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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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와 인간관계의 본성 댓글:  조회:825  추천:0  2022-02-20
  시와 인간 관계의 본성   ㅡ 이어산 교수   “시를 이렇게 써야 한다.”라는 시 창작법은 사실 우스운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시가 지닌 본성에 대한 최대공약수를 공부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깊이 있는 시를 쓸 수 있으며, 명시로 회자 되는 시의 대부분은 그 본성에 충실하여 독자들의 감동을 자아내면서 읽을수록 맛이 나는 작품들이다. 다른 장르의 예술에 비해 초라하고 언어 외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말로 소통하므로 언어를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은 가장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다.    시는 인간의 말에 최대한 많은 뜻을 축약하여 말 그림으로 보여주는 장르이므로 그 어떤 예술과도 비견 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은유’라는 쟁반에 언어의 보석을 담아내는 일이기에 세상의 모든 철학과 예술성을 집약하는 일이다. 유명 시인들에게 인생에서 중요하고 가장 보람된 일을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시를 쓰는 시인’이 된 것을 꼽는 경우가 가장 많다.   모든 시의 출발점은 낭만성과 자기애에 대한 탐구, 항상 동경하는 어떤 것이 마음에 가득하여 삶이라는 집을 아름답고 격조 높게 하며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의 조화도 살필 수 있다.  또한 모순어법을 통하여 빛나는 은유를 성립시키므로 시는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시를 쓸 땐 마음은 뻔하지만 어렵다. 이런 현상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다. 시가 오랫동안 잘 안 되는 원인은 시를 잘 쓰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필자도 처음 시를 배울 때 “욕심을 버려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의 시업에서 그것을 깨닫기까지 10여 년이 걸렸다. 빨리 깨달으면 그만큼 고생을 덜 한다.   욕심을 버리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기초부터 공부하려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오류는 서두에서 언급한, 시가 지닌 본성의 최대공약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본성이란 시의 기초 중에서도 기초작법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좋은 시를 쓰려고 덤벼드는 것은 씨앗을 땅에 심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는 일과도 같다.   오늘부터 시의 본성에 대한 기초를 다시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이 기초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글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음은 시를 쓸 때 꼭 기억해야 할 기초 몇 가지다.   1. 한자어 안 쓰기 한자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말은 무조건 쉬운 우리말로 풀어서 쓰라. 꼭 한자를 써야 할 경우엔 한글 옆에 병기 하되 한글보다 작게 표기하는 것이 우리글과 말을 사랑하겠다는 시인들의 약속이다.   2. 형용사(감정 형용사), 부사 안 쓰기 기쁘다, 행복하다, 좋다 등의 형용사가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은 독자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대표적으로 쓰지 말아야 할 형용사로는 열심히, 효율적인, 합리적인, 최적화된… 등이다. 형용사 대신 동사로 바꿔야 한다. 예를 들면, 예쁘다 → 예쁘지다 → 예쁘하다 또한 부사는 상황을 가장한다. 매우, 아마, 다만, 진짜, 도무지 등등이다. 시에서 부사를 제거하면 소음이 사라져서 글이 맑아진다. 형용사와 부사 대신 동사, 명사, 대명사만 쓰고도 장면이나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3. 피동형 안 쓰기 능동형으로 써야 문장이 자연스럽다. 보여지다, 쓰여지다, 믿겨지다, 잊혀지다, 꺾여지다(이중 피동사) 예) 내 마음은 더 착잡해졌다. → 내 마음이 착잡하다. 잘 닦여진 도로 → 잘 닦인 도로, 끈으로 묶여진 → 끈으로 묶인 깊게 파진 → 깊게 파인, 배가 뒤집혀 졌다. → 배가 뒤집혔다 (피동 표현→ 능동 표현으로 고칠 것. 피동형이나 피동사 중 하나만 쓰면 되는데 영어에서처럼 두 가지를 한꺼번에 쓰는 이중피동은 현대시에서 멀리해야 할 작법이다.   4. 이중 부정형을 쓰지 말 것. 한 문장 안에 부정 표현이 두 번 이상 나타나게 하지 말 것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진실을 말해야 한다. 어른을 모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모르는바 아니다. → 어른을 모시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 의미하지 않는다. (이중 부정은 의미 전달이 불분명해진다. 뜻 파악에 방해가 된다. 이중 부정을 쓰지 않아야 글이 훨씬 깔끔해 진다.)   5. 접속사 안 쓰기 단어와 단어, 구절과 구절,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부사를 쓰지 말 것. 그리고, 그러나, 왜냐하면, 하지만, 그런데… 예) 어제는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한가하다. 균형을 이루지 않을 수 없다. →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중 부정을 쓰지 않는 글이 훨씬 깔끔하고 설득력 있는 글이 된다. 접속사가 많은 글은 논리가 부족한 글이다.   6. 조사와 겹조사 안 쓰기 ‘~의’ ~것 조심해서 쓰기 나의 살던 고향은 → 내가 살던 고향은 작가와의 대화 → 작가와 대화 (‘~의’는 일본식 표현) 그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겹조사) → 그를 사랑했음을 알게 됐다. 내일은 분명 갈 것이라고 믿었다. → 내일은 분명 가리라고 믿었다. ~에 관한, ~에 대한 안 쓰기 건강에 대한 문제는 인류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 건강 문제는 인류 문제와 직결된다. 미국 경제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최근 발표했다. → 미국 경제를 연구한 보고서를 최근 발표했다.   7. 지시대명사 안 쓰기 이, 그, 저, 이것, 저것, 이런, 저런 등 그 어느, 그 어떤, 그 누구, 그 무엇에서 ‘그’를 빼도 말이 되면 빼라.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8. 띄어쓰기와 맞춤법이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전문가인데 이것을 잘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라도 일단 시에서는 낙제다. 요즘은 한글 맞춤법 검사기가 있어서 훨씬 수월하지만, 이것도 100% 믿을 수 없다. 시적 표현을 못 잡아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도 중요하지만, 띄어쓰기와 맞춤법, 오탈자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시와 인간 관계의 본성   ㅡ 이어산 교수   “시를 이렇게 써야 한다.”라는 시 창작법은 사실 우스운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시가 지닌 본성에 대한 최대공약수를 공부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깊이 있는 시를 쓸 수 있으며, 명시로 회자 되는 시의 대부분은 그 본성에 충실하여 독자들의 감동을 자아내면서 읽을수록 맛이 나는 작품들이다. 다른 장르의 예술에 비해 초라하고 언어 외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말로 소통하므로 언어를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은 가장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다.    시는 인간의 말에 최대한 많은 뜻을 축약하여 말 그림으로 보여주는 장르이므로 그 어떤 예술과도 비견 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은유’라는 쟁반에 언어의 보석을 담아내는 일이기에 세상의 모든 철학과 예술성을 집약하는 일이다. 유명 시인들에게 인생에서 중요하고 가장 보람된 일을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시를 쓰는 시인’이 된 것을 꼽는 경우가 가장 많다.   모든 시의 출발점은 낭만성과 자기애에 대한 탐구, 항상 동경하는 어떤 것이 마음에 가득하여 삶이라는 집을 아름답고 격조 높게 하며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의 조화도 살필 수 있다.  또한 모순어법을 통하여 빛나는 은유를 성립시키므로 시는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시를 쓸 땐 마음은 뻔하지만 어렵다. 이런 현상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다. 시가 오랫동안 잘 안 되는 원인은 시를 잘 쓰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필자도 처음 시를 배울 때 “욕심을 버려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의 시업에서 그것을 깨닫기까지 10여 년이 걸렸다. 빨리 깨달으면 그만큼 고생을 덜 한다.   욕심을 버리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기초부터 공부하려는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오류는 서두에서 언급한, 시가 지닌 본성의 최대공약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본성이란 시의 기초 중에서도 기초작법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좋은 시를 쓰려고 덤벼드는 것은 씨앗을 땅에 심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는 일과도 같다.   오늘부터 시의 본성에 대한 기초를 다시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이 기초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글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음은 시를 쓸 때 꼭 기억해야 할 기초 몇 가지다.   1. 한자어 안 쓰기 한자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말은 무조건 쉬운 우리말로 풀어서 쓰라. 꼭 한자를 써야 할 경우엔 한글 옆에 병기 하되 한글보다 작게 표기하는 것이 우리글과 말을 사랑하겠다는 시인들의 약속이다.   2. 형용사(감정 형용사), 부사 안 쓰기 기쁘다, 행복하다, 좋다 등의 형용사가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기쁘거나 슬픈 감정은 독자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대표적으로 쓰지 말아야 할 형용사로는 열심히, 효율적인, 합리적인, 최적화된… 등이다. 형용사 대신 동사로 바꿔야 한다. 예를 들면, 예쁘다 → 예쁘지다 → 예쁘하다 또한 부사는 상황을 가장한다. 매우, 아마, 다만, 진짜, 도무지 등등이다. 시에서 부사를 제거하면 소음이 사라져서 글이 맑아진다. 형용사와 부사 대신 동사, 명사, 대명사만 쓰고도 장면이나 사건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3. 피동형 안 쓰기 능동형으로 써야 문장이 자연스럽다. 보여지다, 쓰여지다, 믿겨지다, 잊혀지다, 꺾여지다(이중 피동사) 예) 내 마음은 더 착잡해졌다. → 내 마음이 착잡하다. 잘 닦여진 도로 → 잘 닦인 도로, 끈으로 묶여진 → 끈으로 묶인 깊게 파진 → 깊게 파인, 배가 뒤집혀 졌다. → 배가 뒤집혔다 (피동 표현→ 능동 표현으로 고칠 것. 피동형이나 피동사 중 하나만 쓰면 되는데 영어에서처럼 두 가지를 한꺼번에 쓰는 이중피동은 현대시에서 멀리해야 할 작법이다.   4. 이중 부정형을 쓰지 말 것. 한 문장 안에 부정 표현이 두 번 이상 나타나게 하지 말 것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진실을 말해야 한다. 어른을 모시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모르는바 아니다. → 어른을 모시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 의미하지 않는다. (이중 부정은 의미 전달이 불분명해진다. 뜻 파악에 방해가 된다. 이중 부정을 쓰지 않아야 글이 훨씬 깔끔해 진다.)   5. 접속사 안 쓰기 단어와 단어, 구절과 구절,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부사를 쓰지 말 것. 그리고, 그러나, 왜냐하면, 하지만, 그런데… 예) 어제는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한가하다. 균형을 이루지 않을 수 없다. →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중 부정을 쓰지 않는 글이 훨씬 깔끔하고 설득력 있는 글이 된다. 접속사가 많은 글은 논리가 부족한 글이다.   6. 조사와 겹조사 안 쓰기 ‘~의’ ~것 조심해서 쓰기 나의 살던 고향은 → 내가 살던 고향은 작가와의 대화 → 작가와 대화 (‘~의’는 일본식 표현) 그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겹조사) → 그를 사랑했음을 알게 됐다. 내일은 분명 갈 것이라고 믿었다. → 내일은 분명 가리라고 믿었다. ~에 관한, ~에 대한 안 쓰기 건강에 대한 문제는 인류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 건강 문제는 인류 문제와 직결된다. 미국 경제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최근 발표했다. → 미국 경제를 연구한 보고서를 최근 발표했다.   7. 지시대명사 안 쓰기 이, 그, 저, 이것, 저것, 이런, 저런 등 그 어느, 그 어떤, 그 누구, 그 무엇에서 ‘그’를 빼도 말이 되면 빼라.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8. 띄어쓰기와 맞춤법이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전문가인데 이것을 잘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라도 일단 시에서는 낙제다. 요즘은 한글 맞춤법 검사기가 있어서 훨씬 수월하지만, 이것도 100% 믿을 수 없다. 시적 표현을 못 잡아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도 중요하지만, 띄어쓰기와 맞춤법, 오탈자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19    수필이론 댓글:  조회:1095  추천:0  2020-01-05
수필이론 수필의 기법 중 교착법이란   교착법은 두 개 이상의 다른 이야기를 중첩시켜 배열하는 기법이다. 이것은 앞이야기의 끝부분과 뒷이야기의 앞부분을 오버랩(겹침)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중성이나 양면성, 또는 서로 다른 인물의 유사성을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이 기법은 앙드레 지드가 발견한 조직법으로서 한 인간의 이중성을 '천사와 악마', 혹은 '현실과 환상' 등의 양면성을 통하여 고발한다. 교착법의 약속은 두 계열 이상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한 계열의 끝부분과 이어지는 다른 계열의 시작부분이 반드시 의미상의 동일성이나 차이성의 형태로 교차(오버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 교차되는 내용이 유사성이나 공통성을 지니면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적합하고, 이질성을 지니면 동일한 인물의 양면성을 대조시키거나 고발할 때 어울린다. 참고 문헌: 한국 현대 수필의 구조와 미학
18    식당 차림표에 보이는 잘못된 표기 댓글:  조회:829  추천:0  2020-01-03
식당 차림표에 보이는 잘못된 표기 1. 누룽지(×)  →  눌은밥(○)  누룽지는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을 뜻하고, 눌은밥은 누룽지에 물을 부어 불려서 긁은 밥을 말한다. 2. 모듬회(×)  →  모둠회(○)  '어떤 목적 아래 여러 사람이 모이는 일'을 의미한다면 '모임'이 바르고 '어떤 대상을 묶음'을 의미한다면 '모둠'이 바르다. 3. 암돼지(×)  →  암퇘지(○)  ‘수캉아지, 암캉아지, 수캐, 암캐, 수평아리, 암평아리, 수컷, 암컷, 수키와, 암키와, 수탉, 암탉, 수퇘지, 암퇘지, 수탕나귀, 암탕나귀, 수톨쩌귀, 암톨쩌귀’ 등의 단어에서는 거센소리로 적는다. 4. 오돌뼈(×)  →  오도독뼈(○)  씹을 때 ‘오도독 오도독’ 소리가 난다고 해서 ‘오도독뼈’다. ‘오도독 오도독’은 작고 단단한 물건을 잇달아 깨무는 소리 또는 모양을 일컫는 우리말이다. 5. 쭈꾸미(×)  →  주꾸미(○) 6. 아구찜(×)  →  아귀찜(○) 7. 찌게(×)  →  찌개(○) 8. 꼼장어(×)  →  곰장어(○), 먹장어(○) 9. 모밀국수(×)  →  메밀국수(○) 10. 안주 일절(×) → 안주 일체(○) 11. 깡소주(×)  →  강소주(○)   '강-'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예) 강굴, 강된장, 강술, 강참숯 12. 회집(×)  →  횟집(○)  회(膾)는 한자어이고 집은 우리말이고, 그 뒷말 '집'이 '찝'으로 된소리가 나므로 사이시옷을 사용하여 횟집으로 표기해야 한다. (갈비살, 공기밥, 선지국, 순대국, 배추국, 시래기국, 만두국, 김치국, 소고기무국, 고기국) 등도 우리말과 우리말, 한자어와 우리말 합성어이고 그 뒷말들이 '쌀', '꾹'으로 된소리가 나므로 사이시옷을 사용하여 (갈빗살, 공깃밥, 선짓국, 순댓국, 배춧국, 시래깃국, 만둣국, 김칫국, 소고기뭇국, 고깃국)으로 표기해야 한다. 13. 육계장(×)  →  육개장(○)  '개장'은 개장국에서 온 말이다. 개장국은 재료가 개고기, 육개장은 소고기, 닭개장은 닭고기이다. 닭계장이라고 하는 것은 닭 계(鷄)를 연상하기 때문이며 육개장을 육계장(肉鷄醬)으로 잘못 쓰이는 것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 14. 설농탕(×)  →  설렁탕(○) 15. 차돌배기(×)  →  차돌박이(○)  접미사 '-박이'는 '무엇이 박혀 있는 것'을 나타내며 접미사 '-배기'는 '특정한 곳이나 물건'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예) '-박이' : 오이소박이, 점박이 따위       '-배기' : 알짜배기, 진짜배기 따위 16. 떡볶기(×)  →  떡볶이(○)  떡 볶기는 떡을 볶는 행위. 17. 곱배기(×)  →  곱빼기(○) 18. 쥬스(×)  →  주스(○) 19. 창란젓(×)  →  창난젓(○)  창난젓은 명태 창자로 만든 것이고, 명란젓은 명태 알로 만든 것이다. 창난은 알(卵)이 아니므로 창란으로 적는 것은 틀렸다. 20. 고등어졸임(×)  →  고등어조림(○)   ‘졸이다’는 ‘마음을 졸이다’처럼 조마조마한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17    ● 「극지의 시」 中 "위기지학의 시"/ 이성복 댓글:  조회:1089  추천:0  2019-11-27
● 「극지의 시」 中 "위기지학의 시"/ 이성복 시는 한 편 쓰나 천 편 쓰나 차이가 없어요. 한 편, 한 편에 천 편의 수준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한 편이 수준 미달이면 아무것도 안 쓴거나 마찬가지예요.  인간정신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분야가 시와 수학과 음악이라고 하지요. 시 수학 음악 이 세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에요. 세 가지 모두 패턴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거예요. 시인이 하는 일도 일상생활 속에 숨겨진 패턴을 찾아내는 거라 할 수 있어요.   어떻든 모든 것의 궁극적 판단은 미추에 달려 있어요. 제일의 기준은 진이나 선이 아닌 미예요. 어떨 때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느냐 하면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것들 속에서 불현듯 패턴이 드러날 때예요.  패턴은 다른 말로 주제 테마 혹은 모티브라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바로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거예요. 시의 재료인 언어는 국가와 민족, 역사와 환경의 제약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실제적인 삶에 즉물적으로 즉자적으로 가장 가까이 다갈 수 있는 도구예요. 달리 말하면 언어는 우리 삶의 최전선이지요. 제가 앓고 있는 아픔은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아픔이 아니거든요. 인생이란 것 자체의 아픔이에요. 이 아픔은 치유될 수가 없는 거예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란 말도 있지만 이 아픔은 죽어서야 끝나요. 언제나 자신에게 질문해 봐야 해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이나 일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을. 가짜가 아닌 게 진실이지요. 진실은 아름다운 거예요. 거짓은 절대 아름다울 수 없어요. 예술가와 예수라는 존재는 참 가까운 거 같아요. 희망은 언제나 더 큰 절망에서 생겨요. 예수가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보다 크고, 또 그 아픔을 스스로 자진해 살아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저는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분들 마음 속에서 제가 그 자리(시의 자리, 시인의 자리)에 서 있는 한, 그 자리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꾸 자신을 돌아봐야 해요. 본립도생이라는 말이 있어요. 근본이 세워지면 길은 자연히 나온다는 거지요. 시는 써도 되고 안써도 되요. 내가 꼭 시를 써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기본이 안된 상태에서 쓰는 글은 쓰나 마나 한 글이고 써서도 안될 글이에요. 글쓰기에서 기본이란 대상과 독자에 대한 배려예요. "가장 값진 것을 보기 위해 잠깐 눈을 감는다.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는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시력장애와 척추장애 남녀의 사랑을 다룬 다큐에서 나왔다는 이 말이 참 좋아요. 지금까지 제가 써온 자폐적인 글 말고 이런 게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문장을 보면 누구나 감동받게 돼 있어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긴 호흡 한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안나푸르나 조난자 일기)". 저는 이글이 문학의 정수라고 생각해요. 문학을 한다는 건 그처럼 세상에 없는 길을 가는 거예요. 거미처럼 스스로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해요. 저는 이 글을 볼 때마다 나쓰메 소세키나 김수영을 생각하게 돼요. 그분들은 자기 자신을 소처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글쓰기를 했어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길에서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거예요. 정말 좋은 문장은 눈물을 나게 하는 게 아니라 눈물이 깊은 속으로 내려가게 만드는 거예요. 저는 문장을 어떻게 써야할 지 막막할 때 카프카의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요. 카프카의 문장은 전부가 시예요. 거기에는 아무런 비유나 장식이 없지만 본질에 닿아 있어요. 시를 쓰려면 시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보다 좋은 시 읽는 것이 더 중요해요. 또 좋은 작가가 되기보다 좋은 독자가 되려는 게 글쓰기의 지름길이에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 안의 스승을 찾는 거지요. 스승이 없으면 헤매게 돼요. 글쓰기에서 바른 길은 자기고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예요. 글을 쓰려면 내가 먼저 아파야 해요. 그래야 남을 아프게 할 수 있지요. 결국 자기를 위한 공부(위기지학)을 해야 하는 거지요. 글 쓰기를 통해 자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돼요. 시가 뭔지, 시가 어디에 있는지 말이에요. 시는 각각의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즉 화자에게 있어요. 그 자리에 제대로 서면 모든 게 시가 돼요. 좋은 시는 언제나 독자를 그 자리에 서게 만들어요. 어떻게도 이름 붙일 수 없는, 헐벗고 누추한 것들의 유배지가 극지예요. 아무도 위안해 줄 수 없고 위로받을 수 없는 극지에서, 시 말고 무엇이 우리를 견딜 수 있게 해주겠어요. 삶이 극지라면 당연히 시도 그래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에요. 극지의 시만이 희망이 될 수 있어요. 왜? 진실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이야기하는 건 주제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에요.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는가의 문제예요. 그걸 알려면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고 그것을 자기 삶에 비추어 봐야 해요. 시는 바로 자신을 제물로 하여 진실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이를테면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위인지학은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이고, 밖에서 안으로 관심을 두는 위기지학은 성장이 무제한인 무한화서라 할 수 있겠지요. 전 우리시대 제일 뛰어난 시인은 황지우 최승자 박남철이라 생각해요. 황지우는 재능이 특별하고 최승자는 시에 순교했어요. 박남철은 뛰어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렇게 갈 줄 정말 몰랐어요. 남들한테 하는 배려는 자기 자신한테 하는 배려예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다치고 남도 다쳐요. 시는 "쓰는 사람"과 "대상"과 "읽는 사람"을 귀한 자리에 두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시를 믿어요. 믿고 싶어 믿는 게 아니라 믿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속절없이 바다에 내리는 눈이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ARENA」,  2015년 3월호)
16    무질서의 질서화와 시의 골격 댓글:  조회:1101  추천:0  2019-11-27
무질서의 질서화와 시의 골격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역사 이래 사람들은 보이는 사물과 대상, 보이지는 않으나 느껴지는 것까지 상징적 언어로 구분하여 왔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편의 세계, 즉 보편적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로 발전시켜 왔고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진리는 계시적 언어, 또는 영적 언어로 구분지어 신(神)의 영역으로 남겨두기도 했다.   시인은 신의 영역 바로 아래 단계인 형이상학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언어를 축약하여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세상 모든 예술의 제일 앞자리에서 거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를 쓸 때 우선 시인의 자세부터 배워야 하는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시만 좋으면 훌륭한 시인인양 알아주는 작품성 지상주의가 우리 시단에 인성이 덜 성숙된 시 노동자나 시 기술자를 양산하기도 했다. 요즘은 시만 잘 쓰는 사람이라고 우대받는 시대가 지나고 있다. 이제 사람다운 시인, 시에 값하는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가 시를 쓴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보편의 세계에서 특수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보편에서 특수를 찾는 작업'은 시인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기억해야할 작법이다. 그러나 보편적 현상을 끌어와서 시를 써 보려고 하면 무질서하고 가닥이 잡히질 않는다. 그래서 시 창작이란 무질서한 사물을 질서화 시키는 작업이라고도 한다. 시에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은 시의 골격을 갖추라는 말이다. 골격을 갖춘다는 이야기는 시적 주제에서 이탈하여 이 말 하다가 저 말 하거나 난삽하여 무슨 말인지를 오르는 잡문을 쓰지 말라는 이야기다. 즉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여서 그 주제와 연관되는 간접적인 이야기나 이미지로 연결되는 확장성 있는 시를 쓰라는 말이다. 이 연습에 게으름을 피우면 시의 실력이 늘지 않는다.   시를 잘 쓰려고 하지 말자. 시가 되도록 쓰자. 이 말도 아주 중요하다. 화려한 언어를 동원하여 아름답게 쓰려고 하면 시도 잘 안 되지만 그런 시는 그 화려한 기교가 시의 감동을 까먹어버린다. 감동은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시인은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담담하고 쉬운 보통 말을 사용하되 말의 조합을 제대로 하는 노력이 시를 잘 쓰는 방법이다. 말의 조합을 잘 한다는 것은 시의 골격과도 직결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를 논리처럼 말하는 작업이고 드러난 뜻이 아니라 감춰진 또 다른 이야기를 쓰는 방법이다. 논리가 보편적이라면 비논리의 논리는 주관적 특수성을 띠는 것이다. 그렇게 써놓고 보고 또 보고 어색한 부분을 고쳐나가는 것이다. 시를 써놓고 밤새도록 퇴고를 했기에 고칠 게 더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것이 바로 초고(草稿)다. 하루 이틀 여유를 두었다가 또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그때 또 고쳐라. 그것이 퇴고다. 퇴고는 여러 번 할수록 시가 단단해 진다.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최문자, 전문   우리가 시 쓰기에 실패하는 이유야 많겠지만 초보자들이 가장 안 되는 부분이 시의 주인공이나 등장 하는 대상에게 확실한 역할을 주는 작법이 서툴다. 다시 말해서 시의 집중도나 골격이 약한 경우가 많다. 위 시는 '나무'라는 주제에 끝까지 집중한 시다. 시가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 나무를 이야기 하면서 결국 생명에 대한 시학으로 치환 되고 있는 것이다.    - 이어산   쉬운 시 쓰기와 시적 대상 찾기    시를 쓰다보면 절벽이 가로막은 것처럼 도무지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거나 싱크홀 같은데 빠진 것 같이 허우적 거리다가 시 쓰기를 그만 둘까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시인치고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406)는 "약간의 노력으로 좋은 시의 열매를 맛보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2천5백 년 전에 이미 설파 했는데 그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는 노력으로 시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는 사람살이의 지점을 읽어내는 일이 곧 시 쓰기요,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질곡을 새롭게 진단하여 세상에 보고하는 일이 시 쓰기인데 신이 아닌 이상 노력 없이 되겠는가? 그리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시 쓰기의 성공이란 사실 없다. 다만 좋은 시 쓰기가 있을 뿐이다. 중국의 대 사상가 루쉰(魯迅)의 말처럼, “길이 없던 곳도 자꾸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것이고, “파도를 겁내지 않고 바다에 나가는 사람이 고기를 잡는다”는 말과도 같다.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변화하는 세상을 읽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면 성공하기 힘들게 되고, 세상의 속도만큼 나도 같이 뛰면 현상유지는 되는 것이며, 세상의 속도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시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시에는 관심이 없고 현대시의 흐름을 모르면서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시를 쓴다면 시가 진부한 넋두리인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 주목받는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어보란 이야기다. 주의할 것은 초보 시인일 때는 남의 시를 모방하여 쓰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계속 기성 시인의 흉내나 내는데 머물면 시인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좀 서툴고 거칠어도 반드시 자기만의 색이 드러나도록 써야 새로운 시인의 탄생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새로운 시인과 시인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말도 생겨났나보다.    그리고 시 쓰기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좋다. 나는 난삽하고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시를 쓰지 말자는 입장이다. 좋은 시와 어려운 시는 다르다.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된 말의 덩어리를 이미저리(Imagery)라고 하는데 이것이 잘 결합된 시는 어려운 시가 아니라 뜻이 깊고 읽을수록 맛이 나는 좋은 시다. 그렇지만 몇 번을 읽어도 뜻이 잡히지 않는 시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된다. 세 번 정도 정독을 해도 시인도 이해하지 못할 시라면 일반 독자들은 머리가 아파서 시를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를 좋은 시라고 꼽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즐기든말든 나는 서정이 살아있는 시의 깃발 아래로 나가려고 한다. 나의 이 강의가 어려운 시론을 짜집기하여 유식한척 폼이나 잡는 것으로 읽힌다면 이 글 읽기를 중단하라. 유식한 시론으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가슴으로 느껴져야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될 수만 있다면 회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깊이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강좌가 학위를 따기위해 마련된 것도 아니요 다만 시를 쓰는데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임을 유념해 주시기 바란다.    오늘은 시적 대상에 대한 것을 생각하면서 세 편의 시를 보자.    물론 시적 대상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선택한 소재는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여러 시인들이 이미 발표한 흔한 소재로 시를 쓴다면 여간해서는 주목받기 힘들다. 어차피 시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쌍방향의 문학인데 여기저기에서 봤던 내용을 다시 본다면 독자는 흥미를 잃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처음 시를 쓸 때,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택하는 것은 '자연'이다. 그런데 이 소재는 수대에 걸쳐서 동서양의 시인들이 너무나 많이 다뤘고 훌륭한 시도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여간 잘 쓴 것이 아니라면 자연에 관한 소재로 시를 써서 좋은 시로 주목 받기 어렵다. 자연을 매개로 시를 쓸 작정이라면 누구나 느꼈을법한 내용은 멀리하고 새롭게 형상화 된 내용, 즉 자기만의 특질화 된 시각의 시를 쓰기 바란다.    와우리 성애원 옆, 금곡폐차장엔    벌써 10년 넘게    쇠와 싸우는 풀들이 있습니다.    보통리 그 넓은 벌판 다 빼앗기고    변두리로 밀리고 밀리다    폐차장 무쇠더미 속까지 떠밀려와 살고 있습니다.    쇠와 살대고 살면서도    쇠와 섞이지 않는 강아지풀 하나    지난 봄에 살해당한    풀의 아이를 배고    죽은 엔진 뼈대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습니다.       - 최문자, 1연    위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인데 시인은 생명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고 파괴된 풍광을 비판, 고발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진술이 무엇인지를 공부하려면 우리나라 최고의 '진술시인'으로 불리는 최문자 시인(계간 시와편견 편집고문)의 시를 눈여겨 보기를 권한다.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중략)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중략)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가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 배한봉, 중에서    그 뻔한 풍광도 시집이 되고, 그 시집은 새도 읽고 나비도 읽고 거름을 져다 나르는 시인도 읽는데 결국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봄을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로까지 진행되어서 서술+묘사+진술+이미지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제각각의 역할이 확실하게 주어졌다. 눈여겨보라. 배한봉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것들은 역할이 명징하기로 유명하다. 시 쓰기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다.    대흥사 입구의 마늘밭    마늘잎들이 누렇게 때깔을 쓰고 있다    마늘이야 마른 생각들 버석거려도 머리통 가득    매운맛을 가두겠지만    수확이 가까울수록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어    머리 뿌리 온통 깨달음으로 채워넣으려는    저 독한 마음을 읽고 있는 한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갈증을 견뎌야 하는    메마른 5월이다. 누가 내 몸을 캐서    불알 두 쪽 갈라본들    거기 통속의 향기 드러나겠는가         - 김명인, 부분    위 시는 '마늘'이라는 대상을 선택하여 마늘의 수확이 가까워질수록 거추장스러운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고 마늘의 특성인 매운맛을 가득 머금고 여물어져 가고 있는 것과 통속의 향기(通俗의 香氣)인 마늘의 특질을 시인에게로 치환(置換)시켜서 오롯이 제 맛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처럼 담백 하지만 사물의 특질과 연결된 자신만의 사람살이의 해석이 시를 쓰는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일인 것이다. 김명인 시인의 시는 서정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읽어 볼 일이다.    - 이어산
15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할 것'/ 안도현 댓글:  조회:1793  추천:2  2019-11-27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할 것'/ 안도현 언젠가 “내 시의 사부는 백석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또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다. 오로지 그의 시를 ‘베끼고’ 싶었다”고 뻔뻔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데 백석은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으며, 당신의 시를 베껴도 좋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백석에 대한 내 사랑은 짝사랑이라 할 수 있다. 백석, 그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의 시를 얼마나 베끼려고 아등바등했는지, 왜 아직도 그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지 말해보려고 한다. 백석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1980년, 대학 1학년 때였다. 지금은 작고하신 시인 박항식 선생님의 저서 에 이 인용되어 있었다. ‘갓신창’‘개니빠디’‘너울쪽’ 같은 몇몇 시어가 좀 낯설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백석이라는 낯선 시인의 이 시 한 편은 스무 살 문학청년의 심장을 뒤흔들 었다. 그 까닭을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내가 학습한 시인들과는 뭔가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백석은 김소월도 한용운도 이상도 윤동주도 아니었다. 청록파도 서정주도 김춘수도 아니었다. 나는 캄캄해졌다. 그만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백석의 시에 반해 버렸다고 은사님께 말씀드렸더니, 또 다른 시들을 보여주셨다. 나는 백석의 새로운 시를 만날 때마다 노트에 한 편 두 편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묘한 흥분과 감격에 휩싸여 손끝은 떨리고 이마는 뜨거워졌다.(1988년 정부의 공식적인 해금 조치 이전에는 내놓고 그의 시를 읽을 수 있는 독서의 자유가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그런 필사의 시간이 없었다면 내게 백석은 그저 하고많은 시인 중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그건 짝사랑이었지만 행복했다.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고, 옷깃을 만졌으며, 맹세했고, 또 질투했다. 사랑하면 상대를 닮고 싶어지는 법이다. 소설가 신경숙은 대학 시절 방학 때 소설을 읽다가 필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다. 나는 이 길로 가리라.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신경숙 산문집 ) 필사는 참 좋은 자기학습법이다. 시의 앞날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어쩌다 눈에 번쩍 띄는 시를 한 편 만났을 때, 짝사랑하고 싶은 시인이 생겼을 때, 당신은 꼭 필사하는 일을 주저하지 마라. 그러면 시집이라는 알 속에 갇혀 있던 시가 날개를 달고 당신의 가슴 한쪽으로 날아올 것이다. 1987년 선배 시인 이광웅이 ‘오송회’ 사건으로 복역하 다가 출옥한 뒤에 나에게 또 백석의 시를 보여주었다. 낡은 대학 노트에 아주 정갈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필사한 시였다.(이광웅 시인은 1992년에 세상을 떴다. 나는 이 필사본을 돌려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내 서랍에 보관하고 있다.) 그 무렵 창작과 비평사에서 이동순 시인이 엮은 이 나왔다. 이로써 세상에 가까스로 백석 시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1989년에 낸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을 백석에게서 훔쳤다. 이 그것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백석의 호흡을 차용한 시들을 여러 편 쓰기 시작했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 길을 만들어 라는 시도 썼다. 현실에서 만나지 못하는 시인을 만나 메밀국수를 한 사발 먹었고, 폭설이 쏟아지는 시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구들장이 뜨거운 집이었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1994년에 나온 네 번째 시집의 제목 역시 백석표 제목이다. 그의 시 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누구나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은 쉽게 할 줄 안다. 그러나 ‘외롭고’와 ‘쓸쓸하다’ 사이에 ‘높고’라는 말을 갖다 놓을 줄 아는 시인이 백석이다. 이 ‘높고’는 양쪽 형용사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그 구차함을 일거에 해소하고 시 전체의 품격을 드높이는 구실을 한다. 베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높고’인 것이다! 그 이후에 낸 여러 시집에서도 백석을 짝사랑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음을 숨기지 않겠다. 애초부터 의도하고 흉내를 낸 것이 있는가 하면 나도 모르게 그에게 스며든 것도 있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졸시 앞부분). 감나무에서 쉬지 않고 매미가 울었고, 러닝셔츠 바람으로 마루에 누워 부채를 부치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메모한 구절이다. 나중에 가만 생각해보니 이 시구 역시 백석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앞부분이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을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지 말자. 그건 30년대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산숙(山宿)」 1938년 에 발표한 시다. 나는 이 시 한 편으로 30년대 산골의 전형적인 풍경과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 여기에서 아주 인상적인 것은 ‘목침’이다. 이 오래된 목침에는 새까만 때가 올라 있다. 화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백석의 매력이 숨어 있다. 그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라는 서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밋밋하고 시의 산문적 서술에 기여하는 말이 ‘생각한다’이다. 그런데 이 말이 아프다.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이 누구이겠는가? 목침에 때를 올린 사람들은 목침을 베고 잔 뒤에 떠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산골의 광산촌을 떠돌거나 만주 등지로 길을 떠나던 30년대 후반의 우리 민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때 묻은 목침 하나를 통해 대다수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현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에서도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 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시인이다. 나는 그의 시에서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것도 좋아하고, 수많은 음식을 나에게 맛보여주는 것도 좋아하고,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호기를 부리는 것도 좋아한다. 짝사랑의 햇수가 삼십년 가까이 된다. 지겨울 때도 되었건만 백석이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도꼬마리 씨앗 같다. 아니, 내가 백석의 몸에 붙은 도꼬마리 씨앗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도 시가 잘되지 않을 때, 해괴하기 짝이 없는 시들이 나를 괴롭힐 때, 백석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인)
14    김삿갓 이야기(1~66)제 1부( 67~ 제 2부) 댓글:  조회:4966  추천:1  2019-11-27
방랑시인 김삿갓 (1) 밝혀진 집안 내력의 비밀. (전편, 미성년자 출입금지) 어머니로 부터 조부(祖父) 김익순에 대한  내력을 듣게 된 병연(炳淵)은  비틀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벽을  바라보고 꿇어 앉아 ,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꺾고  있었다. 희미한 등잔불은 가끔씩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산짐승 우는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여보, 밤이 깊었어요." 남편이 평소와 전혀 다른 , 실성한 모습으로 벽을 향해 앉아 있자, 병연의 아내도 물끄러미 앉아 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늘 집에 오실 때  백일장에 참례하여 장원급제 하셨다고 좋아 하시더니" .. 병연의 아내는  불과 한 시각 전에  남편 모습이 어머니 방을 다녀 온 후 돌변한 것이 의아했다. 그러나 병연은 대답이 없었다. "여보, 어서 자리에 드세요." 아내가 다시 말하자 병연은 그제야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잔불로 어두운 방안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신 아직까지 자지 않았구려." "당신이 그러고 계시는데 제가 어찌 잠자리에 들 수 있겠어요."   "그렇군!,내 미안하오." 자조 섞인 말투로 대답한 병연은   다시 아무 말 없이 공연스레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아내에게 감추려는 듯  다시 시선을 천정을 향했다. 그리곤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천정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보 !" 남편의 부름에 아내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얼굴과 시선을 병연의 등 뒤로 향했다. "오늘, 내 당신을 앞으로 고생 시키지 않고 호강시키리라 생각되더니 모두가 허사가 된 것 같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남편의 다정한 말을 듣자 더욱 궁금한 아내가 가슴 떨려하며 되물었다. "장원급제의 기쁨도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소, 벼슬길도 이제 아득하게 멀어지고.. 아까 부터, 모든 것이 헛된 꿈이요 뜬구름을 쫒는 신세가 된 기분이오." "저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내의 궁금증은  다시 입을 다물고 있는 병연의 모습으로 더욱 커졌다.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오." 아내가 뒤이어 아무 말 없자 병연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오늘, 백일장에 시제는 논공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 , 嘆金益淳罪通于天) 이었소." "제가 그런 어려운 글을 아나요" .. 아내가 이렇듯 대답하자 병연은 당연하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인 후 다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연 병연은, "그 시제로 장원이 되었으나 알고 보니 내가 절절히 탄핵했던 김익순이 사실은 나의 조부였소." 병연의 아내는 이제야  남편이 그토록 괴로워한 까닭을 헤아린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안하오!,  당신을 고생시켜서" .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남편의 말을 들으니 병연의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여보, 저..."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무슨 말이오?" 병연은 천정을 쳐다본 채 물었다. 아내는 몇 번인가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아기를?" 병연은 이제야 아내를 향하여 돌아서며 자세를 고쳐 앉아 아내에게로 얼굴을 향했다. 병연이 마주보자 아내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깊게 떨구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병연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생각해 보면 백일장에서 장원급제 하였겠다, 아내는 태기가 있겠다.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   그러나 병연에게는 기쁨보다 슬픔이 앞섰다.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미천한 아비로 인해 신분이 제한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아내의 말을 듣고도 기쁨에 앞서 가슴만 더욱 메어왔다. 병연은 아내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뜨거운 눈물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차라리 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병연은 밤새 한잠 못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 해가 산마루를 넘어왔다. 사립문 밖으로 나온 병연의 눈에는 세상이 온통 새벽 안개 속에 묻힌 듯 뿌옇게 보였다. 어제 이시각의 병연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에 소생하는 만물처럼  야심찬 사나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속은 희뿌연 재만 남고 희망도 용기도 없는 타락한 몰골이었다.   잡목 숲을 얼마나 걸어 다녔는지 모른다. 병연은 심한피로감을 느꼈다. "아 .."   무거운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잠들었다가 보다 허탈감이 주는 공허함에 가사상태였다.   종달새 한마리가 하늘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병연은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 해는 이미 중천 높이 솟아 있었고 봄볕은 따사롭게 움트는 나뭇가지를 비추고 있었다. 넋을 잃고 망연히 눈앞에 펼쳐진 봄 풍경을 바라보던 병연은 문득 당시(唐詩) 한 수가 떠올랐다. 초색청청 유색황 (草色靑靑 柳色黃), 도화력난 이화향 (桃花歷亂 梨花香) 동풍불위 취수거 (東風不爲 吹愁去), 춘일편능 야한장 (春日偏能 惹恨長)   풀빛은 푸르나  버들은 아직 황색인데,  복사꽃은 만발했고 배꽃은 향기롭네 동풍은 나의 시름을 불어내어 갈 줄 모르고, 봄날은 한도 많고 길기도 하여라.   지금 처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시였다. 그렇다, 이 화창한 봄날은 그에게는 한도 많고 지루하도록 길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문득 단시 한 구절이 떠올라 읊조리는데   만사 개유정 (萬事 皆有定), 부생 공자망 (浮生 空自忙) 모든 일은 운명에 따라 정해지건만, 사람이 공연히 떠돌며 찾는구나.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 병연의 방랑준비.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병연에게는 시야 말로 생의 전부였다. 애써 생각지 않아도 시상(時想)은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지금까지는 입신출세를 해보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자신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었고 문장을 가다듬고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에 시작(時作)을 붙였다. 하지만 출세가 뜬구름이 된 지금 , 문장이 무슨 소용있으며 시 또한 무슨 필요 있단 말인가. 폐족의 낙인이 찍혀 있는 마당에 시를 해서 무엇 한단 말인가.   자괴감에 싸여 며칠을 고민을 거듭하던 병연,  뜬구름 같은 인생,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자연에 묻혀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 하면서  주유천하 (周遊天下)로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병연은 자기의 결심을 실행하기에 앞서 소년시절부터 자기를 깨우쳐준 서당의 스승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리라 마음먹었다.   "허어 , 병연에게는 더 가르칠 것이 없구나. 너를 가르치기엔 나의 글이 너무 짧구나." 스승은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었다. 공부가 깊어갈수록 병연의 깨우침이 스승을 앞섰고 이제 그 결과로  백일장 장원을 하였으니 즉시 스승님을 찾아 뵙는 것이 도리이지만 어지러운 심경 탓도 있고 급제한 바를 떳떳하게 자랑할 처지도 못되었기에 당장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오르게 되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라 떠나기 전에 인사라도 올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서당이 있는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스승님 !" 방안에서는 학동을 가르치는 스승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누구냐 ?" "저 병연이옵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학우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자네 이제 왔는가??" 학우들이 그를 반기는데 , 병연의 장원급제 소식을 뻔히 듣고 있던 터에 조금 늦게 나타났다는 질책어린 대답이었다.   병연은 말없이 방안으로 들어가 스승께  큰 절을 올렸다. "일찍 찾아 뵈오려 하였으나 신병으로 늦었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병연은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래 ? 많이 아팠더냐?? 그래 지금은 괜챦느냐?" 스승은 병연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병연의 병을 염려하였다. "네 지금은 염려하신 덕에 거의 낳았습니다."   "허허헛, 장원급제를 하더니 너무 기쁜 나머지 병을 얻은 모양이다. 거의 다 낳았다니 마음이 놓인다." 스승은 자기 문하에서 장원급제가 나왔으니 여간 즐겁지 않았다. 연실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병연을 바라보며 마냥 만족해하였다.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오늘도 소식이 없었으면 자네 집으로 올라갈 참이었네. 그나저나 자네의 장원급제를 축하하네." 그제야  동문수학 하던 친구들이  저마다 나서며 병연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정말 고맙네. 내가 재주가 있다기 보다 평소에 스승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은덕이고 학우들이 도와준 덕분일세." 병연은 이렇듯 답례를 하였지만 친구들의 축하가 여간 거북스럽지 않았다.   "백일장 다음날 읍내에 나갔더니 저자거리나 주막거리나 할 것 없이 장원급제한 선비 이야기로 들끓더군.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어떤 사람은 자네가 산신령의 화신이라고 까지 말을 하더군." 학우의 이 말에 병연은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이번에는 스승이 한마디 하셨다. "내력을 알 수없는 젊은이가  당당히 급제를 따냈으니, 뒷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나저나 언제쯤 출사하기로 하였느냐 ?"   "아직 결정된 것은 없으나 미구(未久)에  있을 것으로 압니다." 병연은 대답을 아니 할 수도 없어 생각되는 대로 말했다. "매우 장한 일이다. 이제부터는 네 앞길이 열려있는 셈이다. 더욱 정진하도록 하여라." 스승은 정색을 하고 병연을 훈계했다. "예"   병연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 뿐, 학우들이 서둘러 병연을 위한 축하연을 베풀었다. 처음에는 스승님을 모셔놓고 주안상을 벌였지만 스승님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면서 부터 젊은이들 판이 되었다.   "여보게 병연이. 자네 벼슬길로 나아가더라도 우릴 괄시해선 안 되네. 우리들이야  천자문에 명심보감 몇 줄이나 읽고 쓰다, 곧 집어치울 팔자가 아니던가?" "엑끼 이 사람들아 !"   술이란 좋은 것이다. 술 몇 잔을 마신 병연은 어느새 조금 전까지 침울했던 기분에서 벗어나 차차 호기를 되찾고 있었다.   "읍내에는 기생도 많지 않은가 ? 자네는 젊고 잘생긴데다 글까지 일필휘지(一筆輝之)로 통달하였으니 기생은 마음대로 골라잡아 놀 수 있겠구먼." "그야 물론이지. 출세하면 권세는 물론이요. 계집은 자연히 따르는 법, 그래서 모두들 출세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 아니겠나.? 자네도 병연이가 부럽거든  어서 장원급제를 하게."   학우들은 마음껏 마시고 떠들었다. 병연도 오랜만에 가져보는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병연은 학우들의 얼굴을 하나씩 ,  처음 보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오늘 헤어지면 평생 다시 만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아니 모르지 ..바람 따라 떠돌아다니다가, 먼 훗날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밀려왔다. 그것은 훗날 다시 만날지도 모를 이 친구들, 오늘의 젊음은 간곳없고 서로 늙고 피곤한 모습으로 상봉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이 들어서였다.   축하연은 날이 저물어서야 끝났다. 병연은 많은 잔을 마셨지만 좀체 취기가  돌지 않았다. 헤어질 때 병연은 학우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조만간 있을 이별에 서러운 마음을 담으며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병연은 그동안 보아오던 책을 정돈하여 깊숙이 처박았다. 그의 야망을 북돋아 주던 책들이었다.  병연은  이렇게 ,지난시절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와 작별하는  심정으로 책들과 작별을 나누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 집을 떠나는 김삿갓. 이제 언제 떠날 것이며 유랑의 길을 어떻게 잡느냐만 남았다. (떠나기로 결심한 바에야  봄이 가기 전에 떠나도록 하자. 봄바람을 타고 발길 닿는 대로 가면 되지 않겠냐.) 생각이 이렇게 굳어지자 내일이라도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금강산도 보고 싶고 구월산도 보고 싶고, 할아버지가 봉직했다는 선천 땅도 밟아 보고 싶었다. 선천 땅에 가면 할아버지의 체취를 맡을 수 있으리란 막연한 생각도 함께  들었다. 병연은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사실 , 돈을 가지고 유람을 가는 것도 아니라서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지만 ..   싸리나무로 삿갓을 만들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보면 심한 바람도 만날 것이오. 줄기찬 비도 맞게 될 것 이오, 때로는 눈보라도 닥칠 것이니 이것들을 다소라도 이겨내려면 삿갓이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게속 4   방랑시인 김삿갓 (4) 방랑의 시작. 따듯한 봄볕을 받으며 김삿갓은 망연히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던지 .. 야산 기슭이 끝나고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산골에만 살던 그는 넓은 들판을 보니, 일순 가슴조차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논에서는 농부들이 한창 모내기를 하고 있었고 , 어디선가는 농악 소리도 들려왔다. 김삿갓은 구성진 못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모내기를 하고 있는 두렁길에 발길을 멈추고 구경을 하였다.  농군들은 못줄 넘기는 소리와 함께,  빠른 손놀림으로 신명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만히 서서 그들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새참거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해를 쳐다보니, 오시(午時)는 지난 듯 하고 ..   얼추, 새참이 나올 시간이 임박해 보였다. 농사철이 되면 농군들은 하루 다섯 끼를 먹는다. 아침 조반을 마치고 들에 나가면 점심 전에 막걸리가 나오고,  다음으로 점심을 먹게 되고 저녁 전에 국수를 곁들인 술이 나온다. "음..농사철이라 음식이 흔하겠구나." 김삿갓은 입맛이 먼저 다셔졌다. 집을 떠나 올 때 이미 아침은 설친 채 줄곧 걸어왔으니 시장기가 느껴질 법도 하였다. 그는 농부들의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못 줄을 잡은 사람이 선창을 하면 모심는 사람들은 대꾸를 하였다. 어라 뒤야 상사뒤야 여보쇼 농군님네 얼마나 남았나. 문전옥답 서마지기 반달만큼 남았네. 어라 뒤야 상사뒤야 여보쇼 농군님네들 ~ 이 농사 잘 지어 풍년가 불라치면 .. 어라 뒤야 상사뒤야 풍년이 들면 뭣하겠소 .. 한양 가서 비단사서 우리 님 곱게 입혀보세~ 어라 뒤야 상사뒤야 .. 신명나는 일 소리를 들은 김삿갓은   저절로 어개가 들썩 거려졌다. 그도 논으로 당장 뛰어들어 그들과 같이 어울려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이때 마침 아낙네들이 커다란 함지박을 이고 논두렁길을 걸어왔다.   "이크, 새참이 나오는구나." 자기를 대접하려고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기가 든 김삿갓은 무엇보다  반가웠다. "자, 쉬었다 합시다."   못 줄잡이가 줄을 높이 쳐들며 새참이 나왔음을 알리자 엎드려 있던 농군들이 일제히 허리를 펴며 흙탕물에 손을 흔들어 씻고, 하나씩 아낙네 들이   새참을 차리는 논두렁으로 나왔다. 아낙네들은 그릇 그릇 넉넉한 국수를 담아냈고, 막걸리 동이에는 표주박도 띄워 놓았다.   이를 바라보던 김삿갓은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리곤 그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주위를 끌기위해 우선 한마디 내던졌다.   "거 농부가 한번 구성지고 신명납니다 그려, 허허허 ...." 농군들은 일제히 그를 돌아다보았다. 무명 두루마기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폼이 마치 어느 심심유곡에서 내려온 도사(道士) 같이 보였다.   "길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니오?" 늙수그레한 못 줄잡이가 김삿갓의 행색을 살펴보고 말대꾸 했다. "길이야 밟고 지나가라고 있는 것인데, 잘 들고 못 들고 할리가 있겠소이까? ?"   "허, 보아하니 염불이나 조아리는 땡중은 아닌 것 같고 , 그렇다고 선골도인(仙骨道人)도 아닌 것 같고..."   말이 끝나자 김삿갓이 바삐 다음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문전걸식 , 비렁뱅이도 아닌 것 같다는 말씀이오?"   "허허, 그 양반 눈치도 빠르네. 여보시오, 도사 비슷한 양반 , 보아하니 출출하신 모양이니 새참국수에 막걸리나 자시오." 그러자  눈치껏 새참을 이고 온 아낙이 새로 , 국수 한 사발을  말아 김삿갓 앞에 내밀었다.   농사철 들녘 인심은 좋은 법이다.  너나없이 지나는 사람을 불러 차린 상에 젓가락을 얹어주고, 누구라도 맛있는 들녘 음식을 지나치기 또한  어려운법이다.   김삿갓은 순식간에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막걸리도 꿀꺽꿀꺽 마셨다. 배가 불렀고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먹은 값을 한다고 모내기를 하는 논에 들어갈 처지가 아니라서 잘 먹고 간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어디에 가서 하루 밤 신세를 져야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꽤 큰 동네로 들어갔다. 이집 저집을 살펴보다가 사랑채가 있을 만한 어느 큰 집에 이르러, "주인장 계시오?" 목청을 가다듬고 큰 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뉘시오?" 안채에서 풍채가 그럴싸한 중년 남자가 탕건을 쓰고 나타났다.   "길을 가던 과객인데 어둠을 만나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합니다." 김삿갓은 처음으로 해보는 구걸 행각이라 차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과객이라고 ?" 순간, 주인장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과객이 날이 저물면 주막을 찾을 것이지 여염집을 왜 찾는단 말이오, 썩 돌아가시오." 서릿발 같은 말씨로 매정하게 말을 한다.   세상인심이 이럴 수 있을까 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었지만 김삿갓은 꿀꺽 참았다. (어차피 아쉬운 것은 나인데, 화를 낸들 뭐 한단 말이냐.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을 다반사로 겪게 될 터인 즉 .. 허허.. 그러나 오늘 인심은 한번 고약하군.)   이렇듯 생각한 김삿갓 , 그래도 밸이 틀려 한마디 하는데, "허, 안된다면 그만이지 뭐 그깟 일로 호령을 하오 ?" "아니, 저 놈이 ! "   놈자가 서슴없이 튀어 나왔지만 이미 돌아선 그의 등 뒤에 꽂혔다. 김삿갓은 들은 척 만 척 그 집 문전을 떠났다.   몇 집을 더 찾아가 가까스로 어느 허술한 사랑채에 들어가게 된 김삿갓은 저녁도 굶은 채 더벅머리 낮선 머슴 놈과 더불어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 왠지 기가 막힌 생각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 듯한데 ,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가 자신의 처지처럼 애처롭게 들렸다. 김삿갓은 문득 시상이 떠올랐다.   사양구립양시비 / 斜陽邱立兩柴扉   삼피주인 수각휘 / 三被主人手却揮 두우역지풍속박 / 杜宇亦知風俗薄   격림제송불여귀 / 隔林啼送不如歸   날이 저물어 두어 집 문을 두드렸는데  주인은 번번이 손을 휘둘러 쫒는구나. 두견새도 이 박한 인심을 알고 있는지 수풀 속에 떨어져 집에 돌아가라고 울어주누나.   어느 사이 눈물이 김삿갓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신세 한탄이 절로 나왔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5) 김삿갓 눈앞에 우뚝 솟은 금강산. 청운의 큰 뜻이 이루어져 청루거각에 누워 있어야 할 몸이 멍석이 깔려있는 낯선 사랑방에 누워 있다니  대체 어느 쪽이 잘못되어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모두 뜬 구름이야  뜬구름" "아니 이 양반이 잠꼬대는  웬 잠꼬대"   더벅머리 머슴 놈이 부지중에 김삿갓이 내뱉은 말을 잠꼬대로 들었던지 툭툭 발길질을 한다. "총각, 내 잠세." 김삿갓은 이렇게 말하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다음날도 , 또 다음날도 김삿갓은 계속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절은 벌써 오월 이었고 집을 떠난 지 어언 한 달이나 되었다. 봄도 지금은 다 지나가고  신록과 더불어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양구를 거쳐 금강산의 관문인 단발령에 도착하였으니 집에서 부터 오백리 길을  걸은 셈이다. 단발령 ..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쫒겨 ,  이곳을 넘었을 어린 단종왕의 심사가 어떠하였을까  하는 애처로운 마음이 김삿갓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마루턱에 앉아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어 있다가 다시 발길을 재촉 하였다.   단발령을 지나면 천하의 명산 금강산의 품에 안긴다. 이곳에서 비로봉까지의 거리는 백리길 이지만 수려한 내금강에 첫 머리가 밟히는 지점이었다. 금강산을 눈앞에 두자 김삿갓의 가슴은 쿵쿵 뛰고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는 길마다 길가에 나무며 , 막 자란 풀 한 포기며, 뒹굴고 있는 돌멩이 하나까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금강산 어귀 골짜기에는 드문드문 동네도 있었는데 명산을 배경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인심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무릉도원 같은 마을이 나타났다. 김삿갓은 쉬어갈겸 동네 어귀로 들어갔다.   마침 글방에서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집이 있어 김삿갓은 다짜고짜 들어갔다. 방안에는 여남은 학동들이 있었는데 불쑥 나타난 김삿갓을 보자 호기심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글을 짓는 시간이군." 김삿갓은 학동들이 쳐다보던 말든 개의치 않고 학동들이 펼쳐놓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글제는 역발산 (力拔山)으로 항우의 글을 지으라는 훈장의 분부였다. 김삿갓은 호기심에 한 학동이 지어 놓은 글을 주욱 읽었다. "남산북산 신령왈 / 南山北山 神嶺曰   항우당년 난위산 / 項羽當年 難爲山" "남산 북산 신령이 말하기를 항우가 살았을 적에는 산이 되기 어려웠다더라."   김삿갓은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린 학동이 지었다고 믿을 수 없는 솜씨였다. 그래 옆에 아이는 어떻게 썼는가 하고 읽어 보았다.   "우발좌발 투공중 / 右拔左拔 投空中   평지왕왕 다신산 / 平地往往 多新山" "오른손 왼손으로 빼내어 공중에 던지니 평지 곳곳에 새 산이 많이 생겼다."   김삿갓은 감탄했다. 어린 학동들의  글 짓는 솜씨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글 좀 하는 선비들은 힘 센 장사는 두려워하지 않지만 글 잘 하는 인재는 두려워하는 법이다. 김삿갓도 어린 학동들을 보기가 무서웠다. 그렇다고 슬그머니 나오기도 멋쩍은 일이라서 자기도 한수 적어놓았다.   " 항우사후 무장사  / 項羽死後 無壯士   수장발산 투공중  /  誰將拔山 投空中" " 항우가 죽은 후 힘쓴 장사가 없었으니  지금은 누가 산을 뽑아 공중에 던질 것 인가"   김삿갓 처음에 이곳에 들어 올 때는 학동들에게 글줄이나 가르쳐 주고 하루쯤 쉬어갈 요량 이었으나 어름어름할 자리가 아닌 듯하여 황망히 뛰쳐나오고 말았다.   며칠을 더 걷자 금강산이 눈앞에 우뚝 서 있었다. 때는 여름이 되었고 수풀사이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절이 있었다. 김삿갓은 성큼성큼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를 밟았다.   법당 안에는 까까머리 스님 한분과 유건에 도포를 입은 젊은 선비 하나가 대좌하고  김삿갓이 온 것도 모르고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헴 !" 김삿갓은 인기척을 하였다.   "누구요 ?" 중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절 구경 좀 왔소이다." 김삿갓은 천연스럽게 대꾸하고 다짜고짜 법당 안으로 썩 들어섰다.   "아니 이양반이 여기가 어디라고 무례하게 함부로 올라오는 게요 ?" 유건을 쓴 선비가 쌍심지를 치켜세우며 날카롭게 내뱉는다.   "법당이지요, 자비로우신 부처님께서 어디 양반 상놈 가리신 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선비가 어이없어 하며 김삿갓을 위아래 훑어보며 행색을 살펴본다.   차림새는 비록 남루하지만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글줄이나 읽은 사람으로 보였는지 , 이 무례한 방문객을 보기 좋게 물리칠 계책을 재빨리 궁리했다.   "어디서 오셨소이까??" 이번에는 중이 말문을 열었다.   "예,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 올씨다. 잠시 쉬어갈 겸 절 구경을 왔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곁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러자 젊은 선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노골적인 언사로 말을 하였다. "여보시오, 우린 지금 긴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자리를 삼가 주시오."   "어허 , 보아하니 은밀한 말씀을 나누고 계신 모양인데 참 딱도 하시오." "아니 뭐가 딱하단 말이오. ?"       ..   김삿갓은 냉큼 일어날 기색은 없이 그들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6) 선비와의 언문풍월 대결. "아니 뭐가 딱하단 말이오?" 중이 험악한 대꾸를 하는데 그의 말에는 칼과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스님, 긴요한 이야기라면 뒤쪽 승방에서 나눌 일이지 어찌 부처님 앞에서 나눈단 말씀이오. 앉아 계셔도 구만리를 내다보시는 부처님이 두렵지 않고 한낫 지나가는 이 과객은 두렵단 말이오??" "뭣이 ?" 선비와 중은 동시에 입을 딱 벌리며 기막혀 했다. 말을 듣고 보니 이치에 닿는 말이었다. 인간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부처님은 못 속이는 법, 지금까지 부처님 앞에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잘것없는 나그네 하나를 물리치려던 자신들이 부끄러웠다. 선비는 이 낯선 과객의 말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마침내 한 꾀를 생각했다. 그것은 어려운 글 겨루기를 해서 창피를 주어 내쫒을 심산 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풍류 과객을 자처하며 어설픈 글줄이나 읊조리며 밥술이나 얻어먹으려는 부류들을 많이 겪었지만 제대로 시 한수 읊는 놈은 본봐 없었다. 선비는 김삿갓도 그런 치들중 하나로 생각했다. 그래서 글짓기를 하여 뾰족한 코를 뭉개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우선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야 하겠기에 먼저 딴청을 피워 보았다. "보아하니 풍월깨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진정 풍류를 아는 선비라면 내 톡톡히 선비 대접을 하려니와 글에 자신이 없다면 어서 저쪽 주방으로 가서 찬 밥술이나 얻어먹고 가시구려." 김삿갓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오냐, 네 놈이 글줄이나 읽은 모양인데 어디 한번 혼똥을 싸보아라..) 이렇게 선비를 비웃으면서도 표면으로는 정색을 하면서 점잖게 말문을 열었다. "거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외다. 불초 깊이 배운바 없으나 일찍이 부친 덕에 천자문을 읽어 하늘천 따지는 머릿속에 집어넣었고 어미 덕에 언문 줄이나 깨우쳤으니 하교 하시면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김삿갓의 이 같은 말에 중이나 선비는 눈살을 더욱 찌푸렸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건 은근한 도전이 아니던가. "좋소.그럼 내가 먼저 운을 부를 테니 즉시 답을 하시오." 선비는 어차피 내친 발길이라 돌릴 수 없어 이렇게 말을 하고 잠시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타 ! " 그의 입에서 타란 말이 떨어졌다. "타라니, 이건 한문 풍월이오, 아니면 언문풍월이오?" 김삿갓은 눈을 반짝이며 선비에게 물었다. "그야 물론 언문풍월이지." 김삿갓을 싹 무시하는 말씨였다. "좋소이다. 그럼 내 답 하리다. 사면 기둥 붉게 타 ! " "또 타 !" "네 절 인심 고약타 !"     ... 타자가 떨어지기 무섭게 김삿갓이 내뱉으니 선비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더구나 갈수록 듣기 거북한 말이 나오자 다시 더 부를 마음이 없었다. 잘못 더 불렀다가는 무슨 욕이 나올지 모를 판이었다. 김삿갓은 선비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타!" 하고 내뱉으면 "지옥가기 꼭 좋다 !" 하고 내쏠 작정 이었다. 그러나 선비의 입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냥 있기가 안 됐던지 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 승수단단 한마랑 / 僧首 團團 汗馬閬 .. (둥글둥글 중대가리는 땀찬 말부랄이요.) "그깟 언문풍월이야 어디 풍월 축에나 들 수 있겠소 ? 이번에는 진짜 풍월을 해봅시다. 당신이 냉큼 지어내지 못하면 썩 여길 물러나시오." 중의 이 같은 말을 들은 김삿갓은 신명이 났다. "허..그럼 지금까지는 가짜 풍월 이었구려. 좋소이다. 진짜 풍월이 어떤 것 인지 맛 좀 보여주시오 내 맛보고 떫으면 윗자리에서 썩 나가리다." "허, 이 사람 말도 많구먼." 중이 심히 못마땅 한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건방진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까 궁리를 하다가 스스로 묘한 계책을 생각 하였노라 내심 감탄을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한문과 언문을 공부했다 하니 내 운을 부르겠소." 김삿갓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역시 대사다운 말씀 이십니다. 대사는 항시 공평해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잖습니까??" "허허 , 당신은 말방아가 너무 심하오." 선비가 한 마디 내쏘았다. 중이 입을 열어 운을 불렀다. "운은 언문의 "기억"자 "니은"자이고 글제는 산수(山水)로 하시오." "듣고 보니 공평하기는 하나 꽤 까다롭습니다. 하여튼 기왕에 떨어진 운이니 불러 볼 수밖에 더 있겠소이까??" 김삿갓은 끝까지 중의 말을 물어뜯으며 지체 없이 붓을 들어 종이에 일필휘지 (一筆揮之)로 글을 지어 놓았다. "수작은 저춘색벽 / 水作銀 杵春絶壁  이오 ,   운위옥척 도청산  / 雲爲玉尺 度靑山 " 이라 .. 폭포수는 은 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 구름은 옥으로 만든 자가 되어 청산을 가늠토다. " 자 어떻소이까? 시제(時題)의 기억과 니은은 각각 끝자에 붙였소이다."       "......." 중과 선비는 내심 깜짝 놀라 김삿갓을 바라보며 마른 침만 삼켰다. 아무리 헐띁을래야 흠을 잡을 수 없는 명구였다. 김삿갓이 차림새와 딴판인 것을 알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들은 김삿갓을 예로써 정중히 맞을 수도 없고 내칠 수도 없어 쩔쩔 매게 되었다. 김삿갓은 그들의 심보를 환히 꿰뚫고 있었다. 설사 이들이 더불어 풍월을 더하자고 수작을 걸어오더라도 상대하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침이라도 퇘퇘 뱉어주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라서 글로라도 그들을 희롱하고 싶었다. "묵묵 부답인 것을 보니 불초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보구려. 내 한수 더 읊어드리리다." 김삿갓은 이어 글귀를 한자 더 써서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승수 단단 한마랑 / 僧首 團團 汗馬閬  이요,  유두 첨첨 좌구신  /  儒頭 尖尖 坐狗腎" 이라 .. "성령 동령 동정   /  聲令 銅鈴 銅鼎   하고 ,     목약 흑초 락백죽 /   目若 黑椒 落白粥"  이로다. 둥글둥굴 중대가리는 땀찬 말부랄이요. 뾰족뾰족한 선비의 머리통 상투는 앉은 개 좆이로다. 목소리는 구리방울을 구리 솥에 굴리는 듯 요란스럽고 눈깔은 검은 후추 알이 흰죽에 떨어진 듯 하도다. 정말 지독한 욕설이었다. 처음에는 무슨뜻인지 잘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 중과 선비는 뒤늦게 자기들을 욕하는 글임을 알아차렸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 이런 죽일 놈을 보았나?!" 선비가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김삿갓은 벌써 섬돌아래 서 있었다. "여보, 선비님 눈을 부릅뜨니 정말 흰죽에 후추알 떨어진 것 같소이다. 허허허허 ...."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날리며 그 절을 나와 버렸다. 다시 산길을 걷는 그의 가슴은 냉수를 마신 것 같이 시원하였다. 중과 선비가 화가 치밀어  펄펄 뛰는 양이 눈에 선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8) 오애청산 도수래 .. (나는 본래 청산유수를 사랑 한다오.) 금강산 까지 팔십리 남았다는 말을 들은 김삿갓은 모호했다. 비로봉까지 팔십리란 말인지  내금강 입구까지 팔십리 남았다는 말인지 도통 짐작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떠랴, 어차피 세상을 떠도는 몸이거늘, 팔십리든 팔백리든 남은 거리가 문제되진 않았다. 김삿갓은 한가로운 여름구름 같이 유유자적한 터라 하루 삼십 여리만 걸어도 하루해가 지나갔다.   날이 다시 저물기 시작했다. 산골의 저녁은 빠른 법이다. 이렇게 날이 저물 때면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잠자리였다.      "허 , 날아다니는 새도 밤이 되면 찾아갈 둥지가 있건만  .. 나는 또 뉘 집 문 앞을 기웃거려야 한단 말인가 ?"   김삿갓은 탄식이 절로 났다.  두어 고개를 넘으니 조그만 동네가 보였다. 십여 호쯤 되어 보이는  빈촌이었으나  김삿갓은 내심 반가웠다. 더 걸을 수도 있겠지만  도중에 인가를 만나지 못하게 되면 심심산중에서 큰 낭패를 당하게 생겼다.  그는 다짜고짜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발길이 멎는 대로 김삿갓은 어느 집 문간에서 주인을 찾았다. "주인장 계시오??" 잠시 후 뒤꼍에서 허름한 차림의 집주인 인 듯한   남자가 나타났다.  "뉘십니까??" "지나가는 길손이외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까하고 염치없이 들렀소이다." "묵으실 수는 있겠으나 워낙 누추하여 모시기가 부끄럽습니다." 남자는 무척 친절하게 대답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불청객이 어찌 좋고 나쁨을 가리겠습니까. 재워주시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그저 밤이슬만 이라도 피하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김삿갓은 사나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억새풀로 엮은 자리가 깔려 있었다. "저녁은 아직 안 드셨지요 ?" "예, 허나 너무 염려 마십시오." 거드름을 피우는 무리들에게는 심술을 부리는 김삿갓이지만 이처럼 순박한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겸손한 그였다. 설혹 저녁을 못 얻어먹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여보 !" 사나이는 부엌을 향해  마누라를 불렀다. "왜 그러셔요??" 부엌에서 아낙의 대답이 들렸다. "손님이 오셨으니 한사발 더 들여오구려." "아니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김삿갓이 보건데 , 이집 살림도 넉넉지 않아 보이는데 저녁까지 신세를 지게 되니, 고맙고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 곱게 생긴 아낙이 저녁상을 들여왔다. "손님, 비록  험한 음식이지만 같이 드십시다." 사나이는 상을 김삿갓 앞으로 밀어 놓으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김삿갓이 그리 말을 하고 상을 내려다보니 소나무로 만든 개다리소반의 상에는 백기 사발 두개에 죽이 담겨져 있었고 ,김치 한 보시기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초라한 상차림 이었다. "저 때문에 혹시 안주인께서 끼니를 거르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김삿갓은 다소곳이 저녁상을 들여놓던 아낙이 생각되었다. "아 그야 모자라면 또 쑤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어서 드십시오."  김삿갓은 수저를 들었다. 죽은 미음처럼 묽었다. "그래 어떻게 사십니까?" 김삿갓은 이런 죽으로 끼니를 삼으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염려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런 산골에 사는 놈이 별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나뭇짐이나 해서 내다 팔아서 이렇게 풀칠이나 하며 살고 있지요." 주인사내의 말을 들은 김삿갓은 코끝이 찡해 옮을 느꼈다.  (세상에는 하찮은 글줄이나 배워 그것을 팔아 거들먹거리며 사는 놈들도 많구먼!) 김삿갓은 막연한 분노를 느꼈다. "실례가 됩니다만 내외간의 금술은 어떻습니까??" 김삿갓은 대체 이들 부부가 이렇듯 곤궁한 가운데서   무슨 재미로 살고 있을지 궁금하여  물었다. "금슬이요 ? 헤헤헤 ..그야 이를 말씀입니까 ?" 사나이는 갑자기 신명이 나는 듯하였다. "그럼 됐습니다. 많은 재물로 호의호식 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외간 금슬이 좋지 않아 인생을 불행하게 보내는 사람도 많은데 주인장께서는 비록 가진 것은 적을지 몰라도 내외간 금슬이 좋으시다 하니 남들이 부러워할 행복을 가지신 분입니다."  김삿갓은 이렇게 주인 사나이를 위로하고 그날 밤을 초라한 그곳에서 보내고 다음날  떠나며 시 한수를 남겨 놓았다.       . 사각송반 죽일기   / 四脚松盤 粥一器        천광운영 공배회  /  天光雲影 共徘徊 주인막도 무안색  / 主 人莫道 無顔色        오애청산 도수래  /  吾愛靑山到水來 네다리 송반에는 죽 한그릇 뿐인데  하늘과 구름이 같이 서려있구나 주인은 무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염려 마시오! 나는 본래 청산유수를 사랑하니까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9) 와청서원에 우성유라 ..臥听西园 雨声幽 (한가로이 누워 있자니 서원의 빗소리가 그윽하도다.) 금강산은 독특한 풍경을 자랑하는 산이다. 봄은 마치 앙증맞은 일,이십대 아가씨처럼 수줍은 아름다움으로 치장하여 금강산(金剛山)으로 불리고, 여름은 한여름 억세게 자라나는 명아주처럼 생활력이 왕성한 삼, 사십대 여성으로  보아   봉래산(逢萊山)  이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 불리는 이름은 풍악산 (楓嶽山) 이라 하는데 이것은 인생의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오,육십대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인생의 행로를 비유한 것이리라.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이라 하는데 이것은 산의 모습도 늙은 노파의 처지처럼  그 좋던 풍경이 어느덧 사라지고 산골짜기 봉우리마다 바위만 앙상하게 보여서 붙인 이름이다.        ... 발길을 더해 갈수록 금강산의 수려한 본색이 드러났다. 김삿갓은 완전히 주의의 경치에 취해 있었다. 자연히 우암 선생의 시가 저절로 읊어졌다.   산여운구백하고 /  운산 불능 변이로다   ( 山與雲俱白  /  雲山不能辨 ) 운귀산독립하니 /  일만 이천 봉이로다.  ( 雲歸山獨立  /   一萬二千峯)   산도 희고 구름도 희니 산과 구름을 구별할 수 없도다. 구름은 흘러가고 산만 홀로 남으니 우뚝 솟은 봉우리가 일만 이천이로다.          ...   김삿갓은 술에 취한 듯 곤드레 발길로 산길을 올라갔다. 고개를 넘으니 이름 모를 수려한 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데 정면으로 절 지붕이 보이고 그 밑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원하게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도 좋거니와 녹음이 우거진 시냇가에는 뜻밖에도 오 육인으로 보이는 선비들이 모여앉아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순간 김삿갓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쪽을 주시 했다. "올 커니, 천렵을 하는가 보구나. 좋~지. 시내에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하려나 ? 게다가 맑은 소주를 곁들이면 더욱 좋을 터, 이야말로 무릉도원에서 신선놀음 아니냐. 어디 한번 가보자."        .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듯 쏜살같은 걸음으로 김삿갓은 그쪽으로 달려갔다. 과연 김삿갓의 추측대로 선비들이 천렵놀이를 하고 있었다. 냇가에는 솥이 하나 걸려 있는데 닭을 삶는 구수한 냄새가 회를 동하게 한다. 김삿갓은 잘 하면 닭국에 술잔이라도 얻어 먹을 수 있겠다 싶어 신명이 저절로 났다.     선비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김삿갓은 빨리 걷던 걸음을 점잔을 빼는 양반네 걸음으로 바꿨다. 선비들은 모두 여섯 사람이었는데 모두 나이가 이십을 갓 넘어 보였고 옷차림과 생긴 모습에선 귀티가 감돌고 있었다. "허 , 한양 양반네 자제들이 금강산 구경을 와서 천렵을 하는 모양이군... " 김삿갓이 속으로 이같이 새우며 다가갔지만 그들은 저마다 주위 경계에 도취한 듯 아무도 김삿갓의 접근을 모르고 있었다. "허험 ! " 김삿갓은 우선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그들에게 알렸다. 돌연한 불청객의 침입을 그들은 비로소 알아차리고  일제히 김삿갓 쪽으로 눈총을 쏟았다. "참 운치가 있습니다. 어디 명장의 그림이 따로 있습니까?,이곳이야 말로 그림속의 풍경 입니다 그려.." 김삿갓은 우선 넉살부터  늘어놓았다. 젊은 선비들은 불쑥 나타난 이 불청객이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한 사나이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어디를 가는 길이오??" 길을 잘못 든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고 , 차린 행색으로 보아서 당신이 참례 할 곳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였다.  어찌 김삿갓이 이 말뜻을 모르랴. "발길 닿는 대로 가는 나그네가 별달리 갈 곳이 있겠습니까?? 젊은 선비들이 이렇듯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시회(詩會)라도 하시는 것 같아 어깨너머로 배울 바라도 있을까 하여 왔소이다." "뭐 시회라고 ?" 선비들은 자기들끼리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제꼴을 볼 량이면 영락없는 걸인인데 시회를 운운하다니.. 별꼴을 다 본다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눈꼬리가 위로 치켜진 것으로 보아 성깔깨나 있을 성 싶은 사나이가 말참견을 하였다. "당신이 시회를 다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글을 좀 읽은 모양이구료. 어디한번 읊어보겠소 ?" "예, 운자를 주시면 미약하지만 생각해 보지요." 김삿갓은 커다란 돌멩이를 자리삼아 깔고 앉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선비들은 다시 저희들끼리 얼굴을 마주보며 눈을 찔끔거렸다. 이것 봐라 하는 듯이. "좋소, 그럼 내 운을 떼겠소.  봄춘(春) 자 ! " "예, 고맙습니다. 지필 좀 빌려주셨으면 합니다만 ...." "예 있소 ! " 선비 하나가 내미는 종이와 붓을 받아들고 김삿갓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달필로 내리 휘갈긴다. 강호낭인 우봉춘  /  약반시붕 회사루     ( 江浩浪人 又逢春     /  約伴詩朋 會寺樓 ) 소동인래 류수암  /  고감승거 백운부      ( 小同人來 流水暗    /   古龕僧去 白雲浮 ) 박유소답 삼생원  /   호음능소 만종수     ( 薄遊少答 三牲願    /   豪飮能消 萬種愁 ) 의파청회 청시엽  /  와청서원 우성유      ( 擬把淸懷 靑柿葉    /   臥聽西園 雨聲幽 ) 강호낭인이 다시 돌아온 봄날을  만나  시 쓰며  절에서 시회를 같이한다. 골짜기에 한 사람만 나타나도 물가에는 그림자 어리고 절 찾아가는 스님 머리에는 흰 구름이 떠있구나 어쩌다 금강산에 오니 삼생원이 풀린 듯 하고 마음껏 술을 마신다면 온갖 수심도 사라지리라 내 이 간절한 회포를 감나무 잎에 적어놓고 한가로이 누워 있으니 서원의 빗소리가 그윽하구나.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0) 일년춘색 복중전 ..一年春色  腹中傳 (일년내내 춘색이 깊이 전해지도다) 김삿갓의 시를 본 선비들의 얼굴은 일순간 크게 달라졌다. 애초 김삿갓이 예측한 대로 이들은 한양의 권문세도가의 아들들이었다. 추위가 가신 늦은 봄에  돈냥이나 가지고 금강산 유람을 떠나왔는데 아직도 비로봉 근처에는 가보지를 못하고 건너편 절에 숙소를 정해놓고 날마다 천렵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부모 덕택으로 학식깨나 있다는 선비를 불러 독서당을 차려놓고 글공부를 하는 터인지라 이들은 자신들이 글 실력이 남다름이 있다고 뽐내던 처지였고 천만 뜻 밖에도  김삿갓의 글이 진솔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허허 , 노형 이제 보니 보통 솜씨가 아니시구려." 당신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어느새 노형으로 고쳐져 나왔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들은 풍월이지요."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겸손을 보였다. "자, 이리 앉으시오.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한번 어울려 봅시다." 김삿갓은 사양하지 않고 그들이 깔고 앉아 있는 화문석 돗자리로 냉큼 자리를 옮겼다.  "그래 선비들께서는 어디서 유람을 오셨습니까?? 불초가 생각하기로는 멀리 한양에서 오신 듯한데.." "아니 , 우리가 한양에서 온 줄 어찌 알고 계셨소??" 선비들은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사람이 가진 것은 없어도 두 눈 만은 밝습니다. 멀리서 보자하니 육조 대관들이 노니시는 듯하여 내려왔지요." 이왕 내친김이라 에라 모르겠다. 하며 김삿갓은 그들이 좋아 할 말을 던졌다. "육조 대관들 이라고요 ?" 그들은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면서 김삿갓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습니다. 불초가 보기로는 장차 육조에서 노니실 분들이었습니다. 이미 엄친들께서 탄탄한 길을 닦아놓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 ......" 그들은 입이 딱 벌어졌다. 이 허술한 나그네 불청객이 고명한 도인이나 기인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의 처지를 족집게로 뽑아내듯 쏙쏙 뽑아내니 말이다. 사실 이들의 부친들은 조정에서 정삼품 이상의 벼슬자리에 있었다. 때문에 집안의 배경만으로도 벼슬 한자리는 얻어 할 수 있는 처지였다. "허허 , 불초가 괜한 말을 했나봅니다. 너그러이 들어 주십시오." 그들의 심중을 뒤흔들어 놓은 김삿갓은 마무리 격으로 슬쩍 눙쳐버렸다. "귀인께서는 대체 뉘십니까??" 마침내 그들의 말씨는 최상급으로 비약되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강호 유랑인이 무슨 근본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김삿갓의 말은 그들에게는 신비스럽게만 들렸다. 마침내 푸짐한 술상이 벌어졌다. 닭국에 건포와 육포등 귀한 안주가 나왔고 술은 매실주였다. "이제 시 한수만 더 들려주시면 큰 공부가 되겠습니다." 선비들은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김삿갓에게 시 한수를 청했다. "좋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수 지어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모처럼 좋은 안주에 향기로운 술까지 마시게 되었는데다 취향이 도도했다.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  술술 시를 적어 내려갔다. 정관장석 에 소계변 하고  /  백분청유 에 도두견 이라 鼎冠장石 小溪邊             /  白紛靑油  도杜鵑 쌍저협래 하니 향만구 하고  /  일년춘색 이 복중전 일세. 雙箸狹來  香滿口               /  一年春色  腹中傳 시냇가 돌 사이에 솥을 걸어놓고  백분과 청유로 두견화 적을 빚네. 저를 들어 두어 번 입에 넣으니 그윽한 향기가 입 안 가득 퍼지고 춘색은 일 년 내내 깊이 전해지겠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1) 약사금강경이면 천산개골여라.. 若捨金剛景  靑山皆骨餘 (만약에 금강산의 경치를 버린다면 청산은 모두 뼈만 남으리라)   "참 좋습니다." 선비들은 무릎을 쳤다. 김삿갓은 얻어먹을 것을 먹었으니 이제 볼일은 다 끝났다 생각되어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벌써 가시렵니까??" 선비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바람처럼 왔으니 바람처럼 가야지요.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납시다." 김삿갓은 이 말을 남기고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고개를 몇 개 넘으니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가가 보이지 않아 계속 걸었다. 가는 길이 숲속  길이라 해는 아직 넘어가지 않았으나 앞은 어둑어둑 하였다.   이때 삼거리 길에서 중을 만났다. 그는 무료하던 차에 잘되었다 생각하고 슬쩍 문자를 써서 말을 걸었다. "문여소승하처래 ?"   / 問余小僧何處來 ?  ( 여보시오  젊은 스님 , 어디서 오십니까?? )   그러자 젊은 중도 냉큼 문자로 대답을 하여왔다. "소승금강래"      /   小僧金剛來  (소승은 금강산에서 옵니다.)   이렇게 일단 인사 겸 대화가 오가자 두 사람은 자연히 길동무가 되었다. "날이 어둡기 시작했는데 시주께서는 어디까지 가십니까??"   젊은 스님의 말은 매우 정중했다. 글을 할 줄 아는 과객임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정처 없이 나선 길손 입니다. 갈 곳이 따로 있겠습니까??"   "이 근방은 사나운 짐승들이 많이 출몰하는 곳입니다. 바쁜 길이라도 어두운 때는 삼가셔야 합니다. 다행히 소승의 암자가 멀지 않으니 유하고 가십시오."   김삿갓으로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 귀가 번쩍 뜨였다.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스님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룻밤 묵을 곳을 염려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젊은 중을 따라가는 김삿갓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금강산에서 온신다고 하셨지요??"   "예 유점사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유점사라면 금강산 제일의 명찰로 들었는데 예서 몇 리나 되는지요??"   "한 삼십리쯤 될겝니다. 그나저나 시주께서는 금강산 길이 초행이신가요??" "예 처음이지요. 가도 가도 팔십리 길이라고 하는군요." 김삿갓이 길에서 들은 대로 말을 건넸다.   "산길은 원래 정확한 잇수를 헤아리기 어렵지요." "그런가 봅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눈앞에 조그만 암자가 나타났다.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얼핏 보기에는 멋들어진 누각처럼 보였다.   "변변치 않으나 드십시다." 김삿갓은 젊은 중의 안내를 받아 객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미승이 저녁상을 가져왔다. 쌀과 조가 반반씩 섞인 밥이었다. 찬은 모두 산나물이었다. "소찬입니다만 시장하실 터이니 어서 드십시오." "고맙습니다."   김삿갓은 정갈한 산나물 찬이 구미에 당겼다. 밥상을 물리자 젊은 중은 김삿갓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말문을 열었다. "시주께서는 아까 소승에게 글월로 물으셨는데  시나 한수 들려주시겠습니까??"   어찌 고양이가 생선을 싫다 하겠는가. 김삿갓은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글제는 무엇으로 하면 좋겠습니까??"   "여기는 산속이니 산 풍경을 읊어 주십시오." "산 풍경이라 ..... " 김삿갓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즉시 누에가 실을 뽑듯 술술 싯귀를 읊기 시작했다.   약사금강경   / 청산개골여    (若捨金剛景   /  靑山皆骨餘) 기후기려객   / 무흥단주저    ( 其後驥驪客  /  無興但躇躇)   만일 금강산 경치를 버린다면 청산은 모두 뼈만 남으리 다음에 나귀를 타고 온 길손은 흥이 없다 다만 주저하겠지.   "천하의 명시 올씨다. 소승도 풍월을 좋아합니다만 시주께서 읊으신 시를 지으려면 아마 한나절은 고생을 해야 얻을 것 같습니다." 젊은 중이 이같이 격찬하자 김삿갓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원 칭찬이 과하십니다. 다만 남의 것을 모방하였을 뿐입니다.." "겸손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젊은 중은 이렇게 말하고 김삿갓의 귀가 번쩍 뜨일 말을 해주었다. "지금 금강산에는 명물이 하나 있읍지요."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니 명물이 어디 하나뿐이겠습니까 ?" "그런 뜻이 아니라 시 잘하는 스님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많은 시인이 그분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재주를 겨루었습니다만 아직도 그분의 글을 꺾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요 ?" 김삿갓은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호기심과 경쟁심이 동시에 일었던 것이다.   "불초 워낙 과문한 탓으로 그토록 고명하신 스님이 계신 줄 여태껏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스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여기서 약 삼십리쯤 올라가면 입석봉이라는 큰 봉우리가 나옵니다. 금강산 제일이라는 만물상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 아래 입석암이라는 정갈한 암자가 있는데 시승은 바로 그곳에 계십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2) 김삿갓의 대필 시. "과연 명승절지에 명승(名僧)이 계시군요. 불초 감히 고명하신 분과 겨룰수야 없습니다만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야 시주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글이라면 그 스님도 뒤지지 않으시는 분이나  가신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셔야 할 겁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스님은 누구든 찾아오는 손님은 글을 알든 모르든 글 실력을 시험해 보십니다. 그래서 상대는 안 되지만 실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쾌히 대접을 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죽장으로 후려쳐 쫒아버립니다. 물론 시주께서는 좋은 상대가 되시겠습니다만."   김삿갓은 갈수록 흥미를 느꼈다. "거참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만약 겨루기를 하여서 지는 편은 이를 뽑혀야 합니다. 아마 그 스님이 비장하고 있는 자루 속에는 뽑은 이가 한말은 넘을 것입니다."   "오 대단한 지고." 김삿갓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짧아 설혹 이를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꼭 가보고 싶었다.   그날 밤 김삿갓은 시승 생각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반을 얻어먹고 곧장 입석봉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갈수록 산세는 더욱 험악해졌다. 고개는 가팔랐고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 내리는 물소리는 웅장하기조차 하였다. 삼십리 길이라고 하였지만 오시가 넘을 때까지 절반쯤이나 온 듯 했다.   김삿갓은 배가 고팠다. 이른 아침부터 산길을 내처 걸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더구나 오시도 훨씬 지났지 않은가.   "물이라도 마시고 가야겠구나." 그는 조심조심 계곡 쪽으로 내려갔다. 냇가로 내려가는 비탈은 가파르고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돌멩이도 많았다. 간신히 냇가로 나오자 의외로 냇가는 넓었다.   더구나 그의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은 냇가 벼랑위에 아담한 정자가 있었는데 갓을 쓴 선비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별세상에 들어온 느낌이어서 한동안 김삿갓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 커니 , 시회를 열고 있나보구나." 김삿갓은 제 정신이 들자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정자 쪽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급히 걸었다. 그리고 그는 다짜고짜 정자 안으로 올라갔다.   "지나가는 과객입니다만 말석이라도 빌릴 수 있을까요 ?" 화선지를 펼쳐놓고 시작(詩作)을 하고 있던 선비들은 웬 놈이냐는 듯  김삿갓을 쏘아 보았다.   "당신 글줄이나 지을 줄 안다면 어디 끼어보구려. 하지만 글재주 없이 술잔이나 얻어먹으려 한다면 딴 데나 가보시오."   노골적으로 하대하는 말씨였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말에는 이미 이골이 난 김삿갓 아니던가. "그저 책 몇 권을 읽었습니다. 보아하니 공짜로 얻어먹기는 틀린 것 같으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허 , 무료하던 차에 심심치 않은 구경거리가  생겼군 그래." 좌중에 팔자수염을 기른 사내가 마치 김삿갓을 장난감으로 생각했는지 이렇게 거들고 나섰다.   "불초가 여러분들의 무료함을 풀어주게 되었다니 천만다행 입니다. 자, 어디 받아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모욕적인 말에도 낯색을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수작을 부렸다.   "운을 떼라는 말이군. 풍월구경을 하긴 한 모양인데 , 누가 운을 한번 붙여보지." 팔자수염은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뭐 운이랄 것까지야 있겠소.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한번 읊어 보라고 하시오." 누군가 김삿갓을 얕잡아 보고 말을 하였다.   "보시다시피 불초는 워낙 불학무식한 놈이어서 막연히 글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글제라도 말씀하시면 억지로라도 뜯어 맞춰 보겠습니다."   "그럼  금강산의 절경을 읊어보시오. 구경 좀 해봅시다." "해보겠습니다만 불초가 글을 제대로 쓸 줄 모릅니다. 하오니 어느 분께서 대필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내친김에 김삿갓은 바보행세를 하였다.   "허허, 세상 살자니 별일을 다 보겠구먼. 그래 글씨도 쓸 줄 모르면서 어떻게 시를 짓는단 말인가 ? 이거야 말로 기상천외한 일이로군. 좋소. 내가 대필을 할 터이니 어서 불러 보시오." 얼굴이 동그란 선비가 별꼴을 다 보았다는 듯 무릎까지 치면서 붓을 들었다. "그럼 부르겠습니다. 소나무란 글자를 두자 쓰십시오. 김삿갓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음, 소나무 송(松)자를 두자 쓰라는군. 松松이라 ..자 썼소." "다음에는 잣나무란 글자를 두자 쓰시오." "잣나무 백자로군. 栢栢이라..썼소." "그러면 그 뒤로 바위라는 글자를 두자 적어주시오." "바위 암 자로군..岩岩이라 썼소." "끝에다 돌다라는 글자를 붙여주시오." "돌회라 .. 廻라 썼소." 이쯤 되자 좌중의 선비들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침들을 꼴깍꼴깍 삼키며 글이 이루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는 행을 바꾸어 물이란 글자를 두자 쓰시오." "물 수(水)자 두자라고 ? 水水 썼소." "다음으론 산이란 자를 두자 쓰시오." "묏 산자라 , 山山 썼소." "그럼 곳곳이라는 글자를 두자 써주시오." "곳처라는 글자군, 處處라고 썼소." "끝에다 왜 기이하다고 할 때 쓰는 자 있지요? 그자를 한자 써주시오." "이상할 기자로군.奇라 썼소."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끝났으니, 붙여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비들은 김삿갓이 부르는 대로 옮겨 적은 화선지의 조합된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3) 촉촉 금강산..삼야숙청전 (우뚝우뚝 솟은 금강산..사흘 밤을 청천에서 잠이 드네) 松松栢栢岩岩廻  /  水水山山處處奇 송송백백암암회  /  수수산산처처기   소나무 잣나무 바위가 돌고 돌아 물도 산도 곳곳이 기묘하도다.   "허 ..이거 천하의 명시일세!! " 선비들은 글을 읊조리고 나서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들은 이미 금강산을 두고 읊은 수많은 시를 많이 보아온 터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금강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쉬운 글자만 사용하여 딱 두 줄로 간결하게 적은 것은 처음이다.   "허어, 금강산의 경치를 이렇듯 쉽게 나타내는 방법도 있었구먼." 누군가는 탄식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금강산 곳곳의  절경 앞에 할 말을 잊고, 이것을 글로 옮길 적당한 문구를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이 초라한 나그네는 물 흐르듯이 쉬운 글자로 술술 읊어버리니 감탄만이 나올 뿐이었다. "아니 이런 재주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어찌 그토록 시침을 떼셨습니까?? 우리가 그간 실례가 많았습니다. 과히 섭섭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뽐낸다고 이 주제꼴에 빛나겠습니까?? 칭찬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선비들은 하인을 부르더니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술상을 차려 김삿갓을 상좌에 앉혔다. "자, 드십시다. 거 볼수록 수작(秀作) 이로군" 김삿갓은 배불리 먹고 마셨다. 마신 술이 얼큰하게 올라오자 세상살이 사람의 일생이 한낮의 일장춘몽으로 여겨졌다. "선비양반 , 이제 취향이 도도하시니 한수 더 들려주십시오. 귀를 씻고 기다리겠습니다." 김삿갓의 구술을 받아 적던 선비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하자  나머지 선비들의 이목이 김삿갓을 향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어떤 시가 나올까 기대 하면서 김삿갓의 거동을 주시한다. "원 귀까지 씻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이처럼 대접을 잘 받았으니 감사의 뜻으로 한수 더 읊어보겠습니다." 김삿갓은 성큼 붓을 잡고 쓸 줄 모른다는  글씨를 달필로 청산의 유수가 흐르듯이 쓱싹 휘갈기는데 .. 태산재후 천무북  /  泰山在後 天無北    대해당전 지진동   /  大海當前 地盡東 교하 동서남북로  /  橋下 東西南北路     장두 일만이천봉   /  杖頭 一萬二千峰 큰 산이 뒤에 있으니 하늘은 북(北)이 없고  큰 바다가 앞에 있으니 땅은 동쪽에서 끝났도다 다리 아래로는 동서남북 길이 뻗어 있고   지팡이 든 머리에는 일만이천봉이 걸렸도다. "명시로다 ,명시야 ..오늘 우리들이 운이 좋아 시신(詩神)을 만났구려." 좌중은 모두 넋을 잃고 있었다. 시도 시려니와 막힘없이 써 내려가는 김삿갓의 재주가 더욱 놀라웠다. 술김에 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다시 한수를 읊고 싶었다. "이번에는 오언(五言) 시를 지어보겠습니다." 선비들은 다시 긴장했다. 자기들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시 한줄 못 이루고 쩔쩔매고 있었는데 남루한 차림에 삿갓을 쓰고 불현듯 나타난 젊은 선비는 그대로 시신이요 천재였다. 김삿갓은 다시 필을 들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자를 휘갈겼다. 촉촉 금강산은       /   고봉이 만 이천이라      (矗矗金剛山    /  高峰萬二千 ) 수래 평지망 이나  /    삼야 숙청 천이라         (遂來平地望    /  三夜宿靑天 ) 우뚝우뚝 솟은 금강산은 높은 봉우리가 일만 이천이라 평지를 바라보고 내려왔건만 사흘 밤을 청천에서 잠이 들었네. "허 , 또 .. 기가막히군." 선비들은 다시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처음에 두 줄은 평범하더니 끝에 두 줄에 삼야숙 청천이라, 이거 사람 미칠 노릇이군." 한 선비가 김삿갓의 화선지를 들고 ,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래 젓는다. 김삿갓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마셨으니 볼일은 끝이 났고 진짜 볼일을 보러 가야만 했다. "아니 어찌 일어서시오 ?" 선비들이 깜짝 놀라며 김삿갓을 붙잡았다. "어줍잖은 글 덕에 잘 먹고 갑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만나게 되겠지요." 김삿갓은 그 자리를 미련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그리곤 시승이 있다는 입석봉을 향하여 발길을 재촉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4) 입석봉 신승 입석봉은 글자가 말해주듯 깎아지른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은 짐승의 형상을 한것도 있지만 발돋움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상도 있었다. "가히 만물상이로군! "   김삿갓의 입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헌데 시승은 어디에 살고 있단 말인가 ?" 그는 바위 천지인 봉우리 아래쪽을 훑어보았다. 시선이 머무르는 한 곳이 있었는데 둥그스런 큰 바위 아래로 노송 가지가 휘늘어진 밑에 초막 같은 암자가 빼꼼이 보이는 것이다.   김삿갓은 지체 없이 그쪽으로 바삐 걸었다. 길은 바위사이로 나있는 사람이 발로 밟은 자욱이 있는 구불구불  바위 사이 길로, 자칫  발을 잘못 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면 송곳 같은 바위 끝에 뼈가 으스러질 판으로 보였다.   "자기가 무슨 은둔거사라고 이런 곳에 암자를 지었담!" 김삿갓은 저절로 불평이 나왔다. 그러면서   아슬아슬 훠이훠이 땀 흘려가며 바위사이 비탈길을 내려와 암자 밑에 다다르자  신기하게도 딴판으로 평지가 나타났다.   "허, 집터 한번 잘 잡았다." 이번에는 감탄이 나왔다. 뉘라서 이 높은 바위산 중턱에 평지가 있으리라 짐작인들 하겠나? 그러고 보니 저 암자 속에서 시나 읊고 있을 노승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서 부터 암자까지는 싸리나무가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길이 통로 구실을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소로를 따라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넓지 않은 법당이 있었는데 법당 가운데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중이 보였다. 김삿갓은 저 중이 바로 그 글 잘하는 시승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갔다. 늙은 중은 조용히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김삿갓은 한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그를 불렀다. "스님 ... ! " 불경소리가 멎었다. "뉘시오 ?"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고개는 여전히 숙인 채였다. "스님의 공부를 방해 한 것 같아 대단히 죄송합니다. 불초는 입성봉 밑을 지나는 과객 입니다." "그럼 어찌 여기는 왔소??" 중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대꾸를 하였다. "바위의 형상이 가히 만물상이라 절경에 심취하여 발길을 옮기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허허 , 그럴 리가 있나 " 김삿갓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자기의 말이 꾸며낸 것임을 이 늙은 중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이 다시 말했다. "혹시 딴 생각을 하고 오시지 않았소??" "딴 생각 이라뇨 ?" 김삿갓은 자기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는 이 늙은 중을 다시금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금 시주가 과객이라고 하지 않았소??  적어도 자신을 과객이라 칭하려면 시문(詩文)에 능해야 할 것이니 과객은 시문에 통달 하였다는 말씀이 아니오??"  " ... " 김삿갓은 대답에 머뭇거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입을 열었다. "둔재의 몸으로 어찌 시문에 통달 하였다 말씀드리겠습니까, 다만 면무식을 면했다 여깁니다." "겸손의 말씀이군!" "아니올시다. 실은 스님께서 시에 능하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가르침을 받을까 하여 찾아 왔습니다." "하하하하 , 그럼 그렇지 ! " 늙은 중은 자기의 생각이 적중하여 기쁘다는 듯이 비로소 너털웃음을 웃으며 김삿갓을 향해  돌아앉았다." 김삿갓은 그의 얼굴을 보고 순간 다시금 감탄했다. 짧은 머리는 그대로 백발이었고 눈썹역시 하얗게 세었는데 그 아래 자리 잡은 두 눈은 가을 호수처럼 맑으면서도 형형한 빛을 내쏘고 있었으니 , 늙은 중은  가히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채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 빈승에게 가르침을 받겠다고 ? 보시오 . 젊은 시주 , 왜 시를 한번 겨루어 보겠다고 솔직히 말 못하고 어물쩡하는게요 , 그야 이 늙은이를 대접하느라 그렇게 말 했으리라 알고는 있소만." "외람되게 견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도해 주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헌데, 빈승은 한 가지 괴팍한 성질이 있습니다. 그 말도 시주께서는 들으셨소??" 올 커니, 이 뽑는 이야기구나. 김삿갓은 그의 말뜻을 알아 차렸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럼 아직도 모르고 계신가??  우리 시를 주고받는 내기를 함에 있어 한 가지 약속을 하고 싶은데 , 그것은 어느 편이든 막히는 쪽은 진 것으로 하되 진 죄로 이를 하나 뽑기로 합시다." "당연한 말씀 입니다. 그 옛날 이백(李白)도 춘강(春江) 도리지원 (桃李之園)에서 시회를 베풀며 시불성(詩不成) 이면 주삼배(酒三杯)라 하여 벌주 세잔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응당 벌을 받음이 옳을 것 입니다." "하하하 ..과연 시주는 빈승과 좋은 상대가 될 것 같소. 그럼 어서 이리로 올라오시오." 김삿갓은 법당 위로 올라가 늙은 중과 맞대고 정좌했다. "빈승이 먼저 읊어갈 터이니 시주는 뒷글을 맞춰 주시오. 빈승이 더 이상 부르지 못하거나 시주가 댓귀를 짓지 못하면 지는 것으로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시작 합시다." 늙은 중은  법당의 천정을 바라보며 이윽고 읊기 시작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5) 시승과의 문답 노승 .. 조등입석 운생족 (朝登立石 雲生足)            아침에 입석봉에 오르면 구름이 발밑에서 일어나고 삿갓 .. 모음황천 월괘순 (暮飮黃泉 月掛脣)           저녁에 황천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도다. 노승 .. 간송남와 지북풍  (澗松南臥 知北風)           물가의 소나무가 남쪽으로 엎드려 있으니 북풍이 주는 것을 알겠고 삿갓  .. 헌죽동경 각일서 (軒竹東頃 覺日西)            마루의 대나무 그림자가 동쪽으로 기우니 날 저무는 것을 알겠노라. 노승  .. 절벽수위 화소립  (絶壁雖危 花笑立)            절벽은 비록 위태로우나 꽃은 웃으며 피어나 있고   삿갓  .. 양춘최호 조제귀 (陽春最好 鳥啼歸)            따듯한 봄볕 제일 좋은 때련만 새는 울며 돌아가네. 노승  .. 천상백운 명일우 (天上白雲 明日雨)            하늘의 흰구름은 내일의 비가 될 조짐이요 삿갓  .. 암간낙엽 거년추 (岩間落葉 去年秋)            바위틈에 떨어진 낙엽은 지난 가을의 흔적이네. 노승  .. 양성작배 기유일 최길 (兩姓作配 己酉日 崔吉)             양성의 혼사일은 기유일이 제일 좋고 삿갓  .. 반야생손 해자시 난분 (半夜生孫 亥子時 難分)            밤중에 애를 낳으려면 해자시가 어렵도다. 노승  .. 영침녹수 의무습 (影侵綠水 衣無濕)            그림자는 녹수에 젖었으나 옷은 젖지 아니하고 삿갓  .. 몽답청산 각불고 (夢踏靑山 脚不苦)            꿈결에 청산을 거닐었으나 다리는 아프지 않도다. 노승  .. 군아영리 천호가 (群鴉影裏 天戶家)            무리진 갈가마귀 그림자 속에 천호의 저녁이 저물고 삿갓  .. 일안성중 사해추 (一雁聲中 四海秋)            외기러기 울음소리에 천지는 사해에 잠겼도다. 노승  .. 가승목절 월영헌 (假僧木折 月影軒)             가중나무 가지가 부러져 달그림자가 추녀끝에 어른거리고 삿갓  .. 진부채미 산임춘 (眞婦菜美 山姙春)             참며느리 나물이 제맛이 든 것 보니 산이 봄을 머금었도다. 노승  .. 석전천년 방도지 (石轉千年 方到地)            산위에 돌은 천년을 굴러야 땅에 이를 듯하고 삿갓  .. 봉고일척 감마천 (峰高一尺 敢摩天)            높은 봉우리는 한 자만 더하면 하늘을 찌를 듯 하도다. 노승  ..청산매득 운공득 (靑山買得 雲空得)           청산을 사니 구름은 절로 얻은 셈이요 삿갓  .. 백수임래 어자래 (白水臨來 魚自來)            백수에 다다르니 물고기는 절로 오도다. 노승  ..추운만리 어린백 (秋雲萬里 魚鱗白)           가을 구름이 만 리에 뻗쳤으니 고기비늘처럼 하얗고 삿갓  .. 고목천년 녹각고 (枯木千年 鹿角高)            천년 묵은 고목은 사슴뿔 인양 높구나. 노승  .. 운종초아 두상기 (雲從樵兒 頭上起)            구름은 나무꾼 아이놈의 머리위에서 일고 삿갓  .. 산입표아 수중명 (山入嫖娥 手中鳴)            산은 빨래하는 계집의 방망이 소리에 울더라. 노승  .. 등산 조래갱 (登山 鳥來羹)            산에 오르니 새들이 쑥국쑥국하며 울고 삿갓  .. 임해 어처병 (臨海 魚萋餠)            바다에 가니 물고기가 풀떡풀떡 뛰더라. 노승  .. 수작은저 춘절벽 (水作銀杵 春絶壁)             물은 은 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삿갓  .. 운위옥척 도청산 (雲爲玉尺 度靑山)             구름은 옥자가 되어 청산을 재는구나. 노승  .. 월백설백 천지백 (月白雪白 天地白)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니 천지가 모두 희고 삿갓  .. 산심야심 객수심 (山深夜深 客愁深)            산도 깊고 밤도 깊으니 나그네의 수심도 깊도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6) 김삿갓의 고백. 김삿갓 ,노승과의 문답으로 어느덧 밤이 깊었건만 두 사람의 부르고 쫒는 시 짓기는 그침이 없었다. 노승이 부르면 김삿갓이 즉석에서 받고,   삿갓이 받으면 노승이 이내 불렀다. 부르는데도 막힘이 없으려니와 쫒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노승은 김삿갓의 뛰어난 실력에 내심 크게 탄복 하였다. 이것은 김삿갓도 다르지 않아 노승의 실력에 내심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주거니 받거나를 계속 한다면 이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 것 같았다. "어허 , 내 평생 가장 뛰어난 시재(時才)를 만났구려. 더구나  젊은 나이에 이토록 무궁한 시상 (詩想)을 가지고 있다니 그저 탄복할 따름이오." 노승이 이렇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사께서는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소생 금일에야 시선(詩仙)을 만나 뵈온 듯합니다. 대사님을 존경한다는 말씀밖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 시선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외다. 내 칠십 평생에 수많은 시객을 만났으나 진실로 탄복하기는 처음이요. 오늘 내기는 이 빈승이 진 것으로 합시다."   김삿갓은 펄쩍 뛰었다. "대사님 솔직히 말씀드려 오늘밤 겨루기는 승패가 없는 줄 압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는 판단이고 실은 불초가 굴복하였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불초 비록 용자(用字)에 능해 대사님의 부름에 쫒았다 할지라도 그건 한갓 재주에 불과할 뿐 그 속에는 심오한 뜻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사님의 시 속에는 평범함 속에 오묘한 뜻이 서려있으니 어찌 이 미천한 불초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대사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김삿갓은 진정 겸허한 인사말을 하였지만 이 노승을 높게 우러러 모시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누가 뭐라 하여도 이 노승의 시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했다.   "허허허, 빈승이 이겼다고요 ? 대체 그런 예의가 어디 있습니까?? 빈승은 나이를 먹었으나 결국 나이 값도 못하고 시주의 기도 꺾지 못했으니 빈승이 진 것입니다. 백중세가 되었다 할지라도 말 입니다. 늙은이 대접 하느라고 이겼다고 하지 마십시오. 시주는 정말 대성할 분입니다. 헌데 어떡한다??"   갑자기 노승은 정색을 하고 김삿갓을 바라본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   김삿갓은 영문을 몰라 노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 처음에 약속을 하였잖습니까. 지는 쪽이 이를 뽑혀야 한다고, 헌데 빈승은 나이를 먹어 뽑을 이가 없으니 어떻게 약속을 지켜야 할지 걱정스럽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김삿갓은 빙그레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이를 뽑힐 사람은 불초이온데 하물며 대사님의 이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후학을 너그럽게 보살펴 주시니 그저 감격할 따름입니다."   김삿갓은 정색을 하며 노승을 위로하였다. "하하하, 고맙소! 오늘처럼  즐거움을 맛보기는 칠십 평생 처음이오. 나무관세움보살."   노승은 합장을 하면서 김삿갓에게 일예를 보냈다. 두 사람은 십년지기처럼 갑자기 친숙해졌다.   김삿갓은 노승을 진정 마음속 깊이 스승처럼 존경하였고 노승은 젊은 시인을 둘도 없는 제자처럼 사랑했다. 두 사람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시를 논하고 천하의 경륜을 논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두 사람은 의기가 부합되었다.   결국 김삿갓은 한여름을 노승과 더불어 지내게 되었다. 시를 지어 주고받는 사이에 여름이 무르익어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글쎄 행색은 거지나 다름없는 젊은 과객이 입석봉 늙은 스님의 콧대를 꺾어 놓았다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노승과 김삿갓의 일은 사미승밖엔 알 수 없는 일이었건만 , 금강산 일대에 산재한 절과 인가에 이러한 말이 널리 퍼졌다.   말이란 한 사람만 건너가도 커지기 마련인가 ?  급기야는 늙은 중이 젊은 과객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느니, 젊은 과객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한다는등 ..별의별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렇게 김삿갓의 이름은 어느새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떠도는 말이야 어찌되었든 김삿갓은 노승을 깍듯이 섬기었다. 스승으로서의 존경의 선을 넘어 일종의 부정(父情) 까지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노승에게 자기의 내력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는 노승을 신뢰하고 있었다.   "오 그렇던가. 이제야 하는 말이네만 내 자네를 가까이 두고 보면서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네. 아무튼 비극일세. 나무관세움보살."   김삿갓의 집안 내력을 듣고 난 노승은 눈을 감은 채 이렇게 말하고 한동안 묵상에 잠겨 있었다. "대사님 ! "   김삿갓은 자신의 내력을 털어놓고 나자 천만감회가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좀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아 노승을 불렀다. 노승은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다.   "대사님 불초에게 떨어진 기구한 운명은 어떻게 생각하면 전생의 업보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같은 운명을 맞기도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 주어진 운명을 정면으로 맞이하여 헤쳐 나가는 길은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어 집을 떠난 것입니다. 요즈음은 대사님 곁에서 즐거운 나날을 맞이하니 문득 불초도 불문에 입문하여 인간의 고해(苦海)를 건너가고 싶은 생각이 솟아나는군요."   김삿갓은 솔직히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았다. 노승이 인도만 하여 준다면 그의 제자가 되어 삭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승은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불문에 귀의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세.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왜냐하면 자네에게는 시가 있으니까. 시는 자네의 슬픔을 위로하고 마음의 갈등을 진정시켜 줄 것 이니까. 또 자네 삶이 어려울 때 밝은 빛을 비쳐 줄 것이네." 노승은 김삿갓의 시를 높이 사고 있는 터라 그의 불문의 귀의를 만류하였다.   어느덧 김삿갓이 입석암에 머문 지도 달포가 넘었다. 계절은 늦은 여름 벌써 아침저녁으로는 가을 기운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외출했던 노승이 돌아오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 술 생각이  간절하지 ? 늙은 중과 같이 있자니 먹고 싶은 술도 못 먹고 꾹꾹 참고 있으려니 갈등이 여간 아닐걸세." 빙그레 웃기까지 하면서 말하는 노승의 얼굴을 김삿갓은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7)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리도 박정해서, 봄날 지는 꽃만을 울어주느냐.   "대사님 , 갑자기 술 이야기는 어째서 하십니까?? " 사실 술 생각이 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입석암을 훌쩍 떠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돌연 노승이 술 이야기를 꺼내자 마치 잊고 있었던 정든 여인의 이름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째서 갑자기 술 이야기를 꺼내 놓는지 노승의 마음이 궁금했다.   "허허허 , 난 자네의 마음속을 환히 알고 있네. 중이 되어가지고 자네에게 술대접을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마침 자네가 술을 실컷 마실 좋은 일이 생겼네." " ..... "   김삿갓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입석봉 동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그럴듯한 절이 하나 있네. 내 지금 그 곁을 지나왔는데 천하에 내로라하는 시객들이 모여 시회를 열고 있더구먼. 자네 심심할 것이니 거길 다녀오게 맛있는 술이 생길걸세. 그렇다고 너무 취해 돌아오진 말고." 김삿갓은 비로소 노승의 말을 알아들었다. "예. 시회가 열렸다면 구경을 가야지요. 얼마나 쟁쟁한 시객들이 모였는가 궁금합니다." "이사람, 시객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술이 궁금하겠지 ? "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어서 다녀오게나."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김삿갓은 술도 술이지만 시회를 열고 있는 시객들의 수준이 더욱 궁금하였다. 그는 가파른 길을 조심하면서 입석봉 기슭에서 동편으로 휘돌았다. 노송이 우거진 가운데로 제법 큰절이 보였다. 절 입구 시내위로 누각이 올라서 있는데 선비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김삿갓은 단숨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누각 아래로는 근처 아낙네들 인 듯 서너 여인들이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허허, 호화판 시회로구나." 김삿갓은 공연히 신명이 났다. 누가 아는 체도 하지 않는데 그는 성큼 누각위로 올라갔다. "뉘시오 ? " 시객들은 불쑥 나타난 김삿갓을 힐끔 쳐다보았고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예, 천하의 고명하신 분들께서 시회를 열고 계시다기에 구경 차 왔소이다. 물리치지 마십시오." 선비들은 삿갓을 쓰고 차림새가 허술하여 혹 강호를 떠돌며 어설픈 글로 술이나 빌어먹는 그런 부류로 알았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이 젊은 과객에서는 냉큼 얕볼 수 없는 이상한 힘 있는 것 같아 감히 물러가라는 말을 못했다. 선비들은 마냥 외면을 하였다. 김삿갓은 물러가라는 말이 없자 한 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시를 가다듬고 있는 시제를 보니 가을이었다. (허허, 벌써 가을이던가?? ) 김삿갓은 먼 산봉우리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칠월 하순. 평지 같으면 노염(老炎)이 기승을  부릴 때 인데 이곳은 지대가 높은 산중이다 보니 벌써 찬 서리가 내린 듯 , 먼 봉우리 중턱이 붉으스럼하게 보인다.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김삿갓의 가슴에는 가을에 대한 시상과 더불어 천만가지 감회가 아련히 깔렸다. 이런 김삿갓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선비들이 자기들 끼리 수군거린다.   "보아하니 사이비 과객은 아닌 듯하니 글을 한번 지어보라고 하면 어떠하오??  듣자하니 입석봉 시승을 이겼다는 젊은 과객도 삿갓을 쓰고 다닌다고 하는데 저 사람이 장본인인줄 뉘 알겠소??"   "그 삿갓을 쓴 과객은 지금 입석암에 눌러 있으면서 노승과 더불어 시선(詩仙)의 경지를 즐기고 있다는데 여기에 나타날 일이 있겠소??" "하지만 저 사람 거동으로 보아하니 뭐가 나올 법도 하니 글제를 주어 봅시다."   선비들은 구수회의 하듯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후 한사람이 김삿갓에게 말을 던졌다. "여보시오 보아하니 시상을 가다듬고 있는 것 같은데 한수 지어 보겠소?? "   김삿갓은 그렇지 않아도 시를 읊조리고 있던 차였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 불초에게도 기회를 주신다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글제는요 ? "   "푸르던 나뭇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으니 이제 머지않아 낙엽이 짙게 되지 않겠소? 떨어지는 잎을 보고 한수 지어보소. " "예"   김삿갓은 간단히 대답했지만 이미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한편의 시가 무르익었다. "그럼 지필을 좀 빌려주실까요.? "   "옛수 ! " 한 사람이 화선지와 붓을 내주었다. 김삿갓은 필을 들기 무섭게 싯귀를 죽죽 써내려갔다.   소소슬슬 우제제    /  매산매곡 혹몰계       ( 蔬蔬瑟瑟 又齊齊   / 埋山埋谷 惑沒溪 ) 낙엽이 쓸쓸히 휘날려 / 산에도 계곡에도 시내에도 떨어지네   여조이비 환상하    /   수풍지자 각동서       ( 如鳥以飛 還上下  / 隨風之自 各東西 ) 새가 나는 듯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 바람에 휩슬려 사방으로 흩어지네   녹기본색 황유병   /    상시구록 우갱처        ( 綠其本色 黃猶病  / 霜是仇綠雨更凄 ) 푸른것은 나무의 본 얼굴이고   누런 것은 병색이라 / 서리도 원수이지만 가을비는 더더욱 처절 하구나   두자이하 정박물   /    일생하위 낙화제        (杜子爾何 情薄物   /  一生何爲 落花啼 ) 두견새야  너는 어찌 그리 박정해서 / 일생을 봄 날에 지는 꽃만을  울어주느냐.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8) 입석암 노승과의 작별 마지막 글자가 붓끝에서 떨어지자 이를 지켜보던 좌중의 시객들은 숨을 헉하고 쉬었다. 순식간에  싯귀를  써내려가는 재주도 비상하였지만 화선지 위에서 용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서체며 그 글자들이 토해내고 있는 뜻들은 천하의 일품이었다.   장내는 시감에 몰입되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내 한 시객이 무릎을 치며 입을 열었다.   "기가 막히군. 대체 이런 글이 단숨에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을 신호로  시객들이 다투어 김삿갓을 칭찬했다.   그중 한 사람이 김삿갓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선 혹시 입석암 시승과 다투어 이겼다는 바로 그 김삿갓이 아니시오 ? "   김삿갓은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불초가 바로 김삿갓 올시다. 지금은 입석암 대사에게서 글공부 가르침을 받고 있지요."   "허허 , 이거 뜻하지 않게 고명하신 분을 모시게 되어 무상의 영광이로소이다." 시객들은 김삿갓을 상좌로 모셨다. 모두들 기쁜 표정이었다.   술상이 지체 없이 나왔다. 김삿갓은 술잔을 사양하지 않았다. 비록 시인이  아닐지라도 초가을 금강산의 미칠 것 같은 이 풍치를 보면서 어찌 술을 사양할 수 있으랴.   김삿갓은 술 좋고 안주 좋아 두주를 불사하고 마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술을 마실수록 외로움과 막연한 그리움이 전신을 휩쌌다.   "선생 , 청컨대 한수만 더 보여주십시오. 시를 즐기고 배우는 우리들은 삼가 귀감으로 삼겠습니다."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붓을 들었다. 사실인즉 그들을 위해 시를 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시를 읊었다.   장하거연 근 소추  /  탈건포말  보사루    (長夏居然 近素秋  /  脫巾抛襪 步寺樓 )  긴긴 여름 물러나고 가을이 다가와  /  건을 벗고 맨발로 절간을 거니네     파성통야 순장적   /  알색화연 요옥부     ( 波聲通野 巡墻適  / 알色和煙  繞屋浮 ) 시냇물은 졸졸 담을 끼고 감돌고  / 아지랑이 빛은 연기와 함께 집에 자욱이 퍼지네   주도공허 생폐갈  /  시유여채 상미수       (酒到處空 生肺喝  / 詩猶餘債 上眉愁 ) 술을 다 마시고 빈병만 남으니 갈증만 더하고  /  시만 자꾸 생각하니 수심만 맺혀지네   여군분수 파초우  /  응상귀가 일몽유       (  與君分手 芭蕉雨   / 應相歸家 一夢幽 ) 그대와 파초잎에 비내리는 이곳에서 작별을하면  / 집에 돌아가서도 꿈속에 그리울 걸세. 김삿갓은 이렇게 시를 써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수심이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깊어져 눌러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발길이 닿는 대로 바위를 기어오르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산길을 미친 듯이 헤매다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입석암으로 돌아왔다.   "꽤 늦었네 그려" 노승은 법당에서 그를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사님 , 산길을 좀 걸었습니다." "그래 시회는 볼만 하던가 ? "   "술 몇 잔에 제 시만 두어 수 뺐기고 왔습니다." "하하 그럴 테지. 자네 시를 보고 모두 오금을 펴지 못했겠지 .. 헌데 술을 마신 사람 같지 않구먼."   " 산길을 짐승처럼 헤매다 보니 어느새 다 깨어버렸군요." 노승은 김삿갓의 심중을 헤아리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또 보름이 지나 추석도 지났다. 김삿갓은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불문에 귀의할 것도 아니면서 더 이상 무료한 세월을 보내며 노승의 신세를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자기의 생각을 노승에게 전했다. 노승은 묵묵히 앉아 있더니 다음과 같이 시 한수를 지었다.       ..   백척단암 계수하  /  자문구불 향인개  (百尺丹岩 桂樹下  /  紫門久不  向人開 ) 백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  싸리문은 오랫동안 닫혀 찾는 사람이 없네   금조홀우 시선과   /  환학간암 걸구래  ( 今朝忽遇 詩仙過  /  喚鶴看庵 乞句來 ) 오늘 아침 홀연히 지나가는 시선을 만났으니  / 타고가는 학을 불러 암자로 그를 청해 불렀다네.           ..   이별을 아쉬워하는 노승의 김삿갓을 뜨겁게 사랑하는 시였다. 김삿갓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도 필을 들어 시를 지어  노승에게 건넸다.           ..   촉촉첨첨 괴괴기   /   인선신불 공감의   (矗矗尖尖 怪怪奇  /  人仙神佛 共堪疑 ) 꼿꼿하고 뾰족하고 기이함이 더욱 신비해서  /  시선도 부처님도 신령님도 깜짝 놀라네   평생시위  금강석  /  급도금강 물감시   ( 平生詩爲 金剛惜 /  及到金剛 不敢詩 ) 평생 소원은 금강산을 읊으리라 별러 왔는데  /  막상 금강산을 대하니 시가 나오지 않도다.          ..   "역시 명시야 . 자네 떠난 후로도 몸조심하게." "예, 발길이 닿으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날  노승과 점심상을 마주 대하고 석별의 정을 나눈 후  김삿갓은 눈시울을 적시면서 입석암을 떠났다. 계속 ... 방랑시인 김삿갓 (19) 구름따라 발길따라 입석봉을 떠난 김삿갓은 한동안 시냇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떠나오긴 했으나 막상 갈 곳을 정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금강산이니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나가 바다 경치나 구경하자. 그길로 북상하면 함경도 땅이 나오겠지."    내금강 곳곳을 돌아다니고 나니 어느새 구월 초순이 되었다. 산속에  가을은 빨리 와서 벌써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도 눈에 띄었다.   김삿갓은 먹고 자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골마다 암자요. 절이 있었다. 간간히 풍류를 즐기는 시객도 있어 그는 술에 목마르지 않았고 밥  한 술에 배고프지 않았다.   내금강 구경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넘어가는 길로 들어섰다.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금강 까지는 백여 리가  된다고 했지만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저 마냥 걷고 목마르면 냇가에 물을 마시고 날이 저물면 암자나 절을 찾으면 그뿐이었다.   어느 감나무가 울창한 산골마을에 이르렀다. 산중에서 오랜만에 보는 동네였다. 집집마다 감나무에 빨간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김삿갓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마을로 들어섰다. 산골마을이라 돌담이 아니면 싸리나무 울타리였다. 밤은 벌써 다 털려 빈 가지만 남았는데 집집마다 감나무는 감을 잔뜩 매달고 휘늘어져 있었다.   김삿갓은 무심코 어느 돌담길을 휘돌다가 우연히 돌담 너머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곳에는  국화꽃이 만발해 있었다. 순간 김삿갓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국화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국화꽃 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처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처녀는 열여덟, 아홉이나 되었을까 , 삼단 같은 머리가 탐스러운 엉덩이 위까지 치렁치렁 내려뜨려져 있는데 겨드랑이 부근의 살이 터질듯이 불거져  나와 있었다.   김삿갓은 부지중에 침을 꿀꺽 삼켰다. 처녀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음이 자못 안타까웠다. 그는 돌을 던져서라도 처녀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으로 얼굴을 더욱 담 곁으로 바싹 붙이고 열심히 처녀의 자태를 감상하였다. 집을 떠나온 지 어언 반년 , 한창 혈기가 들끓는 청춘은 그녀 쪽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김삿갓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춘정이 샘솟았다. 숨결이 더워지고 심장조차 쿵쿵 뛰었다. 그는 어느새 애타는 자기의 가슴을 시로 읊조리고 있었다.   산중처녀 대여양   /  완착분홍 단포상    (山中處女 大如孃   /  緩着粉紅 短布賞) 시집갈 때 다 된 듯 무르익은 산중처녀  /  분홍빛 짧은 치마를 느슨하게 입었구나.   적각창랑 수과객   /   송리심원 농화향    (赤脚창랑 羞過客  / 松離深院 弄花香) 살색 좋은 통통한 다리는 과객을 부끄러워하고 /  소나무 울밑 으슥한 곳에서 꽃향기를 희롱하네.         ..   김삿갓은 집을 떠나오기전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가 생각났다. 그리곤 쩝쩝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돌려 돌담을 외면했다.   "지금쯤 아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 "  .. 막연한 걱정과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계속했다.   이렇게 몇 고개를 넘다보니 멀리서나마 바다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벌써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우선 잠잘 곳이  급하게 되었다.  그는 인가를 찾았다.   지세를 보아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산중에 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한 고개를 다시 넘었다. 주위는 벌써 어둠에 묻히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김삿갓은 서너 호의 화전민 부락을 발견하였다. 우선 마음이 놓였다. 처마가 땅에 닿을 듯한 토담집들이었다.  그는 한 집을 찾았다.   "주인장 계십니까?? "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허름한 차림의 사나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누굴 찾으시는지요?? " "과객이 날이 저물어 염치없이 찾아 왔습니다. 부엌도 좋으니 그저 산짐승의 해나 면하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손님 누추하지만 들어가십시다. 아무리 단칸방이라지만 이렇게 찾아오신 손님을 부엌으로 모실 수야 있겠습니까?? "   역시 가난한 사람일수록 인정만은 따듯했다.   김삿갓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공기는 매우 탁했다. "손님 저녁 진지 드셔야지요. 저희도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이런 산골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 살기 때문에 대접이 변변치 못합니다."   김삿갓은 미안하여 안절부절 하였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이거 너무 염치가 없군요."   그러면서 삿갓을 벗어 한쪽 구석에 놓았다. 이집도 식구래야 두 내외뿐이었다. 부인이 저녁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조에다 감자를 섞은 밥이었다. 그동안 절간을 다니며 신세를 졌던 터라 하얀 쌀밥이나 보리가 반쯤 섞인 밥을 먹던 입맛이라 들여온 밥은 매우 껄끄러웠으나 주인 내외의 따스한 인정이 너무 훈훈하여 식욕이 절로 일었다.   저녁을 마친 후 김삿갓은 주인 내외와 금강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방이라 어쩔 수 없이 주인 내외와 동침을 하게 되었다. 때문에 잠자리가  몹시 불편하였다.   어설픈 잠자리였지만 설핏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단칸방임을 불구하고 간밤에 잠을 자게 되었으니 삿갓은 주인아낙을 볼 염치가 없었다.   아침이나 얻어먹고 어서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는데 상이 들어왔다. 쌀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보리밥 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손님 대접을 하느라고 갓 지은 밥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주인 내외에게 백배 치하를 한 후 길을 떠났다. 왠지 뭉클한 감개가 앞을 막아 그는 시를 한수 읊었다.        ..   곡목위상 첨착진   /  기간여두 근용신   ( 曲木爲橡 詹着塵   /  其間如斗 僅容身 ) 굽은 기둥 찌그러진 처마는 땅에 닿을 듯  /  방조차 북통만하여 겨우 몸을 움직이겠네.   평생불욕 장요굴   /  차야난모 일각신    ( 平生不欲 長腰屈   /  此夜難謨 一脚伸 ) 평생 긴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 했는데  간밤에는 다리조차 못펴고 새우잠을 잤구나.   서혈연통 혼연칠   /   봉창모격 역무신    (鼠穴煙通 渾然漆   /  蓬窓茅膈 亦無晨 ) 쥐구멍으로 연기가 통해 방안은 칠흑같이 어둡고   창에는 칡과 억새가 엉켜 아침도 모르더라.   수연면득 의관습   /   임별은 근사주인     ( 雖然免得 衣冠濕   /  臨別慇 勤謝主人 ) 비록 이렇기는 했어도 옷젖음을 면했으니  떠날 때는 은근히 주인에게 감사할밖에.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0) " 眼中七子 皆爲盜" ..안중칠자 개위도 (눈 앞에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다) 김삿갓은 외금강에 이르러 바다와 접한 금강산의 또 다른 풍치를 마음껏 감상했다. 이제 계절은 중추(仲秋)로 접어들어 산중의 바람은 얇은 베옷을 헤집고 들어와 오한을 느끼게 한다.   그는 마침내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망망한 바다를 보니 막혔던 속이 확 트이는 것 같으면서도 시름은 파도를 타고 더욱 간절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외금강에서 함경도 땅으로 가는 길은  바다와 육지가 숨바꼭질을 하는 길이었다. 바다를 끼고 나란히 길을 걷다가도 고개를 하나 넘으면 바다는 갑자기 먼 곳에 있었다.   이렇게 해금강이라 일컬어지는 외금강을 지나 북으로 발길을 계속하자 강원도 땅이 다하고 함경도 경내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으로 들어선 큰 읍내는 통천(通川) 이었다.   통천은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삼백여 호의 큰 읍이었다. 읍내 저자거리를 지나 어느 솟을대문이 거만하게 솟아 있는 집 앞에 당도하였다.   무슨 잔치가 있는지 사람들이 분주하게 대문을 들락거리고 울안에서는 기름 냄새와 더불어 음식냄새가 풍겨 나오는데 배가 고픈 김삿갓의 회를 요동시켰다.   김삿갓은 마침 다가오는 사람이 있어 냉큼 물었다. "이집에 무슨 경사가 났소이까?? "   "네, 윤진사 아버지의 회갑잔치라오." 김삿갓은 올 커니 했다. 밥과 술을 넉넉히 얻어먹겠구나. 그는 다짜고짜 솟을대문으로 들어섰다.   "당신 누구요 ? " 하인인 듯 한 사내가 문간 안에 서 있다가 사납게 소리친다.   "아따 , 그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드네. 누구긴 누구야. 윤진사  춘부장님 수연에 참석하러 왔지." 김삿갓이 눈을 부라리며  응수하자 사내는 주춤했다.   그리곤 살펴본 꼬락서니로 보아 윤진사 쪽을 잘 아는 망쪼들은 양반 껍데기쯤으로 생각되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넓은 대청에는 잔칫상이 호화스럽게 차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로 회갑을 맞은 늙은이가  의관을 갖추고 점잔을 빼면서 앉았고, 맞은편에는 이 지방에서 행세깨나 하는 상객들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대문간 곁에는 아무렇게나 둘러앉은 걸인에 가까운 부류들이 있었다.   좌중을 둘러본 김삿갓은 기왕에 얻어 먹을 것, 상객들이 앉은 대청위로 성큼 올라섰다. "아니, 어디라고 올라서는 게요 ! "   김삿갓의 행색을 마뜩하지 않게 쳐다보던 하인 한 놈이 김삿갓 뒤통수에 대고 큰 소리를 질렀다. 일순 , 좌중에 모두는 김삿갓과 하인을 향했다. "아니 무슨 일인데 그러냐??" 윤진사가 큰 소리가 나자 점잖게 참견 했다. "글쎄 걸인 주제에 대청으로 오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소인이 끌어내리는 중입니다요." "오늘 같은 날 너무 큰 소리 내지 말고 술잔이나 먹여 보내도록 하여라."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행색은 걸인 행색을 하였지만 막상 걸인 취급을 받고 보니 기막히기도 하고 울화도 치밀었다. 그는 점잔을 빼는 윤진사가 얄미워 그쪽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인도인가 부대인 , 주인인사 난위인" (人到人家 不待人 , 主人人事 難爲人 ) 즉 사람이 집에 찾아왔는데도 사람대접을 안 하니 주인의 인사는 사람답지 못하구나 하는 말이었다. 통천 지방에서는 글줄이나 읽는 윤진사라 삿갓의 이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음 ? "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김삿갓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이미 홱 돌아서서 대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봐라 저분을 모셔오너라." "저 걸인을요 ? " 하인 놈은 영문을 몰라 주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놈아 내가 보기에는 보통 걸인이 아닌 것 같다. 냉큼 가서 불러 오너라." 하인 놈은 궁시렁 거리면서 김삿갓의 뒤를 따라 문간으로 뛰어갔다. "윤진사, 무슨 일이오 ? " 술을 마시느라 삿갓의 말을 못들은 손님이 물었다. "초라한 과객인데 잘하면 좋은 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소이다." "초라하다니 행색은 어떻습디까? " "허름한 무명 두루마기에 삿갓을 썼습니다."   "그래요 ? " "아니 그런 과객을 알고 계시오?? " "듣자하니 삿갓을 쓰고 다니는 젊은 과객이 금강산 일대에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더군요. 금강산이라면 숨어서 공부하는 인재나 고승이 많을 것인데 그들보다 윗 질이라 하더이다. " 풍문으로 김삿갓의 행장을 들은 모양인데 , 윤진사에겐 초문이었다. "금강산이 여기서 어디라고 그 글 잘하는 과객이 왔겠소 , 삿갓이야 누구든 쓰면 될 것이고."        ..   한편 김삿갓은 큰 길을 향해 걷고 있었다. 배를 주릴지언정 말석에 끼어 앉아 콩나물 대가리를 씹고 십지는 않았다.   "이보시오 ! "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알아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낯선 곳에서 설마 자기를 부르랴싶어 삿갓은 그냥 걸었다.   "여보시오 삿갓 쓴 양반." 그제야 김삿갓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까 그 하인놈 이었다. 김삿갓은 울컥 분통을 터트렸다.   "뭣 때문에 나를 불러 세운단 말이오?? " 김삿갓은 조금 전 분풀이를 하듯 눈을 부라리며 뒤따라온 하인 놈을 위 아래로 훑으며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나으리께서 댁을 모셔오랍니다." "나를 ?  "   "어떤 일인 줄 나도 모르겠지만 하였든 가십시다." 김삿갓은 아까 자기가 내뱉은 말을 윤진사가 들이었으려니 생각했다. 그리고 하인을 따라 다시 윤진사 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올라오시오. 아까는 대접이 소홀했던 것 같소. 너무 괘념치 마시고 술이나 한잔 드시오." 김삿갓은 대청으로 올라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보아하니 글께나 아시는 선비 신듯 한데 이런 자리에서는 의례 시 한 수쯤은 오갈 법 하지 않겠소. 음식을 드시면서 천천히 글 놀이나 해봅시다."  윤진사는 호기심이 동해 이렇게 서두를 꺼내놓았다.   음식상이 새로 차려져 나왔다. 김삿갓은 우선 먹고 볼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양하지 않고 이것저것 배불리 먹고 마셨다. "애, 지필묵을 가져 오너라" 윤진사가 아들에게 명하자 장성한 아들 하나가 냉큼 가지고 왔다.   "저 선비께 드려라." 삿갓 앞에 지필묵이 놓여졌다.   "그럼 , 내 노부님을 위하여 수연시 한 수만 지어 주십시오." 사실 윤진사는 뭣인가 속에 들은 체 하고 있는 삿갓을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따라서 수연시를 청해 삿갓의 실력을 알고 싶었다. "음식을 대접 받았으니 그 값을 해야지요. 그냥 돌아가면 진짜 걸인이 되지 않겠소이까?? "   삿갓은 필을 들었다. 그리고 생각도 할 필요 없다는 듯 ,  첫 구절을 달필로 써 놓았다.   "피좌노인 불사인"  (彼坐老人 不似人) 저기 앉은 노인은 사람 같지 않구나.   "뭐라고 ? " 윤진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기 부친을 가리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 같지 않다고 썼으니 , 이런 모욕이 또 어디 있으랴. 손님들도 글씨를 넘겨보더니 쑥덕쑥덕 거렸다.   삿갓은 일부러 보란 듯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 다음 구절을 썼다.   "의시천상 강신선"  (疑是天上 降神仙)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선만 같구나.   이 글을 보자 울그락푸르락 하던 윤진사 얼굴이 바보처럼 해맑아졌다. "하하하하..이것 참 기가 막하군 ! 나는 첫 구절을 읽고 깜짝 놀랐구먼, 내가 나이를 들었어도 아직도 성질이 괄괄해서 큰일이란 말씀이야."   좌중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럽게 풀어졌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음 구절을 써내러 갔다. "안중칠자 개위도"  (眼中七子 皆爲盜) 눈앞에 있는 아들 일곱은 모두 도둑놈이다.   좌중은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당신 누구보고 도둑놈이라고 하는 거요." "음식을 좋게 얻어먹었으면 고이 삭힐 일이지 재는 왜 뿌리는 거야 ? "   윤진사 아들들이 벌떼같이 일어섰다. "가만있어라. 글이란 완성을 한 후 평하는 법이다."   윤진사는 소맷자락까지 휘저으며 성난 아들들을 만류했다. "참 사람들 성질도 급하구료." 김삿갓은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결구를 써놓았다.   "투득천도 헌수연"  (偸得天桃 獻壽宴) 몰래 천도를 훔쳐서 수연상에 바쳤구나.           즉 ,효성을 나타낸 글이었다. "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소이다. 정말 본인으로선 따를 수 없는 명시올시다 ! 내가 틀림없이 ,사람을 보기는 잘 보았지."   윤진사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좋아했고 성을 내던 그의 아들들도 싱글벙글 이었고 좌중에  손님들도 삿갓의 재주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어쩌면  글귀 한 구절로 사람들을 모두 울고 웃게 한단 말인가 ? 기가 막히군, 기막혀 !"   "여봐라 , 오늘 뜻밖에도 뛰어난 시객을 만나 ,  좋은 수연시를 얻었으니 그 답례를 해야겠구나. 들어가서 나 주려고 만든 의복 일습을 내오거라."   "아버님 , 갑자기 새 옷은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 아들 하나가 물었다. "앞으로 날이 꽤 추워질 터인데 저 선비님 옷은 아직도 여름옷이 아니냐?? 솜 둔 것으로 내오거라."   김삿갓은 수연시 덕분에 음식을 마음껏 대접 받았음은 물론 , 솜둔 두루마기며 핫바지 저고리까지 선물 받게 되었다.  미구에 눈이 내릴 터인데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하룻밤을 편히 지낸 후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났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1)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듯 우뚝 솟아있네. 통천에서 안변까지는 이백오십 리라 했다. 하루해가 또 저물었다. 어둠발이 내리기 시작할 때가 나그네에게는 제일 외로운 시간이다.   김삿갓은 아무 집이나 들어설 양으로 조그만 마을로 들어갔다. 첫눈에 가난한 마을이라 생각되었다. 세상은 참 고르지 않다. 솟을대문에 하인까지 두고 거드름 피우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찌그러져 가는 집에서 겨우 연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헌데 김삿갓이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으로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 사는 사람이 더 많고 인심을 쓰는데는 잘 사는 사람보다 못 사는 사람들이  더 좋았다.   김삿갓은 오막살이 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방안에서는 따듯한 감촉이 느껴지는 호롱불 빛이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인장 계십니까?? " "뉘시오 ? "   방안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뒤이어 방문이 열리면서 오십 세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목을 빼고 쳐다본다.   "나그네가 어둠을 만나 ,미안하게도 하룻밤 신세를 지었으면 합니다." "허허 , 우리 집에도 손님이 오실 때가 있구려. 어서 들어오시오."   주인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김삿갓은 일례를 보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시는 손님이시오 ?"   사람 좋게 생긴 주인이 삿갓을 보고 물었다. "먼 길을 가시는구려. 참 저녁은 아직 자시지 않았을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주인은 방 한쪽 구석에서 실타래를 감고 있던 마누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누라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두 양주분만 계시오?? " "아들 하나하고 며느리가 있지요. 이곳은   어촌도 아니고 농사지을 땅도 별로 없는 곳이라 살기가 참 곤란한 곳이지요."   "아 네, 그렇군요!" 삿갓은 주인장의 이곳 형편을 듣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보았던  빈촌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김삿갓과 마주보고 있는 주인장도 말이 없고 삿갓도 이렇다니 말이 없이 , 두 사람은 묵묵히 등잔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밖에서  부스럭  부스럭  나뭇단을 풀어 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밥상이 들어왔다.   간단한 저녁상이었다. 조밥이 한 그릇, 된장찌개에 김치 한보시기가 전부였다. 김삿갓은  몇 번씩이나 치하를 한 후 수저를 들었다.   언젠가처럼 이집에서도 주인 내외와 같이 한방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불을 끄고 누웠으나 잠은 금방 오지 않았다. 아랫목 쪽에서는 주인 내외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손님이 자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여보, 손님이 오셨는데 저녁은 그렇게 대접했다손 치고, 아침은 어떡하지요 ? " 부인의 말이었다.   "글쎄, 우리 같은 집에 손님이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아침에 조밥을 드릴수야  있나 , 박초시네 집에 뭐라도 맡기고 쌀되라도 얻어 올수는 없을까 ? "   "뭐가 있어야지요. 두루마기 하나 변변한 것 없는데 그나마 며느리가 입고 가고 없으니 어떡한대요." "음, 정 선달 네 집에 날이 새거든 가 봐요. 손님이 왔다고 사정하고 쌀 한 되만 꿔 봐요."   이들의 이야기를 어두운 방에서 듣고 있던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애처로울 정도로 그들의 인정이 따스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른 새벽 , 김삿갓은 소피를 보러 가는 척 하고 주인 내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밖으로 나왔다. 어젯밤 그들의 이야기를 못 들었다면 모를 일이되, 알고 있으면서 밥을 얻어 먹을 수는 없었다.   초겨울 , 차가운 새벽바람을 쏘이며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겨놓는 김삿갓, 저절로 시구가 읊조려졌다.   반중무육 권귀채     /   주중핍신 화급리     ( 盤中無肉  權歸菜  / 廚中乏薪  禍及籬 ) 밥상에는 고기대신 채소가 뽐을 내고    /   부엌에는 땔감이 없으매 화가 울타리에 비친다   부고식시 동기식    /   출소부자 역의행      ( 婦姑食時 同器食   /   出所父子  易衣行 )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그릇 밥을 먹고     /   출타할 때는 부자가 서로 옷을 바꿔 입는다.   아침도 굶은 채 그는 한나절을 꼬박 걸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길가에는 인적이 없었고 ,   멀리 산 아래로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족히 이십 여리는 걸어가야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걸으며 날짜를 꼽아보니 시월 하고도 그믐이었다. "허 , 내일부터  동짓달이로구나!"   날짜를 꼽아본들 무엇하랴 싶지만 한편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동짓달, 이제 평지에도 눈발이 날릴 것이다. 또한 살을 에는 바람도 몰아칠 것이다.   김삿갓은 공허한 마음으로 산천을 휘돌아 보았다. 산도들도 텅텅 비어 있었다. 언제 내렸는지 먼 산봉우리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다정다감한 시인의 가슴에는 시심이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물들었다.  엽락척용 설만두   /  세여천탱 흘연부  ( 葉落瘠容 雪滿頭   / 勢如天撑 屹然浮 ) 잎은 져서 앙상하고 눈은 봉우리에 가득한데   /  산은 마치 하늘을 열어 보는 듯 우뚝 솟아있네 여령나립 아해사   /   혹자중간 선학유   (餘嶺羅立 兒孩似   /  或者中間 仙鶴遊 ) 그 아래 봉우리는 아이인양 늘어서 있고    /  그 가운데 어떤 봉우리에선 학이 놀고 있구나.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2) 김삿갓의 수작 아침을 거르고 나선 길이라 오전이 지나니 몹시 시장기가 들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춥고보니 따듯한 불기운이 더욱 그리웠다.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며 시름없이 걷고 있는데 삼거리가 나타났다. 오른쪽 길  저만치에  주막이 보였다.   김삿갓은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행했다. 사실 , 수중에는 엽전 한 닢 없지만 그곳으로 가면 무엇인가 생길 것 같았다. 주막은 마당도 넓고 마루도 넓었다. 한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반쯤 열려있는 사립문으로 성큼 들어섰다. "게 아무도 없소 ? " 비록 가진 돈은 없었지만 우선 호기롭게 주모를 찾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한 번 주모를 불렀다. 잠시 후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삼십이 넘었을까, 아니면 조금 못 되었을까 ? 첫 눈에 ,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어찌 오셨어요?? " 여인은 시답지 않게 대꾸했다. "주막에 나그네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거 무슨 말을 그리 하시오 ?" 김삿갓은 마루에 걸터앉으며 여유 있게 수작을 부렸다. "미안하지만 요즘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장사를 안 하신다니 , 외상술이라도 먹어대는 건달이 많습니까?? "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장사를 하지 않으니 다른 집으로 가세요. 여기서 한 마장쯤 더 가시면 좋은 주막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여인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주막이 있든 없든 상관없소이다. 댁이 주막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왔을 것이니까요." 여인은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지 못하고 돌리려던 몸을 멈추고 김삿갓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시지 마시오.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다만 문전걸식을 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어차피 주막을 찾더라도 돈 주고 술을 마실 형편은 못되는 몸이니 , 찬술 한사발이라도 얻어 마시면 고맙겠습니다." "보셔요, 손님. 우리 집에는 지금 일이 있어 손님을 대접할 형편이 못 되니 훗날 다시 오신다면 그때는 잘 대접해 드리지요." 여인의 말씨는 차분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주막이라면 으레 주모가 있어 적당히 수작을 부려도 슬그머니 받아주기 마련인데, 주모 같지도 않은 이 여인은 미모로 보나 위엄 있는 행동거지를 보나 , 뭇 사나이들에게 술이나 팔고 있을 여인 같지가 않았다. 해서 김삿갓은 더욱 흥미를 느꼈다. "나는 떠돌아 다니기는 하지만 한번 지나간 곳을 다시 들리지 않습니다. 후일 다시 찾아오라 하셨지만 다시 뵐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오늘의 인연은 술 한 잔으로 끝내시면 되겠습니다." 여인은 김삿갓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고 있었다. 차림새는 그렇다 치고 ,  생김새나 말씨가 그냥 허투로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낭인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암행어사 ?  ... ) 여인의 상상은 이렇게 비약 되었다. 새카만 눈썹아래 자리 잡은 두 눈은 범인과 다른 총명한 정기가  서려있었다. 여인은 속마음을 감추고 퉁겨보았다. "미안합니다만 지금 머슴도 없고 주모도 없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떠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김삿갓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속으론 과연 생각대로 주모가 아니었구나 하고 자기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주막에 주모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 " 김삿갓은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만 무슨 수가 날 것 같아서였다. "저를 주모로 알고 계시는 모양인데 이 주막을 맡아서 장사하는 분은 따로 있어요. 그러니 전들 어쩌겠어요??" "허 참 딱하게 되었소이다. 실인즉 아침도 거른 터이라 이제는 발길을 옮길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듯한 숭늉이라도 주셨으면 합니다만 ..."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여인은 갑자기 수심어린 얼굴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사정이 정 그러시다면 대접할 것은 없지만 저쪽 방으로 드십시오. 시장기나 면하게 해드리지요." "고맙소이다." 김삿갓은 일이 잘 되어 간다고 내심 기뻐하면서  여인이 가리킨 마루가 이어진 방으로 성큼 들어갔다. 방은 어젯밤 사람이 유 했던 듯 아랫목은 따듯했고 훈기가 돌았다. 그는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폈다. 이사이 여인은 안채로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곡절이 있는 집 같았다. 우선 사람이 보이지 않는가 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 후에 여인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김삿갓은 깜짝 놀라며 얼른 일어서 밥상을 받아 잡았다. "차린 것은 변변치 않으나 시장하실 터이니 어서 드시지요." 김삿갓은 밥상을 앞에 놓고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조금 전에 밥상을 건네 받을 때 여인의 머리와 자신의 머리가 가까워지면서 여인의 야릇한 체취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인은 보기 드문  미인이 아닌가?? 집을 떠난 이래로  아내 말고 이토록 젊고 예쁜 여인과 마주 대하는 것은 처음일성 싶었다. "고맙소이다." 김삿갓은 정중히 예의를 차리고 수저를 들었다. 차린 것 없다는 여인의 말과 달리 소반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쌀밥이 주발에 가득 얹혀 있고 갓 끓인 동탯국까지 놓여 있었다. "음식 맛이 이집 마나님 성품을 닮은 모양입니다." 동탯국을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은 삿갓이 수작을 걸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 "정갈하고 감칠맛이 있어 해본 소리입니다." 여인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문 쪽으로 옷깃을 여미며 앉은   여인이 물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부인은 아십니까??  소생은 바람과 같은 몸입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3) 차일피적 적막강산 금백년 .. (이핑게 저핑게 하는 사이 쓸쓸한 강산은 어느덧 백년이 되고 말것이오.) "저는  바람처럼 거침없고,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살고 있지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김삿갓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주막에 주모도 없고 심부름 하는 머슴도 없는 모양인데 무슨 곡절이라도 있습니까?? " "곡절은 무슨 곡절이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만사 모두가 귀찮아 잠시 문을 닫은 것뿐입니다." "그래요 ?" 그러나 김삿갓은 어딘지 석연치 않은 기미를 느꼈다. 그는 묵묵히 밥을 모두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여인은 무슨 말을 할듯 하다가 단념한 듯 상을 들고 나가려 한다. "잠깐만 ! " 김삿갓은 여인을 불러 세웠다. "제가 보기에 부인에게는 필시 절박한 일이 있으신 듯한데. 말씀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 " 여인은 상을 다시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걸 어떻게 아셔요." "부인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제 얼굴에요 ?" "그렇습니다. 바깥양반도 안계신 모양인데 소생이 해 드릴 수 있다면  오늘  밥값으로라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각별히 바쁜 몸도 아니니까요." 여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니 , 관상을  보실 줄 아세요?? " "허허 , 관상을 볼 줄 안 다기 보다 어려서 부터   주역과 역서를  읽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의 삶을 조금 들여다 볼 줄 알지요." 김삿갓은 여인이 자신의 말에 흥미를 느끼자 이렇게 말했다. "맞았어요. 저는 이 년 전에 혼자가 되었지요. 오늘은 큰집에 제사가 있어 집안 식구들은 모두 그쪽으로 보내고  지금은 저 혼자 있지요 . 그리고 ......." 여인은 한숨을 쉬면서 말끝을 흐렸다. "복잡한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말씀을 해주십시오. 대단히 어려운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여인은 삿갓의 말을 듣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예사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뵙는 분에게 집안의 사정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꺼려졌는데 저의 긴박한 사정을 짐작하고 계신 듯하여 의논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안에 복잡한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산송(山訟)이 한 건 있습니다." "산송이라면 묏자리에 얽힌 송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 "예, 이 년 전 춘삼월에 어느 고명한 지관 한 분이 우리 집에 묵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제 남편은 병석에 누워 오늘 내일 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였지요. 그래서 저희 남편을 위해 좋은 자리 하나를 보아 달라고 그 지관에게 청을 하였습니다.  지관은 우리 집에 열흘정도 머물면서 이 근방 산야를 두루 살펴보고 마침내 한 자리를 택해 주더군요. 여기서 이십 리쯤 북쪽으로 가면 갈매봉이란 산이 하나 있는데 그 산 중턱 남향 자리였지요. 그때 지관에게는 쌀 열섬을 사례로 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난 후 한달쯤 지난후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요. 물론 그 명당자리로 장례를 모셨지요."   "그렇다면 일이 잘된 것이 아닙니까?? " 김삿갓은 흥미를 느끼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거기까지는 일이 잘 되었지요. 정말 명당자리 덕분인지  주막에 장사가 부쩍 잘 되지 않겠어요. 애초부터 주모를 따로 두고 하는 장사였지만 장사가 잘 되어 남편 죽은 시름을 잊고 지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가을부터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거예요. 대신 저 위에 주막이 잘 된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하지만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장사란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니까요. 한데 지난여름 어느날 밤,   꿈에 죽은 남편이 나타나 '여보, 내 집 울타리에 침범한 자가 있어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며 말을 하는 것이에요. 그 꿈을 깨고 나서 하도 이상해  남편 산소를 찾아가 보았지요. 그런데 가보니 이게 웬일이래요!  "  여인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소이까?? " "남편 묘 옆에, 그러니까 봉분 오른쪽 우청룡(右靑龍) 쪽으로 웬 묘가 하나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하도 기가 막혀 알아보니까 새로 생긴 이 묘는 건넛마을 안 진사 아버지 묘였던 것이에요. 해서 급히 가서 따졌지요."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집 말이 , 지관에게 후히 돈을 주고 자기네 부친 묏자리 하나를 부탁하였더니 그곳에 모시라 하기에 묘를 섰노라고 능청스럽게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 이장을 하라 하였더니 오히려 비용을 물을 것이니 우리보고 이장을 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무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관가에 송사를 내었지요. 그런데 관가에서는 지금까지 차일피일 하면서 해결을 미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관이 양쪽 집에다 같은 묏자리를 팔아먹은 게로군요. 하지만 산소는 이쪽에서 먼저 썼으니 나중에 쓴 안 진사네가 마땅히 쓰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도리이고 , 썼더라도 파가는 것이 법이거늘 , 그나저나 송사를 받은 안진사네는 지금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가 송사까지 내니까 파가겠다고 하는데 ,  어디 실천에 옮겨야지요. 관가에서도 이렇다 할 결정도 하지 않고요. 아무래도 관가에서 뇌물을 받아먹고 어물쩍 미루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사또께 직접 송사를 해야 하겠군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무렴요. 이쪽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 송사를 하지요."   "선비님께서요 ? 고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쓸 것을 준비해 주십시오." 여인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더니 종이에 붓과 벼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자 김삿갓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掘去掘去 彼隻之恒言  /  捉來捉來 本守之例題 굴거굴거 피척지항언  /  착래착래 본수지예제 파간다 파간다 함은 저쪽이 늘 하는 말이고  / 잡아오라 잡아오라 함은 이고을 사또님이 겉으로만  하는 이야기인데 금일명일 간곤불노 월장재  /  차일피적 적막강산 금백년 今日明日 幹坤不老 月長在  /  此日彼頃 寂莫江山 今百年   이토록 오늘 내일 미루기만 하니   천지는 늙지 않고 세월만 흐를 것 이오   / 이핑게 저핑게 하는 사이 쓸쓸한 강산은 어느덧 백년이 될 것이로다. 김삿갓이 이렇듯 쓰고 붓을 놓으니 여인이 경탄을 한다. "제가 생각했던 대로 과연 선비님은 명문장가 이시군요." 이 말을 듣고 김삿갓도 놀랐다. 여인이 글을 보고 뜻을 알았다는 것인데 흔치않은 일이었다. 그러면서 여인이 말을 하는데 "내일 사또가 이 글을 보시면 저희 집 산송 처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것을 알게 될 것 입니다. 고맙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써드린 보람이 있소이다. 헌데 실례의 말씀 같소이다만, 주막이나 하시면서 지내실  분 같지는 않은데요 ... " 김삿갓이 이쯤 말을 해놓고 여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랑스럽게 말할 것은 아니지만 본래 시댁은 대대로 벼슬을 하던 집안이었지요.  허나, 윗대에 이르러 뭔가 잘못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여 불운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 원래 황해도가 고향이나 이곳까지 살림을 옮겨오게 되었지요. 이곳은 강원도와 함경도가 접한 곳으로 봄과 가을에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길손들이 많아 주모를 두고 심부름 하는 머슴을 서넛 두고도 장사는 잘 되었지요. 안 진사네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는 말입니다." 여인의 말씨는 무척 차분했다. 그러나 벼슬은 어떤 벼슬을 하였었고 이름은 어떻게 되는지 밝히려 하지 않았다. "내 처음부터 내력이 있는 집안 분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생각이 맞았소이다. 그럼 대접을 잘 받았고 , 이만 떠나가겠소이다." 김삿갓은 삿갓을 찾아  손에 들었다. 그러자 여인이 황망히 그를 만류한다. "바쁘신 길이 아니라면 며칠 쉬었다 가세요. 내일 써주신 글을 관가에 낼 터인즉, 그 결과를 보시고 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삿갓도 휑하니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가까이 말해 본 것조차도 얼마만 인가 ? 그는 못이기는 체 하고 주저앉았다. "부인이 혼자 계신다 하는데 외간인 제가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 "그런 것은 괘념치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선비님이 아니셨던들 내일 사또께 청원서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 김삿갓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인이 다시 말했다. "이곳은 길가의 방이라 유하시기 불편하실 터이니 안채로 드세요. 주인께서 쓰시던 사랑방이 있습니다. 김삿갓은 일이 매우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선 여인을 따라 사랑으로 들어갔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4) 月白雪白 天下地白 ..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고 세상천지 모두 하얗다. 여인을 따라 들어간 사랑방은  조금 전까지 누군가 사용하던 것처럼 매우 정갈했다. 기름을 잔뜩 먹음은 장판은 거울처럼 번들 거렸다. "잠시 기다리셔요. 목욕물을 데워 놓을 테니 목욕을 하시지요." 김삿갓은 어안이 벙벙했다. 외간남자가 안채로  들어온  것도 과분한데,   목욕물을 데워 준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 이었다. 허나, 이 순간 모든 것의 결정권은 여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여인이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혼자 따듯한 방에 앉아있으려니 졸음이 사르르 찾아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마주대했던 미모의 여인에 환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온 몸을 휘감았다. "주무셨나봐요." 얼마가 지났을까 여인의 부름소리에 눈을 떴다. 방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여인은 바시시 웃으며 문밖에 서 있었다.  "졸리시면 그냥 주무시게할걸 그랬나봐요." "아이쿠, 그만 깜빡 졸았습니다." 김삿갓은 여인의 수고에 겸연쩍게 대답했다. "목욕물이 데워졌으니 욕간으로 오세요. 저 아래 뜰에 있어요." 김삿갓은 실로 몇 개월 만에 따듯한 물로 목욕을 했다. 때가 국수가락처럼 나온다더니 김삿갓의 경우를 두고 한 말 인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친 물이 마치 재를 풀어놓은 듯이 잿빛 이었다. "뜻하지 않게 호강 한번 잘 하는구나." 김삿갓은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목욕을 끝내자 바로 저녁상이 들어오는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어떻게 닭을 잡았는지 닭찜이 올라와 있었고  향기로운 술도 한 병 올려져 있었다. 맛있는 음식에 술 한병까지 모두 비우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세상 참 ,배가 부르니 만사가 조그맣게 보이는군... " 김삿갓은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후 오늘처럼, 마음 편하게 음식을 먹으며 호사를 부린 때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항상  때마다 끼니를 찾아 주린 배를 채웠지만 그것은 피치 못할 형편이었을 뿐, 언제나 부담이 있는 끼니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에서의 식사는 편안했다. 그것은 아마도 경계심을 가지고 자신을 대하던 여인의 태도 변화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밤은 소리 없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주인여자는 깨끗한 금침을 들여놓고 자리끼 까지 갖다 놓은 후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안채로 들어갔다. 자리에 누운 김삿갓은 갑자기 여인이 그리워졌다. 또 안주인 여자가 아니더라도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청춘의 젊은 피는 본능적으로 이성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불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챘다. 그러면서 지금쯤 안방에서 옷을  벗고 잠자리에  있을  여인의 생각뿐이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 혹시 나와 같은 상념에 사로 잡혀 있을까 ? " 온갖 잡생각이 그의 뇌리를 채우고 넘쳤다. "안방으로 슬며시 건너가 말을 붙여 볼까 ? 일엽편주(一葉片舟)의  고해(苦海)를 건너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함께 논 하여볼까 ? " 온갖 잡념이 그를 짓눌렀다. "아냐 ..지금쯤 그녀도 내가 오기를 기다릴지 몰라.." 한편으론 "까짓 사내 녀석이 과부 하나쯤 꺾지 못해서야 사내라고 할 수 있나 !..." 그는 스스로 엉뚱한 자기 생각을 합리화 시켜 보기까지 하였다. "흥, 기껏 목욕까지 하고 배불리 먹고 따듯한 방에 금침을 깔고 누우니 고마운 생각보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구나, 쯧쯧 ..." 이렇듯 자신을 꾸짖으며 소리를 내 중얼거렸지만 그의 귀와 눈이  자꾸만 안방 쪽으로 향하는 본능은 억제 할 수 없었다. "헛참 ! "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휘둘러보니 문갑위에 연적과 필묵이 보였다. 그는 벼루를 꺼내 천천히 먹을 갈았다. 먹물이 짙어지기도 전에 글이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정리가 다 되었다. 쓸쓸한 나그네의 베갯가의 꿈은 산란하고          / 客愁蕭條 夢不仁 (객수소조 몽불인) 서리찬 달빛만이 더욱 외로워라                   / 滿天霜月 照吾隣 (만천상월 조오린) 푸른대와 소나무는 영원불멸의 절개를 뽐내지만    / 綠竹蒼松 千古節 (녹죽창송 천고절) 홍도와 백리는 봄에만 피고지지 않던가            / 紅枇白李 片時春 ( 홍비백이 편시춘) 왕소군의 뼛가루도 오랑캐 땅의 한줌 흙이 되었고  / 昭君玉骨 胡地土 ( 소군옥골 호지토) 꽃같던 양귀비도 마외파 아래 티끌로 변했네      / 貴妃花容 馬嵬㕓 ( 귀비화용 마외전) 세상살이 이치가 이러할진대                      / 世間物理 偕如此 (세간물리  해여차 ) 그대 오늘밤 몸풀기를 너무 아까워하지 마소서     / 幕惜今宵  解汝身 (막석금소 해녀신)   김삿갓은 이렇게 써놓고 몇 번씩이나 읽어보았다. 복숭아꽃이나 오얏꽃이나 봄에만  화려하게 피어났다 지고 나면 그뿐이며 , 청춘도 이 같아  일생을 통해   잠깐 지나가는 한 때라는 암시였다. 게다가 천하 미녀 왕소군도 흥왕에게 끌려가 임을 그리다 죽으니 한줌 흙으로 돌아갔고, 당 현종을 사로잡았던 양귀비도   안녹산과 함께 잡혀 한 줌 티끌이 되었으니 허무한 일이 아니냐는, 충동을 불사르고 어여쁜 밤을 함께 하자는 추파의 글이었다. 김삿갓은  혼자  빙그레 웃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전한다??" 김삿갓은 써놓기는 하였으나 다음 생각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사내대장부가 먹은 마음을 그대로 실행 해야지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고 종이를 들고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방을 살펴보니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살그머니 방쪽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여인은 잠 든 것 같지는 않았다.  가슴은 연신 두근거렸다. 김삿갓은 살며시 장짓문을 열었다. 장짓문이 바사삭 소리를 내며 열리는데도 여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척이 없었다.  김삿갓은 문틈으로 살며시 종이를 밀어 넣었다. "어머나 ! " 비로소 여인의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삿갓은 아무 말 없이 방문을 다시 살며시 닫았다. 여인이 종이를 펼쳐 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 한동안 쥐 죽은 듯이 방안의 동정을 살피던 김삿갓은 애가 탔다. 지금쯤이면 글을 모두 읽었을 것인데 방안의 동정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젠장 , 글 뜻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게아냐 ?) 김삿갓은 자신이 여인의 교양을 너무 높이 본 것 아닌가 여겼다. 그러나 이쯤 나갔으니 이제는 그대로 물러 설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에헴 !" 잔기침을 해서 아직도 자신이 방문 앞에 서 있음을  여인에게  알리고 싶었다. "누구세요 ?" 여인은 딴청을 부리며 물었다. "사랑채 선비 말고 누가 또 올 사람이 있소이까??" 이번에는 김삿갓이 튕겨 보았다. "어찌 밖에 계셔요. 추우실터인데 .." "글을 보셨으면 답장을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제야 방문이 열렸다. "남녀가 유별할 시각이지만 은밀히 찾아오신 손님을 내쫒을 수야 있나요. 들어오세요." 김삿갓은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어 춥다 ! " 김삿갓은 깔아 놓은 비단 이불을 들추고 몸을 밀어 넣으며 능청을 피웠다. "어머, 어머" ...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며 김삿갓의 무례한 행동을 새삼스럽고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허, 내 오늘 부인의 미모와 교양에 취하여 나비가 되어 찾아왔습니다 그려.." "호호호 ..그럼 제가 꽃이란 말씀이신가요??" "아무렴요 향기를 가득 품은 꽃이지요"  여인은 본능적으로 교태를 짓고 있었다. 김삿갓은 슬그머니 여인의 허리를 감았다. "이러시면 안 돼요." 여인은 살며시 몸을 꼬으며 삿갓의 애간장을 녹였다.  "아까 나의 뜻을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이 큰 집에는 부인과 나밖에  없습니다. 피 끓는 젊은 남녀가 하룻밤 회포를 푼다고 죄 될 것이 없습니다. 부인, 모처럼의 기회  우리 두 사람 .. 회포를 맘껏 풀어  봅시다." 이렇게 말을 한 김삿갓은  여인의 허리를 힘껏 껴안은 채  비단요 위에 천천히 뉘었다. 김삿갓은 초례를 마친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기듯 , 떨리는 손으로 여인의 옷을 하나씩 벗겨갔다. 하나씩 벗겨질 때 마다 여인은 온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벗긴 옷끈을 쉽게 놓지 못하고 끝을 잡고 있었다. 여인의 몸은 우윳빛처럼 희고 탄력 있었다.  벗겨 놓은 몸에서는 난사향이 풍겼다. "아아 ..이렇듯 황홀한 때가 또 있었던고 ?" 김삿갓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어 가볍게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테 섞이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로 ,육욕에 굶주린 세월과 시간이 얼마이던가?? 김삿갓과 여인은 외금강과 해금강이 동해에서 섞이듯, 소용돌이치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 김삿갓은 폭포수가 절벽 아래로 내리 꼿듯 모든 것을 토해냈다. 여인은 은절구가 되어  세찬 폭포수를  온 몸으로 받아 주었다.     ..     夜深 , 水作瀑杵   春絶銀臼 .. 깊어가는 이밤 , 물은 세찬 폭포가 되어 은절구를 찧고 ..   窓外, 月白雪白    天下地白  .. 창밖에는, 달빛도 희고 눈빛도 희고  세상천지 모두 하옛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5) 관북천리 (關北千里).. 안변 가학루에서. 다음날 , 김삿갓은 사랑방에서 느지막이 일어났다. 밖에서는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온 것 같은데 여인이 뭐라고 분부를 내리는 것으로 보아 , 식구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주모도 돌아왔고 머슴도 돌아왔다.   안방 여인은 사랑에 묵고 계시는 선비가 천하의 명문장가로 청원서를 써주셨으니 아침이 끝나는 대로 관아에 가지고 가야한다고 설쳐댔다. 여자란 낮과 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더니 그 말이 옳다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지난밤에 있었던 두 사람의 황홀한 순간을 생각한 것이다. 잠시 후 아침상이 들어왔다. 역시 상다리가 휘어졌다. "저는 마당쇠를 데리고 관아에 들어가 어제 써주신 글을 직접 사또께 드리고 오겠습니다. 떠나지 마시고 사또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보셨으면 좋겠어요." 여인은 남편에게  대하는 모양으로  말을 하며 은근히 김삿갓을 붙잡았다. 김삿갓은 대답대신 빙그레 웃음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관아로 떠난 여인은 점심나절이 되자 만면에 희색을 띄며  돌아왔다. 앞으로 열흘 안에 안 진사네 산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또의 약속을 받아왔다고 하였다. "청원서를 써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기에 삿갓을 쓴 젊은 과객이라 하였더니 사또의 낯빛이 변하더군요. 암행어사라도 되는 줄 알았던가 봐요." 여인은  다녀온 관아에서의 일을 소상히 말하며 김삿갓을 향해 은근한 추파를 던져왔다. 그날 밤 김삿갓은 아랫사람들 모르게 주인여자와 다시 은근한 정을 나누었다. 다음날  일찍 , 관아에서 나졸 하나가 찾아왔다. "주인마님 계십니까??" 나졸은 사또의 분부라며 급히 주인 여자를 찾았다. 주인 여자가 나오자 나졸은 이렇게 말을 했다. "아주머니, 어제 올리신 청원서를 보신 우리 사또께서 크게 탄복을 하시고 오늘 중에 안 진사를 불러 해결을 한다고 하셨으니 염려는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사또께서 어제 그 글을 쓰신 선비께서 아직도 댁에 유하고 계신지 알아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직 유하고 계십니다만 무슨 일 이신지요??" "만나 뵙고 사또의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김삿갓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러시다면 이리 오세요."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문밖으로 가까워졌다. "저 손님 ! " 여인이 김삿갓을  불렀다. 그는 방문을 열었다. "뉘시오 ? "   김삿갓은 밖에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지만 시침을 떼고 물었다. "선비님이셨군요. 저희 사또께서 분부를 하셔서  찾아뵈었습니다." "사또께서요 ? 나는 죄 지은 일이  없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선비님께서 어느 때 이곳을 떠나실지 모르겠사오나, 떠나시기 전에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무슨 일 이랍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희 사또께서 풍월을 즐기시는 터이라 어제 선비님이 써 올리신 청원서를 보시고 몇 번씩 감탄 하신 것으로 보아  모셔다가   풍월을 즐겨 보시려는가. 봅니다." "허, 이거 영광이로소이다. 내 오늘 중에 찾아뵙겠다고 말씀 올리시구려."   나졸은 삿갓에게 고개를 굽실하더니 물러갔다. 김삿갓은 더 머물러 있으라는 여인의 청을 뿌리치고 길을 떠났다. 그가 관아에 도착한 때는 정오가 조금 비켜서였다.   "어서  올라오시오." 사또는 마치 구면을 대하듯이 그를 반겨주었다. "보잘것없는 일개 과객을 이렇듯 환대해 주시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김삿갓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사또는 사십쯤 된 장년으로 안색도 허옇고 살집도 있어 호인의 인상으로 보였다.   "앉으십시다. 어제 보낸 글을 보고 내 무척 탄복했소이다. 그래 한번 만나 뵙고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김삿갓은 자신의 글을 알아보는 사또에게 호감을 느꼈다. 아울러 사또도 상당한 실력가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권오익이라 합니다." 사또가 먼저 자기 이름을 밝혔다. "죄송합니다만  삿갓을 쓰고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근본이 있겠습니까. 다만 본관은 장동 김씨이오니 김립(金笠)이라 불러주십시오." "김립이오 ? " 사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습니다." "그럼 금강산 일대에서 시선 (詩仙)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 김삿갓이십니까?? "   김삿갓은 흠칫 놀랐다. 어떻게 이런 조그만 고을의 수령이 자기의 행장을 알고 있단 말인가. "시선이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그저 금강산에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허허허, 이거 무척 반갑소이다. 이건 분명히 하늘이 내리신 인연이외다. 내 김선비의 선성을 벌써부터 듣고 내심 부러워하고 있던 참입니다."   사또는 김삿갓의 손을 덥석 잡기까지 했다. 김삿갓은 일개 방백이지만 한 고을의 수령이 자기를  알아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다만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이렇게 면전에 보시니 실망이 크실 줄로 짐작 됩니다." "거 무슨 말씀이오, 이곳은 아시다시피 함경도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 입니다. 봄가을이면 금강산으로 오가는 유람객이 많습니다. 내 얼마 전에  금강산에 다녀온 한 문우(文友)로 부터  금강산에 그동안 없던 젊은 시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김삿갓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과장된 이야기 같습니다. 사또" "무슨 말씀 , 내 친구는 헛소문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올시다. 하였든 이렇게 만났으니 기쁘오. 오늘은 우리 약주나 나누면서 시나 읊어봅시다."   사또가 명을 내려 주안상을 준비하라 이르니 주안상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단 듯 지체 없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나누었다. "김선비 , 이만하면 시 한수가 나올 만도 하지 않습니까??" "예, 시제를 주시면 한수 지어보겠습니다." "그림자 영(影)자 어떻습니까??" 김삿갓은 잠시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붓을 들었다.   進退隨 (나)농 壟汝恭      /  진퇴수농 막여공    汝(나)농 酷似實非(나)농   /   여농혹사 실비농 月斜岸面 驚魁狀          /   월사안면 경괴장 日午延中 笑矮容          /   일오연중 소왜용 杭上若尋 無(찾을)역 得     /    항상약심 무역득 燈前回顧 忽相逢           /    등전회고 홀상봉 心雖可愛 終無信           /    심수가애 종무신 不映光明 去絶跡           /    불영광명 거절적 나들이 할때 나를 따름에 공손하기 그지 없으며 너와 내가 같이 보이지만 실은 같을 수가 없도다 달이 서산에 기울면 너의 긴 모습에 놀라기도 하지만 하늘 복판에 이르러선 난장이 같은 너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오네 베개 위에서 찾으면 찾을 수가 없다가도 등잔 앞으로 돌아서면 문득 만나게 되는구나 마음으로는 비록 사랑하나 믿을수는 없으니 광명을 비추지 않으면 종적을 알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김삿갓이 글을 마치자 사또는 무릅을 쳤다. "좋습니다. 참 좋습니다. 과연 김삿갓이란 이름이 유명할만 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사또." "과찬이라니오. 시란 어떤 글자를 써서 표현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시상을 글에 어떻게 넣어 지으냐도 중요하지요. 가히 따라하지 못할 만큼 훌륭한 시를 보여주셨습니다." 김삿갓은 시가 어떤것 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또가 참 멋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녁늦게까지 두 사람은 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김삿갓이 떠나려하자 사또는 못내 섭섭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실참 입니까 ? " "안변으로 갈까 합니다." "그것 참 잘되었습니다. 그곳 수령이 바로 내 친구올시다. 과거는 나보다 일 년 앞섰으나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를 했지요. 문장이 뛰어나고 예서와 경서에 능통해 장차 큰 재목이 될 사람입니다. 김선비가 그곳으로 가신다니 내 소개장을 가지고 가신다면 좋은 글벗을 만나게 되실 터인즉 , 안변에 가시거든 찾아가 보십시오." 사또는 김삿갓의 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교우를 해보라는 내용으로 소개장을 써주었다. 김삿갓은 소개장을 품에 간직하고 사또를 하직한 후 다시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겼다. 길을 떠난 열 하루 만에  김삿갓은 안변에 당도했다. 안변은 원산을 위로 두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일 뿐 아니라 넓지는 않으나 평야에 자리 잡고 있어 곡식이 풍부했다.   안변의 진산(鎭山)은 학성산이다. 가학루(駕鶴樓)는 학성산 동쪽 언덕위에서   동해를 굽어보며 날아갈듯 솟아있는 안변에 유명한 정자이다. 김삿갓은 가학루 다락위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폈다. 가학루에는 이곳을 다녀간 많은 시인의 글이 현판으로 걸려있었다. 그중에서 고려 말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시가 눈길을 끌었다.   묻노니 이 다락을 누가 세웠던고 내 이제 다락에 올라 오래 머무노라 십 년 세월 헛되이 모든 것을 잊었다가 옛 싸움터를 바라보니 눈물이 절로 솟네.   시문하인 시기루   ( 試問何人 始起樓 ) 등임료복 위엄류   ( 登臨聊復 爲淹留 ) 십년도노 부심사   ( 十年徒勞 負心事 ) 백전산하 감루류   ( 百戰山河 堪淚流 )    ..   이곳 가학루 다녀간 만고충신 정몽주, 다락에 올라 본 것은 안변의 경치가 아니라 옛날의 싸움터를 먼저 보았던듯, 눈물을 흘리며 나랏일을 걱정하였던 모양이다. 그 옆에는 이조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시도 걸려 있는데 , 정몽주의 시와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영의정께서 가학루에 오르시어 보고 느끼신 것을 현판에 남기셨으니 강산이 아무리 좋아도 내 땅은 아니니 세월만 덧없이 물 따라 흘러가네.   上相登臨 駕學樓   ( 상상등임 가학루 ) 眼前詩句 壁間留   ( 안전시구 벽간류 ) 江山信美 非吾土   ( 강산신미 비오토 ) 歲月無情 逐水流   ( 세월무정 축수류 )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6) 김립 훈장.(金笠 訓長) 학성산 서쪽에는 표연정이 있어 , 동쪽 가학루와 쌍벽을 이룬다. "가학루 보다는 서쪽에 있는 표연정이 더욱 좋으니 그쪽에도 한번 가보시죠." 누가 그렇게 일러주기에 김삿갓은 서슴지 않고 표연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표연정은 뛰어난 누각이었다. 주위에는 해송(海松)이 울창하고 숲속에서는 꾀꼬리가  영걸스레 울어대고 바다와 접한 남대천 일대는 갈매기가 부산스럽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시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누각위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표연정자 출장제 (瓢然亭子 出長堤)   표연정은 긴 뚝에 우뚝 서있고 학거누혈 조독제 (鶴去樓穴 鳥獨啼)   학은 가고 빈 누각에 새만이 홀로 우네. 십리연하 교상하 (十里煙霞 橋上下)    저녁노을은 십리에 뻗쳐 다리를 위아래로  감싸고 일천풍월 수동서 (一天風月 水東西)   하늘은 한 색 인데 달은 동서의 물결위에 흐른다. 신선종적 운과묘 (神仙踪跡 雲過杳)   신선이 노닐던 종적은 구름에 지워 아득하고 원객금회 세모유 (遠客襟懷 歲暮幽)   나그네 회포는 해가 저무니 더욱 사무치도다. 우화문전 무문처 (羽化門前 無問處)   깃 꽂힌 문전에서 물을 곳이 없으니 봉래소식 몽중미 (蓬來消息 夢中迷)   봉래산 신선의 소식은 꿈속에서 아득하구나.       .. 시를 읊고 난 김삿갓은 누각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을 굽어보았다. 산 그림자가 한 폭의 그림자로  시냇물에 어둡게 어른거렸다. 벌써 저녁나절이 된 것이다. 안변 읍내는 밥 짓는 연기가 지붕위로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김삿갓은 오늘은 어느 집 문전을 두드릴까 생각을 하였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곳 안변에 이르는 지난 얼마간 주막집 여인과 권오익 사또 덕분에 잘 먹고 편하게 잠을 잤다. 그러다보니, 불과 며칠사이에  김삿갓은 배부른 흥정이 앞섰다. 게다가 지금 품속에는 권사또의 소개장이 있지 아니한가?? 안변읍 관아는 읍내 중앙에 있었다. 이제는 잎이 다 떨어졌지만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울울히 들어선 곳에 관사가 있었다. 김삿갓은 위문(衛門)에 이르렀다. 수문장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또 나리를 뵈러 왔소이다. 자, 이것을 사또께 전해주시오." 그는 품속에서 소개장을 꺼내어 수문장에게 주었다. 수문장은 봉서를 받아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렸더니 그가 나타났다.   "이리 따라 오시오." 김삿갓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몇 채의 집을 지나자 후원이 나타났다. 연못을 휘둘러 안쪽으로 들어가자 문선재(文善齊)라는 현판이 붙은 아담한 별채가 나타났다.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두칸 미닫이 문 앞에서 수문장은 고개를 굽실거리며 아뢰었다. "듭시라 일러라." 방안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렸다.   "듭시지요." 수문장의 말에 김삿갓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사또는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고 있다가 김삿갓을 맞이했다. "문안드립니다. 사또 ! " 김삿갓은 우선 인사부터 올렸다. "소개장은 잘 보았소이다. 나는 권공하고는 막역한 친구 사이지요. 그의 소개로 천하의 문장가와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안변사또는 목소리도 걸걸하고 체격도 우람한 대장부였는데 , 첫눈에 김삿갓은 그와 의기가 상통할 것 같았다. "공사가 끝난 해거름에 , 이렇게 찾아 뵈온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원래 나는 놀기를 좋아해서 내 문전에는 시인묵객이 자주 왕래합니다. 더구나 김선비는 내 친구의 소개이니 더욱 반갑소이다. 이왕 오셨으니 마음 편히 계십시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조금씩 친숙해 갔다. "오늘 안변 구경은 하셨습니까?? " "예, 가학루와  표현정 경치를 구경하였습니다." "시신께서 그곳을 보시고 그냥 내려오시지는 않았겠지요?? " 은근히 시 솜씨를 보자는 말이었다.   "예,  표현정 저녁 경치가 좋아 스스로 읊조려 보았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김삿갓은 아까 읊조렸던 시를 낭송했다.   "참 좋습니다. 표현정을 두고 많은 시객들이 시를 지었습니다만 ,  김선비 같은 시인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한번으로는 어쩐지 서운 합니다. 한수만 더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시란 쓰는 맛과 보는 맛도 무시할 수 없으니 자, 여기에 적어 주십시오." 사또는 지필을 내놓았다.   김삿갓은 한 수가 아니라 열 수라도 사양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필을 들기 무섭게 죽죽 써내려 갔다.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   임정추기만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   원수연천벽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   산토고윤월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聲斷普雲中   ..   새홍하처거 성단보운중   숲속 정자에 이미 가을이 깊었으매 ,  글 짓는 나그네의 심사는 덧없이 슬프도다! 물길은 멀어 하늘에 닿을 듯 푸르른데 ,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을 받아 붉기도 하여라. 산은 동그런 달을 외롭게 내뿜고 , 강은 멀리서 오는 바람을 함껏 먹음었네 변방에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가느냐 , 구슬픈 소리가 저문 구름 속에서 들려오누나!      ..   "김선비,이런 글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거요 ? 실로 탄복할 일입니다 ! " 사또는 동그런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기막히다는 표시였다. "내 숱한 시객을 만났지만 이런 시를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오. 내 친구가 좋은 분을 소개했구려." 시를 아는 사또는 김삿갓의 시풍에 깜빡 반해버렸다.   술상이 나오고 취기가 도도해지자 두 사람은 비록 나이의 차는 있으나 십년지기처럼 흉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지자 사또는 정갈한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그리고 내 집에 온 것처럼 불편을 느끼지 말고 지내라고 누누이 당부를 하였다.   다음날  조반은 일찍 들어왔다. 사또는 오전중 공사를 보느라고 자못 바쁜 눈치였다. 김삿갓은  따뜻한 방안에서  홀로 뒹굴고 있노라니 세상근심 모두가 사라지는 듯했다. 점심상을 물리고 나니 사또가  몸소 김삿갓 방으로 들어왔다.   "혼자 무료하셨겠구려." "아닙니다. 사또님 덕분에 세상 편하오이다." "내 오늘 저녁에는 큰 잔치를 베풀까 하오. 더불어 이 근방에 글 깨나하는 양반들을 초청하여 시회를 겸할까 하니 , 김선비의 재주를 한번 보이도록 하시오."   글을 짓는 놀음이라면 어찌 김삿갓이 싫다하랴. 덕분에 푸짐히 먹고 놀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한 가지 청이 있소이다." 사또는 낯빛을 고쳐가지고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 "   "내게는 자식이 둘, 딸이 셋 있습니다. 큰 딸은 작년에 출가를 하였고 장남은 올해 열일곱으로 과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지방 향교(鄕校)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지난 달 부터 집으로 돌아와 홀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애가 과거를 볼 때 까지 스승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 사례는 톡톡히 하리다."   김삿갓은 자못 심각해졌다. 과거를 준비하고 있다면 이미 기초를 뛰어 넘어 수준 높은 경서나 문집을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김삿갓이 걱정하는 것은 가르치는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쳤다 손 치더라도 따라 공부하는   학동의 수준이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우선이고 , 또한 열심히 공부를 하였더라도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면 선생 노릇을 한 보람을 찾을 수 없다 여겼기에 그는 망설였다.   "어떻소이까?? 바쁜 일정이 아니라면 내 청을 들어주시오." 사또가 재삼 이렇게 말을 하자 비로소 김삿갓이 입을 열었다. "한낱 떠돌아다니는 과객을 그토록 생각하시니 고맙습니다. 하오나 소생의 글이 워낙 짧아, 감히 소임을 이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무슨 말씀이시오 ? 하나를 보면 열 을 알 수 있다 하였소. 그대의 시를 보고 읽는 순간 나는 오늘에서야  내 자식의  큰 선생님을  만났다고 생각하였소. 아울러 내 자식이 가히 아둔한 아이가 아니기에 가르치는데도 애를 먹지는 않을게요. 시경(詩經)에 중점을 두어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소. 꼭 부탁을 합니다."   김삿갓은 역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승낙을 하였다. "본인이 천학비재(賤學非才) 이오나 , 사또님의 지극한 분부가 있어 수락하오니   너무 큰 기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하하하하.. 역시, 그대의 겸사에 말이 지나치군요. 하긴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하였으니 그대의 겸양지사가 평소의 풍모를 보는 듯하오, 그대 같은 스승을 모시게 되어 아들놈도 크게 기뻐할 것이오."   이로부터 사또는 김삿갓을 "김선생님"이라 불렀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7) 가련과의 첫 만남. "이따 밤에 벌어지는 연회는 이곳 안변지방에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모일 겁니다.  내가 글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문자를 써가며 이야기를 하려고 무진 애를 쓸 것이오. 하며, 김선생을 보면 얕잡아 보려고 할 터인즉 , 잘 알아서 골려 주시구려." 사또는 빙그레 웃으면서 귀띔을 해주고  다시  동헌으로 나갔다. 이윽고 저녁이 되었다. 시회를 겸해 열리는 잔치는 동헌 곁에 있는 빈청에서 베풀어졌다. 초청받은 양반들은 이미 들어와 앉아 있었으며 기생들은 조붓하게 앉아 있다가   사또의 행차를 맞아 ,일제히 일어서 예를 갖춘 후 , 사또가 상석에 앉자 일제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편, 김삿갓은 사또의 권하는 손짓을 보고 사또의 왼쪽에 앉게 되었다. "여러분들 잘 오셨소이다. 내 오늘은 귀한 손님 한 분을 여러분께 소개하겠소이다. 이 분은 금강산에서 시로써 이름을 날려 시선이란 칭호까지 듣게 된 김선생 올시다." 자리가 정리되자 사또는 우선 김삿갓을 소개했다. 이어 초청된 양반들을 김삿갓에게 소개했다. "저쪽 팔자수염을 하신 분은 원생원(元生員)이고 , 그 옆에 코주부 영감은 서진사(徐進士)며, 바른쪽 꽁생원 같은 분은 문첨지(文僉知)고, 그 왼쪽 눈꼬리가 치켜진 분은 조석사(趙碩士)올시다." 김삿갓은 사또의 소개로 눈이 마주치는 그들과 가벼운 목례로써 인사를 나누었다. 아울러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학문의 깊이는 둘째 치고, 돈푼이나 있는 덕분으로 사또와 친교를 맺고 있는 모양으로 보였다. "저 네 분이 이곳 안변에 사걸(四傑)로 자못 이름이 높은 분들이오." 사또가 이쯤 말을 하자 네 사람 모두 한껏 점잔을 빼며 김삿갓을 쳐다보았다. (내 저것들 문전을 두드려 먹을것과 잠잘곳을 청했더라면 틀림없이 밥한술 주지 않고 박정한 소리로 쫓아냈을 것이다...) 김삿갓이 그동안 방랑을 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행태를 가름하여 그들 사인을  보건데 ,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 그들의 점잔빼는 태도가 더욱 밉살스럽게 보였다. "아니, 너희들은 뭣들 하는 게냐? 새로 오신 손님에게 인사 올리지 않고 ... " 사또는 기생들에게 호령을 내렸다. "예, 소첩은 설매라 하옵니다"  제법 큰형님 뻘쯤 되는 기생이 좌중에 먼저 고했다. 설매(雪梅)라 ..딴은 영락없는 기생 이름이로되, 매화치고는 나무가 고목이 되어 간다고 김삿갓은 생각 되었다. "소첩은 향현(香峴)이라 하옵니다." 향기 그윽한 언덕이라..이름이 좋아 보였다. "소첩은 은하(銀河)라 하옵니다. 역시 운치가 있는 이름이었다. 은하는 기울어 야삼경인데 임은 어이해 오시지 아니하신가.. 하는 시가 있지 않던가??   "소첩은 춘국(春菊)이라 하옵니다." 허허, 국화는 가을에 피어야 향기 높고 청초하거늘 어찌하여  봄에 피었느냐. 그러고 보니 몸이 사뭇 비대하다. "소첩은 소엽(素葉) 입니다." 야들야들하게 생긴 품이 어떻게 보면 바람에 흔들릴 것 같은 나뭇잎과도 비슷하였다.   "소첩은 가련(可憐)이라 하옵니다." 가련이 ? 별난 이름이구나. 가련하다니 무슨 슬픈 일이 그리도 많아 가련하단 말이냐. 나이는 방년 이십세 쯤이나 되었을까 ? 아릿아릿하게 예쁜 얼굴이 단연 군계일학 이었다. 이렇게 기생은 좌중의 사내 숫자에 맞춰 여섯이 들어왔다. 소엽이 사또 곁에 앉고 은하가 김삿갓 옆에 앉았다. 가련이는 서진사 곁에 앉았는데 둘은 벌써부터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로 보였다. 술잔이 오가고 계집까지 곁에 있으니 흥취가 서서히 올라갔다. "여러 양반님들께 김선생의 시 한 수를 보여 드릴 터이니 어느 분이 시제를 말씀하시오." 사또가 좌중에 말을 하자 코주부 서진사가 실눈을 뜨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술을 벌렸다. "당송 팔대시인(唐宋 八大 詩人)의 이름을 넣어  시를 지으면 운치가 있을 것 같소이다." 자기 딴에는 어려운 글제를 냈노라고 생각한 서진사는 턱주가리에 힘을 주어  목을 곧추세우는 통에 늘어진 볼이 더욱 늘어져 보였다. "당송 팔대시인이라 ..서진사, 거 참 멋진 시제를 내셨소이다. 얘들아, 당송 팔대 시인이 누구누군지 알겠느냐 ?" 사또가 이렇게 말하며 기생들의 얼굴을 살피자, 다소곳이 얼굴을 숙이고 있던 가련이가 얼굴을 들면서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소첩이 아뢸까  하옵니다." "가련이 네가 ? 어디 들어보자." 사또가 귀엽다는 듯이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가련이를 지긋이 건네다 본다. "첫째 이적선 (利謫仙- 李白)을 꼽사옵고 둘째로는 유종원(柳宗元), 황산곡 (黃山谷), 백낙천(白樂天), 두자미 (杜子美), 도연명 (陶淵明), 한퇴지 (韓退之), 맹동야 (孟東野) 등을 꼽사옵니다." "하하하하, 네가 잘도 아는구나. 기특하다." 사또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김삿갓은 가련이 ,글을 배운 기녀라고 생각했다. "자, 김선생 가련이가 당송 팔대가의 이름을 대었으니 그대는 이제 시로써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오." 김삿갓은 정중히 예를 보내고 붓을 들었다. 장중에 사람들은 어려운 시제 임에도 불구하고 오래 생각하는 바 없이 덥석 붓을 들어 화선지로 향하는 김삿갓의 손길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 이적선옹 골사상   유종원시 단수방     李謫仙翁  骨巳霜   柳宗元是  但垂芳 황산곡리 화천편   백락천변 응수행     黃山谷裡  花千片   白樂千邊  雁數行 두자미인 령적막   도연명월 구황량     杜子美人  令寂寞   陶淵明月  久荒凉 가련한퇴 지하처   유유맹동 야초장     可憐韓退  之何處   唯有孟東  野草長 이백의 백골은 이미 서리가 되었고 , 유종원도 이제는 이름만이 남았도다! 황산곡 안에는 천만송이 꽃잎만이 날리고, 백락천 가에는 기러기만 떼지어 날아가네. 두자의 미인도 지금은 적막할 뿐인데, 도연의 밝은 달도 쓸쓸한지 오래어라 애달프다 한은 물러가 어느 곳에 있느뇨? 오로지 맹동의 뜰에는 풀만 자라고 있구나.       .. 김삿갓의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이 없이 써 내려가는 솜씨와 글씨도 놀라운 일이지만 만들어진 글귀 또한 천하의 일품 이었다. 좌중은 넋을 잃고 말이 없었다. "선생님 , 실로 절묘합니다." 침묵을 깬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이었다. 그러니까  가련이 먼저 김삿갓의 시를 감상했다는 말이다. 사또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지, "아니다. 네 말이 틀렸다. 이는 절묘한 것이 아니라 귀신의 솜씨로다. 아아, 김선생 .. 당신은 실로 귀재요, 천재이오이다 !" 사또는 이렇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또의 극찬에 안변 사걸들은 말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 순간에 섣불리 나서서 마땅히 할 말 조차 없는 지경 이었다. 그저 어서 이 자리에서 피하고 싶은 생각들 뿐 이었다.   "기가 막힌 시를 보았으니 여러분들에 시흥도 솟았으리라 생각되오. 누가 한 수 읊어 보시려오. 가만 ..시제를 푼 ,서진사가 한 수 보여 주시려오 ?" 사또는 서진사를 꼬집어 지명했다. 그러자 서진사 얼굴이 금방 창백해졌다. "사또 죄송하옵니다만 오늘은 은연중 마신 술이 크게 취하는 듯합니다.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하여 가늠키 어려우니  기회를 훗날로 미뤘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 한 서진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허허, 무슨 술인지 취기가 걷잡을 수 없이 몰려오는군." 문첨지가 이렇게 재빨리 말을 하며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시늉을 해 보인다. 서진사 다음으로 자신에게 화살이 쏠릴 것 같아 미리 방패막이를 친 것이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8) 양반들의 김삿갓 골려먹기. 사또는 빙그레 웃었다. 다른 때 같으면 자기들의 유식함을 어떻게라도 드러내려고 별의별 문자를 섞어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하였을 것이나, 김삿갓의 시를 본 순간, 감히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 보이지 못했다.   사또는 이러한 그들의 심정을 가늠하는 터라 ,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오늘 귀한 손님을 모신 자리라  특별히 비장한 술을 내놓았더니 모두 크게 취하는 모양이구려. 그럼 신기에 가까운 시를 감상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꽃이나 희롱하며 놉시다."   사또의 말이 끝나자 안변사걸은 일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연회는 밤이 늦은 후에 끝났다.  다음날 사또는 자기 방으로 김삿갓을 불렀다. 김삿갓이 사또의 방으로 들어가니 거기에는 사또의 큰 아들이  있었다.   "인사 올려라. 네 스승님이시다." 사또의 말에 아들은 성큼 큰 절을 올린다. "유태선이라 하옵니다. 스승님에 대한 말씀은 저희 아버님을 통하여 익히 들었습니다. 소생 아직 우매하오나 스승님의 가르침을 정성껏 따르겠습니다."   사또의 아들 태선을 본 김삿갓은 그의 풍모와 말씨를 보아, 큰 재목이 될 인물임을 직감했다. "내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아는 대로 깨우쳐 줄터이니 같이 노력하세." 김삿갓은 이렇게 답례하였다. 이로써 유태선와  김삿갓은 사제의 의를 맺게 되었다.   이날부터 별당에 글방을 차려놓고 김삿갓과 태선과의 글공부는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태선은 총명하여 한 가지 이치를 깨우쳐 주면 그것을 여러 가지로 응용하는 능력이 매우 우수하였다. 따라서 김삿갓은 총명한 제자를 두었음에 만족하였고 태선은 어떤 어려운 문제도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 쉽게 가르치는 스승의 학식에 감탄하였다. 이러한 김삿갓의 실력을 아들을 통해 전해 듣고 있는 사또는 매우 기뻐하였다. 더불어 김삿갓을 위하는 정도가 극치에 달했다.   한편, 뜻밖에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근본조차 인수 없는 젊은 과객이 나타나 자신들이 갖던 사또와의 교류가 잠잠해져 불안감을 갖던 안변사걸들은 어떻게 해야 이 녀석을 찍소리 못하도록 콧대를 꺾어놓나 하고 ,  자나 깨나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진사의 큰 사랑으로 사걸이 모이게 되었다. 지난번 김삿갓의 환영연 이후 사걸이 처음으로 다 같이 모인 것이다.   "별고 없으셨소이까?? " 문첨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이들이 첨지나 생원등으로 서로 부르지만 생원에 급제한 일도, 첨지의 벼슬을 지낸 바도 없었다. 서진사 조차도 자신의 할아버지때 진사에 급제했을 뿐 , 정작 본인은 진사시에 응시조차 못했다.   이렇듯 이들은 서로의 상대방이 좋아할 호칭을  마음대로 불러 제치고 있었으나 , 이들은 모두 부농들이어서 소작도 많이 치고 , 행세깨나 하였기에 이들의 호칭을 문제 삼아, 감히  따지고 나설  안변 사람들은  없었다.   "여보 문첨지. 별일이 없었다니 , 그래 자네는 지난번 그 일이 있은 후 마음 편하게 지냈단 말인가 ? " 서진사가 핀잔을 주듯 이렇게 말을 하자 조석사가 잇달아 한마디 한다. "난 낯이 뜨거워 못살겠소.  그놈의 글을 따라갈  재간은 둘째 치고 , 난데없이 나타난 삿갓 때문에 사또와  우리 사이가 소원해 지겠기에  여간 걱정이 아니란 말씀이오."   모두 한 마디씩 불평을 해댔다. 문첨지가 곰방대를 뻑뻑 빨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지방에서 명문거족으로 글 잘하는 양반으로 행세해 왔는데 그놈에 삿갓인지 패랭이인지 하는 젊은 놈 때문에 , 자칫 그동안 우리가 쌓아 온 명성에 먹칠을 하게 생겼으니 잘들 생각하여 그놈을 쫒아 낼 방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오." "쫒아낼 수만 있다면 쫒아 내야지요. 헌데 사또가 자기 아들 훈장까지 맡기면서  편애하고 있는데 순순히  쫒아 내줄까 ?" 조석사가 고개를 갸우뚱 하였다.   "좋은 계책이 있소이다." 서진사가 나섰다. "계책이라뇨?? " "사또도 삿갓놈의 신분과 내력은 모르고 있지 않소이까?  그놈의 애비가 개백정인지 어느 댁 하인인지 근본을 아무도 모르잖소?? 또, 그놈이 대명천지에 삿갓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면  필시 떳떳한 놈은 아닐게요. 허니 , 그놈의 내력을 은근히 물고 늘어지면 본색이 탄로 날까 두려워 야반도주 할 것이 틀림없소이다. "   "거참 좋은 계책이오. 삿갓이 상놈이라면 어떻게 사또의 자제를 맡겨 가르치게 한단 말이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놈의 내력을 알아보면 되겠소이까?? "  조석사가 물었다. "내 우리 집에서 잔치를 걸판지게 준비할 것이니 경비는 우리 네 사람이 같이 부담 하십시다. 나만을 위하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사또를 초청하자는 말씀 입니다. 명분이야 사또의 노고를 위로한다고 하면 그럴듯하지 않겠소? 사또가 오면 자연히 그 삿갓 녀석도 올 겁니다." "경비는 얼마씩 추렴하면 되겠소이까?? " 원생원은 돈이 들어간다는 말에 신경을 쓰며 물었다. "이십 냥씩만 내시오. 그럼 육십 냥이고 내가 사십냥을 내어 모두 백 냥으로 차립시다." 쌀 한 가마가 일곱 냥이 되니까 백 냥이면 너끈할 것이오." 서진사가  힘주어 말을 했다. "헌데 사또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시려오?? " 전에도 사또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헌데 사또는 민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한 일이 있던 터이다. 문첨지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또가 오지 않으면 삿갓만이라도 부를 것이니 걱정 마시오." 그들은 마침내 결정을 하고 잔치준비에 들어갔다. 여러 하인을 거느린 서진사는 사랑채에 앉아서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하인에게 이르며 잔치준비에 일일이 간섭했다. 사또를 초청하는 일은 문첨지가 맡아 관아의 일이 파할 시간쯤 되어 사또를 찾았다. "사또 나으리 ! " 사또는 마침 공무를 마치고 김삿갓과 술이나 나눌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누구요 ? " "문첨지 올시다. 오늘 밤 서진사 댁에서 사또님을 모시고 소연이나마 베풀고자 하오니 왕림하여  주십시오." "아니 갑자기 웬일이오?? " 일전에 이들의 청을 거절한 일이 있었기에 사또가 그 내력을 아니 물을 수가  없었다. "공사다망하신 사또님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릴까 하고 마련한 자리오니 물리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또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소이다. 내 언젠가 한 번 거절한 일이 있은즉, 성의를  다시 거절하기 어려우니 가겠소이다." 문첨지는 좋아라 하며  돌아갔다. 이들이 김삿갓을 곤경에 빠트릴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때 , 김삿갓은 글방에서 태선에게 시경을 강론하고 있었다. 태선에게 시경을 강론한지 열흘을 겨우 넘겼는데 그의 지식은 놀랄 만큼 진보되었다. 이것은 태선의 머리가 비상한 탓도 있지만 삿갓의 가르침이 분명하고도 막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부가 끝날 무렵 , 삿갓은 서진사네 집에 연회가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사또를 초청하는 것만 같았다. 만약 그 어떤 저의가 없다면 지난번 사또 면전에서 은근히 곤욕을 당한 그들이 사또를 청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사또보다 먼저 서진사 집으로 가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리라 마음먹었다. 김삿갓은 먼저 출발 하겠다는 뜻을 사또에게 고하고 사령을 앞세우고 서진사 집으로 향했다. "훈장님 , 저기 고래 등처럼 커다란 기와집이 서진사 어른 댁입죠." 사령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커다란 집이 저녁 어스름에 싸여 있었다. "굉장히 큰집이구나."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29) 김삿갓의 양반 골려먹기. "아마 아흔 칸이 넘을 것이라고들 말하는뎁쇼." 앞선 사령이 말을 하였다. 과연 그 정도가 될 것  같았다. 김삿갓은 서진사가 거드름을 필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서진사 집에 당도했다. 집안은 잔칫집답게 사방에 초롱불이 밝혀져 있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 다녔다. 김삿갓은 누구를 찾을 것도 없이 성큼성큼 사랑채로 향했다.   그가 사랑방 앞에 당도하니 방안에서는 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 자연 양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녀석이 맥을 못 출 것이 아니요 ? 첩의 자식도 어깨너머 글줄이나 익혀 문장깨나 할 줄 안다고 거들먹거릴 수도 있으니 글 잘 한다고 모두 양반이겠소 ?  두고 보시오. 그놈도 서자 아니면 똑똑한 상놈일거요."   김삿갓은 이들이 자기의 내력에 대해 쑥덕공론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다시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그놈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사또는 사람이 없어 그런 놈을 훈장이랍시고 앉혀놓고 용의 알처럼 떠받들고 있단말야 ... "   김삿갓은 부하가 치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뛰어 들어가 늙은 것들의 상투를 잡아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라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그는 마당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큰 기침을 몇 번 하였다.   "거 누가 왔소?? " "예, 불초 삿갓입니다." 사랑문이 드르르 열리며 문첨지가 빼꼼히 내다보았다.   "오 , 훈장께서 오셨군! 그럼 사또께서도 행차하셨소?? " "미구에 납실 것입니다." 김삿갓은 섬돌위로 올라서며 문안인사를 올리고 안으로 썩 들어갔다.   순간 ,방안의 공기가  딱딱해졌다. 양반들은 장죽 담뱃대만 빨고 있을 뿐 삿갓과 얼굴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또는 언제 납신답디까?? " 서진사가 담뱃대를 박달나무 재떨이에 탁탁 털면서 물었다.   "곧 납실 것 입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문간이 소란스러웠다. "사또께서 납시는 모양이네." 앉아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대문간으로 달려갔다.   사또는 사인교를 타고 납시었고 공식 행사가 아니어서 수행원은 많지 않았다. "사또 어서 납시옵소서. 이렇게 찾아 주시니 감격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서진사는 가마 옆에서 연실 굽실거리며 사또를 맞았다.   사또의  입장으로 연회는 바로 시작되었다. 연회 장소는 여덟 칸이나 되는 별채 거실로 애당초 잔치장소로 특별히 지은 곳이다. 잔칫상은 산해진미로 가득차 있었다. 십장생이 그려진 열두 폭 병풍을 배경으로 사또가 자리를 잡았다. 김삿갓의 자리는 말석으로 배정 되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날 사또의 빈청에 모였던 그 사람들뿐이었다. 기생도 그때 그 기생들이었다. 술잔이 오가고 기생들의 거문고와 장구 소리가 흥을 돋았다.   "애들아 이제 좀 쉬거라." 서진사가 손을 휘저어 기생들의 여흥을 중지시켜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또 나으리, 참 즐거운 밤이올시다."  서진사가 축 늘어진 턱을 들어 말문을 열었다.   "서진사 덕택에 모처럼 즐거움을 맛보는구려. 정말 즐겁소." 사또도 취기가 거나해져 기생의 허리를 감싼 채 대답했다. "사또 나으리, 사람은 무엇보다도 근본이 중요하지 않소이까?? " "근본 ? 그야 물론 중요하지요. 바탕이 좋아야 합니다. 말과 소 같은 짐승도 혈통을 가려 쓰는데 항차,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소 " 김삿갓은 이  작자들이 서서히 서론을 꺼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의 말을 유심히 들으며 말을 꺼낸 의도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사또 나으리, 백로가 노니는 곳에 까마귀가 끼일 수 없는 법, 사람에게도 반상(班常)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지 않소이까?? " "반상이 ? 그야  물론이오." 사또는 무심결에 이렇게 말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진사의 어투가 개운치 않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혹시 이 자리에 김훈장이 끼여 있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번뜩 들었다.   "서진사, 뭐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소이까?” 사또는 정색을 하고 서진 사에게 물었다. "아니올시다. 요즘 듣자 하니 내로라하는 집안에 자제들이 천한 것들과 종종 어울린다는 말이 있어 여쭌 말씀입니다." 사또는 서진사의 뒷말이 자기를 들으라는 말로 들려 내심 불쾌하였다. 출신도 모르는 젊은 과객을 빈객으로 대접하며 아들의 훈도를 맡긴 것이 이 지방 토호들에게 상서롭지 못한 일로 보일 법도 한 일이었지만  아들의 진취적인 공부를 이끌고 있는 김삿갓이 아닌가?? 사또는 짐짓 모른 체하고 한마디 했다.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내 조사를 하여 엄중히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이니 너무 염려를 마시오. 자 , 취홍도 도도하니 우리 저 김훈장의 시를 청하여  감상해 봅시다." 사또가 이쯤 말을 하자 나머지 양반네들은 더 이상 군말이 없었다. "글제는 무엇으로 하면 좋겠소?? " 사또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하자  원생원이 팔자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한다. "오늘밤 서진사께서 반상에 대해 말을 하셨으니 양반이라는 글자로 하면 좋겠소이다." "음, 양반이라. 뭐 그것도 좋지. 김훈장, 어디 멋들어진 시를 보여 주시겠소 ? " "예, 사또 나으리." 김삿갓은 서진사 일당의 저의를 알고 있는 터라 주저 없이 붓을 들어 단숨에 써 내려갔다.      .. 彼兩班 此兩班          班不知 班何班           피양반 차양반   반불지  반하반 朝鮮三性 其中班       駕洛一邦 左上班        조선삼성 기중반   가락일방 좌상반 來千里此 月客班       好八字令 時富班         내천리차 월객반   호팔자령 시부반 觀其兩班 壓眞班       客班可知 主人班        관기양반 압진반    객반가지 주인반.                ... 이 양반 저 양반 하고 양반 타령이구나 / 양반이란 무슨 반이 양반인지 알 수가 없네 조선에는 세 가지 성이 그중에 양반인데 / 가락국 에서는 김씨가 으뜸가는 양반이었네 천리길을 왔으매 이 달에는 내가 손님 양반인데 / 돈 많고 팔자 좋으면  요즘은 부자가 양반일세 이따위 양반들이 진짜 양반을 짓누르니 / 손님 양반이 가히 주인 양반들에 지체를 알겠도다. "아니 ? " 글을 읽고 난 서진사는 물론 나머지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얼굴이 붉어졌다. "왜들 놀라시오 ? 김훈장의 글은 요즘세태를 그대로 묘사하는 걸작이외다." 사또는 내심 통쾌하였다. 안변사걸이 글을 보고 놀란 까닭을 사또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술자리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그러나 서진사 등은 어떻게 하여야 이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지 대책이 묘연했다. 양반 시비로 삿갓을 곤경에 몰아넣으려다가   자신들이 진짜 양반을 몰라보는  무식한 양반으로 되었으니 , 분한 마음보다도 뭐라 공박할 말이 냉큼 떠오르지 않았다. "여봐라 , 네년들은 대체 뭣들하고 있느냐 ? " 사또는 기분을 바꿀 양으로 기생들을 호령했다. "자, 이 술잔을 받으셔요." 오늘도 가련은 서진사 옆에 앉아 은잔에 맑은 약주를 찰찰 넘치게 따라 서진사 입가까지 올리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었다. "앗따 , 그년.. 애교 한번 간드러지는구나 ! " 사또는 일부러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돌리려고 애를썼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0) 가련 과의 은밀한 만남. 김삿갓은 안변사걸들이 넋을 잃은 것을 보자 심히 통쾌하였다. 뻘줌해진 연회 분위기는 가련이 때문에 바뀌었다. "참 훈장님은 시상이 무궁무진하신가 봐요.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말이예요. 말이야 바로 말이지 요즘 세상에는 돈 있으면 양반 행세를 하잖아요??   족보도 산다는데요. 뭘." 가련이가 이렇게 말하자 문첨지가 호통을 쳤다.   "예끼 이년, 방자하게 어디서 입방아를 찧느냐 ! 아직 젖비린내 나는 것이 뭘 안다고." "호호호, 첨지님은 항상 쇤네를 미워하시더라. 언제 살풀이를 해야겠어요." 가련이가 이렇게 받아넘기자 문첨지 입이 벌어진다. "살풀이 거 좋다. 네 집 안방에서 하자꾸나. 오늘밤에 가랴 ?"   "아이, 서진사 어른 허락부터 받으셔요." "허허, 그런가?? " 웃음이 한바탕 일자 좌중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훈장님, 시 한수만 읊어 주셔요. 쇤네의 청을 들어 주시겠죠 ? " "애야 ,너도 시를 아느냐 ? " 조석사가 핀잔을 준다. "석사님도 모르시는 말씀을 하시네요. 쇤네는   시를 지을 줄은 모르오나 읽어 색일 줄은 안답니다." 가련이가 곱게 눈을 흘기며 조석사를 반박했다. 이런 가련의 청순한 교태가 청춘의 김삿갓의 가슴에 무엇인가 찌르르 전해진다.   "옳지, 너는 당송 팔대가도 잘 알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네가 시제를 한번 정해 보거라." 사또가 가련을 그윽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했다. "가인 (佳人) 이라 하면 어떠실는지요."   "아름다운 사람이라 , 그것 좋네!! " 김삿갓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붓을 들었다.         ..   抱向東窓 弄未休  (포향동창 농미휴) 그대 살포시 안고 하룻밤을 지새울 제   半含較態 半含着  (반함교태  반함착) 그 모습 수줍던가. 교태롭다 할거나    低聲暗問 相思否  (저성암문 상사부) 내가 좋으냐고 나직이 속삭이니   手整金釵 小點頭   (수정금채 소점두) 금비녀 매만지며 고개만 끄덕이네         ..   "하하하하, 역시 훈장님다운 솜씨요. 마치 서진사와 가련이의 모습을 그린 것 같소이다." 사또는 탄복 하였다. 사또의  말을 들은 서진사는 처음으로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었다. 가련은 새카만 눈을 들어 김삿갓을 은근히 쏘아 보았다. 그리고 눈길이 마주친 김삿갓에게 싱긋 웃음을 보여 주었다. 추파였다. 김삿갓은 가슴이 떨려왔다.   안변 사걸들도 이 글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제각기 몇 번씩 낭송하며  기생의 허리를 껴안으며 술잔을 들었다.    ..   연회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온 김삿갓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옷을 입은 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동짓달도 중순으로 접어들자 날씨가 매섭게 차가워졌고 눈까지 많이 내렸다. 겨울이 한층 깊어진 것이다.       ..   김삿갓은 태선을 가르치며 한겨울을 사또 곁에서 보내리라 마음먹고 있는 터라 되도록 하루하루를 편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하였다. 어차피 방랑에 나선 몸 , 한두 해로 끝날 방랑이 아니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눈이  소담스럽게 내린 어느 날, 관노 한 놈이 작은 쪽지를 들고 김삿갓을 찾아왔다. "훈장님, 소인입니다." 관노는 김삿갓 방문 앞에서 그를 이렇게 찾았다.   김삿갓은 방문을 열었다. "자네가 , 무슨 일인가?" "예, 어느 총각녀석이 훈장님 드리라고 이 쪽지를 주고 갔습니다." "쪽지를? " "예, 여기 있습니다."   김삿갓은 쪽지를 받았다. 관노가 물러가자 그는 방문을 닫고 쪽지를 펴 보았다. 쪽지에는 언문으로 또박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김선생님 전상서. 소녀가 이렇게 외람되이 글월을 올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오늘은 천지가 온통 은백색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런 때 선생님의 시를 경청할 수 있다면 무상의 즐거움을 얻겠나이다. 원컨대 금일 저녁 소녀의 누옥으로 납시어 주옵소서. 지필묵을 준비하고 오시길 기다리겠나이다.                                       가련올림.   내용은 평범한 초청장 이었으나 ,언문이지만   가련의 글씨가 달필인 것에  김삿갓은 저윽이 놀랐다. 쪽지를 읽은 김삿갓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인양 교태가 자르르 흐르면서도 가을 하늘아래 피어있는 한 떨기 국화처럼 청초하기 그지없는 가련의 자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야지. 암  꼭 가고말고." 김삿갓은 혼잣말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저녁 공부가 끝나자 김삿갓은 바쁜 걸음으로 관아를 빠져나왔다.   협문지기가 김삿갓을 보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물었다. "훈장님 어디를 가시는뎁쇼?? " "내 오늘 밤 늦을 것이니  혹시라도 사또님이 찾아 , 묻거든 뽕을 따러 갔다고 말씀드리게." "뽕을요 ? 겨울에도 뽕이 있습니까?? " "암, 겨울에도 따는 뽕이 있다네." 김삿갓은 이렇게 관아를 나선 후 재빠른 걸음으로 가련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통인에게 자세히 물어 두었던 터라 가련의 집을 찾는데는 어렵지 않았다. "이리 오너라." 그는 대문 앞에서 낭랑한 소리로 아랫것을 불렀다. 이내 대문이 열리더니 계집아이가 나타났다. "뉘 시온지요 ? " "삿갓이 왔다고 가련 아씨께 알려라." "그러셔요?? 훈장님이시군요. 어서 안으로 드셔요. 우리 아씨께서 기다리고 계셔요." 계집애의 호들갑이 보통이 아니었다. 김삿갓은 계집애가 안내 하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어서 오셔요." 분홍빛 호박단 치마저고리를 입은 가련이가 섬돌 아래까지 내려와서 김삿갓을 맞았다. "그간 잘 있었나??" "네, 쇤네는 무고하였사옵니다." 가련은 김삿갓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인도했다. "오늘은 웬일인가 ? 나 같은 훈장을 다 초청하고." 가련은 눈을 곱게 흘기며 말을 했다. "전 혹시 안 오시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을 졸이고 있었어요." "허허 , 내가 무슨 뚝심으로 안 올수가 있겠나?? 오히려 감지덕지 하며 달려왔네, 헌데 .. 오늘 이후 내 두 다리가 성하게 될지 그게 염려스럽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가련이는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김삿갓을 요염하게 바라보았다. "자네 눈치가 그렇게도 없었나?? 서진사가 이 꼴을 본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게 아닌가??" "아이 , 훈장님도 서진사와 제가 어쨌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하긴, 절 좋아는 해요. 별의별 소리로 나를 어찌 해 보시려는 것 같은데 , 기생의 몸으로 부르면 아니 갈수도 없는 일이라서 상대는 하고 있습니다만 ,  별 깊은 관계는 아닌 걸요." "알았네. 내 별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닐세." 술상이 들어왔다. 김삿갓은 이전과 달리 가련과 단둘이서 술상을 놓고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훈장님. 처음 뵈올 때부터 아무래도 보통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숨기고 계신 일이 있으신 것 같아요." 술이 몇 잔 기울여지자 가련이 말문을 열었다. "그건 어째서인가 ? " 김삿갓은 취기가 오른 눈으로 가련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글쎄요. 삿갓을 쓰고 계셔서 그런가 ..호호호 , 아녜요, 훈장님의 시를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거,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게. 자네가 자꾸 훈장을 찾으니까 절로 시가 떠오르네." "어머 .. 그렇지 않아도 한 수 청하려고 했는데 들려주세요."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련이가 내미는 붓을 들었다.             .. 세상수운 훈장호     무연심화 자연생   (世上誰云 訓長好   無燃心火 自然生) 왈천왈지 청춘거     운부운시 백발성   (曰天曰地 靑春去   云賦云詩 白髮成) 수성난청 칭도어     잠이역득 시비성    (雖誠難聽 稱道語   暫離易得 是非聲) 장중보옥 천금자     청촉달형 시정상   (掌中寶玉 千金子   請囑撻刑 是情相) 세상에 누가 훈장노릇을 좋다고 했는가 / 연기도 없이 속은 타서 심화는 절로 나는데 하늘천 따지 하는 사이에 청춘은 지나가고 /  부가 어떻고 시가 어떻고 하는 사이 백발이 되네 비록 지성으로 가르쳐도 좋은 소리는 듣기 어렵고 /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궂은소리 듣기 십상이네 손아귀에 보석과 천금 같은 자식을 맡기면서 /  때려서라도 잘 가르쳐 달라는 청이 딱하기도 하여라.         . "호 -" 시를 읽고 난 가련이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감탄을 했다. 그러면서 왈천왈지 ..하늘천 따지 하는사이에 청춘은 지나갔고의 구절에 마음이 딱 꼿혔다. 그것은 가야금 장고 소리에 청춘이 지나가는 자신의 처지와도  같은 것 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떤가?? " 김삿갓은 글쓰기를 마친 후 술 한잔을 기울이고 나서 물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1) 가련과 보내는 밤 " 훈장 노릇이 그렇게도 괴로운 일인가요 ? "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 그러니 훈장님 훈장님 하지 말게." "그럼 뭐라 부르지요 ?" "자네 마음대로 .." "그럼 , 서방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그거 좋군!! "   두 사람은 여기서 말을 멈췄다. 가까운 곳에서  밤 개가 짖는 소리가 나는 듯한데 , 그 소리가 무엇엔가 파묻혀 ,아득하게 들린다. 이순간, 밖에서 눈이 내리는지 방안의 공기는 잠잠하고 촛불은 흔들림 없이  고요한 빛을 내고 있었다. 김삿갓은 갑자기 가련을 안아 보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서방님. 서방님께서 지은 신 시가 왼지, 소첩의 신세를 읊은 것 같아 눈물이 나려 하는군요." "아니 그건 내 신세타령을 한 것 인데 자네 처지와 같다니 그건 무슨 말인가 ? " 김삿갓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감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은 가련이 입에서 나온 , 서방님과 소첩이라는 말 때문 이었다. "권주가를 부르고, 가야금과 장고소리에  저의 꽃다운 시절이 모두 지나가 버릴 것 같아서요." "허허 , 그럴 법도 하군. 허나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모두 다  그렇게 지나는걸 ..." "그럴까요?? " "그렇다니까 , 그러니 자기 생각대로 뜻있게 살아가면 되는걸세." "서방님 ,소첩도 부모님 덕분에 시문을 좀 배워 알고는 있지만 서방님 같은 시제는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서방님 ,소첩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한 가지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 " "뭔가? 말하여보게." 김삿갓은 가련이 기생의 몸이다 보니 말을 함에 있어, 해라를 하여도 될 것이나 혀가 돌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가련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엉거주춤한 반말이 되었다. "서방님을 곁에서 모시면서 시문을 배웠으면 해서요 ..." "이번에는 가련의 훈장 노릇을 하란 말 인가 ? 하하하 ..이러고 보니  다 뜻이 있어 날 불렀군 그래."   "달리 생각지는 마세요. 첫째로는 서방님이 좋으니까 곁에서 모시려고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시가 좋아 배우려는 것이에요. 들어 주시겠어요 ? " 가련이는 말을 하며 엉덩이를 방바닥에 끌듯 붙여, 삿갓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그러다간 이 안변 땅에서 쫓겨나기 십상이지." "그건 또 왜요 ? " "사또 자제의 훈장 노릇을 하는 것도 시기가 나 , 나를 쫒아 내려는 사람이 많은데 , 한 발 더 나아가 자네, 가련이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나보게. 나를 기둥서방이라고 점찍어 배 아파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걸세."   "서방님 , 제가 누구에게 매인 몸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 "우선 서진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게야." "서진사가요 ? 호호호호 ..." 가련이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 영감이  제게 침을 흘리고는 있지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지난봄에는 제 머리를 얹어 주겠다며 이천 냥을 줄 테니 당신 ,소실로 들어오라고 며칠을 두고 치근덕거렸지요." "그래 , 거절했단 말인가 ? " "거절 했지요. 누가 그런 영감탱이한테 순결을 바치겠어요?? " "순결 ? " 삿갓은 눈이 크게 떠졌다.  기생이 순결이라니 .. 별스럽게 들리기 까지 했다. 그러자 가련이 눈치를 채고 .. "서방님은 기생에게는 순결이 없는 줄 아세요?? " "글쎄 , 정절이라는 말은 들은바 있으되 순결 이라는 말은 아직 들은바 없네."   가련이는 갑자기 샐쭉해 지더니 한숨을 푹 하고 쉬었다. "기생이 순결을 말하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가당치 않지요. 하지만 소첩은 아직 동기 (童妓)예요. 여자는 첫 정을 준 남자를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하는 법이에요. 우리 같은 기생들도 마찬가지죠. 그동안 머리를 얹어 주겠다는 사내들은 많았지만 어차피 사내들 틈에서 시들어 갈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첫 정 만큼은 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바치고 싶었지요."   김삿갓은 가련의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평생 처녀의 몸으로 늙어 가겠군." "호호호 ..걱정 마세요. 가련이의 처녀성도 이제는 경각에 달렸으니까요." "경각이라니 ? " "아이참 , 서방님도 어쩜 그리 둔감하세요. 제 머리는 오늘밤 서방님의 손으로 정히 올려질 거예요."   이 말을 듣자 김삿갓은 가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  .. 가련의 첫 정의 상대가 되나 ? " 김삿갓은 어림없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건 외람되오나 제가 결정할 문제여요. 서방님, 부디 제 곁에 오래 있어 주세요. 제가 서방님을 편하게 모실 수 있어요. 싫다 하시면 기생 질을 못해도 좋아요."   김삿갓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가련이와 정이 들더라도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하룻밤 불장난이라면 모르겠지만... 김삿갓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련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듯한 손이 그녀의 마음을 손에 쥐어 보는 것 같았다.   "허참 이거 정말 ,큰일이군!! " 김삿갓은 이런 마음이 앞섰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따로 놀았다. 가련의 앵두 같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 보았다. 가련의 입에서  흥건한  향기가 났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마신 향기로운 술 냄새였다. 김삿갓은 가련의 목덜미를 자신의 팔로 감아 더욱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가련의 입 속으로 넣었다. 코끝에 가련의 깊은 숨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가련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속숨을 아낌없이 교환했다. "아아 ..이러면 안되는데..." 김삿갓의 머리속에선 가련을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끊임없이 샘솟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가련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가련이 삿갓의 손을 살며시 걷어냈다. "서방님 잠깐만 .." 가련은 김삿갓의 성급함을 말렸다. 난데없는 가련의 제지로 김삿갓은 머쓱해졌다. "상 좀 물리고 , 금침을 펼게요."   가련의 의도가 늦게나마 파악된 삿갓은 무안의 웃음을 지었다. "자네로 향하는 마음이 너무 성급해 미안하네..." 김삿갓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가련은 눈동자를 위로하고 삿갓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안해진 김삿갓은 빠른 손놀림으로 주안상을 윗목으로 물리는 가련의 모습을 멍 하고 보다가 술이 취한 척  그 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서방님, 서방님..." 상을 물리고 비단금침을 펴놓은 가련은  술 취해 잠든 척 누워있는 삿갓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자신의 입을  삿갓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불렀다.  삿갓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성급했던  무안감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을 가련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아이참 .." 가련은  술 취한 척 누워있는 삿갓의 옷을 살며시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활활 타던  황촛불을 끄고  바스락 소리를 내며   옷을 벗더니 삿갓 곁으로 파고들었다. 팔팔한 젊은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니 열정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애무했다. 마치 비단잉어를 만지듯 가련의 몸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내 언문 시조를 한수 읊을까 ?" 좀 전까지 취한 척 했던 삿갓이 속삭이듯   가련에게 말했다. "그러셔요." 이렇게 말을 한 가련의 입에서는 더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큰 솔밭 밑에 작은 솔밭 .. 작은 솔밭 아래 옹달샘 ..옹담샘을 돌아가니 여우굴이 나왔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 ..." 삿갓은 가련에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을 했다. "얼굴이지요. 큰 솔밭은 머리털이고 작은 솔밭은 눈썹일 테고 ..여우 굴은 콧구멍이 아니겠어요??" "참말, 맞았다..." 삿갓은 어둠속에서 빙긋이 웃었다.   삿갓이  가련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다가 살금살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 수 읊으랴 ?" .. "농담하시면 싫어요."  가련은 샐쭉 눈을 흘겼다. 삿갓은  가련의 몸을 어루만져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을 했다.   "창 밖에는 동지섣달 함박눈이 내리는데 금침 속에서는 봄을 맞아 복숭아 두 알이 향기롭게 익었도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언덕아래 옹달샘은 월궁 선녀가 목욕하는 자리인가 ? " 김삿갓은 이렇게 읊조리며 가련의 옥문을 더듬었다. "아이 ... " 가련은 몸을 꼬았다.   쌍심지에 불을 붙인 듯 활활 타오르는 삿갓의 욕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삿갓은 가련의 몸 위에 포개졌다. 가련의 아래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삿갓은 냄새에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처(妻)와 첫날밤을 맞았을 때와 같은 냄새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김삿갓은 느지막이 눈을 떴다. 어느 결에 일어났는지 가련은 이미 몸단장을 곱게 한 뒤였다. "잠도 곤하게 잘 주무시네요." 가련이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자네 탓일세.." 잠이 덜 깬 삿갓의 능청스러움에 가련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눈은 게 눈처럼 샐쭉 흘겼다. "예쁘다..." 누워서  올려다보니 가련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2)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운명 .. 가련과의 영원한 이별.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김삿갓은 항상 안변을 떠나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가련과의 사랑에 얽매어 좀체 , 다시 길을 떠날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가련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항상 걱정이 되는 것은 혹시라도 가련의 몸에 아기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었다. 가련과 일생을 같이 한다면 모르겠거니와  김삿갓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처 없는 방랑길에, 한순간 불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저지르고 있는 일인데 만일 아기가 생긴다면 자신 보다 가련의 불행이요, 아이의 불행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 때문에 김삿갓의 마음이  이곳 안변에 더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사또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더니 사또가 펄쩍 뛰었다. "이왕 방랑길에 나섰음에 ,  무엇이 그리 바쁘단 말이오. 우리 집 아이가 급제 하는 것이나 보고 떠나도록 하시오. 누가 가르친 아이인데 결말을 아니 보고 떠난단 말이오?? " 사또는 김삿갓을 극구 만류하였다. 사람과의 일로 ,거만이나 아니꼬운 사태에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지만 인정과 도리에는 약한 김삿갓,  인정에 얽매어 마냥  속절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사또의 자제가 알성시에 응시하여  장원은 아니었으나 급제를 하여 한양으로 떠났다. 그러자 안변 일대에 돈 깨나 있는 집안에서는 김삿갓을 독선생으로 모셔가려고 난리가 났다. 그들은 사또에게 별의별 청을 하는 등  한동안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사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김삿갓을 편하게 하고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해 가을이 가고 겨울도 가고 봄이오자  김삿갓은 이제는 기필코 떠나리라  결심을 했다. 지난 일 년여처럼 편히먹고 계집과 잠자리를 즐기려고 고생하는 아내와 어린자식을 두고 가출한 그가 아니었다. 이곳 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면서 후한 대접보다는 박대를 받는 것이 오히려 편했고,  또 글로써 그들을 매도하여 질타하는 것을 보람과 즐거움으로 여기는 김삿갓이 아니던가??   어느덧 사월이 되어 푸른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산야는 진달래의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새봄 바람에 얹혀 삿갓을 쓰고  훠이훠이 도포자락을 날리며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 삿갓은 가련이와 술상을 마주한 자리에서 슬며시 말을 꺼냈다.   "임자, 내가 그동안 너무 바깥세상을 외면하고 지냈네. 사또의 은혜와  자네의 따사로운 품속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었지. 이제 봄도 되었으니 북쪽으로 두만강까지 두루 유람을 하였으면 하네." 김삿갓이 말을 마치자 가련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제 곁을 떠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잠깐 외지 바람을 쏘이겠다는 것이지.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 올 것 이니 걱정 말게나." "그렇게나 늦게요 ? " 김삿갓의 방랑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련은 겨울이 오기전 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모양이다.   "자고로 시인 묵객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는 법이네. 그러면서 자기의 시를 살찌울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지. 내, 일정 전 이라도 자네 품이 그리우면 그대로 돌아 올 것이니 너무 염려는 말게나." 김삿갓은 되도록 가련이를 안심시켜 주려고 이렇게 말을 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가련이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서방님 뜻이 그러하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꼭 돌아 오시는 거죠 ?" 몇 번이라도 그녀는 다짐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틀림 없대두. 함흥, 북청으로 해서 두만강 까지 갖다 오려면 빨라야 늦가을 쯤 되겠지..."   "꼭 돌아 오셔야 해요. 만약 동짓달까지 서방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가련이는 죽고 말거예요." "죽어 ? " 김삿갓은 가슴이 뜨끔했다. "네 , 저를 살리려면 꼭 그때까지 돌아오세요." "돌아오지" 허나 자신 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이별을 앞둔 그날 밤 , 여느 날보다 더  두 사람의 사랑은 불보다 뜨거웠다.   다음날 아침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시를 한 수 지었다. "막상 길을 떠나려니 나도 왠지 서글프구나. 붓을 주게." 그의 심정은 매우 착잡했다. 오가다 만난 인연이었지만 일 년 이라는 시간의 거미줄에 서로의 깊은 정을 얽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먹물을 찍어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다. 가련문전 별가련    가련행객 우가련  ( 可憐門前  別可憐   可憐行客  尤可憐 ) 가련막석 가련거    가련불망 귀가련  ( 可憐莫惜  可憐去   可憐不忘  歸可憐 ) 가련이 문전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행객이 더욱 가련 하구나 가련아 가련하게 떠남을 슬퍼 말아라 내 너를 잊지 않고 떠난 듯이 다시 오리라. 가련이 시를 읽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기에 슬픔은 더욱 북받쳤다. 가련이는 노자 돈을 후하게 내 놓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임자, 돈을 쓰면서 유람 하는 것은 내 분수에 맞지 않네. 그냥 두어 두게. 나는 빈 몸이 좋아."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에서 눈물을 흘리는 가련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물고 걸음을 재촉했다. 김삿갓이 관아로 돌아와서 사또에게  불문곡직, 하직을 고하니 사또가 매우 섭섭해  만류 하였으나 삿갓의 결심이 너무도 굳건한 것을 알게 된 사또는 체념을 하였다. 그 역시 후하게 돈을 내어 놓았으나 삿갓이 한사코 받지 않으려 하자 , "그래 가련이와는 이야기를 잘 나누었소??" 가련이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또가 물었다. "예, 돌아다니다가 고달프면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하오나 기약 없는 약속이지요."   "관북을 모두 돌아보려면 이삼년은 족히 걸릴 것이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려주시오. 내 그때까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자리가 바뀌더라도 일러놓고 가리다. 그리고 아들놈 가르친 수고는 권해도 받지 않으려 하니 , 대신 가련에게  보내도록 하겠소." "보살펴 주신 은혜도 백골난망 이온데, 더 없는 배려를 하심을 어찌 잊겠습니까."   김삿갓은 큰 절로써 사또와 작별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삿갓은 일 년이 넘도록 정이 들었던 안변을 떠나 다시 정처 없는 방랑길에 올랐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3) 석왕사에 얽힌 내막. "상편" 김삿갓은 마침내 본연의 생활로 돌아왔다. 집을 떠난 지 이 년째 , 그는 안락한 생활보다 천대를 받으며 찬밥 한술로 끼니를 때우게 되더라도 술만 한잔 더해진다면  바람 따라 흘러 다니는 지금의 생활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김삿갓이 안변 관아를 떠나 북쪽으로 길을 잡아 발길을 옮긴지 하루째 , 안변 설봉산 석왕사(釋王寺) 앞에 이르렀다.  이곳은 이태조(李太祖)의 건국신화가 서려 있는 곳이었다. 김삿갓이 이곳 석왕사에 온 까닭은 금강산 입석암을 떠날 때  " 혹시 안변 석왕사에 가게되면 반월 행자를 찾으시오. 그 아이는 나의 제자로 지금은 그곳에 있소이다.  사람이 선량하고 다정하니 , 삿갓선생을 정성껏 도울 것 이오."라는 노스님의 당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설봉산 석왕사는 규모가 워낙 크고 웅장해서 금강산의 장안사나 유점사에 견주어도 규모면에서 조금도 손색없는 큰 절 이었다. 특히 절을 둘러싸고 있는 천년 노송들은 향기 짙은 송진 냄새를 풍겨주고 있어 , 금강산과는 또 다른 정치가 물씬 풍겼다. 김삿갓이 경내에 들어서자 처음 보이는 것은 사대천왕 이었다. 사대천왕은 무시무시한 덩치에 머리에는 관(冠)을 쓰고 손에는 커다란 창을 꼬나 쥐고, 앉듯이 서서 .. 두 눈을 성큼 부릅뜨고 이곳을  출입하는 죄 많은 중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김삿갓은 경내 곳곳을 휘둘러보며  입석암 노승이 말한 반월 행자를 찾았다. 나이가 삼십 가량 되어 보이는 반월 행자는 김삿갓을 만나자 크게 반가워했다. "삿갓 선생님이시라고요 ?  나의 스승이신 큰스님의 기별을 통해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잘 도와 드리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내가 석왕사에 오래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지만 , 있는 동안 구경이나 잘 시켜 주시오." "예, 석왕사에 대하여는 제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물으시는 대로 설명을 해 올리지요." 반월 행자가 앞장서 석왕사 경내를 안내하며 하는 말이, "선생은 이 절이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창건 되었으며 , 절 이름을 석왕사로 부르는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글쎄요 , 석왕사는 어떤 유래를 가진 절입니까??" "그럼 제가 자세한 사연을 설명 드리지요." 그리고 반월 행자는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유래를 들려주었다.          .. 고려 말 이성계가 영흥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청년 이성계는 무예를 닦느라고 각지로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밤에  안변 산속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무너져 가는 집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이었는데 , 집안에 거울은 깨져 있고 화원에 꽃은 모두 낙화(落花)되어 있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해서 , 암자의 중에게 물었다. "스님은 혹시 해몽을 할 줄 아시오 ? " "저는 꿈을 풀 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부근에서 혹시 해몽을 잘 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 " "여기서 저 산속으로 십 리쯤 더 들어가면 토굴 속에서 수행중인 도사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이 파자점(破字占)을 잘 치기로 소문난 분이니  꿈 해몽도 잘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 도사의 이름은 무어라하오 ? " "무학(無學) 도사라  부르옵니다." 이성계는 즉시 토굴로 무학도사를 찾아 갔다. 무학도사는 육십 가량 되었을까 , 토굴 속에서 혼자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파자점을 치러  먼저 찾아온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평생 신수를 보려면 당신이 마음속에 두고 있는 글자를 한 자만 써보여 주시오. 그러면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쳐주겠소." 생긴 것도 준수하고 입은 옷도  말끔해 보이는 앞선 사람이 붓을 들어 문(問)자를 써 보인다. 이성계는 글자를 가지고 어떻게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겠나 하는 ,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무학도사는 問자를  손에 받아 들고, 눈을 감더니 오랫동안 명상에 잠긴다. 그러다가 홀연 눈을 뜨더니,   問 자를 이리도 놓고 저리도 놓고 바라보면서 "쩝쩝" 소리를 내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문득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음 ..평생 신수가 아주 고약하군 그래, 당신은 암만해도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기가 어렵겠소." 그 소리에 놀란 것은 장본인뿐만 아니었다. 등 뒤에서 무심히 듣고 있던 이성계도 깜짝 놀랐다. 무학도사가 말한 한평생 거지꼴을 면할 수 없다는 사람은 어디로 보나 거지차림이 아니었다. 그는 옷도 깨끗하게 입었고 생김새도 준수하여 거지같지 않았다. "스님 ! 제가 어째서 거지 팔자를 타고 났다 하십니까?? 저는 거지가 아니옵니다." 거지로 단정 받은 사나이가 이렇게 항의하자 무학도사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했다. "바른대로 말하라구 ! 問자는 입구(口)자가 문에 걸렸으니, 그대가 문전걸식을 하는 거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 " 당사자는 그 말을 듣고 움찔 하더니,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 "나는 거지 신세를 면해 볼까 하여 옷까지 깨끗하게 갈아입고 점을 치러 왔건만, 아무래도 팔자 도망은 못 하는 모양이구나 ! "  ... 혼자 장탄식을 하며 총총히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보면 무학도사의 파자점은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성계는 놀라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무학도사의 이론대로라면 문(問)자를 써 보인 사람은 모두 거지라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놀라움과 함께 은근한 실망감도 생겨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찾아 왔는고??" 무학도사가 이성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이성계가 말했다. "저도 파자점을 쳐보고 싶어 왔사옵니다." "옳지 , 그럼 마음속에 두고 있는 글자를 써 내보이게. 그래야 그 글자를 가지고 점을 칠게 아닌가."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말씨였다. 이성계는 도사를 골탕 먹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무 글자나 써내도 상관없겠습니까?? " 하고 물었다. "물론이지 ! 무슨 글자라도 좋으니 당신이 쓰고 싶은 글자를 써보이게." 이성계는 주저하다가 조금 전 거지라고 단정 받았던 사내가 썼던 글자와 똑 같은 問자를 써 보이며 말을 했다. "이 글자로 점을 쳐보아 주십시오." 무학도사는 問자를 받아 들더니 또다시 눈을 감고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런 연후 , 눈을 뜨더니 문자를 들고, 조금 전 사내 때와 같이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기만 할뿐, 좀처럼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더니 앉아있는 이성계에게 합장 배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이성계가 만류하자 도사는 이렇게 말을 했다. "장차 이 나라에 주인이 되실 귀인께서 왕림해 주셨으니 이런 황공한 일이 없사옵나이다." 하는 것 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에 이성계는 크게 놀라며 당황했다. "도사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게요. 조금전에 다녀간 사람이 問자를 내 놓았을 때는 거지 신세를 한평생 면하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나도 그 사람과 같은 글자를 내 놓았는데 나에게는 어째서 엉뚱한 말씀을 하시오." 그러자 무학도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파자점이란 아무리 똑같은 글자를 내놓더라도 그 사람의 심지(心志)와 품성과 기상에 따라 점괘가 제각기 다르게 나오는 법입니다. 글자가 같다고 점괘도 같다면 그게 무슨 점이겠나이까?? " 조금 전까지도 반말지거리를 하던 도사였지만 , 어느새 말투가 존대어로 변했다. "아무리 그렇기로니, 같은 글자의 해석이 그렇게도 다를 수가 있단 말이오?? " 무학도사는 다시 경건한 자세로 합장 배례하며 말을 했다. "소승은 다만 점괘가 나오는 대로 여쭈었을 뿐이옵니다. 거기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사옵니다." 이성계는 기가 막혔다. 이런 그의 모습을 간파한 무학도사가 말을 이었다. "똑 같은 問자라 하더라도 , 조금 전에 거지가 내 놓았던 問자와 귀공이 내 놓으신 問자는 근본이 아주 다른 問자 이옵니다." "근본이 다르다니 그건 또 무슨소리오. 問자가 똑 같은데..." "소승이 자세한 설명을 올리겠사옵니다. 아까 그 사람이 써낸 問자는 입(口)이 문(門)에 매달려 있는 問자 이었습니다. 허나, 귀공께서 내 놓으신 問자는 입이 문에 매달린 문(問)자가 아니옵고 , 좌로 보나 우로 보나  , 임금군(君)자가 되오니 장차 이 나라에 임금이 되실 분의 글자라 아니하겠습니까?? " 이성계는 너무도 기막힌 파자점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장차 이 나라의 임금님이 되실 분이라고 까지 하니 , 가슴이 설레어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짐짓 마음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을 하였다. "실상인즉 , 내가 도사를 찾아 온 것은 파자점을 치려는 것이 아니고.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하도 이상하여 해몽을 해 보고 싶어 찾아 온 것이오. 도사는 물론 해몽도 하시겠지요??" 무학 도사는 합장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했다. "파자점이나 해몽이나 모두가 같은 원리이옵니다. 어떤 꿈을 꾸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해몽해 올리겠습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4) 석왕사에 얽힌 내막. "하편" 이성계는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어떤 낡은 집에  있노라니 ,  별안간 모든 닭들이 일시에 "꼬끼오 ! " 하고 요란스럽게 울었습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가  있던 집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뛰쳐나오려는데 이미 지게에는 서까래 세 개를 얹어 놓았더란 말입니다."  "꿈은 그뿐이었습니까 ? " "아니지요.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밖으로 나오니까, 뜰에 피었던 꽃이 별안간 떨어지고 , 그와 동시에 난데없이 거울이 깨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 하여도 예사 꿈은  아닌 듯한데 , 혹시 흉몽이 아닌지요 ? " 무학도사는 꿈 이야기를 모두 듣고,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숙연히 말을 했다. "네 가지로 나뉘어 꾼 꿈은 더할 나위 없는 길몽 입니다." 자신의 느낌과 전혀 다른 무학도사의 해몽에 이성계는 어리둥절하였다. "일시에 집이 무너지고 ,꽃도 떨어지고 , 거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이 어째서 길몽이라 하시오. ?" 무학도사는 옷깃을 바로 여미며 경건한 어조로 말을 했다. "닭은 만인에게 새 아침을 알려주는 영물 이옵니다. 모든 닭이 일시에 울었다 함은 바야흐로 새 시대, 새 아침이 밝아 올 징조를 알려주는 성스러운 조짐입니다. 더구나 닭이 '꼬끼오"하고 울었다고 말씀 하셨는데 , 꼬끼오를 한문자로 바꾸어 쓰면  '고귀위(高貴位)'가 되는 것입니다. 즉, 임금님을 칭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등에 서까래 새 개를 짊어지고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임금왕 (王)자가 되는 것 입니다. 따라서 귀공께서는 장차 임금님이 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듣고 보니 이론이 정연한 해몽이어서 이성계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다면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진 것은 무슨 뜻이오니까??" "그 역시 길몽의 마무리 입니다. 열매가 맺으려면 꽃이 떨어지는 것이 이치이니, 일시에 낙화 한 것은 열매도 일순간 맺을 좋은 조짐 입니다.  그리고 거울이 요란하게 깨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새 나라가 탄생 하는데 만 천하가 어찌 크게 떠들썩하지 않겠습니까??  염려마소서." "하찮은 꿈을 이처럼 대견하게 풀어 주셔서 고맙소이다." "빈도의 해몽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오니 귀인께서는 소승의 해몽을 굳게 믿으시고 금후에는 만사에 자중자애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무학 도사의 격려까지 듣고 나자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고맙소이다. 그러나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올 수 있겠습니까?? " 무학도사는 합장 배례를 세 번씩이나 거푸 하고 나무라듯 말을 했다. "모든 운수는 하늘에서 정 하여 주시는 것이지 ,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옵니다. 소승이 지금까지 여쭌 말씀은 모두가 천기에 속하는 기밀이옵니다. 이런 천기를 누설하면 될 일도 틀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저와의 있었던 일은 일체 입 밖에 내지 말아 주옵소서." 무학 도사로 부터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은 이성계는 ,옷깃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철이 없기로 이러한 일을 어찌  감히 입 밖에 꺼내오리까. 도사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가슴에 아로새겨,   금후에는 일거일동에 더욱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무학도사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앗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인께서는 부디 뜻을 크게 품으셔서 기어이 대업을 성취하도록 하시옵소서." 이성계는 왕후 장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나자, 갑자기 새로운 용기가 북돋아 났다. "고맙습니다. 저를 격려해 주시고 아껴, 깨우쳐 주신 오늘의 은공은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이성계가 이같이 말을 하자  , 무학도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날을 위해 소승이 부탁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들려주시옵소서." "매우 외람된  부탁이오나 ,후일 대업을 성취하시거든 중생을 구제하는 도량으로 이 토굴 자리에 불전을 하나를  지어 주시옵소서."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 무학도사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날이 오기만 하면 어찌 불전 뿐 이겠습니까. 이곳에 절을 지어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도사님을 대궐로 모셔다가 대정(大政)을 자문하는 국사(國師)로 받들어 모실 것 이옵니다." 무학도사는 다시금 합장 배례하며, "너무도 과분한 말씀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면  이곳에 지을 절 이름은 뭐라 하시겠습니까?? "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이성계는  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었다. "절 이름은 그때 가서 결정해도 될 일이 아니옵니까?? " 그러자 무학도사는 고집스럽게 다시 말을 했다. "옛 글에 일일지계는 재어신(一日之計 在於晨 ..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세우고)이요, 일년지계는 재어춘(一年之計 在於春.. 일년의 계획은 봄에 세운다 )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목표를 세우고 매진하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절은 나중에 세우시더라도 이름만은 지금 지어 주시옵소서." "도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나의 신념을 굳히기 위해서라도 절 이름을 미리 지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절 이름을 당장 짓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 이옵니까?? " 무학도사가 즉석에서 나무라듯 말했다. "무슨 일이나 쉽게 생각하신다면 ,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 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 이라도 신명을 다해 애쓰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 법 이옵니다." 이 말도 이성계의 장래를 훈계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도사님의 훈계는 명심하겠습니다. 하오나 , 절 이름을 제가 짖기 보다는 도사께서 직접 지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 무학도사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붓을 들어 종이에 釋王寺 ( 석왕사..왕이라고  풀어낸 곳) 라는 세 글자를 써 보였다. "석왕사 .  좋습니다!!  후일 , 이 자리에 반드시 절을 짓도록 하고, 그 이름은 도사님이 꿈과 글을 풀었다하여  반드시 석왕사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석왕사라는 절 이름은 태조의 등극 전에 만들어 진가이다. 이와 같이 석왕사의 유래를 이야기한   반월 행자는 이어서 말을 하였다. "이성계는  변방을 지키는 한낱 장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나 무학 도사를 이곳에서 만남으로써 하늘의 계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산을 내려 갈 때에는 "나는 왕이 될 것 이다"라는 결심을 확고하게 하게 되었으니  조선왕국의 개국에 무학 도사가 미친 영향은 실로 위대하다고 하겠습니다." "허허 ..영향을 줄 수는 있었겠지요. 허나 국가대사의 도모는 불심의 힘만으로는 가능치 않은 일이지요." 김삿갓은 같은 불제자라고  반월 행자가 무학도사만 편드는 것 같아 이쯤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삿갓 선생 , 이성계가  이곳 설봉산을 내려 갈 때 눈앞에 전개되는 천산 만봉을 굽어보며 읊은 시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 "오 호 ..이성계가 시를 읊었다니 ? 그 시가 어떤 시였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구려." "제가 외어 드리겠습니다." 반월 행자는 이성계의 시를 읊어 보였다.    .. 칡넝쿨 움켜잡고 푸른 봉에 오르니     ( 인수반나 상벽봉   引手攀蘿 上碧峰 ) 조그만 암자 하나 구름 속에 있구나     ( 일암고와 백운중   一庵高臥 白雲中 ) 눈에 보이는 산천이 모두 내 땅이라면  ( 약장안계 위오토   若將眼界 爲吾土 ) 초월 강남인들 어찌 수용하지 못하랴.  ( 초월강남 기불용   楚越江南 豈不容 ) 김삿갓은 그 시를 듣고 이성계의 웅장한 기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하더니 , 이성계야 말로 선천적으로 대왕의 기질을 타고 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였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5) 땡중과 마나님의 승부 석왕사에서 반월 행자와 작별을 한 김삿갓은 다시 북쪽을 향해 정처없는 발길을 옮겼다. 그러면서 금강산 입석암 노승을 비롯하여 반월 행자까지 불가에 귀이하여  수도를 하는 인물은 자신과 다르게 대단한 사람들 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고생을 스스로 선택한 그들의 삶은 김삿갓으로서는 따라할 수 없는  고행이 아니던가,  새삼 그들의 선택에 마음속 깊이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계속 산길로 이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 김삿갓은 다리도 쉬어갈 겸 노견으로 물러나 반려 행자가 헤어질 때 싸준 주먹밥을 풀어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만치 ,몸에는 장옷을 입고 머리에는 남바위를 쓴 행세깨나 하는 양반 댁 마나님 차림의 여인이 하인도 없이 산길을 바쁜 걸음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허, 수행하는 종자도 없이 산길을 가다가 도둑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저러실까." 김삿갓은 마음속으로 공연한 걱정을 하며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길가로 나섰다. 그런데 여인이 지나간 얼마 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녀 간 시비를 가리는 소리가 아득히 바람결에 들려왔다. 거리 관계로 말소리의 내용은 인수 없었지만 , 주고받는 말소리의 억양으로 보아 ,  시비를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런, 조금 전에 지나간 마나님이 산길에서 도둑이라도 만난 것이 아닐까 ? " 김삿갓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소리가 난 곳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얼마를 가다가 앞을 살펴보니, 저만큼 잔디밭에서 아까 지나쳐간 마나님이 오십 쯤 되어 보이는 스님과 말다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도둑을 만난 것이 아니기에 천만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점잖은 댁 마나님이 지나던 스님과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싶어 , 김삿갓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았다. 그때, 스님이 마나님의 손목을 움켜잡으려고 팔을 뻗으며 말을 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이 깊은 산중에서 한번쯤 정을 나누기로 뭐가 나쁘단 말이오?? " 하고 해괴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 이었다. "피차간 아는 사이인가 ? " 김삿갓은 이러한 생각도 들었지만  여인의 다음 대답으로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우연히 길을 가다 만나게 된   사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석존(釋尊)의 십계 중에 불사음계 (不邪淫戒)라는 대목이 뚜렷하거늘 , 어찌 대사는 일시적 사념으로 파계 (破戒) 하시려 하오. 내, 오늘 일은 못보고 안 들은 것으로 할 것이니 사념을 버리고 수행에 전념 하도록 하십시오." 하며 점잖게 스님을 꾸짖고 있었다. 김삿갓은 그들이 다투는 이유를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저런 죽일 놈" 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님에게 욕이 튀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놈의 부당한 요구에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내놓는 마나님의 태도에 존경심이 일었다. 그러나 욕정의 화신이 되어버린 중놈은 좀처럼 물러서질 않았다. 오히려 여인에게 금방이라도 덤벼들 자세로 꼬임의 말을 더하는 것이었다. "만물은 인연의 소생이오. 우리가 깊은 산중에서 이렇게 단 둘이  만난 것도  전생부터의 인연일 것이오. 그대는 어찌 전생의 인연을 무시하고 , 나의 간절한 요구를 거절 하려 하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두말 말고 나의 소원을 꼭 들어주시오." 그러나 마나님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의연하였다. "대사는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자꾸 하시오. 반야경에 색즉시공(色即是空),공즉시색(空即是色)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소이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이런 경전을 읽고 수행 하는 대사는 아직도 육근(六根)을 떨치지 못하고 탐욕과 진애 (瞋恚), 우치 (愚痴)의 번뇌마에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니, 한시 바삐 자아의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의 눈을 속히 뜨시오. 그것만이 불제자가 걸어가야 할 정도 일 것이오이다." 마나님은 불교에 대한 소양이 풍부한지 , 중놈에게 설법 하듯 ,도도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애욕의 열정에 갇혀버린 환장한 중놈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 갈 리가 없었다. 중놈도 우격다짐으로는 성사가 안 될 것을 깨달았는지.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불경을 토론할 생각이 없소. 나는 이미 그대를 범할 것을 결심했는데 , 그대는 나의 소원을 끝까지 들어주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면 우리는 말재주로써 승부를 가리면 어떠하겠소." 설득으로 성공할 자신이 없었음을 깨닫자 , 중놈은 또 다른 방법으로 나왔다. 마나님도 계속 입씨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하자는 것은 무슨 말씀이오니까?? "  하고 다져 물었다. 중놈이 대답하는데 , "내가 지금부터 1,2,3,4,5,6,7,8,9,10의 순서로 그대에게 요구하는 일을 말로 들려 보일 터 인즉, 그대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해보시오. 만약 ,그대가 대답을 끊기지 않고 잘하게 되면 내가 순순히 물러날 것이로되 , 만약 대답을 못해 막힘이 있게 되면 , 그대가 진 것이 되니 나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하오." 김삿갓은 혀를 찼다. 도데체가 중놈의 요구는 부당하기 이를 데 없으며, 노상에서 오가다 만난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감히 몸을 요구하는가. 그런데도 마나님은 겁을 내는 기색조차 없이 중놈을 꾸짖었다. "나는 이미 대사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 여러 말 말고 물러나시오." 그러나 타이른다고 순순히 물러날 중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말재주로 결정하자고 이미 타협안을 내놓았소이다. 그러니 말재주로 승부를 결정 하던가, 나의 요구에 순순히 따라 주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오." 그늘 속에 숨어서   이 같은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저런 죽일 놈을 보았나"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불현듯 뛰쳐나가 마나님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으나 상황이 그의 용기를 억누를 정도로 흥미진진한 면도 있었다. 따라서 저 마나님은   이 같은 곤경을 어찌 벗어 나려나 하는 호기심 또한, 발동하여 좀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좋소이다. 그러면 대사가 내기 말을 걸어오시오. 내가 답 하리다." 마나님은 중놈의 고집을 꺾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중놈의 내기에 응하고 있었다. 그러자 중놈이 이제는 됐다 싶었던지 크게 기뻐하며 즉석에서 내기 말을 시작 하였다. "일 , 일룡사 (一龍寺) 사는 중이  이, 이룡사 (二龍寺) 가는 길에  삼,  삼로 (三路) 길에서  사,  사대부인(士大夫人)을 만났는데  오, 오음 (五陰)이 불통하여  육, 육효 (六爻)로 점을 치니  칠, 칠괘 (七卦)도 좋다마는  팔, 팔괘 (八卦)는 더욱 좋다  구, 구부려라  십, † 좀 하게." 중놈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도 해괴한 소리였다. 김삿갓은 중놈에 이같은 음담패설에 저 마나님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걱정 반 기대 반을 가지고 지켜보며 마나님의 대답이 막혀 , 땡중 놈에게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해지면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마나님의 태도는 의연해 보였다. 그리고 중놈을 향하여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천하의 잡놈아 ! 내가 다시 한 번 훈계를 내릴 테니 그대는 똑똑히 내 말을 듣거라." 그리고 그녀는 말재주 내기에 대한 응답을 시작했다. "일, 일편단심(一片丹心) 이 내 마음  이, 이심 (二心)이 있을 손가  삼, 삼강 (三鋼)이 살아 있고  사, 사리 (事理)가 분명 하거늘  오, 오할 (五割) 할 이 잡놈아  육, 육환장 (六環杖) 둘러 짚고  칠, 칠가사 (漆袈裟)를 걸쳐 입고  팔, 팔도 (八道)를 편답(遍踏)하며  구, 구하는게 고작  십, † 이더냐 이 잡놈아 ! 마나님의 호통은 이렇게 추상같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대사님 대사님"으로 돌중 놈을 깍듯이 예우해 주었으나, 이 제와서는 오활을 할 잡놈이라 불호령을 질렀으니 그 위세가 실로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끼, 천하에 무서운 계집 같으니..." 중놈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줄행랑을 놓았다. 중놈이 도망가 버리자 마나님은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산길을 다시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인이기에 김삿갓은 먼빛으로 나마 , 사라져가는 마나님을 향해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였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6) 방중 개존물 이요, 선생 내불알 이라.. 원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김삿갓은 하루에 육십 리를 걸어야겠다고 작정을 했는데 막상 길을 나서고 보니 그리 되지가 않았다. 하긴 바쁜 걸음도 아니었다. 길을 가다가 힘들거나 고달프면 아무 곳이나 앉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어둠이 내릴 즈음 아무집이나 들려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면 그만이었다. 이렇듯 여러 날을  걸어가던 김삿갓은 오늘은 어쩐지 걷기가 도무지 귀찮아   한 마을로 썩 들어섰다. 때는 오후였다.  봄도 저물어 제법 더워지기 시작하는 오후의 햇살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몸을 무척이나 나른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쉬어 갈 곳을 찾아야 하겠군." 가진 돈이 있다면  주막으로가 술이나 한잔 하고 그곳에서 묵으면 될 것이나 우선은 가진 돈이 없다. 이럴 땐 동네 사랑방을 찾으면 밥은 못 얻어  먹더라도 그곳 동리의 인심을 엿볼 수 있다. 혹간 밤이 깊어 출출한 시장기를 달래는 막걸리나 요깃거리가 나오는 경우도 왕왕 있어 김삿갓처럼 무일푼 과객에게  동네 사랑방은 요긴한 하룻밤 쉬어갈 곳이 되곤 하였다. 어느 동네나 잘사는 사람이 있다. 그중에서는 벼슬을 지냈거나 인심이 제법 후해 오가는 과객을 접대하는데 넉넉한 인정을 베푸는 집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해도 아직 지지 않은 이른 오후는 인심후한 집이나 동네 사랑방을 찾기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해서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서당은 살림집을 겸하는 경우가 없기에 학동들의 공부가 끝나면 빈방이 되기가 일쑤이고 지나는 과객의 하룻밤 휴식처로 안성맞춤이었다. 서당에 하룻밤 쉬어 갈 것을 청하기 이른 시간이지만 그곳에 가서  학동들 공부하는 모습도 지켜보면서 훈장 선생님하고 시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시간 보내기가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뉘 알겠는가. 멋들어진 훈장이라도 만나면 술이라도 한 상 내어 놓을지.. "애, 아가야 이 마을 서당은 어디 있느냐 ? " 삿갓은 꼴망태를 메고 오는 초립동이 녀석에게 물었다. "서당은 왜 찾으셔요." 녀석은 삿갓을 눌러 쓰고 등에는 작은 행랑과 구절 지팡이를 짚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김삿갓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던 듯 이렇게 반문 하였다. "훈장 선생님을 만나려고 한다. 어디 있느냐 ? " "저쪽 세 번째 기와집이여요."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래, 고맙다." 김삿갓은 녀석이 가르쳐 준대로 서당을 찾아갔다.  서당은 제법 커 보였다. 마당도 넓었을 뿐 만 아니라 글방도 큼직했는데 학동들은 열 명이 될까 말까 하였다. "애들아 선생님 어디 계시냐?? " 아이들은 선생님 없이 저희들끼리 글을 읽다가 불현듯 나타난 삿갓의 차림새를 보면서 대답은 하지 않고 저희들 끼리 수군거렸다. "애들아, 선생님 어디 계시냐고 내가 묻지 않았더냐?? " 삿갓은 다소 언성을 높였다. 어린것 들이 꽤나 버릇이 없어 보였다. "누구신데 우리 사부님을 찾으세요." 그중 한 놈이 눈을 말똥말똥 굴리면서 야무지게 물었다. "이놈아 어른이 물으시면 대답이나 썩 할 일 이지 묻기는 왜 묻느냐 ? " 김삿갓은 울컥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호통을 쳤다. 그리고 학동 놈들의 방자한 태도를 보아 선생이라는 작자의 인품도 가히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호통을 당한 녀석이 멀쑥한 표정을 짓더니 어물어물 말을 한다. "선생님은 지금 안채에 계셔요." "그래 너희들 글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들어 앉아 계신단 말이냐 ? " "책이나 읽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허참, 까다롭구나. 길 가는 과객이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을까 하여 찾아 왔다고 말씀드려라." 녀석이 안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찌푸린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선생님은 지금 나오실 수 없으니 그냥 돌아가시랍니다." "그래 ? " 김삿갓은 부아가 치밀었다. 꼴에 훈장이랍시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양이었다. 삿갓은 아이들이나 훈장이나 그렇고 그런 것 같아 머물기를 단념했다. 그렇지만 그냥 돌아서기에는 어쩐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휘 돌아보니 마침 훈장의 탁자에는 갈아 놓은 먹과 종이가 보였다. 삿갓은 붓을 들어 시 한수를 갈겨 써 놓았다. 서당내조지   생도제미십   書堂乃早知    生徒諸未十 방중개존물   선생내불알   房重皆尊物    先生來不謁 서당이란 내 일찍부터 알았거늘 공부하는 학동은 채 열이 안 되는데 방안에 있는 녀석들은 제 잘난 척 만 하고 선생이란 작자는 내다보지도 않는구나.     .. "여봐라 이따 네 선생 오시거든 이 글을 드리거라." 김삿갓은 종이를 휙 내던지듯 놓고 방을 나와 침을 퇙 뱉고는 서당을 빠져나와 바람처럼 떠났다. 이무렵 훈장이란 작자는 거들먹거리며 마누라에게 어깨 주무름을 받고 있었다. "어 거참 시원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렇듯   재미를 보고 있는데 생면부지의 과객이 왔다해서 어찌 나갈 수가 있겠나. 훈장은 낮잠조차 늘어지게 자고난 연후 , 마지못해 글방으로 건너왔다. "선생님 아까 거지같은 손님이 이 글을 써 놓고 가셨어요." 학동은 김삿갓이 써놓은 글을 선생에게 내놓았다. "뭐냐 ? " 훈장은 실눈을 뜨고 종이를 받아 읽는데, 차츰 얼굴색이 변하며 종이를 쥐고 있는 두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죽일 놈이 있나 ! " 훈장의 입에서 앙칼진 욕이 튀어 나왔다.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써 놓은 글을 음에 따라 읽다보면 학동과 선생인 자기를 길거리 똥개를 욕하듯이 써놓지 않았는가?? "허, 고약한 놈이로다." 훈장은 이를 갈았다. 이런 모양을 지켜보던 아이 한 놈이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러셔요. 나쁜 말이라도 쓰여 있습니까?? "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훈장이 불호령을 내렸다. "네 이놈, 네가 무엇을 안다고 나서느냐. 당장 회초리 가져 오너라." 훈장은 엉뚱하게도 죄 없는 학동을 잡으려는 심산이다. 그래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한편 훈장을 욕해준 김삿갓은 서당을 찾아 갈 때와는 달리 ,훠이훠이 시원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처음에 방랑길을 떠났을 때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만 들어도 분통이 터지고 화가 치밀었는데 이제는 조소와 박대를 당해도 세상인심이 그러려니 하고 대범하게 넘기게 되었다. "흠, 지금쯤 그 알량한 훈장이 펄펄 뛰고 있겠군.." 김삿갓은 좀 심한 욕설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거드름 피우던 그가 자기가 써 놓은 글을 읽고 핏대를 올리는 광경이 떠오르니 속이 다 시원하였다. 삿갓은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한참을 걸었는데 어느덧 석양의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목까지 컬컬한 것이 잠자리를 찾기보다, 술 한 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저녁노을과 함께 김삿갓의 발걸음은 자연히 빨라졌다. 야트막한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생각지도 않은 주막이 보였다. 김삿갓은 주막을 보니 반가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는 돈이 없지 않은가. 허실 삼아 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김삿갓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출렁출렁 뛰어 보았다. 그런데 ? 필낭 속에서 분명히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것 참 , 이상하군. 아까도 뒷짐 속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김삿갓이 등 뒤에 지고 있는 행랑이라야 , 겨울 옷 한 벌에 주먹만 한 연적과 붓 몇 자루와 고작 하여 종이 몇 장과 벼루 뿐인데 , 쇠붙이 소리가 나는 것은 의외였다. 그는 길가에 앉아 행랑을 끌러 보았다. 뜻 밖에도 엽전 꾸러미가 나왔다. "돈이 ? "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누구에게도 돈을 받은 일이 없는데 , 돈이 있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었다. "허허, 이 무게도 보통은 아닌데, 내 어찌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 " 그는 손바닥 위에 엽전 꾸러미를 올려보며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족히 한 근은 넘을 무게였다. "그런데 이 돈을 누가 넣었을까 ?" 고개를 갸웃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안변을 떠나올 때 사또가 내놓은 엽전은 이미 마다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 돈은 가련이에게 보내겠다고 했으니 , 사또가 별도로 넣어 주었을 리는 없을 테고 , 그렇다면 가련이 밖에는 없었다. 김사갓이 떠나 올 때, 가련이 또한 노잣돈을 내 놓았지만 한사코 받지 않는 사이에 슬며시 넣어 준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이 이에 이른 김삿갓은 새삼스럽게 가련이의 뜨거운 사랑을 뼈저리게 느꼈다. "감사하오 가련이..." 김삿갓은 백어(白魚) 같던 가련이의 손길을 만지는 듯 엽전을 한동안 만지다가 필낭 속에 넣고 일부는 떼어 옆구리에 찼다. 갑자기 필낭의 무게가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이만하면 내 오늘은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김삿갓은 목을 한번 길게 빼 밀어 보고 휘적휘적 주막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 놓았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7) 사라진 옥관자. 원산을 거쳐 함흥으로 가는 길도 산길로 이어졌다. 날 또한 저물자 까마귀조차 극성스럽게 울부짖으며 자기 둥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신안 마을 입구에서 만난 동리 사람을 붙잡고 물어 보았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황 별감 댁이 어디요 ? " 김삿갓이 이곳에 이르기 전에 들은 바로 , 이곳 신안 마을에 황 별감 댁은 길가는 나그네를 소홀히 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었기 때문이다. "황 별감 댁은 저기 산 밑에 있는 기와집이라오." 동리사람은 팔을 들어 가르쳐준다.    황 별감 집은 산 밑에 있는 제법 큰 기와집이었다. 김삿갓이 문 앞에 이르러  주인을 부르니 ,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왔다.  첫눈에 무척 인자해 보이는 후덕한 노인이었다. 김삿갓은 인사를 정중히 올리고 나서 ,  "지나는 과객이옵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 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황 별감은 매우 민망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모처럼 내 집을 찾아온 손님을 내쫒는 것 같아 매우 미안하오. 우리 집에서는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손주 며느리가 몸을 풀어서 손님을 재워 드릴 수가 없구려.  그러나 저녁만은 대접할 수 있으니 바깥 사랑에서  저녁만 자시고 잠자리는 다른 곳에서 구해 보도록 하시오." 그제야 깨닫고 보니, 황 별감 댁 손주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지 대문간에 빨간 고추가 매달려 있던 인줄이 가로 걸려 있었다. "저녁만이라도 주시겠다니 고마운 말씀 입니다. 그러나 댁에 산모가 계시다면 저는 다른 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김삿갓은 발길을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황 별감은  부랴부랴 옷소매를 붙잡으며 만류한다. "산모가 있기로서니 ,바깥사랑에서 저녁을 자시는 것쯤이야 무슨 상관있겠소. 잠자리까지 제공하지는 못할망정 , 내 집을 찾아 온 손님을 저녁대접도 하지 않고 돌아서게 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니  들어갑시다." 김삿갓은 황 별감의 호의가 하도 고마워, 저녁밥을 그 댁에서 얻어먹기로 하였다. 이윽고 바깥사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  반찬도 여러 가지로 나와 , 가족이 먹는 식탁이지, 낮선 과객에게 한 덩이 던져주는 밥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 별감조차 밥상머리에 지키고 앉아 많이 먹으라고 연신 권하는 것이 아닌가 .. "젊은 양반이 어디를 가는 길인데 길이 이렇게 늦으셨소?? " "네 , 금강산 구경을 마치고  멀리 두만강까지 관북천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허어, 금강산 구경을 하셨다고요? 금강산이 그렇게나 좋다는데 나는 금강산 구경을 한 번도 못했다오." "여기서 금강산이 그리 멀지도 않은데 한 번 다녀오시죠. 천하의 절경이 그곳에 모두 있습니다," "내 나이 이미 칠십이라오. 이제 무슨 기력으로 금강산 구경을 하겠소. 어디 , 좋은 구경 한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김삿갓은 황 별감의 말을 듣자 ,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진해 천하의 명산을 구경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 한편으로 자신은 아직 젊어 , 천하를 두루 유람할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밥상을 물린 김삿갓은 다녀온 금강산의 절경을 황 별감에게 들려주면서 당시 자신이 지었던 절경을 담은 시를 읊어 드렸다           .. "朝登立石 雲生足"  (조등입석 운생족) 아침에 바위를 밟고 서면 발아래 구름이 일고 "暮飮黃泉 月掛脣"   (모음황천 월괘순) 저녁에 황천물을 마시면 달이 입술에 걸린다. "水作銀杵 春色壁"   (수작은저 춘색벽) 물은 은절구공이가 되어 절벽을 찧고 "雲爲玉尺 度靑山"   (운위옥척 도청산) 구름은 옥자가 되어 청산을 가늠터라. "松松白白 岩岩廻"   (송송백백 암암회) 소나무 잣나무 바위는 돌고돌아. "水水山山 處處奇"   (수수산산 처처기) 물도 산도 곳곳이 기묘하도다.    ... "허어, 그렇게나 좋던가요?? " "제가 아직 죽어 ,무릉도원은 가 본바 없으나 ,  천상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지상에는 금강산이 있을 것 입니다." 김삿갓은 그가  읊은 시구 한 소절 마다  , 감탄을 내지르는 황 별감에게 이 같이 말을 해주었다. 삿갓은 밤이 으슥해서야  그 집을 나왔다. 황 별감이 일러 주는 대로 동구 밖에 있는 서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황 별감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문득 생각이 난 듯, 김삿갓의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서당에서는 잠만 자고 내일 아침 식사는 우리 집에 와서 드시오. 내 집에 오신 손님을 쫒아내는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구려." 김삿갓은 남의 신세를 수없이 지며, 이곳에 이르렀지만 황 별감처럼 따듯한 인정을 만나 보기는 매우 드문 일 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장께서 저를 쫒아 내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저녁을 융숭하게 대접받은 것 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사옵니다. 그러나 내일 아침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아무리 산모가 있기로 바깥사랑에서 아침을 자시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겠소. 조금도 거북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침에 꼭 와주시오. 내가 기다리겠소." "이렇듯 고마운 말씀을 하시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김삿갓은 손을 잡아 흔들며 간청하다시피 하는 황 별감의 요청에 그만 감격하여  이렇듯 아침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고마운 노인이시군." 그리고 서당을 찾아 가려니 길이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황 별감 집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길을 찾다 보니 연자방앗간이 보였다. 그 연자방앗간 옆에는 창고인 듯싶은 방이 하나 딸려 있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올 바에야 구태여 서당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 김삿갓은 문득 그 같은 생각이 들자 ,  방문을 열어 보았다. 방에는 새로 짠 듯한 ,빈 가마니만 싸여 있어서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였다. 김삿갓은 서슴지 않고  광 속으로 들어가   바닥에 깔린 볏짚 돗자리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다. 황 별감 집에서 밥도 든든히 먹었겠다. 잘 곳도 마련이 되었겠다. 아쉽다면 술 한 잔이 없을 뿐인데 ..오늘도 운이 좋아 하루를 힘들지 않게 보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아침이 환히 밝았다. 김삿갓은 연자방앗간 광 속에서 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부랴부랴 옷을 추려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아침을 얻어먹으려고 황 별감 집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일러, 황 별감 마당 부근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황 별감 집 대문이 열리며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손에는 구슬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애야, 너 이 댁 아이냐 ? " 어린아이는  김삿갓의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구슬을 가지고 이리저리 던지며 혼자 장난을 치며 놀다가 별안간  "어마 ! 내 구슬 어디 갔어?? "  하고 울상을 지으며 대문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구슬을 찾아 주려고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구슬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8) 다시 찾은 옥관자. 김삿갓은 마당을 찾아보다 못해 조금 떨어진 시궁창까지 와보니 어린아이가 잃어버린 구슬은 다행히 시궁창 언저리에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색깔이 좋은 옥관자(玉貫子) 인 듯싶은 ,  매우 값진 보물로 보였다. 김삿갓이 그 구슬을 줍기 위해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 때마침 시궁창에서 먹이를 찾던 오리 떼 중에 청둥오리란 놈이 썩 다가가 그 구슬을 냉큼 집어 삼켜 버리는 것이 보였다. "이크, 큰일이군! 귀중한 보물인 듯싶은데 오리란 놈이 그만 삼켜 버렸으니 , 어쩐담?! " 김삿갓이 그런 탄식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황 별감 댁 대문이 열리며 아이의 아비인 듯한 20세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부산스런 모습으로 아까 그 어린아이를 안고 나오며 , "네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를 저 아저씨가 가져갔단 말이지 ? " 하고 말을 하며, 김삿갓을 괘씸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안겨 있던 아이조차,  "응 ! 저 아저씨야 ! " 한다. 졸지에 김삿갓은 도둑으로 몰렸다. 김삿갓에게  다가온 젊은이는 , "여보시오, 이 아이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는 우리 집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귀물이니 욕을 보지  않으려면 빨리 내놓으시오." 하며 거두절미로 김삿갓을 몰아 부쳤다. 김삿갓은 옥관자를 청둥오리가  삼켜 버렸다고 사실대로 말을 할까 생각도 하였지만 성미가 급해 보이는 젊은이가 대뜸 청둥오리 배를 갈라 볼 것 같아 , 애꿎은 생명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반나절만 지나면 그 구슬이 오리의 배설물에 섞여 나올 것을.. 그때까지 잠시 내가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되면 생명도 하나 살릴 수 있지 않은가 ? )  이렇게 생각된 김삿갓은 젊은이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을 하였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던 옥관자는 내가 훔쳤소이다. 그러나 반나절 후에는 반드시 돌려드릴 터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그러자 젊은이는 화를 벌컥 내며 "뭐 어쩌구 어째 ? 남에 귀한 물건을 훔쳤으면 당장 내놓을 것이지 무슨 잔소리야 ! " 하고 호통을 치더니 , 즉시 하인들을 불러내어  김삿갓을 결박하라고 일렀다. 젊은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 너, 댓이 일시에 달려들어 불문곡직 하고 김삿갓을 밧줄로 꽁꽁 올가 묶었다. 김삿갓은 꼼짝없이 결박을 당한 후 혼자 생각을 하건데 .. (황 별감은 부처님처럼 인자하신 분인데.. 이 젊은이는 그의 아들인지, 손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하여 조상을 닮지 못하고 성미가 이리도 사나울까 ? ) 젊은이는 결박진 김삿갓을  땅바닥에 꿇어 앉힌 후 또다시 호통을 질렀다. "네가 훔친 옥관자를 아직도 내놓지 못하겠느냐 ? " 김삿갓은 얼굴을 들어 젊은이를 올려다보며 말을 하였다. "옥관자를 내가 훔친 것이 분명하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 반나절이 지난 후에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결박까지 짓다니 너무 성급한 것 아니오 ? " 젊은이는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이놈아 ! 남에 물건을 훔쳤으면 주인에게 당장 돌려줄 일이지 반나절을 보낸 후 돌려주겠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 "이봐라 ! 아무래도 저 놈이 옥관자를 몸에 감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저 놈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   젊은이가 이같이 말을 하자 하인들이 썩 나서서   김삿갓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러나 김삿갓의 몸에서 옥관자가 나올 턱이 없었다. 젊은이는 다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하인들에게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런 놈을 섣불리 다루다가는  큰일 나겠다. 집에서는 아무리 달래도 내놓지 않으니 관가에 끌고 가 치도곤을 청해야겠다. 썩 끌고 관아로 가자 !" 그리고 김삿갓을 굽어보며 엄포의 말을 이어갔다. "이 고을의 사또는 우리집안의 어른이시다. 네 놈이 관아에 끌려가면 살아서 나오지 못하게 될 것 이니  죽기 전에  옥관자를 순순히 내어 놓거라 ! " 관아로 끌려가면 김삿갓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애매한 청둥오리를 죽게야 할 수 없지 않은가 ? 몇 시간만 참으면  청둥오리가 옥관자를  도로 내어 놓을걸 ..그러면 만사가 해결 될 것 아닌가 ? 그러나 청둥오리를 내버려둔 채 자기만 관아로 끌려가면, 옥관자를 찾을 길 또한 묘연해지지 않겠나? 생각이 이에 이른 김삿갓은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에게는 공법자가 있소. 나를 관아로 끌고 가려면 공범자도 함께 가도록 해주시오." "뭐 ? 네놈에게 옥관자를 훔친 공법자가 있다고 ? 누구냐 그놈이 ! " 김삿갓이 얼굴을 들어보니 , 옥관자를 삼킨 청둥오리는 아직도 시궁창에서 다른 오리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김삿갓은 문제의 오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의 공법자는 저기 있는 청둥오리요. 그러니 옥관자를 찾고 싶으면 저 오리도 나와 함께 관아로 데리고 가 주시오. 우리 둘이 함께 가지 않으면 옥관자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오." 젊은이는 그 소리를 듣고 어이없어 하면서 , "이놈아 !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 청둥오리가 너와 공범이란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 " 그러나 김삿갓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말을 했다. "말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재판을 받아보면 될 것이오. 아무튼 저 청둥오리가 나와 공범인 것은 확실하오. 따라서  옥관자를 찾으려면 관아에 함께 가야만 할 것이오." 젊은이가 총명한 위인이라면 이쯤에서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나 , 옥관자 찾는데 만 급급하여 사리와 총기를 잃어버린 듯  "네놈의 이야기는 미친자의 횡설수설 같구나. 그나저나 청둥오리가 너와 공범자라 하니 함께 묶어 가기로 하겠다." 하고 하인에게 청둥오리를 당장 잡아 묶으라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결박을 진 채 , 두 다리를 묶인 청둥오리와 함께 사또가 있는 읍내로  끌려가게 되었다. 젊은이 휘하의 하인들도 모두 동행하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인들은 김삿갓을 끌고 가며 동정하는 마음으로 은근히 귀띔을 해주는데, "문천 고을 사또 어른은 황별감의 조카사위 되는 분이라오. 당신이 동헌에 끌려가면 목숨이 남아나기 어려울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옥관자를 선선히 내어 놓으시오. 그러면 살아날 길이 있으리다." 그러나 김삿갓은 듣기만 할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옥관자를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안 마을에서 문천 읍내 까지는 30리가 넘었다. 일행이 관아에 도착한 때는 이미 한 낮이 지났다. 젊은이는 김삿갓과 청둥오리를 형리에게 인계하여 동헌 마당에 꿇어 앉혀놓고 관아에 들어가더니 사또와 무슨 공론을 하는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이방의 안내를 받으며 사또가 동헌 대청마루에 좌정하더니 김삿갓을 굽어보며 다짜고짜 서슬이 퍼런 호통을 내지른다. "오리와 공모하여 황 별감 댁 옥관자를 훔쳤다는 자가  바로 네놈이냐 ? " 문천 군수 이호범은 처가댁으로 부터 부탁을 단단히 받았는지 ..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태도로 나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머리를 정중히 수구려 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황 별감 댁 자제께서 저를 다짜고짜 도둑으로 몰아 , 제가 오리와 공모하여 옥관자를 훔쳤노라 대답한 것입니다." 사또는 그 말을 듣고 , 눈알을 부라리며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이놈아 !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오리는 말 못하는 짐승이 아니더냐. 헌데, 오리와 공모하여 옥관자를 훔쳤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 " 그러나 김삿갓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태연자약 하였다. "제가 미치고 안 미친 것은 두어 시간 뒤면 저절로 알게 될 것 입니다." "이놈아 ! 네놈이 본관을 우롱해도 분수가 있지 , 방자스럽게 누구더러 기다려라 말라 하느냐 ! " "저 같이 못난 자가 어찌 감히 사또 어른을 우롱하겠사옵니까. 다만  두어 시간 후에 저 청둥오리가 황 별감 댁  옥관자를 반드시 돌려 드릴 것이오니 ,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옵소서." 문천 군수 이호범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으로 김삿갓의 말에서 어떤 암시를 받은 듯.. 잠시 머리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더니 얼굴을 번쩍 들며 물었다. "옥관자를 오리가 돌려준다니 ? 그렇다면 오리란 놈이  옥관자를 삼켰단 말이냐 ?  그래서 두어 시간 후에 똥과 함께 배설해 놓을 것 이란 말이렸다? " 사또가 이렇게 김삿갓을 문초하고 있던 바로 그때 , 김삿갓과 함께 묶여 동헌에 끌려온 오리가 몸을 움츠리는 듯싶더니 똥을 싸는데 , 반짝반짝 빛나는 옥관자를 함께 내어 놓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옥관자를 보자 ,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질렀다. "사또 어른 ! 더 기다리실 것도 없습니다. 지금 막 , 오리가 옥관자를 내 놓았습니다 ! " 사또는 형리를 시켜 똥에 섞여 나온 옥관자를 깨끗하게 씻어 올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손수 검색을 하여 보니 그것은 황 별감댁 옥관자가 분명하지 않은가 ? 이에 사또는 크게 깨달은 바 있는 듯 ,  고개를 신중하게 끄덕이며, "잃었던 물건을 찾았으니 저 사람을 풀어 주어라." 형리에게 명령을 하고 김삿갓 에게 물었다. "옥관자를 오리가 삼킨 것을 뻔히 알면서 그대는 어떤 까닭으로 스스로 도둑을 자처 했는고 ? " 김삿갓은 결박이 풀리자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또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오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제가 잠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나섰던 것이옵니다." "하찮은 오리 한 마리를 살리려고 죄를 뒤집어썼다 ?" "예, 저는 저 청둥오리가 옥관자를 삼키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옥관자를 찾으려는 젊은이가 너무도 성급해 보였기에 , 사실대로 말을 하면 필시 오리의 배를 갈라 옥관자를 꺼내려 하겠기에 어쩔 수 없이 제가 훔쳤노라고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사또는 그 말에 크게 감명을 받은 듯, "허어 ! 오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대가 죄를 뒤집어쓰고 나섰다는 것은 이만저만 가상한 일이 아니로다. 그대는 정녕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인가 ? " "오리가 비록 미물이오나 , 목숨이 소중하기로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여깁니다. 제가 잠시라도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됨으로써 오리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이야 누군들 못하오리까." "허어 ! 그대의 말은 들을수록 명언이로구나!! 그대는 이름을 무어라고 하는가?? " "이름조차 없이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몸이오니 사또 앞을 이만 물러가게 해주시옵소서." 김삿갓은 사또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돌아서더니 황 별감 댁 하인에게 말했다. "나의 삿갓과 지팡이를 돌려주시오." 김삿갓은 삿갓을 뒤집어쓰기 무섭게 동헌 대문 밖으로 총총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또는 그때까지 김삿갓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별안간 일어서며 , 좌우에게 물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39) 백일장 동기와 살인사건 해결하기. "지금 대문 밖으로 사라진 사람이 혹시 김삿갓이 아니더냐!? " 그러나 좌우의 사람들은 김삿갓이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김삿갓이 어떤 사람이옵니까?? " 사또는 더 이상 물어 볼 필요가 없다는 듯 , 부랴부랴 신발을 끌고 부리나케 대문 밖으로 나왔다. 자기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사또가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는 김삿갓은 이미 꽤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이보시오 ! 날 좀 보시오." 사또는 소리를 질러 불렀다. 그러나 김삿갓은 부르는 소리를 들은둥 마는둥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 마냥 휘적휘적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렇다 저분은 분명 삿갓 선생이시다.) 사또는 그런 생각이 들어 체면 불구하고 헐레벌떡 김삿갓의 뒤를 쫒아갔다. "여보세요, 삿갓 선생 ! 나 좀 보세요." 소리소리 지르며 가까스로 따라 잡으니  김삿갓은 그제야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본다. "아니 , 사또 어른께서 웬일이시옵니까? 옥관자 사건의 문초는 끝난 줄 알고 있는데 물어 보실 말씀이 아직도 남아 있사옵니까?? " 문천 군수 이호범은 불문곡직하고 김삿갓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선생은  혹시 김삿갓 선생이 아니시옵니까?? " 김삿갓은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 "삿갓 선생이라니요. 보시다시피 삿갓을 쓰고 다니기는 하오나 사또 어른께 선생이라고 불릴 사람은 못되옵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것은 아니십니까?? " 삿갓의 내숭에 넘어갈 이호범이 아니었다. "선생이 아무리 정체를 숨기려 하여도 저만은 못 속이시옵니다. 선생이 영월 고을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 하셨을 때 , 저는 차석으로 급제했던 이호범 입니다." 이호범이 이렇게 나오자 김삿갓은 더 이상 자신을 감출 수 없었다. "아, 그래요 ? 이것 참 반갑소이다." "저는 그 후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에 급제해 가지고 얼마 전에 이곳, 문천 군수로 제수되어 내려왔습니다. 선생께서는 그 후에 세상을 버리고 유랑 길에 오르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하하 ..인생하처 불상봉(人生何處 不相逢) 이란 말이 있지 않소이까. 영월에서 백일장을 같이 본 분이 문천 군수가 되셨다니 진심으로 기쁘오이다." "저의 고을에서 선생을 만나게 된 이상 , 저로서는 선생과 그냥 작별 할 수 없습니다. 노독도 푸실 겸 , 단 며칠간이라도 저의 고을에서 쉬어가소서." 사또는 이렇게 말을 하며 김삿갓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김삿갓은 손을 내저었다. "사또 어른의 호의는 고맙기 한량없으나,   나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사람이니 그냥 놓아 두소서." "선생께선 무슨 말씀을 ! .. 제가 워낙에 풋내기 사또인 관계로 민정을 처리함에 매우 미숙한 편이니 며칠 동안 묵어가시면서 제게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꼭 들려주십시오." 사또는 이같이 말을 하며 김삿갓을 억지로 잡아끄는 것이었다. "방랑객에 불과한 나 같은 놈에게 치도를 물어 보신다는 것은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을 ! 백일장에서 장원급제 하신 시문 속에는 선생의 고매한 치도정신이 여실히 담겨 있었습니다.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살려 내기 위해 스스로 도둑의 누명을 쓰셨던 정신에 저는 거듭 탄복을 마지 못하는 바이옵니다. 바라옵건대 ,부디 본관의 소망을 꼭 들어주소서." 김삿갓은 인정에 약한 사람이라 이호범의 간청을 떨치고 돌아설 수 없었다. "사또 어른의 말씀이 이토록 간곡하시니 그러면 며칠 동안 술이나 얻어먹다가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이호범이 김삿갓을 관사로 데려와서 그날부터 칙사 대접을 해가며 문천 고을의 민정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어느 날 술을 나누며 사또는 김삿갓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저희 고을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민소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자 김삿갓이 술을 마셔가며 말을 했다. "사또께서는 워낙 영명하셔서 ,백성들의 민소를 가리는데 어려움이 전혀 없으실 터인데, 뭐가 그토록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 " 사또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 "과분한 칭찬 올시다. 실상인즉 , 저 자신도 백성들의 시시비비를 가려주는데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자부를 했습니다. 허나 , 실무에 부딪치고 보니 , 판단을 해야 할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옵니다. 그러니 삿갓 선생께서 저에게 지혜를 좀 빌려 주시옵소서." "사또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라면 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 옛말에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文殊)의 지혜가 나온다고 하였으니 만약 어려운 소송이 있다면 서로 상의해 보도록 하십시다." 그러자 사또는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문천 고을에 지금 판단하기 매우 어려운 소송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남자가 불에 타 죽은 것이었다. 그 남자의 마누라의 말에 의하면 집에 불이 나서 남편이 타죽었다는 것인데 그러나 죽은 사람의 친척들의 말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 남자는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니라 , 그의 마누라가 그를 죽인 후에 살인죄를 면하려고 집에 불을 놓아 시체를 태워 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면서 사또에게 진상을 규명해 달라고 고소를 제기해 왔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사또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물었다. "사또의 심중은 어느 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 하십니까 ? " "염탐꾼을 풀어 그 여인의 평소 소행을 소상히 알아본  결과 ,  그들 부부의 금술이 매우 나빴다고 합니다. 게다가 여인의 성품이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보아, 여인이 남편을 살해한 후에 계획적으로 집에 불을 내어 불에 타 죽은 것처럼 위장을 하였다는 심중을 가지고 있으나 불을 낸 것이나  불에 타 죽었다는 증거가 없기로 고민입니다. "사또께서 여러 방면으로 조사 하시고 심증을 굳히셨다면 , 이 사건은 본부(本夫) 살해에 방화를 겸한 중죄 사건임이 틀림없을 것 같군요." 사또는 김삿갓의 말에서 더욱 힘을 얻은 듯, "저 역시 선생의 의견과 같습니다만 ,심판을 내리려면 당사자가 꼼짝 못할 증거가  있어야 할 터인데 , 심증만 있을 뿐 ,증거가 아무것도 없어 최후 심판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형편 입니다." 사또의 말을 들은 김삿갓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  앉은 몸을 좌우로 까딱 거리더니 잠시 후에 자신 만만하게 대답했다. "증거가 없다 하시니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 이런 사건은 엄격하게 다스려 나가셔야 할 것입니다." "증거가 없으면 확실한 증거를 일부러 만들어 내야 한다고요 ?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 그러나 김삿갓은  사또의 질문에 대답은 안 하고 엉뚱한 질문을 먼저 했다. "하나 물어 보겠습니다. 불에 타 죽었다는 사람은 혹시, 이미 매장을 해 버린 것은 아니옵니까?? " "아닙니다.  죽은 사람의 일가들이 사인을 명확히 밝히기 전에는 매장치 않겠다고 하여 시체는 아직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김삿갓은 무릎을 치며 말을 했다. "그렇다면 지극히 간단합니다. 정말로 불에 타 죽은 사람인지 , 혹은 마누라 손에 죽고 난 뒤 시체로 불에 탄 것인지 .. 시체를 조사해 보면 단박에 알아낼 수 있습니다." 사또는 그 말을 듣고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였다. "선생 ! 타살인지 소사(燒死)인지 시체를 살펴보면 대번에 알아 낼 수 있다는 말씀이 정말입니까 ? " "물론이지요. 사또 어른께 왜 거짓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그러자 사또는 김삿갓 앞으로 바싹 다가 앉았다. "선생 ! 시체를 검사해 보면 뭐가 어떻게 다른지 그 비방을 꼭 좀 알려 주십시오. 이 사건은 제가 사또로 부임해 오고난 뒤 처음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공명정대하게 재판하여 주면 제가 이곳 문천고을에 명관으로 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 사또 어른을 명관으로 만들어 드리기 위해서라도 이 비방만은 꼭 가르쳐 드려야만 하겠군요. 하하하..." 김삿갓은  술 한 잔을 쭈욱 들이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사또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사또는 김삿갓의 말을 듣자 크게  감탄하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호..과연 듣고 보니 , 그처럼 명확한 증거는 없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형리에게 시체를 검안하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또는 밖으로 나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사또의 옷소매를 잡으며 말을 했다. "죽은자의 시체는 마땅히 만인이 보는 앞에서 검시하되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너무 서두르시면 안됩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40) 밝혀진 사인(死因) "시체를 검증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니요? 그것이 무엇 입니까? " 김삿갓이 대답한다. "남편을 죽여 불에 태울 정도로 지능적인 여자라면 , 재판도 공개적으로 하고 시체 검증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해야 하되 , 그 전에 준비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 재판을 섣불리 서둘다 보면 사또께서 백성들에게 엉뚱한 원성을 듣게 됩니다." "재판을 섣불리 서두르다가 제가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다뇨 . 그건 또 무슨 말씀 입니까 ? " "사람은 누구나 곤경에 빠진 약자를 동정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공개된 자리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납득할 증거를 보여주지 않고,   여인을 남편을 살해하여 불에 태워버린 중죄인으로 낙인을 찍어 버리게 되면 , 백성들은 오히려 죄인을 동정하기 마련이고 ... 아울러 사또의 횡포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하오니 , 시체를 검사하기 이전에 반드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김삿갓은 사또에게 이러저러한 절차를 밟은 뒤에 , 백성들의 동의를 이끌어내 최후의 심판을 내리도록 하라고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재판은 선생께서 일러주신 대로 모든 절차를 밟은 후에 공개적으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사또는 문제의 여인을 동헌 마당에 끌어다가 꿇어 앉혀 놓았다. 공개 재판을 한다고 방 (榜)을 미리 써 붙였기에 동헌 마당에는 구경 나온 백성들이 수 없이 많았다. 재판 광경을 방청 나온 사람들 중에는   김삿갓도 한몫 끼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여죄수 옆에는 난데없는 새끼 돼지 두 마리가 죄수처럼 결박을 진 채 꿀꿀 거리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난데없는 돼지를 보고 제각기 한마디씩 쑥덕거렸다. "저 돼지는 어떻게 된 돼지야 ? 돼지도 서방을 죽이고 재판을 받으려고 끌려온 모양이지 ? " "예끼 ,이 사람아 . 설마하니 돼지가 죄수로 끌려왔을라고." "그러면 저 돼지는 왜 끌려온 거야 ?" 돼지가 무엇 때문에 결박을 지어 끌려왔는지 ,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듯 재판을 하는 자리에 돼지가 등장한 것은 사전에 김삿갓이 사또에게 말을 해준 탓이었다. 사또가 동헌 마루 위에서 죄수를 굽어보며 문초를 시작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는 네 남편을 살해하여, 불에 타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분명할진데, 아직도 네 죄를 이실직고 하지 않겠느냐 ?" 그러자 죄수는 사또를 올려다보며 분노에 찬 어조로 항변을 한다.   "사또께서는 어찌하여 아무 죄도 없는 쇤네를 살인범으로 몰아붙이시옵니까? 아내가 남편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 사또께서는 댁에 돌아가 마나님에게 물어 보시면 잘 아시게 될 것 이옵니다." 죄수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 사또의 마누라 까지 물고 늘어질 정도로 악랄하였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그 말을 듣더니 , 모두들 그 여인을 동정해 마지않는다. "저 여자는 살인범으로   몰리는 것이 얼마나 억울하면 사또의 마누라까지 물고 늘어질까, 증거도 없는 저 여자를 본부 살해범으로 몰아치는 것은 아무래도 사또가 잘못 하는 일 같은걸." "누가 아니래 ! 내가 보기에도 사또가 너무 심한 것 같아. 정말로 남편을 죽인 여자라면 저토록 당당하게 나올 수야 없지 않은가 ? " 사또는 구경꾼들의 분위기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문초를 계속했다. "네가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본부를 살해한 죄인임에 틀림이 없다. 네 죄를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는데 ,  너는  어찌 죄가 없다고 발뺌만 하고 있느냐 ! " "사또는 무슨 근거로 쇤네를 살인범으로 몰아치시는 것이옵니까? 죄가 있으면 증거를 보여 주옵소서. 아무리 사또이기로 생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아치는 법이 어디 있사옵니까. " 여인은 길길이 뛰며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거칠게 항변했다. 사또는 이때라 싶어 여인을 굽어보며 다시 말했다. "네가 말 한번 잘하였다. 네가 남편을 죽인 후 불을 질렀다는 증거를 보여 주기만 하면 네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 "그야 물론입지요. 쇤네가 남편을 죽여 불에 태웠다는 증거가 있다면 어찌 인정을 안 하겠습니까. 하오나 그런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증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 " 여인은 당당하게 자신이 무죄임을 주장 하였다. 그러자 방청해 있던 구경꾼들의 분위기는   점점 여인을 동정하게 되었다. 여인이 남편을 죽였다는 이렇다 할 증거도 없으려니와, 재판에 임하는 당당함 등, 여인은 어디로 보나 범인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방청석에서 여인을 동정하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또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때 ,사또가 방청석을 향하여 말을 했다. "방청객 여러분 !  살아 있는 사람이 불에 타 죽는 것과 죽은 사람이 불에 탄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있음을 여러분은 미리 알고 계셔야 합니다."   사또의 이 같은 말에 방청객들은 한결같이 궁금해 하였다. 그리하여 늙은 방청객 한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사또에게 묻는다. "사또 어른 !   생사람이 불에 타 죽은 시체와 죽고 나서 불에 탄 시체는 모두가 시체이거늘 , 무엇이 다르다는 말씀이시옵니까?? " 사또가 대답했다. "같은 시체라도 살아 있을 때 불에 탄 시체와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는 엄연히 다른 모습을 하는 법이오. 그것을 지금부터 여러 방청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증명해 보일 터이니 여러분들은 검증의 과정을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방청객들은 사또의 말에 더욱 궁금증이 일어 , 사또의 일거수일투족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새로 부임해 오신 사또는 대단히 지혜로운 어른이신가 봐, 우리들은 생각지도 못한 비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을 보니.." 하며 눈과 귀를 곧추 세우고 사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또는 형리에게 명 하였다. "돼지 한 마리는 죽여 가지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 한마리는 산채로 묶어 ,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거라. 그리고 장작에 불을 지피거라."  그리하여 동헌 마당에서는 방청객이 지켜보는 앞에서 살아있는 돼지와 죽은 돼지를 불에 태우는 거창한 실험이 시작 되었다.   사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보며 죄수에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산 돼지와 이미 죽은 돼지를 불에 태워 보는 것은, 네 죄가 있고 없음을 가리기 위한 실험이로다. 그러니 너는 똑똑히 보아 두어라." 여인은 그만 , 기가 죽었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 장작불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또는 방청객을 향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산 돼지는 불에 타 죽는 순간까지 호흡을 하므로  불에 타 죽은 후에 , 입안에 재가 쌓일 것이오, 이미 죽은 돼지는 호흡을 할 수 없으니 , 불에 태우더라도 입안에 재가 없이 깨끗할 것 인즉.. 잠시 후면 여러분들은 나의 말의 진위를 확인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두 마리의 돼지가 불에 타고 나자, 사또는 방청객을 다시 둘러보며 말을 하였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는 돼지와 죽은 돼지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직접 불에 태워 보았소. 이제는 방청객 중에서 몇 사람이 나와, 두 마리 돼지 입안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기 바라오." 그러자 두세 명의 방청객이 달려 나와 불에 탄   돼지 입안을 검사 했다. 과연 살아서 불에 탄 돼지의 입안에는 사또가 말을 한 대로 ,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죽은 뒤에 불에 탄 돼지의 입안은 재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 "과연 사또 어른은 정말로 귀신같은 어른이시오. 이런 일 까지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 ? " 방청객 들은 사또의 지혜로움에 혀를 내두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또는 다시 방청객을 굽어보며 말했다. "지금 여러분 앞에서 직접 실험을 해 봄으로써 살아서 불에 탄 돼지와 죽은 뒤에 불에 탄 돼지의 입안 상태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모두 아셨을 것이오. 그 점에 대해서 아직도  의혹을 품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러자 방청객들이 입을 모아 외친다. "사또 어른은 실로 귀신같은 분입니다." "나는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오." 이호범은 방청객들의 칭송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우리가 이미 돼지를 가지고 실험을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저 여인의 죽은 남편의 시체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저 여인의 주장대로 남편이 불에 타 죽은 것이라면 입안에 재가 쌓여 있을 것이요,  만일 저 여인이 남편을 죽인 후 불을 질렀다면 입안이 깨끗할 것인즉, 죄가 있고 없음은 조만간 드러나게 될 것 이오.." "여봐라 ! 죽은 자의 시체를 옮겨 오거라." 사또는 자신에 찬 어조로 형리에게 명했다. 동헌 마당으로 옮겨진 죽은 자의 시체는 형리와 방청객 수 인이 번갈아 입안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죽은 자의 입안은 매우 깨끗했다. "사또 , 죽은 자의 입안은 깨끗하옵니다." 검안을 한 형리가 대청에 좌정한 사또에게 아뢰자  함께 시체의 입안을 살펴본 방청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 " ... 순간 , 방청객의 탄성이 튀어 나왔다. "조용 ..조용." 사또의 곁에 입시하여 있던 이방이 자신도 사또의 다음 말이 궁금하기 이를 데 없어 , 방청객들의 탄성을 제지했다. 사또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쩌렁쩌렁한 어조로 말했다. "죄수는 듣거라. 네가 남편을 죽여 불에 태운 증거가 이렇게 뚜렷한데 , 아직도 자백을 못 하겠느냐 ?" 죄수는 더 이상 무죄를 주장 할 수 없었던지 , 별안간 땅에 푹 엎어지더니 소리 없이 울기만 하였다. 방청객들은 사또의 현명함에 혀를 내두르고 , 남편을 죽인 후 죄를 감추기 위해 불을 지른 간악한 계집의 소행에 혀를 찾다. 방청객 중에 일인이  "우리 고을 사또님이야 말로 , 천고에 없는 명관이시다 !"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이구동성으로 "암, 암" 하면서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일제히 쳤다. 이에 사또는 자신 찬 어조로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여봐라 !  저런 계집은 꼴도 보기 싫다 ! 저년을 당장 끌어내어 처단해 버려라 ! "      .. 이렇듯 문천 군수 이호범이 백성들로 부터 "천고에 없는 명관"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 김삿갓의 덕택이었음은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다. 이호범이 최후의 판결을 내리고 관사로 돌아오니 김삿갓은 어느새 먼저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사또께서 오늘 명 판결을 내리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하며 사또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 아닌가. 이호범이 김삿갓에게 절을  올리며 말한다. "제가 백성들로 부터 과분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오로지 선생의 덕이었습니다. 선생이 아니 계셨더라면 제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 했을까를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 합니다." 김삿갓이 사또의 몸을 잡아 일으키며, "사또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옵니까? 천도(天道)가 무심치 않고 , 세상만사가 사필귀정이다 보니 이 같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이지요. 재판을 공명정대하게 하시느라 노고가 매우 크셨습니다." 사또는 즉석에서 술상을 차려 오게 하여 김삿갓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선생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41) 소에게 맡긴 판결 과 쥐구멍 사건. "무슨 부탁을 ...." "선생이 관북천리를 유람하시기를 단념하시고 우리 고을에 길이 머물러 주시면 저로서는 그 이상 고마운 일이 없겠습니다." 김삿갓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말씀인즉 고맙습니다. 허나, 역마살에 치인 기러기 같은 넋을 타고난 사람보고 한곳에만 머물러 있으라 하시는 말씀은  무리한 말씀입니다. 얼마간 술이나 더 얻어먹다가 떠나가게 해주소서." "선생 ! 문천 고을은 제가 관할하는 고을 올시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아무리 떠나시려 하여도 사또인 제가 못 떠나가게 하면 , 선생은 문천 땅을 한 걸음도 벗어나질 못 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사또는  속마음이 담긴 농담을 하며 , 어떡하든지 김삿갓을 오래 붙잡아 두고 싶어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사또는 퇴청하자 김삿갓과 술을 나누었는데 ,  어쩐지 그날따라  안색이 좋지 않았다. "사또께서 오늘은 기색이 좋지 않으시니 무슨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 김삿갓이 이렇게 묻자  사또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오늘도 골치 아픈 송사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백성 간에 시비가 생겼을 때 사또께서 흑백을 가려 줘야 하는 것은 목민관의 본분이 아닙니까?? " "물론 입니다. 허나 오늘의 사건은 워낙 아리송해서 ..." "아리송하다뇨 ? 어떤 사건이기에 아리송하단 말씀입니까." 김삿갓은 호기심이 일어 물어 보았다. 사또는 술을 권하며 말했다.  "오늘의 소송 건은 내용이 지극히 단순한 사건입니다. 두메산골에 사는 촌부 두 사람이 황소 한 마리를 제각기 자기소라고 싸우다가 , 사또인 저한테 주인을 가려 달라고 소를 끌고 온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둘 중에 한 사람은 멀쩡한 도둑놈인 셈이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누가 소 임자이고 누가 도둑놈인지 전혀 가려낼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허참 , 소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사또 어른 , 해결책을 스스로 찾으셨습니다!! " "네 ?" "지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소에게 물어 본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사또는 김삿갓의 대꾸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  김삿갓을 빼꼼히 쳐다보았다. "소는 귀가 본능이 어떤 동물보다도 강한 동물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간섭하지 않고 그냥 놓아 주어 버리면 소는 영락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소가 어느 집으로 돌아가는가를 알고 나면 누가 소 임자이고 누가 도둑인지 절로 알 수 있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 사또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과연 너무도 절묘한 방법이시옵니다!! " 그러고 나서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허 참 , 그렇게도 쉬운 방법이 있는 것을 나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면 나 같은 위인은 애당초 사또가 될 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 " 김삿갓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정을 베풀려고 너무 긴장을 하시다 보니 오히려 냉정심이 흐트러진 탓이라고 생각 됩니다. 앞으로 그런 점을 유념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충고의 말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금후에는 그런 점에 각별히 유념하도록 하겠습니다."       .. 사또는 백성들로 부터 "명관"이라는 칭송을 듣고 난 이후 , 김삿갓을 어떤 일이 있어도 놓아 주지 않으리라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날마다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안주로 김삿갓의 환심을 사기에 여념이 없이 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에게는 술과 안주의 질과 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며칠만 쉬어 가려던 계획이 달포가 지남에 따라  김삿갓은  마음이 밖에 있어 온 몸이 쑤셨다. (사또에게 떠난다고 작별 인사를 한다고 , 그러라고 하진 않겠고 ..어떡하든 붙잡으려 할 텐데 , 제일 좋은 방법은 아무 소리도 없이 슬쩍 도망을 가버리는 것 밖에는 없겠구나 ..) 이렇게 마음을 다진 김삿갓이  슬며시 빠져 나갈 , 기회를 엿보고 있던 어느 날 .. 사또가 불시에 찾아와 이렇게 말을 한다. "선생이 심심하실 테니 이제부터 재판 구경이나 하시죠. 오늘은 매우 흥미로운 재판이 있을 예정 입니다." "흥미로운 재판이라뇨?? " 가뜩이나 심심하던 김삿갓에게는   사또의 이야기 자체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여러 건의 재판이 밀려 있는데 , 그중에서 유부녀가 바람을 피우다가 남편에게 고발당한 사건도 하나 있습니다. 그 사건은 제법 흥미가 있을 듯하니, 선생은 제 옆에서 구경을 하고 계시다가 제가 판결을 잘못 내릴 경우에는 옆에서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삿갓은 남에 재판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지만 사또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난처하여 사또를 따라  동헌으로 나왔다. 이윽고 사또는 동헌 마루에 덩실 올라앉더니 , 바람을 피우다 남편에게 고발을 당하고 끌려온 여인을 굽어보며 준엄한 어조로 문초를 시작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는 어엿한 남편이 있는 몸으로 , 그의 눈을 속여 가며 외간 남자와 계속 통정을 하였다니 우리 사회에는 삼강오륜이 뚜렷하거늘   유부녀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 "   사또 앞에 죄인으로 끌려 나오면 누구나 겁에 질려 몸을 떨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문제의 여인은 떨기는커녕 눈도 하나 까딱 않고 도도하기 이를 데 없이  보였다. 여인의 옆에는 남편인 듯싶은 사내 하나가 웅크리고 서 있었는데 , 몸을 떨고 있는 사람은 끌려나온 죄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계집이 어떻게 생겨 먹었으면 저렇게도 당돌할까 싶어 ,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사내들이 욕심을 부릴 만큼 교태롭게 생긴 계집이었다. (계집이 예쁘고 교태롭게 생기면 얼굴값을 한다더니 , 저 계집이야 말로 사내들을 호려먹게 생겼구나.)   사또는 심문에 응하는 죄인의 태도가  매우 불량해 보이자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죄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 어찌 대답이 없느냐 ?"  죄수는 그제야 얼굴을 똑바로 들더니 사또의 얼굴을 말끔히 올려다보며 앙큼한 대답을 한다. "쇤네가 외방 남자와 정을 통해 온 것은 사실이옵니다. 허나, 남편을 속여 가며  정을 통해 온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쇤네의 행실은 남편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온데  , 새삼스럽게 그것이 어째서 죄가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사또는 어이가 없는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남편 되는 자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내는 그대의 허락을 받고 바람을 피웠노라 말을 하는데 사실이냐 ?" 사내는 두 손을 모아 잡고 머리를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집사람이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해  오고 있는 사실을 소인도 알고  있기는 하옵니다만 , 소인이  그러한 행실을 허락해 준 일은 결단코 없사옵니다."   사또가 그 말을 듣고 호통을 내지른다. "예끼 이 못난 놈아 !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면 가랑이를 찢어 놓을 일이지,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 계집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관가에 고발은 왜 했느냐 ? "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도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사또 전에 호소를 하게 된 것이옵니다. 사또 어른께서는 소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굽어 살피 시와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기가 막힌 소리다 . 사또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삿갓은 어쩌면 저리도 못난 사내가 있을까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사또는 계집의 행실이 생각할수록 괘씸타 여겼는지 , 계집을 굽어보며 준엄하게 말했다. "죄수는 듣거라. 너도 지금 들은 바와 같이 , 네 남편은 네가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하도록 허락해준 일이 한번도  없었노라고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남편의 허락도 없이 외간 남자와 통정을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 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너는 아직도 네 죄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 " 그러자 계집은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얼굴을 들더니 사또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말한다.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사또 전에 한 말씀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뭐가 알고 싶으냐? 어서 말해 보거라 ! " 그러자 요망한 계집이 따지듯이 말을 하는데, "쇤네 몸에 달려 있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고 있을 뿐 입니다. 그런데 사또께서는 어찌하여 그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이옵니까?" 이에 사또는 분노가 폭발하여 벼락같은 소리를 지른다. "네 이년 ! 아가리 닥쳐라 . 그것이 네 남편의 소유물이지 , 그것이 어째서 네 물건이란 말이냐 ! " 사또와 죄수가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언쟁이 벌어지자 김삿갓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사또가 과연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무척 궁금하였다.   과연 , 사또는 말끝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 말재주를 부리며 빠져나갈 몸부림을 치는 여인을 앞에 두고 ,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 말이 언뜻 생각나지 않아 , 물끄러미 마당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별안간 손을 들어 마당구석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 얼굴을 들어 , 저기 기어가는 짐승을 보아라, 저게 무슨 짐승이냐 ?" 여인이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마당 한쪽 구석에서 쥐 한마리가 살금살금 기어 가는 것이 보였다. "저 짐승은 쥐가 아니옵니까?? " "그렇다 ! 저 짐승은 네 말대로 쥐가 틀림없으렷다 ! " 사또는 여인의 대답에 일단은 못을 박았다. 그리고 "쉬잇 ! " 하고  큰소리를 내어 쥐를 쫒았다. 그러자 쥐가 기겁하여 쪼르르 도망을 치며 자기의 구멍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사또가 죄수에게 다시 물었다. "쥐가 지금 어디로 들어갔느냐 ? " "제 구멍으로 들어갔습니다." "제 구멍이라니 ? 제 구멍이란 어떤 구멍을 말하는 것이냐 ? " "제 구멍은 쥐구멍 아니옵니까?? " "저것을  어째서 쥐구멍이라고 하느냐 ?" "사또님도 참 !, 쥐가 들락날락 하니까 쥐구멍이라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 여인은 무심코 말을 지껄였다. 그러자 사또가  즉시 추상같이  다그치는데, "옳지 ! 이제야 네가 바른 말을 하는구나. 쥐가 드나드는 구멍을 쥐구멍이라 하듯이 , 네 남편만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그것이' 비록 네 몸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네 것이 아니고 네 남편의 '것이' 아니겠느냐 ! 이제야 내 말 뜻을 알아듣겠느냐 ? " 여인이 자기 말에 걸려서 아무런 대꾸를 못하자 , 사또는 지체 없이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저 계집은 어엿한 유부녀 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마음대로 피웠으니 파륜지죄(破倫之罪)를 범했음이 분명하다. 저 계집을 당장 끌어내어 다시는 오입질을  못하도록 곤장 삼십대를 쳐서 놓아 보내라." 사또가 서릿발 같은 판결을 내리자 김삿갓도 치밀어 오르던 체증이 한꺼번에 뚫리는 듯, 통쾌감을 느끼며 사또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사또 어른 ! 이번 재판은 진실로 명 판결이셨습니다. 사또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이 갈수록 자자해 질 것이옵니다." "이제부터 처리해야 할 사건이 아직도 여러 건 남았으니 선생은 끝까지 지켜보아 주소서." 그러나 김삿갓은 지금이야말로 ,몰래 도망 갈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또에게 다시 작은 소리로 말을 했다. "제가 속이 좋지 않아 잠깐 뒷간에 다녀오겠습니다." 김삿갓은 거짓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와 , 부리나케 숙소로 돌아와  길을 다시 떠날 준비를 하며 달포 동안이나 자신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준  문천 군수 이호범 사또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고별인사를   한구절 써 놓았다.         ... 樂莫樂兮 新相知  (낙막낙혜 신상지) 즐거움은 새 사람을 알게 된 것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고 悲莫悲兮 新別離  (비막비혜 신별리) 슬픔은 친구와  헤어지는 것 보다 더 큰 슬픔이 없다.        ... 김삿갓은 장장 한달여 만에 다시 ,바랑을 지고,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잡으니 ,날아 갈 듯 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문천 관아 밖으로  홀연히 나서니 ,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산천초목이 자기를 새삼스러이 반갑게 맞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느껴 보는 해방감에 들떠, 차츰 , 읍내를 벗어나는 김삿갓의 발걸음은 여간 총총 ,사뿐사뿐 하였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42) 色酒家 주모와의 내기. "상편" 문천에서 달포를 보낸 김삿갓 , 어느덧  봄날은 다 가고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김삿갓은 오늘도 북상하는 계절을 등에 업고 자꾸만  북쪽을 향하여 걸어갔다. 얼마를 가다 보니 , "色酒家" 라는 희한한 간판을 내 건 주막이 있었다. (색주가? 미인계 (美人計)를 써서 술꾼들을 많이 불러 모으려고 이러한 간판을 내걸었나?? ) 김삿갓은 술 생각도 간절했지만 괴상망측한 술집 이름이 궁금하여 ,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처지이나, 주막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김삿갓이 술청에 들어서자 저쪽에서 손님들과 히히덕거리고 있던 주모가 반갑게 달려온다. "어서 오세요. 손님도 소문을 듣고 우리 집에 "내기"를 하려고 오신 모양이죠?? " 마흔을 넘어 보이는 주모는 젊은 계집처럼  얼굴에 분칠을 하고 어린아이들이 입는  녹의 홍상(綠衣紅裳) 차림을 하고 있었다. 주모의 차림은 어느 모로 보나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는데 , 김삿갓을 맞으면서 조차, 두렁두렁한 왕방울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배시시 웃는 통에 김삿갓은 "움찔" 하며 , 여자가 징그럽다는 생각이 다 될 정도였다. 김삿갓은 미욱한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대꾸했다. "나 술 한 잔 주시오...나는 아무 소문도 못듣고 지나다가 우연히 들렸는데 ,이 집에 대해 무슨 특별한 소문이라도 있소 ? " 주모는 눈을 호들갑스럽게 뜨며 , "우리 집 소문이 얼마나 요란스러운데 , 손님은 그런 소문도 못 듣고 왔다는 말인가요?? " "그러게 말이오. 나는 색주가라는 간판이 희한하여 발걸음 했지." 그러자 주모는 또다시 호들갑을 떨며 비웃는 듯이 말했다. "색주가란 "계집과 술이 있는 집"이란 뜻인데 , 손님은 그런 뜻도 모르셨나요?? 유식한 양반인줄 알았더니 .." 하며 살짝 비꼰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술을 파는 집 치고 ,  계집이 없는 집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소 ? 내가  세상을 두루 편답을 하며 수많은 주막을 전전했지만 , 소도둑놈 같은 사내놈이 술을 파는 주막은 본 바가 없소이다." "그리고 보면 세상의 주막은 모두 , 색주가라 할 수가 있을 터가 아니요 ? 그런데 , 이 주막은 술은 있어 보이는데 , 계집은 안보이니 어찌된 일이오??" 김삿갓은 짐짓 , 주모의 꼴과 하는 말이  괘씸하여 속마음을 "툭'"던져보았다. 그러자 주모 하는 말, "이보시오 손님  ! 손님 눈은 눈이 아니고 응가 구멍이오?? 나 같은 미인을 앞에 두고 계집이 없다 하는 것은 무슨 몰상식한 말씀이오!! " 하며 시비조로 나왔다. "엇 ! 하하하하 ..나는 그대가 하늘에서 내려 온 선녀인줄  알았지 , 설마하니 주모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오, 그대가 이 집 주모였던가? 그렇다면 어서 술이나 가져 오라구! " 김삿갓이 너스레를 떨며 이같이 대꾸하자 주모도 조금은 마음이 풀어졌는지  말씨가 상냥하게 변하기는 하였으되 , 고개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한다. "그건 안 돼요. 사전에 약속이 있기 전에는 술을 함부로 내놓을 수 없어요." "거참 , 우습구려. 사전에 약속이 있기 전에는 술을 내 올수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 "우리 집에서는 술값을 먼저 받고 술을 내오는 첫 번째 방법이 있고 , 두 번째는  먼저 술을 한잔 따라 놓고 , 손님과 내가 내기를 해서 손님이 이기면 술을 공짜로 드리지만 손님이 지게 되면 술 석잔 값을 내놓아야 하는 방법이에요. 손님은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떤 방법을 택하시겠어요?" 김삿갓은 하찮은 계집과 내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가진 돈이 없으니 공짜 술을 얻어먹으려면 싫든 좋든 내기에 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마침 잘 되었다. 내기를 해가지고 공짜 술을 얻어 먹기로 하자. 어떤 내기를 걸어올지는 모르지만 설마하니 술이나 팔고 있는 돌대가리 같은 계집에게 지기야 하겠는가?) "별로 까다롭지 않은 내기로군. 아무튼 내기를 할 테니까 우선 술이나 한잔 가져 오라구! " 김삿갓이 이렇게 대꾸하자 먼빛으로 구경을 하던 손님 하나가 김삿갓을 향하여  손을 휘저어 보이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여보시오, 노형! 행여 주모하고 내기하지 마시오. 우리는 멋모르고 조금 전에 내기를 했다가 술은 한잔씩 밖에 못 마시고 여섯 잔 값을 뺏겼다오." 그러는 옆에 앉은 일행인 듯한  다른 사내는 계면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주모는 그 말을 한 손님 쪽으로 분노에 찬  눈초리로  쏘아 보며 말을 한다. "이 못난 것들아! 내기에 졌으면 곱게 꺼질 일이지 , 무슨 악화 심정이 있다고 남에 장사에 훼방을 놓는 거야? 대갈통을 부숴 버리기 전에 썩 꺼지지 못해! " 주모가 진짜로 대갈통을 부숴버릴 도끼를 들고 나올 것 같은 서슬퍼런  소리를 내지르자, 손님들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았다. 김삿갓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 이제 알고 보니 주모는 선녀가 아니라 주막 깡패로군 그래! " "그나저나 내가 술을 한잔 먼저 따라 놓고 손님한테 말재주를 부릴 테니 손님은 즉석에서 그 말에 어울리는 답구를 해 주셔야 해요. 즉석에서 대답하지 못 하고 어물거리면 지는 거예요. 알았죠?" 주모는 내기의 방법을 말해 놓고 술을 가지러 술청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다. "쪼르르..." 술 한 잔이 따라졌다. 주모가 따른 술을 김삿갓은 냉큼 집어 쭉 들이켜 버렸다. "어머 ! 내기도 하기 전에 술부터 마셔 버리면 어떡해요." "목이 타올라 못 견디겠는걸 어떡하나 . 내기를 하고 나서 술을 마시거나 , 술을 마시고 내기를 하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 "그건 그렇지만 , 내기에 지게 되면 술값은 틀림없이 석 잔 값을 내야 해요. 아셨죠? " "어따 , 걱정도 팔자일세 .. 어차피 공짜 술을 마시게 될 터이니 빨리 내기나 시작하자구." "길고 짧은 것은 대 보아야  할 테니  단단히 각오하세요." 이윽고 내기를 시작 하는데 , 주모는 허공을 잠시 바라보더니 문제를 말 한다. "오동나무 열매는 동실 동실 (桐實 桐實) ! 댓귀 말을 하나 말해 보세요." "내기가 고작 그 정도 인가 ? 보리 뿌리는 맥근 맥근 (麥根 麥根) .. 어떤가? " "어머 ! 손님은 제법 대답을 잘 하세네요. 그렇다면 오리는 십 리를 가도 오리, 백리를 가도 오리 ... " 김삿갓은 소리를 내어 웃으며 대꾸했다. "할미새는 어제 낳아도 할미새 , 오늘 낳아도 할미새 ..." 주모는 적잖이 놀래며, "새장구는 새 것도 새장구 , 낡은 것도 새장구 ..." "북은 동쪽에 있어도 북이요, 서쪽에 있어도 북이라 !  ..." 김삿갓이 거침없이 대꾸를 하니 주모는 몹시 초조한 빛을 띄며 다음 문제를 말한다. "창 (槍)으로 창 (窓)을 찌르니, 그 구멍은 창 (槍) 구멍인가 , 창 (窓) 구멍인가? " "그런 애기는 얼마든 많네.. 눈 (雪)이 눈 (眼)에 들어가 눈물이 나오니 , 그 눈물은 눈 (雪) 물이라 할 것인가 , 눈 (眼) 물이라 할 것인가 ? 주모의 대답을 듣고 싶네!! " "아이구 엄마야 ! .. 내가 아직도 한 번도 져 본 일이 없는데 , 손님에겐 못 당하겠네." 김삿갓이 막힘없이 힘들이지 않고 대답을 해대니 주모가 손을 번쩍 들며 졌다고 고백한다. "사람이 솔직해서 좋군그래 ..헌데, 나는 아직도 술을 한잔 더 마시고 싶은데, 내기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 "정말이이에요 ? " "물론이지." "그럼 이번에는 문제를 바꿔 한시(漢詩) 짝 맞추기 내기를 할까요? " "한시 짝 맞추기를? 주모가 한시도 알고 있단 말인가 ? " "이 양반이.. 사람을 뭐로 보고 말하는 거예요 ! 내가 이래 뵈도 , 서당에서 삼년 동안 부엌데기 노릇을 하는 통에 백수문(白首文)을 통째로 외울 수도 있는걸요." "재구삼년에 능풍월(齋狗三年 能風月) ,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더니, 주모가 "딱" 그 격일세, 허나.. 백수문을 통째로 외운다고 해도, 한시까지 잘 할 수는 없을 텐데 ……." "애고, 내 걱정을 마시고  손님 걱정이나 하시오." 주모는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지 , 제법 당당하게 나온다. 김삿갓은 웃으며 말했다. "좋소!! 우선 술이나 한잔 더 따르고 ……." 주모는 술 한 잔을 또 따랐다. 김삿갓이 술잔을 들고 마시는 사이, 주모는 어디선가 종이 두루마리를  가지고 나타났다. "한시 짝 맞추기 내기의 문제가 이 두루마리에 적혀 있으니, 빨리 내기를 시작 하세요." 하며, 자랑스럽게 두루마리를 흔들어 보였다. 김삿갓이 보건데, 어떤 선비가 장난삼아 한시 짝 맞추기 글을 적어준 모양이다. "내기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게,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가 술값을 내게 생긴 것 같군." 김삿갓이 짐짓, 자라 모가지 집어넣듯, 어깨를 들어 보이자 주모는 신이 나서 말을 한다. "이 두루마리에는 다섯 개의 유명한 한시가 적혀 있어요. 첫 문제는 한 일자로 시작하는 한시 이고, 둘째 문제는 二 자로 시작하는 한시이고.. 이런 식으로 五자 까지 다섯 편의 시와 그 댓귀가 모두 적혀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한 문제를 낼 때 마다, 손님은 그 댓귀를 대답하면 되는 거예요." "어떤 놈팡이가 그걸 적어 주던가?" "그건 아실 필요가 없어요." 주모가 첫 문제를 읽으려 하자 김삿갓이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가만 가만..다섯 문제중에 몇 문제를 맞혀야 이기게 되는가?? " "다섯 문제 모두를 맞춰야 해요. 한 문제만 틀려도 지는 것이 되요." "그런 불공평한 내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 " "술장수 술을 공짜로 마시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호호호호 ……. 주모는 벌써부터 승리감에 도취된 듯 요사스럽게 웃어 젖혔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43) 色酒家 주모와의 내기. "하편" "첫 문제는 一 자로 시작하는 시예요. 내가 문제를 부르면 즉석에서 대답을 해야 해요, 아셨죠." 그리고 한시 한 줄을 읽었다.   "一粒栗中 藏世界"  (일립율중 장세계)   김삿갓은 주모가 읊은 시구를 듣고 크게 놀랐다. 이것은 오등회원(五燈會元) 이라는 불서(佛書)에 나오는 시로서, 우주의 원리를 일곱 개의 글자로 집약해 놓은 ,  너무도 심오한 시였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주모에게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주모에게 누가 그처럼 심오한 시를 적어 주던가? " 주모는 이번에야 말로 , 내기에 이길 자신이 생겼다고 여기는지 , 의기양양하게 대답을 재촉한다. "내기 문제를 누가 가르쳐 주었든 간에 , 대답을 못 하겠거든 빨리 손이나 드세요."   "허..참 !"  김삿갓은 주모의 태도를 마뜩하지 않게 여기며 댓귀를 불렀다.   "일립율중 장세계".. 좁쌀알 한 알 속에 온 세계가 숨어 있어 "반승당병 자건곤 .. 반 되들이 솥 속에서 하늘과 땅을 삶는다.   (半升당丙 煮乾坤)   주모는 문제가 적혀있는 종이 두루마리를 들여다보다가 김삿갓의 대답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크게 놀란다.  "첫 문제는 용케도 맞추셨네요. 그러나 두번째는 안 될 거예요." 주모는 두 번째 문제를..   "이월강남 화만지 "  (二月江南 花滿枝) 하고 말한다. 김삿갓은 즉각 대답했다.   "이월이면 강남에서는 가지마다 꽃이 피니" ........... "이월강남 화만지 " "타향에서 한식을 맞는 이 몸 고향 생각 간절타"……. "타향한식 원감비" (他鄕寒食  遠堪悲)   "지금 이 시는 당나라 시인 맹운경의 한식일 이라는 시렸다.".. 주모는 약이 오르는지 ,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번째 문제를 읊었다.   "삼오야중 신월색" (三五夜中 新月色) 김삿갓은 또 다시 짝을 맞춰 대답한다.   "삼오야중 신월색"...한가위 보름밤에 달이 솟아 아름다우니 "이천리 외고인심"... 이천리 타향 사는 친구의 마음은 어떠할까. (二千里 外故人心) 세 문제를 연거푸 척척 맞춰내니 주모는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주모는 낙담을 하지 않고 네번째 문제를 불렀다. "四十餘年  睡夢中" (사십여년 수몽중) 주모가 문제를 부르자 김삿갓이 말했다. "그 시는 명나라의 왕수인의 수기우성이라는 시라네. 내가 전문을 읊어 볼테니 들어보라구." 그리고 김삿갓은 시 한편을 줄줄 읊어내렸다. "四十餘年 睡夢中"   (사십여년 수몽중)   사십 여년을 꿈속에서 살아 오다가 "능今醒眼 始夢용"   (능금성난 시몽용)   이제야 깨어나니 눈 앞이 텁텁하네 "不知日巳 過停午"   (부지일사 과정오)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난줄도 모르고 "起向高樓 撞曉鐘"   (기향고루 당효종)   이제사 다락에 올라 새벽종을 치노나.       .. 주모는 내기 문제를 낼 때 마다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김삿갓의 재주에 그만 넋이 나가 버렸다. 실상인즉, 주모는 한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손님들 돈을 우려먹을 심산으로 어떤 한학자 (漢學者)에게 부탁하여 내기 문제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김삿갓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주모는 내기문제를 받을 때 한학자가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 내기문제로 짝 맞추기 내기를 걸면 , 백발백중 첫, 두구절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게요. 만일 세번째나 네 번째 까지 알아맞히는 사람이 있다면 , 그 사람은 우리나라 이태백일 것이오." 사태가 이쯤 되니 주모는 내기에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되지 않았다. 김삿갓에 대해 인간적인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주모는 감격어린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보며 말한다. " 손님이 한시에 이렇게 훌륭하신 분인지 미처 몰랐어요." "내기를 하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나머지 하나도  마저 부르시오." "아네요, 손님처럼 위대한 학자님께 이 이상 내기를 하자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승부는 끝난 것으로 하고 , 술값은 한 푼도 받지 않겠어요."   "웬일 인가 ? 주모는 손님에게   내기 술 한 잔을 먹여 놓고 석잔 값을   받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래요. 못난 사내놈들에게 돈을 욹겨내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손님의 경우는 달라요." "지금까지 내기를 해오다가 별안간 나의 경우는 다르다니 별일이군." "손님은 학식이 너무도 높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어떡해요." "고맙네. 실상인즉 나도 돈 한푼 없어, 내기에 졌더라면 크게 창피를 당할 뻔 했구먼." "네 ? 그런 거짓말은 하지도 마세요. 돈이 한 푼도 없는 사람이 술집에 어떻게 들어와요 ? " "색주가라는 간판을 보자 술 생각이  하도 간절해 , 돈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 없이 덮어놓고 들어왔지." "아이참 ! 기막혀라.. 생판 모르는 술집에 와서 무작정 무전취식을 하려는 배짱이었다는 말씀이에요 ? " “나의 경우는 무전취식이 아니라 무전 치주라는 말이 옳겠지, 하하하." "이제보니 손님은 배짱이 보통이 아니시네요." "돈 없는 놈이 배짱까지 없으면 술맛을 평생 못 보게 될 것 아닌가, 안 그래? 하하하..."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44) 色酒家 주모의 팔자고치기. "그나저나, 어쩌다 주모는 돈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었나? " 주모의 내기 항복을 받아낸 김삿갓 , 화제를 바꿔 주모에게 물었다. 그러자 주모는 갑자기 우울한 얼굴이 되며  신세한탄을 한다. "나도 처녀 시절에는 남들처럼 꿈도 많고, 사랑도 얼마든지 잘 알 수 있는 여자였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사내놈들에게 하도 많이 속아서 , 악녀가 되고 말았어요." "사내놈들에게 얼마나 속았기에 악녀가 되었다는 말인가." "내가 사내놈들에게 속은 이야기는 말도 마세요. 한두 번 속았다면 말도 안하겠어요. 자그마치 사내놈들에게 여섯 번이나 속았으니 악녀가 될 수밖에 없지 뭐예요." "사내들한테 속은 사정이 매우 애석한데,  이왕이면 그 얘기를 들려줄 수 없을까?" 주모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좋아요. 이런 이야기는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 결심을 했었지만 , 손님에게는 특별히 애기할게요." 그리고 주모는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모의 이름은 "최순실"..  함흥 변두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열 다섯되는 해에 이웃마을에 살고 있는 "고영태'라는 총각과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다. 그러나 고영태는 순실이에게 임신을 시켜 놓고 어디론가 멀리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다. 순실의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 되었다. 열 달 만에 딸을 낳았으나 그 아기는 세상에 나온 지 스무 하루 만에 죽고 말았다. 두번째 결혼한 남자는 광산촌에 뜨내기 광부였는데 그 사내도 결혼, 반 년 만에 살림살이를 몽땅 팔아 가지고 남에 집 유부녀를 데리고 도망쳐 버렸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순실은 어쩔 수 없이 함흥으로 들어와 술집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생활 10년 동안 네번이나 사내들에게 정을 주었다가 , 그때마다 돈도 사랑도 잃어버리고 결국은 알거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나는 사내마다  모두가 도둑놈이었으니 , 돈 밖에 믿을게 뭐가 있겠어요." 주모의 말을 듣고 나니 ,그 신세가 무척 처량했다. 김삿갓은 껄껄 웃으며 농의 말을 던졌다. "만나는 사내마다 도망치는 것을 보니, 주모의 옥문(玉門)이 항구형 (港口型) 옥문인가 보군 그래." 주모는 김삿갓의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었다. "항구형 옥문 ? 그게 무슨 소리예요? " 김삿갓은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묏자리에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型)이니, 비룡승천형(飛龍昇天型)이니 하는 ,형국이 있듯이 여자들의 옥문에도 항구형이라는 것이 있거든 , 이렇게 항구형 옥문을 가진 여자에게는 사내들이 가까이 왔다가 ,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달아나 버리는 법이거든 ." 김삿갓은 장난삼아 되는대로 말을 하였다. 그러나 주모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졌다. "항구형 옥문을 가진 여자에게는 사내들이 오래 붙어있지 못한다는 말씀이에요? " "아무렴.. 항구라는 곳은 모든 배가 잠깐 들려서 짐을 싣기만 하고 떠나는 곳이 아니던가? 그래서 주모가 좋아했던 사내들이 한결같이 살림살이를 걷어 가지고 달아났던 것이지. 그러니 주모의 옥문은 보나마나 항구형 옥문이 틀림없을 것이야." 김삿갓은 애초에 농담으로 시작을 했지만 , 주모가 바싹 다가서며  관심을 보이자 이제는 농담이었다는 사실을 말 할 수 없어 , 농담을 진담처럼 포장해서 말을 하였다. 주모는 김삿갓의 말을 듣더니 수긍이 되는 점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쉰다. "손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나는 한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할 팔자라는 말씀이에요 ? " 김삿갓은 웃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무리 항구형 여자라 해도 잘 살아 갈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그러자 주모의 눈이 반짝 빛나며 얼굴에 생기가 "좌르르" 돌아왔다. 그리고 얼른 , 김삿갓의 빈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면서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잘 살아 갈수 있는 방법이란 어떤 방법인 가요 ?" 하고 묻는다. 김삿갓은  주모가 따라 놓은 술 한 잔을 쭈욱 들이키고  웃으며 말한다. "내가 그 비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듣고   그대로 하라구.. 항구라는 곳은 배가 들어와서 짐을 싣고 떠나기도 하지만, 짐을 가득 싣고 와 짐을 부리기도 하거든,  주모는 지금까지 짐을 싣고 떠날 빈 털털이 배만 사랑을 해왔으니.. 결국은 재산을 모두 털리게 된 것이야. 하지만 이제부터는 가난뱅이를 사랑하지 말고 , 돈 많은 영감님을 상대하라구. 돈 많은 영감님과 정분이 나면 , 그 영감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조리 주모에게 아낌없이 부려놓게 될게 아닌가?   그런 방법을 쓰면, 머지않아 주모는 부잣집 마나님으로 출세 할 수 있을게야! " 주모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듣고 보니 과연 그렇겠네요!  손님은 어쩌면 그렇게 아는 것 도 많으세요." "항구형 옥문을 가진 여자는 돈 없는 사내를 상대하면 손해만 볼 것 이니 , 앞으로는 꼭 돈 많은 영감님을 상대하라구. 오늘만 해도 나같이 돈 없는 나그네를 상대하는 통에 술값을 손해 보지 않았는가?".. 마침 그때 , 밖에서 점잖은 목소리로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삿갓이 방문을 반쯤 열고 내다보니 , 의관을 젊잖게 차린 나이 육십쯤 보이는 노인 하나가 사립문 밖에 서 있었는데 , 한 눈에 보아도 돈 푼 깨나 있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김삿갓은 이 기회에 꽁무니를 빼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자세를 보이며 주모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이것 보라구! 지금 문 밖에 내가 말했던 돈 많아 보이는 영감님이 찾아 오셨어. 나는 뒷문으로  슬며시 나갈 터이니 , 내 말대로 돈 많아 보이는, 저 영감님을 잡으라구." 주모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면서, "돈 많은 영감님이라고요 ? 문 밖에 찾아 온 영감님이 돈이 많은 분인지 어떻게 아세요? " "아따,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도 어두워서야 무슨 장사를 해먹겠나. 지금 문 밖에 서 있는  영감님은  짐을 잔뜩 싣고, 항구로 찾아온 배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러니까  주모는 빨리 융숭한 영접을  하여 저 노인이 싣고 온 짐을 주모에게 몽땅 부려놓도록, 영감님 오장 육부를  모조리 녹여 내리란 말이야. 항구형 옥문을 가진 여자는 돈 많은 사람을 상대 하여야만 ,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그만큼 알려 주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들었단 말인가? " 그제야 김삿갓의 의도를 알아차린 주모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님한테 좋은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는데 , 아무 대접도 못하고 이대로 헤어지면 어떡해요." "나 같은 가난뱅이를 가까이 해보았자 손해날 것밖에 없다니까 그러네. 나는 뒷문으로 도망 갈 것이니 저 손님 속히 맞아드려요." 김삿갓은 그 말을 끝으로 부랴부랴 뒷문으로 빠져 나와 버렸다. 주모는 단단히 결심한바 있는지, 밖으로 달려 나가 노인 손님을 맞아들이며,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십시요.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꿈자리가 좋기에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실 줄 알고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늙은 손님도 젊은 색시가 아양을 떠는 것이 싫지 않은지 호쾌하게 웃는다. "허허허.. 꿈자리가 좋아 나를 기다려 주었다니 , 말만 들어도 기쁘기 그지없네 그려 ……. 방안에는  다른 손님은 없는가? " "아이 참, 방안에 있기는 누가 있겠어요. 어젯밤에는 점잖은 어른을 만나는 꿈을 꾸었기에 , 오늘은 아침부터 영감님같이 점잖은 어른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은 걸요.." 김삿갓은 뒷문 밖에서 거기까지 엿듣고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자기 갈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술을 공짜로  얻어먹으려고 "항구형 옥문"이니 어쩌니 하고 수작을 부리게 되었지만.. 그런 엉터리 말에 깜빡 속아준 주모는  앞으로는 돈 많은 영감님만 골라가며 상대하게 될 것 이니 형편도 분명,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니.. 오늘 ,  김삿갓이 얻어먹은 공짜 술 몇 잔 값은 충분히 갚아준 것이 되지 않았던가? 이렇게 생각한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 흔쾌한 발걸음을 이어갔다. 계속 ... 방랑시인 김삿갓 (45) 단천에서 만난 선비 최백호. 김삿갓은 길주(吉州)를 향해 걸었다. 여러 날이 걸려 이름만 그럴 듯이 좋은 길주 땅에 당도하게 되었다. 길주는 옛날부터 과객을 절대로 재우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다. 계절은 북상 할수록 마냥 아름다웠지만,   인심은 북상할수록 북풍한설 몰아치듯이 쌀살해져 가기만 하였고 ,  어느 집을 찾아가도 문을 닫고 본 척도 하지 않는데는 기가 막혔다. 마침 그는 허씨들이 모여 살고 있는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기어코 날이 저물어 하룻밤 유숙을 원했지만 영 헛수고였다. 아무리 과객을 꺼리는 인심이라 해도,   열 집에 한 집 쯤 재워줄 만도 한데 , 이렇게 고약한  동네는 처음 보는 일 이었다.    "과연 과객의 지옥이로구나 ." 김삿갓은 하도 인심이 야박해서 화풀이 시를 한수 읊어 보았다.       .. 吉州吉州 不吉州   (길주길주 불길주) 이름만 길주길주하나 길한 고을은 아니고 許可許可 不許可   (허가허가 불허가) 성만 허가했지 과객은 허가하지 않는구나.         .. 김삿갓은 사흘 밤을 길주에서 보내며, 남의 집 처마 밑이나  빈 헛간에서 밤을 새우는 고생을 하였다. 이렇게 지긋지긋한 길주를 벗어나  고생 끝에 명천에 도착한 김삿갓 , 이곳은 좀 나으려니 했더니.. 이곳 또한 이름만 허울 좋게 명천(明川)이지 , 인심 사납기는 길주에 못지않았다. 원래 명천은 명태의 원 고장이다. 명태란 이름도 명천 사는 태(太)서방이 처음 잡은 고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명태가 썩어 버릴 정도로 많이 잡힌다는 명천땅이지만 김삿갓은 그 북어 꽁지 하나 얻어먹지도 못하고 고생만 했다. "허허 , 이곳도 길주 뺨치는 곳이로다." 김삿갓은 두만강 까지 찾아 가보려던 애초의 계획을 접고 , 명천 땅을 비웃는 글을 한 수 읊은 뒤 부지런히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 明川明川 不明川   (명천명천 불명천) 명천명천이라고 부르지만 사람들은 현명치 아니하고 魚佃魚佃 食無魚   (어전어전 식무어) 어전어전 자랑하지만 밥상에는 북어꽁지 하나 없구나. 다시 길주를 거쳐 단천땅으로  향하니 완연한 여름 날씨였다. 단천은 그나마  비교적 인심이 후한 고장이었다. 서당도 그랬고 민가도 그랬지만 웬만하면 술도 한잔 대접할 줄 아는 고을이었다. 김삿갓은 어느 날 단천에 유명한 남대천 물가로 나갔다. 옥같이 맑은 물이 얕은 천을 흐르는데 ,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못한 삿갓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래 , 내 저 맑고 시원한 물에 들어가 목욕이나 한번 하자 ! ) 김삿갓은 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가서 옷을 훌훌 벗고 , 목욕도 하고 입었던 옷도 대충  빨아서 바위위에 널고 , 마르는 동안 몸을 씻었다. 옷을 말리고 있는 동안 김삿갓은 모처럼 흥이 돋았다. 몸도 마음도 남대천 물속처럼 맑고 개운하였다. 자연히 그의 입에서는 시 한수가 읊조려졌다.       .. 춘수만사택  하운다기봉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 봄물은 사택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기봉이 많기도 하여라 일봉이봉 삼사봉 오봉육봉 칠팔봉  (一峰二峰 三四峰   五峰六峰 七八峰) 수유경작 천만봉 구만장천 도시봉 (須臾更作 千萬峰   九萬長天 都是峰) 잠깐사이 천만봉 구만장천 모두 구름봉.          ... 김삿갓은 모래사장에 팔을 베고 누워 이같이 흥얼거렸다. 그러자 숲속에서 어떤 중년 선비 한사람이 부채질을 하며 나오더니 , "허, 과객양반 실례하오. 혹시 댁이 김삿갓이라는 분 아니시오 ? " 하고 묻는다. 김삿갓은 생면부지의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 함경도 땅에 퍼진 자신의 이름을 어느덧 알아듣고, 묻는 말 같기에 일편 반갑기도 하였다.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제 이름을..." "하하하 ,역시 그분이군요. 어제 우리 마을 어느 서당에 들리신 적이 있지요 ? 그 서당에 갔더니 삿갓을 쓰신 과객 한 분이 다녀가셨다고 해서... " "그래  일부러 저를 만나러 나오셨소?" "그건 아니지만 나도 등물이나 할까하고 남대천에 나왔더니 어디서 시를 읊는 소리도 들리고 삿갓도 옆에  있기에 혹시나 싶어 물었던 것이외다." "그러셨군요.." 김삿갓은 그저 그렇게 인사치례의 말을 건네고 말았지만 , 중년의 선비는 자기를 소개 하였다. "나는 이 마을에 사는 최백호 (崔白浩)라고 합니다. 선생의 성가(聲價)는 익히 들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아셨는지  ? ..."  김삿갓은 자기를 시성(詩聖)으로 칭하는 이유가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허어, 제가 얼마 전에 외가인 안변에 다녀왔더니 , 그곳 사또님 자제를 가르쳐 급제를 시켰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더구나  안변에 내로라하는 양반들을 시로써 옴쭉달싹못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 어떠한 기성(奇聖)인지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참, 무족지언 천리행 (無足之言 千里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이라더니 별것도 아닌 일이 우습게 퍼졌군요." "허..이렇게 대 시인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과분하신 말씀 송구합니다." 이렇게 하여 김삿갓과 최백호는 남대천에서 서로 알게 되었고 최백호의 인품도 학문을 배워 준수한 선비의 풍모를 갖춘 터라 ,김삿갓은 오랜만에 선비다운 선비를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그러니 같은 풍류객끼리 서로 글 애기가 없을 수 없었다. "최선생이 한 수 들려주시오." 김삿갓이 먼저 백호의 시를 한수  청했다. "저 보다도 김선생님이 시인이시니 먼저 한 수 들려주십시오. 그 다음에 제가 하리다." "그럼 운(韻)을 최선생께서 부르시지요." "흐를 류(流)로 하지요."  최백호가 운을 띄웠다. "허허, 강가니까 , 어울리는 좋은 운자를 주셨습니다." "하하 , 김선생은 제 마음에 드는 말씀만 하십니다."    ... 山始劍氣 衝天立   (산시검기 충천위) 水學兵聲 動地流   (수학병성 동지류) 산은 칼의 기상으로 하늘을 찌를듯 서있고 물은 병정의 소리를 내며 땅을 울리고 흐른다.      ... "호.. 과연 , 삿갓선생의 기상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최백호는 진정으로 감탄 하였다. 김삿갓은 자신의 시를 알아 보아주는 최백호를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이번에는 선생 차례요." "운은 ? " "돌아올 회 (廻)! " 최백호는 잠시 시상에 잠기더니 글을 하나 내어 놓았다.         ... 山欲渡江 江口立  (산욕도강 강구립) 水將穿石 石頭廻  (산장천석 석두회) 산은 강을 건너려고 강 어귀에 서 있고 물은 돌을 뚫으려고 돌머리를 돌고 있네.       .. "허허.. 내 시보다 더욱 좋습니다." 김삿갓은  감탄했다. "웬걸요. 김선생님 시에 비하면 졸작이지요." 최백호는 겸손하기만 했다. "헌데 최선생, 실례되지만 첫구에 바랄 욕(欲)자를 아니 불(不)자로 바꾸고 , 둘쨋구의 장수 장(將)자를 어려울 난 (難)자로 바꾸면 어떨까요? 그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 " 山不渡江 江口立    /    水難穿石 石頭廻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해 강 어귀에 서있고 물은 돌을 뚫기가 어려워 돌 머리를 돌아가네.       .. "듣고 보니, 더 운치가 좋아졌습니다. 역시 대가다운 시인이시구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46) 과년한 시인 곱단이. "원 별말씀을 , 죄송합니다. 함부로 최선생의 시를 왈가왈부해서..." 김삿갓은 자기의 시를 고쳤음에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하는 이 선비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헌데 김선생, 내가 듣던 것 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데 성혼은 하셨는지요? " "예, 성혼은 했습니다만 , 선생께선 저보다 연세가 높으신 것 같으니 말씀을 낮추시지요." "허.. 천만에요. 내가 아직은 사십이 못되었는데, 선생 같은 시객에게 그럴 수야 없지요." 하며 그 역시 겸양의 말을 했다. 이렇듯  두 사람이 잠시 세상일을 잊고 , 아름다운 단천 변에 앉아 시와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김선생, 다 있는데 술이 없구려." "허허, 최선생 술은 없지만 물은 맘껏 있소이다! " 김삿갓의 이 말에 최백호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데요 최선생, 선생은 이 마을에서 무엇으로 소일을 하시오? " "하하, 나야 감농(監農)이나 하며 , 이렇게 가끔 산수간에 나와 풍월이나 읊조리며 살고 있지요." "역시 고매하신 분입니다." "김선생은  오늘은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 " "저야 뭐 일정한 여로가 없습니다. 그저 오늘은 이 강물이나 따라 내려가 볼까 합니다." "참, 풍류객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강물을 따라가시면 바다밖에는 없습니다." "허, 그렇습니까? " "김선생, 오늘은 딴 생각 마시고 우리 집에 가십시다. 우리 사랑방에서 며칠 묵으시면서 근동에 글 좀 하는 시객들을 모아 , 풍월도 즐기시면 좋을 것 입니다. 내 꽤 너른 농사를 지어   의식주 걱정은 없는 터라, 김선생이 여러 날 계시더라도  소찬에 밥을 대접할 수 있으니 사양치 마시기 바랍니다." "글쎄올시다, 저야 떠도는 몸이니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  댁에 폐가 될듯하여..." "허허, 자 갑시다. 가셔서 저녁이나 들고 우선 한잔씩 합시다." 김삿갓은 최백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최백호의 집은 과연 선비의 집이요 풍류객의 집이었다. 깨끗한 기와집의 네 귀에는 풍경을 달았고 아름드리 기둥에는 좋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사랑채에 안내된 김삿갓은 대청마루에 책장에 꼿혀있는 고금의 진서(珍書)가 즐비한 것에 놀랐고 이어 나온 주안상의 정갈한 솜씨에 안주인도 바깥 선비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자.. 한 잔 하십시다." "네, 고맙습니다." 이렇게 김삿갓은 최백호의 사랑에 열흘 가까이 머물면서 시름을 잊고 시문을 나누며 기거하게 되자, 금강산과 안변, 문천과 함흥일대등 , 그가 거쳐 지나왔던 곳에서의 소문이 온 동네를 휩쓸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마을에는 과년한 규수 시인 하나가 살았으니 이름은 곱단이라 하였다. 곱단의  어머니는 옛날 함흥의 관기로 있다가 이 마을의 김진사의 첩실이 되어 단천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김진사도 죽고 , 그가 남겨준 농사땅을 도지(賭只)를 주고  비교적 넉넉하게 살면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침선으로 소일하며 살고 있었다. 곱단이는 그런 김진사의 씨앗이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뻤으나, 이상스럽게 혼삿말만 나오면 성사가 되지 않아 스물이 넘도록 출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신이 진사의 딸이라 상민하고는 혼인을 하고 싶지 않은데다 , 막상 내로라하는 양반집에서는 퇴기의 딸임을 앞세워 좋게 보지도 않음으로써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게 된 것이다. 이런 곱단이의 귀에 최백호의 사랑에 온 김삿갓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어머니 백호선생님  사랑에 글 잘하는 손이 들었다면서요? "글쎄 말이다. 나이도 스물다섯밖에 안 들었다는데 그렇게 글을 잘 한다는구나..." "어머나.. 어쩜..." 이렇게 말을 한  곱단이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눈치 빠른 그 에미가 모를 리 없었다.   한편 , 최백호의 사랑에서는 이웃 마을 훈장까지 밤마다   소문난 김삿갓을 보려고 모여 들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어린 학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가 묻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김삿갓은  기초가 되는 천자문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하였다.   "천자문" 이라는 책은  그 옛날 중국 양(梁)나라 때에 주흥사(周興嗣)라는 사람이 지은 만고의 명저(名著)로써, 네글짜씩  짝을 지어 도합 250수로 구성되어 있어서 글자 수로는 모두 1천자로 만들어진 작은 시집(詩集) 이므로  이것을 한 글자, 한 글자씩 가르치는 것 보다 네 글자를 이어서 가르치는 것이 뜻을 새기는데 더욱 좋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 첫 장에 수록된 "天地玄黃"의 경우 , 아이들 열의 열 하나같이 ,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하고  글자만 배우고 익히게 할 것이 아니라, 천지현황의 뜻을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을 묶어서  가르쳐야 , 숲을 먼저 보게 하고 나무를 보게 함으로써 교육의 성과와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寒來暑往" 은 (찰한, 올래, 더울서, 갈왕)이라는 네 글자로 되어 있으니 , 추위가 오니 더위가 간다는 뜻이 되고 , 이렇듯 천자문에 실려 있는 모든 문장을 읽고 새기게 하여야 아이들도 흥미를 가지고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과연, 송곳 같은 말씀이외다!" 모여든 훈장들은  김삿갓의 말에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이렇게 밤마다 최백호의 사랑에서는 학문과 시를 논하는 자리가 벌어지곤 하였는데 , 어느 날은 짓궂은 선비 하나가 말을 건넸다.   "삿갓선생 ! 우리 마을에 처녀 문장가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처녀를 불러다가 시 좀 같이 지어 보면 어떻겠소?" 하며 악의 없이 웃으며  말을 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선비가 말을 하기를, "그 일이야 곱단이 어머니 하고 자별하신 백호선생께서 다리를 놓아야지. 누가 대신 할 사람이 있습니까? " 하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선비가 말하기를, "참, 곱단이가 올봄도 그냥 넘겼으니 이제 스물 하난가 ? 너무 과년해서... 그런데 요즘도 글을 읽나? " 최백호가 말을 받는데, "아, 곱단이 글이야 한 문장 하지요. 요즘도 저 혼자 풍월을 한다던데... " "그려면 백호선생이 곱단이에게 한 상 차리라고 이르고 우리 삿갓 선생님을 한번 모시고 가면 어떻겠소?  혹시나 알겠소?  노처녀 머리까지 얹어줄 기회가 될지? " 삿갓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앉아 있는데  사랑방 손님들은 자기들끼리 이같이 말하며 들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최백호는 정중히 삿갓에게 묘한 의견을 물었다. "저녁마다 마을 훈장 선생들도  더러 권하기도 했지만 혹시 선생께 무례가 될까 염려되어 말씀을 못 드렸는데 마침 우리 내자가 곱단네 집에 볼 일이 있어 들렸더니 그 에미가 반색을 하며 선생의 일을 낱낱이 묻기로  왜 의향이 있냐고 반문하니 퍽 그럴 듯이 말하더랍니다. 이미 조강지처가 계신 줄 아오 만, 대장부가 객지에서 노처녀의 원한을 풀어 주기로 뭐 어떻겠습니까?"   "글쎄올시다. 나야 뭐 객창에서는 무관하옵니다만, 규중의 동정녀의 머리까지 얹어줄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분수에 지나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허허, 김선생. 이렇게 해서라도 처녀귀신 소리를 면하게 해준다면 그 또한 적선이 아니겠소? " "허허... 과분한 말씀입니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련이처럼 기녀가 아닌 요조 규수라는 데는 마음이 끌렸다. "더구나  시서에 능하여 그 어미 소원대로 데릴사위로 들어가시면  단 둘이 풍월도 즐기며, 이런 호강도 흔치않을 것입니다." "허허, 저는 호강하러 객지에 나온 위인은 아니올 습니다만..." "아따 , 덕분에 이 최백호도 술한상 얻어 먹읍시다." "허허허..." 최백호의 집념은 말을 할수록 강해졌다. 계속.. . 방랑시인 김삿갓 (47)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시냇가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란다. 다음날, 최백호는 자기 부인을 시켜   곱단이네 집으로 미리 통지를 보내고  삿갓에게는 새 옷을 한 벌 갈아입힌 후, 그를 데리고 재 넘어 곱단이 집을 찾아갔다. 곱단의 집은 재 넘어 남향에 자리 잡은 조그만 기와집으로 마당 앞에는  한참  장미가 꽃피우고 있었고 손님이 온다는 기별이 있어서 그런지 집안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였다. "이리 오너라! " 안마당을 지나 대청 앞에 가서 최백호가 크게 부르니 부엌에서 한참 음식준비를 하던 곱단 어미가 앞치마 바람으로  뛰어나와, "어머나 ! 백호어른 이렇게 와주셔서... " 하며  부산하게 두 사람을 사랑으로 안내했다. 사랑에 나란히 앉은 두 선비는 무언중에 희색이 만연한데 오늘따라 김삿갓이라는 시인이 자기 집까지 찾아온 지금의 곱단이는 뒤꼍 소나무 아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 척 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한편 김삿갓은 곱단이 집에는 왔으되 그 처자의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뒤뜰에서 오가는 짧은 치마를 입은 처자의 하얀 종아리만 언뜻언뜻 보았을 뿐이다. 상이 들어오기까지 무료했던 최백호는, "김선생 먼빛이나마 곱단이를 보았으니, 이따가  곱단이에게 보여주게 한 수 지어 보시지요." 하고 웃으며 말을 했다. "글쎄요. 뭐 갑자기 생각이 나겠습니까만 한 수 써 볼까요? " 김삿갓은 곱단이가 쓰는 것으로 보이는 붓을 들어 한 수를 적었다. 규중처자대여양   /  완착분홍단포상  (閨中妻子大如孃 / 緩着紛紅短布裳) 적각근창착과객   /  송필심원화향농  (赤脚근창着過客  / 松筆深院花香弄) 규중처녀가 다 커서 어른 같은데, 분홍빛 짧은 치마를 느슨하게 입었구나 붉은 다리가 드러나 과객에게 보이기가 부끄러운 듯, 소나무 울타리에 숨어 꽃향기를 희롱하누나. 곱단이의 지금 표정을 그대로 읊은 시였다. "허어, 곱단이가 좋아하겠습니다." "원 ,별 말씀을.... " 잠시 후 주안상이 떡 벌어지게 나왔고 , 이어 곱게 단장한 곱단이가 나왔다. "자, 뭐 딴 뜻은 아니고 서로 문장을 나누고 담론도 할 겸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했던 차에..." 최백호가 말을 하자 곱단 어미가 말을 받는데, " 암요 , 그렇고말고요. 선비님이 워낙 문장이 높으셔서 아이에게 글도 가르쳐 주실 겸 자주 놀러 오세요." 하며 말한다. 그러자 김삿갓은, "허허, 이거 과객에게 너무 과분한 배려를 하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곱단이는 속으로는 기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아만 있는데, "애야 , 선생님들이신데 어떠냐? 술도 따라  올리고 애기도 좀 하려무나." 곱단 어미가 딸에게  다정하게 이른다. "어머나 어머니도 어떻게..." 상냥하게 웃음 짓는 곱단이는 서글서글한 김삿갓 시인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으나 , 이렇다 말이 없이 술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때 최백담이 잊었다는 듯 "참, 지금 막 김선생이 곱단이 주려고 시를 한 수 지었는데  읽어보아라." 하며 백지를 건네주자 곱단이가 보고, "어머나 오시자마자 어쩌면...." 자기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지은 김삿갓의 시를 흥미롭게 되새겨 보았다. 다음날부터 김삿갓은 혼자서 곱단의 집을 찾아가니 그 어머니도 반겨주었고 노처녀 곱단이는 밤이 이슥하도록 시를 짓고 글을 읽으며 삿갓 선생과 즐기기를 마지않았다. 이렇게 곱단이를 알게 된 삿갓은 최백호에게는 미안했지만 단천 땅을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한달이 되고 또 한달이 보름이 되도록 묵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을 두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곱단이가 삿갓 선생에게 단단히 반했다는군..." "아냐 , 그 삿갓 선생이 곱단이 보다도 더 하다던데..." "그러게 연분이 따로 있지 뭐야, 영 차고 넘쳐서 시집 못갈 줄 알았던 곱단이가...." "글쎄 말이야. 벌써 그 삿갓이   곱단이 뱃속에  애를 넣었다는군." "아이구 망칙해라,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벌써 그렇게 꿀맛을 보았나? " 이렇게 있는 말 없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자 어느 날은 곱단어미가 딸을 불러 말하는데, "애, 요즘 마을에 떠도는 소문이 너하고 삿갓 선생하고, 이상한 말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제 삿갓 선생을 그만 오시라고 할까 ? " 하며 곱단이의 의향을 떠 보았다. "아이참 , 어머니도.. 그 선생님하고 저 하고 무슨 망측스런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행여 ,소문이 그렇더라도 내내 오시던 분을 어떻게 그만 오시라고해요.." 곱단이가 펄쩍뛴다. ("음.. 네가 단단히 마음에 두고있구나...") 곱단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주 결말을 낼 속셈으로 말한다. "글쎄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너만 잘하면 그만이다만  기왕 너도 혼기를 놓쳤으니, 더 이상 말썽이 나기 전에 아주 그 사람하고  성혼을 하던가 하렴. 보아하니 고향도 냉큼 갈겨 같지도 않고 데릴사위 감으로도 그만하면 무던하겠더구나."  그러자 곱단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데, "어머니도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지요." 하며 못이기는 체 승낙을 하였다. "하룻밤에 천리를 간다 하던가? ".. 곱단 어미로 부터  곱단의 의사를 전달받은 최백호는 김삿갓과 곱단이의 성혼을 급전직하로 진행했다. 그런 유월 어느 날, 드디어  곱단이네 마당에서는 조촐한 혼인잔치가 벌어졌다. "허허, 내 이렇게 돈줄 알았지 ! " "암 , 노처녀가 그런 선비를 마다 할리가 있나 ! " "글쎄.. 걸인 시인이 새처녀 얻고 땡잡았지 뭐..." 잔치에 온 동리 사람들은 이렇게 말도 많았다. 삿갓은 혼례에서의 절차와 인사를 모두 치루고 밤이 이슥해서야 곱단이와 오붓한 첫날밤을 맞게 되었다. 김삿갓은 문득 고향의 아내를 생각 하였다. 이렇게 객지에 나와 새장가를 가게 되어 미안하지만 , 대장부가 객지에서 소실 하나 얻는 것쯤 어떠랴 하고 스스로를 용서했다. 그리고 아내와의 그때를 생각하면 , 너무 어릴 때 일이라서 제대로 신랑 노릇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밤은 멋있는 신랑이 되어보자 ! ) 그는 아랫목에 앉아 여러 가지 감회를 억누르고 윗목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곱단이를 정겨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날이 더웠다. 아니, 남들의 눈을 피해 방문을 꼭꼭 닫았기에 곱단이도 김삿갓도 송송 땀을 흘렸다. "곱단이 오늘따라 더욱 곱구만..." 삿갓이 웃으며 입을 열자 "고단하실 텐데 그만 주무시죠.' 그러면서 깔아 놓은 금침을 매만진다. 삿갓이 먼저 겉옷을 벗고 자리로 들려하자, "제 옷도 벗겨주셔야죠." 곱단이가 고개를 숙인채 한마디 한다. "참, 그걸 잊었네..." 삿갓은 곱단의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이제 됐나 ? " 삿갓은 곱단이가 규중처녀라 그런지 주막 안주인이나 가련이 와는 느낌이 달랐다. 어쩐지 여자를 다루는 자신감도 떨어지고 서툴기조차 스스로 느껴졌다. "호호 , 먼저 자리에 드세요." 방안에 불이 꺼지고 신부가 삿갓의 옆에 살며시 다가왔다. 신랑은 먼저 신부의 몸을 매만지며 마지막 걸친 속옷을 헤치기 시작했다. 신부는 몸을 뒤채고 흥분해 떨고 있었다. 삿갓은 신부의 부푼 젖가슴을 끊임없이 애무했다. 그리고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아유, 자꾸 이러시면..." 곱단은 몸을 비틀며 끙끙거렸다. "허허, 참 곱구나 가만 있어라." 삿갓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색색 거리는 신부의 몸을 한참동안 어루만지다 ,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절차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십여 년 간  굳건히 지키고 있던  곱단이의 처녀성에 자신을 입성시켰다. 그러나 그 순간, 김삿갓의 실망은 너무도 컸다. "아니, 처녀가 이럴 수가? ...." 삿갓은 갑자기 하던 짓을 멈추고 앉아, 곰방대를 물었다. 그리고는 뻐끔뻐끔 담배를 피워댔다. (아.. 역시 노처녀란 이런 것인가 ?) 이제까지 삿갓 자신이 상대했던 여인과 너무도 다른 곱단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왜 그러세요. 갑자기? " "아니다 . 어서 자거라." 그리고 삿갓은 불을 켜고 머리맡에 문갑에서 붓을 찾아 들고 백지에 글 한 자를 써 놓았다.     ..   手深內闊  必過他人     (수심내활 필과타인) 털이 깊고 속이 넓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이 지난 자취로다.            ..   새신랑이  첫날밤을 치루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난데없이 불을 켜고 담배를 피우질 않나 ? .. 붓을 들어 글을 쓰질 않나, 가만히 이불 속에서 기다리던 곱단이 눈을 들어 쳐다보니, 새신랑 얼굴이 한심 투성이었다. 그러자 곱단이는 몸을 일으켜 새신랑이 써 놓은 글을 보고서야 ,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듯이 수치와 분노의 얼굴빛을 감추지 못하더니, 새신랑이 쓰고 던진 붓을 들어 아래와 같이 써내려갔다.         ... 後園黃栗 不蜂坼   谿邊楊柳 不雨長    (후원황율 불봉탁   계변양유 불우장) 뒷동산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지고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자란다.     .. 이렇게 써 놓고  신부는 그만 , 복받치는 설움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엎드려 흐느낀다. 삿갓은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여자의 옥문이란 실로 미묘하여  안변 주막집 안주인 같은 호로형이 있는가 하면, 함흥 주막집  여자처럼 항구형도 있으렸다. 그렇다면 곱단이는 세숫대야 형이던가? 허허.. 거 참 알 수 없군! )               ...   "곱단이 내 잘못했네, 제발 눈물을 멈추지 ..." 그날, 김삿갓은 새벽 동이 트도록 곱단이를 달래며 밤을 꼬박 새웠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48) 다시 찾은, 아는 이 없는 쓸쓸한 안변거리. 김삿갓은 행복했다. 곱단이와의 신혼생활은 지난해 가련이와 보낸 시간보다 더 자유롭고 즐거웠다. 노처녀를 여위지 못할 줄 알았던 곱단 어머니는 가히 사위가 자랑스러웠고, 천하의 시객을 남편으로 맞은 곱단이는 김삿갓을 온갖 정성으로 섬기고 사랑했다.   그런 시간은 일년이 넘었고 뜰 앞에 오동나무는 다시 가을 소리를 내고 있었다.         .. 未覺池塘 春草夢   /  階前梧葉  巳秋聲 미각지당 춘초몽   계전오엽 사추성   연못가에 피어난 봄풀은 꿈도 깨지 못했는데 뜰 앞에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 사람이 사는 인생의 부귀영화가 다 무어란 말인가. 오늘,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오동잎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아니한가? "내가 또다시 이렇게 안일한 생활만 해서는 아니 될 텐데.... " 김삿갓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자책이 또 고개를 들기 시작 했다. 조상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세속의 허무함을 잊기 위해서 삿갓을 쓰고  떠난 내가, 사년이 다 되도록 고향에도 가지 않고 떠돌아다닌 결과가 겨우 이렇듯 안일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었던가?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는 고향에 가서 농사를 짓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늙은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 계신지 돌아 가신지도 모르겠고 , 집을 떠나기 전 배가 불러왔던 아내는 아이를 잘 낳아 키우고 있는지?.. 온갖 궁금증이 그를 짓눌렀다. 드디어 가을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삿갓의 마음은 향수에 사로잡혀 들뜨기 시작했다. 더구나 곱단이가 태기가 있는지 배가  불룩해 오는 것을 보니 고향에 아내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내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하면 곱단이가 펄쩍 뛸 텐데 , 어떡하나...)   이런 생각에 잠겨있던 어느날 그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고향집 어머니 방에 가족이 모여들어 임종을 지켜보는 꿈이었다. 머리에 수건까지 두른 어머니 머리맡 에는 약사발을 놔둔 채 모두 모였는데 "우리 병연이만 오지 않는구나." 하며 병석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삿갓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구 여보, 진작 좀 오시지! " 하며 울고, 병석의 어머니는 가냘픈 눈을 떠서.. "병연이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제야 오다니.." 하며 그만, 운명하는 꿈이었다. "아이구 어머니 ! " 그는 꿈결에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잠을 자던 곱단이 잠을 깨며, "여보!, 당신 무슨 꿈을 꾸셨기에 소리를 지르십니까? " 하며 팔을 흔들어 주었다. "음.. 그랬나? " "다 큰 양반이 잠결에 어머니를 찾으세요? " 곱단이는 모로 누우며 그렇게 말을 했지만, 삿갓은 벌써 단천을 떠나 고향 길에 오르는 상상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렇다. 근본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아니 될 일이다. 할아버지만 조상이고 날 낳아 키워주신 어머니는 조상도 아니란 말인가? )   이튿날 아침 , 삿갓은 아내가 없는 틈을 타   행장을 차려입고 장모를 찾았다. "아니 , 갑자기 어디를 가려는 차림인가?" 장모는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아네요. 제가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안변 사또가 저를 무척 아껴 주셨는데 , 어젯밤 꿈에 보이기로 무슨 변고라도 있는가 싶어 , 바람도 쏘일 겸 안부삼아 다녀오려고 합니다." "글쎄 집에만 있으려니 갑갑하기도 하겠지만 , 곱단이 바느질 심부름 다녀 온 후에 보고 가지 갑자기 이렇게... " 장모는 딸이 없는데 행장을 차려 사위를 떠나보내는 것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장모님도 , 대 엿새면 다녀 올 것을 꼭 만나보고 가야 하나요. 나가다가 만나게 되면 말을 해 두지요." "글쎄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   삿갓은 이렇게 말을 하고 인사를 한 다음 성큼성큼 걸어 나와 재를 넘었다. 반짓그릇에 간단하게 못 보고 가서 미안하다는 글을 써놓고 나오기는 했지만 , "혹시 곱단이를 만나면 어떡하나"  걱정을 하였다. 공연히 거리에서 만나게 되면 눈치 빠른 곱단이에게 붙들려, 들어가야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곱단이를 만나지 않은 채 삿갓은 마을을 벗어났다.   모처럼 방랑의 길을 나서니 기분이 날아갈듯 상쾌했다.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안변을 밟았다. 벌서 일년이 넘었지만 거리는 그때나 다름없었고 고향을 찾아 온 듯 반갑기만 한 안변의 산천이다. 누구보다도 가련이가 보고 싶었다.   "음.. 가서 하룻밤 회포나 풀고가자." 이렇게 생각한 김삿갓은 가련의 집 앞에서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점잖은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그러나 대답도 없고 인기척도 없었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삿갓은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이리 오너라."   그때서야 한 사나이가 동저고리 바람으로 대문을 빠끔 열고 내다본다. "누굴 찾으시오 ? " "여기 혹 가련이란 기생이 지금도..." "댁은 가련이와 어떻게 되오?" 사내는 턱을 들어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글쎄 이렇게 찾아 온 것은 아는 사이니까  찾아오질 않았겠소? " "허.. 늦었수다. 가련이는 죽었다오! "   "예~ ?" "허, 이양반 그것도 모르고 찾아왔구려.  왜 지난해 봄에 목을 매달았다지.." "예엣?.. 자결을? " 김삿갓은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다. 지난날 가련과 헤어질 때   가련이 했던  마지막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꼭 돌아 오셔야 해요. 만약 동짓달까지 서방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가련이는 죽고 말거예요. 네? 저를 살리려면 꼭 그때까지 돌아오세요....")   가련이 자살은 자기와의 이별이 큰 원인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김삿갓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쓸쓸히 물었다. "혹시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도 있는지...." "허.. 그 양반, 가련인가 그 기생이 죽고 난  한참 후에  이집을 사서 이사를 온 내가 그걸 어찌아오?" 하고선 대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진다.   "허.. 이런 변이 있나!..." 삿갓은 홀로 탄식을 거듭하다 가련의 집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마음이 하도 울적하여 가까운 주막에 들려 술을 청했다. 주모가 날아온 술을 한잔 마신 삿갓은, "혹시 저 안마을에 가련이가 왜 죽었는지 아오?" 하며 물었더니. "아... 왜 그 기생노릇 하던 가련이요?  서방인가, 남방인가? 못된 놈 떠나보내고 기다리다 지쳐, 들어 누웠다가  불쌍하게도 불현듯  목을 매달았다지요. 아마 ? " "......"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삿갓은 몇 사발술을 더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물었다. "본군 사또님은 안녕하시죠? " "호호.. 손님은 없는 사람만  찾으시네요. 사또님도 새로 갈리셨지요." "네에 ? 그럼 먼저 사또님은 어디로 가셨소? " "그야 모르죠. 들리는 애기로는  관직에서 떠나, 출세한 아드님 임지로 두 양주분이 가셨다죠. 아마 ? " "...." 오늘, 김삿갓이 만난 안변은 불과 이태 전까지와  전혀 다른 안변이었다. 인생무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쓸쓸한 가슴을 안고 혼자 고개만 주억거리며 주모의 말을 듣다가 주막을 나왔다. 황혼이 밀려오는 안변 거리를 거닐면서 쓸쓸한 회포를 달랠 길 없는 김삿갓, 마음을 담은 시 한수를 읊으며 안변의 거리를 떠돌았다.             ... 한번 이별한 뒤 어찌 잊고 견디었겠나 네 뼈는 가루가 되고 내 머리는 서리가 되었구나. 난경은 그림자 싸늘해 봄이 와도 적적할 게고 퉁소는 소리가 끊어져 달도 아득하구나! 일찍이 북위의 귀계곡을 부르며 이별했고 헛되이 주남의 채조장을 저버렸구나 옛 길 흔적 없어 찾기 어려우니 수레를 머무르고 앉아 들꽃의 아름다움만 사랑했도다. 一從痛後 豈堪忘  /  骨汝衛粉 我首霜      (일종통후 기감망  /  골여위분 아수상) 鸞鏡影寒 春寂寂  /  風영音斷 月茫茫      (난경영한 춘적적  /  풍영음단 월망망) 早吟衛北 歸자曲  /  虛負周南 采조章      (조음위북 귀자곡  /  허부주남 채조장) 舊路無痕 難再訪  /  停車坐愛 野花芳      (구로무흔 난재방  /  정차좌애 야화방)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49) 고향 앞으로 이튿날부터 김삿갓은 모든 것을 다 잊고 고향에나 갈 결심을 굳게 하였다. 옛날 걸어온 그 길을 부지런히 걸어 보름 만에 강원도 땅을 밟았다. 가을도 깊어 이제는 조석으로 찬 서리가 내려 겨울을 재촉하는 무렵이었다.   늦은 가을 고향 산천은 이미 낙엽이 지고 오곡을 거두어들인 전답은 황량하기만 했다. 삿갓은 며칠을 더 걸어 영월땅 고향 마을에  당도했다. 벌써 해는 지고 황혼이 깔린 뒤라 아무도 자기를 알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삿갓은  금의환향도 아닌데 차라리 해가 져서 어두운 것에 마음이 편했다.   삿갓은 초라한 초가집 사립문을 가만히 밀고 들어섰다. 집은 사년 전 떠날 때 보다 더 낡고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 ..   마음은 크게 불러야 하겠다고 시켰지만 정작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는 모기소리 보다 작게 나오고 말았다. 부엌 쪽에서는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리는데 아내는 지금쯤 설거지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니 ! "   이번에는 조금 힘을 주어 불렀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아내가 주발 하나를 든 채 "누구세요 ? " 하고 다가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음성이었다. "나요 나 ... 그동안 잘 있었소?" "에구머니나! "   아내는 사년 만에 만나는 남편을 보고 이렇게 외마디 소리만을 칠뿐 장승처럼 멍 하니 서 있었다. "그래 어머니는 안녕하시오 ? " "..... 네."   아내는 겨우 그렇게 대답하고 그때서야 앞장서 방으로 들어가서 등잔불을 댕겼다. 불빛에 언뜻 보이는 아내의 모습은 그동안 너무도 고생을 한 탓인지 더 초라하고 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에 야위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소? " "동네 내려 가셨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아내의 음성은 울음이 섞인 목멘 소리였다. 삿갓도 눈시울이 붉어져 더는 말을 못하고 있다가 불현듯 형의 내외가 생각나 물었다. "형님은 어디 가셨소? "   ".... 돌아가셨어요 그만 ...." 아내는 북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하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뭐 ... 형님이? " 삿갓은 너무도 의외였다.  어려서 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형이었다. 역시 허약한 탓으로 작년 봄에 세상을 떠났다고 아내는 말을 이었다.   더욱이 불쌍한 것은 형수였다. 시집온 지 삼년 만에 아무 소산 없이 남편이 건강해지면 오겠다고 친정에 가서는 결국 청상과부가 된 것이 아닌가. 삿갓은 방에 앉지도 못한 채 감당 할 수 없는 괴로움에 어쩔 줄 몰랐다. "앉으세요. 제가 동네에 가서 어머니랑 익균이를 데리고 올게요."   "익균이가 누구요?" "참 모르시겠네요. 당신 아들이지 누구예요?" "아 참 그렇던가?" 삿갓은 아들의 이름을 알리가 없었다. 아내가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을 때 집을 떠났으니..   "돌아가신 큰 아버지가 지어 주셨어요. 날개 익(翼)자를 써서 익균(翼均)이라고요." "... 음 이름도 괜찮군." 그때 마침 어머니가 마을에서 돌아와서 방에서의 인기척을 듣고 물었다.   "누가 왔냐?" 그러면서 문을 연 노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희미한 불빛에서 보자 , 다시 한 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놀라 눈이 둥그레지며, "아니 ? 네가 ...." 하고 말을 잊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 불효자식이 이제야 왔습니다." 삿갓은 절을 넙죽 하면서 죄스런 마음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 어디를 다녔기에 그동안 소식이 없었니, 네 형은 그만 ..." 노인은 말을 더는 못하고 다시 울음이 터졌다. 삿갓도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 뵈올 낮이 없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래 , 몸성히 돌아 왔으니 다행이다 만 원 사람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 ? " "..... "   삿갓은 달리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서 저녁 차려라 ! " 아직도 우두커니 서있는 며느리에게 다소 마음을 진정한 노인이 이르면서, "참, 익균아. 네 아비다 절해야지." 하고 어깨너머에 영문 모르고 서있는 손자를 앞으로 끌어 세웠다.   삿갓은 그제야 아이를 보았다. "그래 네가 익균이구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자기 모습을  닮은 사내놈이 토실토실 살이 올라 귀엽게 보였다. "자.. 네 애비라니까, 절 좀 하라니까 ..."   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절을 하라니까 꼬마가 달갑게 절을 할리 없었다. 아이는 금방 울상이 되며 할머니 품을 파고들며 울음을 터트린다. "오냐 .. 그만둬라. 원 .. 아비도 모르고 ..." "애가 네 살 되었나요?" "그렇지..만 사년이 다 되었구나." 모자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다.   삿갓도 금강산으로 해서 안변, 문천, 함흥, 단천을 거쳐 길주 명천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대강의 경로를 말씀드렸다. 아내는 서둘러 저녁상을 차려들고 왔으나 가난한 집에 반찬인들 별스러운게 있을 리 없다. "내일은 닭 한 마리 잡자 ! " 어머니는 쓸쓸한 얼굴로 말하며 그래도 돌아온 아들이 대견했던지 자꾸 넘겨다보았다.   얼마 후 밤이 이슥해서야 삿갓은  사년 만에 아내와 나란히 누웠다. 자연히 아내의 입에서는 원망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원 세상에 .. 그렇게 소식도 없이 나가 돌아다니는 양반이 어디 있어요?" "그러게 말이오. 할 말이 없구려." "저는 영 안 돌아 오시는 것 아닌가 걱정되어 밤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허.. 산 사람이 안 올리야 있겠소" "정말 .. 이 어린것들만 없었더라면 .... "  "오..?  왜 어린것들만 없었더라면 개가라도 하려고 그랬나? " "아유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그럼." "정말, 목이라도 매고 죽어버리려고 했지 뭐예요! " "허허, 그래? 그러니 다 삼신할머니가 당신을 살리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 아닌가...?"   "그래 어딜 그렇게 다니셨어요? ..." "참 많이도 다녔지 .. 금강산으로 함경도로 ...." "이젠 다시는 안 떠나시죠? " "글쎄 두고 봐야지." "또 나가시게요 ? " "허허 .. 다음번에도 나갈 양이면  또 아들이나 하나 심어주고 나가든지 허지! " "아유 그럼 이번에는 저도 따라 나설래요." "허어.. 아녀자가 ..그런 소리,  그만하고 잡시다."   "잠이 와요?  그동안 익균이 놈이 왜 난 아버지가 없느냐고  물을 때는 얼마나 난감 했는지 알아요? " 아내는 돌아누워서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삿갓은 난처했다. 그러면서 아내를 달랠 방법이 묘연했다. "허어.. 이젠 그만 좀 하오 .. 낸들 그러구 싶어서 돌아다니다 왔겠소?" 아내도 더 는 말을 하지 않았다. " ....."   그때서야 삿갓은 아내를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워낙 오랜만에 남편의 손이 닿자 아내는 처녀처럼 몸을 떨기까지  했다. 그런대로 아내의 몸은 포동포동 했다.   "당신 객지를 나 다니며 외도도 많았겠지요?" 아내는 몸을 허락 하면서도 한마디 했다. 삿갓은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아내의 말에 순순히 대답할 수는 없는 일 이었다. "허.. 무전에 걸식을 하는 놈이 외도는 무슨 외도를 했겠소? 괜한 소리를 하는구먼! " " ....." 약한 게 여자의 마음이라 ...   무전걸식 이라는 삿갓의 말에 아내는 이렇다 할 대꾸를 못한 채  방법조차 잊어 버린 것 같은 부부간의 이불속 행사가 낯선 듯 , 남편의 몸을 꼭 쥐고 부르르 떨기만 하였다.   그렇게 사년 만에 만난 부부의 분홍빛 밤은 깊어만 갔다.       …….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50) 고향에서 ... 1부, 마지막 편   형이 타계하고 변화가 많았었지 ? " "네 , 오늘아침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내 글방에 와서 아이들이나 가르치게. 난 도무지 나이가 들어서 이것도 이젠 못하겠네 ..." "원 .. 선생님두 이제 환갑이 조금 지나셨는데...." "아니야 자네 같은 제자가 좀 해주었으면 해 ..." "같이 수학하던 동학들 소식은 있습니까? " "이제는 모두 농사나 지으며 잘들 살고 있지." "제법 어른 티가 나겠군요." "암 .. 모두 가장들 아닌가? "   병연은 옛 스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또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한 뒤 마을로 들어가서 옛 글방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각별하게 지낸 친구와 모처럼의 회포를 나누면서 그 친구의 주선으로 그의 집 사랑에 옛날 글방 동학들이 모여 술 한상이 벌어졌다.   "허, 병연이 죽은 줄 알았다." "그놈의 백일장이 생사람 잡았지." "그래 금강산 절경이 그렇게나 기막히다며 ? " 친구들은 반가워하면서 묻는 말도 많았다. 이렇게 마을에 동학들은 함께 술에 취하고 흥에 겨웠다.   병연이 여기저기 다니며 걸식하던 애기 , 서당 훈장하고 싸운 이야기 등 구경하며 다닌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자 그 중 한 친구가 "그 훈장 혼내준 글하나 소개해 보아라" 하며 조른다. 병연은 몇 번 사양을 하다가 함경도 어느 서당에서 훈장을 혼내준 다음과 같은 글을 소개하여 좌중을 웃겼다.      .... 두메구석에 완고한 백성이 고약한 버릇이 남아서 문장 대가를 함부로 욕하며 허풍만 떠벌리는구나 조그만 조개비 잔으로 바닷물을 어찌 측량할 수가 있으며 쇠귀에 경을 읽는 격이니 어찌 글의 뜻을 알겠냐 서속이나 훔쳐 먹는 산골에 간악한 쥐 같은 네놈이요 구름을 타고 넘는 붓끝에 용을 날리는 내로다 마땅히 볼기를 쳐서 죽일 죄이로되 잠시 용서 하노니 다시는 어른 앞에서 버릇없는 행동을 하지 말지어다.        ...   좌중은 모두 허리를 잡고 웃으며 다시 한 번 병연의 재주를 아깝게 생각했다. 이렇게 고향에 온 병연은 삼년 동안이나 자기가 배운 서당에서 훈장 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고향에서의 안일한 생활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병연은 다시, 방랑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생리며 숙명인지 모른다. 방랑할 때 쓰던 삿갓과 죽장을 볼 때 마다 바람과 구름과 유유한 산수가 그리워졌다. (이번에는 한양이나 가볼까 ? 아니면 경상도나 전라도를 가볼까 ?)   김병연, 김삿갓 . 그는, 오늘도 .. 강원도 영월 땅에서  전국 팔도 모두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52 아침부터 온종일 산공기만 마셨나니, 나를 신선으로 아는가 물어 보고 싶노라. 김삿갓이 객실로 들어와 보니, 주인 아낙은 돈을 받아내는데만 극성스러웠지, 객실 꼴은 말이 아니었다. 방바닥은 멍석을 깔아 놓았는데 그나마 낡아서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고 , 들창이라고  손바닥 만큼 빼꼼한 크기 인데다가 그마저 창호지가 수없이 찢어져 찬바람이 사정없이 몰려들었다. 게다가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동을 치건만 , 저녁밥은 언제나 주려는지 소식이 감감하였다. "여보시오 배가 몹시 고픈데, 저녁밥은 언제 주시려오 ?" 부엌에 대고 저녁을 재촉하니 , 주인 아낙의 대답이 걸작이다. "젖 뗄 때부터 먹기 시작한 밥을 한번 쯤 못 먹었다고, 무얼 그리도 재촉하십네까 ?"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점잖은 체면에 화는 낼 수 없고 ,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잠자코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어, "에이, 여보시오. 날마다 세 번씩 먹던 밥을 오늘은 한 번도 못 먹었으니 배가 고플게 아니오. 여러 말 말고 저녁을 빨리 좀 달란 말이외다." 하고 말했더니, 한다는 소리가 또 걸작이다. "그 양반 , 성미가 급하기도 합네다. 성미가 그렇게도 급하다가는 시집온 첫날밤에 새색시더러 애기 낳지 않는다고 구박하지 않겠소? 안기래요? 호호호."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객줏집을 해먹기로, 처음보는 나그네에게 그와 같은 상스러운 농담을 함부로 씨부려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배가 고프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김삿갓도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점잖은 체면에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어떤 경우에나 화를 내지 않으려는 것은 김삿갓의 생활 철학이기도 하였다. 화를 달래기 위해서는 시를 지어 보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저녁 밥을 기다리며 , 안락 마을에서 몇 시간 사이에 겪은 일들을 다음과 같은 즉흥시로 달래 보고 있었다. 안락촌중욕모천   安樂村中慾暮天   안락촌 마을에 해는 저물어 오는데 관서유자용식견   關西孺者聳識肩   관서 지방 선비는 잘난체  뻐기고 촌풍염객지취반   村風厭客遲炊飯   마을 풍속 고약해 밥 줄 생각은 안 하고 범속관인단색전   店俗慣人但索錢   주막 인심 야박해 돈부터 내라 하네. 허복예뇌빈유성   虛腹曳雷頻有聲   배는 비어 꼬르륵 천둥소리 요란한데 파창투냉경무천   破窓透冷更無穿   뚫어진 창 구멍으로 냉기가 서려 온다 조래일흡강산기   朝來一吸江山氣   아침부터 온종일 산공기만 마셨으니 시문인간비각선   試問人間比殼仙   나를 신선으로 아는가 물어 보고 싶노라.            비어 있는 창자를 움켜잡고 배고픔을 달래느라고, 익살맞은 시 한 수를 읊어 본 것이었다.           이날 밤 저녁상이 들어온 것은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 사이)가 가까올 무렵이었다. 그러나 늑장을 부려 마련해 온 반찬은 예상을 뛰어 넘는 것으로서 순두부 된장찌게에 날계란도 두 개씩이나 놓여 있었다. 주인 아낙네는 밥상을 갖다 놓아 주면서, "무척 시장하셨디요? 뭐든지 시장할 때 먹어야 맛이 나는 법이디요 ! " 하고 평안도 사투리로 알쏭달쏭한 말을 뇌까렸다. "잘 먹겠소. 그런데 계란은 한 개면 될 텐데, 두 개씩이나 주셨구려." 그러자 주인 아낙네는 씽긋 콧살을 찡그려 보이더니, "날계란이 양기에 좋다면서요 ? 아실 만한 양반이 능청스레 시치미를 떼시네, 안그래요 ? 호호호." 하며 제법 간드러지게 웃어 쌓는다. 김삿갓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잠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얼른 이렇게 능청스레 받아 넘겼다. "상대자도 없는 이 밤에, 양기만 왕성해지면 무얼 하오." "상대자가 없기는 왜 없시요. 마음만 맞으면 누구든지 상대자가 될 수 있디요." 한다는 소리가 암만해도 수상쩍었다. 그리하여 여인의 얼굴을 새삼스러이 바라보니, 나이는 사십을 넘었을까 말았을까, 광대뼈가 불쑥 나온 것이 미인은 아니었지만 눈두덩이가 가볍고 입술조차 가는 것이,  화냥끼가 좔좔 흐르는 정력적인 얼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김삿갓은 엉뚱한 생각이 들어, "아주머니는 남편과 아이들도 없이 혼자 사시오 ?" 하고 수작을 걸어 보았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상대가 먼저 손바닥을 내밀었으니 남편이 없다면 한 번 건드려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계속 53회로~~ 방랑시인 김삿갓53 혼자는 무서워서 잠도 못자는 여인. 주인 아낙네는 씽긋 웃으며 대답한다. "남편이 없기는 왜 없갔시오. 아이도 머슴아가 둘 씩이나 있디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내심 크게 실망하였다. 유부녀라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거짓말이 아닌가 싶어, "남편과 아이들까지 있는데, 모두 어디를 가고 , 혼자뿐이오 ?" 하고 다시 한 번 물어 보았다. "시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오늘 아침에 큰댁으로 떠났고 , 오고 가는데만 사흘이 걸리니  한참이 지나야 돌아 오갔디요." 김삿갓은 주인 아낙네가 혼자 있는 이유를 그제야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가 어엿한 유뷰녀임을 안 이상, 그녀를 건드려 볼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리하여 저녁을 먹기가 무섭게, "나는 몸이 고단해 그만 자야 하겠소. 아주머니는 안방에 건너가 볼일 보시오." 하고 주인 아낙네를 안방으로 쫒아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자리에 누웠어도, 멀뚱멀뚱 천정만 바라 보일 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저녁 밥을 먹으면서, "상대자도 없는 이 밤에,양기만  왕성해지면 무얼 하오." 하고 말했을 때 그녀가 대뜸, "상대자가 없기는 왜 없시요. 마음만 맞으면 누구든지 상대자가 될 수 있디요." 하고 대답하던 말이 새삼스럽게 귓전을 울려 왔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어둠 속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된다 ! 유부녀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삿갓이 이런 속마음을 새기면서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이때, 주인 아낙네는 안방에서 무슨 신호를 보내는 듯 연신 잔기침을 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재우쳐 오는 정염을 줄기차게 억제해 가며 잠을 청했다. 워낙 고단하던 판이라 쉽게 잠이 들 것 같았는데 , 이 궁상 저 궁상에 한동안 몸을 뒤척거리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잠을 얼마나 잤을까, 옆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문득 깨어 보니, 이불 속에 난데없는 여인이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 깜짝이야 ! 이게 누구야 ! "   김삿갓은 잠결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 나려고 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사내의 몸을 힘차게 부등켜 잡으며, "놀라지 마시라우요. 내라요, 내! 안방에서 혼자 자기가 무수와서 건너왔시오." 하고 말하는 소리는 틀림없는 주인 아낙네의 목소리였다.   순간, 김삿갓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여인을 책망하듯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남편이 있는 여인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약간은 무안스러운 듯 어둠 속에서 조그맣게 속삭인다. "혼자서는 무수와서 잠이 안 오는 걸 어케합네까."   너무도 엉터리 같은 황당한 핑게에 김삿갓은 어이가 없었다. 저녁 상을 받을 때 부터 여인의 심상치 않은 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유부녀임을 알고 있었기에 김삿갓은 욕망이 꿈틀거려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자 편에서 한밤중에 이불 속으로 쳐들어 왔으니, 김삿갓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더구나 혼자 잠자기가 무서워서 건너왔다는 말은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거짓말이 아닌가. "혼자 자기가 무서우니, 나하고 같이 자자는 말인가 ?"   김삿갓은 약간은 밉살스러운 생각이 들어, 짖궂은 소리로 비꼬아대었다. 그러자 여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혼자 자기는 무수우니끼 , 둘이 잘밖에 없지 않갔시오 ?"   "허허허, 말인즉 옳은 말이군그래, ...그런데 둘이 함께 자다가, 내가 자네를 무섭게하면 어떡해 하지 ?" 김삿갓은 여인을 겁탈이라도 할 듯이,  이제와는 다른 한결,  겁주는 어조로 말을했다.   그러자 여인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한다. "무숩긴 뭐가 무수와요 ? 좋기만 할 것 같구만 .... " "이 사람아 ! 자네는 남편이 있는 몸이 아닌가?  남편이 있는 여인이 외방 남자와 한 이불 속에 있어서야 될 일인가 ?"   김삿갓은 목구멍이 타도록 , 솟구쳐 오르는 욕정을 끈질기게 억제하며 의식적으로 다그쳤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패륜 행위를 스스로 경고하는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 아낙네는 정조관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없는지,   "아이참, 그 양반 까탈스럽게구네!   오밤중에 단둘이 하는 짓을 누구래 알갔시오 ! ... 아닌말로  대동강에 배 한 번 지나 갔다고, 표신들 나갔시오 ? 흔적인들  남갔시오 ?"   그러면서 어둠 속에서 손을 뻣어 대뜸 김삿갓의 사타구니를 더듬어 보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의 물건은  아까부터 잔뜩 흥분되어, 남성이 발기 충천 되어 있던 판인지라, 여인의 손길이 사타구니에 와닿자,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어,어..왜 이래 ! 무슨 여편네가 이런 게 다 있어 ! "            그러나 여인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뇌까려대는 것이었다. "앗 - 쭈 ! ... 물건이 제대로 발동했으면서, 괜스레 입으로만 까다롭게 구시네. 요롯케, 사람이 솔직하지 않으면 못쓰는거야요."   김삿갓은 마치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꼴이 되어 버렸다.                                               계속 54   ■방랑시인 김삿갓54 파도를 사랑한 갯바위 일이 이 쯤에 이르자 , 김삿갓도 더 이상 욕정을 억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뭐야 ? 그러면 나더러 기어코 옷을 벗기란 말인가 ?"   김삿갓은  우악스럽게 여인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손길이 여인의 가슴을 사정없이 파고 들자, 여인은 성이 가신듯 자기 손으로 옷을 활활  벗어 부쳤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알몸이 된  주인 아낙네의 풍만한 육체를 자신도 모르게 인정사정 없이 깔아뭉개기 시작하였다. 풍만한 젖통은 한 손에도 넘쳐나 주무를 때 마다 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사정없이 발기된 그의 물건은 여인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여인의 정력은 놀랍도록 왕성하였다. 김삿갓도 오랫동안 금욕 생활을 해왔던터라, 기를 써가며 여인을 흡족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녀와의  교접은  그가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경의로운 것이었다.   조이고 풀고 ,돌리고 흔들고 .. 서로가 만경 창파에 흔들리는 배에 올라 탄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묘미와 열락의 도가니가 이어졌다. 그렇게 한데 섞인 두 사람은,  온 몸이 땀에 젖도록  서로를 탐닉했다.   이윽고 그의 눈에 별빛이 반짝이며 머리 속이 하얗게 되는 순간, 아래 깔린 여인은 그의 허리를 더욱 세차게 부등켜 안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고대로 계시라요 ! "   순간, 김삿갓의 다음 행위를 멈추게 한 여인은 그녀의 자궁 속에 자리한 그를 어루고 달랬다. 그리고 다시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양기를 불러내는 주문 같은 행위를 했다. 김삿갓은 이제까지 많은 여인과 정을 나누었지만 , 이런 경우의 수를  한 적도 당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덧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 속에서 다시  발기가 일어났다. 여인은 그제서야 그가 즐길 수 있도록 허리를 질끈 감은 손을 풀어주었다. 두 번째 정사는 첫 번째 정사보다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넉넉하였다.   이제까지 김삿갓은 많은  여인들과 정을 통해왔다. 그러나 오늘 같이 만난지 몇 시간도 안된 여인과 정을 통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던가. 때문에 김삿갓은 지금까지 정을 통해왔던 여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인을 다루었다.   김삿갓은 세찬 파도가 갯바위를  때리듯 , 여인을 몰아 부쳤다. 그러나 갯바위는 세찬 파도를  온 몸으로 즐기며 받아 넘겼다. 이윽고 갯바위를 때리던 세찬 파도는  바위를 휘돌아, 흰거품을 남기고 사라졌다.  ...계속55~~~ ■방랑시인 김삿갓55 파도를 사랑한 갯바위(후편) 두 번의 연이은 정사로 김삿갓은 녹초가 되었다. 여인도 자못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머금고 , "역시 양기를 돋구는 데는 날계란이 제일인 모양입네다 !" 하고 말을 했지만,  김삿갓은 이미 코를 골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여인은 옷을 추려 입고 조반을 지으러 밖으로 나갔다. 김삿갓이 아침잠으로  비몽사몽하는 사이에 조반상을 들고 나타난 여인이 상을 내려 놓자 마자, "당신하고 나하고, 우리 둘이서 돈벌이 한번 해보지 않겠시요 ?" 하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낸다. 여인의 소리에 부시시 일어나 앉은 김삿갓이, "돈벌이라니 ? 그게 무슨 소리야 ? 자네하고 나하고 도망이라도 가서 장사라도  해보자는 소린가 ? " 김삿갓은 여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렇게 반문했다. 그러자 여인은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오마나! 서방과 자식을 버리고 도망을 가다뇨. 그게 무슨소립네까?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런 짓은 못합네다 ! " 서방질을 할망정 남편을 버리지는 못하겠다는 소리다. "서방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나같은 사람 하고 무슨 돈벌이를 하자는 것인가 ?" 그러자 여인은 무슨 중대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듯, 김삿갓 귓가로 입을 갖다 대며 나직막한 소리로 속삭이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고을에 살인 사건이 하나 생겼는데, 범인이 무슨 이유로 사람을 죽였는지, 그 원인을 알아내는 사람에게는 사또가 상금 일백 냥을 주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당신이 나와 함께 그 문제를 풀어 주고, 상금을 받아 먹자는 말입네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여인인지라, 현상금 일백 냥이 어지간히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자네가 풀 수 있는 문제라면 상금을 혼자 타먹을 일이지, 왜 나까지 끌고 들어가려고 그러는가 ?" "나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 입네다.  그러니까, 문제는 당신이 풀고, 상금은 둘이 나눠 먹자는  말이디요." 여인은 머리는 아둔해 보여도 잇속을 챙기는데는 수단이 대단해 보였다. 김삿갓은 애시당초 현상금 같은 것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순천 가 살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현상금까지 내걸고 원인을 찾는다는 데는 흥미가 당겼다.   "도데체 어떤 살인 사건이기에 사또가 현상금까지 내걸었단 말인가.?"  김삿갓은 정색을 하고 주인 아낙네에게 물어 보았다. 계속~~56 ■방랑시인 김삿갓57 방구월팔삼(方口月八三) 여인은 읍내로 들어 오면서도 상금 생각이 간절한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글을 잘 아신다니까, 방문을 한번 읽어 보기만 하면 상금은 틀림없이 탈 수 있갔디요?" "방문 내용을 읽어 보기 전에는 반드시 상금을 탈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은가 ?"   "그래선  안되요 ! 어떤 일이 있어도 상금만은 꼭 우리가 타야 해요." "자네는 돈에 환장한 사람 같네그려! 돈이 뭣에 필요해 그렇게도 안달인가 ?" "그 돈을 타가지고 밭을 한 뙈기 사고 싶어서 그래요. 노후에 자식새끼들 데리고 편하게 먹고 살려면, 객줏집보다는 농사를 짓는 것이 훨씬 낫거든요."   비록 서방질을 할망정, 갸륵한 소리를 한다. "자네가 이토록 갸륵한 심정을 가지고 있으니, 현상금은 꼭 우리가 타도록 노력해 보세그려. 그러나 상금을 못 타게 되더라도 너무 낙심은 하지 말게! " 김삿갓은 내심으로는 상금을 탈 자신이 있었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예방선을 미리 쳐놓았다.   이윽고 읍내로 들어와  방문이 붙어 있는 남대문 바람벽 앞으로 가 보니, 그곳에는 갓을 쓴 시골 선비들이 십여 명이나 우글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현상금을 타먹기 위해 몰려든 선비들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대문 성벽에 붙어 있는 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 읍내에서 쌀장사를 해먹던 전명헌(全明憲)이란 자가 모월 모일에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범인은 피살자의 등골에 이라는 글자 다섯 자를 써놓고 사라졌다. 누가 무슨 이유로 전명헌을 죽였는지  이라는 뜻을 꼭 알아야 하겠는데, 아직까지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에 관에서는 대금 일백 냥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이 써놓은 글자의 뜻을 알고자 하는 터이니, 강호 선비 제현은 이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하는데 적극 협조해 주기 바란다.                                                  모 月 모日     순천군수    류현진                                                         김삿갓은 방문을 되풀이 되풀이 읽어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라는 글자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말도 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살인 사건과 연관 지을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범인은 전명헌이를 죽인 뒤에 어째서 등골에 이라고 써 놓았을까 ?) 자기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그런 글자를 써 놓았으리라고 짐작은 되지만, 그 글자의 뜻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다른 선비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로, "방구월팔삼이란 도데체 무슨 뜻일까 ? 헛참 !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는걸..." 하고 중얼거리며, 한 사람씩 단념하고 뿔뿔이 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객줏집 아낙네만은 아직도 상금을 타고 싶은 욕심이 넘쳐 있었다. "어때요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알 수가 있갔디요 ? " 김삿갓은 고개를 맥없이 가로저었다.   "문제가 너무 어렵군. 내가 상금을 타먹을 정도로 쉬운 문제였다면, 나보다 먼저 달려온 선비들이 진작 타먹었을 게 아닌가. 남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나라고 어떻게 풀 수 있겠나 ? " 그러자 여인은 화를 벌컥 내며 이렇게 나무란다.   "남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라도 당신만은 풀 수 있지않아요 ? 정력이 그렇게도 왕성하던 양반이 그런 것도 못 풉네까 ? " 여인은 간밤의 일이 무던히도 인상적이었던지, 그 일을 빙자하고 어거지를 부린다.   정력이 왕성한 것과 지능이 높은 것은 전혀 별 개의 문제이건만 무지막지한 객줏집 여편네는 정력이 강한 남자는 뭐든지 잘해 낼줄로 알고 있을 성싶었다. 김삿갓은 그런 말을 누가 들을까 겁을 내며, 여인에게 이렇게 비꼬아 주었다.   "이 사람아 ! 정력과 지능은 별개의 문제야. 그리고 정력이 강한 것으로 말하면, 자네가 나보다도 열 갑절은 더했네 ! " 그러자 ,여인은 눈을 흘겨 보이며, "나는 글을 모르지만, 당신은 글을 잘 알고 있잖아요? 상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타야 합네다 ! "   "자네가 아무리 다그쳐대도 모르겠는 걸 어떡하나. 이삼 일쯤 여유를 두고 찬찬히 생각해 보면, 혹시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모르겠단 말씀이야." 여인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눈을 커다랗게 떠보인다.   "뭬라고요 ? 이삼 일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겠다구요 ? 그렇다면 날래 집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레 ! " 여인은 상금에 독이 올라, 김삿갓을 무작정 집으로 잡아 끄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오늘밤도 깨같은 재미를 보려는 음흉한 생각이 곁들여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삿갓은 못이기는 척, 여인에게 끌려 객줏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였다. 기왕지사 일을 저질러 버렸으니, 남편이라는 사람이 돌아 오기까지 주인 여편네와 재미를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객줏집으로 다시 돌아온 목적은 반드시 여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또가 풀지 못해 현상금까지 내걸고 있는 그 문제를 , 자기가 꼭 풀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풀지 못하면 그 문제를 누가 풀 수 있겠냐는 일종의 오기가 발동을 한 것이었다. ...계속58~~~   ■방랑시인김삿갓59 드디어 풀리는 (상편) "쌀을 외상으로 사거나  현금으로 사거나 수량은 똑같아야 하는데, 전명헌이네 가게에서 외상으로 사온 쌀은 이상하게도 한 말을 사와도 집에 가져와 보면 아홉 되밖에 되지 않는 거에요. 게다가 쌀값에 대해서는 호되게 비싼 이자까지 꼬박꼬박 받아 먹었단 말이에요. 죽은 사람에게 이런 말은 안됬지만,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온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구요."   시골 사람들은 인심이 순박해서 어지간 해서는 남을 비난하지 않건만, 전명헌이가 살해된 데 대해서는 누구도 동정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전명헌이라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외상쌀을 주어가며 고리대금까지 겸해 오다가, 누구에겐가 원한을 사서 죽게 된 모양이군요."   "그거야 우린들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러나저러나 그 사람은 돈에 얼마나 이골이 났는지, 쌀장사를 해먹는 데도 됫박 밑바닥을 이중으로 만들었다는 소문도 떠돌았지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전명헌이 피살 된 원인은 됫박을 속인 데 있다는 심증이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심증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죽은 자의 등골에 씌여 있는 , 이라는 글자의 뜻을 분명히 알아내기 전에는, 여전히 수수께끼가 아니던가. 김삿갓은 이날 읍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염탐을 계속해 오다가, 저녁 무렵에 헛물을 켜고 객줏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어떻습네까 ? 상금은 우리가 탈 수 있겠습네까 ? " 주인 아낙네는 김삿갓의 얼굴을 보기가 무섭게 다그쳐 물었다. "글세 ! ... 아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좀 더 알아보면 되지 않겠나 ? ... " 김삿갓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바람벽에 써 붙인 이라는 다섯 글자를 자꾸만 바라보고 있었다. 피살된 전명헌이라는 사람이 쌀장사를 해먹었다는 사실과, 범인이 피살자의 등골에 써놓은 사이에는 반드시 어떤 연관성이 있겠는데, 그 연관성이 어떻게 얽혀 있는 것인지 암만해도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는 종이 쪽지가 시체 옆에 있었는데, 그것 역시 몽둥이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주인 아낙네가 밥상을 들어내느라고 등잔불을 옆으로 옮겨 놓는다.   그 순간, 김삿갓은 자리를 옮겨 앉아, 바람벽에 붙여 놓은 을 계속 보고 있었는데, 옮겨 놓던 등잔걸이의 그림자가 이라고 쓴 글자를 산적꼬치처럼 위에서 아래로 꿰어 놓은 듯이 보였다. 그 순간 김삿갓은 검은 그림자에 꿰어있는 다섯 글자를 유심히 보았다.   "앗 ! 이제야 알았다 ! " 김삿갓은 무릅을 탁 치며 호들갑스러운 소리를 질러댔다. "뭬야요 !  알아내셨시요 ? " 밥상을 들어 내던 주인 아낙네는 별안간 소리를 지른 김삿갓을 바라보며 묻는다.   "기래 ,기래 ! 이제야 알아냈구먼 ... ! " 김삿갓 , 너무도 기쁜 나머지 어설픈 평안도 사투리로 대답했다. "도데체 비밀이 뭔지 날래 말해주시라요 ! " 주인 아낙네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김삿갓에게 채근했다.   그러자 김삿갓은 글을 모르는 주인 아낙이었지만 너무도 기쁜 나머지, 훈장이 학동에게 가르치듯, 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등잔걸이 그림자가 , 바람벽에 붙여 놓은  다섯 글자의 한복판에  산적꼬치 꿰 듯 비치면서, 자는 자로 보이고 자는 자로 보이고, 자는 자로 보이고 ,자는 자로 보이고, 자는 자로 보인 것이네, 따라서 란 글자가 드러나 보였고, 이것은 쌀장사가 쌀을 팔아 먹을 때, 올바른 됫박을 쓰지 않고, 쌀이 적게 들어가는 작은 됫박을  써왔다는 뜻이 되는 것이네 ! "   "내레 글자는 모르겠지만, 쌀장사를 하다가 죽은 놈이 작은 됫박으로 사람들을 쇡혀 먹은 비밀이 탄로났다면 누군가  죽일만 도 했구만요 !  ..." 김삿갓은  주인 아낙네의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쓴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김삿갓이 쓴 웃움을 지은 이유는 , 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如是因 如是緣 如是果 如是報)라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원인으로, 이러한 인연이 생겨, 이러한 결과를 낳음으로써 이러한 보복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 됫박을 속여 쌀을 팔아오다 비명 횡사한  전명헌은 그가 생전에 저지른 죄악에 대한 당연한 천벌이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풀지 못하는 상금이 걸린 문제도 풀었고, 이제는 우리 문제를 풀어야지요 ! " 밥상을 들어낸 객줏집 여인은 설걷이도 미뤄놓고 이불부터 편다.   "어,어 .. ! " 김삿갓은  졸지에 객줏집 여인 손에 이끌려 이불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오늘은 내레,특별히 봉사를 해드리갔시오 ! " 객줏집 여인은 음흉스런 웃음을 웃으며  김삿갓의 사타구니를 더듬는다.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如是因 如是緣 如是過 如是報) (자네 남편에게 짓는 나의 죄는,  내 탓이 아니라 순전히 자네  탓이네 ....) 김삿갓은 여인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 속으로 법화경 경전을 자꾸 중얼거렸다.              ...계속60   ■방랑시인 김삿갓60 드디어 풀리는 (하편)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상금을 타기위해 객줏집 아낙네와 함께 읍네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인 아낙네는 동헌 바깥마당에 기다리게 하고, 자신은 선화당(宣化堂)으로 사또를 만나기 위해 찾아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들은 김삿갓의 앞을 가로맊으며, 밖으로 쫒아내려고 한다. 김삿갓은 화가 동해 문지기를 향해 호통을 질렀다. "이 사람들아 ! 나는 사또께서 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 상금을 걸고 널리 해답을 구하신다기에, 찾아온 사람일쎄. 그러한 나를 우격다짐으로 쫒아내면, 중대한 살인 사건을 무슨 수로 해결하겠다는 말인가?" 문전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고, 사또가 몸소 마당으로 나오며 소리를 지른다. "무슨 일로 소란을 떠느냐 ? " 사또는 나이는 오십 가량 되었을까, 키는 육척 장신인데다가, 몸집이 돼지처럼 비대한 것이 첫눈에 보아도 우둔하고 거만스러워 보였다. ​ 김삿갓은 사또 앞으로 걸어 나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시생은 남문 밖에 써붙인 방문을 보고, 사또전에 해답을 알려 드리고자 찾아왔사옵니다." 사또는 그 문제로 어지간히 골머리를 앓고 있던지, 기뻐하는 빛을 보이며, "그래 ! 그거 참 기쁜 소식일세그려." ​ 그리고 김삿갓의 옷차림을 위 아래로 훝어보면서 다시 말한다. "방문을 내붙인지 십여 일이 지나도록 찾아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자네는 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 ​ "물론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기에 사또를 만나 뵈러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또는 의심스러운 빛을 보이며, "그러면 묻겠는데, 이라는 말은 도데체 무슨 뜻인가 ? " "대답을 드리기 전에, 사또께 먼저 말씀드려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사옵니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 그게 무슨 말인가 ? " "첫째는 죽은 사람의 쌀가게에서 그가 쓰던 됫박을 증거품으로 미리 갖다 놓는 일이옵고, 둘째는 사또께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직접 검증해 주시는 일이옵니다." 결말을 쉽게 내려면 사또에게 모든 증거품을 직접 보여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런 제안을 하였다. 사또는 시체를 보기가 끔찍스러운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설명만 들었으면 그만이지, 끔찍스러운 시체를 내가 직접 봐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 " "아니옵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사람을 죽였는지, 확실한 증거를 보여 드리기 위해서는 사또께서 꼭 현장까지 왕림해 주셔야 합니다." 김삿갓은 사또에게 명확한 인식을 시켜 주기 위해, 자기 고집을 끝까지 우겨대었다. 사또는 김삿갓의 고집을 꺾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었는지, 통인(通人)을 시켜 전명헌네 쌀가게에서 쓰던 됫박을 즉시 현장으로 가져오게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김삿갓과 함께 피살자의 시체가 있는 현장으로 직접 가게 되었다.   김삿갓이 거적을 들어올리니, 등골에 이라는 글씨가 써있는 시체가 나온다. 김삿갓은 시체 옆에 놓여 있는 몽둥이와 종이 쪽지를 사또에게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몽둥이는 범인이 전명헌을 때려 죽일 때 사용한 몽둥이인가 봅니다. 그리고 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아 ! 쓸데없는 설명은 그만 하고, 이 무슨 뜻인지, 그것만 빨리 말해 주게." 사또는 썩어가는 시체를 보기가 끔찍스러운지, 고개를 돌려 외면한 채 해답만 재촉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문제의 몽둥이를 다섯 글자 위에 길게 올려 놓으며,   "만약 이 몽둥이도 자획(子劃)의 하나라고 본다면, 사또께서는 이 다섯 글자를 뭐라고 읽으시겠습니까 ? "  하고 물었다. 사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자와 몽둥이를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별안간 놀라운 얼굴이 되면서, "몽둥이도 자획으로 친다면 은 라는 글자로 변해버리네그려 ! " 하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렇습니다. 범인은 시체의 등골에이라는 글자를 써놓으면서, 이 글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거든 이 몽둥이를 이용해 풀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몽둥이를 이용해 보니, 사또께서 보신바와 같이 , 은 틀림없는 가 되었습니다."   사또는 대번에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는지, "시중용소두라 ... 그것은 무얼 뜻하는가 ? " 하고 묻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대답한다. "시중용소두란, 전명헌이라는 자가 쌀장사를 해먹으면서 법규에 합당하지 않은 작은 됫박을 써왔다는 뜻이 되는 것이옵니다." "심증만 가지고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오판을 꺼리는 사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어쩌면 문제의 해답이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것이어서 그런 줄도 모른다. "사또께서 제 말씀에 의심을 품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인 줄로 아옵니다. 제 말씀을 믿기 어려우시다면, 확실한 증거품을 하나 보아 주시옵소서 ! "   사또는 확실한 증거품을 보여 주겠다는 말에 적이 놀라는 빛을 보였다. "확실한 증거품이 있다고 ? 도데체 그 증거품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                               .계속61~~~   ■방랑시인 김삿갓61 장사꾼의 본성 (本性). 김삿갓은 시체 옆에 놓여 있는 말(斗)을 가르키며 말했다. "또 하나의 증거품은 바로 이 말이옵니다. 이 됫박은 전명헌이가 쌀가게에서 쓰던 됫박 입니다. 이 됫박은 밑바닥이 이중으로 되어있어서 , 정규 됫박보다 쌀이 훨씬 적게 들어가게 되어 있을 것 이옵니다."   "바닥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니 ? 그게 무슨 소린가 ?" "제 말씀을 믿지 못하기겠거든, 이 자리에서 저 됫박을 해체해 보십시오. 저 됫박은 반드시 쌀이 적게 들어가는 장치로 되어 있을 것이옵니다."   김삿갓은 문제의 됫박을 직접 본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장담을 할 수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들려준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또가 사람을 시켜 됫박을 분해해 보니, 과연 그 됫박은 밑바닥은 쉽게 눈에 띄지도 않을 뿐 만 아니라. 알기 어렵도록 두꺼운 나무로 덮혀 있었다.   "자네 말대로 이 됫박은 밑바닥이 이중으로 되어 있네그려. 원, 이럴 수가 있나 ! " 사또는 놀라기만 할 뿐 , 크게 격노하진 않았다. 이것을 지켜 본 김삿갓은 목민관(牧民官)이 이럴 수가 있나, 하며 은근히 부하가 치밀어 말했다.   "이자는 가난한 백성을 이런 방식으로 두고두고 속여 먹었으니, 이런 악독한 놈은 백 번 죽어 마땅한 것 같사옵니다." 그러나 김삿갓의 말을 듣은 사또의 태도는 의외였다.   "이 사람아 ! 장사꾼이란 워낙 사람을 속여먹는 것이 본업이 아닌가. 남을 속여먹는 것을 잘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장사꾼들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 사또는 뇌물을 얼마나 많이 받아먹었는지, 전명헌이라는 자를 두둔하는 태도로 나왔다. 김삿갓은 세상에 이런 악질 사또도 있는가 싶어 비위가 크게 거슬렸다. 그래서 얼른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는 일단 해결된 셈이니, 이제는 시생에게 상금을 내려 주시옵소서." "주지 ! 주구말구. 상금을 줄 테니 나와 선화당으로 가세." 그리고 동헌으로 오면서 말한다.   "자네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비상한 머리가 있는모양일세그려. 이왕이면 다른 문제도 하나 더 해결해 주게나." "사또께서 해결해야 할 사건이 또 있다는 말씀입니까 ? "   "쌀장사 전명헌이가 왜 죽게 되었는지, 그 원인은 자네의 말을 듣고 잘 알았네. 그러나 그자를 죽인 범인도 이 기회에 꼭 잡아야 할 게 아닌가. 그 범인도 자네가 잡아 주었으면 좋겠네." 그러나 김삿갓은 그 범인까지 잡아 줄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쌀장사에게 빈민들이 착취를 얼마나 심하게 당해 왔으면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겠느냐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범인도 꼭 잡아야 하는 것이옵니까 ?"   "사람 하나쯤 죽인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겠나. 그러나 이번 범인은 내가 꼭 잡아내야만 내 체면이 서겠네." "범인을 꼭 잡아야 사또의 체면이 서겠다는 것은 무슨 뜻이옵니까 ?"   "이왕 말이 났으니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해줌세. 전명헌이라는 자는 평소에 쌀장사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나를 많이 돕던 사람일쎄, 그런 사람이 살해되었으니, 유가족에게 원수를 갚아 주기 위해서도 그 범인만은 꼭 잡아내야 할 게 아닌가."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기가막혔다. 사또란 자가 범죄 사건을 공평하게 다룰 생각은 안하고, 평소에 뇌물을 많이 갖다 준 악랄한 쌀장수의 원수나 갚아 줄 생각만 하고 있으니, 도데체 백성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상금을 내걸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삿갓은 범인을 잡는 일에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두 사람은 동헌에 당도하였다. 사또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그 사이에 깨끗하게 잊어 버렸는지, 김삿갓에게 상금 백 냥을 건네며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보니, 자네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인 것 같아 말하는데, 따로 부탁 할 일이 하나 있네." "특별한 부탁은 무슨 일이옵니까 ?" 김삿갓은 사또의 허실부실한 태도가 오히려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러자 사또는 큰기침을 한 번 하고 나더니, 수염을 새삼스레 쓸어내리며 이렇게 말을한다. "자네는 한양 사정을 잘 모르겠지만, 내 가문은 한양 명문 대가인 간동 대감댁 집안이라네. 간동 대감은 바로 나의 할아버님 되시는 어른이란 말일세. 자네는 의 명성을 들어 본 일이 있는가 ?"  ...계속62~~~ ■방랑시인 김삿갓63 즐거움은 끝까지 누려서는 못쓴다(樂不可極 : 낙불가극) 순천 사또 류현진은 돈이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탓인지, 말끝마다 고 강조하기를 잊지 않는다. 김삿갓은 그때마다 형용하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꼈다. 선비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 아니런가.   (돈밖에 모르는 이런 놈을 어떡해야 골탕을 먹일 수 있을까.) 김삿갓은 지그시 눈을 감고,   속으로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김삿갓이 좀처럼 응낙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사또는 초조한 모양인지, "여보게 ! 돈을 많이 준다는데, 무엇을 주저하는가? 어서 시원하게 대답하게나."   김삿갓은 탐관오리의 자식에게 글을 가르쳐 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기회에 사또를 멋지게 곯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좋습니다. 제가 자제분을 맡는다면 보수는 얼마나 주시렵니까 ?" 하고 눈 딱 감고 물어 보았다. 이왕이면 돈도 우려내며 골탕을 먹이려는 속 셈이었다.   "아까도 말을 했지만, 보수는 자네가 요구하는 대로 준다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오늘부터라도 우리 집 별당에서 아이와 숙식을 같이하면서, 글을 열심히 가르치도록 하게." "그러자면 제가 없는 동안 식구들도 먹고 살아가야 하니까, 집에도 돈이 좀 필요합니다. 죄송스럽지만 선금을 얼마간 주실 수 없겠습니까 ? "   "이 사람아. 자네는 조금 전에 상금을 타지 않았는가 ?" "집에 빚장이들이 와 있어서, 그 돈으로는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러니 저를 붙잡으시려면, 단돈 얼마간이라도 선금을 주셔야 하겠습니다." "허어 .... 돈이라는 것은 절대로 먼저 주어서는 안 되는 법인데 .... 자네가 꼭 필요하다면, 우선 스무 냥만 먼저 가져가게."   사또는 뒤주 속에서 돈 스무 냥을 꺼내 주면서, "이 돈은 집에 갔다 주고, 오늘 중으로 꼭 돌아와야 하네." "고맙습니다. 집에 돈을 갖다 주고, 번개 같이 돌아오겠습니다."   이렇게 사또에게 거짓말을 꾸며대고 밖으로 나오니, 동헌 마당에서 아침부터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객줏집 아낙네가 부리나케 달려오며 묻는다. "사람을 이렇게나 오래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디있시요? 상금은 타가지고 나오십네까 ?"   "허어 ... 자네는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 돈만 기다렸던 모양일쎄그려 ?" 김삿갓은 짐짓 익살을 부렸다. "돈도 기다리고, 사람도 기다렸지 뭐야요. 정말로 상금은 받으셨넵까 ?" "상금은 여기 있네. 이 돈은 자네에게 몽땅 줄 테니, 어서 집에 가지고 가서 땅을 사도록 하게."   김삿갓은 사또에게 받은 스무 냥은 술값으로 남겨 두고, 상금 일백 냥을 객줏집 여인에게 몽땅 내 주어 버렸다. 여인은 돈 꾸러미를 받아 들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며 말한다. "이 돈을 나에게 몽땅 주면 어떡해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절반씩 나눠 가집세다."   상금을 타거든 절반씩 나눠 먹자고 제안한 사람은 분명히 객줏집 여인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상금을 나눠 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에 너털 웃음을 웃으며 여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허허허... 나는 상금을 한푼도 나눠 가질 생각은 없네. 그 돈은 자네가 몽땅 가지고 가서 땅을 사란 말일세." "그럴 수는 없시요. 상금을 타거든 절반씩 나눠 갖자고 약속까지 하지 않았습네까 ?"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돈이 있어 봤자 술이나 먹어 없앨 판이지만, 자네는 땅을 사는데 요긴하게 쓸 게 아닌가. 그러니까 아무 소리 말고 상금을 고스란히 가지고 가란 말이야." "정말로 이 돈을 나에게 죄다 주신다는 겝니까 ?"   "이 사람아 ! 사잇서방도 서방임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서방이 마누라에게 돈을 준다는데, 무슨 놈에 말이 그렇게도 많은가? 안그래? 하하하..." 김삿갓은 한바탕 웃어 보이고 나서,   "나는 이제부터 볼일이 있으니, 자네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여인은 혼자 돌아가라는 소리에 적이 실망하는 빛을 보이며, "오늘밤도 우리 집에서 주무셔야 하지 않습네까 ?" 오늘밤도 특별히 봉사를 잘 해 주겠다는 암시성의  말을 한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사람아! 하루밤쯤 재미를 더 보려다가, 본서방이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다리 몽둥이가 부러질 판이 아닌가? 는 옛글이 있네. 그러니 우리 이제는 그만 헤어지기로 하세."   김삿갓이 이렇게 말을 하자 여인은 아직도 미련이 남는지, 말은 못 하고 눈물만 글썽 거리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은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우연히 만난 남녀간이었다. 그러나 사흘 밤이나 정을 나눈 탓인지, 여인은 얼른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나는 사또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자네는 돌아가란 말이야. 어쩌면 지금쯤 남편이 돌아와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 아닌가 ? " 여인은 그제서야 당황하는 빛을 보이며, 부랴부랴 귀로에 오르는 것이었다.         ...계~속 64~~   ∎방랑시인 김삿갓64 뜀박질만 시킨 이유. 여인을 집으로 보낸 김삿갓은 노상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훈장 노릇을 하겠다고 선금을 미리 받아내기는 하였으나, 탐관오리의 자식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도망을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겠지만, 유 사또 같은 자에게 아무런 응징도 해 주지 않고 곱게 떠나 버리기에는 김삿갓의 심술이 허락하지 않았다. 매사에 돈밖에 모르는  유 사또만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골탕을 먹여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동헌으로 다시 돌아오니, 유 사또는 크게 반가워하면서 "우리 아이가 지금 별당에서 자네를 기다리는 중이네, 보수는 넉넉히 줄 테니 그애에게는 특별히 신경써서 글을 잘 가르쳐 주게!" 하며 아이를 가르치는 것 조차, 돈과 결부시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김삿갓이 별당으로 가보니 과연 사또의 아들인 류중일柳中一이라는 소년이 뜰에서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얼굴은 제 아비를 닮아 둥글 넓적하게 생겨 세숫대야가 넓어 보이나, 머리는 좀 모자라 보이는 아이였다. "네가 사또의 아드님이냐?" 어른이 물어 보면, 버릇이 돼 먹은 아이는 누구나 공손히 대답하는 법이다. 그러나 유 소년은 심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그런 건 왜 물어 보아요?"하고 삐딱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김삿갓은 적이 불쾌감을 느끼며 쯔쯧... 재벌 3세나, 고관 3세나... "나는 오늘부터 너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로 한 훈장 선생님이다."하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그 얘기는 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지만, 나는 글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무튼 너와 나는 오늘부터 별당에서 같이 살아가기로 하였으니, 그런 줄 알아라." 그리고 아이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다시 물어 보았다. "너는 글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떤 일을 좋아하느냐?" "나는 넓은 들판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해요." "음.. 그렇더냐? 그러나 너희 부친께서는 너에게 글을 배워 주라고 하시는데, 너는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면 어떡하지?" "그까짓 글은 배워서 뭘 해요?" 글을 배우는 것에 대하여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글을 배워서 뭣 하다니 .... ?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 아버지는 나처럼 어렸을 때에는 글을 많이 배웠대요.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글 한 번도 안 쓰고도 돈을 자꾸 벌어들이던 걸요." 어린아이가 보고 느낀 대로 솔직하게 씨부려대는 데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너희 아버지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들이기에 그런 소리를 하느냐?" "우리 아버지는 사람들을 잡아다 놓고 볼기를 치면서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하고 고함을 한 번만 지르면 돈이 얼마든지 나오던걸요. 나도 아버지 처럼 돈이나 많이 벌면 그만이지, 그까짓 글은 배워 뭘 하겠냐는 말이예요." 철없는 소년은 누가 들으면 큰일날 소리를 자랑삼아 떠들어대는 것이다. 김삿갓은 소년의 말을 듣고, 유 사또의 폭정이 얼마나 가혹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자식에게 그와 같이 못 된 꼴을 날마다 보여 주면서 글은 무엇 때문에 배워 주겠다는 것인가? 마침내 김삿갓은 유 소년에게 글을 배워 주는 대신 뜀박질을 하도록 시켰다. 넓은 들판에 소년을 데리고 나와 웃통을 벗어 붙이고 뜀박질을 시켰는데, 처음 며칠 동안은 가까운 거리를 뛰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조금 더 거리를 늘렸고 차츰 십 리 이십 리 ...하는 식으로 거리를 자꾸만 늘려 가며 뜀박질을 시켰다. 그러자 뜀박질을 좋아하던 소년도 날마다 뜀박질을 하기에 진력이 났는지, 어느 날은 "훈장 선생님! 날마다 달음박질만 시키고 글은 언제 배워 줄 거예요?"하고 묻는 게 아닌가! 김삿갓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너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달음박질을 잘하는 것이다. 너는 달음박질을 잘하면 살아 남을 수가 있지만, 달음박질을 잘 못 했다가는 누구의 손에 맞아 죽을지 모른다." 소년은 그 말을 듣고 눈알이 휘둥그래진다. "예? 내가 누구의 손에 맞아 죽다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자 김삿갓은 눈 딱 감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 집 조상들은 대대로 내려오며 죄 없는 백성들의  볼기를 수 없이 쳐 왔느니라. 그러니 언젠가는 볼기를 맞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너희 집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런 위급한 때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36계 도망을 잘 치는 일이 아니겠느냐? 내가 너에게 글공부 대신에 달음박질만 열심히 배워주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소년은 그 말을 듣고 기절초풍 하도록 놀라며 "예엣! 볼기를 맞은 사람들이 우리집 식구들을 잡아 죽이려고 몰려올 지 모른다고요? 그렇다면 이거 큰일 났네요.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빨리 알려드려야 해요."하고 외치며 쏜살같이 동헌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소년이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하려고 동헌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자, 김삿갓은 부랴부랴 도망갈 채비를 서둘렀다. 어름어름 하다가는 화가 동한 사또의 손에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쯤 동헌에서는 야단법석이 났겠군. 사랑하는 아들에게 글은 배워 주지 않고 뜀박질만 시켰으니 사또가 펄펄 뛰며 화를 냈을 것이고 나를 당장 잡아 오라고 불호령을 내렸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리고 탐관오리인 사또에게 이만큼이나 골탕을 먹여 주었으니, 이제는 나도 살기 위해서 도망을 가야 하겠다.) 김삿갓은 급히 꾸린 행장을 걸머지고,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깊은 산속으로 사라졌다. ...계속65~~~   ■방랑시인 김삿갓65 두 늙은이가 서로 먼저 죽으라고 한 말은 , 다정한 말이었다. 순천 땅을 벗어난 김삿갓은 정주(定州),선천(宣川) 쪽으로 가보려고 발길을 서쪽으로 돌렸다. 선천은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방어사(防禦使)로 있었던 고을로서 , 역적 홍경래(洪京來)가 야간 기습을 해오는 바람에, 어이없게 반란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김삿갓의 가문은 졸지에 풍비박산이 난 곳이었다. 때문에 역적의 후손으로 낙인찍혀 ,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은 원천 봉쇄 되었으며, 이런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김삿갓 자신이 조상의 죄를 생각하며 , 해를 보기가 부끄럽다 여기고 삿갓을 뒤집어 쓰고,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며 유리걸식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선천, 그곳의 사건 때문이 아니던가.   생각해 보면 선천이라는 곳은 김삿갓의 가문과는 악연이 너무도 깊은 곳이다. 그처럼 악연이 깊은 곳이기에, 이번 기회에 선천에는 일부러라도 꼭 한 번 들러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주를 거쳐 선천으로 가는 길에, 산속에서 길이 저물었다. 저녁을 얻어 먹고 잘 만한 곳을 찾느라고 산속을 헤매다 보니, 저 멀리 산속에 조그만 불빛이 하나 보였다. (옳지, 됐다 ! 저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하자.) 그 집 삽짝문 앞에 이르러 주인을 부르려고 하는 바로 그때, 집안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내외간에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영감이 먼저 죽어요."   "무슨소리 ! 내가 왜 먼저 죽나 ! 임자가 먼저 죽으라고 ! " "영감이 먼저 죽으래도 그러네요. 영감이 먼저 죽어야 영감 장사를 내가 지내 줄 게 아니예요 ? " "쓸데 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저녁이나 지으라구 ! "   주인 영감은 그렇게 말을 하며 밖으로 나오다가, 사립문 안쪽 , 작은 마당에 서 있는 김삿갓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 '   김삿갓은 머리를 정중히 수구려 보이며 말했다. "저는 지나가던 행객이올시다. 길은 저물고 인가는 없어 부득히 하룻밤 신세를 부탁하러 왔는데, 공교롭게도 내외분께서 다투고 계시는 것 같기에 ......"   주인 영감은 그 소리를 듣고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하하하, 우리 두 늙은이가 서로 먼저 죽으라고 한 말을 싸우는 소리로 알았던 모양이구려 ... 그러나 ,아무 걱정 말고 어서 들어오시구려."   주인 영감은 김삿갓을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더니, 마누라를 소개하면서, "오늘 저녁에는 손님이 한 분 오셨으니, 저녁밥을 넉넉히 지어요 ! " 하고 말한다.   팔십이 가까워 보이는 노부부였다.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서로 간에 먼저 죽으라고 우겨대었는지, 김삿갓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누라가 저녁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가 버리자, 주인 영감은 호롱불 앞에 마주 앉으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손님은 우리 두 늙은이가 서로간에 먼저 죽으라고 했던 말을 듣고, 우리가 싸우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구려. 허허허 .... 그러나 실상인즉 그런 게 아니었다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소리 없이 웃을밖에 없었다.   "싸우신게 아니라면 어째서 그와 같이 듣기 거북한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 "먼저 죽으라는 말이 듣기에 거북한 말이라구요 ? " 그리고 주인 영감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며,   "우리같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들에게는 는 말은 결코 거북한 말이 아니라오. 오히려 다정한 말이지요." "먼저 죽으라는 말이 다정한 말씀이라뇨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주인 영감은 너털웃음을 웃어 보이며,   "귀공이 보시다시피, 우리 두 늙은이는 모두가 살아 있는 송장들이오. 그나마 둘이 살다가 하나가 죽고 나면, 남은 사람이 얼마나 외롭고 고적하겠소. 그런 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마누라가 먼저 죽어야만 내 손으로 시체를 꽁꽁 묶어 마누라 장사를 잘 지내 줄 수가 있겠기에 마누라 더러 먼저 죽으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마누라도 나와 똑같은 심정이어서, 내가 먼저 죽어야만 영감 장사를 잘 지내 줄 수 있겠다고 하면서, 나더러 먼저 죽으라고 말한 것이라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 오는 감동을 받았다. 죽음을 눈앞에 바라보는 노부부 중에서  어느 한쪽이 죽고 나면 남아 있는 사람은 뼈를 깎는 듯한 고독함을 느끼게 될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죽기보다도 더 괴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배우자를 그와같은 고통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서로간에 먼저 죽어 달라고 말한 것은 얼마나 갸륵한 부부애인가.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두 분께서 싸우시는 줄만 알았습니다."   "허허허, 송장이나 다름없는 우리에게 무슨 싸울 일이 있겠소이까. 이제는 마누라의 시체를 내 손으로 묻어 주는 일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지요. 그점에서는 마누라도 내 생각과는 별로 다를 것이 없어요." 듣기만 하여도 등골이 써늘해 오는 노 부부의 처량한 인생이었다.   김삿갓은 노부부 둘 만이 생활하는 것으로 보여 , 노인에게 물었다. "두 분 사이에는 아들 딸간에 혈육이 하나도 없으십니까 ?"   그러자 , 주인 영감은 아무 대답을 안 하고 한동안 까닭 모를 우수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계속66~~~ ∎방랑시인 김삿갓66 40년전, 김삿갓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저지른 죄.(적악지가필유여앙積惡之家必有餘殃) "자식이 없기는 왜 없었겠소. 범강장달에 기라성 같은 아들이 삼형제나 있은걸요. 그러나 내 팔자가 사나워서 그만 ....." 주인 영감은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말을 삼켰다. 김삿갓은 아들이 삼형제나 있는데도, 팔십 노부부가 단둘이 살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아니 그럼 아드님들은 모두 어디 가고 두 분만 적적하게 살고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주인 영감은 한동안 우수에 잠겨 있다가 넋 잃은 사람 처럼 말을 하였다. "명이 짧아 죽었다면 원통하지나 않겠소. 장사 같은 세 아이를 홍경래의 난으로 하루아침에 모두 잃었다오." 김삿갓은 '홍경래 난'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홍경래의 난으로 죽었다면, 그 당시 선천 방어사였던 자기 할아버지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음 한켠에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궁금한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눈 딱 감고 이렇게 따져 물었다. "아드님 삼형제를 일시에 잃어버리셔서 얼마나 비통하셨겠습니까? 아드님들은 관군이었습니까, 반군이었습니까?" 주인 영감은 그런 질문을 받자 갑자기 얼굴에 노기를 띠며, "에이, 여보시오! 내 아들들이 아무리 못났기로서니 나라를 배반한 역적의 무리들과 한패가 되었을 것 같소? 우리집 아이들은 당당한 관군이었다오." 그리고 잠시 뜸을 두었다가, "소위 방어사라는 작자 처럼 죽으면 죽었지, 역적놈들에게 항복을 했을 것 같소? 우리집 아이들은 비록 졸병에 지나지 않았지만, 총사령관인 방어사가 역적에게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반란군에게 덤벼들었다가 반란군에게 그만, 무참히 죽임을 당해 버렸다오."하는 게 아닌가! 김삿갓은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주인 영감의 세 아들을 억울하게 죽게 만든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자기 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홍경래에게 항복한 선천 방어사 김익순은 바로 저의 할아버지였습니다"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강렬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아 "그 당시 방어사가 반란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자제분들처럼 억울하게 죽은 병사들이 얼마나 되었습니까?"하고 엉뚱한 말을 물어 보았다. 주인 영감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소위 방어사라는 작자는 역적에게 항복을 했지만,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병사들은 반란군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반란군에게 정면으로 대항 하다가, 숫적으로 우세한 반란군에 밀려나 무참하게 죽은 병사가 여러 백이 넘었을 것이오." 그것은 김삿갓이 이제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김삿갓은 할아버지가 반란군에게 항복한 사실이 부끄러워 숫제 집을 나와 버리고 말았지만, 할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 병사들까지 억울하게 희생이 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방어사 김익순은 나라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부하들에게도 씻지 못 할  죄를 저지른 셈이 아닌가! 주인 양주는 성품이 인자하여 김삿갓을 자신의 아들처럼 따듯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러한 대접을 받을수록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내 할아버지가 방어사로 처신을 잘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선천에는 주인 부부들 처럼 불행하게 된 노인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보니, 김삿갓은 선천 땅에 발을 들여 놓을 면목이 없었다. 물론, 자기만 시치미를 떼고 있으면 선천 사람들이 자신이 옛날 방어사였던 김익순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뻔뻔스럽게 양심을 속여가며 유람하듯이 선천 지방을 떠돌아 다니기가 마음이 꺼렸던 것이다. 이날 밤, 김삿갓은 주인 양주의 얼굴을 대하기가 거북스러워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였다. 새롭게 알게 된 40여 년 전에 할아버지가 저지른 죄악으로 오늘 날 자기가 괴로움을 당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 적악지가필유여앙積惡之家必有餘殃'조상이 지은 죄는 자손에 까지 재앙을 불러온다' 이라더니 ! ... )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주인 양주에게 몇 번이나 머리 숙여 배례하고 다시 나그네의 길에 올랐다. ...계속67~~~   ∎방랑시인 김삿갓 2부 67 김삿갓의 송아지 사주 풀이. 김삿갓이  얼마를 가다 보니, 어느 농가의 마당 한쪽에 있는 외양간에서 중늙은이 하나가 부지런히 들락 거리는 것이 보였다. 까닭이 의아했던 김삿갓이 가던 발을 멈추고 한참을 쳐다 보다가 물었다. "소가 새끼를 낳으려는 모양이죠 ? " "아침부터 산고를 시작 했으니까, 아마 곧 낳게 될 것이오."  "그래요 ? 참 잘 된 일이군요. 그런데 주인 양반은 소가 아들을 낳기를 바라시오, 딸을 낳기를 바라시오 ? " 하고 우스갯 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주인 늙은이도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 넘긴다. "그야 물론 딸보다는 아들을 낳기 바라지요. 암송아지 보다는 숫송아지 값이 더 하거든요." "그러면 나도 아들 낳아 주기를 빌어 드려야 하겠군요. 아무튼 생명 하나가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주고 받는데, 마침 새끼가 나오게 되자, 주인은 부랴부랴 달려가 새끼를 받아내고 있었다. "여보시오 ! 아들이오, 딸이오 ? " 김삿갓은 마치 자기 자신의 일을 만난 듯이 들뜬 소리로 물어 보았다. 주인 늙은이는 새끼 소의 몸을  천으로 닦아 주며,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노형 덕택에 딸이 아닌 아들을 낳았소." 김삿갓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너스레를 쳐보았다, "아들을 낳았으니 노형댁 금년 운수는 대통이구려. 옛날 부터 딸을 낳으면 이라 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라고 일러 온다오. 올해는 마침 을축년(乙丑年), 소띠의 해에 숫송아지를 낳았으니, 노형 댁 송아지야말로 송아지임에  틀림없소이다." 주인 늙은이는 해산 뒤치닥꺼리를 해 주면서, "소에도 진짜 소가 있고 가짜 소가 있나요 ? 그 양반, 못 하시는 말씀이 없으시네." "주인 양반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아무리 소라도 말띠 해에 태어난 소는 절반만이 소일 뿐 나머지 절반은 말의 넋일 것이고, 돼지띠 해에 태어난 소는 마찬가지로 절반은 돼지의 넋이라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 소띠 해에 태어난 노형 댁의 송아지야 말로 진짜 송아지가 아니겠소 ? " 김삿갓은 이와 같은 입심을 한바탕 부리고 나서, "생명이 새로 태어 났으니 이제는 사주(四柱)를 알아 두어야 할 게 아니오 ?" 하고 얼토당토 않은 말을 씨부려대었다. 주인 늙은이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너털 웃음을 웃는다. "에이. 여보시오. 사람도 아닌 소에게 무슨 놈의 사주란 말이오." "허어, 주인 양반은 모르시는 말씀이오. 옛날부터 이라는 말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 소라는 동물은 사람과 다름없는 영물이라오. 그래서 명당의 형국도 소가 누워 한가로이 자고 있다는 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 " 주인 늙은이는 또 다시 너털 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소의 사주라 ? 참 재미있구려 ! 사주를 기어이 잡아 주고 싶거든 어디 한번 ,노형이 잡아 보시구려." "좋소이다. 그렇다면 송아지의 사주를 내가 잡아 드리지요." 김삿갓은 손가락으로 육갑(六甲)을 짚어 가면서, "을축년에 태어 났으니까 태세(太歲)는 을축(乙丑)이 틀림 없고, 이 달이 칠월이니 월건(月建)은 병인(丙寅)이고 ....." 하는 식으로, 송아지의 사주를 풀이했다. 이렇게 나온 ,  송아지의 사주는 다음과 같았다. 고기불리     이향팔자     초년다액     동서분주 (古基不利    移鄕八字     初年多厄     東西奔走) 흉중은우      주야불리    일신고단     식소사번 (胸中隱憂     晝夜不利    一身苦單     食小事煩) 초년기 부터 여러모로 곤란과 어려움이 많이 따를 운명으로 여러모로 노고와 장애가 따르는 수. 출생지와 부모를 일찍 벗어나 고생을 하겠고, 배우자는 뱀,닭, 쥐를 만나면 대길 하겠다. 김삿갓이 이와 같은 사주를 풀어내자 주인 늙은이는 박장 대소를 한다. "하하하 , 정말 , 대단 하시오 ! 어쩌면 기가막히게 맞는 사주를 짚어내셨소이까 ? 동서분주, 일신고단이라 , 틀림 없는 소의 사주 올시다 ! 그런데 배우자를 뱀,닭, 쥐를 만나면 대길 할 것 이라는 대목에서는 더욱 재미있구려 ! " 김삿갓도 주인 늙은이와 함께 너털 웃음을 웃으며 말을 했다. "소는 영물일 뿐 만 아니라 , 집안의 큰 일꾼이요 재산이니, 잘 키우셔서 복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김삿갓은 송아지 사주를 장난삼아, 한바탕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 선천 방향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계속68~~~   방랑시인 김삿갓 (68) 개성 사람들의 두문동 정신.(두문 불출..杜門不出..의 어원)과 선죽교 참배.. "상편" 김삿갓은 진봉산으로  철쭉꽃을 찾아 떠났다. 과연 , 진봉산 철쭉은 변계량이 읊은 시 처럼 천하에 절경이었다. 제법 험한 산 전체에 철쭉꽃이 얼마나 많이 피어 있는지 ,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산 전체가 훨훨 불타 오르는 것 처럼 보였다.   가까이 와 볼수록 더욱 놀라왔다. 철쭉꽃은 진달래꽃과 비슷하면서도 취향은 크게 달랐다. 진달래 꽃의 빛깔은 청초한 연보랏빛이어서 순결 무구한 숫처녀를 연상하게 하지만 , 철쭉꽃은 꽃송이 자체도 풍만하려니와 빛깔도 농염하기 짝이 없어 , 진달래 꽃과 견주어 보건데, 한창 무르익은 삼십대 여성의 육체가 연상되기에 충분하였다.     진봉산에 피어 있는 꽃은 오직 진달래와 철쭉 뿐이었다. 진달래 꽃이 한물 가자, 철쭉꽃이 때를 만난 듯이 황홀하게 피어 있었다. 김삿갓은 마치 옷을 벗고 잠자리에 누워 있는 여체를 어루만지듯  철쭉 꽃송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시 한 수가 읊조려졌다.            ..   지난 밤 봄바람이 동방에 불어 들어 비단 이부자리 곱게 깔아 놓았소 이 꽃이 피는 곳에 새도 울고 있어 그윽한 그 자태 더욱 애를 끊노니          ..   진봉산 철쭉에 넋이 나간 김삿갓 , 정말 아무 생각없이 무심한 발길을 옮기다 보니 ,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이 멀리 바라보였다. 그러자 김삿갓은 5백년 옛 도읍지를 이제야 보게 되었구나 하며 감개가 무량해 왔다.   송악산 기슭에는 수목이 무성하였다.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걸어가며 송악산 높은 봉우리를 올려보며 , 문득 고려조 충신이었던 야은 길재(吉再)의 옛 시조가 머리에 떠올랐다.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재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이성계는 고려를 망하게 하고 조선왕조를 창업하자 백성의 추앙을 받던 , 정신적 지도자인 세 사람을 회유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 끝까지 고려조의 지조를 지켜왔다. 그러므로 그들의 대쪽 같은 절개는 지금도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태조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후일 조선조 3대 태종대왕)이 주석(酒席)에서 포은 정몽주의 심경을 아래와 같은 시(詩)로 떠보았다.     ..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다.    .. 그러자 정몽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안군의 교묘한 회유를 일도 양단(一刀 兩斷)의 절개로 응수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쪽같은 정몽주의 일편단심의 표현은  야망을 꿈꾸고 있는 정안군과 그의 추종세력에게는 전혀,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주석이 파한 후,  포은 정몽주는 죽음을 예감하고 , 말 안장에 거꾸로 앉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선죽교에 이르렀을 때 맞닥뜨린 조영규(趙英珪)의 철퇴에 맞아 숨을 거두었으니 , 세상에 그런 충신이 어디 있으랴  생각되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은 개성 사람들 , 아니 고려조에 충성해 오던 문신(文臣) 72명과 무신(武臣) 48명이 이성계가 고려를 거꾸러뜨리고 새나라 인 조선 왕조를 창건하자 , 그날로 만수산 두문동 골자기로 들어가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새나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성계는 그들의 항거에 크게 당황하여 온갖 회유책을 써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왕 이성계의 회유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이에 크게 진노한 이성계는 만수산 사방에 불을 질러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을 질러 버리면 불길에 견디지 못하고 두문동에서 뛰쳐 나오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문동에 숨어 든 고려조의 망국 지사들은 만수산 전체가 큰 불덩이가 되었음에도 불에 쫒겨 나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杜門不出) 이로 인해 개성에는 두문동 정신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겼고 , 이런 정신적 영향으로 개성 사람들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씨 조선 왕조에서는 인재(人材)를 등용할 때 , 서북(西北)사람을 배척하게 되는 전통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개성사람들은 호구지책으로 장삿길에 나서게 되었으니 흔히 "개성상인"이라고 하면 이익을 취하는데 영악함이 남달라서 , 지금까지도 개성사람들을 흔히 , "깍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익에 영악한 개성사람들이지만 신용이 알뜰하고 셈이 바르기론, 팔도를 두루 편답하더라도  개성상인을 따를 사람이 없는 것이다. (녹십자창업주 허씨일가도 개성사람이다.) 죽음의 도시와 다름없는 개성의 거리를 거닐다 보니, 김삿갓은  문득 정몽주가 살해된 선죽교(善竹橋)를 찾아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죽교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보세요 말씀 좀 묻겠습니다. 선죽교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 " 김삿갓이  지나가는 선비를 붙잡고 물어 보니, 사십쯤 되어 보이는 선비는 얼굴에 근엄한 빚을 띄며, "포은 선생님이 운명하신 선죽교를 가시려고요 ?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라서 말만 듣고 찾으시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내가 앞장 설 터이니 따라 오시오." 하며,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길잡이로 나서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이렇듯 외지에서 온 선죽교 참배객을 앞장서 인도하는 개성 사람들을 보건데 , 정몽주 선생을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흠모하고 사랑하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윽고 선죽교에 당도하자 선비는 다리 앞에서 머리를 숙여 잠시 묵념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 "포은 선생께서는 이 다리 위에서 이방원의 하수인인 조영규라는 놈의 철퇴에 맞아 무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포은 선생께서 흘리신 성스러운 피는 이 다리 돌 속에 깊숙이 물들어서 3백년이 지난 지금도 돌이 이렇게 붉습니다. 보십시요. 이게 포은 선생께서 흘리신 핏자국 입니다." 선비의 말을 듣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선죽교 돌에는 군데군데 핏자국이 남아 있는 듯이 보였다. 김삿갓은 붉은 핏자국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 "무심한 돌도 충신의 피를 알아 보는 모양 입니다. 그러나 이 다리에는 충신을 기리는 비각(碑閣)이 없는 것은 웬일 입니까 ?" 그러자 선비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다. "나라에서는 포은 선생님의 지조 굳은 충성심이 두려워 간신히 비석 하나만이 있을뿐 , 비각조차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니 ,누가 목숨을 걸고 비각을 세우려고 하겠소이까 ? " 선비는 선죽교에 비각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이렇게 말을이었다. "조선 왕조가 되고 난 뒤에는 포은 선생님의 충성심을 누구도 찬양하지 못한답니다. 포은 선생님의 충성심을 모르는게 아니라 섣불리 찬양했다가는 목숨이 달아날까 무섭기 때문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석희박 이라는 무명 시인의 시가 한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시는 어떤 시옵니까 ? " 그러자 선비는 아래와 같은 시를 한 수 읊어 보였다.      ... 산천은 옛 대로되 거리는 비어 있고 저녁놀 잠긴 곳에 물소리만 처량쿠나 홀로히 말 세우고 옛 자취를 찾아 보니 한 조각 비석에는 "정충문"만 남아 있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69) 선죽교 참배와 앉힘 술집 .. "하편" 망국의 설움이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처량한 시였다. 김삿갓은 저물어 가는 선죽교 위에서 선비가 읊은 시를 듣고 , 문득 선비에게 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선죽교를 다녀 갔을 터인데, 알려진 시가 고작 한 편밖에 없다니 , 안타까운 일 이군요. 그렇다면 제가 즉흥시를 한 수 읊어 보기로 할까요 ? " 선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만약 한 수 읊어 주신다면 , 저는 두고두고 마음속에 아로새겨 두겠습니다." 김삿갓은 잠시 시상에 잠겨 있다가 , 시를 한 수 읊었다.       .. 옛 강산에 말 멈추니 시름이 새로운데 반천 년 왕업이 빈터만 남았구나 연기 어린 담장가에 까마귀 슬피 울고 낙엽지는 폐허에는 기러기만 날아가네. 故國江山立馬愁  (고국강산 입마수) 半千王業一空邱  (반천왕업 일공구)   煙生廢墻寒鴉夕  (연생폐장 한아석) 葉落荒臺白雁秋  (엽락황대 백안추) 돌로 된 짐승은 오래되어 말이 없고 구릿대는 쓰러져 머리를 숙였구나 둘러보아 유난히 가슴 아픈 곳은 선죽교 개울물이 흐름없이 흐느끼네. 石狗年深 難轉舌  (석구년심 난전설) 銅臺치滅 但垂頭  (동대치멸 단수두) 周觀別有 傷心處  (주관별유 상심처) 善竹橋川 咽不流  (선죽교천 연불유)      ..   선비는 김삿갓의 시를 듣고 나더니 , 김삿갓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감격 어린 어조로 말을 한다. "선생 ! 저는 선생께서 시에 이처럼 능하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선생 같은 어른을 만나게 된 것은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무슨  말씀을 ..오늘, 나를 위해 수고를 마다 않고 이곳까지 인도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올시다. 저는 하루에 한번씩 이곳 선죽교를 찾는 것을 일과로 삼는 사람입니다." 선비는 이같이 말을하며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선생과 같은 어른과 그냥 헤어지기는 너무나 섭섭합니다. 마침 날도 저물어 오고 하니, 읍내로 들어가 "앉힘술집"에서 술이라도 한잔 나누시면 어떻겠습니까 ? " 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술이라면 나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데 앉힘 술집이란 어떤 술집입니까 ?" 김삿갓은 술집 이름이 처음들어 보는 터이라 선비에게 물었다. 선비는 김삿갓과 함께 읍내로 걸으며 말한다. "조선 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가자 , 개성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벼슬길은 아예 외면을 하게되었고 모두가 장삿길로 나서게 된 것도 그런 변화의 하나이지만 , 앉힘 술집이라는 명물 술집이 생겨나게 된 것도 그때부터의 일이었지요."  "나라가 바뀌게 되면 백성들의 생활에 변화가 따르게 마련이겠지요. 그러나 개성에만 있다는 앉힘 술집은 보통 술집과 어떻게 다른지 여간 궁금하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 개성 사람들이 장사에 전념하다 보니 중국과의 거래가 빈번해져서, 남자들이 집을 오랫동안 비우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앉힘 술집이란 ,남편이 장사차 집을 비웠을때, 가정 부인이 부업삼아 간판을 내걸지 않고 알음 알음으로 알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술을 파는 일종의 내밀 술집이지요. 그러기에 앉힘 술집에서는 술과 안주값을 얼마 달라고 직접 말하는 경우가 없어요. 얼마를 먹었든 간에 손님이 알아서 주는 대로 받는 것이 특색이지요. 게다가 앉힘 술집은 술맛도 빗은 아낙의 솜씨에 따라 천차만별 이지만 맛이 매우 좋고요, 안주도 한번 다녀간 손님의 취향에 맞춰 주어 , 기막히게 좋습니다."   김삿갓은 그렇지 않아도 출출해 오던 판인데 , 안주가 기막히단 소리를 듣자 , 입안에 침샘이 샘물처럼 솟아 나왔다. "술값을 주는 대로 받는다고 하니 , 세상에 그처럼 인심 좋은 술집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아까부터 배가 출출하던 판이니 , 어서 가십시다." 김삿갓은 선비를 재촉하여 술집으로 걸어가다가 , 문득 궁금한 점이 있어 이렇게 물어 보았다. "술값을 손님이 알아서  주는 대로 받게되면, 필시 얌체같은 손님이 없지 않을 것이고, 그런 경우는 술집의 손해가 클텐데, 그래가지고서야 장사가 되겠습니까 ? "   "개성사람 중에는 그처럼 경우에 벗어나는 짓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경우 바르기로는 개성사람들을 당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개성사람들이라고 모두 성인 군자는 아닐 것이고.. 개중에 먹고 마신 술값을 적게 내미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것 아닙니까 ? " 김삿갓은 짐짓 , 개성사람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자 선비는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데,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면 주인은 적게 내민 술값이라도 아무 말 않고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일을 한 사람이 다시 오게 되면 그때는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하고 , 슬며시  따돌려 버립니다."   선비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어느 골목 어귀에서 발을 멈추고, "우리가 지금 찾아가는 집은 바로 저기 보이는 집입니다." 김삿갓이  선비가 가르키는 집을 보니, 여늬 여염집과 다름 없는 집이었다. 그 집앞에 이르러 선비가 대문고리를 잡아 흔들며 , 안을 향하여 작은 소리로 주인을 불러댓다. "아주머니 계시오 ? ... 나, 교동 생원이오. 오늘은 손님 한 분과 같이 왔소이다." 하고 말을하자, 주인 아낙네는 목소리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알아 보는 듯이 , 반갑게 나와 대문을 열어주며,   "어서 오세요. 안방으로 드시죠." 하고 정중히 맞아들인다.   선비와 일행인 김삿갓을 안방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니, 선비는 이집에선  상객(上客)으로 대접 받는 것 같았다. 35,6세로 보이는 주인 아낙네는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단정하게 꽂고 있는 품이 어디로 보아도 현모 양처형의 가정 부인이었다. "매우 깔끔한 인상의 저 여인이 이 집 안주인 입니까 ?" "그렇습니다. 살림살이도 물샐틈 없이 잘하지만 , 음식솜씨가 좋기로도 소문난 부인이지요."   김삿갓 , 자리에 앉으며 문득 생각해 보니 , 선죽교를 찾다 만난 이 선비와 아직 통성명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김삿갓이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선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고보니, 아직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저는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는 김삿갓이라고 합니다." 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청했다. 그러자 선비는 두 손을 설레설레 내저어 보이며 말한다. "뜻에 맞는 사람끼리 술잔이나 나누다 헤어지면 그만이지, 구태여 통성명 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교동골에 살고 있으니 , 교동 생원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교동 생원이라고 자칭한 선비는 끝내 본명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주인 아낙네가 주안상을 들여왔다. 그런데 커다란 소반위에 얹힌 것은 , 보쌈 김치 두 보시기에 소주 한 주전자만 달랑 놓였을 뿐이었다.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아니, 이게 바로 개성 명물인 앉힘 술집의 주안상이라는 겁니까 ?" 교동 생원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것은,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기에 지루할 터이니, 기다리는 동안 입놀림을 하라는 전주상(前酒床) 입니다. 진짜 요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나올 테니 , 그동안에 심심 파적으로 소주로 목이나 축입시다."   손님이 요리를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하여 전주상을 내온다는 것은 처음 들어 보는 소리다. 그렇다면 , 손님에 대한 이곳 개성 술집의 배려는  명물임에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보쌈김치를 안주삼아 소주 몇 잔을 나누고 있노라니까 , 그때부터 본격적인 술 안주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처음 나온 안주는 쇠고기 수육과 돼지 편육이었다. 김삿갓은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많은 진수성찬을 먹어 보았지만 , 이날처럼 맛있는 쇠고기를 먹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삶은 고기는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 얇게 저며져 있었고 크기 또한 적당해서 한 입에 먹기도 좋았지만 , 입안에 넣으면 슬슬 녹아 버릴 정도로 기가막혔다."   "아니, 쇠고기를 어떻게 요리했기에 입 안에 넣기만 하면 슬슬 녹아 버리는 것입니까 ? " 김삿갓은 수육을 연방 집어 먹으며 칭찬의 소리를 하자, 교동 생원이 대답한다. "개성은 워낙 요리를 잘하기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요리를 잘하기로 이렇게 까지 잘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 "나는 요리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수육은 푹 삶은 쇠고기덩이를  두레속에 담아 우물 속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사용할 만큼 베어낸후,   다시 끓는 물에 중탕을 해가지고 종잇장처럼 고기결에  따라 , 솜씨 있게 썰어 내온 것입니다."   "고기 맛이 이렇게 좋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긴, 정성을 그렇게 들였으니 고기 맛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쇠고기 수육도 좋지만 제육 편육도 자셔 보세요. 제육은 워낙 보쌈 김치에 싸서 먹어야 제 맛이 나는 법입니다." 김삿갓, 제육을 김치에 싸서 먹어 보니 , 그것 역시 형용하기 어려운 별미였다. (개성 보쌈 김치는 그 맛이 최고입니다.)   이렇게 술과 함께 맛있는 안주를 정신없이 먹고 있노라니 , 이번에는 기름에 부친 전유어(煎油魚)가 들어왔다. 상에는 먹다 남은 고기 안주를 거두어 내고, 기름에 갖튀긴 생선을 상위에 올려 놓았는데 , 생선을 한 입 베어물면,  입속에서 바삭하게 씹히는 맛이, 혀까지 목구멍으로 함께 넘어 가버릴 지경이었다.   이어서 이번에는 녹말에 부친 따듯한 파전이 나오고 , 잠시 후에는 일정한 크기로 예쁘게 깍은 생율(生栗)이 나왔다. 음식의 맛도 맛이지만 ,만든 사람의 정성이 여간 알뜰할 수가 없었다. 술을 한바탕 마시고 나니 , 조금전에 거두어 내간 수육에다 부침개까지 버무려 끓인 , 매운탕이 나오는데, 고기와 전유어로 끈끈해진 입맛을 얼큰한 매운탕으로 개운하게 씻을수 있도록 주인 아낙이 배려한 것인데 , 그런데 이맛  또한 , 천하의 일미였다.   김삿갓은 술과 안주를 이처럼 맛있게 먹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교동 생원은 술을 마실 만큼 마시고 나더니 , 정색을 하며 김삿갓에게 말을 한다.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다. 앉힘 술집은 보통 술집과 달라서 술을 다 마셨거든 곧장 일어나는 법입니다." "알겠습니다. 내 일생에 오늘밤 처럼 맛나는 술과 안주를 먹어 보기는 처음입니다." 김삿갓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교동 생원은 주인을 부른다.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와서 아주 잘 먹었소이다. 값은 모두 얼마죠 ? " "처분대로 해주십시요." 교동 생원이 이미 말한 대로 , 주인 아낙네는 자기 입으로 술값을 말하지 않았다. 교동 생원은 얼마간의 돈을 내밀며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돈을 넉넉히 드릴테니 , 후일에 이 손님이 혼자 오시더라도 한 번 더 대접해 주시오." 그러면서 김삿갓을 돌아보며 말한다. "이 집 음식이 선생의 입맛에 맞으시는 모양이라 미리 넉넉하게 돈을 맡겼으니 , 혼자서라도 한번 더 들러 , 술과 안주를 드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 김삿갓은 생원의 배려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윽고 거리로 나서니 밤은 깊어 가는데 거리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교동 생원과 작별을 하고 밤거리를 혼자 걸어가며, (나에게 술을 사준 교동 생원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일까 ? ...) 하는 의혹이 자꾸 들었다. 하루에 한 번씩 선죽교를 찾아가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 사람이 확실할 것인데 , 그러나 더이상 그의 정체를 알수는 없었다.   그야 어찌되었던 , 이제는 잠자리를 구해야 할 판이었기에, 김삿갓은 길가에 있는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후 계집아이가 나오더니 대문을 열어 볼 생각은 아니하고 대문 안에서 누구냐고만 묻는다. "나는 길을 가던 나그네로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으니 주인 아저씨께 그렇게 여쭈어라 ! "   그러자 계집아이는 대뜸 , "우리 집은 여인네만 사는 집이예요. 외간 남자를 들일수 없으니 다른 집으로 가보세요." 그 한마디를 매정하게 내뱉고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허허 ... 개성 인심 참 고약하다. 여인네만 사는 집이라면 남자 손님을 더욱 반갑게 맞아 들여야 옳을 일인데 , 그 집 마누라는 음양의 이치도 모르는가 보구먼."   김삿갓은 혼잣말로 익살을 부려 보며 , 이번에는 커다란 기와집 대문을 두드려 보았다. 이번에도 계집아이가 나오더니 대문안에서 누구냐고 묻더니 대뜸 말을 하는데, "우리 집에는 손님을 재워 드릴 방이 없어요. 다른 집으로 가보세요." 하는 것이 아닌가. 방랑시인 김삿갓 (70) 지 훈장이 말한 "팔도의 특성"   개성을 떠난 김삿갓이 예성강(禮成江) 물줄기를 따라 이틀쯤 거슬러 올라가니 , 그때부터는 사람들의 말씨도 다르거니와 얼굴조차 다르게 보였다. (여기가 어딜까 ? ) 사람들의 사투리가 정겹게 들려와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여기는 황해도 금천 땅이라오."   김삿갓은 이곳이 황해도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 불현듯 복받쳐 오르는 어린 시절의 향수에 가슴이 젖어왔다. 김삿갓은 어린시절 ,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7년을 살아 온 바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 금천에서 2백 여리만 더 올라가면 곡산이 아니던가 ? 사투리가 정겹게 들린 이유가 이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해도의 지세는 멸악산맥이 황해도를 동,서로 갈라 놓고 있다. 서쪽은 바다가 가까운 관계로  연백 평야와 재령 평야 같은 들판이 많지만 , 곡산이나 신계 같은 곳은 서쪽으로는 멸악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에는 언진산맥이 덮어 누르고 있는데다, 남쪽에서는 마식령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 한낮에도 해를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험학한 산악 지대다.   선천군수 겸 병마 절도사를 지낸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어이없이 항복을 하자 , 김삿갓의 어머니 이씨는 어린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 그 당시의 머슴이었던 김성수의 고향인 곡산으로 피신한 것도 , 곡산이 그처럼 첩첩 산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김삿갓의 나이는 겨우 네 살이었다. 그러기에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곡산으로 오게된 김삿갓은 천진 난만하게 뛰놀며 글만 읽어 왔었다.   그것은 이미 30년 전의 일이었지만, 김삿갓의 기억 속에는 그 시절이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후에 김삿갓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면서 어머니를 따라 양주, 광주, 평창, 영월,등지로 3년이 멀다 하게 이사를 다니게 되었지만 지금도 누가 , "고향이 어디냐 ?" 하고 물어 본다면, "내 고향은 황해도 곡산이라오." 하고 대답하고 싶을 정도로 곡산에 대한 추억이 너무도 많았다.   물론 황해도에서는 곡산 이외에도 보고 싶은 곳이 너무도 많았다. 해주(海州)와 구월산(九月山)도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이끄는 곳은 역시, 곡산이었다. (그렇다 ! 이번 겨울에는 아무데도 가지 말고 , 곡산에서 보내기로 하자 ! ) 생각만 하여도 가슴 벅찬 흥분이 일었다.   이렇게 황해도 금천으로 들어선 김삿갓은 첫날밤을 어느 서당에서 자게 되었다. 산골 훈장이라면 의례, 입성이 꾀죄죄하고 , 언동도 옹졸한 법이다. 그러나 "선풍재(仙風齊)" 라고 하는 그 서당의 훈장은 구렛나루가 허연데다가 풍채가 유난히 좋아서 , 마치 신선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풍채가 저렇게도 좋은 양반이 무슨 할 일이 없어 , 이런 산중에서 훈장 노릇을 하고 있을까 ? )   이름이 지승하라고 하는 훈장은 김삿갓과 수인사를 한 후, 묻는다. "보아하니 귀공은 공부를 많이 하신 선비 같은데 , 이런 산중에는 무슨일로 오셨소 ? " "저는 워낙 역마성을 타고나서, 명산 대천으로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명산 대천으로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하신다니 , 그거 참 좋은 팔자시구료. 말만 들어도 귀공의 팔자가 부럽소이다."   "팔자가 기박해서 거지처럼 떠돌아 다니는데 , 뭐가 부럽다는 말씀입니까 ? " "그나 저나 선생은 본시 이 고장 어른이 아니신 것 같은데 , 어떤 사연이 계시기에 이런 산골에서 서당을 열고 계시옵니까 ? "  하고  김삿갓이 물어 보았다.   그러자 지승하 훈장은 "허허".. 웃으며 말을 하는데, "나는 본시 한양 사람이라오. 내 조부께서 벼슬을 지내시다가 이리로 귀양을 오게 되셨지요. 나는 삼 십년 전에 조부님을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데, 산수가 하도 좋아 , 조부님이 세상을 뜨신 뒤에도 이곳에 그냥 눌러 살고 있다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심심 파적거리이구요."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에게 다시 묻는다. "그래, 명산 대천을 두루 찾아 다니신다니 , 각 도의 풍습과 인심은 어떠합디까 ? " "아직 삼남 지방은 가보지 않아 , 뭐라고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경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는 이미 다녀 보았는데 , 각 도마다 사투리도 달랐지만 , 특히 사람들의 기질은 제각각 다른 것 같습니다."   "잘 보셨소이다. 귀공이 보기에는 함경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 사람들의 기질은 어떻게 달라 보이더이까 ? " "글쎄올시다. 뭐라고 한마디로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 함경도 사람들은 끈기가 있어 보였고, 강원도 사람들은 부처님 처럼 순박해 보였고 , 경기도 사람들은 말은 잘하지만 미덥지가 않아 보였습니다."   "잘 보셨소이다. 그러기에 옛날 어른들은  팔도의 특색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아시오 ? " 김삿갓은 옛날 어른들이 팔도 사람들의 특징을 어떻게 말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훈장께 솔직하게 물어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저는 과문 (寡聞)한 탓으로 옛날 어른들이 팔도의 특색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모르옵니다. 선생은 저의 무식을 깨우쳐 주소서." "귀공이 무식하다니 , 무슨 말씀을 ! "   지 훈장은 김삿갓을 어떻게 보았는지 , 깍듯이 존대를 해주어 가면서, "좋은 벗이 멀리서 오셨으니 우선 술이라도 한잔씩 나누면서 애기합시다." 하며 사환 아이더러 안에 들어가 술상을 차려 내오라고 이른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 오고 , 술잔을 기울여 가며 김삿갓이 다시 물었다.   "선생께서 알고 계시는 옛 어른들의 팔도 사람의 특색을 들려 주십시오." "허허 .. 귀공은 지식욕이 대단하시구료. 그러면 내가 옛어른들이 이르는 팔도 사람들의 특색을 적어 보이지요."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써보이는 것이었다.   1. 京畿道는 鏡中美人 (거울 속에 비친 미인) 2. 江原道는 岩下老佛 (바위위에 앉은 늙은 부처님) 3. 咸鏡道는 泥田鬪狗 (흙탕밭 속에서 싸우는 개) 4. 黃海道는 石田耕牛 (돌투성이 밭을 갈고 있는 소) 5. 平安道는 猛虎出林 (숲속에서 달려 나온 사나운 호랑이) 6. 忠淸道는 淸風明月 (맑은 바람 부는 밤의 밝은 달) 7. 全羅道는 風前細柳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버드나무) 8. 慶尙道는 泰山峻嶺 (첩첩 태산 속의 험준한 고갯마루)   김삿갓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 비유가 모두 그럴 듯 합니다. 저는 아직 다른 지방에는 가보지 못해 잘 모르겠습니다만 , 강원도를 암하노불이라 하였고 , 함경도 기질을 이전투구에 비유한 것은 어쩐지 수긍이 갑니다. 경기도의 특색을 경중미인에 비유한 것도 그럴듯 하고요."   "하하하, 귀공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 나 역시도 남도 지방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 고향이 제각기 다른 내 친구들을 두고 따져 본 일이 있는데, 모두들 그 비유가 옳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살고있는 지역에 따른 자연 환경의 영향으로 각 지방의 특색이 형성되는 모양 입니다." "물론 그럴겁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니까요. 그러나 황해도를 석전경우라고 하는 것은 약간 어색한 것 같은데 , 선생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 하시옵니까 ? " 곽 노인은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보기에는 황해도 기질을 석전경우에 비유한 것도 옳은 표현인 것 같아요. 소란 놈은 다소 우둔한 편이기는 하지만 , 그렇다고 누구에게  아첨을 하거나 군림을 하려는 동물이 아니거든요. 자기 일 밖에 모르는 소가 돌밭을 꾸준히 갈아 나가고 있다고 했으니 , 그것이 어찌 황해도 사람들의 기질이 아니겠소이까.  나는 이래서 황해도 사람들을 좋아하는 거예요." "황해도 사람들의 그런 기질이 마음에 드셔서 , 한양에 돌아가지 않으시고 이곳 황해도에 뿌리를 내리신 겁니까 ? "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남에 일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 일에만 충실한 것이 황해도 사람들의 특색이 아니겠어요 ? " 지훈장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귀공은 고향이 어디시지요 ? " 하고 물어 본다.   "집이 강원도에 있으니까, 제 고향은 암하노불에 해당하는 강원도 입니다. 그러나 저는 열 살이 넘을때 까지  황해도 곡산에서 자랐으니까, 황해도가 고향이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래요 ? 첫눈에 보아도 어쩐지 황해도 사람 같다 싶었다오. 그러면 이번에는 어렸을 때의 고향인  곡산을 찾아  가시려오 ? " "곡산을 일부러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니나   정처없이 다니다 보니, 불현듯 곡산에 가고 싶었습니다."   "고산종승타산호(故山終勝他山好 : 아무리 좋은 산천도 고향 산천만 못하다)라, 어릴때 자란 고향이 그리우신 모양이구료. 고향이란 머릿속으로 그려 볼 때에는 아름답기 그지 없으나 , 떠난지 오래 되었다면 막상 고향에 가더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를일이요. 가실때 가시더라도 이왕 내 집에 오셨으니 , 며칠 묵으면서 이 근방 산수 구경이나 하시고 떠나시구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1)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 밤. "상편” 다음날 아침 , 조반을 얻어 먹은 김삿갓은 지승하 훈장에게 금천의 산천을 두루 돌아 보겠다고 말을 하고 떠났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곡산에 가 있었다. 그의 발길은 곡산을 향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곡산을 가기 위해서는 신계를 거쳐야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걷던 김삿갓의 눈에, 신계를 앞둔,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에  "臍生堂藥局" 이라고 쓴 커다란 간판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삿갓은 그 간판을 잘못 보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보니, 틀림없는 "臍生堂藥局"이었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음을 웃었다. 간판 글자가 터무니 없는 글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약국은 생명을 다루는 곳이다. 따라서 약국은 '생명을 건져'준단 뜻에서 흔히 "濟生堂" 이라고 써온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간판은 건널 제(濟)가 아닌 , 배꼽 제(臍)자를 약국 이름으로 쓰지 않았나? (저 약국 주인은 한문에 어지간히 무식한 모양이군.)   빈수레 끄는 소리가 사뭇, 요란하고.   못생긴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하는 법이다. 그러려니 돌팔이 의원이라고 별다른 일이 있을손가 , 생각된 김삿갓이 의원 앞으로 가보니, 의원 집은 별로 크지도 않았는데 , 지붕위를 가로질러 올려놓은 간판은 지붕보다 더 커보였다. 김삿갓은 간판 글자가 잘못된 것을 그냥 보아 넘길수 없었다.   (간판이 잘못된 것도 알려 줄 겸, 오늘 저녁은 저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자 ! ) 김삿갓은 약국문을 열고 주인을 찾았다. 약국 주인은 나이가 60가량 되었을까 , 구렛나루를 허옇고 탐스럽게 기른 것이 풍채가 그럴듯한 사람이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무슨 병으로 왔는고 ?" 그는 김삿갓을 환자로 알고  반가운 어조로 맞았다.   "저는 환자는 아니옵고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과객이 무슨 일로 약국에 들렀는가 ? " "이 댁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기에, 그것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 " "제생당의 "제"자는, 건널 제(濟)자를 써야할 것을, 배꼽 제(臍)자로 잘못 쓰셨기에 그것을 알고 계신가 하여 여쭤봅니다."   약국 주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역시, 김삿갓의 예상대로 간판 글자가 잘못 된것을 주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약국 주인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내가 워낙 눈이 어두워 간판을 친구에게 써달라고 했더니 , 그 친구가 글자를 잘못 쓴 모양이구먼. 그러나 어쨌건간에 "제생당"이라고 읽히기만 하면 될 게 아닌가 ? "   약국 주인은 되지도 않은 억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일장 훈계조의 말을 늘어 놓았다. "무슨 일이나 귀공처럼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네. 그러니 귀공도 오래 살고 싶거든 매사를 둥글둥글하게 보아 넘기게."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려 보였다. 그런 김삿갓의 모습을 본 약국 주인은 아래와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통에 더욱 기가 막혔다.   "귀공은 의원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데는 배꼽처럼 중요한 것이 없네. 어린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도 배꼽줄을 잘라 주어야 살게 되거든 !  어찌 그뿐인가 ? '배꼽에 어루쇠 붙인 것 같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명의는 환자의 배꼽만 보아도 그 사람의 뱃속에 어떤 병이 들었는지 환히 안다는 소릴세.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제생당의 제 자는 건널 제 보다, 배꼽 제를 써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될것 이야! "   상사마(相思馬) 궁둥이 둘러대듯, 능구렁이 같은 약국 주인의 변명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 간판 글자가 잘못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승강이는 이제 그만 접고 ,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제가 몰라서 부질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그렇고 , 날이 저물어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 "  하고 화제를 얼른 바꿔 버렸다.   주인 늙은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 김삿갓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귀공은 학식이 많은 모양이니, 오늘 밤은 쉬어 가시게나. 그 대신 내가 눈이 어두워 읽지 못하는 의서가 있으니, 그 책이나 좀 읽어 주게." 주인 늙은이는 안으로 들인 김삿갓에게 '동의보감' 한 권을 내놓으며 첫장부터 자세히 읽어 달라고 한다. 김삿갓이 생각컨데 , 주인 늙은이는 눈이 어둡다는 것은 핑계이고 , 워낙 까막눈이어서,  의원이라면 통달했어야 할 ,  '동의보감'조차 읽어 본 일이 없었을성 싶었다.   김삿갓이 정좌세로 앉아 동의보감을 읽자, 마주 앉아 이를 듣던 주인 늙은이는 점점 자세가 꼬부라지더니 이내, 비스듬히 다리를 뻣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 옆으로 누워 듣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 한참을 듣다 말고 한마디 하는데,   "자고로 명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명의를 들라치면 중국에는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있고 , 우리나라에는 허준(許俊)과 안찬(安瓚), 양예춘(楊禮春) 정도가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들도 명의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명의가 되었거든, 그러니 명의란 칭호는 치료 과정에서 실수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칭호밖에 안되는 걸세." 자기도 명의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려고 한 말 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주인 늙은이도 어쩐지 사람을 많이 죽였을성 싶었다.   그때 마침,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환자 한 사람이 찾아 왔다. 나이는 사십 가량 되었을까 , 얼굴에 살이 붙어 두 볼이 볼기짝 처럼 생겨 먹은 장년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고 ? " 제생당 주인은 부랴부랴 책상다리로 꼬고  앉으며 , 턱을 들어 새삼스럽게 위엄을 떨쳐 보였다. 그러자 환자는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제가 요새 몸이 몹시 불편 합니다. 선생께 진맥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 어디 , 팔을 내밀어 보게." 제생당 의원은 환자의 팔을 잡아당겨 맥을 짚어 보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맥을 짚어 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꼽을 들여다 보시죠 ! )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는 없었다.   제생당 의원은 진맥을 하고 뒤로 물러앉으며 말했다. "맥으로 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군그래."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  자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  그럼 , 자네는 어떻게 괴로운지 증상을 자세히 말해 보게."   "웬일인지 밥을 먹으면 뱃속이 까닭없이 평소보다 불룩해 오고 ,  잠시후 달걀만한 덩어리가 뱃속, 위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뱃속에서 달걀만한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면서 , 자네를 괴롭힌단 말인가 ? " "네, 그렇습니다. 그놈의 달걀 덩어리가 위로 올라왔을때 , 혹시나 입을 크게 벌리면 나와 줄까 싶어서 입을 크게 벌려 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내 ,아래로 다시 내려가 버려, 사람을 괴롭히니, 아마도 병중에서도 보통 병이 아닌가 봅니다."   "음 ...."   제생당 주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이제야 알았네. 그것은 병이 아니라, 방귀가 탈출구를 찾지 못해 뱃속에서 방황을 하는 현상일쎄. 자네 얼굴이 볼기짝 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귀조차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찾지 못해 ,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이야. 내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을 세 첩 지어 줄테니, 그것을 달여 먹도록 하게. 그러면 방귀가 제 갈길을 알아차려서 , 병이 깨끗히 나을 걸세."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북받쳐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고 배꼽을 움켜잡았다. 얼굴조차 빨개졌고.. 김삿갓은 조위승기탕이라는 약이 어떤 병에 쓰는 약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뱃속에 방귀를 몰아 내는데 약을 쓴다는 말조차 , 들어 본 바가 없었다.   환자가 약 세 첩을 지어 가지고 인사를 하며 돌아가자 , 김삿갓이 제생당 의원에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 한약에는 뱃속에 가득찬 방귀를 몰아내는 약도 있습니까 ? " "있지 ! 있구 말구 ! 조금 전에 환자가 지어 간 약이 바로 그 약이라네." 제생당 의원은 눈썹조차 까딱않고 태연 자약하게 배짱 좋은 대답을 한다.   그러자 김삿갓은 무시당한 것 만 같아서 다시 캐고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어떤 의서에 그런 처방문이 나와 있지요 ? "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별안간 너털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하 ...귀공은 사람이 왜 이다지도 고지식한가. 속이 복깨는 것은 필시 위장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런가 ? 그러니 소화가 잘되는 약을 먹게되면 위장이 좋아져서 자연히 방귀가 절로 나올 것 아닌가 ? " "앗차 !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과연 그렇기는 하군요." 김삿갓은 한 대 단단히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제생당 주인은 훈시라도 하듯이 다시 말을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약국을 하고 있지만 , 사람의 몸이란 신비롭기 짝이 없어서 , 병이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낫게 되어 있는 것이네 ,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조금만 불편하면 부랴부랴 의원을 찾아 오거든 ..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약이란 것이 병자의 마음만 안심시켜줄 뿐이고, 약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일세. 죽을 병에 걸린다면 세상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야, 만고의 명의였던 화타나 편작, 허준 같은 사람도 처방문이 없어서 죽었겠나 ? ..." "어때? ...  귀공은 내 말 뜻을 알아듣겠나?" 김삿갓은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귀공이 내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다니 고맙네. 그렇다고 노상, 의원을 멀리 하라는 말은 아닐세.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지팡이가 필요하듯, 병자에게는 의원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야. 그러니 나 같은 엉터리 의원도 먹고 살아가게 되는게 아닌가 ? 안그래 ? 하하하 ...  ! " 하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선생님 계세요 ? "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30십 중반으로 보이는 가난한 가정 부인이 들어선다. 이번에는 또 어떤 환자일까 하고 김삿갓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병으로 왔는고 ? " 제생당 주인은 여자 환자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쓰고 있었다. 60이라는 나이 탓도 있지만 , 어쩌면 환자에게는 반말을 써야만 권위가 선다고 생각한 탓인지도 모른다. 대소사(大小事)에 긴박한 일을 맞아 굿을 하는 사람이나 , 길흉 화복을 점치는 무당들이나 처사들은 자신의 고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내뱉는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긴박과 곤궁에 처한 고객의  우위에 서서, 자신의 허술한 처방이나 미약하기 이를데 없는 방법의 정당성을 역설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김삿갓은 잘 알고 있었다.   환자는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꺼리는 듯  김삿갓을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말한다. "선생님, 혼자 여쭤 볼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그래 ? 그러면 아랫방으로 내려가세 그려 ! " 주인 영감은 여자 환자를 아랫방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그러나 아랫방이라야 장지문 하나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어서 , 숨소리 조차 송두리째 들려 올 정도였다. 찾아 온 여자 환자가 윗도리를 활짝 벗어 부치고, 의원에게 진찰을 정확히 받아 보려는 것이라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랫방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 보면 그건 것은 아니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그러는고 ? " 의원이 그렇게 묻자, 여인은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 "저는 병이 있어 온 것은 아니옵고 , 실상은 태기가 있어서 ...." "태기가 있어서 왔다고 ? ..." 주인 영감은 약간 실망하는 어조로 여인의 말을 듣고 나서, "남편이 있으면 젊은 나이에 태기가 있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가 ? "   제생당 의원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혹시 남편이 없는데 , 태기가 있어서 걱정이란 말인가 ? "  하며 서슴없이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펄쩍 뛸 듯이 놀라 말을 하는데, "선생님 !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남편도 없이 제가, 어떻게 애가 생기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 ... 그렇다면 내가 안 할 말을 했구먼, 남편이 있고 태기가 있다면 그런 경사가 어디 있는가 ?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약국을 찾아왔단 말인가 ? "   여인은 또다시 한동안 말을 주저하는 듯 싶더니, "실상인즉 저는 이미 아이가 열 이나 있사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열한번째의 태기가 있으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선생님을 찾아 온 것은 그 때문이옵니다." "자식이 열 명이나 되는데 , 그중에 머슴아이는 몇 명이나 되는고 ? " "열 아이 모두가 머슴아이 뿐이옵니다." "저런 ! 저런 ! 이제 알고 보니 , 자식 복을 무던히나 타고 났네그려, 게다가 또 태기가 있다니 이번에도 또 아들이 낳을 것은 분명하지 않겠나 ? "   여인은 딴생각이 있어 찾아온 모양인데 , 제생당 의원은 눈치도 없이 딴전만 부리고 있었다. 여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용기를 낸듯이 말을 하였다. "선생님 ! 없는 살림에 머슴아이가 연년생으로 열 명이나 있으니 , 먹이기는 무엇을 먹이며, 입히기는 무엇을 입히옵니까. 그래서 이번 애기만은 숫제 떼어 버리고 싶어서 , 선생님을 찾아온 것 입니다."   제생당 의원은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어조로 대답한다. "허어, 뱃속에 들어 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  , 애기는 삼신 할머니가 점지해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맘대로 떼어 버린단 말인가. 행여 그런 생각 말고 집에 돌아가 몸 간수나 잘하게." 상사마(相思馬) 궁둥이 둘러대듯, 능구렁이 같은 약국 주인의 변명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 간판 글자가 잘못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승강이는 이제 그만 접고 ,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제가 몰라서 부질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그렇고 , 날이 저물어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 "  하고 화제를 얼른 바꿔 버렸다.   주인 늙은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 김삿갓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귀공은 학식이 많은 모양이니, 오늘 밤은 쉬어 가시게나. 그 대신 내가 눈이 어두워 읽지 못하는 의서가 있으니, 그 책이나 좀 읽어 주게." 주인 늙은이는 안으로 들인 김삿갓에게 '동의보감' 한 권을 내놓으며 첫장부터 자세히 읽어 달라고 한다. 김삿갓이 생각컨데 , 주인 늙은이는 눈이 어둡다는 것은 핑계이고 , 워낙 까막눈이어서,  의원이라면 통달했어야 할 ,  '동의보감'조차 읽어 본 일이 없었을성 싶었다.   김삿갓이 정좌세로 앉아 동의보감을 읽자, 마주 앉아 이를 듣던 주인 늙은이는 점점 자세가 꼬부라지더니 이내, 비스듬히 다리를 뻣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 옆으로 누워 듣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 한참을 듣다 말고 한마디 하는데,   "자고로 명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명의를 들라치면 중국에는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있고 , 우리나라에는 허준(許俊)과 안찬(安瓚), 양예춘(楊禮春) 정도가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들도 명의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명의가 되었거든, 그러니 명의란 칭호는 치료 과정에서 실수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칭호밖에 안되는 걸세." 자기도 명의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려고 한 말 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주인 늙은이도 어쩐지 사람을 많이 죽였을성 싶었다.   그때 마침,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환자 한 사람이 찾아 왔다. 나이는 사십 가량 되었을까 , 얼굴에 살이 붙어 두 볼이 볼기짝 처럼 생겨 먹은 장년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고 ? " 제생당 주인은 부랴부랴 책상다리로 꼬고  앉으며 , 턱을 들어 새삼스럽게 위엄을 떨쳐 보였다. 그러자 환자는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제가 요새 몸이 몹시 불편 합니다. 선생께 진맥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 어디 , 팔을 내밀어 보게." 제생당 의원은 환자의 팔을 잡아당겨 맥을 짚어 보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맥을 짚어 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꼽을 들여다 보시죠 ! )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는 없었다.   제생당 의원은 진맥을 하고 뒤로 물러앉으며 말했다. "맥으로 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군그래."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  자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  그럼 , 자네는 어떻게 괴로운지 증상을 자세히 말해 보게."   "웬일인지 밥을 먹으면 뱃속이 까닭없이 평소보다 불룩해 오고 ,  잠시후 달걀만한 덩어리가 뱃속, 위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뱃속에서 달걀만한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면서 , 자네를 괴롭힌단 말인가 ? " "네, 그렇습니다. 그놈의 달걀 덩어리가 위로 올라왔을때 , 혹시나 입을 크게 벌리면 나와 줄까 싶어서 입을 크게 벌려 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내 ,아래로 다시 내려가 버려, 사람을 괴롭히니, 아마도 병중에서도 보통 병이 아닌가 봅니다."   "음 ...."   제생당 주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이제야 알았네. 그것은 병이 아니라, 방귀가 탈출구를 찾지 못해 뱃속에서 방황을 하는 현상일쎄. 자네 얼굴이 볼기짝 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귀조차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찾지 못해 ,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이야. 내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을 세 첩 지어 줄테니, 그것을 달여 먹도록 하게. 그러면 방귀가 제 갈길을 알아차려서 , 병이 깨끗히 나을 걸세."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북받쳐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고 배꼽을 움켜잡았다. 얼굴조차 빨개졌고.. 김삿갓은 조위승기탕이라는 약이 어떤 병에 쓰는 약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뱃속에 방귀를 몰아 내는데 약을 쓴다는 말조차 , 들어 본 바가 없었다.   환자가 약 세 첩을 지어 가지고 인사를 하며 돌아가자 , 김삿갓이 제생당 의원에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 한약에는 뱃속에 가득찬 방귀를 몰아내는 약도 있습니까 ? " "있지 ! 있구 말구 ! 조금 전에 환자가 지어 간 약이 바로 그 약이라네." 제생당 의원은 눈썹조차 까딱않고 태연 자약하게 배짱 좋은 대답을 한다.   그러자 김삿갓은 무시당한 것 만 같아서 다시 캐고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어떤 의서에 그런 처방문이 나와 있지요 ? "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별안간 너털 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하 ...귀공은 사람이 왜 이다지도 고지식한가. 속이 복깨는 것은 필시 위장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런가 ? 그러니 소화가 잘되는 약을 먹게되면 위장이 좋아져서 자연히 방귀가 절로 나올 것 아닌가 ? " "앗차 !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과연 그렇기는 하군요." 김삿갓은 한 대 단단히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제생당 주인은 훈시라도 하듯이 다시 말을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약국을 하고 있지만 , 사람의 몸이란 신비롭기 짝이 없어서 , 병이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낫게 되어 있는 것이네 ,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조금만 불편하면 부랴부랴 의원을 찾아 오거든 ..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약이란 것이 병자의 마음만 안심시켜줄 뿐이고, 약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일세. 죽을 병에 걸린다면 세상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야, 만고의 명의였던 화타나 편작, 허준 같은 사람도 처방문이 없어서 죽었겠나 ? ..." "어때? ...  귀공은 내 말 뜻을 알아듣겠나?" 김삿갓은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귀공이 내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다니 고맙네. 그렇다고 노상, 의원을 멀리 하라는 말은 아닐세.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지팡이가 필요하듯, 병자에게는 의원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야. 그러니 나 같은 엉터리 의원도 먹고 살아가게 되는게 아닌가 ? 안그래 ? 하하하 ...  ! " 하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선생님 계세요 ? "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30십 중반으로 보이는 가난한 가정 부인이 들어선다. 이번에는 또 어떤 환자일까 하고 김삿갓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병으로 왔는고 ? " 제생당 주인은 여자 환자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쓰고 있었다. 60이라는 나이 탓도 있지만 , 어쩌면 환자에게는 반말을 써야만 권위가 선다고 생각한 탓인지도 모른다. 대소사(大小事)에 긴박한 일을 맞아 굿을 하는 사람이나 , 길흉 화복을 점치는 무당들이나 처사들은 자신의 고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내뱉는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긴박과 곤궁에 처한 고객의  우위에 서서, 자신의 허술한 처방이나 미약하기 이를데 없는 방법의 정당성을 역설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김삿갓은 잘 알고 있었다.   환자는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꺼리는 듯  김삿갓을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말한다. "선생님, 혼자 여쭤 볼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그래 ? 그러면 아랫방으로 내려가세 그려 ! " 주인 영감은 여자 환자를 아랫방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그러나 아랫방이라야 장지문 하나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어서 , 숨소리 조차 송두리째 들려 올 정도였다. 찾아 온 여자 환자가 윗도리를 활짝 벗어 부치고, 의원에게 진찰을 정확히 받아 보려는 것이라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랫방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 보면 그건 것은 아니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그러는고 ? " 의원이 그렇게 묻자, 여인은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 "저는 병이 있어 온 것은 아니옵고 , 실상은 태기가 있어서 ...." "태기가 있어서 왔다고 ? ..." 주인 영감은 약간 실망하는 어조로 여인의 말을 듣고 나서, "남편이 있으면 젊은 나이에 태기가 있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가 ? "   제생당 의원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혹시 남편이 없는데 , 태기가 있어서 걱정이란 말인가 ? "  하며 서슴없이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펄쩍 뛸 듯이 놀라 말을 하는데, "선생님 !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남편도 없이 제가, 어떻게 애가 생기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 ... 그렇다면 내가 안 할 말을 했구먼, 남편이 있고 태기가 있다면 그런 경사가 어디 있는가 ?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약국을 찾아왔단 말인가 ? "   여인은 또다시 한동안 말을 주저하는 듯 싶더니, "실상인즉 저는 이미 아이가 열 이나 있사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열한번째의 태기가 있으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선생님을 찾아 온 것은 그 때문이옵니다." "자식이 열 명이나 되는데 , 그중에 머슴아이는 몇 명이나 되는고 ? " "열 아이 모두가 머슴아이 뿐이옵니다." "저런 ! 저런 ! 이제 알고 보니 , 자식 복을 무던히나 타고 났네그려, 게다가 또 태기가 있다니 이번에도 또 아들이 낳을 것은 분명하지 않겠나 ? "   여인은 딴생각이 있어 찾아온 모양인데 , 제생당 의원은 눈치도 없이 딴전만 부리고 있었다. 여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용기를 낸듯이 말을 하였다. "선생님 ! 없는 살림에 머슴아이가 연년생으로 열 명이나 있으니 , 먹이기는 무엇을 먹이며, 입히기는 무엇을 입히옵니까. 그래서 이번 애기만은 숫제 떼어 버리고 싶어서 , 선생님을 찾아온 것 입니다."   제생당 의원은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어조로 대답한다. "허어, 뱃속에 들어 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  , 애기는 삼신 할머니가 점지해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맘대로 떼어 버린단 말인가. 행여 그런 생각 말고 집에 돌아가 몸 간수나 잘하게." "아니옵니다. 이번 아이만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떼어 버려야 합니다. 지금도 굶다시피 살아가고 있는데, 게다가 또 하나 낳게되면 무엇을 먹이옵니까? "   "모르는 소리 그만하게.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에는 제가 먹을 것은 모두 타가지고 나오는 법이야, 그런 것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네." "어르신네들은 흔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어떡합니까. 다섯 아이가 있을 때와 열 아이가 있을 때와는 먹고 살아 가기가 하늘과 땅처럼 다르옵니다. 제 몫을 타고 나온다는 어른들 말씀을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저의 집 식구들을 살려 주시는 셈치고, 이번 아이만은 꼭 떼어 버리게 해주시옵소서. 선생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사옵니다."   살림살이가 어지간히 궁색했던지 , 여인의 부탁은 간곡하기 이를데 없었다. "허어 ... 이런 변고가 있나. 이 사람아, 약국이라는 데는 애기를 못 낳는 여인에게 약을 써서 애기가 생기게 하는 곳이지, 뱃속에 들어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는 곳은 아닐쎄. 그런 것도 모르는가 ? " "제가 그런 것을 왜 모르겠사옵니까. 그러나 저의 집 사정은  남 다르오니 뱃속의 아이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있는 아이들 만은 살려 내야 하겠습니다. 그런줄 아시고 제발 부탁합니다."   여인이 하도 간청을 하니까, 의원 영감도 어지간히 딱했던 모양이다. "어허, 그것 참 ! 세상에 이런 학질이 있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온식구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선생님께서 저의 집 식구들을 꼭 좀 살려 주십시오."   제생당 의원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문득 어떤 결심을 했는지, "이번 애기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떼어 버리고 싶단 말이지 ? " 하고 단호하게 따져 묻는다. 제생당 주인이 이렇게 단호하게 따지듯이 묻는 말투로 보아서는 , 임신부가 그렇게 소원한다면 뱃속의 아기를 낙태시켜 줄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 왔다. 왜냐하면 뱃속의 애기를 섣불리 낙태 시키다가는 모태조차 희생되기 쉽기 때문이었다. (돌팔이 의원인 저 늙은이가, 어쩌자고 무모한 짓을 하려 하는가 ! ) 김삿갓은 제생당 늙은이가 괘씸하게 여겨지기 까지 하였다.   "선생님, 꼭 좀 부탁합니다!  이번 애기만은 꼭 좀 없애 주십시오." 임신부의 태도는 시종 일관 확고부동 하였다. "잘 알았네 . 소원이 그렇다면 자네 소원대로 해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선생님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임신부는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이는 모양이더니 , 이번에는 약 값 걱정을 한다. "약은 몇 첩이나 쓰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약 값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 " 하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대해 제생당 의원은 태연 자약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먹을 것도 없다면서 약 값이 무슨 약 값인가 !  약을 먹지 않고도 애기를 떼어 내는 방도가 있으니, 그 방법을 쓰기로 하세."   그 말을 듣는 순간 , 김삿갓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약을 쓰지 않고도 뱃속의 아이를 어떻게 떼어낸 단 말인가 ?  혹시, 저 엉터리 의원이 몽둥이로 임신부의 배를 두두려 패기라도 할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조차  가득 들어차며,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다음 대화에 귀날이 쫑긋해졌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2)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 밤 "하편" 여인은, "약을 먹지 않고도 뱃속에 애기를 떼어 버릴 방도가 있기는 있사옵니까 ? " 하고 다시  물어 본다.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자신 만만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약을 쓰지 않고도 애기를 떼어 버릴 비방이 있지 ! 그런 비방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를 걸세." "선생님 ! 그렇다면 저한테만은 그 비방을 꼭 좀 알려주시옵소서." "자네는 약 값을 낼 형편도 못 된다니까 , 싫든 좋든 간에 그 방법을 쓸수 밖에 없지 않은가."   김삿갓도 그 비방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어 ,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만약 제생당 의원이 남이 모르고 있는 그런 비방을 알고 있다면 , 그야말로  이곳 제생당 의원이야 말로 , 천하의 명의임이 틀림없다고 생각 되었던 것이다.   제생당 의원이 임신부에게 다시 말한다. "그러면 자네한테만 특별히 그 비방을 쓰기로 하겠네. 지금 자네는 임신한 지 몇 달째 되는가 ? " 임신부가 대답하는데, "석 달전에 경도가 있고 나서 그쳤으니, 달 수로 치면 석 달째 되는 셈이옵니다." "석 달이라 ... 그러면 묻겠는데 , 요즘 소변은 하루에 몇 번이나 보는가 ? " "임신을 한 탓인지 소변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럴테지. 소변을 자주 본다고 했는데, 하루에 몇 번이나 보는가 ? " "일일이 헤아려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하루에 열 번 정도는 되지 않는가 싶사옵니다." "그럼 됬네. 약을 쓰지 않고도 애기를 간단히 떼어 버릴수 있는 비결을 말해 줄테니 , 꼭 그대로하게."   "선생님 ! 그런 좋은 방법이 정말 있사옵니까 ? " "있구 말구 ! 아주 간단한 방법이네. 오늘부터 열흘 동안 소변을 일체 누지 말도록 하게. 그러면 뱃속의 아기가 아직 헤엄을 칠 줄 모를 테니까, 물에 빠져서 절로 죽어 나오게 될 걸세."   옆방에서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옅듣고 있던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 소리를 내지않고 데굴데굴 굴렀다.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 김삿갓은 설마하니 , 제생당 늙은이가 그와같은  엉터리 비방을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러나 임신부는 자신에게는 그 말이 엉터리로 들리지 않았던지 , "선생님 ! 소변을 참는 데도 한도가 있지, 어떻게 열흘 씩이나 , 참고 견디옵니까 ?" 하며 심각한 어조로 반문한다. "제생당 의원의 대답은 또 한번 걸작이었다.   "열흘을 못 참겠거든 닷새 동안 만이라도 참아 보게나. 뱃속의 애기가 아직 활동력이 미약해 , 닷새 동안만  오줌을 참아도 효력이 나타날지 모르네."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만해 보이는 대답이었다.   "소변을 닷새 동안만 참아내면 애기가 정말 떨어지게 됩니까 ? " "물론이지 . 늙은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내 말을 철썩같이 믿고 어서 집에 돌아가 그렇게 해보게." 제생당 의원은 이렇게 뱃속에 아이를 떼는 방법을 설명하고 임신부를 밀어내다시피 쫒아냈다.   그리고 옆방으로 옮겨 오더니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음 ... 내가 오늘은 진땀 뺐는걸." 김삿갓은 제생당 노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자 ,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   "이 사람아 ! 웃기는 왜 웃는가 ?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가 ? " "선생 ! 오줌을 닷새간 참고 견디면 뱃속의 아기가 절로 떨어져 나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 " 김삿갓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제생당 의원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태연스러웠다.   "자네는 내가 환자에게 들려준 말을 죄다 들은 모양일세그려 ? " "그렇습니다. 사람이 과연 오줌을 닷새 동안이나 참고 견딜수 있을까요 ? " 김삿갓은 이 돌팔이 의원을 단단히 혼내 주려고 엄숙한 표정으로 따지고 물었다.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김삿갓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 혀를 차며 말을 하는데,   "자네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내가 자네에게 먼저 하나 물어보세. 자네는 사람이 닷새 동안이나 오줌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없다고 생각 하는가 ? " 순간 , 김삿갓은 허(虛)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기로 , 닷새 동안이나 오줌을 참을 수는 없겠지요." 제생당 노인은 그 대답을 듣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잘 알고 있구만그래. 그 처럼 잘 알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물어 보는가 ? " 김삿갓은 농락을 당하는 것만 같아 , 울화가 "욱" 하고 치밀었다.   "선생은 조금 전에 찾아왔던 여인에게 오줌을 닷새 동안만 참으면 애기가 절로 떨어져 나올 테니, 닷새 동안만 참아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환자에게 불가능한 처방을 알려준다는 것은 혹세 무민 (惑世誣民)이 아닙니까 ? " 김삿갓은 홧김에 혹세 무민이라는 말까지 들고 나왔다.   "혹세 무민 ? 하하하." 제생당 노인은 별안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자네는 알만한 사람이 왜 그런 어리석은 소리만 하는가 ? 나는 의원의 본분으로서 뱃속의 생명을 죽게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자꾸만 낙태를 시켜 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대지않던가 ? 그래 , 할수 없이 결코 가능하지 않은 단서를 달아, 뱃속의 생명도 살리고 무식한 여인도 쫒아 보내기 위해  그럴듯한 허툰수작을 부린것 뿐인데 , 그런 내막도 모르고 나더러 혹세 무민을 저지르고 있다고 ? 이사람이  보기보단 어리숙한 사람이네 !  하하하."   그 말을 듣는 순간 , 김삿갓은 "아차 ! " 싶었다. 제생당 의원은 여인을 쫒아 버리기 위해 지금까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왔는데 ,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자신이 핏대를 올려가며 나선 일이 무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선생님 .. 말씀을 듣고 보니 ,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제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그렇다고 사과 까지 할 건 없네. 많은 환자들을 만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거든, 멀쩡한 건강체이면서도 아프다고 꾀병을 하는 사람도 있고, (건강염려증 = 꾀병) 아픈 곳도 많은데,  돈과 가족을 걱정 하느라고 ,   아프지 않는척 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의원이란 사람은 병자의 병을 고쳐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 병자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서 ,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임기 웅변으로 다뤄 나가야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해 !   그래서 , 조금전 처럼 환자를  잘 다루는 일도  의술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김삿갓은 돌팔이 의원인 줄만 알았던 제생당 노인의 입에서 그와 같은 명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의자 의야 "(醫者意也) 라는 말이 있다. 의술은 환자에 따라 방문(方文)을 달리 하는 오묘한 이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보면 제생당 의원이야말로  진정한 명의가 아니던가 ? 이렇게 생각이 된 김삿갓, 고개를 수그려 제생당 노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 * 우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전국민 의료보험 체계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도 1988년을 깃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위의 두 제도를 시행하며 여러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   제도의 보완과 손질을 맡은 정부가 지속적으로 노력을 한다면 ,   병들어 아파도 병원에 쉽게 못 가는 일과,   최악의 생활고를 겪는 국민이 줄어들 것 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 했습니다.   병들어 아플 때를 대비하여 별도의 의료보장 보험도   들어 놓으시고,   생활비를 벌어들일 일이 끊길 때를 대비하여    생존자금을 저축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고 주변에 위험요소가 없는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3) 고향 가는 길 .. "오애청산 도수래" (吾愛靑山 倒水來) 신계에서 곡산까지는 높고 가파른 산길로  백여리를  가야 한다. 김삿갓이 어린 시절을 보낸 천동 마을은 곡산 읍내에서도 다시, 산속으로 60여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첩첩 산중, 감둔산 (甘屯山)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곡산으로 가는 길 조차, 산이 높고 길이 험해,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천동 마을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  지루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김삿갓은 눈 앞에 펼쳐지는 산천을 정답게 바라보며 걸어가다가 문득 구양수의 시를 떠 올렸다.        ...   산빛은 멀고 가까움에 다름이 없어 하루 종일 산만 보며 걸어 가노라 보이는 봉우리 모양은 제각기 다르고 그 이름조차 나그네는 알 길 없어라.      ...   고향이 가까워져가자 , 김삿갓은 험한 산길을 걸어가면서 , 30여 년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 철부지시절 ,  해 지는줄 모르고 즐겁게 뛰놀며 장난을 치던 불알 친구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 천방 지축으로 까불대던 , 까불이는 지금은 철이 들었겠지.. 머리통이 유난히 컷던 대갈장군은 아직도 천동 마을에 그대로 살고 있을까 ? 또,합죽이, 막동이와 땡굴이,  땅꼬마는 지금은 애 아버지가 되어 있겠지.. 옥수수 처럼 얼굴이 길쭉해서 불렸던 옥쇄기는 지금 보게 되더라도 금방 알아 볼 것 같고 , 조조와 참새, 제제는? 계집애들 꽁무니를 아직도 쫒아 다니고 있을까 ? .. 예쁘장 했던 곱단이는 애 엄마가 되어 있겠지, 얼굴이 넙적해서 세숫대야로 불리던 계집애는 애는 몇이나 낳고 살고 있는지 ? 말을 할때 마다 고개를 살랑살랑 젖던 , 부채는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겠지 ..) 본명은 잊어버렸지만 아명(兒名)만으로도 그들의 얼굴과 뛰놀던 모습이 눈 앞에 떠올라서 , 김삿갓은 흐뭇하기 그지없는 고향가는 길이었다. 산길은 가도가도 끝이없이 이어졌다. 곡산이 심심 산골임을 모르는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찾아와 보니 너무도 깊은 산골이었다.   김삿갓은 깊은 산속을 마냥 걸어가며, 문득 영월에 계실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철없는 자식들을 죽음에서 구해 내려고 첩첩 산중으로 둘려싸인 곡산으로 도망을 오셨던 것이 아니었던가. (철없는 우리 형제를 곡산까지 데리고 오시느라고, 어머니는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그 일을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 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를 회상해 본들 무슨 소용이랴.) 김삿갓은 오늘날 어머니 슬하를 떠나 , 방랑길을  떠도는것 조차도,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업보이고 숙명이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산속으로 깊이 들어 갈수록 주위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간간히 새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적막감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한없이 걸어가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이제는 잠자리를 구해야 할 판이건만 , 도대체 인가는 어느 곳 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를 더 가다 보니, 저 멀리 나무 그늘에  말 한 마리가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말이 있다는 것은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이기에 , 김삿갓은 안심하고 다가갔다. 김삿갓이 가까이 다가가자 누워 있던 말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몸을 부르르 떨면서 먼지를 털어 낸다.   찬찬히 살펴 보니 어지간히 늙어빠진 말이었다. 그래도 산중에서 사람들과 가까이 생활하는 말을 보니 정다운 마음이 앞섰다. 그리하여 가까이 다가가 말의 콧등을 두두려 주니, 말은 사람의 정을 알아보았는지 , 발굽질을 하며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김삿갓은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 말의 등허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늙은 말 (老馬) 이라는 옛 시가 한 수 기억 났다.               ...   늙은 말이 소나무 그늘에 누워 있네 천 리를 달리던 옛 꿈을 꾸고 있는가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 바람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석양이 저물고 있네.   老馬枕松根   (노마침송근) 夢行千里路   (몽행천리로) 秋風落葉聲   (추풍낙엽성) 驚起斜陽暮   (경기사양모)    ...   이렇게 말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삿갓, 산 머리에 초승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도 말 주인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깊은 산중에서 갑갑했던 김삿갓은 시 한수를 읊어댓다.   ..   오두막집 저녁 연기는 사라지고 해는 저물어 새는 깃으로 돌아가네 나무꾼은 하늘에 걸린 초승달을 바라보고 어디쯤 에서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겠지.    ..   바로 그때,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나무꾼이 나무를 짊어지고 말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나무꾼에게 말을 걸었다. "늦게까지 수고가 많으시오." 나무꾼은 김삿갓을 보자, 적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산중에 웬 사람이오? "   "나는 지나가던 과객이오. 천동 마을에 가다가 길이 저물었는데 , 어디서 하룻밤쯤 자고 갈 데가 없을까요 ? " "천동 마을 ? 천동 마을이라면 옛날, 나의 외갓집이 있었는데, 그런 깊은 산골에는 뭣하러 가시오 ? " 나무꾼은 김삿갓에게 천동 마을과 자신의 연관을 말하면서 경계심을 감춘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천동 마을에서 자랐지요. 그래서 지금 천동 마을을 찾아 가다가 날이 저물었군요." "그래요 ?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고향이 그리운 것이지요." "외가는 아직 천동 마을에 계신가요 ? " "웬걸요. 외조부님 돌아가신후 외가 식구들은 모두, 해주(海州)로 살림을 옮겨버려서 지금은 아무도 없다오."   "그러시군요." "그나 저나 반갑소이다. 나의 옛날 외가집 마을이 고향이라니 .. 그리고 이 산골에는 인가라고는 우리 집 밖에 없어요. 날도 많이 저물어서 길을 갈수도 없을 것이니 우리 집으로 내려 갑시다."   인심이 순박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무꾼은 무거운 지게를 짊어진채로 말은 맨몸으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 하는데 , 김삿갓이 옆에서 보기에는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짐을 말에게 실을 일이지, 무슨 고생을 못해 직접 짊어지고 내려가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를 변 서방이라고 말을 한 나무꾼은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 집 말은 너무 늙어서 나는 부려먹을 수가 없다오." 김삿갓은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 하였다. "아니 , 부려먹을 수가 없도록 늙어 버린 말이라면 아예 팔아 버리거나 없앨 일이지 , 무엇 때문에 고생스럽게 키운단 말이오 ? " "그건 노형 생각이지, 나는 그럴 수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단 말이오 ? "   "말이 동물이기는 하지만 ,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의리라는 것이 있어요. 저 말로 이를것 같으면 할아버지 때 부터 함께 살아오고 있는 우리 집 식구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많아 밭도 갈지 못하고 짐도 나르지 못하게 되었지만 우리 집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 말에게 은혜를 너무도 많이 져왔다오." "말에게 은혜를 졌다구요 ? " "물론이지요. 이 말이 어린시절 부터 젊었던 때 까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아주 잘 도와 주어서 오늘날까지, 우리 집이 생활을 할수 있게 해줬지요.  이렇게 저 말로 하여금 조상때 부터   오랫동안 은혜를 입어왔으니, 이제는 그 은혜를 나라도 갚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도록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아울러 말 못하는 미물인 동물과 인간의 교감과 신뢰가 어떻게 대를 이어 전해질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한참만에 산을 내려오니 , 변서방네 집은 절간처럼 조용하였다. 변서방은 나무짐을 내려놓고 , 말을 외양간에 들여매며 말한다. "공교롭게도 마누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고 없어서 , 오늘 밤은 나 혼자예요. 말에게 먹이를 주고 저녁을 지어 올 테니, 방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구려." 변서방은 김삿갓을 방으로 안내하고 등잔불을 켜주었다.   살림 살이라고 방 한복판에 화로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는데 그나마도 마누라가 없는 탓인지, 화로는 불이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한참만에 변서방은 삶은 감자 한 소쿠리와, 네 다리 소반 위에 죽그릇을 놓아 가지고 들어왔다. "많이 시장하셨지요? " "괜찮습니다. 말에게도 먹이를 주셨나요? " "그럼요, 말도 우리 집 식구인데 말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나만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변서방이 들고 온 소반 위에는 죽이 한 그릇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   "아니, 사람은 둘인데, 죽은 왜 한 그릇만 가져 오셨소 ? " 변서방은 계면스런 웃음을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한다. "나는 평소에도 감자만 먹고 살아요. 그러나 손님에게는 감자만 대접하기가 미안스러워 , 오늘은 쌀독 밑바닥을 긁어 가지고 죽을 한 그릇 쑤워 왔지요. 그런데 쌀이 몇 알밖에 없어서, 죽이란것 조차도 맹물에 조갯돌 삶은것 처럼 되어 버렸군요. 그러니 죽을 자시고 나서 감자를 더 잡수세요." 김삿갓은 주인 양반의 성의가 너무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오가다 만난 사람에게 이처럼 따듯한 정성을 베풀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 것인가. 아닌게 아니라 죽그릇을 들여다 보니, 죽이란 것이 정말로 맹물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인 양반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럼 , 미안하게도 죽을 혼자만 먹겠소이다."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죽그릇을 아무리 휘저어 보아도 , 쌀알이라고는 몇 알갱이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을 자시고 나거든 감자를 더 드세요."  변서방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인다. "고맙습니다. 죽을 다 먹고 나거든 감자를 더 먹지요." 김삿갓이 죽을 몇 숟갈 떠먹다 보니 , 죽은 맑은 물과 같아서, 죽그릇 속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이었다. ("허어, 정성은 고맙지만 기가 막히는군" ...) 김삿갓은 변서방이 쑤워 온  죽을  한숟갈  한숟갈 떠 먹으면서 .. 다음과 같은 운치 있는 즉흥시를 한 수 읊었다.     ...   사각송반 죽일기 (四脚松盤 粥一器) 천광운영 공배회 (天光雲影 共徘徊) 주인막도 무안색 (主人莫道 無顔色) 오애청산 도수래 (吾愛靑山 倒水來) 네다리 소반에는 죽 한그릇 뿐인데 하늘과 구름이 같이 비치는구나 주인은 무안해서 어쩔줄 몰라 하는데 염려 마시오 나는 본래 물에 비친 산을 사랑 한다오. 계속...  * 옮긴이 주 요즘은 볼 수 없지만 ..깐종이 어렸을 때, 논바닥  가운데에 무덤같은 조그만 흙더미가 종종 있었습니다. 당시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총(馬塚) 또는 소 무덤(牛塚)이라고 하셨는데, 농사를 짓다 쓰러진 말과 소를, 사람이 죽었을때 처럼 예(禮)를 다하여 쓰러진 그 자리에 묻은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본디, 소와 말은  죽여 가지고 사람들이 고기(肉)로 쓰는 동물인데 ,  당시에 사람들이 이런 말과 소를 위해 무덤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그것은, 소와 말이 비록 동물이지만, 사람들에게  베푼, 은혜를 갚고 싶은 착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   요즘..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예전보다 훨씬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인생역전의 기회를 잡은듯, 국방 장관과 교육부 장관, 그리고 노동부 장관이  되려고, "내로남불"로 ..기를 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삼가, 말총과  소 무덤을  만든 당시의 어른들께 , 존경과 감사의 예(禮)를 드립니다. 방랑시인 김삿갓 (74) 드디어 도착한 천동마을. "상편"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아침을 얻어먹기 미안해서 변서방의 집을 일찍 나섰다. 밤사이 첫 눈이 내려 발을 뗄 때 마다 뽀드득 소리가 연이어 났다. (오늘은 드디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리워했던 천동 마을에 가게 되었구나! )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 김삿갓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흥분이 일었다. 그러다보니 눈으로 얼어버린 길도, 제법 쌀쌀해진 산 속의 추위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까맣게 잊어 가던 기억속의 희미한, 눈에 익은 산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장난꾸러기 친구들과 어울려 50 리가 넘는 곡산 장거리에 몇 차례 다녀 본 길이 아니던가. 이렇게, 눈에 덮힌  험한 산굽이를 돌아 갈 때 마다 옛날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김삿갓이 산길을 정신없이 한참 걷다보니, 문득 눈앞에 장승 한 쌍이 우뚝 마주 보였다. 얼굴과 몸뚱이가 시뻘건 천하 대장군과 , 얼굴과 몸뚱이가 새파랗게 색칠된 지하 여장군이었다. (아! 장승이  아직도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구나! )   김삿갓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장승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하도 기뻐,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 배례를 하였다. "장승님들! 안녕하시오. 옛날 친구였던 밤나무집 둘째가 천동 마을을 다시 찾아 왔소이다."   장승! 우리네 조상들은 통일 신라때 부터  고려조와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절에 가는 길목이나 촌락 어귀에 사람들의 우상인 장승을 세워 놓았다. 장승은 시대를 통 틀어서 사찰과 마을의 경계를 가르는 이정표 역활을 해왔고, 동구 앞에 세워 놓은 장승은 모든 악귀와 질병의 침입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때로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천하대장군의 코를 베어다 달여 먹기도 하였고, 남몰래 찾아와  간절한 소망을 빌기도 하는 우상인 것이다.   장승 앞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며 합장 배례를 하고 있노라니, 마침 저 만치서 사십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지게위에 봇짐을 하나 얹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승 앞에 서 있던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김삿갓은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들고 다가오는 사내에게 목례를 해보이며 물었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이 동구 안이 천동 마을이 틀림없습니까? " 그러자 사내는 김삿갓의 얼굴이 눈에 익은지, 대답은 안 하고 빤히 쳐다만 보았다. 김삿갓도 사내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보아 온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의 얼굴을  잠시 말끄러미 마주보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김삿갓은 별안간 사내의 두 손을 와락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여보게! 자네는 조조라고 부르던 친구 아닌가!   나는 밤나무집 둘째일세, 자네 나를 모르겠나?" 사내는 그제야 생각이 나는지, 김삿갓의 두 손을 힘차게 흔들며 큰소리로 외친다. "맞다 맞다! 자네는 밤나무집 둘째가 틀림없으렸다? 이게 얼마만인가! 그동안 어디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오는가? "   만나는 첫 순간부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그들이었다. 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도 죽마고우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삿갓은 조조와 함께 마을로 들어오며,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소식을 하나하나 물어 보았다. 그중에는 이미 죽은 친구도 둘 씩 이나 있었지만 대부분 천동 마을에 그냥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자네는 지금 아이를 몇이나 두었는가? " "나는 할 일이 없어서 아이만 만들었네 , 머슴아와 계집아이를 모두 합해 자그마치 일곱이나 두었다네." "이 친구 , 어릴 때도 계집 아이 꽁무니를 어지간히 쫒아 다니더니, 결국은 자식 복이 넉넉하군그래, 아이를 일곱이나 만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는걸, 하하하." "이 사람아 ! 만들고 싶어 만든 것은 아닐세. 여편네 궁둥이를 두드려 주다보니 ,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야, 하하하 ...  자네는 아이가 몇이나 되는가? "   "나? ... 나는 오나가나 내 몸 하나뿐인걸. 마누라도 없고, 자식도 없는 외톨박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놓고 떠돌아다니는 덕분에, 자네를  만나게 된 것 아니겠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길어질 것 같아 , 김삿갓은 적당히 거짓말을 꾸며 대었다.   "그래? ... 자네는 어렸을 때 글 읽기를  좋아했기에, 지금쯤은 커다란 감투라도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 "글쎄, 운이 닿지 않아서인지, 팔자 소관인지? 여간, 내게는 등용문(登龍門)이 열리지 않는구먼." 김삿갓은 이것조차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윽고 30년 만에 천동 마을로 들어서는 김삿갓은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 옛날 고작해야 열 채가 될까 말까 하던 집은, 지금은 얼핏 보아도 20채가 넘어 보였다.   "그동안 집이 많이 늘었네그려." "그래 ... 자네가 살때 보다는 많이 늘었지?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디 묵을 작정인가? " 김삿갓의 잠자리를 걱정하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어렸을 때 자라던 고향 산천이 그리워 천동 마을을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천동 마을에 일가붙이가 있는것도 아니고, 각별히 기댈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대답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글쎄 ... 나는 어차피 떠돌이 신세니까 , 잠이야 아무데서나 자면 어떤가." 조조는 김삿갓의 말을 듣고 나서 대뜸 이렇게 말을 한다. "그래? 그러면 밥은 우리 집에서 먹기로 하고 잠은 모임방에서 자면 되겠네." "모임방이라니? ... 이 마을에는 그런 것도 있는가 ? " "그래 ! 동네 사람들이 저녁마다 모여서 미투리도 삼고, 새끼도 꼬는 공동 사랑방이 하나 있지, 거기에 가면 옛 친구들을 많이 만날수 있을게야."   "그거 참 잘됐네 그려. 나는 옛날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어 왔거든! " "자네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나. 그럼, 오늘 밤에는 마을 사람들을 모임방에 오도록, 우리 집 아이를 시켜 사발통문을 돌려놓겠네." 조조의 우정이 눈물겹도록 지극 하였다.   이윽고 조조네 집에 당도해 보니, 그의 집은 옛날과 다름없이 초라하였다. "자네 집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 일쎄, 이제는 아이들이 많아서 집도 늘려야 하겠구먼." "허긴 그래, 아이가 하나 씩 생길 때마다 늘려야지 늘려야지 하면서 그게 ,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먼." "여보 마누라! 이리 와서 인사드려요. 이 친구가 옛날에 나에게 "조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던 "밤나무집 둘째"라는 친구야." 조조가 자기 마누라를 불러 내 김삿갓에게 인사를 시킨다.   "애기 아버지한테서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애기 아버지에게 조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가, 시아버님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셨다구요? 호호호 ."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 불현듯 조조의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참, 자네 어르신께 인사를 올려야지, 어르신 어디 계신가 ?" 그러자 조조는 얼굴빛이 별안간 숙연해지며, "아버지는 이미,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자네가 찾아 온 것은 30년 만이 아닌가." "뭐야? 어르신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구? .. 그래 ,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왔구먼 ...." 김삿갓은 일순,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김삿갓이 저녁밥을 먹은 뒤, 조조와 함께 모임방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이미 2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급히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받고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김삿갓을 모임방 가운데 내세워 놓고 말한다. "여보게들 ! 자네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나?   이 사람은 지금부터 삼십 년 전에 우리들의 불알 친구였던 밤나무집 둘째라네! "   하고 소개하자,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알겠네. 내가 땡굴인데, 내 얼굴을 알아보겠나?" "그럼 그럼! 저기 앉아 있는 친구는 대갈장군과 옥쇄기가 아닌가? " 김삿갓이, 생긴 모습이 남 달라 한 눈에 띄는 대갈장군과 옥쇄기를 가리키자, 좌중에는 "와 하" 웃음꽃이 피었다.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소개하며 김삿갓과 제각기 손을 움켜 잡으며 알아보는 통에, 김삿갓은 눈물겨운 감격을 느끼면서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개중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나는 초면이기는 하오만, 노형의 말씀을 많이 들었소. 또래 친구들에게 조조니, 참새니 하는 엉뚱한 별명을 지어 주었다가, 어른들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 " 하고 말하는 바람에, 좌중에는 일시에 폭소가 터지기도 하였다.   김삿갓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이렇게 자기를 기억하고 열열이 환영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하여 자리에 앉으며,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오늘처럼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  보기는 처음일쎄 , 우리들 모두가 죽지 않고 다시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 인지 모르겠네. 우리네 인간살이에서 우정보다 더 소중한 것이 뭐가 있겠나. 나는 자네들과의 기쁜 재회를 함께 나누고 싶어 술이라도 한잔 사기로 하겠네! " 그러면서 개풍군수 강영창이 몰래 넣어 주었던  전별금(錢別金)중 그동안 쓰고 남은 스무 냥을 송두리째 내놓았다.   그러자 제제가 성큼 앞으로 나앉으며, 김삿갓을 호되게 꾸짖는다. "야, 임마! 너 정신이 돌았냐? 내일 부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너는 고향을 찾아온 손님이고 우리들은 주인 아니냐! 그러니 손님이 술을 산다면, 주인인 우리 꼴이 뭐가 된단 말이냐. 너를 환영하는 술은 우리가 살테니, 그 돈이랑 썩 집어넣어라! " 그 바람에 모두들 "옳소!" "옳소! " 하며 박수를 보낸다.   천동 마을에는 대동계(大洞契)가 있어서 경조사를 맞았을 때 서로 도와주는 제도가 있었고 그 계장은 제제였다.  제제는 김삿갓이 내놓은 술값을 억지로 집어 넣어주고 나서, 계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삼십 년 동안이나 헤어져 지내던 죽마고우가 돌아와서, 환영주가 한 잔 없을 수가 없는데, 오늘 밤 술값은 곗돈으로 쓰면 어떨까 ?" 그러자 계원들은 모두가 쌍수를 들어 찬성한다. "물론 그래야지. 그건 계장이 알아서 하게, 그리고 술만 많이 먹게 해주게." "막걸리 두 말쯤 사오면 되겠지? " "아따, 이 사람아 ! 두 말이고 서 말이고 어서 가져오도록 시키기나 하게."   "그래,그래..그러면 재무(財務)막동이가 막걸이 서 말하고, 북어 두쾌만 사오너라.  그리고 합죽이네 김치가 매우 맛이 좋으니 , 합죽아 ! 오늘은 자네집 김치 좀 꺼내다 맛 좀 보여줘라." 재무 막동이는 술을 사오려고, 합죽이는 김치를 가지러, 문 밖으러 나서려다 둘이서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어이구! 눈이 오시네! 어느새 제법 많이 쌓였는걸 ... " 그러자 모두들 문 앞으로 우루르 몰려와 밖을 내다 보았다.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펄펄 내려 ,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은세계로 바뀌고 있었다. "야아  눈 한번 탐스럽게 온다. 명년 농사는 풍년이 들겠구나! " "옛날 친구가 눈까지 몰고 와서 오는 밤 술 맛은 기막히겠다."   이윽고 막걸리 서 말이 도착되었고 김삿갓을 맞는 환영연이 성대하게 시작되었다. 제제가 대동계 계장으로 첫 잔을 김삿갓에게 따라주며 말한다. "여기 친구들은 모두가 호주가(好酒家)들이라네, 자네 술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 "그래? 나는 지고는 못 가도 마시고는 가는 사람이니, 오늘 밤은 맘대로 따라주게! "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 갈채를 보낸다. "그렇다면 ㅂ7오는 밤 멋지게 어울려 보세. 술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   이렇게 술자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술자리가 어울려 오자, 옛 친구들은 앞을 다투어 김삿갓에게 술잔을 권하였다. 이렇게 취홍이 도도해져오자 땅꼬마가 큰 소리로 외친다. "술이 있는데 가락이 없을 수 있는가? 까불아 너, "나무 타령" 한 곡조 뽑거라! " "그래,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까불아! 퍼떡 일어나서 나무 타령 하거라." 모두가 박수를 치며 까불이에게 시선이 모아지자 , 까불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머리에는 일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바지춤을 일부러 비틀어 당겨 입더니, 허리를 반쯤 꼬부려 병신 시늉을 하면서 나무 타령을 부는다.   품배 품배 품배야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천 냥 주고 배운 소리 한두 푼에 팔린다 얼시구 좋다 엄나무 한다리 절뚝 전나무 이 산 저 산 소나무 오다가다 오동나무 가다오다 가닥나무 님의 손목 쥐염나무 칼로 푹 찔러 피나무 달 가운데 계수나무 방귀 뀌었다 뽕나무 십 리 절반 오리나무 열아홉에 스무나무 돈이 많아 은행나무 돈 없으면 박달나무 방긋 웃는 복사나무 배를 타라네 배나무 휘휘칭칭 버드나무 물고 늘어지는 물구나무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5) 드디어 도착한 천동마을. "중편" 까불이가 어깨춤을 박수 소리에 맟춰,   엉거주춤 찌긋찌긋 추어가며 나무 이름을 거침없이 엮어 나가자 , 좌중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김삿갓은 허리를 움켜잡고 웃다가 술잔을 내밀어 주며 덕담을 했다.   "이 사람아 ! 병신 육갑한다더니 , 제네 꼴이 영락없네. 까불이 자네는 어디를 가더라도 밥을 굶지 않겠네." "예끼 이 친구야, 삼십 년 만에 만난 처지에 나를 보고 각설이 패가 되란 말인가 ?" 이렇게 까불이가 익살을 부리는 바람에 좌중에는 또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또다시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친다. "이번에는 "장타령"을 한번 듣자 ! 뭐 하냐 ? 땅꼬마 ! " 그러자 땅꼬마로 불린 친구가, 빗발치는 독촉에 마지못해 쭈볏쭈볏 일어서며 말한다. "밤나무집 둘째, 듣거라. 삼십 년전 불알 친구가 먼길 마다 않고 찾아와 , 너무도 반가워 장타령을 한 곡조 부를터이니 잘 들어 보거라."   땅꼬마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머리에는 각설이 패나 쓸 법한 낡은 초립을 쓰고, 손에는 두렁박과 지팡이까지 들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좌중이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자, 땅꼬마는 두렁박을 지팡이로 퉁퉁 두두려 가며, 장타령을 구성지게 뽑아 나갔다.   얼~~~럴 ~~널이 ~~~ 각설이패가 왔구나 각설이라 역설이 동지섣달 대목장에 각설이가 왔구나 팔도 강산 돌다 보니 장거리가 내집일쎄 이 술 잡수 안주장 술맛 좋다 청주장 초상났다 상주장 능수버들 천안장 신라 통일 경주장 명태 옆에 대구장 얼 ~~~럴~~널이 ~~~ 함평도로 넘어간다 기생 좋은 평양장 미인 많은 강계장 해주 해주 해주장 박아라 박아 박천장 안고 춤추는 안악장 초당 짓고 배운 소리 실수도 없이 잘한다 목구멍에 불을 켰나 환하게도 잘한다 뱃가죽이 두꺼운가 거침없이 잘한다 대목장에 목쉬겠다 청산 유수로 잘한다    .......   박수소리와 환호성에 방안이 들썩였다. 몇 몇이 장타령 신바람에 일어나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고 땅꼬마는 더욱 신이나 첫 소절 부터 한바퀴 더 돌려 장타령을 뽑았다. 장타령이 끝나자 좌중에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일동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워낙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다가 별안간 조용히 술만 마시려니 , 좌중에 분위기는 갑자기 따분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집에 초상났나 ?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한고 ! "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조조가 한마디 하거라 !" 하며 부추긴다.   조조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한다. "나는 워낙 명창이라 , 이런 시시한 자리에서는 죽어도 못한다" "허긴 , 조조가 한 곡조 하는 날이면 밤나무집 둘째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고 말게다." 제제가 이렇게 말을하자 , 조조가 음치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친구들이 두 손을 마주치며, "맞다, 맞아 ! " 하며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제제가 말하는데, "이렇게 자진해서 노래를 불러줄 사람이 없어서야 흥이 나겠나 ? 그렇다면 대갈 장군과 합죽이가 함께 나와, "변강쇠와  옹녀" 연극이나 한 판 벌려 보면 어떻겠나 ? " 제제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 좌중은 별안간 쌍수를 들며 "와하 ! "하는 함성에 덮혔다.   김삿갓은 변강쇠와 옹녀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산골에서 땅이나 파먹고 사는 옛 친구들이 설마하니 "가루지기" 타령을 알고 있으리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 자네들이 가루지기 타령이라는 책을 읽은 일이 있었던가 ?" "아따 이 사람아 ! 자네는 우리들을 뭘로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지난번 추석 명절때 대갈이와 합죽이가 변강쇠와 옹녀 분장을 해가지고 가루지기 타령을 연극으로 했던 일도 있다네. 그 연극이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소문을 듣고 곡산 읍내에서 구경꾼이 백여명 몰려온 일도 있다네. 그러니 오늘 밤에도 대갈이와 합죽이가 멋지게 연극해 보일테니, 한번 구경하게."   제제는 거기까지 말하고 대갈이와 합죽이를 다그친다. "뭐하냐 ! 어서 옷을 갈아 입고 나오지 않고 ? " 대갈이와 합죽이는 옆방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키가 크고 몸집이 큰 대갈이는 변강쇠로 분장하고, 키가 작고 몸매가 여자처럼 애리애리한  합죽이는 분홍저고리에 남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돌려 쓰고 나와, 영락없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그럴듯한 남녀로 분장을 하고 나오자, 방안에서는 또다시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야아, 고놈의 계집년, 너무도 예뻐 사람 미치겠구나." "정말로 계집년인가, 사타구니를 한번 만져보자." 제각기 난잡스러운 실랑이를 한마디씩 떠벌이는 바람에, 방안은 잠시 난장판이 되었다.   김삿갓도 그들의 능숙한 분장술에 박수를 보내며, 한마디 찬사를 보냈다. "야아, 옹녀의 분장은 정말 기가 막히네. 자네들은 농사는 짓지 않고 연극만 하는 모양일세 그려." 제제가 얼른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이 사람아 ! 그런 재미도 없으면 이런 산속에서 기나긴 겨울을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나. 제법 재미가 있을 것이니 두고 보게. 어서들 연극을 시작하거라."   방안에는 기대와 환희의 빛이 가득 넘쳤다. 일동은 연극을 구경하기 위하여 술상을 옆으로 밀어 놓고 , 모두들 아랫목으로 몰렸다. 이렇게 웃목은 자연히 무대가 된 셈이었다. 옹녀로 분장한 합죽이가 변강쇠로 분장한 대갈이에게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며 고혹적인 미소를 보내자 , 엉큼한 얼굴의 변강쇠는 옹녀의 얼굴을 한동안 그윽히 바라 보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싱긋 회심의 미소를 짓고 너울어울 춤을 추기 시작하며 , 옹녀에게 사랑 노래를 부른다.   사랑 사랑 사랑이여 ! 이리 보아도 내사랑 저리 보아도 내사랑 ! 내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너에게 무엇을 주랴 용왕님이 가져가신 여의주를 네게 주랴    ...   변강쇠가 옹녀를 감싸고 돌아가며 입담 좋은 수작으로 얼러 대자 , 옹녀는 봄바람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난 듯 방긋 웃어 보이며 , 사랑 노래를 받아 넘긴다.   사랑 사랑 사랑이여 ! 태산같이 높은 사랑 하해같이 깊은 사랑 남창 북창 노적같이 다물다물 쌓인 사랑 은하수 직녀같이 울울이 맺힌 사랑     ....   옹녀가 낭랑하게 노래를 뇌까리며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고 변강쇠를 빙빙 돌아가니, 얼이 빠진 변강쇠가  입을 헬렐레 벌리고 옹녀를 이리저리 쫒아 다니다, 마침내 옹녀의 두 손을 와락 움켜잡으며 애타게 호소한다. "너와 나는 천정 배필 , 이 밤에 동방 화촉을 밝혀 봄이 어떠할꼬 ? ....."   변강쇠의 말이 떨어지자   옹녀가 불현듯 그자리에  누워, 다리를 끌어 모아 무릅을 세워서 변강쇠에게 어서 오라는 듯이, 양 다리를 너풀너풀 해보인다. 순간, 방안에서는 다시 "와하 !"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천생 양골(天生陽骨) 변강쇠가 옹녀의 사타구니를 헤집고 들여다 보며, 한바탕 수작을 부린다. "여기가 어떤 골짜기냐 ? " 그러자 옹녀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여기는 옥문관(玉門關) 이 아니오니까." "옥문관이라 ... ? 세상에 관문이 많터라만, 옥문관이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로구나. 나는 이제부터 옥문관을 쳐들어가야 할 판이다. 만의 하나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되겠으니, 옥문관의 산세(山勢)가 어떻고 수세(水勢)는 어떠한지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다 ! "   그리고 변강쇠는 옥문관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척하다가, 매우 감격스러운 어조로 천천히 잡설을 늘어놓는다.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옥문관은 늙은 중의 입이런가, 입술은 있어도 이가 없구나. 소나기를 맞았나, 언덕지게 패였네. 콩밭 팥밭을 지났나 돔부꽃이 웬 말이냐. 도끼날을 박았나, 금 바르게 터져있네. 생수처(生水處) 온담(溫潭)인가 물이 항상 괴어 있네. 무슨 짓을 하려고 움질움질 하는고? 천리 행정 내려오다 주먹바위가 신통쿠나. 만경 창파에 조개인가 혀는 왜 빼물었으며, 임실(任實) 곶감을 먹었나 곶감 씨가 물려있고, 만첩 산중 울음인지 문이 절로 열려있네. 연계탕을 먹었는가 닭의 벼슬이 웬 말인고. 파명당(破明堂)을 하였는가 더운 기운이 절로 난다. 곶감 있고 울음 있고, 조개 있고 , 연계 있어,  어~헛 ! ...제삿상은 걱정이  없네 ! .... "   변강쇠로 분장한 대갈이가 옹녀로 분장한 합죽이 사타구니를 들여다 보며 잡스런 말을 넉살좋게 늘어놓자 이를 지켜보던 누구인가 크게 소리친다. "이놈아 ! 지금 네가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옹녀의 옥문관이 아니고 합죽이의 사타구니로다. 죽을때 죽더라도 정신만은 똑똑히 차리고 보아라 ! "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좌중에는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6) 드디어 도착한 천동마을. "하편" 김삿갓은 대갈이의 몸짓과 표정이 하도 우스워, 아까부터 배를 움켜잡고 웃으며, (가루지기 타령에 나오는 사설을 곧이 곧대로 옮기는 재주와 기억력이 대단하구나 ! ) 하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연극은 계속 되었다. 변강쇠가 옹녀의 옥문관을 들여다 보며 한바탕 잡소리를 늘어 놓고나자, 이번에는 옹녀가 변강쇠의 사타구니를 유심히 들여다 보는 척하다가 , 사뭇 감격스러운 듯 노래조로 이렇게 뇌까리는 것이었다.   "낭군님의 물건은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히도 생겼네. 전배(前陪) 사령을 서려는지 쌍걸랑을 늦게 차고, 오군문(五軍門) 군노(軍奴)런가 목떠기를 붉게 쓰고, 냇물가의 물방안가 떨구덕 떨구덕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철고비를 둘렀구나. 감기에 들었는가 맑은 코는 무슨 일꼬. 성정(性情)도 혹독하다 화가 나면 눈물난다. 어린아이 병이런가 젖은 어찌 게워내며, 제사에 쓴 숭어인가 꼬장이 궁기 그저 있다. 뒷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머리 둥글구나. 소년 인사 배웠는가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덴가 검붉기는 무슨 일꼬. 칠팔 월 알밤인가 두 쪽이 한테 붙어 있네. 물방아 절굿대며 쇠고비 걸낭동물 세간살이 걱정없네 !"   합죽이가 대갈이의 사타구니를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마치 진짜 물건을 바라보기나 하듯 , 일장 얄궂은 소리를  재미있게 늘어 놓자, 방안은 또다시 떠나갈 듯한 박수 갈채가 쏟아진다. "야 ! 옹녀야 그런 귀물을 변강쇠만 가지고 있는줄 아느냐. 우리들도 가지고 있단다." "진짜 귀물은 변강쇠 물건이 아니고 , 네가 가지고 있는 조개 이니라." 여럿이 제 마다 한 마디씩 놀려대어, 대갈이와 합죽이는 더 이상 연극을 할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옆방으로 도망가듯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연극이  끝나 버리게 되었고 , 재미있게 지켜 본 방안의 관객들은 우뢰 같은 박수를 보냈다. "자 ! 우리는 술이나 마시세." 누구가가 주전자를 집어 들며 그렇게 말하며, 술은 다시 시작되었다. 김삿갓은 술을 마셔가며,  새삼스럽게 감탄을 마지 않았다. " 이 깊은 산중에서 자네들이 인생을 이처럼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 오늘 밤의 감격을 나는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걸세." 제제가 술잔을 내밀며 말한다. "우리가 오늘 밤 이렇게 즐겁게 보낼수 있는 것은, 자네가  삼십 년 만에 찾이와 준 덕택일세. 자네도 우리들의 우정을기쁘게 받아 들이는 뜻에서 노래를 한 곡조 들려주게나." 제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동은 "와하 !"하고 함성을 울리며 박수를 보낸다. 노래가 서투른 김삿갓은 어안이벙벙해 왔다. 김삿갓은 시에는 자신이 있어도 노래에는 자신이 없었다. "자네들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서 나도 한 마디 부르기는 해야 할텐데, 노래에는 자신이 없으니 어떡하지..." 김삿갓이 머리를 긁으며 난처해 하자, 일동은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뭐든지 좋으니 한 곡조 뽑으라고 난리였다.   김삿갓은 선비들이 즐겨 부르는 어부사(漁夫辭)나 처사가(處士歌)가 어떨까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런 노래는 아무래도 이 자리에는 어울릴것 같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김삿갓은  무엇이 생각 되었는지 ,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노래가 하나 있네. 자네들이 "가루지기 타령"을 멋진 연극으로 보여 주었으니 , 나는 그 연극에 어울리는 "변강쇠 타령"을 불러보면 어떻겠나 ? " 일동은 그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뭐야 ? ... 변강쇠 타령이라는 노래도 있던가 ?"   "있지, 있구 말고!  옛날에 어떤 선비가 가루지기 타령이라는 소설을 읽고 , 변강쇠의 못된 성품을 비꼬아 준 일이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변강쇠 타령일세." 일동은 그 말을 듣고, 변강쇠 타령을 꼭 들려 달라고 성화같이 재촉한다. 김삿갓은 무릎을 두두려가며, 변강쇠 타령을 익살맞게 부르기 시작 했다.   천하 잡놈은 변강쇠 천하의 잡놈은 변강쇠라 자라는 호박에 말뚝박기 우물가에 똥누기 아이 밴 여자 발길로 차기 지어 놓은 밥에 돌 퍼붓기 불붙은 집에 키질하기 정절 과부 호려내기 물에 빠진 사람 덜미 누르기 활 쏘는 양반 줌팔치기 어화둥둥 내 사랑아 !   강쇠의 행실을 볼 지경이면 엄동 설한에 땔감 없어 나무를 하러 나갈 적에 낫은 갈아 지게에 꽂고 도끼는 갈아 옆에다 끼고 납짝 지게를 걸머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원근 산천에 당도하니 봄 들었구나 봄 들었구나 원근 산천에 봄이 들어 나무는 할 것이 없어 길가에 서 있는 장승을 패니 장승이 괴탄하며 하는 말이 "이 몹쓸 변강쇠놈아 네 어찌 나를 아궁이 귀신으로 만드느냐" 어화둥둥 내 사랑아 ......   김삿갓이 변강쇠 타령을 한바탕 흥겹게 엮어 나가는 중에 옆방으로 달아났던 대갈이와 합죽이가 다시 나타나, 가락에 맞춰 춤을 덩실덩실 추어대는지라, 방안의 흥취는 절정에 도달 하였다. 실로 호화롭기 짝없는 김삿갓, 환영연이었던 것이다. 이런 환영연은 먼동이 터올 무렵에야 파장이 되었다.   모두들 대취하여 뿔뿔이 돌아가려고 일어서는데, 계장 제제가 김삿갓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한다 "내일 아침에 내가 데리러 올 테니, 조반은 우리 집에서 먹세." "고맙네."   친구들이 모두 가버리자, 김삿갓은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지나치게 흥분했던 탓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삼십년 전에 벌거숭이로 뛰놀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 것이 꿈만 같았던 것 이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7) 나무아미타불의 본뜻. 김삿갓은 천동 마을에 찾아와서 부터는 마음이 편하고 즐겁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매일 밤이면 친구들이 모두, 김삿갓이 거처하는 모임방으로 몰려와, 기나긴 겨울밤을 이야기로 보내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모임방에서는 어슷비슷 둘러앉아 미투리를 삼거나 새끼를 꼬거나 , 때로는 덕석이나 멍석등을 짜면서 제각기 제멋대로 늘어놓는 음담패설을 들어 보는 것은 다시없는 즐거움이었다. 밤에 모임방으로 모여드는 사람은 김삿갓의 옛날 친구만은 아니었다. 천동 마을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감둔산 동쪽 골짜기에 반석암(盤石庵)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는데, 그 암자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일휴(一休)스님도 밤이면 가끔 놀러오는 단골 손님중에 하나다. 일휴 스님은 나이가 70이 넘은 대머리 스님이었다. 그는 젊은 중생들에게 불법을 깨우쳐 주기위해 모임방에 자주 온다고 하였지만, 김삿갓은 일휴 스님이 모임방에서 강설(講說)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은 없었다. 그러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모임방에 온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이고 , 어쩌면 마을 사람들이 제멋대로 씨부려대는 음담패설을 들으려고 찾아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그 증거로 , 마을 사람들이 음담패설을 떠들어댈 때면,  일휴 스님은 누구보다도 신바람 나게 박장대소를 하곤 하였다. 이럴때는 스님으로서의 체면 같은 것에는 일절 개의치 않는 일휴 스님이었다.  언젠가 누가 일휴 스님에게, "스님은 돌중이지요 ? " 하고 농담을 걸은 일이 있었는데, 일휴 스님은 농담을 건넨 사람을 나무라지도 않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하하하. 내가 돌중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   내 머리통을 보라구 ! 머리통이 돌덩이 처럼 생겨 먹은 것만 보아도 내가, 돌중이라는 것을 알수 있지 않은가 ! " 이렇듯 젊은 사람들이 심한 농담을 걸어와도 결코 나무라는 일이 없는 일휴 스님이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70이 넘은 그를 친구처럼 대해 왔었고, 일휴 스님 자신도 노소동락(老少同樂)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공언해 왔었다. 김삿갓은 일휴 스님의 활달한 기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한편은 , "산속에 혼자 사시기가  적적하시죠 ? " 하고 물었더니, 일휴 스님은 이렇게 대답 하는 것이었다. "혼자 살기가 심심하니까  이렇게 가끔 사바 세계에 내려와 음담패설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누가 힐난 하듯이 한마디했다. "스님이 염불은 안 외고 잡소리만 즐겨하시면, 수도는 언제 하시오? " "수도 .... ? 마음을 구름 한점 없이 한가롭게 가지면 , 그게 바로 수도인걸 ! ... 극락 세계가 법당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도 모르는가 ? "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짖궂게도 이렇게 물어보았다. "신도들 중에는 젊은 여자들도 많던데, 예쁜 여자가 눈앞에서 아양을 떨 때면 아무리 스님이라도 색정이 동하겠지요 ? " 그러자 일휴 스님은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중은 사람이 아닌가?   중도 속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은 죄다 가지고 있는걸 ! " "스님 ! 그 물건이 예쁜 여신도를 보고 색정이 발동하게 되면 스님은 어떻게 하시오 ? " "그런 경우라면 "나무아미타불"을 연실 되뇌우지."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符籍)조차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무식하기 짝이 없는 그 물건이 염불을 왼다고 곱게 말을 들어 줄까요 ? " "그게 바로 속인들과 중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야. 불도(佛道)를 어느 정도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일시적으로 색정을 느꼈다가도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염불만 외면 대개는 흥분이 가라앉게 되는법이야." "도데체 스님들이 입버릇 처럼 외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오 ? " "자네는 정말로 무식하네 그려. 나무아미타불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단 말인가 ? " "모르니까 물어 보는 게 아니오 ? " "자네들이 정말로 모른다니 설명을 해주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부처님은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계시면서 ,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극락 세계로 보내 주는 부처님이시고 ,  나무(南無)라는 말은 , 극락 세계에 가서 영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과 염원이 담긴 뜻이라네, 알겠나 ? " 일동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갸우뚱하였다.   "그러면, 아침부터 밤중까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 외면 누구든지 극락 세계에 가서 영생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 " 그러자 일휴 스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염불을 왼다고 모두가 극락 세계에 가는 것은 아니야.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도, 마음이 잿밥에 가있다면, 그런 돌중놈이 어떻게 극락에 갈 수 있겠나 ! "   "스님은 조금 전에 자신을 돌중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그렇다면 스님은 아무리 염불을 외어도 극락 세계에는 못 가실게 아니오 ? " "모르는 소리. 나는 머리통이 돌덩이같이 두루뭉슬로 생겨 먹었기에 돌중이라고 말했을 뿐이지, 진짜 돌중은 아니야." "그러면 여자가 옷을 벗고 덤벼들어도, 스님은 제대로  접수하실 수도 없겠네요 ? "   누가 그렇게 놀려대자 방안에는 별안간 폭소가 터졌다. 일휴 스님도 같이 어울려 웃으면서 말했다. "예끼 이 사람아 !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자네는 바라경이라는 경문을 꼭 들어 봐야만 알겠는가 ? "   ("바라경" .... ? ) 김삿갓은 바라경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관음경(觀音經)과 반야경(般若經) 같은 경문이 있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지만, 바라경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 경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석에서 일휴 스님에게 물어 보았다. "스님 ! 불교에는 바라경이라는 경문도 있습니까 ? 저는 처음 들어 보는 경문인데, 그 경문의 내용은  어떤 것이옵니까 ? "   일휴 스님은 대답할 생각은 안 하고 빙그레 웃기만 하다가, "반야경과 관음경은 부처님께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진리를 설파하신 귀한 경문이지. 그러나 바라경이라는 것은 그런 신성한 경문은 아니야."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바라경이 신성한 경문이 아니라구요? 경문에도 신성, 비 신성이 있습니까 ? " "있지 있구말구!  바라경이라는 경문은 신성하지 못한 대표적 경문일쎄 ! "   "그렇다면 바라경은 누가 지어 낸 경문이기에 , 신성치 못하다는 말씀입니까 ? " 궁금한 것은 못참는 김삿갓 , 더구나 바라경이란 것이 자기가 모르는 불교의 경문이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캐어 물었다. 그러자 일휴 스님이 대답하는데,   "바라경이라는 것이 말이 경문이지, 실상인즉 어느 돌중놈이 어떤 여자로부터 해괴망측한 질문을 받고, 즉흥적으로 꾸며낸 잡설에 불과한 것이야.  그 유래를 설명 할테니 들어 보려나 ?" 그리고 일휴 스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옛날 어떤 절에 음흉하고도 익살스러운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 신도가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 무슨 생각에선지 스님에게 이렇게 물어 본 일이 있었다. "스님들은 여자와 한이불 속에 누워 있어도 관계를 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  질문을 받은 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중이로서니, 사지가 멀쩡한 사내로써, 여자와 관계하는 방법을 모를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인이 중을 유혹하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중의 체면으로서는 그런 질문에 말로 상세하게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중은 마치 경문을 외우듯이 이렇게 염송(念誦) 하였다.   "바라바라 줘바라 못 하나 줘바라 ... 바라바라 줘바라 정말 못 하나 어디 한번 줘바라."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8) 도루아미타불의 본뜻.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세상사람들은 그 경문을 "바라경"이라고 불러 오게 되었다고 일휴 스님이 말하자, 좌중은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리고 일휴 스님에게 다시 묻는다. "하하하, 스님은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바라경을 지은 사람은 일휴 스님 자신이 아니오 ? " 그러자 일휴 스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나는 남녀 관계를 모르지는 않지만 , "바라경"을 지은 사람이 나 자신은 아니야."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바라경을 내가 지었다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고백할 일이지 왜 거짓말을  하겠나 ? .. 불경에 보면 남을 속이는 것도 죄악이라고 했거든."   이같은 일휴 스님의 태도로 보아 , 바라경의 작가가 일휴 스님 자신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나이가 70을 넘으면 감정을 초월한 탓인지 , 일휴 스님이 무슨 말을 해도 천박해 보이거나 야비해 보이지는 않았다. "스님들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염불만 외는 것 같은데, 도대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하루에 몇 번이나  외시오 ? " "하루에 몇 번이나 외는지 헤아려 본 일은 없지만, 염불은 많이 욀수록 좋은 것이야. 그래야만 극락에 갈 수 있거든. 자네들도 극락에 가고 싶거든 오늘부터라도 염불 외는 습관을 길러요." "도루아미타불이라는 염불도 있던데 , 나무아미타불과 도루아미타불은 어떻게 틀리오 ? " "예끼 이 사람 ! 또 무식한 소리를 하고 있네. 도루아미타불이 무슨 놈에 염불이란 말인가?" "옛 ? ... 도루아미타불은 염불이 아니라는 말씀이오 ? " 김삿갓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도루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 자네들은 그 유래도 모르는가 ?  그렇다면 내가 설명해 줄것 이니 잘들 들어요." 일휴 스님은 도루아미타불의 유래를 말해 주려고 , 큰 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잡는다. 김삿갓도 도루아미타불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지만 , 그 말의 유래를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김삿갓도 일휴 스님이 말하는 도루아미타불의 유래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일휴 스님이 말한 도루아미타불의 유래는 다음과 같았다. 옛날 어떤 소금 장수가 절에 소금을 한 바리 실어다가 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 가려면 강을 하나 건너야 하는데 , 때가 마침 늦은 겨울이라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말을 끌고 강을 건너기가 매우 위험하였다. "아침에 강을 건너오며 보니, 얼음이 녹기 시작하던데, 지금쯤 강을 건너려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 " 소금 장수가 주지 스님에게 그렇게 물어 보자 , 주지 스님이 웃으며 말하는데 , "강을 건너가면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움보살"이라는 염불을 끊임 없이 외우면, 무사히  강을 건널수 있을 것이오." 소금 장수는 불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강을 무사히 건너 집으로 돌아 가기위해서는  싫든 좋든 간에 염불을 열심히 외는 수 밖에 없었다. 소금 장수는 얼음판을 건너며 , 나무아미타불 관세움보살을 열심히 외었다. 그리고 염불을 열심히 왼 덕택으로 강을 무사히 건너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강을 무사히 건너오고 생각해 보니 , 마음에도 없는 염불을 열심히 왼 일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길헐..!  나무아미타불이 뭔 개수작이야." 이렇듯 한 마디 씨부리고 난후, 문득 강 건너를 쳐다보니 , "아뿔싸 !" ...   소금을 싣고 갔던 말이 강 건너편에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소금 장수는 행여 얼음판이 꺼질까 ? 하는데만 정신이 팔려, 말을 그냥 내버려 두고 혼자만 건너온  것이었다. "에구 에구 쯔쯧 ... ! "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소금 장수는 말을 가지러 강을 다시 건너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소금장수는 위험한 강을 다시 건너며 이번에는, 염불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 생각나지 않자, "도루아미타불 관세움보살! 도루아미타불 관세움보살 " 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된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휴 스님은 도루아미타불의 유래를 거기까지 말해 주고 나서 , "도루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때 생겨난 말이야, 위험할 때는 부처님을 의지했다가도, 위험에서 벗어난 뒤에는 부처님의 고마움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게 인간이거든. 이처럼 교만한 것이 인간이니까, 자네들은 그런 점을 잘 깨달아서, 평소에도 염불을 열심히 외도록 하라구 ! " 하고 제법 스님다운 설교를 들려 주었다. 그러자 누군가 웃으며, "위험에 부딪치면 그때 가서 소금장수 처럼 도루아미타불이라고 외치면 될 게 아니오 ! " 하고 말하자 일휴 스님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 "도루아미타불은 염불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염불은 반드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야 ! " 김삿갓이 천동 마을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많은 친구들이 저녁마다 모임방에 몰려와 재미있는 이야기로 밤을 지새다 보니, 모르는 사이에 한달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낮의 시간만은 지극히 한가하였다. 따라서 별 일이 없을 때는 김삿갓은 늙은이들이 모이는 이풍헌 댁 사랑으로 찾아가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었다.   장기는 조그만 것을 주고 큰 것을 낚는 재미가 있어 , 결국에는 마지막 끝내기에서 결과가 얻어지기 싶상이다. 그러나 바둑은 첫 점 부터 착점을 잘하여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 인생을 사는 것도 장기판과 바둑판 같다고 생각한 김삿갓, 인생의 결과는 한 판의 장기나 바둑처럼 짧지 않고 , 다시 무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79) 질긴 인연의 시작. 해(年)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김삿갓은 이날도 이풍헌 댁으로  바둑을 두려고 모임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조조가 술을 한 병 들고 찾아왔다. "여보게 ! 오늘은 어디 가지말고 나하고 술이나 한잔 하세! 이 술은 어떤 여자가 자네한테 보내 온 특별한 술일세 !" 하고 집을 나서려는 김삿갓의 발길을 잡았다.   술이라면 어떤 술도 마다할 김삿갓이 아니다. "술이라면 먹세그려. 그런데 어떤 여자이길래 나한테 술을 보냈단 말인가 ? " "왜 , 궁금해 ? 그런 사람이 있어 ! 하하하." 조조는 술상 앞에 앉으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김삿갓이 물었다. "이 술이 어떤 술이란 말인가 ?   또 어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고 했는데, 그 여자는 또 누구인가? " "왜 ?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니까 ,궁금하지 ? " "아따 , 이 사람 ! 더 궁금하게 하네..." "그 애기를 하기 전에 , 우선 술맛부터 알아 보기로 하세. 자네가 한 잔 마셔보아서 술맛이 자네 입에 맞으면 , 내가 어떤 여인이 보냈는지 말해주지."   "술이 입맛에 안 맞으면 ? " "아따, 이 사람 ! 언제, 삿갓 입맛에 맞지않는 술도 있었던가 ? " "그랬던가 ? 하하하 !" 김삿갓은  술잔을 손에 들고 조조와 얼굴을 마주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김삿갓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닌걸. 이 사람아 ! 이런 좋은 술이 어디서 생겼는가 ? " 김삿갓은 40 평생을 살아오며 술이라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마셔왔다. 그러나 술맛이 좋고 나쁜 것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셔 본 술은 국화 향기가 그윽한데다가, 술이 혀끝을 톡 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술을 다시 한 번 마셔보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 술은 맛으로 평가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보다는 신선들이나  즐길수 있을 것 같구먼그래."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 칭찬하자, 조조도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고,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을한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고 해서, 자네가 무슨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닌가 ? 술은 다 마찬가진데 쏘기는 뭐가 쏜단 말인가 ! "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좋은걸 좋다고하지, 아무렴 나쁜 것을 좋다고 하겠나 ?  정말이지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야. 대관절 이 술을 빚은 여인은 누구길래 이렇게도 기막힌 술을 빚어 냈을까."   김삿갓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술맛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조조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한다. "이 술을 빚은 여자의 정체를 알고 나면, 술맛이 대번에 뚝 떨어져 버릴지도 모를일일세."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술을 빚은 여인이 누구인가는 막론하고, 이렇게 기막힌 술을 빚을 수 있는 여인이라면 보통 사람은 아니겠는걸."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 칭찬하자 조조는 어이없어 하면서, "자네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대로 말해 줌세. 실상인즉 , 이 술은 취향정(醉香亭) 주모가 보내온 술이라네. 자네는 며칠 전에 그 여자를 만나 본 일이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취향정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 하였다. "뭐 ? 취향정 ? 내가 언제 취향정 주모를 만나 본 일이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 왜, 지난번 제제네 집에서 생일 술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에 이차로 취향정이라는 술집에 갔던 일이 있지 않은가, 이 술은 그날 밤 만났던 수안댁(遂安宅)이 자네에게 특별히 보내 준 술이란 말일세 ! " 조조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집 주모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좋은 술을 공짜로 보내 주었단 말인가 ?" "수안댁이 자네에게 왜 술을 보내주었는지, 궁금하겠지, 그렇다면 그 이유를 솔직히 말해 줌세." 그러면서 조조는  수안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황해도 수안 태생인 수안댁은 열여섯 살 때,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 신랑에게 시집을 왔었다. 남편은 밥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는 모주망태였지만, 수안댁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남편을 하늘처럼 정성스럽게  받들어 모셨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수안댁이 시집온지 5년째 되는 여름에 남편은 독주(毒酒)를 잘못 마시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수안댁은 장사를 지낸 그날로 남편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삼년상을 꼬박이 치렀다. 그런 뒤에는  자기 집에 돌아와 "취향정"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자식이 한 명도 없는 그녀에게는 재혼을 권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지만 수안댁은 모두 거절하고 술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동네 노파들이 "아까운 나이에 재혼은 안하고 하필이면 술장사를 하냐"고 충고를 했지만 , 수안댁은 그때마다, "내 남편은 나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느 집이나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하겠기에, 나는 술꾼들에게 좋은 술을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대접하고 싶어서 술장수로 나서는 것이예요." 하고 대답했다. 이와같은 수안댁의 결심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수안댁은 술을 직접 빚어 팔아 오기를 14,5년, 계절에 따라 앵두주,두견주와 국화주 등 꽃잎과 과일로 만든 술도 썩 잘 빚어 왔지만 , 대중적인 막걸리와 소주 조차, 빚어 놓은 술의 맛과 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손 맛이 탁월했고, 시간이 더해갈 수록 양조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에게는 남 모르게 탄식할 일이 하나 있었으니, 술을 아무리 정성스럽게 빚어 팔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 주는 진짜 술꾼을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술꾼들은 하늘에 별처럼 많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 ) 수안댁은 날마다 술을 팔아 오기는 하면서도, 술맛조차 모르는 술꾼들을 내심, 은근히 경멸하고 있었다.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어느날 저녁 , 조조가 친구들을 4,5명 데리고 술을 마시러 왔다. 제제네 집에서 생일 잔치를 얻어먹고 돌아가는 길에, 한잔 더 마시려고 들렀다는 것이다. 일행 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수안댁은 손님들에게 술을 손수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조차 모르는 초면 손님만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별안간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감탄사를 지르는데, "아니 ! 이 집 술맛이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 " 수안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띄였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을 쳐다 보았다. 그는 오늘 처음 온 김삿갓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어느 친구가 김삿갓을 놀려대는데, "여보게 삿갓 !  술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진데. 이 집 술맛이 뭐가 좋단 말인가."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대답을 가로막고 나선다. "모르는 소리 말게, 삿갓이 음흉스럽게 수안댁 환심을 사려고 일부러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지 !"   김삿갓은 친구들이 놀리는 말을하자, 이렇게 나무라 주었다. "이 못난 친구들아 ! 자네들은 술맛을 그렇게나 모른단 말인가 ? 정말이지 이 집 술맛은 보통 술맛이 아니야 ! " 수안댁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연방 술만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일행이 돌아가 버리자, 수안댁은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삿갓이라는 사람이 술을 마셔가며 "이 집 술맛은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막히지 ?" 하고 연실 감탄하던 소리가 자꾸만 귓전에 울려 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삿갓이라고 하던 그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술맛을 그렇게도 잘 알아 줄까. 조조 일행과 네니 내니 하는 것을 보면, 마을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임은 분명해 보였으나, 그의 행동거지를 보아서는, 마을 사람들처럼 우매한 농부는 아닌것 같고 ..) 수안댁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밤은 깊어 오는데 잠은 못자고 계속 뒤척였다. 게속... 방랑시인 김삿갓 (80) 비장의 술 추로백 (秋露白) (우리 집에는 남모르게 비장해 놓은 추로백(秋露白)이란 술이 있는데, 그  김삿갓이란 사람에게 그 술맛을 한번 보여주면 얼마나 놀랄까...) 수안댁은 몇 해 전에 어떤 고승으로부터 명주(銘酒) 담그는 비법을 배워 가지고, 추로백이라는 술을 한 항아리 담가 놓은 것이 있었다. 양조법을 배우다가 시험삼아 한 번 담가본 것으로서, 돈을 받고 팔기위해 담가놓은 술은 아니었다. 그러나 삿갓이라는 사람이 술맛을 그렇게나 잘 알고 있기에, 그 사람에게는 추로백의 맛을 꼭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수안댁은 며칠을 두고 망설이다가 , 어느 날 마침내 용기를 내어 술 한병을 들고 조조를 일부러 찾아왔다. "며칠 전에 우리 집에 들렀던 삿갓이라는 분에게 이 술맛을 보게 해 주세요. 이 술은 "추로백" 이라고 하는데, 그 양반에게 이 술맛을 한번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하여 조조가 문제의 술병을 들고 지금 김삿갓을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조는, "수안댁이 이렇게 좋은 술을 보낸 것을 보니, 자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을 기회로 수안댁과 잘 사귀어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면 어떻겠나?" 하고 말을 하였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결혼을 못해 환장한 사람인줄 아는가? "   사실 김삿갓은 처자식이 엄연히 있는 몸이어서 새장가를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턱 없는 조조는 두 사람을 어떡하든지 결합시켜 주고 싶어했다. "자네가 돈이 없어 결혼을 겁내는 모양인데, 그러나 조금도 걱정을말게, 수안댁이 돈은 먹고 지낼만큼 벌어 놓았으니 자네가 한 푼도 벌지 않아도 될 것이야."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던간에 나는 결혼할 형편이 안되니 그 문제는 이제 그만하게! " "자네도 우리들 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야 우리 마을에서 함께 살게 될 것 아닌가. 수안댁은 그만하면 인물 좋겠다, 마음씨도 곱겠다, 살림살이 걱정도 없겠다, 술장수라고 덮어놓고 싫어할 것은 없지 않은가? "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수안댁이 술장사를 하기 때문에 , 결혼을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그 점만은 오해하지 말아 주게." "그러면 자네는 언제까지나 홀아비로 늙어 죽을 생각이란 말인가 ? " "나는 자네들에게 말을 안 했다 뿐이지, 홀아비는 아닐세. 영월에는 처자식이 버젓하게 있는걸." 김삿갓은 마침내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해 버렸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날 조조는 친구들과 그 문제로 상의했는데,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 친구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 여간해서는 장가를 가려고 하지 않을걸세, 그러니 장가를 보내려면 우리들이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것 같네." "삿갓도 삿갓이지만, 수안댁의 말도 들어 봐야 할 게 아닌가 ? " "그건 그래! 모르는 과부라면 한밤중에 보쌈을 해 올 수도 있지만, 수안댁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우선 수안댁의 마음을 넌즈시 떠보기로 하세." 친구들은 암암리에 그 문제를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친구들은 술을 마시자고 하면서 김삿갓을 취향정으로 끌고 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을 결합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취향정 문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게 수안댁, 어디 갔는가? 이 친구가 자네 집 술맛이 하도 좋다고 하기에, 오늘은 일부러 이 친구를 모시고왔네."   수안댁은 무심코 나오다가, 일행중에 김삿갓이 끼어 있음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놀란다. "어머! 삿갓 어른도 오셨네요." 김삿갓은 스스럼없이 마루로 오르며, "일전에는 술에 취해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해 미안하게 됐네. 참, 자네가 보내 준 술은 조조와 함께 잘 마셨네. 어쩌면 술맛이 그렇게도 좋게 빚었는가? 고맙네.."   그러자 수안댁이 크게 기뻐하며, "제가 술장사 20년에 술맛 좋다는 칭찬을 들어 보기가 처음이어서, 무척 기쁘옵니다." 그러자 조조가 너스레를 치고 나오는데, "이 사람아! 수안댁이 우리한테는 나쁜 술만 먹이고, 자네한테만 좋은 술을 먹이니까 술맛이 좋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 수안댁이, "마을 양반들은 아무리 좋은 술을 대접해도 칭찬해 줄 줄을 모르니까, 화가 동해 그랬지 뭐예요." "옳 ..아! 이제야 자네 마음을 알겠네 . 좋은 술은 아껴 두었다가, 사랑하는 낭군님에게만 대접하고 싶어 그랬단 말이지? " 그 바람에 좌중에는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김삿갓도 덩달아 웃으며, "아닌게 아니라, 일전에 자네가 보내 준 술맛은 정말로 좋았네. 그런데 술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 "그 술은 추로백이라는 술이었습니다." "추로백....?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걸 !  그 술은 마셔보니 혀를 콕 쏘는 맛이 있는데다, 향기가 그윽한 점이 더욱 좋던데, 그 술은 어떻게 빚은 술인가? " 그러자 옆에 있는 다른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이 사람아! 우리는 술을 마시러 왔지. 술 빚는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은 아닐쎄. 그런 얘기라면 이따가 단둘이 이불 속에서 하고 , 우선 술이나 빨리 가져오게! " "어마! 아무리 농담이라도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사람아! 우리들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을 하고 있는거야. 이 사람이 자네하고 하룻밤 같이 지내고 싶다고 하기에, 우리들이 이 사람을 일부러 데리고 온 거야. 그런줄 알고, 어서 들레술이나  가져오게! "   수안댁은 대답을 못 하고 , 얼굴을 붉히며 부랴부랴 술상을 차리러 달려나간다. 수안댁이 부엌으로 나가 버리자, 친구들이 김삿갓에게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한다. "여보게 삿갓 ! 수안댁이 자네가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네. 지금까지는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길길이 뛰던 수안댁이 오늘, 자네 앞에서는 새색시처럼 얌전해졌구먼 ...." "오랫동안 혼자 살아오다가 맘에드는 짝을 만났으니 그렇겠지, 그나저나 수안댁이 자네가 얼마나 좋았으면 추로백이라는 술까지 보내줬단 말인가? " "수안댁의 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지. 젊은 나이에 20 년이 되도록 독수공방으로 살아오다가, 이제야 마음에 드는 사내를 만난 셈이거든!   친구들이 한마디씩 씨부려대는 바람에 김삿갓은 어이가 없었다. "허허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이 친구들은 앞서 김칫국을 마시고 있구먼 ..." 그러자 조조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 김삿갓을 나무라는데, "자네가 수안댁의 마음을 믿지 못하겠다면, 우리가 자네 앞에서 수안댁의 내심을 직접 물어 봐 주면 될 게 아닌가." 그때 수안댁이 술상을 들고 들어와 , 술을 손수 한잔씩 따라준다. "안주가 벤벤치 못해 죄송해요. 어서 한 잔씩 드세요." 그러자 조조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수안댁에게 따지듯이 묻는다. "이 술을 들기 전에, 수안댁에게 한 가지 꼭 물어 볼 말이 있네." "제게 무슨 말씀을 물어 보시겠다는거예요? " "우리가 무슨 말을 묻든간에 자네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어야 하네. 그런 약속이 있기 전엔 물어 보지도 않을테야." "무슨 얘기인데 대단스럽게 나오시니까 겁이나네요." 수안댁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김삿갓을 건너다 보았다. 계속...                                            
13    나의 시론' / 장석주 댓글:  조회:855  추천:0  2019-08-19
나의 시론' / 장석주 건강한 시인, 잘 사는 시인, 당당한 시인보다 어쩐지 가난하고 병약해 보이는 시인들의 시에 더 이끌린다. 나는 박용래나 김종삼,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시들이 좋다! * 자연 예찬의 시들이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연 예찬의 시들은 정치성을 배제함으로써 교묘한 방식으로 당대 정치를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자연 예찬의 시는 두드러지게 탈정치적이다. 탈정치적인 태도는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탈정치적인 게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자연 예찬의 시는 정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다. * 순수시의 표상으로 꼽는 시인이 말년에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학살의 원흉인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시인의 정체성은 의인(義人)이 아니다. 어쩌면 시인의 정체성은 거지, 바보, 천치, 쪼다, 못난이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 한심하고 하염없는 이들! 생물학적 이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시에 자기를 던진 이들! 이들에겐 농경 정착민보다 변방인, 외부자, 밀입국자, 난민, 떠돌이 광대가 더 잘 어울린다  *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에겐 아무 야망도 욕망도 없다고,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건 야망이 아니라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죽는 날 이런 시를 남겼다. “오른손을 들어, 태양계에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2019)을 읽는다. 김혜순 시는 이 시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이는 낯섦과 그로테스크함의 배후다. 김혜순 시는 ‘시적인 것’에 대한 인습적 이해를 부수고 그 경계를 넓혀왔다. 김혜순 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문법적 단일성에 대한 금지와 위반의 언어다. 김혜순 시의 어떤 구절이 보여주는 정신의 도약과 폭발은 인습적인 사유의 그물로는 포획되지 않는다. 김혜순 시를 읽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는 당신은 자기 안에 있는 인습적 사고와 싸우기를 멈춘 사람이다. * 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자꾸 새장을 탈출한 새로 변신하려고 시도한다. 몸의 증상은 곧 새의 증상이다. 새가 된 기분을 느껴보려는 걸까? “그 새의 신발끈은 풀어져 땅에 끌리고/그 새의 머리끈은 풀어져 측백나무를 칭칭 감고//하지만 나는 나는 것이 좋아/먼 길 떠나는 것이 좋아”. * 김혜순의 시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쉽게 다가오는 구절도 쓴다. “자아(自我)라는 이름의 뚱뚱한 소녀를 생각한다/그녀를 오늘 밤 굶겨 죽여야 한다”.   * 우리 시인 중에도 페르난두 페소아 같이 자기 본명을 감추고 필명이나 이명을 쓴 시인들이 있다.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은 ‘김소월’로 더 알려져 있고, 김해경 (金海卿, 1910~1937)은 ‘이상’으로 더 유명하다. 이들에겐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무의식의 심리가 숨어 있다. 이들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로 돌아간다. 필명은 이들이 선택한 정신적 망명지라고 할 수 있다. * 언어는 시를 이루는 기초 성분이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성립하는 예술이다. 언어-도구는 시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통발이다.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좋은 시인은 시를 얻은 뒤 그 언어를 벗어나 그 너머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언어를 벗어나는 순간 그 언어에 기대어 숨 쉬던 시도 사라진다. 그런 뜻에서 언어는 시의 숙명이자 한계다. * 시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시 한 편 읽지 않아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시를 모른다면 세상의 불확실성에 머리를 쿵 하고 박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와 담 쌓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캄캄한 은총 속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봄철 벚나무 가지마다 만개한 꽃잎 난분분 떨어져 온통 하얗게 만든 길바닥을 자동차가 짓이기고 지나가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 세사르 바예호(1892~1938)는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노래한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인간을 규정하는 말을 늘어놓으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테다. 하지만 시인들은 간략하게 말한다. 축약하고 비약하되 할 말은 다하는 것이다. * 배고파 우는 자식들은 어머니가 거두는 거지들이다. 어린 짐승 새끼들은 수시로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울며 보챈다. 세사르 바예호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달걀노른자로만/과자를 구워주시던 따스한 제과기, 어머니”라고!   시와 비시(非詩)를 가르는 경계선    현대시에서의 묘사(描寫)란 시적 대상을 중심에 놓고 스케치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묘사에는 시적화자(詩的話者/시 속에서 진술하는 사람)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에서 자기주장이 없는 약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감정이 드러난 시는 실패한 시지만 자기주장이 없는 시는 죽은 시"라고들 말한다. 시적 화자가 없다는 것은 시에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시의 전개는 진술을 위해 묘사를 하는 것인데, 묘사는 사진과 같은 것이라면 진술은 나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을 다 쓰면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시는 산문처럼 써놓고 감정을 조절하여 써서는 안 될 말을 골라내는 일이다. 즉 무슨 나무인지를 알 수만 있다면 가지를 다 쳐내어도 된다는 뜻이다. 나무의 보이는 부분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와 의미망으로 연결하여 진술하는 일이 시쓰기다.    진술에는 자기주장, 즉 자기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 묘사만으로도 시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평론가는 진술(陳述)이 없는 시는 비시(非詩)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묘사는 정물화와 같고, 진술이 들어간 시는 시인의 생각을 곳곳에 숨겨놓은 ‘말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진술은 우리들의 정서 밑바닥에 잠겨 있는 상투적인 의미 체계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는 깨달음을 동반하는 표현이어야 한다.     신라 헌강왕 이후     절이 산을 업고 있다     갈전 쪽으로 기울거나     진성 쪽으로 기울거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물지게 지고 가던 남새미 사람     물이 첨벙거릴 때     산은 첨벙거리지 않는 것이     용하다 여겼을 뿐이다       - 강희근, 전문     시 잘 쓰기로 유명한 강희근 시인(경상대학교 명예교수)의 위 시는 짧은 시 속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시의 내용으로 봐선 그 절은 신라 헌강왕 때 지어진 절이겠다. 갈전이 나오고 진성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천년 고찰인 진주 월아산에 자리잡고 있는 청곡사가 분명하다.    이 시에선 묘사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절이 산을 업고 있다’니 절창이다. 청곡사에 몇 번 가본 필자는 진주8경의 하나인 ‘월아산 해돋이’를 보면서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었는데 그 월아산이 온전히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갈전 쪽으로 기울거나/진성 쪽으로 기울거나/언제 그런 일이/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몇 번을 바라본 풍광이었지만 필자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이런 것이 시인의 진술이다. 산이 이리저리 기울어질리 만무하지만 시인의 심미안(審美眼)은 양쪽 마을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서 갈전 쪽으로, 혹은 진성 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으로 산을 업고 있다는 것이다. 남새미 마을 사람들이 길어먹던 우물, 물지게의 ‘물이 첨벙거릴 때/산이 첨벙거리지 않은 것이/용하다 여겼을 뿐이다’    진성 사람들은 자기네 산이라고 하고 갈전 사람들은 자기네 산이라고 했을, 이해에 따라서 자기네 쪽의 산이라고 우기지만 ‘산은 언제나 그대로다’는 표현인데 직설적이지 않으면서 시적 감동을 불러오는 좋은 시다.    시는 '정서적 언어의 회고 양식'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리처즈(I.A Richards)는 과학적 언어인 객관적, 개념적, 비개인적, 지시적, 논리적 의미보다는 정서적 언어인 주관적, 간접적, 개인적, 함축적, 비약적 의미를 살리는 시를 써야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했는데, 비논리적이거나 이질적 경험들을 끌어들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거나 결합되도록 한 포괄의 시(poetry of inclusion)가 최고급의 시이며 그것이 시의 특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론은 테이트의 텐션(tension/긴장감), 브룩스의 역설(paradox/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부조리한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것 너머에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수사법)과 아이러니(irony/반어법이라고도 하는데 시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실제 사실 사이의 괴리, 또는 그런 표현으로 쓰인다)로 발전하였다.   서정적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강희근 시인의 시 선집 '그 섬을 주고 싶다'를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묘사와 진술, 통할(포괄하는 시), 텐션, 역설과 아이러니를 공부하기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 이어산
12    시작법(詩作法) / 고영민 댓글:  조회:806  추천:0  2019-08-19
시작법(詩作法) / 고영민 1. 자기의 핵심역량을 찾아라! 누구나 가장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찾으면 됩니다. 남을 따라하면 절대 최선을 다해도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잘 쓸 수 있는 것이 뭔지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와 맞는 글쓰기를 찾으세요!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를 합니다. 산에서 경주를 하면 백이면 백, 토끼가 이깁니다. 거북이가 이기는 방법은 바다에서 경주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판단을 해야 합니다. 바다로 갈지 산으로 갈지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세요! 그걸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2. 차별화 해라 - 에서 자신의 핵심역량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여, 내가 거북이라고 판단을 해서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갔더니 나 말고도 날고 기는 거북이들이 수두룩 한 것입니다. 그럴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 역시 바다에 갔더니, 나와 비슷한 함민복 거북이, 이정록 거북이, 손택수 거북이, 문태준 거북이들이 먼저 장악을 하고 있더군요.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차별화입니다. 이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쓰기의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차별화의 전략으로 위트, 해악, 쉽게 쓰기, 12남매의 가족사 등을 가지고 승부를 걸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과 차별화 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토끼라고 판단을 했다면 토끼가 있는 곳을  한번 가볼까요? 그곳엔 이미 황병승 토끼, 김행숙 토끼, 김민정 토끼, 강정 토끼 등이 이미 토끼 마을을 장악했군요! 당신이 만약 조금 늦게 토끼 마을에 갔다면 어떻게 차별화 시킬 예정입니까?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자~ 당신을 차별화 하시기 바랍니다!! 3. 경험을 써라! 가장 절실한 것을 써라! 줄거리(서사)를 만들어라! (공광규 시인의 시 작법과 동일)에서 한가지를 더 추가하면 '드라마틱'을 만들어라! 좋은 시에는 분명 드라마틱이 있다. 드라마틱을 만들기 위해서는 3미를 창출해야 한다. 3미란 바로 흥미, 의미, 재미이다. 드라마틱은 경험이고, 진실함이고, 줄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흥미, 그리고 그 안에 의미를 집어넣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재미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흥미를 추구하면 소재주의에 빠진다 너무 의미만을 추구하면 잠언에 빠진다. 너무 재미만을 추구하면 꽁트가 된다. 이 상태를 얼마나 적절하게 간을 맞출 수 있는가가 시인의 관건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대체로 간을 잘 맞춘다. 당신이 만약 음식 솜씨가 없고 간을 잘 못 맞춘다면 시쓰기를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다^^ 우리 딸이 귓속말로 하는 말 “엄마가 끓인 라면보다 아빠가 끓인 라면이 훨씬 맛있어요!” 결국 시도 간을 맞추는 것이다. 얼마나 면발을 꼬들꼬들하게 할 것인지!, 냄비에 물을 얼마만큼 넣을 것인지! 불의 세기를 얼마만큼으로 조절할 것인지!! 퍼진 글을 내 놓은 것은 퍼진 라면을 독자에에 먹으라고 내놓은 라면가게 주인처럼 무책임한 것이다. 4. 끊임없이 펌프질을 해라 펌프질 해본 분? 펌프질을 안하고 반나절만 그냥 놔두면 펌프속의 물은 다시 땅속으로 잦아든다. 그럴 땐 한바가지 마중물을 붓고 다시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엔 탁한 물이 나오다가 나중에 차고 맑은 물이 나오기 시작 한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펌프질을 안하면 뻔한 내용의 글을 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상이 떠오르면 계속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일전에 시창작 강의를 한번 한 적이 있다. 5팀으로 나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게임을 해보았다. “당신에게 소포가 배달되었습니다. 도장을 찍지 않으면 배달된 소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장은 있고 인주가 없네요!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3분 동안 최대한 써보시기 바랍니다” 3분 동안 대략 각 팀마다 30개 정도 인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을 써냈다. 하여, 각 팀마다 처음 생각한 것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물감, 피, 흙, 봉숭아꽃, 김치국물....뭐 이런 식이었다. 그럼 제일 끝에 나온 5가지를 불러보라고 했다. 대답이 가관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들이 나왔다.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처음 생각한 5가지는 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한 것을 남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뻔한 시가 된다는 말이다. 결국 시가 되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장 밑의 것을 끄집어 낼 때 가능한 것이다. 펌프질을 하면 처음엔 흙탕물이 나온다. 하지만 계속 펌프질을 하면 차고 맑은 물이 나온 것과 동일하다. 상투성을 벗는 것이 시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5. 쓰고, 또 쓰고, 또 써라! 그 외에 어떤 방법이 없다. 나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 아니었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되어 버렸다.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되어버렸을 때 나는 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어떤 것이 좋은 시인지도 어떤 것이 좋지 않은 시인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나는 공짜로,  눈먼 잉어가 걸린 격으로 시인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너무 무섭고 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친 듯이 쓰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시가 될만한 것이 있을까 일어나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 사연을 소개한다. 지금 여기에 들어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은 당시의 나 보다 훨씬 시에 대해서 많이 알고 경험이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용기를 갖고 자신에게 도전을 해보길 권한다. 누구나 가장 잘 쓸 수 있는 자기 만의 핵심역량을 갖고 있다. 그걸 찾아 쓰고, 또 쓰고 또 쓰길 바란다. 시가 당신에 넙죽 절을 하며 찾아 올 것이다. 자신을 믿어라! 불안해도 믿어라! 6. 대상을 새롭게 의미부여하라. 기존에 부여된 의미를 새로운 눈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나쁜 것을 좋은 쪽으로, 좋은 쪽을 나쁜 쪽으로, 아름다운 것을 추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숭고한 것을 천박한 것으로, 금기시되는 것을 일상적인 것으로, 일상적인 것을 금기시 하는 것으로..... 이러면서 시가 새롭게 환기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추한 것을 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의미부여 하라. 그곳에 바로 시가 있다. 7. 시를 쓰는 것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시를 쓰는 것은 집 짓는 것과 같다. 누구나 집을 지을 수 있다. 하물며 개미도 집을 짓고, 까치도 집을 짓고, 벌레도 집을 짓는다. 사람이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당연히 집을 잘 짓는다. 이 말은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집을 짓는 순서를 모를 뿐이다.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기둥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시에서 기둥은 바로 줄거리이다. 처음부터 고대광실을 지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기둥부터 세워라. 기둥만 세우면 반은 집을 지은 것이다. 기둥만 세우면 비닐만 올려도 집이 되고, 양철만 올려도 집이 되고, 짚을 얹혀 놓아도 집이 된다. 먼저 기둥을 세워라. 기둥은 줄거리이다. 자기가 접한 대상에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제 트럭에 소나무 두 그루가 실려 가는 장면을 보았다. 자, 그럼 이걸 가지고 줄거리를 만들어 보자. “뽑혀 실려 가는 나무 두 그루를 보니, 살던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가는 가난한 내외 같다. 어디로 옮겨질지 불안하다. 잔 뿌리들은 어린 새끼들 같다. 트럭에는 살던 낡은 가재도구도 있다. 늦은 저녁 옮긴 자리에서 두 소나무는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두 내외(소나무)가 어둑한 집에서 밥을 먹는다.” 그대로 쓰면 된다.   #시론 시작법(詩作法) / 고영민 8. 시를 쓸 때는 門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해라 시도 집을 지을 때와 같이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한다. 독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대문을 얼마나 크게 낼 것인지, 쪽문을 몇 개를 달 것인지. 요즘 시는 문이 너무 작다. 하여 독자들이 쉽게 그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든다. 집이 아니라 일종의 감옥 같은 시들이 많다. 들어가도 나올 수도 없다. 시가 아니라 미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문을 많이 내는 것도 문제다. 이런 시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너무 적나라하고 필요이상의 바람이 들이쳐 집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시는 집이라고 했다. 집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풍경이다. 그러면서 밖이 안과 적절하게 내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해야한다. 시에는 안방의 역할을 하는 부분, 대청마루의 역할을 하는 부분, 부엌, 헛간의 역할, 마당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 필요하다. 이는 적절하게 시의 문을 닫아놓느냐 열어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시를 쓸 때는 문을 어떻게 낼 것인지? 얼마의 크기로 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9. 가장 쉬운 시쓰기는 자기 얘기(추억, 기억)를 쓰면 된다. 이 안에 진솔함이 있다. 그리고 자기만의 얘기는 남과 가장 차별화되는 얘기이기도 하다. 멀리서 시를 찾지 말고 자기안에서, 일상에서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0.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잡아라. 한 대상의 고유한 특징을 잡아 의미를 확장시켜 전혀 다른 대상으로 만들어라. 아래 시에서 갈대를 개꼬랑지로, 머루를 유두로 만들 듯. 갈대가 흔들리는 것이 개꼬랑지가 사람을 반겨 흔들리는 것 같고, 머루는 애를 낳은 여자의 유두와 같지 않은가? 분홍빛 처녀의 유두와 달리, 검은 유두엔 일종의 한과 서글픔이 있다. 이처럼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의미를 확장했으면 그걸 가지고 나만의 기억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라. 그러면 원 대상은 굳이 내가 상징을 부여하지 않아도 저절로 상징성을 갖게 된다. 너무 어렵나? 11. 시를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는 쓴다, 가 아니라 받아낸다, 는 말을 많이 한다. 시는 늘 온다. 길을 가다가도 오고, 잠결에도 오고, 밥을 먹을 때도 온다. 하지만 받아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는 오다가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야구에서 투수가 직구를 던지고 싶은 마음으로 공을 던졌는데, 평소에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공이 가는 것과 매한가지이다. 생각과 손이 따로 노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경우도 똑같다. 내가 어떤 대상을 보고 쓰려고 했는데도 처음 생각한 것과 달리 이상하게 써지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볼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계속 공을 던지는 연습을 통해 내가 직구를 던져야지 생각하면 손이 직구를 던질 수 있게, 커브를 던져야지 생각하면 손이 커브를, 슬라이더를 포크볼을 던질 수 있게끔 몸과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좋은 시상이 떠올라도 공이 엉뚱한 곳으로 던져지듯 제대로 써낼 수가 없다. 포수가 새를 발견했다고 치자. 꿩을 잡기 위해서는 항상 총알이 장전이 되어 있어야 한다. 꿩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꿩을 발견하고, 어, 꿩이네!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면 그 사이 꿩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꿩을 발견하면 바로 겨냥해서 떨어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시적인 상태로 먼저 만들어 놓아야 한다. 12. 시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다들 누군가를 좋아하여 꼬시기도 하고 꼬심을 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애인(詩)을 만들려면 먼저 좋아하는 이상형을 찾아야 한다. 이상형은 찾았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먼저 그리워해야한다. 자기 전에도 떠올려보고, 밥을 먹다가도 빙그레 웃으면 떠올리고 길을 걷다가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리워만 한다고 애인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 다음엔 조금씩 접촉을 해야 한다. 그가 나타나는 시간을 알아내고, 어느 길로 가는지를 알아내고, 우연을 가장한 채 만나기도 하고, 밤늦도록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기도 해야 한다. 한번 두 번, 접촉하면서 안면도 서로 트고, 인사도 나눠야 한다. 그 다음은 상대도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예쁘게 단장해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예쁘게 화장도 하고 옷장을 뒤져 좋은 옷을 골라 입기도 해라. 그러면 상대도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 그 다음엔 조금씩 유혹을 해라.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선물공세도 하고, 당신의 마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라. 그다음 적당한 때를 골라 사랑한다고 열렬히 고백하라. 몸도 주고 마음도 줘라. 서로 옷을 벗고 불 끄고 뜨겁게 하나가 되라. 그러면 생명이 탄생한다. 그 생명이 詩다.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 되는 공식이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하나 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관심- 정성-신뢰-사랑- 하나” 즉 관심을 가지면 보이지 않던 것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 보이는 것에 정성을 드리면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생기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면 생명이 탄생한다. 남녀 관계도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관심도 갖지 않고 정성도 드리지 않고, 신뢰도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글과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시가 탄생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남자가 여자 꼬시는 것, 여자가 남자 꼬시는 것과 같다. 사랑 후에 애가 생기는 것과 같다. 13. 스파링 파트너를 만들어라! 혼자 거울 앞에서 쉐도우 복싱을 하듯 혼자서 시를 쓰면 쉽게 늘지 않는다. 권투선수가 맞으면서 크듯 시 쓰기도 어느 시기까지는 맞아야 큰다. 맞아야 주먹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권투와 마찬가지로 괜찮은 스파링 파트너를 선택해야 한다. 혼자 거울 앞에서 폼 잡고, 자기 폼에 취해 권투를 하다보면 실전에 올라가 몰매를 당하고, KO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자기 폼과 자기 주먹에 대한 객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스파링파트너가 필요하다. 자기 폼이 개폼인지, 똥폼인지, 아니면 진짜 제대로 된 폼인지 스스로 느끼고 확인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칭찬도 좋지만 아프게 때려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후 어느 정도 자기 폼이 잡히고, 상대의 주먹도 보이고, 실전능력이 쌓이면 그때 정말 고독하게 자기를 상대로, 거울을 보면서, 자기 그림자를 보면서 쉐도우 복싱을 해야 한다. 등단 초, 저 같은 경우엔 같은 해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친구가 있어 매일 1~2편씩의 시를 써서 메일로 주고받곤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으로 가혹했다. 아마 그 친구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시를 주고받는 일은 없다. 그냥 지면에 소개되면 어떻더라! 한마디 정도뿐이다. 그와 나는 2년 넘게 서로를 위해 실전과 같은 스파링 파트너의 역할을 했다. 그게 큰 엄청난 도움이 됐다고 말하고 싶다. 14. 링에 올라가라. 계속 경기를 해야 한다. 축구선수나 야구선수가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경기감각이 떨어진다. 아무리 프리미어리그에 있다하더라도 벤치멤버로 있으면 그 선수를 대표로 뽑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적으로 경기에 나가 경기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선수가 한 달을 쉬면 숨을 끌어올리는데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쉬면 쉴수록 경기감각이 떨어진다. 1시간을 뛰던 선수가 10분을 뛰고 헉헉거리게 된다. 선수는 무조건 경기장에 나가야 한다. 축구선수라면 K리그가 없으면, N리그라도 나가야 하고, N리그가 없으면 동네 조기축구회에 나가서라도 공을 차야 한다. 공을 차고, 뛰고, 몸을 부딪치고, 골을 넣을 때 비로소 그는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얘기하는 자이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지면이 어떻든 간에 지속적으로 발표지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지면 속에서 다른 시인들과 함께 놓여 있을 때 자기 시가 어느 수준인지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아! 내 실력이 이 정도구나! 아! 다른 시인들의 실력이 이 정도였구나! 더 분발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 자체가 경기감각이다. 혼자 달리기를 하다가 여럿이 출발선상에서 총소리를 듣고 달릴 때 진짜 자기의 헉헉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게 된다. 권투 선수라면 링 밖에서 후두웤을 할 것이 아니라 링 위에 올라가라! 링이 없으면 새끼줄이라도 묶어놓고 권투장갑이 없으면 주먹에 수건이라도 감고 시합을 해라. 축구선수라면 그라운드에 나가 뛰어라! 그라운드가 없으면 애들을 모아놓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나가서라도 공을 차라.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떨지말고 어디든, 어디든, 자꾸, 자꾸 발표를 해라!  그래야 경기감각이 생긴다. 정 발표할 곳이 없으면 블러그를 만들어 자기 시를 올려라. 그 블러그가 경기장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자기 시를 올려놓는 순간 그 시는 객관화되기 시작하며, 나로부터 분리되어 그 시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자기 시의 문제점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관객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연극을 하는 것과 관객을 앞에 놓고 연극을 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자기 시가 관객들 앞에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동작을 내는지 볼 수 있을 것이며, 아니면 배우가 부실하여 말문이 자꾸만 막히고, 대사를 까먹고  다리가 후들거려 식은 땀을 흘리는지 스스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선수는 죽을 때까지 그라운드에 있어야 한다. 그게 선수다! 시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15. 자기를 믿고, 자기를 사랑하라 두서없이 썼는데, 이 글이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같잖은 글이지만 나름 조금이나마 제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누고자 마음을 내보았습니다. 자기의 시작법이나 시론, 문학관과 많이 다른 부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가져갈 부분은 적당히 취하시고, 전혀 가져갈 것이 없다고 보시면 그냥 무시하고 다 버리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자기를 믿고, 자기를 사랑하세요! 시 쓰기는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데서 비롯된다. 먼저 자신을 믿어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라. 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감수성이 예민하다. 아직 때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게는 시적인 무한 광맥이 있다. 나는 지금도 잘 쓰지만 앞으로 세상을 놀래킬 멋진 시를 써낼 것이다. 이러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세상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겉마음과 속마음을 일치시켜라. 속에서 “너는 안돼! 너는 안돼!” 이런 소리가 들리면 다시 자신에게 사랑과 믿음을 줘라. 내 몸과 마음이 열려야 그때부터 뭔가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너는 잘 쓸 수 있다고. 너는 멋진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해라! 힘들고 좌절감이 올수록, 눈물이 나올수록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라. 그러면 분명 멋진 시를 쓸 수 있다! 고 나는 믿습니다.  “페루 인디언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 전 낚싯대와 대화를 한다. 너는 바다에 나가면 고기를 많이 잡게 될 거야. 이 말을 통해 그 낚싯대는 고기를 잘 잡는 낚싯대가 된다. 남태평양 어느 섬의 원주민들은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쓴다. 그들이 쓰는 무기는 날이 선 톱이 아니라 아우성이다. 모든 주민들이 쓰러뜨릴 나무 주위에 둘러서서 3일 밤낮 나무를 향해 고함을 쳐댄다. 그러면 나무속에 깃들어 있던 혼이 빠져나가면서 나무가 쿵, 하고 쓰러진다.”   다음에 계속..
11    치열한 시 쓰기 / 문정영 댓글:  조회:774  추천:0  2019-08-19
치열한 시 쓰기 / 문정영     '좋은 시란 운문으로서의 운율적 요소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이미지와 새로운 인식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 일 것이다' 1.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는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2.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형상)를 통해서 말한다.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3. 진짜시와 가짜시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겉꾸밈이 아니라 참된 마음이 깃든 시를 써야한다. 4.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시에서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5. 사물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6. 사물이 가르쳐 주는 것     사물 위에 마음 얹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는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시인은 사물을 관찰하며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7. 새롭게 바라보기     좋은 시는 남들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쓰인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어느 날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 대화를 할 수 있게되면, 사물들은 마음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시인에게 건네 오기 시작한다. 시는 사물이 시인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8.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든 자신이 몰두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출처] 치열한 시쓰기 / 문정영 |작성자 마경덕
10    시의 부활을 위하여 댓글:  조회:858  추천:0  2019-08-19
시의 부활을 위하여1/  이재무 왜 시가 읽히지 않을까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로는 내외적 환경 변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외적으로는 매체 환경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첨단 문화 매체에 의해 우리 나날의 일상이 전 방위적으로 포섭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하루 한시도 인터넷과 휴대전화에서 떨어져 살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들은 게임에 빠져 지내기 일쑤고 장년층들도 카톡, 페이스북, 트윗 등 SNS에 의존하지 않고는 나날의 무료를 견뎌내기 어려운 형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른바 전자 사막시대를 살아가는 현대판 유목민들은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며 각종 전자 기술 매체를 통해 타자와의 교감과 소통을 꿈꾸고 기대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양말을 신은 채 가려운 발등 부위를 긁는 일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불통과 소외의 가려움을 해소할 수 없다. 요컨대 시가 독자 대중에게서 멀어진 이유는 이처럼 전자 기술 매체에 중독되어 삶의 권태를 일시적으로 배설할 뿐, 진중하게 앉아 책을 읽고 공감하며 사색하는 일의 수고로움을 기피하는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내적 원인으로는 시인들의 시작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소통 불능의 자폐적 언어로 자기들만의 성채 안에 들어가 끼리끼리 암호를 주고받듯,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작동되는 현재의 소통 체계가 독자들의 시에 대한 흥미를 휘발시켜 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재를 취미로 삼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분재란 엄밀하게 말해서 장애수이기 때문이다. 왜 개인의 취향과 기호 때문에 멀쩡한 나무에 위해를 가해 장애를 만드는지 도통 그 가학 취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시작에서도 나는 이런 현상을 본다. 언어를 분지르고 비틀고 학대하여 장애어를 만드는 현상이 소통 불능의 시를 낳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좋은 시란 시상의 자연스러운 유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난해 시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해 시도 궁극적으로는 독자의 이해에 가 닿아야 한다. 해답이 없는 수수께끼는 수수께끼의 자격을 상실할 수밖에 없듯이 끝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는 시로서 자격을 지녔다고 보기 어렵다. 《시란 무엇인가》의 저자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리면 아무리 수수께끼의 난도가 높다 하더라도 거기엔 답이 들어 있어야 비로소 수수께끼의 자격이 있듯 난해 시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소통이 이루어져야만 시의 자격이 있다. 난해 시가 양산되는 배경에는 전위적 실험을 추구하기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시인이 언어를 장악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시에서 비문이 더러 비평가들의 상찬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문제이다. 비문의 남발이 시의 덕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시의 효과를 위해 우리는 흔히 ‘시적 허용’이라 하여 일부러 문법을 창조적으로 일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적 허용이라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사용해야지 이것이 시 진술의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죽하면 시인의 자질을 알려면 그가 쓴 산문을 읽어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것은 시인의 국어 사용 능력을 불신하기에 나온 말이 아니겠는가. 말이 길어졌지만 이런 내외적 이유로 인해 독자 대중으로부터 시가 멀어졌다고 생각되기에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독자들 또한, 전혀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이 대목 역시 유종호 선생의 말을 빌려 필자의 의견을 피력하자면 우리의 현실 독자들은 시와 친해지기 위한 지적 투자에는 인색하면서도 시가 어렵게 느껴지면 무조건 시인을 탓하는 경향들이 있는 것 같다. 가령 물리학이나 고등수학, 추상미술이나 고전음악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무지를 탓한다. 그러나 시가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탓하는 대신 시인들을 타매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시도 향수할 수 있으려면 지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하다못해 우리는 스포츠 관전을 하기 위해서도 스포츠 ‘룰’을 알아야 한다. 룰을 모르면 모른 만큼 관전의 쾌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는 만큼 느낀다.’는 말이 있다. 시 역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려면 시에 대한 최소한의 ‘룰’ 즉 이미지, 어조, 비유, 상징, 신화, 반어, 역설, 패러디 등등 시의 구성요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숙지는 필요하다.  
9    틀리기 쉬운 글들 댓글:  조회:1622  추천:0  2019-08-19
'되다'와 '돼' 이것도 많이 틀리는 것 중 하나입니다. '되다'와 '돼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말이 아니고, '되다'에 '-어, -어라, -었-' 등이 결합되어 '되어, 되어라, 되었-'으로 활용한 것이 줄어서 '돼, 돼라, 됐-'의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되다 되어 → 돼 되어라 → 돼라 되었다 → 됐다 '안 되'와 '안 돼' 우선 부사인 아니(안)는 뒷말과 띄어 씁니다. “영화 볼래?” “안 보(X) / 안 봐.(○)” 우리말은 위와 같이 어떤 경우도 어간(기본형 '보다'의 ‘보-)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이거 해도 돼?” “안 되(X) / 안 돼(○)” ‘안 되’는 ‘안 보’로 끝낸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안 되어'로 끝나야 하고 이를 줄인 것이 '안 돼'입니다. ‘넥타이 안 매, 그거 안 사’ 등은 ‘매다, 사다’에서 어미 없이 끝낸 문장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뒤에 ‘-어/아’가 생략된 것입니다. #바른_말   #맞춤법 [맞춤법의 재발견] 비슷한데 다른 단어 ●맞히다 vs 맞추다 모양이 비슷해 적을 때마다 혼동되는 단어가 많다. 이들을 제대로 구분해 적는 법은 없을까? 이들은 일부러 묶어서 생각해야 한다. 표기가 비슷하다면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먼저다. 묶어서 생각하여야 명확한 차이를 보기도 쉽다. 실제로 혼동되는 단어들 중 하나인 ‘맞히다’와 ‘맞추다’에 적용해 보자. 공통부분을 찾아보자. 모두 ‘맞다’를 가졌다. 이 단어들이 ‘맞다’라는 의미와 연관된다는 뜻이다. 공통부분을 빼 보자. ‘-히-’와 ‘-추-’가 남는다. ‘맞다’ ‘맞추다’ ‘맞히다’의 차이는 이 ‘-히-’와 ‘-추-’ 때문에 생겼겠다. 이들이 어떤 차이를 이끌었을까? 이들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떠올릴 순서다. 자신에게 익숙한 예문을 생각하여야 이 단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 입을 맞추다, 양복을 맞추다, 줄을 맞추다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졌는가. ‘맞추다’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맞추다’는 두 개 이상의 사물이 있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양복을 맞추다’는 양복을 사람의 체형에 맞게 하는 일이다. ‘입을 맞추다’도 두 개의 입이 필요하다. ‘줄’ 역시 이를 맞추려면 대상이 필요하다. 원래 ‘맞추다’ 자체에 ‘둘 이상의 일정한 대상들을 비교해 살피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굳이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익숙한 예문을 떠올리고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을 비교하는 활동으로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맞히다’는 어떨까. 역시 자주 쓰는 예문을 보자. - 바람을 맞히다, 정답을 맞히다 ‘맞히다’에 든 ‘-히-’는 아래 단어들의 ‘-히-’와 같다. 모두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들이다. - 읽히다, 입히다, 익히다, 눕히다, 식히다, 앉히다, 밝히다, 굽히다, 더럽히다, 간지럽히다 이들 ‘-히-’는 어떤 의미일까? 이들 ‘-히’는 ‘∼게 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읽히다’는 ‘읽게 하다’이고, ‘입히다’는 ‘입게 하다’이다. 원 단어에 ‘-히-’를 넣으면 그런 의미가 생긴다. ‘맞히다’ 역시 마찬가지다. ‘바람을 맞히다’는 ‘바람을 맞게 하다’의 의미다. 사실 ‘정답을 맞히다’는 ‘내가 문제의 정답을 맞게 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게 하다’의 의미인지를 명확히 모르면서도 일상에서 ‘바람을 맞히다, 정답을 맞히다’와 같은 문장을 훌륭하게 쓴다는 것이다. 왜 비슷한 단어들이 만들어져 우리를 혼동시키는 것일까? 새 단어를 만드는 좋은 방법은 이미 있는 단어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다. 그래야 이전 단어의 의미를 반영할 수 있다. ‘맞추다, 맞히다’에도 좋은 점이 있었다. 표기에 이미 ‘맞다’와 의미적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또 그리 어려워만 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문장을 활용하는 능력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니까. 이제 질문이 하나 나와야 한다. 국어의 모든 ‘-히-’가 ‘∼게 하다’의 의미일까? 멋진 질문이다. 안타깝게도 다른 ‘-히’도 있다. 우리는 그 다른 ‘-히-’에 대해서도 배울 것이다. ‘맞히다’에 든 ‘-히-’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8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시론에서 펌한글) 댓글:  조회:844  추천:0  2019-08-19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사오정은 우중충한 집안 분위기를 바꿔볼 양으로 도배를 새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벽지를 얼마나 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민한 끝에 옆 아파트의 평수가 비슷한 집에 살고 있는 저팔계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팔계야, 저번에 도배할 때 벽지 몇 개나 샀니?" 저팔계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응, 그 때 열 두 롤을 샀어." 사오정은 저팔계의 말을 듣고 벽지 열두 롤을 사서 도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 하고 나니 벽지 두 롤이 남는 것이었다. 사오정은 저팔계에게 가서 따지듯이 물었다 ."야, 벽지가 두 롤이 남잖아!" 그러자, 저팔계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응, 나도 그랬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모방한 것입니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창의성이란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베끼고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자신의 것으로 재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는 것은 모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방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모방하십시오. 모방은 창조를 위한 실행의 첫 단추입니다. 모방이 쌓이면 어느 순간 창조라는 질적 변화를 맞게 됩니다. 모방은 학습이고 경험이며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방을 거치지 않은 새것은 없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필수 과정이자 가장 탁월한 창조 전략입니다. 물론 단순히 훔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방하되 창조적으로 모방하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욥기 8:8)
7    안도현시론(1 . 2 , 3 , 4 , 5 , 6 , 7 , 8 ) 댓글:  조회:1062  추천:0  2019-08-19
 무엇’을 쓰려고 하지 말 것/ 안도현시론1 무엇을 쓸 것인가? 한 미국 작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마에 피땀이 맺힐 때까지 그저 텅 빈 종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파울러)라고. 말이 쉽지 그건 또 얼마나 고역일 것인가. 그렇게 했는데도 단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 말은 어떤 소재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글을 쓰려면 집중적인 몰입의 자세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글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퇴고를 완료할 때까지 당신을 따라다닌다. 그 ‘무엇(내용)’과 ‘어떻게(형식)’ 때문에 쩔쩔매는 아이들을 위해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일갈하셨다. “똥 누듯이 쓰라”고. 괜히 어깨와 펜 끝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라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고, 예쁘게 꾸미려는 마음을 없애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뜻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똥을 누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면 다시 묻자. 도대체 무엇을 쓸 것인가? 첫째,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써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 책을 읽어서 알게 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경험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직접적인 경험만큼 생생하지는 않다. 남의 입을 통해 빠져나온 말을 받아 적다 보면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할 우려가 있고, 책으로 얻는 지식과 지혜를 말로 옮겨 적다 보면 현학이나 지적 허영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시인 김용택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시를 쓴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면서,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나는 그것을 쓰겠다’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적었더니 시가 되더라”는 말도 했다. 이때의 ‘어머니의 말씀’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의미다. 둘째,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써라. 시인 이정록의 말을 잠시 경청해 보자.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전화를 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걸 쓰라고 한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고 한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안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그는 ‘문지방 삼천리’라는 말로 기발하게 압축했다. 삼천리는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다 둘러보지 못한다. 애써 둘러볼 필요도 없다. 문지방 안에 삼천리가 다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를 찾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더 귀띔한다. “오래 들여다보면 모두 시가 된다.” 역시 이정록의 어록이다. 기억해 두자. 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려면 당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젊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부터 읽어라. 젊은 시인의 시는 교과서요, 늙은 시인의 시는 참고서다. 우리나라 시인의 시는 한 끼의 밥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시는 건강보조식품이다. 제발 릴케와 보들레르와 엘리어트를 읽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 두보와 이백을 앞세우지 말라. 볼썽사납다. 그들 대가의 시집은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라. 셋째,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쓰지 말고, 낮은 곳에서 돌아앉아 우는 것에 대해 써라. 시는 절대로 ‘초월한 자의 향기’가 아니다. ‘고귀한 사랑’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아니다. ‘고행을 이겨낸 구도자의 경지’가 아니다. 시는 초월하지 못한 인간의 발가락에서 나는 냄새고, 지저분한 사랑이며, 인간과 자연의 불화이며, 한 시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번 돈 3천원이다. 시를 쓰려거든 두꺼운 문학이론서를 독파하지 말라. 창작보다 고매한 철학적 사유로 무장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론이나 세계관이 시를 낳는 게 아니다. 당신의 시가 당신의 이론과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믿어라.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이다.”(김상욱의 ) 넷째,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을 써라. 나의 경험 중에 행복했던 시간들이 남에게도 반드시 행복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과 충족은 남의 불행과 결핍의 증거임을 잊지 말라. 장미와 백합의 우아한 향기에 취하지 말고, 저 들판의 민들레와 제비꽃의 무취에 취하라. 금메달을 목에 건 승리자의 영광보다는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의 실패를 경배하라. 성형수술 한 처녀의 얼굴을 경멸하고 주근깨로 뒤덮인 소녀의 얼굴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라.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졸시 )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적 경험은 나의 경험의 일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시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인은 경험한 것에 대하여 쓴다. 하지만 경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해 본다고 많은 시적 경험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바쁘게 한 세상을 살아왔다고 그 수많은 경험들이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재를 해석하는 능력, 즉 상상력의 도움 없이 어떤 소재에 매달리는 것은 소재주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시에서 소재주의는 시단의 특정한 경향을 답습하거나 이미 규범화한 유파의 문법을 비판 없이 추종할 때, 그리고 글쓰기의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설 때 생겨난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시가 생겨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곧잘 소재주의에 빠진다. 그러므로 ‘무엇’을 쓰려고 1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칭(艾靑)의 생각도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쓰는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어떻게 쓸 것이며, 어떻게 이 세계를 볼 것이며, 어떠한 각도에서 세계를 볼 것이며, 당신이 어떠한 태도로 이 세계를 포용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 시의 소재로서 한 알의 사과가 있다. 당신에게 이 한 알의 사과에 대해 시를 쓰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적어도 다음에 제시하는 열 가지 정도의 행동을 수행하거나 사유를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시의 첫 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1) 사과를 오래 바라보는 일 2) 사과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 3) 사과를 담은 접시를 함께 바라보는 일 4) 사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뒤집어보는 일 5)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어보는 일 6) 사과에 스민 햇볕을 상상하는 일 7) 사과를 기르고 딴 사람과 과수원을 생각하는 일 8) 사과가 내 앞에 오기까지의 길을 되짚어 보는 일 9) 사과를 비롯한 모든 열매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일 10) 사과를 완전하게 잊어버리는 일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제목'은 시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안도현시론2 나는 음식점을 고를 때 간판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간판에 적힌 상호, 간판의 크기, 글자체, 디자인에 따라 그 음식점의 역사와 음식의 맛을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조’라는 말이 붙어 있으면 일단 의심한다. 역사성의 과잉이거나 후발주자의 과장 광고일 수도 있다. 또 무슨 텔레비전에 출연했다고 요란하게 써 붙인 곳이 있으면 경계한다. 그게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맛없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는 문장도 아주 싫어하며, 할인가격을 보란 듯이 써 붙여 놓은 음식점도 꽝이다. 또 있다. 터미널 앞 식당가처럼 한 집에서 조리하는 음식의 수가 많아도 기피 대상이다. 최근엔 ‘웰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간판을 달고 있는 보리밥집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웃기고 있네, 비웃어주고 만다. ◇백석 시엔 멧새 깃털도 없어 후대 독자들 궁금할 수밖에 한 끼의 밥을 위해서도 이모저모 간판부터 살피는데, 하물며 시에서 간판이라고 할 제목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으랴. 시의 제목을 이승하는 ‘첫인상’이라 했고, 강연호는 ‘이름’이라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글을 병법에 비유하면서 “글의 뜻은 장수와 같고, 제목은 맞서 싸우는 나라와 같다”()는 문장을 남겼다. 그만큼 제목은 중요하다. “한 편의 시작품은 여러 부분이나 요소들이 모여 전체의 구조를 이루는데, 이때 제목은 전체 구조를 한 곳으로 응집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조의 확장에 기여하기도 한다.”(강연호, )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백석의 시다. 이 시의 제목은 이다. 그런데 시의 전면에 멧새 소리는커녕 멧새가 빠뜨리고 간 깃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처마 끝의 명태와 이를 동일시 한 시적 화자 ‘나’만이 꽁꽁 얼어 있을 뿐이다. 백석은 왜 이런 제목을 택했을까? 독자가 전혀 뜻하지 않은 의외의 제목을 제시함으로써 제목과 내용 사이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노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각과 촉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이 시의 배경음악으로 멧새 소리를 삽입해 청각적 효과를 가미한 것일까? 후대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인 우리가 심심해 할까봐 일부러 그랬을까?(이 짧은 시 한 편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접었다 폈다 하는 이유도 시에서 제목이 그만큼 중요한 탓이다) 김춘수는 (자유지성사)에서 시인이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따라 시인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를 쓸 때 제목을 붙이는 세 가지 태도가 있다. 첫째는 미리 제목을 정해 두는 것, 둘째는 시를 완성한 뒤에 제목을 다는 것, 셋째는 처음부터 제목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타일리스트답게 시의 의미와 내용을 중시하는 휴머니스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한다. “제목이 정해져야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내용에 결백한 나머지 시의 기능의 중요한 면들을 돌보지 않는 일”이 있다며 시의 형식에 따라 내용이나 제목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무제’있지만 좋은 시 드물어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제목을 처음부터 붙이든 나중에 붙이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 고심하는 그 과정이 창작자에게는 중요하다. 제목을 붙이는 일이 시 쓰기의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제목이 시의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제목을 고치거나 바꾸는 사이에 시는 진화하거나 퇴보하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간다. 그것은 제목이 시의 내용과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에 놓여 있어서다. 실제로 제목을 이렇게 붙여야 한다는 시인들의 조언도 적지 않다. “시의 내용이 추상적일 때는 구체적인 제목으로, 구체적일 때는 추상적인 제목을 붙여주면”(박제천, , 문학아카데미>) 좋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지엽은 “제목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시의 격조와 긴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면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방법”과 “술어를 생략하거나 놀라움을 나타내거나, 감탄형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적 호기심이나 관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선정적인 제목을 다는 경우”도 예를 든다.(, 고요아침)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 그럴 때는 가 기다리고 있다. 대구 근교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박재삼의 시 다. 사실 나는 평소에 시든 그림이든 작품 앞에 ‘무제’라는 제목을 턱, 갖다 붙이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목이 없다니! 그건 자기 작품에 대해 창작자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무제’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제’를 제목으로 내건 작품 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대체로 예술가연 하는 허위의식이 발동하거나, 작품의 미숙성을 눈가림하거나, 작가의 상상력이 부족할 때 궁여지책으로 갖다 붙이는 제목이 ‘무제’를 제목으로 단 시나 그림일 터이다. 특히 비구상 계열의 그림이 이런 제목을 붙이고 화랑에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작품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나의 이런 편견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도록 만든 시가 박재삼의 다. “허리에 감기는 비단”이 왜 아픈지 나도 아니까! 대체로 제목은 시의 중심 소재를 앞에 제시하는 경우(밋밋하고 단순해서 재미는 없지만 내용보다 어깨를 낮춤으로 해서 내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나 공간적인 배경을 취하는 경우(‘-에’'-에서’가 붙은 모든 제목이 그렇다), 주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경우(김중식의 을 읽어보라), 첫 행을 아예 앞에다 내세우는 경우(최승자의 가 대표적이다)가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호기심을 유발하되 난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무겁되 가볍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연암의 호쾌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라. “억양을 반복하는 일은 맞붙어 싸워 죽이는 일과 같고, 제목의 뜻을 드러내 보인 다음 마무리하는 것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적군을 사로잡는 일과 같다. 짧은 말이나 글로 깊은 뜻을 담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은 함락된 적진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일과 같고, 글의 여운을 남겨 놓는 것은 전열을 잘 정비하여 개선하는 일과 같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와 연애하는 법'/ 안도현시론3                                                    ◇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 다작 (多作)·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때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순서를 편의대로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실로 벅차기 짝이 없다. 시간도 많지 않다. ◇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 고 한다. 첫째, 술을 많이 마셔라. 그렇다고 혼자 마시면 안 된다.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일은 시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빗금을 긋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그렇다고 해서 술이 깨지 않은 비몽사몽의 시간에 펜을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있어도 ‘취중진문’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금도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말로 학생들을 꼬드겨 술잔을 권한다.(단,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권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하고는 상종할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둘째, 연애를 많이 하라.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연애감정도 없이 시를 쓰려고 대드는 일은 굳은 벽에 일없이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담쟁이넝쿨은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셋째,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좋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자.)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방대한 저서 에서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삼대 이상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를 즐겨 읽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나는 시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200권쯤 된다. 목록을 받아든 학생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느 세월에?’ 하는 표정들이다.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라고 설명한다. 시집은 악기처럼 비싸지 않고, 무겁지 않고, 고장이 나지도 않는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연주 연습을 하듯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가방에서 잠깐 꺼내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렇게 필사한 시가 대학노트 세 권에 가득하였다. 지금도 문예지를 읽다가 좋은 시를 만나면 반드시 따로 옮겨 적어 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필사를 권한다. 아니, 거의 강요한다. 한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수백 편의 시가 적힌 자기만의 시집이 오롯이 남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다양한 시를 읽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내가 요리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거기에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빛깔과 요리방법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 먹어본 특이한 음식은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훌륭한 관찰의 소재가 되고, 그 기억은 또한 멋진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법이다. 곧 맛있는 시를 많이 음미해본 사람이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막상 주위에 시 한 편도 시집 한 권도 옆에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귀를 열고 들으면 된다. 세상의 여러 소리를 듣는 행위도 책을 읽는 행위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기형도는 어릴 적에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새어드는 빗소리를 들었다. 황동규는 (아래 시)에서 빗소리를 듣기 위해 세상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한다. 손과 발과 입과 눈은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이 마음 역시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귀한 자세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안도현시론4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시는 그 낡은 기준에 갇혀버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다. 시가 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양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감히 정리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여기에다 시인의 시작 태도가 공자의 말씀대로 ‘사무사’(思無邪) 바로 그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시인과 독자와의 교감, 즉 소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서로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언어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가교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저 유서 깊은 ‘낯설게 하기’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자 할 때 여전히 유효한 시적 방법이다. 독자를 편하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하는 시,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인 시, 바른가 싶으면 이미 비뚤어져 있는 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면 당신은 표현의 리얼리티 속에서 감동의 요소를 찾으려고 끙끙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차적으로 당신은 가장 물기 많은 말, 가장 적합한 어휘를 행간에 배치하기 위해 헤매야 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언어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날 때까지 찾고, 지우고, 넣고, 비틀고, 쥐어짜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마라. 적어도 당신 하나쯤은 감동시킬 때까지 언어하고 치고 받고 싸워라. 완벽한 세계관과 정돈된 문학적 관점이 훌륭한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텍스트를 시가 되게 하는 건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 황지우는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찾아 쓰겠다고 말한 적 있다. “어떤 텍스트를 얻은 문장을 시가 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 한마당) 때문이라고. 이 말은 이미 ‘시’로 규정된 모든 규격화된 정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과 시를 갱신해 나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은 딱히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지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손에 잡는 순간 또 달아나버리는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일찍이 간파한 고은 시인은 “시는 심장의 뉴스다”라고 멋들어진 화두를 토하기도 했다. 중국 송대의 시인 강기는 그의 시론집 에서 시에는 네 종류의 높은 경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치가 높은 경지요, 둘째는 뜻이 높은 경지요, 셋째는 상상력이 높은 경지요, 넷째는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다. ‘시적인 것’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꽤 유익한 사색을 제공해주는 시론이다.  그는 먼저 “막혀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통하는 것을 이치가 높은 경지”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치란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섭리를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경융합(情景融合)을 중요한 시의 가치로 여긴 동아시아의 시학과 동일성의 미학을 강조한 서양의 시학이 모두 이런 경지를 향한 시적 모색이라 할 수 있겠다. 천둥번개 지나간 곡우날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쳐 살아 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이안의 이다. 우박은 꽃잎을 찢는 공격적 주체가 아니고, 꽃잎은 우박에 찢어지는 소극적 객체도 아니다. 엄연한 자연의 질서 앞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박은 꽃잎을 깨우고 꽃잎은 우박을 맞이할 뿐이다. 낯선 우박과 꽃잎 사이의 작지만 소중한 소통의 숨길이 우주 전체의 봄을 불러온다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시다. 이때 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으로도 분명 “설레설레” 봄의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내 자신의 언어 만날 때까지 찾고 넣고 비틀고 흔들어라〉 두 번째로는 “표현해낸 것이 표면적인 의미를 초월하게 되는 것을 뜻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문태준의 짧은 시 한 편()을 보자.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 표면적으로는 써레질이 끝난 뒤 흙물이 가라앉는 모습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흙물이 그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이라고 말하는 것도 범상하지 않지만, 그것을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으로 확장하는 상상력은 놀랍다. 그리하여 “우레와 침묵 사이에” 있는 존재의 고독과 무상함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황새는 단순한 조류가 아니라 드높은 정신주의의 한 표상으로 읽힌다.(‘써레’와 ‘우레’라는 유사한 음성기호가 동일한 의미로 나란히 서 있는 언어유희도 볼만하다.) 세 번째로 “깊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연못이 맑아 밑바닥이 다 보이듯이 훤하고 분명하게 써내는 것을 상상력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나희덕의 시 를 보자. 두 딸과 꼽추인 어미 사이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실을 이토록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부조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이다. 그 실은 급기야 모녀를 바라보는 화자에게까지 연결되고,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사람이 시인이다. 다음은 김종삼의 인데, 이 시에서도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된 실을 본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일제 때 10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밥 한 상에 10전이라니 그리 많지는 않은 액수였을 것이다. 분명 구걸로 얻게 되었을 10전짜리 두 개를 부모의 생일 밥값으로 당당하게, 그러나 가련하게 내미는 어린 소녀의 손목이 보일 듯하다. 그 눈망울도 보일 듯하다. 이렇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시를 읽다가 보면 사랑이니 효도니 인정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낡고 뻔뻔한 소리인지 깨닫게 된다. “특이하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으면서 문채를 벗어 떨치고, 그것이 오묘하다는 것만을 느낄 뿐 그 오묘하게 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을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묻자. 시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시적이라는 말을 배반하는 방식을 통해 시적이라는 말을 진화시킬 수는 없을까”(이원, 2007년 가을호)를 고민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안도현/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안도현시론5 비유는 일상적 언어 규범에서 일탈해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는 언어 용법이다. 은유·직유·제유·환유의 뒷글자인 ‘유’(喩)는 ‘말하다’는 뜻의 ‘구’(口)와 ‘옮기다’라는 뜻을 가진 ‘유’(兪)의 결합이다. 즉 비유란 말의 원래 뜻을 옮겨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나리꽃은 노랗다”는 일상 언어를 “개나리꽃은 병아리 부리다”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바꿔보자. 이 ‘병아리 부리’ 속에는 노란 색깔 이외에도 개나리꽃의 모양, 꽃잎의 연약함, 봄의 이미지 등이 첨가된다. ‘노랗다’는 일상 언어의 평이함이 전면 확장되어 의미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상과 대상 연결하는 ‘은유' 비틀고 꼬며 덧칠해야 할까 여러 가지 비유 중에 은유는 차별성 속에서 동일성을 찾는 수사법 중의 하나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는 대립적인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누가 뭐래도 시는 은유의 덩어리다. 은유적 표현을 한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시라는 양식이 은유에 기대어 태어났고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때로 은유의 폐해를 지적하는 연구도 우리의 흥미를 끌어당긴다. 구모룡의 에 따르면 시는 근대적 개념인 세계의 자아화나 동일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은유는 다른 대상을 자기화하는 수사학이다. 다시 말해서 은유는 대상과 대상을 강제적으로 연결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은유적 욕망이 근대에 와서 주체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를 낳았다는 진단이다. 이처럼 “타자에게 폭력적”인 은유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론을 바탕으로 하는 제유 시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말을 비틀고 교묘한 표현을 일삼는 이들에 대한 비판에 일찍이 허균도 가세했다. “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명문장을 보라. 모두 문장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어려운 말로 교묘하게 꾸민 구절이 있는가? (중략) 제자백가서만 보더라도 모두 자신들의 도리를 논했기 때문에 그 글은 쉽고 간결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는 문장과 도리가 둘로 쪼개져 마침내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꾸미는 일이 생겨났다. 이것이야말로 문장의 재앙이다.”(허균 )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민병하 선생님도 수원 근처에 오천평이나 가졌는데…… 싼 땅이라도 좋으니 한 평이라도 땅을 가지고 싶다. 땅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좋으랴…… 땅을 가지고 싶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땅을 가지고 있으면,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 천상병의 시 이다. 시인은 가진 땅이 한 평도 없어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땅을 가지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소유욕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라 할 만하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이런 게 무슨 시인가, 되묻고 싶을 것이다. 이 시에는 시적인 비유도 없고 시적인 발견도 없다고, 이런 시라면 하룻밤에도 수십 편을 쓰겠다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천상병이라는 유명한 시인이 쓴 것이니까 좋은 시라고 추어올리는 게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는 아주 작지만 근원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땅을 가진 뒤에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거나 거기에 부동산을 짓겠다는 투기 욕망 따위는 일절 없다. 오히려 그런 심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시인은 그저 초목과 꽃을 심겠다고 한다(그러다 보면 땅값이 오르겠지, 하고 의심한다면 당신은 정말 속물이다). 이러한 단순성의 미학이 천상병이라는 시인을 만들었다. 이 시에서 무욕의 욕망을 읽고 은유 아닌 은유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은유의 성채 입구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러니 시를 쓰기 위해 책을 뒤져 은유를 배우지 마라. 은유를 잘못 배우면 말을 요리조리 비틀고 무슨 문장이든 꾸미려 하고 교묘하게 꼬는 일이 시의 전부인 줄 알게 된다. 나는 그것을 ‘비유의 덧칠’이라고 부른다. 비유를 덧칠하지 않고 단순한 상상력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저녁에 술 마시러 나갈 때 천상병의 이런 시 구절을 흥얼거릴지도 모른다.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일부분)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가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미당이 작고하기 두 해 전, 1998년 1월호에 발표한 시 다. 그 한 해 전에 나온 마지막 시집 (시와시학사)도 그렇지만 말년에 미당은 여든을 훨씬 넘은 나이에 놀랍게도 소년의 목소리를 얻었다. 어른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상사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소년은 단순하게 세상을 읽으려고 한다. 삶의 갈등과 고뇌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당의 시에 나타나는 이 단순성은 이 세상을 한 바퀴 휘휘 돌아본 뒤에 마침내 다다른 시선(詩仙)의 경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과 인생의 산전수전 끝에 미당은 천진성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눈을 갖게 된 것이다. ◇특정한 틀에 갇히지 말고 천진난만한 상상 표현하길 내 아내는 여기 등장하는 ‘늙은 아내’와 달리 내 담배 재떨이를 아침저녁으로 비워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집에서 내 재떨이는 담배꽁초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버린 휴지 조각, 방바닥에서 집어낸 머리카락, 손톱 따위들을 담는 쓰레기통쯤으로 취급되어 왔었다. 나는 이 시를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아내는 시를 보고 뭔가 찔리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날부터는 정말 내 재떨이도 확연히 달라졌다. 아침저녁으로 담뱃재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재떨이를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도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담배 재떨이는 대체로 둥글다. 그 둥근 모양과 부부 관계가 알맞게 버무려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보름달을 떠올린다. 모자라는 것도, 더 채워야 할 것도 없는 보름달의 원형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 닿아야 할 사랑의 종착지를 상징한다. “아 내곁에 누어있는 여자여./ 네 손톱 속에 떠오르는 초생달에/ 내 戀人(연인)의 꿈은 또 한 번 비친다.”(〈눈 오시는 날〉 일부분) 그동안 미당의 시에 숱하게 등장하던 초생달의 이미지는 이 시에 이르러 비로소 환한 보름달로 가득 차올랐다. 미당은 자연스럽게 보름달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단순함의 힘이다.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의 이다. 근래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행복했다. 특정한 개념과 틀에 갇히지 않은 상상력이 이런 유쾌한 시를 생산했다. 엉뚱함의 힘이다. 꽃이 소를 웃겼다고, 소의 발바닥을 간질였다고, 연약한 꽃이 육중한 소를 살짝 들어 올렸다고 한다.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 세상에 시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엉뚱한 발언을 하랴.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사랑하라 그러면 써질지니'/안도현시론6 ●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 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시인이 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최영철,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 장옥관, 전문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새로 발명하지 말고 있는 것을 발견'/안도현시론7 생텍쥐페리의 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바꿔보면, 가장 중요한 진실은 사막의 우물처럼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시학도 이 마음의 눈을 강조한다. 사물의 껍질보다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것이다. 이른바 ‘관물론’(觀物論)이 그것이다. “관물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어떻게 볼 것인가? 거기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지나치면서도 간과하고 마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어 낯설게 만들기, 나아가 그 낯섦으로 인해 그 사물과 다시금 새롭게 만나기,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格物) 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는 의미를 늘 깨어 만날 수 있다. 시인은 반란자다. 그의 눈이 포착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다. 새로워야 한다.”(정민, )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곳, 보물 같은 의미들이 숨어있다 우리의 연암도 그림의 리얼리티가 단순히 사실적 묘사에서 오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좋은 그림은 그 물건과 꼭 닮게만 하는 데 있지 않다.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고는 훌륭한 그림이랄 수 없다. 잣나무를 그리려거든 잣나무 형상에 얽매이지 마라. 그것은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마음속에 푸른 잣나무가 서 있지 않고는, 천 그루 백 그루의 잣나무를 그려 놓더라도 잎 다 져서 헐벗은 나목과 다를 바가 없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워라. 마음의 눈으로 보아라.” 또 청대의 시인 심덕잠(沈德潛)도 유사한 말을 남겼다. “대나무를 그리는 자는 반드시 완성된 대나무의 모습이 가슴속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 시인은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을 눈으로 발견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없는 멋진 이미지와 새로운 의미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시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발명가’가 아니라 ‘발견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라. 이미 이 세상에 와 있으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들이 있다. 보물인 데도 보물로 보지 못하고, 숨겨진 의미가 있는데도 의미 를 찾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 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머리를 굴리며 하늘에서 뚝 떨어 지는 시를 기다리지 마라. 발명하려고 하지 말고 발견하 도록 애써라. 살갗을 보지 말고 뼛속을 보라.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졸시 전문 이 시의 소재는 겨울 강가에 눈이 내리는 풍경이다. 실제로 어느 겨울 날 나는 강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깔리기 시작하는 섬진강을 갔고, 그 전날 내린 눈이 살얼음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문득 얼음 위에 내린 눈은 왜 녹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물과 눈송이 사이에 어떤 약속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궁금했다.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곰곰 생각하다 보니 이런 시 한 편이 태어났다. 시의 중간에 등장하는 “세찬 강물 소리”는 그 무렵 신문에서 읽은 과학상식 기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모든 물소리는 물방울들이 깨지면서 내는 소리가 모인 거라고 했다. 폭포 소리가 큰 것은 물방울들이 더 많이 깨지기 때문이고, 여울에서는 물방울들이 돌멩이에 걸려 깨지기 때문에 물소리가 난다는 것이다.(나는 초등학생들이 보는 과학이나 생물 관련 책을 자주 뒤적거린다. 거기에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데도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나무가 새로 잎을 피워 내거나 떨어뜨릴 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 나무를 노끈으로 묶거나 필요 이상으로 밤에 불빛을 쪼이면 나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등은 얼마나 매력적인 시의 소재들인가.) ◇삶을 관찰·발견·반성할 수 있게 가슴속 망원경·현미경 갖추길 시인도 과학자의 관찰에 버금가는 관찰의 자세로 사물을 봐야 한다. 아니, 사물의 현상이나 외피에 집중하는 과학자의 관찰을 넘어 시인은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과학은 삶을 앞으로 진보시키지만 시는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양식이기에 더욱 그렇다. “쉽게 지나치는 일상의 한 부분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해 내고 이것을 망각하고 사는 것에 대해 반성을 하고 그 관심이 타인에게로 전해지게 하는 것은 오로지 좀 더 여유롭고 또 세심한 관찰에서 비롯된다.”(김상욱, ) 김명수 시인의 짧은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전문). 바닷가 백사장 위에 찍힌 발자국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파도가 밀려와 그 발자국을 지우는 풍경도 바닷가에서는 흔하게 보게 된다. 그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데서 오롯이 시가 생겨난다. 발자국 흔적의 행방을 찾는 이 의문은 ‘품어주다’라는 동사를 만나 아연 시적 깊이를 획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백사장 위의 발자국을 오래 바라보며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만나게 된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의 표제작인 다음 시의 제목은 이다. 관찰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 시에서 ‘바다의 눈’은 바로 ‘시인의 눈’이다. 바다는 육지의 먼 산을 보지 않네 바다는 산 위의 흰 구름을 보지 않네 바다는 바다는, 바닷가 마을 10여 호 남짓한 포구 마을에 어린아이 등에 업은 젊은 아낙이 가을 햇살 아래 그물 기우고 그 마을 언덕바지 새 무덤 하나 들국화 피어 있는 그 무덤 보네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 곳을 보려면 망원경이 필요하고, 미세한 것을 보려면 현미경이 필요하다.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1970~80년대에 시인들은 주로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았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시인들은 현미경으로 사물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미시적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광장’을 바라보던 시인의 눈이 ‘골방’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광장에 서서 망원경을 들고 군중을 바라보던 ‘그’가 골방의 ‘나’로 회귀한 형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외부를 향해 외치던 3인칭의 목소리를 1인칭의 내면 탐구 형식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장의 햇빛을 뒤로 하고 골방의 그늘에 들어앉은 시는 그 이전보다 훨씬 촘촘한 상상력의 밀도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골방은 음습해서 점점 자폐적 공간으로 바뀌어 가기 마련이다. 광장을 떠나온 자아는 아예 광장을 외면하거나 기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 단계 한국시의 자폐적 경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인의 눈과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할 때가 되었다. 시인은 옆에 항상 망원경과 현미경을 함께 준비해 두어야 하고, 광장과 골방 사이에서 그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말고 그 둘 사이에서 긴장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인이란 시를 빚는 사람이면서 자기 자신을 빚는 사람이므로.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 한 편에 이야기 하나를 앉혀라'/ 안도현시론8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 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 순이의 얼굴이 핼쑥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1970년대가 그랬다. 표현의 자유란 애초에 없었으므로 눈앞에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그때 신경림의 가 솟아나왔다. 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따지듯이 되새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 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주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 수 있게 되었다. ◇침묵 강요하는 참담했던 시절, 신경림 ‘농무’ 현실묘사 ‘충격' 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 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문학 소년이었다. 쥐뿔도 없는 내가 잘난 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술을 나에게 전수한 것은 요샛말로 모더니즘이었다. 나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언어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다. 삶의 남루와 슬픔을 함부로 까발리지 않아야 한다는 창작의 원칙 같은 것도 나름대로 정해두고 있었다. 나는 그저 향기롭기만 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겨운 풍경들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전에는 나와 어울려 놀았으나,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이 생생하게 다시 인화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시집 속의 평범한 좌우명 하나가 실제로 시골 큰집 내 사촌형의 책상 앞에 붙어 있을 것만 같았다. 쓸쓸하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하찮은 세계가 한 권의 시집 속에 그렇게 눈부신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다니! 게다가 구태여 말을 비비꼬지 않더라도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며, 한 토막의 이야기도 서정을 만나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롭게 배웠다. 서정과 서사의 결합, 즉 시에다 이야기를 담는 우리 시의 전통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화의 에 대하여 김기진은, 이 작품이 “생생한 소설적 사건”과 “현실, 분위기, 감정의 파악이 객관적, 구체적”임을 근거로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현실을 형상화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창작방법론으로 이 용어를 제시한 것이다. 이야기가 담긴 서정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시가 이용악의 이다. 이 시에서 이용악은 초근목피의 세월이 우리 민족의 생존을 송두리째 뒤흔들던 1930년대의 상황을 어린 화자의 눈을 통해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그 당시 민중들의 생활상을 마치 단편소설처럼 펼쳐 그려낸 것이다. 이 한 편의 시 안에는 오랜 세월 동안 한 가족이 겪어야 했던 슬픈 이야기가 들어앉아 있다. 아이들은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가장은 가장대로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했다. 떠나지도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시에 하나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들어앉히는 이 방법은 1970년대 김지하에 의해 ‘담시’라는 형식으로 발전했고, 신경림의 를 거쳐 1980년대에는 최두석 등이 ‘이야기 시’라는 개념으로 확대해서 정리한 바 있다.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새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이용악의 는 전체 5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짧은 시다. 언뜻 보면 이 시에는 세부적인 사건도 없고, 특정한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나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장중한 서사적 뼈대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어머니의 상실감을 아프게 바라보는 화자가 선명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슬픔은 ‘이슬이 두어 방울’ 속에 집약되어 있다. 이 두어 방울의 이슬은 이슬의 양이나 슬픔의 무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두어 방울은 현실의 슬픔이 감당할 수 없이 벅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반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슬픔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의 표상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용악은 ‘달빛·박꽃·이슬’이라는 전통적인 자연서정에다 당대 민중의 보편적인 삶의 고통을 ‘두어’라는 관형사로 압축하고 싶었으리라.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의 시 전문이다. 단 석 줄로 삶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이 시는 자꾸 읽어볼수록 아프다. 문장의 끝에 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 그리고 마침표를 유심히 보기 바란다. 첫 행의 물음표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두 번째 행의 말줄임표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의 좌절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마지막 행의 마침표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으로 인한 체념, 혹은 그래도 살아가야 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따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에서 외상값의 의미도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확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에 대한 빚,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빚, 이웃에 대한 빚… 그런 외상값 때문에 사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이야기-서정 만나면 ‘시’ 탄생 감정 구성하고 소재 장악해야 이렇듯 아무리 짧은 시라도 한 편의 시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사건의 전개와 인물의 배치에 관심을 두는 서사지향의 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하나의 관념이나 순간적인 이미지의 포착만으로도 충분히 한 편의 시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장악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를 쓸 때처럼 시에 도식적인 육하원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의 독자가 바라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머리는 매우 세밀한 육하원칙을 바탕으로 시를 통제해야 한다. 시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감정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구성한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은 감정의 순서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시도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하며 시에도 기승전결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시의 기승전결 구조가 겉으로 보이지 않고 시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시인은 머리와 가슴 속에 이야기를 쟁여두고 시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 나희덕의 전문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이 시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판타지의 힘을 빌린 아기 엄마 이야기 하나와 그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귀가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는 모성도 감동적이지만 삶의 어떤 집착으로부터 풀려나는 한 인간(화자)의 모습이 시를 읽는 독자까지도 시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여 해방시킨다. 시인의 뛰어난 소재 장악력이 감동을 낳았다.                (안도현/ 시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6    시 평론 댓글:  조회:1731  추천:0  2019-07-19
#시론               원관념과 보조관념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습관에 관한 얘기를 더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저의 경우로 말씀드렸듯이 첫번째는 같은 단어는 웬만해서 두번 이상 쓰지 말자 두번째는 인칭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자                 꼭 써야 한다면 한번만 어쩔 수 없을 때 두 번 꼭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시맛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 중복된 단어 조심하자 입니다 초심자들의 경우 무엇을 강조하고자 할 때 이런 실수가 나옵니다. 강조를 하고 싶어 쓰다보면 이 말도 그 말이고 그 말도 이 말인데 자꾸 가져다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다가 한글이 참 어려워서 단어 자체가 그런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름이 운집한 이경우도 사실은 한문으로 운이 구름 운이라 중복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것들 말고도 역전 앞에서도 전이 한문으로는 앞전자라 유의해야 합니다 아무튼 중복되는 단어를 조심해서 사용하자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심상법에 관한 말씀을 드렸는데 조금 깊이를 더하려 합니다 어쩌면 진짜 시를 쓰는 법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원관념과 보조관념인데요 1. 원관념이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고 2.보조관념은 내가 생각하는 원관념의 뜻이나 분위기가 잘 살도록 보조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원관념) 나룻배 (보조관념)                   당신은 (원관념)  행인(보조관념)이 됩니다   * 내 마음은 호수처럼 맑다. -------- ------- ☜ 직유법 * 내 마음은 맑은 호수요. ------------------------- ☜ 은유법 예시로 저의 졸시 배롱나무를 보겠습니다      배롱나무   너 없이 피고 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배롱나무가 되었다 중구난방 피는 너를 안고 밑둥이 허예지도록 나는 야위웠는데 시든 날에 여름은 가고 내 모르는 눈물이 동강에 섞이었다 희나리처럼 설운 나는 먹빛 하늘에 살 수 없었으나 명패가 삼문三問인지라 마음만은 겹겹으로 지키었다 사는 것이 한 생만은 아니라서 나는 봄마다 너를 안고 일어나 햇불이 무색하도록 꽃 피게 하리라 이 글에서 너는 원관념 피는 꽃은 보조관념                  나는 원관념 배롱나무는 보조관념입니다   ■  '가려뽑은《무한화서》'/ 이성복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前提를 무시하는 거예요. 3 언어는 때 묻고 상스러운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어요.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에요. 언어 자체가 대상이고 목적이에요. 언어를 수단으로 사용하면 언제나 결핍감을 느껴요. 글쓰기는 언어 자신의 탈주이며 모험이에요. 16 우리는 시를 쓰면서도 언어를 불신해요. 불성실한 하인쯤으로 여기는 거지요. 언어는 우리보다 위대해요. 언어를 믿어야 언어의 인도引導를 받을 수 있어요. 18 우리의 세계는 언어로 된 세계에요. ‘언어 너머’ 또한 언어이고, 지금 이 말조차 언어예요.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20 머리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이지만, 손은 욕망과 무의식에 가까워요. 시는 머리를 뚫고 나오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걸으면 벌어지고, 멈추면 닫히는 치파오라는 중국 치마 같은 거지요. 24 턱수염을 아래서 위로 쓸어 올릴 때의 느낌 아시지요. 그처럼 말에 저항이 없으면 바로 산문이에요. 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35 말은 작고 가볍게 해야 해요. ‘…임에 틀림없다 must’ 보다는 ‘…일지 모른다 may’가 힘이 있어요. 판단 유보의 어조사 ‘의矣’를 즐겨 쓰는 공자에 비해, 단정적 어조사 ‘야也’를 자주 쓰는 맹자를 ‘아성亞聖’이라 한 대요. ‘성인’에는 좀 못 미친다는 것이지요. ‘삼천년뒤 성인이 다시와도 내 말은 못 바꾼다 百世聖人復起 不易吾言’는 그의 말은 너무 도도해서 힘이 떨어져요. 36 시는 빗나가고 거스르는 데 있어요. 이를테면 ‘서재’와 ‘책’대신 ‘서재’와 ‘팬티’를 연결하는 식이지요. 39 항상 입말에 의지하세요. 가볍고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입말이 소중한 거예요. 우리 누구나의 인생처럼…… 65 시는 단도직입單刀直入이고 단도직입短刀直入이에요. 짧은 칼 한 자루 들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거지요. 시는 백미터 달리기에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말을 주저리주저리 하겠어요. 말수를 줄여야 실수도 적어요. 67 가야금 탈 때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어야, 깊고 부드러운 음이 나오지요. 멋진 이미지로 장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지긋함’이에요. 85 시는 반전反轉의 힘이에요. 행과행, 연과 연사이에 전환이 있어야 해요. 가령 ‘꽃이 피었다 - 새가 울었다’는 연결보다 ‘꽃이 피었다 - 새가 죽었다’는 연결이 힘이 있어요. 86 '아주머니 속에 주머니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벗겨보세요. 주머니 속에는 또 머니가 있지요. 그러니까 아주머니의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양파 껍질 벗기듯이 벗기다 보면 나중엔 아무것도 안 남아요. 시는 대상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99 시적 언어는 치타가 누의 목덜미를 무는 것처럼 대상의 급소를 공격해요. 그 한순간을 위해 '뜨거운 솥을 핥는 개'처럼 자꾸 말을 던져야 해요. 135 멋있는 것, 지적知的인 것, 심오한 것 찾지 마세요.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에서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시예요. 사소한 일상보다 더 잔인한 건 없어요. 죄수를 발가벗겨 대나무밭에 눕혀 놓으면, 나날이 커 올라오는 죽순竹筍에 찔려 서서히 죽어간다고 하지요. 170 시는 천둥벼락이고 집중호우예요.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써야 힘이 있어요. 악어가 누의 목덜미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 보셨지요. '저 미안하지만 손 좀 잡으면 안될까요' 이러지 말고 바로 잡아버리세요. 안 그러면 힘들어져요. 171 항상 보여줘야해요. 내가 왜, 어떻게 우울한지 알려고 글을 쓰는 건데, '나 우울해, 건드리지마!' 이러면 되겠어요. 보이게 쓸 형편이 아니라면 말의 꼬임새라도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나'도 살고, '우울'도 살아요. 174 시 쓰기는 봉오리가 피어나거나,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어떤 모양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려워요. 또 시는 재즈 연주와 비슷해요. 과정이 목표이고, 멈추는 곳이 끝나는 곳이에요. 217 시는 침술과 같아요. 문제 되는 부위를 정확히 찔러 통증을 진정시키는 것. 투약이나 수술 없이도, 약간의 아픔만으로 고통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거. 시는 한의학과 마찬가지로 오랜 전통이에요. 278 다친 새끼발가락, 이것이 시예요. 307 시는 알고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가운데 알게 되는 거예요. 331 막막한 바다에서 어부는 어디에다 그물을 쳐야 할지 알아요. 간절함과 안쓰러움,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이 시의 포인트이고 기술이예요. 423 시하고 연애하고 같다고 하지요. 더 깊이 들어가면 저절로 빠져나올 텐데, 나오려고 하니까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425 이유 없이 상대가 함부로 대하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세요. 그 대신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세요. 나한테 잘못이 없으면 그 사람 문제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수신하지 않은 편지는 발신자에게 돌아간다 하잖아요. 430 왜 자기 눈에는 자기가 안 보일까? 470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있지요. 사마귀가 겁 없이 수레 앞에 버티고 서서 한번 해보자고 덤비는 것이지요. 참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짓이지만, 시도 그런 것 아닐까 해요. 아름드리 나무 기둥을 뽑겠다고 부둥켜안고 용써보는 것.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실패 안 할 수밖에 없다는 듯. 이 '올 인'하는 것. 그거라도 안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이성복 시론집《무한화서》에서)   그림에 빗대어 말할 때, 시는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읽으며 선명하게 그려지는 어떤 풍경이 없다면 모호한 안개 속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읽으면 유년의 한때가 머릴 스치고 지나간다. 향토적이며 묘사적이며 또한 감각적인 시의 전개는 누구나 읽는 순간부터 자신의 풍경을 그리게 된다. ‘향수’의 전개 방식은 후렴구가 반복되는 병렬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선명한 영상과 동시에 감각적 언어의 붓질로 인하여 화면 가득 고향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에 젖어 들게 한다. 연마다 시상을 전개하거나 매듭지어 연결하는 영상미적 집약의 서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한 편 속에 시각적, 청각적, 공감각적, 촉각적 시상과 심상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개연성과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어 글이 아닌 그림을 감상한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누구나 아는 작품이지만 ‘시와 풍경’이라는 글제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기에 전문을 인용해본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 정지용』전문 인용 문학의 장르는 다양하며 시 또한 시 속의 시 장르는 매우 다양하고 그것은 표현의 기법 이전에 심상의 전이와 시상의 표출 방식에 대한 시인 자신의 다양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얼마든지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관찰자의 각도, 시간, 마음상태, 풍경의 배경 이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이는 그림이 나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림과 시의 동질성을 분석해본다면 같으면서 다르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면 다만, 풍경화일 것이다. 하지만 풍경 뒤에 분명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 웅숭깊듯 시 역시 풍경 너머 보이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스스로 먼저 감동해야 한다. 자기 감동이 선행되지 않은 글은 사상누각이며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좋은 풍경화를 아무리 세밀하게 원본과 흡사하게 그려낸다 해도 복사본에서는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타인의 글을 답습하거나 타인의 붓을 가져와 내 글에 현란한 채색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풍경으로서의 존재가 없다. 내 글에 대한 질감과 색채를 개발하고 연구할 때 그것이 풍경이 가진 배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의 기초가 될 것이다. 시와 풍경, 풍경과 배경을 나름의 색으로 채색한 몇 작품을 소개해 본다. 안개 속 풍경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무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는 거지요? 무섭니? 물어주시면 아니 안 무서워요! 큰 소리로 대답할게요 이 안개 속엔 아직 이름도 모른 채 심어논 내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짠하게 자라는걸요! 나무는 언제나 나무인걸요! 『안개 속 풍경 / 정끝별』전문 인용 밥통의 계보를 묻다 서동인 부엌에 나뒹구는 파도 빛 얼룩진 밥통 뚜껑을 오랜만에 열었네 세상에, 주인이 먹다 남은 공양미 곰팡이 꽃망울 터뜨리는 텃밭에 나비도 없이 어디선가 검은 구름덩이 내려앉아 엉덩이를 살짝 살짝 내밀고 있었네 속의 것들이 울렁거리는 내 속도 내시경을 들이밀면 저런 풍경일까 하늘까지 뚫린 산동네 골목길을 기어 내려와 살아서도 싸늘한 지하 셋방이 싫어 공중에 매달린 거미집 옥탑방 까지 힘없는 주인을 따라 세간 옮길 때마다 용달차 한구석에 처박힌 불쌍한 녀석, 한강도 서너 번 건너 본 밥통은 현기증 때문인지 제대로 밥 지을 줄도 모르네 어느 해 였던가 유조선 시프린스호 기름띠 보상으로 바닷가 우리 家系에 걸어 들어온 너의 정체, 그 겨울 뚜껑을 연 양식장 굴껍데기 꺼먼 속살에 놀란 아버지 발길에 차여 파도 빛 멍든 너를 새 것으로 바꾸진 못하겠네 문득, 병들고 지친 밥통의 계보를 묻다가 거울 속 네 주인처럼 짠한 생각이 들었네 『밥통의 계보를 묻다 / 서동인』전문 인용 운주사 깊은 잠 이명윤 그들의 꿈에 잠시 스쳐가는 풍경처럼 다녀왔다 눈썹이 지워지고 입술이 지워져가는 석불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눈이 사라졌으니 잠에서 번쩍 눈뜰 염려가 없고 입술이 지워졌으니 또다시 저녁이 와도 끼니 걱정 안하실 일 무심한 얼굴을 더듬어 내려오다 두 손으로 곱게 모은 기도를 보았는데 언젠가 불타는 세월이 기도 앞을 쿵쿵거리며 뛰어다녔을 때도 철없이 눈썹을 쪼던 새가 어느덧 눈이 멀어 발등에 떨어져 죽었을 때도 꿈쩍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 기도보다 깊은 잠에 빠진 까닭이다 점점 얼굴이 지워져가는 얼굴들이 착한 아이들처럼 나란히 앉아 세월 좋게 주무시고 있었다 덩그러니 코만 남은 얼굴이 아침도 벗고 저녁도 벗고 훌훌 표정도 벗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떤 분은 아예 자리를 깔고 하늘 아래 누워 계셨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들을 (허공에 주렁주렁 박힌 창백한 눈과 입들을) 본체만체 저들끼리 야속하게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운주사 깊은 잠 / 이명윤』전문 인용 위 인용한 세 편의 작품의 공통점은 풍경에서 풍경의 배경을 담아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만의 붓을 들어 고유의 색을 채색하여 그 온도를 차별화했다는 점에서 본 글의 주제어인 시, 풍경화에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에 인용했다. 모던 포엠 6월호 글 감상의 주제는 시, 풍경화에 부합하는 작품 세 편을 선별하여 풍경이 담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주목해 본다. 단순하게 풍경을 그려내지 않고 세상을 담는 의미를 부여한 현상을 생각하며 시를 감상해 보자. 첫 작품은 송병호 시인의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라는 작품이다. 달동네의 손금을 읽는 오후 송병호 좁은 고샅길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그 골목에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 깊은 손금들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의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아직은 흐릿한 장래선만 또렷한 선이다 실선들, 흔들릴 때마다 칙칙한 배경의 가끔 끊어졌던 동시상영 두 편의 영화는 오간 데 없고 낡은 영사기 한 대 골목 짓무른 앵글로 바람을 채록하고 있다 한때는 민심을 쥐락펴락했을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깨진 유리창 밖으로 하루를 점치지 못하는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수면 手面의 수상학은 믿을게 못 된다고 툴툴거리며 다 닳아빠진 지문을 가지런히 포개 혼자 졸고 있는 노파 요즘은 거의 사라진 단어 달동네. 달동네는 도시의 외곽이나 산등성, 산비탈 등 비교적 높은 지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의미한다. 달동네의 연원은 해방 이후 귀국한 해외동포들과 종전 이후 월남한 난민들이 도시의 외곽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달동네에 대한 의의와 평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이후 약 40년 동안 도시빈민 주거지역의 전형이었던 달동네의 도시빈민촌은 이른바 달동네 문화라고 부를 만큼 능동적이고 건강한 빈민문화를 상징했다. 이농민들이 주로 거주했던 달동네는 값싼 주거지인 동시에 생존의 공동체였다. 농촌의 이웃관계가 지속되는 공동체였으며, 험난한 도시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기착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재개발사업으로 달동네의 도시빈곤층은 주거비가 싼 곳을 찾아 단독주택지의 지하방, 옥탑방, 비닐하우스, 쪽방 등으로 흩어졌다. 일반인들에게 빈곤층은 눈에 띄지 않는 집단이 되었고, 빈곤층은 고립되면서 이전의 공동체를 통해 얻었던 물질적·정신적 이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 백과 사전』인용 달동네와 손금. 얼핏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지만 시인은 폐가처럼 변한 달동네의 스산한 풍경 속에서 그 배경을 읽고 있다. 시의 전반을 흐르는 기조는 관찰이 아닌 관조를 바탕으로 시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오래된 기억의 골목과 병치하여 손금이라는 占 행위와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그 골목에 숙명처럼 상처 안고 똬리 튼 골 깊은 손금들이 있다 명랑이발관의 해맑은 미소를 지나쳐 엇갈린 오복담뱃가게 생명선은 차마 풍년 쌀가게의 재물선과 영영 만날 수 없는 구획이 되었다 시인이 채록한 달동네에 대한 온도는 2연 첫 행에 기록하고 있다. 달동네의 골목은 돌아도 돌아도 언제나 제자리인 골목에서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그 골목의 이리저리 난삽하게 이어진 골목과 골목의 입구와 출구는 입구라는 개념도 출구라는 개념도 없다. 들어오는 곳이 나가는 곳이며 나가는 곳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것은 나갈 곳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느낌이다. 명랑이발관, 오복담뱃가게, 풍년 쌀가게가 의미하는 삶의 고단한 무게를 시인을 달동네라는 손바닥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3행에서 시인은 달동네의 희망을 보여준다. 그나마 입시학원의 아직은 흐릿한 장래선만 또렷한 선이다 다른 모든 손금의 선들은 희미하고 퇴락하고 지워져 더 볼 것이 없지만 흐릿한 장래선은 또렷하다는 표현에서 시인이 던진 메시지는 경쾌하고 밝은 모습을 독자에게 던진다. 선과 선의 공존 바닥이 다른 면 위의 또 다른 점선들 도시의 손금으로 남아 있다 손바닥 위의 손금은 서로 공존하고 있다. 혹은 운명을 혹은 재물을 혹은 생명을 하지만 달동네가 만든 손금은 ‘도시’라는 새로운 사업화 시대를 건설하는 또 다른 점선의 기초가 된다. 도시의 손금이며 도시를 이루는 손금 일부가 되었다는 달동네 풍경의 배경, 시인이 읽는 달동네의 채색이 어떤 색인지는 시를 읽는 독자 누구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구 6행의 전체가 달동네와 현재와 과거, 미래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조망하고 있는 것, 생의 막바지에 와있는 노파의 눈꺼풀에서 산업화 시대의 단면과 그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한 단면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갖게 된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척결하라'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있고 어떤 말이 시가 될 수 없을까? 일상어와 시어는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모든 일상어가 시어로 쓰일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문장과 대화에서 쓰이는 모든 말은 시어가 될 수 있다. 우리 현대시에는 표준어뿐만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방언과 비속어까지 심심찮게 시어로 등장했다. 김용택은 “환장하것네 환장하것어/ 아, 농사는 우리가 쌔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들이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풍년 잔치는 저그들이 먼저 지랄”()이라며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노골적으로 농민들의 편을 든다. 김진경은 “복어새끼처럼 왜 그런대유/ 배에다 바람을 잔뜩 집어넣구/ 가시를 있는 대루 세우믄 누가 무서워헐 줄 아남유”()하고 충청도 말로 능청을 부린다. 안상학은 “보래요. 삼시세끼 빵만 묵고 살라믄 살니껴? 대한민국 워델 가도 그런 사람 없을께시더”()라면서 경북 안동 말을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김수영이 일찍이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자, 한참 후에 이에 화답하듯 황지우도 풍자의 대열에 합류한다. “간밤에도 그는 외국 바이어들을 만났고, “그년”들을 대주고 그도 “그년들 중의 한 년”의 그것을 주물럭거리고 집으로 와서 또 아내의 그것을 더욱 힘차게, 더욱 전투적이고 더욱 야만적으로, 주물러주었다.”() 이에 질세라 박남철은 한 발 앞서간다. “내 시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차렷, 열중쉬엇, 차렷,”() 하고 호통을 친다. 현대어뿐만 아니라 중세국어, 영어, 화살표 같은 기호까지 시어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문장에 쓰이는 마침표·쉼표·물음표·따옴표·줄표와 같은 부호가 시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못해 절대적이다. 심지어 옥타비오 파스는 침묵도 말이라고 한다. “침묵조차도 무언가를 말하는데, 침묵은 무(無)가 아니라 여전히 기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어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강철 조각이 아니다. 적어도 용접공이 강철과 강철을 이을 때 일어나는 불꽃이거나 그 불꽃의 뜨거움이거나 불꽃이 내장하고 있는 위험한 미래여야 한다. 그래서 때로 시어는 한글맞춤법이나 국어순화운동에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나는 자장면보다 ‘짜장면’이, 메리야스보다 ‘런닝구’가, 브래지어보다는 ‘브라자’가, 펑크보다는 ‘빵꾸’가, 머큐로크롬보다 ‘빨간약’이나 ‘아까징끼’가 더 시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옥타비오 파스도 시적인 언어는 일상으로부터 일탈할 때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작용의 첫 번째 행동은 말들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전통 속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는 한자 혹은 한자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시인들은 한자의 형상이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한자가 시인들을 자극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같지만 ‘산’이라고 쓸 때와 ‘山’이라고 쓸 때 그 함의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우스운 이야기 하나. 어릴 적에 나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산낙지’를 보고 한동안 산에 사는 낙지인 줄 알았다. 가재처럼 심산유곡의 돌덩이 밑 어디쯤 사는……) 그런데 뜻글자라고 해서 그 뜻과 형상이 다 미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념적인 한자어는 시에서 척결해야 할 대표적인 낡은 언어다. 시적 언어의 성취 목표를 한 50년 이전쯤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한자어를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유치환이 에서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노래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박인환이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라며 절망스러워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김현승이 ‘堅固한 고독’을 발표한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이 시인들이 ‘애수’와 ‘애증’과 ‘견고한 고독’을 노래할 즈음에 그 시어들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 시어들은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관념이 ‘화자의 우월적 포즈’()라고 꼭 집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한 편의 시를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진부한 말이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모든 경서와 옛사람들이 이미 언급한 말의 대부분이 이른바 진부한 말이다.”(김창협,  외편)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관념어가 시만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황지우의 시처럼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것, 그게 사랑의 표현방식인 것이다. 관념어는 진부할 뿐 아니라 삶을 왜곡시키고 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알맹이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껍데기를 어루만지게 한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상상력을 옥죄고 언어의 잔칫상이어야 할 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관념어를 척결하지 않고 시를 쓴다네, 하고 떠벌이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휑하니 빈자리가 몹시 쓸쓸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 빈자리를 오래 응시하라. 당신의 상상력이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라는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 처녀를 꽉 붙잡고 놓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낸 자리에 그 처녀를 정실부인으로 들어앉혀라. 그래도 관념어의 옛정이 그리워져 못 견디게 쓰고 싶거든 그 말을 처음 쓴 지 30년 후쯤에나 써라.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읽어주겠다. 이시영의  전문이다. 나는 이 시에서 ‘고독’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이쯤은 되어야 고독을 말할 자격이 있다.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창작 강의] (22) 오늘은 현대시의 난해성을 가져온 '해체시'와 '무의미시' 중에서,  해체시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시대거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온건한 경향이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낡은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지향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경향이 공존합니다. 전자를 보수파, 후자를 개혁 내지는 혁신파라고 부릅니다. 역사는 이 두 상반된 대립들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변증법의 이론이기도 합니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평시조에 대한 사설시조, 시조에 대한 신체시, 신체시에 대한 자유시 등의 대립들을 통해 현대시로 발전해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이르게 되면 이상(李箱)에 의해 소위 과격한 모더니즘의 혁신적인 실험시가 나타납니다. 이상(李箱)의 이러한 실험적인 시풍(詩風)은 한때 잠잠하다가 1980년대에 다시 기승을 부리며 일어납니다. 이것이 이른바 해체시(解體詩)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는 이 해체적 경향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서구적 풍조의 그늘 밑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시단에서 시도된 해체적 경향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림 시를 산문화(散文化)한다든지, 시에 희곡이나 시나리오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시 속에 회화나 도형을 삽입하기도 합니다. 둘째, 표현 매체의 개방 시는 언어 예술이지만 표현 매체를 언어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림, 사진, 도형, 기호 등을 동원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셋째, 기존의 규범 문법에 구속되지 않음 사회적인 약속인 기존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비문(非文)이나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문장을 구사하기도 합니다. 넷째, 시적 주체의 소멸 독특한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담긴 개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끌어다 자신의 글처럼 쓴다든지[pastiche], 광고나 기사(記事), 사진 같은 것들을 오려 붙인다든지[collage] 하는 행위입니다. 다섯째, 탈이념(脫理念) 현상 어떤 주의(主義)나 사상(思想)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합니다. 나아가서는 도덕과 윤리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합니다. 여섯째, 예술의 저속화[kitsch] 현상 일상의 저속한 것들 속에서 소재를 구한다든지, 속어나 욕설 등의 비어(卑語)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으로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으로도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체시의 특징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존의 것들 곧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체 사상이 80년대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시 인기를 얻고 있었던 프랑스의 사상가 데리다(J. Derrida)의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은 기존의 것을 왜 바꾸어 놓아야 하는가 하는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불확정성(不確定性)’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바라다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서 천태만상의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물의 양태를 하나로 확정지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물의 시간적 존재 양태는 끊임없이 변해 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서구의 합리주의는 사물을 우열의 관계로 잘못 확정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감성, 남성>여성, 백인>유색인, 기독교>다른 종교 등으로 앞의 것을 우월한 것으로 확정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우열의 관계는 바른손과 왼손의 관계처럼 기회가 많이 주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리를 뒤바꾸어 후자에게도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해체는 결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잘못된 전통이나 편파적인 관습 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회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수천 년 동안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그렇게 형성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 것들은 비교적 최선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들보다는 바람직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개혁의 대열에 끼지 못하고 개악과 파괴로 규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해체시가 시도하고 있는 것들은 어떠한가 냉정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전통적인 시의 인습을 무너뜨리는 바람직한 혁신들인가. 아니면 기존의 것을 뒤집어 놓겠다는 데리다적인 단순한 거부의 발상인가를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詩)로 불리어지려면 언어를 떠나서는 안 되고 또한 예술의 반열에 놓이려면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에 대한 도전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언어의 구조물’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건필을 기대하며 다음주 무의미시에 대한 소개로 시창작 강의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시(詩)와 평론(評論)에 대한 소고(小考)/ 이담 정항석 일상적으로 시에 대한 것과 그 평에 대한 것은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접근에 대한 마음가짐과 훈련이 없다면 지난(持難)한 것이 되고 마는 경우를 경험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역설하고자 한다. ‘시(詩 poem)는 짓는 것이고 평론(評論)는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이에 대한 명제적(命題的)이고 선언적(選言的)인 주장을 어떻게 투영시켜야 하는가? 첫째는 그 접근의 마음가짐이다. 얼른 말하자면 이렇다. ‘시(詩)짓기는 절대적으로 글쓰기의 한 종류이다’. 글쓰기에 기본적인 바탕이 없이 ‘아귀가 맞는 글쓰기’가 어느 정도의 훈련이나 능력이 아니 되면 시를 짓는 것은 매우 어려워진다. 시가 다소 짧은 어휘나 단어들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만만해 보이지마는 결코 가벼이 다룰 것은 아니다. 예컨대, 1) 문학 장르로써 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렇다. ‘모를 잘 심는 농부’라 하여 벼의 생육 상태를 알 수 있어도 그 생물학적 분석은 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둘을 다 해야 한다. 2)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연구도 해야 한다. 아울러, 시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詩人 poet)의 역할이다. 그래야 가식(假飾)이 없이 선험적 진솔함을 담을 수 있다. 단지 시(詩)를 수백 편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할 경우 시의 형식과 문장 등을 외어서 하는 것으로 이는 흉내에 불과하다. 3) 문학 장르에서 가장 짧은 것이지만 시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단지 고발이나 비판, 조소, 비아냥 등으로 그칠 것이 아니다(이것이 시라고 생각한다면 단세포적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볼멘소리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볼멘소리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이며 교훈적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설명한다. 둘째, 평론(評論)은 글쓰기에 대한 훈련과 재능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론에서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금기이다. 특히, 최근에서 포스트 모던(post-modern)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지만, 이하 각설) 생각에 갇혀서 ‘감성적 위주의 시’를 폄하(貶下)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주목할 것은 그 글과 시가 1) ‘전체적인 글의 틀(frame)’, 2) ‘어법적 문장의 구성’, 그리고 3) ‘동원된 개념이 적절하게 스며있는가’를 면밀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러 신춘문예 심사를 한 이후에 나오는 심사평들은 매우 자의적인 느낌에 의존한 경우가 허다하며 때로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이는 ‘시를 오랫동안 써 왔다’ 하여 다른 이들의 시를 쉬이 접근하여 자신의 눈짐작이나 눈대중으로 저울질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시(詩)짓는 것과 평론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해서도 안 된다. 3. 시는 짧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함축적으로 의미를 담을 수 있다면 최고의 것이라고 이를 수 있지만, 세월을 두고 시(詩)짓기의 견본(見本)이 되며 그 의미에서 감동과 교훈을 주는 시들을 보면 결코 단어나 어휘 몇 개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하여 시는 언어의 경제성을 감안(勘案)한다 하더라도 한 편의 논문(論文 an article)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간략하게 그 틀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서론(도대체 무엇이 문제(issue)인가?) 현상(자연적 사회적 현상=고발내용) 주장(화자의 느낌를 포함) 선험적 시각(이론과 가설) 주장과 선험적 시각에서 주장을 해야 되는 우선적 설명(說明)(기술(記述)과 서술(敍述)포함) 2. 자기 주장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무엇을 언급하려고 하는가?) 시에서는 관념적 그리고 추상적 언급도 가능하지만. 개념화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는 자기 논리적 사고가 접목되어야(embedded) 하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에 대한 것을 정의적 개념화(시에서는 예를 들어, ‘누님같은 꽃이여’라는 것도 이에 해당)를 도식화시켜야 한다 자기 주장에 대한 이론화(理論化)를 갖추는 것이며 이는 비판적이고 우회적이지만 보편적 논리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3. 현상의 구체적 언급(이 이슈가 이슈화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1) ‘무엇이 문제인가’를 구체적으로 언급(=시에서는 묘사에 해당)한다 2) 화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시의 경우, 메타포가 동원될 수 있음) 3) 현상과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관찰이 수반되어야 한다.(꽃의 경우도 언제 피는지, 생육과 그 발달에 대한 것, 그 꽃이 의미하는 보편적 인식을 접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개념을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되 '왜 그러한지'를 필히 언급해야 하며 그 언급은 논리적이고 이성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4. 분석적 접근 결국, 이 부분을 언급하기 위해서 위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와 3.를 대비하여 '대조한다든지' 혹은 '자기주장이 현상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언급해야 한다. 이를테면, (1) ‘현상은 이러했고’, (2)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이러한 까닭이고’, (3)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을 제시한다’는 내용이 절대적으로 분석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시의 경우에서는 이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에는 카피라이터 식의 글이 이 경우만 언급하고, 그나마 더 자극적이고 호객 행위적인 것으로 종결짓고 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집을 짓다가 만 경우와 같다. 정통성이 있는 운문(韻文)을 공부한 이후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채, 디지털적인 사고방식으로 편하게(?) 다가가는 까닭에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러 조소적(嘲笑的)이고 냉소적(冷笑的)인 시들이 여기에 해당하다. 앞뒤 자르고 이것만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사회의 어두운 면을 쓰기 위해서 동원되는 단어들을 비틀어 쓰고는 ‘이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의 시들이 그것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신춘문예에 당선작들이 여기에서 주춤거리다가 호기심을 유발하게 하지만 신춘문예 당선 이후에 글을 쓰지 못하는 경우(당선작에 대한 소감문과 그에 대한 설명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함)가 있다. 그리고는 시를 짓지 못하는 경우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현대사회의 단면을 보고 고발(비아냥, 조소, 비판 등)하는 시들을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어떤 현상을 보고 ‘욕’을 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잘못을 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이다. 1) 무관심, 2) 애 둘러서 언급(누구who를 나무라지 않고 그의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하는 경우), 3) 비아냥 혹은 조소, 그리고 4) 비난 등이 그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글과 시는 생산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4)는 제외된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2)와 3)이다. 그동안 감성적 위주의 시들이 1)에 해당하여 나와 나를 이해주기를 바라는 공감적 공유에 초점을 두었다면 ’자신의 일기장이나 자신만 볼 수 있는 작기장에 옮겨야 할 것이다. 문제는 2)와 3), 특히, 최근 포스트모던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이 돋보여서 그런 것 같은데 그저 고발만 하고 그것으로 그치고 있다 무책임하다. 생산적인 대안적 제시는 없다. 그러다 보니 ‘아니면 말고 식’의 비난적 무책임의 공공성을 함유하고 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판을 생산적인 결과로 도출하기 위해서 ‘쓴소리’를 할 수 있지만, 비난은 그것으로 끝이다. 비난은 댓구의 필요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자기감정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지 ‘하늘에다 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써놓고는 이전의 시들과 차별화되는 양 하지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또한, 시인이지만 평론을 못 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평론을 함부로 할 일도 아니지만 정작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글쓰기가 기본바탕이 아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짓기 전에 글쓰기를 절대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5. 결어 혹은 결론: 앞서 했던 것들을 간추려서 요약 정리하면 된다. 결론적으로는 이렇다. ‘시를 짓는다’ 하는 것은 위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만 언급하기 때문에 마치 헝겊을 기워서 색다른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평론 역시 글쓰기의 연장이기 때문에 위의 과정을 반드시 밟아야 한다. 위의 과정이 체화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평론다운 평론이 있을 수 없으며, 시를 몇 편 지어봤다고 평론을 자처하는 어리석음에 처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 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간추린 것입니다. 공유는 가능하지만, 저작권이 있으므로 반드시 출처와 저자를 밝히고 함께 옮겨가시기를 바랍니다.   바람과 구름 그리고 농담                                             하린     바람과 구름을 우려먹는 기술이 필요하다 만질 수 없는 것을 갖고 노는 비법이 필요하다 이성적인 혀와 몽롱한 감각이 만들어내는 혼종의 판타지가 필요하다 바람에게는 근사한 취미가 필요하고 구름에게는 우호적인 솜사탕이 필요하다 구름의 심장을 훔치거나 바람의 목덜미를 만지는 자질이 필요하다 구름의 목구멍에 손을 넣어 박힌 가시를 꺼내고 바람의 아래턱과 윗턱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는 여유가 필요하다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으니 나는 구름과 바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시인이다 수시로 바람과 구름을 식재료로 볶고 지지고 삶고 찌는 방식이 필요하다 바람의 소문과 구름의 험담을 구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구름을 살해하고 바람을 수배하고 바람 속에 무덤을 만들고 구름의 사상을 읽어내는 경지가 필요하다 바람의 초대나 구름의 청혼을 듣는 귀가 필요하다    나는 언제쯤 바람의 시인 구름의 시인이라는 계급을 획득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바람 빠진 시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구름의 썩어 문드러진 살점을 삼키고 있다  바람과 구름도 모르는 백만 가지 사용법이 나에겐 필요하다   - 2012년 여름호    
5    문학강좌 댓글:  조회:1202  추천:0  2018-08-02
#문학강좌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적 발상 장옥관 시창작 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원천적 단계과 의미화 단계, 형상화 단계. 원천적 단계는 선천적, 후천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시창작 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교육에 의해 계발될 수 있는 후천적 차원. 후천적 차원은 독서와 체험, 사색의 세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화 단계를 다른 말로 하면 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알맹이(관념/사상, 감정 따위)가 있어야 시를 쓸 수 있지 않겠는가. 허긴 알맹이 없는 시가 시중에 많이 나돌고 있다. 시가 그럴듯한 말로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설익은 관념을 그대로 노출하거나, 넋두리, 푸념에 가까운 질펀한 감정의 잔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적 인식의 개념을 명료하게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형상화 단계는 시적 인식을 언어표현을 통해 실현화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어쩌면 형상화 단계가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를 빚는 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시적 인식이 없거나 잘못되면 빈 수수깡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적 인식의 핵심은 감수성, 관찰, 상상력이 핵심이다. 우선 감수성에 대해 살펴보자. 시를 쓰고 싶은 의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인상적인 느낌(즉 아름다운 자연, 극적 사건, 감동적인 순간 등에서 갖게 되는 심리적 충격)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런 충격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대수로운 사건에서도 이런 충격을 자주 받게 된다. 감수성은 천성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훈련에 의해서도 길러질 수 있다. ​ 1. 감수성 기르는 방법 감수성은 말 그대로 느끼는 능력. 느낌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다. 감수성을 기르는 방법은 느낌을 강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햇살이 눈부시다’라는 느낌을 갖는 순간, 한번 중얼거려본다. 그러면 햇빛의 찬란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 다음 햇살이 어떻게 환한지 느껴본다. ‘햇살 속에 유리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찌푸린 미간 때문에 눈썹이 다 없어질 것 같네’처럼 그 순간의 느낌을 되풀이해 느껴본다. 이처럼 느낌을 강화하게 되면 감각의 깊이가 생기고 남들보다 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 시각을 통한 대상 파악 광명에도 초박의 암흑이 발려있는 것 같다. 전깃불 환한 실내에서 다시 탁상용 전등을 켜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분명 한 꺼풀 얇게 날아가는 휘발성분 같은 것 책이나 손등, 백지 위에서 일어나는 광속의 투명한 박피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때로 한 순간 살짝 벗겨내는 그대 이마의 그늘 같은 것 그런 아픔이 있다, 오래 함께 한 행복이여. - 문인수, ​ 나. 청각을 통한 대상 파악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 쥔 에이 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 진다. ​ 종이도 죽는구나 ​ 그러나 입 콱 틀어 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 번 멀리 던져다오 - 문인수, ​ 다. 후각을 통한 대상 파악 사연인즉 이렇다 외출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순간, 오물을 뒤집어 쓴 돼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잠시 한눈을 파는 동안 돼지들이 등비급수로 늘어나더니만 작은 사무실을 차지해 버렸고 아예 두개골 속으로 들어와 골치를 들쑤시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마침내 소굴을 찾아 나서니 이런! 물 대접에 담아 놓은 감자가 바로 범인이었던 것 싹이 난 감자 몇 알, 물 대접에 담아 볕 좋은 창가에 놓아두고 나갔다 온 참이다 움켜쥔 주먹처럼 단단하던 감자는 흐물흐물 허물어지고 바야흐로 흰 거품이 버글버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부신 빛깔이라니― 무지개가 선 것처럼 공기 알갱이들이 뽀얗게 커튼을 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티 한 점 없이 완벽한 악취, 쓰레기통에도 넣을 수 없어 수돗간에 내다두었다 돼지들이 사라지고 난 뒤 무심코 나가본 하수구 어이쿠! 그리마, 노린재, 괄태충, 쇠파리 온 동네 날것 물것들이 죄 모여 꼬물꼬물, 꿈틀꿈틀, 붕붕붕…… 한바탕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 그예 감자는 쭈글쭈글 갈색 피부만 남았고, 지독한 향기 흰 젖이 되어 여린 목숨들 거두고 있었다 쭈그러든 자궁― 거무죽죽 검버섯의 할머니가 그 자리에 누워 계셨던 것이다 - 장옥관, 라. 근육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 김지혜, 부분 ​ 마. 공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1 흥덕왕릉*의 숲에는 비밀이 있다 섭씨 19도, 서풍과 함께 듣는 솔방울 소리, 부재를 위해 텅 빈 공간이 부푸는 한낮, 밤이 아니라도 등불이 하나 둘 차례차례 켜지는 느낌, 일만 그루 소나무가 손 뻗어 나를 만지도록 정지하는 것, 일만 그루의 소나무에 매달리는 섬모 운동,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우는 울음이다 2 비밀이 탄로난 이유가 갑자기 휘몰아닥친 장대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왕국을 베고 눕고자했다 왕이 누리던 고요 외에 십삼층 석탑 같은 왕의 비애를 열어 보고자 했다 어떤 기미도 없이 절규의 힘으로 빗방울이 관 뚜껑 닫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왕국의 슬픔이다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인근의 신라 흥덕왕릉. 흥덕왕은 죽은 장화부인을 못 잊어 내내 독신으로 살았다. - 송재학, 기타 미각, 촉각, 기관을 통한 대상 파악은 생략.
4    문학강좌 댓글:  조회:1235  추천:0  2018-08-02
#문학강좌 시는 어디서 오는가? -시적 발상 장옥관 시창작 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원천적 단계과 의미화 단계, 형상화 단계. 원천적 단계는 선천적, 후천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시창작 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부분은 교육에 의해 계발될 수 있는 후천적 차원. 후천적 차원은 독서와 체험, 사색의 세 범주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화 단계를 다른 말로 하면 시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알맹이(관념/사상, 감정 따위)가 있어야 시를 쓸 수 있지 않겠는가. 허긴 알맹이 없는 시가 시중에 많이 나돌고 있다. 시가 그럴듯한 말로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설익은 관념을 그대로 노출하거나, 넋두리, 푸념에 가까운 질펀한 감정의 잔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적 인식의 개념을 명료하게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형상화 단계는 시적 인식을 언어표현을 통해 실현화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어쩌면 형상화 단계가 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를 빚는 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시적 인식이 없거나 잘못되면 빈 수수깡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적 인식의 핵심은 감수성, 관찰, 상상력이 핵심이다. 우선 감수성에 대해 살펴보자. 시를 쓰고 싶은 의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인상적인 느낌(즉 아름다운 자연, 극적 사건, 감동적인 순간 등에서 갖게 되는 심리적 충격)에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런 충격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대수로운 사건에서도 이런 충격을 자주 받게 된다. 감수성은 천성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훈련에 의해서도 길러질 수 있다. ​ 1. 감수성 기르는 방법 감수성은 말 그대로 느끼는 능력. 느낌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다. 감수성을 기르는 방법은 느낌을 강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햇살이 눈부시다’라는 느낌을 갖는 순간, 한번 중얼거려본다. 그러면 햇빛의 찬란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 다음 햇살이 어떻게 환한지 느껴본다. ‘햇살 속에 유리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찌푸린 미간 때문에 눈썹이 다 없어질 것 같네’처럼 그 순간의 느낌을 되풀이해 느껴본다. 이처럼 느낌을 강화하게 되면 감각의 깊이가 생기고 남들보다 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 시각을 통한 대상 파악 광명에도 초박의 암흑이 발려있는 것 같다. 전깃불 환한 실내에서 다시 탁상용 전등을 켜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분명 한 꺼풀 얇게 날아가는 휘발성분 같은 것 책이나 손등, 백지 위에서 일어나는 광속의 투명한 박피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때로 한 순간 살짝 벗겨내는 그대 이마의 그늘 같은 것 그런 아픔이 있다, 오래 함께 한 행복이여. - 문인수, ​ 나. 청각을 통한 대상 파악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 쥔 에이 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 진다. ​ 종이도 죽는구나 ​ 그러나 입 콱 틀어 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 번 멀리 던져다오 - 문인수, ​ 다. 후각을 통한 대상 파악 사연인즉 이렇다 외출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순간, 오물을 뒤집어 쓴 돼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잠시 한눈을 파는 동안 돼지들이 등비급수로 늘어나더니만 작은 사무실을 차지해 버렸고 아예 두개골 속으로 들어와 골치를 들쑤시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마침내 소굴을 찾아 나서니 이런! 물 대접에 담아 놓은 감자가 바로 범인이었던 것 싹이 난 감자 몇 알, 물 대접에 담아 볕 좋은 창가에 놓아두고 나갔다 온 참이다 움켜쥔 주먹처럼 단단하던 감자는 흐물흐물 허물어지고 바야흐로 흰 거품이 버글버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부신 빛깔이라니― 무지개가 선 것처럼 공기 알갱이들이 뽀얗게 커튼을 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티 한 점 없이 완벽한 악취, 쓰레기통에도 넣을 수 없어 수돗간에 내다두었다 돼지들이 사라지고 난 뒤 무심코 나가본 하수구 어이쿠! 그리마, 노린재, 괄태충, 쇠파리 온 동네 날것 물것들이 죄 모여 꼬물꼬물, 꿈틀꿈틀, 붕붕붕…… 한바탕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 그예 감자는 쭈글쭈글 갈색 피부만 남았고, 지독한 향기 흰 젖이 되어 여린 목숨들 거두고 있었다 쭈그러든 자궁― 거무죽죽 검버섯의 할머니가 그 자리에 누워 계셨던 것이다 - 장옥관, 라. 근육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 김지혜, 부분 ​ 마. 공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1 흥덕왕릉*의 숲에는 비밀이 있다 섭씨 19도, 서풍과 함께 듣는 솔방울 소리, 부재를 위해 텅 빈 공간이 부푸는 한낮, 밤이 아니라도 등불이 하나 둘 차례차례 켜지는 느낌, 일만 그루 소나무가 손 뻗어 나를 만지도록 정지하는 것, 일만 그루의 소나무에 매달리는 섬모 운동,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우는 울음이다 2 비밀이 탄로난 이유가 갑자기 휘몰아닥친 장대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왕국을 베고 눕고자했다 왕이 누리던 고요 외에 십삼층 석탑 같은 왕의 비애를 열어 보고자 했다 어떤 기미도 없이 절규의 힘으로 빗방울이 관 뚜껑 닫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왕국의 슬픔이다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인근의 신라 흥덕왕릉. 흥덕왕은 죽은 장화부인을 못 잊어 내내 독신으로 살았다. - 송재학, 기타 미각, 촉각, 기관을 통한 대상 파악은 생략.
3    들어라. 그래야 넉넉한 사람이 된다 댓글:  조회:1831  추천:0  2010-10-09
들어라. 그래야 넉넉한 사람이 된다 1.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좋은날' 하고 큰 소리로 외쳐라. 좋은 아침이 좋은 하루를 만든다. 2. 거울을 보며 활짝 웃어라. 거울 속의 사람도 나를 보고 웃는다. 3. 가슴을 펴고 당당히 걸어라. 비실비실 걷지 말라. 4. 사촌이 땅을 사면 기뻐하라. 사촌이 잘 되어야 나도 잘 되게 마련이다. 5. 마음 밭에 사랑을 심어라. 그것이 자라나서 행운의 꽃이 핀다. 6. 세상을 향해 축복하라. 세상도 나를 향해 축복 해 준다. 7. 밝은 얼굴을 하라. 얼굴 밝은 사람에게 밝은 운이 따라온다. 8. 힘들다고 고민하지 말라. 정상이 가까울수록 힘이 들게 마련이다. 9.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라. 10. 그림자는 빛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어둠을 타박 말고 몸을 돌려 태양을 보라. 11. 사람을 존중하라. 12. 끊임없이 베풀어라. 샘물은 퍼낼수록 맑아지게 마련이다. 13. 안될 이유가 있으면 될 이유도 있다. 14. 가정을 위해 기도 하라. 가정은 희망의 발원지요, 행복의 중심지다. 15. 장난으로도 남을 심판하지 말라. 내가 오히려 심판 받는다. 16. 어떤 일이 있어도 기 죽지 말라. 기가 살아야 운도 산다. 17. 목에 힘주면 목이 굳는다. 18. 교만하지 말라. 애써 얻은 행운 한 순간에 날아간다. 19. 밝고 힘찬 노래를 불러라. 그것이 성공 행진곡이다. 20. 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 21. 푸른 꿈을 잃지 말라. 푸른 꿈은 행운을 만드는 청사진이다. 22. 미운놈 떡 하나 더 줘라. 23. 말로 상처를 입히지 말라. 칼로 입은 상처는 회복되지만,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 24. 자신을 먼저 사랑하라.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25. 죽는 소리를 하지 말라. 26. 어두운 생각이 어둠을 만든다. 27. 마음을 활짝 열라. 대문을 열면 도둑이 들어오고, 마음을 열면 행운이 들어온다. 28. 집안 청소만 말고 마음도 매일 청소하라. 마음이 깨끗하면 어둠이 깃들지 못한다. 29. 원망 대신 모든 일에 감사하라.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겨난다. 30. 욕을 먹어도 화 내지 말라. 그가 한 욕은 그에게로 돌아간다. 31. 잠을 잘 때 좋은 기억만 떠올려라. 밤 사이에 행운으로 바뀌어진다. ---------퍼온글-------
2    지혜가 담긴 人生의 도움말 댓글:  조회:1938  추천:0  2010-10-09
지혜가 담긴 人生의 도움말 웃음소리가 나는 집에는 행복이 와서 들여다보고, 고함소리가 나는 집에는 불행이 와서 들여다본다.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길다. 늘 기쁘게 사는 사람은 주는 기쁨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이는 가난과 싸우고 어떤 이는 재물과 싸운다. 가난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많으나 재물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적다.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느낌없는 책 읽으나 마나, 깨달음 없는 종교 믿으나 마나, 진실없는 친구 사귀나 마나, 자기 희생없는 사랑 하나마나. 비뚫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이는 똑똑한 사람이고, 비뚤어진 마음 그대로 사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누구나 다 성인이 될수있다. 그런데도 성인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스스로 과욕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돈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낮이 즐겁고, 육체로 결혼한 사람은 밤이 즐겁다. 그러나 마음으로 결혼한 사람은 밤낮이 즐겁다. 먹이가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적이 있고, 여광이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상처가 있다.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진다. 부부는 쇠사슬에 함께 묶인 죄인이다. 때문에 발을 맞춰 걷지 않으면 안된다. 3주 관찰, 3달 사랑, 3년 싸움, 30년동안 서로 참는다. 그리고 그동안 테어난 아이들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미인은 눈을 즐겁게 하고, 아내는 마음을 즐겁게 한다. -- 2008년은 “내 힘들다“ 를 거꾸로 외치면서 ”자살“을 “살자”로 바꾸는 즐거운 세상을 -- ---퍼온글----
1    걷기 자세 댓글:  조회:1951  추천:0  2010-09-29
걷기 자세 잠시 당신의 자세를 점검하라. 코는 약간 위로 올리고, 눈은 지평선 위 먼 곳을 바라보고, 어깨는 편안하게 뒤로 젖혀졌는가? 그렇다면 이제 뻣뻣하지 않게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면서 이 자세를 유지한다. 새로운 걷기 자세 덕분에 당신의 자신감도 커지는 것이 느껴지는가?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라. 세상은 당신 것이다. - 프랑크 나우만의《호감의 법칙》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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