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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할 것'/ 안도현
언젠가 “내 시의 사부는 백석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또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다. 오로지 그의 시를 ‘베끼고’ 싶었다”고 뻔뻔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데 백석은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으며, 당신의 시를 베껴도 좋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백석에 대한 내 사랑은 짝사랑이라 할 수 있다. 백석, 그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의 시를 얼마나 베끼려고 아등바등했는지, 왜 아직도 그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지 말해보려고 한다.
백석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1980년, 대학 1학년 때였다. 지금은 작고하신 시인 박항식 선생님의 저서 <수사학>에 <모닥불>이 인용되어 있었다. ‘갓신창’‘개니빠디’‘너울쪽’ 같은 몇몇 시어가 좀 낯설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백석이라는 낯선 시인의 이 시 한 편은 스무 살 문학청년의 심장을 뒤흔들 었다. 그 까닭을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내가 학습한 시인들과는 뭔가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백석은 김소월도 한용운도 이상도 윤동주도 아니었다. 청록파도 서정주도 김춘수도 아니었다. 나는 캄캄해졌다. 그만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백석의 시에 반해 버렸다고 은사님께 말씀드렸더니, 또 다른 시들을 보여주셨다. 나는 백석의 새로운 시를 만날 때마다 노트에 한 편 두 편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묘한 흥분과 감격에 휩싸여 손끝은 떨리고 이마는 뜨거워졌다.(1988년 정부의 공식적인 해금 조치 이전에는 내놓고 그의 시를 읽을 수 있는 독서의 자유가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그런 필사의 시간이 없었다면 내게 백석은 그저 하고많은 시인 중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그건 짝사랑이었지만 행복했다.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고, 옷깃을 만졌으며, 맹세했고, 또 질투했다. 사랑하면 상대를 닮고 싶어지는 법이다.
소설가 신경숙은 대학 시절 방학 때 소설을 읽다가 필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다. 나는 이 길로 가리라.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신경숙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
필사는 참 좋은 자기학습법이다. 시의 앞날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어쩌다 눈에 번쩍 띄는 시를 한 편 만났을 때, 짝사랑하고 싶은 시인이 생겼을 때, 당신은 꼭 필사하는 일을 주저하지 마라. 그러면 시집이라는 알 속에 갇혀 있던 시가 날개를 달고 당신의 가슴 한쪽으로 날아올 것이다.
1987년 선배 시인 이광웅이 ‘오송회’ 사건으로 복역하 다가 출옥한 뒤에 나에게 또 백석의 시를 보여주었다. 낡은 대학 노트에 아주 정갈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필사한 시였다.(이광웅 시인은 1992년에 세상을 떴다. 나는 이 필사본을 돌려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내 서랍에 보관하고 있다.) 그 무렵 창작과 비평사에서 이동순 시인이 엮은 <백석시전집>이 나왔다. 이로써 세상에 가까스로 백석 시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1989년에 낸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을 백석에게서 훔쳤다. <모닥불>이 그것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백석의 호흡을 차용한 시들을 여러 편 쓰기 시작했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 길을 만들어 <백석 시인의 마을에 가서>라는 시도 썼다. 현실에서 만나지 못하는 시인을 만나 메밀국수를 한 사발 먹었고, 폭설이 쏟아지는 시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구들장이 뜨거운 집이었다.
아는 분은 알겠지만 1994년에 나온 네 번째 시집의 제목 <외롭고 높고 쓸쓸한> 역시 백석표 제목이다.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누구나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은 쉽게 할 줄 안다. 그러나 ‘외롭고’와 ‘쓸쓸하다’ 사이에 ‘높고’라는 말을 갖다 놓을 줄 아는 시인이 백석이다. 이 ‘높고’는 양쪽 형용사들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그 구차함을 일거에 해소하고 시 전체의 품격을 드높이는 구실을 한다. 베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높고’인 것이다!
그 이후에 낸 여러 시집에서도 백석을 짝사랑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음을 숨기지 않겠다. 애초부터 의도하고 흉내를 낸 것이 있는가 하면 나도 모르게 그에게 스며든 것도 있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졸시 <사랑> 앞부분). 감나무에서 쉬지 않고 매미가 울었고, 러닝셔츠 바람으로 마루에 누워 부채를 부치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메모한 구절이다. 나중에 가만 생각해보니 이 시구 역시 백석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앞부분이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을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지 말자. 그건 30년대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산숙(山宿)」
1938년 <조광>에 발표한 시다. 나는 이 시 한 편으로 30년대 산골의 전형적인 풍경과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 여기에서 아주 인상적인 것은 ‘목침’이다. 이 오래된 목침에는 새까만 때가 올라 있다. 화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백석의 매력이 숨어 있다. 그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라는 서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밋밋하고 시의 산문적 서술에 기여하는 말이 ‘생각한다’이다.
그런데 이 말이 아프다. 목침에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이 누구이겠는가? 목침에 때를 올린 사람들은 목침을 베고 잔 뒤에 떠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산골의 광산촌을 떠돌거나 만주 등지로 길을 떠나던 30년대 후반의 우리 민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때 묻은 목침 하나를 통해 대다수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현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에서도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 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시인이다. 나는 그의 시에서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것도 좋아하고, 수많은 음식을 나에게 맛보여주는 것도 좋아하고,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호기를 부리는 것도 좋아한다.
짝사랑의 햇수가 삼십년 가까이 된다. 지겨울 때도 되었건만 백석이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도꼬마리 씨앗 같다. 아니, 내가 백석의 몸에 붙은 도꼬마리 씨앗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요즘도 시가 잘되지 않을 때, 해괴하기 짝이 없는 시들이 나를 괴롭힐 때, 백석의 시집을 펼쳐 읽는다.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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