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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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묶음 2
2019년 08월 19일 11시 29분  조회:955  추천:0  작성자: 륙도하

도토리 두 알 / 박 노 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토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맷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상현 (上弦)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신)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2001)




 

 

말들의 후광 / 김선태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관심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인가.
오랜만에 뿌옇게 흐려진 거실 유리창 청소를 하다 문득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이 거느린 후광을 생각한다.

유리창을 닦으면 바깥 풍경이 잘 보이고,
너의 얼룩을 닦아주면 내가 빛나고,
마음을 닦으면 세상 이치가 환해지듯이
책받침도 문지르면 머리칼을 일으켜 세우고,
녹슨 쇠붙이도 문지르면 빛이 나며,
아무리 오랜 기억도 문지르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듯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얼굴빛이 밝아지고,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면 환하게 상처가 아물며,
돌멩이라도 쓰다듬으면 마음 열어 반짝반짝 대화를 걸어오듯이
닦다, 문지르다, 쓰다듬다 같은 말들 속에는
탁하고, 추하고,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걸어 나오는 환한 누군가가 있다.

쓸수록 빛이 나는 이 말들은
세상을 다시 한 번 태어나게 하는 아름다운 힘을 갖고 있다.
.





 

모자 모델하우스


   김효은

 

내 머리 위 모자 속으로
놀러오세요
비 바람 눈 구름 따위 재해를 피하거나
그보다 더럽고 거센 인재 따위를 피하러 들어오세요
단지 숨기 장소로도 적합하죠
발걸음과 숨소리가 거슬린다구요
음소거 버튼도 있어요
고요를 원한다면 빨간 버튼을
사운드를 원한다면 노란 버튼을
날아갈 것 같은 불안에 날마다 시달리신다구요
그렇다면 초록 버튼을 누르세요
볼륨과 중량은 원하시는 만큼 눌러드려요
꽃발 딛고 서 있는 종아리가 매력적이라구요
살랑거리는 꼬리와 지느러미가
길고 날씬하고 예쁘다고요
자주 그리워하면 당신도 길게 늘어나요
하늘은 어떻게 보냐고요
일단 땅을 뚫어져라 쳐다봐요
그러다가 심호흡을 깊게 하면
가슴이 천장이 시선이 쩍 하고
어느 순간 아가미처럼 활짝 열리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냐고요
나는 당신이 깜빡한 어제의 점심 약속입니다
어느 주말 아침부터 급히 상가에 가느라 못 챙긴 밀린 늦잠입니다
때로 방금이고요 가끔 이따가도 됩니다
챙 넓은 모자를 눌러 쓴 난쟁이입니다
당신이 지워버린 원고지의 빈 칸입니다
당신이 버린 봉제 인형입니다
당신이 휴가 때 버린 유기견입니다
언제든 찾아와 충전기를 꽂고
무기한 쉬어가도 좋을 버스터미널 공용 콘센트입니다
그러나 방전되기 전에 오세요
길고양이 한 마리도 개미 한 마리도
그냥 보내지는 않을게요
단 당신이 살아 있어야만 올 수 있어요
모자를 눌러 쓴 채
온종일 당신이 오기만을 기다려요
묘지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보부상 아니냐고요
내 머리 위 모자 속이 궁금하신가요
비밀 보따리 속에 보물이 잔뜩 들어 있냐구요
물론입니다
이따금 고객들은 검은 공단 소재의
불행이 드리운 챙을 주문하거나
희망의 분홍 레이스만을 고집하기도 합니다만
죽음의 상장만은 팔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냐구요
풀옵션 묘지 모델하우스입니다
전방에 근사한 언덕 하나가 보인다고요
목적지 근처입니다
커다란 모자가 보이시나요
그 모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혹자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아니냐고
묻기도 하지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죽음의 모델하우스
모자 모델하우스로 오세요
당신의 두상에 꼭 맞는
예쁘고 멋진 모자를 제작해 드립니다
처음이라 어색하시다구요
그렇다면 머리에 살짝 얹고만 다니시다가
죽음이 임박하거나
자신의 주검이 익숙하게 만져질 때쯤
푹 눌러 쓰시면 됩니다
결제는 일시불은 언제나 불가능하고요
오로지 평생 상환
할부만 가능합니다
천천히 구경하세요
오늘의 메인 모자 콘셉트는
도서관, 도서관입니다
유난히 책 좋아하는 당신,
책으로 근사한 모자를 만들어드립니다
면류관 보다 멋진 도서관 묘지를 씌워드립니다





 

내 사랑은
신응순

누군가를

사랑하면

일생

섬이 된다

유난히

파도가 많고

유난히

바람이 많은 섬

그래서

가슴에는 평생

등불이

걸려있다

 러시아 격언에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한 번,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는 두 번, 결혼하기 전에는 세 번 기도한다'고 하였다. 부부생활의 어려움을 아주 잘 새긴 시조로 섬이 된 가슴에 등불 밝히고 서로 비추며 삶을 행복하게 해야할 것이라 하였다. 전병태 시조시인

 

―《문장 웹진》 2019.6월호






 

 

사랑한다는 것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폭설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권혁웅


그날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

 

 

 

둥근 발작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
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줄에 동여매세요
자기 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일교차가 당도를 결정한다면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광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
하세요






 

양철  지붕에  대하여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  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  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  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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