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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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5 ]

25    야이야이(가사) 댓글:  조회:1827  추천:0  2018-12-03
    야이야이     장경매 좋으면 좋다고나 할거지 몇시냐고 왜 묻나요 당신께도 핸드폰이 있잖아요 야이야이 능청떨지 말아요 아닌척해도 좋아 없는척해고 좋아 보기만해도 절로 웃음나는 당신같은 그런 사람 좋아합니다 이쁘면 이쁘다고나 할거지 왜 하필 개나리  꽃인가요 당신은 개나리 꽃을 좋아 하나 봐 야이야이 능청떨지 마라요 둘러대도 좋아  엉뚱해서 좋아 생각만해도  절로 웃음나는  당신같은 그런사람 좋아합니다 2018.5월방송국련합합평회에서 제1임자로  호평받았으나 문슨 원인인지 곡 붙혀지지 않는  상황
24    못다한 사랑(가사) 댓글:  조회:1757  추천:0  2018-12-03
           못다한 사랑     장경매 저 하늘 저 많은 별중에 나를 향해 반짝이는 별 하나 그 별 하나 바라보면 빈들에 그대은빛 가슴뚫는 이밤이여 지상에서 못다한 그 사랑인가 밤 깊도록  식지않는 이 가슴에 구름새로 내려 온 한오리 은빛이여 저 하늘 저 많은 별중에 나만 위해 반짝이는 별 하나 그 별 하나 지켜보면 빈들에 그대은빛 맘 적시는 이 밤이여 지상에서 못다한 그 사랑인가 밤깊도록 이슬젖는 눈가에  축복으로 내려 온 한줄기 은빛이여 제4호에     
23    미움인지 그리움인지 댓글:  조회:2825  추천:0  2018-08-02
미움인지 사랑인지   (오랜만에 내리는 비에게)                         ㅈㅏㅇ겨ㅇㅁㅐ 당신 기다려 짧은 이 내  목 한뼘이나 길어 졌소 나 싫어 오지 않는 당신을 주먹  들어 저주 히다가도 정작 찾아 오면 이렇게 기쁜걸 나도 내 속을 정말 모르겠소 2018.7.26.
22    고향 댓글:  조회:1764  추천:0  2018-08-02
고향 장경매 슬픈 달빛아래 옷탑방 하늘 마당에서 타향설음 술잔에 부어 마실 때 공중을 날아 온 문자 어떻게 지내냐?~ 아프지는 않나?.... 버리고 왔건만 문자  타고 온 아래목 온기 시린 가슴 녹인다 얼떠름에 달려 온 아버지 고향 마중 나온것은  쌀쌀한 바람 대문 열어 준것은 덤덤한 뜨락 집안에서 우르르 인사 나온것들은 곰팡이 냄새들뿐 들들한  맛에 왕따  당한 내 입맛 대충대충  에 때우다 허기져 영상에 나타난 주글해진 얼굴 안먹으면 나만 손해란다 북녁을 바라 보니 어떻게 알아 냈는지 또 힘들면 오라는 ㅎㅏㄴㅁㅏㄷㅣ  개열 바른 어머니 젖가슴  돌아늡던  그 아픔 고향  등지고 누뭐 또 삼킨다 2018.4.30.
21    사과배 내 고향 댓글:  조회:3135  추천:7  2012-11-28
사과배  내 고향 해마다 5월의 이 맘때면 무지개 다리 곧추달려 모아산 사이 길 빠져 나오면 사과배 꽃 하얗게 달려 오는 꽃길 매미차 꽃너울 쓰고 신이 났는데 하얀 드레스 입은 내 고향아가씨는 꽃 잔치 나물 잔치  꿀자랑에 신이 낫네  .   해마다 9월의 이맘때면 무지개다리 곧추 달려 모아산 사이 길 빠져 나오면 사과배 볼이 빨갛게 달려오는 향길  가고오는 차량들 향기에 취해 머무는데 배 불룩한 내 고향 아줌마는 사과배  송이버섯 햅쌀 자랑에 신이 났네
20    물고기 댓글:  조회:2731  추천:1  2012-11-11
   물고기 아빠 뿌린 돈 씨 물을 먹고 자라 어느덧 새끼치기 했네 밤이면 물속에 금싸락 반짝반짝 낮이면 물속에 은싸락 반짝반짝 붕어잉어 내 아빠를 뺏어가네 양어장에 사랑빠진 우리아빠 봄에 뿌린 돈씨 정성먹고 자라 어느덧 팔뚝만치 컸네 밤에는 삼촌들과 줄당기기 하고 낮에는 할배들과 줄당기기 하면서 우리아빠 돈주머니 채워주네 양어장에 바져버린 우리아빠
19    어머니 그 마음 알만해요 댓글:  조회:3910  추천:3  2012-02-18
  .bbs_contents p{margin:0px;}     어머니 그 마음 알만해요   장경매 작사/ 조옥형 노래     이웃집 어머니 나를 만나면 반갑게 웃어주며 놀러오래요 머나먼 초소에서 편지왔다며 공세운 아들을 자랑한대요 아 어머니 그 마음 알만해요 그와 나는 언녕부터 꽃편지 오고간대요     밭에서 돌아오는 나를 붙잡고 집으로 가자고 손목당겨요 고향을 건설하러 아들왔다며 일맵시 그대로 끌고만가요 아 어머니 그 마음 알만해요 그와 나는 오늘저녁 만나자 약속했어요          
18    사랑스러운 중국인민해방군전사들이여 댓글:  조회:4091  추천:3  2012-02-06
       사랑스러운 중국인민해방군전사들이여 나라의 큰 잔치 연회석상에서 그대들은  자리  비우고 초소에 섰지만  이 나라의 위험한 곳은 언제나 그대들의 몫이였더라 당중앙의  명령이라면 목숨처럼 받들고 자석처럼 총알처럼 달려 갔었네 맨 먼저 닿고 맨 나중에 물러 섰건만 보수를 따진적 없었고 명리를 위해   다툰적도 없었지. 광주 대 폭설이 내리던 날 텔레비 앞에서  13억 국민은 감동에 눈물을  지었었노라 복구 중에 선채로  잠든 그 대들을 보면서. 맹수같은 홍수에 몸을 던져가며 얼마나 많은 인민의 생명을 구했던가 룡아구같은 불길속에 뛰여 들어 얼마나 많은 생명재산을 구했던가 그리 했거늘 서슴없이 생명을 바친  이도 또ㅡ얼마었던가 지난60여년 세월. 총을 메고 싸운 선인들을 이여서 고스란히 평화와 안전을 지켜낸 사랑스러운 중국인민해방군전사들이여! 당과 인민은   길이길이 잊지 않으리 군말없는 그대들의 충성심을 나라와 력사는 영원히 새겨 두리라 그대들의 피와땀에 절인 두툼한 그 이야기들을. 자랑스러운 중화의 열광(热光)들이여 사랑스러운 중화의 아들딸들이여 영원히 번창 강대 하여라!     
17    소중한 사람 댓글:  조회:47673  추천:0  2012-01-26
  노래제목: 소중한 사람   작사: 장경매 작곡: 강미자 가수: 강미자 2007년 12월 12일 08시 25분 50초 추천 : 230 조회 : 8770 @font-face {font-family:nanum; src:url("player/wfonts/soya_nanum9.eot");} .title{font-family:nanum,굴림,돋움,Tahoma; font-size:9pt; color:#FFDDAA;} .time{font-family:nanum,굴림,돋움,Tahoma; font-size:9pt; color:#FFDDAA; } .shadow {width:100%;filter:progid:DXImageTransform.Microsoft.dropShadow(Color=CCDDEE,offX=1,offY=1,positive=true);   00:22 | 03:46   1. 소중한 사람       이 세상 고운녀자 많고도 많은데 수수한 나를 만나서도 언제나 웃음을 주는 당신 이 세상 잘난남자 많고도 많은데 하찮은 나를 만나서도 언제나 반기며 웃는 당신 한평생 당신의 손발되여 천하게 살아도 한평생 당신을 업고 다니며 땀을랑 흘려도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소중한 사람 이 세상 끝까지 간다해도 나에게 영원한 소중한 사람 나에게 영원한 소중한 사람 나에게 영원한 소중한 사람  
16    나는 연변사람 2 댓글:  조회:3472  추천:1  2010-11-06
    나는 연변사람 (2)   없어도 용기 하나를 자산으로 열심히 꿈을 빚는다.   못나도 패기하나 믿고 열심히 살아간다.   작아도  기 죽지 않고 오직 앞만 보며 가는 배짱 하나만은  든든한 사람   유행이 란무하는 세월 따라하며 사느니보다 자연스런 내스타일이 더 좋은 사람   지금은 초라하지만 있노라 우쭐대는  사람들을 훗날엔  자석같이 당당하고  넉넉하게  손님으로 맞아 줄 나는 미래의 연변사람  
15    환상으로 사는 나의 즐거음 댓글:  조회:3657  추천:0  2010-11-06
       어릴적부터 환상에 잘 부풀고 감성이 뛰여난 나는 나의 환상이 어이없고 황당하기에 부디 성공을 고집하지 않았다.다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즐거움임으로써 절로도 ㅎㅎㅎㅎ 하고 웃으면  마음이 한없이  즐겁다.  그러다가도  이따금씩  하는 엉뚱하면서도 될수도 없는 황당한 생각을 자주 해보기도 했다. 내가 가수되여 청중을 울리는 환영이 떠오른다  때로는 절절하게 때로는 쓸쓸하면서도 경쾌하게 수만의 심금을 울리는 환영이ㅎㅎㅎㅎㅎ 그리고 우뢰같은 박수소리...  개도 웃을 환상이지. 하긴 내게는 그런 타고난 재간이 없다. 노력해도 안되는 조물주가 딱 찍어 놓은  불가한 인간이다.                어릴적 부터 목이 자주 쉬는 병을  해온 연고 였는지 얼마전부터는 목에 물집과 같은 괴사도 생겨 노래는 커녕 어떤 때는 말조차 할수 없어 깡깡 거릴때가  많다. 그런데다 노래할라면 목안에서  끌어 당기는것 같아 자꾸만 기여드는 소리만 내면서 평생 소리 높여 노래 불러 보지도 못했다.따라서 마지막까지 마무리 해 본적도 없다. 거기에  심리소질 때문인지 곡이  궤도밖으로 탈선까지 하는  가수와 멀고도 먼 인간이였다.그래서 음악을 듣기만 하는것이 나의 환상을 채워 주는 유일한 취향이였다. 음악에 취하노라면 노래 잘할수 없는 나는 가사를 쓰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가수되여 청중을 울리고 싶던 생각처럼  청중을 울릴만한  가사를 쓰기가 쉽지 않앗다. 쓰고지우고 하면서 가사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처음 쓴 글이 시인지 가사인지 가릴줄도 모른채  그때 그   처녀작이  내 생활의 여기저기것을 반영한 노래가 되여 세상에 나타났다. 내것만이 아닌 20세기 70년대 후기 80년대초의 20대 처녀들의 실생활이였다.          하지만  연변예술학원에 계시는 고 리일남교수님의 저명 작곡이 아니였다면 그가사는 죽은 가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1982년7월 매주일가로 오르지도 못했을것이다.               (그리고 황상박선생님의 공로를 더욱 빼 놓을수 없다  황선생님이 직접 가져다 수개하시고 룡정시 잡지에 실어 주지 않았다면 리일남 교수님도 발견하실수 없었을것이다. 그리고 얼마전에 연변 텔레비죤문예부의 잘못으로 나의 가 저작권 침해를 입게 된것을 도로 찾게 된것도 황상박선생님의 도움이 아니였다면 되 찾을수 없다. 선생님의 신고가 많았셨다.두분 선생님께  늘 감사하고 감사할뿐이다).      환상은 나에겐 즐거움의 에너지였다. 그리고 글쓰기를 유도해주고  글쓰기를 위해 책을 읽게 해 주었기에  오늘이 있게  되였다.. 가을 인생을 맞지만  취향으로 부지런히  습작을  하니 늘 즐겁고 행복하다. 가수는 못 되여도 가사를 써서 가사 대전에 오르기까지 나의 환상은 헛된것이 아니다.수차 수술하고도 지금까지 별로 큰 탈이 없이 건강을 유지하는것도  환상이 내마음 건강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하여 환상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즐거움의  극장이였으며 . 그리고  습작의  길을  유도해준 내 인생의 참다운 벗이기도 하다. 죽을때까지도 지워버릴수 없는 영원한 벗이기도 하다.     
14    딸을 위한 나의 이미지 댓글:  조회:3111  추천:0  2010-10-28
      올해 내나이 마흔여덟.이 나이 되여서 이미지 개선에 신경 쓰이는것이 우습기도 하다. 1원이 아까와 선로도 타지 않고 시외에 자리잡은 세집으로 걸어 다니던 내가 요즘 들어 돈을 팍팍 쓰면서 촌티를 싹 벗어버리고 새 이미지로 탈 바꿈하는것이 어쩜 나로서도 놀라울 지경이다. 남편은 일찍 바랬던 이미지라며 뒤에서 손벽을 짝짝 쳐주며 하고 딸애는 유달리 밝은 모습으로며 엄지손 내 밀며 개탄 하는데 활기찬 이런 기분속에서 쑥쑤러워 주춤거리던 초기 내 모습은 어느덧 사라져 두 어깨가 쑥 올라갔다        10년전, 작은진에서 그것도 시골쪽으로 출근하다보니 촌 바우의 좁은 견식이라할가, 경제여건 또한 넉넉치 못해 내몸 하나 바로 가꾸지 못했다. 그때는 내가족을 위해 내 모든것을 잃어가면서도 내몸하나 초라한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으며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오직 나에게 가족이 있는것만이 최대의 만족이였다. 그런내가 지금은 왜 이렇게 몸 가꾸기에 신경쓰이는지 그것도 그럴것이 경제수입이 전과 다름없음에 말이다.        늦으막 자식을 본 엄마로서 나는 때때로 딸애의 눈치를 살금살금 살펴 본다. 젊은엄마 가진 애들 비해 늙은엄마 가진 내 딸애가 위축감을 받지나 않나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하고 뭇기를 잘한다.그러면 장난기 많은 딸애가하며 슬적 아닌 보살한다. 그말에 나는 너무너무 기뻐 했더니 하는것이였다.거짓말인 줄을 번연히 면서도 이 엄마를 멀리 하지 않고 친구처럼 가까히 하고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최고의 만족이였다. 온 집안안에 깍쟁이라는 별명을 달고 있는 내가 그날은 딸애가 청하지도 않는 랭면을 한턱 냈다.딸애가 자꾸 말렸으니 말이지 더 높은 요구라도 들어 줬을지도 모른다.       올해 15살인 딸애는 몇년전에 졸졸 뒤 따르던 코흘리개가 아니라 인젠 친구처럼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하며 나를 낮추 표기한다. 그리고는 또 하며 덛부친다. 그럴때마다 딸애가 은근히 보내오는 기대로 가슴이 짱 ㅡ 하게 맞혀 옴을 어쩔수 없다.       내 몸이 깜찍하다는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이를 낳겠다고 애간장을 태우던 15년전, 칼도마에 두번씩이나 올랐던 내가 그 첫번째 수술에서 3천 그람의 피를 흘렸고 두번째 수술에서 2천 6백 그람의 피를 흘렸으니 내 얼굴에 주름 투성이 아닐수 없다. 거울에 아무리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를 보아도 나이보다 5년을 더 늙어 보이는데도 딸은 그냥 깜찍하다고 한다. 나들이 때마다 나에게 유일하게 젊은 빛을 주는 긴머리 드리우기만을 꼭 잊지않고 다듬어 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늙은 엄마하고 때때로 학교에서 자주 만나자기에 시도때도 없이 만나기를 잘하는 우리 모녀......       이 늙은 엄마를 꺼리지 않고 대신 잘 따라 주고 아껴주는 딸이기에 나는 딸을 위해 이쁘고 멋지진 못하지만 단하하고 생기있게 활력있게 자랑을 갖도록 공부에 도움이라도 되여 주었으면하는 바램에서 이 나이에 이미지 개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13    우리집 김치 댓글:  조회:3757  추천:0  2010-10-28
                                   우리집 김치    친정엄마 하던대로 마늘, 고추가루, 작은 양파 , 젠치가루 , 생강 이렇게 5가지 양염으로  얼 버무린 우리집 김치. 맛지게 하려고 왼심을 써본적도 없는 대충대충 만들어진 우리집 김치 뭐가 맛 좋다고 여직 나도 모르게 맛 좋은 김치라고 소문이 난지 오래단다.  70포기씩 담가도 모자라  이웃집에도 나른적없은 우리김치 누구를 통해 소문만 널리퍼져 로두구에서 룡정에까지 퍼져와 요즘 남편단위 녀 직원들이 매일 고 조른다고 한단다. 그런데 이걸 어쩜 좋을가?  가져다 주고 싶지만 줄수 없는 우리집 김치,,, 린색할 만치 줄수 없는 김치여서 그간 남편은 오해를 사 가면서 김치 깍쟁이가 되여버렸다.       올해는 여유가 있으니 베추랑 제일 좋은 시골 배추를  사왔다.  그리고 올해같은  더운 날씨엔 립동이  넘어도 김치하기엔  이른날씨기에 립동이 썩 넘어서 초절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올해의 김치는 여느 김치보다 제일 맛이 좋와야 할 김치가 우리집력사에서 제일 맛이 없었다. 짭지도 않고 생강도 많은것은 더욱 아닌데 ...웬일일가 하면서도 그 원인을 알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채지김치를 하려고 젠치가루를 전번 쓰고 나머지가 좀 있던거 해서 들추엇더니 웬걸 내기가루 대신 젠치가루가  손대지 않은 그대로 자리지킴하고 있엇다찾고자 하는 젠치가루는 반 봉지여야 하는데 한 봉지 그대로이고 내기 가루는 비여 있었다. 그런대로 집식구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 많은 김치를 버릴수가 없기 때문에 ...남편은 종종 트집잡으면서도 냠냠 잘도 자신다. 집들이하던 날  남편단위  직원들이 왔다가  너도나도 김치를 달라고 하기에 솔직히 고백하고 말았다.내기 김치라고. 그 때문에  오해를 풀게 된 여러직원들.      소문난찬치 먹을게 없다고  소문난 우리집 김치 맛 이렇게 곤두박질하게 되였다.      몇해전 내가 출근했던 단위 량식창고에서는 가을이면 제일 분망하다 량식수입시기여서 쉬는날 없었다. 하여 언제 김치맛을 따질겨률이 없은건 물론  담가먹을지도 모를  일이였다.허지만  한끼도 김치를 빼 놓아서는 안되는 남편이기에  그래서  밤에 초절이를 한다.  소금을 많이 넣고 하루  낮 이틀밤  두었었는데  맨 웃부분 배추는 죽지않고  오히려 더 살아나 노랗게 꽃으로 피여 있었고 제일 많이 죽은 것은 3분의2였다. 초절이를  싯은후 소금쳐 다시 항아리에  넣는 부분을 삭제 해버리고 제절에 양염을 버무려 움에 넣는데  꿋꿋이 살아 있는것부터 버무려 맨  밑에 넣었더니  봄에 가서도 사각사각 가을에 갓버무린 김치 같았었으며 거기에  숙성되여 쨍한맛에  담백한 맛이 어우려져 그 맛이 세상 제일인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집 식구들은 고기 없어도 김치하나 만으로도 넘 맛나게 냠냠 잘 먹어 줬다. 어느하루 친정조카가  놀러 왔다가 하는 말> 맨 김치만 놓인 걸 보고 하는 말이였으니까 그럴수도 있었지. 하지만  그 때 김치가  맛이 좋았었는걸.지금도 남편은 를 부른다.숙취에도 김치국물을 주르르 죽죽 마이면 최고라 하신다.      멋을 내거나 맛에  왼심 쓴것도 아니고 고추가루도 아까워서  마늘을  고추가루보다 3분의 1을 더 넣었고  생강도 한근 이상 더 넣지 않되 믹서에 갈아서 채에 밭아서 즙만 넣고  찌기는 말리웠다 채를 볶을 때 넣어 먹었다. 배추도 언니네가 팔고 나머지 퍼런 시래기 배추였다. 좌우명으로 삼은것은 김치 초절이 할때  많이 죽이지 말며 시간을 3일이상 두지 말며 초절이 시간이 오래면 배추에서 오물냄새가 배여 김치맛이 50%가 떨어진다.        별것도 아닌 우리집 김치는 이렇게  소문도 놓고 내기김치로  곤두박질도 했었다.  연길 영자개고기 집에서도 우리집 김치맛을 살려 올린다고 해 소문이 나고 있다니 기쁘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들은 김치를 좋아하지 않아 김치를 많이 담그지 않는다고 하던 동사들도  내가 담그는 방식대로 김치를 담그니 왕년보다  배를 더 많이 담가도 모자라 남편한테 꾸지람을 들었다고 했다.  보잘것 없는 김치 솜씨지만  모두들 그대로 해서  맛 있다고 하니 기쁘고 가슴 뿌듯하다.  
12    결혼 26년 되는 날 댓글:  조회:3282  추천:0  2010-10-28
    결혼 26년되는 날                                                                                    오늘은 10월2일 우리결혼 26년되는 날입니다.      남편은 이날만은 잊지 않습니다. 허파에 바람이    찼을때에도 그러했으니 오늘이야 잊을소냐. 허지만 나는 여직 결혼날을 잊으며 살아왔습니다. 결혼후 첫8년은 헤매이느라 안해노릇 남편노릇까지 겸하다보니 생각할 겨률이 없었고 두번째   10년은 남편이 제노릇 못하는건 물론 마작판에 사람 끌어 들여 쌀축을 팍팍 내며 기를 쓰고 애를 먹이던 시절이여서 전혀 생각이 없었죠. 다음6년은 혼이 달아나 벼락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 탕탕했으니 생각나면 얼마나  생각나랴 잘못된    결혼이라고 하늘이 째져라 땅이 꺼져라 했으니  남은 2년도 그리 달갑지 않았습니다.오늘도 딸애 일로 온하루 세방돌이 하다 돌아오니 남편이 핸드폰을 내 놓으면서   진정에서 하는 말이겠건만 꽁꽁 얼어버린 내 마음은 별로 그에 대한 반응이 없습니다. >했더니 아무튼 처음으로 남편손에서 례물을 받고보니 서쪽에서 해 뜨는 기분이 되여 기쁨인지 서러움인지 알수 없는범벅의 눈물이 쏟아져나왔습니다..씀바귀같은 내 인생에 남편이 즈려밟은 내 인생이  허이허이 고개길을 톺으며 핑글핑글 먼길을 돌아가며 인제 겨우 노오란 꽃이 피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와 분풀이 하고싶고 화풀이하고 싶고 미치고싶어도 참아야 하는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드는지  격는게 힘겨운 줄 알았는데  참는 이 과정이 또한 격는것 못지 않게  힘들다는걸 당신은 알고나 있는지...몇번이고 하려다 만 이 속심을  노란 씀바귀에 담아 보내고 싶습니다. 이 핸드폰이 이내 상처지워주기를 기대 하면서...    
11    고향행 댓글:  조회:3357  추천:0  2010-10-28
font {line-height:110%} var articleno = "7547073";            10월 3일,          국경절 휴가를  빌어  얼마전 부터  벼르던  고향행을 하게 되였다.  친구 보옥씨는  20년만에  고향행이라  무척  들떠 있었고  딸애와 나는  9년만에  가는  고향이라  살뜰한 이웃들이  빨리  보고  싶었다.         남편도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친구집에  갈 일이  있어   대신  딸애가  가게 되였다.  딸애는  무척  고향을  그리워 한다.  너도나도  타투며  안아 주고 업어주던  이웃 어머니들이  늘  보고 싶단다.  그래서  남편은  감감  모르고 있는  딸애한테  <<얘  마침  잘 되였다  너엄마가  래일  고향  내려 간단다. 너도  따라 가거라>>  고  일러줘  이처럼  뒤따른것이다.       고맙게도  보옥씨  남편께서   차를  알선해  주고  운전까지  맡아  주셔  우리는  제법  호강스레  떠났다. 이말저말 하다 보니  어느사이에  조양천과  동불사를  스쳐왔는지도  모르고  로두구에  도착했다.          보옥씨는  짧지않은  20년을  지나    이렇게  고향땅을  밟고  설레이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한다. 길은  그전  흙길이  아니고 콩크리트 포장길로  변해 한눈에  확 띄였지만  옛날에 왁작왁작  떠들며  사람들로 붐비던  정경이 없어  어딘가  스산했다. 천보산  운수과앞에서  딸애를   부리우고  우리일행은   보옥씨가  하향했던  룡수촌으로  향했다.  룡수촌으로 가는 길은  천보산길에   접어 드는데  2002년전까지만해도  이 길은  천보산 광산의  광석을  실은  차들이  오르내리며  북적거렸고 게다가  이맘때면  농민들의  수레도  함께  덜크덩 거렸으며 <<이랴>소리는 노래반주처럼  이거리를  메웠었다 하지만  2002년에  천보산광산  광물질 자원 고갈로 해 파산된 후부터    이렇게  썰렁하단다.  그리고  연해도시며  외국으로  가고  없어  일밭으로  가는  사람도  적어졌고  왕년보다  가을이  늦어 졌단다.  그래서 가는길은  너무  슴슴하고       조용했다.   차창밖으로  태평촌을  내다  보니  인가들이  많이  늘어나  꽤나  오붓하고  살기  좋아  보였다.  길건너   벽돌공장이  여전히  예전보다  더  멋지게  서있으니  아마  마을도   살지고  있는가보다.      어느덧  룡수촌에  도착했다.  모두  포장길이 여서인지   옛날  공사마을길을    알아  볼수없어  그만  지나쳐 갔다.  그냥 올라가서  집체호  짜리를  찾았는데  아무리  올리 흩고  내리  흩어봐도  알수가  없단다.  마당이며  길거리 어디나  사람이라곤  없고  내려오다가  어느  길옆집에서  젊은  부부가  마루에서  뭘 하고  있었는데  그들마저  안목없는 사람들이였다. 인젠  아까 지나쳐 온  그  공사마을  가 보잔다.  아무튼  남쪽  골짝으로  들어가는  어구지에  공사마을이  있었으니  보옥씨와  나는  짚이는데가  있어  둘이  다 이구 일성으로   <<바로  이길이 다.>>  며  긍정적으로  남쪽을 향해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에 들어서니  찌그러지고  무너져가는  빈  집들이  절반 이상이 되며  좀  반반한  집들에서도  사람  그림자라곤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빗물에  햇빛에  싯기고  바래진  주련이  거덜거리는  몇몇  한족집들만이  문이  열려져  인기척이  들려왔다.  반기는  이  없건만  보옥씨는  이골목  저골목  어디라  없이  지어는  어떤  골목은  두번씩  곱씹으면서  돌아 본다.  뒤따라  돌아  보는  내  마음도  쓸쓸하기만  했다.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보옥씨가  와도  알아보지  못하는  룡수촌 .....,  무정하다  한심하게 무정하다.  기울어  지고  벙어리  같은  모습에  머물수록.  맘만  쓸쓸 해  에라  가자  그래서 우리는  아예  일치감치  로두구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좀  남아  있는지라  우리는  사과배고향을  가는  유일한길인  소기 다리에  가보고저    200메터 가까운곳에  차를  세워 놓고  소기다리로  향했다.  다리는  변하지  않았다. 나무다리  옛날모습  그대로다.  어쩌면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가  나는  더 좋았다. 다리우에  오른 내 맘은  동년으로 돌아간 기분이 되여  물에  뛰여 들고 싶어다.  옛날보다  강수위가  높고  강량안이  넓어져  도도한  물결은   내고향의  고품인듯 싶었다.      얼마전에  나는 시 <<.사고배 꽃 >>을  초고를  쓰면서  소기다리가  몹시  그리워져  고향에  가면  꼭 한번은   소기다리에  올라  보리라  속으로  별렸다. 그 나무다리가  변했을가  그대로  있을가  하며  무척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정작  와보니  옛 모습대로여서  얼마나  기쁜지  자칫했더면  만세를  지를번했다. 우리셋은  우리끼리  감상하기엔  너무 아깝다고  오경자씨 부부를  불렀다.  점심식사시간이니  점심이나  먹고  오후에  다시 보자하기에  우리일행은   경자씨네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우리는  집은  사라지고  빈터만 댕그라니 남아 있는  보옥씨의  동년에 살던집이며  우리친구들의  집이며  내가  남편과  제일처움  이사왔던  집도  찾아  보았다.         경자씨네  집에  도착하니  경자씨는  마작 쌓을러  가고  남편인 리봉수씨만 홀로 있었다. 몇분 안되여  경자씨가  돌아와  15분가량  얘기를  나누고  경자씨 녀동생인 순자씨네영업집으로  향했다. 순자씨도 볼겸 말이다.         경자씨와순자씨   이들  형제는  원체  알뜰하기로  소문 있고  작식  솜씨  또한  소문 높아  오늘도  순자씨가  멋지고도  구수하게  볶아 올린  고기채와  콩장, 초두부등  여러가지  채들을  올려  한잔두잔  소주도  마이면서  얼굴에  홍조 피기까지  한병을  다 마이였다.  마지막  밥 한 공기까지  다 챙기면서 .....순자씨 정성에  감사했고  이 만찬을  부담한  보옥씨 남편에게  더욱  감사했다.  내가  부담해야  할것을  보옥씨 남편께서  먼저  선손 쓰다 보니  내가  또  이익을  본셈이다.          보옥씨 남편이   사우나에 가자고  하니  여기는  큰도시  같은  사우나가  아니여서  멋적다고  그래서  이번엔  소기촌에  가  보자고  일치를  보았다.  보옥씨의  제안으로  부르하통하강변을 따라  아래로  아마공장  공동묘지까지  내려갔다.  어릴때  그곳에서  어찌  뛰놀았으면  하필이면  공동묘지까지  찾아가랴   아무런것도  없는  쑥대밭,  그때도  이런  쑥때  밭에서  하늘 잠자리, 바퀴 잠자리,  고추 잠자리를  잡던곳이라며  기어히  찾아  보는거란다. 다시  거슬러  올라와  소기다리를 건너서  사과배고향  소기촌으로  향했다. 가까운  과원들을  두르 돌아 보고  맑은 샘물이  찰랑이는  개울에  내려 갔다.  어찌나  맑은지  우리일행은  약속이나  한것처럼  물속에  손을  잠구고  보옥씨의  남편은 아예  신 양말 다  벗고  물속에  들어 섰다. 이때 내 맘 깊은곳에서는  감탄사가  불쑥 튀여 나왔다. <<저  언덕에  집을 짓고 이 물에  김치 담구며 살았으면 좋겠다.!>> 고/  보옥씨의 련애시절에  지금의  저 남편과  빨래도 하고 련애도 하던 얘기,  개구쟁 시절에  개울에서 강가에서의  짜개바지 개발헤염  떠올려  웃음을  선사해  준 봉수씨  얘기도  구수했다.        실태래같은  이야기에  우리 일행은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돌우에  펄적이  않아버린  우리  엉덩이는  떨어질 념  안 했다. 보옥씨의  남편이  저켠에  있는것을  보고서야  시간이  꽤  지났음을  알고   우리일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귀로에  올랐다.         경자씨부부의  동반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낸  우리  일행은  감사를  표함과 더불어 작별인사 나누고  차에  올랐다.  오래오래  손을  저으며.......               
10    내가 만지지 아버지가 만지십니까? 댓글:  조회:3126  추천:0  2010-10-28
내가 만지지 아버지가 만지십니까? 끔직하게 사랑하고 있는 한 청년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에 걸림돌이 되는것이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시아비 되실분이 극력 반대해 나선겁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설복해 보려고 아버지방에 들어갔습니다. 할말이 없게 된 아버지였답니다. 그들의 결혼에 어찌할수 없는 아버지.... ㅋㅋ
9    죽 밥 댓글:  조회:3086  추천:0  2010-10-09
                              죽 밥       오늘은 맛지게 지으려고 무지 애를 썼는데 외려 밥이 죽밥이 되였다. 옛날같으면 죽밥이라고 남편은 투정했으련만 요즘들어 자주 죽밥을 해도 아무 말 없다. 나역시 죽밥이 좋았다. 나이 50이 가까히 들면서 조금씩 된 밥이라도 잘 넘길수 없고 넘겼다더라도 소화가 잘 되지 않아 한참은 불편을 겪군 한다. 한끼 묵은밥도 잘 넘기지 못해 끓여 먹어야 하니 나이가 알려주는 경종인가 보다.        죽밥을 드려다보니 흘러간 지난세월에 죽밥을 지어놓고 나와 아버지의 투정에도 아무말 없으시던 엄마가 떠 오른다. 위병으로 쓰린 위를 안고 엎디여 있으면서도 아프단말없이 몰래 병고생하셨다. 그러면서도 우리구미에만 맞게 꼬식꼬식하게 밥을 지어 주셨던 엄마였다. 그것이 엄마의 위병을 더 심하게 만들었던것이다. 그때만하여도 지금처럼 의약이 풍부하지 못해 끊이지 않는 치료였지만 한가지로만 받는 치료여서 효과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다가 우리가 즐겨먹는 꼬식한 밥을 드셔야 했으니 병이 낳으면 얼마나 낳으랴 지금처럼 가전제품들이 있어 따로 끓여먹으면 괜찮으련만 그때는 가전제품이 없었고 끓여먹자면 화로불을 피워놓고 끓여야하니 아주 번거로웠다. 엄마는 자신 한사람  때문에 화로불까지 피우려하지 않았다. 자기생각밖에 할줄 몰랐던 나는 그런 생각은 더욱 할줄 몰랐다. 지금 나는 저도 모르게 꼬식한 밥을 멀리 피하고 자꾸만 죽밥을 가까히 하면서부터 지난날 엄마를 새삼 읽게 된다. 처음 엄마도 나처럼 증상이 있다가 식구들따라 된밥을 우격다짐으로 자셨기 때문에 나중엔 위출혈로 돌아가셨을것이다. 때때 죽밥이라도 제대로 드셨더라도 그다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을것이다. 철없던 나때문에 일찍 돌아 가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딸이 왔기에 딸의 구미에 맞는 꼬식한 밥을 지으려했는데 그만 죽밥이 된것이다. 좋아하는 죽밥을 해놓고도 먹을수가 없다. 철없던 지난날이 너무 야속하고 얄밉기도해서…
8    한 교사의 뒤 뜰에서 댓글:  조회:3017  추천:1  2010-10-08
한 교사의 뒤 뜰에서 편집/기자: [ 신정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0-10-03 15:49:48 ] [removed][removed][removed][removed]    교자가 되기전에 당신자신이 학생이 되시라        나의 남편은 모 중학교의 보통 교원이다. 안해인 나는 학부형의 립장이 되여 감독하고 때로는 동사가 되여 교학을 담론하기도 한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남편의 담임사업을 멋지게 마치게 하고싶었던것이다.   《그 학급의 담임교원을 보면 그 학급 학생을 알수 있다》라는 말과 같이 담임교원은 학생의 거울이다. 일거일동 닮아간다고들 한다. 그런데 교자가 먼저 학생이 되지 않고 피교육자들을 훌륭한 학생으로 되라고 한다면 누가 그 설교를 들을가? 때문에《교자가 되기전에 당신 자신이 먼저 학생이 되시라》고 나는 남편의 하루일기 첫머리에 꼬리말을 달아주는걸 잊지 않는다.   내 자식처럼 생각하시라   《학습성적이 높던 낮던 편애하지 말고 외면하지도 마시고 골고루 살펴주시라》고 술기운에 흥이 도도해 할 때면 거기에 맛내기를 섞어가면서 슬쩍 거울반사처럼 비춰본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밖에서 외면당하면 부모의 마음은 아프다. 매 학생을 내 자식처럼 생각하면 모두 이뻐보일것이라고 했더니 남편은 얼마후 정말 내 자식처럼 사랑스럽더라고 말한다.        담임교원은 아이들의 절반 부모이다. 학교에 오면 학생들은 담임교원의 관심과 사랑을 은근히 바란다. 가정에서와 같은 따스한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아이 심리는 병들기 시작한다. 때문에 관심과 사랑은 부모와 교원이 소유해야 할 기본 자질이 아닐가 생각한다. 최근에 알아본데 의하면 학생들의 마음을 보듬어 줄줄 알고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아주며 유모아적이면서도 해학적, 칼날같은 성격도 잠재한 이런 교원이라야 인기 짱이라고 한다. 하여 남편은 학교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모니터에 마주앉아 메신로 계속 한다.       《옷이랑 많이 입고 다녀라 추운데 감기에 걸리면 어떻게 해?》하던가 아니면《숙소에서 밥을 제대로 먹고 다니냐?》하는 마음의 메시지가 전달되면《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학생들의 감동이 달려온다. 남편의 가슴에도 격랑이 일어나는지 대화를 잠시 끊고 담배를 찾는다. 갑갑하거나 감동, 감격하고 분노할 때에도 담배로 달래는데 습관된 남편이기때문에... 그것도 그럴것이 인터넷 싸이방 또는 블로그, 카페 어디나《쌤, 쌤...》이다. 간단한 략칭의 부름이지만 정다운 부름이다. 듣고들어도 싫지 않는 현대식 인터넷 이름 선생님이란 략호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고운것이 제자들이라고 한다. 아이들속에 빠져들어가는것을 어쩔수 없다고 하며 마음은 아이들처럼 젊어진다고 한다.   마음의 평온을 선물하시라        마음의 평온은 좋은 환경에서 비롯된것이기에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으로 될수 있는 웃는 모습을 잊지 말라고 기분 좋게 말해본다.          눈독이 있는 남편의 눈길은 무표정한 모습일 때도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무척 위압감을 준다. 그러나 웃는 모습일 때는 언제 그랬냐싶게 환하기로 살인미소라 할가 아무튼 그때만이 제일 보기좋고 상대의 마음은 자유로와진다.           내가 아침마다 좋은 운, 좋은 하루되라고 남편과 딸애에게 새밥그릇에 밥을 담아주듯 남편도 학생들에게 하는 아침 첫 인사는 환한 웃음과 함께《좋은 아침, 좋은 하루되세요.》이다. 지각생에게도 아침에는 좋은 아침을 선물하며 벌칙을 삼가한다. 날마다 좋은 아침, 좋은 하루를 기대하면서 첫시간부터 환한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부드러움을 주어 아이들의 긴장을 느슨히 해줌으로써 활발한 학습환경을《개발》했다고 한다. 그런후로부터 학부모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벨소리는 귀 아플 정도다.《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 애가 전혀 책을 쥘줄 모르던것이 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은후부터 집에 돌아오면 책을 보며 공부합니다.》라는 말이 전화 저쪽에서 감격을 타고 흘러온다.         대학입시에 희망없는 학생일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단 하나의 꿈이라도 심어주시라       이미 초중에서 기초가 많이 떨어진만큼 때늦은것은 사실이고 대학에 입학 불가능할것은 뻔한 일이다.하기에 공부못하는 내자식 장래를 모색해주듯 그런 학생들에게 그에 따르는 꿈을 키워주면 좋지 않을가 하고 나는 남자의 자존심을 상할세라 조심조심 말해본다. 그러면 남편은《당신이 뭐 알아서 나에게 지시하는거여?》하며 나더러 잔말하지 말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수궁하는 편, 내가 생각는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생각하고 과감히 실행도 하는 쿡쿡 찌르고 나가는 불도저정신으로 내 모르게 실천해보는 남편이다.      한번은 말썽꾸리 학생의 작문을 골라 여러차례 수정을 요구했다. 마지막에 될상싶다고 생각되여 남편은 재수정을 마치고 중학생잡지에 투고해주었다고 한다. 얼마후 그 작문이 척 발표되자 전 학급에 파문이 일었다.《저 꼴지가 다 되는데 내가 왜 못해》하는 식으로 학습성적이 낮은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생기게 되였단다.     자기들도 글을 발표하고싶어서, 형편없는 글이였지만 너도나도 작문원고 하나씩 갖고와서 투고해달라는 성화였단다. 그래서 그런 애들도 반복 수정을 시키면서 수정과정에서 철자법, 문장법... 등을 다시 가르쳤고 수차의 수정에서 실망할 때면 조금만 하면 될거 같으니《자 힘 내자》라는 신심도 함께 주면서 끝내 하나의 완정한 작문을 만들었다. 둘, 셋... 수십개의 학생작문이 발표되였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하면 될수 있다》는 용기를 학생들에게 심어주었고 그들에게 알맞는 꿈, 그 꿈으로 가는 길을 열어줘야겠다는 새로운 계획도 있게 되였다고 한다.     이렇게 남편의 교수사업에 신경쓰다보니 저도모르게 나도 교원이 된 기분이다. 남편이 매번 성과를 올릴 때마다 내 어깨도 우쑥우쑥 올라간다. 이렇게 남편의 교수사업을 뒤에서 살펴보면서 교육사업에 대한 흥취가 도도해졌는데 지난날 나한테 차려졌던 교원사업을 포기한것을 못내 후회하군 한다.     언감생심 남편일과 학교일에 간참한다 하겠지만 그저 남편사업에 다시다를 넣어주고 똑똑 기척을 해주고 부엉이가 되여 남편이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봐 주었을 뿐이다. / 장경매 (룡정) 
7    녀성수필 응모작품 • 손 댓글:  조회:3159  추천:0  2010-10-08
녀성수필 응모작품 • 손 http://hljxinwen.dbw.cn   2010-09-29 17:00:51       (룡정) 장경매   녀자의 손이라면 부드럽고 물기가 촉촉한 살결에 미끈한 손이라 상상될것이다. 허지만 나의 손은 세월의 비바람속에서 손등의 손가락 마디마다 비슬나무껍질처럼 깊은 주름으로 주룩주룩하다. 손바닥은 소나무 껍질처럼 까칠까칠해서 비단 이불이나 침직물 옷을 만질 때면 스치는 감각과 그 소리에 가슴이 다 오삭해난다. 딱딱하게 굳은 살은 오래되여도 지워지지 않아 다듬지 않았다기보다 이젠 아무리 깍고 다듬고 해도 어쩔수없는 고질이 된것이다. 사정을 아는 동창들 모임이나 동료들과의 모임이면 몰라도 요즘 글을 쓴답시고 자주 참석하게 되는 지인들과 선배문인들 모임에 가게 되면 추한 이 손을 내놓기 부꾸러워 청하는 악수에도 뒤로 주춤주춤한다.   어느 년말총화 모임이였다. 나와 사교무를 추던 선배님이 사교무 끝나기 바쁘게 "녀자손이 그게 뭐요?" 하는 핀잔비슷한 말에 부꾸럽고 창피해 몸둘바를 몰라 쩔쩔 매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내 손을 돌려다오 할수도 없는것이다.   12살 나던 해 1970년.   엄마가 갑자기 중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그때부터 나에게는 고생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밥 짓고 저녁이면 엄마 약을 달이기 위해 숫불을 놓고 약을 달이기도 했다. 이렇게 80년도까지 장장 10년을 엄마의 호리원으로, 주부로 내 손은 마를새 없었다.   1978년, 작은진의 량식부문에 취직하였다. 하늘이 보이는 낡은 직장에서 날마다 찬물로 옥수수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가공했었다. 매일 찬물질하다 보니 손등은 갈라터져 참나무 껍질처럼 피더뎅이가 어룩어룩한채 줄이 죽죽 했었다. 그 이듬해 설에 문학애호가들 모임에 갈적에도 이 손때문에 한참 망설였다. 처녀였으니 그런 손으로 가기엔 정말 민망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청하는 부탁이니 사절할수도 없었고 해서 온밤 조개약을 바르고 더운 물에 담그고 하며 겨우 원모양 비슷이 해 갖고 갔었다.   그후 출고원으로 있을 때, 출고 할 때마다 지저분하게 널린 200근짜리 쌀마대를 일으켜 세워야 하고 끌어다 놓아야 하는가 하면 올려 놓아야 했다. 그러노라면 로동장갑 두세컬레는 해져야 한다. 벽돌 다듬기와 막먹는다.   그러하니 내 손 모양이 어떠하리.   녀자는 아이때 고생이 장고생이라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인것 같다. 남편을 만나도 역시 그 고생이였다. 농민호구, 무직업쟁이 남편이였다. 당시 나는 사회의 얕보는 눈길과 생활고로 항상 두어깨가 처져있었다. 못난 녀자의 허울을 벗어버리기 위해 나는 남편을 목단강직업대학에 보내여 3년간 공부시키로 했다.   남편을 보내고 보니 모든 일은 또 내가 해야 했다. 집안 일이건 밖에 일이건, 녀자일이건 남자일이건 가릴것 없이 내가 해야 했다. 남편의 학비와 생활비마저 이 손으로 해결했다. 직장에서는 해마다 선진일군으로 , 상금은 제1위로 년말이면 500원(그때 로임은 37원임)을 차지하군 했었다. 하여 빚을 지지 않고도 남편은 무난히 공부를 마칠수 있게 되였다.   엄마의 아픔을 덜기 위해 군말없이 일했고 딸애와 남편과 오손도손 재미있게 살기 위해 불평없이 사방 가리지 않고 휘ㅡ익 저어온 손이다. 이 손의 부지런함으로 내 집이 사랑으로 살졌다. 또 이 내 손이 인생을 바꿔준것에 감사함을 잊지 않고 갚으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모습에 감개 무량하다. 지금 층집에서 살아가는재미, 사모님이라는 멋진 녀인으로 된것에 지난날 나의 노력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끼며 스스로도 나 자신에게 탄복해마지 않는다.
6    커피 댓글:  조회:2722  추천:0  2010-09-12
                             커피    따끈따끈한 커피한잔  마일수 있는 이순간이  여유로움이 아닐가? 커피를 마이며 지난 일들을 추억하고  얼마나 될지 모르는 앞일도 꼼꼼히 따져  보며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는 이 시각이 자유롭고 여유로운 공간이 아닐가?!     흘러온 세월엔 뒤도 옆도 두리번거릴새 없이  일만하며 세월가는 줄도 몰랐다. 물 마이는것도 금방 뛸듯이 선자리에서 꿀꺽꿀꺽 마이고는  또  일거리를 잡아야 했다. 아침이면 식사 준비부터 아이를 학교에 데려가기까지 마무리 말끔히 하다보면 화장하지않고 출근하는것이 나에게는 보통 일이였다. 남편은 술 자리, 마작에 몸이 담가져  손을 바라 볼새 없었다. 하여 나는 커피 한잔 마일 시간적여유가 없은건 물론 물도 편히 앉아 한숨쉬며 마일 시간조차도 없었다. 하오니 허망 건너 뛴 인생 같다. 뭐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알수 없이 똥진 오소리처럼 꾸벅꾸벅  일만 하며 살아 온 인생. 그것도 돈 많은 인생이면 몰라도 거지 인생이였으니 이 아니 허황한 인생이 아닐까?집 한채없이 빳빳하게 살아온 삶이 생각만해도 신물이 난다.     남자들은 나이50에 섬이 든다더니 아마 그말이 맞는것 같다.  남편은 지금에 와서야 삶에 집착한다. 그래서 지금은 집을 사놓고 나에게 만족을 주고저 여러모로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러해서인지 지금은 이렇게 따듯한 커피 한잔을 마이며 글샘도 파고 이렇게 많은 책들을 보고 있는 새로와진 내 모습이다.      커피. 이제부터 커피는 나에게 수십년을 굳어진 나의 머리를 싹 녹여 줄것이다. 얼음으로 찬 내 맘을 따뜻하게 녹여 줄것이다. 진한 커피처럼 나의 상상도 나의 재주도 영글어 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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