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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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하면 동북3성과 내몽골에 집중 거주하거나 또는 개혁개방 이후 동북에서 산해관 이남으로 많이 이동분포되어 있는 걸로 모두 알고 있지만, 하북성 청룡만족자치현의 어느 시골에 ‘박씨마을’이 있다는 것은 거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곳 ‘박씨마을’은 예전에 일부 학자 및 기자들이 왔다간 이외 우리사회에 많이 소외된 곳으로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의 사각지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씨마을’은 중국조선족 역사과정에서 하나의 중요한 표적지로 남아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를 간략히 말하면 아래와 같다.  명나라 말기 동북에 분포되어 있는 여진족의 한갈래인 누르하치가 점차 세력을 키워 내부를 통일한 후 후금정권을 건립하였다.    이후 후금은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명나라와 대항하고 조선왕조를 침입하여 많은 조선사람들을 포로 납치해서 만족귀족들에게 배분해주고 만주8기군에 편입하기도 하였다.    1636년 후금정권이 국호를 ‘대청’으로 개칭하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1644년에는 산해관 이남으로 진출하였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이때 만족 귀족과 8기군을 따라 많은 조선사람들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지역에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북경 근처, 하북 승덕, 청룡 등 지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청룡의 ‘박씨마을’ 선조들이 포함되었는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이 된다.    이와 같이 ‘박씨마을’ 선조들은 중국조선족 역사의 시초와 연결되었고 ‘박씨마을’도 우리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되었다. 물론 수백년의 시간이 흘러 이 곳 박씨사람들은 점차 현지에 동화되고 만족 또는 한족으로 되어있었으나 박씨성, 선조가 조선인이라는 것은 잊지 않고 대대로 전해왔다.    이후 신중국이 건립되고 민족평등정책의 혜택하에 가슴 속에만 남아있던 민족의식이 되살아나서 1964년부터 민족성분을 조선족으로 고치기 시작하였고 20세기 80년대 말기 청룡현 소속의 몇개 마을에는 수백명의 조선족이 생활하고 있었다.   청룡현의 ‘박씨마을’에 관하여 20세기 80년대 말 이후 일부 학자와 기자들이 이곳을 다녀갔고 연변대학 역사학부 석사연구생들이 현지 조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신문기사와 학술연구에 제한되었고 ‘박씨마을’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은 거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등한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필자 역시 오래전부터 한번 가본다는 것이 미루어져 이번에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2020년 10월 3일 도시우리말학교협의회 제6회 교사연수회가 진황도에서 개최하는 계기로 회의 참석자 전체가 ‘박씨마을’을 찾아갔다.    우리가 간 마을은 팔도하진 탑구촌으로 박씨가족이 제일 많이 사는 마을이었다. 탑구촌은 기타 농촌지역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산골마을로 예전에는 외계와의 연계도 많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 우리민족이 살고 있다는 것은 만약 사전에 일정한 요해가 없으면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조선족마을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였고 박씨사람들에게도 우리민족의 흔적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에서 단지 ‘조선족’이라는 집념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다.  필자는 마을에서 태어난 69세 노인 및 그 자녀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그들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의식만은 아주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김치랑 된장 같은 것을 좋아하고 한복도 한번 입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같은 민족의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느낌이 강하였다.      ▲사진설명: 마을에서 출생한 69세노인과 대화 중(2020.10.03)   이번 탐방에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박씨가족 사람들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대해주었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으며 우리가 가져간 한복을 입은 부녀들과 아이들의 얼굴엔 기쁨이 역력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이동 중에 마을사람들이 호기심 차서 누구냐고 묻기도 하였는데 박씨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친척들이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는 아주 감동을 먹었고 한편 소외된 그들의 마음 오죽했을까 하는 착찹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단체행위로 박씨마을을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전 준비는 좀 있었지만 마을에 대한 요해는 아주 적었다.    현재 탑구촌은 도로가 마을을 지나고 외계와의 연계도 많아 보였으나 마을 면모는 산골마을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고 박씨사람들의 생활도 그리 넉넉하지 않는 것 같다. 한때는 석탄부업으로 생활이 좀 좋아지기도 하였다지만 마을을 떠난 사람들도 많아졌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20세기 80년대 말 이 마을의 박씨성을 가진 조선족이 260여명이 있었지만 현재는 20여 가구에 100명도 되지 않아 박씨마을사람들이 점차 더 흩어져 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이번 걸음에서 이곳은 우리민족사회와 완전히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여기 박씨사람들의 신분은 조선족이지만 조선족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여 있었고 조선족농민들이 노무로 많이 가는 한국과도 전혀 연계가 없었다.    박씨마을사람들은 민족사회에서 잊혀진 존재이지만 조선족이라는 집념속에서 지금까지 왔으니 참 대단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계속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리 역사과정에서 중요한 한폐이지를 장식하는 청룡현 박씨마을은 흐르는 세월 속에, 그리고 민족사회에 소외된 아픔 속에서 점차 초라해지고 소실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이렇게 호소하고 싶다.  박씨마을의 지난 일은 이미 지나갔고 기성세대들에 대한 도움도 필요없는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박씨마을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하여 우리사회에서 뭘 좀 할 수 없는지 심사숙고해보았으면 한다.    2020.10.08 흑룡강신문 연해뉴스
53    우리자신이 “선족”(鲜族)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댓글:  조회:2704  추천:0  2017-10-19
우리자신이 “선족”(鲜族)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정신철         우리는 일부 매체에서 조선족을 “선족”(鲜族)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가끔 보았다. 이에 대해 우리사회 일부에서는 그릇된 호칭을 고쳐야한다고 해당부문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도 을 작성하여 중공중앙선전부와 공안부에 보내여 각 매체와 공공기관에서 조선족호칭을 정확히 사용하도록 요구하였다.        하지만 항간에서는 아직도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호칭하는 현상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조선족자신들이 “선족”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적지않았다. 한번은 연교지역 모 가도판사처 부주임과의 대화에서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하기에 필자는 조선족을 “선족”으로 호칭하는 것은 틀렸다고 말해 주었다. 이에 상대가 말하기를 “본인도 원래 ‘조선족’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조선족들이 ‘선족’이라고 자칭하는 것을 많이 듣고 자기도 모르게 ‘선족’소리가 나간다”고 하였다. 사실 필자도 조선족자신들이 “선족”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가끔 들었다.    여기서 보다시피 타민족의 입에서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호칭한다고 무조건 반발하는 것보다 먼저 우리자신이 “선족”이라고 호칭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선족”이란 호칭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통치의 유물이며 일본침략자들이 우리민족을 말살하고 비하하는 호칭이다. 이런 호칭을 우선 우리머리속에서 철저히 배제해 버려야 한다. 이래야만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호칭하는 현상을 단절할 수 있으며 타민족이 “선족”이라고 호칭할 때도 그 잘못을 정정당당하게 지적할 수가 있다.   
52    정음우리말학교를 지속적으로 꾸려나가자면… 댓글:  조회:3734  추천:0  2015-05-14
정음우리말학교를 지속적으로 꾸려나가자면… 정신철    이번 학기중에 교실문제로 정음우리말학교가 문을 닫지않을까하는 의구심마저 생긴적이 있다. 10개 반에 120여명이 되는  학생들이 장소가 없어 헤메는 정경을 상상만해도 가슴이 떨렸다.  다행히 어려운대로 교실을 찾아 수업을 이어갈 수가 있어 잠시나마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안정되지 못한 장소때문에 우리말학교가 언제 또 앞과 같은 일이 생길지 누가 장담하랴? 교실문제는 항상 나를 불안케 하였다.   지금 교실을 찾아 수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 하나는 교실임대조건와 요구가 아주 까다로와 합작이 잘 될는지 걱정이었고 또 하나는 임대료가 원래 예산보다 훨씬 높아 불안하였다. 사실 정음우리말학교가 개교되어 5학기째 되었지만 이전에는 학교후원회리사회의 정기적인 지원과 북경조선족사회의 후원으로 운영경비에 대하여서는 거의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보면 학교운영경비도 예산을 넘어 적자가 생길 우려가 없지않다.  학교 수입과 지출을 간단히 라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기적인 수입원은 후원회리사회자금 약  10만원, 모 재단지원 약 6만원, 그리고 학부모후원금(이번 학기부터 학부모후원금으로 학생일인당 300원을 받았음)4만원 정도로  모두 합하면 약 20만원이 된다. 지출은 현재 토요일 하루 수업에 소요되는 경비는  6950원(교실임대료 4200원, 강사료 2750원)으로 1년 2학기(32주)에 소요되는 경비는 222400원이 되고 이외 활동비용, 필수품지출 등 잡비까지 합치면 거의 250000원에 달한다. 즉 지금대로 나가면 약 5만원의 적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음우리말학교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다른 한면에서 보면 학교운영을 한 단계 높이는 새로운 계기가 될수도 있다. 현재 학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둘러싸고 많은 방안들이 론의되고 있다. 하나는 회사를 꾸려 학교장소확보와 경비부담을 일부분 담당하여 학교운영의 뒷심이 되어주는 것인데 여기에는 헌신적인 경영자가 나서야 될 일이다. 두  번째는 학부모들의 후원금을 높여 자체의 힘으로 안정적인 장소를 확보하는 것인데 얼마나 많은 학부모들이 이에 호응할 수 있는지 파악이 가지 않는다. 세 번째는 북경조선족사회상대로 모금운동을 벌려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여 장소를 확보하고 학교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것인데 이것 역시 그리 쉬운 일이 아닌것 같다.    이상과 같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우리말학교운영을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 있으며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노력만 하면 실현할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시에서 민족적 정감을 키우고 민족문화를 전승하는데는 우리말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정음우리말학교는 북경조선족사회 전체성원들의 힘을 합쳐 꾸려나가야 한다는 신념이다. 정음우리말학교를 안정하게 지속적으로 운영하려면 먼저 장소문제를 윤활히 해결해야 한다. 장소확보도 한마디로 말하면 역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어찌보면 학교운영에 소요되는 장소확보나 경비부담은 우리사회 전체성원들이  힘을 합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가령 우리 각 자가 일년에 단 외식 한번만을 줄이고 그 돈을 우리말교육에 쓰이게 되어도 어마어마한 자금력이 되지않겠는가… 문제는 단지 우리말교육에 대한 홍보와 동원이 잘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같이 동참하고 기여할 기회가 없었을 따름이다.   (2015.05.10)
51    교실을 찾은 순간 댓글:  조회:4546  추천:1  2015-04-11
교실을 찾은 순간 정신철   내일에 수업해야 하는데 오늘 오전에야 교실이 확정되었다. 잠시나마 숨을 돌리기는 하였지만 이번에 교실찾는 일을 통하여 나는 개개인의 무력함을 너무나도 깊게 느끼게 되었다. 혼자 아무리 뛰여다녀도 일이 잘 풀리지않으니 마지막에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않았다. 하지만 도시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아이들에게 민족언어문자만은 꼭 배워주어야 한다는 신념이 좌절감을 이겼다.  또 이것이 결국 교실을 찾을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정음우리말학교가 고고성을 울린지도 이제는 다섯학기가 된다. 북경조선족사회의 성원과 학부모들의 더 높은 열정으로 학교운영은 그런대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이번 학기가 시작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할 줄이야! 우리는 원래 사용하던 교실을 일시로 쓰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교실문제로 학기중에 기획했던 봄야유회를 학기초에 조직하게 되었고 교실을 찾아 헤메던 그런 시각들은 참 고통스럽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하여 새롭게 생각되는 일들이 많다. 그 하나는 무엇때문에 우리말을 배우는가?  두번째는 우리말을 배워주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세번째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우리말 배워주는 좋은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사회 전체 성원들이 깊게 생각해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한 민족사회의 일원으로 어느 정도 민족성을 유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가령 민족언어와 문자를 잃게되면 민족성도 거의 상실되어 간다고 볼 수있다. 그럼 민족언어문자교육을 진행하는 과정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것은 해당 당국의 무관심도 있고 민족성원들의 등한한 점도 없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는 많은 민족성원들이 나서서 당국에 호소하여 제도적 지원을 유도하는 것도 좋지만 현재 상황은 그렇게 여의치 않다. 다시 말하면 제3자에 기대할 수 없기때문에 자기힘으로 해결할 수 밖게 없는 상황이다. 이러자면 민족성원 모두의 힘을 합쳐 훌륭한 우리말학교를 꾸려나가야 한다.    나는 우리아이들이 우리말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주 기특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안정적이고 쾌적한 환경을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는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곳곳에 있는 외국어학원의 조건을 초월하지 못해도 그들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우리말학교가  기타 외국어학원보다 여건이 더욱 좋을 때 우리아이들의 민족적 긍지감과 자신감이 얼마나 강할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이 번 교실찾기를 통해 현 상황에서  도시 우리말학교운영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체험하게 되었고 의무감과 책임감이 더욱 무겁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 번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여서 이렇게 두서없이 느낌을 적어 본다.                                                                                                                                                  (2015.04.10)  
50    城市少数民族语言文化传承面临困境 댓글:  조회:4381  추천:2  2015-04-03
  改革开放以来,大量的少数民族人口从边远山寨、村庄进入大中城市,城市少数民族人口迅速增多。据不完全统计,我国目前少数民族流动人口规模有2000多万人。随着城市少数民族人口增多,在城市使用少数民族语言文字问题和传承发展民族文化问题日益凸显。然而,由于许多城市没有相关教育机构,少数民族成员,尤其是少年儿童没有机会接受民族语言文化教育,城市少数民族语言文化的传承与发展面临严重的困境。 语言是民族的重要特征之一,也是传承和发展民族文化的主要手段。在民族文化的传承发展中,民族语言是不可或缺的。为满足城市少数民族成员对民族文化的需求,解决城市少数民族儿童的民族语言文化教育问题,少数民族成员曾创办一些民族教育机构,如北京朝鲜族创办的“长白学校”、“中央民族大学附属小学朝鲜族部”等。但是,这些民族教育机构由于受多种因素的影响,最终不得不关闭。城市民间自办的民族教育机构难以存活,究其原因主要有:①不被城市政府及相关部门所重视,缺乏政策指导;②民族教育机构没有名分,开展活动缺乏合法性;③民间自身实力弱,缺乏师资、场地无法解决、办学经费不足等。 在城市,设立什么样的民族教育机构,如何进行民族语言文化教育,这些都是城市少数民族人口非常关注、并希望尽快得到解决的问题,也是各级政府及相关部门应该关注和重视的一个新问题。而从现实看,设立“民族学校”的条件、环境等不具备,但设立一些城市民族教育机构,利用周末进行民族语文培训却具有可操作性,它简捷、时效,家长们也乐于接受。然而,这样的民族教育机构及民族语言培训活动也需要政府相关部门的支持和支援,否则也很困难。 以北京为例,为满足北京朝鲜族群众对民族语言文化教育的需求,一些在京朝鲜族人士于2012年1月开办了周末民族语言培训班,它得到朝鲜族社会的广泛欢迎,坚持至今,参加学习的学生由6人增加到100多人。 参加民族语言培训的学生数量日渐增多表明,一是城市少数民族成员对于开展本民族语言文化教育的意愿很强,二是城市确实需要进行民族语言文化教育的相关机构。然而,在进行民族语言培训活动中遇到了许多问题和困难,其中如下几个问题最为要紧。即,一是归属问题,不清楚类似公益性民族语言培训应该由哪些部门负责管理和指导(是民族工作部门还是教育行政部门?),怎样才能名正言顺?二是教室问题,民族语言培训要稳定而持续地办下去需要固定的场所,其最理想场所是借用当地中小学教室,但因没有名分几乎不可能,哪怕租赁都不行(据了解,当地教育行政部门规定不允许学校对外租赁教室);三是经费问题,培训活动基本靠城市本民族成员的赞助,但从其性质看,类似公益性民族语言培训像社区学校、公办职业技术培训学校一样应该得到政府相关部门的政策支持和资助。 如今,随着城市化进程加快,少数民族人口大量进入城市已变为常态,而且许多城市中非当地户籍少数民族人口远多于当地户籍少数民族人口。城市民族工作范围、对象需要拓展,其中也包括关注和解决城市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语言教育的问题,政府相关部门应拿出相应政策和措施。现阶段,由于受多种因素限制,在城市创办公立民族学校不太现实,但利用周末进行民族语文教育切实可行,实际上多数少数民族成员也是希望先将周末民族语言培训班办好。而且,作为公益性民族语言培训活动,应得到政府相关部门的支持和资助。 在城市,少数民族成员希望设立民族教育机构进行民族语言文化教育的诉求,是他们正当合法的权益,少数民族学龄儿童接受民族教育是他们的权利。而根据宪法和相关民族政策,及时解决城市没有民族教育机构问题,满足少数民族合理诉求是城市政府及其相关部门应尽的责任和义务,也是贯彻落实党和国家民族平等政策和保障城市少数民族人口基本权益的重要举措之一。 城市政府及相关部门应该自觉地执行党和国家的民族政策,高度重视民族教育问题,切实采取有效可行的政策措施,积极主动地支持和帮助城市民族教育,解决好城市少数民族子女的民族语言文化教育问题,打消他们对民族语言文化传承断代的忧虑,让少数民族人口更好地融入城市,促进民族团结和城市社会和谐稳定。 现阶段城市民族教育,可根据当地实际采取如下几种途径:一是在少数民族人口比较聚居的社区学校增设周末民族语言文化培训项目;二是在一些公办学校内设立民族教育部(班),平时正常上课,利用业余时间进行民族语言文化教育;[①] 三是从政策措施上,大力支持和帮助民间自办的民族语言周末培训班,及时解决面临的实际困难。 上述这些途径,无论哪一种都不是很难的事情,关键在于城市政府及其相关部门能否给予关注和认真对待。相信只要相关城市政府及民族、教育行政部门认真落实党和国家的民族政策,倾听城市少数民族成员的呼声,就一定能够满足城市少数民族子女接受民族教育的要求与愿望,让民族语言在城市开花,让民族文化在城市传承和发展,并为城市多元文化增添和谐色彩。 郑信哲(中国社会科学院民族学与人类学研究所) 朝鲜语周末培训班 简介   一些在京朝鲜族人士开办的周末朝鲜语培训班(暂定名:正音朝鲜语周末学校)是一个公益性民族教育活动,其目的是开展民族文化、民族语文教育,为发展民族语文教育和传承优秀的民族文化做贡献。     20世纪90年代以来,大量的朝鲜族人口从东北聚居地区走向山海关以南城市,但由于这些地区没有相应的朝鲜族民族教育机构,朝鲜族青少年学习民族文化、民族语文的机会明显减少,许多家长因自己的子女没有机会学习民族语言和民族文化而苦恼。 2012年末,为满足城市朝鲜族群众对民族语言文化教育的需求,一些在京朝鲜族人士开办了以朝鲜族小学生为对象的朝鲜语培训班,于12月1日—2013年1月12日试办一期,当时有6名小学生参加。2013年3月9日,朝鲜语周末培训班正式开课,学生有30名,每星期六上课,每期32课时。 朝鲜语周末培训班的开办,得到北京朝鲜族社会团体及各界人士的大力支持,也得到了广大家长的积极响应,如今培训班已办第五期,学生由最初的6名增至100多名。 借此,对积极支持和资助开展民族教育的社会各界人士深表谢意!也真诚希望各级城市政府及其相关部门给予关注和相应的支持! [①] 如我们所知,由于历史等原因,在日本有几十万朝鲜人,但日本不愿承认朝鲜人的存在,随之朝鲜人民族教育也被排挤。就是这样一个日本,一些地方不仅承认朝鲜人自办学校,而且在公立学校里设分校或“民族班”,专门招收朝鲜人教师担任教学。如,1966年,在日本的朝鲜学校超过140所,公立学校分校14所,民族班30个,设民族下午班和晚班的学校有208所,学生达4万人;20世纪90年代,大阪府所辖地区130多所学校设置了“民族班”,民族教师有70名。(参见郑信哲《在日朝鲜人历史及其现状研究》,中国方正出版社,2007年,第154页)  
49    조선반도 통일과 중국조선족의 역할 댓글:  조회:3769  추천:2  2015-01-12
조선반도 통일과 중국조선족의 역할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1. 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재 세계상에서 동일민족이 아직 서로 등지고 통일을 이루지 못한 지역은 조선반도밖에 없을 것이다. 국토가 분단되고  동일민족이 갈라져 있는 한 통일문제는 계속 거론될 것이다.  하지만 통일을 어떻게 실현하고 어느 때 실현할 수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각자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반도가 통일해야 한다는 점은 남북조선정부 모두 다른바가 없지만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서는 남북조선입지가 서로 다르기때문에  그 주장과 이해가 다를 수 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조선반도분단은 주변대국의 세력분할이었고 세계냉전체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80-90년대 냉전체제가 완화되면서 한국인들의 조선반도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많이 부풀어졌다. 예컨데 중한수교이후 수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다녀갔다. 저도 그 때 한국학자들과 많이 만났으며 만나는 장소마다 조선반도통일에 대한 화제가 많이 거론되었다. 그 때 만났던 한국인 대부분이 통일에 대하여 아주 낙관적이고 빨리 될 것처름 여기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당시 본인의 소견는 약간 달랐다. 그 요점은 통일은 우리모두의 염원이나 분단이 주변대국의 조종하에 되었고 통일의 주체, 방법 등 면에서 남북조선의 대결이 존재하며, 남북조선의 거주민사이 민족적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더 심할 수도 있는 여건 등을 고려해 볼 때 통일이 그리 쉽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통일이 되더라도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뒤따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좀 늦어도 서로 이해하고 포용력을 일정한 정도 갖춘 다음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남북조선관계는 진전과 퇴보를 반복적으로 하는 양상을 면치 못 하는 것을 보면 위의 판단을 틀리다고 볼 수 없다. 때문에 본인은 현재도 시공적인 통일을 너무 서둘지 말고 통일을 위한 사전준비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돌발적인 변수가 있어 통일이 예상보다 빨리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더라도 이에 따른 엄청 큰 부작용을 감당할 용기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현재 박근혜대통령의 대북정책에서  서로 대화하고, 약속을 지키며, 호혜적으로 교류,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신뢰를 쌓아 통일기반을 구성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그래도 국제정세와 남북조선현실을 잘 파악하고 내 온 정책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통일을 위하여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하는가? 물론 각자 정부측의 해당정책 변화와 전환, 상대방 존중과 경상적인 교류 그리고 양국민들의 통일대비의 각종준비 등도 중요하겠지만 이 모두가 아직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하에 더욱 시급한 것은 서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만남의 장소, 교류의 장소 등을 많이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 역할담당에 재외동포들이 딱 맞춤할 것이다.  2. 통일을 위한 재외동포의 역할 현재 700만명의 재외동포가 있다고 하며 이는 남북조선인구의 10분 1를 차지한다. 지난날 재외동포들이 어떻게 조선반도를 떠나 세계 여러지역에 나갔던지간에 그들 모두 고국의 발전을 기원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은 한결 같다. 그리고 그들은 거주국과 고국사이의 관계향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 왔다.  때문에 재외동포는 고국의 아주 중요하고 귀중한 자산인 것이다. 특히 통일을 추진하는 일에 있어서 재외동포에게는 남북한이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할수 있다.  아시다싶이 현재 남북한사이 각 방면의 교류가 많지 않으며 남북조선사람들사이에는 일부 공식적인 만남이외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이 북을 료해하고 북이 남을 료해하는데 제일 적절한 위치에 서 있는 대상이 바로 재외동포이다. 글로벌화에 따라 재외동포사회는 남북조선체제와 관계없이 양쪽을 모두 상대할수 있으므로 남북조선사이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남북조선양쪽의 교류와 이해증진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냉전시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진영에서 중국, 조선은 모두 사회주의진영의 형제나라로 중국조선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교류가 많았으나 한국과는 거의 단절돼 있었다. 하지만 냉전국면이 완화되고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한관계가 풀리면서 중국조선족은 조선과의 교류를 계속 유지하면서 한국과의 교류도 점차 깊어져 갔다. 따라서 중국조선족은 남북한과 제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재외동포로 조선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에 조선을 알리는 중요한 매파역할뿐만아니라 경제교류에서도 조선족은 남북조선양쪽과 직접적인 교류이외 남북조선사이의 교류증진을 위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짚어 이야기 할 수 있다. 하나는 조선족엘리트의 역할이다. 아시다싶이 조선족은 중국에서 교육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수천수만의 엘리트들이 있으며 중국의 여러 연구기관과 여러 대학교에 조선족학자들이 많이 있다. 중국과학원, 중국사회과학원, 북경대학, 청화대학, 중국인민대학, 중국정법대학 등 북경에만 하여도 수백명의 조선족학자들이 있다. 2013년까지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의 1557명 원사가운데2명의 조선족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대남북정책제정에 조선족에릴트들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현우, 주일공사와 베트남대사직 역임후 현재 외교부 아세아국 국장) 더욱이 남북한인사들의 서로의 만남, 학술, 예술 등 교류는 거의  조선족엘리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이루졌고 서로가 상대방의 산품을 접할 수 있게 된 것도 조선족의  역할이 컸다. 단적인 예로 학술교류에 있어서 일찍히 중한수교이전 남북조선학자들이 한자리에 앉아 교류 할수 있는 장을 연변대학, 북경대학의 조선족교수들이 마련하였다(1989년8월, 1991년 8월 연변대학에서 이미 두 차례의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를 개최,1992년8월에 북경에서 조선학국제토론회 개최 등). 그리고 남북조선학자들 만남의 감격적인 장면들도 많이 있었다. 예컨대 역시 1990년대 중반 연변대학에서 개최한 조선학국제토론회때 마치 8.15노인절이어서 학자들이 경축에 동참하였는 바 그 때 남북조선학자들이  연출장에서 같이 아리랑노래를 합창하는 장면은 아주 감격적이었다. 두번째로 조선족기업인의 대남북조선경제활동 역시 중요하다. 중조변경의 무역의 대부분이 조선족기업인들을 통해 시행되고 있고 당초 한국인들의 중국진출도 거의 조선족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조선의 중국진출, 예컨대 동북, 북경, 상해 등 여러도시에 세운 평양식당 등도 거의 조선족을 통해 실현되었고 현재 조선평양 등 지역에 많아지고 있는 중조합자식당도 조선족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연변에는 벌써 조선의 로동인력을 사용하고 있다.  세번째로는 친인척간의 거래이었다. 중국조선족은 조선과 깊은 친인척관계를 갖고있다. 조선족은 조선과의 친인척거래를 통하여 조선에 많을 지원을 하고있다. 특히 조선경제상황이 어려울때 국제적 지원도 중요하였지만 조선족사회의 민간적인 지원도 아주 대단하였다. 연변같은 경우 조선족 거의가 조선에 친인척관계를 갖고 있으며 친인척거래때 항상 물질적 지원을 많이 하였으며 이것이 또 조선사람들이 중국을 접하는 기회와 간접적으로 한국을 료해하는 도경으로 되었고 친인척방문은 조선주민들이 바깥 세상을 접하는 중요한 루트로도 역할을 하였다. 위에서 보다싶이 지정학적 특정과 중국이란 특수요소 등으로 통일에 대한 중국조선족의 역할 어찌보면 숙명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남북조선통일을 위한 길에 조선족은 어떻게 보면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조선족은 통일고국과의 각 종 연계가 더욱 밀접해 질것이며 통일고국과 중국과의 관계에서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3. 재외동포사회기반 구축을 위한 노력이 필요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남북조선통일에 있어서 재외동포사회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면 재외동포사회가 고국통일을 위한 역할을 어떻게 하면  더욱 잘 할 수 있을까? 물론 재외동포가 남쪽과 북쪽과의 관계를 더욱 돈득히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재외동포사회가 거주국에서 더욱 튼튼히 자리를 잡아야 한다. 여기에는 재외동포들의 정치적 참여, 경제적 축적, 문화적 유지 등 여건으로 거주국 주류사회에서 입지를 튼튼히 하는 것이 아주 필요한 것이다. 재외동포사회는 거주국에 따라 그 입지가 각이부동하다. 중국의 경우 중한수교이전 조선족은 각 영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잘 수행하였다. 정치적 참여을 볼때 동북 집거지역 각 현시에는 조선족 부현장과 많은 행정간부들이 있어 민족의 권익을 잘 대변하였고 경제적으로 과거 조선족인구다수인 농민들은 거의 수전농사를 함으로 주위 한족들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하였으며 문화적으로 마을중심의 인구집거분포는 민족문화와 민족교육을 잘 지켤수가 있었다.  하지만 중한수교이후 다량의 인구이동에서 비롯된 영향은 조선족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다. 다른 한면 남북조선의 현 상황에서 조선족은 고국통일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로 그들이 거주국에서 튼튼한 사회기반구축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중국에서 조선족사회를 유지할수 있는 중요한 여건이기도 하고 통일에 더욱 큰 역할을 할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가령 조선족사회의 정치적 참여가 활발하면 남북조선각 방면 교류에서 더욱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 힘이 커진다면 남북조선경제교류에 더욱 직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선족기업이 확장되어 한국의 기술력, 조선의 노동력을 동시에 사용하게 되면 그 시너지효과가 얼마나 큰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재외동포사회기반을 튼튼히 닦으야 하는지? 재외동포들이 거주국에서의 피타는 노력도 필요하고 고국의 물심양면의 지원도 필요할 것이다. 고국의 정책적, 인재적 등 지원으로 재외동포사회의 힘을 키우고 입지를 튼튼히 하면 통일에 힘이 될뿐만아니라 고국와의 연대도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이외에 재외동포위상을 손상하는 일을 자제하였으면 한다.  중국조선족의 경우 현재 조선족이 한국에 많이 나왔고 이들 대부분이 3D산업에서 막노동을 하는 노동자이다. 다른 한면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보면 조선족을 비하하는 경향이 아주 심하다. 이는 조선족위상에 아주 손상주는 현상이다. 여기서 특히 매체가 더 많이 반성해야 할 것 이다. 그리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재한조선족이 중국조선족의 주류가 아니므로  재한조선족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조선족을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또 하나는 조선족을 왜곡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북조선현실을 보면 중국조선족은 아주 특수하고 중요한 위치에 있다. 중국조선족의 힘을 잘 활용하면 남북조선통일과 발전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왜곡적으로 이용하면 중국조선족위상에 손상을 줄 수 밖에 없다. 예컨대 한 때 물의를 일으킨 “조선족 간첩사건”이라든가, 조선족을 정보수집에 이용하는 등 현상은 조선족위상에 악영향을 초래할 뿐만아니라 조선족의 처지를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좀 삼가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본문은 2014년 11월28일 한국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한 에서 발표한 토론문이다.)  
48    돈도 벌고 땅도 지키자 댓글:  조회:3926  추천:3  2014-08-22
돈도 벌고 땅도 지키자 정신철   얼마전에 중국조선민족사학회는 란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조선족농촌 토지도급경영권확립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계시를 받고 아래의 글을 적어 본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중한수교 및 활발한 교류는 우리조선족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 날로 활성화되어가고 있는 시장경제체제와 민족이 갖고 있는 높은 진취성, 적응성, 소질성 등은 조선족으로 하여금 원래의 전통적인 농업생산에서 상공업으로, 농촌생활에서 도시생활으로, 농민신분에서 시민신분으로 재빨리 전환하는 추진력이 되었다. 또 중한수교와 량자의 밀접한 관계는 조선족들의 한국과의 교류와 한국진출을 다그치는 계기로 되었다. 이러한 결과 원래 농업위주인 우리조선족은 농촌과 토지를 떠나 재빨리 시장경제흐름속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중국에서 도시화과정이 제일 빠르고 도시화수준이 제일 높으며 국외진출이 제일 많은 민족으로 부상되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의 경제생활은 전에없이 활발한 양상을 보였고 농민들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목돈을 벌 수가 있었으며 그들의 생활수준도  한층 더 높아졌다. 어떻게 보면 조선족사회는 여러면에서 기타민족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 나아가고  있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민족사회의 현황을 보면 딱 긍정적인것만은 아니었다. 빠른 도시화과정으로 농촌이 폐쇄되고 민족교육이 축소되고 민족문화가 약화되는 등 현상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민족성원들도 많이 있겠지만 여기서 거론하고 싶은 것은 역시 우리민족에게 가장 소중한 땅문제이다.  과거 우리선조들이 개척한 동북의 농촌과 수전땅은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과거 땅은 양가호구의 중요한 래원일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이전 조선족농민들이  주위 기타민족농민들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족교육과 민족문화를 전승하는 중요한 기지로도 역할하였다. 우리민족에게 이렇게 소중한 땅이 현재 울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농민들이 땅을 너무나도 등한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농민들은 장사 또는 출국에 소요한 목돈마련때문에 땅을 쉽게 양도하기도 하였고 도시진출한다고 땅을 쉽게 양도하기도 하였다. 양도하는데 까지는 그래도 괜찮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한족에게 서뿔리 양도한 처사라고 하겠다. 단적인 례로 현재 흑룡강성 오상시 23개 조선족촌의 경작지 35.7만여무가운데 조선족농민들이 경작하는 땅은 4.7만여무로 전체 면적의 13.3%밖에 되지않는다. 이 결과 많은 조선족촌이 한족촌으로 변모되어가고 있으며 만약 이대로 간다면 땅도 한족들에게 넘어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수 있겠는가! 때마침 중국공산당 제 18기  3중회의에서 농촌토지도급경영권확립을 강화하는 정책을 제정하였으며 농촌토지도급경영권이 “장기불변”한다는 방침하에 새롭게 토지도급경영권을 확립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농민들의 도급맡은 토지에 대한 명확한 측량과 권리확보이다. 우리는 이 기회에 해당 정책을 잘 료해하고 도급맡은 토지에 대한 측량, 권리확보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이 번 “토지확권”에 참여하여 자신의 권리를 확고히 하며 발급에까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번 “토지확권”을 통해 을 갖게된다면 농민들이 각종 토지류전에서 토지도급경영권소실을 방지할 수 있을뿐만아니라  “토지”가 농민들의 “재산”으로 “토지”를 통하여 재산성 수입을 얻을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은 와 같이 중요한 재산증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재산증명은 농촌에 있든, 도시에 가든, 출국을 하든 어디에 있어도 변함이 없는 것은 뚜렷한 바이다. 따라서 조선족농민들이 토지“재산권”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도급경영권확립과 증서발급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밖에 나가 돈을 벌면서 땅도 지키는 아주 중요한 고리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  
47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나도 한마디 댓글:  조회:6276  추천:1  2014-04-19
요즘 한국내에서 중국조선족을 “조선족”인가, “재중동포”인가를 갖고 많이 의론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보기에는 명칭차이지만 사실은 중국조선족을 어떻게 보는 것과 연관이 된다.  한국적 시각에서 보면 중국조선족을 해외동포의 한 부분으로 “재중동포”라 부르는 것은 일본의 “재일동포”나 미국의 “재미동포”를 부르는 것처럼 같은 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적  시각에 불과하다. 사실은 위의 각 자가 처한 배경과 위치가 많이 다름으로 그들을 같은 차원에서 볼수 없다. 조선족은 이미 법적으로 인정받은 중국 다민족국가의 한 성원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조선족은 민족의 자치지역이 있고 각 급 정부기관에는 조선족 관료가 있다. 문화적으로 보면 중국에는 정부관할의 조선족학교, 조선족문화관 등이 있고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에는 조선족교수, 연구원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에서 조선족은 자기특징을 갖은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조선족”이란 명칭은 이미 특유의 고정된 개념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그 누가 승인을 하든 안하든 “조선족”의 존재는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는 것을 갖고 논의하는 것은 하등의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한국적 시각에서 일반인들이 조선족을 “재중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무방하겠지만 정계, 학계에서까지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면서 “조선족”명칭을 무시하는 것은 중국조선족의 객관성을 무시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따라서 이러한 타당성이 없는 언행은 권장할 바가 못 된다.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46    조선족농민과 토지도급경영권에 관하여 댓글:  조회:2987  추천:3  2013-12-26
조선족농민과 토지도급경영권에 관하여            ----중공중앙 제18기 3중 전체회의  과 더불어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1. 날로 좋아지는 농촌정책     중국력사의 몇 천년 흐름속에 토지와 농민의 관계는 제일 중요한 사회생산관계와 경제관계라고 하겠다. 중국 력대 왕조들의 성쇄흥망은 거의 다 통치자들이 토지와 농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토지와 농민의 관계를 원활히 처리하려고 노력하여왔다. 신 중국 건립과 더불어 농민들은 지주계급의 압박과 착취를 벗어나 토지의 주인으로 되었다. 이것은 사회생산관계의 중대한 변혁을 초래하였고 사회생산력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과거 “3급소유, 생산대가 기초”인 농촌집체토지소유제는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을 저해하였다.  개혁개방이후 농촌에서 실시한 “토지도급제”는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을 크게 자극하였고 농업생산력발전을 추진하였다.  이 후 중국정부는 항상 농업, 농촌, 농민문제를 중요시하였으며 농업발전과 농촌실정에 따라 농촌정책을 계속조절하고 새로운 대책들을 마련하여 농민들의 생산과 생활수준제고에 주력하여 왔다.  개혁개방 30여년간에 중국정부는 농업, 농촌, 농민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중요한 정책을 제정하였고 중공중앙과 국무원의 각년에 발표하는 문건가운데 제1호 문건으로 농촌문제주제를 다룬것만 해도 15개나 된다. 중공중앙 “1호 문건”은 각기 부동한 시기 “3농”문제를 파악하고 농촌발전과 농민들의 물질적 리익보호에 심혈을 기울렸다. 때문에 “1호문건”은 지금에 와서 중공중앙이 농촌문제를 중요시하는 전용명사로 되기도 하였다. 1982년 중공중앙 “1호 문건”에서는 일부농촌에 나타난 “토지도급”현상을 긍정하면서 농촌개혁의 중대한 정책으로 토지경영권을 농민들 개인에게 직접 부여하였다. 그후 일련의 “1호 문건”(1983-1986년, 2004-2008년)은 농민들의 생산자주성과 경영자주권을 강조하고 농업에 대한 투자를 증가하며 농민들의 부담을 감소하는데 주력하였다.     2008년 10월에 개최된 중공중앙 제17기 3중 전체회의에서는 전문적으로 농촌문제를 토론하고 《농촌개혁발전을 추진하는 약간의 중대한 문제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를 체결하여 농촌발전문제를 깊이 다루었고 농촌의 기본경영제도의 안정과 개선을 강조하고 농민들에게 더욱 충분하고 보장적인 토지도급경영권을 부여하여 현재의 토지도급관계의 안정을 유지하고 장구불변한다는 원칙을 강조하였으며 농업경영방식을 전환하고 농민들의 련합과 합작으로 조직화수준을 높이며 전문적인 합작사의 발전을 부축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후에도 해마다 3농문제에 관한 “1호문건”을 발표하였으며 2013년 1호문건에서는 토지를 전업농호, 가정농장, 농민합작사에 류전하는 것을 권장하고 지지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가정농장”개념은 이 번 “1호 문건”에서 처음으로 거론되었다.  특히 얼마전에 개최한(2013년 11월12일) 중공중앙 제18기 3중전체회의에서 통과한 은 중국개혁발전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계기로 되였으며 농촌개혁발전의 새장을 열기고 하였다. “3농”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제18기 3중 전체회의에서는 도농 이원구조해결에 입각하여 일련의 농촌토지제도개혁을 심화하는 조치를 제출하였다.  “3농”문제는 중국미래와도 관련이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은 농업의 발전, 농촌의 진보와 농민의 행복을 둘러싸고 일련의 개혁조치를 제출하였으며 이 가운데 농촌토지개혁이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에서 두 가지가 농촌집체토지제도개혁과 집적 관련있는바 하나는 도농통일의 건설용 토지를 확립하고 또 하나는 농촌토지의 집체소유권을 견지하고 농민들에게 도급토지의 류전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에서는 “통일적인 도농건설용 토지시장을 만들고 기획과 용도제한에 부합되는 전제하에 농촌집체경영성 건설용지의 양도, 임대, 주식가입에 허락하며 국유토지와 동등하게 입시하고 동등한 권한과 가격을 실행한다”고 명확히 지적하였고 “엄격한 경지보호제도를 견지하고 완벽하게 하는 전제하에서 농민들에게 도급토지의 점유, 사용, 수익, 류전 및 도급경영권의 저당, 담보권한을 부여하고 농민들이 도급경영권으로 주식에 가입하여 농업산업화경영을 발전하는 것을 허락하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것은 에서 명확히 지적한바와 같이 “농민들에게 더 많은 재산권리를 부여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보다싶이 이번 농촌토지제도개혁의 관건적인 요소는 토지의 류전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명확히 하고 증서를 발급하는 것으로 농민들이 도급경영하는 토지의 장기 불변한 정책을 락실하고 농민들의 주택기지와 가옥의 점유, 사용, 수익, 류전, 저당, 담보 등 권한을 락실함으로 농민들의 토지권익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자신이 경영하는 토지를 류전한 농민들이 다시 신경을 써지 않아도 되며 마음놓고 타곳에서 다른 경영을 할수 있을 뿐만아니라 또 “토지류전”에서 생기는 안정적인 수익도 챙길수 있게 되는 것이다. 17기3중 전체회의에서 농민들의 토지경영권 확립에 중점을 두었다면 18기 3중전체회의에서는 농민들의 토지류전문제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농민들의 토지경영권 확립과 류전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토지경영권을 확립하여야 아무리 류전되여도 소실될 념려가 없고  토지경영권이 류전되어야 농민들이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토지경영권확립과 류전으로 시작되는 농촌의 2차 토지개혁은 또 다시 도농사회생산력을 해방하고 도농발전의 활력을 발산하여 발전성과의 혜택이 농촌과 농민들에게 더욱 많이 더욱 공평하게 돌아 가도록 할 것이다.        2. 토지와 조선족농민   과거 조선족은 농업민족이었다. 농민에게 땅은 제일 소중한 존재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전 조선족 선조들은 인적이 드문 중국동북땅에 발을 붙이고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들의 이동는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화전을 일구어 호구양가(糊口養家)의 방편으로 시작하였고 후에는 떼를 지어 중국땅에 이주, 정착하게 되였다.  그들은 원래 황무지였던 동북지역을 비옥한 농토로 만들고 그 추운 동북지역에 벼농사를 성공적으로 시작하고 보급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20세기20년대 길림성의 연변지역과 길림지역의 수전 100%, 통화지역의 85%가 모두 조선족들이 경작하였고 흑룡강성 수전의 100%, 료녕성 개원지역의 90%, 흥경지역과 심양지역의 85%, 무순지역의 80%과 단동지역의 70% 수전은 모두 조선족이 개발하고 경작하였다고 한다. 1930년대초기에 전 동북지역인구의 3%밖에 되지 않는 조선족의 벼농사는 당시 동북의 전체 벼생산량의 90.1% 차지하였다.  동북지역에 벼농사가  보급되고 발전됨에 따라 예전의 밭농사에 사용하지 못하던 진펄 등이 수전경작과 더불어 옥토로 개간되었고 토지경작율도 크게 높혔다. 이와 같이 조선족은 중국 북방지역의 유일한《벼재배민족》으로 중국 북방의 벼재배력사에 빛나는 한 페지를 남기였다.   봉건압박과 제국주의 침략시기 조선족 선인들이 고국에서 가난과 봉건핍박에 의해 국경을 넘어 바람거친 만주땅을 밟았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만주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고 벼농사의 선두자로 되였지만 자기땅은 여전히 없었고, 이 곳에서 줄곧 피어린 항일운동을 진행하였지만 정치적으로도 위치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가 개간한 땅에서 소작농을 하면서 땅가진 자들의 압박과 착취를 받지않으면 안되였다. 때문에 자기가 개간한 땅의 주인됨은 오매에도 잊지 못 하던 념원이였다.  1945년 동북해방이후  조선족은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분배받았고 토지소유권을 취득하였다. 토지개혁에서 연변지역 9만여가구의 조선족농민들은 12만여헥타르의 땅을 분배받았고 흑룡강성 원 송강지역의 4만여가구의 조선족농민들은 5만여헥타르의 수전을 분배받았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토지문제의 해결은 특수한 의의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토지소유권의 획득은 조선족이 중국에서 토지의 주인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할 뿐만아니라,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치가 정립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정치적위치를 인정받고 경제적으로 토지의 주인이 되였다. 땅을 분배받은 조선족농민들은 이전에 땅이 없어서 받은 설음과 땅의 주인으로 된 행복을 대조하면서 공산당의 옳바른 정책을 찬양하였고  더 없는 열정과 책임으로 새중국 건설과 사회주의혁명에 참가하였다.  땅은 인간생활의 터전이고 우리에게 의식주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때문에 땅은 인류사회의 공동한 재산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땅은 또한 민족의 특수한 내용이 포함되여 있다.    첫째, 이 땅은 우리민족의 애환이 잠겨있는 곳이였고  또 대대로 삶을 지켜온 증인이기도 하였다. 조선족선조들이 부득불 고향산천을 등지고 중국동북지역에 올때 그들을 맞아준 것은 풀초 우겨진 황막한 산야와 비적들의 략탈  그리고 현지관리의 억압이였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리선조들은 이곳에 자리잡고 수세대를 이어왔다. 다시 말하면 이 곳은 우리선조들의 피와 땀이 새겨있는 민족력사의 장이였다.    둘째, 동북지역은 우리민족의 생활터전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우리선조들은 처음 강을 건너 중국동북지역으로 향하였을때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황무지를 비옥한 논밭으로 개척하였으며 그것이 현재 조선족의 생활터전으로 민족적 생활을 영위하는 무대로 되였다.    셋째, 이땅은 우리가 민족문화를 유지할수 있는 장소였다. 우리선조들이 이땅을 개척하면서 민족성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형성하였기에 민족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장소가 있었고 민족문화를 고스란히 지킬수가 있었다.    이렇게 선조들이 개척한 땅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것을 남기였다. 이 땅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하였을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장소를 조성하였으며 민족문화를 고스란히 지킬수 있는 근저로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건립이래 조선족농촌의 경제생활이 주위 기타민족보다 더 풍요럽고 민족교육보급수준이 기타민족보다 높은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바로 우리는 조상들이 개척한 땅에 모여서 수전농사를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였다.     3. 토지경영권 확정과 활용에 관하여 개혁개방의 흐름속에 조선족농촌도 몰라보게 변화되었고 도시진출, 국외진출 등 인구이동 원인으로 농촌인구감소와 토지양도문제가 아주 돌출하게 대두되었다. 인구이동으로 조선족촌 책임자 선출마저 힘들어졌고 타촌, 타지역 한족들이 조선족촌 토지를 임대한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어떤 농민들은 외지에 간다고 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토지를 소홀히 하였고 또 어떤 농민들은 일시 목돈을 위해 일차적으로 토지를 한족에게 장기간  양도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농민은 토지양도계약서에 소위 “영원”이란 글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땅이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땅을 포기하거나 또는 다른민족들에게 양도하였다.  이 결과 수많은 조선족농촌마을의 절반이상의 토지가 기타민족들에게 의해 경작되고 있으며 농토뿐만 아니라 마을도 점차 한족마을로 변모되 가고 있는것이 지금 우리농촌의 현실이였다.   얼마전(2013년11월말) 흑룡강성 조선족농촌에 대한 현지조사에서 얻은 수자 하나만 실례로 들자. 흑룡강성 230개 조선족마을상황을 보면 조선족인구 186471명가운데 외지에 나간 사람이131324명으로 전체수의 70.4%차지하며 촌에 남은 사람수는 65263명밖에 되지않는다. 토지를 보면 조선족들이 소유한 면적 124.2만무 가운데 조선족자신이 경작하는 면적은 30.6만무로 전체면적의 24.6%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에 임대면적이 85.8만무로 전체면적의 69.1%나 차지하였으며 매매한 면적도 7.2만무로 5.8%차지하였다. 보는바와 같이 조선족농민들이 양도하고 매매한 토지가 거의 전체토지면적의 75%차지하였다. 가옥상황을 보아도 조선족가옥 26495채 가운데 자가용 가옥은 10174채로 전체가옥수의 38.3%이고 한족들에게 판 가옥수가5338채로 전체 가옥수의 20.1%차지하였다.  위의 실례에서 우리는 조선족농촌문제의 심각성을 감안할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90년대 이후 조선족농민들은  분분히 농촌을 떠나 도시와 국외로 진출하였다. 농민들이 더 윤활한 생활을 추구하려고 농촌을 떠나는 것까지는 나무랄 것 없다. 이것은 개혁개방정책의 혜택이였고 인간의 정상적인 추구라고 할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농민들은 선조들이 개척한 땅, 자기가 다루었든 땅을 너무 소홀히 대한 것이다. 그럼 현재 조선족농촌문제에서 응당 해결해야 할일은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중국정부의 농촌토지정책에 의하여 도급받은 토지경영권을 확실히 하고 류전에서 소실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개혁개방초기 토지도급정책을 실시한지 얼마되지 않아 1984년 중공중앙 “1호 문건”에서는 농민들의 토지사용기한을 15년으로 규정하였으며 10년후인 1993년에는30년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2008년 10월 중공중앙 제17기 3중 전체회의에서는 “장구 불변”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농민들이 도급받은 땅은 거의 대를 이어 경영할 수 있다는 정책이다. 그리고 이번 제18기 3중전체회의에서 토지경영권확립을 다시 강조하는 한편 농촌토지의 류전을 권장하였다.   때문에 이 시점에 와서 자기의 경작지 면적을 정확히 측정하고 권익을 보장하여야 한다. 따라서 외지에 나간 조선족농민들은 지금 빨리 서둘러 도급받은 토지의 경계선과 면적을 더욱 명확히 하고  새로운 농촌토지정책에 근거하여 양도 또는 임대 계약을 규범화하여 자신의 토지경영권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현재 정책에 의하여 명확히 해놓지 않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특히 1-2 세대가 지나가면 누구도 확실치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과거의 잘못된 계약등을 고치는 문제이다. 우리농민들이 일시적 필요 또는 타지역 진출으로 토지를 소홀히 양도한 경우가 많다. 현재 정책을 보면 과거 어떤 방식으로 토지를 양도했던지를 막론하고 본인 이름으로 된 도급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다. 때문에 먼저 국가에서 제정한 농촌정책을 참답게 리해하고 “법에 따라 농민들의 토지 점유, 사용, 수익등 권리를 보장하고”, “농촌토지에 대한 권리확정, 등록, 증서발급제도를 참답게 해야하다”는 정책에 근거하여 정부의 도급경영권확정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과거 잘못된 계약등을 새롭게 고쳐야 한다. 그리고 민족집거지 농촌의 토지는 우리선조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것으로 민족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땅을 무분별하게 타민족에 양도할 경우 시간이 흘러가면서 소실될 가능성이 많다. 때문에 토지양도에서 본 마을, 본 민족에게 우선적으로 양도하고 될수록 타민족에게는 양도하지 말아야 후환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토지경영권 활성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제18기 3중 전체회의 에서 제정한 농촌토지정책의 중요한 내용이 토지경영권의 활성화이다. 즉 농민들이 토지경영권을 중도 이전, 임대, 양도, 주식합작등 형식으로 류전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토지경영권의 류전을 권장하고 활성화를 제창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토지경영권을 양도할수 있을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농업합작사형식으로 토지에 대한 규모경영을 할수 있고 토지를 주식화하여 수익분배에 참여할수도 있는 등 여러 방법이 있다. 우리농민들은 토지경영권의 류전을 빌어 더 큰 수익을 기대할수 있기 때문에 토지경영권 활성화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네 번째는 가능하면 토지경영권확대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중국의 농촌정책은 갈수록 농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가고 토지사용권도 더욱 확대되리라고 믿는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 차례진 토지경영권을 소중히 여길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여 힘이 닿는 대로 토지경영권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농민들은 자신이 농장주가 되고 목장주가 되는 꿈도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중국의 농촌토지정책을 보면 농민 매 개인에게  토지사용에 대한 권리를 더 부여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자의 권리는 더욱 확대되고 토지를 잃은 사람은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륜락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토지를 잃으면 역시 이러한 운명 피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족농촌토지는 우리의 중요한 자산이고 땅을 잃을 경우 우리의 설자리가 좁아진다. 때문에 이러한 땅을 우리는 소중히 여기고 튼튼히 지켜야 한다. 
45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하여 댓글:  조회:3266  추천:2  2013-08-01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하여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목 차   1. 민족정체성이란?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3. 조선족사회의 형성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5. 조선족의 미래전망     요약문: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활발한 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과 한국을 비롯한 해외진출은 민족적 경제기반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동시에 급속한 인구이동은 인구분산화를 초래하였는바 이는 민족적 정체성유지와 강화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이 살아남려으면 정체성을 상실하여서는 않된다. 그러면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으며 현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있고 또 앞으로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겠는지? 본 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간략한 답이라고 할수 있다. 주제어: 조선족,  조선반도,  민족정체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온 이민자 및 그들의 후손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원천적인 것으로부터 이민 온 지역의 상황에 의하며 일정한 변의과정을 겪었다. 그 결과 중국적 요소가 많이 첨가된 탈조선반도적인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이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반도주민과의 “同源”이라는 전통적인 연대성은 무시할 수 없다.   1. 민족정체성이란? 정체성이란 심리학적 개념으로 영어 “identity”와 중국어 “認同”과 서로 통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많으나 주요하게 신분 및 자아동일성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 뜻인즉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 또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으로 한마디로 귀납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민족정체성이란 무엇인가? J.Carla와 J.Reginald는 민족정체성은 개인이 자기민족에 대한 신념, 태도 및 민족신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한다. [①]J.Phinney는 민족정체성은 복잡한 구조의 하나로 민족에 대한 귀속감와 승낙, 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및 민족활동에 참여 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②] 종합하면 보면 민족정체성이란 인간들이 자기가 속한 민족에 대한 깨달음과 자아민족에 대한 귀속감과 믿음이라고 할수 있다. 인간세상은 종족, 민족 등 여러 인간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는바 민족은 여러 공동체가운데서 제일 상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족은 혈통적인 연대감과 같은 언어,  같은 경제, 같은 지역 그리고 동일한 문화기초위의 같은 의식 등 여러 공동적 요소를 구비한 인간공동체이다. 그리고 민족이 형성되기까지는 오래 역사를 경과하였기때문에 민족은 상대적인 안정성을 갖고 있다. 매개 민족은 자아민족이 소유한 특징으로 기타 민족과 구별된다. 여기서 민족정체성이 거론되는데 그 뜻인즉 주요하게 자아민족에 대한 깨달음으로 소속 성원들이 본인은 어느 민족에 귀속한다는 의식 또는 태도을 말한다.  민족정체성은 타민족과의 만남과 부딪침에서 더욱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민족정체성은 자아민족에 대한 신념과 귀속감이 커가면서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민족정체성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므로 사회발전과 민족이 처한 상황의 변화함에 따라 어느 정도 변화되고 해체되어 새롭게 생성될 수도 있다.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국가정체성은 국민들이 국가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고 민족정체성은 민족성원들이 자아민족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한 근대적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근대 국가는 서방 자산계급의 힘에 의하여 처음 수립되었다. 당시 봉건사회말기에 산생하여 성장한 자산계급은 “자유”, “민주”, “박애” 등 정치적 구호로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건세력을 뒤엎고 근대적 국가건립에 성공하였다. 이 때 출현한 국가는 근대 민족주의기치하에 세운 단일민족의 국가로 민족국가라고도 한다. 이러한 민족국가정체성은 민족정체성과 통일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이후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폭발한 민주, 민족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단일민족국가가 아닌 다민족국가이었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이 꼭 일치하다고 할 수 없다. 국민으로서 그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 등은 여러 민족들이 모두 소유하고 있으나 개별 민족으로서는 그 민족에 대한 귀속감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국가정체성은 상위이고 민족정체성은 하위이며 민족정체성은 반드시 국가정체성에 복종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다민족국가의 분열 또는 동란 등이 생길 수도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사이의 갈등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현실이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아도 일부 민족내부의 민족주의와 분리주의의 경향하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모순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민족국가의 차원에서는 국가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족정체성을 약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③] 3. 조선족사회의 형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 이민에 의하여 형성된 조선민족의 한 갈래이다. 지연적 관계로 중국과 조선반도국가와의 왕래는 오래전부터 진행해 왔다. 이 가운데 인적교류도 아주 활발하였으며 많은 경우는 그들이 상대방지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점차 그 지역 민족공동체에 동화되어 원래 소속된 민족공동체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현재 조선족의 대부분은 19세기 중엽이후 중국동북에 이동,이주와 더불어 정착한 조선인 및 그들의 후손들이다. 특히 청나라의 봉금정책해제와 일본제국주의 조선침략은 더 많은 조선인들의 중국진출을 부추겼다. 하여 중국재류의 조선인이 제일 많을 때 200만명을 초과하였다. 1945년 8월 일본패전이후 광복의 환희속에서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이 조선반도로 귀환하였다. 동시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계속 남게되었다. 이 부분의 조선인들이 중국 국내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을 겪어면서 중국정착의 경향이 날로 강해졌다. 당시 그들은 토지를 배분받았고 지방정부의 관리간부로 많이 발탁받았다. 예컨대 중화인민공화국설립직전에 “동북조선인민의 95%이상을 차지한 농민은 모두 마찬가지로 토지 마소와 가옥을 나누어가지었다.” 그리고 “전동북조선인민의 74%을 차지한 길림연변지구에 있어서 전원공서로부터 구촌에 이르기까지 절대 대부분이 모두 조선인민이 자기로 선거한 조선간부이다.”[④]이와같이 동북재류의 조선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법적으로 중국조선족에로의 전환을 완성하였다. 조선족 선조들은 중국에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국동북변강지역을 개척하였고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에 앞섰으며 국내해방전쟁에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족이 중국 다민족국가의 일원으로 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원의 하나인 동북조선민족은 바로 간고한 30-40년 반침략의 혁명역사투쟁의 과정에서 수 많은 피를 흘렸고 수 많은 생명을 희생하였으며 부지런히 생산하고 열심히 전선을 지원하여 항일전쟁과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면서 자연히 형성된 것이다.”[⑤]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과 확립은 일정한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이란 불안정한 이동, 이주에서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실현된 안정적인 정착까지를 말할수 있다.   (1) 이동, 이주와 정착과정에서 조선족정체성의 형성 조선족선조들이 두망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오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는 우선 생활난이었다. 당시 만주의 넓은 땅과 풍부한 물산이 그들을 유혹했을 뿐 언제는 꼭 조선반도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때의 정체성은 원천적인 조선반도적인 성향, 즉 “나는 조선인이다”는 관념이 아주 농후하였다. 그 후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중국에 “귀화입적”한 경우도 있어 점차 정착성향도 뚜렷해 졌다.[⑥] 하지만 민족정체성은 여전히 조선반도적인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중국땅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항일투쟁을 진행하면서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보지 않고 언제가 조선반도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하여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재류조선인들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국광복의 기쁨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조선반도로 돌아간 것이다. 동시에 중국에 체류한 조선인들의 중국적인 요소도 점차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신문기사을 통하여 중국체류 조선인들의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전의 중국정착취향을 볼 수 있었다.[⑦] 특히 일본패망이후 귀환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중국국내해방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토지개혁과정에서 토지를 부여받으면서 중국정착을 고정화시켰으며 민족정체성도 탈조선반도적인 중국적 경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조선족 국적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한 중공중앙 東北局은 1945년 9월말에 조선족의 상황을 역사적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 곳의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그들은 한족과 같이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한다고 인정하였다.[⑧] 1946년1월1일, 당시 연변전원공서 부 전원인 동곤일은 새해《신년헌사》에서 “현재 우리 연변지역의 민주정권은 이미 건립되었다. 의심할 바없이 연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은 반드시 정부의 법령을 준수하여야 하며 동시에 정부의 법률적 보호를 받는다. 중국국적에 가입하려는 한국인은 입적할수 있으며 중화민국 국민으로 될수 있다. 이렇게 조족(朝族)은 중화민족가운데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될수 있다. 우리정부는 민족평등원칙에 근거하여 조선족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와 문화상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며 민족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 등도 똑같이 존중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다.[⑨] 1948년 8월 중공 연변지역 위원회에서는 결의문을 작성하고 연변 조선민족인민에 대한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였다. 이 결의문에서 “우리 당과 정부가 연변조선민족인민을 중국경내의 소수민족 지위를 비준한 이 정책은 어디까지나 옳다”고 강조함과 동시에 “이 민족은 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의 특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승인하여야 한다”고 하였다.[⑩] 그리고 조선족과 조선 僑民간의 구별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였다.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인민으로서 호적이 있는 사람은 공민이며 잠시 내왕하는 처지로서 호적이 없는 사람은 교민이다. 정부의 허가를 거쳐 이주해 갔다가 다시돌아 온 사람, 우리측 고급정부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 (최근에) 이주해온 자는 교민이다. 가족이 조선에 있지만 가장과 재산이 연변에 있는자는 정부의 허가를 거쳐 공민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공민과 교민은 권리 및 의무상에서 구별되어야 한다.”[11] 결의문에서 중국조선족과 조선교민의 표준에 대한 명확한 지적은 중국조선족정체성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조선족정체성의 확립 1949년 10월1일 북경천안문성루에서 모택동주석은 전세계를 향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포하였다. 이 직전에 중국공산당 연변지구위원회 서기,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가 동북조선인민대표로 1949년9월 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 권리대행 기구) 제1차회의에서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까지 참석하였다. 동시에 동북지역의 조선인 사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동북의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족간부들이 많이 발탁되었고 연변대학, 연변조선족 고급중학교 등 조선족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더우기 1952년 “연변조선민족 자치구”설립과 더불어 기타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민족 자치향, 자치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이 모든 것은 조선족이 이미 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법적 확립은 되었으나 관념적으로나 실지적으로는 좀 늦었다. 당시 조선과의 연계도 밀접하였고 “조선인”, “조선인민”, “조선민족” 등 칭호가 “조선족”보다 더 많이 사용하였다. 1948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건립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에 간 중국동북조선인민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일성주석은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기원하는 중국동북 재류동포들의 성원과 대표단일행의 래조를 환영”한다고 하였고[12] 12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조선민주건설사진전”을 보도하는 기사에서는 “조선관중들은 조국의  승리적 발전에 무한한 감격과 흥분을 느끼게 되었고 중국관중들도 세계민주진영의 일환으로소 조선의 비약적 발전에 경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13] 연변대학을 창설할 때 이를 “동북조선인민대학”으로 가칭하였고 “동북경내 재주조선인 최고학부”라고 일컸다. [14] 그리고 조선을 “동북에 있는 조선민족의 민족조국이면 세계화평민주진영의 일환”이라는 기사보도가 있었고[15]조선전쟁시기 “동북의 수많은 조선인민들 조국의 자유독립을 보위키 위해 조선전장에 자동적으로 떠났다”[16]는 기사도 우리말 신문에 보였다. 여기서 보다시피 당시 조선족은 “조국”문제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 특히 조선전쟁시기 중, 조 양국의 조선민족사이에 있은 빈번한 이동은 “고국”, “모국”과 “조국”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였고 “중국은 인민 조국이요 조선은 민족조국이다”말도 있었다. 하지만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조국문제에 관한 공개토론을 통하여 조선족가운데 존재하는 “다 조국론”, “민족조국”, “법률조국” 등 모호한 이해를 기본상 해결하였고[17] 기타 조선족지역에서도 조국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비판함에 따라 조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였다.[18] 이러한 것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확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농업합작화 운동, 사회주의 개조와 문화대혁명 등을 겪어면서 자신의 중국국민성과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수립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에게는 탈조선반도적인 중국국민의식과 중국다민족가정의 일원인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보다 강하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반도주민과의 “同一源流”의 전통적인 연대감을 완전히 털어버릴수는 없다. 20세기 90년대말 필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6%이상의 응답자가 조국을 “중국”이라고 적었고 “중국 조선족의 귀속”이란 물음에서는 응답자의 73%가 “중국”이라고 하였다.그리고 “기타 민족과의 교류에서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점을 표명하는가”하는 물음에서 79%의 응답자가 “떳떳히 밝힌다”다고 하였고 신문매체에서 기타 민족이 조선족의 우수성을 언급할 때  응답자의 97%이상이 “자긍심을 느낀다”고 답하였다. [19] 이와 같이 조선족에게는 중국국민이란 의식과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이미 깊어졌다. 이러한 의식속에서 조선족은 중국국민으로 중국사회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주류사회진출에도 게으러지 않았다. 조선족가운데 중국국가급 영도자가 나오고 정부장관이 나왔으며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중장, 소장 등 장군계급을 지닌 사람들도 10여명 산생하였고 또 10여명의 정부 차관급과 수 백명의 국장급 인물들이 나왔으며 또 수천, 수만명의 대학 교수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와 기술인원들이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우주선발사, 위성발사 등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선족과학자도 있었다. 조선족은 민족적 긍지감를 갖고 중국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평등한 중국의 민족정책하에 민족언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활용하면서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키워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는 공식사용문자를 조선어로 규정하였고 수 십개 민족향에서도 민족자치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이 집결한 동북 3성과 내몽골에서 수백, 수천개의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가 있으며 조선글 출판사, 조선어 방송국, 조선족 문화관 등이 설립되 있다. 이러한 것은 민족언어 유지와 민족문화 전승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민족정체성 강화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조선족은 중국사회의 흐름에 따라 개혁개방까지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3)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정체성의 변화양상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인구이동에 따른 거주 분산화, 민족집거지역의 슬럼화, 민족교육의 급속한 축소, 한국과의 교류 등은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많은 변수를 초래하여 다중양상을 보였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시기에 따라, 대상에 따라 강화-약화-강화의 교체가 반복되었다. 하나는 민족집거지역을 떠나 중국 기타지역으로 진출한 경우 그 당사자들의 기타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더욱 체감하였고 또 사업과정에서는 민족적 차별감도 느끼게 되면서 민족정체성이 강화되는 한 면 의식적으로 민족성을 감추려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민족정체성은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 한국의 성장과 중국진출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강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민족정체성 약화의 돌출한 현상은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민족교육을 받을 여건과 기회가 없어 민족언어과 민족문화를 터득하지 못하고 민족의식이 점차 희미해짐에  따라 민족에 대한 애착이 날로 멀어져 가고 민족정체성도 약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이 한국에 많이 진출하였다. 이들에게 처음에는 중국국민의식보다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앞섰고 코리안 드림에 많이 기대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한국에서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심각한 차별과 편견을 느끼면서 한국에 대한 기대는 날로 약해지고 한민족이라는 의식보다 중국인, 그리고 중국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더욱 강해지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경우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느끼면서 돈을 벌려고, 좀 더 자유로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친척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한국국적가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들에게는 중국국민과 조선족이라는 정체성보다 생존과 이익이 더 우선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족정체성이라는 것도 매 개인의 실제적 이익앞에서는 한순간 무력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이 갖고 있는 조선반도적인 특징과 중국적인 특징으로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현재 논란도 일고 있다.[20] 일부에서는 조선족정체성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소위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서 언급한 “중국공민”과 “조선민족”의 개념은 동차원의 개념이 아니며 특히 중국에서는 상하위 개념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등하지 않은 두 개념을 합쳐서 조선족의 “이중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것이 성립되면 중국의 56개 민족이 모두 “이중성”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않겠는가?   5. 조선족의 미래전망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민족의 생존과도 연관된다. 조선족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적 입지를 튼튼히 하려면 반드시 민족정체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민족적 지혜가 필요하면 민족적 힘을 키워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볼 때 조선반도주민들과의 연대감도 강화하여야 한다. 도시화와 세계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이미 중국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은 중국의 도시화과정에 발맞추어 과거 농경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여야 하고 세계화의 흐름속에 고국인 한국과의 유대성을 더욱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서로의 이해와 신뢰를 쌓고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의 많은 부정적 결과는 한국을 향한 코리안 드림이 아주 큰 화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정부의 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또는 차별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한국정부는 명확하고 무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을 제정하여야 하며 (현재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조선족입지를 튼튼히 하는데 힘을 기우려야 한다. 다음 조선족자신도 경제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 경제력에 커짐에 따라 도시의 집거지역도 조성할 수도 있고 민족학교도 세울수 있으며 문화활동장소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것 모두가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여건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는 우리 모두 “한 민족”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조선족의 정체성, 한국과 조선의 민족정체성, 제일 조선인의 정체성 등을 떠나서 “한민족”  또는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세계적인 민족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재외동포들이 더욱 많이 한국에 진출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로 진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는 “한국인”이고 나는 “조선족” 또는 “재일 korean”이다고 따지지 말고 현지에서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여 공통적인 민족전통문화를 살려서 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중국의 예로 현재 한국에서 중국진출한 사람들이 수십만이 된다. 앞으로 더욱 많아 질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도 동북 집거지역을 떠나 산해관이남으로 수 십만명이 진출하였다. 도시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민족집거지역 형성이 아주 중요하다. 일정한 민족인구의 집거지역이 생기면 민족교육의 장소가 점차 형성될 것이고 민족교육이 가능하면 더 많은 조선족이 몰려 올 것이 당연하고 한국인들도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시에서도 민족문화를 꽃피우고 한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돈득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발전은 심각한 도전을 맞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기회가 있고 미래가 있다.   참고문헌   陈明: “中国东北境内的朝鲜民族”, 『人民日报』1950年12月6日。 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局(館):『中共延边吉敦地委延边专署重要文件汇编』(1945.11-1949.1)第一集,1985. 朝鮮族簡史編寫組: 『朝鮮族簡史』, 延邊人民出版社, 1986. 韓俊光 等 主編『中國朝鮮族歷史硏究論叢』Ⅱ,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2. 崔洪彬 主編『朝鮮族硏究論叢』4, 연변대학출판사, 1995. 韓俊光,『朝鮮族』, 民族出版社, 1996. 조룡호 박문일 주필,『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발전방략연구』, 요녕민족출판사, 1997. 홍만호: “한국나들이와 도시진출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있는가?” 『문화산맥』2,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7. 金钟国 主编:『党的民族政策与延边朝鲜族』,延边大学出版社,1998. 정신철, 『중국 조선족사회의 변천과 전망』, 요녕민족출판사,1999. 최우길: “중국 조선족의 정체성 변화에 대한 소고”,『재외한인연구』제8호(1999) 김강일 주필,『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연변인민출판사, 2001. 정신철: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 도서출판모시는 사람들, 2004. 황유복: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 『중국조선족사연구』2009, 민족출판사,2011     [①] Carla J., Reginald J.,“Racial Identity, African Self-consciousness and Career in Decision Making in African American College Women,”Journal of Multicultural Counselling and Development, 1998 Vol. 26(No. 1)참조。 [②] Jean.S.Phinney., “ Ethnic Identity in Adolescents and Adults: Review of Research” Psychological Bulletin, 1990,Vol 108(No. 3)참조     [③]戴晓东:《浅析族裔民族主义与公民民族主义》,《现代国际关系》2002年12期;陈晓婧:《浅析中华民族多元一体格局中的民族认同》,《广西民族研究》2005年4期;钱雪梅:《从认同的基本特性看族群认同与国家认同的关系》,《民族研究》2006年6期;都永浩:《民族认同与公民、国家认同》,《黑龙江民族丛刊》2009年6期;谢俊春:《中华民族认同:西部民族地区社会稳定的重要心理基础》,《牡丹江大学学报》2009年7期; 金志远:《论国家认同与民族(族群)认同的共生性》,《前沿》2010年19期; 苏昊:《民族认同和国家认同研究综述》,《民族论坛》2010年8期;吴青海:《试析新疆加强对中华民族认同的意义》,《福建党史月刊》2011年6期;丽君:《论民族认同与国家认同》,《长江大学学报》2012年3期; 温少玲:《中华民族认同研究》,华南理工大学2010年博士论文; 毕跃光:《民族认同、族际认同与国家认同的共生关系研究》,中央民族大学2011年博士论文 등 다수. [④] “동북 조선민족의 새기원—조선인민대표 주덕해동지를 찾아서”,《동북조선인민보》,1949년8월29일。 [⑤] 陈明:《中国东北境内的朝鲜民族》,《人民日报》1950年12月6日。 [⑥] 중화민국4년(1915년)에 화룡현에서 두번째로 조선인입적수속을 하였고 훈춘, 연길, 왕청 등 3개현에서도 이어 수속하였다. 조선인들이 입적한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향유하였는바 당시 화룡현의 12개사(社)가운데 陳德新社 사장이외 기타 사장은 모두 조선인이 담당하였고 연길의 5개향에서는 향장이외 부향장은 모두 조선인이었으며 왕청, 훈춘의 상황도 만찬가지였다. 《延边与朝鲜族》,延边朝鲜族自治州档案馆编《中共延边地委延边专署重要文件汇编》第2集,1986,14-15쪽。 [⑦] “滿洲의 조선 사람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순전히 만주에 정착하고 名實이 함께 만주국의 鮮系國民으로서 미래 영원히 滿洲國의 一翼을 이을 사람이고, 하나는 出稼기분을 청산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조선 내지로 돌아갈 사람들이다.”(《滿鮮日報》1940년3월20일 2면)   “만주에 온 조선 사람들은 과거나 현재나 돈벌이 하여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소위 出稼根性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될 것인데...”(《滿鮮日報》1940년 4월 3일2면) “중국에 있는 우리 교민이 약 400만이 있다. 그중 약 300만이 山海關이외 즉 東三省에 있는데 間島에 있는 100만 교민은 오랫동안 있어서 거기에서 토지소유권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바 아미 이것은 소수민족으로서 해결될 줄 믿는다.” 《동아일보》1945년12월9일)등에서 조선인들의 중국정착경향을 볼수 있다. [⑧]姚作起:, 韓俊光 等 主編《中國朝鮮族歷史硏究論叢》Ⅱ, 흑룡강조 선민족출판사, 1992, 295쪽. [⑨]董昆一:《新年献辞》,延边朝鲜族自治州档案馆编《中共延边吉敦地委延边专署重要文件汇编》(1945.11-1949.1)제1집,1985,8쪽. [⑩]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局(館):《中共延邊吉東吉敦地委  延邊專署重要文件彙編》(1945.11-1949.1)제1집,1985,386-389쪽。 [11] 延邊朝鮮族自治州檔案局(館):《中共延邊吉東吉敦地委  延邊專署重要文件彙編》,1985,387쪽。 [12] 《연변일보》,1948년11월23일。 [13] 《연변일보》,1948년12월10일。 [14] 《연변일보》,1949년2월10일。 [15] 《동북조선인민보》,1950년6월29일。 [16] 《동북조선인민보》,1950년11월11일。 [17] 정신철: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 도서출판모시는 사람들, 2004, 203쪽. [18] “조국관념문제에서의 모호한 인식을 비판”,《목단강 일보》, 1958년8월22일 [19] 정신철: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 도서출판모시는 사람들, 2004, 157쪽.   [20] 황유복:《조선족정체성에 대한 담론》,《중국조선족사연구》2009,민족출판사2011; 조성일:《편찬의 시말》,《문화시대》2009년제1기 등.  
44    민족문화산업활성화에 관하여 댓글:  조회:2888  추천:7  2012-08-16
민족문화산업활성화에 관하여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현재 인구이동, 도시화와 더불어 조선족사회에 있어서 민족문화전통이 날로 희박해지는 추세가 보인다. 하지만 민족문화전통은 민족구성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민족존속과 발전에도 연관이 되므로 민족이 살아남아려면 귀중한 민족문화를 반드시 보존 전승하여야 한다. 다른 한면 경제발전에 따라 크게 늘어나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생활수요에 호응하여 문화산업이 신속히 성장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민족문화는 그 풍부성과 특수성으로 날로 주목을 받고있다. 우리는 이러한 계기를 활용하여 민족문화산업을 부흥시킴으로 민족문화의 발전과 전승에 더욱 기여하여야 할 것이다.     1. 문화산업이란? 문화산업이란 각종 문화자원에 대한 투자와 경영의 경제행위를 말한다. 현재 사회발전과 생활수준의 제고에 따라 인간들의 생활추구도 날로 다양해져 물질적 패션을 추구할뿐만 아니라 생활에서의 문화적 요소를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산업이 흥기되고 신속히 성장하여 그 경제적 효과도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더우기 문화산업은 특정지역의 경제, 사회발전에서 더욱 큰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한 지역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각종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과 관리, 활성화 및 각종 형식의 문화활동 등은 그 지역 문화산업발전을 추진하는 근저이다. 그리고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특징이 하나의 흡인력이 되어 외부로 부터 인재와 투자를 유치함으로 최종에는 그 지역개발과 경쟁력제고에 더욱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한 지역에서 문화예술활동 및 문화산업이 부흥되면 기업의 투자와 생활소비를 추진할수 있으므로 그 지역경제사회발전의 하나의 중요한 기초로 될수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제조업의 30%과 서비스업의 50%이 투자를 결정할 때 먼저 그 지역 문화자원의 가용성을 중요시한다고 한다.[①] 다시 말하면 민족지역에서 문화예술활동과 문화산업이 흥기되면 기업의 투자와 소비생활을 신속히 추진할 수 있어 그 지역발전의 중요한 기초로 될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활동이 문화산업과 지역발전을 추진하는데는 영상, 출판, 음악, 영화 등 문화산업을 유치하는 것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민속활동 예컨대 민간명절, 전통음식, 세시풍속 등과 그 지역 역사유적, 역사사건, 역사인물 등 소재를 활용하여 산업화하는 방법이다. 특히 후자는 지역특색을 발휘하고 지역주민의 지원과 참여를 흡인하는 효과가 전자보다 더욱 강하다. 그리고 이것이 관광, 레저문화와 밀접히 연접되어 일종의 산업链으로 형성되면 지역경제사회발전에 강력한 활력을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문화산업의 흥기와 신속한 성장은 민족지역 경제, 사회발전에 중요한 기여을 할 수 있다.   2. 우리의 풍부한 민족문화자원 민족문화란 한 민족의 생산,생 활과정에서 형성발전한 민족특징을 띤 문화로서 주요하게 물질문화와 정신문화로 분류한다. 물질문화로는 음식, 복식, 주택와 생산기구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신문화로는 언어문자,  문학예술, 철학종교, 풍속습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을 갖고 있으며 풍부한 민족문화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민족문화자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아래와 같다. 하나는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지역에 민족의 역사흐름을 반영하는 수많은 문화유적이고 또 하나는 장기적인 생산과 생활에서 형성발전한  민속문화이다. 이 가운데 민속문화는 민족문화자원의 개발과 산업화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민속은 민간풍속으로 민중들이 생산, 생활과정에서 창조하고 향유하며 전승해 가는 물질적, 정신적 문화현상으로 민속문화는 대중의 생활문화에 속한다. 우리민족은 장기적인 생산생활과정에서 의, 식, 주, 행 등 방면에서 민족특징이 농후한 민속문화를 창조하고 전승하여 왔다. 우리민족은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로 노래와 춤을 즐겼고 다채로운 생활습속, 즉 경사로운 혼인풍속, 감격적인 환갑, 사랑와 미래의 희망이 깃들어 있는 돌잔치, 힘차면서 순박한 체육경기 등 풍속은 지금도 전승하고  있다. 그리고 전통음식들인 냉면, 찰떡, 김치 등은 그 독특한 맛으로 타민족에게도 많이 전파보급되었으며 아름다운 민요, 전통가무, 특색의 주거, 고풍스러운 복식 등에도 농후한 민족문화의 전통을 넉넉히 감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민족의 전통춤 농악무는 2009년에 유네스코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에 뽑히여고 춤으로는 중국에서도 유일한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러한 민속문화 등이 민족문화산업의 기초로 되어 민족경제,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3. 민족문화산업의 현실 민족문화산업의 중요성이 날로 부각되어가고 있는 현재 각 지역에서는 민속문화와 역사문화유적 등 바탕으로  민족문화산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은 이상적이 못 된다. 예컨대 민족문화산업발전의 하나로 현재 많은 지역에서 민속촉건설과 민속관건설을 하고 있지만 모두 단조롭고 획일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 하고 있으며 단지 표상적인 민속현상을 전시하는데 그치고 마는 수준 낮은 중복건설에 불과하다. 문화경영인재가 아주 결핍할 뿐만아니라 전반적 문화자원을 조합하여 활용하지 못하고 단조롭고 획일적인 품목투자는 지역간의 경쟁만 부추기고 있다. 합리적인 문화산업구조가 형성되지 못하여 축제나 민속촌건설은 많으나 문화산업고리가 연결되지않아 산업화정도가 아주 낮다. 그리고 전시나 디지털 기술 등 산업화 될수있는 품목이나 상품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여러 지역에서 건설하고 있는 민속촌과 민속관은 거의 자기 특색을 나타내지 못 하고 있다. 단조롭고 획일적인 형식, 취미성과 체험성이 결핍한 내용, 그리고 민속문화관광에 있어서 민속문화산품의 상품화가 되어있지 않는 현실 등을 보면 역시 장기성이 없어 보인다.   4. 민족문화산업활성화를 위한 제안 한 민족에게 있어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화자산에 대한 보존, 활용 및 다양한 문화활동은 문화산업발전을 추진하는 저력이다.     우리에게는 풍부한 민족문화유산과 전통문화자원이 있다. 우리의 풍속습관, 음식, 복식, 체육과 민간유희 등은 뚜렷한 민족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민족문화산업발전의 우세이다.     그럼 민족문화산업을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     하나, 민족문화자원의 중요한 부분인 민속문화자원과 역사문화자원을 충분히 발굴하여야 한다.     둘째, 현재 민족문화산업발전의 중점은 민속문화의 산업화에 있다. 예컨대 민속문화전시, 민속음식, 민속오락, 민속공예품가공, 민간예술홍보 등 민속문화를 신속히 발전시켜 민속문화브랜드와 민속문화산품을 창출하여야 한다. 셋째, 민족의 민속문화, 역사문화 등에 대한 지식성, 취미성, 체험성을 부각시켜 관광속에 문화, 문화속의 관광을 포괄하는 특색이 있는 하나의 문화관광산업의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 네째, 민속촌건설과 레저문화를 충분히 조합하여  민속촌에 가면 볼 것이 있고 놀 것이 있으며 먹을 것이 있고 조용히 쉬어갈수 있으며 또 돌아갈 때면 선물을 사 갈 수 있도록 다원화의 길을 가야 한다. 다섯째, 민족문화의 산업화과정에서 단순화, 획일성을 피하여 매개 지역의 특색을 살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민족문화산업은 문화자원시장화의 과정으로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동시에 민족사회발전에 대한 기여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민족문화의 전시를 통하여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각 민족사이의 상호이해증진을 추진하는 매개로 될 수 있으며 또 사회안정과 민족화목의 풍경을 과시함으로 국제교류, 투자유치를 추진하여 지역경제사회발전의 계기로 될 수도 있다.    [①] European Commisssion, Culture, the Cultural Industries and Empoloyment, 1998.
43    오직 선진민족으로 탈바꿈하여야…… 댓글:  조회:2283  추천:2  2012-07-31
  조선족은 두만강, 압록강 넘어에서 이민 온 중국“과계민족”(跨界民族)의 하나이다. 과거 100여년간 조선족은 강한 생명력과 꾸준한 노력으로 중국사회에서 공인하는 우수민족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한족인구가 절대다수 차지하고 한문화가 주체를 이룬 중국에서 민족전통을 보존발전하면서 또 한문화에 적응해야 하였다. 이 가운데 많은 모순과 갈등이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민족의 전통을 완전하게 지켜왔다.   하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은 조선족의 전통거주구조와  생활양식을 다 각도로 개변시켰다. 과거 조선족은 정치생활에서는 완전한 중국식을 면치 못하였지만 사회생활은 상대적으로 집결된 지역에서 민족내부의 교류를 위주로 하여왔다. 하지만 개혁개방은 조선족의 민족적 울타리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시장의식이 싹트고 경제리익 추구에 발동을 걸은 수 많은 조선족인구의 이동은 민족적 범위를 벗어나 활동령역을 더욱 넓히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농민들과 동북집거지역의 조선족들의 도시진출이었고 산해관이남지역 진출이었으며 한국을 비롯한 해외 진출이었다.  조선족인구의 동북지역과 농촌탈출은 현재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하였는바   민족교육의 기본장소인 조선족학교가 날로 줄어 들었고 장가들 나이의 총각들이 결혼대상자 없어 고민하였다. 그리고 집거지역의 조선족인구가 급격히 줄어 들면서 옛날 그들이 모여 살던 우리농촌은 날로 쓸쓸해 가고 있다. 원래 소수에 속하는 조선족에게 있어서 이러한 문제들은 민족특성의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결국에는 민족동화의 길을 다그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와같이 일부에서 “위기설”,”해체설”등이 돌 정도로 조선족사회는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다.   물론 조선족사회발전도상에는 불리한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족은 문화소질이 높고 변화에 잘 적응하는 능력이 있을 뿐만아니라 민족의 현황을 잘 파악하고 원활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다. 조선족은 광범한 시장진출에서 민족의 경제실력을 키웠으며 외계과의 접촉에서 민족의식도 강화되였다. 그리고 조선반도에는 두개의 주권국가가 있고 조선족이 그들과의 연대가 더욱 깊어가고 있는 것도 유리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다만 다민족국가에서 민족이 동화되지 않고 살아 남으려면 반드시 민족특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특성을 보존하려면 민족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지위를 확고해야 한다. 이 길은 오직 선진민족으로 부상하는 길밖에 없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경제, 문화가 발달하고 영향력 있는 과학대가, 석학들이 많이 출현하면 민족적 긍지와 자신감은 자연히 증가되고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더욱 강렬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선진민족으로 탈바꿈되면 우리는 인구로는 비록 소수에 속하지만 동화되지 않고 민족특성과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구분포도의 변화는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부각시켰고 민족성원들의 각종형식의 모임은 민족적 연대감증대에 필요하다. 특히 도시민족교육은 민족문화계승에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이고 도시의 민족모임은 교류의 장소로 서로의 연대감을 깊이 하며 민족의식을 자각케 한다. 우리는 주인의식을 키우고 민족발전사업에서도 과거 항일전쟁, 해방전쟁과 합작화운동시기의 열정으로 일을 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술 마시기, 놀기와 과소비의 돈을 적당히 아껴서 도시민족교육기금, 민족인구발전기금 등을 마련하여 민족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의 인구를 증가하는데 활용할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였으면 한다. 현재 우리앞에는 도전과 기회가 동시에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민족이 위축되거나 발전시킬 수도 있다. 민족의 모든 성원들이 모두 각성하여 힘을 합쳐 당면한 문제들을 제때에 해결하고 민족사회성장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위기를 지혜롭게 피면하고 아름다운 앞날을 펼쳐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저자의 《조선족사회의 현황과 미래》란 책자의 머리말이다)
42    4.관내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댓글:  조회:1960  추천:0  2012-07-31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정신철       산해관이남지역을 향한 조선족인구이동이 활발함에 따라 민족교육문제도 날로 돌출해 지고 있다. 민족성원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생각과 의욕 등을 파악하고저 우리는 북경, 천진, 청도 등 지역에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설문조사시간은 2009년8월에 시작하여 12월에 끝마쳤고 227부의 유효 설문지를 회수하였다.       1) 응답자들의 기본 상황     응답자의 성별을 보면 무응답자 10명을 제외한 217명가운데 남자가 98명이고 여자는 119명으로  여자의 수가 약간 많았다. 표1:     표1: 응답자의 성별비교     빈도 유효 % 유효수 남 98 45.16% 여 119 54.84% 무응답   10   합계   227           응답자의 연령을 보면 31--40세가 103명으로 제일 많고 41-50가 그 다음으로 기본상 자녀교육문제에 대두한 연령층이 다수인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표2:     표2: 응답자의 연령     빈도 유효 % 유효수 60세이상 6 2.75% 59-41세 71 32.57% 40-31세 103 47.25% 30-21세 37 16.97% 20세이하 1 0.46% 무응답   9   합계   227           응답자의 혼인상황을 보면 기혼자가 대부분이고 미혼자는 약 13% 차지한다. 표3:     표3: 응답자의 혼인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기혼 181 86.60% 미혼 27 12.92% 기타 1 0.48% 무응답   18   합계   227           응답자의 가정식구상황을 보면 3명가족이 절반이상 차지하고 4명가족이 3분지1를 차지하였다. 표4:     표4: 응답자의 가족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1명 4 1.88% 2명 8 3.76% 3명 113 53.05% 4명 70 32.86% 5명 12 5.63% 6명 5 2.35% 7명 1 0.47% 무응답   14   합계   227                                               응답자의 호적지 상황을 보면 동북3성에 호적을 둔 사람이 70%이상 차지하고 그 다음 산동성과 북경시 호적을 가진 사람들이 약 19% 차지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현 거주지에서 보면 기타지역 사람이었다. 표5:     표5: 응답자의 호적지 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길림성 72 33.33% 흑룡강성 72 33.33% 료녕성 13 6.02% 산동성 23 10.65% 북경시 18 8.33% 천진시 9 4.17% 광동성 4 1.85% 내몽고 2 0.93% 하북성 1 0.46% 하남성 1 0.46% 상해시 1 0.46% 무응답   11   합계   227           응답자의 현 거주지 상황은 청도시, 북경시, 천진시 순으로 각 지역의 설문조사규모와 대응이 된다. 표6: 표6 현 거주시 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북경시 69 30.40% 천진시 60 26.43% 청도시 98 43.17% 무응답   0   합계   227                         응답자의 현 거주지에서 거주한 시간을 보면 4년이상이 70%이상 차지하고 이 가운데 7년이상 거주한 비중이 약 75%차지한다. 이것은 비록 호적지는 아니지만 이들은 이미 현 거주지에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표7:     표7: 현 거주지에서의 거주시간     빈도 유효 % 유효수 1년이사 9 4.46% 1년 10 4.95% 2년 15 7.43% 3년 15 7.43% 4-6년 39 19.31% 7-10년 56 27.72% 11-15년 30 14.85% 16-20년 19 9.41% 20년이상 9 4.46% 무응답   25   합계   227           응답자의 학력을 보면 대학이상이 126명으로 60% 차지하고 중학교이하 학력을 가진 자가 많지않다. 이것은 이들의 생활적응능력이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8:     표8: 응답자의 학력     빈도 유효 % 유효수 대학원 15 7.14% 대학 111 52.86% 고등학교 72 34.29% 중학교이하 12 5.71% 무응답   17   합계   227           응답자의 소득상황을 보면 대부분이 2000-3000원이상이고 이 가운데 5000원이상의 소득자들이 응답자가운데서 약 3분지 1를 차지한다. 표9:     표9:     빈도 유효 % 유효수 1000-1500원 7 3.63% 1500-2000원 16 8.29% 2000-3000원 41 21.24% 3000-4000원 33 17.10% 4000-5000원 20 10.36% 5000원이상 61 31.61% 무소득 15 7.77% 무응답   34   합계   227           2) 응답자들의 민족언어생활       응답자가운데 대부분은 민족언어를 잘 장악하고 있으면 낮은 수준 또는 모른다고 답한 자는 아주 적다. 표10:     표10: 민족언어 장악수준     빈도 유효 % 유효수 잘한다 158 74.18% 보통이다 46 21.60% 잘하지 못한다 5 2.35% 모른다 4 1.88% 무응답   14   합계   227           응답자의 자녀상황을 보면 한명을 둔 가정이 제일 많고 자녀가 없는 응답자는 6명밖에 되지 않는다. 표11:     표11: 응당자의 자녀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0명 6 3.11% 1명 127 65.80% 2명 56 29.02% 3명 4 2.07% 무응답   34   합계   227           응답자 가운데 자녀와 같이 있는 자가 대부분이고 자녀와 떨어져 생활하는 경우의 사람이 29명에 달한다. 표12:     표12: 응답자의 자녀들과 동거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같이 생활 163 84.90% 떨어져 생활 29 15.10% 무응답   35   합계   227           자녀들과의 대화에서 조선어 사용상황을 보면 사용한다는 응답자가 143명으로 무응답자를 제외하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사용하지 않은다는 응답자도 44명으로 적지 않았다. 그리고 무응답자도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이들 가운데서 민족언어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않는지? 표13:     표13: 자녀들과 대화에서 민족어사용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사용한다 143 76.47% 사용하지 안 함 44 23.53% 무응답   40   합계   227           응답자 자녀들이 학교 또는 유치원에 다니는 상황을 보면 조선족학교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모두 95명으로 무응답자를 제외하면 약 56%차지하고 한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약44% 차지한다. 표14:     표14: 조선족 자녀들이 민족학교 다니는 상황     빈도 유효 % 유효수 조선족학교 81 47.65% 한족학교 58 34.12% 조선족유치원 14 8.24% 한족유치원 17 10.00% 무응답   57   합계   227           3) 응답자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의욕       자녀들이 어느 학교 또는 유치원에 보내는 것을 희망하는가에 대하여 응답자 대부분이 조선족학교와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다고 답하였고 한족학교와 유치원을 희망한다는 응답자도 있었다.표15:     표15: 자녀들의 민족교육접수에 대한 희망     빈도 유효 % 유효수 조선족학교/유치원 159 83.25% 한족학교/유치원 32 16.75% 무응답   36   합계   227                  도시에서 꼭 조선어와 민족문화를 알아야 하는지에 대하여서는 절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매우 긍정적인 답을 하였으며 부정적 또는 모르도 괜찮다고 답한 자는 5%좌우밖에 되지 않는다. 표16:     표16: 민족어와 민족문화에 대한 태도     빈도 유효 % 유효수 알아야 한다 206 94.50% 그렇지 않다 5 2.29% 관계없다 7 3.21% 무응답   9   합계   227                   도시에서 민족교육의 제일 적합한 도경에 대하여서는 공립조선족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답이 대부분이고 사립학교, 주말학교 및 현지학교에 조선족반을 설립하는 등에 대하여서는 호응이 많지않다. 표17:     표17:도시민족교육의 적합한 도경     빈도 유효 % 유효수 공립조선족학교설립 157 74.76% 사립조선족학교설립 15 7.14% 주말조선말학교 23 10.95% 현지학교에 조선족반설립 15 7.14% 무응답   17   합계   227                             현 거주지에 조선족학교가 꼭 필요하는지에 대하여서는 절대부분의 응답자들이 긍정적인 답을 하였으며 없어도 괜찮다는 답과 무관심이다고 답한 응답자들은 아주 적다.표18:     표18: 도시에서 조선족학교의 필요성     빈도 유효 % 유효수 꼭 필요하다 199 91.28% 없어도 된다 17 7.80% 관심이 없다 2 0.92% 무응답   9   합계   227                     현재 조선족학교 운영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절반이상의 응답자는 국가 공교육계열에 개입하는 것이다고 답하였고 그 다음은 정부의 지원과 민족경제의 강화가 중요하다고 답하였으며 민족자체의 힘을 합치는 것이다고 한 응답자도 10분지 1이 된다. 19표:     표19: 현재 조선족학교 운영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     빈도 유효 % 유효수 국가 공교육계열에 개입 120 55.56% 민족자체의 힘을 합쳐 20 9.26% 정부의 지원과 민족경제의 강화 76 35.19% 무응답   11   합계   227                            정부에서 조선족학교설립허가만 주고 경제적 지원이 없을 때 민족의 힘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정부의 경제지원이 중요하다고 하였고 민족의 힘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답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표20:     표20: 학교운영을 민족의 힘으로 할 수 있는지?     빈도 유효 % 유효수 할수 있다 75 34.72% 할수 없다 18 8.33% 그래도 정부의 지원이 중요 123 56.94% 무응답   11   합계   227                          4. 간단한 결론     상술의 설문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다.     첫째, 설문지 응답자들의 기본상황에서 연령, 가족식구, 자녀수자, 호적지와 거주지 등을 볼 때 거의가 자녀의 민족교육문제에 당면하고 있으면 민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수 있다.     둘째, 많은 학부모들은 될수록 자녀들과 조선어로 대화하고 자녀들이 민족교육을 받는것을 희망하고 있으나 현 거주지역에 조선족학교 또는 유치원의 미흡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민족교육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거주지에 조선족학교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지역정부에 민족정책관철을 호소하고 민족교육장소설립에 정책적, 경제적 지원을 요구하는 마음도 강렬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 민족의 힘으로 민족교육을 진행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우리가 처한 외부적 환경으로부터 많은 제한을 받고있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총체적으로 현재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은 어려움을 맞고 있다. 하지만 민족교육은 민족발전과 민족문화보존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존재로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고달프도 민족교육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면 안 된다. 우리는 어째든 민족성원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지역에 민족교육의 장을 개척하여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갖고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을 위하여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41    도시민족공동체구성과 네트웍의 역할(요지) 댓글:  조회:1956  추천:0  2012-07-31
도시민족공동체구성과 네트웍의 역할(요지)                                        정신철(중국사회과학원)         현재 조선족사회는 급속한 인구이동으로 많은 문제점을 로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문제들은 민족의 생존과도 깊은 련관을 갖고 있다. 이에 우리는 깊은 성찰을 하고 해결대책마련에 힘을 기울려야 한다. 1. 인구이동조류에 앞장 선 조선족 중국의 개혁개방과 도시화과정은 인구이동을 추진하였으며 이 가운데 조선족인구이동은 중국 각 민족가운데 앞장에 섰다. 조선족인구이동의 급속화는 동북지역의 민족집거지의 약화를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는 조선족농촌마을의 황폐화이었고 동북지역 집거지 조선족인구의 대량감소였다. 특히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민족집거지역을 떠나 원래 조선족이 없거나 드문 산해관이남도시지역에 진출하는 것은 민족인구의 초분산화를 의미한다. 현재 도시진출한 조선족사회의 양상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착되었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작게는 민족성원들의 활동장소로부터 크게는 민족문화전승, 민족교육전개등에까지 이어지는 문제들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지금의 경향을 볼때 중앙과 현지도시정부에서 새로운 정책과 조치를 내놓지 않는 한 상기의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쉽지않다. 하지만 민족사회에서 가만 있어서도 안 된다.  2. 화제로 되고있는 도시공동체구성문제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바로 민족의 도시공동체구상이다. 민족은 일정한 공동특징을 소유한 인간집단으로 민족의 공동특징은 기타민족과 구별하는 계선이고 민족내부응집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민족의 공동특징을 유지하는데는 집단적인 공동체생활이 필요하다. 과거 대부분 조선족은 향촌단위로 상대적인 공동체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민족교육장소를 마련할 수 있었고 민족문화전승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상황과 완전히 다른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것인 즉 조선족인구의 대량적인 도시진출에 따른 일련의 문제로출이다. 민족인구가 분산거주하고 민족학교가 없으며 민족문화시설이 없는 산해관이남지역도시의 실정은 민족공동체생활과 민족정체성유지에 있어서 큰 도전이 아닐수 없다. 도시진출은 매 개인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상대적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민족인구의 분산을 재촉하였다. 원래 인구수가 많지않는 소수민족성원으로 집거지역을 떠나 도시에 진출한다는 것은 민족인구의 거주분산을 의미하고 민족동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민족성원으로 그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도시에서도 반드시 민족공동체생활을 할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여야 한다. 도시에서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려면 역시 민족인구의 상대적인 집거지역이 있어야 하고 민족교육장소가 있어야 하며 민족문화시설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이러한 현안들을 해결하는데는 내적, 외적환경의 많은 제한을 받고 있다. 사회적, 정책적 외적환경을 제쳐놓고 민족자신의 내적환경을 보더라도 민족성원들의 도시공동체구성에 대한 절박성과 정체성유지에 대한 관심 및 노력등이 비교적 결핍한 상황이다. 조선족은 도시화과정에 앞장서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도시가 “농업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귀속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도시공동체구성이 우리에게 날로 절박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3.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의 중요성 도시에서 민족공동체생활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민족의 상대적 집거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여론을 조성하고 함께 모여살수 있는 여건마련에도 힘을 기울려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는 것이 민족적 네트웍일 것이다. 과학기술과 교통의 신속한 발달로 세계는 날로 작아지고 있지만 인구이동은 더욱 활발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조선족인구이동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인구이동에 의한 민족인구의 분산거주추세는 민족내부의 교류와 련대의 필요성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교류와 련대에는 네트웍의 역할이 날로 뚜렷해지고 있다. 따라서 네트웍은 현재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다. 특히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은 더욱 중요하다.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은 민족문화를 바탕으로 민족성원들을 련결하는 중요한 매체이다.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의 기초는 민족교육을 통한 민족력사전수, 민족언어문자유지발전, 민족전통문화전승등이다.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을 통하여 민족성원들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의식하고 민족자호감과 자신심을 느끼게 하며 민족일체성과 민족정체성을 강화한다. 때문에 민족의 문화적 네트웍은 민족성원들의 교류와 련대를 더욱 추진하고 어디에서도 자아민족을 감각케 하고 민족성유지에 힘을 기울리게 한다. 이것은 민족의 생존과 발전과도 련관된다. 물론 도시의 민족공동체구성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              ⊙              ⊙ 현재 우리민족은 중요한 전환기에 처해있다. 전진하지 못하면 후퇴하기 마련이다. 민족성원들은 발전앞에 놓인 어려움을 회피하고 말고 민족에 대한 애착과 신심을 가지고 힘을 합쳐 대면한 문제들을 착실히 해결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필자의 말: 현재 산해관이남도시에 조선족인구가 널리 분포되면서 도시민족교육실행문제와 민족정체성유지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중국조선족이 “농경”민족으로부터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는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하지만 우리민족이 도시에서 어떻게 민족정체성을 지키면서 발전할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아직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기회를 빌어 중국조선족사회의 미래발전에 있어서 꼭 필요한 민족의 도시공동체구축에 대한 화제를 제출하여 민족성원들의 관심과 반응을 기대해 본다.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구상   1. 문제제기와 목적:   200만좌우의 중국조선족가운데 인구이동으로 3분지1이상의 인구가 이미 산해관이남지역에 분포되어 있는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들이 동북지역의 민족전통집거지역을 떠나 한족인구가 절대다수인 산해관이남도시에  진출하고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당면한 제일 큰 고민이 아마 자녀들의 민족교육문제와 민족정체성 유지문제일 것이다.   민족교육은 학부모들의 민족성과 민족인구의 일정한 집중거주가 필요한 전제일 것이고 민족정체성유지에는 민족성원사이의 연대가 중요하다. 그리고 민족성원들의 연대는 크고 작은 집거지가 형성되고 민족문화바탕으로 공동체생활을 하는데서 더욱 강화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족사회의 도시화과정과 더불어 산해관이남지역에 조선족인구가 많이 분포되면서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이 솔선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본 연구는 산해관이남 여러 도시지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하여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필요한 조건, 당면한 문제등을 파악하고 도시공동체구축방안을 탐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의 바람은 조선족사회에 도시공동체구축의 필요성과 방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산해관이남지역에서 상대적인 집거지형성에 동조하며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문화를 유지하면서 생활할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모두 힘을 합쳐 노력하였으면 한다.   2. 연구주제:   동북지역조선족들의 산해관이남지역도시진출에 따른 도시공동체구축문제   3. 연구제강:   1)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발전   - 민족은 여러가지 공동특징을 소유한 비교적 안정된 하나의 인간집단이다   - 민족의 형성에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하였지만 이 가운데 공동한 생활지역이 제일 기본적인 조건일 것이다.   - 민족문화와 민족교육은 민족발전의 기초와 핵심이고 민족교육진행과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에는 민족집거지가 절실히 소요된다.   2) 중국조선족의 공동체생활   - 조선족은 이민민족이다   - 조선족은 이민,정착하면서 촌락중심으로 집거지를 형성하였다. - 조선족은 집거지가 있음으로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문화를 유지하면서 민족공동체생활을 할수 있었다.   3) 도시화과정에 따른 조선족인구의 분산화   - 과거조선족은 이동성이 적은 민족집거생활을 하였다.   -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의 제일 돌출한 현상이 인구이동이었다.   - 인구이동은 조선족사회의 과거 공동체생활전통을 파괴하고 인구를 널리 분산시켰다.   - 조선족인구의 분산화는 전통집거지의 축소를 초래할뿐만아니라 민족특징의 약화 지어는 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4)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의 필요성   - 현재 조선족은 농촌에서 도시로, 집거에서 분산으로 향한 과정을 겪고 있다.   - 조선족의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으로의 진출은 인구분산화를 초래할뿐만아니라 민족교육과 민족정체성유지에도 많은 애로점을 낳고 있다.   - 한족이 대다수인 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이 아주 필요하다.   - 도시공동체구축의 기본 조건은 도시에서 새로운 민족집거지의 형성이다.   5) 도시공동체구축의 여러 요소 분석   -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의 유리한 조건: 개혁개방과 인구이동의 자율화, 점차 강화되고 있는 민족성원들의 민족의식, 한국 및 한국인과의 밀접한 관계, 새로운 도시집거지형성을 위한 노력 등;   - 도시공동체구축의 불리한 요소: 한족인구가 절대다수인 환경, 신속한 도시화과정에 뒤진 사회제도개선, 도시민족정책과 일부제도의 경직성, 민족적 경제력의 결핍 등.   6) 도시공동체구축방안과 대책 - 조선족인구의 일정한 집거—민족교육—민족문화—민족사회단체—더 많은 조선족인구를 흡인—집거지 형성—도시공동체구축 - 도시조선족사이의 연대감 강화   - 민족경제력 강화   - 새로운 도시집거지형성에 관한 여론조성   - 해당 민족정책을 활용하여 도시민족교육, 민족문화조성에 주력   - 한국 및 한국인과의 화합과 유대감 강화   4. 연구실행계획:     - 산해관이남지역도시의 조선족사회현황에 관한 조사   - 해당도시조선족들의 민족정체성유지에 관한 설문조사   - 도시민족문제현황과 도시민족정책연구   - 한국 및 재중한국인과의 상호이해와 협력에 관한 연구   - 도시공동체구축방안 제시와 홍보   «   «   «   «   «   민족사회의 동참을 요청   우리사회는 현재 갈림길에 헤메이고 있다. 민족의 인구이동과 인구증장율저하는 전통집거지역축소를 초래하였고 도시진출과 인구분산화는 민적정체성약화를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산해관이남지역에 민족교육장소를 마련하고 민족의 도시집거지역을 구축하여야 한다. 이에 앞서 도시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리론적 근거와 실천적 가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구공정은 우리힘으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자체로 연구경비를 마련하고 우리자체로 연구하여야 한다. 요컨데 민족에 대한 관심과 애착심을 가진 모든 민족성원들이 물심량력으로 이에 동참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견해와 조언을 바라는 바이다.  
39    “연변시”구상에 대한 소감 (정신철) 댓글:  조회:4435  추천:2  2012-07-31
    “연변시”의 구상은 “연변조선족자치시”인지 아니면 일반 지구급“시”인지? ---“연변시”구상에 대한 소감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인류학연구소 교수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리룡희씨가 얼마전 전국인민대표대회회의에서 “자치주”를 “시”로 고칠 의향을 제출하였고 또 이를 위하여 뛰여다녔다고 한다. 연변의 지방행정수뇌로서 본 지역의 발전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소위 경제발전구상만 강조하고 연변의 특수성, 즉 민족성을 회피한 감을 주기도 한다. 연변경제사회발전에서 연길시의 역할이 대단하다. 하지만 연길시는 현급시로 제 역할을 다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자치주”와 자치주소재지 현시와의 관계문제가 부각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분야에서 논의하기도 하였다.  중국민족리론학계에서는 이들의 관계문제를 해결하려면 “민족자치시”를 설치하여야 한다는 학자도 있다. 가령 “자치시”가 현실로 되면 민족리론연구에서도 하나의 돌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보면 “자치시”설치가 아주 어렵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왜내하면 “자치시”를 개설하면 헌법으로 부터 일반 규정에 까지 모두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공정이 복잡한 것이다. 물론 중앙 주요책임자들이 결심하고 실행하다면 빨리 현실로 될수도 있다. 리룡희주장의 “주”를 “시”로 변화시키려는 의향 역시 연변조선족지치주 소재지 연길시의 행정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알수 있다. 다만 나의 소견같아서 몇 가지는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연변이 소수민족지역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행정구역변경을 거론할 때 항상 “민족”을 빼놓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더욱 강조하여야 한다. 두번째는 “민족자치시” 설치 가능성을 잘 파악하여야 한다. 만약 연변자치주가 “민족자치시”로 개칭되지 않고 “연변시”로 개설된다면 이를 극력 반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법은 민족자치를 약화 내지 취소할 가능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먼저 연변에 “자치”가 없을 때 행정수뇌에 꼭 조선족이 된다고 누구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다음 연변이 자치지역이기 때문에 조선족이 주장이 되고 인민대표로도 되며 부성장/부서기 지어는 장관까지 될 수 있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전쟁시기를 겪은 원 흑룡강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리민동지이외 동북3성에서 발탁된 조선족 차, 장관급 인사가운데 누가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또는 서기를 겪지 않았는가? 한족도 예외가 아니다. 장덕강, 소영 등도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발판을 하지 않았는가? 세번째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만 대표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200만 조선족의 중심역할을 하여야 하므로 자치주 책임자라면 “연변”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안목으로 전체 조선족사회 리익의 대변인으로 되어야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지역의 교훈을 섭취해야 한다. 호남성의 장가계시가 상서토가족자치주를 이탈한 것이나 료녕성 봉성만족자치현 등이 봉성시로 개칭한 후 이러한 지역에서 민족정책의 혜택을 향수하는데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룡희주장은 "국가에서 우리에게 ‘선행선시’를 부여한 만큼 우리는 응당 많은 면에서 보다 사상을 해방하고 보다 사로를 넓혀야 한다. 이래야만 '나아갈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조금 근심이 된다, 그 것인즉  경제사회발전을 추구하는데서 연변이 앞선다면 좋은 것이나 가령 “민족자치시”가 아닌 “연변시”가 사실로 된다면 .중국 기타 소수민족의 미움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8    7.관내 조선족 교육발전의 대책 댓글:  조회:1944  추천:0  2012-07-31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정신철       도시화흐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민족의 도시화과정은 필연적이다. 현재 몇 십만명에 달하는 조선족인구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의 대, 중 도시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만약 동북 3성의 여러 도시에 집결된 조선족인구까지 합하면 우리민족의 도시인구는 이미 상당수에 달할 것이다. 조선족인구의 분산과 민족문화의 약화에 따라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크게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교육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민족교육은 민족 언어문자의 사용과 보전, 민족문화전통의 유지와 발전 및 민족연대성을 강화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여건의 하나이다. 도시화와 더불어 우리의 민족교육은 과거의 농촌중심에서 점차 도시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며 도시 민족교육의 사명은 더욱 중대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도시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발전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이 탐구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도시 민족교육의 진행과 발전을 위하여 현재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것인즉: 첫째, 현지 조선족사회에 대한 파악과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과 현실상황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추진하여햐 한다는 근거를 조성하여 널리 홍보하고 정부와 민족성원들의 도시민족교육에 대한 중시와 호응을 얻어야 한다. 둘째,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 및 민족교육정책을 참답게 활용하여 행정당국에 민족교육의 중요성, 절박성을 호소하고 당의 민족정책을 집행하는 중요한 조치의 하나로 정책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도록 노력함으로 민족교육진행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산해관이남도시에서 민족교육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보장일 것이다. 셋째, 민족교육은 어디까지나 민족내부의 일로 민족의 전체성원이 이를 고민하고 힘을 합쳐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동북해방이후 조선족민중들이 일떠서 민족학교설립에 모든 힘을 이바지하는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 매 개인이 힘이 자라는 데까지 도시민족교육의 진행과 발전을 성원하고 지원하였으면 한다.   넷째, 국내외 모든 민족성원들의 지원도 필요하다. 고국인 한국에서는 도시민족교육에 필요한 서적, 교학시설, 특히 교원파견 가능성도 타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끝) 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37    6.관내 조선족 교육전개의 유형 댓글:  조회:2028  추천:0  2012-07-31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정신철         현재까지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진행과정을 보면 세 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단독으로 조선족학교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현지 한족학교와 연합하여 민족교육의 장소를 만드는 유형이며 세번째 유형은 주말 조선어학교와 학습반 꾸리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을 볼 때 서로의 장단점이 존재한다.   1) 단독 조선족학교 운영 동북지역처럼 조선족학교를 꾸려 민족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이상적인 것이다. 민족언어와 민족문화를 빨리 배울 수 있고 민족의 동질성유지와 응집력양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민족적 기반이 약한 산해관이남지역에서 공영으로 단독 조선족학교를 꾸릴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도 문제이다. 그리고 단독학교운영은 처음에는 현지화과정이 잘 되지않을 가능성이 많고, 학생들의 사회적 교류과 사회진출에서 약세를 보이는 점 등 문제가 존재할 수도 있다. 또 민간경영의 경우  학교부지를 마련하는 등 학교운영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학생들의 학비로 확보하여야 함으로 학부모들의 부담을 크게 증가한다. 그리고 현지 학교교육과정과 동일한 수준으로 나갈 수 있는지도 문제일 것이며 교원들도 불확실성이 많아 안심하지 못 하는 성향도 있을 것이다. 가령 국가 및 현지정부의 정책적, 재정적 지원이 없을 경우 민족단독학교운영이 매우 어렵다.   2) 현지 한족학교과 연합형식으로 운영하는 경우 현지 교육질이 좋은 한족학교와 연합하여 민족교육을 진행하는 경우 그 우세가 현저하다. 첫째는 조선족학생들의 학습질과 자질을 높일 수 있고 둘째로는 도시진출한 학부모들의 부담을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으며 셋째로는 한어 배우는데 도움이 되고 시야와 사회교제를 넓히는데 좋은 기초를 닦을 수 있다.[1] 이러한 형식도 현지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받아 공교육계열에 속하여 질 좋은 학교에 조선족학생부를 설립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그렇지 않고 민간경영의 경우 적당한 학교를 찾는 것도 중요하고 경비부담도 만만치 않으며 학교운영에서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단점일 것이다. 3) 주말 조선어 학교- 이 형식은 한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거나 조선어을 터득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업여시간을 이용하여 민족언어와 민족문화를 전수하는 좋은 형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기성이 없고 강제성이 약하여 민족어와 민족문화 터득의 효과가 크지 못하는 것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럼 세가지 유형가운데 어떤 것이 적합한지? 한 마디로 단언하기 어려우나 출발점은 현지 상황에 맞는 유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가령 조선족학령아동들이 비교적 집결된 도시에서는 단독학교를 꾸리는 방향을 타진할 수 있다. 만약 학령아동들의 수량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너무 분산거주한 도시에서 현지학교에 조선족부를 설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기숙사도 운영해야 할 것이다. 주말학교는 공교육계열에 들지 못하며 민족내부에서 경우에 따라 운영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이왕의 경우 세 가지 경우의 공동적인 어려움은 민간차원의 운영이다. 따라서 국가의 정규교육계열에 포함시켜 정책적으로, 경제적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도록하는 것이 중요한 사명일 것이다.    [1] 정신철: “조선족 도시민족교육의 출로”, 《민족단결》,1999년 제6기. 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36    5. 관내 조선족교육의 현황 댓글:  조회:2206  추천:0  2012-07-31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정신철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족학교가 없는 곳에서 민족의 언어와 문화교육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과거 인구분포의 특징으로 산해관이남지역에는 민족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산해관이남지역 도시로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은 부득불 현지 한족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민족언어와 문화를 습득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민족언어는 민족의 주요한 특징인바 그의 상실은 민족성 상실과 한족화의 과정을 재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과 국외진출은 집거지인구의 분산화를 초래하는 반면 인구의 도시집중을 다그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도시진출과 더불어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국외에 나간 사람들도 귀국후 재정착시 역시 도시지역에 집결되는 추세가 보였다. 조선족사회는 인구의 도시이동으로 날로 분산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분산은 또한 민족문화의 약화를 다그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민족문화를 전승하고 민족특성을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시민족교육의   필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의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여러도시에서 조선족자녀들에게 민족언어와 전통문화를 배워주기 위한 민족교육기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먼저 출현한 것이 민간에서 꾸린 조선어주말학교와 사립조선족학교이었다. 설립시간 선후로 나열해 본다.   1) 북경 조선어학교 1989년4월 북경조선어학교가 북경시 해전구 교육부문의 인가를 거쳐 설립, 1992년5월 제1기 졸업생 428명을 배출하였다. 이 학교는 주말을 이용하여 조선어와 민족전통문화를 배우는 곳으로 기존의 학교시설이나 기관의 시설을 빌려 민족어교육을 진행하는 주말학교이다. 학생구성은 초등학교학생에서 직장청년까지 있어 초등학생반, 중등학생반, 대학생반과 직장인반으로 나누고 수준에 따라 초급, 중급과 고급으로 나누고 학습시간은 3년으로 되어 있다. 이 학교는 개교이래 천여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이후 북경조선어학교은 심양, 길림, 장춘, 할빈, 목단강, 단동, 위해, 석가장 등 도시에 분교를 세워 민족언어문자교육을 진행하였다.   2) 천진시 조선어학습반 1990년 천진시조선족연합회에서 조선어기초반을 개강하였다. 첫 학기에 수강생 35명(대부분은 직장인)이었다. 형식은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8개월기간 조선어문과 문자의 기초를 터득, 사용한 교과서도 자아편집한 것이였다. 1991-1993년에 선후로 , , 등 교재를 사용하였고 초급반, 중급반과 통신반을 모집하였다. 1994년에는 천진시 하서구 직공대학과 연합하여 조선어학습반을 꾸렸다. 당시 조선어붐이 천진에서 일기 시작하였고 각 부문에서 조직한 여러 형식의 조선어학습반이 17개나 되었다. 이 시기 조선족연합회가 꾸린 조선어학습반은 천진시 조선어학습붐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1995년에 여러 여건으로 연합회에서 조선어합습반을 중단하게 되었다.    3) 천진시 새별조선족학교 1993년7월 가 천진시인민정부의 정식인가하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산해관이남에 첫 번째로 꾸린 조선족학교이다. 1998년 5월에는 부지면적이 1650평방메터에 달하는 교실, 기숙사, 식당 등을 포함한 종합청사가 천진시 유일한 조선족집거촌—동려구 신립촌진 보원촌에 마련되었다. 1999년에는 재학생 60여명에 15명 교직원으로 모두 조선족으로 구성되었다. 학생당 학비, 기숙사비,식사비를 포함하여 1년에 3000원을 받고 있지만 학교 운영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즉 다시 매년 기본지출이 30만원 정도로 해마다 10만정도의 적자를 보고 있었든 것이다. 학교의 학생래원 및 교원의 빈번한 이동 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2005년9월에 학교청사를 팔게되어 결국에는 문을 닫지 않으면 되었다. 예컨대2000년통계를 보면 당시 학생의 각종비용은 3000원으로 65명학생이 내는 경비수입이 20만원좌우이지만 학교의 지출은 난방비,전기세와 물세등이 5만원, 교직원의 월급 156,855원이고 식비가 6만원이며 사무비용이 4만원으로 모두 306,855원이 된다. 보는 바와같이 학교는 해마다 10만원좌우의 적자를 내면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4) 북경장백학교(김정국 시기)   1994년 8월 김정국이 북경에 조선족소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학생은 모두 12명(1학년생10명, 유치원생2명)이었으나 이후 빠른 발전을 가져와 1997년에는 학생수가 23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학생수의 증가에 따라 학교시설을 확대하였으나 비싼 학교건물 임대료 등으로  운영상의 부담 또한 적지않아 1998년에는 북경시외지역인 통주로 학교를 옮겼다. 하지만 이 계기로 학생수가 170여명으로 감소되는 등 학교규모가 갈수록 축소되었다. 2001년 김정국은 장백학교운영에서 손을 떼였다. 본 학교는 민간인이 꾸린 사립조선족학교이지만 “조선족학교”라는 간판은 해당기관의 불허가로 걸수 없었고 결국에는 “장백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5) 북경장백학교(김영옥 시기) 1994년 설립한 장백학교는 몇 년간 잘 운영되다가 경비부담 등으로 점차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게 되었다. 2001년에는 흑룡강성 계서출신의 녀성 김영옥씨가 이어받아 학교의 운영자로 되었으며 학교도 여러번 옮기게 되었다. 2003년8월부터 북경시내에 들어와 현지학교와 합작하는 형식으로 운영이 되었으며2006년에 장백소학교(찐숭제4소학교, 약60명 학생)과 장백중학교(찐숭제1중학교 약30명 학생)의 형식으로 남아 있었다. 이 두 학교는 숙소은 각기 있고 수업은 그 학교에 편입하여 하고 과외 기숙생활에서 조선어 학습, 학교보도, 그리고 피아노, 손풍금 등 특기교육을 진행하였으며 당시 조선족교원이 13명(월급 1500원정도)있었으며 한국학생과 북조선학생이 10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대사관 자녀이고 주요하게 한어공부를 하였다. 현재 장백학교의 연장선으로 성아 쌍어초등학교, 연교 중학교, 따창 고급실험중학교와 협력하여 조선족학생을 모집하여 민족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 학교의 초중부 학비는 6000원/학기이고 고중부는 7000원, 여기에 기숙사비, 식비 및 기타비용을 합치면 한 학기에 초중부는 11350원에 또 일차적으로 내는 입학금6000원을 내야 했고 고중부는 14200원에 입학금5000원을 더 내야 했다. 학생들의 이러한 경비는 산해관이남진출의 보통 조선족가정각도에 보면 아주 어려운 부담이 아닐수 없다.   6) 북경금잔디 유치원 1998년9월7일  이 설립되었다. 당시 유치원생은 12명에 불과하였다. 이는 1992년 북경에 진출한 김혜민(흑룡강성 탕원현조선족중학교 일본어교원)이 꾸린 조선족유치원이었다. 이후 유치원은 교육프로그램, 기숙환경, 건강식 등 모든 면에서 부근 기타 유치원수준을 월등하여 현지역의 우수교육기관이라는 좋은 평판을 받는 한면 조선족어린이 내원의 불안정 때문에 2005년부터 한족아이들도 받기 시작하였다. 한족아이들도 조선말, 조선글을 잘 배웠다. 현재 유치원생 220명가운데 조선족이 3분지1정도 된다. 그리고 주변 소학교의 저학년 학생대상으로 방과후에 조선말, 조선글을 배워주고 있다.   7) 북경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 조선족부 1999년9월 북경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 조선족부가 설립되었고 최초에 44명의 소학생이 모였다. 형식은 조선족학생 단독반을 꾸리지 앟고 일반 수업은 부속소학교의 학생들과 같이 하고 과외만는 민족교육중심으로 조선어문과 민족전통문화를 배우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현지 교육질이 좋은 학교와 연합하여 민족교육의 장소를 마련하는 이러한 방식이 학부모들의 호응을 받아 조선족부의 학생수가 증가하는 추세가 보였고 부속소학교가 폐교하기 직전 이 학교에 조선족학생이 140여명이 되었다. 학생들이 내는 비용은 한 학기에 소학생은 3500원, 중학생은 4500원이다. 이 비용에는 부속소학교에 내는 의탁 수업비 1000원과 식비, 기숙사운영,민족교육인력 사용 등이 포함되었다.   8) 북경 삼강학원 2005년 7월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가 폐교되고 해정구 실험소학교와 합병되면서 조선족부 학생도 실험소학교로 전이되고 삼강학원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조선족학생이 115명이었으며 그 후 한때는 학생이 170여명까지 되었다(이 가운데 한족학생이 30명). 하지만 실험소학교에서 매 학생당 2만원의 찬조금을 요구하는 바람에 조선족학생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한족학생이 증가되는 추세로 2008년에 결국은 문을 닫게 되었다.   9) 청도벽산조선족학교 청도조선족학교은 청도시 교육당국으로부터 공식허가를 받은 사립학교로 2000년 8월 28일에 개학하였으며 그 때 학생이 13명이었고 학교는 이창구 구수로에 있었다. 2001년 5월 필자가 방문할 시기 학생이 60명(1--4학년생)되고 교원이 14명 있었다. 2004년3월 청도벽산소학교로 개칭하였고 교사를 이창구 천수로에 옮겼다. 2006년에는 학생이 200명이고 교원은 35명이며 3기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당시 중학교가 설립되지 않아 졸업생들은 현지 한족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나 2007년9월에는 중학부가 설치되었다. 근 10년간의 발전을 거쳐 학교는 초보적으로 규모를 갖추고 학교운영도 정규화에로 나아가고 있으며 지금 소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전부 과목을 개설하고 유치원과 주말한글학교를 부설했다. 하지만 교사는 여전히 임대한 상태이다. 학교에는 지금 소학생 300여명, 유치원생 213명, 교직원 50여명(50%가 한족, 50%가 조선족)을 갖고있다. 학교에서는 청도시 시구의 소학교 통일교과서를 채용하고 조선어과목과 영어회화(외국인 교원) 등 특색언어과목을 증설했으며 조선어, 영어회화와 음악을 제외한 기타 과목은 모두 한어로 수업하여 학생과 의무교육의 동기성을 보장함으로 조선어, 한어, 영어 "세가지 언어 교학"을 실현했다. 현재(2009년5월) 새로운 교사를 건축하고 있는바 부지가 약 61,540평방메터이고 건축면적이 22,000평방메터 되며 2012년8월에는 준공될 계획이다. 그 때 학생규모는 총1500명으로 소학생 720명, 중학생360명, 고등학생 360명, 그리고 유치원생220명 등으로 전망하고 있다.   10) 청도 서원장조선족학교 2006년8월 청도서원장조선족학교는 벽산조선족학교의 초대교장 김장웅선생이 설립했다. 2006년 7월 1일, 김장웅선생은 서원장촌 교사를 임대하여 먼저 서원장조선족유치원을 설립한뒤 8월 28일에 서원장소학교를 설립했다. 지금 서원장조선족유치원과 소학교는 재학생 500여명을 갖고있다. 민영 유치원과 학교이다 보니 학교는 장기간 결손상태에 처해 있으며 2008년만 해도 10만원의 결손을 보았다. 도시민족교육의 특수성으로 학교운영 경비가 보통학교보다 더 지출된다. 왜냐하면 산재하므로 학생수가 적고 학교규모가 크지 않지만 교직원편제와 정상적 경비지출이 보통학교보다 많을 수 밖에 없으므로 재정적으로 더욱 큰 어려움이 있다. 위에서 보다시피 민족교육의 필요로 산해관이남지역에 여러 형식의 민족교육기구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현지정부의 해당정책미비, 재정적 어려움 등 여러 원인으로 어떤 곳에서는 폐교가 되고 어떤 곳에서는 어렵게 운영하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운영자체의 성격을 바꾸기도 하였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현황은 낙관적이 못 된다.  산해관이남지역에서 민족교육기관의 성쇄원인 가운데 하나는 조선족학부모들의 민족교육의욕이 약화되면서 그들은 자녀을 학교에 보내면서도 수학, 영어, 어문 등을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민족언어, 민족문화 터득에는 열성이 부족하였다. 두번째는 의무교육접수에 비해 10배내지 더 많은 경비부담을 해야 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는 정부의 정책적,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글싣는 순서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35    1.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댓글:  조회:2113  추천:0  2012-07-31
    산해관이남지역으로 조선족인구의 다량적인 이동은 이 지역에 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초래하였지만 현재까지 산해관이남지역의 조선족사회현황과 민족교육현황에 대한 파악과 연구는 아주 결핍하였다. 아래는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사회 및  민족교육문제에 대한 필자의 초보적인 연구결과물이다. 이 글이 우리사회에서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사회와 민족교육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과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필자로 부터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 목  차 서언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 서언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조선족은 도시진출, 국외진출가운데서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얻었지만 사회발전도상의 “진통”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인구이동으로 인한 농촌의 황폐화 현상과 민족집결지역의 축소 등은 민족의 정상적인 발전에 많은 저해를 주고 있다. 이 가운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민족교육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교육의 지역범위를 말하면 민족자치지역과 민족산재지역, 즉 집거지역의 민족교육과 산재지역의 민족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중국조선족의 민족자치지역으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자치현밖에 없다. 이외에 조선족들은 민족향을 포함한 기타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곳을 민족산재지역이라고 한다. 물론 산재지역이라고 하지만 조선족들은 여러 지역에서 향, 촌 단위로 상대적으로 집중거주하고 있음으로 민족학교를 운영하는 등 민족교육을 실행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민족교육의 보급과 발전은 조선족의 위상향상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민족교육이 인구이동, 인구감소와 더불어 현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특히 산해관이남지역의 민족교육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황에 임하여 있다.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1)민족교육의 중요성 매개 민족은 자기가 보유한 여러 특징으로 타민족과 구별된다. 중국조선족의 특징은 주요하게 언어문자와 역사에 기초한 전통문화에서 주로 표현되고있다. 지금까지 중국조선족은 한문화의 겹겹 포위속에서 비교적 완전하게 민족전통문화를 보존해 왔다. 중국조선족이 민족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민족교육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민족의 전면적인 발전, 민족성유지와 민족문화전승에 없어서는 안될 요인의 하나가 바로 민족교육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면: 첫째, 민족교육은 민족성원들의 과학문화적 소질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조선족교육의 특징의 하나가 조선말이 교학언어로 되어있는 점이다. 민족언어는 그 민족이 제일 많이 사용하고 또 제일 쉽게 터득할수 있는 언어이다. 때문에 본 민족의 언어문자로 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사실은 교육을 보급하고 민족성원들의 과학문화적 소질을 높이는데 아주 유리하다. 그리고 조선족의 문화교육보급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문맹률이 중국 각 민족가운데 제일 낮은 사실에서도 조선어가 수업언어인 민족교육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점을 말한다. 둘째, 민족교육은 민족의 우수한 인재양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교육의 기능에 있어서 하나는 문화를 보급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육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민족교육은 민족성원들에게 기초지식과 문화를 보급하는 동시에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준다. 때문에 민족교육의 건전한 발전은 민족의 인재양성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있다. 셋째, 민족교육은 민족언어와 문자의 사용과 발전을 추진하고있다. 민족언어문자의 교학은 민족교육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구성부문이다.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성원들은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장악하고 그의 사용범위를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또 민족언어문자의 연구를 추진시킨다. 따라서 민족교육은 민족언어문자의 보존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넷째, 민족교육은 민족의 력사와 전통을 대대로 전수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민족언어문자는 민족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로 세계상의 모든 문화는 그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민족역사와 문화도 민족언어 또는 문자를 통하여 대대로 전하게 된다. 때문에 민족역사를 후세에 알리며 민족문화전통을 전승하고 발전하는데 있어서 민족의 언어문자를 떠날 수 없다. 만약 민족언어문자를 장악하지 않으면 민족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깊이 있게 장악할 수가 없다. 민족교육이 민족전통문화의 보존과 발전에 대한 기여는 아무리 높게 평가하여도 과분하지 않다. 다섯째,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키울수 있다. 민족교육은 민족학생들에게 지식만 배우주는 것이 아니고 민족성원들의 민족적 자신심과 긍지심을 심어주는데도 중요한 작용을 하고있다. 예컨데 민족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선양하고 민족의 우수한 인물들을 소개하며 조선족이 중국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실을 널리 알림으로 민족적 긍지심과 자신심을 키워주는 것이다. 2) 중국에서의 조선족교육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민 온 과경민족(跨境民族)으로 중국에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국사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동북변강의 개척과 건설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고 수전농사의 성공으로 중국북방의 벼재배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신민주주의혁명의 각 시기마다 적극 참가하여 중대한 기여를 하였고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시기에도 앞장에 섰다. 그리고 조선족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우량한 전통이 있어 교육보급과 문화수준이 국내 기타민족보다 높았다. 1990년 중국인구 센서스자료에 의하면 중국 총인구 가운데 초등학교이상 교육을 받은 비율은 전 중국 평균수준은 69.81%이고, 한족수준은 70.67%이며 소수민족 평균수준은 60.60%인데 비해 조선족수준은 82.75%에 달하였다. 교육인구의 매 만명가운데 대학수준 소유자 숫자를 보면, 전국 평균수준은 78명이고 한족은 79명이며 소수민족평균은 61명인데 비해 조선족은 227명에 달하였다. 또 15세 이상의 인구 문맹률을 볼 때, 중국 총체의 평균 문맹률은 22.21%이고, 소수민족의 평균 문맹률은 30.83%에 달하며 한족의 문맹률은 21.53%이다. 이에 비해 조선족의 문맹률은 7.00%밖에 되지 않았다. 15ㅡ39세 연령층의 조선족 문맹률은 0.49%에 불과하지만 한족의 문맹률은 8.75%에 달하였다. 교육연한을 보면 전 중국 평균수준은 6.25년이고 소수민족 평균은 5.29년이나 조선족은 8.52년에 달하였다.  2000년 중국 제5차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대학수준 소유자 숫자를 보면 중국평균수준은 매 만명에 122명이고 한족은 126명에 비해 조선족은 381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석, 박사은 중국평균이 매 만명가운데 8명이고 한족 역시 8명이나 중국조선족은 17명에 달하였다. 조선족은 문화를 숭상하고 교육을 중요시하는 우수한 전통을 갖고 있다. 어려운 이주와 정착시기에도 우리 선조들은 이 전통만은 잊지 않고 마을이 생기는 대로 자기들의 말과 글을 배우고 민족문화를 터득하는 민족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 중국 건립이후 상대적인 안정속에서 조선족교육은 신속한 발전기를 맞이하였으며 그 수준은 중국에서 앞섰다. 단적인 예로 1949년 중국에서 첫 번째로 되는 민족대학―연변대학이 연길에 설립되었고 1958년에는 중국에서 첫 번째의 농민대학―새벽농민대학이 용정에 세워졌다. 그리고 1952년에 조선족지역에는 초등교육이 보급되었고 1958년에는 중학교교육이 기본적으로 보급되었다. 이것은 중국 어느 민족보다 높은 문화교육보급수준이었다. 그리고 1995년 연변대학,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등이 합병되기전의 몇 십년 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내에 3-4개의 대학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의 같은 행정구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경관이었다. 조선족교육보급수준이 중국에서 앞선 원인에는 조선족이 문화와 교육을 숭상하고 민족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조선족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장소가 있기 때문에 민족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도 가필하여야 한다. 조선족은 이주시기부터 모여 생활하는 집단마을을 건설하여 인구의 다수가 농촌마을을 단위로 집결해 있었다. 이러한 민족촌락 공동체는 민족교육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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