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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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버지 성함 (외 6수) 댓글:  조회:159  추천:0  2023-08-07
아버지- 시킨 듯 깝죽거리며 호칭 실타래를 풀어뜨리다   기다마케 되감아도 길 찾는 술래다   그렇게   아-름차도록 버-젓하도록 지-혜를 늘이려나   아버지가 나를 코 꿴 고삐로 하오동 아리랑 열두 고개를 넘노라니   아-름답게 버-거운 지-름길   말뚝으로 기다리다 기둥으로 만나다   아버지 묘역 아버지 동네!     릉소화의 집   생잎이 떡잎이도록 채 줏지 못했다 감아서야 담았으니 눈알은 방안이다.     산의 보모들   산이 산을 업으니 등짐이 멜짐을 이다 산을 산에 주었다고 잎주머니 뿌리 입을 먹다   산은 산만 보았을 때 갈 때가 올 때다.     정영수 뜰에   먼 세월을 막차로 놓쳐도 곁의 옷자락만은 잡은 채 노 젓던 강변의 산천어와 아리랑고개의 계곡 들어섰다   맨발이 빙하수를 마시고 포옹한 숲의 장딴지들이 탁족회를 열면 너울 쓴 구름과 가마 타던 정월 눈보라 궂은비로 세수하던 뒤안길 따라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무지개를 짓뭉갠 홍분 입맞춤 가슴을 얼룩진 코수염새우 쇼후즈 설렁탕 서로끼리 나누면 래일의 차표 잎이 꽃 속에 고속도로 달리고 뿌리가 줄기한테 헬기 몰고 와 우듬지 화라지에서 어제와 래일이 어깨 겯다   실망과 원망이 갈망과 희망의 오누이 분노와 분개가 분발과 분투의 쌍둥이 한줄 김밥처럼 나란히 손잡고 오작교를 넘어서니   뜰에는 아직도 정영수(精英树) 한그루 정미소를 지켜 사랑 겉곡식을 풋바심으로 방아 찧으란다 쿵더쿵-쿵쿵-쿵더쿵-칙칙폭폭···   껍질을 벗은 알몸들이 봉당에 허청에 원앙금침 펴고 동방화촉을 치르면 기장쌀이 팥꼬투리와 동거한다니 찰강냉이 록두와 석삼년 동침이란다   이제는 정원수로 맞벌이로 뒤란에조차 다락방을 짓는다 정영수 뜰에 앞뒤 구중궁궐에 하오동 평대문이 솟대를 높인다.     문턱을 넘다   꽃 폈다고 봄인 줄 알았는데 매화는 겨울에야 웃다 새 울면 생리별이 아니라 짝짓기 뒤풀이다 모르는족족 깨닫듯이 보이는 대로 비껴야리 향기도 눈물 밟고 걷거늘···     고향 어머니   꽃송일 잎이 받들었다 꽃과 잎을 뿌리가 이었다 그 꽃과 잎과 뿌리도 땅이 안았다   만삭이 된 채 동구 밖에서 날 기다리는 똬리의 동이 인 어머니 업고 선 지구가 무거워 떤다.     소리 속에서   무수한 소리들이 허공에 만났다 부딪치고 깨진다 더러는 우로 뛰고 일부는 추락한다 별로 돋은 건 청아한 옥음이고 떨어진건 꽃으로 다시 핀다 언제 보나 허무는 큰 소리만 칠 뿐 시나브로 종내는 사라지고 만다 보이는 숨결은 밤에도 소나무로 짙푸르다 나에게로 돌아온 소리의 날개에 나를 송두리째 태운다. 연변일보 
10    [수필] 설 아닌 설날 댓글:  조회:799  추천:0  2019-07-14
설 아닌 설날 정호원   세월의 한고개 또 올라서도 갖고 온 솔방울은 여전히 꿈의 씨앗이다! 이제 넘을 언덕길에서 상록수 한그루 심으라고 전설처럼 들려주는가 싶다. 그래서 제야의 종소리도 새해의 일출도 공론화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속세의 멤버들과 속심을 나누고 일상을 토론하고 싶은가 보다. 본연의 숨결이 빚는 향기 속에 력동적인 스토리를 엮자고 말이다. 살았던 나날의 바라지가 살아갈 마무리를 전담한다니 다행으로 추억은 예이제 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올 송구영신에도 은근히 품은 유감은 여전히 발작한다. 왜 굳이 설빔이라는 대목에서만 인사하고 안부를 전하나 하는 반발 같은 의심이다. 혈통의 정영수와의 밀회 같은 커뮤니케이션도 무덤으로 통하는 터널이다. 장벽의 길은 폭파하고 파괴하고 나중에 정복이다. 기실 우리에겐 365일을 제외한 시간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교류할 공간이 푸짐하다. 그럼에도 종무식, 시무식 같은 고비사위에야 부랴부랴, 그것도 경직되고 고루한 축복이나 메시지가 오가는 게 심히 비좁고 액색한지도 모르겠다. 설에 나누는 덕담이 물론 훈훈하고 여유롭게 들려 회고와 감회를 유발하면서 새날의 희망과 새해의 다짐이 될 에너지가 맞는다.  허나 가급적 설이 아닌 평소에도 늘 따뜻하고 규칙적인 인사수작 내지 안부인정을 버릇하자는 게 발설의 단초이다. 그런 교류가 빈번하게 치러질 경우 전환기에 담긴 자타의 일상이나 여유는 늘 풋풋하고 활기로 넘칠듯 싶다. 그래서 올해는 나부터 설보다는 원단 춘절 전날이나 이튿날 혹은 련휴나 토요일, 일요일 등 범상한 나날에도 지인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동향인에게 무작정 정례회처럼 공식적으로 파티를 가지거나 회식을 조직해 제목 없는 편안한 교류를 시도할가 한다. 무화과나무가 자살의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면 배신자는 올가미를 받아야 한다. 시행착오를 단죄하고 구새 먹은 신화는 곰팡이를 벗겨야 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된 원고와 피고간의 소송처럼 세말사엔 거창한 설법이 점철된다. 설에 죽음을 떠올리는 건 생명의 시한부를 전달해줄 의무에서다. 난청지대엔 전화도 걸고 타인을 통해 문안도 전해주면서 소통의 장을 극대화하련다. 각주구검에서 해탈되는 패턴이렷다. 매일과 같이 명절기분으로 상차림을 마련해 초대하고 환대하는 인정이 출범한 계기이다. 보다 넉넉하면서도 딱딱치 않은 리셉션이 되기를 바라는 설맞이 소감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대련의 와방점에 진출한 숙부댁을 독행으로 찾았다. 명절을 앞둔 인사였건만 내심으론 겸연하다. 방문자 역시 경직되고 고로한 답습에 로봇으로 작동되는 례속에 시달린다. 세간의 전통적인 세시풍속이라기보다 기존의 틀에 얽매인 수동이였으니 말이다. 차량의 동음이 드릴로 정서를 갉아먹는다. 쿠션도 송곳방석으로 배기다. 내가 조금만 생각을 달리한다면 이런 불행은 자초를 피면할 텐데 말이다. 하여 각도를 바꾸어 숙부를 내 위치에 모셨다. 나를 찾아오시면 어떠랴 하고 감히 주제넘은 망상을 발설한 계기이다. 립장이 다르니 견해도 부동하다. 버릇 따윈 차치하고 모던시대에 이런 통설이 정립되기까진 아직 시간과 과정이 필요함을 안다. 몸이 추워난다. 감수가 얼어든다. 문전옥답에서는 밭두렁, 논두렁 사이 두고 오곡백과를 가꾸면 능히 풍성한 결실은 가능하다. 먼곳의 어르신을 조카 앞으로 세배를 오라는 건 당연히 불효라고 자타가 꾸지람할 것이다. 과연 개념적이고 형식적인 제례除例로도 누리고 즐기고 풋풋한 여백의 지속으로 되는 일상은 설만이 아닐 것이다. 룰을 허물고 장벽을 없애는 통일의 오픈이 되는 타깃이 이 설에서 출발해야 함을 원하지만 말이다. 조금 위안스럽고 느긋한 모꼬지인 것 같다. 나부터 설을 쇠는 의미에 안주함이 우선이렷다. 제야의 종소리나 음력설의 폭죽소리 들리는 시점에서 정초의 다른 정설을 글로벌 화두로 제기하련다. 세초를 통해 설음을 토로한 것 같아 안스럽지만 언젠가 이런 구상이 보다 활기로운 맥락이 되지 않을가 싶다. 더는 옹색하고 경직된 세리머니의 타성에서 맴돌지 말고 이제라도 살아가는 울렁임의 비공식적인 퍼레이드가 되길 바라는 설의 입문개입이자 존속가치이다. 씁쓸하게 자제하는 컨트롤로 개년改年의 또 다른 모멘트이자 잠재력을 이끌어낼 의향은 그래서 가변성을 견주는지 모르겠다.  와방점에서 아니나 다를가 곤혹을 치렀다. 다음 해엔 숙부가 날 방문하라는 악의 없는 익살에도 대방은 대뜸 노기등등해 야단친다. 항간의 프로필이자 시대의 자화상이다. 난 개의치 않는다. 이미 준비한 바가 있었다. 굳이 규정된 스케줄에 얽매워 일맥상통이 아닌 허례허식의 수다를 떨거나 맞절을 주고받는 게 작히나 꼭두각시 탈춤이랴? 설에 미루었던, 묵었던, 겹쳤던 인사나 효도 혹은 안부를 한꺼번에 쏟아내 봉창하는 것 같아 심히 찜찜하고 꿀꿀한 것은 몇년 전부터의 고민이였다. 해프닝이지만 내심을 원맨쇼로 보여주어 드디여 조금 개운하다. 이제 세수岁首 아닌 평일에도 해후 같은 기분을 동반한 인사수작이 빈번할 때 우리 동네, 우리 회사, 우리 혈육, 우리 친구, 우리 패밀리가 더 밀도 있는 통기성을 가질게 아닐가? 평소에 눅잦혔고 숨겼고 스쳤던 진실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설의 편협적 타이틀에 도전했다. 명절의 새삼스런 의의가 푸짐하다. 틀에 박힌 답습을 당장 전격 소환해 응징하고 보다 참신하고 활성화된 페스티벌을 확실하게 발족, 보급함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조카, 가만히 보니 네 말이 일리 있다. 담 설엔 내가 연변 가마!… 며칠 뒤 숙부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고백과 탄백이 동시에 묻어났다. 일요일이나 명절 아닌 평소에 마주치는 막걸리사발이 설에 마시는 모태주보다 더 향기로울지 모르겠다. 부담없이 자작자음하듯이 자유롭고 편안한 심성이 휴식과 차분함의 감미를 시식하게 할 테니깐. 설이 기다려진다. 숙부를 맞이할 준비에 설렘을 눙친다. 아니 할랑거린다. 서재의 독실에라도 궁궐처럼 환대하련다. 어쩌면 최초의 새해맞이 법전인지도 모른다. 생산적이고 건설적이다. 매년 설이면 년하장, 엽서, 선물들이 전보, 우체국, 교통도구를 리용해 배달되던 진력하고 질린 이왕지사들을 현재 나로부터 외면하며 선웃음을 짓지 않는가? 자업자득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이제는 보다 똘똘 뭉치고 짱짱하게 빈틈을 메울 살맛 나는 만남을 핍진하게 가질 수 있을가? 더는 세배나 안부가 설에만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나서 보다 광역화를 노린다는 점에서는 나중에 마침내 공감에로 골인할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으련다.  -복무대로 랭면 한그릇이면 만족이야! 글구 썩장과 도라지무침… 투도온면도… 숙부가 이튿날 또 전화를 주셨다. 초대에 부담을 덜련다는 의지가 내비쳤다. 메뉴선정이 고작 토속적이고 꽤 사치한 저급이다. 그럼에도 일파만파로 퍼지는 설의 또 다른 기류가 동네방네 안방을 감돌아든다. 도시와 외곽 그리고 해내외를 풍미하면서 새 전설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선명하고 간절하다. 파격적이고 이설적인 돌직구일지라도 나중엔 초연하게 동조하리라 본다. 리액션보다 실험 내지 호응 또는 관행이 이뤄지지 않을가 하는 호기심은 사유기제전환이 완성할 여분의 잠재력이다.  -아니요, 숙부님! 제가 실례했습니다. 제가 담해도 찾아가 세배 드리고… 대련  해산물 생회로 청도맥주 나눕시다! 이번엔 내가 사과와 감응으로 굴복과 투항을 선고한다. 설의 래왕에서 세태의 보완과 향유를 달성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첫눈에 반한 이성은 덧정이 들고 처음 타개한 민속은 실행으로 고착된다. 설 아닌 설날이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포지션을 갖다줄가? 떡국, 삼색나물, 찹쌀식혜, 나박김치의 또 다른 맛을 그런 퍼포먼스로 걸맞게 만끽할가 한다.  숙부를 떠올리며 또 아직 개방적으로 통하지 못한 구석을 포함해 가깝게 부닐고싶다. 설익은 설보다 설설 끓는 또 다른 설날에 우리 자주 상봉할 시대적 감수성에서이리라! 드링크는 물론 새 메뉴들의 무한리필은 계절 없이 오픈해 성업 중에 있다. 오시라, 혼행처럼 부담없고 완주처럼 스릴을 감내하며 환득환실할 것이깐.  -흐흐… 그럼 조카가 나한테 장훈을 친 걸 되물리나? 빅장?!… 숙부가 변죽을 울린다. 난 도전에 태클을 당한 역습이지만 되려 흐뭇하다. 비난의 블랙홀은 명절콘서트로도 규정이 가능한 리유에서다. 한결로 엉켜 스케줄이 담뿍 찬 설을 비우고 보다 풍성한 실속을 누림이 소원이다. 이것 또한 레지스탕스와 자률의 오케스트라 통합이라 할가 한다. 진부한 고태의연에서 떠나 새 마을, 새 도시로 옮기는 게 의식전환이자 사상해방이다. 설에 대한 외곡 내지 롱간이 이제 어떤 풍파 내지 물의를 일으킬 걸 미리 감오한다. 추세이자 동향이렷다.  꺾이는 상승세와 급증하는 신드롬의 대결이 시나브로 교체기를 만든다. 아직은 자원봉사자나 시민단체에서조차 발기된 청원서와 전단지도 없는지라 그냥 일각에서는 나름 대로 제안하는 바이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건 숙부처럼 혁신으로 다가오는 선각자가 간세지재처럼 계시여 덜 불미스럽다. 자기를 허물고 신선한 것이라면 바이러스조차 수납할 그릇뚜껑을 여는 손짓이 돋보일 따름이다. 정경유착 있듯이 전통세시와 시대민속의 접목합성이 치르는 미풍량속의 새 버전 콤비이다. 몸집을 크게 불린 설 아닌 설날을 자수서처럼 낱낱이 이실직고하며 그렇게 쇠고 싶다.  설 아닌 설날이 더는 핫이슈가 아닐 줄 믿어야 하는 까닭을 오프라인 모멘트에 게시한다. 장님도 귀머거리도 까꿍- 한번 불러주면 어떠랴 싶다. 초강수의 앵글숏인지 몰라도 감히 배독을 권장할가 한다. 갑질고객처럼 잡음을 튕긴다고 구시렁거린들 아직은 참작할 시점인 까닭도 짓씹자고 말이다… 출처:2018 제4호
9    연변조선족자치주인구 댓글:  조회:1155  추천:0  2018-06-21
장백산 아래 오붓한 백도라지마을이라면 당연히 연변조선족자치주 판도를 지칭하는 상징패턴이라겠다. 치마저고리, 렬사탑, 민속촌, 용드레우물, 만무과원, 백옥미, 인삼, 담비가죽, 록용···조선족집단지의 외곽 이미지이다. 허나 최근 들어 인구감소가 급격하다고 아우성이다. 인구규모, 인구구성, 인구동태 등과 같은 인구의 특성은 경제성장, 건강, 교육, 가족구조, 범죄류형, 언어,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인류사회의 거의 모든 면들이 인구추세에 관련되여있다고 일찍 인구학은 제시했다. 2000년 11월 1일 0시까지 연변 상주인구는 220만 9646명이다. 돈화시 48만 834명, 연길시 43만 239명, 룡정시 26만 1551명, 왕청현 25만 5882명, 안도현 22만 315명, 화룡시 21만 5266명, 훈춘시 21만 1091명, 도문시 13만 2368명이다. 도합 71만 1845세대의 가정이 있으며 남자가 113만 4382명으로 51.34%이다. 특기할 것은 한족인구가 134만 3239명으로 60.79%를 차지하며 여러 소수민족인구가 86만 6407명으로서 39.21%를 점한다. 2000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인구는 80.12만명이다. 1990년 제4차 조사 때와 비하면 한족인구가 15만 5977명으로 13.14% 증가하고 여러 소수민족인구가 2만 6233명 줄어들어 2.9% 감소되였다. 여러 소수민족인구의 범위는 물론 조선족이 절대 다수 비중을 점함을 알아야겠다. 도시인구가 148만 5483명으로 67.23%이고 농촌인구가 72만 4163명으로 32.77%를 차지한다. 이 공보는 인공수표 방법으로 쾌속 종합한 총수자이다. 그러나 꼭 주해로 제기하고픈 건 상기 조선족인구수자 속에 몇십년 전에 연변내의 한족들이 사사로이 암거래로 배우자 일방을 소수민족으로 고쳐 자식을 조선족, 만족, 회족, 몽골족, 쫭족, 시버족, 묘족… 등 15개 소수민족 일원으로 출생신고를 등록했다는 사실이다. 결과 86만 6407명 여러 소수민족인구 속엔 한족개입이 호적화, 법률화, 합헌화됐다는거다. 2010년 전국인구조사 수자에 의하면 연변의 상주인구는 227만 1600명이 된다. 2000년 11월 1일 0시의 제5차 전국인구 조사와 대비할 때, 십년간 모두 6만 1950명이 증가되였고 2.80% 증장되였으며 년평균 증장률은 0.28%였다. 연변상주인구중, 모두 84만 8380가구가 있는데 인구는 219만 4868명이며 평균 매 가구의 인구는 2.59명이다. 이는 2000년 제5차전국인구조사중의 2.99명보다 0.40명 감소된 셈이다. 2010년말까지 연변에는 조, 한, 만, 회 등 20여개 민족이 살고 있다. 조선족인구는 82만명으로 37.7%를 차지하며 한족이 59.29%를 차지하고 기타 소수민족이 3.01%를 차지했다. 2013년말 기준 연변주 인구 227만 6000여명중 조선족은 79만 9000여명으로 전체의 35.1%를 차지했다. 2016년말, 호적 총인구는 146.6만명으로서 총인구의 69.2%를 차지했다. 인구 출생률은 8.36%, 사망률은 6.87%, 자연증장률은 1.49%였다. 2016년말, 총인구중 조선족인구는 75.9만명으로서 총인구의 35.8%를 차지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감소는 흑룡강성, 료녕성 산재지역과는 다른 그 자체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이 있다. 한국을 비롯한 기타 우리 민족이 집중한 여느 나라에서도 동포인구 감소가 비일비재라는 보도가 나돌고 있으나 필경 연변 경우와는 이질적으로 다르다. 자치주인구라는 통계수치가 시사하는 바를 결코 간과해선 안될 줄 안다. 조선족이 주축의 35.8%라는 집계는 수자렬세, 인구감소라는 위기에 몰닉했음을 판정한다. 패밀리 사이즈가 국가제정의 생육지표도 완성 못해 ‘락제생’부부들이 부지기수렸다. 현행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 및 계획생육위원회’라는 간판의 내함을 체크하지 않을 수 없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감소가 주는 충격 내지 화제는 왜라서 이처럼 심각하고 민감한가?! 그것은 바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중국권내에서 제일 처음 조선족자치주라는 민족공동체 패찰을 단 종족집단 부호의 위력 때문일 것이고 다음은 전반 연변판도가 조선족이 제일 많이 모여사는 집거구라는 데서일 것이다. 이 량자의 우세특징으로 규정된 연변이미지는 집중과 중심의 매력으로 각광을 받았기에 그만큼 오늘날 실망감 역시 큰 걸로 해석된다. 단순한 자치주인구라는 통계이지만 공동체의 존재가치를 시사한 까닭도 역시 세대교체의 사명감이다.
8    [수필] 현재의 존재 (정호원) 댓글:  조회:979  추천:0  2017-07-19
수필   현재의 존재   정호원     생명치고는 오늘만큼 화려하고 진실한 게 없다. 시간치고는 금일만치 신선하고 감격적인 게 없다. 그렇다. 목하야말로 활력이고 숨결이다. 어제는 이미 살아버린 흔적이고 래일은 미지수의 약속이다. 그 사이를 오가며 세월은 가장 절실한 사연으로 생체를 보호하고 향수하고 인도한다. 이제 곧 태여날 갓난애도, 바야흐로 저무는 황혼에 스러질 락엽도 작금의 시금석으로 가치존재를 판별한다.   어제는 일요일, 교외의 채석장과 유허비 몇군데 바장이다가 해질녘에 강변에 머물렀다. 연집강에 류입하는 눈석임물을 한동안 관찰했다. 그저께는 당구장 어구에서 포스터를 감상하며 가로등이 사지를 놀리는 가상공간운동을 그려보았다. 래일은 려행사에 가 고종형의 비자신청을 대행해주어야 한다. 다 진실하고 그럴 듯한 명목의 스케줄궤적일텐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행적만은 배제됐다. 가끔 지나간 춘추와 닥쳐올 미래구상에만 신경을 부리고 투자를 준비하나 막상 맞고 겪는 시처위에 한해선 홀시한다. 그래서 시나브로 루락되는 현실편린이 점차 불거져 나중엔 붕괴수위를 넘어선다. 무시무시한 변이는 늘 작은 펑크가 낳은 소산물인줄을 모른다.   수녀 마더 데레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오늘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만족감은 책임완수’라고 명토를 박았다. 맞는 일가견이다. 오늘이 담겨진 생명에 대한 최고례절과 최대의무는 현재를 리드하는 운전기술에 비롯된다. 평준화보다 목전의 시점에서 자아를 성찰하고 문제를 분석할 때 그 성공효과비중은 놀랍게 극치를 릉가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사랑만 아니다. 애념을 주축으로 회전하는 핵심적인 전환점이 포인트다. 목금의 포장 속에 치밀한 안전성과 넉넉한 보장성을 제공받으면서 진행될 때 그 정감은 보다 완미하고 극진하다. 지방에서 도심으로 상경해 살아오면서 보노라니 오늘이 점점 무겁고 오염되고 거치장스럽다. 그러기에 윤택나게 닦으려 행주와 걸레를 자주 꺼내든다. 초침의 많은 음률 가운데 딱 금천(金天)의 숨결만 선거해 추천하는 리유는 그 것의 함의지배가 우선인 탓이다. 어설픈 풀뿌리에 매달린 이슬의 잔명처럼 가냘프게 그네를 뛸 것이 아니라 계절의 주근(主根)에 단단히 내릴 포착을 고려함이 우선이다. 아, 생태계를 가늠해보는 시험대에 나를 내세웠음을 시인하고 만다. 숲은 저만치 고요한데 살래살래 고개 젓는 향기의 재채기는 어런더런 환희에로 부르기에 충분하구나…   나를 관목림에 얼른 비끄러매고 잔생들과 호흡을 맞춘다. 최대 승부처인 자연을 모토로 삼고 오늘의 고삐를 세근에조차 동여맬가 한다. 유력후보처럼 나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가까이 듣는다. 누굴가? 도전장을 내밀던 날벌레들이다. 그들은 이 생로를 포기한 채 카지노의 플레이어로 소일한지 오래된다. 자칫 오늘이라는 공간이 흥망성쇠의 진원지로 주목받기 십상이라는 결론을 미리 판단한다.   오늘에 초청장을 정중히 건네준다. 중국 삼국시대에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이 출병하면서 후왕에게 적어 올린 글이 있었다. 우국(忧国)의 내용이 담긴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출사표의 유래이다. 후에는 출병할 때에 그 뜻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던 글로 통했다. 나의 오늘에 내든 출사표를 무죄판결서류처럼 거뜬하게 이첩한다. 작봉(爵封)치고는 꽤 파격등용이다. 작비금시(昨非今是)에 느닷없이 놀라 듯 갑자기 자격지심을 의심한다. 하다면 어느 목적지로 어떤 속도로 어떻게 출발할 것인가? 위치감각을 조절하는 사이 오늘의 스타트가 어느새 발목에 각반을 동여주고 대님을 재정비한다. 나는 발차를 앞둔 간이역에서 본일(本日)과 악수할 수밖에 없다···   홀제 밀림에서 파도가 쇄도한다. 놀라서 그 쪽에 눈길을 돌린다. 원시림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열광의 소동이 즐겁다. 나에 대한 지지률은 갑자기 반등을 보이더니 어느날엔가 또 하락될지 모른다고 엄포처럼 으름장을 놓는다. 떡갈나무가 단추를 벗기고 아름드리 잣나무가 송두리째 앞섶을 흔들리며 목도리를 풀어 내친다. 주재자는 그래서 건방지고 당당한가! 공천에도 시비가 헛갈리거늘 까짓 개인정감구축에 오류 없으랴! 하여 무효화는 개정이 필요하지 않기에 고집대로 초심에 등불을 더 밝게 켤 따름이다.   뒤를 돌아본다. 어제는 환경위생관리처 골목의 후미진 뒤안길로 꼬리를 사렸다. 아득히 비껴간지라 대봉류소(大凤流苏)처럼 추풍에 흩날린다. 상여의 네 귀에 늘어뜨리는 큰 매듭술 치고는 꽤 너덜너덜하다. 이번엔 시선을 돌려 해란강 너머 과수원을 키 돋음해 내다본다. 백화청사 꼭대기 안테나를 넘어 비암산이 희미하게 안겨온다.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를 지나 모아산 봉황대 유허의 전망대를 운무 속에 찾아본다. 건물에 막힌 차단 속에서 용케 더듬어주는 고향의 바지랑대가 흘린 시간의 지휘탑으로 안내한다. 량극을 오가는 사이 갑자기 몸을 담았던 바위가 흔들거린다. 놀랍다. 나는 지각운동으로 전률하는 산을 의심한다. 잠시 기거한 야외에서 몸살을 앓는다. 간이역에서 하루살이로 착근한 신세가 충격으로 떤다. 들쑹날쑹한 산악이 가벼운 펀칭(punching)으로 나를 거부할 줄이야··· 계곡도 수림도 오늘을 포기한 자를 수납하지 않는 공성소유자일 줄이야···   다시 휴대폰의 스케줄관리메뉴를 클릭한다. 오늘의 일력이 나리꽃처럼 붉게 피여난다. 금방 재생되는 화면의 디자인은 설계만 아니라 표출의 의상을 벗기며 내면으로 비추는 네온싸인이다. 완교지를 받아든 편자의 기쁨인들 이처럼 생동할가?! 과연 내 맘의 정토에 활착률을 내린 식재성공은 얼마나 %를 가질가? 홀로 너덜겅을 벗어나 외진 동네로 떠난다. 둘러보고 싶고 냄새라도 맡고 싶다. 사름률이 높은만큼 보람을 느낄 것이다. 교룡기(交龙旗)는 임금이 거둥할 때에 행렬의 앞에 세우던 기만 아니다. 탐검의 행보에 온갖 잡초도 오색기를 흔들며 사열대에 모신단다. 오솔길에서 오월의 요정이 장미다발을 들고 게걸스럽게 유혹을 아끼지 않는다.   오늘을 말하기엔 오늘의 시간이 너무 짧다. 아마 이 부분만은 래일로 미루고 그 공간에 의탁할가 보다. 한국 김대중 전 대통령은 ‘력사는 우리에게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력사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간이 지나면 력사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는 고담준론을 남겼다. 잠언록 같은 의미를 던져주며 의외의 별건수사에도 적용할 잠재력이 다분하다. 오늘을 살아가고 현실을 영위하는 속물의 진실을 규명하고 처리하라는 충고인줄 알겠다. 내안의 조약을 지키고 그 것으로 꿈의 내용을 알차게 채워야겠다. 조금 경망하지 않나 미심쩍다. 탄로 나면 불법류출된 음원에 대한 류포자검거에 들어갈가부다. 하하! 장본인도 고발자도 스스로임을 고백한다.   오늘을 정리해 수록곡을 묶었다. 처음엔 갈피가 잡히지 않아 번복이 심했다. 인젠 두서가 잡힌다. 서로 상충되면서 엇박자도 많이 빈발했다. 고맙게도 언밸런스를 조률하는 보완으로 오늘이 알뜰한 서빙제공에 나설 줄이야··· 조종사 실수를 비롯해 기체부실 등 제반 가능성을 밀착하면서 추락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나의 비행점검은 늘 이런 연극으로 개봉작이다. 노래치고는 하늘을 날아예는 메아리만큼 아름다운 주제가가 또 있을가?! 창공을 벗겨내려 청계수에 미역 감고 사막에서 다시 비상해 은하계의 옥정수를 길어다 오아시스를 보충하니 말이다.   타자를 하는 사이 모니터 하단 우측에 표시된 시간현시가 또 초로부터 분으로 바뀐다. 나중에 시침수자가 바뀐다. 오늘은 부지런하다. 어김없다. 만날 간다. 서지 않고 자꾸 나를 부른다. 듣지 않으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고 눈을 부라린다. 오늘이 작동하는 메터기를 들여다보며 늘 번망하고 착잡하고 바듯한 스케일을 보듬는다. 진행형이 움직여주는 치다꺼리의 심장인줄 안 탓이다.   나는 아직도 본부석에서 자신을 열심히 지휘한다. 오늘을 옆에 거느린 채 골몰히 잔디밭을 주시하는 감독의 초조감이다. 현재의 존재를 실증하는 승부전이다. 부전자승(不战自胜)이 없는 경쟁도전마당에서 이런 자세는 영형상수(影形相随)처럼 밀착력을 보이지 않는가!···   한모금 농축액을 마시고 웬 비방의 화살도 펀칭으로 선방할 자세는 늘 필수적이다. 현재의 존재는 성공으로 복수할 능력자만이 강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연변일보 2017.7.13  
7    그는 이런 작가였다 -고 류연산 작가를 기리며 댓글:  조회:1027  추천:0  2015-01-14
류연산 선생은 1957년 8월 12일 당시 화룡현 서성진 북대촌에서 출생했다. 1982년 7월 연변대학교 조문학과를 졸업했고 1988년 광주 중산대학교에서 1년간 연수를 받았다. 1982년 8월부터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 편집, 주임, 종합편집부 부장, 총편조리 등 직을 력임했고 2007년 연변대학교에 교수로 전근해 글짓기기초, 문학개론, 문예창작심리학, 소설창작론 등 학과목을 강의했다. 마음이 뜨거운 작가 2012년 1월 17일 연변방송국에 근무하는 필자는 고 류연산타계1주기추모특집을 방송한 적이 있다. 이때 우리 문단의 유명한 작가인 리혜선 선생과 우광훈 선생을 특별초대석에 모시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류연산 작가에 대한 그분들의 인상이라면 독서가, 장서가였고 수집광이라는것이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가로서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다. 세계명작은 그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닥치는대로 읽은것이다. 특히 중국의 고전들은 더 많이 읽었었는데 “수호전”이나 “삼국연의”같은 작품과 중국고대의 경전들인 문심조룡이나 손자병법같은 작품도 읽었다. 수호전은 거의 암기를 할 정도로 읽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마을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은 사람으로 통했고 책을 본 이야기를 듣겠다고 마을 또래들이 줄레줄레 찾아오기까지 하였다. 지금의 표현이라면 마을 또래들 중에서는 인기짱이였다. 그런데 아마 그때부터 력사하고는 무슨 인연이 있었나 본다. 력사소설이 더 많았고 그 후 소설창작에서도 력사제재를 많이 다루었다. 그의 소설의 대표작인 “흑치상지”, “수리재의 망부석”이 그렇고 작품집에 나오는 소설작품도 대부분이 력사제재이다. 이건 그의 독서 분야와 련관이 있다. 장서로 보면 문학작품과 력사서적이 반반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후에 력사연구와 력사기행, 인물전기쪽으로 매료되면서 력사서적은 필요한 공구서적 그 자체였었다. 1992년에 우광훈 작가와 류연산 선생이 한국에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때 한국의 서점에서 책을 구입한다는것은 월급쟁이 수준으로서는 언감생심 엄두를 못낼 때였다. 그래서 찾아다닌 곳이 낡은 책을 파는 고서점을 전전하는것이였다. 그곳에 가면 욕심나는 책들을 값싸게 구입할수 있었으니깐. 그런데 귀국할 때 책보따리가 너무 무거워서 우정국에 가서 부쳐야 했는데 우편료가 한화로 40만원이 들었다. 그때 백여원의 월급에 한화 40만원이면 인민페로 4천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였다. 그때 그가 구입한 책들은 대부분 문학작품으로 그중에 세계명작이 많았다. 류연산 선생의 후기 창작이 력사와 인물전기에 치중해 있다 보니 취재가 필수의 전제조건이였다. 1995년 첫 력사인물을 한국의 한국일보에 련재를 시작하면서 그는 취재에 필요한 록음기, 사진기, 비디오촬영기를 구매했다. 그러다보니 사진기는 세개나 바꾸고 렌즈도 몇개를 구입하였다. 지금 그의 유물중에는 취재중의 록음테프가 백여개, 취재수첩이 십여권, 사진이 수천장이 되고 비디오테이프도 수백시간이 된다. 류연산 선생은 수십년간 발로 뛰는 조사와 연구, 불면불휴의 집필을 통해 동년배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늘 미래지향적인 열린 의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사물을 관찰하면서 인생공간을 부단히 확대했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 칼럼, 수필, 문화기행, 전기 등 다양한 쟝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출중한 재능을 보여주면서 수십년간 근 천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특히 장편문화기행 “혈연의 강들”, “심여추평전”, “류자명평전”, “최채평전”은 우리 민족의 빛나는 발자취와 우리 민족 영령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문화기행과 전기문학작품으로서 선후로 중국 장백산문학상, 한국 기록문화상 등을 수상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 문단 보고문학 수준을 한단계 높이고 력사다큐멘터리붐을 일으켰다고 할수 있다. 류연산선생은 뛰여난 사회활동가로서 일찍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흑룡강신문사 론설위원으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제11기, 제12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교육과학문화위생위원회 위원, 대표자격심사위원회 위원 등 사회직무를 맡고 활동했다. 상품경제의 충격으로 조선문잡지, 출판계통이 충격을 받고 있을 때 그는 사회조사에 적극 나서서 여러측의 의견을 청취한 뒤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민족문화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류연산 선생은 남한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자, 챙기기만 하고 베풀 줄 모르는 삶처럼 가증스러운것은 없다는 좌우명을 갖고 늘 사재를 털어 가난한 이웃들을 껴안고 보듬어주었다. 연변대학에 자리를 옮긴 후에도 류연산은 막강한 실력을 보여줬다. 류연산 선생이 교직에 몸담은 기간은 짧지만 언제나 열정적이고 겸허한 자세로 스승을 존중하고 제자들을 사랑하면서 맡은바 교수와 연구사업을 깔끔하게 완수하였다. 특히 연변대학교 개교 60주년에 즈음하여 모교에 대한 불같은 사랑을 안고 수많은 관련 인사들을 취재하고 밤낮없이 붓을 달려 연변대학교의 력사와 인물, 일화를 다룬 “연변대학산책”을 펴냄으로써 모교의 축제에 소중한 선물을 하였다. 류연산 선생의 유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단 며칠을 살더라도 한번 왔다 갈만한 곳이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나는 천국에 가서 우주공간에서 가장 좋은 관광코스는 지구의 인간세상이라고 홍보를 하고 다닐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홍보대사이다. 이처럼 그는 생활과 자기의 직책에 충실했다. 류연산 선생이 암투병을 한다는 소문이 나자 먼 통화에서 제자들이 문병을 왔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기에 제자들이 불원천리하고 찾아올수 있었던것이다. 발로 뛰는 정열의 작가 우광훈 작가는 류연산 작가의 성공비결을 그의 꾸준함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력사에 대한 깊은 리해력이라는 일가견을 내놓았다. 우리 민족의 민족사는 아직 정리가 잘 되지 못했다. 특히 류연산 선생이 력사연구를 시작하고 취재를 시작하던 때는 더욱 그러했다. 아마 이런 현실이 더더욱 류연산 선생을 민족력사연구에 치우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류연산 선생은 노력가였다. 언제나 쉴새없이 연구하고 답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창작해왔다. 둘째는 행동성이였다. 사실 류연산 선생의 작품 대부분은 취재가 없이는 도저히 쓸수 없는 르포쟝르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편집으로 근무했고 후에 연변대학에서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취재를 떠나기에는 상당한 애로가 있었을것이다. 더구나 취재가 이곳 연변에 국한된것이 아니고 전국 어디나 널려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그는 작품을 위해 필요한 순간이면 출발했다. 명절의 휴가, 휴식일, 출장의 기회를 모두 할애해버렸다. 바로 이런 행동성 즉 결심을 하는 순간 실천을 하는 행동성이 성공의 비결의 하나라 할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이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태가 되지 않는다면 그 어려운 탐방과 취재, 그리고 창작의 외로움을 이길수 없었을것이다. 류연산 선생은 방방곡곡에 답사 흔적을 남겼다. 그런 바탕이 작품의 환경과 인물과 주제로 살아 숨쉬게 됐다.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흑룡강 이 4개 강 류역에 우리 중국 조선족의 뿌리가 있다. 우리는 조선반도로부터 이곳에 이민을 와 이 땅을 개척했고 또 이곳에서 이 땅을 지켜 일제와 피 흘리며 싸웠으며 감격의 해방도 이 땅에서 맞았고 지난 반세기 남짓한 기간 이 땅을 건설해 왔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는 중국 조선족으로 자리매김을 했고 력대의 정치운동과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어오면서도 우리는 이 땅에서 변함없이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으며 그러면서 개혁개방을 맞았다. 그런 의미에서 류연산씨는 이 4개 강을 통털어 혈연의 강이라고 불렀다.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도합 11년의 시간을 들여 4대강을 답사했다. 11년간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흑룡강 이 4대강 류역 1만 5천리를 걸어서 답사, 이 강들에 깃든 우리 민족의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발로 써왔다. 특히 “혈연의 강들”을 보면 그의 발자취가 잘 보인다. 흑룡강을 취재할 때의 정경은 마치 드라마를 보는듯이 드라마틱하기도 했다. 령하 40, 50도가 넘은 혹한속에서 사진기가 얼어서 샤타가 눌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낯설고 땅선 수림속을 헤쳐 가는 길에 수백리를 가도 차 한대 볼수 없는 무인지대를 거쳐 가기도 했다. 흑룡강을 취재하고 돌아와서 그렇게 혹한인 세상을 그렇게 인적이 드문 수림속의 길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차가 고장이라도 생기면 얼어 죽을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하면서 웃었다. 사실 사고를 겪지 않은것도 아니였다. 압록강을 답사하면서 집안으로 가는데 이도백하에서 집안 가는 사이에 길에서 택시가 고장이 나서 중간에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되였다. 눈길에 차를 밀수도 없고 저녁 어둠은 짙어 가는데 오가는 차도 없고 완전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걸어서 마을을 찾아 떠나 경운기라도 빌려 차를 끌어오려니까 눈길에 떠날수 없다고 가려는 사람이 없더란다. 그래 사람이 죽게 된다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경운기를 빌려서 차를 끌어왔는데 천신만고해서 집안성에 들어서니 새날이 밝더란다. 그리고 차가 물에 빠져 온밤 젖은 몸으로 떨던 일들도 있었다. 확실히 그의 취재는 바로 이런 신고속에서 이루어진것이였다. 바로 이런 책임감 있고 력사의 현장과 흔적을 하나라도 놓치면 안된다는 진실에 대한 추구가 있었기에 그의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될수 있었고 중국에 오는 력사학자들이나 민족의 력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될수 있었다. 류연산 선생은 다산작가이고 다재이다. 초기에 소설창작이 위주였지만 후에는 력사, 수필, 칼럼 등 많은 쟝르를 섭렵하고 작품을 창작했다. 특히 후기에 섭렵한 칼럼과 수필들은 력사감 뿐만이 아니라 정론성, 인간성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였다. 류연산 작가는 우선 소설로부터 실화문학에로의 변신을 성공한 문학가이다. 류연산 하면 우리 사람들은 흔히 그를 소설가로 아는 선입견이 있다. 대학교 때부터 소설을 써오던 류연산은 담임교원 박정양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이 수집해오던 컨텐츠를 제공 받는다. 백제의 장군으로 백제가 망한 후 당나라 장수로 빛나게 살았던 흑치상지와 고구려후손인 왕모중에 관한 자료를 넘겨받게 된다. 박교수님과 합작으로 두 분의 자료에 기초해 중편력사소설을 쓰면서 류연산 선생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접하게 됐다. 그 기초에서 1982년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에 배치받은 그는 항일렬사들의 이야기집 장백의 투사들의 책임편집을 맡으면서 우리 민족의 현대사도 접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민족사의 연구가 충분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였다. 특히 그의 가족사적인 영향도 간과할수 없는데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의 의병장이시고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분이신 증조부벌이 되는 류린석 장군과도 인척관계가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유학을 공부하셨는데 류린석 장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가족사적인 뉴대가 그를 민족력사에 심취하게 된 원인중 하나이고 그때로부터 민족사에 사랑과 흥취를 갖고 연구하게 됐다. 류연산 선생은 우리 문단에서 한국에 가장 일찍 간 사람의 하나이며 고국과의 교류에서 가장 일찍 력사의식이 튼 문인이기도 하다. 어느날 그는 친구 다섯명을 불러서 조선족이주실록을 만들자고 제의했으며 자신의 원고료 800원을 선뜻이 내놓았다. 류연산 선생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1991년과 1992년 해마다 3개월씩 한국에 체류해 있으면서 한국에 가있는 조선족들을 찾아 취재, 그들의 애환에 절은 삶을 료해하고 그것을 집필해 1993년부터 실화 “서울바람”을 《청년생활》잡지에 1년간 련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류연산 선생의 창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글로는 “혈연의 강들”을 들수 있다. 그는 허구로 만들어진 소설이 날따라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민족의 력사사실 그대로를 문학의 방식으로 쓴다면 사람들에게 력사도 알려주고 감명도 줄것이라고 인정했었다. 그때가 바로 1994년 11월이다. 그는 이때로부터 자기의 로임으로 우리 민족의 력사가 스며있는 두만강변에 대한 답사를 시작했다. 그는 도보로 다녔기 때문에 경비는 얼마 들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한적 있다. 사실 당시 두만강변에는 차도 없었다. 류연산은 그 엄동설한에 화룡 숭선으로부터 룡정 삼합에 이르기까지 도보로 10일간 답사를 했다. 공사소재지에 가면 려관에 들고 촌에 가면 촌에서 가장 년로한 분을 찾아 그분들 집에서 류숙하면서 흘러간 옛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듬해인 1995년 2월부터 류연산 선생은 기행문학 답사기를 쓰는대로 한국 서울신문에 련재하기 시작했다. 그 원고료를 받아 3월부터 두달에 걸쳐 또다시 룡정 삼합, 개산툰, 선구로부터 도문의 량수, 훈춘의 경신 방천 즉 두만강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는 두만강 답사를 했다. 하지만 두만강 답사로 로정이 끝난것이 아니였다. 류연산 선생은 계속하여 1995년 5월부터 7월까지 압록강을, 1996년 10월부터 송화강을, 1997년에는 흑룡강을 답사했다. 1997년 6월, 북극과 가까운 흑룡강의 발원지 막하에 찾아갔는데 밤 10시에 해가 지고 새벽 2시에 해가 뜨더란다. 그해 12월에 또 막하에 갔는데 아침 10시에 해가 뜨고 오후 2시에 해가 지더란다. 12월의 기온은 령하 54-55도였다. 류연산 선생의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그 곳에 가지 말라고 권고했었다. 그런데 그렇듯 렬악한 환경에서도 막하 2만명 인구에 우리 조선족이 216명이 사는것을 발견했다. 처음 혼자 그 곳에 찾아갔을 때 정처없이 거리를 걷는데 길옆에 “아리랑개장집”이라는 간판이 보였더란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조선족이라고 그렇게 반가와할수가 없더란다. 그의 출현은 현지인들속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다. 연변에서 작가선생님이 왔다며 조선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 남녀로소마다 반갑다고 손을 잡아주었고 그곳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며 우리 민족의 막하에로의 이주로부터 지금의 삶에 이르기까지 밤 새는줄 모르고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술도 억수로 마시게 되였다. 조선족작가가 그 먼 곳에서 왔다니 아리랑, 도라지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그때 민족의 정이라는것이 얼마나 귀중한것인가를 새삼스레 느꼈고 민족의 혼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더욱 큰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렇게 씌여진 류연산 선생의 글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답사기 두만강 1000리 , 압록강 2000리 , 송화강 5000리 , 흑룡강 7000리는 한국 서울신문에 1995년 2월부터 1998년 7월까지 매주 1회로 3년반 동안 련재되였다. 련재가 끝나자 그것을 “혈연의 강”들로 묶어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 초판 서문에서 김병민 교수는 “혈연의 강”들을 읽으면서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쾌감보다는 민족의 력사와 삶의 현장속에 서있다는 숭엄한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고 평가했고 정판룡 교수는 이 책의 재판본 서문에서 이 장편기행문은 중국에 사는 우리 민족의 력사와 현황을 백과전서처럼 집대성한 책이라고 할수 있다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혈연의 강”들은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대사, 민족의 삶의 애환과 이주의 참담한 과정도 그려냈기때문이다. 류연산 작가의 창작반경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내외로 길게 이어졌다. 2005년 류연산 선생은 중편실화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을 창작하여 한국에서 제41회 신동아 실화문학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과 2005년 그가 한국에서 출간한 책 두권은 한국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한 인문부문과 력사부문의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집, 수필집, 기행문학, 인물전기문학 등 지금까지 모두 22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중 중국에서 출판한것은 12권이고 한국에서 출판한것은 10권이다. 2004년 한해에만도 책 4권을 출간한 기록을 남겼다.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력사학가가 아닌 문학가이다. 문학과 력사의 만남에서 문학의 형식으로 력사를 반영했다. 내가 갖고 있는 자료들은 그 력사시대를 살아온 분들이 직접 겪고 보고 듣고 느낀것들이다. 그것을 나의 력사지식으로 려과하고 찾을수 있는데까지 력사자료들을 찾아 대조하며 문학으로 반영했다. 하지만 력사학의 견지에서 보면 나 스스로도 결함이 보인다. 이 면에서는 내가 공를 더 많이 해야 하고 력사학가 차원에서 나를 제고시켜야 한다. 우리의 력사사실을 더욱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를 취미로 읽을수 있도록 필력을 닦겠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부터 류연산 선생이 수집한 자료들은 상당한 분량이고 모두가 소중하다. 그 많은 자료를 책으로 출판하지 못하는것으로 하여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여간만 애간장을 태우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로인님들이 사망되면서 우리 민족의 산 력사들이 소실되고 더는 복원될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류연산 선생은 자신의 답사가 10년 더 앞당겨 진행됐더라면 더 많은 우리 민족의 력사를 발굴했을수 있었을것이라는 후회를 안고 있었다. 이런 조급한 마음으로 그는 력사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한분이라도 더 세상을 뜨기 전에 자료들을 수집하느라 악전고투했던것이다. 생활을 무척 사랑했던 류연산 선생께서 55세의 아까운 나이로 3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아쉽고 절통한 일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류연산 선생의 일대기는 우리 민족 문화발전사에서 한페지를 차지할 분량이기도 하다. 한생을 골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순방답사한 그의 숨결은 오늘도 두만강에, 압록강에, 송화강에, 흑룡강에, 해란강에 도도하게 이어질것이고 남긴 저작들은 후세들의 보물고로 충당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류연산 작가는 비록 떠나갔어도 혼신을 다 바친 그의 문학정신은 살아 숨쉬며 아울러 결사적인 혈투를 보인 작가적인 문학인기품은 우리가 영원히 본받을 귀감이다. "중국민족"잡지 
6    길의 훔친 길 댓글:  조회:758  추천:0  2014-12-19
길의 훔친 길  □ 정호원                미로아처럼 길을 잃었다가 출가 수행자처럼 찾았다. 가취성이 농후하다. 이번엔 길을 훔친다. 내것이 아닌 다른 길을 내 길우에 포개 덧얹어놓는다. 끼살이한다. 길이 길어지고 길이 넓어지고 길이 높아지고 길이 두터워진다. 하여 길의 척도와 광(廣)과 고도와 테두리가 극대화된다. 어떻게 찾은 길인데 함부로 던지랴? 하여 더 층을 덧쌓으려 수축할 따름이다. 누구든 낯선 곳에서 길이 헛갈려 오리무중에 처한 때도 있을것이다. 경험치곤 너무나 잊혀지지 않을 웃음거리다. 그럴 때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려면 남성보다는 녀성에게 묻는것이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메히꼬의 메히꼬시티국립자률대학 연구팀은 남녀 그룹에게 야외에서 버섯을 따오도록 한 뒤 과학적장치를 착용해 이들의 동향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 결과 남녀 모두 비슷한 량의 버섯을 가져왔지만 남자가 녀자보다 에너지를 70% 더 많이 소모할줄이야··· 남자는 버섯을 찾으려고 이쪽저쪽으로 갑절 더 많이 움직였지만 반면 녀자는 한번 간 길은 다시 반복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연구팀은 남성이 지도를 읽는 능력은 녀자보다 월등하지만 녀자는 한번 간 길을 잘 기억하기때문에 일반적인 길눈에는 녀성이 훨씬 밝다고 천명했다. 한편 이런 차이는 선사시대부터 남자는 먼 들판에서 사냥군의 역할을, 녀자는 일정한 구역내에서 채취군의 역할을 담당했기때문이라고 덧붙여 분석했다. 이제 생소한 너덜겅이나 사거리에 나설 경우 길안내를 우선 현합(贤閤)이나 마돈나(madonna), 퍼스트-레이디(first lady)쪽으로 초간택할가보다. 재간택해도 삼간택해도 말이다. 무엇을 누구를 취하는가 하는것이 관건이다. 례하면 혹서를 이기는 방법이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여름에 더우니깐 당연히 랭방설비들이 많이 작동한다. 전기소모가 심각하다. 정부차원에서 대형건물에 대해 일정 온도 이하일 경우 제재했다. 어쩌면 좋으랴? 불피한서(不避寒暑)라고 더위 이기는것도 일종 수양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면 편해지듯이 내심의 번열부터 식혀야 한다. 허겁떨며 무더위 이기려 하지 마시고 더불어 함께 보낸다고 생각하면 한결 편안할것이 아니랴?! 이렇게 더워 헐떡거리는 실내의 공간에서도 폭포수가 흐르는 외길을 걷는 상상련습을 하면 덜 덥다는 판단이렷다. 누군가는 길을 잃어봐야 진짜 려행이라고 단언했다. 기로와 미로를 념두에 둔채 그 어떤 명제를 내세운 호소에 불과하렷다. 기실 미로아거나 실족인 혹은 방황자는 길에서 받은 공포증이 크고 길의 콤플렉스가 많고 길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심기가 불편하니 그럴수밖에 없다. 나도 헤맨적이 있었다. 길우에서 길안의 길을 보지 못해 허둥거렸다. 길눈이 어두웠다. 한번 가 본 길을 잘 익혀두어 기억하는 눈썰미를 갖춰야겠다. 뜻밖의 만남이 있게 해준 길과의 연분이 아닌가! 어찌 보면 길을 잃으면 또 다른 길이 열렸는지도 모른다. 새 작업이 시작된다. 굴착, 발파, 언제 쌓기로 시공중이다. 오솔길과 큰길을 훔쳐다 하나의 궤도에 통합시킨다. 어디 그뿐이랴?! 방천길, 옆길, 갓길, 진창길, 꼬부랑길, 지름길, 갈림길,자갈길, 고샅길, 초행길··· 나만의 독점물이 절대 아니다. 인류의 공유물이다. 물론 선방에서 좌선하는 자세는 아직 나 혼자만의 포즈지만 말이다. 비록 길을 얻었어도 역시 초보자이다. 그냥 아직도 길의 지망생이다. 이게 행복이고 영광이다. 잠재력이기때문이다. 창문을 열었다. 부채살처럼 해살이 밀물로 엄습한다. 나의 길 갈래도 아마 이렇게 무늬를 직조하는가보다. 다래, 머루, 산자두, 포도, 오미자를 따먹는 길이다. 넝쿨 잎새, 줄기, 뿌리, 초리를 되살릴 부활이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효률적인 능동형의 본형이다. 시간의 존재로 립증받고싶다. 구조적인 원리의 확신을 아직은 잠재운다. 대신 길의 디딤돌 주추돌을 깊이 괼뿐이다. 합병된 길들이 대거 불거지고 커지고 실해진채 활개를 친다. 신작로가 되고 아스팔트가 되고 우주선이 된다. 진득찰처럼 한데 끈끈하게 엉켜 붙었다. 시계치륜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시스템치고는 너무나 사개 맞는 배필이렷다. 돌이키니 때론 너무나 결벽증을 보인적도 없진 않다. 완미한것만 추구하고 지엽적인 오류마저 캐다보니 시간랑비, 인생소모가 컸다. 인젠 한눈을 슬쩍 감는편이 바람직하렷다. 길을 버린 업보를 받아도 마땅하렷다. 길에서 고생도 많았고 길과 씨름도 벌였다. 길을 굶었고 길에 피도 흘렸다. 다 괜찮다. 일종 관광으로 여길가 한다. 려행은 길우의 학교다. 탐승객은 도상의 가이드다. 나 역시 그런 련대성으로 다른 길을 하나하나 한갈래한갈래 훔쳐다 내 길의 건널목에 접목시키고있다. 바줄처럼 실하게 꼬아가는 실천의 길깁기이다. 길의 훔친 길이 새 길을 낳고 키우고 손잡고 간다. 나는 길의 달인이자 노예이다. 하여 달갑게 충성한다. 연변일보    
5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의 변증이중성을 리드하는 노하우 댓글:  조회:1426  추천:0  2014-02-25
사상해방은 대외개방을 확대하는 기본적전제이다. 그만큼 부단히 령역을 확장한다. 사상해방의 정도는 대외개방의 심도, 개척혁신의 강도와 경제발전의 속도를 결정한다. 연변(沿边)개방지구로서 연변은 풍부한 자연자원, 독특한 지역우세, 집중된 우대정책, 량호한 발전토대 그리고 유구한 문화함수를 고유했다. 우리 자체의 우세이자 현재바탕이다.    그 가운데서 문화테마는 줄곧 연변의 포장이자 내용물 및 속성으로 작용한다. 경제건설과 대회개방 그리고 홍보물에는 줄곧 연변특징인 문화이미지가 얼비친다. 우리는 문화현상을 자체의 맥락처럼 간주하고 사상해방의 한개 벼리로 삼아야 한다.    지혜와 창조력을 분발시켜 선전문화단체가 시종 왕성한 생기와 활력을 갖추게 하는것은 지역매체의 시대임무다. 현실로 부여된 엄연한 정치의제이다. 이것을 민족사명의 행정과 업무 그리고 의식사유에 긴밀히 투영해 특색있는 인기리에 급부상해야 한다. 사상해방대토론에서 심각하게 실시해야 할 립각점이다. 말로만 허무한 공담을 퍼부을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기 “대선전, 대문화”의 차원에서 선전문화사업의 일대 앙양을 맞아야 할것이다. 그 획기적인 일환을 이끌어내자면 사상해방, 개혁개방을 운운하지 않을수 없다.    현대의 새 단계성 특징을 띤 사회관념의 다원화, 다변성은 우리 문화의 변수를 높이고 한결 업그레이드할것을 촉구한다. 시대의 긴박성과 민족의 당위성으로 그 변증이중성을 감안함이 목전의 과학적발전관이 예시하는 사로이다. 단순한 동기에서 응부적인 일로를 걷기보다 한결 현실적이고도 지향적인 차원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은 각축되면서도 공존하는 한 개의 개념이다. 과거에는 전자가 기존형태로 고착됐다면 현재는 후속적인 련대성으로 새로운 구조격식을 충당했다. 반드시 이 량자의 병진병행으로 문화가 구축될 때라야만 건전하고 완미한 메커니즘으로 이행할수 있다. 그 체계를 여유롭게 고안하고 형세와 민족의 발전수요로 수납할 때 지역경제 역시 괄목할만한 성과물을 구축할것이다.    우리는 문화를 지키고 만드는데만 로심초사했다. 흔히 산업방면은 소외되고 미개척지로 남았다. 하여 따분하고 허무하고 어딘가 애매한 허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문화도 산업화로 이행해 외지로, 해외로 진출할 터전을 닦아야 한다. 한것은 민족브랜드는 자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지구촌 글로벌이라는 인류공유재부이기때문이다. 문화산업의 필요성은 지극히 합리한 매력으로 멀티미디어시대를 매료한다. 첫째, 고부가가치의 산업이라는 점이다. 둘째, 문화산업은 국가 이미지의 제고에도 기여한다는 점이다. 셋째, 문화산업은 파급효과가 막대하다는것이다.    하다면 우리는 민족문화산업을 어떻게 주도하고 리드할것인가?    반드시 시대의 변화와 동조해 과학적발전관으로 출발해야 한다. 사상해방은 사상관념속박을 타파하고 발전의 내재적 동력을 강화하는 객관적 요구이다. 사상은 행동실천의 선도자이고 사상해방은 쾌속발전을 실현하는 황금열쇠이다. 문화산업은 결코 돈벌이라는 수입집계가 아니다. 그런 내재적인 함수를 거느리는 외 문화사업의 구조확장임을 명기할 절박성이 있다. 목전 개척창의하는 용기가 부족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타당하지 못하다면 문화산업 역시 공담에 불과하다. 연변지역의 활성화를 추진하는 첩경 하나가 바로 문화산업을 극대화하는것이다.    급변하는 격변기임에도 답보상태가 없지 않다. 사상관념과 사유방식이 시대의 발전과 뒤떨어지고 새로운 형세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 크게 호소하고 캠페인이 굉장하지만 막상 업무를 추진하려 착수하면 걸림돌이 생긴다. 민감하지 않을 일을 일부러 공연히 예민하게 의혹하고 주춤거린다. 이런 보수적인 페단을 극복하자면 반드시 연변의 실제에 립각하여 사상을 일층 해방하고 자만심리를 극복하며 해이정서를 타파해야 한다. 소극적인 정서와 불순한 관념이 더는 창업의 장애물로 돼선 안된다. 개혁은 고쳐져야 하고 개방은 열리여야 하는것이 아닌가!    연변 민족지역의 실태와 한계를 력사적으로 립증한바 있다. 우리는 자체의 우세와 장원한 타산을 앞세우고 사상해방을 진일보 추진해야 한다. 정책법규에 위배되지 않는 문화산업을 홍포하는 한편 자체의 특색문화풍경을 더 짙게 장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의 번영발전을 기획함에 있어서 실사구시원칙으로 출발하는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자체의 우세적인 문화산업망을 도외시하거나 포기한다. 민속박람회축제를 일회용 손님접대로 부려먹곤 막을 내리자마자 페물로 구겨버린다. 비물질문화유산을 등록하였으나 재활용으로 잠재력을 유발하기엔 력부족이다. 도서, 무용, 미술, 건축, 민속 등 분야의 민족특허권을 공상등록, 법률허가로 인정은 쟁취했지만 후속력은 거의 빵점이다. 수도 북경에 가서 공연콩클무대를 들썽했다지만 연길역에 내리는 순간 증발해버린다. 문화의 생명을 의심하게 되고 예술의 산업성을 경악케 된다. 무턱대고 문예상업구호를 주장하는것이 아니라 가능한 전제하에서의 잠재력을 크게 극대화하자는 발설이다. 민족존속의 필수성과 문화내연성이 당위성으로 능히 추진할 명목이 아닌가!    2007년 연변주정부의 명의로 33가지 주급비물질문화유산보호명록을 공포하였다. 그중 24가지 항목이 성급비물질문화유산보호명록에 들어갔다. 2006년 , 가 처음으로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보호명록에 들어갔고 2008년에는 , 등 8가지 항목이 두번째로 국가급문화유산보호명록에 들어갔다. 연변비물질문화유산보호중심, 연길시민족악기연구소, 연길시북산가두퉁소로인협회 등 문화단체나 협회는 우리 민족 문화산업의 잠재력이다. 한편 비물질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동시에 민간에 산재한 비물질문화유산에 대한 조사, 감정을 진행하여 민족민간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공헌하여야 한다.    우리의 문화령역은 때론 침체와 정지를 면치 못한다. 유명 이벤트를 이끌어내는 적격자이지만 고수하는데 있어서는 패망자거나 투항자이다. 국내외관광객의 유치나 초상인자를 특성화된 콘텐츠로 접목할 때 문화사업의 연장선은 당연히 문화산업의 활무대이다. 지역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을 돕고 서비스, 생산유발, 부가가치를 돕자면 우선 문화의 굴진성이 돋보여야 한다.    연변은 결코 자체의 지역민족생리를 떠날수 없다. 기본적인 대전제를 홀시하지 않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문화산업의 새로운 페스티벌(festival)모식을 연찬해야 한다. 매체는 그 일환으로 자체의 콘텐츠를 산업화, 상업화, 시장화할수 있다고 본다. 그 과정이 브랜드로 되는 첩경일수 있다. 등소평은 사상을 해방함에 있어서 사상과 실제가 부합되여야 하며 주관과 객관이 부합되여야 하며 실사구시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문화산업도 사상해방을 크게 승격시키는 한편 실제주관을 동시에 승화해야 한다. 가장 일약적인 일환으로 문화사업이 문화산업으로 병행하는것이라 하겠다.    고답적인 형이상학이 더는 발붙일 여지가 없는 세상이다. 사상해방에는 “타파하고” “창의”하는 함의가 내포될뿐만아니라 “견지하고” “회복”시키는 의미도 지녔다. 이 량자를 병진하는 수단으로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을 병행하는 노하우의 도출은 실현성이 충분하다. 전통공예, 첨단문화, 민속풍물, 자원중심, 복합클러스터(cluster), 소재단지, 구조조률, 프로그램콘텐츠 등 복구개발에 치중점을 두고 돌파적인 사상해방, 실질적인 개혁개방의 쇄도를 영접해야 한다. 우리의 소명의식 여하가 바로 그 과제를 완수한다.    문화산업의 전략적인 목표는 효과와 속도 및 내실을 필수로 한다. 사상해방은 과학적 발전관을 전면적으로 시달하고 더욱 좋고 빠른 발전을 실현하며 상대적으로 락후한 면모를 개변시키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문화산업의 주도권, 경영권, 전매권이 모두 우리에게 있다. 활을 들었다면 명궁수로 백발백중이여야 한다. 더욱 좋고 빠른 발전을 추진하고 선진지구와의 거리를 줄이자면 자치파워를 활용해야 한다. 그러자면 반드시 사상해방을 일층 강화하고 과학적발전관을 관철, 시달함에 있어서 직면한 새로운 정황, 새로운 문제를 적극 연구하고 개혁개방을 부단히 심화하며 과학적발전관을 추진하여 조화사회건설 등 중요령역과 중점사업에서 새로운 돌파를 가져와야 한다. 사상해방은 목전에 직면한 돌출한 모순과 여러가지 현실적 난제를 해결하는 긴박한 수요이다.    연변의 특징은 문화라는 기호로 잘 알려진다. 연변문화는 변연문화, 자치문화, 접속문화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실정은 바로 문화콘텐츠가 산업브랜드로 불티날 때 더욱 잘 가동된 결과이다.    어떻게 매체미디어도 문화산업에 개입할수 있을가?    의식형태령역에서의 주동권과 참여권도 홀시할수 없다. 공신력을 크게 강조하는 한편 아직도 봉페적인 분야를 향해 자극성을 주입해야 한다. 가령 방송드라마나 연변가요가 산업화, 상업성으로 탈바꿈할 때 우리는 멀티미디어전성기를 누린다겠다. 물론 시장제한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체의 우세와 풍격 그리고 지역특수성을 잘 살려 특수한 소재, 특이한 기법, 특출한 효과로 제작된다면 콘텐츠는 브랜드로 일약 급장성하는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류하는 문화현상이 대국을 쇄도한다고 아우성이다. 반대로 우리 문화선행이 이번에는 한국을 강타할수 없을가? 역시 생산자, 제작자, 방송인의 능동성에 달린 노하우문제이다. 아직은 결과보다 의미가 중요한 시점인만큼 소명의식을 해박하게 잡아야 한다. 콘텐츠가 조선(한)반도를 벗어나 탈아입구할 때 위상이나 위망이 올라가는것은 물론 진정 우리 문화산업의 포인트라겠다. 수용자와 상업토대를 진맥하는 기초상에서 시장확대는 필수적인 우리의 생로이며 흥망성쇠의 갈림길이다.    민족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 민족정신의 육성과 함양에서 우리는 좌적영향의 구속을 팽개쳐야 한다. 한자리에서 그것도 수렁이나 사막에서 답보하는 맹꽁이배역이라면 진작 탈피해야 한다. 문화시처위를 재조명하고 미래지향을 크게 선도할 때이다.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이 근대에 벌려온 피어린 항일투쟁의 귀중한 혁명유산들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무시당하고 장백산개발이 뜨악하다. 게다가 문화재보호가 허술하며 지역우세가 미적지근하다. 공익성문화가 활성화하는만큼 문화산업도 정비례관계로 일로매진할것이다. 매체가 반드시 사상해방대토론의 동풍을 빌어 근린사회, 민족패밀리를 촉동하고 호소해야 하겠다. 해란강닷컴 2월 25일자  
4    술의 철학관 댓글:  조회:913  추천:1  2013-11-12
술의 철학관  정호원 술 마시는 자는 반드시 주덕(酒德)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일찍 "상서"와 "시경"에서 출현했다. 강주정도 금물이거니와 곤드레만드레 역시 취할바 아니렸다. 중국 고대에 술은 신성한 물질로 여겨졌으며 술의 사용은 장엄한 일로, 선조의 제례행사나 귀빈접대 외에 마음대로 쓸수 없었다. 이는 중국 원고시대 주사(酒事)의 습속과 풍격을 점차 형성하게 했다. 술 제조업의 보편적인 흥기와 함께 술은 점차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널리 가담했고 주사행사도 광범해졌다. 술은 인간생활의 한부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20대엔 술고래처럼 억수로 마셨다. 아니 웬만한 주정뱅이를 찜쪄 먹는 호주가악습에 물젖어 있었다. 행악질에 드잡이에 이골이 튼 상습건달풍기가 풍기는 "악동"이였다. 내가 소나기술을 마실 때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인젠 제법 점잖은 량반음주를 선보인다. 초년에 벼락술을 마신 자는 만년에 도태되고 대신 늦은 가마가 천천히 끓는 격으로 그들이 되려 장훈을 치며 점진법을 보인다. 이것이 음주생리이자 주량비결인가싶다. 하여 각국의 음주생태를 무척 궁금해했다. 동양권에서 쉽게 안겨오는것이 한국인들의 음주법이다. 술의 자존심과 오기 그리고 음지에 숨어있는 인간의 리비도까지 발굴한 정체를 굳이 반복하지 않으련다. 폭탄주 하면 우선 한국을 떠올리니 말이다. 일본인들도 한국인처럼 술을 좋아하고 연회를 자주 가지는 편이다. 무사도정신이 음주에도 가끔 비끼나보다. 그들만의 전매권을 행사해오는 더치페이 즉 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일이다. 일명 각추렴, 와리깡(わりかん), AA식이라고도 한다... 린색성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타산적이고 실용적인 일본인의 계산법에 비해 중국에서는 술을 식사할 때 반주형식으로 곁들이며 손님 접대의 1호 메뉴로 등장시키는 관례를 보존하고있다. 주로 즐겨 마시는 술은 맥주이며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극히 희소하다. 주선(酒仙)처럼 술의 순위를 따지고 료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음주법이 바로 중국인의 고로한 초대방식이자 자체의 음주연혁사이렸다. 그런가 하면 서양에서의 미국의 음주문화는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더라도 서로 잔을 권하거나 2차를 가는 일은 거의 없으며 비틀거릴 정도로 취하게 마시지도 않는다. 단지 자기가 마시고싶은 수량의 술을 마시고 특정인이 사겠다고 말하지 않는한 술값은 각자 자신의것만큼 지불한다. 영국은 지역별로 선호하는 주종도 다르고 음주량과 음주문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1982년 웨일즈에서는 일요일에 술을 팔지 못하게 했으며 1976년 스코틀랜드의 술집들은 잉글랜드와 웨일즈보다 일찍 문을 닫았다. 그런 차단으로 음호(飮豪)들을 통제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위스키이며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술을 덜 마시는 축에 속한다. 독일인은 술을 마실 때 술잔을 돌리는 법도 없으며 타인에게 술을 따라주고 권하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또한 술 한잔을 안주도 없이 30여분 넘게 홀짝홀짝 마셔 술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경우도 흔하다. 고추장 맛보기처럼 말이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와 동생 나 셋이서 한상에서 술을 마실 때가 두간했다.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 올리면 아버지께서 비운 잔에 술을 부어 나와 동생에게 차례로 돌렸다. 그런 혹독하면서도 진지한 부자간의 음주풍경이 주정뱅이 나를 구출했다. 내가 아버지 면전에서 술을 배우면서 날탕치던 문란을 극복하던 수련같다. 억병의 고질에서 사임하도록 묵계적인 훈도를 주신 부친님이시기에 더 그립다. 그런 음주교육이 동반해야 바른 기풍이 형성될수 있음을 절감했다. 알고보니 고대 음주례의는 4개 절차가 있다. 바로 절, 추도, 맛보기, 마시기 등이다. 그 뜻인즉 절을 올려 경의를 표시한 다음 술을 땅에 뿌려 자신을 낳아기른 대지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따라서 술맛을 천천히 보면서 주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나중에 잔을 올려 마음껏 마신다. 어른을 섬기고 선배를 존중하던 미덕을 알것 같다. 중국은 56개 민족중 회족이 보통 술을 마시지 않는 외 기타 민족은 모두 음주력사를 갖고있으며 민족마다 자기만의 독특한 음주풍속을 전해온다. 아무리 고상하고 전통적이라고 해서 음주가 무조건 좋다는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술이 몸에 좋다는 과학성의 또 다른 이중성을 결코 간과할수 없다는 지적이다. 즉 술의 량면성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다. 술 자체는 약으로 쓰인다. 건강의 키워드로 활용함을 알겠다. 의학에서 의(醫)라는 말 밑 부분에 있는 유(酉)가 술을 의미한다. 즉 술이 병을 치료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말이다. "동의보감"에서 술은 성질이 매우 뜨겁고 모든 경락을 운행시키며 약 기운을 운행시키고 온갖 나쁘고 독한 기운을 없애며 혈맥을 통하게 하고 위장을 두텁게 하며 피부를 윤기있게 하고 우울함을 없애며 흉금을 털어놓고 마음껏 이야기하게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술은 옛날부터 귀한 약으로 사용돼 왔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모든것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바다물이 얼 정도로 추워도 술은 얼지 않을 정도로 그 내한성이 매우 뜨겁고 독 또한 많기때문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술을 취토록 마시면 독기가 심장을 공격하고 위장을 뚫어 옆구리가 썩고 정신이 혼미하고 착란되며 시력이 희미해져 생명의 근본을 잃게 된다고 기술했다. 술을 놓고 철학을 풀었고 그에게 세계관을 주입시켰다. 이제 술도 생명유기체처럼 작동할지 모른다. 살아있는 모든것은 우주의 조화를 면치 못하고 아울러 신비성을 지닌다. 술도 자체의 마력과 함께 인간의 고용을 덧입었다. 차의 덕이 맑고 고요함이라면 술은 독하고 흥하는 멋이 있다. 이 량자의 긴밀한 결합으로 수용자와 호흡을 같이 한다. 아직도 상정(觴政)이 흥행한다.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하여 정하는 규칙치고는 꽤 얄밉다. 일단 받은 술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남길 때 벌주로 한잔 더 마시는 따위의 약속이니 당연히 세속의 질책을 면치 못한다. 첫잔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두번째 잔은 술이 술을 마시고 셋째 잔은 술이 사람을 마신다 하지 않는가! 그러니 유연하면서도 잠재력이 있는 차의 다례에서 본을 받아 기품을 갖춰야 한다. 그런 출발로 술을 물과 독과 약의 4위일체를 습득하고 제창하면서 점차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본다. 파티주안상의 신선로가 식기전에 또 한잔 감미로운 축배를 들자. 술의 철학관에 취하면서 말이다.
3    우리는 같이 댓글:  조회:1053  추천:0  2013-08-27
우리는 같이 정호원   같이 살아오며 정이 들어 같이 있을수밖에 같이 늙어가며 보살피니 같이 즐길수밖에 서로에게 감사한 일 자신에겐 흐믓한 일 지구에 담겨 인생을 누리는 우리는 같이 하늘아래 땅우를 내처 뭉쳐 기러기로 날며 세상 멀리 꿈을 심느라고 우리는 같이   어제 동행하고 오늘 만나 같이 걸을수밖에 래일 기다리며 홀로 아닌 같이 그릴수밖에 자연에겐 축복 주며 친구에겐 사랑주며 려행에 나선 련인을 느끼는 우리는 같이
2    봇나무행렬 댓글:  조회:1090  추천:0  2013-06-28
봇나무행렬 정호원 연길-왕청-동광-십리평-황구-복흥-륙도위자 코스를 달렸다. 두시간 좋이 달려 신툰이라는 간판아래에 세웠다. 동구밖 입구에 들어서니 청일색으로 한족동네라는데 놀랐다. 더 특이한것은 지붕에 올린 “널판자기와”였다. 고로하면서도 특색적인 풍물로 와닿는 주택 옥개(屋蓋)다. 말짱 홍송널판자로 만든 목와(木瓦)다. 당지자원을 합리하게 리용한 농가의 지혜산물임을 절감케 한다. 초씨성을 가진 농부와 안씨성을 가진 농부 두집을 선후해 방문했다. 경작지 6무를 다루는데 자식들은 전부 시내와 외지로 돈벌이를 떠났단다. “마소의 새끼는 시골로,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한족들의 기성세대는 시골에서 땅농사를 하면서도 자식들만은 출세시키고 견식을 넓힌다는 의지이다. 남녀로소 덩달아 “남부녀대”하는 붐에 비해 한족들의 이동현상은 엄청난 이질감이 있었다. 늙은 내외들은 집에서 잣송이를 따는 부업과 산열매채집을 주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치부의 꿈을 키우고있었다. 집안은 별로 볼품이 없는 가장집물이 전부다. 대조적인 기물은 마당에서 포착됐다. 한마지기에 달할 정도로 휘넓은 뜰에 잣마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노끈으로 포장한 잣마대옆엔 도끼, 낫, 도리깨, 농기구와 서슬 푸른 전기톱이 놓여있었다. “우린 이 고장에서 43년간 살아오우다. 줄곧 터전을 지키고 밭을 다루고 농살 짓지유…” 안씨는 당당하게 어깨를 추스르며 말한다. 차는 다시 달린다. 도로 량옆엔 전통적이면서도 고로한 한족농사(農舍)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토피집을 둘러싼 벽체와 “복(福)”자 주련을 붙인 대문짝, 돌로 쌓은 담장, 마소들이 들어선 마구간은 바탕이 구전한 살림 그 자체였다. 바람벽이 떨어져나가고 창호지가 너덜너덜하고 지붕이 고삭은 조선족농가들에 비해 원형을 잘 보존한 원초적인 집단부락들이다. 옥수수를 말리는 덕과 농기계, 비둘기장은 그들만의 유표한 징표로 토착민의 포실한 가계내실을 마냥 표방하고있었다. 복흥에 이르니 해가 서너발이나 솟아올랐다. 식당은 말짱 한족업주가 위주였다. 가물에 씨나듯이 요행 찾은 “조선족개장집” 간판을 보는 순간 동질성에 뭉클해났다. 한달음에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맙시사-벽에 붙은 쌍 “희(喜)”자가 이방인의 얼굴처럼 서먹하고 애매하기만 하다. 식당구조 역시 한족구들이다. 칸막이 벽지에도 창을 꼬나든 괴물의 풍속도가 걸렸다. 주련처럼 나붙은 문구가 벽모서리에 또 걸렸다. “한족식당이구나. 참…”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것 같은 둔갑술에 의아쩍어 반문할 때다. 곱상하게 생긴 안주인이 동남 부엌에서 살룩대며 다가와 입을 연다. “아니예요. 우린 조선족이지요. 남편은 복흥병원에서 화험원으로 근무하고 저는 훈춘 쌍신에서 시집온지 몇십년 되는데요. 김치장사를 하다가 개장집을 경영하는데요…” 박씨성을 가진 녀인의 해사한 인사치레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소개를 듣고보니 복흥엔 조선족이 거퍼 몇명 없고 조선족식당영업은 자기들이 혼자란다. “원래부터 조선족들이 드물었는가요?” “이전엔 조선족들이 꽤 많았지요. 인젠 학교도 빈 집으로 됐고… 조선말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그녀의 한숨이 실린 한탄은 듣는이로 하여금 역시 갑갑하게만 군다. 동포군체가 둥지를 떠나니 오붓했던 주변환경도 대뜸 수은주가 내려앉아 을씨년스럽다는 결론이렷 다. 다시 출발했다. 장백산어구에 들어선 감이 들었다. 산등성너머로 삐죽삐죽 내민 봉우리들이 가을과 겨울의 환절기에 접어들어 제법 선명하게 두각을 드러냈다. 도로 량켠은 훤칠한 라목들의 대렬이 의장대처럼 씩씩하게 서있다. 차창으로 찬찬히 보니 일초일목마다 서로들 닮아버려 대동소이를 판박이처럼 만들었다는 핍진감이 앞선다. 마술과 술사가 동시에 작동하는 변화다단한 요지경을 내가 손으로 굴리나보다. 나는 경이감에 찬 눈길로 잎이 다 떨어져나간 겨울수림을 눈빗질하고있다. 뭔가 이상야릇한 초점이 끝내 포착됐다. 한것은 십리평을 지나서부터 비탈에 들어선 나무숲이 일매지게 봇나무로 울울창창하다는 발견에 동공을 키워야만 했다. 금창림장에서 잠간 포즈를 취할 때도 미처 예견하지 못한 풍경이다. 무심한 관찰이 아니다. 봇나무수림은 어찌 보면 근거지를 떠나버린 개척자들의 등신상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 착상이자 새삼스런 발견이다. 그분들이 옹기종기 모여살던 마을 산자락에 원주민들의 대리동상처럼 일떠선 행렬이 바로 봇나무수림이 아닌가! 하얀 치마자락을 날리는가 아니면 두루마기를 휘저으며 아리랑고개를 톺아오르는가! 백의겨레의 이동대오가 잠간 숲에 머물러 다리쉼을 취하는 포즈 같기도 하고 밀림을 빠져나가는 경의비마(輕衣肥馬)가 안개발에 가리운채 서성거리는듯하다. 봄과 여름엔 무성한 록음에 덮여져 형체를 분간치 못했으나 락엽으로 잎새가 내려앉은 지금은 라목들로 확연하게 현신하고있다. 백의동포가 마을을 비우고 산중의 절을 지키는듯 아니면 초혼하는 모습으로 샤쯔자락을 흔들어대는듯하다. 기발한 착상은 아니고 불길한 조짐도 아닌 그 어중간한 중립상태에서 내 사유는 골풀이를 친다. 유복지인들이 줄레줄레 떠나는 프로필을 보는 심정은 서글픔만 아니다. 말못할 자가당착에 휩싸인다. 흰 봇나무가 앙상한 비석처럼 동토에 서있다. 정든 보금자리를 훌훌 떠나 외로운 또는 삭막한 집산지에 우두커니 서 바들바들 떠는 환각의 영상으로밖에 안겨오지 않는다. 끼끗하고 말쑥하던 봇나무의 이미지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대신 헐벗고 앙상한 몰골이라는 점이 심히 불안스럽다. 또 살길을 찾아 원정의 촉도난에 올라야 하는 가난의 핍박이라면 운명의 추방이라겠다. 갈대밭에 날아든 갈매기라면 다른 시각으로 흡족하게 웃어줄수 있으련만…한족들은 나무기와를 얹은 두실와옥에서 포실한 살림살이를 영위하고 동족들은 광야라는 객지에 할수없이 나앉아야만 하는가?!…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선에 서서 사진을 남겼다. 한창 시공중에 있는 포장도로옆의 높다란 간판을 파노라마로 기념촬영을 했다. 봇나무행렬을 배경으로 시대의 추억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었다. 한걸음 북으로 더 내디뎠다. 바로 흑룡강성 땅이다. 곧추 가면 로야령, 로흑산, 동녕, 수분하라는 흑룡강성 행정구역이다. 봇나무행렬은 이어지고 자리뜸하면서 전진한다. 하늘이 높이 더 열리고 땅이 더 넓게 뻗어간다. 피난민이 걸어온 리정표이고 위치를 찍어주는 패쪽이다. 아직도 망국노와 주인공의 시처위가 가끔 헛갈릴 때가 있다는 산 증거라겠다.
1    미이라실체 댓글:  조회:1046  추천:0  2013-02-19
[수필] 미이라실체 정호원 아버지는 여느 촌민들과 마찬가지로 토장을 했다가 면례를 했다. 1990년 1월 14일 타계한 아버지를 2001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면례로 부모님을 합장했다. 하여 미이라로 보존되기는 글렀다. 허나 추모의 허허벌판에서 부친은 늘 생동하면서도 영원한 미이라로 계신다. 고대 애급인들은 시체처리방식에 따라 향유를 바르거나 다른 방법 등으로 오래 보관할수 있도록 처리된 미이라를 만들었다. 시대에 따라 처리과정이 다양했지만 내장을 제거하거나 제거하지 않았지만 썩지 않게 잘도 보존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체에 송진을 발라 마포로 싸는 과정만은 항상 일정했다. 애급외에 카나리아제도의 구안체인(人)과 뉴기니, 오스트랄리아 사이의 토러스해협 연안에 사는 부족, 남아메리카의 잉카인들도 미이라를 만들었다. 1991년 해발 3200메터의 알프스산맥 티롤의 빙하지대인 Otztal 계곡에서 얼음에 싸여 바짝 마른 미이라형태로 돼있는 태고때의 원시인 시체 한구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난 매년 청명과 추석에 환고향하면 선참으로 조상의 산소를 찾는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추념은 늘 나를 괴롭히고 분발을 힌트하기도 한다. 구천을 우러러 고인을 되뇜이 괴롭고 부성애를 재생할 땐 힘이 생긴다. 어버이들이 누워계시는 선산이 미이라를 보존한 박물관으로 안겨옴이 그래서 당연하다겠다. 알프스산맥에서 발견된 원시인의 미이라가 세계 이슈로 나도는 가운데 나는 문득 내 가문에도 그런 전대미문의 미이라가 보존됐구나 하는 느닷없는 발견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는 방부제도 어떠한 약물처리도 하지 않은채 아직도 생생한 프로필로 액틀모습처럼 나를 지켜보신다. 2012년 1월 14일은 바로 아버지의 기일제이다. 기제사랬자 곡소리나 분향은 없다. 그저 고요히 시간을 죽이며 어버이의 은혜를 머금을 따름이다. 키보드를 치며 가친님의 숨결이 들려오는 소리에 서재 중앙벽을 앙시한다. 1980년 11월 24일에 찍은 어버이의 흑백유상이 유심히 나를 굽어보신다. 원시인의 미이라가 남긴 유물을 과학자들은 세밀히 파악했다. 아버지의 유품은 그에 비하면 꽤 현대적이고 구전하다겠다. 그런만큼 내 가문의 미이라는 무시로 연구가 가능하고 참배가 신통한셈이다. 아버지의 일기책과 옥편, 회중시계, 족보만 봐도 이를 립증하고도 남는다. 난 평소에 아버지의 지문이 깃든 옥편과 회중시계, 족보를 곧잘 만지작거린다. 색이 바래진 종이장이고 중고품같은 시계지만 가친님의 애용품인 전가지보이기에 소중히 다룬다. 고인의 피부를 다시 느끼는 촉감이 여전하다. 내가 만약 과학자여서 아버지의 유체를 미이라로 해부한다면 맘의 상처부터 밝혀낼것이다. 동란의 금혁지세에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는 허물로 생채기를 남겼다. 앙급자손(殃及子孫)이란 말을 떠올린다. 중중농의 성분딱지는 조부의 강제퇴학명령처럼 가친의 한생을 지지리도 찌물퀐다. 윤동주모교를 2년 선배로 졸업한 향학열이 중학교로 진학할 기회를 포기해야 했는가 하면 빈하중농선전대와 해방군공작대들에게 기시를 당하고 체신에 맞지 않게 알은체해야 했다. 조부가 아버지를 3대 장손이기에 4촌 동생들의 월사금을 벌라며 강박적으로 중퇴시켰고 《로삼편》을 읽던 나날엔 구척장신을 몇뼘은 줄여야 했다. 아버지는 생전에 서인(庶人)으로 살았고 역시 평민으로 하늘나라를 떠나셨다. 하다보니 귀중한 선물이거니 위대한 기념물은 없다. 대신 세대교체적이고 가족적인 련대성 성총에서는 꽤 오롯한 유산을 남겼다. 생전에 베풀어주신 부성애의 할애인상이 제일 소중한 재부이다. 오늘 아버지의 기제사에 특히 알프스산의 원시인 미이라를 떠올리면서 아버지의 실체를 더 절감하게 됨을 어쩔수 없다. 과학자들은 원시인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두가지 부시깃을 출혈을 멈추게 하기 위한 의료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을것이라고 보았다. 구리로 만들어진 도끼날을 리용한 도끼를 소지한것으로 보아 이 원시인은 부족에서 위치가 상당히 높았던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역시 생전에 부시돌의 불을 솜에 켜던 기억이 잠간 있다. 성냥이 떨어지고 라이타 휘발유가 없을 경우 간혹 부시깃을 사용했던것 같다. 아버지의 기제사에 부시화제를 꺼내니 추모의 불꽃이 명멸하는걸 분명 보고있다. 호미, 낫, 삽, 괭이를 도끼와 함께 잡고 일년사시절 밭을 다루었고 나무하러 오봉산, 노루바위, 만진기, 사시평으로 다니셨다. 당년의 로동연장과 초부도구들이 미이라의 영원한 소지품으로 매김될줄이야...사람은 가도 자취는 남고 열매는 져도 향기는 남는다. 조부는 76세, 조모는 84세, 가친은 78세, 모친은 75세로 각각 향년을 보냈다. 평균수명을 따질 때 가히 나의 생명시간도 집계가 나오지 않나싶다. 그런 시공간을 넘나들며 충성과 추모를 이효상효(以孝傷孝)처럼 덧붙일가 한다. 불가사리 미이라로 영존할 가친님의 장구한 명복을 빈다. 이런 소망으로 경주 정씨의 충효가성(忠孝家聲)의 조형력을 보천솔토(普天率土)에 넘치게 이룰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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