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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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카인콤플렉스 댓글:  조회:4105  추천:73  2005-04-14
카인콤플렉스카인, 에 보면 우리 인간 최초로 형제간에 살인을 저지른 자다. 형제간에 우애해야지 죽이고 저쩌고 피를 보다니, 고약할시고!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는 형제자매 사이에 서로 보듬고 돌보는 사랑도 있지만 분명 미워하고 시기하며 증오하는 감정도 있다고 한다. 심층심리학에서 보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은 보통 二律背反의 대립관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것이 성립된다 할 때 형제자매 사이 사랑과 증오, 이것이 곧 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의 당위성적 논리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의 증오의 패륜적인 감정의 二律背反의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야누스적인 존재라는 말이 여기에서도 적중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종종 나도 모르게 자꾸만 갈마드는 형제자매 사이 증오의 감정응어리인 카인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사실 우리의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으로 이런 카인콤플렉스를 알고 있다. 내가 코 질질 빠는 어릴 때다. 아버지는 시내에 나갈 때마다 위의 형들이 아무리 따라 가겠다 고 떼를 써도 다 떼어놓고는 나만 딱 데리고 간다. 그리고는 식당에 데리고 가서 무얼 먹을래 하고는 내가 좋아하는 걸로 가득 사준다. 그리고는 먹어, 먹어 하며 자꾸 조진다. 나는 그 맛나는 것을 코를 훌쩍이며 목구멍으로 넘기기 바쁘게 쑤셔 넣는다. 요렇게 형들 모르게 혼자 얻어먹는 것이 얼마나 맛 있는데, 냠냠... 아마 지금 내 이 똥배는 그때 너무 먹어 불어난 후유증도 없지 않아 있으리라! 아버지 눈에 위에 다섯이나 있는 형들 때문에 내가 항상 잘 얻어먹지 못하는 비실비실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항상 눈이 맞아 돌아가는 엄마 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부모들의 유별난 막내사랑인 것이다. 나는 6형제 막내인데 어릴 때 위의 형제들하고 잘 싸웠다. 특히 내 착 위에 있는 형하고 잘 싸웠다. 물론 내가 억대우 같은 내 형들을 당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전략전술은 항상 선제공격. 먼저 손에 쥐이는 대로 냅다 뿌리고는 내빼기. 그리고는 형이 저 멀찌감치에 나타나면 삑 돌아서서 한마디 내뱉기-니 늙은 다음 보자! 그리고는 다리야 날 살리라 하고 똥집이 빠지라고 줄행랑 놓기. 아마 내가 지금도 달리기에 ‘몇 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그때 단련해낸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때 내 짜개바지 친구 한 놈도 쩍하면 자기 형하고 싸움질 하는데 그 자식도 나하고 전략전술이 비슷. 좀 다르다하면 그 자식은 한 참 내빼다가 삑 돌아서서 씩씩하며 자기 형이 저 멀찌감치에 나타나기를 기다려 자기 발밑 땅에다 금을 찍 긋고는 이 금을 건너오면 개새끼, 개새끼 하며 다시 줄행랑 놓기. 그러면 우리의 형들은 자식 하고 씩 웃으며 돌아선다.카인콤플렉스, 형제자매 사이 불거져 나오는 악연,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적인 본능이라 할 때, 그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불거져 나왔다. 왕권이나 재산을 둘러싼 이해득실에 얽혀 형제자매지간에 죽일 내기를 한 것은 비일비재. 먼 것은 그만 두고라도 한국의 대하드라마 에서 보았겠지만 왕위를 둘러싸고 이방원을 비롯한 형제자매지간에 피를 보는 각축전, 쟁탈전. 이로부터 아비의 낳은 죄이런가 이성계-용의 눈물이 흐르지 않았던가? 중국도 마찬가지다. 煮豆燃豆箕,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중국 삼국시기 魏의 권력을 쥔 曹丕가 재간 많은 동생인 曹植을 시기질투하고 위협감을 느껴 자기가 일곱보를 갔다왔다 할 사이 시 한편을 지어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죽이겠다고 한다. 이에 콩과 그 콩을 닦는데 사용된 콩깍지의 관계를 통해 형제 相殘을 안타까이 읊은 曹植의 가 탄생한다. 멋진 명작이 굳이 이런 피비린내 나는 데서 탄생해야만 하는가? 인간의 비극. 우리의 고전적 명작 도 형제지간의 相殘을 얘기하고 있다. 부모가 넘겨준 재산에 눈이 어두워 형이 동생네 일가족을 엄동설한에 쫓아낸다. 동생이 뭘 좀 구걸해도 듣기는커녕 오히려 문전박대.여자형제들 사이 카인콤플렉스, 신데렐라이야기 전형적이다. 물론 그것은 이붓엄마 자매들사이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친자매들 사이 벌어지는 이야기의 다른 한 변종에 다름 아니다. 왕자 혹은 귀인이 여러 자매들을 무도회에 초청한다. 그것은 왕자 혹은 귀인과 좋은 인연이 맺어지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자매들이 이붓 동생만 뽈끗 빼놓을 뿐만 아니라 고역을 시키고 자기네들만 간다. 그래서 그 이붓동생은 서럽고 맥이 빠진다. 그런데 결국 이 이붓동생이 神助로 역전을 하여 왕녀가 되는 영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우리 고대문학사에 도 이와 같은 맥락의 얘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은 다른 한 양상의 여자형제들 사이 카인콤플렉스 얘기를 톺아내고 있다. 카인콤플렉스, 여기에 사로잡혀 마구잡이로 놀아날 때 우리는 형제자매지간의 패륜 내지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꼬락서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욕이 넘치는 요즘 세상 이런 카인콤플렉스가 자극받아 뿜어져 나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先人들은 언녕 형제지간에 悌하라는 가르침을 거듭 해온 줄로 안다. 그리고 그 보기로 형제지간에 우애를 배푼 많은 감동적인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先人들은 참을 忍자 君子라고 형제자매지간에 충돌이 생겼을 때 서로 참고 감정을 눅잡을 줄 알아야 된다고 권했다. 우리 속담에 손벽도 마주 쳐야 소리난다고 한 것도 역시 참을 忍을 가르친 삶의 지혜로 보아야 하겠다. 나는 우리의 이 너무 멋있다. 놀부 못되게 놀다가 쫄딱 망한다. 이때 부자가 된 우리의 흥부는 落井下石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괘씸하고 서러웠던 모든 감정을 참을 忍으로 참고 눅잡고 형님 하며 놀부네 일가를 포옹한다. 그래서 은 형 좋고 동생 좋은 대단원으로 막을 내린다. 우리 先人들은 바로 이렇게 살아 왔다. 좀 찧고빻고 했더라도 조만간에 마음을 풀고 하나가 되는 형제자매의 우애를 나누었던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인 차원의 형제자매들 사이의 우애로써 카인콤플렉스를 컨트롤 내지는 승화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삶의 지혜다. 내나 내 짜개바지 친구의 경우처럼 어릴 때 멋모르고 ‘니 늙은 다음 보자’나 ‘이 금 건너오면 개새끼’ 했을 때 우리 형들이 자식 하고 씩 웃으며 돌아선 것은 너무 멋있다. 카인콤플렉스의 컨트롤보다 차원 높은 승화다. 그래서 내나 내 짜개바지 친구가 내뿜은 동년의 치기어린 카인콤플렉스는 아름다운 회억으로 남아 오히려 우리 형제들 사이 우애를 돈독히 하는 삶의 감로수가 되고 있다. 요새 애들 달랑 혼자에 카인콤플렉스 무언지 모르고 살아 좋겠다. 동생 하나 더 가질까 하면 도리머리를 흔드는 요즘 아이들, 카인콤플렉스를 원천봉쇄하는 듯하다. 인생은 塞翁之馬라 형제자매들 지간에 끈끈한 사랑의 우애도 못 받는 요즘 아이들, 불쌍도 해라! 인생은 찧고빻고 시껄벅쩍, 사랑도 하고 증오도 하고 곱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가 증오나 미운 감정을 사랑이나 고운 감정으로 컨트롤하거나 승화시켜 나갈 때 삶은 더 그럴 듯하고 재미있다. 2005. 4. 14
19    사디히즘과 마조히즘 댓글:  조회:4661  추천:73  2005-04-08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인간의 심층심리에는 주동적으로 공격하고 정복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만족하는 사디히즘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만족하는 마조히즘 경향이 있다 한다. 이것이 표층심리적 경향으로 표출될 때 외향적이요, 내향적이요 하는 것이 되겠다. 성별적으로 볼 때 대개 남자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여자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거시기 자체가 그렇게 되어 먹었다 한다. 남자는 노출형이고 고사포식인데 반해 여자는 숨긴형이고 벌린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남자가 주동이 되고 여자가 수동이 되면서 남자는 삽입의 배설로 만족을 보고 여자는 받아들이는 포만감의 만족을 느낀다는 것이다. 개인성향에 있어 일반적으로 리더심이 강한 사람은 사디히즘적이고 일반 愚衆은 마조히즘적이다.한국정치의 거물들이였던 박정희, 깡마른 체구에 냉랭한 냉기, 전두환, 독기 서린 눈에 꼭 다문 입, 이들 독재자들은 실로 카리스마적인 사디히즘자들이다. 이에 반해 일반 愚衆들은 개인숭배에 눈이 먼 마조히즘자들이다. 이런 마조히즘자들은 카리스마적인 사디이즘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인종적으로 볼 때 대개 서양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동양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 서양의 동양에 대한 무자비한 피비린내 나는 식민지, 반식민지 침략 및 奴化는 거창한 정치, 경제적인 요인이 주된 원인이 되겠지만 그들의 사디히즘적인 호전성도 무시못할 요소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반해 거듭되는 실패에 동양의 자기기만적인 아Q식 정신승리법 대응양상은 변태적인 마조히즘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문학작품만 놓고 보아도 서양 사람들이 높게 사는 인물들은 고대 희랍 [오디세이]의 오디세이, 중세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현대 [노인과 바다]의 샨타야고... 이들 모두 뛸 데 없는 사디히즘적 영웅들이다. 오디세이, 10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10년간 갖은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는 자기 마누라에게 집적거리는 불한당들을 일거에 무찌른다. 파우스트, 만족을 모르고 끊임없이 탐구하고 추구하고 정복하는 거인, 하늘이 감동하여 천사들이 그를 모셔간다. 샨타야고, 어깨는 처지고 허리는 굽고 한물 간 노인인 듯하다. 그런데 그는 늙음에 不服輸하는 젊음의 기백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젊음을 증명하려는 듯 허술한 쪽배에 작살 하나 달랑 들고 파도가 사품 치는 허허 바다로 상어를 잡으려 나간다. 끝내 잡고야 만다. 그래서 뼈만 남은 다 뜯기운 상어만 달고 돌아왔어도 그는 한량없이 기쁘기만 하다. 우리 문학작품을 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고대 [단군신화]의 곰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기자신와의 힘든 극기 싸움을 한다. 그래서 그는 끝내 성공하여 韓민족의 始祖母가 된다. 중세 고려가요, 모래에 심은 닦은 밤이 싹이 나고 철소가 풀을 다 뜯을 때 유정하신 임과 갈라지겠다는 불가능한 상황설정의 애절함, 일연의 ‘戀君之詞’로 대변되는 임노래, 현대 한용운의 ‘임의 침묵’, ‘임은 갔습니다./.../그러나 내가 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운운, 윤동주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 우리는 문학의 主調는 마조히즘적이다. 정말 우리는 [애국가]라는 國歌에서조차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상징인 동해물과 백두산을 마르고 닿는 축소지향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로 거론하는 거지? 몸에 배인 뛸 데 없는 너무나도 마조히즘적인 발상. 문화유형 상에서 생계수단 차원에서 볼 때 유목문화, 상업문화, 해양문화 쪽이 사디히즘적 성향이 강하고 농경문화 쪽이 마조히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유목문화, 수초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동물살상을 기본으로 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호전성, 공격성, 정복성이 몸에 배인다. 멀리꺼는 그만두고라도 우리와 가까운 칭키스칸 몽고 鐵蹄의 동서양 종횡무진, 그리고 동북산간벽지에서 일어난 누르하치 만주족이 일거에 중원지구를 휩쓸며 대원, 대청제국을 세운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상업문화, 일정한 코스에 따라 나다니며 장사를 생계의 기본수단으로 하는 상업문화는 ‘장사군 제 아비도 속히’는 매정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사가 잘 안 될 때는 날강도로 변하는 무지막지함이 있다. 중국 실크로드의 길이 평화의 길만이 아니고 근대에 서양 사람들이 장사, 무역의 기치를 내걸고 결국 전쟁의 불꽃을 튕긴 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해양문화, 바다의 생물에 대한 살상을 기본으로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면에서는 유목문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럴진대 이들도 호전적이고 공격적이고 정복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유명한 중세 북유럽의 亦貿亦盜, 아니 실은 貿의 간판을 걸고 盜의 행각을 벌인 바이킹은 말 그대로 海盜, 해양문화의 사디히즘적 성향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된다. 농경문화는 유목문화, 상업문화, 해양문화와는 다르다. 농경문화, 日出而作日落而息, 순응적이다. 그리고 春耕夏耘秋收冬藏, 한 자리에서 맴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연의 흐름에 맡기며 때를 기다려 행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은 수동적이고 받아들이는 생활양식에 안주할 수밖에. 문화유형 상에서 지정학적 차원에서 볼 때 섬문화 쪽이 사디히즘 성향이 강하고 대륙문화은 마조히즘 성향이 강하며 반도문화는 그 중간으로 보면 된다. 섬문화, 고립된 외로움 그 자체. 밖의 세계는 항상 호기심을 유발하는 유혹의 존재. 그리고 단절된 세계는 항상 무엇이 모자라고 부족한 듯한 허전함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유혹의 세계로, 모자람이 없는 풍성한 세계로 짓궂은 진출을 시도한다. 중세 한반도와 중국에 대한 倭寇들의 소란, ‘도자기전쟁’이라고도 일컫는 조선조의 임진왜란, 그리고 현대사에 있어서 조선조병탄, 나아가서 중국대륙침략, 그리고 동남아, 더 나아가 태평양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침략의 마수를 뻗친 일본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대륙문화, 地大物博 모자라고 부족함이 없다. 그러니 부러울 것도 없다. 여기에 知足者常樂의 생활철학이 가미되니 더 이를 데 있는가. 그러니 눈을 밖으로 돌려 신경을 쓰며 남을 공격하고 정복하고 할 필요가 없다. 이로부터 마조히즘적인 평화주의가 싹튼다. 중국이 전형적인 보기. 중화주의, 내가 세계의 중심. 大海는 百川을 받아들이는 법이라, 오너라 내게로 스타일이다. 大智若愚식 배포유한 큰 스케일의 마조히즘. 그래서 동서남북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라고 얕잡아 보면서도 굳이 무력으로 공격하고 정복하자고는 안는다. 물론 공격하고 정복하더라도 그것은 諸葛亮식 ‘七擒七縱孟獲(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주어 진심으로부터의 감복을 얻어내는데 있다. 오히려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 시끄럽게 자꾸 집적거릴 때는 만리장성을 쌓아 못 들어오게 막아버린다. 그러다가 일단 들어오면 마조히즘적인 醬독문화로 흔적도 없이 녹아낸다. 만족에게 당하면서 오히려 만족을 녹여낸 漢族이 아닌가. 반도문화, 대륙문화와 섬문화 사이. 섬문화적인 막힌 데가 있다. 그러나 대륙과 연결되어 숨통이 틔워있다. 한반도가 전형적임. 韓민족은 외래 침략세력에 대해 가만히 앉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의병, 의렬단, 독립군, 의용군, 광복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말 그대로 사디히즘적인 줄기찬 항전이다. 여기서 잠간 인도민족과 대비해보도록 하자. 근대에 들어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런데 인도는 사디히즘적인 폭력이 아니라 마조히즘적인 비폭력 즉 깐디 식의 무저항주의로 저항했다. 여기서 폭력에 대한 韓민족과 인도민족의 부동한 대응양상을 극명하게 볼 수 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국의 틈서리에서 부대껴왔다. 이로부터 마조히즘적인 사대주의라는 것이 싹트기도 했다. 조선조시기 중국을 대중화라 하고 스스로 소중화라고 자처한 것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된다. 사회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볼 때 정치, 도덕, 종교는 묘한 사디히즘이나 마조히즘 양상을 드러낸다. 정치라는 것은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이끌고 있으며 그것은 노선, 정책, 방침으로 현실성을 확보한다. 여기에 군대, 경찰, 법 등 강경한 조치들이 밑받침되어 있다. 그러니 정치라는 것은 사디히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종교라는 것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카리스마 앞에서 마조히즘적 심성을 키우는 것이다. 독실한 종교신자들이 수시로 기도하고 설교를 들으며 주기적으로 절대신과 교감하는 것은 이러한 심성을 키우는 구체적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청해의 라마교도들이 몇 천리를 몇 보 안팤에 절을 해가며 티벳에 가서 달래라마 발등에 입술을 맞추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는 것, 천주교에서 고해성소를 하는 것, 이슬람교에서 천신만고 종교성지-메카를 순례하는 것은 그 심성의 가장 구체적이고도 집중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도덕이라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중간양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다 갖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도덕, 사람의 기본 징표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도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여론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도덕은 다분히 사디히즘적이다. 그런데 이 도덕이라는 것이 일단 한 사람에게 있어서 완전히 생리화되어 내재적인 도덕률로 화할 때 그것은 마조히즘적이다. 톨스토이의 도덕적 자아완성이나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그 전형적인 보기로 된다. 사디히즘이나 마조히즘이 위와 같이 직설적인 도경을 통해서도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승화된 대리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쟁, 전형적인 인간의 사디히즘의 집단적 발로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더 노골적이고 무자비한 발로를 보게 된다. 포로 학살 내지는 노예화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된다. 포로문제에서 문명해졌다고 하지만 1차,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현대전쟁이라는 것도 인간의 광적인, 비이성적인 사디히즘의 발로임에는 틀림없다. 어찌 보면 그것은 대량살상 무기가 동원되기에 더 참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에도 전쟁의 암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특히 냉전이 종식된 현 단계에 있어서 교류, 이해, 평화가 시대의 주요흐름으로 돋보이고 있다. 그래서 현재는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인 전쟁은 점점 뒤안길로 사라지고 스포츠게임 같은 것이 부상되면서 새로운 사디히즘 발산통로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스포츠게임이 전쟁을 통해 발산하던 사디히즘을 발산하는 합리적인 대체통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문명이라는 것이다. 올림픽, 월드컵은 ‘세계전쟁’에 다름 아니다. 그 출전선수는 ‘전사’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런 ‘전사’들을 통해 싸움을 하고 있다. 여하튼 이기는 것이 장땅. 1등, 슛... 우리 ‘전사’들 장하다. 나도 이긴 기분. 그러면 ‘전승’축제. 온 나라가 들끓는다. 현대 인간들은 바로 이런 게임을 통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 아닌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대단함, 자부심을 느껴보려 하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스포츠, 축구팬, 광들을 양산하는 소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시기 우리 연변의 ‘오동’축구팀도 마찬가지다. 조그마한 촌구석에서 출범하여 전국 갑급 레벨에서 맹활약하고 1, 2강을 육박하며 맹위를 떨칠 때 우리 얼마나 속시원했던가? 천년 묵은 스트레스가 사디히즘적인 발산을 통해 하루아침에 깡그리 싹 풀린 개운함 그 자체다. 우리 연변 어렵고 스트레스 많이 쌓이는 곳인데 우리 연변축구팀 한 번 더 떨쳐보지. 요새 안 그래도 좋은 소식 들리던데...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이 스포츠게임을 통해 발산될 때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구잡이나 自虐적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병적인 극단적인 표현이다. 히틀러, 게르만종족 우월론에 빠져 나치스로 나가 마구잡이식 사람 잡이는 사디히즘의 전형적인 병적인 표현이다. 현재 담배의 해독을 번연히 알면서도 自虐적으로 계속 피우는 것은 마조히즘의 전형적인 병적인 표현이다. 사실 인간은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을 같이 갖고 있다. 그것은 때와 장소에 따른 차이 및 많고 적게, 강하고 약하게, 주도적으로 부차적으로, 노골적으로 우회적으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치라는 것이 사디히즘적으로 많이 흘러왔다고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민주화의 물결이 일면서 마조히즘적인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때에 따른 부동한 표현양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적인 영웅도 돌아서서는 외로운 눈물을 흘릴 때가 있고 정에는 약한 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의 경우만 놓고 보아도 전반적으로 그들이 사디히즘적이라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마조히즘적 성향이 대단히 강하다. 기독교문화가 바로 그렇다. 왼쪽 뺨을 맞았으면 오른쪽 뺨을 더 때리라고 내밀라는 교리, 따지고 보면 마조히즘적인 깐디 식 비폭력무저항주의. 사실 이 기독교 자체도 사디히즘적인 데가 있다. 중세기 몸서리치는 마녀사냥, 종교재판소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전반 역사를 보더라도 서양 사람들은 분명 채찍과 당근 즉 사디히즘적인 武와 마조히즘적인 文의 논리로 행세해 왔다. 중세기 기사와 신부, 그리고 11~12세기 3차례에 걸쳐 아랍세계에 대한 기독교 십자군원정, 그리고 근대 한 손에 총, 다른 한 손에 성경을 들고 우리 동양에 대해 행한 침략은 그 전형적인 보기들이다. 일본사람의 경우도 보면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의 전형적인 이중성을 나타내고 있다. 중세 직접 사람머리를 베여보는 것으로 칼날을 실험해본다는 일본 사무라이, 그리고 하라기리(할복자살), 현대 ‘가미가제’자폭기, 남경대학살, 수많은 만인갱... 히틀러 못지 않는 광적인 사디히즘 발산. 일본사람 정말 무섭다. 그런데 일본인 개개인을 만나보라. 정말 순하디 순한 양 같다. 무얼 드시겠어요 하면 무엇이나 좋다고 하는 일본사람. 무의지적이다. 여기서 한국 사람과 갈림길이 생긴다. 한국사람 의지적이다. 무얼 드시겠어요 하면 이것, 저것 자기 의사를 분명히 나타낸다. 일본 사람 ‘곤니찌와’ 동시에 90도 허리 굽힙, 그리고 ‘이락샤이마세’ 입에 안 떨어진다. 일본 사람 분명히 마조히즘적인 데가 있다. 일본사람 겉과 속이 다른 이중얼굴이라는 말도 들을만 하다. 서양 사람도 좋고 일본 사람도 좋고 이들에게 있어서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극단으로 달리며 물과 기름처럼 조화되지 못하고 따로 따로 노는 인격분열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좀 안스럽다. 사실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이라는 것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같이 놀아날 때 멋있다. 우리 민족의 고전적 민요 [이라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임은 ‘나’를 뿌리치고 무정히 떠난다. 잡아둘 수 없는 임. 소박맞는 ‘내’ 신세. 한 없이 서럽다. 그래도 원망 하나 없이 임을 보내는 듯한 애잔한 마조히즘적인 [아리랑]. 그런데 서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 발병이 난다’고 저주한다. 여자의 저주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단데... 이것은 사디히즘적인 사랑의 역설적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다. 김소월은 우리 전통 민요풍의 현대시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시가 운율 면에서 뿐만 아니라 사실 정서면에서 우리와 더 닿아 있다. [진달래], ‘나 보기가/역겨워 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역시 소박당한 여인의 비애를 읊는 듯하다. 그런데 그녀는 비애에만 잠긴게 아니고 가장 아름답다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꼿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며 가시는 걸음걸음 사분히 즈려밟고 가시라 하며 축복을 하는 듯하다. ‘즈려밟고’의 마지막 육체적 사랑갈구 운운을 떠나서도 전형적인 마조히즘적인 사랑이미지다. 사랑에 있어서 한 없이 착하기만 하고 무의지적으로 거저 따르기만 하는 마조히즘. 그런데 여기서 사랑의 매서운 빛발은 번뜩이고-‘나 보기가/역겨워 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첫 구와의 조응 대조 속에서 툭 쏜다. 갈 테면 가라, 미련도 두지 않겠다, 그러니 눈물도 없다 하는 식이다. 사랑의 사디히즘. 순하기만 순한 그런 숙맹에 가깝고 눈먼 사랑은 아니다. [아리랑], [진달래]-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의 動靜이 어울리는 멋진 여인상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사실 이런 멋진 여인상은 우리의 고전적 여인상-춘향에게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 당겼다 놓았다 사랑의 고삐를 요리조리 요량하며 이몽룡과 사랑의 스토리를 엮어가는 춘향, 사랑의 사디히즘과 마조히즘을 너무나도 잘 갈무리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마디로 外柔內剛의 향긋한 춘향이라 한다. 사실 우리의 여자들은 다 이런 外柔內剛의 멋진 데가 있다. 행주치마, 외적이 침입할 때는 행주치마까지 동원하여 떨쳐나서는 우리네 여인들. 그러나 독수공방하며 그렇게 그리던 임이 오는 순간에는 버선발로 달려 나가다가도 어마, 옷고름만 쫑긋 물며 돌아서는 여인들. 사랑 안할 수 없다. 드센 기에 뻔뻔하기만 한 대국여자들, ‘하이하이’ 하며 한 없이 굽실거리기만 하는 섬나라 여자들에 비기랴!2005. 4. 8
18    성도착증 댓글:  조회:4670  추천:59  2005-04-07
성도착증우리는 이 세상에 남자나 여자로 온다. 우리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러니 부모들의 낳아준 ‘은공’에는 그리 감지득지할 필요가 없다. 그네들이 자기네 좋아서 어쩌구려 하다가 우리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달갑지 않은 우리가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실존적 고민이 생겨나기도 한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은데 왜 여자가 되었지? 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데 왜 남자가 되었지? 남자가 되고 싶고 여자가 되고 싶은 엇갈린 인생멜로드라마. 한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자기 뜻대로의 남자나 여자가 되어 살았으면 원이 없겠쟈! 나는 정말 여자가 되고파. 너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그럼 우리 한번 되어 보는 거야. 가장 손쉽게는 나는 여자 옷 입고 너는 남자 옷 입는 거야. 짱~ 내가 치마 입으니 그럴 듯 하지? 음, 그런데 수염, 그 꺼칠한 수염... 맞아, 수염 깔끔히 밀고 한술 더 떠 연지꼰지 립스틱 바르고 퍼마머리에 그로테스크하게 여색만들기. 이만하면 록왕 마이크젝슨 뺨칠 정도 되지 않냐?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아예 정형외과에 가서 거세해버리자. 그리면 한국의 하리순지 허리순지 뺨치지 않으리! 너도...지금 참 세월 좋다. 인간실존에 대한 존중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 모든 것을 정상, 적어도 이상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으니 말이다.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중국의 경우 봉건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개혁개방전만 놓고 보아도 남자가 여자의 옷 혹은 여자가 남자의 옷만 입어도 이상한 눈길은 약과고 性倒錯症이라 하여 병적으로 취급했다. 우리 엄마의 경우는 그 어려운 세월에 남편 모실내기에 6형제 키우느라고 내내 우리 남자들 옷만 주어 입다보니 별명도 어느새 ‘남자’로 되고 말았다. 사실 우리 엄마는 너무나도 여성스러운 여린 마음가짐의 여잔데 이런 ‘왕청’ 같은 별명이 척 씌워지니 마음고생 오죽 했겠습니까! 그때 정말 바지만 놓고 봐도 남자의 것은 앞으로 타졌고 여자의 것은 옆으로 타졌지. 그리고 井水不犯河水라 男女바지受授不親했지. 그러다가 개혁개방이 되자 여자들 바지 어느새 앞이 타진 남자바지로 둔갑하고 말았지. 진 청바지 하나만 놓고 보시오. 거기에 무슨 남자바지 여자바지 따로 있는가? 거저 입으면 다지. 사실 바지만의 얘기가 아니다. 머리모양새만 보아도 남자가 장발을 하든가 여자가 단발을 하든가 하는 것이 이제는 희한한 일이 아니고 요새는 젊은 애들 남여 공히 알락달락 염색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화장도 여성점유물인가 했더니 어느새 남자화장품세트들도 출품하면서 남녀 공히 깔끔하고 화사한 화장발을 추구한다. 그리고 남자애들도 귀걸이, 목걸이에 요란하다. 이 모든 것 性倒錯症? 단마디로 결론짓는 것은 무모. 현대는 탈중심에 획일적인 것이 무너지고 흑백논리보다는 다원가치가 존중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성적이고 편리일변도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로부터 남여 성구분에 있어 옷이나 화장 같은 전통적인 형식적 구분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형식적 구분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현대정형외과의술을 통한 진짜 남자 혹은 여자가 되는 방도를 취한다. 멀리 얘기는 그만두고 한국의 하리수, 우리 연변의 모모양... 이들의 요술 같은 여성변신 그리고 당당하고 화려한 노래춤판, 현대과학과 개성적 삶 추구의 개가에 다름 아니다. 나는 언젠가 태국에 갔다가 게이들의 쇼구경을 보게 되었다. 게이, 남자들이 여자로 변한거. 중국말로는 人妖라 한다. 좀 섬뜩했다. 그런데 직접 그녀들을 접하는 순간 나는 그만 입을 짝 벌리고 말았다. 그녀들은 하나 같이 미끈하게 잘 빠지고 쭝쭝쫑쫑 여성적 性徵도 뛸 데 없는 비너스. 人妖가 아니라 진짜 귀신이라도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들이 관광객들의 돈을 노려 폼 잡고 서 있거나 쇼를 하고 지어 몸까지 판다고 하니 좀 서글퍼났고 씁쓸해났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들 가운데는 돈을 떠나서 정말 여자가 좋아서, 여자로 사는 것이 부러워서 게이로 된 순정의 여자가 있다는데 대해 나는 눈을 새롭게 크게 떴다. 그럼 그렇겠지. 나는 보아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우고 당당하고 멋지게 포즈를 취한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 나는 그녀들과 사진을 빵, 빵, 빵 찍었다. 이런 게이들은 수명이 짧다고 한다. 30~40대가 인생막판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또 서글퍼났다. 좀 안타까워났다. 그 꽃 같은 여자들... 그러나 또 다음 순간 好死不如懶活보다는 ‘하루를 살아도’ 살고 싶은 삶을 추구한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코마루가 찡해나며 몸에 와닿는 데가 있었다. 우리는 다 好死不如懶活라 두더지 같은 삶을 살진데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사람 사는 것이 참 안 쉽다.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눈 하나 찍 감고 대개 過一天算一天 되는대로 살아간다. 세상 만화경에 요지경이라 어떤 사람은 딱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데 혹은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만 여자 혹은 남자로 태어나 버렸다. 우리 주변에 천성적으로 남자같이 생긴 여자 혹은 여자같이 생긴 남자 그리고 목소리에 몸가짐 자체도 그 식이 정식인 여자 혹은 남자가 없지 않아 있다. 한국에 탤런트 이정섭씨 키꼴은 장대하되 전형적인 이 케이스. 그는 오히려 이 케이스를 십분 활용하여 크게 뜨는 것 같다. 내 짜개바지 친구놈 하나는 장가를 들기만 하면 한발에 차인다. 생김생김도 그렇고 노는 것도 그렇고 여하튼 남자 맛이 하나도 없다고.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그 모양새다. 그래서 그 자식 살맛이 죽을 지경이라면서 내내 인상 쓰고 다닌다. 나는 그 자식 보기가 하도 딱해서 야, 니 그 하리수처럼 카 해버리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 자식 처음에는 어, 놀라운 표정을 짓더니 다음 순간에는 정말 그럴까 하며 환한 표정을 짓더라. 사람들 살아가다보면 남자로 태어난 것이 힘들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힘들 때가 있다. 그래서 자연히 남자가 되고 싶고 여자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임을 생각할 때 이것이 비극적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가능성 차원에서 비극을 희극으로 전환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의 하리수, 우리 연변의 모모양, 태국의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 모두들 무난히 이런 삶의 지혜를 잘 구사한 모델들이다. 인생은 선택이고 창조이며 이것이 값있는 것이라 할 때 삶의 지혜를 구사하는 性倒錯적인 삶의 추구도 멋진 인생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성을 바꿔 입는다는 性倒着이라 부르고 싶다. 그럴진대 이것은 남자가 여자 브래지어를 끼거나 란제리를 입는 것 같은 그런 해프닝을 피우는 症적인 性倒錯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사실 현대 한국이나 미국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인 나라에서는 性倒錯症을 錯을 着으로 바꾸고 症을 거세해버린 性倒着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의 경우는 지난 세기 90년대에 이미 性倒着적인 논의가 매스컴에까지 오르면서 무엇 이상할 것 없는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동성애자들의 천국. 동생애자들의 근본 심리기초의 하나가 바로 性倒着에 있다. 생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심리도 진짜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는 동성애가 성립되지 않는다. 동성애가 성립되자면 동성애 사이 적어도 한 사람이 이성의 심리적 경향을 가져야 한다. 동성애는 이성애의 갈등 및 불화, 불편을 커버해줄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인류의 이성애에 못지 않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비근한 예로 고대 희랍, 로마는 넘쳐나는 인구조절을 위해 의식적으로 동성애를 조장했기에 현대 미국보다 더한 동성애천국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동성애는 지난 세기 50~60년대까지만 해도 불법적인 변태적 존재이고 사람들의 눈에 나는 이상한 존재였으며 동성애자 자체도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아니라 어딘가 주눅 들고 꾀죄죄한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70년대부터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너그러워지고 포용력이 커지면서 그리고 동성애자 자체가 당당하고 떳떳이 사회에 진출하여 자기네들의 권리를 요구함으로써 현재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해 정상으로 보게 되는 시각교정을 했고 일부 州에서는 동성애를 합법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것이 점점 미국식 인권의 한 내용을 이루는 추세로 뻗어가고 있다. 고대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 임금의 ‘3천궁녀’들 사이 그리고 궁의 太監이나 內侍들 사이에 특정한 환경 하에서 ‘꿩 대신 닭’이라는 식으로 동성애의 ‘향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말에 ‘가시나’라는 말도 고려 공민왕 때 왕궁에서 곱게 생긴 남자애들을 男扮女妝시켜 동성애 파트너로 삼은 ‘假戱男’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동성애는 일개인의 향락에 부수적으로 어쩔 수 없이 생긴 비극적 색채가 농후하다. 사실 중국고전이나 한국고전에 동성애를 취급한 내용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국 에서 조조 군사들의 낭패상 서술장면은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인간은 분명 이상애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도 있는 듯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실존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그 자체로 이해하려는 자세, 그러면서 중국식으로 理解萬歲의 풍조가 일어나면서 동성애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보편적인 시각교정을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문화의 시원 및 주류를 이룬 중국에서조차 몇 년 전 동성애를 다룬 라는 영화가 히트 칠 정도니 우리 사회는 말 그대로 개방, 이해 내지는 포용으로 나아가고 있다.동성애를 포함한 성도착증이 무의식적인 性倒錯症이 아니고 의식적인 性倒着일 때 그것은 적극적인 바람직한 인생자세로 보아 무방하다. 고대 희랍에 재미나는 신화 하나가 있다. 우리 인간은 원래 남녀동일체였다 한다. 그래서 그때 총명과 힘이 넘쳐났다 한다. 그러니 신의 왕 제우스가 위기감을 느껴 칼로 우리 인간을 내려쳤다고 한다. 이로부터 인간은 남녀가 각기 반쪽으로 떨어져 나갔는데 우리가 이성을 그리워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은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으로의 회귀라는 것이다. 性倒着, 어쩌면 이런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입는 것이다. 유명한 심층심리학자 칼 • 융의 관점에 의하면 남자의 무의식속에는 아니마라는 여성적인 요소가 있고 여자의 무의식속에는 아니무스라는 남성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사나이대장부가 남이 안보는 데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로 무의식속의 아니마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다시피 우리의 무의식세계의 남성 혹은 여성은 의식세계와 다른 성적 경향을 추구한다. 심층심리학 차원에서 무의식적인 性倒錯症은 바로 여기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의식적인 차원에서 컨트롤하고 승화시킬 때 性倒着적인 추구가 될 줄로 안다. 性倒着, 말이 쉽지 현실사회에서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통념은 생리적 특징에 바탕하여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의 역할분담을 강요받아 왔다. 여기에서 벗어날 때 그 사람은 이상한 존재로 지목되어 왔다. 이로부터 정신적 압력 내지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과학적인 의학기술도 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그런 단계는 아니다. 상대적으로 놓고 볼 때 남성이 여성에로의 형식적인 생리적 전환은 쉽지만 여성이 남성에로의 그것은 어렵다. 이것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하여 준다. 그리고 그것은 태국의 ‘저 여자, 저 여자, 저 여자....’들처럼 생명감소의 후유증 같은 것도 감수해야 하는 희생도 치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의식 차원의 性倒錯症을 의식차원의 性倒着으로 대체, 승화시키는 만큼 간단하거나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性倒着, 정말 자유자재로 성을 선택하고 소신껏, 마음껏 살아보는 삶은 살 수 없는지? 나는 불교, 아니 내 나름대로의 윤회설을 믿고 싶어졌다. 이 세상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저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났으면 저 세상에서 남자로 태어나는 윤회설 말이다. 이로부터 나 자신의 ‘반쪽’ 성을 다 살아보는 멋지고 완미한 인생이 되었으면 한다. 2005. 4. 8
17    노출증과 관음증 댓글:  조회:5098  추천:73  2005-04-06
노출증과 관음증 우상렬ㅣ연변대학 부교수 화사한 봄기운이 몸을 감싸고돈다. 흑흑, 동물들 발정한다. 1년껏 기껏 장재 두었던 사랑의 봄물이 쏴쏴 터져 나온다. 아, 나도 발정한다. 누가 사람은 발정기 없다 했어? 뭐, 인간은 4계절을 사랑한다고. 그런데 봄이 되면 괜히 싱숭생숭해나고 지네들 흘레하는거 보아도 열 받고 사람새끼들 찧고빻고(♀♁) 하는거 보면 더 열 받고. 이것 또 왜 그런거지? 뭐, 사람들 옛날 발정기때 하는 짓의 조건반사적 유전이라고. 아, 여하튼 나는 벗고 싶다. 벗는 계절. 사랑의 계절. ^0^ 봄 얘기 떠나서 인간들은 벗어 보여주기 싶어 하는 노출증이 있단다. 인간에게 있어서 입는 것이 정상일진대 이것은 분명 비정상이다. 이것이 고질화되어 시도 때도 없이 벗을 때 그것은 의학에서 말하는 병적인 노출증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정상적인 노출증이 있다고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하다고 한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의 옷을 비교해볼 때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여자들의 옷이 노출도가 훨씬 심하고 여자들이 대개 치마를 입는다고 한다. ☞ 보라, 여자들 어느새 바지 벗고 치마 입는다. 그리고 날이 점점 더워짐에 따라 치마길이도 점점 짧아지다가 어느 날에는 달랑 앞뒤만 가린 천쪼박-미니만 남는다. 그리고 위도 점점 더 패이는 심각한 V로 내리닫고 배꼽 위로는 점점 밀리워 올라가다가 어느 새 배꼽티가 되고 만다. 그러다가 좀 대담한 여석들은 브래지어만 달랑 걸고 활보하기. 또 좀 더 간이 큰 여석들은 노팬티도 한번 살짝 시도해보기. 그러다가 서늘한 가을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바지 입기. 그러나 타이트한 바지-듣기에 좋은 健美褲에 팬티 막 찍어내기. 추운 겨울이 되면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아래위 옷 많이 껴 입기. 슬픔의 계절. 그런데 요새는 치마에 스타킹만으로도 견딘다. 밍크코트에 곳곳에 설치된 난방시설 덕택. 여자들 살고 난 세상. 이래저래 여자들은 못 벗어 안이 달아난단다. 왜 그럴가???... 여자들은 자기네 몸덩어리가 남자들보다 여쁘다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단다. 사실 이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따져도 여자들 육체는 훨씬 아름답다. 남자들 게임이 안 될 정도로.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 쫑쫑빵빵 들어가고 나오고, 지그재그 곡선미에 변화무쌍-짱. 오, 나의 비너스요. 그러니 여자들 벗고 싶고 보여주고 싶을밖에. 이것은 정상-人之常情. 오히려 안 벗고 싶고 안 보여주고 싶은 것이 비정상-이상. 그리고 여자들 몸짱은 남자들을 위해 벗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법. 이것은 무의식심층의 생명의식과 관계된다. 싱싱하고 준비된 몸짱을 짱~ 드러낼 때 남자들은 눈이 빛구리 된다. 순간 자기가 씨 뿌릴 터밭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서로 자기가 뿌리겠노라고 지랄발광 한다. 피투성이가 되어 싸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에 여자들은 깨고소해 한다. 그럼 그렇겠지. 그리고는 싸움에서 이긴 가장 센 남자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제일 좋은 종자임에라! 이것이 여자들의 무의식 진풍경이다. 이것이 이제 의식세계에서 나타날 때 자기의 몸매자랑을 전제로 이 남자, 저 남자 튕겨보는 연애행각을 거쳐 일단 이거다 싶으면 결혼으로 골인한다. 첫날밤 은근한 내숭을 떨기는 하지만 몸짱 열어주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는 것도 여자. 그러니 첫날밤 신랑이 신부한테 안 덮쳐보라,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죄’ 어디 있으랴! 맞쟈, 여성동지들! 정말 여자들은 몸짱 노출증에 각고의 노력을 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여자들의 가장 매력포인트인 一个中心, 兩个基本点을 돌출히 하는데 신경을 쓴다. 一个中心, 이것은 매력포인트 가운데 포인트. 옛날 중국에서 여자들의 纏足-三寸金蓮, 그것이 남자들 시각의 강요라고 하기도 하지만 실은 三寸金蓮 때문에 오리걸음처럼 뒤똥되똥 느린 걸음걸이가 처녀막을 잘 보존하고 여성성을 돋보이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들 스스로 선택한 산물이기도 하단다. 요새 여자들이 처녀막을 정형수술로 복원하기도 한단데 이것은 현대과학을 동원한 一个中心지킴이. 兩个基本点, 一个中心 못지 않은 신경이 쓰임. 일단 고봉으로 키우기. 이것이 잘 안되면 다른 수단과 방법 취하기. 일찍 서양에서 나왔다는 여자들의 하이힐-高跟皮鞋, 신기에 편하지 않고 불편하다. 그런데 그것을 신으면 힐이 높아 윗몸이 앞으로 기우는 긴장감을 주기에 오히려 윗몸은 뒤로 꼿꼿이 젖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둔부 쪽은 앞으로 내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兩个基本点을 고봉으로 키우기에 좋고 둔부는 처지지 않고 오돌차져 좋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힐은 덤으로 三寸金蓮 같은 이점도 있다고 한다. 현대 兩个基本点 확대 내지 고봉 정형수술, 그리고 브래지어 쪽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봉 만들어 눈가림하기 등등은 현대과학을 이용한 여자들의 안스러운 노출증의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一个中心, 兩个基本点외에 여자들의 화장끼도 뛸 데 없는 노출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연지꼰지 바른 화사한 얼굴, 요렇게 조렇게 요란함을 자랑하는 헤어스타일, 그리고 생눈섭 밀어내고 눈썹심기에 생눈 잡아 째고 아이도새로 광내기, 그리고 섹시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립스틱 바른 빨간 입술, 그리고 반짝반짝 매니큐어 바른 손톱발톱... 이외에 달랑달랑 반짝반짝 귀걸이, 반지, 손목걸이, 배꼽걸이, 발걸이... 여하튼 눈이 헷갈리도록 아롱다롱한 악세사리들을 동원한 그로테스크한 모양새 갖춤은 나는 여자, 멋진 여자라는 것을 나타내고 주지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무의식적인 육체미 자부심에 기초한 노출증은 여자들로 하여금 각종 모델이나 쇼 같은데 단골손님이 되게도 한다. 여자들, 미술, 조각 등의 누드모델이나 패션쇼, 스트립쇼-裸体表演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三點式 미인선발대회를 독무대로 휩쓴다. 원래 중성적인 뜻을 가졌을 ‘미인’이라는 단어가 전적으로 여자들한테만 전용된 것만 보아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노출증, 물론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남자들. 터들터들, 부시시 껄껄 원숭이상 못 벗어나고 멋대가리 없이 밋밋하고 단순-몸짱이 되기엔 꽝. 그러니 여자들보다 우수한 쪽으로 승부를 걸어본다. 울끈불끈 근육질-보디빌딩, 위통 벗어 제끼기. 그러고 남성 그 자체 노출하기. 어릴 때 죽죽 서서 누가 오줌줄기 더 멀리 갈기는가 비기기, 그리고 사춘기가 되면 자꾸만 내놓고 보여주고 싶은 남성, 특히 여자들에게... 요원의 불길마냥 거침없이 돋아나는 뽀드라지(여드름)-靑春美麗豆도 이런 노출증의 무의식심리차원에서의 생리적 표출. 요새 남자 애들, 여자애들처럼 머리 요란하게 가꾸고 염색하는 것도 신세대 노출증의 다른 한 광경은 아닌지? 노출증이 있으면 관음증이 있는 법. 인간은 바로 이런 이율배반적으로 되어 먹음. 다른 사람의 엄밀한 곳이나 사생활을 은근히 보고 싶어 하는 것-관음증. 동서양을 막론한 전통적인 春畵, 그리고 현대 누드그림, 황색소설은 전형적으로 인간의 이런 관음증인 욕구에 만족을 준다. 특히 春畵 같은 경우는 대개 주문을 받아서 그리게 되는데 주문자의 관음증 취미에 가장 잘 영합한다. 현대 감상심리학에서는 연극이나 영화 감상의 심리적 메커니즘도 인간의 관음증에서 찾고 있다. 관중석은 어둡고 무대나 영화화면은 밝고, 이런 명암이 엇갈리는 속에서 관중은 엄밀히 남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근간에 한국 가족형 TV드라마가 인기상승선을 달리고 있는 원인도 인간의 이런 관음증 욕구를 충족시키는 잠재적 요소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인간의 이런 관음증욕구는 商術에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春畵의 경우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浮繪라 하여 그림뿐만 아니라 판각 등으로 나아가며 일종 미술산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나이트클럽이나 스탠드바 같은 밤술집에서 야한 옷을 입은 여자를 곁들여 쇼를 하는 것은 일단 관음증 차원에서 남자들을 끌어들이기 족하다. 성의 절대적 개방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진짠지 가짠지 어떤 술집에서 써빙아가씨들이 치마를 입었으되 바닥의 반사재를 통해 노팬티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구멍 통한 섹스장면 구경하기는 정말 남자들의 관음증욕구를 만끽시킨다. 사실 이런 관음증욕구는 여자몸매를 나타낸 술병이나 라이타, 그리고 일부 토크쇼에서 외설적인 얘기를 통한 대리만족 행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남자들은 야한 여자가 옆에 없어도 여자몸매의 술병을 쥐는 것만으로도 관음증의 만족과 더불어 술을 더 많이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보기에 안스럽네! 관음증의 경우 대개 내향적이고 안주적인 여자들보다는 외향적이고 공격적인 남자들의 경우가 더 심하다 한다. 남자들 사춘기에 들어 여자들 꽁무니 졸졸 따라 다니는 ‘꼬락서니’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호기심이거니와 이런 관음증의 전형적인 한 발로로 볼 수 있다. 근간에는 페미니즘이요 뭐요 하며 여성들의 잠재되었던 관음증도 많이 살아나는 듯 하다. 일본 같은 경우는 람보 같은 보디빌딩 남자들을 삼각팬티 하나 달랑 입혀가지고 무대위에서 이런저런 섹시한 포즈를 취하거나 쇼를 시키고는 여자들이 무대위로 올라가 남성을 이러구저러구 하는 여성들만을 위한 밤의 쇼무대가 등장했다고 한다. 노출증과 관음증, 우리 인간의 타고난 욕망이라 할 때 그것을 정상적으로 발산시키거나 잘 유도할 때 그것은 우리 심신에 좋은 약이 된다. 사춘기 때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나타나는 노출증과 관음증, 청소년 성교육의 키포인트의 하나다. 우리처럼 근엄한 척 혹은 부끄러운 척 하며 막고 회피하고 숨기고 시치미를 떼는 그런 자폐증적이고 공포증적인 성교육은 무식하고 전근대적이다. 선진국에서 행하는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보고 하는 오픈된 성교육은 노출증과 관음증을 대리만족시키며 알 것도 알게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온다. 우리한테 계시주는 바는 없는지? 노출증과 관음증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니 자연스럽고 정상적으로 잘 유도하고 발산시켜야지 막고 회피하고 숨기고 시치미를 떼서는 문제가 생긴다. 변태가 온다. 강간이라는 것도 이런 변태의 하나에 다름 아니다. 나는 사춘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지났다. 그만큼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랐다는 말이 되겠다. 내가 1980년대초 대학교에 다닐 때다. 우리 학교 남학생 하나가 여자변소에 들어가기 좋아했는데 결국 그 친구는 ‘류망’, ‘건달’이니 하며 전학교적으로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깜방놀음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친구를 비판하는 마당에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해 났는지 몰랐다. 그때 그 친구는 워낙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음매라! 나는 그때 영화에서 어쩌다 한번 나온 처녀총각 키스씬에 그만 혼이 빼앗겨 몇날며칠 잠을 설치던 기억이 오늘까지도 새록새록하다. 못난이같으니라구! 물론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며 度가 지나친 노출증과 관음증, 그것은 정말 병적인 증상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비도덕적 내지는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질 소지도 있다. 명인들의 사생활을 쇠똥에 쇠파리떼처럼 묻어 다니며 도처에 몰카(몰래 찍는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하는 파파라치들, 돈이 눈이 어두운 파렴치한 인간쓰레기들이다. 영국의 다이엔나 왕비는 바로 이런 파파리치의 희생품의 하나. 노출증과 관음증을 컨트룰하고 활용함에 있어서 그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度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설명하기에는 워낙 복잡하고 어렵고 골치 아픈 일. 그러니 가장 손쉬운 방편으로 우리민족 전통한복 여자들 옷과 만족 旗袍를 비근한 예로 설명할 수밖에. 우리민족의 여자들 옷 진짜 멋지다. 다른 거 다 떠나서 노출증과 관음증 차원에서도 고혹적이다. 兩个基本点을 겨우 살짝 감싸는 윗 도리, 고봉의 멋을 살리며 아슬아슬하다. 여기에 휙 당기면 다 드러날 것 같은 옷고름, 그리고 은근 슬쩍 틔워놓은 치마옆구리... 여자들 노출증 발산하고 남자들 관음증 만족받기에 충분. 그런데 모든 것을 감싸는, 특히 一个中心을 깊숙이 감싸는 모성적인 아래 도리 치마는 위 도리의 드러내는 오픈을 커버한다. 우리 남자들의 관음증은 이로부터 병적인 淫心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마침한 度에서 머문다. 그럼 旗袍를 좀 보자. 旗袍하면 희번덕희번덕 하는 신다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一个中心도 희번덕희번덕 한다. 여기에 兩个基本点을 비롯하여 여성적 특성을 그대로 찍어내는 착착 달라붙는 옷무맵시... 너무너무 육감적이다못해 아찔하도록 육감적이다. 노출증이 커버되지 않는 거침없는 노출 그 자체다. 그래서 여자들의 노출증을 남성유혹의 관능으로 발산함과 더불어 남자들의 관음증은 淫心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旗袍는 일상평복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서 입고나서기에 적합한 옷이다. 이에 비해 우리 여성 한복은 언제 입어도 좋은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옷이다. 지루하쟈, 그럼 끝! 2005. 4. 5
16    선배와 후배 댓글:  조회:4315  추천:59  2005-04-04
선배와 후배 우상렬 혈연, 지연, 학연은 한국 인간관계의 끈끈한 정들이다. 선배와 후배는 학연의 확실한 위계질서로서 그 끈끈한 정의 한 보기에 다름 아니다. 선배 온다. 차렷!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음, 너희들도 잘 있니? 한국대학에서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고 후배한테 베풀며 후배가 선배를 깍듯이 모시는 것, 한국 대학의 진풍경의 하나. 선배는 후배보다 대학입학을 먼저 했다. 그러니 나이에 상관없이 선배다. 선배는 선배고 후배는 후배,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을 선배라고 모시는 韓민족 전통적인 의식하고는 좀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일제 식민지시기 군국주의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대학위계질서의 유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좀 껄꺼름하다. 그러나 현재 그것이 분명 한국식으로 새롭게 그 내연이 채워졌음에라 한국대학문화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신입생입학, 대학생활에는 아직 숙맥인 신입생. 어리뻥뻥. 이럴 때 선배가 나선다는 것이다. 얘들아, 모여. 내가 한턱 쏠께! 대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여차여차... 알았니? 그러면 한잔 해. 그리고 어떤 ‘세심’한 선배들은 학과 교수님들의 성미, 습관, 수준 등에 대해 일일이 거론하며 수강신청에 학점 따는 요령에 이르기까지 에헴, 에헴 해가며 ‘훈계’한다. 정말 대학생활 기본원리부터 구체적인 방법, 요령에 이르기까지 ‘가르침’받게 되니 후배들 도정신하여 들으며 고마워할 수밖에. 그것도 선배들 술 얻어먹으며 말이다. 고마울시고, 선배님이여! 이때는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나.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전통적으로 아랫사람이 위 사람을 모시는 것과는 좀 달리 일반적으로 나이 더 먹은 선배가 나이 적은 후배한테 밥이나 술을 사주는 식으로 잘 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배니까 돈도 우리보다 많겠지 하는 식의 합리주의가 작동해서인지, 아니면 삼촌, 삼촌 하면서 짐 하나 더 지워주는 식인지... 여하튼 후배들은 선배들꺼 냠냠 잘 받아먹으면서 선배님, 예예, 알았습니다하며 말 잘 듣고 거저 잘 모시거나 혹은 흉내만 내도 된다는 것이다!그래서 후배들은 담배를 피우다가도 선배들이 오면 당황해 하며 혹은 당황해하는 척 하며 담배를 비벼 끄거나 담배를 등 뒤로 가져간다. 어려운 존재로서의 선배에 대한 예의의 표시다. 이럴 때 선배들은 대개 어깨가 으쓱 올라가며 선배로서의 존재가치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대개 기분이 붕 떠서 그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괜찮아, 괜찮아 피워! 한다. 그러면 후배들은 못이기는 척하고 피운다. 멋진 광경이다. 禮尙往來의 한 경지! 선배와 후배, 아니, 우리 쪽에서는 아래위 학년 사이 막 치고 박는 ‘아수라장’하고는 좀 다른 데가 있다. 물론 선배와 후배 사이에는 또 고향선배, 고향후배 하는 식으로 지연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개개인 사이에 더 끈끈한 정을 쌓아간다. 그리고 이들 사이 후배들은 평시에 무슨 고민거리가 있을 때도 선배들을 찾아가 털어놓으며 조언을 받기도 한다. 한국 대학에는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고 혹은 선배와 후배 사이 관계를 돈돈히 하는 모임이 학기 초에 학과일정에 공식적으로 잡혀 있다. 오리엔테인, MT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모임은 신성한 것으로 대개 학교를 벗어난 어떤 뜻 깊은 장소를 택한다. 그래서 대개 학과교수들도 참가한다. 오리엔테인, 신입생환영회가 되겠다. 오리엔테인, 선배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가르침을 받으며 신입생들 사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면목을 익히는 모임이 되겠다. MT-Member ship of Training, 단체성원들의 훈련 및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모임이라 해야 되겠다. 이것은 매 학기 시작 때마다 가진다. 나는 이번에 내가 교환교수로 와 있는 배재대학교 국문과의 학생들과 MT를 갔다. 나한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선후배 및 교수가 한잔 하며 허심탄회하게 속말을 터놓고 노래에 춤사위에 하나로 어울리는 것도 좋았지만 초봄의 냉기가 냉냉하게 감도는 식전 아침에 벌어졌던 광경은 더구나 인상적이다. 선배들이 앞에 서고 후배들이 뒤에 선 상태로 학생들이 줄을 짓더니 바지가랭이를 올리붙이고 하나하나 둘, 하나하나 둘 하며 그대로 해변가로 달려가 바다로 뛰어들기! 그리고는 우리는 해냈다는 듯이 허허로운 바다지평선을 향해 야호!를 웨친다. 찬 바닷물에서 한참 물장난을 치던 학생들은 선후배 할 것 없이 물참봉이 되고 말았다. 뭍으로 나왔을 때는 모두 낯이 새파래지고 입술을 들들 뜬다. 그러나 그들은 즐거운 기분에 들떠 희희작작 거리며 숙소로 향했다. 그들은 선후배가 하나가 되어 해냈다는 기분에 들떳다. 선배들은 투정 하나 부리지 않고 잘 따라준 후배들이 고마웠다. 후배들은 그 살을 에이는 찬물 속을 앞장서 뛰어든 선배들이 대견스러워 보였다. 선배와 후배, 서로서로 고마운 존재가 된다. 이들은 이렇게 ‘통과의례’를 잘 치러냈다. 이로부터 그들은 하나가 된 새 출발을 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교수들의 마음은 흐뭇하고 얼굴마다에는 미소가 어린다. 한국대학의 선배후배문화,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국유학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다. 우리 과의 한국 친구 하나 나를 초청. 우선생, 오늘 저녁 한잔 합세. 귀맛이 당겼다. 안 그래도 궁굼하던 차. 여기에 선생이라고까지 불러주니 기분이 더 붕 떳다. 그래서 저녁이 되어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밥도 먹지 않고. 식사시간 퍼그나 지났는데도 이 ‘자식’ 감감 무소식. 나는 밸이 상투밑까지 치밀었지만 이 새끼 보자고 벼르며 꾸르륵 하는 배는 달래느라고 열심히 라면을 끓여먹었다. 그리고는 방법 없이 애매한 책하고만 씨름하기. 그런데 밤 한 11시가 되었을가 하는데 그 ‘자식’ 문을 뚝뚝 노크 하더니 얼굴을 삐끔히 들이밀고 우선생, 한잔 하세 그래, 한잔 하세 그래,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만들어 붙인 ‘손술잔’을 주둥이로 가져가며 술 마시자는 내색을 냈다. 임마, 알았어. 나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속으로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며 걸상에서 기신기신 일어났다. 얻어먹는 놈 방법 있나, 나는 그 자식 따라 수걱수걱 기숙사문을 나섰다. 어디 밖의 식당으로 가는가부다 생각을 했는데 이 자식 학교운동장으로 나를 끌고 가는게 아닌가. 그때 이제 금방 가을에 접어들었는지라 학교운동장에는 잔디가 아직 파릇파릇 돋아 있다. 이상한 낌새가 드는 판에 그 자식말로 우선생, 내 막걸리 한 통 받아 왔네, 오늘 달 밝고 날씨 좋으니 여기서 막걸리나 마시며 밤이나 세우세. 나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졌다. ‘자식’, 정말 막걸리 한통에 마른 오징어오리들에 당콩알들이며 그럴싸하게 신문지 위에 벌려 놓았다. 그런데 그 막걸리라는 것을 보니깐 기숙사에서 손빨래할 때 쓰는 물통-바께쯔에 담은 것이였다. 우리 기숙사에도 그런 바께쯔가 있으니 뛸 데 없다. 나는 좀 꺼림직해났다. 그런데 이것은 약과였다. 술잔이 없어 어떻게 하지 했는데 자식 자기가 싣고 있던 흰 고무신, 아니 너무 오래 신어서 그런지 아니면 오래 동안 안 씻어서 그런지 이제는 좀 누르께레한 한 짝을 척 벗더니 거기에다 대고 막걸리를 들이 붇는다. 그리고는 자, 우선생 먼저 한잔 하게, 아주 정중하게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아이, 이 사람아, 어찌 그런데다 술을 마신다 말이요? 나는 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그럼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지, 아무래도 선배! 가 솔선수범을 하는 법이니깐. 그러면서 그는 고무신에 담김 막걸리를 쯥 소리를 내며 다 들이킨다. 그리고는 카, 술맛 좋네 하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손등으로 입 가장자리를 쓱 닦는다. 그리고는 흰 이를 드러내며 사람 좋게 히죽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그 고무신에 막걸리를 붇는다. 그리고는 나한테 내민다.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어망결에 받았다. 우선생, 달리 생각 말게. 막걸리는 이런 데에 마셔야 맛있소. 나는 고려대학교 출신인데 우리는 다 막걸리패요. 내가 학부생 입학을 하니 선배들이 이런 고무신에 척 막거리를 따라 주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지, 지금 생각만 해도 꿈같애, 꿈같애.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는 그제날의 아름다운 꿈을 되새겨 보기 위해서 오늘 이 장소를 마련한 것 같았다. 나는 눈을 찍 감고 단순에 쩍 들이켰다. 그는 확실히 한국식으로 나의 선배가 되기에 족했다. 그는 벌써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집필중이였다. 그리고 그는 나이도 나보다 한두 살 위였다. 나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법, 그리고 그의 고마운 마음에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쩍 들이켰다. 그리고는 카, 술맛 좋네 하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손등으로 입 가장자리를 쓱 닦았다. 그리고는 흰 이를 드러내 며 사람 좋게 히죽 웃었다. 다음 다시 그 고무신에 막걸리를 부었다. 그는 기분 좋게 얼굴에 웃음을 환히 피우며 그 고무신을 받는다. 또 쩍 내기. 그 다음은 내 차례. 나는 두 번째 고무신잔을 받으면서 말했다. 김선생, 우리 중국말에 好事成雙이라고 이것만 마시고 그만 두기오, 내 네일 수업있다 말이요. 아, 그래, 그래. 그는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인다. 그런데 두 번째 고무신잔을 비우고 난 다음에도 세 번째, 네 번째 잔... 계속 이어졌다. 우선생, 아니 이번에는 친구다. 야, 싸나이대장부라면 이만한 술은 다 마시야지. 둘이서 요만이 술이 다 무엇이냐 말이다, 아무것도 아니지, 친구, 그렇지 않나 말이다. 나는 정말 선배의 들뜬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끝내 그 한 바께쯔 막거리를 꽝냈다. 물론 이튼 날 수업은 아침 잠으로 말아먹고. 그 후 내가 이 일을 한국 친구들한테 재미거리로 얘기했더니 선배 따라 울며 겨자 먹기가 어디 그뿐입니까 하더라. 그렇겠지. 나는 알았네. 한국대학의 선배와 후배 관계에서 울며 겨자 먹기 식은 정말 약과다. 진짜 울며 ‘독약’ 먹기는 신참침례식의 기죽이기다. 이른바 선배의 억지 강권 내지 명령이나마 신참후배는 찍 소리 한 마디 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한 강술 한 사발씩 부어놓고 단모금에 마시기. 이 정도 되면 멋진 상징적 의미의 신참침례가 아니고 이것은 정말 ‘독약’ 먹기에 다름 아니다. 정말 언젠가 한국에서 이런 신참참례에 신입생후배가 죽어나갔지 않았던가? 그래도 선배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의 권위를 확보하련단다. 웃어울시고. 이런 식은 후배들 겉으로 되는 ‘존경’은 살지 몰라도 속으로는 반감만 살뿐. 이것은 上行下傚라 선배에게 당했던 후배들이 그 다음 후배들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기죽이는 노릇을 되풀이하며 ‘분풀이를 하’는 악성순환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한국대학에서의 선배와 후배 관계는 정말 우리 중국 유학생들이 농담 삼아 얘기하는 前肚后背 즉 앞 배와 뒤 등의 관계 다름 아니다. 前肚가 가는데 后背가 따라가기 마련. 선배가 어떤 정치선거유세에 나선다고 하자. 그럼 후배는 무조건 선배 찍기. 선배가 당선되면 선배는 또 자기후배부터 챙기주기. 선배와 후배는 서로 싸고 감돌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노릇하기. 사회 정의니 정도니 하는 것은 다 팽개친체. 중국식으로 走後門의 전형적인 한 보기. 선배니 후배니 하는 한국대학문화가 어느새 우리 대학가에도 불어 닥쳤다. 위에서 말한 선배와 후배 사이 합리적이고 멋진 情적인 주고받음,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사실 대학교라는 것이 아래위학년의 관계를 못 떠나는지라 선후배 관계는 숙명적인 것이다. 그럴진대 선배후배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을 따름이지 우리에게도 이런 문화는 있다. 예컨대 신입생환영모임이나 재학생들과 신입생좌담회조직 등등.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국에 없는 멋진 선후배문화가 있다. 위 학년 학생들이 신입생 마중가기, 정말 멋지다. 나는 지금도 내가 1981년 9월 연길역에 내렸을 때 나의 이불짐 보따리를 받아 안은 그 위 학년 선배님을 잊지 못한다. 그때 그 선배님의 열정적인 마중에 초라한 연길역이나마 나한테는 그렇게 멋지게 안겨왔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그 따분한 대학생활에 위 학년 선배들이 우리 반에 와서 사교무를 배워준다고 땀을 뻘뻘 흐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하다. 그리고 ‘안쪽’에서 온 나에게 조선춤을 배워주던 그 복성스럽게 생긴 선배처녀동지도 그렇고. 그런데 요새 우리의 이런 멋진 대학 선후배문화가 좀 일그러져 가는 것 같아 안타갑다. 선후배문화에서도 좋은 것 보다는 나쁜 것을 따라가기에 바빠하는 우리의 대학생들이 더욱 안쓰럽다. 우리 대학생들 속에서도 한국대학교 신참침례식 기죽이기가 기승을 부린다 한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는 우리 대학생 선배 둘이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야밤삼경에 후배들 기숙사에 뛰어들어 후배들 차렷시켜 놓고는 ‘체조’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손찌검을 해가며 선배의 권위와 지엄함을 내보이려 했다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것은 일종 범죄다. 남의 사생활침범, 인명상해죄 나아가서는 사회질서교란죄... 무서울시고. 다 이 선생된 자의 잘 못으로 칠 수밖에. 우리 친구들 남의 것 흉내 내도 무엇 좀 알고 흉내 내야 하지 않겠는가? 신참침례식 기죽이기, 말만 들어도 끔찍하지 않은가? 전통적으로 우리 韓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민족들에게도 이런 풍속이 있었다. 기독교에서 목사나 신부가 신참자 머리나 몸에 물을 뿌리거나 그 머리를 맑은 물에 살짝 담그었다 꺼내는 침례식도 그 한 보기다. 그런데 이런 의식은 신참자의 몸을 진짜 상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재미나는 멋진 상징적인 과정으로 거뜻이 끝나고 만다. 위에서 나타난 한국대학교 신참침례식은 도가 지나친 무지막지함에 다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신참침례를 총장훈시, 학과장훈시, 담임선생훈시 층층이 훈시하는 멋대가리 없는 식으로 대체해왔다. 그러니 우리 학생들이 한국식을 배울 수밖에. 신참침례식, 합리적이며 멋진데가 있다. 그러니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 나름대로 상징적으로 승화시킨 합리적이고 멋진 모습이여야 한다. 사실 한국대학교 MT는 따져보면 선배들이 주동이 되고 앞장에 서서 후배들을 이끌어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간다는 신참침례를 포함한 단체결속의 멋진 데가 있다. 그러니 이런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따라 배워도 좋다고 생각된다. 2005. 3. 25
15    자아실현 댓글:  조회:4210  추천:86  2005-03-31
자아실현 우상렬ㅣ연변대학부교수 자아실현, 액면대로 이해하면 그것은 자기의 무엇을 실현하는 것이 되겠다. 좋은 의미에서 혹은 나쁜 의미에서. 인간은 야누스적인 존재-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 천사적 존재는 좋은 의미에서의 자아실현을 할거고 악마적 존재는 나쁜 의미에서의 자아실현을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아실현이란 그 무슨 남에게 말 못할 음흉한 자사자리한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악마적 의미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의 반대급부인 천사적 의미에서의 자아실현인 것이다. 이것을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줄로 안다. 사회나 다른 사람에게 누나 폐가 되지 않는 전제 조건하에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는 것 또는 사회나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앞의 것은 자기 내부를 향한 자아실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인생을 알차게 멋지게 사는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진짜 학자들이 책보는 재미에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못 놓는 것은 이 경지라 하겠다. 뒤의 것은 자기 외부의 남을 향한 자아실현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더 없이 고상한 경지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선진국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행위가 바로 이 경지라 하겠다. 이런 자아실현은 그것이 자기 내부를 향하든 자기 외부의 남을 향하든 大乘적인 경지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大乘적인 경지의 인생이 가장 이상적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얼마 전 잡지에서 접하게 된 한국의 유명한 연극배우 이주실 여사가 전형적인 이런 인생의 한 모델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10여 년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인생의 회의나 비애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종전대로 연극활동에 불우이웃 돕는 자원봉사를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요새는 암말기로 60세가 넘은 연세에 전격적인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평생의 소원인 대학까지 졸업했으며 계속 연극활동을 하고 자원봉사를 한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자기가 좋아서 한단다. 그녀는 바로 이런 인생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이다. 그녀는 바로 자아실현의 감동적인 인생을 퍼포먼스 한다. 이런 자아실현 인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디까지나 자기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의욕에 따른 자발성, 주동성 및 스스로의 즐거움에 있다. 그것은 이미 몸에 배인 생리화 그 자체다. 그래서 이런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인생의 더 없는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어떤 젊은이들은 자기네들의 결혼식이나 결혼기념일을 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자원봉사하는 것으로 클라이막스를 장식한다. 또는 고아원이나 노인정 같은데 무명으로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 거기에 무슨 생색을 내는듯한 티, 배푸는 듯한 자세, 남에게 보이기 위한 쇼나 홍보, 광고같은 것은 끼일 사이가 없다. 이로부터 좋은 일을 좀 했다고 해서 도처에 자랑을 하거나 기부금이나 의연금을 내면서 성함 밝히는데 신경을 써는 것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인생은 어디까지나 小乘적인 인생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이 아주 살맛이 나는 멋진 나라라고 생각된다. 한국 어느 곳에 꽝 자연재해가 터졌다고 하자. TV에 때리며 성금 한번 호소하면 기하급수로 몇 억씩 올라가는 지원금모금은 안 보이는 사람들의 전화 다이얄 덕택이다. 진짜 순수한 의미에서의 의연금이다. 훈훈한 인정, ‘사랑의 리퀘스트’가 있는 한국. 그럼 우리의 행태를 좀 보자. 우리도 어디에 자연재해 터졌다고 하자. 역시 의연금 호소하기는 마찬가지. 그런데 내는 사람 미미. 그러니 월급에서 무조건 얼마얼마씩 해서 떼여내기. 이것이 이젠 고질로 되다시피 하여 당비까지도 이런 식으로 납부하기. 그러니 떼내는 사람 기분 좋을지 몰라도 떼운 쪽에서는 항상 당하기만 하는 기분. 사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좋은 일하기’를 제3자가 부여하는 당위성적인 논리로 많이 해왔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가 좋아서 하는 자아실현의 경지와는 다르다. 우리도 어쩌면 좀 자기 스스로 기분 좋아서 하는 자아실현 식을 못 해보겠는가? 제3차 심리학 사조를 몰고 온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가 마쓸로의 인간수요 층차설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주의 생리적 요구를 우선시하는데 이것을 만족 받게 되면 안전의 수요가 생겨나고 이 안전의 수요가 만족되면 집단귀속의 수요가 생겨나고 이 집단귀속의 수요가 만족되면 존경의 수요가 생겨나고 이 존경의 수요가 만족되면 고봉체험의 수요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고봉체험의 수요란 바로 필자가 말하는 자아실현의 수요에 맞먹는다. 보다시피 고봉체험 즉 자아실현의 수요는 일단 앞의 생리수요, 안전수요, 귀속수요, 존경수요가 만족을 받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리수요, 안전수요, 귀속수요, 존경수요를 가장 잘 만족시키는 선진국에서 자아실현자가 많이 나타난다는 말이 되겠다.미국의 9.11테로 사건때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주동적으로 달려온 것은 그 한 보기에 다름 아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자원봉사신청자수를 비교해보아도 선진국 쪽이 월등히 많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소박한 말로서 개괄해볼 수 있겠다. 그러니 우리사회도 하루빨리 小康사회를 지나 인간의 생리수요, 안전수요, 귀속수요, 존경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킬수 있는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잠간 공산주의도덕품성 교육에 대해 좀 보도록 하자. 좀 때 지난 고리타분한 얘기 같지만 사실 공산주의도덕품성은 정말로 고상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실현의 경지와 통하는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아실현의 경지보다 더 높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자아실현이 어디까지나 내 좋아서 남을 위하는 경지라면 공산주의도덕품성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위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자아실현경지가 자아중심적이라면 공산주의도덕품성경지는 타자중심적이다. 그러니 사실 자아실현경지는 조건만 구비되면 마쓸로의 심리수요 층차설로부터 놓고 보아도 스스로 쉽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도덕품성의 실현은 절대절명의 무조건성을 전제로 한 인위적인 각고의 노력을 요구한다. 雷鋒, 공산주의도덕품성의 화신이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助人爲樂가 雷鋒의 경지다. 자기가 안 먹고 아껴 쓰며 모은 돈을 익명으로 수재지구에 보내는 것, 쉽지 않다. 자기의 생리수요를 우선시 하는 우리 일반사람에게는 이것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보통사람들귀에는 이런 공산주의도덕이요 뭐요 하면 그것은 허황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현재 물욕이 팽배하는 시장경제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존재보다는 정신적인 존재라 할 때, 물질성에서 벗어나서 정신적인 자유로운 경지를 추구하는 존재라 할 때 助人爲樂의 경지를 창출할 수 있다. 雷鋒은 전형적인 그 한 보기다. 그리고 현대 순수한 의미에서의 종교인들도 이런 경지에서 노닐고 있다. 항상 사회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사랑으로 대할 때 그것은 가능하다. 雷鋒, 구사회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새사회는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감사한 존재다. 그래서 그는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현대 순수한 의미에서의 종교인들, 물론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할 수밖에. 그런데 하느님은 서로서로 사랑하란다. 니 원수까지도. 이것이 절대절명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논리로 그들을 이끈다. 현대학교교육에 있어서 우리 중국에서 중소학생들에게 ‘좋은 일 해오기’, 그리고 요즘 어느 남방에 있는 대학에서 “학생‘좋은 일 하기’저축은행”을 만든 것, 그리고 미국의 일부 대학에서 실시하는 자원봉사학점따기 등 시스템은 결국 따지고 보면 助人爲樂의 경지를 습관화하여 몸에 배이게 하려는 하나의 조치로 볼 수 있다. 몸에 배이게 함으로써 자아실현 내지는 공산주의도덕품성 경지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데 있다고 볼수 있겠다. 2005. 3. 22
14    혈연, 지연, 학연 댓글:  조회:4459  추천:71  2005-03-31
혈연, 지연, 학연 우상렬 한국 사람들의 끼리끼리 똘똘 뭉치는 情實주의를 나타내는 키워드는 뛸 데 없이 혈연, 지연, 학연이다. 그것은 이 혈연, 지연, 학연이 인간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편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혈연, 지연, 학연에 울고 웃는다. 한국 사람들은 이 혈연, 지연, 학연으로부터 종친회니 동문회요 하는 삶의 보금자리를 틀기도 한다. 사실 한국재벌기업이라는 것도 놓고 보면 이런 혈연으로 똘똘 뭉친 가족체에 다름 아니다. 아버지가 기업을 창업하고 그 다음 아들이 이어받고 그 다음 손자가 이어받는 식. 그러면서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나가는 혈연의 장강. 몇 년 전 부턴가 한국은 민주화가 속속들이 퍼지면서 지역자치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은 모종 의미에서 전통적인 지연을 더 확고히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혈연, 지연, 학연의 얘기는 한국만의 얘기만 아니고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親戚, 老鄕, 同學가 전형적인 그 보기가 되겠다. 그런데 중국은 군이 중시되는 세월에는 戰友도 여기에 가세한다. 중국에서도 이런 親戚, 老鄕, 同學 관계를 이용하면 살아가는데 훨씬 편하게 작용한 것으로 안다. 그 넓은 땅덩어리에 많은 인구들이 부대끼며 사는 중국에서 오히려 이런 관계가 더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생판 모르는 외딴 곳에 떨어졌는데 老鄕을 만났다고 하자. 그 어디 안 반갑겠는가? 중국 사람들도 親戚, 老鄕, 同學를 통해 자기의 귀속감을 확인하고 삶의 둥지를 틀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혈연, 지연, 학연은 불교의 무슨 緣 소리를 떠나서 우리 삶의 동심원으로서 그 누구도 이것을 떠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에 혈연을 가지게 되며 고향 땅에서 살다보면 지연이 이루어지고 학교에 다니다 보면 학연이 맺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연들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인간관계로서 현대 인간들의 많은 동호인 관계와는 다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항상 귀속감을 느껴야 마음이 편해지는 지라 이런 연들을 기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특히 현대 인간들은 따로따로 노는 외로움을 이런 모임에서 삶의 귀속감을 만끽하면서 달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연들의 외연은 신축성이 있는 것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그것은 우리에게 달리 안겨온다. 예컨대 우리가 연길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경우 연길은 우리의 혈연, 지연, 학연의 장소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연길을 떠나 중국 남방에 가서 사업하게 될 때 우리의 혈연, 지연, 학연은 확장을 가져와 적어도 연변, 길림성, 동북, 북방이 될 것이다. 우리가 남방에서 조선족이나 연변, 길림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동북사람이나 북방사람만 만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령 또 우리가 누구도 모르는 외국에 갔다 하자. 여기에서 같은 중국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중국 사람은 혈연, 지연, 학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정다운 존재가 된다. 여기에 만약 그 중국 사람이 조선족이라 할 때 그것은 더 진한 정다운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그 어떤 緣을 따지며 情實主義에 많이 매이고 官尊民卑의 관료주의로 많이 흘러온 우리 동양에서는 이런 혈연, 지연, 학연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신라향가 와 같은데서 보게 되는 군은 어버이여신은 어머니여백성은 그 자식이요...’하는 전근대사회의 얘기는 그만두고라도 현대에 들어와서도 나라를 세운 건국주들을 모두 어버이로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 國父 이승만, 조선에서 어버이 수령님 김일성, 중국에서 중화민국의 國父 孫文, 대만의 國父 蔣介石... 여기에 이들의 부인을 國母로 인지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조선에서 1960년대부터 잘 불러진 '하늘은 푸르고 내 마음 즐겁다손풍금 소리 울려라사람들 화목하게 사는내 조국 한없이 좋네우리의 아버지 김일성원수님우리의 집은 당의 품우리는 모두다 친형제세상에 부럼없어라'라는 (집체작)는 혈연, 지연, 학연을 모두 아우르는 情實主義에 다름 아니다. 상대적으로 놓고 볼 때 서양은 보다 많이 개개인 중심의 개인주의와 情實主義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살아왔기에 이런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것들이 음성적으로 나타났음을 볼 수 있다. 보다시피 인간은 혈연, 지연, 학연의 존재다. 우리가 구정 같은 명절이 되면 기를 쓰고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필사의 탈출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끊을 수 없는 緣 때문이다. 외딴 곳에서 부모친척이 그립고 고향이 그립고 동창들이 그리워나는 것은 바로 이런 緣 때문이다. 인간은 바로 이런 緣 때문에 항상 정감이 촉촉이 솟아나고 젖어들며 행복감에 잠긴다. 한국의 종친회조직 같은데서 장학기금을 마련하여 가문의 자제들을 공부시킨다거나 동문회 같은데서 자기네 출신학교 발전을 위하여 기금을 마련한다든가 하는 것은 정말 보기에 좋고 멋지다. 그렇다 하여 우리는 이런 緣을 아무 때나 마구 드러내서는 안 된다. 진승이 왕좌에 앉았을 때 고향 친구 하나가 무모하게 뛰어들다가 화를 입은 것은 그 보기의 하나가 되겠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여 얄팍한 삶의 한 편법으로 삶을 때 그 달콤한 緣의 맛은 싹 가시고 만다. 예컨대 한국에서 봉건시기 관료들이 四色黨爭에 빠지거나 현대 이런 緣 때문에 기업지성을 말아먹든가, 緣을 통해 지역주의를 조장하거나 선거 때 표 하나를 더 낚으려고 광분하는 것은 씁쓸해난다. 그리고 이것이 전근대적인 붕당냄새가 풍기는 종법주의, 지역주의 같은 극단적인 파벌로 나아갈 때 이것은 심히 경계해야 될 인간 삶의 독버섯으로 된다. 모택동이 중국혁명을 영도함에 있어서 가장 경계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현재 중국에서 이런 緣을 통해 기승을 부리는 走后門은 세상의 정의와 공정함을 싹 말아먹으며 정말 사람들 열 받게 한다. 세상만사 독과 약 같이 가는 법이라 우리는 이 緣을 약이 되도록 잘 써먹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적어도 때와 장소에 맞게 도에 어긋나지 않게 써먹을 때 그것은 생의 감로수가 될 것이다. 2005. 3. 25
13    신조어, 류행어 찧고빻고 댓글:  조회:4460  추천:63  2005-03-31
신조어, 류행어 찧고빻고 우상렬ㅣ연변대학 부교수 짱, 한국 짱은 짱이야. 뭐니뭐니 해도 신조어, 류행어 만드는데 짱이야. 나도 이런 신조어, 류행어 하나 만들어보자-신류어. 다름아닌 신조어와 류행어를 찧고빻은것. 이것은 사전에도 없는거야. 새롭쟈? 나는 한국사람 사는 재미 하나, 아니 재치 하나가 이런 신류어 만들어내는것이라고 생각해. 전에는 한두개 신류어 달랑달랑 사람들 입에 오르고 내리더니 언제부턴가는 동시다발적으로 우후죽숙마냥 막 생겨나고, 어리뻥뻥할 지경. 짱, 한국 신류어 차렷-우리도 잘 살아보세, 유전무죄무전유죄, 아메리카드림, 코리아드림, 고개숙인 남자와 남자들 기 살리기,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Well-Bing, DINK, Job-Nomad, 혈연, 지연, 학연, 공주병, 연상의 녀자, 영계, 막가파, 오렌지족, 폭주족, 야타족과 나타족, N세대, 붉은 악마, 오- 필승코리아 짝짜짜, 꿈은 이루어진다, 물태우, 386세대, 못나서 죄송합니다, 얌체족, 핸드폰, 컴맹, 신드림, 홈리스, 프리랜스, 프로그래머, 짱, 아자아자... 이런 신류어들은 뭐니뭐니 해도 그때그때 특정적인 시대적무드의 상징코드가 됨. 이것은 시대적공감대를 형성하며 가장 빨리 확산되여 나감. ‘우리도 잘 살아보세’- 한국 1960년대 새마을운동 때 내건 슬로건. 정부의 거창하고 의미심장한 정책 슬로건을 누구나 몸에 와닿는 소박한 말로 풀이한 류행어. 이것이 당시 현실집착적인 한국사람들의 신바람을 불러일으켜 한강의 기적을 일떠세우는 가장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였음. 유전무죄무전유죄-탈옥자들이 죽어가면서 자기의 억울함을 有錢無罪無錢有罪로 호소하여 1960-70년대 독재시기 법치를 내건,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人治를 꼬집은 류행어. 아메리카드림-한국 GNP 100불도 안되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잘 사는 미국을 바라고 거기서 꿈을 이루려고 돈벌이를 가거나 이민을 간 시대적상황을 얘기한다면 이에 반해 코리아드림은 지난 세기 말부터 한국이 좀 잘 살게 되자 우리 조선족뿐만아니라 동남아쪽 사람들이 한국으로 물밀 듯이 밀려드는 시대적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신조어. 고개숙인 남자와 남자들 기 살리기-'고개숙인 남자’는 한국 IMF때 구조조정으로 남자들이 줄줄이 정리해고 되여 기 가 죽은 상태를 말하고 ‘남자들 기 살리기’는 녀자들 차원에서 이런 ‘고개 숙인 남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킨 류행어.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요새 한국경제가 불경기의 늪에서 헤매게 되면서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삼팔선-38세를 넘기기 어려움,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해먹으면 도둑놈이라 취업하기 어렵고 취업했더라도 화이트칼라같은 좋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며 곧바로 정년이 잇따르는데 늦게까지 오래하면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신조어. Well Bing, DINK, Job Nomad,-이것은 한국 말로 웰빙이니 딩크니 쟘노마드라는 신조어. 이것은 요새 한국 사람들의 전반 변화된 의식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Well Bing, 보다 많이 물량공세에 치우친 이전의 ‘잘 살아보세’보다는 정신적인 삶에 많이 치우치고 삶의 질을 따지는 ‘잘 살기’. DINK는 Double Income-부부 맞벌이하니깐 수입은 두배, 그러나 No Kids, 아이는 가지지 않는다의 합성어, 완전히 부부 자아중심적인 현재적인 달콤만 삶만 추구한다는 족속들. Job-Nomad는 한 직업에 매이지 않고 철새처럼 이 직업 저 직업 두루두루 섭렵하며 편안하게 살겠다는 직업 유목민, 이것은 대개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여 확실한 직업을 보장받아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직업의 흐름에 맡긴다는 편안한 직업관, 그러면서도 마음대로 안되는 직업선택에 자아안위적인 직업관으로 봐야 하겠지. 이런 신류어는 세태풍속도의 한 단면을 여실히 나타내기도 한다. 혈연, 지연, 학연-한국 사람들이 많이 외우는 經久不衰의 류행어. 사람들이 살아가다 보면 어쩔수 없이 이런 연에 매이게 된다. 그러나 끼리끼리 똘똘 뭉쳐 정실주의삶을 추구하는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유별남. 그래서 사회적문제로 비화되여 대통령선거때 지연 어떻고 하며 공약의 한 내용으로 내걸기도 함. 공주병-은근히 새로운 신데렐라콤플렉스에 빠져 스스로의 나르시시즘에 도취되여 환상적기분에 들떠 있는 녀자들의 작태를 나타낸 신조어. 년상의 녀자-陰盛陽衰의 세월에 남자들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녀자한테 기대여 편안하게 살려고 남자들 자존 다 뭉개며 추구하는 녀자들을 나타내는 류행어. 공주병과 년상의 녀자, 희극적이고 서글픈 세태의 한 풍경. 영계-작은 닭, 아니 병아리가 낫겠다. 남자, 특히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 섹스파트너로 선호한다는 세대차가 날 정도로 어린 여자애들을 나타내는 류행어. 그런데 요새 풍경은 녀자들, 특히 나이 지긋한 녀자들도 섹스파트너로 선호한다는 세대차가 날 정도로 어린 남자애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나. 다 무슨 페미니즘인지 덕택때문이란다. 막가파-언젠가 한국에서 이판사판으로 부자들 상대로 살인강도질을 하며 막가는 인생을 산 한 범죄조직. 한국사회에 있어서 빈부대립의 암적인 불안한 요소를 말해준 신조어. 신류어는 사회특정계층의 세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오렌지족, 폭주족, 야타족과 나타족, N세대, 우리,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신조어. 오렌지족-한국 서울 강남의 일부 부자집 자제들이 커피숖같은데서 마음 맞는 녀자애들이 눈에 뜨이면 오렌지쥬스나 사주며 꼬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폭주족-저녁이 되면 고성능 오토바이로 고속도로 시가지를 질주하며 스트레스를 풀거나 놀아나는 일군의 젊은애들. 야타족과 나타족-남자애들쪽에서 ‘야, 타’, 녀자애들쪽에서 ‘나, 타도 되’에서 나왔다는 짝짜쿵, 한국 젊은 애들의 개방된 혹은 외도로 흐르는 교제풍속도. N세대-요새 무슨 오렌지족이고 폭주족이고 무슨 야타족과 나타족이고 다 뒤로 가라하며 컴퓨터사이버세계같은데 도취하며 가장 최신식을 자랑하는 젊은 애들, 배꼽티에 한술 더 떠 머리염색 그리고 긴 뾰족구두에 전반 이미지가 그로테스크한 미를 추구하는 젊은 애들. 이런 신류어는 사회정치적 풍향계로 잘 나타난다. 물태우-6공시절에 주대없이 이리저리 왔다리갔다리하는 노태우 대통령을 물에 비겨 놀린 신조어. 386세대-1960년대 생에 1980년대 대학입학에 현재 30대 나이에 현재 한국 정계를 주도해나간다는 현임 노무현 대통령 밑에 있는 측근들, 그런데 컴퓨터 586도 아닌 구닥다리 386에 비겨 비꼬고 있으니 정치적 해프닝의 한 보기에 다름 아닌 신조어. 이 정치적신류어는 바로 민심, 그러니 정치하는 사람들 눈여겨 볼지고! 이처럼 신류어는 무드고 세태풍속이고 풍향계고 민심이다. 그러니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서 그것은 해프닝이며 대단히 재미있다. 그런데 그것은 별볼일없는데서 쉽게 가볍게 만들어진다. 심각한것이 아니다. 이런 신류어는 전반 민족적인, 나아가서는 국가적인 행사를 치를 때 공감대를 형성하며 반복적으로 인지된 언어표현구들도 될수 있음. 붉은 악마-오- 필승코리아 짝짜짜, 꿈은 이루어진다, 퍼포먼스를 하는듯한 한국의 멋진 응원문화의 키워드들을 장식한 류행어. 한국은 ‘악마’같은 끈기에 ‘필승코리아’의 신념으로 4강의 꿈을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신류어는 이렇게 막강한 긍정적인 힘도 가지고 있다. 신류어는 어느 유명세를 타는 특정 탤런트가 몰고 올수도 있다. 못나서 죄송합니다-고 한국의 유명한 개그 이주일이 어느 출연에 사람들 너무 옷지 않으니 자기도 모르게 한다는 소리가 이 한마디. 그래서 와 사람들 웃음을 자아내자 이 말이 뜨고 류행어가 되자 이씨도 떴다고 한다. 우의 공주병이라는것도 한국 배우 김자옥이 바람을 부어넣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다. 신류어는 ‘족’과 같은 특징적인 단어조성 접속어만 붙여도 쉽게 감칠맛이 살아나며 형성되기도 한다. 우에서 무슨 웰빙이니 딩크니 쟘노마드라는것에 족을 부쳐 웰빙족이니 딩크족이니 쟘노마드족으로 둔갑하여 새로운 신조어가 되는것도 그 한 보기가 되겠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염치’라는 말을 낯설기의 신이한 효과를 살려 ‘얌체’로 바꾸고 여기에 다시 ‘족’을 붙이면 ‘얌체족’이 되는데 이것은 사람줄이나 차줄에 새치기하는 염치없는 족속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로는 제격이다. 신류어는 콩그리스, 이를테면 한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데서도 형성된다. 핸드폰, 컴맹, 신드림은 전형적인 신조어. ‘핸드’는 'hand', 영어의 ‘손’이고 ‘폰’은 ‘phone’, 영어의 ‘전화’라는 말이라 이 두 영어단어를 조합하여 ‘손전화’ 즉 ‘핸드폰’을 만들어냈던 것임. 이것은 분명 영어에 없는 말. 그런데 너무 멋진 합리적인 조합에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 좋아하는 미국 ‘아즈바이’들도 good 하며 잘만 알아듣더란다. ‘핸드폰’이 순 영어 단어의 새로운 조합이라면 ‘컴맹’이나 ‘신드림’은 영어와 한국어 혹은 한국어와 영어의 이중언어조합. 컴맹, computer 대가리 컴에 文盲 맹의 조합, 한국 ‘신드림’증후군의 ‘신드림’은 新 신에 dream 드림이 조합된것. 신류어는 영어에서 새롭게 조합된 말이 그대로 흘러들어와 류행을 이루기도 한다. 홈리스, 프리랜스, 프로그래머, 각기 영어의 'homeless', ''freelance', 'programer'에서 온것으로서 보편적인 현대사회 삶의 한 양상 및 직업적 특징들을 잘 개괄하고 있어 공감대를 형성하며 류행되는 류행어. 신류어는 뭐니뭐니 해도 발랄한 사유의 산물. 그러니 머리가 팽글팽글 잘 도는 N세대들의 점유물의 하나임은 더 말할것도 없음. 그러니 이들한테서 가장 튀고 멋진 신조어가 나오고 있다. 요새 제일 잘 나간다는 짱, 바로 이들이 만들었다. 무슨이 ‘짱’이냐? 어른 ‘長 ’, 뛰어날 으뜸 ‘長’에 여하튼 최고라는 것. 그래서 ‘얼짱’, ‘몸짱’에 여하튼 이 ‘짱’만 붙으면 최고. 눈짱, 코짱, 입짱... 그런데 ‘長’에 장이면 장이면 무슨 ‘짱’이냐? 그것은 어른들이 세련된 척 하고 순한 소리 쓰는것에 반발해 일부러 뙨소리 ‘짱’이라 한다나. 맞아, 그러니 이 ‘짱’이 튀는 거야. ‘아자아자’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아자아자’냐? ‘아자아자 화이팅’이란다. 그러니 좀 알만해. ‘화이팅’이라는것은 ‘힘 내라’는 말이 되겠고, ‘아자아자’는 정신 차리라는 ‘야, 자’가 ‘아자’로 둔갑한 것이 아냐? 그리고 너희들 깜찍하게 반복하는거 좋아하니 ‘아자아자’한거 맞지? 그래요, 욤. 음, 그러면 그렇겠지, 요, 순전히 장난꾸러기들. 여기에 N세대들 컴퓨터에 빠져 서로 주고받는 채팅에 몰입하다보니 짧게 간편하게 그리고 톡 튀게 쓰는 원칙에 놀아나다 보니 이들이 ‘짱’이나 ‘아자아자’같은 신조어를 가장 자연스럽게 많이 만들어 낼 소지가 있음. 이제 이들 신조어의 규범어에 대한 충격을 우리 어른들 어떻게 감당할고? 가공할시고! 이런 신류어, 특히 신조어는 일반적으로 한 시기 반짝 하다가 사라짐. 그러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음. 마치 이런 신류어를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같고 한물 간 세대처럼 기가 죽을 필요는 없음. 기를 쓰며 이런 신류어를 알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밤잠을 못 자는 그런 강박관념도 필요없음. 기억 되는대로 기억하고 흘리듣는 대로 흘리들어라지. 여하튼 편안할 대로. 혈연, 지연, 학연같은 몸에 와 닿는 신류어는 자연히 기억속에 남을것이고 ‘짱’이나 ‘아자아자’같은 별로 심각한 의미가 없는것들은 자연히 뒤안길로 짱,하고 만다. 요즘 중국사람들도 신류어를 제법 많이 구사하는듯하다. 몇년전 애들의 新新人類로부터 근간에 귀족적인 새로운 삶의 패턴을 표방하는 月光族, 그리고 작년에는 지극한 사랑의 로맨스를 나타낸 82/28... 사람사는데는 다 같은 법. 그러니 같은 신류어도 있게 되는 법. 이런 新新人類니 月光族라는것은 한국 신류어의 N세대니 웰빙족과 같은것임. 워낙 우리의 일상적삶이 따분하고 무미건조할진대 이런 신이한 신류어를 만들어 좀 정신적인 자극소나 활력소가 된다면 그리 나쁘지도 않으리. 우리 조선족들의 신류어를 좀 보자. 水肉, 물에 사는 고기, 그러니 물고기. 우리 조선족 개그들만이 만들어낼수 있는 신류어. 水肉, 그 개그 아주머니의 水肉소리 듣고싶다.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아직도 水肉를 팔고 있는지... 이 한심한 세상에. 姐姐, 解決問題, 야 이거 너무 하다. 한국 ‘년상의 녀자’ 뺨치자나. 이런거말고 좀 좋은거... 야, 알았다. 2세낳기, 그럴듯해. 조선족종자 적어니 현재 1세 하나에서 하나 더 낳기. 그런데 많은 사람 이거 아직 잘 모르는것같애. 그러니 캠페인이라도 벌려 ‘2세낳기’를 주어넣어야지. 그럼 ‘2세낳기’가 더 쉽게 되는거야. 야, 또. 생각 안난다. 우리 조선족 신류어 너무 적다. 그만큼 우리 생활이 여유없고 따분하다는 그 자체네. 신류어를 만들어 좁 비꼬고 웃고 떠들썩하며 놀면 못쓰냐? 뭐 신류어 모자라면 좀 빌려 오지 뭐. 한국꺼. 그러나 마구잡이로 빌려오면 안되. 좋은거 빌려와. 그럼 고개숙인 남자와 남자들 기 살리기, 어때? 그거 참 좋! 네, 우리 여기 남자들도 많이 下崗하자나, 그러니 딱 맞는다 말이다, 그런데 녀자들이 문젠데, 기 센 우리 여기 녀자들 ‘남자들 기 살려’주겠나 말이다, 한번 빌어나보지뭐! 자, 얘들아, 짱, 아자아자, 화이팅! 신조어, 류행어 찧고빻고, 신류어 놀아보세나! 2005. 3. 21
12    자궁회귀본능 댓글:  조회:5859  추천:65  2005-03-18
자궁회귀본능 우상렬 "응아"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모두들 좋다고 손벽을 치며 축복해주지만 실은 우리 자체는 고통스러운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운다. 아이러니한 인생. 우리가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가 너무 편했기 때문이다. 가만 있어도 모든 것이 주어지는 세상, 먹고싶을 때 먹고 자고싶을 때 자면 되는 세상. 그리고 그 속은 얼마나 포근했다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기억을 胎志로 본능적으로 갖고 나온다. 그래서 세상의 탁한 공기를 접하는 순간 우리는 나오기 싫어지며 어머니자궁속으로의 퇴행심리가 생겨난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이 세상 살아가는 판에 조금이라도 힘들고 피곤할 때면 우리는 어머니자궁으로의 향수에 젖어든다. 밉게 훨쩍 커버린 우리는 다시 그 속으로 돌아갈수 없는 안타까움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것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크기 싫어하는 퇴행성심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자궁회귀본능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일종 歸巢본능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子不嫌母醜, 자식된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되여 먹었다. 그런데 일단 태여나서는 실제적으로 어머니자궁속으로의 회귀가 불가능한 우리는 보상심리 차원에서 그것의 대리만족체를 찾는다는 것이다. 동년, 우리는 대개 어머니, 아버지의 無微不至한 관심과 보살핌속에서 보낸다. 飯來張口, 衣來伸手. 어머니자궁과 가장 비슷한 상사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른이 되여 힘들 때 그 누가 동년 하기만 해도 그것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안겨온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일종 감회에 젖어든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나서자란 고향이 있을거다. 바로 이 나서자란 인연으로 고향은 어머니자궁과 동년과 클로즈업되면서 우리에게 있어서 더 없이 정다운 존재다. 고향은 부모형제, 정다운 사람들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고향을 떠나면 외롭고 자기도 모르게 일종 향수에 젖어든다. 거저 향수정도가 아니고 심할 때는 향수병으로까지 ‘악화’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무리 껄껄한 사나이라도 나그네길은 외로운 법. 물론 이런 동년이나 고향은 우리가 그 속에 잠겨있을 때 그것이 어머니자궁같은 행복의 시절이나 보금자린지 잘 모를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두 번 다시 되돌이켜 보기 싫은 악몽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훨쩍 커 버리거나 고향을 떠났을 때 그것은 우리와 심미적거리를 형성하며 ‘보기 싫은 악몽같은 존재’는 어느새 퇴색해버리고 신기루마냥 아름다운 존재로 부상된다. 싫어서 떠났던 고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꾸 가보고싶은 곳으로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보다싶이 우리가 나서 자라고 살면서 숙명적으로 맺어진 삶의 보금자리는 모두 어머니자궁같은 존재. 이로부터 가장 큰 삶의 넓은 단위인 ‘내가 나서 자란’ 조국이라는것도 마찬가지다. ‘祖國啊! 母親’은 그 전형적인 보기다. 우리 조선족 1세대들이 이 땅에 와서 코리아고국을 한없이 그린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내 님을 싣고 떠나는...’ 설음, 술이 한잔 되면 자기도 모르게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타령, 그리고 눈물 없이는 읽어내리가기 힘든 ‘망향의 무덤’ 전설... 수많은 화교들이 ‘落葉歸根’이라 대륙으로의 귀향, 이것도 같은 맥락. 중국에서 나서 자란 우리 조선족 3, 4세, 이중 자궁회귀본능에 부대끼며 헷갈린다. 조상들의 뼈가 묻히고 우리 부모들이 태여나기도 한 곳-코리아고국. 피는 못 속여, 우리는 같은 피줄의 코리아를 우리의 어머니자궁으로 여겼다. 1, 2세들의 자궁회귀본능은 여기에 더 부채질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 잘 산다는 한국의 문이 열리기 바쁘게 왁 달려갔다. 벌떼처럼! 그 좁은 문을 닥치고 설치며. 그런데 그 어머니자궁은 우리가 있기에 그리 포근하고 안온한 곳은 못되는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우리. 그제서야 알게 되는 우리의 다른 한 어머니자궁-차이나중국. 나는 현재 여기서 잘 먹고 잘 놀아난다. 그런데 나의 자궁회귀본능은 차이나를 자꾸 떠올린다. 그러니 이른바 불법체류의 멍에를 쓰고 하루하루 마음을 조이며 그 잘난 돈에 속이 바질바질 타는 우리의 불법체류자들, 그들의 자궁회귀본능은 불이 붙는다-차이나로. 歸心似箭 그 자체다. 그 누구든지 애국자로 만들려면 출국을 시켜라, 지당할시고! 자궁회귀본능, 인간은 이것을 충분히 만족받을 때 행복하다. 그러니 무슨 잘못 혹은 죄를 저질렀을 때 그것에 대한 징벌로 고향으로부터, 더 나아가서 조국으로부터의 추방은 더 없이 비참한 것으로 된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이런 자궁회귀본능을 만족받지 못할 때 바로 어머니, 동년, 고향, 조국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것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문학예술창작을 통하여 후련한 대리만족을 받는다. 오 고향이여,그래도 너는 나에게 무엇이기에!2005. 3. 18
11    꼬끼요 댓글:  조회:4372  추천:73  2005-03-17
꼬끼요 우상렬/연변대학 부교수 꼬끼요, 닭은 낮과 밤이라는 우주의 기본 두 질서의 력동적인 순환을 명시해준다. 만물은 낮과 밤이라는 우주의 이 두 질서에 길들어져 있다. 夜伏晝行이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夜伏이란 밤이 되면 자고 晝行이란 낮이 되면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동물은 전형적으로 夜伏晝行한다. 물론 박쥐, 부엉이같은 이례적인 夜行性 동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夜行이란 晝行의 반대 개념으로 낮이 되면 자고 밤이 되면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夜伏晝行하는 晝行性 동물이다. 밤이 되면 눈이 감기고 낮이 되면 눈이 뜨이는 것이 우리의 생리다. 모종 의미에서 옛날 日出而作, 日落而息도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晝行性으로부터 夜行性으로 점점 넘어가는듯하다. 적어도 에디슨이 전등불을 발명한 다음부터라 해야 되겠다. 전등불은 인간에게 너무도 많은 혜택을 주었다. 晝行에만 국한되지 않고 夜行도 할수 있게 되였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수 없이 많은 물질적부를 창조할수 있게 되였다. 인간은 물질적 궁핍함에서 벗어날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른바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현란한 밤생활을 즐길수 있게 되였다. 여하튼 우리는 고상한 일을 한다그래, 즐거운 놀이를 논다그래, 전등불에 잠을 빼앗긴다. 그런데 이런 夜行에 우리의 몸은 항상 고단하다. 夜伏, 밤에 쉬고픈 것이 우리의 생리인데 우리는 이것에 역행한다. 이것이 과도하면 생리적인 신경쇠약이 오는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현대인의 많은 생리적인 신경증은 夜伏가 부족한데서, 잠을 빼앗긴데서 온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신경쇠약증을 막기 위해서도 晝伏, 낮에 밤잠을 미봉하기에 안스러운 몸부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이 출근길 차안에서 꺼벅꺼벅 조는 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이로부터 夜伏晝行의 생리적평형을 이루고자 한다. 그래서 형식상에서 晝伏비중이 夜伏에 량적으로 근접해간다. 그런데 현대 수면의학의 연구에 의하면 晝伏와 夜伏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夜伏는 인간생리의 夜伏가 우주자연의 夜伏에 맞춘 정상적인 잠으로서 숙면이 되지만 晝伏는 이와 반대의 경우로 숙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밤잠 한시간이 낮잠 몇시간과 맞먹는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현대 건강관리학에서는 잠은 낮잠보다는 밤잠을 취하되 취침은 될수 있는 한 자야 즉 밤 12시를 넘기지 않는 것이 건강비범의 하나로 되여 있다. 晝伏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것이 습관화, 고질화되여 낮에는 전혀 정신없이 흐리멍텅해지고 밤에는 정신이 새록새록 맑아지는 夜行晝伏이 몸에 배여 夜伏晝行의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데 방해를 받게 된다는데 있다. 현실적으로 정신로동을 하는 인테리들에게 이런 증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언젠가 어떤 대학에 갔더니 박사생들을 싸잡아 夜猫子라 부르고 있었다. 그 영문을 물었더니 박사생기숙사는 온 저녁 불이 켜져 있는데, 박사생은 낮에 자고 저녁에 공부하는 夜行晝伏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夜行晝伏는 우리의 夜伏晝行의 생리적질서를 180도로 바꾸어놓는다. 이로부터 우리 몸의 생태평형이 뒤바뀌며 파괴된다. 현대인들이 입버릇처럼 외우는 피곤하고 힘든 것은 1차적으로 여기서부터 온다. 주지하다싶이 우리 현대인간은 과학문명의 결정체다. 이 과학문명이 무소불능의 ‘만행’을 감행하고 있다. 세상만물은 얽히고 설힌 가운데 더 없이 교묘하게 짜여진 생태평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만물의 령장운운하며 만물을 모두 인간을 위한 존재로 만들어 왔다. 그래서 돼지는 마치 이 세상에 인간에게 잡수어주십소하고 온듯하고 소는 제새끼보다는 사람들을 위해 젖을 짜주러 온듯하고 닭은 인간을 위해 알을 낳아주러 온듯하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이른바 과학문명을 리용했다. 육식할 가축들은 일단 생장소를 많이 넣은 사료를 대량 먹여 가축의 자연적인 생장주기를 파괴해가면서 빨리 크게 한다. 이때 이런 가축은 허우대가 크고 보기 좋게 커지지만 그 육질은 부실하고 맛이 없다. 이 정도는 그래도 배부른 타령에 그치고 말 괜찮은 편인데 앞으로 이런 육질이 무슨 독소로 변할지는 모를 일이다. 안 그래도 요새 어느 잡지에서 사양장닭의 계란이 닭의 스트레스 배설물이라는 것을 보고는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이 아니다. 닭이 알을 잘 낳게 하자면 닭의 호로몬생장촉진제를 많이 먹이는 것은 물론 잠을 재우지 말아야 한다는 론리이다.그래서 이런 사양장에서는 24시간 전등조명으로 자극을 주며 잠을 자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닭들은 스트레스가 쌓이며 이런 스트레스배출의 방식으로 알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에게 있어서 스트레스는 잠재적인 病源에 다름 아니다. 닭이 이렇게 쌓이는 스트레스로부터 알을 낳게 될 때 그 알이 사람몸에 좋으면 얼마나 좋겠나 말이다. 억지 신부노릇을 하는 닭은 자기의지와는 관계없는 괴로운 ‘산고’를 치른다. 그러니 이런 가축들은 자기들이 죽을 각오로 우리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지도 모른다. 광우병, 조류독감은 어제, 오늘의 저 먼 곳의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코 앞의 얘기다. 가공할시고! 보다싶이 전등 및 과학지식을 비롯한 현대문명은 우리에게 약도 주고 독도 주었다.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약이 되거나 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이런것들을 우리몸의 생리평형 내지는 우리 몸밖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지 않는 전제 조건하에서 활용할 때 그것이 우리한테 약이 됨을 알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것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 그 자체다. 이로부터 人定勝天보다는 天人合一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요새 한국에서 삶의 질을 따지는 웰빙 삶의 추구도 결국 따져보면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낮잠을 우습게 보던 미국에서도 얼마전부턴가는 인간의 식곤증 그 자체를 인정하여 잠정오의 잠간잠을 제창하고 있는 것도 같은 차원의 얘기가 되겠다. 꼬끼요, 금년은 을유년 닭의 해입니다. 닭이 울었으니깐 일어납시다. 점심에는 식곤증이 오니깐 잠간 눈을 부칩시다. 저녁에는 해가 졌으니깐 잡시다.
10    嚴打 댓글:  조회:4518  추천:65  2005-03-14
嚴打 우상렬/연변대학 부교수 嚴打, 중국에서 공안들이 치안질서를 잡는 상투적인 한 방법. 우리말로는 집중단속이 되겠다. 한국 경찰도 이와 마찬가지의 행태를 취하고 있다. 무슨 ‘불법체류집중단속기간’이요, ‘음주운전집중단속기간’이요, ‘학교폭력집중단속기간’이요하는것이 그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현대최신식기기를 리용한 ‘몰래카메라작동지역’이요, ‘비디오카메라24시록화중’ 등 표지판도 같은 맥락에서 리해할수 있다. 그런데 중국공안들이 거저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무슨무슨嚴打기간같은것을 설정해놓고 눈이 화등잔만해 돌아다니는 반면에 한국경찰은 무슨 ‘단속기간’이요 하는것을 사전에 뿐만아니라 그 기간에도 공공연하게 눈에 잘 띄이는 곳에 요란스럽게 프랑카트를 내걸어놓고 눈을 밝히는것만이 좀 다를뿐이다. 50보에 100보, 피장파장. 나는 이 嚴打기간이요, ‘단속기간’이요하는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래서 오늘은 그 부당함을 좀 꼬집어볼까 한다. 그럼 嚴打기간이요, ‘단속기간’이요하는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적어도 법 및 그 집행 그리고 범법자들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줄로 사료된다. 첫째, 법 및 그 집행의 객관적인 형평성을 잃게 된다. 법은 일단 정해지면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수 없는 객관적인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법의 엄숙성을 지키는 기본전제로 된다. 그런데 일단 嚴打기간이요, ‘단속기간’이요하는것을 설정했을 때 같은 법조목이라도 여느때보다 이 ‘기간’의 범법에 적용할 때 이른바 嚴하게 단속하게 되는 실정이다. 이것은 이 ‘기간’을 벗어난 평상시의 법적용과 형평성을 잃게 됨으로써 법의 객관성도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 상응하여 이것은 객관적인 랭정함을 유지해야 할 법집행자들의 주관적인 감정요소를 자극하여 이 ‘기간’에 범법하는 자들에 대해 ‘嚴打기간인데도...’, ‘우리를 무시해도 한도가...’하는식의 전근대적인 ‘괘씸죄’같은것이 발동되여 법집행의 객관적인 형평성을 잃게 한다. 법 및 그 집행이 객관적인 형평성을 상실할 때 현단계 로선, 방침, 정책같은 것 혹은 그 어떤 ‘장관의지’나 관료들의 기분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행태도 면할수 없다. ‘형세가 이러하니 이번에는 이것을 엄하게 다스려...’, ‘현재 이것이 기승을 부리니...’, ‘그 놈 좀 혼내줘...’등은 그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인맥이니 뢰물이니 하는 인위적인 요소의 개입에 따라 법집행이 고무줄놀음이 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기간’에 공안이나 경찰들이 범법자들을 얼마 잡으면 무슨 두당 뽀나스 얼마요 하는 관행도 지극히 애매하거나 억울한 ‘범법자’들을 만들 소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 ‘嚴打기간’이 대개 새해나 설명절때 이루어져 공안들이 술소비돈 마련을 한다는 뒤소문도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로부터 공안이나 경찰이 미끼를 던져 걸려들게 하는 범죄조장도 없지 않아 있을것이다. 이 ‘기간’ 설정은 또한 공안이나 경찰을 이 ‘기간’에만 신경을 쓰도록 만들고 평상시에는 해이해지게 만드는 소지도 갖고 있다. 둘째, 상습적인 진짜 범법자들은 오히려 이 ‘기간’을 피해 다 잠복한다. 이들은 이 ‘기간’과 평상시 범법의 輕重緩急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기간’만 피하면 다다는 요행심리속에 평상시범법심리가 더 조장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반복되는 이 ‘기간’을 겪으면서 싹수가 터 범법방법과 수단이 고단수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이 ‘기간’설정은 평상시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우연한 실수로 이 ‘기간’에 ‘범법’했을 때 오히려 큰 코 다치는 격이 되고만다. 이로부터 이런 선량한 사람들을 실의에 빠뜨려 오히려 상습적인 범죄의 길로 내몰수 있다. 보다싶이 이 ‘기간’설정은 범죄심리 차원에서도 대단히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 ‘기간’설정은 공안이나 경찰에게 더러운 교역의 빌미를 제공할 소지도 없지 않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嚴打기간’같은것을 아무리 비밀에 부친다해도 실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것은 언녕 공공연한 비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공안이 이 ‘嚴打기간’비밀을 어떤 더러운 교역의 수단으로 삼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 언젠가 매스컴에서 때린 경찰이 암세력과 결탁하여 ‘단속’비밀을 흘려보냄으로써 업주와 거래를 한 사실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보다싶이 이런 ‘嚴打기간’, ‘단속기간’설정은 법치사회의 행태가 아닌 전형적인 人治사회의 행태이다. 완전히 법치사회가 이루어진 선진국에서는 이런 무슨 ‘嚴打기간’이요, ‘단속기간’이요하며 요란스럽게 부산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온전하고도 세밀한 법을 제정하고 정말 법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원칙을 적용한다. 그리고 법집행자들, 이를테면 법관들은 법의 객관성, 형평성, 엄숙성을 지키기에 최선을 다 하고 최일선에서 뛰는 경찰은 정상적인 근무로서 항상 범법자를 잡아내는데 촉각을 세운다. 물론 그들도 방법과 수단을 강구한다. 이를테면 깜직한 프랑스경찰은 잠복근무를 하면서 일반적인 ‘음주운전’이나 ‘과속운전’같은것을 잡아내기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기간’같은 설정은 하지 않는다. ‘嚴打기간’, ‘단속기간’설정은 범죄집중단속으로 인한 일정한 사회적효과같은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우에서 본바와 같이 법 및 그 집행이나 범죄심리 차원에서 볼 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니 법치사회로 가는 우리는 이 ‘기간’을 없애야 한다.
9    민족사회건설 온라인네트워크가 한몫해야 댓글:  조회:4182  추천:62  2005-03-14
민족사회건설 조선족온라인네트워크가 한몫해야 우상렬/연변대학 부교수 개혁개방 이래 우리 조선족은 발 빠른 대응을 해왔다. 중국 관내로, 해외로 우리는 잘도 떠났다. 그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른 흐름으로 인하여 심각한 화제로 대두되는 문제의 하나가 인구감소로 인한 조선족 집거구의 흔들림이다. 여기에 지난세기 90년대부터 절대적인 마이나스 인구출생률이 합세하니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인 우리 연변의 경우만 보아도 소재지 연길의 조선족 인구가 37%로서 개혁개방전 절반을 차지하던 인구비률로부터 현재 그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자치주의 절대적인 민족인구수 요구로부터 볼 때 이것은 자치주의 존립여부에 관계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그리고 잡거지역 조선족집거구도 절대적인 인구감소로 해체될 위기에 있다니 이 또한 심각한 문제 가 아닐수 없다.여기에 잇따른 교육문제도 심각한 편이다. 그래서 우리 조선족지성인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며 대안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한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무슨 2세낳기운동을 벌려 인구출생률을 높인다거나 미국의 코리아타운처럼 새로운 조선족집거구로서의 코리아타운이나 거리를 만든다든가하는것이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그리고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어 참 보기에 좋다. 우리 연길의 40대에 들어선 내 또래들가운데는 이미 2세를 안고 흐뭇해하는 친구들이 제법 있다. 그리고 북경의 望京이나 심양의 서탑, 산동성 연태, 청도같은데 실제로 코리아타운이나 거리가 형성되여 조선족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어 그럴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눈에 보이는 이런 가시적인것들이 꼭 실속있거나 확고한것이라고 보기 힘들다는것이다. 나는 중국 인구 몇십억에 조선족 인구 200여만 할 때 벌써 기가 탁 죽어버린다. 우리가 얼마만한 인구를 확보해야 인구적우세를 차지하겠나 말이다. 우리가 인구를 절대적으로 아무리 많이 늘려도 그것은 망망한 중국인구의 바다속에서 그야말로 滄海一粟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구수로 조선족자치주확보니 뭐요 하는것은 별 의의가 없다. 자치주확보는 어디까지나 자치주력사와 문화에 기초한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에 대한 민족정책의 배려에 의해야 될줄로 안다. 여기에 현재 개방된 사회에서 인구류동은 필연적인것으로 한곳에 매여둘수도 없는 노릇이니 문제는 더 확실해진다. 그리고 코리아타운이니 거리요 하는것도 주로는 직업을 비롯한 리해득실에 의해 우연히 결집된 경우가 많은만큼 그것은 내실을 기하지 못한 貌合神離 일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그런만큼 언제든지 쉽게 떠나고 갈라질 소지가 없지 않아 있다. 초봄의 눈덩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한된 인구를 감안할 때 그 또한 어디까지나 제한성을 띨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요새 좀 늦은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온라인네트워크를 자꾸 떠올려본다. 일단은 조선족온라인네트워크를 구성하자는것이다. 몇년전에 어떤 사람이 네트워크상에 사이버국가, 그리고 근간에 심심찮게 생겨나는 사이버대학설립은 우리에게 힌트하는바가 많다. 우리도 네트워크에 조선족세상을 꾸려나가자는것이다. 이로부터 조선족을 온라인으로 하나로 묶어보자는것이다. 조선족의 구심점을 컴퓨터네트워크에서 확보하자는것이다. 그중 하나의 고리를 례로 든다면 교육은 민족진흥의 관건이라 우리도 각종 인터넷학교를 꾸리자는것이다. 소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전일적인 교육체계를 갖춘 학교를 말이다. 물론 이런 학교에서는 조선족의 력사 및 전통문화에 대한 교육 및 홍보도 맡아나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조선족의 정신적인 민족동질성을 확보하는 바탕이 된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뭐니뭐니해도 경제적인 리해득실을 따지는 시대라 조선족경제를 같은 리해득실우에 선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통합할수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될줄로 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각종 경제정보의 교환은 더 말할것도 없고 조선족경제실체들이 상호 보완할수 있는 련결고리역할을 해야 한다. 이로부터 조선족기업체제품홈쇼핑도 한번 마련해볼 필요가 있을줄로 안다. 그리고 조선족경제실체의 수익금 및 조선족들의 적극적인 참여하에 금융조합같은것도 구상해볼수 있다. 일제식민지때 조선사람들이 외채갚기위해 떨쳐나선 경우나 한국IMF때 금붙이모으기캠패인 등의 경우를 놓고볼 때 우리민족에게는 개인의 리해득실을 떠나서도 얼마든지 뭉쳐나설수 있는 저력이 있다. 관건은 명분문제이다. 민족의 장원한 발전을 위한 대의명분을 잘 내세우면 된다. 물론 이 금융조합은 저축에 따른 리자, 그리고 융자 등을 통한 본격적인 은행구실을 해야 될줄로 안다. 그리고 구체적 업무진행은 온라인서비스를 통해 진행하면 될줄로 안다. 여기서 한국의 네트워크를 통한 은행온라인시스템을 도입하면 될줄로 안다. 그리고 민족의 금융조합 등에서 창출되는 수익금은 조선족장학금기금회같은것을 설립하여 조선족학생들, 특히 발전전도가 촉망되는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충당되도록 한다. 이로부터 우리 민족의 인재들이 정녕 민족적혜택을 받으며 커 가도록 한다. 그래서 이들이 커서, 인재가 될 때 내심으로부터 조선족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일제식민지때 일제의 금융잠식에 맞선 조선은행 , 그리고 현재 거대한 영향력을 발생하고 있는 화교들의 화교은행, 이외에 부문별 금융기관, 례컨대 우리나라의 농업신용사나 한국의 농협(은행)같은것도 결국은 다 같은 맥락에서 리해할수 있다. 이외에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민족적행사를 벌리수 있다. 작게는 학생들의 백일장, 크게는 조선족이면 누구나 참여할수 있는 전반 민족한마당축제같은것을 벌려 민족동질성 및 귀속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장을 마련하여 민족구성원들지간에 서로 돕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될뿐만아니라 대화, 교류의 장을 마련하여 살아가는 얘기도 서로 나누고 고민거리를 푸는 화합의 장이 되게 해야 한다. 물론 문학예술의 발표교류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함양에도 대단히 좋을줄로 안다. 특히 현단계 조선족신문잡지경영이 어려운 마당에 네트워크를 통한 인터넷 조선족문학예술원지개척은 작은 투자에 큰 효과를 가져오는 일거량득의 일로 될것이다. 사실 현재 조선족 지성인들은 이런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매우 효과적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례컨대 중국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꾸리는 홈페이지 ‘문화산맥’이 말 그대로 조선족문화함양과 홍보에 크게 한몫 하고 연변대학 김관웅 교수가 꾸리는 홈페이지 ‘우리동네 문학동네’는 말 그대로 조선족문학예술의 향연을 베풀고 있으며 김삼 총편이 이끄는 홈페이지 ‘조선족연우포럼’은 사랑과 지혜를 나누는 조선족의 모임으로서 조선족사회문제,민족문제에 관한 과 를 통하여 활기찬조선족사회만드는데 필요한 포근한 쉼터, 깊은 대화, 활기찬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제각기 노는 홈페이지보다는 조선족온라인네트워크라는 타이틀하에 유기적으로 련결되여 하나로 아우러지는 전반 조선족의 홈페지가 되였으면 한다. 그리고 여기에 민족동질성 차원에서 조선과 한국을 아우르는 코리아온라인네트워크가 이루어져 보다 넓은 범위에서 민족적인 교감을 형성할 때 조선족은 그대로 존재하게 될 뿐만아니라 발전의 전기를 마련할수 있게 될줄로 안다. 현대는 컴퓨터시대라 온라인네트워크, 이것이 가장 손쉽게 조선족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길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이것이 당분간 많은 컴맹의 존재 및 프로그램개발문제 등 이러저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당장 실현에 옮기기에는 시기상조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지향적인것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2005. 3. 14
8    뉴스콤플렉스 댓글:  조회:5376  추천:60  2005-03-11
뉴스콤플렉스 우상렬l연변대학 부교수현대인간들은 알게모르게 많은 콤플렉스에 싸여 자기의지와는 관계없이 코꿰인 소신세의 안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뉴스콤플렉스다. 무슨 정보통신사회요 하는 지금 세상은 이것을 더 부추기는듯 하다. 그럼 뉴스란 무엇이냐? 쉽게 말하여 세상 돌아가는 최근간의 소식쯤으로 리해하면 될듯하다. 세상이 사람사는 세상일진대 먹고 싸고 자며 정상적으로 돌아가다가 좋든나쁘든 삐꺽하고 정상을 벗어나는것들이 다 좋은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고대 로자가 상상속에 구상한 ‘鷄犬之聲相聞而人不相往來’하는 ‘寡人小國’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뉴스에 대한 관심도를 점점 더 높혀왔다. 현대인간들은 뉴스와 차단되거나 하루의 뉴스를 알지 못하면 괜히 가마우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하거나 덩달아 허전해난다. 현대인간들에게 신문의 급속한 확산, TV뉴스시청률상승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럼 인간은 왜서 뉴스에 집착하며 콤플렉스증세까지 보이게 되는가? 뉴스콤플렉스는 인간의 구지욕, 호기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인간은 구지욕,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항상 ‘개처럼 흑흑 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 인간은 일상의 정상을 벗어난 새로운 그 무엇, 이른바 뉴스에서 강한 구지욕, 호기심의 만족을 느낀다. ‘사람이 개를 물었다’, 좋은 뉴스거리. ‘개가 사람을 무는’ 정상을 역전시켰기 때문. 인간은 일상의 정상을 많이 벗어난 뉴스거리일수록 눈이 번쩍 뜨이며 구지욕, 호기심을 최대한대로 만족받는다. 뉴스콤플렉스는 인간의 안전수요에 의해서 생겨나기도 한다. 모종 의미에서, 특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몸에 와닿는 일상의 정상을 벗어난 뉴스거리는 인간의 안전수요에 대단히 역행하는것이다. 이를테면 살인사건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하겠다. 인간은 바로 이런 뉴스거리에서 정신을 차리며 자기의 안전수요를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전을 확보해 나간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국제화라 얽히고설힌 더 없이 복잡한 국면이 펼쳐질뿐만아니라 瞬時萬變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국면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복잡하고도 새로운 국면을 파악하기에 힘에 겨웁다. 그러나 적자생존이라 살자면, 잘 살아나가자면 힘에 겨웁더라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린다. 조금만 정신탕개를 풀면 남한테 떨어지는듯 하다. 그래서 현대인간들은 늘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한것은 인간의 안전수요하고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뉴스콤플렉스는 바로 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고저 내지는 해소하고저 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뉴스콤플렉스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간 대 인간의 뉴대감에 기초한 깊은 인간적동정에 의해 기인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동류의식, 인도주의라는것이다. 뉴스거리형성의 가장 원초적바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과 대립해왔다. 자연에 비해 인간은 약자다. 인간은 뭉쳐야 자연을 전승할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속에서 생겨나는 모든 이변들은 전반 인류의 뉴스거리가 되기에 족하다. 이번 인도네시아의 해일피해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인간은 종족, 민족, 나라별로 뭉쳐 산다. 이로부터 인간적협력의 相反相成의 한 모멘트로 인간지간에는 라이벌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바로 이 라이벌관계로부터 다른 사람 사는데 눈을 돌리게 된다. 라이벌관계가 밀접하면 할수록 더 신경을 써서 많은 뉴스거리, 특히 부정적의미에서의 많은 뉴스거리를 발견해낸다. 현재 글로벌화, 특히 시장경제가 전세계를 강타하게 되자 사람들은 직접 부딪치며 그 어느때보다도 ‘타자’ 즉 다른 사람, 다른 종족, 다른 민족, 다른 나라를 많이 의식하게 되면서 홍수가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뉴스거리에 정신을 못차린다. 사람들은 이런 뉴스거리에 신경을 쓰며 라이벌경쟁에서 기선을 잡으려고 한다. 이로부터 뉴스콤플렉스는 따놓은 당삼이다. 뉴스콤플렉스는 또한 뉴스에 대해 先讀爲快, 先睹爲快의 先占을 함으로써 남보다 더 똑똑해지는듯한 착각, 그리고 先占한 뉴스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일종 먼저 앎을 뽐내는 과시욕을 만족받는데 기인한다. 이로부터 최초로 내보내는 뉴스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새 뉴스를 접하게 되면 남한테 횡설수설 얘기하는것으로 뉴스콤플렉스를 푼다. 그리고는 새 뉴스를 기다리며 다시 뉴스콤플렉스에 사로 잡힌다. 보다싶이 인간은 이래저래 뉴스콤플렉스에 싸인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데는 이 뉴스콤플렉스를 효과적으로 리용할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뉴스거리는 분명 일상의 정상을 벗어난것이되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로 대별해볼수 있다. 뭇사람들이 숭앙할 무슨무슨 모범이 났소 하는것이 전자에 속하겠고 자연재해나 살인강도사건같은것이 터졌소 하는것이 후자에 속하겠다. 지금까지의 뉴스관행을 보면 사회주의쪽에서 좋은 뉴스를, 자본주의쪽에서 나쁜 뉴스를 많이 선호한것같다. 이것은 사회주의쪽에서 ‘따라 배우기’효과, 자본주의쪽에서 警戒효과를 노린 매스컴의 특성과 관계된다. 교육차원에서 론의하면 긍정적인 교육과 부정적인 교육의 갈래판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나라 문화대혁명시기 TV가 보급되지 않은 마당에 정식영화를 돌리기 전에 꼭 한 10분간 시간을 내여 ‘新聞簡報’, 그것도 정치관련 뉴스로 가득찬 ‘新聞簡報’를 내보낸것은 극단적인 한 사례로 볼수 있다. 인간의 뉴스콤플렉스를 자극하는데는, 바꾸어 말하여 뉴스의 흡인력 차원에서 얘기할 때 나쁜 뉴스가 분명 더 효과적이다. 나쁜 뉴스가 그만큼 충격감, 자극성, 신선감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시장효과에 영합한 자본주의사회의 매스컴이 성업중인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여기에 견주어 우리를 좀 돌아보자. 언어문자, 인구 등의 제한으로 우리의 매스컴은 시장경쟁에서 경쟁력이 없다. 여기에 우리는 무슨 기관보요, 후설이요 하는데 딱 매여 구태의연하게 좋은 소리, 듣기 좋은 소리 중심의 좋은 뉴스에 치중하니 사람들 식상해한다. 그래서 문화대혁명시기 아무리 ‘放眼世界’요, ‘關心政治’요, ‘緊跟形勢’요하고 현재 아무리 ‘歟時俱進’이요하며 신문방송매스컴의 뉴스거리로 내리먹여도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현재 우리에게 좋은 소리, 듣기 좋은 소리 중심의 좋은 뉴스도 뉴스겠지만 보다 필요한것은 나쁜 뉴스다. 근간에 시장의 자률에 보다 많이 내맡긴 연길시라디오방송이나 가 그래도 이런 뉴스거리에 신경을 써 적어도 뉴스생태에 평형감각을 이루며 시청자나 독자의 뉴스콤플렉스발산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다. 뉴스거리는 또한 거창한것과 자잘한것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전반인류가 주목하는 자연재해 혹은 전쟁폭발 혹은 우리 중국상황하에서는 당대회개최 등등이 거창한 뉴스가 되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수 있는 살인방화같은 시시껄렁한것들이 자잘한 뉴스가 되겠다. 뉴스의 친화도차원에서 볼때 사람들은 자기와 먼 거창한 뉴스보다는 관계가 밀접한 자기와 가까이 있는 자잘한 뉴스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자잘한 뉴스가 일반 사람들의 뉴스콤플렉스를 더 잘 발산시킨다는 말이 되겠다. 대체적으로 볼때 사회주의매스컴이 거창한 뉴스거리를 많이 다루어왔다면 자본주의매스컴이 자잘한 뉴스거리를 많이 다루어왔다. 사회주의는 인간들을 교육하는 정신적효과를 많이 노렸다면 자본주의는 시청률이나 구독률을 높이는 시장효과를 많이 노렸다. 문화대혁명시기 우리나라에서 ‘放眼世界’요, ‘關心政治’요, ‘緊跟形勢’에 초점을 맞춘 뉴스보도, 그리고 한국에서 ‘남똥뀐소리’까지 다 주어대는 뉴스보도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우리 조선족의 경우를 보면 가 당기관지로서 회의관련 뉴스를 비롯한 거창한 뉴스를 많이 다룬다면 는 생활세말사적인 자잘한 뉴스거리를 많이 취급한다. 전반적으로 볼때 사회주의식 거창한 뉴스보도와 자본주의식 자잘한 뉴스보도 사이 평형을 잡는것이 바람직한 뉴스보도의 길인것같다. 이래야만 사람들은 뉴스콤플렉스를 골고루 발산시킬수 있게 될것이다.
7    종교소론 댓글:  조회:4915  추천:51  2005-03-10
종교소론 연변대학 우상렬 종교하면 얼마전까지만해도 談虎變色하는 우리. 우리는 법적으로 종교신앙 자유라 하지만 사실상 누가 종교를 믿는다면 좀 이상한 눈길로 보아온것도 우리. 여하튼 전반 사회분위기, 무드가 종교하고는 좀 삐꺽하는 쪽으로 흘러왔음. 그것은 종교는 아편이요, 미신이요 하며 귀에 따까리 앉도록 교육을 받은 조건반사적 자연스러움 그 자체. 나는 유물론자이다. ‘종래로 그 무슨 구세주가 없다’는 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종교는 분명히 허황하고 미신적인것으로 확신한다. 그런데 과학문명이 찬연히 꽃피는 현대에 있어서조차도 종교라는 이 괴물이 사라지지 않고 그 세를 더 떨치니 나로서는 좀 아연해지고만다. 그래서 괴물로 인정할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만 보아도 6만이 넘는 교회가 있고 해외에 세워진 한인교회는 4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저녁에 서울남산에 올라가 여기저기에 보이는 헤아리기에 바쁜 교회의 붉은 십자가만 보아도 실감이 간다. 사실 종교는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고 선진국을 비롯한 사람이 사는 곳이면 다 존재하는 인간 삶과 문화의 한 양상이다. 그럼 우리는 왜 종교라는 괴물을 못 벗어나는가? 첫째, 주지하다싶이 인간은 감성과 리성의 유기적통일체이다. 이 량자가 엇갈려 나타나거나 얽혀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심층심리학에서 지적하다싶이 우리의 감성에는 생래적으로 맹목적인 신앙심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신앙심을 전제로 한 종교적성향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여기서 신앙심은 그 어떤 대상을 믿고 우러르며 따르는 경향을 말한다. 이로부터 마조히즘적인 안온감과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것이다. 이른바 전지전능한 전일적인 하느님과 같은 허황한 우상에 대한 숭배는 이런 안온감과 희열을 최고로 느낄수 있는 환영에 놀아남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인간은 약한 존재라는 말의 가장 좋은 주석으로 된다. 둘째, 인간은 지적인 동물. 인간은 과학을 통하여 지적인 욕구를 만족받는다. 그런데 현대과학이라는것이 아무리 발전했다해도 그것이 인간의 모든 지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줄수 있는것은 아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는 항상 련속부절히 우리앞에 펼쳐진다. 인간의 기원 하나만 놓고 보아도 다윈이 과학적인 원숭이진화설을 내오자 이것에 대한 반론 또한 지금까지도 만만치 않다. 그러니 인간기원설은 아직도 중구난방.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기독교기원설은 그 가운데 하나. 인간기원설에 뚝 부러진 정설이 없다고 할 때 하느님창조설이 인간의 이 방면의 지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족하다. 한마디로 말하여 인간이 종교의 우주관, 세계관, 인간관을 통하여 지적인 만족을 받는것은 가장 손쉬운 방편의 하나다. 현대과학의 거장들인 뉴톤, 아인슈타인 등이 과학연구의 끝발에 가서 결국 신의 세계로 떨어지고만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셋째,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 생로병사의 약한 존재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종교는 허황한 약속, 세계에서나마 죽음의 두려움을 갈무리해준다. 천당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 연장선상의 저 세상 설정은 바로 새로운 보다 복된 삶의 시작에 다름 아니다. 이로부터 어쩔수 없이 다가오는 무거운 죽음의 숙명앞에서 천당 운운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그만큼 홀가분해지고 초탈의 맛을 볼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눈물보다는 찬송가로서 동료들의 죽음을 보내는것은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넷째, 현대는 화려한 물질문명을 자랑하지만 아직도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재부의 불공정한 분배 및 끊임없는 경쟁의식 등으로 말미암아 절대적빈곤 혹은 상대적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개성이 강조되고 살아나는 시대다. 개인본위로 따로따로 많이 움직인다. 그만큼 현대인간들은 외롭다. 개개인이 남남이다. 이로부터 현대인간들은 인간의 귀소(歸巢, 자궁회귀본능), 귀속(歸屬)본능을 만족 못받고 사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생존경쟁이 도사리고 있는 직장생활같은데서 이런 귀소, 귀속본능을 만족받을 여지는 도저히 없다. 현대인간들이 무슨 등산애호단체요, 테니스협회요, 바둑협회요 하며 많은 동호인단체를 무어 휩쓸려 다니며 노는것은 이런 귀소, 귀속본능을 만족받기 위한 모지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종교는 신적존재를 매개로 하여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어느때든지 언제든지 누구나 다 수시로 받아들여 도닥여주는 포옹력으로 인간의 귀속, 귀소본능을 가장 충분히 만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불행한 사람의 귀의처인것이다. 현대 여러모로 많이 소외되고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가장 지성을 자랑하는 과학자들조차 종교에 귀의하는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미국의 종교세력이 한국에서 대성을 하고 한국종교가 그토록 빨리 세를 확장할수 있은 원인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외되고 불행한 자들을 많이 포옹한데 있다. 한국교회계통의 많은 자선단체의 활약은 그 구체적보기가 되겠다. 이상 종교의 보편적론의를 전제로 우리 조선족의 상황을 좀 보도록 하자. 현재 우리 조선족의 종교인수는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는듯하다. 연길교회의 크리스마스같은 특이한 날은 더 말할것도 없고 주일례배때 차고 넘치는 인파만 보아도 그간의 사정을 잘 알수 있다. 그리고 도시뿐만아니라 농촌까지 파고든 교회당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우리도 얼마전, 특히 개혁개방전에는 확고히 맑스주의, 공산주의를 믿었다. 맑스주의, 공산주의가 우리의 ‘종교’이고 신앙이였다. 그런데 개혁개방 및 있따른 시장경제도입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격변기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신앙면에서 많이 헷갈렸다. 이른바 신앙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돈을 믿었다. 돈이면 이 세상 다인줄로 알았다. 우리는 아직도 많이들 이렇게 믿고 있는듯하다. 그런데 진작 돈을 잡고 보니 분명 돈이 이 세상 다 아니였다. 우리는 돈 때문에 너무도 많은 대가를 치렀다. 인격적, 도덕적 파탄, 농촌파탄, 가정파탄, 아이들 교육란맥상 등등 코앞에 들이닥친 많은 문제들은 우리를 경악케하고 허탈감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돈이라는것이 생각대로 그리 쉽게 벌어지는것이 아니다. 손에 있던 돈을 날리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이른바 뼈빠지게 일해도 돈이 안 모아지는! 경우도 있다. 한국초청사기에 우리가 당하고 한국 3D업종에서 우리가 고역을 치르는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이래저래 우리는 불행하다. 아직 많이 어렵다. 이래서 우리는 우의 첫째의 경우 인간의 본능적인 신앙심이나 넷째의 경우 인간의 귀소, 귀속본능이 발동되여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게 된다. 여기에 맞닥뜨린것이 ‘하느님’품. 물론 우리에게도 우의 둘째, 셋째의 경우처럼 지적인 문제, 죽음의 문제로부터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을것이다. 우리의 경우 많은 종교인들이 늙은이들임은 그간의 사정을 얼마간 말해주고 있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리성적인 령역보다는 감성, 감정적인 령역에 속한다. 그래서 맹신이나 광신으로 흐르기 쉽다. 모종 의미에서 ‘異端’이라는것이 그 보기가 되겠다. 이런 맹신이나 광신이 광적으로 흐를 때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 얼마전에 우리나라에서의 ‘법륜공’, 일본 옴진리교의 독가스살포사건, 그리고 지난세기말 한국 등 일부 나라의 종교단체에서 나타난 말세론설교 등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종교는 강한 결집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력대의 농민봉기들이 종교의 기치를 많이 들고 나왔고 유태인들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온것도 다름아닌 종교의 결집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민족, 한 나라의 지도자들은 종교에 대해 대단한 신경을 쓴다. 그런데 종교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약이 될수도 있고 독이 될수도 있다. 종교문제, 어디까지나 생각의 문제이고 의식의 문제이다. 그런만큼 강압적인 조치를 취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깨닫게 하고 유도하는것이 상책이다. 이로부터 과학 및 그것의 미래비전 등 과학성에 대한 제시로 인간의 지적인 문제, 죽음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본능적인 신앙심같은것은 잘 유도해서 허황한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나아가게 할것이 아니라 확실한 진리나 과학을 신앙하게 함으로써 승화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완벽한 사회복지를 마련하여 인간의 귀소, 귀속본능을 비롯한 삶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소외되고 불행한 사람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요’사회의 추구, 그리고 선진국에서의 복지사회추구는 바로 이 방향과 일치한줄로 안다. 한마디로 말하여 종교문제는 과학성, 승화, 복지의 문제를 잘 풀이하면 스스로 잘 풀릴 문제로 사회의 약이 되는 존재로 남을것이다. 현단계 우리 조선족의 경우도 여기서 례외가 아니다.
6    웰빙 댓글:  조회:5634  추천:74  2005-02-22
웰빙 우상렬|연변대학 부교수 작년에 한국에 한 둬번 갔더니 심심찮게 눈에 띄이고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웰빙, 웰빙이다. 무엇인가 했더니 영어 well bing을 한국으로 옮긴 말이다. 영어에 햇눈을 뜬 주제라 가만히 음미해보니 좋을 혹은 잘 well에 존재 bing이라 좋은 존재로 리해하고 말았다. 그것이 사람의 삶에 씌이는 말이라 하니 거저 “잘 살기”로 리해하는 것이 무방할 줄로 알았다. 그런데… 잘 살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다. 이것은 天賦人權의 가장 소박하고 보편적이며 진실한 의미. 그러나 잘 살기의 내연은 시기와 때에 따라 다르다. 한국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보리고개” 넘기기 바쁜 1960년대에 있어서 “잘 살아보세”의 의미는 주로 거저 배불리 먹어보는 그런 수준이였다.현재 우리 중국은 溫飽문제에 비중을 둔 小康수준을 추구하고 있으니 한국 1960년대 “잘 살아보세”와 50보100보인셈이다. 이런 삶은 어디까지나 물량공세를 앞세운 삶의 량의 추구에 있다. 이를테면 의, 식, 주 해결에 있어서 량적으로 충분한 만족을 받는데 있다. 그런데 새로운 밀리니엄시대에 들어서 한국(미래지향적으로)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추구하는 잘 살기는 이와 질적으로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다른 점은 삶의 량보다도 질 추구에 있다. 그들이 외우는 이 웰빙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 그럼 그들의 삶의 질을 좀 보도록 하자. 가장 몸에 와 닿는 의, 식, 주를 좀 보도록 하자. 의, 옛날 어려울 때 못사는 사람들은 앞을 가리는것으로 만족했고 잘 사는 사람들은 일종 신분과시용으로 뽐냈다. 그러나 웰빙식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옷은 정말 별볼일 없는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들도 옷을 적시적소에 따라 입기도 하겠지만 포인트는 어디까지나 자기편리만세 방향으로 가닥을 잡는데 있다. 식, 화학비료에 찌든 대량의 공해식품보다는 소량이나마 무공해식품을 선호한다. 록색식품이라는 말이 이로부터 등장했다. 인공사료로 대량으로 키운 동물의 육류보다는 자연방치상태에서 키운 동물의 육류를 선호한다. 笨鷄니 土鷄니 土鷄蛋이요 하는 말이 이로부터 생겨났다. 주, 청정공기에 일조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소음이 없는 친자연적인 주거환경을 선호한다. 아파트단지일 경우라도 거기에는 적어도 록음이 우거져야 한다. 산수가 어우러지면 더 좋고. 그리고 건강센터가 있고 사생활이 충분히 보장되여야 한다. 웰빙식 삶의 질추구는 어디까지나 건강을 둘러싼 과학성을 그 핵으로 하고 있다. 의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콜레스터롤이 생기는 육류보다는 채소류를 많이 섭취하고 록색식품을 먹을지라도 영향을 살리는 차원에서 생식을 많이 하도록 한다. 그리고 생식을 할 경우에도 싹 내지는 씨를 많이 먹는 것이 이상적이라 한다. 요즘 청정바다나 1급수에서 잡은 물고기회나 사시미가 보편화되는 추세도 같은 맥락에서 리해할수 있다. 바로 이 과학성에 기초하여 음식을 달게, 짜게 그리고 너무 맵게 먹지 않는다. 그리고 포식하거나 과음하지 않고 小食小飮을 한다. 그리고 웰빙식 삶의 질추구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것은 물질적인것보다는 정신적인것을 더 추구하는데 있다. 쉽게 말하면 정신적인 즐거움을 더 추구한다는 말이 되겠다. 이로부터 소유욕보다는 소비욕이 강하다. 그러므로 벌고 쓸줄 모르는 구두쇠나 “경제동물”하고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하여 벌어서는 오늘 무엇사고 내일 무엇사고 하며 살림을 늘이는 알뜰살림군하고도 다르다. 개인재산 1호라 할수 있는 집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그들 웰빙족은 집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들 웰빙족은 사용권에 신경을 쓴다. 그들은 집 하나 장만하기 위해 한생을 다 바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 웰빙족은 소유권이 확보되는 집사기보다는 월세나 전세를 내고 드는 사용권이 확보되는 公寓같은것을 선호한다. 편리하게 사용할수 있으면 된다는것이다. 이로부터 인생의 그 어떤 목적에 매여 모든것을 희생하기 보다는 과정적인 즐거움추구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들 웰빙족은 눈에 보이는 먹고 마시고 노는 물질적인 소비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안보이는 정신적인 자아충전, 개발, 확장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들 웰빙족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주어지는 많은 여가생활을 독서나 예술감상, 스포츠활동을 비롯한 건전한 취미생활로 보내거나 배우고싶은것을 배우는것으로 지낸다. 현대인들이 많이 하는 등산이나 려행, 탐험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이런 등산이나 려행, 탐험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야를 펼쳐준다. 언젠가 한국 KBS TV에서 진행한 “지구의 오지탐험” 프로그램은 그 생생한 보기의 하나가 되겠다. 그리고 그들 웰빙족은 정신적인 자아충전, 개발, 확장에 신경을 많이 써기 때문에 그만큼 개성적인 삶을 산다. 나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삶이 아름다운 삶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놓고볼 때 사실 웰빙은 우리에게 그리 생소한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가져오는 현대적인 삶의 필연적추세이다. 그럼 여기에 비추어 우리 조선족의 삶을 잠간 되돌아보자. 우리는 삶의 물량면에서 그만하면 잘 살고 있다. 그런만큼 우리에게도 웰빙식 삶의 질추구가 필요하다. 우리 조선옷, 그만큼 편리한 옷도 없다. 올방자 틀고앉기, 구들생활… 여하튼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에 딱 맞게 개발된 옷. 녀자들 옷, 생리적인 약점 커버하기에 만점. 한국에서 이런 편리함에 더해 “개량한복”을 고안해내니 금상첨화. 우리 음식, 생식, 날것 좋아하고 자연발효식에 인스턴트음식 저리 가라 한다. 우리 집, 공기 잘 통하고 친자연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다니기를 좋아한다. 한국으로, 로씨야로, 미국으로… 우리의 천지는 넓다. 우리에게는 분명 천생적으로 웰빙식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또한 웰빙식과 다른 초라한 면도 있다. 조선옷은 분명 거추장스러운데가 있고 음식은 너무 짜고 매운데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촌놈처럼 너무 포식하고 과음한다. 하루저녁 몇차, 몇차까지에 “뚜포”까지, 정말 못말리는데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대해 너무 집착한다. 소유욕이 강하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처럼 집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끙끙, 사서는 인테리어에 제정신이 아님. 그리고는 집문서를 꼭 쥐고는 아~ 내집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우리의 자화상은 좀 초라하다. 여기에 내집, 내집 하다가 한술 더 떠 “자손팔대”까지 집장만해주기 위해 끙끙 거리는 우리는 정말 못말려. 이제 우리의 삶의 지표는 빤하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문제이다. 생각문제는 두말할것 없이 중요하다. 생각을 바꿀 때 우리는 현재 어려운 상황속에서나마 웰빙을 맛볼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문제를 하나 설정하여 보자. 우리는 훌훌 잘 떠난다. 그런데 3D일 잘 붙어다닌다.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래서 우리는 억울하고 서럽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는 생각을 좀 바꾸어 보자는것이다. 너무 돈, 돈 하지 말고 외국 가 3D일 하는거, 려행, 탐험쯤으로 홀가분하게 생각해볼수 없겠는가 말이다. 자, 그러면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우리도 한번 웰빙 해보세나!
5    사나이 댓글:  조회:5287  추천:65  2005-02-22
사나이 연변대학 우상렬 나는 어릴 때 “안쪽”에서 한족들과 섞여 살았다. 그때 한족 남자들 우리 조선족 남자들 제일 부러워했다. 한족 남자들 자기네 녀자들앞에서 어깨 축 처지고 손발 싹싹 비비며 꼼짝 못할 때 우리 조선족 남자들 에헴 어깨에 힘을 주고 손으로 머리 쓱 빗어넘기며 너무 당당한 모습에 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조선족 남자들 어깨 축 처지고 고개 숙인 남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 남자들을 깍듯이 공대하던 우리의 녀자들도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는듯 하다. 리혼만 놓고보더라도 이전에 녀자들이 많이 당했다면 지금은 남자들이 많이 당한다는것이다. 조선족 녀성지성인들조차도 우리 남자들을 씁쓸하게 본다. 우리 조선족의 녀류 중견작가 허련순은 자기의 작품에서 가냘픈 녀자에 기탁해 스스로 자기의 존재마저 잃어버리며 자기 삶의 “성공”을 이루는 인생을 오물이 흘러드는 “하수구”에 비기면서 거기에 “돌을 던져라”라고 저주한다. 그리고 바야흐로 떠오르는 젊은 녀류작가 박초란은 어쩔수 없이 녀자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우리네 남자들 인생을 기생에 습관되다보니 모든 생리기능이 퇴화해 버린 물고기 “꺽저기”에 비유하여 놀리고 있다. 참, 얼굴이 뜨거워난다. 언제 우리 남자들이 이렇게 못나게 변했는지? 참, 현재는 우리 남자들이 살기 힘든 세상인만큼은 분명하다. 현재는 후기공업화사회이다. 소프트 정보화사회이다. 거의 모든 생산이 자동화온라인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 힘의 작동보다는 섬세하고 소프트적인 작동이 더 통한다. 그리고 남아도는 물량 및 소비력을 전제로 한 제3산업인 서비스업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남에 따라 녀자들의 로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로부터 남자들의 로동력은 많이 도외시되며 “무용지물”이 되고만다. 이로부터 고개숙인 남자들이 량산됨은 더 말할것도 없다. 우리 연길의 경우만 놓고보더라도 지정학적인 특수한 국제적관계 및 민족적기질 등으로 말미암아 다른것은 별볼일 없지만 서비스업은 다른 그 어느 곳보다도 발랄하다. 그래서 우리 연길의 취업상황을 보면 녀자들이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한다. 이로부터 우리 남자들도 많이 고개숙여진 처지가 되지 않을수 없다. 이것은 어쩔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의한 비극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남자, 사나이들의 역설적인 징표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고개숙이는데 거치지 않고 어깨까지 축 처지며 진짜 남자-사나이들의 자존을 땅에까지 떨구는데 있다. 자기는 백수건달이 되여 가냘픈 안해가 벌어주는 밥만 날렵날렵 잘 받아먹는 남자들, 자기가 펀히 살아있으면서도 안해를 위장결혼시켜 기생하는 우의 “하수구”나 “꺽저기”같은 남자들, “년상의 녀자”한테 장가가서 “姐姐, 姐姐, 姐姐問題”하며 편하게 살려고 하는 남자들… 이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꼴볼견의 남자들, 우리 남자들-사나이들의 얼굴을 먹칠해도 한정없이 한다. 정말 더는 못 봐주겠다. 원래 우리 남자들은 이러지 않았는데… 고고학자들이 갑자기 덮친 화산재로 인해 페하가 된 어느 한 마을을 발굴할 때다. 화산재에 파묻혀 뒤범벅이 된 남녀시체를 구별함에 골치가 아플가 했는데 결국 덮치는 화산재를 맞받으며 타서 죽은 시체는 례외없이 남자로 판명되여 일대 위대한 인간성증명의 생생한 한 현장이 되였다한다. 그리고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많은 집단살인을 한 죄증으로 현재 발굴된 “萬人坑”을 관찰해보면 남자는 대개 총알받이로 앞가슴을 벌리며 죽어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통사고가 날 때도 남녀동석의 경우 남자가 녀자보다 죽는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그것은 남자가 위험을 맞받아 끌어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보다싶이 남자는 위험한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죽을둥살둥 모르고 본능적으로 녀자들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것이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멋지게 생겨먹었다. 그래서 녀자들은 본능적으로 우리 남자들의 넓은 가슴을 파고든다. 나는 현실에서 우리 남자들의 이런 멋진 모습을 많이 보아 오기도 했다. 한국 IMF때 나는 마침 한국에 있었다. 줄줄이 정리해고되여 나오는 남자들, 보기에 참 안스러웠다. 처자식을 부양하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참 말이 아니였다. 처자식을 대할 면목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결연히 집을 뛰쳐나오는 남자들. 주동적으로 홈리스(homelesser)가 되는것이다. 그리고는 몇날며칠 배를 굶고 자지 않으면서 자학의 나날들을 보낸다. 이들은 사회적원인으로 인해 불가피적으로 야기된 금융위기에 의해 희생품이 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잘못인양 자학의 심연에서 모대긴다. 이것이 바로 진짜 남자-사나이의 기본자세의 하나이다. 나는 한국에서 또 하나의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한국에도 홈리스가 많다. 이런 홈리스는 대개 남자들이다. 한국에는 종교단체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꾸리는 홈리스를 위한 무료급식소가 많다. 그런데 이런 무료급식소에서 신문지같은것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며 밥을 타먹는 홈리스들이 있는데 나는 저어기 놀랐다. 나는 홈리스하면 대개 생의 모든 희망을 포기한 타락자, 될대로 되라하는자, 알콜중독자등 사회쓰레기들로 알고 있었다. 이런 홈리스가운데도 밥 한끼 얻어 먹는것을 그렇게 얼굴이 가려워하는것은 진짜 남자-사나이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마지못해 홈리스가 되였을뿐으로 가슴속에서는 진짜 남자-사나이의 자존 하나 가득히 품고 재기의 꿈을 꾸고 있었을것이다. 안그래도 며칠전에 한국TV몰카영예시민포착프로에서 홈리스출신이 재기하여 영예시민의 영예까지 따는 광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현단계 진짜 남자-사나이로 되기가 참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시대적특징에 맞추어 진짜 남자-사나이의 개념을 새로 정립한다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男主外女主內의 패턴을 바꾸어 볼수도 있다. 즉 女主外男主內로 말이다. 이것을 陰盛陽衰라 해도 좋다. 그것은 陰陽互補의 시대적인 균형감각을 잘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이 녀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면 남자들은 집에 들어앉아서 내조를 잘 하자는것이다. 투덜거리며 불만을 부리거나 자비감에 빠져 울며겨자먹기로 “억지신랑”노릇을 할것이 아니라 웃으며 멋기게 당당하게 하자는것이다. 이 면에서 한국남자들이 차를 몰고 출퇴근하는 와이프를 아침저녁으로 바래주고 마중한다는 근간의 새로운 진풍경 하나가 진짜 멋지고 중국에서 한족남자들이 언녕부터 주방에 틀고 앉아 료리를 해제끼는것은 전통적인 중국 한족남자들의 진풍경의 하나이다. 자, 그럼 남은것은 우리 조선족남자. 우리도 진짜 남자-사나이로 한번 되여 봅시다. 우리는 한국남자, 한족남자들을 아우를수 있는 최적의 좌표에 서 있다. 이제 남은것은 단지 우리의 결심뿐. 결심발표!!! 丈夫一言重千金, 그럼 우리 말한대로 해봅시다.
4    “허씬칸우”콤플렉스 댓글:  조회:5145  추천:65  2005-02-16
“허씬칸우”콤플렉스우상렬| 연변대학 부교수 요새 대학교수 버젓이 잘 나가는듯하다. 우리 연길만해도 에헴 연변대학에 있소하면 아, 그렇소!하며 좀은 부러운 눈길로 보는듯하다. 그런데 천만에, 말마소! 우리 대학교수들 힘들어 죽겠수다. 바로 “허씬칸우(核心刊物)”콤플렉스때문이라오. 대학교수들사이 시장경제도태제를 실시하여 국가급 “허씬칸우”에 론문이든지 무엇이든지 발표를 해야 장땅이고 지방급 잡지같은데 발표해서는 꼴찌라는것이다. 그래서 수익도 여기에 의해 좌우지됨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러니 자연히 “허씬칸우”콤플렉스에 걸려 우리 대학교수들 자나깨나 너도나도 “허씬칸우”, “허씬칸우”하며 발을 동동 구른다. 바로 여기에 우리 대학교수의 초라한 또 하나의 자화상이 있다. 대학교수의 정도(正道)나 사명을 잠간 보도록 하자. 대학교수하면 뭐니뭐니해도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가 본령인줄안다. 이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정삼각형우에 굳건히 설 때 대학교수의 위상이 바로 선다. 현재 우리 대학교수들을 볼 때 승다죽소(僧多粥少)라 차례지기에 바쁜 강의에 열심히 하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는것으로 인재양성은 그럭저럭 되는판이고 “허씬칸우”에 내기 위해 아득바득하니 과학연구쯤 역시 되는것으로 보아 무방한줄로 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봉사에 있다. 현재 우리 대학가에 있어서 “허씬칸우”의 고유료에 비겨 사회봉사는 말 그대로 봉사인셈이다. 신문, 잡지같은데 원고료없는 글이나 라지오방송, 텔레비 무료출연은 더 말할것도 없고 가령 유료라 하더라도 그것은 “허씬칸우”의 고유료에 게임이 안된다. 그러니 우리 대학교수들의 마음도 자연히 “허씬칸우”고유료에 끌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대학가에는 바쁘오, 뭐요 하면서 무료원고나 출연은 아예 사절하는 동취(銅臭)의 구린내가 나고 있다. 이로부터 대학교수들이 맡아야 할 고상하고도 레벨 높은 정신적인 사회봉사가 멍들고 죽어가고 있다. 잡지나 신문, 방송에 흐드레 잡소리가 많은것은 그 한보기가 되겠다. 우리 연변의 경우는 더 심한줄로안다. 조선글이나 말을 매개로 한 고급적인 사회봉사감이 워낙 적은데다가 우리 조선족교수들까지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나는 교수일반을 떠나 우리 조선족교수에 대해 좀 얘기하려고 한다. 조선족 교수, 우리 200만동포의 엘리트들이다. 우리는 일단 스스로도 이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자부심을 가질 때 사명감도 살아난다. 그럼 엘리트란 무엇인가? 엘리트에는 많은 멋진 타이틀이 붙겠지만 적어도 지성이 안받침된 리드십으로 개괄해볼수 있다. 일반적의미에서 이런 엘리트들의 리드십이라는것이 굳이 거창한 정치적인것보다는 정신적인 정도나 비전을 제시하거나 보여주면서 이끄는것이다. 그래서 엘리트들은 기회나는대로 글을 쓰고 연설을 하며 사회에 참여하고 봉사해야 한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이런 엘리트들이 죽어지낼 때 그 민족도 죽게 되는것이다. 우리 연변대학은 명실공히 조선족대학이라고 말할수 있다. 학생은 더 말할것도 없고 교수도 우리 조선족교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는 쌀 한줌에 어렵게 창업했고 오늘도 어렵게 꾸려가고 있는듯하다. 다른 대학에 비해 교수들의 돈주머니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그만큼 교수들의 돈주머니를 넉넉히 못채워준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허씬칸우”콤플렉스에도 더 많이 빠지는듯하다. 그래서 박사학위소지자 내지는 박사지도교수들까지 돈주머니사정이 좋은 대학으로 줄줄이 가기도 한다. 현재는 시장경제 돈세상이라 이것도 그리 탓할것은 못되지만 적어도 조선족엘리트라는 자부심에 따른 의무와 책임감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오직 이 의무와 책임감을 잊지 않을 때 오늘날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망이 발전한 세월에 어디에 있어나 가나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수, 적어도 우리조선족 대학교수들이 대학교수 본연의 모습을 찾자면 하루빨리 “허씬칸우”콤플렉스를 떨쳐버려야 한다. 주머니가 텅텅 비였어도 쟁쟁 쇠소리나는 대쪽같은 말을 하는 옛선비의 도고하고도 멋진 모습을 떠올려 볼 때다. 선비는 가난해야 되거늘, 예로부터 그 식이 정상으로 가난해왔음을. 가난해야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고 동정하게 되는 법. 그리고 가난해야 사회참여적이고 비판적이 될수 있다. 사회발전은 바로 이런데서 온다. 이것이 바로 청빈락도(淸貧樂道)의 경지. 공자의 수제자 안회가 허름한 집에서 죄기밥 한덩어리 먹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여유작작하게 웃을수 있는 경지가 바로 이런 경지다. 대학교수, 특히 우리조선족 대학교수들은 바로 이런 경지에서 놀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비대”해져 옛선비의 깔끔한 그 모습에 부끄럽다. 우리가 이런 경지에서 놀 때 우리는 아직도 많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우리 조선족의 절대 다수와 한덩어리가 되는 기본 바탕이 마련된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일단 감정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래서 우리 대학교수를 비롯한 조선족엘리트들이 민족지성의 빛을 발할 때 우리 민족구성원들은 정녕 그것을 빛으로 받아들인다. 오직 이럴 때만이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은 구심점과 더불어 미래비전을 갖게 되며 민족엘리트들에 대해 숭엄한 경의를 보낼것이다. 엘리트들에게 주어지는 부(富), 그것은 청빈락도경지의 뽀나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현대는 시장경제인만큼 이런 당위성에 선진국의 교수평가제처럼 지방급 잡지같은데 발표하는 “꼴찌”딱지에나마 더 힘을 넣어주고 방송출연가산점, 사회특강가산점 등 다양한 사회봉사 시스템을 구축하여 실제적인 동기부여를 하는 합리적인 교수평가제가 도입될 때 그것은 금상첨화식의 실제적인 동기부여의 뽀나스가 될것이다. 이렇게 될 때 청빈락도의 당위성과 시장경제의 합리성이 조화를 이룬 대학교수, 특히 우리조선족 대학교수의 바람직한 현실적좌표가 이루어질것이다. 내가 연변을 못 떠나가는 리유, 바로 청빈락도에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잘 안되는 글이지만 끙끙거리며 쓴다
3    실속파(實屬派)와 허속파(虛屬派) 댓글:  조회:5084  추천:63  2005-02-16
실속파(實屬派)와 허속파(虛屬派)우상렬| 연변대학 부교수 이가 빠졌거나 금이 간 사기그릇, 식당에 가 이런 거 눈에 띠였을 때 금시 눈이 찌뿌둥해지며 재수 없다는둥 시벌리며 빨리 바꾸어 달라고 야단을 피우는 우리. 그러나 그 식이 정상이라는듯 시무럭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漢族“맏아바이들”. 내 기억에 어릴 때 이가 빠졌거나 금이 간 사기그릇은 냠냠, 쩍쩍 강아지들이 맛있게 먹는 밥그릇. 그리고 거렁뱅이들이 가련하게 들고 다니는 밥그릇. 그러면서 귀에 따까리 앉도록 많이 들은 “×놈은 ×놈이야! 저런 그릇들을 다 쓰다니. 쯔쯔…”.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말 漢族들이 더럽고 지저분해서 이가 빠졌거나 금이 간 사기그릇을 쓰는가고 했었다. 많은 깔끔한 한국사람들이 여기에 가세하니 그것은 자연히 정설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좀 “잘 나가면서” 고급식당 나들이를 하면서 이거 아닌데하고 머리를 갸웃하게 되었다. 漢族들이 꾸리는 고급식당에서도 심심찮게 눈에 띠이는 이가 빠졌거나 금이 간 사기그릇. 漢族들 풀이 좀 들어보자. 碎碎가 歲歲라, 歲歲가 平安이라 그러니 결국 碎碎平安=歲歲平安이니 무엇이 나쁘나 말이다. 그러니 좀 碎하고 깨지고 금이 간 사발이 대길하고 복된다는것이다. 분명히 碎해서 궁색하고 초라하건만 덩치 큰 漢族“맏아바이” 멋진 변증법적반전을 한다… 여기에 한술 더 뜬다. 보시오, 이 집이, 이 식당이 얼마나 오래되고 전통이 있었으면 사발이 碎하도록 해 왔겠소? 아아, “漢族“맏아바이”, 그만! 이가 빠지지 않고 금이 가지 않은 그릇만을 고집해온 우리를 오히려 무참하게 만드는 漢族“맏아바이”, 워, 쏸 服라! 혹떼러 갔다가 혹 붙인 셈. 그런데 어쩐지 나는 그 漢族“맏아바이” 붙여준 “혹”이 그리 싫지 않았다. 요새는 심심하면 그 “혹”을 만지작거리며 음미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삐걱찌걱 이런저런 문제가 수시로 생긴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 그러니 이런 문제들가운데서 큰 시시비비문제는 시시비비를 따져야 하겠지만 우리 인생에 피할수 없이 지척에 보다 많이 깔려있는 자질구레한 “碎”같은 경우에는 漢族“맏아바이들”처럼 자기 합리화를 통해 웃고 넘기는 대범함을 보이는것이 삶의 지혜다. 이가 빠지고 금이 간 사기그릇은 절대 봐줄수 없어서 그런지 놋그릇, 쇠그릇까지 만들어내는 결벽증에 가까운 우리의 깔끔함, 항상 새롭고 완미한 경지를 추구해서 좋다. 그런데 이것은 실속없이 허속에 놀아날 때가 많다. 그 이가 빠지고 금이 간 사기그릇, 사람들이 얼마든지 쓸수 있다. 漢族들 잘 쓰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버린다. 漢族“맏아바이들” 대범함, 우리의 깔끔함. 인간은 대범한속에 느긋이 참고 견디는 끈기가 형성된다. 깔끔함속에는 신경질만 늘고 결국 제풀에 물앉고 만다. 많이 들었을 “돼지우리이야기”, 한번 더 해보자. 좀 쿠린내가 나더라도 참고 들어주기를. 중국사람, 조선사람, 일본사람, 쿠린내 풀풀 나는 더러운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누가 오래 견디는가를 내기 했다. 오래 견디는 사람이 그 돼지우리를 가지도록 했다. 결론은 빤 했다. 하루에 목욕 세번하며 제일 깔끔함을 자랑하는 일본사람이 가장 먼저 뛰여나오고 그 다음 두번째로 깔끔하다는 조선사람이 두번째로 뛰여나왔다. 그 다음 가장 깔끔하지 못하다는 漢族“맏아바이”는 아예 나올념을 하지 않고 그만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동무하며 쿨쿨 잘도 자 버렸다는것이다. 그러니 그 살찐 돼지와 돼지우리는 당연히 漢族“맏아바이”꺼! 그 배포유하고 대범함이 얼마나 실속있는가? 카~ 배갈 한잔에 고소한 돼지고기 한점 맛 있게 먹는 漢族“맏아바이”를 군침 흘리며 보는 일본사람, 거기에 후회막급이라 땅을 치며 통탄하는 조선사람. 나는 어릴 때 “안쪽”에서 漢族“맏아바이들”속에서 자랐다. 거무틱틱, 그들 사는 집도 별볼일 없이 거무틱틱. 도저히 사람이 살지 않을것같은 “돼지우리”. 그런데 아침해살이 창살을 비집고 들어올 때면 그 어둠기만 한 집안에서 “一毛, 二毛, 三毛…” 끈질긴 생명들이 부시시 눈을 뜬다. “山高皇帝遠”에 “人多就是力量”이라고 그 무슨 “計劃生育”니 뭐니 무뽑듯이 아이들 많이 낳고 보기. 그래서 농촌도거리제를 실시하자 “一毛, 二毛, 三毛…” 총동원에 한몫 잡은 漢族“맏아바이”. “人多爲患”이라, 흥! 漢族“맏아바이” 코방귀 뀐다. 미국놈들도 우리 중국사람 어쩌지 못해. 미국사람보다 코대 더 높은 漢族“맡아바이”. 나는 좀 커서 연변에 왔다. 버섯모자같은 포근한 지붕을 쓰고 흰 회칠을 한 정다운 초가삼간들, 여기에 가을이 되여 붉은 고추타래들이 매달리고 노란 강냉이들이 황금빛을 내며 마당에 널려 있을 때면 정말 살맛이 난다. 생명이 약동하며 넘칠것같다. 그런데, 그런데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計劃生育”만세에 둘 낳아라는 아이도 안낳는 우리! 우리는 정말“計劃生育”에 너무 깔끔했다. “計劃生育”이 울고 간다. 인구마이나스 성장! 아이러니. 그래서 지금 돈을 주면서 더 낳으라고 야단들이다. 그래도… 아직도 깔끔해 실속을 못 차리나… 漢族“맏아바이” 디디하다. 거러지(거지)궁상은 떼놓은 당상! 우리가 보기에 그렇다. 우리는 깨끗하다. 다 신사다. 하이칼라에 삐까삐까 구두… 그런데 漢族“맏아바이” 죽으면 삿자리밑에서도 베개안에서도, 옷깃에서도 돈이 막 나온단다. 미래를 대비해, 후대를 위하여 차곡차곡 모아두었다는 돈-이것이 漢族“맏아바이들”의 底蘊=실속! 우리는 죽고나면 먼지밖에 안 남는 빈털터리 신세-빛 좋은 개살구=허속! 아직도 한국인에게 악몽처럼 남아 있는 IMF. 나는 경제락제생이라는 판정을 받은 IMF. 한국은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더불어 아세아의 4마리 룡으로 떴다. 그렇지, 한국은 소한민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였지. “大”자 콤플렉스에 싸여 편집광적인 집착을 보인 한국. 그래서“大”자를 시도때도 없이 외우는 한국사람들. 우리 회사 세계 제일 큰 재벌, 우리 제품산량 세계 제일 높고, 우리 GNP 만불… “大”자 추구 좋다. 사나이 기백 살아나는듯하다. 그런데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일 때 허구픈 웃음만 나온다. 우리 회사 세계 제일 큰 재벌이면 뭘 해, 은행빚더미에 앉았음에라! 우리 제품산량 세계 제일 높으면 뭘 해, 경쟁력이 없는 쓰레기같은 물건짝들임에라! 우리 GNP 만불이면 뭘 해, 남의 돈 꿔 쓰는 신세임에라! 그래서 한국은 IMF 때 쫄딱 벗기웠다. 치부가 다 들어났다. 룡은커녕 다시 구렁이로 물앉고 말았다. 그런데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어떤가? 이들은 그 “大”자, 그 뜨르르한 실속없는 “大”자를 고집하지 않는다. 이들은 워낙 漢族“맏아바이들”이다. 이들은 무슨 대재벌이니, 공업단지니 하는데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소규모의 家內공업, 빌게이츠식의 벤처기업, “大”자지만 약하고 허속적인것보다는 작지만 탄탄하고 강한 실속적인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들 漢族“맏아바이들” IMF 뭐언지 모르고 GNP 만불 언녕 웃돌았건만 그래도 래일, 래일을 위한 착실한 준비, 준비에 딸라를 귀한 딸처럼 잘 모셔둔다. 그런데 한국은 허울 좋게나마 겨우 GNP 만불 택(턱)걸이를 하다가 중국이 “띵호와”, 미국이 “띵호와”, 프랑스가 “띵호와”…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줄 모르다가 IMF 꽝꽝에 정신 버쩍 들어 허리띠를 졸라매고 와신상담하며 실속파가 되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또 살금살금 “띵호와”놀이에 정신이 없단다. 어이, 漢族“맏아바이들” 좀 봐. 손에 들어오는 딸라 헤기 바쁜 漢族“맏아바이”말이요!
2    고운 아이 매 하나 더 댓글:  조회:5305  추천:72  2005-02-16
고운 아이 매 하나 더우상렬| 연변대학 부교수 고운 아이 매 하나 더, 요즘 부모들 들으면 놀라 혼비백산할 얘기다. 내 아이 어떤 새낀데말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금싸락같은 내 새끼. 우리는 아이들을 “할아버지”모시듯 키운다. 모심받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오히려 아이들을 학교에 모셔가고 모셔오기에 바쁘다. 허리꼬부랑, 기침 콜콜, 불쌍할시구. 부모님들 아이들 키 잘 커는 보약, 뇌영양보충 보약 먹이기 바쁘다. 그리고 시험칠 때는 엿가락에 찰떡 학교대문에 붙이고 안절부절 못하며 기도하기에 바쁘다. 꼭 시험 잘 쳐다오, 꼭 붙어다오… 오, 대학에 붙었냐, 곱다. 그 다음 대학문앞까지 손 꼭 쥐고 가는 우리. 마치 우리의 명줄이 그놈 아이들한테 붙어있는듯하다. 그렇다. 우리는 계획생육을 하다보니 “아새끼” 달랑 하나, 참 외롭고 애처롭고 안스럽다. 그래서 온 신경을 기울인다. 여기에 무슨 우생이니 우육(優育)이니 하는 바람까지 가세하니 우리는 아이들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린다. 정말 우리의 온 삶이 아이들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는 셈이다. 이로부터 중앙TV에서 때린 요, 과잉보호요, “온실속꽃”이요 하는 인위적인 역효과가 드러난다. 내가 태국에 려행갔을 때다. 많은 볼거리가운데서 나를 가장 경악케한것은 많은 관광객들이 호랑이와 정답게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법석을 피우는 광경이였다. 나는 원래 호랑이하면 낯이 새파래지는 무우깍지다. 그래서 나는 겁이 나면서도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그 호랑이는 어떻게 되여 먹었는지 사람이 포즈를 잡아주는데로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한없이 순하디 순하기만 하였다. 사육원의 말을 들으니 이 호랑이는 나서부터 사람의 손에서 컸는데 사람이 먹여주면 먹고 재우면 자는 그런 귀염둥이라는것이다. 그러니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으니 걱정 말라는것이다. 그래서 나도 마음 놓고 호랑이몸둥이우에 올라타고 사진을 한방 박았다. 참 그 호랑이는 사람같았다. 지금 사람같은 체온이 아련히 안겨온다. 이럴때면 사람이 못된 의 우리의 호랑이가 불쌍해났다. 그러나 잠간, 다음 순간 나는 태국의 그 호랑이가 불쌍해
1    강신무(降神舞)와 세습무(世习舞) 댓글:  조회:5901  추천:59  2005-02-16
강신무(降神舞)와 세습무(世习舞)우상렬| 연변대학 부교수 무당에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다. 강신무는 “신”이 들려 스스로 무당이 된 경우이고 세습무는 다른 무당으로부터 배워 무당이 된 경우이다. 한 사람이 대성하는데는 강신무와 세습무적 방식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강신무-끊임없이 눈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총기를 발휘하며 스스로 깨닫고 터득해나가는것. 세습무-끊임없이 눈을 밖으로 돌려 다른 사람한테서 배워나가는것. 간단히 말해 강신무는 자학(自學)의 경지이고 세습무는 타학(他學)의 경지라 할수 있다. 인간에게는 강신무적인 자학의 능력이 천성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나는 일자무식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가감승제를 배우지 않았으련만 돈계산은 귀신처럼 해제낀다. 나는 우리 아버지도 신기하다. 서당문앞도 가보지 못했다는 당신이 두손가락을 폈다접쳤다하면 웬만한 계산은 다 해내고 주먹을 불끈 쥐고 올록볼록 손가락밑둥마디를 짚어나가면 60갑자는 얼음판에 표주박 밀듯이 짚어나갔으니 말이다. 나는 소학교에 입학해서도 깜박 놀랐다. 혁명도사 레닌이 말했다는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자!”, 위대한 수령 모주석이 교시했다는 “학습을 잘 하여 나날이 향상하자!”는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나는 워낙 학교에 가기전에 우리 아버지로부터 이러루한 말을 수없이 들었던것이다. “촌놈” 우리 아버지가 혁명도사, 위대한 수령과 통하는데가 있는듯하여 나는 그때로부터 우리 아버지를 정녕 당신으로 보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쩍 하면 물었다. 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하면서 왜 아는것이 그렇게 많아요? 그때마다 우리 아버지 하는 말이 강신무적인 걸작-생각해보면 알지!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서 바로 이 “생각해보”는 걸작을 배웠다. 나는 누구에게 묻고 배우기전에 먼저 생각해본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며 미립이 트다보니 나는 스스로 깨닫는바가 있었다. 그 많은 명언명구들, 별로 아닌걸.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사람들 제 아니…” 내 입에서도 이러루한 명언명구들이 튀여나올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선생을 깔보기도 했다. 대학이 들어와 “어느어느 작가 몇년도 몇월 몇일에 탄생했소”를 신기한 지식이냥 졸졸 외우며 시험에까지 내는데는 그만 나를 질리게 해버렸다. 책을 보면 다 알것을 왜서 졸졸 외우게 하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를 “세습무”로만 만드는 주입식으로 대변되는 고질병의 발작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믿어야 한다. 인간의 뇌는 동물중에서 가장 큰 용량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잠재력은 대영박물관 하나를 다 기억하고도 남는다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비극은 한생에 있어서 이 잠재력을 몇백만분의 1도 발굴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세습무적인 따라 배우기가 가장 큰 주범의 하나라고 한다.따라 배우기, 학교에서의 선생, 선배나 “어른”들을 “타습”하는것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가장 빠르고도 손쉽게 장악할수 있는 지름길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것을 미신하게 되면서 맹목성을 띠는데 있다. 자기 스스로 아는것 혹은 알수 있는것도 꼭 강의를 들어야만이 마음이 놓이고 그 식이 정상으로 느껴지는것, 변태에 다름 아니다. 소학생들이 책보 미여지도록 교과서를 넣어 다니고 대학생들이라는 우리도 하루에 1, 2, 3, 4, 5, 6, 7, 8, 9, 10절까지 수업을 하는데는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난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것-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사실 우리 인간의 많은 지식은 이런 자습의 경지에서 스스로 터득되는것이다. 이유목염(耳濡目染)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것, 우리 삶의 많은 기본바탕들은 바로 이렇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말로 많이 일컬었다. 또 어떤 일이나 분야에서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숙능생교(熟能生巧)의 경지에 들어 배트랑이 될수도 있다. 사실 종교적 묵상이니 참선이니 하는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무의식세계를 포함한 전반마음의 경지를 읽는것이다. 현단계는 말 그대로 지식이 폭발하는 시기다. 인간이 지식을 따라 가기가 힘에 벅차다. 컴퓨터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그것이 더 없이 편리한 우리 인간삶의 방편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다 배워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나는 이 순간도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워드밖에 모르는 신세다. 지식을 많이 배우면 좋겠지만 그 많은 지식을 다 배울려 하다가는 코 꿰인 송아지신세가 되여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십상이다. 특히 세습무적인 “타습”의 외곬으로 나아가는것은 우리를 매우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신무적인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강신무는 일단 신이 들리게 되면 자기는 무당이 될 운명이라 무당노릇을 열심히 한다. 우리도 일단은 스스로의 적성을 판단해야 한다. 내가 문과형인가, 아니면 리공과형인가 등등. 그리고 적성에 맞는 쪽에 몰입해야 한다. 나의 적성은 이미 그런 쪽으로의 성공을 절반 먹고 들어갔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적성에 바탕한 강신무적인 자습은 아는것은 넘어가고 모르는것을 주공(主攻)할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학습방법이다. 세습무적인 타습이 언제어디서나 주어지는것이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공간적으로 제한적인것인데 반해 강신무적인 자습은 마음만 먹으면 할수 있는 영구적인것이다. 물론 모르는것을 주공하는데 세습무적인 타습의 방조가 필요하다. 선생의 역할은 바로 이런데 있다. 여기서 잠간 세계 최고 갑부 빌 게이츠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빌 게이츠는 분명 강신무적인 존재다. 그는 컴퓨터에 “신들려” 세습무적인 타습이 싫어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든가? 그리고 그는 주로 강신무적인 자습으로 컴퓨터황제가 되지 않았는가? 물론 그 와중에는 세습무적인 타습도 곁들였겠지만. 사실 세계 위대한 발명가나 인물들을 보면 거의 다 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를 많이 추구했음을 알수 있다. 현재 계발식의 창신(創新)교육이라는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를 떠날수 없다. 세습무적인 타습은 일종 힌트나 계발의 계기가 되고 강신무적인 엑스타시(迷狂)나 도취속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자습의 경지를 개척하도록 하는데 있다. 자습의 방법, 방식, 기교… 지식의 바다에서 빠져 죽지 않고 유유작작하게 노닐려면 모종 의미에서 현단계는 배우는 내용물보다 이런것이 더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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