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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한국의 신화
저주로 태여난 아이
조선의 제14대왕 선조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던 어느 해 가을이였다.
맑게 갠 가을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경복궁은 한없이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선조 임금은 무척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고 근정전 넓은 뜰안에 모인 만조 백관들은 임금의 용안만을 우러러볼뿐이였다.
선조 임금을 바라보는 신하들의 얼굴도 모두 근심걱정이 가득 서려있었다.
누구 하나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그래서 바늘 한개가 떨어진다고 해도 소리가 날것만 같은 고요가 온 궁궐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선조 임금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과인이 덕이 없어 이 나라에 자꾸 변고가 생기는 모양이오. 근래 평안도 고을에 자꾸 괴변이 일어나고 있오.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부임하기만 하면 그날 밤으로 죽고마니 이제는 성천 고을에 갈 사람이 없게 되었오. 수령이 없는 성천 고을 백성들은 큰 난리를 당한 백성과 같이 하루도 편안함이 없다 하니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선조 임금의 근심어린 말을 듣고도 신하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평안도 성천 군수로 부임한 사람마다 첫날밤을 못넘기고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두 사람이 죽었을때는 어명에 따라 다른 사람이 부임을 하곤 하였다. 그런데 벌써 다섯번째로 부임한 군수가 하룻밤 사이에 귀신도 모르게 죽임을 당했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임금이지만 , 부임만 하면 죽게 되는 그자리에 어명으로 사람을 보낼수는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근정전에 모여있는 임금과 신하들의 걱정은 태산같았다.
<휴우,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오! 이 일을.......>
임금은 혼자말처럼 이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임금이 걱정하는 소리에 신하들은 몸둘바를 모르고 있을뿐이였다.
무겁고 침통한 공기가 흐르는 동안 임금도 신하도 모두 답답한 가슴을 어쩔수가 없었다.
<.............>
물을 끼얹는듯한 고요함이 계속 흘렀다. 임금의 표정은 더욱 어둡게 변해갔고, 신하들을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임금 앞으로 나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감마마, 아뢰옵기는 황송하오나 소신이 성천 고을로 가겠습니다. >
임금의 표정이 금시 밝아졌다.
<정녕 그대가 성천 고을로 가겠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이렇게 성천 고을 수령을 자청하고 나선 사람은 미관 말직의 김탁이라는 사람이였다.
<비록 소신이 재주는 없지만 한번 가서 부임한 수령들의 변을 당한 까닭을 밝혀내보겠습니다.>
<오, 장한지고!>
임금은 감탄하며 어명을 내렸다.
<그렇다면 경으로 하여금 성천 군수로 제수하노라.>
신하들은 그제야 근심걱정을 털어내고 숨을 돌릴수 있었다.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이군 그래?>
<그래, 벼슬은 낮아도 제법 대장부의 기백이 있어.>
<그런데 괜찮을까?>
<.............>
신하들은 김탁의 용기를 칭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했다. 또 부임하자마자 죽임을 당할까 염려되였기때문이였다.
김탁은 안동 김씨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기가 있었다. 벼슬운이 없어 미관 말직에 머물러 있었지만, 언젠가는 높은 벼슬을 하겠다는 야망을 품고있었다.
이날부터 그는 임금과 신하들의 걱정과 기대를 한몸에 받으면서 성천 고을로 부임할 준비를 서둘렀다. 참으로 용기있고 배짱있는 김탁이였다.
마침내 부임할 준비가 끝났다.
<경이 부임하여 부디 성천 고을 백성들의 근심을 풀어주도록 하오.>
김탁은 임금의 격려를 받으며 성천 고을로 부임했다. 고을 백성들은 새로운 군수를 기쁜 마음으로 반겨 맞이했다.
<이번에 부임한 사또는 자칭해서 오신 분이래>
<음, 그렇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오셨다는 말인데 .......,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
<제발 이번에는 불길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누가 아니래.>
고을 백성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사또의 행차를 구경했다.
김탁은 관아에 도착하여 육방 관속과 고을 유지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런 다음 그동안 부임했던 군수들이 죽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
<모두 그동안 고생들 많았소.그러나 이제는 마음 푹 놓고 모두 맡은바 일에 충실해 주시오.>
김탁은 이렇게 관속들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나서 이방에게 명했다.
<이방은 지금 당장 명주실 열 꾸러미만 구해 오게나.>
<명주실 열 꾸레미를요?>
이방은 이렇게 말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짓자 사또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담배를 구할수 있을까?>
<희귀합니다만 찾으면 구할것입니다.>
<그렇다면 담배도 구해오게.>
<대체 그런것을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이유는 나중에 알것이니 급히 서두르게.>
이때 담배는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희귀하였다. 그러나 성천은 담배 재배가 잘 된다고 해서 나라에서 권장하는 마을이였다.
해질 무렵에 이방은 명주실 열 꾸러미와 담배 몇 춤을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사또, 분부대로 명주실과 담배를 대령하였습니다. >
<오, 수고가 많았네.>
이윽고 땅거미가 깔리고 사방은 어둠속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고을 백성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개미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고을의 거리에는 스산한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쓸려가고 있었다.
<신관 사또께서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실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군. 제발 무사히 넘기셔야 할텐데. 제발 덕분에 고을이 평안해졌음 좋겠어.>
고을 사람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움에 떨면서 사또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사또 김탁은 저녁상을 물린 후 명주실을 풀기 시작했다. 명주실 열 꾸레미를 다 풀어서 방안과 동헌 곳곳에 얼기설기 풀어 헤쳐 놓았다.
<이만 하면 되었다.>
김탁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간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를 계속 피우면서 주역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낭랑한 음성이 동헌에 울려퍼졌다. 문을 꾹 닫고 자옥한 연기속에서 사또는 한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매캐한 담배연기는 더욱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제는 주역을 읊조리는 사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였다.
짙은 안개가 낀것처럼 자욱한 담배연기는 방안을 채우고도 남아서 문틈 사이로 밖으로까지 새어나갔다.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날때가 됐는데........>
사또는 칼을 꽉 잡고 밖의 동태에 잔뜩 귀를 기울였다. 사방은 조용하기만 한데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
이때였다. 갑자기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그치더니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음, 드디여 무엇이 나타난 모양이군!>
사또는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한곳에 모아 밖의 소리를 엿들었다.
<사르륵.......사르륵........, 사르르 사르르.........>
참으로 이상한 소리였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분명 아니였다. 그렇다고 무슨 큰 짐승의 발자국 소리도 아니였다.
<무엇일까?>
사또 김탁은 전 신경을 한곳에 모았다. 그 소리는 더욱 가깝게 다가오더니 방문 앞에서 딱 멈췄다.
사또는 살며시 칼을 뽑아들고 방문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러나 자욱한 담배연기때문인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삐걱!>
방문이 열렸다. 사또는 눈을 부릅뜨고 열려진 방문을 보았다. 자욱한 담배연기속에 시커먼 물체가 움직였다.
<무엇일까? 묘하게 생겼구나. 대체 정체는 무엇일까?>
사또는 이렇게 생각하며 잔득 긴장했다. 숨을 죽이고 두손으로 칼자루를 꽉 잡고 그 물체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큭큭큭....., 큭큭큭.......!>
시커먼 물체가 이상한 소리를 낼뿐 더 이상 앞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자욱한 담배연기로 인하여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으나, 하여튼 그 괴물은 방안을 노려보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방으로 들어로기만 하면 단칼에 목을 베여 버리리라!>
사또는 잔뜩 벼르고 있었다.
<큭큭큭.......! 큭큭큭..........! >
괴물은 더욱 요란스럽게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몸체를 좌우로 심하게 흔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스르륵 스르륵.......스르륵 스르륵.......! >
사또는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사방을 둘러봤지만 그 괴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담배연기 때문에 도망을 쳤구나. 그렇다면 내 짐작대로 무슨 짐승이 틀림없다. 날이 밝으면 알수 있겠지.>
사또는 또 그 괴물이 나타날까 염려하여 밤새 담배를 피우며 주역을 읊조렸다.
멀리서 새벽닭이 울었다.
악몽같은 밤을 쫓아내며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했다.
<과연 사또가 무사하실까?>
<글쎄, 확인해 봐야 알겠지.>
<사또의 방문을 열기가 겁이 나는군.>
<나도 마찬가질쎄.>
날이 훤히 밝자 육방 관속들이 동헌으로 들어서며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두려움과 근심으로 인하여 어둡기만 했다.
육방 관속중의 우두머리인 이방은 시체로 변해있을 사또를 머리에 떠올리면서
<사또 ,소인 문안 아뢰옵니다. !>
하고 말하며 다른 관속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방안에서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잘들 잤는가?>
<아니, 사또 ! 살아 계셨군요?>
이방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다. 시체로 변해있는 사또가 아니고 건강하게 살아있는 사또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자 너무도 기뻐 그렇게 소리친 것이였다.
사또는 껄껄 웃으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방은 내가 죽기라도 한줄 알았단 말인가?>
<아닙니다. 너무도 기뻐서 무심코 그런 말을 했습니다. >
사또는 동헌을 한바퀴 둘러본 후 곧 이방을 비롯한 관속들에게 명했다.
<듣거라! 병방은 건장한 포졸 이십여명을 무장시켜 대령케 하고, 공방은 큰 가마솥에 기름을 한솥 끓이도록 하여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시간을 늦추면 안되느니라.>
<예, 알겠습니다.>
병방과 공방은 재빨리 사또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밤사이 사또의 안녕이 궁금한 고을 백성들이 관아로 모여들었다.
<사또가 살아 계시다.>
<어쩜 다른 사또들과 뭔가 다르다 했더니 과연 다른 구석이 있었군그래?>
<정말 다행이야.>
고을 백성들이 이렇게 웅성거리는 사이에 병방과 공방은 모든 준비를 다 끝내고 사또에게 알렸다.
<포졸을 무장시켜 대령하였고 기름을 가마솥에 끓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수고들 많았네.>
사또는 동헌을 내려와 사방을 휘휘 살피더니 명주실 오라기를 하나 집었다. 그런다음 그 명주실을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명주실은 동헌의 지붕위로 이어졌다.
<어서 사다리를 가져오고 포졸들은 곡괭이를 준비하여 대령하여라!>
이윽고 포졸들이 사다리와 곡괭이를 가져왔다. 사또는 포졸들을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육방관속을 비롯한 고을 백성들은 숨을 죽이고 사또의 난데없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또는 명주실을 따라 동헌의 지붕을 걷다가 어느 한곳에 우뚝 멈췄다. 사또의 뒤를 따르던 포졸들도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사또가 걸음을 멈춘 곳은 동헌의 용마루였다. 용마루 깊숙한 곳으로 명주실이 끌려 들어가 있었다.
사또는 그 명주실이 들어간 장소를 유심히 살핀후 포졸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이 곳을 파헤치도록 하여라. 그러나 조금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 병장기를 든 사람은 무기를 이곳으로 겨누고 파헤치는 사람은 한손에 창칼을 들고 파야 한다.>
포졸들은 즉시 그 명주실이 들어간 곳의 기와장을 한장두장 들어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하는 빛이 완연했다.
살얼음을 밟는 것 같은 긴장속에서 기와장은 한장씩 두장씩 들려져 나왔다.
<으흑!>
한참동안 그곳을 파헤치던 포졸들은 신음을 토해내며 몸을 움칫했다. 용마루 밑의 흙이 움직였기 때문이였다.
<뭔가가 있다! 흙이 심하게 꿈틀거린다.!>
사또는 잠시 포졸들에게 파헤치는걸 중단시키고 그곳을 살펴보았다. 과연 포졸들의 말대로 그곳은 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또는 크게 소리쳤다.
<여봐라, 저기 꿈틀거리는 곳을 일제히 창으로 찔러라!>
포졸들은 힘차게 창으로 그곳을 찔렀다.
<큭큭큭! 크윽큭큭!>
귀를 찢을듯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흙속에서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더욱더 찔러라!>
사또의 호령은 동헌을 쩌렁쩌렁 울렸다.
<찔르랍신다!>
<영차! 힘차게, 더욱 힘차게! >
포졸들은 신바람이 나서 찌르고 또 찔렀다.
<크크 크앙! 크르르...........>
흙속에서는 더욱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서서히 꿈틀거림이 약해졌다.
<그래도 찔러라! 저 꿈틀거림이 완전히 멎을때까지.>
사또의 명령에 포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곳을 찔렀다.
<크크크크.......크크크크.........>
이상한 비명소리도 이젠 약해지고 흙의 꿈틀거림도 멎었다.
<이제 흙을 마저 파헤쳐라!>
사또의 명령이 떨어지자 포졸들은 그곳을 파헤쳤다.
<으악!>
<어이쿠, 저게 뭐야!>
흙을 파헤치던 포졸들은 화들짝 놀라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곳에는 9척이 넘는 큰 지네 한마리가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놈을 동헌 마당으로 떨어뜨려라!>
이렇게 호령하던 사또는 다시,
<마당에 있는 포졸들은 이 지네가 떨어지거던 칼로 쳐서 여덟토막을 내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철썩!>
땅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큰 지네가 동헌 마당에 떨어졌다.
<이크!>
<어이쿠!>
<에구머니나!>
모든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리고 눈을 있는대로 크게 떴다.
사또는 재빨리 사다리를 타고 동헌 마당으로 내려왔다. 그때까지 지네는 신음을 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서 칼로 쳐서 여덟토막을 내라!>
포졸들의 날카로운 칼날이 일제히 꿈틀거리는 지네를 내리쳤다. 지네는 눈깜짝할새에 여섯 토막이 나고 말았다.
<어서 두 토막을 더 내라!>
사또의 고함과 함께 포졸들은 칼을 높이 쳐들었다. 칼날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으헉!>
<어이쿠!>
<저게 웬 괴변이냐!>
이때 칼을 든 포졸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러댔다. 여섯 토막난 지네의 몸뚱이가 <철꺽 >소리를 내며 다시 붙어버린것이였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사또는 소리를 벽력같이 질렀다.
<어서 담배잎을 가져 오너라!>
이방이 서둘러 담배잎을 가져오자 원님은 그것을 가루로 만들게 했다. 가루가 만들어지자 사또는 육방관속들에게 그 가루를 한줌씩 쥐게 한후 소리쳤다.
<포졸들은 지네의 몸뚱아리를 여덞토막을 내고 담배를 손에 쥔 사람들은 토막 난 지네의 몸뚱아리에 뿌리도록 하라.>
포졸들이 지네를 토막내자 육방 관속들은 담배가루를 뿌렸다. 과연 담배가루를 뿌리자 지네는 다시 붙지 않았다.
사또는 토막난 지네의 몸뚱이를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에 넣도록 했다. 포졸들이 창끝에그것을 찔러 하나씩 둘씩 기름 가마에 넣었다.
<이젠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어서 저 징그러운 지네의 대가리도 기름가마에 넣어라!>
사또의 말이 떨어지기도전에 포졸의 날카로운 창끝이 지네의 대가리를 관통하였다.
그 포졸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지네의 대가리를 펄펄 끓는 기름가마에 넣으려고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지네의 입에서 피처럼 붉은 빛이 장대처럼 쭉 뻗어 사또의 이마를 비추었다.
<이크!>
<저건 또 무슨 변고냐?>
<원 세상에 괴이한 일도 다 있지!>
사람들은 모두 놀라 소리쳤다. 이때 붉은 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네의 대가리가 가마속에 떨어졌다.
<사또, 이마에 웬 붉은 점이!>
이방이 소리쳤다.
<뭐라고? 내 이마에 붉은 점이 생겼다고?>
사또는 거울을 가져오라 하여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그랬더니 이마와 눈썹 중간에 호도알만한 붉은 점이 도장처럼 찍혀있었다. 그 점은 아무리 씻고 씻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천년 묵은 그 지네의 보복이 틀림없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고?>
사또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였다.
이리하여 성천고을은 평화롭게 되였다. 그러나 사또인 김탁의 얼굴에 생긴 의혹의 점은 영영 사라지지 않았다.
<해괴한 일이로다. 이 점은 반드시 불길한 조짐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성천 고을이 평화롭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 임금은 김탁을 한양으로 부르고 높은 벼슬을 내렸다.
고을 백성들은 명사또 김탁이 떠나가는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그러나 나라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는 김탁을 잡을수가 없었다.
한양으로 온 김탁은 그동안 떨어져 살아야 했던 가족과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얼마후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니 여보, 당신의 이마에 있던 붉은 점이 없어졌어요.>
아내의 말에 김탁은 반신반의하며 거울을 보았다. 정말 그 점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두달이 지난후에 김탁의 아내는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바라고 바라던 아이를 가진것이였다.
<이것 참 야단났군!>
그러나 김탁은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기뻐하기는 커녕 걱정이 태산같았다. 벌써 김탁은 그 이상한 점이 없어지면서 아내가 임신한 사실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김탁의 아내 유씨는 달이 차서 귀여운 옥동자를 분만했다. 부인은 마음이 흡족하였지만 아이의 아버지인 김탁은 그렇지만 못했다.
아이가 태여나면서부터 김탁은 항상 얼굴에 우울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소?>
하고 누가 물으면 그는 그저 아니라고 힘없이 대답할 뿐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년 묵은 지네가 입에서 내뿜은 그 알수 없는 붉은 광채가 점으로 변하고, 그 점이 잉태하여 자신의 아들로 태여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 불행하고도 두려운 일이다.>
김탁은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죽이고 싶을 만큼 밉고 싫은 아들이지만 이름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붉은 자에 점이라는 점자를 써서 김자점이라?>
김탁은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그 내용을 표시하는 이름이구나. 붉은 자자에 스스로 자로 하여 김자점이라? 그래 이 이름이 좋겠군.>
김탁은 아들의 이름을 자점이라고 지었다. 김탁은 항상 아들을 바라볼 때마다, <어쩜 너로 하여 삼족이 멸하겠구나!>하며 몸을 떨었다.
아버지인 김탁은 이렇게 걱정했지만 김자점은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
<총명하다.>
<지혜롭다.>
<장차 큰 일을 할 아이다.>
김자점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칭찬하였다. 그처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저놈은 반드시 우리 가문을 망칠 놈이다 아아, 지네 ! 천년 묵은 그 지네의 사무친 원한......>
김탁은 아들 김자점이 너무도 지혜롭고 총명하게 성장했으므로 더욱 무섭고 두려웠다. 그래서 처음부터 글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너는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살든지 아니면 머리 깎고 중이 되어라.>
김탁은 항상 이렇게 아들에게 일렀지만, 김자점은 아버지 몰래 글공부를 하였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또 봄이 가고...........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느덧 김자점은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아버지, 이제 소자도 과거를 보겠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아들이 이 말을 꺼내자 김탁은 너무 놀랐다.
<과거? 과거는 보아 무얼 하느냐?>
<그래도 대장부가 과거를 보지 않고 그냥 초야에 묻혀 썩어서야 되겠습니까?>
<안된다. 너는 벼슬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집에서 놀아라. 그리고 너는 글공부도 하지 않았지 않냐?>
<아닙니다. 저는 꼭 과거를 보겠습니다.>
김자점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과거에 응시했다. 그리하여 그는 뛰여난 재주로 단번에 급제를 하였다.
김자점의 급제에 크게 놀란 사람은 아버지인 김탁이였다.
<아아,큰일 났다. 드디여 일이 벌어졌구나!>
김탁은 즉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소신의 아들은 경망하여 나라에서 쓸만한 인물이 못되옵니다. 그러니 등용을 보류하여 주옵소서.>
김탁의 이 상소가 받다들여지기 만무했다. 나라에서는 급제한 김자점에게 벼슬을 주어 등용하였다.
아니나다를까 그후 김자점은 인조 반정에 공을 세워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영의정에 오른 그는 손자를 인조 임금의 후궁 조 귀인의 딸 효명옹주와 결혼시켜 크게 세력을 잡고 궁정을 어지럽혔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 이에 불만을 품고, 청나라를 처려는 효종의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 하여 나라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는 결국 반역 행위가 드러나 전라도 광양으로 귀양했다가 서울에서 역모죄로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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