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돼지와 최치원
신라 제46대 임금은 문성왕이다. 문성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홍필의 난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 장보고가 자기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다가 실패하자 원한을 품고 일으킨 청해진 반란이 가장 컸다.
이러한 파란을 겪은 문성왕이 하루는 충이라는 이름의 신하를 불러 문창 현령에 제수하였다. 미관 말직의 충에게는 벼슬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벼슬이 높아졌으면 기뻐해야 할 텐데 오히려 얼굴은 어둡기만 하였다. 충은 집에 돌아와 식음을 전페하고 수심에 잠겨 있었다.
<아니, 당신 오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부인이 묻자 충은 수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나는 문창 현령을 제수받았오.>
<문창 현령이라면 영예롭고도 높은 벼슬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뻐하시지 않고 왜 우울해 하세요?>
부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보았다. 그러자 충은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예로부터 문창 현령으로 부임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부인을 잃었다 하오 . 그런데 우리인들 그 변괴를 면할수가 있겠오?>
라고 말하였다. 부인도 이말을 듣고 그날부터 근심과 걱정이 태산같았다.
충은 도저히 임금의 명을 거역할수가 없었다. 문창 현령으로 부임하는 것이 무척이나 걱정되고 싫었지만 부임하지 않을수 없었다.
문창현에 부임한 충은 그곳의 노인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이곳에 현령으로 부임한 사람들이 매번 그부인을 잃었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노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옵니다. >
충은 노인들의 말을 듣고나서 더욱더 근심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표졸들에게 명하여 고을 안팎을 철통같이 경계하도록 하였고, 스스로 담력을 키우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세찬 바람과 함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우르릉 쾅!>
뇌성이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고 번쩍번쩍 벽력이 어두컴컴한 하늘을 찢어댔다.
<아니, 대낮에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지며 뇌성 벽력이 진동을 하다니.......!>
현령은 동헌에서 정사를 보고 있다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먼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이때 동헌의 안채인 내동현에서 일하는 하인이 허겁지겁 뛰여와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원님!>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을 떠느냐?>
<마님께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구?>
현령은 깜짝 놀라 내동현으로 뛰여갔다. 집 안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부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아, 마침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현령은 이렇게 탄식하며 집안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 찾았다. 이내 현령은 밖으로 길게 이어져있는 붉은 명주실을 찾아냈다. 그는 무슨 변괴가 있을 것을 념려하여 부인의 옷자락에 붉은 물감을 들인 명주실을 꿰매여 놓았던것이다.
<여봐라, 지금 당장 날쌔고 용감한 포졸 열명만 무장하여 대령하도록 하여라!>
현령의 명에 따라 무장한 포졸 열명이 내동헌에 대령하였다. 그러자 현령은 그 붉은 명주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또, 붉은 명주실이 일악산으로 뻗었습니다. >
현령을 따르던 이방이 소리쳤다. 과연 그 명주실은 고을 뒤에 우뚝 솟은 일악산 깊은 골짜기까지 뻗어있었다.
<경계를 늦추지 말고 서둘러 명주실을 따라 걸어라.>
현령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에 찬 칼을 매만졌다. 포졸들의 날카로운 창끝이 해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대체 어디까지 명주실이 뻗어있는걸까?>
현령은 잠시도 쉬지 않고 포졸과 육방 관속들을 앞세우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붉은 명주실은 커다란 바위틈으로 들어가 있었다.
<사또, 명주실이 바위틈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전진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
이방의 말에 현령은 그 바위틈을 살펴보았다. 바위틈 사이로 거대한 동굴이 있었다.
<여봐라, 동굴을 막고 있는 저 바위를 힘껏 밀어보아라.>
포졸 열명이 힘을 합쳐 바위를 밀었다. 그러나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보,부인! 그 속에 있다면 대답을 해보시오!>
현령의 슬픈 목소리가 산계곡에 울려 퍼졌지만 캄캄한 바위틈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사또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바위문 밤이면 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
포졸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게 정말이냐?>
현령은 눈빛을 빛내여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포졸은 자신이 없다는 말투로,
<소인도 소문만 들었을 뿐입니다.> 하고 말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제 그만 산을 내려갔다가 밤에 다시 와 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현령은 포졸의 말을 듣고 관아로 돌아왔다가 밤에 다시 동굴로 가서 그 바위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굳게 닫혀 있던 바위문이 열려있었고 , 그 동굴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여나왔다.
< 너희들은 여기서 지키고 있거라!>
현령은 포졸들에게 명령하고 이방과 함께 그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얼마쯤 들어갔을때 앞이 툭 트인 밝고 넓은 장소가 나타났다. 그곳은 온갖 기화 요초가 만발해 있고 벌과 나비가 한가롭게 꽃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바위 동굴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니.... ...! 아마 신선이 사느 곳이 아닐까?>
현령은 함께 들어온 이방을 보며 말했다. 이방도 난데없는 경치에 무척 놀란 얼굴을 하고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좀더 안으로 들어가 보세.>
그들은 백보가량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한 채 솟아있는데 화려하기가 무엇에 비할데가 없었다.
현령 충은 그 기와집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려 숨을 내쉬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누가 살고 있을까?>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문을 뚫고 슬그머니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향기가 풍기는 방안에는 한마리의 금빛 돼지가 충의 부인의 무릎을 베고 혼곤히 잠들어 있는것이 보였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수십명의 여인들이 시종을 들고있었다. 모두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여인이였다.
현령 충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향낭을 풀었다. 향낭은 미리 이런 일이 있을것을 대비하여 두개를 만들어 부인과 충이 하나씩 나누어 차고 있던 향낭이었다.
충이 향낭을 풀어 문틈에 대자 그 향기가 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깊은 수심에 잠겨있던 부인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은구슬 같은 부인의 눈물 방울이 뺨을 차고 주르르 흘러 내려 금빛 돼지의 머리우에 떨어졌다.
그 바람에 금빛 돼지가 번쩍 눈을 떴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어디서 인간 세상의 향내가 풀풀 풍기는거지?>
금빛돼지는 이렇게 소리치며 코를 킁킁거렸다. 이때 당황한 충의 아내가 재빨리 말했다.
<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십니까?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풍겨오는것외에는 다른 향기가 나질 않습니다.>
금빛 돼지는 다시 한번 뾰족한 코를 킁킁거리다가 부인의 얼굴을 보고,
<너는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느냐? 나하고 사는 것이 싫어서 그러느냐?>
하며 무섭게 눈알을 부라렸다. 충의 부인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변명을 하였다.
<아니옵니다. 이곳에 와서 신령스러운 당신을 모시고 있으니 더이상 바랄것이 없어 행복합니다. 다만 이곳이 풍습이 인간세상의 풍습과는 많이 달라 괜시리 눈물이 나옵니다. 꼭 오늘이라도 병들어 죽을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슬픔을 금할수가 없습니다.>
금빛돼지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껄껄 웃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런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이곳은 인간세상과 달라 병들어 죽는 경우가 없느니라. 영원히 병들어 죽지도 않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 어서 눈물을 그치거라.>
충의 부인은 금빛돼지의 이 말을 듣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억지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영원히 병들어 죽지를 않는다니 이곳은 정말 천국과 같은 곳이군요? 그런데 제가 인간 세상에 있을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무슨 말?>
금빛돼지가 묻자 부인은 더욱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령스러운 사람이나 존재들은 호랑이 가죽을 보면 무서워 죽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일로 인하여 당신이 죽을까 봐서 걱정입니다.>
금빛 돼지는 더욱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을 위로하고는 말했다.
<걱정 말아라. 나는 사슴가죽이라면 몰라도 호랑이 가죽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사슴 가죽? 그렇다면 당신께서 사슴 가죽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까?>
금빛 돼지는 다소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단다. 사슴 가죽을 물에 적셔 목 뒤에 붙이면 꼼짝 못하고 죽는단다.>
밖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현령 충은 살금살금 그곳을 빠져나와 동굴밖으로 나왔다.
<여봐라, 누가 사슴 가죽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
현령의 말이 떨어지자 포졸들은 제각기 사슴 가죽을 찾기 시작했다. 그중 한 포졸이 불쑥 활통을 내밀었다.
<원님, 이 활통에 달린 끈이 사슴가죽으로 된것입니다.>
<옳지, 그것이면 되겠다.>
현령은 활통의 끈을 잘라 물에 적신후 다시 바위 동굴속으로 들어갔다. 동굴속의 집에서는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금빛 돼지가 깊은 잠에 빠졌구나.>
현령은 살며시 방문을 열고 손짓으로 아내를 불렀다. 부인은 남편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리기 시작했다. <여보, 울지 마오. 그리고 이것을 저 괴물의 목 뒤에 붙이오.>
충의 부인은 물에 적신 사슴 가죽을 남편에게서 받아 금빛돼지의 목덜미에 붙였다.
<크아악! 꽥!>
금빛 돼지는 물에 적신 사슴가죽을 목덜미에 붙이자마자 단말마 비명을 지르며 나가 동그라져 죽어버렸다.
<금빛 돼지가 죽었다!>
<이제 살았구나!>
<에잇, 나쁜놈의 금빛돼지 잘 죽었다.>
금빛돼지에게 잡혀와 있던 여인들은 이렇게 소리치며 기뻐하였다. 그 중의 한 여인은 금빛돼지의 대가리를 힘껏 발로 차고 침을 뱉었다.
이리하여 현령은 부인과 여인들을 구출하여 인간세상으로 돌아왔다. 그 여인들은 모두 그동안 감쪽같이 사라졌던 문창 현령들의 부인들이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렀다. 현령 충의 부인은 금빛 돼지에게 구출된지 열달만에 잘 생긴 옥동자를 낳았다.
<이상하다/ 금빛돼지, 그리고 아가..........?>
현령은 크게 의심하여 이렇게 명하였다.
<저 아기를 당장 바다에 갖다가 버리도록 하여라!>
부인이 울면서 말렸지만 충은 버럭 화를 내면서 듣지를 않았다. 하인은 그 아기를 강보에 싸서 바다에 갖다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바다에 버린 그 아기를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젖을 먹여 키운다는 소문이 온 고을에 파다히 퍼졌다.
충의 부인이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금빛 돼지의 아들로 알고 버리라고 했던 그 아기를 하늘의 선녀가 젖을 먹여 키운대요. 그렇다면 틀림없이 하늘이 우리에게 점지하여 주신 아들이 아니겠어요? 어서 다시 데려다 기르도록 해요.>
<이제 와서 다시 데려와 아들로 기른다면 고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오!>
현령은 매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부인은 한 꾀를 내어 고을에 소문을 퍼뜨렸다.
<원님 부인께서 아들이 보고 싶어 큰 병이 들었대요.>
<에구머니나 가엾어라!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병까지 들었다지 뭐야?>
<어서 그 아들을 찾아오자고 말해도 원님께서 한사코 안된다고 하신대요.>
<이러고 있지만 말고 우리가 원님께 부탁을 드립시다.>
백성들이 우르르 동헌으로 몰려가서 원님께 아들을 찾기를 간청하였다. 현령 충은 마지못하여 허락을 하는 것처럼 명을 내렸다.
<모든 고을 백성들이 원하는데 내가 듣지 않을 수가 없구나. 포졸들은 그 바다에 가서 아이를 찾아서 데려오도록 하여라.>
포졸들은 급히 말을 달려 아기를 버렸던 바닷가로 갔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는 아기가 있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글쎄?>
< 벌써 삼년이 흘렀는데,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늘의 선녀가 젖을 먹여 키웠기 때문에 총명하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포졸들은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바닷가 주변을 샅샅이 찾았다. 이때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글 읽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 왔다.
그곳은 바닷가에서 저만큼 떨어진 곳에 있는 외딴섬이였다.
<섬에서 아이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가 보자!>
포졸들은 급히 배를 저어 그 섬으로 갔다. 과연 그 섬의 높은 바위 위에서 어린 동자가 청아한 목소리로 글을 읽고 있었다.
한 포졸이 동자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동자의 어머니께서 병이 위중하오, 아들을 보고 싶다고 해서 찾으시니 어서 우리와 함께 돌아갑시다.>
그 말을 들은 동자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낳으신 후 금빛 돼지의 아들이라 하여 나를 바다에 버렸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찾는 것은 무슨 까닭이란 말씀이오! 처음부터 부모님과 인연이 없었던 몸, 만약 그대들이 나를 강제로 날 데려간다면 나는 바다에 빠져 죽고 말것이요>
포졸들은 할수 없어 그냥 돌아가 동자의 말을 그대로 현령에게 전했다. 충과 아내는 지난날을 후회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여봐라, 목수와 석공을 그 섬에 보내여 그 아이가 편히 공부할수 있는 암자를 지어주어라.>
현령 충은 쇠로 만든 막대기 하나를 목수의 책임자에게 주면서 이렇게 부탁했다.
<섬에 가거든 이 쇠막대기를 그 아이에게 전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아비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것을 심히 부끄러워 한다는 말도 전하여라.>
목수 책임자는 그 섬에 가서 현령이 보낸 쇠막대기와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런후 숙달된 솜씨로 암자를 완성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후였다. 하늘에서 수십명의 선비들이 그 섬에 내려와 암자에 머물면서 동자에게 글공부를 가르쳤다.
총명하고 지혜로운 동자는 하늘에서 온 선비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학문이 놀랍도록 향상되였다.
<동자의 학문이 이렇게 뛰어나니 반드시 세상에 명성을 떨치리라. 그런데 이름이 없어야 되겠는가? >
선비 한사람이 이렇게 말한후 다시, <성은 최, 이름은 치원이라 하는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동자의 의견을 물었다.
동자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을 지어 주셔서 무어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동자의 이름은 최치원이 되였다. 치원은 그의 아버지가 준 쇠막대기로 날이면 날마다 모래밭에 글씨를 공부했다. 석자나 되던 그 쇠막대기는 반자로 닳을 때까지 공부를 하였다.
치원이 공부하는 그 외딴섬에는 항상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느날 치원은 두보와 이태백의 시를 읊었다. 그 소리는 바람을 타고 흘러흘러 중국에까지 들리게 되였다.
<누가 저토록 청아한 목소리로 글을 읽느냐?>
중국의 천자가 그 소리에 반하여 묻자 신하가 대답했다.
<저 소리는 신라의 유생의 글 읽는 소리인줄로 아옵니다.>
<신라? 신라는 바다 저쪽에 있는 나라가 아니더냐. 그런데 얼마나 학문이 높고 깊으면 여기까지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온단 말이냐?>
중국의 천자는 매우 감탄하였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신라 유생의 학문을 꼭 한번 실험해 보고 싶구나.>
얼마후 천자는 글 잘하는 신하들을 신라로 보내여 신라 유생들과 글 재주를 겨누게 했다. 중국의 학자 두 사람은 처음에 치원이 머무는 외딴섬에 도착했다/
<아니, 저토록 어린아이의 학문이 바다를 건너 중국 땅까지 닿았단 말인가?>
<도무지 믿을수 없는 일이군. 어디 시험을 해보세.>
중국의 학자들은 겨우 여섯살인 치원이와 글짓기를 겨루기로 하고 먼저 운을 뗐다.
삿대는 물 밑의 달을 꾀였도다.
하니 최치원이 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배는 물속의 하늘을 누르도다.
중국의 학자가 그 구절을 이어서
물새는 떴다 다시 잠기는 도다.
하니 최치원이 서슴없이 이렇게 읊었다.
산구름은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구나
중국의 학자들은 대경실색하였다. 겨우 여섯살 먹은 아이의 학문이 이 정도이니 신라 어른들의 학문은 얼마나 높을것인가를 생각하니, 등골에서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였다.
<안되겠네. 큰 창피를 당하기 전에 돌아가세.>
중국 학자들은 더 이상 신라유생들과 글 재주를 겨루는것을 포기하고 뱃머리를 돌려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황제 페하, 신라에는 문재가 뛰여난 사람들이 너무도 많사옵니다. 소신들로서는 도무지 당할수가 없었습니다.
<음, 그렇다면 장차 크게 부강한 나라가 되겠구나.>
중국 천자는 신라의 힘이 더욱 강해지기 전에 쳐부수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신하들에게 명하여 신라를 침공할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이때 최치원은 큰 뜻을 품고 외딴섬을 떠나 신라의 서울로 올라갔다.
<승상 나업의 딸이 인물과 재주가 으뜸 간다고 하니 한번 만나보리라.>
치원은 이렇게 생각하고 거울 고치는 사람으로 가장하여 승상 나업의 집 부근으로 갔다.
<거울, 거울 고치시오.>
치원은 큰 소리로 외치고 또 외쳤다. 그때 마침 나업의 딸이 그 소리를 듣고 유모를 시켜 거울 고치는 사람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유모를 따라 승상의 집으로 들어간 치원이는 나엽의 딸을 보게 되었다. 과연 소문대로 눈부시리만큼 아름다운 소녀였다. 치원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넋이 빠져 그만 유모가 주는 거을을 땅에 깨뜨리고 말았다.
<아니, 귀중한 거울을 깨다니!>
유모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치원을 마구 때렸다. 치원은 울면서 싹싹 빌었다.
<한번 깨진 거울을 어찌하겠소! 다시는 붙일수 없는 일이니 내 그 보답으로 이 집의 종이 되여 빚을 갚겠소. 그러니 제발 그만 때리시오.>
<종이 되여 빚을 갚겠다고?>
<그렇소.>
유모가 들어가서 승상에게 이러한 사연을 말하자 승상은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리하여 승상 나업의 종이 된 치원이는 스스로 <파경노>라하고 소와 말을 먹이는 일을 하게 되였다.
치원이 소와 말을 먹이자 한 마리도 야윈것이 없게 되였다. 그러자 승상 나업은 치원에게 꽃밭에서 꽃을 가꾸게 하였다.
이러는 사이 치원의 나이 열한살이 되였다. 하루는 승상의 딸이 후원으로 나와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꽃은 난간 앞에서 웃는데
그 웃음소리
들리지 않는도다
후원에서 몰래 숨어 이 시를 들은 치원이 그녀의 시를 이어 청아한 목소리로 이렇게 읊조렸다.
새는 숲속에서 울되
그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도다.
치원이 시를 읊자 승상의 딸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무렵 중국의 천자는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상자 하나를 만들었다. 그 상자속은 묘하게 채워졌다. 솜으로 달걀을 싸서 작은 상자 속에 넣고 다시 밀초를 끓여서 그 속에 부어 달걀을 움직이지 않게 했다.
그런 다음 구슬과 황금을 가득 넣었다. 또 그런 다음 돌상자에 넣고 구리와 쇠를 끓여 상자 뚜껑을 때워서 다시는 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중국 천자는 사신을 통하여 신라의 왕에게 그 상자와 함께 이런 말을 전하게 했다.
<너희 나라는 이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알아맞추고 또 그것에 대한 시를 지어서 보내도록 하라.
만약 알아맞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너희 나라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말리라.>
중국 천자가 보낸 사신을 맞이한 신라왕은 깊은 수심에 잠겼다. 도지히 그 상자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승상 나업이 책임지고 이 문제를 풀도록 하여라. 만약 풀지 못한다면 큰 벌을 내리리라!>
신라왕은 어명을 내렸다. 어명으로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된 나업은 걱정때문에 밥을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자지도 못했다.
<아버지, 파경노 치원의 지혜가 뛰여나니 그에게 한번 물어보도록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상 나업은 딸의 이 말에 귀가 활짝 열렸다.
<파경노 치원? 그가 이 어려운 문제를 풀수 있을가?>
<아무튼 불러서 한번 시켜라도 보시는것이 좋겠습니다. >
승상 나업은 치원을 불러 그 문제를 풀게 하였다.
<이 문제를 풀기 전에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치원이 조건을 달자 승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풀어서 글만 짓는다면 네 청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마.>
<문제를 풀기전에 먼저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음,대관절 네 청이 무엇이냐?>
치원은 승상의 딸을 한번 쳐다본후 힘차게 대답했다.
<승상께서 저를 사위로 삼으신다면 곧 글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뭐, 뭐라구? 우리 집 종인 너를 내 사위로 삼아 달라고. 그건 안된다. 다른 청을 말하라.>
<다른 청은 없습니다. 승상께서 큰 벌을 받으실지라도 제게 따님을 주지 않으시겠다면 시를 짓지 못하겠습니다. >
치원은 완강한 목소리로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서 말을 듣고 있던 승상의 딸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 일은 우리 가족의 생명이 달려있는 일입니다. 소녀는 기꺼이 파경노에게 시집을 가겠습니다. >
승상은 하는수 없이 좋은 날을 택하여 치원과 딸을 혼례시켰다.
총명하고 늠름한 신랑이요, 꽃보다 더 아름다운 신부였다. 그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으니 실로 천생연분이였다.
이튿날 아침, 승상은 이제 사위가 된 치원에게 어서 시를 지어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치원은 시를 지을 생각도 않고 발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누워 잠만 자고 있었다.
<언제 시를 지으려고 저렇게 잠만 자고 있을까?>
치원의 아내는 걱정이 되어 물끄러미 잠에 취해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치원이 눈을 번쩍 뜨더니 곧 붓을 들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글씨가 어찌나 힘찬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것 같았다.
둥글고 둥근
돌 가운데 물건이
반은 구슬이요
반은 황금이로다.
밤마다 때를 아는
새인데
정만 머금고
아직 소리는 배앝지 못하였도다.
신라왕은 치원이 지은 시를 사신을 보내 중국의 천자에게 전하게 했다. 천자는 이 시를 읽고 신라의 사신에게 말했다.
<다른 것은 다 맞혔다. 그러나 끝 부분의 <새인데>라는 말은 틀렸다. 이 상자안에는 달걀이 들어있지 병아리가 있는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겠노라!>
신라의 사신은 치원에게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말했다.
<아닙니다. 황제 페하! 그 상자를 열어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곧 상자를 쪼개여 보니 과연 그 동안에 달걀은 까 병아리가 되여있었다.
<신라와 같은 조그만 나라에 이와 같이 모든것을 아는 신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몹시 불리합니다. 장차 신라가 우리를 침공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시를 지은 선비를 불러다가 단칼에 목을 베는것이 좋겠습니다. >
중국의 천자는 신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였다.
<글을 지은 선비를 중국으로 보내도록 하라!>
이렇게 하여 최치원은 중국으로 가게 되였다. 치원은 신라를 떠나면서 특별히 준비한 오십자가 넘는 모자에 <신라 문장 최치원>이란 글씨를 써서 쓰고 있었다.
치원이 탄 배가 며칠동안 서해 바다를 지나 첨성도라는 섬부근에 이르게 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가 딱 멈추어서서 앞으로 갈수도 없고 뒤로 갈수도 없었다.
이때 푸른 옷을 입은 잘생긴 공자 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말했다.
<저는 서해 바다 용왕의 아들입니다. 훌륭하신 선생이 이곳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잠시 용궁으로 가셔서 제게 공자의 도를 가르쳐주십시오.>
용왕의 아들의 간절한 부탁으로 치원은 용궁으로 갔다.
용왕에게 잘 대접을 받은 치원은 용왕의 아들과 함께 용궁을 나와 다시 뱃길을 떠났다.
얼마쯤 더 가니 이번에는 위이도라는 섬에 닿았다. 섬은 너무 오래 가물어서 초목이 붉게 타고 있었다. 그래서 목을 추길 물 한모금도 얻을수 없었다. 그러자 섬 마을 사람들은 몰려와 치원에게 간청했다.
<선생께선 천하의 문장이시니 비를 오게 하는 기우문을 지어주십시오.>
치원은 용왕의 아들에게 부탁하여 비를 내려주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그치고 하늘에서 한 신선이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
손에 날이 시퍼런 청룡도를 들고 있는 신선은 몹시 화난 얼굴로 용왕의 아들을 꾸짖었다.
<나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너를 죽이러 왔다. 어서 길게 목을 내밀거라.>
용와의 아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치원에게 말했다.
<내가 선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여 큰 죄를 지었습니다. >
<아니, 큰 죄라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요?>
<예, 이 섬에 비를 내리게 한 죄이옵니다. 이 섬 사람들은 모두 어른을 섬길줄 모르고 흉악무도하므로 옥황상제께서 일부러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엄하신 명을 어겼으니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
이 말을 들은 치원은 신선 앞으로 한 발 나아가 이렇게 간청했다.
<제가 사정을 모르고 큰 실수를 한것 같습니다. 이 섬에 비를 내리게 한것은 제가 시켜서 한 것입니다. 그러니 벌을 주시거든 제게 주십시오.>
치원은 죽음을 각오한 표정으로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청룡도가 자기의 목을 치기를 기다렸다.
<눈을 뜨세요. 옥황상제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최문장이 곁에서 말리면 그대로 두라 하셨으므로 이제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신선은 휘파람을 불어 구름을 불러서 하늘 저멀리 총총 사라졌다.
신선이 사라진후 치원은 용왕의 아들을 용궁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중국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치원이 석강정이란 곳에 이르러 한 노파를 만났다. 그 노파는 솜에 장을 묻혀 주며 말했다.
<이것은 비록 하찮은 것이나 몸을 보호해주는 물건이니 각별히 조심하여 잃지 않도록 하시오.>
치원은 노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났다. 한참을 가다가 이번에는 수염이 하얀 노승을 만났다. 노승은 치원이를 불러 세워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중원으로 들어가면 큰 화가 닥쳐올거요. 그러니 최문장은 매사에 주의를 해야 하오. 앞으로 닷새를 더 가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것이니, 모든 것은 그 여인이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하시오,>
노승은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과연 닷새를 더 가니 한 아름다운 여인이 길목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치원은 노승의 말이 생각나서 여인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이제 천자가 그대를 맞아들일때 아홉 문을 준비해 놓고 그대를 시험할것이요. 그러니 첫번째 문에 당도하여서는 푸른 부적을, 둘째 문에 들어서서는 흰 부적을, 넷째 문에서는 노란색 부적은 각각 던지시오. 그리고 나머지 문에서는 그대의 시와 재치로 대답하면 될것이요.>
아름다운 여인은 부적을 치원에게 주고 나서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치원이 다시 길을 떠나서 낙양 땅에 당도하니, 한 사람의 학자가 나타나서 치원에게 ,
<해와 달은 하늘에 걸려 있는데, 하늘은 어디에 걸려있느냐?>
하고 묻자 치원이 서슴없이
<산과 물은 땅위에 얹혀있는데, 땅은 무엇에 얹혀있소? 그대가 이 말에 대답한다면 나 또한 그대 물음에 대답하리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학사는 더 이상 말을 묻지 못하고 달아나 버렸다.
마침내 치원은 중국의 서울에 당도했다. 성문을 들어서려고 하는데 머리에 쓴 오십자가 넘는 모자 때문에 들어갈수 없었다.
<신라와 같은 조그마한 나라의 문에서는 능히 드나드는 내 모자가 큰 나라라고 하는 중국의 성문에 걸려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구나. 이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닌가?>
치원이 이렇게 소리친후 성문밖에서 우뚝 서 있었다. 그러자 중국의 천자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성문을 열어 치원을 들어오도록 하였다.
첫번째 문에 들어서니 땅 밑에서 풍악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치원이 푸른 부적을 던지자 그 요란스런 소리가 없어졌다.
치원은 아홉개의 관문을 부적과 지혜로써 통과한후 마침내 중국의 천자를 만났다.
천자는 치원의 지혜와 학문에 감탄하며 차마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집과 값진 보물을 주어 편히 살도록 해주었다.
다음해 치원은 8만 5천 명이 응시한 과거에서 당당히 장원급제를 하여 문신후라는 중국벼슬을 얻게 되였다.
<황소의 난> 이 일어나자 치원은 삐여난 격문을 써서 적을 굴복시키고 그 명성을 드높였다.
그후 치원은 홀연히 푸른 사자를 타고 고국인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왕과 승상 나업, 그리고 그와 혼인을 했던 승상의 딸이 반가이 그를 맞이했다.
<이제는 고국을 위해 일을 해주오.>
진성왕은 치원에게< 아찬>이란 벼슬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치원은 기우는 신라의 천년 국운과 함께 세상살이에 뜻이 없어 홀로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가야산에 들어간 치원은 학과 사슴을 데리고 놀다가 신선이 되여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