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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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60 ]

80    SexualCross (우상렬82) 댓글:  조회:3865  추천:88  2007-05-03
SexualCross 우상렬세상은 정말 돌고 도는 갑다. 언젠가 여자들이 남성억압 하에 죽겠다고 지랄이더니 이젠 남자들이 참 죽을 맛이다. 남성의 여성화, 남자들이 여자처럼 되어야 잘 나가는 세상이니 말이다. 세상이 딱딱한 하드-남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분명 부드러운 소프트-여자들의 세상으로 번져가니 말이다. 노지심이 왼 힘으로 나무를 뽑아버리고 무송이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던 시대는 언녕 지나가고 버튼을 누르거나 컴퓨터자판을 뚜드리는 시대가 아닌가? 아무리 껑껑 거리며 일해봐야 개밥에 도토리신세밖에 안되고 굽실굽실 ‘いらぃませ’쯤 해야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페미니즘의 여권신장 같은 것은 약과고 오히려 남성 스스로가 남성이기를 포기하고 여성화-SexualCross로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남자들한테도 무슨 매너니 화장이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따라 붙는다. 무슨 남자가 그래, 매너 하나 없이. 요새 남자가 여자들한테 심심찮게 듣는 소리다. 여자들한테 반말을 썼거나 여자들 앞을 안면고시 없이 획 지나갔거나 엘레베이터 같은 거 탈 때 남자가 여자 먼저 탓을 경우에조차 이런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이런 소리를 듣는 남자는 이거 아닌데... 속으로 이렇게 되뇌이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거저 이거...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 거세당한 송아지새끼처럼, 아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노새처럼 제풀에 물앉고 만다. 못난 남자들 같으니라꼬. 이러니깐 나 같이 표정이 굳고 행동이 거친 남자들은 설 자리가 없지. 아니, 무슨 표정이고 행동을 떠나서 나 같이 험상굳게 생긴 놈은 아예 SexualCross에서 도태다. 요새 봐라, 남자들 화장하고 매니큐하고 여자들 흉내낸다고 야단들 아니냐. 거리바닥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 남자들 화장품이란다. 아이고 화장품쯤이면 약과지, 정형외과까지 남자들이 붐빈다고 하니, 이것이야 말로 격세지감이로세! 그래서 결론적으로 요새는 꽃미남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다 말이요. 그리고 꽃을 든 남자들이 줄을 선 시대란 말이요. 참 우리가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니는 내꺼야! 하며 남자들이 독점욕을 풍겨야 여자들이 따라주었는데 이제는 나는 니꺼야! 하며 아양을 떨어야 여자들이 받아 줄가 말가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한심할시고’! 남자들이 백기를 든 분명한 여성상위시대. 내 친구 한 놈은 저녁에 그 일을 할 때도 여성상위시대, 올라옵소 한단다. 그러니 땀 뻘뻘 흘리지 않고 그 거창한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단다. 처음에는 남성상위시대, 올라탑소 해야 꼭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성상위시대, 올라옵소로도 되니 희한하고 재미나고 좋더란다. 내 친구 더 기가 막히는 한 놈은 돈을 벌어서는 꼭꼭 마누라한테 챙겨주고는 여성상위시대, 올라탑소와 남성상위시대 올라옵소를 떠나서 여하튼 열심히 그 일을 해주어야 용돈으로 돈을 조금씩 타 쓴다고 한다. 나보다는 못한 놈! 아니 피장파장, 아니 그래도 나보다는 못하지. 여성상위시대, 여성동지들 좋캈소! 그런데 여성동지들 많이 남성화 되었구려~ 그래서 남자들 많이 기 죽는다 이거여. 아니 피장파장이구려. 남성의 자성화⇔여성의 웅성화, SexualCross의 본래적 의미도 이런 것으로 보아야지. 모계사회니 부계사회니, 모권제니 부권제니, 남권이니 여권이니 하는 우리 역사의 일그리진 면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좀 矯枉過正으로 나가도 괜찮다. 남성중심을 폭파하고 올라탑소와 올라옵소의 논리도 폭파하고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키스의 원리로 SexualCross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요, 해체주의요 하는 요즘 좀 아리숭한 얘기들도 이런 SexualCross의 확대판에 다름 아니겠지!
79    누이동생 콤플렉스 (우상렬81) 댓글:  조회:4181  추천:73  2007-04-26
누이동생 콤플렉스 우상렬생사로(生死路)는여기 있으매 두렵고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느냐어는 가을 이른 바람에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한가지에 나고가는 곳 모르는구나아으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도(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신라의 명승 월명사가 부른「제망매가」다. 속세의 인연을 끊은 중이건만 누이동생의 뜻하지 않은 죽음에 애틋함을 금하지 못해 부른 노래다. 나는 대학교 때 이 노래를 접할 때 누이동생에 대한 오빠의 절절한 정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나고 말았다.나는 지금까지도 우리 엄마, 아버지에게 그 무슨 한스러움이 있다면 나에게 누이동생 하나 낳아주지 못한 것으로 치겠다. 우리 집에는 줄줄이 육형제뿐이었으니깐. 내가 누이동생을 가지고 싶었던 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 나하고 제일 딱친구인 옆집의 창수 여동생을 보면서부터였다. 창수네 집은 아이라고야 달랑 창수와  여동생 옥경이뿐이라 어른들이 들에 일하러 나가고 나면 옥경이 보는 몫은 고스란히 창수에게 돌아갔다. 창수는 우리 또래들이 노는 데까지 옥경이를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분명 좋아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지못해, 때로는 역정을 부리면서 데리고 왔다. 친구들도 자꾸 옥경이를 데리고 온다고 아니꼬운 핀잔이다. 그런데 나만은 나도 모르게 옥경이가 좋았다. 나는 창수가 부러웠다. 나에게도 저런 여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그래서 옥경이가 어려 업어줘야 할 때는 내가 창수 대신 업어주고 옥경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탈 때는 내가 걷기며 놀았다. 이 통에 창수놈은 좋아라고 딱지치기며 다마까기 같은 놀음에 빠지고 만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나를 바보 같은 놈이라고 놀려댔다. 그러면 나는 히죽 웃고 만다. 내가 좋아하는 노릇이니 막무가내라 식으로. 내가 여동생을 봐준 덕분인지 나와 창수는 유별난 친구가 되었다. 참, 그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매부 좋고 누이 좋고...그런데 好景不長이라 우리 집과 창수네 집은 갈라지게 되었다. 창수네 집이 이사를 갔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의 여동생와도 갈라지게 되었다. 허전했다. 죽을 기분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공책이며 지우개며를 산다고 거짓말을 해서는 계집아이 꼬마인형을 하나 샀다. 그리고는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엄마와 아버지는 이 자식 정신 나갔다고 야단이다. 은근히 아마 이 자식 올되 사춘기쯤 왔는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사실 나는 올되지도 못하고, 사춘기도 무엇인지 모르고 지났다. 한번은 몽정을 하고는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는가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몰랐다. 나는 대학교에 가서야 사춘긴지 무언지 좀 알았다. 그래서 한번은 열람실에서 은근히 짝사랑하는 처녀동지가 우연히 옆에 와 앉게 되어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다. 그날 밤은 온통 뜬 눈으로 보내고 말았다. 나는 바로 대학교 때 이 사춘병에 걸려 흘레 못한 개처럼 처녀동지들 뒤꽁무니를 많이 따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방학간 내가 집에 갔을 때다. 짜개바지 친구 창수가 찾아왔다. 반가웠다. 놈은 술을 마시잔다. 긴히 할 말이 있단다. 여하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술이 한 두 순배 돈 다음 그 자식 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자기 여동생 옥경이를 책임지란다. 옥경이가 지금 나를 짝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렸단다. 어, 나는 놀라면서도 한편 진정을 찾았다. 고 머루알 같은 눈에 까만 눈썹에 단발머리 계집애... 언제가 방학간에 집에 와 시내를 거닐다가 이제는 제법 처녀티가 나는 숙성한 옥경이를 만났었다. 그녀는 몹시 부끄러워하는 눈치다. 얼굴은 확연히 달아오르며 두 손은 옷깃만 매만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태연했다. 그녀 앞에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업어주고 손잡고 다니던 그때가 생각키웠다. 나는 그녀가 귀여운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주고 말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의 깜찍한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나보고 무슨 책임을 지라니, 아니, 사랑을 하라니 나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났다. 나는 옥경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나를 짝사랑한 여인이건만. 그래서 결국 창수에게도 상처를 남기고. 창수는 네놈이 대학에 가더니 출세했다고 농촌여자가 싫다 이거지 하며 두 눈을 부라리며 나의 멱살을 잡았다. 나는 창수가 잡아 흔드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말았다.내가 연구생 공부를 할 때다. 한번은 술이 얼근하게 되었다. 늙은 노총각의 욕정이 타올랐다. 다짜고짜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어두컴컴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기급을 하며 낯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나의 키스폭포와 가득 찬 물총이 겁이 났던 것이다. 오빠, 이러면 안 되, 우리는 영원한 오빠와 누이동생이잖아, 나를 누이동생으로 남게 해줘. 아, 누이동생이란 말에 나의 키스폭포와 물총은 그만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나는 그녀를 조용히 끌어않았다. 나의 영원한 누이동생으로!누이동생, 나에게는 일종 징그스적인 콤플렉스로 남아 있다. 오빠, 사랑해!하면 나는 그만 신경이 곤두서며 기겁을 하고 만다. 아이참, 누이동생을 어떻게 사랑하지? 안될 소리! 그래서 나는 결국 누이 같은 여자를 사랑하고 말았다.  
78    重慶사람들과 火锅 (우상렬80) 댓글:  조회:4873  추천:67  2007-04-25
重慶사람들과 火锅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중경사람들은 참 먹기를 좋아한다. 천부지국의 풍부한 물산이 먹기를 만들었으리라. 사천요리는 중국의 8대 명요리 가운데 하나다. 사천요리하면 떠오르는 것이 火锅. 그런데 火锅는 사실 중경이 원조고 오리지날이란다. 중경火锅는 명말청초에 중경 嘉陵江가 부두의 배끌군들이 모여서 먹던 음식이란다. 소천엽, 소피, 돼지내장, 오리밸 등 시시껄렁한 것들을 중경음식 특유의 조미료인 톡 쏘는 고추(태양초)와 화한 향내를 풍기며 입안을 얼얼하게 하는 花椒를 넣어서 끓인 국물에 익혀서 먹던 음식이란다. 그래서 중경火锅를 달리 毛肚火锅나 麻辣火锅라 하기도 한다. 물론 중경火锅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다. 처음에는 시시껄렁한 몇 가지만 샤브샤브 해 먹던 대로부터 지금은 소고기, 양고기... 실로 샤브샤브 못하는 것이 없는 듯하다. 한번은 사천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 강걸 교수의 안내로 별로 이름이 있는 것 같지 않은 火锅店에 간 적이 있다. 식당에 들어서니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왔다.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 나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원래 그 귀맛 좋은 시냇물 소리는 내 자리 옆의 타원형으로 된 한 20센치 내외의 너비로 된 물도랑에서 나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물도랑으로 앞뒤로 끈으로 느슨히 연결된 조그만 나무배들이 둥둥 떠가고 있었다. 그 배위에는 火锅에 샤브샤브해 먹을 먹을거리들이 작은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제야 깨도가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일본식 회전초밥을 먹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먹을거리가 물위에 동동 떠가니 그 얼마나 낭만적이냐? 포석정에서 술잔을 동동 띄워서 마셨다는 멋쟁이 신라왕이 생각키운다. 나도 왕이나 된 기분. 사실 나는 신라왕보다 낫다. 먹을거리가 워낙 무진장이다. 전혀 이름도 모르고 먹어보지도 못한 것들이 많다. 샤부샤브,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어도 좋다. 천부지국의 사천이라는 말이 몸에 와 닿는 순간순간들이다. 그리고 이 많은 것들을 1인당 단돈 인민폐 45원에 맥주까지 곁들여 마음대로 갖다 먹으라니 이 참 기가 막히지 않은가? 일본식 회전식당의 빈 접시 헤아리기 보다는 얼마나 대범하고 호쾌하냐? 그래서 나는 샤브샤브 싫큰(싫도록)에 맥주 맥 빠질 때까지 빵빵 마셔주었다. 식성에 술성이 작은 남방사람들은 부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그런데 나의 똥배는 또 나오고... 중경火锅는 먹는 양식도 대단히 다양화되었다. 또 한 번은 강걸 교수를 따라 중경뿐만이 아니고 전국적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중경의 嘉陵江가 산에 의지한 懸空式 전통양식이 밀집된 洪崖洞먹자오락거리에 있는 小天狗火锅娥火锅店에 간적이 있다. 우리 일행이 좌정하자 어여쁜 사천아가씨가 상냥히 웃으며 다가온다. 鴛鴦锅를 하겠는가 아니면 平锅로 하겠는가... 紅湯으로 하겠는가 아니면 淸湯으로 하겠는가... 같이 먹는 큰 솥 火锅로 하겠는가 아니면 개개인이 나름대로 먹는 작은 솥 火锅로 하겠는가... 魚锅로 하겠는가 아니면 鷄锅로 하겠는가... 양손에 떡 쥔 격으로 어리뻥뻥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무거나 좋을 대로, 여하튼 연길에서 먹어보지 못한 걸로, 나의 결론. 그래서 중경火锅는 현재 이름도 다종다양한데 먼저 串串香火锅, 이름 듣기 좋쟈? 무언가 했더니 우리 연길에서 별라별란 것을 다 뀀에 꿴 꼬치를 구워 먹듯이 역시 그런 꼬치를 火锅湯 같은데 넣었다 익혀서 먹는 것이다. 우리 연길 뀀하고 좀 다른 점은 건두부나 채소류 뀀이 더 있는 편이고 뀀을 양념류에 찍어 먹지 않고 거저 먹는 것이다. 그리고 狗火锅도 있다하나 아직 먹어보지는 못했음. 아쉽다. 그러니 오늘도 연길의 狗火锅로나 떼울 수밖에.중경火锅는 뭐니 뭐니 麻辣火锅가 제격. 麻辣, 얼얼하고 매운 맛이 특색이다. 花椒와 辣椒를 주조미료로 하여 기름에 넣고 팔팔 끓이니 花椒와 辣椒의 맛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麻辣 맛이 제격인 붉은 국물-紅湯이 이루어진다. 그 다음 모든 것은 이 紅湯에 넣었다가 꺼내서 먹기. 팔팔 끓는 기름 紅湯이니 일단은 아무리 시시껄렁한 것을 넣어도 멸균이 잘 되니 몸에 탈이 날리 없어 좋았다. 그리고 이 火锅는 共食과 個食이 잘 어우러져 좋다. 紅湯 가마를 빙빙 둘러싸고 앉아 여럿이 같이 먹으니 한가마밥을 먹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난다. 그런가하면 또 나름대로의 식성에 따라 먹을 거리를 넣어 먹거나 건져 먹을 수 있어 좋다. 共食과 個食의 조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음식법. 사실 火锅는 중경의 풍토기후에 가장 잘 맞는 음식. 원래 음식이란 그 지방의 풍토기후에 어우러져서 생겨나는 법. 중경하면 우리에게 떠오른 것은 중국의 안개 도시-霧都. 중경은 여름을 제외하고 해 나오는 날이 드물다. 촉나라의 개가 어쩌다 나온 해를 보고 이상하다 여겨 짖는다는 蜀犬吠日, 그럴듯한 이야기다. 그래서 어쩌다 해가 나오면 명절 같은 분위기가 되어 너도나도 해쪼임에 여념이 없는 중경사람들. 아파트의 베란다가 유난히 큰 것도 이 해쪼임을 위한 것인지. 중경은 확실히 습하다. 해가 적게 나오니 습할 수밖에. 공기가 언제나 촉촉이 젖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중경사람들은 우리 북방에 가면 날씨가 너무 건조해서 코구멍과 입안이 마르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목구멍까지 칼칼해난다는 것이다. 이 습한 날씨 때문에 중경처녀들은 피부가 촉촉하고 매끌하며 희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 북방의 건조한 날씨가 피부를 거칠게 만든다고 한다. 처녀동지들, 정말 그런가? 그런데 세상일은 모두 일장일단이 있는 법. 중경은 바로 이 습한 날씨 때문에 전통적인 주거도 1층은 객실이나 주방, 창고로 쓰고 2층에다 침실을 마련한다. 아파트도 1층이나 2층 같은 낮은 층은 습기 때문에 값이 싸단다. 사람들도 이 습기에 젖어 있는 듯. 중경사람들이 火锅를 먹는 것은 바로 이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란다. 花椒맛이 우러난 火锅湯에 먹거리를 익혀 먹음으로써 습기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花椒去濕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중경음식에는 이 花椒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경 날씨는 춥다. 아니, 가장 덥다는 불가마 중경이 아닌가? 그렇지. 그런데 내가 말하는 것은 주로 겨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네. 사실 겨울 날씨도 우리 북방에 비하면 조금도 안 춥지. 섭씨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가 없으니. 그러나 집안은 무지무지 춥다. 전통적으로 스팀시설을 갖추지 않은 집안 날씨가 바깥 온도하고 같으니 말이다. 집 밖에서는 움직여 추운 줄 모르겠지만 집안에서는 가만히 있으니 추워서 못 견디겠단다. 그래서 우리처럼 술을 마시고 지랄발광하는 것이 아니고 톡 쏘는 태양초 먹고 얼얼한 속에 추움을 이기기. 火锅에 태양초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맛도 맛이거니와 주로는 추위를 들기 위해서다. 辣椒去寒이란다. 그럼 더운 여름날에는 왜 火锅를 먹지? 중국사람 특유의 삶의 지혜-以毒攻毒란다. 한마디로 火锅는 이래저래 좋단다. 중경사람들이 추구하는 음식의 麻, 辣, 鮮, 香 맛을 고루 다 갖추었다는 것이다. 麻, 辣에 대해서는 얼마간 얘기했으니 鮮에 대해서 잠간 더 보고 넘어가자. 중경사람들은 얼마나 음식의 鮮-신선도를 따지는지 바다를 못 끼어 해산물을 마음대로 못 먹는 ‘콤플렉스’가 가득 차 있겠지만 죽은 물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단다. 일반 식당에 가서 물고기를 주문할 경우 식당 안쪽에 들어가 산 고기임를 확인하거나 주방장이 저울에 펄쩍 뛰는 놈을 손님들 앞에 가져나와 확인하게 한다. 중경사람들은 이 세상에 먹기 위해서 온 사람인듯. 食者天下之大本이기도 한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특히 먹거리에 喜新厭舊한단다. 매끼마다 별다른 음식을 먹기에 신경을 쓴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끊임없이 구닥다리 음식은 갈아치워도 火锅만은 그 모양 그 대로 열심히 먹는다는 것이다. 정말 火锅에만 情有獨鐘.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오래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는 중경날씨,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단다. 이 세상 오직 그들만이 하느님한테 소외받은 듯한 기분 속에. 그래서 무엇이든지 두드려 부시고 누구와 싸움을 해서라도 그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싶단다. 그런데 바로 이때 火锅가 생각나며 火锅를 먹으며 그 우울함을 떨쳐버린단다. 그래서 1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火锅를 먹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단다. 중경사람들은 그 무엇을 두드려 부시고 그 누구와 싸움하고 싶은 욕망을 火锅로 승화시킨 셈이다. 입안이 화해나고 얼얼해나는 麻辣火锅로 말이다. 좀 자학적인 맛이 난다. 긴가민가? 사천외국어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계시는 김병활 교수한테 물어보았다. 해가 적게 뜨는 중경의 날씨는 확실히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단다. 그런데 자기가 중경사람들하고 다른 점은 火锅 먹는 것이 아니라 이쪽저쪽 기웃 거리는 산보로써 우울함을 푼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중경사람들은 火锅하고 찰떡 궁합으로 되어 있다. 중경사람들은 火锅에 열광한다.  몇 년 전부턴가는 ‘중국(중경)火锅美食문화절’을 요란스럽게 한다. 며칠 전인 3월 20일에는 '제3차중국(중경)火锅美食문화절'을 굉장히 벌렸다. 문화절 당일 40여 만 명의 중경시민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본 문화절에는 糖酒會니 뭐니 여러 행사가 곁들여졌지만 그래도 가장 인기를 끈 것은 '萬名火锅宴'. 2000여개 火锅宴을 벌려 동시에 만 명이 火锅를 먹도록 한다는 것이다. 직경 3-5메터의 태극모양의 음양火锅宴으로부터 번쩍번쩍 누른 옷을 입고 두 줄로 늘어앉아 용의 배속의 火锅를 먹는다는 龍火锅宴... 실로 엄청난 규모고 다채롭다. '萬名火锅宴'이 끝난 후 각종 매체에서는 대서특필한다. 이번 火锅宴에서 소천엽 몇 톤 먹어치웠고 무엇, 무엇 몇 톤 먹어치웠고 하는 식으로. 중경사람들이 火锅에 대해 이렇게 성세를 올리는 데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제 몇 차, 제 몇 차하는 식으로 요란스럽게 행사를 함으로써 火锅가 확실히 중경 것임을 만천하에 홍보하는 셈이다. 이번 '제3차중국(중경)火锅美食문화절'만 놓고 보아도 火锅는 기네스세계기록 체크위원들에 의해 기네스북에 오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중경은 중국미식가협회로부터 '火锅之都'라는 영예를 따낸다. 이로부터 火锅는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확실한 중경직할시의 브랜드로 자리 잡는다. 중경사람들은 중경火锅를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사천火锅하고도 확실한 변별성을 두면서 사천火锅는 저리 가라한다. 이로부터 중경사람들은 모택동의 ‘不到長城非好漢’을 패로디하여 ‘不到重慶不吃火锅非好漢’이란다.   火锅브렌드얘기가 나오니 자연히 김치얘기가 나온다. 우리 조선사람들 김치는 두말하면 잔소리인 일미다. 그런데 어떤 족속들이 기무찌로 넘본단다. 무슨 특허를 내고 어쩐단다. 얼마 전에 사천외국어대학교의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교수하고 식사를 했는데 사천 泡菜 어떻고 하다가 그 교수 말쌈이 일본기무찌 참 맛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래도 민족심이 발동되어 교수 양반, 그것은 기무찌가 아니고 김치요, 일단 이렇게 시정해주고 다음 그것은 우리 조선사람들이 원조고 오리지날이요, 일본사람들이 자꾸 흉내를 내며 귀찮게 기무찌, 기무찌 한단 말이요. 아, 그래요. 교수가 이 모양이니 일반 사천사람들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중경의 ‘덕수궁’이라는 한국사장이 경영하는 한국식당에서 기가 찬 맛으로 승부하며 한 근에 10원의 고기가격보다 더 비싼 호가로 중경사람들 눈을 삑 틔어놓는다. 얼마 전에 성도에 있는 사천연합대학에 갔다가 학생들 교내 식당에 조선사람 김치를 판다고 하기에 일부러 들어가 먹어보았다. 역시 김치 맛은 김치 맛이로다. 학생들도 열심히들 맛 있게 먹는 모습들이다. 후에 알고 보니 우리 연변의 조선족 젊은 기업인이 성도에 진출하여 김치브렌드를 창출한 것이다. 나는 김치 말고도 중경火锅 못지않게 우리의 많은 음식들도 브렌드화하여 세계적인 각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빔밥, 비빔비빔 냠냠, 얼나나 맛 있냐? 쌈밥, 너무 희기하다, 야들야들 상추에 고추장 듬뿍, 이 아니 녹색건강식품이냐? 설렁탕, 설렁설렁 탕, 끼니마다 탕류 꼭 올리는 중국 남방사람들의 구미에 설렁설렁 먹혀들어갈 것 같다... 좋다! 우리도 브렌드화해 세계진출 해보세!  
77    溫泉魚療 (우상렬79) 댓글:  조회:5061  추천:91  2007-04-13
溫泉魚療 우상렬溫泉魚療, 이런 소리 들어보았는지? 온천에서 물고기 먹으면서 병 같은 거 치료하는 것이겠지. 이쯤으로 필링이 온다. 나도 처음에 그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똑똑한 나의 생각도 빗나가고 만다. 그래 물고기나 먹으면서 병 같은 거 치료한다는 것, 자연요법 어방에 가기는 갔으나 얼마나 범상하고 촌스러운 발상이냐?溫泉魚療는 이렇게 범상하고 촌스럽지가 않다. 적어도 이 우상렬이 모르고 지낸 것은 범상하고 촌스럽지가 않다. 溫泉魚療, 물고기 먹는 거 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오히려 물고기가 사람을 먹는다 해야 할지? 이만하면 희한하지.그래 물고기가 사람을 먹는다? 세상에 웬 그런 일이? 식인어, 두려울시고! 그런데 니는 어찌 안 먹히고 안 죽고 왔냐?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임마, 그래 내 정직한 공산당원이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그럼 귀 구멍 크게 열고 눈 크게 뜨고 한번 잘 들어보아라. 그러나 그 기상천외의 얘기에 정신이 획 돌지나 말아라.  자, 그럼 溫泉魚療하러 가자.溫泉魚療, 중경직할시 統景泉世界에 있다. 統景鎭 지역에 온천이 무진장 많아 아예 泉世界-온천세계라 했단다. 이름이 멋졌쟈? 거저 무슨 무슨 온천이라 하지 않고 泉世界-이 세상 모든 온천을 다 자기 것인양 좀 욕심은 부린 듯하나 얼마나 배포유하고 호쾌하냐? 조용하던 중국 사람이 꿈틀거리고 있는 거야.  사실 統景泉世界, 한국의 수운보온천 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런데 분명 다른 것은 다양화 전략을 추구한 것 같다. 크게 A區, B區 두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A區는 남부유럽 목욕스타일을 추구한 古羅馬浴場區, 북부유럽 목욕스타일을 추구한 北歐風情浴區, 일본 목욕스타일을 추구한 東瀛湯地區 세 구역으로 나누어지고, B區는 통털어 時尙動感區라 하는데 여기에는 人造海嘯池, 休閑大池, 水晶宮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B區의 최고 VIP호텔은 아니지만 준 VIP호텔이라 할 수 있는 水晶宮에 짐을 풀었다. 水晶宮은 水晶宮답게 거의 투명유리로 되어 있고 둥근 모양새에 그리 크지 않고 아담했다. 각 객실의 표시도 멋대가리 없는 아라비아수자가 아니고 海倫溫情이요, 貴妃出浴요, 芙蓉出水요 하는 시적이고 낭만적인 雅名이 붙어있다. 이런 雅名 뒤에는 괄호 열고 닫은 속에 해당 영어로 표기를 해 놓았다. 나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 미녀 海倫의 따뜻한 정이 흘러넘친다는 海倫溫情, 영어로는 HelenWarmth라는 객실에 들었다. 내가 든 객실에는 타원형의 온천욕장이 별도로 갖추어져 있는데 버튼 하나만 누르면 욕장 주변의 벽면으로부터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거침없이 뿜겨져 나와 마사지작용을 한다. 나는 이 욕장에 들어가는 순간에 海倫의 溫情에 녹아나고 말았다.   사실 나는 海倫溫情이요 뭐요 하는데 그리 흥취가 없었다. 醉翁之意不在酒. 나는 사천외국어대학의 강걸 교수로부터 統景泉世界의 온천에 대해 소개받으면서 바로 溫泉魚療에 구미가 버쩍 동했던 것이다. 나의 마음은 언녕 溫泉魚療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착하는 길로 溫泉魚療로 달려갔다. 溫泉魚療는 A區의 古羅馬浴場區에 있었다. 내가 든 水晶宮하고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데 열차바구니 같은 깜찍한 셔틀차가 손님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남자들은 사각수영팬티 하나, 여자들은 비키니 하나 달랑 입은 위에 나처럼 단독 VIP나 준 VIP 객실에 들은 '놈'들은 잠옷 같은 가운을 입고 그렇지 못한 '놈'들은 등허리를 덮을 수 있는 큰 목욕수건 하나를 걸치고 끌신을 딸딸이며 셔틀차를 탄다. 셔틀차는 곧 바로 溫泉魚療가 있는 A區의 古羅馬浴場區 로마광장 동쪽 켠 가장자리에 가서 멈춘다.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주위에 원주형의 기둥이 죽죽 서 있는 로마식 원형분수광장을 가로질러 김이 하얗게 물물 피어오르는 溫泉魚療 욕장으로 향한다. 溫泉魚療 욕장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욕장 가장자리로 머리만 내놓고 느긋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물은 수정처럼 맑아 욕장바닥까지 들여다보였다. 물속에는 거무스레한 물고기들이 떼 지어 다니며 여유작작하게 놀고 있었다. 희한한 것은 많은 고기떼들이 욕장의 물속에 잠겨있는 매 사람들을 감싸고 맴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눈을 지긋이 감고 이 세상 여기가 바로 극락인 듯 흡족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물론 언제나 못 말리는 어린애들과 젊은 처녀들은 희희작작이며 떠들어대기도 했다. 나는 한시바삐 욕장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잠옷가운을 물품보관 카운터에 맡기고 욕장으로 종종 걸음을 쳤다. 그런데 욕장에는 조용히 들어가는 것이 예의다. 요란스럽게 뛰어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의 魚療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두발을 천천히 따뜻한 물에 담그는 순서로 시작하여 온 몸을 물속에 가라앉히고 머리만 내놓고 욕장에 들어앉았다. 들어앉는 순간 미묘한 느낌에 그만 나도 모르게 아, 좋아 하며 눈을 지긋이 감게 되었다. 물고기들이 삽시에 나의 몸을 둘러싸고 프로포즈의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물고기들은 토이기에서 수입하여 들여온 중국말로 坎貝爾이라는 온천수물고기인데 섭씨 43도의 온수에서도 거뿐히 잘 산단다. 坎貝爾는 사람이 온천수에 들어오면 삽시에 온 몸 주위를 감싼다. 전문 사람 피부에 생성되는 노화된 각질이나 죽은 각질을 먹으며 현미경하에서 볼 수 있는 세균들을 먹는다. 그래서 일종 인체 물고기청소기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참 희한하다. 그리고 온천수에 들어가 확장된 사람의 땀구멍을 입으로 뚫어주어 몸속의 노폐물이나 독소를 배출시키고 온천수속의 여러 광물질을 잘 흡수할 수 있게 해줌으로 신진대사를 촉진한단다. 그러니 강걸 교수의 말대로 美容养颜,延年益寿가 제격인 셈이다. 그래서 젊은 처녀로부터 연세가 지긋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다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坎貝爾이 사람 몸 위의 더러운 물건들을 냠냠 맛있게 먹을 때 사람들로 하여금 그 어떤 아픔이나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 황홀감에 잠기게도 한다. 내가 느낀 바로는 첫 사랑 첫 키스의 짜릿짜릿하면서도 묘한 쾌감 그 자체였다.  이런 坎貝爾들은 魚療라 할 만큼 치료효과도 가져온단다. 무좀, 피부병, 상처자리 등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도 한단다. 긴가민가 나는 魚療를 한 나의 발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좀 때문에 항상 지저분하던 나의 발이 어느새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참 희한하다면서 나는 나의 턱을 기준으로 한 얼굴가장 자리를 물밑에 담그어 보았다. 坎貝爾떼들이 욱 몰려왔다. 나의 여드름 자국에 흥취를 느끼는 것 같다. 坎貝爾떼들이 입으로 열심히 물질러주는 덕택에 투덜투덜한 여드름 자국이 매끌매끌해진 것 같다. 기분 좋아 내친 김에 나는 아예 온 얼굴을 물속에 담그어 보았다. 와~ 坎貝爾떼들이 기분 좋게 달려들었다. 여드름 흔적 투성이의 얼굴에 감질맛이 났다. 좋았다. 그런데 숨이 막힌다. 할 수 없이 물 위로 솟아올랐다. 얼굴을 훔쳐보았다. 매끌매끌했다. 기분이 좋았다. 다시 물속에 잠복하기. 그리고 오래 동안 뻗치기. 그런데 결국 숨이 막혀 아쉬움을 떨어버리며 다시 물 위로 나오기. 그리고는 다시 잠복하기... 나는 나의 거시기고 뭐고 모두 魚療를 시켜보고 픈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암거시기'를 의식하는 나의 이성은 살아있어 언감생심 행동으로는 촌보도 나아가지 못하고 마음뿐인걸. 나는 참 세상에 이런 희한한 자연요법이 어디 있나 생각하며 統景泉世界에 있는 동안 몇 번이고 溫泉魚療욕장으로 달려갔다.          坎貝爾들은 참 묘하다. 사람 몸에서도 발쪽으로 가장 많이 모여든다. 발에 워낙 노화된 각질이나 죽은 각질, 그리고 세균 같은 더러운 것들이 제일 많지 않은가? 坎貝爾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서글픈 점을 발견했다. 원래 제일 깨끗하다는 사람의 몸 둥아리가 그렇게 더러울 수 없다는 것. 정말 우리 몸이 그렇게 깨끗하다면 왜 坎貝爾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겠는가 말이다. 坎貝爾들은 물살을 일구며 쫓아도 달아나는가 싶더니 다시 되돌아온다. 나는 내 옆의 하얀 피부의 백설공주 같은 미모의 사천처녀를 먼 산을 보는 척 하며 몰래 훔쳐보았다. 정말 한 입에 삼켜도 비린내 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처녀의 몸 주위에도 온통 거무스레한 물고기 천지다. 순간 나는 매스꺼워났다. 언제나 씻고 바르고 야단법석을 떠는 처녀들도 저렇게 더러울세라구야. 나는 인간의 이른바 깨끗함에 대해 회의를 느껴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坎貝爾들이 얼마나 고상하고 대견해보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기 가운데 물고기를 제일 먹기 좋아하지만 坎貝爾에 대해서만은 입술에 와 매달리며 간지렵혀서도 추호의 먹을 염이 나지 않았다. 별 볼일 없는 풀을 먹고 값진 우유를 짜낸다는 소에 대한 노신의 유명한 명구가 생각났다. 坎貝爾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몸에서 불필요한 노폐물이나 더러운 것을 먹고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친구가 여러 종류의 관상용 물고기를 키우는 큰 어항 안에 전문 다른 물고기들의 배설물이나 어항에 끼는 때를 먹고 산다는 물고기를 가리켜 주기에 참 고상하다 했는데 사람의 노폐물을 먹어치우며 사람의 몸 둥아리를 깨끗하게 해주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황홀감에 가까운 쾌감까지 주는 坎貝爾이야 말로 진실로 고상해보였다. 다음 순간 나는 한국 제주도의 똥돼지가 생각났다. 사람이 위에서 내리갈기는 똥을 주어먹고 무럭무럭 잘 자라난다는 돼지. 이 똥돼지는 고기 맛도 좋아 서울 같은 도회지에서 아주 비싼 값에 팔린단다. 언젠가 한국에 갔다가 이 똥돼지 삼겹살을 먹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똥돼지니 뭔지 해서 좀 꺼림직했는데 한입 먹는 순간 너무 고소하여 그만 혼자 독차지하고 못 먹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똥돼지 얘기가 나오니 우리 똥개가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의 뒷 배설물을 먹고 열심히 살아간다는 똥개, 그 고기 또한 얼마나 맛있냐! 다음 순간 나는 또 악어새와 악어가 떠올려졌다. 산 동물들을 잡아 날 것으로 먹는 악어의 입에는 항상 찌꺼기가 남아있든가 가시가 끼이든지 한단다. 그래서 자기 재간으로는 어쩔 수 없는 악어가 물 위로 솟아나거나 뭍에 나와 입을 쩍 벌리고 있으면 작은 새들이 억어의 입안으로 들어가 그런 찌꺼기를 먹어치우거나 가시까지도 처치해준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가장 무정하고 악한 동물의 하나가 악어라고 하지만 악어는 자기에게 이로움을 주는 그 작은 새의 고마움을 안다. 그래서 악어는 그 작은 새를 잡아먹지 않는다. 눈을 지긋이 감고 그 작은 새의 고마움에 감사하기도 하는 듯하다. 이로부터 악어새와 악어의 공생공존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세상은 사실 이렇게 공생공존의 상생관계에 놓여있다. 사람이 눈 똥을 돼지가 먹고 사람은 그 돼지를 먹고 다시 똥을 누고 돼지는 다시 그 똥을 먹고... 그래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 天人合一이 아니겠는가?   統景泉世界의 溫泉魚療, 돈 안 받고 이 만한 광고 해주었으면 중경직할시시장이 영예시민증서를 수여하든지 統景泉世界의 회장이 감사패라도 주어야 할지고.   나는 우리 연변의 온천을 떠올려 보았다. 단연 백두산 온천이 떠오른다. 우리도 여기에 溫泉魚療 같은 거 할 수 없는지? 사실 溫泉魚療, 별거 아니고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니 말이다. 坎貝爾 같은 물고기를 확보하면 되니 말이다. 없으면 수입이라도 하지. 坎貝爾은 똑 마치 우리 연변의 붕어 같게 생겼다. 작은 것은 3cm 내외이고 큰 것이라야 아이들 손바닥 길이를 넘지 않는다. 붕어가 좀 흰 파란 색을 띠었다면 坎貝爾은 거무스름한 색을 띠었을 뿐이다. 坎貝爾은 우리 백두산 온천에서도 잘 살 것 같다. 우리 백두산온천도 統景泉世界의 온천처럼 유황성분이 많으니 말이다.   그럼 우리 연변에서 溫泉魚療 한번 기대해보세!  
76    진짜 사나이는 한국사나이 (우상렬78) 댓글:  조회:4717  추천:115  2007-04-11
진짜 사나이는 한국 사나이우상렬내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공부할 때 가장 존경하는 한국교수 한분이 있었다. 그래도 이 교수가 쩍 하면 명절이요, 뭐요 하며 술을 잘 사주었다. 이 교수를 우습게 보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나는 여하튼 좋았다. 이 교수는 확실히 좀 웃기는 데는 있기는 하다. 우선 관상 자체가 얼굴이 좁고 하가 빠진 것이 원숭이상에 가깝다. 여기에 술을 자주 마셔서 그런지 눈은 항상 풀린 상태에 게스츠름하게 뜨고 다닌다. 게다가 입가장 자리는 침을 자주 흘려서 그런지 금방 잠에서 깬 사람처럼 좀 디디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교수가 연구원에서 한문뿐만 아니라 현대중국어에도 통달하여 중국전문가로 활약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워낙 대만유학생으로서 박사학위 취득까지 대만에서 장장 12년을 보냈단다. 그런데 이 교수님이 미모의 漢族사모님을 데리고 산다는데 놀랐다. 그리고 그 사모님이 부자집 아가씨였다는 데는 더욱 놀랐다. 그래서 긴가민가 하다가 한번은 교수님댁에서 사모님이 해준 중국요리를 먹게 되면서 확연한 사실로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좀 초라해보이는 우리 교수님이 어찌 이렇게 멋진 사모님을 얻을 수 있었지 하는 궁금증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궁금증은 사실 너무나 쉽게 풀렸다. 좀 맹랑했다. 워낙 우리 교수님은 술 한잔 들어가면 자기의 이왕지사, 특히 연애사를 녹음테프 풀어놓듯이 잘도 얘기한다. 대만유학할 때 말이 잘 통하지 않지, 특히 학비 때문에 너무 어려웠단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구두닦기란다. 다른 일은 할 자신이 없는데 구두닦기만은 잘 할 자신이 있었단다. 워낙 자기는 힘이 없어도 손재간만은 좋았단다. 그래서 열심히 구두닦기에 전념. 바쁜 와중이지만 한국노래 한 곡조 뽐으면서. 삐까삐까 구두를 너무 잘 닦으니 사람들 줄을 지어 발을 들이민단다. 그래서 한국노래는 저절로 흥얼흥얼. 신사숙녀들 많아 기분은 더 좋고. 그러다가 어느 하루 인연은 닿고. 다음 분... 하는 순간에 뾰족한 꽃구두에 연결된 미끈한 여인의 신다리가 눈앞으로 안겨오더란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미끈한 신다리를 더듬어 위쪽의 존귀한 머리까지 쭉 훑어보았단다. 그런데 아차, 쌍겹진 커다란 눈에 늘씬한 전형적인 중국사람 팔등신 미인이 아닌가. 그래서 기분은 붕~ 떠서 죽을둥살둥 모르고 열심히 닦아주기. 그런데 더 재미나고 기분 좋은 것은 이 늘씬한 팔등신 미인이 오며가며 그 뾰족 꽃구두를 자주 들이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두닦기는 꼭 그녀만을 기다리고 위한 데이트가 된 듯한 기분. 그러던차 어느 하루 조용히 데이트 신청을 했단다. 아가씨, 오늘 저녁 나하고 식사나 하지요. 어, 좀 놀라는 듯하는 아가씨. 그러면서도 반가워하는 기색. 어디서요? 저, 고급 한식점 있잖아요, 저녁 6시에 만나요. 좋아요. 기껏 폼을 잡는다고 대만에서 일류로 꼽히는 고급한식점을 잡아놓고는 속은 얼고. 그러나 꼬깃꼬깃 구두닦기 돈을 챙겨 저녁 6시에 어김없이 달려가기. 와, 반가워라, 그녀는 어느새 와서 기다리고. 날 것만 같은 기분. 그 다음 정열의 와인 마시기. 왜 나를 초대하지요? 멋지니깐, 아니 사랑하니깐. 아니, 이렇게 쉽게 사랑해도 되는가요? 사랑에 무슨 쉽고 어렵고가 있어요. 사랑하면 다지. 나는 사랑 안 하는데. 물론 그러겠지, 그렇지만 이제 사랑하게 될거요... 당돌한 진공에 그녀는 좀 당황해나는 듯. 그러나 기분은 좋은 듯. 그래서 데이트는 계속 이어지고. 그러다가 어느 하루 그녀가 시물거리면서 물었단다. 구두닦이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 나를 자꾸 이렇게 고급스러운 데로 끌고 다니지? 사랑을 위하...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거요. 그리고는 빨칵빨칵. 그래서 결국 사랑은 이루어지고, 학비까지 그녀가 챙겨주더라는 것이다. 긴가민가, 거짓부리 하면서 은근히 사모님한테 알아보기. 그러자 사모님 말쌈이 한국총각 구두닦이 열심이에 감복했고 그 대범하고 씩씩함에 반했다더라. 그리고는 자기는 우리 대만남자들이 싸구려만 찾아다니는 쫀쫀이들인가 하면, 일본 남자들이 와리깡만 하는데 진절 머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던차 바로 한국남자들의 사나이 같은 호쾌함에 깜박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것이 허영이고 실속이 없지 않는가고 하자, 그런 허영쯤은 부려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도 자기 남편이 돈 없어 기 죽지 않는 그 모습이 너무 멋지다는 것이다. 자기 남편 항상 하는 말이 자네는 부자집 딸이지만 나는 선비집안의 자식이다 말이요, 선비는 돈이 좀 없어서 그렇지 똑똑하다 말이요... 그러니 부자집에서 선비사위를 맞느라 돈을 좀 쓰는 것도 무방하지. 이렇게 주눅 좋게 능청을 떠는 자기 남편을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일곱살에 할아버지한테서 한문을 배웠소 엇쩠소 하는 교수님보다 우리 사모님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인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수입만 놓고 보아도 마음 좋은 교수님은 한달 월급 인심 쓰기에 바쁘지만 우리 사모님은 중국어, 일본어 강의로 한 몫 톡톡히 잡는다. 그러니 가장 살림은 전격 사모님 덕. 교수님은 차운전도 몰라 항상 사모님 신세지기. 내가 연구원에 금방 유학 갔을 때 대만 유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참 재미나는 것은 한국 남학생들과 대만 여자 유학생들 사이 연애가 잘 되고 결국 결혼까지 골인한다는 것이다. 역시 대만 여자 유학생들 얘기가 한국 남자들 쫀쫀하지 않고 여자를 위해 돈을 잘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 같은 맛에 그만 뿅 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 남자는 돈 잘 써는 거 장땅? 그때 대만 GNP는 언녕 2만불이고 한국은 1만불에 가 닿겠다고 안간힘을 쓸 때다. 그러니 돈은 대만 사람들이 잘 써야 하거늘. 그런데 한국 남학생들은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대만 여자 유학생은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씀씀이는 뒤집어져 있었다. 사랑은 이렇게 역설적인 것.나는 한국 남자들 그렇게 호쾌한 줄 모르겠다. 특히 나한테 있어서. 남자 대 남자라서 그렇겠지. 나는 이렇게 웃고 넘긴다. 맞다. 바로 남자 대 남자, 아니 남자 대 여자에 있어서 한국남자들은 정말 사나이가 된다. 멋지다. 사랑은 돈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주고받으면 더러워지고 구린내가 나고 결국은 파탄이다. 그러나 이 돈이 남자의 보호본능을 나타내고 여자의 안온감을 가져올 때 사랑의 접착제가 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근사한 식당에 들어갔다고 하자. 맛 있는 음식을 재미나게 먹었다. 그런데 결산을 할 때 남자가 AA制니 와리깡하자고 해봐라, 여자들 얼마나 기분 나쁘겠나. 먹었던 음식 도로 올라오겠다. 남자는 여자에게 베푸는 동물. 베풀면서 보호본능을 과시하고 남자임을 느끼게 된다. 괴짜 여자 패미니즘들 싫어할 소리 스톱.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탕탕탕 오토바이 뒤에 태워서 출근시키는 남자보다 근사한 승용차 뒤 자리에 태워서 출근시키는 남자가 멋 있다. 한국 남자들 이렇던가... 여자들 기분 좋쟈?    
75    누나콤플렉스 댓글:  조회:4884  추천:68  2006-11-29
누나콤플렉스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보니 나에게는 누나가 없다. 형보다 더 좋은 누나가 없다. 남이 다 있는 것 같은 누나가 없다. 마음이 허전해났다. 그래서 나는 엄마, 아버지보고 누나를 하나 만들어내라고 떼질도 써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马后炮, 행차 뒤에 나발불기. 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누나 없는 허전한 내 마음! 나는 누나콤플렉스에 쌓였다. 앉으나 서나 누나생각. 소학교에 다닐 때 나는 내 위의 형의 손길에 끌려 학교에 다녔다. 그때 다짜고짜로 나를 끌고만 다니는 것 같은 형이 미웠다. 다른 애들은 누나들이 살뜰히 손잡고 다니거나 업어주기도 하면서 다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쩍 하면 형이 여자라도 되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때로는 형이 누나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정말 ‘형의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누나보다는 못한 사랑이여라!’, 그런거였다. 형이 유하게 부드럽게 나를 대해줄라치면 나는 그만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그때면 형은 영문을 몰라 거저 바보 같은 놈 하고 만다. 나는 소학교 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초중 때까지만 해도 싸움질을 잘 했다. 특히 내 앞에서 이것은 우리 누나가 사준거야, 이것은 우리 누나가 뜨준거야 하고 자랑을 하는 놈하고는 괜히 기분을 잡치며 트 잡이를 했다. 그 누나라는 말이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부족한 때라 우리가 끼는 장갑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입는 세타며 두르는 목도리며 귀에 거는 귀걸이에 이르기까지 토실로 많이 뜬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우리 엄마도 이런 것을 우리에게 뜨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우리 엄마의 지극정성이 슴배인 이런 것들을 끼고 입고 두르고 걸고 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자꾸 나는 마음이 허전해났다. 남들이, 그 누나가 뜨 주었다는 것들이 부러워났다. 부러워나다 못해 시샘이 났다. 그래서 나는 주먹질에 발길을 날리군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심술쟁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누나 없는 나의 무의식적인 누나콤플렉스의 병적인 발산이니 나도 가련할씨구!나에게는 이 누나콤플렉스가 유난히 강했던 것 같다. 지금 나의 아내는 사실 누나 같은 존재다. 나이도 나보다 한 둬살 위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녀가 말 없이 묵묵히 누나처럼 나를 잘 챙겨주었기 때문이다. 거저 누나 같은 편안함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도 나를 남동생처럼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누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하며 피씩 웃었다. 그래서 나는 누나이기 때문에 더 사랑한다고 하며 지궂게 달라붙었다. 참, 그때까지만 해도 연상의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들 눈에 좀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물불을 가릴 계제가 못 되었다. 누나이기 때문에 더 사랑하고 싶은 욕망은 나를 미치게 하였다. 그래서 무조건 진공-결국 나는 그녀의 사랑을 얻어내고 말았다. 나의 사랑은 무의식적인 누나콤플렉스의 순수함에 많이 놀아난 셈이다. 그러니 나의 사랑은 현상적으로는 어쩔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요새 연상의 여인한테 장가들어 편안하게 살아가려는 얄팍한 존재의 남자기생들하고나 姐姐、姐姐,解决问题하는 그런 찰나적인 만족만 추구하는 동물성적인 남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 점 명기해주시기를!2006-11-29
74    성적콤플렉스 댓글:  조회:4544  추천:84  2006-11-28
성적콤플렉스동물은 참 좋겠다. 성적콤플렉스가 없어서. 나는 늘 이렇게 생각을 굴리본다. 인간은 게임의 존재다. 1등, 2등, 3등… 무엇이나 1등이 좋단다. 모듬 매도 먼저 맞아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1등, 2등, 3등… 우리를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 성적콤플렉스까지 쌓이게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1등, 2등, 3등…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분명 행복하러 왔건만.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에게1등, 2등, 3등…을 강요한다. 이래야 세상이 발전한다나. 세상은 발전하겠지만 ‘나’는 초라하게만 되는 이 인생의 아이러니, 역설 속에 우리는 산다.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학교계통에서 교편을 잡아왔다. 처음에는 중학교에서 고중생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대학입학을 위해 너도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아니, 열심히 공부라기보다는 너도나도 1등, 1등하기에 제 정신들이 아니었다. 학교서 강의 듣고 학교 밖에서 과외보도 받고 집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들, 피기없이 창백하게 말라만 간다. 아무 근심걱정 없이 뛰어다니며 놀 애들이 老态龙钟의 겉늙은이가 된다. 오직 1등을 해야만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간다는 착각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아이들, 그래서2등을 하고도 맥삭해하는 아이들, 전형적인 성적콤플렉스의 노예들. 보기에 참 안스러웠다. 입시지옥 바로 그 자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노신선생의 ‘아이들을 구하라!’를 외쳐본다.그 다음 나는 줄곧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쳐왔다. 대학교도 성적콤플렉스가 팽배하기는 마찬가지. 1등 장학금, 2등 장학금, 3등 장학금…에 자유로울 학생이 없다. 너도나도 1등 장학금. 기말시험 끝나고 갸날프게 생긴 학생 하나가 울먹울먹이며 찾아온다. 교수님, 이번 시험 저 꼭 90점 이상 맞아야되요. 그래야 1등 장학금을 타요. 1등 장학금을 못 타면 저 죽을 것 같아요. 뭐, 나는 겁이 더럭 났다. 안 그래도 이전에 시험성적 때문에 학생이 자살하고 어쩌고 하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그 애의 시험지를 찾아 눈을 찔 감고 90점을 주고 말았다. 시험이고 뭐고 사람 살리는 일이 더 급하지 않은가. 사람이 있고 시험이 있었지, 시험이 있고 사람이 있었냐. 나는 그 학생의 성적콤플렉스에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실 요새 대학생 애들 불쌍도 해 나다. 학교에서 규정한 과목시험성적 외에 무슨 자격증, 자격증하는 시험들이 줄을 서 있으니깐. 그러니 성적콤플렉스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다. 불쌍할시구!나는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일이 생각키운다. 1980년대 초반, 대학에 금방 입학했을 때 우리는 장학금이라는 것을 모르고 다 같게 조학금이라는 것을 받았다. 모두들 마음이 천하태평이다. 공부에 그리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성적콤플렉스라는 것도 운운할 여지가 못되는 것 같다. 그런데 한 3학년 쯤 되었을까 했을 때 장학금이라는 괴물이 나타나며 우리를 확 성적콤플렉스의 1급 태풍에 휘말려들게 했다. 공부를 잘 해야, 성적이 높아야 돈을 많이 탄단다. 그러니 너도나도 최고성적, 1등장학금에 혈안이 되어 돌아친다. 모두들 마음 편한 날이 없는 듯 하다. 모두들 시험성적이 높다. 나는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 편한 쪽을 택하도록 했다. 90점이 아니라 60점 만세로 거저 고만고만 공부해서 퇴학 맞지 말고 졸업이나 하면 장땅이다. 그 무슨 애글타글이냐. 나는 배포유해졌다. 아니 배포유해지려 했다. 성적콤플렉스에 쌓여 애글타글하는 우리 반 애들이 불쌍해났다. 그런데 50보에 100보 존재로 나도 힘들었다. 딱 60점만 맞을려고 하는데 그것이 잘 되어 주지 않았다. 자꾸 점수가 오바된다. 61점, 62점, 63점… 1점, 2점, 3점… 오바되는 점수가 아까왔다. 괜히 낭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오바되는 점수들을 사랑하는 그녀들에게라도 주고 싶었다. 사실 나한테는 이 오바되는 점수가 별로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나의 후반기 대학생활은 이 오바되는 점수를 줄이고 60점으로 근접해가는 모지름이었다. 사실 이런 성적콤플렉스는 학생들만의 얘기가 아니고 등차를 매기는 어른들의 게임 같은 데서도 쉽게 생겨난다. 월드컵에서 꼭 몇강 진출, 몇강 진출해야 한다고 하는 강박관념, 그리고 올림픽에서 금메달, 금메달하는 ‘주술’, 바로 그것이다. 나는 어느 나라든지 월드컵에 진출한 것만해도 대단하게 본다. 그리고 그 누구든지 올림픽에서 겨루어본 것만해도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금메달을 못 따고 동메달을 땃다고 우는 선수들이나 아쉬워하는 관객들을 참 이해할 수 없어한다. 동메달이면 어떠냐? 세계 60여억 인구에 3등이 아니냐? 정말 이것 또한 대단한 것이다. 내내 1등, 1등하며 성적콤플렉스에 쌓여있을 때 언제 이 대단한 3등을 즐기지? 그래 정말 성적콤플렉스는 우리 인생의 하나의 큰 함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 큰 함정에서 벗어날 知足者常乐을 떠올려본다. 자꾸 좌우 옆으로 보면서 1등, 1등 하는 정신적 탕개를 너무 조이지 말고 꼴찌해도 내 마음만 편하면 되지 하는 느슨함에 인생을 즐기며 내실을 기하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은가? 그래 이것이 정녕 사람같은 삶이 아닌가? 2006. 11.27
73    學而優則仕 댓글:  조회:4132  추천:53  2006-11-24
學而優則仕學而優則仕이라 우리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공부를 잘 하면 출세한다는 법. 그래서 남자들 기를 쓰고 學而優則仕하기. 일자무식인 우리 아버지도 學而優則仕하기.우리 아버지는 우리 큰 형님을 대단하게 여겼다. 우리 큰 형님이 워낙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다. 우리 큰 형님의 명언 한마디 들어보시라. 공부, 그 잘난 거 호박에 대침놓기. 공부가 그렇게 쉽다는 것이다. 우리 큰 형님은 그 대학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는 1960년대 초반에 대학에를 척 붙었다. 學而優則仕할 가망이 보였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우리 이 큰 형님이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실망시키다니 참. 1960년대 초반의 조선바람에 다니던 대학 중도이폐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격으로 제 친구들 몇이하고 덜컹 조선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잠간 다녀온다고 갔건만 영영 못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의 學而優則仕의 꿈은 산산쪼각이 나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 口頭闡 하나 생겼지-상철이 그 자식 있으면 크게 출세하겠는데~ 참! 우리 아버지의 이 口頭闡은 우리 둘째 형, 셋째 형, 넷째 형, 다섯째 형 줄줄이 대학에 못 붙으니깐 푸푸 내쉬는 한숨과 더불어 더 잦아졌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에 붙으니 이 口頭闡은 사라졌다.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효자노릇 한 거 별로 없어도 대학 하나 붙어준거만은 대단한 효자노릇을 한 것이다. 내가 대학에 붙었다는 순간 아버지는 밝은 표정에 이마의 주름살을 쫙 펴며 없는 수염이나마 쓰다듬는 손놀림을 하며 으흠, 그럼 그렇겠지! 하고 하하하~ 호쾌한 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동네방네에 광고~ 우리 아들 대학에 붙었네, 우리 아들 대학에 붙었네… 그리고는 술상 벌리고 동네사람 불러들이기. 얼씨구 지화자 좋다 연일. 아버지는 내가 공부 안 한다고 그렇게 눈을 부라리더니 이젠 나를 제일 고와한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 모아놓고 하는 말이, 이 자식들아, 그래도 우리 집에 출세한 놈은 상렬이뿐이다. 너네 돈 많이 벌어 상렬이한테 많이 보내거라. 그래야 공부를 잘 하지. 누구의 지엄한 명이라고 우리 형제들은 대학기간에 나한테 경쟁적으로 돈을 부쳐왔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버지덕택에 대학기간에 돈을 여유롭게 주물럴 수 있었다.그런데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 아버지한테 그렇게 실망을 안겨 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집 쪽의 중학교 교원으로 배치 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이것이 못 마땅했다. 짜식, 4년 대학 공부했다는 꼬라지가 고작 그 꼬라지냐 하는 시답지 않은 표정. 우리 아버지 마음속에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금의환향’을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옆에 비서들이 따라 붙고 기사들이 삐까삐까 승용차로 모시는 적어도 ××시 인민정부의 주임이나 장쯤이나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시세말로 문중을 빛내고 조상을 영예롭게 하는 光宗曜祖할 것을 바랐다. 그런데 내 꼬라지가 개도 안 먹는 똥을 싸는 훈장노릇을 한다니 허구픈 마음에 멍 하니 앉아 할 말을 잊은 그 모습만 보이셨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인민교사요, 인류영혼의 기사니 하는 신성한 말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워낙 선생노릇을 좀 우습게 보았다. 우리 삼촌 둘 가운데 큰 삼촌은 중학교에 작은 삼촌은 소학교에 교원노릇을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농사짓는 자기보다 늘 못하게 보았다. 훈장 노릇한다는 양반들이 자기보다 못 산다는 것이다. 내 어릴 때 기억에도 우리 교원노릇을 하는 두 삼촌은 쩍 하면 우리 집에서 쌀을 가져가든가 무엇을 잘 가져갔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이제 한다는 얘기가-야, 저 봐라, 저 누구 집 자식은 대학 졸업하고 무슨 주임을 한다든데, 저 누구 집 자식은 대학 졸업하고 무슨 국장을 한다든데, 저 누구 집 자식은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막 번다든데... 그래서 나의 연구생공부도 시작. 아버지 내 연구생에 붙었어요. 무어, 연구생? 얘, 이제 연구생 졸업하는 날엔 한 자리 크게 합니다. 어 진짜냐? 그래 해봐라. 그런데 3년 연구생공부도 우리 아버지에게는 나무아무타불. 내가 대학교에 훈장으로 남았으니 말이다. 나는 또 우리 아버지를 속인 셈이다. 연구생 졸업하고도 아무런 주임이나 장자 자리 하나 못 얻어했으니깐. 그래서 나는 아버지 보십시오, 대학 선생은 중학교 선생하고 다름니다, 돈을 많이 법니다하고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허리띠 졸라맨 덕택에 장만한 얼마간의 돈을 우리 아버지에게 안겨주었다. 돈으로 떼워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니 그 꼬락서니 다 알고 있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표정에서 헤이, 그래도 한 자리 해야지 하는 아버지의 비탄에 가까운 애원을 읽었다. 그래서 나는 효자노릇 하느라고 마음에 없는 무슨 주임이요, 주석이요 하는 나부랭이가 붙은 것들이 차례지면 아니 아니 하면서도 말없이 받아 물었다. 그리고는 꼭꼭 아버지한테 회보하기. 아버지, 내 무슨 주임, 주석입니다. 은근히 과대포장까지 하면서. 내가 우리 학과의 자습대학 주임자리를 맡아볼 때다. 정말 별 볼일 없는 자리다. 그러나 동료들이 우교장하기도 한다. 농담하느라고. 그래서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아버지 내 자습대학 교장입니다, 차도 타고 다닙니다고 회보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우리 아버지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구나. 그리고는 임마, 교장을 하자면 사람이 성실해야 되고 말을 적게 해야 되고 위엄이 있어야 되고... 어쩌구 하며 교장학을 한바탕 강의하시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말 우기는 일이었다.우리 아버지는 박사도 우습게 본다. 내가 어렵게 박사공부 할 기회를 얻어 한국에 간다고 야단법석을 떠니 한다는 말씀이 공부만 자꾸 해서 뭘 하냐, 그 잘난 박사 한 자리 하는 것만 못하니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또 포스터닥을 하러 떠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한테 말을 할까말까 고민이다. 말씀을 드려보았자 박사하러 떠날 때 하시던 말씀을 그대로 반복할 것 같다. 괜히 심기만 불편하게 할 것 같다. 금년 여든이 훨씬 넘은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나한테 學而優則仕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는 學而優則仕의 출세가도와는 인연이 없다. 내 체질학적으로도 學而優則仕와는 맞지 않다. 나는 교수본연의 평상심으로 애들이나 가르치고 아카데미적 정신유희를 즐기는 것이 낙이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 벼슬길과 학문의 길이 양자택일로 주어질 때 나는 서슴없이 후자의 길을 택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버지한테는 영원한 불효자식인지도 모르겠다. 2006. 11. 23
72    민주주의의 허허실실 댓글:  조회:4038  추천:64  2006-11-22
민주주의의 허허실실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시장화는 현 단계 전반 세계적인 추세다. 사실 민주, 자유, 평등은 중세 봉건주의에 대항하여 내건 근대의 기본 이념들이다. 민주, 독재에 대한 안티테제. 主權在民, 누구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며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민주다. 대통령도 민주 앞에서는 어쩌지 못한다. 민주 참 좋다. 민주는 그대로 자유로운 분위기고 평등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평등의 원칙, 그리고 기권, 나는 자유다. 그런데 모든 사물은 허와 실이 있는 법. 그래서 나는 민주의 허를 찔러본다. 민주의 기본원칙의 하나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다수가결의 원칙. 다수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이 민주다. 그런데 다수란 어떤 존재냐? 다수란 평균치다. 그리고 隨大流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많다. 그래서 이 평균치에서 벗어난 톡톡 튀는 생각을 가진 선구자나 개혁자는 소외된다. 선구자나 개혁자는 항상 외로운 법. 그리고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모난 돌이 징 맞거나 槍打出頭鳥하는 법. 그리고 신생산물은 그것이 미래발전추세를 대변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인 만큼 다수의 논리에서 배제된다. 여기서 다수의 맹목과 횡포를 보게 된다. 선거전에서 입후보자들이 다수를 쫓아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헤매는 꼴은 다른 또 한 보기.다수를 얻기 위해 민주주의는 말농창치기. 여차여차하게 자기 자랑 늘여놓기. 전부 毛遂自薦하는 자들, 겸양의 미덕은 싹 가셔지고 없다. 정말 철면피 그 자체다. 그리고 여차여차 다수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기. 자기가 당선만 되면 천지개벽을 할 듯이 떠벌인다. 쇼적인 과대포장이다. 여하튼 말 잘하고 보기. 주눅이 들거나 어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요새 세상은 전부 말 잘하는 똑똑한 사람 천지다. 그래서 애를 키워도 기 죽이지 않고 당당하고 말 잘하도록 키운다. 민주주의의 허허실실에 헷갈리기 쉬운 요즘 세상, 정신 바짝 차리고 살지어.2006. 11.20
71    문학민주주의 댓글:  조회:4229  추천:54  2006-11-22
문학민주주의요새 문학은 잘 나가는 편이다. 시장경제의 세례를 겪으면서도 문학인구는 더 많아진 것 같다. 워낙 문학은 자아표현, 자아발산의 인간내면의 깊숙한 요구와 매치되어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학은 선택된 일부분 사람들만 하는 줄로 알았다. 전직작가나 전문문학인들만 하는 줄로 알았다. 워낙 문학은 일반 사람들이 근접하기 힘들었다. 문학은 고상하고 신성한 것. 그래서 ‘인류영혼의 기사’들만 하기. 그리고 발표원지도 너무 좁았다. 그래서 어쩌다가 한편 발표하면 그것은 똑 마치 하늘에 별 딴 듯한 희열.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우리가 문학을 보는 시각교정이 많이 이루어졌다. 문학은 단지 교육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다. 문학은 숫처녀의 순정을 노래해도 좋고 장가 못 간 노총각의 고민을 읊어도 좋다. 그리고 발표원지도 더 없이 많아졌다. 인터넷문학은 문학발표의 가장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인터넷세상엔 나름대로의 문학이 흘러넘친다. 문학이 정말 별 볼일 없는 시시껄렁한 것이 되고 말았다. 전직작가도 별 볼일 없는 작가로 되고 말았다. 이전에는 문학을 배고프거나 고통스러워서 많이 한 것 같다. 중국 고대『詩經』시절의 飢者歌其食나 서양의 憤怒出詩人이 바로 그것이다. 처절함 그 자체다. 그래서 존재의 고민을 읊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문학을 배가 부르고 즐거워서 많이 하는 것 같다. 우리 연변의 ‘어머니수필회’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낳을 애를 다 낳고 볼 장 다 보았다. 별로 할 일이 없다. 심심하다. 그래서 문학을 한다 이런거. 그래서 그 문학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거저 시시껄렁한 신변잡사를 넉두리한 것 같다. 그래서 너도나도 수기 같은 수필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의 진실한 토로일 때 나는 체증을 떨어버린 즐거움을 얻는다. 아이 낳을 때 즐거움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리고 니 작품까지 발표했다고 옆에서 떠들어대니 명예욕도 충분히 만족 받는다. 여기에 금상첨화 격으로 수상까지 하는 날에는 정말 기분이 붕 뜬다. 이 세상 모두가 내 것. 여기서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즐거운 고민의 소산.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문학은 홀가분한 존재 그 자체.이것은 다른 한 의미에서의 문학의 백화제방이다. 이것을 문학의 민주주의라해도 무방하겠지. 2006. 11.20
70    사랑의 프로포즈 댓글:  조회:4222  추천:81  2006-11-22
사랑의 프로포즈나는 천 몇 백 년 전의 신라 때 성덕여왕을 짝사랑하는가봐. 자꾸 성덕여왕의 이름을 외운다. 성덕여왕은 참 멋진 데가 있다. 신라 때 지귀라는 별 볼일 없는 노총각, 언감생심 성덕여왕을 사랑했다. 아니 짝사랑했다. 그래서 자꾸 선덕여왕의 행차만 찾아다녔다는 지귀. 그러다가 어느 날 성덕여왕의 불국사행차에 좇아갔다가 만나지 못한 허탈감에 피로가 겹치며 자기도 모르게 절 밖에서 소르르 잠이 든다. 이것을 안 성덕여왕은 절에서 나오자 자기의 팔찌 하나를 끌러 지귀의 가슴 위에 놓아두고 간다~ 잠간, 나는 이 장면이 너무 멋있다. 선덕여왕이 멋있다. 장가 못 간 불행한 노총각 지귀에 대한 인간적 동정이고 배려를 하는 선덕여왕이 멋 있다. 지고무상한 일국의 왕이 별 볼일 없는 최하층의 인간에게 배푸는 동정과 배려임에라 그것은 더 없이 돋보인다. 이것이야 말로 보편적 인도주의의 한 보기다.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다. 우리 반에는 참 똑똑하고 꽃 같은 처녀들이 많았다. 나는 이 처녀들을 참 많이도 짝사랑했었다. 우리 반에는 나 말고도 나 같은 놈이 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속에는 괴짜가 있었다. 별명, ‘카시모도’. 허리 구부정하고 너무 못나 빅또르 · 유고의 장편소설『빠리노따르담사원』에 나오는 벙어리이고 곱새인 종치기 이름을 따서 불렀다. 그런데 바로 이 카시모도가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처녀동지인 ‘양귀비’에게 사랑의 프로포즈를 했다. 결과는 영낙없이 NO였다. 그래도 카시모도는 사랑의 미련을 못 버려 사랑의 연시를 써서 그녀에 대한 애모의 정을 토로했다. 이런 시들은 사랑의 명작으로 되어 당시 문학잡지에 발표되기도 했다. 그래도 성차지 않은지 카시모도는 그녀가 오가는 길목에 서서 ‘거저 보기만 해도 좋은’ 짝사랑을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처녀동지였다. 자기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추물 카시모도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고 이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카시모도에게 붙여준 별명은 ‘정신병자’였다. 그래서 카시모도는 결국 별명 하나를 더 얻게 되었다. 나는 항상 나를 못난이라고 생각한다. 용기없는 못난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교 때 연애 한번 변변히 못한 나다. 겨우 한다는 짝사랑은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고 끝없는 환상에만 빠졌다. 나는 늘 나는 적어도 지귀와 카시모도보다는 잘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이들보다 못난이다. 여왕이면 어떻고 양귀비면 어떻고 대담하게 사랑의 프로포즈로 나간 그들, 나보다 잘 났다. 사랑에 무슨 죄가 있으랴! 사랑은 워낙 짝사랑으로 시작되는 법이매랴. 나는 지금에야 사랑의 용기가 난다. 사랑하는 그녀가 대통령이라도 프로포즈를 할 용기가 난다. 나는 누구의 짝사랑도 받고 싶다. 이때까지 받은 적 없는 짝사랑을. 그럼 나는 그 짝사랑을 선덕여왕처럼 인간미가 넘치게 우아하게 맞이하리라. ‘양귀비’처럼 그렇게 매정하게 놀지는 않으리라!2006.11.20
69    마이카시대 댓글:  조회:4053  추천:91  2006-11-15
마이카시대우상렬요새 우리 대학가에도 심심찮게 자가용 승용차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내에 나가도 자가용들이 눈에 띄게 쌩쌩 내달린다. 분명 마이카(My Car)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자가용 승용차의 보편화, 자가용 승용차가 이제 다시는 권위의 상징이고 부의 상징으로 되지 못한다. ‘하야(승용차)’ 한번 타고 우쭐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래서 격세지감에 우리는 많이 행복해진 감이다. 그런데 행복해진 만큼 우리는 불행해졌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넓어보이던 길이 좁아진 감을 주고 쭉쭉 잘 뻗어나가던 길이 자꾸만 답답하게 막힌다. 10년을 내다보지 못한 행정당국의 한 치 보기 길 빼기에 마이카들이 기하급수로 불어나 앉은걸음을 할 수밖에 없는 답답함에 짜증만 난다. 교통지옥이라는 말이 실감날 때가 멀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 주차할 곳도 마갑지 않아 짜증은 풀라서다.그리고 우리는 분명 마이카시대에 걸맞지 않는 졸부, 촌놈행세도 한다. 쩍 하면 뛰뛰빵빵~ 조용히 길가는 우리를 놀래우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약과다. 주택구역에 들어와서도 뛰뛰빵빵~ 뛰뛰빵빵~을 마구 울려대면서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만만디 중국촌놈들이 언제 그렇게 급해들졌는지 거저 뛰뛰빵빵~으로 앞으로 밀고 나갈 판이다. 택시도 그 꼬라지니 뒤에 느긋이 앉아 있지를 못하겠다. 선진국에서는 파업할 때나 뛰뛰빵빵~ 요란스럽게 울려댄다는데 우리는 왜 이리들 뛰뛰빵빵~하는 거지. 정말 선진국에서는 난잡한 뛰뛰빵빵~을 도시소음으로 치부해 법적으로 규제하기도 한다. 어떤 선진국에서는 아예 뛰뛰빵빵~ 장치가 없는 차를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한단다. 여하튼 뛰뛰빵빵~이 없이 조용조용히들 살자는 것이다.사실 이 뛰뛰빵빵~보다 더 기가 찬 문제는 배기가스문제다. 니 배기량 얼마야, 나 1.8cc, 나 2.2cc… 졸부들 배기량 올리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차 잘 나가서 좋겠지. 그런데 그 배기량에 죽어나는 것은 배기량, 배기량 하는 니까지 포함한 우리 모두다. 기온이 올라가는 이상기온이 계속되다 못해 하늘의 오존층이 뻥 뚫렸단다. 그 주범의 하나는 차 배기. 가스연료가 보급화되면서 인제는 공기가 맑아지며 때벗이를 하는가 했더니 다시 침침해지고 烟集의 분지로 다시 남는 듯 하는 연길-그 주범은 바로 차들이 뒤꽁무니에서 시꺼멓게 내뿜는 배기가스. 연길의 4~50만 인구에 너도나도 차 할 때 연길 하늘의 오존층도 뻥 뚫릴 것이고 곳곳에 시커먼 매연이 감돌 것이다. 교통당국은 바로 이 배기가스를 잡아라. 배기량에 따른 과세, 대형배기량에 중과세, 절실히 필요하고 철저히 집행할지고.사실 이 배기가스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음주운전단속. 음주운전단속의 중요성은 세 살 난 어린이도 아는 법. 그래서 당국에서도 단속에 나서는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흐지부지하고 유야뮤야한 것 같다. 선진국에서처럼 음주운전을 살인행위 맞잡이로 보거나 일단 걸리면 엄하게 처리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현대적인 음주량측정기기도 동원되는 것 같지 않다. 거저 어림짐작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운전하는 친구들보면 음주운전개념 별로 있는 것 같지 않다. 내 옆에 자가용 끌고 다니는 잘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 술은 여전히 흔장만장. 언제 니 박고 내 박을지. 그래서 정말 길을 가기가 무섭다. 나는 내가 갈 인행도를 착실히 걸어가는 데 언제 차가 뒤에 와서 들이박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현실은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정말로 가공할시고.이젠 마이카시대니 일반승용차 정말 별 볼일 없는 존재. 그러니 졸부들 한사코 자기 주제 돌보지 않고 고급승용차 선호다. 여기에 외제 명브랜드가 날개 돋친다. 앞으로 이런 명브렌드도 별 볼일 없는 시대가 올지 모르겠다. 마이프레인(My Plane, 나의 비행기)시대가 올지 모르겠다. 마이프렌인시대는 막 날아다녀서 좋겠지만 적어도 떨어지면 박산나는 그 처절함을 감내해야 되니 역시 문제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 어쩌면 마이카시대보다 더 심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6. 11. 15
68    월드컵 증후군 댓글:  조회:4799  추천:68  2006-06-18
월드컵 증후군요새 세계는 월드컵 열기로 들떠 있다. 이것은 오늘만의 얘기가 아니고 인간이 4년 만에 한 번씩 발작하는 ‘지랄발광’. 그 ‘지랄발광’의 증후군→축구, 고구나 김춘추 얘기를 들먹이며 중국이나 한국의 애국주의자들이 자기 나라의 國粹로서 언녕 있었다하나 아무래도 ‘양놈’들 발명한 스포츠종목 같다. 밀치고 닥치고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기는 아무래도 서양 사람들 체격에 적합한 스포츠종목 같다. 키 작고 힘에 부치는 우리 동양종자들 헤딩 하나 하는데도 참 보기에 안쓰럽쟈? 강압적으로 남의 집 안방까지 밀고 들어가 꽝 터뜨리기는 19세기 서방의 제국주의열강들이 도처에서 식민지반식민지를 개척하는 꼬락서니와 너무 빼닮았다. 안 그래도 어떤 사회학자들이나 정신분석학자들은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총포가 보이지 않는 세계전쟁이라 한다. 인간은 워낙 서로 물어뜯고 죽이고 하는 악마적 본성이 있는데 현대는 대명천지라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경기를 통하여 그런 본성을 대리발산한다는 것이다. 특히 월드컵 같은 집단 대항성 시합종목이 이런 발산을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드컵 때 각 출전국 나라별로 응원팀이 쫙 나누어져 죽기내기로 응원하는 것은 일종 집단광기에 가까운 발산이라는 것이다. 이런 발산통로가 있을 때 인간은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세계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실로 월드컵은 큰 의미가 있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서양 사람의 특성과 룰에 맞도록 짜여진 월드컵에 우리 동양사람이 놀자고 하니 항상 지고 당하기만 하기. 그래서 대리발산이고 뭐고 쌓이기만 하는 동양의 콤플렉스. 꼭 마치 우리 동양미인이 서양미인을 기준으로 하여 뽑는 세계미인선발대회에 가서 못난 새끼오리 신세가 되는 형국. 그러다가 어쩌다가 월드컵에 진출하기만 해도 기적처럼 생각하는 동양의 못난 새끼오리들. 나는 우리 중국의 월드컵 콤플렉스에 자기도 모르게 허구픈 웃음이 나온다. 월드컵 콤플렉스에 기가 죽은 중국 남자들을 볼 때 더구나 허구픈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왜 꼭 차야만 하지? 서양에 코 꿰여 놀아나는 축구를 말이다. 안 차면 그만이지. 그래서 나는 참가는커녕 아예 월드컵이고 뭐고 모르고 지내는 동양의 많은 조용한 나라들을 멋지게 본다. 그들에게서 인간의 주체성을 보기도 한다. 그 잘 난 축구, 월드컵 무언데, 픽 웃으며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대범함, 여유로움을 보기도 한다. 축구, 월드컵, 기어이 해보자면 우리 동양식으로도 한번 해보자하는 그런 배짱이 멋지다.그래서 나는 월드컵을 우습게 본다. 월드컵 중계라도 못 보면 허탈감을 느끼는 그런 축구팬들을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본다. 그리고 이기고 지기에 따라서 울며불며 야단법석을 피우는 그런 축구팬들을 더구나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본다. 거대한 한 개 나라를 축구 잘 차고 못 차고 월드컵에 진출하고 못하고, 그리고 또 16강이요, 8강이요, 4강이요 하는 따위로 강대국이요, 약소국이요 뭐요 하는 판단의 허상에 빠지기도 하는 월드컵 콤플렉스자들. 그래 미국이 축구가 엉망이라 하여 누가 미국을 약소국으로 볼 수 있으며 중국이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다하여 누가 중국을 약소국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월드컵, 나는 전반 세계적인 변태를 본다. 참,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할 일 없다고 생각한다. 할 일 없이 덩덩해 있다가 많은 사람들, 축구, 월드컵이 무언지도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매스컴에서 월드컵, 월드컵 하니 덩달아 월드컵, 월드컵 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은 세상이 우리의 대중사회고 대중문화의 현 주소다. 내일 한국이 찬다. 프랑스하고 찬다. Korean피를 나눈 종자들이 많이들 들떠 있다. 언녕 한국이 꼭 이겨야 한다는 콤플렉스에 짙게 쌓여있다. 나도 Korean종자다. 그런데 나는 내일 축구경기를 안 본다. 워낙 나는 축구에 흥취 없다. 가령 흥취 있다하더라도 나에게는 보다 재미나고 중요한 할 일이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욕을 먹을 것이다. 니 Korean종자 맞니? 민족심도 없는 놈. 아이구, 그 잘 난 축구 가지고 거창한 민족심이니 애국심이니 하는 거 좀 거론하지 말기를! 월드컵 경기장에 國歌가 울려 퍼지니 애국심 운운하기 제격이겠지만. 나는 세상에 ‘니 중국하고 한국 차는데 어느 쪽 응원하지’하는 물음만큼 유치한 물음이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심, 애국심은 이런 흑백논리의 배타적인 천박함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이 심하게 발작할 때는 파쇼에 다름 아니다. 민족심, 애국심은 다른 민족사이, 다른 나라사이 평등하고 우호적이며 보듬는 관계를 전제로 하여 발산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인간세상의 正道로서 ‘友誼第一, 比赛第二’의 모주석의 교시도 떠올려 본다. 물론 오늘 이 세상에서 1등으로 달리던 사람이 2등으로 달리던 사람이 넘어졌을 때 돌아서서 부축하여 같이 라스트선으로 들어설 때 관중으로부터 기립박수는커녕 머저리 취급을 당하겠지만. 그리고 나는 정신병자 같은 생각을 굴려본다. 월드컵에 쏟아 붇는 돈으로 누가 빨리 이 세상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가하는 경기를 벌려보기를. 그러면 인간의 천사적인 면이 살아나면서 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월드컵, 정말 별 볼일 아니다. 사람들 제 할 일 있을 때 그렇게 발광하지 않는다. 정말 할 일 없고 사는 게 재미없으니깐 월드컵, 월드컵 하는 게다. 그럼 좋다. 월드컵을 보라. 실큰 보라. 그런데 보기 싫어하는 나를 끌어들이지 말고. 월드컵, 누구 이기든 지든 관계없이 편견 없는 平常心으로 장난삼아 볼 수 있을 때 정녕 인간의 대동세계는 온다.2006. 6. 18
67    ‘아, 살고 싶다’와 ‘아, 죽고 싶다’ 댓글:  조회:4447  추천:83  2006-06-16
‘아, 살고 싶다’와 ‘아, 죽고 싶다’이 세상에 새빨간 거짓말 세 개 있다면 처녀가 시집 안 가겠다는 것과 장사치가 돈 못 벌었다는 것, 그리고 할머니가 죽겠다는 것이다는 것이다. 늙었으면 죽는 법인데도 죽기 싫어하는 것, 인간의 생명의식의 고양이다. 남자사형수가 사형을 당할 때 자기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경우도 학계에 이미 보고된 상식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생명의식에 공감한다.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종교의 존재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식이다. 인간의 생명을 신선이나 부처나 천당으로까지 연장하니 말이다. ‘好死不如懶活’, 개, 돼지처럼 어떻게 해서나 사는 것이 장땅, 오래 살다보면 신선도 되고 부처도 되고 천당에도 갈 수 있다는 착각, 이것이 우리 인간의 진면모다. 우리는 평시에 죽음을 떠올리는 화장터나 시체조차도 기피해왔다. 그리고 저주하는 말 가운데 ‘가서 썩어져라!’, ‘뒈져라!’, ‘꺼져라!’ 등 죽으라는 말에 가장 큰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제일 죽기 싫어하는 존재로 인간을 꼽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끈질긴 생명의식 때문에 인간은 먹을 것, 못 먹을 것 다 주어먹고 잡아먹고 만들어 먹으면서 오늘 이때까지 지구에서 가장 큰 군단을 형성해 오며 만물에 군림해왔다. 그런데 바로 이 생명의식의 뒤안길을 뒤져보면 인간에게는 분명 죽음의식도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명의식이 인간의 드러난 의식(顯意識)의 세계라면 죽음의식은 인간의 잠재된 의식(潛意識)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평시에 ‘죽겠다’는 말을 참 많이 쓴다.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고와 죽겠다, 미워 죽겠다, 더워 죽겠다, 차거와 죽겠다, 바로 ‘죽겠다’는 말로 극한치를 나타낸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바로 인간이 자주 쓰는 관습어, 반복하여 쓰는 말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인간의 잠재의식을 들여다본다. 인간이 바로 ‘죽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입에 올리는 것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잠재되어 있던 죽음의식의 표출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본다. 생로병사, 자연의 섭리. 인간은 이 자연의 섭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늙어가다 보면 면역력이 떨어져 병들고 병들어 고생하다보면 죽고 싶은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살아가다보면 자기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 힘듬이 겹치고 겹칠 때 살기 싫은 죽음의 욕망도 생겨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에게 생소하지 않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자살이 이루어진다. 한국의 영화스타 이은주가 자살했을 때 당시 앙케이트 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잠재의식속의 죽음의식의 다른 한 표출에 다름 아니다.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바로 숙명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초탈의 경지에서 홀가분하게 받아들인다. ‘돌아가셨다’, 죽음을 우리가 원래 왔던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파악한다. 죽음을 초개같이 여긴다는 ‘視死如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종교에서 인간의 죽음을 위하여 마련한 신선세계, 열반세계, 천당 등도 결국 따져보면 죽음의 한 초탈경지를 마련하고 있다. 원래 없던 ‘나’라는 존재(無)가 생겨나(有)서 다시 원래 없던 ‘나’라는 존재로 돌아가(無)니 돌고 도는 자연의 순환이치에 귀의하는 天人合一의 경지가 따로 없다. 이로부터 우주자연과 더불은 생명의 영원한 존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無로 돌아가지만 그 대신 제2세, 제3세...의 ‘나’가 생겨나며 이 세상에 생명의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것을 볼 때 죽음은 웃으며 맞이할 수 있는 생명의 한 고리가 되겠다. 인생은 생명의식과 죽음의식의 교향곡이다. ‘아, 살고 싶다’와 ‘아, 죽고 싶다’의 교향곡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까지 ‘아, 살고 싶다’만 너무 의식하고 집착해온 것 같다. ‘아, 죽고 싶다’는 잊고 오다가 그것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는 당황해나기도 했다. 어쩌면 드러난 의식에서 고양된 ‘아, 살고 싶다’가 ‘아, 죽고 싶다’를 잠재의식 속에 밀박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보면 잠재의식 속에 억압된 인간의 욕망들을 승화시켜 표출시킬 때 인간은 건강한 심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우리는 인간의 죽음의식도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떠올려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 개인은 유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에서 자살을 절대적인 죄로 보는 관점과는 달리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 한 방식이라고 할 때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불교에서 대성한 스님이 자기의 죽을 시기를 알고 좌선한 자세로 열반에 드는 모습은 슬픔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거룩한 면이 있다. 불교의 한 교파인 라마교에서 죽은 시체를 칼탕쳐 영혼의 승화를 돕는 儀式도 무섭다기 보다는 인간의 죽음을 승화시키는 신성함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인간의 죽음을 슬픔보다는 천당으로 가는 축복된 것으로 찬송가를 불러주며 보내는 모습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죽음의식의 한 표출이다. 일부 나라들에서 불치의 병에 걸려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환자들에게 안락사가 허용되는 것도 인간의 죽음의식 및 죽을 권리에 대한 존중으로 볼 수 있다. 잠재의식속의 죽음의식을 드러난 의식세계로 떠올리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맞이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도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아름다운 한 모습이다.2006. 6. 11
66    朝流 댓글:  조회:4416  추천:62  2006-06-11
朝流요새 무슨무슨 流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을 지칭하는 언어관습인 것 같다. 한국 바람을 일구고 있는 귀에 익은 韓流가 그 단적인 보기가 되겠다. 그래서 나는 우리 중국의 개혁개방 전에 일었던 조선 바람을 떠올려 본다. 나는 이것을 朝流라 부르기로 했다. 朝流는 뭐니뭐니 해도 영화를 필두로 꼽아야 할 줄 안다. 당시「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조선영화들이 중국으로 대거 들어왔다. 그때 조선영화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당시 조선영화 외에 다른 사회주의나라들의 영화들도 많이 들어왔다. 월남영화「阿福」, 알바니아영화「용감한 사람」, 유고스라바아영화「와얼트가 사라르궈를 보위하다」,「다리」, 소련영화「1918년의 레닌」등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있다. 당시 이런 사회주의권 외국영화들 가운데 단연 조선영화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했다. 당시 우리 ‘안쪽’에서는 이런 외국영화들에 대해 별명을 달았는데 조선영화는 ‘又哭又笑’, 월남영화는 ‘飛機大炮’, 알바니아영화는 ‘勇敢的人’, 유고스라비아영화는 ‘와얼트’하는 식이었다. 우리 중국영화에 대해서도 별명을 달았는데 그것은 ‘新聞簡報’이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예술적으로 조선영화에 대해 가장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셈이다. ‘又哭又笑’니 보는 사람들의 눈물샘 웃음샘을 자극하여 희노애락의 감정을 잘도 유발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본령에 가닿았다는 말이 되겠다. 이에 비해 월남영화는 거저 대고 ‘미국 놈’들과 싸우는 영화로 비행기와 대포가 주메뉴가 되는 만큼 따분하고 중국영화는 정식영화를 돌리기 전에 시사교육을 위해 뉴스형식으로 먼저 돌리는 ‘新聞簡報’만큼이나 재미없다는 식의 비양조가 은근히 깔려있다. 1970년대 초반에 겨우 10살에 턱걸이를 한 나었건만 조선영화 한편 보는 것이 최대의 소원이었다. 그때 우리 ‘안쪽’에서는「꽃파는 처녀」를 시간대로 나누어 24시간 돌렸다. 매 상영시간대마다 당시 중국말 그대로 관객이 ‘暴滿’할 정도였다. 기억컨대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새벽 2시 시간대에 상영하는「꽃파는 처녀」를 보았다. 그때「꽃파는 처녀」를 보면서 관객들이 자기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로 온 영화관이 눈물바다가 되는 것이 참 가관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올 때면 모두들 손수건을 들고 상기된 얼굴에 눈물을 닦느라고 여념이 없다. 한번은 우리 짜개바지 친구 몇이「꽃파는 처녀」를 보았다. 울면 머저리, 하고 누가 울지 않는가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아, 니 울었다, 니 울었다 하면서 서로 놀려주기도 했다. 그때 물론 냉전의 이데올로기대립이 팽팽한 시기라 이런 사회주의권 영화들이 사상교육의 열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것이 극단으로 발효된 것이 강청의 ‘八大樣板戱’ 조작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八大樣板戱’는 정말 재미가 없다. 거저 앵앵~ 하다가 만다. 일단 재미가 없으니 보기가 싫어 사상교육이 잘 될 리가 없다. 그때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조직하여 보았지만 ‘樣板戱’를 볼 때면 잠에 꼴아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조선영화는 일단 참 재미나다. 관객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당시 ‘용감한 사람’이나 ‘와얼트’로 대변되는 사회주의권 외국영화의 딱딱함과 경직성은 더 말할 것도 없고 ‘八大樣板戱’가 통판치는 중국영화도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사과 딸 때」나「꽃피는 마을」같은 조선영화는 희극편으로서 당시 희귀한 웃음을 선사하여 그 억압적인 시대적 분위기속에서나마 웃을 수 있었다. 후에 대학교에 입학하여 안 일이지만「꽃파는 처녀」같은 조선영화는 ‘감정조직’, 이른바 ‘감정의 축적과 폭발’ 등이라는 감정요소에 모멘트를 둔 문예이론에 바탕하여 예술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상교육을 진행하되 예술적 감명 속에 자기도 모르게 사상교육을 받는 진짜 ‘寓敎於樂’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영화처럼 사상내용과 예술형식이 드놀지 않고 잘 조직된 영화도 보기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조선영화「보이지 않는 전선」을 보고 특무들의 파괴활동에 경각성을 높였으며「금희와 은희의 운명」을 보고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느꼈고「피바다」를 보고 왜놈들을 미워하게 되었으며「영원한 전사」를 보고 불굴의 혁명투사가 될 결심을 하였고「압연공들」을 보고 노동자들을 따라 배울 결심을 하였으며「남강마을부녀들」,「세동서」를 보고 조선여성들의 위대함을 느꼈고「무명영웅」을 보고 적후공작의 매력을 느꼈으며「당의 참된 딸」을 보고 당원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다. 나는 그때 영웅이 되고픈 소년의 꿈에 들떠「영원한 전사」를 연속 두 번 보았고「무명영웅」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방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춘기에 들어서서는「꽃파는 처녀」의 꽃파는 처녀-花妮를 내 짝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때 마침 사촌 형님이 영화관입장권을 체크하는 일을 보는 지라 그 ‘後門’ 덕택에 나는 많은 조선영화들을 보고 또 보았던 것이다. 그때 조선의 무슨 공연단이 어디에 와서 공연하오하면 보지도 못하면서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나며 흥분되는 것은 또 어인 일인지? 당시 조선은 내 마음의 동경처였다. 언제 한번 조선에 가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내가 연변대학에 입학한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연변대학이 조선의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변대학에 입학하자 바람으로 두만강변으로 가서 맞은 편의 조선의 산천을 바라보는 것이 최대의 소원으로 되었다. 그래서 어느 방학간엔가는 삼합에서 온 우리 동창 집에 가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산천을 싫도록 보았다. 그리고 그때 삼합에서 텔레비존을 통해 조선 텔레비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는 소리에 마음은 얼마나 설레였으며 정말로 보고 듣는 그 순간은 또한 얼마나 숨가쁜 흥분의 도가니속에 빠져들었던가. 그래서 삼합의 우리 동창생과 몰래 좁은 여울목의 두만강을 건너 조선땅을 밟아보기도 했다. 그때 그 짜릿했던 느낌도 오늘까지 짜릿한대로 남아있다. 나는 이때부터 20년가까이 되는 2000년 새해 벽두에야 마음에 그리던 평양에 가볼 수 있었다. 그것도 1년간이나 분에 넘치는 융성한 대접을 받으며 체류했다. 그때 각종 행사때마다 보게 되는 조선의 예술공연에 감탄을 연발했다. 특히 조선노동당창건 55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연인원수로 10만명이 동원된 10만명 집단체조는 그 스케일이나 일사불란한 움직임 및 고난도 동작, 그리고 다양한 내용과 형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 와서 음악무용대학에 다니는 중국 유학생이나 교환교수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봐도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조선의 예술에 대해서만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며 극찬을 보냈다. 당시 조선영화의 특징으로 또 하나 꼽으라 하면 매 영화마다 주제곡이 꼭 있는 것이다. 어떤 영화는 주제곡뿐만 아니라 여러 노래가 나온다. 당시 조선영화 한편 돌리고 나면 바로 이런 영화주제곡이나 노래들이 유행되는 것이 현재 한국노래 유행되기와 맞잡이다.「꽃파는 처녀」를 돌리고 났을 때 ‘꽃사세요...’ 노래와 ‘천송인가 만송인가...’ 노래가 곧바로 ‘走紅’했는데 내가 그때 漢族 친구들 배워주기에 바빴다. 이외에「피바다」의 ‘우리 엄마 기쁘게...’ 노래,「당의 참된 딸」의 ‘포성이 울부짖는 전선길에서...’ 노래... 당시 히트 친 노래들이 많았다. 사실 朝流는 조선족의 조선으로의 回潮로도 나타났다. 똑 마치 현재 우리가 기를 쓰며 한국에 가려 하듯이. 1957년 반우파투쟁 때 민족주의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억울함을 호소할 때 없는 조선족들이 조선으로 밀입국했다. 그리고 1960년 좌우 중국의 3년 자연재해 때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되자 조선족들이 조선으로 대거 밀입국했다. 이때 우리 큰 형님도 대학 3학년 자퇴에 조선으로 건너갔다. 이로부터 우리 조선족의 ‘이산가족’의 기막힌 사연들도 많았다. 오늘날 韓流 때문에 새로운 ‘이산가족’이 생기듯이. 그때 조선에 가서 이밥에 명태국을 먹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때의 감격을 들먹이고 있다. 1970년대에는 정상적인 수속을 밟아 조선을 왕래하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도 이때 친지방문 즉 큰 형님을 만나보러 조선에 갔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가져온 납숟갈에 스덴리스젖가락이 얼마가 멋지든지, 그리고 나이론 양말은 터덜터덜하나마 얼마나 질기든지 주위의 漢族 친구들과 학교 반 친구들한테 자랑하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朝流의 여운은 적어도 1980년대 초까지 미쳤다. 나는 1981년에 우리 연변대학에 입학하여 와서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현재 愛得백화점 자리에 있던 인민영화관이었다. 조선영화「꽃파는 처녀」를 우리말로 돌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遼寧에서 온 몇 친구들이 우르르 같이 달려갔었다. 우리는 워낙 ‘안쪽’에서 漢語로 돌리는「꽃파는 처녀」를 보았던 것이다. 그날 우리말로 돌리는「꽃파는 처녀」를 본 감동은 아직도 가슴에 아련히 남아있다. 그때 내 입에서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의 하나가 바로 나의 고향인 沈陽의 市歌었다. 沈陽 市歌는 워낙 조선영화「꽃피는 마을」의 주제곡 멜로디에 새로운 가사를 써넣은 것이었다. 그때 우리 沈陽 市歌는 매스컴을 타면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나는 그때 내 고향의 市歌가 조선 노래 멜로디를 띠었다는 그 한가지만으로 알게 모르게 얼마나 가슴이 뿌듯해 났는지 모른다. 朝流는 적어도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바람, 즉 日流에 밀리기 전까지 인기를 얻었다.朝流, 20여 년 전 내 기억속의 아름다운 회억의 한 풍경이다. 이제 언제면 다시 그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 2006. 6.10
65    인생은 짧다 댓글:  조회:3823  추천:63  2006-06-11
인생은 짧다인생은 짧다. 누구나 다 공감하는 명제다. 기원 2세기 좌우 조조의「短歌行」‘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如朝露...’는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을 은은히 울린다. 나는 한국 트로트 가수 김종환의「백년의 약속」의 ‘우린 백년도 살지 못하고 언젠가 헤어지지만...’하는 가사를 들을 때는 항상 코마루가 찡해 난다. 실로 짧은 인생에 대한 개탄은 문학사에 끊이지 않고 면면히 흘러내려온 영원한 주제의 하나다. 인생은 짧다는 명제로부터 다른 두 상반되는 명제를 도출해낼 수 있다. 인생은 짧기 때문에 매 시각을 아끼며 열심히 살자는 명제↔인생은 짧기 때문에 되는 대로 막 살자는 명제. 인생은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다. 우리는 이때까지 인생은 짧기 때문에 매 시각을 아끼며 열심히 살자는 명제에 더 공감하며 살아왔다. 나는 이 명제를 +명제로 부르기로 한다. 이 +명제는 사회적 요구에 부합되면서 자연히 우리의 드러난 의식(顯意識)의 가치추구로 되었다. 이에 반해 인생은 짧기 때문에 되는 대로 막 살자는 명제에 대해 우리는 터부시하며 살아왔다. 나는 이 명제를 -명제로 부르기로 한다. 이 -명제는 사회적 요구에 부합되지 못하면서 자연히 우리의 잠재의식(潛意識)속으로 붙박히고 만다. 사실 인간은 +명제만으로 못 산다. 너무 이 명제에만 매어달리면 우리는 살기가 따분해나고 너무 힘들어진다. ‘好人命不長’은 이것에 대한 한 주석이 되겠다. 실제로 ‘鬪私批修’의 극좌 세월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삭막하게 변했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가장 대공무사한 사람이 실제로는 가장 自私自利한 사람식의 허위적인 인간을 키웠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정신적 결백증자들을 기웠던가. -명제는 적어도 이런 +명제가 파생시킬 수 있는 역효과를 커버하는 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명제가 획일적이고 조이는 문화라면 -명제는 일탈적이고 푸는 문화이다. 술 한 잔 하고 알딸딸하여 이 세상이 콩 알만 해보이고 내 멋대로 놀아날 때 나는 +명제로 받은 스트레스를 확 풀 수도 있다. 나는 술 한 잔 할 수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건강상에서도 +명제와 -명제는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명제와 -명제의 균형체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다른 한 쪽을 偏廢하면 심신의 병이 생긴다. 나는 이 +명제와 -명제를 상수도와 하수도에 비기고 싶다. 상수도는 드러난 의식처럼 위에 보이는 곳에 있어 사람들 고마움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하수도는 잠재의식처럼 밑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 사람들 고마움을 잘 느끼지 못한다. 상수도, 맑은 물이 나오니 참 좋다. 그렇다 해서 하수도 없이 맑은 물만 흘러 보내도 문제가 된다. 적어도 물난리가 난다. 그리고 상수도의 맑은 물은 쓰기 마련이다. 그런데 쓰면 오물로 되기 십상이다. 하수도가 없을 때 오물로 된 물은 더욱 큰 문제가 된다. 하수도는 적어도 오물을 처리하는 면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와 같은 도리로 -명제는 +명제의 ‘오물’을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값지다. 하수도는 하수도로서 바로 이런 ‘오물’을 안고 거침없이 흐르고 처리해야 만이 나름대로의 존재가치를 실현하며 제 구실을 한다. 그리고 이 하수도의 ‘오물’이 정화되어 다시 상수도로 흘러들 수 있는 돌고 도는 세상의 이치도 엄존함을 알아야 한다. 실로 하수도가 없는 도시를 상상할 수 없다. 하수도와 상수도의 주고받는, 그리고 돌고 도는 역동적 관계가 +명제와 -명제의 역동적 관계에 다름 아니다. 나는 +명제와 -명제를 또 공기에 비기고 싶다. 공기 없이는 못 사는 줄 누구나 다 안다. 그러면 공기란 어떤 것인가. 사실 우리는 공기 속의 산소 덕에 산다. 그렇다 해서 공기 속에 산소만 있을 때 우리는 산소중독에 걸리어 죽고 만다. 공기 속에는 이산화탄소와 같은 다른 원소도 있어야 한다. 물론 이산화탄소와 같은 다른 원소가 일정량을 초과하면 또한 사람을 질식시킨다. 보다시피 사람을 살리는 산소도 좋고 죽이는 이산화탄소도 좋고 적정량을 확보하고 얽히고설킨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야 만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공기가 된다. +명제와 -명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에 +명제 혹은 -명제를 극단적으로 추구해서는 인생의 파멸을 가져온다. 그럴진대 우리 인생은 +명제와 -명제가 얽히고설킨 유기적 관계임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제 남는 것은 +명제와 -명제를 적시적소에서 발휘하며 바렌스를 맞춰가는 삶의 지혜문제일 것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회에 해를 주지 않는 전제조건하에서 -명제는 얼마든지 통하고 발휘되어야 할 줄로 안다. 우리 사회는 이런 허용도가 점점 넓어지면서 죽 발전해온 줄로 안다. 2006. 6.11
64    발 안마의 매력 댓글:  조회:4905  추천:82  2006-06-11
발 안마의 매력근간에 연길시 어른들의 밤생활 향락문화의 패턴이 바뀐 듯하다. 일단 술놀음이 많이 잦아진듯하고 술놀음을 벌리더라도 강권하지 않고 많이 마시지 않는 경향을 나타낸다. 술 앞에 장군이 없다는 명제를 명기하고 건강을 챙기는 줄로 안다. 그리고 이전에는 1차 술판에서 술을 곤드레만드레 마시고 2차 노래방에서 지랄발광하기였는데 이 2차도 이젠 노래방이 아니라 발 안마소로 직행한다. 그럼 발 안마의 매력은 어디에?먼저, 條條道路通罗马라 우리의 오장육부가 모두 발하고 연결되어 있단다. 발에 오장육부의 혈이 있으니 발혈에 지압을 가 하면 정말로 건강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異類相吸, 陰陽互補라 陰氣 혹은 陽氣를 받는단다. 그래서 남자 손님은 꼭 여자 안마사가 하고 여자 손님은 꼭 남자 안마사가 하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이성의 손이 발을 문질러주는 과정에 陰氣 혹은 陽氣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 안마사들의 陰氣 혹은 陽氣가 다 빠지면 어떻게 하지? 그 다음, 쿠린내 나는 별 볼일 없는 발을 신주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깨끗이 씻어주고 정성껏 주물러주는 데는 황제대접 받는 듯한 붕 뜨는 기분이 든단다. 또 그 다음, 가격이 합리적이어서 일반 소비수준에 맞아 떨어진단다. 노래방에 한번 갈 것을 발안마소에 네댓 번 갈 수 있는 가격이니 그럴 듯하다.나는 발안마 문화를 선호한다. 현재 우리 연길시에 노래방이 상대적으로 잠잠한 대신에 발안마소가 많이 생겨나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것이 우리 연길의 관광상품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람들이 연길에 와서 꼭 들리는 코스의 하나로 발안마소가 부상하고 있다. 나는 이 발안마도 좀 민족적 특성을 살릴 수 없을가하고 생각해본다. 발 위부분의 안마는 무슨 中式, 韓式, 日式, 泰式... 요 하는 것들이 많던데 발안마는 이런 식들이 없는지? 없다면 조선족 식으로 한번 개발이나 해보지. 발이라는 것이 너무 작은 부위라 개발하기 힘들겠지만도. 태국에 가보니 태국전통 안마라 하여 태국안마가 관광객들에게 각광을 받는 것을 보고 한 번 생각을 굴려보는 것이다. 2006. 6.11
63    신길우 교수님, 우리 연변에 한번 더 오십시오 댓글:  조회:3998  추천:48  2006-06-03
신길우 교수님, 우리 연변에 한번 더 오십시오나와 신길우 교수님와의 인연은 몇 년 전으로 소급하게 된다. 그때 신길우 교수님은 우리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교환교수 차로 오셨다. 마침 우리 문예이론팀에 소속되었다. 그래서 나와 오며가며 자주 만나다보니 인연은 깊어만 갔다. 나는 그때 신길우 교수님께서 수필창작론을 강의하러 오시니 문창과 교수쯤으로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교수님은 원래 한국어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그 방면에 조예가 깊으셨다. 그는 워낙 우선 국어학자였다. 그런 만큼 한국어에 대한 그의 애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에게 더 없이 감사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외국손님을 데리고 가장 먼저 찾아보는 곳이 바로 세종대왕릉이다. 언젠가 중국 요녕성의 심양 조선족 대표문인들을 초청하여 가장 먼저 참배시킨 곳도 바로 이 세종대왕릉이다. 내가 작년에 한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다. 원주에 자꾸 놀러 오라 하기에 갔더니 나를 승용차에 태우고 직행하는 곳도 바로 세종대왕릉. 같은 핏줄을 나누고 같은 말을 쓰는 조선족으로서 세종대왕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그날 날씨는 몹시 찌물켰다. 신길우 교수님께서는 연신 내리흐르는 땀을 닦으시며 나한테 사진을 찍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젊은 국문학도로서 그 바탕인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같이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세종대왕릉 앞에서 찍은 이런 사진들을 보면서 해외교포로서 한글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세종대왕에 대한 고마움을 금할 수 없다.신길우 교수님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주옥같은 수필을 써냈다. 그것도 1년에 거의 한권의 수필집을 펴내는 다산인 줄로 알고 있다. 실로 우리말의 진수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그를 지행합일이라 해야 할 지. 그는 워낙 수필가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의 수필이 우리 학교 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의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의 수필 강의도 워낙 명강의였다. 학생들은 그 자상하고도 명쾌한 강의에 감복하고 말았다. 그의 강의는 어느새 대외로 알려져 ‘어머니 수필회’를 비롯한 사회의 문학애호가들조차 청강하였다. 그 중 몇이는 그의 팬이 되고 말았다. 그는 조선족은 문학창작이 우리말을 지키고 민족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의 하나라며 사명감에 넘쳐 역설했다. 신길우 교수님과 나는 종종 약주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거의 문학창작에 대한 열띤 토론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도 나한테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언젠가 화사한 봄날 ‘어머니 수필회’의 아줌마들이 봄놀이를 가자고 신길우 교수님과 나를 특별히 초청했다. 그때 아줌마들은 봄놀이 가는 마당에도 각기 나름대로의 수필 한필씩을 써왔다. 문학소녀 같은 순수한 정열은 말릴 수 없었다. 그녀들은 워낙 신 교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가르침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말이 봄놀이지 실은 봄나들이 수필창작토론회가 되고 말았다. 신길우 교수님은 우리 여기서 우리 말 문학창작의 새싹들을 키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주간으로 있는『남한강문학』잡지를 통해서 등단시키기도 했다. 그때 등단한 많은 문학도들이 오늘도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왕성한 문학창작을 하고 있다. 특히 신길우 교수님은 산재지구인 요녕성 심양의 조선족 문학단체인 ‘요동문학’과 원주문인단체와의 자매관계를 추진하고 그들의 창작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특히 그들을 초청하여 고국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고 문학교류를 진행했는데 이것은 지금도 요녕성 조선족문인들 속에서 쾌재되고 있다. 교수님은 우리 민족의 숨결과 얼이 슴배인 유적지를 많이 답사하기도 했다. 한번은 용정의 윤동주 묘지에 참배 갔다가 윤동주 여동생인 윤혜원 여사의 내외분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그 인연이 끈끈히 이어진 줄로 안다. 그때 윤혜원 여사 내외분은 ‘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참가하기 위해 연길에 잠간 머물고 있을 때다. 그런데 인연이 될라니 교수님은 마침 이 시상식의 윤동주문학상의 심사위원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인연은 더 깊어졌는데 교수님은 윤혜원 여사 내외분이 연길에 머물고 있는 집에까지 초대되어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교수님 나름대로 윤동주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윤동주에 대해 발표한 논문은 이때까지 윤동주에 대해 학계에서 잘못 인식된 부분들을 시정하기도 했다. 교수님, 우리 연변에 한번 더 오십시오. 언젠가 우리 학생들하고 성자산성에 답사갔을 때 교수님께서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곳이라 하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 하나라도 놓칠 새라 비디오카메라를 돌려대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정년이라 하시니 좀 가벼운 마음으로 푹 쉬러 오십시오. 놀러 오십시오. 물론 교수님한테는 정년이라는 것이 없겠지요. 작년에 교수님을 만나뵜을 때, 이제 정년을 하면 무엇 무엇을 해야지 하며 하나하나 손꼽아나가는 그 야심찬 계획에 젊은 저로서도 그만 두 손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도 무엇 무엇을 해야지 하고 말았지요.2006. 5. 24
62    짝사랑 댓글:  조회:3745  추천:47  2006-05-21
짝사랑사춘기, 짝사랑의 환타지계절.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발광나는 계절. 그러면서 사랑은 신비에 쌓인 두려운 것. 그래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이가 없는 계절. 바로 이때 우리는 짝사랑에 빠진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혼을 절반 빼앗는 나날들... 그런데 이 짝사랑은 자기주제를 몰각한 一廂情願의 기껏 부픈 기대치에 놀아나는 환타지의 사랑. 나는 사춘기 때 조선영화『꽃파는 처녀』의 꽃분이를 짝사랑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사랑 사랑 내 사랑-‘꽃파는 처녀’. 영화관 게시판에 나붙은 꽃바구니를 들고 은근히 웃고 있는 대형 포스터의 꽃분이를 보는 것이 집과 학교 사이를 들락날락하는 최대의 낙. 거저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 그러다가 빗물에 색이 바라진 꽃분이를 보았을 때 내 가슴은 얼마나 아려났는지. 꽃분이에 대한 짝사랑은 결국 이제 크면 꼭 꽃분이 같은 처녀한테 장가가리하고 막을 내렸다. 물론 내가 장가를 갈 때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꽃분이하고 영 다른 여자한테 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까맣게 잊어진 듯한 꽃분이에 대한 짝사랑이 언젠가 또 한번 나를 들끓게 하며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내가 조선에 갔을 때다. 어느 공식적인 행사에 갔다가 바로 꽃분이-꽃분이배역을 한 홍영희를 지척에서 우연히 만났다. 새물새물 웃는 모습은 뛸 데 없는 꽃분이. 순간 나의 피는 끓어올랐다. 나의 젊음의 정열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다. 나는 막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대를 찾아 헤맸습니다. 나의 여신이여! 나는 이렇게 부르짖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녀와 눈길이 부딪치는 순간 나는 그만 온 몸이 굳어지며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입속말로 ‘당산을 사랑합니다, 당신을...’하고 되뇌었다. 얼굴은 지지벌개가지고. 못난이 같으니라구! 신라 때 지귀라는 총각이 있었다. 언감생심 선덕여왕을 짝사랑했다. 선덕여왕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구중궁궐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선덕여왕이 절로 행차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간다. 그런데 어느 새 여왕은 절로 들어가고 절문은 덜컹 닫기고. 허탈감에 빠진 지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피곤기가 몰려오고 소르르 잠이 든다. 그 사이 여왕은 절에서 나와 옥팔찌 하나를 깊이 잠든 지귀의 몸 위에 놓고 간다. 잠에서 깬 지귀, 옥팔찌를 발견하고는 다시 失之交臂의 허탈감에 빠진다. 그리고는 온 몸을 활활 태우며 불의 귀신이 된다. 짝사랑의 정열, 사랑의 정열, 불 자체.나는 이미 50대를 바라보는 어른이 되었다. 다시 한번 짝사랑의 순정과 정열을 불태우고 싶다. 다시 한번 짝사랑의 순정에 말이 나오지 않는 떨림을 맛보고 싶다. 지귀처럼 사랑의 정열에 타죽고 싶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미 그런 순정과 정열이 없다. 단지 담담하게 사랑을 바라보며 음미하는 조용함만 남았다. 이것이 성숙이런가. 그래도 나는 오늘 내 정신의 자유를 만끽하며 환타지속에서나마 순수한 짝사랑의 정열을 맛보고 싶다.2006. 5. 21
61    춘향과 황진이 댓글:  조회:3868  추천:76  2006-05-21
춘향과 황진이춘향과 황진이는 우리 남자들의 久遠의 두 여인상. 춘향과 황진이, 누가한테 장가들래 하면 우리 남자들 양손에 떡 쥔 격, 정신분렬증이 일어나기 십상. 워낙 춘양은 숙녀, 황진이는 요부. 바로 낮에는 숙녀, 밤에는 요부하는 그런 숙녀와 요부임에라. 우리 남자들의 앙큼한 심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춘향, 일부종사의 정절을 지킨다. 변학도의 路柳墻花의 수청강요를 갸날픈 여인의 몸으로 맞받아친다. 매 열매에 사랑의「十杖歌」를 불러댄다. 만고의 정열부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춘향은 바로 우리 남자들의 ‘窈窕淑女, 君子好逑’ 타입. 춘향은 남에게 보이기 좋은 여자. 그래서 데리고 다니기 좋은 여자.『춘향전』에서도 보면 이도령은 결국 춘향을 데리고 상경한다. 그런데 우리 남자들은 춘향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밤의 요부-황진이가 필요하다. 그래서 분명 입으로는 사랑 사랑 내 사랑 춘향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감을 자랑말라/일도창해하면 다시 오지 못할거늘/명월이 만건곤하니 쉬여간들 어떠하리’의 황진이를 떠올린다. 황진이는 분명 보잘 것 없는 일개 기생이다. 그러니 우리 남자들 더러운 기생, 퉤퉤 한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가까이하고 싶은 황진이다. 황진이는 술 잘 한다. 한잔 하면 즉흥시에 가무에 흐드러진다. 우리 뭇 사나이들 침침 질질 흘리게 하고 뿅 가게 한다. 그래서 천하의 호남아 임제도 잔 들고 권할 이 없는 서러움을 ‘잡초 우거진 곳에/홍안은 엇다 두고/백골만 남았다’고 슬프게 읊었다.황진이와 춘향은 우리 남자들의 情, 理의 상징코드. 인간은 情, 理의 존재. 情은 물같이 흐르고 싶고 理는 뚝이 되어 막고 싶고... 인간은 심신건강상 情, 理발산의 대상을 찾아 헤맨다. 情, 理가 합일된 사랑의 발산대상을 찾지 못할 때 그것은 우리 남자들처럼 情의 상징코드, 理의 상징코드식의 분열된 상태로 치닫는다. 그럼 여자들은 어떤가? 역지사지, 여자들도 情, 理의 존재라 할 때, 그리고 그 情, 理가 합일된 사랑의 발산대상을 찾지 못할 때 마찬가지로 情의 상징코도, 理의 상징코드식의 분열된 상태로 치달을 것이다. 그럼 여자들의 情, 理의 상징코드는 누구? 이도령과 변강쇠? 여자들한테 물어볼밖에.2006,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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