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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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의 농촌정책과 조선족농민들의 토지보존문제 댓글:  조회:4764  추천:66  2008-12-21
  현재 조선족농촌사회는 농민들의 도시진출과 국외진출로 날로 황량해 지고 있고 더 많은 논밭들이 기타민족의 손에 의해 경작되고 있다. 한 면 중국정부의 농촌정책은 날로 규범화되고 농민들에게 더욱 많은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 즈음에 우리 농민들은 어떻게 자기 앞에 차례진 농토를 빈틈없이 지키고 더욱 활성화하여 수익을 높여가야 하는지가 큰 화제일 수밖에 없다. 본 글 역시 이러한 주제를 필자 나름대로 피력해 보자 한다.   1.중국 조선족농촌의 현실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지도 이제는 30년이 된다. 이 30년 사이 중국은 아주 뚜렷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중국사회의 급속한 발전속에 조선족사회도 몰라보게 변모되어 가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수많은 변화속에 제일 큰 변화라고 하면 조선족인구 이동에서 비롯된 일련의 반응이라고 하겠다.   개혁개방이후 특히 중한수교이후 조선족인구이동은 국내 어느 민족보다 빠른 양상을 보였다. 현재 일반적인 추측에 의하면 동북3성에서 산해관이남 지역으로 이동한 조선족인구가 약 60만명에 달하고 국외진출한 인구가 50여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조선족인구 약 200만명에서 절반이상인 110여만 명이 원래의 거주지 동북3성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서 나름대로 삶을 개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세계 여러 민족가운데서도 보기 드문 현상일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는 국내의 도시화흐름과 국외 이동으로 전통적인 민족집거지가 점차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과 더불어 여러 가지 문제, 즉 민족교육의 축소와 질적 하강, 민족 전통문화의 상실, 농촌총각들의 결혼난, 선조들이 개척한 옥토의 상실 등 현상이 돌출해 지면서 우리민족발전의 중요한 기반들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아마 체감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럼 필자가 지난 7월하순경에 직접 다녀왔던 연변 어느 한 농촌마을의 상황을 예로 이야기하려 한다. 흥서촌과 원하촌은 화룡시내에서 약 10키로좌우 떨어진 서로 인접한 조선족과 한족의 두 행정촌이다. 아래에서는 두 개 촌의 비교로 조선족농촌 현황을 그려본다.   조선족행정촌인 흥서촌에는 3개 마을이 있는 바 아래표와 같다. 마을 가구수 인구수 남은인구 화룡시내 연변지역 기타지역 국외 대학생 행방불명 청두 160 232 63 48 24 17 37 4 39 흥서 158 552 119 152 80 36 124 8 33 룡서 100 305 78 56 44 32 68   27 표에서 보다시피 조선족마을에 남은 사람의 비율은 청두마을이 27.16%이고 흥서는 21.56%이며 룡서는 25.58%로 전체 평균수치는 23.88%이다.樂ҰҰϼːꘘ͋   표에서 보다시피 조선족마을에 남은 사람의 비율은 청두마을이 27.16%이고 흥서는 21.56%이며 룡서는 25.58%로 전체 평균수치는 23.88%이다.   그리고 한족과의 비교에서 먼저 청두마을의 조선족과 한족을 비교해 보면 이 마을 한족 가구수는 69호에 인구 247명으로 가구수에 비해 인구가 많은데 조선족가구당 인구는 1.45명이나 한족 가구당 인구는3.58명에 달한다. 인구이동을 보면 조선족의 국외진출인구가 37명(한국33명, 러시아3명, 일본1명)되나 한족의 국외진출은 없고 연변지역진출17명, 기타지역10명, 화룡시내 42명, 대학재학생5명과 군복무 1명, 행방불명 53명 등으로 이동인구가 128명되나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이 48.18%로 거의 절반에 달하지만 조선족은 27.16%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전 가족이 마을에 남아있는 수를 볼 때 조선족은 10가구(이 가운데 단신이 두 가구)인데 비해 한족은 28가구(단신가구는 없음)에 달한다.   다음 원하한족촌의 상황을 보면 두 개 마을의 전체 가구수는 115가구(실제 162가구)이고 인구는 464명(실제 564명)으로 가구당 인구는 4.03명에 달한다. 가구수가 호적수보다 많은 것은 호적이 없는 가구들이 이 곳에서 거주하기 때문이다. 이동인구를 보면 16가구에서 연변지역에 12명, 기타지역4명, 국외 2명 등 모두 18명밖에 되지 않아 조선족마을에 비하면 아주 안정적인 농촌마을이다.   토지경작 상황을 보면 흥서촌의 전체 경작지면적은 556헥타르이고 이 가운데 본 마을사람들의 경작면적은 226헥타르이고(이것도 본 마을 한족들이 많이 경작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타지역 한족이 경작하고 있는 면적은 150헥타르이며 타 촌 한족들이 경작하고 있는 면적은 180헥타르로 타 촌, 타지역 한족들이 전체면적의 59.35%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반면에 원하 한족촌의 매인당 경작지면적은 0.3헥타르에 불과하나 그들이 실제 다루고 있는 면적은 한 가구가 보통 5-6헥타르이며 어떤 집은 20헥타르 넘게 다루고 있다. 이들이 다루고 있는 경작지 대부분이 조선족마을의 경작지이다. 한족들은 많은 논밭을 다룰 뿐만 아니라 소, 돼지를 사양하는바 돼지 100여 마리씩 기르는 집이 10여 가구가 되고 소 사양하는 집도 10여 가구가 되는데 제일 많이 기르는 집에는 소가 40여 마리 된다.   그리고 조선족마을에는 거의 년로자만이 남아있으나 한족마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거의 다 집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결혼자와 생육자가 몇 명씩 생긴다. 더욱이 본 마을 내에서 연애 결혼한 경우도 있고 타지역에서 시집까지 오는 상황도 있는 것이 한족마을이다.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족마을의 생기발랄한 분위기에 비해 조선족마을은 여지없이 황폐돼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조선족농촌의 현실이다.    2.날로 좋아지는 중국의 농촌정책   중국의 개혁개방은 농촌개혁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것인즉 과거 집단생산과 평균분배의 농업경영에서 토지사용권을  농민 매 개인들에게 돌려줌으로 생산의 자율성, 효율성을 크게 제고하였다. 이 후 중국정부는 항상 농업, 농촌, 농민문제에 대한 중시를 돌리고 농업발전과 농촌실정을 따라 농촌정책을 계속 조절하고 새로운 대책들을 마련하여 농민들의 생산과 생활수준 제고에 주력하여 왔다.   개혁개방이후 현재까지 중국정부는 농업, 농촌, 농민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중요한 정책을 제정하였고 중공중앙과 국무원의 각 년에 발표하는 문건가운데 제1호 문건으로 농촌문제주제를 다룬 것만 해도 10개나 된다. 중공중앙의 “1호 문건”은 각기 부동한 시기 “3농”문제를 파악하고 농촌발전과 농민들의 물질적 이익보호에 심혈을 기울렸다.   1982년 중공중앙“1호 문건”에서는 이미 일부 농촌에 나타난 “호도거리”를 긍정하면서 농촌개혁의 중대한 정책으로 토지사용권을 농민들에게 직접 주었다. 그 후 일련의 “1호 문건”(1983-1986년, 2004-2008년)은 농민들의 생산자주성과 경영자주권을 강조하고 농업에 대한 투자를 증가하며 농민들의 부담을 감소하는데 주력하였다. 2004년에는 농업세와 농림목특산세를 감면하고 알곡생산, 우량품종 보급과 농기구구매에 대한 직접적인 보조정책을 제정하였고 2006년에는 농업세를 철저히 취소하고 농업생산자료에 대한 직접보조 등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 사회주의 새농촌 건설을 추진하면서 기초시설건설의 중점을 농촌에 돌렸고 공업이 농업을 지원하고 도시가 향촌발전을 추진하는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금년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7차 3기전체회의에서는 전문적으로 농촌문제를 토론하고 《중공중앙에서 농촌개혁발전을 추진하는 약간의 중대한 문제에 관한 결정》를 체결하였는바 농촌발전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이 결정은 모두 여섯 부분으로 (1) 새로운 형세하에서 농촌개혁발전을 추진하는 중요한 의의; (2) 농촌개혁발전을 추진하는 지도사상, 목표와 임무, 중대한 원칙;(3)개혁과 창신을 추진하여 농촌제도건설의 강화; (4) 현대농업을 적극적으로 발전하여 농업의 종합생산능력을 제고;(5) 농촌의 공공사업의 발전을 다그쳐 농촌사회의 전면적인 진보를 촉진; (6) 당의 영도를 강화 개선하여 농촌개혁의 추진을 위하여 견강한 정치적 보장을 제공 등이다.   이 가운데 제3부분이 농촌제도건설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첫째는 농촌의 기본경영제도의 안정과 개선을 강조하고 농민들에게 더욱 충분하고 보장적인 토지하청경영권을 부여하며 현재의 토지하청관계의 안정을 유지하고 장구 불변한다는 원칙을 강조하였으며 농업경영방식을 전환하여 농민들의 연합과 합작으로 조직화정도를 제고하고 전문적인 합작사의 발전을 부축한다고 강조하였다.   두번째는  엄격하고 규범적인 농촌토지관리제도를 건립하고  경영권을 명확히 하며 농촌토지의 경영권리, 등록, 증서발급 등 사업을 잘 하여 법적으로 농민들이 하청토지에 대한 점유, 사용, 수익 등 권리를 보장하며 법에 의거하고 자원적이며 보상이 있는 원칙에 따라 농민들이 중도이전, 임대, 호환, 양도, 주식합작 등 형식으로  토지하청경영권의 이전을 용허한다고 규정함으로 토지이전을 더욱 활성화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하청권을 보유하고 사용권을 양도한다는 것이 토지이전 제도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물론 토지하청경영권의 이전은 토지의 집단소유제 성격을 개변하지 못하고 토지용도를 개변하지 못 하며 농민들의 토지하청수익을 손해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세번째는 농업에 대한 지지와 보호제도를 개선하는 조목으로 해마다 알곡생산에 대한 보조와 농산품의 가격보호에 대한 제도를 개선하고 알곡의 최저 구매가를 점차 높이는데 중점을 두었다.   네 번째는 현대 농촌의 금융제도를 건립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도농경제,사회발전을 추진하는 제도를 건립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농촌의 민주관리제도를 건전하게 하는 것이다.   총적으로 이번 중공중앙의 농촌정책의 중심은 농민들을 마음놓도록 하고  농민들의 영농을 고무하는데 있었다.   3.토지는 우리의 중요한 자산   땅은 인간생활의 터전이고 우리에게 의식주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때문에 땅은 인류사회의 공동한 재산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 준 땅은 또한 민족의 특수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이 땅은 우리민족의 애환이 잠겨있는 곳이었고 또 대대로 삶을 지켜온 증인이기도 하였다.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넘어간 이주민 및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하였다. 조선족 선조들이 부득불 고향산천을 등지고 중국동북지역에 올 때 그들을 맞아 준 것은 풀초 우겨진 황막한 산야와 비적들의 약탈 그리고 현지관리의 억압이었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은 이 곳에 자리잡고 수 세대를 이어왔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곳은 우리선조들의 피눈물이 새겨있는 민족역사의 장이었다.   둘째, 동북지역은 우리민족의 생활터전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우리의 조상들은 처음 강을 건너 중국동북지역으로 향하였을 때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황무지를 비옥한 논밭으로 개척하였으며 그것이 현재 중국조선족의 생활터전으로 민족적 생활을 영위하는 무대로 되었다.   셋째, 이 땅은 우리가 민족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장소였다. 우리 선조들이 이 땅을 개척하면서 민족성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형성하였기에 민족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고 민족문화를 고스란히 지킬 수가 있었다.   이렇게 선조들이 개척한 땅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남기였다. 이 땅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장소를 조성하였으며 민족문화를 고스란히 지킬 수 있는 근저로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이래 조선족농촌의 경제생활이 주위 기타민족보다 더 풍요럽고 민족교육보급수준이 기타민족보다 높은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바로 우리는 조상들이 개척한 땅에 모여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농촌의 땅은 버림받는 “서자”의 신세로 변하고 있다. 개혁개방이후 특히 20세기 90년대 이후 조선족농민들은  분분히 농촌을 떠나 도시와 국외로 진출하였다. 농민들이 더 윤활한 생활을 추구하려고 농촌을 떠나는 것까지는 나무랄 것 없다. 이것은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혜택이었고 인간의 정상적인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농민들은 조상들이 개척한 땅, 자기가 다루었든 땅을 너무 소홀히 대한 것이다.   어떤 농민들은 외지에 간다고 또는 돌아않는다고 토지를 소홀히 하였고 또 어떤 농민들은 일시 목돈을 위해 일차적으로 토지를 한족에게 장기간  양도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농민은 토지양도계약서에 소위 “영원”이란 글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땅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땅을 포기하거나 또는 다른 민족들에게 양도하였다.  이러한 결과 수많은 조선족농촌마을의 절반이상의 토지가 기타민족들에게 의해 경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농토만 한족들이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마을도 점차 한족마을로 변모되 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농촌의 현실이었다.   여기서 보다시피 토지의 소실은 민족의 운명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4.토지사용권 확립과 활용    조선족농촌의 토지는 우리 선조들이 피땀으로 개척한 것으로 민족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땅을 무분별하게 타민족에 양도할 경우 시간이 흘러가면서 소실될 가능성이 많다. 현 시점에 와서 우리는 토지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우리는 중국정부의 농촌토지정책에 의하여 차례진 토지사용권을 확립하는 것이다.   개혁개방초기 호도거리정책을 실시한지 얼마되지 않아 1984년 중공중앙 제1호 문건에서는 농민들의 토지 사용기한을 15년까지 연장한다고 규정하였고 10년후인 1993년에는 15년에서 30년까지 연장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금년 10월에 개최된 중공중앙 제17차 3기 전체회의의 결의에 의하면 “장구 불변”이라고 규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농민들이 차례진 땅은 거의 대를 이어 경영할 수 있다는 정책이었다.   때문에 이 시점에 와서 자기의 토지사용권을 다시 확립하여야 한다. 지금 빨리 서둘러 해야 할 일은 과거 우리농민들이 자기 나름대로 타인에게 양도한 토지를  중국공산당의 새로운 농촌정책에 근거하여 현지정부에 힘을 빌어 새로운 양도 또는 임대 계약을 규범화하여 자신의 토지사용권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정책에 의하여 명확히 해 놓지 않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특히 1-2 세대가 지나가면 누구도 확실치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어떻게 과거의 잘못된 계약 등을 고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농민들이 일시적 필요 또는 타 지역 진출으로 토지를 소홀히 양도한 경우가 많다고 본다. 이러한 잘못된 계약 등을 개정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중공중앙 제17차 3기 전체회의에서 제정한 농촌정책을 참답게 이해하고 “법에 따라 농민들의 토지 점유, 사용, 수익 등 권리를 보장하고”,“농촌토지에 대한 권리확정, 등록, 증서발급제도를 참답게 해야하다”는 정책에 근거하여 현지정부에 의탁하고 법적 제도를 활용하여 과거 잘못된 계약 등을 처리하는 방법을 취하여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토지경영권 활성화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번에 제정한 중국공산당 농촌정책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토지경영권의 활성화인바 농민들에게 중도이전, 임대, 호환, 양도, 주식합작 등 형식으로  토지경영권의 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토지경영권의 활성화를 제창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토지경영권을 양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 전문적인 농업합작사 형식으로 토지에 대한 규모경영을 할 수 있고 토지를 주식화하여 수익분배에 참여할 수도 있는 등 여러 방법이 있다. 우리농민들은 자신 실정에 맞는 선택을 하여 토지사용권에서 더 큰 수익기대를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가능하면 토지경영권 확대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중국의 농촌정책은 갈수록 농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고 있고 토지사용권도 더욱 확대되리라고 믿는다. 앞으로 토지사유화의 가능성도 없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 차례진 토지사용권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여 힘이 닿는 대로 토지경영권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이것은 우리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할 수 있는 여건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농민들은 자신이 농장주가 되고 목장주가 되는 꿈도 있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족농촌의 토지는 우리의 중요한 자산이고 우리가 땅을 잃을 경우 우리의 설자리가 좁아지는 것과 같다. 때문에 이러한 땅을 우리는 소중히 여기고 튼튼히 지켜야 한다. (본 글은 2008년12월20일  한중경제친선교류협회, 재한중국동포 관련언론사, 단체 등이 공동주최한 <중국농촌정책과 조선족토지활성화>를 위한 간담회에서의 주제발표문이다.)
3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에 관하여 댓글:  조회:4956  추천:98  2008-12-19
  1. 중국개혁개방이전의 조선족사회의 흐름   중국조선족은 특수한 시기 형성한 조선민족의 한 갈래이다. 과거 조선반도의 자연재해, 일제식민지 약탈에 의하여 많은 조선반도주민들이 두만강,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중국 땅에서  생활터전을 개척하고 항일운동을 진행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보지 않고 언제가 조선반도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여 일제가 망한이후 중국 거주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선반도로 돌아갔다. 여러 여건으로 중국에 남은 100여만이 중국공산당의 국내해방전쟁과 토지개혁에 참여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맞이하였고 중국 다 민족국가의 일원으로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계기로  조선족의 자아 정체성은 점차 혼란에서 벗어나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족은 중국의 농업합자화 운동, 사회주의 개조와 문화대혁명 등을 겪어면서 자신의 중국국민성과 조선민족성 등 이중성격을 더욱 명확하였다.   그 상징의 하나가 조선족은 중국국민으로 중국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주류사회진출에도 게으러지 않았다. 조선족 가운데 중국국가 영도자가 나오고 정부장관이 나왔으며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중장, 소장 등 장군계급을 지닌 사람들도 10여명 산생하였고 또 10여명의 정부 차관급과  수 백명의 국장급인물들이 나왔으며 또 수천, 수만명의 대학 교수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와 기술인원들을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우주선발사, 위성발사 등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사들가운데 조선족과학자도 있었다. 조선족은 민족적 긍지를 갖고 중국에서 생활하였다.   다른 하나는 조선족은 평등한 중국민족정책하에 민족언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활용하면서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키워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는 공식사용문자를 조선어로 규정하였고 수 십개 민족향에서도 민족자치의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족이 집결한 동북 3성과 내몽골에서 수백, 수천개의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가 있으며 조선글 출판사, 조선어 방송국 등이 있었다. 이러한 것은 민족언어 유지와 민족문화 전승에 큰 기여를 하였다.   보다시피 중국조선족은 중국사회의 흐름에 따라 개혁개방까지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2.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에 관하여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인구이동에 따른 거주 분산화, 민족집거지역의 슬럼화, 민족교육의 급속한 축소, 한국과의 교류 등은 조선족의 이중 정체성에 수 많은 변수를 초래하여 다중성의 양상을 보였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시기에 따라, 대상에 따라 강화-약화-강화의 교체가 반복되었다.   하나는 민족집거지역을 떠나 중국 기타지역으로 진출한 경우 그 당사자들의 기타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더욱 체감하였고 또 사업과정에서는 민족차별감도 느끼게 되면서 민족정체성이 강화되는 한 면 의식적으로 민족성을 감추려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민족정체성은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자녀들은 산해관 이남에서 조선족학교가 없기에 민족교육을 받을 수가 없어 점차 민족정체성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 또 한편 한국의 성장과 중국진출은 조선족의 민족정체성강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조선족의 한국진출에서 처음에는 중국국민의식보다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앞섰고 코리안 드림에 많이 기대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한국땅을 밟고 한국에서 한국사회의 차별과 편견으로 한국에 대한 기대는 날로 약해지고 자신이 중국조선족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고 서로의 불신을 낳게 하였다. 다른 한 면  일부 사람들은 차별을 느끼면서 돈을 벌려고, 좀 더 자유로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친척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한국국적가입에도 서슴치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족정체성이라는 것도 매 개인의 실제 이익 앞에서는 한 순간 무력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가령 중국조선족에게 한국이란 고국이 없거나 밀접한 연관성이 없다고 할 때 아마 중국조선족은 여전히 중국사회에서 우수성을 긍정을 받으며 유유히 변화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이란 고국이 있어 조선족은 중국 어느 민족보다 도시, 해외진출이 빨랐으며 어떻게 보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빨리 급속히 시장경제의 물결속에 뛰어들어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우리는 한국만을 원망할 때가 아니다.   3.앞으로의 기대   도시화와 세계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중국에 이미 뿌리를 내린 조선족은 중국의 도시화과정에 발맞추어 과거 농경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여야 하고 세계화의 흐름속에 고국인 한국과의 유대성을 더욱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서로의 이해와 신뢰를 쌓고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사실 조선족사회의 많은 부정적 결과는 한국을 향한 코리안 드림이 아주 큰 화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정부의 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이라고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또는 차별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한국의 무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을 제정하여야 하고 (현재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한국사회에서 조선족이미지 향상에 힘을 기우려야 한다.   다음 이제 우리사회에서도 빨리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경제력에 따라 도시의 집거지역도 조성하고 민족학교도 세우며 문화장소도 만드는 등 민족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는 우리 모두 “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재외동포들이 더욱 많이 한국에 진출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로 진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는 “한국인”이고 나는 “조선족” 또는 “재일 korean”이다고 따지지 말고 현지에서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여 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중국의 예로 현재 한국에서 중국진출한 사람들이 80여만 된다고 한다. 앞으로 더욱 많아 질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도 동북 집거지역을 떠나 산해관이남으로 수 십만명 진출하였다. 이러 와중에 도시에서 민족집거지역 형성이 중요하다. 일정한 인구의 집거지역이 생기면 민족교육의 장소가 점차 형성될 것이고 민족교육이 가능하면 더 많은 조선족이 몰려 올 것이 당연하고 한국인들도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시에서도 민족문화를 꽃피우고 한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돈득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선족에게는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고 미래가 있다.       (본 글은 2008년12월16-17일 한국 해외교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2008 교포정책포럼>에서 발표한 지정토론문이다.)
2    중국인들의 "반한정서"의 발생 및 해소방법 댓글:  조회:3214  추천:107  2008-09-21
      얼마전 한 인터넷의 기사를 보았는데 올림픽체육장부근에서 한 일본인이 갈증이 나서 부근의 올림픽봉사자에게 물 한병을 사려고 하는데 거기에 있는 물은 판매하는 것이 아니였다. 일본인은 그래도 물을 마셔야 하기에 자기는 한국인으로 목이 너무 타서 물 한병만 팔라고 사정하는 바람에 봉사자는 물 한병을 주었다. 일본인은 물값을 주려고 하나 봉사자는 파는 물이 아니기에 거저 마셔라고 하였다. 그 다음 일본인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사실 자신은 한국인이 아니고 일본인이라고 말하였다. 봉사자는 왜 그랬느냐 물으니 일본인이라고 하면 중국인들이 더 반감을 사서 그랬노라 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 기사의 댓글이었는데 한 네티즌이 하는 말이 “너 정말 모르구나. 현재 중국인들은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혐오감을 갖고 있다.” 하나의 댓글에 불과하나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정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본다.     또 하나는 한국매체에서 중국인들의 반한정서를 한창 다루고 있을 때 중국인민일보 산하의 글로벌 타임즈(환구시보)등에서는 한국매체에서 중국인의 반한정서를 너무 과분하게 다룬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으며 “반한정서”는 가장된 명제이고 개념부터 과장된 것이며 “钻牛角尖”(쓸때없는데 힘만 버린다)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사는 한국인들의 우려를 무마하려는 뜻고 있겠지만 또한 역으로 중국인들의 반한정서를 그저 짚고 넘어 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서두를 이렇게 띠는 본의는 현재 중국인들의 반한정서는 확실히 심각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필자가 북경왕징지역에 대한 현지조사에서도 깊이 느끼고 있었던 문제이었다. 현재 우리가 할 일은 있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해결대책 마련에 힘을 기우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럼 중국인들의 반한정서가 왜 이 지경에 빠졌을까? 무엇이 이에 부채질 했을까? 이 모두가 깊은 사색을 자아내는 문제가 아닌가 한다.     중한 수교 16년이래 양국관계는 아주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모두 주시하는 바이다. 접촉이 많을수록 모순과 충돌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중한양국은 서로간 교류에서 많은 곡절을 겪어면서도 정치, 경제등 교류에서는 더 높은 차원인 전략적 협력파트너수준에 도달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중국인들의 “한류”(한국선호)에서 한국혐오의 경지에로 몰았는지? 필자 아래와 같은 점을 짚어 본다.     첫째, 중한양국의 문화교류에서 한국은 문화전파에만 급급했지 어디 한번 여유있게 반성해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예건대 한국드라마는 많은 중국인들이 즐겨 보았다.그런데 락도 도를 넘으면 비애를 초래한다는 말와 같이 현재 와서 그 많은 한국드라마의 획일적인 이야기와 주인공의 운명 등은 많은 중국인들의 한국드라마에 대한 실망과 혐오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최근 어느 사이트에서는 중앙테레피죤방송의 체널8에서 너무 한국드라마들 방송하여 이 체널을 한국체널이라고 이름을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는 야유의 말도 한창 흥행중이다. 그리고 대방에 대한 반감이 생긴이후에는 대방의 모든 것이 좋게 보이지 않듯이 이러한 현상들이 한류(한국선호)에서 한류(한국랭대)로 몰고 가는 하나의 원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둘째, 일부 한국인들의 맹랑하고 자의적 행위와 언론이 매체를 통하여 널리 전파된 결과가 초래한 반한감정, 예컨대 장춘 동기아세아경기장에서 한국인들의 표어, 중국사천지진때 일부 네티즌들의 댓글, 약속 어기고 올림픽개막식노출 등등 이러한 현상 모두가 중국인들의 반한정서를 마구 부채질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일부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하는 행실, 예컨대 자고자대, 중국인 기시, 퇴폐한 행위, 그리고 일부 한국기업의 “야간 도주” 등은 한국인의 이미지를 적지 않게 흐려놓았다.     넷째, 일부 중국인들의 허무한 자존심의 반발로 볼 수도 있다. 대국으로, 과거의 “종주국”으로 자기문화에 대한 우월감은 자기반성보다 대방의 약점에 더 신경을 써게 되고 대방에 대한 질책을 더 잘 하게 된다. “반한정서” 역시 이러한 체질의 어떤 발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중국인들의 반한정서를 어떻게 해소해야 할 것인지? 먼저 중국인들의 반한정서에 대한 기본상황 파악을 해야 한다고 본다. 중국인의 반한정서는 민간인위주에서 대두한 정서이고 그 주요한 표출방법은 인터넷을 통한 언론발표라고 볼수 있다. 인터넷 사용자를 볼 때 젊은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에 반한정서의 주요집단 역시 젊은계층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학생, 고등학교 학생등은 아지 가치관이 미숙하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계층으로 한면으로 그들의 정서발로도 잠시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면 그들은 미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역시 간과할 수 없는 계층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을 너무 모르고 한국인과 거의 접촉이 없은 상황하에서 기본상 다른 사람들의 전하는 말과 인터넷을 보고 생긴 “반한정서”라는 점이다. 중국인의 반한정서는 주요하게 오해와 편견에서 생긴 문화충돌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오해와 편견은 왕왕 상대방을 모르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때문에 기본상황을 파악한후 그 대안의 중요한 여건으로 하나는 서로의 이해를 돕은 교류의 장소와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이들에 대한 교양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양국정부가 깊은 관심을 갖고 경상적으로 다원문화교육을 진행하여 서로의 차이를 승인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의식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양국간의 청소년교류도 확대하여야 한다. 이것은 서로의 만남은 대방의 문화를 터득하고 서로의 오해를 해소하는 중요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것은 도덕과 소질교육을 강화하여 네티즌들의 소질을 높이고 참다운 인터넷문화 정립에 신경을 써야 한다.     
1    프로필 댓글:  조회:3994  추천:121  2006-01-12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사업하는 정신철입니다. 조글로포럼의 덕분에 이렇게 여러분과 교류를 하게 됩니다. 앞으로 많은 도움과 충고 부탁합니다. 그럼 자아소개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인류학연구소 연구원, 대학원 교수. 주요 연구분야: 맑스주의 민족문제이론과 중국소수민족 사회문화발전문제 및 조선민족연구 zhengxz@cass.org.cn, xinzhe58@hanmail.net 1958년 8월 길림성 반석시 출생. 1983년 연변대학 역사학부 졸업,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 법학 석사 졸업. 연변대학 역사학박사 졸업. 사회직무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회장 중국민족이론학회 상무이사 부비서장, 중국인류학&민족학연구회  민족관계전문위원회 비서장, 중국사회과학원 한국연구중심 이사, 한국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객원교수(2003.9-2004.8). 저서: 《중국조선족사회의 변천과 전망》(1999),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2004), 《동북어렵민족현대화 과정의 탐색》(공저,1994), 《한국-안개속의 국가》(주필,1995), 《중국소수민족현황과 발전의 조사연구 총서:용정시조선족권》(공저,1999) 《조선족사회의 현황과  미래》(2010) 중국소수민족인구총서《조선족》(2012)등 저작, 역저를 출판. 논문: 《중국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동서부의 발전격차를 축소하는데 관한 사고》, 《조선족사회발전의 현황과 대책연구》등 130여편의 론문과 번역문 등을 국내외 잡지와 신문에 발표. 연구에 참여한 과제: 중국국가사회과학기금과제《동북어렵민족의 현대화도로 탐색》, 중국국가사회과학기금과제《개혁개방과정에서의 중국민족관계》 국가“8차5개년 계획”사회과학중점과제《중국당대민족사》, 중국사회과학원중대과제《중국소수민족현황과 발전조사연구》, 중국사회과학원중점과제《등소평이론과 민족문제》등. 책임연구과제: 중국사회과학원 청년기금과제《조선족인구유동과 사회안정문제에 관한 연구, 중국사회과학원 기초연구과제《중국소수민족인구유동과 도시민족관계연구》, "동북공정"2003년과제 중국사회과학원 중대과제《청말민초의 중국민족주의 사조와 국족 구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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