는 건물 喪輿房이 있었다. 존위는 마을에서 덕망이 높은 어르신이 맡는데 명예상으로는 가장 높은 권위자이지만 상장의식의 구체사무를 처리하지는 않는다. 도감은 상장의식을 지도하는 사람이고 집사는 구체적인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이며 소임은 도감의 심부름을 듣는 사람이다. 마을에 상사가 발생하면 먼저 존위에게 보고하고 존위가 도감으로 하여금 상가에 가서 상장의식를 지도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出殯하기전에는 집사가 상가에 가서 구체적으로 지도하고 도감은 오직 출빈하는 날에 상가에 가서 친히 지도한다.    상여방은 상구와 장례식에 쓰는 그릇들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보통 마을에서 5~6리 떨어진 위치에 짓는다. 상여는 관을 운반하는 도구로서 길고 짧은 나무토막과 包帳 仰章 등으로 구성 되였는데 보통 12명에서 18명이 메는데 상여군들은 상여의 양쪽에 서서 어깨로 상여를 메여 내간다. 한마을에 상사가 발생하여 장례식을 치를 때 상여계 계원들은 반드시 모두 참가하여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참가하지 않는 자는 벌금을 받는다. 상여계는 매년 년 말에 총결회의를 열고 일년간의 사무를 총결 짓는 동시에 존위와 도감을 改選한다. 20세기 60년대까지 조선족들은 대부분 상여계에서 장례식를 치렀다.    청말 부터 1931년 만주사변 전 까지 시기에는 중국조선족마을의 행정조직이 건전하지 못하였기에 상여계는 일면으로는 마을사람들의 상장의식를 치르는 호조합작 조직으로 공동체의 단결과 화목에 크게 기여하였고 일면으로는 마을사람들의 공덕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면 마을 사람들 중에 분쟁이 일어나거나 어느 가정에 불효자가 나타나면 상여계에서 해결하고 처벌 교육을 하였다. 일제가 동북을 점령한 후 상여계는 다시 상장의식만 치르는 민간조직으로 전환 되였다. 2. 토장습속     토장은 예로부터 조선족들이 시체를 安置하는 주요 방법 이였다. 조선족들은 마치 나무가 땅속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잎과 가지가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조상을 땅속에 정중히 모셔야 자손들의 안녕과 번영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20세기 60년대 이전시기 조선족들은 상사가 발생하면 모두 토장을 하였는데 그 장례식의 구체적 절차는 다음과 같다.    장례식을 치를 때 우선 먼저 喪主 主婦 護喪 祝 司書司貨 등 인물을 확정한다. 상주는 상제의 주요 대표인물로서 장례식의 전부 과정을 주관한다. 부모가 세상을 뜨면 장자가 상주로 되고 장자가 없으면 장손이 承重하여 상주의 역할을 한다. 아내가 사망하면 남편이 상주로 된다. 초혼이 끝나면 상주는 상복을 입는다. 父喪이면 왼팔 소매를 끼지 않고 母喪이면 오른팔 소매을 끼지 않는다. 주부는 장례나 제사 때 상주를 협조하는 여성을 말한다.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 초상에는 死者의 부인이 주부고 虞祭후에는 상주의 부인이 주부역할을 한다. 사자나 상주가 모두 부인이 없을 때에는 同姓친척중에서 選任한다. 호상은 장례식 때 상가집을 대신하여 여러 가지 사무를 처리하고 지도하는 총책임자인데 사자의 이웃이나 친구 중에서 장례의식에 익숙하고 성품이 믿음직한 남성을 선정하여 맡긴다. 축은 장례 때 각종 축문을 읽는 사람이고 司書는 訃告나 銘旌을 쓰는 사람이며 司貨는 장례에 필요한 비용을 관리하고 賻儀金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20세기 60년대 이전까지 조선족의 장례절차는 臨終 招魂 襲 小殮 大殮 成服 弔問 遷棺 發靷 出殯 安葬 등과 같았다. 臨終은 자식들이 부모님의 임종 시 신변에서 지키면서 유언을 듣고 사망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招魂은 사망이 확인되면 死者의 혼을 불러오는 의식이다. 사자의 먼 친척이나 친구가 사자의 옷을 가지고 지붕위에 올라가거나 집 앞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사자의 이름을 부르고 服- 服- 服-을 세 번 반복하여 웨치는것을 말한다. 초혼에 사용했던 옷은 지붕위에 올려놓았다가 출빈하는 날에 태우거나 대염을 할 때 관안에 넣는다. 초혼 후 상제들은 머리를 풀고 哭을 한다. 상장의식에서 사자의 부인 아들과 딸 며느리 장손 등을 喪制라 하고 그 외 친척들은 服人이라고 한다. 상제와 복인이 哭을 하는 방식은 좀 다르다. 상제는 "애고- 애고-" 하고 복인은 "어이- 어이-" 한다. 초혼부터 출빈까지 상가집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것을 금지하며 상제들은 세수를 하거나 이발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襲은 사자를 목욕시킨 후 壽衣를 입히는 절차이다. 보통 사자가 결혼 때나 환갑 때 입었던 민족전통복장을 입힌다.    小殮은 힌 천으로 사자의 몸을 싸고 동여매는 절차이다. 천을 싸기 전에 먼저 飯含의식을 치르는데 사자의 입에 물에 담가놓았던 쌀 3술과 동전 3매를 넣는 것을 가리킨다. 쌀을 넣을 때 "백석, 천석, 만석" 이라고 웨치고 동전을 넣을 때는 "백냥, 천냥, 만냥" 이라고 웨친다. 그 다음 솜으로 눈 귀 코 입을 막는다. 그 후 사자의 두 손을 교차시켜 배위에 얹혀 놓는데 남성은 왼 손을 위에 여성은 오른 손을 위에 놓는다. 시체를 동여맬 때 세 곳 또는 다섯 곳 또는 일곱 곳을 동이며 가장 많기는 열두 곳까지 동인다. 보통 사망당일에 초혼을 하고 그 다음날에 소염을 한다. 소염 후 시체를 七星板 위에 올려놓는다. 칠성판은 보통 넓이 40 센치메터, 길이 170 센치메터의 나무 반자인데 표면에 북두칠성과 비슷한 7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놓았다 하여 칠성반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체를 屛風 또는 包帳으로 막아놓고 식탁 위에 술 과일 고기 등 식품을 차려올린 후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낸다. 소염부터 출빈까지 제사상에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을 올리는데 이것을 上食이라고 한다.    大殮은 시체를 관에 넣는 절차이다. 조선족의 관은 보통 장방형인데 위부분에 "上"자 밑부분에 "下"자를 써놓거나 또는 화살표를 그려 앞과 뒤, 머리와 발 부분을 구별한다. 평안도식 관은 梯형으로 머리 부분이 넓고 다리부분이 좁다. 그리고 앞면에 "上"자를 쓴다. 보통 관의 길이는 1.8메터 넓이는 1.4메터 높이는 30센치메터이다. 조선족의 관은 지역과 관계없이 색을 칠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을 崇尙하는 민족특성이라고 본다.    成服례는 대염이 끝난 후 사자의 자녀들과 기타 친척들이 상복을 입고 치르는 의식을 말한다. 성복례 전에는 상주만이 상복 즉 힌 색 두루마기를 입었다. 성복례 때 상복은 남 상제는 머리에 힌 모자와 벼짚으로 만든 屈巾을 쓰고 몸에 소매가 넓은 麻布두루마기를 입고 왼쪽가슴에 麻布오래기를 꼽고 허리에 마포치마를 두르고 작은 다리에 脚絆을 치고 발에 마신을 신었다. 여 상제는 풀었던 머리 가락을 다시 올려 얹은 후 머리에 힌 천 오리를 매고 마 또는 벼짚을 꼬아서 머리를 동이고 머리위에 麻布片을 덮고 몸에 소매가 좁은 마포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 마끈을 매고 발에 마신이나 짚신을 신는다. 喪杖은 사망자가 남성이면 참대막대기를 짚고 여성이면 버드나무막대기를 짚는다.     성복례 후 弔問객을 접대한다. 조문객을 맞을 때 남상주는 마당에서 哭을하고 여 상제는 방안에서 곡을 한다. 성복례 전에는 조문객을 접대하지 않고 다만 사자와 관계가 좋은 친구들이 問喪을 할 수 있다. 문상은 술도 붓지 않고 절도 하지 않는다. 조문객은 문상 시 靈座앞에 술 한 잔을 부어 올리고 절을 세 번한 후 상주 및 복인들과 맞절을 한번 한다. 그 시기 조문객들이 가지고 오는 부의금은 보통 酒 초(臘) 挽章 등 이였다. 조문객의 조문이 끝난 후 성복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절차는 焚香 初獻 告祝 亞獻 終獻 侑食 등과 같았다.    遷棺은 관을 실내에서 상여에 옮기는 절차이다. 경상도와 평안도식 장례식은 관을 옮길 때 문턱 또는 창턱에 바가지나 사발을 엎어 놓고 관으로 눌러 깨뜨린다. 이런 풍속은 두 가지 상징의미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사자는 다시 이집의 밥을 먹지 않는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사자는 저승에 가면 완정한 食器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천관 시 문틀에 부닥치는 것과 문턱 두개를 넘는 것을 금지한다. 조선족의 전통가옥은 안 방문으로 천관할 수 있기에 문턱 하나만 넘는데 세 칸짜리의 만족 또는 漢族식 가옥은 문턱 두개를 넘어야 하기에 창턱으로 천관한다.    出殯은 관을 상여에 실고 묘지로 운반하는 절차이다. 상여가 출발하기 전에 發靷제를 지낸다. 靈柩를 상여에 실은 후 상여 옆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상제들이 男女老少 순서로 술 한 작씩 붓고 靈柩를 향하여 절을 세 번씩 한다. 제사가 끝난 후 상여가 출발하는데 상여가 집을 떠나는 것을 발인이라고 한다. 상여가 출발하기 전에 도감이 큰 소리로 축문을 읽는데 대체 그 뜻은 "靈柩는 지금 출발하여 幽宅으로 향한다. 낡은 것과 받은 선물을 모두 가지고 영원히 떠난다." 축이 끝나면 喪輿隊는 동시에 상여를 메고 앞으로 나간다. 조선족전통장례는 나이 많은 사람이 사망하면 好喪이라고 하여 출빈할 때 喪輿歌를 부른다. 상여를 안내하는 사람이 상여의 위 또는 앞에 서서 손에 銅鈴이나 힌 수건을 흔들면서 상여가를 두 마디를 부르면 상여대 회원들이 함께 副歌를 불러 호흡을 맞춘다. 주요 내용은 사자가 인간 세상을 떠나기 아쉬워하는 마음과 고향산천과 가족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기대 사항를 반영하였다. 길림지구 경상도식 장례의식의 상여가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引唱: 친인들아 나는 가노라. 우리는 지금부터 영별이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여기를 떠나 어디로 가는가? 북망산천이 나의 거소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저승까지 가는데 몇천리냐? 문밖을 나서니 咫尺에 있구나.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애들아 비통해하지 말아라. 생사병로는 인지상정이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후사는 너희들게 맡기노라. 화목하게 잘 지내다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내말 명심하고 잊지말아라. 내 몸은 이미 쓸모없는 존재로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달도 盈缺이 있고 별도 移轉하노라. 제비는 秋去春回하노라.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引唱: 래년 청명과 추석이 오면 산소를 모시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副唱: 헤-이-요, 헤-이-요, 앞으로 가자 헤-이-요. ……    상여는 때론 세 발작을 가고 두 발작을 후퇴하고 때론 걸음을 멈추고 가족과 친척들게 路費를 빌었다. 상제나 복인들이 상여 앞에 가서 절을 하고 돈을 낸 후에야 다시 앞으로 나가군 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식 장례식은 상여가 나갈 때 종이돈을 뿌리였다. 安葬은 관을 묘지에 묻는 일을 말한다. 묘는 보통 장례식 전일에 파 놓는다. 묘지는 통풍이 좋은 양지 즉 "左靑龍 右白虎" 이고 머리는 산계를 이고 발은 하천을 향한 곳을 선호한다. 묘지를 파기 전에 먼저 開土祝文을 읽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묘지의 깊이는 보통 70센치 좌우이다. 관을 묻을 때 산에 있는 묘지는 머리가 산정을 향하게 하고 평지의 묘지는 머리가 북쪽을 향하게 한다. 관을 땅 밑에 안치한 후 銘旌을 덮는다. 명정은 보통 넓이 40센치 길이 1메터의 붉은 천에 먹으로 사자의 籍貫과 姓氏를 쓴 것을 말한다. 명정을 덮은 후 상주가 옷섶에 오방토를 떠서 관의 사주와 중간에 뿌린 후 모든 일군들이 삽을 들어 흙으로 관을 묻는다. 한족들은 묘를 뾰족하게 만드는데 반하여 조선족들은 묘를 饅圓형으로 다진다. 함경도식 묘는 祭壇과 后土제단을 만드는데 경상도와 평안도식 묘는 후토제단을 만들지 않고 묘 오른쪽 2메터 거리에 소나무 한 그루 심거나 납작한 돌을 山神제단으로 삼는다. 이 시기에는 보통 출빈 후 3일제를 지내고 사자의 생일 사망일 청명 단오 추석 그믐에 제사를 지냈다. 생일제사 기일제사와 그믐 제사는 집에서 지내고 청명과 추석 제사는 산소에 가서 흙을 올리고 벌초한 후 지낸다. Ⅱ 20세기 80년대 이후 조선족상장습관의 변천     1966~1976년까지의 문화대혁명시기 조선족의 전통적인 상장례의습관은 봉건미신으로 간주되여 파괴 되였으며 민간상여조직 상복제도 상장절차 등이 거의 사라졌다. 개혁개방 후 특히 중한수교 후 조선족과 한국의 교류가 빈번하게 진행됨에 따라 어떤 전통적인 상장례의습관은 회복 되였지만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내용으로부터 형식까지 많은 변화를 보인다. 1. 상여계와 토장습관의 변화     20세기 80년대 이후 동북3성의 산간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여전히 토장을 하고 민간장례조직 상여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장례조직의 명칭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본문에서는 길림성장백조선족자치현의 상여계를 예로 토장을 하는 조선족지구의 상장례의 의식의 변천에 대하여 약술하려 한다. 필자는 2010년 초에 장백현조선족사회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장백현에서는 상여계를 향도계라고 하는데 만주국시기에 설립 되였다고 한다. 문화혁명시기에 페지되였는데 개혁개방 후 다시 회복 되였다. 원래는 農戶위주였는데 1986년부터 職工위주로 변하였고 1996년부터 농호와 직공을 구별 하지 않고 모두 가입할 수 있는 상여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지금 계원의 수는 2300여호에 달하는데 이는 장백현조선족호수의 거의 전부 라고 한다.    입계비는 시대의 발전과 물가의 상승에 따라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추세인데 최초의 50전으로부터 1원 5원 10원 20원 50원 100원으로 2010년부터는 150원으로 올랐다. 호를 단위로 입계비를 받는데 한사람이 내면 전체 가족성원들이 계원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장백현 향도계는 조선족의 장례식을 치르는 독립건물 장례당이 있는데 면적은 120평방메터에 달하다. 이 건물은 1996년 계원들이 모금하고 민족사무위원회 민정국 등 현 정부기관에서 지원을 받은 기초위에 향도계 책임자들의 노력으로 석회 모래 목재 등을 구해다가 지었다고 한다. 장례당을 짓기 전에는 어느 민족이나 구별 없이 현 병원의 太平房에서 상사를 처리했는데 풍속습관 위생 등 여러 면에서 많은 불편이 있었다고 한다.     장백현 향도계에는 도감 3명 총무 1명 유사 4명 등 구체적으로 상사를 처리하고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군들이 있는데 이 8명에게 매년 수고비 1000원씩 준다고 한다. 조선족장례당에서는 평균 매년 60여 차례의 장례식를 치르고 있다. 상여계의 회원계원가정에 상사가 발생하면 시체를 직접 장례당에 옮겨 오고 상여계일군들이 상가집의 협조 밑에 모든 장례식을 치러준다. 이를테면 수의를 입히고 시체를 싸고 입관하고 명정을 쓰고 영당을 설치하고 부의금을 받고 묘지를 선택하고 출빈 안장까지 모두 책임지고 처리한다.    관을 운반하는 방법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변하였는데 상여를 쓰지 않고 대신 화물차로 운반한다. 장례비용은 사자가 계원가정의 성원일 경우 장례비 400원을 내고 타향사람이 장백현에서 객사하였거나 농촌사람이 현 병원에서 사망하여 조선족상여계 장례당에서 장례식을 치를 경우 계원보다 200원을 더 받는다. 곤난한 가정이나 저 수입 계원들은 무료 또는 장례비를 절감하여 받는다. 그러나 현성에 사는 비계원조선족가정에 상사가 발생하여 조선족 장례당에서 장례식을 치를 경우에는 벌금으로 1500원을 내야 한다.     2001년부터 향도계를 지도하고 감독하는 조직기구 理事會를 설립하였는데 7명의 前任도감으로 구성 되였다. 그 중에는 이사장1명 비서장1명 재무독감1명 등 3명의 상무이사와 4명의 이사가 포함 된다. 이들은 향도계 전체계원회의에서 선발된다. 이사회가 설립된 후 자금을 축적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12만원에 달하였다. 이 자금은 주요하게 喪具구입 장례당수리비 전기세요금 물세요금 상여차 임대요금 등 지출과 일군들에게 주는 수고비에 쓰인다.    현성 외에 장백현 경내 촌마을들에도 크고 작은 향도계가 있는데 그 운영방식이 현성의 향도계와 같지는 않았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마록구진 2도강촌 향도계에서는 3년에 10원의 입계비를 받고 상가집에서 100원을 받는다. 동촌에 사는 한족들도 향도계에 가입할 수 있다. 다만 자기민족의 습관대로 장례식을 치를 따름이다. 농촌마을에는 현성의 향도계와 같은 조직기구와 관리절차도 없고 장례당도 없다. 오직 매년 촌에서 추천한 당번도감이 상가집에 가서 향도계 계원들을 지도하여 장례식을 치른다. 계원들은 모두 무상으로 일을 돕는다. 개혁개방 후 조선족농촌의 대량적인 인구유동으로 지금 남아 있는 인구는 거의 노약자와 환자이기에 상여계가 있어도 인력부족으로 독립적으로 장례식을 치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므로 마을에 상사가 발생하면 조선족 한족을 가리지 않고 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향도계가 없는 마을에서는 상가집에서 장례식 절차에 익숙한 사람을 모셔다 그의 지도하에 장례식을 치른다. 부의금은 모두 현금으로 하는데 농촌에서는 20~50원이 보통이고 관계가 가까운 사이면 100원을 낸다. 현성에서는 100원이 보통이고관계의 원근에 따라 200원~ 500원 부동한 금액을 한다. 장백현 향도계는 중국정부의 상장제도를 준수하고 移風移俗을 제창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묘지를 선택할 때 경작지와 인공림 그리고 도로에서 3키로메터 이내의 땅을 차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형사범죄자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봉건적 미신활동을 페지 시켰다. 소염 시 사자의 입에 쌀과 동전을 넣는 구습을 취소하였고 상여가도 부르지 않는다. 옛날과 같은 상복을 입지 않고 힌 천을 허리나 팔에 매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명정을 쓰는 방법도 변하였다. 이전에 남성은 學生某公之柩, 여성은 孺人籍貫姓之柩 라고 쓰던 것을 지금은 남성은 學生姓名之柩, 여성은 孺人姓名之柩 라고 고쳤다. 상복도 이전의 효모나 굴건을 쓰지 않고 麻로 만든 두루마기도 입지 않는다. 喪杖도 짚지 않는다. 보통 힌 천을 허리나 머리에 동이는데 상제일 경우 남자는 허리에 여성은 머리에 힌 천을 동인다. 복인일 경우 남자는 왼팔에 여성은 오른팔에 힌 천을 동인다. 다만 상제와 복인이 쓰는 힌 천의 길이와 넓이가 같지 않을 따름이다. 상제의 것이 길고 넓으며 복인의 것이 짜르고 좁다.    그리고 현재 토장을 하는 조선족들은 대다수가 묘 앞에 비석을 세우거나 소나무를 심어서 표기한다. 어떤 집에서는 묘위에 잔디를 移植하고 또 아주 개별적인 현상이였지만 콩크리트와 벽돌로 묘지주위에 호성을 쌓은 사례도 보였다.    총적으로 필자는 장백현의 향도계는 조선족의 호조협작의 우량전통을 발휘하는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안정과 조화로운 발전에도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혁개방 후 조선족 인구 출생율이 낮고 인구유동이 빈번한 사회 환경 속에서 향도계는 조선족구성원들의 심리적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2. 화장제도와 조선족 상장예의 절차의 간소화     20세기 80년대 후 중국정부에서 화장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함에 따라 교통이 불편한 산골을 제외한 대부분지방에서 모두 화장을 하게 되였다. 화장의 절차는 보통 초혼 염 출빈 화장 등과 같다. 일반 2일장 즉 사망 후 다음 날에 출빈을 하지만 간혹 사망당일에 출빈하는 현상도 있다. 습 소염 대염 성복례를 동시에 진행하는데 염이라고 통칭한다.     화장방식은 성시와 농촌이 차이를 보인다. 성시에서는 관을 빈의관에서 마련해둔 簡易棺을 사용하는데 빈의관의 차를 불러 직접 시체를 실어다 보관하고 상가집에다 영당을 설치하고 벽에 명정과 유상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고 조문객을 접대한다. 출빈하는 날 상제와 복인 그리고 모든 빈객들이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화장터에 가서 遺體고별의식에 참가한다. 고별식에 참가할 때 빈객들은 힌 종이로 만든 작은 꽃을 가슴에 단다. 고별식이 끝나면 빈의관의 일군들이 시체를 화장터에 밀고 가서 태운다. 농촌에서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나무반자로 관을 만든다. 대염 후 시체를 온돌위에 놓고 병풍이나 만장으로 시체를 막은 후 영당을 설치하고 조문객을 접대한다. 출빈하는 날 관을 상여차에 실은 후 밖에서 제사상을 차리고 발인제를 지낸다. 어떤 지방에서는 관을 상여에 실어서 마을 밖 2~3리까지 메여 내간 후 다시 차에 실고 화장터에 간다. 보통 화장터가 촌에서 멀리 떨어진 시내에 있기에 교통적인 불편과 경제적 부담으로 남 상제와 몇몇 일군들만 화장터에 가고 다른 사람들은 대문 밖 까지만 바랜다. 화장터에 도착한 후 이미 집에서 발인제를 지냈기에 유체고별식을 하지 않고 직접 화장한다. 화장을 할 때 경상도식은 장자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라고 웨친다. 시체를 태울 때 관 칠성반 초혼의 등 사자의 유물과 상제의 상복을 모두 같이 태워버린다.    길림 요녕 흑룡강지구의 대다수 조선족들은 시체를 태운 후 화장터 부근의 산이나 강가에서 제사상을 차려 놓고 산신제 또는 降神祭를 지내고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린다. 기독교신자들은 골회를 직접 연통을 통해 하늘로 날려 보낸다. 사자의 영혼을 천당으로 보낸다는 뜻이다. 화장 후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기에 묘도 비석도 없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연변함경도식장례식은 화장한 후 골회를 먼저 화장터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산에다 매장하거나 또는 화장 후 직접 산에다 매장한다. 매장 전 먼저 후토제를 지내고 묘를 판 후 벽돌로 작은 집을 짓고 골회함을 안치한 후 콩크리트로 덮개를 만들어서 덮은 후 흙을 올리고 비석을 세운다.    조선족의 대다수 사람들은 제사를 취소하는 것은 자손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개혁개방 후 조선족인구의 유동성이 커서 대부분 청장년들이 외국이나 큰 도시에 가서 생활하고 있기에 고향으로 자주 돌아올 수 없어서 묘를 세운다 해도 옳게 관리할 수 없고 또 정성껏 제사를 모실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산소를 옳게 모시지 못하여 자손들 자신이 심리부담을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묘지를 잘 못 선택하면 도리어 자손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기에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면 그런 걱정이 없다고 한다. 다른 일면으로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생사관과 효도관이 변하여 靈魂不滅論 來世論 등을 믿지 않기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 가서 절을 하고 기복하는 것은 심리적인 위로는 될 수 있어도 진정한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생전에 실제적으로 효도를 드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한다. 묘를 멋지게 장식하고 제사를 잘 모시는 방식으로 효도를 드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허위적인 효도라고 생각한다.    화장제도가 실시된 후 조선족 상장문화의 많은 번잡한 절차와 형식이 간소화 되였다. 이는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른 자연발전 추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일면으로 빈의관과 화장터의 비용이 너무 비싸기에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한 가정에서는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화장터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원래부터 경제조건이 좋지 않은데다 화장비용에 교통비용까지 너무 부담이 크다고 한다. 또는 라는 怨聲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다른 일면으로 대다수 조선족들은 시체를 화장한 후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기에 모든 제사가 취소 되여 형제자매들이 부모님제사를 이유로 함께 모여서 정을 나누고 혈연의식과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기회가 점점 적어지기에 친족들사이의 관계가 갈수록 희박해지고 멀어지고 있다. 결 론:조선족상장문화변천의 원인    조선족의 전통적인 상장문화는 영혼불멸 조상숭배관념과 효사상의 산물이며 그 기본내용과 형식은 조선반도에서 유래 되였지만 환경의 변화와 시대의 발전에 따라 상응하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총적인 추세는 현실적이고 문명하고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간소화 되였다. 조선족상장문화 변천의 주요원인을 규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중국 상장제도의 영향이다. 20세기 80년대 이후 화장제도의 보급으로 하여 산림지구를 제외한 대다수의 조선족들은 시체를 화장한 후 골회를 산이나 강에 뿌려버리고 묘지를 만들거나 비석을 세우지 않기에 아울러 제사도 취소시켰다. 다만 원래조상의 산소만 청명 추석 그믐 등 전통명절에 고향에 돌아가서 전통대로 제사를 지낸다.    둘째는 거주문화의 영향이다. 현재 조선족의 거주문화는 아주 크게 변화하였다. 연변지구의 소수 농촌마을을 제외한 기타 지방의 조선족마을에서 새로 지은 벽돌집은 거의 만족이나 한족식의 세 칸짜리 집이다. 때문에 출빈할 때 관이 문턱을 두 번 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문으로 나온다. 시내에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층집에서 살기에 환자가 병원에서 사망한 후 시체를 직접 빈의관 또는 장례당에 옮겨가서 장례식을 치른다. 때문에 천관식 같은 절차는 없어졌다. 그리고 농촌 성시를 물론하고 상여로 출빈을 하지 않고 일률로 차로 출빈한다. 장례식이 끝나면 보통 식당에 가서 손님을 접대한다. 이것은 여성일손이 부족한 원인도 있겠지만 집의 면적이 작고 구조가 변하였기에 손님접대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인구유동의 영향이다. 조선족농촌청장년인구의 대량적인 유동으로 상여계조직이 있더라도 인력부족으로 장례를 치르기에는 너무 어렵다. 하기에 잡거지역의 조선족마을에서는 조선족 한족을 가리지 않고 어느 집에 상사가 발생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또한 외지나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자손들이 제때에 고향에 돌아와서 산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낼 수 없기에 화장 후 묘지도 비석도 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면 당일부터 상복을 벗고 청명 추석 그믐 등 전통명절의 제사를 제외한 기타 제사를 모두 취소한다.     넷째, 외래문화의 영향이다. 중한수교 후 한국교회의 지원으로 조선족거주구역에는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도의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신자의 가정에 상사가 발생하면 목사나 집사를 모셔다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사자의 영혼을 천당으로 보내기 위해 화장할 때 골회를 연통을 통해 직접 하늘로 날려 보낸다.    다섯째, 생사관 가치관 변화의 결과이다. 시대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에 따라 조선족의 생사관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귀신이나 내세 같은 것을 믿지 않고 현실생활에 충실하고 부모생전에 효도를 드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무덤을 장식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한족문화의 영향이다. 조선족은 장기간 한족과 접촉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족상장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조선족들도 한족의 상장금기습관을 따른다. 예를 들면 출빈 전에 부의금을 전달하며 장례가 끝난 후에 전달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것은 상가에 또 상사가 발생하게 된다는 혐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춘절기간에 상사가 발생하였을 때 외부에 소식을 퍼뜨리지 않고 직계 친척들이 모여서 조용히 입관한 후 시체를 殯儀館이나 장례당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정월5일이 지난 후 부고를 전하고 장례식을 치른다. 또한 상가집의 사람들은 상사가 발생한 해에 출생축하잔치 혼례식 환갑잔치와 같은 경사에 참가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은 불길한 소식으로 명절이나 경사의 분위기를 파괴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5    죽음 체험기 댓글:  조회:5567  추천:0  2013-03-28
스페셜 리포트 0.35평 관 속에 누워 죽음을 통해 묻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 지난 5월 12일 서울 서초동 능인선원에 있는 죽음 체험 수련장 ‘지구별여행자’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유서, 묘비명, 자서전을 쓴 후 입관 직전의 모습. 맨 끝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가 서 있다. 나는 죽었다. 나는 600×1900×450㎜ 크기 나무 관 안에 누워 있다. 누런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고 손과 발은 흰색 끈으로 꽁꽁 묶여 있다. 이 생의 마지막 양식이라며 입에 넣어 준 생쌀 한 숟가락은 조금 전에 다 삼켰다. 움직일 수 없다.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고, 무릎을 굽힐 수도 없다. 얼굴이 가려운데 긁을 수도 없다. 캄캄하다. 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다. 10분 정도 지났다. 답답함이 아늑함으로 바뀐다. 엄마 자궁 속이 이러했을까? 이때 밖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나는 지금 죽음 체험 수련 중이다. 지난 5월 12일 죽음체험수련원을 운영하는 비영리단체 ‘지구별여행자’(구 ‘아름다운 삶’·대표 김기호)가 진행하는 행사에 16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지구별여행자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능인선원 내 방 한 칸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체험 참석자는 50~60대가 대부분이고, 30대 초중반의 젊은 여성 두 명과 30대 후반 부부도 있었다. 자서전 쓰기, 죽음 명상, 유언장 쓰기, 묘비명 쓰기, 입관 체험 등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은 4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지구별여행자는 매달 한 번씩 죽음 체험 수련을 한다. 개별 신청자도 있고, 기업이나 관공서 등 단체 체험도 한다. 2002년부터 총 1만5000명이 죽음 체험을 거쳤다고 했다.        내가 취재를 위한 체험을 한 이날, 미국의 인터넷 매체 VICE라는 곳에서 촬영단이 찾아왔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입관 체험 문화는 한국에만 있어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신기해 한다. CNN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도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자신이 촬영되길 원치 않는 참가자는 미리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최대한 죽음 체험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오후 4시50분. 조용한 음악과 함께 자서전 쓰기가 시작됐다. 출생에서부터 초·중·고등학교 입학과 졸업, 결혼과 출산, 회사 입퇴사 등 내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나는 시간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이력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 여백을 한 자 한 자 채워 가며 내 인생을 슬라이드처럼 돌려본다. 두 번째 자서전 양식이 놓여 있다.        ‘내 인생의 3대 뉴스는?’        ‘이번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이번 삶에서 내가 배운 교훈은?’        ‘만약 나에게 삶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은?’        수련도우미이자 자원봉사자 하지원(여·50대)씨가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2년 전 이맘때 임종 체험을 했다고 한다.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동기 때문에 자살시도를 했고, 불행 중 다행으로 1차 시도에 실패한 후 이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한번 죽어 보십시오” 하고 죽음 체험을 권유했다. 하씨는 죽음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을 다 놓치고 죽으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죽음 체험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간호학을 공부한 그는 전공을 살려 뒤늦게 웰다잉 프로그램 보조강사로 일하는 중이다.        오후 5시30분. 김기호 대표의 강연이 시작됐다. 일명 죽음학 강의. 그는 “죽음도 하나의 여행상품”이라고 했다. 우주적 존재가 되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 체험을 ‘지구별 여행’이라고 불렀다. 그는 100장이 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넘겨가며 차분히 강연을 이어갔다. 동영상과 애니메이션, 사진과 통계 자료를 활용한 강연은 흥미로웠다. 강연의 요지는 “2차원에 사는 개미들에게 3차원에 사는 우리의 존재가 안 보이듯, 죽음은 현실의 너머에 있고 죽음 체험은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 여행과 같다”는 것이다.        오후 6시30분. 수의를 갈아입는다. “수의는 아래부터 입으십시오.” 금색 보자기를 풀어 수의를 보자 죽음 체험을 한다는 게 실감난다. 태어나 처음 만져보는 수의를 내가 직접 입는 기분, 묘하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다. 죽은자는 갖고 갈 게 없다. 양쪽 발목을 묶고, 허리까지 꽁꽁 동여맸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참석자들에게 촛불을 하나씩 나눠 주고 형광등을 끈다. 나의 부고 일지, 유언장, 묘비명을 쓰라고 했다. 하나씩 써 나갔다.     “묵언하십시오. 죽는 날인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유언장 쓰면서 99%는 웁니다. 통곡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속으로 ‘진짜 유언장도 아니고, 가상 체험인데 설마 99%가 울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나의 부고 일지를 먼저 쓴다. ‘나는 오늘 ( )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 )했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나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 )일 것이다.’ 이어서 유언장을 쓴다. 내 앞에는 편지지 두 장이 놓여 있다. ‘진짜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면?’ 상상해 본다. 사랑하는 사람들 얼굴이 하나둘 스친다. 버킷리스트에 적어둔 여행지들이 좌르르 떠오른다. 한 자 한 자 적어 나간다. 담담하게 시작한 유언장 반 장이 채워지면서 점점 감정이입이 돼 간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에게 이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 코끝이 시큰해진다.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기 시작한다. 참으려 하는데 눈물이 줄줄 흐른다. 도우미가 조용히 다가와 휴지를 한 움큼 뽑아 놓고 간다. 어느새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다.        오후 7시30분. 입관할 시간이다. 산 중턱에 내가 들어갈 관이 입을 떡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저승사자를 따라 500미터 정도의 숲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영혼의 거리는 3미터입니다. 앞사람과 거리를 유지하십시오.” 한 손에는 촛불을, 한 손에는 나의 묘비명과 유언장을 들고 산으로 향한다. 어느새 어둑신하다. 서쪽하늘에 주황빛 노을이 서려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빌딩의 조명이 하나둘 켜진다. 바람이 차다. 싸한 공기가 감싸면서 오한이 느껴진다. 내 관 앞에 섰다. 관 속에 들어갔다. 도우미 두 명이 다가와 흰 천으로 손과 발을 꽁꽁 묶는다. 관 뚜껑을 덮는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깜깜하다.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쾅! 쾅! 쾅!” 관 뚜껑 위에 망치질을 한다.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 이따금 김기호 대표가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1.14㎡(약 0.35평)의 공간에 누워, 나는 언젠가 내가 가야할 길을 이렇게 먼저 가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20분? 30분? 시간 개념이 무화됐다. 누군가 꺼내 주지 않으면 나는 관에서 나갈 수도 없다.        “자 이제, 당신은 다시 태어날 시간입니다.”        관 뚜껑이 열린다. 먼발치 도시의 조명에 눈이 부시다. 일어나 앉는다. 봄밤 바람이 피부에 확 닿았다. 새롭다. 바람에 풀꽃들이 한들거리는 것도 새삼스럽다. 나는 가장 짧은 시간에 먼 여행을 다녀왔다.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었다. 출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57100008 죽음 배우는 사회 죽음책 쏟아지고 죽음체험 해보고 웰다잉 강사 키우고 죽음준비학교 만들고… 죽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예일대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출간 6개월 만에 15만부가 팔렸고, 한국죽음학회 최준식 회장(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은 4월 말 ‘죽음학 개론’ ‘임종 준비’를 동시에 냈다. 생사학연구소 오진탁 소장(한림대 철학과 교수)이 4월 말 ‘자살 예방, 해법은 있다’를 출간했다. 부제는 ‘죽음 이해가 삶을 바꾼다’. 오진탁 소장은 총 50권짜리 ‘생사학 총서’를 기획 중인데, 그 첫 책인 ‘삶, 죽음에게 길을 묻다’를 펴내기도 했다.        ‘웰다잉(Well-dying·아름다운 마무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웰다잉 칼럼니스트’라는 신종 직업도 생겼고, 복지재단들은 웰다잉 전문강사를 적극 육성 중이다. 전국 복지관에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죽음준비학교’를 부지런히 연다. 정부 역시 ‘웰다잉’에 무게를 두고 각종 정책에 이를 반영하는 추세다. 지난해 한림대 생사학연구소는 인문한국지원사업단(HK)에 선정됐다. 이 사업은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것으로, 한림대 생사학연구소는 향후 10년간 매년 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또한 지난해 초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을 창립, 존엄사와 임상실험 등 생명을 둘러싼 첨예한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왜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일까. 오진탁 생사학연구소장은 “삶의 질(웰빙) 문제를 넘어 죽음의 질(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접어들면서 생긴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사회 지도층의 자살이 늘고, 학교폭력이나 왕따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도 죽음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요소”라고 밝혔다.        웰다잉은 노인이나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웰다잉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죽음 이해가 삶을 바꾼다’는 측면에서 죽음을 현상학적·인식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로, 죽음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부하는 부류다. 또 한 부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는다는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등 인생의 마지막 길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들이다.        먼저 전자를 보자. 이들에게 죽음 공부는 ‘삶 공부’와 동의어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이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지를 탐구하고 임종체험 등을 통해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히 사는 것이 목표다. 죽음체험수련원인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과거에는 자살을 시도했거나 죽음이 머지않은 노인 등 물리적인 죽음과 가까운 사람들이 주로 찾아왔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20대도 찾아오고 30대 젊은 부부도 많이 온다. 기업 등 단체 체험 역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삼성전자 서비스, 한화생명, JTBC 등의 기업체로 찾아가 죽음 체험 교육을 했다. 임종 체험자가 남긴 소감문을 몇 개 보자.        “삶은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을 100년, 1000년 살 것같이 집착하면서 산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심하면서 겸손하게 살겠습니다.”(정희영·57)        “방향성 없는 ‘성공’에 집착하던 내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죽음을 경험하신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계속 눈물이 났습니다.”(장소현·22)        한국죽음학회의 성격도 비슷하다. 명칭과는 달리 연구자 중심이나 학술적인 단체가 아니다. 일반 대중과 함께하는 장으로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하자”는 게 목표다. 2005년 창립 당시 최준식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죽음부터 배워라.”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있는 ‘한국죽음학회’ 사무실은 현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대표 손명세·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장) 사무소로 쓰고 있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식물인간이나 질병의 말기처럼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가 됐을 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두는 의향서다. 병원에 입원해 생명유지장치를 주렁주렁 달지 않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겠다는 사람들이 의식이 건강할 때 미리 작성해 두는 것이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이름: )는 명료한 정신 상태에서 직접 이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합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진단과 치료에 대하여 나 스스로의 의사 표시가 불가능해질 때 담당 의료진과 가족들이 이 사전의료의향서에 기록된 나의 뜻을 존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실천모임은 3년 전 민간단체로 출범했는데, 지금까지 1만명 정도가 이 의향서를 작성했다. 사무실(02-2281-2670)에 전화하면 우편으로 의향서 서식을 무료로 보내준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후 ‘사전의료의향서’와 동봉된 두 장의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확인증’ 역시 본인이 보관한다. 8000명까지는 실천모임 사무소에서 보관했지만 개인정보 유출의 문제가 있어 더 이상 보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전의료의향서 자체는 법적 효력이 없으나 판례법상 효력을 갖는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위급한 병으로 입원할 경우 병원에 의무기록과 함께 첨부하면 중대 자료가 될 수 있다.        지난 5월 13일 오후,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사무실을 찾아갔다. 실천모임은 웰다잉에 관심있는 자원봉사자 12~13명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한 대뿐인 전화기에서 쉴 새 없이 벨이 울렸다. 자원봉사자 권창중(69)씨와 틈틈이 대화를 나눴다. 그 역시 아내와 함께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뒀다고 했다. 그는 “병원에서 불필요한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집에서 편안하게 임종을 맞으려 한다”고 했다. 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70대로, 작성 이유는 권씨와 비슷하다고 한다. “자식들은 처음엔 동의하지 않았지만 여러 번 설득 끝에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70대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 백발 단발에 금테 안경을 쓰고 빨간 립스틱을 곱게 바른 그는 우아했다. 노부부의 사랑과 존엄사를 다룬 프랑스 영화 ‘아모르’의 여자 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사는 장영자(75)씨. “참 고우시다”고 말을 건네자 “우리 바깥양반 아프기 전에는 더 고왔는데”라며 미소 지었다. 그는 “이 집은 전화가 잘 안 돼. 할 때마다 통화 중이야. 그래서 찾아왔어”라고 했다. 그가 사전의료의향서를 쓰기로 한 것은 병상에 있는 남편을 보면서다. 그의 남편은 3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이 없는 상태다. 큰 병원 세 곳을 전전하다가 치료 가능성이 희박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요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는 “나는 저 짓 안 하려고. 딸이 둘인데, 내가 쓰러지면 병원에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어. 병원에 입원하면 살아있는 사람을 너무 고생시켜”라며 “내가 친구들 여러 명한테 바람 넣었어. 나 따라서 이거(사전의료의향서) 쓴 사람 많아”라고 말했다. 그는 “시신기증도 하려고. 잘 살았는데 뭘 더 바라겠어. 아무 여한 없어”라며 자리를 떴다.        전문가들은 ‘웰다잉’을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부터 버리라고 충고한다.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는 “죽음이 슬프고 두렵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죽음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나는 순간”이라고 하고, 생사문제연구소 오진탁 소장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오 소장은 “한국은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고 지적한다.        김명민과 하지원 주연의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 단적인 예가 나온다. 극중 직업이 장례지도사인 하지원은 바람직한 죽음 문화 정착을 위해 입관체험을 진행하지만 노인들의 거센 항의로 행사가 중단된다. 노인 참가자들은 “나보고 죽어보라는 거냐. 노인네들 모아 놓고 희롱하는 거냐”며 폭언을 해댄다. 기자가 월간조선 근무 당시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2004년 호스피스 간호사 최화숙씨가 쓴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 발간 직후 독자들의 항의를 종종 받았다. “아름다운 죽음이 말이 되냐? 왜 재수 없게 그런 제목의 책을 냈냐”는 항의였다. 화장장이 들어서면 인근 땅값이 떨어지고, 엘리베이터에 ‘4’ 대신 ‘F’가 적힌 것도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오진탁 소장은 “죽음 준비, 죽음 체험이라는 직접적 표현 대신 ‘웰다잉’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면서 서서히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말한다. ‘웰빙’의 연장선상에서 ‘웰다잉’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무조건 외면하는 풍조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는 것이다.     품위 있는 죽음을 추구하는 사람 역시 늘고 있다. 인공호흡기, 강심제와 승압제, 혈액투석, 체외순환 등 생명유지장치를 주렁주렁 매달면서 여명을 늘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진행한 ‘생명나눔 국민인식도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2.3%가 연명치료 중지에 찬성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1년에 18만명 정도의 만성질환자가 말기 상태로 사망하는데, 이 중 15만명 정도가 인공호흡기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환자 대상 조사결과는 더욱 분명하다. 내과계 중환자실 환자 중 생명유지장치 사용을 원한다는 대답은 1%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국에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 미국 대부분의 주와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 등은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제도가 허용돼 있고, 일본 역시 1998년부터 사전의료의향서를 존중하기로 결정했지만, 한국은 사전의료의향서에 대한 허용 지침이 없어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2009년 김할머니 사건으로 촉발된 존엄사 논쟁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김할머니 사건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환자가 폐암 조직검사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자녀들이 김할머니의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며 소송을 건 사건이다. 김할머니는 입원 전 자녀들에게 “혹 내가 식물인간 혹은 의식불명 상태가 되면 인공호흡기를 끼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대법원은 유가족의 손을 들어줘 연명치료 중지를 인정했다. 김할머니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면 당장 생명이 위독하다는 병원 측의 말과는 달리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 만에 존엄사했다.        이후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신상진 의원과 김세연 의원이 존엄사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일단 종교계의 반발이 거세다. 생명경시 풍조를 낳는다는 이유다. 또한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국가의 생명권 보호에 관한 헌법적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도 있다. 다시 말해 존엄사는 국가의 생명보호의무와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곧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된 제도화 방안이 마련될 전망이다.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사위원회(이하 생명윤리심의위)에서는 지난해 12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특별위원회’(위원장 이윤성·서울대 의대 법의학과 교수)를 구성했다.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시민사회단체 등 18명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협의체인 이 위원회는 매달 1회 이상 논의를 거쳤으며, 5월 29일 최종 공청회를 갖는다. 공청회에서 합의된 사항을 생명윤리심의위에 보고할 예정이며, 이를 기반으로 제도화 여부와 가이드라인을 결정할 방침이다.        존엄사의 제도화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삶과 죽음의 정의, 생명의 절대성과 사회적 효율성 등 기본 가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소설가 서영은은 일찌감치 이런 유서를 써 뒀다.        “의식이 없을 때는 절대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이며, 장례는 가족 친지들과 간소하게 치를 것이며, 화장한 재는 산의 나무 밑에 뿌려서 거름이 되게 해 주면 좋겠다.…” 출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257100009     죽음체험수련원 ‘지구별여행자’ 김기호 대표        “사(死)테크를 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구별여행자’(구 ‘아름다운 삶’)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생긴 임종 체험 수련원이다. 2002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어 12년째 운영 중이다. 비영리단체로 능인선원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된다. 개인 참가자를 대상으로 매달 한 번씩 정기적으로 수련을 진행하며, 오붓한 체험을 원할 경우 부부 단위의 신청도 받는다. 청소년들의 자살예방 교육으로 호응이 높다. 참가자가 10~20명일 때 수련의 몰입이 잘 된다고 한다.        지구별여행자는 한 출세지향주의자의 대대적인 전향에 의해 탄생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김기호(48) 대표.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후 대한항공에 입사해 기획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6년 가을까지만 해도 출세를 향해 맹목적으로 전진하는 엘리트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도 했다. 그가 삶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 것은 임사체험자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다.        이후 그는 어린 시절에 묻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냈다. 더 늦기 전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실천하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라 호주 퀸스랜드대학에서 호스피스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귀국한 후 1999년부터 북한산 인근에서 봉사자들을 모아 죽음 교육을 시작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을 주제로 진행한 교육에 관심과 호응이 점점 늘었다. 그는 “행복해지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을 알면 삶이 더 아름다워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면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삶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사(死)테크라는 말을 씁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17세부터 죽음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죽음은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더 빛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죽음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십시오.”
4    죽음학 연구학자와의 인터뷰 댓글:  조회:4078  추천:0  2012-12-01
죽음학 연구학자와의 인터뷰 _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기계_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놀라울 만큼 적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 죽음을 다룬 책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종교적 관점에서 쓴 책 말고는 별다른 저작물이 없었다. 그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죽어본 사람만이 죽음에 대해 정확히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미국 예일대 철학과 교수 셸리 케이건(Kagan·58)은 1995년부터 17년간 '죽음(Death)'이란 제목의 강의를 해오고 있다. 그의 강의는 '열린 예일 강좌(Open Yale Courses)'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공개돼,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서 열띤 호응을 얻고 있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교탁에 앉아 강의하는 그의 친근한 모습도 인기에 한몫하고 있다. 그가 올 4월 펴낸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최근 한국에서 출판됐다(엘도라도 刊). 이 책이 미국 밖에서 번역돼 나온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이 책은 '죽음'을 주제로 한 철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이 있다면 영생하는가? 죽음은 나쁜 것인가? 영원히 살고 싶은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봤음 직한,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져보지 않았을 질문들에 대해 집요하게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묻고 대답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케이건은 조목조목 대답을 내놓고 있지만, 자신의 결론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번쯤 이 질문에 답해보라'고 권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독서다. 이 '교탁 위의 철학자'를 지난달 23일 미국 뉴헤이븐(코네티컷주)에 있는 예일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죽음의 철학자'라는 선입견과 달리 청바지와 체크무늬 셔츠, 운동화를 신은 그는 매우 유쾌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이 책이 다른 나라에서도 출판될 계획이 있습니까. "한국어판이 처음이고, 중국어판이 진행 중입니다. 솔직히 제 책이 두 나라에서 먼저 번역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기쁘고도 놀랐습니다." ―한국에서 처음 번역됐고 한국 기자가 찾아온 셈인데, 왜 한국에서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걸까요. "한국에서 온 당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경험인데 왜 한국일까? 몇 달 전에 중국 베이징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갔다가 예일대 졸업생인 서울대 철학과 이석재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엄청나게 팔렸다'고 하더군요. 한국 인구가 5000만명인데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고요. 인구에 비춰 보면, 미국에서는 고전을 제외한 어떤 책도 그렇게 많이 팔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책은 심각하고 학술적인 내용인데요. 한국이 특히 지적인 사회이거나 '정의'에 민감하기 때문일까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 책이 처음 번역된 것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죽음이나 정의 모두 인간 삶의 중심적 질문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어쩌면 한국의 대학 강의실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샌델 교수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사례 중 '정의란 무엇인가'와 유사한 것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 사람을 희생시켜 장기를 이식하면 5명을 살릴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이 옳은가' 하는 사례 같은 거죠. "그것은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은 비유입니다. '장기이식 사례'라고 부르는 건데, MIT(매사추세츠공대)의 철학 교수 주디스 톰슨이 만들어낸 사례입니다. 나와 샌델은 이 사례를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죠. 어쩌면 두 강의가 비슷한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례일지도 모릅니다." '장기이식 사례'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설명하는 데 쓰인다. 샌델은 정의를 논하면서 이 사례를 들었고 케이건은 자살에 관해 강의할 때 이 사례를 거론한다. ―제 생각엔 '죽음'과 '정의' 두 강의나 책이 소재만 다를 뿐 결국 '철학 입문' 수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학부생에게 가르치는 강의라는 것이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샌델의 강의는 정치학의 입문 코스이고, 내 강의는 철학의 입문 수업입니다. 두 강의 모두 많은 주제를 넓게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샌델은 정치철학자이기도 하지요. 내 저술은 대부분 전문 철학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죽음'은 평범한 개인들을 위한, 누구나 생각해 봄 직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그동안 아무도 많은 대중과 공유하려고 하지 않았던 주제였죠. 나는 수업시간에 칸트나 밀, 흄, 홉스에 대해 말하지만 학생들이 진정 그런 위대한 철학자를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철학이 어떤 학문인지, 어떻게 논리적이고 신중하게 생각할 것인지 배우길 바랄 뿐이죠. 죽음과 사후, 영혼에 대해 논하면서 이런 논쟁적인 문제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내 강의의 목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특정한 관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관점을 갖게 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학생이나 독자는 당신으로부터 올바른 관점을 배우려고 하지 않을까요. "강의하는 방식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 관점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 거예요. 내 카드를 가슴 가까이 대고 안 보여주는 거죠. 이를테면 제가 가르치는 윤리학 강의는 그런 식으로 합니다. 그렇지만 죽음 강의에서는 내가 옳다고 믿는 관점을 말합니다. 마치 과학 강의처럼 말이죠. 과학 선생은 '지구가 둥글다는 관점이 있고 평평하다는 관점이 있다.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둥글다는 이론을 지지한다'고 하겠죠. 다만 죽음 강의에서 저는 제 관점을 학생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여러 가지 관점을 배우고 자신만의 관점을 갖길 바라는 것이죠." ―이 강의를 17년간 해오고 있다면서요. "예일대에 온 것이 17년 전입니다. 죽음 강의는 이전에 있던 시카고 일리노이주립대에서부터 했어요. 그게 1985년이니까, 최소 25년은 했을 겁니다. 교수로서 첫 직장은 피츠버그주립대였습니다. 거기서 저는 주로 윤리학을 가르쳤는데, 일리노이주립대로 옮길 때 그 대학 학과장이 '죽음에 대해 가르쳐볼 생각 있느냐'고 하기에 좀 생각해보고 '하겠다'고 했어요. 그것이 이 강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요. 아까 내 수업을 '철학 입문'이라고 했는데, 어떤 입문 강의는 경품 주머니(grab bag) 또는 뷔페 테이블(smorgasbord) 식으로 하는 게 좋을 때가 있습니다. 몇 해 동안 이 강의를 하다 보니 다양한 주제를 넓게 다루는 방식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묘사할 수 있는가, 죽으면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음이 두려울 수 있는가 하는 생각들이 떠오른 것이죠. 그런 식으로 내 강의의 스토리라인을 짜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당신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영혼이 있다고 믿음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죠. "물론입니다. 영혼을 믿는 것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지요. 특히 많은 사람은 종교적인 이유로 영혼을 믿습니다. 물론 내 강의나 책의 목적이 그런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웃음). 그렇지만 진실은 때때로 불편한 것이죠. 아이들도 자라면서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이를테면 산타클로스의 존재 같은 건가요. "그렇죠. 아주 익숙한 사례입니다. 또 아이들은 자라면서 세상에는 나에게 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나는 세상을 좀 더 정확하게 보게 해주려는 겁니다. 그것이 설령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더라도 말이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왜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단계의 위안이나 평안을 얻을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인간은 로봇보다 나은 기계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은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나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기계라고 생각합니다. 기계와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기계이며, 어떤 계기를 통해 자유의지를 갖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그의 책에서 이 부분이 많은 독자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는 영어판에서도 'machine'이란 용어를 쓰면서 인간을 기계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아무 결함 없는 기계로 태어나 점점 낡게 되고 부품을 교체하기도 하지만, 결국 고장나서 어느 날 쓸모없이 돼버린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죽음의 요체다. ―사람들은 타인의 죽음이나 기르던 개나 고양이의 죽음, 심지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죽음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죽음과 일치합니까. "그렇죠. 토끼나 금붕어, 낙엽과도 다를 것이 없어요. 만약 내가 망치로 당신의 스마트폰을 부숴버린다면 미안하지만 스마트폰은 '죽어'버릴 것입니다. 기능을 멈추는 것이죠. 살아있을 때 하던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죽음입니다. 그런 개념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내 강의의 요점이기도 해요. 내 삶은 우리 집 오디오가 낡아서 고장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고장나고 결국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설명을 영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친구나 가족, 아이가 죽는다면 무척 슬프고 화가 나지요. 그렇다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영생이 나쁜 것이기 때문에 죽음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거나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시간여행도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아, 어려운 질문인데요.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시간여행이 과연 말이 되는가'와 '시간여행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두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사람이 팔을 빨리 휘저으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죠. 나는 항공역학(aerodynamics)은 잘 모르지만, 개념상으로는 인간이 날 수 있을 만큼 빨리 팔을 휘저으면 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과연 그렇게 빨리 팔을 휘젓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아마도 아닐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죠. 시간여행 역시 관념적으로는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물리적으로는, 글쎄요.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가능한지는 물리학자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수업시간에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매우 많은 다양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큰 질문(big question)은 학생들 스스로 물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영원히 살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죠. 아무도 나에게 '영혼이 있습니까' 하고 묻지는 않아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알기 때문이죠. 학생들의 질문은 대개 세세한 부분에 대한 것들입니다. 사례를 들어 설명할 때 질문이 많아집니다. 내가 물리적인 존재, 기계에 불과하다면 사후의 삶이 가능한가? 신이 우리를 부활시킬 때 죽어서 썩은 시체를 다시 조립해 부활시키면 그것은 과연 나인가? 내 시계가 고장나서 일부 부품을 교체했다면 그것은 여전히 내 시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죠. 내 아들이 나무블록으로 쌓은 탑을 '엄마에게 내일 보여주겠다'고 한 뒤 잠들었어요. 그런데 내가 실수로 그걸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설명서를 보고 그것과 똑같이 다시 쌓은 뒤에 아내에게 '이것 봐, 우리 아이가 쌓은 탑이야'라고 한다면 과연 두 탑은 똑같은 탑일까요? 이런 얘기를 하면 질문도 많고 말도 많아집니다. 흥미로운 사례 하나를 더 말해보죠. 의학적으로 뇌 이식이 가능해져서, 뇌를 이식하면 모든 기억이 그대로 옮겨진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큰 사고를 당해 뇌만 남고 모든 신체 기능이 죽어있는데, 존스라는 사람이 뇌만 죽고 신체만 멀쩡하다고 칩시다. 내 뇌를 존스의 몸에 이식해서 그 사람이 깨어났다면, 그 사람은 존스인가요, 나인가요? 심지어 뇌를 두 개로 나눠서 두 사람에게 똑같이 이식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두 사람의 몸에 나의 뇌가 반씩 이식되는 것은 '두 명의 나'가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의학적으로 성공일까요, 실패일까요? 내 강의는 한 학기 내내 이런 복잡하고도 흥미로운 케이스에 대해 토론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학생들은 스스로에게 물을 질문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기보다 원치 않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요. 일찍 죽는다든가 사고로 죽는다든가 하는…. "물론 그렇죠. 스무살에 죽는다면 너무 일찍 죽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여든살에 죽어도 일찍 죽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대략 50세가 지나면 낡아지기(wear down) 시작해서 기능이 저하되고 결국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80세가 됐을 때 30년을 더 보장받는다면 그것은 선물(present)인가요, 저주(curse)인가요? 조너선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영생의 나라를 처음엔 환상적으로 묘사했지만 결국 끔찍한 형벌이라고 썼지요. 그것처럼 인간은 늙고 병들기 마련이기 때문에, 죽음은 때때로 구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죽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요. 나도 할 수만 있다면 100세까지 철학 공부를 하고, 물리학 공부를 100년, 음악 공부에 100년, 세계 여행에 100년을 쓰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너무 일찍 죽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면, '어차피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데 열심히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 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내 인생이 의미 있는 것이 될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심오한 사실은 '내가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70억명과 함께 같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다음에 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선한 것인가'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진정한 가치를 찾은 뒤에 그것을 목표로 삶을 다듬어 나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결국 내가 학생들이나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도 그들의 인생이 앞으로 어떠해야 할지 생각하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명함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이메일 주소를 적어준 쪽지 뒷면에는 공교롭게도 이번 학기 '죽음' 강의의 리포트 과제가 인쇄돼 있었다. 그 문제는 이러했다. "고대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죽은 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나쁘다면 태어나기 전에 내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기분 나빠야 할 것이다. 태어나지 않아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에 대해 기분 나쁠 수는 없으므로,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주장에 대해 5페이지에 걸쳐 논하라." 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종류 질문들의 향연(饗宴)이다.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자살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살에 반대하는 것 같은데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회복 불가능한 환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 같은 것까지 자살에 포함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전쟁터에서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지는 자살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강의를 듣는 아이들이 누굽니까. 스무살 안팎의 아이들입니다. 특히 예일대 학생들은 엄청나게 똑똑하고 재능이 있으며 대단한 기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나는 그 아이들 누구라도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확신을 주고 싶습니다. 특히 미국의 10대들은 너무 시야가 좁아서 자살을 택합니다.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 이 강의와 책에서 자살을 다루는 이유입니다." ―학기 말쯤 되면 학생들 상당수가 당신의 관점에 동의합니까. "놀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걸 물어보지 않습니다. 학기 초에나 학기 말에나 '여러분 중 얼마나 영혼을 믿나요?' 하고 묻지 않는다는 거죠. 아마도 자신의 관점을 바꾼 학생도 있겠고 아닌 학생도 있겠죠. 학기 말에 학생들로부터 짧은 평을 받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낸 강의'라는 평부터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한 학기'라는 양극단의 평가가 나옵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학생들의 관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것이니까요." ―학점을 짜게 주는 사람으로 유명하던데, 그것 역시 학생들이 '가치있는 인생'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인가요. "나는 학점 짠 사람(hard grader)으로 유명한 것 맞아요. 이유는 아주 단순해요. 학생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학생에게 좋은 학점을 준다면, 누군가 특별한 성취를 했을 때 어떻게 구별해 줄 수 있죠? 모두가 A학점을 받는다면 전체 평점이 올라가고 나중에 취직할 때 좋겠지만, '내가 A학점을 받을 만큼 했구나' 하는 성취감은 없어지는 거죠. 예일대에 진학했다는 것은 정말로 뭔가 성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A학점을 줄 수는 없죠. 그리고 예일대 가이드북에 따르면 B학점은 잘했다(good)는 의미입니다. 많은 학생이 잘 하고 있기 때문에 B학점을 받는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와 함께 '죽음' 강의가 열리는 강의실로 향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창문이 장식된, 2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아름다운 교실이었다. 마침 추수감사절 휴일이어서 텅 비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죽음을 토론함으로써 삶을 얘기해왔다. 그가 교탁 위로 풀쩍 뛰어올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교탁 뒤에 서 있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단 말이죠. 한국 사람들도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나요?"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3    "가지 말라"고 할까? "편히 가라"고 할까? 댓글:  조회:5767  추천:1  2012-09-15
생명의 마감길 가는 이에게 "가지 말라"고 할까? "편히 가라"고 할까?   1000여명 임종환자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인간의 죽음을 말한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예쁘게 죽는 사람 없다고… 고독사 두려워 말고 혼자서도 즐겁게 살다가 안전하게 죽을수있는 시스템을 만들라.   삶의 마지막에 마주치는 질문 "비 오는 아침, 환자의 호흡이 멈추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오후에는 여러 가정을 방문했다. 작은 집, 큰 집, 따뜻한 분위기의 집, 조금은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집. '선생님, 이제 전 죽는 건가요?' '영양제라도 더 놔주세요. 어떻게든 해주세요.' 부딪칠 곳 없는 분노와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어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3번이나 응급왕진이 있었다." 오츠 슈이치(大津秀一·35)는 호스피스 전문의다. 도쿄 세타가야구에 있는 완화의료 클리닉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본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1000명 넘게 임종하고 쓴 책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21세기북스)가 일본에서 20만부, 한국에서 40만부 팔렸다. 이 책은 후속판이다. 간결한 문장은 여전하지만 바라보는 방향은 전혀 다르다. 전작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뤘다. 이 책은 '인간은 어떻게 죽는가'를 들여다본다. ◇당신은 TV에서 본 것처럼 죽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암 환자는 마지막 2개월까지 배변·보행 기능을 유지한다. 심·폐질환 말기 환자는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긴 뒤 급속도로 최후를 맞기 쉽다. 치매와 노쇠처럼 진이 빠지게 기나긴 루트도 있다. 어느 쪽이건 남은 수명이 한 달 안쪽이 되면, 주위의 도움 없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동시에 극심한 권태감이 찾아온다. 수명이 일주일 이하가 되면 자주 의식이 혼미해진다. 시간과 장소가 뒤죽박죽 되고, 가족도 왕왕 못 알아본다. 죽음을 24~48시간 앞두고 최후의 고비가 찾아오는데, 의학의 힘을 총동원해도 이때의 고통은 없앨 수 없다. 이 고비를 넘기면 온화한 시간이 온다. 드라마 주인공은 맑은 정신으로 유언하고 스르르 눈을 감는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극히 드물다. ◇가족도 피가 마른다 오츠는 40대 주부의 임종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초등학생 장남이 막 숨을 거둔 엄마를 향해 울부짖었다. "지금 죽어버리면 어떡해! 살 수 있다고 해놓고!" 울던 아이를 진정시킨 건 동생이었다. "형, 이제 그만해."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아버지가 아직 따뜻한 시신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잘 버텨줘서 고마워. 이제 우리는 서로를 위해주면서 잘 살아갈게." 오츠의 경험상,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면서 단번에 "잘 가"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누구나 "가지 말라"고 매달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뒷일은 걱정 말고 편히 가라"고 말하게 된다. 환자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씨가 ○시○분에 사망하셨다"고 선언하는 의료진이 있다. 오츠는 가족이 죽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기다려주고 있다. ◇사무라이와 작별하는 법 연로한 CEO가 오츠에게 불평한 적이 있다. "면회객이 밀려들지만, 다들 똑같은 얼굴로 빈말을 늘어놓을 뿐이야." 어느 날 한 청년이 문병 왔다. 청년이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자, CEO가 면박을 줬다. "말도 안 할 거면 뭐하러 왔나. 어서 가게." 청년이 그제야 싱긋 웃었다. "화내시는 걸 보니 여전하시네요." 오츠가 보기에 문병이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청년은 상대방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필요한 만큼만 말하고 갔다. CEO는 두고두고 이때 일을 유쾌하게 회상했다. 메이지 시대의 정객 가쓰 가이슈가 중병을 앓는 사무라이 야마오카 뎃슈를 문병 간 일이 있다. 가쓰는 "감회가 어떻냐"고 물었다. 야마오카는 "이승에서 볼일이 끝났으니 먼저 가보겠다"고 했다. 가쓰는 간결하게 답했다. "그런가, 그럼 편한 마음으로 가시게."(124~125쪽). ◇고독사는 나쁘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그러나 현대인은 좀처럼 담백하게 죽음을 맞지 못한다. 고령화와 핵가족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노인과 함께 사는 사람이 적어졌다. 이런 사회 변화가 대부분의 사람들을 '죽음의 초보자'로 만들어 버렸다.(108쪽)이런 풍조가 현명할까. 오츠가 보기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깨달을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려면 우선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모두 죽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독사를 두려워한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고독사는 슬프니까 어떻게든 가정을 꾸리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오츠가 보기엔 현명치 않다. "고독사는 불행하다"고 지레 못박기보다, 혼자서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낫다. 문득 궁금해진다. 오츠는 직업이 '임종'인 남자다. 아무리 많은 죽음을 봐도 그때마다 새롭게 무력감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 환자를 돌보러 힘차게 일어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이 괴롭다는 분들이 많다.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방법을 함께 생각하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다." 인생은 유한한 만큼 멋지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  
2    한국 상조(相助)서비스가 뜬다 댓글:  조회:4365  추천:0  2012-07-31
 한국 상조(相助)서비스가 뜬다   전국 300여개 업체… 회원 300만명 시장규모 계속 늘어 수조원대 예상 ‘삶을 잘 마무리하는 것(well-dying)’이 ‘잘 사는 것(well-bing)’만큼이나 중요한 요즘, 상조(相助)서비스를 찾는 소비자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과거 대가족 제도에선 관혼상제 등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를 가족 구성원 스스로의 힘으로 너끈히 해결했지만 저출산과 핵가족화가 심화되는 이때 장례 문화에 익숙지 않은 젊은 세대에겐 이런 일들이 두렵고 벅찬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죽음 이후를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준비해 놓겠다는 실버세대의 관심도 상조서비스로 쏠리고 있다. 어느날 경황없이 찾아온 부모의 죽음을 맞아, 불친절한 대접과 바가지 요금 등 장례식장 횡포를 울며 겨자먹기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변의 얘기가 적지 않다. 적은 돈으로 미리 준비해 큰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상조서비스 업체들의 광고에 귀가 솔깃해지는 이유다. 月 2만~10만원씩 5~10년 불입하면 장례식 때 패키지 서비스 총액 200만~400만원 상품 인기… 1000만원대 프리미엄급도 본래 상조는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조서비스는 혼인이나 장례식 등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관혼상제 행사에 따르는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월부금 형식으로 일정한 금액을 일정 기간 동안 납입하고, 나중에 행사가 있을 때 가입한 업체로부터 장례용품과 전문 인력, 행사 진행 등을 패키지 형식으로 제공받는 서비스를 말한다. 상조업체들은 보통 장례식은 물론 결혼이나 돌잔치, 회갑·고희연 등 가족 모임까지 경조사를 모두 서비스 대상으로 삼지만 대부분은 수익성에서 앞서는 장례 서비스에 주력하고 있다. 상품 가격은 서비스의 내용과 업체의 지명도에 따라 천차만별. 싼 것은 100만원대부터 비싼 것은 1000만원대 프리미엄급까지 다양하며 보통 200만~400만원대 상품에 대한 선호가 높다. 매달 2만원에서 10만원 안팎의 돈을 5년(60개월)에서 10년(120개월) 동안 불입하게 된다. 업체들은 물가가 아무리 올라도 처음에 계약한 가격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0~40대가 주 고객… 연예인 모델 내세운 홍보전 가열 ‘마지막 가시는 부모님께 난 무엇을…’ 감성적 카피로 승부 인터넷 검색창에 ‘상조’라는 단어를 치면 수십 개의 상조업체가 줄줄이 명함을 내민다. 업체 홈페이지를 이용한 광고전도 치열하다. ‘대한민국 대표 상조 전문기업(보람상조)’ ‘효를 으뜸으로 섬기는 기업. 당신의 효 라이프(효원라이프상조)’ 등 업계 대표 주자임을 내세우거나 ‘임종에서 장지까지 원스톱으로(고려라이프상조서비스)’ 등 서비스의 특장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마지막 가시는 부모님께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현대문화상조)’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내 부모를 모시듯 정성을 다하겠습니다(아산상조법인)’ ‘함께 하는 귀천(歸天),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교원상조)’ 등 가슴이 뜨끈해지는 광고 문구를 앞세우기도 한다. 최근 상조업체들은 공중파와 케이블TV, 인쇄 매체를 망라해 인지도가 높고 친근한 유명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해 공격적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보람상조는 탤런트 전광렬과 김해숙을 내세워 30~40대 수요 계층을 타깃으로 홍보전을 펼치고 있다. 효원라이프는 탤런트 이순재, 아산상조법인은 송재호를 각각 밀고 있다. 현대문화상조는 엄앵란, 홍익상조는 전원주가 홍보 전면에 나섰다. 일본 상조회가 모델… 전국 영업망 갖춘 메이저도 최근 등장 케이블 TV 홈쇼핑에서도 판매… 하루 수천 건 계약되기도 우리나라의 상조서비스의 모델은 1947년 시작된 일본의 상조회다. 상조서비스가 생활 깊이 뿌리내린 일본에서는 2300여만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상태다. 전체 장례식의 40%인 35만건 정도가 상조업체에 의해 치러진다. 우리나라 상조서비스의 시발점은 1982년으로 본다. 부산에서 설립된 부산상조가 시작이며 이후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상조업체들이 세력을 키웠다. 현재 영업 중인 상조회사의 원적(原籍)을 따져보면 10곳 중 7곳은 영남 지방에 근거를 두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상조 회사에 가입한 회원 비율을 따져보면 부산 지역이 인구 대비 13%, 마산이 12% 안팎, 울산이 10% 정도로 나타난다. 1% 정도인 서울에 비해 엄청난 수치다. 영남 지역이 한국 상조업의 본산(本山)인 셈이다. 최근 주요 업체들이 서울로 본사를 이전하며 전국적인 영업 활동을 펼쳐 빠른 속도로 회원 수를 늘리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현재 전국적으로 운영되는 상조업체는 300여곳 안팎이다. 상조 관련 단체도 너댓곳에 이른다. 업계에서는 상조서비스에 가입한 회원 수를 대략 200만명에서 300만명으로 추산한다. 업체들이 내세우는 가입 회원수를 모두 합치면 추산치를 훨씬 상회해 ‘거품’이 적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 하지만 앞으로 핵가족화와 고령화 사회의 진전에 따라 회원 수는 1000만명 선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시장 규모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고객 불입금을 기준으로 상조서비스의 시장 규모가 연간 7000억원대에 이른다고 보고 있지만 업계에서는 1조원을 넘어 3조원대에 이른다는 추정도 내놓고 있다. 최근 인기 연예인을 앞세운 케이블TV의 홈쇼핑 방송에는 하루 수천 건의 상품이 판매됐다는 뒷얘기도 들린다. 특급 리무진 장의차, 왕실 전통 장례인 ‘궁중렴’… 사망 접수 2시간 내 출동… 준비부터 추모까지 토털서비스 상조업체들이 내건 상품에는 우선 관(棺)과 수의(壽衣), 관보·결관바·명정·운아·혼백·위패·습신·폐백·예단·다라니·수시포·한지·알코올·베개·탈지면·칠성판·고깔 등 고인을 입관할 때 쓰는 용품이 있다. 다음으로는 △남녀 상복과 수질·요질·행전·두건·리본·완장·상장(지팡이) 등 의전용품 △리무진 차량 등 장의차와 장의 버스 △염과 입관을 하는 장례 지도사와 조문객을 접대하는 도우미 등 일손 지원 △꽃 장식과 기타 서비스 등이 항목별로 분류된다. 보람상조는 국내 최초로 링컨컨티넨털 특급 신형 리무진 차량을 고인 전용 장의차로 사용한다는 점을 앞세운다. 여기에 옛 왕실의 전통 장례에서 볼 수 있었다는 ‘궁중렴’으로 고인을 모신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별세를 맞은 가입자들은 가장 당황스러울 때로 상조업체와 곧바로 연락이 되지 않을 때를 꼽는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중무휴 24시간 콜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그래서 꼭 필요하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편안한 마지막 길을 맞을 수 있도록 호스피스 활동과 장의 준비 컨설팅 등 사전 서비스로 시작해 장의가 발생하면 2시간 안에 전문 장례 지도사를 파견하고 운구와 장례식장 선정, 수시, 입관까지 고객 만족 컨설팅을 펼친다는 점도 홍보 포인트다. 고인의 영상과 장의 영상, 사진을 기록하고 돌아가신 뒤에도 고인에게 메시지나 편지를 전할수 있는 인터넷 추모관 서비스를 운영하는 등 ‘원스톱 토털 서비스’를 내걸고 있다. 상품의 가격 차이는 크게 △관의 재질 △수의의 재질 △의전용품을 대여하는 개수 △장의차 보조비 금액에서 발생한다. 보람상조의 프리미엄 상품은 가격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는데, 360만원 상품은 오동나무관(2치2단)을 사용하지만 480만원 상품은 은행나무관(1치5푼)을, 780만원짜리는 향나무관(1치5푼)을 쓴다. 링컨컨티넨털 리무진과 리무진 장의 버스의 경우에도, 360만원과 480만원 상품은 각각 왕복 200㎞, 400㎞까지만 무료로 지원하고 넘어서면 추가 요금을 지불해야 하지만 780만원 상품에서는 전국 어느 곳이든 추가 요금이 없다. 꽃 장식의 크기와 모양, 장례 도우미의 숫자와 봉사 시간에도 가격대별로 차이가 있다. 보람상조 콜센터 관계자는 매달 3만원씩 120회(또는 6만원씩 60회)를 납부하는 360만원짜리 프리미엄 상품의 인기가 가장 높다고 말했다. 어느 업체에서나 문상객을 접대하는 음식 비용은 상조서비스 상품 가격에 포함되지 않는다. 병원 영안실을 이용했을 경우 시신 안치실료도 따로 내야 한다. 어떤 서비스에 대해 추가요금을 내야하는지 꼼꼼히 챙겨봐야 한다. 출처/ 위클리조선. 채성진 기자 dudmie@chosun.com   [相助] 상조와 보험은 어떻게 다른가 약정금액 완납 전에 행사 치르면 남은 회비 일시불로 내야 예금자보호법 적용 안돼 부도·폐업 때 보상 받기 어려워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매달 일정한 금액을 적립한다는 점에서 상조서비스와 보험은 비슷해 보인다. 모집원을 통하거나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 없이 온라인 상담, 콜센터로 쉽게 가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상조서비스와 보험에는 성격상 확실히 구분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문제는 상당수의 상조서비스 이용자들이 이같은 차이에 대해 잘 모르고 가입하고 있다는 데 있다. 치열한 업체 간 경쟁 탓에 상조서비스가 마치 보험 상품의 하나인 것처럼 소비자를 현혹해 가입을 유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상조서비스와 보험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본다. 먼저, 상조서비스는 가입한 회원들이 장례나 결혼, 회갑 같은 대소사(大小事)를 치를 경우 해당 회원에게 물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보험은 질병이나 사고, 사망 등의 경우에 현금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소비자들의 오해가 가장 많은 부분은 계약에서 지정한 행사가 발생할 경우, 이후 납입금을 계속 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매달 약정한 금액을 완납하기 전에 행사가 발생할 경우, 상조서비스는 행사가 끝난 뒤 남은 회비를 일시불로 모두 납부해야 한다. 보험 계약에서는 가입자가 보험료를 내는 도중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사유가 발생하면 미리 약정된 보험금을 받고 그 이후에는 보험료 납부가 면제된다. 관혼상제 행사를 치른 뒤, 잔여 대금을 낼 것을 요구하는 상조업체와 소비자의 마찰은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다. 소비자에 대한 보호의 정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신고제에 의해 설립이 자유로운 상조회사의 서비스는 보험이나 금융업과는 달리 예금자보호법에 의해 보장을 받을 수 없다. 업체의 부도나 폐업의 경우, 따로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고객들이 상조서비스 가입에 앞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일부 상조업체는 “고객이 맡긴 예탁금 중 일부를 이행보증업체에 맡기기 때문에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선전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행보증업체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약정 내용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안전성 측면에서는 불안한 감이 없지 않은 것이다. 피보험자를 지정해 피보험자에게만 혜택이 제공되는 보험 상품에 비해 상조서비스는 피보험자를 지정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양도·양수할 수 있다. 보험 상품은 가입할 때 성별이나 연령, 병력(病歷) 여부에 따라 제한이 따르지만 상조서비스는 남녀노소 누구나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최근에는 손해보험사들이 ‘상조보험’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보험 상품을 내놓고 있다. 질병이나 상해에 대한 위험 보장과 함께 장례 대행 서비스를 추가한 것이다. 피보험자가 사망할 경우 전문 장례지도사와 도우미가 장례 의전을 진행하고, 계약자가 직접 설계한 상·장례용품을 현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피보험자가 100세까지 생존할 때는 백수(百壽) 축하금으로 만기환급금을 지급하는 상품도 있다.   출처/ 위클리조선. 채성진 기자 dudmie@chosun.com  
1    망자가 불러주는 삶의 노래- 상엿소리 댓글:  조회:3822  추천:0  2012-07-15
망자가 불러주는 삶의 노래- 상엿소리 정말이지 그 이유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한 체온으로 촉감을 나누던 그 사람인데 딸깍하고 숨넘어가는 순간 피부 닿는 게 싫어지고 손이라도 잡으려면 섬뜩하거나 꺼림직 해지기까지 하는 이유를 말입니다.   ▲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는 주검,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만지는 것은 물론 보기조차 꺼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든 죽은 다음엔 이렇듯 관속에 들어갑니다.   ⓒ 임윤수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과 피부를 접촉하는 것뿐 아니라 창백해진 모습을 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 질 정도로 무섭거나 공포감까지 느낀다고 하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가깝던 사이였더라도 죽은 사람으로 시체가 되어있으면 그 사람 만지기를 꺼려합니다. 죽은 지 오래되었다면 살점이라도 썩어 문드러질지 모르지만 체온도 채 떨어지기 전인 사망의 순간부터 원인 모를 거리감이 생깁니다. 심한 경우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도 임종과 운명의 고비를 넘어서는 순간 생전의 관계에 아랑곳없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죽은 사람은 잊고, 살아있는 사람 편안하게 잘 살라고 정 떼고 떠나려 일부러 무섭게 보이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죽은 사람을 무서워하고 시체 만지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정작 그 이유를 물어보면 '미생물학적 요인, 사체로부터 박테리아 등에 의한 질병 감염에 대한 우려나 심리적 요인' 등을 들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싫거나 무섭고, 기분이 나쁘거나 꺼림직 해서라는 정도입니다. 기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군대를 가기 전까지만 해도 상가(喪家)엘 가면 비위가 거슬려 끼니조차 거르곤 했습니다. 그냥 죽은 사람이 있는 집이란 생각에 먹는다는 게 꺼림직 했고 속까지 메슥대거나 울렁거리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일 먹어서 그런지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대로 먹고 상황에 따라 움직이며 모자라면 찾아다 먹을 만큼 적극적일뿐 아니라, 그래야 된다면 주검조차도 기꺼이 만지려합니다. 꽃상여 앞에서 요령 흔드는 선소리꾼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옛날 같으면 상가의 궂은일 중 하나인 상여메기는 천민들의 몫이거나 역할이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치른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 상여는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마친 누군가를 저승으로 옮겨주기는 운반수단이기도 하지만 영가를 위한 마지막 꽃단장이며 치장이기도 합니다. 상여를 메는 사람들은 상여꾼 또는 향도꾼이나 상두꾼이라고도 합니다.   ⓒ 임윤수   죽지 않을 사람이 있을 수 없으니 장사란 누구든 치러야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정작 그 일만은 누군가가 대신해 주길 바라며 자신만은 하고 싶어 하질 않습니다. 인간의 존재와 함께 시작된 것이 인류의 역사라면 시체를 정리하기 위한 장사(葬事) 또한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언제까지나 지속되어야 할 불가분의 대사(大事)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그렇게 피하고 싶어 하는 그 일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장의업을 하거나 그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는 호소는커녕 눈길로도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주검이 된 한사람의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덜 허망하게 잘 갈무리 해드리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 주저하거나 꺼리는 궂은일이기에 서툴지만 기도하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그런 일들을 맞아들입니다. 상두꾼들의 발놀림 따라 너울너울 춤추며 구불구불 흘러가듯 집 떠나고 있는 꽃상여, 알록달록 꽃송이 나풀거리는 상여 앞에서 딸랑딸랑 요령 흔들고 이러쿵저러쿵 선소리 넣으며 요령잡이를 한 지 어언 1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 언뜻 두부장수가 흔들거나 자선냄비와 함께 연말에만 등장하는 종모양이지만 꽃상여 앞에서 사용하는 요령입니다. 장례식장에서조차 점차 듣기 어려운 상주들의 곡소리를 대신해 딸랑거리는 요령소리로 영가된 이의 명복을 빌고 선소리를 빌어 망자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습니다.   ⓒ 임윤수 목소리가 구성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점차 볼 수 없어지는 그런 풍경을 비슷하게라도 답습해 간직하고, 죽은 이의 마지막 길, 저승 가는 길이 너무 쓸쓸하고 황망해 보는 이들이 서럽지 않도록 상여소리로라도 길동무를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르신 중 누군가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들리고 3일이나 5일 후쯤이면 볼 수 있었던 상여 행렬은 장관이었습니다.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흉물처럼 동구 밖 상엿집에 보관되었던 상여가 장삿날이 되면 날이 밝기도 전부터 상가의 마당으로 옮겨져 조립되고 꾸며집니다. 상여를 에둘러 선 상제들, 누런 빛깔의 삼베상복에 짚으로 꼰 새끼줄 허리띠를 두르고 굴건제복을 한 상제들이 '애고'거리며 곡들을 합니다. 죽은 이가 살던 집을 떠나 북망산천이 되는 묘를 향해 떠나갈 준비가 되어있음이 상가의 울타리를 넘어 온 동네에 알려집니다. 발인제가 끝나고 영가된 이가 집을 떠날 때쯤이면 기다란 장대 끝에 매달려 사람들의 손에 들린 명정과 만장들이 바람결에 나풀대고, 선소리꾼이 흔들어대는 요령소리가 '딸랑딸랑'들려옵니다. 요령소리를 신호로 12명의 상두꾼들이 양쪽으로 6명씩 나뉘어 무릎을 쪼그리고 앉습니다. 어깨에 상여에 매여 있는 광목 끈을 걸머메고 무릎 펴고 허리를 곧추세우면 꽃상여가 일어섭니다. 상두꾼들의 어깨위로 올라선 상여가 12명의 상두꾼 발놀림 따라 일렁이듯 흐느끼듯 조심스레 좌로 우로 움직입니다. 마당 한가운데서 발걸음 따라 너울춤이라도 추며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고하듯 처마 끝에 기대 높은 하늘을 향해 한바탕 슬픈 몸짓들을 합니다. '어~허'거리는 상두꾼소리와 '애고'거리는 상제들의 곡소리가 한바탕 뒤섞이면 흔들어대는 요령소리에 박자 맞춰 애간장 우려낼 듯 청승스럽고 애달프기까지 한 선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요령잡이의 선소리는 마냥 구슬프고 처량해 듣기만 좋은 소리인줄 알았는데 이제야 생각하니 그렇지 않습니다. 요령잡이가 하던 선소리는 죽은 자에 대한 예송이며 그가 살아간 한평생을 희로애락으로 농축한 삶의 고백이며 위령의 노래, 영가를 위한 진혼곡이었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을 기승전결로 정리했고 저승세계서 받게 될 심판내용까지 담겨있어,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가르침이기도 했지만 대사(大事)를 치르기 위한 커다란 지혜였습니다.   ▲ 요령에서 울려나오던 딸랑 소리는 상두꾼들의 힘을 돋우는 응원의 소리며 흔들리지 않게 균형을 잡기위한 중심 추의 소리입니다. 요령도 이렇듯 그 크기가 다르니 울려나오는 소리도 다릅니다.   ⓒ 임윤수   요즘은 시골길도 웬만하면 자동차가 쑥쑥 들어갈 만큼 널찍하지만 60년대까지의 시골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신작로를 제외한 대부분 길들은 겨우 사람 하나 걸을 수 있는 논두렁길이거나 밭두렁길 아니면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전부였습니다. 길이 그러니 그 좁다란 길에 널찍한 요즘의 대로를 걷듯 상여를 멘 상두꾼들이 양쪽으로 늘어서서 꼿꼿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상엿소리는 진혼곡이며 좁다란 길을 걷게 하는 지혜의 중심 추 좁은 길로 올라선 양쪽 상두꾼들은 서로 의지해 길 가운데로 발은 모으고 어깨 쪽이 벌어지는 V자 대열로 몸을 기울여만 논두렁 외길을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요령에서 울려나오던 딸랑 소리와 선소리,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차곡차곡 이어지던 상두꾼들의 후렴소리는 힘을 돋우는 응원가며 균형을 잡아주는 중심추가 되어 외나무다리에서도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지침의 소리였습니다. 선소리와 그 후렴은 무게가 만만치 않아 어깨를 짓누르는 상여의 무게를 잠시 덜거나 잊게 해주는 환각의 역할도 했지만 죽은 이가 마지막 가는 길에 커다란 흔들림 없도록 상두꾼들이 사뿐한 발걸음으로 고이 모시게 하는 안무가 같은 구령이기도 합니다.   ▲ 영가된 이 마지막 가는 길에 흔들림 없고 너울춤이라도 추듯 사뿐히 모시려, 자박자박 내딛는 상두꾼들의 발걸음을 고르게 하기위해 움켜쥔 요령을 위로 흔들고 아래로 흔들며 박자를 맞춰줍니다.   ⓒ 임윤수   요즘 상여는 옛것처럼 분해하고 조립해서 반복 사용하는 것도 아니며 알록달록하고 치렁치렁한 헝겊이나 널판으로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종이와 비닐 그리고 각목으로 만들어진 1회용으로 그 규모 또한 8명이나 10명의 상두꾼만 필요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목소리는 물론 요령을 흔들던 손까지 떨리던 그때, 처음으로 선소리를 넣던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요령을 흔들기 전이면 지극한 마음으로 가시는 길 고이 모시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상두꾼들을 모으기 위해 마구잡이식으로 한바탕 요령을 흔들고, 상두꾼들이 모여들면 발맞추고 입(소리) 맞추기 위해 두세 번 정도 후렴구인 '어~허~'소리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상두꾼들과 주고받으며 이산 혜연선사의 발원문을 빌어 발원의 선소리를 시작합니다. '시방삼세 부처님과' '어~허~어~허~' '팔만사천 큰법보화' '어~허~어~허~' '보살석문 스님네께' '어~허~어~허~' '지성귀의 하옵나니' '어~허~어~허~' '자비하신 원력으로' '어~허~어~허~' '굽어살펴 주옵소서' '어~허~어~허' 발인 날자와 영가(죽은 이)된 이의 본관 성명, 생전 거주지를 들어 모든 정령들께 누군가가 꽃상여를 타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향하고 있음을 지극한 마음으로 고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모여든 친빈(親賓)들에게 망자 생전에 맺었을지도 모를 악연이나 서운함, 미운감정이나 서운했던 일, 다퉜던 일, 화났던 일 모두 잊어버리고 명복만을 빌어달라는 당부의 말도 한풀이 하듯 빼놓지 않습니다.   ▲ 사람들의 손에 들린 기다란 장대 끝에는 보내는 이의 마음, 살아남은 자들의 서럽고도 애통한 마음이 담긴 만장들이 한풀이라도 하듯 나풀나풀 흔들리고 있습니다.   ⓒ 임윤수 푸념이라도 하듯 영가된 이 생전의 일들을 하나하나 늘어 놉니다. 잘 아는 이일 경우엔 아는 대로, 모르는 이일 경우엔 모르는 대로 사람이 살다보면 모두 공감하게 되는 그런 이야길 너스레라도 떨 듯 8자씩 끊어 선소리로 이어갑니다. '천년만년 살 거라고' '어~허~어~허~' '먹고픈 것 아니 먹고' '어~허~어~허~' '가고픈 곳 아니 가고' '어~허~어~허~' '입고픈 것 아니 입고' '어~허~어~허~' '쓰고픈 것 아니 쓰며' '어~허~어~허~' '동전 한 닢 아껴가며' '어~허~어~허~' '아등바등 살았건만' '어~허~어~허~' '인생이란 일장춘몽' '어~허~어~허~' '공수래에 공수거라' '어~허~어~허' 넋두리 같고 하소연 같은 선소리가 몇 소절 이어지다 보면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이별의 소리가 들려오고, 찔끔찔끔 흐르는 눈물 닦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회심곡과 명심보감, 채근담은 물론 여기저기서 듣고 기억하는 좋은 말들을 상황에 맞도록 딸랑딸랑 요령소리에 맞춰 선소리로 꾸며갑니다. 상제들의 울음과 덩달아 훌쩍거리는 문상객들의 비통함이 자박자박 내딛는 상두꾼들의 발걸음에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돗자리처럼 펼쳐집니다. 여한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한바탕 축원 같은 선소리가 끝나면 꽃상여,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고 있는 망자를 태운 꽃상여를 둘러멘 상두꾼들은 돌아오지 못할 그 황천길을 향해 자작자작 걸어갑니다. 대문을 나선 상여는 생전의 오욕칠정, 부귀명세 모두 놓아버리고 훠이훠이 장지를 향해 떠나갈 뿐입니다. 그렇게 길을 가다 도랑이라도 나오면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몸부림이라도 하듯 한바탕의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생전이야 마음대로 건네던 다리였지만 이제는 다시 건네지 못할 다리니 그냥 갈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 만장에는 추모의 글도 있지만 삶을 예찬하고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진리의 글도 담겨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설움을 적은 글들도 있습니다.   ⓒ 임윤수 '이 다리는 웬 다린가' '어~허~어~허~' '이승에서 맺은 악연' '어~허~어~허~' '이승에서 쌓은 악업' '어~허~어~허~' '남김없이 끊으라는' '어~허~어~허~' '저승 가는 세심굔가' '어~허~어~허~' '속세번민 인생팔고' '어~허~어~허~' '벗어나는 해탈굔가' '어~허~어~허~' '능파교간 극락굔가' '어~허~어~허~' '이 다리를 건너가면' '어~허~어~허~' '이제다신 못 올 텐데' '어~허~어~허~' '애달고도 설운지고' '어~허~어~허~'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몇 십 분에서 한두 시간 정도 이렇듯 선소리와 상두꾼들의 후렴소리가 반복됩니다. 선소리에는 동지섣달 긴긴밤을 홀로 지새우며 청춘의 뜨거움을 홀로 식혀야 했던 청상과부의 한숨소리와 애환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딱하고도 급급하기만 했던 홀아비의 궁상맞은 삶의 얘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착하게 살던 사람이 대접받으며 살아나갈 내세이야기도 들어있지만 악하게 살던 사람이 고통 받게 되는 저승세계 지옥이야기도 들어있습니다. 발원하며 돌이키고, 축원하며 영가의 명복이라도 빌다보면 상여는 어느덧 장지에 도착합니다. 지관이 잡아준 천하길지 명당에 좌향(坐向) 맞춰 반듯하게 파진 금정(金井)에 영가된 이가 들어있는 널을 조심스레 안장합니다. 그리고 흙을 다지는 달구(회다지)를 할 때 다시 한 번 선소리를 넣으면 선소리꾼 요령잡이의 역할은 마무리 됩니다. 선소리와 후렴구로 불러주는 삶의 노래, 망자의 노래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되어 모두의 가슴에 아름아름 내려앉습니다. 출처 : 망자가 불러주는 삶의 노래 (1) - 상엿소리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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